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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72 불교(광홍명집 23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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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23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5. 승행편(僧行篇)

 

서문

스님들을 논해 보면, 6()를 바탕 삼으니, 이른바 계()ㆍ견()ㆍ이() 3()이다. 대도(大道)는 유명(幽明)에 합치되고 공덕은 현성(賢聖)에 형통하니, 만물을 열어 주고 일을 이루어1) 인간과 천상에 복을 누리게 한다. 율의(律儀)를 인도하여 이해하니 공유(空有)에 조화를 드리운다. 육화를 존경하고 삼보를 밝게 드날리면서 안으로는 4()2)의 폐단을 없애고 밖으로는 8()3)의 당번(幢幡)을 꺾어서 삼천위내(三千圍內)가 모두 스님들의 규율을 받들게 하고, 6만의 긴 햇수 동안 모두 성교(聲敎)를 따르게 하는데, 스님들이 이를 널리 다스리지 않는다면, 누가 이것을 선양할 것인가?

그러므로 웅덩이와 높이 솟은 길을 두루 지나 백육(百六)의 양구(陽九)4)에 이르러 진구(塵垢)가 거기에 따르게 되어 믿음이 훼손된다.

이로운 쓰임새의 편안함과 위험만을 생각하여 형통한 사람은 열고 억누름에 막하지 않으나 비루한 범부는 그 시대의 칭송에도 도리어 막힘이 있기 때문에 대중으로 하여금 사도(邪道)와 정도(正道)를 섞이게 하였다. 사통팔달의 큰 길[康莊]로 재촉하여 이끌고, 기틀에 오르는 길[衢術]을 드러낸다.

이로써 원력(願力)을 채우는 짝은 작은 길을 타고 섭생하고, 천열(天熱)의 부류는 삿된 무리에 의탁하여 만물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격양(擊揚)하여 대도(大道)로 나아감을 엄격히 하고 널리 비유하는 것을 권모(權謀)에 두어 위엄(威嚴)의 자태를 기다리지 않고, 오직 집착에서 벗어날 뿐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부류는 바로 이행(理行)에 통달한 사람이다. 혹 통달하지 못했다면 바로 이단(異端)이 망령되게 일어난다.

만약 좌행(左行)을 본다면 잘못하고 편벽되며 남망(濫惘)이 더욱 심해지면서도, 자신의 번뇌와 미혹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저들이 율의에 어긋난 것만을 문제삼아 서로 부화뇌동하며 좌도(左道)를 짊어지고 끝내 구덩이에 묻혀 사라지는 것이다.

하품(下品) 범부의 예()는 원한을 품고서 사라지나, 상품(上品) 성인의 무리는 흉패(兇悖)를 편안히 참는 것을 슬퍼한다.

 

옛날부터 사람을 다스린 황제는 흥망(興亡)의 다스림을 참고로 하여 배를 삼킬 듯한 커다란 그물을 열며, 용납하고 기르는 관대한 정치를 펼치어 우내(㝢內)에서 어진 풍화(風化)를 천양하며 앉아서도 태평을 이루었다. 출처(出處)의 성규(成規)를 널리 하고 이 대재(大齎)를 베풀었다. 여타의 것은 낱낱이 살피어 규찰하니 모두 팽선(烹鮮)5)의 격언이 되었고, 거두어 펼쳐서 잘못을 꾸짖으니 엄밀한 법망의 비밀스런 명령을 양보하였다. 후대의 화근이 재앙을 부채질하는 데 이르러서는 제방(隄防)을 열지 않고 가리고 울면서 모서리를 향하니, 이것은 반드시 문드러지고 무너져서 급기야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정적(政績)을 모아 현명함을 펼쳐 드러내어 혹 조칙(詔勅)에 대항하여 당언(讜言)을 세우기도 하였고, 혹 논을 일으켜 정의(正議)를 따지기도 하였고, 혹 우러러 받들어 고상함을 기리기도 하였으며, 혹 슬픔을 머금고 조문을 읊기도 하였는데, 이와 같은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조례(條例)를 지어 수록해 둔다.

 

- 양홍명집』 「승행편(僧行篇)의 총목

() 유영(庾永)위제출조령승치경(爲帝出詔令僧致敬)

진 상서령(尙書令) 하충건(何充建)의불합주(議不合奏)2

진 환현(桓玄)서론도인경왕자(書論道人敬王者)와 답

진 환현의 우서론경의(又書論敬議)와 왕령답(王令答) 8

석혜원(釋慧遠)여환현서론불경(與桓玄書論不敬)과 답

환초위조사문불수경(桓楚僞詔沙門不須敬)과 답 5

석혜원(釋慧遠)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석혜원의 여환현서명사태사(與桓玄書沙汰事)

지도림(支道林)여환현서론승적(與桓玄書論僧籍)

정도자(鄭道子)서론거식(書論踞食)

범백륜(范伯倫)서론거식(書論踞食)

범백륜의 표론거식(表論踞食)과 조답(詔答)

 

석혜의(釋慧義)답범백륜서(答范伯倫書)와 답

범백륜(范伯倫)여생관이법사서(與生觀二法師書)

후진주(後秦主) 영환(令恒)표이사파도조(表二師罷道詔)와 답

나집(羅什)여진주서론환파도사(與秦主書論恒罷道事)

석혜원(釋慧遠)답환현령반속서(答桓玄令返俗書)와 답

석승암(釋僧巖)답유공불환속서(答劉公不還俗書)

석도성(釋道盛)계제무론사태사(啓齊武論沙汰事)

 

- 광홍명집』 「승행편의 총목

동진(東晋) 구도호(丘道護)지담제뢰(支曇諦誄)와 서문

후진(後秦) 석조(釋肇)나집뢰(羅什誄)와 서문

() 석혜림(釋慧琳)석법강뢰(釋法綱誄)와 서문

송 석혜림의 축도생뢰(竺道生誄)

송 사령운(謝靈運)석담륭뢰(釋曇隆誄)

송 사령운의 석혜원뢰(釋慧遠誄)

송 장창(張暢)약야산경법사뢰(若耶山敬法師誄)

남제(南齊) 석혜림(釋慧林)석현운뢰(釋玄運誄)

남제율사석지칭뢰(南齊律師釋智稱誄)

남제우희경법사행장(南齊虞羲景法師行狀)

() 심약(沈約)정수니행장(淨秀尼行狀)

() 효무제(孝武帝)사태승도조(沙汰僧徒詔)

원위(元魏) 효문(孝文)포숭제승조(褒崇諸僧詔)7

남제(南齊) 심휴문(沈休文)술중식론(述中食論)

심휴문의 술승회식론(述僧會食論)

 

북제(北齊) 문선(文宣)사태승의조(沙汰僧議詔)와 답

() 간문(簡文)조도징법사망서(吊道澄法師亡書)

양 진안왕(晋安王)여소부승정교(與所部僧正敎)

양 왕균(王均)여동양성법사서(與東陽盛法師書)

양 석지림(釋智林)여여남주옹서(與汝南周顒書)

양 유효표(劉孝標)여거법사서(與擧法師書)

양 왕만영(王曼潁)여교법사서(與皎法師書)와 답

양 유지린(劉之遴)조진법사망서(吊震法師亡書)

양 유지린의 조진형이경불서(吊震兄李敬朏書)

양 유지린의 조경정망서(吊京正亡書)

양 유효표(劉孝標)동양금화산서지(東陽金華山棲志)

() 석진관(釋眞觀)여서복야서(與徐僕射書)

() 서릉(徐陵)간인산심법사파도서(諫仁山深法師罷道書)

() 석운적(釋雲積)상무제지사태표(上武帝止沙汰表)

대륙(戴逵)이서선성명선사(貽書仙城命禪師)

유림사문(幽林沙門) 석혜명(釋惠命)수서북제대선생(詶書北齊戴先 生)

() 내사(內史) 설도형(薛道衡)조연법사망서(吊延法師亡書)

수 석언종(釋彦琮)복전론(福田論)

() 고조(高祖)문승출가손익조(問僧出家損益詔)와 답

당 고조의 출사태불도조(出沙汰佛道詔)

당 태종(太宗)영도사제승전조(令道士在僧前詔)와 표

금상의 영의사문경삼대조(令議沙門敬三大詔)[백관이 논의한 표()ㆍ 계()ㆍ장() 및 조칙과 친히 올린 표()ㆍ계()ㆍ논() ]

 

 

[여러 스님들의 뇌사(誄辭)와 행장]

1) 도사(道士) 지담제뢰(支曇諦誄)와 서문 진() 구도호(丘道護)

()나라 의희(義熙) 7(411) 5월 모일 도사(道士) 지담제(支曇諦) 스님께서 춘추 예순다섯에 돌아가셨으니, 참으로 애절하다.

법사께서는 서역(西域)의 후손으로 원래가 강거국(康居國) 태생이시다. 종족으로 인하여 국()으로 씨()를 삼았고, 법사의 훈요를 깊이 새겨서 이를 본받아 지()로 성()을 정했다.

오흥군(吳興郡) 오정현(烏程縣) 도향(都鄕)의 천추리(千秋里)로 옮겨와, 금상(金商)의 정기(貞氣)를 보태고 양육(陽育)의 소율(韶律)에 의지하면서 먼 지역을 쫓아 태어나 하천과 산악에 화합하여 신명을 받으셨다.

식정(識情)이 고요하고 순수하며 도량이 훤하고 엄숙하셨는데, 도에 이름[道致]은 천기(天期)를 드러내고 덕범(德範)은 소기(素器)에 빛났다. 바른 깨달음이 홀로 우뚝하여 온갖 이견(異見)으로도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으며, 지극한 마음이 깊고 견고해서 중론(衆論)으로도 그 견해를 당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구(塵垢)를 초월하여 품행이 높고 학문의 조예가 깊었다. 지혜의 이치를 어린 나이에 발명하고 미묘함을 궁구하고 현묘함을 좋아하여 이처럼 도를 밝혀 노년을 빛내었다.

그러므로 신화(神化)의 경계에다 신령한 기풍을 떨칠 수 있었고, 말대(末代)에 묘한 교화를 연출하면서 전대(前代)의 철인(哲人)을 이어받아 맑고 빛나며, 도속(道俗)을 화목하게 하여 귀의하게 하였다.

여러 방토(方土)를 다니면서 대업(大業)을 펼쳐내고, 유색(幽賾)을 묘하게 찾고 맑은 말로 미묘함을 분석하였다. 덧붙여 선()으로 문사(文辭)를 보태고 식견과 완상으로 조류에 참여하니 참으로 그 기풍 뛰어나기가 한 시대의 으뜸이었다.

스님께서 중년에 성시(城市)의 주변에 머물기 어려움을 개탄하여 숨어사는 것을 법도로 삼았으니, 산수(山水)의 성품이 원래 자연을 좋아하고 정외(靜外)의 침묵은 천심(天心)으로부터 체득하였다. 이로써 사람들과의 연()을 이별하고

 

그 자취를 절벽과 계곡 사이로 감췄는데, 오흥군(吳興郡)에 거처를 정하여 곤륜산과 마주하였다.

도를 맛보며 교화를 숭상한 지 12여 년 동안 정업(淨業)의 머무름을 넓히고, 마음을 씻어 진구(塵垢)를 닦아내니, 그 통발과 상()의 아름다움이 영원토록 흥성할 만하였다. 이에 그 종지(宗旨)를 기려서 어짊에 귀의하는 이가 사방에서 몰려들었고, 그 풍화를 새겨서 뜻을 품은 자가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찾아와 나루터를 물어 보았다.

이때에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숭배되어 많은 사람들이 재법(齋法)과 강의를 연이어 청하였으나, 스님께서 마음을 비운 채로 만물을 대하셨기에 일찍이 움직이고 그치는 것으로써 마음에 연연하는 것이 없으셨다.

마음을 미루어 이치를 펴 나가매 시작되기 전에는 도속을 달리 이루고 중간에 나가서는 하나의 덕으로 감싸 안았다. 또 멀고 가까움을 미루어 장차 현로(玄路)를 쓸어내고 퇴락한 풍화를 잇고자 묘한 사다리를 방외(方外)로 걸쳐서 그윽한 자취를 따르게 하셨는데, 애석하게도 오래 계시지 못하고 병들어 가셨으니, 아는 이는 그 가신 것이 너무나 애통하다고 말하였으며, 마음에 감득한 이는 참으로 슬프다고 여겼다. 대체로 작위(爵位)가 없으면서도 고귀하셨기에 살아서는 영예롭고 죽어서는 애도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지극한 이치가 아득하여 한 갈래이나 살고 죽는 것은 형체의 시초에 정해져 있고, 그윽한 식견이 묘하게 비추더라도 형해(形骸)의 그릇은 땅과 함께 같이 썩어간다.

그러나 기쁘고 슬픈 경계에서 마음의 기약을 없애며 만나고 헤어지는 마음을 없애지 않은 자가 어찌 잃고 얻는 것으로 슬픔과 기쁨을 삼아 장기(長岐)에 임하여 슬퍼하지 않겠는가?

비록 어둡고 없어지는 것은 체득하기 어려우나 전한(筌翰)에 의탁하여 그 풍화를 가슴에 새기고 약호(弱毫:)를 끌어다가 마음을 펼친다면, 맑은 빛을 거두어도 다함이 없을 것이니, 이에 삼가 만가를 짓는다.

 

[1]

끊임없이 이어지는 종고(終古),

아득하고 아득한 현로(玄路).

묘한 인연을 두드림이 없으니

긴 잠에서 깨지 못하는구나.

 

생사의 오고 감이 어지러우며

움직이고 쉬는 것이 서로 어그러지는구나.

백 세()를 서로 치달려 간 것이 백 세가 되어

말세가 될수록 더욱 어리석네.

진로(塵勞)에 영원히 빠졌으니

누가 그 연유를 알겠는가.

 

[2]

지인(至人)이 운수를 타니

영각(靈覺)이 그 안에서 비롯되네.

창해를 일찍이 보지 못하니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작은 것이 없네.

 

대명(大明)이 조화롭고 밝아서

깊은 밤 이윽고 밝아지네.

()를 멸하여 공()으로 되돌아가고

 

어둠이 걷히고 곧 밝아지는구나.

 

대도로 적시되 정해짐이 없고

짐승들도 어짊으로 돌보아지네.

어리석은 자도 버리지 않고

아는 이는 더욱 밝게 깨우친다네.

 

[3]

우뚝하시구나, 법사여.

대도의 성품도 자연스럽고

한마음 이루어 속세를 끊으니

정성으로 더욱더 그윽하다네.

 

미묘함을 궁구하여 신봉(神鋒)을 이루고

오묘한 깨우침 틈도 없으리.

속진의 집착하는 바

여기에 이르러 없어지네.

 

집착이 끌어당기지만

마음을 견고히 부여잡고

진구(塵垢)의 얽매임 털어 버리고

영혼의 연못을 떨치어 끌어당기네.

 

[4]

세속을 초탈하여 청아(淸雅)하니

바른 말씀 엄숙하며

넓고 깊은 텅 빔이여

열심히 노력하여 나아감이여.

 

조화롭되 탄식함이 있고

달리하되 두드러지지 않으며

마음을 머물게 하여 홀로 깨치고

생각을 천 인()으로 떨치네.

 

허무(虛無)로 만물을 접대하시니

와서 따르지 않는 것이 없네.

 

[5]

속세를 다니며 제도하시고

설법의 소리 울리게 하여 빛을 드날리며

현사(玄肆)에서 도()를 여시고

비로소 마음의 빗장을 열어내시네.

 

명극(冥極)을 위치지어 다스리고

그윽하고 미묘함을 쪼개어 밝혀

생각을 잊고 선한 마음을 당기니

조화롭게 어긋남이 없네.

군방(羣方)을 회통하고

돌아갈 곳에 종합하네.

멀리 퇴락한 법칙을 부축하여

정법의 울타리 넓히어 견고히 하네.

 

이 오묘한 지혜를 풀어내어

신령스런 위엄 퍼뜨리시네.

 

 

[6]

그윽한 경계에서 침묵하시어

나루터 가는 길 인도하시네.

정숙하고 그윽함은 하나되기 쉽고

화려하고 어지러움은 없어지기 어렵네.

 

스님이 이것을 슬퍼하시고

중도에 수레를 멈추고 수레를 묻어

바위틈 골짜기 숨어사셨네.

수풀 우거진 곳에 집을 지었네.

 

바깥의 인연을 물리치고

()을 안으로 거둬들여 민첩히 하고

통발을 펴시니 복종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미묘함이 다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7]

무성한 곤륜산

언덕과 구릉의

봉우리 연이어지고 구름이 빼어나니

골짜기 골짜기마다 둘러져 있네.

 

그늘진 뜰이 적적하고 고요한데

맑은 냇물 겹겹이 흐르네.

멀어져 보이지 않고

텅 비어 고요하네.

 

현풍(玄風)은 아득하고

승도들의 마음 화평하고 고요하네.

고요한 방에서 도()를 맛보니

신령한 거처 적막하네.

 

마음은 도에 따라 친해지고

()은 속세와 더불어 소원하네.

 

[8]

()는 진실로 외롭지 않고

()에는 반드시 이웃이 있네.

 

맑은 연못에 그림자 드리우고

뛰어난 업으로 사람 거두며

아득한 풍모로 종지(宗旨) 밝히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은

가슴에 큰 기약 품고

때에 맞춰 와서 나루터 어딘가 여쭤 본다네.

 

절실히 하여 다함이 없으니

매일매일 성하여 신령스럽고

숲속 땅속에 묻혀 사니

도심(道心)은 언제나 새로워지네.

 

[9]

성인이 가시니 말씀 끊기고

현명함은 드러나고 이치는 어그러지며

 

어둡고 어두운 말을 이어

현묘한 교화는 사라지는구나.

 

덕 높은 스승이여,

도인과 속인의 생각을 돌이켰는데

오래도록 수명을 누리기를 바라서

이런 낙유(落維)를 거두어들이네.

 

어찌하여 조문하지 않는가?

세상을 버리고 영원히 이별하네.

그 모습과 자취 길이 돌아가며

이렇게 가시니 따르지 못해

 

아는 이 누구나 통곡하였고

함정(含情)이 다 함께 슬퍼하네.

슬프고 슬퍼서 애달프다.

 

[10]

옛 얽힌 일들을 생각해 보며

이틀 밤을 지체하며 보낸다.

 

청우(淸宇)에서 고요히 즐기며

그윽한 골짜기에서 풀에 의지하며

흐르는 급류에 씻어 내리고

대숲에 편안히 몸을 기대네.

 

자주 이름난 별들에 흥하여

잔을 띄워 국화꽃 주으며

배와 유자를 달게 먹으며

죽순으로 소박한 음식만들어

시를 읊고 노래를 하였네.

 

즐거이 누구나 만족하며

이러한 노님을 잘 살펴봐 주셨으니

생각만 하여도 눈에 어리네.

슬프고 슬프다, 그 만남이여.

 

천 년에 다시금 뵙지 못하니

옛 정만 새기며 눈물짓는다.

비분이 솟구쳐 통곡할진대

오호라 비탄에 애타구나.

 

[11]

있으면 반드시 없어지려니

시작하면 끝으로 돌아가니

통달한 사람은 잘 살필지니

천 년도 단 하룻밤이네.

 

우매한 사람은 혹 응하여

흉함과 길함을 잘못 보네.

 

멀구나, 법사여.

일찍이 현실(玄室)을 되돌려

오랜 겁 닦으며 근면하시니

빠르게 하지 않아도 빠르네.

 

명연[冥緣]을 만나시기를 바랐더니

마침내 영술(靈術)을 만나

묘하게 행하여 운행하지 않아도

진실로 깊게 질()을 잃어버리네.

 

심정은 어둡지 않고

망연히 넋 놓아 하염없으니

감회를 종이에 담고자 하여

그윽한 기풍을 적어 보는데

오호라, 비탄에 가슴만 적신다.

 

2) 구마라집법사뢰(鳩摩羅什法師誄) 석승조(釋僧肇)

도는 저절로 넓혀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넓히는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는다. 속인은 저절로 깨우치지 못하니, 그 깨우침은 반드시 스승에 의지한다. 스승에 의지하기 때문에 세간에 드높은 깨우침의 기약이 있으며, 사람에 연유하는 까닭에 도에는 소성(小成)의 운세가 있다. 소성의 운세가 있다면 신령한 나루터에서 흐름을 거두고, 드높은 깨우침의 기약이 있다면 현봉(玄鋒)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러나 능인(能仁:석가모니)께서 세상을 밝히고 장차 천 년을 기약하시자, 시절마다 삿된 마음을 받들어 시비가 다투어 일어났다. 그러므로 신령한 규율(規律)이 숨어들고 빛의 실마리가 어지럽게 되었다.

이에 구마라집 법사가 있었으니, 대체로 선각(先覺)의 유사(遺嗣)이다. 생각을 대방(大方)에 두고 마음을 고관(高觀)으로 치달려

 

석도(釋道)의 피폐함을 살펴보고 창생(蒼生)의 곤궁함을 슬퍼하셨기 때문에 그 신묘한 자태를 분신(奮迅)하여 말대(末代)의 세속에 그 형태를 이루어 홍서(洪緖)를 계승하며 한 시절의 성참(城塹)이 되었다.

세간이 잠에 취한 것을 큰 소리로 깨웠는데, 대낮에도 어두운 시절을 지혜의 해로 밝히셨다. 도가 소멸된 곳에서 무너진 벼리를 결집하고 운이 다한 곳에서 퇴락하는 실마리를 모을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시절을 타고 만나며 굽은 것을 섞어서 바르게 하였다.

한 번 두드려 깨우치매 당시에 호향(互鄕)6) 사람과 같은 사람이 없었고, 다시 두드려 깨우치면 높고 험준한 높은 산들도 어짊으로 돌아왔다. 이때에 이르러 양과 사슴의 수레에 그 바퀴가 뽑혀서 육사(六師)의 수레만이 그 자취를 뒤덮었으나, 두 번 생각함의 그윽함이 이미 밝아졌으니 1()의 오묘함도 이에 현달되었다.

이로써 영동(嶺東)에 단좌하였으나, 그 메아리가 팔극(八極)으로 달려가니, 그 넓게 펼쳐진 가르침을 기뻐하며 구류(九流)가 따를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대진(大秦)의 부요(符姚) 두 대왕이 군대를 파견하였다.7) 이 두 왕은 마음을 대각(大覺)의 문호에 노닐며, 그 형체는 만화(萬化)의 위에서 머물면서 바깥으로는 희화(羲和)8)의 풍화(風化)를 드날리고, 안으로는 홍법(弘法)의 법술(法術)을 성대히 하였다.

도는 신령의 주고받음에 부합하고 굽혀서 형수(形授)가 되었다. 공이 종장(宗匠)으로서 중시받지 못하여 그 도마저 존경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신명의 보배를 마음속에 쌓아서 감통한 뒤에 움직이게 되었다.

공이 진천(秦川)에 형응(形應)하면서부터 촉용(燭龍)이 신광(神光)을 밝히듯 하였고, 큰 종지를 넓히는 것이 마치 희화(羲和)가 부상(扶桑)에서 나오듯 하였다. 상도(常道)를 고루 다스려 중현(重玄)의 오묘함을 다하였고, 삿됨을 막고 속됨을 깨달아 명교(名敎)의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말마다 때에 들어맞고 이치마다 원만하게 회통하였으므로 그 변론은 헛되이 일으키지 않았으며, ()는 헛되이 주창한 적이 없었기에 마침내 법고(法鼓)가 염부제(閻浮提)에서 다시 울리고, 범륜(梵輪)이 천북(天北)에서 재차 굴려지게 되었다. 지위는 닦아서 이룸을 초월하며, 몸은 백련(百練)으로 정미해지고, 행동은 때에 응하여 감춘 것이 아니었으니, 누가 여기에 부합할 수 있겠는가?

간략히 말하자면, 그 법의 넓힘이 춘양(春陽)에서 융성해졌고, 그 환난을 제거함이 가을 서리보다도 매서웠다. 그러므로 가없이 높으신 말씀이 참으로 우뚝하시며

 

참으로 위대하였다.

그러나 운세가 막혀 흥함이 멀어졌으니 사람들이 저녁 무렵이라 말하는 때이다. 계축년(癸丑年)에 향년 70세로 413일에 대사(大寺)에서 서거하였다.

 

오호라, 참으로 비통하다.

대도(大道)의 종장(宗匠)이 서쪽으로 가시니

영축(靈軸)이 동쪽으로 꺾이는구나.

아침 해가 비추다 희미해지니

보배의 산자락 무너지네.

 

천지와 사방에 낮과 밤으로

길 잃은 가마 아홉 번을 도네.

신명(神明)의 관문이 다시 닫히니

3()는 다투어 열린다.

 

밤에 빛이 아쉬우니

눈먼 이 슬퍼하네.

감회는 끝이 없고

사람들은 그를 생각함이 평소의 백 배가 되네.

 

이렇게 만가를 지어 올린다.

 

선각(先覺)이 돌아가시어

신령한 풍화(風化)가 아득해지고

통달한 선인(仙人)도 사라져 가니

응진(應眞)은 텅 비어 조짐조차 없어지네.

 

분분한 구류(九流),

바르다 그르다 서로 다투니

한가로운 눈먼 이는

신묘한 근기(根氣)가 가라앉는구나.

 

시절에 지남(指南)이 없어졌으니

누가 명도(冥度)를 알겠는가.

대인(大人)이 원대한 정각 이루고

그윽하게 생각하여 홀로 깨치네.

 

텅 비워 고요히 침묵하고

이 같은 현소(玄素)를 끌어안고서

기약에 따라서 운수를 타고

천로(天路)로 날개질 하네.

 

이미 운수에 따랐다고 말하고

마땅히 시절의 바람으로

생명을 받아 이로움을 타고

형상은 기이한 모습을 드러내어

 

강보로 덮였을 때부터 특출나고

이빨이 날 무렵 뛰어나서

한 번 생각하여 다시 거론하지 않고

깨우침에 스승을 기다리지 않네

 

8정도(正道)에 투신하고서

3()에서 노니네.

현묘한 근기가 우뚝하시어

위대한 말씀을 널리 펴시네.

 

꼿꼿한 절개로

홀연히 세속의 영화를 버리시고

대도의 법문에서 머뭇거리고

소박함 기리고 즐기셨다.

 

경전을 살펴보시고

오묘한 것을 기록하시며

넓게 하여 스스로 멸하는 것이 없으시고

()에는 의족(擬族)이 없었다.

 

서리가 맺혀서 얼음과 같고

신명이 편안하여 산과 같구나.

외적인 자취는 더욱 높고

내면의 빛은 더욱 밝았다.

 

드높은 말씀이 위대한지라

이로써 본받고 인()을 심는데

화평하게 텅 빈 생각

오로지 묘하고 진실되네.

 

()으로 현리에 형통하고서

()으로 사람에 감응하는구나.

말을 하면 세간의 보배[世寶]라고 하고

침묵하면 시절의 보배[時珍]라고 한다.

 

정화(精華)의 풍화가 이미 세워졌는데

두 개의 가르침 또한 공경하게 되었네.

누가 도가 사라진다고 하는가.

현묘한 교화 바야흐로 새로워지네.

 

()이 깨닫게 되면서부터

()가 넓혀지지 않음이 없으며

신령한 풍화 멀리까지 날리고

빼어난 메아리 가득하구나.

 

이 대방(大方)을 넓혀서

이 지혜의 등불에 불을 지펴

대도의 말씀이 처음 퍼지자

 

세속의 그물이 없어지고

어리석음의 뿌리 뽑혀

상품(上品)의 선()이 날로 늘어나네.

 

사람이 깃들이는 속세에도

그 길은 정해진 것이 없어서

이 같은 군유(群有)를 거두어들여

쇠퇴한 기풍을 다시 매었다.

 

네 가지 은혜로 따르면서

지혜의 서리를 드리웠는데

저쪽의 유마(維摩)를 본받으시니

자취는 성방(城坊)에서 참여하였다.

 

형태는 비록 원만하게 응하였으나

()은 제향(帝鄕)에서 텅 비고

다가오는 가르침 비록 미묘하나

어찌 좋다고 하겠는가.

 

위대하다, 대인이여.

원만한 공덕을 높이 떨치며

이 같은 명()과 상() 표방하여

저 같은 텅 빈 침묵을 드러내시네.

 

갖가지 묘함을 꿰뚫어

현묘한 법칙을 한데 묶어서

반야를 그윽이 선양하시어

하늘의 북쪽에 응하였네.

 

어떻게 운수를 되돌리려나.

그윽한 마을에서 깊게 새겨내니

천로(天路)는 누가 형통하며

3()는 누가 막아내겠는가?

오호라, 슬프고 애달프다.

 

지인(至人)이 무위(無爲)에 머무시면서

이루지 못함이 없으셨네.

권도(權道)의 그물로 은혜 드리워

길게 펼치고 멀리 얽어매었다.

 

순수한 은혜에 아래로 낚싯대 드리우고

나그네 떠돌며 위로 글을 짓네.

 

정성스럽게 선()으로 유도하시며

공경스럽게 덕화가 멀리까지 이르니

대도가 세속을 바꿀 수 있고

교화가 시절을 옮길 수 있네.

 

하늘도 참으로 무심하시니

이 신령한 규구(規矩)를 꺾고

지진(至眞)이 홀연히 떠나가시네.

순일한 대도가 거두어졌구나.

 

하늘도 사람도 통곡하고

지신[]과 백령[]도 눈물 흘리니

애달프고 애달프니 슬픔 더하다.

 

스님이 이렇게 가셨으니

연세가 106세이시네.

 

대도의 종장이 쓰러지시니

청정한 법륜도 축이 뽑히고

아침해 햇살도 희미해지며

산악도 여기서 거꾸러졌네.

 

온 우주 어둠에 휩싸이니

한 시절 도의 눈 잃어버리네.

창생(蒼生)도 애달파 슬퍼할진대

누가 보살펴 주고 누가 길러줄 것인가.

 

드넓은 하늘도 슬퍼하니

나 역시 비통만 더하는구나.

오호라, 참으로 비통하구나.

 

예전에 내가 한때

어짊의 냇물에서 노닐었으니

남기신 자취를 받들면서

그 허현(虛玄) 받들어 이어나가리.

 

써도 끝이 없고

뚫을수록 더욱더 견고해지니

빛나는 햇살이 흠이 없으니

몇 년을 보탤 것을 생각하네.

 

남아 있는 정 다 펴지 못하고

이미 따라서 교화하여 옮기시니

만약 속전할 수 있다면

천으로써 바꾸네.

 

때는 기다려 줄 수 없고

목숨은 연장할 수 없으니

이 한 몸 이 목숨 하나일진대

기댈 곳 기댈 연() 없구나.

 

생각은 끝이 없고

마음은 하늘에 대해 슬프니

오호라, 참으로 비통하다.

 

 

3) 무구법강법사뢰(武丘法綱法師誄) () 석혜림(釋慧琳)

원가(元嘉) 11년 겨울 11월 신미일에 법강(法綱) 법사께서 운명을 달리하셨으니 참으로 애달프다.

우뚝하게 방교(方矯)에 세워서는 이미 통임(通任)을 상하였고, 낮게 원비비(圓比)에 따라서는 또한 강결(剛潔)을 어그러뜨리며 산에 거처해서는 고고(枯槁)의 폐단을 조화시키고, 마을에 머물러서는 효추(囂湫)의 근심을 오게 하였다. 두 가지 마음을 헤아려 두 가지 일을 간략히 한 분은 오로지 법사뿐이다.

어려서 경화(京華)에 노닐다가 커서는 그윽한 산자락에 깃들었으니, 뜻을 즐겁게 하여 들어가고 나가며 마음을 타고 오고 갔다.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을 싫어하여 산림에서 한가롭게 지냈다. 숲속의 조용한 골짜기에서 물류(物類)를 고요하게 관찰하였다. 사람으로서 특별한 행동거지가 없는 듯이 생각되었으나, 나는 이 스님의 진실됨을 보았다.

천성이 영민한 데다 풍미(風味)로 도야하면서 정리(情理)에 머물며 문의(文義)를 완상하고 의탁하셨다. 교유할 때는 믿음의 서약을 돈독히 하고 나아갈 때는 복외(復外)의 도를 사모하였다. 몸은 법복(法服)에 파묻혀 구슬로 장식한 갓끈에 얽매임을 일찍 끊었고, 발자취를 신묘한 강역(疆域)과 동등히 하여 단지(丹墀)9)의 막힘은 일찍이 결정되었다. 하물며 상문(桑門)에서 바로잡고 떨쳐버리는 자취가 한갓 의복(倚伏)의 수()이겠는가?

예전에 서로 만난 것으로 인하여 경개(傾蓋)10)하여 교분을 맺어 함께 삭발하고 편안하게 여러 만물에 부합하고 감회를 펼치며 괴로움을 풀어내면서 세월을 보냈다. 드디어 손을 잡고 교량 위에서 노닐며 서로를 도우며 등()에서 살았다. 영수(靈岫)에서 바람을 마시고 현진(玄津)에서 도()를 퍼서 즐거움을 따르고 흥겹게 하니 천 년에 이 한 시절뿐이다.

숲속의 새는 흩어지며 갑자기 연월을 채우시어 스님은 고가(高柯)에 다다르고 나는 진흙 속에 빠졌구나. 항상 산간에 은거함을 점치고 한가롭게 혼자 거처함을 기대하였으나, 드디어 양고산해(梁高山海)의 이별만 이루었다. 동쪽의 파도는 다시 오지 않고 서쪽의 해는 거둘 수 없으며, 물은 다 흘러가 버리고 백골을 증구(曾丘:심산유곡)로 돌아가게 하니, 참으로 슬프구나.

이에 삼가 만가를 짓는다.

 

조상과 성씨는 은()나라이니

스님은 탕왕(湯王)의 후예이시다.

영광된 명성 속에서 드러나지 않더라도

근원은 맑고 밝네.

 

어려서 우환을 만나

집안에서 상복도 입지 못한 채

인자한 고모가 보살폈으니

 

양육을 고모에 의탁하였네.

 

이윽고 15세에 이르러

총명과 변재가 특출한지라

두 가지 기이함이 유달리 뛰어났으며

짝지어 펼치어 나란히 빼어나셨네.

 

뜻은 인간의 세상을 비루하게 여기어

신묘한 경계를 없애고

생명의 가까운 것을 벗어버리고

인연의 오래됨을 기쁘게 사모하였네.

 

이미 현리(玄理)의 자취를 따라가매

명교(名敎)의 자취를 밝게 깨달아

인의(仁義)의 밖에서

통하여 애석한 바 아니네.

 

집안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앉아서 마음으로 회통하니

주비(朱扉)에 의지하지 않고

암벽에 살고자 뜻을 정하였네.

오시되 자취를 남기지 않고

떠나되 깃을 끊지 않으시며

 

서로 견주며 함께 모였다가

나아가고 물러가며 손상되고 이익을 얻네.

나는 파도에 떠밀려 괴로운데

스님은 마음으로 나아가실 수 있었네.

 

도법(道法)의 연못에서 날아 올라

함께 덕림(德林)에 모여

가지런히 조화로운 기풍을 떨쳐내며

현묘한 말씀을 함께 울렸네.

 

궁궐로부터 온 나라에 두루

눈으로 마음으로

가서 교화하니 아득히 이어지고

생각을 보내어 침음(沈吟)하네.

 

또한 이미 멀리 떠나가시니

천도(天道)가 밝았는데

스님은 옛 산을 벗어나고

나는 아득히 먼 곳으로 돌아왔네..

 

바라건대 조화로운 운수를 타고

그늘에 깃들여 함께 쉬었네.

차가운 잿더미 연기 없고

낙엽이 지듯이 헤어져 가네.

 

바라보기 원해도 따를 길 없어

스님이 이처럼 세상 뜨시네.

사람들 가셨다 말들 하는데

그 기풍 가슴에 서려 있다.

오호라, 참으로 비통하구나.

 

한겨울 추위는 매섭고

강가의 나루터 쓸쓸한데

차가운 바람이 천막에 휘몰아치고

싸라기눈 날리며 배 안으로 들어오네.

 

목숨은 가까이에서 그쳤으나

돌아가는 길은 오히려 멀구나.

슬픔도 한탄도 다했을지니

고요히 슬픔으로 외치네.

 

외로이 다님에 초라해지며

가르침 그대로 갚지 못하네.

오호라, 참으로 비통하다.

 

호구산(虎丘山)11)에서 노닐던 시절 새겨 보면서

명멸(冥滅)의 여산(廬山) 봉우리 추모할지니

중경(中京)에서 큰스님 행장(行狀) 거두어 보니

번경(番境)에서 손잡아 주신 것 생각하고

 

마음에는 쌍만(雙巒)에서의 일이 휘몰아치고

생각은 양성(兩省)에서 얽히어 이어지네.

무엇으로 무극(無極)의 대도(大道) 이어갈거나.

마음속에 남겨진 것은 답답하고 울적함뿐인데.

 

엄동설한 매서울세라 떠나시고

여름더위 따가울세라 하직하셨네.

사운(四運) 어지러워 돌고 도니

마음은 멀리 갈 것을 기약하며 오래도록 숨으니

진실로 오는 인연 없어지지 않아도

살아계신 던 때 생각해 보면 슬픔만 더하는구나.

오호라, 참으로 비통하구나.

 

 

4) 용광사(龍光寺) 축도생법사뢰(竺道生法師誄) () 석혜림(釋慧琳)

원가(元嘉) 11년 겨울 10월 경자일(庚子日)에 도생(道生) 법사께서 여산(廬山)에서 돌아가셨으니, 참으로 애달프다. 선인(善人)이 다 떠나가시니 추모하여 애달파 함이 얕지 않고, 이치를 머금은 이가 사라졌으니 애석함만 더욱 깊어진다.

법사의 본성은 위씨(魏氏)로 팽성(彭城) 사람이다. 부친은 광척현령(廣戚縣令)이었다. 법사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특이하였다. 손을 잡고 법태(法汰) 법사에게 나아가 옷을 바꿔 입고 업()에 따랐다.

천자(天資)가 총민하고 사려가 일찍부터 빼어나시어 학업에 뜻을 둔 그 해에 바로 강좌(講座)에 올랐다. 이때에 도를 기리는 재주 있는 스님이나 저명한 선비들은 모두 그의 말을 궁구하여 그의 생각에 꺾이고 그의 정밀하고 치밀함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참으로 노련(魯連)이 전단(田單)을 굴복시키고,12) 항탁(項託)이 공자(孔子)를 항복시킨 것13)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성품이 고요하면서도 강렬하고 기운이 부드러우면서도 따르기가 쉬웠는데, 희사(喜捨)로써 사람들을 접하고 인도하였기에 만물이 더욱 우러러보았다.

중년(中年)에 유학하면서 널리 특이한 소식을 찾느라 양주(楊州)에서 진주(秦州)에 이르기까지 여산을 오르고 곽산(霍山)을 밟았다. 구마라집의 대승의 취지와 제바(提婆)보살의 소도(小道)의 요체의 이치를 모두 창달하여 그 오묘함을 높이 들어 올렸으니, 듣는 바는 나날이 뛰어나고 보는 바는 더욱더 깊어졌다.

마침내 깨우침을 얻고서, “()이란 이치의 헛된 바이니, 상에 집착하면 이치에 미혹된다. 가르침이란 교화가 말미암는 바[]이기에 도리어 가르침에 묶이면 어리석어진다. 이로써 그 이름을 구하여 진실됨을 따지려고 한다면 허탄(虛誕)에 미혹되고, 마음을 구하여 일에 응하게 되면 격언(格言)에 어두워지게 된다. 호나라에서 서로 전하고 중화(中華)에서 배움을 이었으나, 이 같은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자가 일찍이 있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미혹함을 거두어 홀로 옮기어 남기신 자취를 실행하셨다. 마침내 여러 경전을 구름같이 펼쳐 보이니 온갖 의혹이 얼음처럼 풀렸다.

석가의 이치가 맑아서 찾기 쉬운 데다 진귀한 말씀 모두가 통론(通論)을 이루었으니, 노담(老聃)과 장주(莊周)가 명교(名敎)를 말하고, 수필(秀弼:王弼)이 현심(玄心)을 깨달은 것도, 여기에서 바뀌게 될 것이다.

만물은 광영(光穎)을 기피하고 사람은 정월(貞越)을 허물 삼는데, 원수 맺은 이도

 

다 함께 굴복하니 군유(群遊)를 꺾기 좋아하였다. 바로 날개를 드리워 그 자취를 거두고 그림자를 암벽 사이로 숨겨서 어둠에 따라서 도를 지극히 하였으니, 자취를 남기시되 우공(愚公)이 배에 오르는 자취 그대로 하셨다.

한 번 가심에 돌아오시지 않으니, 마침내 그 명이 산자락에서 다하셨다. 참으로 환기(寰畿)에 비감(悲感)이 일어나니, 애달프다.

 

사수(泗水)와 변수(汴水)의 맑음과

여량산(呂梁山)의 우뚝함과 같은

오로지 이 같은 숙령(淑靈)이라야

이 같은 밝고 뛰어난 사람 길러내는구나.

 

풀 가운데 난초(蘭草)와 같이

돌 더미 가운데 옥()과 같이

다듬어 이룬 게 아닌데도

향기롭고 아름다움 이루었네.

처음에 학업의 큰 뜻 품고서

현묘한 자취를 깊이 새겨서

법문을 듣고서 마음으로 이해하고

경문과 펼치어 익히네.

 

어린 나이로 강의하여

새기지 못하는 글이 없으며

()으로써 말씀을 단속하고

어리석은 말씀을 숭상하지 않았네.

 

유식자(有識者) 모두 존경하고

현묘한 이치 찾아내는 것에 만족하며

중년에 가르침 상고해 보면

이치로 씻어내어 다함이 없었네.

 

방토(方土)로 다니며

그윽한 이치를 구하여

비록 특별한 가르침 얻어들었더라도

더욱더 함께 가까워짐을 깨닫는구나.

 

길이 다하여 돌아감이 없고

수레 끌채를 되돌려 수레를 고치고

이름난 자취를 없애고

일의 기준을 천양하시네.

 

누가 막아서 흐르지 않게 하겠으며

누가 어둡게 하여 깨닫지 못하게 하겠는가?

아침해 떠올라 비추듯 하니

밝음이 사방에 가득하구나.

4()10()

의지하여 인도하여 바로잡고

소와 말로 바꾸고

물고기와 새를 풍성하게 하네.

 

누가 이러한 실상을 징험하고

이 같은 도에 미혹될 것인가?

머뭇머뭇 이렇게 깨달아

내게도 법언(法言)을 내려 주시며

대도가 참으로 이러할지나

군생(群生)이 듣고 모두 전파하네.

 

혼자서 거슬러 우뚝 솟을 뿐 아니라

다문(多聞)을 꾸짖고 훼손하며

제자가 괜찮다 대꾸하니

배움을 넓히도록 타이르셨네.

 

앎은 정성(貞誠)과 조화되고

떠도는 시끄러움 가르쳐 보살피시며

침묵의 그늘 옮기어 크게 되면

이러한 말들 그치네.

 

깃들어 살면서 꽃을 피우곤

대숲에 머물며 숨으셨으니

생각을 돌이켜 근원 찾아서

냇물도 언덕도 걸림없었네.

 

한가함에 의지한다면

인자(仁者)는 장수한다14)고 말하네.

목숨은 매달려 있으니

영구하지 않다네.

난초꽃 갑자기 시들고

갑자기 기운이 상해지니

오호라, 참으로 비통하구나.

 

이에 처음으로 이별을 생각하니

지나간 3년 전 가을

시원한 바람이 맑기만 하고

구름 드높게 숲속에 떠 있었네.

 

남포(南浦)에서 이별하고서

손을 마주잡은 뒤 길을 달리하였네.

스님이 가시매 텅 빈 듯하고

마음속 추억이 처량하네.

 

 

누가 은둔하여 있는가?

각각 물을 따라가거나 거슬러 올라가니

영원한 이별에 애석하구나.

서로 이룬 것이 다르구나.

오호라, 참으로 비통하다.

 

바람이 거꾸로 불어올지니

메아리 끊은 채 떠나셨기에

구름이 드리울 인()이 없구나.

 

3년 전 늦가을 세상 뜨시나

다시금 세월 흘러 봄이 왔구나.

날짐승 기쁜 소리 들려올지니

신기(神氣)의 따스함을 자세히 살피네.

 

상서(庠序)를 이 달에 생각하여

정업(淨業)을 익히기에 좋은 때이나

강당(講堂)의 공적(空覿) 숨기어지고

고좌(高座)의 허문(虛聞)에 가슴 아프네.

 

일로 인하여 탄식하여 이치를 새기고

인연의 정을 슬퍼하여 그리워하니

오호라, 참으로 비통하구나.

 

천도가 망망하고 어두우니

믿고 따라가 궁구하고

이치는 소멸되지 않으니

함께 돌아가기를 바란다네.

 

아름답게 다 펼치시니

정념(情念)으로 추모하네.

짧은 글 한 편을 짓기도 전에

어느덧 슬픔만 쏟아내는구나.

오호라, 참으로 비통하다.

 

5) 담륭법사뢰(曇隆法師誄) 사령운(謝靈運)

이치에 맞게 논리를 세운다면, 백가(百家)라도 그 올바름을 보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스스로를 깨우친다면 하나의 몸이라도 그 자빠짐을 걱정하지 않는다. 마침내 서로를 분별할 수 없어서 나와 그대가 모두 탄식하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주고자 하였어도 끝내 누가 알겠는가?

행적(行跡)이 세워지기를 기대한다면 선악을 캐묻지 않고, 명예와 이름만 전하고자 한다면, 훈유(薰蕕)15)가 함께 다하게 된다. 그러나 뜻은 몸으로 굽혀지는 바가 아니다. ()의 제한하는 바를 벗어나기를 기대했던 자를, 직접 내 눈으로 살펴서 이 같은 사람을 보았다.

법사께서는 지혜로운 마음과 밝은 식견이 어릴 적부터 형통하였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집안이 부유하여 집안에 금백(金帛)이 가득하였다. 게다가 수레를 장식하고 사죽(絲竹:현악기)을 연주하며, 대로에서 절경(絶景)을 논하고 화사(華肆)에서 현관(絃管)을 연주하면서 10, 한 달을 보내고, 해를 보내며 지냈다. 조이(趙李)의 함양(咸陽)16)과 정정(程鄭)의 임공(臨邛)17)을 믿었다.

이리하여 긴긴 밤에 홀로 깨어나 슬퍼하며 탄식하기를, “저 좋고 싫은 것이 번갈아 다가오니, 끝내 근심과 고통으로 돌아가는구나. 그 뿌리를 막지 않으면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삼계(三界)에 번갈아 묻히니, 여러 천상조차도 일순간일진대, 하물며 제경공(齊景公)이 우산(牛山)에 올라가 한탄한 것18)과 조무(趙武 :趙孟)가 음()을 기다린 것이 계절에 알맞은 경치나 풍물을 재촉하고 이슬과 서리를 핍박한 것이겠는가? 이것을 미루어 말해 보면 이 어찌 오래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탄식하며 영화로움을 물리치고 만물과 나를 아울러 제도하려는 뜻을 지녔었다. 어머니가 그 마음을 갸륵하게 여겼는데, 아우들과 그 거조를 상의하고는 서로 약속하여 출가하여 한 몸으로 도를 구하였다. 문호를 닫고 속세를 이별하며 처자식을 영원히 끊고 기쁨과 즐거움을 영원히 이별하니, 어찌 즐거움이 아닌 것으로 나아가겠는가?

성년(盛年)이 되어 종고(終古)의 은애(恩愛)를 지금에서야 이별하셨다. 배를 타고 남쪽에서 거슬러 올라 여악(廬嶽)에 은거하여 한 번 석문(石門)의 향로봉(香爐峰)에 오르자, 6년 동안이나 산을 내려오지 않았으니, 실로 대중들로서는 그 깊이를 헤아릴 바가 아니었다. 법사도 그 절개를 굽히지 않으셨으나, 만물을 구하고자 하는 생각은 숨어살면서 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기에 동학(同學)이 병에 걸리면 석장을 휘두르며 만 리를 달려가서라도 구하곤 하셨다.

내가 이때에 동산(東山)에서 병에 걸렸었는데, 그 기풍을 이어받기를 멀리서 바랐으나, 어찌 뵙기를 원한다고 산에 사람을 초대할 수 있겠는가? 법사가 이미 지극하게 머무시면서도 비루한 사람을 위해 수고로움을 다하신 것은, 예전에 대략이나마 시()를 지어 기록해 두었기에 다시 번거롭게 하지 않는다.

다시 도중에 산으로 돌아가 대언(大言)을 이루셨는데, 정성스러움을 다하여 마침내 수확이 있게 되자, 들보를 이어 단애(斷崖)를 잇고서 굽이진 계곡 물을 마시고 죽순과 지출(芝朮)을 잡수셨다.

법의 말씀을 펼치셨다가 함께 거두시어 다시 추위와 더위를 거쳤다. 다만 산양(山陽:산의 남쪽)만이 얼굴색을 기쁘게 하고, 영윤(令尹)만이 진기(進己)의 색을 하나로 할 뿐만이 아니다.

실로 유미(幽微)를 밝게 깨달아 가까이 막힌 것을 씻어내고 쇠한 것을 닦아내면서 나날이 그 근심을 잊으셨다. 흰머리가 되도록 함께 살면서 무상(無象)에서 벗어나 믿고 따라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매 구하여 모은다고 무슨 인연이 있겠는가

나중에 법사의 병환이 심해지셨기에 내가 멀리서라도 문안하곤 하였는데, 가는 길이 험해서 소식이 자주 끊어졌다. 여름이 되어 병이 심해져 열흘이 못되어 바로 천화(遷化)하셨으니, 참으로 살고 죽는 것은 명()이다.

이 같은 행실이 참으로 말미암은 것이 있었는데, 그만 비보(悲報)를 접하자 비통함만 서리니 보통의 마음의 백 배나 된다. 종이와 먹으로

 

어느 때인들 그 이름을 기약하고자 함이 아니다. 대체로 그 지조를 흠모하면서 한평생 깊이 따랐기에 내가 침묵하지 못하겠다.

이리하여 감회를 표하고자, 붓을 끌어당기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로는 형식(形識)을 되새겨 보고

아래로 이류(理類)를 따져 볼지니

소리를 가려내 조화를 알고

잎사귀 하나로 전체를 보네.

 

만물은 신령을 달리하고

사람은 지혜로 귀하게 된다.

이것이 신명(神明)이니

살펴보고 뜻으로 말씀하시네.

 

처음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지혜의 마음으로 관찰하여

아름다운 꽃향기 토해 내고

해와 달 마음에 끌어안았네.

 

저 난초와 같이

바람이 지나가고 기가 초월하며

저 천예(天倪)와 같이

구름이 흩어져 빛을 펼치네.

 

이름을 구하고 몸을 단속하며

혹 어리석은 시대를 만나서는

일찍이 저런 이 보지 못했으니

나면서부터 마음이 태연하여

마음으로 생사의 이치를 살피셨네.

 

누가 기쁘게 위로하겠는가?

정정(程鄭)과 조비연(趙飛燕)과 이부인(李夫人)

집에는 금비단이 쌓여 있고

재주가 있어 기예(技藝)를 익혔네.

 

머리를 들어올려 힘차게 나아가고

여러 악기들 소리 아름답고

술과 오락으로 흥을 돋우고

마음은 곱고 옷은 사치하네.

 

아침에 석양빛을 다그치고

저녁에는 별빛이 옮겨지는 것을 꺼리며

유유자적하며 낮을 보내고

처량하게 밤을 보내네.

 

세월 흘러감을 기뻐하고

아름답게 와서 마음속 집착없이 평안하니

괴로움과 즐거움 돌고 돈다네.

몸이 다하니 오래된 것과 새 것이 서로 바뀌네.

 

버리고 다시 가니

살아서는 빠르게 이름을 빌리네.

누가 쉽게 뺏겠는가?

어떤 방법으로 세월을 돌이키겠나?

 

정밀한 것과 조략한 것이 함께 섞이고

선악이 뒤섞이어

마음에 제한이 있으나

이치에는 규범이 없네.

중사(衆肆)를 시험삼아 살펴보고

살핀 것을 얻기를 바라네.

도가(道家)는 가까이에서 넘어지고

여러 무리들은 먼 것을 결하였네.

 

이름을 빌리는 것은 항상 누구인가?

이치를 옆에 두고서 어찌 되돌리는가?

홀로 겸망(兼忘)하시고

마음으로 인하여 선()하네.

 

만물을 손상시켜 깊이 미혹하고

저것을 몰아냄을 부러워하고

경사(京師)에서 옷을 바꾸어

여정(廬頂)에서 석장을 흔드셨네.

 

오래도록 세간의 영화를 이별하고서

한평생 산중에 머무셨는데

비단옷 버리고 베옷 입으며

번잡함 버리고 검소하셨네.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고생스럽게 여겼지만

스님은 적정(寂靜)을 취하시어

컴컴한 가운데 빛을 보고

어리석음에 나아가서는 끊어버렸네.

 

지혜가 마음을 잡아서

이치에 대하여 열반하시네.

아끼는 마음 이미 떨쳐 내지 않았으니

막힘을 어떻게 떨쳐낼 것인가?

스님이 가엾게 생각하시고

고행의 일을 행하니

고행의 일은 자기에게 있고

 

이롭고 바른 것은 상대에게 있었네.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자비로 번뇌를 끊어 주어서

만 중생 모두를 구원하자면

먼저 마땅히 차안(此岸)을 구제해야 하리.

수레가 떠나면 마음은 어긋나고

마침내 이치는 바르네.

 

양홍(梁鴻)19)은 처자를 이끌고

삼태기를 메고 스님을 보고

닭과 기장밥으로 대접하거나20)

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통하였다.21)

세상에서는 현자라고 일컬었어도

길에서는 매우 비루하게 보였다.

 

비로소 법사를 만나

홀로 신의 이치에 빼어나

형체의 수명은 다하기 쉽지만

승낙은 판단하기 어렵네.

 

마음을 타고서 천화(遷化)하시니

가신 님 무어라 탄식할손가?

도를 생각하니 더욱 엄하며

경명(景命)은 이미 편안하여

만물을 불쌍히 여기고 산을 떠나

마침내 여관(旅館)에서 쉬시니

참으로 슬프구나.

 

혼백과 정기가 함께 따르다가

연릉(延陵)22)에 이르러 끝맺었는데

솔개와 하늘밥도둑과 같은 곤충에게 함께 베푸는 것은

칠원(漆園:장자)이 깨우친 바이더라도23)

텅 빈 들판에 시체를 버려두는 것과

어찌 다르며 어찌 바로잡겠는가?

 

다행스럽게도 남겨짐이 있다면

벌레나 새 들에게 보태어 주니

참으로 슬프고 애닯구나.

 

스님의 한평생 돌이켜보면

함께 깊은 산에 머물며

더불어 따르며 일을 시작하였고

함께 높은 곳에 올라 내려다보았네.

 

바위를 열어내 냇물 터놓고

가시를 잘라내 숲을 시원하게 하니

멀리서 볼수록 중첩되고

가까이 볼수록 드높을세라.

 

일은 땅 사이에서 적고

미묘함을 찾아 진리를 탐색하니

어떠한 구절로 궁구하지 않으며

어떠한 의심으로 분석해내지 않겠는가?

 

책을 펼쳐서

보관해 두었던 종이도 펼쳐내어

질문과 답변이 오고가며

낮이 밤을 이어

장저(長沮)와 걸익(桀溺)과 같이 나란히 밭을 갈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와 같이 함께 고사리를 먹네.

 

자취를 같이하여 마음으로 기뻐하지만

일을 달리하여 뜻을 달리하네.

병을 이어 마음만 애태우며

돌아가신 소식 듣고 모두 슬퍼하니

누구인들 애통해 하지 않겠나?

 

눈물이 흘러서 소매적시니

오호라, 참으로 슬프구나.

가신 지 오래라 계절 바뀌니

땅자락 기운도 변하였고

어느덧 가을이 끝나고 한 겨울이니

계수보다 더 나은 것24) 바다에 던지며

가신 이 영원히 그려볼진대

생각을 할수록 가슴시리네.

 

아래로는 상인(常人)을 이별하시고

위로는 기다림이 없음을 부끄러워하니

오호라, 참으로 애달프구나.

 

6) 여산혜원법사뢰(廬山慧遠法師誄)와 서문 송() 사령운(謝靈運)

도는 한 갈래로 남아 있기에 교화를 달리하여도 빛나기는 마찬가지다. 덕은 묘한 이치에 합쳐지기에 방토(方土)가 틀리더라도 그 이룸을 고르게 한다.

예전에 도안(道安) 스님이 관우(關右)25)에서 현풍(玄風)을 떨치자, 법사께서 그 흐름의 끝을 강좌(江左)26)에서 이어받으셨는데, 그 풍화를 듣고 모두 기뻐하며 사해(四海)가 함께 귀의하였다.

 

이리하여 산림 속에서 인()에 귀의하며 숨어살며 뜻을 구하였다. 마침내 대중 스님들이 운집하여 깨끗한 행을 부지런히 닦으시면서 법을 같이하며 그 풍화를 마시고 도문(道門)에 깃들이셨으니, 불멸 후 5백 년 후에 우러러 사위국(舍衛國)의 옛 풍화(風化)를 이어서 구불구불한 여산(廬山)에서 영취산의 말씀을 전하셨다고 말할 만하니, 그 양양하기가 일찍이 들어 본 적도 없던 바이다.

내가 배움에 뜻을 품던 해에 그 문인의 말석이라도 자리하기를 희망하였는데, 애석하게도 소원을 미처 이루지 못한 채로 스님께서 이승을 영구히 하직하셨으니, 바야흐로 춘추가 여든넷이시다.

의희(義熙) 13(417) 가을 86일 서거하셨는데, 나이가 드시자 마침내 신명을 거두시니, ()이 다하고 몸이 못쓰게 되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니 천 년토록 빛을 드리우실 것이니, 참으로 애달프구나.

이에 삼가 만가를 올린다.

 

그 옛날 계셨던 도안(道安) 스님은

대도의 풍화(風化)로 덮이어

대법이 장차 다하자

기울어진 벼리에 의지하네.

 

바탕은 고요히 움직임을 그치고

참다움 머금어 세속을 정리하였네.

스승을 섬기되 효성스럽고

제자를 기르되 의로웠다.

 

여래(如來)를 우러러 넓혀 가고

바람과 비를 뿌리며

고개 숙여 법사에게 내리시니

위의가 남달리 뛰어나셨네.

 

공부에 전념하여 창문 밖을 넘보지 않으시고

살펴보시매 문 밖을 나가지 않으셨다.

거친 음식 드시면서도

홀로 장초(萇楚)27)가 되셨네.

 

밝디 밝은 고당(高堂)이여,

엄숙하고 엄숙한 법정(法庭)이여,

위엄이 있고 정숙도 하니

더욱더 높고 더욱더 맑구나.

 

편안하고 여유있는 말씀

넉넉한 자태여,

널리 자비를 펼쳐내며

만 중생 모두를 넉넉히 이롭게 하였네.

 

훌륭한 재능이여

노력하고 노력하는 자질이여

머리 묶었던 어릴 적 도를 맛보고 나서

부모 곁 떠나서 스승 따랐네.

 

삼보에 지극히 공양드릴 때

미묘법(微妙法) 깨쳐서 의심 없애고

성대한 교화를 두루 펼쳐서

어진 덕으로 감싸 주셨네.

 

이로써 도리를 묻게 됐으니

사해(四海)가 다 함께 귀의하였다.

찾아가 뵙고자 마음먹은 이는 달려와

스님의 계덕(戒德)에 고개 숙였네.

 

높으신 명성이 사방 떨치니

오탁(五濁)의 세상도 잠시 밝아지고

대도를 드높이 선양하시자

더욱더 텅 비게 되었네.

열여섯 왕자28)

어려서 선각이 되었고

스님이 출가한 때는

아직 지학(志學)15세가 안 되었을 때이네 .

 

저 등림(鄧林)과 같이

감로에 적셔지고

저 아름다운 옥과 같이

이미 갈고 쪼았네.

 

대종(大宗)이 이르자

 

좌중(座衆)에 훌륭한 사람이 많이 모이고

스스로 찾아와 함께하여

영사(靈寺)를 세웠다.

 

옛 바람은 기미를 궁구하고

새로운 공부는 때때로 익히며

스님이 자세히 지도하시니

조화롭고 화목하였네.

 

구마라집 스님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러러 바라보면 서로 한마음이 되었네.

참선하는 대중을 이끌어

친히 삼매(三昧)를 이었다.

 

여러 가지 아름다움 모두 거두었으니

참으로 높고도 크도다.

빛나는 도덕이 위대한지라

이해 관계를 뛰어넘었다.

 

육합(六合)의 운수가 궁색해져서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말라서

해와 달은 빛이 가려지고

삼광(三光)의 밝음은 잠자게 되었네.

 

여러 산기슭의 나뭇가지 꺾이고

연이은 물결도 잔잔해지니

위대한 가르침 실마리를 드리우며

미풍은 영원히 그쳐버렸다.

참으로 슬프구나.

 

살아서는 충소(沖素)를 다하고

죽어서는 슬픔만 더하는구나.

소박하게 흙 속에 묻혀 버리니

유해를 거두어 똑같이 보이네.

 

하늘과 사람도 슬퍼하고

제석(帝釋)도 애달퍼하니

남겨주신 풍모 익숙하고 익숙하며

남겨진 쓸쓸함 마음속 가득 차는데

슬프구나, 법사님이여.

 

마지막에 여기에 거처하셨으나

방 안에 말씀이 전해지지 않고

길에는 지름길 없으니

참으로 더없이 애통하구나.

단목(端木)이 공자를 장사지낸 후

슬퍼한 것이 6년이었다.29)

위로는 수사(洙泗)30)를 사모하면서

아래로는 제전(蹄筌)을 꺼렸다.

 

지금 스님의 제자들은

모두 이 같은 어려움에 부닥쳤으니

아침에 빈 방을 쓸어내면서

저녁에 빈 산에 눈물지으니

스님이 가신 게 애통하구나.

다시금 언제나 돌아오실까.

 

바람이 대나무와 잣나무에 불어오며

구름은 바위와 봉우리 사이에 자욱하니

골짜기의 계곡이 우는 듯하며

산림이 얼굴색을 바꾸는구나.

 

예로부터 풍문을 듣고

귀의하길 원하였건만

산과 강물에 가로막혀서

마음만 있었지 가지 못하였네.

 

시종일관 한이 되어

숙세(宿世)의 인연을 가벼이 하고

편안히 길러짐을 맡기시어

염부(閻浮)를 원하지 않으니

마음만 갈수록 애가 타는구나.

 

7) 약야산((若耶山) 경법사뢰(敬法師誄)와 서문 송() 장창(張暢)

만물에 의지하여 노닐고, 용도를 다하여 바깥에서 태어나도 도가 오는 것은 나로부터이니 마음속에 품고서 기뻐한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서 보배를 끌어안고 겸거(兼車)를 이끌며 위()나라를 벗어나고, 난새처럼 구름 끝을 날아오르는데, 어찌 수레를 늘려 위나라로 들어가겠는가?

이로써 선비가 세속에 거만한 것은 오히려 그 도에 외로운 것이며, 숨어사는 백성은 번민이 없이 높게 홀로 있는 것이다.

 

내가 매번 책을 펼칠 때마다 환하게 빛이 비추었기 때문에 나의 감회를 적어 들춰내보나 실로 몸과 마음이 충족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법사께서 충독(沖獨)의 운()이 어렸을 적에 이미 드높았으며, 절령(絶嶺)의 기운으로 어렸을 적에 이미 원대한 뜻을 품었다. 여산으로 수레를 돌려 쉬실 때에는 비로소 머리를 잘라 뜻을 멀리 천 리 밖에 두었는데, 이에 삭발한 몸을 구하시어 도에 나아가 속가(俗家)를 잊고서 법()으로 들어가셨다.

당시 석혜원 스님은 높으면서도 더욱 드높아 오히려 유치한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드디어 산골짜기 맨 위의 태양이 텅 빈 곳에 임하고 험난한 땅에 던져져 몸소 실천하였으니 법사는 기이하게 받아들이셨다.

자손은 화윤(華胤)에서 날개짓하고, ()을 모아 소박하게 본분을 지키며 매섭게 내리는 서리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선대(先代)부터의 기풍이 고절(苦節)하였기에 함께 배우는 이들이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해도 마치 사람들이 그 거조를 바꾸지 못하듯 하였다.

이때에 경장(經藏)이 비로소 동쪽으로 전해지고 업()이 화우(華右)에 번창하자, 바로 만 리 길을 두드려 가서 자주 함곡관과 낙양에서 노닐며 정()과 혜()를 아울러 깨닫고 쓰임을 다하여 날로 작아졌다.

구마라집 스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혜원 스님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이에 그 자취가 거두어져 문호가 닫히고 거처가 막혀서 산굴이 막히었다. 그러나 뜻을 버리지 않은 이가 약야산(若耶山)에서 뜻을 버리지 않은 것이 20여 년이나 되었다.

내가 병을 핑계로 물러나 몸을 바람에 맡겨 생각이 법사에게 머물면 (법사께서) 감응(感應)하여 와서 노닐게 되어 자리를 함께하며 편안히 말씀 나누어 청사(淸榭)에서 말을 마치시고는 말씀도 없이 그대로 떠나가시곤 하셨다. 참으로 말없이 사귐을 두터이하면서 동정(動靜)에 허()하고 원만하였다.

징사(徵士)31) 대옹(戴顒)32)은 인품이 뛰어나고 생각이 고원하며 신묘한 거처(居處)를 함께 아름답게 하여 기풍(氣風)과 이치가 서로 융화(融和)되었다. 이에 산굴에 의지하여 집을 이루고 산림에 머물러 관()을 열었다. 바로 이처럼 사람의 겉모습을 떠나서 마음으로 벗을 삼았는데, 서쪽의 강물에 물결이 일자 동산(東山)이 이미 무너졌다. 바람과 구름도 그치고 초목마저도 애도할지니, 마음속에 슬픔만 여전하다.

눈물이 흘러 눈도 뜨지 못하겠으니, 참으로 애절하다.

삼가 이에 만가를 지어 올린다.

 

높은 곳에 계신 상왕(上王)

이수(伊水)와 낙수(洛水)에서 봉황을 노래하고

일로(逸路)에 구름이 날고

 

고헌(高軒)에서 학울음 울려퍼지네.

 

영원(靈源:隱者가 사는 곳)의 세상의 흐름

유인(幽人)이 대신 만드네.

돌아오는 사람들

옛날을 뛰어넘어 운수(運數) 열리니

 

교화의 옛 자취 받들어

옛 길을 따르며 들은 것을 이어가네.

옥을 만들면 윤기를 머금고

금을 다스리면 차가운 기운을 떨치네.

 

평생의 배움은 그윽하고

나이가 차면서 비로소 시작하니

아름다운 덕 이미 높고

꽃이 펴서 자라나네.

 

()은 만대에 빼어나고

그 풍화 천리에 나타나며

정과 사랑은 아울러 가볍게 보고

집과 나라도 풀과 같이 생각하였네.

 

통달하였구나, 철인(哲人)이여.

홀로 현보(玄寶)를 늘어놓고

수레를 7()으로 모아서

안장을 8()로 날렸다.

 

삼강(三江)은 매우 고요하고

여산(廬山)의 땅은 뛰어나니

땅은 만물을 떠나고

자취는 현리(玄理)에 머물렀네.

 

높고 원대한 맑은 지혜

집을 얽고 연()을 이어서

군유(群有)로 앞서 몰아

인천(人天)의 세계로 길을 떠났네.

 

나는 화합을 만들어

저 청풍을 모아

업보에 떠돌다 좋은 인연 만나서

묘리(妙理)로 마음을 다스려 가네.

 

봄철의 하늘에 햇살 비추고

가을의 저녁 때 달빛 비추니

마음의 방촌(方寸)이 이를 곳이 없어

육합(六合)이 모두 다 거둬지더라.

 

위대한 구마라집 스님이여,

공덕이 삼계(三界)에 으뜸이시라

진도(眞道)와 속세(俗世)에 관면(冠冕)이시고

신도(神道)의 우두머리 되셨네.

 

만약 사람들이 그 말씀 마주하면

수레를 받들어 그 자취를 따르고

사막의 매서운 추위와

계속되는 바람에 눈까지 내리며

소매를 얼음 같은 서리에 내던지고

해지는 저녁 때 옷자락을 잡았다.

 

누가 나루를 물었는가?

유유(悠悠)한 철인이시니

장자와 노자도 옷깃 여미고

공자와 주공(周公)도 사모했을세.

백대(百代)에 걸쳐서 한 사람이라

만물을 실어서 개화(開化)했으니

마음속 원만하셨네.

 

조백(糟魄)33)을 살피고

이러한 무생(無生)을 옮겨서

숲속에 거처를 정하시고서

묘하게 환중(環中)으로 들어가시니

도는 형이상(形而上)에서 나왔다.

 

이 사람이라고 말하니

그윽한 길은 홀로 밝아

지혜는 마음에서 텅 비고

관조는 그 모습을 실체화하네.

 

살아서는 무주(無住)에 머무시다가

다르게 상심(相尋)을 무너뜨리셨다.

구마라집 스님은 앞서 떠나시고

석혜원 스님은 지금 떠나가셨으니

장석(匠石)34)은 무엇을 움직이는가?

 

백아(伯牙)가 소리를 끊었고

근심하여 멀리 숨어버렸다.

예전의 그대의 마음을 돌이켜

동쪽의 산속에 자취 여시니

약야산(若耶山)에 자취를 지우셨네.

일찍이 풍수(風首)를 휘날리어

봄에는 구름 덮인 언덕에 자리하고

정원에 풀을 맺어 집을 지으며

물가에 머금고

달님은 동쪽에 빼어나게 떠오르고

서산에 해지니 노을 지는구나.

 

마음의 행보는 그치지 않아

잠자고 깨는 일 아예 없구나.

 

흰 구름 절조에 임하고

맑은 바람 절개를 단련시키니

 

5()로 다스리고

6()로 견주면서

4()로 생각을 돌이키고서

3()의 법으로 길을 삼았다.

 

생멸(生滅)은 법에 있고

제행(諸行)은 항상되기 어려우니

철인이 장작불 모두 태우니

오래된 불씨에 타오를지니

 

햇빛도 어둠을 던지고

따뜻한 봄철에 서리맺히니

참으로 애달프고 애달플지라.

 

옛날 내가 어린 나이에

일찍이 청운의 꿈 품었으니

무상한 세월에 서글퍼져서

이처럼 마음을 달래보노라.

 

가난한 집에서 부모 모시니

논밭을 갈아도 배부르지 않고

나아가 격문을 내걸며 기뻐하니

몸은 본디부터 외롭구나.

 

이미 형상(形相)에 멀리했는데

다만 도에 통하여

내가 병이 나면서부터

높이 동산(東山)에 정자를 만드네.

 

밝은 달 가는 길에 고요히 비치고

흰 구름 가는 길에 한가로이 덮이네.

소나무처럼 울부짖으며

바람결 따라서 말씀 전하네.

 

내가 대후(戴侯:戴顒)를 탄식하며

일찍이 양준(涼峻)에 거하여

큰스님 기리며 앉았으려니

마음이 동하여 운()을 짓는다.

 

언제나 다시금 뵈올 것인가?

유계(幽界)와 현계(顯界)가 서로 다르니

가야금 보고도 연주할 줄 모르고

세 번 술상을 받는 것은 누구와 마주할 것인가?

참으로 애달프고 애달플지라.

 

산속의 옹달샘 말랐으려니

소나무 대나무 슬퍼하누나.

가을의 아침에 서리내리니

서늘한 가을밤 길기도 하다.

참으로 애달프고 애달플지라.

 

쓸쓸한 마음에 그리울진대

기러기 소리만 쟁쟁하구나.

성품을 드넓게 열어냈어도

뉘라서 한 줌의 정이 없을고?

 

텅 빈 집 풀숲만 무성하구나.

연인은 건물들 슬프구나.

생사의 존망(存亡)이 바뀌었으니

물색(物色)도 시들어 바래는구나.

참으로 애달프고 애달플지라.

 

창생(蒼生)도 다스림을 잃었고

만물도 돌아갈 곳이 없고

어둠이 깔려서 밤중 됐으니

햇빛도 흐려져 빛 잃는구나.

참으로 애달프고 애달플지라.

 

사방을 둘러봐도 막막할지니

내 마음의 쓸쓸함만 더하는구나.

눈물 흘러 끝이 있더라도

다시 오신다 기약 없으니 더욱 슬프구나.

 

오래도록 그리워하며 슬픔에 잠기네.

두서없는 말만 지껄이누나.

참으로 애달프고 애달플지라.

 

8) 신안사(新安寺) 석현운법사뢰(釋玄運法師誄)와 서문 남제(南齊) 석혜림(釋慧林)

유세차(維歲次) 건무(建武) 4(497) 58일 갑오일에 사문 석현운(釋玄運) 스님께서 오른쪽으로 누우시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 ()이 위성(危城)35)을 떠나시니, 참으로 애달프구나.

 

법사께서는 원래 초방(譙邦)의 우족(右族)으로 돈황(燉煌)에 사셨다. 어려서 단정하고 총명하며 인자롭고 조화로운 성품을 받으시고, 커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덕을 심으셨다. 참다움이 하늘에 우뚝하여 참으로 도법(道法)의 훌륭한 귀감이 되었으며, 속전(俗纏)을 떨구고 진구(塵垢)를 초월하여 현진(玄津)에서 자취를 씻어내고 법도(法道)에 깃드셨다.

율의(律儀)의 지극함으로 말미암아 고요하게 체미(體微)의 미묘함을 배우고 어짊을 감추고 이름을 숨기는 행실과 쌓음을 베푸시되 모양을 잊은 보시는 말로 다할 수 없으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늘 이처럼 풍성하게 하셨다.

법의 말씀을 펴서 당시 세속에 다리를 놓았는데, 이치로 생각하심은 중세(中世)에 으뜸이셨다. 스님을 우러르는 이들이 멀리서 찾아왔는데, 허무(虛無)를 지극히 하여 진실로 돌이켰기에 그 수레자국이 사방에 가득 찼다.

제후(帝后)나 저이(儲貳)처럼 존귀한 이나, 번영(藩英)과 정재(鼎宰) 같은 높은 이들도, 도에 절하며 스승을 높이 여기고 도모함을 보며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크신 도량이 깊고 오묘하였기에 귀하고 천함으로써 살펴보심을 어긋나게 하지 못하였다. 가지런히 평탄하면서 넓고도 깊었기에 추위와 더위로도 그 회포(懷抱)를 같이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상법(像法)과 말법시대(末法時代)를 총괄하여 피폐한 흐름을 높여 떨친 이가 있다면, 법사야말로 바로 그런 분이다.

가르침을 펼치는 인연에도 기한이 있고, 뒷짐을 지고 하는 노래도 끝남이 있어서 풍화(風火)가 그 징조를 알리니 위험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한 인식에 더욱 밝아졌다. 성령(聖靈)이 없어졌다가 드러나자 점차적으로 고함을 자주 기뻐하셨다. 바야흐로 춘추가 예순아홉이니, 참으로 슬프구나.

바깥으로는 그 목이 메이는 식()을 받고, 안으로는 통곡하는 혼()에게 자문하니, 지나간 자취를 사모하여 제()함도 행동은 진실로 헛된 말이다. 삼가 만가를 지어 올린다.

 

꽉 막힌 세상이 크기도 하여

고해(苦海)는 갈수록 넓어지는구나.

애욕의 덮개에 가려서

애정의 그물만 넓게 펼치네.

 

정법의 등불이 밝지 못하고

지혜의 빛은 어두워지며

썩어가는 집에 불길이 치솟으니

맹렬한 불꽃만 넘실대누나.

 

이의(二儀:天地)가 만들고 훼손한 것이

계산해 보니 몇 해가 되었네.

삼전(三轉)36)하여 크고 멀어져

공겁(空劫)을 뉘라서 헤아릴건가?

 

종명(從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강물에 빠져도 구제하지 못하고

자취를 이으니 이미 소원해져서

진실로 명세(命世)에 의지한다.

 

어느 날 철인이 태어나셨다.

성령(聖靈)의 내림도 인연 따르며

빛으로 적시어 기량을 쌓으니

어린 나이에 드러나네.

 

신기(神機)가 어려서 환하였고

 

응감(凝鑑)이 일찍이 드러나

마치 옥이 처음부터 빛나는 듯하였고

구슬이 샘을 여는 듯이 하였다.

 

혼탁한 세상을 싫어하여

현미(玄微)를 초월하여

어리석은 속박을 버리고

정으로 어그러짐 깨끗하게 끊으셨네.

 

이를 새로 갈 어린 나이에 절개를 세우고

어린 나이에 스승을 따라가

규칙을 받들어 단속하고 공경하여

엄숙하게 위엄스런 모습을 본받았네.

 

몸소 순수하고 깨끗하게

마음과 행동을 삼갔으며

배우매 비밀스런 근원을 분별해 내고

물으매 이치의 심원을 궁구하였네.

 

지나간 의심은 여기에 비추고

뛰어난 공이 배가 되니

사유(思惟)는 높고 업은 성대하였다.

 

어느덧 중년에 이르러

넉넉하고 심오하며 깊고도 넓네.

법공(法空)을 굴리어 펼치니

구름이 걷혀서 햇살이 비치네.

 

길에 오르니 평평한 듯하고

막힌 것을 열어서 드러내듯이 하네.

유유(悠悠)한 품류(品類)

우러러 받드네.

 

()를 오른쪽으로 하여 명성을 떨치고

()을 왼쪽으로 하여 빼어나게 드러났다.

명성은 덕으로 인하여 펼쳐지고

칭함은 도로 인하여 풍부해졌다.

 

서로 끌어 장려하며 물어 구하고

기쁘게 연구하여 가르치셨다.

후덕한 자비가 땅과 같았고

높으신 뜻은 산꼭대기와 같았다.

 

끼니를 거두시고 겸손함으로 나아가

솜옷 버리고 추위로 괴롭게 지내셨다.

쌓아 남겨두는 적이 없이

재물은 다 보시하셨다.

 

비천하거나 귀하거나 모두 즐거운 낯빛으로

이 아름다운 경사를 즐기어

자리를 균등히 하여

가르침을 넉넉히 미치게 하여

어두운 의식을 밝히네.

지혜로 이끄시면서

힘써 마음으로 이루었네.

어두움에 접하여 무성히 받아들이고

미혹을 어루만져 진실되게 하네.

 

미묘한 것에 의지하여 요점을 청하시어

모두 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험한 길 아무리 멀다 하여도

정성껏 달려가 끌어 주시고

 

생멸(生滅)의 이치가 서로 지휘하니

한생각 생각도 쉬지 않았다.

남으신 햇수가 많지 않아서

서방(西方)의 빛이 갑자기 다가오네.

 

구름이 변하여 어떻게 멈추겠는가?

장차 정토의 세계로 옮겨가시니

참으로 애달프고 애달플지라.

 

몸은 병고에 시달리고

생각은 사질(四疾)에 이르러

침놓고 뜸뜨고 치료하여도

약마다 효험이 없구나.

 

마음을 단정히 하고 가르침대로

바로 자애로운 율()을 생각하셨네.

정진(精進)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고

중생을 구할 것을 맹세하셨는데

참으로 애달프고 애달플지라.

만나면 끝끝내 헤어지고

잠시 만나서는 이별하고

똑같이 소림(素林)에 슬퍼하니

고요한 한밤중에

착하게 살아라 이르시고서

 

하늘을 쳐다보시며 의젓하게 올라가시고

저 감궁(紺宮)에 나아가

이 진사(塵舍)를 떠나시니

참으로 애달프고 애달플지라.

 

미언(微言)의 대의(大義)가 끊어져 묻혀 버리니

넓은 바다 건네주던 배가 부서지니

 

숭고한 대()의 위엄과 화려함 밀어내고

높은 당()의 화려한 조각들에 잡초만 무성하네.

 

형체를 버려서는 남겨진 것이 있는 듯하고

그 마음 옮겨서는 영혼은 어디의 경계에 있는가?

훈앙(訓仰)에 의지하여 무리를 돌아보고

피눈물만 흘리며 가신 님을 그리노라.

참으로 애달프고 애달플지라.

 

9) 남제(南齊) 안락사(安樂寺) 율사 지칭(智稱) 법사 행장(行狀) 작자 미상

법사님의 휘()는 지칭(智稱)이시다. 하동(河東)의 문희(聞喜) 사람으로 속성은 배씨(裵氏)인데 모 군()의 모 씨()이다. 분회(汾澮)의 맑은 근원을 거머쥐고 하산(河山)의 빼어난 바탕을 이어받아 상엽(上葉)에 신령한 인()을 쌓고 염부제에 지혜의 성품을 이루었다. 곧구나, 맑음이여. 처음부터 잘 갖추었고 온량(溫良)과 공검(恭儉)을 그 몸으로 얻었으니, 이리하여 천운(天韻)의 참다움을 견고히 하시고, 함장(含章)하여 빛을 숨기어 사람 사이로 점차로 가라앉아 그 멀고 가까움을 헤아릴 수 없었다.

대체로 1촌 크기의 꽃은 깊은 골짜기에서 빛을 감추고 1척 크기의 보배로도 연성(聯城)을 쪼개지 못한 것으로 말미암아 살펴보는 자는 그 크고 수려함을 헤아리지 못했으며, 멀리서 듣는 자는 그 큰 이름을 듣지 못했다. 오랑캐에게 구속되어 천백(阡陌)에서 일으켰는데, 나이 서른이 되어 처음으로 여러 경전을 열람하고는 물러나 탄식하며 말하였다.

백 년도 잠깐인데 헛되이 공명(功名)만을 중하게 여겼구나. 이름은 늘 머물지 않고 공업(功業)과 환난은 반드시 짝을 맺는다. 길흉(吉凶)과 회린(悔吝)은 공구(孔丘)의 책에서 이미 징험하였으며, 변화(變化)의 기복(起伏)은 역대의 성인마다 말하여 왔는데, 어떻게 정영(莛嶸)의 바깥과 요곽(寥廓)의 겉에서 유계(幽界)와 현계(顯界)를 통괄하여 크게 무변(無邊)으로 이끄는 것을 알겠는가? 저곳에 내 스승이 있으니, 내 이제야 돌이킬 바를 알았다.”

이에 5()37)에 두 손을 모으고 4()38)에 옷매무시를 고치고, 예리함을 무디게 하여 분분함을 풀어내어 여기서 다하였다.

()나라 대명(大明) 연간에 익부(益部:益州)에 인선사(印禪師)가 있었다. 그 절개가 꿋꿋하고 꿰뚫어 보는 안목을 지녔는데 걸출하여 제사(帝師)가 되었다.

상인(上人)이 그 풍모를 얻어 듣고 스스로를 의탁하고자 찾아뵙고 예를 다하자, () 스님이 용촉(庸蜀)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면서 같이 손을 붙잡고 배를 탔다. 이에 송()나라 태시(泰始) 원년(465)에 옥루(玉壘)에서 출가하였으니, 그 정성이 사람과 하늘을 감동시켰으며, 신심은 금속마저 꿰뚫었다.

 

반야의 곧은 마음으로 도량의 발걸음을 드높였는데, 이에 정업을 공경히 하면서 스승을 받들며 어진 이를 만나 뜻을 분명히 하였다. 9()에 즐겁게 노닐며 3()으로 치달렸으니, 마라(摩羅)가 번역하였고 용왕이 감춘 것을 비록 수지하고 외우더라도 이를 종지(宗旨)로 취하지 않고, “마음을 거두는 것은 자취이니, 자취가 치밀해져야 마음이 살펴진다. 도를 넓히는 것은 행()이니, 행이 치밀해져야 도가 보존된다. 주상을 편안히 하여 사람을 다스리자면 예()보다 앞서는 것은 없으며, 삿됨을 쉬게 하여 선()으로 변하게 하자면 계율보다 존중할 것이 없다. 수레를 화택(火宅)에서 몰아내고 고해에서 날아가니, 3()를 바라보되 이를 밟지 않고 만 겁을 거치더라도 쇠퇴하지 않는 것은 오직 비니(毘尼)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잔가지와 잎을 골라서 버리고 생각의 근본을 쌓아 고삐를 멈추어 마음을 씻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마침내 석장을 끌며 발걸음을 옮겨 천 리 길을 떠났다. 경전을 끌어안고 발우를 손에 쥐고 백사(百舍)39)의 길도 쉬지 않고 서쪽으로 형산(荊山)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풍포(灃浦)를 지나서 화하(華夏)를 두루 다니시며 널리 기이한 말씀을 수집하셨다.

그 형해(形骸)가 흙과 나무 같았을지라도 심식(心識)은 아름다운 옥과 같았으니, 높아서 우러르지 않음이 없었고, 견고하여 뚫지 않음이 없었다. 잠을 자는 곳은 편안하였지만 그 자리는 따뜻하지 않았고, 생각을 지극히 하여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도에 입문하신 지 3년 동안 스승을 따라 네 번 강의하였는데, 가르침이 빼어나 공()이 배가 되었고, 업이 성대해져 경전마다 밝게 깨우치셨다. 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마다 각각 아름다움이 있으니, 선니(宣尼)의 학()이 어찌 참다운 스승이 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때 구()와 은()의 두 분 상인(上人)이 선배 고승으로서 서초(西楚)에서 활약이 뛰어난데 다보(多寶)의 영() 율사가 그 소문을 듣고 편지를 동도(東都)에서 띄웠으나, 이때 법사께서는 강릉(江陵)에 머무시고 계셨다.

이에 구()와 은() 법사에게 품신(禀申)하여 두루 수소문하였기에 스님이 마침내 경락(京雒)으로 돌아와 영() 스님과 익우(益友)가 되었다. 모두 전최(殿最)40)로 저울질하여 말에서는 청화(菁華)를 베어 내고, 돌피와 쭉쟁이를 버려두고 벼와 수수를 가려내며, 염매(鹽梅)41)로써 마침내 솥에 삶는 일을 이루었다. 그 이치를 연마하고 그 대의(大義)를 깊게 하여 부수(膚受)42)의 말학(末學)이 뒤따를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태시(泰始)

 

6년에 처음으로 진택(震澤)에서 십송률(十誦律)을 강의해서 사상(事相)을 천양하여 신도(神道)를 지척에 두었는데, 높은 담론이 운한(雲漢)을 벗어났고, 정미한 이치가 무간(無間)에 들었다. 8만의 위의(威儀)일지라도 흡족하게 그 이치를 유창하게 하였으니, 5()의 장구(章句)를 풀어내어 그 파도와 함께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후진(後進)은 그 종지를 알게 되고 선달(先達)이 그 관점을 바꾸어 빛이 나며 아름다운 물음들이 많아졌다.

법사께서 그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응수하면서도 그 행()에 여력이 남아 있었다. 청아한 말씀을 하루 종일 하시더라도 일이 그 가운데에 있었다. 구구(具區)에 서운(栖雲)을 세우고 건업(建業)에 연조(延祚)를 운영하여 엄하게 명령하지 않아도 방이 숙연해졌으며, 노역(勞役)을 재촉하지 않고도 동우(棟宇)가 나란히 지어졌다.

방등(方等)이 전해진 이래로 호나라가 변하여 한()나라가 되었으니, 홍재(鴻才)와 거학(鉅學)이 바퀴처럼 연잇고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며, 법화경유마경의 대가(大家)가 틈틈이 출현하였다. 열반경성실론을 창도(唱導)하여 곳곳마다 무리를 이루었으나 도리어 율장(律藏)의 헌장(憲章)은 이 시대에 가장 적었다. 마치 털옷으로 휘감아 목까지 덮으면서 그 부속(附屬)들에게 어질게 행하라고 권하는 식이었다.

이처럼 그 연원(淵源)이 넓고 크며 오래되어 고로(故老)들이 미혹하게 되자 험준함에 막혀 다시 숨었는데, 예전의 업을 닦아서 그 수레를 풀어 내면서 모두 호리(毫釐)까지 분석하여 엉겨 붙은 것을 떼어 내었다. 깊게 갈아 엎되 멀리 다다랐으며, 홀로 깨우침을 가슴에 품었기에 이로써 반호(反戶)의 남쪽과 만궁(彎弓)의 북쪽에도 가능하였다.

소리에 따라 메아리가 울리듯이 만 리로 퍼졌기에 문인이 해마다 늘고 경위(經緯)가 날마다 새로워졌다. 고당(高堂)에 앉았어도 4()을 끌여들였고, 법륜(法輪)을 굴리며 동업(同業)에 참례하기가 20여 년이었다. 군자가 이 도()가 여기서 중흥하였다고 말하였는데, 경조(慶弔)를 끊고 유속(流俗)을 막았는데, 일찍이 주문(朱門)43)과 화려한 집 앞을 지나치신 적도 없었다.

()나라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이 천승(千乘)을 가벼이 보고 마음을 8()로 비웠는데, 일찍이 법사를 초청하여 저택 안의 절에서 강의하시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 덕의 내림을 받고자 혹 임금을 접대하듯 모시겠다고까지 일렀으나, 법사께서 웃으면서 나는 틈이 없다고만 대답하셨다. 아울러 강론하는 자리에 바로 위치함에 미쳐 서늘함과

 

따뜻함을 교차하게 되었다.

이때 법연(法筵)이 널리 설치되어 선비들이 숲과 같이 모였다. 법주(法主)의 명예가 이미 치솟자 빈객(賓客)들이 넘쳐났다. 제목을 내어 편()에 명하고 의난(疑難)이 날카롭게 나왔으나, 법사께서 변화에 응하는 것이 마치 메아리같이 하여 듣는 것이 주저하지 않는 듯하셨다.

변론에 매인 자는 그 토대를 허물고, 강한 것을 뽐내는 자는 그 예각[]을 잘랐으니, 그 무리에 이르기까지 근본을 잃고 가지를 잃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를 청강한 이들마다 성대한 집회라고 칭찬하였으나, 법사의 성품이 원래 강직(剛直)하였으나 즐겁게 물음을 기다리시며 뜰에 가득하도록 말을 하더라도 일찍이 노여운 기색조차 없으셨다. 자신을 비워서 박학하게 단속하면서 그 재주를 다하셨다. 해석을 보강하고 생략하는 데 근거가 있어서 가르치시는 것이 늘 한결같았다.

어려서 속가에 계실 때는 효성과 우애를 도모하여 신발을 벗는 따위의 네 가지를 섭수[四攝]44)하며 애욕과 집착의 두 가지를 잊었다. 친당(親黨)의 서계(書契)를 써서 봉해 두고 이를 꺼내지 않았다. 안으로는 용서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며 누르면서도 군림하시지 않으셨다. 언제나 도와 속은 다르기 때문에 우다(優陀)에게 친히 그 말씀을 받들고서 어찌 그 말씀을 익히며 그 가르침을 소홀히 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번뇌에 매이더라도 이를 숙연히 하여 잠깐 사이에 없애었다.

법사께서 십송률을 강의하신 것이 바야흐로 오흥(吳興)에서 건업(建業)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이며, 의기(義記)8편을 찬술하여 그 말을 간추려 제정(制定)의 이치를 드러내셨으니, 배우는 이마다 이를 전하여 묘하기가 고금에 드물다고 생각하였다.

춘추 72세에 제()나라 영원(永元) 3년 건강현(建康縣)의 안락사(安樂寺)에서 신명이 천화하셨는데, 사방의 승니가 조문한 것이 마치 형과 누이를 잃은 듯하였다. 참으로 말하지 않고도 미더움이 있고 부르지 않아도 감응한다는 것이 이것을 말함이다.

이처럼 공경에 머물며 행을 간략히 하시면서 기쁘고 노여움을 낯빛에 드러내지 않으셨으니, 사람을 알아서 잘 인도하고 인재를 골라내어 버린 적이 없었다.

당시에 재물에 대해서는 청렴하여 나의 뜻을 취하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시되 변화에 처하여 넘치지 않게 하셨으니, 그 우렁차고 당당하기가 발해(渤海)와 갈석산, 황하와 화산이 그 양을 다 채울 수 없을 정도였다. 대체로 청정한 행의 의표(儀表)이시고, 마음을 쉬게 하는 궤범(軌範)이셨다.

제자 도진(道進) 등은 대들보가 이미 꺾임을 마주하여 저 덕음(德音)이 영원히 끊어진 것을 비탄한다. 참으로 그 믿음을 펼쳐

 

징험이 있으니 그 향기를 세간에 퍼지게 하니 부끄러움이 없다.

 

10) 여산 향로봉사(香爐峯寺) () 법사 행장 제() 우희(虞羲)

법사의 휘()는 승경(僧景)이고 본성은 구양(歐陽)이며 형양(衡陽) 상향(湘鄕) 사람이다.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선법(善法)의 인연을 채워 금생에 원대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황중(黃中)45) 때부터 자연히 이치에 형통하셨다.

경전의 독송을 좋아하면서 행실을 바로 하셨으니, 비록 행동거지는 방정하셨으나 몸과 입에는 거침이 없었다. 10세 때 홀로 어머니를 섬기며 효성을 다하다가 어머니가 재혼하였는데, 양가(良家)에서 이를 좋게 보지 않았다. 이에 사직하고 다시는 그 명()을 받지 않았다.

약관(弱冠)에 세간에 부역하여 얽매였는데, 이때 융마(戎馬)가 교외에서 생겨나 우격(羽檄)이 날마다 붙었다. 이에 몸에 갑옷을 두르고 산천을 넘나들기 10여 년이나 되었다.

비록 바깥으로는 간극(艱棘)을 막았으나 안으로는 자비심을 맺었다. 그러므로 사람 사이를 떠나지 못했으나, 이미 식심(息心)의 행을 갖추었다. 나중에 팽려(彭䗍)를 거쳐 가면서 여산(廬山)을 보고는 기뻐하며, 여기서 끝을 맺겠다는 뜻을 세웠다. 다시 상천(湘川)으로 되돌아와서 그릇됨을 버리며 도를 맛보느라 식사하는 것조차 잊곤 하였는데, 날마다 한 차례씩 소찬만 먹었다.

나중에 누문(壘門)을 나서면서 곧 처실(妻室)과 이별하였다. 어느 날 꿈을 꾸자 여산(廬山)의 산신(山神)이 머리 숙여 절하면서 여산은 커다란 산으로 험준하여 하늘에 맞닿습니다. 이것을 삼궁(三宮)이라 합니다. 암벽이 만 길[]이나 치솟았으니, 참으로 진인(眞人)을 굴복시켜 거처하게 할 만합니다. 진인을 만약 뒤따르게 하지 않는다면 이 산은 영원히 피폐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다시 꿈을 꾸었을 때는 산신의 청을 받아 가서 향로봉(香鑪峯)의 석문정(石門頂)에 이르러 은각(銀閣)ㆍ금루(金樓)ㆍ단천(丹泉)ㆍ벽수(碧樹)가 가파르게 깎아놓은 듯이 있었으니, 세간에서 보기 드문 광경을 목도하였다.

마침내 닭이 울어 새벽을 알리자, 빠르게 새벽길을 떠났는데, 이때 강릉(江陵)의 승도(僧徒)들이 정업(淨業)을 행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혹 법사에게 말하였다.

형주(荊州)의 법사(法事)가 가장 무성하니 여기서 동쪽으로 노를 저어 하수(夏首)에서 서쪽으로 떠가면 승정(僧淨) 도인이 선정(禪定)에 깊이 들어 있는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니 이 분이 바로 참으로

 

나의 스승이시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삭발하고는 그를 따라가서 죽림선방(竹林禪房)에 머물면서 곡식을 끊고 말없이 도를 사유하였는데, 혹 새벽이 되더라도 잠자지 않았다.

자사(刺史)가 그 기풍을 전해 듣고는 기뻐하며 연이어 초청하다가 마침내 이 스님은 찾아뵐 수는 있으나 찾아오게 할 수는 없다고 일렀다. 마침내 누차 초막을 찾아왔는데, 마침내 감복하고서 수계(受戒)를 청하였다. 강한(江漢)의 인사들이 구름같이 귀의하였다.

이보다 앞서 신선의 묘당(廟堂)이 영험하기가 마치 메아리 같았는데, 침범을 받으면 재앙을 보이기를 십여 차례나 하였다. 법사가 그곳을 옆에서 살펴보았더니 산신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예를 갖추며 두 사람의 신동(神童)을 보내어 아침저녁으로 시봉케 하였다. 어떤 여자 무당이 이를 보고 연유를 캐어 물었으나 법사가 대답하지 않았다.

여산의 산신이 다시 간절하게 청하자, 영명(永明) 10(492) 7월에 석장을 떨치며 봉우리를 올라 다니면서 살펴보니 꿈속에서 본 그대로였다. 이에 돌을 기반으로 삼고 암벽에 의지하여 얽어매어 바르게 앉아서 생각을 단정히 하였는데, 호랑이와 표범이 찾아와 무리를 이뤘다.

예전의 대덕 담륭(曇隆) 스님과 혜원(慧遠) 스님의 문도들이 이곳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이미 인적이 드물었다가 그 소란해짐을 견디지 못하였다. 갑자기 산바람에 이상한 냄새가 나서 사람마다 머리가 아프고 몸에서 열이 나곤 하였기에 얼마 되지 않아 모두 하산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오직 법사께서 홀로 찾아가되 한 번 가서 돌아오지 않으셨다. 이미 화서(禾黍)로 양생하는 일을 물리쳤기에 서리와 이슬의 기운을 피하지 않았으니, 때때로 넝쿨을 붙잡고 험지를 뛰어넘는데 그 행동이 마치 나는 것 같았다.

또 여러 마군(魔群)이 법사가 오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는 우레와 바람으로 변화시켜 시험하였으나, 법사가 이를 보고도 신명의 쓰임새를 확연히 알자, 이에 마군이 장난을 그쳤다. 오랫동안 찾아다니며 험난하고 그윽한 곳에다 석량(石梁)과 석실(石室)을 이룩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영산(靈山)의 비지(秘地)인지라, 백신(百神)이 노닐던 곳이었다.

법사가 계율을 설하며 향을 피우자 신()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였다. 예전에 신인 오맹(吳猛)이 이곳에 들어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이 이후로 오직 법사만이 다시 이곳으로 올 수 있었으니, 복희 황제 이래로

 

단 두 사람뿐이었다.

처음 법사가 산에 들어온 지 2년째에 선미(禪味)를 처음으로 갖추었는데, 매번 마음을 거두어 적정(寂靜)에 들어가면 바로 미륵여래(彌勒如來)를 친견하였는데, “숙세(宿世)에 심은 인연이다라고 말하였다.

건무(建武) 4년 봄 갑자기 제자들에게 내 타고난 나이가 아흔 살이나, 남은 햇수를 더하여도 세상에 이로움이 없고, 4()만 다른 사람에게 누가 될 터이니, 중생을 구하고자 염두에 둔다면, 오랫동안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721일에 표극령(標極嶺) 서쪽 편을 시체를 두는 처소로 삼았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이레 후에 병이 들었는데 병에 걸린 지 이레만에 임종하셨다. 춘추가 58세이셨는데, 임종하실 때는 합장하시면서 원하건대 3()에 태어나 일체 중생의 고통을 건지게 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다시 내가 이 몸을 까마귀와 새에게 보시하겠으니, 그리 알고 매장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처음 법사가 아래 절에 있는 몇 사람을 불러 같이 안거하면서 강의를 전하였는데, 혹 어떤 이가 법사에게 지금 산을 나와 의사에게 찾아가거나, 아니면 음식을 권하여 잡수시게 하고 싶다라고 말하자, 법사는 나에게는 이 몸이 누가 되는데 지금 나에게 몸이 없다면, 나에게 다시 무슨 누가 있겠는가?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천화하신 지 열엿새가 되어도 용모가 여전히 살아 있듯 하였는데, 두 손을 굳게 쥐고 있었다. 이를 펴 놓아도 다시 쥐었다. 이에 숙덕(宿德) 비구들이 모두 도를 얻은 사람은 이레를 기한으로 삼는데, 법사가 병에 걸려 세상을 뜨기까지가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 두 손가락이 펴지지 않는 것도 참으로 그럴 만하다고 말하였다.

처음에는 향로봉이 우뚝 솟아 있어 날짐승조차도 날아오지 않았는데, 법사가 처음 거쳐 가자 늘 한 쌍의 까마귀가 날아와 둥우리를 틀었으나, 법사가 천화 하시자 까마귀도 따라서 멀리 떠나갔다. 법사의 숙세(宿世)에 유원(幽源)함에 의지하여 오랜 동안의 정업(淨業)에 바탕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로 희사하면서 익혀 성품을 이루었다. 미묘하게 현리에 통하셨기에 그 마음에 연유하여 이 같은 일이 있게 된 것이다.

산림에 한 번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않았으니, 영관(榮觀)을 끊고도 초연하신 것이, 마치 여덟 가지 진미로 몸을 보전하는 식량을 삼듯 하였는데, 구전연화(九轉延華)의 술법을 모두 신발 벗듯이 하였으나, 오로지 곧은 마음과 정한 뜻을 무가(無價)의 보주(寶舟)에 두고서 화성(化城)을 애호하며 피안(彼岸)만 기약하였으니, 우러러도 참으로 헤아릴 길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일컬을 이름조차 없다.

 

11) 남제 선림사(禪林寺) 비구니 정수(淨秀) 행장 심약(沈約)

비구니 석정수(釋淨秀) 스님은 본성이 양씨(梁氏)로 안정(安定) 오씨(烏氏) 사람이다. 그 조상은 소호씨(少昊氏)에서 백익(伯益)에 이르기까지 우() 임금의 치수(治水)를 도왔기에 영씨(嬴氏)란 성을 하사받았다.

주나라 효왕(孝王) 때에 그 16세 손 비자(非子)를 진()에 봉하였고, 그 증손자 진중(秦仲)이 선왕(宣王)의 후백(侯伯)이 되었다.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천도하자, 진중의 소자(少子)를 양()에 봉하여 양백(梁伯)으로 삼았다.

()나라 경제(景帝) 치세에 양림(梁林)이 태원태수(太原太守)가 되어 북쪽 땅의 오씨(烏氏)로 옮겨 드디어 군인(郡人)이 되었다. 이때 이후로 후손이 점차 번창하였는데, 명성과 덕망이 번갈아 빛나며 선면(蟬冕)이 첩첩이 비췄다.

한나라 원가(元嘉) 원년에는 양경(梁景)이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는데, 어려서 한시(韓詩)를 읽어 세간의 통유(通儒)가 되었다. ()나라 때에는 양상(梁爽)이 사도(司徒) 좌장사(左長史) 비서감(秘書監)이 되어 전적에 해박하고 현리(玄理)에 능하였다.

()나라 태시(太始) 연간에 양천(梁闡)이 양주(涼州)와 옹주(雍州) 두 개 주의 자사(刺史)가 되었으니, 바로 정수 스님의 할아버지다. 손자 위()가 진나라 범양왕(范陽王) ()의 표기참군사(驃騎參軍事) 어양태수(魚陽太守)가 되었다.

영가(永嘉) 연간에 나라가 무너져46) 위조(僞趙)가 되자, 비서감(秘書監) 정남장사(征南長史)가 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진나라로 되돌아와 산기시랑(散騎侍郞)이 되었다. 그 아들 주()는 자가 도도(道度)로서, 정로사마(征虜司馬)였고, 아들 찬지(粲之)는 송()나라에서 벼슬하다가 정로부참군사(征虜府參軍事)가 되어 용천현(龍川縣) 도정후(都亭侯)로 봉해졌는데, 스님이 바로 도정후의 넷째 따님이시다.

광겁(曠劫)에 걸쳐 지혜의 깨우침이 우뚝하여 당년(當年)에 묘한 이치를 터득하셨으니,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보통의 아이들과 같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신정(神情)이 우뚝하여 보통 아이들의 무리 속에 들지 않았다. 어짊을 행하고 도를 숭상하여 법문(法門)에 그 마음을 씻었다.

열 살이 되던 해에는 자비로운 마음이 더욱 독실해져서 화장하는 용모를 끊고 치장하는 습관을 버리고 경전을 외우며 도를 행하면서 오랫동안 재법(齋法)을 행하며 채식만 하셨다.

열두 살 되던 해에 출가를 원하였으나, 식구들이 이를 괴롭게 여겨 금지하면서 모두들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마음으로 명감(冥感)을 기원하면서 일념으로 정미롭게 하자, 누차 상서(祥瑞)가 빛나고 서상(瑞相)을 얻으셨다.

넷째 숙부가 선각(先覺)이었는데, 안팎으로 비유를 열어 주자 비로소 아조(雅操)를 얻을 수가 있었다.

스님은 천성이 총민하시어 어려서부터 유별났는데, 일곱 살이 되자 자연히 재법(齋法)을 지켰다. 집안에서 스님들을 청하여 도를 행하는 때에, 대반열반경에서 고기 먹는 것을 금하는 구절을 듣고는 늘 채소만 먹으며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양친이 이를 알고 만약 어육(魚肉)을 얻게 되면, 바로 버리곤 하셨다.

예전에 외국의 보련(普練) 도인이란 분이 경사(京師)에 오셔서 양씨 집에 출입하다가 바로 5()를 내리게 되었는데, 이후로 열심히 계율을 받들어 지키면서 이를 범하지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늘 예배하고 독송하는 것으로 업을 삼으면서 다른 일에 힘쓰지 않았다. 손으로 글씨를 쓰게 되자, 언제나 사경(寫經)만 하였는데, 가지고 있는 재물을 오직 공덕의 쓰임새로 충당하면서 세속의 기호(嗜好)로 운영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도문(道門)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부모가 장애가 되었기에 세월만 보내다가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바로 뜻하던 바를 얻었으니, 치장을 거두고 청원(靑園)에서 삭발하고 사주(寺主)로 복응(服膺)하였다.

스님은 스승을 섬기며 공경을 다했는데, 마음으로 이치를 잇고자 몸을 다하여 힘쓰면서도, 마치 미치지 못함을 두려워하듯 하였다. 3()을 애써 닦으면서 낮과 밤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스님들이 대중의 소임을 뽑을 때마다 매번 상수(上首)로 임하셨다. 열심히 정진하면서도 마주하는 일마다 잘 주선하여 처리하셨다.

개사(開士) () 선생이란 이가 청원(靑園)에서 스님을 보고는, 바로 이 비구니는 마땅히 도솔천에 태어나리라고 말하며 예언하였다.

다시 몸소 불당(佛堂)

 

내에서 좌선하시다가, 세 사람이 함께 있다가 홀연히 공중에서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는데, 그 소리가 마치 소가 우는 듯하였다. 두 사람의 비구니가 놀라 두려움에 떨었으나, 상인(上人)은 태연자약하여 서서히 일어나서 평상에서 내려와 방으로 돌아가 초를 가져다 소리나는 곳을 찾아보았는데, 난간에 이르렀을 때, 남아 있던 두 사람의 비구니가 바로 불당(佛堂) 위에서 어떤 사람들이 서로 각자 스스로 길을 피하라. 아무개 스님이 돌아온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중에 다시 선방에서 도반 몇 사람과 함께 좌선하였는데 한 비구니가 깜박 잠이 들었다. 이 비구니가 잠자던 도중에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머리를 방안으로 들이밀고 아무개 스님을 놀라게 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이 비구니가 놀라서 다시 좌선하지 못하였다.

또 어느 때 좌선하다가 도반인 어떤 비구니가 작은 인연사(因緣事)로 잠시 평상에서 내려오려는데, 어떤 사람이 손으로 제지하며 아무개 스님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기가 막혀 천천히 나오며 전에 없던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비슷하게 많이 일어났으나 바로 기록하지 않아서 대부분 잊혀져 버렸기에 모두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스님은 천성적으로 계율을 굳게 지켰기에 나아가고 멈추며 몸을 굽히고 일어서매 반드시 법도에 따르고자 하였다. 마침내 요() 율사의 강의를 청하면서 안으로는 스스로 사유(思惟)하여 거의 천 일에 다다랐으나 마음속의 근심사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밤에 꿈을 꾸었는데 까마귀와 구관조와 참새가 각각 수레를 타고 있는데, 수레에 다시 헌대[]가 안치되어 있었다. 수레의 크기가 마치 새의 형태와 같았는데, 같은 목소리로 내가 아무개 비구니가 강의하고 떠나가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합창하였다. 깨어나서 몹시 기뻐하며 일이 잘 이루어지리라 생각하였다. 강의하는 날이 되어 70명의 단월의 도움을 얻어 공양을 진설하였는데, 과일과 음식이 모두 깨끗하였다.

나중에 영() 율사를 청하여 율()을 열었는데, 바로 강의를 시작하는 날에 깨끗한 단지의 물이 자연스럽게 향기를 발하는 것이 마치 수원(水園)의 향기와 같아서 대중이 모두 기뻐하였다.

스님이 좌선에 힘써서 정()을 얻으셨기에 한밤중이 되어 일어나 보면, 다른 도반들은 없었다. 바로 장차 독거계(獨居戒)를 범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여

 

율사에게 물어보자, 율사가 ()한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허물이 있지 않을까 주저하였는데, 여러 사찰의 비구니가 여법(如法)하지 않은 행실이 많음을 보고는 한탄하며 홍휘(鴻徽)가 멀지 않았으니, 영서(靈緖)가 허물어지리라. 스스로 허물을 드러내어 그 몸을 질책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만물을 인도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스님이 손수 참회하며 마나타(摩那埵)47)를 행하였는데, 마침내 경사(京師)2() 대중으로서 이를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와 같은 사람은 율행(律行)이 명백한 데다 규구(規矩)가 법도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늘 허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어떻게 우리들은 동정(動靜)에 허물이 많음에도 뉘우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가?”라고 탄식하였다. 이리하여 서로 이끌며 널리 참회하면서 남김이 있지 않았다.

다시 남원(南園)에서 영() 율사에게 수계(受戒)를 받았는데, 수계하는 날에 단지의 깨끗한 물의 향기가 예전처럼 다시 발하였다. 이에 청원의 여러 비구니 및 여타의 사찰에서 다시 수계받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율사가 이로써 차례대로 사찰을 방문하여 계품(戒品)을 널리 열어 대교(大敎)를 천양하였는데, 이리하여 헌궤(憲軌)의 넓은 흐름이 지금까지 불어오게 되었다.

영 율사가 다시 상인(上人)에게 여러 사찰 비구니에게 약속하여 말하게 하였는데, 높은 평상과 세속의 옷을 입은 이는 모두 고치도록 하였다.

상인이 가르침을 받들어 약칙하자 이를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율장이 비로소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중에 다시 삼장 법사에게 나아가 수계하였는데, 청청한 물의 향기가 다시 예전처럼 퍼진 것이 청원과 다르지 않았다. 그 대중이 이미 많아 소견이 같지 않았으나, 스승은 이미 천배(遷背)하여 다시 근시(覲侍)가 없었다. 마침내 별도로 주처를 세우고자 생각하여 바깥으로는 성림(聖林)의 법을 엄격히 하고 안으로는 연묵(宴黙)을 다할 수 있는 자를 생각하였다.

()나라 대명(大明) 7(463) 8월 황수의(黃修儀)와 남창공주(南昌公主)가 삼보를 깊이 우러르고 덕행을 존중하여 처음 정사(精舍)를 이룩하였는데, 상인이 베옷만 입어 몸을 따뜻이 하지 못하고 채식만으로 굶주림을 잊고서 몸소 진흙을 이기고 기와를 구우면서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였다.

송나라 태시(泰始) 3(467) 명제(明帝)선림(禪林)’이라 호()를 내렸는데,

 

대체로 성품이 고요함을 좋아하여 명감(冥感)에 징조가 있었다. 마침내 감실(龕室)을 짓고 성상(聖像)을 이룩하여 갖추지 않은 바가 없었다. 또 여러 경전을 서사(書寫)하여 모두 갖추면서 노랗게 염색을 들였다. 모두가 저절로 이루어졌는데, 사가라용왕(娑伽羅龍王)48)의 형제 두 사람이 그 자취를 드러내어 하루가 다 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이때 친한 이들이 왕래하다가 몸소 이를 목격하였다.

같이 머무는 십여 명을 불러다가, 가르치고 교화하며 장려하고 이끌며 모두 좌선과 독경을 하게 하였다. 매번 성승(聖僧)을 봉청(奉請)하여 과일과 음식을 올리는 때마다 반드시 기적이 있었다.

또 어느 때에 성중(聖衆)을 경건히 청하여 이레 동안 공양하였는데, 예참(禮懺)을 마치고 마음을 거두어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바로 두 사람의 외국 도인이 손을 들며 함께 말하는 것을 보았다. 한 사람은 거라(呿羅)라 말하고, 한 사람은 비거라(毘呿羅)라고 말하였다. 이때 스님이 입고 있던 가사의 색깔이 마치 오디가 익은 듯 하였는데, 이로써 진흙을 가져다 그 옷 빛깔을 지우면서 목격한 그대로 실행하였다. 마침내 원근의 비구니들이 서로 이를 본받아 옷을 고쳐 간색(間色)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오대색(五大色)의 허물이 이로써 끊어졌으니, 마침내 진도[]와 세속에 나눔이 있게 되었다.

이후로 다시 아뇩달지(阿耨達池)의 오백 나한을 청하여 날마다 범성무차대회(凡聖無遮大會)를 열었는데, 스무 날에 가깝도록 공양을 차렸으나, 여전히 풍족하였다.

다시 계빈국(罽賓國)의 오백 나한을 청하였는데, 상족(上足)이 무려 천여 명이나 되었다. 아울러 범승(凡僧)을 청하여 예전의 법도처럼 행하였다. 처음 하루가 지나서 어떤 외국의 도인을 보았는데, 대중 스님들이 모두 알지 못하였다. 마침내 시험삼아 서로 통역하여 질문하였는데, 그가 계빈국에서 왔다고 말하였다. 다시 언제쯤 여기로 오셨는가?”라고 묻자, “이미 온 지가 1년이나 되었다고 대답했다. 대중 스님들이 기이함을 느끼고 사람을 시켜 문을 지키게 하면서 그 동정을 살피게 하였는데, 공양을 마치고는 송림문(宋林門)으로 나갔다. 사람을 시켜 따라가 보게 하니, 송림문으로 나가는 것은 분명히 보았는데 십여 걸음을 걷다가 그 종적이 홀연히 사라졌다.

다시 성승(聖僧)을 청하였는데, 대야에 향기로운 더운 물을 붓고

 

여러 가지 물건을 갖추고서 예배하였다. 안과 밖이 조용하였는데 그릇에 국자로 물 뜨는 소리만 들려오는데, 그 물 뜨는 소리가 용수법(用水法) 그대로였다. 마음속으로 이곳에 사람이 있는가 의심하여 여럿이서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단지 물에서 국자가 자연히 흔들리는 것만을 보게 되어 이로써 그 신기함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한밤중에 홀연히 방안 가득히 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벌써 날이 밝았다고 말하며 일어서서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 보니 여전히 어두웠다. 이에 다시 문을 닫고 침상으로 돌아와서 다시 누웠어도 오랫동안 광명이 서려 있었다.

다시 병이 나서 아주 위독하였는데 갑자기 큰 광명이 세계에 두루 비춰 산하(山河)와 수목(樹木)이 확 트이는 것을 보고서 기뻐하며 홀로 미소지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물어보자, 목격한 바를 그대로 말해 주고는 다시 일어나 예배하고 독송하는 것을 예전과 다름없이 하였다.

다시 병이 들어 몸이 매우 상하였는데 홀연히 두 손을 받드는 그 모양이 마치 물건을 받들 듯하였다. 옆 사람에게 말하여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무엇을 받들려는가?”라고 물어보자, “보탑(寶塔)이 땅에서 솟는 것을 친견하였는데, 마음으로 이를 받들고자 한다. 번기[]ㆍ당기[]와 꽃과 기락(伎樂)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구나라고 말하였는데, 이때 병이 곧바로 완쾌되어 다시 도지지 않았다.

다시 병이 들어 며칠 동안 아주 심하여 위독한 때가 많았다. 동쪽을 바라보며 허공에다 합장하다가 한순간에 급히 향과 불씨를 찾고 나서 다시 합장하면서, “미륵불(彌勒佛)과 사리불(舍利弗)과 목련(目連) 등의 여러 성인들을 친견하였다고 말하고, 여러 성제자들의 수효가 한량없지만 허공에 가득하심을 보았다. 갑자기 미륵불께서 시두말성(翅頭末城)에 하생(下生)하시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번기ㆍ당기와 꽃과 기락 및 삼대(三臺)를 가지고 영접하였다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번기ㆍ당기와 꽃과 기락을 올린다면 세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둥근 하늘 아래에서 머물며 하나의 보대는 길 가운데에 놓여 있고, 하나의 보대는 미처 길로 접어들지 못했으며, 하나의 보대는 보이지 않고 단지 소리만이 들린다. 이때 이미 두 개의 보대가 만들어졌으니, 이 같은

 

징조로 바로 하나의 보대를 더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쌍수(雙樹)의 보배 꽃이 근처에 있다고 말하고, 사람들이 평상 가까이 다가오게 되면 내 꽃을 밟지 말라고 말했다.

이 이후로 병이 바로 완쾌되었는데, 전후로 병에 걸릴 때마다 늘 서상이 있었다. 혹 시원한 바람을 얻거나, 혹 묘한 약을 얻거나, 혹 기이한 향기를 맡으면 병이 바로 완쾌되었다.

병이 낫는 것에도 이치가 있었으니, 점차로 깨끗이 없어지는 것이 모두 이러했는데, 그 횟수가 아주 많아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다시 천감(天監) 3(504) 여름철에 병이 나셨는데, 낮에 잠자다가 바로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이 바로 위요(圍繞)하면서 찬불하는 것을 보았다. 찬불소리가 밖에까지 들려 그만 잠을 깨었는데 앓던 것이 바로 나았다.

다시 낮에 누웠다가 눈을 떠 보니, 부처님께서 방에 들어오시며 번기ㆍ당기와 보개가 방안에 가득한 것을 친견하고는, 옆 사람에게 향을 피우라고 말하였으나 다시 친견하지는 못했다.

상인이 천감 5(506) 617일에 병고(病苦)를 얻어 가슴이 답답하여 음식을 넘길 수조차 없으셨다. 팽성사(彭城寺)의 영() 법사가 619일 밤에 꿈속에서 어떤 처소를 보았는데, 도솔천상이라 하였다. 그 주처가 엄숙하고 수려하여 가히 세간에 견줄 바가 아니었는데, 이곳이 상인의 주처이다라고 말하자, 바로 상인이 그 가운데 있음을 보았다. 이윽고 법사가 상인에게 상인이 좋은 곳에 태어날 터이니, 마땅히 이를 준비해야 하리라. 상인은 원래 법사의 소품(小品) 단월(檀越)이니, 이를 저버리지 말라고 말하였다. 이에 상인이 바로 법사께서는 대장부이시며, 경교(經敎)에 형통하셨기에 승지(勝地)에 머무실 수 있다 하겠으나, 저는 여인네인데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법사가 다시 그렇지 않다. 비록 남자라 하더라도 정진(精進)을 할 수 없고, 지계(持戒)가 상인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그 몸이 점차로 위독해져 법사를 면회조차 할 수가 없었다. 병이 점점 심해져 마시는 죽조차 나날이 적어졌는데, 치료를 하여도 차도가 없었고 점차로 계속 이어졌다.

712일이 되자 이때에 하늘에서 비가 내려 날씨가 시원해졌는데, 답답한 증세가 약간 호전된 듯하였다.

 

스스로 꿈에서 불당의 서쪽으로 맞이하러 온 것을 보았는데, 사람마다 번기ㆍ당기와 찰간(刹竿)을 잡고 온 것이 마치 수레를 땅에 대놓은 듯하였다. 이에 번기ㆍ당기의 이치를 만든 것이 세간의 군대에서 북을 메고 깃발을 흔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20일에 바로 기()가 끊어져 다시 죽을 마시지 못하였다.

22일에 서로 알고 지내던 대중 스님들을 청하여 법회를 열었는데, 마음만은 분별이 남아 있듯이 하였다.

25일이 되자, “시방세계의 제불(諸佛)께서 허공에 가득하신 것을 친견하였다고 말했다.

27일이 되자, 나중에 혼절한 듯이 누워 있었는데, 두 군데에 뜸을 뜨자 한참 후에 약간 몸을 움직이며, 스스로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불과 여러 보살을 친견하였는데, 모두 황금색이었다. 내 손 안에 유리로 만든 깨끗한 단지가 하나 있었는데, 높이가 3척 정도였다. 이대로 미륵불께 올리니 바로 광명을 발하여 내 몸으로 비추셨다. 도솔천에 이르자 다시 음식을 보지 않아도 저절로 배가 부른데, 이로써 인간의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단지 인간의 음식은 모두 냄새만 맡고 음식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또 이때 천상에서 파리병(波利䴵)을 가지고 왔는데, 이를 영 법사에게 내어 주고자 하였다. 어떤 사람이 어떤 뜻으로 떡을 가지고 가는가?”라고 묻자, “영 법사에게 드리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영 법사는 인중(人中)의 과보(果報)인데, 어떻게 천상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는가? 가지고 갈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영 법사가 한가롭게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기에 상인이 법사를 맞이하며 법사에게 정갈한 소찬을 만들어 산중에서 좌선하는 도인에게 잡수시게 해야 합니다. 만약 3()을 닦으면 바야흐로 도솔천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법사는 좌선을 하지 않고 음식을 만들게 하여 산에 바쳤다. 상인은 도인으로 하여금 좌선인과 인연을 만들려고 하였다.

8월이 되자 몸이 점점 나빠져 여타의 일을 말하지 못하고, 단지 말하기를 서른두 사람의 동자가 있는데, 한 사람은

 

공덕천(功德天)이라 이름하고, 두 번째는 선녀천(善女天)이라 이름한다. 이는 가비라천(迦毘羅天)49)이 다스리는 곳인데, 늘 올 때마다 좌우에서 나를 부축한다고 하였다. 인간의 음식을 얻어 대중 사이에서 이를 행하라고 말했다.

다시 공중에서 밤낮으로 풍악이 울리는지라, 내 귀를 시끄럽게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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