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21권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4. 법의편 ④
28) 답운법사청개강서(答雲法師請開講書:운 법사가 개강을 청했던 글에 답함) 양 소명 태자(昭明太子) 통(統)
근자에 보내신 편지를 읽어 보고서 대도(大道)의 이치를 보여 달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석가의 가르침은 깊고 깊은 데다 지극한 이치는 깊고도 순수하기 때문에 한 모양의 도는 막막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둘이 아닌
법문도 적막하여 메아리조차 없습니다. 현종(玄宗)에 깊이 통달하고 묘한 이치를 정미하게 터득하지도 못하면서 이 같은 처소를 어찌 경솔하게 가릴 수 있겠습니까? 정교(正敎)를 선양하려는 것은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제자가 내법(內法)의 이치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좋아하며 즐깁니다만,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찾아내고, 먼 곳에 있는 것을 오게 하여도[鉤深致遠] 미처 터득하지 못한 바가 많습니다. 이롭게 하는 이치는 대체로 달리 논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 스님들께서는 법문(法門)으로 들어가시어 도에 노닐며 날로 넓혀가고 있고 법사님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말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찬품[湌稟]을 보이기를 원한다고 말하더라도 참으로 비유할 것이 없습니다. 이 같은 이치를 생각하여 얻는다면 다시 더 많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통(統)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和南].
- 상소명태자계(上昭明太子啓:소명 태자에게 올리는 계) 석법운(釋 法雲)
전하께서 생이지지(生而知之)하는 상근기(上根器)의 식견으로 이치를 정미하게 하여 입신(入神)하였으니, 저절로 변재(辯才)가 뛰어나고 묘한 말씀이 속세를 벗어납니다. 왕복할 때마다 자리를 닫고 마음속으로 이에 도취됩니다. 진실로 제천으로 하여금 선을 찬양하게 하고, 참으로 석범(釋梵)으로 하여금 꽃이 비오듯 내리게 합니다.
빈도(貧道)가 비록 어려서 갈 곳을 알았다 하나 장성하면서 업(業)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곁에서 보좌한다면서 성명(聲明)에 함부로 입김을 불어넣으니, 부끄러움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도, 어찌 그윽한 이치를 맛보기를 원하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감히 이같이 기앙(祈仰)한 것도 참으로 묘한 말씀을 듣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지금 외람되이 답지(答旨)를 받고서도 물러나 가벼이 벗어날 것을 생각하나 군정(群情)이 허락지 않으니, 참으로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갈앙(渴仰)은 참되고 기허(飢虛)는 거짓된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돌이켜서 소원하는 바를 다시 검찰하시기를 재차 바랍니다. 오직 바라는 것은 감로가 당연히 열리는 것뿐이니, 이를 써야만 영원토록 비루함을 내칠 수 있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사홍서원(四弘誓願)163)으로 곡진하게 부디 세 가지 청을 허락하십시오.
정중하게 아룁니다.
- 답운법사서(答雲法師書:운 법사에 답하는 글) 양 소명 태자
보내신 두 번째 편지를 보았습니다.
이치를 기술하라는 뜻을 알았습니다만, 이로움을 행하는 것을 변론하지 않은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감로가 열린다 해도 미래세(未來世)의 설법에 더욱 부끄럽기만 합니다. 만약 이치의 줄기를 간단하게 표방하는 것에 그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지 물고기 눈으로 법사의 야광주(夜光珠)에 비기려는 것이 창피스러울 뿐입니다.
통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29) 사칙뢰수서여의계(謝勅賚水犀如意啓:칙령으로 수서여의를 내려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계)
신 통(統)은 아룁니다.
칙령을 내리신 것에 응하여 좌우의 백불장(伯佛掌)이 칙지를 받들어 선포하여 수서여의(水犀如意) 1병(柄)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 법식(法式)은 도의(道義)에 필요한 바입니다. 백옥(白玉)이 아롱지게 빛나더라도 이것과 견주면 귀하지 않고, 산호가 그 바탕을 뽐내더라도 이것과 짝하면 진귀하지 않습니다. 다듬고 잘라내어 이미 이루어졌으니 예전의 용렬함을 덮었습니다. 마치 한나라 황제의 비녀를 덮어쓰고, 조요(趙堯)가 어사대부의 보인(寶印)을 얻듯이 하였습니다.164)
삼가 우러르며 그 위신력을 받들어 여러 강석(講席)을 진설하였으니, 참으로 기쁨의 나한으로 하여금 환속[棄鉢]의 안타까움을 품게 하시며 왕을 공경하는 예를 표하는 석유(碩儒)로 하여금 이별하게 하였습니다. 곰 장식의 보배 칼은 자환(子桓)165)이라도 그 대뢰(大賚)를 수치스럽게 여기며, 이우(犛牛)의 경불(輕拂)은 장창(張敞)166)조차도 그 옛 의례를 부끄러이 여길 것입니다. 은택을 특별히 내려 주시니, 삼가 엎드려 이를 받으면서 뛸 듯이 기쁜지라, 참으로 저의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30) 해이제의영지(解二諦義令旨:2제의 뜻을 풀이하는 영지)와 문답
2제(諦)의 이치와 실상(實相)은 깊고 그윽하니, 참으로 허무(虛無)를 품지 않으면 그 넓고 원대함을 형통할 수 없다. 도를 밝히는 방법은 그 유래가 한둘이 아니나, 요체를 들어 논하자면 모두 경지(境智)를 벗어나지 않는다. 혹 때로는 경계로 이치를 밝혔고, 혹 때로는 지혜로 행을 드러내었으니, 2제에 이르러 바로 거울로 나아가 그 이치를 밝혔다. 만약 그 방책에 미혹하면 3유(有)를 끊지 못하고, 만약 그 이치에 통달하면 만 가지 누(累)가 이로써 없어진다.
2제라 이르는 것은, 그 첫 번째를 진제(眞諦)라 이름하고, 두 번째를 속제(俗諦)라 이름한다. 진제는 또한 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도 이름하고, 속제는 또한 세제(世諦)라고도 이름한다. 진제와 속제가 그 바탕에서 결정되어 이름을 세운 것이니, 제일의제와 세제는 칭찬하고 깎아내리면서 안목을 세우려는 것이다.
만약 순서대로 말하자면, 첫 번째가 진제이고, 두 번째가 속제라 말해야 되는데, 1과 2가 합쳐지면 그 수는 3이 된다. 단지 수가 2를 넘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이름에 전후가 있으나, 이치에는 그와 같은 방편이 없다.
진제는 속제를 연유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속제 또한 진제를 연유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에 바로 일진일속(一眞一俗)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진(眞)’이란 참되다는 뜻으로 바로 평등하여 다시 다른 법이 없으나 능히 섞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속(俗)’이란 모인다는 뜻으로 이 같은 법이 생겨나면 헛되고 거짓된 것이 일어나고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제일의’는 무생(無生)의 경계 가운데로 나아가 별도로 아름다운 이름을 세운 것이다. 이 같은 법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묘하여 따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세(世)’는 서로 단절된다는 뜻으로 생멸에 떠다니되 머무는 상(相)이 없다. 『열반경』에서도 “출세인(出世人)이 아는 것을 ‘제일의제’라 이름하고, 세간 사람이 아는 것을 ‘세제’라 이름한다”고 말하였는데, 이야말로 그 칭찬하고 내리깎는 이치를 증명하는 글이다.
2제는 그 이름을 세우는 차별이 있어 서로 같지 않으니, 진(眞)ㆍ속(俗)ㆍ세(世) 등을 ‘일의(一義)’로써 말하고 제일의제는 ‘이의(二義)’로써 말한다. 이 같은 이치의 덕을 바로 말하면 제일의가 역시 ‘제일’이란 뜻이 된다. 세간이 이미 부박하고 헛되니, 다시 의(義)가 있지 않다. 이로써 단지 ‘세(世)’라는 이름을 세우는 것이다.
‘제(諦)’는 실상을 살핀다는 뜻이다. 진제는 실상을 살피기에 ‘진’이라 하고, 속제는 실상을 살피기에 ‘속’이라 한다. 진제는 유(有)도 여의었고 무(無)도 여의었으나, 속제는 유(有)이면서 무(無)이다. 유(有)이면서 무(無)이기에 이와 같은 것을 가명(假名)이라 한다. 유(有)를 여의고 무(無)를 여읜 이와 같은 것이 중도(中道)가 된다. ‘진’은 중도이기에 불생(不生)으로 바탕 삼으나, ‘속’은 이미 가명이기에 생법(生法)으로 바탕을 삼는다.
(1) 남간사(南澗寺) 석혜초(釋慧超) 자이제의(諮二諦義:2제의 뜻을 물음)
남간사 혜초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諮問):헛되고 거짓된 것이 일어나고 만들어지는 것을 이름하여 ‘속(俗)’이라 합니다. 유(有)와 무(無)에서 벗어난 것을 이름하여 ‘진(眞)’이라 합니다. 헛되고 거짓됨이 마땅히 ‘진’과 함께하고, 한바탕에 마땅히 다름이 있다는 것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영지(令旨)의 답변(答辯):세상 사람들이 아는 것은 생법(生法)을 바탕 삼고 출세인(出世人)이 아는 것은 불생(不生)을 바탕 삼습니다. 사람에 따라 논을 짓는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합니다. 만약 ‘진’을 논한다면 바로 유(有)에 즉하여 공(空)한 것이 되고, ‘속’은 공(空)을 가리켜 유(有)가 됩니다. 이 같은 이치에 의거하여 밝혀 보면
그 별다름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자문:진(眞)과 속(俗)을 이미 한바탕이라 말하였으니, 진제(眞諦)에도 일어나고 움직임이 있음을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당연히 일어나 움직이더라도 스스로 움직여 진제와 관련되지 않는 것입니다.
영지의 답변:진리는 적연(寂然)하여 일어나고 움직이는 모양이 없으나, 범부는 미혹된 식견으로 스스로 일어남과 움직임을 잘못 보는 것[橫見]입니다.
자문:일어나고 움직임이 있어서 범부가 잘못 보는 것인지, 일어나고 움직임이 없어서 범부가 잘못 보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영지의 답변:만약 일어나고 움직임이 없으면, 이를 ‘잘못 본다[橫見]’라고 이름하지 않는데, 움직임이 없으면서도 움직임을 보게 되니, 이 때문에 잘못 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문:만약 법에 일어남과 움직임이 없으면 오직 ‘1제(諦)’이어야만 합니다.
영지의 답변:이 같은 이치는 늘 적멸하여 이 자체로 1제가 됩니다. 일어남과 움직임을 잘못 보는 것이 다시 1제입니다. 오직 응하는 것이 둘이기에 ‘일(一)’이라 말하지 못합니다.
자문:잘못 보는 것은 있기도 한 것이며, 없기도 한 것입니까?
영지의 답변:사람에 의지하여 말을 하자면, 이 같은 잘못 보는 것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문:만약 사람에 의지하여 말하기 때문에 잘못 보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법에 의지하여 말하자면 움직임을 보게 되지 않습니다.
영지의 답변:법은 움직임이 없어서 잘못 보는 자가 스스로 그 움직임을 보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2) 단양윤(丹陽尹) 진안왕(晋安王) 소강(蕭綱) 자이제의(諮二諦義)
단양윤(丹陽尹) 진안왕 소강(蕭綱)과의 문답이다.
자문:이치의 터득은 사람에 따라 가려지기에 유생(有生)과 불생(不生)이 있습니다. 거짓되거나 허무한 것이 불생과 함께 단지 한바탕인지, 당연히 다른 것인지를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영지의 답변:범부의 소견으로는 그 일어나고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되고, 성인의 소견으로는 그 불생을 보게 됩니다. 사람으로 논하자면 그 바탕이 다릅니다. 만약 모양을 말하자면 바로 다름을 이루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지난번 해석과 같으니, 다시 더 논하지 않겠습니다.
자문:만약 ‘진’이 ‘속’과 다르지 않고 ‘속’이 ‘진’과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속인의 소견으로 생법(生法)을 바탕 삼을 수 있겠으며, 성현의 소견으로 불생(不生)을 바탕 삼을 수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속’에 즉하여 ‘진’을 아는 것입니다. ‘진’에 즉하여 ‘속’을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하면 저절로 달라짐이 없는 것을 이룹니다. 사람으로 한정하여 견(見)을 판단하면 생(生)과 불생(不生)의 특별함이 있게 됩니다.
자문:속제의 바탕이 이미 헛되고 환(幻) 같다고 말하였는데, 어떻게 진실한 가운데서 이같이 헛되고 환 같은 것을 본다는 것인지 알지 못하습니다.
영지의 답변:진실의 바탕은 원래가 헛되고 환 같음이 없습니다. 미혹한 이는 횡견을 내어 이것을 유(有)라고 합니다. 진실을 상하지 않으면 그 바탕은 저절로 허무하고 아득한 것입니다.
자문:성인의 소견은 흘러 움직이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고, 범부의 소견은 흘러 움직인다고 보는 것입니다. 흐름과 흐르지 않음이 다르니,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하나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영지의 답변:흐름과 흐르지 않음이 각각 한바탕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바로 말하자면 범부는 흐르지 않는 가운데 횡견을 내어 이 같은 흐름이 있다고 합니다. 이에 논하자면 한바탕이라고 하겠습니다.
자문:진적(眞寂)의 바탕은 원래가 흐르지 않습니다. 범부가 흐름을 보아도 참다운 바탕을 여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하나의 진(眞)이 있어야 하기에 2제를 이루지 못합니다.
영지의 답변:바탕이 늘 서로 마주하기에 이치가 다를 수 없습니다. 단지 범부가 헛되고 허무함만을 보고 성인은 참답고 적멸함을 살핍니다. 만약 저와 같은 범부와 성인으로 한정한다면, 2제란 이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초제사(招提寺) 석혜염(釋慧琰) 자이제의(諮二諦義)
초제사 혜염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범부는 세속을 보되 생법(生法)으로 바탕을 삼으며, 성인은 참다움을 보되 불생을 바탕으로 삼습니다. 생과 불생에 대해 단지 다르다고 보고 어떠한 이치에 의해서 한바탕임을 살필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영지의 답변:범부는 무(無)에 대하여 유(有)라고 칭하고 성인은 유를 마주하여 무라고 판단합니다. 유와 무가 서로 마주하기에 여기서 한바탕이라 이르게 된 것입니다.
자문:여기에서 한바탕이라고 말하였는데 한바탕은 도대체 무엇이라 이름하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영지의 답변:바로 유(有)가 무(無)와 다르지 않고 무는 유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하나’라 이름하는 것으로 다시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자문:만약 무(無)가 유(有)와 다르지 않고 유가 무와 다르지 않다면, 단지 그 한 갈래만을 보게 되는데, 어떻게 2제라 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범부는 유(有)를 보고 성인은 무(無)를 봅니다. 두 가지 소견이 이미 갈라졌으니, 이로써 둘을 이룹니다.
자문:성인은 무(無)를 보고 무를 ‘제(諦)’라고 이를 만하더라도 범부는 유(有)를 보고 어떻게 ‘제’라고 말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성인이 무를 보고서 성스러움으로 ‘제’를 삼는데, 범부가 살펴서 유(有)가 된다고 말하니, 이 때문에 범(凡)으로써 ‘제’를 삼는 것입니다.
(4) 서현사(栖玄寺) 석담종(釋曇宗) 자이제의(諮二諦義)
서현사 담종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성인은 세제(世諦)를 보기도 하고 세제를 보지 않기도 합니까?
영지의 답변:성인은 범부의 견해에 세제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만약 성인에 대해 논한다면, 성인은 다시 이것(세제)을 보지 않습니다.
자문:성인이 이미 세제를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제로써 중생을 교화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성인은 미혹이 없기에 스스로 세제를 보지 않더라도 성인이 범부의 소견(所見)을 아는 것은 무방합니다. 이 때문에 완곡하게 만물의 마음에 따라 2제가 있음을 설하게 됩니다.
자문:성인이 범부의 소견의 세제를 안다면 이는 바로 범부가 아니겠는가?
영지의 답변:이 같은 범부가 바로 세제입니다. 성인은 이 같은 범부를 보지 않습니다.
자문:성인이 이미 범부를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범부의 소견의 세제를 알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성인은 비록 스스로 평범함이 없더라도 평범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스스로 그것을 유(有)라고 하니, 이 때문에 완곡하게 그 심정에 따라 세제를 말하게 됩니다.
(5) 중랑(中郞) 왕규(王規) 자이제의(諮二諦義)
사도(司徒) 종사중랑(從事中郞) 왕규와의 문답이다.
자문:‘진’과 ‘속’이 이미 같지 않음을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서로 마주하는 이치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성인이 얻는 바는 스스로 그 무(無)를 보는 것이고, 범부가 얻는 바는 그 유(有)를 보는 것입니다. 견(見)이 원래 같지 않으나 ‘속(俗)’이 ‘진’의 바깥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과는 서로 무방합니다.
자문:이미 다름이 없다는 것을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바탕에 두 가지 이치가 있다면 마땅히 이치가 바탕에서 떨어지거나, 이치에 마주하고 바탕에 마주해야 합니다.
영지의 답변:다시 모양을 내지 않고 일체라고 이름합니다. 이로써 범부와 성인의 소견이 달라서 저절로 다른 이치를 이룹니다.
자문:범부는 단지 속제만 보고도 진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영지의 답변:다만 속제만을 보고 진제를 보지 못합니다.
자문:그 바탕이 서로 마주한다면, 어떻게 참다움을 보지 못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범부가 만약 진제를 보게 되면, 속제를 살펴보지 말아야 한다. 속제를 본다는 것은 이미 허망한 것인데, 어떻게 진제를 볼 수 있겠는가?
(6) 영근사(靈根寺) 석승천(釋僧遷) 자이제의(諮二諦義)
영근사 승천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만약 ‘제일(第一)’은 지나침이 없는 것으로 이치를 삼았다면, 이는 찬탄할 만한 이름입니다. 진제가 속제를 여의었으니, 이 또한 찬탄할 만한 이름입니다.
영지의 답변:이 같은 바탕이 진실함에 나아가서는 찬탄하는 말조차 하지 못합니다. 제일의제가 이미 다시 그 아름다운 이름을 세우니, 이 때문에 찬탄하는 것입니다.
자문:나에게 이기는 자[勝我]가 없다면 이미 찬탄할 수 없습니다. 나의 바탕이 진제에 마주하는데, 어떻게 찬탄하지 않겠습니까?
영지의 답변:나에게 이기는 자가 없다면 이로써 칭찬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바탕이 진제에 나아간다는 것은 바로 내가 진실한 것이기에 찬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문:나에게 허물이 없다면 이로써 칭찬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거짓이 없는데 어떻게 칭찬하지 않겠습니까?
영지의 답변:거짓됨이 없는 것이 바로 바탕의 이름이 됩니다. 사람이 이치를 터득하면 이것을 이치의 해득이라 말합니다. 바로 그 실체를 칭할 만해도 어떻게 찬탄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문:이 같은 법을 벗어날 수 없는 자를 어떻게 찬탄할 수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이미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였으니 찬탄할 만하지 않으니 어찌 하겠는가?
(7) 나평후(羅平候) 소정립(蕭正立) 자이제의(諮二諦義)
나평후 소정립과의 문답이다.
자문:속제가
생법(生法)인지 아닌지를 살피지 못했습니다.
영지의 답변:속제의 바탕이 바로 생법(生法)입니다.
자문:속제가 이미 잘못 보는 것인데 어떻게 생(生)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잘못 보는 것이 바로 유(有)가 되니, 이로써 생이 있게 됩니다.
자문:잘못 보는 것이 유(有)가 된다면 실로 자체로 법이 없습니다. 실로 법이 없다면 어떻게 생이라 말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이와 같은 생법(生法)을 ‘잘못 보는 것[橫見]’이라 이름합니다. 또 이와 같이 잘못 보는 것을 ‘생법’이라 이름합니다.
자문:만약 이와 같이 잘못 보는 것이 있으면 생이 있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반드시 생이 있다면, 어떻게 잘못 본다고 이름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이미 잘못 본다고 말하였으나 실제로 생이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잘못 보아 있다고 하는 것이니, 이로써 잘못 생겨나는 것[橫生]입니다.
(8) 형산후(衡山侯) 소공(蕭恭) 자이제의(諮二諦義)
형산후 소공과의 문답이다.
자문:제일의제가 이미 의목(義目)이 있음을 살피지 못하겠는데 어떻게 세제만 유독 의명(義名)이 없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세간 자체가 헛된 세속인지라 분별할 만한 이치가 없습니다.
자문:만약 분별할 만한 이치가 없다면, 어떻게 ‘제(諦)’라 말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범부가 속된 소견에서 살피기 때문에 ‘제’라는 이름을 세우는 것입니다.
자문:만약 범부의 속된 소견에 ‘제’라는 이름을 받았다면, 범부의 속된 소견에도 이치에 해당하는 글자를 세워야만 합니다.
영지의 답변:범부의 속된 소견에서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제’라는 이름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헛된 세속에는 이치가 없는데, 어떻게 글자를 강제하여 이치를 삼겠습니까?
자문:헛된 세속이 비록 참다운 이치가 없더라도 헛된 세속에 이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 같은 헛된 세속이 있는데, 어째서 이치의 이름을 얻지 못합니까?
영지의 답변:바로 헛된 세속이기 때문에 가릴 만한 이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가릴 만한 이치가 있다면, 어떻게 ‘헛된 세속’이라 이름하겠습니까?
(9) 중흥사(中興寺) 석승회(釋僧懷) 자이제의(諮二諦義)
중흥사 승회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영지(令旨)를 풀이하여 말하기를, “진(眞)이 속(俗)을 벗어나지 않고 속(俗)이 진(眞)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진은 모양이 없고 속은
모양이 있는데, 모양이 있고 없는 다름을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그 바탕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모양이 있고 없는 것은 이곳에서는 같지 않습니다. 단지 범부의 소견으로 유(有)가 되고 성인의 소견으로는 무(無)가 됩니다. 이로써 논하자면 구별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자문:이미 한 가지 법이라면, 어떻게 소견에 두 갈래가 있을 수 있습니까? 소견(所見)에 이미 두 갈래가 있는데, 어떻게 법은 한 갈래이어야 합니까?
영지의 답변:이치는 두 갈래가 아니나, 사물의 소견에 따르기 때문에 두 갈래가 있게 됩니다.
자문:소견에 이미 두 갈래가 있는데, 어떻게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까?
영지의 답변:법이 만약 두 갈래 모두 실하다면, 서로 어긋날 수 있습니다. 법이 늘 두 갈래가 아니나 사람의 소견에 두 갈래가 있기에 이로써 논을 짓는 것인데, 어떻게 서로 어긋난다 하겠습니까?
자문:사람의 소견에 두 갈래가 있다면 두 갈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치는 이미 한 갈래인데, 어떻게 두 갈래가 있다 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이치는 비록 두 갈래가 아니지만, 사람으로 한정한다면 두 갈래가 이루어집니다.
(10) 시흥왕(始興王) 제사남(第四男) 소영(蕭映) 자이제의(諮二諦義)
시흥왕 제사남 소영과의 문답이다.
자문:제일의제는 그 이치가 제일 간다는 것인데, 덕(德) 또한 제일 가지 않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이치가 이미 제일이니, 덕 또한 제일입니다.
자문:바로 제일이라 한다면, 이미 덕의 이치를 쌓았는데, 어떻게 다시 ‘의(義)’라는 글자를 붙여 번잡하게 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제일’이라 바로 말하면 이치에 대해서 어둡기 때문입니다. ‘제일견의(第一見義)’라 해야 아름다움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문:만약 의(義)라는 글자를 더하여 아름다움을 다할 수 있다면, 어째서 덕(德)이라는 글자를 보태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합니까?
영지의 답변:제일이야말로 덕(德) 자체인데, 어떻게 보태기를 기다리겠습니까? 단지 의(義)라는 글자를 보태었다면, 덕의 이치가 겸하여 아름다워집니다.
자문:바로 제일이라 불러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데, 편벽되게 ‘의’라는 글자를 보태니, 이에 한정되는 것 같습니다.
영지의 답변:제일은 덕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에 ‘의’라는 글자를 보태면, 두 가지 아름다움이 함께 펼쳐지는데 어떻게 한정되겠습니까?
(11) 오평왕(吳平王) 세자 소려(蕭勵) 자이제의(諮二諦義)
오(吳)나라 평세자(平世子) 소려와의 문답이다.
자문:통지(通旨)에서 “제일의제와 세제는 칭찬하고 깎아내려서 이름을 세웠으며, 진제와 속제의 2제(諦)는 바탕을 정하여 이름을 세웠다”고 말하는데, 진제의 이치가 이미 말과 생각을 묘하게 끊은 것을 살펴보면, 어떻게 바탕을 결정하는 이치가 있는지 아무리 해도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영지의 답변:그 모양 없음에 대해 말하자면 ‘진(眞)’도 없고 ‘진’이 아님도 없습니다. 모양과 이름에 의탁하여 말한다면 ‘진’으로써 바탕을 결정하게 됩니다.
자문:만약 진제의 바탕이 없는데도 지금 말에 의탁하여 바탕을 가린다면, 진제의 모양 없음을 살피지 못한다고 하겠는데, 어떻게 말에 의탁하지 않고 모양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말에 의탁하여 모양을 분별한다면, 오히려 그 덕을 깎아내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만약 다시 말에 의탁하여 모양을 분별한다면, 허무하고 그윽함에 누(累)가 됩니다.
자문:진제는 허무하고 현묘하여 말을 떠났는데, 지금 이미 ‘진(眞)’이라고 말하였으니, 어떻게 말에 의탁하여 모양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유(有)에 의탁하여 이같이 이름합니다. 이름은 원래 이 같은 모양에서 비롯하니, 이 같은 이치의 모양 없는 허적(虛寂)함을 손상하지 않습니다.
자문:이처럼 말에 의탁하여 바탕을 가린다는 것을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이치에 합당하기도 하고, 이치에 합당하지 않기도 합니다.
영지의 답변:이름 없음으로 이름을 말하면, 완전히 이치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자문:만약 말에 의탁하여 이름을 가린다면, 이름이 이치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이같이 의탁하는 것을 살피지 못하겠으니, 장차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영지의 답변:비록 이치에 합당하지 않더라도 중생을 인도하고자 반드시 이름과 모양으로 말하게 됩니다.
(12) 송희사(宋熙寺) 석혜령(釋慧令) 자이제의(諮二諦義)
송희사 혜령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진제는 불생을 바탕으로 삼고, 속제는 생법(生法)을 바탕으로 삼지만 불생(不生)이 곧 생(生)이고 생이 곧 불생이니 바탕 가운데 형상[相]이 있고 이치 가운데 형상이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영지의 답변:바탕 가운데 형상이 있지만 이치가 형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문:이치가 이미 형상이 아니니 바탕이 어찌 형상이 된다고 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범부는 그 유(有)를 보고 성인은 그 무(無)를 살핍니다. 현상에 제약되면 다르게 되지만
바탕으로 나아가면 언제나 같습니다.
자문:바탕에 이미 두 가지가 없으니 어찌 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만약 바탕에 별도의 두 가지가 없더라도 보는 것[所見]에 연하여 두 가지가 있게 됩니다. 소견이 이미 두 갈래로 갈라졌으니 반드시 바탕을 밝혀야만 합니다.
자문:만약 영지(令旨)로 내려진 이해와 같다면, 결과적으로 사람으로 나아가 밝히는 것입니다.
영지의 답변:사람으로 한정하면 소견은 두 가지가 됩니다. 2제의 이름도 이로써 생겨납니다. 사람의 소견으로 나아가 밝히는 것은 이 또한 무엇을 거리끼는 것이겠습니까?
(13) 시흥왕 제오남(第五男) 소엽(蕭曄) 자이제의(諮二諦義)
시흥왕 제오남 소엽과의 문답이다.
자문:진제를 ‘진(眞)’이라 칭하는데, 이것이 ‘실제의 진(眞)’입니까?
영지의 답변:이와 같이 실제의 진을 얻게 됩니다.
자문:보살이 ‘진’을 만나는 때에 ‘속(俗)’도 잊고 ‘진(眞)’도 잊는 것입니까?
영지의 답변:‘속’도 잊고 ‘진’도 잊습니다. 그러므로 ‘진(眞)’에 회통한다고 말하게 됩니다.
자문:만약 ‘속’도 잊고 ‘진’도 잊기 때문에 ‘진’에 회통(會通)한다고 말한다면, ‘속’도 잊고 ‘진’도 잊는 것을 어떻게 ‘실제의 진’이라 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만약 ‘속’도 남기고 ‘진’도 남긴다면, 어떻게 ‘실제의 진’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바로 이 같은 두 갈래를 버리기 때문에 ‘실제의 진’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자문:만약 ‘속’도 잊고 ‘진’도 잊는 것이 ‘실제의 진’이라면, 또한 ‘진’도 잊고 ‘속’도 잊는 것도 ‘실제의 속(俗)’이 되어야 합니다.
영지의 답변:‘속’도 잊고 ‘진’도 잊기 때문에 ‘진’을 보게 됩니다. ‘진’도 잊고 ‘속’을 잊기 때문에 더욱더 속이 아닌 것을 보게 됩니다.
자문:보살이 ‘진’에 회통하여 이미 ‘속’도 잊고 ‘진’도 잊었는데, 지금 ‘실제의 진’이라 말한다면, 바로 이치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영지의 답변:거짓되게 ‘실제의 진’이라 부르는 것이니, 끝내 ‘진(眞)’조차도 잊게 됩니다. 두 가지를 다 잊는 것을 ‘실(實)’이라 이르는데, 어떻게 이치에 어긋났다고 하겠습니까?
(14) 흥황사(興皇寺) 석법선(釋法宣) 자이제의(諮二諦義)
흥황사 법선(法宣)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의지(義旨)에서 “속제는 유(有)이고 무(無)이기 때문에 생법(生法)으로 바탕을 삼는다”고 말하였는데, 법(法)이 있고 체(體)가 있다면 ‘생(生)’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을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무(無)는 무법(無法)인데 어떻게 ‘생(生)’의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속제는 유(有)와 무(無)가
상대적(相對的)으로 세워집니다. 이미 상대적이기 때문에 이를 ‘생(生)’이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자문:만약 유(有)와 무(無)의 두 가지 법(法)을 아울러 칭하여 ‘생(生)’이라 한다면, 생의 이치는 이미 한 갈래인지라 유와 무가 서로 다를 바 없습니다.
영지의 답변:범부의 소견을 함께하기 때문에 생(生)의 이치가 같게 됩니다. 유이고 무인데, 어떻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자문:만약 유와 무가 결과적으로 구별된다면, 이에 응하여 생(生)과 불생(不生)도 있어야만 합니다.
영지의 답변:이미 상대해서 이름을 세웠기 때문에 생(生)의 이치가 동일해지는 것입니다.
(15) 정향후(程鄕侯) 소지(蕭祇) 자이제의(諮二諦義)
정향후 소지와의 문답이다.
자문:‘제일(第一)’이란 이름을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형태를 의지하는 것입니까?
영지의 답변:바로 형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문:제일의 모양 없음에 어떻게 형태를 의지하는 것이 있습니까?
영지의 답변:이미 제일이라 하였는데, 어찌 의지하지 않겠습니까?
자문:제일이 의지함이어서 이미 ‘제일’이라 말하였으니, 세제(世諦)도 제일을 의지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제이(第二)’라고 이름합니까? 만약 속제가 의지함이어서 ‘제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진제가 의지함이니 ‘제일’이라 이름하지 않습니다.
영지의 답변:만약 ‘제일’을 부르는 것이 의지함이더라도, 그 이치가 이미 넉넉해서 헛되이 ‘속’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제이’는 바로 상대(相待)적인 호칭입니다.
자문:만약 세제의 이름을 ‘제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제일’이란 호칭도 형태에 의지하는 바가 없습니다.
영지의 답변:제일은 ‘진(眞)’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미 서로 의지한다고 말하였으니, 세간의 이름을 기다려 두어도 알 수 있습니다.
(16) 광택사(光宅寺) 석법운(釋法雲) 자이제의(諮二諦義)
광택사 법운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성인의 소지(所知)의 경계는 진제에 해당하는데 능지(能知)의 지(知)를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진제에 해당합니까, 아니면 속제에 해당합니까?
영지의 답변:능지(能知)는 지혜이고 소지(所知)는 경계입니다. 지혜가 그윽한 경계를 이루면 바로 ‘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문:지혜가 있는 사람은 진제에 해당합니까, 속제에 해당합니까?
영지의 답변:만약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부른다면, 바로 속제에 해당합니다.
자문:속제의 사람이 어떻게 진제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영지의 답변:성인이 ‘속’을 잊을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진지가 있게 됩니다.
자문:이 같은 사람이 이미 아득하여 생이 없다면, 사람이라 호칭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영지의 답변:아득하여 생이 없으니 사람이라 말하지도 못합니다. 이름과 모양에 의탁하여 설한다면 항상 이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17) 영근사(靈根寺) 석혜령(釋慧令) 자이제의(諮二諦義)
영근사 혜령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진제 가운데에서 유(有)를 보는 것입니까? 속제 가운데에서 유(有)를 보는 것입니까?
영지의 답변:진제 가운데에서 유(有)와 속(俗)이 있다고 잘못 보는 것입니다.
자문:속제의 유(有)는 실제의 것입니까, 허망한 것입니까?
영지의 답변:이것은 허망한 유(有)입니다.
자문:허망한 것을 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유(有)를 보는 것입니까?
영지의 답변:허망한 유(有)를 보는 것입니다.
자문:이름과 모양이 없는 가운데에서 어떻게 이름과 모양이 있다고 보는것입니까?
영지의 답변:이름과 모양이 없는 가운데에서 이름과 모양을 있다고 보게 되니, 이로써 허망한 유(有)가 됩니다.
자문:이름과 모양이 없는 것을 망견(妄見)으로 있다 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마치 뜨거운 불과 같습니다. 미혹한 이는 차갑다고도 말하나, 뜨거운 불 속으로 나아가면 어찌 차가운 모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모양 없는 것에서 이름과 모양이 있다 하면, 불 가운데에도 이와 같은 차가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지의 답변:불은 원래가 늘 뜨거운 것인데도 망견으로 차갑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미혹된 것입니다. 차갑고 뜨거운 것은 원래 다른 것입니다.
(18) 상궁사(湘宮寺) 석혜흥(釋慧興) 자이제의(諮二諦義)
상궁사 혜흥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범부의 미혹이 마땅히 ‘진(眞)’에 대해서 미혹한 것이라면, ‘속(俗’)에 대해서도 미혹해야 할 것입니다.
영지의 답변:‘진’에 대해서 유(有)를 본다면, 이는 ‘진’에 미혹한 것입니다. 이미 ‘속’이 있음을 보았기에 ‘속’에 대한 미혹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문:만약 ‘속’을 이해하게 된다면 바로 ‘진’을 이해하게 됩니다.
만약 ‘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찌 ‘속’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진리의 허적(虛寂)은 미혹된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비록 ‘진’을 이해하지 못하였더라도, ‘속’을 이해하는 데 구애 받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문:이 같은 마음이 ‘진’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진’에 대해서도 도리어 미혹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마음이 이미 ‘속’을 이해하였다면, ‘속’에 대해서도 미혹함이 없어야 합니다.
영지의 답변:실제로 말하자면, 모두가 미혹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속’을 분별하는 것은 아주 다양하기에 ‘속’ 가운데 처해서 각각 달리 이해하게 됩니다.
(19) 장엄사(莊嚴寺) 석승민(釋僧旻) 자이제의(諮二諦義)
장엄사 승민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세속의 마음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공(空)에 대한 이해는 ‘진’의 이해에 해당합니까, ‘속’의 이해에 해당합니까?
영지의 답변:이름과 모양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자문:모양이 비슷하다는 것은 ‘진’에 해당합니까, ‘속’에 해당합니까?
영지의 답변:무생(無生)을 익숙하게 보는 것은 ‘속의 이해’라 이름하지 않습니다. 무생을 보지 못하였기에 ‘진의 이해’라 이름하지도 못합니다.
자문:만약 능조(能照)의 지혜가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니라면, 소조(所照)의 경계도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니어야 합니다. 만약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니라면, 바로 3제(諦)가 있어야 합니다.
영지의 답변:소조(所照)의 경계가 이미 무생입니다. 무생이 바로 ‘진’인데, 어떻게 3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문:만약 경계가 바로 ‘진의 경계’라면, 어떻게 지혜가 아닌 것이 진지(眞智)입니까?
영지의 답변:무생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진지(眞智)가 아닙니다. 이 같은 지혜가 ‘진’이 아니라 하더라도, ‘진의 경계’를 익숙하게 보는 것을 어떻게 방해하겠습니까? 어떻게 그 지혜가 ‘진’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경계마저 ‘진의 경계’가 아니라 하겠습니까?
(20) 선무사(宣武寺) 석법총(釋法寵) 자이제의(諮二諦義)
선무사 법총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진제에는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데, 속제에는 생도 있고 멸도 있습니다. ‘진’과 ‘속’의 두 가지 이치가 다르다고 말하나, 그 법의 바탕을 논하자면 단지 하나일 뿐입니다. 바탕이 이치에 따르는데, 어떻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영지의 답변:바탕도 이치에 합쳐지지 못합니다.
자문:범부와 성인이 두 가지
소견으로 나아가 두 가지 이치를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범부와 성인이 두 가지 소견으로 나아간다면, 마땅히 두 가지 바탕이 있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영지의 답변:이치에는 서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한바탕이라 말합니다. 범부와 성인이 두 가지 소견으로 나아가면, 두 가지 바탕에도 다름이 있게 됩니다.
자문:만약 범부가 유(有)를 본다 하고 성인이 무(無)를 본다 하면, 범부는 세제의 유(有)를 보아야 하고 성인은 태허(太虛)의 무(無)를 보아야 합니다.
영지의 답변:태허(太虛)조차도 성인의 소견이 아닙니다. 태허도 상대적(相待的)인 것에 연유하여 이름을 얻었기에 그 대(待)에 연유하여 태어난 것이므로, 아울러 범부의 소견이 됩니다.
자문:범부가 보는 공(空)과 유(有)는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영지의 답변:범부로 나아가 말하자면 유(有)는 실(實)이고 무(無)와 다릅니다. 성인으로 한정하여 논하자면 무(無)는 유(有)와 다르지 않습니다.
(21) 건업사(建業寺) 석승민(釋僧愍) 자이제의(諮二諦義)
건업사 승민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속인이 ‘속’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는 ‘속’의 어지럽고 번잡함[參差]을 이해하는 것을 속을 이해한다고 말해야 합니까, 아니면 ‘속’의 허가(虛假)를 보는 것을 ‘속’을 이해한다고 말해야 합니까?
영지의 답변:‘속’의 어지럽고 번잡함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문:속제는 어지럽고 번잡할 뿐만 아니라 또한 허망하기도 합니다. 어째서 그 어지럽고 번잡한 것을 이해하면서 허망함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영지의 답변:만약 범부에게 허망함을 이해시키는 것은 바로 ‘진’을 이해하는 것이지, 허망함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속의 이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22) 광택사(光宅寺) 석경탈(釋敬脫) 자이제의(諮二諦義)
광택사 경탈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성인이 ‘진’을 본다는 것이 점차적으로 보는 것[漸見]입니까? 갑작스럽게 보는 것[頓見]입니까?
영지의 답변:점차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문:모양 없는 허무(虛無)한 마음으로 한 번 이러한 이치를 보아 만 가지 모양도 함께 적막해집니다. 어째서 ‘진’을 보는 것이 점차적으로 있어야 하는지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영지의 답변:범부에서 성인에 이르는 것은 그 이해에 깊고 얕음이 있으나 ‘진’은 본래 허적(虛寂)합니다. 보는 것이 점차적으로 있음에 연유한다 하여도 무방합니다.
자문:한 번 모양 없음을 얻으면 아울러 만유(萬有)를 잊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모두 잊는 것이 아닙니다.
영지의 답변:한 번 모양 없음을 얻으면 만유를 모두 잊습니다.
자문:한 번
모양 없음을 얻어서 만유를 잊는다면, 이 또한 한 번에 허무한 마음을 얻어 저와 같은 ‘진의 경계’를 다하는 것이기에 점차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영지의 답변:여래가 적막(寂寞)에 회통(會通)하여 ‘진’을 다하였으나, 행(行)을 얕게 하여 성인은 항상 스스로 점견(漸見)합니다.
자문:만약 ‘진’을 보는데 점차적으로 한다면 갑자기 회통할 수 없고, 또한 만유를 점차로 잊는다면 만유를 갑작스럽게 잊을 수 없습니다.
영지의 답변:이해에 우열이 있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보게 됩니다. 마음을 잊고 편벽하지 않기 때문에 만유가 함께 적막해지는 것입니다.
31) 해법신의영지(解法身義令旨:법신의 뜻을 해석하는 영지)와 문답
법신(法身)이 허적(虛寂)하여 유(有)와 무(無)의 경계를 멀리 떠났고, 인(因)과 과(果)의 바깥으로 홀로 벗어났으니, 지혜[智]로도 알 수 없고 식견[識]으로도 가릴 수 없는데, 어떻게 변론이 가능하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그 이치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침묵해서는 안 되니, 이 때문에 언설에 따라 ‘법신’이란 호칭이 있게 되었다. 천축에서는 ‘달마사리(達摩舍利)’라 말하는데, 이 땅에서는 ‘법신(法身)’이라 부른다. 이처럼 당체(當體)로써 한다면 자성(自性)의 안목을 삼거나, 또는 언설(言說)로써 한다면 상대하여 이름을 세운 것이다.
법신의 ‘법(法)’이란 법도에 따른다는 뜻이고, 법신의 ‘신(身)’이란 바탕이 있다는 뜻이다. 법도에 따르는 바탕이 있기 때문에 ‘법신’이라 말한다. 간략하게 언설로써 그 바탕을 대략 개진하되, 이를 ‘상주신(常住身)’이라고도 하고, 이를 ‘금강신(金剛身)’이라고도 하나, 되풀이하여 연구하더라도 그 법도는 그렇지 않다.
만약 이를 ‘금강’이라고 결정한다면 바로 이름과 모양이 되고, ‘상주’라 결정한다면 반드시 방위와 처소가 성립된다. 이른바 ‘상주’라는 것은 원래가 이름에 의탁한 것이고, ‘금강’이라 부르는 것도 원래가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
실체를 논하는데 그 성품이 무생(無生)과 같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의 몸은 무위(無爲)하여 제법(諸法)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도 “여래의 몸은 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몸은 한량없고 가없어서 자취마저 없으며 알 수도 없고 형체도 없으니 궁극적으로 청정한 것인데, 아는 바가 없이 청정하기에 무(無)가 될 수도 없다. 묘유(妙有)라고 호칭하여도 다시 유(有)가 아니니, 무(無)를 여의고 유(有)를 여읜 것을 ‘법신’이라 부른다.
(1) 초제사 석혜염(釋慧琰) 자법신의(諮法身義:법신의 뜻을 물음)
초제사 혜염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법신이 모양도 없고 바탕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다. 어떻게 바탕을 써서 몸의 이치를 풀이할 수 있습니까?
영지의 답변: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니 논할 만한 바탕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름과 모양에 의탁하였으나, 묘한 바탕 아님이 없습니다.
자문:만약 이름과 모양에 의탁하였기에 묘한 바탕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이름과 모양에 의탁하더라도 모양 없음을 이루지 못합니다.
영지의 답변:이미 이름과 모양에 의탁한다고 말하였다면 이치가 실제로 모양 없음이 명백합니다.
자문:만약 이름과 모양에 의탁하였기에 이치에 실제로 모양이 없다면, 그 도리에 이미 모양이 없는데 어떻게 바탕이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말에 의탁하여 만물을 따르는데 어떻게 바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자문:말에 의탁하여 만물을 따른다면 다시 모양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영지의 답변:뜻의 변제(邊諦)에서 만물을 따르나, 도리에는 모양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 없음을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묘한 바탕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자문:진실은 본래 모양이 없다면 바로 이와 같이 만물에 따라야만 하는데 어떻게 이러한 진실(眞實)을 은폐하고 억지로 언상(言相)을 만들어내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진실은 모양이 없으니 가까이 배워서 엿볼 바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여러 비천한 이들을 인도하고자 하면, 반드시 언상(言相)에 의탁해야만 합니다.
(2) 광택사 석법운(釋法雲) 자법신의
광택사 법운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법신이 상주하는데도 만행(萬行)을 얻게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영지의 답변:이름과 모양의 도(道) 가운데서 만행이 얻어집니다.
자문:이미 만행을 얻었는데, 어찌 이것이 모양 없음이 됩니까? 만약 반드시 모양이 없다면 어떻게 만 가지 행이 얻어집니까?
영지의 답변: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데 어떻게 얻을 만한 유(有)가 있겠습니까? 이름과 모양에 의탁하여 헛된 말로 얻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자문:실제로 만행이 있고 실제로 불과(佛果)를 얻는 것인데, 어떻게 모양이 없어서 그 얻는 바가 아주 없겠습니까?
영지의 답변:묻는 자체가 마음에 머물러 실제로 만행이 있다 하시는데, 지금 만행이 원래 공(空)하다고 말하였으니, 어떻게 실제의 과(果)를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문:현재 중생이 만행을 닦는데, 어째서 전부 없다고 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영지의 답변:범부의 속된 소견으로 이를 말하여 있다고 하는 것이나, 도리로 따져 보면 실제로 만행이란 없습니다.
자문:경전에서는 늘 머무는 것을 설명하여 묘유(妙有)라고 하셨는데, 만약 그것이 헛된 말씀이라면 어떻게 ‘묘유’라 말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이름과 모양에 의탁하기 때문에 ‘묘유’라 말하는 것입니다. 도리에는 이름과 모양이 끊어졌는데, 무엇을 묘하다 하겠으며, 무엇을 있다고 하겠습니까?
(3) 장엄사 승민(僧旻) 자법신의
장엄사 승민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법신이 모양을 끊었고 지혜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모양을 끊고 아는 것을 끊었다면, 어떻게 몸이 있다고 칭할 수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데 일찍이 어떠한 몸이 있었겠습니까? 이름과 모양을 빌미로 삼아 말하기 때문에 ‘법신’이라 말합니다.
자문:헛된 이름과 모양으로 말하더라도 이는 지혜로 비춘 것인데, 어떻게 지혜로도 알 수 없고 식견으로도 살피지 못한다 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이 또한 이름과 모양에 의탁하여 지혜의 눈으로 내다볼 수 있습니다.
자문:만약 지혜의 눈으로 내다볼 수 있다면, 지혜로써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지혜로 알 수 없다면, 지혜의 눈으로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영지의 답변:지혜의 눈으로 내다보지 못하며 또한 내다볼 만한 법(法) 조차 없습니다.
자문:만약 내다봄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법신이 있다 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이(理)는 듣고 보는 것을 끊었고, 실(實)은 법신이 없습니다.
자문:만약 법신이 없다면 정각(正覺)도 없을 터이나, 정각이 이미 계셨는데 법신이 어찌
없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언제나 말에 의탁하기 때문에 정각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각도 이미 말에 의탁하여 있는 것인데, 법신이 어떻게 그 유(有)를 결정하겠습니까?
(4) 선무사 석법총(釋法寵) 자법신의
선무사 법총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법신이란 호칭이 바로 묘(妙)의 근본에 있다고 하는데 금색(金色) 장륙(丈六)의 몸이 바로 법신이란 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영지의 답변:통괄하여 논하자면 근본 자취는 모두가 그렇습니다. 분별하여 말하자면 다만 상주(常住)에 있습니다.
자문:만약 다만 상주에 있다면 몸에 있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통괄적으로 장륙의 금색신을 취한다 하더라도, 장륙을 어떻게 ‘법신’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상주하는 것이 이미 묘한 바탕이 있는데 어떻게 몸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장륙의 금색신 또한 만물을 따를 수 있으니, 이 때문에 통괄하여 ‘법신’이라 호칭하게 됩니다.
자문:만약 상주하여 누(累)가 없는 것을 ‘법신’이라 부른다면, 장륙에는 누가 있는데, 어떻게 ‘법신’이라 말하는 것입니까?
영지의 답변:중생이 크게 우러러 헛되이 장륙을 보더라도 장륙이 유(有)가 아닌데 어떻게 ‘실제의 누(累)’가 있겠습니까?
자문:만약 장륙이 유(有)가 아니라면, 어떠한 것을 가리켜 ‘몸’이라 할 것입니까?
영지의 답변:만물에 따라 유(有)를 보게 되는 것을 응신(應身)이라고 말합니다.
자문:이미 응신이라 말했는데, 어떻게 다시 ‘법신’이라 말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통괄하여 모양으로 구별하기 때문에 근본 자취를 겸하게 됩니다. 실제의 이치를 따져 보면 금색신(金色身)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5) 영근사 석혜령(釋慧令) 자법신의
영근사 혜령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지극한 지혜를 ‘법신’이라 이름하는지 모양을 끊은 것을 ‘법신’이라 말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영지의 답변: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 집장법신(集藏法身)이고 원만하고 지극한 지혜는 바로 실지법신(實智法身)입니다.
자문: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면, 몸으로서 몸 아닌 것도 없습니다. 이미 법신이 있는데 어떻게 모양이 없다고 말합니까?
영지의 답변:바로 모양이 없기 때문에 ‘법신’이라 말합니다.
자문:만약 모양이 없기 때문에 ‘법신’이라 말한다면, 지혜의 이름과 모양은 다시 ‘법신’이 아닙니다.
영지의 답변:이미 모양 없는 지혜인데, 어찌 법신이 아니겠습니까?
자문:그 몸이 있는데 어떻게 ‘모양 없음’이라 이름하겠습니까? 만약 모양이 없다면, 어떻게 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이름과 모양이 없음에서 ‘법신’이라 거짓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자문:만약 법신에 이름과 모양이 있다고 거짓되게 말한다면, 어째서 곧바로 모양 없음을 가리켜 ‘법신’이라 말하지 않습니까?
영지의 답변:이미 모양 없는 것에서 헛되게 이름과 모양을 세운 것입니다. 어찌 이 같은 모양 없음으로 법신을 설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하겠습니까?
(6) 영미사 석정안(釋靜安) 자법신의
영미사 정안 스님과의 문답이다.
자문:법신이 감응(感應)을 내리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영지의 답변:법신은 감응이 없습니다.
자문:근본적으로 감응하여 교화하기 때문에 ‘법신’이라 칭합니다. 만약 감응하여 교화함이 없다면, 어떻게 ‘법신’이라 말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근본적으로 법도에 따르는 바탕을 ‘법신’이라 이름하게 됩니다. 감응하여 교화한다는 말은 지금 따를 바가 아닙니다.
자문:만약 감응하여 교화함이 없다면, 어떻게 따를 수 있겠습니까? 이미 만물에 따르는데 어떻게 감응하여 교화함이 없다 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중생이 크게 우러러 이로움을 받았기 때문에 사물의 규범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교화의 연(緣)이 이미 다하였는데 어느 곳에서 감응하여 다시 교화하겠습니까?
자문:만약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바로 감응하여 교화를 이룹니다. 만약 감응하여 교화함이 없다면 어떻게 만물을 이롭게 하겠습니까?
영지의 답변:능히 ‘우러름을 생기게 할 수 있다면 궤범(軌範)이 저절로 이루어지는데, 어찌 수고롭게도 지극한 사람이 진속(塵俗)에 그 몸을 굽어 감응한다 하겠습니까?
자문:이미 ‘우러름’을 일으켰는데도, 어찌 감응하여 교화함이 없겠습니까? 만약 감응하여 교화함이 없다면, 우러르더라도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영자의 답변:바로 세존이 지극하시어 신묘함이 아주 깊은 것에서 연유하십니다. 단지 우러르기만 하여도 저절로 가피를 입습니다. 만약 감응한 연후에야 이롭다 한다면, 어떻게 지극히 신묘(神妙)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감응하지 않고도 이롭게 하니, 이로써
그 지극한 아름다움을 이루었습니다. 만약 반드시 실제로 감응해야 한다면, 보살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32) 사칙뢰간강계(謝勅賚看講啓) 양(梁) 소명(昭明) 태자
신 통(統)이 아룁니다.
주서(主書) 관만안(管萬安)이 칙지를 받들어 선포하며 신이 지금 강연을 마친 것을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삼가 가르침이 심오하시어 경전을 모두 터득하셨으니, 두표(斗杓)167)를 고르게 하여 사시(四時)를 바로하시고 태양을 고루하여 만국(萬國)을 비추십니다.
신은 천생이 불초한지라 비록 가볍게 칙지를 받들지라도 천문(天文)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옥부(玉府)를 엿보며 참으로 송구스러울 따름인지라 자나 깨나 은혜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더욱이 삼가 중사(中使)를 내리시어 왕림하기도 하셨으니, 이처럼 특별히 돌보아 주심에 무어라 아뢸 바 없습니다. 참으로 저의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아뢰오니 잘 살펴봐 주십시오. 삼가 올립니다.
33) 사칙참해강계(謝勅參解講啓:칙령을 내려 해강에 참여하심을 감사하는 계)
신 통(統)이 아룁니다.
주서(主書) 주앙(周昻)이 칙지를 받들어 선포하며 북돋아 주심에 힘입어 신이 지금 강연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삼가 지극한 이치는 들리지도 보이지도[希夷] 않으며, 미묘한 말은 그윽하고 깊은지라, 이를 우러러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드디어 평범하지 않게 이렇게 베풀고 풀이할 것을 탐하여 장차 연장자에게 마땅히 양보하여 도리어 자손들을 가르치는 은혜를 내려 주시고, 마땅히 배워야 하는데도 도리어 경전을 해설하라는 조칙까지 내리셨습니다. 가만히 팔위(八威)의 책략을 옆에 끼니 신물(神物)조차 간여하지 못하고, 구단(九丹)168)의 꽃을 복용하니 신선의 무리조차 부리게 되었습니다.
신이 황제의 위엄을 우러러 받들어 이 배우는 도반들을 가르쳤으며, 성지(聖旨)를 받들어 선양하여 군유(群儒)를 깨우쳤습니다. 북과 풀무는 스승을 달리하며 도균(陶鈞)169)이 오랫동안 막혔습니다. 바야흐로 혜시(惠施)170)로 하여금 장단을 재는 것을 부끄럽게 하였고, 공손(公孫)으로 하여금 그 견백(堅白)171)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왕생(王生)172)은 변론을 버리고 이미 신기(神氣)를 다하였고, 법개(法開)173)가 굴욕을 받고 동쪽 봉우리로 영원히 숨었는데, 중사(中使)가 곡진하게 임하여 자리를 더욱 빛냈으니, 삼가 특별하신 자비를 입어 우러러보며 말씀드릴 바를 모르는지라, 참으로 저희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아뢰오니 잘 살펴봐 주십시오. 삼가 올립니다.
34) 사칙뢰제지대열반경강소계(謝勅賚制旨大涅槃經講疏啓:칙령으로 제지대열반경의 강소를 내리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계)
신 통(統)이 아룁니다.
후각응칙(後閣應勅) 목불자(木佛子)가 칙지를 받들어 선포하여 『제지대반열반경강소(制旨大般涅槃經講疏)』 1부 10질 합목(合目) 101권을 내려 주었습니다. 추운 땅에서 해를 보더라도 이보다 더 기이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약초를 캐다가 신선을 만나더라도, 어찌 이보다 기쁘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육효(六爻)로 밝혀서 기미(幾微)의 상(象)을 깊이 깨닫고, 사서(四書)로 거두어 역내(域內)에 명을 베풀어 다하였는데, 어찌 인과만을 가두어 이 같은 보성(寶城)의 가르침을 구별하고 진(眞)과 속(俗)을 망라하여 이와 같이 월만(月滿)의 글을 열어내겠습니까? 도(道)로써 대천세계를 흡족케 하고 교화로써 백억의 중생들을 균등히 합니다. 구름은 식종(識種)을 북돋워주고 비는 신전(身田)에 두루 뿌려지는데, 어찌 당제(唐帝)의 구서(龜書)174)와 주왕(周王)의 책부(策府)175)를 다시 논할 것이며, 어찌 반우(盤盂)176)에 새기고 구삭(丘索)177)을 물리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감로의 묘한 경전을 예전부터 특별한 은혜로 내려 주시는지라, 자신을 헤아려 어리석음을 없애게 되니, 경사로운 은혜를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참으로 정대(頂戴)의 지극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받들어 아룁니다.
35) 사칙뢰제지대집경강소계(謝勅賚制旨大集經講疏啓:칙령으로 제지대 집경의 강소를 내리신 것에 대한 계)
신 통(統)이 아룁니다.
선조(宣詔) 왕혜보(王慧寶)가 칙지를 받들어 선포하여 『제지대집경강소(制旨大集經講疏)』 2질 16권을 내려 주었습니다. 감로가 이마에 닿고 지혜의 물로 마음을 씻으니, 마치 어둡다가 밝음을 만난 듯하고, 굶주리다 배불리 먹은 듯합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색계(色界)도 아니고 욕계(欲界)도 아닌 두 세계가 함께 있는 듯하고, 글도 아니고 이치도 아닌 3승(乘)이 운집하는 듯하기에 4무애변(無礙辨)으로 이를 말하여도 지극하지 못하며, 여덟 가지 소리로 이를 천명하여도 다하지 못합니다. 천기(天機)에 굽어 응하시어 이와 같이 성스러움을 지으시니, 진여(眞如)와 함께 다하지 못하며 일월과 더불어 함께 매여 있습니다.
단지 용산(舂山)에서 보배를 만나고 대해(大海)에서 구슬을 얻듯이 하였습니다만, 신이 실제로 어떻게 항상 인도하심을 입을 수 있었겠습니까? 펼쳐서 붓을 휘둘러 다 펼쳐 보인다 한들, 어찌 마음을 펴 보일 수 있겠습니까? 소매를 걷고 말을 늘려도 다할 수 없습니다. 노래하고 춤추더라도 내려 주신 은혜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아뢰오니 잘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올립니다.
- 답광신후서(答廣信侯書:광신후에게 답하는 편지) 진안왕(晋安王)
왕이 아룁니다.
예전에 개시(開始)하신 것을 우러러 따르며 『열반경』의 강의를 잘 들었습니다. 산중에서 마음껏 즐기며 마음을 세상 바깥으로 노닐었으니, 푸른 소나무와 흰 안개가 곳곳에 가득하여 마냥 기쁘기만 합니다. 높은 봉우리와 괴이한 암석이 눈을 즐겁게 하여 마침내 돌아갈 바도 잊었습니다. 게다가 법(法)의 물이 새벽마다 흐르고 하늘 꽃이 밤마다 내렸으니, 찾아가서 돌아갈 것을 잊었다는 옛말 그대로입니다.
왕법(王法)으로 이끄시매 만물이 따르는지라, 연고도 없이 홀로 가는 것에만 힘을 다합니다. 이처럼 높은 발자취를 우러르고자, 촌심이나마 이와 같이 끝맺겠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36) 여광신후서(與廣信侯書:광신후에게 보내는 편지) 진안왕
왕이 아룁니다.
요사이 소식이 뜸하였습니다.
매번 편지를 쓴다 하면서도 뒤로 미루기만 하였습니다. 바람이 거세고 추위가 매서우니, 원하건대 몸을 잘 간수하십시오.
삼가 정명(淨名)의 법석을 받들고 친히 금구(金口)를 이었고, 말씀은 녹야원(鹿野苑)에서 진귀해지며, 이치는 영취산에서 즐거워지니, 은밀한 비장(祕藏)이 여기에서 융성해졌고 장엄한 도량이 이로써 더욱 드러났으니, 어찌 다만 마음의 등불이 밤에 밝고 의미의 꽃술이 새벽에 날릴 뿐이겠습니까? 하물며 생각을 지혜롭게 하고 밝음을 넓히어 근본적으로 내교를 기르고 지금 10선(善)의 수레를 따르며 8정(政)의 길을 열고 반야(波若)의 물을 흘려 의식(意識)의 더러움을 씻어내며 이처럼 봄에 싹이 터서 바야흐로 가을에 결실을 맺음에 있어서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저는 매번 화림(華林)178)에서의 훌륭한 집회를 그리며 말단의 자리나마 기웃거립니다. 아침이 지나고 밤이 끝나면 묘한 말씀에 목욕하고, 자리가 파하고 난 여가에 물러나 쉬면서 성찰을 늘려 갑니다. 손 붙잡고 올라가 함께 담소를 나누면서 9층의 불탑(佛塔)을 우러러보고 백척의 간두(竿頭)를 굽어보면, 금지(金池)에는 달이 떠오르고 옥수(玉樹)에는 바람을 머금으니, 이때가 되어야 법의 즐거움[法樂]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권유(卷帷)의 부질(部帙)에 그 한 모퉁이를 실어 전하였으니, 지혜의 비가 흘러 넘치고 기쁨이 충만하기만 합니다. 헛되이 현하(懸河)의 물을 뜨더라도 본받을 길이 없고, 공(空)하여 소유(所有)가 없으니, 그 정령(情靈)이 빛나지 못하면서도 어리석음에 연하여 애착만 남아 있어 스스로 제거하기 어려움을 탄식할 뿐입니다.
수레에서 내린 이래로 이치다운
말이 점점 적어졌으니, 옛 추억은 이미 다했으나 새로운 이해는 미처 맛보지 못했습니다. 이미 입으로 외우며 다시 마음으로 분별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물병을 쏟아 놓는 일[瀉甁]179)을 늘 감사하면서도 끝내 모포에 물 들이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물며 자비의 구름이 이미 덮었고 지혜의 바다도 깊어졌으나, 그림자 끝에는 아직도 파도가 남아 있으니, 단지 씻어낼 때만 기다립니다. 단지 서로 멀리 떨어져 햇수만 쌓이니, 하고 싶은 말에 눈시울이 가득합니다. 원컨대 이를 삼가 받아 주십시오. 말로써는 제 마음을 다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 광신후 소영(蕭暎)의 답왕심요(答王心要)
광신현(廣信縣) 개국후(開國侯) 소영이 황공하옵게도 죽을 죄를 지었음에도 매번 가르침만 받습니다. 청아한 말씀이 종이와 짝하니 문채(文采)가 더욱 수려합니다. 계속해서 위로의 말씀을 내려주시나, 나날이 추위와 서리는 더해만 갑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거처를 흥하게 하여 조화롭게 기뻐하면 백성들이 넉넉해지고 과오도 없어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하관(下官)이 슬기롭지 못하고 식견마저 어두운 데다 배운 것마저 천박하여 남들보다 뒤떨어집니다. 이에 책을 끼고 계단을 돌아올라 친히 교의(敎義)를 받들고서야 두 귀는 감로를 맛보고 마음은 제설(制說)을 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늘 같으신 사려가 깊고 그윽하며, 그 슬기로운 정이 넓고도 깊었습니다. 세 가지를 밝히시면 한 가지라도 귀감이 되었기에 오랫동안 미혹하여 이치에 막힌 것을 풀게 되었습니다. 4무애변(無礙辨)을 펴서 생각하기도 힘든 것을 천명하여 잠깐 사이에 깨치게 되었습니다. 어찌 한나라 황제가 꿈속에 금인(金人)을 보고서 범향(梵響)이 다시 넓어지고 비록 진(晋)나라 황제가 마음에 두고서야 미언(微言)이 처음으로 드러났겠습니까?
매번 저녁 나절에는 경연(瓊筵)에 달려가고 아침에는 주폐(朱陛)에 오릅니다만, 방림(芳林)의 승집(勝集)과 현포(玄圃)의 법좌(法座)를 일찍이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신발을 보운(寶雲) 속으로 끌어당기며 혹 자연스럽게 도를 물으시고, 옷자락을 펼쳐서 널리 바라보면서 언뜻 모난 뿔을 꺾어서 진리를 풀어내셨습니다. 이때에 강연의 말석에 외람되게 참여하여 청아한 논조를 듣고 친히 말씀을 받들면서 몇 번이나 안색을 바꾸었습니다.
요즘은 강론하는 자리에서 전하에게는 동류를 제한하고 협소함을 나누어서 하늘의 권고를 외람되이 펼친 것이 하관(下官)에까지 미쳤으니, 누가 그 어짊을 흠모하지 않겠으며, 어떻게 그 덕을 그리워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은 동쪽으로 두고서 늘 우러러보는 것을 앞서서 합니다.
하관(下官)이 은혜를 덮어 주심에 힘입어 오랫동안 우러러 사모하였으니, 비록 묘한 이치를 듣더라도 어리석은 마음으로 입을 열기조차 어렵습니다. 바야흐로 수레를 몰아 분향(枌鄕)을 찾아가 말석에서 의심스러운 것을 묻고자 하였는데, 홀연히
영지(令旨)를 받게 되어 내려주신 가르침의 여파를 얻었다. 이를 읽으니 두렵기만 하고, 몸을 숙여 들여다보매 부끄럽기만 합니다.
참으로 은혜가 융중하고 아래를 돌보시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자비의 구름과 지혜의 바다를 바로 만나니, 이를 되돌려 그 속문(屬文)을 우러러보면 마치 물병을 쏟아놓듯 하는데, 매번 글을 지을 때마다 실로 비루하게만 지어지는지라 실로 부끄럽기만 합니다.
하관의 혹연(惑緣)이 이미 깊이 쌓여서 진루(塵累)를 없애지 못하였으니, 근자에 섭위(攝衛)가 어긋나 중도에 그만 병에 걸렸습니다. 구경(究竟)을 찬승(餐承)하고 말품(末品)을 벽개(闢開)하지 못하고 다만 헛되이 스스로를 책망하여도 끝내 모두가 인연(因緣)의 운수(運數)에 관련됩니다. 날마다 살피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유사(儒史)를 펼치더라도 기쁨을 덜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관이 매번 서우(西郵)를 찾아가서 갖추어 영덕(令德)을 먹을 때마다 우러러 장화(章華)의 위에서 부촉하심을 보고 혹 감당(甘棠)의 밑에서도 송사(訟辭)를 들었으니, 문한(文翰)이 분분하여 아침에 이르도록 그친 적이 없었습니다.
청아한 논조와 그윽한 말씀에 밤이 깊어서야 침상에 드셨습니다. 춘화(春華)의 객(客)은 좌석의 오른쪽으로 하여 당(堂)에 올랐으며, 추실(秋實)의 빈(賓)은 좌석의 왼쪽으로 인하여 방에 들었습니다. 문종(文宗)과 의부(義府)가 이로써 모두 모여졌으니, 이와 같은 최상의 즐거움을 실제로 지금 시절에 겪어 봅니다.
하관이 예전에 양원(梁苑)에 노닐 적에 완곡하게 살펴 주시는 은혜를 입었으나, 지금은 유독 떨어져 있어 맑으신 안색을 오래도록 뵙지 못하고 멀리서 우러르기만 합니다.
마음이 다하여도 남음이 있으니 말을 할 적마다 눈시울만 붉어집니다. 오직 소식만을 그리다가 이때에야 적셔 주심을 받았습니다. 엎드려 원하오니,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다시 삼가 하교(下敎)를 받들겠습니다.
늘 은혜로운 말씀을 받들게 되는지라, 참으로 보살펴 주심이 깊습니다. 영(映)이 참으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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