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20권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4. 법의편 ③
20) 상대법송표(上大法頌表:대법송을 올리는 표) 황태자 강(綱)
신 강이 아룁니다.
신이 듣자오니, 지극한 이치가 융성하여 덕음(德音)이 울리고, 공을 이룸이 가득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퍼진다고 합니다. 어찌 여기에 비길 바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신령한 참새가 상서로운 나무에 간혹 머무르는 것처럼 일은 구획한 가운데에 담기고 경사로움은 한 가지 사물에서 밝혀집니다. 마치 손이 춤추고 발이 구르는 듯이 하여 그 법식(法式)을 전하여 왔습니다. 하물며 도(道)는 백비(百非)에서 나오고 뜻은 3대(代)보다 높으니, 어찌 붓을 놓고 말을 숨겨 영가(詠歌)를 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천상천하에 묘한 깨달음의 이치가 홀로 원만하시고, 삼천대천세계에 무연(無緣)의 자비를 널리 드리우시니, 지혜의 배가 끊어짐이 없고 법(法)의 권세가 끝이 없습니다. 그 몸이 지존(至尊)의 자리에 이르러 지극한 이치를 내리시니, 단비에 젖되 편중되지 않아 마음의 밭은 윤택함을 받습니다. 이에 구위(九圍)가 함께 잠기어 모두 돌아갈 끝을 알아서 만국이 일장춘몽임을 하루아침에 모두 깨달았으니, 이는 부처님 법 가운데
훌륭한 일이면서 나라의 지극한 아름다움입니다.
상고시대(上古時代)를 둘러봐도 이와 같이 성대한 적이 없었으니, 송가를 짓는 것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삼가 「대법송(大法頌)」 한 수를 지어 올리지만, 조비(曹丕)1) 종정(從征)의 부(賦)와 유탄(劉坦)2) 유시(遊侍)의 이야기에 짝하지 못하니, 엎드려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삼가 장조(狀詔)를 올리고 빼어난 보배를 모아서 표를 받들고 송을 받들어 이같이 아룁니다.
신 강이 삼가 아룁니다.
황제가 태자의 표주문을 살피고서 아울러 지어 올린 「대법송」의 글과 뜻이 모두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이를 읽으며 즐거워하였다.
- 「대법송(大法頌)」과 서문
황제께서 고요한 법신(法身)으로 본원을 저버리지 않고 위신력을 드러내어 이 땅에 강림하셨다. 용안(龍顔)ㆍ일각(日角)ㆍ삼루(參漏)ㆍ중동(重瞳)ㆍ형표(衡表)ㆍ연주(連珠)ㆍ문위(文爲)ㆍ옥두(玉斗)3)의 특이함을 갖추었다. 납록(納麓)4)으로부터 기틀을 열어 천지의 덕이 이미 펼쳐지고, 제후를 봉하여 그 자취를 열었으니, 일월의 밝음이 예전보다 밝아졌다.
백규(百揆)의 질서는 순임금에 의해서, 구하(九河)의 소통은 우임금에 의해서 균등히 펴졌으니, 오히려 은(殷)나라를 섬기는 예를 넓히면서 또한 재전(在田)5)의 법도를 굴복시켰다. 오묘(五昴)6)가 아침에 날아와서 적문(赤文)의 상서로움을 고하였다. 이레 동안 비가 내려 녹색(綠色)의 부록(符籙)을 받게 되자, 신기(神器)7)가 돌아갈 바가 있게 되어 정운(鼎運)8)이 여기에 모여들었다.
초문(焦門)에서 덕을 잃은 임금을 내치고,9) 유수(鮪水)에서 백모(白旄)로 군진(軍陣)을 일으킨10) 후에 황천(皇天)의 권명(睠命)을 받은 것에 연유해서 사해(四海)가 기쁘게 추대하였는데, 어찌 헛되이 패정(沛庭)에서 치우(蚩尤)를 제사지내고, 왕패(王覇)에서 하빙(河氷)을 의지하는 것을 빌리겠는가?
시절이 황폐해져 차서(次序)가 끊기고, 오래되어 도수(度數)마저 어긋나자, 오석(五石)11)을 골라 이를 보충했다. 지축이 기울어져서 쌓인 얼음이 갈라져 이에 아홉 개의 못[九藪]을 다스려 바로잡았다. 달 속의 두 마리 토끼와 해 안에 산다는 세 발 가진 까마귀는 왕업을 정함으로써
빛나게 되었다. 섭제(攝提)12)는 방위에 어긋나고 맹추(孟陬)13)는 벼리를 잃게 되어 청대(淸臺)14)를 두어 분별하였다. 이미 낡아버린 관면(冠冕)을 다시 덧대고, 부서진 행패(珩珮)를 다시 수선하며, 옥궤(玉几)에 기대어 천경(天鏡)을 쥐고서 선기(璿璣)를 밟은 채로 단정하게 공수하며, 암랑(巖廊)에 머물면서 깊이 침묵하였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른두 해째이다.
그러므로 천덕(天德)이 위에서 하나가 되고 지수(地數)가 아래에서 둘이 되자, 다시 삼진(參辰)15)을 밝게 하여 해와 달이 바뀌지 않고 두 개의 빛은 합벽(合璧)과 같고 오정(五精)은 연주(連珠)와 같았다. 종사(宗祀)에 연향하여 하늘에 짝하고, 교사(郊祀)에 치성드리며 산택(山澤)에 예를 올렸다. 오사(五祀)를 경건하게 행하니 그 공덕이 백신(百神)에게까지 드리워졌다.
하천(河川)과 오악(五岳)마다 상서로움이 드러나고 바람과 연기마다 길조가 내렸으니 청운은 음률을 구하고16) 황기(黃氣)가 피어오르는지라, 유산(隃瑜)의 위봉(威鳳)17)을 듣고, 대하(大夏)의 정균(貞筠)18)을 만들었다. 양관(陽管)은 봄에 화합하고 자종(雌鍾)은 율(律)에 응하며,19) 상림(上林)20)의 과역(課役)이 공정하여 성기지 않았고 상부(相府)의 점(占)은 어김이 없었다.
약수(若水)21)에서 육영(六英)22)을 연주하고 함지(咸池)를 동정(洞庭)으로 펴서 꿩23)을 잡아 화천(和天)의 음악을 움직이며 화(華)를 세워서 세속을 편하게 하는 음악을 폈다. 협율(協律)로는 조화롭게 차서(次序)를 잇고, 전악(典樂)으로는 조화로운 절도(節度)를 다했으니, 시서(詩書)가 이에 마련되고 상표(緗縹)가 이에 갖추어졌다. 바퀴를 부들로 감싸서[蒲輪]24) 복생(伏生)의 송(誦)을 받고 과두(科斗)로써 노택(魯宅)의 글25)을 천거하며 증율(蒸栗)26)과 살청(殺靑),27) 옥첩(玉牒)과 석기(石記)로 가득 채우고 안을 넓혀 기린(麒麟)을 빛나게 하였다.
대(臺)를 두어 질(秩)을 명하며, 하(河)를 본받고 악(嶽)에 의지하여 직분(職分)을 이룩하고 유사(有司)를 세우며, 구름과 상서로운 불, 그리고 높은 산을 함께 예복에 쭉 이어 그리니 그 색은 문휘(文翬)보다 고왔고 문장은 직조(織鳥)보다 아름다웠다.
간언하는 북을 높이 달아놓고 비천한 사람들의 말조차 버리지 않았다. 폐석(肺石)28)으로 그 원한을 풀어 주면서 비방을 교판(橋板)에 쓰게 하여 초명(草名)이 아첨하는 사람을 가리키면 그 사람들을 바로 조정에서 물리쳤다. 금수처럼 칭하면서 죄를 범하거나 간사한 사람들을 내어 쫓았다. 이로써 용이 날고 봉황이 모이며 하천은 고요하고 바다는 평탄해졌다.
이슬 내리는 것이 마치 꿀물 같았고 샘물 솟는 것이 마치 예천(禮泉) 같았으니, 계수나무 장작을 자르지 않더라도 단증(丹甑)이 저절로 익었으며, 옥역(玉睪)을 끌지 않더라도
은옹(銀甕)이 이로써 가득 찼다. 강물의 빛은 막이 쳐져 있는 듯하였으며 나무의 그림자는 수레 같았다. 향기가 사방에 퍼지고 오색으로 아롱졌으니, 신명(神明)이 비호하고 상서로운 징조가 널렸다. 금린(金鱗)과 철면(鐵面)이 벽노(碧砮)의 보배를 받치고, 바다를 가르고 산을 오르며 백환(白環)의 사신을 보내왔으니, 해를 싣고 북두(北斗)를 실은 채 왕에게로 오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평하고 태몽(太蒙)하여 생각을 굽히지 않음이 없었다.
방숙(方叔)29)과 소호(邵虎)30)와 같은 신하와 균비(均鼙)와 응고(應鼓)와 같은 장수가 용호(龍虎)의 비도(祕韜)를 잡고 주현(朱玄)의 이략(異略)을 거머쥐며, 묘당(廟堂)의 위에서 넉넉함을 받아 그 위엄은 변방의 아래에까지 떨쳤다. 옥문(玉門)을 나서며 직지(直指)하여 금성(金城)을 건너고자 책략을 써서, 요사스러운 잡종들을 소탕하고 도탄(塗炭)에 빠진 중원(中原)을 바로잡았다. 북쪽으로 지맥(地脈)에 임하고 서쪽으로는 천거(天渠)를 넘었으니, 곤이(昆夷)가 환란을 그치고 숙사(夙沙)가 저절로 굴복하였다.
견융(犬戎)의 사슴을 잡고 밀수(密須)31)의 북을 달았으니, 고가(槀街)에는 갓끈을 매는 노족(虜族)이 있고, 약수(渃水)에서 항복받는 우두머리를 보았는데, 사방에서 흙먼지가 일지 않고 육합(六合)이 함께 관통되었으니 황덕(皇德)이 참으로 융성하구나. 마침내 태평의 교화가 끝없이 펼쳐지고 천자(天子)가 안으로 무생(無生)의 지극한 지혜를 포용하며, 바깥으로는 건도(乾道)를 체득한 넓은 자취에 응하니, 장차 권교(權敎)를 고쳐 실도(實道)를 드러내고자 하여 방편의 설법을 내치고 화성(化城)32)의 미혹함을 인도하였다.
이에 단정히 임금의 자리에 앉아 대궐에 거처하면서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눈감은 채 화서(華胥)33)를 꿈꾸고, 고야(姑射)34)를 기뻐하며, 현호(玄扈)35)에서 재궁(齋宮)의 복장을 입은 채, 오로지 분양(汾陽)36)에서 지극한 다스림을 그리면서, 건상(褰裳)보다 구정(九鼎:천자의 지위)을 가볍게 여기고 만승의 천자 보기를 헌신짝을 버리는 듯이 하였다면, 이것은 대체로 지극히 공정한 핵심적인 도리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 출세간(出世間)에 이른 것은 아니다.
금옥(金玉)을 냇가 골짜기에 숨기고 금슬(琴瑟)을 큰 구덩이 속에 버리며, 비천한 몸과 나물밥과 초가집과 흙 계단, 수레에 붉은 칠을 하되 화려하게 하지 않고 사슴의 털옷을 입되 장식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체로 검박함으로써 만물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 출세간(出世間)의 단계는 아니다.
또 그물을 풀어
짐승을 놓아주며, 우물을 파고 썩은 고기를 가리면서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우는[泣辜] 은택을 일으켜 더위에 부채를 부치는 자비를 행하며 남에게 양보하는 것도 마음속으로 모자라듯 하면서, 마치 자신이 구덩이에 빠진 듯이 여기는[納隍] 마음을 자나깨나 잊지 않았으니, 이는 대체로 백성에게 인자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 출세간(出世間)의 단계는 아니다.
자부(紫府), 청구(靑丘), 형산(陘山), 장수(漳水)37)에서 하상(河上)38)의 도문(道文)을 돈독히 하고, 기백(岐伯)39)의 장구(章句)를 기뻐하면서, 감천(甘泉)40)에다 태일(太一)의 단(壇)을 열고 숭산(嵩山)에다 봉고(奉高)의 읍(邑)을 두고서, 갈석산(碣石山)에 선문(羨門)의 서(誓)를 새기고41) 불기산(不期山)에 교문(交門)의 노래를 지은 것42)은 대체로 단지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그 일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독실하게 따지더라도 넓혀지지 못하니, 비록 농종(巃嵸)의 선(禪)43)을 얻더라도 끝내 장생(長生)의 어려움에 떨어진다. 모두가 헛되이 3청(淸)44)의 즐거움을 밟더라도 8도(倒)45)의 경계를 떨치지 못하는데, 어떻게 지혜의 횃불로 생사(生死)의 무명(無明)을 비추어 5음(陰)의 덩어리를 벗어나 6도(度)의 배를 타고 중덕(衆德)의 바다에 떠서 불생(不生)의 언덕을 밟는 것과 같겠는가?”
마침내 국계(國界)를 장엄하게 하고 도량을 건립하면서, 널리 이로움을 베풀고 불사(佛事)를 천양하며, 저 중생들을 거느리고 함께 인수(仁壽)를 건너, 이같이 얽매인 이들을 인도하여 대승(大乘)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구유(九有)가 그 마음을 기울이고 시방의 풀들이 모두 쏠려 건너가 의지하듯이 하여 모두 귀의하였으니 빛나기가 마치 아침 해가 온갖 꽃을 피우듯이 하였고, 단비가 퍼부어지는 것이 마치 농부가 고우(膏雨)를 기다리듯 하였다. 공덕으로 덮어줌이 이미 원만한데다 지혜의 문을 반드시 갖추었다.
그럼으로써, 『반야경』을 방등(方等)의 제법(諸法)으로 삼아 우뚝 솟되 그 끝을 다하지 못하고, 깊이 파고들되 바닥이 없었다. 온갖 선을 무상(無相)으로 거두고 구해(九垓)를 시작으로 끝이 없었다. 비유하건대 내[川]가 그 흐름을 달리하더라도 큰 바다에 들어가서 맛을 같이 하는 것과 같고, 온갖 꽃이 어지럽게 피었어도 수미산(須彌山)에 이르러 한 가지 빛깔인 것과 같다. 공(空)하고 공(空)하여 집착하지 않고 여여(如如)하게 모두 만나니 합쳐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고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었다. 종각(種覺)이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진실로 부처의 어머니에게서 비롯하니, 온갖 경전이 이에 다다르지 못하기에 이를 경전의 왕이라 부른다.
이리하여 한 말씀의 법우(法雨)를 떨치고 5안(眼)을 드러내어 중혼(重昏)을 인도하려고 하여, 해는 소양(昭陽)46)에 있고 별자리는 현호(玄枵)47)에 있으며 협종(夾鍾)48)이 중춘(仲春)에 응하고 갑신(甲申)이 길일에 있으니, 장차 동태사(同泰寺)로 행차하여 크게 법륜(法輪)을 굴렸다.
이 절은 우리 황제가 이룩하신 것으로 대리서(大理署)49)를 개수하여 가람의 자리를 이루었다. 철승(鐵繩)을 변화시켜 금소(金沼)를 만들고 철망(鐵網)을 바꾸어 향성(香城)을 삼았으니, 뜨거운 사막에 신묘한 빛을 비추고 타오르는 불속에서도 시원함을 일으켰다.
천 개의 두공이 높고 우뚝하며 백 개의 두공은 하늘처럼 둥그렇고 붉은 벽과 검은 대들보와 화려한 서까래와 옥으로 만든 디딤돌, 세 개의 계단은 나란히 이어지고 사방에 물이 두루 흐른다. 옥익(玉翼)을 위에 놓아 하늘을 쓰다듬고 은영(銀楹)을 날려 빛을 가렸다. 무지개를 끌어다 구불구불하게 내렸고 처마에 등나무를 둘렸으며 연꽃을 꺾어다 우물에 뒤집어 놓고 모자(冒字)의 형태로 창문을 내었다. 붉디붉은 보탑(寶塔)은 이미 법화(法華)의 자리와 같고, 우뚝한 장표(長表)는 의요(意樂)50)의 나라와 함께 한다.
아래로 백은(白銀)의 도랑을 파고 그 가장자리에 금박의 벽돌이 빛났다. 솟을대문이 훤히 열리고 동마(銅馬)의 장식에 연유하지 않고, 보전(寶殿)이 노을 같이 열렸으나 봉황(鳳凰)의 서상(瑞相)에 의지하지 않았다. 금륜(金輪)이 해와 같이 빛나고 임치(臨淄)51)의 땅 속으로 묘하게 임하니, 층층이 솟구친 누각에 시렁을 얹으며 구불구불 비스듬히 하늘로 솟구친다.
커다란 집은 서리를 머금고 온실(溫室)에는 따뜻한 기운이 훈훈하고, 조각한 누각의 안에는 귀뚜라미가 다니며 울어대니, 출입문 안으로 뱁새가 돌아와 기운차게 울어댄다. 당호(幢號)를 ‘마니(摩尼)’라고 하며 깃대에는 금루(金縷)가 매여 있다. 밑받침의 직경이 10장, 방울의 둘레는 4곡(斛)으로, 칠보의 가지가 엇갈려 늘어졌으니, 여덟 가지 공덕의 맑은 물이 흐르는데, 땅 속의 지초(芝草)는 달빛을 기다리며 하늘 꽃은 바람에 나부낀다. 법고(法鼓)가 밤에 울리니 그 소리 가운데 법을 듣고, 옥 같은 가지가 새벽에 흔들리니 잎사귀마다 소리를 이루어, 덕양(德陽)의 궁전을 묘하게 하며 미앙(未央)의 궁궐을 아름답게 한다.
그러므로 동란(銅欄)은 3장이고 우물 난간을 추가하여 옥루(玉樓)가 열두 곳인데,
멀리 신선을 부끄러워하니, 비유하자면 저와 같은 청량대(淸涼臺)는 난대(蘭臺)의 사찰과 흡사하다. 도리(忉利)52)는 조원(照園)의 동쪽에 있고, 제석(帝釋)은 천성(天城)의 북쪽에 있다. 그러므로 신임계갑(辛壬癸甲)53)하며 새의 울음소리가 무성하니 참으로 이를 무어라 형용할 수 없다. 쟁쟁하게 끊이지 않고 소리내며 큰 소리로 서로 섞이니 막연하여 뭐라 이름할 수도 없다.
마침내 옥과 같은 해는 정기(精氣)를 드날리고 상서로운 구름은 빛깔마저 고와져서 훈풍이 서서히 불어오며 연로(淵露)가 엷게 깔렸다. 뒤로는 위엄 있게 진을 치고 앞으로는 경계하는 열을 두었으니, 장수의 진영(陣營)이 별처럼 연이었고 커다란 종소리가 메아리를 토하였다. 천궁(天宮)의 법가(法駕)를 움직여 천로(天路)의 위신을 떨쳤으니, 백령(百靈)이 부축하고 천승(千乘)이 벽력같이 치달았다. 육규(六虯)54)가 수레를 같이 하고 칠두(七斗:북두칠성)가 휘황함을 드리우며 구름은 드물게 허공을 타고 호위하는 수레를 펼쳐서 빛을 넘어 그림자를 밟으니 태양이 하늘을 덮고 배회하였다. 금빛 덮개와 옥으로 장식된 수레 및 표범 가죽의 옷과 악어 가죽의 북, 밤색 말과 검은 말은 윤기가 흐르고 천마(天馬)는 용맹스럽고, 녹색의 활과 노란 쇠뇌는 코끼리의 무늬와 물고기 무늬가 새겨 있었다. 차비(佽飛)55)가 말의 고삐를 조절하여 교룡 베는 칼56)을 수고로워 하지 않는데, 호분(虎賁)57)이 날개를 숨기고 어찌 시끄럽게 우는 까마귀를 쏘는 것에 의탁하겠는가?
고요하면서도 빛나고 번쩍거리면서도 조용하니, 대통(大通)의 문을 나서서, 천자(天子)가 조련(彫輦)의 존귀함에서 내려와 접족(接足)의 예(禮)를 행하며, 금산(金山)58)에 정배하고 월면(月面)59)에 귀의하였다. 만세의 소리를 듣는 것 같이 육변(六變)의 움직임을 굽어보듯 하였다.
마침내 여래(如來)의 옷을 부여잡고 사자좌에 오르니 분분한 백 가지 사려를 고르게 하며, 삼청(三請)의 은근함을 가엾이 여겨 참다운 지혜의 깊은 줄기를 열고, 피안을 건너는 넓은 가르침을 밝혔다. 2제(諦)로 공(空)과 유(有)의 나루를 드러내고, 2지(智)로 권(權)과 실(實)의 바닥을 쌓아 놓았으니, 대승으로 그 장애됨을 뚫고 도심(道心)으로 돌아갈 기슭을 찾아 인과(因果)로 거두되, 운전하지 않고도 이같이 행하였다. 진도(眞道)와 세속(世俗)은 구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이곳으로 와서 두 가지 법을 쓰지 않고 중도(中道)에 회통하였다.
부처님의 깊은 바다를 다하여 부처님의 법장(法藏)으로 들어가서, 수투(修妬)60)의 묘한 경전을 통달하고
용궁의 비법(祕法)을 연구하며, 사바(娑婆)의 깊은 이치를 선양하고 중성(衆聖)의 미언(微言)을 천양하였으니, 정법(正法)의 물이 이미 적셔지자 삿된 비난이 저절로 수그러졌다. 지혜의 태양이 널리 비추자 삼독의 서리가 사라졌으니 4생(生)에 흑암을 없애고 삼계(三界)에 무명을 거두었다. 우뚝하기가 수미산의 큰 바다에 있듯이 하여 그 훌륭하기가 말하자면 뭇 별이 둥근 달을 에워싸듯 하였다.
이때 천룡팔부(天龍八部)61)가 허공계(虛空界)를 가득 메우고 옷을 깔아 자리를 이루며 꽃을 무릎이 파묻히도록 뿌렸다. 삼천대천세계가 그 예토(穢土)의 바탕을 변화시키고 화택(火宅)에는 괴로움을 없앤다는 기약이 있으며, 악도(惡道)는 휴식을 얻고 니리(泥犁:지옥)는 널리 그쳤다.
수많은 도인(道人)과 득도(得道)한 명승(名僧)들이 즐겁게 설법하였다. 변재(辯才)하듯이 그 지혜가 신자(身子)62)와 같아서 청목(靑目)과 흑치(黑齒)63)를 뛰어넘어, 저와 같은 광슬(廣膝)과 적자(赤髭)64)를 드높였다. 불법을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전한다[瀉甁]는 생각에 부합되고, 물들여진 고운 모포를 적시듯이 하였으니 마치 금을 다시 다듬고 옥을 다시 쪼듯이 하는지라, 예전에 듣지 못한 것을 듣고 얻지 못한 것을 얻었기에, 귀를 기울이며 낯빛마저 변하여 이로움을 청하되 그치지 않았다.
문무백관이 나란히 줄지어 관자와 신발이 연이었고, 풍초(豊貂)가 휘황하며 화수(華綬)가 빛났으니, 사위성(舍衛城)에서 열렸던 대림(大林:죽림정사)의 강좌 같다고 말하여도 지나치지 않았다. 장차 하나의 불성(佛性)이 자인(子因)을 만나 이로써 함께 나오니, 낱낱의 불국토(佛國土)가 모두 두 가지를 내치고 세 가지를 버렸다. 남풍(南風)을 노래하며 황로(黃老)를 기리고, 벽옹(辟雍)65)에 임하며 공씨(孔氏)의 집에서 강의를 하는 것에 비기더라도 어찌 자잘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3월 갑진(甲辰)에 이르러 법석(法席)이 원만해지자, 여래께서 대광명을 놓으셔서 드물게 있었던 기적을 드러내었다. 웅장하게 빛을 놓으시니 구슬 같은 불길로도 이에 짝하지 못하고, 뚜렷함이 위에서 드리우니 붉은빛과 자줏빛이 다투어 빛을 내며, 영하(榮河)66)가 그 상서로움과 윤택함을 부끄러이 하고, 분음(汾陰)이 그 휘황한 그림자를 누추하게 여겼다. 마침내 입전(入殿)의 자운(紫雲)을 가렸고 홍문(鴻門)67)의 묘기(妙氣)를 빼앗았다.
예전에 『법화경』을 처음 설하시자 백호(白毫)에서 널리 빛을 내셨으며, 『반야경』을 선양하시자 몸이 젖혀지도록
웃으셨다. 왕사성(王舍城)의 서상(瑞相)을 천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어찌 성주(聖主)가 여러 불신(佛身)과 같이하여 이같이 묘한 모양을 내리고 여러 불력(佛力)과 함께하여 마치 부계(符契)와 같이 하지 않는가? 차라리 연묵(淵黙)의 겸허(謙虛)를 거머쥐고 지성을 늠름하게 펼쳤으니, 도모하되 주저하지 않고 미루되 머물지 않으면서, 백성의 심정으로 마음을 삼되 자신(自身)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무거운 짐을 대신 지되 피곤한 줄을 모르고 4생(生)을 섭수하였다.
황태자 신 강(綱)이 동상(東廂)에서 그 음식을 맛보며 몸소 대법(大法)을 이었으니, 서순(西巡)하고 동수(東狩)하며 그 흥성을 노래한다. 시산(柴山)에서 산천에 제사지내며 노래를 읊조려 이같이 지었으니, 하물며 관대를 벗고 감로를 받으며 몸을 굽혀 도(道)를 새기는 것이겠는가?
이에 감히 그 성대한 공덕의 모습을 기술하고자 다음과 같이 송가를 짓는다.
옥첩(玉牒)은 멀고 아득하여
청사(靑史)에 길이 이어지네.
대도(大道)는 오승(五勝)68)을 따르고
기풍은 백왕(百王)보다 뛰어나다.
상구(商丘)69)에서 옥[瑱]으로 명하고
희수(姬水)에서 옥[璜]으로 열며
성인이 나와야 강물이 맑아지고70)
황제를 기대해야 바다가 조용해지네.
하늘을 본받아 땅을 일깨우니
그 공덕은 양나라로 돌려지네.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팔짱 낀 채 남면(南面)하니
그 극기(克己) 준엄한 암벽 같구나.
교의(敎義)를 새롭게 만들고
옷을 지어 따뜻하게 덮어 주며
구소(九韶)71)는 울림을 바꾸고
육악(六樂)72)도 다시 퍼졌다.
의봉(儀鳳)은 은은히 울리는데
돌 치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널리 벽수(璧水)를 다스리고
교상(膠庠)73)을 훤히 열어
가볍고 빠른 수레로 인재를 초빙하니
정기(旌旗)가 드높이 휘날린다.
난대(蘭臺)74)가 가득 차서
광내(廣內)에 이것을 보관하였다.
향초와 난의 향기 퍼지고
녹자(綠字)를 문장에 새긴다.
문치(文治)의 공덕을 입으며
무치(武治)의 자취도 빛난다.
제호를 조각하여 가슴에 새기고
도교의 책[紫書]을 말하며 서책을 나누었다.
남가(南街)에서 예물을 청하고
북궐(北闕)에는 왕들이 부복한다.
정기(旌旗)가 휘날리고 서한이 모여드니
자취를 새기고 어지러운 상황을 글로 쓴다.
은거(銀車)로 끌어 따라가고
흑절(黑節)75)로 외국의 사신들을 불러 모으며
문치(文治)가 바다 끝까지 균등하니
교화는 용향(龍鄕)까지 널리 퍼지네.
서쪽으로 월굴(月窟)76)을 넘고
동쪽으로 부상(扶桑)까지 다다른다.
초라한 궁궐이 우임금에 비견되고77)
그물을 풀어주는 일은 탕임금에 견준다네.
구실(衢室)에서 어긋남도 용납하고
명대(明臺)에서는 어진 이들을 끌어들이네.
어진 정치에 게을리 하지 않으며
간언의 북소리 쟁쟁하다네.
만 가지 상서로움이 복을 모으고
백신(百神)이 상서로움 알리는구나.
흑단(黑丹)은 윤택함을 토해내고
붉은 화초 향기를 피우누나.
구슬을 껴안고 그 모습 비추니
별빛조차 광채를 머금었다.
금액(金液)의 연못 아래 학이 노닐고
높다란 오동나무에는 봉황이 깃들며
불곰이 새벽마다 모여 있고
흰 꿩이 아침마다 날아드네.
백우(伯友)78)에게 옥을 보이고
서왕모(西王母)에게 도를 물으며
다닐 적마다 건목(建木)을 지나치고
지날 적마다 성당(盛唐)을 지목하네.
끝끝내 운수가 열리지 않았으니
어찌 세상의 다리라 하겠는가?
나에게 걸림이 없어야
다 함께 언제나 원만하다.
옥란(玉鑾)은 천천히 흔들리는데
금륜(金輪)은 새벽에 장엄하구나.
자주색 규룡은 날개를 드리우고
검푸른 천리마 내쳐 달리니
용맹스런 병사 비켜서고
신룡(神龍)이 갈 길을 열어주네.
옥마는 뒤섞이고
천랑(天狼)79)이 눈부시게 빛나네.
검은 깃발에 햇살 비추이고
취봉(翠鳳)80)에 양기(陽氣)가 서리는구나.
앞에는 드높이 윤기가 어리고
뒤에는 육지로 연결된 다리 놓였네.
바람이 옮겨 가고 천둥이 소멸하니
들고 남이 휘황할지라.
보좌(寶座)가 우뚝하고
좋은 향기 싱그러우며
법을 배우는 학도(學徒)가
구름같이 뜰을 메우네.
자비의 구름이 은택을 드리워
정법의 단비에 시원해지네.
3밀(密)은 끝이 없고
4변(辨)마저 헤아리기 어렵구나.
저 해보(海寶)와 같고
비유컨대 저 산왕(山王) 같을지라.
지혜의 흐름을 누리고
약초 나무 새순이 돋아나네.
태양 같은 부처님 세상에 나오시어
다 같이 미혹의 서리를 없애고
제석천(帝釋天)이 노래 부르니
유계(幽界)의 귀신조차 찬양한다네.
하늘 꽃이 다투어 내리니
천상의 거문고 절로 울리고
산은 고운 빛 물들어
휘황한 빛살이 저문다.
연기 아닌 기운이 서리자
연뿌리는 꽃을 피우고
삼계(三界)에 널리 은택을 내리니
은혜가 팔방(八方)에 고루하다네.
아득하고도 당당하구나.
배가 되어 노를 저으니
이에 신(臣)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21) 상황태자현포강송계(上皇太子玄圃講頌啓:황태자의 현포강송계를 올리는 계)와 답(答)
- 상황태자현포강송계 서중랑장(西中郞將) 진안왕(晋安王) 강(綱)
강(綱)이 삼가 아룁니다.
순임금의 소(韶)가 처음 불릴 때에 신령스러운 자태로 저절로 춤추었고 율(律)이 연주되어 베풀어지자마자 교화된 마음이 다투어 안정되었습니다. 새처럼 가볍고 잎사귀같이 짧더라도 오히려 빛나는 덕음(德音)을 알아차렸으며, 선(善)에 목욕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니 어찌 손뼉치며 기뻐함을 잊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그 바탕은 높고 심원하며 도를 춘금(春禁)81)으로 기르니, 학문의 농장[文圃]에 울타리를 치고 이치의 강에서 물고기를 잡으십니다. 뜻을 용궁(龍宮)으로 쏟고 마음을 보인(寶印)으로 닦으니, 생집(生什)의 재주를 구름처럼 모으고
아울러 응왕(應王)82)의 짝에 명하여 기틀을 찾고 이치를 분석하면서, 기뻐하며 쉬지 않으니, 그 붉은 꽃과 빛나는 달이라도 어찌 이것을 잊어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소장(素藏)의 만절(晩節)과 현영(玄英:겨울)의 첫 기운에 서리 맞은 대나무는 음기를 머금고 바람 맞은 오동나무는 잎사귀가 흩어지니, 온화한 바른 이론이 신묘한 마음에 부합됩니다.
강(綱) 제가 다행스럽게도 태어난 것이 이 같은 태평성대인지라, 발자취를 뒤따르며 입은 은혜를 받들어 든든한 기반을 갖추었으나, 달라붙은 파리는 떼지 못하고 술 취한 코끼리는 묶지 못하는지라, 보배를 잊어버리고 옷에 취하며 구슬을 가라앉히고 그 이마만 두드리다가, 이같이 훌륭한 선법(善法)을 듣고서 어떻게 노래하는 것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현포원강송(玄圃園講頌)」 한 수를 지어 올리니, 문채는 화려함을 부끄러워하고 생각은 조영(彫英)에 미치지 못하면서 헛되이 기뻐하는 마음만을 간직하니, 끝내 청풍(淸風)의 아름다움에 부끄럽습니다.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이와 같이 아뢰니, 부끄러워 얼굴 붉히며 식은땀만 흘러내립니다. 삼가 올립니다.
- 답황현포원강송계령(答玄圃園講頌啓令:현포원강송계에 대한 답령) 양 소명태자
편지에 동봉한 강송(講頌)을 받아 보았는데, 시종일관 볼 만한 것이 참으로 빼어난 가작(佳作)을 이루었다. 말이 그윽하고 글이 빼어나면서도 따뜻하고 우아하니, 어찌 그 마음만을 꾸몄다 하겠는가? 참으로 탁월하기가 일품이다. 몇 번이고 읽어 보니 병도 저절로 나은 듯싶다.
쌍인(雙因)과 8변(辯)에 이르러 법석(法席)의 지극함이 가득하고, 은초(銀草)와 금운(金雲)은 물색(物色)의 아름다움을 얻었으니, 내가 이 같은 뜻에 뿌리박아 참으로 기쁘다. 면회에 늦었으니, 여기서 말을 다하지 못한다.
통(統)이 적는다.
- 현포원강송(玄圃園講頌)과 서문83) 서중랑장 진안왕
생각해 보건대, 보산(寶山)이 지엄하기에 둔한 말의 다리는 세어보지 못하니, 지혜의 바다는 멀리서부터 물결이 이는데 가벼운 쪽배를 어찌 띄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래알을 살펴서 그 오묘함을 어지럽히고, 절구공이를 짝하더라도 그 형체에 미혹하니, 백대 동안 다 같이 암둔하였는데, 천년간 뉘라서 이것을 열겠는가?
황상이 금륜(金輪)에 의탁하고 옥경(玉鏡)에 고루 부합하여 고(苦)의 습(習)을 불쌍히 여겨 자비의 등불을 이어 비췄다. 학수(鶴樹)에 다시 봄이 돌아오고
용천(龍泉)이 다시 밝아졌으니, 현수(玄水)에 상서로움이 어리고 단릉(丹陵)84)에는 번개가 휘황하였다. 도도한 빛은 불을 감싸고 덕은 운명(雲名)을 덮으며 지혜의 광명이 해가 비추는 것과 같고, 인욕의 힘이 명월주(明月珠)처럼 빛난다.
하늘은 이루고 땅은 평탄한데, 저 멀리 엄숙하고 멀리 돈독해서 그 은택(恩澤)의 흐름이 가없는지라 교화를 행하여 바깥을 굴복시키니, 창하(滄河)는 거울처럼 잔잔하고 벽해(碧海)는 바람이 순조로워 이진(二辰)에 상서로운 기운이 어리고 오절(五節)에 길한 연무가 범람한다. 물고기와 새들은 그물을 풀어버리는 은택을 입고 백성들이 인수(仁壽)의 자비에 목욕하니, 이로써 바른 교화가 그윽하게 통하고 법륜이 늘 굴러간다. 공(空)한 경계의 허(虛)를 전하는 것과 유사하니 마치 현하(懸河)가 윤택하게 흐르는 듯하다.
저군(儲君)의 덕은 신묘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 몸은 춘경(春瓊)보다 투명하며 음식은 한가한 새벽녘에 먹고 마음은 법건(法犍)85)에서 노닐었다. 음악을 연주하고 글을 쓴 것은 수놓은 비단처럼 아름답고 청담(淸談)의 논변도 옥이 빛나는 듯하였다. 하계(夏啓)86)로서도 그 덕을 민망하게 여기며, 주송(周頌)으로도 풍화하기에 부끄러움이 있다.
이에 현포원에 마음을 다스린 뛰어난 이들이 깃들어, 진서(陳徐)의 선비들에게 아울러 명하여 하루 종일 담소하며 도를 강의하다가 아침에야 그친다. 손님은 소리 없이 따르고 향기는 기운에 동하는데, 7변(辯)이 폭포같이 흐르고 쌍인(雙因)이 모두 열린다. 정(情)은 피안에서 노닐며 이치를 기원(祈園)에 새기니, 영탑(靈塔)이 솟아오르고 하늘 꽃이 잠깐 사이에 떨어진다. 때가 되어 중추절에 거두어들이고 아름다운 별빛이 새벽까지 빛나니, 그 기운이 금비(金扉)보다 차갑고 서리가 옥관(玉琯)에 어린다.
이 현포원은 그윽하고 울창하여 유독 아름다운 훌륭한 땅이다. 붉은 당실(堂室)과 백옥 같은 디딤돌에다 푸른 물과 은모래가 갖춰져 있으니, 새는 목을 꼬며 옥소리를 내고 나무에는 묘한 잎사귀가 울창하기만 하다. 금액(金液) 같은 물이 흘러내리며 봉래산(蓬萊山)의 모양을 그려내는데, 바람은 월전(月殿)을 낳고 해는 괴연(槐煙)을 비추고 있다.
강(綱)이 특별히 총애하심을 힘입어 미진수겁(微塵數劫)이 다하도록 받들어 모실 것이니, 보배누각에 들어가 가만히 묘한 간책(簡策)을 살피면서, 물오리가 물을 만난 듯이 기뻐할 것이다. 그 신령함을 한층 밝히고자, 이에 감히 다음과 같이 송가(頌歌)을 읊조린다.
[1]
황덕(皇德)의 의표(儀表)가 햇빛처럼 임하시며
제업(帝業)의 도리(道理)가 구름처럼 번창하네.
교화가 융성하여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팔짱을 끼니
유덕함이 크고도 아름답다.
기(機)는 8해(解)를 태우고
도리가 3분(墳)을 비추니
위대하고 위대한지라
만대토록 이 한 분의 임금이시네.
[2]
해와 달이 밝고도 밝아서
금옥같이 윤택한 꽃을 피운다.
일곱 가지 맑음이 아름다우니
세 가지 어짊이 가상하다.
이 정법의 단비를 드리우니
널리 적셔서 싹을 틔우며
의로움의 물에 물결 일어
문화(文華)가 환히 비추인다.
[3]
꽃향기 가득한 동산에 구름이 성하여
천궁(天宮)은 보배와 짝하고
이치를 따져 공명(空冥)을 논하며
그윽한 기틀로 대도를 깨우친다.
촘촘한 누각이 창공에 드리우니
이층의 전각은 아름답기만 하구나.
햇살은 금빛 구름에 비추이고
바람은 은빛 풀잎에 깃드네.
[4]
어깨를 나란히 하여 뒤따르며
손으로 보배 구슬 거머쥐고
손으로 쳐들어 사방을 비추니
구구(九衢)가 환해진다.
고개 숙여 모자람을 살피니
무리지어 옥구슬을 받드네.
마침내 연석(燕石)과 같고
다시 제우(齊竽)와 같구나.
22) 위량법사제열반경소서(爲亮法師製涅槃經疏序:양법사를 위해 열반 경소의 서를 짓다) 양 무제(武帝)
말이 아니고서야 말에 의탁할 것이 없으니, 말하더라도 말을 하는 폐단이 없으리라. 말이 폐가 된다면 말을 그쳐야 하는데, 말이 그쳐지면 여러 가지 견해가 다투어 일어난다.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께서 본원(本願)을 받들고 생을 의탁하시어 자비로운 힘을 나투어 응화(應化)하셨다. 문자를 여의고 가르침을 이룩하되, 심상(心相)을 잊고 도에 통하니 옥돌과 벽옥의 값을 달리하고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의 흐름을 가르고자 하셨기에, 육사외도(六師外道)를 제압하여 4도(倒)를 바로잡았고, 8사(邪)를 뒤집어 일미(一味)로 돌이키셨다.
세간의 지혜로 견주는 것마다 굴복시키고, 다른 사람의 입을 막아서 구슬 구하는 마음을 인도하며, 코끼리를 보는 눈을 열어서 불난 집에서 불에 타는 이들을 구하고, 험난한 바다에서 물에 빠진 이들을 건지셨다. 그러므로 법의 단비를 내려 말라붙은 씨앗을 다시 무성하게 하셨고, 지혜의 태양을 띄워 오랜 밤중을 밝히셨다.
가섭(迦葉)의 비분강개를 일으키고 진실하고 지극한 말씀을 토하였으니, 비록 다시 2시(施)87)는 앞과 같고 5대(大)88)는 뒤에서 펴더라도 서른네 가지 질문은 엇갈리고 변론은 다르니 방편으로 권장하여 이끄시고자 각각 뜻에 따라 대답하셨다.
경론의 요지를 거론하자면 두 갈래를 넘지 않으니, 불성(佛性)으로 그 본유(本有)의 근원을 여시고, 열반은 지극함으로 돌이키는 줄기를 밝히셨다.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고
기(起)도 아니고 작(作)도 아니니, 그 이치가 만 가지 선행(善行)보다 높고 그 일이 백비(百非)를 끊었다. 공공(空空)으로도 그 진제(眞際)를 헤아릴 수 없고 현현(玄玄)으로도 그 묘문(妙門)을 다할 수 없다. 스스로 그 덕이 평등함에 고루하여 마음이 무생(無生)에 합쳐지지 않고서야, 금장(金牆)의 옥실(玉室)에 어찌 쉽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23) 양간문제법보연벽서(梁簡文帝法寶聯壁序) 양 원제(元帝)
생각해 보건대, 천문(天文)을 살피는 것은 해와 달이 올곧고 아름답기 때문이며, 인문(人文)을 살피는 것은 조화가 밝게 빛나기 때문인데, 하물며 백옥(白玉) 같은 백호상(白毫相)이 밝게 비추어 하늘과 사람의 바깥을 뛰어넘고, 금첩(金牒)은 공해(空解)하여 문장의 바깥에서 생겨나는 것이겠는가? 비록 경지(境智)가 아득하여 언어가 여기서 끊어졌더라도, 이에 노래를 지어 간략하게 말할 수는 있으리라.
참으로 『서경』에서는 「탕고(湯誥)」를 언급하고89) 『열자』 「황제」편에서 꿈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였다. 예전에 왕기(王畿)를 박(亳)읍에 두었으나 지금은 제업(帝業)을 떨치어 공덕이 천하에 베풀어졌다. 내가 나온 유래가 어찌 요허(姚墟)ㆍ석유(石紐)ㆍ초성(譙城)ㆍ온현(溫縣)90)과 함께하며 어룡(御龍)91)이 하나라에 살고 당두(唐杜)가 주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그치겠는가?
황제가 옷을 늘어뜨리고 병풍을 등진 채로, 방위를 분별하고 위치를 바로 하여 천하의 수레와 서적이 함께 모이며, 남쪽으로는 교지(交趾)92)에 이르러 풍운이 적셔지고, 서쪽으로 유사(流砂)까지 실제로 전쟁이 그쳤다. 사람을 살리는 검(劍)을 잡고 음악이 펼쳐지고 다스림이 안정되어 포희(庖羲)의 거문고93)를 줄이고 16특승(特勝)94)을 서로 겸하여 은밀한 것을 알고 드러난 것을 알았다. 장차 28군상(群像)95)을 칭하여 비호(貔虎)와 같게 하였으니, 어찌 취옥(翠屋)에서의 노닒을 포용하여 이루고 석실의 만남을 널리 이룰 것을 기다리겠는가? 그러므로 그 마음을 종(宗)으로 삼는 자는 상(相)을 잊고 귀의하며 의지하는 자는 항상 즐거워한다.
예전에 전륜왕(轉輪王)이 법을 지키자, 남궁(南宮)에 금빛 용의 서상(瑞相)이 나타났고, 범천(梵天)이 도를 청하자 동조(東朝)에 보개(寶蓋)의 상서로움이 들었다. 선을 다하고 아름다움을 다하여 황대(皇代)에 홀로 드높았다.
예전에는 나가서 벼슬하고 들어와 집안을 지키며, 가을과 겨울철에는 문무를 추고 피리를 불었다[羽籥].96) 참으로 주나라 때는 어린 사람들을 찬미하여 단정한 선비의 자질을 갖추도록 하였다.
한나라 때에는 말학(末學)을 채우기 위해 의론을 잘 관통시키는 선비를 취하여 의지하였다. 대전(大傳)에서는 이것을 맹후(孟侯)라고 논했고, 소대(小戴)97)에서는 이것을 사업(司業)이라고 말했다. 산천(山川)의 진귀함은 교사(郊祀)의 봉영(奉迎)을 기다려야 알 수 있고, 천막에 가려진 뒷말은 개간하는 밭에 의지하여 징험을 구하였다. 지금을 예전의 일과 견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내가 부군(副君)으로서 업을 행한 것이 선니(宣尼:공자)를 넘어서니, 도는 서죽(筮竹)을 열어 만드는 것보다 높고, 소리는 희발(姬發)98)을 넘어서는데, 어찌 변란(卞蘭)의 송(頌)을 빌렸겠는가? 형산(衡山)과 화산(華山)의 가파름에 비하겠고 발해(渤澥)의 물결과도 같다. 충성을 드러내고 효도를 다하며 행을 닦고 도를 말하며 널리 베풀어 어짊을 숭상하면서, 움직임을 적게 하여 성취에 힘쓰니, 지혜로 춤추는 닭을 살펴보고 효(爻)로는 봉의(封蟻)를 나눈다.
처음 벼슬길에 오르매 시험을 보아 공을 밝혔으니, 그 덕이 삼보에 보태지고 위세가 구류(九流)에 행해졌다. 군사를 감독하여 호랑이처럼 용맹스럽게 자리잡고 큰 칼을 부리며 선면(蟬冕)99)을 쓴 채 위로는 경(卿)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고통 받는 이들을 구제하니 만물이 평등하게 고루 퍼지는 은혜를 우러르게 되었다. 기수(沂水)와 대산(岱山)과 공산(邛山)과 민산(岷山)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이 후래(後來)의 정치를 사모하였고, 진창(陳蒼)에 반구(反裘)100)의 교화를 남겼다. 바다까지 묵책(墨幘)의 소리가 높았기에, 그 위세가 황지국(黃支國)에까지 이르렀고, 그 교화가 적곡(赤谷)101)에까지 행해졌다. 남쪽으로는 순옥(舜玉)까지 통하고 북쪽으로는 요류(堯柳)102)까지 평정하며, 조선(朝鮮)은 바다를 건너오고 야랑(夜郞)103)은 변방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 연후에 도를 체득하여 세상에 떨치고 비처럼 골고루 은혜를 베풀었다. 한(漢)은 무신(戊申)을 사용하고 진(晋)은 경오(庚午)를 섬겼는데, 이처럼 앞서 빛났던 것보다 더욱 휘황하여 홀로 원정(元貞)하기만 하였다. 은혜가 봄바람 같고 겨울철의 햇빛 같아서, 도를 행하는 것으로 가마를 삼았고 어진 이를 채근하는 것으로 천리마를 삼았으며, 뜻을 위편(韋編)에 두었고 마음을 상질(緗帙)에 남겼다.
허상(許商)104)의 산술(算術), 왕위(王圍)의 사보(射譜). 남귀(南龜)105)의 이설(異說), 동치(東馳)의 잡부(雜賦), 선량(善良)한 사람을 관리로 임명할 때의 바둑[奕棊], 선문(羨門)106)의 식법(式法) 등과 잠(箴)이 금검(琴劍)107)에서 흥하였고, 명(銘)이 반우(盤盂)108)에서 비롯된 이 모든 것들이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가리키듯 하지 않음이 없었다.
경수(涇水)를 찾고 위수(渭水)를 가려서 다시 봉염(鳳豔)으로써 풍비(風飛)하고 난문(鸞文)으로써 표수(飈竪)하였다. 가는 것은 무륜(無倫)에 들어가고 큰 것은 원기(元氣)를 머금으니, 그 운은 율려(律呂)를 조율하고 문채는 현황(玄黃)을 울렸는데, 어떻게 빼어난 선비를 취하고자 치주(稚主)에게 묻겠는가?
녹야원(鹿野園)의 깊은 이치와 용궁(龍宮)의 그윽한 말씀에 이르러, 멀리 학도(學徒)에게 명하여 친히 강석에 올라 글마다 헌장(憲章)을 이루고 말마다 법식(法式)을 이루었다. 오고간 왕찬(王粲)109)의 일은 위저(魏儲:魏文帝)보다 뛰어나고 주고받은 채모(蔡謨)110)의 도는 진량(晉兩)보다 높았다. 마치 매달린 종이 울리듯 하였고 구준(衢罇)111)의 잔을 기다리듯이 하였다.
가까이 있는 이는 그 자취를 따랐고 멀리 있는 이는 명성을 들었다. 이런 쇠와 같이 견고한 비법(祕法)으로써 보명(寶冥:華胥國)에 대하여 밤마다 꿈꾸게 하였으며, 멸함도 없이, 생각함도 없이 화서(華胥)는 밤에 감응하였다. 스스로 지혜의 다리를 만들고 지혜의 칼을 밝히고 계향(戒香)을 피우며 정수(定水)에 목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공(空)을 쌓아 갑자기 현겁(賢劫)을 불러 흐리게 하며 마침내 서루(黍累)112)를 드러내고 줄기를 돌이켜 구슬을 온축하여 전하겠는가? 게다가 대진(大秦)의 전적이 팔체(八體)에 부합하지 않고 강거(康居)의 전자(篆字)도 육효(六爻)와 달라서, 2승(乘)이 처음 열어 내는 것은 마치 말이 토끼에게 전하는 것과 같았다.
한 몸으로 함께 귀의하는 것은 코뿔소를 버리고 코끼리를 숭상하는 것이었다. 그 잎사귀를 윤택하고 무성하게 해서, 생각마다 그 쌓여짐을 평탄하게 하였다. 근본은 아득할지라도 끝내는 상인(相因)을 바로 하여 거짓된 공적을 말하더라도 그림자만은 거두지 않았다. 이렇게 나중의 마음에 나아가서도 도리어 자취를 처음의 욕망의 불꽃으로 되돌려 멋대로 하고 근본을 함께하면서도 전도되었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고, 아울러 집장(集藏)에 모이며 맑은 구슬은 가난한 여자에게서 빛나니 성품과 형상은 늘 공하였다. 『반야경(般若經)』에는 5시(時)의 말씀이 없으니 번뇌를 낳지 않는다. 열반이야말로 만 가지 덕의 근본이니, 그 화려한 꽃을 헤아려서 가리키는 요점을 뽑아내지 않음이 없었다.
저쪽의 대린(玳鱗)을 따고 이쪽의 취우(翠羽)를 거두며, 수수(隋水)에서 윤이 나는 구슬을 취하고 곤산(琨山)에서 옥을 취하여 매번 학관(鶴關)에 이르러 새벽을 열고 황기(黃綺)의 짝이 아침에 모이며 어등(魚燈)이 밤마다 빛나고 진오(陳吳)의 무리가 밤늦게까지 모신 것은 모두가 신묘한 법도를 우러르고 총명한 가르침을 몸소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좋은 이름을 내리셔서 ‘연벽(聯璧)’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연’자는 구슬을 꿰인 것과 견줄 만하고 ‘벽’자는 해가 뜨는 것에 비길 만하였다.
지금의 세차(歲次)는 섭제(攝提)113)이고 성기(星期)가 감덕(監德)에 있으니 백 가지 법의 밝은 문호가 여기서 모두 갖춰졌다. 천금(千金)도 이롭다 하지 않으며,
유독 이 같은 경전만을 드높이니, 모두 220권으로 제목을 『법보연벽(法寶聯璧)』이라 하였다. 마치 옥배(玉杯)에 이슬 맺힌 것이 겸가(蒹葭)가 서린 듯하며, 금대(金臺)에 문설주를 박은 것이 운몽(雲夢)을 삼키듯 하였다.
역(繹) 나는 서하(西河)에서 때를 기다리며 남국(南國)에서 관(官)을 통솔할 때부터 열 번이나 봉관(鳳琯)을 돌며 겨우 한 번 용광(龍光)을 받들었다. 저술함에 힘들이지 않고 다만 복상(卜商)의 서문114)을 찬양하여 예전의 성대함을 돌아보면 그 글은 공안국(孔安國)의 저작에 비해 실로 부끄럽기만 하다.
삼가 그 작위(爵位)만을 뽑아 적었는데, 바로 열거해 보면 아래와 같다.
사지절평서장군(使持節平西將軍) 형주자사(荊州刺史) 상동왕(湘東王) 역(繹). 27세. 자(字)는 세성(世誠).
시중(侍中) 국자좨주(國子祭酒) 남난릉후(南蘭陵侯) 소자현(蕭子顯). 48세. 자는 경창(景暢).
산기상시(散騎常侍) 어사중승(御史中丞) 팽성후(彭城侯) 유개(劉漑). 58세. 자는 무관(茂灌).
산기상시(散騎常侍) 보병교위(步兵校尉) 동관시(東官侍) 남낭야왕(南瑯瑘王) 순(循). 42세. 자는 언원(彦遠).
오군태수(吳郡太守) 전중서자(前中庶子) 남낭야왕 규(規). 43세. 자는 위명(威明).
도관상서(都官尙書) 영우군장군(領右軍將軍) 팽성후(彭城侯) 유유(劉孺). 55세. 자는 효치(孝穉).
태부경(太府卿) 보병교위(步兵校尉) 하남후(河南侯) 저구(褚球). 63세. 자는 중보(仲寶).
중군장사(中軍長史) 전중서자(前中庶子) 진군후(陳郡侯) 사교(謝僑). 45세. 자는 국미(國美).
중서자(中庶子) 팽성후 유준(劉遵). 47세. 자는 효릉(孝陵).
중서자(中庶子) 남낭야왕 치(穉). 45세. 자는 유통(孺通).
선성왕우전복(宣城王友前僕) 동해후(東海侯) 서개(徐喈). 42세. 자는 언옹(彦邕).
전(前) 어사중승(御史中丞) 하남후(河南侯) 저운(褚雲). 60세. 자는 사양(士洋).
북중랑장사(北中郞長史) 남난릉태수(南蘭陵太守) 진군후(陳郡侯) 원군정(袁君正). 46세. 자는 세충(世忠).
중산대부(中散大夫) 금화궁가령(金華宮家令) 오군후(吳郡侯) 육양(陸襄). 54세. 자는 사경(師卿).
중산대부(中散大夫) 낭야왕(瑯瑘王) 자(藉). 55세. 자는 문해(文海).
신안태수(新安太守) 전가령(前家令) 동해후(東海侯) 서리(徐摛). 64세. 자는 사궤(士繢).
전상서좌승(前尙書左丞) 패국후(沛國侯) 유현(劉顯). 53세. 자는 사방(嗣芳).
중서시랑(中書侍郞) 남난릉후(南蘭陵侯) 소기(蕭幾). 44세. 자는 덕현(德玄).
운휘장사(雲麾長史) 심양태수(潯陽太守) 전복경조(前僕京兆) 위릉(韋稜). 55세. 자는 위직(威直).
전(前) 국자박사(國子博士) 범양후(范陽侯) 장관(張綰). 43세. 자는 효경(孝卿).
경거장사(輕車長史) 남난릉후(南蘭陵侯) 소자범(蕭子範). 49세. 자는 경측(景則).
서자(庶子) 오군후(吳郡侯) 육조(陵罩). 48세. 자는 동원(洞元).
서자(庶子) 남난릉후(南蘭陵侯) 소진(蕭瑱). 40세. 자는 문용(文容).
비서승(秘書丞) 전중사인(前中舍因) 남낭야왕(南瑯琊王) 허(許). 25세. 자는 유인(幼仁).
선성왕문학(宣城王文學) 남낭야왕. 훈(訓). 25세. 자는 회범(懷範).
세마권겸태주경(洗馬權兼太舟卿) 팽성후(彭城侯) 유효의(劉孝儀).
49세. 자는 자의(子儀).
세마(洗馬) 진군후(陳郡侯) 사희(謝禧). 26세. 자는 휴도(休度).
중군록(中軍錄) 전세마(前洗馬) 팽성후(彭城侯) 유온(劉蘊). 32세. 자는 회분(懷芬).
전(前) 세마(洗馬) 오군후(吳郡侯) 장효총(張孝總). 42세. 자는 효총(孝總).
남서주치중(南徐州治中) 남난릉후(南蘭陵侯) 소자개(蕭子開). 44세. 자는 경발(景發).
평서중록사참군(平西中錄事參軍) 전서통사사인(典書通事舍人) 남군후(南郡侯) 유견오(庾肩吾). 48세. 자는 자신(子愼).
북중기실참군(北中記室參軍) 영천후(穎川侯) 유중용(庾仲容). 57세. 자는 중용(仲容).
선혜기실참군(宣惠記室參軍) 남난릉후(南蘭陵侯) 소방(蕭滂). 32세. 자는 희박(希博).
사인(舍人) 남난릉후(南蘭陵侯) 소청(蕭淸). 27세. 자는 원전(元專).
선혜주부(宣惠主簿) 전사인(前舍人) 진군후(陳郡侯) 사하(謝嘏). 25세. 자는 무범(茂範).
상서도관랑(尙書都官郎) 진군후(陳郡侯) 은권(殷勸). 30세. 자는 홍선(弘善).
안북외병참군(安北外兵參軍) 팽성후(彭城侯) 유효위(劉孝威). 39세. 자 는 효위(孝威).
전(前) 상서전중랑(尙書殿中郞) 남난릉후(南蘭陵侯) 소개(蕭愷). 29세. 자는 원재(元才).
24) 장엄민법사성실론의소서(莊嚴旻法師成實論義疏序) 양 황태자 강
만사(萬事)는 문리(文理)를 겸하였고 이치는 기상(氣象)에 통한다. 그곳에 건너가는 자도 오히려 미혹되고 그것을 구하는 자도 혹 넘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양자(揚子)115)에게 현경(玄經)116)을 질문하자,
도리어 익히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며, 문후(文侯)에게 상고(上古)의 음악을 연주해주었으나, 오히려 잠을 잤다고 한다.
청대(淸臺)에서 역(曆)을 따져 보더라도 수왕(壽王)117)이라도 부과(賦課)가 치밀하지 못하였다. 기(氣)는 두우(斗牛)118)에서 나타나더라도 남창(南昌)의 땅이 혹 편안하기도 하였다. 하물며 지혜의 문이 깊고도 그윽하여 들어가는 이가 참으로 드물며, 법의 바다가 파란만장하여 띄우는 것조차 쉽지 않음에 있어서랴.
하수(河水)와 위수(渭水)가 섞이고 사악한 것과 더러운 것이 어지럽게 됨으로써 3독의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고통의 나무가 자라나서 선전(善田)의 싹을 틔우지 못하니, 마음 꽃의 다채로움이 어떻게 피어나는가? 무상(無常)의 누각이 서로 일어나고 어두운 방 안에 불이 밝지 않다. 따라서 꿀을 먹을 때에 찌꺼기를 걸러 내고 모두 기이한 논의를 귀하게 여기며 오래도록 가시 위에 누워 앞 다투어 사종(邪宗)을 일으킨다. 부처님의 해는 텅 비고 둥글어 바른 흐름이 진구(塵垢)를 쓸어버리게 됨으로써 양손에 네 개의 발우를 들고서 녹야원(鹿野園)의 가르침에서 시작하여 몸을 쌍림(雙林) 가운데에 눕히고 상유(象喩)119)의 말씀에서 마치셨다.
함생(含生)은 동등하지 않으며 열리고 막힌 이치는 근기(根氣)로 인하여 감수(感受)가 서로 같지 않기에, 깊고 얕은 말이 혹 다르기도 하였다. 곳곳마다 말씀을 펴시면서 본래 근기의 연(緣)에 응하시되 각각의 군품(群品)에 따라 달리하지 않으셨다.
금관(金棺)이 닫히자, 전단(栴檀)의 재를 돌이킬 수 없었으니, 유지(乳池)가 또한 마르며 백첩(白㲲)의 재가 이로써 다했다. 가섭(迦葉)이 정(定)에 들어 환희를 얻어 지혜가 멸하자, 말지(末地)의 보응(報應)도 이미 끝나고 우바(優波)120)의 몸도 또한 시들었다. 이로써 5부(部)121)로 나뉘어 흐르고 8건(乾)122)이 집견(執見)을 내었다. 근원을 찾는 것이 이미 어긋났으니, 집착을 취하여 더욱더 구별하였다.
네 가지 모양[四相]123)은 무상(無常)의 칼이고, 세 가지 쌓임[三聚]124)은 고가(苦家)의 바탕이다. 계속 익혀서 끊이지 않기에 ‘집제(集諦)’라고 말한다. 무위(無爲)가 몸에 있어 굳게 구할 수 있다. 등지(等智)로 단절할 수 있다면 나한은 오히려 물러서는데 어떻게 다만 천리나 떨어져 있더라도 이치는 터럭끝에서 일어나니 삼시(三豕)의 서(書)125)로 진사(晋史)에 잘못 전해지고, 북쪽으로 수레 채를 향하고서 남쪽의 영(郢)으로 치달아126) 나무 끝에서 연꽃을 뽑았으니, 비유하자면 복자(服子)가 병(兵)에 대해 논하여 그 이익과 해로움은 알지 못하고 기둥을 아교로 붙여놓고 거문고를 연주하여[膠柱鳴瑟]127) 마르고 습한 변화가 없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8백여 년 뒤에 중천축국(中天竺國)의 어떤 바라문의 아들을 하리발마(訶梨跋摩)라 이름했는데, 양나라 말로는 사자개(師子鎧)라 하였다. 네 가지 종류의 위다(圍陀)를 집에서 익히고 3품(品)의 지혜를 갖추어 도(道)에 들어갈수록 더욱더 형통하였다. 달마(達摩) 사문에게 사사하면서는 같은 것을 일삼지만 열어주는 것은 이전과 반대였다. 마침내 미언(微言)이 이미 끊어진 것을 탄식하였고, 풍화가 쇠퇴하여 떨치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였다.
말로 맞서서 논리를 세우되 주색(朱色)과 자색(紫色)을 우선하여 가리고,128) 뜻을 일으켜 말로 토하되, 반드시 경수(涇水)와 위수(渭水)129)는 자기로부터 말미암았다. 마침내 이치를 모으고 포괄하여 이단(異端)을 저울질하였으니, 헛되고 어긋난 것을 잘라내고 바르고 실다운 것을 찾아 모아 102품을 지은 것이 바로 이 논서(論書)이다.
성실(成實)의 ‘성(成)’은 글에 근거한다는 것이고, 성실의 ‘실(實)’은 이치를 밝히는 데 있으니, ‘성’을 말하여 무너짐에 마주하고 ‘실’을 말하여 허무(虛無)를 형용하여, 비담(毘曇)과 외도(外道)의 두 갈래 길을 모두 폐하고 여래(如來)가 주로 논한 두 가지 이치를 겸하여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처럼 용수(龍樹)와 마명(馬鳴)이 단지 대교(大敎)를 수단으로 삼고, 가전연(迦旃延)130)과 법승(法勝)131)은 소승(小乘)을 얽어매었으나, 이를 겸하여 총괄하더라도 이 같은 이론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화씨족(花氏族)의 왕이 이에 정대(頂戴)하고, 누거(樓佉)132) 외도가 혀가 굳어 말을 하지 못하였으니, 백 갈래의 흐름이 출처(出處)를 달리하였으나 다 함께 한 곳의 바다로 돌아갔다.
만 가지 이치로 구분하던 것이 ‘성실’에서 모두 거두어졌는데, 어찌 다만 배나 두드리며 열반하여 그 깃발의 자취를 어지럽히겠는가? 닭이 진제(眞諦)를 알린다 하더라도, 정리(精理)가 어두워 색채를 가렸으니, 많은 햇수를 지나도록 영재(英才)가 적었다.
아! 우리 대양국(大梁國)에 이르러서야 황도(皇圖)가 치성하여 운(運)이 열렸는데, 황제가 하늘을 머금고 땅을 감싸 안는 덕과 봄철에 낳고 여름에 기르는 어짊에다, 서원(誓願)을 근본으로 하여 이 땅을 거느려 교화하자, 늘 거룩한 법륜이 항상 구르니 삼보(三寶)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에 감로가 펼쳐져도 사부대중이 싫어하지 않았다.
장엄사(莊嚴寺)의 민(旻)법사는 난새와 봉황의 우의(羽儀)인지라 광경(光景)을 짊어지고, 뜻에 깊이 형통하고 마음으로 미래를 알았으나, 그 자취를 범부와 같이 하였기에, 그 근원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는 4인(忍)133)을 끌어안고 행으로는 3공(空)134)에 합쳤으니, 지혜가 문수와 비견되고, 현묘하기는 선길(善吉)135)과 같으며,
총지(總持)는 아난(阿難)136)의 덕과 균등하고, 설법은 부루나(富樓那)137)의 공이 있었다.
우리 황제에게 아양을 떨며 나를 정법으로 일으키고 이러한 논을 크게 펼쳐서 크게 경사(京師)에 성행케 하였다. 책상자를 짊어지고 다투어 달려오며 글을 써서 멀리서 찾아왔으니, 관군(冠軍)의 세력을 수고롭게 하는 것 없이 위용(衛容)을 기울였다.138) 참으로 화음(華陰)의 덕(德)139)이 있었기에, 사람마다 귀의하여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풍모가 사위국과 같아서 사수(泗洙:공자를 의미함)를 뛰어넘으니, 서관(西關:노자를 의미함)이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며 남궁(南宮:장자를 의미함)이 다투려 하지 않았다.
상궁사(湘宮寺)의 지천(智蒨) 스님은 그 필찰(筆札)의 공이 법태(法汰)가 안석(安石)에게 보답한 것과 다르지 않으며, 청변(淸辯)의 묘함이 어찌 다만 도림(道林)이 자유(子猷)를 끊은 것이겠는가?
대체로 10권을 1부로 엮어 편집했으니, 법사가 점차로 병이 깊어져 깊이 부촉하였는데, 어찌 다만 전생(田生)이 죽어 시수(施讐)의 손에서 누울 뿐이겠는가?140) 마공(馬公)의 학문이 바야흐로 정씨(鄭氏)에 연유해서 그 이치를 개진하였다고 일컬어진다.141)
25) 내전비명집서(內典碑銘集序) 양 원제(元帝)
법성(法性)은 공적하고 심행(心行)은 처소를 끊었다. 감득(感得)에 바로 형통하며 방소(方所)에 따라 인도한다. 그러므로 작원(鵲園:죽림정사)에서 선법(善法)으로 유인하고 마원(馬苑:白馬寺)에서 널리 폈으며, 백림(白林:사라수림)에서 물러나 청수(靑樹)가 나열되었다. 이리하여 금첩(金牒)을 펴서 은신(銀身)에 의탁하였으니, 상교(象敎)가 동쪽으로 유포되어 남국(南國)으로 교화가 행해졌다.
오나라 군주142)가 지성으로 이레 밤을 기도하자 광명이 비쳤으며, 진나라 왕이 성상(聖像)을 그려 오제(五帝)를 헤아려 더욱 새롭게 하였다. 차도(次道)ㆍ효백(孝伯)ㆍ가빈(嘉賓)ㆍ현도(玄度)143)의 이 몇 사람들은 일대의 명사이다. 혹 가람을 수리하기도 하였고, 혹 마음을 돌이켜 변론하기도 하며, 명송(銘頌)을 칭하여 공(公)을 드높였다.
그 글들을 살펴보면 진실하면서도 폭넓고 간략하며 온화하고 윤택하다. 내가 이 같은 말만 듣고 그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으니, 반고(班固)와 같은 석학이 깊은 학문을 일찍이 찬송한 것과 비슷하고, 육기(陸機)144)가 깊게 찾아낸 것이 비명(碑銘)의 부(賦)로 들리는 것과 매한가지다. 오직 백개(伯喈:蔡邕)는 명문(銘文)을 지었고 임종(林宗:郭泰)은
부끄러움이 없었다. 덕조(德祖)145)가 능히 읊조리고 원상(元常)146)이 글을 잘 썼음에도 그 한 시대에만 성대하였고 뒤를 잇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반야(般若)가 깊고 그윽하며 진여(眞如)가 묘하고 고요함에 있어서랴!
마주하는 말마다 누(累)가 되어 그 경계가 참답지 못하니, 금석(金石)에다 무엇을 새긴다 하겠으며 명송(銘頌)으로 누구를 기린다 하겠는가? 그러나 탑을 세우며 공덕을 새기거나 사방에 절을 세우면서 혹 그 유래를 적거나 서원(誓願)을 적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검은 돌에다 이를 새겨 썩지 않게 후대에 전하려는 것이다.
또한 마음을 지극히 한 응공(應供)이 있었으니 이를 ‘상문(桑門)’이라 말한다. 혹 ‘지낭(智囊)’이라고 부르고 혹 ‘인수(印手)’라고도 호칭하는데, 높은 법좌에서 이름을 드날려 사윤(師尹)의 자리로 참여하였다. 도림(道林)에게 중시받아 비룡의 자리를 같이하며, 아미(峨眉:慧持法師)와 노부(盧阜:慧遠)와 같은 현인과 업중(鄴中:佛圖澄)과 완등(宛鄧:釋道安)과 같은 철인(哲人)들에 대해서는 역사책마다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에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문(碑文)을 세워서 이들을 기리는 바이다.
세대가 빨리 바뀜에 논하는 글의 이치는 하나 둘이 아니며, 시절의 일이 옮겨지매 속사(屬司)의 문체가 달라지기도 하였다. 단지 번잡하면 그 미약함을 한탄하고, 간략하면 그 간소함을 싫어하고, 화려하게 꾸미면 바탕을 잃어버리고, 실다움을 따르자면 글의 맛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인용한 일이 비록 넓더라도 그 뜻은 한 가지이니, 혹 새로운 생각에 의탁할지라도 간략함에 의지할 바가 아니다. 혹 처음과 끝으로 서첩(書帖)에 순서를 정하여 일은 마치 과역(課役)을 강요하듯 하거나, 간혹 앞과 뒤로 널리 섭렵하기만 하여 체제가 정밀하지 못하기도 하다. 능히 빼어나면서 화려하지 않게 하고, 질박하면서 조잡하지 않게 하며, 넓으면서도 번거롭지 않게 하고, 간략하면서도 경솔하지 않게 하며, 문채가 드러나면서도 질박함이 있게 하고 간략하면서도 윤택하게 하자면, 일마다 마음에 따라 돌이켜야 하고, 이치는 말에 따라 깊어져야 하므로 이에 청화(菁華)에 틈새가 없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내가 어려서부터 옛사람의 글귀나 본떠 짓는 것[彫蟲]을 좋아하여 장성하면서 더욱 독실히 하였는데, 마음을 석전(釋典)에 두고 눈을 사림(詞林)에 맡기며 항상 여러 가지 것을 수집하여 저술할 생각을 하였다. 비유하자면 제법(諸法)의 바다에 파도가 그칠 새 없는 것과 같으며, 수미산이 한 가지 빛깔로 돌이켜지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높고 비천한 것을 가리지 않았으니, 비록 상세하지 않더라도 모두 따르기에 넉넉하다.
이름을 『내전비명집림(內典碑銘集林)』이라 지었는데, 도합
30권이다. 장차 오는 세상의 군자들이 혹 이것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26) 선림묘기집서(禪林妙記集序) 서명사(西明寺) 석현칙(釋玄則)
- 선림묘기 전집서(前集序)
일체 제불(諸佛)에게는 모두 3신(身)이 있다. 첫 번째는 법신(法身)으로 원심소증(圓心所證)이라 하고, 두 번째는 보신(報身)으로 만선소감(萬善所感)이라 말하며, 세 번째는 화신(化身)으로 수연소현(隨緣所現)이라 한다.
지금의 석가모니불은 법신이 오래도록 증득되고 보신이 오래도록 이루어진 것이기에, 지금 출현하신 것은 화신일 뿐이다. 말하자면 과거에 석가불께서 보리심을 내어 그 명호(名號)가 같기를 서원하였기에, 지금 성불하고서도 명호를 ‘석가’라 하는 것이다. 3무수겁(無數劫) 동안 보살행(菩薩行)을 닦으면서 하나하나의 겁수(劫數) 가운데 무량불(無量佛)을 섬기다가, 도중에 정광여래(定光如來)를 계속해 만나고는 머리카락을 진흙바닥에 펴고 금빛 꽃을 받들어 올리면서 수기(授記)를 받아 무생인(無生忍)을 얻었다. 그러나 일체의 부처님께서 장차 성불하려는 때에는 반드시 100겁을 거치면서 상호(相好)의 업을 닦아야 한다.
석가가 발심한 것이 미륵보다 나중이나 불사여래(弗沙如來)를 만나 이레 동안 우러르며 날마다 새롭게 게송으로 찬송하였는데, 이로써 구 겁을 뛰어넘어 먼저 도를 이루게 되었다. 성불하려는 때에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났으니, 이때 보명보살(普明菩薩)이라 이름하였다. 저곳에서의 천수(天壽)를 다하고 염부제로 하강하여 흰 코끼리를 타고 모태의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가셨다.
그 모친인 마야(摩耶)부인이 흰 코끼리를 품은 꿈을 꾸었다. 범선(梵仙)이 점을 치며 “만약 해와 달의 꿈을 꿨다면 국왕이 태어나고, 만약 흰 코끼리를 꿈꾸었다면 성자(聖子)가 태어나리라”고 예언하였다. 모친이 이후로 고요하고 편안하게 조리하면서 말을 부드럽게 하여 날마다 다르게 하였으니, 보살이 처음 태어나매 대지가 진동하고 그 몸이 자금색(紫金色)인 데다 32상(相)과 80종호(種好)와 1심(尋) 크기의 둥근 광명이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보를 걸으면서 마범(魔梵)을 항복시키고자 성실(誠實)의 말씀을 하시며
“천상 천하에 내가 제일 존귀하다”고 하셨다. 품에 안고 천사(天祠)로 들어가니 천상(天像)이 모두 일어섰는데, 아사다(阿私陀) 선인이 합장하며 감탄하기를, “상호가 분명하니 반드시 법왕(法王)이 되리라. 내가 죽게 될 터이니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됨이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이 분이 바로 정반국왕(淨飯國王)의 태자이시다. 자(字)가 실달다(悉達多)인데, 조부의 이름은 사자협(師子頰)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정반(淨飯)이며, 어머니는 마야(摩耶)라 부른다. 대대로 전륜왕(轉輪王)이 되었는데 성이 구담씨(瞿曇氏)이다. 다시 능통했던 일로 인하여 따로 성을 석가라고 하였다.
맑은 깨우침이 자연스럽고 예술이 천부적이어서 비록 5욕(欲)에 머물더라도 욕망(欲望)의 진구(塵垢)를 받지 않았다. 나라의 사대문(四大門)을 다니면서 늙고 병들고 죽은 자와 어떤 사문을 보고서 궁중으로 되돌아와 깊은 염리심(厭離心)을 내셨다. 홀연히 한밤중에 천신(天神)이 부축하고 경계하며 보마(寶馬)에 올라타고 성을 넘어 출가하셨다. 6년간 고행한 끝에 그것이 도가 아님을 깨닫고 바로 정관(正觀)에 의지하여 보리(菩提)를 얻으셨다.
이때 소를 치는 여인이 우유를 끓여 죽을 만드는데 갑자기 높이 끓어오르자 소치는 여인이 놀라워하면서 보살에게 바쳤다. 보살이 이를 잡숫고 기력이 충만해져 강에 들어가 목욕하고 기슭으로 오르는 때에, 나무가 저절로 가지를 드리워 보살을 위쪽으로 인도하였다. 보살이 여기서 길상초(吉祥草)를 따다가 보리 수 밑에 앉으시자, 악마가 이를 보고 노여워하는 마음을 내면서, “이 사람은 내 세계를 텅 비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관속 18억만 명을 이끌고 여러 가지 고구(苦具)를 가져다가 보살을 겁주면서 급히 일어나 오욕(五欲)의 즐거움을 받도록 재촉하였다.
다시 묘의천녀(妙意天女) 세 사람을 보내어 보살을 유혹하였는데, 이때에 성의자정(聖意慈定)에 들어가 연민하는 마음을 내자, 마군(魔軍)이 자연히 흩어져 물러가 버렸고 세 사람의 묘의천녀는 영귀(癭鬼)로 변하였다. 마군이 항복하자 2월 8일에 명상(明相)이 출현하는 때에 정각(正覺)을 이루셨다. 이미 성불하고서 중생의 근기를 관찰하고는, 저들이 소법(小法)을 즐겨서 대법(大法)을 감당하지 못함을 알고, 바로
바라나국(波羅奈國)으로 가서 교진여(憍陳如) 등의 다섯 사람을 제도하여 4제(諦)의 법륜을 굴리셨는데, 이것이 삼보(三寶)가 출현하는 시초였다.
그 후에 설법하여 제도한 사람의 숫자, 크게 모인 보살회(菩薩會), 깊고 깊은 무상(無相)의 말씀과 신통을 시현하는 그 힘이 모두 경문(經文)에 갖춰져 있다. 다시 한때 도리천(忉利天)으로 올라가 90일 동안 안거하면서 모친에게 설법하였다. 이때 우전국왕(優闐國王)과 바사닉왕이 부처님의 덕을 사모하여 전단나무를 새기고 모포에 부처님의 모습을 그려서 완성하였다.
이후로 부처님께서 도리천에서 내려오시자 이룩한 성상(聖像)들이 모두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부처님께서 그 정수리를 어루만지시며 “네가 미래세에 불사(佛事)를 잘 이룩하라”고 말씀하셨으니, 불상이 일어난 것이 바로 이때부터이다.
교화의 인연이 끝나갈 무렵에 그 무리들이 권태로워 하자, 부처님께서 바로 대중에게 “앞으로 3개월 후에 내가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후사를 기록하시니 경전에 그대로 갖춰져 있다.
그러나 여래의 실다운 몸은 언제나 있으면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법화경』에서는, “영취산과 여타의 여러 주처(住處)에 언제나 계신다”고 말한다. 지금 태어나시고 멸하는 것은 부처님의 화신으로서, 그들을 제도하고자 그 부류와 같이 화현하였으니, 이것이 생을 받은 이유이며 다시 유위(有爲)가 반드시 옮겨짐을 알게 하였으니, 이것이 죽음을 보이신 이유이다. 다시 중생의 근기가 성숙한 것이 탄생을 보이신 이유이고, 중생의 감득이 다한 것이 멸하심을 보이신 이유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 사람과 하늘이 공양하면서 여러 가지 보탑을 이룩하였는데, 다시 대가섭이 1천 명의 아라한을 소집하여 법장(法藏)을 결집하였다. 아난이 전해지지 않던 구전(口傳)을 공개하여 결집시키고 남김없이 외워내는 것이 마치 병속의 물을 다른 그릇에 조금도 새지 않고 따르듯 하였다. 백 년 후에 철륜왕(鐵輪王)이 있었으니 자(字)가 아수가(阿輸柯)이다. 그는 또한 아육(阿育)이라 이름하였는데 귀신을 부려서 하루 만에 천상과 인간 세계에 8만 4천 개의 사리보탑(舍利寶塔)을 이룩하였다. 이때 부처님의 유물인 옷과 발우와 석장
등과 여러 사리가 신비롭게 변한 것은 참으로 하나 둘이 아니었다.
한나라 명제(明帝)가 꿈에서 감응하여 금구(金軀)에다 일패(日佩)를 두른 장륙(丈六)의 모습을 본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석가의 본래 모습과 같다. 또 오나라 군주 손권(孫權)이 사리를 불태우고 철퇴로 내리쳤어도 변하거나 부서지지 않았고, 또한 석상(石像)이 강물에 뜨고 서용(瑞容)이 바다에 떠밀려 온 일과 반야의 그윽한 힘과 관음의 촘촘한 영험은 모두 별기(別記)에 갖췄으나, 그 지적이 너무 많아서 특별히 기록하지 않는다.
- 선림묘기후집서(禪林妙記後集序) 경사(京師) 서명사 석현칙
듣자니 상전[象]에서 포괘(庖卦)를 분석하여 신명(神明)의 덕을 기렸으며, 가르침으로 기주(箕疇)147)를 알리고, 이륜(彛倫)의 순서를 실어서 조화롭게 하였다. 이 이래로 이를 계승하는 이가 더욱 많았으니, 아름다운 다스림에 화합하여 나날이 빛나지 않음이 없어서 금규(金閨)를 높여 값을 올렸다. 하물며 진승(眞乘)의 상지(上智)는 만유(萬有)를 건넘으로써 말을 흥하게 하였고 비밀스럽게 숨겨둔 원음(圓音)이 백령(百靈)을 경계하여 그 이치를 펼침에 있어서랴.
미혹함을 밝히는 것이 수려한 별빛과 균등하였고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감로와 견주어진다. 스스로 육영(六瓔)148)으로 천자의 지위에 올라 사륜(四輪)의 덕을 휘날리지 못하면서, 어찌 지극한 진리를 살피겠으며 묘한 근본에 대한 기틀을 연구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도가 무성한 이는 그 가르침을 크게 닦고, 업이 창성한 이는 그 글이 빛남을 알 수 있다.
삼가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 순리에 따라서 지극한 표준을 고르게 하고 성경(聖敬)으로 가르침을 모으며 10선(善)으로 어짊을 드날리시어 교화는 반취(蟠竁)의 겉을 부드럽게 하고 4등(等)으로 세속을 조율하여 그 기풍이 서수(胥燧)의 이전보다 높았다. 또한 현범(玄範)을 높여서 사(詞)를 다듬었으며, 상원(常源)에 무늬 놓아 귀감으로 삼고 썩은 동아줄에 단비를 내리면서 생각이 급고독원(給孤獨園)에 머물렀다. 마침내 만물을 다듬는 틈틈이 예지(睿旨)로써 친히 하거나 멀리하였고 정명(正名)의 끝에 아름다운 주제를 지속적으로 베풀어 주었다. 스님들은 용시(鎔施)의 은혜를 짊어지고 소륭(紹隆)의 은택을 입었다. 이에 처음 정중하게 부르시니 가슴에 두려움만 쌓인다.
삼가 성지(聖旨)는 사라지기 어렵고 현진(玄津)은 건너기 어려운데, 텅 비어 마치 구멍으로 엿보듯 생각하는지라,
혼돈(混沌)이 열려지지 않음을 한탄한다. 진실로 문 앞에서 부르짖음에 의지하여 시절의 상(象)에 얻는 것과 같은 것이 없으니 나대(蘭臺)의 태사(太史) 겸 좌시극(左侍極) 응산현(應山縣) 개국후(開國侯) 모씨(某氏)가 살펴봄을 권하면서도 피곤함도 마다하지 않고 열람하면서도 쉬지 않았다. 이에 서로 더불어 서림(恕林)의 영악(英萼)을 뽑고149) 기산(耆山)의 신우(迅羽)를 쏘아버리며150) 팔부의 법장(法藏)의 뛰어난 보배를 찾아서 3점(點)151)의 영액(靈液)을 당겨서 1부라고 이루고 이를 정리하여 총 10권을 완성하였다.
그 정미한 이치를 비교하여 일마다 말이 끊어졌고 가르침의 바다는 이미 법문(法門)이 아득하여 더욱 넓기만 하였다. 비록 긴요하고도 오묘한 이치가 이미 전수(前修)에 다 갖추어져 있더라도 두루 널리 채집한 글들은 「별록」으로 충당하였다. 실로 형산(荊山)에 오르는 이는 연성(連城)에 대하여 옥을 바치려는 것을 생각하며,152) 초빈(楚濱)에 노니는 자는 포궤(苞匭)에 대하여 공납하기를 바라는데, 하물며 용궁(龍宮)의 으뜸가는 보배가 정전(情田)에 현란하게 비추고 녹원(鹿苑)에 남겨진 향기가 자엽(字葉)에 서리는 것이겠는가?
비록 생각이 올곧다면 누가 받들어 올리는 것을 잊겠는가? 게다가 보배를 이룬 뒤에는 어루만짐이 있고 규칙을 밝히는 데는 이어짐이 있다. 잠시 이루시고 돌아가셨으나, 그 밝은 법도는 속사(屬事)로 남아 있다. 바야흐로 그와 같은 글을 열면 임옥(琳玉)과 낭옥(瑯玉)이 마침내 빛나며, 이를 가리고자 하면 난초와 국화가 저절로 나뉜다. 인도함이 있어 여기로 오는 것은 동영(東瀛)의 옥회(沃澮)에 비유되고, 각자 귀의하여 응하는 바는 남약(南籥)의 궁징(宮徵)153)에 짝한다. 이에 이치로 서로 귀속시켜 대체로 10장(章)을 이루었다. 장절(章節)마다 상하로 나뉘어 20권을 이루었으니, 경심(經尋)이 1,500여 축(軸)이고 뜻에 의해 360여 조(條)를 나누었다. 10장(章)을 세우고 4례(例)를 이뤘는데, 처음 두 번째는 진도와 세속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고, 그 다음은 염오(染汚)와 청정(淸淨)의 연유를 아울러 밝히는 것이다. 중간의 4장은 수증(修證)의 갈래를 평탄히 하는 것이고, 뒤의 2장은 인도하는 규범을 내리는 것이다. 서로 그 차례에 따라 서술하되, 각각 여러 가지 항목에 예속시켰으니, 대체로 큰 이치가 찬란해지고 지극한 말이 실추되지 않았다.
일천 문호가 눈부시게 널찍하니 늘어서고 화려하게 백 갈래 길이 겸하여 쌓이니 새벽별이 구슬을 엮은 것과 같아서 진실로 질서 있게 하지 않았으나 돌무더기가 떨어지는 듯하며 봄의 울창한 수풀은 비단으로 누빈 듯하여, 참으로 다듬은 것은 아니지만
울창하게 펼쳐져 있는 듯하였다. 그윽하게 살펴 깊이 부합하기 때문에 오묘한 이치를 그윽하게 돌이키면서도 문란하지 않으니 오히려 의지할 만하다.
그러나 깃털 하나로도 봉황의 빛깔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기록을 많이 하지 않았다. 쌍비(雙飛)로도 부주(鳧洲)를 다할 수 없으므로 여타의 아름다움을 다 하기 어렵다. 이미 금구(金口)의 가르침으로 제한하였기에 참으로 옥설(玉屑)154)의 비평이 없다. 그 사이 아주 자잘한 것을 제거하고 빼고 취할 것을 헤아려서, 혹 천리에 오류를 남길까 두려워 매번 세 번씩이나 더 살폈다.
마침내 용삭(龍朔) 3년(663) 5월 17일 첫머리에 윤언(綸言)을 받들어 지금 인덕(麟德) 원년(664) 5월 4일에 전후의 2부의 책을 완비하였으니, 앞의 것은 간략하면서도 유창하고 뒤의 것은 넓으면서도 잡스러움이 없었다. 가히 석망(釋網)의 넓은 강령을 떨치고 법문(法門)의 요체(要諦)를 총괄하여 식심(息心)의 훌륭한 자취를 열고 다문(多聞)의 영유(靈囿)를 갖추었다 할 수 있다.
삼가 바라건대, 제호(醍醐)155)의 빼어난 맛으로 신충(宸衷)을 영원히 비옥케 하며, 반야의 명주(明珠)로 예악(睿握)을 길이 밝혀서, 이 글이 실추되지 않고 참다운 종지가 해와 달과 더불어 함께 매달리고, 이 복이 끝이 없어 보배로운 연조(年祚)가 궁양(穹壤:천지)과 함께 같아지리라. 진실로 이와 같이 말한다.
『선림묘기후집(禪林妙記後集)』의 총목 총10장
1장 진성(眞性), 2장 가연(假緣), 3장 유염(流染), 4장 즉정(卽淨), 5장 관문(觀門), 6장 행법(行法), 7장 승위(乘位), 8장 극과(極果), 9장 교력(敎力), 10장 화공(化功).
위의 하나하나의 장은 여러 법취(法聚)를 묶은 것이다.
27) 법원주림서(法苑珠林序)
중대사원대부(中臺司元大夫) 농서(隴西) 이엄(李儼) 지음
육효(六爻)가 일어나 팔괘(八卦)가 나열된 이래로 비로소 서계(書契)가 있었고
훈전(訓典)이 빛났다. 봉전(鳳篆)과 용도(龍圖)와 금간(金簡)과 옥자(玉字)와 백가(百家)는 자취를 달리하며 만 권이 자잘하게 나뉘었다. 비록 이치는 정미함을 궁구하며 말은 사물의 규범을 다하더라도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단속하는 것이 인간 세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시초에 근원을 두고 종극을 구하는 것으로 어찌 세속의 바깥을 갖추겠는가?
장사(藏史)의 설(說)156)과 원리(園吏)의 말157)도 있으니, 보경(寶經)이라도 허망하고 금적(錦籍)158)조차도 괴이쩍은 것이, 마치 얼음에 새겨서 이룬 것이 없는 것과 같고 글이 텅 비어 실답지 않은 것과 유사하다. 『연화경』을 관통하는 묘한 이치와 패엽(貝葉)에 쓴 경전은 2승(乘)의 넓음과 8장(藏)의 깊은 신비를 갖추어 깊고 얕음을 다투고 그 우열을 비교하더라도 조그마한 개미를 높은 숭산(嵩山)과 화산(華山)에 견주려는 것과 같으며, 우잠(牛涔)의 미약함으로 양쯔강과 한수(漢水)의 넓음과 다투려는 것이다.
현료(顯了)의 이치와 은밀(隱密)의 도리, 해탈의 문과 총지(摠持)의 뜰은 전제(前際)와 후제(後際)가 나란히 진여(眞如)에 계합하니, 초심(初心)이나 말심(末心)이나 모두 정각으로 되돌아온다. 혼미한 중생을 욕망의 바다에서 인도하면 정리(情理)의 먼지가 마음의 때와 함께 똑같이 없어지고 곤궁한 이들을 자비의 안방으로 인도하면 의보(衣寶)와 계주(髻珠)가 함께 이르고 교화는 항하사의 경계에 넘쳐나며 그 공덕은 미진(微塵)의 겁에 가피내린다.
참으로 크면서도 지극하구나. 이루 다 기릴 수가 없다. 비를 내려 주나라에 징조를 보이고159) 일패(日佩)로 한나라에 감통하자,160) 채음(蔡愔)이 서쪽으로 가고 축란(竺蘭)이 동쪽으로 넘어왔다. 금구(金口)의 말씀과 보대(寶臺)의 이치가 서책에 가득하고 고문자로 채워져 중토(中土)를 덮었다. 권축(卷軸)이 번다하고 조류(條流)가 깊고 넓기에, 실상(實相)의 진원(眞源)은 결국 자세히 살펴보기 어려웠다.
우리 황제의 대당국(大唐國)이 만물을 이루어 성상(聖像)이 군림하자, 현묘한 가르침이 넓혀지고 석가의 무리들이 모여들었다. 책으로 찍어내어 광채를 전하고 구우(區宇)를 비추어 윤택케 하며, 범향(梵響)의 메아리와 읊조리는 소리가 도성에 울렸다. 널리 베풀어 성대히 하는 것은 가리켜 비유하더라도 지극히 하기 어렵다.
서명(西明)의 대덕(大德) 도세(道世) 법사는 자(字)가 현운(玄惲)으로 석문(釋門)의 영수이다. 어려서는
총명하여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오색 빛깔의 옷을 입을 때에 낙식(落飾)161)하였다. 그 자비가 은근하여 개미와 같은 미물에게조차 널리 자비를 베풀고 그것을 바탕으로 구수(具受)의 단(壇)을 이루어 계품(戒品)이 원만하게 밝혀졌다. 마치 삼킨 구슬과 같이 동등하게 보호를 받고 율의(律儀)가 정밀하게 밝혀져 비쳐지는 거울에 따라서 함께 똑같이 기뻐하였다. 대승(大乘)을 사모하여 실상을 분명히 밝혔다.
뛰어나고 박식하였기에 서명사로 모시게 되었다. 이어서 5부(部)를 보는 틈틈이 3장(藏)을 두루 살펴보았다. 고금에 대를 이어 여러 사람들이 제작한 것이, 비록 그 취향이 단아하고 글이 아름답다 하나, 모두 전하여 기록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문유(文囿)의 청화(菁華)를 따다가 대의(大義)의 첨복(瞻蔔:香樹)을 냄새 맡으며, 그 부류에 따라 편집하면서 『법원주림(法苑珠林)』이라 하였는데, 모두 100편으로 정리하여 총 10질을 이루었다. 뜻이 풍부하고 글이 간략한 것은 우씨(虞氏)의 『박요(博要)』에 근거하였으며, 자취를 펴서 도를 비춘 것은 양나라 승우(僧祐)의 『홍명집(弘明集)』을 엿본 것이다. 그 말로써 아름답게 하여 그 호를 이와 같이 빛내면서, 지극한 자취를 드날려서 남김없이 하였으니, 묘한 문호를 포괄하되 극진히 하였다.
마침내 대당 인덕 3년(666) 섭제격(攝提格), 율은 고세(沽洗) 5월 10일162)에야 편집을 마쳤다. 자못 그 그윽한 말을 모아서 권(卷)를 살펴볼 때마다 마음의 구슬을 얻게 될 것이고, 정도(正道)를 따르는 이는 글을 펼칠 적마다 감로를 마실 것이다. 이것을 풀어나감으로써 미묘함을 알게 되고 이것을 보게 됨으로써 오묘함을 보게 될 것이니, 둥근 태양과 더불어 다 함께 비추고 선궁(璇穹)과 더불어 장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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