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25권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5. 승행편 ③
32) 복전론(福田論) 석언종(釋彦琮)
수양제(隋煬帝)가 대업(大業) 3년(607)에 새로이 율령(律令)과 격식(格式)을 하교(下敎)하면서, “여러 스님들과 도사들 가운데 계청(啓請)할 바가 있으면, 먼저 반드시 절하고 난 연후에 이치를 개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비록 이와 같이 영(令)을 내렸으나 스님들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때 사문 석언종이 그 같은 일을 참지 못하고 「복전론」을 지어 항거하였다. 그 뜻이 풍자(諷刺)에 있으니, 말하는 자는 죄가 없고 그것을 듣는 자는 스스로 훈계를 삼을 뿐이다. 황제가 나중에 조정에서 친견하는데, 여러 사문들로서 절하는 이가 없었다.
대업 5년(609) 서경(西京) 교남(郊南)에서 문물(文物)을 크게 열면서 두 종교를 조정에서 친견하였는데, 스님들이 예전처럼 여전히 절을 하지 않자, 다시 조칙을 내려 “조칙이 행해진 지 오래되었는데, 스님들은 어째서 절을 하지 않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이때 명섬(明贍) 법사가 “폐하가 삼보를 넓히고 지키시려면,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경전에서 속인(俗人)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가르침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칙령을 내려 “만약 절을 하지 않는다면, 송(宋)나라 무제 때에는
어째서 절을 하였는가?”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송나라 무제는 포악하고 무도한 임금으로 정사(政事)를 그르쳤습니다. 모두 절하지 않으면 바로 살육하였으나 폐하는 이와 다른지라 절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칙령을 내려, “절하는데 스님들은 우뚝 서 있기만 하니, 이와 같이 넷을 세어 절을 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들이 “폐하가 반드시 스님들을 절을 시켜야겠다면, 마땅히 법복을 벗기고 속인의 옷을 입힌 연후에 절을 시켜도 늦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만 망연하여 어찌 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다음날 대재(大齋)와 법사(法祀)를 모두 베풀었으나 모두 기록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여러 스님들에게 “짐이 일찍이 스님들 가운데에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어제 남교(南郊)에서 대답하는 것을 보니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로 끝까지 절하는 사람이 없었다. 황건(黃巾)의 선비와 여인들은 처음 절해야 한다는 칙령을 듣자마자, 이로(李老:노자)의 무리와 합일하여 연이어 절을 하되 그치지 않았다. 황제가 역시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여 묻지 않았다. 이에 논(論)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전에 동진(東晋)의 태위(太尉) 환현(桓玄)이 사문도 왕에게 절해야 한다고 품의(稟議)하였다.
여산(廬山)의 혜원(慧遠) 법사가 당시의 고명(高名)한 석덕(碩德)이셨는데, 지혜의 당번(幢幡)이 부러지려는 것을 슬피 여기고 계율의 보배가 장차 가라앉음을 애도하여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서 절하는 의례(儀禮)가 마침내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말을 이은 것이 은밀하고 예를 인용한 것이 깊어서 후학들이 열람하더라도 그 글의 이치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가한 틈을 타서 다시 서술하면서 다시 「복전론」이라 이름붙이며 말하였다.
홀연히 귀한 손님이 멀리서 찾아왔는데, 멀리 환씨(桓氏)에 붙어서 예전의 의론을 다시 논하고자 하였다. 이에 주인이 생각을 오래도록 하고 나서 소리 높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손님께서는 복전(福田)의 중요함을 듣지 못하신 것 같으니, 내가 지금 당신에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무엇을 복전이라 부르는가 하면, 바로 삼보를 일컫는 것입니다. 공(功)으로 묘한 지혜를 이루고 도(道)로써 원각(圓覺)에 오른 이를 부처라고 합니다. 현리(玄理)가 그윽하여 적막하고 정교(正敎)가 정성스러운 것을 법(法)이라 말합니다. 금계(禁戒)로 참다움을 지키고 위의(威儀)가 세속을 벗어난 사람을 스님이라 합니다.
모두가 4생(生)을 인도하는 수장(首長)이고, 6취(趣)를 항해하는
나룻배입니다. 드높기가 천상이나 인간보다 우뚝하고 무겁기가 금석(金石)을 넘어서니, 비유하면 진보(珍寶)와 같은데, 어찌 그 모양이 못났다고 함부로 그대가 품의(稟議)를 행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법주(法主)로서 종지를 표방하시는 바이고, 정법은 부처님을 스승삼아 근본에 머무르는 바이며, 스님은 성제자(聖弟子)가 되어 이 같은 부처님과 정법을 기리는 바이니, 가히 존귀한 이와 비천한 이일지라도 그 자리를 같이하며 근본과 말단조차도 그 문호를 함께하기에 일에 따라 세 가지를 말하나 바탕을 논하면 한 갈래일 뿐입니다.
50여 년간 8만의 경전을 펼쳐 지귀(指歸)를 설하신 것은 오직 이 지극일뿐입니다. 소리를 거두시고 그림자를 없애어 쌍림(雙林)의 운수(運數)를 다하셨으니, 전단나무에 새기고 잎사귀에 글을 적어서 한결같이 교화의 자취를 남겼습니다. 성현이 그 사이에 일어나고 문학(門學)이 서로 이어졌으니, 화합으로 대중을 삼아 정법의 주지(住持)를 의탁했습니다.
금인(金人)이 한나라 궁전을 비추고서야 상법(像法)이 낙포(洛浦)에 형통하였는데, 선각(先覺)을 줄기로 삼아 모두 구장(舊章)을 답습하였습니다. 방외(方外)를 도모하고자 발심하고 세간을 버려서 공덕을 세웠기에 관직과 영예로도 그 뜻을 움직이지 못하고, 친속으로도 그 정에 누를 끼치지 못합니다. 옷은 잘라내어 색을 지우고 머리카락은 베어내어 속인의 용모를 버리고서 관모(冠帽)를 쓰지 않는 것을 의례로 삼는데, 어떻게 속대(束帶)로써 장식을 삼겠습니까?
상천(上天)의 제석(帝釋)조차도 늘 예를 다했으니, 실로 일개 하토(下土)의 왕(王) 정도는 언제나 절을 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경전에 나와 있고 율에도 나와 있으니, 이 같은 법은 특이한 것이 아니기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도에 막힘이 없습니다.
제왕(帝王)의 중대함을 받들고 신기(神祇)의 거대함을 버금해 보면, 8황(荒)이 그 덕을 흠모하고 사해(四海)가 어짊에 귀의하니, 승니(僧尼)가 입조(入朝)하여 절한다는 것은 일찍이 보고 듣지 못했습니다. 만약 다른 뜻이 있다면 삼가 고견을 청합니다.”
이에 손님이 말했다.
“『주역』에서는 ‘천지의 대덕(大德)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의 대보(大寶)는 위(位)이다’1)라고 말하였습니다. 노자도 ‘역(域)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대왕이 그 한쪽에 머문다’2)고 말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실로 왕의 땅 아닌 곳이 없으며, 나라를 건립한 이래로 왕의 신하 아닌 이가 없습니다. 그것을 주(主)로 연결하여 하늘을 본받고 땅으로 법을 삼아 억조창생(億兆蒼生)을 덮으니, 바야흐로 봄을 만나 여름에 이르게 하여 만물을 생장시키니, 해와 달의 빛으로 이들을 비추고 윤택케 하여
구름과 단비의 기운으로 이룹니다.
6합(合)이 모두 줄기로 삼는 것이 마치 바다와 같기 때문에 백성이 별빛처럼 다 함께 우러릅니다. 이족(夷族)과 융족(戎族)도 안색을 바꾸고3) 말과 소도 고개를 돌리니, 뱀은 일찍이 수후(隋侯)에게 구슬을 바쳤고,4) 물고기는 예전에 한(漢)나라 황제에게 감응하였습니다. 어찌 그 호적에 편입을 면하면서도 그 법문에 연유하여 번뇌를 해탈하여 피안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度脫] 넓은 어짊을 잊고, 이같이 공양하여 널리 이룩하는 것을 버리며, 스스로를 높이고 크게 보면서 겸손하고 공손함을 갑자기 없앨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면 금수와 장차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통을 펼치고 성과(聖果)를 이룰 수 있다면 도가 천하를 덮고 이치는 언외(言外)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헛되게 머리 깎은 이를 섬기어 도리어 3독(毒)만 늘려가고, 허망하게 복식(服飾)을 바꾼다 하면서 오히려 6진(塵)에 물듭니다. 계율과 인욕을 닦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취하지 않으면서 성명(聖明)의 교회(敎誨)에 어긋나려 드니, 세속의 범부와 다를 것이 없는데, 어떻게 선독(宣讀)의 수고로움만 지니며 만승천자의 예법을 거부하십니까? 형용이 다른 것에 연유하여 어찌 한 사람에 대한 존경을 빠뜨릴 수 있습니까?
예전에 비구가 거사의 다리를 잡고, 보살은 오만한 대중에게 머리를 숙였으니, 이 같은 글이 오늘날에도 창연하나 지금 그 같은 갈래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권도(權道)가 따르기 어려우니, 불성(佛性)이 존귀하다 해도, 하물며 임금으로서 천하를 다스리는데, 이는 신명(神明)이 내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백양(伯陽:노자의 字)이 만령(萬齡)의 규범을 열고, 중니(仲尼)가 백왕(百王)의 규칙을 베풀었는데, 임금을 만나면 절하면서 반드시 조정의 전례에 따르도록 했습니다. 사문만이 홀로 이를 업신여기니, 이를 참으려 해도 누가 용납하겠습니까? 나쁜 풍조는 바꾸기 어렵고 악한 흐름은 오래 하기 쉬우니, 성명한 황제를 만나지 않으면 누가 이를 바로잡겠습니까?
갑자기 상도(常道)에 어긋나는 변혁을 일으켜 신의(信義)가 없다는 비평만 초래할 것입니다. 이는 지극한 말에 근거한 것이니, 이를 상세히 살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이에 주인이 말했다.
“제가 세운 것은 내(內)이고, 손님께서 비판하신 것은 외(外)입니다. 안으로는 법리(法理)에 형통하고 바깥으로는 인사(人事)에 국한하는 것이어서 서로 기리는 것이 현격한데, 어떻게 햇수를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배운 것이 상세하지 못하고 들은 것이 흡족하지 못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미혹한 바를 제가 마땅히 분별해 드리겠습니다. 시험 삼아 그
요체를 거론하면 모두 일곱 가지 조목입니다.
첫 번째가 ‘보답하지 않는 덕은 없다’, 두 번째가 ‘거두지 않는 선이 없다’, 세 번째가 ‘방편에 걸림이 없다’, 네 번째가 ‘적멸(寂滅)하여 영화가 없다’, 다섯 번째가 ‘의례(儀禮)를 넘을 수 없다’, 여섯 번째가 ‘조복[調服]하여 어지러울 수 없다’, 일곱 번째가 ‘인(因)하여 잊을 수 없다’입니다.
처음의 네 가지 조목은 당신의 비판에 대답하는 것이고, 나중의 세 가지 조목은 법식(法式)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제가 듣자오니 하늘은 말하지 않고도 사시(四時)가 행해지고, 왕이 말하지 않아도 온 나라가 다스려져서 백성들이 뭐라 이름할 수 없는 데에 이른 것이니, 왕이 무슨 노력을 한 것이겠습니까? 이룬 뒤에도 그대로 여기에 머물지 않고 행한 뒤에도 과시대지 않았으니, 이것은 선왕(先王)의 지극한 선(善)이고 대인의 지극한 덕(德)입니다. 똑같이 서류(庶類)에게도 은혜를 내리어 골고루 백성들을 참여케 하며, 초목을 달리하거나 벌레와 새까지도 그릇되게 차별하지 않았으니, 둥근 하늘을 짊어지고 방토(方土)를 밟으며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며 혜택을 내리니, 곡식을 먹고 물을 마시며 배를 불려서 은택을 머금게 합니다.
이미 마음으로 출가(出家)를 허락하고 자비와 덕으로써 도(道)에 들어가 과거의 거친 업을 끊고 미래의 묘한 과(果)를 바라는 바이며, 이미 깊은 은혜를 입었기에 다시 후한 보답을 꾀하고자 만선(萬善)의 이로움에 따르고자 하는 것이 어찌 일신(一身)을 공경하는 것에 두는 것입니까?
선으로 돌이켜 보답하여 그 보응을 거두는 것은 참으로 깊지만, 몸으로 존경을 표하여 거두는 이익은 얕습니다. 참으로 그로 말미암아 스님들은 바른 의례(儀禮)를 잃고, 세속도 여타의 경사(慶事)가 덜어질 것입니다.
스님들이 속인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미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알아서 믿을 수 있다면 이치상 당연히 따라서 세워야 합니다. 혹 따르기 힘들다고 말하게 된다면 그 일은 마땅히 없애야 합니다. 어찌 그것을 존숭하여 그 복을 구하려고 하면서 그것을 낮추어 다시 그 예를 책하고자 합니까?
이미 예법에 따르되 바로 세속과 같이해야 한다는 것은 복을 구하되 그 은택을 바라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기리면서 한편으로 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스님들을 백성의 부류로 치부하고자 하면, 하얀 것도 아니고 검정 것도 아닌지라, 무어라 이름할 수도 없게 됩니다.
가만히 교연(郊禋)을 살펴보면 총제(總祭)만이 존재하여 복을 우러러 존귀하게 여긴다면서 스님들을 이같이 비루하게 여기니, 공대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스님들로 하여금 속인에게 절하게 할 수 있습니까? 천지가 거꾸러지더라도, 이 같은 의례는 드물고 어그러진 것입니다. 다음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것을
‘보답하지 않는 덕은 없다’고 말합니다.
법이 이미 점차 쇠퇴하고 사람들 또한 말세로 치닫는데도 성인이 드물어졌으니, 참으로 그 말과 같이 되었습니다. 비록 범부의 부류에 처했더라도 인욕(忍辱)의 갑옷을 두르며, 계학(戒學)에 이지러짐이 있더라도, 오히려 지혜의 경전을 논하였으니, 탑(塔)이 귀한 것과 같고 부처님이 존귀한 것과 같습니다.
정법에 귀의하면 선(善)이 생겨나고 이를 훼손하면 죄가 쌓입니다. 용맹으로써 처음 발하여 애욕을 끊는 것이 어렵더라도 버릴 수 있고 널리 원하여 마침내 기약하게 됩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돌이켜 6취(趣)로 나아가니, 이 때문에 삭발하는 때에는 천마(天魔)조차 두려움에 떨고, 옷을 물들이는 날에는 제석(帝釋)마저 기뻐합니다. 기녀(妓女)마저 그 가피를 입어 무루(無漏)가 바로 원만해지고, 술 취한 사람도 잠시 머리 깎는 것으로 연을 삼아 바로잡습니다. 용자(龍子)가 부처님에 의지하여 사람을 놀래키는 것을 멈추었고, 상왕(象王)이 부처님을 뵙고서 사람 겁주는 것을 그쳤습니다. 위령(威靈)이 여기에 있고, 의복(儀服)이 이것에 연유합니다.
대부분 구족계(具足戒)를 받지 못하였어도 부처님의 이치를 찬양하였으니, 이에 어리다고 경시하지 않고 스님들의 힘을 빛나게 거양하였습니다. 바리(波離)5)가 이미 득도하여 석자(釋子)가 마음을 굴복하고, 니타(尼陀)6) 또한 귀의하였으며, 바사닉왕(破邪匿王)마저 뜻을 굽혔습니다. 이렇게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간에 스승으로 본받을 만합니다. 그런 연후에 현명하거나 어리석은 사이와 침묵하고 말하는 사이의 설익고 잘 익은 것이 서로 비슷하여 그 버리고 취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육안으로 분별하면 아마 보배를 만나지 못할 것이니, 신심이 평등해야만 혹 그 참다움을 만나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겨우 네 사람을 채워야 하나의 대중[衆]7)을 이루니, 스님들이 이미 널리 받아들이고 부처님도 역시 통하여 계시어 공양하는 때에 이상하게 끓는 물을 보고 바로 음식을 남겨서 스님들에게 베풀었고, 옷이 특이하게 금실로 짜여진 것을 보고서야 대중 스님들을 받들었으니, 스님들의 위덕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좋은 복전 가운데 최상이라 부를 만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의 종(宗)이 될 만합니다. 이것을 두 번째의 ‘거두지 않는 선이 없다’고 말합니다.
만약 정명(淨名)의 공(功)을 논하자면, 일찍부터 운지(雲地)에 올라 병들어 드러누운 뜻은 원래가 세상의 경계를 넘고자 하는 것이니, 오랫동안 신족(神足)을 행하여 모두들 그 변재(辯才)에 감탄하였으며, 신학(新學)은 정례(頂禮)하여 진심으로 법보시(法布施)에 감사하였습니다. 일마다 권도(權道)가 타당한지라,
실로 그 법식(法式)을 상도(常道)에서 전할 바가 아니기에 시절마다 그 예(例)가 잠시 변화했던 것이 많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허공장(虛空藏)이 절하지 않아도 여래께서 책망하시지 않았으며, 사미(沙彌)가 원력을 크게 발하여 화상(和上)을 앞질렀으니, 한번 떠나가 바로 깨우침에 모두들 놀랐습니다.
다시 상세히 경전을 풀이해 보자면, 갈래에 통하지 않음이 없어서 대사(大士)를 업신여기지 않고 홀로 높은 자취를 이룩하니, 저와 같은 상만(上慢)의 부류를 경계하고자 이와 같이 하심(下心)의 절을 베푸셨습니다. 한 가지 도를 곧 지성으로 사용하니, 이미 세 가지 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 법식을 항상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기틀에 따라 법을 이루는 것이 참으로 보기 드뭅니다. 헛되이 교화를 넓히더라도 율의(律儀)를 저술하기란 참으로 어려우니, 대성께서 2지(智)8)의 밝음을 발하여 5편(篇)9)의 약계(約戒)를 제정하셨고, 그 작치(爵齒)10)를 폐하시고 계하(戒夏)를 두셨습니다.
시교(始敎)와 종교(終敎)로 훈요에 형통하니, 이근기[利根]와 둔근기[鈍根]가 모두 우러르게 되며, 법랍이 많고 적음에 순서가 있어 앞서고 뒤서는 것이 섞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도 별도의 업을 내지 않으면서 7중(衆)이 널리 행하게 하니, 자연의 이치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옛날에 부인이 죽자 노래를 부르며 항아리를 두들겨 장단 맞추고, 아들을 영(嬴) 땅에 장사지내고 몸소 장례를 치르고 흙을 덮어 준 것도,11) 한낱 필부의 절조일진대, 어찌 명왕(明王)의 제작(制作)이라고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깨달음의 전요(典要)가 그윽하고 성인의 말씀이 아득한데도, 한 모서리만을 집착하여 4무애변(無礙辯)에 어긋나려 하니, 이를 세 번째의 ‘방편에 걸림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주(周)나라 주하사(柱下史)가 오랫동안 왕역(王役)을 맡고, 노(魯)나라 사구(司寇)가 국재(國宰)에 머물렀으나 그 줄기를 『도덕경(道德經)』으로 돌이켜 바야흐로 무명(無名)을 말하였으며, 가르침은 『시경』과 『서경』에 있으니, 제작(制作)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요임금과 순임금을 조술(祖述)하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헌장(憲章)하여 몸소 허리를 굽혀 공경한 이가, 이들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
소보(巢父)와 허유(許由)의 기풍은 예전부터 이를 기리며 내려온 것이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지조도 지금까지 이를 돌이켜 숭상합니다. 이처럼 10력(力)12)으로 높이 올라 4류(流)13)를 멀리 제도하는 듯합니다. 이와 같은 유위(有爲)의 고통을 싫어하고 저 무여(無餘)의 적멸(寂滅)을 기뻐하니, 공정(公庭)에 생각이 매이지 않고 왕사(王事)에 마음을 쓰지 않으며, 자연히 해탈하는 것이 참으로 유생(儒生)이 짝하는 것과 다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네 번째의
‘적멸하여 영화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 귀신을 제사 지내고 천악(川岳)에 망질(望秩)함과 같은 것은 국가의 위엄 있는 성전(聖典)과 문서에 아름답게 전해집니다. 저와 같은 신령의 부류는 왕도 존중하였으나, 스님들은 신령에게 예를 드리지 않으면서 도리어 스님들은 신령에게 절을 받는데, 왕이 어찌 거꾸로 존중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상하가 어긋나는 것이며 정법에 위배되는 것이니, 저고리와 바지를 거꾸로 입으면, 어찌 모양이 근사하다고 하겠습니까?
신령조차도 현재와 미래의 스님들을 옹호하는 것입니다. 지성으로 기도하여 개통(開通)을 얻더라도, 주문(呪文)과 기도(祈禱)의 힘에는 끝끝내 절하는 이치가 없으니, 이를 다섯 번째의 ‘의례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본래 황왕(皇王)이 분연히 일어나면, 반드시 진인(眞人)이 생을 의탁하는 것으로, 상덕(上德)을 비록 정심(淨心)으로 몰래 감추더라도, 바깥의 형상은 여전히 세속의 모양에서 표방됩니다. 이로써 도(道)가 치복(緇服)에서 창달될 때는 마음으로 힘쓰는 것이 용맹스러워지고, 업(業)이 현문(玄門)에 감춰졌을 때는 형태의 공손함도 마땅히 끊어야 하는데, 예전의 실다움을 구하는 것은 전대(前代)의 법문(法聞)에나 갖춰져 있습니다.
국주(國主) 빈바사라(頻婆沙羅)와 부왕(父王) 정반(淨飯)은 예전에도 모두들 성스러움으로 돌이켜 한결같은 수행을 신봉하면서 매번 섬기며 귀의하였으니, 평범한 스님을 보더라도 생각을 돌이켜 부처님처럼 기렸습니다. 양친에게 무릎 꿇는 것으로 효(孝)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참으로 불효죄(不孝罪)에 해당하지 않는데, 임금에게 절하는 것으로 공경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어찌 불경(不敬)의 허물이라고 하겠습니까?
법마다 특별하고 다름이 있으니, 그 바탕에 혼잡함이 없게 하고자, 이에 따르도록 제정하였으니, 이를 여섯 번째의 ‘조복하여 어지럽힘이 없다’고 말합니다.
삼가 다라(多羅)의 묘한 경전과 석가의 참다운 말씀을 살펴보면, 찰리(刹利)에 머물기에 존귀하다고 말하고, 반야에 의지하기에 보살핀다고 말합니다. 네 가지 믿음을 깨뜨리지 않고 열 가지 선에 이지러짐이 없이 하면서 부처님을 받들고 스님들을 섬기어 공을 쌓고 덕을 늘려가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해의 정기와 달의 모양이 내려지고 적광(赤光)과 백기(白氣)를 감득하여 금륜(金輪)이 구르고 주보(珠寶)가 다시 매달리게 되니, 하늘에 응하고 백성에 순응하여 대도(大圖)를 다스리며 명경(明鏡)을 거머쥐게 됩니다.
바야흐로 5상(常)의 법[術]을 열고서 끝내는 8정(正)의 대도(大道)를 넓히게 되니, 이 또한 숙명(宿命)을 관찰하여 지나간
인(因)을 돌이켜 보며, 불교를 존중하고 승보(僧寶)를 기리면서 계향(戒香)을 늘리고 지혜의 힘을 늘리게 됩니다.
스스로 천기(天基)를 옮겨서 높이며 범궁(梵宮)의 원대함에 비길 수 있어야 성조(聖祖)의 햇수가 늘 굳건해서 겁석(劫石)과 함께 장구해질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레 같은 권세가 지극해지고 용호(龍虎) 같은 위엄이 융성해져서 경사스러운 일이 반드시 함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침범하면서 노여움만 일으켜 말을 내어 호령함이 마치 바람 불어 풀이 눕듯 하니, 이미 스님들의 예를 내려 누르고 나니, 누가 감히 인한 덕을 펼치겠습니까?
단지 명공(冥功)을 손상시키고 성업(盛業)을 기반으로 삼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지성을 다하고 명을 다함이 이와 같을 뿐입니다. 이를 일곱 번째의 ‘인을 잊지 못함’이라 일컫습니다.
이처럼 대략 내 뜻을 밝혀서 그대의 의혹을 대략이나마 없애고자 하였는데, 널리 듣고 싶거든 마땅히 대부(大部)를 찾아보십시오.”
이에 손님이 말했다.
“주인께서 인용하신 이치와 사례가 번잡하니, 제가 우매하다 하나 대체로 받들어 엿볼 수 있었습니다. 글이 유명(幽明)을 거두었고, 변재(辯才)가 내외(內外)를 싸안았으나, 제전(祭典)을 논하는 것에는 아직도 미혹이 남아 있습니다.
『주역』에서는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 말하고, 음양의 헤아릴 수 없음을 신(神)이라 말한다’고 하였는데, 실로 신령의 길은 어둡고 은밀하여 사람의 경계가 끊어졌습니다. 그 제사 지내는 법도는 반드시 예관(禮官)에 의지해야 합니다. 본래는 태상(太常)을 두고 관장하게 하니 태축(太祝)과 같습니다. 귀신의 일조차도 끝내 신오(臣伍)의 반열에 들어감을 알게 됩니다. 진불(眞佛)이 이미 떠나가셨고, 성승(聖僧) 또한 멸도(滅道)하였으니, 우러러 명도(冥道)를 믿는 것은 완전히 유신(幽神)에 이르는 것입니다.
말세의 범부는 부박하게 회향을 말하고 함께 은일(隱逸)을 꾀하며 서로 삭발하는 것을 도우며 배우고 단회(檀會)를 관장합니다. 이로써 그 법의(法衣)를 보태게 되고, 탑방(塔坊)을 간수하게 되며, 이로써 그 세속의 부역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겨우 왕법(王法)의 그물에 저촉되어 백성의 도관(道貫)을 실추시킵니다. 이미 전사(典祀)와 같을진대, 어떻게 보배라 칭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조정에서 천자를 예경함은 진실로 늘 하는 의례(儀禮)이니, 강경하고 힘이 있는 것에 고집하려는 것은 통달한 식견이 아닙니다. 송씨(宋氏)의 옛 제도14)도 풍화가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오직 서로 답습하려고만 하니, 다시 서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인이 말했다.
“손님께서는 하나만 아시고 둘은 모르십니다. 좋은 말을 들어보시고
조금이나마 그릇된 생각을 거두어 보십시오.
제가 듣자오니, 귀신의 ‘귀(鬼)’란 돌아갈 ‘귀(歸)’인지라 사람이 죽어서 들어가는 바입니다. 귀신의 ‘신(神)’이란 혼백 ‘령(靈)’이니, 형체로써 근본을 삼습니다. 귀신은 사람보다 못하니 오직 악도(惡道)에 머물 뿐입니다.
신(神)은 색(色)보다 뛰어나 널리 정취(情趣)를 갖추니, 마음에 있는 영지(靈智)를 신(神)이라 칭합니다. 은밀하여 알기 어렵기에 헤아리기 어렵다고 말하니, 그 바탕과 쓰임새를 칭하여 움직임과 고요함이라 말합니다. 그 성욕(性欲)을 갈래지어 음(陰)이 있고 양(陽)이 있다고 합니다.
『주역』의 이치는 대체로 이와 같기 때문에 갈래를 달리하여 일기(一氣)에서 현달되고 지성스런 말은 6식(識)을 결여하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점차로 이룩하는 것을 단연코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이 보응하고 명계(冥界)가 감통(感通)하여 숨어서 다가오며 몰래 떠나가기에 ‘신(神)’이란 호칭으로 이를 표방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쓰임새를 특별히 하려는 것입니다.
비유하여 말한다면, 부모가 내어 주심을 받고 건곤(乾坤)의 나눔을 이어서 기를 보존할 수 있으며 형체를 세울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도(神道)와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바로 나의 심업(心業)으로 일찍이 건곤에 감득하지 못하고, 부모에게서 얻어 식(識)은 태장(胎藏)을 머금어 더욱더 허공에까지 펼쳐지고, 의(意)는 훈종(熏種)을 둘러 널리 세계에 가득하여 떠나가면 다시 태어나는 것이 마치 불꽃이 연이어 나오는 것과 같으며, 오면 다시 가는 것이 마치 물결이 계속 옮겨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뿌리를 보지 못하는데, 그 시초를 따져 본다고 어찌 그 끝을 보겠습니까?
이에 혼탁하면 범부가 되고 이를 맑게 하면 성인이 되는 것이니, 신도(神道)가 세밀하고 그윽하더라도 이치는 진실로 상세히 하기 어렵습니다. 신령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을 대각(大覺)이라 일컬으니, 생각으로도 어찌 알 수 있겠으며, 이름과 모양으로도 누가 다할 수 있습니까?
진신(眞身)은 원래 옮겨가 시들어짐이 없으니, 봉사가 스스로 이를 바라보지 못하고 생각에 의지하여 옛 자취만 따르니, 마음을 기울여 유법(遺法)에만 노닙니다. 만약 이를 전하고 주지하는 대임을 맡아 요묘(要妙)의 문을 열고자 한다면 이 같은 스님들에 의지하고 부처님의 부촉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자비로운 구름를 빌려서 안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황제의 위엄에 의지하여 바깥의 힘으로 삼으니, 현풍(玄風)이 멀리까지 미쳐서 여기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가르침은 3세를 형통하고 대중은 4부(部)로 나뉘었으니, 2부(部)는
도법(道法)에 따르고 2부는 세속에서 지킵니다.
도에 따를 때는 상존(像尊)의 의식을 준수하고, 세속에서 지킬 때는 전공(典供)의 일에 애를 씁니다. 상존(像尊)은 비구와 비구니를 일컫고, 전공(典供)은 우바새와 우바이를 말합니다. 소상자(所像者)를 존귀할 때는 신위(神位)에 참여하지 않고, 소전자(所典者)를 공양할 때는 아랫자리에서 신하의 차례에서 참여합니다. 전공(典供)하는 사람을 근원으로 한다면 주제(主祭)의 역을 함께하더라도 내가 일을 맡지 않는다고 당신이 어떻게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간절한 말에 연유하여 나의 깊은 자취를 드러내어 이치가 이미 명확해졌으니, 다시 이 같은 것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송(宋)나라 초엽에 잠시 이러한 억누름을 행한 것은 저 또한 참다움에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번거롭게 두루 논하지 않더라도 변방(邊方)의 풍속으로 그 아름다움을 보지 않고, 갑자기 버리고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 참으로 괴이하기 그지없습니다.”
손님이 말했다.
“이 같은 말씀이 참으로 이치가 있습니다. 선도(善道)를 말씀해 주셨으니, 여기서 삼가 물러가겠습니다.”
33) 문출가손익조(問出家損益詔:출가의 손익을 묻는 조서)와 표(表) 당(唐) 고조(高祖)
황당(皇唐)이 운세를 열자 여러 가지 가르침이 나란히 흥기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불법(佛法)에 신심을 돈독히 하여 경사(京師)의 옛 저택을 희사하여 흥성사(興聖寺)를 이룩하였고, 여타의 회창사(會昌寺)ㆍ승업사(勝業寺)ㆍ자비사(慈悲寺)ㆍ증과사(證果寺)ㆍ집선사(集仙寺) 등이 연이어 이룩되었다. 마침내 도관(道觀)이 세속에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에 태사령(太史令) 부혁(傅奕)이 본래 황건족(黃巾族) 출신으로 치복(緇服)을 매우 싫어하였는데, 또 나라에서 특별히 존중하는 것을 보고 우려하는 마음이 날로 심해져서 마침내 「폐불법사(廢佛法事) 11조」를 올려서 말하기를, “불경은 거짓된 데다 요망하며 말은 괴이하고 일마다 은밀하여 국가에 해를 끼치고 집안을 깨트리기에 세상에 이로움이 있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청하건대 호나라 부처의 삿된 가르침을 천축으로 되돌리시고, 모든 사문들을 상재(桑梓)15)로 돌아가게 하시면, 집안과 나라가 번창하고 이담(李聃)과 공구(孔丘)의 가르침이 여기서 행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무제(武帝)가 소소한 논변을 받아들이고 보필하는 신하가 멋대로 말하는 대로 맡겨 두었다. 이리하여 조칙을 내려 스님들에게 “부모가 주신 수염과 머리카락을 버리고 군신(君臣)의
복장(服章)을 없애니, 이로움이 어느 사이에 있으며, 이익은 어떠한 마음의 바깥에 있습니까? 손해와 이익의 두 가지 이치를 묘하게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질문하였다.
제법사(濟法寺)의 사문 양양(襄陽) 석법림(釋法琳)이 부혁의 말에 격분하였는데, 질문이 내렸다는 것을 듣고 바로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법림(法琳)이 듣자오니, 지극한 도는 말이 끊어졌다는데, 도대체 어찌 구류(九流)로 가릴 수 있겠습니까? 법신(法身)은 형상이 없으니 이는 십익(十翼)16)으로 설명할 바가 아닙니다. 단지 사취(四趣)17)가 아득하여 욕해(欲海)에 정처 없이 떠돌고, 삼계(三界)18)가 막막하여 사산(邪山)19)에 거꾸로 떨어집니다.
제자(諸子)가 미혹하여 스스로를 태우고, 범부는 물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니, 지극한 사람이 신령(神靈)을 내리셨던 바, 대성(大聖)이 이로써 세상에 나오시어 해탈(解脫)의 문을 열고 편안한 길을 드러내었습니다.
이에 천축에서는 왕족마저 은애(恩愛)로운 이와 이별하여 출가하였으며, 동하(東夏)에서는 귀족조차 영화(榮華)를 버리고 도에 들어가 두 갈래 생사에서 벗어나기를 서약하고 한 갈래의 묘한 열반을 구하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선(善)을 펼쳐서 4은(恩)20)에 보답하고 덕을 세워서 3유(有)21)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그 이익입니다.
형체를 훼손하여 그 뜻을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수염과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용모를 버렸습니다. 세속을 변화시켜 그 도에 회통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군신(君臣)의 화려한 복장을 멀리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그 겉모습으로는 부모에 대한 봉양을 버렸다 하나 속으로는 그 효를 생각하며, 예법으로는 임금을 섬기는 것에 어긋났다 하나 마음으로는 그 은혜를 기립니다.
은택을 원수나 가까운 이에게 드리워 대순(大順)을 완성하고 유계와 현계를 복되게 하니, 어찌 소소한 어긋남에 구애받겠습니까? 상품의 지혜로운 사람은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로움이 있으나, 하품의 평범한 부류는 성인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손해를 끼칩니다. 악을 징계하여서는 넘치는 이를 날로 새롭게 하고, 선으로 나아가서는 사람을 형통시켜 교화에 감화케 하니, 이것이 그 대략(大略)입니다.”
34) 출사태불도조(出沙汰佛道詔:불도를 사태하라는 조서를 냄) 당(唐) 고조(高祖)
문하(門下)여, 석가가 가르침을 천양함에 깨끗함을 우선하였으니, 번뇌와 더러움을 멀리 없애고 탐욕을 끊어 없앴다. 이것은 훌륭한 업을 널리 펴고 선근(善根)을 심으려는 때문이었다. 우매한 이를 인도하고 백성[品庶]들을 제도하였다. 따라서
경교(經敎)를 연출하여 그 배우는 무리를 단속하고 몸과 마음을 조복(調伏)22)하여 여러 가지 집착[染著]을 버리며, 의복과 음식은 모두 4배(輩)23)에게 갖추어졌다.
정각(正覺)이 돌아가시고 상법(像法)이 유행하면서부터 말대에 이르러 점차로 지리멸렬하여 갈수록 어그러지고 넘치게 되었다. 난잡한 무리들이 스스로를 존귀하게 생각하고 떠돌아다니며, 게으른 사람들은 구차하게 요역(徭役)을 피하고자 함부로 머리를 깎고서 출가(出家)란 이름에 의탁하며 욕심대로 마음껏 즐기며 끊임없이 뭔가를 추구하였다. 마을에 출입하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축산(畜産)을 획책하며 재물만 쌓았다. 밭을 갈고 베를 짜서 생활하며 장사하는 것으로 업을 이루니, 하는 일이 마치 편호(編戶)와 같으며, 그 자취가 속인들과 균등하였다. 나아가서는 계율의 글에 어긋나고, 물러서서서는 예전(禮典)의 가르침이 없었다. 몸소 겁탈을 행하며 벽을 뚫거나 담을 넘는 도둑질[穿窬]을 하였다.
괴이하고 요사스런 말을 지어내고 사납고 무법한 사람들과 교재하며 매번 법망에 걸리어 중형(重刑)에 빠져서는 진여(眞如)를 더럽히고 묘법(妙法)을 훼손시켰으니, 비유하면 이 같은 돌피가 좋은 싹을 더럽히고, 진흙이 맑은 물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
또 가람의 땅은 본래 정거(淨居)라 부르는데, 이는 마음이 깃드는 장소이므로 이치적으로 그윽하고 적막하여야 한다. 근대 이래로 사찰이 많이 들어섰으나, 한결같이 조용한 경계를 구하지 않고 오직 시끄럽고 잡스런 쪽으로만 나아간다. 수리하고 이룩하는 것이 드높고도 우뚝하기만 하여 큰 건물과 작은 건물이 서로 어긋났다. 은닉(隱匿)을 초래하고 간사(姦邪)함을 받아들였다. 혹 상점들과 이웃하고 푸줏간과 마주하기도 하여 먼지만이 방 안에 자욱하고 비린내가 길에 가득하였다. 다만 거만한 마음만 길러서 존중하는 이치를 어그러뜨렸다.
또 노씨(老氏)가 교화를 편 것은 근본과 충허(冲虛)를 관통하여 뜻을 무위(無爲)로 기르며 정(情)을 물외(物外)로 보내어 참다움을 온전히 하여 하나를 지키는 것으로 이 같은 것을 현문(玄門)이라 말한다. 그러나 세간 일에 치달려 종지(宗旨)에 더욱 어긋났다.
짐은 대기(大期)를 새겨 우내(宇內)를 다스리며 교법(敎法)을 흥륭하고, 그 이익을 깊이 생각하면서 마음을 호지(護持)하는 데 두었으니, 옥석을 구분하고 향초와 잡초를 가려서 묘도(妙道)가 길이 보존되고 복전(福田)이 영원히 굳건해지며 근본을 바로잡아 원천을 밝히고자 한다.
마땅히 여러 승니 및 도사와 여관(女官) 등을 사태(沙汰)시켜야 한다. 열심히 정진하여 행을 닦으며 계율(戒律)을 따르려는 자는 바로 큰 사찰과 도관(道觀)에 거주하게 하면서 관(官)에서 옷과 음식을 공급하되 부족함이 없게 하라. 그러나 열심히 정진하지 못하고 계행이 결여된 이는, 공양을 감당하지 못하니, 즉시 도에서 파면하여 각각 고향[桑梓]으로 돌아가게 하라. 관리들은 조식(條式)을 분명하게 만들어 법교(法敎)에 힘써서 제도에 어긋나는 일은 반드시 중단시키도록 하라.
35) 영도사재승전조(令道士在僧前詔:도사로 하여금 승전에 있게 하라는 조서)와 표(表)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11년(637) 낙읍(洛邑)을 순행(巡行)하였는데, 황건(黃巾)이 예전에 스님들과 더불어 논의한 것이 주상에까지 알려졌다. 이리하여 조칙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노군(老君)이 내린 규범은 뜻이 청허(淸虛)에 있고, 석가가 전하는 준칙(準則)은 이치가 인과에 있다. 그 가르침을 구하자면 인도하는 자취는 길을 달리하지만, 그 종(宗)을 구하자면 홍익(弘益)의 풍화는 도달함을 함께 한다. 그러나 대도(大道)의 흥기는 먼 옛날에 시작되었으며, 그 근원이 무명(無名)의 시초에서 나왔고, 그 일은 유형(有形)의 바깥에서 높아졌다. 양의(兩儀)로 나아가 운행하고 만물을 포용하여 기르니, 이 때문에 나라를 경영하여 다스림을 지극히 하고 원래의 것으로 되돌려 순박함으로 되돌렸다.
불교의 흥기는 서역에 기틀을 삼으니 후한(後漢)에 이르러 중토(中土)에 가피를 내렸다. 신변(神變)의 이치에 방편이 많고 보응의 연(緣)이 하나가 아니니, 근세에 이르러 믿음이 점차로 깊어져서 사람들은 당년의 복만 기리고, 집안은 내생의 화를 두려워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세속에 매인 이는 현종(玄宗)을 듣고서 크게 웃어버리나, 이채로움을 좋아하는 이는 진제(眞諦)를 바라며 다투어 귀의하였다.
처음에 그 파도가 마을에서 샘솟아 끝내 그 바람이 조정을 휩쓸게 되어 세속과 달리하는 전범(典範)으로 하여금 바꾸어 중묘(衆妙)의 우선으로 삼으며, 제화(諸華)의 가르침이 도리어 1승(乘)의 뒤로 처지게 되었으니, 세상을 피하여 돌아감을 잊는 것이 이로써 대대로 쌓여졌다.
지금 정조(鼎祚)가 다시 번창한 것이 이미
상덕(上德)의 경사에 의지하였고, 천하가 크게 안정된 것도 무위(無爲)의 공에 힘입었다. 이를 풀어 기리고 이 같은 현화(玄化)를 천양하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 이후는 재계하여 공양하며 행(行)을 세우는 것으로부터 칭위(稱謂)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도사와 여관을 승니의 앞에 있게 할 것이다. 이는 근본을 세속으로 돌이켜 구유(九有)를 창달케 하고, 조상을 기리는 풍화(風化)를 만엽(萬葉)에 드리우고자 함이다.
이때 경읍(京邑)의 스님들이 각각 반박문을 올렸으나 유사(有司)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문 지실(智實) 스님은 후생(後生)인데도 영준하여 내교(內敎)와 외교(外敎)에 밝았는데, 여러 숙로(夙老)의 손에 끌려 대가(大駕)를 따라 표를 올려 관구(關口)까지 다다랐다. 그 표(表)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지실 능이 말씀드립니다.
모년에 죽을 때[桑楡]24)가 가까워 바야흐로 태평치세를 만났으며, 그 모양이 포류(蒲柳)25)와 같이 되어 성명(聖明)한 인군(仁君)을 만났습니다. 가만히 듣자오니 아비에게는 간언하는 아들이 있으며 임금에게는 간언하는 신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비록 출가하였지만 여전히 신자(臣子)의 대열에 있으니, 감히 범하더라도 숨겨짐이 없다면 감히 진술하지 않습니다.
삼가 조서를 보아 하니, 국가의 계통이 주하사(柱下史:노자)에서 나왔다고 하며, 존조(尊祖)의 풍화가 전대(前代)의 분전(墳典)에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를 천하에 반포하였으나 칭송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도사들을 승니의 위에 두고자 하시니, 이를 받들어 살펴보면 어찌 감치 조칙에 항거하겠습니까?
그러나 노군이 규범을 내린 것은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패용하던 복장 또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관사(觀寺)를 세우지 않고 문인(門人)을 이끌지 않고 주하(柱下)에 거처하면서 참다움을 온전히 하고 용덕(龍德)을 숨겨 본성을 기릅니다. 지혜로운 자가 이것을 보면 슬기롭다 말할 것이고, 어리석은 자가 이것을 보면 어리석다고 말할 것이니, 노나라의 사구(司寇:공자)가 아니면 이를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의 도사들이 그 법을 따르지 않고 관복을 입는 것이 여전히 황건족의 폐습이지, 원래 노군의 후예가 아닙니다. 삼장(三張)26)의 더러운 술법을 행하며, 오천자(五千字)의 묘문(妙門)을 저버리고, 도리어 장릉(張陵)과 같이하며 어지럽게 장구(章句)를 행합니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이래로 늘 귀도(鬼道)로써 부질없는 세상을 교화하면서 함부로
노군의 후예라 의탁하였으니, 이는 실로 좌도(左道)의 싹입니다. 만약 스님들의 윗자리에 처하게 되면, 참으로 참다움과 거짓됨이 함께 흘러서 나라의 교화에 손해가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이와 같이 상주하지 않으면 어떻게 신자(臣子)의 정을 나타내겠습니까?
삼가 도경(道經) 및 한나라와 위나라의 여러 사책(史冊)마다 불교를 우선하고 도교를 뒤로 한 사례를 기록하였으니, 이는 별전(別典)에서 진술하는 바와 같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하늘 같은 자비를 완곡하게 드리워 이를 살펴 주십시오.”
(1) 제사문등치배군친칙(制沙門等致拜君親勅:사문 등이 임금과 부모에게 절하는 것을 제도화하는 칙지) 당 고종
칙지(勅旨)
군친(君親)의 의리(義理)는 재삼(在三)27)의 가르침을 중요시 하고, 애경(愛敬)의 도리는 백행(百行) 가운데에서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와 노자 이문(二門)이 비록 이치로 늘 하는 경계를 끊었다 하나, 공경(恭敬)과 효도(孝道)에 관계된 일은 유진(儒津)에 적합하여 지존(至尊)의 땅에서 무릎 꿇고 절하는 예를 행하지 않았던 것을 그대로 따라 오랜 세월이 지나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송조(宋朝) 때에 잠시 이러한 풍조가 혁파되었으나 조금 가려 뽑았다가 다시 옛 관행을 따르게 되었다.
짐이 천경(天經)28)을 이어받아 효를 드날리고 지의(地義)를 바탕으로 하여 예를 펼치며, 명교(名敎)를 장려하여 이와 같은 진속(眞俗)에 은혜를 내렸다. 뇌향(瀨鄕)29)의 기틀은 천구(天構)를 이루고, 연하(連河)30)의 교화는 국왕에게 부촉하는 것이니, 이를 다스리는 연유가 참으로 여기에 있다.
지금 도사와 여관 및 승니도 군황후(君皇后) 및 황태자와 그 부모에게 절을 하도록 명하나, 혹 항상된 정리(情理)에 어그러질까 염려스럽다. 유사(有司)에게 이를 자세히 의논하여 상주하도록 명하노라.
용삭(龍朔) 2년(662) 4월 15일 광록대부(光祿大夫) 우상(右相) 태자빈객(太子賓客) 상주국(上柱國) 고양군(高陽郡) 개국공(開國公) 신(臣) 허경종(許敬宗)이 선포하다.
(2) 상고종황제사문불합배속표(上高宗皇帝沙門不合拜俗表:고종황제에게 사문이 세속인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는 표를 올림) 석위수(釋威秀) 등
삼가 엎드려 밝은 조서를 받드니, 스님들로 하여금 임금과 아비에게 무릎 꿇고 절하라고 하셨습니다. 의리로도 그대로 시행해야 하고 이치로도 저항할 도리가 없습니다. 단지 유교와 불교의 밝은
가르침은 모두 바르게 간언하는 글을 진술하여 이어져 온 교화를 넓게 펼쳐서 모두 추요(芻蕘)의 도로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스님들이 국가의 중대한 은혜를 입고서 방외(方外)의 예법을 열고, 솔토(率土)에 안거하며 세속을 벗어나는 마음을 넓혔습니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은 모두 법도를 다스려 준수하고 세속을 변화시키는 의례를 존중하면서 예법에 항거하는 자취마저 온전히 하였습니다. 드디어 경교(經敎)가 넓혀져서 대대로 풍성해졌으니, 종장(宗匠)이 멀어져서 때때로 나타나지만 한(漢)나라에서 수(隋)나라에 이르기까지는 수행하는 사람들이 거듭 막혔지만, 영취(靈鷲)31)의 기풍은 도리어 울창해지고, 선원(仙苑)의 교화는 오히려 성기게 되어 황운(皇運)이 처음 일어나 해외(海外)까지 이끌어 다스리는 것만 못하였습니다.
오축(五竺)과 오악(五嶽)이 진(鎭)을 같이하며, 신주(神州)와 대하(大夏)가 문(文)을 함께하고, 황화(皇華)의 명운(命運)이 대이어 융성하여 칙사를 태운 수레가 연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스러운 자취가 흥하게 수립되어 남겨진 발자취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범려(梵侶)의 내방이 서로 연이어 끊어지지 않았으니, 지금 만약 도리어 임금과 아비에게 절하게 하여 여러 경전과 다르게 한다면 바로 세속을 놀라게 하는 영예를 드러내면서도 때로는 가볍게 허물어뜨리는 가망성을 펴는 것입니다.
예전에 진성제(晋成帝)가 어리석어 유빙(庾氷)이 조칙을 고쳤으며, 환초(桓楚)가 거짓을 꾸미자 왕밀(王謐)이 언변으로 대항하였습니다. 송나라 무제(武帝)도 만년에 학정(虐政)이 심해져서 스님들이 군주에게 절하는 것을 제도화 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지하였습니다. 참으로 일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전을 그르치고, 이치가 천상(天常)의 의례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비록 유언비어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마침내 품의를 어지럽힐 것인데, 하물며 하발(夏勃)이 절하라는 칙령을 내려 상천(上天)의 노여움을 받았으며, 위도(魏燾)가 주살을 행하여 역병을 초래한 책망을 이루었으니 참으로 이러한 길이 오래도록 펼쳐져서 보고 들은 것을 갖추어 거론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스님들은 패(佩)를 받들고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모르는데 임금의 조칙이 한 번 발하여 만국으로 퍼질까 두려웠습니다. 반드시 환해(寰海)에 그 기풍을 기리게 해야 하는데, 바야흐로 예법을 잃었다는 오명을 넓히게 되고 아득한 후대에 혹 허물을 본받게 되는 것이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면 폐하가 삼보를 중흥하고 자비로 4생(生)을 섭수하면서 친히 부촉하신
뜻을 이어서 학도(學徒)의 의탁을 장려하셨기에 스님들은 안으로는 정교(正敎)를 따르면서 진실로 무릎 꿇고 절하는 형용을 사절하였으며, 밖으로는 밝으신 조칙을 받들어 유례(儒禮)의 존경을 다하였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땅을 굽어보면 죄를 진 것에 대해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매우 깊습니다. 간청하지 않는 것도 신하나 아들의 깨달음에 어긋나는 것이니, 혹 부처님의 교화를 가리고 임금을 속이는 죄에 빠질 것입니다. 삼가 여러 경전에서 속인에게 절하지 않는 글을 나열하여 간략하게 주상께 올립니다.
삼가 원하건대 하늘 같은 자비를 내려 살펴 주십시오. 조정의 의론이 잘 조화를 이루어 마침내 진(晋)나라 신하32)를 따라 그 길을 가고, 법을 버릴 것을 항상 이야기하여 제(齊)나라 임금에게 법도를 돌렸습니다. 위엄에 폐를 끼치니, 참으로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용삭(龍朔) 2년(662) 4월 21일 상(上)
이때 경읍(京邑)의 스님 200여 명이 봉래궁(蓬萊宮)으로 가서 표(表)를 아뢰었다. 임금이 좌우의 상(相)을 청하여 말하기를, “자세히 의논하도록 칙령을 내린다. 절하고 절하지 않는 것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나중의 집회를 기다려라”라고 하였다. 스님들은 물러갔다.
마침내 서명사(西明寺)에서 큰 집회가 열려 서로 의논하여 함께 계장(啓狀)을 올렸는데, 여러 벼슬아치에게 알려 살펴볼 것을 운운하였다.
(3) 상옹주목패왕론사문불응배속계(上雍州牧沛王論沙門不應拜俗啓: 옹주의 목, 패왕에게 사문이 속인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논하는 계를 올림) 석도선 등
승 도선(道宣) 등이 말씀드립니다.
금하(金河)33)에서 자취를 옮겨 옥문(玉門)34)에서 교화를 떨치면서부터 대대로 성인이 나셨고, 비로소 훌륭한 보필이 융성하였습니다. 머리를 조아려 도를 청하고 귀향하여 나루를 알게 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찰이 열지어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되고, 인사(仁祠)가 바둑돌이 놓인 듯이 빽빽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천상과 사람이 복전(福田)의 길을 우러르며, 유명(幽明)이 정도(正道)의 의례를 지니며, 믿음이 청정한 선비들이 숲을 이루듯 모이고 고상한 빈객이 구름처럼 결집하였습니다. 교(敎)를 삼법(三法)35)으로 나누어 만대에 우의(羽儀)를 드리웠고, 지위를 4부(部)36)로 열어 5승(乘)37)의 청범(淸範)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법해(法海)가 넓어서 무리 지은 것을 나누기 어렵고, 지나치게 범하는 것이 날로 늘어나 임금이 살펴보심을 더럽혀 비상의 조칙을 내려
임금과 부모에게 절하라 하시면서 측은한 감회를 드리워 드러나게 조정의 의론을 소통하시니, 스님들이 이와 같은 성명하신 명령을 입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참으로 그 행실이 빛을 내는 때를 결여하였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주상의 근심과 은혜를 입으며 또한 법의 가르침이 동점(東漸)하여 거듭하여 융성하였다가 쇠하였습니다. 세 번이나 박해받고 다섯 번이나 굴복함을 만난 것도 모두 휴명(休明)의 시대가 아니었고 포악한 군주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포된 명령은 나라를 다스리는 전모(典謨)가 아니었고, 상도에 어긋나 양사(良史)의 꾸짖음을 초래하였습니다. 일의 이치는 되돌리기 어려우니, 다시 옛 나루를 답습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왕이 왕도[京甸]를 통치하시고 기형(機衡)을 부리시니, 도속(道俗)이 이에 와서 소생하여 번잡한 일을 쉬게 되었습니다. 지금 법문(法門)이 폐쇄되어 성교(聲敎)가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장애를 잠재우고 어려움을 없애려는 때와 빠진 사람을 구제하고, 위기를 제거하는 때에 의거하여 스님들은 대궐문을 두드려 미치기 어려우니, 다만 학처럼 목을 길게 빼고 구중(九重)을 기다립니다. 하늘의 계단은 오르기가 어려우니 마침내 여러 가지 생각으로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이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마음속의 생각을 펼치는 이유는 굽어 커다란 은혜가 드리워져 흠뻑 적셔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여래께서 부촉하신 바를 따르고 존숭하며 맑은 바람이 구해(九垓)에 미칠 것이며, 정교(正敎)의 상법(像法)이 다시 흥륭하고 경복(景福)이 사해(四海)에 빛날 것입니다.
실로 궁색함을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이같이 알려드립니다. 소란이 극심함을 생각하면 실로 부끄럽기만 합니다.
삼가 올립니다.
4월 25일
(4) 상영국부인양씨청론사문불합배속계(上榮國夫人楊氏請論沙門不合拜俗啓:영국 부인 양씨에게 사문이 속인에게 절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계를 올림)양씨 부인은 제후의 모친이다. 정법의 교화를 공경하고 숭상하여 복의 문호를 크게 이룩하였다. 성상(聖像)을 이룩하고 경서(經書)를 서사하되 끊이지 않고 이루었다. 궁궐에 출입할 적마다 보태어 안부를 묻지 않았다. 스님들이 그 문정(門庭)을 방문하여 이같이 편지를 보낸다고 한다.
승 도선(道宣) 등이 말씀드립니다.
삼보(三寶)가 동쪽으로 흘러온 지 6백여 년간, 사속(四俗)이 계율에 귀의하는 인(因)을 세우고, 5중(衆)이 복전의 임무를 열었습니다. 백왕(百王)이 지도(至道)의 덕화를 이어가되 만대에 이르도록 유성(惟聖)의 풍화를 부채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환해(寰海)가 그 돌아갈 바를 알게 되고, 생령(生靈)이 회향(廻向)할 바를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지혜의 태양이 사라진 지 천여 년이 되어 이미 바른 행은 오르기 힘들고 엄한 과급(科級)은
범하기가 쉽습니다. 드디어 강아지풀과 돌피가 푸른 밭을 두루 더럽히게 되었고, 어리고 건장한 이가 백수(白首)의 징조를 품는 것은 그 사례가 전대의 경전에 갖춰져 있어 이를 듣거나 보게 됩니다. 또한 성인은 숨었다 하여도 평범한 스님들은 기(器)를 드러내었으니, 후대의 주지(住持)함이 이와 같지 않다면 과연 누가 현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금석(金石)과 진흙으로 성상(聖像)의 얼굴을 나타내고 법의와 삭발로써 온전한 스님들의 모양을 본뜹니다. 의지하여 믿고 훼손하는 것에는 그 과보가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이와 같이 닦임에 어긋나서 모두 정도(正道)가 아닙니다.
게다가 스님들의 참되고 거짓됨은 익었는지 설익었는지를 알기 어려우니, 행실과 덕망의 깊고 얕음은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모두 미혹됩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공양을 형통하게 하라고 말하였으니 마치 끝없는 바다와 같고, 율마다 별과(別科)를 제정한 것도 마치 단애(斷涯)에 끝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근본 갈래[宗途]가 이미 나열되어 명교(名敎)가 이에 의지하는데, 세속을 벗어나는 위의가 마련되어 참다움으로 나아가는 원만한 덕화(德化)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천룡(天龍)으로 하여금 공경을 다하여 유계와 현계로써 마음을 돌이키게 하여 널리 지켜 마음속에 새기며 공덕의 흐름을 끊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비유해 보면 혼탁함에 물들여지는 때를 지나서 사람들은 시들어지고 와전됨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옷을 훔치고 꾸미며 속이는 무리들이 함부로 허무(虛無)에 기대는 반려(伴侶)들을 끌어들여서 그 행실은 진속(塵俗)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도법(道法)에서는 헌장(憲章)을 가리고 있습니다.
주상이 이를 열람하시고 임금과 어버이에게 절을 시키고자 하면서도, 하늘 같은 은덕을 드리워 조정에서 재론하라고 조칙을 내렸습니다. 스님들은 안으로 반성하여 송구스러워하는 것이 마치 불로 지진 듯하고 불에 타는 듯 하였으며 지킴을 잃은 것을 서로 돌아보며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불교는 4부(部)에 널리 통하여 접촉되는 것이기에 유명(幽明)조차 이에 대해 감히 생각하게 됩니다. 가만히 의논해 보면 부인이 보내어진 부탁을 처리해 주셨습니다. 하물며 다시 이러한 바르고 선함을 체득하고 이를 섬기는 마음을 내시어 궁궐에 규범을 내리셔서 도속(道俗)에 밝음을 이루심에 있어서랴?
지금 삼보가 묻혔고, 중생 구제를 이루는 것은 연(緣)에 달려 있기에 물음을 내어서 말씀드리니, 부디 구하여 제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꺼내져 발탁됨을 입어 옛날에 의지하여 주지(住持)하게 된다면 부촉하신 바에 귀의하여 여기에서 널리 지킬 것입니다.
가볍게 간략하게 아뢰니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삼가 올립니다.
4월 27일
(5) 간제재보서불교융체장(簡諸宰輔敍佛敎隆替狀:여러 재보에게 편지하여 불교의 융체를 서술하는 장계)
『열자』에서는 “주(周)나라 목왕(穆王) 시절에 서쪽 끝에서 화인(化人)이 찾아와 산천(山川)을 거꾸로 하고 성읍(城邑)을 옮기어 참으로 천변만화가 끝이 없었다. 목왕이 그를 신처럼 존경하고 성인처럼 중시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무렵이 부처님의 교화가 처음 이뤄진 때입니다.
주사행(朱仕行)과 석도안(釋道安)의 경록(經錄)에서는, “진시황 시절 서역(西域)의 사문 18명이 와서 진시황을 교화하였으나, 이에 따르지 않고 그들을 옥에 가두자 밤중에 금강장륙인신(金剛丈六人身)이 나타나 옥문(獄門)을 깨고 구해 내었다. 이에 진시황이 머리 숙여 사과하였다”고 합니다.
『한서』에서는, “무제(武帝)가 원수(元狩) 연간에 서역을 개척하다가 금인(金人)을 얻었는데, 크기가 1장 남짓하였다. 감천궁(甘泉宮)에 세워두고 황제가 대신(大神)이라 생각하여 향을 피우고 예배하였다. 나중에 장건(張騫)을 파견하여 대하국(大夏國)에 가서 찾아보게 하였더니 신독국(身毒國)이란 곳이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천축(天竺)이었다. 저쪽에서 부도(浮圖)라 이르는 것이 바로 불타(佛陀)이다. 이것이 처음 부처의 이름과 모양이 알려진 것이다”라고 합니다.
성제(成帝)의 도수사자(都水使者) 유향(劉向)은, “내가 장서(藏書)를 검토해 보다가 가끔씩 불경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에서 이미 행해졌으니, 시황(始皇)이 태웠으나 다 태우지 못한 것입니다.
애제 원수(元壽) 연간에 경헌(景憲)을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가게 하여 부도의 경전을 외어서 돌아왔다. 이때에 한나라 경계에 약간이나마 재계(齋戒)가 행해졌다고 합니다. 이것에 의하면 일찍이 불법이 알려졌으나 중도에 숨었다가 다시 여기에서 중흥된 것입니다.
후한 명제(明帝) 영평(永平) 연간에 임금이, 금인(金人)이 대전(大殿) 앞으로 날아오는 것을 꿈꾸고, 바로 진경(秦景) 등을 서역으로 보내어 불법을 찾아보게 하였습니다. 드디어 삼보를 얻어 동쪽의 낙양으로 전하였습니다. 석가의 입상(立像)을 그렸으니 이는 불보(佛寶)이고, 『사십이장경』을 번역하였으니 이는 법보(法寶)이며, 가섭마등(迦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 스님이 오셨으니 이는 승보(僧寶)입니다. 낙양성 서문쪽에다 절을 짓고 사람을 제도하여 개화하였으니,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가서 전전하며 주지(住持)하다가 한조(漢祚)에서 마쳤습니다.
위씨(魏氏)의 1대 5주(主) 45년간, 존경하는 것이 점차로 깊어졌으나, 스님들에게 절을 시켜 이를 훼손시킨다는 일을 일찍이 듣지 못했습니다.
오씨(吳氏)의 강표(江表) 4주(主) 59년간, 손권(孫權)이 불법을 개칭하고, 서상에 감득하여 절을 세워 ‘건초(建初)’라 이름하였습니다. 그 후 손호(孫皓)가 가혹한 정치를 하여 이 같은 일을 없애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의 간언으로 중지하고, 마침내 스님들을 모셔다 5계(戒)를 받았습니다.
또 촉(蜀)에서는 2주(主) 43년간, 이때에는 군국(軍國)의 나라로 불교를 도모하여 믿음을 훼손하였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진(晋)나라 사마씨(司馬氏)가 동서로 정치를 이룩하여 12주(主) 156년간입니다. 중조(中朝) 가운데 네 사람의 황제만이 믿음이 지극하여 다른 의논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직 동진(東晋)의 성제(成帝) 함강(咸康) 6년(340)에 승상(丞相) 왕도(王導)와 태위(太尉) 강량(康亮)이 죽고 나서 유빙(庾氷)이 정치를 보좌하였는데, 황제가 어렸기에 황제에게 조칙을 내리게 하여 스님들에게 절을 시켰습니다. 이때에 상서령(尙書令) 하충(何充)과 상서(尙書) 사광(謝廣) 등이 절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의논하였는데 오고 가며 세 번이나 품의하여 당시에 바로 수그러졌습니다.
그 뒤로 62년 후 안제(安帝) 원초(元初) 연간에 태위(太尉) 환현(桓玄)이 주상의 위엄을 떨치게 하고자 칙서를 내려 절하게 하였으나 상서령 환겸(桓謙)과 중서(中書) 왕밀(王謐) 등이 이에 반대하여 간언하기를, “지금의 사문이 비록 마음속으로는 깊이 존경하지만 형체를 굽히는 것을 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자취가 솔토(率土)에 가득하고 그 갈래가 방내를 벗어났으니, 이로써 외국의 군주들도 엎드려 절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아육왕 등이 비구에게 예배한 고사이다. 참으로 도가 있어야 귀한 것이지 사람으로 경중을 삼지 않습니다.위문제(魏文帝)가 간목(干木)에게 절하고, 한(漢) 광무제(光武帝)가 자릉(子陵)을 만났던 일들이다. 생각해 보면, 대법(大法)이 동쪽으로 유전되어 나날이 더해져 매우 오래되었는데, 풍화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었어도 그것을 넓히는 것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찌
홀로 뛰어난 교화로써 날마다 점진적으로 도야하는 것이 아니겠으며, 깨끗하게 단속하는 기풍은 극성한 다스림에 지장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환현이 다시 여산의 혜원 법사에게 편지를 내어 노자(老子)가 왕후(王侯)를 균등히 하여 3대(大)라 한 것을 서문으로 하였습니다. 혜원 스님이 “방외(方外)의 의례는 제화(諸華)의 예법에 예속되지 않는다”고 대답하셨으니, 이에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다섯 편을 지어 그 같은 일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안제(安帝)가 정권을 되돌리자 다시 믿음을 되돌려 받들다가 공제(恭帝)에서 끝이 났습니다.
송(宋)나라의 유씨(劉氏)는 8군(君) 5기(紀)인데, 비록 효무제(孝武帝) 대명(大明) 6년(462) 잠시 군주에게 절을 하도록 제정하였지만 선대의 정치에 의거하였습니다.
제(齊)ㆍ양(梁)ㆍ진씨(陳氏)의 삼대 110여 년간 극진히 존중하되 한결같이 하여 신심이 날로 깊어졌습니다.
중원(中原)의 위씨(魏氏) 10여 군주 155년간 불법이 크게 유포된 것은 위수(魏收)38)의 양사(良史)에도 보입니다.
오직 태무제(太武帝) 진군(眞君) 7년(446)에 참언(讒言)을 듣고 정법을 멸하였으나, 결국 5년 만에 염병에 걸려 붕어(崩御)하였습니다. 이에 다시 불법이 흥륭되다가 정제(靜帝)에서 끝을 맺었습니다.
진(晋)나라가 중원을 잃고 나서 강표(江表)에서 황제를 칭하였으니, 급기야 나라가 열여섯으로 나뉘었습니다.5량(涼)ㆍ4연(燕)ㆍ3진(秦)ㆍ2조(趙)ㆍ하(夏)ㆍ촉(蜀)이다.
이때 여러 위정자들이 정법을 믿어 어긋남이 없었으나, 오직 혁련발발(赫連勃勃)만이 하주(夏州)를 점거하고 흉포함이 끝이 없어 살생만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등 위에 성상을 차고서 스님들에게 절을 시켰으나 나중에 벼락 맞아 죽었습니다. 그 뒤 얼마 안 있다가 끝내 북대(北代)에 병탄되었습니다. 처자식이 형벌에 처해진 것은 소자현(蕭子顯)의 『제서(齊書)』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고제(高齊)39)는 업(鄴)에서 6제(帝) 28년간, 믿음을 예전보다 두터이 하여 나라에 두 가지 섬김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우문주씨(宇文周氏)40)는 5제(帝) 25년간, 처음 무제(武帝)가 불법을 깊이 믿다가 나중에 장빈(張賓)의 품의를 받아들여 바로 도법(道法)을 접수하여 불교를 없애려 하였습니다. 이때 도안 법사가 있어
「이교론(二敎論)」을 지어 대항하였는데, 논문에서 “9류(流)는, 그 가르침이 몸에 그치는 것이기에 외교(外敎)라 이름한다. 3승(乘)은, 그 가르침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니, 내교(內敎)라 이름한다. 노자는 교주(敎主)가 아닌데, 『역(易)』의 겸괘(謙卦)를 거론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황제가 이를 듣고 보존하고 폐지하는 이치가 어긋나게 되자 바로 둘 다 폐지하였습니다. 그러나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게 되자 정권이 바로 옮겨졌습니다.
수씨(隋氏)가 운을 이어 2제(帝) 37년간, 문제(文帝)가 믿음을 존숭하여 다시 불법을 일으키면서 해내(海內)에 탑을 설치한 것이 무려 백여 주(州)나 됩니다. 모두 아름다운 상서로움을 나타내었으니, 『도전(圖傳)』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양제가 부록(符籙)을 잇고 전조(前朝)를 개혁하면서 비록 스님들에게 절을 시켰으나 스님들이 끝내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대화(大化)가 동쪽으로 유포된 지 600여 년간 세 번 박해를 당하고 다섯 번 절을 하게 되었으니, 이미 나라를 다스리는 전모에 어긋났으며, 또한 휴명(休明)의 정치도 아닙니다. 잘리고 베이는 가혹함을 어지러운 왕조마다 겪었으며, 그 꿇어앉히는 의례가 후사가 단절된 왕조마다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사리에 어긋나는 전철(前轍)을 밟게 되었으나, 참으로 삼보(三寶)는 귀계(歸戒)의 종지이고, 5중(衆)41)은 복전의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비록 믿음과 박해가 교차하였고 재앙과 허물이 옮겨지더라도,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 망하고 흥하는 바가 있는 것이지 도에 처하여 일찍이 흥하고 폐한 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천여 대성(大聖)42)께서 현겁(賢劫)의 대기(大期)에 나와 그 수명이 6만 년으로 석문(釋門)의 정법에 머물렀습니다. 하물며 열여섯 분의 존자(尊者)께서 삼주(三洲)에서 도를 이루시며 9억의 응공(應供)43)께서 사부대중을 지키는 데 있어서입니까? 이에 의거하여 이어가되 운수를 다하여도 끝이 없는데 폐하는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 단정하여 유가(儒家)의 경전에 합치시키려 합니까?
또 『주역』의 「고궤(蠱卦)」 효사(爻辭)에서는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예기』의 「유행편(儒行篇)」에서는 “천자를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세속의 4위(位)에도 일찍이 굴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세속을 버리고 도를 따르는데, 이를 책망하여 신첩(臣妾)의 예를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또 호천(昊天)의 상제(上帝)와 악독(嶽瀆)의 영기(靈祇)는 참으로 인군(人君)의 주재(主宰)인데도 제향(祭饗)하며 하배(下拜)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지금 스님들은
부처님의 계율을 받아 그 형체에 부처님의 모습을 갖추었으니, 천룡팔부(天龍八部)도 그 도를 받들어 그 모습을 우러르며 스님들에게 절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명우(冥祐)를 뚜렷이 징험하고 서상(瑞祥)이 갖가지로 피어났던 것입니다. 예전에 전해 들은 것입니다. 어찌 다시 노씨(老氏)와 일치하여 왕후(王侯)를 3대(大)와 균등히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사문이 생(生)에 의탁하여 재물과 여색을 돌보지 않고, 영화와 봉록(俸祿)에도 매이지 않으며, 시속(時俗)을 뜬구름처럼 보면서 형명(形命)을 아지랑이처럼 달관(達觀)하니, 이 때문에 출가인(出家人)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한 번 출가하면 가인(家人)의 예법을 남기지 않고, 한 번 세속을 벗어나면 세속에 처하는 의례에 물들지 않으면서 그 도를 뚜렷이 하는 것은 실로 백 대(代)에 변하지 않는 전범입니다. 그 흐름이 극히 넓기 때문에 간략하게 기술하겠습니다.
지금44) 불경(佛經)에서 사문이 속인을 경배(敬拜)하지 않는 것을 밝힌 대목을 나열하겠습니다.
『범망경(梵網經)』 하권에서는, “출가인의 법도는 국왕ㆍ부모ㆍ육친에게 예배하지 않는 것이니, 또한 귀신을 섬기지도 않는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열반경』 제6권에서도, “출가인은 재가인(在家人)에게 예배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분율(四分律)』에서도,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장유(長幼)의 순서대로 절하게 하였으나, 일체의 백의(白衣)에게 절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불본행경(佛本行俓)』 제53권에서는, “수두단왕(輸頭檀王)이 여러 권속과 백관(百官)과 더불어 차례대로 부처님께 절을 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 ‘왕은 지금 우바리(優波離) 등의 여러 비구에게도 절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왕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5백의 비구와 새로 출가한 이들에게 정례하였는데, 모두 차례에 따라 절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살차니건경(薩遮尼乾經)』에서도, “만약 성문(聲聞)45)과 벽지불(辟支佛)46)의 법이나 대승법(大乘法)을 비방하고 훼손하여 헐뜯으며 비평을 하는 자는 근본죄(根本罪)를 범하는 것이다.지금 스님들이 대승과 소승의 경전에 의거하여 임금과 부모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불교를 받드는 것으로, 명령을 내려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고 속인에게 절하게 하는 것은 실로 부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근본죄를 범하는 것이다. 또 선악의 업보가 없다고 비방하여 후대(後代)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스스로 교인(敎人)으로 만들어 견고하게
주처하여 버리지 않는 것, 이것을 ‘근본중죄(根本重罪)’라 이름한다. 대왕이여, 만약 이 같은 죄를 범하여 스스로 참회하지 않는 자는 선근(善根)을 소멸하여 무간지옥(無間地獄)의 고통을 받게 된다. 왕이 이 같은 불선(不善)의 중업(重業)을 행했기 때문에 범행(梵行)의 아라한과 여러 선인(仙人)과 성인(聖人)들이 나라를 떠나갔다. 여러 천상이 이를 슬퍼하며 여러 선량한 귀신들도 그 나라를 지키지 않았다. 대신(大臣)이 서로를 보필하되 다툼이 일어나 서로를 해치고, 사방에서 도둑이 일어나더라도 천왕(天王)이 하강하지 않으며, 용왕이 숨어서 홍수와 가뭄이 나서 순조롭지 않으니, 죽는 이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때 사람들이 그 허물을 알지 못하고 여러 하늘을 원망하고 여러 귀신을 탓하는데, 이 때문에 행법(行法)과 행왕(行王)이 이와 같은 고난에서 구해 주게 하려면 이 같은 허물을 짓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한 것은 경전의 말씀과 같은 데다 다시 여러 논문마다 많이 나와 있기에 더 이상 싣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승47) 도선 등이 조정의 대신과 여러 공경(公卿)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삼가 임금과 아비에게 절하라는 조서(詔書)를 보게 되니, 참으로 그 사리(事理)가 깊고 원대하여 감히 얕은 마음으로는 헤아리지도 못하겠습니다. 출가의 자취는 열성(列聖)이 규칙을 가지런히 하며, 진속(眞俗)의 과급(科級)은 백왕(百王)이 수레바퀴를 같이합니다.
간목(干木)48)이 위(魏)나라에 있으면서 목을 높이 쳐든 채로 문후(文侯)를 알현하였고, 자릉(子陵)49)이 한(漢)나라에 살면서 장읍(長揖)50)의 예로 광무제(光武帝)를 찾았습니다. 저와 같이 소도(小道)라 칭하는 이조차 오히려 고답(高蹈)의 문호를 가슴에 새기는데, 어찌 이 사문이 한방(閑放)의 아름다움을 드리우지 못하겠습니까?
단지 삼보로써 그 자리를 누리고 귀경(歸敬)의 의례(儀禮)를 펼치며, 오중(五衆)으로 성심(誠心)을 펼쳐서 나날이 복전(福田)의 길을 열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깎아서 유가(儒家)의 예법과 같이 한다면 부처님도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낮추어서 임금과 아비에게 절해야 한다면 스님들은 공경할 만한 부류가 아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삼보가 완전히 폐지되고 귀의계(歸依戒)가 인륜(人倫)을 끊게 되고 유도(儒道)를 스승으로 삼게 되어 공자의 경전을 석가의 전적보다 높게 여길 것입니다.
예전의 진(晋)나라와 송(宋)나라에도 그 전대(前代)의 규범을 갖추고자 팔좌(八座)51)가 품의를 상세히 하였으니, 참으로 귀감 삼을 만합니다.
스님들이 국가의 각별한 은혜를 입어 출가가 개방되었기에, 법을 받들어
도를 행하며 성스러운 준칙(準則)만 우러르다 갑자기 절하게 되니 경전에 심히 누를 끼치게 됩니다.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참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내법(內法)의 경전과 고사(故事)를 열거하여 앞서와 같이 거론해서 조정의 의론(議論)에 간책으로 쓰고자 하니, 청컨대 자세히 살펴봐 주십시오.
공경스럽게 아룁니다.
5월52) 15일에 9품 이상의 문무 관료와 주(州)ㆍ현(縣)의 관리들 천여 명이 중대(中臺)의 도당(都堂)에 모두 앉아 그 일을 논의하였다. 이때 경읍의 서명사(西明寺) 사문 도선(道宣)ㆍ대장엄사(大莊嚴寺) 사문 위수(威秀)ㆍ대자은사(大慈恩寺) 사문 영회(靈會)ㆍ홍복사 사문 회은(會隱) 등 3백여 명이 경문과 앞서의 소장(訴狀)을 가지고, 고사를 열거하며 그 이치를 폈다.
이때 사례(司禮) 태상백(太常伯)과 농서군왕(隴西郡王) 박차(博叉)가 여러 스님들에게 “칙령에서는 속관(俗官)들에게 품의를 상세히 하라 하였으니, 스님들께서 물러가셔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당시 갖가지 의논이 분분하여 한 가지로 확정하지 못하자, 농서왕이 “불법이 황제의 대를 연이어 전해진 것이 이미 오래되는데도, 칙령을 내려 임금과 아비에게 절하라 하시면서 다시 조정의 논의를 허가하셨습니다. 지금 대중이 이치를 세우더라도 그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사례(司禮)가 이미 “직사(職司)가 먼저 건의를 하면 이에 동의하는 자는 서명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그대로 두기로 합시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사례대부(司禮大夫) 공지약(孔志約)이 붓을 들어 장계(狀啓)를 서술한 것은 뒷장에 나온 대로이다.
주사(主事)에게 크게 낭독케 하고 바로 지위에 따라 서명케 하였으니, 서명한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좌숙기(左肅機) 최여경(崔餘慶)이 “칙령을 내렸음에도 직사(職司)가 별도로 논의를 세우는 것은 명에 따르지 못하는 것과 같은지라, 사례가 해산을 청한 다음에 각각 별도의 장계를 대(臺)로 보냅시다”라고 말했다.
이때 보내진 의논된 문장의 누르고 기리는 것이 실로 잡다하였다. 지금 담당하는 바의 상하에 따라 이를 따로 구분하였으니, 절하지 말라는 글을 먼저 열거하고, 그 다음에는 함께 절하자는 장계(狀啓)를 개진하고, 그 뒤에 절하자는 의논을 기술하였다. 좋고 나쁜 것을 모두 기록하였는데, 그 건건은 다음과 같다.
(6) 중대사례태상백농서왕박차대부공지약등의(中臺司禮太常伯隴西王博叉大夫孔志約等議:중대사례 태상백, 농서왕 박차, 대부 공지약 등의 의논)53)
가만히 살펴보면 백 가지 자리에 있어 비록 윗사람을 존경하는 도를 지니더라도 스승으로 삼아서는 오히려 불신(不臣)의 의리(義理)가 있는데, 하물며 부처님께서 법을 드리워 그 일은 속세의 기준을 넘어서고 머리카락을 깎는 것은 형체의 손상과 같고 석장을 짚는 것이 비녀를 꽂거나 끈을 매는 것과 달리하며 출가는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부모를 봉양[色養]하는 경계가 아닙니다. 진속(塵俗)을 벗어났는데 어찌 이름을 명예롭게 하는 경지이겠습니까?
공덕은 제도(濟度)를 깊게 하고 도는 숭고함을 지극하게 합니다. 어찌 반드시 저 현문(玄門)을 깨뜨려 유교(儒敎)의 자취로 끌어가려 하십니까? 석복(釋服)을 열어 제치고 공구(孔丘)처럼 절하라 하니, 세속의 길에 처하여 마땅히 예배를 본받게 하는 것은 바로 그 가르침을 기리면서 그 도를 훼손하려는 것이고, 그 복을 구하면서 그 몸을 굽히게 하는 것입니다. 두세 번 거듭 검토해 보아도, 도의 이치에 어긋난다고 하겠습니다.
또 도의 가르침으로 삼는 것은 비록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온전히 하는 것인데, 비록 출가하여 세속을 벗어나더라도 그 돌아감은 한 갈래입니다. 게다가 멀리 천구(天構)를 표방하여 황기(皇基)를 크게 열었는데, 그 이치를 존엄에 의지하고 법식(法式)을 고상함에 맞추었습니다. 아울러 옛 관례에 따르더라도 이장(彝章)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만약 반드시 이를 고쳐야 한다면 옛것을 잘 살핀 것이 아닌 듯합니다. 비록 임금과 부모를 기리고 존중함으로써 신충(神衷)을 가슴 아파하더라도 도법(道法)을 이지러뜨리기가 참으로 어려운지라, 다시 슬기롭게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이미 순추(詢芻)54)의 조칙을 받들었으나, 진악(塵嶽)의 정성됨을 다하더라도 만족시켜드리지 못함이 송구스럽기에 두려움만 깊어집니다.
(7) 사원의(司元議) 1수
형체를 이기(二氣)에서 본받으니 엄부(嚴父)를 막대(莫大)의 지존(至尊)이라 호칭하고, 쓰임은 오재(五材)55)에서 바탕으로 하니 원후(元后:천자)를 측천(則天)의 고귀함으로 표방하였습니다.
무릎 꿇고 손을 모아 인사드리는[擎跪曲拳] 예절은 도화(陶化)의 반려들도 함께 따르고, 힘써 일하며 봉양하는 방도는 회생(懷生)의 무리들이 함께 기강으로 삼습니다. 임금과 아비에 있어서 그 이치는 명언(名言)을 끊습니다.
노자와 석가 이문(二門)이 진속을 떠나 허무(虛無)의 한 가지 이치로 유(有)를 없애고 공(空)에 회통하니, 그 서상이 비야리(毘耶離)56)에서 보이며 자비의 게송을 천양하였습니다. 또 기운이 함곡관에서 떠돌며 『도덕경(道德經)』의 편장(篇章)을 열었으며, 목안(木雁)57)의 사이에 처하여
양생(養生)을 염려하며 색성(色聲)의 모양을 그치고 적멸(寂滅)을 마음으로 삼았습니다. 또 예의를 밟아가는 이는 그 묘한 요체(要諦)를 다하지 못하며, 충효를 마음속으로 따르는 이는 그 파란(波瀾)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치는 태극(太極)에 우선하여 있으며 일은 생령(生靈)의 겉을 떠났으니, 이 때문에 그 도를 존중하게 되면 복식을 달리하며 그 가르침을 중히 여기게 되면 예법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근고(近古)에서부터 말대(末代)에 이르기까지 연혁(沿革)이 잠시 이지러졌더라도, 이 같은 도는 실추됨이 없었으니 슬픔으로 쌍수(雙樹)에 묻히자, 세 번 통곡함에 이르러서는 후진(後進)이 그 풍화에 어긋남을 예방하였습니다. 유종(儒宗)을 단속하여 법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옛 가르침을 보충하여 이루는데 어찌 새로운 의례를 제정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대궐의 위엄을 굽혀서라도 방외(方外)의 이치를 펼쳐야 하며, 존친(尊親)의 중함을 거두어서라도 환중(寰中)의 유행(遊行)을 따라야 합니다. 어리석은 신의 좁은 소견으로는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의논드립니다.
(8) 사융의(司戎議) 1수
신이 듣자오니, 삼재(三災)58)에서 그 불로 변하고 6도(度)에서 그 응축(凝縮)을 뛰어넘으니, 이자(二字:孝子經)를 경전으로 삼는 것은 백성들이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로써 백호(白毫)59)로 모양을 드러내어 1승(乘)을 만겁에 천양하였으며, 자기(紫氣)의 그림자를 나타내어 만 가지 갈래를 하나의 이치로 섞었습니다.
이에 유진(儒津)이 있고 인진(軔軫)으로 그 나루를 건너며 천지음양(天地陰陽)의 부여받은 것을 아름답게 하며 군신과 부자의 화목함을 예법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따라서 진실을 바라고 자취를 재어 그 형체를 단정히 하기에 저 가르침이 궐리(闕里)에 우선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려 힘써 행하며 오는 것을 닦고 지나간 것을 뉘우치니, 그 교화가 연하(連河:尼連禪河)에서 점차로 이루어졌습니다. 석가로서 내방(內防)을 삼고 위대한 궁궐에 바르게 제도를 두고 유가(儒家)로 외검(外檢)을 삼아 그 영대(靈臺)를 단속할 수 없다면 별도로 현종(玄宗)의 근본 규범이 있어서 풍물(風物)을 떨쳐 버립니다. 9만 리를 간다는 붕새를 짧게 날게 하고 메추라기를 오래 날게 하며 8천 년을 산다는 대춘나무의 명을 재촉시키고 조균을 오래 살게 한다면서 꾀함도 없고 하는 일도 없는데, 무엇을 얻을 것이고 무엇을 잃겠습니까?
그러나 도교와 불교의 두 가지 가르침이 모두 삼보(三寶)를 갖췄으니, 불교는 불(佛)ㆍ법(法)ㆍ승(僧)으로 종지를 삼고, 도교는 도(道)ㆍ경(經)ㆍ사(師)로서 이치를 삼는데, 어찌 그대로 생(生)을 섭수하여 의탁함이 있게 하고, 성품을 연마하여 그
자량(資糧)을 형통하겠습니까? 진실로 다스리게 되어 이와 같은 기틀을 이루게 됩니다. 성예를 보좌하고 교화를 농후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구는 깨우치지 못하고 선생은 편벽만 많아지고, 세속을 벗어남만을 자랑하여 떠돌며 편안하게 지내고 거만하게 허풍을 떨면서 필부의 비천함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형해(形骸)를 만승천자에게 곧추 세우며, 자식을 키워준 은혜를 잊고 3대(大)에 몸을 숙이지 않습니다. 진실로 임금과 아비가 마땅히 바꾸어야 할 것이며 신자(臣子)로서 그 그릇됨을 알아야 합니다.
드디어 임금의 윤음이 내려지고 그 폐단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효를 다하고 충성에 머물며 창언(昌言)하여 그 자취를 고치고 비록 옛것을 돌이켜 도를 사모하더라도 군정(群情)을 참작해야 하니, 메아리를 생각하는 이는 계곡에서 그 소리를 꺼지지 않게 하며, 진속을 어루만지는 자는 산에서 작은 것이라도 거리를 두지 않으며, 반드시 여인(輿人)60)의 칭송을 갖추고 추요(蒭蕘)의 말씀을 천거하였습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주하사(柱下史:노자)가 서쪽으로 떠돌며 천여 개의 제사가 있었고, 정법(正法)이 동쪽으로 유포된 지 600여 년이 되었습니다. 비록 역법이 시조(市朝)에서 변하더라도 일에는 손실과 이익이 없습니다.
오직 유빙이 사문의 배례(拜禮)를 책망하고 환현(桓玄)이 비구의 예법을 논의하였는데, 다행히 하충(何充)이 간언을 올리고, 혜원이 편지를 보내어서 그 같은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아 도가 마침내 실추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대역(大易)은 삼성(三聖)을 경륜하고,61) 고상(蠱象)은 왕후를 섬기지 않았으며,62) 대례(大禮)는 양의(兩儀)에 충만하였으며, 유자의 행동은 천자를 신하 삼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엄릉(嚴陵)이 앉은 채로 광무제를 만났고, 아부(亞夫)63)가 장읍(長揖)의 예로 한문제를 만났는데 거만한 태도가 어찌 역린(逆鱗)을 건드렸다고 말합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은 갓끈을 매지 않는 것입니다.
옛것을 생각해 보면, 어찌 사도(師道)를 앞섰으며, 법려(法侶)가 어찌 융소(戎昭)64)에 뒤처졌겠습니까? 위로는 구천(九天)의 진황(眞皇)과 십지 보살(十地菩薩)로부터 아래로는 남산(南山)의 사호(四皓)65)와 회남(淮南)의 팔공(八公)66)에 이르기까지, 혹 그 기풍에 순응하여 예를 다하기도 하고, 혹 기운을 부려 그 처소에서 노닐기도 하며 일관하여 몸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10실(室)의 조그만 읍에도 충성스럽고 미더운 사람이 있으니,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까?67) 오형(五刑)이 내려져 삼목(三木)68)에 관련된 자는 절하지 않으니, 어찌 오덕(五德)을 갖추어 삼복(三服)69)에 머무는 이를 절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내린다 하여도 책망하지 못하니,
엄숙한 덕(德)의 성심(誠心)을 공손히 하여야 받아들여 기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함식(含識)의 부류와 회생(懷生)의 부류는, 그 몸을 내던져서 충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더라도 저와 같다면 왕의 신하가 되지 않으며 힘을 다하여 효도를 다하더라도 저와 같다면 그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게 됩니다.
비록 간략하게 삼장(三章)으로 하고 율령(律令)을 3척(尺)의 죽간으로 가벼이 하더라도 여기서는 매한가지입니다. 삼천(三千)의 위의(威儀)가 크더라도 덮이지 않고, 살벌한 죽임으로 크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입니다. 어찌 도가(道家)ㆍ석가(釋迦)와 요(堯)ㆍ공자가 제도를 달리하며 훼손과 예교(禮敎)가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연꽃은 결수(結綬)70)의 빛깔이 아니고, 패엽(貝葉)은 삭규(削珪)의 이치와 달리합니다. 속인은 속대(束帶)로서 이장(彛章)을 삼으나, 도사는 관모를 쓰되 속대를 매지 않으며, 속인은 머리를 묶어 치장을 삼으나, 불가의 사람은 삭발하여 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라를 떠나더라도 불충(不忠)이라 하지 않고, 집안을 떠나더라도 불효(不孝)라 말하지 않으니, 세상의 자질구레하고 번거로운 일에서 벗어나 임금과 부모에 대한 애정을 잘라내고 기욕(嗜欲)을 없애고 처자에 대한 정을 버리는 것은, 이치로서는 만물의 부류에 구분되고, 상도(常塗)로는 범위를 설정하여 제한할 수 없습니다.
태어남이 부모보다 중한 것이 없는지라 자식이 이별하지 않고, 보시는 천지보다 두터운 것이 없는지라 만물은 응답이 없습니다. 군친의 은혜에 일마다 명상(名象)을 끊었는데, 어찌 머리를 조아리고 머리를 굽힌다고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출가하는 것이 임금과 아비에게 어찌 완전히 그 보를 돌리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까?
한 생각에 반드시 인왕(人王)으로 원수(願首)를 삼고, 4제(諦)는 부모에 대한 홍익(弘益)으로 삼으니, 바야흐로 진겁(塵劫)을 없애서 생사를 벗어나게 된다면 어찌 무릎 꿇는 것으로 충성을 다한다 하겠으며,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것으로 효를 다한다고 하겠습니까?
반드시 세속의 경계를 싸안고 유사(儒肆)에 처하며 그 용모를 굽히고 예를 다해야 한다면, 불효(不孝)가 후사를 끊는 것보다 지나침이 없는데, 어째서 혼인을 강제하지 않습니까? 불충(不忠)이 불신(不臣)보다 큰 것이 없다면, 어째서 신첩이라 칭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가사로 조복(朝服)을 삼고 빈도(貧道)라 칭하면서 나아가 절하게 하면, 이치와 범절의
두 가지를 잃게 되고 명칭도 아울러 어그러지니, 참으로 한 번 무릎 꿇는 이로움이 만승의 지존을 보태지도 못하고, 한 번 절하는 수고로움이 삼복(三服)의 실추를 드러내는 것이 두렵습니다. 불가한 것을 법칙으로 삼고자 하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왕은 아비가 없이 삼로(三老)71)를 섬기며 형도 없이 오수(五叟)72)를 섬기는데, 임금은 사람들 가운데 존귀한 바이지만 또한 그도 존경하는 바가 있습니다. 법복을 존경하는 것은 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 존경하는 사람을 몸을 굽히게 한다면 그 도를 비천하게 여기는 것이고, 공경하면서 도를 낮출 수 있다면 이것은 결핍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찌 공경을 자신에게 두고 도를 사물에 두는 것과 같겠습니까?
공경함을 두면 자신에게 나아가고, 도가 있으면 만물이 존중됩니다. 도를 존중하는 것은 사물에 대해 존경하기 때문이며, 사물을 존경하는 것은 역시 자기에 대해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다시 형체가 몸과 같고 도가 그림자와 같다면 몸은 이미 소리와 같고, 도가 메아리와 같아서 형체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르고, 소리가 일어나면 메아리가 호응하는 것이니, 도를 숭상하자면 그 형체를 받들어야 합니다. 몸이 숨어버리면 도도 그쳐지는데, 어떻게 몸에 머무는 도를 도 바깥의 몸에 허리를 굽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방외의 사람에게 몸 가운데의 공경을 남기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저들이 하나를 지키며 도에 머물러 진속과 섞이지 않는데, 만약 절을 시킨다면 이것은 세속의 도라고 말하니 세속화될 수 있습니다. 세속화되어 도에 참여한다면 한 가지에 바로 두 가지가 있게 되는 것이니, 도에 전적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어찌 도속(道俗)의 상역(常域)을 구분지어 전일(專一)의 지성을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승기율(僧祇律)』에 의거하면, 가사를 공경하는 것은 불탑을 공경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가사를 ‘복전의(福田衣)’라고도 하고, 그 옷을 ‘소수(銷瘦)’라고도 이름하는 것은 이것을 입어 번뇌를 없애버릴 수 있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개(鎧)를 ‘인욕(忍辱)’이라 이름하는 것은 마군을 항복시킬 수 있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이 또한 연꽃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제불(諸佛)의 당번(幢幡) 모양이 되기 때문에 참으로 가사의 뜻은 지극합니다.
이처럼 불탑을 손상하거나 저와 같이 당번의 모양을 파괴하며, 장차 인욕을 업신여겨 다시 복전(福田)을 손상하며 심히 위태로운 의심을 이용하게 된다면
마침내 버리고 취하는 것에 미혹하게 됩니다. 옷을 벗고 절하게 한다면 월나라의 풍속으로 장보(章甫)의 의례(儀禮)가 아닙니다.
옷을 단정히 하고 나아가게 한다면 치의(緇衣)는 조정의 전범(典範)과 다릅니다. 이 때문에 사위(舍衛)의 경계에 선유(禪幽)하며, 고문(高門)의 땅에서 보병(步屛)하게 됩니다. 이치로는 조정의 청을 끊고, 일로써는 알현의 영광에 어긋납니다. 어찌 내가 그 도를 숭배하는 것은 저쪽에서 오는 것을 청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청해 놓고서 그것을 비천하게 여긴다면 다시 무엇을 하겠습니까?
여산(廬山)은 도덕이 머무는 바인지라, 수간(搜簡)의 예(例)에 처하지 않고, 감당(甘棠)은 청송(聽訟)이 그치는 바이므로 법식조차 만물을 자르지 않는 사려가 있어야 합니다. 산이 나무와 더불어 무심하니, 덕으로써 만물을 남겨야 법이 도와 더불어 넉넉함이 있을 터인데, 어찌 도를 숭상하면서 그 사람을 보내고자 합니까?
따라서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다면 도는 사람을 필요로 하여 행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왕이란 사람은 비록 미천하더라도 위치로는 제후의 위에 있는데, 수행자들이 어찌 그 예를 낮출 수 있겠습니까?
만약 두 갈래가 속여 어긋난다면 하나만 취하여 그것을 버려두게 됩니다. 그것을 버려두게 되는 도는 ‘삼치(芟薙)’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빼앗는 바가 더욱 많은데 어찌 허리를 숙이게 하는 것에 그치겠습니까?
만약 두 갈래가 여러 가지 도움이 된다면 바로 그것을 숭상하게 됩니다. 그것을 숭상하는 도는 ‘존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찌 그 도를 존귀하다고 하면서 도리어 공경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임시로 금취(金翠)를 진의(眞儀)로 삼더라도, 금취로써는 엄숙함을 늘리지 못합니다. 추구(蒭狗)로써 상(像)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추구로써는 가벼움을 더할 수 없습니다. 엄숙히 하고 공경하는 것은 끝내 도에 의탁하는 것이니, 그 경중이 만물에 관계하지 않습니다. 만물이 도를 옮길 수 없는 것은 도(道)가 항상 만물에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사문이 옷을 잘못 입고 법복을 밑천으로 삼아 귀하게 되는 것이니, 그 법복을 공경하는 것이 어찌 사람에 달려 있는 것이겠습니까?
절하지 않는 전범(典範)도 그 이치가 경률(經律)에 드높으니, 법을 국왕에게 부촉하였고 일은 지켜 보호하는 것에 의지합니다. 법을 항상되게 하면서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한 모퉁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천문(千門)이 밝아질 것입니다. 그 형통하는 것은 호법(護法)의 자량(資糧)에 있고, 이를 막는 것은 법을 실추시키는 우려에 있습니다. 그 실추시키는 것과 함께하면서 어떻게 보호한다고 하겠습니까? 하필이면 스님들의 용모를 꺾어 법복을 반벽(盤辟)하여 만국의 귀의하려는 자로 하여금 그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을 하게 합니까?
“사람이 이롭게 여기는 것으로 인하여 이롭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이롭게 여기는 술(術)은 또한 그 정예(精詣)로 인하여 이로워지는 것입니다. 일광(日光)이 위에서 비치고, 황운(皇運)이 높이는 바에 미쳐서 바다는 천황(天潢:은하수)에 접하고 가지는 보구(寶構)에 연이었습니다. 무상(無上)의 도에 의지하여 무강(無疆)의 업을 천양하며 별씨(別氏)와 타족(他族)도 공경하여 오히려 그 가는 바를 숭상할 것입니다. 신기(神基)와 영고(靈泒)의 도로 어찌 지금을 지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한 가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월지(月氏)의 동국(東國)에서 보조(寶祚:임금의 자리)를 이에 기다리고, 정수(定水)가 그윽하게 파도치며 정법의 구름이 아롱져 만물을 윤택케 하여 해탈의 경사(慶事)를 드높이고 상주(常住)의 복을 흐르게 하여 전왕(前王)과 후제(後帝)조차 전대(前代)에 숭상하며 따랐는데, 성주(聖主)와 양신(良臣)이 어찌 이것을 바꾸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음으로 천 번이나 되새겨 보더라도 부득이한 것이니, 이 같은 연(緣)이 만들어지더라도 장래에 이로움이 없을 터입니다. 항하(恒河)의 모래같이 많은 겁(劫)에 있어 호리(毫釐)만큼의 누가 있다면 비록 솔토(率土)마다 그 머리를 부수고 군생(群生)의 뼈를 갈더라도 어찌 이를 숨겼다는 책망을 막을 수 있으며, 불충의 죄를 어찌 없앨 수 있습니까?
이 또한 가당치 않은 두 번째의 이유입니다.
신이 그 일을 급급히 하고 그 정성을 구구히 하려는 까닭에 머리를 긁고 가슴을 쓰다듬으며 간담마저 씻습니다.
삼가 성조(聖朝)께서 지극한 가르침을 중흥시키고, 늘 내원(柰苑)을 봄과 같이 따뜻하게 하여 법륜(法輪)을 영원히 굴리시기를 바랍니다. 일심으로 그 사람을 기쁘게 거두고 만복이 임금의 거처에 멀리서 비추게 된다면, 만약 죽더라도 사는 것과 같다면 아침저녁과 같이 짧은 순간이라도 좋을 것입니다.
가만히 미루어 보면, 조칙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 이치가 너무 어려워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천정(天情)을 한 가지로 꾀하시어 이에 연유하게 하여 슬기로운 생각으로 그 측근의 품의를 구하시니, 누가 사려를 다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용렬한지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두 가지 가르침을 무(無)로 삼는다면, 참으로 성운(聖運)에서 숭상하는 바이니, 거룩하여 숭상한다면 무(無)가 아닙니다. 두 가지 가르침을 유(有)로 삼는다면, 밝은 때에 첨삭하며 시에 맞춰 제거하는 것은 아마도 유(有)가 아닐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갈림길에서 떠돌며 양 갈래가 서로 다투나, 도는 그 자취를 남겨야 하고 이치는 그 마음으로 싫증내지 말아야 하는데, 작은 구멍으로 어찌 하늘을 본다 하겠으며, 우물 안 개구리가 어찌 바다를 헤아린다 하겠습니까?
이치가 서기(庶幾)의 바깥으로 끊어졌고, 일이 지식(智識)의 기준을 넘어섰습니다. 스스로 문필의 일에 종사하다가 붓을 놓고 적막함을 두드렸다가 소리를 없앱니다.
새들이 모인 곳에서 헤아려 말하고 피리 소리가 나는 곳에서는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며 귀머거리가 세상에 나와도 세속(世俗)과 함께하고, 장님과 더불어 함께 늙어갑니다. 비록 심령을 다한다고 해도 끝내 그 보고 듣는 것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팔풍(八風)으로 멀리 부채질하고 만뢰(萬籟)로 모두 그 소리를 바치며, 양요(兩曜)가 휘황하게 떠오르면 천 가지 형태가 그 그림자를 숨기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아마도 자취를 사모함이고 법규를 돌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해를 따르는 해바라기 같아져서 냇가마다 감로가 맺힐 것입니다.
한여름에 뜨거운 것을 먹듯이 얼굴에 땀을 흘리며 마치 봄철에 얇은 얼음 위를 밟고 지나가듯 전전긍긍하니, 이에 두려움이 함께 밀려듭니다.
삼가 의논드립니다.
(9) 사형태상백유상도의(司刑太常伯劉祥道議:사형 태상백 유상도의 의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조정의 질서는 엄숙히 공경하는 것을 우선하고, 생육(生育)하는 은혜에 있어서는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부모를 봉양[色養]함을 중하게 여깁니다. 석가와 노자의 두 가지 가르침이 지금 모두 이에 어긋나니, 제왕과 동등한 예절로 마주하며 도리어 부모에게도 공경을 받으면서도 관대하게 받아들이며 옛날부터 지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이치를 대체로 찾아보면 모두 그럴 만한 연유가 있습니다. 참으로 삭발은 관면(冠冕)과 달리하는 것이며, 가사는 장복(章服)을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출가하기 때문에 가인(家人)의 공경도 없고, 세속을 버리고서 어찌 조정의 예법에 구애받겠습니까?
현교(玄敎)의 청허(淸虛)함과 도풍(道風)을 멀리 비춤에 이르러서는 그 일을 고상히 하고 왕후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으며 제왕에게도 신하가 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이를 말하자면, 국가가 이미 그 도를 보존하기에 그 몸을 굽히지 않게 된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장(前章)에 근거하여 관례에 어긋남이 없게 하십시오.
삼가 의논드립니다.
절하는73) 것을 의논한 자들은 사문이 마땅히 절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예전에 황각(皇覺)이 우내(宇內)를 다스리며 일찍이 믿고 훼손하는 근원을 열었는데, 어떻게 상법(像法)과 말법(末法)에 넓히고 간략케 하는 의논이 흐르지 않겠는가? 최근에 법해(法海)가 넓어서 그 부류를 나누기 어려우니, 마침내 현유(玄猷)를 더럽히게 되었다.
대체로 조정에서의 논의를 들어 보니, 문리(文理)에 구애받는 선비들은 도를 폐하고 사람을 따르자고 한다. 그 말을 비교해 보면, 참으로 방역(方域)에 형통한 큰 창도라 말할 수 없다.
내가 이로써 여러 가지 옛일을 고찰하여 진실에 따라 이를 엄격히 하니, 부처님을 따르는 군자들은 혹 상세히 살펴보기를 바란다.
36) 의사문겸배장(議沙門兼拜狀) 3수
(1) 좌위위(左威衛) 장사(長史) 최안(崔安)과 도록사(都錄事) 심현명(沈玄明) 등의 장계(狀啓)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실로 자기(紫氣)74)가 참다움을 솟구치고 현빈(玄牝)75)의 풍화가 서쪽으로 드리우며, 흰 무지개가 교화를 드리워 열반의 그늘이 동쪽으로 흘러왔습니다. 날개를 부리어 노을을 타고 옥경(玉京)에 그림자를 드리워 온갖 오묘함을 거두고, 나루에 자비로움을 적막하게 비추어 금원(金園)을 열어서 지극한 도로 융화시키니, 그 뜻이 공(空)과 유(有)에 우뚝하며 이치가 희이(希夷)76)에 통하였습니다.
속진(俗塵)이 쌓임을 없애고 다스려서 인(因)의 누업(累業)을 씻어내어 신도(神道)로써 가르침을 보호하니 이로써 일찍이 조짐이 있었습니다. 머뭇거림을 평탄히 하여 업은 이미 따르는 것을 존중하고 폐해진 것을 흐르게 하여 이치는 징혁(徵革)된 것에 의지하였습니다.경계하여 말하기를, “법을 지켜 고상함을 칭하여 유폐(流弊)라고 한다. 경전에 어긋나게 속인에게 절하게 하는 것을 징혁(懲革)이라 한다. 일이 불가하니 그 이치를 어찌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재삼(在三)77)의 공경을 근본으로 하여 육위(六位:六爻)로 존비(尊卑)의 상(象)을 엄격히 하며 백행(百行)은 사시(四始)78)에 근본하여 망극(罔極)의 말씀을 드리웠습니다. 근본이 세워진 연후에야 도가 생겨나고, 형체를 공경히 하여 여기서 예법이 조화롭게 되었으니, 진실로 왕법(王法) 교화의 시초이고 천지의 경략(經略)입니다.
부처님은 법으로써 스승을 삼고 제왕은 하늘로써 준칙을 삼으니, 역(域) 가운데 4대(大)79)가 있어 왕자가 그 한 구역에 머물게 됩니다. 왕(王)과 도(道)는 이미 그 저울을 나란히 하고, 천(天)과 법(法)이 견고하여
일관됩니다. 몸은 법기(法器)이니, 법이야말로 도의 근본입니다. 황색 관을 쓰고서 도를 사모하고 물들인 옷[緇裳]을 입고 부처님을 받들면서 임금과 아비에게 경례하는 것이야말로 그윽한 파도에 묘하게 합쳐집니다.경계하여 말하기를 , “불법은 환외(寰外)의 지존(至尊)이고, 제왕은 역중(區中)의 지존이다. 그 가르침을 기리면서 엎드려 절하라 하니, 이는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환속시켜 세속의 사람으로 편입하려는 것이다. 이로써 법수(法水)가 막혀서 흐르지 않을 터인데, 어찌 그윽한 파도에 묘하게 합쳐지겠는가?
또한 계록(戒籙)은 높더라도 모배(膜拜)80)로써 엄숙함을 다하여야 하니, 하물며 귀하고 천함이 현격한데 순식간에 무릎을 꿇어 공경됨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경계하여 말하기를, “왕밀(王謐)이 ‘사문은 상하가 모두 공경하나 예법은 동등하다. 궁궐에 머무는 이가 그 종치(宗致)를 같이하여야 장유(長幼)로써 순서를 두게 된다. 나루로 나아가는 길은 현격함이 있으니, 그 이치에 절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참으로 그 말이 귀감 삼을 만하다”고 하였다.
반드시 산림에 홀로 다니며 물아(物我)를 아울러 잊고, 가깝고 먼 것을 섞으며 총애와 욕됨을 같이하면서 나에게 은택을 내리는 것을 옳다 하지 않고 자신을 훼손시켜도 어찌 그르다고 말하겠습니까?
스스로 묻히어 무정(無情)과 같이 하고 고즈넉하여 늘 적막합니다. 어찌 헛되이 가유라위(迦維羅衛)를 우러르며 이마를 조아리며, 천존(天尊)을 바라보고 바르게 절하겠습니까?
진용(塵容)은 세속과 다르지 않으니, 경례를 올리게 하여도 참다움에 어긋나지 않습니다.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문은 머리를 깎고 치의(緇衣)를 입으니, 이처럼 도속이 다르기 때문에 절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쯤은 경문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절하더라도 참다움에 어긋나지 않고 용납하는 것은 세속과 다를 바가 없이 하려는 것으로, 이는 남쪽을 가리키며 북쪽이라 이르고, 흰 것을 검다고 말하는 것이다.
백양(伯陽:노자)이 화광(和光)81)에서 가르침을 시작하여 가볍게 여기지 않은 것은 상례(常禮)에서 가르침을 펼치고 묘하게 겸존(謙尊)의 덕을 조화롭게 하고 멀리 인조(隣照)의 규범에 부합하였습니다.경계하여 말하기를, “백양은 희주(姬周)에 태어나서 그 몸으로 주사(柱史)를 지냈는데, 관리가 된다는 것은 바로 왕조의 한 직책을 맡은 것이다. 보통 도가를 유가와 한 부류라고도 하니, 임금과 아비에게 절을 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4중(衆)에게 경시하지 않는 예법은 권도(權道)의 하나이다. 당시에 오히려 문명(文命)은 나속(裸俗)에 들어가 옷을 벗은 것과 같았다. 솔토(率土)를 예로 하여 모범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삼극(三極) 가운데에서 스승이 그 말단에 처하니, 말단은 경례를 드러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무엇이 의심스럽다고 애통해 합니까?경계하여 말하기를, “석가의 대중은 스승과 제자가 서로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가르침의 이치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그 본말을 대략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어찌 이같이도 맹랑한가?”라고 말하였다.
만약 가사가 용보(龍黼)와 다르고, 곡건(縠巾)이 별변(鷩弁)과 달라서 그 복색이 이미 서융(西戎)의 것인데 절하는 것은 어째서 반드시 화하(華夏)의 방식이어야 합니까? 각자 그 근본에 따라 이식(彛式:법식)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원래 바르게 은둔하여[貞遯]82) 청규(淸規)가 세속에 떨쳐져 신화(神化)가 영향을 끼치고 계행(戒行)에 정미하게 힘쓰며 문채는 오동나무에서 난새가 날개를 펼치듯이 화려하고 범행(梵行)은 밤에 학이 날아오를 듯이 청정합니다.
금정(金旌)은 짐승들을 부르고 경부(瓊符)로 다스려 덕이 빼어나고 나이 많은 이는 그 절하며 경례하는 것을 없애고,
그 나머지 초학(初學)이나 후진으로 성예(聲譽)가 하잘것없는 이는 아울러 임금과 아비에게 경례를 다하게 해야 합니다.
청하건대 늘 하는 헌장(憲章)에 편입하도록 하십시오.경계하여 말하기를, “만약 절하지 않는 것을 그르다 한다면, 덕이 높거나 연세가 높은 이는 어째서 제외하는가? 만약 절하지 않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후진의 초학이라도 절하지 말아야 한다. 그 진퇴가 참으로 모순되고 없애고 취하는 것이 저절로 어긋난다. 이를 늘 하는 헌장으로 편입하라고 하니, 어찌하여 소견이 이리도 짧은가?”라고 말하였다.
이같이 하여 덕으로 나아가 업을 닦게 하면, 진속으로 나아가는 자취가 날로 융성해지고, 고난 속에서도 절개를 지키며 단(壇)에 깃들면 도에 들어가는 마음이 날로 장려되어 현풍(玄風)이 이로써 원대해지고 국장(國章)이 날로 모아질 것입니다. 경칙(景則)이 자세하게 드러나 잘못된 것이 조용히 가지런해지기를 바랍니다.경계하여 말하기를, “종(宗)에 어긋난 것을 ‘경칙’이라 한다. 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도리어 잘못되었다. 이 같은 것을 근거하여 다른 것을 징험해 보더라도 무엇을 볼 만한 게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스스로를 법칙으로 삼는데 어찌하여 옛것에 구애받겠습니까? 비상(非常)의 이치를 거울삼자면, 반드시 비상의 비춤에 근거해야 하니, 천감(天鑒)으로 그윽이 열람하여 슬기로움을 체득하여 미묘함을 드러내 밝힙니다. 상외(象外)의 유종(遺宗)을 탐색하고 환중(環中)의 유치(幽致)를 지극히 하며, 비록 잠시 늘 듣던 바에 놀라움이 있더라도 마침내 대도를 베풀게 될 것입니다.
삼가 의논드립니다.
(2) 우청도위(右淸道衛) 장사(長史) 이흡(李洽) 등의 장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교는 충허(冲虛)하고 불교는 비적(秘寂)하다고 하겠습니다. 어짊을 밝혀서 만물을 구제하고 이치를 숭상하여 마음을 삼는 데 이르러서는 유풍(儒風)을 돌아보고 이치로써는 다름이 없습니다.경계하여 말하기를, “유교(儒敎)에서 밝힌다는 것은 환역(寰域)을 넘어서지 않는다. 석종(釋宗)만이 이를 가려서 그 견문을 높이니, 이로써 위나라 동양왕(東陽王) 비(丕)가 ‘불법의 충흡(沖洽)함은 유가나 묵가로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지금도 그 같은 말이 다르지 않으니, 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덕이 쌓이고[宿德] 나이가 많이 들도록[耆齒], 계율에 어그러짐이 없이 숲 속에 살고 골짜기로 숨으며 그 일을 고상하게 하니, 이 같은 사람들은 실로 존중할 만합니다. 그 외의 약관(弱冠)으로 어리석어 구하며 수양하나 알려짐이 없는 사람은 참다움을 등지고 세속에 섞여서 마음과 행실에 위배됨이 많습니다. 이러면서도 절하지 않는 것은 이치로도 그 형통함을 윤허(允許)하기 어렵습니다.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문(沙門)이라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법을 이어서 현자를 본받고 우매한 이를 계도하고자 함이다. 그 의례에 진신(搢紳)의 장식이 결여된 것은 그 가르침이 묘랑(廟廊)의 규거와 달리하여 종지를 구하려는 까닭으로 단지 그 몸을 드러내는 것이니, 누가 그 덕업(德業)을 나눌 수 있겠는가? 세속을 바로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예를 동등히 하는 것이다. 어찌 존귀함과 비천함으로 간격을 둘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단지 집 안에 있으면서, 또 나라 안에 있으면서 부모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데, 절을 하지 않는 의례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경계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임금과 아비를 받들고자 한다면 반드시 절하여야 한다. 그러나 사문은 왕후(王侯)를 받들지 않고 천속(天屬)의 은혜조차 등지는데, 절을 시키는 것으로 가르침을 삼는다니, 생각이 없는 듯하다”라고 말하였다.
바라건대
억지로라도 절을 시켜서 후대에 모범을 내리십시오.
삼가 의논드립니다.
(3) 장안(長安) 현령 장송수(張松壽)의 장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불교와 도교의 두 가지 문은 그 허적(虛寂)함이 일치합니다. 비록 마음을 방외(方外)로 다스려서 인간 세상에서 자취를 물리칠 수 없더라도 자취는 세속과 더불어 나누고 일은 시간과 더불어 간격을 두어야만 합니다.
지금 출가한 사람들 가운데 세속의 무뢰배가 많이 섞여 있으니, 바깥으로는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를 높이고, 안으로는 사사로이 만나는 것에만 힘을 쓰기 때문에 헛되이 도에 들어갔다는 이름만 남아 있고, 끝내 세속을 여읜 실다움이 없습니다.경계하여 말하기를, “무릎 꿇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를 죄를 따져 벌주지 않는 것은 법을 받들어 그렇게 한 것이다. 사사로이 알현하는 것은 진실로 가르치는 뜻에 어긋난다. 단지 저와 같은 불령(不逞:반역자)한 부류에 대해 엄격하게 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곤륜산에 불을 놓아 옥석(玉石)을 모두 태우려는 것인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임금과 부모의 자리와 같음에 이르러서는 그 예법이 신자(臣子)를 겸해야 하며, 효도와 공경을 줄기로 삼아야 그 이치가 집안과 나라에 깊이 합니다. 제도(制度)가 없다면 무엇으로 다스려지겠습니까?
바라건대 승니ㆍ도사ㆍ여관(女冠) 등은 도(道)로써 당시의 필요한 바를 삼고, 일은 법으로 인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비록 군후(君后)에 있어서는 구식(舊式)에 의거하여 듣더라도 이것을 버리고 이미 절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돌아가서 부모를 보게 되면, 자식의 도리를 마땅히 베풀어야 하며, 도관이나 절에 있을 때에는 석가의 전적에 따라야 합니다.경계하여 말하기를, 승니는 합배(合拜)한다면 마땅히 절해야 한다. 합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때를 가리겠는가? 어찌 삭발을 한다고 해서 똑같이 한 사람이 되겠는가? 입장에 따라서 요약하면 다름을 여는 것이다. 하지만 법복을 예로 하는 것은 시종일관 두 가지가 없다. 일에 처하여 마침내 다른 경(經)을 만드니, 이것은 곧 두 갈래에서 머뭇거리는 것이고, 때를 구하여 망령되게 서 있는 것이다.
비굴하게 몸을 굽히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삼아 다소나마 헛되게 다투는 것을 막으며, 도덕으로써 스스로를 높여 점차로 교법(敎法)을 넓히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좁은 소견을 올리기에 삼가 엎드려 두려움만 늘어납니다.
삼가 의논드립니다.
(4) 중대사례태상백농서왕박차집의장주(中臺司禮太常伯隴西王博叉執議狀奏:중대사례 태상백 농서왕 박차가 의논하여 아룀)83)
사례(司禮)ㆍ승니ㆍ도사ㆍ여관 등이 임금과 아비에게 절하는 일을 논의하되, 1,539인이 논의 끝에 절하지 않게 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대사성령(右大司成令) 호덕분(狐德棻) 등이 논의하여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모든 사람이 재위(在位)에 있을 때에는 모두 윗사람을 받드는 도를 융성하게 하지만 그 스승된 이는 오히려 불신(不臣)의 의리가 있게 됩니다. 하물며 부처님께서 법을 드리우시자 일은 상규(常規)를 벗어났습니다.
삭발하는 것이 몸을 손상시키는 것과 같은 데다 석장을 떨치는 것은 비녀를 꽂는 것과 다릅니다. 출가하는 것은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부모를 봉양[色養]하는 경계가 아니라 세속을 벗어 버리는 것이니, 어떻게 벼슬길에 나아가는 경지이겠습니까?
공을 깊이 하여 제도하고 도를 지극히 하여 숭고하게 하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저 현문(玄門)을 깨뜨려 이러한 유가(儒家)의 자취로 끌어들여야 합니까? 법복을 벗고 속인에게 절을 시켜 공문(孔門)을 답습하여 석례(釋禮)를 행하게 하는 것은, 그 가르침을 보존한다면서 그 도를 훼손하려는 것이고, 그 복을 구한다면서 그 몸을 비굴하게 하는 것이니, 이치를 상세히 따져 보아도 흡족하지 못함이 있습니다.
또 도(道)가 규범을 삼는 것이 비록 신체발부를 온전히 하는 것이더라도, 출가하여 세속을 벗어나는 것은 그 돌아감이 한 가지 갈래인 데다 더욱이 멀리 천구(天構)를 표방하고 황기(皇基)를 크게 열었으며, 이치는 존엄에 의지하고 그 법식(法式)은 고상함에 부합하였습니다.
실로 이 두 가지 가르침은 서로 이어진 지 오래이니, 우리 대당국에 이르러 아름다운 풍화를 더욱 떨치게 되었습니다. 비록 왕의 도모하심이 멀리 펼쳐지고 실제로 하늘의 공에 의지하여 성스러운 법륜이 늘 굴려져 진실로 명조(冥助)를 불러들였습니다.
지금 하루 아침에 구법을 고친다면 장래에 이로움이 없을 터이니, 항하(恒河)의 모래같이 많은 겁에 터럭만큼의 누업을 일으키게 되면, 넓은 하늘 아래 솔토에서 그 몸을 태우고 뼈를 갈더라도, 어떻게 법을 쇠망케 하였다는 책망을 막을 수 있으며, 불충(不忠)의 죄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그 개창하여 잃는 것이 차라리 수문(修文)에 어긋나는 것만 못하니, 공자도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84)고 말하였고, 노자도 성인은 항상된 마음 없이 백성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85)고 하였으니, 두 가지 가르침의 이로움은 홍익(弘益)이 많습니다. 백성의 마음은 그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많습니다. 그 이로운 바를 바꾸는 것은 이로움에 인하는 도가 아니고, 그 본심에 어긋나는 것은 무심(無心)이라 말하지 못합니다.
청하건대 옛 법의 진실됨을 따라 절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삼가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덕이 상황(上皇)을 가려 업이 하문(下問)에서 빛났으니, 임금과 부모의 공경은 신충(神衷)을 열어내더라도 도법은 어그러지기 어렵고 도리어 슬기로운 생각만 남게 됩니다.
이미 아래 사람에게 물어보는[詢蒭] 칙지를 받들어 감히 진악(塵嶽)의 참다움을 다하였습니다. 두 가지를 조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두려우니 마음속으로 송구스러움만 더합니다.
다시 1,354인이 논의하여 절을 하도록 주청하였습니다.
우겸(右兼) 사평(司平) 태상백(太常伯) 염립본(閻立本) 등이 논의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신이 듣자오니 굳센 것은 끊어지고 부드러운 것은 보존됩니다. 현풍(玄風)의 묘한 이치를 부채질하고 그 형체를 쓰게 하고 욕됨을 달게 여기어 석로(釋路)의 미언을 떨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선하(善下)의 근원을 열어서 불경(不輕)의 의리를 열 수 있습니다. 이로써 성문(聲聞)도 거사에게 절을 하고 주하사(柱下史)는 주왕(周王)에게 위지(委質)86)하였다. 이것은 치복(緇服)의 본보기[表綴]를 이루고 황관(黃冠)의 귀경(龜鏡)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이래로 그 근본의 궤범을 잃고 역대에 진리를 그르쳐서 세속을 익히며 그 미혹의 길을 지켰으나, 참으로 한 사람이 하는 바는 만물이 굽어보는 것입니다.
천지를 이어가고자 황왕(皇王)으로 대가(大駕)를 몰아 뛰어난 경계로 금륜(金輪)을 굴리고 현역(玄域)에다 옥경(玉京)을 이룩하였습니다. 바로 참다움을 찾는 도사(道士)로 하여금 수장(守藏)의 옛 풍화를 따르게 하며, 삭발한 사문으로 하여금 예가 구비된 면전(綿典)을 넓히도록 하였는데, 하물며 태양이 하늘에 빛남을 드리우며 둘이 아닌 밝음을 표방하는 데 있어서 이에 대제(大帝)가 존귀함을 자칭하며 우내(宇內)를 다스리니, 그 지극함이 삼재(三才)의 존귀함으로 통합니다.
또한 두 가지 가르침이 규범을 만드는 것은 비록 속진(俗塵)의 용모를 끊었더라도, 그 일이 출가하는 것에 불과해서 나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함께 그 형체를 사경(姒鏡)에 비추게 되니,87) 모두 요풍(姚風)을 우러러 교화하였으니, 어떻게 대궐[宸居]과 동등한 예로 홀로 참다운 자취를 드높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지존(至尊)을 업신여기고 나이 많은 이를 얕보는 것은 인륜(人倫)의 패악(悖惡)입니다. 임금의 신하가 되고 아비를 공경해야 도에 혐의가 없어지니, 그 의리를 상세히 살피시어 무릎 꿇고 절하도록 윤허하십시오.
앞서88) 4월 16일, 승니ㆍ도사ㆍ여관 등이 임금과 아비에게 절하도록 명하는 칙지를 받들었으나, 항상된 것을 그르칠까 염려하여 유사(有司)에게 부촉하여 상세하게 논의하고 상주케 하셨는데, 그 상주(上奏)의 문건이 앞서와 같습니다.
삼가 칙지를 받듭니다.
(5) 정사문배군조(停沙門拜君詔:사문이 임금에게 절하는 것을 정지하라는 조서) 당 고조
동대(東臺)의 약부(若夫)는 중국 후손의 열성(列聖)과 자취는 달리하지만 다 함께 굴러가고
중토(中土)와 외국의 교화를 고루 다스리니, 백 가지 생각이 한 갈래로 이른다.
주(周)나라에서 밤에 유성이 떨어지고 한(漢)나라에서 꿈에 연이어 빛났으니, 묘한 교화가 서쪽에서 옮겨져 그 은혜로운 흐름이 동쪽에 덮였다. 현빈(玄牝:노자의 도)의 그윽한 이치와 벽락(碧落)의 드문 소리는 육순(六順)89)의 기틀을 함께 열고, 오상(五常)의 근본에 모두 화합하였으니, 이로써 사랑하고 공경하는 땅에서 무릎 꿇고 모습을 잊게 되었다. 그 유례가 오래되니, 이 같은 폐단을 바꾸지 못한다.
짐이 제위에 올라 정사를 돌보며 참다움을 숭상하여 세속을 인도하고자 해탈의 나루를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상명(常名)의 경계를 깊이 생각하였다. 바로 존친(尊親)의 도는 예경(禮經)의 격언으로써 우애로운 의리는 시인(詩人)의 밝은 기준이 되었다. 어찌 속세를 끊은 빼어난 규범이라도, 믿음의 공경을 잊을 수 있겠는가?
잘못됨을 없애며 규범을 방정히 하면서 따뜻하고 맑은 질서를 남기고자 하니, 앞서 도사ㆍ여관ㆍ승니들에게 절하도록 명하였으나, 항심(恒心)에 놀라움이 미칠까 염려스럽다.
이를 상세히 하여 정하도록 하였더니, 유사가 모두 전고를 인용하고 아울러 정리(情理)를 개진하여 두 가지 갈래를 연혁하여 보니 분분하여 서로 반반이다.
짐이 여러 의논을 살펴보고 그윽한 이치를 깊이 따져 보았으나 기영(箕潁)90)의 교화로 세속의 일을 고상하게 하였다. 전대에까지 멀리 생각해 보니, 참으로 있음직한 일이다.
지금 임금이 자리하더라도 절을 할 필요가 없으나, 그 부모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양육이 더욱 깊어져서 공경하고 복종함을 밝혀서 장차 편안하게 이룩되도록 하라. 지금 이후로는 마땅히 무릎 꿇고 절하도록 하라.
주무 관헌은 이를 시행하도록 하라.
용삭(龍朔) 2년(662) 6월 8일 서대시랑(西臺侍郞) 홍문관 학사 경차도위(輕車都尉) 신(臣) 상관의(上官儀)가 선포하다.
(6) 상사문응불배친표(上沙門應不拜親表:사문이 부모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는 표를 올림) 정사옹(程士顒) 등
신이 아룁니다.
신이 듣자오니, 부처님의 교화에서 의지하는 바는 만물이 귀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진실로 6도(道)91)에서 침명(沈冥)92)을 건져 올리고 3승(乘)93)에서 몽식(蒙識)을 제도하니, 그 덕은 이미 넓혀지고, 그 공(功)은 또한 커졌습니다.
부처님께서 법왕(法王)이 되신 것도 유계와 현계가
귀의한 바입니다. 법으로써 양약을 삼아야 번뇌의 4혹(惑)이 이로써 맑아지고 없어집니다. 스님들은 부처님의 종자인지라 미래제(未來際)에 널리 펼치시어 역대의 영주(英主)로 하여금 도덕을 중히 여겨 보호하고 유지하도록 하였고, 믿음이 깨끗한 현명한 자들로 하여금 자녀를 출가시켜 이어나가게 하였습니다. 진실로 승니가 구우(區宇)에 두루하며, 그 규범을 내려 한량없이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구유(九有)를 자비롭게 제도하시고자 1승(乘)을 개창하셨으니, 애경(愛敬)의 도가 융성하고 성무(成務)의 길은 더욱더 멀어졌습니다. 가까이 밝은 조칙을 받들어 스님들에게 부모에게 절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야말로 효도의 시초를 기리는 것이고 공경의 근원을 펴는 것이지만 불교에는 진실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출가하여 그 부모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도(道)와 세속(世俗)이 그 나루를 달리해서 계율에 귀의하여 투신하여 출처가 둘이 되어 달리하고 진속이 그로 말미암아 어그러지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부처님의 계율을 받아 그 형체로 부처님의 모습을 갖추고 법의 그물이 현격하여 공경하는 모양조차 완전히 다릅니다. 스스로 고상히 하는 기풍이 있어서 인주(人主)에 대해서조차 오히려 동등한 예를 두려고 하니, 어찌 신하로서 도리어 무릎 꿇고 절하는 의례를 받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며 가슴을 매만져 봐도 그 같은 뜻을 열 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원컨대 나라에는 두 가지 공경함이 없으니, 크게 방외의 자취를 열어 스님들은 내교(內敎)를 받들어 바로 그 몸을 세워 도를 행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사사로운 마음이 지극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표를 받들어 이같이 올리오니, 참으로 위엄을 더렵혔습니다.
엎드려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삼가 올립니다.
(7) 직동대사인풍신덕상(直東臺舍人馮神德上:직동대사인 풍신덕이 올림)94)
첫째, 도사나 승니가 옛것에 의거하여 승니가 전과 같이할 것을 청합니다. 이 1조(條)는 정관(貞觀) 11년(637)에 있었다. 지금은 위와 합하여졌다.
둘째, 승니가 옛것에 의거하여 부모에게 절하지 않을 것을 청합니다.95)
신이 듣자오니, 비교(秘敎)가 동쪽으로 유포되자, 현명한 군주로 인해서 그 교화를 천명하였고, 현풍(玄風)이 서쪽으로 옮겨지자, 식(識)에 의지하여 종지를 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문(千門)을 널리 제도하여 그 이치는 아도(雅道)를 펼쳐서 만품(萬品)을 끌어 유인하여 이치는 삿된 나루를 막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성교(聖敎)에 따라 이를 누르고 고양하는 것이지, 어찌 인사(人事)에 따라 흥하고 망할 수 있습니까?
사문(沙門)이란 미래의 승과(勝果)를 구하는 이들이고, 도사(道士)란 유생(有生)의 자연을 믿는 이들입니다. ‘자연’이란 성진(性眞)을 취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서 그 가까운 거짓된 자취를 끊는 것입니다.
‘승과’란 뜻에서 조짐을 미리 막아 멀리 도로 향하는 마음을 열어내는 것입니다. 인도하여 제도하는 원천이 비록 같지 않더라도, 선을 따르는 것은 마침내 하나의 길로 돌아가게 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가 원(元)을 끌어안고 극(極)을 세워서 일(一)을 다스려 정(貞)으로 날아가고 대도(大道)를 타서 겸(謙)을 유포하며, 무위(無爲)에 순응하여 두루 제도하여 마음으로 만물을 회통하니, 그 교화가 엄숙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에 도교와 불교의 존귀와 비천을 정하시어 사문을 엎드려 부복하도록 누르시는데, 엎드려 절하는 것은 상례(常禮)와 같이하는 것으로 세속을 벗어나는 일은 그 존귀함과 비천함에 있지 않습니다. 물아(物我)의 정(情)을 어찌 무위(無爲)의 오묘함이라 말하겠습니까?
폐하께서 도풍(道風)을 천양하시어 석가의 가르침을 대대로 개진하시면서 매번 재기(齋忌)에 이를 때마다 언제나 복을 기도하게 하시는데, 복을 기도하는 것은 처음부터 경전의 가르침에 의지하시면서 다시 어찌 어긋나게 하십니까?
폐하는 조화(造化)의 신종(神宗)이시고 부모는 인자(人子)의 자칭(慈稱)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지극히 중하더라도 절시키는 의례를 멈추셔야 합니다. 태어나는 것은 이미 인신(人臣)이라 말하는데, 어떻게 완곡하게 정례(情禮)를 펴실 수 있습니까?
존귀함을 버리고 애호함으로 나아가시며, 중한 것을 버리시되 경전에 어긋나는지라, 그 정리에 연(緣)하는 바가 오히려 형통하시지 못한 듯합니다.
가르침에 의거하여 혹시라도 행을 쓴다면, 폐하께서 하늘을 거느리어 도를 빛내시고, 만물에 순응하여 그 형체를 유포하시더라도, 일찍이 형체와 물건 사이에 어긋남이 허용되지 않는데, 청청한 가르침이 어찌 고쳐질 수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폐하께서 천상과 사람의 뜻에 기인하여 만물의 마음에 순응하신다면, 엎드려 부복하는 새로운 의례를 중지시켜서 존귀함과 비천함의 구관(舊貫)에 따르게 하십시오.
금광(金光)이 동쪽에서 빛나고, 진속의 슬픔을 보태지 않으며, 자기(紫氣)가 서쪽에서 빛나서 물아(物我)의 귀함에 놀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바로 대도가 혼미하지 않으니, 밝은 시절의 성대함을 얻게 되면 복업(福業)이 영원히 방정해져서 성일(聖日)이 더욱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8) 상영국부인양씨론배친무익계(上榮國夫人楊氏論拜親無益啓:상영국 부인 양씨에게 부모에게 절하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논하는 계) 석 도선(道宣) 등
승 도선 등이 아룁니다. 저희들이 가만히 듣자니, 법을 융성케 하자면 반드시 밝은 철인(哲人)에게 귀의하고 진전(眞詮)을 받들고 보호하는 것은 진실로 총망(寵望)을 바탕으로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부인이 일찍부터 훈수(熏修)96)를 이루어 끝이 없는 복을 열어내되, 일찍이 믿음과 지혜를 표방하여 썩지 않는 인(因)을 세웠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교시하신 위의(威儀)와 법문(法門)의 궤식(軌式)에 이르러서는 은혜의 그늘을 특별히 내려서 능멸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칙령을 내려 스님들이 조정에 절하지 않도록 허용하셨으니, 참으로 부촉하신 뜻에 합당합니다. 이와 같이 깊이 은혜를 내리신 마음이 깊고도 깊습니다.
그러나 부모에 대해서는 무릎 꿇고 절하게 하시니,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다만 흡족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심히 위배됩니다. 만약 일찍이 이와 같은 것을 전해 듣지 않았다면, 아마도 속가(俗家)의 법과 같게 될까 두렵습니다. 스님들이 표주하여 감히 간언할 수가 없으니 마음이 더욱 황당한지라 이로써 간청을 드립니다. 부디 자비를 내려서 주상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은혜로운 광명에 따라 복의 경사(慶事)가 더욱 깊어질 것이니,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받들어 아뢰니 잘 살펴봐 주십시오. 세속의 어지러움이 심한 곳에서 다만 송구스움을 알 뿐입니다.
삼가 올립니다.
(9) 상청불배부모표(上請不拜父母表:부모에게 절하지 않음을 청하는 표를 올림) 석 위수(威秀) 등
삼가 기록합니다. 불경에서는 출가한 사문이 부모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니 손해됨만 있고 이로움이 없다는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범망경(梵網經)』에서는 “출가인은 국왕과 부모에게 예배하지 않는다”고 하고, 『순정리론(順正理論)』에서는 “나라의 군주는 비구(比丘)가 예로써 절하는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현교(玄敎)가 동쪽으로 유포된 지 6백여 년간 상대(上代)의 황왕(皇王)은 경전에 의지하여 우러르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성제(聖帝)가 따르며 받드는 데에 이르러 가르침을 이룸이 한층 융성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찰간(刹竿)이 늘어서 서로 마주보게 되고, 정려(精廬)가 우뚝하게 연이어 들어서자, 사람들이 선(善)을 사모함을 알게 되고,
집집마다 허물을 생각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스님들은 또한 생령(生靈)에 더해졌는데, 어찌 충효를 잊겠습니까? 밝으신 조칙을 내리시니, 지금의 솔토(率土)가 모두 따른다 하겠으나, 아마도 직필(直筆)의 사신(史臣)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났다고 기록하여 만대(萬代) 이후에 황제의 기풍이 더럽혀질까 두렵습니다.
승 위수(威秀) 등이 아룁니다.97)
가만히 듣자 하니, 진도(眞道)와 세속(世俗)이 그 구역(區域)을 달리하고, 상문(桑門:沙門)은 유생(有生)의 미련을 잘라내어 유계와 한계가 특별히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전의(田衣)98)에는 머리 숙여 절하는 모양이 없으니, 그 이치가 참으로 인정을 넘어서며 그 도가 만물과 어긋나는데, 하물며 모습을 계율에서 두드러지게 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은혜를 갚되 형해(形骸)로써 하지 않으며, 봉양을 하되 복과 선을 기약하며 의례(儀禮)를 고치지 않고 스님으로서 절을 하여 반드시 유생(儒生)과 같게 만드는 것은 스님들에게는 계율을 넘어선 허물이 있게 되고, 부모에게는 복을 손상시키는 누(累)가 있게 되는 것이니, 신자(臣子)의 생각으로는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원대한 뜻을 떨치시고 유개(幽槪)를 제장(提獎)하시며, 이미 나라마다 숭앙케 하시면서 또한 집안에서 바로 하실 것을 간청합니다. 세속을 버리고 세속에 익숙한 의례를 없애고, 출가하여 재가인의 공경을 끊게 하셨으니, 호법(護法)이 여기에 있고, 참으로 복을 가져오는 것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자연의 가르침에도 밝혀낼 것이 있으니, 사람마다 스스로 근면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면서 삼가 표(表)를 받들어 이같이 아룁니다. 폐하께 폐를 끼치기에 삼가 송구스러움만 늘어납니다.
(10) 상배친유손표(上拜親有損表:부모에게 절하는 것의 해됨을 아뢰는 표) 석정매(釋靜邁) 등
사문 정매(靜邁)가 말씀드립니다.
책간(策簡)에서 앞선 것을 고하니, 부모가 그 자식에게 몸을 굽히고 형장(形章)이 혁신되어도 개사(介士)는 임금과 부모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삼가 생각해 보면 스님들이 말을 펼치어 부처를 잇고 존경을 계승하는 뜻은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공경은 높은 곳에서 내려옵니다. 그 기풍에서 절개를 꺾고 복장을 속인과 달리하는 것은 형장(形章)이 바뀌는 것과 다르지 않고 사문에게 임금과 부모에게 몸을 굽혀 절하게 하지 않습니다.
내외에 자비를 베풀어 비록
형체를 변화시켜 계승하더라도 마음으로 임금과 부모를 공경한다면 거기에 감히 소홀함이 있겠습니까? 마치 신하가 임금의 붕어(崩御)에 복을 입듯이 하여, 날과 달이 바뀌더라도 그 형체는 비록 길상(吉祥)을 따르더라도 마음으로는 삼년상을 지키듯 합니다. 이로써 8음(音)을 끊고 조용히 하며99) 3년을 기한으로, 마음의 공경을 다하고 그 오는 것을 숭상하는 것을 압니다.
만약 도리어 부모에게 절하라고 명한다면, 도속이 함께 부처님 계율에 어긋나게 되기 때문에 끝내 전도되어 헛되이 고해에 빠져 윤회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천지조차 흔들리고 귀신조차 감응하는데, 어찌 무릎 꿇고 엎드릴 수 있겠습니까?
단지 공가(公家)의 이로움은 하지 못함이 없음을 아는 것인데, 지금 고치는 것으로 인하여 만유(萬有) 가운데 한 가지 허물이라도 있게 된다면 성상(聖上)이 놓아 주어 정법을 익히도록 한 홍은(洪恩)마저 저버리게 될지니, 겁(劫)이 다하도록 그 몸을 부수어도 어떻게 책망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헌서(獻書)의 길을 널리 여시어 추언(蒭言)의 변론이라도 널리 채납(採納)하시니, 티끌같이 가벼울지라도 이를 열람해 주십시오. 삼가 두려워 땀만 흘립니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11) 상친동군상불령치배표(上親同君上不令致拜表:임금과 같이 부모에게 절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표를 올림) 석숭발(釋崇拔)
사문 숭발(崇拔)이 말씀드립니다.
삼가 듣자 하니, 도속의 헌장(憲章)은 형체와 마음을 바꿉니다. 그 형체로는 임금과 아비에게 절하지 않음으로써 출처(出處)의 의례(儀禮)를 현달(顯達)하고, 그 마음으로는 공경함이 삼대(三大)에 형통하여 기르고 공양하는 무거움을 따른다 합니다.
근자에 은혜롭게 칙령을 받들어 스님들이 군왕에게 절하지 않게 되었으나, 그 부모에게는 여전히 절하라 하였으니, 이야말로 애경(愛敬)의 예법은 융성하나, 경전의 가르침이 결여된 것이며 승보(僧寶)를 남겨두면서 무시하는 것이며 업신여기게 하니, 계율에 귀의한 것을 없애어 오랫동안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찌 군주로서 고상한 자취를 열어 부처님의 말씀에 어긋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하로서 하배(下拜)하는 의례를 취하고 마주하여 성지(聖旨)에 위배된다면 자식을 내쳐서 그 복을 구하고 절을 받고는 재앙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 교화에 의문(疑問)이 들고, 두 번째는 이치적으로도 모순이 생깁니다.
삼가 원컨대, 임금을 공경하는 예법을 따라 신하의 의례를 형통시키십시오.
임금에게 누만 끼치어 마음만 더욱 곤란해집니다.
(12) 통론전의우열(統論前議優劣:앞서 논의한 우열에 대하여 통틀어 논의함)과 찬(讚) 석도선(釋道宣)
논하여 말씀드립니다.
위위(威衛)와 사례(司列) 등이 상주한 것은 그 말이 몹시 아름다운데 이치는 어떤가 하면, 모두가 전고를 생각지 않아 실제로 대의(大義)에 어두운 것뿐입니다. 참으로 무릎을 꿇려서 공경을 삼는다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화를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내경(內經)에서는 “사문이 속인에게 절하면 임금과 아비의 공덕 및 수명을 손상시킨다”고 하였으니, 이들을 강제로 엎드리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가볍게 추기(樞機)만 발동시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다시 대답하여 그 뜻을 말했으나, 어찌 손상시킴이 이렇게도 막심한 것입니까?
그리하여 위위(威衛) 등의 상주문(上奏文)은 통하고 막히는 두 가지를 겸했으며, 사례(司列) 등의 상주문은 한 갈래만 빙설같이 고집하였다. 이로써 혹 두 가지 품의의 우열을 가리자면, 내가 초(楚)나라는 이미 잃었고 제(齊)나라도 미처 얻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양자를 겸한 것은 살갗처럼 엷기만 하고, 빙설같이 굳은 것은 고황(膏肓)과 같으니, 그러므로 위위(威衛)를 을과(乙科)에서 승진시키고, 사례(司列)를 경제(景第)로 물러나게 하였다.
범공(範公)의 질의와 같은 것은 그 이치가 볼 만하고 글이 화려한데, 농서공(隴西公)이 상주한 것은 말이 간략하면서도 이치를 분명히 하였다. 이미 사람들은 이에 조화를 이루고 점치는 사람들이 따랐다. 그러므로 하늘에 흩어져서 아래로 퍼지게 되었다. 고상한 아름다움과 자비롭게 기르는 땅임을 융성히 하여 다시 엎드려 절하는 어짊을 넓혔습니다.
이때 법려(法侶)의 명승(名僧)과 도시와 시골의 원로들이 모두 말하기를, “내 뜻에 맞지만 가르침에 어긋나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경문을 모두 드러내어 널리 표(表)를 상주하였으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장이 대궐 안으로 연이었다. 단 천문(天門)이 깊고 멀어서 청을 하여도 어찌할 수가 없었으니, 조칙을 받들어 종지를 구하여도 처리하기 어려웠다.
『주역』에서도 “숫양이 울타리를 들이받아 그 뿔이 걸렸다”고 하였으니,100) 지금의 석씨의 승려들이 어찌 그렇지 않은가.
찬탄(讚歎)하여 말한다.
위위(威衛)의 부류
논의가 비록 통하고 막혔지만,
사람으로서 도를 폐하니
참으로 얻지 못하는구나.
사례(司列) 등의 장계
석가(釋家)를 누르고 유가(儒家)를 따르는데
절을 시켜 임금과 아비마저 손상케 하였으니,
어떻게 충성스런 도모라 하겠는가?
질의가 번잡하지만
진술하는 요체는 간단하기에
하늘과 사람도 기뻐하며 받아들이니
이에 조칙을 내리시네.
공손하게 밝으신 명령을 받들어
손뼉치고 노래하네.
현적(玄籍)을 돌이켜 보면,
여전히 누가 남아 있으니, 이를 어찌 하겠는가?
스님과 속인 모두 의문을 내어
모두 표를 올려 아뢰며
마음을 다하여 피력하였으나
황도(黃道)를 얽어매지 못하였네.
물러나야 할지 나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행동거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빌미조차 없었네.
우러러 바라건대 신명이 내리어
이 같은 법의 흐름을 소통하시이다.
(12) 사문불응배속총론(沙門不應拜俗總論:사문이 속인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는 총론)
석언종(釋彦琮)이 말하였다.
사문이 속인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체로 출처가 그 흐름을 달리하며 내외가 갈래를 따로 하기 때문이다. 종지에 머물며 지극함에 체득하여 생각을 쉬고 몸을 잊으니, 삶을 구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대화(大化)에 따르는지라 구차하지도 않다. 마음은 우내(㝢內)를 뛰어넘고 자취는 환중(寰中)에 의탁하였으니, 이로써 임금과 예를 동등히 하고 천속(天屬)의 은혜마저도 등지기 때문이다.
만물을 교화하되 그 교화를 옮길 수 없으니, 생생(生生)으로 그 생에 누가 됨이 없으려면, 임금과 아비에게 두 손을 마주잡고 위로 올렸다가 내리면서 예[長揖]를 취하는 것이 그 큰 이치다.
만약 인사(人事)를 미루어 여러 경우를 찾아본다면 절하지 말아야 한다. 이에 그 사례가 열 가지이다.
산천에 망질(望秩)101)하고 천지에 교사(郊祀)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이롭게 하고자 하여 임금이 성심(誠心)을 다하였다. 지금 삼보를 주지(住持)하여 계율로 귀의해서 이로움을 넓히고 유명(幽明)에 교화를 드리우면서 간략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야말로 ‘신기(神祇)의 부류’에 해당한다.
제사지낼 때 시동(尸童)이 된다면 반드시 소목(昭穆)102)에 흡족하게 하여 희생을 자르고 익힌 것을 천거하여 그때에는 신하가 되지 않는다.
지금 삼보가 바탕을 하나로 하여 스님들을 부처님처럼 공경하는 것은 이미 내전(內典)에 갖춰져 있으므로 번잡한 말을 기다릴 필요조차 없으니, 이야말로 ‘좨주(祭主)의 부류’에 해당한다.
기송(杞宋)의 군주(君主)는 두 왕조의 후예103)이며, 왕이란 사람들이 존중하고 공경하여 나라의 국빈으로 삼은 것이다. 지금 스님들은 법왕(法王)의 후손으로 왕이란 부처님에게 부촉을 받아 사부대중을 장려하고 삼행(三行)을 닦으니, 이야말로 ‘국빈(國賓)의 부류’에 해당한다. 도를 존중하여 스승처럼 따르기에 바로 신하가 아닌 것이다. 비록 천자를 알현하더라도 이에
북면(北面)하지 않는다.
지금 사문들이 부처님의 지극한 가르침을 전하여 범부를 인도하고 만물을 끌어가면서 그 스승으로서 엄숙히 하여 배움을 공경하는 것이 이에 있으니, 이야말로 ‘유행(儒行)의 부류’에 해당한다.
『예기』에서도 “개사(介士)는 절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 용모의 절개를 잃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아부(周亞夫)가 한문제(漢文帝)에게 장읍(長揖)한 것이다. 지금의 사문들이 몸에 인내의 갑옷을 두르고, 욕망의 마군을 베어내며 손에 지혜의 칼을 쥐고서 마음의 미혹을 벗겨내니, 이야말로 ‘개주(介冑)의 부류’에 해당한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관을 쓰고 빈객을 점치는 것은 선인을 존중하는 것이다. 섬돌104)에서 관을 쓰고서 어미와 형에게 절을 함으로써 성인의 예를 하는 예법으로써 사람을 이루는데, 지금 사문이 대법(大法)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도탄(塗炭)에 빠진 군생(群生)을 구하고 부처님께서 남긴 자취를 공경히 따르면서 적윤(嫡胤)을 이어가니, 이야말로 ‘전중(傳重)의 부류’에 해당한다.
요임금을 측천(則天:하늘로 법을 삼음)이라 불렀어도, 영양(潁陽)의 높음에 굴복하지 않았고,105) 무(武)임금을 아름다움을 다했다[盡美]고 하였으나, 끝내 고죽(孤竹)의 고결함을 온전히 하였다. 지금 사문이 그 일을 고상히 하고자 왕후를 섬기지 않으니, 시끄럽고 더러운 세속으로부터 매미처럼 허물을 벗어 버리는 가운데에서 스스로 환구(寰區)의 바깥에 이르렀으니, 이야말로 ‘일민(逸民)의 부류’에 해당한다.
오형(五刑)을 범하여 삼목(三木)106)이 채워지고 수초(菙楚)107)로 매를 맞고 금철(金鐵)이 목에 둘러져 있는 사람들은 그 예를 갖추는 것을 책망하지 않는 법이다. 지금 사문들이 수염과 머리카락을 자르고 후사(後嗣)를 끊고 형체를 훼손하며 의복을 고쳐 입으니, 이야말로 ‘심형(甚刑)의 부류’에 해당한다.
또 조칙을 내리는 관리가 미천하더라도 하늘을 받들고 귀한 것을 본받는다. 사문은 비천하더라도 명을 받았기에 존귀한 것이다. 하물며 덕이 유계와 명계를 움직이고 교화가 신령과 귀신까지 적시며, 인간과 천상에 이르기까지 고해의 물결을 잠재우고, 품서(品庶)의 뜨거운 불길을 시원하게 하는 데 있어서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공덕이 이미 넓다고 하겠으며, 은택이 이미 크니 어찌 진속(塵俗)을 끊은 무리로 하여금 임금과 부모에게 절하게 하여 얽매이게 하며 한방(閑放)의 부류로 하여금 깎아내려 명교(名敎)와 같게 하려는 것인가?
내가 어려서 이 같은 것에 애쓰다가 커서는 널리 찾아보았는데, 청편(靑編)에 남겨진 것을 모으고, 한간(翰簡)에 남겨진 전대(前代)의 훌륭한 것을 수집하였으니, 다시 묻힌 것에 감득하여 불일(佛日)을 빛내며 불을 환하게 다 부쳐 사(詞)를 짓는 것도, 자못 앞으로 오는 세상에 이같이 좋은 일이 전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또 고금의 서론에서도
모두들 공경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니, 이 같은 한 글자에 의지하여 어리석은 이들이 이에 그대로 미혹되었다. 왜냐하면 ‘경(敬)’이란 글자는 마음을 형통한다는 것이다.
『곡례(曲禮)』에서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였으니, ‘절’이란 오직 몸을 굽히는 것이다. 주(周)나라에서 아홉 번 절하는 의례108)를 펼쳤으니, 이로써 임금과 아비는 존엄하니, 마음으로 공경하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없다. 법률을 중하게 하여 몸을 굽혀 절하게 하는 것은 경전에 어긋남이 있다. 절로써 공경을 대신하려 드니, 어찌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책에서 “절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여 문장을 만들었다. 혜원 스님도 “깊은 골짜기에서 어찌 새벽의 이슬을 기다리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대체로 그 망극함을 스스로 말한 것이다. 이렇게 쓴 것도 그 뜻이 여기에 있다. 달관하거나 통달한 현자들은 참으로 이를 비평하지 않을 것이다.109)
[수양제(隋煬帝)가 대업(大業) 3년(607)에 새로이 율령(律令)과 격식(格式)을 하교(下敎)하면서, “여러 스님들과 도사들 가운데 계청(啓請)할 바가 있으면, 먼저 반드시 절하고 난 연후에 이치를 개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비록 이와 같이 영(令)을 내렸으나 스님들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때 사문 석언종이 그 같은 일을 참지 못하고 「복전론」을 지어 항거하였다. 그 뜻이 풍자(諷刺)에 있으니, 말하는 자는 죄가 없고, 그것을 듣는 자는 스스로 훈계를 삼을 뿐이다. 황제가 나중에 조정에서 친견하는데, 여러 사문들로서 절하는 이가 없었다.
대업 5년(609) 서경(西京) 교남(郊南)에서 문물(文物)을 크게 열면서 두 종교를 조정에서 친견하였는데, 스님들이 예전처럼 여전히 절을 하지 않자, 다시 조칙을 내려 “조칙이 행해진 지 오래되었는데, 스님들은 어째서 절을 하지 않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이때 명섬(明贍) 법사가 “폐하가 삼보를 넓히고 지키시려면,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경전에서 속인(俗人)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가르침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칙령을 내려 “만약 절을 하지 않는다면, 송(宋)나라 무제 때에는 어째서 절을 하였는가?”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송나라 무제는 포악하고 무도한 임금으로 정사(政事)를 그르쳤습니다. 모두 절하지 않으면 바로 살육하였으나 폐하는 이와 다른지라 절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칙령을 내려, “절하는데 스님들은 우뚝 서 있기만 하니, 이와 같이 넷을 세어 절을 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들이 “폐하가 반드시 스님들을 절을 시켜야겠다면, 마땅히 법복을 벗기고 속인의 옷을 입힌 연후에 절을 시켜도 늦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만 망연하여 어찌 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다음날 대재(大齋)와 법사(法祀)를 모두 베풀었으나 모두 기록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여러 스님들에게 “짐이 일찍이 스님들 가운데에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어제 남교(南郊)에서 대답하는 것을 보니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로 끝까지 절하는 사람이 없었다. 황건(黃巾)의 선비와 여인들은 처음 절해야 한다는 칙령을 듣자마자, 이로(李老:노자)의 무리와 합일하여 연이어 절을 하되 그치지 않았다. 황제가 역시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여 묻지 않았다.110)
그러나 이 문제를 품의하는 이들은, 사문이 절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자 하여, “예전에 황각(皇覺)이 우내(宇內)를 다스리며 일찍이 믿고 훼손하는 근원을 열었는데, 어떻게 상법과 말법이 넓히고 간략케 하는 의논에 흐르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참으로 법해(法海)가 넓은지라 그 부류를 가리기 어려우니, 이에 현유(玄猷)마저 더럽히게 된다.
대체로 조정에서의 논의를 들어 보니, 문리에 구애받는 선비들은 도를 폐하고 사람을 따르자고 한다. 그 말을 비교해 보면, 방역(方域)에 형통한 큰 창도라 이를 수 없다.
내가 이로써 여러 가지 연고를 고찰하여 이에 따라 이를 탄핵하는 바이다. 무릇 부처님을 기리는 군자들은 혹 상세히 살펴볼 수도 있겠다.]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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