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73 불교(광홍명집 24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6.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24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5. 승행편

 

12) 사태승도조(沙汰僧徒詔:승도들을 사태시키라는 조칙) () 무제(武帝)

문하(門下)

불법(佛法)이 와전되어 사문(沙門)이 잡스러워져서 커다란 가르침을 이루어 성취할 수 없게 되고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간특한 마음이 빈발하여 흉한 모습만 자주 들립니다. 결국 도를 망치고 세속을 어지럽히니 사람과 신령이 서로 노한다. 이에 그 소재를 밝혀서 사찰의 장로(長老)들도 조용하게 함께 사태시키라.

나중에 이를 위반하면 연좌한 자까지 주살(誅殺)할 것이다.

주무 부서는 조격(條格)을 상세히 하여 조속하게 시행하라.

 

13) 포양승덕조(襃揚僧德詔:승덕을 기리라는 조칙) 7수 원위(元魏) 효문제(孝文帝)

(1) 제이승현위사문도통조(帝以僧顯爲沙門都統詔:승현 법사를 사문도통으로 삼자는 조칙)

문하(門下)

근자에 공들의 표문을 접수하고서야 조속히 사문도통(沙門都統)을 결정해야 함을 알았다.

덕행(德行)을 가려서 어진 스님을 선발하고자 자나깨나 생각해 보더라도 부처님을 계승하는 큰 소임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혹 도가 높은 데다 법랍(法臘)이 많으면서도 이치적으로 얽매임이 없어야 하며, 혹 법기(法器)가 그윽하고 식견이 아득하면서도 진세(塵世)의 업무를 드높이 관장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사원사(思遠寺)의 주지(主持) 승현(僧顯) 법사께서는 어질고 계행(戒行)이 빛나며 맑은 기풍이 거울처럼 비치신다. 총명함이 깊어 그윽히 명달(明達)하고 도심(道心)마저 청량(淸亮)하시니, 참으로 이 같은 큰 책임을 맡더라도 대중을 묘하게 화합하는 본보기가 될 터이다. 최근에 이미 말로 아뢰었으니 칙령을 내려 사문도통(沙門都統)으로 모시도록 하라.

또 부의(副儀)의 두 가지 일은 치문(緇門)과 속인(俗人)이 함께하였으나 근자에는 잘 통솔하여 홀로 다스리게 됨으로써 드디어 이러한 임무를 폐지하였다.

지금 덕을 돕고 어짊을 칭찬하자면 반드시 그 사람이 필요하니, 황구사(皇舅寺)의 승의(僧義) 법사께서는 행실이 점잖고 신명이 트였으며, 총명하고 정업에 힘써서 업이 무성하며 도가 뛰어나시니, 마땅히 기대에 부응할 터이니 도유나(都維那)로서 현도(賢徒)를 빛내도록 조치하라.

 

(2) 입승니제조(立僧尼制詔:승니의 제도를 세우라는 조칙)

문하(門下)

깨달음이 응집되어 맑아 텅 비게 되면 일마다 세속의 바깥을 뛰어넘는다. 그윽함을 받들어 자취를 기리면

 

이치에 맡겨 말을 잊게 된다. 그러나 말이 없다면 어떻게 석가의 가르침을 펼 것이며, 세속 없이 어떻게 참다움을 드러낼 것인가?

따라서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펼치자면 반드시 계전(誡典)을 귀감 삼아야 하며, 6()로 교화를 넓히자면 반드시 척파(尺波)에 의지해야 한다.

상교(像敎)가 동쪽으로 유포된 지 천 년하고도 이미 절반이나 되었다. 진나라와 한나라의 화속(華俗)은 제도로써 금지하는 것이 더욱 엄하였기 때문에 전세(前世)의 뛰어난 이는 마땅함에 따라 조례(條例)를 일으켜 세상의 가벼움과 무거움으로써 현오(玄奧)를 도왔다. 선조(先朝)의 치세에 일찍이 스님들이 금지해야 하는 것을 만들었지만 조금이라도 자세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마땅히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근자에 사문도통 승현(僧顯) 스님께서 아뢰시기를, “다시 한번 간정(刊定)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짐의 식견이 참으로 천박함에도 불구하고 지극한 경전을 함께 연구하고자 하였으나, 국사(國事)가 번거롭게 일어나서 마주하여도 상세히 따져 보지 못하였다. 또한 일시적으로 법도를 세워 거칠게나마 세상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고, 모름지기 다 같이 교서를 펼쳐서 그 충심을 다스려야 한다.

 

(3) 청제법사일월삼입전조(請諸法師一月三入殿詔:법사에게 한 달에 세 번 대궐에 들어오실 것을 청하는 조칙)

문하(門下)

()을 기리고 업()을 찬탄하더라도 종현(宗玄)만 못하다. ()을 도와 그 뜻에 영향을 받더라도 어찌 뛰어난 철인(哲人)보다 앞서겠는가?

그러므로 주공단(周公旦)이 붕당에 대한 고()를 지었으며, 석가가 선지(善知)의 글을 창도하였다. 지위가 존귀한 이는 어진 이를 거두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덕행이 뛰어난 이는 어진 자를 가까이하는 것을 숭상하였다.

짐이 비록 능력이 모자라 도에 가까이 갈 수 없었으나 선조의 치세에 육합(六合)을 경영하느라 안으로 다스릴 경황이 없었다. 그래서 황정(皇庭)에는 드높고 아득한 위용이 결여되었으며, 대궐[紫闥]에 세속을 넘어서는 의례(儀禮)를 소홀히 하여 흠선(欽善)의 이치와 복전(福田)의 자량(資良)이 참으로 부족하였다.

장차 의덕(懿德) 법사께서 수시로 오셔서 설법하신다면, 나와서는 도미(道味)를 맛보게 되며, 물러서서는 조정을 빛낼 수 있다. 조칙을 내려 대전(大殿)에 입궐하시어 한 달에 세 번 법문을 청하니, 그 인원 수와 법휘(法諱)는 별도로 첩지(牒紙)에 송부해 둔다.

 

(4) 영제주중승안거강설조(令諸州衆僧安居講說詔:여러 주의 대중 스님에게 안거하고 강설하게 하는 조칙)

 

문하(門下)

현리(玄理)에 의거하여 오묘함으로 돌이키는 것은 진실로 명풍(冥風)에 근거하고, 지혜를 머금고 자비를 익히는 것은 참으로 과지(果智)를 모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복의 더위에도 도를 다스리는 항상된 규칙을 단속하고 90일 간의 더운 여름에도 법을 다스리는 아름다운 계책을 원만하게 한다.

이에 여러 주()에 칙령을 내려 이같이 하안거(夏安居)하는 청청한 대중을 모시되, 대주(大州)에는 300, 중주(中州)에는 200, 소주(小州)에는 100명을 두고서 그 인원과 처소에 따라 강설(講說)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

모두 승기속(僧祇粟)을 공급하여 완비하되, 만약 식량이 적고 대중이 부족하여 이 같은 인원 수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는 밝혀서 그 양을 줄여서 다시 보고하라.

제각각 현명한 장인을 공경하여 참으로 슬기로운 덕을 추앙하여야 할 것이니, 함부로 처리하여 후진(後進)을 게으르게 하지 말라.

 

(5) 증서주승통병설재조(贈徐州僧統幷設齋詔:서주의 승통의 명복을 빌며 재를 설치하라는 조칙)

문하(門下)

서주(徐州)의 도인(道人) 승통(僧統) () 스님께서는 기풍과 식견이 형통하였고, 법기(法器)가 고상하며 자태가 청아하셨다. 도업(道業)이 밝고도 넓으며 이치의 맛이 깊고도 맑았기에 그 맑고 무성한 명성은 일찍이 서주(徐州)의 패군(沛郡)에 드러나셨다. 아름다운 사고와 그윽한 이룸은 패군(沛郡)의 초현(譙縣)에 퍼졌었다. 법을 창달한 것이 북경(北京)에까지 이르러 그 덕이 도속간에 분분하여 황연(皇筵)에서 공양 올리며 진우(辰宇)에 좋은 자리를 펼쳤었다. 참으로 어질고 슬기로우니, 짐도 몹시 존경하는 바이다.

()에 따라 서거하시어 이에 세상을 달리하셨는데, 근자에야 갑자기 그 소식을 듣고 나니 비탄이 가슴을 적신다. 지금 그 길은 연주(兗州)의 복현(濮懸)에 가까우니, 청주(靑州)의 사수(泗水)가 어찌 멀다 하겠는가? 비통함에 젖어 그 공덕을 기릴수록 슬픈 마음만 늘어난다.

서주에 비단 300필을 하사하니, 명복을 빌고 공양하면서 다시 5천 명분의 재법(齋法)을 이룩하도록 하라.

 

(6) 세시도인응통백조(歲施道人應統帛詔:해마다 도인 응통에게 비단을 보시하라는 조칙)

문하(門下)

응통(應統) 스님께서는 전대(前代)의 철인(哲人)을 잇고, 도문(道門)의 자취를 계승하여 현범(玄範)을 그윽하게 거두셨기에 충유(沖猷)가 이에 의탁하였다. 지금 세속의 명예를 사양하시니, 이치에 따라 별도로 공양올리도록 하라.

8()의 이치를 취하여 해마다 비단 8백 필을 보시하고 사배(四輩)에게 베푸는 것에 근거하여 사시(四時)에 따라 공급하도록 하라.

다시 선을 닦는 근본은

 

목숨을 바쳐 힘쓰는 데 있으니, 음식을 베푸는 인()은 내전(內典)에서도 아름답게 여기는 바이다.

조정의 관직에 따라서 해당되는 달에 차례대로 보시하여 가까운 것을 미루어 멀리 이르고 이치를 깊게 탐구하면 다만 세속의 마음을 열어 높일 뿐 아니라 또한 도를 향한 뜻에도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7) 위혜기법사망시백설재조(爲慧紀法師亡施帛設齋詔:혜기 법사가 돌아가시매 비단을 보시하고 재를 마련하라는 조칙)

문하(門下)

서주(徐州)의 법사 혜기(慧紀) 스님은 그 도량이 방정하시고 원대하셔서 도식(道識)이 순일하면서 텅 비었다. 뛰어난 거동은 세간의 바깥으로 우뚝하셨기에 그 거두어 섭수하는 공덕이 실로 견줄 만한 부류가 없었다.

팽성(彭城)에서 법을 빛내시어 성예(聲譽)가 중국 변방에까지 무성하시고 후예(後裔)가 꽃 피었으니, 송양(宋壤)에서 논()을 연구하고 공덕을 원근에 심으셨다. 참으로 예전에 녹야원의 이치를 창도함에 있어 종장되심이 치문(緇門)의 으뜸이시니, 연이어 현자의 총림(叢林)을 기리면서 사마(死魔)를 쫓아버리고 양기(良器)를 섬세히 다듬으셨다.

이에 부음을 듣고 나니 슬픔에 목이 메이고 감회만 어린다. 서주에 조칙을 내려 비단 300필을 보시하고 아울러 500명 분의 재법(齋法)을 이룩하여 명복을 빌도록 하라.

 

14) 술승중식론(述僧中食論:스님들의 중식에 대해 서술하는 논) 남제(南齊) 심휴문(沈休文)

사람이 도()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심신(心神)이 혼미하기 때문이다. 심신이 혼미한 이유는 외물(外物)이 어지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크게 어지럽게 하는 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이익만 다투면서 이름을 영예롭게 하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요사스러움이 만연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달고 기름지며 살찌고 무성한 것이다.

이름을 영예롭게 하려는 것은 비록 나날이 마음에 쓰더라도 근본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쌓임이 없다. ‘요사스러움이 만연하면 더욱 깊어지고, ‘달고 기름지며 살찌고 무성해지면 누()가 더욱 심하다. 만사(萬事)를 말하더라도 모두 세 가지 일의 가지와 잎사귀일 뿐이다.

성인은 이 같은 세 가지 일을 끊지 않고는 비록 도를 구하더라도 얻을 바가 없음을 아셨기에 어쩔 수 없이 법도를 세워 간략히 하여 따르기 쉽게 하신 것이다. 만약 곧바로 말하자면 이 세 가지 일이 미혹의 근본이라 마땅히 금지해야 하지만, 이 같은 세 가지 일은 인정(人情)에 깊이 미혹되기 때문에

 

생각으로 없애기 어려운 것이다. 비록 금지하는 뜻이 있더라도 일이 갑자기 따르기 힘드니 방주(方舟)로 하천을 건너는 것에 비유된다.

어찌 곧바로 피안에 이르기를 바라지 않겠는가마는 강물의 흐름이 이미 급하니 이에 마주하여 곧장 건너가는 이치는 없기 때문에 흐름에 따르되 삿되지 않으면 오래 걸리더라도 그 지극함을 얻게 된다. 이는 비록 빠르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을 금지하자면, 마땅히 그 단서가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먹는 것을 잠깐 사이라도 쉴 수 있겠는가?

그 성품의 누()가 되는 것이 그보다 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저녁밥을 정오 이전으로 합해 두었다. 정오 이후로는 아무 일 없이 고요하게 하였다. 이같이 별다른 일이 없는 것에 기인하여 생각이 단촐해진다. 처음에는 전일(專一)하지 못하나 오래되면 저절로 익숙해진다. 이에 팔지(八支)를 단속하고 금계(禁戒)로써 매어 놓으니, 욕심이 만연하더라도 앞서의 것을 얻을 빌미가 없어지고, 영예로운 이름의 온갖 누()도 일에 따라 점점 없어진다. 그러므로 예전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정오가 지나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이 같은 것은 대체로 누를 없애는 수단이며 도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모두들 먹지 않는 것에 그친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 나아갈 바에 미혹되어 그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15) 술승설회론(述僧設會論:스님들의 설회를 서술하는 논) 심휴문(沈休文)

법사(法事)를 경영하는 것은 반드시 이치에 맞아야 한다. 지금 세상에서 대중 스님들을 초청하여 단지 한 번의 모임으로 그치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 늘 사람들의 청을 받으신 것에 연유한다. 이로써 상법(像法)1)을 본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예전에 세상에 계실 때에는, 부처님과 대중 스님들은 승가람(僧伽藍) 내에는 원래 식구(食具)를 활용하지 않고 때가 되면 발우를 가지고 중생에게 복을 구하였다.

지금의 대중 스님들 가운데 정오를 지키는 이가 적을 뿐 아니라 좋은 음식을 달고 맛있게 하며 많이 요리하여 풍성하게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지금 청하여 부르더라도 마지못하여 늦게 찾아온다. 기름진 것을 맛보는 입에 소찬만 갖추어 진상하니, 고개를 늘어뜨리고 이마를 찡그리는 것도 맛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즐거움을 누려 복을 펼 수 없는 것이 아닌 이상

 

예전에 스스로 잘 다스릴 수 없는 것과 같지 않고 사배(四輩)에게 의지해서 몸을 의탁할 곳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렇다면 복을 구하더라도 도리어 거슬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독실하게 논해 보면 그 이치는 그런 것만도 아니다. 어째서 출가한 사람은 원래 걸식으로 공양을 충당하는가? 계율이 분명하니 스스로 주방을 만들고 정인(淨人)을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은 이미 사찰 내에서 풍족하기 때문에 다니며 걸식하는 일이 끊어졌다. 혹 발우를 가지고 문 밖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무리들은 비천하며 열등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대중 스님들은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다시 걸식하려 들지 않는다. 이것이 오래되어 마침내 후진(後進) 가운데에서도 이치를 구하는 이는 드물기 때문에 곧 다니며 걸식하는 일이 다시는 행해질 수 없다고 말한다.

백정왕(白淨王)의 아들 전륜왕(轉輪王)이 존귀함에도 불구하고 발우를 지니고 찾아다니며 복을 베풀었는데, 어떻게 천 년의 바깥에도 미치지 못하는 평범한 사문과 궁명(躬命)의 종[僕竪]이 스스로의 입과 배만을 불리려고 하는가?

지금 스님들을 한 번의 모임에 초청하는 것은 이미 그 모양이 걸식하며 다니는 것과 흡사하기 때문에 행걸(行乞)과 수청(受請)의 두 가지 일은 다르지 않다. 만약 지금 다니며 걸식하는 일을 다시 하지 않게 되고, 다시 청하여 부르는 것도 하지 않는다면 걸식법(乞食法)은 이로써 영원히 묻혀질 것이다. 이 법이 이미 묻혀지면 스님들은 부처님의 종자가 아니고, 부처님의 종자가 이미 없어졌다면, 삼보(三寶)마저 땅에 떨어질 것이다.

지금 모임을 행하는 자는 마땅히 예전의 일을 추념해야 하니, 49년간 부처님께서 비구들을 거느리고 성안에 들어가 걸식하시며 그 위의와 거조와 동작에 중생의 마음이 감응하도록 하셨다. 이같이 도를 구하여야만 도가 그에 합당해진다. 만약 이처럼 마음을 운행한다면 바로 회통(會通)할 수 있다.

 

16) 문사태석이조(問沙汰釋李詔:불교와 도교를 사태시킬 것을 묻는 조서)와 답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

짐이 듣자니, 구액(九液)2)에 정신을 집중하여 학3)이 되어 현주(玄州)의 경계에서 두려워하였고, 6년간 고행한 석가는 번뇌의 나루를 짊어졌다고 한다. 혹은 귀신의 술법을 써서 시해(尸解)4)의 술()을 밝히기도 하고, 혹 인연의 요체를 말하여

 

니원(泥洹)의 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태일(太一)5)로 도법(道法)을 천양하여도 끝내 경거(輕擧)에 그치고, 여래께서 이치를 증득하였어도 적멸(寂滅)해질 뿐이었다.

조룡(祖龍)6)의 자취가 잠들고 유장(劉莊)7)이 현몽하면서부터 이 이래로 귀의하는 일이 분분해져 점차로 넓어졌다. 부모를 버리고 얽매임을 벗어던지며 나라를 등지고 집안을 잊으니, 도관(道館)이 산등성이마다 가득하고 가람(伽藍)이 주()ㆍ군()마다 편재해 있었다.

만약 저 금색신(金色身)이 교화할 수 있었다면, 회남(淮南)8)이 살육당하지도 않았을 터이고, 위신력(威神力)이 자유자재하다면 앙굴마라(央掘摩羅)9)가 어찌 형벌을 받았겠는가?

또 이처럼 용()을 부리는 것이 진실되지 않은데도, 형산(荊山)에는 반염(攀髥)10)의 미련이 남아 공상(控像)을 허무(虛無)로 삼으며 전수(瀍水)와 낙수(洛水)에서 야광의 괴이함을 깨닫고 그 시비에 계합(契合)되니, 짐이 실로 이에 미혹되었다.

치의(緇衣)의 대중이 속인의 절반이나 되며, 황복(黃服)의 무리가 호구보다 명수(名數)가 지나쳐서 국가에서 나누어주는 것도 이로써 충실해지지 못하며, 왕의 쓰임새가 이로 인해 결핍되었다.

그 정도(正道)를 가려내어 좌술(左術)을 없애고자 하는 것은 첫째는 국가를 윤택케 하고, 둘째는 군품(群品)의 미혹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앞다투어 따르는 바가 이미 오래된지라, 갑자기 중도에 사태(沙汰)하기가 실로 어렵다.

양가(兩家)의 부침하는 두 갈래 길의 길고 짧음에 있어서는 그 우열을 가리켜 말할 수 있으니, 그 말에 머뭇거림이 없을 것이다.

 

- 답사태석이조표(答沙汰釋李詔表:석가와 노자를 사태하라는 조서에 대해 답하는 표) 북제(北齊) 번효겸(樊孝謙)

신이 듣자오니 천도(天道)의 성()과 명()은 성인도 말한 바가 없으니, 대체로 그 이치가 섭렵하여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백양(伯陽:노자)의 도덕(道德)의 논의나 장주(莊周)의 소요(逍遙)의 이치는 그 남긴 말에서 뜻을 취하면 그런 대로 찾을 수 있으나, 옥간(玉簡)ㆍ금서(金書)ㆍ신경(神經)ㆍ비록(祕錄)11)이나 삼시(三尸)12)와 구전(九轉)13)의 기묘함과 강설(絳雪)과 현상(玄霜)14)의 이채로움에 이르기까지 회남자(淮南子)가 도를 이룰 때 개가 구름 속에서 짖었다거나15) 왕교(王喬)가 신선이 되자 검()이 천상으로 날아올랐다는 것은 모두가 헛된 말로 해조(海棗)16)의 얘기이니 이를 구한다 하여도 마치 바람을 잡듯이 하고, 이를 배운다 하여도

 

마치 그림자를 붙잡듯이 합니다.

()나라의 군주와 제()나라 임금과 진()나라의 황제 및 한()나라 황제가 저와 같은 방사(方士)들을 믿고서 참다움을 만나기를 바랐으나 서복(徐福)17)이 한 번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난대(欒大)18)가 찾아가서 얻지 못하였는데도, 오히려 도영(倒影)19)에서 멀리 하늘에 올라 손바닥을 치며 기쁘게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귀신에게 제사 지내며 신령에게 구한다면 혹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강벽(江璧)이 이미 죽어 여산(驪山)의 무덤으로 다시 들어갔으며,20) 용매(龍媒) 역시 죽어 끝내 무릉(茂陵)의 분묘(墳廟)로 들어가게 됨에 이르러21) 비로소 유향(劉向)이 홍보(洪寶)를 믿었으나22) 죽은 다음 책망만이 남았으며, 왕충(王充)이 황제(黃帝)를 비난하였으나 사라지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말엽 이후로 불교가 크게 성행하였는데, 서쪽 땅에서 경전을 베껴쓰고 남궁(南宮)에다 성상(聖像)을 그리면서, 곤지(昆池)의 지묵(地墨)겁소(劫燒)의 재라 말하며,23) 춘추(春秋)에 밤이 밝아진 것을 신령(神靈)이 내리신 날이라 합니다.24) 법왕이 자유자재로 변화하여 끝이 없고 세계를 미진(微塵)에 두며 수미산(須彌山)을 낟알 속에 들이는 것도 모두 이치는 허무(虛無)를 근본으로 하여 여러 가지 방편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망한 무리들이 단순히 출가만을 구하니 약왕(藥王)이 그 몸을 태우고25) 파륜(波崙)26)이 피를 흘렸습니다. 만약 그렇게 잘 할 수 없다면 열심히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찌 형체를 바꾸고 모습을 변하여 세속 사람과 달리하겠습니까?

생각과 감정을 멋대로 하면 다시 속물과 같이 되어 버리니, 용궁(龍宮)에 관한 이야기도 사소한 논의가 되고 녹야원(鹿野苑)의 말씀도 지나가 버린 말이 됩니다.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만 도풍(道風)이 장차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으시고 자신을 굽혀 백성을 제도하시니, 산귀(山鬼)도 영험을 드리우고 해신(海神)도 직분을 다하기에 상중(湘中)의 석연(石燕)도 때 맞게 내리는 비에 목욕하며 떼지어 날고, 대상(臺上)의 동오(銅烏)도 온화로운 바람을 쐬며 홀로 지저귑니다.

단지 주()나라가 낙읍(洛邑)에 도읍하였다가 다스림을 호경(鎬京)27)에서 거두었으며, ()나라는 함양(咸陽)에 거처하며 그 혼을 풍패(豊沛)28)로 거두었습니다. 분진(汾晋)의 땅에서 왕의 자취가 시작되었고 이미 돌아다니는 데 지치고 다스림에 수고로워 다시 문원(文苑)에 마음을 쓰고 백가(百家)를 저울질하였습니다. 요지(瑤池)29)에서 옥을 쥘 것을 생각하고 적수(赤水)에서 구슬을 구할 것을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서왕모(西王母)가 백환(白環)을 헌납한 것은 순()임금의 덕에 감응하였기 때문이고,

 

상천(上天)이 패옥(佩玉)를 내린 것도 실로 우()임금의 공에 보답하고자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마천(司馬遷)과 사마광(司馬光)이 말을 기록하고 반고(班固)와 반초(班超)가 일을 기록하였으나 3()의 말을 보지 못하였고, 1()의 이치를 듣지도 못했습니다.

황제(皇帝)의 음악(音樂)과 백왕(伯王)의 예법(禮法)이 일찍이 시절에 따라 연혁(沿革)되었는데, 좌도(左道)가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니, 어찌 사태(沙汰)를 주저할 것입니까?

신이 삼가 아룁니다.

 

17) 조도징법사망서(弔道澄法師亡書:도징 법사가 돌아가심을 조의하는 글) () 간문제(簡文帝)

계를 잘 살펴보았다.

존사(尊師)께서 어젯밤에 열반하신 것을 전해 들으니 참으로 비통할 따름이다. 법사께서는 지업(志業)이 밝으시고 도풍(道風)이 순일하시며, 계주(戒珠)가 맑게 빛나고 복익(福翼)이 원만하셨다. 더욱이 식견이 명리(冥理)에 형통하고 심해(心解)로 멀리 살피셨으니, 비가 내릴 것을 기록하시면 반드시 들어맞았고, 흑우(黑牛)를 말씀하시면 틀림이 없었다.

이에 감복하는 이가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았고 이로움을 받는 이는 도속(道俗)을 겸하였다.

제자가 경사(京師)로 돌아가 바로 연을 맺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어찌 잠시라도 따르지 못하고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혼자 말하였다.

그러나 훌륭한 업이 원래 깊은 데다 지혜의 힘이 오랫동안 이로우니 반드시 그 신명(神明)을 보배로운 땅에 노닐게 하고 자취는 청정한 하늘에 드러낼 것이다. 단지 유지(乳池)에 대해 말하고 향관(香棺)에 빈소를 여는 것뿐으로 입실(入室)하여도 공()에 들지 못하였으니, 마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단지 여래께서 강생(降生)하신 자취가 이로 말미암아 니원(泥洹)에 드셨으니, 바로 생()ㆍ주()ㆍ멸()에 해당되어서는 어찌 정해진 형상이 있겠는가? 예전의 성인이나 후대의 현자가 어떻게 형태를 드러내고 소리를 내겠는가? 인연을 미루어 비교해 보더라도 처음부터 그런 예는 있지 않다.

상인(上人) 등이 아울러 3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쌓아 도를 주시어 함께 격려하고 책하며 구업(舊業)을 널리 따르면서 도량에는 끊어짐이 없게 하고 이익이 실추되지 않도록 하였다. 돌아가신 분에게 보내는 물건은 여법(如法)하게 공양할 것이니, 어찌할 것인가? 참으로 어찌할 것인가?

 

18) 여동양성법사서(與東陽盛法師書:동양의 성 법사에게 보내는 글) () 왕균(王筠)

보살계(菩薩戒) 제자 왕균(王筠) 법명 혜거(慧炬)가 머리 숙이고 합장하며 동양(東陽)의 성() 법사께 인사드립니다.

제자가 매우 운이 좋게도

 

일찍이 만나 접촉하였었는데 세월이 흘러 어언 30년이나 지났습니다.

그 기품과 덕망을 흠모하며 홀로 회포만 쌓으면서 산천(山川)을 사이에 두었으니, 예배할 방법마저 없습니다. 사마참군(司馬參軍)이 우러러 돌봐주심을 서술하고 곡진하게 방문하여 기억해 주시니 이미 옛것을 보살펴 주시는 정을 입고 아울러 은근한 뜻을 지녔으니, 기쁘게 정대(頂戴)하는 것이 참으로 비유하여 말하기 어렵습니다.

삼가 조화롭게 복을 누리시어 향년 아흔넷이셨으니, 강인(絳人)30)의 높지 못함을 웃으시고 은종(殷宗)31)의 장수와 함께하셨습니다. 귀는 목까지 늘어졌고, 치아는 튼튼하여 먼저 빠진 것이 없으며, 꽃같이 환한 미소와 빛나는 풍채로 신령을 기쁘게 하고 본성을 다스리니, 실로 숙세에 선인(善因)을 심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훌륭한 과보를 초래하겠습니까?

정성을 다하여 연장자와 노인을 존경하고 덕을 품은 채 옛것을 돈독히 하며 바람에 의지하여 깊게 도를 사모하고 기쁘게 부러워하여 깊이 우러릅니다. 일어서고 앉을 적마다 생각하고, 자나깨나 가슴에 새겼습니다. 제자가 이와 같은 번롱(樊籠)에 묶이고 이와 같은 영쇄(纓瑣)에 쫓기어 도를 여쭤볼 길조차 없으니 몸을 매만져도 잃어버린 듯합니다.

마음속으로 명회(冥會)를 기약합니다만, 강과 산이 지척간이라도 도술(道術)을 서로 잊었으니 그 형체의 자취마저 버려두게 됩니다.

오직 바라는 것은 공경하여 도와서 이러한 심오한 도리를 기약하여 지킨다면 적송(赤松)32)의 붉은 머리카락이 다시 어찌 귀하겠습니까? 석장을 날려 그 몸을 떨침이 참으로 단석(旦夕)에 있습니다.

참된 마음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풀어내더라도 다 펼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단 한마디라도 은혜를 내려 주신다면 어찌 다행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제자 균()이 머리 숙여서 인사드립니다.

 

19) 여여남주옹서(與汝南周顒書:여남 주옹에게 보내는 글) () 석지림(釋智林)

근래에 듣자오니, 단월이 2()의 새로운 이치를 서술하면서 삼종(三宗)의 취사(取捨)를 개진하여 참으로 그 소리가 항률(恒律)과 달리 하며 비록 만물의 나아감이 빠르지 않는데도 이미 논문을 저술하여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기쁨에 따라 충만하여 두루하니, 만물이 늘 중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다시 단월을 계승하더라도 당시에 이론(異論)을 세운 것이 당시의 학중(學衆)을 침범한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논문을 지은 것이 비록 이루어지더라도 정해져 반드시 나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듣고는 놀라면서 저도 모르게 한탄하였습니다. 이 같은 이치의 갈래는

 

처음 듣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묘음(妙音)이 가운데에서 이미 67년간이나 끊겨서 그 이치가 높으나 항상 읊조리는 것조차 전할 수 없었습니다.

빈도(貧道)가 스무 살 되는 때에 바로 이 같은 이치를 깨닫고 항상 이 같은 미묘한 깨우침에 의지하여 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매번 기뻐하였으나 더불어 함께함이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마침내 장안(長安)의 장로들을 만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관중(關中)은 아주 좋은 땅으로 옛날부터 이러한 뜻이 있어서 늘 법회를 열어 성대히 하여 때에 능하였으나 이 같은 이치를 깊게 이해하는 자가 원래 많지 않았으며, 이미 상정(常情)을 범하였으니 후진이 듣고 배운다 하나 수가 매우 적고, 전하여 형통함에 있어서도 대략 그러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강설(講說)하면서 한 시절을 그르쳤는데, 그 같은 여타의 이치는 종록(宗錄)에서 보여집니다만, 오직 이 같은 갈래는 백 리 안에 이만큼 성취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만 먹다가 끝내 병이 들었으니, 이미 쇠약하여 질병이 낫지 못하고 아침 저녁으로 서쪽으로만 맴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같은 도는 지금 이후로 영원히 끊어집니다. 단월이 실마리 없이 기틀을 발명하여 홀로 방외(方外)에서 창조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뜻하지 않게 이 같은 말을 외람되이 귀로 들으니, 기쁘기도 하고 안위도 되는 것이 실로 견줄 곳이 없습니다. 이 같은 이치를 밝게 세워서 법등(法燈)의 종자가 있게 해야만, 비로소 진실한 행도(行道)의 으뜸가는 공덕이 될 것입니다.

비록 다시 나라와 성곽 및 처자를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보시하더라도, 그 복의 이로움이 서로 지나침이 없을 것인데, 이미 다행히도 이를 새기고자 하는 마음을 내었으니, 마땅히 널리 선포하여 상찬(賞讚)하도록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법의 이치를 밝게 논하였으니, 마땅히 인()에 있어서는 사양함이 없어야 하는데,33) 어찌 대중의 마음만을 애석히 여겨 그 기이한 뜻을 잃겠습니까?

그리하면 논문이 완성되더라도 다시 중복된다면 단월이 찾아와 혹 이것으로써 법의 장애가 될까 두렵습니다. 지나간 의리는 그러므로 우스운 논의가 아닙니다.

생각하건대 한 부를 서사(書寫)하여 보내 주신다면, 빈도가 서쪽으로 돌아가서 가는 곳마다 널리 퍼지게 할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끌고 갈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입산하고서도

 

다시 이같이 서()하는 것도, 모두가 깊이 부촉하고자 함입니다.

 

20) 여거법사서(與擧法師書:거 법사에게 보내는 글) () 유준(劉峻)[일명 효표(孝標)]

행리(行李:使者)에게 높으신 말씀과 빛나는 덕에 대해 들었습니다. 멀리에서까지 바람소리를 듣고 혼비백산하니 신선이 되는 석수(石髓)34)를 바라고 태음(太陰)의 용촉(龍燭)을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푸른 별은 밤하늘에 떠 있고 시원한 구름은 가을을 보내며, 도가 승하면 살찌니 참으로 두루 거둡니다.

무지개를 옷으로 입고 밤의 이슬을 천막으로 삼아 노란 국화의 떨어진 꽃술을 먹으며 맑은 계곡의 흘러가는 물을 잔에 담습니다. 새벽에 돌아가는 기러기를 기다리고 아침의 물오리는 저녁 때 울음소리를 듣게 되며 짝을 잃은 외로운 고니는 그 모습이 처량하기만 합니다.

대체로 소사(蕭史)35)가 봉황새를 타며 열자(列子)가 장풍(長風)을 부리는 것을 본받아서 비록 형경(荊卿)36)이 옆에 마치 사람이 없는 듯이 하여 빙설 위에 굳게 드러누운 채로 숨어서 드러내지도 않는데, 어떻게 이를 기리겠습니까?

경유(經囿)에서 달리고 서포(書圃)에서 날개짓 하는 데 이르러서는 용궁(龍宮)의 묘한 경전을 지극히 하고 석실(石室)의 홍기(鴻記)를 섭렵하며, 도생(道生) 스님도 그 천진(天眞)에 부복하고 만천(曼倩)도 만물을 분별함을 감사합니다.

만약 이 같은 것을 익힌다면 동자가 뜻을 조충(雕蟲)37)에 두어 안으로 문장을 잘 지으며 밖으로는 영화(英華)가 드러날 것입니다.

무성한 가을의 대나무와 밝게 비치는 봄의 소나무, 작송(爵頌)은 명주(明珠)의 명예를 그치고, 장문(長門)은 황금의 수려함보다 뛰어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빛나면서도 수려합니다.

예전에 절하(浙河)를 여행하다가 조궤(組繢)를 보고는 부지불식간에 종이를 사르고 붓을 태워 혼백이 여기서 다하며 이 이래로 규()와 벽()의 두 갈래를 끊었으니, 마음은 청화(菁華:精華)를 돌아보고 장()은 구절(九折)로 휘감겼습니다.

해를 다스려 밝음을 멈추게 하더라도 일순간의 틈을 넘지 못하고 바다가 용솟음친다면 어느 누구도 한 구석에 가두어 두지 못할 것입니다. ()으로 까치를 막아 나머지 보배를 전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바라건대 청휘(淸徽)를 열람하여 어지럼증을 고치겠습니다. 그러나 월민(越民)은 관을 파는 것이 아니니, ()나라가 어찌 소(:순임금의 음악)를 연주하는 땅이겠습니까?

바라건대 더불어 나아가시되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21) 여교법사서(與晈法師書:교 법사에게 보내는 글)와 답 양() 왕만영(王曼穎)

제자(弟子) 고자(孤子) 만영(曼穎)이 머리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몸소 찬술하신 고승전(高僧傳)을 보여 주시고 골라 뽑아내게 하시어 힘써 처음과 끝까지 살펴보고 단지 위대한 재주만을 보였을 뿐으로 종이가 찢어지고 먹물이 배어나오더라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이같이 지극한 법이 드리워지고 명덕(名德)이 이미 일어났다면 햇수가 거의 5백 년에 가깝고 시절이 여섯 대를 거치며, 마등(摩騰) 스님과 법란(法蘭) 스님이 서역에서 법륜을 굴리시고, 안후(安侯)와 지참(支讖) 스님이 석장을 쥐고 동도(東都)로 오셨으니, 비록 그 자취에 출몰(出沒)이 있고 그 행에 깊고 얕음이 있다 하나, 모두 배와 다리를 만들어 중생을 크게 이롭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도속에 모두 그 미덕(美德)을 전하고, 연참(鉛槧:저술의 뜻)으로 그 말씀을 새겨서 이를 후세에 밝게 드러내어 전대의 빼어난 이들을 찬양하였다. 도안(道安) 스님과 구마라집(鳩摩羅什) 스님은 진서(秦書)에 간간이 나오고, 불도징(佛圖澄) 스님과 도진(道進) 스님은 조()나라 책에 섞여 나오며, 진사(晋史)에서 모은 것들은 당시에 국한된 것입니다.

송전(宋典)에서 좋아하는 것은 대체로 모은 것으로 말미암습니다. 아울러 군태(君台)의 기록38)을 잘못 내어 원량(元亮)의 설()39)에 섞여 있습니다. 감응(感應)을 혹 높이 미루더라도 유계(幽界)와 명계(明界)는 대강이 없을 수 없습니다. 방문(傍文)을 넓게 드러내더라도 그 빛까지 천양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나오는 여러 전기(傳記)들은 또한 수정한 것이 아닙니다.

경흥(景興)40)은 우연히 산속에 거처하는 사람들을 모았고, 승보(僧寶)는 유방(遊方)의 선비들을 편벽되게 편집하였고, 법제(法濟)는 오직 고일(高逸)의 조목만 열거하였으며, 법안(法安)은 지절(志節)의 과목을 부과하는 것에 그쳤고, 강홍(康泓)은 단도개(單道開)를 기록하였고, 왕수(王秀)41)는 고좌(高座)를 칭하였고 승유(僧瑜)는 탁월하다 하여 홀로 수록하였고, 현창(玄暢)은 초연하여 따로 기록하였습니다. 오직 석법진(釋法進)이 지은 왕건(王巾)의 저술은 그 뜻을 종합하여 일가(一家)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나, 이름은 널리 언급하였지만 넓지 못했고, ()는 세웠어도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양조(梁朝) 이래의 작자(作者)들 또한 이와 같은 병통이 있었으니, 승우(僧祐)는 너무나 간추렸는지라 이미 법제(法濟)와 그 허물을 같이하며, 왕수(王秀)는 말단까지 상세히 기록하여 다시 경흥(景興)의 비방을 얻었습니다.

창공(唱公)이 편집한 것이 최고로 실제에 가깝습니다.

 

그 비루한 뜻을 대강 살피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법사께서 이번에 제작하신 것이야말로 불간(不刊)의 홍필(鴻筆)이라 말할 만합니다.

면면히 고금을 이어가며 내외(內外)를 포괄하면서도 언사로 귀속시켜 이를 견주어 가되, 꾸미지도 않았고 질박하지도 않은데, 번잡하다고 말하더라도 생략하기 어렵고, 간략하다고 말해도 어찌 보탤 수 있겠습니까?

()’로써 이름을 삼았으니, 이미 이르지 못한 이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였고, 조례(條例)를 열어 넓게 이루었으니, 실로 선한 자로 하여금 권하기에 족합니다.

두세 사람이 앞뒤로 찬술하였으나, 어찌 긴 것을 줄이고 짧은 것을 늘리며 동일한 수준에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문도(文徒)는 마침내 덧붙일 만한 한마디 말도 없었을 텐데 저잣거리에서도 헛되이 천금(千金)의 상금을 베풀어서 바야흐로 새장 속으로 들어가고 인각(麟閣)으로 올라가며, 경급(瓊笈)을 출납하고 옥사(玉笥)를 거두고 펴는 것뿐입니다.

제자가 실로 불민하기에 어려서 일찍이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최근에는 허약해진 나머지 길을 마주함에 어두움만 많아졌습니다. 보내 주신 책을 얻어 펴보자 바로 이러한 글이 여기에 있으므로 우러르느라 토론할 틈조차 없었는데 어찌 그르다 할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두루 통하여 윈칙(元則)의 이론을 살펴보는 것을 진실로 부끄러워하고 도에 머무르면서 휴혁(休奕)의 책을 아는 것만이 깊었다. 사안(謝安)이 축도생(竺道生) 스님의 광대한 풍류를 흠모하였고, 은호(殷皓)가 지둔(支遁) 스님의 뛰어난 재주를 한탄하였듯이 열흘이 못 되어 마음이 다해서 수고롭기만 한지라, 힘을 다하여 이 같은 글로 드릴 말씀을 대신합니다.

제자 고자(孤子) 왕만영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 답왕만영서(答王曼穎書) () 석군백(釋君白)

군백(君白) 제가 고승전을 찬술하면서 편지를 보낸 것은, 침과 쑥을 놓아 깨우침을 얻어 누추한 글을 한층 더 깔끔히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도는 사람에 의하여 넓어지고 이치는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드러납니다. 도를 넓히고 가르침을 풀이하는 데는 고승(高僧)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점차 물들어 접촉하게 된 이래로 유법(遺法)을 밝혀서 공덕을 달리 하고 훈적을 다르게 하여 대를 이어 흥성케 하여 후생(後生)을 돈독케 하기 위해서 이치는 종합적으로 거두어야만 합니다.

빈도가 어려서부터 서법을 익히거나 책 상자를 끌어안은 것이 부족한지라,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늘

 

연묵(鉛墨)만을 흠모하여 먹물을 칠하여 선법(善法)의 선양하는 일을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청취하고 열람하는 틈마다 전하여 기록하는 것에 마음을 두었으니, 매번 조금이라도 칭찬할 만한 것이 있으면, 바로 다시 검토할 것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단지 온갖 전기를 찾아보았으나, 번잡하고 간략한 것이 서로 같지 않않습니다. 혹 어지럽고 번잡한 것을 다시 편집하거나 혹 행사(行事)에 더해지고 빠진 것은 이미 별서(別序)에 상세히 하였으며 아울러 와서 갖추어 고하였습니다. 촌관(寸管)을 헤아리지 않고 십과(十科)42)를 세워 조류(條流)를 헤아려 견주었는데, 그 뜻과 말을 간략히 하였으나 필로(筆路)가 아득해서 그만 말이 잘못 누추해졌습니다. 원래가 스스로 누락된 것만 갖추려고 한 것인데, 어찌 외람되게 고청(高聽)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단월의 학문이 이미 공구(孔丘)와 석가를 겸하여 그 이치가 현유(玄儒)에 통하였고, 글을 뽑아 문채(文彩)를 다듬는 일에도 안팎으로 오랫동안 힘썼으니, 열람하는 틈틈이 삭제하고 첨가하시면서 상세히 살펴 주십시오.

이 때문에 비천함도 잊고 용문(龍門)에다 편지를 낸 것입니다. 그러나 일은 고상한데 말이 촌스러우니 마음속에 부끄러움만 많아집니다.

글에서 헛되이 칭찬을 하셨으니,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찬론(贊論)의 십과(十科)를 지었기에 다시 편지를 보내는데, 만약 오류가 있더라도, 부디 이를 잘 살펴봐 주십시오.

석군백(釋君白)

 

22) 조진법사망서(弔震法師亡書:진 법사의 돌아가심을 조문하는 글) () 유지린(劉之遴)

제자 유지린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물거품과 번개는 갑자기 사라지나 3()은 멈추지 않는데, ()가 공하며 아()가 없으니 5()43)에 어떻게 머물 수 있습니까?

존사(尊師) 승정(僧正)께서 염부제에서 천수(天壽)를 버리시고 묘락(妙樂)으로 신명을 옮기셨습니다. 비록 이처럼 숙세에 심은 것에만 의지하더라도 반드시 선지(善地)로 오르실 것입니다.

사람마다 속으로 그 가신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소리 죽여 울부짖으니 슬픔에 가슴이 찢어질 듯하고, 재삼(在三)44)의 중함을 생각하여 추모하는 마음만 애절합니다. 애욕의 묶임에서 영원히 떠나셨는데, 다스림을 마음대로 못하니 어찌하겠습니까? 또 어찌하겠습니까?

승정께서 정묘한 이치를 기특하게 드러내시고, 경론을 거두어 회통하시면서 산나물로 그 몸을 마치며 유위(有爲)를 다스려 다하셨습니다. 해마다 바싹 여위면서 그 의표(儀表)2부 대중에 드리웠으니, 어찌 단지 식심(息心)의 영수일 뿐이겠습니까? 참으로 인륜(人倫)의 준걸입니다.

제자가 어려서부터 만나뵈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평생 동안 우러러 존경하면서

 

선우(善友)를 이에 의탁하고 슬픔과 병이 다하기를 기대하였으나 씻어내지 못한 것이 비통하기만 합니다.

애통한 마음은 더욱더 아파오는데 갖은 애를 써서 용모를 다듬지만 미혹되어 외람되지만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제자 유지린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23) 여진법사형이경굴서(與震法師兄李敬胐書:진 법사의 형 이경굴에게 보내는 글) 유지린(劉之遴)

()과 멸()은 무상하기만 한데, 현제(賢弟) () 법사는 구시나성의 역사(力士)와 함께 살면서 도량에 머무셨는데, 이미 오래전에 하셨던 법언이 안타깝게도 영원히 끊어졌습니다.

오내(五內)가 끊어져 자신의 수명도 다하지 못하고, 덕업(德業)을 드높이지 못하며 마침내 질병만 키우셨습니다.

크게 근심됨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마침내 천화하시자, 도속(道俗)이 모두 경악하였습니다. 공회(孔懷)의 지극함을 생각하면 천륜(天倫)도 한탄할 만하니, 그 정()이 영원히 가시어 거처할 수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또 어찌하겠습니까?

법사는 의미(義味)가 해박하시어 흑의(黑衣) 가운데 영수이셨으며, 식견과 풍도가 화락(和樂)하고 단아하여 당대의 사람들 입에 회자(膾炙)되셨습니다.

예전에 경사에서 성상(聖上)마저 눈을 내리깔고 접견하셨는데, 고을로 돌아가시자 두루 바르게 하며 예()를 중요시 하였습니다.

강설로 이롭게 하심이 실로 넓고 많았는데, 사묘(寺廟)를 다스리시어 복업(福業)이 실제로 넓게 퍼졌습니다. 생각과 포부가 넓게 만물과 더불어 거리낌이 없었으니 더불어 사귀는 이마다 당대의 현자였습니다. 백의와 흑의가 그 아름다움에 귀의하였고 멀거나 가깝거나 존경하였으니, 어찌 다만 마음을 쉬게 하여 근심을 다하게 할 뿐이겠습니까? 실로 인륜의 보배를 잃었습니다. 추모하는 마음에 탄식만 앞서나, 어찌 그칠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수고롭게도 편지와 여타의 물건을 남기셨는데, 이를 대할 적마다 목메임만 더합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명문(銘文)을 지으시고, 또 포기실(鮑記室)에게 지서(誌序)를 지으라 하셨으나, 포군마저도 다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기에 내가 포군을 직접 만나서 여러 가지 일과 행실 및 휘유(徽猷)를 말해 주고 반드시 사라지지 않는 일을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돌에 기록하여 올리고 공장(工匠)을 불러 이를 다듬게 하였습니다. 돌에 새기는 것이 정성껏 하여 오래지 않아 성취되었으니, 말이 길수록 처량해지고 붓을 잡음에 비탄만 쌓입니다.

유지린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24) 조승정경법사망서(弔僧正京法師亡書:승 정경 법사가 돌아가심을 조문하는 글) 유지린(劉之遴)

820일 유지린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마침내 법계(法界)가 텅 비고 산의 나무마저 쓰러져 버렸습니다. 존사 대정(大正)께서 신명을 정토(淨土)로 옮기시자 범부(凡夫)가 천박하여 슬픔과 기쁨에 막혀 이 부음을 받고 오내(五內)가 끊어지며 슬픔이 복받치기에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영원히 가심을 추모하여 애욕(愛欲)의 얽힘을 끊으신 것을 생각해 보면 마음을 이길 수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또 어찌하겠습니까?

대정께서는 덕이 한 시절에 우뚝하시고 도()가 사부대중에 드리웠는데, 학도(學徒)를 훈도하여 상법(像法)을 이어 융성하게 하셨습니다. 법랍이 스님들 중에서 상수(上首)이시며, 행실이 인륜의 사표이셨으니, 공사(公私)간에 우러러 존경하며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들 우러러 존경하였습니다.

이처럼 오시(五時)45)와 구부(九部)46)로 널리 해설하신 것은 예전의 선배들에게 필적하시며 왕년의 현자들과 부류를 나란히 하였습니다. 비록 구마라집ㆍ승조(僧肇)ㆍ도융(道融)ㆍ도항(道恒)ㆍ지도림(支道林)ㆍ도안(道安)ㆍ도생(道生)ㆍ혜원(慧遠) 스님이라도, 어찌 마주하여 숭상하겠습니까?

돈오(頓悟)는 도생 스님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후대로 널리 펴서 미언(微言)이 끊어지지 않게 된 것은 실로 스님에게 의지하였습니다. 다시 애어(愛語)로 이익케 하시며 4()을 다하시어 멀리 이르게 하였는데, 단인(檀忍)과 지혜(智慧)6바라밀[六度]를 두루 밝게 갖추셨으니, 백의와 흑의가 귀의하고 함식(含識)마저 저 가피를 깨달았습니다. 나룻배를 어리석은 이들 사이로 띄우면서 실로 사탑(寺塔)으로 동량을 삼아 나날이 쓰면서도 깨닫지 못하다가 지극한 덕이 운수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어찌 도는 장구하고 세간은 짧다던데, 공을 드리우시자 그 몸이 떠나가십니까?

큰 바다를 비추어 수미(須彌)로 떨어지시고 저 높은 산을 비추어 밝은 해를 늘 드리우셨는데, 이제 가셨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다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법사를 어려서부터 북면(北面)47)하여 가슴에 새기어 나이 60이 넘어서까지 늘 좌우에서 모셨습니다. 재삼(在三)의 중요함이 하루아침에 기울어져 슬픔이 끝없으니,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제자가 벼슬 살며 모신 것이 50여 년인데, 보살펴 주심을 융성히 하지 못하면서 서로 법려(法侶)를 기약하였으나, 보리(菩提)가 지극하여 감히 자만하지 못하였습니다. 미래를 알기 어려운 데다 현재는 서로 떨어졌으니, 은혜로운 말씀이 평생토록 영원히 만고에 같이할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처량해지니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고 울면서 애도만 하니, 삼가 흰 종이를 내어 놓고 붓을 놀려 보더라도 외람되이 목만 메입니다.

제자 유지린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25) 동양금화산서지(東陽金華山栖志) 유효표(劉孝標)

무릇 새는 산 위에 살면서 나무 끝에 층층이 둥우리를 틀고, 물고기는 연못 밑에 잠겨서 모래 진흙 속에 굴을 파는 것이 어찌 이상하겠는가? 대체로 성품이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백벽(白璧)을 잊으면 수륜(垂綸)을 즐기게 되고, 옥정(玉鼎)을 짊어지면 경상(卿相)을 필요로 하게 된다.

행하고 숨는 것이 복잡하게 얽히며 드러나고 어두운 것이 어그러지는 것은 불꽃이 활활 타고 물이 흐르며 둥그런 것이 움직이고 네모난 것이 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묘당(廟堂)과 강해(江海), 봉호(蓬戶)와 금규(金閨)가 그렇게 된 이유를 그렇게 여기고 즐거운 바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어찌 털 가진 짐승과 깃털 가진 새의 상처가 그 사이에 낄 수 있겠는가?

내가 시골에서 태어나 함부로 처신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마음으로 운대(運臺)와 주옥(朱屋)을 겁내어 고개(高蓋)와 청조(靑組)를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안개와 이슬에 젖으며 일한(逸閑)하기만 더욱 원하였으니, 매번 청뢰(淸瀨)에 발 씻음을 생각하고 초구(椒丘)에 기대어 쉬고자 하였다. 자나깨나 마음에 그리면서 그 오는 때를 기렸었다.

지렁이는 오로지 흙만을 파고 백성은 하늘만 따르고자 한다. 이모(二毛)48)에 이르기까지 암굴[巖穴] 속에 살았으니, 그 머물던 곳이 바로 동양군(東陽郡)의 금화산(金華山)이다.

동양(東陽)은 실로 회계(會稽)의 서쪽이니, 이곳에는 대나무가 화살처럼 빽빽이 자라나 있고, 산천이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못은 넓게 이어졌다. 이 처럼 그 봉우리가 떼 지어 첩첩이 치솟은 것이 은하수에 닿았고 노을에까지 접해졌다. 교림(喬林)이 빽빽하여 봄에는 푸르고 겨울에는 녹색이다. 굽이치는 계곡마다 흘러가는 물결은 그 바닥이 10()이나 되고, 조각조각의 구름이 합쳐져 천리에 가득 가랑비가 흩어진다.

참으로 뛰어난 구릉이어서 신명(神明)이 이 그윽한 집에 머무니, 이로써 제홍(帝鴻)49)은 여기에서 노닐며 솥을 만들어 우사(雨師)가 이에 기대어 연기(煙氣)를 탔었는데, 이 때문에 그 골짜기를 적송(赤松)’이라 이름하였고, 산자락을 진운(縉雲)’이라 부르게 되었다.

최근에 강을 다스리던 가운데 니재(泥滓) 위에서 선비를 불러 모아

 

풍진(風塵)에 높이 솟구쳐 용이 깃들고 봉황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든 것은 참으로 푸른 물결과 깨끗한 돌이 유인(幽人)을 모으게 한 데에서 말미암는다.

금화산은 예전의 마안산(馬鞍山)이다. 신령을 거두고 성인을 숨기면서 명선첩(名仙諜)을 열거하였는데, 좌원방(左元放)은 이 산에 대해 칭하여 홍수와 오병(五兵)을 면할 수 있으며, 신단(神丹)의 구전(九轉)을 합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금화의 정상에는 자암산(紫巖山)이 있는데, 산이 붉은빛을 띠기에 이렇게 부른다. 비스듬한 언덕 아래는 깊은 물가가 이어져 있다. 봉우리가 솟구쳐 가파른 산 위로 해와 달마저 이지러지는데, 산기슭부터 올라가 보면 점차로 높아질수록 험준해진다. 언덕 길 점점 좁아지고 험해져 물고기들이 연이어 뛰어 오른다.

길가에는 끊어진 골짜기가 있어 수문이 닫혀 포효하듯 한다. 나무 끝부터 살펴보면 초원(焦原)의 석읍(石邑)만 유독 위험하게 매달린 것이 아니다. 산의 중턱에 다다르면, 넓고 깊은 커다란 못이 있고 높은 언덕이 넉넉하게 자리한다. 내가 지은 초막도 실제로 여기에 자리하였다.

사는 곳의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변을 에워싸고 상부(象郛)가 있고 둔덕 앞에는 평야가 고즈넉하다. 눈을 크게 하여 멀리 바라보면 동서쪽에 두 개의 시냇물이 있는데, 사시사철 맑은 샘물이 솟구쳐 흐른다.

푸른 물결에 때 맞춰 비가 내리면 빗방울 떨어져 음악소리 이루고, 흰 파도에 물보라가 일면 물이 솟구쳐 세차게 흘러 물소리가 커진다. 물살이 흘러가며 도랑에서 마주쳐 엇갈리고, 기와에 물방울이 매달려 섬돌에서 물결 흐르며 장막을 두르니 두레박으로 퍼올릴 것이 없다. 이곳에서 세수하여 씻으니 물병과 대야가 필요 없다.

단풍나무와 옻나무, 산유자나무, 상수리나무, 가래나무와 잣나무, 계수나무, 녹나무가 심어져 있고, 형태를 나누고 빛깔을 달리하니, 실로 천 갈래 만 가지이다. 붉은 열매를 맺어 푸르스름한 과육을 싸안으니, 백체(白蔕)가 자라고 자줏빛 줄기가 올라왔다. 나무가 우거져 자라고 풀이 무성하게 돋아나 바람을 떨쳐 내며 퉁소 소리에 가지를 드리우며 처마의 창 쪽으로 잎이 펼쳐 있다.

울타리와 골짜기의 물가에는 꽃들이 열지어 모여 피고 푸른 봄에 이르러서는 시들어가고 부평초가 자라난다. 샘물이 흐르게 되면 도량(都梁)이 되어 향내를 머금었다가 향기를 뿜어낸다. 장락화(長樂花)는 서리를 맞으며 의남초(宜男草)에 이슬 맺히고 부용과 연꽃의 붉은빛은 물에 비치며 언덕의 차조기 옥색 잎은 바람 따라 흔들린다.

 

추녀 끝에 서서 바라보면 근심도 걱정도 잊는다.

구릉과 언덕에 여러 가지 약초가 무성하구나. 땅바닥에 뿌리를 세우고, 산자락에 가지를 뻗으니, 금 같은 소금은 벽옥보다 더 귀하고, 옥고(玉鼓)50)는 명주(明珠)보다도 귀하니, 참으로 본성을 길러 묵은 병을 없애고, 나이를 되돌려 얼굴에 화색을 띤다. 최문자(崔文子)의 황산(黃産)에 의지하지 않고51) 부국(負局)의 자환(紫丸)을 사용하지 않았다.52)

새는 드높이 맴돌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구슬 같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녹색 날개와 붉은 털, 흰 날개와 비취빛 새들은 조용히 날개짓 하고 조화로운 울음소리 귓가에 울려 퍼진다. 모두 동산과 연못에서 훈련시켜 길들이고 닭과 오리들을 여럿이 함께 먹는다.

짐새는 날마다 별을 엿보며 소리는 종소리와 북소리에 짝한다. 쟁쟁대는 노래기가 햇볕 나기만 기다리니, 그 앵앵대는 소리가 거문고를 방불케 한다. 긴 팔 원숭이[玄猨]는 옅은 안개 속에서 맑게 울어대고, 나는 원숭이[飛㹳]는 연기 속을 쏘다니며 흥얼댄다. 그 울어대는 소리가 맑아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귀를 즐겁게 한다. 참으로 그 소리가 피리를 넘어서고 생황(笙簧) 소리를 묻히게 한다.

집 동쪽에 초제사(招提寺)를 지었는데, 바위를 등지고 계곡에 임해 있고, 층층 건물은 빛을 끌어들인다. 장엄한 전각(殿閣)은 벼랑에 닿아 있어 허공 속에 넓고 높게 솟아 있다. 상서로움을 들여 환한 빛이 나게 하였다. 왼쪽으로 돌아보고 오른쪽으로 흘끗 보니 인자롭고 지혜로운 자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석덕(碩德)과 명승(名僧)이 석장을 떨치며 구름같이 모이셨다.

7각지(覺支)로 마음 다스려 5()을 없애니, ()의 향기 성하게 피어 올라 정수(定水)에서 몸을 씻는다. 밤에 화로에 불을 지피고 새벽에 법고(法鼓) 소리 울려 퍼진다.

나는 신발을 벗어들고 옷을 잡아매고 허리 굽혀 예배드리며, 철인(哲人)에게 도를 묻고서 지극한 가르침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매번 들으니 이승의 강물 어지럽고 피안(彼岸)의 기슭은 영원히 고요하다. 즐거운 모습으로 춘대(春臺)에 올라 우주를 벗어나는 듯하다. 좋고도 즐거우니 어찌 다만 말로만 하겠는가?

절의 동남쪽으로 도관(道觀)이 있는데, 벼랑 옆에 높이 솟아 있어 아래로 비구름을 바라본다. 누각과 정자에 난초 둘러 있고 대나무 숲에 그림자 비추며 날아갈 듯한 도관과 줄지어 선 추녀는 안개 속에 옥처럼 환하다. 낮에는 곡식을 먹지 않는 백성53)을 머무르게 하고 해마다 신선의 객을 오게 하였다. 성수(星髓)를 먹고 흘러가는 노을을 마시며 장차 운의(雲衣)와 예상(霓裳)을 차려 입고서 용을 타고 학을 부렸다.

도관 아래에 석정(石井)이 있어서 물이 솟아 흐르는데,

 

마치 사람이 만든 것같이 새겨지고 다듬어졌다. 솟구쳐 새어나와 거세게 흘러 그 소리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리듯 하니 눈이 놀라고 혼이 놀라는 듯하였다.

절과 도관 앞뜰에는 모두 키 큰 대나무들을 심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대나무들이 언덕과 구릉을 뒤덮었다. 대숲 바깥으로는 기름진 밭이 있는데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고 산속의 샘물이 이를 비옥케 하여 울창하고 기름지다. 정백(鄭白)54)의 물길을 트고 막아도 이와 같지는 않으니, 붉은 곡식이 넘쳐나 오리와 기러기들도 배불리 먹는다. 봄철의 자라는 벽계(碧鷄)55)에게 맛있는 물건이고, 겨울의 버섯은 탈구새에게 진귀한 먹거리가 된다.

비단 두건은 언덕에서 취하고, 짧은 베옷은 동산 가운데서 얻는다. 물풀은 연못과 강가 옆에 자라나고 풀은 들판과 습지를 덮으니 양육하여 넉넉히 하는 밑천이 되고 삶의 쓰임이 된다. 울타리에 넉넉히 채우고 산봉우리를 가득 채우지 않음이 없다.

연초와 연말에 농사일 뜸한 때에 막걸리를 막 거르고 맑은 술이 비로소 익으면 농가의 늙은이들 병을 들고 함께 이르러 가시나무 수풀 아래에서 서성거리며 술잔을 늘어놓고 주고받는다. 술에 취하여 귀까지 붉어지면 춤추며 떠들썩하게 노닐고 즐겁게 곳집에 대해 논하며 심고 거두는 것을 이야기한다.

웃으며 노래하고 술잔 들어 서로 절하니 인생이 즐겁다. 이 기쁨을 누가 헐뜯을 것인가? 누에 쳐서 옷 입고, 밭 갈아 밥 먹으며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쉰다. 느즈막하게 먹는 밥이 고기처럼 맛있고 일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세속에 구하는 것 없고 만물에 꺼림이 없다. 영예와 욕됨을 따지지 않고 칭찬과 허물도 모른 채 넓디넓은 천지간에 마음속에 전전긍긍하는 경계가 없으니, 어찌 혜생(嵆生)56)이 형을 받게 되고 양자(楊子)57)가 고각에서 떨어진 것과 더불어 그 우열을 견주겠는가?

 

26) 여서복야영군술역승서(與徐僕射領軍述役僧書:서복야 영군이 역승을 서술한 것에 대해 보내는 글) () 석진관(釋眞觀)

천정(泉亭) 광현사(光顯寺)의 석진관이 영군(領軍) 단월(檀越)에게 서한을 올립니다.

가만히 듣자오니 4()의 개사(開士)가 장차 쇠퇴하려는 정법을 바로 잡고 10()의 고인(高人)이 이미 끊어져 가는 현문(玄文)을 지키며, 기사굴산(耆闍崛山)의 자취를 남겨

 

연좌(宴坐)의 풍화에 이지러짐이 없었고, 기수원(祇樹園)의 남은 싹으로 하여금 경행(經行)의 도를 얻게 하였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황화(皇華)께서 준엄한 법칙을 선포하시어 승니(僧尼)의 부류 가운데 명적(名籍)에 올라가 있지 않은 자는 이 같은 법계(法戒)를 버리게 하여 일반 백성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저 가람(伽藍)을 버리고 이한(里閈)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미 넓은 천하에 왕의 신하 아닌 이가 없습니다.

마땅히 부지런히 애써서 몸을 수그려 공손히 받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마음에서 문득 이에 대해 의혹이 생겨납니다.

불법(佛法)이 일어난 지 천여 년이 지나 이 땅에 전해져서 수백 년이 되어 여러 스님들이 생겼으나 어찌 많다고 하겠습니까? 비록 시조(市朝)가 빠르게 바뀌고 풍화가 갑자기 옮겨지더라도 지혜의 횃불은 늘 밝았으며, 계율의 향기는 여전히 향기로웠습니다. 그 복되고 이로움은 말로는 다하기 어려우니, 신령한 상서로움을 나타낸 것은 여러 사전(史傳)에도 나와 있습니다.

부도(浮圖)와 화상(和上)이 업중(鄴中)에서 이채(異彩)를 띠었고, 고좌(高座)의 법사가 공락(鞏雒)에서 향기를 전하였는데,58) 혹 곤명(昆明)의 연못 안에서 겁소(劫燒)의 남은 재를 가려내기도 하고, 장사사(長沙寺)에서는 쇄신(碎身)의 유음(遺蔭)을 감득하였으며, 단도개(單道開)가 경계에 들어가자 선인의 별이 바로 떴습니다. 법성(法成)이 세상을 떠나자 감마(紺馬)의 서응이 나타났습니다. 청목(靑目)ㆍ적자(赤髭)ㆍ황모(黃眸)ㆍ백족(白足)과 연이은 눈썹마다 칭찬을 드리우니 귀를 기울여 그 이름을 전하였습니다. 정수(定水)는 깊고도 맑으며 의봉(義峰)은 산이 견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왕성한 도망(道望)은 가섭의 높은 자취에 견주어지고, 엄숙한 위의는 알비(頞鞞)59)의 깨끗한 행실과 함께하였습니다.

최근 들어 나날이 의리나 인정이 경박해지고 정법의 홍기(洪基)는 미처 다하지 않았습니다. 문득 그 본뜻을 거슬리고 저와 같은 전심(前心)을 빼앗으니, 고전(高殿)을 우러르면 매우 마음이 아프고, 구방(舊房)을 떠나면 슬프지 않음이 없습니다. 법좌는 의연하나 다시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선문(禪門)에 연연하여 다시 돌아갈 날이 없습니다. 갈림길조차 없어지고 이별의 슬픔만이 남았습니다. 비록 하량(河梁:이별)을 달리하더라도

 

이별을 말해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만약 명적(名籍)을 잇지 않는 것이 큰 죄가 된다면, 이같은 허물을 끌어내는 일도 슬퍼할 만합니다.

무릇 세속을 벗어난 사람은 모름지기 수도에 힘쓰게 하고자 그 방외(方外)의 예법(禮法)을 허용하여 역내(域內)의 절도(節度)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혹 명적에 올려 있지 않으면서 부령(簿領)에 관련됨이 없는 자는 모두 방내(方內)를 다니며 법을 들으며, 처소에 따라 편안히 하면서 찰간(刹竿)에 기대어 거처를 삼고, 정오가 되어서는 밥을 먹습니다. 혹은 나무 밑에서 두타(頭陀)하거나 혹은 바위자락을 난야(蘭若)로 삼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를 어떻게 계속 그냥 놔두겠습니까?

만약 훌륭한 업이 온전하지 못하여 청금(淸禁)의 훼손이 많다면, 마땅히 도를 기려야만 이 같은 일이 지극해질 것입니다. 지계(持戒)와 범계(犯戒)는 가리기 어렵고, 성인과 범부는 서로 범람하는 것이, 비유하면 암라(菴羅)의 열매가 설익고 잘 익은 것을 가리기 힘들고, 설산의 약이 참되고 거짓됨을 분간하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문득 곤봉(崑峰) 위에서 옥과 돌을 함께 태우고, 대택(大澤) 가운데에서 용과 뱀을 같이 죽이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슬픕니다.

또 애정을 끊고 부모를 하직하며 치의(緇衣)를 걸치고 머리카락을 잘라서 이미 복사(僕使)도 없고 처자식과도 영원히 관계를 끊었고, 혹 늙고 병든 나이로 혼자 몸의 가난한 선비에게 모두 자제(子弟)에 의지하여 다시 봉양하고 가정을 영위하라는 것은 마치 비가 쏟아져 하루아침에 도랑에 빠져 죽는 것과도 같습니다. 바로 높은 산의 골짜기로 나아가 투신하거나 긴 끈으로 목매어 죽기도 하니, 그 명()에 비록 멱라(汨羅)의 고통이 되풀이되더라도 이것에 비하면 도리어 가벼울 것입니다. 황곡(荒谷)의 비탄도 이에 비하면 중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재(奇才)와 절학(絶學)은 후생에 의탁하는 것이고, 청강(聽講)과 송경(誦經)은 모두 만수(晩秀)로 충당하는 것입니다. 수타(須陀)가 계()를 얻는 것은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고, 신자(身子)60)가 이름을 날리는 것은 그 차별이 기로(耆老)와 다름없습니다. 이와 같은 부류가 만약 아울러 치의를 바꿔 입는다면, 아마도 이 같은 법문이 이어지지 않을 것이고 범륜이 끊어지며 정사(精舍)마저 텅 빌 것입니다. 만약 팔진(八陣)을 쉬지 않고 사교(四郊)에 성이 쌓이라도, 앞서 가는 이에 의탁하거나 뒤처져서 따를 것입니다.

내가 이와 같은 사람은 참으로 쓸모가 없다고 말하니,

 

만약 발거(拔距)61)와 돌을 던지는 능력과 쇠를 없애고 갈고리를 펴는 힘이 있다면 군의 막부를 쫓아가 오랫동안 전업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찍이 치의를 입는 것을 숭상하여 사우(寺宇)에 머무르니, 용맹을 익히는 마음이 옅어지고 도를 즐기는 마음만 깊어졌습니다.

만약 위개(衛玠)62)의 수척함이 아니면 맹창(孟昶)63)의 나약함과 같을 터이니, 이미 말을 부리고 화살을 당기는 데 익숙하지 못하며, 행진하더라도 수고롭기만 할 것입니다. 비록 다시 그 몸에 갑주를 둘렀어도 법의(法衣)라고 생각할 것이며, 손에 창을 쥐어줘도 석장(錫杖)이 아닐까 의심할 것입니다. 반드시 멀리서 전쟁의 북소리를 듣게 되면 안색이 변하고 마음이 당황해질 것이며, 멀리서 군의 깃발을 쳐다보게 되면 혼비백산할 것인데, 장차 도성을 지키는 위엄에 저촉되어 이사(二師)의 용맹함에 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왕의 수입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국가의 저축에 이로움도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널리 그 부렴(賦斂)을 거두려고 한다면 단지 유랑(流浪)하는 무리는 흩어져 달아날 것이고,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散誕] 부류는 끝까지 가난할 것입니다. 향리에는 밭과 집도 없고 경사(京師)에도 또한 주인이 없을 것입니다. 신발을 거두어 들이게 되면 두 발꿈치가 다 닳아 있고 옷깃을 거두면 양쪽 모두 드러나니 동생(董生)의 백결(百結)을 보고서도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며, 표주박 하나의 안자(顔子)의 밥을 보고서도 너무 많아 배부르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썩은 흙을 구하여 약으로 삼으니, 어찌 자환(紫丸)64)을 알겠습니까? 사람들이 버린 헌 옷[糞掃衣]를 입으니 어찌 황견(黃絹)의 예를 만나겠습니까?

회벽(懷璧)65)의 허물도 따르지 못하니 진실로 면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그 도에 있게 하자면 차라리 분위(分衛)하며 스스로를 충당하게 해야지, 바로 백성으로 되돌리면 식량조차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조(皇朝:陳 武帝)가 통치하여 역수(曆數)를 다스리고 제성(齊聖)이 흠명(欽明)하여 헌원(軒轅)과 복희(伏羲)의 자취를 이어가고 염제(炎帝)와 호천(昊天)과 어깨를 마주하였습니다. 명경을 거머쥔 풍화는 더욱 원대해지고 옷을 늘어뜨리는[垂衣]66) 교화는 점점 깊어지며 아울러 삼보의 동량이 되어 10()을 널리 폈습니다.

예전에 한나라 명제가 영감하여 금인(金人)을 꿈꾸었고, ()나라 무제(武帝)가 다시 수리하여 옥상(玉像)을 모셨습니다. 지금 쓰는 것도 옛것을 본떴으니, 저와 같이 한다면 부끄러운 바가 있을 것입니다.

 

경법(經法)을 깊이 애호한 것은 선예대왕(仙預大王)67)과 같이 하고, 보탑을 이룩한 것이 무우국주(無優國主:아육왕)와 비슷합니다. 미천한 것을 밝혀 드러내어 소보(巢父)68)의 청허함을 믿게 하며 불러 모아 사냥하고 고기잡아 엄생(嚴生)69)의 고상함을 허락하였습니다.

만약 법의(法衣)를 벗고 도업(道業)을 따르지 않는다면, 혹은 항상 저사(邸肆)에서 지내거나 전원(田園)에 늘 거처하더라도 백성의 조례에 따라 부려야 할 것입니다. 그 선정과 풍송(風誦)을 잘 이해하면서 소찬을 먹으며 청빈하거나, 혹 널리 창도하여 공이 있어서 거룩한 말씀을 기록할 수 있거나, 혹 탑묘(塔廟)를 수선하여 경서를 이룩하면서 구제에 마음을 두고 학업에 힘쓰는 이, 내지는 늙고 파리한 무리와 가난하고 병든 부류에 이르기까지 다행히 호적에 편입되더라도 그 쓰일 바가 없는 무리들은 아울러 사찰에 머물게 하여 승적(僧籍)에 올린다면 반드시 십성(十城)의 보배를 기리더라도 혹 형산을 벗어나서 백보 이내에 향기나는 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절마다 부랑한 스님들을 단절시키고 대중에 술 먹는 식객이 없게 하면서 육시(六時)마다 기도하게 하여 늘 국계(國界)로써 마음을 삼고 3()을 올바로 닦게 한다면, 반드시 군왕(君王)의 근본에 쓰임이 있을 터이니, 어찌 유계(幽界)와 명계(明界)가 기뻐 날뛰고 사람과 귀신이 함께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명계(冥界)의 힘으로 이를 보살피며 선연(善緣)을 장려하고 도와야 하니, 이런 연후에 이의(二儀)가 편안해지고 육기(六氣)가 조화로워질 것이며, 달리는 말의 안장을 내리고, 군기는 그 깃대를 접게 될 것입니다. 변지의 팔황(八荒)이 부용하여 단수(丹水)의 군사와 마주함이 없을 터이고, 금옥과 비단으로 내조(來朝)하여 도리어 계산(稽山)의 모임70)을 생각하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습니까? 참으로 기쁩니다.

다시 변방의 염려가 없어지고 군자(軍資)가 필요 없어져서 비용조차 가벼워질 것입니다. 삼가 구하는 것을 들어주십시오.

삼가 오직 영군(領軍) 단월(檀越)은 밖으로는 분전(墳典)을 탐색하고, 안으로는 경론을 깊이 연구하여 재주가 유악(帷幄)보다 높고 의지함은 염매(鹽梅)보다 중합니다. 반드시 뜻을 추요(蒭蕘)에게 내려서 마음을 정법에 두고 작은 것도 자세히 헤아리고 초라한 것도 잘 살피기 바랍니다. 이에 그 한 오라기라도 거두어 준다면 참으로 기쁘겠습니다.

 

자세하게 그 논에 힘써서 난초와 쑥에 함께 호미질을 하거나 향기로운 풀과 냄새나는 풀을 같이 자르지 말고 선인(仙人)의 모범을 얻어서 법륜(法輪)을 다시 굴리고, 장자가 원림(園林) 가운데 다시 자리를 깔게 된다면, 광유(匡維)의 덕이 항산(恒山)과 대산(岱山)처럼 높아질 것이며, 바로 옹호하는 공덕이 창명(滄溟)처럼 넓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번잡함을 더하니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27) 간인산심법사파도서(諫仁山深法師罷道書:인산의 심법사가 도를 행하지 않음을 간하는 글) () 서릉(徐陵)

가만히 듣자오니, 출가(出家)의 한가로움은 허공과 같은데, 세속의 새장과 같은 울타리는 옥살이에 비유한다고 합니다. 이는 단지 경전마다 명문(明文)이 있을 뿐 아니라 세간에서도 다 같이 목도하는 것입니다.

언뜻 듣건대 법사께서 저 배를 뒤집어 운항하시되, 나아가 치의(緇衣)의 임무를 되돌리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눈앞의 뛰어난 재지(才智)로 장구한 깊은 계책은 아닌 듯 싶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면, ()에서 낙()으로 들어가면 낙 가운데의 낙을 알지 모르고, 낙에서 고로 들어가면 바로 고 가운데의 고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평소에 법사와 오래 사귄 것은 아니나, 서로 알고 지낸 이래로 다시 멀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좋은 약은 반드시 맛이 좋은 것은 아니고, 충간(忠諫)은 결단코 귀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 편벽함을 보게 되니 말하지 않고는 참으려고 해도 참을 도리가 없습니다. 30년 동안 막대한 업을 이룩하였는데,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이미 이룬 공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누구라도 애석하게 여길 것입니다. 정중하게 그 높은 마음을 헤아리더라도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장차 유악(帷幄)71)의 계책이 아닌 것으로 유후(劉侯)를 모아서 그 형체를 와룡(臥龍:諸葛孔明)에 짝하더라도, 멀리 갈씨(葛氏:諸葛孔明)를 구하여야 하는데, 황석(黃石)72)의 병법(兵法)을 어찌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삼고초려하여도 두 번 다시 만날 길 없으며, 그 작위가 오등(五等)에 봉해진 이를 보고자 하여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중합(中閤) 밖의 문에서는 붉어지기는 어렵지만 희게 되는 것은 쉽습니다. 피리를 불며 봉황의 소리를 연주하는 것을 때론 듣지 못하고 무녀(舞女)와 가희(歌姬)는 헛되이 노력하지만 유희가 되어 버립니다. 그것을 구하는 자는 소털과 같이 많지만 이것을 얻는 자는 소뿔처럼 적습니다. 이 밖에 다시 무엇을

 

들여다보겠습니까?

법사가 지금 만약 퇴전하시면 반드시 마음에 들 만한 한 가지도 없을 터이니, 눈앞의 열 가지 큰 이익을 잃어버리시게 됩니다. 왜냐하면 불법은 세밀한 흐름을 간략하게 하지 않기에 입도(入道)하면 존귀해지고 귀의하면 귀해지는 것이니, 위로는 천자(天子)에게도 조배(朝拜)하지 않고 아래로는 제후(諸侯)에게도 사양하지 않으며, 홀로 세간을 노닐며 무위자재하니, 이것이 그 이로움의 첫 번째입니다.

그 몸에 손수 애쓰는 수고로움이 없으면서도 입으로 향적(香積)의 밥을 먹으며, 마음으로는 처첩(妻妾)에 대한 의무를 염려하지 않으면서 몸에는 베옷[芻摩]을 걸치면서도 아침마다 밭고랑을 밟을 근심이 없으며, 저녁에는 천리의 괴로움이 없는지라,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유유자적하는데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그 이로움의 두 번째입니다.

몸소 맡아야 할 중책이 없고, 방역(方域)에 거처하니, 하얀 벽과 붉은 문은 가지런하게 공경을 다하며, 밤에는 거문고를 타고 낮에는 가야금을 울리니, 이는 스스로 그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아침에는 붓을 들고 저녁에는 시를 읊으며 그 정()을 논하며 발을 구릅니다. 이것이 그 이로움의 세 번째입니다.

설사 가시가 왕도(王道)에 생겨나고 긴 냇가에 다리가 놓이더라도 항리(巷吏)와 문아(門兒)가 어찌 이로 인하여 우러러 부르겠습니까? 한 필의 비단도 바치지 않고 1()의 쌀도 공창(公倉)에 들이지 않으니, 고부(庫部)의 창사(倉司)가 어찌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이로움의 네 번째입니다.

문 앞이 시끄럽더라도 나는 도리어 편안히 잠을 자고, 골목 안이 떠들썩하더라도 나는 놀라는 기색이 없고, 집안은 크고 작은 조세(調稅)를 그쳐 문에서는 젊은 장정이 부역을 멈추고서 들어가고 나아감을 마음대로 하고 가고 옴을 자유로이 하니, 이것이 그 이로움의 다섯 번째입니다.

출가하여 올바른 스님이 되지 못하더라도 세속의 선비들보다도 훌륭하니, 설사 살육하려는 마음이 있더라도 손으로는 목숨을 끊는 죄를 짓지 않고, 남몰래 정을 통하더라도 결국에는 초조하여 애를 태우니 세속을 바로잡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 번뇌가 만 배나 되니 무엇이라 하여도 백의(白衣)보다 훌륭합니다. 한번 애욕의 바다로 들어가면 영원히 가라앉아 나오지 못하니, 이것이 그 이로움의 여섯 번째입니다.

종소리를 듣고 예배를 드리며 향기를 맡고 마음을 이루어 아침마다 존의(尊儀)를 뵈면서 저녁에는 보축(寶軸)을 펼치니 찰나의 착함이 이에 따라 생겨납니다. 물방울의 공이 미약하더라도 점차로 큰 그릇을 채워가니,

 

가히 그 인연의 과보를 알지 못합니다. 선과 악이 분명하니 이로써 말하더라도 그 이로움을 다하기 어렵습니다.

설사 달상(達相)의 백의라도 애진(埃塵)의 임무가 남아 있고, 멀리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엄격한 가르침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머리를 조아립니다. 형체가 떠나면 마음은 남지만 몸이 옮겨가면 뜻도 따라가게 됩니다. ()에 막힌 이는 이 같은 것을 얻게 되고, 빈궁하여 괴로운 이는 영원히 말미암는 것이 없습니다. 가까이 눈앞에 있어 말하지 않아도 볼 수 있으니, 이것이 그 이로움의 일곱 번째입니다.

산간의 나무 밑에서 스스로를 기약하기 어려우니,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에 씻는 것이 실로 드물지만 이와 같은 부류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기만 합니다. 이와 같은 이는 만나기 어렵고 일심(一心)의 사람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법사가 배우지 않은 것이 없어서 총승(聰勝)의 인()을 번갈아 익혔는데, 하루 아침에 아득한 이치로 마음을 돌렸으니, 이것이 그 이로움의 여덟 번째입니다.

직성(織成)의 부질(部帙)을 열고 과거의 인()을 보며, 유리(琉璃)의 축권(竺卷)을 펼치고 미래의 과()를 징험하니, 인을 알고 업을 알아서 죄를 짓지 않으며, 복을 알고 보()를 아는데, 무엇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위로는 나룻배의 노가 없으니 물에 빠지는 슬픔을 보게 되고, 아래로는 부낭(浮囊)을 잃어서 바로 몸이 가라앉는 화근이 있으니, 이것이 그 이로움의 아홉 번째입니다.

군품을 널리 구제하여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 되니, 물이나 뭍이나 허공으로 다니는 것조차 모두 존귀하게 여겨서 말을 하면 도려(屠梨)73) 화상이라고 부르며, 편지를 쓰면 반드시 치경(致敬) 또는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和南]’라고 합니다. 원근이 칭송하며 귀한 이나 천한 이가 모두 우러릅니다.

법사가 지금 퇴전하시면 이 같은 일을 바로 징험하실 수 있습니다. 가사를 벗자마자 만나는 사람마다 너와 나라 부르며, 편단(偏袒)을 풀자마자 이름을 바로 부르게 되며, 평교(平交)하는 이는 옛일을 논하지 않고, 비천한 자조차도 사양하지 않으며 말을 가벼이 하여 호칭할 것입니다. 탑석(榻席)은 종래와 현격하게 다르며, 조금 자재(自在)함을 얻게 되면 바로 군()으로서 봉작(封爵)합니다. 만약 무릎 꿇고 손을 거두지 않는다면, 스스로 이르러도 인()이 없게 됩니다. 굽어보고 올려다보며 맞이하여도 법도에 합치되지 못하니, 이와 같이 애쓰는 것에 함께할 만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그 이로움의 열 번째입니다.

 

열 가지 일을 대략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같은 기회를 헛되이 놓치면 그 사이의 깊은 도를 어찌 모두 기술할 수 있겠습니까?

어짊을 우러르는 이는 마음이 마경(魔境)에 머물러 마군에게 미혹되고, 뜻이 삿된 갈래에 붙어 삿됨을 받아 성품을 바꾸게 됩니다. 설사 그 눈썹이 가는 버들과 같더라도 어찌 마음에 담기에 넉넉하겠습니까? 뺨이 붉은 복숭아 같더라도 어찌 장구하겠습니까?

이부자리를 함께하고 베개를 나누어도 장신(長信)의 슬픔74)이 있고, 앉고 누우며 때를 잊으면 추호(秋胡)의 원한75)을 면하기 어려우니, 낙천(洛川)의 신녀(神女)도 일찍이 동아(東阿)를 미혹하지 않았는데,76) 세상의 아름다운 여인일지라도 어찌 그대의 일에 관계하겠습니까?

무릇 마음이란 얼굴과 같으니, 만약 그 남녀의 그리워하는 정[繾綣]을 논하자면 기개를 같이하고 마음을 같이합니다. 한 번 얽매임을 만나면 밤을 새도록 일어남을 미워하게 됩니다. 법사가 반조(返照)에 형통하지 못하면서 어찌 꽃 파는 이치를 깨닫겠습니까? 다른 이의 마음을 얻지 못했으니, 어찌 저 뜻을 알겠습니까? 참으로 계수나무를 큰 불에 태워 버리는 것이 슬프기만 하고 명주가 진흙 속에 묻혀 버리는 것이 애석하기만 합니다.

제자가 오늘날 뜻밖에 여쭤보는 것도 반드시 법사에게 조소를 받을 터인데, 세상의 백의가 무엇을 탓하고 무엇을 제한하겠습니까? 단지 한 사람이 도에서 물러나 편안하지 못하여 위태로우니, 이를 미루어 말하자면 진실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비유하면 기와가 길에 가득하더라도 사람들이 놀라지 않으나 한 조각의 황금은 만 명의 사람도 가던 길을 멈추게 합니다.

바로 말하자면 법사에게는 도로 들어가는 공이 이미 갖추어져 있고 염속(染俗)의 법도 더해지지 않았으니, 어찌 금을 적동(赤銅)으로 바꾸고 은을 연석(鉛錫)으로 바꾸는 것과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슬프고 참으로 애석하니 오히려 참을 수 있는 것과 참기 어려운 것을 잘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바라는 것은 속세의 일을 버리고 애써서 진로(塵勞)를 쉬고 바른 마음을 일으킬 것을 아는 것입니다. 행실과 뜻의 두 가지를 온전히 하고, 부박함에 세밀한 생각을 보태어 더욱 사유한다면, 앞서의 일을 후회하고 나중에 한탄하는 수고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제자가 계산하는 것과 같다면 멀리는 10수 년 안에 측은함을 알게 되고, 가까이로는 서너 해 안에 헛되이 창도함을 어찌 하겠습니까? 만 가지 한탄과 만 가지 슬픔이 어찌 멀리 미치는 것을 알겠습니까?

스스로 늘 그르치고 스스로를 어긋나게 하여

 

한평생을 영원히 버리게 됩니다. 이로써 끊어진 가야금 줄은 이을 수 있으나 마음이 한 번 가면 머물기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혹 만약 불 속에서 꽃이 피면 이를 드물다고 말할 수 있으나, 미혹한 사람이 돌이킴을 안다면 도에서 벗어나도 멀리 가지 못합니다. 빨리 밀쳐 내고 급히 정로(正路)로 오른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법사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함이 아니나 어리석은 자에게 미혹되는 것은 아난(阿難)이 마군에게 희롱당한 것과 같습니다. 마치 삼보의 힘을 받들어 저와 같은 여러 흉악한 것을 제압하는 바와 같으니, 반야의 당기[]와 번기[]를 세운다면 천마(天魔)도 스스로 물러서는 법입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 뜻이 합당하다면 세속의 속됨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만약 높은 마음을 회통하지 못하더라도 멈추어 귀를 기울이기만 하여도 다행입니다.

 

28) 간주조사태승표(諫周祖沙汰僧表) 석담적(釋曇積)

() 담적(曇積)이 말씀드립니다.

황제 대단월(大檀越)의 덕은 건곤(乾坤)을 쥐고 마음은 일월에 걸렸으니 공평무사한 도()를 밝게 비추며 헤아릴 수 없는 조화(造化)를 감았다 폅니다.

그러나 그 위세가 조백(皂白)77)에 임하다가 슬프게도 승니에까지 이르렀으니, 현강(玄綱)78)을 끌어당겨 출로(出路)를 제시하며, 그 오름을 맑게 하고 행실을 연마하여 밝은 시절에 자취를 드러내었습니다.

덕이 부족한 사문이라도 세속으로 되돌려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이에 밝은 조칙을 내려 그 시부(試簿)를 책하며 여러 주()로 반포하여 마침내 과업(課業)을 물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도에 들어가는 것은 실로 갈래가 많아서 참으로 하나만이 아닙니다. 모양에 따라 사람을 징험하자면, 다섯 가지 이치의 부족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혹 어떤 승니는 해마다 절에 살면서 근검절약으로 자신을 영위하고, 원행(願行)과 요심(要心)으로 금계(禁戒)를 범하지 않고, 향을 피우고 탑을 돌면서 열심히 예배하며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침식조차도 잊습니다. 단지 성품이 우둔하여 독송하여도 연()이 없고, 고생스럽게 익히고 배워도 한 자도 깨닫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신 뜻을 살펴보면 오로지 문장을 독송하는데 총명(聰明)한 이만 옳게 여기지만 다시 물러나지 않는 스님들이 실행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을 옳게 생각해서 한쪽 면만 바라보는 생각을 바로 하여 분명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또 참되지만 총명하지 못한 것은

 

()의 근본이지만 총명하지만 참되지 못한 것은 지()의 형상입니다.

만약 쓰임새를 가지고 업()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한 사람에게 다 갖추어지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실제로 스님이 아니라면 만족을 위해서 지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대각(大覺)의 지혜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러 가지 법도마다 하늘과 사람이 받들어 수지하는 것인데, 하물며 일개 범부가 쉽게 생각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여러 성인께서 스스로 신변(神變)을 말씀하셨으나, 이와 같은 대법(大法)에 있어서는 더하거나 덜지 못하니, 대인(大人)이 세상에 나오면 근본을 알고 기틀을 알며 묘한 방편을 많이 써서 사람들을 점차로 교화시킵니다. 중생의 근기와 행실이 각각 같지 않으니, 성인이 경전을 말씀하시되 서로 다르게 하시어 한 갈래만이 아니라, 안과 밖이 서로 통하게 하므로 실제로 어긋남이 없습니다.

또 공자가 3천의 무리를 거느렸으나 통달한 이는 72명뿐이고, ()에 올라가 입실(入室)한 이는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외의 나머지를 어찌 배척하여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주()ㆍ현()ㆍ군()마다 제각각 배우는 사람이 있으나, 그 덕이 안연(顔淵)에 미치는 이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참으로 안연에 미치지 못한다고 군()을 없애고 세우지 않는다면 덕이 없는 완고한 스님들도 환속시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안연에 미치지 못하는 이라도 촌사람보다는 뛰어나며, 덕이 없는 완고한 스님이라도 외도(外道)보다는 훌륭합니다. 삼가 이 같은 두 갈래가 첫 번째의 부족함입니다.

혹 오로지 나무 밑으로 돌아와 석장을 높이 들고 발우를 짚고 정오를 기다리며 식사하면서 명()을 바로 하여 스스로 살아가는데 명예도 버리고 이롭게 길러짐에도 마음을 두지 않으며, 이치를 관()하여 번뇌를 없애며 문송(文誦)을 결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도에 들어간 것에 대해 논하자면, 내업(內業)에는 남음이 있습니다. 그 문해(文解)를 따져보면 모양의 공덕[相功]은 부족할지라도, 어찌 화려한 경사(京師)에 대중을 모은다고, 반드시 모두가 유덕(有德)한 스님이고, 홀로 임야에 산다고 모두가 행사(行士)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과일이 설익고 잘익은 것은 색과 모양만을 따져서 먹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출몰도 형태와 이름으로 취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 세 번 거듭 생각해 보아도 이것이 두 번째의 부족함입니다.

혹 성상(聖像)을 이룩하느라 몇 년 동안 애를 쓰고,

 

가람을 수리하느라 근심하며 정근(精勤)하여 세월을 보냅니다. 몸을 던져 만물을 구제하느라 추위와 고통에도 마음을 쓰지 않기도 합니다. 약을 베풀어 사람에게 내어 주느라 배고프고 곤궁한 것 때문에 그 뜻을 바꾸지 않습니다. 단지 총기(聰氣)가 없어 나날이 독송하는 것이 한마디 말에 지나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해가 지도록 읽어도 몇 장을 채우지 못해도 그 회향(廻向)을 기준으로 보면, 몸은 헛되이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그 나아가는 뜻을 징험해 보면 바로 부처님의 참다운 아들입니다. 지금 무고하게 환속한다면 지나가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고 진성(眞性)을 갑자기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의 부족함입니다.

부처님 설법에 의하면 스님들 자체가 복전(福田)이니 이치는 손상시키거나 억누르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늙고 그 형체가 비천하여도 법복(法服) 자체가 존중할 만하니, 어찌 아침에는 베풀고 저녁에는 빼앗아서 스스로 높였다가 훼손할 수 있습니까? 좋고 싫은 것은 무상한 것인데, 어떻게 한 사람에게 그 득실을 책하고 12충전(冲典)79)에 항상되지 않은 법식을 두겠습니까?

아마도 성인의 마음에 부합하지 않고, 대승의 갈래에 심히 어그러져서 위로는 자비를 훼손하고 아래로는 정화(正化)가 어그러질까 두렵습니다. 오직 이 같은 일이 후세로 전해져 스님들을 무고하였다는 비방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의 부족함입니다.

지금 대주(大周)는 대국(大國)인데, 승니는 얼마 되지 않고 사찰이 늘어섰다 하나 겨우 만여 곳에 이를 뿐입니다. 단지 2부 대중을 초빙하여 그 사이를 채우고서 범종을 울리며 나라를 위해 행도(行道)하게 하면서 방편으로 그 장단을 다하게 하다가 자세하게 허물과 죄를 찾아 이를 축출하여 백성으로 되돌려서 동량(棟梁)을 텅 비게 하였습니다.

만약 타방(他方)의 다른 나라에서 멀거나 가깝거나 이 소식을 알게 되면, 스님들 사이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탑묘(塔廟) 아래에서 땅을 취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말할 것입니다. 정말로 이상하게 여길 만합니다. 단지 완고한 스님들에게 부역(負役)의 임무는 주더라도 병사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사찰의 토지를 백성에게 내어 준다 하더라도 어찌 나라가 부강해지겠습니까?

()은 갑자기 없앨 수 없고, ()은 점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모두 여러 가지 번뇌를 갖고 있습니다. 만약 원만(圓滿)한 수행을 갑자기 없애려는 것은 불법(佛法)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그대로 그 몸을 훼손시킬 뿐 아니라 마군(魔軍)은 반드시 방편을 얻게 됩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한 번은 지극히 선()하다고 하면서 정갈하게 공양을 보태다가 한 번은 지극히 악()하다고 하면서 물러가 환속시킵니다. 이 같은 말의

 

소견은 바로 삼보를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조잡하고 세밀한 것을 평등하게 본다면, 마군도 방편을 얻기 힘들 것입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순일(純一)하게 착한 이도 환속한다면 거칠게 될 것이나, 거친 무리들도 오히려 만물의 착함을 이룰 수 있으니, 경문의 도리는 참으로 그 행이 거칠고 세밀한가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환속하지 말아야만 불자(佛子)를 이루게 되니, 그 진퇴에 세 번을 거듭 생각함에 이것이 여전히 다섯 번째의 부족함이 됩니다.

빈도가 여생을 천박한 자질로 명()을 관우(關右)에 맡겼는데, 이제 덕화(德化)를 입고 은혜를 받아 도업(道業)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 지팡이를 짚고 신음하면서 이와 같은 정성된 마음을 보내지만 죽은 죄에 땀을 흘리며 삼가 두려움만 늘어갑니다.

삼가 아룁니다.

 

29) 이선성혜명선사서(貽仙城慧命禪師書:선성 혜명 선사에게 보내는 글) () 대규(戴逵)

생각해 보면, 위수(渭水)는 맑고 경수(涇水)는 탁한데도 서로 섞이어 물결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소나무는 길쭉길쭉하고 전나무는 짤막짤막한데도, 함께 어울려 견정(堅貞)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함령(含靈)5()에 힘입어 이치를 온당히 하고 3()를 범주로 삼아 이로써 궐리(闕里)의 유동(儒童)80)이 수제(洙濟)81)에서 예경(禮經)을 천양하였고, 고현(苦縣)의 가섭(迦葉)82)은 유사(流沙)에서 묘도(妙道)를 천양하였습니다. 그러나 2()를 가두고 대체로 1()에 국한되었으니, 어찌 녹야원(鹿野苑)에서 정법이 일어난 것과 비기겠으며, 영취산(靈鷲山)에서 망상(妄想)을 소탕한 것과 견주겠습니까?

반만(半滿)83)이 이미 펼쳐지고 방편과 진리가 모두 드러나서 참으로 가르침에는 얕고 깊음이 있으나 사람에게는 안팎이 없습니다.

선사께서는 덕망을 멀리 떨치시고 높은 행실이 만물의 사표이십니다. 4()로 섭수하고 목양(牧羊)으로 인하여 송경(誦經)하고, 책상자를 짊어지고 천리를 가며 용궁(龍宮)을 지나 포괄하셨습니다. 이로써 안으로는 9()84)를 관통하여 설산(雪山)의 비장(祕藏)을 총괄하고, 바깥으로는 칠략(七略)85)을 갖추어 벽수(壁水)의 분전(墳典)을 갖추셨습니다. 지둔(支遁) 천태(天台)의 명문(銘文)과 축진(竺眞) 나부(羅浮)의 기(), ()은 칠령(七嶺)을 부()하고 태()는 삼하(三河)를 노래하였으며, 보사(寶師)는 장생(莊生)을 묘절(妙折)하여 거공(璩公)의 저론이 여기에 모여 운몽(雲夢)을 삼키듯이 하고 손바닥을 가리키듯 하였습니다.

정계(淨戒)를 묘하게 수지(受持)하는 것이 마치

 

명주를 얻듯이 하셨습니다. 율의(律儀)를 잘 갖추신 것이 마치 매달린 거울에 임하듯 하시고, 라운(羅云)86)의 밀행(密行)을 받으시고, 빈두로(賓頭盧)87)의 복전을 이으셨습니다. 정수(定水)를 퍼담아 곧 각관(覺觀)에 올라 선()의 가지를 높이 그늘로 하여 장차 희사(喜捨)를 넘겼습니다. 이로써 호남에 있는 소수(瀟水)와 상수(湘水)도 멀게 생각지 않고 면륙(沔陸)88)으로 찾아왔습니다. 용천(龍泉)에 지팡이를 심어 정사(精舍)를 지었습니다.

마곡(馬谷)에서 수레를 돌려 가람(伽藍)을 짓고, 산봉우리를 뚫어 감실(龕室)을 만드니, 어찌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드는 것을 빌리겠습니까? 산에 의지하여 원림을 만드니 수고로움이 없었으며, 금을 깔아 땅을 얻는지라89) 개사(開士)가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소맷자락이 화음(華陰:華林園)과 같은지라, 법려(法侶)가 다 함께 달려가고, 대중이 직하(稷下)로 모였습니다. 선실(禪室)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두약(杜若)의 향기가 나고, 지제(支提:)에서 저녁을 맞이하면 잠시 도원(桃源)에 들어간 듯하였으니, 향산(香山)의 거룩한 메아리가 피어나고 완적의 휘파람 소리[阮嘯]90)가 서로 조화를 이루듯 하였습니다.

일전(日殿)의 묘한 소리는 손금(孫琴:孫登의 가야금)과 더불어 가락을 같이하였고, 자개(紫蓋)의 우뚝한 소나무는 뛰어난 변재를 휘둘렀으며, 커다란 낭떠러지의 신묘한 우물은 높은 마음을 빛냈습니다. 그러므로 재주로써 산을 사고 덕으로써 같은 가마를 타고 갔습니다. 그 아름다운 행실을 봉우리처럼 높이니, 그 행적이 매우 뛰어납니다.

제자는 업풍(業風)에 생각을 두드리고 욕해(欲海)에 그 형체를 가라앉혔으니, 저궁(渚宮)에서 빠지고 넘어져 장차 이기(二紀)를 거쳤습니다. 낮에는 쭈그리고 앉아 생각에만 열중해 피곤해 하고, 밤에는 슬픔에 잠겨 나쁜 꿈만 꾸니, 마음속으로 너와 나를 잊고서 1()으로 돌이켜 흉금을 털어내며 3()을 밝게 열어낼 수 없었습니다. 이미 서등(鼠藤)91)을 생각하여 더욱더 조계(鳥繫)를 상하게 할 뿐입니다.

예전에 배움에 뜻을 두어 사서(賜書)를 전하여 오례(五禮)를 열심히 하고 3()92)을 물리도록 봐서 위편이 끊어질 정도가 되어 다른 것들을 공부하였습니다. 약관에 벼슬하여 백가(百家)를 다스렸으나 벼슬 살면서 문한(文翰)에만 매였습니다.

비록 용문(龍文)을 찾고 회계(會稽)에 올라 초료부(鷦鷯賦)93)를 짓고 앵무새를 노래하지는 못했더라도 만약 그 조그마한 것을 구하려 한다면 옛사람과 흡사합니다. 단지 만물이 물거품 같음을 깊이 깨닫고 보니 팔과 팔이 닿듯이 서로의 만남이 슬퍼집니다.

늘 매미가 허물 벗듯이 세속의 이해를 벗어나 진여(眞如)의 맛을 탐하고자 합니다. 하루는 운성(隕城)에서 수괴관(修隗舘)을 방문하여 무릎을 꿇고

 

기뻐하며 마치 가죽신이 갈 길을 만난 듯하였으나, 그 나아감에 다하지 못하고 흉금을 떨치며 한탄만 내었습니다.

이리저리 찾아보면서 옷에서 세간의 그물을 털어 내고 신발에 실오라기 매인 것을 벗겨 내며, 창랑(滄浪)에 갓끈을 씻고 한음(漢陰)에서 작은 옹기를 껴안았습니다. 천하를 다니며 구전(九轉)을 맛보고 활용하여 깊은 근심을 없애니, 점차로 삼공(三空)을 깨달아 장차 고인(苦忍)에 올랐습니다. 선량(仙梁)에서 옥()을 바라보더라도 스승을 따름을 폐하지 않고, 깊은 골짜기에서 복숭아 나무를 꺾더라도 거리낌 없이 이로움을 청하였습니다.

미천(彌天) 석도안(釋道安)94)의 좋은 기()로 언뜻 착치(鑿齒)에 답하고, 안문(雁門)95)의 고론은 때에 맞게 가빈(嘉賓)96)에게 답하였으니, 겨울에도 따뜻하기가 봄철과 같기를 바랍니다.

원컨대 바른 규범을 소중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방은 가까우나 사람은 멀기만 하니, 금대(襟帶)에 더욱 의지하고 나머지 말이나 남아 있는 편지에는 볼 만한 것이 없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30) 수대선생서(酬戴先生書:대 선생에게 답하는 글) 석혜명(釋慧命)

무릇 일진(一眞)은 늘 고요하고, 나타냄과 신비함은 그윽함을 같이합니다. 만성(萬聖)이 기틀을 타고 어긋나거나 순응하면서 그 자취를 달리하였으니, 이로써 서관(西關)97)에서 도를 밝히고 동쪽 뜰98)에서는 어짊을 논했습니다.

순박함을 새겨서 공()을 바꾸고 유()와 무()의 수레를 달리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이 같은 두 가지 문을 거두어 이 두 가지 가르침을 근원으로 한다면 어찌 3()99)에 귀종하고 5()100)으로 들어가 천박함에 의지하여 깊어지며 방편에 의지하여 참됨을 드러내지 않겠습니까? 이는 마치 연못이 네 갈래 물로 나뉘어 처음은 이름을 달리하더라도, 바다가 팔하(八河)를 이끌어 결국에는 맛을 달리하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단월이 어려서부터 기이한 재주가 우뚝한 데다 여러 가지 실마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풍요로운 말은 세상에 탁월하고 단아하게 이루어 감은 그윽함과 같이 하였습니다.

지혜로 5()을 섭렵하고 그 학문이 3()를 겸하여 이로움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안생(顔生)의 일궤(逸軌)를 따르며 그것을 손상시키는 것을 도()로 삼고, 이씨(李氏)의 현종(玄蹤)을 사모하였습니다. 다시 6()이 두루 넓어지고 백가(百家)가 풍성하여 성인(聖人)과 현자(賢者)가 분파를 달리하고 유가(儒家)와 묵가(墨家)로 그 유파를 나누었으며, 혹시 일이 넓고 글이 성하거나, 혹 말은 드높고 이치가 원대하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을 병에 물을 담듯이 하고, 그 논하는 것은 강물이 아래로 흘러가듯이 거침이 없었습니다. 거울을 깨끗이 닦는데 지치지 않고 커다란 종도 맡아서 두드립니다.

자건(子建)101)도 그 기이한 문체에 두 손을 모으고, 장경(長卿)102)도 그 높은 자취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진()나라와 초()나라가 터를 나누고,

 

()나라와 양()나라가 그 세속을 뒤바꿨더라도, 백미(白眉)의 청안(靑眼)은 귀옥(龜玉)의 값어치를 넘지 못합니다.

봉황이 깃들고 용이 누웠으니, 마치 고기와 물이 어울리는 것과 다름없어서 지식으로 고()가 공함을 비추고 뜻으로는 진속(塵俗)을 물리쳤으니, 형체가 비록 낭묘(廊廟)에 있으나 기()는 강호(江湖)에 두었습니다. 이로써 마음이 실타래같이 얽매인 것을 한탄하며 이를 세간의 그물이라 말하였습니다.

말은 응륙(應陸)103)과 같고, (調)는 장엄(張嚴)104)에 합해져 주화(朱火)가 갑자기 전해짐을 안타까워하고 맑은 파도가 빠르게 흘러감을 가슴 아파하여 발을 씻어 도()를 따르며 귀를 씻어 영화(榮華)를 사양하니, 구전(九轉)으로 태허(太虛)를 충당하고 4()으로 병을 없앱니다.

그런 연후에 8()을 찾아 1()을 맛보면서 10()을 풀어내어 세 가지 환난을 없애 버린다면, 이 같은 덕이야말로 어찌 지극하지 않겠습니까?

빈도가 식()의 거울을 맑게 하기 힘들고 마음의 때는 쌓이기 쉬우니, 참으로 그 정()이 화수(華水)에 부끄럽고 계율은 풀을 얽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재주는 불을 거두는데 힘쓰고 배움은 전등(傳燈)을 사양하며, 안으로는 충만한 공덕에 부끄럽기만 하고, 밖으로는 인간 세상에 친함이 없으니 일구(一丘)에 머뭇거려 형체를 봉류(蓬柳)에 거하며 천인(千仞)에 가만히 머물러 균송(筠松)에 뜻을 의탁합니다.

바람과 서리로 네 계절을 헤아리고 조백(眺魄)으로 삼순(三旬)을 맞이하며, 밤에 산새가 우는 것을 기다려 구성(九成)을 대신합니다. 낮에 고기가 노니는 것을 보면서 이자(二子)105)를 따르는 데에 이르러서는 가난한 집과 남루한 옷이 본래 근심이 되지 않고 주문(朱門)과 결사(結駟)도 나에게는 모두가 뜬구름과 같습니다.

등나무에 쥐가 침범하기 쉽고, 나무 위의 원숭이는 조용하기가 어려운 것을 한탄합니다. 영취산(靈鷲山)을 애써 생각하며 계족산(鷄足山)을 힘들게 생각합니다.

숲에 가을의 잎사귀가 떨어져도 일찍이 독각(獨覺)의 밝음이 없었으며, 계곡에서 봄에 꾀꼬리가 지저귀어도 전해 들은 것이 적다는 한탄만이 절박합니다. 홀연히 편지를 보내신 것을 받고는 간곡하게 살펴봐 주심을 입었습니다. 그윽한 기운은 난초와 같고 맑은 소리는 옥과 같으니, 참으로 눈에 선하여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나 실로 가슴 깊이 반성해 보면 부끄러움만 더하니, 그 의식은 천지(天池)가 북쪽의 큰 바다[北溟]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설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구체적인 일은 이정(泥井)이 동해를 부끄러워한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기대하는 것은 이 사람이니, 나에게서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황석(黃石)을 볼 날이 멀지 않아서 맺은 약속이 눈앞에 있으니 백구(白駒)를 매어서 오늘 아침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뛰어난 계획을 매우 공경하여 상황에 따라서 서찰을 내었으나,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하니, 이것으로 어찌 회답할 수 있겠습니까?

 

 

31) 조연법사망서(弔延法師亡書:연 법사를 조문하는 글) () 설도형(薛道衡)

823일 설도형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세속이 무상하여 연() 법사께서 마침내 천화(遷化)하셨으니, 마음속에 슬픔이 가득하여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 애절함이 마치 몸을 가르듯 하니 참으로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법사께서는 어릴 적에 세속을 버리시고 진표(塵表)에 발걸음을 높이 하셨으니, 마음으로 회홍(恢弘)을 깨닫고 이치로 정오(精悟)를 식별하셨습니다. 그 영대(靈臺)의 신우(神宇)를 우러를 수는 있으나 들여다볼 수는 없었으니, 지혜의 바다와 정법의 근원은 건널 수는 있으나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맑은 거울이 자주 비추어도 피곤해 하지 않는 것과 같고, 비유하면 저와 같은 커다란 종이 두들겨져 그대로 응하듯이 한 것과 같습니다. 찾아가매 길이 끊어지고 현유(玄維)의 끈이 떨어졌으니, 뜻을 그윽한 암벽 사이로 두어 확고히 하여 뽑을 수 없었습니다.

높은 자리와 넉넉한 예우로도 그 생각을 돌리지 못하였고, 위엄 있는 위세와 준엄한 법도로도 그 마음을 두렵게 할 수 없었습니다. 경행(經行)하고 연좌(宴坐)하시며, 험난함을 평탄케 하셔서 두 갈래를 없앴으니, 그 계덕(戒德)과 율의(律儀)는 시종일관 한결같았습니다.

성황(聖皇)이 운수(運數)를 열어서 상법(像法)이 중흥하자, 탁월하여 치림(緇林)에서 우뚝하시니 우두머리를 칭할 수 있었습니다. 신극(宸極)의 지존조차 몸을 굽혀서 스승과 제자의 의리를 베풀었으니, 삼보가 이로써 넓혀지고 2()가 이로써 선양되었습니다. 실로 불도징 스님과 구마라집 스님을 따를 만하며 도안 스님과 혜원 스님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러나 법의 기둥이 갑자기 기울고 어짊의 배가 돌연히 가라앉으니, 비통함이 사부대중을 얽어맬 뿐만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해 쓰라린 아픔을 느낍니다.

스님께서 석장을 짚고 물병을 쥐고서 일찍이 가르침을 받들어 당()에 올라 입실(入室)하여 그 바탕을 다하여 은밀하게 하셨으니, 재삼(在三)의 정리(情理)에 대해 매우 가슴 아파하시다가 이제 가셨으니, 이를 어찌 하겠습니까? 이 무상함을 어찌 하겠습니까?

아무리 근심하여도 위로를 얻지 못하고, 단지 슬픔만이 깊어집니다. 삼가 흰 종이를 꺼내드니 슬픔이 더욱 복받치는지라, 붓을 이어가지 못하겠습니다.

제자 설도형이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드립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