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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68 불교(광홍명집 19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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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19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4. 법의편

 

11) 내전서(內典序)[()나라 사도(司徒) 경릉왕(竟陵王)1)의 교시를 받들어 짓다] 심약(沈約)

아득하구나, 군생(群生)의 시초(始初)! 그 이치가 3()의 바깥에 숨었으니, 그 일은 2()으로 엿볼 바가 아니다. 스스로 식견 있는 이와 함께 달려가서 연()에 따라 업을 받으니, 하늘과 사람이 자취를 달리하며, 날고 기는 것은 관()을 달리하였다.

그 괴로움과 즐거움이 번갈아 돌아오고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서로 이어지면서 화륜(火輪)에 의지하여 달리는 것이 불꽃이 바람에 옮겨가듯이 하지 않음이 없다. 촌음(寸陰)의 짧은 해 그림자가 영겁(永劫)의 먼 길로만 치달리니, 그 정령(精靈)이 일어나고 엎드리는 길은 만 갈래이고 이름은 천 가지나 된다.

여래께서 근원을 항품(恒品)에 발하신 것은 아마도 함생(含生)의 하나인 것이다. 머리를 나란히 한 채로 앞 다투어 달리는 것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이와 달리 할 수가 없었다. 무시(無始)의 처음에 한 삼태기의 흙을 보태고 단주(斷籌)의 끝에 공업(功業)을 이룸에 이르러서는 길은 멀고 업은 커서 오묘한 수레자취를 멀리 이어, 밝음을 거듭하고 지혜를 쌓아서 영각(靈覺)

 

홀로 깨우치셨다.

서른두 가지 상호(相好)가 우뚝하여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밝게 비추고, 열여덟 가지 존귀한 법이 무()의 바깥을 에워싸며 6()의 업은 이미 깊고 10()의 공은 원대하기만 하였다. 방편으로 만물을 구제하고 마군(魔軍)을 항복시키되 힘에 의하지 않으셨다. 묘법을 굴리고 감로(甘露)가 비를 내리게 하며 배와 수레로 6()를 건네주고 나루터와 다리로 5()를 이어 놓으셨다. 네거리의 긴 두렁에 오르고 1()의 넓은 길에서 노니니 이로써 일은 방등(方等)에 가득하고 이치는 신궁(神宮)에 가득 찼다.

커다란 방편의 교화에 화합하여 종극(宗極)을 마주하여 떨침에 이르러서는 만물에 널리 자비의 조짐을 보이며, 그 몸은 잊어버리고 자신이 아닌 것을 드러내셨다. 그 행이 4()에 부합하고 도()10()에 올랐다. 이 같은 영성(靈性)의 기특한 통달은 스스로 회포를 얻고 신공(神功)의 묘한 힘은 배움을 기다리지 않고 이루어 홀로 중생을 교화하시는데 그 한도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번뇌가 얽히어 풀리지 않은 채 분분하더라도 이치에 따라 단박에 깨우치고서, 마음을 내치고 생각을 막아 몸과 마음에 욕심이 없었다. 생사의 오랜 수고로움을 싫어하여 적멸을 돌아보고 법륜(法輪)을 굴리며 아득하게 스스로 얻어 번뇌의 쌓임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건너려는 마음으로 도()로 나아가니 공덕이 한 가지 업만이 아니었다. 비록 이치에 회통(會通)하여 근원을 함께하더라도 싹트는 마음은 다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드높은 마음과 아득한 행실이 길을 달리하더라도 다 함께 나아가고, 속내를 잊고 욕심을 막아 길을 달리 하더라도 한 갈래로 이르렀다. 혹 풀더미로 그 몸을 싸기도 하고 혹 형해(形骸)를 숲속으로 내던지기도 하니, 안으로는 형상(形相)을 잊고 바깥으로는 시호(兕虎)를 길들이며 혹 앉고 눕고 가고 서는 것은 그 자취가 대중과 어긋나지 않더라도 선정의 업과 정혜(定慧)의 문호는 잠깐 동안이라도 시원해지지 않으므로 그 참고 견딤이 쇠나 돌과 같이 굳세었고 계행(戒行)이 보배구슬과 그 빛을 함께하였다.

가을 철새는 때에 맞춰 날아오고 봄철의 다랑어도 때에 맞춰 헤엄쳐 강으로 올라오며 굳게 지조를 지키면서 오랫동안 소식(蔬食)하며 생각마다 근신하니 묘한 자취가 여기서 멀지 않았다. 신령스러운 길이 비밀스러워도 깨달음이 있으면 반드시 형통하게 되었다. 그것에 연유하여 이에 다다르니 이 때문에 지혜에 의지하여 허물을 탐색하며 마음을 타고 이치를 비추었다. 구구한 회포가 녹아 내려서 집착함이 없어지고 삼계(三界)에 모두 처하여 홀로 그 신()과 더불어 다니며, 사천(四天)을 포괄하여

 

만겁(萬劫)을 줄이고 늘이니, 조그마한 이치를 듣고자 도량에 올라가 한 말씀을 듣고 피안(彼岸)에 오르셨다. 긴긴 밤이 새기 전에 마음은 스스로 깨치고 거룩한 자취를 따라 신묘한 광명에서 휴식을 취하셨다. 걸망을 지고 스승을 따르며 숲에서 살면서 업()을 종합하셨다. 발로는 지혜의 문을 밟고 배움은 용장(龍藏)에 통하며 묘한 사자후(獅子吼)가 저 멀리 이어지고 난새의 소리는 아득히 들린다. 가부좌를 하여 마음을 운영한다면, 그 정성스럽게 기약하는 것이 바로 자취가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신공(神功)으로 인도하고, 깨닫지 못한 이를 비추어 열어 주니, 설법하는 아름다움과 그 이치가 여기에서 어우러졌다. 구토(九土)와 팔방(八方)의 풍속이 모두 다른데 널리 교화를 베풀어 일을 행하여 널리 장려하니 모두가 빛을 정토로 옮기고 의()를 보배로운 땅에 올릴 만하다.

화려함을 몰아내고 치장을 잘라내며 애착을 끊고 부모님을 이별하고서, 태어남이 없는 흐름 속에서 북을 치고 노를 잡으며 속세에 드러난 길에 발자취를 남기셨다. 참으로 1천의 부처님께서 그 정수리를 쓰다듬고, 칠주(七住)에 공을 고루하셨다. 저 청신사(淸信士)와 청신녀(淸信女)가 광겁(曠劫)에 인연을 심음에 이르러서는 비록 다시 용모와 복장을 고치지 않았더라도 계율의 덕을 안으로 넓히고, 비야리성(毘耶離城)2)을 우러르며 재갈을 두려워하며, 파사(波斯:페르샤, 지금의 이란)를 쳐다보고 수레바퀴를 돌려 4()으로 아득하게 몰고 나가, 8()의 도도함에 배를 띄우셨다. 이처럼 열 가지 명호(名號)로 존숭하고, 세 가지 명달(明達)에도 막힘이 없으며 비록 법신(法身)이 있지 않더라도 그 몸이 상주(常住)하였다. 능인(能仁)이 권화(權化)하신 자취가 4()에 있으나, 이것이 오도(悟道)의 시작이 아니었다. 잠시 사라쌍수에서 입적(入寂)하셨으니 어찌 신진(薪盡)3)의 다함이 있겠는가?

인간과 천상이 우러러보며 비슷하기만 해도 마음을 내기에, 금을 깎고 옥을 다듬어 그 모습을 새기고 그 자태를 그렸다. 신령스러운 자태가 태양처럼 빛나고 보배로운 사찰이 구름처럼 운집하였으니, 혹 귀신의 공을 부리기도 하고, 혹 골수의 힘을 의지하기도 하였다.

사람이 이룩하되 사람의 재주가 아닌 듯한 데다 보배까지 새겨 넣으니, 여덟 가지 무늬의 용장(龍章)과 아홉 가지 빛깔의 경화(瓊華) 아닌 것이 없었다. 치아와 머리카락으로 신령함을 전하고 옷가지와 신발로 증명을 남기니 성스러운 자취가 우뚝하여 염부제(閻浮提)에 태양처럼 빛난다. 신비로운 광명은 떠오르다가 떠나가고 별은 정찰(淨刹)에 무성하다. 만약 이

 

곧은 마음을 타고 정성을 다하여 몰래 나간다면, 한식경이면 쫓아갈 수 있고 한 생각이면 다다를 수 있다. 그 내림에 감득하는 것이 고르지 않아서 구름이 되고 눈이 되며 안개처럼 흩어진다.

이 또한 빛이 상역(象譯)에 비쳐지고 광휘가 겸도(縑圖)에 비쳐지는 것이다. 간독(簡牘)을 잡아 일을 기록하는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는 대체로 지나간 자취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먼 소리를 빛나게 잇기 때문이니, 비록 전서(篆書)와 주서(籒書)가 글자를 달리하고 호나라와 화하(華夏)의 법도가 틀리더라도 심령을 통하게 하며, 새기는 이치를 누르고 드러냄에 이르러서는 내외가 그 법도를 같이하며 사람과 신이 헤아림을 하나로 한다.

분전(墳典)4)과 구삭(丘索)5)은 방역(方域) 내의 사책(史策)이고, 본기(本起:佛五百第自說本經)와 하생(下生:彌勒下生經)은 방외(方外)의 기전(紀傳)이다. 통괄하여 말하자면 원시(原始) 이전부터 다르니, 경기(經記)가 복잡하고 넓으며 조류(條流)가 엇갈려 흩어지기에, 한 가지 일의 시말마다 이치를 가르고 권수(卷數)를 가르는지라, 혹 말뜻이 단절되어 멀어지기도 하고, 혹 문자가 서로 엇갈리기도 하니, 나중에 조항을 보충하고 나면 앞서 보았던 것에 어두워진다.

그 근원을 찾아 흐름을 토론하더라도 갈 곳을 알지 못하니, 비록 이치에 정밀하고 마음이 밝더라도 구구절절이 막혔다. 이리하여 처음 깨우치고 배움을 시작하는 사람은 그만 미혹에 빠지는 이가 많았다. 게다가 중국과 외국의 여러 성인들이 모두 훈전(訓典)을 남겼으니, 비록 가르침에는 그 문호를 달리하나 이치에는 다른 자취가 없었다. 그러므로 진속(眞俗)의 두 가지 책으로 서로 번갈아 부축하고 장려하게 되었다.

공자가 그 단서를 발명하고 석가가 그 이치를 다하여 그물을 펼치고, 그물을 놓는 어짊과 은혜가 여기에서 있게 되었다. 백성을 변화시켜 세속을 바꾸어 점차로 이르게 하니, 정밀하고 조잡함으로 억누르고 인도하는 데도 각각 합당한 연유가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완곡하게 정령(情靈)을 변론하고 묘전(妙典)에 마음을 깃들게 되었다.

공유(空有)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겸망(兼忘)의 책을 널리 섭렵하면서, 군류(群流)를 샅샅이 개괄하여 이 같은 전적을 이루었으니, 일은 사례에 따라 나누고, 뜻은 이치에 따라 붙였다. ()을 간추려 깨달음을 넓히되, 이보다 숭상할 것이 없어 이치로써 구하여 묘과(妙果)를 증득할 수 있었다. 이처럼 사남(司南)의 수레6)를 타더라도 오히려 미혹하지 않았다고 칭할 수 있고, 사조(四照)의 풀을 굴복하더라도 그 쓰임새에 미혹함이 없는데, 하물며 여섯 필의 말이 함께 달리고 만 가지 갈래가 함께 흐르는 것이겠는가? 해와 달이 하늘을 가로질러도 이것에는 다다르지 못하고,

 

강과 바닷가 땅을 가로지르더라도 어찌 족하다고 이르겠는가? 대체로 도에 들어가는 수단과 방법이 있어야 군생(群生)이 이것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12) 남제황태자해강소(南齊皇太子解講疏) 심약(沈約)

황태자가 건원(建元) 4(482) 415일에 대승(大乘)의 명망 있는 스님들을 현보원(玄圃園)으로 모셔다가, 보지(寶池)의 금원(禁苑)에 안거하게 하였다. 모두에게 공양구(供養具)를 진대(珍臺)와 기사(綺榭)에서 충당하여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보시하며 현음(玄音)을 육소(六霄)에 울리고, 미언(微言)이 영겁에 창달되게 하며 3()7)이 그 묘한 과보를 널리 펴고 10()8)가 그 상서로운 인연을 찬양하였다. 두 가지 기운을 밟아 업을 보태어 9()을 벗어나 공에 나아갔다.

716일이 되자, 옥체마저 내던지며 경례하였는데, 가마와 면류관과 영수(纓綏) 등이 내려진 것이 대체로 아흔아홉 가지 물건이나 된다. 원컨대 이와 같은 힘으로 널리 유명(幽明)의 가피를 내리신다면, 제실(帝室)이 숭산(嵩山)과 화산(華山)처럼 견고해지고, 창검(蒼黔:백성)이 인수(仁壽)의 복을 누릴 것이다.

만약 그 형체를 고해에 빠뜨렸다면 이치에 따라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 몸을 축생의 길에 떨어지게 하였다면 머지않아 다시 돌아올 것이다. 시방의 3()가 모두 저 같은 말을 증명할 것이니, 이 같은 서원이 어그러진다면 정각(正覺)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13) 남제경릉왕발강소(南齊竟陵王發講疏)와 송() 심약

크도다. 묘각(妙覺)의 오묘함이여! 무상(無相)은 색()이 아니니 공()으로도 다할 수 없다. 그러나 말씀을 세우고 가르침을 내려서 인도하는 방책을 삼았다. 자비의 파도와 지혜의 물을 비록 끌어올 수는 있어도 그 근원을 알지 못했다. 신령스러운 책들과 귀한 서적들은 멀리 용장(龍藏)에서 채집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뜻은 천산(天山)의 바깥을 가리키고 문()은 교하(交下)의 바깥에 숨음에 이르러서는 산가지를 끊어서 계산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기수급고독원(祈樹給孤獨園)이나 암라원(菴羅園)의 묘한 사자후와 4()1()의 바른 말씀에 이르기까지 다시 번역하여 중토(中土)에 통하게 하였으나,

 

항하의 모래 한 톨과 같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말의 유래가 바다같이 넓고 이치의 갈래가 구름처럼 오묘하니 글자의 흐름에 의지하여 울리고 만 가지 바퀴가 함께 나아가며, 가지에 따라 나누고 잎사귀가 흩어지며 문장을 나누고 구절을 파헤치더라도 만분의 일도 다하지 못한다.

경릉왕 전하가 마음이 상지(上地)를 뛰어넘고 도가 생지(生知)에 우뚝하여, 그윽한 나루터에 보배로운 업을 심고 아득한 마음에 바른 이해가 맺혔다. 방등(方等)의 영수(靈邃)와 감로(甘露)의 심현(深玄)일지라도 그 길에서 노닐며 그 방문을 열어 보지 않음이 없다. 비장(秘藏)이 동국(東國)에 가피 내린 것은 반드시 모아 놓지 않음이 없었으니, 모두가 보배로운 비단으로 매어 놓고 아름다운 전서(篆書)로 써놓았다. 빛이 옥으로 된 상자에 서리고 눈부신 빛깔이 옥으로 된 끈에 아롱지니, 생각마다 미언(微言)을 떨치고자 하였으나, 이에 감득하는 깨우침이 없었다.

이리하여 영명(永明) 원년(483) 28일 상저(上邸)에 강좌(講座)를 마련하여 명망 있는 스님들을 수도로 모이게 하였으니, 모두가 진도와 세속을 깊이 분별하고 명상(名相)을 꿰뚫었으며, 미묘함을 나누되 막힘이 없으며 의심스러운 것을 대하여서는 통달한 듯이 하였다.

저택에 있는 법운정려(法雲精廬)에 함께 모여서 현음(玄音)을 여섯 밤 동안 연설하여 법문(法門)을 천재(千載)에 길이 열었다. 실로 엄숙하고 장엄한 것이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이었다. 법왕(法王) 이래로 청승(聽僧) 때까지 조목을 실은 것이 아래와 같다. 그 같은 일을 여기에 기록하면서 송()을 짓는다.

 

열 가지 명호가 신묘(神妙)하고 공적(空寂)하니

세 가지 명달은 공하여 그윽하다.

성인의 자취를 펴고

자비의 가르침을 베푸네.

 

향기로운 법의 실마리

밝고 밝은 통발을 남기니

소리마다 묘한 법을 머금고

꽃마다 보배로운 연화가 핀다네.

 

문장은 용장(龍藏)을 휘어잡으니

그 이치 하늘로 치솟는다.

임금이 그 비추임 받으시니

대도(大道)가 우뚝하여 지혜를 늘리네.

 

별빛이 휘장(揮帳)처럼 드리우며

거룩한 법회(法會)가 구름처럼 모여드네.

생각은 아지랑이처럼 치달리는데

이치는 가을 매미를 밝히는구나.

 

영장(靈場)이 빛을 드러내

법의 물결이 흐름을 이루네.

이 같은 최상의 과보를 타고서

아름다운 연()으로 영구히 인도하네.

 

14) 제경릉왕해강소(齊竟陵王解講疏) 2수 심약

[1]

 

형체를 빌려 교화를 빛내자면, 반드시 기운(氣運)에 맡기는 길에 연유해야 하며, 방도에 연유하여 이치를 인도할 때는 반드시 하늘을 본받는 자질과 같이해야 한다. 이로써 신령을 깊은 상서로움으로 나타낸다.

성인을 왕궁에 탄생하게 하니 빛을 진위(辰緯)9)에 머물게 하고 꽃을 일월에 머물게 하였다. 그러므로 자비를 쌓아 성()을 이루고 오묘함을 쌓아 공()을 이루며 도량에 조로(照路)를 드러내고 고해의 언덕에서 미혹의 뿌리를 뽑으셨다.

제자 소자량(蕭子良)이 번뇌의 옷깃을 세탁하여 정업(正業)에 마음을 두고, 걸출한 스님들을 엄숙하게 모시고 지혜의 성전(聖典)을 공경하게 펴니, 비밀장(秘密藏)의 오묘한 글이 마치 구름 드리워 비내리듯 하였다. 지금 백수(魄首)는 길을 붉게 물들이고 일현(日弦)은 삭()에 오르며 7()는 생각을 응결하고 공명(空明)이 생각을 모으며 비록 신의 자취가 조금 멀더라도 남아있는 티끌은 여기에 있다. 자리를 장식하고 궁궐을 꾸미어 휘장을 길게 드리워 저택을 성대하게 하며 성실함을 헤아리고 일을 공경히 하여 이 보집(寶集)을 세웠다.

난천(蘭泉)의 물결이 용솟음 치고 향기가 가득하고 구름처럼 서리며, 비밀스런 이치를 그윽하게 더듬으니 아득한 진언(眞言)이 멀리 퍼지는구나. 종조(宗條)는 이미 올려지고 공을 다하여 이미 나아가며, 마침내 강론하는 누각은 그 자리를 거두고 이치의 법고(法鼓)가 소리를 그쳤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인연을 타고 이같이 아름다운 연()에 연유하여 장차 상주(上住)에 오를 것이니, 시방의 3세가 이를 증명하여 어긋남이 없다.

 

[2]

지극히 오묘하신 중상(衆象)들이여, 생각을 그윽이 하여 통하고, 이치가 군방(群方)에 으뜸이니 이에 감하여 응한다. 난새 소리는 노랫소리를 거두고 원만하신 광명은 광채를 잠자게 한다. 위화(委華)의 모습은 전하지 않고 땅에서 뛰노는 상서로움도 이미 멀어졌다. 한마디 말이 도에 들어가도 일은 순간적으로 어렵다. 한 번 깨달음에 공()을 뛰어넘으나, 효험이 순식간에 멀어진다. 만약 미진을 쌓아 길을 만들고 반딧불을 모아 밝음을 삼지 못한다면, 지혜의 문을 본받아 배를 법의 기슭에 대지 못하리라.

제자가 저녁마다 애태우고 해마다 감회만 쌓으면서도 날마다 부족하기만 하였다. 이에 공경스럽게 명망 있는 스님들을 모셔다 오묘한 성경을 펼치게 하였으니, 티끌을 떨치고 막힘을 통하게 하여 법륜(法輪)이 구름처럼 드리우게 되었다. 월전(月殿)은 려()를 포함하고 백현(魄弦)은 해에 올라가 감로가 이미 다하여 말을 보좌(寶座)에 거두고, 글을 거두어

 

자리를 파하니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 채 서로 함께 나아갔다.

삼가 선후(先后)10)를 우러러보니 선후는 아름다운 덕을 지녔고 그 자취 또한 훌륭하였으며 도는 화악(華岳)을 싣고 교화가 분음(汾陰)에 이르렀다. 일찍이 난궁(蘭宮)11)을 버리고 새벽에 초액(椒掖)을 떠났으니, 천승(千乘)도 뒤쫓지 못하고 만종(萬鍾)이라도 이에 이르지 못하였다. 영원토록 사모함도 짧은 햇수로 계속 이어가지 못하였다. 보응을 기리는 성실함도 영겁토록 융성하기를 생각하였다. 공경스럽게 몸을 바쳐 보시에 충당하고 이로 인하여 유계(幽界)에 통하는 것으로 인하여 그 마음을 묘각으로 다듬었다.

원하건대 성령(聖靈)께서 속히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사천(四天)에 우뚝하고 10()의 지존을 수기(受記)받게 하소서. 3()가 모두 이를 증명할지니, 단심(丹心)으로 서약하되, 빛나는 태양과 같이 하소서.

 

15) 여형주은사유규서(與荊州隱士劉虬書:형주의 은사 유규에게 보내는 편지) 제 문선공(文宣公) 소자량(蕭子良)

유규(劉虯)가 처음에 당양령(當陽令)이 되었다가 그 뒤에 남군승(南郡丞)이 되었으나, 얼마 안 있다가 스스로 사직하고 비로소 불의(拂衣)12)를 섬기었다. 당시 나이가 32살이었는데, 논자는 이 사람을 한나라 소병(疎邴)에 견주기도 하였다.

바로 벽곡(辟穀)을 하며 곡식을 물리치고, 지출(芝朮)을 씹으며 삼베옷을 입었다. 삼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으며 초가집에다 흙담을 쌓고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경을 읊으며 오랫동안 재계(齋戒)하면서 6()13)를 빠뜨리지 않았다. 세제(世諦)의 전적을 다시 익히지 않고 바둑과 붓글씨와 같은 작은 기예(技藝)도 일체 끊었다. 오직 부처님의 이치만을 정밀하게 연구하며, ()하되 보()를 받지 않으며 돈오성불(頓悟成佛)의 이치를 펴내니, 당시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법화경등의 경전을 주석하고 열반경의 대품(大品)과 소품(小品) 등을 강의하였다.

제나라 건원(建元) 초엽에 조칙을 내려 통직산기사랑(通直散騎侍郞)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문선(文宣:소자량 자신)은 묘법을 깊고 널리 이해하였는데 규가 석가에 대한 이치에 정통하다고 생각하여 동쪽으로 유규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옥촉(玉燭)14)은 연수를 더하고 금상(金商)15)은 율()에 있으니, 추위와 더위가 바뀌어 가는데 근황은 편안하신가? ()의 성찬을 열심히 맛보며 즐거이 따르면서 이를 기르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나도 이를 기껍게 생각하지만, 백성이 한마음인데다 중생이 병을 앓지 않기에 집을 연이어 경계를 구획할 수 있는데, 장차 무엇을 다시 구하겠는가?

단지 좋은 책을 혼자 끼고 있으면서 이로운 말을 베풀지 않는군요.

 

원하건대, 그대가 참으로 내 마음을 병들게 하니, 이로써 천 리를 멀다 않고 편지를 보내 내 뜻을 전한다. 맑고 순일함을 이미 드러내고 의리나 인정이 경박함을 대대로 이어받게 되면서부터 은거하고 현달하는 도리는 고르지 않으며, 침묵하고 말하는 갈래는 서로 엉긴다.

혹 지혜를 꾸며 어리석은 이를 경각시키기도 하고, 혹 격한 마음으로 세속을 깨우치기도 하며, 혹 자신을 더럽혀 어둠을 형통시키기도 하고, 혹 그릇된 노래로 도를 밝히기도 한다. 양을 잡아 죽이고 말을 몰아도 견고함을 닳게 할 수 없다. 일부러 미친 체하여 바보같이 한다고 어떻게 흰 것을 검게 할 수 있는가?

()나라에서 벼슬하고 위()나라에서 울타리가 되어 인외(人外)의 기운이 날로 아득해졌고, ()나라에 들어와 양()나라로 다니며 구중(區中)의 운()이 날로 적어졌다. 그 경중을 가리고 그 득실을 가늠하자면, 바로 마음속 깊이 이를 감상하느니, 차라리 그것에 부합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내가 어려서는 한가한 마음을 기르고 장년이 되어서는 절개를 지키는 것을 사모하였는데, 미진(微塵)과 같은 자취가 규호의 끈처럼 얽혔으나, 마음은 강호로만 치달린다. 내 스스로 그대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 기풍을 듣자니, 마치 친구와도 같다. 수레를 돌리려는 생각은 다만 슬프고 식려(式閭)의 예법에 단계가 없다. 참으로 수레에 기대어 속내를 깊이 할 뿐이다. 광주리를 먼 길에 기울여도 그대가 오롯하게 멀리하니 참으로 발탁하기 어렵다.

담백한 뜻은 흰 구름과 같이 흐르고 높은 마음은 푸른 소나무와 더불어 함께 흥겨워하고, 널리 익히며 글에 의탁하니, 치림(緇林)이 시들다가도 풀이 다시 돋고 분명하게 공()과 유()를 분별하더라도 연하(連河)가 막혔다가 다시 흐릅니다. 소위 말을 잊은 사람이 하늘과 사람에 대해 논할 수 있다고 하여 어찌 봉황과 학이 날 수 있다고 모이는 것에 마음을 두겠는가?

애욕의 바다를 드높이 건너고 선정의 큰길로 나란히 나아가니, 호야(濠射)16)의 명유(冥遊)에서 젖고 기원정사와 영취산의 법려(法侶)에 몸을 굽혀서 곤궁한 자에게 3()을 천명하고, 어리석은 이에게 2()를 발명하는 것도 이 같은 인()이 있어서인데, 어떻게 통하여 화창할 리가 있겠는가?

지금 황제의 풍화가 실로 아름다워서 지극한 도를 널리 펼치기에, 4()가 넘치지 않으며 5()도 흩어지지 않는다. 서문을 붙이고 글을 다듬어 경법(經法)을 널리 베푸는데, 사람이 기황(璣璜:구슬의 일종)을 천하게 여기며 집집마다 예의와 양보를 익힌다. 땔나무를 하고 풀을 벨 때에도 때를 맞추기 때문에 근교에는 숲이 울창하고, 그물을 침에도 절도가 있어 비늘 달린 것과 날개 달린 것이 즐거이 날아다니며 함께하니,

 

첩첩산중의 골짜기에도 밭고랑이 이어지고, 기름진 밭과 비옥한 뜰에는 새벽과 저녁나절에는 발자취가 끊어짐에 이릅니다. 참으로 예전에 숨어 있는 벗을 초빙하기에, 뛰어나고 기특한 이들이 모일만 합니다.

그러므로 문거(文擧)17)는 야성(冶城)의 언덕에 집을 짓고 차종(次宗)18)은 서산(西山)의 터에 식원(植援)하며, 갈홍(葛洪)19)이 해축(海岫)에서 유유자적하게 도를 즐겼고[考槃], 석원(釋遠:혜원)은 종유(鍾幽)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매번 그 남긴 자취를 밟을 때마다 구원(九原)20)의 찬탄만 깊어집니다. 만약 그 고고한 걸음을 옮길 수 있다면, 어떻게 이 네 사람을 가슴 속에 새기겠는가? 예전에 선니(宣尼)가 백설(伯雪)을 만나보고21) 문수(文殊)가 유마(維摩)를 찾아간 것도,22) 어찌 서로 잊는 도리를 몰라서였겠는가? 참으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아직 서술하기 전에 도()로써 자중자애하기를 바란다. 한두 가지라도 능거(凌琚)의 구변에 왕원장(王元長)의 문장을 갖추게 할 것이다.”

왕이23) 또 남군태수(南郡太守) 유경유(劉景蕤)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겨울 그대로 인하여 유거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올 봄에야 회답을 받았다. 말하는 이치가 우뚝한 것이 참으로 재주가 있으니, 실로 자운(子雲)의 필찰(筆札)24)과 원유(元瑜)의 서기(書記)25)로도 거듭 탄식할 만하니 더욱더 기쁘게 생각한다.

이 사람이 참다움을 머금고 진실을 끌어안으니, 구름과 노을에 비길 만하다. 세속을 등지고 그윽한 곳에 거주하면서 숲과 물가에 살며 기뻐하고 그 둥지를 기뻐하고 숲을 좋아한다. 남쪽 형산(荊山)에서 뜻을 길러도 변보(卞寶)26)와 함께 값을 다툴 만하며 빛을 불가의 옷으로 감싸도 참으로 수후(隋侯)의 구슬27)과 함께 빛날 만하다. 비록 안회(顔回)와 단간목(段干木)28)이 벼슬을 버리고 한가하게 숨어살고, 양웅(楊雄)29)과 정박(鄭樸)30)이 조용하게 사는 것을 기뻐했더라도 만약 이 사람을 얻을 수 있었다면, 참으로 해를 같이 하여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도()의 성품이 하늘처럼 유유하고 선심(禪心)이 스스로 고요하며, 9()를 도탑게 기뻐하고 3()을 궁구하여 맛을 보니, 재가보살이라면 그것을 행하여 힘들지 않고 백의거사라면 그것에 나아가 방도를 쉽게 하였을 것이다. 장차 지혜의 횃불로 혼미해진 것을 밝히고, 법교(法橋)로 물에 빠진 이를 구하고자 하니, 영악(靈崿)의 남겨진 풍화를 일으키고 정림(貞林)의 끊어진 그림자를 비춘다.

나도 관직을 떠나 숨어사는 것에

 

뜻을 같이하고자 하는 마음이 지극하기만 한지라, 경사(京師)의 원림 사이를 강산으로 삼아 유유자적한다. 잠시 다시 마음을 형통하여 멀고 가깝거나 모두 그윽하게 사귀고, 서광이 비춤에 지난 것을 깨달아 깊은 감회를 글로 써 보고, 그윽한 이치를 분명하게 갈라보며, 생멸(生滅) 가운데의 말을 자취 삼아 진제와 속제의 이치를 따진다.

그러므로 다시 편지를 내서 기읍(畿邑)으로 올 것을 부탁한다. 그대가 도를 물어본 다음에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청해 보도록 하라. 이곳의 난산(蘭山)과 계수(桂水)도 노닐기에 족하고, 선비들도 현종(玄宗)에 짝하여 어울릴 벗이 많이 있다. 한 가지 작위로 보탤 것이 아닌데, 어찌 정포(旌蒲)31)로 구분을 두겠는가? 다만 정성스러움을 다할 뿐이다. 반드시 깊게 깨달아 너의 고정된 규범을 벗어던지기를 바란다. 때에 맞춰 비용을 보내겠다.”

다시32) 유규(劉虯)의 고향 사람 이부랑(吏部郞) 유고지(庾杲之)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여 유지(喩旨)를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도(司徒) 경릉왕(竟陵王)이 신묘함에 힘을 쓰는 것은 말과 모양이 끊어진 바였고 일에 접하는 것은 멀고 가까움이 모두 근원으로 삼는 바였다. 종과 돌이 예악(禮樂)의 근본이 아니듯이, 영수(纓綬)와 갈건(褐巾)이 어찌 조야(朝野)를 일컫는 것이겠는가?

생각건대 암암리에 던지는 마음은 형해(形骸)로써 구애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양저(梁邸)에서 편지가 전해 와서 친히 그 말씀을 받들었는데, 꿈속에서 맑은 얼굴을 본 것이 몇 년이나 되었다. 장인(丈人:유규를 가리킴)이 고안(羔雁)33)으로 영달하고자 한 것이 아니므로 포백(蒲帛)의 전승(典勝)을 쉬게 하고 그윽함에 의탁하여 믿음을 통하여도 답장을 기대함이 더디었다.

군왕(君王)이 교외에 거처를 정하니, 샘과 언덕이 띠를 둘러 드러나더라도 그 공()을 드러내지 않고 숨더라도 그 자취를 표방하지 않으니, 조용히 인야(人野) 사이에서 두 가지 이치를 다하였다. 또한 두루 보살핌에 마음을 써서 널리 진속(眞俗)을 펴고 들은 것을 사색하고 기준으로 묶어서 함께 온갖 오묘함을 다스렸다. 산언덕에 대들보를 세우고 물가에 관부(館府)를 텅비게 두었다. 진실로 기대함이 크지만 보답이 적고 미미하며 더디다. 예전에 동평(東平)34)이 선을 즐거워하였고 군대(君大)35)는 동각(東閣)에서 표창받았다. 철왕(哲王)36)은 소박함을 좋아하여 그대를 서산에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 성하지 않겠는가?

백령(百齡)이 회오리바람처럼 모여들어

 

응결하여 저절로 사물이 되는 것은 천년에 한 번 있는 기회이다. 어짊을 행하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다. 또한 차가운 눈 때문에 길을 조심하는 것도 자취를 없애는 결과가 되지 못하니, 커다란 종을 대궐에 걸어두더라도 어찌 소리를 없애는 길이겠는가?

이미 다른 사람의 자취를 드러내었으므로 만물과 같이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어찌 산수(山水)에 정이 없는가? 만나는 상황에 따라 응하니 사랑하거나 막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 밟는 땅마다 적막한데 형악(衡岳)이라고 어찌 친하며 종산(鍾山)은 어찌 박대하는가? 생각할수록 감회가 깊어지므로, 더 이상 번잡한 말을 기다리지 않겠다.”

유규는 마음속으로 굳게 이미 결심하고 다시 바깥의 사물에 흔들리지 않았다. 건무(建武) 초엽에 국자박사(國子博士)로 초빙되었으나, 건무 2(495) 겨울에 병이 심하여 강주(江州)로 옮겼다. 흰 구름이 떠도는 것이 마치 문으로 들어오듯 하면서 이상한 향기가 풍기다가, 공중에서 경쇠 소리가 울리는 때에 죽었으니, 나이가 예순이었다. 제자들이 아비의 상을 치르듯 하였으나 상복을 입지 않았다. 도인과 속인으로 그 장례에 참석한 사람이 수백 명이었고, 여타의 논을 수집한 것이 모두 24권이다.

양나라 대통(大通) 3(529) 여러 선비가 시법(諡法)을 논하였는데, 고인(高人) 유선(庾詵)도덕이 널리 알려진 것을 ()’이라 이르니, 이 시호를 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진식(陳寔)문이란 세간의 규범이고, 행은 선비의 준칙이다. 시호를 내린다면 문범선생(文範先生)’이라야 한다고 말하였다.

남군 태수 임언승(任彦昇)내가 선생과 여태껏 서로 접하여 왔으나, 형주와 오군이 수천 리인지라, 일찍이 무릎 꿇고 가서 여타의 이론을 모두 계승하지 못하였다. 어찌 다만 당년에 발분할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그 한이 종고(終古)에 깊다. 그러므로 숙야(叔夜)37)가 검루(黔婁)38)에 대해 서술하고 한탁(韓卓)이 거중(巨仲)을 사모한 것도 반드시 그 광진(光塵)을 접하여 풍채를 이었다고는 하지 못한다. 바로 다시 원대한 이치를 희구하나 생각만 오래 간직한 지 이미 천년이나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스스로를 높이니, 설령 경전을 옆에 끼고 빗자루를 가지고 낮이나 밤이나 문을 쓸다가 천인(千仞)의 한 뼘이나 만경(萬頃)의 한 줄기 물도 보지 못한 채 마침내 마주하여도, 만고에 그 문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이같이

 

천년의 한스러움을 잊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유정자(幽貞子) 우효경(虞孝敬)그의 아들이 현달하여 양나라 태상(太常)으로 벼슬하였는데, 나와 친하다. 선인(先人)이 남긴 책을 구하여 차례대로 전하여 말하였다고 하였다.

 

 

16) 청어강계(請御講啓)와 답

(1) 청어강계(請御講啓:어강을 청하는 계)와 칙답 양간문제(梁簡文帝)

신 강()ㆍ신 윤()ㆍ신 기()가 아룁니다.

신들이 듣자오니, 자궁(紫宮)은 하늘에 걸리어 현상(玄象)을 분명히 밝혔고, 헌대(軒臺)가 산악에 있어 멀리서도 좋은 책을 경청한다 합니다. 이로써 도가 점차로 융성해질수록 예가 번잡해지고, 덕이 펼쳐질수록 일마다 편안해졌습니다. 이는 대체로 지치(至治)의 존귀함을 표창하는 것이고, 생민의 근본을 기르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대광엄전(大光嚴殿)에서 신령함에 힘써서 법도를 드리우니, 하늘을 비게 하여 집을 여십니다. 공이 깊어 크게 창성해 가고 일마다 흡족하여 문화가 밝아지며 별을 본받아 극을 세우며 구름을 끊어 구도(構道)를 열어가되, 빛을 3()처럼 밝히고 머금음은 백도(百堵)를 넘습니다. 모두들 마음속에 꽃이 피었다고 말하니, 어찌 훌륭한 장인(匠人)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신통이 드러난 바이니 어찌 자래(子來)39)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청정한 국토에 훈락(薰落)의 예법이 끊어졌고, 석궁(釋宮)으로 드높이 매진하심에 그 이치에는 녹명(鹿鳴)40)의 연회가 없어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묘하고 훌륭한 당사(堂舍)에서 본사(本師)께서 부처의 사자후를 발하셨고, 마니(摩尼)의 보전(寶殿)에서 여래께서 법음(法音)을 천양하셨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몸소 윤택한 모습으로 강림하시어 감로를 흩뿌려 주십시오. 윤택한 지혜의 구름이 일어나 자비의 단비를 흩뿌려 주시니, 그 광명으로 업이 성대해져서 저와 같은 창생(蒼生)을 인도해주십시오. 천거(天居)에 계시면서 무상(無相)을 말씀하시어 다 같이 참다움으로 돌이키며, 불사(佛事)를 이룩하시어 솔토(率土)에 은혜를 드리우시고 세속을 교화해주십시오. 참다움에 함께하여 세속을 교화함이 참으로 지극하기에, 한 가지를 집어내면 두 가지 아름다움이 드러나는지라, 어찌 크다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같은 형산(陘山)의 위나 신선이 사는 바위 아래, 서도(西都)에 봉황이 깃들이고 기양(岐陽)에 악작(鸑鷟)이 찾아온다면 어찌 해를 같이 하여 말하지 않겠습니까?

감히 마음속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엎드려 힘써 이룸을 기다립니다. 한번 살펴보심을 구하니 식은땀이 흘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올립니다.

 

- 답청어강계칙(答請御講啓勅:어강을 청하는 계에 대한 칙답) () 무제(武帝)

 

계를 살펴보았다.

나도 강의하고 싶은 마음은 그대들과 생각을 같이 한다. 서경에서 이르기를 하루, 이틀에 만기(萬機)를 처리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또한 그것을 지나친다. 나이가 들고 뿌리가 익어 기력이 쇠잔하니, 이 같은 보려(黼戾)41)를 짊어지고 무거운 짐을 지고 넘는다.

정오에 한 끼를 먹거나 혹은 먹지 않기도 하는데, 주공단(周公旦)의 토악(吐握)42)도 수고롭다고 생각하기에 부족하고, 초군(楚君)이 정사에 바빠 해가 진 뒤에야 식사를 한 것도 지금에는 대수롭지 않다. 새벽녘에 서둘러 옷을 걸치고 바삐 달려오느라 쉬지를 못하는 데다, 낮에는 수고롭고 밤에는 걱정하느라 정화(精華)가 이미 고갈되었다. 헤아릴 일이 많아서 옷소매를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垂拱] 편안히 있지도 못하고 있다. 나라 일을 맡길 만한 사람도 없으니 어떻게 앉아서 한가롭게 담소할 수 있겠는가? 도를 행하는 것은 백성을 편안히 하기 위함이니 반드시 의논해야 한다.

이에 칙한다.

 

(2) 중계청어강(重啓請御講:어강을 청하는 두 번째 계)와 칙답 양 간문제

신 강ㆍ신 윤ㆍ신 기가 아룁니다.

오늘에 이르러 감히 주상께 아룁니다. 원컨대 법우(法雨)를 내리시어 하늘의 살펴보심이 멀리까지 응결하여 은덕을 입지 못한 이조차 이에 따르게 하십시오. 기대함은 약목(藥木)을 균등히 하고43) 성실함은 기수(器水)를 함께하여,44) 봄꽃을 아름답다 하다가 도리어 가을철의 향기로운 콩잎을 연민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덕이 우뚝하시어 천도(天圖)를 받으시고 도가 융성하여 말씀마다 계합하셨습니다. 네 쌍의 3()과 여섯 쌍의 5()로도 이를 비유하지 못하며 열 사람의 요임금과 아홉 사람의 순임금으로도 견주지를 못합니다. 가을바람이 스산해짐에 일찍이 쉬지 못한다는 생각을 내시니, 한 물건이 처소를 잃더라도, 오히려 자신이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여기는[納隍] 어짊을 일으켰으며, 구실(衢室)45)의 정을 남기어 석거(石渠)의 강론46)은 아직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엎드려 생각해 보건대 신통이 드러나는 곳에서 한 생각에 만기를 열람하시고, 대권(大權)이 행해지는 곳에서 때에 따라 3()에 응하니, 마치 선정의 적멸에 처하여 그림자가 시방에 나타난 듯합니다. 한 번 도량을 일으켜 8()가 되었으니 어찌 취율(吹律)의 후()47)가 웅상(熊湘)의 수고로움48)을 균등히 하고, 주정(鑄鼎)의 임금49)이 풍우(風雨)의 의무를 다한 것과 더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평등의 지혜로 여래의 자비를 행하시어, 창생을 제도하기 위한 희유한 일을 내리셔서, 조정에 1()이 가득하고 유정(有情)한 존재가 10()을 이루게 하시며, 지혜의 구슬과

 

법의 횃불을 사람마다 지니게 하시고, 4()5()을 집집마다 바랄 수 있게 하소서.

삼가 하늘과 같으신 위엄을 무릅쓰고, 다시 상계(上啓)하여 이와 같이 아룁니다. 진심으로 우러르며 엎드려 윤허하시기를 바랍니다. 북기(北冀)에 산이 없다고 하면 어찌 자체로 지난날보다 높을 수 있겠습니까? 남양(南陽)에 경치를 되돌린다면 지금과 현격할 것입니다.

삼가 올립니다.

 

- 중답어강계칙(重答御講啓勅:어강을 청하는 계의 두 번째 칙답) 양 무제

거듭 올린 계를 살펴보았다.

나도 강의하고 싶은 마음은 그대들의 생각과 같으니, 그 생각하는 바가 예전에 답서를 내린 것과 다르지 않다. 아직 변방을 거두지 못하여 나라의 경비에 결핍됨이 많다. 이와 같은 일 등을 항상 헤아려야 하니 나머지 번잡한 일들은 다 말할 수조차 없다. 솔토(率土)가 안녕하지 못하여, 풀을 먹는 이가 많았다. 아울러 성심으로 따르는 자들이 이어지더라도 상()을 균등하게 내리지 못하였다. 따라서 원망하는 이는 많은데 그 말을 기리는 이는 적었다.

한나라 치세에 국토를 크게 넓혔지만 가의(賈誼)50)는 도리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고, 위나라 왕실이 근심이 없었는데도 양부(楊阜)51)는 오히려 이에 대해 슬퍼할 만하다고 하였다. 하물며 다른 마음을 먹지 않는 조아(爪牙)나 심복과 다름없는 신하들과 또 도를 논하는 유악(帷幄)의 선비들이 사총(四聰)을 열지 않고 팔달(八達)의 길을 메우고 있으니 어찌 하겠는가? 왕후(王侯)가 비록 많더라도 성을 다스리는 것을 맡기지도 못하고, 낮에는 모진 애를 쓰고 밤에는 근심하는 것이 마치 서리와 칼날을 밟듯이 하는데, 썩은 끈으로 여섯 필의 말을 부리려 하더라도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시경에서도 일찍이 말하지 않았는가? “나를 아는 자는 나의 마음에 근심이 있다고 하고 나를 알지 못하는 자는 내가 무엇을 구한다고 말한다.”52) 지금은 진실로 담소해서는 아니 된다. 그대들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하고자 하면, 스스로 여러 스님들을 중운전(重雲殿)으로 모셔다가 도()의 이치를 강의하도록 하라.

이에 칙한다.

 

(3) 우청어강계(又請御講啓:다시 어강을 청하는 계)와 칙답 양 간문제

신 강ㆍ신 윤ㆍ신 기가 아룁니다.

감히 총령(寵靈)에 빗대어 누차 살펴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신지(神旨)를 내리시되 촛불을 드리우시지 않았습니다. 삼가 황정(皇政)은 넓으며 천복(天覆)은 원대하고 해하(海河)는 평안하며 일월은 밝습니다. 낙수(洛水)에는 번방(蕃方)이라 칭하는 호족(胡族)이 있고, 고가(藁街)53)에는 귀순한 노족(虜族)이 있습니다.

모두들

 

창을 받들다가 이미 거두니 가을의 먼지조차 날지 않습니다. 괴극(槐棘)54)은 다사(多士)의 시55)와 균등하고, 초당(貂璫)56)에는 어짊을 얻었다는 칭송이 자자합니다. 참으로 성덕(聖德)이 충만하시어 해가 기울도록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당시에는 우임금의 탄식이 많았지만 사람들은 요임금의 마음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백벽(百辟)이 부끄러워하고 여러 관리들은 해이해졌습니다.

신들이 세 가지 선57)도 듣지 못하며 혹은 한 자리의 관직도 다하지 못하며 음식을 좋아하여 재상(宰相)의 꾸지람을 받고 인색함을 배워 참군(參軍)의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천원(天苑)에 뿌리를 맺어서 예전에 일보다 더 드높입니다. 이로써 더럽힘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다시 주상께 아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자대비를 기쁘게 여기시고 특별히 허락을 내려 주십시오. 광명을 발하여 땅을 흔들리게 하신다고 그 법도가 세속 일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기틀에 따라 약을 쓴다고 사람으로서 그 말씀을 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함생(含生)이 모든 솔토에서 마음의 꽃과 나무를 이루어 함께 6()을 돌고, 거울 속에서 구슬을 얻어 모두들 세 가지 장애를 열 것입니다. 정성껏 소원하는데, 누구인들 바라지 않겠습니까? 지엄하심을 무릅쓰니 두려움이 갑절이나 늘어납니다.

삼가 올립니다.

 

- 우답어강계칙(又答御講啓勅:다시 어강을 청하는 계에 대한 칙답)

그대들이 올린 계를 살펴보았다.

다시 감회를 말하겠다. 그대들이 곡식 가꾸는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천하의 짐이 무거움을 알겠는가? 용렬한 군주와 못난 임금이 이로써 그 자취를 이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전복되는 이유는 모두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염려하지 않은 탓이다. 하물며 지금 나라가 편안하지 않음에 있어서이겠는가?

은감(殷鑑)이 멀지 않아 바로 전대(前代)에 있으니, 내가 지금 행하는 바가 비록 어제와 다르더라도 오로지 강의하는 것만 알고 나라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바로 저와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술()을 달리 쓰더라도 함께 망하게 되는 것이다. 주역에서도 망할까 두려워하여야 무리지어 나는 뽕나무에 매어놓듯이 편안하리라”58)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건건(乾乾)하여 밤중까지 근심하여야 겨우 나중의 화근을 면한다고 말하였다. 너희들도 이에 대해 생각해 보거라. 첫 번째와 두 번째 모두 이전의 칙령과 같이 한다.

이에 칙한다.

 

(4) 사상강위개강계(謝上降爲開講啓:상이 개강을 허락함을 감사하는 장계)

신 강()이 아룁니다.

사인(舍人) 서엄(徐儼)이 조칙을 받들어 선포하니, 걸림없는 대자대비를 본원[本誓]에 어긋나지 않게 하여, 내년 정월에

 

삼혜경(三慧經)59)의 설법을 열라고 하셨습니다.

삼가 조칙을 받드니, 몸과 마음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굶주렸다가 궁궐의 좋은 음식을 먹더라도 이것보다 더하지 않고, 가난한 이가 보배 구슬을 얻었다 하더라도 이것에 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엎드려 원정(元正)이 경사스럽게 흐르고 대구(大裘)60)는 예를 다 갖추니, 지혜의 구름이 윤택함을 연잇고 법의 단비가 이어 내립니다. 세간을 벗어나는 넓은 은혜가 양춘(陽春)과 더불어 드리웁니다. 이같이 함생이 약목(藥木)에 따라 늘어나니, 기쁨을 만국과 함께하며 복이 구위(九圍)로 넘칩니다. 어찌 다만 어리석은 신들에게 일찍이 없었던 일일 뿐이겠습니까?

삼가 칙령을 선포하여 소릉왕 윤()과 무릉왕 기()에게 달려가겠습니다. 모두 갖추어 서로 달려 나가 주상께 감사드릴 말조차 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올립니다.

 

(5) 계봉청상개강(啓奉請上開講:개강을 받들어 청하는 계)와 칙답

신 강이 아룁니다.

진여(眞如)가 강설함이 없더라도 통발이 없으면 깨닫지 못하며, 극과(極果)는 응하지 않더라도 주앙(注仰)하여 이것에 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릇에는 물의 인연이 있어야 바야흐로 원희(圓曦)의 그림자를 보게 되고, 약초는 기르는 성품을 머금어야 지혜 구름의 자비를 드리우게 됩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폐하께서 옥경(玉鏡)으로 천자의 자리에 임하시고 금륜(金輪)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기에 응하는 자취마다 꾀함이 있으며, 굽어 임하실 적마다 만물을 이롭게 하십니다. 본원에 어긋나지 않고 어리석은 이들을 개화하시고자, 대승(大乘)으로 시방을 몰아서 만국을 인수(仁壽)로 운전하시니, 기껏해야 쇠를 다듬고 곡식을 거두는 공적으로 어찌 이 같은 조화에 비기겠습니까?

강물을 트고 냇가를 열어 천하를 덜어 주고 보태니, 그 지혜는 아홉 명의 순임금보다 높고, 밝기는 열 사람의 요임금을 벗어납니다. 임금의 행차 때 마다 감로의 단비를 내리시니, 하늘과 사람은 춤추고 함생은 이로움을 더합니다. 이에 그 흐름을 등지고 돌아갈 줄을 알게 되니, 피안에 미혹되어 돌아감을 알게 됩니다.

신이 외람되게 달려가 듣고 싫어할 줄을 모르며, 오늘날 이같이 단심을 아룁니다. 삼가 법륜을 굴리셔서 비루한 이들이 듣게 되는 은혜를 거두지 마십시오. 일찍이 어리석은 신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니, 그 정성스런 마음으로 다시 열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하게 한 말씀 내려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세 번 청하오니, 왕사(王舍)에 미묘한 말씀을 내리시고

 

보방(寶坊)에 묘한 이치를 모아 주십시오. 성심으로 평등하게 외아들과 같이 창생(蒼生)을 굽어보시니, 이에 신이 청을 올려 넓은 가피가 끝없기를 청합니다. 이와 같이 윤허내리기를 모두들 고대하니, 두 어깨에 짊어지신 것을 어찌 감히 다 깨닫겠습니까? 원하는 바를 들어 주시니, 참으로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이와 같은 일을 알려드립니다.

삼가 올립니다.

 

- 답청개강계칙(答請開講啓勅:개강을 청하는 계에 대한 칙답)

계를 살펴보았다.

그대가 생각하던 바를 진술하고, 법사(法事)를 이미 잘 마무리하였으니 어찌 기쁘지 않은가? 내가 안팎의 여러 가지 연()으로 인해 근심스럽고 수고로움이 분분해서 밥 먹고 쉴 틈조차 없다. 일을 잠시 폐하고 도를 논하고자 하여도 겨를이 없다. 그대는 곧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일을 행하라.

이에 칙한다.

 

(6) 계사상강위개강(啓謝上降爲開講:개강을 허락해준 것에 대한 감사 장계)

신 강이 아룁니다.

신의 간절한 소원이 지극하여 누차 신의(宸扆)61)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실로 감로의 단비를 내려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적셔 주시기를 바랍니다. 천청(天聽)이 아득하여 따를 만한 귀감을 내려주시니, 마른 묘목을 적시는 것이 어찌 스스로 불쌍히 여기는 것에 견주겠습니까? 더위 먹은 새가 숲을 생각하듯, 어찌 편안함만 갈망하겠습니까?

근자에 대승정(大僧正) 혜령(慧令)스님을 모셔다 다시 간구하고자 합니다. 부디 칙지를 내리셔서 내년 2월에 금자파야경제(金字波若經題)를 열도록 허락을 내려 주십시오.

특별하신 은혜로 어리석은 소청에 곡진하게 응해 주시니, 이에 절을 하며 칙지를 듣게 되는지라 참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몸과 마음이 기쁜 것이 마치 자비로운 광명에 마주한 듯하고, 손과 발이 춤추니 그 이치가 달리 익혀서 된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생각해 보면 향성(香城)62)에서의 묘한 말씀은 실로 신비로운 글을 우러르며, 윤택하기가 비구름에 견주고 밝기가 일월을 넘습니다. 미혹한 길로써 올바름을 알게 하여 크게 균조(均朝)를 꿈꾸게 하며 범지(梵志)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천마(天魔)조차 멀리서 예배하는데, 제환(提桓:釋提桓因)이 들은 것을 지금에서야 듣고 파륜(波崙)63)이 구하는 바는 세간에 다시 나오기를 바라니, 그 이익이 넓고 깊어서 끝이 없습니다. 구위(九圍)가 깨달음을 얻고 시방이 알게 되었으니, 비록 그 앎이 처음 흘러감을 일으켜 마음은 뒷생각을 궁구하더라도 바야흐로 5()64)를 함께 내던지고 한 가지 공()을 두루 비추니 우뚝하고

 

아득하여 참으로 깨닫기 어렵습니다.

신이 이에 혜령 스님을 굴복시키어 이 같은 은전을 계속 선포하였으니, 대승으로 널리 제도함도 성스러운 자비에서 연유하였습니다. 삼가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는다 하여도, 어떻게 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마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 일을 이와 같이 알려드리며 감사드립니다.

삼가 올립니다.

 

17) 어강파야경서(御講波若經序) 양육운(梁陸雲)

이치가 필경(畢竟)에 이르면, 비추임이 다하여 공적(空寂)해지기에, 3()65)에 들어가 관()을 깨닫고 5()66)을 인도하여 나루터를 건너간다. 이를 비유하자면, 뜨거운 불꽃이 멀리 비추어 삿된 것이 접촉하지 못하듯 하니, 마치 저와 같이 해가 떠서 한 가지 모양을 드러내어 도()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

나열(羅閱)67)로부터 그윽한 말씀을 천명하고, 향성(香城)68)에서 그 묘한 설법을 널리 폈으니, 미륵(彌勒)이 원광(圓光)69)에 글자를 드러내고, 제석(帝釋)은 명주(明呪:眞言)에 선()을 생각한다. 이를 받아 지니어 독송하면 그 위신력이 거센 바람을 가르고, 공경하게 받들면 그 복과 이익이 보탑(寶塔)을 넘어선다. 대체로 여러 성인의 원만하게 지극함은 만 가지 법의 근원이다.

황제의 참다운 지혜는 자기로부터이고 큰 자비는 만물에 부응하며, 해와 달을 보내고 맞이하며 하늘과 땅도 가로하고 마주선다. 3()70)의 부박한 기풍을 누르고 5()의 퇴락한 세속을 바로잡고자, 구실(衢室)로 나와 임하며 일을 물리치고 재계를 하니, 황옥(黃屋)이라도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매번 창생을 생각하며 그 덕이 구우(區宇)를 두루 살피니, 지극한 인으로도 드러내기 부족하다.

이치는 이름과 말을 끊었어도 낱낱이 말씀하시는 것이 한층 더 은근하다. 예전의 지혜의 등불이 빛을 감추고 법장(法藏)이 흐름을 나누었으니, 3()이 대립하여 달리며 5()가 서로 어긋났다. 가려(訶黎)가 좁고 열등하여 다만 흑월(黑月)의 빛을 우러르고, 비담(毘曇)이 좁고 막혀서 물에 잠긴 보배 구슬을 보지 못함에 성황(聖皇)이 기대에 응하여 여러 미혹을 없애고 이단의 학문을 굴복시켜서 천궁(天宮)의 넓음을 지극히 하시면서, 용전(龍殿)의 깊은 비밀을 궁리하였다. 이로써 보리심(菩提心)을 크게 발하여 반야경을 널리 펼치고 번뇌의 미혹을 영원히 끊고 다 함께 청정하게 돌이키며, 군생(群生)에게 감로를 적시고 법륜을 굴리되

 

쉬지 않았다.

주상이 천감(天監) 11(512)대품(大品:대품반야경)의 주석을 달아 이 이래로 친히 강설하는데 힘을 쏟았다. 삼혜경(三慧經)을 거듭 밝힌 바가 참으로 심오하다. 이에 1품을 구별해 내어 따로 경권(經卷)을 세웠다. 또한 관음력중특현보문(觀音力重特顯普門)장으로 말미암아 등주(登住)71)하여 행()을 깊게 하였다. 화엄경의 품을 출간하였으니, 이로써 그 요지를 뽑아내어 신학자를 깨닫게 하였다.

대승정 혜령(慧令) 스님은 법문(法門)의 상수(上首)이고 또한 총지(總持)의 신족(神足)이므로, 원력은 수제(須提)의 질문과 같이하고 가섭(迦葉)의 청과 함께하였다. 이에 어전(御殿)에서 이 경전을 강설하도록 청을 올리자, 이를 허락하는 조칙이 내렸다. 이윽고 대동(大同) 7(541) 312일 금자(金字)반야바라밀삼혜경을 화림원(華林園)의 중운전(重雲殿)에서 강의하였다.

화림원이란 대체로 강좌(江左) 이래로 후정(後庭)으로 삼아 연회를 열던 장소이다. ()나라에서 제()나라에 이르기까지 연수가 거의 2백여 년인데, 위엄을 갖춘 이융(夷戎)의 군주들이 대체로 사치스러웠다. 그 무도장과 종각 등이 마치 아방궁의 옛 터와 같았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조정 대신이 함께하며 흥겨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므로 지극한 사람이 우내(宇內)를 다스린 이래로 음악과 여색을 막고 내치고자 궁궐의 미녀를 되돌려 보내고, 서인(庶人)과 영유(靈囿)를 함께하면서, 다시금 화림원을 철거하여 일체가 무상함을 깨닫게 하였으니, 보대(寶臺)마다 10()에 힘입어 바야흐로 굳건해졌다.

이 같은 하늘의 정원을 희사하여 도량을 건립하고서 장엄한 법사를 열어 스님들을 초빙하였다. 엄숙하고 신묘한 건물은 취헌(翠巘)의 그늘을 드리우고, 우뚝한 이층 누각은 단치(丹雉)의 위에 임하였다. 넓디넓은 광명이 암라(菴羅)72)의 땅에 드리우고, 몸과 마음의 안락함이 환희(歡喜)의 뜰에 임하였다.

이때 3()의 절기를 맞이하여 만물이 무성하게 피어올랐으니, 바람과 햇빛이 더디어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았다. 상서로운 꽃과 보배로운 나무가 7()을 환하게 비추고 옥저(玉底)와 금지(金池)

 

8()으로 물결쳤다. 높은 대문을 환히 열어 대중이 운집하였는데, 법석으로 달려가느라 웅성거리다가 종소리를 듣고서야 조용히 하였다.

황태자의 지혜가 실달(悉達)과 같고 공덕이 담마(曇摩)를 뛰어넘으니, 3(殿)의 속된 즐거움을 버리고 2()를 끌어서 도를 물었다. 선성왕(宣成王) 및 왕후(王侯)와 종실(宗室) 등도 모두 깊은 마음을 내어 함께 깨끗한 행을 닦았다. 계향(戒香)을 내어 선()을 조절하고 물들인 옷을 입고서 함께 반열(班列)에 나아갔다. 그림자를 드리운 선면(蟬冕)과 구불구불한 관대(冠帶)를 하고, 금문(金門)을 에워싸고 옥계(玉階)에 올라 서 있는 이가 가득하여 큰 무리를 이루었다. 이에 경필(警蹕)73)이 북쪽으로 치닫고 계극(棨戟)74)이 동쪽으로 돌았다.

문마다 맑고 깨끗함을 떨치고자 곁에서 향을 피웠는데, 정거천(淨居天)의 옷을 입고 수미좌(須彌座)에 올라 여덟 가지 묘한 소리로 말씀하시니 걸림이 없었다. 시방세계가 공손하게 들으면서 그 부류에 따라 깨우침을 얻었는데, 그 깊은 이치는 읍주(挹注)75)에 있어 다하기 어려웠다. 기쁨의 말씀이 가고 옴에 더욱 새로워졌으니, 숙학(宿學)과 노승조차도 한쪽으로 편벽되어 오로지 몇 가지 법륜에 의지하여 경문(經文)을 깨치지 못하자, 작은 의지를 변화시켜 헤아리고 천존(天尊)을 우러르며 질문을 발하였다.

마침내 지혜의 칼을 휘둘러 의심의 그물을 터놓고 미혹한 방향을 제시하여 바른 자취로 돌이키자, 얼음이 스르르 녹듯이 하며 모두들 기쁘게 정대(頂戴)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마치 연꽃이 점차 피어나듯 하였는데, 비유하자면 초승달이 점점 자라나는 것과 같았다.

대체로 이를 듣는 대중은 황태자ㆍ왕후ㆍ종실ㆍ외척에서부터 상서령 하경용(何敬容)과 백벽(百辟), ()ㆍ사() 및 노사주(虜使主) 최장겸(崔長謙)과 사부(使副) 양휴지(陽休之)와 외국의 여러 사신들까지 1,360여 명이었다. 모두가 그 오는 길이 구역을 넘고 갈래가 만 리나 떨어진 곳이었는데도, 황제의 교화를 우러러 짐을 실어 말을 치달렸다. 하늘 꽃[天華]의 향기를 맡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머리를 조아려 예를 극진히 하고 찬탄하면서 그 뒤를 연이었다. 또 별도로 의학승(義學僧) 1천여 명을 동태사(同泰寺)로 초청하여

 

밤마다 제의(制義)를 덮었는데, 아울러 이름은 용상(龍象)을 멋대로 하고 지혜는 강하(江河)를 훤히 알았다. 전하여 익히는 것은 사병(瀉甁)76)에 비유하고, 경을 외우는 것은 소낙비가 내리치듯 하였다.

사문 석법륭(釋法隆) 스님은 나이가 100살인데 학문이 3()에 두루 밝고 식견이 8()을 꿰뚫었다. 법을 설하여 사람을 제도하는데 북쪽의 변경의 요새에서도 그 이름이 드높았다. 중국에서 마하반야경을 강의한다는 소문을 듣고 스스로 멀리서 찾아왔으니, 이때가 승정 혜령 스님이 강연에 대해 계를 올리기 전이었다.

경사의 도인과 속인들도 황제가 그 강의를 허락했음을 알지 못했는데도, 강의를 시작하는 날이 되자 다시 외국의 스님들이 찾아왔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으며 그 대중들도 알지 못한 채 함께 법좌에 모였다. 이로써 방광(放光)이 두루 비쳐 지신(地神)이 이를 널리 알렸음을 알 수 있으니, 어찌 말을 달리고 코끼리를 부려서 사신을 수고롭게 하겠는가? 명부(冥符)에서 이미 신고(信鼓)의 기약이 있었을 것이다.

회계(會稽) 무현(鄮縣) 아육왕사의 석법현(釋法顯)은 고행을 닦으면서 지혜를 구하는데 뜻을 두었는데, 이미 울다(鬱多)의 사유와 함께하였으며, 파륜(波崙:薩陀波崙)의 자상하고 빈틈없이 마음을 쓰는 것과 함께하였다. 이윽고 강연에서 스스로 그 원력(願力)을 펴고자 피를 뽑아 바닥에 뿌려 지극한 성의를 표하는 데 썼으니, 예전에 몸을 베어 공양하고 뼈를 갈라 경전을 베끼면서 정법에 귀의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았다는데, 지금 이것을 보게 되니 예전의 신심이 참으로 헛된 말이 아니다.

대체로 23일간 강의하였다. 강의를 열고 강의를 폐하는 때까지, 날마다 두루 공양하여 경사(京師)에 널리 베풀었는데, 문무의 시위(侍衛)가 그 반뢰(班賚)를 더하였다.

주상이 천하에 빛을 드리운 지 40여 년간 몸소 검약하고, 그 몸을 나물과 소찬으로 편안히 하였으며, 늘 작은 전각에 머물면서 비바람이나 가릴 정도였다. 그 머무는 곳과 앉는 곳도 겨우 무릎을 허용할 정도의 크기였다. 바깥으로는 3()의 예를 끊고 안으로는 천종(千鍾)의 연회를 막았다. 음식을 주선하는 일에서 해마다 만금을 절약하고, 궁궐을 수리하는 비용에서 해마다 수억 냥을 절감하였다. 겸하여 널리 지리(地利)를 거두어 바다 속에 보배를 넣는 것과 같이 하였다. 천부(泉府)77)를 채우고 늘어나게 한 것이 비유하자면 용금(龍金)78)이 다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사람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고 나라의 경비를 해치지 않았다. 재법(財法)에 보시를 두루 겸하여 다하지 않았다.

이번 강연도 신묘한 기적이 넘쳐나니 참으로 불가사의하였다. 첫 번째, 궁중의 불상이 모두 광명을 발하였다. 두 번째, 대지가 진동하여 모두 솟구치거나 내려앉았다. 세 번째, 밤마다 비가 내리다가 낮에는 맑아져서 기운이 편안하고 꽃이 만발하면서 티끌조차 날리지 않았다. 네 번째, 건추를 울리자 강연에 몰려들어 어깨를 부딪치고 바퀴에 걸려 4()에 넘쳐났는데도 사람과 말이 조화를 이루어 서로 놀래지 않았다. 다섯 번째, 법석을 베푼 것이 불과 만 명이 앉는 자리에 불과하나, 항하사 대중이 몰렸어도 비좁지 않았다. 여섯 번째, 사부대중이 멀리서라도 묘한 설법을 들었으나, 강당이나 복도 바깥에서도 더욱 똑똑히 들었다. 일곱 번째, 깨끗한 공양을 두루 베풀어 주방에서 밤새워 마련하지 않았어도, 묘한 음식이 때에 맞춰 백 가지 맛이 가득하였다. 여덟 번째, 기이한 향기가 풍겨 나와 바람을 따라 가득해졌다. 아홉 번째, 맑고 고운 아악(雅樂)이 저절로 소리를 울렸다. 열 번째, 그 어짊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허공에 가득했다.

이와 같은 것은 대체로 예전에 부처님께서 증명하시고 여러 하늘이 감응하신 것으로, 예전의 신령함보다 한층 더 보배로우며 예전의 서상보다도 꽃비가 더욱 흩날리는 것이었다. 이때 솔토가 기뻐서 손뼉을 치고 함령이 기뻐하면서, 복전(福田)에 참례하고자 일마다 다투어 희사(喜捨)하였다.

주상이 그 마음의 자취를 나누어 커다란 바람을 드러내었으니, 가만히 한 구절을 받들어 지니더라도 온갖 선이 생겨나고, 두 글자가 귀에 들어오면 훌륭한 보응이 있을 텐데, 하물며 대승(大乘)을 널리 운전하여 정법을 두루 드날리는 것에 있어서랴.

모두가 지혜의 뿌리를 발명하여 묘한 과보로 함께 나아가되, 여러 보함(寶函)에 비장한 것을 그와 같은 금자(金字)로 전하였으니, 만겁(萬劫) 동안 광명이 항상 하고 대천세계에 이로움이 가득하여 참으로 성대하니, 진실로 덕을 칭할 수조차 없다.

소신(小臣)도 강연에 참석하였는데, 직은 역사 기록에서 참고하였다. 삼가 당시의 일을 수록하고서 지금 동태사에서 어명으로 강의하게 된 것의 서문을 짓는다.

 

어출동태사강금자반야경의소(御出同泰寺講金字般若經義疏)와 문답 제1

1[226] 발반야경제(發般若經題) [논의자 6]

 

18) 어강금자마하반야바라밀경서(御講金字摩訶般若波羅蜜經序) 시중 (侍中) 국자좨주(國子祭酒) 신 소자현(蕭子顯) 찬술

포희(庖犧)79)가 신명을 움직이자, 팔상(八象)80)이 열()을 이루게 되었다. 주나라 문공(文公)이 성스러움을 다하자, 육허(六虛)81)가 이로써 널리 펼쳐졌다. 이는 대체로 세속을 이끄는 조그마한 전범(典範)으로 방외(方外)에 형통한 커다란 훈요는 아니다. 한나라 명제(明帝)82)가 스스로 강의함에 이르러서는 유술(儒術)로 국한하였고, 간문제(簡文諦)는 소원한 것을 말하여 경전을 전공하는 것을 사양하였으니, 마치 영약(靈若)83)이 우물을 보듯이 하고, 운몽(雲夢)이란 곳이 가슴 속에 있는 듯이 하였다.

황제가 지극한 도를 체득하고 이를 성대하게 거행하였으니, 진실로 총명하여 천자가 되었다. 10()가 이로써 있게 되어, 굽히어 인왕(人王)에게 응하였다. 여덟 가지 복이 이에 생겨나니 참으로 세간의 군주에게 귀의하였다. 깊게 살핌이 끝이 없고 진겁(塵劫)의 시초를 자세히 살펴 형통한 바를 적막하게 비추며 육합(六合)의 바깥을 갖추었다. 이같이 무위(無爲)를 굴복시켜 모두 학()이 있음을 드러내었다. 단나(檀那:보시)와 인욕(忍辱)을 함께 닦고 선정과 지혜를 같이 드러내었다. 나라의 성을 벗어나 크게 희사하면서 왕궁의 시절과 같게 하였기에 진보(珍寶)의 양이 사천(四天)에까지 이르렀다.

또 전륜왕의 나날과 함께하는 것이, 마치 기러기 깃털처럼 가볍게 하면서 이를 버리는 것도 마치 신발을 벗듯이 하였다. 그러므로 도가 황왕(皇王)을 능가하였으므로 그 사적이 방책(方冊)마다 드높았다. 이 어찌 생이지지(生而知之)하는 상품(上品)의 덕을 쌓은 것이 아니겠는가? 흉중에 신묘한 기틀을 담고 꿰뚫은 것이 3()에 비견되며, 그 공이 두 가지 지혜와 나란하니, 누가 이와 더불어 함께 할 사람이 있겠는가?

금자(金字) 마하반야바라밀경은 대체로 법부(法部)에서도 지존(至尊)이 되는 것이며, 원통한 성인의 지극한 가르침이다. ()을 열어 모양 없음[無相]으로 근본을 밝히니, 수레바퀴를 굴려 구경(究竟)으로 함께 흘러가고, 깊고 오묘한 이치는 구름과 같은데도, 깊은 글은

 

맑으면서 넉넉하기에, 이전 세상의 학인(學人)들로서는 이를 능히 받아 지닐 만한 이가 드물었다.

황상이 대승을 귀히 여겨 법장(法藏)에 노닐었으니, 그 도를 같이하고 뜻을 합쳐서 마음속으로 이를 총지(摠持)하였다. 친히 왕의 말씀을 움직여 윤발(綸紱)을 묘하게 넘었으니, 마음을 밝히는 커다란 통발로 인도하고, ()을 터득하는 기이한 갈래를 표방하였다. 이에 비취색 비단을 다듬어 금자(金字)의 전서(篆書)로 새겼는데, 온갖 보배로운 장식을 갖추되 그 품목마다 무가(無價)의 보배를 다하였다. 지영(芝英)84)이 아름다움을 사양하고 금벽(金碧)이 서로 빛났으니, 비록 하도(河圖)가 내린 것을 영예롭다 하여도, 이것과 견주면 서상(瑞相)이랄 게 없다. 청옥(靑玉)으로 선간(仙簡)을 삼았어도 이에 비하면 뒤쳐진다.

황태자는 만기(萬機)의 휴일을 계승하고 정사를 듣는 한가한 틈에 살펴보는 것을 이용하였다. 마치 저 훈풍(薰風) 속에서 널리 전하는 설법을 듣기를 원하는 것과 같으니 간절하게 청을 올린 연후에야, 마침내 수락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대통(大通) 5(533) 태세(太歲) 계축(癸丑) 2월 기미삭(己未朔) 26일 갑신일(甲申日)에 여가(輿駕)가 대통문(大通門)을 벗어나 동태사(同泰寺)로 행차하여 강연을 열었다. 강연을 열면서 도인과 속인에게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이룩하였다. 1만의 기병이 마치 용이 달리듯 하였고, 1천의 수레가 번개처럼 움직였으니, 하늘의 음악이 아홉 번 이루었고, 범음(梵音)이 사방에 합쳐졌다. 길을 가득 메우자 그 흩날리는 먼지가 안개처럼 하늘에 연이었는데, 이처럼 도량(道場)을 세우고 복전(福田)을 건립하였다.

황제가 곤룡포를 벗고 법복을 입으시며 존귀하게 임하시자, 대전은 자감(紫紺) 빛으로 화려하게 하였고 법좌는 높고 넓게 연이은 것이 상계(上界)에서도 이를 흉내내지 못하였으니, 신학(新學)은 오를 수조차 없었다. 하늘 같으신 용안이 훌륭한데다 다 친히 말씀을 내리셔 민첩한 변론을 펴시고 거침없는 말을 놓으시자, 말이 유창하여 다함이 없었고 이어진 고리도 저절로 풀어졌다. 마음대로 질문하여도 스스로 얼음 녹듯 풀어 주어, 이치에 막힌 것을 함께 없애고 의심의 그물을 모두 거뒀다. 이 또한 현경(懸鏡)처럼 숨기지 않고 구준(衢樽)에서 대작을 기다리듯이 하였다.

더욱이 긴 법연(法筵)이 계단까지 이르도록, 관면(冠冕)을 쓴 이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고, 방을 가득 메운 스님들이 산처럼 쌓였다. 별전(別殿)에 마주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였고, 높은 주랑(周廊)을 에워싸고 빽빽이 앉았으니, 송곳 하나라도 세울 자리가 없었고, 바늘 하나라도 꽂을 만한 자리가 없었다.

 

법의 단비가 널리 윤택케 하는 것을 이어받고 감로를 기뻐하느라 돌아갈 바를 잊었는데, 마치 백 갈래의 냇물이 큰 바다에 이르고, 온갖 별이 해와 달을 우러르듯이 하였다.

황태자와 왕후 이하 시중(侍中)ㆍ사공(司空)ㆍ원왕(袁昻) 등이 698명이었고, 승정 혜령 스님 등의 의학승(義學僧)으로 자리를 메운 이가 1천 명이었다. 낮에는 마음을 같이하여 청강하였고, 밤에는 다시 그 제정한 이치를 기록하였다. 여타의 승니(僧尼)와 우바새(優婆塞)ㆍ우바이(優婆夷) 대중과 남관(男冠)의 도사, 여관(女官)의 도사와 백의(白衣)의 거사와 파사국(波斯國)의 사신과 우전국(于闐國)의 사신과 북관(北館)에 귀화한 사람들이 강사(講肆)에 무리를 지었기에, 장막을 제공하여 설치해 주었는데, 무려 319642명이나 되었다.

또 이궁(二宮)의 무위(武衛)와 숙직의 몸으로 몸에 보과(葆戈)를 세우고 금갑(金甲)을 두른 채, 아울러 따로 천부(泉府)에서 준 강연의 성찬(盛饌)을 받았다. 다시 수만 명을 청중의 예()에 넣지 않았다.

외국의 도인 사가야사(沙呵耶奢) 스님은 100세였는데, 단특산(檀特山) 가운데서 좌선하다가 중국에 큰 강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찾아왔다. 기틀에 감응하여 먼저 통하였으니, 만 리라도 지척 간이었다.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이를 다시 번역하여 선포하니, 마침내 3()을 터득하여 성정(聖情)을 드높게 비추었다.

또 파사국(波斯國)의 사주(使主) 안구월(安拘越)과 황복(荒服)의 먼 이융(夷戎)조차 연이어 참례하여 법좌에 가까이하였는데,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서 일찍이 듣지 못했던 것을 기쁘게 전수받았다. 여러 종족의 출가인이 이치를 듣는 것을 귀하게 여겼는데, 바로 네 사람이 동시에 삭발하였다.

이보다 앞서 보지(寶誌) 법사는 신통이 헤아릴 길 없었고 신령한 자취가 참으로 많아 따로 별전(別傳)이 남아 있다. 천감(天監) 원년(502) 주상이 처음으로 천하에 빛을 드리우매, 바야흐로 예악(禮樂)에 마음을 두느라 미처 분양(汾陽)에 의탁하지 않았을 때, 법사가 그 해 9월 손수 진미선(塵尾扇) 하나와 쇠로 만든 석장을 주상께 바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주상 또한 그 뜻을 취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미 30여 년이나 되었다. 그 부채의 자루가 작은 끈으로 매여져 있어, 항상 문설주에 매어 놓았는데 손가락으로 짚은 자국이 완연히 남아 있었다. 이 궁궐에 이르러 석장을 울리며 당()에 올라서 부채를 잡고 강연하였다. 그러므로 대천세계를 울리며 널리 설법하는 자는 참으로 명부(冥符)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야흐로 봄이 한창 화창한 때에 매일 저녁 비가 쏟아졌으나 법고가 아침마다 울리자 바로 맑아졌다. 그때 2()을 지나 날짜로 삼칠일을 채웠는데 햇빛이 부드러우며 구름과 햇볕이 상서로웠다. 강의를 폐하는 날에 사부대중이 운집하여 참례(懺禮)을 마쳤는데, 정전(正殿)의 시방대상(十方大像)에서 갑자기 광명을 발하여 백호 사이에서 만자(卍字)가 좌우로 두루 일어났으니, 신령한 모양이 환하게 발하면서 금빛 자태가 뚜렷해졌다. 순식간에 왼쪽의 시방보살상(十方菩薩像)이 연이어 광명을 놓았는데, 오른쪽 옆구리 아래에서 어깨에까지 이르자, 성상(聖像)이 친히 몸을 굽혀 경건하게 절하였다. 대중이 모두 이것을 목격하였다. 이에 이와 같은 면문(面門)을 나타내 그 이치를 증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문(多聞)의 제자는 내성(內聖)의 풍화를 드리우고, 우사(右史)는 말을 기록하였는데 진실로 황제의 법도이다. 이리하여 가까운 신하에게 당시의 일을 기록하라고 명하였으니, 무릇 일을 물어보아 완비하지 않음이 없었다. 혹 멀리까지 그 풀이가 전해져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바로 찾아왔고, 혹 종치(宗致)가 알려지지 않아 먼저 이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와 같이 추심하는 이들이 모두 본습(本習)을 생각한 바이다. 혹 해를 멀리하고 별을 달리하며 이치는 선후를 이루었다. 혹 계속 오고 가더라도 마침내는 한결같이 성지(聖旨)를 묻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 방책에 따라 응수하되, 마치 메아리가 소리에 따르듯 하였다. 만물로 마음을 삼고 일은 여기에서 드러내었다. 후세의 학자들은 마땅히 이와 같은 취지를 깨달아야 한다.

주상이 법을 넓힌 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여러 학승들이 멀거나 가깝거나 함께 모여서 경사에서 회합하였다. 그러나 승가(僧家)의 학문은 스승에게 배워 서로 지키는 것으로, 비록 입으로 말하는 것을 믿더라도 오로지 귀로 듣는 것에만 의지하는 바이기에,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이치를 깨닫는 이가 드물었다.

주상이 매번 형통하게 풀이하였는데, 신비롭고 다채로운 뜻을 얻은 것은 이미 말하기 이전으로 문구를 인용하기를 바로 수십여 차례나 하여 정밀하고 상세하게 밝혔어도, 이를 따라서 깨달을 수가 없었다. 구학(舊學)의 여러 스님들은 마치 촛불을 끈 듯이 침묵하며 기세가 수그러져 혀가 굳었으니, 실로 이와 같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수만의 대중이 우러러보면서 일시에 마음속으로 기뻐하였으니, 이 같은 여러 가지 일은 종이와 묵으로 기술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또 외국의 여러 스님들이 논의한 이치가 반드시 세운 바의 이치에 관한 것이 아니었기에, 평소에 마음속으로 의심하던 것이 있으면 바로 찾아와 해결책을 구하였다. 혹 게송을 외운 연후에 의심을 묻기도 하였고, 혹 질문을 청하여 끝나고 나서 찬탄하며 원()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혹 말을 마치고 그대로 자리로 돌아가서 대중이 모두 알지 못하기도 하였으며, 혹 자문을 마치고 그대로 떠나가 그 소재를 모르기도 하였다. 그 용모와 복식이 일정하지 않아 범부인지 성인인지 실로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와 같은 강연이 동저(東儲)에서 시작하여 이레 만에 그쳤으나, 여러 스님들이 이를 칭찬하느라, 그치려 해도 그칠 도리가 없었다. 다시금 계속 청을 하였기에, 다시 14일을 거쳤는데도 법의 이로움을 청하는 대중들이 우러러보며 그치지 않았다.

주상이 이에 나라 일을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기에, 그 간청을 허락하지 않고 강좌를 해산하고자 하였다. 황제가 재물을 희사하여 널리 보시하였는데, 돈ㆍ비단ㆍ은ㆍ석장 따위의 물건이 201종류나 되었고, 그 가치가 무려 196만 냥이었다. 황태자가 친히 옥경(玉經)을 받들어 7보로 경함(經函)을 짜서 경전을 공양하였다. 다시 스님들에게 돈과 비단을 보시하였는데 343만 냥이었다. 육궁(六宮)에서 희사한 것만도 270만 냥이었다.

주상이 억조창생(億兆蒼生)에 군림하면서 그 스스로를 검소하게 하였으니, 사복(司服)이 맡아 다스리던 바와 옹인(饔人)들이 담당하던 것은 조정의 전장(典章)이 아니라 그 자신을 받드는 비용에만 그쳤다. 즉 태궁(太宮)은 하루에 10만 생의(生衣)1천 금을 지출하였으나, 주상이 이를 취하지 않고서 별도로 스스로 운영하여 공급하였다. 거친 옷만 입으며 옷을 빨아 입었으며 그 사용하는 그릇도 질그릇과 같은 것으로 하였다. 하루에

 

한 번의 소찬만을 먹으면서도 정오가 지나면 먹지 않았다. 추위와 더위가 엄습해 오더라도 삼베옷 이상을 넘지 않았으니, 그 머무는 처소도 사방 1장을 넘지 않았다. 예전에 그 자리를 두르는 휘장으로 쓰던 것을 지금은 상 밑에 깔아 놓았다. 근처에 시위를 두지 않고 주변의 장식물을 없애고, 좌우에 오직 경서의 권축(卷軸)만을 남겼으니, 마주하는 것에 단지 향로와 석장만이 보일 뿐이었다.

먼동이 틀 무렵까지 조정에 앉아 있다가 해질 때에 잠시 쉬었는데, 밤늦도록 법보(法寶)를 살펴보느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잠자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는 늘 이롭게 하였으나 자신은 언제나 단속하였다. 진실로 기거(起居)할 때의 항상된 일이었고 대궐 가운데의 실제 기록이다. 또 궁인(宮人)의 고정된 격식으로써 해마다 수천만 금의 봉급을 지급하였는데, 일체를 아끼지 않고 남겨두지 않았다. 비록 한나라 문제(文帝)가 그 옷을 땅에 끌리도록 입지 않았고 광무제(光武帝)가 곡식을 10곡까지 헤아렸다 하나, 이것과 비하면 우스울 따름이다.

절과 불탑 및 여러 가지 재회(齋會)를 이룩하면서, 자식의 일처럼 달려오는 백성에게 의지하지 않았고, 대포(大酺)의 예()85)를 함께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산택(山澤)의 지리(地利)를 취하는 것으로 여법한 정재(淨財)로 삼았다.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 지출을 하였고 재물은 밖에서 취하는 것이 없었다. 한 번 부역하는 수고로움도 용뢰(傭賚)로 한정하였으므로 그 제작이 천궁(天宮)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며, 음식은 승려들이 먹는 음식[香積]과 같이 마련할 수 있었다.

국조(國朝)의 대례(大禮)는 삼원(三元)86)을 넘기지 않았는데, 삼원을 이룩하여도 대중이 수만 명에 불과하였다. 해를 걸러 운영하면서 살펴본 뒤에야 집행하였다. 나중에 경비를 보태면서도, 오로지 분규를 감독하는 것에 경비를 많이 썼다. 이 같은 법회에 대해서는 자신의 정재(淨財)87)를 지출하였기에,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그 읍절(邑節)이 되기를 원하였다. 흔쾌하게 받기를 청하면서 타고난 복을 다투어 취하였다. 호령을 기다리지 않고 과솔(課率)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 서직(黍稷)과 형향(馨香)조차 기약한 대로 절기에 따라 이르렀기에, 수십만 가지의 성찬이 끝이 없었는데, 이로써 황상의 교화하는 힘에 의하여 백성이 선근(善根)을 이룬 바임을 알 수 있다. 군국(軍國)은 늘 절도 있게 하였고, 창고는 늘 쌓아 놓고 천하로써 공기(公器)를 삼으면서, 추호라도 이를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처음 주상이 열세 가지의 무진장(無盡藏)을 이룩하였는데, 방생과

 

보시의 두 가지 과()가 있었다. 이 같은 창고는 이롭기가 한량없었는데, 매월 재회(齋會)를 열 때마다 다시 여러 사찰에 재물과 음식을 보시하였다. 다시 별도로 지도(至到)88) 장문휴(張文休)에게 칙령을 내려 날마다 도살장으로 다니면서 정조(鼎俎)를 끊도록 명하니, 즉시 속량(贖良)하고 죄를 사면한 이가 수억이니, 이와 같은 것을 상도(常道)로 삼았다.

장문휴(張文休)는 예전에 운리(運吏)였었는데, 때때로 운반하던 곡식을 풀어 가난한 이에게 나눠 주었다. 그 죄가 대벽(大辟)89)에 해당되었으나 주상이 한편으로는 가엾고 한편으로는 측은히 여겨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중죄를 사면할 뿐 아니라 지도(至到)의 임기를 더 보태주었다. 이미 빙난(憑煖)90)의 뜻을 펼친 것도 아니었고, 또 급암(汲黯)91)의 청죄(請罪)도 없었다. 남들에게 숨기고 예전의 중한 허물을 용서하였기에, 마침내 장문휴가 큰 은혜를 짊어지고 잠시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중(日中)에 밥을 거르기도 하면서, 쉬지 않고 다니며 경읍(京邑)을 두루 살폈는데, 그 걸음걸이가 날듯이 하였다. 북을 치고 기를 휘날리며 스스로 짊어지고 뛰어다니며,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나 들판의 짐승들로 4()의 품류(品類)를 타고 난 것은 놓아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때 조정 대신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를 따라 기뻐하였는데, 비용이 1,114만 냥이나 들었다.

주상이 그 마음의 자취를 나누어 열 가지 조항을 나열하였으니, 혹 재물을 희사하여 지금의 법사에 참여하는 자, 혹 재물을 희사하여 공양하는 자, 혹 재물을 희사하여 자비를 행하는 자, 또 재물을 희사하여 경전의 암송을 청하는 자, 혹 재물을 희사하여 절기마다 공양에 충당하는 자, 혹 재물을 희사하여 방생에 충당하는 자, 혹 재물을 희사하여 보시에 충당하는 자, 혹 그 몸을 버려 대중에게 보시하는 자, 혹 손가락을 태워 삼보에 공양하는 자, 혹 강의를 듣고 출가를 원하는 자도 있었다.

비록 예전에 여래께서 도()로 교화하시어 깨달음을 얻게 한 것과 같지는 않으나, 이로써 법안(法眼)이 생겨나지 않은 것은 근성(根性)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이다.

주상이 아울러 그 사람들과 함께 큰 서원을 발하였는데, 그 발원문은 따로 드러내었다. 소신이 강연에 배석하면서, 삼가 서문을 지어 대체로 이치를 육과(六科) 및 문답(問答)으로 세웠다.

 

1질에 13권을 수록하다. 1[226]

 

- 반야경제논의(般若經題論義)여섯 사람이 논의하였다. 중사(中寺)의 승회 (僧懷) 스님, 치성사(治城寺)의 법희(法喜) 스님, 대승정 영근사(靈根寺)의 혜 령(慧令) 스님, 용광사(龍光寺)의 승작(僧綽) 스님, 외국 스님 가타바(伽陀 婆), 선무사(宣武寺)의 혜거(慧巨) 스님 양도강(梁都講) 법표(法彪)

도강(都講)이신 지원사(枳園寺)의 법표(法彪) 스님이 마하반야바라밀경이라 창언하시자, 제칙(制則)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만천(曼倩)이 말하기를, 말하는 것이 어찌 용이한가? 지극한 이치에 있어서는 참으로 말할 수가 없으니, 비록 그 양 모서리를 두드리더라도 끝내 4()92)에는 부끄러운 것이다. 실다운 지혜는 움직임이 없고 지극한 이치는 말이 없으니 고요하기가 헤아릴 길 없고 우뚝하기가 홀로 원대하다.

허공계(虛空界)를 모두 비추되 그 밝음을 옮기지 않으며 유()의 경계에 쓰임새를 다하되 그 공을 베풀지 않는다. 머무름이 없는 머무름으로 머무르고 얻음이 없는 얻음으로 얻는다. 백 가지 복이 그 모양을 달리하나 무생(無生)으로 함께 들어가고, 만 가지 선이 그 흐름을 달리하나 평등으로 다 같이 모인다. 그러므로 군맹(群盲)을 인도하여 치달리게 할 수 있고, 여섯 가지 배를 띄워 다 함께 제도하여 보리의 묘과(妙果)를 이루고 열반의 그윽한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세 가지 명()도 그 기틀을 엿볼 수 없고 일곱 가지 변론도 그 실다움을 드러낼 수 없다.

대성 세존(世尊)께서 본서(本誓)에 거슬리지 않고 방편의 힘으로 중생을 끌어 인도하니, 그 이름과 모양이 없는 것에 이름과 모양을 의탁하여 말씀하셔서 도를 찾는 이가 갈래를 살피게 하고 나루터를 묻는 이가 돌아갈 바를 알게 하셨다. 그럼으로써 왕사성(王舍城)에서 소리 높여 설법하며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말씀하신 것이다.

 

경전은 대품경(大品經)이라고도 이름하는데, 옛날부터 서로 전해진 것에는 모두 5()의 반야(般若)가 있다. 경론을 따져 보면 그 같은 설은 보이지 않고 오직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만이 남아 있으니 그 제목을 권말에 첨부하여 경문을 갖추어 놓았다.

첫 번째는 부처님께서 왕사성에 계시면서 말씀하신 대품반야경이고, 두 번째는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원림(祇洹林) 가운데 계시면서 말씀하신 금강반야(金剛般若)이고, 세 번째는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원림에 계시면서 말씀하신 천왕반야(天王般若)이고, 네 번째는 부처님께서 왕사성에 계시면서 말씀하신 광찬반야(光讚般若)이고, 다섯 번째는 부처님께서 왕사성에 계시면서 말씀하신 인왕반야(仁王般若)이다.

그와 같은 금강반야에는 여덟 권이 있다고 말하는데, 회남(淮南)에 분포되어진 교량공덕(校量功德)1품만이 있으니, 바로 그 본래 이름을 금강반야라 이름한다. 권말의 제목에서는 부처님께서 5()반야경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초시(初時)에 말씀하신 것이라 하나, 이 땅에는 제2시의 설법이 아직 없다. 두 가지 설이 서로 반대되니 참으로 받아쓰기가 어렵다.

대지도론(大智道論)반야부(般若部)에는 그 권질(卷帙)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다고 말하였는데, 단지 광찬경(光讚經)방광경(放光經)도행경(道行經)만을 말하였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경전은 5시에 나열되지 않으니, 이 땅에는 광찬경방광경도행경의 세 가지 경전만이 있다.

방광경이 바로 대품이고, 광찬경도행경방광경과 다를 게 없이 바로 자세하거나 간략한 것이 다를 뿐이다. 광찬경서품(序品)에서부터 산화품(散華品)까지 모두 27품이다. 대품산화품까지 29품이 있으니, 광찬경은 그 가운데 2품을 삭제하여 없앴다. 도행경은 처음에 삼단품(三段品)에서 나중에 촉루품(囑累品)까지 모두 30품인데, 대품에 의하면 앞서의 6품을 제외하고 오히려 모두 84품이 있어야 하니, 도행경54품이 생략되어 없어졌다. 광찬경도행경대품과 더불어 그 일과 이치가 다를 바 없는데, 이것은 경을 번역하는 이가 그 말을 꾸몄기 때문이고, 천축에 있을 때부터 이미 3()로 나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대품에 주석을 달아 다섯 가지 별처(別處)를 열었으니, 그 글에 따라 이치를 따져 보더라도 다른 처소가 없다. 승혜 스님의 소품서(小品序)에서는 이 같은 경전의 정문(正文)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이는 부처님께서 때를 달리하여 교화에 맞추고자 자세하고 간략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 경문이 많은 것은 10만 게()이고 적은 것은 600게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대품은 바로 천축에서의 중품(中品)’에 해당하니 단지 네 종류만을 말하고 5시를 거론하지 않았다. 앞서 승혜 스님이 소품서에서는 바로 7권의 반야가 오랫동안 전해지면서 빠진 것이 생겨났다고 하니 머지않아 이를 회복하여 후회가 없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승혜 스님이 소품은 바로 도행반야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그와 같음을 아는가 하면, 세 가지 일로 징험해 보고 그 타당함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는 도행반야의 말미에 소품이라고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7권에 29품이 있는데 도행의 경문에는 30품이 있는 것이다. 승혜 스님은 30품에 서문을 붙이고 29품에는 서문을 붙이지 않았다. 세 번째는 승혜 스님의 서문에서는 단지 도행(道行)의 두 글자만을 찬양하였는데 그 문장에서 이르기를 장은 비록 30품이 있지만 으뜸 삼는 것이 도()이고 말은 비록 10만 송이 있어도 이에 동반하는 것은 행()이다. 행이 쌓여진 연후에야 무생(無生)이 되고, 도가 충족해진 연후에야 보처(補處)가 된다라고 말하였다.

이 같은 이치로써 도행경이 바로 소품임을 알게 된다. ‘대품이란 이름은 도안(道安) 법사가 경을 번역하고 난 후에 붙여진 일로써, 도안 스님이 이르기를, “예전에 한음(漢陰)15년간 있을 때 방광경을 강의하였는데, 해가 항상 두 번씩 지나쳤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대품(大品)’이라 이름하지 않았으니 먼저 도착한 것도 소품이고 나중에 온 것도 소품으로 모두 30장이 있다. 대품에는 90장이 있으니 그 많고 적음이 같지 않다. 그 모양으로 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다시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서 5시의 가르침을 말씀하셨는데 제1시에는 녹야원에 계시면서 4()의 법륜을 굴리셨고, 이와 같이 제5시에는 사라쌍수

 

사이에서 대반열반(大般涅槃)을 굴리셨다고 한다. 대품의 때는 제2시의 가르침이고, 정명사익경은 제3시의 가르침이며, 법화경은 제4시의 가르침이라 하는데 이 같은 이치는 옳지 못하다. 석론(釋論)에서는 수보리(須菩提)법화경가운데서 설법을 듣고 4()의 진리를 깨달아 득도한 사람이 모두 부처가 되었다고 말하니, 이에 연유에서 지금 물으니 이것은 필정(畢定)인가, 불필정(不畢定)인가?

이와 같이 법화경을 듣는 것이 앞서고 대품을 말씀하신 것이 나중이므로 이러한 인연에 의하여 대품경을 제2시의 말씀이라 하지 못한다. 이야경(二夜經)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도를 얻으신 밤으로부터 열반한 밤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가지 일 사이에서 말씀하신 경전의 가르침은 모두가 실다워서 전도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같은 이치로써 니련선하(尼連禪河)의 기슭에서 처음 도를 얻으신 날로부터 사라쌍수 가운데서 열반에 들어가신 날 밤에 이르기까지 늘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다.

중본기경(中本起經)에서는 여래께서 처음 도를 이루시자, 우다야(優陀耶)가 돌아왔는데, 정반왕(淨飯王)지금 외딴 곳에서 무슨 일을 사유하는가?”라고 묻자, 우다야가 세존께서는 오직 일체가 공()한지라 고()ㆍ락()이 참답지 않다고 하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정반왕이 큰일이구나. 실달이여, 일체가 모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없다고 말하는가? 큰일이구나. 실달이 사람들과 더불어 원수가 되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이와 같이 처음 성도하신 때에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셨다.

고귀덕왕경(高貴德王經)에서는 보살의 수행은 방등대반열반(方等大般涅槃)이다. 보시를 듣지 못했고 보시를 보지도 못했다. 이렇게 대열반을 듣지도 못하고 대열반을 보지도 못했으니, 법계(法界)를 깨닫고 실상(實相)을 터득하면 공()하여 소유(所有)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제구공덕경(第九功德經)에서는 보살이 대열반을 닦으나 일체법(一切法)에 처하여 이를 보지 못한다. 만약 본다고 하면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끝내 반야바라밀을 닦지도 못하고 대열반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이와 같이 자세히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인연 때문에 처음 성도하신 날로부터 열반에 드신 날 밤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반야바라밀경을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다.

반야바라밀은 제불(諸佛)의 모태이니, 3세의 여래께서 모두 이로 말미암아 태어나신다. 모양 없는 대법(大法)을 우습게 논할 수 없으니 어찌 차제(次第)로써 제한하고 5()로써 국한할 수 있는가? 근성이 같지 않아 그 듣는 것도 한 갈래가 아닌데 이 또한 다만 5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에 장엄사(莊嚴寺)의 승민(僧旻) 법사가 여러 학사들과 서로 연구하고 그 근성을 검토해 보니 마땅히 듣는 바에 응하여 대체로 380명이 있었다. 이처럼 시교(時敎)는 참으로 많아서 한 사람이 출세하여 여러 사람이 이익을 얻는데 어떻게 다만 한 갈래 근성의 사람을 위하여 5시를 차례 짓고 대법륜을 굴리겠는가?

마하반야바라밀경이라 말씀하시어 이를 경의 제목으로 이름 붙인 것에도 대체로 세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법이고, 세 번째는 사람과 법을 함께 거론한 것이다. 사익(思益)이란 뜻을 살펴보면 사람으로 경을 이름 붙인 것이고, 법화열반은 법으로 경을 이름 붙인 것이고, 정명승만(勝鬘)은 사람과 법을 함께 거론한 것이다. 이 경전에 이름 붙이되 법으로 그 경전을 이름하였으니, 법을 없애고는 사람도 없고 사람을 없애고는 법도 없는데, 어떻게 이 경을 법으로 이름하였다고 말하겠는가?

반야는 참되나 법과 사람은 방편의 이름이다. 이것은 인가(人家)의 법이지 법가(法家)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도제(道諦)는 법의 보섭(寶攝)과 같다. 이 때문에 이 경이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어 마하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천축의 말이고 은 이 땅의 말이다. 외국에서는 수다라(修多羅)’라고 이름하고 여기에서는 법본(法本)’이라고 말한다. 모두 다섯 가지 이치가 담겨져 있다. 첫 번째는 출생(出生)이고, 두 번째는 용천(涌泉)이고, 세 번째는 현시(顯示)이고, 네 번째는 승묵(繩墨)이고, 다섯 번째는 결만(結鬘)이다.

이라는 글자를 새겨 보면, 또한 세 가지 이치가 있다. 첫 번째는 구()이고, 두 번째는 통()이고, 세 번째는 유()이다.

 

는 변하여 없어지지 않음을 이름하는 것으로 이를 이름하여 라 하는데, 3세에 변화하지 않으니 바로 한결같다는 뜻이다. ‘은 이치에 막힘이 없음을 이름하는 것으로, 이를 이름하여 이라 하는데, 일체에 장애가 없는 것이 의 뜻이다. ‘는 온갖 선을 낳는다는 것으로 이를 이름하여 라 하는데, 만 가지 행이 그 자취를 밟는 것이 법이라는 뜻이다.

이라는 글자로 수다라를 대신하는데, ‘수다라이라 이름한다. 이처럼 이란 이름으로 달리하고 수다라의 이름을 이라고 한 이유는 범부와 성인이 공유(共有)하기에 이로써 이라 한다. ‘이란 이름으로 달리하는 것은, 이 땅의 성인이 말씀하신 것을 이름하여 이라 하기에, 이로써 이라는 글자를 따로 하여 수다라를 대신해서 듣는 이로 하여금 믿음과 이해를 얻고자 함이다.

마하는 이 땅의 말로 ()’이고, ‘반야는 이 땅의 말로 지혜이다. ‘바라(波羅)’는 이 땅의 말로 피안이다. ‘()’은 이 땅의 말로 ()’이다. ()’라고도 이르니, 말을 총괄하여 번역하면 대지혜도(大智慧度)’라 이른다. ‘피안도(彼岸度)’라 말하는 것은 대체로 국어와 같지 않은데, 이곳에서 그른 것이 저곳에서는 옳고, 이곳에서 옳은 것이 저곳에서는 그르다. 세속의 말에 따르니 다른 뜻이 없다. 이 가운데 네 가지 뜻이 있으니, 첫 번째가 칭덕(稱德)이고, 두 번째가 출체(出體)이고, 세 번째가 변용(辨用)이고, 네 번째가 명종(明宗)이다.

칭덕에 해당하고, ‘지혜출체에 해당하고, ‘변용에 해당하고, ‘피안명종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다시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 번째가 법설(法說)이고, 두 번째가 비설(譬說)이다. ‘는 법설에 해당하고, ‘피안은 비설에 해당한다. 바로 피안으로써 열반을 비유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의 뜻인가 하면 공()이 바로 대의 뜻이다.

열반십팔공(涅槃十八空)에서는 대공(大空)이란 말은 반야바라밀공(般若波羅蜜空)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 경전에서 ()이 크기 때문에 반야도 커서 소공(小空)에 맞지 않기에, 대공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가 만약 그 를 결정하였다면, ‘라 이름하지 못하는데, 칭할 만한 것이 없기에 라는 뜻이 된다. ‘지혜의 뜻은 무엇인가 하면, 제법(諸法)의 실상을 능히 깨닫는 것이

 

()’의 뜻이고, 제법의 무생(無生)을 능히 비추는 것이 ()’의 뜻이다. 만약 비춤이 있고 얻음이 있다면 지혜라 이름하지 못하니, 비춤도 없고 얻음도 없어서 원래 원만하고 적막한 것을 지혜라 이름한다는 뜻이다.

()’의 뜻은 무엇인가? 생사가 차안(此岸)이고 열반이 피안(彼岸)이며 번뇌가 중류(中流)이다. 제일의 ()’에 의해서 네 가지 흐름을 구제한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이를 ()’라 이름한다. ‘()’를 만약 ()’라고 결정했다면, ‘()’가 되었다고 이름하지 못하니,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것을 ()’라 이름한다는 뜻이다. ()’라고 이르는 것은 무생(無生)의 지혜로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 않는 것을 ()’했다고 하는 것은 체성(體性)이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가 되었다고 이름한다. ()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과()에서 도달한 것을 보지 못하니, 이 같은 것을 ()’라 이름한다는 뜻이다.

피안차안의 뜻은 무엇인가 하면, 생사는 차안이고 열반은 피안이다. 생사가 열반과 다르지 않고 열반이 생사와 다르지 않기에, 두 가지 법을 행하지 않는 것이 피안과 차안의 뜻이다.

이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마땅히 살바야(薩婆若)93)를 얻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아니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닦지 않으면 당연히 살바야를 얻게 됩니까?”

아니다.”

세존이시여, 닦음도 아니고 닦지 않음도 아닌 것으로 살바야를 얻게 됩니까?”

아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에 이르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바야를 얻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살바야를 얻는 것이 마치 모양과 같다.”

수보리가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이법(二法)에 의하지 않고 불이법(不二法)에 의하지 않고 어떻게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게 됩니까?”

얻을 바가 없기에 얻는 것이니 이와 같이 얻는다 하여도 얻는 것에 얻을 바가 없다. ()이 곧 살바야이니 이와 같이 일체종지가 바로 살바야다. 색이 모양과 같은 것 내지

 

일체종지가 모양과 같다.”

모두가 한 가지 모양에 두 가지도 없고 분별도 없기에, 이 같은 뜻으로 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집착을 버리고 연()을 취하여 마음을 잊고 이치를 구한다면, 메아리같이 그 소리를 듣고 환()과 같이 법을 듣는 것을 참으로 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할 수 있다.

다만 첫 번째 장을 독송하고 다시 다른 식견이 없으니, 이치는 전등(傳燈)과 어긋나고 마음은 수수(受水)가 아닌데, 어떻게 지혜의 전당에서 금구(金口)를 펴겠는가?

감로를 향성(香城)에 흩트리고 좋은 밭의 종자를 윤택케 하여 보리(菩提)의 싹을 키우니, 비유하건대 연못의 물이 백 갈래의 냇물을 따라 큰 바다로 들어가듯 하고, 초명(蟭螟)94)의 눈이 천 일이 지난 뒤에야 그 밝음을 엿보듯 하는데, 어떻게 그 기슭에 정박하는 것을 알겠는가?

차라리 그 빛이 비추는 바의 멀고 가까운 곳을 살펴보고, 대중들에게 의지하여 숙세(宿世)에 공덕의 근본을 심고 여래의 자비로운 근력(根力)을 우러르는 것뿐인데, 참으로 의혹이 있더라도 어찌 이에 대해 대답할 수 있겠는가? 여타의 문답이 12권이나 되는데, 그 책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글을 여기에 모두 싣지 못한다.

 

19) 사개강반야경계(謝開講般若經啓:반야경을 개강한 것에 대한 감사 장계)과 칙답 양 간문제

신 강()이 아룁니다.

삼가 대가(大駕)가 동태사로 납시어 금자의 반야바라밀경제(波若波羅蜜經題)를 여셨으니, 미생(迷生)에게 지혜로운 태양을 비췄고 세간을 벗어나는 근원으로 이끌었습니다. 백 가지 꽃이 그늘을 같이 하고 만 가지 흐름이 바다로 돌이켜지니, 유계(幽界)와 현계(顯界)가 이를 모두 찬양하고 솔토(率土)가 윤택해졌습니다.

신이 몸에 장애를 받은 이래로, 그 몸이 펴지기를 바라였으나 그 채움을 결하였는데, 감로가 널리 드리워 사람과 하늘이 모두 번창하고 반야의 마사(魔事)가 홀로 그 몸을 다하였고, 법륜(法輪)을 치달리고자 사사로움을 깊게 하여 가책마저 어겼으니, 참으로 하정(下情)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받들어 이와 같이 알립니다.

삼가 올립니다.

 

- 답사개강반야계칙(答謝開講般若啓勅:반야경을 개강한 것에 대한 감사 장계에 대한 칙답)

너의 계()를 잘 살펴보았다.

그대를 위해 금자의 반야바라밀경을 강의하였는데, 제목을 낼 무렵에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모이고 화하(華夏)와 이융(夷戎)이 모두 모였다.

 

비가 연이어 해를 가리니, 법사(法事)가 이로써 폐하지나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10()과 만물이 밝게 열리고 유계와 현계가 함께 기뻐하나, 실상(實相) 가운데는 원래 가고 옴도 없다. 몸이 이르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어찌 이에 있겠는가?

몸을 잘 보양하여 너무 수고롭게 하지 말거라. 앞으로도 20일이나 남았으니, 일수가 참으로 번거롭다. 지금 함께하지 않고 나중에 같이 만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다시 헌대로 돌아가고자 하니, 조칙을 번거롭게 쓰지 않겠다.

이에 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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