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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66 불교(광홍명집 17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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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17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3. 불덕편

 

사리감응기(舍利感應記) 수 저작 왕소(王劭)

경사리감응표(慶舍利感應表[幷書]) 수 안덕왕웅백관등(安德王雄百官等)

수국립불사리탑조(隋國立佛舍利塔詔) 수 문제(文帝[自注一十六州等])

기주(岐州) 봉천사(鳳泉寺)

옹주(雍州) 선유사(仙遊寺)

숭주(嵩州) 숭악사(嵩岳寺)

태주(泰州) 대악사(岱岳寺)

화주(華州) 사각사(思覺寺)

형주(衡州) 형악사(衡岳寺)

정주(定州) 항각사(恒覺寺)

곽주(廓州) 연운악사(連雲岳寺)

모주(牟州) 거신산사(巨神山寺)

오주(吳州) 회계산사(會稽山寺)

동주(同州) 대흥국사(大興國寺)

포주(蒲州) 서암사(栖巖寺)

소주(蘇州) 호구산사(虎丘山寺)

경주(涇州) 대흥국사(大興國寺)

병주(幷州) 무량수사(無量壽寺)

수주(隋州) 익주(益州) 진주(秦州) 양주(楊州) 정주(鄭州) 청주(靑州)

호주(毫州) 여주(汝州) 과주(瓜州) 번주(番州) 계주(桂州) 교주(交州)

상주(相州) 대자사(大慈寺)

양주(襄州) 대흥국사(大興國寺)

장주(蔣州)

 

12) 수국립사리탑조(隋國立舍利塔詔:수나라에서 사리탑을 세우는 조서) () 고조(高祖)

문하(門下)가 우러러 생각해 보니, 정각(正覺)이야말로 대자대비로 군생(群生)을 구제하며 중생을 제도하신다. 짐이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성교(聖敎)를 중흥하였다. 사해(四海)

 

안의 일체 인민과 더불어 다 함께 보리심을 내어 복업(福業)을 같이 닦아, 지금의 현세와 오는 세상에 영원히 선업(善業)의 인()을 지어 함께 묘과(妙果)에 오를 것을 생각하였다.

마땅히 스님 서른 분을 초청하여 법상(法相)을 외우고 풀이하면서 대중을 선도할 수 있게 하고자 한다. 각각 시자 2명과 산관(散官) 각각 1명을 붙이되, 훈륙향(薰陸香) 120근과 말 5필을 가지고 각자 길을 나누어 사리를 봉송하라. 앞서의 예를 따라 여러 주()에 불탑을 이룩하되, 절에 미처 보시하지 못한 자는 바로 산수 좋은 곳의 사찰에 나아가고, 불탑을 이룩하는 것은 예전의 산림(山林)과 같이 하라. 예전부터 절이 없던 곳은 해당 주() 내의 청정한 절터에 그 불탑을 건립하고 담당하는 유사(有司)가 법식을 만들어 해당 주()에 보내도록 하라.

스님들이 많은 경우는 360명이고, 그 다음은 240명이고 그 다음은 120명으로 정하되, 만약 스님들이 적은 경우라면 스님을 만나뵙는 것을 다하라. 짐과 황후와 태자와 널리 여러 왕과 자손 및 내외 관인과 일체 백성과 서민이나 유계(幽界)와 현계(顯界)의 생령(生靈)을 위하여, 각자 7일간 행도(行道)하며 참회를 주선하라. 행도하는 날로부터 타찰(打刹)하되 주()가 같은지 다른지를 묻지 말고 사람에 따라 보시하되, 돈은 10() 이하로 한정하니, 10문을 초과하지 못한다. 이처럼 보시하는 돈으로 불탑을 운영하라. 만약 주가 적어서 충당하지 못하면 정정(正丁)을 시키거나 창고의 물건을 이용하라. 솔토(率土)의 여러 주의 승니(僧尼)는 널리 사리를 위하여 재()를 이룩하되, 1015일 오시(午時)를 기한으로 모두 석함(石函)에 봉안하도록 하라.

총관(總管)과 자사(刺史) 이하에서 현위(縣尉) 이상은 군기(軍機)를 쉬고 일상 업무를 이레 동안 정지하고 오로지 행동과 타찰 등의 일을 검교(檢校)하며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야 짐의 뜻에 따른다 할 것이다. 주관하는 자는 이와 같이 시행하라.

인수(仁壽) 원년(601) 613일 내사령(內史令) 예장왕(豫章王) () ()이 선포한다.

 

 

13) 사리감응기(舍利感應記) 왕소(王劭)

황제가 예전에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때[潛龍], 어떤 바라문 사문이 그의 집을 찾아와 사리 한 주머니를 내어 주며 말하였다.

단월(檀越)이 마음이 착하기에 이를 남겨 주니 받들어 공양하라.”

사문은 이렇게 말하고는 바로 떠나갔다. 다시 찾아도 그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그 후에 황제가 사문 담천(曇遷)과 더불어 각각 사리를 손바닥에 놓고 세어 보았는데, 늘 적거나 많아서 수효가 일정하지 않았다. 이에 담천 스님이 말하였다.

일찍이 바라문의 설법을 듣자니, 법신(法身)은 수량을 떠난지라 세간에서 헤아릴 수 없다.”

마침내 칠보상자를 만들어 넣어 두었는데, 성비구니[神尼] 지선(智仙)이 말하였다.

불법이 장차 멸하리니, 일체의 신명(神明)이 지금 서쪽으로 떠나간다. 네가 천하의 어진 아비가 되어 불법을 다시 중흥시킨다면, 일체의 신명이 다시 돌아오리라.”

그 후 주씨(周氏)1)가 과연 불법을 멸망시키자, 수나라 왕실이 천명을 받아 이를 다시 복원하였다. 황제가 매번 성비구니의 말씀을 생각하며 말하였다.

내가 부처님에 연유하여 일어났으니, 천하의 사리탑 안에 각각 성비구니의 성상을 모시라.”

황제와 황후가 경사(京師)의 법계니사(法界尼寺)에 연기부도(連基浮圖)를 만들어 오랜 소원에 보답하고 그 밑에다 사리를 안치하였다.

개황(開皇) 15(595) 늦가을 밤에 신기한 빛이 있어 기단에서 위로 올라가 노반(露盤)을 오른쪽으로 휘감았는데, 빛나기가 용광로의 불길과도 같았다. 열흘 동안 네 번이나 이와 같이 하였다.

황제가 인수 원년(601) 613일 인수궁(仁壽宮)의 인수전(仁壽殿)에 친림하였으니, 이 날이 바로 태어난 날이다. 해마다 이 날에는 마음속 깊이 되새기며 복과 선을 닦아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여러 대덕 사문을 초빙하여 함께 지극한 도를 담론하였는데, 해내(海內)의 여러 주에서 고상(高爽)하고 깨끗한

 

30여 곳을 선발하여 각각 사리탑을 이룩하게 하였다.

황제가 마침내 몸소 칠보상자로 30과의 사리를 받들어 궐내에서 내어다 어좌(御座)의 책상 위에 안치하고, 여러 사문과 더불어 향을 피우며 예배하면서, “제자가 늘 정법(正法)으로 삼보(三寶)를 호지(護持)하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게 하십시오라고 발원하였다. 이에 금병(金甁)과 유리상자 30개를 가져다 유리상자로 금병을 싸고는 사리를 그 안에 안치하였다. 훈륙향을 이겨서 그 뚜껑에 칠하고 봉인하였다.

30()가 동일한 시각, 1015일 정오에 (사리를) 구리함과 석함에 넣어 일시에 탑을 이룩하였다. 여러 사문들이 각자 정근(精勤)하여 사리를 받들어 행하였다. 처음 주의 경계에 들어가면 먼저 집집마다 청소하여 더러운 것들을 가리고 도속과 선비와 부녀자가 성안을 가득 메워 멀리까지 맞으러 나왔다. 총관(總管)과 자사(刺史)를 위시한 여러 관인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인도하였다. 사부대중이 복장을 엄숙히 하고 함께 보개(寶蓋)ㆍ번당(旛幢)ㆍ화대(華臺)ㆍ상련(像輦)ㆍ불장(佛帳)ㆍ불여(佛輿)ㆍ향산(香山)ㆍ향발(香鉢)과 갖가지 음악으로 공경스럽게 공양하였다. 각자 향과 꽃을 가져다 사르거나 흩뜨리면서, 둘러싸고 범패(梵唄)를 외웠으니 거룩한 소리가 우아하였다. 아함경(阿含經)2)의 사리가 구시나성(拘尸那城)3)으로 들어갔다는 법에 의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구름처럼 안개가 서린 듯이 모여들었다. 눈멀거나 다리를 절거나 늙거나 병들었어도 기어서라도 마중 나오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문이 사부대중에게 노래를 지어 말하였다.

지존(至尊)은 보살의 대자비로 끝없이 중생을 뼈에 사무치도록 가엾이 여기니, 이 때문에 사리를 나누어 천하와 함께 선인(善因)을 짓고자 한다.”

또한 경전의 갖가지 방편을 인용하여 타이르고 훈도하자, 모두들 감동하여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대중이 한 마음으로

 

합장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자, 사문이 참회문을 다음과 같이 낭독하였다.

보살계(菩薩戒) 불제자 황제 아무개가 시방3세의 일체제불(一切諸佛)과 일체제법(一切諸法)과 일체현성승(一切賢聖僧)에게 삼가 고합니다. 제자가 삼보의 복을 입어 창생(蒼生)의 군부(君父)가 되었으니, 일체의 서민과 더불어 보리도(菩提道)에 이를 것을 생각합니다. 지금 사리를 여러 주로 나누어 탑을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널리 선업을 닦아 다 함께 묘과(妙果)에 이르게 하고자 함입니다. 제자와 황후 및 황태자, 널리 여러 왕 자손 등과 내외의 관인과 일체 법계의 유계(幽界)와 현계(顯界)의 생령(生靈), 삼도팔난(三塗八難)4)을 위하여, 참회하고 행도하면서 시방에 상주하는 여러 부처님과 12부경(部經)의 깊은 법장(法藏)과 제존보살(諸尊菩薩)과 일체현성(一切賢聖)을 받들어 청합니다. 원하오니, 자비를 내시어 제자들의 청을 거두어 도량에 임하소서. 제자가 일체 중생을 위해 죄를 고백하며 참회하는 것을 증명해 주십시오.”

이리하여 법답게 예배하며 모두 삼귀의계를 받았다. 사문이 다시 말하였다.

보살계 불제자 황제 아무개가 널리 일체 중생을 위하여 죄를 고백하니, 무시이래(無始已來)로 지은 열 가지 악업을 스스로 지었거나 남을 시켜 지었거나 짓는 것을 보고 따라 기뻐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죄의 인연으로 지옥ㆍ축생ㆍ아귀로 떨어지고, 설사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수명이 짧고 병이 많으며 비천하고 빈궁하여 사견(邪見)에 빠져서 번뇌 망상을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지금 여래의 자비로운 빛의 드리우심을 받고, 저와 같이 많은 죄를 지금에야 깨달았습니다. 마음속 깊이 부끄럽게 여기고 이를 두려워하며, 삼보 앞에 죄를 고백하여 참회합니다. 부처님의 지혜의 태양을 이어받아 모두 소멸되기를 발원합니다. 지금 몸 이후로 성불하기까지, 원하건대 다시 이와 같은 여러 죄를 짓지 않기를 발원합니다.”

대중이 이와 같은 말을 듣고,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겼으며, 재물과 옷가지를 희사하고 머리카락을 잘라 보시하는 이가 헤아릴 수도 없었다. 날마다 큰 재법(齋法)을 열어 예배하고 참회하며 계율을 받으면서, 지금 이후로 선을 닦고 악을 끊어서 세세생생 대수(大隋)의 신민이 되기를 발원하였다. 늙은이나 어린이나 화하(華夏)나 이융(夷戎)을 막론하고 모두 이 같은 서원을 발하였는데, 비록 도살하고 수렵하며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조차도 몸소 선법(善法)을 생각하였다.

사리를 상자에 넣으려고 하자 에워싼 대중들의 목이 메었다. 사문이 보배병을 높이 받들어 사부대중 사이로 다니며 보여 주자, 사람마다 눈을 닦으며 자세히 보아 함께 그 광명(光明)을 목격하였으니, 슬피 우는 울음소리가 우레처럼 울렸고, 천지가 이로써 진동하였다. 대체로 이같이 안치하여 곳곳마다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 진신(眞身)이 이미 감응하여 영탑(靈塔)에 늘 머무르시자, 천하가 이를 우러러 귀의하여, 복된 날이 나날이 늘어 다하지 않았다.

황제가 탑을 이룩한 아침, 대흥궁(大興宮)의 대흥전(大興殿) 뜰 서쪽에서 규()를 집고 서서, 불상과 사문 367명을 맞이하며 번개(旛蓋)ㆍ향ㆍ꽃ㆍ찬패의 음악을 울렸다.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전당(殿堂)으로 와서 황제가 몸소 향을 사르고 예배하고는, 동랑(東廊)으로 내려와 친히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소찬(素饌)을 먹으며 재계하였다. 이때 내궁(內宮)과 동궁(東宮)이 경읍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만우(萬宇)와 배와 수레를 거쳤는데, 일체의 권속과 인민이 성법(聖法)을 받들어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대중 스님이 처음 들어오자 칙사가 좌우로 나란히 서서 이를 헤아렸다. 현양문(顯陽門)에서 계단을 오르기까지 대체로 세 번이나 헤아렸어도, 언제나 한 사람이 남았다. 황제가 어떤 이상한 스님이 갈반(曷槃)으로 어깨를 덮고 있는 것을 보고는 좌우를 둘러보며 말하였다.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고, 여기서 떠나가시라.”

그리고 나서 다시 세어 보니, 과연 갈반으로 어깨를 덮고 있던 이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사리가 행차하자,

 

황제가 말하였다.

지금 불법이 중흥하는 때이기에 반드시 감응이 있을 터이다.”

이후로 곳곳마다 이 같은 기적을 표주(表奏)하였는데 말한 것과 같았다.

옹주(雍州)의 선유사(仙遊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눈이 내렸다가 사리를 장차 봉안하려 하자, 하늘이 바로 밝게 개었다. 함에 모시고 나니 구름이 다시 모였다.

기주(岐州)의 봉천사(鳳泉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장차 함을 만들고자 하는데 절의 동북쪽 20리 떨어진 곳에 갑자기 무늬 있는 돌이 네 개가 나타났다. 옥처럼 빛나고 윤기가 나며 크기가 가지런하여 이것을 가져다 중함(重函)을 만들었다. 대함(大函)은 남쪽 벽이 기이한 색채가 나면서 사라쌍수의 모양처럼 되었다. 높이가 33촌이고 줄기가 눈처럼 하얗고 잎사귀는 마노(瑪瑙)의 색과 같았다. 북쪽 벽면과 동쪽 벽면에는 새ㆍ짐승ㆍ용ㆍ코끼리의 모양이 있었다. 네 개의 벽면에 모두 꽃잎 모양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그 후에 기단의 돌이 점점 변하여 수정처럼 되었다. 사문 도찬(道璨)이 쌍수의 모양을 그려서 허주(許州)에 안치하였는데, 잎사귀가 모두 푸른빛으로 변하였다. 그 다음해에 기주(岐州)의 대보창사(大寶昌寺)에서 협주(陜州)의 서상도(瑞相圖)를 모사하여 불당에 안치하고 민가(民家)에서 공양하게 하였다. 큰 성상에서 세 번이나 붉은빛을 발하여 문밖으로 흘러나가 마침내 문밖의 십불상(十佛像)과 관세음보살도 누차 광명을 발하였는데 5일 이내에 하늘에서 꽃이 다시 떨어졌다.

경주(涇州)의 대흥국사(大興國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함을 만들려고 하여 세 집에서 각각 오래된 마호석(磨好石)을 기증하였다. 그 주에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해 보니 그 모양이 서로 들어맞았다.

진주(秦州)의 정념사(靜念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먼저 사찰의 스님들이 여러 신선들이 하강하여 붉은 끈으로 땅을 재고 쇠못으로 박아 탑의 기단을 정하는 것을 꿈꾸었는데, 바로 그 장소였다. 다시 상서로운 구름이 밀려들어 사리를 덮었고,

 

이때 10월에 눈이 내렸는데, 근처의 풀과 나무가 모두 꽃을 피웠다. 사리를 함에 넣으려 할 때, 신비스러운 빛이 멀리 비추며 공중에서도 찬탄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주(華州)의 사각사(思覺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하늘이 음산하여 눈이 내렸으나, 사리를 봉함할 때 해가 바로 떠서 비추어 오색의 빛 무리가 졌다. 땅에서 몇 장()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수레바퀴와 같아서 바로 탑 위를 덮었다. 수십 리 바깥의 멀리서도 이를 볼 수 있었다. 바로 붉은 빛이 하늘로 올라갔다. 사리를 봉안하고서 구름과 안개가 일고 상서로운 눈이 하늘 꽃처럼 흩날렸으니 사람의 옷에 묻어도 녹지 않고 오래갔다.

동주(同州)의 대흥국사(大興國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사리를 근처의 역()에 놓아두었다. 그날 밤 비가 내리고 다음날 아침에 맑아져서 가마를 옮겼는데 구름과 해가 이를 맞아 밝게 비추었다. 남문으로 들어가는데 성의 북쪽에는 여전히 비가 내렸다. 절에 도착하고 나니 비가 다시 내렸다. 함에 넣자 해가 떠서 온갖 색의 빛 모양이 해를 에워싸는 것이 마치 수레바퀴 같았다. 예전에 사찰의 혜진(慧眞) 스님이 성인의 정수리 위에 둥근 광명이 있어 천지를 밝게 비추며 서방에서 문으로 들어와 서 있는 꿈을 꾸었다. 사리를 봉안하는 가마가 도달함에 미쳐서 연고도 없이 그곳에 머물렀다. 이로써 탑을 세울 자리를 정하였다. 128일 밤에 오색의 둥근 광명이 기단에서 위쪽으로 올라가 성내를 두루 비췄는데 밝기가 대낮 같았다. 50리 바깥에서도 모두 이것을 보았다. 이듬해 4월 흰 빛이 탑 서쪽에서 일어나 탑의 동쪽을 비추며 오래 있다가 없어졌다.

포주(浦州)의 서암사(栖巖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926일 사리를 인수사(仁壽寺)에서 관리하는데 그날 밤 당내(堂內)에 광명이 대낮 같았다. 28일 터를 정하자, 다음 날 땅이 크게 울리며 산이

 

울부짖었는데, 돌 위에서 종소리와 북소리가 났다. 107일 사리를 서암사로 옮기는데 땅이 또 진동하였다. 8일 가마를 산으로 옮기는데 따르는 이가 수천이었다. 강한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불어 바람의 힘으로 순식간에 불당에 이르렀다. 그날 밤에 부도 위에 광명이 서렸는데 길이가 몇 척이나 되며 꺼졌다가 켜지기를 십여 차례 하였다. 유리병 내에도 광명이 있어 다섯 갈래로 흩어지며 나왔다가 다시 병 속으로 거둬들여졌다. 또 두 개의 광명은 크기가 발우만 하던 것이 서쪽 벽에서 나와 서로 한 갈래로 합쳐져 탑의 기단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한식경이 지나서 없어졌다. 다시 빛이 발하여 당()으로 흘러들었는데 산꼭대기에도 큰 빛이 일어나 2백 리나 비추었다. 멀리서 본 이들은 모두 산에 불이 났다고 말하였다. 9일 밤 또 두 가닥의 빛이 부도를 감쌌는데 그 한 갈래가 서쪽 계곡을 비추고 또 한 갈래는 남쪽 계곡을 비췄다.

12일 당내에 또 빛이 있었으며 모양이 향로와 같았다. 부도의 노반(露盤)으로 흘러가는데, 빛이 옮겨가고 나서 꺼졌다. 그날 밤 노반 위에 또 광명이 서렸는데 흩어지기도 하고 모이기도 하였다. 모두가 연꽃 같았고, 점차로 옮겨가며 꺼졌다. 13일 밤에 부도 위에 마치 3불상(佛像)과 같은 빛이 다시 서렸다. 높이가 1척인데 그대로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14일 밤에는 세 갈래의 빛이 당에서 나와 한 줄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한 줄기는 동북쪽으로 흘렀으며 또 한 줄기는 궁궐 같은 모양으로 포주성을 휘황하게 비추었다. 삭망(朔望)에 이르러 절과 성내에서 이상한 향기를 늘 맡게 되었으며, 복숭아꽃과 능금나무의 꽃이 제철도 아닌데 피어났다. 사람들이 이것을 꺾어 공양하였다.

사리를 봉함하는 날 밤에 또 광명이 서려서 다시 탑에서 흘러 나왔는데 둥글기가 마치 큰 거울과 같았다. 자주색과 적색 빛이 많았으며 이것을 본 사람마다 그 색과 모양이 같지 않아서, 혹 큰 번갯불 같다고도 하고, 혹 들판에 불이 타는 것 같다고도 하였다. 또 아무것도 보지 못한 이도 있었는데 열 사람 가운데 두세 사람이었다. 어떤 부인이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안고 와서 살려 달라고 빌었는데 그날 밤이 되어 다시 소생하였다. 광명이 비추는 것을 보고서 병이 나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여러 주마다 감응이 있었으나 서암사가 가장 많았다. 대체로 태조(太祖) 무원(武元) 황제가 창건한 것에 연유한다.

병주(幷州)의 구무량수사(舊無量壽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사리를 처음에는 도량에 놓아두고 대중이 예배하였는데, 병이 중한 이도 바로 차도가 있었다. 탑을 일으키는 아침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낮에도 컴컴하였으나 끝나고 난 후에 햇빛이 다시 밝게 비췄다. 오색 구름이 드리워 사리를 함에 봉안하려고 하자 그대로 빛을 발하였는데, 1척이나 5촌 정도였다. 또 한량없는 천신(天神)들이 각각 꽃ㆍ향ㆍ당번(幢幡)ㆍ보개를 들고 병주성을 덮었다.

정주(定州)의 항악사(恒嶽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어떤 이상한 노인이 찾아와 예배하고 삼베 한 필을 보시하고 흙 몇 삼태기를 짊어졌다. 사람들이 그의 성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이 땅에는 원래 수맥이 없었다. 개황(開皇) 3(583) 초엽에 사찰을 건립하면서 그 서쪽으로 8리 떨어진 곳의 백용연(白龍淵)이 갑자기 동쪽으로 흘러 지나갔는데, 노역을 시작하자 물길이 바로 끊어졌다. 다시 새로 탑을 이룩하자 물길이 다시 크게 흘렀다.

상주(相州)의 대자사(大慈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하늘이 음산하여 눈이 내렸으나, 사리를 내려놓으려 하자 해가 비추다가 처음 함에 봉안하자 구름이 다시 합쳐졌다. 탑을 이룩한 이듬해 8월에 광천니사(光天尼寺)에서 협주(陜州)의 서상도(瑞相圖)를 모사하여 불당에 놓아두었는데 신기한 빛이 여러 차례 발하는 것이 마치 번개와 같았다. 또 오색의 구름이 보개(寶蓋)처럼 당상 위에 떠 있었는데 하루에 네 번이나 목격하였다. 또 수풀 속 나무 모양과 같은 흰 구름이 생겨났고 노란 꽃비가 어지럽게 내렸다. 그 꽃은 마치 큰 나비와 같고 빛깔은 푸른 유리와 같았는데 날아다니며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떠 있다가 사라졌다. 이듬해 정월 사찰에 다시 하늘 꽃이 내렸다.

정주(鄭州)의 정각사(定覺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사리가 도착하자 사찰 동쪽에 광명이 서린 것이 마치 커다란 유성이 흐르듯 하더니 불당에 들어가 사라졌다가 가마가 이곳에 이르자 까닭도 없이 저절로 멈췄다. 이미 탑의 기단을 서쪽 기슭에 정해 두었는데, 그 동쪽 기슭의 오래된 사리탑에서 세 가닥의 빛이 일어나 서쪽으로 흘러 그 자리로 들어갔다. 사찰의 스님들이 2천 명 분의 공양을 마련하였는데, 만여 명이 와서 이를 먹어도 다하지 않았다. 한 개의 독에서 밥을 80동이[]나 퍼내도 음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사찰의 대중 스님 2백여 명을 공양하고 며칠이 지나서야 마침내 그 음식이 다하였다. 사리를 함에 봉안하는데 사면에 걸린 번당(幡幢)이 바람이 없는데도 한순간에 안쪽으로 기울었다.

숭주(嵩州)의 한거사(閑居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사리를 따라온 사람은 만여 명이었다. 또 토끼가 고갯길을 거꾸로 달려 내려와 몇 차례나 가마 밑으로 지나 다녔다. 하늘이 음산하여 눈이 내렸는데 사리를 내리려 하자 바로 해가 떴다가 함에 봉안하고 나자 구름이 다시 합쳐졌다.

호주(毫州)의 개적사(開寂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경계 내에는 원래 돌이 없었는데도, 사리가 도착하자 바로 세 곳에서 각각 한 개의 네모난 간 돌을 얻었다. 하나는 함과 같은데 바닥이 없어서 이를 합쳐서 사용하였기에 다시 새길 필요가 없었다. 탑에 기단을 마련하고자, 기단을 반석(盤石)까지 파 내려갔는데, 두 개의 우물이 옆을 받치고 있었다. 하늘이 음산하여 눈이 내렸으나 사리를 내리려 하자 해가 떠서 비추다가 함에 봉안하고 나서야 구름이 다시 합쳐졌다.

여주(汝州)의 흥세사(興世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하늘이 음산하여 눈이 내렸다. 사리를 내리려 하자 해가 떴으나 함에 봉안하고 나자 구름이 다시 합쳐졌다.

태주(泰州)의 대악사(岱岳寺)에서 탑을 이룩하였다. 사리가 주에 다다르자 그날 밤 악묘(岳廟) 안에서 북소리가 났다. 하늘이 밝아지자 삼중문(三重門)이 모두 저절로 열리며 약 30()의 장수가 묘에서 나왔는데 모두가 악신(岳神)이었다.

 

사리가 주의 절로 가는데 몇 리 가지 않아서 구름이 산정에서 출현하였다. 오색으로 세 겹씩 둘러져 있었으며 흰 빛이 마치 무지개와 같이 사리를 뒤덮었다. 안개가 흩어져 많이 깔려 사람들의 옷을 적셨는데, 그 모양이 마치 구슬을 늘어뜨린 것과 같았고, 그 맛이 감로와 같았다. 아침으로부터 정오가 되자 안개 기운이 거두어져 산으로 되돌아갔는데, 3단으로 나뉘어 오고 가는 것이 마치 군대의 행진과 같았다. 이것은 악신(岳神)이 와서 맞이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병 안에서 소리가 나면서 빛을 발하였는데 높이가 1장 남짓한데 한식경이 지나자 없어졌다. 사람들이 이를 자세히 보면 유리 내의 금병이 저절로 열려서 병 아가리에 1촌 정도의 빛이 마치 젓가락처럼 걸려 휘황하게 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상자를 갑자기 되돌려도 끝내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이와 같이 여드레가 지나서 함에 봉안하려 하자, 빛이 흩어져 나오며 다시 금병으로 들어갔는데, 구름과 안개가 다시 일었다. 법화경을 외우는 어떤 동자가 찾아와 사리에 절을 하고 바로 들판에서 몸을 태워 공양하였다. 이듬해 26일 태산(泰山)의 신고(神鼓)가 밤새도록 울었는데, 북쪽에서 들으면 그 소리가 남쪽에서도 났고, 남쪽에서 들으면 그 소리가 북쪽에서도 났다. 동쪽과 서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청주(靑州)의 승복사(勝福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기단을 5척 정도 파 내려가니 반석에 닿아, 돌이 저절로 큰 함이 되어서 이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아울러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병 안에 빛이 서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였다.

모주(牟州)의 거신산사(巨神山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사리가 처음 도착하자, 두 가닥의 커다란 자주색 불길이 가는 길을 비추었다. 하늘이 음산하여 눈이 내리다가 사리를 내리려고 하자 햇빛이 다시 들었는데 사리를 함에 봉안하고 나서 구름이 다시 합쳐졌다.

수주(隋州)의 지문사(智門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106일 기단을 파다가 신령스런 거북을 얻었다. 7일에 감로가 석교(石橋)에 내렸다. 옆의 버드나무에는 셀 수도 없는 검은 벌이 날아와 이를 둘러쌌다. 8일 아침에는 안개가 많이 끼었는데

 

사리가 도착하자 하늘이 다시 밝아져 빛이 쏟아졌다. 갑자기 문 안에 있는 나무의 줄기가 붙은 것[連理]5)을 보았고, 수양버들 밑을 지나가자 감로가 다섯 갈래로 흘러 가마 위를 적셨다. 날씨가 음산하였으나 사리를 내리려 하자 햇빛이 들었다가 사리를 함에 봉안하고 나자 구름이 다시 합쳐졌다. 신령스런 거북의 색과 모양이 특이하였는데 그 배에 왕이 주사(州使)를 일으키니 참군(參軍)이 이를 봉안한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날마다 그 우리를 열고 거북의 머리를 보려 하면 오그라들어 볼 수가 없었다. 칙사(勅使) 저작랑(著作郞) 왕소(王劭)가 살펴보자 거북이가 바로 머리와 발을 길게 늘어뜨리며 사람들 쪽으로 머리를 돌렸는데, 날마다 이와 같이 하였다. 이에 머리에 있는 그 글을 보니 상대왕팔십칠천만년(上大王八十七千萬年)’이라고 쓰여 있었다. 황제가 친히 거북이를 쓰다듬고서 소매에 넣어두었는데 마치 길들인 것 같았다. 궁내의 늪이나 풀숲 사이로 놓아두어도 다시 어전(御前)으로 곧장 돌아왔다. 매번 놓아 주어도 늘 이렇게 하였다.

양주(襄州)의 대흥국사(大興國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하늘이 음산하여 어두웠으나 사리를 내릴 때는 해가 비췄다가 사리를 함에 봉안하고 나자 구름이 다시 합쳐졌다.

양주(楊州)의 서사(西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당시 양주 일대에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으나 사리가 양주에 들어오자 그날 밤 큰비가 내려 해갈하였다.

장주(蔣州)의 서하사(栖霞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인근 사람이 부처님께서 서북쪽에서 오시는데 보개와 번당과 꽃이 가득한 꿈을 꾸었다. 사찰의 대중이 모두 꽃과 향을 들고 사리가 도착한 곳으로 마중간 것이 꿈과 꼭 들어맞았다.

오주(吳州)의 대우사(大禹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사리가 다섯 번이나 강을 건넜으나 바람과 파도가 일지 않았다. 절에 도착하자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의 빛이 일어났다. 자주빛 영지를 얻었는데 높이가 2척 남짓하였고 네 개의 뿌리에 세 개의 뚜껑이 있었다. 하늘이 음산하여 어두웠으나 사리를 내리려하자 해가 다시 비췄다가 사리를 함에 봉안하고 나서야 구름이

 

합쳐졌다.

소주(蘇州)의 호구산사(虎丘山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그 땅이 진사도(晋司徒) 왕순(王珣)의 금대(琴臺)였다. 땅을 파다가 벽돌상자를 발견했는데 은합자에 사리 하나가 있었다. 발우에 물을 담아 띄우자 오른쪽으로 네 번이나 돌았다. 사리가 처음 소주에서 떠나자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가 사찰에 이르기 전에 해가 다시 떠서 여러 가지 빛깔의 구름이 떠서 가마에 임하여 움직였는데 오고 가며 흩어지지 않았다. 탑의 처소에 이르자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며 하늘이 또 음산하여 어두워졌다. 사리를 내리려는데 구름이 잠시 걷혔다가 사리를 함에 봉안하고 나자 구름이 다시 합쳐졌다. 예전에 절 안에 돌우물을 뚫었는데, 그 우물이 이틀이나 운 것도, 대체로 사리가 도래한 서응이다.

형주(衡州)의 형악사(衡岳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사문이 사리를 받들고 강릉에서 물길을 2천여 리쯤 가자 사방에서 역풍이 불었다. 바람이 그치라고 기도하자 바로 그쳤다. 다시 사방에 순풍이 일기를 기도하자 모두 바라는 대로 되었다. 처음 기단을 파자 봉우리 위에 뭉쳐 있던 흰 구름의 넓이가 2장 남짓하였는데 곧바로 기단이 있는 장소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서야 흩어졌다. 다시 음산하여 어두워졌는데 사리를 내리려 하자 해가 다시 떴다가 사리를 함에 봉안하고 나서야 구름이 다시 합쳐졌다.

계주(桂州)의 연화사(緣化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사리가 성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이르자 수천 마리의 새가 가마를 끼고 날다가 성에 들어가서야 흩어졌다. 사리를 탑에 봉안하는데 오색 구름이 밀려와 이것을 덮었다.

번주(番州)의 홍양향(洪楊鄕) 숭양리(嵩楊里)의 영취산사(靈鷲山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땅을 파다가 송나라 말엽에 안치한 석함 세 개를 얻었다. 두 개는 각각 구리함이었는데, 두 개의 작은 은으로 만든 성상이 담겨 있었다. 또 하나는 은으로 만든 병에 금병을 담았는데 원래 사리가 있지 않았나 싶으나 지금은 비어 있다. 이미

 

그 굴 속에 신선이 운기(運氣)하는 상()이 남아 있었다. 예전에, 송나라 임금 유의륭(劉義隆)6) 때에 천축의 성승(聖僧) 구나발마(求那跋摩)7)가 양도(楊都)로 가다가 도중에 영취사(靈鷲寺)를 지나가면서 여러 스님들에게 저 사이에 신비한 서상이 서려 있으니 왕자가 보위에 올라서 불탑이 건립되는 징조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보살의 성주(聖主)가 이를 크게 확장하게 되었다. 그 해 겨울 과연 제비떼가 수놓은 성상을 함께 물고 당내에 안치하였다. 또 제나라 군주 소도성(蕭道成)이 처음 시흥태수(始興太守)가 되었을 때, 이 절에 와서 백탑(白塔)을 이룩하였는데, () 천가(天嘉) 3(562) 사찰 내에 비문을 세웠다. 이처럼 성주가 이를 확장한 것이 오늘날에도 징험된다.

교주(交州)의 선중사(禪衆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익주(益州)의 법취사(法聚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하늘이 음산하여 어둡다가 사리를 내리려 하자 하늘이 다시 맑아졌다. 함에 봉안하고 나서 구름이 다시 합쳐졌다.

확주(廓州)의 법강사(法講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사리가 처음 경사(京師)를 떠나 임고(臨皐)에 머물렀다. 사문이 사리를 잃어버리는 꿈을 꾸었는데, 이날 밤 확주에 높이가 몇 장()이나 되는 빛이 나타났다. 동쪽으로 절에 들어왔는데 불탑을 오른 쪽으로 돌고 성루의 안팎을 환하게 비췄으니 멀리서 보면 장작을 쌓아 놓고 태우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갔다. 그 빛이 차츰 서쪽으로 흘러가 한식경이 지나서 없어졌는데, 바로 탑 기단을 정한 자리가 바로 그 빛이 없어진 자리였다. 또 향기가 이상하게 휘날렸다.

과주(瓜州)의 숭교사(崇敎寺)에서 불탑을 이룩하였다.

괵주(虢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본 주에서 비록 사리를 봉안하지 않았으나 대중 스님들을 청하여 행도(行道)하는데, 이상한 새가 날아와 대들보 위에 앉아서 흡사 경 읽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놀라지도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하룻밤과 하루 낮 동안 독경하는 상 밑에 멈추어 있었기에, 사람마다 찬탄하며 쓰다듬으면서 다시 이를 끌어안은 채로 행도하였습니다.

 

법사가 불전에서 저 새에게 계()를 수여하자 한참 있다가 그대로 날아갔습니다.”

수주(隋州)의 전첨(典籤) 왕위(王威)가 유인(流人) 90명을 호송하였는데 길에서 사리를 만나자 죄수를 모두 석방하였다. 천 리 이내에는 한 사람도 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수주의 사람이 운수(溳水)에서 고기를 잡다가 3백 일간 옥살이를 하였는데 사리를 보고는 모두 풀려났다. 여타의 주에서도 모두 이와 같았으니, 그 유래가 참으로 많다.

황제가 10월에 밥을 먹다가 매번 치근(齒根)에서 사리를 얻곤 하였는데 황후도 이와 같았다. 은쟁반에 물을 담아 그 한 알의 사리를 띄워 백관에게 보여 주었는데 순식간에 두 개가 되어 오른쪽으로 서로 이어서 돌았다. 두 사람의 귀인(貴人)과 진왕(晋王) ()와 예장왕(豫章王) ()이 조개를 하사하면서 칙령을 내려 이를 살펴보게 하였다. 각각 조개 내에서 사리 하나를 얻었는데 20일이 지나지 않아 궁내에 19개나 생겼다. 광명을 많이 일으켰는데 이로써 원근의 도속이 가지고 있던 사리를 모두 봉헌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진짜이겠는가?”라고 하면서 여러 사문과 이를 더불어 시험해 보았는데 과연 13개가 옥이나 곡식낱알이었다. 진형사리들은 모두 철퇴로 내리쳐도 손상되지 않았다.

 

14) 경사리감응표(慶舍利感應表:사리 감응을 경하하는 표)와 조답(詔答) () 안덕왕(安德王) () 백관(百官)

신 웅() 등이 아룁니다. 신이 듣자오니, 대각(大覺)은 원만함을 갖추어 이치로 공()과 유()를 비추고, 지극한 성인은 허응(虛凝)하여 그 이치에 생멸(生滅)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 형체를 나누어 미진을 모으더라도 오히려 금 항아리에 담아 놓으며 몸을 흩뜨려 먼지처럼 불어도 오리려 보찰(寶刹)을 일으킵니다. 석제(釋提)8)가 불탄 재를 달라고 한 이후, 아육왕이 불탑을 건립한 이래로, 사리를 분배하는 훌륭한 업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가 광겁(曠劫)에 걸쳐 인()을 쌓아 숙세의 보리를 증득하고 그 자취를 인왕(人王)으로 내려 세계를 보살피려 함이니, 예전에 도가 운수에 따라 사라지고 인사(仁祠)가 훼손되었으며, 자비의 등불이 그림자를 없애고 지혜의

 

바다가 흐름을 끊었습니다. 황조(皇祚)가 이미 일어나고 법고(法鼓)가 울려 구역과 우내(宇內)를 모두 정토로 삼아 생령의 부류가 모두 거룩한 구름에 덮였습니다.

지난 여름 6월에 조칙을 내리고 사문을 맞아들여 사리를 봉송하며, 101530개 주에서 동시에 불탑을 건립하였습니다.

포주(蒲州) 서암사(栖巖寺)에서 불탑을 세울 장소를 모색하다가 이 산 위에서 종소리가 울렸는데, 사리는 강당에 모셔두었습니다. 그날 밤 예전 부도 위에서 큰 광명이 발하였습니다. 이윽고 당내로 빛이 흘러 들어와 방안에 가득하였습니다. 사리를 동함에 넣어두었는데 다시 그 빛이 나는 것이 향료와 같았으며 공중으로 올라가 부도(浮圖)의 보병에 이르러서는 다시 자주색 불꽃을 내었습니다. 흩어지기도 하고 모이기도 하면서 모두 연꽃 모양을 이뤘습니다. 또 광명이 부도 위에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불상과 같고 꽃과 같고 완구(宛具)와도 같았습니다. 한참 머물러 있다가 점차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또 광명이 일어나 부도의 보병을 휘감았습니다.

포주(蒲州)의 성내 인수사(仁壽寺)의 스님들이 산정을 바라보니, 그 빛이 대궐과 같은 것이 산봉우리와 계곡을 환하게 비추고 포주성의 동남 한쪽 모서리도 환하게 비추면서 한참이나 꺼지지 않았습니다. 서암사는 바로 태조 무원(武元) 황제가 건립한 절입니다.

또 화주(華州)에 보탑을 설치하는 장소에 때마침 구름과 안개와 큰 눈이 내렸는데, 홀연히 맑게 개이더니 탑 위에 오색의 수레바퀴 모양으로 떠올랐습니다. 사리를 내리고 나서야 다시 구름과 안개가 끼었습니다.

황제와 황후께서도 사리를 얻으셨는데, 빛이 광채를 드러내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니, 지극한 덕으로 정성스럽게 하여 도가 영성(靈聖)에 합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비한 공덕과 묘한 모양이 이와 같이 기특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목숨이 길고 햇수가 번창하여 이미 태평성대를 보았으며, 살아서 선업(善業)을 만나 바야흐로 진로(塵勞)의 경계를 벗어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절하며 표를 올려 경사스러움을 알립니다.”

문하가 우러러 생각건대, 정각(正覺)이 군품(群品)을 감싸 보호하고 생명을 고해에서 제도하며 미혹한 어리석은 이를 화택(火宅)에서 구하셨다. 짐이 이로써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하며 귀의할 것을 맹세하였다. 솔토(率土)의 신민(臣民)과 더불어 유계(幽界)와 현계(顯界)가 모두 함께 훌륭한 업을 받들어 같이 선인(善因)을 짓고자 사리를 분배하여 신령한 탑을 이룩하고자 한다. 대성께서 자비와 민첩함으로 빈번하게 광상(光相)을 보이고 궁전 내에 사리가 신령스러움을 내리는 것은 그 유래를 헤아리기 어렵다. 자연이 변화를 일으켜 기쁘게 은혜를 받들어 일찍이 없었던 것을 얻었다. 이것은 진실로 군생(群生)의 커다란 행복으로 이런 아름다운 복을 늘리는 것이 어찌 짐의 작은 정성으로 감득함에 이를 수 있겠는가?

왕공(王公) 등의 표()를 살펴볼수록 두려움만 앞선다. 짐이 왕공 등과 모든 서민과 더불어 더욱 매진하여 삼보를 흥륭케 하겠다. 지금 진형(眞形) 사리가 불과 50과인지라 예전의 법도에 따라 관리하며 해내(海內)로 나누어 보냈다. 3()6()가 모두 개전(蓋纏)9)을 면하고 품식(稟識)과 함령(含靈)이 다 같이 묘한 과에 오르기를 바란다. 주무관청은 시행하라.

고려ㆍ백제ㆍ신라의 세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본국에다 불탑을 일으켜 공양하고자, 각기 한 과의 사리를 청하였기에, 조칙을 내려 이를 허락하였다. 경사(京師)의 대흥선사(大興善寺)에 불탑을 이룩하도록 조칙을 내리면서, 먼저 사리를 상서(尙書) 도당(都堂)에 안치해 두었다.

122일 새벽에 행차할 때에, 천기(天氣)가 맑고 바람이 순조로웠으며, 보여(寶輿)ㆍ번당(旛幢)ㆍ향화(香花)ㆍ음악과 갖가지 공양이 거리마다 가득하였다. 도속과 선비와 부녀자가 몇 천만억인지 알 수 없었다. 복장(服章)을 지위에 따라 갖추고 용모를 차례에 따라 꾸몄다. 상주국(上柱國) 사공공(司空公) 안덕왕(安德王) () 이하 모두가 걸어서 절에 다다랐다.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어 예배하고 참회하였다.

 

푸른 참새가 대중 사이를 다녔고, 혹 어떤 자가 차고 있는 칼을 뽑아 던져서 보시하기도 하였는데, 사람들 사이로 떨어졌으나 모두 다치지 않았다.

인수(仁壽) 2(602) 정월 23일 사리를 다시 분배하여 51주에 신령스러운 불탑을 건립하였다. 총관(總管)과 자사(刺史) 이하 현위(縣尉) 이상은 일상 업무를 폐지하고 7일간 스님들를 청하여 행도하게 하였다. 가르침을 펴며 타찰(打刹)하여 금전 10문씩 보시하였으나, 한결같이 예전의 기준에 따랐다.

48일 오시(午時)를 기하여 나라 전체가 똑같이 사리를 내려 석함에 봉안하였는데, 서응(瑞應)을 감득한 곳을 별도로 기록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항주(恒州) 천주(泉州) 순주(循州) 영주(營州)

홍주(洪州) 항주(杭州) 양주(涼州) 덕주(德州)

창주(滄州) 관주(觀州) 영주(瀛州) 기주(冀州)

유주(幽州) 서주(徐州) 거주(莒州) 제주(齊州)

내주(萊州) 초주(楚州) 강주(江州) 담주(潭州)

모주(毛州) 패주(貝州) 송주(宋州) 조주(趙州)

제주(濟州) 연주(兗州) 수주(壽州) 신주(信州)

형주(荊州) 양주(梁州) 난주(蘭州) 이주(利州)

노주(潞州) 여주(黎州) 자주(慈州) 위주(魏州)

변주(汴州) 기주(杞州) 허주(許州) 예주(豫州)

현주(顯州) 조주(曹州) 안주(安州) 진주(晋州)

회주(懷州) 협주(陜州) 낙주(洛州) 등주(鄧州)

진주(秦州)[사리를 다시 얻었다.] 위주(衛州)

낙주(洛州) 정주(鄭州)

 

항주(恒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를 주 관내로 모셔다가 영탑을 건립하였는데 34일에야 주에 도착하였습니다. 바로 주부(州府)의 관인들과 함께 그 순행을 규찰하여 처소에 안치하였습니다. 다만 살펴보니 관내에서는 용장사(龍藏寺)가 탑을 세울 만한지라 당월 10일에 땅을 고르고 기단을 팠습니다. 16일 미시(未時)에 이르러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왔는데 절 안의 향기가 비할 데 없이 이채로웠습니다. 도속과 관인과 사가(私家)가 모두 이 향기를 맡았습니다. 성이 김씨이고 이름이 찬()인 어떤 노인이 콧병을 앓아 향기를 맡지 못한 지가 20여 년이 넘었습니다. 이때 대중 가운데 있다가 역시 이 향기를 맡은 것으로 인하여 콧병이 나았습니다.

48일에 이르러 오시에 사리를 내릴 때에는 태양이 밝아서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보배 조각과 하늘 꽃이 내렸는데 그 모양이 마치 금박과 은박 같았습니다. 크기가 서로 달라 분분히 흩어져 내렸는데 마치 눈이 내리듯 하였습니다. 먼저 기단의 석함 위로 내리더니 절 안과 성내에도 두루 떨어졌습니다. 모두 여러 가지 색깔이 휘황하게 빛나며 햇빛에 금색으로 반짝였습니다. 이때 옷으로 이것을 받기도 하고 다시 땅에서 줍기도 하여 도속의 대중 10만여 명이 모두 이것을 목격하고 얻었습니다. 또 찰주(刹柱)의 동쪽과 서쪽 두 곳에 갑자기 이상한 기운이 일어났는데 그 색이 황백색으로 처음에는 가늘더니 나중에는 점점 거칠어졌습니다. 마치 봉화의 연기와 같았는데 용의 형태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방향을 돌려 곧장 위로 올라가 탑 머리를 돌다가 청한(淸漢)으로 올라 가버렸습니다. 그 크기를 헤아리기 어려웠는데 한참 만에 없어졌습니다. 또 네 마리의 흰 학이 동북쪽에서 날아와 탑 위를 돌다가 서남쪽으로 날아갔습니다. 20일 사시에 탑의 기단을 쌓아 이룩하자 다시 보배 조각과 하늘 꽃이 비가 오는 듯이 내렸습니다. 이것을 모두 주워 담아 보니 1()이나 되었습니다. 참군(參軍) 왕량(王亮)을 보내어 황제에게 먼저 봉헌하였습니다. 황제가 꽃을 펴서 보배 조각 안에서 다시 사리 3과를 얻게 되자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영주(瀛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땅을 파고 사리를 석함에 봉안하려는데 이때 깊이가 6척 남짓하였습니다. 흙 속에서 갑자기 짙은 자주색 빛이 나타나더니 잠깐 사이에 사라졌는데, 그 흙 위에 검은 글씨가 있었습니다. 전서체(篆書體)로 어지럽게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불탑(佛塔)’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삼가 표장을 올려 이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여주(黎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기단을 파고 사리를 탑에 봉안하다가 땅 속에서 한 조각의 명문을 얻었는데 천추만세락미앙(千秋萬歲樂未央)’이라 쓰여 있었습니다.”

관주(觀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탑 위에 오색 구름이 있었는데 마치 수레의 덮개와 같았습니다. 그날 오시에 나타나 저녁까지 있었습니다.”

위주(魏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를 봉송하는데 몇 차례나 빛을 발하였습니다. 다시 병든 사람이나 혹은 눈병을 앓는 사람이거나 혹은 오내(五內)를 앓는 사람이 발원하며 예배하였더니 병이 모두 쾌차하였습니다. 48일에 이르러 사리를 내리려 하는데 오시가 되자 하늘에서 갑자기 한 조각 오색 구름이 뜨더니 그 향기가 평상시와 달랐습니다. 잠깐 사이에 금빛 꽃을 내렸습니다. 9일 아침에 다시 은빛 꽃을 내렸는데 성안에 가득하였습니다. 그 꽃의 크기가, 큰 것은 마치 유협(楡莢)만 하였고 작은 것은 화정(火精)과 같았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얻은 것을 함에 담아 봉헌하였습니다. 그날 다시 한 마리 검은 개가 귀는 늘어지고 가슴은 희었는데 사리탑 앞에서 왼쪽 발을 펴고 오른쪽 발을 굽힌 채로 앉아 있다가 사람들이 행도하는 것을 보고는 바로 행도하였고, 사람들이 재법(齋法)을 지키는 것을 보고 바로 재를 지켰습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주어도 먹지 않고, 오직 맑은 물만을 마시고자 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재를 풀고 나서 죽을 주자 비로소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 절에는 원래 몇 마리의 사나운 개가 있었는데 단지 한 마리의 개만 보고도 다투어 달려 나와 짖고 물었는데 이 개가 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그만 모두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렸습니다. 이때에 남자와 부녀자 30만여 명이 이를 보았으나 모두 이 개를 알지 못하고 어디서 왔는지 살피지 못했습니다.”

진주(秦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7, 사리를 내리려는 때에 땅이 약간 흔들렸고 8일에는 크게 흔들렸습니다.”

연주(兗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나누어 봉송하여 탑을 이룩하라고 칙서를 내리시매, 하구현(瑕丘縣)

 

보락사(普樂寺)가 가장 깨끗하여 그 자리에서 사리를 봉안하였습니다. 지난 325일 엄숙하게 이룩하여 함의 뚜껑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다듬을 때에 그 바탕이 푸른 빛이었는데, 공을 들이자 점차로 마노 빛으로 변하여 다섯 가지 빛깔이 서로 어울려 문채가 휘황하였습니다. 다시 그 안에 백옥이 생겨났는데 안과 밖이 서로 통하여 사물을 물처럼 비췄습니다. 그 안팎이 맑고 매끈하여 사람을 비추는 것이 거울과 같았는데, 여기에 사리를 봉송하였습니다.”

조주(曹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329(사리가) 자성(子城) 위에 이르자 붉은 빛이 나타났습니다. 45일 신시(申時)에 사리가 사라쌍수에 나타나자 아울러 사자의 모습이 함께 드러났습니다. 5일 해시에 사리에서 금빛이 일었는데 길이가 7촌이었습니다. 6일 묘시에는 용화수가 출현하여 그 밑에 불상도 함께 드러났습니다. 6일 묘시에는 감실(龕室)의 판자를 칠하는데, 바깥으로 광명이 흘러 그 모양이 마치 금빛의 꽃과 같았습니다. 6일 신시에 감실의 북쪽 판자 윗면을 칠하는데, 불보살과 사라쌍수 등의 모습이 화현하였습니다. 6일 해시에는 사리의 정사 안에서 희고 노란 꽃 모양의 빛이 출현하였는데, 길이가 4, 5촌 정도였습니다. 8일 진시에 감실의 판자 뒷면을 칠하는데, 구름과 안개가 서린 그 모양이 금빛과 같았습니다. 사시에 감실의 판자 뒷면을 칠하는데, 사라쌍수와 연꽃에 불상과 대중 스님들과 사자의 모습 등이 비췄습니다. 오시에는 탑 위에 오색 구름이 출현하였습니다. 오후에는 감실의 안쪽 판자를 칠하는데, 사라쌍수와 누각 등의 모양이 비췄습니다.

9일에는 감실의 안쪽 판자를 칠하고 그 위에 돌과 기문(基文)을 쌓았고, 나중에 감실의 판자 바깥 면을 칠하는데, 큰 사라쌍수와 스님들이 향로를 들고 있는 형태가 나타났습니다. 금부처도 출현하였는데, 마치 태자가 처음 태어난 모습과 흡사한데다 황금색으로 빛났습니다. 나중에 세 분의 스님이 몸에 자황색의 법복을 걸치고 손에는 향로를 들고 공양하였는데 그 향기가 세상의 향과

 

틀려서 매일같이 항상 그 냄새를 맡고 있습니다.”

진주(晋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를 탑 앞에 놓자 세 번이나 방광하였는데 모두가 자주색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를 목격했습니다.”

기주(杞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가 34일에 주에 도착하여 14일 진시에 유리병 안의 색이 달처럼 희었는데 잠깐 사이에 붉은 빛으로 변하였습니다. 42일이 되자 나중에는 자주색으로 변하면서 푸른 빛을 띤 채 병 안에 흘러 다니면서 가고 오고 돌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도속이 이를 바라보고 실상(實相)의 모습에 귀의하였는데 한참 만에 흩어졌습니다. 7일 오시에 신비로운 그림자가 다시 출현하여 그 변화와 움직임이 휘황하였는데 앞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서주(徐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가 228일 주의 서쪽에 있는 어떤 역에서 숙박하였습니다. 그날 밤 음산하여 비가 내렸는데 사리에서 방광하였습니다. 주에서 45리 떨어진 정도사(淨道寺)의 스님들이 북산에서 광명을 목격했습니다. 그 빛이 역의 사리가 있던 처소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사리의 석함은 45일 경에 다듬기를 마쳤는데, 바로 선인(仙人) 2명과 스님 4, 거사 1, 기린 1마리, 사자 1마리, 물고기 2마리의 모습이 드러나고 나머지는 마치 산수(山水)의 모양과 같았습니다.”

등주(鄧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가 46일 석함이 변하여 옥과 마노가 되었습니다. 그 돌 위에 무늬가 있었는데 정국덕(正國德)’이라는 세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아울러 신선과 기린과 봉황 등이 나타났습니다.”

안주(安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절에다가 안치하고자 사리를 봉송하였는데 정업법사가 공주(共州)의 관인과 함께 그 기단을 재었습니다. 신시에 갑자기 향기가 나더니 냄새가 하늘을 타고 올라갔는데, 미묘한 향내가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속이 모두 경악하여 그 장소로 몰려들었는데 향기가 가득 차 있다가 오경이 되어서 점차로 흩어졌습니다. 48일에 행도일(行道日)을 채우고 큰 재를 열어 오시에 사리를 내리려고 하였습니다. 도속 1만여 명이 있었는데 법사가 고좌(高座)에 올라 손으로 사리를 받들어 대중에게 보여 주자 사람마다 슬픈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바로 붉은 빛이 법사의 손에 쥐어져 있던 병 입구에서 나와 두 번이나 방광하였는데 높이가 1척이나 되었습니다. 또 석함에 내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흰 구름이 몰려와 덮개처럼 둥글게 뭉쳐서 함 바로 위를 오른쪽으로 몇 번 돌다가 다시 원래 온 자리로 되돌아가 사라졌습니다. 또 탑 남쪽에 예전부터 불각(佛閣)이 있었는데 당시에 사리를 그 안에다 안치하여 열쇠로 잠가두고 그 아래에 도량을 세워 지키는 사람 두 명을 보내어 간수하였습니다. 갑자기 누각 위에서 많은 사람이 다니는 것이 들렸는데 누각의 문을 살펴보니 여전히 잠겨 있었습니다. 또 잠깐 사이에 사람이 다니는 소리가 들려 달려와 보고하였습니다. 사주(寺主)가 함께 와서 누각의 문을 열고 그 안을 살펴보니 오직 불상만이 있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또 사리를 내리는 것을 마친 날 신시에 이르러 정범(淨範)법사와 두타승(頭陀僧) 정도(淨滔) 스님이 사리탑 뒤의 수암(水巖)가에서 바위를 등지고 여러 도속에게 보살계(菩薩戒)를 수여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물고기가 행렬을 지어 물속을 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머리를 모두 남쪽으로 내미는 것이 마치 귀의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대략 1만여 마리나 되어 두 분의 선사를 모셔다 배를 타고 물에 들어가 고기에게도 계율을 수여하였습니다. 그러자 여러 물고기가 모두 머리를 배로 향하고 배를 따라다니는 것이 마치 법을 듣는 것과 같았습니다.”

조주(趙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가 34일에 주에 도착하였습니다. 신들이 관내의 문제사(文際寺)에 안치하여 탑을 이룩하였습니다. 2일 사찰하고 행도하였는데, 사리를 탑에 놓자 붉은 빛이 일었습니다. 미시(未時)에서 신시까지 붉은 빛이 일었는데, 다시 볼 때마다 다른 것이 혹 코끼리 모양 같기도 하고, 혹 누각 같기도 하고,

 

흰 빛으로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며 사리를 휘감고 병을 휘감으며 행도(行道)하는데, 없어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고 늦기도 하였습니다. 관인과 도속이 이를 목격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울음소리가 절 안에 가득했습니다. 나흘째가 되자 다시 붉은 빛이 일어났는데 금빛처럼 빛났습니다. 가로 세로가 1척 남짓하였고, 자주색과 녹색의 모양이 사이사이 보이면서 앞뒤로 세 번이나 나타났는데 한참 있다가 사라졌습니다. 한 분의 불상이 드러났는데 길이가 2척 남짓하였습니다. 연화좌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었으며, 다시 두 분의 보살이 양옆에 있었는데 크기가 1척 남짓하였습니다. 묘시(卯時)에서 사시에 이르도록 여러 가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도속과 사부대중 2만여 명이 모두 이것을 우러러 목격했습니다.”

예주(豫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의 병에 흰 빛이 어리다가 잠깐 사이에 오색이 되어 병 안에서 돌았는데 그 모습이 아주 이채로웠습니다. 또 사리탑에 명문을 새기는데 그 돌의 결이 한결같이 고와서 황제의 한 글자를 파는데 윗점에서 세로로 당기고 가로로 그려 새기는 곳에 따라 마치 금을 깎듯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주(利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가 326일 밤 1경에 빛을 발하였는데, 아문(衙門) 안을 달처럼 두루 비췄습니다.”

명주(明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48일에 사리를 내리려 하는데, 땅을 파서 석함을 안치하다가 한 분의 성상을 얻었습니다.”

위주(衛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43일에 재를 마치고 사리를 금병 바깥으로 내었는데 그 빛깔이 붉은 것이 아주 선명하여 심상치 않았습니다. 또 유리병 바닥을 다니기도 하고 병의 모서리를 떠돌기도 하였으니 병의 위아래 가장자리를 따라 광명이 바깥으로 비췄습니다. 8일에 이르러 처음처럼 붉게 비췄습니다.”

낙주(洛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311일 하늘에서 비가 내렸고 13일에 그쳤습니다. 계덕사문(戒德沙門) 승맹(僧猛)이 이전에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다니지를 못하였는데, 그날 사리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찰의 대중이 달려 나오자 승맹 자신이 병이 있어 맞이하지 못하니 제자 법장(法藏) 스님에게 부축하라고 당부하고서야 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돌려 생각을 바르게 하자 바로 걸어 다닐 수 있어서 성에서 10여 리 남짓이나 걸어 나와 친히 사리를 맞이하였습니다. 이에 숙환이 점차로 나아 걸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모주(毛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가 227일 주에 도착하였는데 그날 법식에 따라 안치하였습니다. 모든 남자와 여자가 모두 보리심을 내어 앞 다투어 귀의하였는데 벙어리가 말을 하고 다리를 저는 이가 모두 걷게 되었습니다. 석함이 유리처럼 변하였는데 안과 밖이 환히 들여다보였습니다. 412일에는 하늘에서 금과 은의 꽃비가 비오듯 떨어졌습니다. 표장을 올리면서 이를 봉헌하였습니다.”

기주(冀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에서 빛을 발하였는데 오색이 성내를 두루 비췄습니다. 이때 어떤 스님이 예전에 병을 앓아 눈이 멀었는데도 사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허리와 다리에 병을 앓아 15년간이나 다리를 절었는데 사리가 주 관내의 정해진 장소로 도착하자, 이 병든 사람이 예배하며 발원하여 바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송주(宋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34일에 사리가 주에 도착하자 그 관할 송주성(宋州城) 현시(縣市)의 뜰에 예전부터 오래된 우물이 있었습니다. 물맛이 짠데다 빛깔도 붉은 색이었기에 전혀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현의 주민 호자건(胡子乾)이 물을 길어다 진흙을 이겼는데 그 빛깔이 하얀 것을 이상하게 여겨 먹어보니 물맛이 좋았습니다. 43일에는 사리가 탑 안에서 붉은 빛을 발하였고, 6일 밤 오경에는 사찰 내에 다시 흰 빛의 광명이 나타났습니다. 7일 진시에는 사찰에 하늘에서 흰 꽃이 비오는 듯이 내렸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펄펄 내리는 것이 마치 가는 눈과 같았으나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8일 오시에 사리를 함에 봉안하려는데

 

하늘에서 흰 학이 내려와 탑의 기단 위를 빙빙 돌며 날아 다녔습니다.”

회주(懷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를 회주성 내의 장수사(長壽寺)에 안치하였습니다. 45일 진시에 한 마리의 장끼가 석함의 가장자리로 날아와서 마음으로 이를 따르듯 하였는데 그 날개가 꽃과 같았습니다. 날아오르거나 앉으면서 사람이 가까이 가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하내(河內)의 현민(縣民) 양매(楊邁)에게 특별히 보였는데 도속 6천여 명이 함께 목격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칙사사문(勅使沙門) 영찬(靈璨) 스님이 보살계를 수여하자 그 장끼가 스님을 마주하여 앉은 것이 마치 법을 듣는 것과 같았습니다. 스님이 이 꿩은 야생의 새이니 내법(內法)의 도리로 둥우리에 매어 두지 못한다고 말하여 바로 성 북쪽의 태행산(太行山)에다 놓아 주었습니다. 사리탑 상자 위에 발자국이 있었는데 탑의 동남쪽에서 30보 정도 와서 탑이 있는 장소로 곧장 이르러서는 그 자취가 보이지 않았는데 들어간 장소조차 없습니다. 혹 그 넓이가 4촌이기도 하고 3촌이기도 하였습니다. 구불구불한 모양이 마치 용이나 뱀의 자취와 같았습니다. 서민과 도속이 모두 함께 이를 목격하였습니다. 8일 오전에 사리를 탑의 함 속에 봉안하려는데, 병 바깥으로 빛이 솟구쳐 몇 바퀴를 돌면서 아롱진 빛깔이 휘황하게 비췄습니다. 혹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였습니다.”

변주(汴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다.

사리가 32일에 도착하자 임시로 주의 관사(館舍)에 안치하였습니다. 6일 밤에는 대덕(大德) 혜철(慧徹) 스님 등이 갑자기 향기를 맡았는데 기이하여 심상치 않았습니다. 8일에 이르러 여러 스님들이 사리를 맞이하여 탑이 있는 곳으로 봉송하자 대덕 스님 승찬(僧餐) 등의 다섯 사람이 다시 향기를 맡았습니다. 혜복사(慧福寺)의 문에서 40여 보 떨어진 곳에서 푸른 빛의 광명이 솟구쳐 휘황하게 드리운 것이 마치 장막과 같았는데 오래 머물다가 사라졌습니다. 그 사찰에 사리가 모셔져 있어 승방(僧房)에서 공양하였는데, 그날 기주(杞州) 사람 장상인(張相仁)이 승방에서 사찰 내의 사리가 다시 푸른 빛을 발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마치 새로 도착한

 

사리의 색과 형태와 흡사하였습니다.

10일에는 다시 적색의 광명이 사찰의 불당 위에 임하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높이가 5척 정도였습니다. 그날 밤 4경에 다시 푸르고 붉은 여러 가지 빛이 섞인 광명이 사찰에서 목격되었습니다. 다시 어떤 노모가 요통을 앓은 지 20여 년이 넘는지라 지팡이를 짚고 땅에 기다시피 다녔습니다. 사리가 절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까스로 찾아와 예배하였는데 대중들 사이에서 사리의 빛을 보고는 바로 허리의 병이 완쾌되어 지팡이를 버리고 걸어 다녔습니다.”

낙주(洛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습니다.

사리가 316일에 주에 도착하여 한왕사(漢王寺)에 안치하였습니다. 23일에는 갑자기 향기가 드리웠는데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47일 밤 1경이 다할 무렵에 동풍이 홀연히 불어와 등불을 꺼뜨렸습니다. 불당의 동남쪽에서 신비로운 광채가 촛불처럼 빛났습니다. 다시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와 관인과 도속들이 다 함께 이를 목격하여 마침내 생각을 더욱 굳건히 하였습니다. 8일이 되자 사리를 내리려는 차에 탑의 가장자리에 있던 오동나무 줄기와 잎사귀가 뿌리까지 굽어졌습니다.”

유주(幽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습니다.

“326일부터 홍업사(弘業寺)에다 사리를 안치하였습니다. 석함을 다듬기 시작하여 양쪽 면을 물로 씻어내자 마치 거울처럼 빛났습니다. 안쪽 바깥쪽이 서로 통하듯이 비췄는데 자주색 광명이 불꽃처럼 일어나 그 돌을 아롱지게 하였습니다. 또 마노와 비길 만큼 윤택하고 광채가 서리는 것이 흡사 유리와 같았습니다. 41일에 이르러 재를 일으켜 행도하였는데, 사흘째 해시에 이르러 사리 앞에 향을 사르며 공양하였습니다. 등불이 뜰을 훤히 비추고 별이 밤하늘에 빛났는데, 흰 빛이 불여(佛輿)의 위에서 커졌다 줄었다 하였습니다. 8일이 되어 사리를 함에 봉안하는데 새벽부터 진시까지 함의 돌에 무늬가 나타났습니다. 흡사 그 모양이 보살과 같아서 아롱진 빛이 성대하였고, 또 여러 신선과 같았습니다. 그 사이에 새와 동물, 나무, 숲 등 여러 모양 등이 여느 것과 달라서 참으로 자세히 적기도 어렵습니다.

 

그 무늬가 분명하게 드러나서, 지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진상합니다.”

허주(許州)에서 표장을 올려 전하였습니다.

“33일 초야에 주의 북쪽 경계에서 90리 떨어진 곳에서 사리가 방광하였는데, 자주색과 붉은 빛의 두 가지 빛깔이 성의 안팎을 환하게 비췄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이와 같이 신기한 빛을 보았습니다. 47일에는 주부의 대청(大廳)에서 사리가 금병의 바깥으로 나와 유리병 내에서 행도하며 방광하였습니다. 8일이 되어 사찰의 불탑이 있는 장소로 행차하였는데, 다시 광명이 솟구쳤습니다. 오시에 사리를 석함에 봉안하려고 하자, 다시 오색의 빛으로 아롱진 구름이 탑 위에 임하였는데, 구름 형태가 마치 덮개와도 같았습니다. 육왕조탑본기(育王造塔本記)에 따르면, 그 날 탑의 서남쪽으로 100여 보 떨어진 곳에서, 9척 깊이의 마른 연못 가운데에서 갑자기 감미로운 물이 저절로 솟구쳤는데, 그 물이 참으로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도속 가운데 이것을 본 사람이 2만여 명이라고 하는데 모두들 이 물을 마셨습니다. 서응을 모두 기록하여 표주를 올려 이같이 아룁니다.”

형주(荊州)에서는 사리에 구름이 나타나 수레의 덮개와 같았는데, 탑 위에 구름이 머물면서 꽃비를 내리는 것이 바람에 떠돌아다니며 떨어지지 않았다. 또 온갖 새들이 탑 주위를 빙빙 날았다.

제주(濟州)에서는 사리가 원래 한 과뿐이었는데, 그곳에 다다르자 두 과로 현신(現身)하여 휘황하게 방광(放光)하였다. 기이한 향기가 퍼지며 구름 사이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저절로 종소리가 울리며 어질다고 칭찬하였다. 큰 새떼가 탑 아래로 몰려들었다.

초주(楚州)에서는 사리를 모셔다가 행도하는 날이 되자, 들사슴이 와서 법문을 들었고, 학이 탑 위를 떠돌았다.

거주(莒州)에서는 사리가 원래 한 과뿐이었는데, 그곳에 다다르자 세 과가 현신하여 휘황하게 방광하였다. 기단을 파자 땅 속에서 동탑(銅塔)을 얻었는데, 갑자기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었다.

영주(營州)에서는 사리가 세 번이나 흰 빛을 발하였다. 오래된 귀석(龜石)

 

저절로 갈라져서 이를 석함으로 썼다. 항주(抗州)에서는 산 속에다 기단을 팠는데, 천연의 석굴이 나와 이를 사리함으로 썼다.

담주(潭州)에서는 사리를 강에 있던 새들이 마중 나왔다.

노주(潞州)에서는 사리가 그곳에 다다르자, 자연히 샘이 솟았는데 이를 마시면 병이 나았다.

홍주(洪州)에서는 사리를 위해 목이 하얀 까마귀가 길을 인도하였다.

덕주(德州)에서는 사리가 그곳에 다다르자, 절름발이가 걷게 되었고, 큰 새가 탑을 떠돌았다.

정주(鄭州)에서는 사리가 방광하고 번당이 안쪽으로 숙여졌다.

강주(江州)에서는 사리가 그곳에 다다르자, 행도하는 날에 밭을 갈던 사람이 동으로 된 불상 1구를 얻었다.

난주(蘭州)에서는 사리를 봉안하고 그 기단을 파다가, 땅 속에서 1기의 석상을 얻었고, 또 어린아이가 손으로 파헤쳐 2구의 동불상을 얻었다.

자주(慈州)에서는 사리에 흰 구름이 드리워 마치 신선이 나는 듯하였다. 저절로 샘이 솟았는데, 이를 마시면 병이 나았다.

염주(廉州)에서는 사리를 분배받지 못하고 따로 한 과의 사리를 얻었는데 광명을 발하는 것이 부처님의 향로에서 향기가 나며 향이 타오르는 모양이었고, 또 노랗고 하얀 연꽃 모양이기도 하였다. 하늘에서 보배 조각이 비오듯 내렸다.

옹주(雍州)에서는 표를 올려서 인수 2(602) 512일 경성(京城) 내의 승광사(勝光寺)ㆍ대흥선사(大興善寺)ㆍ법계사(法界寺)와 주()의 공해(公廨) 안과 성 관할의 거리에 하늘에서 은박이 비오듯 내렸는데, 큰 것은 유협(楡莢)만 하였고 작은 것은 밀기울[] 같았다. 표를 올려 봉헌하였다.

인각사(仁覺寺)에서 512일 미시에 바람이 서남쪽에서 불어왔는데 향기가 진동하였다. 사문 및 경생(經生)의 도속 등이 모두 이 냄새를 맡았다. 그날 밤 은박과 하늘 꽃이 비오듯 내려 파초(芭蕉)의 가지와 잎사귀나 종려나무 줄기

 

위에 떨어져서 사람마다 모두 이를 주웠는데 크고 작음이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인수 265일 밤, 인수궁(仁壽宮)의 자선사(慈善寺)의 새로 지은 불당 안에서 신령스러운 광명이 뚜렷이 비췄는데, 그 모양이 발우만 하였다. 앞서의 기둥에서 대들보를 휘감으니 대중 스님들이 모두 이를 목격하였다.

인수 265일 밤, 은박과 하늘 꽃이 비오듯 내려 비파의 잎사귀나 다른 풀 위로 떨어지거나 땅으로 떨어졌다.

인수 268, 여러 주에서 사리를 봉송하고서 사문이 궁궐로 돌아가 배알하자 칙지를 내려 위문하였다. 9일에 자선사로 가서 경광재(慶光齋)를 거행하게 하였다. 대중 스님들이 절에 모여 찬송하고 오른쪽으로 돌며 향을 사르고 난 다음 공양하려는데 하늘이 희미해지더니 다시 은박과 하늘 꽃이 비오듯 내렸다. 사인(舍人) 최군덕(崔君德)이 이를 담아 봉헌하였다. 경성 내의 승광사(勝光寺)에서 협주(陜州)의 사리 석함이 변화하여 서상과 사라쌍수 등의 형상을 드러낸 것을 모사해 모셨다.

인수 2523일 이후 절에서 매일같이 방광하였는데, 날마다 계속되었다. 감득에 연하여 빛을 발하되 밤낮을 그치지 않았으니 성의 관할에 도속이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찾아와 보는 사람마다 귀의하고 예배하였다. 문을 메우고 길을 채우며 가고 오는 것이 마치 저잣거리와 같았다. 이와 같이 빛이 휘황함을 보자 사람들의 마음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보리심을 내었다. 그 성내의 여러 사찰과 외현과 여러 주에서 흰 비단에다 모사하여 가져가기도 하였는데, 혹 수레에 올려놓자 방광하기도 하였고, 혹 길을 환히 비추기도 하였고, 혹 앞서의 장소에 이르자 밝게 빛나기도 하였으니 광명의 색깔이 보는 이마다 달랐다.

인수 2715, 경성 내의 연흥사(延興寺)에서 석가불의 금동장육상(金銅丈六像)을 관정(灌頂)하고 모사하였다. 그날 밤 보배 조각과

 

은꽃이 비오듯 내렸으니, 향기의 기이함이 견줄 바 없었다.

협주(陜州)에서는 사리가 315일 신시에서 48일 술시까지 도합 열한 번이나 신령한 서상을 나타냈는데, 모두 스물한 가지 일이 있었으며, 네 번이나 방광하였다. 빛 속에 꽃나무가 보였는데, 두 번이나 오색의 구름이 드리웠으며 땅을 파자 새를 얻었다. 석함이 기이하게 변화하였는데, 여덟 그루의 사리쌍수가 있었고 나무 밑에 물이 보였으니, 한 분의 누워 계신 부처님과 세 분의 보살과 한 분의 성비구니[神尼]였다. 함 안에도 새가 나타났는데 세 송이의 금빛 꽃이 피었고 구름이 일어 수레모양을 이루었는데 번당과 보개가 저절로 생겨났다. 함 안에서 향기로운 구름이 흘러나오며 다시 방광하였다.

사리가 협주성에 있을 때, 323일 밤 2경 사이에 대통사(大通寺)ㆍ선법사(善法寺)ㆍ천업사(闡業寺)에서 모두 광명이 나타났다. 오직 선법사에서 나타난 빛은 그 안에 두 그루의 꽃나무가 피었는데 그 모양과 빛깔이 분명하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그 빛깔이 처음에는 붉은 빛이었다가 점차로 희게 변하였는데 나중에 흩어질 때는 수은과도 같았다. 방안에 가득하여 안에 있는 물건을 모두 뚜렷이 비추었다.

사리가 대흥국사(大興國寺)에 있을 때, 42일 밤 2경 사이에 영승사(靈勝寺)에서 광명이 나타났는데 앞뜰의 과일 나무와 북쪽 언덕의 초목까지 환하게 비췄다. 빛이 비추는 곳마다 그 형태가 뚜렷이 드러났으니 탑의 기단 아래의 땅을 파내려 가서 새 한 마리를 얻었다.

사리가 대흥국사로 보내졌는데, 328일 묘시에 사마(司馬) 장비(張備)가 대도독(大都督) 후진(侯進)과 함께 검교(檢校)하였는데 기단을 쌓고 당을 파서 이미 5척 깊이나 되었다. 문향현(閿鄕縣) 옥산향(玉山鄕)의 주민 두화운(杜化雲)이 괭이질을 하다가 갑자기 새 한 마리가 나왔는데 푸르고 노란 색이 크기는 메추라기만 하였다. 탑 안을 태연자약하게 걸어다녔는데 잡아도 겁내지 않았다. 봉송도 하기 전에 그 새가 죽어버렸다. 지금 복사(福事)를 운영하는데,

 

사리탑 안에서 신기한 새를 얻었으니, 그 출처가 신기하여 모두들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였다. 지금 별도로 새 그림을 그려서 삼가 주청하는데, 오색의 구름이 다시 나타났다.

315일 신시에 사리가 협주성 남쪽으로 3리 떨어진 계곡에 이르렀는데, 바로 오색의 구름이 동남쪽에서 울창하게 일어나 갑자기 한 데 모여 하나의 보개처럼 이뤄졌다. 그 색이 자주색으로 변하였는데 사리가 성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흩어져 버렸다. 당시에 도속이 모두 목격하였다.

28일 미시에는 대흥국사에서 다시 오색의 구름이 있었으니 서북쪽과 동남쪽의 두 곳에서 불어와 사리탑 위에서 서로 합쳐져서 한 무더기가 되었다. 이때에 문림랑(文林郞) 위범(韋範)ㆍ대도둑(大都督) 양민(楊旻)과 관민 등이 모두 이를 직접 목격하였다. 그 구름이 조금 있다가 흩어지면서 두 번이나 소리가 울렸다.

사리가 주에 있을 때, 323일 밤 보좌(寶座)에서 소리가 나는데 마치 사람이 고요함을 깨는 소리와 같았다. 세 번을 거듭하고서야 그쳤다. 나중에 대흥국사에 있었을 때, 45일 유시에 다시 예전보다 더 큰 소리가 한 번 울렸는데 도속이 모두 들었다. 석함의 안과 밖의 사면에 불보살과 신니(神尼) 및 사라쌍수와 광명이 나타났다.

47일 사시에 사인(使人)을 보내어 방광 등 네 가지의 서상을 표하고자 하였는데, 마치 떠나가기도 전에 사마 장비가 효현령(崤縣令) 정건의(鄭乾意), 문향현승(閿鄕縣丞) 조회탄(趙懷坦), 대도독 후진과 백성 후겸(侯謙) 등과 사리탑 기단 내의 석함을 함께 검사하다가 함의 바깥 동쪽 면의 돌에 무늬가 어지럽게 있는 것을 보았다. 장비 등이 이것을 신기하게 여겼는데, 다시 북쪽 면을 정건의가 소맷자락으로 닦아내고 손으로 문지르고 나서 그 위를 향하자 바로 사라쌍수 한 그루가 보였다.

 

동서쪽에 서로 마주하여 가지와 잎사귀가 모두 갖추어졌는데, 진한 청색이었다. 잠깐 사이에 도속이 몰려들었는데 다시 서쪽면 바깥을 물로 씻어내자 두 그루의 나무에 오색 빛깔의 잎사귀가 달린 것이 보였다. 그 다음에 남쪽면 바깥에 다시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가지가 위로 뻗어 있었으며 그 잎사귀 색깔이 노랗고 하얀색이었다. 그 다음에 동쪽면의 바깥에 다시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빛깔이 파랗고 잎사귀가 길었다. 사면의 나무 밑에 모두 물결 무늬가 있었는데 이 두 나무 사이에 있었다. 사인(使人) 문림랑(文林朗) 위범(韋範)이 처음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사마 장비가 그 다음에 이를 볼 때에는 이미 그 새가 서 있었고 새 앞에는 세 송이의 금꽃이 놓여 있었다. 새의 크기와 털 색깔은 예전에 땅을 파면서 얻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서남쪽으로 날아가 부처님 밑에 이르러 함 속에 머물러 있었다. 서남쪽에 가까운 모서리에 다시 한 분의 보살이 있었다. 연화대에 앉아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가 2촌이었다. 서쪽면의 안쪽에도 다시 두 분의 보살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한 분은 금색에 얼굴을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한 분은 은색으로 얼굴을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로의 거리가 거의 3촌이나 되었다. 서쪽 모퉁이 위에 누워 계신 한 분의 부처님께서 계셨는데 몸을 기울여 머리는 북쪽을 향하고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세 분의 보살이 석함의 안쪽에 나란히 있으면서 붉은 빛 도는 자주색 광명을 내었는데 높이가 1척 정도였다. 사시에서 미시까지 그 형상이 다시는 옮겨가지 않았다. 이것을 그리고 난 후에 색이 점점 엷어져 없어졌는데 도속으로 이를 본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함은 원래 푸른 돌 색이고 그 기단이 검은 색이었는데 서상을 볼 때에는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거죽이 사면에 두루 매끄러웠다. 사람들이 모두 둘러앉아 그 모습을 비춰보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함의 안팎 사면에 모두 한 분의 부처님과 세 분의 보살 세 명, 비구니 한 명과 새 한 마리, 꽃 세 송이와 나무 여덟 그루가 나타났다. 지금 따로 이를 그려서 삼가 첨부하여 상주한다.

오시에

 

사방에서 구름이 일어나 수레바퀴의 모양으로 변하였다. 다시 당번과 보개를 저절로 이루었으니 탑 위로 향기로운 구름에서 두 번이나 광명이 나타났다.

48일 오시에 사리를 내리려는데, 이때 도속이 슬피 울자 사방에서 홀연히 구름이 일시에 일어나 연기와 같고 안개와 같았다. 점차로 위로 올라가 태양 가까이 이르러 해를 둘러싸고 하나의 햇무리로 변한 것이 마치 수레바퀴와 같았다. 안에 별도로 흰 구름이 둥글게 뭉쳐서 해를 가렸다. 햇빛이 점차로 작아지고 어두워지면서 작은 잔만 하였는데 바퀴 밖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구름이 바퀴살이 되었는데 그 바퀴와 바퀴살이 모두 붉은 빛 나는 자주색이었다. 사리를 내리고 나자 그 구름이 흩어져 없어지고 햇빛이 다시 원래대로 밝게 되었다. 다시 탑원에서 서북쪽의 담장 바깥으로 커다란 당번과 보개가 저절로 생겨났는데 그것이 사리를 에워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에 사람을 시켜 당번을 가져다 공양하라고 말하였는데 사리를 내리고 나자 그 당번과 보개 따위가 홀연히 사라졌다. 이때에도 도속으로 이를 목격한 이가 적지 않았다.

술시(戌時)에 이르러 사마 장비 등이 탑 위에 푸른 기운이 탑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구름이 아주 향기로워서 사인(使人) 문림랑(文林郞) 위범(韋範)과 대흥사의 담창(曇暢) 스님이 그 안에 들어가 살펴보았다. 장비가 위범 등과 함께 광명이 서북쪽과 동남쪽의 두 곳으로 흘러가 잠깐 사이에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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