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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64 불교(광홍명집 15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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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15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3. 불덕편

 

서문

세속을 계몽(啓蒙)하여 바로 하는 것은 오묘한 전적과 법주(法主)의 스승인데, 스승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이가 소위 왕이다. 그러나 왕을 갈 왕()자로 새겨서 백 갈래 시냇물이 다다르는 바다와 같은 조종(朝宗)이라 이르더라도, 왕이란 호칭을 취하는 것을 이것에 견줄 수 있다.

따라서 왕이라고 통괄하여 부르는 것은 인연의 번잡함을 간추려 만물과 이치를 양분해서 그 요체를 두 가지로 거론하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만물을 자세히 하고자 함이고, 두 번째는 이치를 밝히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자세히 하는 왕은 바로 인왕(人王)과 천왕(天王)이다. 그 교화를 행하는 바가 만물에 연유하므로, 만물은 그 몸에 머문다. 그 몸이 존재하여 교화를 행하다가 몸이 없어지면 교화마저 시든다. 이 같은 것은 외부로 그 몸만을 따지고 내부의 심식(心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한 교화를 가리켜 외교(外敎)라 부른다.

두 번째는 이치를 밝히고자 하는 것으로 바로 법왕(法王)이신 불각(佛覺)의 경우이다. 교화를 행하는 바가 이치에 연유하므로 이치는 그 마음에 있다. 마음이 존재하면 교화가 행해지고, ()이 소멸되면 경계가 끊어진다. 이처럼 내부로 그 마음을 거두어 외경(外境)에 인연하지 않기에 그 교화를 가리켜 내교(內敎)라 부르는 것이다.

만약 그 몸을 두터이 하여 생()을 보존하는 경우, 생생(生生)하여 다하지 않을 것이다. 생을 버리고 정()을 없애면 그 정이 없어져 고요함을 비칠 것이다. 가령 형체를 남기는 가르침을 만국(萬國)이 그 사표로 삼을지라도, 마음을 단련하는 술법은 1천의 성자가 모두 매한가지이기에 도법(道法)과 세속의 두 가지 가르침으로 나가고 들어오며 높이고 낮추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유()에 들어가 그 형태에 잠겨서 6()를 늘 이어가고, 도법에서는 공()으로 나와 그 지위를 높이니 3()이 이로써 분명해진다.

정도(正道)가 동쪽에 유포된 이래로 6백여 년간 우매한 백성을 제도하여 신심을 내게 하였는데, 실로 그 교화를 받은 대중이 하나둘이 아니다. 독부(獨夫)가 학정을 펴서

 

스님들을 땅에 묻고 성상(聖像)을 부순 이는 두세 사람뿐이나, 현명한 군주로 도법을 존중하여 사찰과 탑을 이룩한 이는 참으로 많다. 오나라 왕이 부처님의 신성함을 헤아려 보고 천상과 사람이 모두 귀의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어서 송나라 군주가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고 조현(朝賢)의 종봉(宗奉)을 명확히 하였으나, 여타의 경우는 무지몽매하기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자취의 상서로움을 서()하고, 다시 송()을 지어 훌륭한 공덕을 표하고자 하는데, 이를 부류에 따라 열람한다면, 어찌 심성(心性)을 빛내지 못하겠는가?

 

초서(初序) () 홍명집』 「불덕편의 목차

() 종병(宗炳)의 명불론(明佛論)

 

대당 광홍명집(光弘明集)』 「불덕편의 목차

1) () 사문 지도림(支道林)의 불보살상찬(佛菩薩像讚)

2) 진 사문 혜원(慧遠)의 불명(佛銘)

3) () 시중(侍中) 사령운(謝靈運)의 불법명찬(佛法銘讚)

4) () 심약(沈約)의 불기서(佛記序[幷勅答])

5) 진대(晉代) 이래 불상감응상(佛像感應相)

6) 양 고조(高祖)의 출육왕사리조(出育王舍利詔)

7) 양 진안(晋安)의 보리수송(菩提樹頌[幷表])

8) 양 간문제(簡文帝)의 창도불덕문(唱導佛德文[十首])

9) 양 간문제의 사불사계(謝佛事啓[十首])

10) 양 심약(沈約)의 불찰탑상제명(佛刹塔像諸銘[十首])

11) 양 왕승유(王僧孺)의 창도불문(唱導佛文)

12) () 고조(高祖)의 어국내립사리탑조(於國內立舍利塔詔[幷瑞應表謝])

 

1) 불석가문보살등상찬(佛釋迦文菩薩等像讚)

 

() 사문 지도림(支道林)

 

(1) 석가문불상찬(釋迦文佛像讚)과 그 서문

사람을 다스리는 도를 인의(仁義)라 말한다. 그러나 인의에도 근본이 있어서 이를 도덕(道德)이라 이른다. 예전에 희주(姬周) 말엽에 부처님이라 불리는 대성(大聖)이 계셨으니, 바로 천축의 석가족 백정왕(白淨王)의 태자이시다. 속성(俗姓)이 모족(母族)이었기에 그 성을 구담(瞿曇)이라 하였는데, 신령스런 혈맥을 받들어 이었으니, 이로써 도를 밝혀 후세에 빛나는 이름을 남기셨다. 중화(中和)를 마시고 탄생하셨는데, 백정왕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이어받아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나되, 태어나자마자 말을 하셨다. 참으로 천작(天爵)으로도 그 귀함을 더하지 못하고 진실로 일록(逸祿)을 기다려도 족함이 없다.

그러므로 늘 밤마다 보위(寶位)에 오르는 일을 근심하여 궁궐의 뜰을 거닐었는데, 동궁(東宮)을 답답하게 여겨 구역(區域)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다가 마침내 높이 떠나 성문 밖으로 다니셨다. 사방의 궁궐 문을 열고서 병든 이의 고통을 세 번이나 숙고하였는데, 풍인(風人)이 독한 말로 감정에 불을 질렀어도 마음속으로 달갑게 받아들여 노여워하지 않고, 수도자에게 대유(大猷:대도)를 질문하고서 이같이 속세에 묻혀 있음을 한탄하셨다.

드디어 어둔 새벽에 먼 길을 떠나 세상을 피하여 한가롭게 머물었는데, 동궁의 귀중한 보배조차 저버린 채 시자도 물리치고 행장(行狀)마저 가벼이 하셨다. 용장(龍章)

 

좋은 옷을 가져다 가난한 이의 베옷과 맞바꾸면서 따르는 이들조차 강가에서 되돌려 보내셨다. 그리고 뜻을 반석같이 굳혀서 마음을 태산처럼 편히 하고, 풀더미를 모아 거처를 바로 하며, 마음을 꺾고자 서약하셨다.

안반(安般)1)의 기운을 다스리고 10()2)을 운용하여 그 마음을 붙잡으며, 4()3)8()를 고르게 운용하고 2()에 따라 간략하게 순행하며 보내고 맞이하는4) 두 경계를 끊으셨다. 코끝에서 묘일(妙一)을 연()하며 3()5)의 몽수(矇秀)를 발하여 4()6)을 비워 함께 거두셨다. 5()7)은 환부(還府)로 옮기고, 6()8)은 조용한 숲에서 비우며 5()의 욕화(欲化)를 낮추어 태소(太素)의 호심(浩心)을 넓히셨다. 반야(般若)로 씻어 내어 덕()에 나아가고, 7()에 침잠(沈潛)하여 현리(玄理)를 끌어내며, 명어(冥魚)9)6()10)에서 찾고 세월이 흐르자 통발[]11)마저 없애셨다. 만겁토록 쌓인 습()을 털어내고, 당년에 똑같이 생이지지(生而知之)하여 5()을 감추고 빛을 드날리며 여섯 부처님을 이어 전해짐을 이루셨다.

우뚝한 키가 6()이고, 몸에는 둥근 빛이 돌았다. 황중(黃中)12)을 열어 내되, 그 색이 금빛처럼 고았다. 그 거조가 허공을 메우고, 유유히 가다가 홀연히 없어진다. 8()의 향기를 내뿜고 편안히 즐거운데도 광채를 드리운다. 그 오묘함을 견주려 하여도 일찍이 조짐조차 없었으니, 참으로 6()13)에 탁월하시다. 기틀에 따라 드러내시는지라 그 교화가 삼오(三五)14)보다 융성하였다. 충량(沖量)은 태허(太虛)보다 넓었고, 신개(神蓋)는 양의(兩儀)보다 넓었다.

이간(易簡)을 기다려 바탕을 이루었고, 대화(大和)를 모방하여 아름다움을 칭하였다. 원시(員蓍)는 그 신묘한 적정(寂靜)을 상징하고, 방괘(方卦)는 그 지혜의 두루함을 본뜬 것이다. 많은 도움으로 남겨진 상서로움을 비추고 숙명(宿命)에 근본하여 제작하셨다. 혹 덕의 이치로 그것을 감싸고 혹은 충화의 기풍으로 그것을 성기게 하셨다.

모습은 날마다 새로워짐을 드러내고 묘주(妙主)는 다하지 아니함을 기약하시고 그 아름다움은 푸르러 그 푸르름이 쪽빛보다도 푸르다. 백련(百練)을 다하여 순수함에 나아가고, 만물을 인도하여 이치로 돌이켜서 요순과 공자의 바깥으로 건져내셨다. 815)에 속하여 지극을 말하고 분색(憤索)16)을 뛰어넘어 전()을 일으켰으며, 도행(道行)3()17)를 취하고,

 

노담(老聃)과 주공(周公)을 계승하여 더욱 그윽케 하셨다. 신묘한 교화를 서역에 드리운 것이 마치 아침 햇살이 양곡(暘谷)에서 떠오르는 것 같았다. 백성이 이를 사모하여 행()을 일으켰는데 마치 곡조가 조화롭게 울려 퍼지는 듯이 하였다.

이 때에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은 바로 복희(伏羲)의 기풍보다 아득하며, 신기하고 오묘함은 바로 헌원(軒轅)보다 빼어나며 빛나는 문채(文采)는 주당(周唐)보다 성대하고, 칭송하는 맛[頌美]은 추로(鄒魯)보다 여유 있으니, 참으로 신화(神化)의 으뜸이고, 황왕(皇王)의 종모(宗謨)라 하겠으나, 나이 드시매 마음에 따라 자취를 없애 니원(泥洹)에 드셨다.

지극한 사람은 행하는 때가 있고 그치는 때가 있으니, 혹 이쪽을 숨기고 저쪽을 드러내기도 하기에 마침내 인토(忍土:娑婆)에서 자취를 끊고 명()을 유위(維衛)18)로 돌려보내셨다. 세속에서는 항상됨을 따르는 것에 놀래나, 참으로 세상에 머물고 떠나가는 일을 통리하셨다. 영각(靈覺)의 성품에 이르러서는 삼계(三界)가 순수함을 다하여 그 텅 빈 것이 마치 개울이 뒤집어진 듯하고, 그 열반하시는 것이 마치 하늘이 무너지듯 하였다. 검수(黔首)는 긴긴 밤을 늘 어둠에 쌓여 있는데, 어두운 흐름이 나루터마저 쓸어내는지라, 6()가 산이 무너지듯 퇴락하였다. 3()의 바퀴축이 끊어지고 고삐가 풀렸기에 문도(門徒)가 피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파하였고, 백령(百靈)이 애도하며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도가 높으면 낮게 임하고 머뭇거리는 이도 가까이하여 기리게 된다. 그러므로 곡()할 것을 바라지 않아도 곡하게 되니, 함께 천하를 잊는 것은 쉬우나 천하로 하여금 함께 잊게 하는 것은 어찌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신령한 풍화가 전파되어 6()에 두루 퍼지니 역수(曆數)가 적현(赤縣)에서 다하여 뒤에 돌아가시었다. 이른바 함께 듣고 그 신령한 모습을 우러러 그릴지라도 그 자취 끊어진 지 이미 1천 년이나 된다. 기원(祇洹)이 이로써 퇴락하고, 옥수(玉樹)마저 시들었으니, ()는 없어지고 사람은 떠났으며 시절조차 쇠하였다. 재주도 없이 숨은 채 대유(大猷)만 우러러볼지니, 아침에 뜨는 해를 쫓아가더라도 미치지 못하고, 뽕나무에 붙더라도 위로 오르지 못한다.

신묘한 말발굽이 예전에 있었으니, 원하건대 다시 공경할 것을 말한다. 붓을 당겨 옛 법도를 일으키고자 감회를 적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태상(太上)은 아득하기만 한데

당요(唐堯)가 천명(天命)을 이었구나.

공구(孔丘)는 주나라에서

떠돌며

 

세 번이나 전하였다.

 

밝고 밝으신 석가(釋迦)님만이

진실로 제왕 중에 으뜸이시다.

이에 응하여 밝게 일으키시어

이로써 축건(竺乾:인도)을 교화하셨네.

 

서로 길러 내어 즐거이 화합하고

맑게 씻어 내어 근본을 비우며

세상의 법왕(法王)으로 수레를 부리면서

종지를 가다듬어 현리(玄理)를 바르게 하셨다.

 

넓은 도리가 참으로 위대한지라

꽃을 피우고 신령을 담았으니

곤륜(崑崙)처럼 드높이 나투어

태청(太淸)처럼 아득히 높을세라.

 

헤아리기도 어려운 저 태상(太像)

그 빛이 참으로 밝고

화합하기 어려운 그윽한 소리는

여덟 갈래로 아롱졌구나.

 

지혜의 횃불이 휘황하여

내 갈 길을 비추는구나.

사람마다 그 현철함을 기뻐하니

뉘라서 그 오묘함을 알겠는가?

 

우러르면 안개를 거머쥐듯 한지라

피안(彼岸)으로 건너는 나루마저 뜬구름일세.

지엄하기가 한 여름처럼 뜨거우나

부드럽기는 봄볕 쬐듯이 하였네.

 

그릇에 견주어 모습 드러내며

그 기()는 우뚝하니 신령스럽구나.

머리를 수그리면 연기처럼 사라지고

허리를 세우면 나는 용과 같구나.

 

북치고 노래하며 고해(苦海)를 건네주니

신령한 기운이 나날이 새롭구나.

그 누가 이같이 행하려나?

홀로 도균(陶鈞)19)을 운용하였네.

 

3()의 마음은 그윽하기도 한데

8억의 말씀을 널리 펼치고

2()가 이미 넓혀져

쌍한(雙翰)이 오직 관장하네.

 

진귀하고 빼어난 것으로 채우고

평화롭고 간략한 것으로 편안히 하여

궤 안에 감추어 두어

진실로 선하게 하는구나.

선범(善法)의 인()이 어질어지리니

찬양하고 되새기면서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성품을 말하여

어찌 넓히고 천명하겠는가?

 

뚜렷이 밝아서 해와 달 같으나

드러나고 숨는 것 여전하다네.

삶이 안개처럼 분분해서

무성히 왔다가 이미 사라졌다.

 

지인(至人)은 완전히 교화되어

자취는 세상을 따라 미미하여지니

이름을 빌려서 니원(泥洹)이라 부른다네.

말씀으로 깨우치고 말씀으로 되돌리니

그 기풍을 6() 속에 남기시어

적기(赤畿)20)에서 기다린다.

 

그 모습은 남아있지 않음이 없으니

뉘라서 그 기미를 깨달을까마는

마음을 비추어 붓을 드니

그윽한 빛 만나 뵙기를 간절히 비는구나.

 

(2) 아미타불상찬과 서문(阿彌陀佛像讚[幷序])

6() 이외는 전적(典籍)으로 그려 낼 바가 아닌데, 신도(神道)가 세상을 등지는 것을 어찌 마음으로 헤아릴 터인가? 그러므로 사람이 안다고 해도 그 알지 못하느니만 못하다고 일렀다. 매번 꼿꼿이 서 있으면서 살펴보지도 못하면서 알지 못한다고 배척하려고만 하니, 이 때문에 우물 안 개구리가 웅덩이를 자랑하며 빙이(憑夷)가 추수(秋水)의 공업(功業)을 떠벌리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내가 대방(大方)에 노닐면서

 

마음을 굳게 하여 여한(餘恨)을 없애고 이로써 휴식을 얻었다. 따라서 다시 여러 가지 기이하고 아름다운 일을 말하고자 한다. 불경에서 이르기를, “서쪽에 나라가 있으니, 그 나라 이름을 안양(安養)이라 한다. 길은 멀고도 아득한데 항사(恒沙)를 넘는다고 하였다. 준비한 것이 없다고 비난하는 자는 그 경계를 지나갈 수 없고 빠르지 않다고 비난하는 자가 어찌 빠르게 이를 수 있겠는가?

저 부처님의 명호가 아미타(阿彌陀)인데, ()나라 말로는 무량수(無量壽)이다. 그 나라에는 왕법 및 작위와 서열도 없어서 오로지 부처님을 임금으로 섬기고 3()을 가르침으로 삼는다. 남녀가 각각 연꽃 속에서 피어나 생육하기에 잉태하는 더러움도 없다. 관우(館宇)와 궁전은 모두 7보로 자연히 이뤄진 것이지, 사람이 힘들여 이룩한 것이 아니다. 원림과 연못에는 기이한 물건이 울창하고, 날짐승과 물고기들이 연못과 숲속에 모여 사는데, 둥우리에 깃들며 무리를 짓는 축생조차도 진여(眞如)에 따른다. 문짝 없는 창합(閶闔)21)이 경림(瓊林)에 있고, 맑은 소리가 소관(簫管)에서 저절로 울리며, 아득한 하늘에서는 꽃비가 흩뿌려지고, 온 나라에 신풍(神風)이 불어오니 오래된 것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 감로가 서리고 예천(醴泉)이 솟아나며 은혜로운 바람이 불어오면서 덕화(德化)가 선류하기 때문에 거룩한 말씀의 감응이 마치 우레 같고, 지혜의 연못마다 구름이 드리워 맑은 물을 넘치게 한다.

각부(覺父)22)가 고귀한 말씀을 발하시면, 진인(眞人)이 그윽하게 받들어 유흥조차 폐하므로 5()를 허무에 의거하여 공()으로 섭입하게 된다. 반야로 깨달음을 옮겨 가서 현묘를 드러내기 때문에 온갖 오묘함이 여기서 크게 열린다. 신령한 교화가 이로써 영구히 전해지는데, 이에 별도의 경전과 논기(論記)가 있다.

그 이치를 말하자면, ()나라 땅 오미(五味)의 세상에서 부처님을 받드는 바른 계율로 아미타경을 독송하면서 저 나라에 태어나고자 발원하되, 진실하게 마음을 거두는 이는 목숨이 다하면 혼령이 떠나가 저곳에 화현하여 마침내 부처님을 뵙고 신묘하게 깨우쳐 바로 도를 얻는다. 구차하게 생()을 구하여 지말이나 따르며 측간에 남기는 자취나 보태주면서 마음만 신국(神國)으로 치달려서는 참으로 바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에 장인(匠人)이 그 신령한 모습을 그림으로 이룩하였기에 드높으신 자태를 우러러 뵈옵게 되었으니, 천품(天稟)에 비롯하여 칭송하는 말로도 다할 수 없으나,

 

보잘것없는 송()을 지어 다음과 같이 사()를 붙인다.

 

왕유(王猷:왕도)는 바깥을 다스리고

신도(神道)는 안쪽을 쉬게 하는구나.

크시다, 정각(正覺)이시여.

종사(宗師)를 겸하셨네.

 

태정(泰定)의 수레가 빛나니

황중(黃中)의 빼어난 자태이시네.

고요한 지혜로 주고받음을 끊었으니

세 가지 명달(明達)로 고즈넉이 편안하네.

 

금방(金方)에 경계를 여시니

이어진 길목이 아득하구나.

저곳의 신화(神化)가 멀고도 머니

대기(大機)에 감()하여야 응현(應現)하며

 

5()를 평탄하게 다듬고서

6()로 미묘(微妙)를 연마하네.

()과 유()가 그 모양을 함께 하니

현문(玄門)이 활짝 열렸구나.

 

읊조리는 노랫소리 가지런하여

세밀한 이치 마음으로 이어가는데

현사(玄肆)가 양양하여

3()으로 거두네.

 

옛 것을 간직하여 본연(本然)을 그리고

오는 것을 깨달으니 나날이 새롭다네.

현우(賢愚)의 두 가지 재주 누가 내렸나?

밝고 어둠이 사람에 달렸구나.

 

화토(火土)를 이룩하여 강토를 가꿔 가니

구름은 드높이 하늘 위로 밀려들며

자관(紫館)은 샛별처럼 솟아 있고

화려한 전각이 별님처럼 늘어섰구나.

 

대궐의 쪽문은 사방으로 통하고

금빛 성곽은 산비탈로 이끄네.

별빛 기울자 아침 해 떠오르고

고운 빛의 여명이 빛나네.

 

신묘한 방죽은 서로 맞닿고

아홉 근원은 깊고 깊구나.

물결에 통발을 두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니

물고기들은 드물게 입질을 하네.

 

연못에는 관리를 두어 다스리지 않으니

놀래어 날아가 숲 속에 깃드는구나.

손님은 채찍질하여 달려가며

비가 내려 기심(機心)을 묻네.

감로(甘露)는 누구를 적시는가.

난초 꽃이 향기를 더하는구나.

꽃은 구름을 따라 짙어지고

세속에 시원한 바람 불어오네.

 

어여쁜 꽃술이 나부끼며

신령한 기운 꽃망울 감싸네.

경림(瓊林)에 소리가 어울리고

8()이 무늬를 이루는구나.

 

숫돌에 갈수록 빛나는데

연꽃이 햇빛에 더욱 빛나네.

내리쬘수록 새롭게 맑아져서

꽃잎마다 향내가 피어나네.

 

잠길수록 그윽하게 꽃피우니

바람에 흩날려 날개짓 한다네.

햇살을 머금어 꽃잎을 피우니

그윽한 꽃잎이 신령하게 맺히는구나.

 

온갖 것이 바람결에 모양 바뀌며

오묘하게 쌓여 자라난다네.

만 가지 갈래가 단번에 바뀌면

법도를 같이하여 좌망(坐忘)하리라.

 

(3) 제보살찬(諸菩薩讚) 11

문수사리찬(文殊師利讚)

 

천진(天眞)하여 그윽한 이치를 깨우쳤으니

신령한 교화가 실로 유구하구나.

예전에 용상(龍象)이 대각(大覺)을 심었는데

지금은 꿈결에 방역(方域)을 다니시네.

정처 없이 신령한 파도를 타시고

 

유야(維耶)의 고을로 드높이 행차하시어

이쪽을 건지되 그 바탕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저쪽을 비추되 계신 곳 여전히 한가롭구나.

 

무리를 접하시되 깨끗이 닦아야 만나 주시고

눈으로 살피시되 겸망(兼忘)을 꿰뚫으셨네.

범천(梵天)과 제석(諸釋)조차 법회를 기렸으니

삿됨을 내치고자 아름다운 명성을 거두셨다.

 

미륵찬(彌勒讚)

 

대인(大人)이 달[玄度]의 자취를 따라서자

길을 헤매는 사람[弱喪]도 허공에 오르는 듯 건너가고

서로 통하여 스승과 제자 관계가 저절로 없어지니

석가께서는 그윽한 안식에 오르시고

미륵님이 신령한 사다리를 놓아 주시니

거룩한 글로 새겨서 영편(靈篇)에 실었노라.

 

건괘(乾卦)를 타는 것도 구오(九五)에 인하는데

신룡을 부려서 도솔천에 이르고

법고(法鼓)가 현궁(玄宮)을 울리니

커다란 소리가 삼천세계에 자자하다네.

 

눈부시기가 소왕(素王)의 자태를 머금었는데

가부좌하여 연꽃의 향기를 흩날리노라.

텅 비었으나 높은 뜻을 일으켜

8()으로 자연(自然)을 연출하시네.

 

고요한 지혜는 그윽하고 미묘하여

흘겨보며 더없이 그윽하다고 읊조리네.

칠칠(七七)23)의 연수를 돌면서

운수(運數)에 응하여 중번(中墦)에 오르시네.

 

이 땅에 서른두 가지 자태를 드리우셔서

화림원(華林園)24)을 빛내시며

열심히 법륜을 달리게 하고

세 번 손 펴심도 예전의 연()에 있구나.

 

유마힐찬(維摩詰讚)

 

유마의 바탕은 신묘한 성품이니

큰 교화가 기연(機緣)의 뜰에 빛났구나.

그렇다고도 못하고 아니라고도 못하는데

인연 좇아 모습과 이름을 얻는구나.

 

백성이 꿈틀대면 내 몸도 아프고

남들이 기뻐하면 내 마음도 편한데

기쁨과 아픔이 어찌 모습과 그림자 같을까마는

모양에 그림자 따르듯 기심(機心)에 응하는구나.

현묘한 가락으로 10()을 거두어서

우열을 다투어 4()에 우뚝하시네

기약을 잊고 유수(濡首)25)를 만나

아름답고 훌륭하게 생사를 찬양하는구나.

 

선사보살찬(善思菩薩讚)

 

현화(玄和)는 청기(淸氣)를 토하는데

이 이름 난 아이를 끌어

누각에 올라서 봄철을 노래하나

높은 흥취에 따르기가 어렵네.

 

허무(虛無)를 타고 영각(靈覺)에 감득하니

그물을 펴서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치는구나.

겉보기엔 텅 비어 있는 듯한데

있고 없음이 저절로 같아진다네.

 

높음을 잊고서 내려가지 않고 공중(空中)에 머물러

유유자적하게 몇 길이나 되는 곳에서

꽃에 인하여 무착(無著)을 청하며26)

 

허공에 올라 부용(芙蓉)을 흩뿌리네.

 

능인(能仁)이 절묘한 곡조를 읊조리며

()이 바로 자연의 공()이니

공과 유가 서로 그 자취를 비추나

그윽한 깨우침에는 공()을 비추는 것마저 없다네.

신묘한 기약으로 통발의 깨침[筌悟]27)을 발하니

홀연히 영감(靈感)이 통하는구나.

 

법작보살(法作菩薩)

 

예전에 좋은 법회가 열렸는데

이날 따라 신통함이 많았구나.

 

유마가 깊은 울림을 발하니

가르침을 청하자 둘이 아니라 일렀네.

 

그윽한 말씀 뉘라서 짝할 건가?

법작보살은 마음이 가는 곳을 따르네.

 

아름답고 훌륭하게 깊은 마음을 운용하여

맑고 맑은 소리가 고즈넉하구나.

 

추이(麤二:법작)는 기분(起分)을 표하고

묘일(妙一:불이입)은 무생(無生)에 의탁하노라.

 

수한보살찬(首閈菩薩讚)

 

수한보살은 아상(我相)을 없앴으니

이치를 만들되 두 가지의 허()로 인하였네.

두 가지의 허로 묘함을 얻는 듯하나

같은 모습은 도리어 추()로 들어갔다.

 

속진(俗塵)의 자취 어찌 억지로 끊을까?

한 가지를 잊으면 본래의 없음에 돌아가려니

()을 함께 하는데 무엇이 귀할 것인가?

귀함이 없어야 마음이 편하리라.

 

불순보살찬(不眴菩薩讚)

 

사랑으로 4()을 낳으니

연못은 세상 길의 영원함에 비교된다.

 

살펴서 얻지 못하고

공덕은 만물을 만물 그 자체로 고요하게 한다.

 

어떻게 고요한 틈 속에서

고요한 지혜는 신묘한 이삭을 가렸는가?

자취를 끊어 영제(靈梯)에 옮기니

있고 없음에 치달리지 않는다네.

불순보살이 현화(玄和)를 그윽케 하나

그 마음은 둘이 아닌 경계에 노닐었네.

 

선숙보살찬(善宿菩薩讚)

 

신묘함을 체득하면 깨달음조차 잊을진대

생각으로야 이치를 다하지 못한다네.

()을 가져다 허공에 내던지니

메아리가 낭랑하여 수레를 따라 이동하네.

 

5()에 맡겨 명계(冥界)를 유람하니

어둠이 다하면 그림자 자취도 사라진다네.

3()를 모두 힘써 구하나

선숙보살만 홀로 깊이 사라졌네.

 

선다보살찬(善多菩薩讚)

 

 

큰 것이 작은 이를 넘으니

작은 것이 큰 이를 욕한다네.

대도(大道)라 이르는 것은

마음을 형체와 이름 밖으로 보내는 것이네.

 

가난하고 넉넉함을 끊어 내어 모두 잊으니

말없이 스스로 그윽히 터득하네.

선다보살 그 바탕이 아득할지니

높은 뜻에 통하여 편안하다네.

 

수립보살찬(首立菩薩讚)

 

수고로움도 수고 아님에 연유하니

감응(感應)은 헤아릴 바 아니리.

근심에 즐거움도 모르는데

만물을 형통해도 내 일 아니리.

 

모습을 섞어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에 같이하니

그 마음 뉘라서 따르리.

좋은 법회 이치를 깊이 말하나

수립보살이라야 이를 체득하리라.

 

월광동자찬(月光童子讚)

 

영묘한 동자 신묘한 이치에 편안하니

편안하여 저절로 주고받음도 잊는다.

넓은 법도로 속인의 어리석음 근심하니

그 몸을 통틀어 월광(月光)이라 부르네.

 

마음은 양의(兩儀)의 온()으로 삼고서

자취는 유익(流溺)의 다리로 삼는다.

뛰어난 자태 건축(乾竺:천축)에서도 빼어난데

그 이름 적현(赤縣) 고을까지 알려졌네.

 

신화(神化)로 세속에 얽매임 꾸짖으며

현라(玄羅)로 유방(遊方)에 이른다.

바위 언덕마다 병고가 심해지기에

멀리 달려와 옥당(玉堂)에 행차할지니

 

물을 대어 주되 유대(有待)를 일으키고

명계(冥界)로 돌이키되 장소가 다하지 않노라.

날개를 휘저어 높은 산자락에 깃들이고

매서운 바람으로 기이한 향기를 실어 보내네.

 

2) 불영명(佛影銘) 진 사문 석혜원(釋慧遠)

불영(佛影)은 서역 나가하라국(那伽訶羅國) 남산(南山) 고선석굴(古仙石窟)에 있다. 유사(流沙)를 거쳐 경도(徑道)로 접어드니, 여기서 15850리이다. 세간에 감응하는 일이 전기(前記)에 상세하게 나온다.

근습(近習)에 집착하면 세상에 희유한 말씀에 통하지 못하고, 상도(常道)만 종일 매만지면 만물 바깥의 감응을 새기지 못한다. 이리하여 속진(俗塵)의 생각으로 현금(玄襟)을 다스리고 천라(天羅)로 신려(神慮)를 거두어들인다. 만약 이처럼 생을 다한다면 어찌 이 삶을 만나겠는가? 이렇게 마음으로 희구하더라도 기약하지 못한다.

마침내 분한 마음을 일으켜 잠자는 것도 잊고, 백 갈래로 마음을 써서 개탄한다. 깊은 밤에 고요히 생각하며

 

마음으로 그 이치를 터득한다. 이리하여 은혜가 9()의 은혜에 넘쳐나 무연(無緣)의 자비를 세 번 되풀이하며 묘함은 법신의 감응을 찾아 말없이 교화를 주재한다. 교화는 그것으로 규정되지 않고 단지 느껴지는 것이다. 자비 또한 그것으로 규정되지 않고 단지 인연에 의한 것이다. 깊이 마음속으로 스스로 얻는다. 비유하자면 일월이 하늘에 빛나서 그 빛과 그림자가 뚜렷이 비치는 것과 같다. 군품(群品)이 이를 영예롭게 여겨서 유정(有情)이 다 같이 따르며, 모두 자기에게 현영(懸映)이 있음을 즐거워하며, 곡성(曲成)이 맡겨지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오묘한 사물에 대한 말도 공()이 여기에서 다한다.

유명(幽明)의 지극함을 따르고자 하면, 그 도를 말하더라도 있는 듯 없는 듯하기 때문에 말로써 논하지 못한다. 어떻게 이를 증명하는가 하면, 법신(法身)이 만물을 운용하는 것은 그 사물을 가리지 않고 단서만 조짐하며, 끝을 도모하지 않고 그 성취를 이룬다. 이치는 만화(萬化)의 바깥에서 그윽하고, 헤아림은 무형(無形)과 무명(無名)에서 다하였으니, 만약 통발에 의지한다고 말하더라도, 실로 도()가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예전의 자취를 숨기어 기틀을 높이기도 하셨고, 혹 생도(生塗)를 드러내어 바탕을 정하기도 하셨고, 혹 찾아보지 못하는 경계에서 홀로 발명하기도 하셨고, 혹 기유(旣有)의 장소에서 서로 마주하기도 하셨다. 홀로 발명하는 것은 형체에 비기고, 서로 마주하는 것은 그림자에 견준다.

명기(冥寄)를 추론해 보면 유대(有待)이겠는가, 무대(無待)이겠는가? 스스로 살펴보면 사이가 없는 곳에 사이가 있어서 법신(法身)을 구하되 원래는 2()이 없다. 그 형체와 그림자의 나누어짐을 어느 누가 정하겠는가?

지금 도를 배우는 이가 모두들 광대(曠代)의 바깥에서 성스러운 바탕을 본받으나, 신령한 감응이 이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헛되이 원화(圓化)의 형체 없음만 터득하고자 하니, 나아가고 머무름에 그 자취만 정하는 것이 어찌 그릇되지 않겠는가?

혜원이 예전에 선사(先師)를 찾아가 수년간을 받들어 모셨는데, 자비로운 훈계에 계몽하여 현적(玄籍)에 뜻을 두었을지라도, 매번 기적을 전해 듣고서야 뜻을 돈독히 하였다. 서역(西域)의 사문을 만나서 유방(遊方)의 말씀을 틈틈이 듣고 나서야 불영(佛影)이 있는 것을 알았으나 전하는 자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였다.

 

산중에서 계빈국(罽賓國)의 선사와 남국(南國) 율학(律學)의 도사(道士)를 만나 보니, 예전에 들은 바와 똑같은 데다 아울러 그 사람이 여러 곳을 유람할 때 지나갔던 곳이다. 이리하여 상세히 물어 보니, 대부분 예전에 전해 들었던 것과 들어맞았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신도(神道)에 처소가 없어서 형상에 마주하고 의탁하여 백 갈래 생각이 회통(會通)하더라도 한순간에 감득하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이로써 그 참다움을 투철하게 깨달아 그 믿음을 독실히 하여 장차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모아 참다운 이치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므로 기쁘게 따르는 현자들과 더불어 이에 탱화를 그리고 명문(銘文)을 짓는 바이다.

 

[1]

크도다. 대상(大像)이여,

그 이치 그윽하여 이름조차 없구나.

신묘하게 체득하여 교화로 거두었다.

 

그림자 떨구고 모습조차 여의며

겹겹의 바위에서 광채를 돌이키니

비어있는 정자에 빛이 응결하네.

 

()에 있어도 어둡지 않고

어둠에 처해도 도리어 밝으니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하는구나.

 

백령(百靈)을 조종(朝宗)으로 섬기며

처소마다 달리 감응하되

자취가 끊어져 아득하구나.

 

 

[2]

황량한 우내(宇內)는 아득할지니

권장(勸獎)도 장려(獎勵)도 아예 없구나.

허무를 말하며 모습을 그리니

공허(空虛)를 휘저어 모양을 전한다.

 

상호(相好)를 갖춰서 미묘법(微妙法)을 체득하니

충만한 그 모습 저절로 드러나네.

백호(白毫)가 휘황하게 빛나니

캄캄한 밤중조차 밝아지네.

 

정성에 감득하여 응현(應現)이 있으니

간절히 두들겨야 대답이 있으리.

 

남기신 말씀 산의 굴 속에 두었으니

나루터 깨달으면 그윽한 상()이 주어지리.

어루만져 터득함이 있더라도

공덕이 예전부터 있지 않았던가?

 

[3]

발길을 되돌려 공경조차 잊을지니

생각도 말고 알려고도 말아라.

3()조차 그 빛을 거두니

삼라만상 한 가지 빛깔이어라.

 

뜰 같은 우주가 아늑하고 편안하니

돌아갈 길 헤아리지 말거라.

깨달음은 적정(寂靜)으로 이루고

힘으로 널리 떨칠 것이라.

지혜의 바람이 멀다 하나

티끌처럼 모아야 쉬게 되리.

그대가 그윽이 살피지 않으면

그 누가 저 끝까지 부채질하겠는가?

 

[4]

아득한 말씀이 저 멀리 퍼져

돌이켜 동쪽까지 굽어보고

기풍(氣風)을 기뻐하고 도리를 사모하며

계율을 우러러 법도를 깊이 하네.

 

터럭 끝까지 오묘함을 다하고

운용은 경소(輕素)를 통해 구하고

광채에 기탁하여 허무(虛無)에 엉기니

구름 사이로 빛이 나는구나.

 

자취는 참된 모습을 형상화하고

이치가 그 나아갈 뜻을 깊게 하며

기적을 일으켜 흉금을 열어 내고

상서로운 바람이 길을 인도하네.

 

맑은 기운이 추녀 끝에 감도니

어둠과 밝음 섞이어 새벽을 늦추네.

거울에 비춘 신묘한 모양새 흡사하니

옷자락에 기대어 진여(眞如)를 만나리라.

 

[5]

새겨 넣고 그려 넣어

애써서 다스리고 힘써서 구하니

마음을 가다듬어 똑바로 듣고서

네가 닦은 것을 살펴본다.

 

 

바라건대 이와 같은 신하의 길에

저와 같은 현류(玄流)를 비추니

마음을 영소(靈沼)에서 씻어 내어

화기(和氣)를 마시고 부드러움에 이르리.

 

()를 비추되 간략함에 응하여

지혜로써 털어 내어 두루하며

마음을 깊이 해서 그윽함에 기대네.

 

깊이 명탁(冥託)을 마음에 품고

밤에 신유(神遊)를 생각하네

목숨 마치는 것을 한 번 마주하면

백 가지 근심도 영구히 물러나리.

 

()나라 의희(義熙) 8년 임자년(壬子年) 51일 대중과 함께 이 불단(佛壇)을 세우고 불상을 본산(本山)에 이룩하였다. 정성을 다하였기에 비록 세간의 장인(匠人)이 조성하였더라도 그 공에 보탤 바가 없었다. 세차(歲次)의 성기(星紀)에 이르러 적분약(赤奮若)28)을 태음의 허()로 바로잡고 마침내 93일에 별기(別記)를 상세히 검토하여 돌에다 새겼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정성(精誠)을 다하여 도속(道俗)이 즐거이 감득하였으니, 그 남기신 자취에 모두들 기뻐하였다. 마침내 마음속으로 근본에 응현(應現)하여 일이 고된 것조차도 잊었다. 이 때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揮翰] 빈객들이 함께 읊조리며 원유(遠猷)를 기리면서 전해지는 기적을 그림으로 새겼으니, 많은 현자가 모여 그 자취를 다시 새로이 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이 대통(大通)의 법회에 운집했던 것은 진실로 이치상 기대하는 바가 아니었다. 오래도록 마음속으로 멀리 안타까워하면서 저 신국(神國)의 경계를 넘어섰다.

 

(1) 진양양장육금상찬서(晋襄陽丈六金像讚序)

석화상(釋和上)이 장육상(丈六像)을 세우는 것으로 인하여 쓴다. 예전에 중우(衆祐)29)께서 강령(降靈)하시어 천축에서 태어나셨다. 왕궁에 의탁하여 상국(上國)에서 일어나 자취를 중명(重冥)에 드러내어 신로(神路)를 여셨으니 우주가 휘황하고 대천세계(大千世界)에 빛이 가득하였다. 만 갈래 흐름의 근원을 밝히고자 두루두루 비추되 주재(主宰)가 없이 하셨다.

깨달음의 도가 이미 텅 비게 응결하시어 고요한 광명을 드리우셨는데, 마침내 변화를 타시고 만물을 움직이시자 온갖 삿된 것도 그 마음을 바꾸었으며, 신령스러운 걸음을 내디디시어 시절에 감응하시자, 여러 가지 의혹이 다 같이 풀어졌다. 법륜(法輪)을 그윽이 움직이시고 3()을 나란히 굴리셨으니, ()가 세상에서 교대로 일어나 하늘이나 사람이 늘 꿈꾸던 바가 되었다. 맑은 소리 울리매 빼어난 메아리가 멀리 퍼졌고, 따스한

 

바람이 크게 불자 멀리서도 선법(善法)의 가르침이 생겨났다.

말년에 천사(千祀)를 내리고 다만 대화(大化)를 기뻐하였는데, 이로써 운수가 그 만남을 어긋나게 하여 나루터를 두드리는 사문도 깊고 심원함을 발명하는 것을 얻지 못하였다. 망량(魍魎)의 신비한 그림자는 지극한 말씀을 먹는다. 비록 흔쾌히 여진(餘塵)을 맛보더라도 도풍(道風)이 멀리 떠나가매 거룩한 행보를 디뎌보나 그윽한 자취는 아득하기만 하였다. 매번 해를 생각하면, 그 흡사한 자태가 눈에 어른거려 자나 깨나 가슴 속에 맺혀 있었다. 만약 그 형태를 마음의 눈으로 그린다면, 명응(冥應)30)의 기약이 있어도 유정(幽情)을 발함이 없었다. 이를 한탄하고 스스로 슬퍼하며 그 의탁하지 못함을 속상해 하였다. 멀리 백 가지 생각에 이르러 공경하고 사모하는 생각을 신중히 하며 8()과 뜻을 같이하는 감회(感悔)를 추술하였다. ()은 꿈속에서 마주하고, ()은 그 가운데에서 깨닫게 되었다. 드디어 문인(門人)에게 명하여 성상(聖像)을 주조하도록 하였다.

비록 형체와 이치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가는 길에도 점차(漸次)가 있다. 정밀하고 조잡한 것이 정말로 다르지만 깨달음에는 모두 인()이 있는 법이다. 이에 신령한 규범을 본떠서 수진(殊津)의 마음을 열고 그 자태를 신묘하게 본떠서 백려(百慮)의 회()를 열며 먼 곳을 생각하는 자로 하여금 후엽(後葉)에 현근(玄根)을 조짐하게 하셨고 가까이 따르는 이에게는 중겁(重劫)의 두터운 인연을 만나게 하셨다. 이로써 도와 복이 함께 넓어져서 참다운 자취를 따르게 되었다. 세 갈래 근원도 그 흐름을 돌이킨다면 아홉의 신()과 그 연원이 같게 되었다. 이때에야 사부대중이 기뻐하며 도()와 속()이 고르게 나아가게 되어 그 자취가 조화로워서 응하는 자가 수풀과 같았다.

다 함께 성상을 주조하여 허실(虛實)에 봉안하였다. 이로써 조력하는 이는 추호도 주저하지 않았고, 권선(勸善)하는 이는 오랫동안 근면하였으며, 힘쓰는 이는 저녁 무렵까지 수고를 다하여도 피곤함을 말하지 않았다. 물사(物事)마다 그 능한 것을 맡기니 하루를 넘지 않고 이뤘으니, ()이 사람의 일에서 비롯되었어도 마치 하늘이 이룩하는 듯하였다.

뜻을 밝히자면 사()만한 것이 없고, 덕을 넓히자면 송()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뜻을 사로써 드러내어야 공업(功業)을 남길 수 있으며, 덕은 송으로 펴야만 그 모습을 그릴 수 있으니, 사가 아니고 송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이를 아름답게 하겠는가? 그래서 다음과 같이 송()을 짓는다.

 

위대하신 천인사(天人師).

밝고 밝으신 원도(遠度).

중생을 넘어서 우뚝하시니

 

먼저 온전히 깨우치셨구나.

 

은혜는 허무(虛無)를 기뻐함에 있으니

오묘하여 헤아리지도 못하는구나.

시절에 감()하여 일어나고

세상에 응()하여 권장한다.

 

금빛 용안(容顔)으로 비추임을 발하고

거룩한 상호(相好)는 빛나게 드리웠네.

신령한 자태가 정중하시고

신묘한 행보는 거룩하시구나.

 

만물을 고요히 이루시되

그윽하게 부려서 아득히 다니시네.

위대하다, 석가시여!

더불어 개화(開化)하여 가시는구나.

고요함이 깊다 깊어 고즈넉하니

움직이면 하늘마저 따르고

면면히 멀리까지 다스리시니

아름답게 오래도록 길들이시네.

 

종지(宗旨)를 돌이키면 모양도 없으니

빛살도 숨어서 그림자 여의네.

천 년간 우러러 기렸으니

이같이 견주어 이같이 본받을지라.

 

(2) 문수상찬(文殊像讚) 은진안(殷晋安)

 

문수보살 지혜가 깊으시니

정법(正法)을 드러내되 말씀이 없으시구나.

현리(玄理)를 찾으매 큰 광명을 놓으시니

()에 오르시니 그 뜻마저 뛰어나시네.

3()이 밝고 밝아서

그 밝기가 햇빛 같구나.

신통(神通)이 그윽하여

이에 신변(神變)하시니 바로 저 모습이로다.

 

항하사(恒河沙)처럼 광대하여

군생(群生)을 보살피시네.

참다운 기풍을 그윽이 가려서

천사(千祀)에 신령함이 가득하구나.

 

생각으로 밝은 도리 그리매

잠꼬대에도 정성이 깃들인다.

속진(俗塵)을 끊으시고 외로이 머무시니

생각마다 태명(太冥)을 기도하노라.

 

(3) 문수상찬(文殊像讚)과 서문[幷序]

문수사리(文殊師利)는 방토(方土)를 다니시는 보살이시다. 진구(塵垢)를 여의는 말로 인하여 있게 된다. 이로부터 그 명호가 먼저 된 것은 아니다. 저 칭호가 생겨남을 근본으로 하여 지극한 도가 그 모습을 일으켰다. 마음을 비우고 겸허하게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는[虛引] 성품이 5()에서 드러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을 따르는 표준은 동진(童眞:沙彌)에게 전해 듣고 세속을 삼가는 기풍을 옮길 때는 때를 느끼는 가르침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유수(濡首:文殊)라 이르기도 하다가, 다시 법왕자(法王子)로서 그 이름을 삼기도 한다.

그윽한 이치를 다하려는 이는 반드시 깊고 큰 자취를 남겨야 하는데, 옛날은 아득히 머니 어찌 언상(言像)의 지극한 바가 되겠는가? 셀 수 없는 겁의 공()은 쌓인 티끌보다도 높고 아득하게 멀고 텅 비어 있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대략 그 계통을 서술하기를 청한다.

만약 사람이 처음 나오게 되면 제주(帝冑)로부터 법왕(法王)이라 높여 부르게 되어 무상(無上)의 마음이

 

독오(獨悟)에 조짐하여 발중(發中)의 감응이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다. 정각(正覺)을 한 번 가까이 만나게 되자 영주(靈珠)가 안으로 비치어 하늘의 해가 지지 않는 사이에 도위(道位)에 뛰어 오르게 되었다. 마침내 깊은 뿌리가 영원히 땅 속에 서려 가지를 드리우자 신비로운 줄기가 다 함께 무성해지고, 자비의 기운이 은혜로운 바람과 더불어 불어왔다. 3()의 밝음은 일월과 더불어 나란히 빛나니 바탕을 갖춘 바가 미묘하기에 참으로 그 공덕은 법신(法身)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처럼 천기(天機)가 운전하되 신통(神通)으로 집을 삼고, 원응(圓應)이 밀회(密會)하되 빠르지 않은 것으로 그림자의 자취를 삼았다. 이것이 바로 움직이되 적멸(寂滅)을 여의지 않고 우주에 충만한 이유로써, 홀연히 무상(無常)의 경계에서 이름이 유방(遊方)에서 으뜸이 되는 소치이다.

세존께서 나오시자 약진(躍進)하는 밝음을 이끌어 잠덕(潛德)을 향림(香林)에다 드러내자, 경사스러운 구름이 서쪽으로 몰려오는 것으로 인하여 다시 이 절에 용이 나타났다. 법륜(法輪)이 다시 굴려지니 그윽한 말씀이 계속 울려 퍼졌다.

그윽한 밝음에 짝하여 연원도 지극하니 깊은 말씀을 발하면서 도()를 개사(開士)에게 비추었기에 모든 부처님께서 이를 칭송하시며 아름답게 여기셨다. 그 바탕이 속진(俗塵)을 끊었기 때문에 갓끈을 씻는[濯纓]31) 자는 그 자취를 높였으니, 천화(天和)를 합하여 빼어나게 만들며 충기(沖氣)를 마시어 혼령으로 삼고 중소(重霄)32)를 펼치어 그늘을 거두며 덕음(德音)의 말씀을 메아리처럼 울려 퍼트린 것이 아니라면, 뉘라서 이에 비기겠는가?

장차 군생(群生)의 본성을 흔들고 지유(至柔)의 주인으로 거처하고자 한다면 한 삼태기 보태어 공을 이루고서 그 기틀을 넓게 열어 내어 항사(恒沙)를 넓히어 집으로 삼는다. 만약 그렇게 하고서 문수의 기풍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무궁의 양()에는 이르지 못하고 오래도록 방촌(方寸)의 고요함 속에서 미소 지을 것이다.

세존께서 가신 지 거의 천사(千祀)라 이르는데, 빛을 비추어 그늘을 거두는 것은 다시 시절과 더불어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이로써 지극한 종지를 깊이 마음속에 품는 자는 장진(長津)의 근원을 잃는 것을 슬퍼하였고, 바람과 해가 잠잠해지고 저무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리하여 다 함께 금석(金石)으로 표현해 내었고, 글로써 계속하여 칭송하려는 바이다.

범부의 못난 생각이

 

저절로 다하여야 모든 구름과 이슬의 윤택함을 늘리게 되는데, 지금 만나는 바는 대체로 그 수명이 백 년이나 줄어들었다. 전륜왕이 염부제(閻浮提)에서 왕이 되어 아육(阿育)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빼어난 법도를 우러르며 성상(聖像)을 이룩하였다. 비록 진재(眞宰)가 형태에 남겨지지 않더라도, 마치 영위(靈位)에 주인이 있는 듯하다. 비록 유사(幽司)는 마음으로 구하지 않더라도 감응이 여기에 이른다.

신변(神變)의 기적이 누차 백성들의 청()을 바꾸었으니 험난함으로 인하여 때를 깨달아 믿음이 저절로 오게 된다. 마음으로 쇠한 운()을 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로 명유(冥維)의 공에 연유하여 어둡고 피폐해지는 세속을 형통케 할 것이니, 이는 한 가지 이치만으로 넓혀질 바가 아니다.

이로써 탁상(託想)의 현자가 공경과 정성을 다 바쳐 장차 끊어진 실마리를 이을 것을 생각하며 터럭 끝만큼의 마음이라도 끌어내어 그 자리를 나타낼 것이다. 멀리 원장(元匠)을 모방하여 하늘이 본뜨는 대로 성상을 새겼다. 감득(感得)하여 마음으로부터 깨닫는 것이 아니라도 즐거이 이 같은 경사를 함께 노래하는 바이다.

 

아득한 동진(童眞)이여,

어리거나 늙거나[弱齡] 어리석은 이 깨우치시네.

꽃부리를 머금고 이삭을 토해내시니

현리(玄理)에 올라 봉우리를 밝는구나.

 

마음은 도리의 임금이시나

바탕은 텅 비어 있구나.

 

물결 따라 유방(遊方)을 교화하시니

높으신 발자취를 따라서

빛을 뿌려 비추니

이 나라에까지 이르셨네.

 

생각하여 연장(淵匠)에 마주하고

하나로 다스려 공경을 더할세라.

겸허한 마음으로 아주 오래도록

일체를 떨구어 진구(塵垢)를 막는다네.

 

3) 불법명찬(佛法銘讚)

 

(1) 불영명과 서문(佛影銘[幷序]) 사령운(謝靈運)

대자대비로 만물을 넓히는 것은 감득에 기인하여 접하는 바이다. 만물을 접하는 연()은 그 단서가 하나만이 아니기에 그 형체로써 따지기 어려우나, 이치로써 헤아리기는 도리어 쉽다. 그러므로 경전마다 모두 실려 있으며 기론(記論)마다 드러나 있다. 비록 구덩이 속에 숨겨진 배[舟壑]33)가 다하더라도 상법(像法)이 아직 남아 있으니, 운수에 감득하는 기풍은 일월보다 깊다.

법현(法顯)도인34)께서 기원(祇洹)에서 돌아오시어 불영(佛影)을 세세히 설명하시고 두루 신령스러운 기적을 행하셨다. 바위와 암벽에 아로새겨진 것이 마치 형체가 남아 있는 듯한데, 위의(威儀)가 단정한데다 상호마저 구족하시니, 그 자초지종은 알지 못하나 늘 고요히 계시는 듯하다. 여산(廬山) 법사께서 그 기풍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유실(幽室)에서 따라 기뻐하며 빈 바위를 상세히 고찰하고, 북쪽으로는 준령에 기대고 남쪽으로 표간(滮澗)을 비추며 그 남긴 형체를 모사하여 청채(靑彩)에 의탁하였는데, 어찌 그 모양을 본뜨되 돈독히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지극한 마음으로 이를 전한다.

도병(道秉)도인이 멀리 그 이치를 선양하며 나에게 명문(銘文)을 지어 판각(判刻)에 충당하라고 당부하였다. 석명(石銘)이 시작된 것은 참으로 공()이 퍼지게 되는 것에 연유하는 것이지 도가 숭대(崇大)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비유가 어찌 천박한 생각과 얕은 공부로 펼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일이 끝나고 나면 오래도록 돌아봐도 끝이 없다. 용렬하나마 힘을 다하고자 하여 마음으로 수락하였는데, 미묘한 도와 그윽한 이치는 만에 하나도 적지를 못하였다. 참으로 정성스런 마음만을 모으면 군물(群物)을 감득하니, 나는 솔개라도 목소리를 바꿀 기약이 있으며, 천제(闡提)35)일지라도 스스로를 건지는 방도를 얻었다.

마땅히 정토(淨土)를 찾아가고자 하면, 저 도량을 면대하여야 하리니, 성인이 나를 속이지 않으시기에 과보를 이루려면 반드시 보응(報應)하게 되리라. 이윽고 붓을 들어 글을 이어가면서도 마음속으로 탄식만이 앞선다.

 

군생(群生)은 물들어짐으로 인하여

6()에 얽매이고

7()이 번갈아 쓰이며

9()가 첩첩이 이어진다.

 

다하였구나! 5()이여,

거두었구나! 4()이여,

두루 돌고 돌아

()의 뿌리에 감겨 나아가지 못하는구나.

 

휘감겨 끝없이 나아가지 못하고

돌고 도는 것이 자기에게 있으니

4()의 구름이 엷게 덮이고

5음의 불길이 치솟는다.

 

아름다고 훌륭한 정각(正覺)

지극하게 형통한지라

움직여도 적멸(寂滅)을 상하지 않고

행하여도 그침에 어그러지지 않네.

 

너의 긴 꿈을 깨우고

너의 깊은 치우침을 바르게 하며

나의 신명(神明)으로

너의 영묘한 지혜를 이루리라.

 

나에게는 자아(自我)가 없어서

참답게 그 의리를 이었네.

너에게는 너[自爾]가 없어서

반드시 그 거짓을 떨쳐 버렸다.

 

거짓은 이미 여러 가락이며

의리도 여러 갈래이다.

소리로 인하여 운()을 이루었고

()에 나아가 얼굴을 연다.

 

그림자를 바라보면 역()을 아니

소리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구나.

형체나 소리의 바깥에서

다시 살필 수 있네.

 

멀리 보며 상()을 나타내고

가까이에서는 빛을 가리며

바탕이 되는 것도 아니고 공()한 것도 아니니

헤아리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바위처럼 우뚝하고 수풀처럼 빛나니

못에 다가가서 우물에 비춰보며

 

()을 빌려 비취색을 전하니

밝게 빛을 발하셨네.

 

금빛 상호(相好) 아득한데

저 백호상(白毫相) 그윽하기도 해라.

해와 달이 그곳에 있는데

어찌 이를 탄식하리오?

 

일찍이 스님들을 바라보며

정성을 다하여 마주 대할 것을 기다리네.

그 기풍 받들어 법칙을 남겨야 하니

탁 트인 듯이 하도 넓어 탄식만 나온다.

 

공경스럽게 남긴 자취를 꾀하고

드높은 봉우리에 막힌 길 뚫네.

집집마다 이르게 하리.

방안마다 그윽케 하리.

 

물결이 일렁이며 섬돌 위를 비추고

달빛 끌어다 창문을 비추며

구름 흐르다 봉우리에 걸리고

바람 불어 솔잎에 스치네.

 

지세(地勢)가 아름답고

상형(像形) 또한 돈독하니

엷게 색을 입히고

여러 사물을 바라보며 깊이 깨우치네.

 

멸한 듯 없는 듯

본뜬 듯 배운 듯

그 깨끗하고 고요한 것으로 인하여

영혼의 독존(獨存)을 감득할 수 있네

 

성실하게 하여 미쁘다고 하며

은혜 또한 계속 이어지니

! 도를 생각하고

삼가하여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지 말라.

 

약상(弱喪)36)을 추천하고

천제(闡提)를 부리시네.

돌아가는 길 이제야 보니

어리석은 이 깨우쳐 여기에서 만나네.

 

그 마음을 채찍질하여도

세월은 끝없이 흐르는구나.

영혼의 집에 가르침 내려서

석장(錫杖)을 휘두르며 공경스럽게 타이르노라.

 

(2) 불찬(佛讚)

광록대부(光祿大夫) 범태(范泰)가 칙명을 받들어 짓다.

세밀하고 거친 것이 일마다 다르나

시초와 종말은 이치로써 통한다.

일을 버리고 이치로 나아가면

밝음으로 나아가 어리석음을 떨쳐버리네.

 

오로지 이 영각(靈覺)

마음으로 우러러보며

4()은 중생을 구제하고

6()는 자기에게 있구나.

 

밝게 저침(儲寢)37)을 깨우니

누가 교화의 시초가 되는가?

저녁에 쌍수에서 멸도하시니

어떻게 본래의 무()로 돌아가셨겠는가?

 

아득하게 멀리 있는 신()

멀리서 편안한 듯하며

다시 올 기약을 말하기 원하여

이 윤서(淪湑)를 면한다.

 

(3) 범특진서(范特進書: 범태가 사령운에게 보내는 편지)

경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예로부터 높은 선비를 둘러볼 것 같으면, 대부분 유정(有情)의 부류이므로 저 역시 경을 동반으로 여기는데, 어찌 소원하게 지나쳐 그대로 외로이 멀리할 수 있습니까? 제가 옛 정만 간직한 채로 동쪽을 쳐다보며 한탄하는 처지나, 형편이 바로 달려가지 못합니다. 치공(熾公)을 천백(阡陌)으로 보는 것은 마치 경이 스님을 산에 거처하게 하는 이유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진실로 이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세월이 무척 빨리 변하나 편안하지는 못합니다.

 

지팡이를 짚고 군()으로 가는 것은 좋은 일이나 기원(祇洹) 가운데에는 도리어 기이한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복업(福業)의 깊은 연()이 눈앞에 삼삼하나, 그 모습을 보더라도 다른 이에게 일러 줄 수가 없습니다. 말을 듣고 깨닫는 것이 또한 어렵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의 말은 번잡할 뿐입니다. 이만 붓을 놓습니다.

범태(范泰) 제가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기원정사 불탑의 찬시(讚詩)는 이미 치공(熾公)께서 일러 주신 대로 마음을 다소나마 비우고 지었습니다. 참으로 도반과 함께 노래하여야 옳다고 하겠습니다.

 

(4) 답범특진서송불찬(答范特進書送佛讚: 범태가 편지와 함께 불찬을 보낸 것에 대한 답서)

늦추위에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늘그막에 마음만 앞서나 생각을 내더라도 다리가 따라주지 못하니, 금년 봄부터 갈수록 우환만 더해집니다. 옛정을 생각하여 편지를 이같이 보내 주시니, 부디 기영(企詠)이 열매 맺어 기갈 면하기를 바랍니다. 산중에 있으니 한가로워 소식마저 끊어졌는데, 문득 여러 찬시(讚詩)를 보게 되니, 참으로 위안이 됩니다. 세속을 벗어난 가영(歌詠)이라 이를 만합니다. 가만히 세 번이나 새겨 보면서 음미할수록 감회가 깊어집니다.

봉화(奉和)38)하니 마치 이별한 듯합니다. 비록 말을 볼 수는 없지만 뜻은 여기에서 다하였습니다. 종제(從弟) 혜연(惠連)은 후진(後進)이지만 문장이 뛰어난 우리 가문의 제일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멀리 드러낼 수 있습니다. 기원(祇洹)의 법업을 이은 것이 날로 무성하니 따라서 기뻐함이 얼마나 지극하겠습니까? 6()39)의 아름다운 인연은 바라봐도 끊이지 않습니다. 때에 맞춰 짓기 시작한 초제(招題)40)는 산남(山南)에 있습니다. 남쪽 처마는 시냇가에 접해 있고 북쪽 창은 바위를 등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마음을 쉬니 더 이상 더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평생 아득히 종이를 앞에 두고 탄식만 합니다. 공경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합니다. 만약 또 그 쪽으로 가는 인편이 있으면 다시 안부를 묻겠습니다.

21일 사령운이 회답합니다.

 

(5) 화범광록기원상찬(和范光祿祇洹像讚[三首幷序]: 범태의 기원상찬에 화답함) 화범특진기원상찬(和范特進祇洹像讚: 범신과 함께 짓는 기원정사 성상의 찬시)

범후(范侯)가 멀리 성상의 찬시를 보내며 나에게 함께 시를 짓자고 하였습니다. 신도(神道)는 희미하여 속하는 것을 말하기를 원합니다. 순식간에 세 수의 시를 매듭지어 저 도량을 기약합니다.

 

 

불찬(佛讚)

이 대각(大覺)

마음속에 그려볼수록 영험하구나.

더러움을 다하여 지혜로 비추시니

헤아림이 지극하여 혜()가 밝으시다.

 

3()로 무아(無我)를 이루시고

한결같이 군생(群生)을 건지셨네.

이치는 심행(心行)으로 막히었고

도리는 모습과 소리로 끊기었네.

 

보살찬(菩薩讚)

누구라도 우러러 받들면

본성을 돌이켜 근심을 덜고

()으로 혜()를 길러서

이치에 따르도록 할지니

 

처음은 4무량(無量:四等)이지만

마침내는 10()이노라.

두루 구하기를 지극히 하면

바깥에서 모두 여의리.

 

 

연각성문합찬(緣覺聲聞合讚)

병고(病苦)를 꺼리는 마음은 많은데

만물(萬物)과 겸하는 마음은 적구나.

저 화성(化城)41)과 같이

방편으로 보배를 얻을지니

 

열반으로 꾀어내

너의 생로병사를 구제한다.

시작은 세 가지 수레[三車]42)이나

타는 것은 언제나 한 갈래 길목이다.

 

(6) 무량수송(無量壽頌) 사촌동생 혜련(惠連)에게 화답하다

 

법장(法藏)비구 왕궁에 오래 사시다

대도를 기리시어 국성(國城)을 나섰구나.

마흔여덟 가지 원력으로

군생을 구하고자 널리 서약하셨는데

 

정토(淨土)가 얼마나 묘하기에

오는 이마다 맑고 뛰어나다 하는가?

말년에 편안하게 살고 싶으면

아침부터 나서서 교화를 받들어야 하리라.

 

(7) 유마힐경중십비찬(維摩詰經中十譬讚) 8

 

물방울 모여 거품이 되다[聚沫泡合]

물의 성품 원래 방울지지 않는데

급한 물결 물방울 따라 모인다.

모양을 달리하나

흩트리면 텅 비어 없어진다.

 

군자가 근본을 안다면

어찌 일마다 수고롭게 주고 뺏겠는가?

어리석은 속인은 변화에 놀라기에

비켜서 태어나야 기쁘다 여긴다.

 

불꽃[]

성품의 안 모습과 겉모양을

불꽃 아니고서야 어찌 불을 알겠는가?

새롭게 새롭게 서로 변해가며

 

타오르는 것이 나를 향해서가 아니니

어찌 다른 사람에게 막혀서

평생토록 인과(因果)에 미혹되는가?

 

파초(芭蕉)

태어나는 갈래 원래가 많을지니

파초가 아는 것이 하나뿐이 아니며

꽃봉오리 피더라도 열매 맺지 않으니

꽃 피우되 무슨 열매 나오겠는가?

 

지혜로운 이는 비유(譬喩)를 잘하는데

주인 없이 부리는 이 누구인가?

가까운 인연이 때와 합치되지 않으니

흩어지는 날을 보아라.

 

허깨비[]

허깨비를 공들여 같게도 다르게도 만드니

어느 것이 참되고 거짓인가?

한결같이 떠나가는 사물을 따라 지나가니

이미 떠난 것 이를 게 무엇인가?

 

모르는 이 오래도록 가까이 하는 것을 의심하고

아는 이는 모두를 손님으로 여긴다.

만나고 헤어짐에 마음 쓰지 말라.

백 대()를 사는 사람 없으리.

 

[]

깨어나면 잠자느라 몰랐으나

잠을 자더라도 보지 않는 것이 없다.

마음 상태 밝고 밝은데

좋고 나쁨이 스치며 만 가지로 변화하네.

 

깨어나면 지난 일에 눈멀지니

지난 일이 아까워 미련 갖는다.

누가 사바(裟婆)가 다함을 보았는가?

어찌 적현(赤縣) 땅이 아니겠는가?

 

그림자와 메아리의 만남[影響合]

그림자와 메아리가 형체와 소리를 따르듯

만물에 기본을 두기 때문에 이치가 생긴다.

하루아침에 빠르게 털어내니

비슷할 게 무엇이려나?

군유(群有)라고 어찌 이렇지 않을까만

무식하여 자기(自己)라고 부르네.

네 가지 빛깔 오히려 근본이 없는데

여덟 가지 미묘(微妙)는 편안히 믿고자 한다.

 

뜬구름[浮雲]

물결 위에 달그림자 밝은데

초목이 무성한 남산에는 비 내리네.

변화를 마음대로 하여도

내 것으로 취하지 못하니

 

부질없이 바람에 흩어지는데

어찌 다시 주워 모으겠는가?

제법(諸法)에 아()가 없으니

무엇으로 아소(我所)에 연유하겠는가?

 

번개[]

 

번뜩이는 번개 지나가니 놀라고

보면서도 따를 수 없다.

늘 하는 물건도 생멸이 뒤따르는데

뉘라서 빠르고 늦음을 가리려나.

 

삼가하여 공념(空念)에 머물지 않게 하니

갑자기 신묘한 이치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여

자신을 발한다면 도를 믿기가 쉽고

()을 잊어버린다면 복을 길이 하리.

 

4) 불기서(佛記序[幷勅啓三首]) 심약(沈約)이 양나라 고조의 칙령을 받아 찬술함

조칙에서 작년에 우천(虞闡) 등에게 불기(佛記)를 찬술케 하고서 서문을 지어 보라 하였다. 서체(序體)가 아름답지 못하여 누차 고쳐 보았으나 여전히 미진함이 남아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3()에 인하여 법을 의탁하고, 2()에 의거하여 이치를 밝히며, 모양에 통달하여 종지를 구하고 집착하지 않고 도를 이룬다고 한다. 그 지귀(指歸)를 논하는 것도 여전히 지극하지 못한 것만 같다. 그러므로 이로써 서로를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도 한 갈래의 착한 일이라 할 것이니, 붓을 거두어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 일부로 조칙을 가리키지 않았으나, 우천(虞闡) 등이 서문을 맺었는데 말단이 서로 대동소이한 듯합니다고 일렀습니다.

이제 신 심약이 아룁니다.

불기의 서문을 지금 삼가 올립니다. 실로 문장과 이치에 취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삼가 엎드려 받들어 올리오니, 참으로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삼가 올립니다.”

조칙에서 불기의 서문이 참으로 볼 만하니, 지금 이를 비단에 베껴 써서 유포할 것을 명하노라고 일렀다.

서문은 아래와 같다.

만 갈래의 함령(含靈)은 문자로 다할 바가 아닌데, 어찌 만물이 태어나는 것을 티끌 쌓아 올리듯 헤아릴 수 있겠는가? 무리(無理)에서 시작하여 무생(無生)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비록 요지(要旨)가 있다 하나, 원시(原始) 이래로 얻어 듣지 못하였다. 스스로 신령하게 비추고 특별나게 통달하여 종극이 여기에 있지 않다면 그 이치에 기틀이 되는 시초가 막혔으니, 이를 뚫는 일마저 바로 끊어졌다. 참으로 사과(四果)조차 헤아리지 않는 것이 아니니, 10()는 엿보지도 못한다. 막막하여 아득하기만 한지라 있다 해도 따르는 바를 몰랐다.

그러나 여래께서 한 삼태기의 공을 온전히 하여 비로소 영생의 길에 오르셨다고 말씀하셨다. 적멸을 일으켜 돌리시고 열심히 정진하되 달리어 쉬지 않으셨다. 5()로 나고 죽는 대천세계(大千世界)마저도 털끝에다 견주고, 삼계(三界)로 가고 오는 아승기겁(阿僧祇劫)조차 멀다고 이르기에 부족하다. 밝은 관조(觀照)를 쌓아 한 생각도 그치지 않았으니, 마침내 생멸(生滅)을 여의고

 

묘과(妙果)를 증득하셨다. 참으로 공()과 유()를 함께 내치셨으니, 어찌 헛되이 제나라를 바꾸고 노나라를 변화시킨 것에 그치겠는가? 하늘은 넓고 구역은 비좁은데 그 같은 일을 무엇으로 이를 수 있겠는가? 지극한 사람은 자기라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문자의 이치를 귀히 여기겠는가?

대체로 만 가지 미혹이 서로 불어오기에 어둡고 밝음이 이어서 일어났으니, 반드시 업()을 연()에 빗대어 열어내어야 일마다 통달하게 된다. 한 마디 말씀을 발하시자 마음속으로 조아리지 않음이 없었고, 이치마다 만물을 따르니 움직이되 자기를 위함이 아니었다. 정법(正法)의 사자후(獅子吼)가 걸림 없이 맑게 울리자, 감로(甘露)가 용궁에 빛나게 서렸으니, 이치를 열어 가르침을 천명하셨다. 여기에 다다름에도 점차(漸次)가 있어서 녹원(鹿園)에서 사제(四諦)를 말씀하셨고, 사라쌍수(沙羅雙樹)에서 백비(百非)를 가리셨으며,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넓히셔서 1()의 큰 서쪽 복전(福田)을 넓히셨다. 길 잃고 헤매는 이들에게 갈 길을 찾아주고, 타향으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바를 깨우쳐 주셨으니, 어그러짐을 되돌리는 것도 그 갈래가 하나만이 아니었다. 백호광(白虎光)을 비추되 찰토(刹土)를 항사(恒沙)에 두루하시고, 일곱 걸음을 내딛으시며 용의 언덕을 막아 덮으셨다.

신도(神道)를 끝까지 미루어 심령(心靈)을 근본으로 하여 감득이 따라오고 무변(無邊)을 타넘는 것도 지척간이나, ()이 어그러진 것은 법성(法城)을 마주하고도 이를 보지 못한다. 상교(像敎)에서 말()을 이르고 경전과 논서가 동쪽으로 유포되는데 미쳐서 뜨거운 모래 길은 멀기만 하고 눈 덮인 산봉우리는 드높기만 하였다. 옆으로 적어 나가고 왼쪽으로 써나가는 글자가 수만 자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형통하였고, 잎사귀를 잘라 글을 이루어 다시 번역하여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 이래로 지금까지 천사(天祀)가 절반이나 지나서야 신령한 자취가 약간이나마 열려서 덕망 있는 스님들이 간간이 나오셨다.

율장(律藏)과 방등(方等)이 점차 지극하게 행해졌으나, 서쪽 나라에 쌓인 채로 이르지 못한 경전이 아직도 더 많다. 비록 상주(常住)하는 법신(法身)이 아득히 멀더라도, 2(二諦)3()가 참으로 깊고 넓은지라 대도를 깨우쳐 이치를 구하는 것은 이로써 족할 것이다. 능인(能仁)이 이와 같은 대성(大聖)을 본받으시니 이야말로 본사(本師)이시다.

오래도록 군품(群品)은 정령(精靈)에 매여 있었으나, 예전의 인()과 지나간 업()에 어두워 빠뜨린 것이 많았는데, 신화(神化)에 감응하여 대충이라도 서로 보게 되었으며, 또한 이름난 명문세족들의 후예들과 본국의 세속의 연()이 흩어지게 되었다. 중부(衆部)

 

갑자기 토론하기 어려워서 신묘한 공덕과 오묘한 위신력이 같이 나왔으나 이름마저 달리 하였는데, 태중에 드리워 대도를 구하는 것이 어찌 한 가지 상호에 그치겠는가?

가유라위(迦維羅衛)에 생을 의탁한 것도 원래 권도에 연유한 자취인데, 북문(北門)으로 나온 것은 정법을 깨닫는 시초가 아니다. 이윽고 동방에까지 두루 비췄으니, 어찌 그 교화의 지극함이 형통하지 못하다 하겠는가? 대도(大道)에 나아가신 이래로 49년간 묘하게 응현(應現)하신 일이 많았으니, 마땅히 거두어들여서 함께 경계를 이루었다. 경전과 불상 및 오래된 기록이나 경찰(境刹)의 유기(遺記)에 이르러서 그 권화(勸化)하시는 공덕이 이로써 더욱 원대해졌다.

대권(大權:보살)은 넓혀 몸을 없애므로써 만물을 구제하였고, 응진(應眞:나한)은 빛나는 큰 덕으로써 마음을 드러내시니 자신을 위함이 아니셨다. 자취가 나뉘어 혹 다르더라도 끝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같았기에 그 신묘한 갈래가 서로 어긋나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참으로 신령하고 기이함이 이처럼 우뚝하였기에 이로써 말조차 끊어졌다.

도징(圖澄:불도징) 스님이 오자 용상(龍象)이 조나라와 위나라에 나타나고, 나집(羅什) 스님이 오자 봉황이 관보(關輔)에 모였으며, 건타(犍陀:犍陀勒)는 가까이 경락(京洛)에서 노닐고, 단개(單開:單道開)는 저 멀리 나부(羅浮)에까지 이르렀다. 비록 그 자취를 세속과 같이 하였다 하나, 감히 깊은 뜻을 엿보기도 어렵다. 길은 옥문(玉門)43)을 나왔으니 법좌(法座)가 여기서 멀지 않다. 7()9()가 눈에 새로운데, 신령한 감응마저 허다하니 그 은택이 서쪽에 내려졌다. 울창한 광경이 천산(天山)의 바깥에 드러나니, 덕망 있는 스님들이 매번 이를 거쳐 지나왔기에 신묘한 자취가 빛나 모두 문주(文注)가 있게 되었다. 황폐한 것이 번창하자 잡스러운 것조차 함께 생겨나게 되었으니, 실로 가지런하게 가꿔야만 한다.

5()를 인간과 천상에서 나누고, 중뢰(中牢)를 두터운 땅에 설치하여 각각 업력(業力)에 따라 적확하게 하여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이 모두 진도(眞道)와 세속(世俗)을 단속하였으니, 그 이름과 모양이 시종일관 올곧은지라, 거룩한 갈래가 아득하여 원대하기에 바로 도량으로 나아갔다. 이를 징험하고 깨닫고서 소인이 친근하도록 다듬었는지라 만학(晩學)까지도 개화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 함께 건네주는 방주(方舟)이며, 큰 자비의 넓은 길잡이라고 하겠다. 비록 다시 지혜로 시육(視肉)44)을 혼란시키고 형체로 척수(尺棰)를 다하더라도 그 움직임에 연하여 반드시 응하는 법인데, 어찌 이곳에 나아가는 사람이겠는가? 이로써 지극한 성인이 은근하게 매번 훌륭한 인재를 끌어들이고 문자로 드리워 뜻을 보이며

 

미래에 그것을 전하였다.

황제는 행()으로 무시(無始)를 이루고 도()를 광겁(曠劫)으로 계승하였다. 열 가지 명호를 그 몸에 간직하고 3()에 막힘이 없었다. 이 묘유(妙有)에 몸을 굽혀서 이 같은 전륜(轉輪)에 참여하여 미혹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오래도록 정도에 미혹하였다. 이를 기리지 못하는 무리들이 헛된 마음으로 미신이나 우러르고, 갈래를 다듬는답시고 골똘히 생각하더라도, 그 같은 일로는 한 가지도 거두기 어렵다. 뜻을 가벼이 하면서 업()에 힘쓸지라도 진전이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저와 같이 네거리를 넓혀 주더라도, 화택(火宅)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리하여 중서시랑(中書侍郞) 우천(虞闡), 태자세마(太子洗馬) 유개(劉漑), 후군기실(後軍記室) 주사(周捨)에게 조칙을 내려 널리 경장(經藏)을 수색하고 주설(註說)을 채집하되, 조목을 달리하고 유파를 나눠서 부류에 따라 편집하도록 하여 단시일에 큰 공을 이루었다. 이것을 비유할 수 있게 되어 마침내 불기(佛記)라 하였다. 대략 30편인데, 그 감응하는 부류에 따라 사건의 종류가 비슷하면, 단지 그 한 가지만 취하는 데 그치고 여타의 기록은 취하지 않았다. 혹 나중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일 같은 진부한 기록들은 경전에서도 보이나, 그 같은 일이 실로 막막하여 사실을 징험할 만한 근거가 없는 것은 모두 싣지 않고 똑같이 의심되는 것을 없앴다. 또 사람들의 소문에 의하거나 생각에 의탁하여 현몽(現夢)한 일들은 더욱이 신뢰하기 어렵기에 한결같이 수록하지 않았다.

만약 저 멀리 나아가고자 하면 반드시 멀리 따르는 바를 기록해야 하고, 도를 깨닫고자 하면 반드시 근본으로 삼을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그 문호를 얻어 말씀하신 이치를 몸소 이어갈 수 있다. 그 길을 알지 못하고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하면서 눈 가리고 어두운 길을 찾아가 저절로 이치에 부합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저와 같은 온갖 흐름을 끌어다가 한 가지 근원으로 돌이키되, 만약 수많은 함식(含識:중생)들에게 길을 바라보게 하고 갈 곳을 알게 하며 지시(砥矢)45)를 살펴 돌아갈 곳을 말하게 한다면 갈림길에서 머뭇거리지 않게 될 것이다. 참으로 청렴하고 깨끗한 선비들조차 이 같은 경구에서 취할 바가 있으리라.

 

5) 불상서집(佛像瑞集) 당나라 종남산 석씨(釋氏)

부처님의 교화는 삼천대천세계를 영역으로 삼지만 가깝게 작은 식견으로는 또한 남주(南洲)에 국한된다. 이것은 통틀어 계산해보면 신주(神州)가 모두 성교(聲敎)를 덮어 남겨진 신령스러운 자취는 희주(姬周) 초엽에 닫혔다. 전한(前漢) 이후로 다시 시대를 뛰어넘어

 

출현했는데, 유향(劉向)이 천각(天閣)의 장서(藏書)를 조사하다가 간혹 불경이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적현(赤縣)에 산이 갈라져 물길이 열린 이래로 때때로 서상(瑞像)이 보였는데, 혹 불탑이 땅 속에서 솟구치기도 하였고 혹 부처님께서 하늘에서 강림하시기도 하였다. 그 같은 실마리가 복잡하기에 버려두고 간략하게 열서너 가지만 발췌하여 기록해 두는데, 이는 목격하지 못한 이에게 그 서상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대당 아육왕 고탑의 역사[幷佛像經法神瑞迹]

월주(越州) 동쪽으로 370리 떨어진 무현(鄮縣)에 탑이 있는데, 서진(西晋) 태강(太康) 2년 혜원(慧遠) 스님에게 감응하여 땅 속에서 솟아오른 것이다. 높이가 14, 너비가 7촌이었다. 노반(露盤)5층이며, 빛깔이 파란 것이 마치 돌 같으나 돌은 아니다. 사면 바깥에 새긴 이상(異相)1천 가지나 되었다. 양무제가 목탑(木塔)을 만들어 덮어두었는데, 이 때 팔왕(八王)이 가마를 타고 고을들을 순행하고 있었다. 지금도 신기한 서상을 볼 수 있어서 성승(聖僧)에게는 빛과 소리가 울리기도 한다. 상세한 것은 별전(別傳)에 수록되어 있다.

정주(鄭州) 초화사(超和寺)의 불탑은 정주의 남쪽 1백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 기단의 자취가 지금까지 남아 있어 사원은 옛 시기를 함께 아우르고 있었다. 섬돌은 아주 촘촘하게 이어져 있는데 무쇠로 세요(細要)를 만들었다. 길이가 8척이고, 사면(四面)의 세요 길이가 15촌이며, 깊이가 5촌이다. 돌 아래쪽에는 진흙으로 기초를 다져 놓았다. 탑의 남쪽 기단에서 샘을 판 것이 10여 경()이 되는 데 둘레가 3척이며 물이 소리 없이 솟아난다. 영휘(永徽)46) 연간에 곤륜노(崑崙奴)47)가 있어 샘에 들어가 밑바닥을 끝까지 파보니 단지 돌기둥만이 나열되어 있어 끝내 그 수원을 찾지 못하였다. 돌기둥 틈으로 석탑이 허공으로 솟아 있었기에 물이 고여 이르지 않았다.

기주(冀州)[옛적에는 위주(魏州)라 하였다.] 임황현(臨黃縣) 서북쪽 30여 리 떨어진 곳에 아육왕의 사리사(舍利寺)가 있다. 최근에 비구니가 머무는 절로 삼았다. 고탑(古塔)이 있는데, 돌을 짜 맞춰 기단으로 삼았고, 연못 바닥에 탑이 솟아 있다. 삼면의 물이 아주 깊어서 오직 서쪽으로만 다닐 수 있는데, 연근(蓮根)이 발에 채이나 사람들이 두려워 감히 채집하지를 못하였다.

 

기주(岐州) 기산(岐山)의 남쪽에서 기산현(岐山縣)의 북쪽 20여 리 떨어진 곳에 법문사(法門寺)의 탑이 평원(平原)에 있다. 옛날부터 30년마다 한 번씩 개방을 했는데, 개방할 때마다 반드시 감응이 있었다. 현경(顯慶) 5(660)에 칙령을 내려 지종(智琮) 스님에게 이 절을 참배하여 서응(瑞應)을 청하게 해서 미혹한 이를 개명하도록 당부하였는데, 광명이 휘황하게 드리워진 것을 도속(道俗)이 모두 목격하였다. 이 때 탑을 파다가 궁궐로 모셨다. 용삭(龍朔) 2(662)에 다시 옛 탑의 자리에 봉안하였다. 그 사리가 어른의 손가락 마디만 하였는데 길이가 2촌 남짓하였고 그 안에 구멍이 네모나게 뚫려 있었다. 빛깔이 희고 빛이 났으니 그 모양은 별도(別圖)에 그려져 있는 그대로이다.

익주(益州) 성도(聖都)의 성곽 아래에 복감사(福感寺) 탑이 있는데 원래 이름은 대석사(大石寺)였다. 수나라 초엽에 선() 율사가 그 옛터를 찾아내고서 사리를 얻고자 샘 바닥까지 파내려 갔는데 단지 돌 한 개만이 있었다. 그 위에 나무로 만든 9층 부도(浮圖)가 얹어져 있었는데 참으로 신령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나라 촉왕(蜀王) ()가 다시 샘 밑바닥까지 파내려 갔으나,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쳐 밑바닥에 이르지 못하고 그 옆을 파자, 한 조각의 돌이 나왔으니 바로 예옥(黳玉)48)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볼 수 있다.

익주(益州) 북쪽으로 1백 리 떨어진 낙현성(洛縣城) 북쪽 성곽 아래에 보흥사(寶興寺) 탑이 있는데, 그 절의 원래 이름은 대석(大石)이었다. 그 일이 복감사(福感寺)와 같다. 익주 서남쪽 1백여 리 떨어진 곳에 진()나라 원현(原縣) 등의 여러 절의 탑도 위에 적은 바와 동일하기에 생략하기로 한다.

윤주(潤州) 강녕현(江寧縣)의 옛 고을 주작문(朱雀門) 동남쪽의 고월성(古越城) 동쪽에 지금은 폐쇄된 장간사(長干寺)가 있다. 예전에 서진(西晋)의 혜달(惠達) 스님이 광명에 감득하여 1장이나 파내려 가서 세 개의 석갑(石匣)을 얻었다. 그 가운데에 금함(金函)이 있는데 3과의 사리와 머리카락과 손톱이 들어 있다. 그 머리카락은 잡아당기면 3척이나 되는데 손을 놓으면 나선형으로 감긴다. 지금은 3층의 전탑(塼塔)과 아울러 찰간(刹竿)과 불전(佛殿)만이 남아 있다. 여타의 것은 잡목만 우거져 있다. 큰 벌레가 탑의 기단으로 올라가곤 한다. 더럽히는 자가 있으면 때리고 큰소리로 울부짖어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니, 혹 이로써 죽는 이도 있었다.

 

회주(懷州) 동쪽의 무척현(武陟縣)의 서쪽 7리 떨어진 곳에 묘락사(妙樂寺) 탑이 있는데, 기단의 사방이 15보이고 모두 돌로 짜여 있다. 돌의 길이는 5척에다 너비는 3촌이며, 그 아래 부분이 매우 조밀하다. 고로전(古老傳)에는 이 탑의 기단에서 샘이 위로 치솟는다고 전한다.

과주(瓜州) 성 동쪽 3리 떨어진 곳에 진흙탑이 있으니, 주나라 시대의 육왕사이다. 지금은 없어져서 오직 기단만이 남아 있다. 그 위에 지붕을 이고 네 개의 기둥과 벽이 둘러싸여 있는데 때때로 광명을 비춘다. 관청이나 사가(私家)의 선비나 부녀자들이 찾아와 복을 빌곤 한다.

청주(靑州) 임치성(臨淄城) 내에 아육왕사가 있다. 그 형상이 겉에 드러나 있는데, 숲 속 깊숙이 큰 나무 밑에 있다. 예전에 석조(石趙)49) 시절에 불도징(佛圖澄)이 이를 알고 찾아가 취하였는데, 땅을 20여 장이나 파고 들어가서야 얻었다고 한다.

하동(河東) 포판(蒲坂)에 아육왕사가 있는데, 때때로 광명을 비춘다. 요진(姚秦) 시대에 발굴하여 석함(石函)의 은갑(銀匣) 속에서 부처님 뼈를 얻었는데, 영롱하게 빛을 내는 것이 참으로 특이하다.

병주(幷州) 자성(子城)의 동쪽에 있는 아육왕사는 지금은 비구니가 머무는데, 정명사(淨明寺)로 고쳤다. 그 기단의 소재는 지금은 잊혀졌다.

병주(幷州) 유사현(楡社縣)의 성곽 아래에 육왕사의 소탑(小塔)이 있는데, 지금은 스님들이 머물고 있다.

대주(代州) () 동쪽에 아육왕의 탑이 있다.

낙주(洛州)의 옛 고을 서쪽 백마사(白馬寺)에서 동쪽으로 1리 떨어진 곳에 아육왕의 탑이 있다.

감주(甘州) 동쪽의 120리 떨어진 산단현(刪丹縣)의 성 동쪽의 약수(弱水) 북쪽으로는 흙이 쌓여 있다. 고로전에서는 아육왕의 고탑(古塔)이라 이른다.

사주(沙州) 성안에 지금은 없어진 대승사(大乘寺) 탑의 기단이 남아 있는데, 이것을 아육왕의 탑이라 말한다.

진주(晋州)에서 북쪽으로 곽산(霍山)의 남쪽 기슭에 흙더미가 쌓여 있는데, 고로전에서는 육왕사탑이라 이른다.

 

앞서 열거한 여러 탑은 희주(姬周) 초엽 때일 것이다. 대전륜왕(大轉輪王)이 있어 아육(阿育)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를 무우(無憂)라고도 이른다. 이 주()를 통치하였는데 1만여 나라가 있었다. 귀신을 부려 하루 동안에 84천 개의 탑을 이룩하였다. 이 땅에도 남아 있는데, 매번 신비로운 서응을 발한다. 자세한 것은 감응전(感應傳)에 나온 그대로이다.

 

-양주(楊州) 육왕(育王)의 금서상(金瑞像)

()나라 손호(孫皓) 시절에 후원(後園)에서 얻었다. 손호가 처음에는 이를 멸시하고 더럽게 여겼었는데, 온몸에 부스럼이 나며 아프자, 태사(太史)가 점을 치고는 대신(大神)을 침범했다고 일렀다. 이에 손호가 사과하자 차도가 있었으니, 이로 인해 신심을 내게 되었다.

 

-오군(吳郡) 송강(松江)에 떠있는 석상(石像) 두 구

예전에 서진(西晋) 건흥(建興) 연간에도 불상이 송강(松江)에 떠 있었다. 거사 주응(朱應)이 이것을 맞이하여 건져내니 높이가 7척이었다. 통현사(通玄寺)에 모셔 두었다. 그 등에 명문(銘門)이 있는데, 하나는 유위(惟衛)라 이름하고, 또 하나는 가섭(迦葉)이라 이름하였다.

 

-형주(荊州) 장사사(長沙寺)의 서상(瑞像)

동진(東晋) 태원(太元) 초에 형주성의 북쪽에 나타났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 시험 삼아 칼로 쳐 보니 바로 금부처였다. 장사사(長沙寺)의 스님들이 절로 맞이하였는데 광상(光上)에 범어로 아육왕이 이룩하였다고 쓰여 있었다. 양무제가 이를 듣고 도읍으로 맞이하였는데 큰 광명을 내었다. 나중에 양나라가 망하자 다시 형주로 맞이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어 볼 수 있다. 역대로 방광(放光)한 서응(瑞應)이 모두 다 적혀 있지는 않은데, 이는 별전에 나온 그대로이다.

-형주 대명사(大明寺) 단우전왕(檀優塡王)의 상()

양무제가 천감(天監) 원년(502)에 전단나무 상()이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꿈꾸고, 조칙을 내려 80인을 모집하여 천축으로 보냈다. 그들은 천감(天監) 10년에야 귀환하였는데, 이미 황제가 붕어하고 원제(元帝)가 강릉(江陵)에서 즉위하였다. 형도(荊都)로 맞아들였는데, 나중에 정릉(靜陵) 곁에 절을 세우고, 여기에다 안치하였다.

 

 

-양주(楊州) 장간사(長干寺) 아육왕(阿育王)의 상()

동진(東晋) 함화(咸和) 연간에 단양윤(丹陽尹) 고리(高悝)가 장후포(張侯浦)에 빛이 서리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여 금상(金像) 1구를 얻었으나 광배(光背)와 발이 없었다. 이를 싣고 장간항(長干巷)에 다다랐는데 소가 서서 가지 않기에 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장간사로 들어갔다. 나중에 몇 년이 지나 동해에서 사람들이 구리로 만든 발이 바닷물에 떠 있는 것을 끌어 올려다가 금부처에 맞추니 과연 들어맞았다. 나중에 40년 후에 남해(南海)에서 구리로 만든 광배를 바다 밑에서 건졌는데, 이를 다시 부처가 있는 곳으로 보내 맞춰보니 꼭 들어맞았다.

()ㆍ송()ㆍ제()ㆍ양()ㆍ진()ㆍ수()ㆍ당()7대 동안 내전에 모셔다 공양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그 광명을 비춘 서응은 별전에 나온 그대로이다. 지금은 경사(京師)의 대흥선사(大興善寺)에 안치되었는데, 여기에도 삼가 적어 둔다. 진신(眞身)은 여산(廬山) 봉정사(峯頂寺)에 있다.

 

-양주(凉州) 남쪽 1백 리 떨어진 절벽에 있는 진흙으로 빚은 행상(行像)

예전에 저거(沮渠)의 몽손왕(蒙遜王)이 양토(凉土)에서 복사(福事)를 넓히는 것에 전념하였는데, 이 절벽에 형상(形像)을 크게 이룩하였다. 천변만화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눈을 아찔하게 하였다. 흙으로 빚은 성승(聖僧)이 마치 사람과 똑같았다. 늘 저절로 걸어다니며 잠시도 쉬는 때가 없었다. 멀리서 보면 걸어다니고 사람이 다가가면 바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면모를 보면 걸어다니는 모습과 같았다. 땅에 흙을 뿌려놓는 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보면 발자국이 완연하였다. 지금도 여전한 것을 볼 수 있다.

 

-양주(襄州) 단계사(檀溪寺)의 금부처가 걸어다닌 기적

동진(東晋) 영강(寧康) 연간에 사문 석도안(釋道安)이 이룩하였다. 조성되자마자 바로 만산(萬山)을 걸어다니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 절로 돌아왔다. 밤이 되면 다시 절 문을 벗어나 산으로 다니는데, 바위를 밟을 때마다 하나의 발자국 모양이 드러나 있었다.

주 무제가 정법을 소멸시켰을 때, ()의 부장(副長) 손철(孫哲)이 성품이 흉악하고 거칠어 가장 먼저 없애고자 하였다. 1백여 명에게 밧줄을 목에 매어 끌어당기게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손철이 크게 노하여

 

5백 명을 보태어 땅바닥에 쓰러뜨려 땅이 크게 울렸다. 이에 손철이 기뻐하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급사하였다. 금부처를 훼손하던 당시, 겨드랑이로 옷이 말려 올라간 속에 명문(銘門)이 있었는데, “이 불상은 삼주(三周) 갑오년에 없어지리라고 적혀 있었다. 달력과 대조해 보니 그 대강이 들어맞았다. 그 밟고 다니던 돌이 예전의 사찰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지금 계법(啓法)이라 이름하는 것이 이것이다.

 

-양주(涼州) 서쪽 번화현(番禾縣)의 상서로운 석상의 기적

원위(元魏) 태연(太延) 연간에 사문 유살하(劉薩河)가 번화(番禾)의 동북쪽을 다니다가 어곡산(御谷山)을 바라보고 절을 하며, “이 산중에 불상이 나올 터인데, 만약 그 상호(相好)가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나라에 난이 일어나 백성이 괴로워진다고 일렀다. 87년이 경과한 정광(正光) 초년에 비바람에 산이 진동하면서 불상이 출현하였는데 길이가 3장 남짓하였으나 머리가 없었다. 이에 올라가 바로 명을 내려 머리를 이룩하여 안치하였으나, 안치하는 대로 떨어졌다. 이때 위나라의 정도(正道)가 갈라져 동서로 나뉘었다. 40여 년 후에 양주의 동쪽으로 7리 떨어진 계곡 안에서 돌로 된 불상의 머리를 찾아서 불상에 맞춰 보자 꼭 들어맞았다. 주나라 보정(保定) 연간에 불상의 머리가 다시 떨어지자, 수나라 초엽에 다시 되돌리고서 서상사(瑞像寺)를 지었다. 수양제가 서쪽을 정벌하고자 이곳을 지나치면서 감통사(感通寺)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많이 있으나 모두 자세히 따져 보면 들어맞지 않는다.

 

-경사(京師)의 숭의사(崇義寺)에 있는 석영사(石影寺) 불상의 기적

길이가 8촌이고 두께가 58분이다. 자색 석영의 빛깔이다. 양무제 태청(太淸) 연간에 어떤 스님이 외국에서 가지고 왔다가 난을 만나자 여산(廬山)에 안치하여 산꼭대기에 상을 모셨다. 수양제가 번진(蕃鎭)의 강양(江陽)에 있으면서 별기(別記)를 보고 찾아가 구하여 얻었다. 나중에 보위에 오르자 곡지(曲池)의 일엄사(日嚴寺)로 보냈는데 절이 황폐해지자 숭의사로 섭입되었다. 경사(京師)의 도속이 모두 찾아가 보았으나 매번 같지 않은데, 부처님을 보았다거나 신을 보았다고도 하며 산림(山林)과 당개(幢蓋)가 앞뒤가 같지 않았다. 정관(貞觀) 7(631)에 조칙을 내려 궐 안으로 맞아들였다.

 

 

-방주(坊州) 옥화궁(玉華宮)의 철불상(鐵佛像)이 서상을 일으킨 기적

주무제(周武帝)가 정법(正法)을 멸망시키는데, 강명(姜明)이란 이가 그 일을 감독하기 위해 밤길을 떠났다. 매번 산 위에 광명이 드리우는 것을 보고 새벽에 찾아가 보았으니, 가로 누운 돌이 있는데 그 모양이 꼭 불상과 같았다. 이에 괭이로 사방을 파 보니 바로 철광으로 되어 있어 훼손하지 못하였다. 그 몸길이가 3장인데 골짜기에 발이 있었다. 이에 마을 사람과 함께 꺼내려 하였으나, 홀연히 물결에 떠내려갔다. 지름길로 따라가 발을 건져다가 우뚝하게 세웠다. 이에 표장을 올려 상주하였는데, 이 때 천원(天元)을 이어 조력(祚歷)을 고쳐 원호를 대상(大象)이라 하였다.50) 조칙을 내려 그 장소를 대상사(大像寺)로 삼았다. 이리하여 불법을 열었으니, 수나라 초엽에는 현제사(縣濟寺)로 고쳤다. 태종(太宗)이 궁에 있을 때 찾아가 예배하며 치장을 장엄하게 하였다. 궁에서 30리 떨어진 곳의 원림에 두었다. 영휘(永徽) 연간에 궁립사(宮立寺)로 고쳤다. 어두운 밤에 매일같이 광명을 발하였다.

 

-양주(襄州) 현산(峴山) 화엄사(華嚴寺)의 노사나(盧舍那) 불상이 서상(瑞相)을 일으킨 기적

원래는 주나라 때의 옛 불상이었다. 정법이 멸하게 되자 불상을 숨겼기 때문에 보존할 수 있었다. 매번 흉한 일이 있으면 콧물을 흘려 예언하였다. 수나라 문제가 붕어할 때가 되자 한쪽 코에서 콧물이 흘러 가슴까지 적셔서 금박이 떨어졌다. 비록 나중에 다시 금박을 입혔어도 쳐다보면 여전히 콧물을 흘렸다. 정관(貞觀) 말년 4월에 연이어 콧물이 흘러 멈추지 않아, 가슴 언저리까지 적신 것이 무려 한 자나 되었다. 마침내 태종이 승하(昇遐)하여 이를 징험하였는데, 그 일이 있을 조짐을 보인 것이다. 6월이 되어 콧물을 다시 흘리자 전국에서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7월에 홍수가 범람하여 성곽까지 잠겨 깊이가 1장 남짓하였다. 지금도 이 불상을 볼 수 있다.

 

-진조(陳朝)에 중운전(重雲殿)이 날아가 바다로 들어간 기적

이 전각(殿閣)은 양무제가 이룩하여 그 가운데다 진보(珍寶)를 갖춘 불상을 안치해 놓았다. 양나라가 망하고 진나라가 등극하였으니, 무제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장사지내는 도구로 쓰려고 충운전 안의 휘장을 거두고자 하였다. 인력을

 

넉넉히 하여 사방에서 에워쌌는데, 홀연히 서운(瑞雲)이 어리면서 큰비가 퍼붓고 번개가 내리쳐서 백공(百工)이 놀라 달아나 버렸다. 또 불이 공중에 늘어져 있으면서 화염이 서로 이어졌는데, 중운대전과 그 안의 불상 모두가 위로 떠올라 불꽃을 서로 비추면서 동쪽으로 가버렸다. 온 나라에서 이를 쳐다보았으나 눈앞에서 사라지고서야 비가 그치고 다시 햇빛이 비췄는데, 오직 초석만이 남아 있었다. 한 달이 지나 어떤 사람이 동주(東州)에서 와서 이 날 중운전이 공중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 바다를 보는 사람들은 때때로 그것을 본다. 원위(元魏)의 낙경(洛京)의 영녕사(永寧寺) 탑도 하늘이 울리며 동해로 들어간 그 기적이 이와 같다.

 

-강주(江州) 여산(廬山)의 문수보살상이 서상을 일으킨 기적

예전에 진나라 명신(名臣) 도간(陶侃)이 깃발을 세웠다. 남해의 어부가 바닷가에 빛이 서렸다고 보고하자, 도간이 명을 내려 찾게 하였다. 잠깐 사이에 금불상이 파도를 헤치며 배로 건너오는 것을 보았다. 그 명문(銘門)을 받아 보니, ‘아육왕이 이룩한 문수보살상이라 적혀 있었다. 무창(武昌)의 한계사(漢溪寺)로 보냈다가 나중에 형주(荊州)로 옮기고자 성상을 모셔다 배에 실었는데, 배가 그만 물에 가라앉았다. 혜원 법사가 이를 맞이하여 여산에 안치하였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지금은 산동(山東)의 임중각(林重閣)에 있다.

 

-유주(渝州) 서쪽으로 1백 리 떨어진 상사사(想思寺)의 북쪽 석산 위에 부처님의 발자취 열두 곳이 남아 있는 기적

모두 길이가 3척이고 너비가 11, 깊이가 9촌이다. 가운데에는 물고기의 무늬가 있으니, 불당에서 북쪽으로 15보 떨어진 곳에 있다. 스님들이 이곳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순주(循州) 동북쪽 흥녕현(興寧縣)의 영감사(靈龕寺) 북쪽 돌 위의 부처님 발자국 30여 매가 있는 기적

큰 것은 길이가 5척 이하이다.

 

-경사(京師)의 대흥선사(大興善寺)의 크고 신령스러운 기적

불상(佛像)ㆍ불골(佛骨)ㆍ불치(佛齒) 등이 있다.

-무주(撫州)의 불상이 걸어서 스스로 무주 동쪽 20여 리까지 간 기적

 

무주에 현경(顯慶) 연간에 담주의 걸어다니는 불상이 있었는데 스스로 옮겨서 그 주의 동쪽 20리까지 갔다. 산중의 길마다 두 발자국이 나타나 있었다. 길이가 3척인데 서로 간에 거리가 5백여 보나 떨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 유래를 몰랐는데, 어떤 사람이 산 속을 뒤지다가 그 기적을 보고, 원근에 두루 전하여 장차 절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자사(刺史) 이하 관인(官人)들이 가뭄에 시달렸기에 수레에서 내려 불상으로 손수 걸어가서 무주의 절로 되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세 사람이 받들고 무주로 모셔 갔는데, 가는 도중에 구름이 밀려와 그 날 밤에 큰비가 내렸다. 이 때부터 해마다 풍년이 들었는데 지금도 무주에 있다.

수나라 때에 장주(蔣州) 흥황사(興皇寺)의 불전(佛殿)이 불에 탔다. 그 가운데에 6() 높이의 구리 불상이 바로 대들보 밑에 있었는데, 불이 나서 대들보가 떨어지려 하자 불상이 스스로 남쪽으로 5, 6척 남짓 움직여서 그 모습을 온전히 하였다. 사방에 흙과 기와의 재가 흩날렸으나, 불상이 5, 6척 떨어져 있었기에 티끌조차 묻지 않았다. 지금은 백마사에 있는데 새들조차 침범하지 않는다.

 

-간주(簡州)의 삼학산사(三學山寺)에 부처님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기적

매일 밤 신기한 등불이 허공에 머물러 있는데 멀리서는 보이나 가까이 가면 꺼진다. 또 육재일(六齋日) 밤이 되면 그 불빛이 많아진다.

 

-방주(坊州) 옥화사(玉華寺) 동북쪽 자오천(慈烏川)의 기적

무덕(武德) 연간에 거인(居人) 학변(郝辯)이란 이가 원래 신심이 있었다. 산에 사는 사슴떼가 산모퉁이를 비켜 가는 것을 보고 바로 그 자리를 파보았는데 석상 한 구를 얻게 되었다. 높이가 4, 5장이었는데 산에서 냇가에 있는 자기 집으로 옮겨 놓았다. 그 모양이 육화사의 동쪽에 있는 불상과 흡사하였다. 고로전에서는 가섭불 시대에 이 산에 40여 구를 숨겨 놓았는데 지금 두 구가 출현하였고 나머지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고 이른다[양주(涼州)에 출현한 기적도 이와 같다].

 

-형주(邢州) 사하현(沙河縣) 사면동불(四面銅佛)의 기적

길이가 4척 남짓이다. 수나라 초엽에 어떤 사람이 산에 들어가서 스님들이 이 같은 성상(聖像)을 모시는 것을 보고는

 

공양을 청하였는데, 갑자기 스님들이 사라졌다. 그 사람이 업고 나오려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러 곳의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끌고 가려 하였으나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사하사(沙河寺)의 스님들이 이를 듣고 시험삼아 끌어 보니, 순식간에 절까지 옮겨졌다. 나중에 후세 사람이 절 옆에서 금 한 덩어리를 주웠는데 위에는 두 마리 까마귀의 형태가 있고, 명문에는 사면불(四面佛)을 도금하려고 한 것으로 인해 도금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바로 불상 위에 까마귀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수나라의 후주(後主)가 그 서응의 자취를 전해 듣고, 공인을 보내 이를 본떠 주조케 하였으나, 공정이 순조롭지 못하여 끝내 모자란 부분이 남아 있었다. 2백여 일이 지나서야 일을 마쳤는데, 지금도 사찰 안에 남아 있다.

예전에 신탑(神塔)과 서상(瑞像)이 세속을 개화하여 범부를 인도하였다. 깊게 밝지 못한 이가 이로써 신심을 내었으니, 그 특이한 모양에 믿음을 내고서야 마음을 거둬들일 수 있어서 마침내 경전을 펼쳐 토론하고서야 신묘한 깨우침을 열게 된다. 4()가 늘 소란케 하고 6()이 늘 침범하는 것을 알고 깨치고 나면, 두려움을 뛰어넘어 햇빛이 비추는데, 다시 고해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무시(無始)와 같게 된다. 도를 넓혀 같이하니, 밝음을 널리 드리우는 도가 어찌 이렇지 않겠는가?

경권(經卷)이 불에 타지 않은 것에 이르러서는 화완포(火浣布)51)에 부합되는 것이었고 그 책이 공중에 떠서 젖지 않았으니, 바로 천개(天蓋)의 영()과 같았다. 거룩한 사찰이 연이어 있고 종소리가 원근으로 울려 퍼지매, 신승(神僧)이 수없이 출현하여 공양을 받아 도속에 형통하였으니, 이 같은 갈래가 많기도 하다. 모두 감통기(感通記)에 적혀 있다.

 

6) 출고육왕탑하불사리조(出古育王塔下佛舍利詔又牙像詔) 양나라 고조(高祖)

대동(大同) 4752)에 조칙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하늘이 자비롭게 널리 덮여 있으며, 의롭게 거두지 않는 바가 없다. 방편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는데, 어찌 방위와 처소를 달리 하겠는가?

상우현(上虞縣)의 백성 이윤지(李胤之)가 땅을 파서 치아사리(齒牙舍利) 1과를 얻었는데, 크기가 2촌에 약간 모자라며 양 모서리를 쌍쌍이 합쳐서 수형(獸形)을 이루었다. 그 안의 한쪽에는 불상 12구를 모시고 한쪽에는 15구를 모셨는데, 새겨 넣은 것이 맑고 깨끗하며 꾸며 놓은 자태가 참으로 묘하니, 참으로 신령이 이룬 것이지 사람이 이룬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 진형사리(眞形舍利) 6과를 모셔 놓았다. 일찍 동주(東州)의 석경(昔經)으로 상주하였으나, 주상이 별달리 유념하지 않았다. 이윤지는 잘 묶어서 동쪽 치소에 보관해 두었다. 마침내 진형사리가 중서(中署)에 강림하여 광명을 발해서 보기 드문 모양을 드러내시니,

 

대자비로 고통을 구제하는 것이 참으로 이유가 있다 할 만하다.

부처님의 힘을 계승하여 이를 넓히고 크게 펼치고자, 천하에 그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이 달 16일 매상(昧桑) 전까지 모두 사면하니, 당일로 방면하라. 또 법신(法身)을 잘 받들어서 불단에 다시 모셔 놓고 공양하라.”

대동(大同) 48월에 달이 5()를 범하고 노인성(老人星)이 빛났는데, 장간사(長干寺) 아육왕의 탑을 수리하자 사리와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치아가 나왔다. 아육(阿育)은 철륜왕(鐵輪王)이다. 염부제 1천하(天下)의 왕이었는데, 하룻밤에 귀신을 부려 84천 개의 탑을 이룩하였으니, 이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어가(御駕)를 부려 장간사로 행차하여 무애(無礙)의 법희식(法喜食)53)을 설치하면서 조칙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천지가 차고 기우는 것은 시절의 소식(消息)에 따른다. 만물이 그 미혹함을 낳아 고루하지 못하고, 2()도 그 덮고 싣는 것을 늘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수고롭고 빼어난 것이 햇수가 다르며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햇수를 달리 한다.

작년에 제대로 수확하지 못하여 곡식이 귀해지자 백성이 곤궁해졌으므로 이로써 법을 그르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다. 용서하려는 마음으로 그 허물을 찾아보면 혹 불쌍하기도 하니, 수레에서 내려 죄를 묻고 지나간 잘못을 들어 보면, 그 허물이 원수(元首)에게 돌려지니, 바로 짐 자신이리라. 만약 법()으로 얽어맨다면, 바로 스스로 새로워질 길이 없을 터이니, 서경(書經)에서도 무고한 이를 죽이느니 바로잡지 아니함이 없다라고 이르지 않았던가? 주역에서도, “때에 따르는 이치야말로 크다고 일렀는데, 지금 진형사리(眞形舍利)가 세상에 나왔으니,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을 만났다.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이 일어나니 지금 아육왕사(阿育王寺)로 행차하여 무애회(無礙會)를 열 것이다.

노인네나 어린아이 중에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게 할 것이니, 마치 굶주린 이가 먹거리를 얻듯이 하고, 오랫동안 헤어졌던 이가 부모를 만나듯 하리라. 유계(幽界)나 현계(顯界)나 그 마음을 돌이키고, 원근이 다투어 우러르며, 선비와 아녀자가 하포(霞布)와 도포를 입고 관모과 양산을 쓰고 운집하여 시절에 따라 덕을 펴나가면 사람과 백령(百靈)도 함께 기뻐할 것이다. 천하의 죄는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두 지금 사면한다.”

 

7) 상보리수송계(上菩提樹頌啓[幷勅]) 양나라 진안왕(晋安王) ()

신 강()이 아룁니다.

신이 듣자오니, 끌채를 두드려 소리를 내거나 박자를 맞추는 소창(小唱)도 그 풍아(風雅)를 흠모함이 있고 파인(巴人)54)의 천박한 곡조도 양춘(陽春)55)을 우러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무나 아욱의 가는 잎이 아침 해에 기울어지며, 횃불의 희미한 빛은 스스로 그치지 못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지극한 덕과 밝으심으로 도를 그윽이 하여 운수를 열었으니, 신묘하기도 하고 성스럽기도 하니 도는 헌규(軒嬀)56)를 넘어섰습니다.

정각(正覺) 정진(正眞)에 그 공덕이 지극히 원만하게 부합되니, 상주(常住)로써 즐거움을 삼고, 법희(法喜)로써 달가움을 삼습니다. 자비로운 단비가 땅 끝까지 미치고 슬기로운 교화가 유계(幽界)와 현계(顯界)로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8()이 순조롭고 4()가 바르기에 천하가 안정되고 해외(海外)마저 편안해졌습니다.

용굴(龍窟)의 위엄을 펼쳐서 취산(鷲山)의 정법을 이었으니, 도모하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으면서 실로 창생(蒼生)을 불쌍히 여기셔 무상(無相)을 베풀어 인도하여 진역(眞域)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도의 나무를 이룩하고 드러내어 금용(金容)에 비견하였습니다. 서원하는 이에게는 인()을 맺게 하고, 정례(頂禮)하는 이에게는 복을 늘리게 하였습니다만, 그 갈라져 만나는 것이 한 가지인데, 고금에 어느 누가 두 가지라고 하였겠습니까?

삼가 그릇으로써 승로(承露)57)를 나타내고, 동아(東阿)58)에서 천명(薦銘)하오니, 서상(瑞相)이 황룡(黃龍)으로 나타나 중산(中山)에서 찬송을 지었습니다. 신이 비록 불민하여 어리석은 마음뿐이나 삼가 보리수송(菩堤樹頌)’ 한 수를 지어 올립니다. 학문이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하고 생각조차 치밀하지 못한지라, 성덕(盛德)을 빛내어 드날리되 그 한 모서리조차 비슷하게 하기에는 참으로 모자람이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허깨비 같은 말이 부끄러운지라, 엎드려 지묵(紙墨)을 올리면서도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삼가 올립니다.”

손수 칙서를 내리고 계를 살펴본다. 전해 올린 보리수송을 열람해 보니, 문장이 참으로 아름다운 데다 글 뜻마저 진정 깨끗하다. 법왕(法王)을 찬양하고 도수(道樹)를 칭찬하되,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쓰는 것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3()의 선()이 지극하다 할 것이다. 단지 언급한 나라의 아름다움은 모두 사실이 아니니 기어(綺語)59)의 허물이 없다 하지 못한다. 이에 그 어긋남을 경계한다.”

 

-보리수송과 서문(菩堤樹頌[幷書])

생각해보면 인연에 의해서 가유(假有)는 중생의 막히는 뿌리일지나, 정법의 뿌리는 그렇지 않아서 지인(至人)의 묘리(妙理)이다. 이로써 삼계(三界)6()가 업장(業障)에 싸여 스스로 미혹하더라도, 8()10()는 귀종(歸宗)을 이끌어 통하게 한다.

따라서 능인(能仁)대사께서 인연 따라 도를 펼치시되, 화택(火宅)에서 불타는 것을 가엾이 여기시고, 욕류(欲流)에 늘 휩쓸려 가는 것을 슬퍼하셨다. 백정왕이 궁궐에 의탁하여 금색신(金色身)을 드리웠으니, 이 같은 세 가지 미혹에 머물면서 화협(畫篋)조차도 참답지 않음을 보이셨다.

저 사대문을 벗어나시자, 뜬구름이 쉽게 사라지는 것에 놀라셨는데, 마침내 부처님의 둥근 해가 뜨고, 정법의 우레가 울렸으니, 이윽고 점교(漸敎)를 이룩하여 방편의 자취를 드리우셨다.

3()가 세상에 나와 하나의 도()로 귀의할 바를 알리고, 군창(群蒼)을 크게 인도하여 미처 건너지 못한 이를 마저 구제하였다. 마침내 법의 구름과 법의 단비로 윤택하게 적시니, 가없는 세계가 평등해지고, 지혜의 등잔과 횃불의 조명이 허공처럼 한량없었다. 만물의 인()은 헤아리기 어려운지라, 교화의 연()이 이로써 그쳤는데, 우거진 조림(造林)을 열어 내시니, 밝은 해가 푸른 가지를 비추었다.

슬프다! 6()8()에 덮이었다. 대성(大聖)께서 안 계셨다면, 뉘라서 지혜의 다리로 고해를 건네주겠는가? 이에 우리 황제가 건원(乾元)의 슬기와 공덕을 체득하고, 천지의 순일한 정기를 머금고서 옥경(玉鏡)의 신묘함을 비추며, 태평(太平)의 운세를 거머쥐었다. ()ㆍ우()를 삼켜서 화하(華夏)를 잉태하고, 한조(漢朝)를 잡아두고 주()를 가두어 두면서 6()를 부려 창생을 자식 삼고, 2()를 드러내며 길러 자라게[亭毒] 하였다. 음악으로 날줄을 삼고 예법으로 씨줄을 삼으면서도 문무를 겸하였는데, 형벌이 번다해지는 것[秋荼]60)을 막으며 9()의 엄한 과급[]을 폐지하였다.

봄철의 단비가 생명을 사랑하듯 3()의 촘촘한 그물을 풀어내었으니, 참으로 함지(咸池)61)의 영령조차도 그 면목을 잃고, 분수(汾水)62)의 덕조차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소양(少陽)63)은 원진(元眞)에 대해 권면하며 아름답게 여기고, 번신(蕃臣)은 괴곤(槐袞)64)에서 자신의 임무를 다하였다[燮和]65)하였다. 8() 3()9() 4()의 선비가 안으로 왕사(王事)를 펼치며 정책을 쓰고자 애쓰고, 성을 지키고 병거(兵車)를 미는 장수는 변방을 지켜 강토를 보호하면서 한결같이 문궤(文軌)에 따랐다.

만방(萬方)과 더불어 행하였으니, 바야흐로 천흉(穿胸)과 누억(鏤臆)의 추장이시고, 단신(短身)과 장비(長臂)66)의 우두머리이시기에 남월(南越)의 삭석(鑠石)과 북극(北極)과 천사(天沙), 동쪽으로는 일지(日枝)로 가고 서쪽으로는 월기(月紀)를 넘으니 산봉우리를 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험준한 승도(繩度)67)의 산을 넘고, 배로 바다를 가로질러 건너며 부모(浮毛)의 파도에 법주(法主)를 띄웠다. 사방에서 받들며 들어와 조공(租貢)을 바치고 충성을 다하며 벼슬을 청하였고 동심(同心)의 새를 바치며 비견(比肩)의 짐승을 다투어 진상하였다.

마침내 상서로운 조짐이 연이어 일어나고 복스러운 조짐이 모두 드리웠다. 영지(靈芝)는 솟구치고 달빛은 교원(郊園)에 서리는데, 의봉(義鳳)과 인호(仁虎)를 칭송하는 소리가 나라에 가득하였다. 마치 구슬 같고 벽옥 같아서 중기(中畿) 지방을 환히 비추었고, 구름인 듯 구름 아닌 듯하게 궁치(宮雉)에서 배회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인수(仁壽)로 몰아가고 동물과 식물을 널리 유황(幽隍)에서 제도하였다. 햇수는 안락하고 백성은 풍요로워 집집마다 넉넉하고 풍족하였다. 늙은이는 들거나 이는 것이 없고 아이는 뛰놀며 노래하였다. 선을 따라 행하는 것이 물의 흐름과 같았고 풍화에 응하는 것이 풀과 같았다. 농업을 열어 대본(大本)에 힘쓰고 칼이나 가래 등의 농기구를 주조하여 붉은 낱알은 상자에 담고 청부(靑鳧)68)는 꿰어 두었다.

위로는 하늘을 비추고 아래로 샘을 흐르게 하여 하늘이 이루어지고 땅이 평평해졌다. 천자(天子)가 외아들처럼 균등히 하고 4()을 불쌍히 여기어 정행(正行)의 인()을 보이고, 출요(出要)의 길을 가리키고자, 널리 도량을 이룩하여 묘법(妙法)을 크게 펼쳤다. 열반의 보배로운 노로 역류에 휘말리고 미혹에 빠진 대중을 건지고, 자비의 광명으로 깨어나지 못한 여러 미혹된 사람들을 비추었으니, 저 법륜(法輪)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고루하여 시원한 바람을 잎사귀마다 불어 주었다.

그러므로 천인(天人)이 무봉(舞鳳)69)으로 조원(照園)을 떠나 선()을 찬양하고 보살님들도 코끼리를 부리어 향토(香土)를 넘어 왕래하셨다. 5백의 보개(寶蓋)가 빛을 하나로 뿌리고,

 

수만의 영락(瓔珞)이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졌다. 감실이 장엄하여 온 나라에 독특하게 세워지고 3()의 보전(寶殿)을 이루며, 네 기둥의 보대(寶臺)를 세우니 비록 한후(漢后)가 신명(神明)을 기리던 궁궐이나 헌원(軒轅)이 신선(神仙)을 기다린 관루(觀樓)가 어찌 보배로운 운대(雲臺)에 그 자취를 드리우신 등각(等覺)에 비슷하기나 하겠는가?

정각(正覺)을 이루신 처음을 생각하시어 보리수를 심으시고 4()가 진보(珍寶)를 바치고 백공(百工)이 기교를 뽐내어 금을 다듬고 옥을 새기고 거울을 다듬고 구슬을 꿰었다. 설산(雪山)처럼 만들고 보개(寶蓋)처럼 형태를 꾸몄다. 사방에 휘장을 둘러 그늘을 드리우며 오면(五面)을 보개로 가렸으니, 그 이름이 만월보다 드높고 그 덕이 천지를 뒤덮었다. 고운 빛은 천추(千秋)의 나무와 함께 하고 빼어남은 오색의 꽃과 연이었다. 벽일(璧日)이 아롱지고 옥체(玉蔕)가 연기를 피어나게 하며, 미풍에 천천히 흔들리고 보배로운 가지마다 노래 소리 울린다. 눈부시게 묘한 빛깔이 가지마다 드리우니, 의젓하기가 금산(金山) 같고, 존귀하기가 취월(聚月)과 같다. 믿음 있는 아낙이 백미(百味)를 공양하고70) 제천이 네 발우를 바쳤을 때71) 상서로운 향초를 흩뿌리며 청작(靑雀)이 연이어 찾아왔다. 우레를 토해내는 마왕의 항복을 받고 산을 떠메는 귀신조차 내쳤으니, 그 기이하신 자태를 어찌 다 말할 수가 있겠는가?

이야말로 선법(善法)을 낳는 묘한 연()이고 수행으로 나아가는 깊은 복이니, 지금 이처럼 아름답기가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햇살을 드리우는 공덕이 무궁하여 해와 달처럼 임하시되, 영락(永樂)을 기려 만세 동안 지금 같도록 빌면서 송()을 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면면히 이어지는 역사[綿史]에 실린 것을 읽어 보매

영편(靈篇)의 비춤만이 아득하다.

보배로운 책이 가득한지라

황제의 홍도(弘圖)가 그 빛을 감싸네.

 

새 발자국은 상서롭다 하고

용마(龍馬)의 그림은 경사를 알린다데.

9()에 은혜를 내리니

5()이 노래를 부르네.

기르고 기르니 지극할진저

대량(大梁)이 거룩함을 여는구나.

공덕이 삼고시대(三古時代)를 넘어서니

대업(大業)이 천명에 드높구나.

 

금륜(金輪)이 도를 내리고

옥형(玉衡)이 정치를 고루하니

굴복하지 않는 이 없고

덕이 있어 이로써 성대해지네.

 

1()이 돌이켜 나오니

5()이 깨끗해지고

타고나면서 태평가를 부를 줄 아니

곤충마저 그 성품을 얻었네.

 

순 임금 부엌에 신령한 연꽃이 탐스럽고

 

요 임금 뜰에 신묘한 명협(蓂莢)72)이 피어나고

어떻게 도수(道樹)에 비길런가?

뒤덮어 적시니 널리 윤택하구나.

 

아름답게 빛 드리우며

향기로운 꽃들이 겹겹이 피어나네.

시절 따라 백화가 만발하니

이윽고 천 가지 잎사귀 피어나고

저곳의 법신(法身)을 나투어

이곳의 서첩(瑞牒)을 꾀하네.

여섯 척 큰 배로 바다를 건너고

성곽에서 평화로이 네 가지를 거두는데

은택(恩澤)이 이미 퍼졌으니

순풍(淳風)이 널리 드리운다.

 

지혜의 경계가 밝고 밝으니

정법의 우물이 시원하고

백신(百神)이 탄식하며 우러르니

천불(千佛)이 정법(正法)을 칭찬하시네.

 

영예로운 빛 움직이며 비추니

고귀한 촛불이 햇수를 고르고

보리(菩提)를 영원히 세우니

바야(波若:반야)를 오래도록 펴리라.

 

아름다운 명후(明后)

하늘처럼 만수(萬壽)를 누리시라.

 

8) 창도문(唱導文) () 간문제(簡文帝)

열 가지 악()은 연()이 거대해지면 마음의 길목에서 쉬이 미혹되어 버리고, 만 가지 선()의 힘이 미미하면 신령한 성품에 감득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칼을 갈아 불 속에 뛰어 들더라도 도량에 뜻을 세우니, 살타(薩埵)는 몸을 던지고서라도 반드시 묘각(妙覺)을 이루었으나, 중생은 염착[]만 쌓으니 파도에 떠밀려 되돌아오지 못한다. 고해에 빠지기 쉽고 자비의 파도가 텅비게 쓸어버리며 갈애(渴愛)는 생사와 그 문호를 같이하고, 무명(無明)은 결망(結網)과 더불어 길을 같이한다.

제각각 백비(百非)로 치달려 이 같은 4()에 얽매이나, 사람들은 힘을 다하여 생각하고서 저 같은 3()을 밝힐 것을 생각한다. 마침내 여래께서 그 기틀로 인()을 삼아 교화를 펴시는데, 마치 대의왕(大醫王)처럼 병에 따라 약을 쓰시는 것과 같다.

지금 황상(皇上)의 교화하는 기틀은 하늘을 본받고 땅을 망라하여 만고의 어진 바람을 불어 주어 말세를 백왕(百王)의 시대로 되돌린다. 창생(蒼生)을 감싸고 받쳐서 여수(黎首)를 자비롭게 기르니, 하늘 끝과 바다 밖에까지 그 도를 받들고 바람을 마신다. 모이주머니를 끌어안고 입으로 물어 주니, 어짊을 머금고 덕을 마신다 할 것이다. 황상께서 백성이 어질거나 우매한 것에 관련 없이 외아들같이 사랑하시니, 모두 다 함께 극기(克己)의 정성스런 단심(丹心)으로 마음을 밝혀서 흡족하게 이루어야 하리라.

지존(至尊)을 받들고자 사바세계(裟婆世界)의 석가문불(釋迦文佛), 환희세계(歡喜世界)의 전단덕존(栴檀德尊), 수정찰토(水精刹土)의 월전여래(月電如來), 보명세계(寶明世界)의 산해혜불(山海慧佛)께 예배드립니다.

원하노니 성어(聖御)가 천지와 더불어 융성해지고,

 

자명(慈明)이 일월과 더불어 고루 비추게 하소서. 구유(九有)73)가 평강(平康)의 은택을 입어 팔방(八方)에 인수(仁壽)의 은혜가 펼쳐지게 하소서. 옥촉(玉燭)의 아름다움이 햇빛 비추듯 멀리 비추고, 격양(擊壤)의 노랫가락이 천하에 두루 들리게 하소서.

존경은 마음으로 내는 것이나, 오체(五體)로써 그 바깥을 공손케 하며, 마음이 그 가운데에서 발하여 6()으로 두루 이르되, 한 가지 선의 마음으로 물들어 만 겁 동안 썩지 않게 하소서. 백 개의 등불이 널리 비춰서 천 리가 한결같이 밝아지되, 정법에 기대어 평안을 이루고 선()을 쌓아 경사를 늘리게 하소서.

오늘날 다행히 이 같은 훈계를 만났으니, 어찌 마음 다하여 황태자를 받들기 위해 동방보해불(東方寶海佛)ㆍ남방등명불(南方燈明佛)ㆍ서방무량불(西方無量壽佛)ㆍ북방상덕불(北方上德佛)께 예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오니, 이명(離明)74)처럼 마음을 비추고 합벽(合璧)75)처럼 바깥을 부드러이 하며, 옥진(玉振)처럼 구름을 띄우고 금성(金聲)처럼 바다를 거울로 삼아 나날이 안색을 뵈올 때마다 사선(四善)의 기풍이 흐르게 하소서.

이미 온문(溫文)의 덕이 펼쳐져서 실로 감국(監國)의 중함이 드러났기에 창생이 그 덕화(德化)를 마시고 유식(有識)이 그 어짊을 머금었습니다. 섭화(燮和)하여 안으로 교화하니 일들은 주경(周經:書經)보다 빛나며 덕을 찬양하고 안으로 덕을 기르니 가르침이 돈사(惇史)에서 드높으므로 정도(正道)에 짝하여 천명을 받들게 하소서. 풍화를 펼쳐서 은혜를 거두며 따뜻하고 자비롭게 6()을 펼치게 하소서.

제각각 마음을 거두어 귀빈(貴嬪)을 받들고자 53분의 부처님과 35분의 세존 및 당래(當來) 현겁(賢劫) 천불과 현재의 170분의 세존에게 예배드립니다.

삼가 원하오니, 월상(月相)이 만선(萬善)과 더불어 위대해지고, 금성(金聲)4()마다 보우하며, 7()을 일으켜서 환히 비추고 상락(常樂)10()를 빛나게 하소서. 규수(閨守)마다 어짊을 받들고 궁궐에서는 덕을 기뻐하여, 그 빛이 옥벽(玉壁)과 같이하며 곤경(崑瓊)처럼 빛나게 하소서.

대체로 듣자하니 드높기가 5() 같아야 황실을 보호한다 하고, 종실의 자손으로 성곽을 삼아야 반석처럼 굳건하다 합니다. 이로써 친척들은 노나라와 위나라가 형제의 나라처럼 지낸 것과 같이 하고, 맡은 임무는 소하(蕭何)와 조삼(曺參)처럼 해내니 3(:三公)가 자리를 마주하기만 하면 도()를 논하고, 구극(九棘)76)이 왕을 섬기어 쉼없이

 

정사(政事)에 매진한다 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각자 마음을 써서 임천(臨川)ㆍ안성(安城)ㆍ건안(建安)ㆍ파양(鄱陽)ㆍ시흥(始興)ㆍ예장(豫章)과 남강(南康)ㆍ여릉(廬陵)ㆍ상동(湘東)ㆍ무릉(武陵)의 여러 왕가와 나라의 척속(戚屬) 및 육사(六司), 권문세족[鼎貴]들을 받들고자 목숨 바쳐 사리의 형상과 보리의 묘탑(妙塔)으로 솟구쳐 나투신 다보여래(多寶如來)와 석가여래의 쇄신(碎身)께 예배드립니다.

삼가 원하오니, 그 마음을 깨끗이 다스리고 몸을 맑게 하여 태산을 찌르듯 하며 황제의 사직(社稷)이 융성하고 황손이 번창하게 하소서. 대중이 각자 일심으로 3보에 귀의하오니, 삼계의 도를 달리하는 술법과 5()의 갈라진 길마다 천상이나 인간사에 정업(正業)을 심어 제각각 1()의 과보로 돌이키게 하시며 또 귀신은 과보를 이끄니 일은 명도(冥途)에 밝아지게 하소서.

10()의 꽃다운 과보도 정력(正力)에 어긋나고 5()의 괴로운 마음으로 번뇌만 쌓아가면 다시 총명하고 정직하고자 하여도 3()의 제사(祭祀)를 덜지 못하고, 음양(陰陽)조차 헤아리지 못하니 6()의 막힘에 오히려 더 빠져들게 됩니다.

대중이 마땅히 정성을 다하되 천룡팔부(天龍八部)와 호탑(護塔)의 선왕(善王) 및 수라(脩羅)ㆍ팔비(八臂)ㆍ마혜수라(摩醯脩羅)ㆍ삼목대신(三目大神)에 모두 이르고 존경정전(尊敬正典)과 청정(淸淨)의 반야[波若]와 구경(究竟)의 열반 및 법화회(法花會)의 글과 정명(淨名)의 불이설법(不二說法)에 남김없이 예배합니다.

원하건대, 일체의 선신(善神)께서는 무명을 영원히 끊고 정본(正本)에 언제나 따르며 보궁(寶宮)에 눕고 거처하며 향적(香積)에 앉으십니다. 제석천이 깊고 넓음으로 반야의 배를 띄우며, 정거천(淨居川)에 드러누워 아름다운 소가 끄는 마차를 부리니, 그 은택이 삼계에 이르고 밝음이 사천(四天)을 비춥니다. 대비(大悲)로 고통에서 건지고 매사에 앞서의 자취를 밝히니, 자비를 드리워 동락(同樂)하시며 뜻을 높여 명호(名號)를 일러 주십니다. 이로써 신령스러운 권화(權化)로 자취를 드리우시는 것은 나고 감을 같이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보살의 위회(位懷)는 드러내고 거두는 방편이 많더라도 끝이 없는 치열한 고뇌는 기나긴 길에서 8()를 부추깁니다. 얽매어 있는 번뇌[纏情]는 험난한 길에서 6()를 둘러싸고 금박의 옥침대에 누워서도 오히려 해탈만을 생각하지만 구슬 꿰어 비단으로 수놓은 이불을 덮고는 중간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뜨거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얼음처럼 찬 물이 파도치는데 암실(暗室)은 천 겹으로 둘러싸이고, 흑성(黑星)은 백 개의 칼날이 삼엄합니다. 쇠바퀴로 뼈를 부수고 구리 기둥으로 장()을 그을리니, 칼끝에서 상처입고 검의 날에 베입니다. 이 같은 온갖 고통에 초췌해져서, 한 번 쉬는 것도 따르지 못하면 영겁을 영원히 여읜 듯하며 찰나라도 그치게 된다면 천 대()에 오래도록 이별한 듯합니다.

서로 더불어 염부제에 의지하며 물거품같이 살면서 헛것에 의지하니, 그 위험하고 약한 바탕은 떠돌기조차 험난하며, 바람과 번개같이 흘러가니 참으로 머물기도 어렵습니다. 하물며 3()이 번갈아 닥치고 낮 쥐와 밤 쥐가 번갈아 드나드는 데다 독화살과 독사가 더없이 두렵기만 한지라, 오로지 정법(正法)에 의지하여 이같이 쌓인 염오(染汚)를 덜어 내고, 영원토록 백복(百福)을 누리며 6()을 길이 끊고자 합니다. 대적하여 이르러도 강한 것이 없으니 오로지 부처님만 의지합니다. 지금 6()4()3()8()을 위해 자비로 거두어 주소서.

일심으로 십주보살(十住菩薩)3()의 성문(聲聞)에게 두루 예배드리며, 세간을 구하시는 관음(觀音)ㆍ헌개보적(獻蓋寶積)보살ㆍ서방대세지(西方大勢至)보살ㆍ동국묘음(東國妙音)보살ㆍ사변정명(四辯淨名)보살ㆍ이토(二土)보살ㆍ나발(螺髮)보살ㆍ주경(珠頸)보살ㆍ선숙(善宿)보살ㆍ미륵(彌勒)보살ㆍ문수(文殊)보살ㆍ금강장(金剛藏)보살ㆍ해탈월(解脫月)보살ㆍ엽음개(葉蔭蓋)보살ㆍ상거수(常擧手)보살ㆍ십대제자ㆍ오백나한에게 두루 예배드립니다.

원하오니, 묶인 것을 비워서 번뇌를 쉬게 하십시오. 역내(域內)의 백현(百縣)과 방외(方外)의 천성(千城)마다 모두 옥살이가 없어지고, 사람이 화합하되 독사라도 덮어 주고 속세를 교화하되 개미라도 바로잡으며, 짐새의 독을 먹더라도 죽지 않고 검으로 내리치더라도 상하는 것이 없게 하십시오. 함생(含生)을 계속 잇지 않고 생사를 돌이켜 원만을 이루게 하십시오. 위교(渭橋)77)에서 날마다 배부르고 예상(翳桑)78)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었으니 3()를 내치고 지옥을 부수며, 마왕의 병졸을 쳐부수며 생사의 군대를 물리쳐서 염라조차 10()의 마음을 내며 우방(牛傍)조차 5()의 업을 열어 가는 것이 물고기가 물이 다하듯이, 새에게 숲이 다하듯이 하게 하십시오. 한 번 법의 말씀 듣자오면 더러운 바탕을 버리고 사람마다 오체(五體)를 기울여 3()께 예배하게 하십시오.

 

 

9) 예불발원문(禮佛發願文) 왕승유(王僧孺)

지극한 깨우침은 고즈넉한지라 원래 말조차 끊어졌으며, 오묘한 생각은 허통(虛通)한지라 수단과 형상조차도 소략하게 합니다. 일마다 백비(百非)를 끊었으나 오는 것이 있으면 이에 감응하고, 이치는 4()를 잃었으므로 빛나게 감응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황상(皇上)은 도를 기틀 앞에서 비추고 사고는 바깥에 얽매이는 것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은 분수(汾水)에서 응결하고 마음은 환중(寰中)에서 사양하며, 헌구(軒丘)에서 도법(道法)에 허리를 굽히니 그 형체는 우내(宇內)에서 수고롭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법인(法因)이 자취를 드리워 염부제의 경계를 드러내 보이시고, 큰 권세로 이 땅에 오시어 사바(裟婆)의 영역에 굽어 임하셨습니다. 이로써 만유(萬有)를 씻어 내고 군생(群生)을 벗어나고자 하여, 보배의 연못에서 깨끗한 물에 씻고, 높은 가지를 도법(道法)에 드리우게 되었습니다. 중생을 굴복시켜 섭수하는 어짊이 그 연()을 만날수록 감득이 지극해지고 쓴 말과 부드러운 말의 덕화(德化)는 감득이 있어야 이같이 창도(唱導)됩니다. 날마다 쓰면서도 그 이로움이 한량없음을 알지 못하니, 모두 다 함께 증가하여 도달하되, 지존(至尊)을 받들고자 부처님께 목숨 바쳐 정성스럽게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면서 운운합니다.

원하오니, 황제 폐하가 지도(至道)4()와 함께 돌이키고, 그윽한 풍화(風化)8()과 더불어 넓혀서 순박한 근원을 3()로 돌이키고, 부박한 물결을 9()에 버리게 하소서.

지극한 다스림을 오늘에서야 만나고, 대도(大道) 또한 이 때에 이르렀으니, 호랑이와 표범을 밟아도 놀라지 않고, 전갈과 뱀을 디뎌도 물지 않게 하소서. 금을 묻고 옥을 깔며 범문(梵文)마다 부합하니, 좋은 곡식 절로 나며 예천(醴泉)은 마냥 솟구치고, 금수레와 옥마(玉馬)는 그 모양을 마주 번쩍이고, 현학(玄鶴)과 단봉(丹鳳)은 오가며 지저귀고, 광경(光景)은 휘황하게 비추고, 배는 떠다니고 수레는 치달리게 하소서.

무릎 굽혀서 이마 닿지 않음이 없으니, 머리를 들면 그 말씀 새롭게 하시어 고가(藁街)에 들어가 시중들며, 위수(渭水)에서 절하며 배알하되, 천지와 더불어 장구하고, 반석처럼 더욱 굳어지게 하소서. 중악(中岳)도 옮겨질 수 있고 장강(長江)도 맑아지는데, 우리 성황(聖皇)께서 갈수록 따뜻하고 갈수록 그윽해지게 하소서. 말하지 않고 교화를 행하니, 그 무위(無爲)

 

가르침에 숙연하게 하소서.

도를 갖추어 살펴 원량(元良)을 드러내고 멀리 살피되 세밀히 헤아리며 근본을 꿰뚫어 그 지극함을 아우르니 수고롭게 꾸미지 않고 자세하고 간곡하게 깨우치지 않아도 됩니다. 하물며 고요히 공()과 유()를 깨달아 함께 진()과 세속을 살펴서 행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어 이미 정법의 신심과 정법의 수지(受持)를 갖추었음에 있어서랴! 모두들 다 같이 진심으로 여러 대군(大君) 전하를 받들고자 부처님께 목숨 바쳐 정성스럽게 예배하면서 운운합니다.

우러러 바라건대 황태자 전하가 후덕하여 창창(蒼蒼)을 체득하고, 널리 거두되 반박(磻礡)을 기다리게 하소서. 전성(前星)79)이 밝게 빛나고 동리(東離)80)가 환해져서 참다운 말씀이 멀리 이르러 조화로운 기운이 하늘에 닿는지라, 재주 있는 이마다 다투어 귀의하고 정갈한 사람은 고루 이루게 하시되, 옥체가 맑고 윤택하여 금성(金聲)을 묘하게 뛰어넘게 하소서.

실다움이 가득한 뛰어난 말씀에 도가 두루 퍼지고 덕이 넓어지게 됩니다. ()를 잡고 곤룡(袞龍)을 입는[秉珪襲袞]81) 고귀함과 홰나무에 앉고 팥배나무에 쉬는[坐槐憩棠] 존귀함으로 동쪽 해돋이를 함께 아쉬워하고, 서쪽 해넘이를 안타까워합니다. 파초와 갈대가 실답지 않음을 깨닫고, 거울 속의 달이 헛되이 빛남을 터득하며, 번개가 잠깐 사이임을 믿으며, 그림 속의 물이 따라서 합쳐지는 것을 징험합니다. 당연히 지혜의 횃불을 널리 비춰서 보배로운 물결로 씻어 내었습니다. 이 같은 슬기의 뿌리를 키워서 이와 같은 묘한 재배를 이루어 냅니다. 또한 각각 더하여 태위(太尉) 등이 제왕(諸王) 전하(殿下)를 받들고자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운운합니다.

우러러 바라건대 여러 왕 전하가 이미 밝고 현명하여 그 성예(聲譽)가 하초(河楚)82)를 넘어서, 사람마다 서로 칭송하며 우러르게 하소서. 대도(大道)가 단석(旦奭)에 고루하고 공덕이 우척(右戚)83)에게 이르며 인위가 주친(周親)에 알려지게 하소서.

3()의 지위에 오르면 2(:日月)와 더불어 그 끝을 마주하게 하시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 4()84)가 고루 견고하게 하소서. 팽조(彭祖)와 연자(涓子)85)의 장구함과 같아지되, 비유컨대 소나무와 대나무처럼 곧게 하소서.

하늘의 가지가 빽빽하고 상도(常道)의 잎사귀가 향기로운 것을 보면, 실로 옥진(玉振)

 

난요(蘭搖)ㆍ금장(金鏘)ㆍ계욕(桂縟)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짧은 글을 보고서 금사[]를 알고 한 터럭을 보고서 봉황을 헤아립니다. 재주는 동전(銅殿)을 높이고 말이 운대(雲臺)에 넉넉하여 그윽하게 뛰어납니다. 이같이 훌륭한 선업(善業)으로 여러 왕 전하를 받들어 정성스럽게 예배하면서 운운합니다.

우러러 원하오니, 여러 대왕 전하는 그 아름다움이 청아한 기풍(氣風)과 함께 드러나고, 그 뛰어나기가 흰 구름과 함께 빛나서 청지(淸祉)를 길이 모으고 늘 원길(元吉)을 누리게 하소서. 목민(牧民)으로 나서면 성예가 백성 간에 드높고, 조정에 들어오면 명예가 만물의 우측에 처하게 하소서. 덕망이 산왕(山王)처럼 무겁고 지혜가 해장(海藏)처럼 뛰어나되, 그 목소리 울림은 구슬 나무보다 곱고 거울처럼 맑은 슬기는 옥전(玉田)보다 빛나게 하소서.

도가 운악(雲幄)으로 흐르고 덕이 초위(椒闈)에 감득하니, 필시 예전의 훌륭한 인()에 연유하여 숙세(宿世)에 좋은 운수를 받았음이 분명한데, 하물며 다시 정법의 단비에 흠뻑 젖으니 지혜의 해가 뜨는 것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비록 강후(姜后)가 귀걸이를 벗어 주나라 왕에게 죄를 청한 일86)과 달리 하더라도 번희(樊姬)가 고기를 버리며87) 형후(荊后)를 자극한 일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공손과 검박함으로 자신을 지키면서 욕심을 거두어 옥을 조각한 것을 버리고 화려한 것을 내쳐서 요심(了心)이 막히지 않고 정견(正見)에 의심됨이 없으며 모두 다 함께 정성스럽게 육궁(六宮)의 권속들을 받들고자 부처님께 목숨 바쳐 정성스럽게 예배하면서 운운합니다.

원하오니, 6()의 권속들의 업()은 희일(姬日)88)보다 화려하였고 명성은 규진(嬀辰)89)보다 번창하여 그 빛을 뿌려 도서(圖書)에 새기고, 그 향기는 시사(詩史)에 전하게 하소서. 자리가 보인(寶印)에 고루하고 행실이 달빛과 마주하게 하시어 6신통(神通)을 얻고 4무애변(無礙辯)을 얻게 하소서.

한명(閑明)의 덕을 받아 심묘(深妙)의 마음을 품었으니, 어찌 나무가 자라듯 닦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의지하되 게으름이 없었습니다. 의흥(義興) 등의 여러 공주(公主)는 이 같은 화려함을 잊고 이 같은 공주의 높은 지위를 즐거워하며 숙세의 기별(記別)한 것을 아울렀기 때문에 앞에 나타나 믿게 되었습니다. 지진(至眞)에 영향 받고 현극(玄極)

 

오매불망하여 사람들마다 제각각 더하여 이르러 여러 공주를 받들고자, 부처님께 목숨 바쳐 정성스럽게 예배하면서 운운합니다.

우러러 원하오니, 여러 공주들도 나날이 지혜의 성품을 늘려 지혜의 뿌리가 자라나게 하소서. 4()4()가 이미 존귀해져 답습하였으니, 7()7()에 물러남이 없게 하시며, 그침이 없게 하소서. 이 같은 왕의 자식[王姬]90)들을 무성케 하시고 황제의 여식(女息)들을 빛나게 하소서. 탕목(湯沐)에 길이 배향하며 산하(山河)와 더불어 견고하게 하소서. 영원히 붉은 비단옷을 입고 춥거나 덥거나 한결같이 다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3()은 우레처럼 치달리고 8()는 벼락처럼 흘러드니, 혹 화택(火宅)에 비기거나 급류에 비견하기도 합니다. 이로써 1척의 파도와 1촌의 빛조차도 막강한 힘으로도 머물게 할 수 없고, 월어(月御)와 일거(日車)는 뛰어난 재주로도 가로막지 못합니다. 그 사이에서 고()를 마시고 독()을 먹으며 아픔을 끌어안고 슬픔을 머금으니, 몸과 입은 10(使)91)에 연유하는 것이고, 마음은 8()92)의 주재입니다. 다 같이 서로 더불어서 나와 남이 모두 서로 제도하여 업의 굴레를 참회하여 무시(無始) 이래로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열 가지 악을 짓되 스스로 짓거나 남을 시켜 지었으니, ()을 보고도 칭찬하지 않고 악을 듣고 따라 기뻐하며 숲을 불사르고 못을 말리며 사냥개를 몰면서 새 매를 띄웠습니다. 정위(鄭衛)의 소리93)를 다하고 감미로운 맛만 지극히 하여 웃고 떠들며 악을 행하며 잘못된 일들만 이루었습니다.

성상(聖像)을 능멸하며 불탑을 부수고 방등(方等)을 공경하지 않고 화합(和合)을 깨트리면서 자기로 잣대를 삼아 남의 계책을 저버리니, 부끄럽게도 마음으로 이치를 등지고 어리석게도 부모를 속였습니다.

비록 7척이나 되는 몸으로 다른 사람의 1촌도 안 되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니 나에게는 그 마음대로 하지만 남에게는 마음과 입을 멋대로 하기 쉽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죄를 지었으니 제각각 일편단심으로 모여서 부처님께 목숨 바쳐 정성스럽게 오체투지하며 운운합니다.

우러러 원하오니, 여기 모인 대중 모두가 몸과 입이 청정해져서 행원(行願)이 구족(具足)하게 하소서. 세 가지 업의 장애를 없애시고 세 가지 명달(明達)의 지혜를 밝혀서 5()6신통(神通)이 자유롭게 하소서.

 

 

(1) 참회예불문(懺悔禮佛文) 왕씨(王氏)앞 사람과 같음

무릇 유()는 원래 있는 것이 아니나, 취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있다고 합니다. ()는 원래 없는 것이 아니니 집착할 것이 없기 때문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취하는 것이 있다는 미혹이 일어나면 갑작스럽게 만 가지 누()를 이루고, 집착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단숨에 아홉 겁을 뛰어넘습니다.

도가 귀한 것을 알아야만 공과 유를 함께 잊으며, ()을 소중히 하여야 진짜와 가짜가 짝지어 비추게 됩니다. 기운을 받은 함령(含靈)은 이 같은 근본을 들을 바 없으니 형체를 밝혀 그림자를 드리우되 그 유래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앎을 드러내더라도, 마치 비단을 뒤집어 쓴 것 같아서 그 어리석은 근기(根氣)를 가려내어 인도하지 못합니다. 심원하고 오묘한 것을 숭상하지만 깨우치지 못하니, 막막하기가 어두운 바다와 같고, 컴컴하기가 위태로운 성곽과 같습니다. 업의 바람이 휘감겨 엉기어 3()에만 오래도록 애를 씁니다. 미혹의 물에 휘둘려 두 가지 죽음이 서로 뿌리를 같이 하는데, 괴로움으로써 괴로움을 버리고 어둠으로써 어둠을 따라 끝내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

근본을 따지면 빛깔과 마음을 여읜 것이 아니고, 일마다 나고 죽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얽매임에 쌓여서 나고 죽음에 묻혀 떠돌고 여섯 가지 애욕(愛欲)을 마음대로 하여 여덟 가지 삿됨을 일으킵니다. 혹 남을 속여 번창하기도 하고, 인의(仁義)를 잠시 행하다 횡사하기도 하고, 혹은 재주가 고르고 지혜가 같은데도 이 사람은 빈천하고 저 사람은 호강하기도 하고, 혹 날을 같이하여 때를 나란히 하였는데도 남은 득의(得意)하고 나는 실기하기도 합니다. 단지 보시하여도 그 과보가 적막하다고 말하며, ()이 마주하는 것이 뚜렷함을 알지 못하니, 지금의 과()는 예전에 연()하여 지나간 일이 나타나고 심어져 이루어진 것인데, 마치 부계(符契)와 같아서 머리터럭만큼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생을 재촉하여 그 연명하려는 술법에나 힘써서 헛된 목숨을 그 아득한 운수로 되돌리려 하니, 마땅히 찰나 간에 시들면서 잠깐의 틈조차 남기지 않는 이치를 깨우쳐야 합니다. 동쪽에서 받들어 그 말씀을 거두어 기르니 서쪽 기슭은 이미 희미해졌습니다. 비유하자면 강의 급류와 같고, 잎사귀에 맺힌 한 방울의 이슬과 같습니다. 거짓으로 쌓은 성곽은 제거하기 쉽고 독수(毒樹)는 스스로 공격합니다. 만약 헛된 것과 실다운 것 두 가지를 밝히고 진도(眞道)와 세속을 함께 구별해내지 못한다면, 어찌 정성껏 본받아 회향하며 마음에 새기고 닦아가되, 물러서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면서 날로 더욱더 견고해질 수 있겠습니까?

남평대왕(南平大王)94) 전하가 진상(辰象)

 

정기를 머금고 해악(海岳)의 순일한 영기(靈氣)를 길러서 숙세(宿世)8()95)을 모셨기에 일찍이 7()96)에서 노닐었습니다. 묘한 인()을 영겁에 의지하여 이 땅에 훌륭한 과보를 불러들였으니, 순금이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옥이 더욱더 다듬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이용하여 쌓이기도 전에 이미 흩뜨려지고 거두기도 전에 모두 희사(喜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법을 본받고자 신령스러운 손끝에 연유하여 그 신묘한 성상(聖像)을 우러르며 허리 숙입니다. 이와 같이 재법(齋法)을 엄숙히 이룩하는 것을, 비유하건대 자물쇠를 채우는 것같이 하였습니다.

스님들과 속인이 몰려들어 지나갈 틈도 없이 넘쳐나며 명향(名香)이 방안에 가득하고 보배 꽃이 땅을 뒤덮었습니다. 고귀한 범천(梵天)이 몸을 숙여 돌이켰는데, 어떻게 진목(震木)이 그치며 구름이 걷히지 않겠습니까? 그 청아한 삿대에 어찌 바로 물고기가 뛰어오르며 말을 부리지 않겠습니까? 삼가 사부대중이 지성으로 오체투지하여 목숨을 걸고 동방여래에게 귀의하며 운운합니다.

우러러 원하건대 대왕 전하가 5()를 안에 남기고 10()으로 바깥을 구축하여 백복(百福)이 장엄하고 만지(萬祉)가 두루 모여 놀라운 꿈이라고 그 생각을 거스르지 않고 달게 잠자더라도 그 정신을 편안하게 하여 다시 보배로운 길을 열어서 지혜의 업이 날로 늘게 하십시오.

현극(玄極)이 뭉친 것은 학자(學者)가 가늠할 바가 아니며, 묘한 근본은 생각하기도 어려운데, 어찌 행인(行人)이 이를 헤아리겠습니까? 그러므로 10()에서도 나곡(羅穀)97)의 의심이 있는 것을 본다고 하니, 3()에서도 시양(兕羊)의 미혹만을 품게 된다고 합니다. 스스로 몸을 다하여 기각(機覺)하고 극()을 비춰서 명허(冥虛)하며 이치를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근본에 합치되어 한결같지 않다면, 어떻게 세상을 인수(仁壽)로 제도하여 만물을 위험에서 건져 올리겠습니까?

도화(道化)는 벽해(碧海)마저 싸안았고 성예는 적현(赤縣)에 드높은데, 예전에 요 임금의 빛은 오직 세상에 나아갔을 적에 있었고 순 임금의 우직한 효도는 오는 과보를 겸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방(四方)의 순행(巡行)98)은 우 임금의 자취를 피곤하게 하였고, 6()99)로 탕 임금 자신을 고달프게 하였습니다. 아울러 구역(區域) 가운데에서 애를 쓰며 수고롭게 하여 방내(方內)를 이롭게 한다 해도, 어찌 고해의 근원에서 백성들을 제도하고 두려운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신력(神力)을 일으켜 법의 사자후(獅子吼)를 외치면서 향성(香城)의 묘한 이치를 궁구하고 금하(金河)의 깊은 말씀을 궁리하여, 그 지혜는 용수(龍樹)보다 높고 슬기로움은 마명(馬鳴)보다 뛰어나고자 한다면 반드시

 

신민(臣民)을 씻겨 내고 치백(緇白)을 장려해야 합니다. 하늘이 덮고 땅이 기르고 물에서 태어나고 뭍에서 나는 것에 모두 자비를 내려 한결같이 평등함을 깨우쳐야 합니다. 황제 폐하와 여러 대군 및 태자를 받들고자 부처님께 목숨 바쳐 정성스럽게 예배하면서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우러러 원하오니, 황제 폐하는 경조(景祚)7()이 서로 고루하고 황기(皇基)2()와 더불어 영구하며 땅은 평안하고 하늘은 법도를 이루어 음악이 조화롭고 예법이 흡족하니, 옥촉(玉燭)으로 길을 바로잡아 재앙이 이르지 못하게 하소서.

순조로운 바람과 상서로운 단비가 기름지고 윤택하게 서로 어울리니, 병마(兵馬)를 내치고 장정(壯丁)을 쉬게 하며 창을 녹이고 칼을 내치게 하소서. 남쪽 기슭에 머물고 북쪽에 임하며, 서쪽을 덮으며 동쪽으로 점차 이어지니, 단비를 내리시고 지혜로운 구름을 덮게 하소서. 오직 노끈으로 관대를 맬지니, 황제가 만수무강하시어 창도(唱導)가 되고 원수(元首)가 되게 하소서.

또 원하오니 황태자 전하가 예업(叡業)이 맑고 빛나서 정명(貞明)과 촛대를 나란히 하고 행실이 맑고 자태가 온화하여 숭산(崇山)ㆍ곽산(霍山)과 나란히 우뚝하게 하소서. 소리를 내어서는 희주(姬周:주나라)의 가요를 부르고 도()는 한 장(漢莊)100)을 넘게 하여 영원히 지혜의 물에 목욕하고 지혜의 태양을 늘 비추게 하소서.

으뜸가는 묘법(妙法)을 그 몸에 지니고 지극한 인()을 자신에게 두고 여덟 가지 쌍수(雙樹)에서 그 빛을 거두고 숨기셨으니 보배 성이 열리지 않고 지혜의 문이 막혔습니다. 그리하여 성후(聖后)가 먼 길에 법륜(法輪)을 힘써 굴리고, 아득한 구덩이에서 보주(寶舟)를 노 저으니, 도가 인기(人祇)에게 두루 미치고 복은 조묘(祧墠)에 융성합니다. 공경스럽게 원림과 침전(寢殿)을 섬기고 경건하게 종우(宗祏)를 받드니, 이 같은 묘과(妙果)에 연유하여 7()의 성령(聖靈)을 받들고자 부처님께 목숨 바쳐 정성스럽게 예배하면서 운운합니다.

우러러 원하오니 밝음이 거듭되고 성스러움이 더하여 어렴풋하게 있는 듯하여 신()을 올려 나라를 깨끗하게 하고 천궁(天宮)으로 행차하여 금거(金蕖)에 화생하여 보전(寶殿)을 거닐도록 하소서.

정성된 마음을 내적으로 다하니 지극한 깨우침이 있는 듯하고 그 형체에 힘써서 바깥을 다하니 법신(法身)도 지척 간인 듯하다. 여러 대중이 서로 더불어 함께 모여 제왕의 형제 및 비주(妃主)와 척속(戚屬)을 받들고자 부처님께 목숨 바쳐 정성스럽게 예배하면서 운운합니다.

원하오니 제왕 전하가 강토(疆土)를 가르는 것이 제희(諸姬)보다 성대하게 하시고 반석(磐石) 같기가

 

융한(隆漢)을 넘게 하소서. 덕은 노위(魯衛)보다 높게 하시고 의리는 간평(間平)101)보다 무겁게 하소서. 도를 논하면 백벽(百辟)이 그 풍화(風化)에 의지하고, 글을 지으면 군려(群黎)가 그 교화를 우러르게 하소서.

지극한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 그 계상(季像)을 계승하여 융성하게 하고 다만 안으로 어린이나 어른들이 모두 이와 같은 다복을 받게 하여 온갖 꽃이 봄에 만발하듯이, 비유하자면 만 가지 열매가 가을에 이루어지듯이 하게 하소서. 신해(信解)가 굳고 깊어서 날개를 펴되 게으름이 없게 하소서.

소승(小乘)의 뜻이 열등하여 그 일이 오로지 자기 하나뿐이나, 대사(大士)는 뜻이 균등하여 6()를 포용합니다. 오늘날 단주(檀主)는 그 믿음이 명주(明珠)와 같아서 거울을 옆에 두어 수고로움이 없으며, 그 바탕이 빼어난 옥과 같아서 바깥의 광채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늘 만물과 나를 균등하게 하고 마음으로 원한이 있는 자나 친한 이를 평등하게 보고자 하십니다. 대중이 제각각 정법에 정성껏 귀의하니, 28()ㆍ사천왕(四天王)ㆍ제석천(帝釋天)ㆍ범천(梵天) 및 인간으로 가난한 이나 병든 이 내지 지옥에서 고초를 겪는 이를 위하여 거룩한 모습의 신묘한 성상과 보리(菩提)의 보탑(寶塔)에 예배하면서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대승(大乘)의 오묘한 장경(藏經)과 묘법(妙法)의 깊고 깊은 경전과 대신(大身)의 무변신(無邊身) 및 대력(大力)의 무량력(無量力)ㆍ사향사과(四向四果)와 팔현팔성(八賢八聖)에게 원하오니, 6()의 악한 조짐을 없애어 4()를 빛나게 하소서. 지극한 다스림이 만우(萬宇)에 빛나고 그윽한 교화가 9()를 꿰뚫게 하며 단단한 껍질에 덮이고 비늘에 쌓인 것이나 습생(濕生)ㆍ난화(卵化)8()6(), 3()5()가 모두 은혜로운 이익을 얻어 따라서 의지할 바를 알게 하소서. 도림(刀林)의 칼날을 멈추게 하고 검수(劍樹)는 그 칼끝을 꺾어버리어 미혹한 성곽의 길을 열어 네거리를 가리켜 주소서. 어두운 방에 밝음을 이루어 3()를 크게 드리워서 모두 함께 도량으로 나아가 깨달음의 씨앗에 오르게 하소서.

 

(2) 초야문(初夜文)

멀리 무시(無始) 이래로 이 몸까지 이르렀으니, 나고 죽음이 돌아가며 치닫는 것은 먼지 날리는 수레바퀴로도 견주지 못하며, 밝고 어두움이 번갈아 닥치는 것은 장작과 불로도 비유하지 못합니다. 물이 흘러가되 급하게 가지 않아도 천 개의 달이 이것을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여귀풀의 벌레는 쓴 맛에 익숙하고 계수나무 벌레는

 

단맛을 좋아합니다. 단잠은 오동나무에 기대는 것보다 더하고 오랜 혼란은 누룩을 베고 자는 것보다 심합니다. 그 이치는 다른 곳에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며 매사가 참으로 자기 스스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 같은 형해(形骸)를 받고서도 그 빌미하고 이르는 바를 모르니, 장차 이 심식(心識)은 마침내 어디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까?

오로지 세력과 지위로 서로 높이고 하루아침뿐인 화려함을 서로 뽐내며 병거(兵車)와 보병(步兵)이 성하여 경쟁하듯이 당년에 서로 치닫기만 합니다. 모두들 그 굳센 마음과 튼튼한 이빨과 불그레한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을 지니지 않음이 없습니다. 입으로는 기름진 것과 맛난 것을 좋아하고 몸으로는 가볍게 편안히 하며 악기를 타며 노래를 지치게 불러도 싫증내지 않고, 만옥으로 새긴 평상과 상아로 마감한 자리가 길게 늘어져 있더라도 삼가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비천(悲泉)과 약목(若木)102)의 출몰도 사람과 관계없다고 합니다. 쭈그려 앉은 까마귀[蹲烏]103)와 돌아보는 토끼[顧兎]의 승낙(昇落)도 항상 자재(自在)하며, 그 목숨이 풀잎같이 연약하고 그 몸이 괴로움의 그릇임을 달리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어찌 개와 닭이 도살장으로 뛰어들고, 고라니와 사슴이 주방으로 찾아들며, 가을 메뚜기가 주저하지 않고 불꽃으로 날아들고, 봄철 누에가 실을 뽑으며 저 죽을 것을 깨치지 못하는 것과 다르다 하겠습니까?

앞서서 마주할 것을 구별하지 못하였고 되풀이하는 그 원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하나의 두려운 길에 접촉함에 이르러서는 맹문(孟門)104)도 험난하지 않았습니다. 수레바퀴에 그 몸이 찢기었으나, 이같이 하여도 그 아픔을 그치지 못하고, 뒤꿈치를 자르고 어깨에 못을 박았으나, 이같이 하여도 그 괴로움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윤회(輪廻)의 기복은 아득할지니, 이로써 하늘 가운데의 하늘이 자비를 내려 인도하시되, 여름철 강물의 도도한 물결을 막고, 가을 들판에 타오르는 불길을 누르셨습니다. 혹 상주(商主)와 같고 의왕(醫王)이라고도 헤아리는데, 그 형체를 삼천세계에 두루하여 가르침을 백억 일월 세계(百億日月世界)에 전파하셨습니다. 혹 그 위신력을 드러내거나 혹 모든 범경(梵境)을 적막하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3()의 고를 여의고, 미소 지으심에 4()이 즐거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병에 따르고 기틀에 맞추어 얽힌 것을 풀어 주시고 이치를 말씀하시되, 낮이나 밤이나 이를 제지(制止)하신 것을 8()이라 이름합니다. 8정도(正道)의 열쇠로써 법의 관건(關鍵)을 삼으셨으니, 이는 참으로 세상을 벗어나는 오묘한 나루입니다. 재가(在家)에서 그 행이 뛰어난 이들이 서로 더불어 정성스럽게 귀의하면서 남평왕(南平王) 전하를 받들고자 부처님께 목숨 바쳐 정성스럽게 예배하면서 운운합니다.

 

우러러 원하오니, 대왕 전하의 슬기로운 업이 맑게 빛나되 남악(南岳)과 더불어 견고케 하시고, 곧은 마음과 우뚝한 행실은 동명(東溟)과 함께 넓어지게 하소서.

만 가지 허물이 연기처럼 꺼지고 백 가지 재앙이 안개처럼 없어져서 묘한 술책에 미혹되지 않고 억센 악마가 침범하지 못하게 하소서. 마음의 우울함과 상쾌함을 모두 몰아내어 그 몸에 나아가게 하시고 따뜻하고 서늘함에 따라서 그 성품을 얻게 하소서. 스스로 하늘을 본받는 기()를 받게 하시어 영원히 선위(膳衛)의 도를 견고하게 하여 6신통력을 얻고 4무애의 지혜를 구족케 하소서.

태양이 곤오(昆吾)105)에 있으면 생각이 많아지고 일이 소란스러워지며, 해가 몽사(濛氾:해 지는 곳)에 떨어지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뜻이 즐거워집니다. 옥 같은 달과 구슬 같은 별이 그 화려함을 보태고자 서로를 비추고, 가벼운 구름과 옅은 안개는 날이 개면 저절로 수그러지는데, 종을 울리면 메아리가 퍼지고 불을 켜면 빛을 발합니다. 법당(法堂)이 날아갈 듯이 추녀 끝에서 높이 휘날리니 모든 색()이 바래졌습니다. 이름난 향기가 그윽하며 겹겹이 처마가 나와 가볍게 구르고 금표(金表)가 빛을 머금고 붉은 기둥이 빛깔을 짙게 하는데, 하물며 천존(天尊)이 우뚝하여 위광(威光)을 사방에 비추며 푸른 연꽃처럼 빛나는 것이 참으로 가설(珂雪:흰 눈)과 같습니다. 기위(祇衛)106)가 지척임을 깨달으니, 임원(林園)107)이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이구(離垢)108)의 손님을 크게 부르고, 응진(應眞:아라한)의 반려를 널리 모았으니, 청범(淸梵)이 머금고 토하여 한번 외치매 세 번 탄식하게 됩니다. 이에 밀의(密義)가 높이 거양되어 우러르고 법의 수레가 끊이지 않게 됩니다.

남평왕은 기틀을 얻는 민첩함을 체득하고 신묘함에 들어가는 미묘함을 바탕 삼았으며, 덕을 쌓고 조화를 머금어 어짊을 본받고 의로움을 바로 하였습니다. 이에 선()은 세밀하더라도 다하지 않음이 없고 허물은 가볍더라도 반드시 버렸습니다. 받는 것을 허약(虛籥)같이 하고 비추는 것을 현경(懸鏡)같이 하였으니, 노위(魯衛)109)의 존귀함을 잊고 부악(柎萼:)의 화려함을 간략히 하였습니다. 보기 드문 훌륭한 자리를 이룩하여 만나기 어려운 법장(法場)에 임하니, 서로 더불어 오체투지하며 부처님께 목숨 바쳐 정성스럽게 예배하면서 운운합니다.

우러러 원하오니 대왕 전하가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시고 한 모양의 도리에 올라 그 덕의 단계는 움직이지 않고 지혜는 원행(遠行)에 뛰어나게 하소서. 은혜로운 성예가 양양하여 8()

 

더불어 멀리 퍼지고, 뛰어난 옥체가 6()과 더불어 서로 가락을 맞추니, 설산(雪山)의 좋은 약을 먹으며 노성(露城)의 감미(甘味)를 마시게 하소서. 곤복(袞服)과 환규(桓珪)4()와 더불어 영구하고, 붉은 바퀴와 수놓은 깃대는 천사(千祀)를 이어 항상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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