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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81 불교(구경일승보성론 2권 / 究竟一乘寶性論)

by Kay/케이 2023.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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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2

 

 

견혜 지음

륵나마제 한역

한길로 번역

 

 

2. 불보품(佛寶品)

 

부처님의 몸은 과거세가 없고

현재세도 없고

미래세도 없어서

고요히 스스로가 깨달아 나신지라

 

이미 스스로가 깨달아 아시고는

남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이 때문에 그들에게 설하시되

두려움이 없는 항상한 도를 설하신다.

 

또 부처님은 능히

저 지혜, 자비의 칼과

묘한 금강저(金剛杵)를 잡아 가지시어

모든 고뇌의 싹[苦芽]를 베며

 

모든 소견의 산[見山]을 부수고

뒤바뀐 뜻[顚倒意]을 뒤엎고

일체 번뇌의 숲[稠林]을 감추어 주시니

이 때문에 나 이제 경례하는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보여 나타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함이 없는 몸은 자연 그대로이어서

남을 의지하지 않고서 아시나니

지혜와 자비와 힘으로써

자타(自他)의 이익을 다 구족하게 하시네.

 

이 게송은 불보(佛寶)가 포섭한 그 여덟 가지 공덕을 대략 밝힌 것이다. 어떤 것을 여덟이라 하는가 하면, 함이 없는 몸이 그 첫째이고, 자연스러움이 그 둘째이고, 남을 의지하지 않고서 아는 것이 그 셋째이고, 지혜가 그 넷째이고, 자비가 그 다섯째이고, 힘이 그 여섯째이고, 스스로의 이익됨이 그 일곱째이고, 남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그 여덟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미래도 아니어서

자성(自性)의 함이 없는 몸이시고

도 법신의 고요한 몸이시니

이 때문에 자연 그대로인 줄을 알라.

 

다만 안 몸[內身]으로 스스로가 증득하셨기에

남을 의지하지 않고서 아신지라

이같이 세 세계를 깨달아 아시어

인자한 마음으로 도를 설하시며

 

지혜와 자비의 칼로

고통과 번뇌의 가시를 뽑아 주시니

앞의 세 글귀를 이롭게 하는 것이고

뒤의 세 글귀는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함이 있음을 아주 여읜 그것을 함이 없는 것이라 하나니, 알아두라. 또 함이 있는 것이란, 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법이 그것인데, 저 함이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몸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고, 이 때문에 함이 없는 몸이라고 이르는 것이니, 알아두라. 게송에 부처님의 몸은 과거세도 없고 현재세도 없고 미래세도 없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또 일체의 희론(戱論)과 허망한 분별을 아주 여읜 고요한 몸이시기에, 이를 자연스러운 몸이라고 이르는 것이니, 알아두라. 게송에 법 몸의 고요한 몸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 남을 의지하지 않고서 아는 것이란, 남의 인연을 의지하지 않고서 증지(證知)하기 때문이다. 남의 인연을 의지하지 않고서 증지하는 것이란, 남의 인연을 의지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의인연을 의지해 나지 않는 것이란, 스스로가 깨달을 뿐 남을 의지해 깨닫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래의 함이 없는 그 법신(法身)의 모양에 의지하기 때문에 일체 불사가 처음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자연히 행하여 항상 쉬지 않으며, 이와 같이 희유(希有)하고도 부사의한 부처님의 경계는 남을 따라 듣지 않나니, 남을 따라 듣지 않는 것이란, 스승을 따라 듣지 않고서 그 자재한 지혜와 말 없는 몸으로 스스로가 깨달아 아는 것이다. 게송에 스스로가 깨달아 아신다,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미 스스로가 깨달아 알고 나선 그런 뒤에야 다른 눈 어두운 중생들을 위해 깨달아 알게 하고, 다시 그들을 위해 함이 없는 법신을 증득하사 더 없는 도를 설하신지라, 이 때문에 더없는 지혜와 자비라고 이르는 것이니, 알아두라.

게송에 이미 스스로가 깨달아 아시고는 남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이 때문에 그들에게 설하시되, 두려움이 없는 항상한 도를 설하시네고라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두려움이 없는 항상한 도를 것은 그 도의 두려움이 없는 것이 바로 항상한 것임을 밝힘이라, 세간을 벗어난 퇴전(退轉)하지 않는 법으로써 이와 같이 차례차례로 또 남의 고통과 번뇌의 뿌리를 뽑아 주시니, 여래의 지혜ㆍ자비와 신통의 힘을 이러한 세 글기 칼과 금강저(金剛杵)의 비유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 어떤 것을 고통의 뿌리라 하는가 하면, 대략 말하건대 세 세계[三有] 가운데태어나는 명색(名色)이 그것이고, 또 어떤 것을 번뇌의 뿌리라 하는가 하면, 이른바 몸에 대한 소견과 허망한 삿된 소견과

 

의혹과 계취(戒取) 따위가 그것이다. 또 명색이란 것이 거기에 포섭되어 고뇌의 싹을 자라내나니 알아두라. 여래의 지혜와 자비심이 능히 저 싹을 베기 때문에 이러한 뜻에서 칼의 비유를 설함이니, 게송에 부처님은 능히 저 지혜와 자비의 칼을 가지셨기에 모든 고뇌의 싹을 베시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삿된 소견과 의심이 번뇌에 포섭되어 아주 도를 보지 못함으로써, 세간의 지혜로선 알 수 없고, 그 빽빽한 번뇌의 숲을 파괴할 수 없는 것이 마치 세간의 나무숲이나 담장과 같으므로 저 비슷한 법을 여래의 칼로써 능히 파괴하는지라 이 때문에 금강저의 비유를 설한 것이니, 게송에 묘한 금강저를 잡아 가지셨기에 모든 소견의 산을 부수고 뒤바뀐 뜻과 일체 번뇌의 숲을 덮어 주신다,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 여섯 글귀를, 여래장엄지혜광명입일체불경계경(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佛境界經) 가운데, 차례로 나타내어 설하였으니 알아두라.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하면, 경 가운데 말씀하기를, “문수사리여, 여래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는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느니라하셨다. 이것이 바로 여래의 함이 없는 모양을 밝힌 말씀이며, 그 다음에 다시 설하시기를, “[]가 없는 청정한 유리 땅 속에 제석왕(帝釋王)의 몸이 거울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또한 아홉 종류의 비유를 든 것이 다 여래의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을 밝힌 말씀이다. 도 말씀하시기를, “문수사리여,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청정한 법신(法身)도 그러하면서 움직이지 않고 나지 않고, 마음으로 희론(戱論)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지라, 분별하지 않으므로 분별이 없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생각이 없어 부사의하고, ()함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없어 고요하고, 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으므로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고, 닿일 수도 없고, 모든 모양이 없으므로 깨달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느니라고 하셨으니, 이러한 글귀들이 다 고요함을 설명하는 차별의 모양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부처님의 일체 하시는 일 가운데 일체의 희론과 분별을 아주 여의신 그 고요하고도 자연스러움을 밝힌 것이며, 다음에 또 다른 나머지 수다라(修多羅) 가운데 설하시기를, “여실히 일체 법문을 깨달아 안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다 여래께서 남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큰 보리를 증득하심을 밝힌 것이다.

또 다음에 설하시기를, “여래의 보리가 열여섯 가지 있다고 하셨다. 이 때문에 경에 말씀하시기를, “문수사리여, 여래에 이와 같이 일체의 법을 여실히 깨달아 아는지라 일체 중생들의 법 성품이 깨끗하지 않아서 때[]가 있고 티[]가 있는 것을 관찰하고서 떨쳐 일어나 모든 중생들 앞에 대비로써 나타나느니라고 하셨으니, 이는 여래의 더없는 지혜와 자비를 밝힌 것임을 알아두라. 그리고 문수사리여, 여래는 이와 같이 일체의 법을 여실히 깨달아 아느니라, 하신 말씀은 앞에 설한바 여래는 몸 없는 것으로써 몸을 삼는다는 것과 같음이니, 여실히 깨달아 아는 것이란, 여실히 분별없는 부처님의 지혜로써 알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의 법 성품을 관찰하는 것이란, 또한 삿된 무리[邪衆]의 중생들까지 다 나의 몸속에 있는 법의 성품과 법의 세계인 여래장(如來藏)과 같이 저 모든 중생들도 그러하여서 아무런 차별이 없는 그것을 여래의 지혜 눈으로써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깨끗하지 않는 것이란, 모든 범부들은 그 번뇌장(煩惱障)이 있기 때문이다. 때가 있는 것이란, 모든 성문과 벽지불로서는 그 지장(智障)이 있기 때문이다.

티가 있는 것이란, 모든 보살마하살은 저 두 가지에 의지하는 습기장(習氣障)이 있기 때문이다. 떨쳐 일어나는 것이란, 갖가지 중생들을 교화할 수 있는 방편의 갖가지 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대비란 것은, 큰 보리를 이룩해 일체 중생들에게 평등히 대자대비한 마음을 일으켜서 저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증득하신 지혜처럼 같이 깨달아 알아서 큰 보리를 증득케 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일체 중생들에게

 

평등히 큰 바퀴를 굴리어 항상 쉬지 않는지라, 이와 같이 세 글귀가 능히 남의 이익을 일으키기 때문에 힘이라 하는 것이니, 알아두라. 또 이 여섯 글귀의 차례를 말하자면, 맨 처음의 새 글귀는 이른바 같을 이가 없는 공덕이니, 여래의 법신이 상응(相應)되어 자신의 이익을 나타내 보임이요. 그 나머지 세 글귀는 이른바 지혜의 평등인, 남의 이익을 나타내 보임이다. 도 이에 대한 뜻이 있으니, 지혜가 있으므로 해서 제1의 고요한 법신을 증득했는지라, 이 때문에 자신의 이익이라고 이르는 것이고, 또 자비와 힘의 두 가지에 의지하여 큰 법 바퀴를 굴리는지라, 이 때문에 남의 이익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미 불보(佛寶)를 설했으니, 다음엔 법보(法寶)를 밝히기로 한다.

 

 

3. 법보품(法寶品)

 

저 불보에 의지하여 참된 법보가 있는지라, 이러한 뜻에서 불보를 먼저하고 그 다음에 법보를 나타내 보임이니, 저 법보에 의지하기 때문에 네 게송을 설한 것이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또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저것에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또 저것을 여의는 것도 아니며

 

생각해 헤아릴 수도 없고

듣고 얻는 지혜의 경계도 아닌지라

언어(言語)의 길을 벗어나서

속마음으로만 청량함을 아시네.

 

저 참되고 묘한 법의 해가

청정하여 때[], []도 없으니

크나큰 지혜의 광명이

널리 모든 세계를 비추매라

 

능히 음산한 장애와 각관(覺觀)

탐욕ㆍ진심ㆍ우치 따위와

일체의 번뇌를 깨뜨리시니

이 때문에 나 이제 경례하는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사의하고 둘이 아니고

분별이 없고 청정하고 현현(顯現)하고 대치하는 것이

무엇에 의지하여 무슨 법을 얻는가 하면

여의는 법이 바로 두 진리의 모양이네.

 

이 게송은 법보가 포섭한 그 여덟 가지 공덕을 대략 밝힘이다. 그 여덟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 부사의하고, 둘째 둘이 아니고, 셋째 분별이 없고, 넷째 청정하고, 다섯째 현현하고, 여섯째 대치하고, 일곱째 결과를 여의고, 여덟째 원인을 여읨이 그것이라, 여의는 것을 게송으로 말하겠다.

 

사라짐의 진리와 도의 진리인

이 두 진리가 여읨을 섭수[]하는지라

각각 세 가지 공덕이 있는 것을

차례대로 설명하겠으니 알아두라.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앞서 말한 였 가지 공덕 가운데 처음부터의 세 가지 공덕인 그 부사의한 것과 둘이 아닌 것과 분별이 없는 것 등은 사라짐의 진리가 번뇌의 결과를 여읨을 섭수하는 것을 나타내 보임이요, 그 나머지 세 글귀인 청정한 것과 현현하는 것과 대치하는 것 등은 도의진리가 번뇌의 원인을 여읨을 섭수하는 것을 나타내 보임이니, 알아두라, 또 법의 모든 여읨을 증()하는 것을 사라짐의 진리라 하고, 어떤 법을 수행하여 번뇌를 끊는 것을 도의 진리라 하며, 이 두 진리의 합한 것을 청정한 법이라 한다. 이 두 진리의 모양을 여의는 법이라 하나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생각해 헤아리지도 않고 말도 없이

슬기로운 이는 속 지혜로써 아느니

이러한 이치이기 때문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지라

 

부사의한 법과 청량함과 둘이 아닌 법과

또는 분별이 없는 법과

청정하고 현현하고 대치하는

이 세 글귀는 마치 태양과 같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사라짐의 진리에 세 가지 법이 있음을 대략 밝힘이다. 이러한 뜻이기에 부사의한 것이니, 알아두라. 또 무슨 뜻이기에 부사의한 것이냐 하면, 네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그 네 가지란, 첫째 없다고 하겠는가, 둘째 있다고 하겠는가, 셋째 있다거나 도는 없다고 하겠는가, 넷째 둘이라고 하겠는가, 게송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또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저것에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또 저것을 여의는 것도 아니라고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 사라짐의 진리가 세 가지 법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할지니,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사라짐의 진리를 알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그 세 가지란, 첫째 생각해 헤아리는 경계가 아니니, 게송에 생각해 헤아릴 수 업고 듣고서 얻는 지혜의 경계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둘째 일체의 음향(音響)과 명자(名字)와 장구(章句)아 언어(言語)와 상모(相貌)를 아주 여의었기 때문이니, 게송에 언어의 길을 벗어났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셋째 성인만이 증지(證知)하는 법이기 때문이니, 게송에 속마음으로 아시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사라짐의 진리를 어떻게 둘이 아닌 법이라 하고, 또는 분별이 없는 법이라 하는가 하면,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 가운데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리불아, 여래의 법신이 청량(淸凉)한 것은 둘이 아닌 법이기 때문이고, 분별이 없는 법이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음이니, 게송에 역시 청량함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이 둘인데 둘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하면, 이른바 둘이란, 업과 번뇌가 그것이고, 분별이란, 이른바 쌓임[]이 업 또는 번뇌의 원인과 삿된 생각 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저 자성(自性)이 본래 적멸(寂滅)하여 둘이 아니고 두 가지 행이 없는 줄을 안다면, 괴로움이 본래 나지 않음을 알 것이니, 이를 괴로움의 사라지는 진리라 하는가 하면, 사라지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의 사라지는 진리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에 말씀하시기를, “문수사리여, 어떤 법 가운데에도 마음과 뜻과 의식과 지어감이 없는 것은 저 법 가운데에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분별이 없기 때문에 삿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생각을 지니기 때문에 무명(無明)을 일으키지 않고, 무명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곧 열두 가지 인연을 일으키지 않고, 열두 가지 인연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곧 나는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사라지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의 사라지는 진리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괴로움의 사라짐이란, 처음이 없고 지음이 없고 일어남이 없고 다함이 없고 다함을 떠나서 항상하고 청정하고 변하지 않는지라 그 자성의 청정하여 일체 번뇌장(煩惱障)에 얽매임을 벗어났습니다. 세존께서 항하사보다 지나친 떠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고 부사의한 불법을

 

필경 성취하셨기에 여래의 법신이라고 이르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여래의법신이 번뇌장에 얽매임을 여의치 않은 그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르나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등등 승만경 가운데 사라짐의 진리를 널리 설해 두었으니, 알아두라.

또 무슨 인()으로써 이 사라짐의 진리 여래의 법신을 얻는가 하면, 이를테면 견도위(見道位) 중에서나 또는 수도위(修道位) 중에서 분별없는 지혜가 마치 세 종류의 해[]와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알아두라. 게송에 저 참된 묘법의 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른바 세 종어떤 것이냐 하면, 첫째 해 바퀴[日輪]의 청정한 것과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일체 번뇌의 때를 아주 여의었기 때문이다. 게송에 청정하여 티끌과 때가 없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둘째 일체의 빛과 모양을 나타냄이 설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일체 종류의 일체 지혜로써 능히 비춰 알기 때문이다. 게송에 큰 지혜의 광명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셋째 어두움을 대치하는 것이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일체의 지혜로써 대치하는 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라, 게송에 널리 모든 세간을 비추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을 대치하는 법이라, 하는가 하면, 이른바 진실하지 않는 일 모양에 의지하여 허망한 분별의 생각을 갖춤으로써 탐욕ㆍ진심ㆍ우치에 끌리는 번뇌를 내나니,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우치한 범부들은 결사(結使) 번뇌에 의지하여 진실하지 않는 일 모양을 취해 생각하기 때문에 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진애(瞋愛)에 의지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무명(無明)의 허망한 생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킨다. 또다시 저 탐욕ㆍ진심ㆍ우치 따위와 허망한 분별에 의지하여 진실하지 않는 일 모양을 취함으로써 그 생각이 삿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삿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의지하여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를 의지하여 탐욕ㆍ진심ㆍ우치를 일으키는지라,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몸과 입과 뜻 등이 탐욕의 업과 진심의 업과 우치의 업을 조작하고, 이 업을 의지하기 때문에 다시 나고 또 나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 우치한 범부들은 번뇌의 쌓임을 의지하여

 

삿된 생각을 일으키고, 삿된 생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에 의지하기 때문에 일체 업을 일으키고, 업에 의지하여 나는 것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이 일체 종류의 번뇌가 업을 더럽히어 그 더러움이 또 더러움을 내는지라, 이 때문에 우치한 범부들은 하나의 진실한 성품이 저 여실한 성품과 같음을 여실히 아리도 못하고 여실히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여실한 성품을 관찰하되, 그 모양을 취하지 않고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한 성품을 볼 수 있나니, 이 같은 진실한 성품을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평등히 증명해 아시는 것이다.

또 이 같은 허망한 법의 모양을 보지 않아야만 여실한 법이 바로 진여의 법계인 줄을 여실히 알아보리니, 이는 제1의 이치인 진리를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법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기 때문에 이를 평등히 증하는 지혜[平等證智]라 하고, 이를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種智]라 한다. 장애를 대치하는 법을 응당 이렇게 알지니 진여의 이치를 일으켜서 대치하는 법이기 때문에 저 대치하는 법은 다시 현재와 같은 일을 일으키지 않는지라, 게송에 모든 음산한 장애과 각관(覺觀)과 탐욕ㆍ진심ㆍ우치 등 일체 번뇌를 깨뜨린다,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이 사라짐의 진리를 얻는 여래의 법신은 그 견도위(見道位) 중에서나, 수도위(修道位) 중에서의 분별없는 지혜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널리 말하자면,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 등 수다라(修多羅) 가운데, 이른바 수보리(須菩提), 진여와 여래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음이니, 이러한 평등을 알아야 한다. 이미 법보를 설했으므로, 다음엔 승보(僧寶)를 설하기로 하겠다.

 

 

4. 승보품(僧寶品)

 

대승의 법보에 의지하여 퇴전(退轉)하지 않는 보살의 승보가 있는지라, 이러한 뜻에서 법보의 다음에 승보를 나타내 보인 것이며, 저 승보에 의지하여 이 때문에 네 게송을 설한 것이다.

 

 

바르게 깨달아 바르게 아는 이는

저 일체 중생들을 보되

청정하고 가 없고

고요하고 진실한 경계로 보나니

 

저 일체 중생들의

자성(自性)인 청정한 마음을 앎으로써

번뇌의 진실함이 없음을 보는지라

이 때문에 모든 번뇌를 여의는 것이다.

 

장애가 없는 청정한 지혜를 갖춘이는

사실 그대로 중생들을 보되

그 자성인 청정한 성품을

곧 불ㆍ법ㆍ승의 경계로 보나니

 

거리낌이 없는 청정한 지혜로써

모든 중생들의 성품을 보는 것이

한량없는 경계로 두루한지라

이 때문에 나 이제 경례하는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여실히 안의 몸[內身]을 알고

지혜로써 청정함을 보는지라

이 때문에 더없는 승보라고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네.

 

이 게송은 또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여실히 중생들을 보되

적정하고 진실한 법신으로 보나니

그 성품이 근본 청정함으로써

번뇌가 본래부터 없는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여실히 진여의 경계[本際]는 본래부터 []하고 법도 한 것인 줄을 보나니, 게송에 바르게 깨달아 바르게 아는 이는 일체 중생들을 보되 청정하고 가 없고 적정하고 진실한 경계로 보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저 바르게 깨달아 바르게 아는 이는 처음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진여의 경계가 적정함은 도 없고 법도 없는 것이어서 번뇌를 소멸하여 증()할 그 때에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닌 줄을 여실히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이는 자성(自性)의 청정한 법신을 보는 것이라, 대략 두 가지 법이 있는 것을 말하겠다. 이른바 그 두 가지란, 첫째 성품은 본래 자성의 청정함을 보는 것이요, 둘째 모든 번뇌는 적멸(寂滅)함을 보는 것이니, 게송에 저 중생들의 자성인 청정한 마음을 앎으로써 번뇌의 진실함이 없음을 보는지라, 그러므로 모든 번뇌를 여의는 것이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자성의 청정한 마음이 본래 청정한 것인가 하면, 또 본래 청정한 것이 항상 번뇌에 더럽힘이 되기도 하나니, 이 두 가지 법이

 

저 누() 없는 진여의 법계 가운데에 선한 마음과 불선한 마음이 함께 할 뿐, 다시 제3의 마음은 없는지라, 이러한 이치란 깨달아 알기가 어려운 것이니, 이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찰니카[刹尼迦]의 선한 마음도 번뇌에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찰니카의 불선한 마음도 번뇌에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면, 번뇌가 마음에 닿지 않고, 마음도 번뇌에 닿지 않거늘, 어떻게 닿지 않는 법이면서 능히 마음을 더럽힐 수 있습니까? 세존이시여, 그러나 번뇌가 있어서 그 번뇌가 마음을 더럽히는 것도 있거니와, 자성의 청정한 마음이면서도 더럽히는 것이 있음을 분명히 알기 어려운 것이옵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을 성자승만경가운데 널리 설했으니, 자성의 청정한 마음과 또는 번뇌에 더럽히는 마음을 잘 알아두라.

또 두 종류의수행이 있으니, 이를테면, 여실히 수행하는 것과, 도는 두루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증명해 알기 어려운 이치이다. 여실히 수행하는 것이란, 이른바 중생들의 자성의 청정한 것을 곧 본성의 경계로 보기 때문이다. 게송에 장애가 없는 청정한 지혜를 갖춘 이는 여실히 저 중생들을 보되 그들의 자성인 청정한 마음을 곧 불ㆍ법ㆍ승의 경계로 보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며, 두루 수행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십지(十地)에 두루한 일체 경계이기 때문이고, 일체 중생은 다 일체 지혜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일체 경계에 두루하는 것이란, 그 일체 경계에 두루함으로써 세간을 뛰어난 지혜에 의지하여 일체 중생 내지 축생(畜生)까지도 다 여래장(如來藏)이 있다고 보는 것이니, 알아두라.

저 일체 중생을 보되 다 진여의 본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초지(初地)의 보살마하살이 일체 진여의 법계를 두루 증()하기 때문이다. 게송에 거리낌이 없는 청정한 지혜 눈으로써 모든 중생들의 성품을 보는 것이 한량없는 경계에 두루하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안 몸[內身]으로 저 누()없는 법계를 스스로가 깨달아 알아서 장애가 없고 거리낌이 없는 것은 이 두 가지 법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첫째 여실히 수행하고 둘째 두루 수행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이른바 세간을 뛰어나서 여실히 진여의 법을 안으로 증()하는 그 지혜는 2()과 범부 사람들과 더불어 같지 않음이니 알아두라. 또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보살마하살의 세간을 뛰어나서 청정하게 증하는 지혜를 밝힘이라, 대략 두 가지 수승한 성문ㆍ벽지불의 증하는 지혜를 설하겠으니, 그 두 가지란, 첫째 막힘이 없고, 둘째 거리낌이 없음이 그것이다. 막힘이 없는 것이란, 이를테면 여실히 수행하여 모든 중생들의 보리자성의 청정한 경계로 보기 때문에 막힘이 없는 것이다. 거리낌이 없는 것이란, 이를테면 두루 수행하여 여실히 그지없는 경계를 알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여실히 도를 알아보아야

청정한 부처님의 지혜를 보나니

이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 성인은

중생들의 의지하는 대상이 될 수 있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하면, 또 초지(初地) 보살마하살의 증한 지혜[證智]에 의지하여 청정하게 도를 보고 그 지위의 승()에 물러나지 않아야 능히 저 더없는 청정, 수승한 원인을 볼 수 있으리니, 알아두라. 게송에 여실히 도를 알아보아야 청정한 부처님의 지혜를 본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 초지의 증한 지혜는 다른 보살마하살의 보시, 지계 등 바라밀 공덕보다 뛰어난지라,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여실히 진여를 보고서 증한 지혜에 의지해야 하나니라. 이 때문에 일체 중생ㆍ하늘ㆍ용ㆍ팔부(八部)와 성문ㆍ벽지불을 더불어 의지하는 곳을 삼음이라, 게송에 물러나지 않는 성인은 중생들의 의지하는 대상의 될 수 있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무슨 뜻으로써 성문 승보(僧寶)에 귀의하는 것은 밝히지 않았습니까?

보살 승보는 공덕이 한량없는지라, 이 때문에 응공(應供)이고, 응공이기 때문에 으례 예배와 찬탄과 공양에 응하는 것이지만, 성문 사람들은

 

이러한 뜻이 없으니, 이 때문에 성문 승보에 귀의하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경계와 모든 공덕과

증지(證智)와 또는 열반과

모든 지위가 청정하여 때가 없음과

대자대비를 만족케 함과

 

여래의 집에 태어남과

자재한 신통을 구족함과

그 과()의 수승함이 가장 위가 없는

이러한 수승한 것이 귀의 하는 뜻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대략 열 가지 수승한 뜻을 설함이니 모든 성문ㆍ벽지불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 열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재 관찰하는 것이 수승함이요, 둘째 공덕이 수승함이요, 셋째 지혜를 증한 것이 수승함이요, 넷째 열반이 수승함이요, 다섯째 지위가 수승함이요, 여섯째 청정한 것이 수승함이요, 일곱째 평등한 마음이 수승함이요, 여덟째 태어남이 수승함이요, 아홉째 신통의 힘이 수승함이요, 열째 그 과()가 수승함이다. 관찰하는 것이 수승함이란, 이를테면 진여의 경계를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을 관찰의 수승이라 하는지라. 게송에 경계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공덕이 수승함이란, 보살의 수행은 만족하게 여김이 없어 2()들의 욕망이 적는 것과는 같지 않나니, 이것을 공덕의 수승이라 하는지라, 게송에 공덕이라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지혜를 증한 것이 수승함이란, 두 종류의 나 없음을 증함이니, 이것을 지혜의 수승이라 하는지라, 게송에 증지(證智)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열반이 수승함이란, 중생들을 교화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열반의 수승이라 하는지라, 게송에 열반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지위가 수승함이란, 이른바 열 가지 지위가 그것이니 이것을 지위의 수승이라 하는지라, 게송에 모든 지위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청정한 것이 수승함이란, 보살이 지혜의 장애[智障]를 아주 여의는 것이니, 이것을 청정의 수승이라 하는지라, 게송에 청정하여 때가 없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평등한 마음이 수승한 것이란, 보살의 대비가 두루 중생들을 덮어 주는 것이니, 이것을 평등한 마음의 수승이라 하는지라, 게송에 대지대비를 만족케 한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태어나는 것이 수승함이란, 모든 보살은 태어나도 태어남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을 태어남의 수승이라 하는지라, 게송에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신통의 힘이 수승이란, 이를테면 삼매의 자재한 신통 따위의 힘이 수승함이니, 이것을 신통 힘의 수승이라 하는지라, 게송에 삼매의 자재한 신통을 구족함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 과()가 수승함이란, 맨 마지막의 더없는 보리(菩提)가 그것이기 때문이니, 이것을 과의 수승이라 하는지라, 게송에 과의 수승함이 가장 위없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어떤 영리하고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모든 보살의 공덕이 한량없는 것을 알아서 보리의 한량없는 광대한 공덕을 닦아 익히며, 큰 지혜를 지니고 자비가 원만하여서 저 한량없는 중생들의 성행(性行)과 번뇌의 숲을 비추어 아는 것이 마치 초생달과 같으리니, 다만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보름달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보살마하살은 저 모든 성문과 또한 아라한(阿羅漢)의 도를 증득하여도 지혜가 적은 사람으로서 대비심이 없는 이는 자기 몸을 위해 비추는 것이 마치 별과 같은 줄을 알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이 알고서 여래의 크나큰 보름달의 몸을 취하려고 한다면 보리의 도를 닦아서 마땅히 초생달을 버려야 하겠거늘, 보살이 마음을 일으키되 그 나머지 별의 몸인 성문ㆍ벽지불에게 예배하고 공양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옳지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또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일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함을 밝힘이다. 처음으로 보리심을 발기한 모든 보살들로서도 이미 다른 중생의 몸을 이익되게 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번뇌 없는 청정한 금계(禁戒)를 닦아 간직하거나 또한 아라한의 과()를 증득한 성문 사람들을 항복받거늘, 어찌 하물며, 열 가지 자재함[十自在] 등 한량없고 그지없는 공덕을 얻은 보살마하살로서 성문ㆍ벽지불 따위의 그 공덕 적은 사람들과 같겠는가. 이런 이치가 없을지라, 이 때문에 경 가운데 게송으로 말하였다.

 

만약에 자신을 위하여

이 때문에 금계를 수행하고

대자한 마음을 아주 떠나서

파계한 중생들을 버리거나

 

또는 자신을 위하기 때문에

금계의 재산을 호지(護持)한다면

이같이 금계를 호지하는 자는

부처님께서 청정함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네.

 

만약에 다른 중생들을 위해

이 때문에 금계를 수행한다면

능히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경이

마치 땅ㆍ물ㆍ불ㆍ바람과 같은지라

 

 

다른 중생들을 위하여

1의 대비심을 일으키는

이것을 청정한 계율이라 하고

그 밖의 유사한 것은 청정한 것이 아니라 하네.

 

어떠한 뜻에 의지해 어떠한 사람을 위하여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이 삼보(三寶)를 설하셨습니까?

게송으로 말하겠다.

 

능히 조어(調御)하는 이와

그의 증득한 법과

그의 제자에게 귀의할지니

삼승(三乘)을 위해고

세 공양[三供養]을 믿는 등

이 때문에 삼보를 설하심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대략 설하건대 세 종류의 뜻에 의지하고 여섯 종류의 사람들을 위해 이 때문에 삼보를 설하심이다. 이른바 세 종류의 뜻이란, 첫째 조어사(調御師)이고, 둘째 조어사의 법이고, 셋째 조아서의 제자이니, 게송에 능히 조어하는 이와 그의 증득한 법과 그의 제자에게 귀의할지니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여섯 종류의 사람이란, 그 어떤 것이 여섯이냐 하면, 첫째는 대승(大乘)이고, 둘째는 중승(中乘)이고, 셋째는 소승(小乘)이고, 넷째는 부처님을 믿음이고, 다섯째는 법을 믿음이고, 여섯째는 스님을 믿음이니, 게송에 삼승을 위하고 세 공양을 믿는 등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맨 처음, 첫째의 뜻을 해석하건대, 첫째의 대승과 넷째의 부처님을 믿는 사람이란, 양족(兩足) 중에 가장 뛰어난 제일 높으신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다. 조어사ㆍ대장부(大丈夫)라는 뜻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니, 게송에 능히 조어하는 이께 귀의할 것을 말함이 이 때문이다. 또는 부처님의 보리를 취하는 보살 사람들을 위하기 때문이니, 게송에 대승을 위할 것을 말함이 이 때문이다. 또는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복밭[福田] 사람들에게 공양할 것을 믿게 하기 때문이니, 게송에 부처님을 믿어 공양할 것을 말함이 이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서 불보를 설하여 내세움이니, 게송에 이 때문에 불보를 설하심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미 첫째의 뜻에 있어서 첫째의 대승과 넷째의 부처님 믿는 사람을 해석했으니, 다음엔 둘째의 뜻을 해석하기로 한다. 둘째의 중승(中乘)과 다섯째의 법을 믿는 사람이란, 번뇌를 여읜 중에 가장 뛰어난 제1의 법에 귀의하는 것이다. 조어사께서 증득하신 그 공덕의 법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니, 게송에 증득하신 법에 귀의할 것을 말함이 이 때문이다. 또는 깊고 깊은 인연법을 남을 의지해 알지 않고

 

자연히 아는 벽지불 사람들을 위하기 때문이니, 게송에 중승을 위할 것을 말함이 이 때문이다. 또는 제1 묘법의 복밭 사람들에게 공양할 것을 믿게 하기 때문이니, 게송에 법을 믿어 공양할 것을 말함이 이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서 법보(法寶)를 설하여 내세움이니, 게송에 이 때문에 법보를 설하심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미 둘째의 뜻에 있어서 둘째의 중승과 다섯째의 법 믿는 사람을 해석했으니, 다음엔 셋째의 뜻을 해석하기로 한다. 셋째의 소승(小乘)과 여섯째의 스님을 믿는 사람이란, 모든 대중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제1의 보살 스님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조어사의 제자로서 모든 부처님 여래의 설하신 법을 여실히 수행하여 서로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니, 게송에 제자에게 귀의할 것을 말함이 이 때문이다. 또는 남을 따라 듣는 성문(聲聞) 사람들을 위하기 때문이니, 게송에 소승을 위한 것을 말함이 이 때문이다. 또는 제1의 성중(聖衆)인 복밭 사람들에게 공양할 것을 믿게 하기 때문이니, 게송에 스님을 믿어 공양할 것을 말함이 이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서 승보를 설하여 내세움이니, 게송에 이 때문에 승보를 설하심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세 종류의 뜻에 의지하여 여섯 종류의 사람들을 위해 설한 것이니, 이 때문에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이 삼보를 설하셨고, 게송에 말하기를, ‘능히 좋아하는 이와 그의 증득하신 법과 그의 제자에게 귀의할지니, 삼승을 위하는 세 공양을 믿는 등, 이 때문에 삼보를 설하심이네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 교화해야 할 중생들을 차례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이러한 뜻에서 세간의 진리[世諦]에 의지하여 삼보에 귀의할 것을 나타내어 보이고 말씀하며 내세우심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버릴 수 있음과 또는 허망함과

물체가 없음과 또는 두려워함과

두 종류의 법보와 또는 승보는

구경(究竟)의 귀의가 아닌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법이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그 두 종류란, 첫째 설하는 법이고, 둘째 증()하는 법이 그것이다. 설하는 법이란, 이를테면 여래께서 수다라(修多羅) 등 명자(名字)와 장구(章句)의 자체에 해당된 바를 설하는 것이니, 저 설한 바의 법이 도를 증할 때엔 그 사라지는 것이 마치 배와 뗏목을 버리는 것과 같다. 게송에 버릴 수 있는 것임을 말함이 이 때문이며,

 

증하는 법이 또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원인과 결과에 의지하는 두 종류의 차별이 그것이다. 어떤 법에 의지하여 어떤 법을 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이른바 도가 있는 것이란 함이 있는 모양[有爲相]에 섭되는 것이다. 만약에 함이 있는 모양에 섭수되는 것이라면, 저 법은 허망한 것이다. 게송에 허망한 것임을 말함이 이 때문이다. 만약에 허망한 것이라면 진실함이 아니겠고, 진실함이 아니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겠고, 진리가 아니라면 곧 무상(無常)한 것이겠고, 무상한 것이라면 귀의할 것이 아닐 것이다.

또 만약에 저 성문의 도에 의지하여 사라짐의 진리[滅諦]를 얻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물체가 없는 것이 마치 등불이 꺼지는 것과 같아서 다만 조금의 번뇌와 고통을 끊을 뿐이다. 만약에 그러한 것이라면, 이는 물체가 없을 것이요, 만약에 물체가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남의 귀의하는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게송에 물체가 없는 것임을 말함이 이 때문이다. 스님에 있어서도 무릇 삼승(三乘)의 사람이 있으니, 삼승의 사람 가운데 성문(聲聞) 스님에게 의지하면 항상 두려움이 있으므로 항상 부처님ㆍ여래에게 귀의할 것을 구하는 동시에 세간을 여일 것을 구하나니, 이는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해야 할 일을 아직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회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이란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냐 하면, 아라한(阿羅漢)으로서 비록 번뇌를 다했다 하지 못하고선 그 일체 함이 있는 행상(行相)에 지극히 두려워하는 마음이 항상 앞에 나타난다.

이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아라한은 공포(恐怖)가 있나이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그 일체 행상(行相)이 없는 데에도 두려워하는 생각이 주착되어서 마치 어떤 사람이 칼을 잡고 와서 자기를 해치려는 것과 같음이니, 이 때문에 아라한은 그 구경의 즐거움이 없기 마련이다. 또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의지함을 구하지 않는 데에 의지할 것이니, 마닐 중생들이 저에 의지함이 없으면 저들은 두려워하리라. 공포 그것 대문에 귀의할 데를 구하는지라, 이러한 아라한은 공포가 있어서 공포 때문에

 

여래에게 귀의하나니, 이 때문에 만약 그와 같이 저들이 공포가 있다면, 저 사람은 필경 저 두려운 곳을 멀리 여의기 위해 두려움 없는 곳을 구하는 것이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저 두려움을 멀리 여의는 곳에 귀의하는 것을 이르되, 배우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는 것이라 하나니, 이 때문에 성문의 법보와 승보인 이 두 보배는 조그마한 귀의는 될 수 있어도 구경의 귀의는 아니옵니다라고 하였다. 게송에 두 종류의 법보와 승보는 구경의 귀의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것이 또 무슨 뜻을 밝힘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중생들의 귀의할 유일한 곳은

부처님 법신의 저 언덕이라

부처님 몸에 귀의하면 법이 있고

법에 귀의하면 마침내 스님이 있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적정(寂靜)하여 둘이 아닌 것도 때[]를 여읜 법의 몸이시기 때문이고, 유일한 법의 몸은 맨 마지막으로 청정한 곳이기 때문이다. 또 삼승(三乘)의 사람으로서 구호해 주는 이가 없거나 귀의할 데가 없는 자에겐 오직 저 언덕[彼岸]의 끝없는 근본 진미이고 끝내 다함이 없으므로 여기에 귀의할 수 있으니, 항상 귀의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모든 부처님ㆍ여래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항상하고 청량(淸凉)하고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귀의할 수 있는 것이다.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 가운데 널리 설해 두었으니 알라.

무슨 뜻으로서 불ㆍ법ㆍ승을 이름하여 보배라고 말씀하십니까?

게송으로 말하겠다.

 

참된 보배는 세간에 희유하고

밝고도 깨끗하고 또 세력이 있어

능히 세간을 장엄할 수 있고

가장 위되어 변하지 않는 이러한 것이기 때문이네.

 

이 게송이 또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이른바 보배란 여섯 종류의 서로 비슷한 것이 있으니, 저 여섯 종류의 서로 비슷한 상대되는 법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법ㆍ승을 이름하여 보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여섯 종류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세간에서 얻기 어려운 것이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선근(善根)이 없는 중생으로선 백천만겁을 지나더라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게송에 참된 보배는 세간에 희유하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둘재는 더러움이 없는 것이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일체 번뇌 있는 법을 다 여의었기 때문에 게송에 밝고도 깨끗하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셋째는 위덕(威德)이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여섯 신통의 부사의함과 위덕의 자재함을 구족했기 때문이라, 게송에 세력이 있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넷째는 세간을 장엄할 수 있는 것이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그 장엄이 능히 세간에 뛰어나기 때문이다. 게송에 능히 세간을 장엄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다섯째는 수승하고도 미묘한 것이 서로 비슷하여 상대외는 법이니, 세간을 뛰어난 법이기 때문이다. 게송에 가장 위된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여섯째는 고치거나 달라질 수 없는 것이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니, 번뇌 없는 법을 얻었으므로 세간의 여덟 가지 법으로선 흔들 수 없기 때문이다. 게송에 변하지 않음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어떤 법에 의지하여 이 삼보가 있으며, 어떻게 이 법에 의지하여 세간과 또 세간을 뛰어난 청정한 삼보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까?

그 뜻을 위해 두 줄 게송을 설한 것이다.

 

진여는 더러움에 섞여 있는가 하면

모든 더러움을 아주 여읜 것이고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이기도 하고

또는 부처님의 하시는 업이기도 하네.

 

이와 같은 묘한 경계는

모든 부처님의 아시는 바이라

이 묘한 법신(法身)에 의지하여

삼보를 출생하게 되는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이러한 삼보의 성품이

오직 부처님들의 경계인 것은

그 네 가지 법의 차례가

모두 부사의하기 때문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진여가 더러움에 섞임이 있다는 것은, 이른바 진여의 불성도 모든 번뇌에의 얽매임을 여의지 못한 여래장(如來藏)이기 때문이다.

 

또 모든 더러움을 아주 여읜 것이란, 곧 저 여래장이 몸을 바꿔 부처님 지위에 이르러서 법신을 증득한다면, 이를 여래의 법신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이란, 곧 저 몸을 바꾼 여래의 법신 형상 가운데 모든 세간을 뛰어난 열 가지 힘과 두려움이 없는 등 일체의 공덕이 한량없고 그지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하시는 업이란, 곧 저 열 가지 힘과 일체의 불법이 자연히 더없는 부처님의 업을 항상 일으켜서 언제나 쉬지 않고 버리지 않고 항상 모든 보살들에게 수기(授記)하심이다. 저 곳에 차례로 네 가지 법의 부사의한 것이 있어서 그 네 가지 곳에 차례로 네 가지 법의 부사위한 것이 있어서 이 때문에 여래의 경계라 하는 것이다. 그 네 가지 곳이 무엇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더러움과 깨끗함의 상응되는 곳이고

더럽히지 않아서 청정한 곳이고

서로가 법을 버리지 않는 곳이고

자연히 분별없는 곳이 그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진여가 더러움에 섞임이 있다는 것은 동일한 때에 깨끗함도 있고 더러움도 있어서 이곳이 바로 부사의한 것이다. 부사의한 것이란 깊은 인연의 법을 믿는 성문ㆍ벽지불은 그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 가운데 부처님께서 승만에게 말씀하시기를, “천녀(天女), 자성(自性)의 청정한 마음인데도 염오(染汚)가 있는 것을 분명히 알기 어려우니라. 두 가지 법이 있어서 분명히 알기 어려운 것이니, 이를테면, 자성의 청정한 마음을 분명히 알기 어렵고, 저 마음이 번뇌에 더럽히게 됨을 또한 분명히 알기 어려움이다. 천녀여, 이러한 두 가지 법은 너나 또는 큰 법을 성취한 보살마하살이라야 받아 들을 수 있고, 그 밖의 성문ㆍ벽지불 따위는 다만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이 두 가지 법을 믿을 뿐이니라고 하셨다. 게송에 더러움과 깨끗함의 상응되는 곳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다음 모든 더러움을 아주 여읜 것이란, 진여는 본래 더러움이 있는 것이 아니거늘,

 

뒤 때에 가서청정하다고 말하는 이곳이 바로 부사의한 것이다. 이 때문에 경에 말씀하기를, “마음의 자성이 청정하니 자성이 청정한 그 마음의 본래 청정함은 저 마음의 본체 그대로라고 하였다. 여래께서 이와 같이 아신지라 이 때문에 경에 또 말씀하기를, “여래가 한 생각 마음으로 상응하는 지혜로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으셨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며, 게송에 더럽히지 않아서 청정하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이란, 이를테면 과거세에나 미래세에 한결같이 범부들 지위 속에 더럽혀 있으면서도 항상 진여의 법신을 버리지 않으시어 일체의 불법이 다르지도 않고 차별도 없으니 이곳에 바로 부사의한 겻이다. 이 때문에 경에 말씀하시기를, “다시 불자여, 여래의 지혜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왜냐하면, 일체 중생계 가운데 끝내 한 중생의 몸속에도 여래의 공덕과 지혜를 구족하지 않은 것이 없건만, 다만 중생들이 다 바뀌어서 여래의 지혜는 아주 뒤바뀜을 여읜 지혜이고, 일체의 지혜이고, 스승이 없는 지혜이고, 거리낌이 없는 지혜인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자여, 마치 크나큰 경전 책 하나가 삼천대천(三千大千) 세계 하나와 같아서 그 대천세계 가운데 일체의 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다.

또 이천(二千) 세계와의 비등한 책엔 그 이천 세계 가운데의 일을 죄다 기록하고, 소천(小千) 세계와의 비등한 책엔 그 소천세계 가운데의 일을 죄다 기록하고 사천하(四天下)와의 비등한 책엔 그 일체 사천하의 일을 죄다 기록하고, 수미산(須彌山)과의 비등한 책엔 그 수미산 등의 일을 죄다 기록하고, 지천(地天) 궁전과의 비등한 책엔 그 지천 궁전 가운데의 일을 죄다 기록하고, 욕천(欲天) 궁전과의 비등한 책엔 그 욕천 궁전 가운데의 일을 죄다 기록하고, 색천(色天) 궁전과의 비등한 책엔 그 색천 궁전 가운데의 일을 죄다 기록하고, 무색천(無色天) 궁전과의 비등한 책엔 그 무색천 궁전 가운데의 일을 죄다 기록하여서,

 

저 삼천대천세계와 같은 그러한 것들의 크나큰 경전 책이 아주 미세한 티끌 하나 속에 들어 있는가 하면, 일체 미세한 티끌이 죄다 그렇게 되어 있다. 때마침 어떤 사람이 세간에 나타나 그 지혜와 총명이 구족하고 청정한 하늘 눈[天眼]을 성취하여서 이 경전 책이 미세한 티끌 속에 있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어떻게 이같이 광대한 경전 책이 미세한 티끌 속에 있기만 하여 모든 중생들을 요익(饒益)하지 않을까.

내가 이제 부지런히 방편을 마련하여 저 미세한 티끌을 깨뜨리고 이 경전 책을 꺼내어서 중생들을 요익하게 히리라.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 때에 저 사람이 곧 방편을 마련해 미세한 티끌을 깨뜨리고서 이 경전 책을 꺼내어 중생들을 요익하게 하는 것과 같음이다. 불자여, 여래의 지혜 그 형상 없는 지혜와 거리낌 없는 지혜가 중생들의 몸 속에 구족해 있건만, 다만 우치한 중생들이 뒤바뀐 생각에 덮이어서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신심을 내지 못하는지라, 이때에 여래께서 거리낌이 없는 청정한 하늘 눈으로 일체 중생들의 몸을 관찰하고 이미 관찰하시고는, 말씀하시기를, ‘이상하고 이상하도다. 어떻게 여래의 구족한 지혜가 몸속에 있는데도 알아보지를 못할까. 내가 마땅히 방편으로 저 중생들을 가르쳐 성인의 도를 깨달아서 모두 일체의 망령된 생각과 뒤바뀜과 번뇌에의 얽매임을 아주 여의게 하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여래의 지혜가 각자의 몸속에 있는 것이 부처님과 다름이 없음을 구족히 보게 하리라하시고는 여래께서 즉시 저 중생들을 가르쳐 여덟 가지 바른 도[八正道]를 닦아서 일체 허망한 것과 뒤바뀐 것을 여의고 뒤바뀐 것을 여의고 나선, 여래의 지혜를 보게 하시나니, 이는 여래와 함께 중생들을 요익케 하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게송에 서로 법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역시 이 때문이다.

다음 부처님의 하시는 업이란, 똑같은 때이거나 일체의 곳에서나 일체의 때에 자연 분별이 없어

 

중생들의 마음에 수순하고 교화할 중생들의 근성(根性)에 수순하되 뒤섞이지도 않고 그르치지도 않으면서 수순하여 부처님의 업을 일으키시나니 이곳이 바로 부사의한 것이다. 이 때문에 경에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여, 여래가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불법 가운데 들어가게 하기 위해 이 때문에 한량없는 여래의 업을 일으킴에 있어서 한없는 말이 있는 것이다. 선남자여, 여래의 온갖 실로 하시는 업을 저 일체 세간의 중생들로서는 헤아릴 수도 없고, 셈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명자(名字)로써 말할 수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과거의 중생들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고, 일체 부처님들의 국토에서 휴식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일체 부처님은 다 평등하셨기 때문이다. 일체 세간을 벗어난 마음으로써 업을 일으켰기 때문이고, 분별 엇음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죄다 평등하시기 때문이다. 다름도 없고 차별도 없는 그 법의 본성과 본체이기 때문이니라.”

그와 같이 널리 말씀하셨으며, 다시 청정하지 못한 비유리(毘琉璃)와 마니 보배 구슬[摩尼寶珠]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여, 그대들은 이 비유에 의지해 알아두라. 여래의 업은 부사의 하기 때문에 평등하여 두루 이르기 때문에 일체의 곳에 나무랄 수가 없기 때문에 삼세(三世)가 평등하기 때문에, 삼보(三寶)의 종자를 끊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비록 이같이 부사의한 업 가운데 머무시면서도 허공의 법신을 버리지 않고, 허공의 법신을 버리지 않으시면서도 중생들에게 그들의 들어야 할 명자(名字)와 장구(章句)를 따라 설립하신다. 비록 중생들을 위해 이같이 설법하되 항상 일체 중생들의 마음으로 염()하거나 관()하는 것을 멀리 여의시나니, 왜냐하면 일체 중생들의 마음을 여실히 아시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게송에 자연히 분별이 없기 때문에 이 묘한 법신에 의지하여 삼보를 출생하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뜻에서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깨달은바 보리의 법과

보리의 갈래에 의지해 아는 것과

보리의 갈래로 교화하는 것과

중생들이 보리를 깨닫는 것이다.

 

첫째의 글귀는 바른 인()이 되고

나머지 세 글귀는 깨끗한 연()이 되나니

앞의 두 글귀는 스스로의 이익이고

뒤의 두 글귀는 남을 이익되게 함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이 네 글귀가 일체 아는 바의 경계를 통틀어 포섭한 것이다. 이것이 또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첫째의 한 글귀는 그 법을 증하는 것을 말함이니, 알아두라. 저 법을 증한 것을 이름하여 보리라 함이니, 게송에 깨달을 바 보리의 법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글귀에 있어서 보리의 갈래에 의지해 아는 것이란, 모든 부처님들의 보리의 공덕이 능히 그 부처님들의 보리를 짓는 인()이기 때문이니, 게송이 보리의 갈래에 의지해 안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셋째 글귀에 있어서 보리의 갈래로 교화하는 것이란, 보리의 갈래로써 남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 글귀에 있어서 중생들이 보리를 깨닫는 것이란, 그 교화를 받은 중생들이 보리를 깨닫기 때문이다. 이 네 글귀가 차례로 상()을 취하지 않고 이 행()에 의지하기 때문에 청정한 보리가 삼보를 출생하는 것이니, 알아두라. 게송에 깨달을 바 보리의 법과 보리의 갈래에 의지해 아는 것과 보리의 갈래로 교화하는 것과 중생들이 보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함이 곧 이 때문이다.

그리고 한 글귀는 인()이 되고 세 글귀는 연()이기 때문에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는 것이다. 이 보리를 얻음으로써 열 가지 힘 등 모든 부처님의 법과 서른두 가지 모든 부처님의 모습을 갖추어 여래께서 업을 일으키는 것이다. 여래의 법에 의지해 중생들이 음성을 듣고 저 법에 의지하기 때문에 청정한 인연을 얻어 삼보를 출생하는 것이니, 알아두라. 그러므로 게송에 첫째 글귀는 바른 인이 되고 나머지 세 글귀는 깨끗한 연이 된다, 말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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