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1권
견혜(堅慧) 지음
륵나마제(勒那摩提) 한역
한길로 번역
1. 교화품(敎化品)
일체 더없는 높은 이에게
나 이제 다 귀명하는 것은
법왕의 법장(法藏)을 열어서
모든 중생들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해서다.
모든 부처님의 수승하고 미묘한 법을
비방하여 법이 아니라고 하는 자는
어리석고도 지혜가 없음으로 해서
삿된 것과 바른 것에 미(迷)하기 때문이며
지혜를 구족한 사람이라면
삿된 것과 바른 것을 잘 분별하리니
이와 같이 논(論)을 짓는 것은
바른 법을 어기지 아니하리라.
삼승(三乘)의 보리에 수승하여
삼계(三界)의 번뇌에 대하여
비록 이 제자가 짓는다손 치더라도
바른 것을 취하고 삿된 것을 버리며
모든 명구(名句)에 대한 이치와
초(初)ㆍ중(中)ㆍ후(後)의 공덕을 잘 설함으로써
슬기로운 자 이 이치를 듣고서
딴 법을 취하지 않을 것이네.
내가 부처님의 뜻을 받고서
깊고도 바른 이치에 굳게 머무는 것처럼
사실 그대로 수행하는 자라면
부처님의 말씀대로를 취하리.
비록 선교(善巧)한 말은 없더라도
다만 진실한 이치가 있을 뿐이니
저 법을 응당 받아 간직하되
금(金)을 취하고 돌을 버리듯이 해야 하리.
묘한 이치는 참된 금과 같고
선교한 말은 기와나 돌과 같으니
명구에 의지하고 이치에 의지하지 않는
저 사람들은 무명(無明)에 어두워 있네.
자기 죄의 업장(業障)에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의 묘법을 비방한다면
이러한 모든 사람들은
곧 모든 부처님의 꾸짖음을 받을 것이며
혹은 다른 법을 취할 마음이 있어서
모든 부처님의 묘법을 비방하더라도
이러한 모든 사람들은
곧 모든 부처님의 꾸짖음을 받을 것이며
갖가지 공양을 위하여
모든 부처님의 묘법을 비방하더라도
이러한 모든 사람들은
곧 모든 부처님의 꾸짖음을 받을 것이며
어리석거나 아만(我慢)을 부려
작은 법 행하기를 좋아하여서
법과 또는 법사를 비방하는 자도
곧 모든 부처님의 꾸짖음을 받을 것이며
바깥으로 위의(威儀)의 상을 나타내면서
여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법이나 또는 법사를 비방하는 자도
곧 모든 부처님의 꾸짖음을 받을 것이며
명예를 구하기 위해
그 때문에 갖가지 이설(異說)을 일으켜서
법이나 또는 법사를 비방하는 자도
곧 모든 부처님의 꾸짖음을 받을 것이며
말이 수다라(修多羅)를 어기면서도
이것을 진실한 이치라고 말하여
법이나 또는 법사를 비방하는 자도
곧 모든 부처님의 꾸짖음을 받을 것이며
이익을 구하기 위해 대중을 포섭하되
지혜 없는 자를 속이고 의혹시켜서
법이나 또는 법사를 비방하는 자도
곧 모든 부처님의 꾸짖음을 받을 것이니
부처님께선 이러한 따위의
극악한 죄를 짓는 중생들을 관찰하사
자비하신 마음으로 자재하게
그들을 위해 설법하여 괴로움을 제거하시매라.
깊은 지혜와 큰 자비로써
능히 이같이 이익되게 하시니
나의 설법은 이익을 구하지 않고
바른 법을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네.
2. 불보품(佛寶品)
부처님의 몸은 과거세가 없고
현재세도 없고
미래세도 없어서
고요히 스스로가 깨달아 아신지라.
이미 스스로가 깨달아 아시고는
남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이 때문에 그들에게 설하시되
두려움이 없는 항상한 도를 설하시며
또 부처님은 능히
저 지혜, 자비의 칼[刀]과
묘한 금강저(金剛杵)를 잡아 가지시어
모든 고뇌의 싹[苦芽]을 베고
모든 소견의 산[見山]을 부수고
뒤바뀐 뜻[顚倒意]을 뒤엎고
일체 번뇌의 숲[稠林]을 감추어 주시니
이 때문에 나 이제 경례하는 것이네.
3. 법보품(法寶品)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또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저것에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또 저것을 여의는 것도 아니며
생각해 헤아릴 수도 없고
듣는 지혜의 경계도 아닌지라
언어(言語)의 길을 벗어났으니
속마음으로만 청량(淸凉)함을 알리
저 참되고 묘한 법의 해[日]가
청정하여 티[塵]도, 때[垢]도 없으나
크나큰 지혜의 광명이
널리 모든 세간을 비추매라.
능히 음산한 장애와 각관(覺觀)과
탐욕ㆍ진심ㆍ우치 따위와
일체 번뇌를 깨뜨리시니
이 때문에 나 이제 경례하는 것이네.
4. 승보품(僧寶品)
바르게 깨달아 바르게 아는 이는
저 일체 중생들을 보되
청정하고 ≺나≻가 없고
고요하고 진실한 경계로 보나니
저 일체 중생들의
자성(自性)인 청정한 마음을 앎으로써
번뇌의 진실함이 없음을
이 때문에 모든 번뇌를 여의는 것이며
장애가 없는 청정한 지혜를 갖춘 이는
사실 그대로 중생들을 보되
그 자성인 청정한 성품을
곧 불ㆍ법ㆍ승의 경계로 보나니
어두움이 없는 청정한 지혜로써
모든 중생들의 성품을 보는 것이
한량없는 경계에 두루한지라
이 때문에 나 이제 경례하는 것이네.
【문】어떤 법에 의지하여 이 삼보(三寶)가 있는 것입니까?
【답】게송을 말하겠다.
진여는 더러움에 섞여 있는가 하면
모든 더러움을 아주 여읜 것이고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이기도 하고
또는 부처님의 하시는 업이기도 하네.
이와 같은 묘한 경계는
모든 부처님의 아시는 바이라
이 묘한 법신(法身)에 의지하여
삼보를 출생하게 되는 것이네.
5. 일체중생유여래장품(一切衆生如來藏品)
【문】어떻게 일체 중생에게 다 여래장이 있는 줄을 아십니까?
【답】게송으로 말하겠다.
일체 중생들의 경계가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여의지 않는 것은
저 청정하여 때[垢] 없는 체성(體性)이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라.
일체 부처님들과
평등한 법 성품의 몸에 의지하여
일체 중생들에게도
다 여래장이 있는 줄을 아는 것이네.
다시 게송으로 대략 말하겠다.
체(體)와 인(因)ㆍ과(果)ㆍ업(業)과
상응(相應)과 또는 행(行)과
때의 차별과 모든 곳에 두루함과
변하지 않음과 차별이 없는
이러한 묘한 이치의 차례가
곧 제1의 참된 법 성품이라
나 이렇게 대략 설해 두노니
그대는 이제 잘 알아야 하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를 게송(偈頌)으로 말하겠다.
자성(自性)의 항상 더럽히지 않음이
보배와 허공과 깨끗한 물 같으니
법을 믿음과 또는 반야(般若)와
삼매와 대비 등이 그러하며
정(淨)ㆍ아(我)ㆍ낙(樂)ㆍ상(常) 등은
저 언덕[彼岸] 공덕의 과(果)이고
괴로움을 싫어하여 열반을 구하는 것은
욕망과 소원의 모든 업(業)이네.
큰 바다의 그릇과 보배와 물이
한량없고도 다할 수 없고
등불 광명의 닿는 빛과 같이
불성의 공덕도 그러한 것이라.
실상을 보는 이가
범부며 성인이며 부처님이라 말하나
중생의 여래장(如來藏)으로선
그 진여가 차별이 없다.
부정(不淨)과 깨끗함에 섞임[雜淨]과
또는 선정(善淨) 등이 있는데
그와 같음을 차례대로 말하여
중생이고 보살이고 부처님이라 하네.
허공이 일체를 두루하지만
허공은 분별함이 없는 것처럼
자성(自性)의 매[垢]없는 마음도
역시 두루하되 분별함이 없고
허공이 두루 이르시지만
허공 자체는 미세한 티끌도 더럽히지 않듯이
불성도 중생들에게 두루하지만
모든 번뇌가 더럽히지 않으며
일체 세간이
허공을 의지해 생멸하듯이
번뇌 없는 경계에 의지하여
모든 근(根)의 생멸이 있네.
불이 허공을 사르지 못하거늘
만약에 사른다면 그럴 이치가 없으리니
이와 같이 늙고 병들고 죽음도
불성을 사를 수는 없는 것이며
땅이 물을 의지해 머물고
물이 또 바람을 의지하고
바람이 또 허공을 의지하지만
허공은 땅ㆍ물ㆍ바람을 의지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쌓임과 경계와 감관이
번뇌의 업 속에 머물고
모든 번뇌의 업들은
불선한 생각에 머무르며
불선한 생각의 행(行)은
청정한 마음속에 머물지만
자성의 청정한 마음은
저 모든 법이 머물지 아니하네.
쌓임ㆍ느낌ㆍ경계는 땅과 같고
번뇌의 업들은 물과 같고
바르지 않는 생각은 바람과 같고
청정한 마음의 경계는 허공과 같음이라.
성품에 의지해 삿된 생각을 일으키고
삿된 생각이 번뇌의 업을 일으키고
또 번뇌의 업을 의지하여
쌓임과 느낌과 경계를 일으키나니
다섯 가지 쌓임인 경계와 느낌 등
그 모든 법을 의지하여
모든 근(根)의 생멸 있는 그것이
마치 세계가 이룩되고 무너지는 것과 같네.
청정한 마음을 허공과 같아서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고
또 화합하는 이치도 없고
나고 머물고 사라짐도 없는지라.
허공 같은 청정한 마음이야말로
항상 밝아서 바꾸거나 변함이 없거늘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에
객(客)ㆍ진(塵) 번뇌에 더럽혀지네.
보살마하살은
불성에 대하여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늙고 병듦 없음을 실답게 아나니
보살이 이와 같이 알고
능히 생사를 벗어나서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생멸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이네.
부처님 몸이 변하거나 다르지 않음은
다함이 없는 법을 얻으셨기 때문이고
중생들이 귀의하게 되는 것은
그 그지없는 경계이기 때문이며
언제나 두 가지가 아닌 법에 머무심은
허망한 분별을 떠나셨기 때문이고
항상 집착하지 않고 조작하지 않으심은
그 청정한 마음의 힘이시기 때문이라.
법신과 또는 여래와
거룩한 진리와 또는 열반의
그 공덕이 서로 떠나지 않음이
마치 광명이 태양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네.
6. 무량번뇌소전품(無量煩惱所纏品)
시들은 꽃 속의 모든 부처이고
뭇 별 속의 아름다운 꿀이고
껍질 겨 속의 알찬 열매이고
더러운 땅 속의 참된 금이며
땅 속의 값진 보배 광이고
모든 과일 씨 속의 싹이고
썩고도 허물어진 옷으로써
참된 금의 형상을 싸놓았으며
빈천하고도 추악한 연인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잉태하고
까맣게 타버린 흙 모형 속에
가장 훌륭한 보배 상(像)이 있는 격이라.
중생들의 탐욕ㆍ진심ㆍ우치와
허망한 생각과 번뇌 따위의
그 모든 때[垢] 속에도
다 여래장(如來藏)은 있기 마련이네.
꽃ㆍ벌과 껍질 겨와 더러운 똥과
땅ㆍ과일과 또는 낡은 옷과
빈천한 여인과 타버린 흙 모형은
번뇌의 때[垢]하고 서로 비슷한 것이며
부처님과 꿀ㆍ벌과 참된 금과
과일의 싹과 금 형상과 전륜왕과
가장 훌륭한 보배 형상 등은
여래장과 서로가 비슷한 것이네.
【문】꽃과 부처님의 비유는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까?
【답】시들어진 꽃을 말한 것은 모든 번뇌에 비유한 것이고, 모든 부처님을 말한 것은 여래장에 비유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공덕으로 장엄하신 부처님께서
시들은 꽃 속에 머물러 계시지만
청정한 하늘눈을 지닌 자는
꽃을 제거하면 부처임이 나타나는 것을 보나니
부처님 눈은 자체를 보는 법이어서
일체 중생들에게 두루하되
아래로 아비지옥에 이르기까지
다 여래장을 구족한 것을 보시는지라
스스로 항상 머무는 곳에 처하사
자비(慈悲)의 방편으로써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장애를 멀리 여의게 하시네.
마치 썩어빠진 꽃 속에
모든 여래가 계시는 것은
하늘 눈 지닌 자는 보고 알아서
시들은 꽃잎을 제거하는 것처럼
여래께서도 이와 같이
탐욕과 번뇌의 때[垢]인
그 부정한 중생들 속에도
다 여래장을 구족한 것을 보시나니
대자대비한 마음으로써
세간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일체 중생들을 위하사
번뇌의 꽃잎을 제거해 주시네.
【문】벌과 꿀의 비유는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까?
【답】뭇 벌을 말한 것은 모든 번뇌에 비유한 것이고, 아름다운 꿀을 말한 것은 여래장에 비유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최상의 묘하고 맛 좋은 꿀이
뭇 벌에 둘러싸여 있지만
필요로 하는 자는 방편을 베풀어
법을 흩어 버리고서 꿀을 취하나니
여래께서도 이와 같이
일체 지혜의 눈으로써
모든 번뇌의 벌들이
불상의 꿀을 둘러싼 것을 보시는지라.
큰 방편의 힘으로써
저 번뇌의 벌들을 흩어 버리고
여래장을 나타내는 그것이
마치 꿀을 취해 수용(受用)하는 것과 같네.
백천억 나유타(那由他)의
그 뭇 벌레들이
미묘한 꿀을 가로막음으로써
능히 가까이 할 자가 없지만
슬기 있는 자는 꿀을 필요로 하여
저 뭇 벌들을 살해하고서라도
최상의 맛 좋은 꿀을 취해
뜻대로 수용(受用)하는 것처럼
번뇌 없는 지혜는 꿀과 같아서
중생들의 몸속에 있는데
번뇌는 독한 벌레와 같으므로
이 때문에 여래께서 살해하시는 것이네.
【문】거와 열매의 비유는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까?
【답】껍질 겨를 말한 것은 모든 번뇌에 비유한 것이고 겨 속의 열매를 말한 것은 여래장에 비유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곡식의 열매가 겨 속에 있을 적엔
능히 수용할 사람이 없지만
언제나 필요하여 수용할 이가 있으면
방편으로써 그 껍질 겨를 제거하네.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의 몸에
여래의 상품이 있기는 하되
번뇌의 껍질 겨에 둘러싸여서
부처님 일을 할 수 없는 것을 보시고
훌륭한 방편의 힘으로써
세 세계의 중생들로 하여금
번뇌의 껍질 겨를 제거하게 하여
뜻대로 부처님 일을 일으키시나니
마치 벼 곡식과 보리 곡식이
모든 껍질 겨를 여의지 않고는
속 열매가 깨끗이 다뤄지지 못해서
훌륭한 식용(食用)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네.
이와 같이 여래장도
번뇌의 겨를 여의지 않고는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그 번뇌에 허덕거리게 하는지라.
부처님은 자유로운 법왕이시므로
중생들의 몸속에 계시어
능히 좋은 맛을 보여 줌으로써
저 허덕이는 괴로움을 제거하시네.
【문】똥과 금의 비유는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까?
【답】더러운 똥을 비유한 것은 모든 번뇌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고, 참된 금을 비유한 것은 여래장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치 어떤 사람이 먼 길을 가다가
금을 더러운 똥 속에 떨어뜨린 것이
백천세 동안을 묻혀 있어도
본래 그대로 변하지 않는지라.
청정한 누를 지닌 이가 보고는
뭇 사람들에게 두루 알려 말하기를
이 가운데 참된 금이 있으니
그대들은 가져다가 수용하라고 하는 것처럼
부처님도 중생들의 성품이
번뇌의 똥 속에 빠진 것을 보시고
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미묘한 법 비를 부으시며
또 마치 부정(不淨)한 땅에
참된 금 보배를 흘린 것을
모든 하늘눈은 분명히 보지만
중생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는지라.
모든 하늘눈이 이미 보고는
중생들에 일러 주어 다 알게 하고
더러움을 제거하는 방편을 가르쳐
그 참된 금을 깨끗이 해 수용하는 것처럼
불상도 저 금과 마찬가지어서
번뇌의 더러움 속에 떨어진 것을
여래께서 관찰하시고는
중생들을 위해 청정한 법을 설하시네.
【문】땅과 보배의 비유는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까?
【답】 땅을 비유한 것은 모든 번뇌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고, 보배 광을 비유한 것은 여래장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치 가난한 사람의 집 땅에
값진 보배 광이 있기는 하지만
저 가난한 사람이 알 수 없고
보배 또한 말하지 않는 것처럼
중생들도 이와 같이
자기 마음의 집 속에
상상할 수 없고 다함이 없는
법 보배의 광이 있다.
비록 이 보배의 광이 있기는 하되
스스로가 깨달아 알지 못하고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사의 가난과 괴로움을 받는 것 같네.
또 마치 값진 보배 광이
저 가난한 사람의집에 있긴 하되
사람이 내가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고
보배 또한 내가 보배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법 보배의 광도 이와 같아서
중생들이 마음속에 있긴 하지만
중생은 가난한 사람과 같고
불성은 보배의 광과 같은지라.
저 중생들로 하여금
이 값진 보배를 얻게 하기 위해
이 때문에 모든 여래께서
일부러 세간에 출현하시는 것이네.
【문】과일과 싹의 비유는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까?
【답】과일 껍질을 비유한 것을 모든 번뇌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고, 종자 싹을 비유한 것은 여래장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갖가지 과일 나무의
종자 싹이 썩지 않음으로써
땅 속에 심고 물을 주어
자라나 큰 나무를 이룩하는 것처럼
일체 중생들의
가지가지 번뇌 속에도
다 여래의 성품 있는 것이
무명의 껍질에 둘러싸인지라.
모든 선근(善根)의 땅에 심어
저 보리(菩提)의 싹을 냄으로써
차례차례로 점점 자라나
여래의 나무 왕[樹王]을 이룩하나니
땅과 물과 불과 바람과 허공과
시간과 날과 달의 인연을 의지해
다라수(多羅樹) 등의 종자 안에서
크나큰 나무 왕을 출생하는 것이네.
일체 중생들도
다 이와 마찬가지어서
번뇌의 과일 껍질 속에
정각(正覺)의 종자 싹이 있나니
바르고 깨끗한 모든 법의
갖가지 인연에 의지하기 때문에
차례차례로 점점 자라나서
부처님의 큰 법왕을 이룩하는 것이네.
【문】옷과 금 형상의 비유는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까?
【답】허물어진 옷을 비유한 것은 모든 번뇌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고, 금 형상을 비유한 것은 여래장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허물어진 옷으로 금 형상을 둘러싸서
저 한길 복판에 버려두어도
모든 하늘눈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가운데 금 형상이 있다고 하리니
가지가지 번뇌의 때[垢]로써
여래장을 둘러싸 있지만
부처님의 거리낌 없는 눈은
아래로 아비지옥[阿鼻獄]에까지 보시는지라.
누구나 다 여래의 몸이 있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얻게 하기 위해
널리 모든 방편을 베풀어서
가지가지 묘법을 설하시네.
금 형상이 허물어진 옷에 싸여서
넓은 벌판길에 떨어져 있어도
하늘눈을 지닌 자가 보고는
그 청정함을 위해 뭇 사람들에게 보이나니
중생들의 여래장도
번뇌의 허물어진 옷에 둘러싸여서
세간의 험한 길에 놓여 있건만
스스로를 깨달아 알지 못하는지라.
부처님의 눈은 모든 중생들에게
다 여래장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위해 갖가지 법을 설하사
모두 함께 해탈할 수 있게 하시네.
【문】여인과 전륜왕의 비유는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까?
【답】빈천한 여인을 비유한 것은 모든 번뇌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고, 가라라(歌羅邏) 네 가지 원소[四大] 가운데 전륜성왕의 몸이 있는 것을 비유한 것은 나고 죽는 가라라장(歌羅邏藏) 가운데 여래장 있는 것이 전륜성왕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치 고독한 여인이
빈궁한 집에 살고 있으면서
몸에 전륜성왕을 잉태하고도
스스로가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세 세계[三有]는
빈궁한 짐과 같고
잉태한 여인은
부정한 중생들에 비유한 것이며
중생들의 성품은
저 장(藏) 속의 태[胎]와 같고
그 속에 있는 때[垢] 없는 성품은
고독하지 않음에 비유한 것이라
빈궁한 여인이 때 묻은 옷을 두르고
지극히 누추해 괴로움을 겪으면서
고독한 집에 살고 있긴 하지만
전륜왕의 귀중한 짐을 잉태한 몸이네.
이와 같이 모든 번뇌가
중생들의 성품을 더럽힘으로써
한량없는 고뇌를 받기만 하고
귀의할 처소가 없는가 하면
사실 귀의할 처소는 있어도
귀의할 마음이 없는 것은
그 각자의 몸 가운데에
여래장이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네.
【문】모형과 형상의 비유는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까?
【답】진흙 모형을 비유한 것은 모든 번뇌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고, 보배 형상을 비유한 것은 여래장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어떤 사람이 진금(眞金)을 녹여서
진흙 모형 속에 부어 넣으면
바깥엔 까맣게 타진 진흙이 있고
안에는 진금 보배의 형상이 있으리니
그 때에 저 사람이 이미 식혀진 것을 알고서
바깥 진흙의 장애를 제거하고
모형을 열어 나타나게 한 뒤에
그 속의 진금 보배 형상을 꺼내는 것처럼
불성(佛性)의 항상 밝고 깨끗한 것이
객(客)ㆍ진(塵) 번뇌에 더럽히는 것을
모든 부처님은 잘 관찰하시어
그 장애를 제거하고 나타나게 하시네.
때[垢]를 여읜 그 밝고 깨끗한 형상이
더러운 진흙 속에 있는 것을
주사(籌師)는 열(熱)이 없는 것을 알고
그런 뒤에야 진흙의 장애를 제거하나니
여래께서도 이와 같으시어
중생들에게 있는 그 불성이
엄연히 번뇌에 묻혀 있어서
모형 속에 들어 있는 형상과 같음을 보시는지라.
능히 교묘한 방편으로써
설법의 방망이를 잘 사용하사
번뇌의 모형을 때려 부수고는
여래장을 환히 나타내 보이시네.
7. 위하의설품(爲何義說品)
【문】다른 수다라(修多羅) 가운데엔 다 일체의 ≺공(空)〉한 것을 설하였거늘, 여기엔 어째서 진여의 불성이 있음을 설하십니까? 게송으로 말하겠습니다.
곳곳의 경 가운데에
안팎의 일체 ≺공≻함을 설하되
함이 있는 법은 구름과 같고
또 꿈과 눈흘림 같다고 했는데
여기엔 무엇 때문에
일체 모든 중생들의
다 불성이 있는 것은 설하고
그 공적(空寂)한 것을 설하지 않습니까?
【답】게송으로 말하겠다.
겁약(怯弱)한 마음이 있거나
경만(輕慢)한 중생으로서
허망한 법에 집착하여
진여의 실다운 성품을 비방하며
자신에 신아(神我)가 있다고 생각함으로
이러한 중생들로 하여금
다섯 가지 허물을 아주 여의게 하기 위해
이 때문에 불성이 있음을 설한 것이네.
8. 신전청정성보리품(身轉淸淨成菩提品)
청정함과 청정함을 얻음과 멀리 여의는 것과
자타의 이익과 상응(相應)하는 것과
깊고 쾌하고 큰 것에 의지하는 것이
저 하는 바의 뜻과 같음이네.
맨 처음 부처님의 보리와 또는 보리를 얻는 방편을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앞서 부처님의 법신인
그 자성의 청정한 체(體)가
모든 번뇌의 때[垢]와 객(客)ㆍ진(塵)에게
더럽힘이 되는 것을 설했으니
마침 허공 가운데의
때를 여읜 청정한 해와 달이
저 두텁고 빽빽한 구름에게
많이 끼어 덮인 것과 같음이라
부처님의 공덕은 때가 없고
항상하고 또 변하지 않고
모든 법을 분별하지 않으시어
번뇌 없는 참된 지혜를 얻으셨네.
다음은 때가 없는 청정한 체를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치 청정한 못[池] 물이
조금도 더러운 티가 없는데다가
가지가지 꽃나무들이
그 주위를 항상 둘러싼 것과 같고
또 라후(羅睺)를 여읜 달과
구름의 가림을 여읜 햇빛과 같이
때 없는 공덕을 갖추시어
나타나는 그것이 곧 저 몸이시라.
큰 벌의 맛 좋은 꿀과
견고하고 청정한 진금(眞金)과
보배 광과 큰 과일 나무와
때가 없는 저 진금의 형상이고
또는 전륜성왕의 몸과
미묘한 보배의 여래 형상인
이러한 등등의 모든 법이
바로 여래의 몸이신 것이네.
다음은 스스로가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함을 성취하는 것을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샘이 없고 또 두루 이르러서
없어지지 않는 법과 더불어 항상하고
청량하여 변하거나 다르지 않아서
그 적정(寂靜)한 곳을 물러나지 않으시니라
모든 부처님 여래의 몸은
허공의 모양 없는 것과 같으시면서도
모든 수승한 지혜 있는 이를 위하여
여섯 감관[根]의 경계를 지으시나니
미묘한 빛을 나타내어 보이기도 하고
미묘한 음성을 내어 듣기기도 하고
부처님의 계향(戒香)을 맡게 하고
부처님의 묘법의 맛을 주시며
삼매의 감촉을 깨닫게 하기도 하고
깊고 묘한 법을 알아서
자세히 번뇌의 숲을 생각하게 하기도 하되
부처님은 저 허공의 모양까지를 여의셨네.
다음은 제1의 이치에 상응하는 것을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허공처럼 부사의하사
항상하고 또 청량하고
변하지 않고 고요하사
모든 분별을 두루 여의신다.
일체 곳에 집착하지 않으사
거리끼고 거친 감촉을 여의시니
부처님의 청정한 마음에 때 없음을
역시 보거나 잡을 수 없네.
다음은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처음이 아니고 중간도, 뒤도 아니어서
파괴하지 않고 다르지도 않고
세 세계[三界]를 아주 떠나서
때[垢]가 없고 분별이 없는지라.
이 깊고 깊은 경계는
이승(二乘)들의 알 바가 아니니
수승한 삼매의 지혜를 갖춘
이러한 사람이라야 볼 수 있네.
항하사[恒沙]보다 더 지나친
그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오직 여래만이 성취하셨으므로
다른 어떤 사람과도 공통하지 않으시네.
여래의 묘한 형상 몸[色身]은
청정하여 때가 없는 체(體)이어서
그 모든 번뇌란 번뇌와
일체의 습기를 아주 여의시네.
가지가지 수승한 묘법의
그 광명으로 몸을 삼아서
중생들을 해탈케 하기 위해
항상 휴식할 사이가 없으시네
하시는 일의 부사의함이
마니 보배[摩尼寶]와 같아서
능히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나
저 몸은 진실한 것이 아니네.
세간을 위해 법을 설하사
고요한 곳을 나타내 보임은
교화하여 순숙(純熟)하게 하기도 하고
수기(授記)하여 도에 들게 하기도 하시네.
여래는 거울 형상의 몸이시되
본체(本體)를 떠나지는 아니하시니
마치 일체의 빛이란 빛이
허공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네.
다음은 여래의 항상 머무시는 몸을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존의 체(體)는 항상 머무사
한량없는 인(因)을 닦으셨으니
중생계(衆生界)는 다하지 아니하나
자비하신 마음은 뜻대로 하시네.
지혜는 상응(相應)함을 성취하사
법 가운데 자재함을 얻음으로서
모든 마군[魔怨]을 항복 받으시니
그 체가 고요하기 때문에 항상하네.
다음은 헤아릴 수 없는 체를 설하되 게송(偈頌)으로 말하겠다.
말로써 설할 수 없고
제1의 이치 진리에 해당하고
모든 각(覺)ㆍ관(觀)의 자리를 떠났으므로
비유로써 설할 수도없는지라
최상의 수승 미묘한 법은
열반이 있다는 것을 취하지 않나니
이는 삼승(三乘)들의 알 바가 아니고
부처님이 아시는 경계이네.
9. 여래공덕품(如來功德品)
스스로가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그것이 제1의 이치 진리의 몸이니
제1의 이치 진리 몸을 의지하여
이 세간의 진리 몸이 있는 것이니
그 과(果)가 모든 것을 여읜 순숙(淳熟)한 가운데에
예순 네 가지 갖가지 법과
모든 공덕의 차별이 구족해 있네.
대략 게송으로 설하여 말한다.
부처님의 힘은 금강저(金剛杵)이어서
지혜 없는 자의 장애를 부수되
여래는 두려움이 없으므로
대중 가운데 처하심이 사자와 같으며
여래의 특수한 법은
그 청정한 것이 허공과 같고
저 물 속의 달과도 같으므로
중생들이 이것을 두 가지로 보네.
맨 처음 열 가지 힘을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도리에 계합하고 계합하지 못함과
과보와 업과 또는 모든 근성과
믿음과 두루 이름과
때를 여의는 모든 선정과
또는 과거세를 기억하는 것과
하늘눈과 적정(寂靜)한 지혜
이러한 등등의 여러 글귀를
열 가지 힘이라고 말하는 것이네.
다음은 금강저와 같은 것을 게송으로 말하겠다.
도리에 계합하고 계합하지 못함과
업의 성질과 중생들의 모든 믿음의 근기와
가지가지 따라 닦는 지위와
과거세 숙명(宿命)의 차별이며
하늘눈과 번뇌를 다 끊는 등
이러한 부처님의 힘 금강저로써
저 어이석음의 갑옷ㆍ산ㆍ담장ㆍ나무들을
다 능히 찌르고 부수고 흩고 깨뜨리시네.
다음은 네 가지 두려움 없는 것을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여실히 모든 법을 깨달음과
모든 도(道)에 장애되는 것을 막음과
도를 연설함과 번뇌를 끊음이
이것이 네 가지 두려움 없는 것이라.
알 바의 경계에 있어서
필경 자타(自他)를 다 알되
스스로가 알고서 남을 알게 하는
이것이 곧 장애되는 길을 막는 것이며
능히 수승 미묘한 과(果)를 증득하되
스스로가 얻고서 남을 얻게 하여
자타의 이로운 진리를 설하는
이것이 곧 모든 곳에의 두려움 없는 것이네.
다음은 사자왕과 같은 것을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치 사자왕이
모든 짐승 가운데서 자유로우며
항상 산의 숲속에 있어서
모든 짐승을 겁내지 않듯이
사람의 왕이신 부처님도
모든 군중 가운데 처하여서
겁내지 않고 잘 머물러
굳고 떨치고 또 빠르시네.
다음은 부처님의 열여덟 가지 특수한 법을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처님은 허물이 없고 다툼이 없고
허망한 생각 등의 잘못이 없고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지 않음이 없고
가지가지의 모든 생각이 없으시며
뜻을 조작하거나 마음을 두둔함이 없다
욕망과 정신에 물러나지 않고
염(念)ㆍ혜(慧)ㆍ해탈(解脫)과
해탈지견(解脫知見)에 물러나지 않으시며
모든 업에 지혜를 근본삼아서
세 세상을 알아 장애가 없으시니
이것이 열여덟 가지 공덕이고
또 나머지 말하지 않은 것이 이러하네.
세존의 몸과 입은 잘못이 없으므로
그 누구가 와서 파괴하더라도
속마음에 움직이는 모양이 없으시니
이는 조작한 마음도, 버리는 마음도 아닌 것이며
세존의 욕망과 정진하는 생각과
청정한 지혜와 해탈 지견은
언제나 잃어버리지 않으시니
이는 알 수 있는 경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며
일체 모든 업 따위에
지혜를 근본삼아 전전(展轉)하사
세 세상에 장애가 없으시니
이는 광대한 지혜의 행함이 항상한 것이라.
이것을 이르러 여래의 몸이
큰 지혜와 상응(相應)하여서
저 크나큰 보리(菩提)의
가장 수승 미묘한 법을 깨닫는 것이라 하나니
일체 중생들을 위해
큰 법 바퀴를 굴리사
두려움이 없는 수승 미묘한 법으로써
저 중생들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시네.
다음은 허공의 상응하지 않는 이치를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땅ㆍ물ㆍ불ㆍ바람 등은
저 법이 ≺공≻ 가운데 없고
모든 물질 가운데에도 없고
허공은 거리끼는 법이 없는지라
부처님도 거리끼는 장애가 없으심은
마치 허공의 모양과 같은 것이고
여래께서 세간에 머물러 계심은
마치 땅ㆍ물ㆍ불ㆍ바람과 같은 것이네.
그러면서도 부처님 여래의
그 모든 공덕만은
또한 한 가지 법도
다른 세간과 공통한 것이 없네.
다음은 서른두 가지 대인의 모습을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발바닥의 모양은 판판하여
천 폭(幅)의 바퀴를 구족하고
발등은 높으면서 위가 두둑하고
이니녹왕(伊尼鹿王)의 장딴지와 같으며
손발은 모두 부드럽고
온 손가락이 다 가늘면서 길고
아왕(鵝王)과 같은 비단결의 손가락이고
팔뚝과 팔꿈치는 위아래가 두둑하며
두 어깨는 앞뒤가 판판하고
좌우 양편이 함께 다 원만하고
서면 손이 무릎까지 내려가고
말의 음경처럼 감추어져 있으며
몸매와 키의 헌칠하고 단정함은
니구수왕(尼仇首王)과 같고
몸매는 일곱 군데가 가득하면서
윗부분의 반은 사자와 같으며
위덕(威德)의 힘이 견고함은
마치 나라연(那羅延)과 같고
몸빛이 신선하고 청정하고 미묘하고
부드럽고 연한 것은 바로 금빛의 피부이며
깨끗하고 부드럽고 섬세하고 빽빽하게
한 구멍엔 한 터럭이 나 있으며
털은 보드랍고 연하게 위로 쏠리면서
가느다란 바퀴처럼 오른쪽으로 쏠렸고
몸엔 깨끗한 광명이 둥글게 둘러서
정수리 위의 모습이 높이 나타나며
목은 공작왕(孔雀王)과 같고
턱 모양은 사자왕(獅子王)과 같으며
머리털은 깨끗한 금 정기의 빛이어서
마치 인다라(因陀羅)와 같으며
이마 위 백호(白毫)의 상은
온 낯에 청정한 광명이며
입에는 마흔 개의 이[齒]를 갖추어
두 어금니가 눈[雪]보다도 흰데다가
그 표고도 빽빽하고 안팎이 환한
위아래의 이가 함께 다 가지런하며
가릉빈가(迦陵頻伽)의 음성처럼
묘한 음성이면서 길고도 먼 음성이고
음식은 씹어 넘김이 없으면서도
맛에 있어서의 최상의 맛을 얻으시며
혀는 가늘고도 엷고 넓고도 길고
두 눈은 순수한 검푸른 빛인데다가
눈썹이 마치 우왕(牛王)과 같고
모든 공덕은 연꽃과 같으신지라
이같이 사람 중에 높은 이로서
서른두 가지 묘한 모습을 설하노니
그 낱낱 모습이 잡란(雜亂)하지 않아
온 몸에 탈 잡을 것이 없으시네.
다음은 물속의 달과 같은 것을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가을 허공에 구름 한 점 없고
달이 하늘 또는 물속에 비추면
일체 세간의 모든 사람들이
죄다 달의 세력을 보는 것처럼
청정한 부처님 법 바퀴 속에도
모든 공덕의 세력을 구족했으므로
불자(佛子)로서 여래를 볼 때에
그 공덕의 몸이 또한 그러하네.
10. 자연불휴식불업품(自然不休息佛業品)
교화할 수 있는 중생들에게
그 교화하는 모든 방편으로써
중생들 교화하는 업을 일으켜
온 중생계를 다 교화하시되
부처님은 자재한 분이어서
그 교화할 수 있는 중생들에게
항상 때를 기다리고 곳을 기다려
자연 불사(佛事)를 일으키시네.
대승(大乘)을 모두 깨달아 아는
가장 묘한 공덕 덩어리시어서
마치 큰 바다의 물ㆍ보배와 같이
부처님의 지혜도 역시 그러하시며
보리(菩提)의 넓고 그지없음이
마치 허공계(虛空界)와 같으셔서
한량없는 공덕이신 큰 지혜의
햇빛[日光] 광명을 놓으시니
두라 온 중생들에게 비추는
모든 부처님들 묘한 법신의
그 더러움 없는 공덕장(功德藏)이
바로 나의 몸과 다름이 없으매라.
번뇌장(煩惱障)과 지장(智障)의
구름ㆍ안개가 덮힌 것을
모든 부처님의 자비하신 바람이
불어서 다 흩어지고 사라지게 하네.
다음은 대승(大乘)의 업(業) 비유를 설하되 대략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석(帝釋)과 묘법의 복[鼓]과 구름과
범천(梵天)과 해[日]와 마니(摩尼)와
메아리와 허공과 땅과 같이
여래의 몸도 역시 그러하시네.
처음 제석의 거울 형성 비유를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저 비유리(毘琉璃)의
청정한 큰 땅 가운데
천주(天主) 제석의 몸이
그 가운데 거울 형상으로 나타나듯
이와 같이 중생들 마음의
청정한 큰 땅 가운데에도
모든 부처님 여래의 몸이
그 가운데 거울 형상으로 나타나네.
제석의 나타나고 아니 나타나는 것이
땅의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음에 의지하듯
이와 같이 모든 세간에도
거울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안 나타나기도 하며
여래께서의 기멸(起滅) 있는 것이
틀리고 안 틀린 마음에 의지하듯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에게도
거울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안 나타나기도 하며
그러므로 천주 제석의 몸
거울 형상의 생멸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여래의 몸도 그와 같이
거울 형상의 생멸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네.
마치 땅이 넓고 두루함으로써
높고 낮고 더러움을 멀리 여의듯이
큰 유리도 밝고 깨끗함으로써
때[垢]를 여읜 공덕이 평등하며
또 저 큰 비유리가
청정하여 때가 없기 때문에
천주의 거울 형상이 나타나고
모든 장엄 거리가 함께 생겨나네.
어떤 남자가 여인들이
그 가운데 천주를 보는 동시
묘한 장엄 거리를 본다면
그 곳에 태어날 원을 세우며
중생들이 거기에 태어나기 위해
모든 선한 행을 수행하되
계율을 지키고 보시를 행하고
꽃을 뿌리고 값진 보배를 버릴지라.
그러다가 뒷날 공덕이 다 되면
땅도 사라지고 그들도 사라지겠지만
마음의 유리 땅은 그대로 청정하여
모든 부처님의 거울 형상이 나타나리니
모든 불자와 보살들이
부처님을 뵙고는 마음껏 기뻐하여
다 함께 보리(菩提)를 구하기 위해
원을 일으켜서 모든 행을 닦으리라.
다음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그것이 바로 여래이시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비유리가 없어지면
저 거울 형상도 없어지듯
교화할 중생이 없으면
여래가 세간에 나타나지 않으시네.
유리 보배의 땅이 청정함으로써
부처님의 묘한 형상을 나타내 보이고
저 청정한 마음이 무너지지 않으므로써
신근(信根)의 싹이 자라나는지라.
바르고 깨끗한 법의 생멸을 따라
부처님의 형상도 생멸하는 것일 뿐
여래가 생멸하지 않는 것은
마치 제석왕(帝釋王)과 같음이니
이 사업이 자연히 있어서
이러한 것의 현전(現前)함을 보는 것이고
여래의 법신은 생멸하지 않아서
모든 세간이 다 되도록 항상 머무시네.
다음은 하늘 가운데 묘법의 북 비유를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하늘 가운데 묘법의 북 소리가
스스로의 업을 의지해 있듯이
모든 부처님의 설법하는 음성도
중생들 스스로의 업으로 듣는지라.
그 묘법의 북 소리가
공용(功用) 자리의 몸과 마음을 아주 떠나서
일체 모든 하늘들로 하여금
공포를 여의고 고요함을 얻게 하듯
부처님의 설법 음성도 그와 같이
공용 자리의 몸과 맘을 떠나서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열반의 길을 증득하게 하시며
저 전투(戰鬪)를 시작할 적에
수라(修羅)의 힘을 깨뜨리기 위해
북으로부터 겁나는 소리를 내어서
수라들로 하여금 물러나 흩어지게 하듯
여래께서도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번뇌의 괴로움을 소멸케 하기 위해
온 세간을 위해 설법하사
수승한 선정의 길을 보여 주시네.
다음은 일체 세간 사람들이 자신의 과실을 깨닫지 못하는지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귀머거리는 가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하늘 귀는 듣긴 하되 두루하지 못하고
오직 슬기로운 이의 경계만은
들음으로써 마음이 더럽히지 않으네.
다음은 구름비의 비유를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알아두라 자비한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그 마음이 온 세간에 두루 가득하고
결정코 무구장(無垢藏)을 지님으로써
부처님의 비가 곡식의 종자를 깨끗이 하나니
세간은 선한 업을 의지해 있고
바람을 의지해 구름비를 내고
자비 등에 의지해
부처님 묘법의 구름비를 증장하네.
기세간(器世間)을 의지하여 허공에서 내리는 빗물[雨水]의 맛이 변해 달라지는 것을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치 허공 가운데에서
여덟 가지 공덕의 물을 내리지만
그 물이 짠 것들 머무는 곳에 이르러서
가지가지 다른 맛을 내는 것처럼
여래의 대자대비하신 구름도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의 물을 내리지만
그 물이 중생들 마음의 곳에 이르러서
가지가지 신해(信解)의 마음을 내는 것이네.
차별 없는 마음을 게송으로 말하겠다.
묘법 대승(大乘)을 믿는 자와
또는 그 중에 법을 비방하는 자
사람과 차다조(遮多鳥)와 아귀(餓鬼)는
이 세 종류[三聚]가 서로 비슷하나니
정정취(正定聚)의 중생과
습기(習氣)의 부정취(不定聚) 중생과
신견(身見)의 사정취(邪定聚) 중생은
모두가 삿된 소견 때문에 생사에 유전하네.
가을 하늘에 구름비가 없으면
사람이 텅 비고 새가 괴로움을 받고
여름 하늘에 빗물이 많으면
아귀를 태워서 괴로움을 받게 하는데
부처님은 세간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으시든
자비한 구름으로 법 비를 내리시니
법을 믿는 그릇은 들을 수 있고
법을 비방하는 이는 듣지 못하네.
중생을 옹호하지 않는 것을 게송으로 말하겠다.
하늘의 빗방울이 수레바퀴와 같이
아래로 쏟아져 온 땅을 파헤치고
우박 또는 벼락과 돌과
금강(金剛)과 포화(爆火)를 퍼붓는가 하면
때로는 저 미세한 곤충과
산 숲과 모든 과일 나무와
풀ㆍ벼와 길가는 사람들을
옹호하지 않아 비를 내리지 않듯이
여래께서도 그러하시어
저 크고 작은 중생들에게
상응되는 모든 방편을 다하사
지혜와 자비의 구름비를 내려 주시는가 하면
때로는 모든 번뇌의 습기와
아견(我見)ㆍ사견(邪見)의 중생
이러한 가지가지 중생들에겐
일체 지혜로서도 옹호하지 않으시네.
괴로움의 불을 끄는 것을 게송으로 말하겠다.
병든 자가 병의 원인을 여읠 줄 알아야
그 병 없애는 약을 구해 치료하듯
괴로움의 원인과 그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감촉을 여읠 줄 알아야 수행할 수 있나니
처음이 없는 세간의 생사 물결에
다섯 갈래[五道]로 이리저리 응전하면서
다섯 갈래 속에 욕락을 느끼는 것은
마치 썩은 똥을 냄새 맡는 것과 같은지라
차갑고 뜨거운 애욕 따위의 감촉은
모든 괴로움이 필경 있기 마련이니
그들의 괴로움을 소멸해 주기 위해
큰 묘법의 비를 내리시는 것이네.
하늘 가운데엔 괴로움을 물리치고
사람 가운데엔 괴로움을 거슬러 구함으로
이것을 아는 슬기로운 이는
사람ㆍ하늘의 자재한 욕락을 구하지 않나니
슬기로운 이는 부처님 말씀을 믿어
이미 믿고 나선 괴로움을 알고
다시 그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괴로움 없앨 것을 관하고 또 없애는 길을 아네.
다음은 범천(梵天)의 비유를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범천의 과거의 원(願)이
모든 하늘의 청정한 업을 의지해
범천이 자연히 나타나는 것처럼
변화하는 부처님의 몸도 그러한지라
범궁(梵宮) 속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항상 욕심 세계[欲界]에 나타나니
모든 하늘들이 그 묘한 빛을 보고
다섯 가지 욕락의 경계를 잃어버리는데
부처님의법신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항상 온 세간에 나타나시니
중생들이 보고는 환희심을 내어
모든 세계의 욕락을 즐거워하지 아니하네.
나타나고 나타나지 않음이 있는 것을 게송으로 말하겠다.
하늘로부터 내려와 모태에 들어서
탄생함을 보여 부모가 있으며
재가(在家)해서는 어린 아이로 보이면서
모든 기예(技藝)를 배워 익히며
희락(戲樂)도 하고 유행(遊行)도 하다가
출가(出家)해서는 모든 고행을 행하기도 하고
외도들에 나아가 배우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모든 천마(天魔)를 항복받기도 하며
급기야 성불해서는 법 바퀴를 굴리어
길을 보여 주고 열반에 드시니
모든 박복한 중생으로선
여래를 뵈올 수가 없는 것이네.
음은 햇빛의 비유를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치 햇빛이 처음 나와서
널리 모든 연꽃에 비추건만
그 같은 때에 피어나는 꽃이 있고
같은 땡 오므라드는 꽃이 있는 것처럼
부처님의 햇빛도 이와 같아서
일체 중생들에게 널리 비추건만
지혜 있는 이는 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고
죄 있는 이는 꽃 오므라드는 것과 같으며
또 햇빛이 물과 꽃을 다 비추되
햇빛으로선 분별하는 것이 없듯이
부처님의 햇빛도 이와 같아서
어디를 비추어도 분별하는 것이 없네.
그 차례대로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치 해가 처음 세간에 나와서
천 광명이 차례차례로 비추되
먼저 높은 큰 산에 비춘 뒤에야
중간 산과 아래 산에 비추는 것처럼
부처님의 해도 이와 같아서
차례차례 온 세간을 비추되
먼저 모든 보살들에게 비추고
그 뒤에야 다른 중생들에게 비추시네.
광명의 바퀴가 같지 않는 것을 게송으로 말하겠다.
형상 몸ㆍ지혜 몸의 두 가지 법과
대비(大悲)의 몸이 허공과 같아서
두루 모두 세간을 비추기 때문에
부처님의 해는 태양의 해와 같지 않으시네.
태양의 해는 모든 국토의 허공을
두루 비출 수 없을뿐더러
무명(無明)의 어두움을 깨뜨리지 못하고
알 수 있는 경계를 보여 주지도 못하는데
갖가지 빛을 놓으시는
광명의 구름으로 널리 덮으며
대자대비하신 몸으로부터
진여의 묘한 경계를 보여 주시네.
부처님이 도시나 촌락에 드시면
눈 없는 자도 눈을 얻어서
부처님을 뵙고는 큰 이익을 얻고
또 모든 악업을 다 소멸하며
무명 때문에 모든 존재에 빠졌거나
삿된 소견 때문에 어두움에 가린 자들도
여래의 햇빛이 비춤으로써
그 지혜의 보지 못했던 곳을 보게 되네.
다음은 마니주(摩尼珠)의 비유를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언제 어떤 곳에서나
구하는 바 뜻을 만족케 하되
마니 보배는 무심한 그대로
중생들의 원을 만족케 하는 것처럼
자재하신 큰 법왕(法王)께서도
똑같이 자비한 마음에 머무시어
중생들의 갖가지 원을 들어 주시되
부처님의 마음은 분별하는 것이 없으시네.
다음은 메아리의 비유를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치 모든 메아리 소리가
딴 것을 의지해 일어나게 되므로
자연히 분별이 없어서
안의 머묾도 아니고 바깥의 머묾도 아닌 것처럼
여래의 음성도 그와 같이
남의 마음을 의지해 일어나므로
자연히 분별이 없어서
안의 머묾도 아니고 바깥의 머묾도 아니네.
다음은 허공의 비유를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어떤 물질이건 볼 수 없는 것이 없는가 하면
관찰하는 것도 없고 의지하는 것도 없는지라
눈 알음알이[眼識]의 경계를 벗어나서
어떤 물질이건 볼 수 없는 것이 없네.
허공 가운데 높고 낮음을 보되
허공은 그렇지가 않는 것처럼
부처님 가운데 일체를 보는 것도
그 이치가 또한 그러한 것이네.
다음은 땅의 비유를 설하되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체 모든 초목(草木)이
큰 땅을 의지해 자라나건만
땅으로선 분별하는 마음이 없네.
더 자라나 성취시키는 것처럼
중생들 마음의 착한 뿌리도
부처님의 땅을 의지해 자라나건만
부처님은 분별하는 마음이 없이
더 늘어나 성취시키기에
부처님의 음성은 메아리와 같아서
명자(名字)도 없는 것을 설하시고
부처님의 몸은 허공과 같으시므로
누구나 두루 다 볼 수는 없네.
땅을 의지하는 모든 법이
일체가 다 묘한 약이어서
두루 모든 중생들을 위하고
어느 한 사람에게 제한하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 땅에 의지하는 모든 법도
바르고 깨끗한 묘법의 약이어서
두루 모든 중생들을 위하고
어느 한 사람에게 국한하지 아니하네.
11. 교량신공덕품(較量信功德品)
부처님의 품성과 부처님의 보리와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 사업은
모든 세간을 뛰어난 청정한 사람으로서도
능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
이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만약에 믿는 이가 있다면
그는 한량없는 공덕을 얻어
일체 중생계에 뛰어나리니
부처님의 보리를 구하는
헤아릴 수 없는 과보로써
한량없는 공덕을 얻는지라
이 때문에 모든 세간에 뛰어나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마니 구슬 보배를 희사하되
그 시방 세계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 두루 펴서 두고
부처님의 보리를 구하기 위해
모든 법왕(法王)에게 보시하는
이 사람의 이러한 보시가
한량없는 항하사 겁을 계속할지라도
만약에 또 어떤 사람이
묘한 경계의 한 게송을 듣고
듣고 나서 다시 신심을 낸다면
이는 보시의 복 한량없는 것보다 초과하리라.
만약에 어떤 슬기로운 사람이
더없는 계율을 받들어 지키되
몸ㆍ입ㆍ뜻의 업이 다 청정하여
자연히 항상 호지(護持)하고
부처님의 보리를 구하기 위해
이같이 한량없는 겁을 계속한다면
이 사람의 얻는바 복도
헤아릴 수 없기는 하지만
만약에 또 어떤 사람이
묘한 경계의 한 게송을 듣고
듣고 나서 다시 신심을 낸다면
이는 계율의 복 한량없는 것보다 초과하리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선정에 들어
세 세계의 번뇌를 다 사른다면
하늘을 뛰어나 저 언덕으로 가서
보리의 방편까지도 없기는 하지만
만약에 또 어떤 사람이
묘한 경계의 한 게송을 듣고
듣고 다시 신심을 낸다면
이는 선정의 복 한량없는 것보다 초과하리라.
혜(慧)가 없는 사람으로서 희사하는 것은
부귀(富貴)의 과보를 얻을 뿐이고
금계(禁戒)를 닦아 지키는 자는
하늘 가운데 태어날 뿐이지만
수행하여 모든 장애를 끊는 것은
혜(慧)가 아니면 제거할 수 없나니
혜야 말로 번뇌장(煩惱障)을 제거하고
또 지장(智障)까지를 제거할 수 있네.
법을 듣는 것이 혜(慧)의 원인이 되기에
이 때문에 법을 듣는 것이 수승하거늘
하물며 법을 듣고 나서
다시 신심을 낼 수 있는 사람이랴.
내가 여기에 설한 바 법은
자신의 마음을 청정케 하기 위해서이니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하는 것이
곧 수다라(修多羅)에 상응하는 것이라.
만약에 지혜 있는 사람이
듣고서 능히 믿어 받는다면
나의 이 설한 법이
역시 저 사람을 거둬 줌이 될 것이네.
등불과 번개와 마니(摩尼)와
해와 달의 모든 광명을 의지해
일체 눈을 지닌 자들이
다 경계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부처님 법의 광명을 의지해
지혜 눈을 지닌 자는
법의 이 같은 이익 있음을 보나니
이 때문에 나 이 법을 설하는 것이라.
만약에 일체 설한 것이
이치가 있고 법이 있는 글귀라면
능히 수행하는 이로 하여금
세 세계를 아주 여의게 할 것이네.
또 적정(寂靜)한 법을 보여 준
가장 수승한 더없는 길이므로
부처님의 말씀만이 이 바른 경전이고
그 밖의 다른 것은 뒤바뀐 말들이니
비록 법구(法句)의 뜻을 설하여
세 세계의 번뇌를 끊는다 하지만
무명(無明)이 지혜의 눈을 덮고
탐욕 등의 때가 둘러싸여 있네.
도 부처님의 법 가운데에
조그마한 부분을 따내어 설한 것과
세간의 경건과 훌륭한 말씀들
저 세 가지를 받아들여야 하거늘
하물며 모든 여래께서는
번뇌의 때를 아주 여의시어
누(漏)없는 슬기로운 사람으로서
그 설한 바 수다라(修多羅)이랴.
모든 부처님을 떠나서는
일체 세간 가운데에
다시 수승한 지혜로서
여실히 법을 아는 이가 없네.
여래께서 설하신 분명한 이치가
바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인 만큼
이것을 헤아린다면 법을 비방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상인을 비방하거나 법을 파괴하는 것은
이 모든 삿된 생각으로 그러함이니
번뇌에 허덕이는 우치한 사람들이
허망한 소견으로 계교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삿된 소견과 더러운 법에
응당 집착하지 않아야 할지니
깨끗한 옷으로 빛깔을 받음에는
때와 기름끼가 더럽힐 수 없는 것이네.
【문】무슨 인연으로 이 법을 비방하는 자가 있습니까?
【답】게송으로 말하겠다.
어리석어서 바른 법을 믿지 않고
삿된 소견과 교만한 마음으로
과거에 법을 비방한 업장이 있어서
분명하지 않는 이치에 집착하며
공양과 공경에 집착하여
오직 삿된 법만을 보고
선지식(善知識)을 멀리 여의고는
법을 비방하는 자에게 친근하며
즐거이 소승 법에 집착하는
이러한 중생들은
대승을 믿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 법을 비방하는 것이네.
슬기로운 이는 다음의 것을 겁내지 않나니
원수ㆍ뱀ㆍ불 따위의 독과
인다라(因陀羅) 또는 벼락과
칼ㆍ몽둥이와 사나운 짐승과
사자ㆍ호랑이ㆍ이리 따위는
목숨을 끊을 수 있을 뿐이고
저 두려운 아비지옥(阿鼻地獄)에
사람을 들어가게 할 수는 없지마는
그 반면 깊은 법을 비방하거나
법다운 벗 비방하는 것을 겁내나니
이것은 결정코 사람으로 하여금
저 두려운 아비지옥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라.
비록 나쁜 벗을 가까이 함으로써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피를 내고
또한 부모를 살해하고
여러 상인의 목숨을 끊으며
화합한 스님네를 파괴하고
모든 선근(善根)을 끊더라도
이러한 자는 바른 법을 계념(繫念)만 한다면
저 아비지옥의 곳을 벗어날 수 있거니와
만약에 또 어떤 사람이
깊고 깊은 법을 비방한다면
저 사람은 한량없는 겁에
결정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네.
만약에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법을 배워 믿게 한다면
저 사람은 곧 나의 부모이고
또 선지식(善知識)이기도 하리니
저 사람이야말로 슬기로운 이로서
여래께서의 열반하신 뒤엔
삿되고 뒤바뀐 소견을 돌리어
바른 도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네.
삼보(三寶)의 청정한 상품과
보리(菩提)와 공덕과 사업 등
내가 대략 설한 일곱 가지는
부처님 경전과 상응(相應)한 것이라.
이 모든 공덕을 의지하여
원컨대 목숨이 끝날 적에
무량수(無量壽) 부처님의
그지없는 공덕 몸을 보며
나와 또는 다른 믿는 이도
이미 저 부처님을 보고 나선
원컨대 때[垢] 여읜 눈을 얻어
더없는 보리를 성취하여지이다.
≪논≫ 제1의 교화품(敎化品)에 있어서 이미 게송 가운데 설한 바와 같이 이 논은 넓은 문[廣門]이 열 한 품이고, 중간이 일곱 품이고, 대략 설한 것이 단 한 품이 있으니 알아두라. 그리고, 맨 처음에 해석한 한 품이 이 논에 있어서의 법 이치의 체상(體相)을 갖춰 포섭한 것이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불ㆍ법ㆍ승 삼보의
상품과 도와 공덕과 사업을
대략 설한 것이 이 논의 줄거리이니
일곱 가지 금강 글귀가 곧 그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금강이라고 말한 것은 마치 금강과 같이 저해하거나 파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증득할 바의 이치도 그러하기 때문에 금강이라고 말한 것이며, 글귀라고 말한 것은 이 논의 글귀가 능히 증득할 바의 뜻을 더불어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안 몸[內身]으로 법의 말 없는 체(體)를 증득하는 것인 만큼, 듣고 생각하는 지혜로써 증득하기 어려운 것이 마치 금강과 같은 것이다. 명자(名字)와 장구(章句)가 능히 저 이치 속의 증득할 지혜를 말해 줌으로써 바른 도에 수순하여 능히 그 근본을 짓기 때문에 이를 글귀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도 무슨 뜻이냐 하면,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두 가지 뜻이란, 첫째는 증득하기에 어렵다는 뜻이고, 둘째는 원인이란 뜻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뜻이라 함이니 금강의 명자와 장구가 이러한 것인 줄 알아두라.
또 무엇을 뜻이라 하고, 무엇을 글자라 하는가 하면, 뜻은 일곱 가지 증득할 뜻이 있다. 이른바 일곱 가지 뜻은 첫째 부처님이란 뜻이고, 둘째 법이란 뜻이고, 셋째 스님이란 뜻이고, 넷째 중생이란 뜻이고, 다섯째 보리(菩提)란 뜻이고, 여섯째 공덕이란 뜻이고, 일곱째 사업이라 뜻이다. 이것을 뜻이라 함이니, 이 때문에 경(經)에 말씀하기를, “제1의 이치인 진리의 뜻은 이른바 심연(心緣)으로서도 알 수 없거늘 하물며 명자와 장구이겠는가”고 하였다. 그리고 글자란 것은 어떤 명자와 장구와 말소리와 바람 소리를 따라 이 일곱 가지 뜻을 표현하기도 하고 설명하기도 하고 밝히기도 하고 보여주기도 하는 이것을 이름하여 글자라 함이니, 이 때문에 경에 말씀하기를, “세간의 진리란 이를테면, 세간에서 소용되는 일들을 명자와 장구와 언어(言語)로써 설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 일곱 가지 금강 글귀의 뜻은 여러 경 가운데 널리 설한 것과 같으니 알아두라.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하면, 부처님이란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경 가운데 아난(阿難)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여래라고 말하는 것은 볼 수 있는 법이 아니니 이 때문에 눈의 알음알이[眼識]로선 얻어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법이란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경 가운데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이 때문에 귀의 알음알이[耳識]로써 듣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스님이란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경 가운데 아난에게 말씀시기를, “아난아, 스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함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몸과 입으로 공양하고 예배하고 찬탄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중생이란 듯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경 가운데 사리불(舍利弗)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리불아,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경계라, 알체 성문(聲聞)ㆍ벽지불(辟支佛) 등이 바로 지혜로써도 중생이란 뜻을 관찰할 수 없거늘 하물며 마음이 산란한 범부이겠는가. 이 뜻 가운데에 오직 여래를 믿을 뿐이다. 이 때문에 사리불아, 여래를 따라 이 중생의 뜻을 믿을지니, 사리불아,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제1의 이치인 진리이니라. 사리불아, 제1의 이치라고 말한 것이 곧 중생의 경계이니라. 사리불아, 중생의 경계라 말하는 것이 곧 여래장(如來藏)이니라. 사리불아, 여래장이라고 말하는 것이 곧 법신(法身)이니라”고 하였다.
보리라는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경 가운데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란 것이 곧 열반의 경계이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열반의 경계란 것이 곧 법신이겠나이다”고 하였다. 공덕이란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경 가운데 사리불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리불아, 여래가 설한 바 법신의 뜻은 항하사[恒沙]보다 지나는 떠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는 헤아릴 수도 없는 부처님의 법이며 여래의 지혜ㆍ공덕이니라. 사리불아, 마치 세간의 등불이 광명의 빛과 닿임이 떠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는 것과 같으며, 또 마니 보배 구슬이
광명의 빛과 형상이 떠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라. 사리불아, 법신의 뜻도 이와 같아서 항하사 보다 지나치는 떠나지도 벗어나지도 않는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의 법이며, 여래의 지혜ㆍ공덕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사업이란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경 가운데 문수사리(文殊師利)에게 말씀하시기를, “문수사리여, 여래가 분별하지 않는가 하면, 분별하지도 않거니와 분별할 것도 없어서 자연히 분별이 없나니 짓는 바 사업대로 자연히 행하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이러한 것들이 이른바 일곱 가지 금강자구(金剛字句)를 대략 설한 것이다. 이것이 논에 있어서의 체상(體相)을 통틀어 포섭한 것이니 알아두라. 이 때문에 게송으로 말하였다.
일곱 가지 모양의 차례는
총지자재왕경(總持自在王經)의
보살수다라서분(菩薩修多羅序分)
널리 설한 세 글귀가 있고
그 나머지 네 글귀는
보살여래지혜(菩薩如來智慧)의
차별분(差別分)에 있으니
응당 이와 같이 알아두라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이 일곱 가지 금강자구(金剛字句)로써 이 논을 통틀어 포섭한 것이다. 일체 불법에 있어서 그 모양을 널리 설한 것이 다라니자재왕경(陀羅尼自在王經)의 서분(序分)에 있는 세 글귀와 나머지 네 글귀가 저 수다라의 보살여래법차별분(菩薩如來法差別分)에 있는 것과 같으니 알아두라. 서분(序分)에 있는 맨 처음의 세 글귀가 어떤 것이냐 하면 저수다라의 서분 가운데 말하기를, “바가바(婆伽婆)께선 일체 법을 평등히 증득하시고 법 바퀴를 잘 굴리시고 한량없는 제자들을 잘 교화하여 조복하셨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세 가지 근본 자구(字句)는 차례로 불ㆍ법ㆍ승을 나타내 보여 저 삼보(三寶)가 차례로 생기고 성취됨을 설한 것인 줄 알아두라. 나머지 네 글귀는 삼보의 원인에 수순하여 삼보의 원인을 성취함을 설한 것인 줄 알아두라.
이것이 또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모든 보살로선 팔지(八地)가운데에 열 가지 자재함을 으뜸으로 삼아 일체의 자재함을 구족히 얻는지라, 이 때문에
보살은 도량의 수승 미묘한 곳에 앉아서 일체법 가운데에 다 자재함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바가바께선 일체 법을 평등히 증득하셨네”라고 하였으며, 또 모든 보살로선 구지(九地)에 머물 적에 일체 법 가운데 더 없는 최대의 법사가 되어서 일체 중생들의 마음을 잘 알고 일체 중생들의 근기인 제1의 저 언덕[彼岸]에 이르러 일체 중생들의 번뇌와 습기를 끊을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큰 보리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법바퀴를 잘 굴리시네”라고 하였다. 또 보살로선 십지(十地) 가운데에서 더없는 법왕(法王)의 지위에 머물게 되고 그 뒤에는 일체 부처님 처소에서 불사를 일으키는 것이 자연히 행하여 항상 쉬지 않나니, 그러므로 경 가운데 말하기를, “한량없는 제자들을 잘 교화하여 조복하시네”라고 하였다. 저 한량없는 제자들을 잘 교화하여 조복하신 것을 저 경 가운데에서 그 다음으로 나타내어 보였으니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큰 비구 대중들과 함께 계셨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또한 또 한량없는 보살들이 있어 함께 계시고, 이와 같이 차례로 성문의 지위를 잘 교화하며 부처님의 보리(菩提)로 일체 번뇌를 잘 조복하시고, 이와 같이 필경 한량없는 공덕을 지니신지라 또 성문ㆍ보살의 모든 공덕을 설하고 나서 다음엔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부사의한 삼매 경계를 설하셨다. 또 모든 부처님, 여래의 삼매 경계를 설하고 나서 다음엔 때 없는 큰 보배 장엄의 보배 궁전 성취하는 것을 설하였다. 도 큰 보배 장엄의 보배 궁전 성취하는 것을 설하고 나서 다음엔 대중들이 운집하여 갖가지로 여래에게 공경 찬탄하되 갖가지 옷을 뿌리기도 하고 갖가지 꽃을 뿌리기도 하고 갖가지 향을 뿌리기도 하는 것을 설하시니, 이러한 것은 불보(佛寶)의 부사의한 일을 나타내 보인 것인 줄 알아라.
다시 그 다음엔 묘법의 장엄한 법좌(法座)를 설하시고, 또 묘법의 장엄한 법좌를 설하고 나서 다음엔 법문의 명자(名字)를 설함과 동시에 공덕을 나타내 보이시니, 이러한 것은 법보(法寶)의 공덕 차별을 밝힌 것인 줄 알아둘지라.
다시 그다음엔 모든 보살마하살의 공통된 삼매경계를 설함과 동시에 갖가지 공덕을 나타내 보이시니, 이것은 승보(僧寶)의 공덕 차별을 밝힌 것인 줄 알아두라. 그 다음엔 다시 여래께서 큰 광명을 놓으사 모든 보살마하살과 태자(太子)에게 법왕(法王)의 직위 수여하는 것을 설하시고, 그 다음엔 다시 누구에게도 두려움이 없고 겁약(怯弱)하지 않는 변재(辯才)를 설하시고, 그 다음엔 다시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제1공덕을 설하셨다. 그 다음엔 다시 가장 제1인 대승의 법을 설하시니, 이는 저 대승을 여실히 수행하기 때문에 법 가운데 과(果) 증득하는 것을 나타내 보임이라. 이러한 것이 곧 저 삼보의 더없는 공덕의 차례 차별이다. 서분(序分) 가운데의 뜻을 대략 이미 끝내었으니 이와 같이 알아두라.
이미 자재왕보살수다라서분(自在王菩薩修多羅序分) 가운데의 삼보(三寶)를 설하였다. 다음엔 불성의 뜻을 설하건대 예순 가지 법이 있어서 저 공덕을 청정케 함이다. 왜냐하면 저 청정한 한량없는 공덕의 성품이 있는지라 저 성품을 청정케 하기 위해 예순 가지 법을 닦는 것이다.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십지경(十地經) 가운데 자주자주 금(金)을 설하여 비유로 삼았으니, 이것이 저 불성을 청정케 하기 위한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이 다라니자재왕경(陀羅尼自在王經) 가운데 여래의 사업을 설하고 나서 그 다음에 청정하지 않는 큰 비유리(毘琉璃)와 마니(摩尼)보배의 비유를 설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여, 마치 선교(善巧)한 마니 보배 기술자가 청정한 큰 마니 보배를 잘 앎으로써 큰 마니 보배의 성질이 있는 산중에 나아가 아직 청정하지 못한 마니 보배를 캐내고 이미 보배를 캐내어서는
독한 잿물[灰]로 씻고 독한 잿물로써 씻은 뒤에 다시 검은 머리털 수세를 갖고서 닦되, 그것만으론 만족하지 않아 부지런히 쉬지 않고, 다음엔 다시 신맛이 나는 음식 즙(汁)으로써 씻고, 음식 즙으로써 씻은 뒤에 또 수세로 둘러싼 나무로써 세밀히 갈고 닦되 그래도 만족하지 않아 부지런히 쉬지 않고 그 다음엔 큰 약물 즙으로써 씻고 약물 즙으로써 씻은 뒤에 다시 보드라운 천으로써 닦고 이 보드라운 천으로 닦은 뒤에 구리ㆍ쇠 따위 광물[鑛]의 성질과 비유리의 때[垢]를 아주 여의고서야 바야흐로 큰 비유리 보배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그 청정하지 못한 모든 중생들의 성품을 잘 앎으로써, 알고 나선 곧 그들을 위해 ≺덧없음≻과 ≺괴로움≻과 ≺나≻없음과 ≺청정하지 않음≻을 설하사 저 세간을 좋아하는 중생들을 놀래고 겁내게 하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세간을 싫어하고 성문(聲聞)의 법 가운데 들어가게 하시되 부처님ㆍ여래는 그것으로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부지런히 쉬지 않으시어, 그 다음엔 다시 ≺공≻함과 ≺모양 없음≻과 ≺원 없음≻을 설하사 저 중생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여래의 설하신바 법 바퀴를 알게 하시되, 부처님 여래는 역시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서 부지런히 쉬지 않으시어, 그 다음엔 다시 물러나지 않는 법 바퀴를 설하고 또 그 다음엔 청정한 바라밀(波羅蜜)의 행을 설하시나니, 이를테면 세 가지 일을 보지 않고 중생들로 하여금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갖가지 원인을 의지하고 갖가지 성품을 의지하여 불법 가운데 들어가게 하시나니, 불법 가운데 들어가게 하시기 때문에 더없는 최대의 복밭[福田]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또 이 자성(自性)이 청정한 여래의 성품을 의지해 이 때문에 경 가운데 게송에도 말하였다.
마치 돌광[石鑛] 가운데
진금(眞金)을 볼 수 없듯이
능히 청정하게 보는 이라도
부처님을 보는 것이 그러하네.
앞서 불성을 설함에 있어서 예순 가지 청정한 업과 공덕이 있다고 하였다. 그 예순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이른바 네 가지 보살의 장엄과, 여덟 가지 보살의 광명과 열여섯 가지 보살마하살의 대비(大悲)와 서른두 가지 보살의 업이 그것이다.
이미 불성의 뜻을 설하고 다음에 부처님의 보리(菩提)에 열여섯 가지 더없는 보리와 대자대비하신 마음이 있음을 말하였으며, 이미 부처님의 보리를 설하였다. 다음에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공덕은 설하였으니, 이른바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특수한 법이 그것이다. 이미 공덕을 설하고, 다음에 여래의 서른두 가지 더없는 큰 업과 이러한 일곱 가지 금강자구(金剛字句)의 뜻과, 저 수다라(修多羅)에 널리 설한 체상(體相)을 설하였으니, 이와 같이 알아두라.
【문】이 일곱 가지 글귀에 어떤 차례가 있습니까?
【답】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처님으로부터 그 다음에 법이 있고
법 다음에 스님이 있고
스님 다음에 거리낌 없는 성품이고
그 성품 다음에 지혜가 있으며
십력(十力) 등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들을 위해
이익되는 사업을 일으키는
이러한 차례가 있는 것이네.
이미 맨 처음의 한 품이 이 논에 있어서 법 이치의 체상(體相)을 갖춰 포섭한 것임을 설하였다. 다음엔 일곱 가지 품이 또 이 논에 있어서 법 이치의 체상을 갖춰 포섭한 것임을 설했으며, 게송의 뜻까지를 해석해 두었으니, 응당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예경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모든 여래께서 중생들을 교화하시니 만큼, 저 중생들로서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여래를 존경하며 법에 귀의하고 여래를 존경하며 스님에게 귀의하고 삼보에게 귀의한다. 열두 게송을 설함에 있어서 처음 불보(佛寶)를 밝히기 때문에 네 게송을 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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