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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82 불교(구경일승보성론 3권 / 究竟一乘寶性論)

by Kay/케이 2023.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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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3

 

 

견혜 지음

륵나마제 한역

한길로 번역

 

 

5. 일체중생유여래장품(一切衆生有如來藏品)

 

여기서부터 나머지 게송을 논한 것은 차례로 저 네 글귀에 의지해 널리 차별하여 설한 것이니, 알아두라.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앞서 게송에 이렇게 말하였다.

 

진여는 더러움에 섞여 있는가 하면

모든 더러움을 아주 여읜 것이고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이기도 하고

또는 부처님의 하시는 업이기도 하네.

 

이와 같은 묘한 경계는

모든 부처님의 아시는 바이라

이 묘한 법신(法身)에 의지하여

삼보(三寶)를 출생하는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이냐 하면, 앞서 설한 바와 같이 일체 중생은 다 여래장이 있는지라 무슨 뜻에 의지하여 이와 같이 설했는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처님의 법신은 두루 가득하고

진여는 차별이 없는 것이어서

다 진실로 불성이 있는지라

이 때문에 항상 있다고 설함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세 가지 뜻이 있다. 이 때문에 여래께서 어느 때 어떤 중생이건 다 여래장(如來藏)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른바 그 세 가지란, 첫째는 여래의 법신이 일체 중생들의 몸에 두루 있는 것이니, 게송에 부처님의 법신은 두루 가득하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둘째는 여래와 진여가 차별이 없는 것이니, 게송에 진여는 차별이 없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셋째는 일체 중생이 다 실지도 진여의 불성이 있는 것이니, 게송에 다 진실히 불성이 있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라, 이것이 세 글귀의 뜻이다. 여기서부터 논한 것은 여래장 수다라(修多羅)에 의지하여 내가 뒤에 설한 것이니, 알아두라. 게송의 본래 말한 그대로이다.

 

 

일체 중생들의 경계가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여의지 않는 것은

저 청정하여 때[] 없는 체성(體性)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라

 

일체 부처님들의

평등한 법 성품의 몸에 의지하여

일체 중생들에게도

다 여래장이 있는 줄을 아는 것이네.

 

()와 인()ㆍ과()ㆍ업()

상응(相應)과 또는 행()

때의 차별과 모든 곳에 두루함과

변하지 않음과 차별이 없는

 

이러한 묘한 이치의 차례가

곧 제1의 참된 법 성품이라

나 이렇게 대략 설해 두노니

그대는 이제 잘 알아야 하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이냐 하면, 대략 이 게송을 설한 것이 열 가지 뜻이 있다. 이 열 가지에 의지하여 제1의 이치와 진실한 지혜의 경계와 불성의 차별을 설한 것인 줄 알아두라. 이른바 그 열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 체(), 둘째 인()이요, 셋째 과(), 넷째 업()이요, 다섯째 상응(相應)이요, 여섯째 행()이요, 일곱째 때의 차별이요, 여덟째 일체 곳에 두루함이요, 아홉째 변하지 않음이요, 열째 차별이 없음이라. 맨 처음 체()와 인()에 의지하여 이 때문에 한 게송을 설한 것이다.

 

자성(自性)의 항상 더럽히지 않음이

보배와 허공과 깨끗한 물 같으니

법을 믿음과 또는 반야(般若)

삼매와 대비 등이 곧 그러하다.

 

이 게송에 있어서 앞의 반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재한 힘은 변하지 않는지라

그 실다운 체()의 부드러움을 생각하건대

보배ㆍ허공ㆍ물의 공덕과

서로 비슷한 상대의 법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앞서 세 가지 뜻을 설했는데 이 세 가지 뜻을 그 자체의 모양과 또는 같은 모양에 의지하여 설한 것이다. 여래의 법신 세 가지 청정한 공덕이 마치 보배 구슬[如意寶珠]과 허공과 깨끗한 물과 같아서 그것이 서로 비슷한 상대의 법이니, 알아두라. 이것이 또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생각함이란, 바로 여래의 법신에 의지하여 생각하는 것이니, 닦는 것을 죄다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의 반 게송이 또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 장애가 있으니

법을 비방함과 에 집착함과

세간의 괴로움을 두려워함과

모든 중생을 버림이 그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잇찬티카[一闡提]이거나 외도이거나

성문(聲聞)이거나 독각(獨覺)이거나

믿는 등의 네 가지 법이

곧 청정한 인()인 줄 알라.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대략 일체 중생계 가운데 세 종류의 중생이 있음을 설한 것이다. 이른바 그 세 종류란, 첫째 ()를 구하는 중생이고, 둘째 를 아주 구하지 않는 중생이고, 셋째 저 두 가지를 다 구하지 않는 중생이 그것이며, 를 구하는 것에 또 두 종류가 있다. 해탈의 도를 비방하여 열반의 성품이 없는 자로서 항상 세간에 머물기를 구하고 열반을 증할 것을 구하지 않는 중생이 그 하나이고, 불법 가운데에 잇찬티카[一闡提]와 같은 지위의 중생이 그 둘이니, 이는 대승(大乘)을 비방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 말씀하시기를, “사리불(舍利弗)이여, 만약에 어떤 비구ㆍ비구니와 우바새(優婆塞)ㆍ우바이(優婆夷)가 한 가지 소견[]을 일으키거나 두 가지 소견을 일으켜서 모든 부처님, 여래를 저 세존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사리불이여, 이 사람은 두 가지 소견을 일으키는 인연으로써 어두움을 따라 어두움에 들어가고 캄캄한 데를 따라 캄캄한 데에 들어가리라. 나는 이러한 사람을 잇찬티카라고 말하노라고 하셨다. 게송에 이른바 법을 비방하는 자라든가 또는 잇찬티카라는 것이 이 때문이었다.

다음 를 아주 구하지 않는 것이 또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두 종류란, 도를 구할 방편이 없는 자가 그 하나이고, 도를 구할 방편이 있는 자가 그 둘이다. 도를 구할 방편이 없는 자가 또 두 종류이니, 그 두 종류란, 첫째는 많은 종류의 외도로서 갖가지 삿된 계교를 하는 자들이니 이를테면, 승카[僧佉]와 위세사(衛世師)와 니건타야제자(尼㨜陀若提子) 따위로서 도를 구할 방편이 없는 그러한 자이다. 둘째는 불법 가운데에 외도들의 행()과 같은 자로서 비록 불법을 믿기는 하되 뒤바뀐 소견을 가진 자가 바로 그것이니

 

이를테면, 독자(犢子) 따위들이 그 몸속에 가 있다고 보아서 제1의 진리를 믿지 않고, 진여 법의 함을 믿지 않으므로, 부처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외도와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을 계교하여 라 하거나, 아상(我相)으로써 교만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그들을 위해 공해탈문(空解脫門)을 설하사 깨달아 알게 하시건만, 저 사람들의 계교하는 것은 뿐이고 진실함이 없는지라 저 사람들 때문에 보적경(寶積經) 가운데 부처님이 가섭(迦葉)에게 말씀하시기를, “차라리 를 계교하는 것이 수미산(須彌山)과 같음을 볼지언정 교만한 중생이 을 계교하여 라고 하는 것은 보지 않으리라. 가섭이여, 일체 삿된 소견은 을 깨달아야 그 삿된 소견을 여읠 수 있다. 만약에 을 보고서 라고 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교화하여 세간을 여의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게송에 이른바 에 집착하는 자라든가, 또는 외도라는 것이 이 때문이었다.

다음, 도를 구할 방편이 있는 자가 또 두 가지이니, 그 두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성문이니 게송에 이른바 세간의 괴로움을 두려워하는 자라든가, 도는 성문이라는 것이 이 때문이다. 둘째는 독각이니 게송에 이른바 모든 중생을 버리는 자라든가, 또는 독각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저 두 가지를 다 구하지 않는 것이란, 이른바 제일 영리한 근기의 중생과 모든 보살마하살들이다. 왜냐하면, 모든 보살은 저 를 구하는 잇찬티카들과 같지 않기 때문이고, 또 도를 구할 방편이 없는 갖가지 외도들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또 도를 구할 방편이 있는 성문ㆍ독각들과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모든 보살은 세간과 열반을 보는 길이 평등하기 때문이고, 열반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이고, 세간의 법으로선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세간의 행을 수행하여 자비와 열반을 굳게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고, 근본 청정한 법 가운데에 잘 머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저 를 구하는 중생인 잇찬티카 사람들과 불법 가운데에서 잇찬티카의 지위와 많은 자들을 이르되

 

사정취(邪定聚) 중생이라 한다.

또 아주 를 구하지 않는 중생 가운데 도를 구할 방편이 없는 데에 떨어진 중생들을 이르되, 부정취(不定聚) 중생이라 한다. 를 아주 구하지 않는 중생 가운데 세간을 떠나서 도를 구할 방편이 있는 성문, 독각과 저 두 가지를 다 구하지 않는 평등한 도의 지혜인 보살마하살을 이르되 정정취(正定聚) 중생이라 한다.

또 한편으론 장애 없는 도의 대승(大乘)을 구하는 중생을 제외하고서 그 나머지 네 종류의 중생이 있다. 그 네 종류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 잇찬티카이고, 둘째 외도이고, 셋째 성문이고, 넷째 독각이니, 저 네 종류의 중생들은 네 가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증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서 여래의 성품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네 가지 장애가 무엇이냐 하면, 대승의 법을 비방하는 잇찬티카의 장애가 그 첫째이다. 이 장애를 대치(對治)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믿는 대승이라, 게송에 이른바 법을 믿는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자신의 몸 가운데 가 있는 줄을 그릇 계교하는 외도들의 장애가 그 둘째이다. 이 장애를 대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보살마하살들의 수행하는 반야(般若) 바라밀이니 게송에 이른바 반야라는 것이 이 때문이다. 세간의 모든 괴로움을 두려워하는 성문 사람들의 장애가 그 셋째이다. 이 장애를 대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보살마하살들의 수행하는 허공장(虛空藏) 또는 수능엄(首楞嚴) 삼매 등이니 게송에 이른바 삼매라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할 것을 어기고 대비한 마음을 버리는 독각들의 장애가 그 넷째이다. 이 장애를 대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대비를 수행하여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니 게송에 이른바 대비라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것을 이르되 네 가지 장애, 네 가지 중생이라 함이니, 저 네 가지 장애를 대치하기 위해

 

모든 보살마하살들이 대승 등 네 가지 대치하는 법을 믿어 수행하여서 더없는 청정한 법신(法身)을 얻어 제1의 저 언덕[彼岸]에 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네 가지 청정한 법계에 의지해 선한 법을 수습(修習)하는 그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께 수순하는 법의 아들로서 부처님의 집에 태어나기 때문이라, 이 때문에 게송에 말하였다.

 

대승의 믿음으로 아들을 삼고

반야로써 어머니를 삼으니

()의 태()에다가 대비의 젖이라

모든 부처님의 여실한 아들이네.

 

게송에 믿음 등의 네 가지 법이 곧 청정한 인()인 줄 알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 또 과()와 업()에 의지하기 때문에 한 게송을 설한 것이다.

 

()ㆍ아()ㆍ낙()ㆍ상() 등은

저 언덕[彼岸] 공덕의 과()이고

괴로움을 싫어하여 열반을 구하는 것은

욕망과 소원 따위의 모든 업()이네.

 

이 게송 가운데 앞의 반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략 네 글귀의 뜻을 설함이니

네 가지 뒤바뀐 법이 그것이라

법신 가운데에 뒤바뀜도

이 대치하는 법을 수행하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저 믿음 등의 네 가지 법은 여래의 법신도 이것으로 인하여 청정하는 지라, 저 앞서 네 가지 법을 설하고 그 다음에 차례로 네 가지 뒤바뀜을 대치하는 것을 설했다. 여래의 법신 네 가지 공덕 바라밀의 과[波羅蜜果]가 곧 이것인 줄을 알아두라. 게송에 네 글귀의 뜻을 대략 설함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것이 도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이른바 물질[] 등의 무상(無常)한 일 가운데에 상()의 생각을 일으키고, 괴로운 법 가운데에 즐거움의 생각을 일으키고, 없는 법 가운데에 의 생각은 일으키고, 청정하지 않는 법 가운데에 청정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이러한 것들을 이름하여 네 가지 뒤바뀜이라, 하나니 알아두라. 게송에 네 가지 뒤바뀐 법이 그것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 네 가지 뒤바뀜을 대치하기 위해 네 가지 뒤바뀜이 아닌 법이 있는 줄을 알아 둘지니, 그 네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이른바 물질 등의

 

무상한 일 가운데엔 무상의 생각과 괴로움의 생각과 없는 생각과 청정하지 않다는 생각 등을 일으킴이 그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네 가지 뒤바뀌지 않은 법이라 하나니, 대치(對治)할 것임을 알아두라. 게송에 대치하는 법을 수행하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이러한 네 가지 뒤바뀜을 대치함에 있어서 미래의 법신에 의지하는 것이 다시 뒤바뀐 것인 줄을 알아 둘지니, 게송에 법신 가운데에 뒤바뀜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 뒤바뀜을 대치함에 있어서 네 가지 여래의 법신 공덕 바라밀의 과가 있다고 설한 것은 그 네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이른바 상()바라밀, ()바라밀ㆍ아()바라밀ㆍ정()바라밀이 그것이니, 알아두라. 게송에 대치하는 법을 수행하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씀하시기를, “세존이시여, 범부 중생들은 다섯 가지 쌓임[五陰]의 법에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나이다. 이를테면 무상(無常)한 것에 상()의 생각을, 괴로운 것에 즐거운 생각을, 없는 것에 의 생각을, 청저하지 않는 것에 청정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나이다. 세존이시여, 일체 아라한(阿羅漢)과 벽지불(辟支佛)한 지혜로서는 일체지혜의 경계와 여래의 법신을 본래 보지 못하거니와 만약에 어떤 중생은 부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여래의 법신에 대하여 항상하다는 생각과 즐거움의 생각과 의 생각과 청정하다는 생각을 일으킨다면 세존이시여, 저 중생은 뒤바뀐 소견이 아닌지라 이를 바른 소견이라고 하리라. 왜냐하면 여래의 법신만이 이 상()바라밀이고, ()바라밀이고, ()바라밀이고, ()바라밀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법신에 이러한 소견을 일으킨다면, 이야말로 바른 소견이라 하리니, 세존이시여, 바른 소견이란, 곧 부처님의 참된 마음이라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나고 부처님의 법으로부터 나고 법으로부터 화생하여 법의 나머지 재산을 얻겠나이다고 하였다. 여래의 법신이란, 곧 이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네 가지 여래의 법신 공덕 바라밀은 인()으로부터 과()를 향하는지라 그 차례대로 정()ㆍ아()ㆍ낙()ㆍ상()을 설한 것이니, 알아두라. 어떤 것이 그 차례대로 인으로부터 과를 향하는 것이냐 하면,

 

이를테면 대승(大乘)을 비방하는 잇찬티카[一闡提]들은 실상 청정함이 없는 데에도 마음으로 세간의 청정함을 좋아하여 집착하는지라, 이 장애를 대치하는 것이 이른바 모든 보살마하살이 대승을 믿어 수행하여서 제1의 정()바라밀을 얻는 것이니, 알아두라. 다음엔 다섯 가지 쌓임 가운데 신아(神我)가 있다고 보는 외도들의 장애이다. 이들은 실상 신아가 없는 데에도 신아를 좋아하여 집착하는지라, 이 장애를 대치하는 것이 이른바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般若)바라밀을 수행하여서 제1의 아()바라밀을 증득하는 것이니, 알아두라.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일체 외도들은 물질 따위의 진실하지 않은 일에 집착하여 가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저 외도들은 아상(我相)에 집착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아상의 허망함과 뒤바뀜이 없으면 일체 ㄸ대에 가 없으리니, 이러한 뜻에서 여래의 여실한 지혜는 일체 법의 없음을 아시어 제1의 저 언덕에 도달하시는지라, 여래는 피아(彼我)가 없고 아상(我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 때에 여실히 보고 아시는 것이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고, 뒤바뀜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없음이 있음이라고 한다. 없음이란, 저 외도의 허망한 신아(神我)가 없다는 것이다. 있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께서 저 자재함을 얻는 가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게송에 말하였다.

 

청정한 허공과 같이

1없음을 얻은지라

모든 부처님이 청정한 몸을 얻은

그것을 이름하여 큰 몸을 얻음이라 하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큰 몸을 얻음이란, 이른바 여래가 제1 청정한 진여의 법신(法身)을 얻음이라, 저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실다운 는 자재한 몸을 얻으셨기 때문이고, 1 청정한 몸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게송에 모든 부처님이 청정한 몸을 얻음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이러한 뜻이기에 모든 부처님은 청정하고도 자재함을 얻으심이니,

 

게송에 큰 몸을 얻음이라 하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이 뜻에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 여래가 무루계(無漏界) 가운데에서 제일 가장 자재한 를 얻으신 것이다.

또 이러한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래의 법신은 있는 몸이라고 하지 않나니, 아상(我相)이 없고 법상(法相)이 없기 때문이라, 이러한 뜻에서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저 상이 이와 같이 없기 때문에 여래의 법신은 없는 몸이라고도 하지 않나니, 저 진여인 나의 몸만은 있는지라, 이 때문에 법신을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저 상이 이와 같이 있기 때문이다. 이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외도들이 묻기를, “여래가 죽은 뒤에 그 몸이 있습니까? 그 몸이 없습니까?”라고 하지만, 이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여래께서 기억해 듣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는 것이다.

모든 성문(聲聞) 사람들은 세간의 괴로움을 두려워함으로, 저 세간의 괴로움을 두려워하는 것을 대치하기 위해 모든 보살마하살이 일체 세간의 삼매와 세간을 뛰어난 삼매를 수행하여 제1의 낙()바라밀 과를 증득하는 것이니, 알아두라. 벽지불(辟支佛) 사람들은 일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버리고서 고요함에 머물기를 좋아함으로, 저 중생들을 버리는 것을 대치하기 위해 모든 보살마하살이 대비를 수행하여 한량이 없는 세간에 머물면서 항상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제1의 상()바라밀의 과위를 증득하는 것이니, 알아두라. 이것이 이른바 모든 보살마하살의 믿음과 또는 반야와 삼매와 대비인 네 가지 수행이다. 이와 같이 차례로 여래의 몸 정()ㆍ아()ㆍ낙()ㆍ상()의 네 가지 공덕 바라밀의 과를 얻는 것이니, 알아두라.

또 다른 뜻이 있으니, 이 네 가지에 의지하여 여래의 법신을 일컬어 그 광대(廣大)함이 법계와 같고 끝없음이 허공과 같고 미래세를 다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대승을 믿어 수행하는지라, 이 때문에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항상 청정한 법계(法界)를 얻어 제일의 저 언덕에도 달하시나니, 이 때문에 그 광대함이 법계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지라, 이 때문에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허공인 법신을 성취하사 기세간(器世間)으로써 끝까지 가 없고 허공장(虛空藏) 등 한량없는 삼매를 수행하시나니, 그 때문에 일체 처소와 일체 법 가운데에 다 지재로움을 얻으신다. 이 때문에 그 끝 없음이 허공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비를 수행함으로써 일체 중생들에게 한량없는 시절을 겪으면서 자비한 마음을 얻어 평등하신지라, 때문에 미래세를 다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이 네 가지 바라밀은 번뇌 없는 세계[無漏界] 가운데 평등히 머무는 지라 성문ㆍ벽지불이나 큰 힘을 얻는 자재한 보살로서도 여래의 공덕 법신인 제1의 저 언덕을 증오하기 위해선 네 가지 장애가 있다. 그 네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연의 상[緣相]이고, 둘째는 인의 상[因相]이고, 셋째는 나는 상[生相]이고, 넷째는 무너지는 상[壞相]이다. 연의 상이란, 이를테면 무명(無明)의 머무는 자리가 그것이니, 곧 이 무명의 머무는 자리가 행()을 더불어 연을 짓는지라, 무명이 행을 연하는 것과 같이 무명의 머무는 자리 연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인의 상이란, 이를테면 무명의 머무는 자리가 행을 연하는 것이니, 곧 이 무명의 머무는 자리가 행을 연하는 그것이 인이 되는지라, 행이 식()을 연하는 것과 같이 번뇌 없는 업[無漏業]의 연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는 상이란, 이를테면 무명의 머무는 자리 연이 번뇌 없는 업의 인에 의지하여 세 가지 뜻대로 나는 몸[三種意生身]의 인에 의지하여 세 세계[三界]에 나는 것과 같이 세 가지 뜻대로 나는 몸의 나는 것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상이란, 이를테면 세 가지 뜻대로 나는 몸이 부사의한 그 변해 바꿔지는 죽음을 연하는 것이니, 나는 연에 의지하기 때문에 늙어 죽음이 있는 것과 같이 세 가지 뜻대로 나는 몸이

 

그 부사의한 변해 바꿔지는 죽음을 연하는 것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 일체 번뇌의 더럽힘은 다 무명의 머무는 자리 근본에 의지하는지라, 무명의 머무는 자리를 떠나지 못함으로써 성문ㆍ벽지불이나 큰 힘을 얻은 보살로서도 무명의 머무는 자리 때[]를 아주 떠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마지막 함이 없는 정()바라밀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또 저 무명의 머무는 자리 연에 의지하여 미세한 상[細相]과 희론(戱論)의 습기를 아주 멸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마지막 함이 없는 아()바라밀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또 무명의 머무는 자리를 연하여 미세한 상과 희론의 쌓임이 있고 번뇌 없는 업을 인하여 뜻을 쌓임[意陰]을 내는 것을 아주 멸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마지막 함이 없는 낙() 바라밀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번뇌의 더럽힘과 업의 더럽힘과 나는 것의 더럽힘을 아주 멸할 수 없음으로써 이 때문에 마지막 감로(甘露)인 여래의 법신을 증득하지 모하고, 부사의한 그 변해 바꿔지는 생사를 멀리 여의지 못함으로써 항상 열반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변해 달라지지 않는 몸을 얻지 못하고, 이 때문에 마지막 함이 없는 상()바라밀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또 번뇌의 더럽힘과 같이 무명의 머무는 자리도 그러하다. 업의 더럽힘과 같이 번뇌 없는 업의 행도 그러하다. 나는 것의 더럽힘과 같이 세 가지 뜻대로 나는 몸과 또는 그 부사의한 행에 바꿔지는 죽음도 그러한지라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마치 번뇌 있는 업의 인을 연하여 세 세계[三有]에 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세존이시여, 무명의 머무는 자리 연과 번뇌 없는 업의 인에 의지하여 아라한(阿羅漢)ㆍ벽지불(辟支佛)과 큰 힘을 얻은 보살의 세 가지 뜻대로 나는 몸을 내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삼승(三乘)의 자리 세 가지 뜻대로 나는 몸과 또는 번뇌 없는 업으로 나는 것은 다 무명의 머무는 자리에 의지하니 만큼, 이는 연이 있지, 연이 없는 것이 아니옵니다고 말한 것과 같음이다. 이러한 것을 성자승만경

 

널리 설했으니 알아두라.

다시 성문ㆍ벽지불이나 큰 힘을 얻은 보살로서의 그 세 가지 뜻대로 나는 몸 가운데엔 정()ㆍ아()ㆍ낙()ㆍ상()바라밀인 저 언덕 공덕의 몸이 없는지라, 이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오직 여래의 법신만이 상()바라밀이고, () 바라밀이고, []바라밀이고, ()바라밀인것이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여래의 법신은 그 자성(自性)이 청정하여 일체 번뇌장(煩惱障)과 지장(智藏)의 습기를 여의었기 때문에 청정한지라, 이 때문에 여래의 법신만이 정()바라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일 고요하고도 자재한 를 얻었기 때문에, 또는 없는 희론(戱論)을 떠나서 마지막으로 고요하기 때문에 라고 한다. 이 때문에 여래의 법신만이 아()바라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뜻대로 나는 쌓인 몸[陰身]의 인()을 아주 여의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의 법신만이 낙()바라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간과 열반을 평등하게 증득했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의 법신만이 상()바라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 법이 있음을 대략 설하겠으니, 이 두 가지 법에 의지하여 여래의 법신이 정()바라밀이 있는 줄을 알아두라. 두 가지 법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본래의 자성이 청정함이니, 인의 상[因相]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더러움을 떠나서 청정함이니, 수승한 상[勝上]이기 때문이다.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이 두 가지 법에 의지하여 여래의 법신이 아()바라밀이 있는 줄을 알아두라. 그 뚜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모든 외도들의 치우침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 허망한 의 희론을 여의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든 성문들의 치우침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 없음의 희론을 여의기 때문이다.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이 두 가지 법에 의지하여

 

여래의 법신이 낙()바라밀이 있는 줄을 알아두라. 그 두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일체 괴로움을 멀리 여의는 것이고, 둘째는 일체 번뇌의 습기를 멀리 여의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으로써 어떻게 일체 괴로움을 멀리 여의는가 하면, 일체 종류의 괴로움을 없애기 때문에 또는 일체 뜻대로 나는 몸을 없애기 때문이다. 어떻게 번뇌의 습기를 멀리 여의는가 하면, 일체 법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이 두 가지 법에 의지하여 여래의 법신이 상()바라밀이 있는 줄을 알아두라. 그 두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일체 함이 있는 행을 없애지 않는 것이니,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의 치우침을 여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일체 함이 없는 열반을 없애지 않는 것이니, 항상 있다는 소견[常見]의 치우침을 여의기 때문이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 가운데 설하기를, “세존이시여, 모든 행을 무상(無常)으로 본다면 이는 아주 없다는 소견이고 바른 소견이 아니며, 열반을 상()으로 본다면 이는 항상 있다는 소견이고 바른 소견이 아니리니 허망한 생각으로 보기 때문에 이러한 소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앞서 법계법문의 제일 진리를 설한 것에 의지하여 곧 세간의 법을 열반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 세간과 열반의 두 가지 법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세간과 열반의 집착하지 않을 것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게송에 말하였다.

 

분별이 없는 사람은

세간을 분별하지도 않고

열반을 분별하지도 않나니

열반이야말로 평등이 있기 때문이네.

 

이 게송에 있어서 뒤의 반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만약에 불성이 없는 자라면

모든 괴로움을 싫어할 수 없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또 하고자 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을 것이네.

 

이런 뜻이기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만약에 여래장(如來藏)이 없는 자라면 괴로움을 싫어하거나 열반을 구하기를 즐겨할 수 없으리다. 또 열반에 대한 욕망도 없고

 

원하여 구하지도 않으리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음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대략 말하건대 불성의 청정함이 바로 부정취(不定聚) 중생을 인하여 두 가지 업을 지을 수 있다. 그 두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세간의 갖가지 고뇌를 보는 것에 의지하여 모든 고뇌를 싫어하기 때문에 마음을 내어서 그 세간의 일체 고뇌를 여의려고 하는 것이다. 게송에 만약에 불성에 없는 자라면 모든 괴로움을 싫어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둘째는 열반의 즐거움을 보는 것에 의지하여 그 고요한 즐거움을 바라기 때문에 구하는 마음과 하고자 하는 마음과 원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 게송에 만약에 불성이 없는자라면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또 하고자 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을 것이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하고자 하는 것이란, 열반을 구하기 때문이고, 구하는 것이란, 열반을 희구(忄希求)하기 때문이고, 희구하는 것이란, 그 법을 희구함에 있어서 겁약(怯弱)하지 않기 때문이다. 얻고자 하는 것이란, 그 구하는 법 가운데 방편으로 추구(追求)하기 때문이고, 또는 자문(諮問)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란, 그 법을 기대하는 것이고, 기대하는 것이란, 마음과 마음이 서로 행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게송에 말하였다.

 

괴로움의 과()요 즐거움의 과를 보는 것은

불성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니

만약에 불성이 없는 자라면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무릇 모든 세간의 괴로운 과를 보는 것과 무릇 모든 열반의 즐거운 과를 보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법이다. 선근(善根)의 중생으로서 일체 의지함이 있는 것은 진여의 불성을 인하여 그런 것이고 불성을 떠나선 인연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게송에 괴로움의 과와 즐거움의 과를 보는 것은 불성에 의지하여 있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만약에 인연이 없으면서도 이러한 마음을 내는 것이라면, 잇찬티카[一闡提] 따위 열반을 성품이 없는 자도 응당 보리심(菩提心)을 내어야 하리니, 게송에 만약에 불성이 없는 자라면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 성품이 아직 일체 객()ㆍ진() 번뇌의 모든 때[]를 여의지 못했다면

 

이는 삼승(三乘) 가운데에 일찍 일승(一乘)에 대한 신심을 닦아 익히지 못했거나 또는 선지식(善知識)들에게 친근하지 않고 선지식들에게 친근할 인연을 닦아 익히지 앟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화엄성기(華嚴性起) 가운데 말하기를, “또한 사견취(邪見聚) 중생들의 몸속에도 다 여래의 해 바퀴[日輪] 광명이 비추는 것은 저 중생들의 이익을 짓고, 미래 인연의 선근을 짓고, 모든 깨끗한 법을 더 늘어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앞에 설하기를 잇찬티카들이 항상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열반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으니, 이 뜻이 무엇인가 하면, 대승(大乘)을 비방하는 그 인연을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대승을 비방하는 마음과 대승을 구하지 않는 마음을 돌이키려고 하기 때문이라, 한량이 없는 때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또는 저 중생들도 실상 청정한 성품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라 해서 항상 끝까지 청정한 성품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서로 걸맞는 뜻에 의지하여 이 때문에 한 게송을 설한 것이다.

 

큰 바다의 그릇과 보배와 물이

한량없고도 다할 수 없고

등불 광명의 달빛과 같이

불성의 공덕도 그러한 것이라.

 

이 게송에 있어서 앞의 반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처님 법신의 지혜ㆍ선정ㆍ대비가

중생들의 성품을 섭수하는 그것이

마치 큰 바다의 보배와 물과

서로 비슷한 상대법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세 가지 곳이 있기 때문이니, 차례로 세 가지 있는 것이 마치 큰 바다와 서로 비슷한 상대 법이다. 여래의 성품 가운데에 인()을 의지하여 필경 서로 걸맞은 뜻을 성취하는 것이니 알아두라. 그 세 가지 곳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법신의 청정한 인()이고, 둘째는 부처님의 지혜를 모은 인이고, 셋째는 여래의 대비를 얻은 인이다.

법신의 청정한 인이라, 대승을 수행하는 그 그릇이 서로 비슷한 상대 법이니, 한량없이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송에 이른바 부처의 법신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바다와 서로 비슷한 상대 법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지혜를 모은 인이란, 난야와 삼매가 값진 보배와 더불어 서로 비슷한 상대 법이니, 게송에 이른바 지혜와 선정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여래의 대비를 얻은 인이란, 대자대비하신 마음이 물과 서로 비슷한 상대법이니, 게송에 이른바 대비로써 중생들의 성품을 섭수한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물과 서로 비슷한 상대 법이기 때문이다.

또 지혜와 삼매문을 수행하는 것이 보배와 서로 비슷한 상대법이니, 저 분별 없고 부사의한 큰 세력과 공덕을 지닌 것이 서로 걸맞기 때문이다. 또 보살의대비를 수행하는 것이 물과 서로 비슷한 상대 법이니, 일체 중생들에게 부드럽게 하는 그 대비로써 한결같은 맛과 평등한 맛을 얻음이 서로 걸맞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저 세 가지 법에 이 세 가지 인이 화합되니, 필경 버리거나 떠나지 않기 때문에 서로가 걸맞는다고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뒤의 반 게송은 또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통과 지혜와 때[]없음이

진여(眞如)를 떠나지 않는지라

등불 광명의 뜨거운 빛과 같이

때 없는 세계도 그와 비슷한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역시 세 가지 곳이 있으니 그 차례의 세 가지가 등불과 서로 비슷한 상대법이다. 여래의 법계 가운데에 과()를 의지하여 서로 걸맞은 법이니 알아두라. 그 세 가지 곳에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신통이고, 둘째는 번뇌의 다됨을 아는 지혜이고, 셋째는 그 번뇌가 다된 것이다.

이것이 또 무슨 뜻이냐 하면, 신통이란 다섯 가지 신통이 있으니, 그 광명이 서로 비슷한 상대법이라 수용(受用)하는 일이 능히 흩어버리거나 없앨 수 있는 것이어서 지혜와 서로 통하고 어두움을 대치하는 법이어서 그 대치하는 것이 서로 비슷한 상대 법이기 때문이다. 게송에 이른바 신통이란 것이 이 때문이고, 또 광명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번뇌의 다됨을 아는 지혜란, 번뇌 없는 지혜의 그 뜨거운 것이 서로 비슷한 상대법이라

 

능히 업과 번뇌를 남김없이 다 사를 수 있으므로 사를 수 있는 그것이 서로 비슷한 상대되는 법이기 때문이니, 게송에 이른바 지혜란 것이 이 때문이다. 또 뜨거움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번뇌가 다 된 것이란, 몸을 바꿔 번뇌가 다된 그 빛이 서로 비슷한 상대되는 법이니, 항상 때가 없이 청정함으로써 그 광명을 구족한 모양의 때 없이 서로 비슷한 상대법이기 때문이다. 게송에 이른바 때 없이란 것이 이 때문이고, 빛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또 때가 없는 것이란, 번뇌의 장애[煩惱障]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청정한 것이란, 지혜의 장애[智障]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광명이란, 자성(自性) 그대로의 청정한 몸이니, 저 두 가지 장애가 바로 객()ㆍ진()번뇌이다. 이와 같이 대략 여섯 가지를 설함이다. 번뇌 없는 지혜란, 그 번뇌를 여읜 무학(無學)들이 몸소 법을 섭수한 것이라, 번뇌가 없는 법계 가운데엔 저것과 이것이 공통되어 서로가 버리거나 떠나지 않고 차별하지 않나니, 법계의 평등한 그것이 마침내 서로 걸맞은 뜻인 줄을 알아두라. 그리고 또 행()의 뜻에 의지하여 이 때문에 한 게송을 설한 것이다.

 

실상을 보는 이는 말하기를

범부나 성인이나 부처님이나

중생의 여래장(如來藏)으로선

그 진여가 차별이 없다 하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범부는 마음이 뒤바뀌었고

실상을 보는 이는 범부와 다르고

여실히 뒤바뀌지 않으신

모든 부처님은 희론(戱論)을 여의셨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앞서 여래의 법계 가운데 일체 법을 밝히되 진여의 청정함은 모두가 같은 모양인 것임을 밝혔으니, 이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분별없는 지혜 법문 등에 의지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해 설한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대략 세 종류의 사람에 의지함을 밝힘이다. 그 세 종류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여실히 보지 못하는 범부이고, 둘째는 여실히 보는 성인이고, 세 번째 필경 여실함을 성취한 여래의 법신이다.

이것이 이른바 세 종류의 행이니, 알아두라. 어떻게 아는가 하면, 뒤바뀜을 갖는 것과 뒤바뀜을 여읜 것과

 

희론(戱論)을 여읜 이러한 차례이다. 이것이 또 무슨 뜻이냐 하면, 뒤바뀜을 갖는 것이, 이를테면 모든 범부들은 세 가지 허망한 생각의 마음으로 보기 때문이니, 게송에 범부는 마음이 뒤바뀌었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뒤바뀜을 여읜 것이란, 성인으로선 허망한 생각의 마음으로 보는 것을 아주 여의었기 때문이니, 게송에 실상을 보는 이는 범부와 다르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희론을 여읜 것이란, 바로 뒤바뀜과 모든 희론을 여의고 번뇌의 장애, 지혜의 장애와 또는 번뇌의 습기를 모든 여래께서 그 근본을 아주 다 끊으셨기 때문이다. 게송에 여실히 다 바뀌지 않으신 모든 부처님은 희론을 여의셨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곧 이행에 의지하여 나머지 네 종류의 뜻을 널리 차별하여 설했으니, 알아두라. 다시 저 세 종류의 사람들에 의지하고 때의 차별에 의지하여 이때에 한 게송을 설한 것이다.

 

부정(不淨)이 있고 청정이 있고

또는 선정(禪淨)이 있음으로써

이와 같이 차례대로 말하기를

중생이고 보살이고 부처님이라 하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 등 여섯 글귀의 뜻은

대략 법의 본성과 본체를 밝힌 것이고

그 차례의 세 때[三時] 가운데엔

세 종류의 명자(名字)를 설한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앞서 번뇌 없는 법의 성품을 밝힌 그것이 곧 여래께서 널리 설하신 갖가지 법문이라 저 모든 법문을 여섯 글귀의 뜻에 의지하여 대략 설하였으니, 이른바 체()와 인()ㆍ과()와업()과 상응(相應)과 행()을 다 포섭한 것이다. 게송에 체등 여섯 글귀의 듯은 법의 본성과 본체를 대략 밝힘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세 때 가운데엔 차례로 저 세 종류에 의지하여 명자(名字)를 설한 것이니, 알아두라. 게송에 그 차례의 세 때 가운데엔 세 종류의 명자를 설함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것이 또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부정한 그 때를 이름하여 중생이라 함이니, 게송에 이른바 부정함이 있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부정을 청정케 하는 그 때를 이름하여 보살이라 함이니,

 

게송에 이른바 청정함이 있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선정(善淨)한 그 때를 이름하여 여래라 함이니, 게송에 이른바 선정함이 있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 말씀하시기를, “사리불(舍利弗)이여, 곧 이 법신도 항하사[恒沙]겁을 지나는 동안 한량없는 번뇌에 얽매여서 처음이 없는 시절로부터 세간의 생사 물결에 수순하여 가고 오기도 하고, 나고 죽기도 했으니, 이를 이름하여 중생이라 하느니라. 사리불이여, 곧 이 법신이 세간의 생사 고뇌를 싫어하여 일체 욕심을 버리고는 열 가지 바라밀을 닦아 84천의 법문을 섭수하고 보리행 닦는 이를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느니라. 사리불이여, 곧 이 법신이 일체 번뇌의 얽매임을 떠나서 일체의 고뇌를 벗어나고, 일체 번뇌의 때를 떠나서 청정한 법 속에 머물러서 일체 중생을 관찰하는 지위에 도달하고, 일체 경계 가운데 다시 수승할 이가 없어서 일체의 장애를 여의고, 일체 법 가운데에 자재한 힘을 얻었으니, 이를 이름하여 여래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게송에 이러한 차례대로 설한 것이 곧 중생이고 보살이고 부처님이네라고 말한 것이 역시 이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곧 저 세 때에 의지하여 여래의 법성(法性)이 일체 곳에 두루함을 밝힘이니, 이 때문에 한 게송을 설한 것이다.

 

허공이 일체를 두루하지만

허공은 분별함이 없는 것처럼

자성(自性)의 때[]없는 마음도

역시 두루하되 분별함이 없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과실ㆍ공덕ㆍ필경 그 어느 때에나

두루 이르고 또 같은 모양이라

그 하등ㆍ중등ㆍ상등의 일체 중생이

마치 허공 가운데의 빛과 같음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모든 범부나 성인이나 부처님의 그 자성이 청정하고, 마음이 평등함은 분별이 없는지라 저 청정한 마음이

 

세 때의 차례에 있어서 과실의 때이건, 공덕의 때이건, 공덕이 청정한 필경의 때이건, 그 동일한 모양의 차별 없는 것이 마치 허공이 기와ㆍ은ㆍ금 세 종류 그릇 속에 있되 평등하여 다름이 없고 차별이 없어서 어느 때라도 있는 것과 같음이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경() 가운데, 세 때의 차례가 있는 것을 설하였다.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 설하시기를, “사리불이여, 중생계를 떠나서 법신이 있지 않고 법신을 떠나서 중생계가 있지 않으니, 중생계가 곧 법신이고 법신이 곧 중생계라, 사리불이여, 이 두 법은 뜻이 같고 이름만 다르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여기서부터는 곧 이 세 땡 의지하여 여래의 법성이 일체 곧고 두루 이르는 것을 밝힘이라 부정한 때이거나 청정한 때이거나 변하지 않고 다르지 않는 것을 설한 것이 열다섯 게송이 있으니, 이러한 여러 게송이 그 중요한 뜻을 대략 설한 것이다.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모든 과실의 객()ㆍ진()이 와서

자성의 공덕과 어울리더라도

진여의 법체는 변하지 않아서

본래와 같이 뒤에도 그러하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열한 게송과 두 게송은

차례로 부정한 때에 있어서

번뇌의 객ㆍ진 과실이다.

 

열넷째, 열다섯째의 게송은

선정(禪淨)한 때에 있어서

항하사 보다 지나는 부처님 법의

그 이탈하지 않고 부사의한

부처님의 자성의 공덕이라

 

과거세에나 현재세에나

또는 미래세에나

여래 진여의 성품은

그 본체가 변치도 않고 다르지도 않네.

 

처음 부정한 때에 의지하여 변하지 않고 다르지 않음을 설한 것이 이 열한 게송이다.

 

허공이 두루 이르지만

허공 자체는 미세한 티끌도 더럽히지 않듯이

불성도 중생들에 두루하지만

모든 번뇌가 더럽히지 않으며

 

일체 세간이

허공을 의지해 생멸하듯이

번뇌 없는 경계를 의지하여

모든 근()의 생멸이 있네.

 

불이 허공을 사르지 못하거늘

만약에 사른다면 그럴 이치가 없으리니

이와 같이 늙고 병들어 죽음도

불성을 사를 수는 없는 것이며

 

 

땅이 물을 의지해 머물고

물이 또 바람을 의지하고

바림이 또 허공을 의지하지만

허공은 땅ㆍ물ㆍ바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쌓임과 경계와 감관이

번뇌의 업 속에 머물고

모든 번뇌의 업들은

불선한 생각을 의지하며

 

불성한 생각의 행()

청정한 마음속에 머물지만

자성의 청정한 마음은

저 모든 법에 머물지 아니하네.

 

쌓임ㆍ느낌ㆍ경계는 땅과 같고

번뇌의 업은 물과 같고

바르지 않는 생각은 바람과 같고

청정한 마음의 경계는 허공과 같음이라.

 

성품에 의지해 삿된 생각이

삿된 생각이 번뇌의 업을 일으키고

또 번뇌의 업을 의지하여

쌓임과 느낌과 경계를 일으키나니

 

다섯 가지 쌓임인 경계와 느낌 등

그 모든 법을 의지하여

모든 근()의 생멸 있는 그것이

마치 세계의 이룩되고 무너지는 것과 같네.

 

청정한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도 없고 연()도 없고

또 화합하는 이치도 없고

나고 머물고 사라짐도 없는지라

 

허공과 같은 청정한 마음이야말로

항상 밝아서 바뀌거나 변함이 없거늘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에

객ㆍ진 번뇌의 더럽힘이 되네.

 

이 허공 비유의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이냐 하면, 여래의 성품이 부정한 때에 의지하여 그 법체(法體)가 변하지 않는 것을 밝힘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바르지 않은 생각은 바람이고

모든 업의 번뇌는 물이고

자성의 마음은 허공이니

이 허공이 저 바람, 물을 의지해 나기 않는지라

 

자성의 청정한 마음은

그 모양이 허공과 같으므로

삿된 생각의 바람이

흩어지거나 무너뜨릴 수 없으며

 

모든 업의 번뇌 물도

허공만은 적실 수 없고

늙고 병들고 죽는 치성한 불도

허공만은 사를 수 없는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며, 마치 삿된 생각의 바람 바퀴[風輪]를 의지하여 업의 번뇌 불덩어리를 일으키는 것처럼 업의 번뇌 불덩어리를 의지하여 쌓임과 느낌과 경계의 세간을 낼 수는 있으되, 자성인 마음 허공은 나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나니, 게송에 바르지 않는 생각은 바람이고 업의 번뇌는 물이고 자성인 마음 허공이 저 바람ㆍ물을 의지해 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삿된 생각의 풍재(風災)와 업이 지나가는 번뇌의 수재(水災)와 늙고 병들고 죽는 등의 화재(火災)를 의지하여 쌓임과 느낌과 경계의 세간을 불고 적시고 사르고 무너뜨릴 수는 있으되,

 

자성이 청정한 마음의 허공만은 헝상 머물러서 무너지지 않는지라, 이와 같이 부정한 때에 있어서 기세간(器世間)과 서로 비슷한 상대 법이라 모든 번뇌의 더럽힘과 업의 더럽힘과 나는 것의 더럽힘은 쌓임도 있고 사라짐도 있지만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함이 없는 성품은 마치 허공이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처럼 항상 변하거나 바꿔지지 않아 법체(法體)를 나타내 보이나니 이것이 바로 자신의 청정한 법문인 허공 비유라, 다라니자재왕보살수다라경(多羅尼自在王菩薩修多羅經) 가운데 널리 설한 것과 같으니, 알아두라.

저 경 가운데 말씀하시기를, “여러 선남자여, 번뇌는 본래 체()가 없는데, 진여의 성품은 밝고도 깨끗하다. 일체 번뇌는 약하고도 얇은데, 비바사나(毘婆舍那)는 큰 세력이 있으며, 일체 번뇌는 객()이고 진()인데, 자성은 청정한 마음의 근본이다. 일체 번뇌는 허망한 분별인데 자성의 청정한 마음은 여실히 분별하지 않느니라. 여러 불자(佛子), 마치 큰 땅은 물을 의지해 머물고, 물은 바람을 의지해 머물고, 바람은 공허를 의지해 머물지만, 저 허공만은 의지하여 머무는 곳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여러 선남자여, 이러한 네 가지 요소[四大]가 바로 땅ㆍ물ㆍ바람ㆍ허공인데, 이 네 가지 요소 가운데 허공 요소만을 가장 수승한 것이라 하고, 큰 힘이라 하고 견고한 것이라 한다. 또 변동하지 않는 것이라 하고 조작하지 않는 것이라 하고, 해산하지 않는 것이라 하고,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아서 자연히 머무는 것이라 하느니라.

여러 선남자여, 저 세 가지 요소는 나고 사라짐이 서로 어울리어 실다운 체성(體性)이 없으므로 찰나에도 머물지 않느니라. 여러 불자여, 이 세 가지 요소는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무상(無常)하느니라. 여러 불자여, 그런데 허공계만은 항상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느니라. 여러 불자여, 이와 같이 쌓임과 경계와 느낌은 업의 번뇌를 의지해 머물고, 모든 번뇌의 업은 바르지 않는 생각을 의지해 머물고, 바르지 않는 생각은 불성인 자성의 청정한 마음을 의지해 머무느니라고 하셨다.

 

또 이런 뜻이기 때문에 경() 가운데 말씀하시기를, “자성의 청정한 마음이 객진 번뇌에 더럽히나니 여러 선남자여, 모든 삿된 생각과 모든 번뇌의 업과 모든 쌓임ㆍ경계ㆍ느낌 이러한 법은 인연의 화합을 따라 나고 인연의 파괴로써 사라지느니라. 여러 선남자여, 저 자성의 청정한 마음은 인()도 없고 연()도 없기 때문에 화합하는 것이 없어 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느니라. 여러 선남자여, 허공의 경계와 같이 자성의 청정한 마음도 그러하고, 바람 요소의 경계와 같이 바르지 않는 생각도 그러하고, 물 요소의 경계와 같이 모든 업의 번뇌도 그러하고, 땅 요소의 경계와 같이 쌓임ㆍ느낌 등도 그러하느니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일체 법은 다 근본이 없고 다 견고함이 없나니, 머묾이 없음은 머무는 근본이 없기 때문이고 근본이 청정함은 그 근본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부정한 때를 의지하여 그 분별없는 모양과 자성(自性)의 청정한 마음이 허공의 경계와 서로 비슷한 상대 법임을 설하였다. 이미 저 바르지 않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바람 경계와 서로 비슷한 상대 법임을 서라고, 이미 바르지 않은 생각에 의지한 그 모든 업 번뇌의 원인 모양이 물 경계와 서로 비슷한 상대 법임을 설하였다. 그리고 이미 저 쌓임ㆍ경계ㆍ느낌을 내는 그 결과 모양의 변천하는 것이 땅과 서로 비슷한 상대 법임을 설하였으나, 저 죽고 병들고 늙음을 사르는 모든 과환(過患)의 모양이 불과 서로 비슷한 상대 법임을 설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다음의 게송을 설하였다.

 

세 가지 불이 있어서

차례로 인간과 지옥을 사르며

갖가지 고통을 일으키기도 하고

모든 행의 근()을 녹이기도 하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이 세 가지 불이 부정한 때에 있어서 저 여래장(如來藏)을 변하게 하거나 다르게 할 수는 없음을 밝힘이니,

 

이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생사란 세간의 이치[三諦]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죽음이란, 모든 근()이 무너지는 것이고, 나는 것이란, 모든 근이 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늙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함이 있는 모양의 경계를 여의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항상하고 청량(淸凉)하여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미 주정한 때를 의지하여 변하지 않고 다르지 않는 것은 설하고, 다음 부정을 청정케 하는 때를 의지하여 변하지 않고 다르지 않는 것을 설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여실히 불성을 아나니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늙음도, 병드는 것도, 없는 그것이 불성이라

 

보살이 이와 같이 알고

능히 생사를 벗어나서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생멸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괴로움의 불을

성인은 아주 다 꺼버린지라

그러므로 모든 보살에겐

업의 번뇌를 의지해 나는 불이 없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늙고 병들고 죽는 따위 고통의 불이 부정한 때에 있어서 업의 번뇌 뿌리를 의지해나는 그것이 마치 세간의 불이 섶나무 뿌리를 의지해 나는 것과 같음을 밝힘이다. 모든 보살은 뜻대로 나는 몸[意生身]을 얻어 남으로써 그 부정을 청정케 할 때에 필경 모든 고통을 아주 다 없애버리나니, 이런 뜻이기 때문에 모든 업의 번뇌가 항상 사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慈悲)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나타내 보이면서도 그 나고 죽는 것 등을 멀리 여의나니 진실 그대로를 보기 때문이다. 또 이런 뜻이기 때문에 모든 보살마하살은 선근(善根)에 의지해 나지 않는다. 마음의 자재한 힘을 의지해 나고, 대비의 힘을 의지해 세 세계[三界]에 출현하는지라, 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고

 

늙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고, 병든 것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고, 죽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되, 그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고통의 법이 없나니, 진실 그대로 진여의 불성은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임을 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부정을 청정케 하는 때라고 한다. 수다라(修多羅) 가운데 번뇌 없는 업의 좋아하는 근본 번뇌의 의지해 널리 설한 것과 같으니, 알아두라. 그것이 바로 여래께서 대해혜보살경(大海慧菩薩經) 가운데 설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 경에 설하시기를, “대해혜여, 어떤 것이 세간에 머무는 선근(善根)으로서 번뇌에 상응(相應)되는 것이냐 하면, 이른바 모든 선근을 모음에 있어서 만족하게 여김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소원으로 태어나서 모든 유()를 거둬 가지기 때문이고, 일체 부처님, 여래를 구해 뵙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을 교화하되 마음으로 지치거나 게을리 하지 않기 때문이고, 일체 부처님들의 묘법을 거둬 가지기 때문이고, 모든 중생들에게 항상 이익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항상 모든 법을 즐거이 탐구하는 그 번뇌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고, 항상 모든 바라밀을 구하는 그 번뇌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니라. 대해혜여, 이것을 이르되, 모든 보살마하살의 그 세간의 선근이 번뇌에 상응되는 것이라 하나니, 이 번뇌를 의지해 모든 보살마하살이, 세 세계[三界]에 태어나서 갖가지 괴로움을 받되, 그 세 세계 번뇌의 허물에 더럽힘이 되지는 않느니라.”

대해혜 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선근을 무슨 뜻으로써 번뇌라고 이름하나이까?”

부처님은 대해혜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해혜여, 이러한 번뇌는 모든 보살마하살이 세 세계에 태어나 갖가지 괴로움 받을 수 있음으로써 이 번뇌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세 세계가 있는 것이고 번뇌에 더럽혀서 세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라. 대해혜여, 보살은 방편의 지혜 힘으로써 선근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세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것을 이르되 선근이 번뇌에 상응되어서 세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고, 더럽힌 마음으로 태어나는 것을 아니라고 하느니라.

대해혜여,

 

마치 어떤 장자(長者)나 거사(居士)가 다만 외아들이 있을 뿐이어서 매우 사랑하고 매우 생각함으로, 보는 이들도 기뻐했는가 하면, 저 외아들이 어리석은 마음에다가 장난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주 깊은 뒷간 똥구덩이 속에 떨어졌다. 그 때 저 부모와 또는 친척들이 그 깊고 깊은 뒷간 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는 외아들을 보고는 한심하고 슬퍼하고 울부짖으면서도 그 깊고 깊은 똥구덩이 소에 들어가 외아들을 꺼내지 않는지라, 때마침 그 곳 대중 가운데 다른 어떤 장자의 아들이나 혹은 거사의 아들이 있다가 그 아이가 깊고 깊은 똥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빨리빨리 외아들이란 생각을 내어서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일 뿐, 조금도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곧 그 깊은 뒷간 똥구덩이 속에 들어가 그 외아들을 꺼내는 것과 같으니라. 대해혜여, 앞서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이 비유를 설하는 것이다. 대해혜여, 어떤 것이 그 뜻이냐 하면, 대해혜여, 깊고 깊은 똥구덩이란 것은, 세 세계를 말하는 것이고, 외아들이란 것은 일체 중생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보살로선 그 일체 중생들에게 외아들이란 생각을 내어야 하는 것이다.

대해혜여, 그 때의 부모와 친척들은 말하자면 성문(聲聞)ㆍ벽지불(辟支佛)과 같은 사람이니, 2()의 사람으로서 중생들이 깊고 깊은 똥구덩이 속에 떨어져 잇는 것을 본다면, 보고 나서 슬피 울기는 하되, 저 중생들을 꺼낼 수는 없느니라. 대해혜여, 그 때에 있었던 다른 어떤 장자의 아들과 거사의 아들이란 것은, 보살마하살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번뇌를 벗어나 청정하여 때[]가 없는지라, 때를 벗어난 마음으로써 현전에 함이 없는 진여의 법계를 보고 그 자재한 마음으로 곧 세 세계에 태어나서 저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이다.

 

대해혜여, 이것이 이른바 보살마하살의 대비이니 필경 모든 존재[]를 멀리 여의고, 필경 모든 얽매임을 멀리 여의고서 세 세계 가운데, 거듭 태어나되 방편의 지혜 힘 때문에 모든 번뇌의 불이 사를 수 없는지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얽매임을 멀리 여의게 하기 위해 법을 설하는 것이다. 대해혜여, 내가 이제 이 수다라(修多羅) 글귀를 설하는 것은 모든 보살의 마음에 의지함이니, 일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자재한 힘을 얻어서 세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모든 선근과 자비한 마음의 힘에 의지하고 방편 반야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이것이 이른바 그 부정을 청정케 하는 때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 보살마하살은 여실한 지혜로써 여래의 법신의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줄을 아는지라, 이 때문에 그와 같은 보살마하살의 공덕 법체(法體)를 얻는 것이다. 이 수다라 글귀는 앞서 이미 설하셨고, 여기서부터는 큰 비유리(毘琉璃) 마니 보배[摩尼寶]의 비유를 들어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대해혜여, 마치 값진 큰 비유리 마니 보배 구슬을 잘 다루어서 그 매우 청정하고 훌륭한 광명의 것이 진흙 속에 떨어져 1천년 동안을 묻혀 있다가, 저 마니 보배가 천년을 지난 뒤에야 곧 저 진흙에서 나왔다. 나와서는 물에 씻고 씻고 나선 매우 깨끗하고 매우 깨끗이 씻은 뒤엔 아주 빛이 나서 곧 본래 청정하여 때[]가 없던 그 마니 보배의 몸을 잃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대해혜여,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이, 일체 중생들의 자성(自性)은 청정하고 광명이 있는 깨끗한 마음이지만 그것이 객()ㆍ진() 번뇌에 더럽히게 되는 줄을 여실히 아느니라. 대해혜여, 모든 보살은 마음을 내기를, ‘저 모든 번뇌가 중생들의 자성 청정한 마음을 더럽히지 않건만, 이 모든 번뇌의 객ㆍ진이 허망한 분별의 마음을 일으키는구나하고,

 

저 모든 보살은 다시 마음을 내기를, ‘내가 이제 필경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객ㆍ진 번뇌의 때를 멀리 여의게끔 그들을 위해 설법하리라고 하나니, 이러한 보살은 겁약(怯弱)한 마음을 내지 않고, 일체 중생들에게 돌아다니면서 증상(增上)의 힘을 내어 내가 필경 해탈을 얻게 하리라고 하는 것이다.

보살은 그 때 다시 마음을 내기를, ‘이 모든 번뇌는 아무런 체()가 없는 것이구나하고, 보살은 그 때 또 마음을 내기를, ‘모든 번뇌가 체가 없고 모든 번뇌가 약하고도 얇으니 만큼 이 모든 번뇌는 머무는 곳이 없구나고 하나니, 이러한 보살은 그 모든 번뇌가 허망한 분별을 의지해 있고 삿된 소견의 생각을 의지해 있으니만큼 바른 소견을 지닌 자에겐 모든 번뇌의 때가 일어날 수 없는 줄을 여실히 아는 것이다. 보살은 그 때 다시 마음을 내기를, ‘나는 마땅히 모든 번뇌가 다시 나지 않는 것임을 여실히 관찰하리니, 그 번뇌를 내지 않음으로써 모든 선한 법을 내리라하고, 보살은 그 때 또 마음을 내기를, ‘내 스스로가 만약 모든 번뇌를 일으킨다면, 어떻게 그 번뇌에 얽매인 중생들을 위해 설법하여 번뇌에의 얽매임을 벗어나게 할 수 있겠는가하고, 보살은 그 때 또 마음을 내기를 내가 모든 번뇌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그 번뇌에 얽매인 중생들을 위해 설법할 수 있을지라, 나는 마땅히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리라고 하나니, 번뇌가 선근에 상응되는 것을 모든 중생들을 위해 교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니라고 하였다.

또 어떤 것을 이름하여 세간이라 하는가 하면, 세 세계[三界]가 거울의 형상과 서로 비슷한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번뇌 없는 법계 가운데 의지해 세 가지 뜻대로 나는 몸이 있으니, 알아두라. 저 번뇌 업음으로 인하여 선근을 짓는 것을 세간이라 하는가 하면, 번뇌 있는 모든 업으로 인하여 번뇌를 짓는 그 세간을 여의기 때문에 이것을 열반이라고도 하나니라. 이런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함이 있는 세간이 있고 함이 없는 세간도 있으니, 세존이시여, 함이 있는 열반이 있고, 함이 없는 열반이 있기 때문이다. 또는 함이 있고 함이 없는 심왕(心王)법의 상응하는 법이 있기 때문이옵니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 부정을 청정케 하는 때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뜻은 제6의 보살 현전(現前) 지위에서 말하는바 저 모든 번뇌가 다되어 장애 없는 반야바라밀의 해탈하는 현전에서 대비를 수행하되, 일체 중생들을 구호하기 때문에 증득을 취하지 않는 것이니, ‘보만경(寶鬘經)’ 가운데 번뇌가 다됨에 의지해 성()에 들어가는 비유를 설한 것과 같음이다.

그 경 가운데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여, 마치 어떤 성()의 가로와 세로와 넓이가 각각 1유순(由旬)이고, 많은 성문이 있는가 하면, 그 길이 험하고 캄캄 어두워서 매우 겁이 나긴 하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사람은 많이 안락을 받는데, 어떤 사람이 외아들이 있을 뿐이어서 매우 사랑하고 매우 생각하던 나머지, 저 성이 그렇게 쾌락하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곧 외아들을 버리고 가서 성에 들어가려고 했다. 이 사람이 방편으로 험한 길을 거쳐 저 성문에 이르러서 한쪽 발은 문 안에 들여 놓고 한쪽 발은 아직 들지도 않은 찰나에 문득 그 아들이 염려되어서 곧 생각하기를, ‘나에겐 외아들뿐이거늘 내가 올 때에 어째서 끝까지 데리고 오지 아니했을까. 그 누가 기르고 보호하여 뭇 고통을 여의게 하겠는가하고는, 곧 성을 버리고 아들 있는 처소에 되돌아가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이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다섯 신동[五通]을 닦아 익히고 닦아 익히고는, 곧 번뇌를 다할 수 있으되 증득을 취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번뇌가 다된 신통을 버리고 가서 범부의 지위 가운데 다니느니라. 선남자여, 큰 성은 큰 반열반(般涅槃)에 비유한 것이고, 성문이 많은 것은 8만 삼매문에 비유한 것이다. 길이 험난한 것은, 마군의 업[魔業]에 비유한 것이고, 성문에 도달한 것은, 다섯 신통에 비유한 것이고, 한쪽 발을 드리어 놓은 것은, 지혜에 비유한 것이고,

 

한쪽 발을 들지도 못한 것은, 보살로서의 해탈을 증하지 못함에 비유한 것이고, 외아들을 말한 것은 다섯 갈래[五道]의 일체 중생들에 비유한 것이다. 그 외아들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은, 대비한 마음에 비유한 것이고, 아들의 처소에 돌아가는 것은, 중생을 조복하는 것에 비유함이다. 해탈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증득하지 않는 것은, 곧 방편이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의 대자대비는 헤아릴 수 없는지라, 그러므로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은 큰 방편의 힘으로 큰 정진을 내고 견고한 마음을 일으켜 선정을 수행하여서 다섯 신통을 증득하나니라. 이러한 보살은 선정과 신통의 업을 의지하여 마음이 청정한 번뇌가 없음[無漏]을 잘 닦아서 멸진정(滅盡定)이 현전에 나타나며, 이러한 보살은 곧 대비한 마음을 낼 수 있어서 일체 중생들을 구호하기 때문에 현전에 번뇌 없는 지혜의 신통으로 돌아다녀 적멸(寂滅)의 열반을 취하지 않고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기 때문에 세간에 돌아다니면서 또한 범부의 지위를 나타내 보이느니라. 4의 보살 염혜(焰慧) 지위에 있어선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정진을 잘 일으키고 남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견고한 마음을 잘 일으키나니, 이는 번뇌가 다된 현전이다. 5의 보살 난승(難勝) 지위에 있어선 다섯 신통에 의지하며 스스로가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마음 작용의 번뇌 없음을 잘 성숙하나니, 이는 멸진정이 현저함이다. 이 때문에 제6의 보살 지위에 있어선 장애 없는 반야바라밀로써 번뇌가 다된[漏盡]현전을 일으키며, 이 때문에 제6의 보살 현전 지위에 있어선 번뇌가 다된 자재함을 얻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청정이라 한다.

이 보살이 이렇게 자신이 바르게 수행함으로써 중생들을 교화하여 저 곳에 안치시키고, 대자 대비한 마음을 얻어 뒤바뀐 중생들에게 구호하는 마음을 내어서 적멸의 열반에 집착하지 않는다. 저 모든 방편을 잘 일으켜 세간문(世間門)을 나타내는가 하면,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에 열반문(涅槃門)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은 보리분(菩提分)을 만족하였기 때문이다. 네 가지 선정[四禪]을 수행해 욕심 세계에 도로 태어나서 지옥ㆍ축생ㆍ아귀(餓鬼)ㆍ범부 등 갖가지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모든 몸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자재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이미 부정을 청정케 하는 때를 의지하여 변하지 않고 다르지 않는 것을 설하였다. 다음 선정(禪淨)한 때를 의지하여 변하지 않고 다르지 않음을 설하기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부처님 몸이 변하거나 다르지 않음은

다함이 없는 법을 얻으셨기 때문이고

중생들이 귀의하게 되는 것은

그 그지없는 경계이기 때문이며

 

언제나 두 가지 아닌 법에 머무심은

허망한 분별을 떠나셨기 때문이고

항상 집착하지 않고 조작하지 않음은

그 청량한 마음의 힘이시기 때문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병들지 않고 늙지도 않고

항상 청량한 그대로이고

또는 변하거나 다르지 않기 때문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를 또 게송으로 말하겠다.

 

항상하기 때문에 나지 않나니

뜻대로 나는 몸을 여의었기 때문이고

언제나 항상하기 때문에 죽지 않나니

부사의한 죽음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청량하기 때문에 병들지 않나니

번뇌의 습기가 없기 때문이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늙지 않나니

번뇌 없는 행이 없기 때문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여래의 성품이 부처님 지위에서 그 때[]없이 청정한 광명이 항상 자성(自性)의 청정함에 머무는 것을 밝힘이라, 과거세부터 항상하기 때문에 나지 않나니, 뜻대로 나는 몸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미래세에도 항상하기 때문에 죽지 않나니 부사의하게 변하거나 바꿔지는 죽음을 여의었기 때문이라 과거세부터 청량하기 때문에 병들지 않나니, 무명(無明)의 머무는 지위에 속하는 것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는 세 세상[三世]에 떨어지지 않아 변하지 않기 때문에 늙지 않나니, 번뇌없는 업에서 회전함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다시 게송으로 말하겠다.

 

둘이 있고 또 둘이 있는가 하면

다시 둘둘의 글귀가 있으니

차례대로 여상(如常)한 그것이

곧 번뇌 없는 경계 가운데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항상하고 또는 언제나 그대로인 것과, 청량하고 또는 변하지 않는 이것이, 곧 네 글귀이라, 번뇌없는 법계 가운데에 차례차례 하나하나의 글귀가 둘둘의 근본인지라, 이 둘둘에 대한 뜻의 차별을 해석함이다. 부증불감수다라(不增不減修多羅) 가운데 설하시기를, “사리불(舍利弗)이여, 여래의 법신이 항상한 것은 다르지 않은 법이기 때문이고 다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사리불이여, 여래의 법신이 언제나 그대로인 것은 항상 귀의할 수 있기 때문이고 미래세에도 평등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여, 여래의 법신이 청량한 것은 두 가지 법이 아니기 때문이고, 분별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사리불이여, 여래의 법신이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지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고 조작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니라고 하신 것과 같음이다.

이미 변하거나 다르지 않는 것을 설하고, 그 다음 차별 없음을 설하였으니, 차별이 없는 것이란, 곧이 선정(善淨)의 때에 의지해 과거세부터 끝까지 자체의 모양이 선정한 것은 여래장(如來藏)이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 이 때문에 한 게송을 설한 것이다.

 

법신과 또는 여래와

거룩한 진리와 또는 열반의

그 공덕이 서로 떠나지 않음이

마치 광명이 태양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네.

 

이 게송 가운데 앞의 반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신이나 또한 열반이

뜻은 같으면서 이름만 다른지라

번뇌 없는 경계 가운데 머물러

네 가지 뜻의 차별이 있음은 대략 밝힘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번뇌 없는 법계 가운데에 여래장을 의지한 것이 네 가지 뜻이 있고, 네 가지 뜻을 의지한 것이 네 가지 이름이 있음을 대략 설함이니, 알아두라.

 

어떤 것이 그 네 가지 뜻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불법의 서로 떠나지 않음과

또는 저 진여의 성품과

법체(法體)의 허망하지 않음과

또 자성의 본래 청정하이 그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불법의 서로 떠나지 않는 것이란, 이 뜻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하지 않는 여래장은 항하사 보다 지나는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 부사의 한 부처님의법입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저 진여의 성품이란, 이 뜻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육근취경(六根聚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여섯 감관이 바로 처음이 없는 때로부터 필경 모든 법체이옵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법체의 허망하지 않는 것이란, 이 뜻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경 가운데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또 제1의 진리는 이른바 허망하지 않는 열반에 그것이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저 성품은 과거세부터 항상 법체로서 변하지 않기 때문이옵니다고 하였다. 자성의 본래 청정한 것이란, 이 뜻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경 가운데 부처님이 문수사리(文殊師利)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래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는 과거세부터 열반에 드셨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또 이 네 가지 뜻에 의지하여 차례로 네 가지 이름이 있는 것이란, 그 네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법신이고, 둘째는 여래이고, 셋째는 제1의 진리이고, 넷째는 열반이라 이런 뜻이기 때문에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 가운데, 사리불(舍利弗)이 사뢰기를, “여래장이란 곧 법신이기 때문이옵니다고 하였고, 성자승만경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법신을 떠나서 여래장이 있지 않고 여래장을 떠나서 법신이 있지 않으니, 세존이시여, 한 가지 괴로움이 사라짐의 진리[苦滅論]에 의하여, 이를 여래장이라고 말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여래의 법신을 한량없고 그지없는 공덕이라 하나이다고 하였는데, 세존께서 대답하시기를, “열반 그것이 바로 여래의 법신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뒤의 반 게송이

 

또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체의 지혜를 깨닫고

일체의 습기를 여읜지라

부처님 몸과 열반의 몸은

1의 이치를 떠나지 아니하네.

 

이 네 가지 이름은 여래의 법신 번뇌 없는 경계 가운데에 같은 맛이고, 같은 뜻이어서 서로가 버리거나 떠나지 아니하나니, 이 때문에 비록 네 가지 이름이 있긴 하나 저 네 가지 뜻이 한 법문을 떠나지 않고, 한 법체를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일체 법을 증득하고 일체 지혜를 깨달은 것과 또는 일체 지혜의 장애와 번뇌의 장애 습기를 떠나는 이 두 가지 법이 번뇌 없는 법계 가운데에서 다르지 않고 차별하지 않으며, 끊어지지 않고 서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가운데 게송으로 말하였다.

 

한량없는 공덕이

일체 부사의하사

차별하지 아니하는 해탈이시니

해탈 그것이 곧 여래이네.

 

이 뜻이기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성문(聲聞)ㆍ벽지불(辟支佛)이 열반을 얻은 것은 부처님의 방편이기 때문이옵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성문ㆍ벽지불로서 열반이 있다함은 이는 부처님의 방편이다. 부처님께서 저 기나긴 길 넓은 벌판에 멀리 여행하다가 피로에 지쳐 있는 중생들을 보고 퇴전(退轉)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사 그들을 위해 쉬게 하기 때문에 조화의 성[化城]을 조작하시는지라, 여래께서 이와 같이 일체 법 가운데에 큰 자재함과 큰 방편을 얻으셨기 때문에 이러한 뜻을 밝힌 것이며, 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여래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께선 평등한 열반을 증득하셨기에 일체 공덕이 한량없고 그지없고 헤아릴 수 없고 청정하여 필경 맨 마지막 경지에 도달하셨나이다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네 가지 뜻에 의지한 필경의 공덕은 모든 부처님 여래가 차별이 없는지라 열반의 모양은 더없는 과() 가운데이고 부처님과

 

열반은 일체 공덕이 서로 버리거나 떠나지 않거늘, 만약에 부처님의 지위 더없는 과 가운데를 떠나서 지혜를 증득한다면, 다시 어떠한 사람도 열반의 법이 있지 않으리니, 이러한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그리고 일체 지혜에 의지하며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번뇌 없는 법계를 비유로써 나타내 보였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보만경(寶鬘經)에 화사(畵師)의 비유로써 일체 공덕 구족한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그것이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치 갖가지 화사(畵師)

그들 아는 것이 각각 차별이어서

저 한 사람의 아는 부분을

둘째의 사람은 알지 못하는지라.

 

어떤 자재한 국왕(國王)

그 모든 화사들에게 명령하되

저 그림판이 마련된 곳에

나의 몸을 원만히 그릴지어다

 

온 나라의 모든 화사들은

일체 다 손을 모을지니

너희들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아야

곧 이 국왕의 형상을 완성하리라고

 

화사들이 명령을 받고 나서

국왕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저 모든 화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참여하지 못한지라

 

저 한 사람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국왕의 형상이 이룩되지 않는 것은

그 온 몸의 낱낱 부분을

만족케 할 수 없기 때문인 것과 같음이네.

 

이른바 모든 화사는

보시 계율 등 모든 행에 비유한 것이고

이른바 국왕의 형상은

일체 지혜를 나타내 보인 것이며

 

한 사람이 참여하지 못한 것은

한 가지 행이 모자람을 비유한 것이고

국왕의 형상이 이룩되지 않은 것은

의 지혜가 구족하지 못한 것이네.

 

이 게송에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이런 뜻이기 때문이다.

보만경(寶鬘經)에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으라. 내가 이제 너를 위해 다음의 비유를 설하리라. 마치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죄다 그림을 잘 아는지라, 그중에 혹은 물감을 잘 버무리어 바르기도 하고, 혹은 잘 갈아서 무늬를 내기도 하며, 혹은 몸뚱이를 그릴 줄 아는 반면 손발을 그릴 줄은 모르고, 혹은 손발을 그릴 줄 아는 반면 얼굴이나 눈을 그릴 줄은 모른다. 그때 어떤 국왕이 비단 한 폭을 이 여러 사람들에게 주면서 명령하기를 무릇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는 죄다 모여와서

 

이 비단 폭 위에 나의 몸 형상을 그릴지니라고 하자, 그 때 여러 사람들이 과연 다 모여들어서 그들의 능한 부분에 따라 공동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마침 화사(畵師)한 사람이 어떤 사고를 반연하여 끝내 올 수가 없으므로, 이미 모인 여러 사람들끼리 그리고 나서 공동으로 국왕께 바친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그렇다면, 이 그림을 그 여러 사람들이 죄다 모여서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여, 내가 이 비유만을 설해선 그 뜻이 나타나지 않는구나. 선남자여, 한 사람이 오상을 이미 성취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불법도 그러한 지라 만약에 한 가지 행을 성취하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여래의 바른 법을 구족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니, 이 때문에 요컨대 모든 행을 구족해야 더없는 보리(菩提)를 성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 이 보시 등 모든 바라밀의 낱낱 차별은 오직 여래만이 아시는 경계니, 여래께선 저 갖가지 차별을 아시는 것이 한량없고 그지없는지라. 저 산수(算數)와 자재한 힘으로서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저 간탐[] 등 모든 번뇌를 대치하나니, 이 때문에 청정한 보시 등 모든 바라밀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일체 갖가지 지혜와 일체 의 지혜와 갖가지 삼매문을 수행함으로써 여덟째의 보살 부동 지위[不動地]에 있어선 일체 보살의 지위를 분별하지 않고 간격 없이 자연 도()의 지혜에 의지해 생사 없는 법의 지혜[無生法忍] 얻을 것을 수행하여서 여래의 번뇌 없는 계율[無漏界]을 성취 구족하고 일체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아홉째의 보살 선혜 지위[善慧地]에 있어선 아승지 삼매 다라니 바다문[陀羅尼海門]에 의지해 한량없고도 그지없는 모든 부처님의 법을 섭취하고, 일체 중생들의 근()을 아는 지혜에 의지해 한량없고도 그지없는 공덕의 지혜에 의지해 한량없고도 그지없는 법의 지혜를 얻는다.

 

열째의 보살 법운 지위[法雲地]에 있어선 일체 여래의 현전 바라밀 지혜에 의지해 한량없고도 그지없는 공덕덩어리를 성취하여 생사 없는 공의 법 지혜[無生空法忍]를 얻는다. 그 다음엔 모든 삼매를 얻어 일체 번뇌의 장애와 지혜의 장애를 끊음으로써 모든 해탈문의 지혜에 의지해 청정한 저 언덕[彼岸]의 공덕을 성취하여 일체 갖가지 지혜와 일체 의 지혜를 구족히 얻는지라, 이러한 네 가지 지위의 지혜는 성문, 벽지불의 지위가 아니니, 성문ㆍ벽지불들의 지위로선 그 거리가 매우 먼지라, 이런 뜻이기 때문에 차별하지 않는 열반의 경계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 때문에 게송에도 말하였다.

 

()와 지()와 해탈은

법계의 본체를 떠나지 않는지라

차별이 없는 열반의 경계가

마치 태양과 서로 비슷한 상대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어떤 혜()이건 어떤 지()이건 어떤 해탈이건 저 세 가지는 법계의 진실한 체를 떠나지 않는지라, 저 네 가지 공덕이 차별없는 열반의 경계를 성취하는 것임을 밝힘이니, 게송에 차별이 없는 열반의 경계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 저 네 가지 뜻의 차례 때문에 네 가지의 서로 비슷한 상대법이 있으니, 알아두라. 그 네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부처님의 법신 가운데 세간을 뛰어난 분별없는 혜()에 의지하여 능히 제일 무명(無明)의 캄캄한 어두움을 깨뜨리는 그것이 저 광명의 비춤과 서로 비슷한 상대 법이다. 게송에 이른바 ()’라는 것이 이 때문이고 마치 태양과 서로 비슷한 상대이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둘째는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에 일체 지혜를 얻어서 그 지혜가 일체 갖가지를 아는 그것이 저 일체 사물을 비춰 방출하는 광명의 그물과 서로 비슷한 상대법이니, 알아두라. 게송에 이른바 ()’라는 것이 이 때문이고, ‘마치 태양과 서로 비슷한 상대이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셋째는 저 두 가지에 의지해 자성(自性)의 청정한 마음으로 해탈한 그것이 때[]가 없고

 

때를 여읜 광명 바퀴의 청정한 것과 서로 비슷한 상대법이니, 알아두라. 게송에 이른바 해탈이란 것이 이 때문이고, ‘마치 태양과 서로 비슷한 상대이네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넷째는 곧 이 세 가지가 법계를 떠나지 않고 진실한 본체를 떠나지도 않아서 서로가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 그것이 서로 비슷한 상대법이니, 알아두라. 게송에 이른바 법계의 본체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때문이고, ‘마치 태양과 서로 비슷한 상대이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러므로 게송에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몸을 증득하지 않고는

열반을 얻을 수 없는 그것이

마치 광명을 버리고는

태양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음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앞서 설한 바 번뇌 없는 법계 가운데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 모든 부처님 법신 가운데의 번뇌 없는 모든 법은 일체 공덕이 서로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여래의 장애 없는 법신의 지혜를 멀리 떠나서는 일체 장애를 떠난 열반의 체상(體相)을 볼 수도 없고 증할 수도 없는 것이 마치 태양의 광명을 떠나서는 태양의 바퀴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또 이런 뜻이기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법은 우열(優劣)이 없기 때문에 열반을 얻는가 하면, 그 모든 법의 평등함을 아는 지혜이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평등한 지혜이기 때문에 열반을 얻는가 하면, 평등한 해탈지견 때문에 열반을 얻고, 그 평등한 해탈임을 알아보기 때문에 열반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여래께서 열반의 경계는 하나의 맛이고 평등한 맛이라고 설하셨다. 이를테면, 해탈은 하나의 맛임을 밝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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