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83 불교(구경일승보성론 4권 / 究竟一乘寶性論)

by Kay/케이 2023. 3. 18.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4

 

 

견혜 지음

륵나마제 한역

한길로 번역

 

 

6. 무량번뇌소전품(無量煩惱所纏品)

 

게송으로 말한다.

 

앞서 여래장(如來藏)을 설하여

열 가지 뜻을 나타내 보이고

그 다음 번뇌전(煩惱纏)을 설하되

아홉 가지 비유로써 설하였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앞서 여래장을 의지해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 저 법이 항상 머물러 법체(法體)가 바뀌거나 변하지 않은 그것을 설하여 여래장의 열 가지 뜻이 있는 것을 밝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의 번뇌장(煩惱障)의 얽매는 것을 의지해 그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 자성(自性)의 청정한 마음이 구족한 법신을 설하되, 아홉 가지 비유로써 여래장이 항하사보다 지나는 번뇌장에 얽매인 것을 밝히었으니 수다라(修多羅)에 설한 것과 같다. 알아두라. 아홉 가지 비유는 앞서 게송에 설한 그대로이다.

 

시들어진 꽃 속의 모든 부처님이고

뭇 벌 속의 아름다운 꿀이고

껍질 겨 속의 알찬 열매이고

더러운 똥 속의 참된 금이며

 

땅 속의 값진 보배 광이고

모든 과일 씨 속의 싹이고

썩고도 허물어진 옷으로써

둘러싼 참된 금의 형상이면

 

빈천하고도 추악한 여인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잉태하고

까맣게 타버린 흙 모형 속에

가장 훌륭한 보배 상()이 있는 격이라.

 

중생들의 탐욕ㆍ진심ㆍ우치와

허망한 생각과 번뇌 따위의

그 모든 더러운 때[]속에도

다 여래장(如來藏)은 있기 마련이네.

 

이 게송의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 여기서부터 이것을 의지하여 네 구절 게송의 뜻을 대략 설하고, 나머지 비유는 쉰 네 게송으로 널리 설했으니, 알아두라. 다시 말하자면, 이 네 구절의 게송이 널리 저 설한 게송 가운데의 뜻을 통틀어서 대략 설한 것이니, 알아두라.

 

또 그런 뜻에 의지하여 대략 설한 것이 다음의 두 게송이다.

 

꽃ㆍ벌과 껍질 겨, 더러운 똥과

땅ㆍ과일과 또는 해진 옷과

비천한 여인과 타버린 모형은

번뇌의 때[]와 서로 비슷한 것이며

 

부처님과 꿀ㆍ열매와 참된 금과

과일의 싹과 금 형상과 전륜왕과

가장 훌륭한 보배 형상 등은

여래장과 서로 비슷한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꽃ㆍ벌 등의 여러 비유는

중생들의 몸속에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

모든 번뇌의 때가 있음을 밝힌 것이며

 

부처님ㆍ꿀 등의 여래 비유는

중생들의 몸속에도

비롯함 없는 때로부터 구족한

그 자성의 때 없는 체()가 있음을 밝힌 것이네.

 

다시 이 여래장을 대략 설하건대 수다라(修多羅) 가운데에, 일체 중생계는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 객()ㆍ진()의 번뇌가 마음을 더럽히는가 하면, 그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청정 미묘한 법신과 여래장이 서로 버리거나 떠나지 않음을 밝히었다. 이 때문에 경()에도 말하기를, “자신의 허망함을 의지하여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 중생들의 더럽힘이고 자성(自性)의 청정한 마음을 의지하는 것이 중생들의 청정이라고 하였다. 어떤 것이 자신의 마음 더럽힘이냐 하면, 자신의 마음을 의지해 더럽히는 것이 아홉 가지 비유가 있으니, 이를테면 시들어진 꽃 등의 비유가 그것이다.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탐욕ㆍ진심ㆍ우치의 상속하는 번뇌와

또는 그 결사(結使)와 훈습(熏習)

도를 보거나 도를 닦아서 끊는 번뇌와

부정 또는 청정한 지위에 있는 번뇌라

 

시들은 꽃 등 여러 가지 비유로써

아홉 가지 비슷한 상대를 설하되

그지 없는 번뇌의 얽매임 때문에

그 모든 차별의 모양을 설하였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아홉 가지 번뇌가 자성(自性)이 청정한 여래의 법신 경계 가운데에 있는 것을 대략 설함이니, 마치 시들은 꽃 등 아홉 가지 비유가 모든 부처님들에 있어서의 항상 바깥 객()의 모양인 것처럼 모든 번뇌도 그와 같이 진여의 불성에 있어서의 항상 객()ㆍ진()의 모양인 것이다. 그 어떤 것을 아홉 가지 번뇌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탐욕의 부리는 번뇌이고,

 

둘째는 진심의 부리는 번뇌이고, 셋째는 우치의 부리는 번뇌이고, 넷째는 더 늘어나는 탐욕ㆍ진심ㆍ우치의 결사(結使)번뇌이고, 다섯째는 무명(無明)의 머문 지위에 섭수된 번뇌이고, 여섯째는 도를 봄으로써 끊는 번뇌이고, 일곱째는 도를 닦음으로써 끊는 번뇌이고, 여덟째는 부정한 지위에 섭수된 번뇌이다. 이러한 아홉 가지 번뇌를 저 아홉 가지 비유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니, 알아두라.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세간의 탐욕 등이 중생들의 몸속에 섭수되어 있는 그 번뇌는 능히 부동지위[不動地]에 있어서는 업행의 반연으로 형상 세계[色界]와 무형 세계[無色界]의 과보를 성취하므로, 세간을 뛰어난 지혜라야 끊을 수 있는지라, 이것을 이름하여 탐욕ㆍ진심ㆍ우치의 부리는 번뇌라고 함이니, 게송에 탐욕ㆍ진심ㆍ우치의 상속하는 번뇌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더 늘어나는 탐욕ㆍ진심ㆍ우치 등이 중생들의 몸 속에 섭수되어 있는 그 번뇌는 능히 복된 업과 죄 업을 지어가는 반연을 일으켜 욕심 세계[欲界]의 과보만을 성취하므로 오직 부정관(不淨觀)의 지혜가 있어야 끊을 수 있는지라. 이것을 이름하여 더 늘어나는 탐욕ㆍ진심ㆍ우치 등 결사 번뇌라고 함이니, 게송에 이른바 그 결사라는 것이 이 때문이다. 또 아라한(阿羅漢)의 몸속에 섭수되어 있는 그 번뇌는 능히 번뇌 없는 업을 지어가는 반연을 일으켜 때[]없이 뜻대로 나는 몸[意生身]의 과보를 내므로 오직 여래의 보리지혜[菩提智]만이 끊을 수 있는지라, 이것을 이름하여 무명의 머문 지위에 섭수된 번뇌라고 함이니, 게송에 이른바 훈습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도 두 종류의 배우는 사람이 있으니, 첫째는 범부이고, 둘째는 성인이라, 범부의 몸속에 섭수되어 있는 번뇌는 처음 세간을 뛰어난 마음으로 세간을 뛰어난 법을 보는 그 지혜로써 끊을 수 있는 지라, 이것을 이름하여 도를 봄으로써 끊는 번뇌라고 함이니, 게송에 이른바 도를 본다는 것이 이 대문이다. 성인의 몸속에 섭수되어 있는 번뇌는 앞서 말한바 세간을 뛰어난 법을 보는 그것과 같이, 도를 닦는 지혜로써 끊을 수 있는지라, 이것을 이름하여 도를 닦음으로써 끊는 번뇌라고 함이니,

 

게송에 이른바 도를 닦는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또 구경(究竟)이 아닌 보살로서 초지(初地)로부터 칠지(七地)에 이르기까지의 섭수된 번뇌는 일곱 번 머무는 그 지위 가운데, 대치(對治)할 법이므로, 팔지(八地) 이상 세 번 머무는 지위 가운데 도를 닦는 지혜로써 끊을 수 있는지라, 이것을 이름하여 부정한 지위에 섭수된 번뇌라고 함이니, 게송에 이른바 부정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또 필경 구경인 보살의 몸속에 섭수된 번뇌는 팔지(八地) 이상 세 지위 가운데 도를 닦는 지혜의 대치할 법이므로, 금강삼매의 지혜만이 끊을 수 있는지라, 이것을 이름하여 청정한 지위에 섭수된 번뇌라고 함이니, 게송에 이른바 청정한 지위에 있는 번뇌라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아홉 가지 번뇌의 차례를 대략 설한 것이다. 시들은 꽃 등 아홉 가지 비유를 내가 이미 널리 설했으니 알아두라. 또 이 아홉 가지 번뇌는 84천 중생들의 행을 의지하기 때문에 역시 84천 번뇌의 차별이 있으니, 마치 여래의 지혜가 한량없고 그지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량없고 그지없는 번뇌가 여래장을 얽매었기 때문에 한량없는 번뇌장이 얽어맨 여래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게송에도 말하였다.

 

우치한 범부와 아라한과

모든 배우는 이와 큰 지혜의

그 차례가 네 종류의 번뇌이고

또는 하나이고 둘이고 다시 둘이라

 

이러한 차례대로

네 범부와 한 성인과

두 배우는 이와 두 큰 지혜를

부정한 지위라고 말하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이 아홉 가지 비유가 번뇌 없는 경계 가운데에서 이러한 차례대로의 네 가지 비유이고, 또 다섯 가지 비유이니, 후에 가서 둘둘[二二]의 모든 더러움도 이 번뇌를 의지해 더럽힌지라, 이 때문에 청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또 어떻게 이 아홉 가지 탐욕 등 번뇌가 시들어진 꽃 등 아홉 가지 비유와 서로 비슷한 상대인 줄을 알며,

 

또 어떻게 여래장이 모든 부처님 등 아홉 가지 비유와 서로 비슷한 상대인 줄을 아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부처님의 신력(神力)에 의지하기 때문에

저 뭇 미묘한 꽃들이 있어서

처음 피어날 적엔 사랑스럽고

뒤에 시들어 변하면 사랑스럽지 않는지라

 

마치 꽃들이 피고 시들음에 따라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않듯이

탐욕 등 모든 번뇌도 그리하여

처음엔 즐겁다가도 뒤엔 즐겁지 않네.

 

뭇 벌들이 꿀을 따내기 위해

진심(瞋心)으로 모은 꽃을 빠는데

진심이 일어나는 그 때엔

갖가지 고뇌를 내기 마련이며

 

[]가 속 쌀을 굳게 하기 위해

밖은 겨 껍질로 덮였는데

이와 같이 우치한 맘이 얽어매면

속의 굳은 쌀을 못 보기 마련이네.

 

마치 냄새가 더러운 똥과 같이

지혜로 탐욕을 보는 것도 그러한지라

욕심을 일으키는 모든 모양의

그 결사(結使)는 더러운 똥과 같네.

 

마치 저 땅 속에 묻힌

갖가지 값진 보배 광을

중생들은 하늘눈이 없어서

이 때문에 볼 수가 없듯이

 

이러한 자재한 지혜가

무명(無明)의 지위에 덥인 것을

중생들은 지혜 눈이 없어서

이 때문에 볼 수가 없네.

 

마치 종자가 겨 껍질을 벗어나

차례로 그 싹이 돋아나듯이

도를 보고 번뇌를 끊는 지혜도

차례로 여러 지위에서 돋아나네.

 

그 해로운 신견(身見)들로써

미묘한 성인의 도를 섭취하여

도를 닦아 번뇌를 끊는지라

이 때문에 허물어진 옷을 설함이네.

 

일곱 지위 가운데의 모든 번뇌는

마치 태장(胎藏)의 얽어맨 것 같으므로

그 태장을 아주 여읜 지혜라야

분별이 없어서 순숙(淳熟)하며

 

세 지위에서 모든 때[]를 앎은

마치 흙 모양의 바른 것 같으므로

큰 지혜의 모든 보살이라야

금강정(金剛定)의 지혜로써 끊을 수 있네.

 

시들은 꽃에서 흙 모형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아홉 가지 비유로써

탐욕ㆍ진심ㆍ우치 따위의

아홉 가지 번뇌를 나타내 보인지라

 

번뇌 가운데의 여래장(如來藏)

부처님들과 상대되는 법인

이러한 아홉 가지 뜻을

세 가지 체()로써 섭수하였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법신과 자성(自性)의 청정한 마음과 여래장 등 세 가지 진실한 체를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 등 아홉 가지 비유의 서로 비슷한 상대법이 있는 것을 말함이니, 알아두라. 세 가지 진실한 체가 무엇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법신과 진여와 여래의 성품

이 세 가지 진실한 체를

세 가지 비유와 한 가지 비유와

다섯 가지 비유로써 나타내 보였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처음 세 가지 비유로써 여래의 법신을 나타내 보였으니, 알아두라. 세 가지 비유란 이른바 모든 부처님과 아름다운 꿀과 견고한 것으로써 법신을 나타내 보임이니, 게송에 법신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한 가지 비유란, 이른바 참된 금으로써 진여를 나타내 보임이니, 게송에 진여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다섯 가지 비유란, 첫째 땅 속의 광이고, 둘째 나무이고, 셋째 금 형상이고, 넷째 전륜성왕(轉輪聖王)이고, 다섯째 보배 형상이라, 능히 세 가지 부처님 몸을 내는 것으로써 여래의 성품을 나타내 보임이니, 게송에 여래의 성품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또 법신이란 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법신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청정한 참된 법계의 몸이고

또는 저 습기에 의지한 몸이라

깊고 얕은 이치로써 설하기 때문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모든 부처님, 여래에겐 두 가지 법신이 있는 것을 밝힘이다. 그 어떤 것을 두 가지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교요한 법계의 몸이니 분별없는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부처님, 여래의 법신은 다만 속 몸[內身]의법계로부터 증득할 수 있을 뿐이니, 알아두라. 게송에 청정한 참된 법계의 몸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둘째는 저 인()을 얻기 위해서이니, 이를테면 고요한 법계가 그것이다. 법을 설하는 것은 교화할 수 있는 중생을 의지해 설하지만, 저 설하는 법은 진여의 법신을 의지해 저 설하는 법이 있는지라, 이를 습기라 함이니, 게송에 저 습기에 의지한 몸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 저 법을 설하는 것이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밀한 것이고, 둘째는 거친 것이다. 세밀한 것이란, 이른바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해 깊고 깊은 비밀의 법장(法藏)을 연설하되,

 

1 으뜸 되는 진리에 의지해 설하기 때문이요, 거친 것이란, 이른바 갖가지 수다라(修多羅)ㆍ기야(祇夜)ㆍ화가라나(和伽羅那)ㆍ가타(伽陀)와 장구(章句)의 가지가지 차별을 세속의 이치에 의지해 설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게송에 말하였다.

 

세간을 뛰어난 법으로써

세간에 비유할 것이 없는지라

이 때문에 저 성품을 의지하여

도로 저 성품의 비유를 설하건대

 

마치 아름다운 꿀이 하나 맛인 것처럼

미세한 법의 맛도 그러한데

저 수다라 등의 설한 것은

가지가지 다른 맛인 것과 같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모든 부처님과 아름다운 꿀과 견고한 것 등이 세 가지 비유라, 이것이 바로 여래 진여의 법신이 그 두 가지 뜻이 있음을 밝힘이니, 첫째는 일체 중생들을 두루 덮어주는 것이고, 둘째는 온몸 가운데 아무것도 남김없이 일체 중생의 그 여래장이 있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또 무슨 뜻이냐 하면, 중생계 가운데 어떤 중생이건 여래의 법신을 떠나서 법신 밖에 있거나, 여래의 지혜를 떠나서 지혜밖에 있는 중생이 없기 때문이니, 마치 가지가지 빛과 모양이 허공을 떠나서 있지 않는 것과 같음이다. 이 때문에 게송으로 말하였다.

 

마치 모든 빛과 모양이

허공 떠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중생들의 몸도

모든 부처님 지혜를 떠나지 않느니

 

이러한 이치이기 때문에

일체 중생들에게

다 여래장이 있는 그것이

허공 가운데의 빛과 같다고 설하며

 

그 성품이 변하지 않고

()가 본래 청정함으로써

참된 금의 변치 않음과 같은지라

이 때문에 진여의 비유를 설하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저 진여 여래의 성품과 또한 삿된 무리[私聚] 중생들 몸속의 자성 청정한 마음은 다름도 없고 차별도 없음을 밝힘이다. 그 광명이 밝아서 객()과 진()의 모든 번뇌를 여의었기 때문에 후에 여래의 법신인 이러한 것을 하나의 참된 금 비유로써 설하고,

 

진여의 차별 없음을 의지해 부처님의 법신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중생은 다 여래장이 있다고 설함이니, 자성의 청정한 마음을 비록 청정이라고 설함이니, 자성이 청정한 마음을 비록 청정이라고 말하지만, 본래 두 가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경() 가운데 부처님이 문수사리(文殊舍利)에게 말씀하시기를, “문수사리여, 여래는 여실히 자신의 근본 청정함을 알아보는 지혜가 있으니 자신의, 근본에 의지하는 지혜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의 다 청정한 몸이 있는 줄을 아느니라. 문수사리여, 이른바 여래의 자성, 청정한 몸은 이 두 가지 법이 다름도 없고 차별도 없느니라고 하셨으며, 이 때문에 게송에도 말하였다.

 

일체 중생들의

그 평등한 여래장과

진여의 청정한 법을

여래의 체()라고 이름하네.

 

이러한 뜻에 의하기 때문에

일체 중생은

다 여래장이 있다고 설하나니

응당 이렇게 알아야 하네.

 

다시 게송에 말하였다.

 

불성이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는 땅 속의 광과 같고

다른 하나는 나무의 열매와 같아서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 그러한지라.

 

자성(自性)의 청정한 마음으로

더 없는 도를 수행하되

두 가지 불성에 의지하여

세 가지 몸을 내게 되나니

 

첫째의 비유에 의지하기 때문에

첫째의 법신이 있는 줄 알고

둘째의 비유에 의지하기 때문에

둘째의 불신이 있는 줄 알라.

 

참된 부처님 법신의 청정함은

마치 참된 금 형상과 가느니

그 성품이 변하지 않음으로써

공덕을 섭수한 진실의 체이라

 

큰 법왕의 지위를 증득하심이

전륜성왕(轉輪聖王)과 같아서

거울 형상에 의지한 체이므로

화신불의 형상을 나타내시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나머지 다섯 가지 비유한 이른바 땅 속의 광과 나무의 열매와 금 형상과 전륜성왕과 보배 형상 비유로써 세 가지 부처님의 법신 내는 것을 나타내 보임이니, 자체의 성품인 여래의 성품과 모든 중생의 여래장을 의지하여

 

이 때문에 일체 중생은 다 여래장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무슨 뜻을 보임이냐 하면, 모든 부처님, 여래가 세 가지 몸이 있어서 그러한 이름의 뜻을 얻기 때문이니, 이 다섯 가지 비유가 능히 세 가지 부처님 법신의 인()을 짓는 것이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여래의 성품 인()이라고 말하나니,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가운데 성품의 뜻을 밝혀 그것으로써 인의 뜻으로 삼음이라, 이런 뜻이기 때문에 경 가운데 게송으로 말한다.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

성품은 모든 법의 의지가 되나니

성품을 의지하여 모든 도가 있고

또 열반의 과()를 증득하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의 성품이란, 경 가운데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여래장을 의지하여 모든 중생들을 설하신 것은 그 처음이 없는 과거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과 같음이며, 이른바 성품이란,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여래장은 곧 법계장(法界障)이고, 세간을 뛰어난 법신장(法身障)이고, 세간을 뛰어난 최상의 장이니, 자성이 청정한 법신장이고, 자성이 청정한 여래장이기 때문입니다고 말한 것과 같음이며, 모든 법의 의지가 되는 것이란, ‘성자승만경, “세존이시여, 이 때문에 여래장은 곧 의지하는 것이고, 주지(住持)하는 것이고, 건립(建立)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떠나지 않는 지혜와 끊이지 않고, 이탈하지 않고, 다르지 않고, 함이 없고, 부사의한 부처님의 법을 떠나지 않았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끊거나 이탈하거나 다름이 있는 외에 지혜를 떠난 함이 있는 법을 떠났으며, 역시 의지하고 가지고 주지하고 건립하는 것은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이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음이다. 성품을 의지하여 모든 도가 있는 것이란, ‘성자승만경, “세존이시여, 생사도 여래장을 의지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생사를 설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여래장을 잘 설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 말한 것과 같음이다. 또는 열반의과를 얻는 것이란,

 

성자승만경세존이시여, 여래장을 의지하기 때문에 열반을 증득하기도 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여래장이 없다면,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여 구하지 않을뿐더러 열반을 좋아하지도 않고, 열반을 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고 말한 것과 같음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여래장의 끝나는 자리와 여래의 법신은 차별이 없음을 밝힘이다. 진여의 체상(體相)이 필경 불성의 체성이어서 어느 때 어떤 중생의 몸속에서나 다 다함이 없는 것이니, 알아두라.

이것을 어떻게 법상(法相)을 의지해 아는가 하면, 이 때문에 경에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여, 이 법성(法性)과 법의 체성(體性)은 자성(自性)이 항상 머무는 지라,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든, 또는 세간에 출현하지 않든 간에 자성의 청정함은 항상 머물러 있기에 일체 중생이 다 여래장이 있느니라고 하셨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법성을 의지하거나 법체를 의지하거나 법상을 의지하는 것은 응당 법을 의지하는 방편이니, 이 법을 그와 같이 부사의한 것이라 하는가. 아니면 그와 같이 부사의하지 않는 것이라 하는가. 일체 처소에서 법을 의지하는 것은 법을 의지해 생각하고 법을 의지해 믿어서 마음의 청정함을 얻고 마음의 결정을 얻는 것이다. 저 분별할 수 없는 것을 진실이라하는가, 진실하지 않는 것이라 하는가, 다만 여래를 의지하여 믿을 뿐이니, 이 때문에 게송에 말한다.

 

다만 여래를 의지해 믿고

1의 이치를 믿을 뿐이니

마치 눈에 없는 자로선

태양의 바퀴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일체 중생계 가운데, 네 가지 중생이 있는 것을 대략 설함이니, 여래장을 모르는 자는 마치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과 같음이다. 어떤 것을 네 가지 중생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범부이고, 둘재는 성문(聲聞)이고, 셋째는 벽지불(辟支佛)이고, 넷째는 처음 보리심(菩提心)을 내는 보살이라,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 가운데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신견(身見)의 중생들에겐 그 경계가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네 가지 뒤바뀜[四顚倒]을 취하는 중생에게도 그 경계가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살날한 마음으로 ()을 잃은 중생에게도 그 경계가 아니옵니다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신견(身見)의 중생이란, 모든 범부를 말하는 것이니, 저 범부들은 실상 빛 등 다섯 가지 쌓임[五陰]의 모든 법이 없는데도, 그것을 취해 []라든가 내 것[我所]이라고 생각함으로써 허망하게 내 것에 집착하여 교만하는지라, 신견 등을 떠난 자로서 다 사라짐의 진리[滅諦]와 번뇌 없는 성품[無漏性]과 감로의 법[甘露法]을 믿지 못하거늘, 하물며 세간을 뛰어난 일체 지혜의 경계 여래장을 증득하거나 깨달을 수 있겠는가. 이럴 이치가 없을 것이다.

또 네 가지 뒤바뀜을 취하는 중생이란, 이른바 성문과 벽지불 사람이니, 저 성문ㆍ벽지불들로서는 응당 여래장을 수행하는 것이 상()이겠거늘 여래장을 수행하지 않는 그것을 상()이라 하고 뒤바뀐 생각으로 일체 법의 무상(無常)한 것을 취해 여래장의 무상함을 수행하여 그 무상의 수행을 즐겨하니,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모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응당 여래장을 수행하는 것이 낙()이라 하고 뒤바뀐 생각으로 일체 법의 다 괴로운 것을 취해 여래장의 괴로움의 수행을 즐겨하니 알지 모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응당 여래장을 수행하는 것이 아()이겠거늘 여래장을 수행하지 않는 그것을 아()라 하고 뒤바뀐 생각으로 일체 법의 무아(無我)인 것을 취해 여래장의무아를 수행하여 그 무아의 수행을 즐겨하니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응당 여래장을 수행하는 것이 정()이라 하고, 뒤바뀐 생각으로 일체 법의 부정(不淨)한 것을 취해 여래장의 부정함을 수행하여 그 부정의 수행을 즐겨하니,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응당 여래장을 수행하는 것이 아()이겠거늘 여래장을 수행하지 않는 그것을 아()라 하고 뒤바뀐 생각으로 일체 법의 무아(無我)인 것을 취해 여래장의 무아를 수행하여 그 무아의 수행을 즐겨하니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응당 여래장을 수행하는 것이 정()이겠거늘 여래장을 수행하지 않는 그것을 정()이라 하고, 뒤바뀐 생각으로 일체 법의 부정(不淨)한 것을 취해 여래장의 부정함을 수행하여 그 부정의 수행을 즐겨하니,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은 성문ㆍ벽지불들로선 여실히 법신에 수순하여 수행할 수 없으니,

 

이런 뜻이기 때문에 제1의 저 언덕[彼岸]인 상()ㆍ낙()ㆍ아()ㆍ정()의 법은 저 성문ㆍ벽지불들의 알 바 경계가 아니며, 이와 같이 그들은 뒤바뀐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와 부정 등을 즐겨하니, 저 여래장은 그들의 경계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대반열반수다라(大般涅槃修多羅) 가운데 못물[池水]의 비유로써 이 뜻을 널리 밝혔으니 알아두라.

저 경 가운데 말씀하시기를, “가섭(迦葉)이여, 마치 봄철에 어떤 여러 사람들끼리 큰 못에 들어가 목욕을 하면서 배[]를 타고 유희하다가 잘못해 유리(琉璃)보배를 그 깊은 물속에 빠뜨렸다. 이 때 여러 사람들이 모두 물에 들어가 이 보배를 찾아내기 위해 서로가 다퉈가면서 기와ㆍ돌ㆍ풀ㆍ나무ㆍ모래ㆍ자갈 등을 잡고는 각각 제 나름대로 유리구슬을 찾은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기뻐서 가지고 나와 곧 그것이 진짜가 아닌 줄을 아는가 하면, 이 때 그 보배 구슬은 그대로 물속에 있고 구슬의 힘 때문에 물이 다 맑고도 잠잠한지라, 이에 대중들이 비로소 보배 구슬이 그대로 물속에 있어서 마치 허공의 달 모양을 우러러 보는 것과 같음을 보고, 이 때 그 대중가운데의 한 슬기로운 사람이 방편의 힘으로써 조용히 물에 들어가 곧 구슬을 꺼내는 것과 같느니라. 너희들 비구도 그와 같이 무상한 생각과 괴로움의 생각과 무아의 생각과 부정의 생각 등을 수집(修集)하여 지실이라고 하지 말지니, 그것은 저 여러 사람들이 각각 기와ㆍ돌ㆍ풀ㆍ나무ㆍ모래ㆍ자갈을 가지고서 보배 구슬이라 하는 것과 같음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응당 방편을 잘 배워서 있는 곳마다 항상 상()ㆍ낙()ㆍ아()ㆍ정()의 생각을 닦아야 하리라. 다시 알아둘지니, 먼저 네 가지 법의 모양을 수집하는 것은 다 뒤바뀜이다. 참된 보배를 얻고자 모든 생각을 닦는 이라면, 저 슬기로운 사람이 보배구슬을 교묘하게 찾아내는 것처럼 해야 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상ㆍ낙ㆍ아ㆍ정의 생각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또 산란한 마음으로 을 잃은 중생이란, 이른바 처음 발심한 보살로서 한 여래장의 이치를 여읜 것이니, 잃어버리고 변하고

 

무너지는 물질로써 수행하는 것을 공해탈문(空解脫門)이라고 한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 발심한 보살은 마음을 내기를, ‘사실 법이 끊어지고 사라짐이 있는지라 뒤 때에 열반을 얻으리라고 하나니, 이러한 보살은 한 여래장의 수행을 잃은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을 어떤 물건인 것처럼 생각하여 나는 마땅히 을 얻으라고 하거나, 또는 마음을 내기를, ‘물질 따위 법을 떠나서 별도로 다시 이 있으니, 나는 마땅히 수행하여 저 을 얻게 하리라고 한다면, 저 사람은 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법이기에 그것이 여래장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하지 않은 여래장이란

더 없는 불법을 말하는 것이니

서로가 버리거나 떠나는 모양이 아니고

한 가지법도 늘거나 주는 것이 아니네.

 

여래는 함이 없는 몸이어서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한지라

()ㆍ진()의 허망이 더럽히지만

본래의 자성은 할 뿐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한 가지 법도 줄지 않는 것이란 줄지 않는 번뇌가 그것이고, 한 가지 법도 늘지 않는 것이란, 진여의 성품 가운데 한 가지 법도 늘지 않음이 그것이다.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 것이란, 청정한 체()이기 때문이니, 게송에 서로가 버리거나 떠나는 모양이 아니고 한 가지 법도 늘거나 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두 가지 여래장의 한 지혜가 있으니, 세존이시여, 한 여래장이 만약에 떠나거나 벗어나거나 달라진다면, 일체 번뇌장(煩惱障)이겠나이다. 세존이시여, 하지 않은 여래장 항하사보다 지나는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것은 부사의한 불법이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떤 번뇌로써 어떤 곳에 없는가를 이렇게 여실히 보고 아는 것을 한 지혜라 한다. 또 어떤 모든 불법이 어떤 곳에 구족해 있는가를 이렇게 여실히 보고 아는 것을 하지 않은 지혜라 하나니, 이와 같이 분명히 있고 없는 두 극단을 떠나야만 여실히 그 한 모양을 아는 것이다. 이 두 게송 가운데 이러한 뜻을 밝힘이다.

또 중생으로써 만약 이같이 한 지혜를 떠난다면, 저 사람은 곧

 

부처님 경계의 바깥이어서 부처님 경계와 상응(相應)하지 않아 결정을 얻지도 못하고 전일한 마음을 얻지도 못하는지라, 이런 뜻이기 때문에 산란한 마음으로 을 잃은 중생이라고 이르는 것이니, 왜냐하면 제1의 이치를 떠남으로써 한 지혜의문과 분별없는 경계를 얻어 증()할 수도 없고 얻어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자승만경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여래장의 지혜를 이름하여 한 지혜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의 한 지혜는 일체 성문ㆍ벽지불들의 본래 보지 못하고, 본래 얻지 못하고, 본래 증하지 못하고, 본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일체 괴로움의 짐은 부처님만이 증할 수 있으니, 일체 번뇌장을 무너뜨리고 일체 괴로움을 없애는 도를 닦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 여래장은 곧 법계장(法界藏)이기 때문에 신견(身見) 등 중생으로선 얻어 볼 수 없는지라, 이미 신견의 모양을 설한 것은 그 대치(對治)할 진실한 법계가 현전(現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이 세간을 뛰어난 법신의 여래장은 뒤바뀐 중생들의 경계가 아닌지라 이미 무상(無常) 등 세간의 법을 설한 것은 그 대치할 세간을 떠난 법계가 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이 자성이 청정한 법계의 여래장은 산란한 마음으로 을 잃은 중생들의 경계가 아닌지라, 이미 번뇌의 때[] ()ㆍ진()의 더럽힘을 설한 것은 그 한 자성과 청정한 공덕의 법이 서로 버리거나 떠나지 않음으로써 세간을 뛰어난 법신이란,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또 한 가지 맛과 평등한 맛인 법계의 차별 없는 지혜 문에 의지하여 세간을 뛰어난 자성의 청정한 법신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을 이르되, 여실히 진여를 보고 아는 것이라 하나니, 이 때문에 경에 설하기를, “십주(十住)보살로서도 조금 여래장을 볼 수 있을 뿐이거늘, 어찌 하물며 범부나 이승(二乘)들 사람이겠느냐고 하였고, 이 때문에 게송에도 말하였다.

 

 

마치 엷은 구름 가운데의

허공에 있는 해[]를 보듯

청정한 지혜의 모든 성인들이

부처님을 보는 것도 그러한데

 

성문과 벽지불은

눈 없는 자와 같아서

여래를 볼 수 없음이

마치 해를 못 보는 소경이네.

 

아는 바 일체법이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허공계와 법계에 두루한 것을

한량없는 지혜로써 볼 수 있나니

 

모든 여래의 법신이

일체 곳에 가득 찬 것을

부처님 지혜만이, 볼 수 있음은

그 한량없는 지혜이기 때문이네.

 

 

7. 위하의성품(爲何義說品)

 

진여이고 불성인 여래장의 뜻이 장애 없는 구경(究竟)의 보살 지위에 머무는 보살의 제1성인으로서도 역시 그 경계가 아니라면, 이것은 일체 지혜의경계이기 때문이리니, 만약에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어리석고 뒤바뀐 범부들을 위해 이러한 것을 설합니까?

바로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대략 네 게송을 설한 것이다.

 

곳곳의 경 가운데에

안팎의 일체 함을 설하되

함이 있는 법은 구름과 같고

또 꿈과 눈흘림 같다고 했는데

 

여기엔 무엇 때문에

일체 모든 중생들의

다 여래성품이 있는 것은 설하고

그 공적(空寂)한 것을 설하지 않는가라고 하지만

 

겁약(怯弱)한 마음이 있거나

모든 중생을 경만(輕慢)하거나

허망한 법에 집착하여

진여의 불성을 비방하며

 

자신에 신아(神我)가 있음을 계교함으로

이러한 중생들로 하여금

다섯 가지 허물을 아주 여의게 하기 위해

이 때문에 그 불성이 있음을 설한 것이네.

 

이 네 구절의 게송을 열 한 구절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여러 수다라(修多羅) 가운데

함이 있는 법을 설한 것은

이를테면 번뇌와 업 등이

구름 따위처럼 허망하다는 것이니

 

번뇌는 마치 구름과 같고

업을 지음은 꿈과 같고

눈흘림 같은 쌓임도 그러함은

번뇌와 업이 나기 때문이네.

 

먼저 이미 이렇게 설했지만

이 구경(究竟)의 논 가운데엔

다섯 쌓임을 여의게 하기 위해

진여의 불성이 있음을 설한 것이라.

 

 

중생들이 듣지 못함으로써

보리심(菩提心)을 내지 않거나

혹은 겁약한 마음이 있어서

자신의 모든 허물을 속이고

 

또는 보리심을 내지 못함으로써

속이고 난 체하는 뜻을 일으켜

보리심 낸 사람을 보고는

내가 저 보살보다 낫다고 하나니

 

이와 같이 교만한 사람은

바른 지혜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

이 때문에 허망함을 잡을 뿐

정작 여실한 법은 알지 못하며

 

허망하게 중생들의 허물을 잡음으로서

()ㆍ진()의 더럽힌 마음에

실로 저의 모든 허물이 없고

자성의 청정한 공덕인 줄 알지 못하면서

 

허망한 허물을 잡음으로써

여실한 공덕을 알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자타의 평등한

그 자비심을 낼 수 없네.

 

저 진여의 불성을 듣고

큰 용맹의 힘을 일으키거나

또는 지혜와 대비이신

세존에게 공경을 다한다면

 

다섯 가지 법을 늘여 내어

그 평등에 물러나지 않음으로써

일체의 허물은 다 없어지고

오직 모든 공덕만이 있으리니

 

일체 중생 보기를

더 나의 몸과 다름없게 여기어야

더없는 부처님의 보리를

빨리 성취할 수 있을 것이네.

 

 

8. 신전청정성보리품(身轉淸淨成菩提品)

 

이미 때[]있는 진여를 설하였고, 여기서부터는 때 없는 진여를 설함이니, 알아두라. 때 없는 진여란, 이를테면 모든 부처님ㆍ여래가 번뇌 없는 법계 가운데에서 일체 갖가지 모든 때를 아주 여의고 잡된 더러운 몸을 바꿔 청정한 몸을 얻는 것이다. 여덟 글귀의 뜻에 의지하여 대략 저 진여의성품인 번뇌 없는 법신을 차별해 설하겠으니, 알아두라. 그 여덟 가지가 무엇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청정하게 얻음과 멀리 여의는 것과

자타의 이익에 상응(相應)하는 것과

깊고 쾌하고 큰 것에 의지함인

시간[]과 수효[]가 저 법과 같음이네.

 

이것이 이른바 여덟 글귀의 뜻이니, 차례대로 한 게송으로써 여덟 가지 뜻을 나타내 보이겠다. 어떤 것이 여덟 가지냐 하면, 첫째는 진실한 체[實體]이고, 둘째는 인()이고, 셋째는 과()이고, 넷째는 업이고, 다섯째는 상응하는 것, 여섯째는 행()이고, 일곱째는 항상한 것이고, 여덟째는 부사의한 것이다. 진실한 체이란, 앞서 여래장이

 

번뇌장의 얽매임을 떠나지 않는 것을 설하였는데, 그 모든 번뇌를 아주 떠남으로써 몸을 바꿔 청정함을 얻는 이것을 진실한 체라 하나니, 알아두라. 게송에 이른바 청정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만약에 한량없는 번뇌장이 여래장을 얽어맨 것에 의혹하지 않는이라면 그는 한량없는 번뇌장을 벗어난 법신에도 역시 의혹이 없겠나이다고 하였다. ()에는 두 가지 분별없는 지혜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을 뛰어난 분별없는 지혜이고, 둘째는 세간을 뛰어난 지혜를 의지하여 세간에 의지해 행하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이것을 인()이라 하나니, 게송에 이른바 얻음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 곧 이 얻음을 의지하여 지혜의 과()를 얻어 증()하는 이것을 과()라 하나니, 게송에 이른바 멀리 여읨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업이란, 두 가지 멀리 여의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번뇌의 장애를 멀리 여의는 것이고, 둘째는 지혜의 장애를 멀리 여의는 것이다. 이러한 차례이기 때문에 멀리 여의는 것이라 하고, 이같이 멀리 여의는 것이 곧 스스로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성취하기에 이것을 업이라 하나니, 게송에 이른바 자타의 이익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상응(相應)하는 것이란, 스스로가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그것이 한량없는 공덕을 얻어서 항상 끝까지 주지(住持)하기에 이것을 상응이라 하나니, 게송에 이른바 상응이란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여섯째의 행과 일곱째의 항상함과 여덟째의 부사의한 것이란, 이를테면 세 가지 부처님의 법신이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항상 쉬지 않으신 그것이 부사의한 것이니, 게송에 깊고 쾌하고 큰 데에 의지함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대략 게송에 말하였다.

 

진실한 체와 인()ㆍ과()

업과 또는 상응하는 것과

행과 항상함과 부사의한 것을

부처님 지위라 하나니 알아두라.

 

또 진실한 체에 의지하고 인()에 의지하여 부처님 지위 가운데에서 저 방편의 인을 얻는지라. 이 때문에 세 게송을 설한 것이다.

 

앞서 부처님의 법신인

그 자성의 청정한 체가

모든 번뇌의 때와

 

()ㆍ진()의 더럽힘이 되는 것을 설했으니

 

마치 가운데의

때를 여읜 청정한 해와 달이

저 두텁고 빽빽한 구름의

그물에 덮인 것과 같음이라.

 

부처님의 공덕은 때가 없고

항상하고 또 변하지 않고

모든 법을 분별하지 않으시어

번뇌 없는 참된 지혜를 얻으셨네.

 

이 세 구절의 게송을 네 구절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부처님의 몸이

청정한 참된 묘법을 떠나지 않음은

마치 허공의 해와 달 같아서

그 지혜가 더러움을 떠남이 둘이 아니니

 

항하사를 지난 부처님 법의

밝고 깨끗한 모든 공덕은

조작하는 법의 상응이 아니고

저 진실한 체를 떠나지 아니하네.

 

번뇌의 장애와 지혜의 장애인

저 법은 사실 체가 없어서

항상 객ㆍ진의 더럽힘이 됨으로

이 때문에 구름의 비유를 설함이라.

 

저 두 가지 인()을 아주 떠나

가지 분별없음을 향하여

분별없는 참된 지혜를

저 과()에 의지해 얻는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앞서 몸을 바꾼 진실한 체의 청정함을 설하였는데, 또 청정이란 것이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그 두 가지란, 첫째 자성의 청정한 것이고, 둘째 때를 여읜 청정한 것이다. 자성의 청정함이란 이를테면 자성의 해탈이 버리거나 여의는 것이 없음이니, 저 자성인 청정한 마음의 체가 일체 객ㆍ진 번뇌를 버리지 않는 것은 그것이 본래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를 여읜 청정함이란, 이를테면 해탈을 얻는 것이고, 또 저 해탈이 일체 법을 여의지 않는 그것이 마치 물이 모든 먼지와 때를 여의지 않음으로써 청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성의 청정한 마음도 모든 객ㆍ진과 모든 번뇌의 때를 아주 여읨으로써 다시 남음이 없기 때문이다. 또 저 과()를 의지해 때를 여의어 청정함이니, 이 때문에 네 게송을 설한 것이다.

 

마치 청정한 못[]물이

조금도 더러운 티가 없는데다가

가지가지 꽃나무들이

그 주위를 항상 둘러싼 것과 같고

 

또 라후(羅睺)를 여읜 달과

구름의 가림을 여읜 햇빛과 같이

때 없는 공덕을 갖추어서

나타나시는 그것이 곧 저 몸이라.

 

벌의 맛 좋은 꿀과

 

견실하고 청정한 진금(眞金)

보배 광과 큰 과일 나무와

때가 없는 저 진금의 형상이고

 

또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몸과

미묘한 보배 여래의 형상인

이러한 등등의 모든 법이

바로 여래의 몸이시네.

 

이 네 줄의 게송을 여덟 줄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탐욕 등 객()번뇌는

마치 흐린 물의 먼지와 같고

분별없는 훌륭한 지혜의

그 과()법은 못물과 같으매라.

 

부처님 법신의

일체 공덕을 나타내되

저 지혜를 증한 과()에 의지하여

이 때문에 이렇게 설한 것이네.

 

탐욕이 흐린 물의 먼지와 같아서

청정한 법은 먼지에 섞어 더럽히고

교화해야 할 모든 중생은

마치 못을 둘러싼 연꽃 같은지라.

 

선정의 습기로 스며들어서

진심[]의 덮임을 멀리 여의고

대자대비한 마음의 물로써

모든 중생을 두루 이익케 하시며

 

마치 저 보름달이

구름이 덮인 그물을 멀리 여의고

그 광명이 중생들에 비추어서

능히 모든 어두움을 제거하듯

 

부처님의 때 없는 해와 달도

어리석은 구름의 실 그물을 여의고

지혜 광명이 중생들에 비추어서

모든 캄캄한 어두움을 제거하시며

 

견줄 이 없으면서 같은 법을 얻어

능히 미묘한 법 맛을 내시니

모든 부처님은 꿀처럼 굳어서

벌 찌꺼기의 장애를 멀리 여의시네.

 

진실 미묘한 공덕이

능히 모든 빈궁을 끊고

능히 해탈의 세력을 주시니

이 때문에 금과 나무의 비유를 설한 것이며

 

법 보배의 진실한 몸이

더 훌륭한 양족존(兩足尊)

거룩한 빛을 필경 성취하시니

이 때문에 뒤의 세 비유를 설한 것이네.

 

또 앞서 두 가지 지혜가 스스로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업에 의지하는 것을 설하였으니, 그 두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세간을 뛰어난 분별없는 지혜이고, 둘째는 세간을 뛰어난 분별없는 지혜에 의지하여 몸을 바꿔 몸을 얻는 것이니, 그 수행의 인()이 번뇌를 멀리 여의고서지혜의 과()를 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스스로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란, 해탈을 얻어 번뇌의 장애를 멀리 여의고, 지혜의 장애까지를 멀리 여의고서장애 없는 청정한 법신을 얻음이니, 이른바 스스로의 이익을 성취함이다. 남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란,

 

이미 자신의 이익을 성취한 후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 자연 저 두 가지 법신을 의지하여 세간의 자재한 힘과 행을 나타냄이니, 이것이 이른바 남의이익을 성취함이다. 또 스스로가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에 의지하여 업을 성취하나니 이런 뜻으로 네 게송을 설한 것이다.

 

샘이 없고 두루 이르러서

없어지지 않는 법을 더불어 항상하고

정량하여 변하거나 다르지 않아서

그 적정(寂靜)한 곳을 물러나지 않으신지라

 

모든 부처님 여래의 몸은

허공의 모양 없는 것과 같으시면서도

모든 수승한 지혜를 갖춘 이를 위하여

여섯 감관의 경계를 지으시나니

 

미묘한 빛을 나타내어 보이기도 하고

미묘한 음성을 내어 듣기기도 하고

부처님의 계향(戒香)을 맡게 하고

부처님의 묘법 맛을 주시며

 

삼매의 감촉을 깨닫게 하기도 하고

깊고 묘한 법을 알아서

자세히 번뇌의 숲을 생각하게 하기도 하되

부처님은 허공의 모양까지를 여의셨네.

 

이 네 줄의 게송을 여덟 줄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략 두 가지 법을 설하건대

업과 지혜가 그것인 줄 알지니

만족한 해탈의 몸이고

청정한 참된 법의 몸이라.

 

해탈의 몸과 법의 몸이

둘이고 또 하나인 줄 알지니

이를테면 샘이 없고 두루 이르고

마지막 함이 없는 몸이기 때문이네.

 

번뇌가 다 되어 샘이 없음은

모든 습기를 멸했기 때문이고

거리낌이 없고 장애가 없음은

지혜의 두루 이르는 것인 줄 알지며

 

함이 없음은 멸하지 않고

진실한 체는 허물이 없고

허물이 없는 그것을 근본이라 하나니

이것이 항상이란 글귀의 해석이라.

 

이 항상이란 글귀들에 상대되는

네 가지 허물이 있는 것을 알지니

죽음과 무상과 전환하는 것과

헤아릴 수 없는 물러남이 그것이네.

 

죽음이 없기 때문에 항상하고

항상하기 때문에 청량(淸凉)하고

전환하지 않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고요하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나니

 

저 구경(究竟)의 발자취와

청정한 지혜며 깨끗한 법의 체와

구족한 빛ㆍ소리 등등으로

모든 감관을 나타내 보이시는지라.

 

허공이 모양이 없으면서도

그 빛 등의 모양을 나타내듯

법신도 역시 그러하여

여섯 감관의 경제를 구족하셨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경 가운데 설하기를, “허공의 모양처럼

 

모든 부처님도 그러하시다고 하였다. 이는 제1의 이치에 의지한 모든 부처님 여래 청정하신 법신의 그 자체 모양이 공동하지 않은 법에 의하기 때문에 이는 같이 설한 것이다. 또 이런 뜻이기 때문에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에 문답하기를, “수보리(須菩提), 네 생각엔 어떠하냐, 서른두 가지 대인의 모습을 성취함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는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뜻을 해석하는 대로는, 대인의 모습을 성취함으로 해서 여래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겠나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렇고 그러하니라. 수보리여, 모습을 성취한다 해서 여래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라. 만약에 모습을 성취함으로 해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轉輪聖王)도 응당 여래이어야 하리니, 이 때문에 모습을 성취한다 해서 여래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하면, 여래의 제1 이치에 의지한 청정하신 법신이기에 이런 뜻을 밝힌 것이다. 도 상응하는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허공처럼 부사의하사

항상하고 또 청량하고

변하지 않고 고요하사

모든 분별을 두루 여의시며

 

일체 곳에 집착하지 않으사

거리끼고 거친 감촉을 여의시니

역시 보고서 잡을 수 없는 것이

부처님의 청정한 마음 때 없는 것이네.

 

이 두 줄의 게송을 여덟 줄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해탈의 몸과 법의 몸이

역시 스스로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나니

스스로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함에 의지하는 것이

저 곳에 상응(相應)하는 이치이네.

 

일체 모든 공덕은

부사의한 것인 줄 알고

세 가지 지혜의 경계가 아님으로써

일체 갖가지의 지혜인 줄 알라.

 

모든 중생은 부처님의 체이어서

미세하기 때문에 듣고 얻는 경계가 아니고

1의 이치이기에 생각해 얻는 지혜도 아니니

이것이 곧 세간을 뛰어난 깊은 비밀이네.

 

세간의 닦는 지혜로선 알지 못하나니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은

본래 일찍 볼 수 없어서

빛을 못 보는 소경과 가고

 

이승(二乘)은 마치 어린 아이가

해ㆍ달의 바퀴를 못 보는 것과 같나니

나지 않기 때문에 항상하고

멸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그대로이며

 

둘을 여의기 때문에 청량하고

 

법 성품으로 머물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을 증하기 때문에 고요하고

일체를 깨닫기 때문에 두루하며

 

머물지 않아서 분별하지 않고

번뇌를 여의어서 집착하지 않고

지혜의 장애가 없어서 어두움을 여의고

부드러워서 거친 것을 여의며

 

빛이 없어서 볼 수가 없고

모양을 여의어서 잡을 수가 없고

자성(自性)이기 때문에 청정하고

더럽힘을 여의기 때문에 때가 없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허공의 비유로써 모든 부처님 여래의 그 함이 없는 모든 공덕이 부처님의 법신을 떠나지 않는 것을 밝힘이니, 모든 세계 마다 헤아릴 수 없는 수승한 큰 방편의 업과 수승한 대비(大悲)의 업과 수승한 큰 지혜의 업을 얻어서 일체 중생들에게 즐거운 모양을 주기 위한 그 때 없는 청정한 세 가지 부처님의 몸이다. 이른바 진실한 부처님과 법의 즐거움을 수용하는 부처님과 또는 화신(化身)의 부처님이 항상 쉬지 않고 항상 끊이지 않은 채 자연히 수행하여 일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니, 알아두라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오직 부처님, 여래의 법신만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이 몸에 의지함으로써 모든 행의 차별에 상응하는지라, 이 때문에 여덟 게송을 설한 것이다.

 

처음이 아니고 중간도 뒤도 아니어서

파괴하지 않고 다르지도 않고

세 세계[三界]를 아주 떠나서

때가 없고 분별이 없는지라

 

이 깊고 깊은 경계는

이승(二乘)들의 알 바가 아니니

수승한 삼매의 지혜를 갖춘

이러한 사람이라야 볼 수 있으며

 

항하사[恒沙]보다 더 지나친

그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오직 여래만이 성취하셨으므로

다른 어떤 사람과도 공동하지 않으시네.

 

여래의 묘한 형상 몸[色身]

청정하여 때가 없는 체이어서

그 모든 번뇌란 번뇌와

일체의 습기를 아주 여의시고

 

갖가지 수승한 묘법의

그 광명으로 몸을 삼아서

중생들을 해탈케 하기 위해

항상 쉴 사이가 없으시네.

 

하시는 일의 부사의함이

마니 보배[摩尼寶]와 같아서

능히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는

저 몸은 진실한 몸이 아니시고

 

세간을 위해 법을 설하사

고요한 곳을 나타내 보임은

교화하여 순숙(純熟)하게 하기도 하고

 

수기(授記)하며 도에 들게 하기도 하시네.

 

여래는 거울 형상의 몸이시되

본체(本體)를 떠나지는 아니하시니

마치 일체의 빛이란 빛이

허공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네.

 

이 여덟 줄의 게송을 스물다섯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앞서 설한 바 부처님의 법신과

일체 갖가지의 지혜와

자재함과 열반과

1의 이치인 진리와

 

또는 헤아릴 수 없는 법과

응공(應供) 등등의 공덕은

자신이 안으로 증할 뿐이니

응당 이와 같이 알아야 할지라.

 

저 세 가지 몸의 차별은

법신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

이른바 깊고 쾌하고 큰

한량없는 공덕의 몸이 그것이고

 

그 중에도 진실한 체의 몸을 밝힘은

모든 부처님의 법신을 말한 것이니

대략 설하자면 다섯 가지 모양과

다섯 가지 공덕이 그것인 줄 알라.

 

함이 없고 차별이 없어서

두 가지 치우침을 아주 여의고

번뇌의 장애와 지혜의 장애와

또는 삼매의 장애를 벗어나셨네.

 

일체의 때를 여의었으므로

이 때문에 성인의 경계이니

청정한 광명 비춤이

곧 법성[法性]으로써 그러한지라.

 

한량없는 아승지(阿僧祗)

그 셈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견줄 이 없는 모든 공덕으로써

1의 저 언덕[彼岸]에 도달하셨네.

 

진실한 법신의 상응(相應)

그 쾌함을 셈할 수 없으므로

생각하는 경계가 아니고

또 습기를 아주 여의었으며

 

그지없는 모든 불법은

차례차례 보신(報身)을 떠나지 않으므로

가지가지 법 맛을 수용하되

모든 묘한 빛을 나타내 보이며

 

청정한 자비(慈悲)의 습기는

허망한 분별이 없으므로

모든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해

자연 휴식(休息)하는 일이 없네.

 

마치 여의 보배 구슬[如意寶珠]

중생들의 마음을 만족케 하듯

즐거움을 주는 부처님으로서도

그와 같이 신통의 힘이 자재하신지라

 

이 자재한 신통의 힘을

대략 다섯 가지로 설하겠으니

법을 설함과 볼 수 있음과

모든 업을 휴식하지 않음과

 

또는 휴식하고 은몰(隱沒)함과

진실하지 않은 몸을 나타내는

이러한 것을 요약해 말하되

다섯 가지 자재한 힘이라 하네.

 

마치 마니 보배 구슬[摩尼寶珠]

가지가지 모든 빛을 의지하듯

본생(本生)과 다른 모든 모양은

일체가 다 진실하지 않는지라

 

여래도 역시 이와 같이

방편의 힘으로 나타내 보이시기에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내려와서

차례로 모태여 들어가 태어나고

 

 

모든 기예를 배워 익혀

어린 아이로서 왕궁에 들어갔다가

모든 욕심의 모양을 싫어 여의고

출가(出家)하여 고행을 행하며

 

모든 외도들을 찾아 묻고는

보리의 도량에 나아가서

마군의 무리를 항복 받고

큰 묘각(妙覺)의 높은 이를 이룩하시매랴.

 

더 없는 법 바퀴를 굴리고

남음이 없는 열반에 드시어

청정하지 않은 국토에서

이러한 일들을 나타내시되

 

세간에서 휴식하실 사이 없이

그 무상(無常)과 괴로움과

무아(無我)와 적정(寂靜)

방편의 지혜 힘을 펼쳐 설하사

 

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세 세계의 괴로움을 싫어 여의게 하고

그 뒤엔 열반에 드시어

적정(寂靜)한 도에 들어가시네.

 

그런데도 성문(聲聞)사람들은

이 허망한 모양이 있으므로 해서

내가 열반과 법화(法華)

모든 경전을 얻었다고 말하는지라.

 

그들에게 다 여실한 법을 설하사

지혜의 방편으로 거둬 주시되

과거의 허망하던 마음을 돌려서

최상의 승()에 순숙하게 하시고

 

묘한 보리기(菩提記)를 수여하되

미세하고도 큰 세력으로써

저 어리석은 중생들로 하여금

험란한 나쁜 길을 벗어나게 하시며

 

다시 깊고 쾌하고 큰 것을

차례로 설하시나니 알아두라

첫째는 법 몸의 여래이시고

둘째는 형상 몸의 부처님이시라.

 

마치 허공 가운데에

일체의 형상 몸이 있듯이

처음 부처님의 몸에서나

최후 부처님의 몸에서도 역시 그러하네.

 

여기서부터 아래는 곧 이러한 세 가지 부처님 몸을 의지하여 중생들을 즐겁게 하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대략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세존의 체는 항상 머무사

한량없는 인()을 닦음으로써

중생계(衆生界)가 다하지 않는 한

자비하신 마음으로 뜻대로 하시며

 

지혜는 상응(相應)함을 성취하사

법 가운데 자재함을 얻음으로써

모든 마군을 항복 받으시나니

그 체가 고요하기 때문에 항상하네.

 

이 두 줄의 게송을 여섯 줄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몸뚱이와 목숨과 재물을 버리고

모든 불법을 섭취(攝取)하사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필경 본래의 원을 원만케 하시는지라.

 

청정한 부처님 몸을 얻고는

대자대비하신 마음을 일으켜

네 가지 뜻대로[四如意]를 수행하사

저 힘을 의지해 세상에 머무시네.

 

미묘한 지혜를 성취함으로써

 

열반이 있다는 그 마음을 여의고

항상 마음의 삼매를 얻으사

즐거움의 상응함을 성취하시며

>

항상 세간에 계시면서도

세간의 법에 더럽히지 않고

청정한 감로(甘露)의 곳을 얻기에

이 때문에 일체 마군을 여의시네.

 

모든 부처님이 본래 생멸하지 않음을

그 본래부터가 적정(寂靜)하기 때문이고

언제 누구이건 귀의할 수 있으므로

이 때문에 나에게 귀의하라고 말씀하심이라.

 

처음의 일곱 가지 비유는

여래의 형상 몸의 항상한 것이고

뒤의 세 가지 비유는

선서(善逝)의 법 몸의 항상한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법 몸을 의지해 나아가선 더없는 몸을 얻어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알아두라. 그 헤아릴 수 없음을 의지해 이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말로써 설할 것이 아니고

1의 이치 진리에 해당하며

모든 각()ㆍ관()의 자리를 떠났으므로

비유로써 설할 수도 없는지라

 

최상의 수승 미묘한 법은

열반이 있다는 것을 취하지 않나니

이는 삼승(三乘)들의 알 바가 아니고

부처님만이 아시는 경계이네.

 

이 두 줄의 게송을 다섯 줄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란

언어(言語)의 모양을 떠났기 때문이고

언어의 모양을 떠난 것은

1의 이치에 해당하기 때문이며

 

1의 이치에 해당하는 것은

사량(思量)하는 경계가 아니고

사량하는 경계가 아님은

비유로써 아는 것이 아니며

 

비유로써 아는 것이 아님은

가장 수승하여 위없는 것이고

가장 수승하여 위없는 것은

열반이 있음을 취하지 않으며

 

또한 공덕과 과실(過失)

이 두 가지를 취하지도 않나니

앞서 다섯 가지 비유가

바로 그 미세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고

 

여래의 법신이 항상함이란

그 다음 여섯째의 비유한 것이니

법신이 자재함을 얻기 때문에

여래의 형상 몸도 항상하기 마련이네.

 

9. 여래공덕품(如來功德品)

 

이미 때[]가 없는 진여의 법신을 설하였고, 다음엔 저 때 없는 진여의 법신을 의지한 일체 공덕을 설하겠으니, 마치 마니 보배[摩尼寶]가 그 광명과 형색(形色)의 모든 모양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여래의 법신 한량업고 그지없는

 

그 자성의 청정한 때 없는 공덕도 그러한지라, 이런 뜻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공덕에 의지하여 다음의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스스로가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그것이 제1의 이치 진리의 몸이니

1의 이치 진리 몸을 의지하여

이 세간의 진리 몸이 있는 것이라

 

그 과()가 모든 것을 여읜 순숙(淳熟)한 가운데에

예순네 가지 갖가지 법과

모든 공덕의 차별이 구족해 있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먼저 자신을 성취하되

모든 불법을 주지(住持)하여야

1의 법신을 섭취하여

남을 위해 주지할 수 있네.

 

모든 여래 세존이시기에

세간의 진리 몸이 있나니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은

처음 부처님 몸의 섭취하는 것이고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대장부(大丈夫)의 모습 등

저 법의 즐거움을 수용한 보신(報身)

두 번째 부처님 몸의 섭취하는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열 가지 힘 등 예순 네 가지 부처님 몸의 공덕을 밝힘이다. 어떻게 아는가 하면, 바로 저 뜻을 의지해 아느니, 이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부처님의 힘은 금강저(金剛杵)이어서

지혜 없는 자의 장애를 부수되

여래는 두려움이 없으므로

대중 가운데 처하심이 사자와 같으니

 

여래의 특수한 법은

그 청정함이 허공과 같고

저 물 속의 달과도 같으므로

중생들이 이것을 두 가지로 보네.

 

여기서부터의 공덕품(功德品) 가운데 나머지 게송을 논한 것은 이 두 게송을 의지하여 차례로 저 열 가지 힘 등 예순네 가지 여래의 공덕을 나타내 보인다. 다라니자재왕경(陀羅尼自在王經)에 널리 설한 것과 같으니, 알아 두라. 처음 열 가지 힘을 의지해 이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도리에 계합하고 계합하지 못함과

과보와 업과 모든 근성과

믿음과 두루 이르름과

때를 여의는 모든 선정과

 

또는 과거세세를 기억함과

하늘눈과 적정(寂靜)한 지혜

이러한 등등의 여러 글귀를

열 가지 힘이라고 말하는 것이네.

 

또 네 가지 두려움 업음을 의지하여 이 때문에 세 게송을 설한 것이다.

 

 

여실히 모든 법을 깨달음과

모든 도()에 장애되는 것을 막음과

도를 연설함과 번뇌를 끊음이

이것이 네 가지 두려움 없는 것이라.

 

알 바의 경계에 있어서

필경 자타(自他)를 다 알되

스스로가 알고서 남을 알게 하는

이것이 곧 장애되는 길을 막는 것이며

 

능히 수승 미묘한 과()를 증득하되

스스로가 얻고서 남을 얻게 하여

자타의 이로운 진리를 설하는

이것이 곧 모든 곳에의 두려움 없는 것이네.

 

또 열여덟 가지 부처님의 특수한 법을 의지해 이 때문에 여덟 게송을 설한 것이다.

 

부처님은 허물이 없고 다툼이 없고

허망한 생각 등의 잘못이 없고

산란한 맘을 안정하지 않음이 없고

가지가지의 모든 생각이 없으시며

 

뜻을 조작하거나 마음을 두둔함이 없어

욕망과 정진에 물러나지 않고

()ㆍ혜()ㆍ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에 물러나지 않으시며

 

모든 업에 지혜를 근본삼아서

세 세상을 알아 장애가 없으시니

이것이 열여덟 가지 공덕이고

또 나머지 말하지 않은 것이 이러하네.

 

세존의 몸과 입은 잘못이 없으므로

그 누가 와서 파괴하더라도

속마음에 움직이는 모양이 없으시니

이는 조작한 마음도, 버리는 마음도 아닌 것이며

 

세존의 욕망과 정진하는 생각과

청정한 지혜와 해탈지견은

언제나 잃어버리지 않으시니

이는 알 수 있는 경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며

 

일체 모든 업 따위에

지혜를 근본삼아 전전(轉展)하사

세 세상에 장애가 없으시니

이는 광대한 지혜의 행함이 항상한 것이라.

 

이것을 이르되 여래의 몸이

큰 지혜와 상응(相應)하여서

저 크나큰 보리의

가장 수승 미묘한 법을 깨닫는 것이라 하나니

 

일체 중생들을 위해

큰 법 바퀴를 굴리사

두려움이 없는 수순 미묘한 법으로써

저 중생들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시네.

 

또 서른두 가지 대인의 모습에 의지하기 때문에 열한 게송을 설한 것이다.

 

발바닥의 모양은 편편하여

천 폭()의 바퀴를 구족하고

발등은 높으면서 위가 두둑하고

이니녹왕(伊尼鹿王)의 장딴지와 같으며

 

손발은 모두 부드럽고

온 손가락이 다 가늘면서 길고

아왕(鵝王)과 같은 비단결의 손가락이고

팔뚝과 팔꿈치는 위아래가 두둑하며

 

두 어깨는 앞뒤가 편편하고

좌우 양편이 함께 원만하고

서면 손이 무릎까지 내려가고

말의 음경처럼 감추어져 있으며

 

키의 헌칠하고 단정함은

니구수왕(尼拘樹王)과 같고

몸매는 일곱 군데가 가득하면서

윗부분은 반은 사자와 같으며

 

위덕(威德)의 힘이 견고함은

마치 나라연(那羅延)과 같고

 

몸빛이 신선하고 청정하고 미묘하고

부드럽고 연함은 바로 금빛의 피부이며

 

깨끗하고 부드럽고 섬세하고 빽빽하게

한 구멍엔 한 터럭이 나 있으며

털은 보드랍고 연하게 위로 쓸리면서

가느다란 바퀴처럼 오른쪽으로 쏠렸고

 

몸엔 깨끗한 광명이 둥글게 돌려서

정수리 위의 모습이 높이 나타나며

목은 공작왕(孔雀王)과 같고

턱 모양은 사자왕(獅子王)과 같으며

 

머리털은 깨끗한 금정기의 빛이어서

마치 인타라(因陀羅)와 같으며

이마 위 백호(白毫)의 상은

온 낯에 청정한 광명이며

 

입에는 마흔 개의 이[]를 갖추어

두 어금니가 눈[]보다도 흰데다가

그 깊고도 빽빽하고 안팎이 환한

위아래의 이가 함께 다 가지런하며

 

가릉빈가(迦陵頻伽)의 음성처럼

묘한 음성이면서 길고도 먼 음성이고

음식은 씹어 넘김이 없으면서도

맛 가운데 최상의 맛을 얻으시며

 

혀는 가늘고도 엷고 넓고도 길고

두 눈은 순수한 검푸른 빛인데다가

눈썹이 마치 우왕(牛王)과 같고

모든 공덕은 연꽃과 같으신지라.

 

이같이 사람 중에 높은 이로서

서른두 가지 묘한 모습을 설하노니

그 낱낱 모습이 잡란(雜難)하지 않아

온 몸에 흠 잡을 것이 없으시네.

 

이 부처님의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특수한 법과 서른두 가지 대인의 모습을 대략 하나로 뭉친 이것을 예순네 가지 공덕이라 함이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예순 네 가지 공덕의

닦는 원인과 결가 갚음의

그 낱낱 각각 차별을

보녀경(寶女經)’에 차례로 설하였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이냐 하면, 앞서 모든 부처님, 여래 예순네 가지 공덕의 그 원인과 결과의 차별을 설한 것을 밝힘이다. 이 차례에 의지하여 보녀경가운데, 널리 설했으니, 알아두라. 다시 이 네 가지를 의지하여 차례로 네 가지 비유가 있었으니, 이른바 금강저(金剛杵)와 사자왕(獅子王)과 허공의 비유와 물 속 달의 비유 등 아홉 줄의 게송이 그것이라, 저 아홉 게송을 의지하여 대략 게송으로 말하겠다.

 

하물며 충돌하면 인자한 마음이 없어서

저 무심(無心)함과 같지 않나니

이 때문에 금강저, 사자왕의 비유와

허공 또는 물 속 달의 비유를 설함이네.

 

 

또 열 가지 힘의 금강저 비유에 의지해 이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도리에 계합하고 계합하지 않음과

과보와 근성과 중생의 모든 신근(信根)

가지가지의 도 닦는 지위와

과거세 일의 온갖 차별을 아시며

 

하늘눈을 통하고 번뇌를 다 끊는 등

이러한 부처님의 힘 금강저로써

저 어리석음의 갑옷ㆍ산ㆍ답장ㆍ나무를

찌르고 부수고 흩고 끊어 버리시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여래 여섯 가지 힘의

그 차례의 셋과 또 하나와

아는 바 경계 가운데에

삼매의 모든 장애를 여의며

 

또 나머지 번뇌의 장애를 여의는 것이

마치 저 무겁고 굳고 파괴할 수 없는

갑옷ㆍ담장 또는 나무들을

부수고 흩고 끊어 버림과 같으매라.

 

여래의 열 가지 힘도

마치 저 금강과 같이

부수고 흩고 끊으므로

이 때문에 금강저를 설함이네.

 

또 네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 사자왕의 비유에 의지해 이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마치 사자왕이

모든 짐승 가운데 자유로이

항상 산 숲에 처하여

모든 짐승들을 겁내지 않듯

 

사람의 왕이신 부처님도

모든 군중 가운데 처하여

겁내지 않고 잘 머물러

굳고도 힘세고 빠르시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대략 게송으로 말하겠다.

 

병고(病苦)를 알고 병고의 원인을 알아서

저 병고의 원인을 아주 여의고

성스러운 도의 묘한 약을 설하사

병고를 여의기 위해 멸()을 증하며

 

모든 두려움을 아주 여의고서

힘차고 빠른 성()에 잘 머무시니

불왕(佛王)께서 대중에 계시어

그 두려움 없음이 사자와 같으시네.

 

일체 법을 잘 앎으로써

이 때문에 잘 머무시고

일체 곳에 겁내지 않음으로써

이 때문에 우치한 범부를 여의시며

 

이승(二乘)과 청정한 이로선

나에겐 견줄 이 없음을 봄으로써

일체 모든 법 가운데에

마음이 항상 안정되고 견고하시매라.

 

어째서 힘차고 빠르다 하는가 하면

무명(無明)의 머문 자리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거리끼는 곳이 없으시니

이 때문에 힘차고 빠르다 함이네.

 

또 열여덟 가지 공동하지 않는 법의 허공 비유에 의지해 이 때문에 세 게송을 설한 것이다.

 

 

땅ㆍ물ㆍ불ㆍ바람 뜻을

저 법이 가운데 없고

모든 물질 가운데에도 없고

허공은 거리끼는 법이 없는지라

 

모든 부처님도 장애가 없으심은

마치 허공의 모양과 같은 것이고

여래께서 세간에 머물러 계심은

마치 물ㆍ불ㆍ바람과 같은 것이네.

 

그러면서도 부처님ㆍ여래의

그 모든 공덕은

또한 한 가지 법도

세간과 공동한 것이 없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대략 게송으로 말한다.

 

성문(聲聞)과의 공한 행[空行]

슬기로운 이와의 자재함은

최상의 미세(微細)한 법이므로

이 때문에 다섯 가지 원소[五大]를 나타내 보임이며

 

모든 중생들 수용하는 것은

마치 땅ㆍ물ㆍ바람 같아서

세간도 떠나고 출세간(出世間)도 떠났으므로

이 때문에 허공의 요소[虛空大]를 설함이네.

 

서른두 가지 공덕이

법신을 의지해 있는 것이

마치 세간의 등심지[燈炷]

밝고 따뜻한 빛ㆍ모양과 같으매라.

 

상응(相應)의 차별 없음이

모든 여래의 법신인 만큼

그 일체 모든 공덕의

차별 없음도 역시 그러하네.

 

또 서른두 가지 대장부의 모습인 물속 달의 비유에 의지해 이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가을 허공에 구름 한 점 없고

달이 하늘 또는 물속에 비추면

일체 세간의 모든 사람들이

죄다 달의 세력을 보는 것처럼

 

청정한 부처님 법 바퀴 속에는

모든 공덕의 세력을 구족했으므로

불자(佛子)로서 여래를 볼 때에

그 공덕의 몸이 또한 그러하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를 대략 게송으로 말한다.

 

서른두 가지 공덕을

보는 이가 환희심을 내는 것은

그 공덕이 법신ㆍ보신ㆍ화신의

세 가지 부처님을 의지해 있기 때문이라.

 

법신은 청정하여 때가 없어서

모든 세간을 아주 여의고

여래의 바퀴 속에 있으므로

중생들이 이것을 두 곳으로 보지만

 

마치 청정한 물속의

달그림자 모양을 보듯이

이 서른두 가지 모습은

형상 몸을 의지하기에 그러함이니

 

저 마니 보배 구슬이

광명의 빛과 모양을 여의지 않듯이

형상 몸도 그와 같아서

서른두 가지 모습을 여의지 아니하네.

 

 

 

10. 자연불휴식불업품(自然不休息佛業品)

 

이미 때[]없는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설하였고, 다음엔 모든 부처님, 여래의 업을 설하겠으니, 저 모든 부처님의 업은 자연히 행하여 언제나 쉬지 않고 중생들을 교화하시나니, 알아두라. 이것이 바로 앞서 설한바 두 가지 법이 있음을 의지해 자연히 행하는 것이다. ㄸ도 이런 뜻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업이 자연히 행하여 언제나 쉬지 않는 그것을 의지해 항상 불사(佛事)를 일으킴이다. 이 때문에 여섯 게송을 설한 것이다.

 

교화할 수 있는 중생들에게

그 교화하는 모든 방편으로써

중생들 교화하는 업을 일으켜

온 중생계를 다 교화하시되

 

부처님은 자재한 사람이어서

그 교화할 수 있는 중생들에게

항상 때를 기다리고 곳을 기다려

자연 불사(佛事)를 일으키시네.

 

대승(大乘)을 두루 깨달아 아는

가장 묘한 공덕 덩어리이어서

마치 큰 바다의 물ㆍ보배와 같이

여래의 지혜도 역시 그러하시며

 

보리(菩提)의 넓고 그지없음이

마치 허공계(虛空界)와 같아서

한량없는 공덕이신 큰 지혜의

햇빛[日光]광명을 놓으시니

 

두루 온 중생들에게 비추는

모든 부처님을 묘한 법신의

그 더러움 없는 공덕장이

바로 나의 몸과 다름이 없으매라.

 

번뇌장(煩惱障)과 지장(智障)

구름ㆍ안개 덮인 것을

모든 부처님의 자비하신 바람이

불어서 다 흩어지고 사라지게 하네.

 

이 여섯 게송의 뜻을 열 네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어떤 근성(根性) 어떤 지혜건

어떤 것들 어떤 곳, 어떤 때이건

그 업을 지음은 차별이 없으시니

이 때문에 부처님의 업이 자연이시네.

 

다시 말하자면 어떠한 근성의

모든 중생도 다 제도한 것이고

어떠한 지혜로써

능히 그 중생들을 제도하며

 

또 어떤 것으로 교화하는 것이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이고

중생을 어떤 곳 어떤 때에 교화할 것임이 그것이네.

 

진취(進趣)와 공덕이

()가 되고 섭취(攝取)가 되는 것과

장애와 또는 장애를 끊는

모든 반연을 분별하지 않으시니

 

진취란 이른바 십지(十地)이고

공덕이란 두 진리로 인()함이고

()는 이른바 큰 보리이고

섭취는 보리의 권속이 그것이며

 

저 장애란 이른바 그지없는

 

번뇌와 또는 그 습기(習氣)이고

장애를 끊음이란 이른바

대자대비하신 마음이 그것이네

 

이것을 이르되 일체 때에 있어서

항상한 갖가지 인연이라 하나니

이러한 여섯 가지 대상을

다음 차례대로 설하리니 알아두라.

 

큰 바닷물의 보배와

허공의 해와 땅ㆍ구름ㆍ바람과 같고

또 땅은 큰 바다와 같고

지혜는 물이고 공덕은 보배이며

 

보리는 허공계와 같이

그 넓이가 중간도 뒤도 끝도 없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두 가지 업은 햇빛과 같은지라.

 

일체 중생계가

다 여래의 성품 있는 것을

능히 두루 비추어 아는 것이

마치 땅에 묻힌 광[]같음을 아시며

 

또 저 크나큰 땅처럼

자제가 안정 견고하여 움직이지 않으면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피아(彼我)의 차별 없음을 보시네.

 

()ㆍ진()의 번뇌 따위는

본래 체성(體性)이 없으니 만큼

일체가 다 허망한 것이어서

마치 구름 덩어리처럼 진실하지 않나니

 

대자대비한 마음을 일으키심이

마치 거세게 부는 바람 같아서

번뇌의 장애와 지혜의 장애가

다 저 구름 덩어리처럼 흩어지네.

 

교화의 사업이 끝나지 않아서

이 때문에 항상 세간에 계시니

과거세로부터 지금에까지

자연 휴식하지 않으시기 마련이네.

 

앞서 설한 바와 같이 모든 부처님, 여래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시나니, 만약에 그렇다면, 곧 함이 업는 법이겠고, 함이 없는 법이라면 업을 수행하지 않겠거늘 어떻게 자연히 휴식하지 않고서 중생들의 일을 교화한다고 하겠습니까?

저 부처님들의 큰 사업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모든 의혹을 끊기 위해서라, 이 때문에 저 헤아릴 수 없고 때 없이 청정한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의지하여 큰 사업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고, 또 이 때문에 비유로써 한 줄의 게송을 설한 것이다.

 

제석(帝釋)과 묘법의 북[]과 구름과

범천(梵天)과 해[]와 마니(摩尼)

메아리와 허공과 땅과 같이

여래의 몸도 역시 그러하시네.

 

이 한 줄 수다라(修多羅)를 의지하여 뜻을 섭취(攝取)한 것이 게송의 아홉 가지 비유이다. 여기서부터 아래는 그 나머지 예순여섯 게송을 널리 설한 것이니, 알아두라. 또 저 널리 게송의 뜻을 설한 아홉 가지 비유를 의지하여 대략 저 뜻을 설하고,

 

차례로 여래의 더 없이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시는 수행의 구경(究竟)을 설하되, 열아홉 게송으로써 해석하였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일체의 업을 아주 여읜다면

일찍 결과 있는 것을 보지 못하나니

일체 의혹된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의혹의 그물을 제거하기 때문이라.

 

아홉 가지 비유를 설한 것은

저 수다라(修多羅)의 명칭이고

이 모든 법을 널리 설한 것은

저 수다라 가운데 내용이며

 

아홉 가지 비유를 널리 설한

지혜의 경계라고 말하나니

쾌하고 묘한 지혜를 장엄한

그 지혜 있는 자라야 들어가네.

 

구족한 부처님의 경계에 대해

저 제석천의 비유와

유리 또는 거울 형상 등

아홉 가지 비유를 설한 것이니

 

알아두라 저 중요한 뜻을

보거나 설하거나 두루 이르는 것은

그 모든 상 있는 지혜와

몸ㆍ입ㆍ뜻의 업을 여읜 비밀이라.

 

대자대비하신 이라야

공용(功用)의 마음을 여의게 되어

분별이 없어서 적정(寂靜)하고

적정한 지혜이기 때문에 때가 없네.

 

큰 비유리(毘琉璃)

제석천 등의 비유처럼

지혜를 끝까지 만족했기에

이 때문에 끝까지 적정하고

 

청정한 지혜를 지님으로써

이 때문에 분별이 없나니

가지가지 뜻을 성립하기 위해

일부러 제석천 등 비유를 설함이며

 

저 뜻을 성립하는 것으로서

아홉 가지 법을 설한 것은

생사를 여의고 신통을 여의신

부처님들이 이 일을 나타내심이라.

 

이것이 이른바 가자가지 뜻의

그 비유를 대략 설한 것이니

앞 비유는 뒤와 다른 것을 해석하고

뒷 비유는 앞과 다른 것을 해석함이네.

 

부처님의 몸은 거울 형상과 같고

저 유리로된 땅과 같기도 한데

사람에게서 음성이 나지 않은 것이 아님이

마치 하늘의 묘한 법 북과 같으며

 

불사란 불사를 다 일으킴이

저 큰 구름의 비와 같아서

이익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없고

이익을 내지 않는 것도 없으며

 

가지가지의 모든 종자는

범천(梵天)처럼 움직이지 않으면서

순숙(淳熟)하지 않는 것이 없음이

저 큰 해 바퀴[日輪]와 같으며

 

모든 어두움을 죄다 깨뜨림이

저 여의 보배[如意寶]와 같으면서

희유(希有)하지 않는 것이 없음이

마치 저 음성의 메아리와 같으며

 

모든 인연을 죄다 성취함이

마치 저 허공과 같아서

일체 중생들의 의지하는

그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마치 저 크나큰 땅이

주지(主持)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일체 가지가지의 물질이

죄다 저 큰 땅을 의지하는 것과 같음이라

.

 

온 세간의 가지가지 물질을

역시 다 짊어지기 때문에

모드 부처님 보리(菩提)

세간을 뛰어난 묘법에 의지하는 것이네.

 

일체 청정한 업을 성취하셨기에

모든 선정과 네 가지 한량없음과

또는 네 가지 허공 선정이

모든 여래의 그 자연이시라.

 

항상 모든 세간에 머물러

이러한 모든 업이 있으시니

그 어느 때나 앞뒤가 없이

이러한 묘업(妙業)을 일으키시네.

 

 

11. 교랑신공덕품(較量信功德品)

 

앞서 네 가지 법을 설하였고 여기서부터 아래는 지혜 있는 사람으로서 저 법 가운데에 능히 신심 내는 것을 밝힘이다. 저 신심 내는 이의 얻는바 공덕을 의지하여 열네 게송을 설한 것이다.

 

부처님 성품과 부처님의 보리와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의 사업은

모든 세간을 뛰어난 청정한 사람으로서도

능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

 

이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만약에 믿는 이가 있다면

그는 한량없는 공덕을 얻어

일체 중생계에 뛰어나리니

 

부처님의 보리를 구하는

헤아릴 수 없는 과보로써

한량없는 공덕을 얻는지라

이 때문에 모든 세간에 뛰어나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마니 구슬 보배를 희사하되

그 시방 세계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 두루 펴어 두고

 

부처님의 보리를 구하기 위해

모든 법왕(法王)에게 보시하는

이 사람의 이러한 보시가

한량없는 항하사 겁을 계속할 지라도

 

만약에 또 어떤 사람이

묘한 경계의 한 게송을 듣고

듣고 나서 다시 신심을 낸다면

이는 보시의 복 한량없는 것보다 초과하리라.

 

만약에 어떤 슬기로운 사람이

더 없는 계율을 받들어 지키되

몸ㆍ입ㆍ뜻의 업이 청정하여

자연히 항상 호지(護持)하고

 

부처님의 보리를 구하기 위해

이 같이 한량없는 겁을 계속 한다면

이 사람의 얻는바 복도

헤아릴 수 없기는 하지만

 

만약에 또 어떤 사람이

묘한 경계의 한 게송을 듣고

듣고나서 다시 신심을 낸다면

이는 계율의 복 한량없는 것보다 초과하리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선정에 들어

세 세계의 번뇌를 다 사른다면

하늘을 뛰어나 저 언덕으로 가서

 

보리의 방편까지도 없기는 하지만

 

만약에 또 어떤 사람이

묘한 경계의 한 게송을 듣고

듣고 나서 다시 신심을 낸다면

이는 선정의 복 한량없는 것보다 초과하리라.

 

()가 없는 사람으로서의 희사하는 것은

부귀의 과보를 얻을 뿐이고

금계(禁戒)를 닦아 지키는 자는

사람ㆍ하늘 가운데 태어날 뿐이지만

 

수행하며 모든 장애를 끊는 것은

()가 아니면 제거할 수 없나니

()야말로 번뇌장(煩惱障)을 제거하고

또 지장(智障)까지를 제거할 수 있네.

 

법은 듣는 것이 혜()의 원인이 되기에

이 때문에 법을 듣는 것이 수승하거늘

하물며 법을 듣고 나서

다시 신심을 낼 수 있는 사람임에야

 

이 열네 게송을 열한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였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법신과 또는 저 전환하는 것과

공덕과 또는 그 이치를 이룩하는

이 네 가지 법을 보이는 것이

오직 여래의 경계뿐이라.

 

슬기로운 자 있다고 믿으며

필경 그 얻을 것을 믿고

모든 공덕을 믿음으로써

빨리 더없는 도를 증득하며

 

마침내 저 언덕[彼岸]

여래 머무시는 곳에 도달하나니

저 경계가 있는 그것이

바로 부사의한 경계임을 믿기 때문이네.

 

우리들도 저 언덕의

이러한 공덕을 얻을 수 있으니 만큼

오직 수승한 지혜를 깊이 믿고서

정진하여 선정을 염()하려 할 뿐이라.

 

지혜 등 공덕의

더없는 보리심(菩提心)을 닦아서

일체가 항상 현전(現前)한다면

이같이 항상 현전하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 불자(佛子)

저 언덕 청정한 공덕이라 하나니

필경 다섯 가지 바라밀[五度]

능히 성취하는 것이 이 공덕이네.

 

분별하지 않는 세 바라밀로써

필경 그 청정함을 성취하는지라

대치(對治)하는 법을 여의기 때문에

보시는 오직 보시의 공덕이며

 

지계(持戒)는 오직 지계이어서

이것이 나머지 두 바라밀의 수행이니

이를테면 인욕과 선정과 정진의

세 바라밀이 모든 곳을 두루하는 것이네.

 

아끼고 탐함을 대치하는 법을

번뇌의 장애라고 이르고

헛되이 세 가지 분별하는 법을

지혜의 장애라고 이르나니

 

저 모든 장애를 멀리 여의려면

다시 다른 수승한 인()이 없고

오직 참되고 묘한 지혜일뿐이라

이 때문에 반야(般若)가 수승한 것이며

 

저 지혜의 근본은

이른바 듣고 얻는 지혜가 그것이니

듣고 얻는 지혜로써 지혜를 내기에

이 때문에 듣는 것을 수승하다 하네.

 

또 여기서부터 아래는 앞서 설한 바의 뜻을 밝힘이라. 어떠한 법을 의지해 설하고,

 

어떠한 이치를 의지해 설하고, 어떠한 모양을 의지해 설했는가 하면, 처음 저 법을 의지하기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내가 여기에 설한 바 법은

자신의 마음을 청정케 하기 위해서이니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하는 것이

곧 수다라(修多羅)에 상응하는 것이라.

 

만약에 지혜 있는 사람이

듣고서 능히 믿어 받는다면

나의 이 설한 바 법이

역시 저 사람을 거둬 줌이 될 것이네.

 

여기에서부터 아래는 저 이치를 의지하기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등불과 번개와 마니(摩尼)

해와 달의 모든 광명을 의지해

이레 눈을 지닌 자들이

다 경계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부처님 법의 광명을 의지해

지혜 눈을 지닌 자는

법의 이러한 이익 있음을 보나니

이 때문에 나 이 법을 설하는 것이네.

 

여기서부터 아래는 다음 저 모양에 의지하기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만약에 일체 설한 것이

이치가 있고 법이 있는 글귀라면

능히 수행하는 이로 하여금

세 세계를 아주 여의게 하리라.

 

또 적정(寂靜)한 법을 보여 준

가장 수승한 더 없는 길이므로

부처님의 말씀만이 이 바른 경전이고

그 밖의 다른 것은 뒤바뀐 말이네.

 

여기서부터 아래는 법을 옹호하는 방편에 의지하기 때문에 일곱 게송을 설한 것이다.

 

비록 법구(法句)의 뜻을 설하여

세 세계의 번뇌를 끊는다 하지만

무명(無明)이 지혜의 눈을 덮어

탐욕 등의 때[]가 둘러싸여 있네.

 

또 부처님 법 가운데에

조그마한 부분을 따내어 설한 것과

세간의 경전과 훌륭한 말씀들

저 세 가지를 받아들여야 하거늘

 

하물며 모든 여래께서는

번뇌의 때를 아주 여의시어

()없는 슬기로운 사람으로서

그 설한 바 수다라(修多羅)이랴.

 

모든 부처님을 떠나서는

일체 세간 가운데에

다시 수승한 지혜로서

여실히 법을 아는 이가 없네.

 

여래께서 설하신 분명한 이치가

바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인 만큼

이것을 헤아리는 것은 법을 비방함이니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성인을 비방하거나 법을 파괴하는 것은

이모든 삿된 생각으로 그러함이니

번뇌에 허덕이는 우치한 사람들이

허망한 소견으로 계교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삿된 소견과 더러운 법에

응당 집착하지 않아야 할지니

깨끗한 옷으로써 빛깔을 받음에는

 

[]와 기름기가 더럽힐 수 없네.

 

여기서부터 아래는 바른 법 비방하는 것을 의지해 이 때문에 세 게송을 설한 것이다.

 

어리석어서 바른 법을 믿지 않고

삿된 소견과 교만한 마음으로

과거에 법을 비방한 입장이 있어서

분명하지 않는 이치에 집착하며

 

공양과 공경에 집착하여

오직 삿된 비법만을 보고

선지식(善知識)을 멀리 여의고는

법을 비방하는 자에게 친근하며

 

즐거이 소승 법에 집착하는

이러한 따위의 중생들은

대승을 믿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 법을 비방하는 것이네.

 

여기서부터 아래는 바른 법을 비방하여 나쁜 과보를 얻는 것에 의지해 이 때문에 여섯 게송을 설한 것이다.

 

슬기로운 이는 다음의 것을 겁내지 않나니

원수ㆍ뱀ㆍ불 따위의 독과

인다라(因陀羅) 또는 벼락과

칼ㆍ몽둥이와 사나운 짐승들과

 

사자ㆍ호랑이ㆍ이리 따위는

목숨을 끊을 수 있을 뿐이고

저 두려운 아비지옥(阿鼻地獄)

사람을 들어가게 할 수는 없지마는

 

그 반면 깊은 법을 비방하거나

법다운 벗 비방하는 것을 겁내나니

이것은 저 두려운 아비지옥에

반드시 비방한 사람으로 하여금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라.

 

비록 나쁜 벗을 가까이 함으로써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피를 내고

부모를 살해하기도 하고

여러 성인의 목숨을 끊기도 하며

 

화합한 스님들을 파괴하고

모든 선근(善根)을 끊더라도

이러한 자는 바른 법을 계념(繫念)만 한다면

저 아비지옥의 곳을 벗어날 수 있거니와

 

만약에 또 어떤 사람이

깊고 깊은 법을 비방한다면

저 사람은 한량없는 겁에

결정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네.

 

여기서부터 아래는 설법하는 법사에게 존경 존중하는 마음을 내는 것에 의지하여 이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만약에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법을 배워 믿게 한다면

저 사람은 곧 나의 부모이고

또 선지식(善知識)이기도 하리니

 

저 사람이야말로 슬기로운 이로서

여래의 열반하신 뒤엔

삿되고 뒤바뀐 소견을 돌리어

바로 도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네.

 

여기서부터 아래는 설법하여 얻은바 공덕으로써 회향하는 것을 의지해 이 때문에 세 게송을 설한 것이다.

 

 

삼보(三寶)의 청정한 성품과

보리(菩提)와 공덕과 사업 등

내가 대략 선한 일곱 가지는

부처님 경전과 상응(相應)한 것이라.

 

이 모든 공덕을 의지하여

원컨대 목숨이 끝날 적에

무량수(無量壽) 부처님의

그지없는 공덕 몸을 보며

 

니와 또는 다른 믿는 이도

이미 저 부처님을 보고나선

원컨대 때[] 여읜 눈을 얻어

더없는 보리를 성취하여지이다.

 

여기서부터 아래는 대략 글귀의 뜻을 설하였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어떠한 법을 의지해 설하고

어떠한 이치를 의지해 설하고

어떠한 모양을 의지해 설했는가 하면

 

저 법대로 설하고

저 이치대로를 설하고

저 모양대로를 설하였네.

 

저 일체 모든 법은

여섯 게송으로써 나타내고

자신을 옹호하는 방편은

일곱 게송으로써 설하며

 

바로 법 비방하는 것을 밝혀

이 때문에 세 게송이 있고

여섯 게송으로서 저 원인을 보이고

두 게송으로써 저 설법하는 사람에게

존중 공경하는 마음 내는 것을 나타내었네.

 

대중들이 듣고서 알고 받으면서

큰 보리를 얻을 것이므로

대략 세 가지 법을 설하여

저 과보를 나타내 보인 것이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