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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62 불교(광홍명집 13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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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13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2. 변혹편

 

17) 변정론 십유구잠편(辨正論十喩九箴篇) 석법림(釋法琳)

 

(1) 십유편(十喩篇) ()

이도사의 십이론(十異論)에 대한 반박

황건(黃巾)의 도사 이중경(李仲卿)이 그 학문은 관규(管窺)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지혜는 억측이 부끄러운데도, 백조(白鳥)의 우익(右翼)이라 자랑하며 해괴한 것만 우러러 중화(中華)만을 기렸다. 반딧불의 빛을 뽐내어 그 빛을 일월과 다투었으니, 이에 십이구미론(十異九迷論)을 지어 지성(至聖)을 폄하하였다.

내가 그 무식함을 개탄하며 그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 생각하여 열 가지 비유로 일러 주고 아홉 가지 잠언으로 깨우쳐서 훈계하되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가리키듯 하였다. 참으로 밝게 통달한 군자는 이를 상세히 하여 정법으로 돌이키기를 바란다.

 

-외도의 첫 번째 이적(異蹟)

태상노군(太上老君)이 그 신령(神靈)을 현묘옥녀(玄妙玉女)에 의탁하여 왼쪽 겨드랑이로 태어났다.

석가모니는 마야(摩耶)부인의 태중에 들어 오른쪽 옆구리를 열고 태어나셨다.

-내법(內法)의 첫 번째 비유

노군은 상도(常度)와 어긋나게 목녀(牧女)에 의탁하여 왼쪽으로 태어났다.

세존은 덕화(德化)에 수순하여 성모(聖母)에 기인하여 오른쪽으로 태어났다.

-개사(開士)의 변론: 노경유(盧景裕)ㆍ대선(戴詵)ㆍ위처현(韋處玄) 등이 오천자를 집해한 것과 양나라 원제(元帝)와 주나라의 홍정(弘政) 등의 고의류(考義類)에 따르면, 태상(太上)은 넷이 있으니, 소위 3황 및 요순이라 한다. 상고(上古)에 이와 같이 덕망이 큰 임금이 있어서 만백성 위에 임하였다고 말하니, 이로써 태상이라고 이른다. 곽장(郭莊)시절에 어진 이를

 

임금이라 하고, 재주가 세대에 버금가지 못하는 이가 신하가 된다고 말하였다. 노자는 제()도 아니고 황()도 아니니, 4()의 경계에 있지 않은데, 어떠한 전거로 갑자기 태상이라 칭하는가?

도가의 현묘(玄妙)중태(中台)주도(朱韜)옥찰(玉札)등의 경전과 출새기(出塞記)를 검토해 보면, 노자는 이모(理母)의 소생이라 말한다. 현묘옥녀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미 정설이 아니라 거짓되고 황당한 이야기이다. 선인옥록(仙人玉籙)에는 선인은 처자가 없고 옥녀는 지아비가 없다고 이르니, 비록 여자의 형체를 받았더라도 궁극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다. 만약 이 같은 서응이 있었다면 참으로 가상하기가 이를 데 없으나 어째서 사기(史記)에는 그 글이 없으며 주서(周書)에도 실리지 않았는가?

헛된 것만을 좇아 실다운 것을 도리어 책망하니 참으로 망령된 말이라 하겠다. 예기에서는 관직에서 물러나 직위가 없는 것을 좌천(左遷)이라 하다고 하고, 논어에서는 왼쪽으로 옷고름을 매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이른다. 이처럼 왼쪽이 오른쪽보다 훌륭하다고 하면, 도사가 행도하는데 어째서 왼쪽으로 돌지 않고 오른쪽으로만 도는가?

나라의 조서(詔書)에서도 모두 ()와 같다고 이르는 것도 천도(天道)에 순응하는 상도(常道)이다.

 

-외도의 두 번째 이적

노군이 훈요를 내려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장생(長生)을 열었다.

석가는 가르침을 마련하여 불멸불생의 영멸(永滅)을 보셨다.

-내법의 두 번째 비유

이담(李聃)은 품질(稟質:稟性)에 태어남이 있고 소멸됨이 있으니, 사는 것을 근심하며 환생(患生)의 삶을 두려워하였기에 백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석가는 모습을 드리워 죽는 것을 보이고 사는 것을 보이셨으니 적멸의 멸()로 돌아가 금색 몸[金身]으로 빛나셨다.

-개사의 변론: 노자가 나에게 큰 걱정이 있으니 그 몸이 있는 것만한 것이 없다. 나에게 몸이 없어지면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근심이 연유하는 바는 이 몸을 따를 게 없다고 말하였다.

 

노자가 이미 몸이 있는 것을 걱정하며 고뇌 없음을 추구하였기에 머리가 희어짐을 면치 못했으니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 만약 장생을 말하였더라도 어떠한 연고로 일찍 죽었는가?

 

-외도의 세 번째 이적

노군이 생()에 응()하여 이 동하(東夏)에 태어났다.

석가는 자취를 드리워 저 서융(西戎)에 우뚝하셨다.

-내법의 세 번째 비유

이이(李耳)는 형체를 받아 동주(東周)의 고현(苦縣)에 살았다.

능인(能仁)이 드리운 자취는 중하(中夏)의 신주(神州)에 이르셨다.

-개사의 변론: 지도론(智度論)에서는 ()과 천이 그 수를 겹치기에 삼천(三千)이라 이르고 일천을 두 자리 수로 가승하기 때문에 대천(大千)이라 이르니, 가유라위가 그 중앙에 있다고 말한다. 누탄경(樓炭經)에서는 총하(葱河)의 동쪽을 이름하여 진단(震旦)이라 하는데 해가 처음 동쪽 모퉁이에서 빛을 내기에 이렇게 이름한다.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는 것은 모두 중앙의 주()에 자리하고 변방에 태어나지 않는다. 변방에 태어나게 되면 땅이 기울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법원전(法苑傳)고승전(高僧傳)영초기(永初記)등에 따르면, 송나라 하승천(何承天)과 지엄(智嚴) 법사가 서로 변방과 중토를 논쟁하였는데, 법사가 중천축의 땅은 하지가 되면 해가 정중(正中)에 이르러 똑바로 선 나무에 그림자가 없어지나, 한나라 땅의 영대(影臺)에서는 그 시기에 맞춰 표()를 세워도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하였다. 산경(算經)에 따르면, “하늘 위는 1()이고, 땅 밑은 1천 리이다라고 하나 어떻게 이를 알았겠는가?

중토와 변방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니, 사례를 간략케 하여 논하자면, 중천축국은 땅의 중심으로 그 방토가 대해와 5만여 리나 떨어져 있다. 만약 이 땅이 동쪽으로 해변에 접해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바로 진단은 원래가 동쪽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가유(迦維)는 서쪽에 접했다고 하지 못하니, 그 같은 이치로도 징험된다.

 

-외도의 네 번째 이적

노군은 문왕(文王)의 시대에 융주(隆周)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석가는 장왕(莊王)의 시절에 계빈(罽賓)

 

교주(敎主)가 되셨다.

-내법의 네 번째 비유

백양(伯陽)의 직책은 말단 신하로 장리(藏吏)에 편입되었으니 문왕의 시대에 있지도 않았고, 융주의 종사도 아니었다.

모니(牟尼)는 그 지위가 태자인 데다 그 몸으로 가장 존귀함을 증득하셨으며, 소왕(昭王)의 성년(盛年)에 해당하시니, 바로 염부제의 교주이시다.

-개사의 변론: 전한서에서는 공자는 상상류(上上流)로 성인이고 노자는 중상류(中上流)이니 현인이다라고 말했다. 하안(何晏)과 왕필(王弼)노자는 성인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고, 이교론(二敎論)에서도 주하사(柱下史)는 조정에 있었으나, 원래 어울리지 못하고 주나라를 벗어나 진나라로 들어가면서 윤희에게 도를 말하였으나, 제후(諸侯)에게 알려지지 못하고 천자를 만나지도 못했다. 만약 주나라 종사였다고 하더라도 역사에 분명한 증거가 없으니 정설에 부합하지 않는데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사기와 왕검(王儉)백가보(百家譜)에 따르면, “이이(李耳)는 고양(高陽)의 후예로, 시조(始祖) 구요(咎鷂)는 순 임금의 이관(理官)이었으니 이()로써 씨를 삼았다. 이씨가 흥기한 것은 노담에서 비롯하니, 노담 이전에는 이성(李姓)이 없었고 오직 그 씨는 이()였을 뿐이다. 나무 밑에서 태어났기에 이씨라고 불렀다. 노자 아들의 이름은 종()이었는데 위문후(魏文侯)를 섬겼으니, 대체로 춘추 말엽 육국(六國) 때의 사람이다. 문왕의 치세에 이씨 성이 없었는데 어떻게 노담이 출사하여 주나라 종사가 되었겠는가? 연대가 서로 어긋나 근거할 만한 증표가 없다고 말했다. 포박자에서는 문왕의 치세에 태어났다고 말했고, 혜강(嵇康)과 황보밀(皇甫謐)은나라 말엽에 태어났다고 말했는데, “대체로 도()는 위조된 글이라 지적하면서 국전에 실린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외도의 다섯 번째 이적

노군이 자취를 내린 것은 주나라 왕실의 시대이니, 세 번

 

숨고 세 번 나타난 것이 무려 5백여 년간이었다.

석가가 응현(應現)하여 호나라 시절에 태어나셨으니, 한 번 죽고 한 번 태어나되, 그 나이가 불과 여든이셨다.

-내법의 다섯 번째 비유

이씨가 세 번 숨고 세 번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근거할 만한 증거가 없으니 설령 5백여 년이라 하여도 거북이나 학의 장수에 비하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법왕은 한 번 멸하고 한 번 태어나시면서 미진(微塵)의 용자(容姿)를 보셨으니 80여 년간 항하사의 중생을 제도하셨다.

-개사의 변론: 여러 사()와 정전(正典)을 검토해 보면 세 번 숨고 세 번 나타나 출몰하였다는 글이 없다. 오직 장긍(臧兢)ㆍ제유(諸揉) 등의 고의례(考義例)에서만, “공자가 인ㆍ의ㆍ예ㆍ악의 근본을 설한 것이 첫 번째 때가 되고, 난왕(赧王)의 치세에 천실(千室)이 이미 병들자, 노군이 180계와 태평경(太平經)170편을 수여한 것이 두 번째가 된다. 한나라 안제(安帝) 때에 장천사(張天師)에게 정일명위(正一明威)의 가르침을 내렸다. 이 때 스스로 주나라의 주하사라 자칭하면서 태상에게 파견되었다 하였으니, 이 때가 세 번째이다라고 말했다.

대체로 형체를 응현하여 가르침을 이루는 것도 반드시 연()에 따라야만 하니, 교화하여 제도한 사람은 모두가 그 문도로 충당되는데 어떻게 5백여 년간 제자라고는 없었는가?

세 번 나오고 세 번 숨었어도 문인을 보지 못하자, 그 학()을 잇고자 자기가 계승하였을 뿐이니, 이처럼 황당하게 하한(河漢)에 어찌 그러한 말이 있겠는가? 저자거리에서나 헛되이 전해져 주나라에 있었을 때는 미천하여 작은 수레나 끌면서 머리를 실타래처럼 늘어뜨렸고, 한나라 때에는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면 구름이 모이고 비가 따랐다는데, 우보(宇寶)수신기(搜神記)에서도 그 같은 말을 듣지 못했고, 제해(齊諧)이기(異記)에도 그 같은 영험함이 실리지 않았다. 무리한 고집을 세워 조작하였으나 그 망령됨이 너무 심하다.

 

 

-외도의 여섯 번째 이적

노군이 세상에 내려온 것은 주나라 문왕 때부터 공구의 시절에까지 이른다.

석가가 하생(下生)하신 것은 정반왕(淨飯王)의 왕가에서 비롯되니 우리나라 장왕(莊王)의 치세에 해당한다.

-내법의 여섯 번째 비유

가섭(迦葉)은 항왕(桓王) 정묘년에 태어나 경왕(景王) 임오년에 임종하였으니 비록 공구의 시대에 이르더라도 희주(姬周) 창왕(昌王)의 시대에는 나오지도 않았다.

조어장부(調御丈夫)가 소왕(昭王) 갑인년에 태어나시어 목왕(穆王) 임신년에 임종하셨으니, 이는 정반왕의 후손이시기에 그 태어난 것이 장왕 이전이다.

-개사의 변론: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담을 만나고 예를 물었는데 이것이 사기에 모두 드러나 있다. 그러나 문왕의 종사였다는 것은 이를 증거할 만한 전적이 없다. 주나라 말엽에 임관하였다는 것은 찾아볼 수 있으나, 주나라 초엽이었다는 글은 사서에 실리지도 않았다. 주례의 관의(官儀)를 검토해 보면, 문왕ㆍ무왕ㆍ성왕ㆍ강왕의 치세에 주사(柱史)나 장리(藏吏)라는 관명이 없었으니, 이처럼 정품(正品)에 그 조항이 결여된 것으로 미루어 주나라 말엽의 말단 사관이었을 뿐이다.

 

-외도의 일곱 번째 이적

노군이 주나라 때 처음 태어나 늦게서야 유사(流沙)로 나아갔는데 그 끝을 알지 못하고 장소를 알지 못한다.

석가는 서국(西國)에서 태어나시어 제하(提河)에서 임종하셨으니, 제자가 가슴을 두드리고 제호(諸胡)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내법의 일곱 번째 비유

노자는 뇌향(賴鄕)에서 태어나 괴리(槐里)에서 죽었으니 그 진일(秦佚)이 조문한 것을 따져 밝히면 그 둔천(遁天)의 형()을 나무랄 만하다.

 

구담은 정반왕의 궁궐에서 탄생하여 학수(鶴樹)에서 모습을 거두었으니, 한나라 명제 치세에 전해져 난대(蘭臺)의 서책 가운데 비장되었다.

-개사의 변론: 장자내편에서는 노담이 죽자 진일이 그를 조문하여 세 번 곡하고서 나갔다. 제자가 이상하게 여겨 부자의 문도가 아니지 않느냐고 묻자, 진일이 내가 들어가 보니, 어린 것이 곡하는 것은 그 아비를 곡하는 듯하고 늙은이가 곡하는 것은 그 자식을 곡하는 듯이 한다. 옛날에 둔천의 형이라 일컬은 것이 바로 이 사람이라 하겠으나 지금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둔()이란 숨는다는 뜻이고, ()이란 얽매임을 벗어났다는 것이고, ()이란 몸이니, 처음 노자가 얽매임을 면하고 형체를 숨긴 신선이 되었다고 말하나 지금은 아니다. 그릇된 말로 사람들의 인정(人情)을 빼앗은 것이 한탄스럽다. 그러므로 죽음을 면하지 못했으니 이는 내가 사귀는 자가 아니다.

 

-외도의 여덟 번째 이적

노군의 도오(蹈五)ㆍ파십(把十)ㆍ미미(美眉)ㆍ방구(方口)ㆍ쌍주(雙柱)ㆍ참루(參漏)ㆍ일각(日角)ㆍ월현(月懸)은 중국 성인의 관상이다.

석가는 코가 금정(金挺) 같으시고 눈은 정성(井星)과 비슷하시며 정기가 청련(靑蓮)같으시고 머리에는 나발(螺髮)이 있었다. 이것은 서역 불타(佛陀)의 관상이다.

-내법의 여덟 번째 비유

이로의 미미와 방구는 장자(長者)의 징조이고, 도오와 파십도 성인의 관상이라 하지 못한다.

바가(婆伽)는 해가 모여 쇠를 녹이는 금색이 있으니, 이미 보기 드문 징조를 드러내었다. 만 자() 천 폭의

 

기이함은 참으로 성인의 관상을 표시하는 것이다.

-개사의 변론: 노자중태경(老子中胎經)따위의 경전에서는 노담이 황색(黃色)ㆍ광상(廣顙)ㆍ장이(長耳)ㆍ대목(大目)ㆍ소치(疏齒)ㆍ후순(厚脣)에다 손에 십자무늬가 있고 발바닥에 이오(二五)의 무늬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간과 다른 모양에 불과하지 성자의 특이한 모습이 아니다. 전기(傳記)에서 또 노자는 콧날이 섰고, 머리가 크며, 입이 뾰족하고, 이가 성기며, 눈은 사팔뜨기이고, 귀는 늘어졌으며, 머리카락은 푸르고 검으며, 입술이 두껍고, 귀가 크다고 하였으니, 그 모양이 이러한데 어찌 부처님과 견주려는가?

여래의 몸은 키가 6()이되 똑바르며 치우치지 않았고, 7()의 둥근 광명이 여러 어두운 곳[幽冥]을 비추었다. 정수리에는 육계(肉髻)가 있고, 머리카락은 감청색인 데다 귀는 늘어졌으며, 눈은 시력이 좋았으며, 사자와 같은 턱에다 7()의 수레무늬가 감겨 있고, 입은 40개의 치아가 희고 고르며, 혀는 얼굴을 덮은 것이 연꽃잎 모양이며, 손등이나 손바닥에는 모두 무늬가 나 있었다. 그 목소리는 천둥이 울리는 것 같고 여덟 가지 소리로 울리었다. 가슴에는 만()자가 새겨져 있고, 발바닥에는 천 겹의 수레무늬가 있고, 몸 색깔이 자마(紫磨)와 같은지라 그 상호(相好)를 이름하기 어렵다. 32가지와 80가지 종정(種禎)을 갖추고, 한 번 광명을 내면 지옥도 잠시 쉬고, 한 번 법을 연출하면 고통을 쉬는 것이 여러 경전에 나와 있으니, 번거롭게 다시 지목하지 않겠다.

 

-외도의 아홉 번째 이적

노군이 가르침을 펴되 삼가고 양보하는 위의(威儀)로 중하(中夏)에 의지하는 것이다.

석가가 법을 제정하시니 엄숙한 위용으로 외국(外國)에서 따른다.

-내법의 아홉 번째 비유

노자는 속인으로 관직은 말단이고 의관을 갖추어 엎드려 절하며 조장(朝章)에 봉사한다.

부처님은 성주(聖主)이시니 도와 속이 어긋나는데,

 

복장과 모습과 위의가 어떻게 범부가 제정한 것과 같겠는가?

-개사의 변론: 예전에 단양(丹陽)의 여개흥(余玠興)명진론(明眞論)을 찬술하여 도사들을 반박하고 그 허망함을 드러내었다. 그가 논한 것을 참고하면, 두건과 갈의(褐衣)의 복식은 바로 옛날 유묵(儒墨)이 입던 것이다. 예전에 5()는 녹건(鹿巾)을 쓰고 허유(許由)는 피관(皮冠)을 썼으니, 모두 속인의 복식이다. 갈의는 치수가 36척으로 도합 360촌인데 1년에 36()이 있는 것을 따랐다고도 하고, 1년에 360일이 있는 것을 본떴다고도 말한다. 갈의는 앞에다 두 가닥의 띠를 내리는데 음양이 두 가지로 갈라지는 것을 본떴다고 말한다. 두건의 양각(兩角)은 다시 2()를 본뜬 것이다. 여씨(余氏)는 또 만약 주나라와 진나라 이세에는 바로 하나라의 열 달을 일 년으로 삼았는데, 그 도수(度數)를 나누는 것이 늘고 줄며 역()의 운행이 없어졌는데도 어떻게 360이란 숫자를 얻었는가?”라고 말했다. 요 임금과 순 임금 및 주공과 공자를 고찰해 보면 이 같은 옷을 입지 않았고, 황제(黃帝)가 황인구진(皇人九眞)의 영()을 만났을 때를 살펴보고, 다시 제곡(帝嚳)으로 내려와서 하우(夏禹)에 이르러 도산(塗山)과 종산(鍾山)1)의 장서(藏書)를 열었는데, 이 같은 복식은 따져보아도 일찍이 근거되는 바가 없다. 주나라에 붉은 참새의 징조가 있었고 단서(丹書)의 서응에 감득하였으니, 그 화덕(火德)에 부응하고자 세간에서는 붉은 옷을 입었다. 노자는 주나라 사람으로 말단 관리에 자리했으니 관대와 관복(官服)을 입고 엎드려 부복하면서 항의(恒儀)를 받들었다. 치두(治頭)의 그 원래 이름은 귀졸(鬼卒)이라 일렀으니, 황건의 적록(赤籙)은 백양을 본받은 것이 아니며, 물을 뿌리며 부금(符禁)을 행하는 것은 장씨(張氏)에게서 배운 것으로, 이는 도도 아니고 속도 아닌데, 도대체 누구의 풍화를 배운 것인가?

 

-외도의 열 번째 이적

노군의 가르침은 효성과 인자함으로 덕의 근본을 삼는다.

석가의 법은 친척을 버리는 것으로 행의 시초를 삼는다.

 

-내법의 열 번째 비유

노자의 훈요는 미친 것 같아서 양친을 죽이는 것으로 행의 시초를 삼는다.

석가의 가르침은 인자하여 4()을 구제하는 것으로 덕의 근본을 삼는다.

-개사의 변론: 그대들 화호경(化胡經)에서는 윤희가 노담을 따라가려고 하자 노담이 만약 그 마음이 지극하다면 나를 따라갈 수 있으니, 마땅히 그대의 부모와 처자 일곱 사람의 목을 베어 와야만 떠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윤희가 마음을 지극히 하여 곧바로 부모 및 일곱 사람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노담의 앞에 두자 바로 일곱 개의 돼지머리가 되었다고 말했다.

무릇 천지의 도에 순응하는 것이 행()이고, 화기(和氣)를 상하지 않는 것이 효()이다. 정란(丁蘭)이 늙은 나무에 감통하고2) 동영(董永)의 효성이 천녀(天女)에 이르렀다.3) 금수조차도 어미 자식간에는 그 부모를 아는데 하물며 노담과 윤희가 천하에 도를 행하고자 하면서 그 부모의 목을 치게 했으니 어떻게 효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그 처자식을 죽게 하였으니 어떻게 인자하다 이를 수 있겠는가?

 

십유편 하()

-외도가 첫 번째로 논하는 탄생의 우열

성인이 응현하는 자취는 저와 같은 범부와 달라서 혹 용이나 코끼리를 타고 태중에 처하며 옆구리나 겨드랑이를 열고 세간에 나오니, 이처럼 양기(兩氣)에 관련 맺지 않기에 양친에 빌미하지 않는다. 왼쪽과 오른쪽이 다른 것에 이르러서는 그 우열이 다르니, 이것이 그 우열의 첫 번째 다름이다.

-내법에서 깨우쳐 주는 탄생의 우열

 

오른쪽으로 옷고름을 매는 우임(右衽)은 오랑캐가 존중하는 것이고, 왼쪽으로 옷고름을 매는 우명(右命)은 중화에서 숭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춘추에서는, “총경(冢卿)에 명()이 없고 개경(介卿)에 있다면, 이 또한 어긋난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고, 사기에서는 인상여(藺相如)가 공이 커서 염파(廉頗)의 오른쪽에 자리하자 염파가 이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말했으며, 장의가 진()나라를 숭상하고[] 위나라를 그르쳤다[]. 여러 사람들은 한()나라를 숭상하고 위나라를 그르쳤다고 말했으니 아마도 편벽되지는 않은 듯하다. 예기에서는, “좌도(左道)가 백성을 어지럽히니 그를 죽였다고 말했으니, 어찌 오른쪽이 높고 왼쪽이 열등하지 않겠는가?

황보밀의 고사전(高士傳)에서는, “노자는 초()나라의 상인(相人)으로 집이 와수(渦水)의 남쪽에 있었다. 상송자(常松子)에게 사사하였는데 상자(常子)가 병이 들자 이이가 찾아가 문안하였다고 말했다. 혜강4)이이는 연자(涓子)에게 구선(九仙)의 술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태사공 등의 여러 책을 검토해 보면 노자가 왼쪽 겨드랑이를 가르고 나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미 정사에 나오지 않으니 믿을 수 없음이 명확해진다.

창을 휘두르고 붓을 놀리는 것은 대체로 문무의 시초이고 5()3()은 음양의 으뜸이다. 이로써 석문(釋門)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사람들의 쓰임에 맞추려는 것이고, 장릉의 왼쪽으로 도는 것은 천상에 거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석가가 무연(無緣)의 자비를 일으키시며 유기(有機)의 부름에 응하셨으니, 그 자취를 말하자면, ()3아승기겁을 채우고 상호는 백 겁을 구족하신 것이다. 신명을 내리되 옥상(玉象)을 타고 그 7()를 가리며 금빛 자태로 태어나셨다. 32가지 상호로 상서로움을 나타내 지부(地府)를 열고 18가지 상서로운 기운이 천궁(天宮)을 놀라게 하니, 신령한 모양이 시방에 두루하고 신묘한 광채가 팔극(八極)에 나타난 것도 그 근본을 기술하자면, 오랫동안 증득하여 원명(圓明)해진 것으로 모래알로도 그 수를 계산하지 못한다. 일찌감치 적조(寂照)에 들었으니 허공으로도 그 바탕을 헤아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뭇가지가 꺾어진 것으로 서응이 위대하다고 하고 머리가 흰 것을 징조삼아 상서로움이 드리워졌고 하는가?

반딧불로 용촉(龍燭)과 밝음을 다투고 고기 눈알로

 

여의주와 빛남을 다투니, 이야말로 도가 열등하다는 첫 번째 근거가 된다.

 

-외도가 두 번째로 논하는 교리 건립의 깊고 얕음

무릇 생()과 멸()이 없는 그 이치는 균등하나, 세상을 교도하여 범부를 이끄는 데에는 차이가 없지 않다. 단지 사는 것은 만물이 즐거워하기 때문이고, 죽는 것은 만물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도(生道)는 얻기 힘들기에 반드시 공을 닦아야만 하고, 멸법(滅法)은 구하기가 쉬운데 어찌 수고롭게 배움을 받겠는가?

그러므로 몸을 솟구쳐 10()을 다니며 스스로 겁수(劫數)를 거치면서 몸을 남기더라도, 기운(氣運)이 다하고 형체(形體)가 쇠락하면 일시에 신령(神靈)이 떠나가니, 이는 교문(敎門)이 다른 두 번째 근거이다.

-내법에서 깨우쳐 주는 교리 건립의 깊고 얕음

무릇 몸을 없애는 것은 커다란 근심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지혜를 끊는 것은 오랜 수고로움을 끊으려 함이다. 생명을 혹이 달린 것처럼 말하고, 성품을 없애는 것을 왕의 즐거움과 같이 보는 것은 대체로 노장의 말이다. 그러면서도 면면히 상주한다면 고황(古皇)5)은 죽지도 않고 끝도 없게 된다. 계속 이어져 이름조차 없다고 하면 노씨(老氏)는 다시 무물(無物)로 돌아가게 된다. 늘 남아 있다고 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이르더라도, 어찌 무물이 장생(長生)으로 변하겠는가?

다시 그 깊고 얕음을 밝히자면, 약한 것을 가꾸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글과 마음을 비우고 배만 채우는 논에 이르러서는 부생(浮生)의 유한함을 살피고 지혜의 물의 가없음을 한탄하는 것뿐이다. 대치(大治)를 말하더라도 방역(方域) 가운데로 국한되고, 천하를 다스린다 하여도 그 성품의 가늠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뜻[] 때문이다.

어찌 저 대각이 무궁(無窮)의 연()을 열고 원극(圓極)의 비춤을 드리우는가? 세세한 것을 헤아린다면 극미(極微)조차 궁구하고 이치를 따진다면 제어함에 정해진 곳이 없다. 향기가 화기(和氣)와 함께 어울리고 그 정신과 몸이 태허(太虛)보다도 굳은 것은 그 양을 말한 것이다. 숭산과 화산은 언덕과 험준함을 달리하며 큰 바다와 우물은 깊이를 달리한다. 이 같은 것이야말로 도가 열등한 두 번째 근거이다.

 

 

-외도가 세 번째로 논하는 동서 방위의 다름

무릇 동쪽과 서쪽의 두 방향은 원래 음양으로 나뉘고, 왼쪽과 오른쪽의 두 자리는 인의(仁義)가 달리 이루어진다. ()은 선()을 기르는 것이기에 양()이 다시 그 생을 형통케 한다. ()는 마름하여 이룬 것을 주로 하는 것으로, ()은 숙살(肅殺)을 논한다. 두 가지 기운을 가르침으로 삼게 되면 음이 양에 미치지 못한다. 5()으로 말하더라도 인은 깊고 의는 얕으니, 이 같은 것이 방위를 달리하는 세 번째 근거이다[비판: ()은 양()으로 아비인데, 그 방위가 서북간이다. ()은 음으로 어미인데 서방ㆍ남방ㆍ북방이 음이 성한 고장으로 중남(中男)의 방위에 처한다. 남방은 양()이 성한 땅으로 중녀(中女)의 거처이다. 남자와 여자에 정해진 방위가 없어서 음과 양에도 일정한 기준이 없다. ()이 토()를 해치기에 기()를 갑처(甲妻)로 삼는다. ()이 목()을 이기기에 이로써 을()을 경처(庚妻)로 삼는다. 건은 이미 그 자리가 높아서 서북쪽에 처하는데, ()은 출제(出帝)인지라 동방에서 다시 나오니, 그 지극하기가 예석(禮席)과 같다. 만약 남북으로 이를 포설하면 바로 서쪽이 상방(上方)이 되기에 건의 존귀함에 순응한다고 말한다. 동쪽과 서쪽으로 나열하면 남쪽이 상방이 되니, 말 그대로 양이 무성해서 우열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내법에서 깨우쳐 주는 덕위의 고하

무릇 금()은 지아비이고 목()은 지어미인데 음양을 누가 영원히 잡을 수 있겠는가?

()는 남쪽이고 감()은 북쪽이나 남녀에 정해진 방위가 없다. 이로써 자오(子午)가 동쪽으로 양을 삼는 것도 남녀가 동방에서 태어나는 것을 취한 것이다. 자오는 서쪽을 음으로 삼는 것이니 말하자면 부모가 늙어 서쪽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로(生老)에 따라 음양을 가리는 것이지, 존비(尊卑)로써 뛰어나고 열등한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설령 부모가 서쪽에 있더라도 비천하지 않을 터이고 자식인 남녀가 동쪽에 있더라도 어떻게 아비처럼 받들 수 있겠는가?

인은 의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고, 의는 인이 아니면 길러지지 못하는데, 이로써 자오는 동쪽을 인으로 삼고 부모(父母)의 서방은 의에 해당한다. 장소에 따라 기준을 세우되 대방(大方)에 미혹함이 없는데도, 구구하게 그 태어난 곳만 가르고 봉역(封域)에 구애받는다. 서강(西羌)은 대우(大禹)가 나온 곳으로 인범(仁汎)의 덕이 삽시간에 비었고, 동이(東夷)는 문왕이 태어난 곳으로 마름하여 이루는 가르침이 영원히 결핍되었다. 강한(江漢)을 삼켜서 낮고

 

좁은 곳에 구차하게 머물지 않고 위수(渭水)를 흘러가게 하고 경수(涇水)의 물줄기를 돌리니 제황(帝皇)의 신택(神宅)조차 없었다[앞서는 그 삿됨을 꺾어내자 나중에 그 바른 것에 탄식하였다].

무릇 석씨는 천상이나 지하에 존귀함에 우뚝하게 머무르고 삼계(三界)6()에 우뚝함으로 그 오묘함을 이루니, 소학(小學)에게는 2()을 반려삼고 대심(大心)에게는 5()을 짝 지운다. 비유하자면 온갖 별이 북극성을 받드는 것과 같고, 금산(金山)이 벽해를 수놓는 것과 같다. 녹두(鹿頭)와 상면(象面)도 교만한 마음을 굴복하고 육사외도(六師外道)10()도 엎드려 예를 다했는데, 어떻게 서갑(徐甲)6)이 범부에게 창피를 당하고 윤회가 관사(關史)에 이끌리어 아치(牙齒)의 사이에서 배움을 받아[고사전에서는 이르기를, “상송자(常松子)가 그 입을 크게 벌리자, 노자가 치아는 딱딱하더라도 없어지고 혀는 부드러울지라도 남아 있다고 말했는데, 이에 상송자가 참으로 그렇다고 말했다고 하였다.] 장리(藏吏)7)의 사이에서 이름을 거두는가?

이야말로 도가 열등한 세 번째 근거가 된다.

 

-외도가 네 번째로 논하는 화연(化緣)의 넓고 좁음

무릇 중화와 이융은 예의가 서로 다르니 그 존귀함과 비천함은 분전(墳典)에 드러나 있으며, 변방과 중앙의 도가 달라서 그 뛰어남과 뒤쳐짐은 역사책에도 나와 있다. 융적(戎狄)의 군주에게는 멋대로 왕을 참칭(僭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초나라와 월나라의 군주조차도 스스로를 자()라 내렸는데, 어떻게 훈족(獯族)의 소장(小匠)이 우리 천왕(天王)의 대사에 필적하겠는가? 이것이 중화와 오랑캐가 다른 네 번째의 근거가 된다.

-내법에서 깨우쳐 주는 화연의 넓고 좁음

도덕경()에 따르면, “노자가 도를 닦아 스스로 세상을 등지면서 무명(無名)에만 힘쓰니 주나라가 쇠퇴하자 관문을 나서면서 두 편의 가르침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서전모(典謨)에는 노씨가 제정한 것이 나와 있지 않다. 이교론에 따르면 “5천자의 글은 그 말을 이룬 것을 허용하더라도 노자가 윤희에게 말한 것은 대체로 서술하되 창작하지 않은 것이다. 또 직책이 장리(藏吏)에 불과하여 직위가 아형(阿衡)이 아니기에 융성했던 주나라의 종사라는 일은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앞서는 그 삿됨을 꺾어내자 나중에 그 바른 것에 탄식하였다]. 석가가

 

신령을 가유라위에 내려 왕궁에 그 바탕을 의탁하였는데 지혜롭기가 실로 나면서부터 알았으며 도를 두루 깨달았으니, 백억의 중생에게 혜명(慧明)을 연출하고 법운(法雲)을 대천세계에 드리우며 영택(靈澤)을 시방에 두루하였고 신묘한 덕화를 사표(四表)에 드리웠다. 단애처럼 높고 절벽처럼 험준한 전()과 용이 메고 코끼리가 짊어지는 글이 대체로 이곳에 넘쳤다. 비록 떠돌며 숨어 사는 술책으로는 그 작은 티끌조차도 기록하지 못하고, 추연(鄒衍)이 하늘을 논하는 이론으로는 그 한 방울조차도 의논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장전(章詮)의 팔십문(八十文)5천자에 비기려 드는가?

그대가 담장의 틈새만큼도 엿보지 못하면서 무경(武庚)이 관숙과 채숙이 어울린 것을 본받아 비방하더라도 어떻게 해와 달을 상하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그 무식함을 생각하면, 이것이 도가 열등한 네 번째의 근거가 된다.

 

-외도가 다섯 번째로 논하는 장수와 요절의 길고 짧음

무릇 노군이 도에 계합하여도 가운데를 둘러싸니 허공과 더불어 그 양이 같으며, 신령(神靈)이 형상의 바깥을 뛰어넘어 변화에 따라 무궁하므로 수명이 범부와 같지 않고 숨고 나타남이 세속과 확연히 다르다. 석가의 생애는 한계가 있어서 수명이 그 기한을 재촉하기에 한 번 멸하면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데[비판: 노자가 장생하였다 하나 지금 어느 군() 어느 현()에 살아 있는가?] 여든 살이 어찌 위급함을 기약하지 않는가?

-내법에서 깨우쳐 주는 장수와 요절의 길고 짧음

도덕경()에서는 이씨를 배고 나서 태중에 81년간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태양(太陽)의 수()이다. “그 수명이 160년이다라고 하였는데, 태중에서 이미 그 절반을 넘긴 것이다. “삼변오백(三變五百)이다라고 하였으니 장차 진귀하고 괴이한 것을 빌려 칭한 것이 아니다.

태사공이 초나라의 노래자(老萊子)와 주나라 태사 담()을 모두 노자(老子)라 생각하였으니, 230년이라거나 혹은 160세라고도 말했다.

황보밀은 제자(諸子)의 책은 대부분

 

믿기 어려우나 진일(秦佚)이 조문하였다는 것에서 노자가 죽었다는 것만 참되다 하겠다. 세상 사람들이 곡신(谷臣)이 죽지 않는 것을 보고, 이로써 현빈(玄牝)이라 하였으니, 호사가들이 이에 가탁하곤 하였다. 신선전(神仙傳)에서는, 울화자(欝華子)ㆍ녹회자(錄回子)ㆍ전예자(傳豫子)ㆍ태성자(太成子)ㆍ적정자(赤精子)ㆍ무성자(武成子)ㆍ윤수자(尹壽子)ㆍ진행자(眞行子)ㆍ석야자(錫射子) 및 읍선생(邑先生) 등이 모두 노자 자신이라고 이르는데, 이는 잡서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신선의 정경(正經)에서 출전된 것이 아니기에 근거로 삼지 못한다. 무릇 천지에 도술(道術)이 있다 하여 도술하는 선비가 언제 모자란 적이 있었기에, 어떻게 늘 한결같이 한 사람의 노자뿐인가? 모두가 후세에 이것을 배우는 무리들이 기이한 것만 좋아하여 노자를 기리고자 구분을 없앤 것에 불과하다. 소견이 천박한 도사들이 노자를 신비롭게 꾸며내어 후세 학자들에게 이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니, 이 때문에 황당한 말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말은 미더우니 본받을 만하다.

무릇 묘락(妙樂)3()을 갖춰 이루어지고, 법신(法身)5()으로 세워진다. 이로써 생멸을 한꺼번에 내치고 원각(圓覺)의 성품을 드러내어 공()과 유()를 함께 어우르는 영의(靈儀)의 오묘함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 형체는 보고 듣는 표면을 넘어서고 이름도 정진(情塵)의 바깥에서 멈춰짐을 얻게 된다. 고요하게 상락(常樂)함은 글자로 이어 새길 바가 아니며8), 우뚝하게 원명(圓明)함은 말과 형상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비록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가 연달아 익더라도 수명을 늘리지 못하고, 동해의 뽕밭이 몇 번 변하더라도 영구한 것이 아니다. 5()9번 변해서는 승조(繩鳥)가 잠시 머무는 것을 슬퍼하며 새하얀 눈과 검은 서리를 유구(遊駒)에 비교해도 진실로 믿기 어렵다. 참으로 종구(終馗)는 대춘(大椿)9)의 장구함이 없고, 하루살이에게는 거북과 학의 연수(年數)가 드물다. 이야말로 도가 열등한 다섯 번째의 근거가 된다.

 

-외도가 여섯 번째로 논하는 교화한 자취의 전후

도가와 불가의 두 가지 경전이 각각 그 설을 개진하는데, 혹은

 

겁겁이 세상에 나와 다투어 섬기되 우선함이 없고, 또는 대대로 출생하여 다툼이 진부하여 오래되니, 아득하여 증거를 삼기 어렵다. 지금 전()과 사()에 의지하여 그 시대를 결정하니 인륜으로 말하자면, 나이 많은 것은 존귀하고 어린 것은 비천하다. 향당(鄕黨)으로 말하자면 형을 기리고 동생을 어리다 하니 이와 같이 앞서고 뒤섬이 다른 것이 여섯 번째 근거이다.

-내법에서 깨우쳐 주는 교화한 자취의 선후

석가는 융주(隆周)의 초엽에 태어났고 노자는 희계(姬季)의 말엽에 태어났으니, 그 햇수를 말하자면 2백여 년이나 되고 세대를 논하자면 10여 명의 왕이 있었다. 자줏빛 기운과 푸른 소가 소왕(昭王)과 장왕(莊王)의 치세에 있었으나, 신묘한 광명과 흰 코끼리는 환왕(桓王)과 경왕(景王)의 햇수와 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안개가 끼어 하늘을 어둡게 하고 탁한 흐름이 땅을 뒤덮으니, 문중(文仲)이 제사를 거꾸로 지내자 공자가 그 슬기롭지 못함을 탓하였고, 자금(子禽)이 성인을 훼손하자 사()는 그 실언을 비난하였다. 말의 티는 다듬기 힘들어 준마라도 세 치 혀를 따라가기 힘들다고 이른 것이 참으로 허망하지 않다[앞서는 그 어리석음을 꺾어내자 나중에 그 거룩함에 탄식하였다].

무릇 그 자취를 드리워 범부에 응현하고 그 바탕을 위취(危脆)에 의탁하며 기틀을 밟아 만물을 교화하여 수명을 백 년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결국 인연이 되어 닦는다면 믿음이 여기에서 말미암고 미혹을 일으키고 수명을 줄여서라도 교화를 넓히고자 한다면 자씨(慈氏)조차 이 때문에 의심을 내었으니, 어찌 태산을 조약돌로 재어 헤아리겠는가?

비유하자면 수명을 오래하여 아득할 뿐이나, 영허(靈虛)는 잣대로 가릴 바가 아니고 겁수는 멀어 다하지 못한다. 어떻게 뱀굴에서 신선을 구하듯이 그 일찍 죽는 것을 번복하려는가?

쓰르라미가 약을 기다려도 그 목숨을 늘리지 못하는데, 메추라기가 날아올라 대붕과 함께 날개를 펴고 높이 나는 것을 짝하려 들고 노새가 준마와 발걸음을 멀리하는 것을 다투려 하니, 이야말로 도가 열등한 여섯 번째의 근거가 된다.

 

-외도가 일곱 번째로 논하는 천신(遷神)과 반적(返寂)의 다름

노군이 처음 태어난 날이 이미 범부와 같지 않았고, 자취를 숨긴 때에는 세상과 달리하였다. 이로써 서쪽으로 가서 유사를 지나

 

함곡관(函谷關)을 건넜으니, 푸른 소가 경계를 벗어나고 자줏빛 기운이 하늘에 떠 있었으나, 그 자초지종을 헤아리기 어렵고 방역(方域)을 알지 못한다.

석가는 사위성(舍衛城)에서 위험한 병을 끌어안고 쌍림(雙林)에서 운명할 것을 고하고, 관에 불을 질러 시체를 태워 호나라 법과 같이하자, 기운이 다하여 신명이 떠났으니 일찍이 범부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이처럼 세상 떠나는 것을 달리하는 것이 일곱 번째의 근거이다.

-내법에서 깨우쳐 주는 천화와 둔세

도덕경()에서 이씨가 태중에 형체를 받아 사람들에게 시종(始終)의 이치를 보였다하더라도 이 어찌 생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장생(莊生), 노담이 죽자 진일이 조문하였다고 말했는데, 뇌향(賴鄕)에서 태어나 괴리(槐里)에서 죽었는데도 그 자초지종을 헤아리기 어렵다 하니, 이 어찌 장님이 아니런가[앞서 삿됨을 꺾어 내고 나중에 그 올바름에 탄식하였다].

무릇 큰 자비로 원만하게 교화하고 덕이 충만하더라도 인연이 다하고 기틀이 망하면, 인주(仁舟)는 양하(兩河) 사이에 가라앉고 혜일(慧日)은 쌍수(雙樹)에 빠지게 된다. 그 육천축(六天竺)의 여덟 나라가 열을 서고, 법주(法儔)의 성스러운 대중이 짝하면서 우레가 마주치고 바람이 일었으며,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안개가 모였다. 영치(靈齒)와 서골(瑞骨)은 수승한 복을 수방(殊方)에 밝히고 감색 머리카락과 붉은 손톱은 절대(絶代)의 신비로운 공덕을 드러내었기에 이야말로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음을 알게 해준다. 이와 같이 널리 구제하는 덕이 아름다워 드러내지도 않고 숨지도 않아 그 풍화(風化)가 성대하거늘 어떻게 정호(鼎湖)10)에서 죽어 돌아오고 교산(橋山)의 무덤가를 홀로 지키는 것과 같겠는가?

유사(流沙)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부풍(扶風)의 언덕만 헛되이 무덤을 세웠으니[황람(皇覽)에서는 황제(皇帝)의 무덤이 교산(橋山)에 있고 노자의 무덤이 부풍(扶風)에 있다 하였다], 이야말로 도가 열등한 일곱 번째의 근거가 된다.

 

-외도가 여덟 번째로 논하는 상호의 많고 적음

무릇 성인의 묘한 상()은 원래부터 범부와는 다른 것이니, 팔채(八采)ㆍ쌍동(雙瞳)ㆍ하목(河目)ㆍ해구(海口)ㆍ용안(龍顔)ㆍ학보(鶴步)ㆍ반우(反宇)ㆍ기호(奇毫)ㆍ권발(卷髮)ㆍ녹청(綠晴)은 이인(夷人)들의 본래 형상이고, 높은 코와 깊이 들어간 눈은 호나라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인데, 어떻게 내가 성인이

 

기이한 상을 내는 것에 필적하겠는가?

만약 부처를 섬겨서 이 같은 보()를 받는다면 중국의 선비와 부녀자가 호나라 사람 모습으로 바뀔 것이니, 이처럼 상호를 달리하는 것이 여덟 번째의 근거이다.

-내법에서 여덟 번째로 깨우쳐 주는 상호의 많고 적음

성인의 상호와 바탕은 늘 같지 않으니 그 처소에 따라 묘하게 드러난다. 이로써 뱀의 몸과 용머리를 한 성인이 상황시대(上皇時代)에 도를 드러내었으며, 눈동자 두 개에 젖가슴이 네 개인 임금이 중고시대(中古時代)에 그 덕을 빛냈다. 팔을 늘어뜨린 주공의 상은 준마의 한 오라기 털처럼 드물었으며, 귀가 어깨까지 늘어진 우 임금은 곤륜산의 한 조각 옥과 같았다[앞서 미혹을 밝혀 내고, 이어서 바로잡는 것을 탄식하였다].

무릇 법신(法身)은 평등하기가 여여(如如)해서 정해짐이 없이 다스려 일컬어짐을 끊어버린다. 만물에 부응해서 몸을 화현하게 되니 묘한 바탕으로 명언(名言)을 섭렵한다. 그러므로 백호(白毫)와 감첩(紺睫)이 빛나고 과순(果脣)과 화목(花目)이 아름다운데다, ()자가 천 갈래로 감기는 상이 있고, 일륜(日輪)과 월채(月彩)가 특별나고, 색 아닌 묘색(妙色)의 용자(容姿)와 상()을 여의면서 상을 구족한 몸을 갖추었다. 그러나 박구(薄拘)는 갖춘 것 같아도 갖추지 못했고 전륜왕은 갖추었으나 명확하지 않다[살차경(薩遮經)에서는, “비색(非色)이 낳는 성품이야말로 여러 상()보다 수승하다고 말했다. 복덕이 수승한 80종호(種好)는 불일신(佛日身)을 오묘하고 장엄하게 한다. 비유하자면 삼천대천세계 4()의 모든 중생이 전륜왕이 되고서 다시 여기에 백 갑절을 보태야 여래 일모의 공덕에 이르고 다시 여기에 백 갑절을 보태야 종호 하나의 공덕에 이른다. 다시 여기에 백 갑절을 보태야 상 하나의 공덕에 이르고 다시 여기에 백 갑절을 보태야 미간(眉間)의 백호상(白毫相) 공덕에 이른다. 다시 여기에 백 갑절을 보태야 하나의 무견정상(無見頂相)의 공덕에 이르고 다시 여기에 백 갑절을 보태야 여계(蠡髻)의 공덕에 이른다]. 선인(仙人)이 이것을 보고 슬퍼하며 황혼의 노쇠함을 한탄하였고, 범지(梵志)가 만나보고 감흥을 일으키며 영화(靈華)의 만나기 어려움을 개탄하였는데, 어떻게 도오(蹈五)와 파십(把十)의 기이한 상을 표시하고 몽기(蒙䫏)와 단치(斷椔)로 기이함을 드러낸 것에 그치겠는가[조식(曹植)상론(相論)에서는, “공자의 얼굴은 몽기와 같고 주공의 모양은 단치와 같다고 했다].

어찌 양문(陽文)11)이 종멸(鬷蔑)12)과 아름다움을 견주고 맹추(孟娵)13)가 방겸(隴廉)14)과 빼어남을 다툴 수 있겠는가? 이야말로 도가 열등한 여덟 번째의 근거가 된다.

 

-외도가 아홉 번째로 논하는 위의(威儀)의 이동(異同)

노자의 가르침의 행동거지, 즉 위의를 갖추어 부복(俯伏)하며 손을 모은 채 물러서니, 검은

 

두건과 누런 도포에 홀()을 쥐고 신발을 끄는 것은 법상(法象)의 표명에 불과하니 이것은 대체로 화하의 옛 제도이다[비판: 도사는 원래 유복(儒服)을 입었기에 속인과 다르지 않다. ()나라 무제(武帝)의 치세에 이르러 비로소 누런 도포를 입었다. 24겹으로 재봉질한 것은 음양(陰陽)24절기에 응한다고 하는데 이는 사람이 멋대로 정한 것이다. 그와 같은 전거는 어디에도 없다]. 석가의 가르침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데다 한 폭은 옆으로 두르고 반자락은 한 편으로 두르는 치마를 입게 하며 머리를 깎아 정수리를 드러내고 개처럼 걸터앉고 여우처럼 쭈그려 앉게 하니 인륜(人倫)에 짝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랑캐의 풍습인데 어떻게 이 같은 형태와 제도가 우리나라의 위의에 필적하겠는가? 이와 같이 형태와 복식을 달리하는 것이 아홉 번째의 근거이다.

-내법에서 아홉 번째로 비유하는 위의의 이동

옥패(玉佩)와 금초(金貂)15)는 나무꾼이 베풀 수 없고, 하의(荷衣)와 혜대(惠帶)는 왕정(王庭)에서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응기(應器)16)는 영묘(靈廟)에 늘어놓는 그릇과 다르고 물들인 옷은 조종(朝宗)의 복식과 다르다. 이 때문에 도에 편승하는 이는 혹 기틀에 따라 만물을 따르기도 하며, 덕에 의지하는 이는 혹 시대를 바로잡아 세상을 훈계하기도 한다. 이로써 머리카락을 자르고 문신을 새기기는 해도, 중니(仲尼)가 태백(太白)의 어짊을 칭찬한 것은 일상에 반하여 도에 부합된다. 시인(詩人)은 당체(棠棣)가 꽃피움을17) 아름답게 여겼는데, 하물며 성품을 돌이켜 정신을 맑게 하여 범부와 달리 성인을 이룸에 있어서 그 형태와 복장조차 달리하지 않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옷은 복전(福田)을 모방하고 그릇은 잣대로 헤아리기가 어렵다. 사동(絲桐)으로 귀를 현혹시키지 않고 주자(朱紫)로 눈을 부시게 하지 않으니, 가볍고 살찐 것으로 그 몸을 함부로 하지 않고 위세를 다투어 그 마음을 놀래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나한(羅漢)은 진인(眞人)이니 소리와 색깔에 오염되지 않고 영예나 지위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찌 갈관(鶡冠)18)과 작변(雀弁)19)으로 스스로를 얽매고 이빨을 두드려[磕齒]20) ()를 토하며 도()라고 이르겠는가?

나무에 기어 올라가 물고기를 찾으니 어긋나도 한참이나 어긋난 것이고, 뱃전에 표시를 하여 칼을 찾고자 하니 이 어찌 비루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야말로 도가 열등한 아홉 번째의 근거가 된다.

 

-외도가 열 번째로 논하는 규약의 순역(順逆)

 

노군이 규범을 짓되 오직 효도와 충성만을 생각하여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건지는데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자애로웠으니, 이로써 성교(聲敎)가 영원히 전해져 백왕(百王)조차 어기지 않았다. 현풍(玄風)에 오래도록 가피받아 만고(萬古)에 어긋남이 없으니,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는 항상된 법식[楷式]이 되었다. 석가의 가르침은 부모를 버리기에 어질지도 못하고 효성스럽지도 못하다 하고, 아사세왕(阿闍世王)은 그 아비를 죽였는데도 말을 거꾸로 하여 죄가 없다 하였으며, 조달(調達)은 형을 쏘았는데도 죄를 얻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것으로 범부를 교도하면 사악함만 기르게 될 터인데 만약 세간의 규범을 삼으면 어떻게 선()이 생겨나겠는가?

이처럼 어긋나고 순한 것을 달리하는 바가 열 번째의 근거이다.

-내법에서 비유하는 돈오와 점수

의로움에서 도덕이 비천해지고 예에서 충신의 부박함이 생겨난다. 자잘한 어짊[𤨏仁]은 필부를 기롱하고 대효(大孝)는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흉악하다고 이를 비웃는 것은 도리어 중하의 몸가짐에 어긋난다. 상사(喪事)에 임하여 그릇을 두드리는 것은 화속(華俗)의 가르침을 그르치게 한다[원양(原壤)의 어미가 죽자 관을 타고 노래를 읊었다. 공자도 제사를 도왔으나 이를 탓하지 않았다. 자상(子桑)이 죽자 자공(子貢)이 조문하였는데, 네 아들과 마주 보며 웃었다. 장자(莊子)는 그 처가 죽자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효를 가르치면 천하에서 아비된 사람을 공경하게 되고 충성을 가르치면 천하의 임금된 이를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널리 만국을 교화하는 것이 현명한 군주[明辟]의 지극한 인이 되고, 그 형체를 4()에 드리우는 바가 실로 성왕(聖王)의 큰 효도이다.

불경에서는 “6()로 윤회하는 바탕을 가려 보면 부모 아닌 이가 없으니, 나고 죽어 삼계(三界)로 뒤바뀌어도, 누가 원수 맺고 가까이 하는 것을 가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또 무명이 지혜의 눈을 가려 생사 가운데 오고 가며 짓는 바가 많아서 서로 아비가 되고 자식이 되니, 원한 맺은 이도 헤아려 보면 친구이고 친구도 헤아려 보며 원수 맺었던 이다. 이로써 사문은 세속을 버리고 진리로 나아가되 서류(庶類)를 천상의 권속(眷屬)으로 균등히 하고, 영예로움을 버리고 도로 나아가면서 함기(含氣)를 자신의 부모처럼 평등하게 대한다[보정(普正)의 마음을 행하여 보친(普親)의 뜻을 펼친다]. ()는 청허함을 기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만을 중시하고, ()은 평등함을 귀히 여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원수와 친한 이를 분별하니, 이 어찌 현혹되지 않겠는가?

 

권세를 다투어 부모조차 버리는 것은 역사에 그 일이 분명하니, 제나라 환공과 초나라 목공이 바로 이 같은 부류인데 성인을 욕하려는 것이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이야말로 도가 열등한 열 번째의 근거가 된다.

 

(2) 구잠편(九箴篇)

주나라 치세에 불법의 기연이 없었던 일

외도의 변론: 무릇 말이란 번드레한 언사를 존중하지 않고 이치에 맞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노래는 맑게 울리는 것을 기리지 않고 가락에 맞는 것만을 귀하게 여긴다. 불경에서는 여래가 설법할 때에 여러 나라의 천자들이 널리 모여들었고, 혹 광명을 비추어 대천세계에 두루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단 석가가 세상에 있던 날은 우리나라의 주조(周朝)에 해당하는데, 사서(史書)에 쓰인 것에 누락이 없는데도 천왕(天王)이 저 총령을 찾아갔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중화의 황제가 어질지 못하여 그 도량에 참례하지 못했겠는가?

변방의 비루한 임금들만 연()이 있어 법좌(法座)를 더럽힌 것이다. 광명을 비추면 중생이 고()를 여의게 되는데 이 땅에는 무슨 죄가 있다고 제쳐 놓아 깨달은 사람이 없게 하는가?

홀로 은혜로움에서 벗어나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우러러 능인(能人)을 헤아려보면 이 사사로이 경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비판: 너에게는 부처님을 만나 뵙는 업이 없이 성인을 비방하는 허물만 있으니, 어떻게 신()을 원망하겠는가? 단지 자신의 허물일 뿐이다]. 마음씨를 따지고 실다움을 탓하자면 일마다 어그러지고 말마다 어긋난다. 거짓됨이 분명하기에 헛되다고 이를 말한다. 범부가 깨치지도 못하고 그림자를 따라 짖어대는데도 세간에서 이를 알지 못하니 그와 같이 현혹시키는 것이 첫 번째의 근거이다.

 

내법의 잠언(箴言): 해가 하늘에서 눈부시게 빛나더라도 눈먼 늙은이는 그 색을 보지 못하며, 우레가 땅을 울리더라도 귀머거리는 그 울림을 듣지 못하니, 이것은 아마도 기연의 감득이 끊어진 것이다. 포악을 부리는 흉악한 도척의 마음을 공자의 슬기로도 막지 못했으며, 촌늙은이가 화를 내어도 잘 타일러 그 분노를 제지하지 못했으니, 이 또한 성정(性情)이 이지러진 것이다[장자에 이르기를, “공자가 도척을 만나자 도척이 도리어 공자를 탓하였다. 이에 공자가 송구스러워 그만 물러났다. 유자(劉子), ‘공자의 말이 촌로의 밭으로 뛰어들자 촌로가 화를 내며 그 말을 세웠다. 공자가 자공을 시켜 화해코자 하였으나 더욱 화를 낼 뿐이었다. 이에 마부를 보내어 빌게 하자 촌로가 그만 화를 풀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도에 부합되면 만 리를 떨어져 있어도 부응하고 위세가 어긋나면 간담처럼 붙어 있어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상극이 되는데, 하물며 무시(無始) 이래의 결사(結使:번뇌)는 광막하여 그 고뇌와 애욕이 창해와 더불어 깊이를 다투고, 유위의 업보가 넓어서 그 진로(塵勞)가 산악과 험준함을 다투기에 군정(群情)이 갑작스럽게 이를 수는 없다.

이를 인도하여 점차로 쌓아 나가되, 온갖 행이 다 갖추어 질 수는 없기 때문에 한계를 나누어 권장하는 것이, 마치 천지의 3()에서 비로소 자연과 부합되는 것과 같다[노자에서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고 한다]. 제나라와 노나라가 다시 변하여 지극한 도에 나아가자 먹구름이 때를 맞춰 비를 내렸고 단단한 얼음이 서리를 맞고 갈라졌으니 모두 점차로 쌓아가는 일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의 황제가 덕화를 주제(主帝)하여[수미사역경(須彌四域經)에서는 응성(應聲)보살이 복희씨로, 길상(吉祥)보살이 여와씨(女媧氏)로 화현하였다고 한다.] 순일한 풍화(風化)의 시초에 머무르자, 3()이 그 말을 이루어[공적소문경(空寂所問經)에서는 가섭이 노자(老子), 유동(儒童)이 공자로, 광정(光淨)이 안회가 되었다고 한다.] 이미 순일함의 말단을 부흥시켰다. ()ㆍ허()ㆍ충()ㆍ일()의 이치는 황로가 그 말을 풍성하게 하였고, ()ㆍ서()ㆍ예()ㆍ악()의 글은 주공과 공자가 그 가르침을 융성케 하였다. 사양함을 밝히고 본바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성인에 오르는 단계이니, 3()5()은 인천(人天)이 이에 비롯하여 나아가는 바이다. 대체로 명부(冥符)는 부처님의 이치에 부합하는 정변(正辯)의 지극한 말이 아닌지라, 도를 찾더라도 벙어리나 귀머거리 같고 그 처소를 둘러보아도 멀고 가까움을 다하지 못한다. 이것은 토끼나 말에게 나루터를 묻는 격이고 제도하는 것을 묻더라도 얕고 깊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논해보면 은나라와 주나라의 세대는 석가의 가르침이 행해질 바가 아닌 것이, 마치 염위(炎威)가 혁혁하게 빛나도 어린아이가

 

눈을 바로 하여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번개와 천둥이 칠 때에 겁 많은 이가 귀를 기울여 듣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이로써 강과 연못이 솟구쳐 오르자 소왕이 그 탄신(誕神)을 두려워하였고, 구름과 무지개의 색이 변하자 목후(穆后)가 성인이 떠난 것을 즐거워하였는데[주서이기(周書異記)에서는, 소왕 24년 사월 초파일에는 강과 냇물, 못과 샘이 모두 넘쳤으며, 목왕 52215일에는 태풍이 몰아쳐 나무가 부러지고 하늘이 어두워지며 흑구름이 끼면서 흰 무지개가 서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총하(葱河)를 넘어 교화를 받을 수 있으며, 설령(雪嶺)을 딛고 넘어서 성의(誠意)를 다할 수 있었겠는가?

정명(淨名)이것은 소경의 허물이지 해와 달의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그 천착하는 말들을 궁하게 하는 데 참으로 적합하다 하겠다. 아마도 그대의 혼돈스러운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우니, 이 같은 것은 그대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기에 이것이 그 눈이 멀었다는 첫 번째의 근거이다.

 

불상과 불탑을 이룩하는 일

외도의 궤변: 무릇 동산(銅山)이 무너지자 낙종(洛鍾)이 응하고 가회(葭灰)가 이지러지자 달무리가 사라졌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바람이 불지 않으며, 용이 올라가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구름도 일지 않는다. 지금 석가 부처의 힘이 가장 존귀하다고 하면서 한 생각에 마음을 쓰면 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세속의 범부들이 각각 재물을 기울여 앞 다투어 탑묘를 이룩하고, 주보(珠寶)를 아끼지 않고 당우(堂宇)를 다투어 세우니, 혹 흙을 다져다 단()에다 세워 놓고 오랑캐의 모습을 새겨 놓으며, 금을 바르고 비단에 싸서 이적(夷狄)의 모습을 대신하고, 단청에 오묘함을 다하고 칼과 끌을 다루는 기술을 극진히 하면서 한 번 절하고 한 번 인사드리며 감통(感通)을 바란다. 그러나 호나라 법이 남쪽에 전해진 이래로 6백여 년간 한 사람도 부처를 보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어째서 호나라 사람은 한 번 머리 숙여 절하였는데도 여래를 만나게 되었으며, 한나라는 정중히 하여도 조어장부(調御丈夫)를 만나지 못했는가?

만약 교화가 이르지 못했다고 하면, 이것은 영험함이 없으면서 인간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그 위신력을 헛되이 말하더라도 세간에서 이것을 가려내지 못하니, 이야말로 세상을 미혹하게 하는 두 번째의 근거이다.

내법의 잠언: 좌철(左徹)21)은 성인을 흠모하여 그 상을 새겨 놓고 헌원(軒轅)에게 절을 하였고, 구천(句踐)은 현자를 사모하여 금을 녹여 범려(范蠡)를 모방하였으며, 정란(丁蘭)은 효를 다하고자 칼과

 

끌로 조각해 놓은 상으로 부모를 대신하였으며, 안회(顔廻)는 어짊을 배우고자 벽화를 수놓아 성현을 그려 놓았다. 그러므로 근심과 기쁨이 그 표정에 나타나고 정성이 꿈결에도 통하였다. 이 같은 지극함으로 도리천에서 되돌아오시지 않으시자 우전왕(優塡王)이 목상을 새기고,22) 견림(堅林)23)에서 그림자를 거두시자 아수(阿輸)24)가 마침내 금을 주조하였다. 단청에 묘상(妙相)을 의탁하고 신령스러운 자태를 도금과 끌에 맡기니, 혹 참다움을 엿보려 하자 자리를 비키고, 모양을 베끼려 하자 몸을 돌리기도 하였다[감응전(感應傳)에서 이르기를, “양주(揚州) 장간사(長干寺)에 아육왕(阿育王)의 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그리려 하였으나, 절의 스님이 그 금색(金色)이 훼손될까 허락하지 않았다. 조상주(造像主)가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기를 그 정성에 감응한다면 성상이 서쪽으로 돌아가라고 빌었다. 그리고 고각 내에 안치해 두고 문을 걸어 놓았는데 이튿날 아침에 열어 보니 성상이 서쪽으로 돌아갔는지라 이에 그 모사를 허락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신비로운 감응이 다하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숭상하는 것이다.

상법(像法)이 유포되어 동토(東土)를 교화하여 바른 덕화가 남쪽으로 옮겨 가자 밤중에 금인을 꿈꾸고 강물에 옥마(玉馬)가 떴으며, 신비로운 광채가 상수(湘水)에 비추고, 서기(瑞氣)가 단계(檀溪)에 서렸으며[감응전에서는 여릉(廬陵)의 발몽사(發蒙寺) 육왕상기(育王像記)에 그 성상이 여릉을 나와 삼곡(三曲)에서 서광을 비추어 상주(湘州) 소담(昭潭)에서 그쳤는데, 광명을 내어 기슭까지 훤해졌다고 한다. 무창(武昌) 단계사(檀溪寺)의 서상(瑞像)은 그 상이 단계에 비추어 물속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한다], 장사(長沙)에서 해를 모은 듯한 자태를 드리우고 여악(廬岳)에서는 금을 녹인 듯한 바탕을 드러내었다. 그 같은 일이 이처럼 광대하니 간략하게 말하겠다.

우보(于寶)수신기(搜神記), 임천(臨川)선험기(宣驗記)나 징응(徵應)명상유명록(冥祥幽冥錄)감응전(感應傳)따위에서는 한나라 명제 이래로 제나라와 양나라에 이르기까지 왕공과 고을 관리와 청신사ㆍ청신녀 및 비구ㆍ비구니 등이 지극한 성인을 명감(冥感)하여 눈으로 그 신비한 광명을 목도한 이가 대체로 2백여 명이나 된다. 이처럼 만산(萬山)에 그 자취를 보이고 강물에 비추었으니, 청대(淸臺)의 밑에서는 만월 같은 용좌(容座)를 보이고, 옹문(雍門)의 바깥에서는 상륜(相輪)의 그림자를 보았으며, 남평(南平)은 서상의 응현을 얻었고, 문선(文宣)은 성아(聖牙)를 감득하는 꿈을 꾸었고, 소후(蕭后)는 한 번 주조하매 그대로 이뤄졌는데, 송나라 황제는 네 번이나 그렸으나 이루지 못했으니, 그 같은 실례가 너무 많아서 모두 다 나열할 수가 없다. 아무리 그대가 안목이 없더라도 어찌 저와 같은 신령함을 내치려 드는가?

그러므로 덕은 갖추지 않음이 없기에

 

열반이라 말하고 도는 통하지 않음이 없기에 보리라 말하며, 지혜는 두루하지 않음이 없기에 불타라 말한다. 이곳 한나라 말로 저곳의 범어를 번역하니, 저곳과 이곳에 부처님이 분명해지는 것이 참으로 미덥다 하겠다.

어떻게 이를 증명하는가 하면, 무릇 불타는 한나라 말로 대각이고, 보리는 한나라 말로 대도이며, 열반은 한나라 말로 무위이니, 그대가 온종일 보리(菩提)의 땅을 밟으면서도 대도가 보리의 다른 이름임을 알지 못하며, 대각의 경계에 몸을 받았으면서도 대각이 곧 불타를 번역한 이름인 줄을 깨우치지 못하는구나.

그러므로 장주가 크게 깨우친 이는 나중에야 한낱 커다란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고 말하자, 곽상이 깨우침의 각()이란 성인이다라고 주석하였다. 다시 근심을 품은 이는 모두 깨치지 못했으니, 공구도 그대와 함께 모두 꿈을 꾸는 것이다란 대목에서는 부자와 자유(子游)가 말을 잊어버리고 신묘하게 터득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크게 깨우친 것이 아니다라고 주석하였다.

군자(君子)공구의 이 말 또한 다한 것이다라고 말했어도, 열반이 적조(寂照)하여 헤아리지 못하고 헤아려도 지혜롭게 알지 못한다. 말이 끊어져 마음 씀씀이가 소멸되어야만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 된다. 법신은 3()4()으로 이루어지니 텅 비어 아무것도 없으므로 해탈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묘하게 터득하기만 하면 근심이 그치게 되는데, 부자(夫子)가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멀리 부처님에게 그 공덕을 미루어 본다. 왜냐하면 유향(劉向)고구이록(古舊二錄)을 살펴보면, “불경이 중하에 유포된 지 150년 후에야 노자가 처음으로 5천자를 말하였다. 그러므로 주나라의 노자조차도 불경을 보았던 것이, 그 말하는 언교(言敎)에서 간혹 징험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부자도 무릇 역()이란 무위(無爲)이고 무사(無思)이니,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감득하여 형통한다고 말했는데, 천하의 지극한 신령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와 함께 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대의 귀에 대고 이르노니,

 

그대가 마땅히 오래된 미혹을 버리고 늦게라도 깨우침을 받아야 하리라.

지제(支提)25)를 제작하는 것은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 대체로 과보(果報)에 응하고자 선인(善因)을 심는 것이다. 비간(比干)26)이 충직함으로 그 무덤을 빛냈다. 자르지도 않고 벌초하지도 않으면서 전계(展季)27)가 정조로써 무덤[]을 지켰다. 사민(四民)10선을 마음에 품으며 전륜왕의 은혜를 멀리 생각하고, 삼계는 6신통(身通)을 존중하여 나한의 덕을 밝게 드러낸다[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는 네 부류의 사람에게 이룩해 준다고 한다. 투바(偸婆)는 한어로 총()이다. 전륜왕ㆍ나한ㆍ벽지불ㆍ여래를 말한다]. 지혜는 10()에 두루하고 덕은 4()에 가득하며 묘한 변론이 망언(忘言)에 합치되고 가르침을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드리우며 큰 밝음이 비치지 않는 곳에까지 다하고 불빛을 어둠이 없는 곳에 드리웠다. 그러므로 그 향기로운 재를 금병(金甁)에 담아서[香炭金甁]28) 온몸을 여덟 나라에 퍼뜨리자 그 광채가 선명해지고, 그 몸을 흩트려 시방에 두루 채우자 오색이 영롱하게 빛났다. 허공을 휘감으며 한나라 시대에 빛을 내니 여덟 가지 색채로 나뉘어 빛났으며, 신령스런 감응이 오나라 궁궐에 나타났다. 이처럼 백경(百鏡)의 영감과 천하의 묘탑(妙塔)이 구름과 이슬을 받들고, 목탁의 가락이 풍화를 드높여 자줏빛 기둥과 붉은 대들보가 허공계에 멀리 떠있으며, 곤계[]와 지봉(跂鳳)이 멀리 영방(靈方)에 접하고 잇따라 장려한 자태를 다하며 윤환(輪奐)의 아름다움을 지극히 하였어도, 어떻게 높은 산을 우러러 경행(景行)을 잊지 않는가? 숭상함을 표하고자 건물을 우뚝 세우는 것도 홍유(鴻猷)를 심으려는 것뿐이다. 어찌 우물 속의 변론으로 창해가 넓고 좁음을 조롱하고, 느릅나무와 박달나무의 지혜로 곤륜산의 높낮이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대가 알지 못하여 소경 같은 것이야말로 두 번째의 근거이다.

 

위의와 복식 및 사용 그릇

외도의 궤변: 무릇 예의는 덕을 이루는 묘한 훈요(訓謠)이고 충효는 몸을 세우는 행의 근본이다. 신하와 백성이 옛 법을 잃고도 그 나라가 존속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자손이 불효하면서 그 집안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지금 구담(瞿曇)이 제정한 법은 반드시 옷을 호나라 복식과 같이 하면서 사람 가운데 스승이라 하고, 입으로는 오랑캐의 말이나 읊조리면서 이를 세간에서 귀하다 한다. 무뢰배들이 이로 인해

 

퇴폐해져서 부형의 윗자리에 앉아 스스로를 상문(桑門)이라 부르고, 군왕을 앞에 두고도 오만하여 석종(釋種)이라 자칭한다. 그 집안에 태어나서 어질지 못하고 효성스럽지도 못하며, 나라에 형체를 드러냈으면서 예절도 없고 공경하지도 않는다[비판: 예기(禮記)에서는 아들이 관을 쓰면 그 아비는 초례(醮禮)하며 어미는 절한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지위가 높아서라고 했으니, 참으로 무례하고 불효한 짓이라 하겠다]. 이처럼 그 문호마다 효경[梟獍]의 자식을 배출하고 사람마다 승냥이와 이리의 자식을 기르면서도 가슴을 어루만지며 마음을 논하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천도(天道)에 가까움이 없다면서 중화와 이융이 어찌 나뉘었으며, 오직 덕으로써 보필한다면 어떻게 오랑캐와 한나라를 나눌 수 있는가?

어찌하여 두건을 쓰고 선()을 닦는 것만을 치우치게 훌륭한 복이 아니라 하고, 대머리에게 단월을 행하는 것만이 홀로 과()를 감득한다고 하며, 어짊이 어떻게 머리 깎는 것을 기다린다 하는가?

수진(守眞)에는 그 형체를 훼손하는 수고로움이 없는데도 세상에서 이것을 알지 못하니 이와 같이 미혹됨이 세 번째의 근거이다.

내법의 잠언: 무릇 현성(玄聖)이 장전(章典)을 개칭하며 인과로써 종지를 삼았고, 소왕(素王)이 훈요를 늘어 놓음에 명교(名敎)로써 근본을 삼았다. 명교는 다스려 이룩하는 것에 두고 인과는 도를 세우는 것을 기약하니, 도를 세우는 것은 애착을 버리는 것으로 으뜸을 삼고, 다스림을 이루는 것은 충효를 우선한다. 두 가지 이치가 하늘처럼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해를 같이 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사문은 그 행이 세속에 드러난 바를 뛰어넘고 마음은 속진(俗塵)의 바깥으로 떠도니, 위의롭게 나아가되 법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고, 옷을 입고 그릇을 맞추는 것도 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니염(泥染)은 만 가지 바탕을 함께 돌이키는 것이고, 검은 옷은 온갖 무늬의 색을 지우는 것으로, 간략하게 하여 해탈에 따르며 네모지게 주름 잡아 복전을 표시하고, 옷을 한쪽에 걸쳐 집로(執勞)를 표시하고[예기에서는 집()을 옷깃이라 하였다.] 소매를 잘라 운역(運役)에 편하게 한다[논어에서 평복의 깃을 길게 하되 바른쪽 소매를 짧게 하며라 이른 것이 바로 집()을 만드는 것이다]. 성인이 제정하신 바가 공연히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애착을 버리고 부모를 등지는 것은 성스러운 대중을 맞이하려 함이고, 소리와 색깔을 내던지는 것은 범행(梵行)에 따르고자 함이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사치스러움을 없애고자 함이고,

 

고개 숙여 바탕을 엄숙히 하는 것은 공경함을 잊지 않고자 함이다. 분위(分衛)하며 옷을 털어 입는 것은[掃衣] 목숨을 지탱하고자 함이고, 말에 숨기거나 비뚤어짐이 없는 것은 삿됨을 없애고자 함이다. 소리를 조화롭게 하며 안색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다툼이 없게 하고자 함이고, 들이쉬고 내쉼을 편안히 하는 것은 말을 신중히 하고자 함이다. 세상의 귀한 이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는 것은 정절을 지키고자 함이고, 청빈을 즐기는 것은 도의 성품에 순응하고자 함이다. 삿된 것에 마주하여 피하지 않는 것은 8정도(正道)에 주()하고자 함이고, 안색을 정중히 하는 것은 중생의 병을 애틋하게 여기고자 함이다. 사람과 하늘이 기리는 것은 3()이 깨끗하기 때문이고, 현리(玄理)를 다하고 진여(眞如)를 지극히 하는 것은 구경(究竟)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며, 어짊을 넓혀서 널리 구제하는 것은 충효를 지극히 하려 하기 때문이다.

도사는 이와 같지 못하여 말로는 도를 사모한다면서 마음속으로는 진리에 가까이하지 않는다. 가정을 버렸다면서 그 형체를 세속과 달리하지 않는다. 둥근 관을 쓰더라도 현상(玄象)을 귀감삼지 않으며, 네모난 신을 신더라도 지리(地理)의 밝음을 결한다. 남정(南鄭)이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두건을 쓰고,29) 공기(公旗)30)가 집안을 몰살시킨 홀()을 손에 쥐며, 도욱(道昱)31)이 송나라에 화근을 일으킨 복식(服飾)을 입으며, 손은(孫恩)32)이 진나라를 망하게 한 치마를 끌면서 생민(生民)의 항상된 업을 폐하지 않고 노예처럼 부림 받는 노역조차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세간과 어울려서는 충효의 예절을 어긋나게 하고, 신선을 구할 때는 높이 우러르는 도가 결여되어 있으니, 창승(蒼蠅)이 희고 검다는 변론만을 초래하고 박쥐가 새인가 쥐인가라는 조롱을 받는 것과 같다. 그대가 스스로 이런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이 먼 것이 세 번째의 근거이다[정법념경에서는 비유하자면 박쥐와 같은지라 사람이 새를 잡을 때에는 굴로 들어가 쥐가 되고, 사람이 쥐를 잡을 때에는 굴을 나와 새가 된다고 말하였다. 지금의 제주(祭酒)가 모두들 처자식을 거느리며 인자하다고 하고, 밭을 갈며 신체발부를 훼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왕이 조(調)를 부과하면 바로 출가하였다고 둘러대니, 이 또한 박쥐의 행색이라 하겠다].

 

농사를 짓지 않고 분위(分衛)하는 일

외도의 궤변: 무릇 성인이 세상에 응현(應現)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창생(蒼生)을 제도하여 이익케 하려는 것으로, 우러르고 내려다보며 몸을 숙여 살펴서 군품(群品)을 이롭고 편안케 한다. 이로써 초목을 맛보아 오곡(五穀)의 정기를 합치게 하고 뽕나무를 심어 팔잠(八蠶)의 비단실로 충당한다. 이렇게 하여 옷을 걸치고, 이로써 심고 거두는 것을 남기게 된다. 직정(稷正)33)을 세워 유사(有司)를 두고 옷으로써 백성을 이롭게 하는 바가 이에 있지 않는가?

만약 여인네가 길쌈하지 않으면 천하가 이 때문에

 

추위에 시달리고, 남정네가 밭을 갈지 않으면 천하가 이 때문에 먹을 것이 줄어들게 된다. 지금 석가가 법도를 세워 길쌈을 하지도 않고 김을 매지도 않으니, 그 경전에는 곡식을 끊는 방책(方策)이 없는데도, 논밭에는 심고 가꾸는 농부를 볼 수가 없다. 그 가르침에는 연단(練丹)으로 되돌리는 술법이 없는데도 그 업은 길쌈을 하는 아낙네를 폐지하니, 이로써 발우를 들고 석장을 휘두르며 입에 풀칠하는 것이 누구에게 의지하는지 알기나 하겠으며, 왼쪽으로 옷고름을 매어 비뚤어지게 입는 옷은 어떻게 얻은 것인지 알기나 하겠는가?

그러므로 해마다 굶주림과 추위가 어김없이 닥쳐와도 그 이롭게 함을 듣지 못했으니, 이미 곤궁해진 것을 보면서도 세간에서 이것을 알지 못하는 미혹됨이 네 번째의 근거이다.

내법의 잠언: 도를 도모하되 먹는 것을 먼저 하지 않고 신의를 지키되 반드시 굶주림을 나중에 한다. 이로써 걸 임금이 밭 매는 것을 자랑했으나 공자는 금수와 같다고 말하였으며, 번수(樊須)가 파종법을 배우자 중니(仲尼)가 소인이라고 탓하였다. 직하(稷下)에서 지위가 없는데도 녹을 준 것은34) 그 현명함을 높이기 때문이었다. 검루(黔婁)35)가 벼슬하지 않고도 은사(恩賜)를 받았던 것은 그 청명함을 숭상하였기 때문이니, 선인(善人)의 도가 반드시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만 하겠는가?

내가 말하건대, 석가의 가르침은 인과로써 징험하여 3세의 넓은 근원을 상세히 하는데, 선도(仙道)는 금옥(金玉)만을 숭상하여 한평생의 헛된 낭비에 수고롭다. 왜냐하면 무릇 똑똑하고 어리석은 것과 오래 살고 요절하는 것은 참으로 손가락으로 손바닥 가리키듯이 하며, 가난하고 넉넉하며 귀하고 천한 것은 눈앞에 역력하기에 그 과보의 감응도 형체와 그림자처럼 차이가 없다. 업연(業緣) 또한 소리에 메아리가 울리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이러한 것이 그 이치이다.

단약(丹藥)을 먹고 죽지 않으며 액()36)을 마시고 장생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고시(古詩)에서도 복식법(服食法)으로 신선을 구하지만 대체로 약 때문에 잘못되니 좋은 술 마시고 비단과 무명을 입느니만 못하다. 후인들에게 이르노니 도사들은 삼가하여 이것을 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말이 헛되니 그 같은 공부를 버려라. 함부로 그 연수를 줄이는 것이다.

그대들에게 연단(練丹)으로 돌이키는 방술이 있다면서 어찌하여 다시 논밭을 구하는가? 또 베 짜는 아낙네를 말하면서 처를 거느리는 방을 또한 안다. 그러므로

 

도사는 한결같이 밭을 갈아야만 하고 여관(女冠)은 열심히 길쌈을 매야 하는데 어찌하여 그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충당하지 못하고 늘 몸에 필요한 것조차 부족한가? 길쌈하지 않고 김을 매지 않는다면 바로 부처(負處)에 떨어지는 것이다.

누관(樓觀)의 황건(黃巾)에다 사슴 가죽을 벗고 땅에 의지하며, 현도(玄都)의 귀졸(鬼卒)의 노란 색 도포를 벗어 버리고 나란히 밭가는 것을 살펴보면, 이미 곡식을 끊은 사람이 아니고 그 머슴 사는 것의 수고로움을 부끄러워한다. 스스로 방아를 찧고 간다면 굶주림은 그 가운데 있게 된다. 형체를 수고로이 하고 마음을 근심스럽게 하는데, 도대체 무슨 도가 있다 하겠는가?

한나라 안제(安帝) 원년 임오년에 도사 장릉이 황서(黃書)를 나누어 주며 남녀 간에는 화합하는 법이 있으니 삼오(三五)ㆍ칠구(七九)는 교접하는 도리이다. 그 도의 진결(眞決)은 단전에 있다라고 하였다. 단전이 바로 옥문(玉門)이다. “오직 이 같은 금법(禁法)의 비오(秘奧)를 급히 행하되 도중에 누설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도중이란 바로 익공(溺孔)37)이다. 스승이나 도반, 부모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 근()을 더럽히는 이름이다고 말했다. 또 말하기를, “시집가지 않은 여자아이로 열네 살 이상이면 결명(決明)의 도()가 있다고 말했다. 5천자에 주석을 붙이되, “도를 도라고 이른다는 구절을 아침식사가 맛있다고 새겼고, “상도(常道)가 아니다라는 구절은 저녁에 대변이 된다고 새겼다. “두 가지가 같이 나왔으나 그 이름을 달리 한다는 구절은 사람의 근()이 나오고 빠지는 것이니, 정기가 나오고 빠지는 것이다라고 새겼으며, “그윽하고 또 그윽하다는 대목은 다시 코와 입이라고 새겼다. 장릉이 이 같은 술법을 아름답게 여겨 그 아들과 손자의 3대가 서로 이어 행하였는데, 그대가 이와 같은 것을 본받아 생민(生民)을 더럽히려 하는구나.

만약 백성에게 그대들의 법을 따라 행하도록 권장한다면 즉시 불효불공해져서 세상에 표범과 이리의 씨앗만이 배출되고, 예절도 없고 신의도 없어져서 집집마다 효경(梟獍)의 자식만 생겨날 것이 분명하다.

기이한 재물을 가린다는 것이란 여주(驪珠)를 채취하고자 아홉 굽이 깊은 골짜기도 마다 않는 것이고, ‘화박(華璞)을 구한다는 것이란 남염(藍琰)을 좇아 삼습(三襲)의 위험조차 꺼리지 않는 것이다. ‘보배를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란 지도(至道)를 사모하는 것이니, 문틈으로 들여다보고 세력과 이익을 새털보다도 가볍게 여기되, 그 그윽함에 들어가 영예로운 자리도

 

신발 벗듯이 가볍게 하면서 참다움만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도 그 힘을 아까워하지 않고, 가난한 손님이라도 그 재물을 인색하게 하지 않는 것도 대체로 명익(冥益)을 바라는 것인데, 이 어찌 미혹이라 하는가?

요망함에 이르는 신선술은 그 원류가 깊다고 하겠다. 한종(韓終)과 서복(徐福)이 진나라에서 처음으로 사기를 쳤고, 문성(文成)38)과 오리(五利)39)가 한나라에서 거짓됨을 드러내었다. 학을 부린다고 말하면서도 구름을 타는 실다움을 보지 못하였고, 안개를 먹는다고 말하면서도 굶주림을 달래는 미더움을 보지 못하였으니, 원숭이와 게나 조가비와 같다고 비난받고, 바람 잡고 그림자나 매려 한다는 말을 듣기에 이르렀다[조식(曹植)변도론(辯道論)에서는 선인(仙人)은 원숭이에 속하는 무리이다.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도를 얻어 신선이 되려는 것은 저 꿩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 조가비로 변하는 것이고, 제비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게가 되려는 것이다. 허공을 떠돌면서 그 날개를 연못물에 적시더라도 그 날개가 여전히 보이고 홀연히 투신하며 신을 화하고 몸을 바꾸어도 다시 물고기와 게가 될지니, 어찌 다시 수풀에서 날개짓하며 추녀 끝에 사는 즐거움을 알 것인가? 우애(牛哀)가 병들어 호랑이가 되었다가 그 형을 만났어도 물어 죽였으니 이와 같을진대 변화가 무어 그리 귀하다 하겠는가]. 그 실과(實瓠)를 저버리고서는 그릇을 만들지 못하며 석전(石田)을 폐하게 되면 기예롭지 못하고, 좌도(左道)를 천시하게 되면 허위가 된다. 대체로 실다움을 검토하게 되면 그와 같은 것을 쌓게 되고, 헛된 것만 추구하게 되면 이상한 것만 모은다. 이치에 부합하면 세간이 중히 여기는 것이고, 정리에 어긋나면 만물과 어긋나게 된다. 그러므로 평범한 일일 뿐이니 어찌 미혹되다고 말하는가? 도를 낮추고 부처를 높이는 것 또한 타당하지 않다.

이처럼 스스로 알지 못하고 그대가 눈먼 것이야말로 네 번째의 근거가 된다.

 

가르침을 다스림의 근본으로 삼은 일

외도의 궤변: 무릇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니 근본이 굳어지면 방토가 편안해진다. 이로써 은사(恩賜)가 자식을 기르는 문에 이르고 은혜가 임산부의 안방으로 흘러든다. 그러므로 자손이 제사를 배양하고 대대로 해마다 어그러뜨리지 않는다. 비록 지극한 효가 훼손되더라도 제사를 끊어지게 하지는 못한다. 그럼으로써 국가는 부강해지고 천하는 흥성해지는 것인데, 백성이 이미 쇠락하였는데 집안이나 나라가 남아 있었다는 일은 들은 적이 없다. 지금 불교가 처첩을 두지 않는 것으로 법을 받드는 것[奉法]이라 이름하고, 일찍 떠나가는 것을 열반이라 부르니, 장생(長生)의 방책이 결여된 데다 또한 불사(不死)의 술책마저 없다. 이와 같이 하면 한 세대 내에 집안과 나라가 텅 비게 될 것이다. 속인이 비록

 

복을 구하고자 하여도 그 형체와 목숨이 피폐됨을 알지 못하고 집안의 안녕을 다투어 기리더라도, 어찌 종사가 소멸됨을 깨닫기나 하겠는가?

죽을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독초를 먹고, 물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장강(長江)으로 뛰어든다고 말할 수 있다. 천황(天皇)과 지황(地皇)의 세상에 부처가 없어서 국조가 늘어났으나, 후조(後趙)와 후위(後魏) 이래로 스님들의 국운(國運)이 단축된 것도 바로 참다움과 거짓됨이 섞여서 예악이 조화롭지 못함에 연유하는 데도 세간에서 이를 알지 못하고 미혹되는 것이 다섯 번째의 근거이다.

내법의 잠언: 무릇 정신을 밝혀 성품을 돌이키는 것이 도에 들어가는 요문(要門)이다. 속정(俗情)을 끊고 욕심을 버리는 것은 성과(聖果)에 오르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도가 높은 이를 숭상하고 덕이 넓은 이를 칭찬한다고 말했으니, 도로써 신령함을 전하고 덕으로써 성스러움을 부여받되, 신령함과 성스러움이 서로 전해져야 양사(良嗣)라 이른다. 도의 근원을 막고 덕의 뿌리를 잘라내는 이와 같은 것을 후생이 없다고 이른다. 욕심을 버리는 것을 후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니, 그대는 듣지도 못했는가?

예전에 하상지(何尙之)석씨의 교화는 이루지 못함이 없어서 참으로 도에 들어가는 가르침의 근원이고 진실로 세속을 다스리는 데 으뜸이라 부른다고 말하였다.

무릇 한 가지 선을 행하면 한 가지 악을 줄이고, 한 가지 악을 줄이면 한 가지 형벌을 쉬게 하며, 한 가지 형벌이 집안에서 쉬게 되면 만 가지 형벌이 나라에서 쉬게 된다. 그러므로 5()10()이 올바른 다스림의 근본임을 알 것이다. 5계를 닦으면 악취(惡趣)가 줄어들고, 10선을 늘리면 인천(人天)이 길러지고, 인천이 길러지면 올바른 덕화(德化)가 융성해진다. 악취가 쇠퇴하면 재해가 없어지는 것이[정법념경에서는 사람이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면 제천(諸天)이 줄어들고 아수라(阿修羅)가 성하게 되며 착한 용의 힘이 없어지고 악한 용의 힘이 세진다. 악한 용의 힘이 세지면, 서리와 우박이 내리고 때 아니게 폭풍우가 몰아쳐서 오곡이 익지 않게 되며, 질병이 연이어 들고 백성이 굶주리면서 서로 살상하게 된다. 만약 사람이 계율을 지키는 것이 많아지게 되면 제천의 위광(威光)을 증가시키고 아수라를 감소시킨다. 악한 용의 힘이 없어지고 착한 용의 힘이 세져서 비바람이 순조로워지고, 4()가 화창하며 감로비가 때맞추어 내린다. 곡식이 잘 익으며 백성이 즐겁게 살고, 병난이 쉬고 질병이 떠돌지 아니한다고 말했다.] 마치 장작을 고르고 잡초를 자르는 것과 같다. 무성해질수록 드러내기 어렵기에 화염을 끊고 불씨를 식혀서 미묘한 것을 이루어야 드러내기 쉬워진다. 뼈를 강하게 하고 기운을 약하게 하는 것은 이씨(李氏) 늙은이의 지고한 말씀이고, 골수를 충실히 하고 정수를 아끼는 것은

 

선가(仙家)의 깊은 이치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도리어 음욕(婬欲)을 묘한 훈요라 이르고, 처자식을 교화의 근원으로 삼으니, 노자를 받들면서도 그 말을 훼손하고, 신선을 흉내 내면서도 그 술법을 저버린다. 이처럼 개와 말을 사랑하는 것은 그 알아주는 은혜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고, 효경(梟獍)을 싫어하는 것은 그 물어뜯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밤새워 지키면서 수고로움을 대신하여도 그 공덕은 개나 말보다도 못하다. 역린(逆鱗)하고 비방하는 죄는 효경보다 심하니, 이 어찌 아홉 개 달린 살모사가 아니겠는가? 귀신을 수레에 가득 태우니 참으로 두렵기만 하다.

국운과 연조가 길고 짧은 것은 천명이라 이르나, 흥하고 망하고 늘어나고 짧은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요()ㆍ순()ㆍ우()ㆍ탕()이 모두 제명대로 살았으나, ()ㆍ주()ㆍ유()ㆍ여()는 오랜 세월을 살지 못하였다. 희발(姬發)40)이 도를 행하여 오래 살았으나, 영정(嬴政)41)은 형벌을 남용하였기에 국조가 짧아졌다[진사(陳思)가 논하기를, “예전의 요()ㆍ순()ㆍ우()ㆍ탕()ㆍ문()ㆍ무()ㆍ주()ㆍ소()ㆍ태공(太公)은 백 살이나 살았다고 한다. 7()3()이 도를 행하며 정무를 돌보았는데, 성인이 다스리는 천하에 신령함이 그치지 않았다. 슬기롭게 한 나라를 다스리며 고심하지 않았고 이렇게 각각 천수(天壽)를 다하였다. 걸 임금이 명척으로 추방되고, 주 임금이 목야(牧野)에서 죽임을 당하고 견융(犬戎)이 유왕(幽王)을 죽였다. 여왕(厲王)은 죽지 않았어도 주나라는 8백 년 만에, ()나라는 이세(二世)에 멸망하였다. 이 당시에는 본래 부처님과 스님들이 없었다]. 모고(謨誥)가 눈앞에 있으니 이를 헛된 말이라 이르지 못하는데, 어떻게 부처가 없으면 국조가 늘어나고 부처가 있으면 국운이 단절된다고 하는가? 말하기란 얼마나 쉬우며 말 바꾸기란 얼마나 쉬운가?

애석하구나. 그대가 자신을 해롭게 하고 남을 해치는 것이 참으로 개탄스럽다. 어둡기가 밤에 돌아다니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눈먼 것이 다섯 번째의 근거가 된다.

 

충성과 효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

외도의 궤변: 무릇 효는 덕의 근본이고 인륜에 우선하는 것인데, 막대(莫大)의 근본을 오직 믿을 뿐이다. 호천(昊天)의 은택은 어떻게 갚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살아서는 온정(溫凊)42)의 공손함을 다하고, 죽어서는 분릉(墳陵)의 예를 갖추는 것이다. 지금 부처가 내리는 훈요는 이것을 방치해 두어 그 해골을 풀숲에 내던지고 재물을 많이 거두어들여 자신의 탑묘나 운영하는 것이니, 어리석은 자를 미혹하게 하여 이와 같은 전례를 폐지케 하고 죽은 아비와 어미의 관마저 돌보고 봉수(封樹)하는 마음까지 없게 만든다[비판:상황(上皇)의 시대를 보면 장례를 치르지 않다가 주나라 둔석(窀穸:埋葬)의 일에서 비롯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등함(藤緘)ㆍ혜독(槥櫝)ㆍ와엄(瓦掩)ㆍ우관(虞官)이 있었는데 모두 중고시대(中古時代)에서 비롯하였다. 주나라 문왕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해골을 들판에 널어 두었는데, 이 때부터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은 장()이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다. 공자가 병이

 

심해지자 문인들이 후하게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으나 공자가 이를 듣고 내가 하늘을 속였으니 마땅히 불모지에나 묻혀야 한다. 봉분을 세우지 말고 가시나무나 둘러 치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화뇌동하여 말세에 장례를 치르니 대체로 속됨을 면치 못한다고 하겠다]. 오랑캐의 죽은 시체와 영혼에는 도리어 묘하게 새기고 치장하는 것만 극진히 한다. 귀신은 그 족속이 아니면 배향하지 않고 만물은 그 선조가 아니면 제사지내지 않는데, 부모는 존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함이다. 수장(水葬)과 화장(火葬)의 풍속이 같지 않고, 시체를 묻어 두고 시체를 놓아두는 것은 고을과 나라마다 원래 다른 것이다. 드러난 채로 버려두거나 다른 것을 써서 복을 구하더라도 어찌 흙이 그 다름을 알기나 하겠는가?

각각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인데, 세간에서 이를 가려내지 못하는 것이 그 미혹함의 여섯 번째 근거이다.

내법의 잠언: 벙어리와 귀머거리를 인도하려면 우러르거나 숙이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사양하여야 한다. 어리석음에 막힌 사람을 깨우치자면 귀를 잡아끌고 손바닥을 들어야 한다.

인륜은 효도와 공경에 근본하니, 효도와 공경으로 나고 이루는 것을 충당한다. 그러므로 부모 없이는 태어나지 못하고 성인이 아니면 세우지 못한다고 말했다. 성인이 아니면 법이 없고 효자가 없으면 부모가 없으니, 이와 같은 것으로 그 생성(生成)하는 이치에 형통하여 스승과 부모의 정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안회(顔回)가 죽자 안로(顔路)가 공자의 수레를 청하였는데, 공자가 안회는 나를 아비처럼 보았지만 나는 안회를 자식처럼 여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체로 그 이치는 사랑하고 공경하는 예가 다르더라도 두 가지 이치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현명하거나 어리석은 성품은 그 인품이 달라서 세 계단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살아 있으면 효성스럽게 공양하여 어긋남이 없게 하고 죽으면 장례를 지내되 예법에 맞게 하는 것이 예제(禮制)의 다름이다. 작은 효는 힘을 쓰고 중간 효는 수고롭게 하며 큰 효는 모자람이 없게 하니, 이처럼 성품이 달리 나뉜다. 저 석가의 가르침과 견주면 그 이로움이 바로 이런 것에 있다. 피를 닦고 몸을 사르는 부류와 보탑(寶塔)과 인사(仁祠)의 예법 모두가 그 시작을 정중히 하고 끝맺음을 신중히 한다[敬始愼終]고 이르는 것이다. 전륜왕이 84천 개의 불탑을 이룩하고 제석천이 3천 개의 투바(偸婆:탑파, 솔도파)를 이루었으니,[아육왕경(阿育王經)에서는, “왕이 84천의 궁인을 죽이고서 밤에 궁중에 울음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이에 왕이 후회하며 84천 개의

 

탑을 이룩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로써 진단에도 불탑이 있게 되었다. 석제환인(釋提桓因)은 천상에다 3천 개의 투바를 이룩하였다.] 바닷물을 퍼내어 구슬을 구하고 네거리를 깨끗이 하고자 돌을 고르는 것은 대체로 힘을 수고롭게 함이다. 군생(群生)을 총괄하여 자신같이 돌보면서 함기(含氣)를 평등히 하여 천속(天屬)으로 삼고, 유루(有漏)의 땅을 다니며 무뢰(無賴)의 짝을 짊어지는 것은 대체로 그 마음을 수고롭게 함이다. 가마를 실상(實相)의 구역으로 돌리고 정신을 적조(寂照)의 장소로 모아서 니원을 목적하여 영원토록 돌이키고자 법신(法身)을 타고 멀리 보니, 이야말로 불궤(不匱)의 도이다. 이에 그 모친이 하늘에서 내려오자, 금관(金棺)을 열고 법구(法句)를 연출하였다.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보배 평상을 잡고 운구하였으니[지도론에서는 정반왕이 죽자 부처가 직접 승상의 다리 한 쪽을 잡고 화장하는 곳[闍維處]까지 가시어 후세의 일체 중생들에게 낳고 길러 주는 은혜를 갚아야 함을 보이셨다고 한다], 효도와 공경을 표하는 의례가 여기서 갖추어졌다. 그 해골을 버리라고 하는 가르침이 어느 곳에 있단 말인가?

경전에서 시체를 날짐승에게 널리 보시하라고 권장하는 것도 그 뜻이 묵은 빚을 갚아서 장래의 업을 면하고자 함이니, 장주가 말대의 후한 장례가 예를 잃는 근본이라고 탓하며, 개미는 어째서 가까이하게 두며 금수는 어째서 멀리 내쫓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지 않은가?

살아 있으면 그 몸으로 여관[逆旅]을 삼고 죽으면 천지로써 관곽을 삼는다. 도리어 상고시대에 의지하여 혐오스런 물건을 매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삶을 경시하고 죽음을 중시하는 폐단이다. 선도(仙道)를 구하는 이는 책상자를 짊어지고서라도 스승을 따르고, 우산을 메고 언덕길을 멀리하는 법이다. 풀더미를 뒤집어쓰고서 난초를 모으며 곰가죽 옷을 입더라도 금 거북은 이루기 힘들고 옥화(玉華)는 그려 보기도 어려운데, 골수가 엉기고 해골이 되도록 헛되이 이 같은 말에나 이른다. 무지개를 타고 교룡(蛟龍)에 업힌다는데 일찍이 그 같은 일을 본 적도 없다. 해골로 버려져 땅귀신이 되고 그 뼈가 천태(天台)가 된다. 따라서 살아서는 기르는 은혜를 결하고 죽어서는 명익(冥益)의 이로움이 없으니, 예심(例心)이 만물을 위태롭게 하고 삿된 그물로 군생(君生)을 가로막는다. 구족(九族)에게는 올바름을 훼손하는 재앙이 따르고 육친(六親)에게는 성인을 훼손하는 업을 초래하여 위태하고 썩은 것만 붙잡는 것이 참으로 한심하다. 거만하여 삼가지 않으니 그 어리석음이 어찌 그리 심한가.

이와 같이 눈먼 것이 여섯 번째의 근거가 된다.

 

 

3보에 번복하지 않는 일

 

외도의 궤변: 무릇 중화와 이족(夷族)의 말과 소리는 같지 않다. 그러나 불경에서 석가모니라 부르니 이것은 오랑캐 말이고, 이 땅의 말로 번역하자면 능유(能儒)라 부른다. 능유라는 이름과 지위는 주공과 공자보다 낮다. 그러므로 능유라는 졸렬한 이름을 숨기고자 석가라는 오랑캐의 발음을 남겨 두는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한나라 말로 는 무()이고, ‘뇩다라는 상()이고, ‘삼먁삼은 정변지(正遍知)이고, ‘보리는 도()이다. 이 땅에 예전에 무상정진(無上正眞)의 도와 노장의 가르침이 있었으니 오랑캐 법과 다를 것이 없기에 이 때문에 번역하지 않았다. 또 보살마하살은 한나라 말로 대선심중생(大善心衆生)이나 이 같은 이름도 비천하여 상사(上士)라 하지 못하기에 그 비루한 칭호를 숨기고자 번역하지 않았다. 대체로 번역하지 않은 부류는 그 예가 모두 이와 같다. 세상의 눈을 가리고 중생의 마음을 어지럽히니, 옛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기려서 그 흐름이 방탕해지는 것은 항상 있는 폐단이다. 같은 것을 싫어하고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은 속세의 항상 있는 비루한 마음씨이다. 이로써 한단(邯鄲)에 포복(匍匐)하는 손님이 있고,43) 약상(弱喪)에는 망귀(忘歸)의 객이 있었으니44), 세상에서 이를 알 수 없으니 미혹됨의 일곱 번째의 근거이다.

내법의 잠언: 이름이 하나의 사물을 얻을 수 없는 것을 실()과 빈()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세상의 헛된 말에 따라 현성의 우열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순가(荀家)는 수()로써 바탕을 삼고 중씨(仲氏)는 산()으로써 그 이름을 지었는데, 산이 언덕[]보다 높다 하나 중씨의 어짊이 부자(夫子)만 못하고, 머리 수()자가 이()를 총괄하나 순덕(荀德)이 노담(老聃)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능유(能儒)라는 이름이 어떻게 주공과 공자보다 비천하겠는가?

그러나 석가라는 명호에는 그 여러 가지의 뜻이 함축되어 있으니, 그 두루함이 만덕(萬德)을 꿰뚫었기에 어질 인()자로 편벽되게 새길 수가 없다. 이는 그 어짊이 네 구()를 뛰어넘는데 어떻게

 

이것을 단정적으로 번역할 수 있겠는가?

일 자체가 어쩔 수 없으니 억지로 그 오래된 명호만 남겨 둔 것이다. 또 도가에 예전부터 정변지(正遍知)의 도()가 있었다고 말하나 보리(菩提)와는 다른 것이 아니다. 참으로 정교(正敎)가 유포된 후에 이 같은 명호를 훔쳐다 날조한 것이니, 그 실체를 조사하고 근원을 따져 보면 어찌 이 같은 명호를 찾을 수나 있겠는가?

상법(上法)은 높고 훌륭한 것이고 도의(道義)는 맑고 형통한 것이니, 정법은 사법(邪法)을 뒤집고 참다움은 거짓됨에 반대된다. 지금 부서(符書)와 주저(呪詛)를 정법이라 이를 수 없는데, 향기로운 풀과 냄새나는 풀이 섞여 있으니 참되다고 이르지도 못한다[도사외귀장부(道士畏鬼章符)에서는 왼쪽에 태극장(太極章)을 두르고, 오른쪽에 곤오철(昆吾鐵)을 차고서 해를 가리키면, 비추는 것이 정지되고 바로 귀신이 엉켜서 천 리 이내는 피바다가 된다고 말한다. 황신월장(黃神越章)을 만들어 귀신을 죽이고 또 적장법(赤章法)을 만들어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수자(守雌)45)하여 하품(下品)만 선망하기에 상품(上品)이라 이름하지 못하고[노자에서는 부드러움을 지키느니만 못하다라고 말하고, 도의 성품이 물에 가깝다고도 말한다.] 입을 꿰매고 눈을 감았으니[장자에서는 이주(離朱)의 눈을 감기고 양자와 묵적(墨翟)의 입을 꿰맨다고 말한다.] 어떻게 도()라 부를 수 있겠는가?

마치 봄철의 새가 지저귀는 것이 노래 부르듯 하여도 새에게는 노래를 부르는 실다움이 없고, 가을철의 벌레가 나무를 파먹는 것이 글자와 비슷하더라도 벌레에게는 글자를 해독하는 참다움이 없다. 그 명과 실이 범람한다는 것은 대체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또 보살을 번역하지 않았다고 의심하는데 이 또한 미혹이 극심한 것이다. 서경에서는 상품의 성인은 기러기와 모기에게까지 덕이 이르렀다고 이르니, 모두 벌레로써 이를 칭하며, 경전에서는 다족(多足)2()의 중생 가운데 여래가 가장 높다고 말씀하시니, 이 또한 곤칩(蜫蟄)으로서 함령(含靈)에 형통하는 것인데, 중생이 어찌 범성(凡聖)을 초월하겠는가?

대심(大心)이란 호칭은 아래로 열등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대가 때를 벗겨 티를 구하나 남위(南威)의 수려함을 훼손하지 못하고 환심을 사고자 찡그리는 것을 본받을지라도 서시(西施)의 어여쁨에 미치지 못한다. 마땅히 다시 그대에게 그 지장(指掌)을 일러 주겠다. 석가는 부처님의 현명(顯名)이고 보리는 법의 존칭이다. 보살은 스님들의 향도가 되니, 3()야말로 승호(勝號)이다. 번역하는 사람이 그 원래 이름을 남긴 것도, 주문(朱門)과 옥주(玉柱)의 참언이나 양부(陽父)ㆍ음모(陰母)의 요언과는 같지 않다[황서(黃書)에서는, 명문(命門)을 열어 진도(眞道)를 감싸고 인영(人嬰)으로 용호(龍虎)를 둘러싸고 삼오칠구(三五七九)를 실으면 천지가 망라된다. 그러므로 주문(朱門)을 열어 옥주(玉柱)를 들이밀고 양기(陽氣)가 음모(陰母)를 고대하는 것이 마치 옥음(玉陰)이 양부(陽父)를 기다리듯 손으로 문질러 잡으라고 이른다]. 말똥을 영신(靈薪)이라 부르고 침을 옥액(玉液)이라 부르고[치아를 두드리는 것을 천고(天鼓)라 부르고, 침을 예천(醴泉)이라 하며, 말똥을 영신(靈薪)이라 하고,

 

늙은 쥐를 옥박(玉璞)이라 하는데, 상청경(上淸經)에 나온다.] 일이 비루하기에 겉으로 드러냄을 겁내어 더러움을 버리고 알아보기 어렵게 하였으니, 마치 신령한 봉황을 그 덕으로 감싸되 보기 힘들고, 비루한 쥐새끼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여 형체를 숨기는 것과도 같다. 비록 그 바탕을 숨기고 같은 것을 섬기더라도 못생기고 어여쁜 것이 서로 다르다. 우매하여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니, 그대가 눈먼 것의 일곱 번째의 근거가 된다.

 

처소가 달라도 제도가 한결같은 일

외도의 궤변: 성인이 교화에 응하되 처소에 따라 인도하게 된다. 호나라에서는 머리를 깎아 정수리를 드러내고 한나라에 처해서는 단정한 것이 진신(搢紳)과 같은 것도, 중화와 오랑캐가 늘 하는 행태이지 가르침이 뛰어나고 열악한 것이 아니다. 만약 부처가 이 같은 관면(冠冕)과 조복(皂服)을 버리고 치의(緇衣)를 두르게 하여 우리 중화의 풍습을 버리고 멀리 호나라의 풍속을 받게 한다면, 이는 관면을 겸하여 형통하지 못한 것으로 바로 그 지혜와 역세(力勢)가 두루하지 못한 것이 되는데, 어떻게 처소에 따라 형체를 드러내어 가르침을 내린다고 이르는가? 참으로 이와 같지 않다면, 바로 부처는 원래 천축의 호나라 신이고 중화의 대성(大聖)이 아닌데, 어떻게 머리 깎는 훈요를 정국(正國)에 내릴 수 있는가?

만약 한나라가 호나라의 형태를 배운다면 머리를 깎고 이름을 바꾸어 부처를 섬겨야 하니, 이와 같이 하면 호나라도 한나라 법도를 익혀서 두건을 쓰고 도를 받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머리를 드러내고 머리카락을 묶는 것이 고을마다 풍속이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애석하게도 선비와 백성이 이로써 선을 닦고자 하니, 참으로 옆집의 썩은 삿갓은 귀히 여기면서도 자기 집에 수놓은 관모는 천하게 여긴다고 할 만하니, 세간에서 이것을 가리지 못하고 미혹되는 것이 여덟 번째의 근거이다.

내법의 잠언: 지극한 도는 운세에 응하되 처소가 없으니, 성현이 기틀을 타고 만물을 인도한다. 공자도 구이(九夷)에 머물면서 그 누추함을 탓하지 않았고, 우 임금은 나국(裸國)에 들어가서는 즐거이 옷을 벗었고, 희백(姬伯)은 월()나라에 유배 가서는 문신을 새겼고, 무령(武靈)도 세속에 따라 호나라 옷을 입었다. 비록 통발과 그물이 그 기술이 다르더라도 고기를 잡고 토끼를 잡는 공덕은 같다고 하겠다. 하물며 풍습이 변하여 마음을 다지고 형체를 훼손하여 뜻을 굳게 하고, 비녀와

 

머리끈을 버려서 도를 만나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라내고 참다움을 닦게 되더라도, 성인이 제정한 것은 헛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의(仁義)3()에서 변하고 도척이 5()의 귀감이 되어 성인의 가르침이 멀리 이어졌는데, 죽은 쥐를 함부로 이름하여[유자(劉子), ()나라 사람들은 죽은 쥐를 옥박(玉璞)이라 하였다고 말했다.] 현화유미(玄化幽微)라 하였으니, 닭과 봉황의 그 바탕을 섞이게 하였다[문자(文子), ()나라 사람들은 산 닭을 봉()이라 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95종류의 외도가 서융(西戎)에 성행하였고 36부의 위경(魏經)이 동국(東國)을 어지럽혔다.

우루겁자(優婁佉子)46)의 논과 위세사주(衛世師主)의 경[열반경에서는 위세사론(衛世師論)이라 한다.]과 길두(吉頭)와 이라(夷羅)의 신선[화선외도(火仙外道)를 길파두(吉波頭)라 하고 수선외도(水仙外道)를 이숙라(夷叔羅)라 한다.]과 말가사야(末伽闍夜)의 도[약제자(若提子)는 단견(斷見)의 외도]와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혹 물과 불에 의탁하여 성인을 구하였고, 해와 달에 근거하여 신화(神話)를 배웠으며, 4()를 비인(非因)이라 집착하였고 3()에 과보가 없다고 지칭하였다. 그 앎[]에 막힌 것이 명산(冥山)처럼 어두운 데다 삿된 마음이 어두운 골짜기와 같이 그늘졌으니, 이와 같은 부류가 서쪽 땅의 삿된 이론이다.

그 다음은 귀신도 웃는 헛된 이야기를 노래삼아 읊은 것이니,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한다 하여 중경(仲卿)의 비루한 마음을 놀라게 하고, 비를 모으고 바람을 모은다 하여 유안(劉安)의 얕은 생각을 경악시켰으며, 혹 몸에 황서(黃書)의 부록(符籙)을 차기도 하고, 혹 입으로 혼령을 날린다는 부적을 외우기도 하고, 혹 금궐(金闕)을 밟으며 신역(神域)에 노닌다 하고, 혹 옥경(玉京)에 살면서 누()를 씻어 낸다는, 이와 같은 예가 동쪽 구역의 이단의 배움이다. 아울러 모두 삿된 그물로 그 마음을 뒤덮고 바늘을 거꾸로 하여 눈을 찔러서 미혹의 구덩이를 깊게 파고, 의심의 성체를 높이 쌓으면서 각각 한쪽 모서리를 끌어안고 삼계에 미혹되어 빠져들었으니, 2()을 다투어 지키면서 9()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식체(識體)가 윤회하면서 무명(無明)이 그 머무는 근본을 가려서 마음이 떠돌아다니니, 취상(取相)47)이 그 깊은 근원에 빠져 버렸다. 대성이 도의 눈으로 미리 살펴보시고 기틀에 따라 약을 내리셨으니, 서쪽 땅에 그 바탕을 일으켜 정교가 동쪽으로 유포되었다. 병이 중하면 의왕(醫王)이 몸소 강림하였고 병이 가벼우면 그 처방을 멀리서 부촉하여 편비(偏裨)로써

 

효경(梟獍)을 잘라냈고 중장(重將)으로써 암고래와 수고래를 죽였으니, 이 또한 석문이 편벽됨을 부드럽게 하는 술법이면서 법왕인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의 위세이다.

성인에게는 두 가지 제작이 없고 용모와 복식의 이치가 고르다. 맑은 시냇물과 혼탁한 강물이 넓은 바다로 들어가면 그 맛이 같아지는 것과 같다. 푸른 옷과 붉은 옷도 수미산에선 그 색깔이 검게 변한다. 충화자(冲和子)선기(琁璣)의 글은 모두가 신선의 죽지 않는 도를 구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오늘날 나 자신의 신명(身命)을 길러서 채화(彩華)에 머물러 3, 5백 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는 참다운 것으로 장생구시(長生久視)48)의 이치도 여기에 있다. 지금의 도사들은 법을 배우되 이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니 대략 단지 불가(佛家)에서와 같이 그 몸이 죽으면 정신(精神)을 밝혀서 승지(勝地)에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것에 해당한다. 만약 이 몸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면 차라리 마음을 기울여 불도를 배우느니만 못하다. 불도는 정신을 단련하여 나날이 밝게 하고 나날이 이롭게 한다. 참으로 명리(名理)가 있어 정혜(定慧)의 법을 고요하게 닦을 수 있다. 어찌하여 수고롭게 스스로 도사라고 이름붙이면서 불가 스님들의 법을 배우는가? 배우면서도 이를 올곧게 하지 않으니 대체로 용을 그리고 호랑이를 그리는 데 짝할 뿐이다. 어째서 녹건(鹿巾)을 풀고 누런색의 도포를 벗어버리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고 가사를 물들여 세존에게 귀의하지 않는가?

세간의 도사들이 행도의 의리를 본받아 논지를 대략이나마 헤아린 연후에야 형통하게 되는데[불가의 경전과 논서를 끌어다가 도가의 책으로 개작한 것을 말한다. 황정(黃庭)원양(元陽)영보(靈寶)상청(上淸)따위의 경전이나 3()의 전()법화경이나 무량수경에서 표절하였다.] 마음을 닦으려면 좌선에 의지해야 감득을 바랄 수 있다[좌선이란 말을 고쳐서 사신(思神)이라 불렀다]. 상청(上淸)은 아주 높아서 상계(上界)의 영역을 밟지 못하며, 태청(太淸)의 선법(仙法)도 버려두고 논의하지 않으니, 어떠한 법을 취하여 불가와 달리하여 도사라 부르는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의취를 얻은 이는 마땅히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그대는 남쪽 사람으로 모산(茅山)의 도사 충화자(冲和子)

 

법을 손수 배웠는데, 충화자는 도은거(陶隱居)와 더불어 늘 불법을 존중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단지 대중 스님들을 만나기만 하여도 예배하지 않는 일이 없었고, 동굴 내에 모두 불상을 안치하고 스스로 문도(門徒)를 거느렸으니, 그 배움을 받는 선비들이 아침ㆍ저녁으로 참회하고 늘 불경을 외우면서 선기(琁璣)에 따라 글을 옮겨 적었다. 충화자가 이같이 제정하였기에 당시에 부처님을 존중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도은거는 대란(大鸞) 법사에게 답하는 글에서 지난달에 말씀을 귀로 듣고 새벽에 눈으로 글자를 보았습니다. 이에 해를 거듭하여 예배드리니, 이로써 진응(眞應)이 찾아와 응하셨습니다. 등나무와 창포를 털어내고서 물을 긷고 꽃을 따 놓고 옷자락을 여미고는 생각을 바르게 하여 경석(警錫)에 귀를 기울입니다. 제자 화양(華陽) 도홍경(陶弘景)이 합장하고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和南]”라고 말했다. 그대의 스승이 일찍이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스님들을 존중하여 달리 이설(異說)이 없었는데, 그대는 어째서 스스로 본종(本宗)에 거스르려 하는가? 의롭지도 못하고 어질지도 못하니, 마침내 그 죄가 극형의 법망을 초래케 되리라.

모자(牟子)의 논에서도, “요 임금ㆍ순 임금ㆍ주공ㆍ공자ㆍ노씨의 교화를 부처님에게 비교하자면 흰 사슴을 기린에 비기는 것과 같다고 말했는데, 그대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눈먼 것이야말로 여덟 번째의 근거가 된다.

 

노자가 부처가 아님을 지적

외도의 궤변: 천황(天皇) 구기(九紀)의 이전에 서계(書契)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태호(太昊) 육효(六爻)의 이후에 문자가 생겨났다. 이 이래로 점차 전적에 실린 것이 많아졌으니, 예전의 현자와 앞서의 성인이 모두 분()과 전()을 지었다. 인사하며 물러서고 창과 칼을 맞댄 것이 모두 전책(篆冊)에 진술되어 있으니, 이로써 좌사(左史)와 우사(右史)가 그 일을 기록하고 그 말을 적어 놓되, 붓가는 대로 바로 말하여 그르치거나 거짓됨이 없었다. 위서(魏書)』 「외국전(外國傳)과 황보밀의 고사전(高士傳)에서도 상문(桑門)부도경(浮圖經)은 노자가 지은 것이다라고 말했고[비판:부도경이란 것은 위략(魏略)서역전(西域傳)에서는 임예국(臨猊國)에 있던 사율(沙律)이라 이름하는 신인(神人)이 전한 것이라 한다. 사율은 나이가 많고 백발인데 늘 사람들에게 부도(浮圖)를 만들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사람에게 재난이 있거나 자식이 없는 이에게는 부도의 재계(齋戒)를 권유하고 재물을 희사하여 죄를 덜게 하였다. 임예왕이 오래도록 태자가 없자 그 왕비 막야(莫耶)가 부도에 제사 지내고서 태자를 낳아, 바로 부도라 이름하였다. 전한(前漢)의 애제(哀帝) 시절에 진경(秦景)이 월지국에 사신으로 가자 왕이 태자를 시켜 구전케 하였는데,

 

이로써 부도의 경교(經敎)가 전한에 일찍이 행해졌다. 63년 후에야 명제가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그러나 진경이 경을 전하였다는 일을 조사해 보아도 노자의 말이라는 언급이 없다. ()나라 때의 도사 왕부(王浮)서역전을 고쳐서 명위화호경(明威化胡經)으로 날조하였는데, 노자가 유사(流沙)에서 오랑캐 왕에게 부도를 만들게 하여 변신하여 부처가 되었다. 바야흐로 부처가 있게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그 속임수가 지극하다 하겠다. 그러나 계빈(罽賓)은 여기서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데도 돌아왔으니, ()나라와 한()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상인과 번사(蕃使)들이 끊임없이 왕래하였으나, 노자가 그 곳에 있었다는 말을 전한 적이 없었고, 호나라 사람으로 화현하여 부도경(浮圖經)을 설하고 그 몸으로 부처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노자가 부도를 만들었다 하여 이 때부터 은혜에 보답하고자 사리를 공양하여 성덕(聖德)을 추앙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거짓되는가?] 원굉(袁宏)후한기(後漢紀)에서는 노자가 호나라에 들어가 몸을 나누어 부처가 되었다는데, 도가의 경고(經誥)에 그 같은 설이 몹시 많다고 하였다[원굉의 한기(漢記)를 검토해 보면, 본래 노자가 부처가 되었다는 글이 없었다. 당시 조정에 박식한 이가 많았다는데 어떻게 귀를 가리고 방울을 훔치려 드는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명위화호경전(明威化胡經傳)에서는 호나라 왕이 노자를 믿지 않자, 노자가 위신력으로 굴복시키니 바로 용서를 빌며 허물을 참회하고 스스로 수염을 깎고 머리를 잘라 허물을 빌고 죄를 빌었다. 노자가 큰 자비로 그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 권교(權敎)를 설하고 근기에 따라 계율로 약속하였는데, 모두 두타(頭陀)와 걸식으로 흉악한 마음을 억제하도록 시켰다. 죄인의 복식처럼 옷을 비뚤게 입혀 억센 성품을 무디게 하고, 그 형모를 훼손시켜 양비(剠劓)의 몸임을 드러내게 하고, 그 처첩을 두는 것마저 금지시켜 해악한 종자를 끊게 하였다[비판: 너희들이 처첩을 두는 것을 금지시키켜 죄를 삼는다면 현도(玄都)에 모여 있는 성인을 제비집 같은 뚝방으로 삼는 것이고, 지덕(至德)의 청허(淸虛)조차 감옥 같은 관사(觀舍)로 삼는 것이 된다. 이미 장생을 배웠다면서 너희들이 늘 처첩을 끼고 있으며 이씨를 흠모하니 모두가 이씨의 양자들이다. 그러나 이이(李耳)의 종씨이면서 사람마다 처자를 구하니, 바로 장릉과 장로가 대를 이어 처첩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남관(男官)과 여관(女官)의 두 가지 이름이 있게 되었는데, 바로 스승을 스승으로 이어가는 별호이다. 위나라와 진나라 이래로 도관에서 아이를 낳았고, 진나라와 양나라 때에는 원내에서 아이를 기르면서 부녀자를 주문(朱門)으로 고쳐 부르고, 남편을 옥주(玉柱)라 바꿔 불렀다. 이처럼 음욕과 외설은 도가에서 나왔으니, 바깥으로 청허(淸虛)를 사칭하며 안으로는 외설스러운 것에만 전념하니,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가]. 이로써 병이 중하면 독한 약을 쓰면서 그 배를 갈라 장을 씻어 내야 하니 죄가 깊을수록 엄한 형벌로 구속하되, 반드시 그 종사를 죽이고 사직을 없애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땅의 군자는 태어날 때부터 도진(道眞)을 이어받았으니[한관의(漢官儀)를 검토해 보면, 경제(景帝) 이래로 국학(國學) 내에 도관을 두어 그 무리를 가르치면서 세간에 도관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ㆍ진()ㆍ제()ㆍ위()의 전대를 고찰해 보면, 오로지 호로(瓠盧)로써 성경(盛經)하였다. 본래 천존의 형상이란 것이 없었다. 임자(任子)도론(道論)이나 두()씨의 유구(幽求)를 조사해 보면, 모두 도는 형체나 바탕이 없으니 대체로 음양의 정기(精氣)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도은거(陶隱居)내전(內傳)에서는 모산(茅山)에 불교와 도교의 두 법당을 세우고 하루 걸러 조례하였는데, 불당에는 불상을 모셨으나 도당(道堂)에는 형상을 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왕순(王淳)삼교론(三敎論)에서는 근세의 도사들이 생계를 이을 방법이 없자 사람들의 귀의를 받고자 불가(佛家)를 본떠서 형상을 만들고, 천존(天尊)과 좌우 보처(寶處)의 두 진인(眞人)이라 거짓되이 부르면서 도당(都堂)에 안치하여 그 의식(衣食)을 마련했는데, 양나라 때의 육수정(陸修靜)도 그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수고롭게 머리를 깎지 않고도 근본적으로 지극한 훈요에 따르니 어찌 대머리에게 빌리겠는가?

그러므로 그 몸에 허물이 없는데 뉴계(紐械:구갑과 족쇄)를 차는 것을 즐겁게 여기며, 집안에 화근이 없는데 검은 상복과 누런 띠를 두르는 것을 생각한다. 우매함이 심하니 참으로 비통하다. 예전에 한나라 명제가 꿈을 꾸고 이 같은 법이 처음 들어왔으니, 다시 호나라 사람을 묘당에 세우되, 한나라 선비들은 따라 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위나라가 한나라의 전철을 밟아 도리어 옛날 관습대로 행하였다. 석륵(石勒)의 날에는 호나라 풍습을 기리고자 스님인 징()도인49)과 모우(毛羽)를 교족(嬌足)하였다. 부역을 피하는 부류가 앞 다투어 수염과 머리카락을 잘랐다는데도, 세간에서 이것을 알지 못한 것은 미혹됨의 아홉 번째의 근거이다.

내법의 잠언: 큰 건물은 여러 가지 자재로 이루어지듯이 군생은 교화가 가능한 한 부류의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방의 성스러운 지혜를 모래에 비겨도 다하지 못하고 8만의 법문을 강물과 바닷물로도 측량하지 못함에 견주게 된다. 그러므로 이쪽에 성인이 있고 저쪽에도 성인이 있어 어깨를 마주하는 곳에서 그 부류를 달리하더라도, 예전의 부처님과 나중의 부처님은 세상이 다르더라도 그 자취를 다 같이 이어 나간다. 상법(像法)과 정법(正法)이 어긋나게 드리우고 깨끗함과 더러움으로 그 구역을 나누니, 악을 다스리고 선을 권장하는 것은 그 유가 매한가지이다.

주공과 공자가 세간에 훈계를 하였지만 일찍이 백왕(百王)을 바꾸지 못하였다. 추연(鄒衍)과 맹자의 독설조차 천 년 동안 아름답게 내려왔는데, 어찌 세 번 변하고 세 번 바뀐 것이 희주(姬周)의 한 세대에 국한되며, 도를 이루어 성불하는 것을 노자의 한 몸에 두겠는가?

이처럼 다른 사람은 성인이 되는 이치가 없는지라 군맹(群萌)이 도에 오르는 기약을 끊었다. 앞서는 열 가지 다른 것으로 비평하더니, 나중에는 한 가지로 같다고 칭찬하는 것과 한 벌의 두루마리 책에서도 칭찬하고 욕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고, 책을 펴는 사이에 마주하고 등지는 것마저 서로 어긋나니, 눈 가리고 털옷 훔친다는 이 같은 속담이 참으로 미덥다고 하겠다.

참되고 거짓된 것은 그 형체를 마주하되, 마치 벼이삭과 돌피가 서로 짝하듯이 한다. 밭을 잘 가는 이는 벼이삭을 남기고 돌피만 뽑아내고, 도를 구하는 이는 참다움에 의지하여 거짓됨을 버린다.

사문의

 

뛰어난 종지가 유포된 지 오래되는지라, 한나라 황제가 마등 스님에게 엎드려 절하고[법본전(法本傳)에 기술되어 있다], 오나라 왕이 강승회(康僧會)에게 허리를 굽히고[오록(吳錄)에서는 오나라 임금이 승회 스님에게 불법은 세속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자, “악행은 저질러 사람에게 발각되면 사람에게 주살당하고, 악행을 저지르고도 이것을 숨기면 귀신에게 주살당한다. 주역에서도 선행을 쌓으면 반드시 경사가 있다고 하였고 시경에서도 복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것이 비록 유가의 세속적인 교훈이라도 불법으로 나아가는 점차적인 훈계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 스님이 처음으로 위나라 군주와 자리를 마주하고[위록(魏錄)에서는 탁발도(拓拔燾)가 최호의 말만 믿고 불법을 헤치고 불상을 부수며 경전을 태우고 스님들을 내몰아 환속시켰는데, () 스님이 이 때 정월 초하루 날 석장을 짚고 법의를 갖추고서 성문에 서 있자, 문지기가 탁발도에게 알렸다. 도가 참수하라고 명하여 칼로 세 번이나 내리쳤으나 상처조차 없었다. 형리가 도에게 알리자, 도가 몸소 패도를 쥐고서 앞서와 같이 내리쳤다. 다시 호랑이 우리에 가두자 호랑이가 눈을 감고 머리를 굴복시켰다. 도가 시험삼아 천사(天師)를 불러다 우리 옆에 세우자 호랑이가 울부짖으며 물려고 하였다. 도가 그제야 부처님의 교화가 맑고도 높아서 황로(黃老)가 이에 견주지 못함을 알고는 담 스님을 상석에 모시고 사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림(道林)이 진나라 군주의 평상에 오르고, 진나라 시절의 치세에 도안(道安)을 극진히 예우하여 함께 가마에 타고, 조나라 땅에서는 징() 스님에게 임금이 비단옷을 올리며 존중하였다[부서(符書)에서는 부주(符主)가 다닐 적마다 도안 스님을 모셔다가 함께 가마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고승전(高僧傳)에서는 석호(石虎)가 불도징 스님을 대화상(大和上)이라고 부르며, 옷을 비단으로 수놓아 매번 대전에서 올리며 왕공에게 명하여 가마를 매게 하였다고 한다]. 모두 도로써 극존(極尊)조차 항복받고 덕으로 만승천자를 귀의시킨 것이 참으로 지극하다 하겠다.

황로의 술법은 그 유래가 서로 다툴 만한 것이 아닌데도, 비재(費才)50)가 뛰어남을 겨루다가 자기 몸을 망쳤고, 최호(崔皓)가 삿되게 모함하다가 그 몸을 해쳤다[위서(魏書)에서 말하기를, “최호와 구겸지(寇謙之)가 탁발도에게 정교를 멸할 것을 권하였다. ()가 나중에 악질에 걸리자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고 한다]. 강빈(姜斌)51)이 삿되게 주장하다가 그 바탕을 헛되이 하였고, 왕부(王浮)52)가 경을 날조하다가 그 몸에 재앙을 불러들인 것도 모두 눈과 귀로 징험되는 것으로, 모두 헛된 말로써 더불어 취할 것이 아닌지라, 그 존중함은 이와 같았는데, 그 욕보임은 저와 같았다.

안회와 민자건이 공문(孔門)을 만나 덕행을 으뜸으로 드날렸고,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귀곡(鬼谷)에서 만나 허황된 속임[浮詞]의 선조에 자리했으니, 이는 사람 됨됨이로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 배운 것의 옳고 그름에 따른 것이다. 또 현신과 간신이 서로 침범하면 간신을 저버리고 현자를 표창하는데, 성인과 사기꾼은 가리기 어려우나 사기꾼을 따져 보면 성인이 드러나니, 사상(蛇床)53)과 미무(蘪蕪)54)가 그 바탕을 함께 해도 처방에 통달한 이는 그 모양을 분별하고 구문(苟吻)55)과 소화(素華)라는 것이 뿌리를 나란히 하여도 약을 아는 이가 그 성분을 잘 분별하는 것과 같다. 이로써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축출되었다가 다시 보직되었으며, 공문이 비었다가 다시 찬 것도 다 연유가 있는 것이다. 한나라 명제가 사견을 시험하여 그

 

예봉을 잘라 내고, 혜일(慧日)이 빛나고 법운(法雲)이 드리워지자 강번(姜潘)이 집을 버리고 도에 들어갔으며, 여초(呂焦)가 거짓됨을 등지고 참다움을 따랐으며, 조마(曹馬)가 지혜의 등불을 전하여 꺼지지 않았고, 진나라와 위나라에서 샘이 솟아 마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대는 징석(澄石)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니, 이 또한 거짓말이 아니겠는가?

황로의 풍화가 부박하여 용모와 복장조차도 변했으니, 도인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것을 세속에서는 암인(閹人)이라 부른다. 저주를 잘하고 욕설을 잘하니 예로부터 귀졸(鬼卒)이라 이름하였다. 그 괴로움을 구하고자 머리를 풀어 헤쳐 목에 두르고 노끈으로 스스로를 묶고서 쇠똥을 몸에 바르고 서로 채찍으로 두들기는 것이다. 그 계율에 따르면, 만약 부록(符籙)을 잃게 되면, 재갈을 물려 무릎 꿇리고 손에 차꼬를 채우고 바람을 등지고 땅을 쓸게 하는데, 버들가지 백 자루가 저절로 닳아 없어져야 모면하게 된다. 주장(秦章)을 훔치면 감옥의 잿더미 속을 기게 하고 등에다 물동이를 지게 한다[도사(道士) 손씨(孫氏)의 법의(法儀)에서 나왔다]. 그 벌을 탓하는 것이 특히 심하여 마치 노예를 다루는 법도와 같고, 죄를 문책하고자 재갈을 물려 꿇어앉히는 것이 축생의 부류에나 견줄 만하다. 그러나 석문(釋門)은 종을 쳐서 대중을 모아놓고 그 당시만 꾸짖는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로 도가에는 금강사자(金剛師子)와 호법선신(護法善神)이 없었다. 이것은 대체로 불교에서 밝힌 것으로 황로가 먼저 획책한 것이 아니니, 이 또한 다른 사람의 뛰어난 규범을 본받고자 우리의 성스러운 자취를 훔친 것뿐이다. 그러므로 안지추(顔之推)신선이 되는 일은 오로지 금옥(金玉)만을 낭비하는 것뿐이니, 대체로 헛되게 내던지는 것이다. 화산(華山)의 밑에 백골이 잡초처럼 우거졌으니, 어떻게 신선이 된다는 이치가 있을 리 있겠는가? 설사 신선이 되더라도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기에 끝내 세간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일렀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것을 배우도록 권하니, 불가(佛家) 3세의 일은 미더워 징험할 수 있으므로 가업(家業)에나 마음을 돌려 경솔하지 말라.

원래 4()5()으로 형유(形有)를 분석하고 육주(肉舟)3()로 군생(群生)을 실어 나르되, 만 가지 행실을 공()으로 돌리고 천 가지 문호를 선()으로 돌이킨다. 변재와 지혜가 어찌 6()과 백씨(百氏)의 헛된 해박함과 비하겠는가? 요 임금ㆍ순 임금ㆍ주공ㆍ공자ㆍ노자ㆍ장자는 미칠 바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귀심편(歸心篇)을 지어

 

자제를 훈계하였는데도, 그대가 이를 알지 못하니, 그 눈먼 것이야말로 아홉 번째의 근거가 된다.

고고(考古) 통인이 점형(占衡) 군자와 더불어 이경(李卿)이 비방한 이론을 살펴보고 개사(開士)가 변정(辯正)한 말을 열람하였다. 상세히 이를 의논하면서 분개하고 한탄하면서 삿되고 바른 것의 그 자취를 달리하고, 참다움과 거짓됨의 그 흐름을 나누고, 그 옳고 그름을 결정하여 득실을 밝히고자 하였으니, 바라건대 후진들은 이것에 의심내지 말지어다.

통인(通人)이 말하였다.

내가, 조화(造化)가 음양에 근본하는 것을 살펴보고 물류(物類)가 천지에서 생겨나는 것을 더듬어 3()의 세상을 거쳐서 5()의 글을 찾아보았습니다. 천존(天尊)이란 신을 보지 못하였고, 대도(大道)의 형상도 없었습니다.

영보(靈寶)의 구천생신장(九天生神章)에서는, ‘기운이 맑은 것이 높이 올라가 양()을 쌓고 하늘을 이루었으며, 기운이 맺혀 찌꺼기로 뭉친 것이 쌓여서 땅을 이루었다. 사람이 생겨나는 것도 모두가 3()에 연유해서 양육되고 9()가 그 형태를 경영하니, 이러한 연후에야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음양이란 것이 사람의 근본이고 천지가 만물의 근본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근본은 기운일 뿐인지라 신()을 따로 말하지 않습니다.”

군자가 말하였다.

도사의 대소은서(大宵隱書)무상진서(無上眞書)따위에서는 무상대도군(無上大道君)55()의 무극대라천(無極大羅天) 가운데 옥경산(玉京山) 위에서 다스리고, 7보로 된 현대(玄臺)ㆍ금상(金床)ㆍ옥궤(玉几)와 선동(仙童)과 옥녀(玉女)가 시중드는 곳, 32천의 삼계(三界) 바깥에 머문다고 이릅니다. 신선오악도(神仙五岳圖)에 따르면, ‘대도천존은 대현(大玄)의 도(), 옥광(玉光)의 주(), 금진(金眞)의 군(), 천보(天保)의 현(), 원명(元明)의 향()과 정지(定志)의 리()의 재앙이 미치지 않는 곳을 다스린다고 이릅니다. 영서경(靈書經)에서는 대라천은 555555중천의 상천(上天)이다라고 합니다.

 

오악도(五岳圖)에서는, ‘()란 도()이다. 태상대도도중지도신명군(太上大道道中之道神明君)은 고요하게 태현(太玄)의 도()를 가장 잘 지킨다고 말합니다. 제천내음(諸天內音)에서는, ‘하늘이 여러 신선과 더불어 누도(樓都)의 북을 조안(朝晏)의 옥경(玉京)에서 울려 도군을 기쁘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 같은 황당한 말을 미루어 보면, 도군은 하늘의 신명(神明)이나, 주ㆍ현에 예속되고, 천존은 다시 하늘의 서민이 됩니다.

불가의 경전에 따르면, ‘삼계의 바깥이 생사를 벗어났다고 이름하니, 분단(分段)의 형체가 없으며, 색ㆍ심의 경계를 여의었다고 논하는데, 어떻게 보대(寶臺)와 옥산(玉山)과 주ㆍ군ㆍ향ㆍ리가 있겠습니까?

허망함이 심해서 이것을 되돌리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단지 도가에는 거짓된 말뿐으로 볼 만한 자취가 없는데도, 세속에서 이것을 배워 향상하는 것이 이미 그 날수가 오래됩니다. 온갖 삿된 것을 다투어 늘어놓되 서로 맞지 않는데, 그 이름을 바로 하고 이치를 상세히 하고자, 지금 그 연기(緣起)를 대략 거론하여 이를 판단하겠습니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요 임금 이전에는 군()과 현()이 없었다가 순 임금이 오악(五岳)을 순행하면서 비로소 주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상서(尙書)에서는, 우공(禹貢)에서 바야흐로 주라는 이름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춘추 때에는 현은 크고 군은 작았는데, 군이 현에 예속되었습니다. 한나라 고조 이래로 현을 군에 예속시켰으니, 이는 전고(典誥)마다 분명합니다. 9()는 우 임금의 자취이고, 백군(百郡)은 진()나라가 병탄한 것입니다. 하물며 도를 얻어 천상에 있으니, 접하는 일마다 꾀함이 없을 터인데도, 어떻게 호구(戶口)에 귀속되고 향리(鄕里)에 사는 것이 일반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까? 이미 주와 현이 있다면 관리와 백성이 있을 터인데, 주목(州牧)과 군수(郡守)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향장(鄕長)과 이사(里司)는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의 동생입니까?

이처럼 배운 것이 구멍만한 도사들과 무식한 황건족이 고금의 일을 알지 못하고 경사(經史)조차 보지 못하고서 인간 세상에 주와 현이 세워진 것만 보고, 천상도 이 세상과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거짓됨을 지켜서 참다움으로 삼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 맥락과 본말은 소도론(笑道論)에서 거론한 것과 같습니다.”

통인이 말하였다.

 

장주가 말하기를, ‘그 시초를 살피면 태어남이 없다[無生]. 다만 무생(無生)이기 때문에 본래 무형(無形)한 것은 아니다. 다만 무형이기 때문에 본래 무기(無氣)한 것은 아니다. 황홀한 사이에 변화하여 기운이 있고, 기운이 변하여 형체가 있고, 형체가 변하여 생이 있다. 사람의 생은 기()가 모인 것으로, 모이면 생이 되고 흩어지면 죽게 된다. 그러므로 유()와 무()가 서로 생하니 만물은 한 가지이다. 어째서 한 가지인가 하면, 천하는 하나의 기운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것에 미루어 말하자면 별도로 대라천에 높이 처하며 홀로 존귀하다고 칭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군자가 말하였다.

양기황정경(陽氣黃精經)에서는, ‘금액(金液)으로 흐르고 금단(金丹)으로 뭉치는 것이 아홉 번 반복하여 기()를 맺고 정()를 이루는데, 정이 변화하여 신()을 이루고, 신이 변하여 사람을 이룬다. 양기(陽氣)는 붉은 빛이기에 이를 현단(玄丹)이라 이름한다. 음기(陰氣)는 노란 빛이기에 이를 황정(黃精)이라 이름한다. 음양(陰陽)이 교합(交合)하여 두 기운이 정()을 내리면, 그 정이 변화하여 신이 되고, 정과 신이 뭉쳐져 구천(九天)으로 올라간다. 구천의 기운이 단전(丹田)으로 내려와서 신과 합쳐져 명문(命門)에 임하는데, 반드시 아홉 번을 지나쳐야 아홉 개의 단()을 이룬다. 위에서는 변화하고 아래에서는 뭉쳐져 사람을 이룬다고 이르는데, 만물을 주재하여 생하게 하는 별도의 신()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통인이 말하였다.

옛부터 명유(名儒)들과 하상공(河上公)이 오천자를 주해한 것을 살펴보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이를 이름하여 이()라 한다’56)고 하였습니다. ()란 정()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니, 이를 이름하여 희()라 한다고 하였는데 희()란 신()입니다. ‘잡아도 얻지 못하니, 이를 이름하여 미()라 한다고 하였는데 미()란 기()입니다. 이것을 모양 없는 모양[無狀之狀], 아무것도 없는 것의 형상[無物之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의 바탕이 아득하고 망망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맞이하여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보지 못함은 기의 형태가 청허(淸虛)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뒤에서 좇아도 그 뒤를 불 수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이는 도의 근본이 기에서 생겨남을 서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청경(上淸經)에서는, ‘내가 아득하고 망망한 가운데 태어나서 참으로 현묘하고 심오하다. 현묘하고 심오한 가운데에서 텅빈 것이[空同] 태어난다. 허공 속에서

 

태무(太無)가 생겨나고, 태무가 변화하여 3()가 밝아지니, 하나의 기는 푸른색이고 하나의 기는 흰색이고 하나의 기는 황색이다라고 이릅니다. ()에서 이()가 생기고, ()에서 삼()이 생긴다고도 말합니다.

생신장(生神章)에 따르면, ‘노자는 원시(元始)의 세 가지 기운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었으니, 이것이 사람을 주재하고 그 바탕을 본받는다. ()은 정령(精靈)이고, ()은 변화이고, 기는 기상(氣象)이다라고 말합니다. 육간적(陸簡寂)ㆍ장긍(藏矜)ㆍ고환(顧歡)ㆍ맹지주(孟智周) 등의 노자의(老子義)에서는, ‘이와 같은 3()을 합쳐 성스러운 바탕을 이룬다고 일렀고, 자연은 모양에 형통하는 바탕이고, 3()는 모양을 구별하는 바탕이다라고 일렀습니다. 도가 종지로 삼는 것을 검토해 보면, 기를 근본으로 삼으며, 3기의 속에 색이 있고 마음이 있는 것을 고찰해 보면, 이미 색ㆍ심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생사의 두려움을 면치 못하는데, 어떻게 항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군자가 말하였다.

원래 도에서 우선하는 것은 기()로써 바탕을 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증명하는가 하면, 양생복기경(養生服氣經)에서는 도는 기(). 기를 보호하면 도를 얻는다. 도를 얻으면 오래 남는다. ()은 정()이다. 정을 보존하면 신이 밝아진다. 신이 밝아지면 오래 산다. 정은 혈맥의 흐름이고 골수를 지키는 영신(靈神)이다. 정이 없어지면 뼈가 썩고 뼈가 썩으면 죽는다고 일렀습니다. 그러므로 장주(莊周)불고 마시고 들이쉬고 내쉬며 오랜 것을 뱉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니, 팽조(彭祖)가 이를 닦아서 수고(壽考)를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말을 비교해 보면, 화기(和氣)를 기를 수 있으면 장생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일러 도를 얻었다고 일컫는 것뿐입니다.”

통인이 말하였다.

설사 도가 있어도 스스로 생할 수 없고 자연(自然)에서 나오니, 도의 근본은 자연일 뿐입니다. 도에는 마주하는 바가 있으니, 이미 다름이 있음에 기인하기에 바로 무상(無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노자가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말하였고, 왕필(王弼)천지와 왕도가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법()이라 호칭한다. 자연이란 이를 것이 없는

 

궁극의 말이고, 도란 지혜와 신령스런 조화[靈和]의 칭호이다. 지혜를 쓰는 것은 지혜 없음에 미치지 못하고 형체가 있는 것은 형체 없음에 이르지 못한다. 도는 유()의 이치이기에 자연의 무()의 이치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일렀습니다.”

군자가 말하였다.

주역』 「건착도(乾鑿度)에서는, ‘예전에 수인씨(燧人氏)가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쳐다보고 방위의 명칭을 결정하였고, 포희씨(庖羲氏)가 이로써 8()를 그렸습니다. 황제(黃帝)가 명을 받아 대요(大撓)를 시켜 갑자(甲子)를 만들고 용성자(容成子)를 시켜 역수(曆數)를 만들었다고 이르니, 5()9()의 설이 여기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설괘(說卦)에서는, ()의 수()인 구()라는 것은 하늘의 도를 세우는 것이니, 음양(陰陽)이라고 말한다. 음은 이()이고 양은 일()이니, 하늘에는 삼()이 있다. 땅을 세우는 도는 부드러움[]과 강함[]이니, 강함은 이()이고 부드러움은 일()이기에 땅에도 삼()이 있다. 사람을 세우는 도는 인()과 의()이니, 의는 이()이고, 인은 일()이기에 사람에게도 삼()이 있다. 삼삼은 구()인지라 음양이 서로 감싸서 만물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별도의 신()이 있어 대현도(大玄都)에 처하여 고개천(高蓋天)에 좌정하되, 위로는 삼청(三淸)을 망라하고 아래로는 삼계를 포용하여 칠영(七英)의 방()에 머물며 구궁(九宮)의 위로 나아가서 신()을 운행하여 기운을 퍼뜨려 만물을 이룩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 어찌 그릇된 말로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덕을 비교해 보면 그 업이 서로 다르고, 자취를 견주어 보면 그 일이 서로 틀립니다. 사문은 공덕을 높이 하여 거스름이 없으나, 도사는 언행(言行)을 내세우면서 허물만 많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자취를 세우고 썩지 않는 현유(玄猷)를 지어가되, 아득하여 기리지도 못하는 것은 오로지 석가의 가르침뿐인데, 어떻게 웅덩이의 작은 물로 빙이(憑夷:河神, 河伯)의 큰 물결을 대적할 수 있습니까? 참으로 견줄 부류가 없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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