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61 불교(광홍명집 12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4.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12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2. 변혹편

 

16) 결혁폐불승사(決對傅奕廢佛僧事[幷表]) 면주(綿州) 진향사(震響寺) 사문 석명개(釋明槩)

비구승(比丘僧) 명개(明槩)가 말씀드립니다.

명개 제가 듣자오니, 3()이 하늘을 통괄하고 5()가 땅을 다스려, ()를 널리 머금어 원대하였으며 덕()은 널리 덮어 어진 가르침을 고루 펴서 백성을 훈도하였기에 자애로운 마음을 드리워 만물을 기르니 중고(中古)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도가 이지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나라 문제가 현명하다 하나 선()을 보고도 따르지 못했고, 현종(顯宗)이 지혜로워 도를 체득하였어도 이에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존의(尊儀)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무릎을 꿇어 감천궁(甘泉宮)에서 금인(金人)의 서상(瑞象)에 절하였습니다. 목을 빼들고 기다리다 덕양(德陽)에 동상(銅像)이 내리는 징조를 꿈꾸고, 마침내 진경(秦景)을 서쪽으로 보내어 유사(流沙)를 넘어 도를 찾았습니다. 마등(摩騰) 스님이 동쪽으로 들어와 총령을 넘어 참다움을 전하자, 이때부터 한조(漢朝)가 차츰 교화되었고 절을 일으켜 백마(白馬)라 이름하였습니다.

도의 흐름이 진나라 치세에 이르러 사찰을 이룩하여 청룡(靑龍)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 간에 존의를 모사하여 사찰과 불탑을 다투어 이룩하고 이것을 기렸는데, 혜운(惠運)이 낙인(落忍)에서 날아오르고, 법수(法水)가 근원이 다하는 곳에서 용솟음 쳤습니다. 유식자(有識者)를 복덕의 숲으로 달리게 하였고 창생(蒼生)을 선()한 땅으로 오르게 하여, 이처럼 불법을 천명하여 어리석은 이들을 교화했습니다.

그러므로 영평(永平) 말년에 상서로운 서응(瑞應)이 잇따르고 오색 구름이 흘러 적셔서 감로(甘露)를 맺었습니다. 택마(澤馬)는 치달리고 신작(神雀)은 날아 모였으니, 주영(朱英)에서 함영(含穎)의 싹을 키우고 자파(紫葩)에서 연리(連理)의 가지가 생겨났기에 참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기적이라 이르고 항상 있지 않는 상서로운 서응이라 하였습니다. 마침내 서역이 자진하여 굽혔고 남월(南越)이 어짊에 귀의하였습니다. 말 안장을 눕혀 놓고 병졸을 쉬게 하며 쇠를 녹이고 칼을 놓았으니, 어찌

 

성령(聖靈)이 내리매 이에 감득하여 계율을 받들고 선을 행하면서 정성껏 이치를 밝혀서 유명(幽明)을 통달한 것에 연유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서경에서도 하늘이 신령한 물건을 내어 성인에게 복을 내려 주시되, 덕이 없으면 이와 같은 것이 숨고 도가 있으면 이를 보게 된다고 말했으니, 이를 돈사(惇史)1)에 기록한 것이 참으로 상세합니다.

우리 대당국(大唐國)이 대기(大期)를 복응하여 운수를 열고 만기(萬機)를 장악하고 역수(曆數)를 다스리며 천명을 내어 나라를 이룬 것을 생각해 보면, 처음 그 의리를 일으키되 도로써 백령(百靈)을 조화롭게 하였고 바야흐로 영도(領導)에 올라 위엄을 만국(萬國)에 드리웠으니, 이로써 세간이 충실해지고 덕화(德化)가 미쳤습니다. 동도(東都)에서 죄인을 벌하였으니, 건덕(建德)의 무주(武周)가 북삭(北朔)에 그 몸을 드러눕히고, 형주(荊州)가 오나라를 평정하고 진롱(秦隴)을 소탕하면서 바야흐로 7보의 대가(大駕)를 날듯이 몰아가며 천륜(千輪)을 이끌되 가볍게 들었으니 우뚝하기가 이를 데 없고 위대하여 그 이름을 누구와 빗대겠습니까?

공은 이미 이루어지고 일 또한 마치자, 한층 더 불법에 마음을 두고 날마다 보살폈습니다. 그러므로 총지(總持)를 장엄하게 하고 구급(九級)을 다시 일으켜 사문 석자(釋子)를 재차 천 명이나 득도케 하니, 상법(像法)의 교화가 전대보다 더욱 흥성하였고 사찰과 불탑이 성스러운 치세보다 더욱 일어났습니다. 이에 3보를 정대(頂戴)하고 4()를 널리 보살피며 합장하여 머리 숙이고, 제왕의 존귀함도 잊고서 마음을 거두어 무릎을 꿇으며 지극히 공경하는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명개가 이같이 경사스러움을 만나고 이같이 상서로운 운세에 처했기에 바야흐로 마음을 식혀 사찰을 깨끗이 하고 현문(玄門)에서 뜻을 다하기를 발원하여 여섯 때마다 정근(定根)하여 성세(聖世)의 덕망에 보답하고 오체(五體)를 굽혀 망극한 은혜에 힘써 보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부혁의 방자한 광언이 주상에게까지 들리고 조정에 퍼지게 되었는데, 경박한 말로 성인을 멸시하고 날랜 입으로 현자를 비방하니, 그 말하는 바가 추악하기는 올빼미 소리와 같고 그 소리는 악독하기가 짐새의 울음과 같습니다. 오로지 불법을 파멸시키고 대중 스님들을 망치고자, 옷과 양식을 끊고 사찰과 불탑을 없애려고 하는데, 그 연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부혁은 일찍이 도사였는지라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을 가슴에 담아 두었는데, 이 때문에 성인을 훼손하고 범부를 뒤떨어지게 하고자, 어리석음을 뛰어난 지혜라 찬양하면서 아래 것으로 위의 것에 자랑하며 짧은 것으로 긴 것을 보태려 하니, 그 이치에 어긋나고 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단지 참언(讒言)으로 덕을 해치며 편중되게 들어 현자를 상하게 합니다. 이 때문에 송()나라에서 자한(子罕)의 말을 듣고 묵적(墨翟)을 가두었고, ()나라가 계손의 말을 믿고 중니(仲尼)를 추방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현자도 일찍이 스스로 면하기 어려웠는데 여덟 조목으로 비방하니, 혹 사람들에게 누가 될까 합니다. 그러나 주상이 밝아서 간특함을 용납하지 않았으니, 허물이 셋이라면 어찌 그 중 하나라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뜬구름은 하늘에 있고 밝은 해는 때를 맞춰 뜨거워지나, 날아다니는 먼지가 눈을 가리기에 양정(陽精)이 이로써 밝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혁이 근거 없는 말로 보고 듣는 것을 어지럽히고 정리(情理)를 현혹시켜 말이 뒤섞이게 하는지라, 이 같은 말은 들을 수도 없는데 어찌 편중되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청하오니, 함께 결대(決對)하고서야 남기거나 폐지한다면 즐거움을 같이 할 수 있겠습니다.

명개가 치문(緇門)의 대중에 참가하여 법려(法侶)에 참여하였는데 홀연히 비방을 듣고 보니 어찌 마음이 상하지 않겠습니까? 칼로 심장을 도려내어도 이보다 아프지 않을 터이고, 칼로 골수를 찌르더라도 어찌 이보다 해롭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비방하는 말로 깊게 상처냄이 이보다 더 심하니, 경전에서도 그 몸을 잃고 법을 지키며 목숨을 바쳐 도를 넓힌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가 아닌가 합니다. 바야흐로 장()을 뽑아내고 담()을 씻어 내어 삿된 반역의 원수를 앙갚음하고자 이와 같이 표주하여 진심으로 사부(師父)의 욕됨을 설욕할 것입니다.

감히 성총(聖寵)을 거슬린 것이 참으로 당혹스럽습니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삼가 상주하오니, 부혁이 부처님을 비방하고 스님들을 폐지하라는 일, 8조를 결파(決破)하고자, 아래와 같이 순서 지었습니다.

첫 번째로 결파하려는 것은, “승니로서 60세 이상은 환속시켜 병정(兵丁)을 삼아 군병(軍兵)을 강하게 하고 농업을 권장시켜야 한다는 일입니다.

명개 제가 듣자오니, 지극한 이치는 말을 초월하여 근본적으로 비방하고 칭찬하는 바깥을 넘어섰습니다. 현종(玄宗)은 말을 여의었으니 말하고 침묵하는 단서마저 뛰어넘었습니다. 그러나 물정(物情)이 이를 깨치지 못하고 그 깊고 얕음을 말에 의탁하니, 세간의 도 가운데 미혹됨이 많아서 헛되이 정세하고 조잡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외의 도가 있어 그 삿됨과 올바름이 서로 다르기에 이도(異道)라고 말합니다. 범부와 성인의 자리를 분별하여 대소의 가르침이 나뉘는데, 만약 1()에 다 같이 모인다면, 어찌 이에 고집하여 부처님을 비방할 수 있습니까?

끝내 지극한 과보로 나아가는 것을 현달(賢達)시키지 않고 참다움을 잘못 말하니, 비유하자면 천 갈래의 개천이 창해(滄海)로 치닫고 만 갈래의 흐름이 거해(巨海)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내도(內道)와 외도(外道)의 그 근거하는 바가 명확한데, 이 어찌 헛된 말이겠습니까?

법화경에서도 여러 과거불(過去佛)이 지금 계시거나 또는 멸도(滅度)하셨거나, 만약 그 법을 듣는 이는 성불하지 않는 이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고, 열반경에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佛性)이 있으니, 궁극적으로 모두 불도(佛道)를 이루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도가의 법륜경(法輪經)에서는 사문을 만나게 되면 무량(無量)함을 생각하며 하루빨리 출가하여 부처님의 참다움을 익힐 것을 발원하라. 만약 부처의 도모함을 보게 된다면 무량함을 생각하여 일체를 널리 법문으로 설입하도록 발원하라고 말했습니다. 영보통현진일경(靈寶洞玄眞一經)에서는 모든 참다운 고선(高仙)들은 이미 불도를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영보태상비요경(靈寶太上秘要經)에서는 제각각 지금 불도를 다 같이 얻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둘이 아닌 묘한 법문은 끝내 고루 섭입하여 하나의 지극한 과보에 반드시 다 함께 오르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단에 집착하여 스스로를 해치면서까지 미혹에 떨어지는지라, 근대의 학자들이 그 뜻을 거두는 것이 참으로 용렬하여 진도(眞道)의 말씀을 몰래 훔쳐다 거짓된 경전에다 안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5()를 윤전(輪轉)하여 선경(仙經)에 기탁하여 만들었으니, 3천위의(千威儀)는 도계(道戒)를 빌려 칭하고, 부처님을 참례하여 법을 받는 것을 천존(天尊)이라 고쳐 만들면서 힘써 행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을 금궐(金闕)로 뒤바꾸었습니다. 본행(本行)을 돌이켜 본상(本相)을 삼고, 부처님 말씀을 도언(道言)이라 이름하고, 불법의 위의를 흉내 내어 대중 스님들의 법식(法式)을 본뜨고, 혹 참다움을 가져다 거짓된 것을 만들었으니, 누가 그 옳고 그름을 가리겠습니까?

정도(正道)를 뒤바꾸어 사도(邪道)로 집어넣었으니, 어찌 전도됨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 하는 일이 어리석은 도둑이 담비옷을 훔쳐다 거꾸로 입는 것과 같고, 그 부류는, 어리석은 범부가 목걸이를 훔쳐다 거꾸로 매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부류를 조목조목 댄다면 그 수효가 참으로 많습니다만,

 

대충 두세 개만 거론하여도 그 실마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단지 부혁은 일찍이 도사가 되어 그 몸에 누런 옷을 걸쳤는데, 이로(李老) 무위(無爲)의 풍화를 따르지 않고 장릉의 병리법(兵吏法)만을 전행(專行)하였으니, 그 또한 쌀도둑 신세가 되어 올바르지 못하게 거둬들였고, 이름을 귀졸(鬼卒)이라 하였으니, 이는 저주(詛呪)하며 기피하는 것입니다. 탕목(湯沐)과 즐소(櫛梳)를 세속과 같이 하며 애욕을 탐하니, 세간과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속마음으로 시기하는 마음을 품고 바깥으로 이치에 벗어나는 말을 풀어내어 비방이 분분하고 욕하는 말이 거듭되니, 이를 참으려고 해도 누가 용납하겠습니까?

지금 일의 조항에 따라 순차적으로 척결하고자 하니, 원컨대 성감(聖鑒)을 드리워 조금이나마 상세히 열람해 주십시오.

부혁은 대중 스님들이 삭발하고 옷을 물들여 입으며 제왕을 알현하지도 않고 부모를 저버리니 충효롭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만, 지금의 도사는 관모와 두건을 머리에 쓰고, 임금에게 절하고 집에 남아 부모를 공양하는 것을 충효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지금 이미 그러하지 않거늘, 어찌 홀로 그릇되다고 책망하는 것입니까? 무릇 충성을 논하자면, 임금을 섬기되 목숨을 다하고 의로움을 다하되 몸을 잊어야 합니다. 효를 논하자면, 부모를 모시되 성의를 다하여, 계시거나 안 계시거나 받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도안(道安)은 직간하여 진()나라를 보호하였고, 불도징(佛圖澄)은 충언으로 조()나라를 바로잡았으며, 목련(目連)은 발우를 받들어 그 어미를 공양하였고, 석가(釋迦)는 관을 짊어지고 부친을 장례지냈으니, 나라를 안녕케 하고 집안을 구제한 것이 어찌 충효가 아니겠습니까?

도사 장로(張魯)는 한조(漢朝)에 반란을 일으켰고 손은(孫恩)은 진()나라 때에 반역을 꾀했고, 진서(陳瑞)는 도를 익혀 그 이족(夷族)을 멸하게 하였으며, 공기(公期)는 선도(仙道)를 배우다가 멸문을 당했는데, 국가를 어지럽히고 집안을 깨뜨리는 것이 어찌 충효라 하겠습니까?

부혁은 또 대중 스님들이 짝을 지어 내통하고 옷을 입은 모양새로 외부를 차단하니, 태아를 없애고 자식을 죽여 예에 어긋나고 천도(天道)에 거슬린다고 무고하였습니다만, 지금 도사들이 기()를 합하여 재법(齋法)을 닦고 교접하여 도를 받으니, 마땅히 태를 보호하여 자식을 낳되 예에 따라 천도에 합쳐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부가 오래 이루어 음양의 근본을 합하더라도 생산(生産)이 없으니,

 

이야말로 참으로 태를 없애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마땅히 가려내어 백성을 만들고 그 자식을 길러 호구(戶口)를 증가시켜 병정을 늘리게 하는 것이, 어찌 나라를 두텁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혁은 또 스님들이 10만이나 되니 60세 이상은 가려내어 병정을 만들면 병마(兵馬)가 강해지고 농업이 권장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병마의 강성(强盛)을 논하고자 대중 스님들의 부류를 찾아보면, 여래의 가르침을 본받아 쌀과 국수의 소찬(素饌)만을 먹고, 토란과 부들로 반찬을 삼기에 몸이 허약하고 힘이 고갈된 데다 심기(心氣)마저 허약하여 살아있는 풀조차 꺾지 못하는데, 어찌 곤충을 밟겠습니까?

인욕(忍辱)을 익히고 자비로움을 닦으며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하기에 적을 만나더라도 겁이 많아 손을 쓰지 못할까 의심스럽습니다. 헛되이 행진(行陣)만 시킨다면 군병의 세력에 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도사의 수효가 수만에 이르는 것을 논하자면, ()을 제사지내고 오()를 섬기면서 금법(禁法)을 받고 부록(符籙)을 행하는 데에 장초(章醮)를 드리우면 반드시 닭과 돼지를 잡고 제초(祭醮)에는 술과 포를 구하니, 고기와 술에 마음대로 취하고 배를 불리기에 몸이 살찌고 힘이 강하며 마음에 용기가 생기고 기가 강해지니 참는 것을 눌러 가까이하지 않고 살리는 것을 미워하며 죽이는 것을 좋아하니, 군진(軍陣)에 임하면 반드시 용감하게 손을 쓰리라는 것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군오(軍伍)에 열을 지어 있으면 반드시 병마의 세력이 강해질 것이니, 그 힘을 겨루자면 도사가 강하고, 그 덕을 논하자면 대중 스님들이 뛰어나므로 버리고 취하는 이치를 이로써 확실히 알 수 있다.

몸소 밭 갈고 힘써 일하여 농업을 권장하라고 말했는데, 이는 좁은 소견에서 연유한 것으로 형통하는 길이 아닙니다. 세속은 한 가지 예법으로 고르게 할 수 없으며, 정치는 한 가지 도로만 다스릴 수 없고, 선비는 한 가지 행실만 취할 수 없으며, 백성은 한 가지 업()으로만 이룰 수 없습니다. 한서(漢書)』 「화식부(貨殖部)에서는 예전에는 4()이 섞여서 살지 않았으니, 선비는 서로 더불어 조정의 연회에서 인의(仁義)를 말하고, 공인(工人)은 서로 더불어 관부(官府)에서 기술을 상의하고, 상인은 서로 더불어 시정(市井)에서 재물의 이익을 말하고, 농부는 서로 더불어 들녘에서 씨앗 뿌리는 것을 논의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네 가지는 각각 그 거처를 안정시켜 그 생업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재물을 얻어 천지의 마땅함을 이루는 이치가 있고 국가의 비용을 충당하는 이로움이 있습니다. 지금 대중 스님들에게도 각각 업이 있으니, 그 내부를 논하자면 자비와 인욕으로 마음을 미루는 것은 바로 선비의 인의이고, 그 외부를 말하자면 선교방편(善敎方便)으로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것은 공인의 기술이고, 그 행실을 논하자면 보시로써 서로 대가를 치루는 것은 상인의 시정이고, 그 도를 말하자면 나와 남을 함께 구제하는 것은 농부가 애써 가꾼 밭입니다. 이와 같이 그 정성의 지극함이 귀신도 감동시킬 만한지라, 오직 덕으로써 천지를 움직이고 자비심을 되돌려 혜택을 내리며 은혜를 베풀어 시절을 윤택케 합니다.

따라서 선정(善政)을 베풀게 되면 비가 세차게 내려 물레방아를 돌리고, 날아다니는 해충이 그 경계를 피해 가고 구릉 위의 보리가 쌍으로 이삭이 열리며 나무가 아홉 싹을 틔우게 된다. 이것은 대체로 선정의 공에 연유하는 것으로, 단지 농업을 권장하는 힘에 따르는 바가 아닙니다.

또 대중 스님들을 제왕에게 배알시켜 조전(朝典)에 편입하자고 이르는데, 이와 같은 것은 얼핏 보아도 미혹의 전도됨이 가장 깊습니다. 이미 구덩이에 빠졌다고 다른 이까지 우물 속에 빠뜨려 함께 빠지려 하는 일이 있을 수나 있습니까?

예전에 환현(桓玄)2)이 찬탈(簒奪)하고 나서 광포하고 무도하여 이같이 논의를 부쳤으나, 조정의 논의가 이것을 따르지 않고 사문 석자(釋子)가 삭발하고 옷을 물들여 입는지라 참으로 방외(方外)의 사람이니, 영역의 예절에 구애받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사를 입어 한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은 조종(朝宗)의 복식이 아닌데 발우와 석장이 어찌 낭묘(廊廟)의 그릇이겠습니까? 그러나 환현이 패역하여 고집을 부리며 깨닫지 않고 삼존을 욕보이고 7묘를 소탕하자, 백성이 원망하고 신이 노하여 대중은 반역하고 가까운 이도 멀리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군사가 동릉(東陵)에서 패망하고, 그 몸은 서포(西浦)에서 망했습니다. 그 뒤집어진 수레의 자취와 같은 명감(明鑒)을 누가 교훈으로 삼지 않겠습니까?

우리 대당 황제께서 천명(天命)의 성스러움을 우뚝 이루시고 휴명(休明)의 기대에 응하셨습니다. 마침내 회창(會昌)의 운세를 맞이하여 도탄(塗炭)에 빠진 것을 구제하고 성교(聖敎)를 넓혀 백성을 훈도하며 지극한 어짊을 드리워 만물을 기르므로 햇수가 순조로워져 해마다 풍년이 되고

 

기후가 부드러워 시절이 창성하였습니다. 지극한 덕과 그윽한 공은 이어져 도의 벼리를 다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안으로는 4()을 품고 바깥으로는 3()을 받들어 가마를 내려 귀의하고 면류관을 벗어 회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팔방이 이마를 조아리고 만국이 그 풍화에 수그리는데, 어떻게 세속을 떠난 사람을 책망하여 속가의 예법을 갖추라 하십니까?

지금 도사들이 갈건(褐巾)을 두르고 판()을 잡고 관모를 쓰고 이미 신하의 옷을 입었으니, 반드시 조알(朝謁)의 예를 행하여야 합니다. 옛날 천사와 같은 귀한 선비도 일찍이 제왕(帝王)에게 절하였는데, 지금 귀졸(鬼卒)의 천부(賤夫)는 반드시 경상(卿相)에게도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도사들은 그 스승의 법도를 익혀서 제왕을 조알하고 관장(官長)을 참배하도록 하여 조전(朝典)에 편입시키는 것이 어찌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로 시대가 이미 9대를 거쳤는데, 그 동안 도사들이 도를 그르치고 조정을 어지럽히며 요망한 말로 국법을 범한 이가 도사(圖史)를 열어 보면 어느 세대인들 없겠습니까?

후한의 헌제(獻帝) , 장릉과 장로가 귀신의 말을 속여 말하고 참서(讖書)를 거짓되게 지어, “한조(漢祚)가 멸한 뒤에 황의(黃衣)가 천하를 얻는다고 일렀는데, 뒤이어 거록(鉅鹿)의 장각과 멀리 바깥으로 내응하여 황건을 만들고 누런 도포를 걸치고, 그 무리를 모아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자 모의하여 사직(社稷)을 위험에 빠뜨렸다가 마침내 주살당했습니다. 예기에서도 도를 그르쳐 백성을 어지럽히는 자는 죽여야 한다고 일렀습니다.

지금 도사들이 이로(李老)가 조정에 참례하던 복식을 입지 않고, 장로의 나라를 어지럽힌 옷을 걸치고 스승과 제자로 서로 이어가면 도둑 같은 형태를 고치지 않습니다. 사람 수가 이미 많아졌으니 서로 함께 결탁하여 적당을 이루면 혹 엿보게 될지도 모르니, 이 어찌 미리 방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숫자를 따져 보면 5만이라 하는데, 이들을 가려내어 병정을 만들고 해마다 세를 물리고 조()를 내려서 남녀를 낳게 하면, 나라가 이로워지고 백성이 두터워지고 병마가 강해지고 농업이 권장될 것입니다.

참으로 명개 저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도 여법(如法)한 이는 존경하여 따르고, 금계(禁戒)에 어긋나는 이들은 폐함이 마땅합니다. 강아지풀과 돌피를 한꺼번에 없애면

 

논밭의 새싹이 울창해질 것이고, 간사함을 멀리하여 그 무리들을 숙청한다면, 어찌 어질어지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로 결파하려는 바는, “절은 초가집이나 토굴로만 짓되…… 진시황과 한무제가 유덕(有德)한 임금이었다는 것입니다.

명개 제가 듣자오니, “법신은 형상이 없더라도 만물에 응기(應氣)하자면 반드시 방소(方所)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짐짓 전신(全身)을 드러내어 다보탑(多寶塔)에 두었으니, 방편으로 그 몸을 조각내어 아육왕(阿育王)의 감실(龕室)까지 유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인연에 따르는 바이고, 있고 없는 것은 만물에 맡기는 것이니, 성스러운 힘의 방편과 변화는 참으로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부처님께서 천축에 태어나시어 그 나라의 풍속에 따라 사유(闍維)로 장례지내고 이를 거두어 탑을 이룩하였으니, 탑은 바로 묘당을 말합니다. ()란 모()이니 제사를 지내며 받들어 섬기되 그 모습이 남아 있듯이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종묘와 사직으로 견주어 보면, 모두 이렇습니다. 단지 여래께서 멸도하신 1백 년 후에 아수가왕(阿輸伽王)3)이 태어나 철륜(鐵輪)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위덕으로 귀신을 부리며, 복력(福力)으로 영묘(靈廟)를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하여 84천의 탑이 해뜨기 전에 이루어졌고, 천 개의 기둥과 백 개의 대들보의 법당이 아침이 되기 전에 이룩되었지만, 이 어찌 사람의 힘을 수고롭게 한 것이겠습니까?

이와 같은 신령한 공덕이 있는데, 어떻게 범부의 마음으로 성현의 일을 의심하겠습니까? 됫박으로 큰 바다를 재어 보려는 것과 같으니 이처럼 잣대로 허공을 헤아리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사리가 동쪽으로 유포되자 오왕(吳王)이 이에 감득하였으니, 강승회(康僧會)가 머리 숙여 기도하자 지극한 정성에 홀연히 임하였습니다. 손권(孫權)이 이를 시험해 보고자 절굿공이로 내리쳐도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마침내 빛을 뿜어내되 그 위로 통하게 하고, 부려(斧戾) 사이를 비추되 그 광채가 옆으로 통하여 암랑(巖廊)의 밑을 비추자, 강승회가 기뻐하며 그 신령스러움을 널리 찬탄하였습니다. 손권과 조정 대신들이 이것을 보고 모두 믿음을 내어 탑을 이룩하고 가람을 설치하였는데, 이로써 강좌(江左)에 불사(佛事)가 크게 펼쳐졌으니, 어찌

 

태상(太上)이 관중(關中)에서 썩은 뼈를 갈라 보아도 사리가 없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까? 천사(天師)가 그 몸을 큰 뱀의 뱃속에서 장사 지냈는데 어찌 남길 몸이나 있었겠습니까? 이에 빙자하여 생겨나는 바가 오로지 간특한 것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리 8()을 남겨 그 유신(遺身)을 표하는 데에 썼다는 것을 듣고 바로 작은 돌멩이 두 개를 가져다 선란(仙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란은 근본적으로 미친 돼지의 음낭이고, 현단(玄壇)은 노자 귀신의 묘당일 뿐입니다. 만약 사리를 호나라 사람의 뼈라 말하더라도, 이치적으로 미친 돼지의 음낭보다는 뛰어납니다. 불도(佛圖)를 호나라의 무덤이라 하더라도, 어찌 노자 귀신의 묘당과 견주어 서로 높이고 낮추면서 그 급수를 같다고 말하겠습니까?

게다가 지금 도사들이 사리를 눈의 티처럼 보는데, 어찌 순순히 귀의하겠습니까? 부도를 보게 되면 마음의 가시처럼 여기고 오로지 훼손할 것만 모의하고, 참으로 사악한 것만 헛되이 궁리하므로 이를 이룰 수나 있겠습니까?

역대 이래로 제왕이 된 자는 예전에 선근을 심고 바른 믿음을 많이 간직하여 보배를 써서 탑을 이룩하고 보물을 거두어 참다움을 기렸던 이들이니, 모두 그 조상을 생각하고 제사지내는[追遠] 정성을 표하여 이와 같이 공경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9층의 불탑을 잘 이룩하여 장엄하게 갖추고, 백 개의 서까래를 얽어 장려함을 다해서 가난한 사람이 이를 받들게 하고자 범궁(梵宮)을 이룩하였습니다. 장자(長者)가 비단줄을 잇자 천당이 나타났으니, 인과의 도리가 이처럼 뚜렷한데도 식견이 어두운 무리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에 대해 논하겠습니다.

인왕경(仁王經)에서는 세간의 제왕에는 다섯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속산왕(粟散王)인데 위덕(威德)이 가장 열등하며, 두 번째는 철륜왕(鐵輪王)이니 염부제를 다스리고 세 번째는 동륜왕으로 2천하를 겸하고, 네 번째는 은륜왕(銀輪王)이니 3천하를 교화하고, 다섯 번째는 금륜왕(金輪王)이니 4천하를 통치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다섯 부류의 왕도 그 지위를 논하자면 상하가 같지 않고, 그 덕을 말하자면 뛰어나고 열등한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진시황과 한무제를 미루어 보면 염부제 내에서 오직 진단(震旦)의 왕일 뿐이니, 다섯 부류의 왕 가운데 속산왕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그 덕이 열등하여도

 

훌륭한 궁전에 머물고 그 지위가 비천하여도 높은 누대에 거처합니다. 은혜로써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오로지 채찍으로 만물을 부렸으니, 신기(神祇)까지 분노하게 하고 책망하게 하는데 이르러 백성조차 개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관(史官)이 이를 폄하하여 무도하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또 그 몸이 죽은 연후에 분릉(墳陵)을 성대하게 이룩하여 만금을 낭비하고 백성을 수고로이 부렸으나, 마침내 골육이 흩어지고 영혼이 없어지면서 날로 적적하게 되는데, 그 위엄과 복덕이 어디에 있다고 하겠습니까?

우리의 석가께서는 세상에 응하시되 홀로 덕과 위신력이 비할 데 없이 높으시니 도는 백령(百靈)의 으뜸이고 신통은 만억을 뛰어넘었으니, 참으로 성인 가운데 지극한 성인이십니다. 공덕이 천성(千聖) 이전보다 뛰어나시니 왕 가운데 법왕(法王)이시고 그 지위가 백왕의 으뜸에 자리하는데, 어떻게 저 부혁이 진시황과 한무제로 그 우열을 다투려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이시야말로 공덕이 높으셔서 훌륭한 전당(殿堂)에 머무시고 지위가 지극하시기에 높은 누대(樓臺)에 처해야 하오며, 또한 만물을 부리시되, 오직 덕화(德化)로써 사람을 감동시키셨지 채찍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왕마다 희사(喜捨)하여 영신(靈神)이 나타나는 것을 도왔으며, 멸도하신 후에는 탑묘를 일으켰습니다. 사리가 멸하지 않아 위령(威靈)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이것을 훼손하고자 하면 그 선 채로 나쁜 징조를 보이고, 이것을 깨뜨리고자 하면 그 눈으로 화가 이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나라 군주 손호(孫皓)가 학정을 펴면서도 음탕하여 죄와 복을 기피하지 않고 보응이란 없다고 이르면서 구리 불상을 파다가 변소 옆에 세워 놓았는데, 48일이 되자 불상에다 소변을 보면서 오늘이 8일이니 그대의 머리를 씻어주겠노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음창[]를 앓게 되어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태사(太史)가 이를 점치고서 대신(大神)을 범하였다고 말하자, 신령한 땅귀신에게 두루 기도하였으나 이적(異蹟)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야 부처님을 가리킨 것임을 듣고서 놀라, 앞서의 허물을 개탄하며 그 불상을 맞이하여 향수로 목욕시키고는 머리를 땅에 대고 사과드리자 그 말소리에 응하여 바로 완쾌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신심을 내고는 종신토록 근신하였습니다.

또 송()나라의 대신 사회(謝晦)가 몸소 형주성(荊州城)에 부임하게 되자, 성 안에 5층탑이 있었고 절 안에 사리탑이 있었는데, 사회가 성품이 흉악하여 원래 지극한 신심이 없었기에

 

사찰이 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허물어 실어 내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탑 앞에 이르렀는데, 대중이 모두 두려워하여 손을 쓰지 못하자 사회가 군인을 시켜 북을 치면서 핍박하여 감문(龕門)을 때려 부수고 존상(尊像)을 파괴하였습니다. 잠깐 사이에 구름이 뒤덮여 땅이 어두워지고 모래 바람이 하늘에 가득하여 사회와 군인의 몸에 흙먼지가 자욱하였습니다. 손으로 닦아 내는데 살갗과 살점이 함께 떨어지면서 바로 악질(惡疾)이 되어 온몸에 종기가 생겼습니다. 오래지 않아 반역을 꾀하다가 곧바로 주살되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송선(宋宣)영험기(靈驗記)에서 말하는 것과 같기에 기전(記傳)에 의거하는 것은 이만 줄이겠으나, 이 같은 사례로 소통하는 것은 여러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 제시하여 그 마음의 이목을 밝혀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석가가 세상에 응하자 만물이 함께 받들었기에 예전부터 있었거나 지금 이룩하고 있는 사찰과 탑묘는 그대로 남겨둘 것을 명개 저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청하고자 합니다. 이로(李老)가 세상을 버리고 마음으로 허무(虛無)를 숭상하였는지라, 그 세간에 있을 때 관사(館舍)라는 것조차 없었는데, 지금 앞 다투어 이룩하니 바라건대 이 같은 것을 없애야만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결파하려는 것은 여러 주와 현마다 사찰과 불탑을 헐어 내어야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가 다스려진다는 일입니다.

명개 제가 듣자오니, “예전의 어진 임금은 자신을 공손히 하여 남면(南面)하였는데, 그 지혜가 천지에 내려앉더라도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 변재(辯才)가 만물을 덮더라도 일찍이 스스로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수고롭게 선비를 찾아다니며 선비를 마구 부리는 데 편안해 하십니까?

단지 그 사람을 얻게 되면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찾아 아실(我室)을 열고 명당(明堂)에서 정사를 생각하고, 업무를 헤아려 유사에게 분할하고 방토(方土)에 따라 직관(職官)을 수여하면, 팔개(八愷)4)가 잇따르고 10()이 조정에 이르더라도 국가를 보호할 수 있고 사직을 안녕케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자비의 덕화를 넓히고, 부조(賦租)를 경감하여 가난한 이를 구휼하고 지극한 어짊의 가르침을 행하며, 형벌을 간략히 하고 옥사(獄事)를 조심히 하면서 덕을 펴되, 그 은택을 멀리 이르게 하여야 점차로 편안해질 것입니다. 공을 이루면 예()를 제정하고 악()을 짓는데, 이같이 하면 지극한 다스림이라

 

칭송할 수 있습니다. 서경에서도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으로 기틀을 삼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은 좋은 관리로 근본을 삼는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을 얻으면 나라가 편안해질 것이고 그 사람이 아니라면 백성이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신과 좋은 관리를 가려야만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반드시 선을 기리고 복을 짓고 과보를 심으려면 인()을 닦아야 하기에 신명(神明)을 정중하게 섬기고 영묘를 받들어야 하는데, 어찌 불탑을 부수고 묘당을 폐하며 사찰을 압수하여 스님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까?

영기(靈祇)는 화와 복의 징조가 되니 반드시 근신하여야 하는데, 부혁의 흉악하고 방자한 미친 발언은 성조(聖朝)도 명감(明鑒)하실 터이기에 이를 다스려 미혹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이에 대해 논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무에 깃대를 걸고서 사()로 삼고 돌을 쌓아 군()이라 칭하면서 흙을 다듬어 단을 이루고 띠를 둘러 장식을 합니다. 급한 곤액이 있으면 기도를 올려 다소나마 위령(威靈)을 얻고, 홍수와 가뭄에 정성을 드리면 자그마하지만 은복(恩福)이 내려집니다. 하물며 부처님은 그 신묘한 모습이 우뚝하시고 영험한 모양이 엄연하신데 이것을 가벼이 훼손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한나라 명제가 꿈을 꾸고서 절을 이룩하여 백마(白馬)라 이름하고, 손권이 서상을 징험하고 탑을 지어 건초(建初)라 이름하였으니, 이 이래로 대를 이어 이룩하여 왔습니다. 만약 신도(神道)가 묻혀 없어진다면, 제왕이 어찌 섬길 수 있으며, 위령(威靈)이 다한다면 나라의 임금이 어찌 다시 이어나갈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눈으로 살피고 그 몸으로 겪게 됨으로써 귀의하고 회향케 되는 것인데, 도가는 이렇지가 못하여 실로 이어받을 근거조차 없습니다. 이로가 주나라를 섬기던 시절에는 현단(玄壇)이란 것조차 없었는데, 장릉이 한나라에 모반을 꾀할 무렵에 관사(觀舍)를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후한의 순제(順帝) 연간에 패()나라 사람 장릉이 촉땅을 떠돌다가, 옛 늙은이들이 한나라 고조는 24()에 응하여 24개 산에 제사 지내고 바로 왕이 되어 천하를 차지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장릉이 그 덕을 가늠하지 않고 바로 이 같은 모의를 꾀하여 소를 죽여 24곳에 제사 지내고, 흙으로 단을 설치하고 초가지붕을 얹어 놓고서 24()라 칭하였습니다. 바로 치관(治館)이 일어난 것이

 

여기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23곳은 촉 땅에 있고 윤희(尹喜)1곳은 함양(咸陽)에 있습니다.

이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꾀어 흉악한 무리를 불러 모았으니, ()를 거두고 쌀을 바치게 하여 난리의 단서가 될 것을 모의하였습니다. 이 때 뱀에게 먹혔기에 대역죄를 짓지 못하였는데, 그 손자 장로에 이르러 난리를 일으키니 한중(漢中)에서 기병하였다가 조조(曹操)에게 몰살당했습니다. 이 이래로 지금까지 못된 무리가 서로 이어져 치관(治館)에 의탁하여 늘 요사스러운 것만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나라 순제 중평(中平) 원년5)에 거록(鉅鹿) 사람 장각(張角)이 황천부사(黃天部師)라 자칭하고 36장수(將帥)를 두었는데, 모두 누런 베로 된 건을 쓰게 하고 멀리 장로와 통하였으니 그 무리가 10만에 이르렀습니다. 업성(鄴城)을 불 지르자 한나라가 하남윤(河南尹) 하진(何進)을 파견하여 병사를 일으켜서야 토벌하게 되었습니다.

또 진()나라 무제(武帝) 함녕(咸寧) 26)에는 도사 진서(陳瑞)가 좌도(左道)로써 대중을 현혹시키며 천사(天師)라 자칭하였기에 그 들러붙은 무리가 수천이나 되었지만 세월이 지나자 익주자사(益州刺史) 왕준(王濬)에게 토벌되었습니다.

또 진나라 문제 태화(太和) 원년(535)에 팽성(彭城)의 도사 노송(盧悚)이 대도제주(大道祭酒)라 자칭하면서 삿된 술법으로 대중을 현혹시켜 그 무리를 모았습니다. 이른 아침에 광한문(廣漢門)을 공격하면서, “해서공(海西公)을 대전(大殿) 가운데로 맞이하자고 외쳤는데, 환비(桓秘) 등에게 발각되어 전투를 벌이다 모두 몰살당했습니다.

또 양무제 대동(大同) 5(539)에는 도사 원긍(袁矜)이 요사스런 말로 대중을 현혹시켜 금법(禁法)을 행한다고 하여 산 속에 모였으나 관군이 수색하여 모두 소탕되었습니다.

수나라 개황(開皇) 10(590)에 이르러서는, 면주(綿州) 창륭현(昌隆縣)의 도사 포동(蒲童)이 좌동(左童) 두 사람과 더불어 붕계관(崩溪館)에서 성인이 되었다고 자칭하면서 백성들을 현혹시켰습니다. 평상을 천정에 닿도록 겹쳐 놓고 그 위에 앉아서 열다섯 명의 동녀(童女)라야 그 법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여자들을 평상으로 불러올리고 휘장을 쳐서 바로 간음을 행했습니다. 이와 같이 달을 거듭하여 간통한 부녀자가 수백 사람에 이르렀는데 나중에 그 일이 발각되자 곧바로 도망쳤습니다.

또 개황 18(598)에 익주의 도사 한랑(韓朗)과 면주(綿州)의 도사 황유림(黃儒林)이 촉왕(蜀王)을 선동하여 반역을 일으키게 하면서, “큰일을 이룩하자면 반드시 뛰어난 연()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하여 촉왕에게 창고를 탕진하여 1천 척() 크기의 도상(道像)을 이룩하게 하였습니다. 천 일 동안 대재(大齋)를 이룩하면서 선제(先帝)의 모습을 그리되 머리와 손을 묶어 놓고 저주하여 염매하였습니다. 하북공(河北公) 조중경(趙仲卿)이 그 득실을 검사하고 경성(京省)으로 압송하여 문책하자 바로 그 죄를 자복하였기에 시정에 내놓고 형에 처했습니다.

지금 대당(大唐)이 천명(天命)을 연혁(沿革)하였어도 요사스러운 것이 여전히 일어나서 무덕(武德) 3년에 이르러 제거하였습니다. 면주 창륭현(昌隆縣)의 백성 이망(李望)이 원래 황로를 섬기면서 늘 요사스러움을 행하다가 대업(大業) 말년에 제거되었고, 도사 포자진(蒲子眞)이 도술(道術)을 몰래 행하다가 동경으로 압송되다가 양한(梁漢)에서 죽었기에 그곳에서 장례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망이 거짓되게 포자진은 가까운 시일 내에 돌아온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그 현()의 산기슭에 석실을 하나 두었는데 암굴이 그윽하여 사람들이 감히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이망이 이것을 빙자하여 요사스러운 짓을 하면서, 밝은 곳에서는 목청을 높여 큰 소리로 통전(通傳)을 받으라고 말하며,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숨을 죽여 작은 목소리로 화복을 거짓되게 말하고 정직한 단월로 하여금 몇 번이나 그 마음을 쏠리게 하는데 비뚤어지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이치를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 도사가 말한 것이 현()에 자자하고 주에 들리자 관인(官人)이 처음 검찰하였으나 그대로 믿었습니다. 나중에 자사 이대례(李大禮), “이 같은 일은 가벼운 것이 아니니 반드시 상주해야 한다. 친히 징험해 보고 나서야 시비를 가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합주(闔州)의 관인과 도사 등의 1백여 기()의 말을 타고 가되, 노란 옷과 두건을 앞 다투어 치장하였는데, 제반(祭盤)을 많이 차리고 초물(醮物)을 배로 늘리면서 술과 포육에 잡미를 그가 필요한 대로 공급하였습니다. 함께 굴 앞에 이르러 두 번 절하고 기도하자 이망이 이 때 거짓되게 말하기를, “듣는 이는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오직 파서현령(巴西縣令) 낙세질(樂世質)이 기정(機情)에 깊이 통달하여 그 거짓됨을 알고서 어두운 곳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이망의 목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바로 때맞춰 문책하자 위망이 자복하여 주의 옥관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 죄를 부가하고자 하였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명개 제가 도사(圖史)를 낱낱이 살펴보고 고금을 널리 찾아보면, 기전(記傳)에서 전해지고 눈으로 보이는 것마다 도를 그르쳐서 정치를 어지럽힌 사람이 세대마다 있었으니, 대략 대여섯을 드러내어 감계(鑒誡)로 삼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이들을 열람하여 바로 솎아 내어야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명개 저의 미혹한 소견에 따르면, 이처럼 이로의 청허(淸虛)의 도를 행하는 경우는 그대로 두고, 만약 장릉의 더러운 술법을 익히면 규찰하여 폐지해야 합니다. 저 같은 요사스러움을 소탕하여 그 잔당을 없애야 참으로 포악함이 없어지고 난리가 그쳤다고 이를 수 있으니, 이 어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네 번째로 결파하려는 것은, “승니가 베옷만을 입고 재법(齋法)을 생략하면, 누에가 횡사하지 않고 가난한 이가 굶주리지 않는다는 일입니다.

명개 제가 듣자오니, 화합의 기운을 본받아 허망한 몸을 이룬다 합니다. 바깥의 목숨은 반드시 옷과 음식으로 길러 가고 안으로 보응(報應)은 형신(形神)에 의지하여 존립하는데, 형신은 홀로 서지 못하고 옷과 음식에 의하여 충당해야 하나, 옷과 음식을 낭비하지 말고 염치 있게 행동하며 절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유교경(遺敎經)에서는 비구가 공양을 받아 사지의 육신을 지탱한다고 말하였고, 색깔 있는 옷을 없앰으로써 장식을 버린다고 말하였으니, 참으로 이와 같은 것이 밝은 계훈이 되니 누가 이것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단지 여래의 제계(制戒)는 근거에 따라 같지 않아서 사람에 따라 상근기와 하근기가 있듯이 계율의 제정에도 급하고 느슨함이 있습니다. 상근기에게는 급하게 제정하여 갑자기 닦게 하고[頓修], 하근기에게는 느슨하게 수여하여 점차로 나아가게 합니다. 상근기에게 급하게 제정하는 것은 하루에 한 끼만 먹게 하며, 먹는 것도 채소에 불과하고 입는 것도 옷 세 벌에 불과하며,

 

옷은 분소의(糞掃衣)만을 입게 합니다. 하근기에게 느슨하게 제정하는 것은 두 끼의 식사를 허용하며, 소유(蘇乳)까지 먹게 하고 옷은 열 벌까지 늘려 주되 비단옷까지도 허용합니다. 혹 늙고 병든 스님들과 위급한 병에 걸린 출가 선비의 몸은 굶주림과 추위에 곤란을 겪기에 반드시 털옷을 공급하고 약석(藥石)으로 보호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상근기는 여러 가지 자량구(資糧具)에 빌미하지 않고도 스스로 진리를 증득하나, 하근기는 자량의 인연을 의지하여 도를 깨우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정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이처럼 승니의 옷을 무명으로 줄이고 재법을 생략해서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국세를 원활히 한다고 하나, 승니가 재를 한 번 지내더라도 발우 하나를 먹는 것에 불과하고 한 벌의 옷을 입는 것도 몇 조각의 옷에 불과한데, 농부 열 사람의 입을 덜고 누에 10만을 죽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도사가 한 번의 초제(醮祭)에 술과 고기를 백 그릇이나 쌓아 놓고 1년에 명릉(命綾)이 천 필이나 드는 것을 따져 본다면, 마땅히 여기에는 천 명 분의 식량을 손해보고 억만 마리의 누에가 죽어야 하니, 이로써 부혁이 도사들로 인한 손해가 막심한 것을 알면서도 거짓으로 모르는 척하여 따지지 않고, 소비가 적은 승니에 대해서만 그릇되게 논하므로, 이같이 부당한 말은 군자라면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명개 저의 미혹한 소견으로는 마땅히 도사들이 초제와 명릉을 단절시켜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국가를 이롭게 하고 백성과 만물을 훼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대로 두어 금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손해를 끼치고 백성을 해롭게 할 것인데, 성명(聖明)하신 성상(聖上)께서 어찌 이를 살피지 않겠습니까?

다시 논하겠습니다.

도사들이 서약을 거쳐 먼저 10()를 받고, 그 다음에 80(), 나중에 180() 300대계(大戒) 내지는 앉고, 일어나고, 눕고, 쉬는[坐起臥息] 3천위의(千威儀)를 수지(受持)하게 되는데, 모두 비요(秘要)라 이르면서 함부로 남에게 수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보지혜상품(靈寶智慧上品)을 찾아보면, “10계의 그 첫머리부터 색욕이 없어야 마음에 방탕함이 없어진다고 말했고, 소마지혜경(消摩智慧經)에서는 다른 사람의 처자를 보게 되면 애욕의 감옥에서 벗어나기를 발원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도사들이 이것을 전승받았으니 이치적으로도 따라 행하여야 마땅한데 첫머리에 적은 것조차도 행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이에 어긋나는 것만 일삼습니다. 왜냐하면 두건을 쓰고 판()을 거머쥐는 것이

 

경전을 따르는 듯하지만 부인을 거두고 자식을 기르는지라 도리어 파계(破戒)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공공연하게 색욕(色欲)을 행하면서도 끝내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고의로 경전의 계율마저 위반하는데, 어떻게 창피한 줄을 알겠습니까? 이 어찌 닭과 참새가 문을 마주하고 교미하면서도 수치스러움을 모르고 개와 돼지가 네거리에서 교접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과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함수(鹹水:海水)를 많이 마시면 실수를 잊어버리고 사소한 것만을 생각하게 되며 6()이 방자해져 10계를 범하게 됩니다. 첫머리의 한 가지 계율조차도 깨뜨리고 지키지 않았으니, 나중의 3천위의도 이치적으로 폐지하여 활용하지 않을 것인데 부록(符錄)과 과금(科禁)을 어떻게 시행하겠습니까?

노자금단(老子金丹)따위의 경전이나 진인내조(眞人內朝)의 율()에 의지해서 삭망(朔望)에 제를 지내고 개인의 방에서 스승을 모신다면서 깊은 정으로 서로 가까이하며 남녀가 교접하여 네 눈과 두 코를 위아래로 서로 맞닿게 하여 두 입과 두 혀로 서로 짝을 이루어 음양을 받아들여 정기(精氣)를 형통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부부의 예를 이루는 것이고 남녀의 도가 합치는 것인데, 이와 같이 하며 도를 닦으려 한들 어떻게 도를 닦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로써 출가한다 하여도 어떻게 출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미혹에 빠짐이 이 얼마나 심합니까?

또 부처님을 교활하다고[黠兒] 말하지만 이치상 지혜가 넉넉하시고 관음을 광대라 놀려도 실로 방편(方便)이 구족(具足)하신데, 제주(祭酒)들이 조정을 어지럽히며 어리석어 지혜가 없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천사조차 뱀에게 먹혔는데 어떻게 신통하다 하겠습니까?

금법(禁法)을 면케 하여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이 부처님의 대자비이고, 괴로움을 없애 주고 해로움을 감하는 것이 관음의 지극한 행입니다. 은혜를 빌면 저절로 베풀어지니 이는 삿되게 꼬여서 재물을 취하려는 것과 다릅니다. 덕에 보응하려는 마음을 내는 것을 어찌 옆구리를 찔러 물건을 빼앗는다 하겠습니까?

이처럼 관음이 자비로워서 옥사(獄事)를 건져 주는 것을 도리어 가둔다고 모함한다면, 천사가 금법(禁法)을 행하여 원수 맺은 이를 죽이는 것은 마땅히 망나니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선 어진 것을 보시면 권장하고 나쁜 것을 들으면 불쌍히 여기시니, 자비가 평등하여 원수 맺거나 친한 이의 두 가지 차별이 없습니다. 노자또한 착한 것은 나 또한 착하다 하고, 착하지 못한 것도 나 또한 착하게 여긴다고 하였으니, 천사가 5()3()4()

 

9()를 섬겨 저주하는 법을 받아 금염(禁厭)의 부적을 행하여 원수 맺은 이는 미쳐서 그 마음을 잃게 하고 미워하는 이는 놀래켜 목숨을 잃게 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이야말로 참으로 세속의 악신(惡神)이고 인간의 살귀(殺鬼)입니다.

명개 저의 미혹한 소견으로는 지금의 도사들이 도탄(塗炭)ㆍ합기(合氣)ㆍ금주(禁呪)ㆍ장부(章符)를 행하는데, 이 같은 것은 이로의 바른 말이 아니라 장릉의 사악한 법으로 요사스럽게 현혹시키고 속여서 나라에 손해를 끼치고 백성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를 엄단하여 그 사악한 거짓됨을 그치게 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로 결파하려는 것은 승니의 저축을 끊으면 백성이 풍요롭고 장수와 선비가 모두 넉넉해진다는 일입니다.

명개 제가 듣자오니, 여덟 가지 대각행(大覺行)은 욕심을 죽이는 것으로 우선을 삼고 다섯 가지 비구의 명칭 가운데 걸사(乞士)를 으뜸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줄이고 일을 간략하게 하면 경영하는 근심이 다시 없으면서 걸사가 되어 연()을 따르게 되니, 어떻게 저장하는 폐단이 있겠습니까?

노자에서는 많이 쌓아 두면 반드시 망한다고 말했고, 주례(周禮)에서도 쌓이면 이를 나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쌓아 놓은 것을 나눌 수 있어야 그 행이 단나(檀那)7)에 부합되는 것이니, 많이 쌓아 놓으면 반드시 없어진다는 그 말이야 말로 거룩한 이치에 부합됩니다. 노자가 무위(無爲)의 도를 행한 것을 찾아보면 오로지 청허(淸虛)에 맡겨서 마음을 적정(寂靜)하게 닦아 세간의 일을 운영하지 않았는데, 지금의 도사들은 모두 이것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록(二錄)의 대재(大齋)와 삼원(三元)의 경회(慶會)에서는 어리석은 무리를 부르고, 미혹된 무리를 속이고자 요리를 차려 손님을 불러 모아 술과 어육을 갖춰 손님을 대접하면서 재를 주관하며 고기를 갈라 주니 그 일이 마치 포정(庖丁)과 같고, 어육을 주관하는 것을 보면 또한 백정과도 같습니다. 고기를 발라 말린다 하여도 피 묻은 것을 그대로 삼키고, 술을 맑게 걸렀다 하여도 찌꺼기가 남아 있는 것을 그대로 씹으니, 그 욕심이 끝이 없어 멋대로 하면서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게다가 비단을 많이 장만하여 명채(命綵)로 삼고, 수수와 보리를 널리 부과하여 도조(道租)를 내게 하니, 이같이 생기는 것이 많아 창고에 가득 쌓이고, 다시 이와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데서 창고에 연이어 쌓이게 되니, 그 골짜기 같은 마음으로 어떻게

 

만족이란 것을 알겠습니까?

명문 사족(仕族)들은 이를 가려 따르지 않으나 미천한 성씨(姓氏)의 평민들만 운집하는데, 이 또한 그 도법(道法)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술과 어육을 탐하기 때문이니, 참으로 잡스럽고 외설스러운 것이 많아 이루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게다가 그 무리들이 비루하고 인품조차 용렬스러워서 출가 사문들이 대부분 귀한 가문의 훌륭한 선비임에 비하여 도관(道觀)에 있는 도사들은 대개가 비천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양나라 무제가 국조(國祚)를 이룬 이후에 그 몸을 보시하여 절에 들어가 대중 스님들에게 공양하였고, 수나라 황제 때에는 진효왕(秦孝王)의 자식이 그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여 불법을 닦아 행했으나, 일찍이 도관에 들어가 그 몸을 보시했다는 제왕을 한 사람도 듣지 못했고, 일찍이 한 사람의 왕자도 출가하여 도를 섬긴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대부분이 명문 사족의 귀족 문벌이니, 혹 부부가 서로 하직하고 함께 속세를 여의거나, 남녀가 서로 권하며 같이 출가하는 일은 늘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니,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승니의 저축을 끊으면 군민(郡民)이 풍요롭고 넉넉하게 된다고 말합니다만, 가난하고 부귀한 것을 논하자면 모두가 업연(業緣)이고, 귀하고 천한 것은 명운에 관계됩니다. 어리석은 것과 슬기로운 것은 그 생각을 바꿀 수 없고 예쁘고 못생긴 것도 그 몸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과보가 좋고 나쁜 것은 업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씀하셨고, 서경(書經)에서도 명상(命相)이 길하고 흉한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이릅니다. 이로써 군민으로 비천한 업이 있는 이에겐 내주어도 얻지 못하고, 그 상이 부귀로운 이는 그대로 두어도 늘 풍요롭습니다. 그러므로 한나라 문제가 꿈을 꾸고 등통(鄧通)을 총애하였는데, 관상 보는 이가 등통을 점치기를 가난하여 끝내 굶어 죽을 것이라고 이르자, 이에 황제가 부유하게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렸는데 어째서 가난하다 하는가?”라고 나무라면서 구리 광산을 주어 그 야금[冶鑄]을 맡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일을 당하여 도망가다가 남의 집에서 굶어 죽었다 합니다. 또 고구려(高駒麗)의 시녀가 아이를 배자 관상 보는 이가 점치기를 존귀한 왕이 될 것이라고 하자, 왕이 이 아이는 나의 혈육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시녀가 기운(氣運)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했다고 둘러대었습니다. 나중에

 

아들을 낳게 되자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놓아두면 돼지가 핥아 주었고 마구간에 내던지면 말이 젖을 먹여 끝내 죽지 않고 나중에 부여(夫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업연과 명운은 명조(冥兆)에 정해져 있는 대로 끝내 어긋나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보태 주고 빼앗을 수 있습니까?

경전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업과(業果)는 틀림없어서 선한 업을 지으면 복을 받고 악업을 지으면 재앙을 받게 되는, 이 같은 이치가 분명한데 어떻게 현혹될 수 있습니까?

지금 만약 경을 인용하더라도 그 깊은 미혹을 더욱 두텁게 할 뿐이니 서적에 따라 사례를 들어 그 얕은 식견을 열어 내겠습니다. 왜냐하면 옛날 무정(武丁)의 시대에 호() 땅에서 뽕나무와 닥나무[桑穀]가 조정 내에 함께 자라나자, 태사(太史)가 이에 대해 점을 쳐서, “잡초가 조정에 생겼으니 조정이 망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무정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몸가짐을 바로 하고 선정(善政)을 닦자 그만 뽕나무와 닥나무가 말라 죽고 은()나라의 도덕이 중흥되었습니다. 어찌 선을 닦는데 복이 없다 하겠습니까?

또 제신(帝辛)의 때에 성 모퉁이에서 참새가 까마귀를 낳았는데, 태사가 이것을 점치고, “작은 것이 큰 것을 낳았으니 국가가 번창하리라고 예언하였는데, 제신이 이에 교만해져서 선정을 닦지 않자 은나라가 바로 망했으니, 어떻게 악업을 지어도 재앙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부혁은 살아 있을 때의 실다운 재물로 죽은 후에 헛된 이름을 산다고 말했는데, 그 뜻은 살아 있을 때 보시하더라도 죽고 나면 보응이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더불어 말할 수 있습니까?

봄철에 파종하고 나면 저장한 것이 바닥나고, 가을철에 수확하여 겨울철에 저장해 두면 창고가 가득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보시에는 내세(來世)의 보응이 있기에 태첩(胎疊)에 감득하여 장전(掌錢)을 내주게 되었으며, 덕에는 반드시 현세의 보답이 있기에 구슬을 물어다 부록(負鹿)을 내주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경적(經籍)에 그 증거가 명확하므로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또 부처님께 예배하더라도 부귀하지 못하고 재법을 지키더라도 부귀하지 못하다고 말하는데, 국가의 태묘(太廟)를 살펴보면, 선황의 영혼을 백신(百神)이 시중들고 만백성이 이를 기리며 지존(至尊)에게 절을 합니다. 그러므로 대위(大位)에 머물러 존명(尊名)에 처했을 때에도, 신하가 몸을 숙이면

 

봉록(俸祿)을 받고 부귀를 누리게 되는데, 하물며 부처님은 법왕으로서 그 위신력이 높고 큰 데다 덕이 천성(千聖)을 뛰어넘고 도가 백신(百神)의 으뜸이므로 예배하며 정성껏 기도하면 이치상으로도 부귀해질 것이고, 간절하게 귀의하면 반드시 존귀해질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한 표주박의 물과 한 덩어리의 밥으로 굶주린 사람을 보살펴 주고도 오히려 서로 보답을 하였습니다[扶輪相報].8) 지금 한 번의 재법으로 백성을 공양하더라도, 어떻게 도와주며 갚아주는 복록이 없겠습니까? 그 부류를 갈라 말하더라도 이치상으로 현혹됨이 없습니다.

명개 저의 소견에 의하면, 저장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공유물로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것만 저축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유물로 여래께서 장기간의 저장을 제지하신 것입니다. 이같이 공유물은 개방하고 사유물을 금하는 것은 대성(大聖)의 밝은 훈요(訓謠)이니, 마땅히 도사들로 하여금 이것을 배우게 하여 사유물의 예축을 금지시키는 규칙을 만들어 공유물만 용인하고 점차로 불법을 배우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춘추에서는 제나라 환공(桓公)이 좌사(左師)와 자산(子産)에게 예를 묻자 좌사가 예법이란 하늘의 규범이고 땅의 이치이며 백성의 행실입니다. 대국은 이것을 활용하고 소국은 이것을 배운다고 일렀으니, 지금 도가가 부처님에게 배우는 것도 그 유가 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여섯 번째로 결파할 것은 제왕이 부처가 없으면 대치(大治)의 연조(年祚)가 늘어나고, 부처가 있으면 정치가 가혹해져 국조가 짧아진다는 일입니다.

명개 제가 듣자오니, 중국은 3천 일월(日月)12천 천지의 중앙이라 합니다. 전륜왕(轉輪王)이 연이어 나왔고 성주(聖主)가 계속 태어나면서 7보를 다스려 4()의 왕이 되어 10()을 행하면서 만국에 가피를 내려 평등한 덕화(德化)를 열었으며, 원한을 부드럽게 하여 가까운 이를 화목하게 하고 자비의 풍화를 불어서 해치는 것을 누르고 살생을 없앴습니다. 위세를 떨치거나 진노하지 않고도 만물이 행해지고, 부리거나 수고롭게 하지 않아도 백성이 다스려졌습니다. 대겁(大劫)을 만나매 순박한 풍속이 점차 부박해져서 지극한 덕이 쇠퇴하고, 정기(正氣)가 이에 다했습니다. 마침내 오탁(五濁)이 솥의 물을 끓게 하고 3()가 다투어 일어나니, 열여섯의 대국이

 

각각 존귀하다는 명리(名利)를 떨치고 8천의 부락이 모두 봉역(封域)을 점거하며 칼과 창으로만 치달아서 일마다 흥망을 다투어 서로를 해치고 죽였습니다. 석가가 이 같은 도탄을 가엾이 여기고 그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히 여겨 경교(經敎)를 펴서 선을 권장하여 현자를 인도하였으니, 계율을 재정해서 악업을 금함으로써 죄를 징계하고 일체의 헛된 것을 쉬게 하여 진리로 돌이켜 근원을 되찾아 근본으로 돌렸습니다.

중원의 땅과 비교해 보면, 상고(上古)의 초엽에 세상은 독실하고 시대는 순박하여 서계(書契)를 짓지 않았는데, 민속이 부박해지자 전적(典籍)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주공(周公)은 상황시대(上皇時代)에 나지 않았고, 공자는 하대(下代)에 태어나서 예를 제정하고 음악을 만들어 세속을 인도하고 백성을 훈계하여 다스림을 이루어 풍화(風化)를 일으키고 시절을 바로잡아 폐단을 구했으니, 이 모두가 부박함을 멈추고 다툼을 그쳐서 소박함으로 되돌려 순박함을 되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석가와 비교해 보면 그 법도가 매한가지입니다. 만약 제왕에게 불법이 있기 전에 크게 다스려짐의 연조가 길었고, 불법이 있은 후에는 정치가 가혹해져 국조가 짧아졌기에 불상을 섬기지 말아야 하고 불경을 읽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부류를 잘라 말하자면, 제왕이 주공과 공자가 있기 전에는 크게 다스려짐의 연조가 길었으나, 주공과 공자가 있고 난 후에는 정치가 가혹해져 국조가 짧아졌으니, 주공과 공자의 귀신에게 제사 지내거나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어찌 이치상으로 온당하다 하겠습니까?

단지 부처님이 없다면 법도 없어져서 사람들이 악을 멀리하여 선을 닦을 줄 모르듯이 예법도 없고 가르침도 없다면 세간에서는 임금을 섬기고 부모를 봉양하는 것도 가리지 못할 것입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예교(禮敎)는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데, 어찌 불법이 잠시라도 폐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논하겠습니다.

부혁이 인용한 것을 찾아보면 후한 광무제(光武帝) 이전에는 불법이 없어서 국조가 유구하고 연조가 길었으니 자식은 아비의 대를 잇고 신하는 임금을 시해하지 않았으나, 한나라 명제 이후에 불법이 있고부터는 자식이 아비의 대를 잇지 않고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합니다. 부혁의 이 같은 말을 징험해 보면, 그 용렬함을 알 수 있으니, 비록 도사(圖史)를 인용하더라도

 

시종을 모두 궁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상대(上代) 이래로 제왕이 된 자를 찾아보면, 혹 그 한 몸뿐으로 후사마저 끊겼거나 또는 세대를 거듭하다가 망했습니다. () 소호씨(小昊氏)의 정치가 번잡하여 구려(九黎)가 난을 일으켰고 그 후사가 불초하여 한 세대에 망했습니다. 제지(帝摯)에도 정실의 후사가 없었으니 그 정치도 기년(朞年)을 채우지 못하고 그 한 몸으로 멸했습니다. 그 이후로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의 자식도 모두 불초해서 그 한 몸으로 대가 끊겼고, 하나라의 걸 임금과 은나라의 주 임금도 모두 포악해서 신하에게 주살당했습니다. 그 사이에 혹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기도 하였으니 예(羿)와 한착(寒浞)이며, 또 동생이 형의 자리를 빼앗은 적도 있었으니, 중임(仲壬)9)과 옹이(雍已)10)와 같은 경우입니다. 심지어 주나라 세자 조()는 경왕(敬王)을 추방하였는데, 이것은 자식이 아비를 폐한 것입니다. ()나라 황실에 이르러서는 조고(趙高)가 이세(二世)를 살해하였으니, 이것은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것입니다. 전한(前漢)에 이르러서 여후(呂后)가 조정을 어지럽히고 왕망(王莽)이 국정을 찬탈하였으니, 이러한 것이 어떻게 불법이 있었기 때문이겠습니까?

만약 한나라 명제 이후로 소제(蕭齊)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불법을 숭상하여 정치가 가혹하여 국조가 짧았다면, 우문(宇文)에 이르러 한때 불법을 파괴하였으니 정치가 선량하여 국조가 길었어야만 하는데, 부혁은 소제까지는 모두 논하였으나 우문에 이르러서는 말하지도 않았으니, 이것은 비단 서민을 의혹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성명(聖明)을 속이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로써 논하자면 그 일이 마땅히 탄핵되어야 합니다. 우문씨(宇文氏)가 위나라를 찬탈하여 학정을 펴면서 무도하였으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를 시기하고 형과 아우가 서로를 죽이며 성현을 능멸하고 불법을 파괴하였으나, 그 다스림이 고작 다섯 임금에 24년뿐이었습니다. 이같이 한 가지 조항을 미루어 보더라도, 제왕에게 불법이 없으면 정치가 가혹하여 국조가 짧아지고, 불법이 있으면 정치가 선량하여 국조가 늘어난다는 것은 근대에 누구나 다 아는 것인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단지 부혁이 태사의 관직이란 중책을 맡았으니 반드시 기밀(機密)을 신중히 다루어 망령되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옛 성인들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걱정하고 말을 하고 나면 근심했다고 하는데,

 

부혁은 화복을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요사스러운 것만 일삼으니, 혹 뒷일은 묻어 두고 앞의 것만 거론하거나 또는 머리는 숨기고 꼬리만 드러내어 도법(道法)을 감추고 비호하면서 부처님과 스님들을 모함하니, 매 거론하는 일마다 그 말에 치우쳐서 결국에는 바른 말이 없습니다. 성조(聖朝)는 명감(明鑒)하신데 어찌 이에 대해 살피지 않으시겠습니까?

명개 저의 미혹한 소견으로는, 제왕이 국조가 유구하고 연조를 길게 하고자 하면 반드시 불법을 크게 일으켜 선근을 심고 공덕을 닦아서 군민(群民)을 따뜻하게 보살피며 해치는 것을 누르고 살생을 없애서 나고 죽는 가늠을 분명히 하고, 자족하는 마음을 지키고 충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아첨하는 이야기를 멀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30의 대기(大期)가 스스로 원대하여 7()의 국조가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남자에서도 천하에서 존귀한 것은 그 보위의 세력이 아니고, 장수하는 것은 천 살이 아니다. 정리에 맞게 만족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존귀한 것이고 나고 죽는 가늠을 분명히 하는 것이 장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곱 번째로 결파하려는 것은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을 봉()하여 서역으로 보내도 호나라는 반드시 이것을 행하지 않는다는 일입니다.

명개 제가 듣자오니, 중니가 가면서 미언(微言)이 끊어졌고, 제자(弟子)가 죽으면서 대의(大義)가 어긋났다 합니다. 이 때부터 시경서경이 분분하여 어수선하였는데, 진시황에 이르러 태워 없애니 전적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한나라 무제 때 마침내 부흥하여 문예가 다시 천양되었는데, 대정(大庭)에다 관()을 두고 현궁(玄宮)에 실()을 두기에 이르렀으나 무위(無爲)의 도만 익혀서 불언(不言)의 교()를 행하였습니다. 사양하는 것으로 덕을 삼고 비천하고 유약한 것[卑弱]으로 마음을 삼아 오로지 청허(淸虛)에 맡기고 인의(仁義)를 끊고 세속을 여의는 것만 힘써서 그 몸과 이름을 저버린 것이, 9() 가운데에 바로 도가의 유입니다. 그러므로 한서』 「예문지에서는 도류(道流)란 대체로 사관(史官)에서 비롯되었는데, 역사에 일의 성패를 기록하였으니 고금의 도에 37()가 있다. 지금 이로(李老)는 대체로 이것 가운데 한 가()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강장(康莊)

 

()를 이룩하고, 갈석(碣石)의 궁()을 쌓으면서 유학의 종지를 천양하고 문예(文藝)의 술법을 펴서 강토(疆土)를 일으켜 다스림을 제정하고 풍속을 이끌어 백성을 훈계하고, 예법과 음악을 닦으면서 헌장(憲章)의 순서를 매기는 것이 9류 가운데 유학(儒學)의 유입니다. 그러므로 한서』 「예문지에서는 유류(儒流)는 대체로 사도(司徒)의 관리에서 비롯되었으니 음양을 가려 교화를 밝힌다. 요 임금과 순 임금을 근본으로 삼고 중니를 스승으로 삼는데 52()가 있으니, 지금 유학으로 전해진다고 말했습니다.

9류 가운데 도류와 유류의 덕화가 으뜸이고, 백가(百家) 가운데 도가와 유가의 배움이 가장 앞서는지라 그 쓰임새에 각각 타당함이 있어 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도법(道法)은 허무를 창도하여 세속을 멀리하는 것인지라 폐단을 구할 수 없으나, 유술(儒術)은 교화를 말하기에 백성을 근신케 하여 만물을 이끌 수 있으니, 이를 따져서 말한다면 우열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로를 살펴보면 오로지 무위에 맡겨서 구하는 것을 그치고 구제를 단념하고 자기만을 제도하기에, 마음에 넓은 구제가 없으며 행동에 다른 이와 겸하는 것이 결여되었으니, 성문(聲聞)의 자리(自利)와 가깝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청정법행경(淸淨法行經)에서는 마하가섭이 노자로 화현하였다고 말하는데, 가섭은 이미 그 마음이 작은 데다 노자 또한 큰 뜻이 없었으니, 법행경의 말은 미덥기가 그지없습니다. 공자는 예술(藝術)로써 백성을 훈계하고 예교(禮敎)로써 세속을 고르게 하였으며, 익히는 것이 적더라도 남을 이롭게 하고 점차로 배워 나가서 겸하여 제도하니, 보살의 이타(利他)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청정법행경에서는 유동(儒童)보살이 화현하여 공구(孔丘)가 되었다고 이릅니다. 유동은 이미 그 마음이 크기에 공구 또한 겸하여 제도하였으니, 법행경의 설법이 이치적으로 어찌 허망하겠습니까?

이로의 전적과 공자의 경전을 고찰해 보면, 가르침의 자취는 다르다 하겠으나 이치는 한 가지로 귀착됩니다. 만약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을 봉하여 서역으로 보내더라도 호나라는 반드시 따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부혁의 참뜻이 어찌 호나라의 가르침이 여기 왔으니 한나라 사람은 받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부류를 갈라서 말하자면 오르고 내림이

 

현격합니다. 생각해 보면 부처님은 대성이신지라 그 교화가 시방에 가득하여 멀리 위령(威靈)을 드리우시기에 한나라 명제가 몸소 목격하고 군신이 감격하며 백성이 귀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 서쪽으로 가서 멀리 천축에 이르게 하였으니, 마등 스님이 그 지극함에 따르고자 교화를 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주공과 공자는 소성(小聖)인지라 덕이 한쪽에 국한되기에 위령을 멀리 드리우지 못하고 그들의 가까운 이들만 감응케 하니, 이 때문에 서역의 사람들은 믿음을 낼 연()조차 없어서 이곳에 와서도 주공과 공자의 경전을 맞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자의 가르침이 서쪽 땅에 행해지지 않는 것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논하겠습니다.

신묘(辛卯)의 밤이 밝아진 것은 노사(魯史)에 그 화적(火迹)이 전하여져 있고, 병자년에 별이 빛난 것은 한서(漢書)에 그 위령(威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상교(像敎)가 서쪽으로 옮겨지고 법의 흐름이 동쪽으로 이르렀습니다. 마등 스님이 한나라 때 찾아와서 진언(眞言)을 처음으로 번역하였고, 급다(岌多)가 수나라 때 들어와서 석가의 전적을 많이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등나무 껍질[藤皮]과와 패엽(貝葉)으로 멀리 천축의 글을 전하였고, 옥첩(玉牒)과 금전(金牋)으로 가까이 진단의 말을 번역하였습니다. 이 이래로 지금까지 유포되었으니, 한나라 명제 이래로 이미 15대를 거쳤고 번역한 사람은 196명이나 됩니다. 출간된 경전(經典)ㆍ율장(律藏)ㆍ소기(疏記)ㆍ논서(論書)2,145부로 모두 6,152권입니다. 이 또한 범음(梵音)으로 연출되어 천축에서 전해진 것이니, 그 용굴(龍窟)의 경주(經廚)11)를 논하자면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영취산의 법장은 이보다 만 배나 되니 어떻게 다할 수 있습니까? 지금 번역한 것이 대체로 소본(小本)이 많을 뿐입니다. 제왕의 시대를 고찰하고 그 도사를 찾아보면 전()이나 고()마다 근거가 명확한데 어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도가(道家)에서 주가 달린 경적을 찾아보면, 옛날에 없던 것이 지금에 있으나 참다운 것은 적고 거짓된 것만 많습니다. 예문지에서 밝힌 대로 도류에 비록 37793편이 있다 하나, 오직 782편만이 이로의 청허자수(淸虛自守)

 

도를 밝히고, 30711편은 제왕의 정치와 덕화, 고금의 도를 밝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한서』 「법본내전에서는 한나라 명제 영평(永平) 14년 정월 초하루 조례 때에 오악 18()과 여러 산의 도사 저선신(楮善信) 690명은 마등 스님과 축법란 등이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낙양에 오자, 나라 전체가 그들을 숭배하고 존경하여 천하가 귀의한 것을 전해 들었다. 저선신 등이 속으로 질투하는 마음을 품어 겨루어 보고자 하였다. 이에 도가의 경서를 모두 가져 왔으니 도합 37744권이었다. 그 때 불을 붙이자 모두 타 버렸는데 저선신 등이 부끄러움에 감정이 격양되어 죽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나라 명제 때에 도가의 경서는 37744권에 불과합니다. 비록 책의 묶음이 많다 하나 모두 도가의 경전은 아니니, 오직 509권만이 천존이 말한 것이고, 나머지 235권은 황로 등 여러 제자의 책입니다. 이 이래로 이 숫자를 넘어서는 것은 모두 도사들이 망령되이 조작하여 늘린 것이기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송조(宋朝)에 이르러 도사 육수정(陸修靜)이 송나라 명제에게 대답하기를, “도가의 경서와 약방(藥方)과 부도(符圖)는 모두 1,228권이 있는데, 오직 이것만 올바르고 다른 것은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도사들이 마음대로 지어내기도 하고 또는 불경을 개작하기도 하여 목록을 보충하여 부질(部帙)을 늘려 놓고 240권이 있다고 말하는데, 앞의 숫자를 넘는 것은 대부분 허무맹랑한 말에 불과합니다. 도사에게 나중에 나온 경전을 물어 보면 천존이 다시 설한 것이라고도 말하고 또 노자가 예전에 말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마음이 내키는 대로 경전을 설했다 하더라도 마땅히 처소가 있어야만 합니다. 어느 황제, 어느 시대, 어느

 

, 어느 달인지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만 유전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데도, 이와 같이 망령되이 속이니 이치적으로도 삭제해 버려야 합니다. 또 세속의 선비들이 지은 것을 도경(道經)으로 내세우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부류는 그 수가 참으로 많습니다. 예를 들면 태현경(太玄經)은 양웅(揚雄)이 지은 것이고, 통현경(洞玄經)은 왕보(王褒)가 쓴 것이고, 지귀경(指歸經)은 엄군평(嚴君平)이 만든 것이고, 삼황경(三皇經)은 포정(鮑靜)이 지은 것이고, 개천경(開天經)은 장반(張泮)이 날조한 것이고, 화호경(化胡經)은 왕부(王浮)가 지은 것입니다. 또는 반고(槃古)의 전기(傳記)를 끌어대거나 제자(諸子)의 편수(篇數)를 취하기도 하였으니, 세속의 책에 가차해서 도교를 삼기도 하였고, 석가의 전적을 훔쳐다 노자의 경전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이는 앞서 간략하게 진술하였기에 다시 말하지 않겠으나, 마치 가난한 이가 곤고하다고 다른 사람의 보배를 훔쳐다 재산을 삼고, 굶주린 이가 추개(芻芥)를 씹으며 진미(眞美)로 여기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명개 제가 보는 바로는 노자2편만이 바르므로 도경으로 그대로 행하게 하되, 나머지 여러 부질은 모두 거짓된 것입니다. 일마다 반드시 소소한 것을 다스려서 도가와 불교가 다르고 이로와 석가가 틀리다는 것을 가려낸다면, 서박(鼠璞)12)을 멋대로 하지 않고 꿩과 봉황을 구분하게 되니, 나중에 배우는 무리들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여덟 번째로 결파하려는 것은 통괄적으로 불법을 논하자면 허망함이 많고 미더움이 적으니, 이는 도인(道人)들이 도가의 말을 빌렸기 때문이다라는 일입니다.

명개 제가 듣자오니, 진신(眞身)은 절대적이어서 형체나 바탕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지극한 이치는 마음을 벗어났으니 어찌 언어로써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크구나, 대도(大道)의 바깥이 텅 비었구나. 참으로 묘하구나. 진일(眞一)의 거죽을 뛰어넘었구나. 마침내 4()가 일시에 없어지고 백비(百非)가 한꺼번에 물러가니, 말을 다하고 생각을 지극히 하여도 그 한 물건을 이름할 수도 없으나, 단지 망식(妄識)이 여전하고 미혹된 마음이 꿈틀거려 사방으로 미쳐 다니면서 깨어나지를 못하고, 다섯 가지에 취해서 오래도록 혼미하니, 이 때문에 대성이 자비를 드리워 뜻을 구제해 두었습니다. 이로써

 

5()의 자취를 열고 4무애변(無礙辯)의 법음(法音)을 개통하였으니, 몸이 아니면서 그 몸을 드러내었기에 그 몸이 법계(法界)에 가득하고 말이 아닌데도 말로 드러내었기에 그 말씀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두루합니다. 그러므로 미진수(微塵數)의 화신(化身)을 나누되 다함이 없고, 항하사(恒河沙)의 법장(法藏)을 연출하더라도 끝이 없습니다.

수미도경(須彌圖經)에서는 보응성(寶應聲)보살이 복희씨로 화현하고, 길상(吉祥)보살이 여와씨로 화현하고, 유동보살이 공구가 되고, 가섭보살이 이로로 화현하고, 묘덕은 몸을 개사(開士)에게 의탁하고 능유(能儒)는 국사(國師)로 태어났다고 말하고, 열반경에서는 모든 경서와 전기와 논서와 기예의 문장들이 모두가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3황ㆍ5제와 공자ㆍ이로와 주공ㆍ장주도 모두 보살의 화신으로 거두어지고, 문자(文字)와 도서(圖書) 및 시장(詩章)과 예악(禮樂)도 한결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장에 섭수됩니다. 문리가 뚜렷하니 어찌 허망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부혁은 말에 집착하고 이치에 어두워 그 덕화(德化)를 보면서도 진리에 미혹하여 오로지 형체의 자취로만 비평을 하고, 명자(名字)와 그릇으로 서로 국한하기에 진흙과 나무로 성인을 비방하였습니다. 탱화를 가지고 진리라 하기 어려우니 탱화로써 진짜를 대신하는 것이므로 어찌 진불이 되겠습니까. 참다운 부처님을 진흙과 나무로 그 성스러움을 표현하더라도 이는 성인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각()이라 이름하더라도 이것은 가명일 뿐으로, 실제의 부처는 형상이 없기에 그 형상에 가탁하는 것은 참다움이 아니라 하겠으나, 참다움이 아닌 것으로 불상을 이룩하는 것도 그 형상으로 인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실다움이 아닌데도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이름자로 인하여 실다움을 깨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름도 없고 실다움도 없으나 깨닫는 이가 이로써 통하게 되고, 형상도 없고 참다움도 없으나 통달하는 이가 이로써 현리(玄理)를 터득하는 것이 묘해서 이 같은 말의 지극함이 참으로 묘하다 할 것이고, 이 같은 이치의 지극함이 참으로 깊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부혁은 깊은 이치에 어둡고 업보에 미혹되어 이 몸 이후를 논하지 않고 오직 눈앞의 일만을 따지니, 만약 부귀를 구하고자 하면 날쌘 말과 갑옷으로 변방에서 힘을 써야 하며 불상을 이룩하여 공을 닦아

 

그 복력을 비는 힘은 필요치 않다고 말합니다. 주나라 무제는 날쌘 말이 가장 많았고 세상에 갑옷이 가득하여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데다 정벌에 힘을 쓰고 강역(疆場)을 지켰으니 마땅히 부귀를 누려야 하는데도 지금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만약 무명과 비단이 넉넉하고 곡식이 무르익기를 바란다면, 채소와 뽕밭과 삼베를 가꾸고 거름을 모아야 하며, 열반경천 부를 옮겨 적고 법화경을 백 번 외워 복력을 기원하는 힘은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데, 건덕(建德)은 널리 뽕밭을 차지하고 설거(薛擧)13)가 말똥을 충분히 갖고 있어서, 가꾸는 것이 많아 창고와 주방에 거둬들이는 것이 많았는데, 지금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만약 식량을 충분히 가꾸고자 하면 밭가는 것은 죄가 되지 않으니, 단지 수로를 내어 물을 끌어들여 논에 물을 주고 언덕에 부어야 하며, 전해용왕경(轉海龍王經)10부를 돌려가며 비가 내려 윤택하기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 소선(蕭銑)이 형주(荊州)를 점거하면서 제방[堤堰]을 평소보다 배나 늘렸으나, 비옥해지자 과()를 붙여 거둬들이면서 변방을 튼튼히 지켰는데도 지금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이로써 미루어 보면 우리 대당 황제가 안으로는 선근을 심고 복에 의지하며, 바깥으로는 천도(天道)에 따르고 백성에 순응하였으니, 이 때문에 중화(中華)와 융족(戎族)이 모두 따르고 적당(賊黨)이 수급(首級)을 바치게 되었고, 창고가 충실해지고 국토가 깨끗해졌습니다. 만약 안과 밖의 향보(饗報)가 아니라면 어찌 이 같은 환난을 평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충신과 효자를 구하여 세상을 보조하고 백성을 다스리자면 오직 효경1권과 노자2편만을 읽어야 하며 널리 불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데, 이 같은 경전을 살펴보면 단지 세간의 충효만 밝히는 것으로 출세간의 충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무릇 세속에 머무르면 손수 밭을 갈아 부모 봉양에 힘을 다하고, 출가하면 도를 닦아 법을 기리고 자비심을 내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는 것은 눈앞의 작은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고, 자비심을 내는 것은 미래의 큰 덕으로 보답하는 것이니, 비록 잠시 존중하고 봉양하는 바에 어긋나는 것이 마치 부모에게 소홀히 하는 것 같아도 끝내는 이것을 제도하게 되니 효도가 지극하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삼세(三世)를 윤택케 하는데 어찌

 

아침저녁으로 수고롭겠습니까? 그 은혜가 백 생()을 윤택케 하는데 어떻게 아침저녁으로 봉양하는 것만을 탓하겠습니까? 출세간과 비교해 보면 뛰어나고 열등한 것이 이처럼 분명해집니다.

노자2편이 충신과 효자가 세상을 보좌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충분히 밝힐 수 있다고 말하는데 노자를 살펴보면 생각을 끊고 참다움을 지키며, 마음을 잊어 세속을 멀리하여 부모를 등지고 돌아보지 않으며, 임금을 저버리되 내던지듯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데 어떻게 노자가 봉양하여 효도하고 참다움을 지켜 충성하며 백성을 다스리고 세상을 보필하는 것이라고 논할 수 있겠습니까?

노자내가 큰 걱정거리를 갖고 있는 이유는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몸이 없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일렀습니다. 이것은 그 몸조차 싫어하여 세상을 등지려는 것인데, 어떻게 세상을 보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몸이 귀하여 천하가 있더라도 잠시 의탁할 수는 있으나 오래 하지는 못한다고 말했는데, 하상공(何上公)의 주석[]에서는 인군(人君)이 그 몸을 귀하게 여기고 남을 천대하면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하여도 잠시 머무르기만 하지 오래 있지 못한다고 일렀으니, 이것은 세속을 저버리고 영예로움을 내던지는 것이기에 백성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부혁이 완고한 생각을 지니고 가볍게 입술을 놀리는 것을 살펴보면, 말은 번잡하나 이치는 적어서 말다운 말은 적으며 욕하는 말만 많습니다. 진독(瞋毒)으로 남을 모함하고 나쁜 말을 내뱉어 멋대로 세속을 미혹시키는지라, 마침내 올빼미 소리의 더러운 기운이 부락마다 가득해지고 짐새의 독한 소리가 길목마다 시끄러워졌습니다. 무식한 삿된 무리에게 큰소리로 전하도록 사주하니, 달견(達見)의 선비들이 이를 개탄하며 가엾이 여깁니다. 그런데도 도법만을 두둔하고 아끼며 부처님과 스님들을 미워하니, 참으로 만물이 그 유유상종하는 것처럼 사람과 축생도 그와 같이 합니다. 그 짝을 이룸이 치우(蚩吁)의 개가 헌원(軒轅)에게 짖어대고 도척의 무리가 부자(夫子)를 싫어하는 것과 어찌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단지 부혁은 불법이 존귀하여 대중 스님들이 훌륭하여 자리에 앉으면 상석에 앉고, 행차하면 앞장서고, 제왕이 그들을 숭배하며 조정 대신들이 정대(頂戴)하고, 절과 불탑이 장대하며 공양이 충실하고, 백성들이 앞 다투어 귀의하여 선비와 숙녀가 몰려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현단(玄壇)의 안쪽에 이르러서는 일마다 황폐한 마을과 같고, 도관을 다스리는 가운데 도리어 제사가 폐해지며,

 

시절마다 제초(祭醮)에 빌미하고 술과 고기로 의탁하여 사람을 부르며 혹 길하고 흉함에 의지하여 향응(餉應)을 보내어 만물을 끌어들였습니다. 약간이나마 견식이 있는 이는 그 속임수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조금이나마 신심이 있는 자가 어찌 그 청을 맞아들이겠습니까?

그는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늘 투기하는 마음을 내어 속된 말로 날조하여 억지로 욕을 보이려 하고, 그 욕하는 마음에 더러운 기운이 지극하고, 저주하는 것에 나쁜 말을 다하였습니다. 비방하되 재앙조차 두려워하지 않으며, 죄를 알면서도 비방하는데, 어떻게 죄와 복을 따지기나 하겠습니까?

눈앞에서 마음대로 불살라도 어찌 그 마음이 기쁘지 않으며, 손마다 잘라내더라도 어찌 그 상쾌함을 싫다 하겠습니까? 서경에서 사람은 그 위를 싫어하고 짐승은 그물을 미워한다고 이른 것이 바로 이것을 지칭한 것입니다.

옛날에 최호가 위나라 태무제를 설득하여 불법을 파괴하고 승니를 죽게 하면서 스스로는 집안에다 불상을 모셔 놓고 예배하였는데, 태무제가 이것을 알고 그 요사스러움에 분노하여 바로 죽여서 저자거리에 시체를 널어 놓고 칙령을 내려 지나는 사람마다 그 입에 대소변을 누게 하였습니다. 태무제가 다시 불법을 부흥시키니, 처음과 같이 존중하고 섬겼습니다. 또 주나라 무제가 광포하고 무도하였기에 불법을 훼손하고 불경과 불상을 불태우며, 탑과 절을 허물고 대중 스님들을 해산시켰다가 그 몸에 나창(癩瘡)이 나서 죽었는데, 근대에도 그 영험함이 상세하고 분명히 드러나 있으니, 성상도 깊이 생각하여 그윽하게 살펴보십시오.

부혁의 죄업은 바야흐로 니려(泥黎)에 떨어져 영겁토록 묻힐 것이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명개 제가 그 삿된 것을 불쌍히 여겨 바른 말로 깨우쳐 주고자 하니, 참으로 미혹함을 되돌려 도법을 여의는 것이 어찌 멀다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여러 동지(同志)들도 이와 같은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