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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60 불교(광홍명집 11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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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11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2. 변혹편

 

14) 당상폐성불승표(唐上廢省佛僧表) 및 당폐성불승잠(唐廢省佛僧箴)

태사령(太史令) 조산대부(朝散大夫) () 부혁이 삼가 상서(上書)를 올려 사찰과 불탑을 줄이고 승가(僧伽)를 폐지하는 열한 가지 조목을 거론하고자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1)

신이 듣자오니,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헌원(軒轅)ㆍ전욱(顓頊)의 치적이 이로(李老)의 풍화(風化)에 합치되고[반론: 시경(詩經)에서는 윗사람이 아래 사람을 풍화하고 아래 사람은 윗사람을 풍자한다고 하였다. 이를 비판하자면, 노자는 주나라의 일개 도서관 관리였다. 지금의 비서관에 해당한다. 본래 천자가 아니었는데, 도대체 어떤 풍화(風化)가 있어 복희와 신농 같은 상대(上代)의 제왕(帝王)과 합치될 것인가], ()ㆍ하()ㆍ탕()ㆍ희()의 정치는2)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에 부합됩니다[반론: 주공과 공자는 조정의 신하였다. 위에 기술하는 우ㆍ하의 덕화로 하대(下代) 말세의 백성을 교화하는 것은 인왕(人王)이 아니고서야 교주(敎主)라 자칭할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우ㆍ하 네 임금의 교화가 도리어 주공과 공자에 합치되었다 하겠는가]. 비록 성인에게는 앞서고 뒤쳐짐이 있으나 도덕에는 차별이 없으며 임금에게는 내력[沿革]이 있으나 치술(治術)은 같습니다.

듣자오니, 여든 살의 노부는 땅을 치며 노래 부르고 열다섯 살의 소년은 배를 두드리며 즐거워하는데, 농사짓는 자들은 밭을 양보할 줄 알며 길에 떨어진 것도 줍지 않습니다. 효자가 집안을 이어가고 충신이 나라에 가득해서 나라의 임금이 환난을 입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원수를 갚는다고 합니다[반론: 나라에 충신이 있다면, 어찌 국난이 있을 리 있겠는가? 전상(田常)3)6()4)의 사도(司徒)는 마땅히 반역하지 말았어야 했다].

부모가 병환이 나서 종신토록 곁에서 시중든다면 어찌 증삼(曾參)과 민자(閔子)와 벗하지 않겠습니까? ()과 서()가 숲을 이루고 묵적(墨翟)과 취공(取恭)5)의 겸애(兼愛)가 짝을 이루어 서로 보좌하니[반론: 29대에서 오직 한 명의 증삼일 뿐이다. 한나라 고조 이전에는 민자 한 사람만을 거론할 수 있지만 숲을 이룬다는 말은 근거 없는 말인데도 이를 보좌하였다고 상주하였으니, 아무리 거짓된 일을 근거 삼더라도 너무 심했다.] 도를 지켜 덕을 머금어 욕심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었는데[반론: 실제로 주우(州吁)6)와 숙단(叔段)7)은 도를 지키지 못했고,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욕심내어 구하는 것만 일삼았다.]

 

총영(寵榮)이나 치욕(恥辱)에 놀라기도 하고 조정(朝廷)의 반위(班位)에도 참례하였습니다[반론: 반숭(潘崇)8)과 예(羿), ()9)은 모두 살해되었는데, 이를 놀랐다고 이른 것은 수긍할 수 없다. 계씨(季氏)와 양화(陽貨)10)도 조정의 반열에 들었다]. 형산(荊山)의 정() 위로 기어 올라가 용을 타고 승천하였고,11) 구씨(緱氏)의 단() 주위에서 학을 타고 따라갔고,12) 요지(瑤池)의 왕모(王母)가 사신을 보내 맞이하여 예를 다하였으며,13) 벽해(碧海) 무이(無夷)의 신()이 두루 다니면서 5()를 배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이로(李老)와 공자의 가르침을 함께 받았는데[반론: 황제가 용을 타고 승천한 것은 대체로 3()의 세()이다. 요지의 왕모는 주나라 목왕(穆王)의 시대인데, 이를 계산하면 이로(李老)가 나오기 전이고 공구라는 이름이 없었던 때입니다. 노자의 가르침에 거슬리면서 공구의 책을 익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호나라 부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반론: 그대가 이미 부처님이 없다고 말했는데, 대체 어디에 도가 있다 하겠는가].

한나라 명제(明帝)가 밤중에 잠자다 금인(金人)이 들어오는 꿈을 꾸자, 부의(傅毅)가 글을 올려 호나라의 신()이라 하였습니다[반론: 만약 주나라 때에 이미 불법이 전래되지 않았다면, 부의가 어떻게 부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았겠는가? 불상이 전래된 지 오래인지라 부씨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선조가 이미 부처님이라 말하였는데 그대는 없다고 하니, 이는 오역중죄(五逆重罪)의 재앙을 스스로 영겁토록 심은 것이다.] 후한(後漢)에 이르기까지 중원(中原)에는 이를 믿는 이가 없었는데[반론: 거짓말이 너무 심하구나.] ()나라와 진()나라의 오랑캐 가운데 믿는 자가 약간 있었습니다[반론: ()ㆍ악()ㆍ의관(衣冠)은 진조(晉朝)에서 처음 정비된 것인데, 그대가 오랑캐라 욕하는 것은 도대체 중하(中夏)의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착융(笮融)14)은 불가(佛家)의 재()를 핑계 삼아 반역을 일으켜 마침내 강동(江東)으로 도망가 숨었으며, 여광(呂光)15)은 호나라를 정벌하는 척하다가 임금에게 반역하여 서쪽 땅에서 대치하였습니다[반론: 당시 사람들이 부융을 시기하고 비방하여 결탁하였다고 말한 것뿐이다. 여광은 정벌에서 돌아와 보니 부견(符堅)의 진()나라가 이미 망했는지라 하우(河右)에 머물면서 양주(凉州)의 패권을 잡은 것뿐이다. 그러므로 스님들에게 연유해서 반란을 일으켜 서쪽 땅을 점거한 것이 아니다].

이 이래로 요망한 오랑캐가 점점 성행하여 중화(中華)를 잡스럽게 하였으니[잠언(箴言): 자비가 충만해서 말겁(末劫)의 악세(惡世)에도 출연하는 것이니, 인연이 있어 득도(得度)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진신(搢紳)의 문벌에서도 도리어 대머리[禿丁]의 삿된 계율이나 받고, 선비[儒士]의 학문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요망한 오랑캐의 방자한 말이나 즐겨 논합니다[잠언: 진신이란 인욕(忍辱)의 도를 따르는 이들이고, 선비란 금구(金口)의 말씀을 귀히 여기는 이들이다].

노래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와 비슷하여 한 번 듣더라도 근본을 잃게 되고, 그 냄새가 어물전의 비린내와 같은지라 한 번 지나치더라도 향기를 잃게 됩니다[반론: 그대가 개구리 울음소리를 내고 비린내를 풍기는지라, 이 소리를 듣는 이는 반드시 근본을 잃고 한 번 그대 곁을 지나치는 자는 향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 누워서 하늘에다 침 뱉으면 욕보는 것은 자신인데, 이 같은 말을 누가 믿겠는가]. 아울러 가람(伽藍)을 크게 설치하되 장대한 것이 하나둘이 아닌 데다[잠언: 천당에 태어나는 업을 짓고자 함이고, 해탈하는 인()을 심고자 합니다], 공인(工人)을 시켜 진흙 오랑캐를 홀로 앉혀 놓고[잠언: 다투어 몸과 손을 움직이고 의논하여 성존(聖尊)의 상()을 만든다], 화하(華夏)의 홍종(鴻鐘)을 울려 여러 스님들 가운데 거짓 대중을 불러 모읍니다[잠언: 백 번이나 달구어 낸 신종(神鐘)을 울려서 삼천의 성중(聖衆)을 소집한다].

순박한 백성의 이목을 어지럽혀

 

사사로이 재물을 구하고[잠언: 신심(信心)이 이목(耳目)에 감응하여 탐욕과 어리석음의 재물을 내려고 한다], 여인들이 짠 능라비단으로 음사(淫祀)의 깃발[]을 만듭니다. 금과 은을 세공하여 탑에 새기거나[잠언: 여인들은 능라비단을 짜서 속명(續命)의 깃발을 만들고, 금은을 세공하여 쇄신(碎身)의 불탑(佛塔)을 이룩한다], 찹쌀ㆍ기장ㆍ국수ㆍ멥쌀로 승니(僧尼)의 대회나 열면서 향ㆍ기름ㆍ양초로 호나라 신의 법당을 밝히느라[잠언: 찹쌀ㆍ기장ㆍ국수ㆍ멥쌀로 복전(福田)의 회상(會上)에 다투어 차려 내는 것이다] 민간의 재물을 착취하고 국가의 저축을 바닥내는데도 조정의 대신들조차 일찍이 한 번이라도 뉘우친 적이 없으니, 참으로 가슴 아픕니다[반론: 조정의 대신이 속된 것을 버리고 진리에 귀의하여 석문(釋門)을 존경하는 것은 사견을 내는 것과 엄연히 다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천문(天門)의 개합(開闔)을 정하시고 보위(寶位)를 일신하시어 만물의 둔()과 비()를 형통하시어 백성[黔黎]을 다시 보살피시되, 이로(李老)의 무위의 덕화를 펴신다면, 인민이 스스로 교화될 것이고, 공구(孔丘)의 애경(愛敬)하는 예()를 받든다면 천하가 효성스러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경전에서 가르치는 것은 죄와 복을 망령되이 말하기 때문에[잠언: 원래 가르침을 펴는 연유는 사람들이 죄악의 문을 닫아버리고 선을 행하는 길을 열어 주려는 것이다] 마침내 군민(軍民)이 부역을 멀리하고 삭발하여 숨어 버리니, 양친조차 섬기지 않고 열 가지 악을 행하는지라[잠언: 양친의 은혜와 사랑을 버리고 10()의 인풍(仁風)을 닦는 것도 자그마한 거스름을 참아 내어 대순(大順)을 이루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감에 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간사함이 날로 심해질 것입니다.

신이 서계(書契)16)를 열람해 보니, 포희(庖犧)에서 한나라 고조에 이르기까지 29대조 4백여 임금이 있었습니다. 듣자오니, 단지 상제(上帝)를 교사(郊祀)하는 것만을[반론:원구(員丘)의 남교(南郊)일지라도 살생의 허물을 면하지 못하는데, 어찌 부처님의 계율이 불살생(不殺生)을 우선하는 것과 같겠는가? 시비를 따져 보면 알 수 있으리라] 관청에서 다스리고 민간이 보살핀다 하였으나, 사원과 동상에 사직을 건립하여 나라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것은 일찍이 보지 못했습니다. 바라건대 호나라 부처의 그릇된 가르침을 천축으로 물리치십시오[잠언: 인연에 감응하여 불사(佛事)를 일으키는지라, 제도를 마치면 다시 왕래하지 않는다. 중생에 응하여 세상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니, 모두 때에 따르는 것이다].

모든 사문(沙門)을 상재(桑梓)17)로 돌려보내고, 영을 내리시어 과()를 벗어난 무리들에게 세금[]을 물리시고, 부역을 회피하는 무리들에게 부역을 내리십시오. 소독(小禿)이 출가하는 것을 금하여 국가에 오래도록 예를 다하게 하면[반론: 예전에 엄자릉(嚴子陵)18)이 천자에 나아가 절하지 않았고 조원숙(趙元淑)이 오래도록 사공(司空)을 역임했어도 전적마다 이를 아름답게 여긴다. 하물며 사문은 출세한 복전인데다 석씨(釋氏)는 물외(物外)의 높은 선비인지라 절을 시켜 그 처지를 어긋나게 하는 것은 도리에도 어긋난다], 충신이 늘어나 종묘(宗廟)를 밤새 지킬 것이니,

 

대당(大唐)을 넓히어 조화(造化)의 주()가 되시면, 마침내 백성이 편안해져서 희황(犧皇)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반론:조화(造化)의 시대에는 인민에게 조세를 물리지 않았기에 소위 희황의 국민이 배를 두드리며 누워 있었던 것이다. 성명(聖明)이 위에 계신데, 어떻게 최호(崔皓)나 강빈(姜斌)의 말을 믿겠는가].

() 혁이 황공하옵게도[반론: 임금을 섬기는 데는 충성을 다하되 말에 신의가 있어야 한다. 듣자오니 사실이 아닌 것을 주청하면 그 죄는 돌아갈 바가 있다. 나라를 무고하는 것은 결국 반드시 칼날에 복종하게 된다.] 삼가 나라와 백성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상주하오니, 열한 가지 조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무덕 4(621) 620일 조산대부(朝散大夫) () 태사령 신 부혁이 삼가 올립니다[반론:그대가 주청한 대로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해치는 일은 참으로 불가한 것이다].

 

15) 당파사론(唐破邪論)

진왕(秦王)에게 올린 논계(論啓)

사문 법림 등이 아룁니다.

() 제가 듣자오니, ()이 지극하면 그 소리가 애처롭고 이치가 바르면 그 말이 곧다 합니다. 궁자(窮子)는 그 말이 참되기를 바라고 부지런한 사람은 그 일을 노래하기 원하는데, 무엇 때문에 대업(大業) 말년에 천하가 환난을 입어야 했습니까?

2()가 혼탁하고 4()가 들끓었으니, 풍파가 휘몰아쳐 흙먼지만 휘날리고, 언덕마다 불이 붙어 들녘마저 타는지라, 5()가 강을 건넌 길이 두절되고[五馬絶浮江之路]19) 7중이 평루에 있다는 노래가 있습니다[七重有平壘之歌].20)

봉화를 피울 때 경계하여 우격(羽檄)21)이 나부껴도 변경의 요새[關塞]에는 근심이 많아 조두(刁斗)22)로도 식지 않았습니다. 도는 쇠하고 덕은 어긋나서 마침내 국운(國運)이 다하고 물자를 운송하는 것[轉輸]이 매우 번잡해졌습니다. 인두세를 거두며 백성의 재산을 갈취해 가고, 송장이 쌓여 언덕을 이루어 피가 냇물처럼 흘렀습니다. 산 사람이 삶을 즐기지 않고 만물 또한 수고스러워합니다. 알릴 곳도 없고 해골을 던져버리고 쫓아갈 곳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거꾸로 매달린 듯이 괴로워하고 만국(萬國)은 주인이 없는 것을 곤혹스러워 하니 어떻게 법륜(法輪)의 울림을 끊어 정교(正敎)를 능멸할 수 있는 것을 도모하겠습니까?

성상(聖上)이 백성을 돌보는 마음을 내어 호천(昊天)의 명()에 순응한다면, 마침내 의로운 깃발을 다시 세워 천하를 다스리게 될 것이니, 이러한 때라야 도속이 덕의 큰 힘을 입게 되고 중화(中華)와 이융(夷戎)도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천지가 화합하여 8()이 형통하면, 음양을 헤아리고 사서(四序)가 순조로워서 방국(邦國)을 온화롭게 하고 인륜이 정비될 것입니다.

공덕은 보천(補天)을 덮고 신은 입극(立極)을 기다립니다. 단비가 내려 만물을 기르고 일월이 개어 빛이 내리쬘 터이니, 성명(聲明)으로 발하고 문물로 실마리를 이어나갑니다. 그 은덕이

 

갈대를 젖게 하여 교화가 물고기와 벌레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바야흐로 9()를 거듭 밝히되 5()를 다시 펴서, 석거(石渠)의 학()23)을 일으키고 상서(庠序)의 풍()24)을 널리 편다면, 멀리는 헌희(軒羲)25)를 잇고 가까이로는 문경(文景)26)에 버금갈 것이니, 그 공업이 영구히 융성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젓고 발을 구르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부혁이 상주한 일을 들여다보면, 미처 읽기도 전에 5(:五臟)가 갈라지고, 소리내어 읽으면 6()이 찢어집니다. 슬프게도 삿된 말이 정도(正道)를 현혹시키고 마귀의 말이 진리를 누르는 것이 아래의 어리석은 이들조차 듣기 거북한데, 하물며 위로 천청(天聽)을 간섭하고자 하겠습니까?

부혁도 벼슬아치인지라 물망(物望)을 얻고자 하였을 텐데, 어찌 인정을 멀리하여 무고한 악업을 지었겠습니까? 그러나 언사가 비루하고 사리가 분명치 못하여 선왕의 전모(典謨)를 욕되게 하고 인륜의 풍궤(風軌)를 상하게 하였는데, 그 부인조차 대꾸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언필유중(言必有中)이라 하겠습니까? 공자도 한 마디 말이라도 이치에만 맞으면 천하가 그곳으로 돌아가지만, 한 가지 일이라도 상도(常道)에 어긋나면 처자식조차 외면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상주한 일을 돌이켜 대도(大都)를 통괄해서 본말을 따져 보면, 궐정(闕庭)과 조정을 모욕하고 성인을 욕보인 것이 극심합니다. 그러므로 부혁의 본뜻은 이로써 스스로를 도모하고자 함이니, 비록 영달은 구할지라도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결국은 조야를 희롱하고자 함이니, 폐하가 하늘에 호응하고 때에 순응하여 도록(圖籙)을 장악해서 만국(萬國)의 근본으로 매진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복이 세상의 위급을 구하는 힘이 되고 난리를 평정하는 공이 될 것이기에, 참으로 위망(威望)은 선대의 3()을 덮고 성망(聲望)은 예전의 5()를 능가할 것입니다. 3()를 깊이 유념하여 복전에 뜻을 두고 출가인을 예우하신다면, 하늘같은 은택에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단지 일부 스님들이 계행(戒行)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국은(國恩)을 입거나 무식한 무리들이

 

죄를 짓기도 하는지라, 부혁이 이 같은 악담을 늘어놓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가슴 치며 통탄할 노릇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이 죄가 있다면 극형이라도 감수할 것이나, 부혁이 성인을 능욕하는 언사가 지나친 것이 개탄스럽고, 또 사견을 내는 자가 이로써 비행을 저지를까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춘추(春秋)에 따르면, 노나라 장공(莊公) 7년 여름 4월에 항성(恒星)이 빛나지 않고도 밤중이 대낮같이 훤하였는데, 이는 바로 부처님께서 탄생하신다는 서응(瑞應)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진신(眞身)과 응신(應身)의 두 몸과 권실(權實)의 두 가지 지혜와 3()8해탈(解脫)5()6신통(神通)의 위신력이 있으십니다. ()을 불가사의하다고 말하고 법을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도는 중성(衆聖)을 니원(泥洹)으로 인도하고, 그 힘은 고해에 빠진 범부를 거두어 주십니다.

후한 명제(明帝) 영평(永平) 3년에 꿈에 금인(金人)을 본 이래로 상교(像敎)27)가 동류(東流)하였는데, 그 상서로운 모습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음은 한나라와 위나라의 역사서와 요석(姚石)28) 등의 서책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도안(道安)과 도욱(道昱) 등의 스님들과 불도징(佛圖澄)과 구마라집(鳩摩羅什) 등의 고승들에 이르러서야 그 높은 덕행을 깊이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당대의 명승은 모두 임금에게 그 존귀함이 알려져 존경받았습니다. 5백 년 이래로 사원과 불탑이 9()에 두루하고 승니가 3()에 가득하였습니다. 당대의 임금들이 모두 존경하자 조야가 진심으로 귀의하였는데, 상교(像敎)가 흥행하여 지금까지 단절되지 않은 것이 진실로 인왕(人王)의 힘에 의지한 것입니다.

세간의 군신과 부자간에 은택이 있더라도 보답받기 힘들고 넓은 하늘은 보응(報應)조차 없을 것이나 부처님께서는 이 중생들 가운데 출세하신 자부(慈父)이시고 범부나 성인을 모두 위하는 양의(良醫)이신데도, 이를 짓누르려 하고 허물을 씌워 욕보인다는 것은 이치로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러러 생각해보면 여래의 지혜는 유무(有無)를 벗어나신 것인데, 어찌 3황이 헤아릴 수 있겠으며, 그 힘이 조화를 머금으셨는데 어찌 2()로 가릴 수 있겠습니까?

열자(列子)에 따르면, “예전에 상()나라의 태재(太宰) ()가 공구(孔丘)에게 그대는 성인인가?’라고 묻자, 공구가 나는 아는 것이 많고 잘 기억할 뿐이지

 

성인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3왕이 성인인가?’라고 묻자, ‘3왕은 지혜와 용기가 가상하나 성인인지는 나도 모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5제는 성인인가?’라고 묻자, ‘5제는 어짊과 신의가 가상하나 성인인지는 나도 모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3황이 성인인가?’라고 묻자, ‘3황이 때를 바르게 잘 썼으나 성인인지는 나도 모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태재가 놀라서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성인인가?’라고 캐물으니, 공구가 안색이 변하면서 뜸을 들이다가 서방에 성인이 계신데,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럽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고 교화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지기에 너무나 위대해서 백성이 무어라 이름 붙이지도 못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만약 3황과 5제가 반드시 성인이라면, 어째서 공자가 이를 말하지 않고 숨겨서 바로 성인을 감춘 죄를 범할 리가 있었겠습니까? 이로써 추측해보면, 부처님이야말로 대성인이신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노자의 서승경(西昇經)에서는, “우리 스승이 천축에 출현하셨다가 니원(泥洹)으로 가셨다고 하였고, 부자(符子)노씨의 스승 이름은 석가문(釋迦文)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공자나 노자의 책에서도 부처님을 스승으로 존중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글이 적지 않은데, 어찌 부혁 한 사람에 의해 비방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공손룡(公孫龍)견백론(堅白論)을 지어 3황을 탓하고 5제를 그르다 하였다고, 지금까지도 이것을 읽는 이들이 어금니를 깨무는 것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을 터인데 참으로 애석합니다.

주상(主上)께서는 지성(至聖)으로 심신을 삼가고 도리에 밝으셔서 말을 풀어놓고 소를 쉬게 하며, 식려(式閭)29)하고 무덤 위에 흙을 북돋워 고대 성왕(聖王)의 풍화를 일으키고 석가와 노자의 교화를 열고자 하였습니다. 광간(狂簡)의 설은 더욱 그것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만약 제왕에게 부처가 없다면 크게 다스려지고 연조(年祚)도 길게 되나, 부처가 있을 때는 정치가 가혹하여 국조(國祚)도 짧아진다고 말한다면, 요 임금과 순 임금은 홀로 다스려 자손에게 미치지도 못했을 것이며 하()ㆍ은()ㆍ주()ㆍ진()의 왕정도 몇 번이나 바뀌었을 것입니다. 소장(蕭牆)의 변()30)이 잇달았고, 이 때에는 부처님께서 계시지도 않았는데 어떠한 연고로

 

국운이 짧았던 것입니까?

단지 림() 제가 이전에 요순시대를 살았더라도 일용사(日用事)를 알지 못하나, 바깥에서는 필시 이것을 좋지 못한 일로 볼 것이니, 멀리 서번(西蕃)의 나라까지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화하(華夏)가 무식하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공자는 말이 천하에 가득하더라도 허물이 없고, 행동이 천하를 채우더라도 원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말하는 자는 허물이 없고자 하고 듣는 자는 스스로 경계를 하려 해도 부혁은 하는 말이 너무 불손해서 이것을 듣는 자마저 모두 놀래는지라, 마침내 국풍(國風)을 어지럽히며 특히 화하(華夏)의 민속에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삼가 충정을 표하고자[丹款] 감히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대왕 전하는 천품이 뛰어나 저절로 우뚝하신데다 풍채가 반듯하고 도량도 넓으신지라, 어진 것을 즐겨서 동쪽을 평정하였고, 원만함을 기뻐하여 서초(西楚)로 방향을 돌리셨습니다.

아형(阿衡)과 백규(百揆)에 식년시로 육조[式序六條]를 보태었으니31) 덕이 이미 장막을 들어 올렸고 어짊은 그물을 찢었습니다. 강장(康莊)32)의 저택[]를 열고서 순경(筍卿)의 빈()을 앉히고33) 수죽(脩竹)의 원()을 일으켜34) 문아(文雅)의 객()을 예우하시니,35) ()는 지극히 정()에 근거하며 부() 또한 사물에 동화됨이 극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진실로 명예는 조야에 드러나고 아름다움은 전영(前英)을 꿰뚫었습니다.

다만 제가 안으로 부족한 것을 돌이켜 보면 비록 방원(方圓)에 쓰임새가 없으나, 부혁이 어리석기 그지없어 스님들을 대머리라 욕하며 업신여긴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극악무도한지라,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존로(尊盧)와 혁서(赫胥)36) 이래로, 천지가 개벽한 이후 부혁처럼 패륜한 자가 없습니다. 뼈가 부러지고 마음이 무척 아픈 데에 처하지 않더라도 삼가 부혁이 해를 끼친 일을 기록하여 조목조목 답변한 것이 아래와 같습니다. 보잘것없는 글로 위엄만 손상시켰는지라, 엎드려 사죄드립니다. 삼가 올립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해내(海內)에서 임금을 섬기는 자는 적으나 홍교(弘敎)를 즐기는 이는 많다. 바깥으로 호나라의 부처를 섬기고 안으로는 사견(邪見)을 내어 머리카락을 깎고 옷을 바꿔 입고는 신자(臣子)의 문을 벗어나 승니(僧尼)의 집으로 들어간다. 우뚝 선 채로 임금을 만나고,

 

앉은 채로 무릎 아래로 내려다보니, 참으로 불충불효(不忠不孝)하면서 연방(連房)에 모인다. 부처는 서역에 있는데 말도 이상하고 가는 길도 멀기만 한데, 부모도 버린 채 재산을 모으면서 장년(壯年)을 두려워하고 노년(老年)을 무시하며, 부자와 강한 것을 중시하고 가난하고 약한 것을 경시하며, 소년(少年)을 애호하고 기년(耆年)을 천대하면서 광대짓으로 예능(藝能)을 삼고 속임수로 종지(宗旨)를 삼는지라, 참으로 부처는 일성(一姓)의 집안 귀신이다. 귀신이 되더라도 다른 씨족을 용납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 살아 있는 남자를 죽은 오랑캐에게 주겠는가? 이곳의 명주(明珠)를 업신여기면서 저곳의 고기 눈알을 존중하여 엄부(嚴父)를 버리고 다른 이를 모시면서, 어찌 열 개의 진흙 오랑캐를 꿇어앉혀 경상(卿相)을 삼고, 한 소쿠리 식은 밥을 올려 제왕으로 대우할 수 있는가? 부처의 사설(邪說)에 따르면 인정에 가깝지 않게 될지니, 부처가 우스꽝스럽게 큰 소리를 쳐도 전맹(栴孟)37)에 미치지 못하고 사치스럽게 조성하는 것이 죄가 걸주(傑紂)보다 크기에 집안에 들이면 집안이 망하고, 나라에 들이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체로 출가(出家)라는 것은, 안으로는 부모와 애첩을 하직하고 밖으로는 관직과 영화를 버려서 위없는 보리(菩提)를 구하며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고자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조종(祖宗)의 복식을 벗고 복전(福田)의 가사를 입는 이유도, 도를 행하여 4()에 보답하고 덕을 세워 3()를 이롭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 큰 뜻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을 오랑캐 귀신이라 욕하고 스님들을 대머리라 욕하는 것과 같은 경우를 공자와 노자의 경서나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 내외의 사적들에서 살펴보면 대략 공자나 노자가 부처님을 스승으로 존경한 곳을 인용할 수 있고 이것을 증명하는 글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로써 이 삿된 인간에 대한 답변을 대신하는데, 저 부혁은 엎드려 지은 죄를 빌어야 할 것입니다.

도사법륜경(道士法輪經)에서는, “만약 사문(沙門)을 만나면 무량(無量)을 생각하고, 일찌감치 출가하여 진불(眞佛)을 배운다고 원을 세우라고 하였고, 다시 만약 불도(佛道)를 보거든 무량을 생각하고, 일체 중생이 법문(法門)에 널리 섭입하도록 원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태상청정소마보진안지지혜본원대계상품경(太上淸淨消魔寶眞安志智慧本願大戒上品經)

 

사십구원(四十九願)에서는 말하기를, “만약 사문니(沙門尼)를 만나거든, 마땅히 일체법도를 밝게 깨우쳐 도를 얻는 것이 부처님과 같게 되도록 원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노자의 승현경(昇玄經)에도 천존(天尊)이 도사 장릉(張陵)에게 고하되, 동방에 가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을 받으라고 하였고, 도사 장릉(張陵)별전(別傳)에도 장릉이 학명산(鶴鳴山) 가운데 있으면서 금상(金像)을 공양하며 불경을 되풀이하여 읽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다시 승현경에서는, “동방여래(東方如來)께서 선승대사(善勝大士)를 태상(太上)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그대가 장릉에게 설법하는 것을 여래께서 들으시고, 나를 보내어 그대를 만나 보게 하셨다고 말하면서, 장릉에게 너는 나를 따라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자. 네가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할 것이고, 듣지 못한 것을 듣게 할 것이다라고 권했다. 이에 장릉이 대사에게 예배하고 그를 따라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갔다고 하였습니다.

노자의 서승경에서는 내 스승이 천축에서 교화하시는데, 니원으로 잘 이끄신다고 하였습니다. 지혜관신대계경(智慧觀身大戒經)에서는 말하기를, “도학을 마땅히 염두에 두고 대범천(大梵天)의 유영궁(流影宮)으로 가서 부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승현경에서는, “만약 사문이 찾아와서 경을 듣고 재법(齋法)을 보고자 하면, 공양주는 음식을 마련하는 비용만을 따져서 그 참관을 제지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상석에 모시고 도사(道士)나 경사(經師)는 그 아래에 앉아라고 하였습니다. 승현경에는 다시금, “도사가 재()를 지내 공양하는데, 만약 비구가 찾아오면, 상석에 모시고 공양을 잘 마련해 드리고 도사나 경사는 아랫자리에 앉아라. 만약 비구니가 찾아와 법을 듣고자 하면, 가려진 곳에다 모시고 상석으로 예우하면서 공양주(供養主)는 법에 맞게 공양해야 하니, 이를 제지해서는 안 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화호경(化胡經)에서도, “우담발화 꽃 꺾기를 원하고, 전단향 사르기를 원하니, 천 불의 금색신(金色身)을 공양하면서 정광(定光)에 고개 숙여 예배드린다고 하였으며, 다시 부처님께서는

 

어찌 이리도 늦게 오셨으며, 어찌 이리도 일찍 열반에 드셨는가?” 석가문불(釋迦文佛)을 뵙지 못하니, 마음이 울적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영보소마안지경(靈寶消魔安志經)에서는, “‘도는 재계(齋戒)를 우선하되, 부지런히 닦아서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다[신본(新本)에는 부지런히 닦아서 금궐(金闕)에 들지니로 개작되었다]. 그러므로 대법교(大法橋)를 만들어 사람들을 널리 제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노자대권보살경(老子大權菩薩經)에서는, “노자는 가섭(迦葉)보살이 진단(震旦)에 화현하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영보법륜경(靈寶法輪經)에서는, “갈선공(葛仙公)이 태어나 며칠이 지나자, 외국의 사문이 찾아와 갈선공을 보고서 두 손을 모으고 선공의 부모에게 이 아이는 서방의 선사보살(善思菩薩)이신데, 지금 한나라 땅에 오신 것은 중생을 교화하고자 함이니, 선도(仙道)에 노닐다 백일승천(白日昇天)하리라고 말했다 선공이 제자들에게 내 스승의 성씨는 파열종(波閱宗)이신데, ()는 유나하(維那訶)로 서역 사람이시다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선공청문중성난경(仙公請問衆聖難經)에서는, “갈선공이 제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예전에 석도미(釋道微)ㆍ축법개(竺法開)ㆍ장태(張太)ㆍ정사원(鄭思遠) 등 네 사람과 동시에 원을 세웠는데, 도미와 법개 두 사람은 사문이 되겠다고 원을 세웠고, 장태와 정사원 두 사람은 도사가 되겠다고 원을 세웠다고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선공기거주(仙公起居注)에서도, “(갈선공이) 갈상서(葛尙書)의 집에 태어났는데, 상서의 나이가 이미 여든을 넘었으나, 이 때 처음으로 아들을 보았다. 이때 어떤 사문이 천축의 스님이라 자칭하면서 저잣거리에서 향을 샀다. 상인이 의아해 하며 연유를 묻자, 스님이 내가 어젯밤 꿈에 선사보살이 갈상서의 집에서 태어나는 것을 보았으니, 내가 이 향으로 목욕시켜려 한다고 대답했다. 태어나는 때가 되자, 이 스님이 찾아가서 향을 사르고 오른쪽으로 일곱 번을 돌고 공경스럽게 예배하고서 목욕시키고

 

가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선공청문상경(仙公請問上經)에서는, “사문과 도사는 말을 할 때는 도에 뜻을 둔다고 하였습니다. 상품대계경(上品大戒經)교량공덕품(校量功德品)에서는, “부처님의 탑에 시주하면 천 배의 과보를 얻고 사문(沙門)에게 시주하면 백 배의 과보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승현내교경(昇玄內敎經)에서는, “혹 어떤 이가 여느 때에는 복을 짓지 않다가, 사문과 도사가 설법하여 권선(勸善)하는 것을 보고서야 생각지도 않던 것을 깨우치게 된다고 운운하였습니다.

도사 도은거(陶隱居)38)의 예불문(禮佛文)지혜본원대계상품경(智慧本願大戒上品經)에서는, “부처님과 스님들의 중식(中食)을 불탑과 사찰에 보시할 때 1() 이상을 하게 되면 모두 24천 배의 보답이 있다. 공덕이 적더라도 과보는 많으니 세세생생 현명하고 경사가 끊이지 않으며, 7대 조상까지 모두 무량불국토(無量佛國土)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선공청문경에는, “다시 범부가 이 같은 공덕을 지으면서 사문이 되기를 원하면 도사 태부(太傅)는 후생에는 사문이 될 것이니, 불법을 크게 공부하여 마침내 대중 가운데의 법사[衆法師]가 될 것이다. 다시 어떤 사람이 사문과 도사가 재정(齋靜)하고 독경하는 것을 보고 이것을 비웃으면서, ‘저들이 허공에 대고 경을 읊조리는데, 이는 대체 무엇을 바라고자 함인가? 허기진 배에 일중(日中)에 한번만 먹으니 이들은 죄인일 것이다고 말하였다. 도사가 자비심을 내어 그들을 타일러도 고집을 부리고 뉘우치지 않는다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다섯 가지 고통을 겪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선공청문경에서는, “5()은 유속(儒俗)의 업이다. 도교와 불교가 각각 그 가르침이 크게 선으로 돌아간다고 감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태상영보진일권계법륜묘경(太上靈寶眞一勸誡法輪妙經)에서는 내가 여러 하늘을 낱낱이 살펴보니, 수없는 겁 이래로 여러 도사ㆍ백성ㆍ남녀가 무상정진(無上正眞)의 도()를 얻는 것을 보았다. 고선(高仙)

 

진인(眞人)ㆍ자연(自然) 및 시방의 부처가 모두 전생에 근수(勤修)하는 고통을 받으면서 도를 구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법륜묘경(法輪妙經)에서는, “도가에서는 대체로 윤회를 없애지 않고 다시 환생(還生)하여 인간 가운데 대지혜(大智慧)와 명달(明達)을 얻는 이는, 수없는 겁을 닦아서 진인을 이룬다. 고선과 자연 및 시방의 부처님은 행업(行業)에서 제신(制身)ㆍ정지(定止)ㆍ좌선(坐禪)ㆍ사미(思微)를 이루지 않은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상 기록된 것은 도가의 경전에 보이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받드는 문장들로 앞서와 같습니다.

주서이기(周書異記)에서는, “주나라 소왕(昭王)이 즉위한 지 24년째 갑인년 48일에 강물과 연못이 갑자기 불어나고 우물과 샘이 모두 넘쳐흘렀다. 궁전과 인사(人舍) 및 산천대지가 모두 진동하고 밤중에는 오색 빛줄기가 태미성(太微星)을 꿰뚫었고 서쪽으로 온통 퍼져 청홍색으로 물들었다. 주나라 소왕이 태사(太史) 소유(蘇由)에게 이는 무슨 길조인가?’라고 묻자, 소유가 대성인이 서방에 태어나셨기에 이 같은 서응이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소왕이 앞으로 천하가 어찌 되겠는가라고 묻자, 소유가 지금은 별다른 것이 없으나, 1천여 년 후에 그 성교(聲敎)가 이 땅까지 미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소왕이 바로 사람을 시켜 돌에다 새기고 남교(南郊)의 천사(天祀) 앞에 묻었으니, 이 때가 부처님께서 처음 왕궁에 태어나신 때이다.

또 목왕이 즉위한 지 32년째에 서방에 몇 갈래 빛줄기가 비치는 것을 보았는데, 예전에 소유가 한 말을 이미 들었기에 바로 서방에서 성인이 세상에 나신 것을 알았다. 그러나 목왕이 이치를 몰랐기에 주나라의 도가 옳은 것이 아니라고 여기고, 상국(相國) 여후(呂侯)와 함께 서쪽으로 들어가 도산(塗山)에서 제후와 회맹(會盟)하여 광변(光變)의 재액을 없애려고 기도하였는데, 이 때가 부처님께서 오래도록 이미 세상에 머무르셨을 때이다.

또 목왕 52년 임신년 215

 

새벽에 폭풍이 휘몰아쳐 집을 무너뜨리고 나무를 부러뜨리면서 산천대지가 모두 진동하였는데, 오후가 되자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들면서 서쪽으로 흰 무지개 열두 갈래가 남북으로 통하여 걸쳐 있었는데 밤이 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목왕이 대사 호다(扈多)에게 이는 무슨 징조인가?’라고 묻자, 호다가 서방의 성인이 멸도하셨기에 이제 쇠상(衰相)이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목왕이 크게 기뻐하며 짐이 저 사람을 늘 두려워했는데, 이제 멸도(滅度)하였다니, 짐이 이제 무엇을 근심하리오?’라고 말했다. 이 때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무렵이다라고 하였다.

사록(史錄)에서는 오나라 태재 비가 공자에게 도대체 누가 성인인가?’라고 묻자, 공자가 서방에 성인이 계신데,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럽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고 교화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하기에 너무나 위대해서 백성이 무어라 이름 붙이지도 못한다고 대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기록은 공자의 책에 보이는, 부처님을 찬양하는 문장들로 앞서와 같습니다.

다시 부혁의 말에 대해 답변드리겠습니다.39)

()에는 ()을 보면 따르지 못하듯 하고, ()을 보면 끓는 물 만지듯 하라고 하였는데, 태상(太上)의 귀한 덕도 이런 다음에야 세워지게 됩니다. 덕으로써 사람을 돌이키고, 말로써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인데, 부혁이 부덕(不德)하여 허물 많은 몸으로 하는 말마다 교화를 비난하고 대성을 모독하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공자와 노자 같은 성인도 스스로 3보를 찬양하여 도사를 시켜 승니에게 겸양하라 하였는데, 부혁이 공자와 노자를 전수받아 스승으로 삼으면서도, 어째서 스승의 가르침을 거역하여 성인을 욕보이려 합니까? 부자(符子), “노씨의 스승 이름이 석가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선생은 모자(牟子)2권을 지어 불법을 상세히 논하였습니다.

내전천지경(內典天地經)에서는, “부처님께서 삼성(三聖)을 보내어 저 동토를 교화케 하셨으니, 가섭보살을 저쪽에서는 노자라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청정법행경(淸淨法行經)에는, “부처님께서 세 사람의 제자를 보내셔서 진단을 교화하셨으니, 유동보살(儒童菩薩)을 저쪽에서는 공자라 부르고, 광정보살(光淨菩薩)을 저쪽에서는 안회(顔回)라 부르고, 마하가섭(摩訶迦葉)을 저쪽에서는 노자라 부른다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전한서(前漢書)에 따르면, “효무제(孝武帝)가 원수(元狩) 연간에 곽거병(霍去病)을 시켜 흉노(匈奴)를 토벌케 하여 고란(皐蘭)을 지나 거연산(居延山)에 이르렀는데 곤야(昆耶)의 휴사왕(休闍王)5만여 명을 데리고 투항하였다. 그리고 크기가 한 길이나 되는 금인을 얻어다 감천궁(甘泉宮)에 안치하였다. 무제가 이를 대신(大神)으로 여겨 향을 사르고 예배하면서 아울러 서역을 개척하고자 장건(張騫)을 대하국(大夏國)에 사신으로 보냈다.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신독국(身毒國)이 있는데, 신독국은 일명 천축(天竺)이라고도 합니다라고 말하였기에 부도(符圖)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들었다고 합니다.

위서(魏書)에서는, “한나라 무제가 금인을 얻었는데 제사를 지내지 않고 단지 향을 사르고 예배하였을 뿐이었지만 이로부터 불교가 차츰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장제(莊帝)에 이르러서 초왕(楚王) ()이 부도(浮圖)를 좋아하여 재계(齋戒)하면서 누런 비단과 흰 비단 30필을 기증하여 속죄하였다. 나중에 초왕에게 조칙(詔勅)이 내렸는데, ‘초왕이 부도의 인사(仁祀)를 숭상하여 정갈하게 석달 동안 재계하면서 신에게 서약하였다니, 참으로 미덥구나라고 하였다. 환제(桓帝) 때에는 양해(襄楷)불타와 황로(黃老)로 주상에게 간언 올리니, 생명을 아껴서 살생을 멀리하며 욕심을 줄이고 무위를 숭상하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후한서에서는, “효명제(孝明帝) 영평(永平) 3년에 주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목에 일월을 걸고 궁전으로 날아들어 왔기에 여러 신하에게 이를 물어 보자, 통인(通人) 부의(傅毅)신이 듣자오니, 서역에 신이 있다는데, 그 이름을 부처라 한답니다. 폐하께서 보신 것이 이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명제가 바로 낭중(郎中) 채음(蔡愔)ㆍ중랑장(中郞將) 진경(秦景)ㆍ박사 왕준(王遵) 등을 사신으로 천축에 보내어 그 형상을 그려 오게 하였다. 이에 채음이 사문 섭마등(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동토로 돌아와 낙양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중국에 사문이 있게 된 시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후한서』 「교사지(郊祀志)에서는, “()이란 한자로 각()인데, 군생(群生)을 깨우친다는 뜻이다. 그 가르침을 개괄하면, 선을 닦되 자비심을 위주하여 산 무리를 죽이지 않고 청정하게 노력하는 것이니, 그 정수가 바로 사문(沙門)이다. 이는 한자로 식심(息心)인데, 삭발하고 속가를 떠나 정을 끊고 욕심을 씻어 내어 마침내 무위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또 사람이 죽더라도 정신은 멸하지 않고 나중에 다시 형체를 받는다고 하는데, 선악을 행하면 내생에 모두 보응이 있다고 한다. 선을 행하고 도를 닦는 것을 귀히 여기기에 그 정신을 수련하여 무아(無我)가 되면 무생(無生)에 이르러 성불한다고 한다. 신장이 16척인 데다 황금색인데, 정수리에 일월의 광채가 빛나고 변화가 무상(無常)하여 이르지 않는 데가 없고 만물에 화통하여 군생(群生)을 크게 제도한다. 경서가 수천 권이나 되는데, 허무(虛無)를 종지로 삼되 정조(精粗)를 포괄하여 통괄하지 않음이 없다. 넓고 커다란 언행을 즐겨서 구하는 바를 일체의 안에 두며, 밝히는 바를 보고 듣는 바깥에 두고 현미(玄微)로 돌이키기에 참으로 심오해서 헤아리기 힘들다. 그러므로 왕공(王公)이나 대인(大人)이 생사가 보응하는 시말을 관하게 되면, 그만 아연해져서 낯빛이 변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위서에서는, “채음이 불상과 경전을 얻었는데,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과 석가모니의 입상(立像)이었다. 명제가 화공에게 명하여 그 형상을 모사하게 하여 청량대(淸凉臺)와 현절릉(顯節陵) 위에 안치하였고, 경문(經文)은 난대(蘭臺)의 석실(石室)에 봉해두었다. 채음이 귀환할 때에 백마에다 경전을 싣고 한나라로 왔으니, 이로 인해 백마사(白馬寺)가 낙양의 옹문(雍門) 서쪽에 세워졌다. 그 경전의 요지를 말로 다할 수는 없으나, 생생(生生)의 부류가 모두 행업(行業)에 기인하여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 수도(修道)의 차례나 심행(心行)의 등급은 한둘이 아닌데, 모두 얕은 데를 연하여 깊은 데로 들어가서 미묘(微妙)에 빗대어 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인순(仁順)을 쌓고 기욕(嗜慾)을 줄이는 것에 따르면서 허정(虛靜)을 익혀 통조(通照)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 수행을 시작하는 마음은 불ㆍ법ㆍ승에 의지하여 삼귀의계(三歸依戒)를 받는 것이다. 삼귀의는 군자의 3()와 같다. 5()가 있어서 살생ㆍ절도ㆍ음행ㆍ망어ㆍ음주를 끊게 되는데, 큰 뜻은 인()ㆍ의()ㆍ예()ㆍ지()ㆍ신()과 같다. 이것을 지키면 인간이나 천당 같은 좋은 곳에 태어나서 귀신과 축생 등의 여러 고통을 여의는데 선악의 처소에도 대체로 여섯 곳이 있다고 말한다. 마음을 경계하고 몸을 바르게 하고 입으로 망어를 끊는 것을 총괄해서 모두 10선도(善道)라 한다. 이같이 할 수만 있다면, 가까이는 천당의 과보를 얻고 멀리는 보리(菩提)를 얻게 된다. 부처는 사월 초파일 밤에 성모(聖母)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는데, 그 연대는 주나라 소왕(昭王)ㆍ노왕(魯王)ㆍ장왕(莊王)의 시대에 해당한다. 형상이 남과 달라서 32()이 있는 데다 하늘에서 서응이 내려 이에 호응하는데, 여기에도 32가지가 있다. 부처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향나무로 화장하여 영골(靈骨)을 나누었는데, 크기가 쌀알만 하고 붉은 빛이 도는 흰 색이며 내리쳐도 깨지지 않고 태워도 타지 않는다. 매번 광명을 발하여서 신비로운 영험이 있었다. 부처가 멸도한 지 116년 후에 아육왕(阿育王)이 위신력으로 부처의 사리를 나누고 귀병(鬼兵)을 시켜 84천 개의 탑을 이룩하였는데, 지금 낙양(洛陽)ㆍ팽성(彭城)ㆍ부풍(扶風)ㆍ촉군(蜀郡)ㆍ고장(姑臧)ㆍ임치(臨淄) 등에 모두 이와 같은 탑이 있으니, 한결같이 신비롭다고 하였습니다.

한법본내전(漢法本內傳)에는, “명제가 바로 낭중 채음ㆍ중랑장 진경ㆍ박사 왕준 등 18명을 사신으로 천축국에 보내자, 섭마등 스님 등과 함께 석가의 입상을 가져 왔다. 이것은 우전왕(優塡王)의 네 번째 사()가 만든 것이다. 명제가 섭마등에게 법왕이 세상에 나오셨는데, 어째서 그 교화가 이곳에는 미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자, 마등 스님이 가비라위국(迦毘羅衛國)은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백억 일월세계의 중심인지라, 3세의 제불(諸佛)이 모두 이곳에 출세하십니다. 천주ㆍ용ㆍ귀신으로 원행력(願行力)이 있는 이는 물어 볼 것도 없이 모두 이곳에서 태어나 부처님의 바른 교화를 받고, 이에 감득(感得)하여 도를 깨닫는데, 다른 곳의 중생은 부처님에게 감득할 만한 연()이 없기에 부처님께서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비록 가시지 않더라도 광명이 미친 곳에는 5백 년이거나 천 년이거나 천 년이 지나더라도, 모두 성인이 나타나 부처님의 성교(聲敎)를 전도하게 됩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영평 14년 정월 초하루에는 오악(五岳)의 여러 도사들이 조례(朝禮)를 지내다가 서로 돌아보며, ‘지금 지존(至尊)께서 우리의 도법(道法)을 버리고 멀리 오랑캐의 가르침을 구하시는데, 우리들이 지금 조례를 시작으로 각기 태상천존(太上天尊)이 제작한 경서를 가지고, 힘닿는 대로 모두 표()를 올리자고 말하면서, 이렇게 상주하였습니다.

오악 열여덟 산관(山觀) 태상삼통(太上三洞)의 제자로서 저선신(楮善信)을 위시한 690명이 죽을죄를 각오하고 주상께 아룁니다.

신들이 듣자오니, 태상(太上)은 무형(無形)이고 무명(無名)이고 무극(無極)이고 무상(無上)이시니, 바로 허무자연대도(虛無自然大道)의 원수(元首)이십니다. 스스로 조화에 따라 도덕이 생겨나기에 무상과 무위의 지존이시고, 자연의 아비이십니다. 상고시대에는 한결같이 받들어 백왕(百王)이 이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도가 희황(犧黃)에 이르시고 덕이 요순(堯舜)을 덮으니 4()가 빛나고 팔표(八表)가 어질어 귀순하기에 신들도 받들어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근본을 버리시고 지엽을 따르시어 서역의 가르침을 구하시는데, 신들이 보건대 서역에서 섬기는 것은 오랑캐의 신인지라, 말조차 중국과 맞지 않으므로, 다시 호나라 사람을 청하여 그 말을 번역하여 한어(漢語)와 같게 해야 합니다.

신들이 헤아리건대, 폐하께서 비록 이것을 번역하시더라도 이는 대도(大道)가 아니므로 믿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신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면, 함께 시험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신들은 오악 여러 산관의 도사들인지라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경전에도 해박합니다. 원황(元皇) 이래로 태상경행(太上經行)을 모두 터득하였고, 태허(太虛)의 부주(符呪)에도 모두 통달하였으니, 혹 부록(符籙)을 삼켜 기()를 먹기도 하고, 혹 방책(方策)을 써서 귀신을 부리기도 하며, 혹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타지 않고, 혹 물을 밟더라도 빠지지 않고, 혹 백일승천하기도 하고, 혹 형체를 땅에 감추기도 하는지라, 방약(方藥)과 법술(法術)에도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들이 비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첫째는 성상의 뜻을 편안케 하고자 함이고, 둘째는 진위를 가리고자 함이며, 셋째는 대도로 돌이키고자 함이고, 넷째는 화하의 풍속을 잡스럽지 않게 하고자 함입니다. 신들이 만약 서로 견주어 여의치 못하다면, 주상의 엄중한 판결에 맡길 터이나, 만약 신들이 서로 견주어 이긴다면 헛된 것을 없애 주십시오.

마침내 칙령이 내려져 상서령(尙書令) 송상인(宋庠仁)이 장락궁(長樂宮)에 들어가 이달 보름 백마사 남문 바깥에 모이라는 조칙을 전하였습니다. 이에 도사들이 진단(眞壇) 세 개를 함께 설치하였고, 진단마다 별도로 24문을 설치하였습니다.

남악(南岳)의 도사 저선신을 위시한 70명이 영보진문(靈寶眞文)ㆍ태상옥결(太上玉訣:태상통현영보적서옥결경)ㆍ공동(崆峒)ㆍ영장(靈章)ㆍ승현(昇玄)ㆍ보허(步虛:통현영보옥경산보허경)ㆍ태상좌선인청문(太上左仙人請問)ㆍ자연오칭(自然五稱:태상무극대도자연진일오칭부상경)ㆍ제천내음(諸天內音: 태상영보제천내음자연옥자) 따위의 경 103권을 모았습니다.

화악(華岳)의 도사 유정념(劉正念)을 위시한 70명이 지혜정지(智慧定志: 태상통현영보지혜정지통미경)ㆍ지혜상품계(智慧上品戒:태상통현영보지혜죄근상품대계경)ㆍ선인청문(仙人請問)ㆍ본행인연(本行因緣:고상옥황본행집경)ㆍ명진과(明眞科:대도통현영보장야지부구유옥궤명진과) 따위의 경 62권을 모았습니다.

항악(恒岳)의 도사 환문도(桓文度)를 위시한 70명이 본업상품법과(本業上品法科)ㆍ죄복명진과(罪福明眞科)ㆍ재의(齋儀:태상황록제의)ㆍ태상통현진문(太上洞玄眞文) 따위의 경 80권을 모았습니다.

대악(岱岳)의 도사 초득심(焦得心)을 위시한 70명이 제천영서도명(諸天靈書度明:제천영서도명묘경)ㆍ구천생신장(九天生神章:영보자연구천생신장경)ㆍ태상설극(太上說極:태상노군설상청정경)ㆍ태허자연(太虛自然:태상노군허무자연보기경)ㆍ멸도오련생시도(滅度五練生尸道:태상통현멸도오련생시묘경)ㆍ자연권의(自然券儀:통현영보자연권의) 따위의 경 85권을 모았습니다.

숭악(嵩岳)의 도사 여혜통(呂慧通)을 위시한 140명이 태상안지상품(太上安志上品)ㆍ삼원품계(三元品戒:태상통현영보삼원품계공덕경중경)ㆍ태극좌선공(太極左仙公) 신선본기내전(神仙本起內傳)ㆍ복어오아입성(服御五牙立成:통진태상청아시생경)ㆍ조석조례(朝夕朝禮) 따위의 경 95권을 모았습니다.

곽산(霍山)ㆍ천목산(天目山)ㆍ오대산(五臺山)ㆍ백록산(白鹿山) 18산의 여러 산관의 도사들로 기문신(祁文信)을 위시한 270명이 태극진인부령보문(太極眞人敷靈寶文:태극진인부령보재계위의제경요결)ㆍ태상통현령보천문(太上洞玄靈寶天文) 및 오부경(五符經)ㆍ보허문(步虛文)ㆍ신선약법(神仙藥法:신선복이단석행약법)ㆍ시해품(尸解品)ㆍ상천부록칙금(上天符籙勅禁) 따위의 경 85권을 모았으니, 모두 합쳐서 569권이었는데, 이를 서단(西壇)에 안치하였습니다.

다시 모성자(茅成子)허성자(許成子)열자(列子)황자(黃子)노자(老子)장자(莊子)혜자(惠子)등 도합 27() 제자(諸子)의 경서가 모두 235권이었는데, 중단(中壇)에 안치하고, 찬식(饌食)ㆍ존사(尊祀)ㆍ백신(百神)을 동단(東壇)에 안치하였습니다. 마침내 명제가 칠보행전(七寶行殿)을 백마사 남문 바깥에 설치하고 서쪽으로 부처님의 사리 및 경전과 불상을 안치하였습니다.

보름 동안 재를 마치자, 도사들이 자적(紫荻)과 전단(栴檀) 따위의 침수향(沈水香)을 서단의 경교(經敎) 위에 쌓아 놓고 울면서, “신들이 태상무극대도원시천존(太上無極大道元始天尊)과 중선(衆仙)의 백령(百靈)께 아뢰오니, 지금 호나라의 신에게 화하의 주상이 현혹되어 삿된 것을 믿는지라, 정교가 실종되고 현풍(玄風)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신들이 삼가 삼오보강(三五步剛)의 법에 의지하여 감히 경전을 단상에 놓아두고 불로써 시험하고자 하는데, 듣도 보도 못한 기적을 널리 펴서 진위를 가리고자 합니다라고 고하면서 바로 경전에 불을 붙였으나, 경전이 그만 불에 타 버려 모두 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도사들이 경전이 불에 타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크게 놀랐는데, 예전에 승천하였다는 이가 다시 승천하지 못하고, 예전에 형태를 감추었다는 이가 다시 감추지 못하며, 예전에 불 속에 들어갔었다는 이가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예전에 금주(禁呪)에 능했다는 이가 귀신을 불러도 호응이 없었습니다. 예전에 갖가지 공능(功能)이 있었다는 이들도 하나같이 징험(徵驗)이 없었기에 마침내 여러 도사들이 크게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이 때 태부(太傅) 장건(張騫)이 저선신에게, “그대들이 지금 시험해 보았어도 아무런 영험이 없었다. 이는 허망한 것이기에 마땅히 서역의 진법(眞法)을 따라야 하겠노라고 말하자, 저선신이 대답조차 못했는데, 남악의 도사 비숙재(費叔才)는 대중 앞에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기조차 하였습니다. 때마침 부처님의 사리에서 오색의 광명이 나타나 공중에서 도는데 마치 보개(寶蓋)처럼 대중을 둘러싸서 해를 가렸습니다.

그러나 마등 법사는 이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기에 자비의 어진 힘으로 몸을 솟구쳐 높이 날아올라 공중에서 자유로이 서고 눕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웃으며 앉아 있었는데, 이 때에 하늘에서 꽃비가 불전(佛前)과 스님들 위로 내렸습니다. 다시 하늘에서 여러 가지 음악소리를 들려주어 사람들의 마음을 동하게 하였기에 대중이 이를 보고 기뻐하며 모두들 신기하다고 감탄하였습니다. 마침내 축법란 법사가 대중 사이에서 이같이 게송을 읊었습니다.

 

여우는 사자와 짝하지 못하고

등잔은 일월처럼 빛나지 못하네.

연못에 바닷물을 담지 못하고

언덕은 숭악(嵩岳)처럼 드높지 못하네.

 

법운(法雲)이 세계에 드리우고

선법(善法)의 씨앗이 싹트니

희유(希有)한 법이 드러나

가는 곳마다 군생(群生)을 교화하네.

이 때 대중이 축법란 법사를 수백 겹으로 에워싸자, 법사가 다시 범음(梵音)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였기에 마침내 대중이 3보를 기리고 법보와 승보를 칭송하게 되었습니다. 법란 스님이 인도(人道)와 천도(天道) 및 지옥의 인연을 설하기도 하고, 소승이 아비담(阿毘曇)을 설하기도 하며, 대승의 마하연(摩訶衍)을 설하기도 하고, 참회멸죄(懺悔滅罪)를 설하기도 하며, 출가의 공덕을 설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사공(司空)이었던 양성후(陽成侯)와 유선준(劉善峻) 등의 관리와 백성 및 부녀자가 발심하여 출가하였는데, 사악(四岳) 여러 산관의 도사 여혜통을 위시한 620명이 출가하였고, 5품 이상의 관료 93명이 출가하였으며, 9품 이상의 진원장군(鎭遠將軍) 강구아(姜苟兒) 175명이 출가하였습니다. 또 경도(京都)의 시민이었던 장자상(張子尙) 270명이 출가하였고, 명제의 후궁인 음부인(陰夫人) 왕첩여(王婕妤) 등의 238명이 출가하였습니다.

열엿새가 되는 날에 명제가 문무대신 수백 명과 함께 출가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 주었는데, 날마다 공양을 진설하고 밤마다 연등을 밝혀 갖가지 재주와 풍류를 벌이되, 그믐날까지 행하면서 법의(法衣)ㆍ정병(淨甁)ㆍ발우(鉢盂) 등을 모두에게 보시하였습니다.

다시 열 곳에 사원을 세웠으니, 성 바깥에 일곱 곳의 사찰, 성 안에 세 곳의 사찰을 두었습니다. 일곱 곳의 사찰에는 비구 스님들이 머물렀고 세 곳의 사찰에는 비구니가 머물렀는데, 한나라의 불법이 이 때부터 흥기하였습니다.

 

한법본내전은 모두 다섯 권입니다.

1권 명제득몽구법품(明帝得夢求法品)

2권 청법사입법공덕품(請法師立法功德品)

3권 여제도사비교도탈품(與諸道士比校度脫品)

4권 명제대신칭양품(明帝大臣稱揚品)

5권 광통유포품(廣通流布品)

 

현통기(玄通記)에 따르면, “후한 환제(桓帝) 건화(建和) 3년 기축년에 사문 안청(安淸)이 있었는데, 안식국(安息國)의 왕세자였다. 나라를 버리고 출가하여 뜻을 포교에 두었는데, 낙양에 와서 경전을 외출하였다라고 합니다. 위서에서는, “문제 황초(黃初) 3년 임인년에 사문 담마가라(曇摩迦羅)가 허도(許都)로 와서 계율을 역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시중(侍中) 부의(傅毅)가 지은 한법왕이기(漢法王異記)에는, “주나라 소왕 27년 정사년에 부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오서(吳書)에서는, “오나라 임금 손권(孫權)의 적오(赤烏) 4년 신유년에 사문 강승회(康僧會)가 있었는데, 강거국(康居國) 대승상(大丞相)의 아들이었다. 오나라 땅에 와서 초옥을 짓고 불상을 안치하여 도를 행하였는데, 오나라 사람들이 이를 처음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유사(有司)에게 신고하였다. 오나라 임금이 부처님에게는 어떠한 영험이 있으신가?’라고 묻자, 승회가 부처님께서 신령스러운 자취를 거두신 지 이미 천여 년이 넘었으나, 사리를 남기셔서 헤아릴 수 없어 응현(應現)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오나라 임금이 만약 사리를 얻게 되면 마땅히 탑을 세우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삼칠일이 지나자 마침내 오색이 영롱한 사리를 얻었는데, 자르려고 하면 더욱 단단해지고 태워도 타지 않으면서 광명이 큰 연꽃처럼 일어나 궁궐을 훤히 비추자, 오나라 임금이 기적에 감탄하면서 마침내 신심을 내었다. 이에 사찰을 지어 올리자 사람들이 득도하여 출가하게 되었다.

오나라 임금이 상서령(尙書令) 도경후(都卿侯) 감택(闞澤)에게 한나라 명제 이래로 몇 년이 지났는가?’라고 묻자, 감택이 영평 10년에서 지금 적오년까지가 175년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오나라 임금이 불교가 한나라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는데, 어떠한 인연으로 이제야 강동(江東)에 이르렀는가?’라고 말하자, 감택이 영평 14년에 오악의 도사가 마등 스님과 힘을 겨뤘으나 도사들이 지게 되자, 남악의 도사 저선신과 비숙아 등이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는데, 문도(門徒)들이 그들을 남악에 장사지내고 문도의 출가를 단속하였기에 유포되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한나라 조정이 병란에 시달려 그칠 새가 없었기에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야 창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오나라 임금이 다시 공구와 노자를 부처님에게 견주어 보면 어떠한가?’라고 묻자, 감택이 신이 살펴보건대, 노나라의 공구는 재주가 특출나게 뛰어나고 성덕이 비할 데 없어서 세간에서는 호를 소왕(素王)이라 합니다. 경전을 제작하고 주나라의 도()를 기려서 후대까지 전하였으니, 사유(師儒)의 풍화(風化)가 고금에 빛납니다. 다시 일민(逸民)이 있으니, 허성자(許成子)ㆍ여성자(呂成子)ㆍ원양자(原陽子)ㆍ장자(莊子)ㆍ노자(老子) 등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책도 모두 수신(修身)하여 자족하면서 산과 골짜기로 다니며 그 뜻을 마음껏 펴는 것인데, 그 학()이 담박(淡泊)으로 귀착되고, 일마다 인륜과 장유(長幼)의 세절(細節)에 어긋나는지라, 이 또한 세상을 편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풍화가 아닙니다. 한나라 경제(景帝)에 이르러서 황로(黃老)의 의체(義體)가 특별하게 깊어지자, ()라는 칭호를 경()으로 고치고 처음 도학(道學)이 세워졌는데, 조야에 칙령을 내려 이를 외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노자의 2가를 불법에 비길 수는 없으니, 그 이유는 공자와 노자가 세운 가르침이란 하늘을 본받아 쓰임새를 정하는 것이라 하늘을 어기지 못하나, 제불이 세운 가르침을 하늘조차도 받들어 행하면서 감히 부처님께 거역하지 못하기 때문에 참으로 서로 견주지 못함이 분명하다고 말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오나라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감택을 태자의 태부(太傅)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나라 명제(明帝)가 일찍이 궁궐의 서쪽에 부도를 모셨는데, 외국의 사문이 금쟁반에 물을 담아 대전(大殿) 앞에 놓아두고 사리를 물속에 집어넣자, 그만 오색의 광명이 일어났습니다. 명제가 기적에 감탄하며 대도(大都)의 동쪽에 넓은 집 백 칸을 새로 지어 정사(精舍)로 삼았습니다.

원위(元魏)의 태조 천흥(天興) 원년에 조칙을 내려, “불법이 일어난 것은 그 연유가 오래이다. 이롭게 제도하는 공이 생사를 명조(冥助)하는데, 신령스러운 자취로 궤범(軌範)을 남겼기에 참으로 의지할 만하다라고 하면서 경읍(京邑)에 궁사(宮舍)를 짓되 잘 꾸미도록 명하여 신도들을 이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이 해부터 5층 부도와 기사굴산(耆闍崛山) 및 수미산전(須彌山殿)을 지으면서 장엄하게 치장하게 된 것입니다. 별도로 강당과 선방 및 사문의 거처도 지었는데, 어느 것 하나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사적을 찾아보면 통유(通儒)마다 불법을 거론하면서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아름답다고 하였는데, 부혁의 삿된 소견은 대체 무엇에 연유하기에 이리도 죄를 자초하는 것입니까?

위나라 세조(世祖)도 즉위하자, 태조와 태종의 업을 이어받아 매번 덕망 높은 사문을 초빙하여 함께 토론하였습니다. 사월 초파일이 되면 불상을 받쳐 들고 거리를 행진하였는데, 세조가 친히 문루(門樓)에서 이를 참관하며 꽃을 뿌리고 예배하였습니다.

사문 혜시(惠施)는 기적을 많이 행하였는데, 혁련창(赫連昌)이 장안을 점거하였을 때, 혜시 스님이 칼을 맞았으나 몸에 상처 하나 없었습니다. 50여 년간을 장좌불와(長坐不臥)하였는데, 진흙탕을 밟아도 발에 티끌하나 묻지 않고 도리어 발이 더욱 깨끗해졌기에 세간에서는 백각아란야(白脚阿蘭若)라 불렀습니다. 이 때 국왕이 스님을 존중하여 불법을 일으켰는데, 죽은 지 10여 년이 지났어도 그 몸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위나라 태무제(太武帝) 때에 최호(崔皓)가 사도(司徒)가 되었는데 불법을 믿지 않았는지라, 매번 무제에게 불법을 욕하곤 하였습니다. 개오(蓋吳)가 관중(關中)에서 난을 일으키자, 이 틈을 타 최호가 진언을 올렸는데, 이로 인해 불법이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도사의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가 최호와 힘들게 쟁론을 벌였으나 최호가 이를 따르지 않자, 마침내 구겸지가 ()은 금년에 멸문(滅門)의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나중에 태무제가 온몸에 종기가 나서 아픔을 견디기 어려웠는데, 군신(君臣)이 모여 의논하기를, “최호가 망령되이 불상을 부쉈는데, 폐하의 병환이 필시 이에 연유하리라고 하였다. 결국 최호는 나중에 주살(誅殺)되면서 오형(五刑)을 고루 받았는데, 이처럼 악업을 쌓아 끝내 재앙을 입는 것이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원위(元魏)의 군주가 임한 것이 17() 179년간인데, 오직 7, 8년 동안만 불법이 황폐하였고, 그 외에는 모두 혁혁하게 빛난 것이 이루 말할 수도 없습니다.

흥광(興光) 원년에는 다섯 곳의 큰 사찰마다 태조 이래로 다섯 제왕이 불상 다섯 구를 주조하였는데, 각각 크기가 16척이었고, 구리 25만 근을 사용하였습니다. 태화(太和) 원년에는 방산(方山)에서 태조가 성채를 경영했던 곳에 사원사(思遠寺)를 건립하였습니다.

정광(正光) 원년 세차(歲次) 경자년(庚子年) 7월에는 명제(明帝)가 조복(朝服)을 보태고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습니다. 같은 달 23일에는 승니와 도사와 여관을 청하여 대전(大殿) 앞에서 재를 마련하였는데, 재를 마치자 명제가 시중(侍中) 유등(劉騰)에게 칙령을 내려 법사에게 도사와 함께 토론하여 제자의 의심을 풀어 주도록 청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에 청통관(淸通觀)의 도사 강빈(姜斌)과 융각사(融覺寺)의 법사 담모(曇謨)가 가장 논변에 능했습니다.

명제가 부처님과 노자는 시대가 서로 같은가?”라고 묻자, 강빈이 노자가 서쪽으로 들어가 오랑캐로 화하였으니, 부처의 시대는 시자(侍子)를 담임하는지라, 동시대가 분명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법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자, 강빈이 노자개천경(老子開天經)에 근거하여 알 수 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법사가 노자는 주나라 무슨 왕 몇 년째에 태어났으며, 주나라의 무슨 왕 때에 서쪽으로 들어갔는가?”라고 묻자, 강빈이 주나라 정왕(定王)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을묘년에 초나라 진군(陳郡)의 고현(苦縣) 여향(勵鄕)의 곡인리(曲仁里)에서 914일 밤 자시(子時)에 태어났으며, 주나라 간왕(簡王)이 즉위한 지 4년째인 정축년에 주나라의 수장사(守藏史)로 근무하다가 13년째인 경술년에 태사(太史)로 승진하였다. 주나라 경왕(敬王)이 즉위한 원년 경진년에 나이가 85세였는데, 주나라의 덕()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관령(關令) 윤희(尹喜)와 헤어져 서쪽으로 들어가 오랑캐로 화현하였으니,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법사가 그렇다면 부처님은 주나라 소왕(昭王) 24년 사월 초파일에 태어나셨고, 목왕 52215일에 멸도하신 것이 되니, 열반하신 때를 계산해 보면 무려 345년이나 흘렀다. 바야흐로 경왕 3년째에 이르러 노자가 태어났다고 했는데, 나이가 85세 되던 해가 경왕 원년이라고 하면 대체로 425년이나 흘렀다. 또 윤희와 서쪽으로 숨었다 하나, 이에 대해서는 햇수나 달수가 현격하여 말마다 같지 않으니, 어찌 거짓이 아닌가?”라고 반박했습니다.

강빈이 만약 부처님이 태어난 것이 주나라 소왕 때인 것이 어떠한 글에 기록되어 있는가?”라고 묻자, 법사가 주서이기에 나와 있는데, 한법본내전에는 그 글이 더욱 분명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강빈이 공자야말로 법을 제정한 성인인데, 당시에는 부처님에 대해 기록된 글이 없다고 말하자, 법사가 그대는 식견이 어찌 이리도 좁은가? 살펴보되 넓고 깊지가 못하구나. 공자가 삼비십경(三備十經)40)을 이루어 천ㆍ지ㆍ인이라 했으니, 부처님에 대한 말도 이 가운데 완비되었다. 그대 스스로 잘 살펴보기만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강빈이 공자는 성인인지라 말하지 않고도 아는데, 어찌 점을 쳤겠는가?”라고 말하자, 법사가 오직 부처님만이 중성(衆聖)의 왕()이시고 4()의 어른이신지라, 일체 중생의 전제(前際)와 후제(後際) 두 가지가 길하고 흉한 시말(始末)을 통달하셔서 점을 치지 않고도 보신다. 다른 성인들이 안다 하나 그와 같은 이치가 없으니, 반드시 시()ㆍ구()에 빗대어 영괘(靈卦)로써 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명제가 시중 상서령(尙書令) ()을 보내어 칙령을 선포하여 도사에게 전하기를, “강빈의 말에는 종지가 없다. 빈에게 물어볼 것이니, 개천경은 어디서 얻었으며, 누가 이를 말했는가?”라고 캐묻게 하였습니다. 즉시 중서시랑(中書侍郞) 위수(魏收)와 상서랑(尙書郞) 조형(祖塋) 등을 보내어 그 경전을 가져다 살펴보게 하면서 황제가 관리에게 이를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태위(太尉) 단양왕(丹陽王) 숙종(肅綜)과 태부(太傅) 이식(李寔)과 위위경(衛尉卿) 허백도(許伯桃)와 이부상서 형만(荊巒)과 산기상시(散騎常侍) 온자승(溫子昇) 등의 170명이 정독을 마치고, “노자는 5천자를 저술한 것뿐이라 다른 말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의논해 보니, 강빈의 죄는 대중을 현혹시킨 것에 해당하는지라, 황제께서 지금 강빈을 극형에 처하십시오라고 상주했습니다. 그러나 삼장법사(三藏法師) 보리류지(菩提流支)가 간절히 탄원하였기에 그만 형을 중지하고 마읍(馬邑)으로 귀양보냈습니다.

흥광 이후에 경읍이나 사방의 여러 사찰로는 새로 지은 것이나 오래 된 것을 막론하고 모두 6,478개소가 있었고, 승니는 77258명이 있었는데, 심지어 응사조(鷹師曺)41)를 보덕사(報德寺)로 개수한 예도 있었습니다.

위나라의 천하가 선양(禪讓)되기까지를 고찰해 보면, 불경이 전해져 중국에서 편집된 것이 대체로 415부로 도합 1,919권이고, 승니의 숫자를 대략 계산해 보면 2백만 명에 이르며, 사찰은 3만여 곳이나 있었습니다. 이 때 세상은 평화롭고 인민은 풍요로웠으며, 승니의 대중이 많았어도 계율을 어기는 이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영가(永嘉)에 남쪽으로 천도하여 진나라에 이르기까지 3백여 년 동안 상교가 동토에서 일어났으나 미처 성행하지는 못했는데, 명승(名僧)과 고덕(高德)이 출현하여 이로움은 더욱 늘었습니다. 당시의 임금들은 흉악한 무리들이 도처에 널려 있기는 하였으나, 칭찬받을 만했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승니 가운데 60세 이하는 가려내어 백성으로 되돌리면, 병마(兵馬)는 강해지고 인구는 늘어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사찰이 많은 데다 스님들이 대중을 이루기에 경비의 손실이 막대하다. 이 같은 사찰을 지어서 외로운 노인이나 가난한 이나 집 없는 이나 의로운 선비에게 나누어주기를 청하고 3만 호의 주()마다 하나의 사찰만을 두고 초옥과 토탑(土塔)을 만들어 경전과 불상을 안치한 다음에 호()나라 스님 두 사람만 파견하여 오랑캐의 법만 전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서역의 오랑캐는 오니(惡泥)에서 태어나 진흙 덩어리만을 섬기는데, 지금도 털이 나고 비린내가 나며 얼굴은 사람이지만 마음은 축생인지라, 올빼미가 사람 말을 대신하듯 나려(騾騾)42)의 사색(四色)으로 탐욕스러우면서 반역하는 악종(惡種)이다. 부처도 서방에 태어났으니, 이는 중국의 바른 풍속이 아니라 요매(妖魅)의 사기(邪氣)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포희(庖犧) 이래로 29대 동안 부자와 군신 간에

 

충의를 세우고 효도를 이루어 도를 지키고 덕을 실천하면서, 모두 신주(神州)에서 생장하여 화하(華夏)의 정기(正氣)를 얻었기에 인민들이 모두 순박하였으니, 이는 그때 세상에 부처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나라가 일어난 것이 진중(秦仲)에서부터 35대이니, 모두 638년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제왕에게는 부처가 없으면 치적(治積)이 장대해지고 연조(年祚)가 늘어났지만 부처가 있으면 정치가 가혹하여 국조(國祚)가 짧아졌다. 포희씨 이래로 29대 동안 불법이 없었기에 임금은 성명(聲明)하고 신하는 충성스러워 국조가 유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부혁이 말하기를, “불법이 있기 전에는 인민이 순박하고 부드러워서 세상에 찬탈(簒奪)과 반역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승니를 폐지하여 아예 없애자는 궤변에 대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대체로 형색(形色)은 가리기 쉬우나 옳고 그름은 밝히기 어려운데, 스스로 그릇된 것에 오래 처하더라도 어찌 이를 알기나 하겠습니까?

예전에 혜원(慧遠) 법사의 답환현서(答桓玄書)에는, ‘경전의 가르침을 말하자면, 대체로 3()가 있는데, 첫째는 선사(禪思)로써 미묘(微妙)를 섭입하는 것이고, 둘째는 남아있는 전()을 외우는 것이고, 셋째는 복업을 짓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을 짓더라도 금계(禁戒)를 지키지 않기에 그 자취가 아란야(阿蘭若)43)가 아닌 이들도 있고, 또 경문을 많이 외워 끊임없이 읊조리더라도 의리(義理)를 유창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 또 장로(長老)의 연배이면서 3()가 깊지 않더라도 법을 본받으며 체성(體性)도 곧아서 큰 허물을 범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같이 따져 보더라도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릴지 실로 가려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출가공덕경(出家功德經)에 따르면, 한 사람을 제도하여 출가시키는 것이 보탑(寶塔)을 범천(梵天)에 닿도록 이룩하는 것보다 뛰어나다고 합니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하면,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어야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니, 자신을 깨끗이 하고 3()를 주지(住持)시켜, 7세의 조상에게 다리를 놓아 주고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컨대, 죄가 있는 자는 법에 의하여 힘써 다스리시고, 잘못이 없는 자는 나라를 위해 도를 행하게 하십시오.”

부혁이 말하기를, “사찰이 많은 데다 스님들이 대중을 이루기에 경비의 손실이 막대하다. 이 같은 사찰을 지어서 외로운 노인이나 가난한 이나 집 없는 이나 의로운 선비에게 나누어주기를 청하고 3만 호의 주()마다 하나의 사찰만을 두고 초옥과 토탑(土塔)을 만들어 경전과 불상을 안치한 다음에 호()나라 스님 두 사람만 파견하여 오랑캐의 법만 전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사찰을 민간에 넘겨주고 초가에 불상을 안치하자는 궤변에 대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불법이 한나라 땅에 유포된 지 이미 5백여 년인데, 사찰은 승니가 대대로 이어 왔습니다. 감탑(龕塔)과 당전(堂殿)은 모두 선대에 이룩해서 지금껏 경영되는 것이고, 방우(房宇)와 문랑(門廊)도 모두 신심에서 이룩된 것입니다. 혹은 양친의 존몰(存歿)이나 7세의 조상들의 왕생에까지 미치기도 합니다. 장차 뛰어난 과보를 얻는 것은 그 종자가 현재의 복전에 있으니 모두가 저들의 기뻐하는 마음에서 조성된 것이지, 부처님이나 스님들이 세금을 거두어 이룩한 것이 아닙니다.

()에도 공을 이루고 나면 이를 훼손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정자산(鄭子産)이 백이(伯夷)의 사당을 허물지 않자, 공자도 어진 이[仁人]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물며 부처님은 삼계의 어진 복전이시고 4()의 부모이신데, 공양하며 잘 모시는 것이 옳지 이를 훼손해서야 되겠습니까? 또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그 법을 인왕(人王)에게 부촉하신 바도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재차 생민(生民)을 이룩하여 불도(佛道)를 거듭 일으켰으니, 바로 여래의 대단월주(大檀越主)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한나라 명제 영평(永平)의 덕화(德化)를 따르고 효문제(孝文帝) 개황(開皇)의 시절을 가까이하기를 청합니다.”

서역의 오랑캐는 얼굴은 사람이지만 마음은 축생인지라, 욕심 많고 반역하는 악종이며, 부처가 서방에 태어났기에 요매의 사기라는 궤변에 대해 답변드리겠습니다.

사기역제왕검목록(曆帝王儉目錄)도은거년기(陶隱居年記)등에 다르면, 포희씨는 뱀의 몸에 사람 머리이고, 대정씨(大庭氏)는 사람 몸에 소의 머리이며, 여와씨(女媧氏)도 뱀의 몸에 사람 머리이고, 진중연(秦仲衍)은 큰 새의 몸에 사람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하우(夏禹)는 서강(西羌)에서 나왔고, 문왕도 서강(西羌)에서 태어났습니다. 간적(簡狄)은 제비 알을 삼켜서 태어났고, 계백우(契伯禹)

 

어미의 가슴과 등을 갈라 태어났습니다. 이윤(伊尹)은 공상(空桑)에 의탁하였고, 위나라 임금 원()씨는 이적(夷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응하여 명()을 밝혀서 혹 남면(南面)하여 고()라고 자칭하거나, 혹 임금으로서 만국에 임하기도 하였는데, 비록 태어난 곳이 외지고 궁벽하며 형태와 모양이 추하더라도 각각 하늘의 위세를 머금고 성덕을 품었다고 할 것입니다.

노자도 목모(牧母)에 의탁하여 태어났으니, 그 자신도 하층의 범부인데, 어떻게 그 태어난 출생이 미천하다고 성인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공자는 군자가 머무는 곳이 어째서 비루한가? 그 말이 미덥도다라고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도가 있으면 존귀하다고 하였으니, 어찌 높고 낮음으로 이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은 모나지 않게 응하고 기틀에 따라 드러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석가의 조상을 살펴보면, 대체로 천대 전륜왕(轉輪王)의 후손이면서 바로 찰리왕(刹利王)의 태자이십니다. 조짐을 기약하여 이곳에 이르러 물상(物象)에 감()하여 형체를 이루었는데, 삼천세계의 중앙에 나셔서 남염부제(南閻浮提)의 대국에 가르침을 내려 방책을 마련한 것도, 단지 중생의 이익만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강족(羌族)과 호족(胡族)에서 나왔거나 융족(戎族)과 노족(虜族)에서 태어났다고, 모두 씨족이 나쁘다고 한다면, 태호(太昊)와 문명(文命)은 모두 성인이 아닐 것이고, 노자와 문왕도 스승으로 섬기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지리지(地理誌)』 「서역전(西域傳)에 따르면, 서호(西胡)는 단지 총령(葱嶺)의 동쪽에 있는 36개의 나라라고 이르는데, 이는 부처님이 태어난 천축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약 이를 알면서도 거짓되게 말하였다면, 그 죄가 얼마나 깊겠습니까? 만약 알지 못하고 함부로 떠든 것이라면, 죽은 뒤에도 나무람이 있을 것입니다.”

포희 이래로 29대 동안 부자와 군신 간에 충의를 세우고 효도를 이루어 도를 지키고 덕을 실천하면서…… 모두 신주(神州)에서 생장하여 화하의 정기(正氣)를 얻었다는 궤변에 대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사기회남자(淮南子)의 여러 서책에 따르면, 황제(皇帝)의 시절에 치우(蚩尤)가 있었는데, 머리가 구리로 되었고 이마는 쇠로 되었다 합니다. 온 천하에 난리를 일으켜 황제(黃帝)와 판천(阪泉)에서 전쟁을 벌였는데, 마침내 황제가 제위(帝位)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치우가 명을 어기자, 다시 탁록(涿鹿)의 벌판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대체로 52년간이나 걸렸습니다.

전욱(顓頊)의 시절에도 좌동정(左洞庭)과 우팽려(右彭蠡)에서 삼묘(三苗)를 주살하였습니다. 급총서(汲塚書)죽서이기(竹書異記)에서는, ‘()이 요()를 평양(平陽)에 가두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는데, 지금도 요를 가두었다는 성벽이 남아 있습니다. 또 순은 단수(丹水)의 나루에서 묘족과 전쟁을 벌였고, 요가 아홉 개의 해에 화살을 쏘아 오우(烏羽)를 떨구었다고 합니다[초사(楚詞)에서는 열 개의 해가 연속하여 떠올라 쇠가 녹아 흐르고 돌이 녹아 내렸다고 하였다]. 커다란 봉황을 청구(靑丘)에서 얽어매고 동정에서 길다란 뱀을 처치하고 대택(大澤)에서 봉시(封豕)를 살육하고, 사수(泗水)에서 구영(九癭)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상서(尙書)에서는 홍수가 하늘까지 이르러 산이 잠기고 구릉을 무너뜨렸기에 여민(黎民)이 굶주리고 백성은 토굴에 숨었다고 말합니다. ()의 시절이 되어서야 백성이 마음을 놓았고, 백곡자(柏谷子)는 물러나 들판에서 밭을 갈았는데, 삼묘(三苗)가 덕의 정치를 하지 않자 우()가 직접 그들을 멸망시켰습니다.

하나라 걸()의 시절에 왼쪽에 하제(河濟)가 있고 오른쪽에 태화(太華)가 있었으며, 이궐(伊闕)은 그 남쪽에 있었고 양장(羊腸)은 그 북쪽을 등지고 있었습니다. 황도(皇圖)를 불사르고 용봉(龍逢)을 죽인 데다, 성탕(成湯)을 가두고 말희(妺嬉)44)에 현혹되어 정치를 하였습니다[정사(政事)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에 탕이 몰아내어 멸망시켰다].

탕의 시절에는 대체로 아홉 차례 정벌을 하였고 스물일곱 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 7년 대한(大旱)에 하수(河水)와 낙수(洛水)가 흐름을 멈추고 쇠가 녹슬고 돌이 부서졌습니다.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토벌하는 데는 3년이나 걸렸고, 은나라의 주()는 달기(妲己)에 빠져서 열 가지 악행으로 백성을 함부로 해치고 다섯 가지 가혹한 형벌을 남용하였는데, 현자의 심장을 가르고 임부의 뱃가죽을 벗겨 내면서 문왕을 가두고 기자(箕子)를 내쳤습니다.

주나라 무왕이 목야(牧野)에서 주()를 정벌하자, 그 피에 절구공이가 떠내려 갔는데, 녹대(鹿臺)에서 주살하면서 왕이 친히 쏘아 죽이고, 그 머리를 태백(太白)의 깃발에 매달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이를 그르다 하여 그 곡식조차 먹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공자조차도 무왕은 아름다움을 다했으나 선을 다하지는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무왕의 치세는 삼감(三監)이 난을 일으켰고, 성왕(成王) 때는 이숙(二叔)이 뜬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선왕(宣王)6월에 출정하는 것을 시경(詩經)에서는 험윤(獫狁)의 무리 깡그리 쳐부수고 태원(太原) 땅에 이르렀네라고 노래합니다. 채미(採薇)에서도 수역(戍役)에 보내진 것을 노래하면서 북쪽에는 북녘 오랑캐의 어려움이 있고 서쪽에는 곤이(昆夷)

 

걱정거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채기(採芑)에서는 선왕의 남쪽 정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혁이 말하는 상대(上代)의 도()가 전해져 3() 아래의 3()의 시절이라면, 반드시 도를 지켜서 덕을 행하고 충의(忠義)를 간직하며 효도를 행하여 이 때에는 부처 없이도 맑고 태평했을 터인데, 어째서 대대로 끊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그 해독이 백성에게 이르게 하여 무고한 재앙을 입게 하였습니까? 이리하여 요석(姚石)이 도리어 영가(永嘉)의 치세를 사모하게 된 것인데, 어떻게 위대한 무위의 시절이라 이름한 것입니까? 삿되게 보고 잘못 말하면서 도대체 누구를 거짓되다 하는 것입니까?”

진나라가 진중(秦仲)으로부터 35세이니, 모두 6백여 년이다라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기에서도 은나라 이전에는 제후들조차 계보를 찾을 수 없었기에 세차(歲次)도 어긋난 것이 많아 연대의 추정이 사실상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상서(尙書)에서도 단지 갑자(甲子)로만 차례를 정하고 연월을 따라 정하지 않았으니, 당시의 사관(史官)조차도 이를 보류하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삿된 소견으로 진중(秦仲)에서 이세(二世)까지를 6백여 년이라 하는 것은, 한 세대가 너무 길다고 보여지는데, 도대체 무엇으로 증거를 댈 수 있겠습니까?

춘추시대 이전에는 진()이란 나라가 원래 없었고, 춘추시대 이후에야 진백(秦伯)이 있었던 것입니다. 춘추시대 때 진나라는 비로소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진나라는 단지 주나라의 소읍으로 효왕(孝王)의 치세에 비자(非子)45)를 시켜 견수(汧水)와 위수(渭水) 가장자리에서 말을 기르게 하였는데, 미처 천명(天命)을 받지 못하여 정삭(正朔)이 없다가 증손자 진중이 선왕(宣王)의 치세에 거마(車馬)의 녹을 받아 임금을 섬기는 대신이 되었을 뿐입니다. 진중의 손자 양공(襄公),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천도하는 것을 되돌리고서야 작위가 백()으로 봉()해졌기에 비로소 문공(文公) 이후부터 사기에 출전되기 시작하는데, 이로부터 멸망하기까지 불과 2백여 년입니다.

사기죽서요공연기(陶公年紀)등에도 모두 진나라에는 역수(曆數)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비록 주나라 치세의 신하들은 여러 제후의 말석에나 자리했는데, 어떻게 연기(年紀)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호해(胡亥)에 이르기까지, 사기에서는 단지 여공(厲公)의 연대로만 열거하는데, 2세를 끝으로 101년간뿐이니, 대부분의 연대는 모두 춘추에 부가되고 별기(別記)는 따로 없었습니다. 난왕(赧王)의 말엽에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이 주나라가 쇠약한 틈을 타고 멸망시키고서 왕호(王號)를 참칭(僭稱)한 것뿐입니다. 따라서 여러 역사를 이어 보더라도 진나라는 고작 549년입니다.

()나라의 비서(秘書) 양개(楊玠)사목(史目)에서는, 진나라가 처음 봉해진 때로부터 멸망하기까지 대체로 356백여 년 간이라 이르는데, 대체로 처음으로 진()이란 국호를 봉하고서 6백여 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이는 중국을 무력으로 통일한 기간은 아닙니다. 부혁이 이처럼 삿된 소견으로 진나라의 짧은 연조를 함부로 늘리니, 어찌 망령되지 않습니까?”

제왕에게 부처가 없으면 연조(年祚)가 늘어났으나, 부처가 있으면 국조(國祚)가 짧아졌다. 포희 이래로 한나라 고조에 이르기까지 29대 동안 나라의 연조(年祚)가 오래되고 임금은 성명(聖明)하고 신하는 충성스러웠다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치는 귀하고 깊이 있게 근거하여야 하니 말은 실록에 근거하여 하겠습니다. 먼저 포희씨는 어째서 나라를 자손에게 남기지 못하고 홀로 다스렸습니까?

요와 순의 두 임금도 5()에 들어가는데, ()는 어질게 다스려 성명(聲明)을 다했고, ()도 자애로워 성명을 다했다고 합니다. 상서이전(二典)에서 논하는 바에 따르면, 그 백성을 교화하여 도로 다스리는 공업이 가히 으뜸이었는지라, 백성이 무어라 이름하지도 못했으니, 실로 하늘이 내린 명군(明君)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는 형을 폐하고 자리에 올랐으며 그 아들 단주(丹朱)는 불초했고, 순은 아비가 완악하고 어미는 강팍한 데다, 홀몸으로 후사도 없었습니다. 이 때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어째서 대대로 전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사라져 버렸습니까?

은거년기(隱居年紀)에 의하면 하나라 우() 임금이 다스린 것이 9년 이고 예(羿)가 찬탈한 것이 15, 다시 착()12년간을 찬탈했고, 하나라 고()11년간, ()12년입니다.

 

다시 답변하면 에는 순 임금과 우 임금은 천하에 우뚝하게 공을 이루었으니 그 문장(文章)이 혁혁하다고 말합니다. 대우모(大禹謨)에는 우 임금은 궁궐도 초라하고 먹는 것도 거칠었으니, 검은 옷을 입고 수로의 관개에만 진력했다고 말하는데, 백성을 대신하여 치수(治水)했기에 백성에게 큰 공을 세웠다고 할 만합니다. 만약 황천(皇天)이 그 덕을 보하였다면, 어째서 천조(天祚)가 영구하지 못하고 단지 9년간만 다스렸겠습니까?

감년기(勘年紀)에는, 하후(夏侯) 이후에는 소강(小康)의 치세로 이르는데, 그 신하 가운데에는 궁()ㆍ예(羿)ㆍ한()ㆍ착() 및 풍이(風夷)ㆍ회이(淮夷)ㆍ황이(黃夷)ㆍ짐심(斟尋) 등의 나라가 차례로 반란을 일으켜 대략 26년 동안 하후를 쫓아내고 스스로 자리에 올랐다 합니다. 당시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찬탈과 역모는 도대체 누구에 의한 것이었습니까?

()나라 탕()의 치세 13, 외정(外丁)의 치세 3, 중임(仲壬)의 치세 4, 태갑(太甲)의 치세 10, 옥정(沃丁)의 치세 13, 태무(太戊)의 치세 10, 외임(外壬)의 치세 3, 옥갑(沃甲)의 치세 4, 반경(盤庚)의 치세 9, 소행(小幸)의 치세 7, 무을(武乙)의 치세 4, 조경(祖庚)의 치세 7, 조을(祖乙)의 치세 10년입니다.

다시 답변하여 드리겠습니다.

탕 임금이 어질어 남살(濫殺)하지 않고 그물을 쳐도 세 곳을 열어 두었고, 하나라의 걸 임금도 명조(鳴條)로 추방했을 뿐이니, 그 어진 덕이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어째서 천력(天曆)이 유구하지 못했으며, 외정(外丁)과 외임(外壬)도 연조가 그토록 짧았습니까?

상서에서는, “탕 임금이 아홉 차례나 정벌하였고 태갑이 다섯 차례나 정벌하였는데, 이윤(伊尹)이 탕의 둘째 아들 승()을 옹립하고, 다시 승의 동생인 중임(仲壬)을 옹립하면서 다시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으로 추방하였다고 말합니다. 급총서(汲冢書)에서는 이윤이 보위를 찬탈하였는데, 나중에 태갑이 몰래 도망나와 손수 이윤을 죽이면서 그 아들을 등용시켰다고 전하니, 과연 충직한 시대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이 때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어째서 틈이 내부[蕭牆]에서 일어나고 군신은 그토록 무도했습니까?

주나라 무왕(武王)의 치세 11, 의왕(懿王)의 치세 3[후사(後嗣)없음],

 

희왕(僖王)의 치세 5[후사 없음], 경왕(頃王)의 치세 6, 광왕(匡王)의 치세 6, 원왕(元王)의 치세 8, 열왕(烈王)의 치세 7, 정왕(靜王)의 치세 6, 정왕(貞王)의 치세 8, 도왕(悼王)의 치세 101, 애왕(哀王)의 치세 3, 사왕(思王)의 치세 5월입니다.

다시 답변하여 드리겠습니다.

무왕이 주()를 정벌하고자 군대가 맹진(孟津)을 건널 때 흰 물고기가 배로 뛰어 들어왔으니 하늘의 가명(嘉命)도 이에 응했다고 할 만합니다. 난리를 평정했다 하여 시호(諡號)를 무()라 이름하였는데, 백성이 그를 믿고 따르며 생기가 되살아났습니다. 이문(里門)을 지날 때마다 수레에서 허리를 굽히고 무덤에 흙을 덮어 주는 예를 다하면서 소를 놀리고 말을 풀어 놓아 태평을 이루었는데도, 어째서 연조가 짧아 다스린 것이 경우 11년뿐이며, 더욱이 의왕(懿王)과 희왕(僖王)에게는 후손조차 없었던 것입니까? 주나라 무제가 폐불하여 수조(壽祚)가 모두 궁하고 자손들이 다하니 잠시 사이에 운명이 옮아갔습니다.

()나라 5세 여섯 임금의 재위 기간도 49년에 불과합니다.

소왕(昭王) 5[주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왕으로 불린 재위 기간이 5년이다]. 효문왕(孝文王) () 1, 양왕(襄王) () 3, 진시황(秦始皇) () 37, 호해(胡亥) 3, 상제(殤帝) 자영(子嬰) 46

다시 답변하여 드리겠습니다.

주나라 현왕 5년째에 진나라 목공(穆公)이 패권을 잡기 시작했는데, 34년째에 진나라가 주나라에 정권을 이었습니다. 죽서이기에서는 진중 이전에는 본래 연세(年世)의 기()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요공연기에서는, “진나라가 임금 자리를 찬탈하고서 덕정(德政)을 펴지 않았기에 그 차제가 5()의 경계에 들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연조가 유구하지 않으면 제왕이라 할 수 없는데, 부혁이 짧은 것을 길다 하고 헛된 것을 가리켜 실하다 하니, 도대체 무슨 속셈이 있는 것입니까?

진나라 때에는 북쪽에 성곽을 쌓아 오랑캐를 방비하였는데, 부소(扶蘇)를 죽이고 2세를 옹립하자, 진승(陳勝)이 봉기하여 관동(關東)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한나라 고조(高祖)의 재위 기간 12, 혜제(惠帝) 7, 문제(文帝)는 고조의 넷째 아들로 적자가 아닙니다. 무제(武帝)는 본래 교동왕(膠東王)으로 경제(景帝)의 여섯 번째 아들이며 적자(嫡子)가 아닙니다. 한나라 때에는 흉노가 변방을 침입하여 봉화가 감천궁(甘泉宮)을 환히 밝혔는데, 남월(南越)이 복종하지 않아 수전(水戰)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효경제(孝景帝) 때에 오나라와 초나라 등 7개국이 반란을 일으켰고, 소제(昭帝)가 승하하자, 형의 아들 창읍왕(昌邑王)을 세웠는데 창읍왕이 즉위한 지 27일 동안 무려 1,127가지의 죄를 물어 적광(翟光)이 그를 폐하고 나중에 선제(宣帝)를 옹립하였습니다. 이 때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후한(後漢)은 대체로 12195년간입니다. 광무제(光武帝) 33, 효명제(孝明帝) 18, 장제(章帝) 13, 화제(和帝) 17, 안제(安帝) 19, 순제(順帝) 19, 환제(桓帝) 21, 영제(靈帝) 31, 헌제(獻帝) 30년입니다.

이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후한서에서는, “광무제가 반란을 눌러 반정(反政)을 이루고, 명제가 이를 다스려 태평하게 하였으니, 백성에게 백 리의 근심이 없었고 관리는 집을 떠나는 고달픔이 없었다. 기린(麒麟)이 담장 안으로 들어오고 봉황(鳳凰)이 오동나무에 깃들었으며, 붉은 참새ㆍ아롱진 거북ㆍ파랑새ㆍ흰 사슴 등의 상서로운 징조가 잇달아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그윽하고 가득한 은총이 내리고, 샘이 솟아나 하늘과 통하는 은택이 펼쳐지니, 팔방(八方)이 그 덕화(德化)를 마시고 만국이 그 풍화(風化)를 기렸다고 말합니다.

논형(論衡)등의 책에서도, “후한의 좋은 징조와 서상은 하ㆍ주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부혁이 부처님이 있으면 연조가 짧다고 하였는데, 이때는 어째서 연조가 이렇게도 길었습니까?

은거(隱居)에서는 위나라 황초(黃初) 원년부터 소제(蕭齊)의 말엽까지 대체로 282년이다라고 말합니다.

 

탁발(拓跋) 원위(元魏)는 열일곱 임금이 있었는데, 대체로 179년입니다. 이 때에는 불법이 있었는데, 어째서 연조가 이렇게 유구하였습니까?”

불법이 있지 않은 시절에는 인민이 순화하여 찬탈과 반역이 없었다는 궤변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째서 주나라 열왕(烈王)의 동생 현왕(顯王)은 보위를 찬탈했는데도 48년간이나 자리를 지켰으며, 도왕은 옹립된 지 불과 101일 만에 서제(庶弟) 의 아들 조()에게 살해당했습니까?

경왕의 동생 애왕은 치세가 3개월에 불과하고, 동생이면서도 자기 형인 애왕(哀王)을 죽인 사왕(思王)5개월간 다스리다가 어린 동생이었던 효왕(孝王)에게 다시 살해당했으니, 이 세 왕이 다스린 기간이 모두 합쳐 고작 1년뿐입니다[양개사목(陽玠史目)과 요공년기(陶公年紀)에 나온다].”

부혁이 말하기를, “서역의 호족 가운데 단말국(旦末國)은 병사가 320인에 불과하고, 소완국(小宛國)의 병사는 200인에 불과하며, 융로국(戎盧國)의 병사는 300인에 불과하고, 거륵국(渠勒國)의 병사는 300인에 불과하며, 의내국(依耐國)의 병사는 350인에 불과하고, 욱립사국(郁立師國)의 병사는 331인에 불과하며, 단상국(單相國)은 병사가 45인에 불과하고, 고호국(孤胡國)도 병사가 45인에 불과하나, 무릇 8개국의 호나라 병사는 모두 합하여 1,891인이다. 모두 그 왕업(王業)을 빛내고자 땅을 점거하면서 서로 침략하여 인민을 살육한다. 하물며 지금 대당(大唐)의 승니가 20만여 대중이나 되는데, 호나라 법에 결탁하여 민심을 얻고 있으니, 어찌 이를 방비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을 살펴보면, 단말과 소완 등의 8개국은 모두 총령 동쪽에 있습니다. 한나라 지방에서 서역까지는 장안에서 만 리에 불과하니, 원래가 부처님이 탄생하신 땅이 아닙니다. 또 승니 가운데 일찍이 모반을 꾀한 이가 없는데, 저들이 멋대로 죄를 짓는 것이 스님네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까? 이는 단지 마귀가 부혁의 마음에 들어가 밖으로 삿된 말을 하는 것으로, 지나간 일을 헛되게 끌어들여 지금의 현인을 욕보이고 있습니다. 어진 이는 이것이 이치에 크게 벗어나는 말임을 알 것이나,

 

어리석은 이는 다른 생각을 낼 수도 있으니, 조야를 현혹시키는 것이 참으로 가슴 아픔니다.

부처가 한나라 땅에 와서 해만 끼쳤지 이로움이 없었으니, 집안에 들이면 집안이 망하고 나라에 들이면 나라가 망한다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나라 명제의 치세에 불법이 처음 전파되었다. 대당(大唐) 성조(聖朝)의 신심 바른 군자들은, ‘여러 부처님의 대인(大人)들은 모두 속세를 벗어난 높은 선비인지라, 열반의 묘한 뜰에 노닐면서 반야(般若)의 진공(眞空)에 머무시니, 그 모양을 말로 형용하지도 못하고 그 생각을 마음으로 헤아리지도 못한다. 형체가 같아도 법을 성품으로 삼는지라, 수명을 태허(太虛)와 함께 하다가 단지 중생에 부응하여 몸을 드러내는 것이 마치 물속의 달과도 같다. 따라서 구사(瞿師)46)3()의 모습을 보고 나한(羅漢)이 장육(丈六)의 모양을 보는 것이다. 용자(容姿)를 뵙게 되면, 참으로 허공 가득히 크시면서도 모공에 들일 만치 작으시다. 인연에 따라서 응하고 변화하여 항상된 거동[常儀]이 없으셨다고 일렀습니다.

석가의 시초를 살펴보면, 대개가 후한의 교사(郊祀), 진서(晉書)위서(魏書)등의 책 및 왕검(王儉)사록(史錄)과 비장방(費長房)삼보록고교(三寶錄考校)보요본행경(普耀本行經)등에서는, ‘부처님은 주나라 때에 제15대 임금인 장왕 9년 계사년 사월 초파일에 전단나무로 지은 누각에서 흰 코끼리 모양을 보이시면서 도솔천(兜率天)에서 천축국 가비라성 찰리왕종(刹利王種) 정반대왕(淨飯大王)의 제1 부인 마야의 태중에 드셨다. 10년 갑오년 사월 초파일 밤 귀수성(鬼宿星)47)이 만나는 때에 남비원(嵐毘園) 바라수(波羅樹) 밑에서 마야(摩耶) 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탄생하였으니, 광명을 내어 삼천세계를 비췄다고 말합니다.

서응경(瑞應經)에서는 유성이 지면서 빛을 발하는 때에 태자가 태어났다고 하며, 본행경(本行經)에서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데도 비가 내렸다고 이르는데, 좌전(左傳)에서 유성이 비처럼 쏟아졌다고 하고, 두씨주해(杜氏注解)에서도 이 때에 구름이 없었다고 주석한 것이 불경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통유(通儒)들은 대체로 부처님이 태어나신 때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열아홉 살에 출가하여 서른 살에

 

성도(成道)하셨는데, 49년 동안 세상에 머무시면서 설법하시다가 주나라 광왕(匡王) 4년 임자년 215일 후야(後夜)에 구시성(拘尸城)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드셨습니다.

멸도하신 이래로 지금 대당국의 무덕(武德) 5년 임오년까지 따져 보면 1,221년입니다. 멸도하신 후 116년 만에 동천축국에 아육왕이 있어 부처님의 사리를 거두고 귀병(鬼兵)을 시켜 84천 개의 보탑(寶塔)을 염부제에 두루 지었는데, 우리 한나라 땅의 9() 이내에도 보탑이 남아 있습니다.

아육왕이 바로 보탑을 지은 때가 이 땅에서는 주나라 경왕(敬王) 26년 정미년에 해당합니다. 탑이 주나라 치세에 세워져 열두 명의 왕을 거쳤는데, 진시황 34년 분서갱유(焚書坑儒) 때에 아육왕의 여러 탑들도 이로 인해 훼손되었습니다. 아울러 불가의 경전도 전해졌다는데 그 소재를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석도안(釋道安)과 주사행(朱士行) 등의 경전목록(經典目錄)에는, “진시황 때에 외국의 사문 석리방(釋利防) 등의 열여덟 명의 현인이 불경을 가지고 와서 진시황을 교화하고자 하였으나, 진시황이 따르지 않고 도리어 석리방 등을 가두었다. 밤중에 장륙(丈六)의 금강신(金剛神)이 감옥을 부수고 구해내자, 진시황이 이에 놀라 머리 숙이고 사과하였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혹 누군가가 비록 이 같은 설이 있으나 연대를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증거로 삼을 수 있겠는가? 그 결말을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전한 성제(成帝) 때의 도수사자(都水使者) 광록대부(光祿大夫) 유향(劉向)의 전기(傳記)에는 유향이 널리 사적을 살피고 경서를 보았는데, 매번 내가 전적을 들출 적마다 가끔씩 불경을 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열선전(列仙傳)를 지으면서, ‘내가 장서(藏書)를 검색하며 태사 창()을 따라 열선도(列仙圖)를 찬술하였는데, 황제 이래의 여섯 대에서 지금까지

 

선도(仙道)를 이룬 이가 7백여 명이었다. 그러나 유향이 그 허실을 살펴보니 단지 146명만이 얻었다고 말했으며, 그 가운데 74명은 이미 불경을 보았다고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또 유향이 말한 장서(藏書)라는 말을 살펴보면 대개 시황(始皇) 때인데 사람들 사이에서 책을 감추었던 것입니다. 어떤 이는 공자의 집에 감춰져 있던 책이었다고 말하는데, 이로써 미루어 보면, 어찌 진한(秦漢) 이전에 불법이 진단에 유행하지 않았겠습니까? 도안이 기록한 열두 분의 현자도 찾아보면, 바로 그 70명이 명수 가운데 있는데, 지금 열선전에는 72명이 나옵니다. 문수사리반열반경(文殊師利般涅槃經)에서는,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지 450년 후에 문수가 설산(雪山)에 이르러 5백 선인에게 12()의 경전을 설하고서 본국에 돌아가 열반에 드는데, 항성(恒星)의 상서로움이 그 때에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지리지서역전을 살펴보면, ‘설산은 바로 총령이다. 그 밑에 있는 서른여섯 개의 나라가 예전부터 한나라를 받들었다. 총령에는 눈이 많기에 설산이라 부른다는 대목이 있으니, 문수사리가 선인(仙人)을 교화한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자세히 대조해 보면, 바로 유향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으니, 비록 진나라 치세에 불타 없어졌으나 한나라가 일어나자 다시 출현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형양(荊楊)ㆍ오()ㆍ촉()ㆍ부풍(扶風)ㆍ낙양(洛陽)의 보탑이 있었던 자리는 모두 신비한 서응(瑞應)을 드러내었다는 것은 여러 서책에 실려 있습니다.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 계묘년에 유향이 열선전을 찬술한 것이 명확한 사실이니, 주나라 치세에 불법이 들어온 지 오래되었는데도, 눈뜬장님이 부처님이 있으면 연조가 짧아진다고 말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경률이상(經律異相)에 따르면, 석가의 정법(正法)1천 년이고 상법(像法)1천 년인데 말법(末法)1만 년이라 합니다. 5천 년 이후에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의 학인(學人)

 

3달지(達智)를 얻어 4도과(道果)를 증득하고, 말법시대가 지나가서야 드디어 가사(袈裟)를 벗게 된다고 합니다.

주서이기를 살펴보면, ‘목왕이 서방에 성인이 있는 것을 알고는 화류팔준(驊騮八駿)의 말을 타고 서쪽으로 가서 부처님을 찾고자 하였으니, 이 때문에 선양(禪讓)하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제나라 때의 상() 법사가 고려국(高麗國)의 사신에게 서주(西周)의 제5대 임금 소왕 24년 갑인년에 태어나셨으니, 지금 무덕 5년까지가 바로 1,577년째이다라고 대답한 것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목왕의 치세에 법이 이미 동방에서 행해졌음을 믿을 수 있으니, 유향조차도 갈수록 분명해진다고 말합니다.

또 한나라 무제 때에 곤명지(昆明池)를 파다가 검은 숯덩이 비슷한 것이 나왔는데, 동방삭(東方朔)에게 물어 보자, 동방삭이 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서역의 호나라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중에 외국의 사문 축법란이 왔을 때 이 같은 일을 물어 보자. 법란 스님이 이것은 겁초(劫初)에 타다 남은 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동방삭은 박식한 사람으로 나면서부터 지혜가 남달라서 묻는 것에 응수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대답 못하는 말이 없었는데 어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호나라 사람을 언급한 것은 아마도 동방삭이 불법을 일으키고자 뛰어난 사람이 온다는 것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이같이 대답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아난(阿難)이 이를 총지(總持)하여 한마디의 말씀도 잊지 않았는데, 가섭(迦葉)이 결집(結集)하는 때에 천 분의 나한이 모두 피지(皮紙)에 쓰고 패엽(貝葉)에 새겨서 5백 곳의 중국(中國)에 보내 각각 받들게 하셨기에 열여섯 대왕이 각각 탑을 동시에 세웠습니다.

한나라 치세에 비로소 동쪽으로 두 곳의 도읍을 거쳤으니, 제왕으로는 16대 동안 범경(梵經)을 한나라의 정언(正言)으로 번역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6백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이로써 불일(佛日)이 다시 빛나게 된 것입니다. 영평 초년에 경전과 성상(星像)이 다시 유행하여 개황(開皇)의 시작과 함께 흥성하였습니다.

위나라 사람 주사행과 사문 도안 등이 함께 기록해 둔 것만도, 화융(華戎)과 도속(道俗)을 망라하여 모두

 

182명이나 됩니다. 번역된 경ㆍ율ㆍ논과 대소승 3()의 잡기(雜記) 등은 모두 2,171부로 총 6,446권이니, 참으로 4()의 경계에 감로(甘露)를 내리지 않음이 없었기에 혜일(慧日)3() 가운데 들어와 장차 승업(勝業)을 영원히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악행을 버리고 선을 행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불법에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다. 나라를 보하고 인민을 이롭게 하는 것도 가히 따를 만한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부혁이 집안이 망하겠다고 한 집안은 어떤 집이고, 나라가 망한다고 한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삿된 소견만 내세우는 부혁이야말로 참으로 뿔 없는 축생일지니, 밤새도록 표독한 마음만 다져서 오래도록 독을 품는지라, 실오라기만큼의 선량함도 없다고 할 만합니다. 산더미 같은 죄를 짊어지면서도 오랜 악행을 뉘우치지 않고 늙을수록 더욱 고집만 부리니, 눈뜬장님의 생각으로 성인을 가늠하는 것이, 어찌 한 자 크기의 기러기가 봉황을 비웃는 것이나, 우물 안의 개구리가 큰 바다를 믿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있겠습니까? 천제(闡提)48)이고 역종(逆種)이며 지옥에 떨어질 죄인이라고 말할 만하니, 그 어그러진 것이 불쌍해서 이렇게라도 대꾸해 주는 것입니다.

대체로 72()3()5()ㆍ공구(孔丘)ㆍ이담(李聃)을 한나라 땅의 성인이라 하나, 그 골육을 삼천(三泉)에 눕혀 놓으면 구절(九節)이 썩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부처님처럼 사리를 내어 광명을 발하되, 센 불로 태워도 타지 않고 망치로 내리쳐도 깨지지 않은 이는 아직 없었습니다. 이것은 지금이라도 다시 시험해 보면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 같은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불법의 신령한 공덕을 알기 충분한데, 소위 진단의 여러 성인들로서 어느 누가 이에 짝할 수 있겠습니까?

욕을 보여 해치고자 했던 일도 참기가 어려운데, 풍속을 해치고 복전(福田)을 깨뜨리며 생민(生民)을 현혹하고 조정을 더럽힌 것이,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불법이 한나라에 들어오자 치세에 이로움이 없었다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에 준하여 말씀드립니다. 이 땅의 선성(先聖)들은 더 넓힐 수 없습니다. 공자는 주나라 영왕(靈王) 때에 태어났고 경왕(敬王) 때에 죽었으니,

 

세상에 70여 년간이나 있었습니다. 그를 성인이라 하니, 반드시 당시의 임금을 보필하여 바로잡을 수 있었는데도, 어째서 14년 동안 70개국이나 다니면서 송나라에서는 앉아 있던 나무가 잘리고 위나라에서는 쫓겨났으며 진채(陳蔡)에서는 양식조차도 떨어진 데다 환퇴(桓魋)의 난에 쫓겨 가면서 상가집 개와 같다고 부르짖었습니까? 비록 제후(諸侯)가 부를 때마다 달려갔어도 일찍이 등용된 적이 없었는데, 춘추시대의 치세는 문무(文武)의 도()가 실추되어 임금은 암둔하고 신하는 간사스러워서 예악(禮樂)이 붕괴되었습니다.

이 때에도 부처님이 없었는데, 어째서 모반과 반란이 이같이 심했으며, 찬탈(簒奪)과 시역(弑逆)은 누구에 의한 것입니까? 공자가 하늘을 우러르며 땅을 내려다보면서 때를 따르며 조심히 난을 피하느라 처자식마저 보살피기 힘들었는데, 목숨을 마치기 백 년 동안 이롭게 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어찌 쓴 박이겠는가?’라는 말을 하고, 냇물처럼 흘러가누나라고 탄식하다가 계손씨(季孫氏)에게 핀잔을 들었고, 봉황새가 오지 않고 하수(河水)에 용도(龍圖)가 나오지 않는다고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마침내 서쪽에서 사냥하다가 기린을 잡았다고 하자 소매 깃을 걷어 얼굴을 닦으면서, “내 도가 다했구나. 비록 문도 3천 명이 시()를 산정하고 예()를 정했다 하나, 죽자마자 이름조차 잊혀질 터이니, 내가 후대에 어떻게 비칠 것인가? 도척(盜跖)이란 욕이나 먹고 장인(丈人)이란 비난을 받겠구나라고 외쳤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논해 본다면, 저 부혁조차도 가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와 노자 두 사람의 성인도 이를 근심하였는데, 어떻게 내가 목석처럼 입 다물고 탄정(彈正)조차 하지 않겠습니까?”

사찰에 승가 대중이 많아지면 반드시 역모 죄를 짓게 되니, 후조(後趙)의 사문 장광(張光)이나, 후연(後燕)의 사문 법장(法長)이나 남량(南涼)의 도밀(道密)이나, 위나라 효문제(孝文帝) 때의 법수(法秀), 태화(太和) 시절의 혜앙(惠仰) 등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최홍(崔鴻)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를 살펴보더라도, 이런 색인(色人)은 없었는데, 이는 도대체 어떤 사적에서 출전된 것입니까? 거짓말을 지어 내어 임금을 현혹시키니, 이에 나라의 사관(史官)에게 그 망령된 상주문을 조사할 것을 청합니다.

전한서후한서에 따르면,

 

곤양(昆陽)의 상산(常山)에 청니(靑泥)와 녹림(綠林), 흑산(黑山)에 백마(白馬)와 황건(黃巾) 및 적미(赤眉) 등의 수십여 적당(賊黨)이 있었으나, 모두 속인인지라 스님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것은 말하지 않습니까?

후한서에 따르면, 패주(沛州) 사람 도사 장로(張魯)의 어미가 자색(姿色)이 고우며 귀도(鬼道)를 따랐는데, 유언(劉焉)의 집에 내왕하였다고 합니다. 유언이 나중에 익주자사(益州刺史)가 되자, 장로를 중용하여 독의사마(督義司馬)를 삼았는데, 장로가 별부사마(別部司馬) 장수(張修)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한중태수(漢中太守) 소고(蘇固)를 포위하여 살해하였습니다. 사곡(斜谷)을 단절시키고 한나라 조정의 사신을 죽이고 장로가 한중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다시 장수마저 죽이고 그 병졸을 가로챘는데, 이 때부터 하느님의 말이라 둘러대어 누런 옷을 입고 왕으로 자처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로가 장각(張角) 등과 호응하여 무리를 모으면서 황건(黃巾)을 씌우고 도사의 복장을 차려 입혔는데, 마침내 이들 수십만 명의 적당이 천하에 해를 끼치면서 30여 년간이나 한중을 점거하다가 나중에 조조(曹操)에게 격파되자 황의(黃衣)도 이에 따라 멸망했습니다.

이 때에도 사문은 한 사람도 없었고, 단지 도사만이 주름잡고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것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한나라와 위나라의 명승(名僧) 가운데 덕화를 이루어 나라를 이롭게 한 이들이 즐비한데, 어찌하여 이것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단지 나쁘게만 선전하여 남의 허물 잡는 것만 능하니, 어찌 군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위지(魏志)에서는, ‘장로(張魯)의 자()는 공기(公旗)이고, 조부는 능()이다. 곡명산(鵠鳴山)에서 촉()의 학자를 불러다가 도가의 서책을 날조하여 백성을 속였는데, ()를 받는 이에게 다섯 말의 쌀을 받았기에 세간에서는 쌀도둑이라 불렀다.

장릉이 죽으면서 그 아들 장형(張衡)에게 업()을 전하였고, 장형이 죽으면서 장로에서 다시 전하였는데, 장릉을 천사(天師)라 하고, 장형을 사사(嗣師)라 하고, 장로를 계사(係師)라 하면서 자기들을 3()라 불렀다. 장로는 어려서부터 유언(劉焉)과 친했는데, 유언이 죽자 그 아들 유장(劉璋)이 옹립되었으나, 장로가 따르지 않자, 장로의 어미와 그 가실(家室)마저 죽였다.

이에 장로가 한중을 점거하고, 귀도(鬼道)로써 백성을 다스리되,

 

부서(符書)와 장금(章禁)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처음 배우는 이를 귀졸(鬼卒)이라 이름하였다. 도를 받는 자가 황금이나 비단 같은 물건을 바치면 제주(祭酒)라 부르면서 제각각 무리를 통솔하게 하였으니, 무리가 많아지면 치두(治頭)라 달리 이름하였다. 병이 있는 자는 죄를 자백하게 하였다[首過]. 대부분은 장각의 무리와 흡사하다고 말합니다.

후한서』 「황보숭전(黃甫嵩傳)에 따르면, 거록(鉅鹿)의 장각(張角)이 대현량사(大賢良師)라 자칭하면서 황로(黃老)를 받들며 장릉의 술법을 행하였다 합니다. 부수(符水)와 축법(祝法)을 써서 병을 치료하였으니, 제자 여덟 명을 사방으로 보내서 그 교화를 펴게 하였는데, 다닌 지 10여 년 만에 무리가 수십만에 이르러서 청주(靑州)ㆍ서주(徐州)ㆍ유주(幽州)ㆍ기주(冀州)ㆍ형주(荊州)ㆍ양주(楊州)ㆍ곤주(袞州)ㆍ예주(豫州) 8개 주의 백성 가운데 호응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에 36()을 설치하고 방마다 장군의 호를 내렸는데, 대방(大方)1만여 명이고, 소방(小方)6천여 명이었습니다. ‘창천(蒼天)이 죽으니 황천(黃天)이 나오리라. 갑자년에 천하가 대길하리라는 요언(謠言)을 퍼뜨려 흰 흙으로 경읍의 절문마다 쓰게 하되, 모두 갑자란 글자로 새겼습니다.

중평(中平) 원년 35일에 안팎이 일제히 도사의 황건(黃巾)과 황갈(黃褐)을 입게 하면서 사람을 죽여 하느님에게 제사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에 적당 수십만의 무리가 처음으로 영천(穎川)에서 천하에 난리를 일으켰는데, 바로 황보승에게 토벌되었습니다.

 

남정(南鄭)의 배반으로 한나라가 촉()을 잃은 일[위서(魏書)에 수록]

손은(孫恩)이 선도(仙道)를 익혀 진()나라가 망한 일[진서(晉書)에 수록]

도육(道育)의 제사로 송나라가 화를 입은 일[송서(宋書)에 수록]

우길(于吉)의 부금(符禁)으로 오나라가 위태했던 일[오서(吳書)에 수록]

공기(公旗)가 선도(仙道)를 배우고 집안이 멸한 일[화양국지(華陽國志)에 수록]

진서(陳瑞)가 도법(道法)을 배우고 멸족된 일[진양추(晉陽秋)에 수록]

 

위화(魏華)가 지아비를 어긴 일[영보경서(靈寶經序)에 수록]

장릉(張陵)이 조강지처를 버린 일[견릉전(見陵傳)에 수록]

자등(子登)이 아비를 등지고 위숙(衛叔)이 형을 죽인 일[신선전(神仙傳)에 수록]

 

이상은 예전부터 도사로서 집안이나 국가를 망하게 한 반역을 일으킨 자들입니다. 대략 인용하면 앞과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릉의 3대가 귀도(鬼道)를 행한 때로부터 부서(符書)와 장초(章醮)는 도가(道家)에서 나왔는데, 요망한 짓을 서슴지 않고 길흉을 함부로 지껄이기에 간악함이 이로부터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나라와 위나라 이후나 진나라와 송나라 이래로 도속이 요매(妖魅)에 빠진 것이 그 수가 적지 않은데, 어찌하여 스님들만 이에 끌어들이고 유교와 도교의 2교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대업(大業) 말년의 왕세충(王世忠)ㆍ이밀(李密)ㆍ두건덕(竇建德)ㆍ유무주(劉武周)ㆍ양사도(梁師都)ㆍ노명월(盧明月)ㆍ이궤(李軌)ㆍ주찬(朱粲)ㆍ당필(唐弼)ㆍ설거(薛擧) 등도 모두 속인이었지 스님이 아닌데, 어찌하여 이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일마다 치우치고 도리마다 어긋나면서 악인과 빌붙어 현인을 시기하니, 부혁이야말로 신하로서 충의롭지 못하다 하겠습니다.”

청컨대, 호나라 부처의 삿된 가르침을 서역으로 물리치고 승니를 모두 환속시키십시오. 이 승니들을 모두 귀속케 하십시오라는 궤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주(莊周)‘6() 안에서는 성인은 논하되 의론하지 않고 6합 밖에서는 성인들은 존재하되 의론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자는 () 가운데 4()가 있으니, ()는 그 하나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ㆍ서()ㆍ예()ㆍ악()의 이룸을 살펴보면, 이륜(彛倫)의 순서를 바르게 하고 충렬(忠烈)과 효자(孝慈)의 앞섬을 밝히려면 먼저 마음을 공경(恭敬)에 두고서 임금과 아비를 섬겨야 하는데, 지극한 덕을 칭송 받더라도 오로지 위를 편안케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뿐입니다.

그 요도(要道)라는 것이 단지 풍속을 변화시켜 위내(衛內)를 노나라로 되돌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해탈의 말을 입에 담을 수나 있겠습니까? 끝내 6()9()

 

구경(究竟)의 이치를 펴지도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생을 두터이 하고 만물을 고르게 한다는 말이나 용도(龍圖)와 봉기(鳳紀)의 이야기조차도, 어진 마음을 지녀서 미더움을 더하여 여향(厲鄕)이나 다스리자는 뜻이고, 경을 다듬고 상()을 드러내 궐리(闕里)를 확장하려는 글입니다. 그 다음을 9()라 이르고, 마지막을 7()이라 합니다.

전한서』 「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된 서책을 살펴보면, 모두 13269권인데, 작게 보면 이롭지 않은 책이 없으나, 크게 보면 도()를 풀어내는 책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국 모두 한 생 이내에 국한되는 것으로 삼세(三世)를 밝혀 뛰어넘는 것은 없습니다. 당세에 드러난 인과의 이치를 새벽에 건너고자 하여도 여전히 어둡고, 길하고 흉한 업보(業報)의 이치는 고개를 넘을 때까지도 훤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요유(逍遙遊)한 편도 유유(有有)의 속정(俗情)에 미혹한 것이고, 도덕경(道德經)두 편도 공공(空空)의 경계에 들지 못하기에 여전히 6합의 껍데기 속이며 5()의 속된 꾀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찌 4()의 풍부함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번뇌의 장소에서 6()를 시끄럽게 하며 티끌을 줍는 일의 업이나 지을 뿐입니다.

원래 실상(實相)은 깊고 아득한지라 요도지도(要道之要)49)를 넘어서는 것이며, 법신(法身)은 지극히 고요하여 현지우현(玄之又玄)50)을 벗어난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큰 스승만이 이 같은 묘각(妙覺)에 사무쳐서 2()을 단번에 내몰고 만덕(萬德)을 모두 거두어 시끄럽지도 적막하지도 않으신데, 어떻게 경계의 지혜로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음을 구할 수 있으며, 어떻게 형체와 이름으로 취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것보다 더 작아서 안이 없고, 큰 것보다 더 커서 바깥이 없는지라, 법계(法界)를 헤아려 슬픔을 일으키고 허공을 따져서 서원(誓願)을 세우셨으니, 이것이 예토(穢土)에 생을 받아 왕궁에 거룩하게 태어나시어 금색신(金色身)을 보이시고 옥호(玉毫)의 상()을 펼치시면서 자비의 구름을 취령(鷲嶺)에 드리워 화택(火宅)의 불길을 끄시고, 계봉(雞峰)에 지혜의 바람을 부쳐 주신 이유입니다.

그윽한 길에 안개도 사라지고 다니실 적마다 금련(金蓮)이 발을 받치고, 앉으실 적마다 보좌(寶座)가 몸을 받쳤습니다. 나가시면 제석천(帝釋天)이 앞장서고 들어오시면

 

범천(梵天)이 뒤따랐으며, 왼쪽을 보하는 밀적(密迹)은 악을 없애는 것으로 공을 삼고, 오른쪽을 살피는 금강(金剛)은 선을 기르는 것으로 일을 삼았습니다. 성문(聲聞)과 보살(菩薩)들이 받들되 신하가 임금 모시듯 하였는데, 8()의 만령(萬靈)이 다시 삼엄하게 에워쌌습니다.

열반을 연출하시는 때에는 땅이 여섯 번 흔들렸는데, 반야를 설하시자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가 오듯 내렸습니다. 참으로 백복(百福)이 장엄하여 만월이 창해(蒼海)에 임한 듯하였는데, 천 갈래 빛이 휘황하게 빛난 것이 햇빛이 보배산에 비친 듯하였습니다.

사자후(獅子吼)를 한 번 발하시면 외도(外道)들의 예봉을 꺾었고, 법고(法鼓)를 한 번 울리시면 천마(天魔)조차도 머리를 숙였습니다. 실로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을 법왕(法王)이라 부르는 것인데, 어찌 망해 가는 주나라의 가섭(迦葉:老子)에 그 덕을 비길 수 있겠으며, 말세의 유동(儒童:孔子)과 서로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천상천하에 홀로 조어지존(調御之尊)이라 칭하는 것이며,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그 자비의 은총을 우러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치가 심오하고 향하는 것이 멀어서 전제(筌蹄)51)에 의지한 뒤에야 교문(敎門)의 선교(善巧)를 깨우치게 되니, 역시 사우(師友)에 의지하여야 그 가르침을 형통할 수 있습니다.

84천의 법장(法藏)2()10()의 문장, 기원(祇園)과 녹원(鹿苑)의 말씀, 바다 속 용궁의 밀지(密旨), 옥첩(玉牒)과 금서(金書)의 글자와 7()8()의 말씀 모두가 지극한 도를 백왕(百王)에 드리우지 않음이 없고, 현풍(玄風)을 만고(萬古)에 부치지 않음이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실다운 말씀이 참으로 불가사의하며, 가까이는 나라를 편안케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며, 멀리는 범부를 초월하여 성도(聖道)를 증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형체가 6()에 두루하고 가르침이 시방에 가득한지라, 참으로 세계의 복전(福田)이고 창생(蒼生)이 돌아갈 곳입니다.

지금 이것을 존중하고 믿는 이들은 마치 7(:北斗七星)가 북신(北辰:北極星)을 도는 것과 같고, 교화를 받고 믿는 이들은 만 갈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 신변(神變)과 공업(功業)이 천도와 인도를 이롭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어라 이름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항하사(恒河沙) 같은 인()이 충만해서 상락(常樂)의 과보를 얻기에 그 선()함이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단지 시운(時運)이 무르녹지 못해서 호족(胡族)과 한족(漢族)이 달리 감득한 것뿐인데, 이 때문에 서방이 먼저 그 말씀과 화신(化身)을 받들었는지라, 동국(東國)에서는 잠깐 보고 듣기만 해도 자비의 구름이 층층이 쌓이고 지혜의 태양이 빛을 드리우는 이로움이 있습니다.

영평(永平)의 해에 금인을 꿈꾸었고 적오(赤烏)의 세차(歲次)에 사리(舍利)를 보았는데, 마침내 한()ㆍ위()ㆍ제()ㆍ양()의 정치에서 상교(像敎)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ㆍ진()ㆍ진()ㆍ송() 이래로 명승이 간간이 배출되었으니, 혹 청대(靑臺)의 주변52)에서 만월(滿月)을 그리기도 하였고, 혹 옹문(雍門)53)의 바깥에서 상륜(相輪)을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하북(河北)에서 그 말을 새기면 한남(漢南)에서 이를 옮겨 적었으니, 도는 삼보(三輔)54)를 흥하게 하고 믿음은 9()를 윤택하게 하였습니다. 강좌(江左)를 넘어 더욱 성행하다가 금행(金行)55)을 거치면서 점점 풍성해졌는데, 위수(渭水)에서는 소요(逍遙)의 원()이 갖춰지고 여악(廬岳)에서는 반야(般若)의 대()가 모였습니다.

큰 자비와 오묘한 뜻으로 길을 재촉하여 왕림하시자, 석학과 고승이 멀리서 줄지어 찾아왔습니다. 마침내 양나라 무제의 치세에 이르러 3()가 연이어 저울질하였고, 수나라 문제(文帝) 초엽에는 5()이 나란히 하였습니다. 비록 몸은 자극(紫極)에 있어도 마음은 분양(汾陽)56)에 두었으니, 올바로 닦고자 맛난 음식조차 끊고서 계율의 향기를 맡고 법의 즐거움을 맛보며, 중생을 4()에서 건져 내기 힘들 것을 염려하여 몸소 7()을 다하여 지키면서도 곤룡포(袞龍袍) 장식을 가벼이 보아 물들인 옷만 입고, 아로새긴 가마를 버리고 부들방석에만 앉았기에 지금에 이르도록 혜대(惠臺)의 업()을 널리 이룩하고 보탑(寶塔)의 기틀을 널리 열었던 것입니다[양기(梁記)에는 동대(東臺)와 서부(西府)가 서로 80년간이나 이어졌다고 한다. 도읍의 큰 사찰만 7백여 곳이었고, 승니로서 강의하는 대중만도 1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내전을 토론하여 성업(聖業)에 함께 따르되,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세간의 영화를 멀리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다섯 도읍의 호족(豪族)이 벼슬도 마다하고 찾아왔고, 4()의 명가(名家)가 영화를 버리고 도에 들어갔습니다. 3()3()이 다스리던 땅으로부터 성교(聲敎)가 미치는 경계에 이르기까지 머리 숙여 회향(回向)하고 오체투지로 귀의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미 만물을 이롭게 한 것이 깊고도 오래되었으니, 공자와 노자가 드리웠다는 풍화가 어찌 이보다 클 수가 있겠습니까?

삼십육국춘추(三十六國春秋)57)에서의 고승과 명승 및 모자(牟子) 등의 전기에 따르면,

 

바야흐로 후한 명제 영평 10년 이래로 불법이 동쪽으로 전해진 것이 조대(朝代)로는 10, 햇수로는 6백여 년이 흘렀는데, 명승과 대덕(大德)으로 세상에서 존중받은 이가 대체로 257명입니다. ‘부견(附見)’으로 보충된 이나 연나라와 조나라의 왕공(王公) 및 제나라와 양나라의 경상(卿相) 등이 대체로 251명이었습니다.

그 행업(行業)을 표시하고자 크게 10()를 정하였으니, 첫 번째가 역경(譯經)이고, 두 번째가 의해(義解)이고, 세 번째가 신이(神異)이고, 네 번째가 습선(習禪)이고, 다섯 번째가 명률(明律)이고, 여섯 번째가 유신(遺身)이고, 일곱 번째가 송경(誦經)이고, 여덟 번째가 흥복(興福)이고, 아홉 번째가 경사(經師)이고, 열 번째가 창도(唱導)입니다.

이 같은 고승들은 4()를 본받은 덕()이 있고 3()을 완비한 공()이 있었는데, 법이 진단에 전해진 것도 실로 이들에 의한 것입니다[이에 사견(邪見)은 숨기고 논하지 않았다. 단지 15가지 나쁜 것을 말한 것은 설산(雪山)의 안에는 본래 감로(甘露)가 많고 독초가 있기 때문이다. 큰 바다 안에 진주가 있고 또한 나찰도 많다. 비유하자면 곤륜산에 조약돌이 없는 것과도 같다. 등림(鄧林) 가운데 나뭇가지 하나가 썩은 것이 뭐가 그리 이상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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