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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59 불교(광홍명집 10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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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10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2. 변혹편

 

10) 주조폐이교립통도관조(周祖廢二敎立通道觀詔) 주나라 황제 우문옹(宇文邕)

무제는 치의(緇衣:불교)를 시기하며 황로(黃老:도교)의 법을 신봉하였기에 도법(道法)만을 남기고자 불종(佛宗)을 폐지하려 하였다. 여러 사람들과 의논할 때마다 한결같이 석씨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기에 무제가 오랫동안 생각을 하였으나 이는 원래 도모하던 바가 아니었다.

도안(道安) 법사가 이교론(二敎論)을 올려 도법(道法)에는 들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자, 비록 뜻을 굽히지는 않았으나 그 이치가 여러 사람의 뜻에 통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홀로 남겨 두지 못하고 바로 이교(二敎)를 모두 제거하였는데, 마침내 분한 마음이 가슴에 가득하여 발설하게 되었다. 한 달이채 지나지 않아 조칙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극한 도는 넓고 깊어서 합쳐 이루되 끝이 없으니, 그 바탕이 공()과 유()를 감싸 안고 이치는 유현(幽玄)의 지극(至極)에 달하였다. 단지 갈래가 이미 나뉘고 그 흐름의 근원이 날로 멀어지니, 순박함을 여의고 형태와 도량이 이처럼 어긋나서 3()8()가 시비를 서로 다투고, 9()7()은 말을 달리하여 서로를 능멸하였다. 그만 도가 숨어 이룸이 적어진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는데도, 서로 회통하여 돌이키지 못하고 다툼으로 치달려 끝내 쉬지를 못한다.

지금 통도관(通道觀)을 세울 수 있어 성현의 미묘한 말과 선현의 전훈(典訓:가르침)과 금과(金科)의 옥전(玉篆)과 깊고 비밀스러운 현문(玄文)으로 여원(黎元)을 구제하여 기르고, 가르침의 이치로 부축하여 이루고자 하니, 마땅히 이를 널리 천명하여 하나로 꿰뚫어야 할 것이다.

작은 언덕에 노니려는 이에게 숭산과 대악(岱岳)

 

드높음을 알게 하고, 돌맹이를 지키려는 이에게는 발해(渤澥)의 넓고 맑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그 크기를 살펴서 사람 수를 정할 터이니, 달리 하고자 힘써서 그 식()이 변치 않는 이에겐 녹봉을 내리되, 주상이 친히 시행할 것이다.”

이 때에 정원(定員)120명을 두어 감호(監護)케 하면서 관리(官吏)의 힘에 각각 차등을 두었다. 이문(李門)의 사람 가운데 당대에 유명한 이를 뽑아 의()ㆍ관()ㆍ홀()ㆍ리()를 입히고 통도관학사(通道觀學士)라 이름하였다.

전에 사문(沙門)이었던 경조(京兆)의 번보광(樊普曠)이란 이가 우스갯소리를 잘하여 사람들을 웃기곤 하였는데, 황제가 몹시 존중하여 통도관으로 불러들였다. 비록 강제로 환속하였지만 머리를 깎은 채로 수염만 남겨 두었다.

황제가 무슨 일로 머리는 깎고 수염은 남겨 두었는가?”라고 묻자, 번보광이 신은 폐하를 배운 것입니다. 비록 2교를 없애되 통도관을 남겨 두었으니, 수염은 속가의 꾸밈이기에 남겨 두었고, 머리카락은 속가의 가르침이 아니기에 잘랐습니다라고 말했다. 황제가 속가에서 머리카락을 남기고 그 위에다 관대(冠帶)를 쓰는 것이, 어찌하여 예교(禮敎)가 아니라 하는가?”라고 묻자, 번보광이 머리카락 없는 선비에게 그런 것이 무슨 가르침이 되겠습니까? 신이 미리 이를 잘라 버렸는데, 관모를 덧씌운다고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그만 황제가 웃고 말았다.

이 때부터 늘 머리카락을 깨끗이 자르고 관모를 쓰고 갓끈과 옷깃을 드리웠는데, 사람들이 물으면 내가 열병을 앓는다고 대답하였다.

 

 

11) 주조평제소승서폐립항거사(周祖平齊召僧敍廢立抗拒事)

주나라 무제가 제()나라 승광(承光) 2년 봄에 동쪽의 고씨(高氏)를 평정하자, 예전에 도를 닦던 대덕(大德)들을 불러 대전(大殿)으로 모이게 하였다. 황제가 어좌에 올라가 폐립(廢立)의 뜻을 설명하고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짐이 천명을 받은 것은 하나의 구우(區宇)를 안녕케 함이니, 세상에 세 가지 가르침을 펴게 되면 그 풍화(風化)가 갈수록 멀어질 것이다. 이를 자세히 살펴 연구하여 지극한 이치를 안정시키고 병폐가 많은 것을 도화(陶化)시키고자 하니, 지금 함께 이를 폐지할 것이다.

그러나 6()의 유교(儒敎)는 문물을 넓히는 정술(政術)인 데다, 예의와 충효는 세상에 마땅한 바이기에 남겨 둘 것이다. 참다운 부처는 형상이 없으니, 멀리서 공경하더라도 마음으로 드러낼 수 있다.

불경에서

 

부도(附圖)의 어록을 찬탄하여 강대하게 조성하면 복을 지극하게 쌓는다고 칭송하니, 이는 실제로 무정(無情)에 불과한데 어떻게 은혜가 깊다 하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이 이것을 그대로 믿어 귀한 재물만 축내니 참으로 낭비이다. 그러므로 이를 폐지할 것이니, 다시 불경과 불상조차도 모두 없앨 것이다.

부모는 그 은혜가 막중한데도 사문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기에 그 패악이 극심하여 국법(國法)으로 이를 허용하지 않으니,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기리고 효도를 다하라.

짐의 뜻이 이와 같은데 여러 대덕들은 그 이치가 어떻다고 말씀하시려는가?”

이 때 사문 대통(大統) 5백여 명이 모두 왕의 위세에 눌려 간언을 올리고자 해도 따르기 어려웠다. 관내(關內)에 불법이 이미 제거되었으나, 이치는 고립되지 않았는데도 대중이 잠자코 있자, 다시 조칙을 내려 그 답을 재촉해도 서로 돌아다보며 면목 없이 고개를 떨군 채 탄식만 하였다.

혜원(慧遠) 법사는 이름이 드높았는데, ‘불법이 의탁하려면, 사부대중이 그 의지가 되어야 하는데, 어찌 말을 하지 않고 능히 그 이치를 통할 수 있겠는가?’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바로 나와서, “폐하가 대역(大域)을 통치하며 한 지방의 존귀함을 얻으셨는데, 세속에 따른다고 말씀하시면서 3()를 헌장(憲章)하셨으니, 조칙에서 참다운 부처는 형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참으로 하늘의 이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눈과 귀가 있는 생령(生靈)은 경전에 의지하여 부처님 말씀을 듣고 불상에 의지하여 그 참다움을 드러내는 법인데, 지금 만약 이것을 폐지하면 존중함도 일어나지 않을 터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혜원이 다시 한나라 명제 이전에 불경과 불상이 이르지 않았는데, 이 땅의 함생(含生)이 어째서 허공과 같은 참다운 부처를 알지 못했습니까?”라고 말하자, 황제가 그만 대답하지 못하였다.

혜원이 만약 경전의 가르침에 의거하지 않고 스스로 법을 알 수 있다면, 3() 이전에는 문자가 없었어도, 사람들이 스스로 5() 따위의 법을 알았어야 하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어째서 단지 어미만을 알고 아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마치 금수와 같았습니까?”라고 힐난하자, 황제가 또 대답하지 못하였다.

혜원이 만약 형상이 무정(無情)하여 이를 섬겨도 복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면, 나라와 집안마다 7()의 신상이 있으니, 이와 같은 것은

 

유정(有情)의 허망한 모양일 뿐인데, 어찌 그 같은 일을 따르는 것입니까?”라고 힐난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 같은 힐난에는 대답하지 않고, “불경은 외국의 법이기에 이 나라에서는 필요치 않으므로 이를 폐지하여 쓰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7묘는 상대(上代)로부터 이룩된 것이니, 짐이 또한 이를 옳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장차 함께 폐지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혜원이 말하였다.

만약 외국의 경전이기에 이곳에서 쓰이지 않는다면, 중니(仲尼:공자의 )가 말한 바도 노나라에서 나온 것이니, ()과 진()의 땅에서는 이 또한 폐지하여 행하지 말아야 마땅합니다. 7묘가 그릇되다 하여 이를 폐지하신다는데, 이는 조고(祖考)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니, 조고를 존중하지 않게 되면 소목(昭穆)이 순서를 잃게 됩니다. 소목이 순서를 잃게 되면 오경(五經)조차도 소용이 없는데, 예전에 유교(儒敎)를 남겨 두었던 그러한 이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이러하다면 이와 같이 세 가지 가르침을 동시에 폐지하고서 장차 무엇으로 나라를 다스리시렵니까?”라고 말하였다.

황제가 노나라 땅과 진()과 진()이 책봉된 구역과 다르다 하나 왕자(王者)의 한결같은 덕화 아님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불경과 7묘에 대한 힐난과는 그 부류가 서로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황제로서는 소통시킬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혜원이 만약 진나라와 노나라가 하나의 덕화를 다 같이 따라서 경교(經敎)가 형통하게 시행된다고 하면, 진단과 천축이 비록 나라의 경계가 다르더라도, 염부제 4()의 이내는 전륜왕의 한결같은 덕화 아님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불경을 따르는 것을 같지 않다 하여 지금 이것 하나만 폐하려 드는 것입니까?”라고 말하자, 황제가 또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혜원이 조칙에서는 승가(僧家)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 효를 봉양하라하였고, 공자의 경전에서도 입신(立身)하여 도를 행하여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를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이에 황제가 부모의 은혜는 중한 것이기에 서로 북돋우어 색()을 길러야 하는데도, 부모를 버리고 소홀히 하니 이는 지극한 효를 이룬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혜원이 만약 이같이 말씀하신다면, 폐하의 좌우에 있는 이들도 모두 양친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를 풀어 놓지 않고 오랫동안 부역을 시켜 5년씩이나 부모를 만나지 못하게 합니까?”라고 말하였다.

이에 황제가 짐 또한 상하의 순번에 따라 돌려보내 시봉케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혜원이 다시 부처님 또한 스님들에게 겨울철과 여름철에는 인연에 따라 도를 닦고 봄과 가을에는 집에 돌아가 봉양케 하였다. 이 때문에 목련(目連)이 밥을 얻어다가

 

부모를 먹이고, 여래께서 관을 메어 장례를 치르셨으니, 이 같은 이치야말로 크게 형통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유독 이것만 폐지하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하였다.

황제가 또 대답을 하지 못하자, 마침내 혜원이 목소리를 높여 폐하가 지금 왕의 힘이 자유로운 것만 믿고 3()를 파멸시키려 하니, 이야말로 삿된 소견을 내는 사람입니다. 아비지옥(阿鼻地獄)은 귀하고 천함을 가리지 않는데, 폐하께서는 어째서 이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이에 황제가 발끈하여 안색을 바꾸고 크게 노하여 혜원을 노려보면서, “단지 백성이 안락함을 얻는다면, 짐은 지옥의 온갖 고통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혜원이 폐하가 지금 삿된 법으로 사람을 교화하여 고업(苦業)의 씨앗을 심게 하였으니, 마땅히 폐하와 함께 아비지옥으로 떨어질 것인데, 도대체 어느 곳에 얻을 만한 즐거움이 있겠습니까?”라고 따졌다.

이때에 황제가 그 이치에 말문이 막히자, 앞서 도모하였던 뜻만 그대로 간직한 채, 다시 대답하지 않고 스님들은 어서 돌아가시라고만 말하였다.

유사(有司)가 스님들의 성()과 자()를 가려내 기록하면서 황제가 3년이나 학정을 가했기에 관롱(關隴)의 불법이 몰살되어 거의 없어졌다. 이미 제나라 경계를 합병하면서 여기서도 폐지시켰다.

이 때 위나라와 제나라의 동천(東川)에서 불법이 흥성하였기에 눈에 띄는 사찰만 4만여 곳이 넘었는데, 이를 왕공(王公)에게 하사하여 저택으로 삼고, 5()의 석문(釋門) 3백만 여명을 감하여 모두 군민(軍民)으로 되돌려 편호(編戶)로 복귀시켰다. 불상을 동강내고 경교(經敎)를 불태웠으니 삼교의 복재(福財)와 부록(簿錄)은 모두 관물로 압수하여 바로 상으로 이를 나누어 주고 탕진시켰다.

황제가 천하의 뜻을 얻었다고 여겼는데, 1년이 되지 않아 독기(毒氣)가 몸 안에서 피어올라 종기가 겉으로 드러났다. 추악한 모습이 드러나자 이미 참회하여도 되돌릴 바가 없었으니, 곧바로 운양궁(雲陽宮)에서 은신하다가 7일 만에 붕어하였다.

천원(天元)이 그 조력(祖曆)을 이어 동경(東京)과 서경(西京) 두 고을에 사찰을 우뚝 세우고 보살승(菩薩僧)을 처벌하여 부처님의 교화를 다시 열었다. 황제가 붕어한 지 오래지 않아 국운이 연혁되어 수나라 고제(高帝) 때에 이르러 바야흐로 크게 형통하였으니, 이는 나중에 기술하는 바와 같다.

가까이는 대당(大唐) 이부상서(吏部尙書) 당림(唐臨)명보기(冥報記)를 보면,

 

외조부 수()나라의 좌복야(左文僕射) 제공(齊公)이 문제(文帝)를 친견하였는데, 문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또 있느냐고 물어 보면서, “처음 죽었을 때 주나라 무제를 만났는데, 대수(大隋)의 천자인 것을 전해 듣고서, ‘예전에 나와 함께 창고에서 밥을 먹었으니, 옥백(玉帛) 또한 내가 저장한 것이다. 내가 지금 불법을 소멸시켰기에 큰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나를 위해 공덕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하였다. 이에 문제가 조칙을 내려 천하 사람 모두 1()씩을 내게 하여 그 명복을 기리게 하였다고 전하는 대목이 있다.

 

12) 주조순업청개불법사(周祖巡鄴請開佛法事) 임도림(任道林)

주나라 건덕(建德) 6(577) 114일 주상이 업궁(鄴宮)의 신전(新殿)에 임하자, 내사(內史) 우문앙(宇文昻)과 상사(上士) 이덕림(李德林)이 상서를 올리려는 사람들의 표문(表文)을 접수하였다.

이 때 임도림(任道林)이 표()를 올렸는데, 상사(上士)가 그 표문을 열람하고서, “그대가 두 가지 가르침에 대해 논하고자 하나, 주상이 기변(機辯)에 능하여 마주 답변하기 힘드니, 생각을 다시 하라고 권하자, 임도림이 주상의 능변(能辯)은 사방에 그 이름이 나 있기에 저도 일찍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 능변을 들은 까닭에 왔으니, 어찌 변론해 보지 않고 지나칠 수 있습니까?”라고 운운하였다. 이에 대전으로 소환하여 주상이 어좌(御座)에 올라 서쪽에 선 채로 조칙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이 주상을 섬겨 광정(匡政)의 다스림을 돕고자 하니, 짐이 이를 가상히 여기노라. 조목조목 진술하되 말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이에 임도림이 제나라의 여민(餘民)을 안무(按撫)하고자 부역을 경감하는 일을 표주하였는데,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임도림이 다시 덧붙여 말하였다.

나는 원래 불도(佛道)를 펴고자 서원하였는데, 오로지 세속의 정치만을 논하니, 이는 군주에게 빌붙고자 아첨하는 것과 같습니다만, 실상은 천심(天心)으로 법을 보호하려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의 넓은 가르침은 권()에 응하는 것에 방위가 없으니, 참으로 지혜의 방편이 높고 기특합니다. 널리 정법을 펴서 이 같은 5(五濁)을 구제하고 3()를 건져 내면, 인간이나 천상이나 6()4()으로 돌이켜 귀의하면서 그 개오(開悟)를 받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한나라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5백 년이 넘도록 왕공과 경대부가 이어 받들고 전하여 형통시켰으나, 대주(大周)에 이르러 잠깐 사이에 폐지되었습니다. 폐하가 전대(前代) 제왕(帝王)의 교화를 이어 다스려 후대의 황제에게 전승하는데, 어찌하여 불교에만 편중되어 옛 것을 본받지 못하게 하십니까?

만약 이처럼 어진 것을 그르다 하여 선현(先賢)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제 말에 따르면 폐하에게도 이로울 터인데, 구태여 불교를 폐지할 이유를 참으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조칙을 내렸다.

부처는 서역에서 태어나 우연히 동하(東夏)에 전해진 것이다. 따라서 그 원래의 풍교가 중국과는 어긋난다. 한나라ㆍ위나라ㆍ진나라의 치세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하였으나, 5()가 어지럽게 다스리고서야 그 풍화가 바야흐로 융성해졌다. 짐은 5호가 아니기에 마음속으로 이를 공경하지 않으니, 단지 정교(正敎)가 아니기에 폐지한 것뿐이다.”

그러자 다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진 때로부터 이미 7대가 지났습니다. 유연(劉淵)이 진나라를 찬탈하였으나 원래 중하(中夏) 사람이 아니었기에 정삭(正朔)이 아니라 하여 오호(五胡)라 칭합니다. 그 한나라ㆍ위나라ㆍ진나라의 치세에 부처님의 교화가 이미 널리 퍼졌고 송나라와 조나라 및 부견(符堅)의 연()나라가 오랫동안 답습하여 융성케 하였습니다. 폐하가 오호와 같이 불법을 흥성하게 닦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신다면, 청하건대 한나라와 위나라처럼 그 종지만이라도 끊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시 조칙이 다음과 같이 내렸다.

부처의 이치가 넓다는 것은 짐도 이미 살펴보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대부분 헛되이 크면서 부박하게 꾸며낸 말인지라 죄를 지으면 과거세로 미루고 복이 없으면 미래세를 지칭하는데, 일마다 징험되는 바가 없으니, 이를 행하더라도 미혹만 많아진다. 그 선을 권장하는 것을 논하자면 옛날의 예()와 다를 바가 없고, 그 악을 끊는 것을 연구하자면 어찌 세속의 율령(律令)과 다르겠는가? 일찌감치 이것을 폐지하고자 그 학()을 도려낸 것이다. 이것은 결단코 이롭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에 제거하려는 것이다.”

다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이치가 깊으면 말도 커지니 이것은 마음으로 가까이하여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 시절이 멀어지면 일도 깊어지는데 어찌 조그마한 기틀로 이것을 가리고자 하십니까? 어떻게 1세의 좁은 소견으로 오래된 형통한 의논을 막으려 하십니까? 미혹에 막혀서 깨달음을 소홀히 하니 이것 또한 허물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부처님의 이치는 법계(法界)에 지극하고 가르침의 바탕은 내외(內外)에 형통하므로 그 행()을 말하자면 나와 남을 모두 이롭게 하고, 그 과()를 가리자면 언제나 즐겨 도모함이 없으니, 덕을 심어

 

그 은혜를 융성케 합니다. 천지가 그 도를 전수하여 널리 이롭게 함이 가없습니다. 그 기특함을 보면 신통이 자재한지라, 그 교화를 널리 펴서 만국(萬國)을 다 같이 거두되, 그 구제하는 바가 원수 맺힌 이나 친한 이를 고르게 다스리고, 자애로움으로 유식(有識)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계율로 바깥의 악을 끊고 마음의 그릇됨을 눌러 안정시키며, ()로써 고금을 비추고 그 지혜로 만물을 궁구(窮究)합니다. 만약 집집마다 이와 같이 행하면 백성마다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고, 나라마다 이것을 닦으면 병장기가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비록 이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어떤 곳에서 이로움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다시 주청하는 바이니, 신이 듣건대 효도하는 자는 하늘의 도를 지극히 하고 순응하는 자는 땅의 양육을 지극히 한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 신령함을 형통시켜 밝은 빛을 4()에 떨치니, 백행(百行)의 근본은 누구라도 효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예전에 세간에서 도가 기울자 위()나라 종실(宗室)이 붕괴하였는데, 태조가 위엄을 떨쳐 하늘을 보()하고 난리를 평정하여 왕업(王業)을 개창하였습니다. 폐하도 이 같은 홍서(鴻緖:임금의 혈통)로 인해 황제의 지위에 올라 4해에 군림하면서 그 덕을 천하에 드리우게 된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이보다 큰 것이 없는데 그 한 몸이 그치는 것으로 도를 없다 하니 어떻게 자신의 심지만 믿어 스스로의 이해만을 고집하십니까?

발톱과 이빨만을 믿고 왕의 세력을 방자하게 써서 태조가 건립한 사찰과 묘당을 부수어 버리고, 태조가 섬겼던 영상(靈像)을 내치며, 태조가 받들었던 법교(法敎)를 폐지시키고, 태조가 존중하였던 스님들을 환속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참으로 부모가 쓰던 탁자조차도 감히 이를 훼손하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아버지가 친히 모시던 바를 어찌 경시하고 훼손할 수 있겠습니까?

국조(國祖)가 늘고 줄어드는 것은 부처님께 연유한 것이 아닌데, 정치가 흥하고 망하는 것이 어찌 법()에 관련되겠습니까? 어찌 한순간에 허망한 생각만을 믿어 만세(萬世)의 조롱을 자초하십니까?

어리석은 신이 죽기를 각오하고 그 불가함을 특별히 두드러지게 적는 바입니다.”

다시 조칙이 다음과 같이 내렸다.

효도의 이치가 어찌 지극하지 않을까마는, 오로지 그 한 몸의 이로움만 고집하여 이를 지키느니, 큰 지혜로 권도(權道)의 방편을 써서라도 상도(常道)로 되돌려 합쳐야 할 것이다. 탕 임금과 무왕(武王)이 그 임금을 정벌하였어도 어짊과 슬기에 그릇됨이 없었으나, 미생(尾生)1)이 신의를 지킨다고 도리어 화를 이르게 하여 그 몸을 망쳤다. 일이 만약 유익하다면 어긋남이 있더라도 그 행을 따라야 할 것이고,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

 

순응하더라도 반드시 잘라야 한다. 자기 한 사람만 구하고자 4()를 미혹에 빠뜨릴 수는 없으니, 바깥으로는 태조를 어겼더라도 안으로는 검원(黔元)을 윤택케 한 것이다. 사문에게 환속하도록 영을 내려 부모를 모시게 한 것은 천하의 효를 이루고자 함이니, 각각 스스로 살아가며 다른 이를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왕토(王土)를 다스려 이롭게 보살피되 이융(夷戎)을 버리고 중하에 따르게 해서 6()을 다 같이 하나로 하는 것이야말로 만대에 이름을 날려 태조를 드러내는 바인지라, 바로 효의 궁극이라 이를 터인데 어떻게 이것을 그릇되다고 하는가?”

다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만약 부처를 훼손하는 것이 이롭고 스님들을 훼손하는 것이 백성에게 유익하다고 말한다면, 옛날에 태조가 건강하던 날에 만기(萬機)를 그윽히 살피고 천도(千途)를 슬기롭게 통괄하였다. 만약 불법이 그 교화에 손해가 된다면 반드시 이것을 제거했을 터인데, 어찌하여 해가 갈수록 받들어 모셔서 천하에 흥성케 하였겠습니까?

또 불법이 남아 있었던 나날에 피해를 준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며, 이것을 파괴한 이래로 어떠한 이익을 이루었습니까? 만약 실제로 이로움이 없다면 차라리 불효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조칙이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법의 흥기(興起)에는 그 시절이 있는 바이기에 도를 허용하기 어렵다. 제정(制定)은 위에서 행하는 바에 연유하는 것으로, 왕자가 준칙을 세웠으면 조그마한 이익이 있더라도 불법을 폐지해야 하는데, 부처는 이로움이 없으니 이치적으로도 이것을 허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섬겨도 징험이 없고, 모셔서 감득하고자 하여도 효험이 없으니, 스스로 무료한 것만을 구하여 어떻게 나라를 이롭게 하겠는가?

이것을 폐지한 이래로 백성의 부역(賦役)이 다소나마 줄어들고, ()ㆍ조(調)는 해마다 늘어나고, 병사는 나날이 융성해져서 동쪽으로는 제나라를 평정하고 서쪽으로는 요사스런 융족을 물리쳤다. 나라가 편안하고 백성이 즐거운데 어찌 이로움이 없다 하겠는가? 만약 섬기는 것이 유익하다면, 태조가 날마다 되풀이하여 제나라를 토벌하고자 하였는데도 어떻게 이를 이루지 못하였는가?

짐이 지금 불법을 파괴하였는데, 만약 이것이 해가 된다면, 분명 일신을 망쳤을 터인데, 지금 동하를 평정하게 되었으니, 그 이로움을 분명히 알겠다. 이를 폐지하는 것이 도리에 맞기에 이치적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이롭지 못하노라.”

다시 상주하였다.

자고로 나라가 정치를 세우는 것이 도를 귀히 여겨서 그 교화를 제정하려는 것인데, 백성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덕보다 높다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보건대, 도가 없어지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지, 군사적 힘이 강하다고

 

국조(國祚)가 장구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포악한 주() 임금은 그 무리를 믿어 제업(帝業)이 기우는 화가 뒤따랐고, ()나라의 무왕(武王)은 복과 덕을 닦아 황기(皇基)를 다졌습니다. 춘추시대의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교만하게 싸우다가 그 몸을 망쳤고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도를 두려워하여 다시 편안해졌습니다. 이로써 논하자면 부처를 없애고 스님들을 물리친 것이 동하를 평정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불법을 망칩니까?

이는 마땅히 평정한 시기가 되어 우연히 부합된 것입니다. 망령되이 법을 없애면서 이롭다고 일컬으니, 만약 그렇다면 탕 임금이 정벌하여 중하를 차지하고, 문왕(文王)이 숭()을 멸망시키고, 무왕이 주()를 주살하고, ()나라가 천하를 병탄하고, 적한(赤漢)이 항우를 멸망시킨, 이와 같은 여러 임금이 어찌 불법을 훼손한 것에 연유하겠습니까?”

이 이후로 논변이 마주하여 사람의 법도를 조롱한다거나, 또는 임금과 부모에 대한 예법을 묻어 버린다거나, 또는 망령되이 불성(佛性)을 이른다거나, 또는 색심(色心)을 분석하여 이를 조롱하거나, 또는 그릇된 업을 짓는 것을 되풀이 한다거나, 또는 그 몸이 원래 음양(陰陽)이라고 강변하였으나, 도림이 모두 그와 같은 비난을 척결했다.

황제가 비록 반론은 무겁게 하여도 세 번이나 다섯 번 이치를 다하여 그 성품을 밝히기만 하면 도림이 그 의심을 없애어 남겨 놓지 않았으니, 반론이 있을 적마다 이를 통하게 하였다.

이에 황제가 말하였다.

그대가 업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하나 대체로 성인에 들어가는 기대가 있으니 그 본성(本性)이 업을 벗어나지 않는다. ()는 범부의 취향에 통하는 것이 있고, 이와 같은 도는 범부와 성인에 널리 형통하지 않은 바가 없다. 이러하기에 그 가르침에는 공자와 석가의 헛되게 높이지는 것이 없다. 따라서 도()와 속()이 형통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부질없이 삭발하는 꾸밈새를 더한다. 참으로 제왕(帝王)이 바로 여래임을 알겠으니 마땅히 장륙신(丈六身)을 단절해야 하고, 왕공이 바로 보살이니 문수(文殊)를 섬기는 일을 생략해야 한다. 나이 많은 이를 상좌로 삼으니 빈두(賓頭)가 필요 없으며, 어짊과 은혜로 단도(檀度)를 삼는데 어찌하여 나라를 버리려 하는가?

가장 뛰어난 스님들을 편안케 하고자 어찌 보살을 수고롭게 하는가? 방정(方貞)과 근신(謹身)이 바로 목차(木叉:波羅提木叉)2)가 되는데 하필이면 계()를 받아야 되는가? 검약함이야말로 바로 욕심을 줄이는 것이기에 두타(頭陀)에 의지할 필요가 없으며, 채식이야말로 지극한 장재(長齋)인데 어찌 번거롭게 곡기(穀氣)를 끊어야 하는가?

현묘함에 맡겨 나를 없이 한다면 무엇에 근거해서 공을 터득하겠는가? ()을 잊고 오로지 대승(大乘)으로만 나아가니,

 

어찌 반야(般若)를 기대하겠는가? ()과 무()가 바로 두 가지 지혜이니 관()과 공()ㆍ유()를 관찰할 필요가 없고, 권모(權謀)가 그대로 선교방편(善巧方便)인데 어찌 변화를 기다려야 하는가?

벼슬 내리는 것이야말로 수기(授記)하는 것이니, 그 증과(證果)가 시들지 않는다. 작위와 녹봉이야말로 천당의 복을 받는 것인데 어찌하여 상계(上界)를 기다려야 하는가? 벌을 내려 살육하는 것이 지옥에 감응하는 것이니 니리(泥犁)3)를 가르칠 필요가 없으며, 백성을 자식 삼으니 참으로 대자대비라 이를 수 있으며, 4해를 집으로 삼으니 이는 법계(法界)와 같이 하는 것이며, 정무를 돌보되 이치에 맞게 하는데 어떻게 만물을 구제하는 것과 다르다 하겠는가? 백성을 안락케 하는 것이 어찌 고액을 제도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벌을 내려 해로움을 없애는 그 이치가 바로 마군을 항복받는 것이고, 임금으로 천하에 임하는 것이야말로 참답게 득도(得道)를 이루는 것이다. 천하가 태평한 것이 어찌 정토(淨土)와 다르겠으며, 만물이 고른 것이 어찌 가유(迦維)4)에 뒤지겠는가?

경이 다른 마음을 품고 비뚤어진 견해만 헛되이 일으키니 일에 비추어 말하자면 실제로 도()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고 보니 뜻이 넓고 말이 깊다 하겠으나, 도를 거두어 세속과 섞이게 하고 전일(專一)을 옮겨서 집견(執見)을 흩어지게 합니다. 이리하여 가는 곳마다 참다움을 타고서 유정(有情)이 도를 갖추게 하고 만물과 나를 골고루 편안하게 하니 천 가지 무리가 한 가지로 고르게 되는지라 참으로 아름답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은 아직도 이것이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지극한 도가 하나라면 이를 융화할 만한 두 가지가 없을 터이고 만약 이치에 언제나 안팎이 있다면 바로 늘 구별될 터이니, 이는 하나라 하더라도 하나가 아니고 절반이라 하더라도 절반이 아니고 두 가지라 하더라도 두 가지가 아니기에, 이는 도()이기도 하고 속()이기도 합니다. 이러한즉 검은 옷과 흰 옷이 어지럽게 섞이고 유가(儒家)와 석가(釋迦)가 그 차례를 잃게 됩니다. 바깥과 안이 모두 섞여서 위아래마저 그 부류가 어긋나는데 어떻게 멀리 맑은 가르침에 잠기게 할 수 있습니까?

이 또한 가까이는 백성의 풍속을 현혹시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로써 음과 양이 같은 기운이라 하여도 태어나고 죽는 것은 늘 다르고, 천지가 그 형태를 고르게 하여도 높고 낮음은 늘 다르기에 그 형태를 갖추어 땅을 움직이고 하늘을 조용히 할 수 없습니다. 또 이것을 그 기운이 나란하다고 소견을 내어 음()이 생하고 양()이 죽는다 하나, 실제로 일에 있어서는 이 같은 이치가 없습니다. 헛된 말은 쓰임새를 이루기 어려우니, 이로써 형체를 고루 하고 기운이 한 가지라는 것은 말로는 같다고 할 수 있어도 태어나고 죽으며 높고 낮은

 

이치는 따로 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같게 하여도 같지 않고 하나로 해도 한 가지가 아니기에 도()와 속()의 이치가 같다 해도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꾀함이 없다 해도 자연히 구별됩니다. 또 이처럼 왕이 한 가지라 이름하여도 범부와 성인은 원래가 다른 것이고, 그 형태와 일이 조짐이 같더라도 넓고 좁음이 완전히 틀립니다. 이러한 까닭에 유가와 석가는 처음부터 함께 흥기하지 않습니다. 도와 속이 천지와 함께 동화(同化)하더라도 만약 이것을 덮어서 하나로 하고자 하면 바로 도로써 세속을 폐해야 합니다. 세간에 이를 모두 이롭게 한다 하더라도 두 가지 이치가 드러나고 숨는 것이 고루 밝아지니, 지금 하나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도리어 하나를 페하는 것이 되어 참다움을 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다시 조칙이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그대가 도와 속이 원래 다르고 내외가 완전히 어긋난다고 말하는데, 이 같은 도가 도에만 비롯한다면 속에 관련이 없게 된다. 석씨는 그 석씨에 비롯하는 것이지 유가(儒家)에 의지함이 없다. 도가 만약 도()만 생각한다면 도에 어떠한 이로움이 있겠는가?

부처가 만약 혼자서 부처라면 그 교화에 어떠한 공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도와 속이 서로 보태고 유()와 석()이 번갈아 드러나는 것이다. 경이 이처럼 짐의 말에 근거하지 않으면서, 경은 도대체 무엇을 논하고자 하는가?

이는 내외를 누르고 기려서 이것과 저것을 폐하고 일으키는 것이다. 지금 국법으로 시행하지 않고 왕법(王法)으로 금지하니 폐하고 흥하는 것도 천자의 운수에 있어서 항상된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 늘 흥한다는 이치가 없는데 이를 폐한다고 무슨 죄가 있는가?”

다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성지를 받들고 보니 구름이 걷히고 해가 드러나듯 합니다. 삼가 조칙을 듣자오니 참으로 성인의 말씀이나 다름없습니다. 도가 그 도에 비롯하지 않으면 속() 아닌 바가 드러나지 않기에 불교가 부처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직 왕만이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로써 석씨의 가르침이 동쪽으로 전해진 이래로 5백 년이나 흘렀어도 널리 법의 교화를 펴는 것은 오로지 왕의 힘에 의지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도는 사람에 빌려 넓어지는 것이고 신령함은 사물에 연유하여 감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법이 발전하고 퇴보하는 것은 그 공()이 성지(聖旨)로 돌아가니, 도에는 흥망이 있어서 이치적으로 항상되지 못하고, 법에는 숨고 드러남이 있어서 이치적으로 늘 보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폐지되었으니, 이치적으로도 바로 시행할 수 없으나, 단절이 오래 되면 흥하는 시기가 뒤따를 것이니, 흥하고 폐하는 것이 서로 갈마들면서 이치도 스스로 그 기틀에 응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운수에 따른다면 이 또한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조칙이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제왕(帝王)의 법은 취하고 버리는 것을 잘 결정하고, 가고 옴을 밝게 판단하여서 그 같고 다름을 세밀히 살피며 상도가 아닌 것을 묘하게 따지는 것이다. 짐이 석씨의 가르침을 부내(府內)에서 깊이 생각하고, 지금 고금을 따져 비교하며, 그 일이 행해지는 것으로 징험해 보고 그 득과 실을 계산해 보니, 그 이치가 상도(常道)도 아니고 요체도 아니다. 그 글이 높고 기특하다 하나 꾸미지 않은 것이 없어 쓸모가 없기에 이것을 버려 폐하려는 것이지 어찌 유교와 석가를 사랑하고 미워함이겠는가?”

다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법을 넓히는 근본은 반드시 그 마음을 통달함에 두어야 하니 사람이야말로 그 교화를 형통케 하는 으뜸입니다. 요컨대, 정도에 뜻을 두는 것입니다. 자신을 꺼리는 것을 나쁘다고 보거나 마음속에 품은 채 멀리하거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만 아름답게 생각하거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만 친근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은 스스로 그 보는 것에 미혹되고 그 듣는 것에 어지러워지는 것이니, 그 비방하거나 바른 말조차도 가리지 못합니다. 이를 바로 신임하여 받아들이면 말하는 대로 부화해서 시비를 내는 것에 따라 그 단점만을 깊이 따져 나날이 미운 마음만 내니, 참으로 헛된 것으로 참다움을 바꾸는 것이고 시끄러운 소리로 그 뜻을 미혹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멀리해야 할 것은 받아들이고 가까이해야 할 것은 멀리해서 논의하는 것조차 비뚤어지게 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마다 한결같이 그르니, 이 또한 참다움을 해치는 화근이고 덕을 잃게 하여 요사함만 쌓이게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황제가 이것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갈래를 열어서 논단(論端)을 일으켜 다음과 같이 물어 말하였다.

짐이 들으니, 군자의 행동거지는 반드시 예의에 맞아야 하고 밝은 철인(哲人)의 진퇴(進退)는 반드시 기틀에 따라야 한다고 한다. 경을 마주 대하면서 그대에게 누차 술을 권하였으나 마시려 하지 않고 고기조차 먹지 않는다고 사절하는데, 술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약이고, 고기는 배고픔을 채우는 반찬으로, 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맛보는 것인데도, 경은 어째서 홀로 천하게 여기면서 그 몸을 상복 입듯이 하여 예법(禮法)으로 제정된 것조차 먹지 않는가? 지금 차려 낸 것은 원래 먹을 수 있는 것만 하사하였기에 이를 맛보아야 하는데도 먹지 않으니, 이 어찌 허물이 아닐 수 있는가?”

다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즐기는 것은 정절 있는 장부가 비천하게 여기는 바이고, 고기를 좋아하고 맛있는 것만 즐기는 것은 청렴한 선비가

 

싫어하는 바입니다. 그 마음을 억제하여 도에 따르는 것은 예전의 현자들이 칭찬한 것이고, 욕심을 억눌러 덕을 기르는 것은 지나간 철인들도 탄식했던 것입니다. 하물며 고기는 산 목숨을 죽여야 하는 것이고 술은 정신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이것을 먹지 않는 것이 도리이니, 어찌 이것을 그르다 하겠습니까?”

다시 조칙이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고기는 산 목숨을 해치는 것이니 이것을 끊는 것은 그렇다 해도, 술은 산 목숨을 해치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그 제도를 누르려 하는가?

만약 손해가 없게 행한다면 그 죄를 따지더라도 그르다고 말할 만한 허물이 없다. 즉 마시고 밥 먹는 것조차도 죄로 삼는 것 자체가 참으로 온당하지 못한다 하겠는데, 어째서 술만 편중되게 끊어야 하는가?”

다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계율의 결제(結制)는 인연사(因緣事)에 따르는 것이고 범죄(犯罪)는 그 마음에 연유하는 것입니다. 고기는 그 바탕이 목숨을 해친 것에 기인해서 이것을 먹으면 바로 죄가 되고, 술은 그 성품이 해치는 것은 아니나 과음하면 정신을 어지럽히는 것에 연유하여 다른 곳에서 허물이 생겨납니다. 그 같은 허물도 술에 기인하기에 술을 끊으면 곧 없어집니다. 이로써 막아서 그치게 하는 것과 제도를 정하는 것이 같지 않으니, 술의 바탕 자체가 죄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조칙이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죄는 성품을 제지하는 것인데 술에 바탕한 죄가 생겨난다 하면, 지금 술이 센 사람은 마셔도 취하지 않고 또 정신이 어지럽지 않아서 죄를 짓지도 않는다. 이 같은 사람은 술을 마셔도 죄를 짓지 않으니, 이와 같이 하면 마셔도 허물이 없으며 죄를 범하지도 않는데, 어째서 술을 끊는 것으로 계율을 만들고 어질다 하는가?

술을 마시고도 그 술을 견딜 수만 있으면 계율을 지킨다고 이름할 수 있고, 적게 마시고도 취한다면 큰 죄인이 될 것이다.”

다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허물을 제지하고 어긋남을 방비하는 것은 본래 선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계율은 바르고 착하게 해서 몸과 입에 어긋남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중도(中道)로 인하여 쉬게 하고 성품을 가로막아 두 가지를 끊는 것을 계선(戒善)이라 이름합니다. 지금 술이 센 사람이 정신이 어지럽지 않다 하여 음주계(飮酒戒)를 파하지 않는다면, 이는 실제의 이치로는 죄가 아니나, 바로 술을 마시는 것에서 죄가 생겨나기에 술 아닌 것에서 위반하게 되는 일 자체를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그 인연 가운데서 범하게 되는 것을 유죄(有罪)라 이름하게 됩니다. 따라서 불음주계(不飮酒戒)에 어긋나면 이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조칙이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대사(大士)가 도를 머금는 요체는 묘한 터득에 있고, 지극한 사람은 높이 통달하되

 

고집하지 않음을 귀히 여긴다. 마음을 융화(融和)시켜 법성(法性)과 고루게 넓히고, 생각을 내되 허공과 그 크기를 함께 한다면, 만물에 선() 아닌 것이 없으니 아름답고 추악한 것조차 어찌 도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된다면 술 속에 살고 고기 속에 드러눕더라도 어찌 유죄(宥罪)라 하겠는가? 처자를 데리고 아이를 끌어안고 다닌다고 어찌 허물이 생긴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태자는 부인을 얻었어도 도를 얻었고, 주타(周陀)5)는 그 부인을 버리고도 방탕해졌으며, 정명(淨名)6)은 속세에 처해서도 높이 현달(顯達)하였고, 신자(身子)7)는 출가하였어도 어리석었다. 이러한 까닭에 착한 이가 착함을 이루지도 못하면서 나쁜 것을 어떻게 나쁘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술을 금지하고 고기를 끊는 것을 귀히 여김은 대도(大道)와 어긋난다 할 만하다.”

다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용과 호랑이는 비늘과 이빨로 재주를 삼고, 원숭이와 새는 뛰어넘고 나는 것으로 재주를 삼는데, 군자(君子)는 해행(解行)을 도()로 삼고, 현철(賢哲)은 진실(眞實)로써 덕을 이룹니다. 내도(內道)와 외도(外道)에서 이를 기특하다 이르니 검은 옷과 흰 옷이 고상하더라도, 만약 해()만 있고 행()이 없다면, 우물이 말라붙어 물 없는 우물처럼 텅 비어 실하지 못한 것이, 마치 구름이 떠 있되 비가 내리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로써 만물을 이루려는 자는 승묵(繩墨:法度)으로 바로 하고, 천하를 다스리려는 자는 법리(法理)로써 근본을 삼습니다. 능히 어질고자 하면 삿됨의 씨앗을 방비하고 간특함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행의 허물조차도 살을 찢듯이 고통스럽게 하고, 한 마디 착함을 천금보다도 중히 여깁니다. 만약 심금으로 묘하게 터득하자면 사악함을 착하게 해서 신묘한 지혜를 비워 밝게 해야만 죄에 처해도 복을 이룰 수 있으니, 그러므로 바탕이 비천한 신하를 옮겨 하늘의 중한 임무에 처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극(聖極)에 다다르면 존귀하고 신하가 되면 비천해지는데, 지금 이같이 하면 임금과 신하가 어지러워지고 상하가 거꾸로 될지니, 이와 같은 일의 불가한 바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겠습니다. 어찌 말로는 충효를 말하면서 그 몸으로는 늘 반역을 꾀하는 것과 다르며, 입으로는 자비(慈悲)와 희사(喜捨)를 논하면서 그 형태로는 살생하고 훔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모두가 정()을 끊고 일을 번잡하게 하는 것이니 헛되이 높여도

 

쓸모가 없기에 재주가 크더라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이치는 작더라도 반드시 통해야 하는데, 도리어 이와 같은 것에 집착하여 도()로 삼으니 참으로 신뢰를 얻기가 힘든가 봅니다.”

다시 조칙이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정에 집착하면 도를 논할 수 없고 지혜가 적은 이는 더불어 참다움을 논하기 어렵다. 우물 속의 물고기가 어찌 동해 바다가 깊고 넓은 것을 알겠으며, 제비와 참새가 울타리나 날아다니면서 어찌 대붕(大鵬)이 떠도는 것을 선망하기나 하겠는가?

이 모두가 작은 것으로써 대취(大趣)를 거슬리는 것이고, 글을 지켜 형통한 길을 해치려는 것이다. 만약 자신을 만물에 비교하면 나 아닌 사물이 없고 사물을 나에 비교하면 사물 아닌 내가 없으니, 나는 이미 사물과 다를 것이 없는데 사물 또한 어찌 나와 다르겠는가?

나와 사물이 둘이 아니니 나와 남이 한 가지로 고르게 된다. 마음을 비운 자에게는 같지 않은 물건이 없으니 그 공을 남기는 일마다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하리라.”

다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성지를 받들고 보니 명의(名義)가 깊고 넓은 데다 종원(宗源)이 넓어서 살펴보더라도 연유조차 없고, 이를 빗대어 하늘을 들여다보더라도 누가 그 너비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또 깊은 바다를 재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그 깊이를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비하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이 없고,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비해 보면 크지 않은 작은 것이 없습니다. 큰 것은 크지 않은 것이없으니 추호(秋毫)라도 작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은 작지 않음이 없으니 태산(太山)이라도 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대(大大)는 크고 작음이 아니고 소소(小小)는 작고 큰 것이 아닙니다. 작고 큼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크고 작음은 다르면서도 같습니다. 크고 작은 것에 같고 다름이 없는데, 어떻게 작고 큼이 다르고 같음이 있겠습니까? 다른 것이 같은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같은 것이 다른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까?

같다고 할 수 있는 같은 것도 없어서 다른 것조차 같은 것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까닭에 같으면서도 같은 것이 아닌 같은 것이란 없고, 다르면서도 다른 것이 아닌 다름이란 없습니다. 어째서 같고 다름을 다르고 같다고 하고, 다르고 같음을 같고 다름이 아니라 하십니까?”

황제가 이에 대답하지 않으니 마침내 임금과 신하가 조용히 오랫동안 말없이 있었다. 이에 조칙을 내려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고요히 있는가? ()를 흩뜨려 무()로 돌리고자 하는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청변(淸辯)을 그치도록 하지 말라.”

다시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옛 사람은 말을 할 때는 두려워하고 말을 꺼내고 나서는 근심하였으니, 이로써 옛날에는 말을 하지 않는 임금이 있었고, 세간에는 공을 없애는 선비가 전해졌습니다. 이처럼 말을 그침으로써 그 아는 것을 표하려는 것이지 옳지 못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조칙이 이와 같이 내렸다.

지극한 사람은 꾀함이 없어도 일찍이 하지 아니함이 없다. 아는 이는 말하지 않아도 말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앵무새는 말을 하더라도 쓸모가 없고 봉황은 말하지 않더라도 궤범(軌範)을 이룬다. 나무는 임자가 없더라도 남아 있고 기러기는 죽더라도 울지 않는데, 그대는 지금 취하고 버리는 것으로 어떻게 자적하는가?”

다시 조칙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선비는 한마디면 사람을 알아보고 눈을 마주치면 도를 남긴다 하였다. 그러므로 그 안색을 보면 마음을 궁리하고 그 말을 들으면 그 공덕을 가린다. 짐이 그대와 더불어 말을 나눈 지 오래되었으니, 그간의 정리를 어떻게 간략케 하겠는가?

경은 짐을 위하여 진술한 바를 기록하여 세상 사람들이 짐의 뜻을 알게 하여라. 이와 같은 것이야말로 짐을 돕는 것이니 어찌 그 충성을 부끄러워하겠는가?”

임도림이 불법이 묻히자 죽기를 무릅쓰고 청을 올렸으나, 황제의 마음이 이미 기울어 그 논하는 바에 따르지 않았다. 변론을 통하여 비록 생각이 밝아졌다 하더라도 원래의 생각을 끝내 바꾸지 않았다. 장안에서 가르침을 폐지한 것을 이어받아 나중에 따로 통도관을 세웠으나 그 배우는 것은 모두 노장(老莊)인지라 허무(虛無)의 말만 늘어놓으면서 3()를 형통하게 펴고자 하였다. 이치의 세력으로 인하여 석부(釋部)를 밝힐 수 있기를 기대하며 표주한 것이다. 업성(鄴城)의 의학사문(義學沙門)으로 열 사람의 총명하고 고명한 이를 통도관에 둘 것을 청하였으니,

 

주상이 그 표주문을 읽어 보고 경 자신이 통도관에 들어가 학문을 즐기면 그 논이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을 터이니, 이로써 자신을 보충하면 큰 이로움이 있으리라고 말하며 음식을 차려 내었다. “경은 짐을 꾸려 입관(入關)하라고 말하면서, “여러 사람들은 물러가라고 하였다.

5월 초하루 장안 연수전(延壽殿)에서 회견하였는데, 그 달 24일에 황제가 운양궁(雲陽宮)으로 행차하였다가 61일에 붕어하였다.

천원(天元)이 동주(同州)에서 국조에 오르자, 913일에 장종(長宗) 백기공(伯岐公)이 주청을 올렸다. 황제가 이를 윤허하며 불법의 이치는 넓고 크며 도의 지극함은 아득하고 미묘하기에 시주를 일으키는 것이 도리에 맞으니 그 법을 연구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상주가 이어진 것은 상주한 일이 혹 어긋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상주문에서 신이 원래 일을 밝힌 것은 다만 법을 일으키고자 함입니다. 누차 정중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조속한 시행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상이 윤허하여 의조(議曹)에서 주결(奏決)하니 상하가 뜻이 합쳐져 참으로 다른 갈래가 없습니다. 하루 만에 이를 반포하여 시행하면 천하가 모두 경사스럽다고 칭송할 터인데, 신이 어찌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일렀다.

마침내 대성(大成) 원년 정월 15일에 이르자 조칙이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현풍(玄風)을 널리 세우고 3()를 존중하되 특별히 공경하라. ()의 교화는 넓디 넓어서 그 이치를 돌이켜 높일 만하다. 예전의 사문 가운데 덕행(德行)이 맑고 높은 이 일곱 분은 정무전(正武殿) 서안(西安)에서 행도(行道)하게 하라.”

226일 원()을 대상(大象)으로 고치고 다시 칙령을 내렸다.

불법은 넓고 커서 천고(千古) 이래로 모두 기리는 바인데 이를 어찌 숨기고 버려 두어 행하지 않는가? 지금 이후로 왕공(王公) 이하에서 여서(黎庶)에 이르기까지 모두 닦고 섬기도록 짐의 뜻을 알린다.”

그 날 대전에 존상(尊像)을 봉안하고 경건하게 닦게 하였다. 이 때 불교와 도교 두 대중에서 각각 한 사람의 대덕을 뽑아 법좌(法座)에 올라 묘전(妙典)을 가르치고 드날리게 하여 사람들 마음의 두려움을 없애고자 서로 미묘한 말씀을 하게 하였다. 부처님의 이치는 넘실대는 큰 바다처럼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였으나,

 

도가의 종지는 떠다니는 것이 맑다 해도 얕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예봉을 꺾자 좌중의 왕공들이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428일 조칙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불교의 이치는 깊고 그윽하여 신기(神奇)하고 넓고 큰지라, 반드시 그 화의(化儀)를 널리 열어서 그 수행(修行)을 형통하게 하라. 이를 받드는 이들은 경전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살피되, 도를 따르는 이들은 반드시 머리카락을 자를 필요는 없다. 형체를 훼손시키는 것은 대도(大道)를 어그러뜨리는 것이다. 마땅히 머리카락과 수염을 남기고 복식을 엄히 하여 높은 이치로 나아가야 한다.”

이에 사문 가운데 덕이 고결하며 학업(學業)이 넓어서 명과 실이 휘황하고 성망(聲望)이 가상한 이 120명을 선발하여 척호사(陟岵寺)에 두고 나라를 위해 도를 행하게 하였다. 그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4()가 부족하지 않도록 조치하면서 민간에서 참선하고 경전을 외우는 것도 한결같이 장애가 없게 하였다. 오직 경사(京師)와 낙양(洛陽)에 각각 한 곳의 사찰만을 두고 여타의 주와 군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주나라 대상(大象) 원년(579) 528일 임도림 법사가 동주(同州) 위도(衛道) 호택(虎宅)에서 그와 같은 일을 기술하여 주상에게 올리자 내사(內史) 패공(沛公) 우문택(宇文澤)이 친히 열람하고, 소내사(小內史) 임경공(臨涇公) 우문홍(宇文弘)이 열독하며, 장례(掌禮) 상사(上士) 탁발행(託拔行)이 이를 검토하고, 도상사(都上士) 질구신(叱寇臣)이 다시 심사하였다.

 

13) 주천원립대위원숭상사(周天元立對衛元嵩上事) 왕명광(王明廣)

전 사문 왕명광(王明廣)8) 대상(大象) 원년 227일에 위원숭(衛元崇)이 상소를 올려 불법을 파하라 한 것에 대해 답서를 올립니다.

업성(鄴城) ()나라 무제(武帝)가 만든 백마사(白馬寺) 불도징(佛圖澄)의 법손(法孫) 제자 왕명광은 두렵고 황송할지나 죽기를 각오하고 글을 올립니다.

왕명광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익주(益州) 야안사(野安寺)의 거짓 도인 위원숭이 변재가 우뚝하여 하늘도 가리는지라, 바른 것을 억누르고 그릇된 것을 꾸며 내어 불도(佛圖)를 폐하고 승보(僧寶)와 법보(法寶)

 

파하라고 주청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그릇된 말로 주상을 현혹하였으나 선제(先帝)가 이를 반박하여 밝히니, 대국(大國)이 이를 믿어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넓은 천하에 그 사사로운 논에 대해 억조창생(億兆蒼生) 모두 이것을 괴이하게 여겼으니, 참으로 그릇되기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학문이 넓어 유치하지 않고 재주가 민첩하나 생지(生知)를 사절하였기에 일찍이 그 하나의 지언(志言)을 열람하고 여러 갈래의 논을 읽고, 백씨(百氏)를 찾아보며 6()을 다시 세밀하게 보아 위원숭의 말을 징험해 보니 완전히 들어맞지 않습니다. 애석하게도 불법이 전래된 지 오래인데, 오늘날 비뚤어진 소견에 그 몸이 찢기는 것이 슬픕니다.

아첨으로 그 몸이나 구차하게 면하려는 것은 나라의 도적입니다. 바로 말하여 중형(重刑)의 주살(誅殺)을 피하지 않는 일은 나라의 복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죽기를 각오하고 진실됨을 다하였습니다. 위원숭의 6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라건대 천원(天元) 황제는 4()을 열고 4()에 통하였기에 잠시나마 천위(天威)를 드러내고 조금이라도 성려를 돌려주십시오. 은혜와 벌()의 조목은 엎드려 형벌과 법을 기다리겠습니다. 삼가 올립니다.”

신 왕명광이 삼가 대답하겠습니다.

시경에서는 응보 없는 덕은 없고 대꾸 없는 말은 없다고 일렀으니, 비록 용렬하여 어리석더라도 여러 선배 달사(達士)들의 말을 들어 보면 지극한 도는 심려를 끊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대덕(大德)은 하는 말마다 명성이 따르며, 군자는 경박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독실하게 논하시어 미혹됨을 없애고 집착을 깨뜨려 군명(群冥)에게 도를 열어 주셨기에 천인(天人)들이 스승으로 공경한 유래가 아주 깊습니다. 어진 말씀으로 만물을 교화하여 범부와 성인을 그 어짊으로 돌이켰는데, 감로(甘露)와 난지(蘭芝)라 하더라도 그 덕을 보였던 이가 과연 누구겠습니까?

설사 요 임금을 도가 지극하다고 일러도 평양(平陽)에서 금인(金人)을 꿈꾸지 못했습니다. 순 임금을 도모함이 없다고 일러도 일찍이 포판(蒲坂)에서 서광(瑞光)을 여의었습니다. 슬프게도 헛되이 살다가 쉽게 죽으면서도 정법을 듣기 어려우며, 순일하고 뛰어난 풍화는 자못 거스르고, 꾸며 내어 아첨하는 말은 쓰기 힘듭니다. 만약 제나라와 양나라가 불법을 부흥시켜 국조가 융성하지 못했다 하면, ()ㆍ우()

 

스님들에게 어떤 업을 지었기에 황종(皇宗)의 후사가 끊어지고 백성들이 굶주려 얼굴빛이 누렇게 된 것입니까?

양사(梁史)에서 천지를 뒤덮는 홍수가 요 임금 말년에 일어난 것을 누가 듣지 못했습니까? 도를 온전히 하는 것이 어째서 당ㆍ우의 방토(邦土)이어야만 합니까? 백성이 붕괴된 것이 어찌 제나라와 양나라에 국한됩니까?

의로운 행실이 나라를 풍요롭게 하고, 보전(寶殿)을 일으키되 수고로워하지 않았고, 예절이 폐지되어 햇수가 다하고, 흙마당에 머물면서 한가롭게 지냈습니다. 그러므로 부의(傅毅)가 세상 사람들이 신농씨(神農氏)가 몸소 밭을 갈고 요순씨(堯舜氏)가 초가집에 산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고 말한 것도 대체로 쇠퇴하던 시절의 말이었지 선왕의 도()는 아니라 하겠습니다. 제나라와 양나라는 불탑과 사찰에 의해서 복덕의 인()을 열었는데 어찌하여 그 이어지는 응보의 가피(加被)를 책망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증자(曾子)사람이 선을 좋아하면 복이 다다르지 않았더라도 화근을 멀리 없앤다. 사람이 악을 행하면 화가 미처 이르지 않았더라도 복을 멀리 내친다고 말했습니다. 포박자(抱朴子)어질다고 반드시 장수하는 것도 아니고 어리석다고 반드시 일찍 죽지 않는다. 착하다고 복을 가까이하지도 않고 악하다고 화를 만나지도 않는다고 일렀습니다. 어째서 가까운 징험을 책망하고 멀리 있는 커다란 징조를 버리려는 것입니까?

고금(古今)은 변화하여 옮겨지고 문질(文質)은 교대로 바뀌는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세속을 구제하는 이치는 여전히 시절에 적합함을 귀히 여기는데, 슬프게도 당ㆍ우의 뛰어난 풍화는 그 옳은 것을 말하자면 홀로 옳지 못하고, 제나라와 양나라의 말법(末法)도 그 그른 것을 논하자면 홀로 그르지 못합니다.”

신 왕명광이 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시경에서 덕행이 위대한 사람은 온 나라가 그를 따른다고 이르는데, 자연의 조화가 어찌 인간사에 관여하겠습니까? 여섯 곳의 천상이 권청(權請)하고 만국이 귀의하였는데, 7()8()의 법당(法堂)을 무엇이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천 명의 스님들이 머무는 사찰이라 하더라도 대현(大賢)이 없다면 누가 공경할 것이고, 대성(大聖)이 없다면 누가 찾아오겠습니까? 열반경에서는 다른 이의 재물을 빼앗지 않고 늘 일체의 중생에게 보시하며 사원과 승방(僧房)을 만들면 부동국(不動國)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셨으니, 여러 경전이 이미 매사에 그 연유가 있음을 드러내었는데 부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어떻게 무고할 수 있습니까? 절을 평연(平延)이라 이름하는 것도 위원숭이 망령되이 논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세우신 가람을 어떻게 비뚤어진 소견으로 이름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은 헤아림이 그 분수에 넘치고 주고 빼앗는 것이 의식에 어긋나는 것이니,

 

이 같은 행실이 어떻게 포고(布鼓)를 달리하여 뇌문(雷門)을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천정(天庭)에 대해서 개미굴을 자랑하며 지아비와 지어미를 권하여 성인의 대중을 삼으라 하면서 마음대로 혼인하고 음행을 짓게 하고 나라의 주인을 여래(如來)라고 이르는 것은, 그 숭배를 바라고자 아첨하는 말이니, 참으로 청백하게 간언하는 선비는 이와는 다른 것입니다. 어찌 위릉(魏陵)이 총애를 받을 것을 구하여 초나라 왕에게 자식의 처를 빼앗도록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태제(太宰) ()가 가까운 이익만을 구하여 오나라 군주에게 창창(蒼蒼)의 꿈을 해몽하였으니, 마음속으로는 따르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말을 아름답게 하였습니다. 그가 삿된 말을 믿었기에 이로써 나라가 멸망했습니다.

위원숭은 죄를 지어 승관(僧官)에서 쫓겨나자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는데, 아마도 성지(聖旨)를 훼방하는 일도 여기에서 생겨났다고 봅니다. 그 둥지를 메우고 절을 깨뜨리려는 이치를 펴지 못하자, 존귀하기가 부처님과 같다고 일러 황제의 마음을 선동하였습니다. 참으로 한 사람의 마음을 왜곡되게 취하고자 3()의 복전(福田)을 매몰시켰는데, 대체로 백 번을 듣더라도 누가 이를 개탄하지 않겠습니까?

불법의 전래는 영구하여 끝이 없으므로 하늘이 있고 땅에 있는 것은 그 가는 곳마다 존중하였는데, 전대의 황제와 후대의 왕으로 존중하지 않은 이가어디 있습니까? 어찌하여 유독 이 나라에서만 이것을 천하게 여깁니까?

예전에 변화(卞和)가 초나라에서 곤란을 겪었고 공자가 진()나라에서 액운을 겪었듯이 지금으로 옛 일을 비하자면 아마도 개탄하는 소리만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신 왕명광이 다시 대답합니다.

부처님께서 자부(慈父)가 되시어 천상과 인간을 조어(調御)하셨으니, 처음이나 중간이나 나중이나 어질고 이롭게 하여 일체를 편안히 하셨습니다. 사라쌍수(沙羅雙樹) 사이에서 그 신체를 숨기시자 땅이 시방에 진동하였고, 머리카락을 사천(四天)에 내어 주고 그 몸을 여덟 나라로 갈라 주셨습니다. 열반경에서는 불상이나 불탑을 이룩하는 공덕이 마치 대무지(大拇指)와 같아서 늘 환희심을 내면 부동국(不動國)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비를 봉양하고 스승을 섬기는 일은 고전(古典)에도 이미 언급되어 있는 것입니다. 속수(束脩)로 공자의 가르침을 일으켰으니, 어찌 이것을 없다고 논하겠습니까? 위원숭이 비난을 보태어 법당에 들어가더라도 절하지 않는데, 어찌 잘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전에 당요(唐堯)가 하늘의 다스림을 본받았는데 하늘에 물이 넘치는 재난이 있었고 주나라 때는 종묘의 예를 갖추었으나, ()에 비를 내리게 하는 힘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불탑에 복이 이르지 않는다고 이르면서

 

그 이루는 바를 모두 허물로 돌린다면, 이 또한 하늘이나 종묘조차도 헛되이 구하는 것이 될 것이니, 모두 중지시키고 내쳐야만 합니다. 만약 이치로써 명기(冥氣)의 운수를 미루어 본다면, 하늘과 묘당의 은혜 또한 그 명운이 다할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어찌 불당과 불탑이 구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비공(費公)이 땅에 엎드리고 노나라의 아들이 하늘로 돌아간 것은 어찌할 수 없듯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사람이 어찌 이미 그 명이 다한 것을 이어 받아야 합니까?

명으로 정해지지 않으면 복도 밀쳐 낼 수가 있으니 그 이치를 달리 하여 따져야만 합니다. 반드시 자비로운 가피가 있으면 길상이 두루하매 병든 이가 이에 귀의하여 쾌차함을 얻으며, 기원정사에서 평복(平服)으로 병을 앓는 이가 고통을 구제받고 재난을 물리친 일이 하나둘이 아닐 정도로 많았습니다. 다시 여타의 난을 보호받은 것은 더 이상 자세히 논하지 않겠습니다. 이처럼 도가 홀로 하지 않고 두루하여 덕화(德化)를 이루지 않는 곳 없이 천 갈래를 하나로 이루는 것이 어찌 내심(內心)에 그치겠습니까?

마치 수가(輸伽:아수가왕)가 보탑(寶塔)을 건립하기에 이르러 백귀(百鬼)가 이를 도와 하루 만에 공을 이루었고, 작리(雀離)가 부도를 일으키시자9) 4()이 밤중에 그 힘을 도운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큽니다. 천지를 감득시키고 귀신을 움직였는데 바깥으로 닦는 것에 복이 없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처럼 만약 가난한 이에게 과()를 내려 그 행하는 바를 억누르면 백성이 혹 괴로움을 한탄하기도 하므로, 이를 의롭게 포용하며 베풀어 피곤함을 잊게 하여야 합니다. 만약 반드시 불탑과 사찰에 연유해서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곤궁해졌다면, 지금 이미 스님들이 폐하였으니, 가난한 이는 마땅히 졸부라도 되어야 하는데 성시(城市)의 어려움이 예년보다 더욱 심해졌으니 이런 것도 부처님에 연유했다 할 수 있습니까?

귀신은 공경하지 않는다 하여 이것을 일러 아첨이라 한다면 사직(社稷)이나 나무에 절하고 구하는 것에는 그 미혹됨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만약 사직이나 나무가 귀신이 의지하는 곳이라 하여 이것을 받드는 것이 허물이 아니라 한다면, 이 또한 불전과 불탑은 부처님을 위해 주지(住持)하고 경영하는 곳인지라 반드시 여법(如法)하다고 해야 합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허공에 계시고 진흙이나 나무에 처하지 않는다고 둘러댄다면, 귀신 또한 명적(冥寂)한 것인데 어찌 나무 가운데 있을 리 있겠습니까?

이치에 순응하여 만물을 제도하는 것은 성스러운 가르침에 더욱더 관련된 것이기에 그 이치가 풍요롭고 이로운 것이 아니면 경전의 말씀에 허용되지 않습니다. 대체로 천궁(天宮)이나 불탑을 철거하여 교병(橋屛)의 담이나 두르고, 불상을 수놓고 경을 싸는 비단을

 

피고름의 옷으로[膿血之服] 충당하니, 천하가 나날이 굶주리게 되고 백성이 해마다 초췌해집니다. 귀신이나 작은 성인도 일찍이 속이질 못하는데 제불(諸佛)의 대령(大靈)이 어떻게 그 등지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시경에서는 넓고 넓은 하늘이여 그 덕을 고치지 않는다면 기근이 내려진다네라고 말한 것도 이것을 이른 것입니다. 지난 조대(朝代)의 공신은 지금의 건장(健將)으로, 창과 칼로 토벌하고 평정하고서야 먼 곳까지 숨을 돌이키게 됩니다. 그러나 태어나면 영화로운 공훈이나 주문(朱門)과 자실(紫室)로만 치닫다가 죽게 되면 백성을 시켜 묘를 세우고 능을 짓게 하면서 죽은 것을 제사지내느라 산목숨을 죽이고, 헛된 것을 기려 실다운 것을 손상케 하니 실로 수고로움만 있지 이로움이 없습니다. 그 처음부터 말할 바가 아닌데 하물며 석가여래(釋迦如來)의 도가 3천 세계를 가피하여 백억의 중생을 교화하심이 그 이전을 보아도 눈에 띄지 않는데 그 이후를 살핀다 하여도 도대체 누가 더 훌륭하겠습니까?

외도의 스승을 항복받고 천마(天魔)의 무리를 잘 굴복시키되 1촌의 병장기도 쓰지 않았는데 1촌의 칼날을 어찌 수고롭게 하였겠습니까? 오색 광채를 두루 비추어 꺼지지 않으매 두려움이 없어지고, 4무애변(無礙辯)을 퍼뜨리매 안락함을 입었기에 가히 장수(將帥)이면서 원수(元帥)로서 그 이름이 높고 위대한지라 이에 절을 짓고 묘를 세우는 것이 어찌 이치에 어긋난다 하겠습니까?

토룡(土龍)이 비를 내리지 못하는데도 늘 이를 따라 복을 구하는 판인데, 진흙 부처가 설사 말을 못하더라도 이를 존중하는 이에게 어찌 징험이 없겠습니까?

예전에 마경(馬卿)이 곽거병(藺去病)을 사모하였고 공부자(孔父子)가 주공을 꿈꿨으니, 이로써 옛 것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오랜 덕을 존중하며 따르는데, 하물며 삼세의 제불(諸佛)이 가르치는 이치는 모두 같아서 미륵이 처음 태어나더라도 석가의 유법(遺法)을 순식간에 버릴 수는 없습니다.”

신 왕광명이 또 대답합니다.

수행도 없으면서 넉넉하기만 한 스님들에게 과()를 부여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하겠으나, 덕망 있는 가난한 스님들에게서 절을 빼앗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심지어 관채(管蔡)10)가 신하답지 않았어도 희종(姬宗)11)이 모두 살육한 적이 없었는데, 복상(卜商)12)이 비루하고 인색하였더라도 어찌 공자의 무리가 순식간에 내치겠습니까?

말을 기르는 목동이 먼저 어지럽게 섞인 말을 쫓아내더라도 소를 키우는 어린 동자는 오히려 무리를 지키는 소를 총애할 것입니다. 장자(莊子)도는 있지 않는 곳이 없으나 이에 계합하는 이라야 형통한다고 말했으니, 다만 이상하게 여겨질 뿐이지 지극한 도에 합치되지 못하면

 

오직 이러할 뿐입니다. 석가ㆍ주공ㆍ공자ㆍ요 임금ㆍ순 임금ㆍ노자ㆍ장자가 내세우는 것이 비록 다르더라도 귀착점은 한 가지인데, 어찌 결승(結繩)의 치세만 홀로 바른 다스림이라 이름하고 머리 깎은 스님들만 유독 권도(權道)라 이름짓습니까? 이것은 국한되어 편협된 마음이 지나친 것으로 만물을 고르게 하는 깨우침을 어찌 의탁한다 하겠습니까?

노자도 상품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중품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하는 듯 마는 듯하고, 하품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비웃으며 내친다하였으니, 위원숭이 이미 불법(佛法)의 하품 선비인데, 그 형체에 법복을 훔쳐다 걸쳤어도 가시나무와 보배를 가리지 못하고 그릇되게 보배라 헤아렸으니, 더러운 말이 그 거짓된 입에서 나오되 불손하게 붓끝만을 귀히 여겼습니다. 이처럼 관서(關西)의 땅에 인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 타당하지 못한 상서문을 누가 긍정하여 미덥다 하겠습니까?

왕명광 제가 산으로 달아나고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과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의 백성들을 보면서, 예전에는 어진 것을 기리어 찾아왔지만 지금은 법이 파괴되어 흩어져 유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익만을 좋아하여 사민(士民)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흩어져 유망하는 허물이 있다고 말할 만합니다. 일찍이 외국의 재화(財貨)라고 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외국 스승들의 훈계만 유독 섬기지 않는 것을 보게 되니, 천하가 괴이쩍게 여기는 일이 여기에서 비롯됐습니다.

왕명광이 참다움을 생각하고 충신(忠臣)을 마음으로 삼고 보니 그 이치가 말할 만하지라 우러러 주청하는 것입니다. 단지 선대 황제가 그 깨우침을 달리하여 위원숭의 말을 썼으나 이미 지나간 것을 되돌리기 어렵기에 이에 따라 간언하지 않은 지 3년이 지났습니다. 세 번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니 한 가지라도 따를 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바른 격식을 찾아 고쳐 주십시오.”

신 왕명광이 또 대답합니다.

생각해 보면 산은 난()과 쑥을 함께 기르고 바다는 용과 뱀을 같이 키우는데, 아름답고 추악함이 그 부류가 섞이고 어질고 어리석음이 어지럽게 자라잡으니, 이에 만약 용과 뱀을 함께 예뻐하면 옳고 그름에 분별이 없는 것이고, 만약 난과 쑥을 함께 뜯으면 그 득과 실을 누가 밝히겠습니까?

만약 유덕한 이를 남겨 두고 불초한 이를 솎아 낸다면, 첫 번째는 가풍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군품(群品)을 미혹하게 하지 않는 것이고, 세 번째는 하늘에서 선()을 꾸짖는

 

비웃음을 없애는 것이고, 네 번째는 백성의 덕을 두텁게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대주(大周)가 천 년[千載]의 대기(大期)에 응하고 만기(萬基)의 자리에 임하자면 예()를 잇고 악()을 밝혀서 땅을 합치고 하늘을 평탄히 하되, 무공(武功)은 열렬하고 문채(文彩)는 휘황하여 참다움으로 세속을 밝게 보살펴야 합니다. 어진 스님들은 나라의 기틀인지라 요민(姚民)의 병()으로 폐하지 않으면 성스러운 대중이 돌아올 터이니 어찌 홀로 구자(龜玆)의 진법(陣法)만을 따르겠습니까?

혹 자비로써 바깥을 접하고 총명과 변재(辯才)로써 안을 밝히고, 대승(大乘)을 개발하여 여서(黎庶)를 실어 나르는 이도 있고, 또는 선림(禪林)에서 날개를 거두거나 정수(定水)에는 비늘을 담그는 데 부낭(浮囊)을 굳게 지켜 인욕의 갑옷을 견지하는 이도 있고, 혹은 형체를 고치고 옷을 바꿔서 보통 사람과 달리 하였으나 음탕하기가 끝이 없는 이가 있다면 어리석은 속인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위원숭이 솎아 낼 것을 청한 것도 일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천지는 그 공이 지극하나 시절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고 일월이 차고 기우는 데에는 짧고 긴 것이 있습니다. 지금 노장(老莊)의 학()이 인간세에 만나 보기 어렵다고 하여 혹 나라에서 이것을 합쳐 함께 행한다면, 그 법식(法式)을 어긴 자도 죄를 주어야 하는데 무엇으로 이를 가려낼 수 있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유교를 본받아 행하면서도 자신을 돌이켜 예로 돌린다 하되 만나는 일마다 위배됨이 많음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예법(禮法)에서 안주가 떨어지면 더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고기를 밀쳐 두고 나물을 찾는 자를 보지 못했으며, 술잔을 가득 채워 마시지 않는다고 했는데 술잔이 찼는데도 권하지 않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예의상 석 잔 이상 못 마신다 했는데 술을 실컷 마시고 취하지 않는 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천자는 합위(合圍)하지 않고 제후는 엄군(掩群)하지 않으며, 서민은 예란(麑卵)하지 않는다는데,13) 내가 어려서 현문에 깃들었으나 엄군하고 합위하는 일이 그치지 못했으며, 눈을 들어 보면 모두 예란(麑卵)하는 백성뿐이었습니다. 저들이 이미 예와 어긋났는데도 어째서 그 유복(儒服)을 벗기지 않습니까?

교화(敎化)는 도로 말미암고 넉넉한 정치는 예로써 이루어지니, 영예와 욕됨으로 군자를 대하고 형벌로써 소인을 거느리는 법입니다. 들판의 밭을 갈고 김을 매는 법은 볍씨와 가라지를 가려내야만 하고, 뽕잎을 따자면 나무를 꺾어야만 한다고 어찌 그 뿌리까지 자를 수 있겠습니까?”

신 왕명광이 다시 대답합니다.

충신과 효자의 이치에는 여러 갈래가 있는데 어째서 밭을 갈아 세금을 내는 것만

 

으뜸으로 삼습니까?

예기에서는 작은 효는 힘을 쓰고, 중간 효는 수고로움을 쓰고, 큰 효는 부족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사문이 효로 삼는 것은 위로는 모든 부처님께 순응하고, 가운데는 4()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합식(合識)을 위하는 것입니다. 이 셋이 부족하지 않는 것이 큰 효의 하나가 됩니다. 이러한 까닭에 시경에서는 화락한 군자는 복 구하기를 쉬지 않는다고 일렀는데, 이처럼 6경을 쓰지 않고 도리어 떠도는 말만 믿어 정도(正導)가 이지러지는 것은 누구나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힘을 다해 부모를 섬기는 것을 겨우 작은 효라 이르는데, 세금을 내어 위에 헌상하는 것은 용민(庸民)을 늘리는 것이나, 스님들께 시주하고 불상을 공경한 것은 모두 이치에 합당합니다.

위원숭이 창과 방패를 앞세우고 거역하면서 스스로를 막아 상언하여 사람들을 멸시하고, 돌을 공경한다고 어리석은 스님들이라 이름하고, 불상을 공경한다고 어리석은 속인으로 치부하였으니, 처첩과 간음하며 자식 키우는 것은 축생조차도 하는 일인데 이것만을 가슴 속에 품고 그 생각에만 골몰하니 이 얼마나 고루합니까?

효경에서는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입신행도(立身行道)하여 후세에 이름을 떨쳐서 부모를 드러내는 것은 효의 끝이다라고 일렀습니다. 만약 사문이 출가하는 것을 일러 양친을 등진다고 비평하게 되면 증삼(曾參)이 공구를 섬긴 것도 바로 불효한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도로써 서로 발명하고 거룩한 전범(典範)을 듣고 새기며 속수(束脩)로 예의에 들어맞게 하려는데 스님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 하겠습니까?

노자도 ‘4()이 행해지지 않으면 대상(大象)이 창달되지 않고, 5()이 들리지 않으면 대성(大聲)이 이르지 못한다고 일렀습니다. 이처럼 2()을 영구히 멸망시키고자 하면 대승이 창달되지 않을 것이니, 위원숭이 그 뜻을 밝혔다면 출가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뜻을 만약 밝히지 못했다면 그가 후회하는 것이 무엇이 옳다 하겠습니까?

예전에 정공(丁公)이 한()나라에 들어가 지점(至點)의 잔교(殘橋)를 먼저 노획하였고 마모(馬母)가 강()에 반하자 엎질러진 물로 떠나감을 자초했는데,14) 이것으로 나라를 망친 장수들이 충신을 임용하여 쓰지 않고 지아비를 떠난[逭夫] 아낙이 끝내 정숙하다는 명예마저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원숭은 원래 석가에게 목숨 바쳐 귀의하였기에 그 시작은 착하다고 이를 수 있으나 도법(道法)을 싫증내어

 

세속으로 돌아갔으니, 그 끝은 옳다고 하지 못합니다. 저와 같은 첩실과 난신(亂臣)을 장수라고 헤아리는 것과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천하에는 악이 오래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몸을 오래 보존하겠습니까? 참다움을 등지고 세속으로 향하는 것이 반란을 도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스님들을 가려내고 사찰을 세우도록 청하였습니다만, 왕명광 제가 듣자오니, 금과 옥은 서로 다른 보배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같이 보배로 여깁니다. 현도(玄道)와 유가(儒家)는 이치가 다르지만 자취를 따라 멀고 가깝거나 함께 따릅니다. 어찌 공자가 자기 나라에 태어났다고 스승으로 모시려 하고, 부처님께서 먼 나라에 처하셨다고 버리려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그 일이 뛰어나지 못하면 저절로 끊어질 터인데 어리석은 지혜만 늘어놓으니, 그 옳고 그른 이치를 스스로 한결같이 하지도 못합니다. 예전에 공구는 서묘(逝墓)15)는 천 년의 규모(規模)가 된다고 말하였고, 석가는 왕사(往寺) 가 만대의 영탑(靈塔)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형태를 보고서 생각을 이겨 내어 불상을 면대하고 마음으로 귀의하는 것과 스승을 존중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 그 이치가 한가지입니다. 정란(丁蘭)이 속대(束帶)하여 나무로 만든 어머니의 형상을 섬겼고,16) 무진(無盡)은 한량없는 영락(纓珞)을 풀어서 다보불탑(多寶佛塔)에 봉헌하였습니다.17) 아득한 옛날을 돌이켜 보고 청아한 속진(俗塵)을 생각해 보면, 이미 씨앗을 심어 숲을 이루었으니 이치로도 넘지 않습니다.

예경을 살펴보면 천자(天子)7()와 제후(諸侯)5()와 대부ㆍ경ㆍ사대부에는 각각 계급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늘을 신()이라 부르며 원구(圓丘)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땅을 기()라고 불러 방택(方澤)에서 제사지내며, 사람을 귀()라고 불러 종묘(宗廟)에서 제사지내는 것입니다. 용과 귀신은 비를 내리는 수고로움이 있고 소를 기르면 쟁기를 끄는 효험이 있다고, 혹 그 모습을 부락마다 그리고, 그 상()을 성문(城門)마다 새기는데, 어찌 천상천하(天上天下) 삼계(三界)의 대사(大師)가 이곳과 저곳, 4()의 자부(慈父)로서, 위덕(威德)은 백억이 존중하는 바이고 풍화는 만령(萬靈)의 모범이 되시는 것인가?

그러므로 어진 이는 이에 회향하고 군류(群流)는 명학(溟壑)18)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고 커다란 빛이 섭수하는 것은 마치 양요(兩曜)가 뭇 별을 거느리는 것과 같습니다. 월지(月支)에서 그림자를 남기시고 나갈(那竭)에서 그 몸을 재로 하였으니, 사리가 사방으로 전파되어 기원(祇洹)에서 이룩되었습니다. 현자나 성인이나 이에 빙자하여 복을 크게 하고, 높은 이나 귀한 이도 이것에 의지하여 편안함을 얻게 되었는데,

 

갑자기 칠층구가(七層九架)의 불탑과 감실(龕室)을 헐어 내어 서까래를 자르더라도, 4()8()에 도를 잃은 적이 없어서 영을 내리지 않아도 다스려지고, 가르침의 형체가 시절에 따라 이롭기도 하고 감하기도 합니다.

지극한 이치는 말하지 않고도 얻어진다 하나, 경전과 불상을 시행해야만 형통한 이나 통달한 선비가 그 있는 곳마다 쓰임새를 드러내어 참다움을 보살피고 세속을 밝혀서 성스러운 감득이 시절에 따르게 될 것입니다. 만약 태공(太公)을 기다려 경상(卿相)을 삼는다면 천 년을 기다려도 태공이 없을 것이고, 구마라집으로 사훈(師訓)을 삼고자 한다면 만대에도 구마라집이 없을 것입니다. 법은 스스로 현달되는 것이 아니니 그 넓히는 것은 반드시 사람에 기인하는데, 어떻게 대주(大周)에 법륜(法輪)을 영원히 소멸시킬 수 있습니까?

성상께서 6()로써 만물을 다스리되 9()을 스스로 밝혀서 비뚤어진 이치는 시행하지 마시고 바른 말은 반드시 써야 합니다.

예전에 진시황이 공구(孔丘)의 묘를 파헤쳤다가 재앙이 3일 동안 연이었고, ()나라 태무제(太武帝)가 승가람(僧伽藍)을 없앴다가 재난이 7년 동안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최호(崔皓)의 망령된 말을 알 수 있으니 위원숭의 말을 쓰기란 어렵습니다. 어진 이는 다른 사람의 것을 덜어다 자신을 이롭게 하지 않고 슬기로운 이는 화를 즐기면서까지 이름을 좇지 않습니다.

위원숭은 하늘을 망하게 하여 가피를 없앴으니 그 사람의 몸이 한 번 그치게 되면 어떠한 곳에 태어나야 하겠습니까?

왕명광 제가 식견이 비록 지남(指南)을 사양하고 그 언사가 신의에 어긋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만, 이처럼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면 온갖 선()을 해칠까 염려스럽습니다.

대체로 남의 단점을 용서하는 것이 그 행을 두터이 하는 것이고, 만물의 덕을 마음속에 두는 것이 그 지혜로운 자의 인()을 베푸는 것입니다. 지금 스님들이 아름답고 추악함이 설령 서로 절반이라 하더라도 어찌 모두 쫓아내어 남기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하늘조차 그 바람을 잃고 솔토(率土)마다 한탄하며 어리석은 이조차 이같이 묻어 버려 빛을 없앴으니, 주나라의 덕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탓합니다. 유가의 선비를 공경하여 그 존중함을 드러내면서 석가의 자식만 천대하여 그 뜻을 시원케 하였으니, ()을 가벼이 보고 돌을 귀히 여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까? 왕도(王道)의 위대함을 따져 보더라도, 이 어찌 이치적으로 옳다고 하겠습니까?

흙은 물을 머금어야 평평해지고, 나무는 끈으로 묶어야 곧아집니다. 명군(明君)은 간언을 받아들여 기피하지 않고, 통달한 선비는 배우기를 좋아하여 시비하지 않고, 슬기로운 이는 가벼이 진노하지 않습니다.

하우(下愚)의 소견으로 말하니, 부디 어짊을 가벼이 끊지 마시고 3보의

 

복전을 다시 일으키면, 하늘은 거두지 않은 바가 없고 땅은 두루 싣고 산은 보듬어 주고 바다는 받아들일 터인데 어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열 가구마다 반드시 충신이 있다 하는데, 한 나라 안에 도리어 어진 스님들이 없습니다.

삼가 천원(天元) 황제께서 덕망 있는 이를 천거하고 어진 이를 받아들이며 빼어난 이를 부르고 우뚝한 이를 뽑았습니다. 번거로움을 생략하여 간략하게 하고자 주()마다 하나의 사찰만을 두고, 산림이나 석굴은 그 처소에 따라 거주를 허락하면서 사리를 지니고 있는 이는 다시 탑을 이룩하도록 하여 그 절을 주나라의 중흥사(中興寺)라 이름하셨습니다[절은 지혜를 즐기는 선비들을 고양하여 그 뜻을 펴게 하는 곳이다]. 조용한 도반들이 말을 쉬고 형통(形通)을 구하며 내외로 두루 이익을 얻어 공사 간에 손실이 없습니다. 이것은 도와 속의 다행(多幸)이고 바로 현도(玄道)와 유가(儒家)가 그 뜻을 쾌활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나라의 흥륭(興隆)한 황제의 대업(大業)이 백왕(百王)보다 중해져서 대상(大象)의 군주가 4해에 빛날지니, 하늘이 높더라도 이를 멀리서나마 듣게 될 것입니다.

가벼운 거동과 비루한 말에 그만 기()가 다하여도 혼()마저 아득하나, 이에 죽기를 각오하고 청하노니, 우레와 같은 위엄을 내리시어 그 풍우(風雨)의 덕을 펴 주십시오. 삼가 올립니다.”

227일에 그 간언이 받아들여져 한장란(韓長鸞)이 상소문을 접수하고, 내사(內史) 상대부(上大夫) 귀창공(歸昌公) 우문택(宇文澤)과 내사 대부(大夫) 탁발행공(拓跋行恭) 등이 왕명광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불도징은 3백여 년 전 사람인데, ()을 보아 하니, 나이가 불과 30여 세에 불과한데도 멀리 상성(上聖)의 제자라고 칭하니 이 어찌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왕명광이 대답하였다.

혹 주나라를 이어가는 일은 백 세가 지나더라도 알 수 있는데, 선사(先師)께서 비록 3백여 년 전 사람이라 하나 그 시대를 논하자면 불과 10세에 불과한데 어찌 미혹이라 하겠습니까?”

이에 우문택이 물었다.

위원숭이 비뚤어진 견해를 상소하여 가람으로 백성을 해롭게 하고 나라를 손실케 하였는데, 경이 지금 재건립을 권청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견이 있어서입니까?”

왕명광이 대답하였다.

걸 임금과 주 임금이 나라를 잃자 은나라의 선비가 주나라로 돌아갔으니, 이처럼 나라를 망치고 집안을 깨뜨린 것이 불법에 연유하지 않는 것은 내외의 전적이나 도속의 글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이를 내치지 않았으니, 이러한 까닭에 재건립을 청하는 것입니다.”

 

우문택이 다시 물었다.

제나라 임금 고위(高偉)가 불법을 이룩하다가 나라가 깨지고 집안이 망하여 지금껏 꺾이지 않았습니까?”

왕명광이 대답하였다.

제나라 임금이 나라를 잃은 것은 두 가지 이치가 있어서이지 불법에 연유한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는 역수(曆數)에 다함이 있어서이니, 개벽 이래로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는 아끼고 벌주는 것에 중도(中道)를 잃었기에 군자가 그 하류(下流)에 머무는 것을 싫어하였으니, 이로써 주나라로 거두어진 것으로 불법에 연유한 바가 아닙니다.”

우문택이 다시 물었다.

경전이란 호나라 책으로 허망한 것인데 어찌하여 이것을 인용하여 구실로 삼습니까?”

()이 불경이 허망하다고 말한다면 나 역시 공구의 가르침이 참되지 않다고 말하겠습니다.”

우문택이 다시 물었다.

경은 무엇에 근거하여 공씨의 가르침이 참되지 않다는 말을 징험하겠습니까?”

장주(莊周)는 공자의 행적이 옛적의 일과 같이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이미 추구(芻狗)19)를 진술하였는데, 백대를 지나도 그 유풍(遺風)을 노래하고 천 년이 되어 이를 읊조리며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諸子)를 두루 찾아보더라도 한 사람도 부처님을 허망하다고 이른 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우문택이 다시 물었다.

정란(丁蘭)의 목모(木母)에 대해서는 경의 인용이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 사람이 목모를 쓰러뜨리고 밟자 목모가 이 때문에 피를 흘렸는데, 고조(高祖)가 절을 파괴한 이래로 진흙과 나무 및 돌로 빚은 불상에서 어찌 피를 흘린 적이 있었습니까?”

왕명광이 대답하였다.

예전에 하()나라가 아홉 개의 솥을 세워서 9()를 진정시켰습니다. 한 곳의 주가 조용하지 않으면 한 개의 솥이 끓어 넘치고, 9주가 조용하지 않으면 아홉 개의 솥이 모두 끓어 넘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두 나라가 전쟁을 하여 사방이 소란스러워도 끓어 넘치는 솥을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대전(大殿) 앞에 옛 것에 따라 솥을 세워 두고 있는데, 유독 편중되게 진흙과 나무와 돌로 만든 불상이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이를 책망하여 내버릴 수 있겠습니까?”

31일에 칙령으로 음식을 내리고 북궁(北宮)에서 대좌(對坐)하였는데, 식사를 마치자

 

대가(大駕)를 내려 경사로 돌아왔다. 황제가 북궁의 남문(南門)을 벗어나자 상서를 올린 사람들과 더불어 얼굴을 맞대고 절을 받았는데, 절하고 나서 내사 탁발행이 이와 같이 칙지를 선포하였다.

해와 달이 비록 밝다 하여도 뭇 별로써 그 빛을 보충하는도다. 왕이 현명하여 지극히 성스럽다 하나 이 또한 신하가 있어야 그 구제를 바로잡는 법이다. 짐의 덕이 어두우매 경들이 각각 충성스런 계책을 헌상하니 참으로 가상하다. 글과 편지가 많아서 모두 찾아서 밝히지 못했으나 마땅히 넘겨보고 따로 검교(檢校)를 할 것이니, 경들은 대기하도록 하라.”

48일에 내사 상대부(上大夫) 우문택이 다음과 같이 칙지를 선포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래하여 그 거쳐 온 연대가 오래 되니, 그 지극한 이치를 논하고자 하여도 참으로 밝혀내기 어렵다. 단지 세상이 점차로 부박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으니 청정한 법이 혼탁하게 변했다. 고조(高祖) () 황제가 이러한 까닭으로 폐지하여 건립하지 않은 것이다.

짐이 지금 마음을 지극한 도에 두고 선법(善法)을 넓히려고 생각하고 있다. 바야흐로 가려 뽑아서 연마하고 정성스럽게 이러한 이치를 닦아서 지금 그 형색과 복식을 고치지 않고 덕행(德行)을 보존하고자 한다. 널리 도량을 설치하여, 공경스럽게 선법(善法)을 행하고자 하니 왕공 이하 모두 마땅히 잘 알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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