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8권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2. 변혹편 ④
6) 격상분경갱승조(擊像焚經坑僧詔) 원위 세조 태무제
황제의 휘(諱)는 도(燾)이다. 명원제(明元帝) 태상(泰常) 8년(423)에 즉위하였으나 여덟 살에 불과한 매우 어린아이였다. 정치에는 의지할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오직 태보(台輔)만을 신임하였다. 이 때 사도(司徒) 최호(崔浩)가 유별나게 부처님을 믿지 않았는데, 황제가 국사(國事)를 물을 때마다 매번 품에 안고, “불법(佛法)은 허망하여 세속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황로(黃老)의 선도(仙道)만이 마음을 보존할 수 있다”고 속삭였다. 최호가 선도를 믿게 하고자 『노자도덕경』을 전수하고 그 말만 믿고 따르게 하면서 따지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윽고 도단(道壇)을 만들어 놓고 사방에서 방사(方士)를 초빙하였다.
당시에 불법이 융성하였는데 최호가 이를 시기하여 늘 결점만을 찾았다. 개오(蓋吳)가 행성(杏城)에서 반란을 일으켜 관중(關中)이 소란스럽게 되자 황제가 서쪽을 정벌하였는데, 이 때 최호가 장안까지 따라왔다. 어떤 사문이 경내에 보리를 심어 놓고 준마를 부리며 말을 길렀다. 황제가 경내로 들어가 들러보다가 말이 부리는 데로 따라 들어갔다가 승방(僧房) 내에 활과 화살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최호가 절에서 나와 상소를 하여 이를 탄핵하자 황제가 대노하여 “이는 사문이 쓰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개오와 통모(通謀)하여 사람을 해치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유사에게 명을 내려 그 사찰의 스님을 주살하고서 절 안의 재산과 주목(州牧)과 군수(郡守)나 부호들이 기증한 물건을 열거해 보니 대체로 만금 이상이었다. 이에 조칙을 내려 불상을 불지르거나 부수어 불단 밑에 놓아두도록 칙령을 내리고,
사방에 장안에서 하던 대로 하게 하였다.
태평진군(太平眞君) 5년(444), 황제가 스물아홉 살이 되어 춘추(春秋)가 방성한 데다 무공까지 능하였다. 최호가 삿된 꾀로 연이어 방사(方士)를 부추겨 미혹시켰기에 선관(仙觀)에 매일같이 행차하였으므로 석문(釋門)의 청정한 대중은 거의 말살되었다. 다시 조칙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어리석은 백성이 무식하여 헛된 것을 믿고 요망한 것에 미혹되어 사사로이 사무(師巫)를 기르고 참기(讖記)를 숨겨 둔다. 사문의 무리가 거짓된 서역의 황당함을 빙자하여 앉아서 요망한 씨앗을 이루는지라 정치적 교화를 가지런히 하여 순일(純一)한 덕(德)을 천하에 펼 수 없게 되었다.
왕공(王公) 이하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사사로이 사문을 기르는 자는 금년 2월 15일을 기한으로, 그 기한을 넘겨 사문을 내보내지 않는 이는 죽일 것이고 남아 있도록 허용하는 이는 일족을 멸할 것이다.”
이 때에 공종(恭宗)1)이 태자감국(太子監國)이 되어 평소에 불법을 공경하였기에 자주 표(表)를 올려 사문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형벌의 남용이라고 개진하면서 이는 부도와 불상의 죄가 아니니, 지금 그 도를 폐하고 모든 사찰의 문을 잠가 두어 세간에서 이를 받들지만 않게 하더라도 토목과 단청이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두세 번을 거듭하였어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에 사문 현고(玄高)가 있었으니 공문(空門)의 호걸이었다. 태자 황(晃)이 그를 스승으로 섬겨 부처님같이 존중하며 모셨다. 최호가 황제에게 총애를 얻었으나 황이 섭정하게 되면 혹시라도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황제에게 거짓으로 밀고하되, 황이 달리 도모하는 바가 있으니 만약 미리 방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또 황이 현고 스님과 내통하고 있는데, 현고는 귀물(鬼物)과 서로 통하는 데다 인심마저 널리 얻었으니,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황제가 처음에는 그 말을 따르지 않다가 나중에 태자를 유폐시켰는데, 꿈속에서 그 선조(先祖)가 태자는 무사하냐고 물어보자, 이 일을 백관(百官)에게 상의하게 되었다. 모두들 태자가 어질고 효성스러운데도 억울하게 갇혀서 욕을 당한다고 탄원하였다. 이에 황제가 황을 방면하여 정무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최호가 다시 무고하자 황제가 이를 믿고 그대로 황을 금중(禁中)에 가두어 죽게 하였고 현고 스님은 교남(郊南)에서 교수형에 처하였다.
최호가
조정에서 그 뜻을 펴자 열왕(列王)조차도 감히 무어라 말하지 못하였는데, 바로 태평진군 7년(446) 3월에 조칙을 내려 “일체를 소탕하되 모든 부도와 불상과 오랑캐 경전을 전부 부수고 태워 없애라. 사문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묻어 버리라”고 하였다. 이야말로 최호가 바라던 것이었다. 나중에 황제가 병을 얻어 고통을 받게 되자 최호도 그 3족(族)이 주살되었으니 아무리 긴 탄식을 한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같은 사적은 「석로지(釋老志)」에 자세히 나온다.
7) 대집도속폐립이교의(大集道俗廢立二敎議) 주(周)무제(武帝)
주나라 고조는 시기심이 많았으니 어찌 틈새만한 혐의도 인내하였겠는가? 대총재(大冢宰) 진국공(晋國公) 호(護)가 백규(百揆)를 헤아려보고 서정(庶政)을 맡아 다스렸는데, 황제가 이를 시기하여 혹시라도 보위를 빼앗길까 두려워한 나머지 마침내 호(護)를 궐내로 불러들여 손수 죽이고, 조정 대신 여섯 집안과 친족까지도 멸하였다. 황제가 이로써 천하에 뜻을 얻어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참위(讖緯)를 신임하여 이에 마음을 기울였다. 예로부터 전해져 오기를 “검은 자[黑者]가 득세하리라”고 하여 검은 색이 천하를 얻는다고 일렀는데, 이는 마치 한나라 말엽에 노란 옷이 왕이 된다는 요상한 소문이 퍼졌던 일과 같다. 황색으로 적색을 대신하여 운수를 계승하듯이 그 모양이 검은 것이라 말하는 경위도 대략 이와 같았다. 이로써 주(周)나라 태조가 위(魏)를 장악하고 서쪽으로 달아나 옷가지와 물건이나 깃대조차 모두 검은 색으로 바꾼 것도 도참의 예언을 기약하고자 한 것으로, 이 또한 한나라 광무제(光武帝)의 여명이다.
예전에 고양(高洋)이 제(齊)나라의 운을 열게 되자, 세속에 이와 같은 요상한 소문이 퍼졌다. 이에 고양이, 검은 것이란 조(稠) 선사인데 검은 옷이 천자가 된다는 것이라 말하면서 죽이려 하였으나, 조 선사의 깊은 견식을 보고는 허물을 깨닫고 그대로 방면했다는 것은 별항(別項)에서 기술한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주조(周祖)가 처음에는 불법을 존중하여 사문에게 가례(嘉禮)하였는데, 노란 옷을 걸치게 하고 검은 옷을 금지시켰다. 이 때문에 도사 장빈(張賓)이 거짓말을 꾸며내어 임금을 속였는데, 사사로이 그 무리들을 현달시키고자 검은 옷의 석문(釋門)은 나라의 금기(禁忌)이고 황로(黃老)는
나라의 서응(瑞應)이라 말하였다. 황제가 그 말을 받아들여 도가를 믿고서 불가를 업신여겼는데 친히 부록(符錄)을 받고서 몸소 의관(衣冠)을 입었다.
이 때 예전에 스님이었던 위원숭(衛元崇)이 장빈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사이로 서로를 선동하여 황제의 마음을 미혹시키고자 스님들은 대부분 나태한 데다 재물과 음식만을 탐하는지라 존경하기에 부족하다고 말했다. 황제가 이에 백 명의 스님들을 초빙하여 대궐로 들어오게 하여 7일 밤을 행도(行道)케 하였다. 이 때 사람마다 면밀하게 몰래 탐지하였는데, 황제 또한 스님들과 함께 한 처소에서 잠을 자며 그 득실을 살펴보았다. 어떤 스님은 독송하기도 하고, 어떤 스님은 범패(梵唄)를 외우며 예불 참회를 하기도 하였는데, 스님들은 모두 늠름하게 황제의 작은 행동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윽고 기약한 날짜를 채우게 되자 어쩔 도리없이 단념하였다.
천화(天和) 4년(569) 을축년 3월 15일에 조칙을 내려 덕망 있는 스님들과 이름난 유생(儒生)과 도사(道士) 및 문무 백관 2천여 명을 소환하였다. 황제가 정전(正殿)에서 삼교(三敎)에 대한 논의를 친히 비교하여 유교(儒敎)를 먼저 하고, 불교를 그 다음으로 정하고, 도교를 가장 높게 정하면서, 이는 무명(無名)보다 앞서서 나온 것이고 천지의 겉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 때에 의논이 분분하고 소견마다 서로 틀려서 결정하지 못한 채로 해산하였다.
그 달 20일에 지난날처럼 모여 다시 논하였는데 시비가 더욱 커져서 황제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황제가 “유교와 도교는 이 나라에 늘 따르던 것이고 불교는 나중에 전래된 것이다. 짐이 마음을 정하지 못했는데 모두의 의논은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이 때에 의논하는 자들이 이치를 따져 연고도 없이 없애려 한다고 말하자, 황제가 “세 가지 교(敎)가 세속을 교화한다는 것은 이치적으로도 합당하지 못하다”고 변명하였다.
4월 초에 다시 예전대로 모여서 논의를 지극히 하여 이치를 개진하였으나 황제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다시 사례대부(司隷大夫) 견란(甄鸞)2)에게 칙령을 내려 “불교와 도교의 이교를 상세히 가려서 그 깊고 얕음을 결정하고 진위를 가리라”고 하였다.
천화(天和) 5년(570)에 견란이 『소도론(笑道論)』 세 권을 지어 올렸으니, 이는 삼통(三洞)이란 이름을 비웃고자 함이었다. 5월 10일에 황제가 여러 신하들을 모두 모아 놓고 견란이 올린 논문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도법을 상하게 하였다고 생각하면서
황제가 친히 이것을 가져다 원래 의도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대전에서 태워 버렸다.
이 때에 도안(道安) 법사가 『이교론(二敎論)』을 올려 “내교(內敎)와 외교(外敎)에 대해 말하면 그 마음 닦는 술법을 3승(乘)으로 이름하는 것이 내교이고, 그 형체를 가르치는 술법을 9류(流)라 이름하는 것이 외교이다. 도(道)는 별다른 가르침이 없어서 본시 유류(儒流)에 속하는 것인데 겸겸(謙謙)으로 변화된 것이다”라고 논하였다. 황제가 이 논을 열람하고 조정의 재상들에게 하문하였으나 맞서는 이가 없자 마침내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처럼 5년이 지나 건덕(建德) 3년(574) 갑오년 5월 17일에 이르러 처음으로 불교와 도교 양교(兩敎)를 끊고 사문과 도사를 환속시키게 되었다. 3보(寶)의 복재(福財)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찰과 도관 및 불탑과 묘당을 왕공(王公)에게 하사하였는데, 여타의 것은 별항에 기술한 그대로이다. 이 때 위왕(衛王)이 그 같은 일을 참지 못하고 궁궐로 들어가 건화문(乾化門)을 불태우고 황제를 공격하였다. 차마 손을 쓰지 못하고 물러나 호뢰(虎牢)3)에 머물며 명을 기다리다 바로 체포되어 경도(京都)로 압송되었는데 그 아비와 자식 12명 및 모의에 참여한 이들 모두가 주살되었다.
8) 이교론(二敎論) 사문 석도안(釋道安)
(1) 귀종현본(歸宗顯本)
동도(東都)의 일준동자(逸俊童子)가 서경(西京)의 통방(通方)선생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제가 듣자오니, 풍화(風化)의 흐름이 기우는지라 6경(經)이 이로써 찬술되었으며, 헛된 숭상이 늘어나매 2편(篇)이 이로써 지어졌다 합니다. 따라서 만물을 부드러이 하고 널리 윤택하게 하되 반드시 구제하는 것을 유(儒)라 이르고, 이를 쓰되 만물에 부족함이 없이 하여 반드시 형통시키는 것을 도(道)라고 말한다 합니다. 이것은 모두 공자와 노자의 신묘한 공덕으로, 어떻게 이를 따져 볼 수나 있겠습니까?
근자에 석씨의 가르침을 열람해 보면, 글이 넓고 뜻이 풍부한 데다 사람을 인도하여 어질게 선(善)으로 이끄는 것을 보게 되니, 그 나아갈 바를 추스르는 바가 참으로 훈훈하여 자애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3교(敎)가 비록 다르더라도 선(善)을 권장하는 이치는 한 가지이고, 그 갈래의 자취가 참으로 다를지언정 이치의 회통(會通)은 매한가지라 하겠습니다. 노자가 그 몸을 우환(憂患)이라 탄식하고 공자가 흐르는 냇물을 한탄하였으니, 참으로 외물(外物)을 뒤로 하여 그 삶을 보존하고자 함입니다. 지나간 것을 감득(感得)하여 만물의 풍화(風化)를 아는 것이, 어찌하여 석전(釋典)의 염신(厭身)과 무상(無常)의 설을 기피하는 것이겠습니까?
단지 소소한 것에 얽매어 있는 부류는 탁 트인 시각을 갖지 못합니다. 천지를 하나의 손가락처럼 가지런히 하고 시비를 한 가지 기운(氣運)으로 균등히 할 수 없으니 담론할 때마다 매번 같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마니주(摩尼珠)4)를 품속에 숨겨 두는 것이고, 깊은 밤의 대명월(大明月)을 가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막중한 순풍(純風)을 상하게 하면서 오로지 한 가지로 꿰뚫는 그윽한 가르침을 틀어막고, 겁수(劫數)가 다하도록 도모한다 한들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삼가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개시(開始)하여 천명하시기를 청합니다.”
이에 통방선생이 말하였다.
“네 질문이 참으로 과격하구나. 언변은 지극하다 하겠으나 이치는 다하지 못했도다. 내가 비록 불민하다 하나, 상국(上國)을 헤아려 영장(靈章)을 복응(服膺)하고, 말석에서나마 그 풍화를 다졌기에 지금 너에게 간략하게나마
그 요체를 개진하고자 한다.
대저 만 가지 풍화는 무생(無生)에 근본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생(生)이란 무생이니, 3재(才)가 무시(無始)에서 비롯되어 시작하는데, 시초란 무시이다. 그러나 무생과 무시는 만물의 성품이고, 유화(有化)와 유생(有生)은 사람의 쌓임이다. 쌓임은 비록 그 바탕이 하나이지만 형체와 정신은 두 가지로 달리 하는데, 흩어지면 그 형질(形質)이 구별되더라도 심수(心數)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체를 구하는 그 가르침을 외(外)라 칭하고, 정신을 구제하는 그 가르침을 내(內)라 부른다. 이로써 『지도론(智度論)』에서는 내외의 두 가지 경전이 있다 하였으니, 『인왕(仁王)』5)에서 내외의 두 가지 논을 말씀하시고, 『방등(方等)』6)에서 내외의 두 가지 율(律)을 밝혔고, 『백론(百論)』7)에서 내외의 두 가지 도를 말하였다. 만약 내외를 통틀어 논한다면, 바로 저와 같은 중화(中華)와 오랑캐[夷戎]도 골고루 갖춰야만 한다. 만약 기국(器國)의 명(命)이 방내(方內)에 있다면, 바로 유교(儒敎)와 석교(釋敎)라고 일러도 괜찮을 것이다.
석교(釋敎)는 내교(內敎)이고 유교(儒敎)는 외교(外敎)인데, 성전(聖典)을 갖추어 드러내는 것이 참으로 허망하다. 전적을 자세히 열람하고 그 근원을 따라가 보면 가르침에는 오직 두 가지만이 있는데, 어떻게 세 가지가 있겠는가?
옛적에는 소박하였는지라 3분(墳)과 5전(典)의 고(誥)조차 펼쳐지지 않았다. 순일한 풍속이 차츰 멀어지자 구삭(丘索)8)의 글이 바로 지어졌으니, 이로써 통틀어 논하자면 ‘7전(典)’이라 하고, 통괄하자면 ‘9류(流)’라 한다. 모두가 치국(治國)의 모범이고 수신(修身)의 술법이다. 그러므로 「예문지(藝文志)」에서도, ‘유가(儒家)의 유(流)는 대개 사도(司徒)의 관리로부터 비롯되는데, 인군(人君)을 돕고 음양(陰陽)에 순응하여 교화(敎化)를 밝히려는 것이다. 그 글이 6경(經) 가운데 노닐면서 뜻을 5덕(德)의 끝에 두고 요순을 이어 기술하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를 모범으로 삼는데, 그 종사(宗師)가 바로 중니(仲尼)로 그 도가 가장 높다’고 하였다.
도가(道家)라는 유는 대개 사관(史官)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청허함으로 자신을 지키고 비겁함으로 스스로를 가꾼다. 이것은 인군(人君)되는 이가 남면(南面)하는 술법으로 요순의 극기(克己)와 선양(禪讓)에 부합하고자 공손하게 변화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음양가(陰陽家)의 부류는 대개 희화(羲和)9)의 관리에서 비롯되었는데, 공경스럽게
호천(昊天)을 순응하여 일월과 성신(星辰)의 운행을 추산하고 관측하여 백성에게 시절을 정중하게 수여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법가(法家)라는 유는 대개 이관(理官)에서 비롯되었는데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준다[信賞必罰]는 것으로써 예법의 제도를 보충하였다. 『주역』에서는 ‘선왕(先王)이 벌을 분명하게 하여 법을 따르게 하였다’고 한 것이 그 특징이다.
명가(名家)라는 유는 대개 예관(禮官)에서 비롯되었는데, 옛날에는 이름과 자리가 같지 않으면 예절 역시도 달리 헤아렸다. 공자가 ‘반드시 그 이름을 바로 하리라.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따르지 않고, 말이 따르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으니,10) 이것이 그 특징이다.
묵가(墨家)라는 유는 대개 청묘(淸廟)의 관리에서 비롯되었는데, 볏짚으로 지붕을 덮고 나뭇가지로 서까래를 달았다. 이처럼 검소함을 귀히 여기면서 삼로오경(三老五更)11)을 봉양하여 겸애(兼愛)하였다. 사(士)를 선발할 때는 대사(大射)로 뽑았다. 이로써 현자들을 높이고 엄부(嚴父)를 종사(宗祀)로 삼아 이로써 그 귀신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 특징이다.
종횡가(縱橫家)라는 유는 대개 행인(行人)의 관리에서 비롯되었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시(詩) 3백 편을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겼을 때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혼자서 처결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시를 많이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12) 또 ‘훌륭한 사자(使者)이구나! 훌륭한 사자이구나’13)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일을 살펴서 마땅하게 처리해야 하며 명을 받는 것이지 말을 받는 것이 아니란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그 특징이다.
잡가(雜家)라는 유는 대개 의관(議官)에서 비롯되었는데, 유가와 묵가(墨家)를 겸하고 명법(名法)을 포함한다. 나라의 바탕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서 왕의 다스림을 살피되 꿰뚫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그 특징이다.
농가(農家)라는 유는 대개 농직(農稷)의 관리에서 비롯되었는데, 오곡(五穀)을 파종하되 경작과 양잠을 권하여 입을 것과 먹거리를 넉넉히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8정(政) 가운데에서 첫 번째가 식량(食糧)이고, 두 번째를
재화(財貨)라고 하니, 이것이 그 특징이다.
만약 유파로서 이를 가려내면 9교(敎)가 있어야 하나, 만약 총괄하여 이를 합치면 모두 유종(儒宗)에 귀속된다. 그 관직을 논하자면 각각 왕실 조정의 한 직책이 되고, 그 서적(書籍)을 논하자면 황가(皇家)의 한 책자이다. 한 조대(朝代) 내에서 9류(流)가 그 개천을 다투고, 대도(大道)의 치세에 그 소성(小成)을 다투어 논하게 하니, 어찌 위로는 황극(皇極)의 둘도 없는 풍화를 상하게 하고, 아래로는 소소함만 넓히는 폐단을 열지 않겠는가? 참으로 좀벌레와 큰 기러기가 조정과 민간[朝野]을 어지럽힌다고 이를 수 있다.
부처의 가르침이란 것은 이치를 찾아 성품을 다하는 격언으로 세간을 벗어나 참다움으로 들어가는 자취이다. 그 글을 논하자면 12부(部)로 나뉘고, 그 이치를 논하자면 네 가지 실단(悉檀)이 있다. 그 이치가 묘한 경계 가운데 있기에 참으로 이름지어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화를 발휘하는 것이 바깥에 있다 하나, 이 또한 마음으로 찾아볼 바가 아니다. 얽힌 것을 풀어내고 통발을 떨쳐내 그 정신을 길러 모두 비추니, 가까이는 생사를 뛰어넘고 멀게는 열반[泥洹]을 증득하면서 5승(乘)을 떨치어 천명하게 된다. 중생의 기틀이 깊고 얕음에 따라 6도(道)를 상세히 밝히고, 선과 악의 오르내림을 가려서 그 출세를 기약하되 두루하지 않는 이치가 없다. 이는 왕법(王法)의 교화가 다하지 못함이 없음에 견줄 수 있다. 능히 넓히고 능히 줄이되 바탕이 없어 꾸미지도 못하니, 이는 천하에서 생각할 바가 아닌데, 참으로 어떤 유파가 이 같은 가르침과 함께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유교와 도교의 천가(千家)와 묵가(墨家)와 농가(農家)의 백씨(百氏)가 서로 주고받으며 치달리더라도 그 헤아림에 이르지 못한다. 오직 석씨의 가르침만이 그 이치의 권실(權實)이 넉넉한 것이다. 남음이 있어 깨닫지 못하는 것을 권(權)이라 부르고, 남김없이 그 이치를 깨닫는 것을 실(實)이라 부르는데, 합쳐서 선유(善誘)라고 이름하니, 어떻게 묘하다는 것으로 칭찬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3교가 비록 다르나 권선(勸善)하는 이치는 매한가지’라고 이르니, 나는 선(善)에도 세밀하고 조잡하며 뛰어나고 열등한 바가 다르다고 말한다. 세밀함이란 백화(百化)를 뛰어넘어 높이 오르는 것이고, 조잡함이란 9거(居)를 따라 돌며 쉬지 못하는 것인데, 어떻게 같은 해에
이를 말하여 그 우열을 말할 수 있는가?
또 교(敎)의 자취는 달리 하지만 이치는 같다고 말하는데, 이는 세상의 잠언을 인용하여 현교(玄敎)를 새기려는 수작이다. 대체로 이 같은 것은 어리석은 이의 우매함일지니, 그 근본을 밝히지도 못한 것이다.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하면 이치를 새기는 것을 말한다. 이치란 무엇인가 하면 가르침을 풀어내는 것이다. 가르침마다 이처럼 과보가 있다면 그 이치가 어떻게 같다 하겠는가? 이치가 만약 같다고 하면 가르침을 어떻게 달리할 수 있겠는가? 통발로는 물고기를 기약하지 못하고, 그물로는 산토끼를 잡지 못하니, 이름을 짓는다고 이치도 같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살려는 마음을 두터이 하고 몸의 근심을 살피라는 경계가 점차로 일어나고 그 냇물이 흘러감을 깨닫지 못하는 탄식을 하면서 문물(文物)을 제작하였더라도, 이는 방내(方內)의 지극한 말일 뿐이다. 참으로 방내를 뛰어넘는 웅대한 외침이 아닐진대, 어떻게 색(色)을 미루어 그 극미(極微)를 다하였겠는가?
이는 노씨가 가리지 못한 바이고, 마음을 따져 생멸을 그치는 것은 선니(宣尼:孔子)가 이르지 못한 바이니, 얼핏 보면 다한 듯하여도, 잘 살펴보면 궁극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서 ‘색심(色心)을 분별하면 무량(無量)한 모양이 있으나, 이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이 깨칠 바가 아니다’고 말씀하셨다. 성문이 보살과 더불어 망상(妄想)의 고을을 벗어났다 하나, 보살은 그 은혜가 9도(道)를 겸하고 성문은 그 몸 하나만을 홀로 선하게 하기에 이는 이슬에 젖음을 강물에 견주는 것과 같고, 미진(微塵)을 수미산(須彌山)에 비기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범부의 식견으로 이를 가지런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정명(淨名:유마거사)은 ‘햇빛을 저 반딧불과 같다고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만약 고른 것으로 고르다고 하고, 고르지 못한 것으로 고르지 못하다 하는데, 고른 것으로 고르다 하면 고른 것은 고르지 못할 터이다. 내가 듣자 하니, 천하를 잘 다스리는 일은 다스리지 않고도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산을 깎고 연못을 메운 연후에야 평탄해진다고 하는가?
오리의 짧은 다리를 계속 덧대고 학의 긴 다리를 잘라낸다고 어찌 처음부터 같겠는가? 대체로 이것은 미친 사람이 함부로 떠드는 것이지, 어떻게 통달한 선비의 밝은 식견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속담에서도 ‘자주색이 너무 진하면 붉은색을 어둡게 하고, 이것에 광분하면 현자(賢者)도 넘친다’고 하였다. 그 부류를 자세히 하되
이를 돌이켜 네 마음속으로 깨우치길 바라노라.
위로는 천자에 이르고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색심(色心)을 기르지 않고 그 몸을 이룸이 없다. 비록 음양을 받아 그 몸을 이루니 그 색과 마음이 같다고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을 섞을 수는 없다. 어찌 음양의 이치가 고르다고 그 귀천마저도 같다 하는가?
이처럼 지극한 이치가 아님이 분명해지는데, 비록 억지로 같게 한다 하여도 그 이치가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2) 유도승강(儒道昇降)유가는 6전(典)에 통하나 도가는 단지 2편뿐이니, 그 높이고 낮추는 두 가지 일은 4사(史)에 뚜렷하게 수록되어 있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선생이 공자와 석가를 경수(涇水)와 위수(渭水)14)처럼 가려내고 그 맑고 탁함을 크게 드러내시어 유가와 도가의 쓸 것은 쓰고 버릴 것은 버리어 취사해 주십시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6씨(氏) 가운데 도가를 우선하였고, 반고(班固)는 9류(流) 가운데 유종(儒宗)을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그 조술(祖述)을 검토하면 가(家)라고 명명할 수 있고, 그 헌장(憲章)을 논하면 본받기에 어긋나지 않으니, 모두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적으로 합당하지 못하다 하겠습니다. 그 요체를 잡게 되면 어떻게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하였다.
“길이 묻히고 평탄하지 않더라도 돌아갈 바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붉은색과 자주색의 사이에도 오래도록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 『한서』의 십지(十志)는 옛날의 「예문지」를 본받은 것이니 5행(行)이 어찌 지금 비롯되었겠는가?
농가(農家)가 다스림의 근본인데도 사마천이 이를 말하지 않았고, 안훼(安毁)15)와 종횡(縱橫)에 대해서는 관전(官典)에 모두 누락되었다. 그러므로 맹견(孟堅)이 찬술한 것은 과거와 지금의 옳은 것을 칭찬하려는 것이고 자장이 논한 것은 과거의 견해가 잘못된 것을 꾸짖는 것이다.
이로써 『전한서(前漢書)』에서는 사마천이 분적(墳籍)을 차례 매긴다면 황로(黃老)를 우선하고 6경(經)을 뒤로 할 것이며 유협(遊俠)을 논한다면 처사(處士)를 물리치고 간웅(姦雄)을 나아가게 할 것이다. 화식(貨殖)을 기술한다면 이익을 좇는 세력을 숭상하고 가난한 자를 부끄러워 할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이 폐단이다.
『후한서』에서는 태사령 사마천이 『좌씨(左氏)』와 『국어(國語)』를 채집하고 『세본(世本)』과 『전국책(戰國策)』을 산삭하여 『초한춘추(楚漢春秋)』16)에 근거하여 시대사를 나열한 것으로, 위로는 황제(黃帝)에서 아래로는 기린을 잡기까지 「본기(本紀)」와 「세가(世家)」와 「열전(列傳)」을 지었는데, 연이어 기표(紀表)한 것이 대체로 130편으로 이 가운데 10편이 실전되었다.
경(經)을 수집하고 전(傳)을 거두면서 백가(百家)의 일이 분산되었는데, 훼손이 너무 심하여 없어진 채로 그 책 제목조차 전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힘쓰는 바가 많이 듣고 널리 새기는 것만 공을 삼았기에 이치의 탐구가 천박하여 깊지 못하다. 그 술학(術學)만을 논하여 황로(黃老)를 기르며 5경(經)을 업신여겼으니, 인의(仁義)를 가벼이 보고 수절(守節)을 천하게 보았다. 이처럼 그 폐단을 기록하며 도를 손상시킨 허물은 극형의 죄에 이른다. 또 『진서(晋書)』 「예악지(禮樂志)」에서는 ‘세간에서는 자장(子長)을 칭송하나 『사기』에서는 뛰어나되 두루 언급하지 못하였다[奇而不周]’고 하였다. 여기서 뛰어나다는 것은 옛 것에 박학(博學)하여 깊이 통달하였다는 것을 이르는 것이고, 두루 언급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유도(儒道)의 피폐를 이른다. 유도가 이미 피폐하여 성인의 가르침을 일으키지 못하였는데, 어떤 왕이 이를 따랐겠는가?
도가를 기르느라 유종(儒宗)을 폐하여 천하를 어지럽히고 풍화를 변모시키며 세속을 훼손하다가 위나라와 진나라를 망하게 하고 4이(夷)가 서로 중국을 침략하여 위태롭게 되었다. 이 모두가 국사(國史)와 실록(實錄)의 글인데, 어찌하여 다르다 하여 그 득실을 재려 하는가? 전(典)이나 지(志)마다 상세히 열거되었는데, 취하고 버리고 오르고 내리는 것을 어찌 비루한 마음으로 예상이나 했겠는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노자의 가르침은 대개 자기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되 귀함과 숭상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대도(大道)를 논한다면 3재(才)의 근원으로 삼고 상덕(上德)을 분별한다면 5사(事)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도연(陶埏)이 물건을 만드는 것과 같고 탁약(槖籥)이 끝이 없는 것에 비유되니 선생은 어째서 이것을 억눌러 유가의 밑에 두려고 하십니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듣자 하니 뜻이 크게 조화로우면 변화와 항상에 힘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시절에 편안히 하여 순도(順道)에 처하는 이는 옛 것을 돌이켜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경』에서 ‘잘못도 없고 실수도 없으니 모두가 옛 법을 따르기 때문이네’라고 하였다. 예문(藝文)의 흥성(興盛)은 『역(易)』이 가장 뛰어난데, 네가 노자가 역(易)과 한 가지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와 같겠는가?
예전에 복희씨가 고개를 들어 하늘의 형상을 살피고 몸을 굽혀 땅의 법칙을 살필 때에 가까이는 자기 몸에서 취하고 멀게는 여러 물건에서 취하여 마침내 처음으로 8괘(卦)를 지었다. 신명(神明)의 덕에 통하여 만물의 정(情)을 유추하였으니, 문왕(文王)이 6효(爻)를 보태고 공자가
10익(翼)을 넓혔다. 그러므로 역(易)의 도리가 깊다고 말한다. 사람으로는 세 사람의 성인으로 되풀이 되었고, 세간으로는 삼고시대(三古時代)를 거쳤으니, 이 때문에 「계사(繫詞)」에서는 ‘역(易)에 태극이 있으니 이로써 양의(兩儀)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역설(易說)」에서는 ‘대저 유형(有形)은 무형(無形)에서 생겨난다’고 말하는데, 이 때문에 태역(太易)이 있고, 태초(太初)가 있고, 태시(太始)가 있고, 태소(太素)가 있다고 말한다. 태역이란 그 기색(氣色)을 보지 못함이고, 태초란 형기(形氣)의 시초이고, 태시란 형체의 시작이고, 태소란 바탕의 시초이다. 원래의 기운과 형체의 바탕은 서로 떨어진 게 아니기에 이 때문에 혼돈(混沌)이라고 말하며, 이를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아서 따르더라도 얻을 수 없기에 역(易)이라 말한다.
『효경설(孝經說)』에서는 “홀수 달은 양절(陽節)이고 짝수 달은 음기(陰基)이니 양(陽)을 얻어 이루고 음에 합하여 머물게 되는데, 서로 짝을 배당하여 도(道)로 삼는다. 그러므로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라 이르고, 음양의 헤아릴 수 없는 이러한 것을 신(神)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이로써 그 본 것에 따르더라도 노자보다 현명하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그대가 어짊이 덕을 잃는 것에서 일어나고 예절이 생겨나면 충의와 신의가 부박해진다고 말하는데, 그 익힌 바만 편안히 여기고 보지 못한 것은 훼손하려 한다. 또 큰 즐거움은 천지와 함께 동화(同和)하고 큰 예는 천지와 함께 동절(同節)한다는데, 어찌 이를 기리는 햇수를 꾸며서 그 보응받는 세월을 탓하려 드는가?
그러나 노씨의 뜻은 원래가 요랑(澆浪)을 구하며 텅 비고 부드러운 것으로 아랫사람들을 잘 대해주니 어질게 몸을 닦는 것이 가하다. 어질고 유능한 사람들을 숭상하지 않는다면 다스림이 어떻게 계속 이어질 수 있겠는가? 대체로 역(易)의 한 가지 겸손을 부축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유가의 한 유파이다. 같이 내쳐서 5덕(德)17)을 겸하여 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3) 군위교주(君爲敎主)세간에서는 공자와 노자를 교화를 넓힌 사람들이라 일컬으나 전모(典謨)를 찾아보면 오직 임금으로 교화의 주체를 삼았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삼가 현자(賢者)가 제작한 것을 찾아보고 그 떨어지고 합쳐지는 것을 분석해보았습니다. 이것을 유파로 따지자면 9교(敎)가 있고 이를 합치면 하나같이 유종(儒宗)이라 하니, 그 이치의
실례를 찾아보면 합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명가는 등석(鄧析)18)에서, 잡가는 윤희(尹喜)에게서 유래되었다. 법가는 이리(李悝)와 상앙(商鞅)을 참고하였고, 묵가는 호(胡)19)에서 나왔고, 농가(農家)는 촌 늙은이가 일으킨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제작이 어질고 달통한 것이라도,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공자와 노자는 성스러우니 가르침이라 이름할 수 있기에 9류(流) 가운데에서 오직 그 두 가지만을 논하자면 유교와 도교가 어찌 뒤쳐지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네가 묻는 것 자체가 크게 통하지 못한 것이다. 제왕이 공을 이루고서 악(樂)을 제정하고, 안정되게 다스리고서 예(禮)를 제정하는데, 이 같은 것은 대체로 황업(皇業)의 성대한 일이다. 그러나 좌사(左史)는 그 말을 적어 놓고 우사(右史)는 일을 기록하였으니, 일은 『춘추(春秋)』가 되었고, 말은 『상서(尙書)』가 되었다. 백왕(百王)이 그 풍화를 함께 하여 만대에 그 궤범을 고루하였다. 만약 자리에 있으면서 재주가 없다면 널리 찬양하더라도 이지러짐이 있고 재주가 있으면서도 자리가 없으면 빛이 나더라도 온전하지 못하다. 옛날 주공이 7년 동안 섭정하면서 6관(官)을 제정하였으니, 공자와 노자를 어떻게 교주(敎主)로 삼을 수 있겠는가?
공자는 비록 성달(聖達)하였더라도 벼슬이 없었던 사람이다. 위(衛)나라에서 수레를 되돌린 이후로 문궤(文軌)를 넓히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바로 수절(守節)하여 조술(祖述)하는 것이었을 뿐이기에 가르침의 원천을 삼을 수는 없다. 또 주하사(柱下史)는 조정에 있었으나 원래가 화합하지 못하고 주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면서 윤희(尹喜)에게 도를 말하였다 하나, 제후에게 들리지도 않았는데 하물며 천자이겠는가? 일찍이 선현(仙賢)이라 불렸으나 참으로 양쪽 모두 결핍되었기에 도자(道子)는 유종에 속한다는 것을 이미 앞서 간단하게 드러내었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공자가 노담에게 예를 물었으니 스승과 제자의 이치가 남아 있습니다. 또 『논어』에서는 ‘공자가 스스로 나는 조술하기만 하였지 창작하지 않았다[述而不作]. 옛 것을 미더워하며 좋아하였으니 가만히 나를 노팽에 비겨 본다’고 하였습니다. 선생께서 공자는 성인이라 이르면서 노자를 현자라 하시니, 그 부류를 견주는 이치가 어떻게 이치다울 수 있습니까? 기리고 내치는 것이 진실하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성인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비루하다 하나 어찌 감히 함부로 천착(穿鑿)하겠는가? 지혜가 없다 해도 정성은 다할지니
오직 모전(謨典)에 의거하는 바이다. 혜자(嵇子)가 ‘노자는 연자(涓子)를 찾아가 9선(仙)의 술법을 익히고 연단(練丹)과 복이(服餌)20)의 방법을 찾았다’고 이르는데, 만약 이렇게 하여 성인에 이르렀다면 배웠다고 말하지 못한다. 『논어』에서도 ‘나면서부터 아는 이가 으뜸이고, 배워서 아는 이는 그 다음이다’라고 말한다. 『전한서(前漢書)』에 의거하면, 공자를 상상류(上上流)로 분류하여 모두 성인이라 하였고, 노씨를 중상류(中上流)로 분류하여 모두 현인이라 하였다. 또 하안(何晏)과 왕필(王弼)도 모두 노자는 성인에 이르지 못했다고 이르면서 이들 모두 그 자리하는 바에 달통하였다고 하였는데, 내 어찌 이와 달리할 수 있겠는가?
공자는 ‘나에게 일정한 스승이 없다’고 말했으니, 노담에게 예를 물었다는 것도 이 같은 뜻이다. 어떤 이가 농사를 질문하자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고 말했고, 또 김매는 것을 묻자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고 하였다. 태묘(太廟)에 들어가서는 매사를 물어 보았지만, 어찌 농사짓고 밭 갈고 묘를 지키는 사람들이 공구보다 어질겠는가?
생각해 보면 그 겸손한 말씨로도 부류를 견주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이의 평론이 사실에 가까움을 알고 스스로 겸양하여 마음을 비웠는데, 성인을 모욕한다고 말하면 아마도 자기 자신에게 누가 되리라[공자가 장홍(長弘)에게 악(樂)을 물었고, 사양자(師襄子)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하나 어찌 홍자(弘子)의 부류가 모두 공자보다 슬기로웠겠는가? 성인의 자취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노나라 은공(隱公)은 대체로 나라를 양위(讓位)한 현군(賢君)이나 사람들은 그를 평가하여 하하품(下下品)이라 하였고, 노자는 무위(無爲)의 대성(大聖)인데도 『한서』에서는 그를 중상품(中上品)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반표(班彪) 부자가 헤아리는 것이 순탄하지 못함을 알 수 있는데, 선생께서는 어떻게 이것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으시려 하십니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네가 가깝다고 두예(杜預)의 말을 취하고, 멀다고 『춘추』의 이치를 가벼이 하는구나.
은공(隱公)은 환공(桓公)의 서형(庶兄)인데 환공이 어렸으므로 정사(政事)를 대신하였다. 환공이 자라나자 정무를 환공에게 되돌렸는데, 비록 정무는 되돌릴 수 있었으나 시기심을 없앨 수는 없어 종횡으로 간섭하다가 마침내 환공에게 살해되었다. 이미 스스로를 온전히 하지 못하여 동생을 불의(不義)에 빠뜨렸으니 나라를 양위한 아름다움이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사람이 하품이 아니라면 누가 하품이겠는가?
『한서』에서 평한 것이 이로 인해 정확하다 하겠다. 또 공자가 명을 받아 소왕(小王)이라 이름하였어도 전적에는 노자를 성인이라 칭한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 말하는 바가 전(典)에 관련되지 않으니 참으로 군자로서 부끄러운 바가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상서(尙書)』에는 광인(狂人)이라도 그 생각을 이겨내면 성인이 되고 성인이라도 생각이 어긋나면 광인이라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성인은 배우는 것과 관계없다고 이르시니 이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공자를 생이지지(生而知之)라 하는 말도 그 배운 것을 가리켜 쌓아 익히는 것이다. 유향(劉向)이 유가는 논했으나 석교는 미처 논하지 못했다.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원래 교화에 따르지 않으니 중용(中庸)의 부류라야 교화에 순응하여 바뀐다. 성인이라도 미치게 되면 상지가 아니고 미친 이라도 성인이라면 또한 하우가 아니니, 미친 이와 성인을 가리는 것 모두가 중용이다. 노자가 ‘성인을 끊고 슬기를 버리면 백성에게 이익이 백배로 늘어나리라’고 말했으니, 이는 모두 중재(中才)의 거룩함이지 상지(上智)가 아니다.”
(4) 힐험형신(詰驗形神)형체와 정신의 가르침은 초편에서 이미 밝혔으니 여기에서는 이를 점검하여 그 전거에 의한 증명을 다시 징험한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선생께서 형체를 구하는 가르침을 외교(外敎)라 칭하시는데, 비록 말씀이 그럴듯하더라도 이를 수긍하지 못하겠습니다. 『역경』에서는 ‘기미(幾微)를 알면 신묘(神妙)하다’ 하였는데, 어떻게 7전(典)에 부화뇌동한다고 모두 형체의 가르침이 되겠습니까? 이를 새겨 가려내 보면 그 정신을 구제하는 이치가 어찌 있다 하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서경(書經)』에서 멀리 안다고 칭하는데, 가장 먼 것이라야 당(唐)ㆍ우(虞) 시대이다. 『춘추』에서 그 말을 비겨서[屬詞] 말마다 왕업(王業)을 다하였다고 하였으니, 예(禮)ㆍ악(樂)의 경량(敬良)과 시(詩)ㆍ역(易)의 온결(溫潔)이 모두 저 한 몸을 밝히고자 하는 것인데, 어찌 3세(世)를 논할 수 있겠는가?
가르침이 형체의 방내(方內)에 있는 자는 넓은 가피를 갖추지 못하였고 보여짐이 생표(生表)를 뛰어넘는 자는 존재하되 의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주역』에서 ‘기미는 움직임의 징조’라 하였으니, 그 징조를 능히 비추는 것이야말로 신령함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리하여 그 정신을 말하더라도 그 정신의 수련을 가리지 못한다. ‘정신의 수련’이란 마음을 닫고 비춤을 열어 내는 것이다. 그 정신이
오랜 겁수(劫數)토록 유령(幽靈)이 망하지 않는지라, 습(習)을 쌓아 가서 성인을 이루니 10지(地)를 밟아 날로 밝아지고 9택(宅)을 지나쳐 높이 나아가는 이러한 것이 바로 석씨의 가르침의 넓은 바이다. 경전에서는 ‘정신을 구제하고 고통을 건지되 건지는 것에 선을 닦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6도(度)에서 중생을 거두어 그 마음을 깨끗이 하되 이를 일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5) 선이열반(仙異涅槃)선도는 수명을 늘리는 술법이기에, 그 종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열반은 상주하는 과보이기에 그 차이가 엄연하다.
이간이 다시 물었다.
“석씨가 열반이라 말하면 도가는 선화(仙化)라 이르고, 석씨가 나지 않는다고 이르면 도가는 죽지 않는다고 말하니, 참으로 그 헤아림은 하나인데 어떻게 다르다 하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혼령을 날려 우화(羽化)한다는 것이란 신단(神丹)의 힘이라 하겠고, 질병이 없어지고 근력이 강해지는 것 또한 이복(餌服)의 공이라 이를 수 있다. 애석하게도 공을 이루되 전생에 이룬 것임을 알지 못한다. 태어나면서 기력이 다르기에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인(因)에 연유하는 것으로, 길고 짧음이 모두 업에 달려 있다. 불법이 유생(有生)을 헛되이 여기니, 이로써 그 몸을 잊고 만물을 제도한다. 도법(道法)은 오아(吾我)를 참되다 하여 이 때문에 기(氣)를 마시고 삶을 기른다 하나, 생생(生生)이 귀하지 않은데 이를 남기는 것에 무슨 공이 있다 하겠는가?
설사 수명을 약간 늘려도 끝내 죽지 않을 도리란 없다. 그러므로 장주도 노자를 가리켜 ‘옛날에 하늘의 형태에 따르고자 하여 일찍이 그와 같은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사람이 없으니 일찍이 하늘을 따르는 선인이란 없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진(秦)나라가 망할 무렵에 부풍(扶風)에서 죽어 괴리(槐里)에 장사지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열반이란 늘 항상되고 청량해서 다시 태어나고 죽는 것이 없으니, 그 마음을 지혜로도 알지 못하고 그 형체를 그려도 측량하지 못한다. 알지 못하면서 그 이름을 억지로 적(寂)이라 부르니, 참으로 지극하면서 극진하다.
쌍림(雙林)에서 비춤을 거두었더라도 영지(靈智)는 늘 남아 있으니, 그 바탕을 사유(闍維)에 시현하여 사리(舍利)를 언제나 남겨 두셨다. 비록 대춘(大椿)이 오래 산다 하더라도 팽조(彭祖)가 이를 슬퍼했듯이, 비상천(非想天)에 오랜 겁을 머물더라도 그 문호조차 가리지 못하는 법이다. 범부와 성인의 이치가 현격하여 움직임과 조용함이 하늘만큼 차이나는데, 어떻게 동시에 높낮이를 가릴 수 있겠는가?
네가 어떻게 일월의 아래에서 이에 맞서 달리 비추겠는가? 희화(羲和)와 밝음을 다투려 하다가 망령됨에 이르는 것이 어찌 이리도 심한가?
(6) 도선우열(道仙優劣)도가 허무를 넓혀서 욕심을 줄이는 것으로 그 우수함이 겸양하는 덕에 있다. 신선은 복이(服餌)에나 치달리는 것으로 그 융함이 헛된 효험을 바라는 데에 있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선생께서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공(功)이 전생의 업과(業果)라고 높여 말씀하시는데, 그 지말을 상세히 하면 도리어 성긴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가의 지극함은 그 지극함을 장생(長生)에 두는지라, 태일(太一)로 들이쉬고 내쉬며 오랜 것을 내뱉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선생께서 어찌 낮추려 해도 낮출 수가 있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노씨의 이치는 대체로 허무(虛無)를 근본으로 삼고 유약(柔弱)을 작용[用]으로 삼는 것으로, 하늘의 근원을 깊게 생각하여 인간 세상을 높이고자, 기(氣)를 키워 조화롭게 기르되 그 얻고 잃는 것을 변함없게 하는지라, 궁하더라도 도모하지 않고 통달하더라도 도모함을 없앤다는 것이다. 이것은 배우는 이가 다른 유(流)를 존중하여 그 도를 남기려는 소치이다. 금단(金丹)을 연마하여 삼키고 이슬을 마시며 옥기(玉氣)를 먹어 혼령이 승천하게 된다는 것도 매미에 날개 돋힌 것과 같다. 송장을 벗어 내어 그 형체를 바꾸더라도 이와 같은 것은 모두 노자와 장자가 말을 세운 근본 이치와 어긋나는 것인지라, 그런 이치가 점차로 유포되어도 도교와 짝하지 못한다. 비록 빼어난 이가 있다고 기록에 남아 있어도 도를 말하는 이는 이것을 취하지 않았다.
옛날에 한나라 무제는 방술(方術)을 좋아하여 난대(欒大)의 요사스러움이 뒤따랐고, 광무제(光武帝)가 참서(讖書)를 믿어 환담(桓譚)21)의 간언을 일으켰다. 선도는 방술(方術)인지라 유(流)에도 포함되지 않는데, 사람으로 방사(方士)가 되는 것이 그 이치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네가 어찌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따르면서 이치를 등지고 황당한 것만 따르려 드는가?”
(7) 공노비불(孔老非佛)부처님이 서역에 태어나신 것을 공씨 혼자서만 짐작하였는데 상나라 태제가 이 일을 물어본 것이 『열자(列子)』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서역에서는 부처라 이름하고 이쪽에서는 깨달음이라 이릅니다. 서쪽에서는 보리(菩提)라 말하고 이쪽에서는 도(道)라 말합니다. 서쪽에서는 니원(泥洹)이라 이르고 이쪽에서는 무위(無爲)라 이릅니다. 서쪽에서는 반야(般若)라 칭하고
이쪽에서는 지혜(智慧)라 새깁니다. 이와 같은 이치에 따르면 공자와 노자도 바로 부처나 매한가지이니 무위(無爲)의 대도(大道)란 예전부터 늘 있어 왔습니다.”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비루한 속인은 대도를 말하지 못하니 그 형체에 막혀 있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선비는 종극(宗極)을 가리지 못하니 그 이름에 구애받기 때문이다. 맹자에 따르면, 성인을 선각(先覺)이라 하였으니, 성인 가운데서도 가장 지극한 이일지라도 어떻게 부처님을 넘어서겠는가?
그러므로 역경(譯經)하는 이가 깨달음이란 말로 부처를 번역한 것이다. 깨달음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자각(自覺)과 각타(覺他) 및 만각(滿覺)이다. 맹가(孟家)의 한마디가 어찌 이와 같은 세 가지 보리(菩提)를 갖추었겠는가?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따르면, ‘위없는 지혜로 지혜를 태워 비추는 것이 영통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이치를 바로 도라고 번역하였다. 도라 이름하는 것이 비록 도교와 같더라도 그 이치는 판이하다. 어째서인가 하면, 만약 유종(儒宗)을 논하자면 도를 이름하여 대소에 통한다고 한다. 『논어』에서는 ‘소도(小道)일지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으나 멀리가면 빠질 것이 두렵다’고 일렀다. 만약 석씨의 경전을 말하자면, 도라는 이름은 바르고 삿된 것에 통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96가지를 모두 도라 이름한다. 그 이름만을 들으면 참다움과 거짓됨을 가리기 힘드나, 그 법을 징험해 보면 삿되고 올바름이 스스로 가려진다. 보리(菩提)의 대도는 지도(智度)로써 체(體)를 삼고 노씨의 도는 허공을 모양[狀]으로 삼는다. 체(體)와 용(用)이 이미 현격한데 참으로 그 그림자의 메아리를 가리기 힘들다. 외전(外典)에서는 무위(無爲)로써 번잡한 일을 쉬게 하는 이치로 삼으나, 내경(內經)의 무위(無爲)는 세 가지 모양이 없이 행한다는 것이다. 이름이 같더라도 그 내용이 다르니 근본적으로 비슷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이쪽의 호칭을 빌려 저쪽의 종지를 번역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름을 빗대어 그 실다움을 논하는데, 어떻게 이를 의심하겠는가?
이 같은 사례에 근거하면 공자와 노자는 부처가 아닐진대, 어떻게 그 같음이 분명해진다고 하는가?
예전에 상나라 태재 비(嚭)가 공구(孔丘)에게 ‘그대는 성인인가?’라고 묻자, 공구가 ‘나는 아는 것이 많을 뿐이지 성인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삼왕(三王)이 성인인가?’라고 묻자, ‘삼왕은 지혜와 용기가 가상하나 성인인지는 나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다시
‘5제(帝)는 성인인가?’라고 묻자, ‘5제는 어짊과 신의가 가상하나 성인인지는 나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다시 ‘3황(皇)이 성인인가?’라고 묻자, ‘3황이 때를 바르게 잘 썼으나 성인인지는 나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에 태재가 놀라서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성인인가?’라고 캐어묻자, 공구가 안색이 변하면서 뜸을 들이다가 ‘서방에 성인이 계신데,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럽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고 교화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지기에 너무나 위대해서 백성이 무어라 이름 붙이지도 못한다’고 대답했다. 만약 노씨가 반드시 성인이라면 공자가 어째서 말하지 않았겠는가?
이로써 그 이치를 교감해 보면, 마땅히 부처는 단지 부처님으로 미루어져야 한다[『노자서승경(老子西升經)』에는 “천하의 대술(大術) 가운데 불술(佛術)이 제일이다”라고 하였고, 또 『서승현경(西昇玄經)』에는 “우리 스승이 천축을 교화하시다가 니원에 드셨다”고 하였으며, 또 『부자(符子)』에는 “노씨의 스승 이름이 석가문이다”라고 이른다. 바로 도가의 서책마다 모두 부처님을 스승으로 섬긴다].”
(8) 석이도류(釋異道流)세간을 벗어남에 3승(乘)이 있고 역중(域中)에는 4대(大)가 있어 서로 현격하기가 하늘과 땅 차이다. 그 다르기가 진토(塵土)와 지옥보다도 더하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후한서』에서는 ‘불도의 신령한 교화는 신독(身毒)에서 일어났다 하였으니[『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서방에 천독국(天毒國)이 있다”고 하는데, 곽경순(郭景純)의 주석에서는 “바로 천축국이다”라고 이르고, 『한서』 「서역전(西域傳)」에서는 “천축국을 일명 신독국이라 한다”고 기술한다.] 그 맑은 마음이 얽힘을 풀어내게 하는 가르침과 공(空)과 유(有)가 겸유(兼遺)하는 종지는 도서(道書)의 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도교야말로 불교를 섭수하는 것입니다. 불경에서도 일체의 문자가 모두 부처님의 말씀이라 하였기에 더욱이 외도의 책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선생께서 석씨의 가르침을 높은 자리에 두고, 유가와 도가를 그 말단에 두는 것은, 그 형세에 비롯하지 않고 다만 성인을 비방하는 것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가 『한서』를 인용하여 질문하는데 나 또한 다시 『한서』로써 대답해 주겠노라.
『후한서』 「서역전」에서는 장건(張騫)이 천축은 그 땅이 습기가 많고 무덥다고만 일렀으며, 반용(班勇)22)은 신독국(身毒國)을 열거하고, 바로 부처님을 받들어 살생하지 않았으되 정문(精文)ㆍ선법(善法)ㆍ도달(導達)의 공(功)에 대해서는 전하여 기록한 바가 없다.
내가 그 이후의 후설(後說)을 듣자 하니, 그 나라는 중토(中土)가 평탄하고 넓으며 옥촉(玉燭)과 4시(時)가 고르고 평화로운 데다 신령스러운 지혜가 운집하여 현자가 연이어 태어나며 신기한 자취가 기이하다 한다. 그 도리가 사람의
경계를 끊었으나 영험에 감득하여 밝게 드러나서 일마다 하늘 바깥을 벗어났다. 그러나 장건(張騫)과 반초(斑超)가 이를 듣지 못했다고 어찌 그 도가 닫혀 있다가 운수가 열려서야 그 잎사귀가 무성해졌다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경전이 이다지도 많겠는가?
한나라 때 초국(楚國)에서 재계하고 재를 올리는 일이 무성했었는데, 환제(桓帝)가 다시 꽃과 보개로 이를 꾸몄으나 미의(微義)를 새기지 못하고 단지 신령스럽게만 여겼다. 어짊을 좋아하여 살생을 싫어하고 폐단을 내쳐서 착함을 기리기에 이로써 어질고 달통한 군자들이 그 법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큰 것만을 좋아하였어도 다를 것이 없는 데다 기이한 변론이 이를 데 없었으니, 비록 추연(鄒衍)의 하늘을 논하는 변론이나 장주(莊周)가 달팽이 뿔을 논하는 것조차 그 만 분의 일도 개괄하기에 충분치 않다. 『한서』에 수록된 것을 살펴보면 징조가 서렸던 일에 겸하여 그 미의(微義)를 취하되 이를 새기지 못하고 단지 도서(道書)의 부류라고만 일렀다. 그 신기함을 말하며 영험을 감득하였다고 하나 그 말과 이치가 천표(天表)를 끊었으니, 4장(藏)을 두루 살피면서 2제(諦)를 함께 개진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9도(道)를 통틀어 논하더라도 부처님 말씀 아닌 것이 없다. 다시 별도로 3승(乘)을 밝혔으니 유가와 도가는 실로 그 유가 아니다. 이처럼 내가 그 증거를 명확히 하였어도 네가 시원하게 통하지 못하는구나.”
(9) 복법비로(服法非老)거룩함을 끊고 슬기를 버리는 것은 노자의 마음이다. 황건(黃巾)과 엽복(葉服)은 장(張)씨의 법이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경전에서는 석가의 성불(成佛)이 이미 미진수겁(微塵數劫) 이전이라는데, 혹 유림(儒林)의 종조이기도 하고, 또는 국사(國師)의 도사이기도 하니, 참으로 불도(佛道)의 그윽함이 부계(符契)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정법행경(淸淨法行經)』에서는 ‘부처님께서 세 사람의 제자를 보내어 진단(震旦)을 교화한다고 말씀하시며, 유동보살(儒童菩薩)을 저쪽에서는 공구(孔丘)라 부르고 광정보살(光淨菩薩)을 저쪽에서는 안연(顔淵)이라 부르고, 마하보살(摩訶菩薩)은 저쪽에서는 노자(老子)라 부른다’고 합니다. 선생께서 다르다고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사사로운 게 아닌가 합니다.”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도(聖道)는 허적(虛寂)한지라 그 원통(圓通)한 감응이 방위가 없다. 방위 없는 감응을 이와 같은 군품(群品)에게 내리되 기국(器國)에 깊고 얕음이 있듯이 감통에도 두텁고 옅음이 있다. 그러므로 모양 없는
모양으로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말 아닌 말로써 8극(極)에 가득하다. 실답게 진사(塵砂)에 응하는 것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여덟 가지 모양으로 감통을 이루고 쌍림(雙林)에서 멸도(滅度)를 드러내는 것이 대도(大道)이다. 방편으로 육도에 들어가 그 자취를 거두고 그 빛을 무디게 하는 것이 소도(小道)이다. 소도는 괘(卦)를 그려 4시(時)를 다스리기도 하고, 또는 파종을 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거나, 또는 정벌을 일으켜 난리를 평정하거나, 또는 예를 행하여 만물을 훈계하거나, 또는 허무(虛無)를 말하여 번영을 낮춰 보거나 또는 유(有)를 논하여 공적(空寂)을 중하게도 하는데, 어떻게 노생(老生) 홀로 한 자취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수미사역경(須彌四域經)』에서는 보응성(寶應聲)보살을 이름하여 복희(伏羲)라 부르고 보길상(寶吉祥)보살을 이름하여 여와(女媧)라 부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도사는 장릉(張陵)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바로 귀도(鬼道)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노자와는 관련이 없다. 어떻게 이를 아는가 하면, 이응(李膺)이 『촉기(蜀記)』에서 말하기를, ‘장릉이 전염병을 피하여 구사(丘社) 가운데서 귀신을 부리는 술서(術書)를 얻었는데, 이로써 귀신을 부리는 법을 터득하였다가 나중에 큰 뱀에게 물려 죽었으나 제자들이 승천하였다고 망령되이 기술하였다’고 한다.
『후한서』에서는 패주(沛州) 사람 장로의 어머니가 자색(姿色)이 빼어난 데다 귀도(鬼道)를 익혀서 바로 유언(劉焉)의 집에 왕래하였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익주(益州) 자사 유언이 바로 장로를 임용하여 독의사마(督義司馬)로 삼았다. 장로가 별부사마(別部司馬) 장수(張修)와 더불어 군사를 동원하여 한중태수(漢中太守) 소고(蘇固)를 죽이고 사곡(斜谷)을 끊고 한실(漢室)의 사자를 죽였다. 장로가 한중을 얻게 되자 바로 장수를 죽이고 그 병조(兵曹)를 거느렸으니 마침내 한나라 조정의 역적이 되어 황건을 쓰고 누런 도포를 입었다.
장로의 자는 공기(公旗)인데 처음에 조부 장릉(張陵)이 순제(順帝) 때에 촉으로 가서 학명산(鶴鳴山)에서 도를 배웠다. 부서(符書)를 조작하여 백성을 미혹시켰는데 그 도를 받는 이마다 쌀 다섯 되를 냈기에 세간에서는 쌀도둑이라 불렀다.
장릉이 그 아들 장형(張衡)에게 전하고 장형은 장로에게 전했는데, 장로가 스스로 천사군(天師君)이라 자칭하였다. 배우러 오는 이는 처음에 귀졸(鬼卒)이라 이름하고 나중에는 제주(祭酒)라 부르면서 제주가 각각 부중(部衆)을 통솔하였는데, 대부분 치두(治頭)라 이름하였다. 모두 가르침을 굳게 믿어 허황되다는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병이 있으면 단지 수질(首絰)을 두르게 하였다. 제주가 각각 동로(同路)에 의사(義舍)를 이룩하고 정자를 지으며 쌀과 고기를 마련하여 행인들에게 공급하였는데, 먹는 이가 그 양대로 넉넉히 취하게 하되 많이 먹으면 귀신이 사람을 아프게 한다고 하였다. 법을 어기는 자는 먼저 세 번 영을 내리고 그 후에 형벌을 행하였다. 장리(長吏)를 두지 않고 제주로서 서강(西羌)을 다스렸으니 오랑캐들이 믿고 따랐기에 조정에서도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에 바로 장로를 진이중랑(鎭夷中郞)으로 제수하여 그 공헌(貢獻)을 혈통케 하였다.
장로가 한중에서 30년이나 세력을 뻗쳤으니 헌제(獻帝) 건안(建安) 20년에 조조가 이를 정벌하여 양평(陽平)에 이르렀다. 장로가 한중을 내어 놓고 항복하려 하였으나 그의 동생 장위(張衛)가 이를 듣지 않고 병졸 수만을 거느리고 관문을 굳게 지켰다. 이에 조조가 격파하여 장위를 참수하였다. 장로가 양평이 이미 함락된 것을 전해 듣고 이마를 조아리며 항복하려 하였으나, 염포(閻圃)가 이를 설득하여 ‘지금 급히 가게 되면 그 공이 가벼우니 먼저 파중(巴中)에 의지한 연후에 몸을 의탁하면 공이 더 많아진다’고 하였다. 마침내 남산(南山) 기슭으로 도망쳐 창고를 모두 불 지르고자 하였으나 장로가 ‘내가 장차 명(命)을 나라에 의탁하고자 하였으나 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늘에 이르러 예봉을 피하고자 하는데 나쁜 뜻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창고를 봉해 두고 떠나갔다. 조조가 남정(南鄭)에 입성하고서 이 같은 일을 가상하게 여긴 데다, 또 장로가 원래 좋은 뜻을 품은 것을 알고는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장로가 바로 가속과 함께 환영 나오니 그에게 진남장군(鎭南將軍)을 배수하고 낭중후(閬中侯)로 봉했다. 그러나 장각과 장로 등이 원래 한나라 말엽에 노란 옷이 왕이 된다는 귀신의 말에 따라 마침내 노란 옷을 입었으나, 조조가 명을 내려 황색을 적색으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황건적의 난이 이때서야 평정되었다.
이 이래로 점차 폐단이 늘어나 송나라 무제 때에 모두 금지되었다. 구겸지(寇謙之)의 때에 이르러 점차 회복되었는데, 지금 대도(大道)의 치세에 풍화를 같이하게 되었으니, 소무(小巫)의 두건과 빛깔도 원래대로 고쳐야 마땅하다 하겠다. 또한 노자 대현(大賢)이 본래 귀함을 끊었으니 조정 대신과 그 복색이 달라야만 할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경학(經學)에는 옷차림새를 달리 하지 않았기에 황건과 베옷은 장로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는 국전(國典)의 명문(明文)인데 어찌 거짓이라 하겠는가?
대저 성현이 훈요를 지으면 넓으면서도 온화한데, 귀신의 엄한 다스림은 그 움직임에 춥고 따뜻함이 있다. 노자가 5미(味)를 경계하였는데도 제주가 모두들 마음대로 술을 마셨으니, 장씨가 귀신의 옷을 제작하여 누런 베옷으로 통일한 것으로 진위가 분명해서 그 완급(緩急)을 늘 볼 수 있다. 이 아래로 장씨의 몇 가지 허황된 말을 간단하게 인용하여 미처 듣지 못한 이를 깨우치는 데 쓰고자 한다.
혹 경전을 금하여 가격을 치솟게 하였던 것도[止價][『현광론(玄光論)』에서는 “도가의 여러 경전은 범부의 마음으로 잡스럽게 제작되었기에 그 가르침의 자취도 음험해서 전해지지 못했다”고 한다. 오직 금백(金帛)을 주어야 경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는 죽을 때까지도 이 경전을 구해보지 못하였으니, 이익을 탐하여 자비가 없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었다. 또 그 방술조차 더럽고 깨끗하지 못하였는데, 치아를 두드리는 것을 천고(天鼓)라 하고, 침을 예천(醴泉)이라 하고, 말똥을 영신(靈薪)이라 하고, 늙은 쥐를 지약(芝藥)이라 하였으니, 이런한 도를 구한다고 해도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혹 망령되게 진도(眞道)라 이른 것도[『촉기』에서는 “장릉이 학명산(鶴鳴山)에 들어가 자칭 천사(天師)라 하였다” 한다. 한(漢)나라 가평(嘉平) 말엽에 큰 구렁이에게 물려 죽었는데 아들 장형(張衡)이 이리저리 찾아보아도 찾지 못하자, 청의(淸議)의 기평(譏評)을 두려워하여 방편으로 영화(靈化)의 자취를 남기고자 학의 발자국을 석벽 위에 새겨 놓았다. 광화(光和) 원년(178)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고하기를, “정월 7일에 천사가 현도(玄都)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과 산적들이 이를 날조하여 전하되, 그 죽은 이를 팔아 산 자를 이롭게 하였으니, 대역죄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었다], 또 기(氣)를 머금어 죄를 풀어 준다거나[황서(黃書)를 망령되이 사용하는데, 그 주문은 근거할 게 없는 데다, 명문(命門)을 열어 진인(眞人)의 영아(嬰兒)를 감싸고 용처럼 엎드리고 호랑이처럼 어우르며 남녀가 노는 일이 모두 황서에 쓰여 있다. 삼오칠구(三五七九)로 하늘을 망라하고 땅을 거둔다고 꾀어서 선비와 부녀자가 이에 엮어 금수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하는데, 이를 써서 재난을 막는다는 것이 어찌 가당한 일인가], 또 종교를 빙자하여 난리를 일으키거나[귀도를 앞세워 난을 일으켜 황건(黃巾) 귀도(鬼道)의 해독이 한실(漢室)에 미쳤다. 손은(孫恩)이 선도(仙道)를 구하고자 하다가 그 화가 황진(皇晋)에까지 미쳤으니,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해치면서까지 천하를 미혹케 하였다], 또 적장(赤章)과 황서(黃書)로 덕을 베어 내거나[7대 조상을 이롭게 한다면서 이를 면하고자 모래를 짊어졌다. 종이를 낭비하며 태상(太上)에게 주장(奏章)을 올렸는데, 술일(戌日)과 진일(辰日)에는
태상이 들어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태상이 들어 주지 않으면 백성이 억울하게 죽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가련하기만 하구나], 또 귀신이 두렵게 한다고 부적을 채우거나[왼쪽에 태극장(太極章)을 차고 오른쪽에는 곤오철(昆吾鐵)을 찼다. 해를 가리키면 그 비춤이 멈춘다 하고 귀신을 가리키면 천 리 이내는 피로 물든다고 하였다. 만약 황서(黃書)와 적장(赤章)을 받게 되면 바로 영선(靈仙)이라 하였다], 또 백성에게 강제로 수(輸)와 과(課)를 부과하거나[『촉기』에서는 그 도를 받는 이에게 쌀ㆍ고기ㆍ무명ㆍ비단ㆍ물건ㆍ붓ㆍ종이ㆍ돗자리ㆍ오색 비단을 바치게 하였다. 나중에 점점 사악해져서 쌀 따위를 바치는 백성을 점점 늘려 나갔다], 또 묘문(墓門)을 열어 두거나[좌도(左道)의 기(氣)가 남아 있다고 종묘의 문을 열어 두었다. 춘분과 추분마다 부엌에 제사 지냈고, 동지와 하지 양지에는 세속과 같이 제사 지냈다. 먼저 치록(治錄)ㆍ병부(兵符)ㆍ사계(社契)를 받았으나, 모두 군(軍)ㆍ장(將)ㆍ이(吏)ㆍ병(兵)이라 일렀으니, 참으로 교계(敎戒)하는 이치랄 게 없었다], 또 헛된 고행이 액운을 막는다거나[도탄재(塗炭齋)도 장로에게서 생겨난 일이다. 노새가 끄는 연자방아로 갈아 낸 황토를 얼굴에 칠하고 머리에 발라 땋아 내렸다. 의희(義熙) 초년에 이르러 왕공(王公)조차 조회(朝會)를 생략하고 이것을 발랐다. 오(吳)나라 육수정(陸修靜)이 진흙을 이마에 바르면서, 이같이 하여 고액을 넘긴다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또 꿈속에서 죄를 지었다가거나[꿈에, 예전에 죽은 이들을 보고 변괴라 이르면서 귀신을 불러 먹이며 군병들에게 월장(越章)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경거망동하여 흉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황신(黃神)과 월장(越章)을 만들고서 이를 지니고 다니며 귀신을 죽였다. 적장(赤章)을 만들어 이를 지니고 다니면서 사람을 죽였다. 속정(俗情)을 기쁘게 하는 것에만 급급하여 죄의 재앙을 계산하지 않았으니, 암암리에 나쁜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이 참으로 사악함의 극치라 하겠다]. 이 같은 것은 모두 3장(張)의 귀법(鬼法)이지, 어찌 노자의 뜻이라 하겠는가?
상대(上代)로부터 부견(符堅)의 요(姚)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중 스님들을 도사(道士)라고 불렀다. 구겸지에 이르러 처음으로 도사라는 명호를 훔쳐다 사사로이 제주(祭酒)라는 이름과 바꿨으니, 그 같은 일은 『요서(姚書)』에 간단하게나마 적혀 있으므로 누구나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법행경(法行經)』이란 것을 번역한 사람이 없다면 비록 의과(疑科)에 편입하였다 하더라도 그 넓은 뜻을 해치지는 않는다. 마하가섭(摩訶迦葉)은 석가의 제자로서 도를 이어받아 널리 찬양하였는데 어찌 3장(張)의 부록(符錄)을 얻고자 하였겠는가?
궤변을 노자의 말에 의탁하여 헛된 말만 주워 모아 서로 떠받친다고 한다. 다시 사실에 근거하는 말로 그 헛된 수작을 증명하려고 하니 참으로 개탄스럽기만 하다. 이를 깊이 살피기만 하여도 다행이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도가(道家)를 잘 살펴보면 그 품위에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노자의 무위(無爲)이고, 두 번째가 신선의 이복(餌服)이고, 세 번째는 부록의 금염(禁厭)입니다.
그 장식(章式)으로 나아가면 대체적으로 세밀하고 조잡함이 있어서, 조잡한 것은 살귀(殺鬼)로써 사람을 염매하는 것이고, 세밀함은 수련을 통하여 시해(尸解)하거나 수명을 늘리는 것입니다. 다시 청록(靑綠)이 있어서 이를 받자면 금백(金帛)이 필요합니다. 왕후가 이를 받게 되면 연조(年祚)를 늘려 국조(國祚)를 이롭게 하고, 서민이 이를 받으면 몸이 가벼워져 질병이 없어지는데, 선생께서는 어째서 이런 것은 논하지 않으시고 오직 비루하다고만 여기십니까?”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대의 말이 어찌 이리 비루한가?”
실로 왕이 일으키는 제작(制作)이란 사사로이 애써서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영명(靈命)이 있어 하늘과 사람이 응해야 한다. 부록과 서응이 내리지 않음이 없어서 상대(上代)에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용봉(龍鳳)과 귀린(龜麟)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제왕의 부록이다.
지금 대주(大周)가 우내(宇內)를 다스려 역수(曆數)를 품고 도략(圖略)을 받으니 해돋이가 신묘해지고 벼락이 치며 별이 떨어졌다. 위로는 구실(衢室)에 떠들썩하고 아래로는 영대(靈臺)에 거두어졌다. 저와 같은 3광(光)을 나열하고 2병(柄)을 움직여 그 덕을 종고(終古)와 같이하니 축생과 식물마저 신령함을 드러냈다. 그 어짊이 2의(儀)에 나란히 하여 유명(幽明)조로 제수를 올려 제사지낸다. 그러므로 진용(眞容)이 상을 표하되 연유(淵猷)를 비추고, 상망(象罔)을 구하되 미혹되지 않고 어묵동정(語黙動靜)을 닫아서 이름과 말을 내치니, 유(有)와 무(無)를 넘어서서 피안과 차안을 뛰어넘지 못한다. 만기(萬機)가 추구(蒭狗)와 같아서 이를 유(有)라고 이르지도 못한다. 효성스럽고 자비로움으로 억조(億兆)의 여서(黎庶)에게 자비를 베푸니 이를 무(無)라고 이르지도 못한다. 4해(海)가 한 집안이니 이를 저곳이라 달리 이르지도 못하고, 9주(州)가 넓고 넓으니 이를 이곳이라 부르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이에 떠도는 이는 그 깊고 얕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를 밟고 다니는 이는 그 두텁고 옅음을 다하지 못한다. 삼족오(三足烏)와 구미호(九尾狐)와 빨간 참새[赤雀]와 녹색 거북[綠龜]의 좋은 서상이 때 아니게 찾아오니, 이야말로 대도의 넓은 어짊이 그 빛을 사표(四表)에 가득 채웠다. 이에 경사스러운 서령(瑞靈)이 모두 모여 국조(國祚)를 두터이 하여 끝이 없게 하는지라, 어찌 성덕(聖德)이 맑고 편안하지 않겠는가? 천조(天朝)의 많은 선비들조차 귀록(鬼錄)의 말을 미더워하는데 무격(巫覡)의 말을 전하는 것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예전에 신(神)이 밭으로 호(號)를 내렸던 것은
처음에 밭을 구했던 뜻과 같고 백성들이 조(趙)에게 참새를 바쳤던 것은 처음에 작위를 받은 징표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 모두 항간에 떠도는 비루한 말일진대, 그대가 어찌 이런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가?
그러나 황제의 존귀함은 하늘과 사람간의 의리를 다하는 것이고 왕자(王者)라는 이름은 패공(覇功)의 업을 다하는 것에 있다. 신종(神宗)에게 명을 받아서 환우(寰宇)에 그 풍화를 넓히고 산악(山嶽)에 봉선(封禪)하여 마침내 공을 이루어 천지에 보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귀신의 말로 경륜의 시초를 삼은 것을 보지 못했고 또한 괴이한 말로 그 종지를 원대하게 이룬 적이 없었다. 생민(生民)을 미혹시키고 왕의 교법을 손상케 하니 진도(眞道)와 속세(俗世)를 어지럽혀서 참다움으로 돌아가도 따를 바가 없이 하였다. 오직 공자(孔子)는 그 명을 아는 것을 귀히 여기고 백양(伯陽)은 숭상하는 것을 내쳤는데 어떻게 귀신의 부록을 얻었다고 그 수명이 늘어나기를 기대하겠는가?
만약 이것을 받으면 반드시 이롭다고 말하니, 지금 부적을 지니고 있는 도사들이 모두 장수해야 하고 부록이 없는 생민은 마땅히 그 수명이 짧아야만 하는데도 실제로 이와 같은 징조가 없으니, 대체 무슨 도가 있다 하겠는가?”
(10) 명전진위(明典眞僞)두 편의 경(經)은 실재하는 말이기에 참되다고 할 수 있지만, 3황(皇)은 날조된 것이기에 그르다고 한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노자의 『도덕경』 5천 자는 가장 얕은 것이고, 『상청(上淸)』의 삼통(三洞)은 깊고 그윽한 것입니다. 또 『영보(靈寶)』의 존경(尊經)은 천문옥자(天文玉字)로서 9류(流)를 뛰어넘고 백씨(百氏)를 넘어섭니다. 그런데 유가가 도가를 통솔한다 하니,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도덕경』은 소박하나 존중할 만하고, 장생(莊生)의 「내편(內篇)」은 그 사표로서 통솔할 만하다. 이 외에 제작된 것은 범부의 속정에서 비롯한 것으로 『황정(黃庭)』이나 『원양(元陽)』은 『법화경(法華經)』을 주워다가 도(道)란 말로 부처를 바꾼 것이니 고쳐 쓴다 하여도 참으로 치졸하다. 『영보』는 장릉이 창작한 것으로 오나라 적오년(赤烏年)에 처음으로 나왔다. 『상청』은 갈현(葛玄)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宋)나라와 제(齊)나라에서 유행되었다. 성인이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살펴보면 원래 권화(勸化)하자는 것인데 천문(天文)의 큰 글씨가 어떻게 이것을 새겨 낼 수 있겠는가?
고문(古文)의 대소(大小)는 두 가지 전서(篆書)에서 시작되어 그 사례를 구하더라도 모두 들어맞지 않는다. 양평(陽平)의 귀서(鬼書)를 이곳에서 살펴보면 진(晋)나라 원강(元康) 연간에
포정(鮑靖)이 『삼황경(三皇經)』을 날조하였다가 주살된 일이 『진사(晋史)』에 나와 있어 후세 사람들이 이것을 피하여 삼통(三洞)으로 고쳤다. 그 이름이 변하였더라도 그 바탕이 남아 있어 3황을 밝혀 종극(宗極)으로 삼은 것에 불과하다. 이 같은 말은 모두 범부의 말에서 나온 것이기에 가르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인의 입과 관련이 없는데 어떻게 전경(典經)이라 하겠는가? 장씨와 갈홍의 무리가 모두 잡스러운 부금(符禁)으로 세속을 교화한다면서 기이하고 황당한 것으로 밝음을 거스르고 무위(無爲)라 이르니 참으로 슬프구나.
어찌 벌레자국을 가리켜서 창힐(倉頡)의 글과 비하려 하고 썩은 우유를 감로와 견주려 하는가[장로의 『촉기(蜀記)』에 따르면 24치(治)가 있다는데 양평(陽平)을 다스린 것이 가장 큰 것이라 한다. 지금 도사들이 장초(章醮)를 쓰고 부염(符厭)을 모으면서 모두 양평이라 부르는 것은 그 근본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상청(上淸)을 통현(洞玄)으로 삼고 영보(靈寶)를 통진(洞眞)으로 삼고 3황(皇)을 통신(洞神)으로 삼아 이를 삼통(三洞)이라 이른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도덕경』이 심오하면서도 간단한 것은 원래가 이근기(利根機)의 사람을 제접(提接)하고자 함이고, 불경이 널리 드러내는 것은 근본적으로 둔근기(鈍根機)의 선비를 건져 내고자 함입니다. 이치를 다하여 그 일을 징험해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석씨의 전적은 용솟음치듯 그윽함을 드러내면서 이를 갈무리하였으니 현장(玄章)은 넓고 넓어 간략하면서도 모두 통하였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이근기의 사람에게는 간단하게 설명하니 그 이치를 바로 터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근기의 사람에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외워서 지니게 하려는 것이고, 둔근기의 사람에게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은 외워서 지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둔근기의 사람에게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이치를 설명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반야(般若)의 한 자리와 같은 것은 현(玄)을 영취산에 펼쳐서 그 모든 것을 이익되게 하는 것에 이르러서 수십 주(周)나 되었다. 지혜로운 전적도 이와 같아서 여타의 전적도 모두 매한가지이다. 형통하되 그 말을 자세히 하는 것은 둔근기에 달려 있는데 어찌하여 거짓말이 이리도 심한가?
향성(香城)의 금간(金簡)과 용궁(龍宮)의 옥첩(玉牒)으로 천상과 인간의 경전을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8음(音)의 부(部)와 질(帙)은 그 수가 끝이 없으나 12부로 갖춰서 모두 다하지 못함이 없다. 시 300수를 개괄하여 한마디로 이른 것도 이 같은 예로써 그 넓으면서 간략한 바를 알 수 있다. 도가의 경전을 살펴보면 36부(部)가 넓다 하나 넓기만 했지 간략하게 거두지를 못했으니, 바로 둔근기에게 어떤 이로움이 있을 리 있겠는가?
넓더라도 간략하게 할 수 있으면 넓기만 한 게 아니고, 간략하게 하더라도
넓힐 수 있으면 간략한 게 아니니, 참으로 석씨 전적의 깊이가 이와 같다.”
(11) 교지통국(敎旨通局) 전(典)이 세간의 다스림을 넉넉히 하되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좁다고 한다. 왕법의 교화에 가까우나 멀리 출세를 기약하기에 멀다고 한다.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다.
“주공과 공자가 가르침을 세워 위를 편안히 하고 아래로 백성을 다스려 그 풍속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노장은 현도(玄道)만을 말하는지라 순박함으로 되돌려 무위를 기릴 수 있으니 교화하기에 족하다고 할 수 있는데 어째서 호나라 경전을 빌리겠습니까?
또 비녀를 뽑고 머리카락을 잘라내어 모습을 해치고 성씨를 바꾸니, 저와 같은 억센 오랑캐는 교화할 수 있으나 중화에 펼 수는 없습니다. 마차가 육지를 다닐 수 있으나 물 위에 뜨지 못하고, 배가 물길을 다니되 육지에서 짐을 싣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는 황당한 것만 많아서 조짐이 없는데도 지옥으로 두렵게 하여 겁 많은 이를 떨게 만들고, 천당으로 꾀어내어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헛되이 바라게 합니다. 멋대로 미진수(微塵數)의 겁(劫)을 말하면서 일찍이 멀지 않다고 이르고, 멋대로 항하사(恒河沙) 세계를 말하면서 크지 않다고 말합니다. 또 가난함은 인색함에 연유하고 부자는 보시에서 온다고 하니, 부귀는 공경에 기인하고 빈천은 오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비롭고 어질어서 살생하지 않으면 수명이 늘어나고, 생명을 많이 해치고 물고기를 잡거나 짐승을 잡으면 해마다 나이가 줄어든다 운운합니다.
그 말하는 것을 검토해 보면 서로 맞아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보시를 좋아하고 목숨을 해치지 않는 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가난한 채로 일찍 죽고, 욕심도 많고 살생을 많이 한 이는 부자이면서도 장수를 누립니다. 선정과 엄격한 계율을 지키더라도 병에 걸리나 살생을 많이 하면 책봉(冊封)과 상은(賞恩)이 융성해집니다. 고뇌가 미혹에서 생긴다는 말은 미덥더라도 작위(爵位)와 녹봉은 살생에서 얻어지는 것이기에 이는 마치 꿀을 심어 갈대가 자란다는 것과 같습니다. 어미와 자식이 서로 떨어지게 하는 것이 마치 황소의 털에서 부들풀이 생겨난다고 하는 것과 같아서 인(因)과 과(果)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비록 업보(業報)를 말하나 마음에 짚이지도 않으니 헛되이 미래를 말하여 그림자를 붙잡으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자연에서 부여받는 것이 도견(陶甄)23)과 같지 않다 하며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두 홀로 화생(化生)하는 것이 잠깐 사이라 스스로 있는 듯하면서도 없어서 길하고 흉한 것은 운세에 따른 것입니다. 헤어지고 만나는 것이 내가 아니라 하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 정신도 없어지는 것이 마치 등잔이 꺼지면 밝음도 함께 없어짐과 같으니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헛된 말끝에 쓸모없이 그 발걸음만 고되게 하여 징험할 수 없는 가운데로 치닫게 됩니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 말이 어찌 그리 비루한가? 참으로 구덩이나 우물 속에 빠져서 한쪽만을 지키려 드는구나. 맹자가 ‘사람들이 아는 바가 사람들이 모르는 것만치 미덥지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내가 너에게 말해 주겠다.
옛날에 대도(大道)를 밝히는 이는 다섯 번 변하여야 그 형체와 이름을 낼 수 있고, 아홉 번 변하여야 상주고 벌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방내(方內)는 점진적으로 차례 맺어지는 것이기에 갑자기 이루지 못한다. 낚시질하고 사냥하는 것을 시세에 따르게 하여 사민(四民)의 난폭함을 금하였고, 3구(驅)24)의 예절로써 왕의 어진 자취를 드러내었으니 참으로 아름답다 하겠으나 선을 다하지는 못했다.
선생(先生)이 그 기국(器局)을 제작하며 환우(寰寓)라 이른 것을 살펴보면 하늘을 열둘로 나누고 들판은 유사(流砂)를 끝으로 하였다. 땅을 9주(州)로 나누고 서쪽은 흑수(黑水)에 막혀 있으니 그 논하는 바가 지나간 일은 빠뜨리고 미래를 생략했는데, 그 한 생(生)에 머물러 3세(世)를 논하지 않았다고 어찌 성인들이 이를 몰랐겠는가?
가연(嘉緣)을 믿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으니, 석가가 그 근원을 다하는 참다운 외침을 발하고 대비의 넓은 자애를 펴서 위로는 성인에 이르고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그 행실을 평등히 하여 살생조차 하지 않았다. 지극히 어진 사람이다. 이처럼 도(道)로써 진도와 속세를 끌어안고, 이치로써 정령(精靈)을 철들게 하였으니, 인수(仁壽)를 보리(菩提)로 옮기고 교의(敎義)를 권실(權實)로 섭렵해서 허무(虛無)를 근본으로 삼는 이에게는 공공(空空)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유(有)를 남겨 두는 이는 계학(戒學)과 정학(定學)의 권(權)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지혜의 빛이 휘황하기에 장왕(莊王)이 이 때문에 야밤이 환해지는 것을 보았다. 적심(赤心)이 넘쳐흘렀기에 명제(明帝)가 이 때문에 신령스러운 꿈을 꾸었다[춘추좌전(春秋左傳)』에서는 노나라 장공(莊公) 7년 갑오년 4월 신묘일 밤에 항성(恒星)이 보이지 않고 유성(流星)이 비처럼 쏟아졌다고 하는데, 바로 주나라 장왕(莊王) 10년이다. 『장왕별전(莊王別傳)』에서는 왕이 바로 주역의 서죽을 뽑아 보고는 “서역에 금빛 사람이 세상에 나왔으나, 이는 중화의 재앙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불경에 따르면, 여래가 4월 8일에 태중에 드시어 2월 8일에 태어나셨고 또 2월 8일에 성도하셨다고 한다. 태어나실 때와 성불하실 때 모두 광명을 발하였다고 하면서 세상에 나신 때가 바로 성불하신 날이라고 한다. 주나라는 11월을 정월로 하였으니, 춘추에서의 4월이 바로 중하(中夏)의 2월이다.
천축에서 정월 쓰는 것에 따르면 중하(中夏)와 같다. 두예(杜預)가 진(晋)나라의 역법(曆法)을 써서 계산한 바에 따르면 신묘년 2월 5일이다. 공봉(共奉) 동충(董忠)이 노(魯)나라 역법을 써서 계산한 바에 따르면 바로 2월 7일이다. 전대 주나라의 역법을 써서 계산한 것에 따르면 바로 2월 8일이다. 구마라집(鳩摩羅什) 법사의 연기(年紀)와 「석주명(石柱銘)」에 따르면 『춘추좌전』의 기록과 맞아 떨어진다. 여래는 주나라 환왕(桓王) 5년 을축년에 태어나시어 환왕 23년 계미년에 출가하시고, 장왕(莊王) 10년 갑오년에 성불하시고, 양왕(襄王) 15년 갑신년에 멸도하셨으니, 지금으로부터 1,205년 전이다].
참으로 형통하여 그 감득을 보태면서 인연 따라 깨달음을 열어 주되, 그 운(運)이 백령(百齡)에 이르러 만겁토록 균등히 하였다. 마침내 진나라 경제(景帝)가 서쪽으로 사신을 보내 마등(摩滕) 스님이 동쪽으로 오게 되었다. 도(道)가 황한(皇漢)의 조정을 빛내고 그 훈요가 영평(永平)의 사직(社稷)을 베풀었으니 만물이 빛을 내지 않고 사람은 풀처럼 드러누웠다. 바야흐로 꽃을 피우매 바로 어두워지고 문물이 퍼짐에 드러나지 못함을 알 것이다. 네가 처음에 같다고 한 것도 그 차이를 가리지 못한 것으로, 이로써 그 처음이 같은 듯하여도 같지 않고 그 끝이 다른 듯하여도 다르지 않음을 알 것이다.
어째서인가 하면 순일한 도를 닦는 이는 세속을 되돌리고자 애쓰는 법이다. 세속을 다시 되돌릴 수 있으면 순일해질 것인데, 세속으로 되돌리는 모범은 삭발하는 일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삭발하여 그 자태를 훼손하는 일이야말로 고매한 소박함을 남기는 것이며, 부모를 하직하고 애정을 끊는 일은 성인의 성스러운 곳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욕심을 털어 내는 것이 그 시작하는 마음이고 형해(形骸)를 입는 것이 과보의 끝맺음인데, 어찌하여 삼계에 연연할 것이며, 어떻게 육도에 연이어 남아 있으려는가?
태백(太伯)이 문신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잘랐어도 서이(西夷)라 할 수 없고 범려(范蠡)가 성을 바꾸고 이름을 고쳤어도 어떻게 동하(東夏)가 아니라 하겠는가? 가까이는 천승(千乘)을 사양했기에 『논어』에서도 그 덕이 지극하다고 칭찬하였으며, 멀리는 9택(宅)을 하직했으니, 어찌 씨족(氏族)의 소소함에 얽매이겠는가?
그러므로 『아함경(阿含經)』에서는 ‘4성(姓)이 출가하여 동일한 석씨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장자』는 배와 수레로써 이를 비유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예법에는 들고 남이 있고 음악에는 변천이 있는데, 네가 어떻게 함부로 이 국토라 이르는가?
성인의 가르침에는 방위가 없어서 사람과 하늘이 그 응기(應氣)에 어긋남이 없다. 묘한 교화는 바깥이 없는데
어떻게 중화(中華)와 이융(夷戎)이 그 마음이 막혀 있겠는가? 이로써 한 말씀으로 외치면 만품(萬品)이 고르게 깨치게 되는데 어떻게 이융과 중국이 서로 단절되겠는가? 『유마경』에서는 부처님께서 한 말씀으로 연설하시면 중생이 그 부류에 따라 각자 터득한다고 하였다.
섬개(纖介)만큼의 악이라도 겁수를 지내도록 없어지지 않고 터럭만큼의 선이라도 영원토록 그 몸에 쓰임새가 있다. 단지 화와 복이 서로 이르는지라 기복이 없지 않으나, 득과 실이 서로 이어져 그 가볍고 무거움을 명계(冥界)로 전하니, 복을 이루면 천당에 자연히 다다르고, 죄가 쌓이면 지옥에 이처럼 떨어진다. 이는 필연의 운수로서 의심할 바가 못 된다. 만약 남모르게 선을 행하더라도 그 보를 드러나게 받는 것을 세간에서는 음덕(陰德)이라 부르니 사람마다 모두 이를 미더워한다. 드러나게 악을 행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를 받게 되니, 이 같은 이치도 참으로 그럴 만한데 어찌 미덥지 않다 하겠는가?
『주역』에서는 ‘선을 쌓으면 반드시 나중에 좋은 일이 있고 악을 쌓으면 반드시 나중에 재앙이 따른다’고 하였으나, 상신(商臣)은 사악한데도 장수를 누렸으며 안자(顔子)는 서기(庶幾)25)였으나 일찍 요절하였다. 백우(伯牛)는 충화(冲和)를 머금었으나 질병으로 죽었는데, 도척(盜跖)은 불량함만 갖추었어도 몸이 날래고 강하였다. 이 모두가 선하고 악함에 징험하는 바가 없어서 이 같은 미혹한 그물이 생겨나는 것으로, 만약 석씨의 가르침이 없다면 이 길에서 영원히 곤란하게 될 것이다.
경전에서는 업(業)에 세 가지 보(報)가 있으니, 첫 번째는 현보(現報)이고, 두 번째는 생보(生報)이고, 세 번째는 후보(後報)라고 말씀하신다. 현보라는 것은 선악이 이 몸에 시초하여 그 괴로움과 즐거움을 이 몸으로 받는 것이다. 생보는 그 다음 생의 몸으로 바로 받는 것이고, 후보는 2생이나 3생이나 백천만생 이후에 받는 것이다. 그것을 받는 데는 주(主)가 되는 것이 없다. 반드시 그 마음에서 연유한다. 마음에 주재가 없어도 반드시 그 일을 감득하게 된다. 연(緣)에는 강하고 약한 것이 있기 때문에 과보에도 더디고 빠름이 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비유하자면 빚을 진 것처럼 강한 쪽이 먼저 끌어당기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이 같은 인과의 상벌과 세 가지 보의 넓은 갈래는 스스로 재주가 형통하여 식견이 통달한 이가 아니면 그
문을 얻지 못한다. 세간에서 선을 쌓고도 재앙이 따르거나 흉한데도 좋은 일이 따르는 것은, 이 모두 현재의 업보가 미치지 않는 데에 전생의 보가 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른 이도 화를 만나고 간특한 이도 복을 누린다고 말하게 된다. 어찌 이것을 의심하여 이와 같은 것에 혐의를 지우려 드는가?
안자가 수명이 짧았던 것은 그 운세가 예전에 맞닿았기 때문이고, 지금 쌓은 덕은 그 이로움이 미래에 남아 있다. 도척이 장수를 누린 것도 예전에 행한 선의 대가이니 지금 행한 악은 미래를 쇠퇴하게 한다. 보충하여 말하자면 초나라 목왕(穆王)의 자(字)가 상신(商臣)이다. 초나라 성왕(成王)의 태자였는데, 세상에서는 아비를 죽인 죄가 있으니 그 시호(諡號)를 목(穆)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이름과 실제가 차이가 난다. 이는 모두 생보와 후보의 두 가지 보에 해당하는 것으로 현보는 아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업이 잡스러우면 잡되게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가리왕(歌利王)26)이 찬제(羼提)27)를 갈랐다가 벼락에 맞았고, 말리(末利)부인이 수보리를 공양하고 왕후가 되었으니, 이 같은 부류는 모두가 현보이다. 그대가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이 부귀의 인이 되고, 계율을 지키는 것이 질병의 인이 된다고 말하더라도 경전에서 이미 그에 대해 꿰뚫은 것이 있으니 말할 만하다.
혹 악연(惡緣)이 있더라도 선업(善業)이 발동하면 살생을 많이 하고도 봉작을 받게 되며, 혹 선연(善緣)이 있더라도 악업이 발동하면 선정과 계율이 엄하더라도 병에 걸린다. 병은 악업에서 초래되는 것이지 어찌 선업을 닦아 얻는 것이겠는가?
귀하게 되는 것은 선업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살생하는 것에서 감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논서(論書)에서도 ‘이 같은 연이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그 받는 것은 부정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받는 것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 인이 변치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벼를 심으면 벼를 수확하는 것이지 보리가 생겨나지는 않는다. 보리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벼를 밭에 심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땅이 연이 되고 벼는 인이 된다.
그러나 인과가 넓고 넓어서 참으로 자세히 살피기도 힘드니 경전의 참다운 말씀에 의거하여 대략 두 종류로 표시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생업(生業)이고, 두 번째는 수업(受業)이다. 10선(十善)을 모두 행하여 인신(人身)을 모두 함께 얻는 것이 생업이다. 가난하고 넉넉하고 귀하고 천하고 똑똑하고 어리석고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은
수업이다. 그러므로 보시(布施)하게 되면 큰 부자가 되고 인색하면 가난하게 된다. 인욕(忍辱)에서 단정함을 얻고 진노에서 누추함을 얻게 되니, 이처럼 인과 과가 서로 마주한다. 업보의 이치가 아득하기에 통달한 사람조차도 이에 어두워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지라 사견이 일어나게 되는데, 혹 사람이 죽으면 정신조차 없어져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거나[이러한 것은 단견(斷見)이다], 또는 흩어지고 모임이 다하지 않아 마음에 간격이 없다고 이르거나[이는 상견(常見)이다], 또 길하고 흉하고 괴롭고 즐거움은 모두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거나[이는 타인론(他人論)의 외도들이다], 또 제법(諸法)은 자연(自然)인지라 인과에 연유하지 않는다고 헤아리기도 한다[이는 무인론(無因論)의 외도들이다]. 화복의 운수는 6부(府)에서 서로 대체되고 고락(苦樂)의 보응은 양행(兩行)에서 서로 뒤바뀐다. 이를 만나는 이는 그 짝하는 것이 없게 되니, 이로써 명교(名敎)의 책은 위에 근본하지 않고 선악의 보응은 아래에서 증험되지 않는다. 만약 세 가지 보를 살펴볼 수 있어 궁하고 통하는 분수(分數)를 볼 수 있다면 니부(尼父)도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고 중유(仲由)도 알고자 하는 것을 단념했으리라.
그러므로 문자(文子)가 황제(黃帝)를 일러 말하기를 ‘형체에 미란(糜爛)이 있으니 정신이 천화하지 못하였다. 천화하지 못한 것으로 천화를 타게 되니 그 변화가 무궁하다’라고 일렀다. 또 영부(贏傅)에서 장례지내면서 말하기를, ‘골육이 땅에 돌아가나 신기(神氣)는 없지 않음이 없다’고 일렀다. 석씨의 경전에서도 ‘식신(識神)은 형체가 없으니 헛되이 네 마리 뱀을 타고 형체는 상주하지 않는데 주인되는 정신이 무상의 집에 남아 있다’고 말씀하시니, 이 같은 것은 모두 정신이 6도(道)로 치달린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형체가 그 한 번의 생으로 다한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말이다. 경전을 믿지 못하더라도 그 헌고(軒誥)를 따져 보면 불경이 6전(典)을 뛰어넘고 9류(流)를 끊은 이유를 살필 수 있으니, 무엇으로 마음을 소통시켜 요체를 터득하며 영부(靈府)를 단련하여 근원을 다하고 교화를 이루어 수경(水鏡)에 흔적 없이 할 것인가?”
(12) 의법제의(依法除疑)법(法)에는 상계(常楷)가 있다. 사람에게 정칙(定則)이 없더라도 법에 의지하면 온갖 의혹이 저절로 풀릴 것이다.
마침내 동자가 얼굴을 찡그린 채 화를 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듣자오니 석씨의 경전이 깊다 하나 명교(名敎)에서 의논할 바가 못 됩니다. 그윽한 풍화가 너무도 아득하니 어찌 기물(器物)의 모양으로
밝힐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풍화의 흐름을 물들이는 이는 형체의 질곡(桎梏)을 벗어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마음을 삼으며, 이치의 맛을 궁리하는 것은 마음의 티끌을 없애는 것으로 마지막 생각을 삼습니다.
뜻을 굳세게 하는 이는 백이(伯夷)와 상산사호(商山四皓)와 발자취를 나란히 할 것이고, 몸을 정결히 하는 이는 엄광(嚴光)28)과 정박(鄭樸)29)과 더불어 그 자취를 같이 하니, 명예를 내치고 욕심을 없앴습니다. 그러나 석씨의 훈요는 다소 사치로 치달으니, 위로는 부모의 대를 끊고 아래로는 처첩의 분한을 덜면서도 재(齋)를 열어 효선(肴膳)의 맛을 다합니다. 또한 불탑과 사찰을 장엄하게 하여 사가(私家)의 저축을 바닥내며 군국(軍國)의 자금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문들 가운데 빼어난 이가 적어서 이와 같이 중한 은혜를 입어도 그 덕에 보답하지 못합니다. 혹 논과 밭을 일구어 농부와 함께 그 유를 같이하거나, 물건을 팔아 재물을 구하고자 상인과 이익을 다투거나, 또는 귀한 이들과 왕래하며 스스로를 자랑하거나, 또는 길흉을 점쳐서 명예를 덮어 버리니, 그 근원을 맑게 하여도 차츰 탁해져서 파도에 휩쓸려 버립니다. 내가 괴이하게 여기는 이유도 참으로 이에 있습니다. 가만히 불법으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다른 풍화를 찬양하고자 하여도 이 같은 것을 보고 나면 씁쓸해져서 마음을 씻어 내고자 하여도 의탁할 바가 없게 됩니다.”
선생이 혀를 차고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듣자 하니 인개(麟介)30)의 사물은 땅[皐壤]의 일에 통달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털과 날개 달린 족속이 어찌 파도에 흘러가는 그 형체를 가릴 수 있겠는가?
그 부류가 다르면 사는 곳도 달라지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다. 열 가지 성품이 깊고 넓어서 함생(含生)이 고르게 있고, 2제(諦)가 자세하고 깊어서 물아(物我)가 이로써 관통하니, 그 유(有)를 가리자면 9도(道)가 엄연하고, 공(空)을 말하자면 만상(萬像)이 이같이 적연(寂然)하다. 이러한 까닭에 『반야』에서 ‘색(色)이 곧 살바야(薩婆若)31)이고 살바야가 곧 색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색은 무지(無知)의 완고한 바탕이고 살바야는 모든 부처님의 신령한 비추임이다.
유(有)는 논하자면 참으로 구별을 하지 못하지만, 무(無)를 말하자면 하나이면서 둘이 아닌 게 참으로 지극하다. 노씨의 허무(虛無)는 유(有)의 바깥으로 그 이치를 늘리고, 석가는 법의 성품을 본받아 색에 즉하여
그윽함에 노닐어도 기물(器物)의 모양에 접촉되지 않으니 어떠한 연을 빌려서 이를 없앨 수 있겠는가?
색에 즉하여 법의 성품이 고요해지니 경계와 지혜가 함께 적막하기에 『반야경』에서는 가명(假名)을 깨뜨리지 않고 제법의 실상을 말씀하셨고, 『유마경』에서는 단지 그 병통만을 없애며 법을 없애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이 같은 도가 참으로 미덥다고 해도 누가 이것을 따르겠는가? 그러므로 세속의 흐름에 빠진 이를 구하고 중겁(重劫)의 깊은 뿌리를 뽑아내어 멀리 3승(乘)의 나루를 열고 천상과 인간의 길을 크게 넓힌다.
대사(大士)가 행을 세우는 것은 단도(檀度)를 우선으로 하고 종극을 표방하는 것은 사찰을 으뜸으로 한다. 보시에는 과보가 따르기에 헛된 낭비가 아니니 참으로 은혜로운 덕이 있는데 어찌 헛되다고 하는가?
정미로운 것이 부박해져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만 점차 일어나서 만물의 감회를 잃는 것이, 어찌 성인의 뜻과 관련 있겠는가? 그러므로 큰 궁궐과 옥새가 요순의 마음이 아니듯이 호화롭게 살며 맛난 것을 먹는 것이, 어찌 석가의 생각이겠는가?
지금 대주(大周)가 천하를 부려 순일한 풍화에 가피 받고 6합(合)에 도의 강령(綱領)을 떨치고 8황(荒)에 덕의 강목(綱目)을 펴니, 냇가에는 파도를 헤치는 촌부가 없고 계곡에는 한숨을 쉬는 선비가 없어서 사민(四民)이 모두 그 업을 편안히 하고 백관이 각각 그 직분을 다한다. 오곡이 밭 가운데 결실 맺고 창고마다 쌓여 있는 채로 썩어 가니, 바야흐로 땅을 두드리며 태평을 노래하고 배를 치며 그 성대한 교화를 바라보는데, 네가 어떻게 망령된 생각에 접촉되어 이를 피폐하다고 하는가? 옛 사람이 탄식하며 재주 있는 것이야말로 걱정거리라 하였는데 참으로 그 말이 미덥도다.
공문(孔門)의 3천 제자가 해내(海內)에 우뚝하더라도 이를 골라내어 4과(科)에 충당하면 그 수효가 열 사람도 채우지 못한다. 그 가운데 백우(伯牛)는 악질에 걸렸고 안회(顔回)도 일찍 죽었다. 상(商)은 인색하고 사(賜)는 재물을 늘렸고, 구(求)는 가렴주구하였고, 유(由)는 강퍅하였는데도, 세간에서 이들을 추대하여 인륜의 근본으로 삼고, 그 높은 자취를 기리며 진신(搢紳)의 사표로 삼으면서 백 대(代)가 그들의 남긴 풍화를 흠모하고 천 년토록 그 경행(景行)을 추앙하였다.
그러나 사문에 이르러서는 그 몸을 못 마땅히 여기고
그 절개를 꾸짖으려고만 한다. 대체로 머리카락과 살갗이 후사를 잇기에 부족한데도, 사람들은 이를 아끼려고만 하나 사문은 신발 벗듯이 내던진다. 이름과 지위와 재물과 여색은 유정(有情)들을 막는 것으로 사문은 이것들을 벼껍질처럼 보니, 이야말로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남이 없애지 못하는 것을 없애는 바이기에 참으로 세간을 뛰어넘는 나루이고 도를 넓히는 훌륭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세속을 벗어난 참다움을 드러내니 사사공양(四事供養)을 족히 소화할 수 있고, 그 고상한 자취를 취하면 4은(恩)에 보답할 수 있는데 어찌 그 뛰어나기가 이 정도에 그치겠는가?
곤륜산(崑崙山)은 흔히 옥이 많다 일러도 조약돌이 널려 있으며, 부수(浮水)에 금이 넘친다 하여도 어찌 흙과 돌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사문 가운데 선정을 닦고 금계(禁戒)를 지키는 이가 많더라도 다섯 가운데 셋은 계율을 빠뜨린 이가 없지 않다. 바로 도로써 그 사람을 폐하는 것이지 사람으로써 그 도를 폐하지 못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이와 같은 것을 보고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가?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법에 의지하되 사람에 의지하지 말며, 지혜에 의지하되 식(識)에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 주 임금과 도척의 발자취를 보았다고 요 임금과 공자의 흔적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달(調達)의 자취를 보았다고 묘덕(妙德)의 풍화를 잊으려 하니 지금 그대에게 그 이치를 가려서 말해 주겠다.
3승은 모두 생사를 벗어나는 그윽한 수레이지만 그 크기에 깊고 얕음이 있다. 9류(流)가 모두 우내(宇內)를 밝힌다 하나 이를 모아 놓으면 어떻게 총괄하고 구별할 수 있겠는가?
유가(儒家)의 경(經)에서는 ‘효(孝)는 덕의 근본이니 가르침이 이로써 생겨난다’고 말했다. 이미 덕의 근본이라 일렀으니 그 도는 인의(仁義)의 자취를 높이는 것으로 가르침이 이로써 생겨났고 분전(墳典)이 이로써 펼쳐졌다. 그러나 함께 돌이킨다 하여도 자취를 달리 하고 함께 다다르더라도 생각이 백 갈래이므로, 모두 효도와 자비로 총괄되는데 네가 어째서 이에 미혹하는가? 유교로 이를 통괄하는데 네가 어째서 이를 의심하는가?”
마침내 동자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잣나무 대들보로 고루광실(高樓廣室)을 짓고 보니 초가집의 누추함을 알겠습니다. 드높은 일월을 어찌 구릉 따위가 필적하겠습니까?
참다운 통발이 넓고 깊은 것을 보고서야 세간의 훈요에 가까이하게 되고 2경(經)의
진실된 말을 찾아보고서야 3장(張)의 허망함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서역에 태어나셨기에 그 형태와 위의를 보지 못하다가 가르침이 동토(東土)로 흘러서 남은 음성이나마 듣게 되었으나, 신령스러운 자취가 넓고 멀어서 마음으로 이치에 어긋난다 하였으며, 인과가 고요하고 아득한지라 참으로 명언(名言)을 끊었다 하였습니다. 지금 미욱한 소견으로 높으신 말씀을 듣고 보니 조금이나마 의혹이 풀리고 막힌 것이 녹아내리니 마치 봄철의 얼음과 같습니다. 처음으로 부처님의 경전이 망망하여 널리 2제(諦)로 거두고 유종은 큰 바위 같아서 9류(流)를 총괄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그 올곧은 말에 놀라면서도 이를 칭찬할 수조차 없습니다. 제가 참으로 불민하였으니 삼가 바라건대, 좋은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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