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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56 불교(광홍명집 7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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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7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2. 변혹편

 

5) 열대왕신체흑해

 

(15) () 순제(荀濟)

순제는 영천(穎川) 사람으로 나중에 강좌(江左:강동)에 살았다. 온갖 책을 널리 섭렵하면서 세속을 바로잡는 데에 뜻을 두었다. 처음 양나라 무제가 포의(布衣)였을 때부터 서로 알고 지냈다. 황제가 보위에 올라도 벼슬을 내리지 않자, 순제가 불평하며, “미간에 먹물을 좀 묻혔다고 격문(檄文)까지 손수 짓는구나라고 말하였기에 황제가 이를 몹시 언짢게 여겼다. 양주자사 음자춘(陰子春)을 좌천시키자, 순제가 시를 써서 증정하였는데, 그 글에서 시절의 풍속을 전한다면서 간혹 황제 노릇하는 이라고 칭했다. 이에 황제가, “저 사람이 비록 재주가 있으나 풍속을 어지럽히고 반대되는 것만 좋아하여 등용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순제가 뜻을 얻지 못하자 늘 근심 속에서 20여 년을 보냈다. 황제가 석문(釋門)을 신봉하여 사찰과 불상이 융성해진 것을 보고, 바로 그 때 상서를 올려 불교를 논하되 탐욕스럽고 사치스럽고 요망하다고 비난하였다. 또 동태사(同泰寺)를 이룩하는 비용이 너무 크니,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라고 비평하였다. 그 표문(表文)을 간략하게 적어 본다.

“3()5()은 제황(帝皇)이 으뜸으로 삼는 것이고, 4()6()는 종고시대(終古時代)의 규모(規模)입니다. 한나라 무제가 금인(金人)을 제사지내고 나서 왕망(王莽)이 신()이란 나라를 세웠고, 환령(桓靈)이 부도를 제사지내고 나서 엄수(閹豎:환관, 내시)

 

권력을 잡았으니, 삼국(三國)이 이 때부터 셋으로 나뉘어 대치하였습니다. 다섯 오랑캐가 영토를 병탄하여 의관(衣冠)이 강동(江東)으로 흩어지자, 오랑캐의 가르침이 중토(中土)에 일어나서 아비와 자식의 가까움을 멀게 하고, 군신의 의로움을 어긋나게 하고, 부부의 화목을 소원하게 하고, 친구 간의 미더움을 끊어 해내(海內)를 무려 3백 년이나 어지럽혔습니다.”

세속을 끊는다는 것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이를 서술조차 하지 못하겠으니, 이는 지나치게 편파적인 기술이다. 금인(金人)이 처음 내려온 것까지도 왕망의 찬탈 따위와 연관지었으니,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주공(周公)이 은()나라 주왕(紂王)의 머리를 벤 것이 어찌 불경(佛經)을 보았기 때문이며, 진시황이 유생(儒生)을 묻은 것이 석씨의 교화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가 붕괴되고 악()이 무너질 때는 부도를 보지도 못하였는데,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무도했던 일과 스님들의 거짓됨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이리하여 강기(綱紀)가 어지러워졌다고 운운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어지럽힐 수 있는 것이고, 부부(夫婦)와 부자(父子)를 누가 그르쳤다는 것인가?

단지 망령된 말일 뿐이기에 이를 기술하기에도 부족하다. 그러나 순제가 그같이 스님들을 미워하고 부처님을 깊이 비방한 것도 상소문을 개괄해 보면, 반드시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니, 그 또한 불법을 배척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단지 황제가 미미한 부류에 처한 자신을 발탁하지 않고 조정의 영예로운 관직을 내리지 않은 것을 미워한 것뿐으로, 비루한 말로 스님들을 모욕하고 깊은 글로 부처님을 욕되게 한 이유도, 실제로는 뜻을 달리하여 황제를 조롱한 것이었다. 말미에 이같이 조잡한 말을 여기에 실어 둔다.

순제가 표를 올려 말하였다.

옛날의 조칙을 돌이켜 보아도, 삿된 것을 기려서 그 목숨을 다시 일군다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시절마다 조상 제사에 일찍이 몸소 헌향하지 않았고, 대나무로 포()를 삼고 밀가루로 희생을 만들어 종묘를 속이니, 이는 임금[黃屋]의 존엄을 거스르고 노비[蒼頭]의 노역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요괴스러운 호나라 귀신을 예배하면서 그 몸을 기울여 탐욕스러운 대머리 도둑에게 공양하고, 삿된 오랑캐를 깊이 믿어 제()를 속이고 사()를 함부로 하니, 아마도 총명하고 정직하더라도 천복(天福)은 폐하를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제가 이 같은 말을 토한 것도 노여움이 동했기 때문이었다. 양조(梁祖)가 아침저녁으로 제사에 헌향하고, 4()가 바뀔 때마다

 

시원함과 따뜻함을 살피면서 눈물을 흘려 신하를 감동시켰으니, 그 효를 생각함이 시부(詩賦)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 때문에 경양대(景陽臺)와 지경전(至敬殿)에서 모두 문조(文祖)와 헌후(獻后)의 석전(釋奠)을 진설하였는데, 어떻게 일찍이 몸소 헌향하지 않았다고 이르는가?

그러므로 앞서의 일을 되돌려 자기 마음을 풀고자 욕하는 것이다. 대나무로 포를 삼고 밀가루로 희생을 만들어 희생으로 쓰는 곡식을 교체한 것이나, 빈채(蘋采)와 조채(藻采)로 봄철 제사를 지내는 것1)이 어찌 양조 때에만 있었겠는가?

존귀함을 굽혀 비천한 데에 나아간 것은 만대에 드문 일인데 신발을 벗은 듯이 잊어버렸으니, 이 어찌 백왕(百王)의 허구이겠는가? 행동은 8()2)을 총괄하고, 위치는 상인(上忍)3)에 이웃한 것이 아니니, 어찌 자비를 행하며 욕심을 끊는 것을 성년(盛年)에만 행하였겠는가? 오랫동안 재법을 지키며 정성을 다하되 죽을 때까지 이러하였다.

순제가 또 말하였다.

신이 청하건대, 얻고 잃음을 말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 주십시오. 석씨의 근원을 따져 보면 원래 중국에서 배척하자, 변두리로 투신하여 이매(魑魅)4)를 소탕시켰던 자입니다. 그리하여 순 임금 때에 도올(檮杌)5)을 삼위(三危)로 내쫓았고, 좌전(左傳)에서 간사한 윤성(允姓)()의 음은 연()이다.을 과주(瓜州)에 머물게 하였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두예(杜預)6)는 윤성이 음융(陰戎)의 별조(別祖)로서 삼묘(三苗)와 함께 삼위(三危)로 추방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서』 「서역전(西域傳)에는 색종(塞種)은 원래 윤성의 오랑캐이니, 돈황(燉煌)에 대대로 살다가 월지(月氏)에게 쫓겨서 총령에 머물다 남쪽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또 현도(懸度)ㆍ현두(賢豆)ㆍ신독(身毒)ㆍ천독(天毒)은 모두가 와전된 것으로, 색종(塞種)이 석종(釋種)으로 된 것도 그 실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윤성과 삼묘는 함께 살아서 가르침의 자취가 서로 화합하니, 그 석종이 충ㆍ효ㆍ인ㆍ의를 행하지 않고, 탐욕이 심하기에 이를 일러 부처라 하는 것이니, 부처란 어긋난다는 뜻입니다. 혹 발()이라고도 이름하는데, 발이란 어지럽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폐하가 중화의 융성한 후예로서 요흥(姚興)과 석씨(石氏)를 존중한 것7)은 강족(羌族)과 호족(胡族)의 규범이기에 이것이 그 취하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윤성이 돈황(燉煌)에 머무는 것이 서쪽 오랑캐라는 말을 따져 보면, 현도(懸度)와 현두(賢豆) 등은 모두 남범(南梵)이 된다. 서융은 우공(禹貢)8)에서

 

전한 것을 서술한 것인데, 현도 이하는 순제가 이에 보태어 비방한 것이다. 3()를 읽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다고 단정하는가?

대체로 현도는 북천축의 험준한 땅이니, 이곳은 밧줄을 타고 건너야 하는 곳이다. 현두와 천축은 어진 풍화가 행해져서 4()가 조화로운 것이 백옥같이 빛나기에 그 땅에는 홍수와 서리가 끊어졌다. 7()이 비추는 것이 금경(金鏡)과 같은지라, 신묘한 기틀이 날래다. 사람들이 천상의 말로써 뜻을 전하고 글자는 천상의 글자에서 나왔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서로 찬탈한 적이 없었다. 이는 땅의 중심이기에 중국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충효를 행하는데 어찌 이것을 없다고 말하는가?

순제가 말하는 내용은, 전룡(田龍)3()의 죄를 묻고 5제를 그르다 한 것과 같은데 누가 이를 귀담아 듣겠는가?

순제가 말하였다.

석가가 융족(戎族) 출신으로 옆구리에서 탄생하자 마야부인이 숨을 거두었다는데, 그 같은 일은 올빼미나 이리에게나 마땅한 것입니다. 자라나며 아비와 보위를 다투다가 편안치 못하다고, 마침내 아비를 등지고 임금을 어기며 절개를 거스른 것이 이렇게 심하기에 달다(達多)가 돌을 던지고 난타(難陀)가 활을 당겼습니다. 상도(常道)를 변혁시켜 스스로 굶어 그 형체를 해골같이 하였는데, 어찌 만물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흉악한 무리들을 모아 옷을 바꿔 입히고 삭발시켜서 헛된 말만 늘어놓았으니, 참으로 받들어 모시기에 부족합니다. 96() 가운데 이 도가 가장 탐욕스러운데도, 저와 같이 방자한 어리석은 것을 즐겨서 많은 이가 신봉하였습니다. 심지어 유리왕(瑠璃王)이 석가 종족을 토벌하는데도 구담(瞿曇)은 길가에서 이를 쳐다만 보았으니, 그 살아 있는 친척조차도 일찍이 보전하지 못하고 몰살당하여 흩어졌는데, 무엇을 구제한다는 것입니까?

이야말로 충효를 행하지 않는 것이니, 만약 천하가 이를 배운다면, 폐하조차도 스스로 거처할 곳이 없게 되므로, 이것이 그 취하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불경을 찾아보면 옆구리를 가르고 태어났다는 것도 그 이치가 예전의 경전에서 나온다. 또 천사(天師)를 파괴시켜서 그 공덕이 크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공양으로써 그를 받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 성모(聖母)되는 이가 명이 장차 끊어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태어난 지 이레가 지나 천중(天中)으로 올라가 보답하였다. 그러므로 옆구리로 태어나고 등을 갈라 태어났다는, 이와 같은 것도 올빼미나 이리와 같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함부로 활을 잡아당기고 돌을 던진 일을 빙자하여 권행(權行)을 벗어났다 하고, 임금을 거스르고 절개를 거슬렸다고 하니, 대체 무엇을 비방하고자 하는가?

스스로 굶으면서

 

외도(外道)를 개화(開化)하고 속인을 변화시켜 탐욕의 문을 조용히 하였는데도, 여러 도 가운데 불도(佛道)를 가장 탐욕스럽다 하는 것은, 오로지 욕하고자 함이다. 나라를 죽이기만 했지 보호하지 않았다고 하나, 이는 정해진 업은 없애기 어려움을 드러내려는 것으로, 여러 전적마다 이를 자세히 하여 그 이치가 묻혀지지 않았다. 순제가 이를 교묘하게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뜯어 맞춰서 글을 이루었으니, 이를 일러 재주가 있어도 거리낌이 없어야 모양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순제가 말하였다.

지금의 승니(僧尼)는 농사도 짓지 않고 짝을 이루지도 않으니, 모두 낳고 기르는 것을 끊고 임금을 우습게 알며 부모를 업신여기는지라, 예법을 거스르고 풍화를 손상시키니, 이것이 그 본받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의 이유입니다.”

순제의 이 말뜻을 살펴보면 오로지 황제 자신을 빗대고 있는 것으로, 승니가 욕심을 끊어 생을 뛰어넘으려는 것을 깊이 알고 있다 하겠다. 이 같은 이치는 따를 만한 것으로 실제로는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짝을 맺지 않고 기르는 것을 끊는다고 하여 황제의 행동을 배척하였으니, 그 논을 드러내되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스님들을 빗대어 임금을 욕하고 있는 것이다.

순제가 말하였다.

생령(生靈)에 있어서는 부부가 화합하여 남녀를 낳아 기르는 것인데, 오랑캐 법은 이에 어긋나는 데다 흙과 나무를 많이 쓰면서도 오로지 보시만을 구하니, 어떻게 이것을 크게 그르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본받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의 이유입니다.”

순제가 본받지 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일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본시 호나라 법이 음란하지 않은 데다, 또 호나라 어느 곳에 보시할 만한 진흙과 나무가 있겠는가?

사례를 들어 비평하고 있으나 부처님은 오랑캐 사람이 아니라 천축의 종족이다. 호나라는 서융(西戎)의 부류로 그 근본이 범축(梵竺)의 향리와는 다르니, 신주(神州)를 한지(漢池)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지금 한()이라는 것도 다시 검토해 보면, 양나라 부근에 그친다. 한나라가 비록 처음 황제로 봉해진 곳을 이르는 말이더라도 그 도읍이 경락(京洛)에 있으니, 그 나머지 오나라와 초나라는 중화라 이르지 않고 땅이 연이어져 서융이라 간주하였는데, 다시 서융이 변화하여 화하가 되었다. 오직 부처님의 법교(法敎)만이 색심(色心)을 끊는 것이니, 호나라와 범축의 두 종류는 이어 낳는 것을 늘 익히고 있다.

순제가 말하였다.

간사스러운 오랑캐가 거짓으로 스스로를 대각(大覺)이라 칭하고, 비구의 도당이 음욕을 자행하며 자식을 죽이니, 승니는 모두 이와 같습니다. 지렁이와 개미를 해치면서 부도를 일으키고 재물을 낭비하면서 당사(堂舍)를 구축합니다. 만약 모니(牟尼:석가모니)를 조망해 보더라도 저들이 음행을 저지르고 살인을 자행하면서도 이는 자비라고 사칭하니, 그 무리를 조망해 보면

 

실제 구제하는 바가 없습니다. 또 대각(大覺)이 군생(群生)에게 이로움이 없는데도 천하가 이를 깨닫지 못하니, 이것이 그 본받지 말아야 하는 세 번째의 이유입니다.”

이같이 크게 비방하는 것이 참으로 괴상하니, 형통한 사람이나 통달한 선비가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일마다 추악하게 날조하여 실상을 왜곡시키면서, 어찌 이 같은 것을 조망한다고 하는가?

그러나 대도(大盜)가 나라를 취하면 천하의 죄인이 되고, 음욕을 저지르고 자식을 죽이면 이는 불법의 도적이 되니, 그 혼탁함이 드러나면 바로 사국(四國)으로 쫓겨 가거나 오는 세상에 3()9)에 떨어질 것인데, 승니는 모두 이렇다고 말하니, 아무리 거짓되게 비방하더라도 이는 너무 심하다고 하겠다. 또 대각은 자비가 없다고 말하면서 또 중생에게 이로움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어리석음으로 큰 지혜를 헤아리고 성인으로 범부를 제도하여 대각이 교화를 이루는 일을 가로막아 순박한 사람이 선()을 넓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사마귀에게 수레바퀴를 가로막는 용맹함이 있음이며, 우물 안의 개구리가 구덩이 속에 막혀 있는 마음이라 말할 만하다.

순제가 말하였다.

호나라 법은 탐욕스러워 오직 재물 얻는 것만 생각하는지라 바로 3()을 행하여 만방(萬方)을 해롭게 합니다. 6()를 닦아 3()를 융성케 하는 것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그 본받지 말아야 하는 네 번째의 이유입니다.”

재물과 음식은 생을 두터이 하는 것이나 욕심 많은 이는 이에 빠지게 된다. 쌓아 놓게 되면 이를 베푸는 것은 청렴한 선비에게 늘 있는 마음인 데다, 육도단(六度檀)도 희사(喜捨)를 처음으로 삼으니, 부처님을 종조로 3보의 자리가 세워졌기에 부처님을 교주로 삼는다. 이에 정각이 자비로써 베풀어졌으니, 불법이 없다면 어찌 6()의 공()을 알 것이며, 자비의 풍화를 끊는다면, 어찌 3보의 바른 교화를 알겠는가?

순제가 그 뜻을 얻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그것에 빠져 단지 탐욕만이 늘어나 앞 다투어 사람들을 탓할 뿐이었다. 현달(顯達)하지 못하였다고 그 몸으로 막힌 것을 털어내는 것조차 싫어하니, 속세의 올곧은 선비도 일찍이 헛된 말을 하지 않는 법인데, 참으로 순제야말로 비루한 범부라 하겠다. 글재주를 함부로 놀리는데, 순제 혼자서만, 고옹(顧雍)10)이 만호(萬戶)의 봉작을 받았으나 식구들은 알지 못하였고, 제갈량(諸葛亮)3()을 상으로 받았어도 곳간에는 1()짜리 비단조차 없었고, 사안(謝安)이 백만이나 되는 반도를 평정하고도 찡그린 얼굴을 펴지 않았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가? 능인(能人)4()11)를 버리자 황제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는 이와 같은 것은 모두 실제의 기록이다. 하물며

 

그 몸을 버리고 다시 몸을 받으며 삼계(三界)를 돌아보기를 마치 감옥처럼 여기면서 오직 재물과 음식을 8()의 독사처럼 생각하였다. 여기에 의발만을 지니고 새처럼 공부(空府:하늘)를 떠돌아 막힘없이 오고 가며, 물오리처럼 강물로 떠도는 이와 같은 이들을 사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스님들이 비록 계율을 범하지 않았더라도 청정하지 못하여 이에 어긋나면 스님이라 이름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어찌 간신과 학대하는 임금을 직설(稷契)과 당()ㆍ우()와 같다 하고, 강아지풀과 가시를 좋은 묘목과 좋은 나무에 비하는가?

말을 드러내어 간언(諫言)하는 것은 맑고 흐린 것을 둘로 가르고자 하는 것인데, 한결같이 우매하고 흉악하다고 날조하여 뛰어난 선비를 누르려는 것은 이치로도 옳지 못하다. 이 때 양나라의 정치는 어질게 기르는 것을 단서로 삼았으니, 황제가 욕심을 끊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스님들은 숲 속에 깃들고 암굴을 의롭게 여겼는데, 다니다가 파리가 앉았다고 표범이나 호랑이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형통한 사람은 이치를 논하되, 이를 개괄하여 잘못은 버리고 허물은 덮어 두고자 하니, 이는 선비가 늘 애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나라의 유행(儒行) 가운데 공자 한 사람만이 장복(章服)을 훔쳤다고 꾸짖으며 당시 나라가 기울 것을 염려하였다. 스님들의 참되고 거짓된 그 권교(權敎)와 실교(實敎)는 가리기 어렵기에 오직 부처님만이 이를 아시고, 다른 이는 그 보고 듣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순제는 이를 통달하지 못했으니 번거롭게 논할 만한 가치조차도 없다. 일찍이 불탄 재를 얼굴에 뒤집어쓴 것만 개탄하면서 어찌 되돌릴 줄을 모르는가?

순제가 말하였다.

불가의 유교(遺敎)란 논밭을 갈거나 일구지 않고 재물과 곡식도 저장하지 않고, 구걸해서 먹고 얻어 입는 두타(頭陀)에 힘쓰는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수십만 대중이 아란야(阿蘭若)12)에는 관심이 없고 가르침에 따라 농사짓지 않는 이만 많기에 천하에 굶주리는 근심만이 있게 되었습니다. 가르침을 전하고 설법하지만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이 같은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아가고 물러섬에 이치를 다하지 않으니, 이것이 그 본받지 말아야 하는 다섯 번째의 이유입니다.”

순제가 유교가 있음을 알았고 또 아란야의 무리가 있음을 알았으나, 가르침을 늘리는 것은 알지 못했으니, 어찌 3보의 기업(基業)을 맡기겠는가? 단지 부처님의 덕이 장대하여 하늘을

 

공양하고자 아래로 내려와 승전(僧田)에 임하였으니, 복을 넓히고 마음을 일구면 이치가 위로 솟구쳐 오를 것이다. 가르침에는 열고 닫는 것이 있어 근기(根氣)에 따라 알맞게 제정하기에 한낱 곡식 낱알로써 도에 쓰인다고 국한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기국(氣局)을 개통(開通)하여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만약 나의 제자들이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면, 여래의 백호상(白毫相) 가운데의 한량없는 공덕을 백천만으로 나누어 그 한 몫을 취하여 내 제자들에게 공급하여 받아 쓰게 하더라도 다함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도를 위해서 출가하고, 도를 위해서 공양하고, 도를 위해서 이를 받고, 도를 위해서 복을 넓히는 것쯤은 알아야 한다. ()는 원래 허통(虛通)하기에 속세에서 따질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사공양(四事供養)을 받고서 이를 다시 부처님의 덕으로 되돌리게 되는 것이다. 경전에서 여법(如法)하게 받는 보시는 천금이라도 이를 받고, 부처님의 교화에 어긋난다면 한 잔의 물이라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이를 날조하여 오직 재물과 음식만을 탐한다고 이르는가?

또 경전에서 아상(我相)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을 받으면 어둠 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음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에 반하여 허공처럼 행하되 다함이 없어야 올바른 것이다. 이로써 마음 바깥의 경계가 따로 없고, 경계를 보는 것이 바로 마음이기에 공양과 보시에 따르는 것이다. 실로 쌓아 두고 베푸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지 바깥에 달린 것이 아니다. 경전에서 “6()13)는 마음에 있지 일에 있지 않다고 하였는데, 이야말로 바른 말이니, 이로써 인증해 보면 알 수 있으리라.

순제가 말하였다.

열반에 대한 질문을 하여 세존께서 멸도하신 이후에 경전의 가르침을 만약 얻게 된다면 파순(波旬)14)이 더불어 경을 분별한다고 하였으니, 이 같은 발문(發問)을 살펴보면 구담(瞿曇)은 해와 같이 남아 있으나 그 문도들이 참다움과 거짓을 가릴 수 없다. 하물며 중화에서 부역을 피하고자 하는 간사한 무리들이 어찌 이에 미혹되지 않겠는가?”

순제의 이 같은 말을 살펴보면 그가 아주 무식함을 알 수 있다. 그 글에서, 멸도하면 마군(魔軍)과 부처를 가리기 힘들다고 밝혔는데, 어찌 부처님의 세상이라고 기술하는가? 문인조차도 경 가운데 세 종류의 4()를 가리지 못하는데, 마군과 부처와 삿된 것과 바른 것을 살펴 정하는 것은 순제로서도 알 바가 아니기에 저 역시 이를 기술하지 않았다.

중화에서 부역을 피하는 간사한 무리가 어찌 미혹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황당한 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역을 피해 온 자가 아닌 것을 충분히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은 논하지 않고,

 

어째서 착한 것은 가리고 나쁜 것만 드러내어 이렇다 저렇다 하는가?

열반경(涅槃經)에서 부역을 피하고자 출가하여 도를 뜻하는 마음이 없다면, 내 마땅히 이를 환속시키되 국왕을 위해 사자로 삼으리라라고 말하였으니, 이야말로 바른 말이다. 어째서 이와 같은 것은 기록하지 않는가?

순제가 또 열반경을 인용하여 아사세왕(阿闍世王)15)이 아비를 해치자 기바(耆婆)16)가 그 정황을 설명하였다고 말하였는데, 부처님은 오직 이치로써 그 미혹을 없애 주시나, 세속에서는 단지 일의 결말만을 생각하여 미혹의 그물이 점점 깊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음계(陰界)에서 그 가운데에 들어가 아비를 구하여도 근본을 얻지 못하니, 오직 망상에서 아비라 이를 뿐이며, 그 실제의 사람은 이미 비켜 태어나 모해를 꾀하며 귀한 자리를 취하려 한다. 만약 앞서서 깨우쳐 아비가 본래 공한 것임을 알게 되면 어떻게 역모를 일으키겠는가?

나라조차도 본디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부처님의 개화에 연유하여야 망심(妄心)을 깨달아 지난 일을 후회하고 부끄럽게 여겨 근거 없이 얻은 것을 사양하게 될 터이다. 순제가 이와 같은 것을 통달하지 못하고 일로써 이치를 징험하여 천자가 경전에 주석붙인 일을 배척하고 신하가 반란 일으킨 것을 조롱하면서 부처는 아비가 없고, 아비가 없다는 것은 반드시 없애라는 것이라고 설한다고 일러 그 자취를 고집하여 가르침을 훼손하니, 참으로 그 어리석음을 이상하게 여길 가치조차 없다. 여타의 것도 조잡하게 비슷한 일로써 번잡한 논리를 짓는 것이 참으로 이와 동일한 예라 하겠다. 또 장융(張融)과 범신(范縝)의 삼파론(三破論)을 인용하였으니, 이는 전집(前集)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장융과 범신에 대항하는 말은 나중에 후술하는 데서 보이는데, “이로써 장융과 범신이 논을 세워도 이것을 파괴할 수 없었으니, 참으로 헛된 말이다라고 하였다.

순제가 말하였다.

예로부터 황제는 제후(諸侯)와 빈객(賓客)을 스승으로 삼아 천 년에 한 번 만난 것을 아침저녁에 본 듯이 대하였다. 현명함이 세상에 드문지라 우주 간에 홀로 우뚝하다며 지금 곧 삭발하여 천 명의 무리를 신하로 삼지 않고 수만 명이나 되는 무리들이 황제의 스승이라 칭하니, 이는 옳지 못하다. 요흥(妖興)과 석호(石扈)가 귀한 음식을 3천 곳의 절에 바치고 경궁(瓊宮) 8백여 곳에 극진히 대접을 하였어도 끝내 그 후손이 멸망하였는데, 송나라와 제나라 이래로 전대(前代)의 실정을 깨닫지도 못하였다.”

여타의 것은 스님들을 욕하는 더러운 말이기에 이는 귀를 가리기에 족하다. 이를 빗대서 황제를 저주하는 말이 분명하니, 장몽(莊蒙:莊子)의 우화가 이와 같다고 하겠다.

 

순제가 말하였다.

스님들은 그 출신이 빈천한지라 오로지 생각하는 바가 조세와 부역을 면하고자 함이기에 도에 나아갈 것을 기약하지 않고 탐욕과 음행에만 뜻을 두고, 중화의 전적을 훔쳐 내어 조권(朝權)을 침탈하는 것이 대체로 열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가 커다란 집을 지어서 몰래 임금의 거처를 흉내 내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대실(大室)을 만들고 호나라 불상을 치장하여 명당(明堂)의 종사(宗祀)와 견주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삿된 말을 널리 번역하여 그 행을 권장하고 유포시켜서 제왕의 조칙(詔勅)조차 업신여기는 일입니다. 네 번째는 비단과 무명을 받고서 천당과 5()의 헛된 과보를 파니, 이는 대군(大君)의 덕상(德賞)을 빼앗는 일입니다. 다섯 번째는 미리 뇌물을 받아 지옥과 6()의 재앙을 면하게 하니, 이는 임금의 형벌을 빼앗는 일입니다. 여섯 번째는 3()라 자칭하면서 4()에 가탁하여 앉아서 군왕을 비웃으니, 이것은 위엄의 치술(治術)을 빼앗는 일입니다. 일곱 번째로 사찰과 불상을 많이 이룩하고 승니를 멀리 득도시키는 것은 패왕(覇王)의 기틀을 정하려는 일입니다. 여덟 번째로 3()6()4()의 법집(法集)이 있는데, 이것과는 별도로 정삭(正朔)을 달리 행하여 몰래 징발하려는 일입니다. 아홉 번째는 극락을 설치하여 어리석은 소인배들을 꾀어내고 광대를 이용해 원회(遠會)로 불러내어 불국토의 안락함을 늘어놓는 것은 왕법(王法)의 교화가 고통스럽다고 배척하고자 함이니, 이는 세속을 변화시키고 풍화를 옮겨서 조세를 거두려는 일입니다. 열 번째는 법석(法席)에 대중을 모이게 하여 삿된 꾀로 변통하면서 돈푼이나 내는 것을 칭찬하고 이를 훼손하면 욕을 본다 하니, 이는 여상(呂尙)6()17) 비책(秘策)입니다. 대체로 이 같은 열 가지 일 가운데 한 가지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 싹이 드러나기만 하여도 바로 주살하여 소탕해야 마땅합니다. 지금 방자하게 유포되어 우리 임금의 교화가 미치는 땅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또 높은 누대에서 큰 종을 치는 것은 대궐의 전루(箭漏:시계)를 기대함이고, 큰 사찰마다 번기[]ㆍ당기[]과 보배 일산[寶蓋]을 내거는 것은 충정(充庭)의 노부(鹵簿)18)를 업신여김이며, 재회(齋會)를 열어 귀한 음식을 거두는 것은 왕공(王公)의 향연을 잡스럽게 하는 것이고, 고월(高越)의 찬패(贊唄)를 창하는 것은 식거(食擧)의 등가(登歌)19)를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 공덕을 찬탄하여도 진사(陳詞)의 축사(祝史)에 견주고,

 

보시를 받더라도 속백(束帛)의 차등(差等)을 두며, 위의를 갖추되 정기(旌旗)의 문물(文物)을 흉내 내니, 모든 거조가 조정의 의례를 몰래 흉내 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운운합니다.

폐하가 모든 것을 기울여 사찰에만 공급하면서 만승천자가 부용(附庸)의 의례를 흉내 내어 승니에게 엄숙히 절하고, 3()조차도 대신의 예를 갖추니, 총애가 이미 지극한데 모욕 또한 어찌 이리 지독합니까? 이것이 신이 말하는 그 취하지 말아야 할 네 번째의 이유입니다.”

순제가 열거한 열 가지 조항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한 가지 날조로 귀결된다. 이것을 끌어다가 억지로 맞추어 황제의 마음을 거듭 움직여 미리 황제의 기신(機神)에 통달하고 깊이 황제가 그를 등용하지 않은 것을 감내하며 통할 수가 없었다. 원망하는 마음만 쌓여 불법의 비방에 빗대어 면전에서 조롱하였으니, 말은 신하라 하였으나 뜻은 경멸하고자 함인데, 어떻게 주상을 스님들에게 빗대어 잘못되었다 하면서 드날리지 아니하는 악이 없다 하는가?

말은 비록 황제를 중히 여긴다 하였으나, 도리어 황제의 무식을 증명하고자 하였으니, 바로 악정을 하여 민심을 잃은 임금이고 못나고 어리석은 임금님이란 것을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드러나고 말을 꾸며내어 속인 것을 가렸을지라도 자취만은 훤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아는 이는 어려움을 생각한다고 이르는데, 사람이 실로 알기가 어려운지라 그 어려움을 아는 이는 천 년에 하나뿐이라고 한다.

양조(梁祖)가 순제의 마음을 깊이 알고 정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 일찍이 재주가 있으나 거스르기를 좋아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그러나 나중에 상소한 일은 모두 순제의 변재와 현격하게 차이 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졸렬함을 여기에 기재해 둔다.

순제가 말하였다.

폐하가 인과(因果)로써 반드시 정해진다고 기대를 하여도 그 보응(報應)에는 변하여 늘어나는 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법(像法)을 존중하여 보시를 지극히 하여도, 모두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나무를 베어 내며 개미에게 불 지르고 땅을 파는 것은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것인데, 어찌 대각(大覺)의 자비를 돌아보겠습니까?

호나라 귀신이 복을 드리울 수 있다면 유도(儒道)를 폐지할 수 있고, 석가의 대머리가 병난(兵難)을 없앨 수 있다면 병기(兵機)를 없앱니다. 지금 관문(關門)을 겹으로 쌓아 근심을 없게 하면서도, 말뚝을 박아 빈터를 다지고 개미를 죽여 공덕을 쌓으니, 이미 석가의 전적과 어긋나게 요사스러운 것만 기리고 아첨하는

 

()만을 치르는 데다 다시 명교(名敎)마저 무너뜨리니, 5척 키의 양 치는 아이라도 이를 알고 의심스러워할 것입니다.

4()의 존의(尊義)는 그 덕에 변함이 없으니, 이것이 신이 폐하에게 그 취하지 말라는 다섯 번째의 이유입니다.”

순제가 일로써 이치를 증험한 것을 상세히 따져 보면, 지금 이치로써 일을 통하게 하는 것뿐이다. 인과의 보응은 그 일이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아서, 만약 인()이 앞서고 과()가 뒤쳐짐을 믿지 않는다면, 형체가 움직이면 그림자가 따른다고 이르지도 못할 것이다. 사물의 이치가 뚜렷한데, 어떻게 미혹될 수 있는가?

나무를 베고 땅을 파는 것은 천상(天常)의 오래된 규거(規擧)이고, 절을 세우고 공양을 일으키는 것은 인륜(人倫)의 지극한 공경이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개미를 훼손시켰다 하나, 이와 같이 하지 않은 황제가 또 어디 있는가?

이로써 복을 지어도 자기의 자량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기에 사료의 속인들이 노역을 수고롭게 여기지 않았으니, 그 같은 죄는 다른 사람에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저들이 백충(百蟲)을 죽이더라도 저들의 죄가 아니다. 도리어 정법을 요망한 책이라 이르고 정갈한 재법[潔齋]을 아첨하는 제사로 여기니, 이는 유계(幽界)와 명계(明界) 모두가 분하여 이를 가는 것이고, 현자와 성인이 불쌍히 여기는 바이다. 그러므로 산악(山嶽)과 강수(江水)의 대신(大神)도 부처님을 받들며 복의 은사(恩賜)를 빌고, 천지의 성령(聖靈)이 머리 숙여 절하며 현장(玄章)을 청하는 것을 순제가 알지 못하는데, 우주 가운데 우뚝 서서 4무외(無畏)를 얻고 공유(空有)의 세상에 홀로 머물며 네 가지 변재(辯才)를 갖추는 것은 순제로서는 알 바도 못 된다. 혹 알았다면 이는 고의로 비방하여 황제의 마음을 흔들려는 것이다.

순제가 말하였다.

진나라가 3()에서 헛되게 명을 받고, 한나라가 다섯 가지 이익에 속임을 당하였으니, 요사스런 거짓말을 그대로 믿어 온 이래로 한결같이 지금에 이르렀으나, 그 그릇됨을 마음으로 살피지 못하니, 어찌 전대의 허물을 징계할 수 있습니까?

또 다섯 가지 일을 인용하여 증명하자면, 송나라와 제나라 양 대는 부처님을 존중하고 스님들을 경배하였는데 나라는 망하고 종묘가 변하였습니다. 단지 부처님은 요사스럽고 승니는 거짓된 것이니, 간사함만 마음에 품어 태를 떨구고 자식을 죽여 음행을 저지르며 도를 어지럽힙니다. 이러한 까닭에 송나라와 제나라가 멸망한 것입니다. 지금도 송나라와 제나라의 절과 불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그 같은 일을 본받으니, 송나라와 제나라의 변란이 말하지 않아도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승니가 하안거를 지내면서 개미를 밟지 않는 것은 함생(含生)의 목숨을 아낀다 하지만

 

이는 임금을 업신여기고 아비를 잊으면서 벌레에게만 어질게 하는 것입니다. 태를 떼어내고 자식을 죽이면서 거꾸로 모기를 기르는 것입니다. 대체로 역()이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3()6()입니다. 지금 석씨가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자식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 데에 이르러서 마침내 나라를 다스리는 법마저 문란해졌습니다.”

순제는 송나라와 제나라가 부처님을 얻었기에 일찍 망했다고 하여 황제를 속이려 하였으나, 어찌 홀로 부처님을 훼손하고 신기(神祇)를 훼손할 수 있는가?

대업(大業)의 운세가 폐하고 흥하는 것은 하늘의 정해진 운명이고, 선양(禪讓)하거나 추방하고 주살하는 것은 국가가 그때 그때의 경우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전대의 왕이 스스로 만 년을 임하였더라도 나중의 황제가 그 자리를 이어야 할 까닭이 없으니, 이것은 서로 사양하는 불변의 이치이고 생하고 멸하는 대기(大期)인데, 어떻게 한 시대가 늘 남아 있기를 고집하여 백 왕이 혁명(革命)하는 운세를 미혹시키는가? 이 같은 것은 모두 합당치 못하다.

제나라와 송나라의 여러 황제들이 부처님을 존중하고 스님들을 공경한 까닭은 황제의 자리에 있게 된 연유를 알았기 때문으로, 그 은혜를 새기어 후덕하게 대한 것이다. 또 황제의 자리가 보존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인()을 행하여 장구한 과()를 바랐던 것이다. 예전에 인이 이미 짧아지자, 이를 만 년으로 늘릴 수 없는지라, 이에 양나라가 선양을 받은 것이다. 지금의 인()이 나아가지 못함은 인()에 따라 즉시 과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그 보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업의 운수가 서로 순환하여 4()를 잃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부처님을 업신여겨도 그 보응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업신여겨도 보응이 없다면 교묘(郊廟)의 여러 신과 하늘의 신과 원구(圓丘)20)의 지신(地神)과 방택(方澤)과 산천(山川)의 망질(望秩)21) 모두를 없애야지, 어찌 유독 부처님과 스님들만이 이와 같은 황당한 무고를 받아야 하는가?

태를 떨구고 자식을 죽여서 원수만을 남겼다고 이르는데, 그렇다면 그대 또한 원수일진대, 어째서 벼슬을 구하려 드는지 스스로 보지도 못했다는 것인가?

이와 같이 글을 써서 아뢰자, 양무제가 대노하여 조정의 선비를 모아 놓고 그 죄를 물어 창피를 주고자 하였으나, 순제가 몰래 위나라로 도망가 정제(靜帝)를 보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이 탄로나자 제나라 문양(文襄)에서 화형 당했으니, 나이가 80여 세였다.

순제가 도리에 어긋난 것만 행하면서

 

재주를 망령되이 자랑하며 벼슬을 구하여 영예를 얻고자 하였으나, 그릇된 지혜로 스스로를 망쳤다. 예로부터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구하지 말라 하였는데,22) 순제는 벼슬이 없는 몸으로 묘당(廟堂)의 일을 도모하였으니, 참으로 외람되다고 하겠다.

부처님께서 어진 개화(開化)를 펴시어 왕과 대신들을 손상하지 않고, 계율을 지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삿된 것을 없애서 혹()을 소멸하셨다. 이와 같은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3()8정도(正道)로 출가인을 이끌고, 6()와 사흥서원(四弘誓願)으로 선비와 속인을 개화시키니, 그 가운데 좁고 넓은 것에 알맞게 교화하여 인연 따라 깨닫는 것을 종지로 삼았으니, 나머지는 부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순제가 행실 바른 선비는 말하지 않고 오로지 업을 어지럽히는 범부만을 기술하여 거짓된 것으로 참다움을 배격하고, 삿된 것으로 바른 것을 능멸하고,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치려 하고, 편벽된 것으로 온전한 것을 어지럽히려 하였으니, 그 재앙이 닥치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위없는 전범(典範)을 펼쳤다고 하였다. 마침내 여타의 재앙이 다하지 않은 채 몸을 불태우는 대가를 받았으니, 참으로 불쌍하다고 하겠다.

 

(16) () 장구자타(章仇子陀)

장구자타는 위군(魏君) 사람으로 제나라 무평(武平) 연간에 유림학사(儒林學士)가 되었다. 이 때 불법을 존중하여 그 조성이 극에 달하여 대체로 비옥하고 윤택한 토지를 스님들을 위하여 사용하고 창고 속 재물을 다 기울여 부처님의 복전에 충당하였기에 속된 선비들에게까지 미칠 바가 아니었다. 장구자타가 미관말직(微官末職)이나마 다행으로 여기지 못하고,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제왕은 위로는 하늘의 신을 섬기고 아래로는 서민 대중을 돌봅니다. 군신과 부부의 강기(綱紀)에는 근본이 있습니다. 위나라와 진나라 이래로 호나라의 요사스러움이 화하(華夏)를 어지럽혀서 마침내 임금을 등지고 아비를 저버리며 지어미답지 않고 지아비답지 않습니다. 간사하고 사치스러우며 벌을 내리고 복을 주는 권력을 쥐고 흔들며 앉아서 경례를 받고 속가의 선비들을 업신여깁니다. 비빈[妃主]들은 낮에 스님들의 방에 들어가고, 자제들은 밤에 비구니의 방에서 잠을 잡니다.”

신은 정확(鼎鑊)을 겁내지도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면서 재계한 뒤 죽음을 각오하고[輿襯] 표주문을 받들고 널리 들리게 하였으니, 그것이 모두 10여 매나 되었다. 표주문을 올리자 황제가 크게 노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고나굉(高那肱)이 사람은 명예를 구하고자 죽으려는 것인데, 폐하가 만약 저 사람의 머리를 베신다면, 퇴락한 한술(漢術)이 자라게 될 것입니다.

 

금족령을 내려 저절로 죽게 하십시오라고 말하자, 이에 따랐다. 2년이 지나 주나라 무제가 제나라를 평정하자 집에서 나오게 되었다. 수나라 초엽까지 살아 있었는데 그 후의 종말은 알 수 없다. 지금 장구자타(章仇子陀)의 표주문을 읽어 보면 오직 스님들이 요망하고 음탕하면서 재물을 축적한 일만을 기술하여 다시 별도로 거론하는 바가 없다. 하는 말이 번잡한지라 일마다 벌여 놓으면 식견이 없는 이는 상소를 올리는 일이 아주 많았다고 여길 터이고, 넉넉하게 꿰뚫어 보는 이는 단지 두 가지의 자취인 재물과 여색이라고 여길 것이다.

순제의 말과 대동소이하나 재주와 이치가 구름과 진흙 같아서 그 시대에 미치지 못했다. 위나라와 제나라 양 대의 명승이 숲과 같았으나, 열 명의 대통(大統)을 천거하여 이를 관장케 하였고, 소현서(昭玄署)를 세워서 이를 단속하여 청청한 대중을 빛내어 타락하지 않게 하였다.

장구자타는 집안이 원래 몹시 가난하였는데 먹고 입는 것이 따르지 못하여 그 몸뚱이에 귀감을 삼는 바가 오직 옷과 음식뿐이었다. 이처럼 오랫동안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자 스님들의 후한 보시를 질투하여 이에 항의하는 표주문을 진술하게 되었으나, 마침내 내침을 당하여 그 뜻이 여의치 않았다. 참으로 담담한 사람이고 박식한 선비라도 말을 함부로 하여 도야(陶冶)가 없다고 일렀는데, 부혁이 또다시 가필하여 도야라는 말을 가볍게 깨는 것이다라고 바꿨으니, 하지(下智)의 어리석은 이도 이를 비웃을 터인데, 하물며 상지(上智)의 통달한 이이겠는가?

 

(17) () 위원숭(衛元崇)

위원숭은 원래 하동(河東) 사람인데 먼 조상이 관직을 따라 집을 촉()으로 옮겼다. 양나라 말엽에 스님이 되었으나 미친 듯이 떠돌아다녔다. ()씨가 촉을 평정하자, 이로 인해 관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천화(天和) 2(567)에 표주를 올렸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ㆍ우()의 풍화(風化)는 부도(浮圖) 없이 나라를 다스렸어도 나라가 편안했습니다. 제나라와 양나라 때에는 절을 지어 백성을 개화하였어도 백성을 바로 세우지도 못하고 도에 부합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만약 백성들의 병폐가 사찰에서 연유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나라의 다스림이 어찌 부도에 달려 있겠습니까?

단지 백성의 마음을 도에 합쳐지도록 다스리되, 백성이 도에 부합되어야 편안해지고, 도가 백성을 길러야 치도(治道)가 세워집니다. 이로써 제나라와 양나라가 앞 다투어 상법(像法)으로 치달려 9층의 탑을 구름에 닿도록 세웠고, ()ㆍ우()는 서민을 염려하여 흙을 쌓아 올리더라도 땅에 닿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나라와 양나라는 절을 지어 공이 없지 않은데도 국조(國祚)가 늘지 않았는데, 당ㆍ우가 어찌 부도를 이루는 등의 대업(大業)을 이루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다스린 것이겠습니까?

단지 백성이 이롭고 나라가 이로우면 부처님 마음에 계합하는 것입니다. 불심(佛心)이란 대자비를 근본으로 삼아 함생(含生)을 안락케 하기에 여원(黎元)의 부역조차 수고롭게 하지 않고, 흙과 나무를 파내는 것조차 경건히 하니, 이는 유식(有識)을 손상시켜서 무정(無情)을 두터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주(大周)가 운을 열어 역대로 이어온 것을 마음으로 새겨 6()을 거두어 한 마음에 두었고, 해와 달이 서로 비출 것을 제도하며, 4()을 기르는 것이 두터운 땅과 같았고, 만백성을 덮는 것이 현천(玄天)과 같았습니다. 진실로 3()이 중흥하자, , 많은 백성이 편안한 시절을 비로소 만나게 되었습니다. 5()가 새롭게 건립하고 백성들이 때를 만나게 된 것을 축하하였으니, 어찌 당ㆍ우의 훌륭한 풍화를 흠모하지 않고 제나라와 양나라의 말법(末法)만을 남겨 두겠습니까?

위원숭이 삼가 청하건대, 평연대사(平延大寺)를 이룩하여 4해의 만백성을 거둔다면, 그 이룸을 권하지 않아도

 

형세에 따라 가람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니, 한쪽에 2()5()를 안치하십시오.

평연사(平延寺)란 도인과 속인을 구별하는 것도 없으며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도 않고, 서민 대중을 애호하되 평등히 하여 보태거나 훼손함이 없습니다. 성황당(城隍堂)을 절로 만들면 바로 주나라 임금이 여래(如來)이고, 고을을 승방(僧坊)으로 만들면 부부가 함께 성중(聖衆)이 될 것입니다. 부지런히 양잠하여 호과(戶課)를 충당하고 정과(政果)에 공출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덕을 헤아려 3()을 만들어 연로함에 따라 상좌(上座)를 삼고, 어질고 지혜로운 이를 뽑아 집사(執事)로 충당하고, 과감한 이를 구하여 법사(法師)를 삼아 10()을 행한다면 비록 편안하지 못함도 다스려질 것이니, 무탐(無貪)을 드러내어 도둑질을 끊어야 합니다. 이로써 추운 이에게 옷을 입혀 주고, 아비 없는 고아는 길러 주고, 홀아비는 과부와 짝지어 주고, 늙고 병든 이는 잘 보살펴 빈궁함을 덜어 주고, 충효로운 가문에는 상을 내리고, 흉악한 무리들에게는 벌을 내리십시오.

맑고 청백한 선비를 등용하여 아첨하는 관리를 물리치면, 6합에 주() 임금을 원망하는 소리가 없어질 것이고, 8()에 주나라를 노래하는 가락이 퍼질 것입니다. 날아다니고 물에 잠기는 것은 그 둥지와 구멍이 편안해질 것이고, 물과 물에서 그 소임대로 장생할 것입니다.이하 생략.”

위원숭이 이 같은 말을 상소하게 된 것도 이유가 있다. 일찍이 지도론(智道論)을 읽고 천왕(天王)이 부처님을 본받아 다스린다는 것을 보고, 이 때문에 평연사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대자비가 중생을 안락하게 한다고 기술한 것이 그 이치는 맞다 하겠으나, 일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부부가 화목하면 욕심을 끊을 수 없고, 성황당을 절로 충당한다 하나 이는 거룩한 기틀이 아니니, 이 때문에 가당치 않은 것이다. ()에 즉()하는 것을 공()이라 함은 바른 지혜가 아니고서는 깨닫지를 못한다. 범부에 즉()하면 성인이라 하나, 어찌 하근기(下根機)의 범부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2()를 함께 행하고 2()이 같이 운전되어야 도로써 세속을 형통시켜 그 출요(出要)를 기약할 수 있게 된다. 위원숭이 그 세워짐을 권하지 않아도 형세에 따라 가람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이른 것도 사람과 축생이 손상되기 때문이니, 만약 이같이 하게 되면 부처님의 대자비와 어긋난다는 것이다.

옛날 아육왕이 탑을 만드는데 하룻밤에 1만 명의 귀신을 부렸다. 그러나 지금은 부도를 이룩하려고 하면, 몇 년이나 걸리는 데다 재물과 목숨도 피해를 입는데, 하물며 흙을 반죽하여 벽돌과 기와를 만들어 햇볕에 말리는 것도

 

풀벌레에게는 불의 지옥을 만드는 것이 되고, 개미에게는 물의 재난을 일으키는 것이다. 참으로 그 제도가 어질고 자비스럽더라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지극한 계율이다. 그러므로 비구가 방사(房舍)를 이룩할 때에는 먼저 이를 없애서 재난을 방비하여야 하니, 그 목숨을 손상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물을 아끼되 자비심을 일으켜 어진 탑을 이룬다는 것은 그 이치가 극히 바르다 하겠으니, 일에 있어서는 실제로 이같이 행하기가 힘들다.

또 말하였다.

덕이 있으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현재 수과(輸課)23)를 면제하여 주고, 수행은 없으면서 풍족한 스님에게는 수과를 물린다. 풍족한 스님에게 수과를 물린다면 여러 스님들이 반드시 과세를 중지시키고자 앞 다투어 탐욕을 끊을 터이고, 가난한 사람에게 면제하여 주면 여러 사람이 면제 받고자 앞 다투어 충효를 닦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불법이 일어나고 국가가 안정될 터이니, 실로 3보를 멸하지도 않고 백성을 환난에 빠뜨리지도 않게 됩니다. 이에 열다섯 가지 조항이 있으니, 모두가 이 같은 일을 마음에 두고 평등하게 행하도록 권장하는 일이야말로 실로 불법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권장하는 것이 평등하지 못하면, 이야말로 불법을 멸하는 것이 됩니다.

 

대승(大乘)을 행하도록 권장할 것

청빈을 기리도록 권장할 것

탐욕을 버리도록 권장할 것

사람들이 죄를 자수하도록 권장할 것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하도록 권장할 것

백성에게 농토의 개간을 권장할 것

백성의 화합을 권장할 것

만남을 은혜롭게 여기도록 권장할 것

시장이 모두에게 이롭도록 권장할 것

노인을 존중하고 봉양토록 권장할 것

사찰에 병역을 부과하지 말도록 권장할 것

삼장(三藏)을 탐하지 않도록 권장할 것

삼장을 적게 세우도록 권장할 것

스님들이 스님들을 다스리도록 권장할 것

대승의 계율을 공경하도록 권장할 것

 

이와 같은 일의 조항은 이에 어긋나면 법이 어긋나고, 이에 따르면 가르침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울러 표장(表狀)에 병기하여 불교와 도교의 두 논을 진술하면서 주객(主客)을 세워 대소(大小)를 논하였다. 위원숭이 이치로 아법(我法)을 통달하여 2()를 섬기지 않고 오직 주조(周祖)만을 섬겼는데, 2가를 텅 비게 해 놓고 말하기를, “주나라 황제가 몸소 그와 같은 일을 행한다면, 내가 황제를 섬기지 불도를 섬기지 않겠노라라고 하였는데, 말로 드러낸 것이 복잡다단해서 무려 30여 매나 되었다. 대략 자비로운 구제를 우선해야 하는데, 스님들이 사치스럽고 태만하여 법도를 가리지 않는다고 탄핵하였으나

 

부처님을 훼손하는 말은 없어서 간혹 참다운 도를 토하기도 하였다. 당나라 이부(吏部) 당림(唐臨)명보기(冥報記)에서 이와 같이 운운하였다.

 

(18) () 유혜림(劉慧琳)

진군(秦郡) 사람으로 출가하여 양도(楊都)의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다. 재주와 학문이 있어 송나라 노릉왕(廬陵王)에게 알려졌으며, 균선론(均善論)일설에는 백흑론(白黑論)이라고도 한다.을 지었다. 그 논박이 궁한 것도 통하게 하였으니, 나중에 법의편(法義篇)에 수록되었다. 대체적으로 비교하자면, 단지 6()를 깨닫더라도 5()와 함께 나란히 행하게 되고, 믿음도 자비와 함께해야 고르게 세워진다는 것이다. 길이 다르더라도 돌아가는 것이 같다고 하였으나, 그 발자취를 지킬 수 없었다.

 

(19) 범진(范縝)

범진은 남군(南郡) 사람으로 어려서 고아였는지라 빈궁하였다. 패국(沛國)의 유헌(劉獻)에게 배웠는데 탁월함이 비길 데 없었다. 문하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짚신과 베옷을 입고 돌아다녔는데, 그 말이 날카롭고 논조가 고상하였다. 늘 부처란 없으니 있는 것은 오직 자연(自然)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말도 역시 법의편에 수록되어 있다. 심휴문(沈休文)이 이를 반박하였으나 여기서는 번거롭게 싣지 않는다.

 

(20) () 고환(顧歡)

고환은 오군(吳郡) 사람으로 불교와 도교의 2교가 서로 비난하는 것을 보고, 고환이 이하론(夷夏論)을 지어 이를 통일하고자 하였다. 그 대략을 말하면, “불교 쪽에서 말하자면 실상(實相)인데, 도교 쪽에서는 현빈(玄牝)이라 말한다. 도의 대상(大象)이 바로 부처님의 법신이고, 부처님은 이융(夷戎) 간에 있으므로 이융의 말을 썼고, 도는 중화에 있으므로 중화의 말을 썼다. 독립되게 이를 세워 놓고 고치지를 않으니, 모두 그 배움을 끊어야만 근심이 없어진다. 오랜 겁()의 모든 성인들이 모두 이와 같이 하나만을 따랐는데, 노자와 석가는 시작하지 않은 것을 나누고 어리석은 이는 합하지 않은 것을 나눈다. 수억 가치의 착함을 닦아가되 닦음이 두루 해서 성인을 이루었기에 비록 열 가지로 호칭하고 천 가지로 칭호하더라도 끝내 다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글 가운데 불교를 누르고 도교를 추켜세우는 것이 있으니, 이는 도문(道門)의 사람인지라 이를 논평하기에 충분치 않다.

또 장융(張融)문율(門律)의 뜻도 고환과 동일하나, 전집(前集)에 이미 상세히 나와 있기에 후편에서는 간단하게 인용하였는데, 이 역시 법의편에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부처님은 금색 자태에 키가 6장이고, 도가는 흰 머리에 범부와 같은 모습인데, 부처님은 왕위를 버렸으나 도가는 임금의 신하였고, 부처님의 교화는 이르지 않는 나라가 없으나 도교는 신주(神州)를 벗어나지 못하며, 부처님의 탑은 염부제에 두루 하나 도교는 묘지가 괴리(槐里)에 있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 같은 것을 인용하여 그 부류를 견주어 보겠는가?

 

(21) () 형자재(邢子才)

형자재는 하간(河間) 사람으로 위나라에서 저작랑(著作郞)으로 임관하였다가 중서(中書) 황문랑(黃門郞)으로 옮겼다. 성씨(姓氏)로 그 사람을 남길 수 없다고 여겼다. 원경(元景)에게, “그대는 어째서 성이 왕씨(王氏)인가?” 하고 묻자, 그만 원경의 낯빛이 변하였다. 그러자 형자재가 나는 왜 하필이면 성이 형씨일까? 5세나 남길 수 있을까? 그러나 부처님은 서역의 성인이시기에 그 유명(幽冥)조차 멸하셨다. 이처럼 정신이 다시 태어나게 하여, 어찌 금생의 형자재를 수고롭게 할 것인가? 그 후신이 장씨이면 또 어쩔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이 또한 반론과 풀이가 있으니, 법의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22) () 고도양(高道讓)

고도양은 양서(涼書)에 기재된 것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석씨가 개화하자, 그 풍화를 듣고 모두 기뻐하였는데, 의리[]가 천지 바깥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말은 눈과 귀에서 드러남을 벗어났다. 이로써 가르침을 널리 이루는 것을 장려하니, 바로 9()의 일가(一家)라 하겠다. 그리하여 이를 깊이 애호하였는데, 그 술법조차 고상하다.

그러나 부도와 사찰을 극히 장엄하게 하여 물과 뭍의 재물을 소진하니, 이룩하는 이가 황금과 백옥을 아끼지 않는다 하나, 생민(生民)의 힘마저 소진시키는 것이 어찌 대각의 뜻이겠는가? 참으로 지극히 공경함에는 문채가 없고, 지극히 신령함에는 꾸밈이 없는지라, 천하의 희생을 다할 수 없다. 하늘에 제사 지내되 송아지[繭栗]를 쓰더라도 천하의 문채(文彩)를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신을 모시기 위해 마른 나무와 볏짚을 쓰는 것이다. 참으로 정성만 있으면 빈조(蘋藻)일지라도 백 가지 물건 가운데 으뜸이다. 명덕(明德)이 그윽해지지 않는다고 삶은 소[]를 약제(約祭)24)에서 제외하는데, 하물며 영취산(靈鷲山)의 술법과 피안(彼岸)의 유별남에서 이를 헛되이 구할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떠돌아다니는 이들은 모두가 비루할지니, 괴로움을 피하고자 도망치는 이들이 날로 성하기에 그 진실한 마음을 바로 하는 것은 백 사람 가운데 한 사람뿐이라 하겠다. 이미 주홍색과 자줏빛이 한 번 섞이자, 성황(城隍)의 사직(社稷)에 여우와 쥐가 들끓어 대법(大法)의 정화(精華)를 더럽히고, 농사짓고 양잠하는 긴요한 일을 훼손시킨다. 그러나 계권[:계약서ㆍ증서]을 집행하는 이는 이것을 근심하지 않고, 권형(權衡)25)을 재어 보는 이는 이것을 탓하지 않는다. 나라를 가진 이는 마땅히 이를 살펴서 절제해야 한다.”

이와 같다면 사양하는 것이 법을 지키는 진실한 충신이 되니, 부혁 또한 어떻게 그것을 헤아린 것인가? 식견이 높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고식전(高識傳)에 기재되었을 것이다.

 

(23) () 이공서(李公緖)

이공서는 조군(趙郡) 사람으로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음양(陰陽)을 잘하였다. 어려움을 겪는 집을 보게 되면 이를 걱정하며 재()를 지내 주고 복되게 도와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부모를 도태시키고 제왕을 능멸하며, 육친을 폐하고 예의를 저버리는 것이다. 옷을 물들이고 머리카락을 깎아서 스스로 형여(刑餘)1)에 견주면서 허망한 말로 현혹시키니, 그 부모마저도 이롭게 할 것인가? 음양을 묵가(墨家)라 하니, 비록 폐단이 있더라도 이를 살펴보고 4()의 절기(節氣)를 따르기에 거두는 바가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술법은 풍화만 손상시키고 유명(幽冥)에 의탁하여 기괴한 술법만 번창시키니, 참으로 애석하구나. 나라를 온통 미혹시켰으며,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구나. 참으로 슬프다. 내가 죽는다면 복 짓는 일 모두가 끊어질 터이다. 화하(華夏)를 버리고 서쪽 오랑캐를 따르니, 식견 있는 자는 이것을 허용치 않으리라고 말하였다.

그 동생 개()는 자()가 계절(季節)인데, 문장을 잘하였으나, 불경을 읽을 때마다 발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이것은 북방의 속된 선비들이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마음대로 따르는 큰 괴수이다라고 하였으니, 애석하게도 그 삶을 헛되이 하는구나.

위없는 선법(善法)으로 정신을 기른다 하더라도 죽으면 헛되이 죽을지니, 하근기(下根機)의 악한 이는 어두운 보()에 떨어져 명계(冥界)에서 그 업에 따르는데, 그 근본으로 돌이킴을 어떻게 기약할 것인가? 오는 때도 알지 못하는데, 지금 어찌 이것을 알겠는가? 군축(群畜)들과 어리석은 늙은이라도 무엇이 다르겠는가?

 

(24) () 노사도(盧思道)

노사도는 범양(范陽) 사람으로 제나라에서 벼슬하여 황문랑(黃門郞)이 되었다. 주나라 무제(武帝)가 제나라를 평정하자 경사(京師)로 찾아가 서정기(西征記)를 지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요흥(姚興)이 불법을 좋아하였고, 구마라집이 경전과 논술을 번역하자, 불도(佛圖)가 해내(海內)에 두루 하게 되었으니, 비구와 비구니가 된 선비와 여인들이 열 가운데 예닐곱입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낭비하는 것이 어찌 해마다 수만금이 아니겠습니까? 황제가 홀로 운세를 후대까지 기리자면, 이를 솎아 내어 중지케 하는 것이 나라를 강하게 하고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상책입니다.”

주제흥망론(周齊興亡論)을 지었으니, 대략 다음과 같다.

주나라 태조가 처음 보위에 올랐는데, 대총재(大冢帝) 우문호(宇文護)는 태조(太祖)의 조카였다. 뜻을 품고 재상 일을 보았는데 친히 고명(顧命)을 받았다. 주나라 고조가 높이 거처하며 이를 깊이 굽어보다가 하루아침에 그 머리를 베었으니, 대체로 그 무리가 모두 이와 함께 살육 당했다. 이리하여 호사스러움을 버리고 바른 도리를 폈으며, 안을 살찌우는 것을 버리고 몸소 대포(大布:화폐)를 만들었다. 바야흐로 육궁(六宮)에서 시작되어 구복(九服)으로 깊이 퍼지면서 석씨의 개화로 가르침을 세웠다. 그 근본이 귀하고 청정하다 하나, 근세 이래로 재물과 국력을 낭비하게 되자, 바로 조칙을 내려 이를 제거하였으니, 이는 전대의 왕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노사도가 그 낭비를 규찰한 것을 논하여 이를 폐지하는 것이 나라를 강하게 하고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정책이라 하였으나, 이것은 일대의 좁은 식견일 뿐이지 원대한 홍략(弘略)이 아니다.

불법이 개화(開化)를 행하는 요체(要諦)는 정신을 맑게 하여 미혹을 없애고자 함이다. 저들이 재물을 흩트리며 복을 바라는 것은 목숨과 재물이 종당에는 흩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헛되이 이를 아껴서 생을 두터이 하고자 하나, 이는 재물만 지키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에서도, “거둔 것이 많으면 없어지는 것도 많기에 쌓아 놓으면 이를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이른다.

석숭(石崇)이 재물과 색()으로 주살 당하였고, 은신(殷辛)도 이와 같이 일찍이 살육되었으니, 자고로 모두가 이와 같다. 보고 듣는 것에만 넘쳐서 이를 단념할 수 없으니, 탐욕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다. 옛날 한나라 무제는 능()에서 수명을 다하였고2), 진나라 황제는 언덕[]에서 명을 다하였는데3) 재물과 보배가 가득하였어도 종당에는 모두 침탈당하였다. 어떻게 버린다 하면서 모으는 것만 탐내어 상복(上福)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경앙(敬仰)의 지극함을 숭상하고 형해(形骸)를 갈라 도화(道化)를 따르는 것이니,

 

이로써 전정(全正)의 지극함을 답습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거두고 쌓아 놓기만 하는 것은 자신이나 남을 수고롭게만 하고, 그 몸과 마음으로 이를 헤아리되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이 없더라도 그 몸이 죽고 이름이 없어지면 졸지에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어서 속된 것을 익혀서 그대로 따른다.

간략하게 근대를 거론하면 제나라 시대에 복사(福事)를 행하여 사찰과 불탑이 융성해지고 승가(僧家) 대중이 번잡해졌다. ()로써 그것을 절제할 수 없어 마침내 혼란스러워지자 그 공양을 감하여 국률(國律)을 맑게 했다. 달마다 도참(圖讖)의 말만 헛되이 들었기에 주나라 군대가 이를 듣고 그 갑주(甲冑)를 쪼개게 되었으니, 제나라 임금이 이와 같이 우매한 임금이었다. 국가의 재물을 지키기만 하면서 널리 베풀 수 없었는데, 마침내 우문(宇文)이 이를 깨뜨렸다. 탕장(帑藏)에 가득 쌓아만 놓고 이를 풀지 않았으니, 손수 말 재갈을 물리고 군문(軍門)을 찾아갔으나 재물과 보배는 이미 주나라 것이 되고 말았다.

주조(周祖)2()를 폐하면서 만대의 상책으로 여겼다. 서쪽을 평정하고 동쪽을 토벌하여 쳐들어가서 치지 못함이 없자, 이를 법을 멸하게 한 묘략(妙略)이기에 참으로 하늘이 돕는다고 여겼다. 제나라를 통일하여 화폐를 거두었다. 원래가 가난한 나라로 비단이 아주 드물었는데 하루아침에 이것을 얻게 되자, 눈 가는 대로 이를 끌어안고 손이 닿는 대로 비단을 날라 수레가 길게 이어졌다. 이것이야말로 대도(大盜)에게 나라가 멸망한 것이다. 이로써 군사를 일으키는 성대한 업이 되었다. 생하고 멸하고 얻고 잃는 것은 일찍이 헤아릴 수조차 없는데, 눈앞의 뜻에 맞는 것만 따져서 후세를 생각하지 못했으니, 내가 상대방을 치면 상대방도 나를 친다는 것은 예로부터 늘 그러하였으니 이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주조가 이로써 만대에 늘 기리고 천지와 그 연조(年條)를 같이한다고 일컬으며 동굴을 깊숙이 파서 이를 거두고 쌓는 것에만 애를 썼다. 검소함을 지키고 소찬(素饌)을 먹으며 극기(剋己)하여 세속을 장려하였으니, 이 역시 만대 가운데 이 한 사람뿐이라 하겠다. 그 해 붕어하여 세상을 등지자 그 아들이 이를 베풀어 문물을 크게 넓히고 명성과 위세를 드높게 하였으니, 바로 불법을 개창(開創)하여 백성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또 뛰어난 재상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여 대국의 위세를 드리웠다. 네 사람의 황후를 세우고 여덟 명의

 

주국(柱國)을 표하였으며, 앞뒤로 의장대의 병사를 평상의 갑절로 하여 각각 스물네 명씩으로 하였다.

예로부터 황제와 제왕은 서로 견주지 않았다 하여 원호(元號)를 선정(宣政)이라 세우고 강보에 쌓여 있는 어린아이에게 왕위를 선양하고는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라 호칭하였다. 춘추가 많다 하나 그 몸을 잃지 않아 한 시절을 채우지 않았으니, 다시 만고의 예법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어린아이가 서지도 못하였기에 그 아비가 전횡하였으니, 조력(祚曆)이 옮겨지고 운수가 다하여 수나라 고조가 선양받자 보위와 나라의 재물도 모두 수나라 것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것을 어찌 본받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를 본받지 말아야 하는데도, 수나라가 비록 법을 중히 여겨 사찰과 불탑을 널리 세웠다 하나 재물에 관한 일에 이르러서는 달리 말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쌓아 놓은 곡식과 면포[帛布]가 나라 안에 두루 쌓였으니, 창고마다 가득하여도 이를 베풀 수 없었다. 그러므로 복의 문을 비록 열었다 하여도 문을 열어 그 있는 것을 보여 준 것뿐이라 하였다.

양제(煬帝)의 말엽에 이르러 천하가 들끓고 교외 성채의 바람이 드세져서 기전(畿甸) 이내에 안개가 맺혔다. 처음 보위에 오르자 황제의 덕을 칭송하여 만년(萬年)이라 하였는데도 나중에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다. 모두 그 면목을 욕하고 온갖 허물을 들췄는데 창고마다 도둑들이 들끓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 끝이 없었다. 그 몸뚱이는 모반하는 신하에게 사로잡히고 여러 군장[百辟]들은 백성[黔首]들에게 곤란을 당하였으니, 이 같은 것을 개괄적으로 거론한다면 나무를 지키면서 토끼를 기다렸으나 얻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참다운 말씀은 미더워서 증험할 수 있으니, 어떻게 그 옳음을 알았다 하겠는가?

예로부터 보위에 올라 천하에 임하면 만() 년이라 외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비록 햇수를 만 년이라 하나 이처럼 그 기한이 정해져 있는데도, 하물며 만이라는 숫자를 줄인 경우는 어느 시대에도 없었다. 이미 전대의 왕이 만 년을 채우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후대의 황제도 그 뜻이 이것을 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제각각 만 년이라 하였으나 지금 모두들 어느 곳에 있는가? 어째서 5()이 서로 답습하는 것을 거울삼지 못하는가?

이로써 현명한 황제와 뛰어난 현인은 5()가 반드시 흩어짐을 알고 상지(上智)의 식견 높은 이는 3()을 비추어 닦아 가니, 이미 재물을 쓴다는 것은 그림자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다. 재물을 쓰지도 못하고 하사하지도 못하면 친지조차도 분을 품게 되니, 이로써 나라나 집안이나 이를 남에게 베풀되,

 

마치 신발을 벗듯이 해야 하는 것이다. 재물처럼 그 목숨마저도 떠도는 먼지같이 내던지고, 성식(性識)을 장엄하게 하여 하루 빨리 법신(法身)을 갖춰서 좋은 방편을 성취하여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으로 이끌어 줌에 힘써야 하니, 이것만이 지극한 가르침이라 하겠다. 여타의 것은 아지랑이처럼 있는 것이니, 이를 알진대 무엇을 다시 논하겠는가?

그러므로 경전에서, 겁수(劫數)가 불태워져 끝마치니 건곤(乾坤)이 텅 비고, 수미산과 거해(巨海)가 모두 재가 되어 휘날리고, 천신ㆍ용ㆍ사람ㆍ귀신조차 그 가운데 목숨을 잃는다고 말씀하셨다. 천지음양이 일찍이 기우는데 나라가 어떻게 향상되겠는가?

이와 같이 법구(法句)는 참다움을 꿰뚫었다 하겠으나 외도나 범부는 참으로 이에 힘쓰지를 못한다.

 

(25) () 부혁(傅奕)

부혁은 북지(北地)의 이양(泥陽) 사람인데, 그 본이 서량(西涼)이다. ()나라가 제()나라를 벌함에 따라 주()나라에 들어가 통도관(通道觀) 벼슬을 살았다. 수나라 개황 13(593)에 중산(中山) 이파(李播)와 함께 도사가 되기를 청하여 17년 동안 한왕(漢王)을 섬겼으니, 양대(凉代)에 이르러 기주(岐州)로 좌천되었다.

황운(皇運) 초엽에 태사령(太史令)을 제수(除授) 받았다. 무덕(武德) 4(621)에 사찰과 불탑, 승니를 줄여서 국리민복(國利民福)을 꾀하는 11조를 상주하였는데, 고조가 이를 듣고도 끝내 행하지 않고 부혁에게 돌려보냈다. 이에 그 표장을 많이 베껴서 원근에 유포시켰는데, 경사의 여러 스님들이 파사론(破邪論)을 지어 이에 대항하였다. 나중에 열거하는 것처럼 부혁은 표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 번째 조항은 승니(僧尼)로서 60세 이하는 솎아 내어 백성으로 만들면 병마(兵馬)가 강해지고 농업이 권장될 것입니다. 주역에서도 남녀가 정기(精氣)를 섞어야 만물이 화생(化生)한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음양과 부자(父子)는 천지의 대상(大象)이기에 어길 수가 없습니다. 건강한 젊은이가 스님이 되고 아리따운 규수가 비구니가 되어 예법을 어기고 혼인하지 않고서 태아를 떼어내고 자식을 죽여 호구(戶口)를 감하게 하니, 어찌 이를 탓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불가(佛家)가 천지의 화생을 거스르고 음양(陰陽)의 도()를 등지는데, 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청하건대 앞서의 조항을 의거하여 살펴보십시오. 노자는 지성(至聖)인데도 제왕을 늘 배알하였고, 공자는 성인인데도 재상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물며 도인은 취할 만한 덕도 없는 데다

 

그 의로움도 떨치지 못하면서 공경(公卿)을 우습게 알며 천자와 마주하고자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노자와 공자의 제자와 그 예를 함께 하여 왕신(王臣)에게 배알케 하되, 이를 조전(朝典)에 편입하십시오.”

부혁의 상주문이 이처럼 그 논리가 충분치 않으니, 그 나가는 곳이 서로 달라서 한 가지로 말할 수 없다. 주역에서는 정기를 섞는 것을 칭찬한 것이고, 부처님은 욕심을 끊으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씨(李氏)의 도문(道門)이 서로 결탁하여 짝을 맺고, 낮이나 밤이나 서로 밀회하여 주역의 음양에 순응함을 알겠으니, 이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부처님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약 순응한다 하면 참으로 세속과 같을 터인데, 어찌하여 스님들을 모방하여 고요함을 지키고 욕심을 끊어 꾀함이 없다 하는가?

이 같은 일로 토론해 보면, 그 얽힌 것이 저절로 분명해지나 위에서 이미 기술했듯이 어리석은 이는 찾아보지도 못한다. 도리어 이이(李耳)의 자손이 천하에 가득하고 장릉(張陵)의 후사가 여러 주에 흩어져 있으니, 조종(祖宗)이 그 실마리를 남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만약 그 선대와 달리하고자 하면 이는 후사를 끊는 것인데, 3천 가지 죄가 이보다 높은 것이 없다면서 어떻게 황서(黃書)와 복기(服氣)를 되풀이하고, 삼오(三五)와 칠구(七九)의 경으로 위아래를 서로 조화롭게 하며, 4()2()의 가르침을 삭제하지 못하는가?

불교는 이와 달라서 욕망은 허물의 근원이므로 먼저 계율을 지켜 세속의 때를 벗겨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이 불도가 그 길을 달리하는 것으로 식견이 높은 이라야 이를 체득하게 된다.

청하건대 공자와 노자의 문인들과 같이 왕과 신하를 배알하게 하십시오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어째서 부혁이 이 같은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어째서 스스로 스님들이 부모를 업신여기고 임금에 저항한다 하여 이를 충성과 효도가 아니라 말하는가?

참으로 도사가 늘 임금과 부모에게 절하는 것을 알겠으나 어째서 도사가 스님들을 흉내 내어 배례를 거부하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는가? 스스로 그 부류를 교화하지 못하면서 어째서 다른 이의 실다움을 규탄하여 이를 탓하는가?

도사가 배알하는 것은 유래가 있으니, 그 형체를 훔치고 말을 남용하여 허풍을 치면서 세속을 벗어나는 구역에 함부로 들어가 황건을 두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각(張角)의 풍모일 뿐이다. 위의(威儀)를 본받고자 예법을 거부하는 것은 치문(緇門)의 궤범이다. 심지어 이로(李老)의 복식도 그 근본이 조정의 장복[朝章]을 답습한 것이고, 모자와

 

신발도 난대(蘭臺)의 태사(太史)와 같이 하였으니, 절하고 물러서는 것 따위는 대부(大夫)의 의례이다. 어찌하여 그 문인은 이리도 거만하여 선사(先師)의 자리도 거부하고 사문의 법을 우러러 받드는가? 모두 옳지 못하다. 관대한 정치를 만나 이를 내버려 두고 결박하지 않으나 법으로 탄핵한다 하면 어떻게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단지 부혁이 상소한 일은 잡스러운 것이라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니, 오랑캐 부처님의 삿된 가르침을 서역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하거나, 또 호구 3만의 주마다 사찰 하나만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살펴보기에도 부족하다.

첫 번째 부혁의 말은, “대당국(大唐國)의 장정(壯丁)인 비구와 비구니 20만 명이 서로 호나라에 결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이를 예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청하건대 한 사람씩 짝을 짓게 하면 해마다 10만 명을 낳을 터이니, 이 또한 유생(劉生)의 옛날 계책입니다라고 거짓 천명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만 나열한 것이 앞서 이미 드러낸 것과 같다.

또한 여자는 갑옷을 입고 홀아비는 창을 들고 적당(賊黨)을 지어 나라를 등지게 되면 어찌 웃어넘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데, 대당의 사찰에 적을 둔 불도(佛道)2() 대중이 불과 7만도 넘지 못하는데, 어떻게 임금을 속이려고 드는가? 상제(上帝)에게 20만 대중이라 속였으니, 이는 자신을 벌해야지 다른 사람을 수고롭게 할 것이 없다.

두 번째는, “사찰을 초당(草堂)과 토사(土舍)로 지어야 합니다. 진시황과 한무제는 덕이 있는 임금이었는데 참으로 불교로 인해 사치하고 방종하게 되었습니다. 사찰과 불탑이 84천인데 이를 나라마다 본받으니 다시 갑절이나 늘어났습니다. 무릇 선비와 서인이 지나간 죄를 속으로 근심하여 오는 복을 마음으로 헤아리니, 천당과 지옥을 함부로 말하여 우리 화하 사람을 저주합니다. 심지어 진시황의 아방궁(阿房宮)과 한무제의 감천궁(甘泉宮)도 그 궁궐의 옛 자취가 10여 개에 불과한데 사관(史官)은 이를 기록하여 무도(無道)하다고 일렀습니다라고 거짓 천명하는 것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무도하여 지나치다고 이르신 적이 없다. 다시 장융(張融)의 삼파(三破)의 말을 인용한 것은 전집(前集)에 자세히 나와 있다. 지금 다시 이를 현시해 보면, 부처님의 개화(開化)는 나무를 의지하여 집을 만드는데, 그 몸에 병이 있을 때는 방편으로 작은 방을 만들게 된다. 사찰과 불탑을 크게 짓는 것은 신심(信心)에서 운영하는 것이다.

다시 청하건대 복전(福田)을 더 늘리시고 스님들이 아닌 이들에게는

 

()를 내게 하십시오. 천당과 지옥의 선악(善惡)의 과보가 이와 다르고, 품류(品類)의 구분에는 날고 가라앉는 이치가 천도(天道)로 구별되니, 도경(道經)이 왕왕 지옥을 말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므로 반드시 천당은 얼마나 되고 지옥은 몇 곳인지 조사해야 합니다라고 운운하였다.

그러므로 도가의 보허(步虛)에서는, 하늘과 사람은 그 바라는 것이 같아서 급하게 자미(紫微)에 들어가면 7대 조상까지 천당에 태어나고 자기 몸은 대낮에 승천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천당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이 하나둘이 아닌데도 스님들이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세 번째는, “사찰과 불탑을 줄이면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요망한 오랑캐가 거짓으로 절을 짓는 복을 말하기에 비루한 사람이 이를 믿고서 다투어 사찰과 불탑을 운영하니, 작은 절에는 백 명의 스님이 있고, 큰 절에는 2백 명의 스님이 있습니다. 이를 군병으로 통솔하면 다섯 개의 사찰마다 족히 1개 여단을 구성하는데, 여러 사찰을 모두 합하면 그 군병이 6개 군단을 넘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 생민을 침탈하면 국가의 대환이 될 것입니다. 청하건대 호구(戶口) 3만의 주마다 사찰 하나만을 남겨 두십시오. 또 예로부터 스님들이 모반을 꾀한 것은 10여 차례나 되니, 그 흉당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청하건대 반드시 소탕하여 호나라 기운을 소진시킨다면, 열흘 이내에 우주가 깨끗해질 것입니다라고 거짓 천명하는 것이다.

부혁이 이와 같이 상주하여 망령되게 군병(軍兵)이 많다고 기술하였다. 이 때 2부 대중의 수는 7만을 채 넘지 못했는데, 그 절반은 비구니였으니, 어찌 대국의 6개 군단과 같다고 하겠는가?

또 모반을 꾀하는 스님의 흉당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이르는데 스님들이 모반을 꾀하면 바로 세속에 구애받는 것이거늘, 홀몸으로 독립해 있으면서 어떻게 대중을 동원하겠는가?

거짓을 인용하여 간사하게 꾸며 풍속을 어지럽히고 임금을 기만하니, 천지(天地)도 이를 용납하지 않으므로 일찌감치 소멸될 것이다. 또 그 묘지를 상세히 따져 보면 모반을 꾀하는 신하와 가혹한 관리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는데, 혼탁한 무리가 관리가 되는 것은 어째서 어느 시대에도 있지 않았다 하는가?

()4()4)을 추방하는 일은 부처님을 섬긴 것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 그 후사를 끊은 것이 어찌 스님들의 가르침이었겠는가? 신하 하나가 절개를 바꾸었다고 하여 주상을 함께 주살할 수는 없거늘 스님 하나가 허물을 저질렀다고 하여

 

종족 전부를 멸하려 드니, 부혁이 장계를 올리던 날 바로 이에 따라 시행하기를 바랐으나, 편벽되게 지은 것이 분명하기에 그 의논조차도 하지 못하겠다.

네 번째는, “승니는 무명옷만 입게 하고 재법(齋法)을 없애면, 가난한 이가 굶주리지 않고 누에가 횡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듣자오니, 부처님께서 승니에게 계하시어 분소의(糞掃衣)와 오철(五綴)의 발우와 망중(望中)의 한 끼 식사만을 하도록 계율을 내리셨다 하는데, 산중에 홀로 앉아 청허하게 머물면서 참선하고 경을 외우는 이 같은 것이 부처님의 전장(典章)과 법도(法度)입니다. 이처럼 누에를 죽여 옷을 만드는 것을 부처님께서 계율로 허락하지 않으셨는데도 지금 부처님의 이치가 헛된 것임을 알고서 일부러 이를 위반합니다라고 거짓 천명하는 것이다.이것은 순제(荀濟)의 말이다.

여타의 것은 비루하고 추악한지라 그 아래 말을 삭제해 버리니, 들을 필요조차 없다.

다섯 번째는, “승니의 거처를 단절시키면 이로움이 쌓여 백성들은 풍요로워지고 선비들이 모두 넉넉해진다고 거짓 천명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제왕(帝王)에게 부처님이 없으면 대치(大治)의 연조(年條)가 길어지고, 부처님이 있으면 정치가 가혹해져서 국조(國祚)가 짧아진다고 거짓 천명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을 서역의 오랑캐에게 전하더라도 반드시 시행하지 않는다고 거짓 천명하는 것이다.

여덟 번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체적으로 논하자면 허망한 것이 많고 실다운 것이 적다고 거짓 천명하는 것이다.

아홉 번째는, “농업을 장려하고 공업을 안정시켜서 장터를 그 가운데 열게 하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이 풍족해진다고 거짓 천명하는 것이다.

열 번째는, “제왕이 천명(天命)을 받게 되면 모두 전대(前代)의 정치를 혁신하게 된다고 거짓 천명하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직언(直言)과 충간(忠諫)은 예로부터 입에서 나왔으나 화가 그 몸에 미쳤다고 거짓 천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한 가지 조항을 개괄하여 풀이하기에는 너무 번잡하다. 말을 아끼고자 번거로운 것을 간략히 하여 여러 가지 다른 것을 함께 풀어내어 상주하자, 고조(高祖)가 이를 열람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조칙을 내려 여러 주의 사찰과 불탑을 폐하게 하였으니, 95) 64일이다. 나중에 상주하자, “그대가 크고 올바르게 상주한 일로 남에게 살해당할까 두려워할 것이나 지금 이후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정관(貞觀) 6(632)에 다시 상서를 올려 스님들은 나팔을 불어야지 종을 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하였다.

 

불법은 요망하고 삿되다라고 말하였다. 황제가 이 조칙을 소우(蕭瑀)에게 보이자, 소우가 부혁은 성인을 그릇되다고 하니 참으로 무도하다라고 말했다. 이에 부혁이 반박하여 소우는 선조 이래로 종묘를 섬기지 않고 호나라 귀신만 숭배하였으니 효자가 아니기에 부모조차도 없다. 불교의 가르침이 중화에 들어온 이래로 선비로서 식견이 고매한 이들은 그 요망함을 반박하였다고 하는데, 이상은 고식전(高識傳)에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부혁이 전()에서 이와 같이, “고조(高祖)가 그 말에 따라 사찰을 폐지했다고 했으나, 이는 실제로 임금을 기만하는 것이다. 어찌 4년에 상서를 올리고 9년에 여러 주의 사찰과 불탑을 폐지하거나 줄였겠는가? 마침내 이에 회답하는 조칙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조목이 한결같이 헛되므로 만 갈래 길이 모두 이렇다고 하겠다. 부혁이 그 몸이 죽은 연후에도 전을 내어서 팔려고 하였으니, 비록 조칙을 꾸며 내었다 일러도 이미 죽을 만한 목숨이 없었다. 또 소장(所狀)을 올려 종치는 일을 허가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망령된 작태이다. 경전에서 홍종(鴻鍾)을 쳐서 병란을 알리고 건추(楗槌)를 쳐서 대중을 모이게 한다고 말씀하셨고, 부처님의 종을 친다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또 소우가 종묘(宗廟)를 섬기지 않고 오로지 호나라의 부처님만을 섬겼다고 기술하였으니, 이것은 얼굴을 마주하고 재백(宰伯)에게 속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양전(梁典)에는 고조가 7()에 매번 제를 올리고 나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는 일은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지금 경사(京師)의 동쪽과 서쪽 양제(兩第)에는 모두 종묘가 있으니, 4()에 제향(祭饗)하여 서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의롭기가 아무리 들어도 넘치지 않는데 이 같은 전()을 널리 폈으니 이 또한 가소롭지 않은가?

변두리의 짧은 식견에 연하여 날조한 것에 그치기에 중화라 드러내기도 부족하니, 참으로 애석하구나. 정식(淨識)이 한 번 오염되면 순식간에 침체되니 근본으로 돌이키는 것을 어떻게 기약하겠는가?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앞서 논평한 것처럼 그 흥하고 망한 부류에 따라 여기에 상세히 적어 둔다.

당림(唐臨)명보기(冥報記)를 검토해 보면, 태사령 부혁은 무덕 초년에서 정관(貞觀) 14년에 이르도록 늘 부처님과 스님들을 비난하였는데, 그 해 가을 병을 얻어 급사하였다. 처음 부혁이 도사 부인균(傅仁鈞)

 

설색(薛賾)과 친하게 지냈는데 나중에 부인균과 설색이 모두 관록(官祿)을 받았으나 부인균이 먼저 죽었다. 설색이 꿈에 부인균을 보았는데, 그가 예전에 빚진 돈을 진흙 사람[泥人]에게 갚으라고 말하였다. 설색이 누구냐고 묻자, 바로 부혁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날 밤 소부(少傅) 풍장명(馮長命)이 또 다른 꿈을 꾸었는데, 역시 어떤 곳에서 이미 죽은 선조들을 많이 보았다. 이에 풍장명이 불경에서 말하는 죄와 복이 사실이냐고 묻자 모두 사실이라고 대답하였다. 또 풍장명이, 살아서 부처님을 믿지 않았는데 죽어서 어떠한 보를 받느냐고 묻자, 부혁은 이미 월주(越州)로 유배되어 진흙 사람이 되었다고 대답하였다. 풍장명이 새벽에 조정 대전(大殿)으로 들어가다가 설색을 보고 꿈꾼 것을 말하자 설색도 자신이 꿈 꾼 것을 말하였는데, 두 가지 꿈이 모두 맞아 떨어졌다. 마침 당림이 그 곁에 있다가 이를 듣고 함께 개탄하였다. 설색이 바로 부혁에게 돈을 보내 주면서 꿈꾼 것을 말하였는데 며칠이 지나서 부혁이 죽었다.

여기서 진흙 사람이란 니리(泥犁) 가운데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 니리는 바로 지옥의 별명이다. 팔대지옥(八大地獄)이 지하에 있는데 여타의 자잘한 지옥은 산중이나 바다에 흩어져 있어 여기서 고통을 받는다 하니 참으로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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