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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54 불교(광홍명집 5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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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5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2. 변혹편(辯惑篇)

 

서문

세속의 미혹(迷惑)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미혹은 부처님께서 환영과 거짓된 것으로 인심을 잘 유혹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미혹은 인과(因果)란 막막하기에 그 몸담고 있는 세상만을 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부처님을 대각(大覺)이라 이르니, 빌미의 기초를 지극히 관조(觀照)하시며, 성욕(性欲)1)이 여러 갈래임을 살펴서 병에 따라 약을 쓰는 권도(權道)를 단련하셨다. 그러므로 우러르니 금색신(金色身)의 자태를 나투시어 6()의 거룩한 몸을 드리우시자, 그 빛이 퍼져 두루 밝히되 대천세계(大千世界)를 통틀어 교화를 여셨다. 따라서 그 도를 따르는 이는 진토(塵土)에서 증오(證悟)를 얻게 되는데, 안으로는 10(使)2)의 얽매임이 풀어지고 밖으로는 8()의 폐단을 소탕시킨다. 그러므로 물과 불을 밟더라도 장애가 없고 귀신과 용을 제어하여 그 신()을 기쁘게 한다. 3()6()으로 신령스러운 금단(襟丹)의 묘술(妙術)을 창달하고, 4무애변(無礙辯)3)8해탈(解脫)로 만물의 강구(康衢:大道)를 연출하니, 그 도가 참으로 뚜렷하더라도 이를 모두 말하기 힘들다.

이수(李叟)가 도()라 칭한 것에 이르러 겨우 두 편()을 지었으나, 명색이 주()나라의 사신(史臣)에 불과하기에 그 학문이란 것도 주나라의 일개 관리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향(厲鄕)에서 태어나 괴리(槐里)에서 죽었는데, 장생(莊生)이 이 사실을 기록해 두었으나, 진나라 때 분실되었으니 참으로 그릇된 논()이 아니라 하겠다.

사마천(司馬遷)이 그를 기리어 서쪽으로 가서 유사(流砂)에 은둔하였다고 말하였는데, 한나라 경제(景帝)가 이 말을 그대로 믿어서 동하(東夏)의 도학(道學)을 열었다. 이 이후로 그 종지(宗旨)의 단서가 점차 유포되어 마침내 신주(神州)에 퍼졌다. 지혜를 끊어 수자(守雌)4)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리석은 속인들을 믿게 하고자 헛되이 날조하여 참답다고 칭찬하였다. 이어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따위의 경전을 지었는데, 불법(佛法)4()10()ㆍ겁수(劫數)를 흉내 내어 그대로 따르면서 흙을 뭉쳐 사람을 만들어 놓고 관세음보살이 태상노군(太上老君)을 시봉한다고까지 꾸며 대었다. 황서(黃書)5)로 수명을 제도하고 적장(赤章)6)으로 귀신들을 불러들인다고 하는데, 이 같은 말이 너무나

 

맹랑하여 입에 다 담기에도 부족하다.

바야흐로 부처님을 능멸하고 법보(法寶)와 승보(僧寶)를 과장하고, 속인을 속여 존극(尊極)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전적에 해박하며 식견이 깊은 이는 스스로 이를 멀리하여 상도(常道)를 살렸다. 그러나 배운 것이 적어 헤매는 자는 혹 저들에게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덕경두 편도 연자(涓子)7)가 설한 것으로, 백양(伯陽)이 윤()이 되어 이것을 전하였으니, 이는 말만 전한 것으로 실제로 지은 것은 아니다[述而不作]. 4() 이하로는 모두가 도의 부류가 아닌데도, 그 후학(後學) 되는 문인들이 구술(衢術:道術)을 넓히면서 말할 때마다 비슷한 것을 끌어들였기에 도리어 본종(本宗)에 막대한 누를 끼쳤다. 그러므로 신선전(神仙傳)에서도, “저술하지 않은 도사들이 거짓되게 전했는데, 노자가 대대로 국사(國師)였다는 것은 참으로 지나치다라고 말하면서 갈홍(葛洪)은 참으로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선비인지라 천 년에 한 번 정도 태어난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여타의 사람들은 모두 그만그만한지라 수레를 나란히 하여 함께 달린 정도라 하였다.

불경에서는 이담(李聃)을 언급조차 하지 않으나, 도가(道家)의 책에서는 석가의 가르침을 많이 인용하였다. 사람의 무리가 위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속담처럼 말하여지는 것으로 아래에 처하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에 지금의 속된 일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모양에 따라 의()를 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는 본래 기()인지라 그릴 만한 상()이 없는데도, 부처님의 금색(金色)의 자태를 흉내 내고 천당과 지옥을 나열하면서 5()10()을 그대로 옮겨 적어 시행하고 있는데, 이에 상응하는 다른 자취가 없었다. 결국 재용(才用)이 부족하여 스스로 그 종과(宗科)를 세울 수 없어 불경을 훔치고 그 이치를 도둑질하여 이를 모방하여 도()라 칭하였으니, 양웅(楊雄)의 태현(太玄)에 이르러서야 그 이도(異道)에 머무름을 비로소 뚜렷이 하게 되었다. 포박자(抱樸子)에서는 도를 논하여 멀리 권도(權道)라는 것을 열었는데, 장자(莊子)의 혜시(惠施)에 출현한 것으로 명가(命家)라 할 만하니, 어찌 상황(上皇)의 근원에 깊숙하게 원밀(元密)이 한철(漢徹)의 명호를 취한 것과 같겠는가?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능인(能仁)의 의례(儀禮)에서 따온 것으로, 이 같은 자취가 실로 허다한데, 모두 후세에 꾸며낸 것이다. 또 속세에서 3()의 업에 미혹하여 4()의 보()를 경시하는데, 사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이곳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느 곳에 이를지 모른다. 이로 인해 빠져 들어 나올 때는 인연이 없다. 만약 큰 줄기를 펴지 않는다면,

 

미혹이 오래갈수록 더욱 심해지니 번잡한 것이 싫더라도 어떻게 이를 간략히 할 수 있겠는가?

또 덧붙여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체로 미혹을 풀어내는 것은 넓은 소견과 의로운 행실에 있으니, 전해 듣고 암기하는 것은 참으로 주사(舟師)를 구별하기 힘들다. 따라서 4불괴정(不壞淨)8)이 유포되기 시작한 이래로 한결같이 일정정취(一正定聚)9)를 섭정(涉正)의 역()이라 칭하였다. 나머지는 처음으로 염의(染衣)를 입는 것이 가벼운 털[輕毛]10)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풍화(風化)를 수순하여 기리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옻칠한 나무는 연마하더라도 색이 선명해지지 않기에 이로써 미혹된 것을 가리고 정도를 밟아 깨달음의 기연(機緣)을 열고 그 형태를 정하여 도를 안정케 하는 것은 반드시 계명(稽明)의 덕에 따라야 한다.

법이 진단(震旦)에 유포된 이래로 믿음과 욕설이 서로 침해하였는데, 대체로 억측에 연유해서 마음대로 결론 내린 것뿐으로, 3()가 필연적인 일인데도 이를 우화(寓話)라고 일렀고, 6()의 뚜렷한 형태조차 헛된 귀지(歸指)라고 말한다.

대체로 생사의 윤회는 업에 따라 가고 오는 것으로, 생각과 생각에 의지하여 몸을 부여받고 겁()과 겁에 따라 그 식()을 전하게 된다. 이 때문에 호상(濠上)의 영화로움11)에서 방생(方生)의 이론이 지어졌고, 주하(柱下)12)의 예철(睿哲)은 그 귀()를 신()이 아니라 칭하게 되었다. 시절이 오래되어 다함이 있어도 그 생애(生涯)는 다하지 않는다고 말할 만하다. ()의 아버지는 황능(黃能)으로 변화하였고13), 한왕(漢王)14)은 변하여 창견(蒼犬)이 되었으며, 팽생(彭生)이 돼지로 변하여 제공(齊公) 앞에 나타났고, 원백(元伯)이 갓끈을 드리워 그 이름을 한사(漢史)에 드높였다. 이 같은 일이 많아 모두 띠[]에 쓰기도15) 어려운데 무식한 무리가 망령되게 추론하며 말하기를, “3()16)가 천상에 있다는 것은 권유(權猷)의 고궤(高軌)이며 제사를 지내고 귀신에게 음식을 베푸는 것은 효도의 권유이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이 같은 것은 인륜의 전모(典謨)에 어긋나고 천상(天常)의 행사(行事)를 넘어서는 것이다. 괴이한 글로 세속을 어지럽힌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유혼(遊魂)에 대한 말이 나오고 경서에 고신(故身)의 의무를 서술한 것과 같이 소목(昭穆)17)의 순서를 두어 조상을 높이며 부모를 존중하되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는 때에 따라 슬픔을 다하고 조상의 제사 때에는 정성을 다하고 경건해야 한다. 그 유래가 같은 조상을 함께 숭앙하고 서리 밟아[踐霜]18)

감흥하는 것이 열대(列代)의 이륜(彛倫)이니, 어찌 태어난 바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오로지 자기 몸 하나를 남기면서

 

귀신이 없다는 말을 늘어놓으며 스스로 유신(有身)의 술법만을 받아들인다.

전집에서 이미 홍명집을 논했는데 지금 다시 드러내 보고자 한다. 그 명리(名理)를 따져 보고 경론을 찾아보면, 그 권부(卷部)5천이나 되는데, 모두 경목(經目)을 열람하여 이치는 8()에 통하고 그 종귀를 묘하게 판별해 낸 것이다. 이는 전적을 널리 수색하여 저와 같은 일들을 모두 단제하여 미혹을 되돌린 것으로, 6()4()은 선과 악을 타고 업을 이루며, 4()6()는 오르고 내려가는 과보를 이었다. 이 같은 도는 드넓은지라 배우지 않으면 통달하지 못하는데, 어찌 비루한 범부의 억측을 믿어 대성(大聖)의 밝은 지략(智略)을 배척할 것인가?

게다가 10()의 인주(仁舟)를 나열하여 커다란 마음으로 고해(苦海)를 구제하고, 4()의 계단을 나누어 소지(小智)의 삿된 산을 인도하며, 3()으로 양승(兩乘)을 통괄하고 4()으로 8()을 쳐부수는 것이다. 대강 이와 같다면 그것에 미혹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다시 사찰과 불탑을 거룩하게 꾸미는 것이 어찌 재물을 낭비하는 일이겠는가? 스님들에게 공양하고 시주하는 복전(福田)을 남용하고, 불법의 번창을 침해하면서 시속(時俗)을 조롱하고 불법(佛法)을 매도하여 모두 매몰시키곤 하였다. 그러므로 주나라와 위나라의 두 무제(武帝)가 태생이 원래 유도(幽都) 출신이고, 혁련(赫連)의 두 임금이 험윤(獫狁)의 후손임을 생각하면, 그 고향이 인의(仁義)의 역()이 아닌지라 성품 자체에 도견(陶甄)의 마음이 없다 하리니, 저들이 법맥을 멋대로 끊어 놓은 것도 참으로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

지금 열대(列代)를 개괄적으로 편집하여 목차를 정했는데, 혹시라도 미혹에 빠진 이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서문에서 이와 같이 말해 둔다.

 

() 홍명집』 「변혹편의 목록

1) 모융(牟融)의 변혹(辯惑)

2) 실명(失名)의 정무론(正誣論)

3) 종병(宗炳)의 난하승천백흑론(難何承天白黑論)

4) 하승천(何承天)의 달성론(達性論)

5) 안연지(顔延之)의 난()

6) 석도항(釋道恒)의 석박론(釋駁論)

7) 장융(張融)의 문율(門律)

8) 주옹(周顒)의 난()

9) 석현광(釋玄光)의 변혹론(辯惑論)

10) 유협(劉勰)의 멸혹론(滅惑論)

 

11) 이삼(李森)의 난불현불형론(難不現佛形論)釋高明答

12) 소자량(蕭子良)의 석의혹서(釋疑惑書)

 

() 광홍명집』 「변혹편의 총목(總目)

1) () 진사왕(陳思王)의 변도론(辯道論)

2) () 손성(孫盛)의 성현동궤노담비대현론(聖賢同軌老聃非大賢論)

3) 진 손성의 서도반신노자의문(敍道反訊老子疑問)

4) 남제(南齊) 심휴문(沈休文)의 균성론병난급해(均聖論幷難及解)

5) 서열대왕신체혹해(敍列王臣滯惑解)

6) 원위(元魏) 태무(太武)의 폐불법조(廢佛法詔)

7) () 고조(高祖)의 집승론폐립(集僧論廢立)

8) 주 사문(沙門) 석도안(釋道安)의 이교론(二敎論)

9) 주 견란(甄鸞)의 소도론(笑道論)

10) 주 고조(高祖)의 폐이교조(廢二敎詔)

11) 주 무제(武帝)의 평제집승론폐립(平齊集僧論廢立)

12) 주 전사문(前沙門) 임도림(任道林)의 항제론(抗帝論)

13) 주 전사문 왕명광(王明廣)의 청흥법표(請興法表)

14) () 부혁(傅奕)의 상폐불법표사(上廢佛法表事)

15) 당 이소경(李少卿)의 십이구미론(十異九迷論)幷書

16) 당 사문(沙門) 석법림(釋法琳)의 상파사론(上破邪論)幷表啓

17) 당 사문 석명개(釋明槪)의 상립불법사(上立佛法事)

18) 당 이사정(李師政)의 내덕론(內德論)

19) () 대안(戴安)의 석의병요주석의론(釋疑幷姚主釋疑論)及外問答往反十首

20) () 사문 석혜정(釋慧淨)의 절의론(折疑論)

 

1) 변도론(辨道論) () 조식(曹植)

신선(神仙)에 관한 책과 도가(道家)의 말에 의하면, 부열(傅說)19)은 위로 올라가 진미수(辰尾宿)가 되었고, 세성(歲星)은 내려가 동방삭(東方朔)20)이 되었다고 이른다. 회남왕(淮南王) ()이 회남에서 주살(誅殺)되었는데 이를 도를 얻어 승천하였다고 이르고, 구익(鉤弋)이 운양(雲陽)에서 죽었는데 시체가 사라져 관이 비었다고 말하니, 그 허망함이 어찌 이리 심한가?

중흥하여 독실한 논()을 일으킨 선비로는 환군산(桓君山)이 있는데, 그가 저술한 것 가운데 좋은 것이 많이 있다. 유자준(劉子駿)이 예전에 그에게 물었다.

참으로 욕심을 줄이고 귀와 눈을 가린다면 노쇠하지 않겠는가?”

이 때 뜨락에 오래된 느릅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환군산이 그것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나무야말로 마음의 움직임이 없으니 욕심을 참아낼 수 있고, 가릴 만한 귀와 눈이 없는데도 가지가 시들어 썩어 버렸다. 그런데도 그대는 노쇠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군산 당신이 느릅나무로 비유를 들어 말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어째서인가 하면, 내가 예전에 왕망(王莽)의 전악대부(典樂大夫)였는데, 악기(樂記)에 이르기를, ‘문제(文帝)가 위문후(魏文侯)의 악사(樂士) 두공(竇公)을 얻었는데, 나이가 180세인 데다 두 눈마저 멀었다. 황제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어떻게 악기를 다룰 수 있느냐고 묻자, 두공은 13세 때 실명하였는데 부모가 일하지 못하는 것을 애처롭게 여겨 그에게 북과 거문고를 가르쳤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자기가 도인법(導引法)에 능하지 못한데도, 어떠한 힘을 얻어 장수하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마침내 환군산이 이에 대답하여 말하였다.

대체로 맹인이 되면 오로지 안으로 그 마음만을 살피게 되는데 이는 외감(外鑒)의 조력이 아니다. 먼저 유자준을 반박하여 안으로 살피는 것에 이로움이 없었고, 물러나 두공의 말을

 

논하여 살펴보지 않은 것으로 증거를 삼았으니, 내가 그 정론을 보지 못했다.”

환군산이 다시 말하였다.

방사(方士) 가운데에 동중군(董仲君)이란 이가 있었는데, 옥중에서 거짓으로 죽었다가 며칠이 지나 눈을 떴는데 벌레가 몸에서 나오더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후에 다시 죽었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군자가 모두 아는 것인데 어찌 비유를 들어 말하겠는가? 대체로 신령함이 지극하더라도 천지에 불과하니, 흙 속에서 겨울을 보낸 벌레들은 여름철에는 깊이 숨어 있지 않고 천둥 번개는 겨울철에 치지 않는다. 시절이 변하매 물건도 변하고 기운이 옮겨지매 사물도 이에 따른다. 저 동중군이란 이가 그 기()를 미리 간직해 두었다가 몸을 시체로 변모케 하여 피부가 썩어 벌레가 생겨난 것이 어찌 그리 이상하겠는가?”

세간에는 방사(方士)가 여럿 있었는데 우리 왕이 모두 초빙한 적이 있었다. 감릉(甘陵)에는 감시(甘始)가 있었고, 여강(廬江)에는 좌자(左慈), 양성(陽城)에는 극검(郄儉)이 있었다. 감시는 기()를 부려 도인(導引)을 행하였고, 좌자는 방중술(房中術)에 밝았고, 극검은 벽곡(辟穀)에 능통하여 모두 3백 세라고 칭하였다. 이들을 위()나라에 모여 들게 한 이유는 이 무리들이 간특한 것과 교통하여 대중을 속이는 데다 행하는 것이 요사스러워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을 매우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 잡아다가 가두어 두었다. 감시는 늙었어도 어린아이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다른 술사들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러나 감시는 말만 번듯하고 실제적인 것이 없이 대부분 괴상한 말만 늘어놓았는데, 만약 진시황이나 한무제를 만났더라면 다시 서복(徐福)21)이나 난대(欒大)22)의 무리가 되었을 것이다.

() 임금과 주() 임금은 세대를 뛰어넘어 그 사악함이 비슷하고, 간사한 인간은 시대를 달리해도 그 거짓됨이 같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 세간에는 선인(仙人)에 대한 거짓된 설이 있으니, 선인이란 원래가 원숭이[猱猨]의 족속인데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도를 얻어 마침내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참새는 바다에 들어가서 조개가 되고, 꿩은 바다에 들어가 게가 될 뿐이며, 배회할 때는 그 날개가 가지런하지 못해도 그 날개를 스스로 알아야만 한다. 홀연히 스스로 몸을 던져 신화(神化)하여 그 바탕이 변하더라도 다시금 거북이나 자라와 더불어 무리를 이룰 것이니, 숲속의 작은 둥우리에 깃들면서 담벼락이나 추녀 끝을

 

선망하는 것을 스스로 알기나 하겠는가?

이리하여 돌아보면 필부가 속이며 허망한 말을 받아들이고 현혹된 얘기를 미더워하는 것이다. 예우를 융성하게 갖추어 초빙하여도 신하로 삼지도 못하고, 재산을 기울여 공양하여도 구하는 것마다 헛되고, 왕작(王爵)을 흩트려 이를 영예롭게 하고 조용한 관사에 머물게 하여도 햇수만 헛되이 보낼 뿐으로, 끝내 한 가지 효험도 없는지라, 혹 사구궁(沙丘宮)에 묻히기도 하였고23), 오작궁(五柞宮)에서 붕어하기도24) 하였다. 시절에 임하여 비록 그 몸을 주살하고 그 족속을 멸하더라도 여전히 분분하기에 도리어 천하의 비웃음만 산다. 그러므로 수명이 길고 짧고 골격이 강하고 약한 것은 각각 그 사람마다 다른 것으로, 잘 보양하는 이는 끝까지 가고, 힘들게 하는 이는 반 정도 가고, 헛되이 쓰는 이는 요절하게 되니, 이를 것이 고작 이것뿐이다.

조식(曹植)의 자는 자건(子建)이다. () 무제(武帝)의 넷째 아들이다. 처음 동아군왕(東阿郡王)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시호를 진사왕(陳思王)이라 하였다. 어려서 규장(珪璋)을 익혔고, 열 살에는 문장에 능했기에 붓을 들면 바로 글을 이루었으니, 고치는 것이 없었다. 세간의 기회마다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한단(邯鄲)의 순()이 그를 보고 놀라서 천인(天人)이라 부르며 감복하였다.

조식이 불경을 읽을 때마다 아주 유창하게 반복하며 지도(至道)의 종극(宗極)처럼 되었다. 마침내 그 7()을 사용하여 높이거나 내리거나 짧거나 길게 소리를 내어 불경을 독송하니, 이 때문에 세간의 풍송(諷誦)이 모두 그를 본받게 되었다. 일찍이 어산(魚山)에서 노닐다가 공중에서 범천(梵天)의 찬송을 듣고 이를 흉내 내어 후세에 전한 것이 바로 양법원집(梁法苑集)에 수록되었다. 이리하여 도의 근원을 통괄하고 신선의 기록을 정밀하게 연구해 보고 거짓된 것이 너무 지나침을 알고 이 같은 논문을 지어 자세히 천명한 것이다.

 

2) 성현동궤노담비대현론(聖賢同軌老聃非大賢論) () 손성(孫盛) 안국(安國)

잠시 한가로이 머무르게 되자, 다시 노래를 부를 만하였기에 옛 철인(哲人)의 현미(玄微)를 우러르고 대현의 영구(靈衢:영도)를 궁리하면서 그 풍류(風流)를 자세히 살피고 행동을 낱낱이 따져 보니, 그 높고 낮은 언사가 참으로 비슷하였다.

대성(大聖)은 시운(時運)을 타기 때문에

 

그 자취가 인()한 것에서 움직이고, 대현(大賢)은 그 조짐을 잇기에 대성과 더불어 나아가고 숨는다. ()한 바가 같지 않기에 읍양(揖讓)과 간과(干戈)의 자취가 달라지나, 조짐을 이어 도를 버금가게 행하기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자취가 서로 다르지 않다. 이 또한 청룡과 맹호가 비바람을 따르고, 그 모양과 소리가 그림자와 메아리로 서로 어울리듯 하는지라, 이치가 참으로 자연스러워 억지로 둘러 댄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기자(箕子)와 문왕(文王)이 그 조짐을 같이하여 호시(虎兕)의 입 앞에서도 크게 길하였고, 안회(顔回)와 공자가 함께 곤란을 당하여 광진(匡陳)의 사이를 떠돌았다. 당요(唐堯)는 하늘을 본받고 후직(后稷)과 설()은 그 덕화(德化)를 도왔다. ()과 무()가 천명(天命)을 개혁하자 이윤(伊尹)과 여상(呂商)이 그 공업(功業)을 도왔다. 여기서 논해지는 것이란, 이른바 쓰이면 세상에 나아가고 버림받으면 세상을 피하는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이론이니, 내가 그대에게 말하려는 것이 어찌 미덥지 아니하랴.

어째서인가 하면, 대현(大賢)은 상()을 보고 그 그릇을 아는 것이다. 상을 보고 그릇을 알면 그 길흉(吉凶)을 미리 총괄하게 되고, 이로써 형체의 운전(運轉)이 저들과 같아져서 다스림이 인응(因應)하게 된다. 군방(群方)을 대하더라도 끝내 원길(元吉)을 보호할 터이니, 궁하더라도 그 막힘을 통하게 함이 그 법도 가운데 하나이다.

단지 성인을 흠모하고 역()을 즐거워하여 기다리며 배향(配享)하니, 그 어두움[]을 흠모하여도 어두워질 수 없고 적막함을 기뻐하여도 적막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로써 우열이 갈라진다. 중현(中賢)과 세 번째 등급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성인과 차이가 나는 것도 명체(冥體)의 도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운용하여도 스스로 현동(玄同)25)을 얻지 못하기에 옛것을 바라고 훌륭한 것을 기리며 생각을 높이 하여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는 것이다. 순일한 풍화(風化)를 흠모하여 오로지 지허(至虛)를 노래하므로 숲속이나 골짜기에 깃들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것이 소보(巢父)26)와 허유27)의 무리이다. 고삐를 높이 드는 것과 말씨와 행실을 높이 하는 것은 노자(老子)와 팽조(彭祖)의 무리이니, 짐짓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치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형색(形色)이 조급하여 고요한 것을 좋아하고 그 바탕이 부드러워 강한 것을 좋아하니, 항상 익히는 것을 계속하고 드물게 들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세속의 상도(常道)이다. 이로써 치우친 말을 보게 되더라도 그 인응(因應)의 당처(當處)를 다시 찾지 않으며, 속이는 거짓된 논을 보게 되더라도 지나치게 강직한 허물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다.

 

노자가 이룬 것이 성교(聖敎)와 동일하다는 논리야말로 대장(大匠)을 대신하여 네 발가락과 여섯 손가락[騈拇枝指]28)을 잘라내는 것에 비유되니, 성교(聖敎)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구하는 마땅함에서 멀어진 것이고, 도를 밝히는 깊은 의리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6()에 어찌하여 항상 허정(虛靜)의 훈요(訓謠)와 겸충(謙沖)의 교회(敎誨)가 빠졌겠는가?

공자가 조술(祖述)하되 제작(制作)하지 않았다. 믿으며 옛것을 좋아하되, 가만히 스스로를 노팽(老彭)에 비겨 본다고 말했으니, 이 같은 이치를 따르자면 노팽의 도는 성교(聖敎)의 안에 갇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두 가지 일을 지목하여 이야기 한 것으로 이미 그릇된 것이 아닌 참다운 말이다. 이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이유는 성인이 고요함을 좋아하였으며, 3()5() 이하가 제작(制作)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역상(易象)과 경분(經墳)이 찬란하게 만들어지고 건물과 의복이 시대에 따라 일어난 것인데, 이 어찌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주역에서는 성인이 이루면 만물이 살펴본다고 하였는데, 이 같은 말이 증거가 된다.

대체로 노팽의 덕을 지목하여 말하자면, 자신과 비슷한 부류로 그 형적을 자취 삼는 처소로 삼으면서 원한을 숨긴 채 사람들을 사귀었다. 좌구명(左丘明)조차 이를 안쓰럽게 여겼고, 공구(孔丘)도 이를 부끄럽게 여겼는데, 어떻게 자신의 말에서 상()과 체()의 지극함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겠는가? 안회와 공자는 도인양생(導引養生)을 섬기지 않았는데 노팽은 이를 길렀으니, 공자와 안회가 이 사람과 같았을지라도 노팽은 그들과 달리하였다.

대체로 이와 같은 것을 헤아려 보면 아성(亞聖)의 자취 아님이 없으나 그럼에도 다시 그 책에는 간간이 모순됨이 남아 있다. 이를 대략 다음과 같이 나열해 본다.

크게 슬기로운 진신(搢紳)은 다행히 그 폐단을 없애는 법인데, 무성하면서도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노담(老聃)의 경거망동한 이치로서 융적(戎狄)을 훈계하고자 하여도 그 선도(宣導)하는 바가 세속과 다르다. 만약 선도(宣導)가 상류(上類)와 틀린 것을 밝혀 보자면, 옷고름을 왼쪽에 매는 것은 현화(玄化)의 소치가 아니고, 외롭게 떠도는 것은 영예롭게 은둔하는 거동이 아니다.

이에 하()나라가 갈라지자 앞서서 교훈을 내렸는데, 이른바 성인의 가르침이란 가까운 데서 먼 데로 나아가는 것임에도

 

일찍이 수레를 굴려 위험을 피하고자 이와 같이 무작정 떠도는 일은 없었다. 만약 재앙이 두려워 그 땅을 피한다면, 바로 성인의 문호에서는 상()나라 때나 은둔할 수 있었지, ()나라 땅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참으로 그 도를 얻었다면 칼날 위를 떠돌고도 남음이 있는데, 땅을 밟았다면 이미 대길(大吉)이 된다. 어찌 이토록 천심(天心)을 거역하여 융맥(戎貊)처럼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조정의 은사(隱士)를 바라지 않으면서 신선의 무리를 얻고자 하는가?

예전에 배일민(裵逸民)숭유(崇有)귀무(貴無)의 두 가지 논을 지었는데, 당시 이것을 논하는 사람들은 허승(虛勝)의 도에 통달하지 않은 자라고 하였고, 혹은 시절을 속이고 은둔한 자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무()를 숭상하여 이미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고, ()를 존숭하여 얻지 못하였다. 도가 만물을 이루는 것이 잠깐 사이임을 생각하면 인응(因應)에 규거(規擧)가 없으나, 그 변화에 따라 가는 것이니 맑은 시절을 만나면 서계(書契)를 만들며 팔짱을 끼고 천하를 다스리며, 만물을 움직이는 덕화(德化)를 만나면 형체가 분연히 일어난다. 이로써 그 비추는 것이 비록 같다 하여도 유무(有無)의 가르침은 그 말이 다르기에 성교(聖敎)가 비록 한 가지일지라도 그것을 칭하는 이름은 다르다.

요와 순 임금은 결승(結繩)을 바라지 않았고, 탕왕과 무왕은 절하고 물러서는 것을 흉내 내지 않았는데, 이 어찌 다르겠는가? 이는 시절 운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백양(伯陽)29)이 오래된 도를 고집하여 지금에 있게 하고, 일민(逸民)이 지금에 있는 것에 고집하여 오래된 풍화(風化)를 끊었으니, 내가 이 때문에 저 두 사람이 원화(圓化)의 도에 통달하지 못하고 각자 한쪽만을 자랑한다고 여기는 바이다.

 

3) 노자의문반신(老子疑問反訊) () 손성(孫盛)

도덕경(道德經)에서,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으면 그 신비함[]을 볼 수 있고, 항상 욕심이 있으면 그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같이 나왔으나 이름이 다르다. 둘은 모두 신비스러운 것[]이다. 신비 중의 신비이며, 모든 신비의 문()이다”30)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구설(舊說) 및 왕필(王弼)의 해설을 보면, 신비함[]을 시초(始初)라 이르고, 나타남[]을 끝이라 이른다.

 

그 시초를 보고 끝을 구하되, 신비함을 살펴서 그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통달한 이의 귀감이다. 이미 정신을 맑게 하여 그 신비함의 처음이 밝아진다면 이로부터 모두 안정되어야 마땅한데, 어째서 반드시 욕심이 있음[有欲]에서 끝을 구한다 하는가? 마땅히 유욕(有欲)으로 모두 묘문(妙門)에서 나온다. 똑같이 그것을 현()이라고 하는데, 만약 이처럼 오고 가는 것이라면, 어떻게 무욕(無欲)만 홀로 귀히 여기겠는가?

천하 모두가 아름다움이 아름답게 되는 것을 알면 이것은 추악함이며, 모두가 착한 것이 착하게 되는 것을 알면 이것은 착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생각해 보면, 아름다움과 추악함이란 이름은 아름다움과 추악함의 실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도덕(道德)이 순박하게 아름다우면 착하다고 이름하고, 완고하여 귀먹고 어두우면 나쁘다는 소리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주역에서는, “악이 쌓이지 않으면 그 몸을 없앨 수 없다고 하였고, 다시 어여쁨이 그 사이에 있으니 사지(四支)로써 이를 드러내고 사업(事業)으로 일으킨다고 하였으며, ()는 아름다움을 다하였으나 선을 다하지 못하였다31)”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커다란 아름다움과 커다란 착함은 천하가 모두 아는 것인데, 어떻게 이를 추악함이라 이르겠는가? 만약 허미(虛美)를 아름답지 않다고 하고, 착한 것을 착하지 않다고 하며, 아름다운 바가 아름다움이 지나쳤다고 하며, 착한 바가 중도에서 벗어났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것은 모두 세교(世敎)에서 미워하는 것이다. 성왕(聖王)이 힘써서 천하를 경계한 것 역시 스스로 그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다시 훌륭한 사람을 떠받들지 말아야 사람들이 다투지 않는다. 얻기 힘든 재물을 귀히 여기지 말아야 백성이 훔치지 아니한다. 늘 백성이 알지 못하게 하고 욕심내지 않게 하며 저 슬기로운 이라도 감히 하지 못하게 한다”32)고 말하였다. 배움이 끊어지면 근심도 없다. ‘[]’라는 대답과 []’이라는 대답의 차이는 어느 정도이며, 착한 것과 악한 것과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가?”33)라고 말하였다. 아래 장()에서는, “착한 이는 착하지 못한 이의 스승이고, 착하지 못한 이는 착한 이의 귀감이다. 그 스승을 귀히 여기지 않고 그 귀감을 아끼지 않으면, 비록 슬기롭다 하여도 크게 미혹된 상태이다”34)라고 말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면 백성들이

 

진실로 욕심이 없다면 어찌 스승에게 스승된 바가 있겠는가? 이미 서로가 스승과 제자이면서 배우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착하지 않은 사람이 착한 이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훌륭한 사람을 떠받들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귀하고 아끼는 것을 지니면 어여쁨과 추악함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데, “서로의 차이가 얼마인가?”란 무엇을 이르는 것인가?

또 아래 장에서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도 가르친다”35), “내 말이 매우 알기 쉬우나 천하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 수 없다”36)고 하였다.

내가 이를 가르침의 아비로 삼으려 합니다”37)라는 것은 원래가 이 같은 말이다. “배움을 끊지 못한다는 것에서 끊는다 함은 요 임금과 공자의 학문인가? 요 임금과 공자의 학문은 시대에 따라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노씨의 말은 그 숭상하는 바를 한결같이 하여 시대에 따라 가르침을 베푸는 것으로 이로써 도가 백 대를 통하게 되었다. 그 숭상하는 바를 한결같이 하여 적절하게 변화하는데 있어 막히지 않는 것이 없다면 이것 또한 가려지는 것이니 통할 수 없게 되는 이유이다. “도는 텅 비어 있어 그 쓰임에 차고 넘치는 적이 없다. 그 빛을 부드럽게 하고 그 티끌과 함께한다”38)고 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면 노담이 도를 안다 하겠으나 도를 체득한 자는 아니다. 예전에 요 임금이 천하를 다스렸을 때 일해(日解)가 없었겠는가? 만물에 비추는 것을 본받아 중사(衆師)에게 맡기어 필부에게 주고 말을 이어 가듯 선양(禪讓)하였으니, 어찌 도는 텅 비어 있어 그 쓰임에 빛과 티끌로 함께 물결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러나 백양은 그렇지 아니하였으니, 이미 혼탁한 자리에 처하여 다시 멀리 서융(西戎)으로 은둔하였다. 행동거지에서는 미친 것처럼 분별없이 함부로 날뛰고, 책을 지어서는 그 말을 비뚤게 하였으니, 그 빛을 부드러이 하여 티끌과 같이하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겠는가? 그러므로 그가 참으로 도를 알았다 하나 도를 체득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도경(道經)에서 세 가지 것은 밝혀 낼 수 없는 것으로 모두 하나로 혼연 일체를 이루었다. 끝없이 이어지니 무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다. 결국 없음[無物]의 세계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없음의 형상을 홀황(惚怳)이라고 한다”39)고 하였다. 그 아래 장에서는 도라고 하는 것은 황홀할 뿐이다. 황홀하기 그지없지만

 

그 안에 형상[]이 있다. 황홀하기 그지없지만 그 안에 질료[]가 있다”40)고 하였다. 이 두 장()에서는 물건이 없다고도 이르고 물건이 있다고도 말하는데, 앞에서는 마땅하지 아니한 것이 있다고 하였다.

태고의 도를 가지고 오늘의 일[]을 처리하라”41)라고 하였고, 아래 장에서는 집착하는 자 잃을 수밖에 없고, 억지로 하는 자 실패하게 마련이다”42)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태고의 도를 가지고 오늘의 일을 처리하라. 혹 집착하거나 그러지 않았거나 어찌 모순의 논리에 빠지는 일이 없겠는가?”, “거룩함을 끊고 슬기를 버리면 사람에게 이로움이 백 배나 더할 것이다”43)라고 말하였다.

(손성 자신)가 말한다. 대체로 어질고 거룩함에는 반드시 어질고 거룩한 덕이 있다. 이것을 따르면서 존숭하지 않는다면 기르고 가르쳐서 어찌 화합할 수 있겠는가? 어짊과 의로움을 숭상하지 않으면 효성과 자애의 길이 끊어지는데, 노씨가 이미 거룩함을 끊는다 하면서 매 장마다 성인이라 칭하니, 이미 성인이라 칭하면서 그 자취를 어찌 끊을 수 있겠는가?

만약 끊고자 하는 것이 요ㆍ순과 주공ㆍ공자의 자취라면, 성인이라 호칭하는 것은 대체 어떤 성인의 자취인가? 그 말과 같이 하면 성인 가운데는 그 자취를 없애야만 하는 자가 있고, 또 그 자취를 칭해야만 하는 자가 있다. 칭하는 것과 없앤다는 것이 같지 않으므로 내가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가?

어짊을 끊고 의로움을 버리면 사람들이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워진다”44)라고 하였는데, 만약 이같이 말하고, 어짊과 의로움을 끊지 않으면 효성스럽지도 자애롭지도 못하게 된다.

다시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사람됨을 갖춘 사귐”45)이라고 하였는데, 사람됨을 갖춘 사귐[與善仁]에서 그 어짊을 살피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앞서서 끊고자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이것을 옳다 하면, 마땅히 이를 다시 언급하여 기술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그르다 하면, 두 가지 어짊의 이치가 자세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는 어짊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어짊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니, 이 또한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거룩하지 못한 것을 거룩하다고 이르고, 어질지 못한 것을 어질다고 이르면, 이는 바로

 

죽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 따로 드높이 부르짖을 필요조차도 없다.

여기에다 장주(莊周)성인이 죽지 않으면 대도(大盜)가 그치지 않는다고 일렀고, 다시 전상(田常)이 인의(仁義)를 훔쳐 제()나라를 취하였다고 말했다.

천지가 주조하여 선악을 같이 기르는 데는 각각 자연의 이치를 부여받아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올빼미와 수리가 본래 독하기에 난새와 봉황에게서 배움을 빌리지 않고, 표범과 호랑이는 해로운지라 기린에게서 술()을 빌려오지 않는다. 이 모두가 자연적인 천성이지 외부 환경에 따른 것이 아닌데, 어떻게 흉악한 이가 어짊과 의로움을 빌려 그 간악함을 구제하겠는가?

묵돌[冒頓]이 아비를 죽이고 정백(鄭伯)이 회()를 훔친 것과 같으니, 어찌 앞서서는 효도를 흉내 내다가 나중에는 해침을 얻는가?

장주(莊周)와 이로(李老)가 마주 쳐서 그 뿌리를 끊고 바른 가르침을 훼방하는데, 도적을 밉다 하면서 방패와 창을 녹여 만들고 밥 먹다가 목이 메이는 것을 보았다고 오곡(五穀)을 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후세에 이를 논하는 자들은 비록 그 이치를 왜곡하여 변론하여 해석하더라도 모두 성인을 죽이는 데 어렵고 부모를 잊어버리는 것에 괴로워서 쓰러지지 않는 바가 없다.

성인이 천하를 보살피니, 백성이 모두 귀와 눈을 기울인다고 말했는데, 스승과 제자가 서로 귀히 여기고 아껴 주어야 만물을 밝히게 된다. 이같이 되기만 하면 이를 아는 이를 어찌 드물다 하겠는가? 드문 것을 아는 이를 어찌 반드시 귀하다 하는가?

자기 몸만 귀히 보면서 구복(九服)으로 어찌 금은보화를 찰 수 있겠는가? 소리 높여 이르기를 귀한 것은 드문 것을 아는 데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풍속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므로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의 가르침이란 그렇지 않아서 중용(中庸)의 도로 그 말을 부드럽게 하고 이치로 훈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에 있어도 반드시 들리고,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들린다고 이르는 것이다. 이같이 들려야만 반드시 통달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 착함을 남들이 보지 못해도 번민하지 않는 것은 잠룡(潛龍)의 덕이며,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 모두가 좋다 해도

 

반드시 이를 살피고 모두가 나쁘다 해도 반드시 이를 살피는 것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드러내지 않고 조금인 것을 안다고 귀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 가르쳐 인도하는 것이 여유로워 이치가 자연스럽게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니, 어찌 노담의 말과 해를 똑같이 하여 우열을 가리려 드는가?

()란 충성과 신의의 얄팍한 껍질로 혼란의 시작이다. 앞을 내다보는 것은 도의 꽃이며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람[大丈夫]은 두꺼운 데 머무르고, 얄팍한 데에 거하지 않는다. 열매에 머무르고, 꽃에 거하지 않는다”46)라고 하였다.

내가 말한다.

노담이 성인의 예악(禮樂)은 족히 알았다 하겠으나, 아득하고 뛰어나게 갖춘 것이 아니기에 이를 얻어 제작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를 고의로 훼손해서 다시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단지 예학(禮學)을 폐하여 그 맡겨진 것을 온전히 하는 것은 자연의 논리인데, 어찌 말세[叔末]에 다시 자연의 도로 돌아갈 수 없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겠는가?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마음을 펴고자 한다면 그 즐기는 것에 마음을 쏟게 되어 만물을 구하는 데에 마음을 쓸 수 없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헛되이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그 폐단만을 부추기게 된다. 혹 누가 장주와 노씨도 이유가 있어 이같이 외쳤을 것이니, 대체로 성교와 더불어 그 겉과 속이 되기에 만물을 도야(陶冶)하여 가르침을 밝히려는 것은 그 돌아감이 하나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인의 도는 광대하여 모든 것을 갖추었다.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 달린 듯한데, 어떻게 비추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노씨의 말이 비록 모두 6경을 논박한 것이라면, 차라리 다시 허물될 것을 기다리느니 노자나 장자를 도와주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장주가 해와 달이 떠서 횃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나, 그 허망하고 이상스러운 말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한쪽에 막혀서 조리 없이 횡설수설하는 이상한 말들뿐이다.

왕과 제후는 하나를 얻어 천하의 정()이 된다’47)고 하였는데, 정이란 바르다는 뜻이다.

 

아래 장에서는 누가 그 끝을 알 수 있겠는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올바름이 변하여 이상스런 것이 되고, 선한 것이 변하여 사악한 것이 된다’48)고 하였다.

이 두 장을 살펴보면 혹 천하가 바르다고도 하고 혹 바르지 않다고도 말하는데, 이미 착한 이는 착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라 말해 놓고 어찌 사악한 것이 된다고 하는가? 천하의 선은 하나인데 혹은 스승이 되었다가 혹은 사악한 것이 된다 한다. 천하의 정도는 하나인데 올바름이 변하여 이상스런 것이 된다고 하니,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손성의 자는 안국(安國)이며, ()나라에서 벼슬하여 급사중(給事中) 비서감(秘書監)이 되었다. 어려서 3()9()을 섭렵하여 사적(史籍)을 익혔다. 그러므로 성현이 그 모습이 아득하더라도 말로 드러난 것에서 얻을 수 있으니, 인애(仁愛)로 나를 도야하여 서물(庶物)을 다스리되, 서서히 젖어 들게 하는 공로는 경사(經史)보다 큰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진양춘추(晋陽春秋)30여 권을 지어 노씨를 중현(中賢)의 부류라고 평하였는데, 이로써 관윤(關尹)이 되어 책을 지은 것은 조상을 이어서 의거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혜자(嵆子)49), “노자는 연자(涓子)에게 나아가 9()의 술법을 배우면서 도인(導人)과 양생(養生)을 익혔다고 말하였으니, 이 말로 증험할 수 있다. 성인에 이르렀다면 배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면서 아는 이가 으뜸이고, 배워서 아는 이는 그 다음이다”50)라고 하였다. 왕은 어디에 위치하기에 왕업[鴻猷]을 맡아 이루겠는가?

그러므로 반고(班固)가 사람을 9()의 예()로써 차례 지으니, 공구(孔丘) 등을 상상(上上)이라 하고, 이에 비견되는 예를 모두 성인이라 하였다. 이담(李聃) 등은 중상(中上)이라 하고, 이에 비견되는 예를 모두 현인이라 하였다. 성인에는 지성(至聖)과 아성(亞聖)이 있고, 현인(賢人)에는 대현(大賢)과 중현(中賢)이 있으니, 아울러 신령스러운 기틀에 날카롭고 무딤이 있으며, 그 지혜의 쓰임새에 점차적인 것이 있고, 갑작스러운 것이 있다.

손성이, 노자는 대현이 아니라고 서술한 것은 한가롭고 자유롭게 스스로를 기르는 것만을 취하여 천하를 아울러 구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앉아서 주()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서 서쪽으로 숨어 진양(秦壤)에 이르러 부풍(扶風)에서 죽어 괴리(槐里)에서 장사 지내졌으니, 그 또한 하늘로 은둔한 신선이 아닌가? 그렇다.

 

 

4) 균성론(均聖論) () 심약(沈約) 휴문(休文)

천지가 싹트면서부터 민생(民生)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아득하고 막막하여 무어라 이르지 못하나, 어찌 말하지 못할 바가 있겠는가? 진실로 이름 붙이는 방법이 있으나, 태허(太虛)의 광막함과 무시(無始)의 아득함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말과 모양으로 이를 살필 수 있겠는가?

참으로 마음의 걱정될 일이 끊어지고 천지가 한데 모여 와서 그 가운데에 거처하는 것에 미쳐서는 터럭 끝이 커다란 바다에 떠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잘못된 비유이다.

그렇다면 이 천지가 생겨난 이후는 일념(一念)과 같다. 우리가 시기를 아무리 오래 잡아도 헌원과 복희의 시대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천지란 것도 저 태허 속에 자리하듯이 헌원과 복희의 시대도 천지 속에 깃드는 것일 뿐이다. 도량이 좁은[齷齪] 무리들은 혁서(赫胥)51)가 가장 멀다고 말하니, 그 같이 소소한 것으로 생각을 국한시키는가?

세상에 부처님께서 계시되 그 시원을 알지 못한다. 예전의 부처님이나 나중의 부처님께서 서로 그 도를 달리하지 않으셨고, 법신(法身)이 깊어서 각각 그에 따라 감응하시며, 그 감응이 부르는 바는 대천세계도 지척처럼 넘으시는데, 인연 없이는 그 자취를 따르더라도 엿보지 못한다. 사바세계의 남쪽 경계를 염부제(閻浮提)라 이르는데, 총령 서쪽 편에 이르는 길이 그리 멀지 않음에도 운수가 열리지 못하여 이치와 동떨어지게 되었다.

무슨 근거로 이렇게 주장하는가 하면, ()나라와 은()나라 이전에는 서전(書傳)이 간략하였다. ()나라 왕실이 천명을 받고 나서야 경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ㆍ기()와 적제(狄鞮)52)가 그 방토에 따라 직분을 얻었는데, 거듭 번역하며 조공해 오자 요황(要荒)53)을 모두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8()5()이 모두 어리석고 미개한지라 문자조차 알지 못하여 말이 서로 통하지 못하였으나, 모두들 왕부(王府)에 폐백을 올리고 청묘(淸廟)에 제사지냈다. 서쪽의 가까운 나라들은 그 길이 멀지 않았으니, 잎사귀를 종이 삼아 가로로 쓴 글자는 인도와 중국이 서로 달랐으나, 실로 깊은 뜻과 묘한 이치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ㆍ우() 3대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이치가 전해지지 않았기에 그 일이 유독 서쪽을 경계 삼았는지라, 도가 동쪽으로 유포되지 못했던 이유는 중국이란 소소한 땅의 연응(緣應)이 미처 열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 돌아감을 구하고 요지를 찾으려고 한다면 차라리 4()의 음악과 날을 같이하여 말하는 것이 낫다. 희공(姬公:周公)이 빠뜨린 것이 아니다. 아마도 이런 법은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염호(炎昊)의 시대에 불이 없어 곡식을 먹지 못하고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으니, 어짊과 측은의 일은 가슴속에 싹조차 틔우지 못했다. 고기가 아니고 가죽이 아니면 꼿꼿이 선 채로도 죽을 터이기에 대성(大聖)께서 은근하게 구제하시고자 뜻을 내어도 목숨이 이것에 의지한다면 이치상 갑작스럽게 빼앗기 어렵다.

수인씨(燧人氏)가 불을 발명하여 비린 것을 익혀 먹도록 바꾸었으니, 날것을 익혀 먹도록 바꾼 것에서 마침내 부처님의 가르침이 싹트는 조짐이 보였다. 왜냐하면 날것을 익혀 먹는 그 같은 일이 처음에는 어렵다가도 이 같이 시작하기 어려운 것이 쌓여 나가면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농씨(神農氏)에 이르러 다시 물을 대고 오곡을 파종하도록 이끌어 가서야 백성들이 곡식을 먹게끔 되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 고기가 아니라도 배를 불릴 수 있었기에 살생을 기피하는 일이 차츰 많아지다가 이 이래로 불쌍히 여기고 아껴 주는 일이 날로 퍼졌다. 봄철에 사냥 나가서도 새끼 밴 것을 놓아 주며, 여름철에 수렵하여도 곡식을 해치는 것만 잡으며, 가을철에 사냥하고 겨울철에 덫을 놓으면서 피해가 큰 것만 잡았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살생하는 법을 금하기 어려움은 이미 논한 그대로이다.

주공과 공자 두 성인의 종조(宗條)가 점차로 넓어져 그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우는 소리를 듣고서는 고기를 먹지 못하였다. 초목을 잘라 내고 베어 내는 것에도 때를 맞추게 되었고, 새끼 사슴이나 알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으며, 고기를 잡아도 씨를 말리지 않았고, 화전하여도 벌판에다 함부로 불을 놓지 않았으며, 그물대신 낚싯줄을 사용하였고, 둥지에서 잠자는 것을 쏘지 않았으며, 고기 먹고 비단옷 입는 일조차 나이 70세 이상의 노인이 되어야 했다. 소ㆍ양ㆍ개ㆍ돼지까지도 함부로 잡지 않게 하였다.

이로써 계율의 다섯 갈래가 생기게 되었고, 또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열리게 되었다. 누룩을 지어 술을 빚는 일과 음욕에 매여서 여색에 빠지는 일과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일과 함부로 남의 물건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은 외전(外典)에서도 금하는 것인지라 석가의 가르침을 구태여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 네 가지 일은 사람을 해치는 것으로 사람은 함령(含靈) 가운데 으뜸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짐승을 해치는 일인데 축생은 생품(生品) 가운데 말단이다. 가장 으뜸의 성인이신 부처님께서 큰 가르침을 열고

 

마땅히 차례를 두었으며, 또한 부처님의 계율로 인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가장 큰 죄로 여기게 하였다. 내성(內聖)과 외성(外聖)의 이치가 고르고 도리가 하나인데도, 이치에 어두운 무리가 외교(外敎)에만 집착하여 양을 통째로 삶고 돼지를 산 채로 잡아 제사지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미혹된 자가 만약 석가의 가르침대로 모든 일이 업보에 인연한다면 우 임금ㆍ탕 임금ㆍ문왕ㆍ무왕조차도 처벌받아야 하며, 주공과 공자도 솥에 삶겨져야 한다고 이르기도 하는데, 이처럼 도리에 어두운 것이 어찌 이리 심한가? 시험삼아 고증해 본다면 반드시 깨닫는 바가 있으리라.

 

화양(華陽) 선생의 진군(鎭軍)균성륜(均聖論)에 대한 비판 산민(山民) 도은거(陶隱居)

예전의 부처님이나 나중의 부처님께서 서로 그 도를 달리하지 않으셨다. ()나라 왕실이 천명을 받고 나서 상()ㆍ기()와 적제(狄鞮)가 그 방토에 따라 직분을 얻었다. 서쪽의 가까운 나라들은 그 길이 멀지 않았으나, ()ㆍ우() 3대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이치가 전해지지 않았기에 그 일이 유독 서쪽을 경계 삼았는지라, 도가 동쪽으로 유포되지 못했던 이유는 희공(姬公)이 빠뜨린 것이 아니다. 아마도 이런 법은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수인씨(燧人氏)가 불을 발명하여 비린 것을 익혀 먹도록 바꾸었으니, 날것을 익혀 먹도록 바꾼 것에서 마침내 부처님의 가르침이 싹트는 조짐이 보였다.

주공과 공자 두 성인의 종조(宗條)가 점차로 넓어져 그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우는 소리를 듣고서는 고기를 먹지 못하였다. 초목을 잘라 내고 베어 내는 것에도 때를 맞추게 되었고, 새끼 사슴이나 알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이로써 계율의 다섯 갈래가 생기게 되었다.…… 이 네 가지 일은 사람을 해치는 것으로 사람은 함령(含靈) 가운데 으뜸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짐승을 해치는 일인데, 축생은 생품(生品) 가운데 말단이다. 내성(內聖)과 외성(外聖)의 이치가 고르고 도리가 하나이다.

삼가 불경에 의하면, 한 분의 부처님께서 나오시려면 여러 겁을 지내야 한다는데, 논문에서는 예전의 부처님과 나중의 부처님께서 서로 떨어지심이 어느 정도인지 밝히지 않았다. 석가불의 나투심은 장왕(莊王) 시대54)에 가까운데, ()ㆍ우()와 하()ㆍ은() 시대에 어찌하여 이미 있었겠는가?

주공이 언급한 적이 없는 것도 아마도 부처님께서 출현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지 이를 고의로 숨긴 것과는 관련이 없다. 아육왕(阿育王)이 탑을 만든 것도 경왕(敬王)

 

치세에 해당하는데, 염부제에는 4주가 있었으나 동쪽 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논하지만, 이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부자(夫子)가 화하(華夏)의 예법으로 가르침을 일으켰는데 어찌하여 이법(夷法)을 설해야만 한다고 하는가?

그러므로 중국(中國)이 예를 잃었다고 탄식하면서 4()에게 이를 구하였는데, 이 또한 그 뜻이 각별하다. 4이의 음악도 원래 요황(要荒)의 변두리에서 나와 4()에 던져진 것으로 또한 가까운 위우(危羽)55)의 들판이었다. ()의 자취가 이른 것도 하원(河源)에 미치지 못하였다. 월상국(越裳國)의 백치(白雉)도 오히려 중역(重譯)으로 칭하나, 천축(天竺)과 계빈(罽賓)은 오래도록 상국(上國)과 단절되어 있다가 주나라가 쇠퇴한 이후에야 간혹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므로 추자(鄒子)56)는 적현(赤縣)이 우주(宇宙) 안에 있고, 9()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나라 초엽 장안에 비로소 부도 및 경전과 불상이 있었으나 보고도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장건(張騫)이 비록 대하(大夏)에 명()을 드리우고 감영(甘英)이 멀리 안식국(安息國)에까지 당도했을지라도 참으로 그 풍교(風敎)를 널리 번역하여 이 같은 법을 천양하지 못하다가, 이윽고 황제의 조정으로 날아드는 꿈을 꾸고서야 약간이나마 드러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것은 시절이 이르러야 형통하는 것으로 운수의 기복과는 관련이 없다.

만약 반드시 연응(緣應)의 기약이 있어야 한다면 예전의 순박한 군생(群生)은 무슨 죄를 지었으며, 지금의 부박한 군생은 어떠한 행운을 만들었는가? 설사 이 같은 법본(法本)으로 구제하더라도 대체로 죄는 살생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고기를 먹던 시절에 살생하는 것을 누가 심하다 하였겠는가? 이윽고 불과 곡식을 기다려서야 교법(敎法)의 씨앗을 펼쳤다 하나 큰 자비의 위신력에 대해 이를 무너뜨리는 것이 있지 않았겠는가?

만약 갱미(粳米)와 양미(糧米)를 파종하지 않았다면 살생하는 일을 그치기 힘들었을 터인데, 이전 시절에 과거 제불(諸佛)은 어떠한 법으로 가르침을 삼았겠는가? 이 같은 가르침의 싹은 또 어떤 부처님에게서 일어났는가?

아울러 네 가지 계율은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그 과보가 잠시 가벼웠다가 한 번 맹수를 죽이게 되면 그에 대해 무거운 업보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가벼웠다가 끝에 가서는 무겁게 되니, 이 또한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대체로 사람을 이루는 도는 인()과 의()라 말하며, 주공과 공자는 우는 소리를 듣고 먹지 않았다고 이른다. 잘라 내고 베어 내는 것도

 

시절에 따른 것은 대체로 인의의 도를 크게 밝히고자 한 것이다. 날짐승과 들짐승 및 풀과 나무에까지 이르러서도 오히려 그러하다고 말하였으니, 하물며 사람에 대해 멋대로 학대할 수 있겠는가?

안으로 부족한 것을 근심하여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그 뜻이 연()의 보응에 있으니, 그 자취를 얼핏 보면 비슷한 것 같으나 그 정리를 논하자면 현격히 다른 것이다. 내외의 두 성인을 살피지 못하고 그 같은 일을 고르다 할 수 있겠는가?

이 가운데서 어긋나면 갑자기 깨닫기[頓悟] 힘드니 삼가 이를 자문(諮問)으로 삼아 귀를 씻으시라. 원컨대 이와 같이 못난 글을 살펴보시라.

석가불의 나투심은 장왕(莊王) 시대에 가까운데 당()ㆍ우()와 하()ㆍ은()에 어찌 이미 있었겠는가?

주공이 언급한 적이 없는 것도 아마 부처님께서 출현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니, 이를 고의로 숨긴 것과는 관련이 없다 하겠다. 아육왕(阿育王)이 탑을 만든 것도 경왕(敬王)의 치세에 해당하는데, 염부제에는 4주가 있어서 동쪽 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논하나, 이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다.

석가가 출세한 연도와 달수는 알 수가 없다. 불경에 이미 연력(年曆)의 주기(注記)가 없다. 이 같은 법이 또 동쪽에 유포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주나라 장왕의 시대임을 알 수 있겠는가?

단지 춘추에 노()나라 장공(莊公) 74월 신묘일에 항성(恒星)이 보이지 않은 것을 근거삼고 있으나, 3()의 연도조차도 이미 같지 않은데 외국에서 어떤 역법(歷法)을 썼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어떤 것에 근거하여 노나라 장공 4월이 외국의 4월인지를 알 수 있는가? 또 외국에서 주나라의 정력(正曆)을 썼다고 하더라도 4월 신묘일을 따져 보면 5일이지 8일이 아니다. 만약 은()나라의 정력을 쓰면 주나라의 4월은 은나라의 3월에 해당하고, 하나라의 정력을 쓰면 주나라의 4월은 하나라의 2월에 해당한다. 모두가 불가(佛家)4월 초파일과 같지 않다. 만약 노나라의 4월로 증명을 삼는다면 햇수와 달수가 어긋나서 결정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것을 증거로 삼지 못한다면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햇수와 달수를 찾아볼 만한 근거가 없다. 그러나 석가가 탄신하시자 하늘이 밝아졌다는데 그 별자리를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서상(瑞相)에는 또 일월과 성신이 멈추어 운행하지 않은 것도 있으나, 또 명성(明星)이 뜨던 때에 땅에 떨어져서 7()를 갔다고 한다. 처음부터 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이 없는 것은 춘추에 항성이 뜨지 않았다는 것과는 그 의취가 어긋난다. 만약 아육왕이 탑을 세운 것이 경왕의 시대라면 염부제의 4주에 이 도가 이미 동국(東國)까지 유포되었을 것인데 경왕 이래로 6()에 이르기까지 기주(記注)가 세밀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아육왕이 탑을 세운 것이 경왕의 시절이 아니라는 것이 다시 한 번 분명해진다. 이로써 추측해 보면 석가의 탄생은 주나라 시절에 가깝다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주공과 같이 밝은 마음으로 어찌 이를 없다고 하겠는가?

부자(夫子)가 화하(華夏)의 예법으로 가르침을 일으켰는데 어찌하여 이법(夷法)을 설해야만 한다고 하는가? 그러므로 중국(中國)이 예를 잃었다고 탄식하면서 4()에게 이것을 구하였는데, 이 또한 그 뜻이 각별하다.

가르침을 베푸는 차례는 이미 상세하게 논했기에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4()의 음악도 원래 요황(要荒)의 변두리에서 나와 4()에 던져진 것으로 또한 가까운 위우(危羽)의 들판이었다. ()의 자취가 이른 것도 하원(河源)에 미치지 못하였다. 월상국(越裳國)의 백치(白雉)도 오히려 중역(重譯)으로 칭하나, 천축(天竺)과 계빈(罽賓)은 오래도록 상국(上國)과 단절되어 있다가 주나라가 쇠퇴한 이후에야 간혹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므로 추자(鄒子)는 적현(赤縣)이 우주(宇宙) 안에 있고, 9()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나라 초엽 장안에 비로소 부도 및 경전과 불상이 있었으나 보고도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장건(張騫)이 비록 대하(大夏)에 명()을 드리우고 감영(甘英)이 멀리 안식국(安息國)에까지 당도했을지라도 참으로 그 풍교(風敎)를 널리 번역할 수 없었다. 반드시 황제의 조정으로 날아드는 꿈을 꾸고서야 약간이나마 드러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것은 시절이 이르러야 형통하는 것으로 운수의 기복과는 관련이 없다.

원래 서역은 그 길이 가까운데도 대법(大法)이 미치지 못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연응(緣應)이 발명되지 않은 것에 연유하는 것이지,

 

그 길이 멀어서라고 할 수는 없다. 그 길이 이미 가까워졌는데도 이와 같은 법이 오랫동안 동방에 유포되지 않았는데, 이를 만약 연응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다면, 무엇으로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나중에야 동토로 전해진 것도 모두가 연응에 연유하여 발명된 것으로, 장애가 뚫리는 것에도 각자 그 시절이 있음을 앞에서 이미 모두 논하였다.

만약 반드시 연응(緣應)의 기약이 있어야 한다면 예전의 순박한 군생(群生)은 무슨 죄를 지었으며, 지금의 부박한 군생은 어떠한 행운을 만들었는가? 설사 이 같은 법본(法本)으로 구제하더라도 대체로 죄는 살생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고기를 먹던 시절에 살생하는 것을 누가 심하다 하였겠는가? 이윽고 불과 곡식을 기다려서야 교법(敎法)의 씨앗을 펼쳤다 하나 큰 자비의 위신력에 대해 이를 무너뜨리는 것이 있지 않았겠는가?

만약 갱미(粳米)와 양미(糧米)를 파종하지 않았다면 살생하는 일을 그치기 힘들었을 터인데, 이전 시절에 과거 제불(諸佛)은 어떠한 법으로 가르침을 삼았겠는가? 이 같은 가르침의 싹은 또 어떤 부처님에게서 일어났는가?

아울러 네 가지 계율은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그 과보가 잠시 가벼웠다가 한 번 맹수를 죽이게 되면 그에 대해 무거운 업보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가벼웠다가 끝에 가서는 무겁게 되니, 이 또한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대체로 사람을 이루는 도는 인()과 의()라 말하며, 주공과 공자는 우는 소리를 듣고 먹지 않았다고 이른다. 잘라 내고 베어 내는 것도 시절에 따른 것은 대체로 인의의 도를 크게 밝히고자 한 것이다. 날짐승과 들짐승 및 풀과 나무에까지 이르러서도 오히려 그러하다고 말하였으니, 하물며 사람에 대해 멋대로 학대할 수 있겠는가?

안으로 부족한 것을 근심하여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그 뜻이 연()의 보응에 있으니, 그 자취를 얼핏 보면 비슷한 것 같으나 그 정리를 논하자면 현격히 다른 것이다. 내외의 두 성인을 살피지 못하고 그 같은 일을 고르다 할 수 있겠는가?

이 가운데서 어긋나면 잠깐 사이에 깨닫기 힘드니, 삼가 이를 자문(諮問)으로 삼아 귀를 씻으라. 원컨대 이와 같이 못난 글을 살펴보라.

백성이 육식(肉食)으로 연명하면서 불씨와 낱알을 몰랐는데, 그 육식마저 금지한다면 가르침이 어떻게 행해지겠는가? 이것도 앞서의 논문에서 상세히 논하였기에 다시 반복하여 풀이하지 않겠다. 중생이 연과(緣果)를 만나는 것에는 각각 만나는 시절이 있으니, 옛날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교화받지 못한 것은 그 악업(惡業)이 무성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법을 듣게 된 것은 그 선업(善業)이 싹틔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선과 악에 각각 그 시절이 있으니, 순후하고 부박하다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다섯 갈래의 계율에도 각각 경중이 있어서 비살계(非殺戒)가 가장 중하고 네 갈래의 계율은 이보다 가볍다. 그러므로 5()이 비록 다르다고는 하나 서로 일어나는 것이니, 사람을 해치는 것에 대한 계율은 사람이 중하기 때문에 먼저 나온 것이고, 금수를 해치는 것에 대한 계율은 금수는 가볍기 때문에 나중에 교화 받은 것이다. 훈계(訓戒)의 도는 그 순서가 참으로 타당하니, 주공과 공자가 점차로 인의(仁義)와 측은[]을 편 것도 앞서의 논문에서 이미 상세히 논하였으므로 중복되는 논변을 그치기로 한다. 만약 석가의 가르침이 반드시 방역(方域)의 이치와 어긋난다고 한다면 이것은 내 자신의 학문을 벗어나는 것인지라 감히 언급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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