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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53 불교(광홍명집 4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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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4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1. 귀정편

 

13) 도교의 금지를 명하는 조칙[捨事李老道法詔] 양 고조 무황제

양나라 고조(高祖) ()황제는 34세에 보위에 올라 49년 동안 정사를 돌보았다. 억조창생(億兆蒼生)에게 은혜를 베풀면서 피곤하더라도 비록 손을 놓은 적이 없었다. 내경(內經)이나 외전(外典)을 가슴에 품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주석 붙인 것이 모두 수천여 권이나 되었다. 그러면서도 절약하여 스스로 절제하면서 화려한 것과 연을 맺지 않았으니, 그 잠자는 처소마저 단촐하였다.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는데 삼베옷을 입고 부들방석에 앉으며 짚신을 신고 갈건(葛巾)을 썼다. 처음 제위[大寶]에 나아가 바로 이 같은 일을 모두 갖추었는데, 매일같이 한 끼니만 먹고 비린내 나는 것을 끊었으니, 참으로 제왕으로서 이와 같이 한 사람은 드물다.

예전에 노자를 섬기면서 부록(符籙)과 도참(圖讖)을 숭상하였는데, 그 근원을 깊이 연구해 보았으나 한결같이 헛된 것이므로 이에 황제가 몸소 신필(神筆)을 들어 도교(道敎)를 버린다고 조칙을 내렸으니, 그 글이 다음과 같다.

삼가 천감(天監) 3(504) 48, 양나라 황제 난릉(蘭陵) 소연(蕭衍)이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존귀한 법보(法寶)와 거룩한 스님들께 합장하고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和南].

엎드려 경전을 보니, 보리심(菩提心)을 내는 것이 곧 불심(佛心)이라는데 여타의 여러 선법(善法)으로는 비할 데가 없나이다. 중생을 삼계의 고문(苦門)에서 벗어나 무위(無爲)의 품부 받은 길[賦路]로 인도하고자 여래께서 누진지(漏盡智)를 얻어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도가 지극하여 기연(機緣)에 통하시고, 덕이 원만하여 성위(聖位)를 취하시고,

 

지혜의 횃불을 밝혀 미혹된 이들을 비추시니, 거울 같은 법의 흐름에 진구(塵垢)가 맑아졌습니다. 하늘에서 서응(瑞應)의 자취를 알리자, 속세의 밖[象外]에서 신령한 모습이 번득였으니, 미혹된 무리를 욕망의 바다에서 제도하여 중생[含識]을 열반으로 이끌고, 상락(常樂)1)의 높은 산에 오르게 하며 애욕의 강[愛河]의 심연을 벗어나게 하는지라, 언행이 4()2)를 뛰어넘으시고 말씀은 백비(百非)3)를 벗어나셨습니다. 자취를 사바(娑婆)4)에 응하여 왕궁에 탄생하시어 삼계(三界)로 나아가 가장 존귀하시니 보리수[道樹]에서 빛을 이루셨습니다. 널리 대천세계(大千世界)에 빛을 드리우셨으나, 단지 기심(機心)이 천박하여 곧잘 싫증을 내는지라 원상(圓常)을 깊이 말씀하시면서 다시 학수(鶴樹) 아래에서 광채를 거두셨습니다. 아사세왕(阿闍世王)5)이 죄를 씻고 바수(婆藪)6)가 재앙을 면했는데, 만약 대성 법왕(法王)을 만나지 못했다면, 누가 능히 이를 구하였겠습니까? 자취가 비록 은밀할지라도 그 도는 이지러짐이 없나이다.

제자가 우둔하여 헛되이 노자를 섬겼는데, 역대로 이를 계승하여 이 같은 삿된 법에 물들었으나, 이제 인행(因行)을 익혀 선법(善法)을 발명하매 미혹을 버리고 돌아갈 바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 구의(舊醫)를 버리고 정각(正覺)에 귀의하여 의지하겠나이다.

제가 미래세에 태어나면 동남(童男)으로서 출가하여 경법(經法)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중생[含識]을 제도하여 다 함께 성불하기를 발원하오니, 차라리 정법(正法) 가운데 머물면서 오랫동안 악도(惡道)에 떨어질지언정 노자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잠시라도 천상에 태어남을 즐거워하지 않겠나이다. 대승(大乘)의 마음에 이르러 2()에 대한 생각을 끊고자 하니, 원컨대 모든 부처님께서 증명해 주시고 보살님께서는 섭수(攝受)7)해 주십시오. 삼가 제자 소연이 합장하고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마침내 황제가 도인과 속인 2만여 명과 함께 중운전(重雲殿) 중각(重閣)에서 이 글을 손에 펴 들고 보리심(菩提心)을 내었다. 411일에 이르자 다시 문하(門下)에 칙령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대경(大經) 가운데 도()에 아흔여섯 종류가 있다고 말씀하셨으나 오직 부처님의 한 가지 도만이 정도이고, 그 나머지 아흔다섯 종류를 사도(邪道)라 이름하였다. 짐이 사도인 외도를 버리고 올바른 내법(內法)의 모든 불ㆍ여래를 섬기고자 하노라. 만약 공경대부로서 이와 같은 선법(善法)에 동참하고자 하는 이는 각각 보리심을 낼지어다. 노자ㆍ주공ㆍ공자 따위는 비록

 

여래의 제자로서 그 자취를 펼쳤다 하나 이 역시 삿된 것으로 단지 세간의 선()일 뿐이며 범부를 깨우쳐 성인이 되게 하지 못한다. 공경(公卿)의 백관과 후왕(侯王)의 종족은 마땅히 거짓된 것을 돌이켜 참다움으로 나아가되, 사도를 버리고 정도로 들어가라. 그러므로 경교(經敎)성실론에서는, ‘만약 외도를 섬겨 이를 중히 여기면서 불법을 가벼이 여긴다면 이것이 바로 사견(邪見)이다. 만약 마음을 한 가지로 모은다 하더라도 이 같은 것은 무기(無記)8)의 성품이지 선악의 성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을 섬기는 마음이 강하고 노자에 대한 뜻이 약해져야만 청신(淸信)이라 하리라. 청신이란 말에서 청이란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해서 더러운 혹업(惑業)의 죄가 모두 소멸된 것이고, 신은 정법을 믿되 사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신의 불제자(佛弟子)라 일컫게 되니, 여타의 여러 신앙은 모두가 사견이기에 이를 청신이라 칭할 수 없으니, 문하(門下)에서는 이를 속히 받들어 시행토록 하라.”

천감 3(504) 417일이 되자,9) 시중(侍中) 안전장군(安前將軍) 단양윤(丹陽尹) 소릉왕(邵陵王)이 다음과 같이 상계(上啓)하였다.

신이 들어보니, 여래의 장엄상(莊嚴相)은 위대하여 유정천(有頂天)에 맞닿으며, 미묘한 색신(色身)은 막막하여 끝없이 드러나신다고 합니다. 금륜(金輪)에 의탁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은속(銀粟)에 맡기어 범부에 응하셨습니다. 반야(般若)의 날카로운 칼을 갈아 열반의 묘과(妙果)10)를 기르시며 생사의 고해에 배를 띄워 상락(常樂)의 피안(彼岸)으로 제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비의 구름을 드리워 감로의 비를 내리셨으니, 7() 8()11)에서 교화하신 이치가 실로 무궁합니다. 4()5()로 이익되게 하신 방책이 다함이 없는지라 빙설같이 맑은 햇빛에 안개가 벗어나고, 구름이 흩어지자 횃불이 그 빛을 가리고 진세(塵勢)가 저절로 고요해졌습니다. 참으로 속가에 들어가면 몽저(蒙底)를 교화하고 세간을 나서면 이 같은 진여(眞如)를 돌보는지라, 번뇌[稠林]의 삿된 길로 빠져든 사람을 법문(法門)으로 인도하시되 쉬지를 않으셨습니다. 갈애(渴愛)에 눈멀고 귀먹은 선비들이 이를 사모하여 그 자취를 따라 돌아갈 바를 깨우치게 되었으니, 도의 나무가 바야흐로 가비라위성(迦毘羅衛城)에서 자랐으나 그 덕음(德音)은 경락(京洛)에서 무성해졌습니다. 항성(恒星)

 

보지 못하고 주나라에서는 징조가 드러났고, 만월의 둥근 자태는 한나라 때 감하여 현몽하였습니다. 5()이 전해지자 만덕(萬德)이 조짐하였으니 화속(華俗)이 그 가르침에 잠겨서 다투어 높은 바람을 부채질하였기에 이 같은 3()으로 미혹되어 길을 잃어버린 이를 비추어 줍니다. 또한 이 같은 7()에 의거하여 긴긴 밤의 고통을 뽑아내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이, 황제 보살께서 천도에 응하여 만물을 다스리며 병풍을 등지고[負扆]12) 백성에 임하시어 우주의 광명을 머금고 청해(淸海)를 비추며 무애변(無礙辯)을 내려 백성[黎庶]들을 인도하고 본원력(本願力)으로 중생을 섭수하되, 능히 처방에 따라 약을 쓰고 권도(權道)를 열어 인행(因行)을 뚜렷이 하며 1()의 이치를 존중하고 10()의 기틀을 넓혀서 이로써 만방(萬邦)으로 회향하는 것을 만나게 되고서야 모두들 바른 식견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유계(幽界)나 현계(顯界)의 영령(英靈)과 기신(祈神)이 모두 제도하심에 힘입으며 사람마다 등각(等覺)의 서원을 일으키고, 중생마다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근본 경계로 돌아가고자 열심히 날개짓 하며 근원으로 되돌려 나아가니, 이를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롭게 보살피고 풍요로운 것은 나루터에서 다리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도가 이미 광명에 가피 입어 백성이 이미 교화되었습니다. 마침내 응진(應眞:나한)이 석장(錫杖)을 날리어 허공에 날아올라 그림자를 접하여 삿된 것을 깨뜨린다. 외도가 정국(正國)을 견지하니 가람과 정사 및 보찰(寶刹)이 서로 마주 보고 도를 강설하며 경을 전하여 덕음(德音)이 귀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예전에 이치의 근원을 통달하지 못하여 외도를 믿은 것은 마치 맛난 과일을 얻으려 하였으나 도리어 쓴 과일을 재배하고, 기갈을 면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소금물을 마시러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미혹한 이들이 다소나마 돌아갈 바를 깨우치게 되어 보살대계(菩薩大戒)를 받아 몸과 마음을 계행(戒行)으로 다듬어 노자의 삿된 풍화(風化)를 버려서 법류(法流)의 참다운 가르침에 들게 하십시오. 엎드려 바라건대, 하늘 같은 자비심을 드리워 이를 허락해 주십시오. 삼가 아룁니다.”

418일 중서사인(中書舍人) 신 임효공(任孝恭)이 조칙을 선포하였다.

미혹을 돌이켜 정도(正道)로 들어갈 수 있다면, 이는 가히 숙세(宿世)에 뛰어난 인행(因行)을 심었다고 할 것이니, 마땅히 용맹정진토록 하라.”

 

 

14) 폐이로도법조(廢李老道法詔) 북제 고조 문선(文宣)황제

예전에 금릉(金陵)의 도사 육수정(陸修靜)이란 자가 도문(道門)의 명망을 얻고서 송나라와 제나라의 양대에 걸쳐 3()의 도를 근본으로 삼아 펼치고 갈홍(葛弘)과 갈연(葛衍)의 법을 널리 폈기에 마침내 치장(郗張)의 선비들에게 문호(門戶)가 봉해지고 부록을 받게 되었다. 뒤이어 망령되이 궁리하여 재법(齋法)마다 의례를 널리 제정하되, 호사스러움을 다한 것도, 어찌 그 뜻이 왕자의 환심을 사고자 함이 아니었겠는가?

양조(梁祖) 때 운세를 열어 내어 도법(道法)을 버리라는 칙령이 떨어지자, 육수정이 그 분을 이기지 못하여 문인과 함께 변경으로 망명하였다가 북제(北齊)로 들어갔다. 다시 금과 옥을 뿌려 여러 귀족들에게 보내면서 그 마음을 의탁하여 도법(道法)을 일으키고자 하였기에 마침내 황제까지도 이에 미혹되었다.

천보(天保) 6(555) 9월에 조칙을 내려 여러 사문과 도사들로서 그 학업이 달통한 자 열 명을 불러들여 친히 만나보며 살폈다. 이 때 도사들이 여러 사문들의 옷과 발우를 휘날리거나 감기도록 주문을 외웠는데, 여러 개의 옷걸이에 주술을 걸어 가로눕히거나 곧추서게 하기도 하였다. 사문들이 일찍이 방술(方術)을 익히지 않았기에 한결같이 묵묵히 앉아서 대응하지 못하였다. 선비나 부녀자가 이를 보고자 가득 모여들었는데, 귀인이나 천인이 모두 그 마음이 동하여 육수정의 무리들이 더 훌륭하다고 여겼다. 마침내 여러 도사들이 참새 떼들처럼 날뛰면서 의기양양하여 물고기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늘을 쳐다보며 고담을 자랑하고 도술을 과시하면서 떠벌리며 말하였다.

신통을 잠시 부려서 횡포하고 강압적인 것을 꺾는다. 사문이 한 가지를 보여 주면 우리들은 두 가지를 보여 줄 수 있다. 지금 자그마한 술법을 보여 주었는데도 바로 물러가 굴복하여 버렸으니, 앞으로 일어날 일도 짐작할 수 있다.”

마침내 황제가 상통(上統) 법사에게 명하여 육수정과 겨뤄 보게 하였다. 이에 상통 법사가 말하였다.

방술이란 작은 재주이니, 속된 유생(儒生)조차도 이를 부끄럽게 여기는데, 하물며 출가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의 명령을 거역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하좌(下坐) 말석(末席)의 스님을 시켜 견주어 보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사람을 보내 적당한 이를 찾았다. 이 때 불준(佛俊)이란 스님이 있었는데 일명 담현(曇顯)이라 하였으나, 어떤 사람인지 내력조차 알지 못했다. 단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속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다가 때때로 구변을 토하여

 

깨달음을 거론하는 것이 참으로 이치가 깊었다. 상통 법사가 그 그릇이 깊음을 알고서 사적으로 교제하였는데, 이 때 명승(名僧)이 운집하였기에 담현 스님은 말석에 있었다. 술에 만취하여 높은 곳에 위태롭게 앉아 있었기에 유사(有司)가 감히 부르지 못하고 이 일을 상통에게 전하였다. 그러자 상통이 말하였다.

도사 좨주[祭酒]는 상도(常道)를 행하는지라, 술 마신 도인과도 서로 말을 나눌 수 있을 터이니, 부축해서 데려 오라.”

이에 대중이 모두 이를 걱정하였으나 상통의 권위에 누구도 이를 말하지 못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담현 스님을 부축하여 보좌에 앉혔는데, 담현 스님이 그 위에 똑바로 서서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술을 마시고 많이 취해 있었는데, 얼핏 들으니 사문이 한 가지를 보여 주면 당신들이 두 가지를 보일 수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이 과연 사실인가?”

이에 도사들이 사실이라고 답하자, 담현 스님이 바로 한쪽 발을 들고 서서 말하였다.

내가 이미 한 가지를 보여 주었으니 그대들은 과연 두 가지를 보여줄 수 있겠구나.”

이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다시 담현 스님이 말하였다.

옷 등에 주술을 걸어 날아다니게 한다니, 내가 일부러 문을 열어 놓고 그대들의 술법을 시험해 보겠노라.”

() 선사의 옷과 발우를 가져오게 하여 주술을 걸게 하였다. 여러 도사들이 일시에 분발하여 모두 함께 주문을 외웠으나 하나같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에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옷을 거두게 하였는데, 열 명이 함께 잡아당겨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담현이 옷을 거두어 옷걸이에 걸어 두고 다시 주술을 걸게 하였으나 여전히 효험이 없었다. 도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하였는데, 마침내 말과 구변으로라도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여 말하였다.

불가에서는 스스로 내법(內法)이라 부르는데, 안은 작은 것이다. 또 우리 도가를 외법(外法)이라 부르니, 바깥은 큰 것이다.”

이에 담현 스님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천자(天子)가 안에 거처하니 작다는 것이고, 백관(百官)이 바깥에 있으니 크다는 것인가?”

그러자 육수정과 그 무리들이 그만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친히 눈으로 옳고 그름을 증험하고 바로 조칙을 내렸다.

법문(法門)은 둘이 아니며 진종(眞宗)은 하나일 뿐이니, 바른 길을 구하고자 하면 적막함과 고요함[寂泊]을 근본 삼아야 한다. 좨주(祭酒)의 도()란 것도 세간 가운데 헛된 것이거늘, 속인들이 이를 깨치지 못하고 여전히 숭배하는구나. 술 찌꺼기가

 

맛있다 하나 청허(淸虛)가 있을 리 있겠으며, 말린 육포[駒脯]가 달더라도 자비와는 현격한 것이니, 위로는 인사(仁祠)에 달라지고 아래로는 제전(祭典)과 어긋난다. 모두가 금지해야 마땅하니, 다시는 이를 따르지 않도록 하라.”

칙령을 원근에 반포하여 널리 알리게 하였다.

도사로서 항복하여 귀의한 이는 소현대통(昭玄大統) () 법사에게 득도(得道)를 부촉하여 출가를 허락하였는데, 발심하지 못한 이도 염의(染衣)를 입고 삭발케 하였다. 이 날 참수당한 이가 하나둘이 아니었는데, 스스로 신선이라고 자칭하는 이들은 삼작대(三爵臺)에 올려놓고 몸을 던져 날아 보게 하였으나 모두 시신이 부수어져 땅에 흩어졌다. 이로써 거짓된 것이 단절되고 제나라의 국경 내에 두 가지 신앙이 없게 되었다. 주나라 때와 수나라 초엽에 이르러 그 술법이 점차로 자라나 지금 동천(東川)에까지 이르렀으나, 이 같은 종파는 미미한 것이라 말할 가치도 없다.

황제의 휘()는 양()이니, 바로 원위(元魏)의 승상(丞相) 고환(高歡)의 둘째 아들이다. 맏형 징()이 급한 성격으로 인해 흉노에게 해를 입자, ()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상국(相國)이 되었다. 위나라의 역수(曆數)가 다하매 양이 남교(南郊)에 단을 쌓고 서죽(筮竹)을 뽑아 대횡(大橫)ㆍ대길(大吉)ㆍ한문(漢文)의 괘()를 얻었다. 이에 금불상을 주조하였는데 순식간에 조성되었다. 위나라를 거두어 선양(禪讓)하면서 위문제(魏文帝)라 봉호(封號)하였으니, 바로 선양을 받고 국호를 대제(大齊)로 정했다.

무릇 그 행하는 바가 어리석은지 지혜로운지를 가릴 수가 없었는데, 정무를 복야(僕射) 양준언(楊遵彦)에게 위임해 두고 황제는 불사(佛寺)만을 크게 일으켰기에 승니가 여러 주마다 가득하였다. 겨울철과 여름철에는 보시를 길거리마다 행하여 끊이지 않게 하였다. 이 때 조 선사가 황제를 깨우쳐 타이르며 말하였다.

단월(檀越:施主)과 나찰13)들이 나라를 다스리니, 물가에 임하여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황제가 이 말끝에 여러 나찰들이 뒤에 있는 것을 친히 목도하고서 마침내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응요(鷹鷂)를 금하여 그 관직마저 없애고 어육[漁屠]과 맵고 냄새나는 채소[辛葷]를 시장에서 팔지 못하게 하였다. 황제가 늘 좌선하면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았다. 부처님께 예배하고 그 주위를 돌되 바람같이 빨리 하였다. 소현대통에게 계율을 받을 때는, 얼굴을 땅에 대고 머리카락을 밟게 하면서 계율을 주게 하였다.

예전에 황제가

 

진양(晋陽)에 있으면서 사람을 시켜 낙타를 타고 칙령을 내렸다.

절로 찾아가 경함(經函)을 가져오라.”

사신이 그 소재를 묻자 말하였다.

일단 성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낙타에 맡겨 두라.”

이에 꿈결같이 어느 산자락에 이르렀는데 산 중턱에 사찰이 있었다. 여러 사미들이 멀리서 보고 말하였다.

고양(高洋)의 낙타가 온다.”

곧바로 어떤 노승에게 안내하여 절하게 하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고양이 천자 노릇하는 것이 어떤가?”

아주 성명(聖明)합니다.”

무엇 때문에 왔는가?”

경함을 가지러 왔습니다.”

고양이 절에 있을 때, 독경을 게을리 하여 북쪽으로 가면서 동두(東頭)에 건네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보고하였다.

처음 황제가 곡구(谷口)의 목정불사(木井佛寺)에 이르렀을 때, 어떤 치인(癡人)이 몸을 버리려 하였는데,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홀연히 황제에게 내가 가면 바로 뒤따라오라라고 말하였다. 이 날 밤 치인이 죽자 황제가 뒤이어 진양에서 붕어[]하였다.

 

15) 통극론(通極論) () 사문 석언종(釋彦琮)

대체로 세상을 피하고 세상에 나아가는 두 가지 갈래는 그 영화로움과 욕됨을 가릴 수 없다. 진방(眞方)과 속방(俗方)의 두 가지 단서에 대해 누가 그 같고 다름을 가려내겠는가?

이 때문에 대은(大隱)은 저잣거리에서 어울리지 않고, 높은 발자취는 산림(山林)에서 근심이 없다. ()하다고 색()의 바깥이 아니고, 천지라는 것도 아지랑이[指馬]와 같다. 이름은 의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간()이나 쓸개[]처럼 가까운 것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말을 하거나 혹은 침묵하거나 진실로 말과 침묵의 방도를 초월하고 혹 있거나 혹 없거나 참으로 있고 없는 것의 경계를 초월한다. 그것은 운홍(雲鴻)이 날개를 떨치면 공작이 그 멀리 나는 것에 고개 숙이고, 정명(淨名:유마 거사)이 나타나면 비구가 그 높은 언변에 탄식하는 것과 같다.

발심하면 바로 출가하는 것이지, 머리 깎는 것이 이와 무슨 상관있겠는가? 속방(俗方)을 버리면 바로 입법(入法)인 것인지, 어찌 꼭 비녀를 뽑아야만 하겠는가? 이처럼 염정(染淨)14)의 문은 권실(權實)로써 알지 못하고, 화복[倚伏]15)의 이치는 길흉(吉凶)으로 깨닫지 못한다. 장생(莊生)16)을 제1의 논()으로 삼고, 석자(釋子)에게 회삼(會三)17)의 뜻을 논하게 한다. 크도다. 진실로 멀고도 깊어서 탐색하여 알아내기는 어렵다.

가만히 들으니,

 

음양(陰陽)이 합쳐져야 만물이 이루어지고 짜고 싱거운 것이 어울려야 여덟 가지 진미가 나온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4()의 변함없는 순차를 폐하고 다섯 가지 맛을 나누려 하는가?

이로써 말하건대, 어찌 진방(眞方)과 속방(俗方)이 섞여 있는 것을 은자와 현자라 일러서 이를 다르다 하겠는가? 혹 배운 것이 없어 식견이 얕다면, 이는 바로 주공과 공자를 능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니, 옹졸하고 천박한 벼슬아치가 자신의 지위를 제왕과 비교하면서 억지로 자신을 높여서 입신(立身)한다고 해도 한 사람일 뿐이다.

인과(因果)가 있음을 믿지 않고 불법(佛法)이 없다고 함부로 말하면서 열반[泥曰]을 우습게 여기며 사문을 능욕하니, 어리석게도 진부한 유생(儒生)을 답습하여 마침내 명계(冥界)의 화를 자초하는구나. 혹 속세의 옷을 내던지게 된다면 그 형상은 덕이 하늘과 인간 세계에서 우뚝한 것과 같다. 비로소 승명(僧名)을 거니, 뜻은 소리가 멀리 해역(海域)까지 퍼지는 듯하다. 우뚝하니 높게 처하는 것이 참으로 지극한 성인일진대, 10()18)이 오히려 3()19)을 가로막아 이를 듣지도 못하니, 어찌 안다고 하겠는가? 기연(機緣)에 따르지도 못하면서 만물을 접하려 드니, 끝끝내 어리석은 것을 감싸 안고 이것만 지키려 드는구나. 슬프다. 저 공자와 노자가 비록 다르다 하나 길은 한 갈래인데, 어찌하여 그르다고 탓하는가? 뜻 높은 달사(達士)들로서 그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어지러운 것을 풀어내고 날랜 것을 무디게 하고자 깃대와 북을 차려 놓았는데, 비록 다시 높고 낮음이 있더라도 끝내 도로써 이치의 근본을 삼는다면, 오색 비단실이 짜이듯, 수미산에 가까워지면 모두 함께 만나게 되리라. 삼라만상이 허공에 의지하여 모두 모였는데, 그 근본을 돌이키면 본래 어지러운 물건이고, 그 깊은 골짜기를 삼켜내면 실로 망망한 바다이다.

참으로 불도(佛道)를 찬양하고 빛내고자 현문(玄門)을 장려하려면 조금이라도 나를 없애고 삿됨을 없애서 자기를 낮추고 남을 기려서 후세에 전하여야 할 것이니, 그것을 논하여 이렇게 이른다.

범행(梵行) 선생은 속세와 높이 담쌓고 홀로 산자락에 살았는데, 영명(英明)하기가 구천(九天) 위에 노닐었고, 기개가 있어 8()의 거죽을 싸안았다. 돗자리에 누워 돌을 베고 머리카락을 잘라 내어 마음을 비우니, 누더기 옷은 양속(羊續)20)의 두루마기와도 같지 않았고, 승상(繩牀)은 관녕(管寧)21)의 탑()과도 달랐는데, 서악(西岳)에 숨어산 지 수십 년이나 되었다.

확실하게 흔들림이 없고 고요하게 꾀함이 없었으나, 매번

 

탄식하기를, “궁하면 그 몸을 홀로 어질게 하고, 통하면 아울러 천하를 구제하는데 백성[蒼生]들이 어지러이 애욕의 그물에 갇혀서 스스로 청승(淸昇)을 이룰 수 없구나. 앉아서 도탄에 빠진 세상을 두고 보느니, 차라리 숲에 사는 것을 접어 두고 인간 세상에 나가 분위(分衛:걸식)라도 해야 하겠구나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 자취를 접어 두고 잠시 세상을 돌아다녔다. 경읍(京邑)을 지나 파상(灞上)에 다다랐는데, 행락(行樂)하던 어떤 공자(公子)가 준마[龍媒]를 흐르는 물에 던지고 학개(鶴蓋:車馬)를 떠 있는 구름으로 날려 버리며 수놓은 아름다운 의복과 온화한 바람이 불어와 기()에 합쳐지며, 옥 재갈과 금 안장은 눈부시게 번쩍인다. 척과(擲果)22)의 사랑은 반생(潘生)에 속하며, 할수(割袖)23)의 총애는 이미 한제(漢帝)를 미혹하게 하였다. 성안까지 가마를 대어 놓고 조왕(曹王)24)의 자리에 배석하며, 연못가에서 재갈을 나란히 하여 산공(山公)25)의 상()을 쫓을 만하였다.

마침내 길에서 선생을 만나자, 공자가 이상스레 여기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차림새가 마치 연()ㆍ조()의 선비와 같으시고, 머리카락은 오()ㆍ월()의 빈객과 같습니다. 그런데 형색은 마치 진채(陳蔡)에서 환난을 겪은 듯한 데다,26) 옷차림새도 초()ㆍ노()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눈을 내리뜨고 혼잣말을 하며 미간을 찡그리시는데, 가지고 있는 오지발우[瓦鉢]는 안회(顔回)의 표주박과 다르고, 지팡이 울리는 소리가 원헌(原憲)의 명아주 지팡이[蔾杖]와 다른 것이, 이 땅에서는 미처 보지 못한 것으로서 제가 일찍이 들은 적도 없습니다. 감히 여쭙건대, 선생께서는 어느 곳에서 오셨습니까?”

이윽고 선생이 묵묵히 있다가 천천히 대답하였다.

그대를 보아하니, 명예와 이익이나 쫓으면서 빛깔과 소리에 마음이 어지러운지라, 하늘을 이고도 그 높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땅을 밟고도 그 두터움을 알지 못하는구려. 내가 듣기에 우물 안에는 배를 삼킬 만큼의 큰 고기[呑舟之鱗]도 없고 느릅나무[楡枌]를 심을 틈도 없으니, 구름을 드리우는 날개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대의 무리가 아닌데 그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시험삼아 그대에게 말해 줄 터인즉, 그대가 잠시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귀기울여 듣기를 바란다. 우리 스승은 덕의 근본을 깊게 얽어서 3아승기(阿僧祇) 초에 나무를 심었으니, 묘과(妙果)를 백 겁의 말대(末代)에 홀로 높이 이루었노라.

법계(法界)를 총괄하여 지혜를 삼고, 마침내 허공(虛空)에서 그것으로

 

몸을 이루었다. 정녕 기()2()를 본받고 도()가 만물에 두루 펼쳐졌다. 이런 까닭으로 몸이 있지 아니함이 없다. 그 헤아림은 규구(規矩)의 바깥을 넘어서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지혜는 그 쓰임새가 사고와 의론의 밖을 초월하여 인간의 일로는 이를 추측할 수 없으니, 어찌 의론에 처해서 얻을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범부를 깨우쳐 이를 보고 듣게 하자면, 반드시 진인(眞人)의 그림자와 같은 자취를 나타내야 할 것이니, 마치 곡풍(谷風)이 울부짖는 호랑이를 따르듯 하고, 오색구름이 날아올라가는 용을 쫓듯이 하노라.

감응(感應)이 서로 맞닿아 상리(常理)를 생각하매 마침내 도솔천의 천궁에서 강신(降神)하여 가비라성(迦毘羅城)에 모습을 드리웠으니, 그 성씨를 구담(瞿曇)이라 하고, 그 종족을 찰리(刹利)라 하는데, 속명이 실달(悉達)이고, 도자(道字)가 능인(能仁)이니, 바로 백정왕(白淨王)의 태자이시다.

가세(家世)는 전륜왕을 답습했고, 문풍(門風)은 성도(聖道)의 인()을 이었다. 땅은 삼천세계의 가운데에 있어 낙읍(雒邑)과 다르다. 나라에는 8만이 내조하여 계령(稽嶺)까지 넘어 이른다. 종친이 매우 많은데 누가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우리 스승께서 태어나시자 땅이 여섯 갈래로 흔들렸으니, 이에 일곱 걸음을 걸으시자, 다섯 가지 정갈한 꽃비가 나라에 가득 내렸고, 두 마리 용이 허공에서 물을 뿌렸다.

신령스러운 서응이 모두 이르고 길상이 모두 모였으니, 여러 백 대()를 돌아보아도 일찍이 이 같은 적이 없었도다. 게다가 그 잉태한 것조차 요()ㆍ헌원[]과 다르고, 태어난 것이 우()ㆍ계()보다 빼어나니, 흑제(黑帝)27)의 태몽의 조짐이나 흰 광명이 방 안에 가득한 징조를 그 무리들이 가상하다고 이를지라도, 어찌 이 같은 것으로 의논할 수 있겠는가?

몸 둘레가 금빛으로 1장이나 되고 미간의 백호(白豪)5척이며, 앞가슴에 만() 자가 펼쳐져 있고, 발바닥에는 천 개의 윤상(輪象)이 그려져 있으신데, 대략 서른두 가지라 일컫는다. 이는 용안(龍顔)ㆍ호비(虎鼻)ㆍ팔채(八彩)ㆍ쌍동(雙瞳)ㆍ방아(方我)ㆍ묘색(妙色)으로 그 우열을 따질 만한 것이 아니다. 비록 여공(呂公)이 한고조의 관상을 본 것만으로도 세간에서는 그에게 사람에 대해 아는구나[知人]’라고 하였는데, 만약 사타(私陁)28)가 우리 스승을 본 것을 빗댄다면, 어찌 해와 같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리하여 대보(大寶)에서 업()을 높이 받들고, 지위를 소양(少陽)에서 바르게 하며,

 

갑관(甲觀)29)을 활짝 열어 두고 용루(龍樓)를 빼어나게 세우며, 다재다능하여 문무를 겸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해도, 스승[師保]과 관련되지 않고 스스로 천골(天骨)에 기인하셨다.

어쩌다 태자가 연못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는 때나, 널리 둘러보면서 원림을 치달리는 때에는 기력이 향상(香象)과 맞먹고 기세가 신공(神功)에 으뜸이었으니, 시험 삼아 희발(姬發)30)과 조비(曹丕)31)를 논하더라도 더불어 비교할 수 없는데, 한영(漢盈)32)과 하계(夏啓)33)를 어찌 관련시켜 말할 수 있겠는가?

부왕이 파수(把守)를 삼엄히 면밀하게 살폈고 구중의 궁궐에서도 그 소리가 40리 바깥까지 들렸으며, 3()의 밀전(密殿)에 궁녀가 2만이나 되었다. 그러나 도의 성품이 고요하고 뜻이 굳건하여 비록 3()34)의 경계에 머물지라도 마음은 한결같아서 절개를 바꾸지 않았다. 왕성의 4()을 유람하다가 애()ㆍ노()ㆍ병()3()를 스스로 한탄하며, ‘인생이 이와 같은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신발을 벗고 참다움을 구하는 것을 어찌 이에 비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가 복숭아꽃이 새로 피어나고 비가 내리던 때인지라 청춘(靑春)은 바야흐로 중춘(仲春)에 접어들고 달은 반달이 되어 누각 위에 떠 있었다. 야심한 밤에 기녀와 숙직 서는 궁인들을 보니, 시체가 드러누운 것 같아 궁궐이 패가와 같음을 깨달으셨다. 천왕이 백마에 의지하여 성을 넘고 시종에게 보관(寶冠)을 건네주며 궁궐로 돌아가게 하였다. 비록 다시 진나라 시대의 소사(簫史)35)나 주나라 시대의 자진(子晋)36)이나, 허유(許由)37)가 기산(箕山)에서 귀를 씻고, 장주(莊周)가 복수(濮水)에서 꼬리를 끌고 다닌다38)고 한들, 이로써 속세를 여의는 것을 어찌 멸시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선림(仙林)이 처음 비녀를 맑은 물에 목욕하고 도량의 좋은 나무 밑에서 노닐며 죽을 얻어먹고 풀을 깔아 자리로 삼으셨다. 마침내 10()39)의 지혜를 두루 통달하고 6()40)의 신통을 갖추어 마병(魔兵)의 침해를 대업(大業)으로 이겨 내고서 부처님이라 홀로 칭하게 되셨으니, 이 이가 바로 나의 스승이시다.

법륜(法輪)을 내국(奈國)에서 처음 굴리시자, 스님으로는 교진(憍陳)41)이 처음 득도하였는데, 가섭(迦葉) 형제와 목련(目連)42)

 

도반에 이르러 서역에서 큰 세력을 이루고 동방에서 두루 길하게 되었다. 28()의 천주와 16()의 국왕 가운데 그 도에 굴복하여 마음을 다하며 바람을 마시고[餐風] 합장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타화궁(他化宮)에서 1()43)를 펴고 기사산(耆闍山) 위에서 3()을 모았으니, 선길(善吉)44)이 무득(無得)의 종지를 말하였고, 정명(淨名:유마 거사)이 불언(不言)의 이치를 드러내었다. 10()의 외도를 굴복시키고 육군(六群)의 비구45)를 제계(制戒)하였으니, 가슴으로 강물을 마시고 내뱉으며 손바닥으로 산자락을 흔들었는데, ()으로 논하자면 모난 돌이 닳아야 하고, ()로 말하자면 미진(微塵)으로도 모자란다. 이야말로 삼계의 대사(大師)이시고 만고의 독보(獨步)이시니, 내가 비루한 재주로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설령 주공이 예()와 악()을 지었고, 공자가 역()을 기술하고 시()를 지었으며, 재여(宰予)와 자공(子貢)이 언어에서 뛰어났고, 자하(子夏)와 자유(子游)는 문학에서 돋보였으며, 좌원방(左元放)ㆍ갈효선(葛孝先)ㆍ하상공(河上公)ㆍ주하사(柱下史)까지도 모두 방내(方內)로만 치달았으니,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 함령(含靈)의 복이 다하자 법왕이 제하(提河)에서 떠나가셨으니 춘추가 여든이셨다. 응신(應身)은 부서져 낟알이 되셨는데, 흘리셨던 피는 어디에서 쫓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 의문을 다투어 결정하고 임종의 마지막 공양을 바쳤으니, 슬프다. 지혜의 횃불이 꺼지고 자비의 구름이 사라져 다시 무명의 긴긴 밤이 되었으니, 제자들이 참으로 이를 슬퍼하였다.

그리하여 그 상호(相好)를 향기로운 전단나무에 새겨 우러르고 그 전제(筌蹄)46)를 패엽(貝葉)에 기록하였으니, 삼장(三藏)을 받아 지키며 4()를 보충하여 우리 스승의 풍화를 실추시키지 않았다. 마침내 세간의 도가 어지러워지고 군정(群情)이 비뚤어져서 사람마다 지금 것으로 옛것을 대신하자, 상법(像法)의 운수가 북쪽으로 갔다가 점차 동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금인(金人)이 유장(劉莊)47)의 꿈에 나타났고, 마등(摩騰)이 채암(蔡愔)의 요청을 기다렸다. 유교(遺敎)가 한나라 땅에 유포되어 개창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5백 년이나 되었다.

 

이 이후로 강승회(康僧會)ㆍ축법호(竺法護)ㆍ불도징(佛圖澄)ㆍ구마라집(鳩摩羅什)이 발자취를 이어 찾아와 방등(方等)48)을 선교하였고, 도생(道生)ㆍ도안(道安)의 승려와 혜엄(慧嚴)ㆍ혜관(慧觀)의 문도는 소리를 줄이고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와[掛冠] 모두 귀의할 수 있었으니, 승가[緇門]가 번창해졌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내 어려서 산동(山東)에서 자라나 늘 소왕(素王)의 아업(雅業)을 존중하다가, 만년에 관우(關右)49)를 떠돌면서 황로(黃老)의 현언(玄言)을 사모하였는데, 모두 다 고통의 강물을 넘지 못하고 도리어 불타는 집[火宅]50)에 떨어지는 것으로, 변함없이 위대한 것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뿐이다. 전대의 청진(淸塵)을 기리고, 군영(群英)의 먼 자취를 우러르며, 이 같은 정도(正道)로 돌이켜 스스로 진흙탕에 빠진 것을 건져내니, 예로부터 욕심을 여읜 일민(逸民)이나 삿된 것을 쳐부수는 대장(大將)이라 이름하는데, 바로 우리의 도반들이 이렇지 아니한가?”

이에 공자가 이맛살을 찡그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아하니, 선생의 언변이 비록 하늘을 뒤덮는다 하여도, 그 하시는 말씀이 어찌 그리도 허황되십니까? 생각하건대 부처님께서 교화를 펴시던 때가 우리 나라 종주(宗周)의 운대(運代)에 해당합니다. 스스로 사바(娑婆)를 모두 거두어 돌이키지 않음이 없다고 칭하는데, 혹 광명을 끝없이 비추는지라 그 말씀이 유정천(有頂天)에 떨친다거나, 또는 8부의 운집(雲集)과 시방의 폭주(輻湊)가 있다고도 합니다. 천축이 우리나라에서 10만여 리나 떨어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모두가 수미산의 남쪽이고 염부제(閻浮提)의 안쪽인데, 어찌하여 이곳의 선비들만 부처님의 처소에 다다른 자가 전무하며, 어찌하여 여래께서 유독 이곳만을 빠뜨려서 남은 빛이나마 내려 주지 않았습니까? 비록 우리 진한(秦漢)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어찌하여 우리나라의 옛 문헌[墳籍]에조차 실린 적이 없습니까?

참으로 이와 같은 두세 가지 의심이 날로 심해집니다. 제가 듣자오니, 지조를 지키더라도 속연(俗緣)을 끊지 않고, 은둔하더라도 부모를 거스르지 않는다 하니, 참으로 이러한 까닭에 화광(和光)이 근진(根塵) 속에 머물고 연꽃이 불 속에서 피어나게 됩니다. 띠를 두르고[束帶] 관의 끈을 내려뜨리는 것[垂纓]이 덕을 닦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기른 채로도 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는 본래 허통(虛通)한지라, 이르는 데마다 옳지 않음이 없어야 하는데도, 어찌하여 관대(冠帶)와 비녀는 버리면서

 

지팡이와 발우는 그대로 남겨 둡니까?

생각하건대 남겨 준 몸을 상하지 않는 것이 효심을 드러내는 시초인 데다,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으니 결국 조정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데도, 지금 이미 죄수복을 입고 머리카락을 잘랐으나 그 죄를 자세히 따지지 않고 천자를 모시지 않는데도 스스로를 높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감히 선생께 여쭙고 이를 자세히 판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선생이 말하였다.

내 듣자 하니 대음(大音)은 속인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이것을 징험하는구나. 1()의 작은 구멍으로 하늘을 들여다보고 조그만 소라 껍질로 바다를 재려 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법문이 멀리 드러낸 것이, 나나 그대가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이제 위신력을 빌려 다시 말하겠노라.

우리 스승이 도를 펴서 널리 거두고 고른 영험을 멀리 베풀지라도, 단지 중생의 인연이 부박하여 스스로를 한계 짓고 가로막는 것이지, 부처님의 위신력이 크지 못하고 거룩한 은혜가 고르지 못한 것과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해와 달이 모습을 드리워 하늘을 빛내고 천둥 번개가 소리를 내어 땅을 흔들어도 눈멀고 귀먹은 이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어찌 그 빛이 미미하고 소리가 작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사위성(舍衛城)에서 노니실 적에도 나머지 2() 3()의 가구가 이를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고 하는데, 10만 리나 떨어진 변두리에서 무엇이 그리 이상하단 말인가?

생각하건대 주공과 공자가 태어난 것이 본래 화하(華夏)의 읍이었는데, 가까운 이적(夷狄)마저 그 이치를 믿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동방삭(東方朔)이 승천하고 회남왕(淮南王)이 부록(符籙)에 들어가 난새를 타고 날아가며 안개 속을 배회하였다는데도, 신선을 칭찬하기는커녕 도리어 세간에 그런 사람이 있었음을 숨기고 기록조차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 스승의 도술을 맛보는 일을 돈사(惇史)51)에 써 놓았겠는가? 하물며 진시황을 지나면서 전적이 모두 타 버려 옛 전적들이 온전치 아니한데, 어찌하여 이 같은 한 줌의 글을 받아 지키려 드는가?

참으로 큰 식견이 없기에 저와 같은 정진(正眞)을 의심하고, 이와 같이 속세에 따르는 것을 달게 여겨 그 몸이 깨끗하지 못함을 깨닫지도 못하니, 어찌 명()이 무상한 것을 이해하겠는가? 입고 즐기는 것은 여러 번 되풀이하여 멈추지 않고, 아끼고 탐하여 한 오라기의 터럭조차도 떨어뜨리지 못하니, 어리석고 우매한 백성이 참으로 가엾구나.

 

스스로 형해(形骸)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누가 현호(炫好)를 가꿀 것인가?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라 내어 내 마음을 스스로 굴복하여 의복마저도 그 색을 지웠는데, 애욕의 정이 어떻게 일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다섯 묶음[五綴]으로 생각을 지키고 여섯 때[六時]마다 마음을 매어서 물외(物外)를 숙연케 하니, 이를 역류(逆流)라 부른다.

가만히 들으니, 하우(夏禹)가 강바닥을 쓸어내매 그 수족을 힘들게 하였고, 묵적(墨翟)이 만물을 이롭게 하매 머리와 종아리를 아끼지 않았다는데, 그 몸을 죽여 어짊을 이루고 굶어 죽으면서도 의리를 지키는 이와 같은 일들도 대효(大孝)에 어긋날 때가 있다. 그러나 책마다 이를 아름답다 하는데, 하물며 우리가 성품을 길러 현문(玄門)에 기거하면서 입신(立身) 행도(行道)하여 널리 6()의 중생을 제도하고자 만덕(萬德)을 높여 따르고자 하는데, 어찌 그대는 소절(小節)에 구애받는 것만 배워서 살갗과 머리카락 사이만을 돌보려 드는가?

영화로운 명예를 부추겨 쫓는 것은 북쪽을 향해 인사드리는 것이다. 만약 공로가 미약해서 녹봉(祿俸)이 미미하다면 힘만 든다고 달아날 터이다. 공로가 많을수록 쉴 틈이 없고 자리가 높을수록 늘 걱정스러운지라, 참으로 위태로운 것이 늘 편안치 못하기 때문에 천 길[] 아래로 보배 구슬을 던졌다고, 어찌 그 보배를 천하다 할 것인가? 단지 불 속에 피는 연꽃은 내가 말할 바가 아닌데, 물들면서 물들지 않는 것을 그대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공자가 말하였다.

선생이 억지로 말을 꾸며내고 과장되게 하여 잘못된 것을 가리려고만 하고 가시덤불을 귀히 여겨서 잘라 내지 않으십니다. 듣기가 거북하더라도 독실한 이론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대략 그 병폐를 조목 짓자면 네 가지라 하겠습니다.

제가 듣자오니, 옥수(玉樹)는 갈대밭에서 무성해지지 않고, 위엄 있는 봉황새는 제비나 참새 떼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선생의 도가 비록 미묘할지라도, 문인들은 어찌하여 그렇게 용렬하고 버릇이 없습니까? 혹 형색이 남루하고 가문이 미미하거나, 또는 출신이 비천하고 신지[]가 어둡기도 하니, 여러 선비로서 참례할 만한 3()52)이 없는 데다 필부로서 경작할 만한 10()의 땅도 없습니다. 실로 임금을 등지면서도 한가롭지 못한데다 가문을 부끄럽게 하면서도 입신하지 못합니다. 부역을 피해 사찰에 의탁하여 그 몸만을 법복(法服) 속으로 용인하니, 사람을 보더라도 서늘함과 따뜻함을 살펴주지 못하고, 경을 읽어도 바른 이치를 풀어내지 못하면서 헛되이 백성에 대해 마음을 높이기만 하고

 

양친에 대한 예법도 버립니다.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 이것이 그 첫 번째 폐단입니다.

제가 듣자오니, 검소하게 상수리나무로 서까래를 하고 흙으로 계단을 만든 것은 당요(唐堯)가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화려한 궁실과 아름다운 누각이 즐비한 것은 상신(商辛)53)이 풍속을 망치게 한 때문이라 합니다. 하물며 여래께서 행하시되 욕심을 줄이는 것을 염두에 두고 덕은 대비(大悲)에 근본을 두어 단지 무덤가에서 정좌하고 나무 밑에서만 경행하셨는데, 어찌하여 찰간(刹竿)9층으로 치장하며 7()의 누대(樓臺)를 세우는 것입니까? 일하는 이의 수고로움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머무는 자의 편안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검약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니, 이것이 그 두 번째 폐단입니다.

제가 듣기에 스스로 공을 떠벌리지 않는 것은 노담(老聃)의 지극한 가르침이고, 자신의 덕을 찬양하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격언이라 합니다. 힘써 겸양하는 것은 군자의 종길(終吉)이고, 극구 사양하는 것은 성인의 으뜸가는 미덕입니다. 만약 안으로 덕이 충만하다면 자연히 바깥으로 우러나와 빈객이 이에 응하여 자리에 앉을 때마다 칭송하게 될 터인데, 어째서 불심(佛心)이 맑고 고요하여 얻고 잃는 허물을 없앴다고 하면서 홀로 세존(世尊)이라 호를 붙이고, 이를 남에게 미루려 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더욱이 저와 같은 많은 경전이 두 번째의 이치라 하지 않고 각각 제일이라고 호칭하니, 이로써 자연히 모순이 생겨나는데, 장차 어떻게 말할 것입니까? 스스로 낮추는 것이 아니니, 이것이 세 번째 폐단입니다.

제가 듣자오니, 정리(情理)를 양보(兩寶)54)에 두고 마음으로 4()55)를 삼가는 것이 바야흐로 통인(通人)의 아회(雅懷)이고, 염사(廉士)의 고절(高節)이라 이른다 합니다. 그러나 종족과 헤어지거나 또는 산수 간에 떠돌기도 하니, 어떻게 현도(玄道)가 청정하다 하겠습니까?

속세를 등진 사문들이 다시 싫증 없이 구하고 유위(有爲)의 이로움을 탐하여 속인들에게 그 골수마저도 남기지 말도록 권하되, 그 보시를 논하는 데는 털끝만큼의 양보도 없습니다. 혹 귀한 이가 지나가거나 또는 상객(上客)이 머무르면, 이를 허심(虛心)으로 접대하지 못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을 갑절로 하니, 이 또한 식견이 있는 이가 다 함께 싫어하는 것임은 해내(海內)가 다 압니다. 스스로 단속하는 것이 아니니, 이것이 네 번째 폐단입니다.

제가 바로

 

말하는 것이 비록 쓰다 하더라도 약석(藥石)을 삼으셔서 선생께서 높으신 식견으로 이를 자세히 살펴 주십시오.”

선생이 말하였다.

나와 그대가 무슨 도를 말한다고 이를 비웃겠는가? 그대는 단지 이치가 같은 것만을 선호하니, 어찌 다른 이치를 알겠는가? 아무리 훼손하고자 하여도 금강을 훼손할 수는 없도다. 우리의 도가 넓디넓은데, 어찌 업신여길 수 있으랴?

내가 듣자 하니, 만기(萬機)로써 총괄하니 이로써 성왕(聖王)을 크다고 말하고, 백천(百川)을 받아들이기에 이로써 거학(巨壑)을 깊다고 한다. 왕은 보잘것없는 백성이라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바다는 작은 개울이라도 저버리지 않는데, 하물며 우리 스승의 대도(大道)가 광대하여 제도하지 않음이 없는지라, 마음으로 모두 거두되 원수이든 친한 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마땅히 그 계덕(戒德)의 크고 작음을 가려야만 종족의 부류의 고하를 섞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똥을 치는 비루한 사람도 이를 돌이켜 나지 않는 자리[不生之位]56)로 건너는 것이고, 글에 능한 귀한 선비라도 거꾸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안으로 숨겨진 것은 가려내기 힘드나 바깥으로 모양 지어진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데, 그대는 어째서 제멋대로 이를 저울질하려 드는가?

내 일찍이 수경(水鏡)에 모습을 비춰 본 적은 없으나, 단지 그 모습으로 사람을 취한다면 큰 허물이 될지니, 마침내 숙향(叔向)이 종멸(鬷蔑)57)의 말에 굴복하였고 장자(長者)로서 사미의 말에 깨닫게 되었다. 또한 다시 궁했다가 통해지는 데에도 운세가 있고, 비괘(否卦)와 태괘(泰卦)58)가 항상되는 것은 없다. 혹 처음에는 영화롭다가 나중에 욕을 보기도 하고, 또는 처음에는 미천하다가 나중에 융성해지기도 한다. 그 다른 자취가 참으로 분분하니, 이렇게 간략히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송곳 하나 세울 땅이 없더라도 요순(堯舜)의 덕을 사모하지 않고 나머지 후손도 잇지 않았다면, 어찌 탕() 임금과 무왕(武王)의 성명(聖明)을 전하였겠는가? 6()을 병탄한 진시황이 예전에 말[]을 좋아하던 목동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으며, 법삼장(法三章)59)을 약속한 한고조도 생각해 보면 망명한 정장(亭長)이었다. 번쾌(樊噲)와 관영(灌嬰)은 고기와 비단을 팔았고, 이윤(伊尹)과 여망(呂望)은 밭 갈고 낚시질하는 사이에서 흥성하였다.

역대로 이와 같은 가문이 이어 내려와서 마침내 4해의 강족(强族)5()60)의 권세 있는 씨족이 되어 관면을 쓰고 구름을 타는 듯 높이 오르며 풍류가 세상을 풍미하여도 아침

 

햇살이 비치면 이슬의 달콤함을 흠모하더라도 남아 있기 힘드니, 밤을 지낸 풀에 서리가 덮이면 땅강아지와 개미조차도 구별하기 어렵다. 그 쓰이고 쓰이지 않게 되는 것과 호랑이와 쥐새끼도 어찌 항상 그러하겠는가? 말단을 찾아 그 뿌리를 캐어 보면 인륜은 모두 한 가지이니, 어찌 가벼이 가마를 타고 다닌다고 옹기장이를 업신여길 것인가? 비록 재주가 주공단(周公旦)과 같더라도 이 역시 무엇이 볼 만한 것이겠는가?

시험삼아 이를 말하자면, 아침의 저잣거리가 부질없이 번잡하여 몸과 마음을 공연히 피로하게 하니, 지혜로운 이는 다 함께 이를 버리고 어진 이는 모두를 비루하게 여긴다. 단지 이 같은 마음만을 내어도 도에 들어갔다 할 수 있으니, 이는 그 땅을 피하여 돌아오기 때문이다. 내가 내세의 고통을 싫어하여 지난 허물을 깨달았는데, 그대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집착하여 지금 미혹에 빠지니 어떻게 안빈낙도(安貧樂道)하여 다재다능한 일을 줄이고 멀리할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태묘(太廟)의 희생에 어린놈이 삶은 기러기를 쓰겠는가?

내가 지금 질박하게 거처하면서 생각을 잡스럽지 않게 가라앉히느라 인의(仁義)에도 끌릴 틈이 없는데, 어찌 번잡스럽게 영화를 함부로 생각하겠는가? 그대가 참으로 빈모(牝牡)를 타고 다니며 스스로 먹고 자는 것도 잊으면서 어떻게 서늘하고 따뜻함을 살펴주는 작은 재주마저 지킬 수 있겠는가? 뜻을 밝혀 주는 얕은 재주로 마음을 닦더라도 은덕에 보답하였다 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정성(定省)61)의 거동에만 국한하는가? 널리 교화할수록 인도할 수 있는데, 이것이 어찌 우러러보고 굽혀 보는 일에 그치겠는가? 이와 같은 것을 나는 도리어 첫 번째의 훌륭함[一勝]이라 이르겠다.

우리 스승이 한가롭게 즐겁게 거처하시며 모여 사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힘써 받아들이는 것을 경시하면서 어떻게 홀로 구슬 목걸이를 하시겠는가? 이로써 그 형체를 오산(五山)에 두시고 정신(精神)3()62)에서 노니시니, 혹 동토(童土)를 받기도 하시고 또는 겉보리[馬麥]63)를 들기도 하시면서 깨끗한 마음의 작은 시주를 칭찬하시고, 잡다한 모양의 많은 희사를 질책하시어 이와 같은 것에 의지하여 선근(善根)을 세우며 참다운 신심을 드러내기를 바라셨다. 이 이후로 속수(束修)의 바탕을 크게 하여 공양의 의식으로 삼은 것이, 어찌 부처님 자신이 이를 원한다고 하겠는가? 중생이 뜻을 이루는 것이다.

다만 속된 범부로서는 깨닫기 어려우니 교만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없애지 못하고 앞 다투어 이름난 보배를 다투어 기증하여 많은 복을 이익으로 거두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옥반(玉槃)의 고찰(高刹)이 해를 가리고 하늘까지 솟구치니, 수놓은 서까래와 나는 듯한 용마루가

 

구름과 나란히 집안을 덮었다. 이름을 다투고 높은 것을 좋아하는데, 선법(善法)이 어찌 이와 같은 것에 있겠는가?

모양에만 집착하여 식견이 모자란 것이 급기야 이 지경에까지 다다랐으니, 비록 지진(至眞)의 이치와 어긋났다 하더라도, 영화스러운 쾌락을 감득하기에 족하다 하여 생민(生民)이 이것을 공()으로 여기나, 여래께서도 어떻게 그 설을 다스리시겠는가? 이와 같은 것을 나는 도리어 두 번째의 훌륭함이라 이르겠다.

내가 듣자 하니, 무가(無價)의 보배는 가난함을 구제할 수 있다고 일컫고, 불사(不死)의 신향(神香)은 병을 완쾌시킨다고 한다. 단지 중생이 삿된 무당의 미친 약만을 믿어 정각(正覺)의 감로를 저버리니, 이미 독이 퍼져 깊은데다 미혹에 휩싸인 지 오래되었다. 우리 스승이 세상에 나오신 것도 원래 이를 구제하여 공()을 삼고자 하신 것이니, 나를 알아 주는 이가 드문데도 침묵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단지 중생이 진리를 알아서 회향하게 하신 것인데 어찌하여 옳고 그름을 스스로 취하겠는가?

이처럼 두 분의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란히 계시지 않는 것은 두 개의 태양이 하늘에 함께 있지 않는 것과 같으니, 그 호를 무등(無等)이라 한다. 지극한 가르침이 널리 펴지게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니, 군자가 소성(小聖)으로서 겸양의 풍모를 섬기는 것과는 같지 않다. 지극한 이치로 함께 돌이키되 그 마음에 따라 달리 설법하니, 이러한 경전을 최고라 호칭하여 각각에 응하여 듣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같은 것을 나는 도리어 세 번째의 훌륭함이라 이르겠다.

내가 듣자 하니, 사민(四民)의 이로움을 빼앗지 않고자 백 상자의 금을 내어 주지 않는다고 한다. 단지 큰 환난이 없어지지 않았기에 반드시 이를 보양하면서 기다린다. 나를 걸사(乞士)라 부르면 그것을 받아 족함을 알고, 그대를 시주라 하면 마음을 다하여 국가와 도성(都城)을 바치더라도 어찌 나를 탐욕스럽다고 책망하겠는가?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욕심내는 폐단이 아닌가? 이를 징험해 보면, 재물을 서로 나누어 가진 것이 어찌 관중(管仲)과 포숙(鮑叔)뿐이어야만 하는가?

내가 듣자 하니, 천왕의 무고(武庫)에서 지출되는 것은 일찍이 신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데, 하물며 우리 스승이 복된 물건을 받아 주시는 것을 어떻게 스님들만이 홀로 갖는다 하는가? 본래 4()64)에서 온 것이라고 해도 지금은 3()에 귀속되어 쓰인다. 도를 위하여 공양을 일으키는 것은 의리상 복을 행하는 데 어긋난다. 이미 시방에 상주하는데도, 이를 그르다 하여 사사로이 자기 것으로 삼는다고 말하나, 자기 것으로 전용하는 것은 법률이 허락하지 않는 바이고 대중을 청하는

 

것은 화합할 방도가 없다.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그대가 무슨 덕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고, 내가 어떠한 마음으로 멋대로 하겠는가? 단지 우리가 함께 허물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 뿐인데, 어찌 이로움을 탐내고자 하겠는가?

생각해보면 7() 무게의 쌀을 물에 던지자 불붙어 타올랐는데, 먹고 남은 것은 발우 하나로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어 군류(群類)의 배를 불렸다. 부처님께서는 개가 굶주려도 이를 인색하게 대하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사람에게 아끼겠는가?

이로써 함부로 쓰게 되면 죄를 자초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공덕을 남에게 베풀어 주게 하여 이로움을 얻게 하신 것이다. 참으로 중생들이 박복하여 우리 스승의 감싸 주려는 마음을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이, 마치 아귀가 시냇물이 흐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병든 이가 맛을 느끼지 못하는 듯이 하는구나. 그 죄를 아귀나 병자와 연관 짓는데, 어떻게 맛이 없다고 이를 버리겠는가?

듣자 하니, 공신(功臣)이 임금을 섬기면 속백(粟帛)이 이르지 않아도 공을 세우고, 명주(明主)가 스스로를 탓하면 창민(蒼旻:蒼天)은 말하지 않고도 그 덕을 입는다. 그대가 스스로 감득하지 못함을 개탄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스승이 은혜롭지 못하다고 비방하니, 이와 같이 탐욕스러움[饕餮]을 지닌 채 어떻게 그 사람을 평가하려 드는가?

정후(鄭侯)도 재산을 기울여 교제하였고, 전군(田君)65)마저도 빈객에게 마음을 베풀었는데, 공규(空規)의 호탕한 성세(聲勢)로 어찌 복전(福田)이라 이르면서 이를 받들어 드러내겠는가? 이와 같은 것을 나는 도리어 네 번째의 훌륭함이라 이르겠다.

내가 비록 말은 부족하나 이치에는 남음이 있으니, 그대가 단지 예전에 미처 듣지 못한 것에 놀라고 미처 보지 못한 것에 현혹되는 것뿐이기에 내가 말하는 바를 그대도 깨달을 수 있으리라.”

공자가 말하였다.

선생께서 비록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스스로 허물이 없다 하더라도 끝내 수주(守株)66)의 부류에 불과합니다. 보응을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막막한 일입니까?

제가 듣자오니, 혼원(混元)이 개벽(開闢)하여 청탁(淸濁)으로 갈라지자, 옅은 것과 진한 것을 다르게 받아서 어리석음과 성인이 갈라져 나왔다고 합니다. 머리와 발이 모나고 둥근 것이나, 날개 달린 새와 비늘 달린 물고기가 그 명이 나뉘어 수명이 짧은 것이나, 일신이 영화롭거나 욕을 당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연의 조화가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를 숙업(宿業)에서 그리된 것이라 하겠습니까?

살펴보건대 천경(天景)의 운행은 이지러지지 않는 법이거늘, 비록 그 신세가 젖먹이 시절에 요절하거나 무도하기가 미친 듯했어도 천수를 다하여 복을 누렸으니, 업에 따라 만난다는 것이 만약

 

이와 같다면 어찌 인과가 징험된다 하겠습니까?

기식(氣息)이 모이면 사는 것이고 흩어지면 죽는 것이니, 형태와 정신은 위로 돌아가고 아래로 가라앉는 것으로 만사(萬事)가 텅 비고 넓은지라 이미 백 년을 넘었습니다. 도대체 어떠한 곳이 천궁(天宮)이며 누가 지옥에 떨어집니까? 이는 비루한 사람이나 믿는 것이지 달사(達士)는 이를 말하지 않습니다. 선생께서 풍속을 미혹되게 이어가시니, 청하건대 다시 살펴보십시오.”

선생이 말하였다.

공자(公子)는 참으로 변재가 있는 선비일진대, 소견이 어찌 그리 천박한가? 말하는 것이 백 세를 넘지 못하고, 지나온 것이 8()을 넘지 못하는데, 어떻게 과보가 끝나는 시기를 알 수 있으며 인연의 본제(本際)를 살필 수 있겠는가? 범부의 6()에 국한해서 성인의 3()이 그릇되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듣자 하니, 백곡(百穀)을 뿌려 키우는 것도 흙과 물의 공로만이 아니니, 4()을 기르는 것도 어찌 음양의 힘에 그치겠는가? 이미 종류마다 근()이 있으니, 또한 모여 일어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몸을 합한 부부라 할지라도 자손을 낳지 못하기도 하고, 그 몸이 홀아비도 아니고 과부도 아닌데 남녀의 조화가 균등하지 못하니, 반딧불이가 날고 매미가 부화하고 벌이 둥우리를 틀고 개미가 알을 낳는 것에 이르기까지 양정(兩精)이 함께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2()의 회임(懷任)에 따른다고 하겠는가?

만약 단지 건곤(乾坤)에서 부여받는다면, 사람이 어찌 부모에 의지하겠는가? 한결같이 운세에 맡긴다면, 어질고 효성스러운 것을 대체 어디로 귀속시키겠는가? 이로써 그 고르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과보가 고리처럼 이어짐을 알 수 있다. 그 갈래가 3()로 나뉘는 것이 마치 별이 만품(萬品)으로 늘어서듯 하는지라, 혹 빠르면 금생에 받거나 혹 늦으면 내세에 이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이치가 필연적인데 어찌하여 그릇되다 하는가?

생각해 보면 상과 벌을 남용하지 않는 것은 왕자의 명법(明法)이고, 죄와 복이 어긋나지 않는 것은 업도(業道)의 대공(大功)이다. 정치란 5()으로 벌을 내리고 녹봉과 벼슬로 상주는 것이나, 유기(幽祈)3()의 죄를 내리고 인천(人天)의 복을 주는 것이다. 이는 눈앞에서 거울로 삼아 경계할 수 있는데, 어찌 그대에게 내가 헛된 이론을 지어 내겠는가?

그대가 아직 영어(囹圄)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정위(廷尉)67)가 있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미처 대종(岱宗)68)으로 떠나지 않았다 하여 귀부(鬼府)가 없다고 함부로 말하는구나.

단지 선과 악이 쌓여 한 번 이루어지면 그 재앙과 경사가 부족함이 없으니,

 

이를 증명하는 전적이 숱한데도 그대가 알지 못하는 것뿐이다. 소륵(疏勒)에서 샘이 솟은 서응69)이나 대강(大江)에서의 횡석(橫石)의 감응70)이나, 양공(羊公)의 백옥(白玉)71), 곽거(郭巨)의 황금72), 어사가 타는 말[驄馬]이 포선(鮑宣)의 말[]73)을 표방한 것이나, 학이 쾌삼(噲參)에게 구슬을 던져 준 것이나,74) 선왕(宣王)이 두백(杜伯) 때문에 붕어하고,75) 양공(襄公)이 팽생(彭生)을 두려워하고,76) 백기(白起)가 죽음을 맞이하는 징조나,77) 이광(李廣)이 제후가 되지 못하고,78) 육항(陸抗)의 재앙이 그 후손에 남겨지고,79) 곽은(郭恩)80)의 화가 그 몸에 다다른 이와 같은 징험이 모두 뚜렷한데, 누가 감히 명묘(冥杳)라고 말하겠는가?

비록 알았거나 몰랐거나 6()에서 이를 말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신귀(神鬼)를 제사지내어 3()에 계속 전해지니, 죽으면 모두 허망하다고 한다면, 어째서 어진 행실 남기기를 구하겠는가?

유가(儒家)와 묵자(墨子)의 작은 가르침을 버리지 못한다면 마침내 유명(幽冥)의 큰 이치마저 잃게 된다. 그대가 애석하게도 재주가 좋으나 지나치게 어리석으니, 일찌감치 귀의하여 참회하면서 우리들의 참다운 말씀을 터득해야 하리라.”

공자가 말하였다.

선생께서 현하(懸河)의 변재가 참으로 일품이시나 아직도 폐단이 있습니다. 제가 듣자오니, 하늘이 백성을 낳아 기르되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을 짝지었는데, 이로써 형기(刑器)를 변화시키고 기령(氣靈)을 거두어 기른다 합니다. 혼인은 예로부터의 홍규(洪規)일지니,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대대로 내려온 옛 법도인지라, 죄의 보응은 자손과 관련이 없고, () 역시 처첩에 장애받지 않습니다. 드디어 선혜(善彗)81)에게 꽃을 파는 약조[]를 허락하게 하고, 묘광(妙光)82)에게 시주(施珠)의 믿음을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중향(衆香:구마라집)이 거느린 6만 명을 법사라 일컬었고, 비야(毘耶)83)가 거느린 2천 명을 대사(大士)라 이름하였는데, 어찌하여 유독 이런 짝을 버려두고 그 정성(情性)을 옹호하는 것입니까?

지극히 높은 용[亢龍]은 뉘우침이 있는 법이라 그와 같게 된다면 품물(品物)이 어떻게 생겨날 것이며, 부처님의 종자는 누구로 인하여 이어갈 것입니까? 이것이 선생의 첫 번째 폐단입니다.

제가 듣자오니, 맹수는 백성을 괴롭히는 것으로 업을 삼고 독충은 생물에 상처를 주는 성품을 갖고 있으니, 이로써 절기(節氣)의 차서(次序)에 따라 가을에 사냥하고[秋獮] 해로운 것을 제거하게 되는 때는 하묘(夏苗)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천도(天道)의 상법(常法)인데, 어찌하여 이를 죄라 하여 두려워합니까?

소와

 

돼지를 희생에 충당하고 양과 기러기로 예물을 삼아서 마침내 요리사의 손에 요리되어 그 몸을 귀한 손님의 뱃속에 장사지내는 것도, 본래 하늘에서 낳은 것이니, 저것이 어찌 이런 것에 쓰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새를 해쳤다고 내 자신이 죽는다면 호랑이도 안에서 다스려야 합니다. 어떻게 그 형체의 명을 기르는 일을 그칠 것이며 땅을 개간하는 것을 비워 둘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선생의 두 번째 폐단입니다.

제가 듣자오니, 하늘에는 기성(箕星)이 늘어서고 땅에는 천군(泉郡)이 자리 잡았으니, 술이라는 물건도 그 내력이 아주 깊습니다. 쓸쓸함을 달래고 그 성품을 부드러이 하는 데 이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혜강(嵇康)과 완적(阮適)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승석(升石)의 주량으로 정()을 돋구었고, []ㆍ순[]84) 두 성인은 종호(鍾壺)의 술을 마시는 곳에서도 그 덕을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관중(管仲)은 이것에 의지하여 현묘한 것을 말하고 우공(于公)은 이것에 의지하여 죄인을 처단하였습니다. 옛 철인(哲人)에게서 들으니 연회는 열지 않을 수 없으니, 단지 스스로 마시되 예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인데, 어찌 술 마시는 것이 대중들을 막고 홀로 청정하게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선생의 세 번째 폐단입니다.

제가 듣자오니, 8()으로 백성과 하늘의 음식을 드러내고 5()는 도기(道器)의 몸을 의지합니다. 이것으로부터 바람과 안개로 호흡하고 지로(芝露)를 마시는데, 살아 있는 부류가 되는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배불리 먹더라도 마음을 조심하기만 하면, 도업에 해가 되지 않는데, 어찌 재법(齋法)을 지키는 듯하여 힘을 고달프게 해서 도업(道業)의 근수(勤修)에 모자람이 있게 합니까? 이것이 선생의 네 번째 폐단입니다. 선생이 이와 같은 폐단을 만약 고치신다면, 저 또한 이를 따를 수 있습니다.”

선생이 말하였다.

내가 듣기에, 강강(剛强)은 교화하기 힘들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사실이구나. 그대가 폐단이라 하는 것도 스스로 그 폐가 되는 것을 몰라서이다. 나는 이미 통달하였는데 그대가 어찌 그 통달한 바를 알기나 하겠는가? 이로써 살펴보면, 서로 더불어 도를 말하지 못하겠구나.

생각하건대 비루한 언사와 불손한 행동은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 기피하는 것인데, 삿된 행실로 어질지 못하니, 오히려 선대의 달사(達士)를 부끄럽게 하는구나.

그러므로 남자들은 겨우 강보(繈緥)를 벗어나자마자 제비가 쌍쌍이 나는 것을 선망하여 처첩을 찾는 것이고, 여자는 겨우 젖을 떼면 빈방에 외로이 있는 것을 싫어하며 감정이 풍부해지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조그마한 즐거움을 탐하면서도 공공연하게 세간의 예법을 행한다고 하는데, 이미 그 습관이 오래되어 상도(常道)처럼 되어 혼돈스럽게 되었으니 누가 이상하게 여길 것인가? 이는 창피함을 모르는 것이 메추리나 때까치의 부류보다 심하니,

 

하잘것없는 혼인 제도로써 감히 돈독하고 단아한 고상한 것들을 비난하지 말라.

또 혼()은 바로 혼()이다. 일이 미혹에 빠져 이루어진다는 뜻이니 떳떳하지 못한 범절임이 분명하므로 참으로 비루하며 위험한 행동이다. 유독 유하혜(柳下惠)의 절조를 가지고 음부(婬夫)를 꾸짖으며, 팽조(彭祖)85)가 홀로 잠자리에 드는 술법으로 온화한 성품을 기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양서(良書)에 수록되어 있어 그 방책(方策)을 아름답다 하거늘 하물며 우리 스승께서 내린 가르침이야 말할 바가 있겠느냐?

깨끗한 행실의 종경(宗經)을 넓힌다면 어찌 다시 저와 같은 삿된 풍속을 따르겠는가? 이와 같은 욕심의 그물에 둘러싸여 6()의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면 기생이나 첩을 데려갈 수 없다. 이미 4()의 바깥으로 초월하였는데 어찌 처첩이나 끼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오직 2()86)의 백의(白衣)만이 업에 매여 이를 허락하는 것으로, 홀로 잠자리에 드는 거사의 정()은 잡되게 섞이기 어렵다. 단지 품물(品物)이 태어나는 것은 스스로 인연에 가탁하는 것인데 하필이면 자신의 배필을 기다려 후사가 있어야 하겠는가? 우리 스승에게서 이러한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동일하게 화생(化生)하여도 사()에게는 여인들의 업이 없다. 4()를 가로막아 법희(法喜)로 그 몸을 길렀으니, 이를 첫 번째의 통달이라 한다.

내가 듣자 하니 나고 죽고 가고 오는 것은 원래가 자벌레가 기는 것과 같고, 드러내었다 감추었다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하는 것이 순환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업을 운전하는 것은 사람과 축생 중 어느 것을 기준으로 하겠는가?

이로써 위희(衛姬)87)와 촉제(蜀帝)의 무리에다 우애(牛哀)88)와 백기(伯奇)89)의 무리가 있으니, 여우가 아리따운 여인이 되고 이리가 서생이 되어 참으로 일이 돌아갈 바를 생각지도 못하므로 어찌 쉽게 깨달을 수 있겠는냐?

생각해 보건대 계율을 지킴으로써 귀신과 용을 두려워하지 않고 덕을 간직하기에 벌과 전갈마저 겁내지 않으니, 쫓기는 비둘기가 그 그림자에 숨고 사나운 호랑이가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잘해 주면 보배 구슬로 이를 갚고 사람들이 싫어하면 독기(毒氣)로 이에 응수하니, 참으로 자기가 편하고자 산 것을 거침없이 죽이면서 어찌 금수만이 만물을 해친다고 생각하는가?

비록 다시 날고 기는 것이 그 형체를 달리하였더라도 그 몸을 아끼는 것은 다르지 않은데, 윤회에는 시초가 없으니, 어느 누가 친지 아님이 있겠는가? 자신같이 남을 용서하라는 비유로 어찌 이를 참아내겠으며, 어찌 유생의 혈육을 주재하여

 

쓸모없는 살가죽을 채울 수 있겠는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물건과 내가 동일하게 이르는 바이니, 이로써 황씨(黃氏)가 자라를 먹지 않았고90), 공자(孔子)도 식혜 항아리를 덮었던 것이다.91) 하물며 우리들이 인자하여 이를 측은히 여기는데, 누가 살찌고 신선한 고기를 달고 맛있다 하겠는가? 단지 다섯 가지 계율로 참회하여 개과하며 쌍림(雙林)에서 영원토록 제정하셨으니, 이를 두 번째의 통달이라 이를 수 있겠다.

내가 듣자 하니, 술독에 빠져 소처럼 마시는 것이 옛날에도 있었다 하는데, 106대의 운수가 다하자 국가의 혼란이 여기서 일어났고 36개의 나라를 잃은 것이 참으로 이에 연유한다. 다만 지금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한다고 이것을 어떻게 징험할 수 있겠는가? 내세에 어두움에 빠지게 될 터이니 장차 이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문거(文擧)92)의 술통은 비지 않으며, 현석(玄石)93)의 잠은 깨우기 힘든 것과 같다. 대체로 생각해 보면 술에 취하면 미치광이가 되는데 그렇게 되어 가지고 어찌 지극한 도를 논할 수 있겠는가? 술취함이 깊어지면 허물이 많아지고 술기운이 미약하면 죄는 옅어지는데, 술을 마셔도 실수가 없다고 말하려 해도 일찍이 그런 일은 없었다.

옛 성현이 엄히 경계한 것은 진실로 이러한 것이거늘 마음대로 하여 만물의 명을 상관하지 않더라도 술잔을 들지 말아야 할지니, 이를 세 번째의 통달이라 이를 수 있겠다.

내가 듣자 하니, 계율로 그 마음을 억제하고 재법(齋法)으로 그 뜻을 고르게 하는 것이 도에 들어가는 첫걸음이라 한다. 백성을 가르치는 본법(本法)이란, 단지 지업(支業)만을 세우는 것인데 몸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만약 마음껏 욕심을 즐기면 끝내 어려움만 가득할 터이다. 이로써 끼니를 두 때로 한정하여도 4()를 보충하기에 족하니, 사마귀가 뒤를 따르는 것을 깨닫고 이리떼가 앞서는 것을 보게 된다. 위망(危亡)의 기약이 이미 끊어지면 배고프고 목마른 마음이 드디어 완화되고 스스로 도가 훌륭해지는 것을 기뻐하여 살찌게 되니, 어찌하여 먹는 것이 적어 피곤하다고 탄식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제왕이 종묘에 제사지내고 부자(夫子)가 백양(伯陽)에서 가르침을 청하더라도, 맵고 냄새나는 채소를 끊고 재실에 깨끗하게 머물러야 하는데, 하물며 우리가 그 몸을 버려 도를 구하면서 어떻게 맛있는 음식에 마음을 두겠는가? 이와 같은 것이 네 번째의 통달이라 이를 수 있겠다.

그대가 이를 행할 수 없다고 나에게 폐단이 있다고 말하지 마라. 내가 말하는 것을

 

그대가 받아들여 이를 따른다면 다행이다.”

마침내 공자(公子)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으니, 온몸[百體]이 모두 땀에 젖어 혼비백산하여 간담이 서늘해졌고 오색(五色)에 주인이 없었다. 이미 호랑이를 생각하듯이 다시 용을 만난 듯, 당황스럽기가 미친 것 같았기에 미처 대답도 못하였다. 선생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였다.

내가 만물을 가엾이 여기는데 그대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러자 공자가 다소나마 안심하고서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였다.

제가 원래 비천한 고을에 태어나 대각(大覺)의 이름을 듣지 못하였기에 품성이 거칠어 도리어 외도의 삿된 소견만을 따랐으니, 선생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장차 화가 미칠 뻔하였습니다. 하풍(下風)의 지말이나마 이어받고 보니 정미로운 이치가 마음속에 새롭습니다. 큰 자비로 앞서의 실례를 거두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원컨대 삭발을 허락해 주신다면 선생의 문하에서 업을 받겠습니다.”

이에 선생이 말하였다.

그대가 미혹을 깨우쳐 되돌릴 줄 아니 잘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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