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3권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1. 귀정편 ③
10) 수고편(遂古篇) 양(梁) 시중(侍中) 강엄(江淹)
내 일찍이 「조화편(造化篇)」에서 옛것을 익혀서 요즘의 제도로 삼고자 하였는데, 저촉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다시 이와 같은 글을 짓는다. 천문(天問)의 상(象)을 겸하여 이리저리 궁리해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 본다.
듣자 하니, 옛날에 큰 불이 일어났을 때
물조차 혼돈되어 어두워져 그 끝을 구별할 수 없었네.
여와씨(女媧氏)가 돌을 정련하여 하늘을 막았고[煉石補天]1)
공공(共工)은 부주산(不周山)에 머리를 부딪쳤다네.2)
하수(河水)와 낙수(洛水)에서 교전하니, 어찌 그리도 깊은가?
황제(黃帝)와 염제(炎帝)는 탁록천(涿鹿川)에서 다투네.
여기(女妓)3)의 아홉 아들이 씨족(氏族)의 조상이 되었네.
치우(蚩尤)가 병기를 만든 지 천 년도 넘었다네.
열 개의 해가 동시에 요(堯) 임금 시대에 떠올라
예(羿)가 해를 쏘아 죽인 일4)이 어찌 진짜 그러하겠는가?
항아(嫦蛾)가 달로 달아났다고5) 누가 전했는가?
풍륭(豊隆)이 구름 타고 영선(靈仙)이 되었다네.
하후계(夏后啓)가 두 용을 부린 것이 무슨 인연인가?
부열(傅說)6)이 별에 몸을 맡긴 것도 어찌 타당한 것인가?
과부(夸父)의 지팡이가 등림(鄧林)이 된7) 이치도 실로 밝히기 어려운데
나무 찾아 천 리를 가는 까마귀에 대해서는 논하기 쉽겠는가?
목왕(穆王)이 신선을 존경하여 두루 돌아다녔는데
하종(河宗)8)이 서왕모(西王母)와 함께 말을 나눴다네.
청조(靑鳥)9)가 전하는 말은 진실될지니
오색(五色)의 옥돌은 서쪽 기슭에서 나온다네.
곤륜(崑崙)의 터는 바다와 이곳 사이에 있는데
종주(宗周)에서 1만 2천 리나 된다네.
『산해경(山海經)』 옛 책은 편마다 이해하기 어렵고
곽박(郭璞)이 풀이한 두 편도 세밀하지 못하네.
상천(上天)에 강기(剛氣)가 있다 함은 도가의 말인데
해와 달과 다섯 개의 별이 허공에 매여 있다네.
도경(倒景)10)과 땅 사이로 구름과 안개가 나오며
9지(地)의 아래에 하늘이 있는 것과 같네.
토백(土伯)이 몸을 아홉 번이나 굽힌 것을 어찌 먼저 하였겠는가?
서방(西方)의 욕수(蓐收)11)가 금문(金門)12)을 담당하고
북극(北極)의 우강(禺强)13)은 늘 그곳에 있는데
요(堯) 임금의 두 딸이 상수(湘水)와 원수(沅水)에 노닐었다네.
소명(霄明)과 촉광(燭光)14)이 오히려 더 빗나고
태일(太一)15)과 사명(司命)16)은 귀신의 우두머리라네.
산신도 나라가 망하면 혼령이 떠돌진대
가유라위(迦維羅衛)17)의 도(道)야말로 가장 높을세라.
황금신(黃金身)에 대해 누가 그 근원을 캘 수 있겠는가?
항성(恒星)도 보지 못하면서18) 무엇을 논할건가?
그 설이 빛나니 성인의 말씀이라는데
6합(合) 이내는 늘 이치에 어둡다네.
유명(幽明)이 본성을 어그러뜨리고 지혜를 어둡게 하니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조차 믿을 수 있을까?
공갑(孔甲)19)과 환룡(豢龍)20)이 예로부터 함께 전하였고
우(禹) 임금 때 방풍(防風)이란 나라는 우산(隅山)에 있었네.
춘추시대의 장적(長狄)은 어느 곳에서 태어났기에
임조(臨洮)21)에서 보게 된 것은 또 무슨 인연인가?
봉래의 물결이 전보다 얕아졌는데
동해의 파도는 그만 뽕밭이 되었다네.
산이 무너지고 마을이 잠긴 것이 수천인데
돌이 나고 흙이 덮이니 분명히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한나라 때 곤명지(昆明池)를 파자 재가 나왔고
위(魏)나라가 제수(濟水)의 도랑을 파자 소라와 조개[螺蚌]가 단단해졌다네.
태양이 다시 뜨니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
북두(北斗)가 안 보이니 어느 곳에 숨었을까?
건장궁(建章宮)22)의 봉궐(鳳闕)에는 신령한 빛이 이어지고
미앙궁(未央宮)의 종거(鍾簴)에 고운 꽃이 피었구나.
구리로 병기를 만든 것이 진(秦)나라 이전일진대
장부의 채색 옷은 6국(國)에 앞서도다.
주(周)나라 때 여자가 세상에 나왔으니
반군(班君)23)이 푸른색 실로 짠 신을 신고 태산에 노닐었다네.
인간과 귀신 세계의 사이에 신선[隱淪]이 있으니
4해(海)의 바깥을 누가 네모나거나 둥글다 하겠는가?
옥저(沃沮)와 숙신(肅愼)은 동북변에 있고
장비(長臂)와 양면(兩面)24)이란 나라로 배를 타고 가는구나.
동남쪽 왜국(倭國)은 모두 문신을 새겼는데
그 바깥이 흑치국(黑齒國), 다음이 나민국(裸民國)이고
3척 키의 주유국(侏儒國)이 인접하였는데
서북쪽에 있는 정령(丁零)25)과 오손(烏孫)26),
거사(車師)27)와 월지(月支)28)는 종족이 번다하고
마제국(馬蹄國) 사람들은 아주 잘 달리며
서남쪽에 있는 오익(烏弋)과 계빈(罽賓),
천축(天竺)과 우전(于闐)29)은 모두 호(胡)나라 사람이라네.
조지(條支)와 안식(安息)은 서해 가에 있는데
사람 자취가 대진(大秦)까지 뻗쳤네.
산호(珊瑚)ㆍ명주(明珠)ㆍ구리와 금은,
유리와 마노(瑪瑙)를 섞어 늘여 놓았네.
차거(車渠)와 수정도 진짜 아닌 것이 없는데
웅황(雄黃)과 자석(雌石)은 산에서 나온다네.
푸르고 흰 연꽃은 물가에 덮여 있고
궁전과 누각은 7보로 새겨졌다네.
땅이 끝나고 바다에도 사람들이 사는데
장고(長股)와 심목(深目)이란 나라에 어찌 군신(君臣)이 있겠는가?
남자와 여자 및 3신(身)이 있네.
결흉(結胸)에는 반설과 외팔의 사람이 있네.
지종국(跂踵國)과 교경국(交脛國), 우민국(羽民國)은
죽지 않는 나라라고 하는데 무슨 이유인가?
아득한 조화의 이치에 따르기 어려울진대
성인도 헤아리지 못하니 범부에 있어서랴.
틈틈이 붓 가는 대로 이 글을 지었으니
땅거미 지며 우레와 번개 치는 것에 잠시나마 근심을 잊고 또한 그대에게 보이고자 함이네.
「양전(梁典)」에서 말하였다.
“강엄(江淹)이 금자(金紫)30)에 올랐다. 예전에 엄이 여섯 살 때 이미 글에 능하고 시를 잘했다. 자라나면서 식견이 늘고 취미가 고상하였다. 나이 20세에 송(宋)의 여러 왕에게 5경(經)을 전수하였는데 빈객의 예로 대접받았다. 초년 열세 살 때까지는 아비가 없어 가난했으나 손수 나무를 해다가 어머니를 공양하였기에 효성이 사방에 알려졌다. 양나라 조정에서 여섯 번이나 시중(侍中)에 임명하였다. 그는 곽박(郭璞)이 오색의 붓을 매어 자신에게 내어 주는 꿈을 꾸고 나서 글을 지어도 꾸미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재주가 다하였다고 말하였으나 그가 뜻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문집 10책이 있는데 천축(天竺) 연과(緣果)의 글을 깊이 신봉하였다.”
내가 그 행적을 검토해 보아도 모두가 전해진 바와 같다. 부처님의 도리를 기술한 것이 비록 많지는 않으나 이를 전부 「별편(別篇)」으로 수록해 두었으니, 이로써 명현의 아름다운 뜻을 알 수 있다.
11) 가훈귀심편(家訓歸心篇) 북제(北齊)의 광록(光祿)대부 안지추(顔之推)
3세(世)의 일이 미더워서 모두 징험할 수 있으니 집안에서도 마음으로 귀의하여 소홀히 하지 말지어다. 그 사이의 묘한 이치는 모두 경론에 갖춰져 있으나, 여기서 다시 약간이나마 칭찬하여 기술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그대들이 아직도 신심이 굳지 못한 것이 염려되니, 대략이나마 다시 권유하고자 한다.
본래 4진(塵)31)과 5음(陰:5蘊)으로 형유(形有)를 갈라 보고 6주(舟:바라밀)와 3가(駕)32)로 군생(群生)을 실어 나르니, 만 가지 행업(行業)이 공(空)으로 돌아가고 천 가지 문호가 선(善)으로 들어간다. 변재(辯才)와 지혜가 어찌 다만 7경(經)이나 백씨(百氏)의 해박함으로 빗댈 수 있겠는가? 요(堯)ㆍ순(舜)ㆍ주공(周公)ㆍ공자ㆍ노자ㆍ장자가 미치지 못할 바임이 분명하다.
내교(內敎)와 외교(外敎)의 두 가지 가르침은 원래 그 바탕이 하나이지만 지극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다르며 깊고 얕음도 같지 않다. 내전(內典)의 첫 번째 법문에서 다섯 가지의 금계(禁戒)를 설치하는 것이 외서(外書)의 5상(常)인ㆍ의ㆍ예ㆍ지ㆍ신과 부합된다. 어진 이에게는 살생하지 않는 금계(禁戒)가 있고, 의로운 이에게는 도둑질하지 않는 금계가 있고, 예의 바른 이에게는 사음을 행하지 않는 금계가 있고, 지혜로운 이에게는 술 마시지 않는 금계가 있고, 미더운 이에게는 거짓말 하지 않는 금계가 있다. 민간에서 수렵을 하거나 군대를 동원하거나 잔치를 벌이며 형벌을 내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백성의 성품을 갑자기 바꿀 수 없기에 행하는 것을 절도 있게 하여 함부로 하지 않게 하려는 것뿐이다. 따라서 주공(周公)과 공자로 돌아가고 석종(釋宗)을 등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가?
세속에서 불교를 비방하는 것에는 대체로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세계 바깥의 일 및 신령한 교화의 방도가 없는 것을 허무맹랑하다고 비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길흉과 화복이 미처 보응(報應)하지 않은 것을 속인다고 비방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승니(僧尼)의 행업(行業)이 순수하지 못함이 많다 하여 이를 간특하다고 비방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금은 재화를 낭비하는 데다 조세와 부역을 소모시키는 것으로 나라에 해가 된다고 비방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인연에 따라 선악을 보응한다 하더라도 어찌 오늘의 갑(甲)을 고생시켜 후세의 을(乙)을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사람이 다르다고 비방하는 것이다. 지금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풀어 말하기로 한다.
첫 번째를 분석해 보면, 멀리 하늘에 있는 물건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이 아는 바로는 천지만큼 큰 것은 없다. 하늘은 정기(精氣)라 하는데, 해는 양정(陽精)이라 하고, 달은 음정(陰精)이라 하고, 별은 만물의 정(精)이라 하니, 이것이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안(安:천)이다. 별이 떨어지면 바로 돌이 된다고 하는데, 정(精)이 만약 돌이라면 빛을 내는 성품이 있을 수 없다. 또 질량이 무거워지는데 어떤 곳을 파서 엮을 수 있겠는가?
별은, 직경이 큰 것은 하나가 1백 리나 된다는데, 하나의 별자리에는 머리와 꼬리 사이의 거리가 수백만 리나 되는 물건 수만 개가 서로 연이어 있다. 가로는 좁고 세로로 경사져 있으며 늘 차고 기울지 않는데, 별은 해와 달의 빛과 색깔이 동일하고 단지 크기가 서로 차이 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해와 달도 또한 돌이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돌이란 단단하고 치밀한 것인데 삼족오(三足烏)와 옥토끼가 어떻게 돌의 기(氣) 가운데 있을 수 있겠으며, 어찌 홀로 운행할 수 있겠는가?
해와 달과 별이 만약 모두가 이러한 기(氣)라면 기의 바탕은 가벼워 떠다니는 것인데, 마땅히 하늘과 합쳐져 가고 오며 순환하며 어긋나지 않아야 하고, 그 사이의 늦고 빠른 이치 또한 동일하여야 한다. 그런데 해와 달과 5성(星) 및 28수(宿)는 어째서 각각의 도수(度數)에 따라 이동하되 고르지 않는가?
차라리 원래 기(氣)였다가 땅에 떨어지면 홀연히 돌로 변한다고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겠다. 땅이란 것이 혼탁한 찌꺼기라면 그 이치상 마땅히 내려갈수록 두꺼워져야 하는데도 땅을 파면 샘이 나오니, 이것은 흐르는 물과 고여 있는 물 사이에 또 무슨 물건이 있는 것인가? 하천이나 수많은 계곡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나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며, 바다는 어째서 넘치지 않는가? 귀허(歸墟)와 미려(尾閭)33)에서 다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또 부싯돌은 도대체 어떠한 기운에 의해서 불꽃을 내는가? 밀물과 썰물이 가고 오는 것은 도대체 누가 그것을 조절하는 것인가? 은하수[天漢]는 손끝에 있거늘
어찌 흩어지거나 떨어지지 않으며, 물의 성품이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거늘 어째서 위로 올라가는가?
천지가 처음 개벽했을 때 바로 별자리가 있었으나 9주(州)가 미처 구획되지 않아 열국(列國)이 갈라지지 않았기에 강토를 가르고 벌판을 구획하는 것이 일월성신의 운행로를 따르는 것과 같았는데, 봉건(封建) 이래로 누가 이것을 담당하였는가?
나라란 늘어나고 줄어듦이 있으나 별은 나가고 물러섬이 없어서 재이(災異)ㆍ서상(瑞祥)과 화복(禍福)의 그 사이에는 차이가 없는데, 커다란 현상(懸象)과 줄지은 별의 무리로 분야(分野)34)를 만들어 어찌하여 중국(中國)에만 국한시켰는가?
묘성(昴星)은 전두(旄頭)가 되고 흉노(匈奴)가 있는 곳이다. 서호(西胡)ㆍ동이(東夷)ㆍ조제(彫題)ㆍ교지(交趾)가 있는데, 어째서 이곳들은 거론하지 않는가?
이로써 궁리해 보면 모두가 무지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어찌 인간사의 평범함을 우주의 바깥으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대체로 사람들이 믿는 것은 오직 귀와 눈에 의함이요, 이 밖의 것은 모두 의혹을 품어 왔다. 유가에서 하늘을 설명할 때에는 자체적으로 여러 가지 뜻이 있으니, 혹 혼(渾)이라고도 하고, 개(蓋)라고도 하며, 궁(穹)이라고도 하고, 안(安)이라고도 한다. 북두칠성이 북극성을 도는 것과 원(苑)과 유(維)의 별들이 모이는 것을 만약 직접 살펴보더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동감하지 않으니, 만약 이를 측량해 본다면 또한 어찌 근거할 만하다 하겠는가? 어째서 범부의 억설만을 믿고서 대성(大聖)의 묘한 이치를 의심하여 항하(恒河)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의 미진수겁(微塵數劫)을 없다고 하는가?
추연(鄒衍) 역시 9주(州)에 대해 말하기를, “산 속에 사는 사람은 물고기가 나무만큼 크다는 것을 믿지 않고, 바다에 사는 사람은 나무가 물고기만큼 크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나라 무제도 현교(弦膠)35)를 믿지 않았고, 위나라 문제조차도 화포(火布)36)를 믿지 않았다. 호나라 사람도 비단을 보고 누에가 나뭇잎을 갉아먹고 실을 뱉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옛날에 강남에서는 1천 명을 덮는 천막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하북에서는 쌀 2만 석을 싣는 배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으나, 실제로 모두 사실임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세간의 주술사가 여러 가지 환술로 불구덩이를 지나다니고 칼날을 밟으며 오이를 심고 우물을 옮기는 등 눈 깜작할 순간에 천만 가지 변화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힘으로도 일찍이
이같이 할 수 있는데, 어째서 신통으로 감응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천 리나 되는 보배 당기[幢]와 번기[幡]와 백 유순(由旬)이나 되는 자리[座]에서 정토(淨土)를 화현하고, 묘탑(妙塔)이 땅에서 솟구친다는 것37)이 방해가 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두 번째의 비방을 분석해 보면, 대체로 믿음과 비난이 일어나는 것은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아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볼수록 그 일이 번잡해진다. 정성이 깊지 못하면 업연(業緣)이 감응하지 못하기에 시절마다 차이가 있으나 어려움이 지나면 그 보답을 얻게 된다. 선악의 행동에서 화와 복이 귀착되는 것이니, 9류(流)와 백씨(百氏)가 모두 이를 동일하게 논하는데, 어째서 오로지 석가의 전적만을 허망하다 하는가?
항탁(項託)38)은 요절하였고, 안회(顔回)는 단명하였으며, 백이(伯夷)는 굶어 죽고 원헌(原憲)39)은 얼어 죽었다. 또한 도척(盜跖)은 오래 살았고 장교(莊蹻)는 복을 누렸으며, 제나라 경공(景公)은 강성하였고 환퇴(桓魋)는 부유했으니, 만약 먼저의 업(業)을 이끌어 그 후생(後生)을 기약한 것이라면 진리는 고쳐져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선을 행하더라도 우연치 않게 화를 심은 과보를 만날 수 있고, 악을 행하더라도 갑자기 복의 조짐을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원망하여 바로 속이며 거짓말 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요와 순을 헛되다고 말하는 것이고, 주공과 공자를 바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인데, 어찌 이런 것을 믿어 입신(立身)하려 하겠는가?
세 번째의 비방을 분석해 보면, 개벽 이래로 착하지 못한 사람은 많고 착한 사람은 적었는데 무슨 연고로 순결해야 한다고 화를 내고 책망하면서 덕이 높은 명승(名僧)의 행실을 보면 덮어 두고 말하지 않는가?
속된 것을 잠깐 보기만 하여도 바로 그릇되었다고 비난이 일어나니, 이것은 배우는 이가 노력하지 않을 뿐인데, 어떻게 가르치는 이의 허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승(僧)과 속(俗)이 경전과 율법을 배우는 것이 어찌 세상의 선비들이 시(詩)와 예(禮)를 배우는 것과 다르겠는가? 시와 예의 가르침으로 조정의 선비들을 재어 비교해 보아도 대략이나마 그 행을 온전히 하는 이가 없는데, 경전과 율법의 금계(禁戒)로 출가한 사람들을 재어 보면서 유독 스님들에게만 범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또 행실이 그릇된 신하조차도 녹을 받는 벼슬자리를 구하는데, 금계를 훼손한 스님이 공양을 받는 것이 어째서 그렇게 창피하단 말인가? 그 계행을 스스로 범한 자가 있다면 법복은 이미 입었더라도
스님들의 명수(名數)에서 제적시키면 되는 것이다. 해마다 재계(齋戒)하고 독경하며 지켜 가는 것을 따져서 모든 보통 사람[白衣]들과 비교해 본다면, 어찌 그 차이가 산과 바다의 크기에만 미치겠는가?
네 번째의 비방을 분석해 보면, 내교(內敎)는 여러 갈래이나 출가는 한 가지 법일 뿐이다. 만약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효성을 다하면서 인혜(仁惠)를 근본으로 삼는다면, 반드시 유수(流水)를 통달하여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을 필요조차 없을 것인데, 어째서 정전(井田)을 다 폐하여 탑묘를 세우고 편호(編戶)를 다해야만 승니가 되겠는가?
따라서 이 모두는 정치가 절도에 어긋나기 때문이니, 이에 따라 법에 어긋난 사찰들은 백성들이 농사짓는 것을 방해하고, 도업(道業)이 없는 승려들은 나라의 조세를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대각(大覺)의 본래의 뜻이 이런 것이 아니다.
이를 재차 논해 보면, 도를 구하는 것은 이 몸을 다스리는 계책이고, 비용을 아끼는 것은 국가를 위한 도모이다. 몸을 다스리는 계책과 국가를 위한 도모는 두 가지로 나누지 못하니, 참된 신하가 임금을 위해 부모를 저버리고 효자가 집안을 편안케 하고자 나라를 잊는 것에도 각각 그 행이 있는 법이다. 유자(儒者)가 군왕과 제후에게 굽히지 않는 것으로 그 섬기는 것을 고상히 여기고, 은자(隱者)는 군왕을 내치고 벼슬도 사양하며 세상을 피해 산 속으로 들어오는데, 어찌 그 부역(賦役)만을 계산하여 죄인으로 여기는가? 만약 백성[黔首]들을 모두 교화하여 도량에 들게 한다면, 묘락(妙樂)의 세상이나 양거(儴佉)의 나라와 같아질 것이고, 바로 갱미(粳米)가 자연히 지어지고 보배가 한량없을 터이니, 어찌 농사짓고 누에치는 작은 이로움만을 추구하겠는가?
다섯 번째의 비방을 분석해 보면, 형체는 비록 죽더라도 정신은 남아 있어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다시 후세의 몸[後身]을 기약하게 되는데, 비록 연속되지 않는 것 같더라도, 죽고 난 다음에 앞서의 몸에 기대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늙은이가 되고 아침이 저녁이 되는 것과 같을 뿐이다. 세상에서는 귀신이 있어 혹 꿈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동첩(僮妾)으로 내리기도 하고 또 처노(妻拏)로 감응하기도 하며 음식을 구하여 이를 얻으면 반드시 복을 내린다는 것도 아주 없는 일이 아니다. 지금 사람들은 빈천하게 되고 병이 들어 고통에 시달리게 되면 원망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전생에 공덕을 닦지 않은 것으로, 이로써 논해 본다면 참으로 복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자손이란 것은
본시 천지간에 하나의 창생(蒼生)에 불과할 뿐인데, 어떻게 자신의 몸을 섬기는 것으로 도를 애호하는 기틀을 삼아 자신의 넋[神爽]을 일순간에 버리고자 하는가?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소통시키되 한쪽이라도 얻는다면 대를 이어 노래하면서 그 영광이 가득할 것이다.
범부가 무지몽매하여 미래세를 보지 못하고 저곳에서의 생과 지금의 생이 한 몸이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만약 천안(天眼)이 있어서 그 생각 생각마다 그에 따라 멸할지라도 바로 생겨나고 생겨나 끊어지지 않는 것을 살펴본다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또 군자는 세상에 처하여 자신을 다스려 예(禮)로 돌이켜서 시대를 구제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가정을 다스리는 이는 한 가정을 경사스럽게 하고자 함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한 나라의 보탬이 되고자 함인데, 처자식이나 신하 및 백성을 자기 몸과 비교해 본다면, 궁극적으로 어느 것이 더 가깝겠는가?
그래서 고행을 무릅쓰면서 덕을 닦는 것인가? 요(堯)ㆍ순(舜)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는 즐거움과 쾌락을 버리고 잊어버렸다. 한 사람이 도를 닦아 수많은 창생(蒼生)을 제도하는 것과 몇 사람의 죄업을 없애는 것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이 태어나 세상에 머물 때에는 반드시 속가의 생계를 돌보면서 문호를 세워야 하기에 처자식을 내버려 두고 모두 함께 출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출가하지 못하더라도 단지 행업을 닦고 경전의 독송에 유념한다면, 이는 내생의 자량(資糧)이 될 것이다. 사람의 몸이란 참으로 얻기 힘든 것이니,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12) 칠록서(七錄序) 양(梁) 처사 완효서(阮孝緖)
해와 달이 반듯하게 밝더라도 광경(光景)이 없으면 비추지 못한다. 숭산(嵩山)과 화산(嵩山)에 실어 기르는 것도 바람과 구름이 없으면 감(感)하지 못한다. 대성이 몸을 떨쳐 일으켜 세간의 명을 기약하는 것도 풍속을 널리 구제하여 잘못된 인륜을 바로 잡으려는 소치이니, 공자가 3분(墳)ㆍ5전(典)과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을 찾아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아름다운 공을 이루어 위대한 교화를 이루었겠는가?
그러므로 홍업(鴻業)이 황폐해져서 도가 끊어지자
제호(帝昊)40)가 효획(爻畫)을 만들어 숨은 이치를 결승(結繩)으로 나타내었고, 황힐(皇頡:倉頡)이 문자를 창제하였다. 이로부터 옛것을 이어가되, 하는 바가 달라서 공을 이루고 다스림을 안정시키는 데에도 갖가지 방책이 있게 되었다. 이에 올바른 종법이 다하자 그만 악(樂)이 붕괴되고 예가 무너졌다. 선성(先聖)의 법도가 위태로워져 중니(仲尼)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대도가 행해지는 것은 3대의 뛰어남과 함께해야 하는데 나는 이에 이르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대체로 뜻이 있으면 할 바가 있는 법이기에 공자는 고문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되돌아간 것이니, 이로써 소왕(素王)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시경』과 『서경』을 산정하였고, 예ㆍ악을 정하여 『춘추』에 5시(始)41)를 나열하였고, 역도(易道)에서 10익(翼)을 일으켰다. 공자가 죽자 미언(微言)도 끊어지게 되었고, 70명의 제자가 이어 죽으니 대의(大義)도 마침내 어그러졌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풍속이 달라지고 정치가 변하자, 백가(百家)가 다투어 일어나고 9류(流)가 서로 흥기하였다. 영정(嬴正)42)이 그들을 미워하였기 때문에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가 있었다.
한나라 혜제(惠帝) 4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책의 소지를 금하는 법률이 철폐되었는데, 그 이후로 밖으로는 태상(太常)ㆍ태사(太史)ㆍ박사(博士)를 두어 책을 소장케 하고 안으로는 연각(延閣)ㆍ광내(廣內)ㆍ비실(秘室)의 부(府)를 두었고, 헌서(獻書)의 길을 열어 이를 옮겨 적는 관리[寫書官]도 두었다. 효성제(孝成帝)의 치세에 이르러서는 망실되었던 것이 있었다. 이에 사자(使者) 진농(陳農)을 시켜 천하에 남아 있는 책을 구해 오게 하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 유향(劉向) 및 그의 아들 준(俊)과 흠(歆) 등이 전적을 낱낱이 대조하여 매 한 편마다 이를 기록하여 상주하였다. 이윽고 유향이 죽자 황제가 흠을 시켜 그 전대의 업을 이어받게 하고, 온실(溫室)의 책을 천록각(天祿閣)으로 옮기게 하였다. 흠이 이에 여러 편목을 총괄하여 『칠략(七略)』을 지어 올렸다. 나중에 한나라의 난대(蘭臺)에 이르러 서부(書部)를 만들었다. 또 동관(東觀) 및 인수달(仁壽闥)에서 신기(新記)를 편찬하자 교서랑(校書郞) 반고(班固)와 부의(傅毅)가 비적(秘籍)을 함께 관장하였는데, 반고가 『칠략』의 언사를 따라 『한서』의 「예문지」를 만들었다. 그 이후에 저술한 자가 있었는데,
원산송(袁山松)이 그 책 속에 기재되어 있다.
위나라와 진나라의 시대에는 문적(文籍)이 점차로 늘어나서 모두 비서(秘書) 중외(中外)의 삼각(三閣)에 수장해 두었다. 위나라의 비서랑 정묵(鄭黙)이 오래된 글들을 산정하였고, 당시의 논자들은 시비[朱紫]43)를 가려냈다.
진나라의 영비서감(領秘書監) 순욱(荀勗)이 위나라의 중경(中經)에 근거하여 다시 『신부(新簿)』를 저술하였다. 이것을 나누어 10여 권으로 하였으나 총괄적으로는 4부로 구분하였다. 혜회(惠懷)의 난44)에 그 도서가 대부분 소실되었고, 강좌(江左)45)에서 처음 편찬한 열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남아 있지 않다. 나중에 비록 모았으나 뒤섞인 것이 극심하여 저작좌랑(著作佐郞) 이충(李充)이 이를 다시 산정하였다. 순욱의 구부(舊簿) 4부(部)의 법에 근거하여 그 을부(乙部)와 병부(丙部)의 서첩(書輒)을 교체하였고, 중편(衆篇)의 편명은 생략하여 삭제하였으며, 총괄적으로 갑(甲)과 을(乙)로 목차를 정했다. 이 때 이후로 세대마다 이것을 본받아 기술하게 되었다.
송나라 비서감 사령운(謝靈運)과 승왕검(丞王儉), 제나라의 비서승(秘書丞) 왕량(王亮)과 감(監) 사굴(謝朏) 등이 아울러 신진학자로서 다시 목록을 찬술하였다. 송나라의 비서 은순(殷淳)이 『대사부목(大四部目)』을 편찬하였고, 검(儉)은 또한 별록체에 의하여 찬술하여46) 『칠지(七志)』라 이름하였다. 그 가운데 조정의 남겨진 기록에 대한 수집이 다소간 자세하였는데, 그나마 없어진 것이 태반이다.
제나라 말엽에 병화가 비각(秘閣)에까지 이르렀고, 양나라 초엽에는 대부분 없어졌다. 이에 비서감 임방궁(任昉躬)에게 명하여 부집(部集)을 더 모으게 하였다. 다시 문덕전(文德殿)에 별도로 많은 도서를 소장하였는데 학사 유효표(劉孝標) 등을 시켜 이를 정리하게 하여 수술(數術)47)의 글을 나누어 다시 하나의 부(部)로 삼았다. 봉조청(奉朝請) 조훤(祖暅)을 시켜 그 목록에 서명을 붙이게 하고, 상서각(尙書閣)에 경사(經史)와 잡서를 별도로 소장해 두었다. 그리고 화림원(華林園)에는 불교의 경론을 모아 두었다. 강동[江左]에서 장질(章帙)의 편찬이 성행한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완효서는 어려서부터 고대의 전적[墳籍]을 애호하였는데 장성하여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병이 나서 한가로이 누워 있으면서도 옆에 번거롭고 자질구레한 것을 두지 않고 새벽녘에 이르면
담황색 책 주머니를 펼쳤는데 밤이 깊어 누경(漏更)이 지나서야 녹색의 장질을 덮었으니, 어찌 그 유(流)의 대략(大略)을 공부하여 은밀하고 심오함을 깊이 있게 탐지하지 못했겠는가?
매번 기록[錄]을 펼쳐 놓고 스스로를 반성해 보면 모자란 것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남아 있는 은기(隱記)를 수집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무릇 송나라와 제나라 이래로 왕공이나 진신(搢紳)의 집에서는 고대의 전적을 모을 수 있으면 반드시 그 명부(名簿)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대체로 고대의 전적을 만나게 되는 경우 보았던 것 같기도 하고 들은 것 같기도 하여 관목(官目)과 대조해 보면 분실된 것이 많은지라 이에 여러 집을 총괄적으로 수집하여 다시 신록(新錄)를 지었다. 그 방내(方內)의 경사(經史)에서부터 술기(術伎)에 이르는 도합 5록(錄)을 내편(內篇)이라 부르고, 방외(方外)의 불교와 도교를 각각 하나의 녹(錄)으로 처리하여 이를 외편(外篇)이라 불렀는데, 대체로 목록이 일곱 가지로 나뉘었기에 『칠록』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예전에 사마자장(司馬子長)이 수천 년 동안의 일을 기록하자, 선철(先哲)이 그 부지런함을 갸륵하게 여기고 비록 다시 양사(良史)라 칭하였으나 군더더기를 주워 모았다는 질책[捃拾之責]이 따랐다. 하물며 여러 도서 4만여 권을 총괄하여 모두 이를 토론하고 연구해서 그 대의를 천명하였어도 그 요지를 소통하였다기에는 재주가 부끄럽고 그 편제(編制)를 통달하였다기에는 학문이 민망스러우니, 반사(班嗣)48)의 사서(賜書)가 아니며, 황향(黃香)49)의 동관(東觀)50)이 아니다.
검토하고자 해도 서적[卷軸]이 부족하였고, 의심나는 것이 있더라도 주변에 따져 볼 만한 근거가 없었으므로 어찌 오류가 많지 않았겠는가? 후세에 나를 책망할 것이 어찌 이 책에 있지 않겠는가? 장차 두려우니 만약 간정(刊正)할 것이 있다면 군자를 기다리기를 바란다.
예전에 유향(劉向)이 책을 교감하면서 매전 하나의 녹(錄)을 만들 때마다 그 지귀(指歸)를 논하고 오류를 바로잡아 상주하였는데, 이것도 모두 본서에 수록했다. 당시에 중록(衆錄)을 별도로 편집하고서 이를 『별록(別錄)』이라 하였는데, 지금의 『별록』이 바로 이것이다. 아들 흠이 그 요지를 탐구하여 『칠략』을 지었으나, 그 첫 번째 편은 바로 나머지 여섯 편을 총괄한 것[總最]이다. 그러므로 ‘촬략(撮略)’이라 이름하였고, 그 다음을 ‘육예략(六藝略)’이라 하였고, 그 다음을 ‘제자략(諸子略)’, 그 다음을 ‘시부략(詩賦略)’, 그 다음을 ‘병서략(兵書略)’, 그 다음을 ‘수술략(數術略)’,
그 다음을 ‘방기략(方技略)’이라 하였다.
왕검(王儉)의 『칠지(七志)』에서는 육예(六藝)를 경전으로 수정하였는데, 그 다음은 제자이고, 그 다음의 시부는 문한(文翰)으로 수정하였고, 그 다음의 병(兵)을 군(軍)으로, 그 다음에 수술을 음양(陰陽), 그 다음의 방기를 술예(術藝)로 수정하였다.
유향과 유흠이 비록 『칠략』이라 일컬었으나 실제로는 여섯 가지 조목만이 있었다. 그러므로 별도로 도보(圖譜) 1지(志)를 첨가하여 7이라는 명수를 온전히 하였는데, 그 외목(外目)에는 또 『칠략』 및 『한서』 「예문지」 가운데 경부(經簿)에서 빠진 도서를 조목으로 나누고 방외의 경전과 불경과 도경(道經)을 각각 하나의 목록으로 처리하여 『칠지』의 후속을 삼았어도 그 편수에 넣지 않았다.
지금 찬술한 『칠록』은 왕검과 유향 부자를 참작하였다. 왕검이 육예라는 호칭을 경전의 제목으로 쓰기에는 부족하다 하여 경목(經目)을 표방하면서 경전으로 고쳤는데, 지금은 이것을 따랐다. 그러므로 ‘경전록(經典錄)’이라 서(序)하여 내편의 제1장으로 삼았다.
유향 부자와 왕검은 중사(衆史)를 『춘추(春秋)』에 합쳐 두었는데, 유씨의 시대에는 사서가 매우 적어서 『춘추』에 아울러 붙였으니, 참으로 그것이 일례가 되었다. 지금 여러 가(家)의 기(記)ㆍ전(傳)이 경전보다 갑절이나 늘어났기에 지금 이 같은 뜻을 따른다고 하면 참으로 번잡해질 것이다. 또 『칠략』의 시부(詩部)는 육예의 시부를 따르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 책이 많아진 데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 때문에 하나의 약(略)을 별도로 두었다. 지금 이 같은 예에 따라서 중사(衆史)를 달리 견출하니, ‘기전록(記傳錄)’이라 서(序)하여 내편의 제2장으로 삼았다.
제자(諸子)라는 명칭은 유씨와 왕검이 동일하다. 또 유향 부자는 병서략‘(兵書略)’이라 하였는데, 왕검은 병(兵)이라는 글자가 천박하고 군(軍)이라는 말의 의미가 더 깊고 넓다 하여 병을 군으로 고쳤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예로부터 병혁(兵革)ㆍ병융(兵戎)ㆍ치병(治兵)ㆍ용병(用兵)이란 말이 쓰여 왔으므로 이것은 무사(武事)를 총괄하는 말이다. 따라서 다시 군(軍)을 고쳐서 병(兵)을 쓰기로 한다. 병서는 그 양이 이미 적어졌기에 별록(別錄)을 쓰기에는 부족해서 지금은 자부(子部) 끝에 첨부하여 총괄적으로 자병(子兵)이라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자병록(子兵錄)’이라 서하여 내편의 제3장으로 삼았다.
왕검은 시부(詩賦)라는 명칭이 여타의 제도를 겸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이 때문에
문한(文翰)으로 고쳤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경세(頃世)의 문사(文詞)를 총괄적으로 집(集)이라 일컫기에 한(翰)이라는 글자를 집으로 고치면 그 명칭이 더욱 뚜렷해질 터이다. 따라서 ‘문집록(文集錄)’이라 서하여 내편의 제4장으로 삼았다.
왕검의 수술(數術)이란 명칭은 번잡하다는 혐의가 있기에 음양(陰陽)으로 다시 고쳤다. 방기(方技)라는 말도 전거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예술로 고쳤다. 음양이란 말은 한 편으로 편중되기에 수술이란 말의 포괄적 의미만 못하다. 술예(術藝)라고 하면 육예와 수술이 뒤섞여서 방기의 요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까닭에 다시 유씨에 근거하여 원래 명칭을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방중(房中)의 신선은 이미 선도(仙道)에 편입되고, 의경(醫經)의 경방(經方)은 별도로 창안하기 부족한 까닭에 모두 합쳐서 ‘술기(術技)’라는 칭호로 하나의 녹(錄)에 명칭을 붙여 내편의 제5장으로 삼았다.
왕씨는 『도보(圖譜)』 일지(一志)에서 유향 부자의 약(略)을 삭제하였는데 유향 부자의 수술 가운데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역대로 전해지는 『도보』와 지금의 것에는 차이점이 있다. 생각해 보면 도화(圖畵)의 편목은 도(圖)에 따라 부(部)로 정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그 명제(名題)에 따라서 각각 본록(本錄)의 보(譜)에 붙였다. 또 주석과 기(記)의 종류는 사체(史體)와 서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전의 끝에다 등재하였으니, 이와 같은 것이 모두 내편이다.
석씨의 가르침이 중토(中土)에 덮여서 강설(講說)과 풍미(諷味)가 바야흐로 공씨의 전적에 버금가는데, 비록 왕씨가 편목으로 등재하였다 하더라도 그 지목(志目)의 범위를 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치에 따라 일을 살피면 편안하지 않아서 불법을 실어서 목록을 외편의 제1장으로 삼았다.
선도의 책은 유례가 오래되었는데, 유씨는 신선을 방기의 말단에 배열하였고, 왕씨는 도가의 경서를 『칠지』의 외편에 두었다. 지금 이를 합쳐 ‘선도(仙道)’라고 서하여 그 목록을 외편의 제2장으로 삼았다.
왕씨는 도가를 앞에 놓고 불교를 뒤에 놓았는데, 여기서는 불교를 앞에 놓고 도교를 뒤에 둔다. 이는 대체로 그 종지가 같지 않은 데다 그 가르침에도 얕고 깊음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내편과 외편의 두 편을 합쳐서 일곱 편의 편록(篇錄)으로 결정하였는데, 천하에 남아 있던 도서나 비기(秘記)는 대부분 여기로 편입되었다.
양나라 보통(普通) 4년(523) 세유(歲維) 단알(單閼) 중춘 17일, 건강(建康) 금중(禁中)의 저택에서 처음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통인(通人) 평원(平原)과 유묘(劉杳)가 나와 함께 다녔는데 그 일을 기뻐하였다. 유묘가 뜻을 품었으나 오래도록 붓을 들 기회를 얻지 못하였는데 내가 이미 저술에 착수하였다는 것을 전해 듣고 기뻐하며 뜻을 같이하였다. 함께 서집(書集)을 옮겨 적으면서 서로 그 견문을 넓히니 참으로 힘이 되었다. 이는 또한 석씨를 전하는 데에 강성(康成)51)이 되었으니, 참으로 자순(子順)52)의 서(書)에 귀착된다고 하겠다.
■ 고금서최(古今書最)
『칠략(七略)』:서(書) 38종 603가(家) 13,219권이다. 572가는 없어지고 31가만이 남아 있다.
『한서』 「예문지」:서(書) 38종 596가(家) 13,369권이다. 552가는 없어지고 44가만이 남아 있다. 원산송(袁山松)의 『후한서』 「예문지」의 서(書)에는 87가가 망실되어 있다.
『진중경부사부(晋中經簿四部)』:서(書) 1,885부 20,935권이다. 그 가운데 16권은 불경 서부(書簿)로 양이 적다. 2권에는 실려 있는 것이 많은지 적은지 자세하지 않다. 1,119부가 없어지고
766부만이 남아 있다.
진(晉) 원제(元帝) 『서목사부(書目四部)』:305질 3,014권.
진 의희(義熙) 4년(408) 『비각사부목록(秘閣四部目錄)』.
송(宋) 원가(元嘉) 8년(431) 『비각사부목록』:1,564질 14,582권이다. 55질 438권은 불경이다.
송 원휘(元徽) 원년(473) 『비각사부서목록(秘閣四部書目錄)』:2,020질 15,074권이다.
제(齊) 영명(永明) 원년(483) 『비각사부목록』:5,000권에 새로 보충하여 2,332질 18,010권이다.
양(梁) 천감(天監) 4년(505) 『문덕정어사부(文德正御四部)』와 『술수서(術數書)』의 목록을 합쳐서 도합 2,968질 23,106권이다.비서승(秘書丞) 은균(殷鈞)이 찬술한 『비각사부서』에는 문덕서(文德書)에 대해 소홀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신집칠록(新集七錄)』 내외편(內外篇)과 도서(圖書)를 합쳐서 55부 6,288종 8,547절 44,526권이다.6,078종 8,284질 43,624권 가운데 경서 203종 263질 879권이 도록(圖錄)으로 첨부되어 있다.
중편(中篇) 5록(錄):46부 3,453종 5,493질
37,983권이다.3,318종 1,306질 37,108권 가운데 경서는 135종 187질 775권이 도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외편(外篇) 2록:9부 2,835종 3,054질 6,538권이다.2,759종 2,978질 6,434권 가운데 경서 78질 104권이 부가되어 있다.
■ 『칠록』의 목록
「경전록(經典錄)」 내편(內篇) 1
역부(易部):본(本) 4종 96질 590권.
상서부(尙書部):27종 28질 190권.
시부(詩部):52종 61질 398권.
예부(禮部):140종 211질 1,570권.
악부(樂部):5종 5질 25권.
춘추부(春秋部):111종 139질 1,153권.
논어부(論語部):51종 52질 416권.
효경부(孝經部):59종 59질 144권.
소학부(小學部):72종 72질 313권.
이상의 9부는 591종 710질 4,701권이다.
「기전록(記傳錄)」 내편 2
국사부(國史部):216종 509질 4,596권.
주력부(注歷部):59종 167질 1,221권.
구사부(舊事部):87종 127질 1,038권.
직관부(職官部):81종 104질 801권.
의전부(儀典部):80종 252질 2,256권.
법제부(法制部):47종 95질 886권.
위사부(僞史部):26종 27질 161권.
잡전부(雜傳部):241종 289질 1,446권.
귀신부(鬼神部):29종 34질 205권.
토지부(土地部):73종 171질 869권.
보장부(譜狀部):43종 423질 1,064권.
부록부(簿錄部):36종 62질 348권.
이상의 12부는 1,020종 2,248질 14,888권이다.
「자병록(子兵錄)」 내편 3
유부(儒部):66종 75질 640권.
도부(道部):69종 76질 431권.
음양부(陰陽部):1종 1질 1권.
법부(法部):13종 15질 118권.
명부(名部):9종 9질 23권.
묵부(墨部):4종 4질 19권.
종횡부(縱橫部):2종 2질 5권.
잡부(雜部):57종 297질 2,338권.
농부(農部):1종 1질 3권.
소설부(小說部):10종 12질 63권.
병부(兵部):58종 61질 245권.
이상의 11부는 290종 550질 3,894권이다.
「문집록(文集錄)」 내편 4
초사부(楚辭部):5종 5질 27권.
별집부(別集部):768종 858질 6,497권.
총집부(總集部):16종 64질 649권.
잡문부(雜文部):273종 451질 3,587권.
이상의 4부는 1,042종 1,375질 10,755권이다.
「술기록(術技錄)」 내편 5
천문부(天文部):49종 67질 528권.
위참부(緯讖部):32종 47질 254권.
역산부(曆算部):50종 50질 219권.
오행부(五行部):84종 93질 615권.
복서부(卜筮部):50종 60질 390권.
잡점부(雜占部):17종 17질 45권.
형법부(刑法部):47종 61질 307권.
의경부(醫經部):8종 8질 50권.
경방부(經方部):140종 180질 1,259권.
잡예부(雜藝部):15종 18질 66권.
이상의 10부는 505종 606질 3,736권이다.
「불법록(佛法錄)」 3권 외편(外篇) 1
계율부(戒律部):71종 88질 329권.
선정부(禪定部):104종 108질 176권.
지혜부(智慧部):2,077종 2,190질 3,677권.
의사부(疑似部):46종 46질 60권.
논기부(論記部):112종 164질 1,158권.
이상의 5부는 2,410종 2,595질 5,400권이다.
「선도록(仙道錄)」 외편(外篇) 2
경계부(經戒部):290종 318질 828권.
복이부(服餌部):48종 52질 167권.
방중부(房中部):13종 13질 38권.
부도부(符圖部):70종 76질 103권.
이상의 4부는 425종 459질 1,138권이다.
문자집략(文字集略):1질 3권, 서록(序錄) 1권.
정사산번(正史刪繁):14질 135권, 서록(序錄) 1권.
고은전(高隱傳):1질 10권, 서록(序錄) 1권.
고금세대록(古今世代錄):1질 7권.
칠록(七錄):1질 11권.
잡문(雜文):1질 10권.
성위(聲緯):1질 10권.
이상의 7종은 21질 181권이다.
완효서가 이전의 목록에서 빠진 것을 다시 찬수하여 여기에 등재하였다.
효서는 진(陳)나라 유현(留縣) 사람이다. 송나라 중령군(中領軍) 완흠(阮歆)의 증손자인데 조부 혜진(慧眞)은 임하(臨賀) 태수였다. 아비 언(彦)은 태위(太尉)로 종사중랑(從事中郞)이었다. 효서는 열세 살 때 5경(經)의 대의를 거의 통달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상주(湘州)에서 일을 보았는데, 남지(南紙)53)에 글을 쓰지 않아 아버지의 청백함을 이루었다. 나이 열여섯 살 때에 부모상을 당하자 상을 마칠 때까지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채식이라도 맛이 있으면 바로 뱉어 버렸다. 종산(鍾山)에서 강의를 듣다가 어머니 왕씨(王氏)가 갑자기 병이 들자 효서가 강좌(講座)에 있다가 놀라서 되돌아갔다. 약을 쓰는 데 생인삼(生人蔘)이 필요하자 스스로 종산의 높은 봉우리로 채집하러 갔다. 며칠이 걸려도 얻지 못하다가 홀연히 사슴이 앞으로 지나가기에 속으로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슴이 머물렀던 곳으로 가서 보니 과연 인삼이 있었다. 이에 어머니의 병이 바로 완쾌되었다. 제나라 상서령 왕안(王晏)이 권문 귀족과 거래를 트고자 인사하러 와서 부르는 것이 몹시 다정하였으나, 효서가 이를 싫어하여
울타리를 뚫고 숨어 버렸다. 왕안이 예물을 보내도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언젠가는 장을 먹다가 맛이 있어 그 연유를 묻고는 왕씨 집안에서 보내온 것이란 것을 알고서는 바로 뚜껑을 덮게 하였다. 나중에 왕안이 주살당할 적에 그 무리가 아니라 하여 화를 면하게 되었다.
일찍이 녹림(鹿林)에다 정사를 지었는데 주위에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서 주변과의 왕래를 끊었다. 어려서부터 면식이 있었던 어사중승(御史中丞) 임방(任昉)이 찾아왔어도 나아가고 싶었으나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녹림을 살펴보면서 그 형인 리(履)에게 “집은 가까이 있는데 사람은 참으로 멀리 있구나”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태중대부(太中大夫) 은예(殷藝)가 일찍이 시를 증정하려 하자, 임방이 이를 제지하며, “은둔하면서 이미 뜻을 달리하였는데, 어째서 이에 관여하려 하는가?”라고 말렸다. 마침내 조정에서도 이를 귀히 여겨서 부르는 것을 단념하였는데, 오직 배정자(裴貞子)하고만 친교를 유지하였다.정자(貞子)는 바로 자야(子野)의 시호이다.
천감(天監) 12년(513)에 비서감(秘書監) 부소(傅昭)가 천거하였어도 나가지 않자, 천자가 헛된 이름만을 내세워 명예를 얻으려 한다고 여겼기에 이 때부터 다시 부르거나 초빙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찌 효서를 이어서 그의 높은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 남평(南平)의 원양(元襄)이 리(履)에게 물었다.
“예전에 임금 대부(大父)가 불러도 와서 머물지 않아 근심거리가 되었으니 무엇 때문인가?”
효서가 대답하였다.
“만약 고라니로 참어(驂馭)를 삼는다 하더라도, 저 준마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왕이 「이암(二闇)」과 「성청의(性請議)」를 짓고 나서 이를 보여 주며 윤문을 청하기도 하였는데, 세조(世祖)가 「충신전」과 「석씨비명(釋氏碑銘)」을 지었다. 단양윤(丹陽尹)이 「연신기(姸神記)」를 지었으나 먼저 거사(居士)를 가려낸 연후에 시행하였다. 파양(鄱陽) 충렬왕(忠烈王)이 효서의 자부(姊夫)이다. 왕과 여러 선비들이 명절마다 음식을 보냈어도 하나같이 받지 않았다.
예전에 스스로 서죽(筮竹)을 뽑아 죽는 날을 살펴보고는 유저작(劉著作)과 같은 해라고 말하였다. 그 해 가을에 유묘(劉杳)가 죽자 효서가 눈을 내리깔면서, “내가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라고 말하였다. 수십 일이 지나자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이 때 나이가 쉰여덟이었다. 황태자가 사신을 보내 조문을 하고 부조를 후하게 하였으나 그 아들
서(恕)가 선대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끝내 사양하며 받지 않았으며, 그 문인들이 문정처사(文貞處士)라 시호하였다.
효서는 온갖 서적을 두루 꿰뚫어 어느 것 하나 능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힘을 다하여 강기(强氣)하는 것은 학자들의 으뜸이었다. 『칠록』과 『삭번(削繁)』 등을 지었는데, 서책 181권이 남아 있어 세상에 통용되었다. 그 목차에 불도(佛道)를 편입하여 방외(方外)의 편목(篇目)으로 넣었으니, 방외의 편목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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