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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51 불교(광홍명집 2권/ 廣弘明集)

by Kay/케이 2023.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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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홍명집(廣弘明集) 2

 

당 석도선 지음

이한정 번역

 

1. 귀정편

 

8) 위서석로지(魏書釋老志) () 저작(著作) 위수(魏收)

대인(大人)은 공을 이루어 생민(生民)을 인도하니, 결승(結繩)1) 이후에는 문자[書契]로 기록하였다. 복희(伏羲)와 헌원(軒轅) 이래로 3대에 이르렀고, 3()2)5()3)의 자취는 이미 진나라 때 불타 버렸다. 한나라가 그 남겨진 전적을 수집하여 복구한 것만도 산더미 같아서 6()4)7()5),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으로 구분되었다.

석씨의 학문은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에야 알려졌다. 원수(元狩) 연간(B.C. 122117)에 곽거병(霍去病)이 곤야옥(昆邪玉)과 크기가 1장 남짓한 금인(金人)을 노획하자, 황제가 이를 대신(大神)이라 여기고 감천궁(甘泉宮)에 세워 놓고 향을 사르며 예배하였으니, 이 때부터 불도(佛道)가 점차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서역을 개척하고자 장건(張騫)을 사신으로 대하국(大夏國)에 보냈는데 돌아와서 신독(身毒)의 천축국에 부도(浮圖)의 가르침이 있다고 말하였다.

애제(哀帝) 원수(元壽) 연간(B.C. 2A.D. 5)에 경헌(景憲)이 대월지(大月氏)의 왕에게 부도(浮圖)의 경전을 구전으로 받았다. 후한의 명제(明帝)가 금인의 꿈을 꾸었는데 정수리에서 햇빛 같은 광채를 내며 대전(大殿)으로 날아올랐다. 부의(傅毅)가 처음으로 황제에게 그것이 부처님이라고 대답하였다. 낭중(郎中) 채음(蔡愔)과 박사 진경(秦景) 등을 천축으로 파견하여 부도(浮圖)의 유범(遺範)을 사경(寫經)하고 사문 가섭마등과 축법란 등과 함께 낙양으로 돌아왔다. 다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과 석가의 입상을 얻게 되자 황제가 화공에게 영을 내려 이를 그리게 하고, 청량대(淸涼臺)와 현절릉(顯節陵)에 안치하고, 경전은

 

난대(蘭臺)의 석실(石室)에 봉안하였다.

부도는 불타(佛陁)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발음을 그대로 따서 쓰는 것이다. 번역하면 정각(淨覺)이라 하는데, 더러움을 소멸하고 밝은 도를 이루어 거룩하게 깨쳤다는 것을 말한다. 대체로 그 경전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생생(生生)의 부류가 모두 행업(行業)에 기인하여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생겨난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세계를 거치더라도 영혼[識神]6)은 없어지지 않으며, 선하고 악한 일을 하는 데에는 반드시 보응이 있다. 점차 좋은 업[勝業]을 닦고 거칠고 더러운 것[麤鄙]을 도야하여 수많은 겁()을 지나 신명(神明)을 수련하고 연마하면 무생(無生)에 이르게 되어 불도를 얻게 된다. 수도(修道)의 차례나 심행(心行)의 등급은 하나둘이 아닌데, 모두 얕은 데로부터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미묘(微妙)한 것에 의지하여 드러나니, 대개 인순(仁順)을 쌓고 기욕(嗜慾)을 줄이며 허정(虛靜)을 익혀 통조(通照)를 이룸에 있다.

그러므로 그 수행을 시작하는 마음은 불ㆍ법ㆍ승에 의지하는데, 이것을 3()라고 한다. 이것은 군자의 3()7)와 같다. 5()가 있어서 살생ㆍ절도ㆍ음행ㆍ망언ㆍ음주를 끊게 되는데, 큰 뜻은 인()ㆍ의()ㆍ예()ㆍ지()ㆍ신()과 같다. 이를 받들어 지키면 인간이나 하늘 세계의 좋은 곳에 태어나지만 어그러뜨리고 범하게 되면 귀신이나 축생 등의 여러 고통 속에 떨어지게 된다. 선악으로 태어나는 장소는 대체로 여섯 갈래[六道]로 나뉜다.

그 도에 참례하는 이는 수염과 머리카락을 깎고 속가를 하직하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어 율도(律度)를 따르면서 서로 화합하여 머문다. 마음을 다스려 청정하게 닦으면서 탁발하여 자급자족하는 것을 사문이라 이름한다. 혹 상문(桑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근거가 되는 업에 각각 차별이 있어서 이를 3()이라 하는데 성문(聲聞)ㆍ연각(緣覺) 및 대승(大乘)을 말한다. 그 타고 갈 수 있는 것을 취하여 이를 운전하며 도()에 이르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하였다. 상근자(上根者)8)6()9)를 닦고 만행(萬行)으로 나아가 수억 갈래의 중생을 제도하여 오랫동안 두루 다니며 깨달음의 경계에 올라 부처님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본래 석가문(釋迦文)이라 불리니 이것을 능인(能仁)이라 번역하는데, 덕이 가득하고 도가

 

갖추어져 만물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천축국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의 왕자로 4월 초파일 밤에 탄생하셨는데,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출생하셨다. 그 자태와 모습이 특별한 것이 서른두 가지나 되었다. 하늘에서도 서른두 가지의 상서로운 징조[嘉瑞]를 내려 이에 응답하였다. 215일에 열반에 드셨으니 이를 멸도(滅度)라 부르는데, 혹은 상()ㆍ낙()ㆍ아()ㆍ정()이라고도 말하니, 생사 및 여러 고()에 얽매임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또 이르기를 제불(諸佛)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진실(眞實)이란 것이니, 지극(至極)의 체()라 이르는데, 얽매임을 묘하게 끊었기에 방위나 처소로도 기약하지 못하고 형체로도 그 끝을 헤아리지 못한다. ()이 있으면 이에 응하되, 바탕은 언제나 고요하다.

둘째는 권응(權應)이란 것이니, 6도의 만류(萬類)와 화광동진(和光同塵)10)하여 시절을 따라 나고 죽으며 부족함을 보태어 중생을 이롭게 하되, 그 형체가 감()에 연유하여 태어나기에 바탕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형체를 가려서 비록 법체[眞體]에서 물러나더라도 바뀐 것이 없다. 단지 시절마다 묘감(妙感)이 있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뵙지를 못하는 것뿐이니, 이는 부처님께서 태어나셨더라도 실제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고, 멸도하셨더라도 실제로 멸도하신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제자들이 향나무로 화장하여 영골(靈骨)을 나눠 갈았는데, 크기가 쌀알만 하고 내리쳐도 깨지지 않고 태워도 타지 않았다. 광명을 발하면서 신비로운 영험이 있기에 이것을 사리라 부른다. 제자들이 이것을 거두어 향과 꽃으로 싸고 경배하고자 궁실을 지었는데 이것을 탑이라 부르니, 마치 종묘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탑묘(塔廟)라 부른 것이 바로 이것이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지 116년 후에 아육왕(阿育王)11)이 위신력으로 부처님의 사리를 나누고 여러 귀신에게 84천 개의 탑을 만들게 하여 세계 각처에서 완성하였는데, 모두 한날한시에 조성되었다. 지금 낙양(雒陽)ㆍ팽성(彭城)ㆍ고장(姑臧)ㆍ임치(臨淄) 등에는 모두 아육왕의 사원이 있다. 대부분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부처님의 자취나 손톱과 치아는 천축에 남아 있다. 중도(中途)에 왕래한 이는 모두 이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처음 교법을 설하신

 

이래로 모두 기록으로 남겨져 그 심오한 이치를 한데 모아 누락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모두 3() 12부경(部經)이다. 이것은 9()가 서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그 대체적인 귀종(歸終)을 종합해 보면 결국 3()을 근본으로 하고, 그 뒤에 나한과 보살이 서로 계승하며 논을 지어 경전의 이치를 더욱 분명하게 해서 외도를 꺾었으니, 모두가 여러 장부(藏部)의 이치의 방계(傍系)이다. 외도의 질문을 상정하여 내법(內法)으로 이를 풀어낸 것으로 중국에도 전해져 점차 널리 퍼졌다.

한나라 초엽의 사문들은 모두 붉은 베로 짠 옷을 입다가 나중에 잡색으로 바꾸었으나 미언대의(微言大義)까지는 자세하게 연구하지 못하였다. 상산(常山) ()의 사문 도안(道安) 스님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날마다 1만여 단어를 암송하며 그 깊은 뜻을 연구하였는데, 스승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12년 동안 조용한 방에 홀로 앉아 생각을 정미하게 가다듬어 신령하고 묘한 자취를 깨달았다. 예전에 번역 출간된 경전에 오류가 많은 것을 보고 그 잘못된 점을 정정하였는데, 나중에 사문들에게 법을 전하여 중원에 크게 빛났다.

위나라의 선왕(先王)이 건국한 것이 현삭(玄朔)12)에서 비롯하였으므로 풍속이 순일하여 서역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부도의 성교(聲敎)를 미처 전해 듣지 못하였다. 아울러 신원(神元)13)과 위진(魏晋)이 서로 왕래하면서 문제(文帝)14)는 낙양에 있었고, 소성(昭成)15)은 양국(襄國)에 있었기에 드디어 남하(南夏)의 불법을 섬기는 일을 갖추게 되었다.

태조가 중산(中山)을 평정하느라 군국(郡國)을 경유하였는데 사문을 만나게 되면 언제나 공경을 다하여 군대의 병사들이 예를 범하지 않도록 엄금하였다. 사문 승랑(僧朗)이 그 문도와 함께 태산(泰山)에 은거하자, 황제가 칙서를 보내 비단 자리와 주석으로 만든 발우를 증정하며 예를 올렸다. 지금은 이곳을 낭공곡(朗公谷)이라 부른다.

천흥(天興) 원년(398)에 조칙을 내려, “불법의 발흥은 그 유래가 깊다. 이롭게 구제하는 공덕은 그 생사에 가호가 있으니 신령스러운 자취인 유법(遺法)이야말로 믿고 의지할 만하다라고 하면서, 유사(有司)에게

 

칙령을 내려 경성(京城)에 장엄하게 꾸민 궁사(宮舍)를 짓게 하고 불교를 믿는 이들을 머물게 하였다. 이 해에 5층 부도와 기사굴산(耆闍崛山) 및 수미산전(須彌山殿)을 만들었는데, 장엄하게 치장하고 별도로 강당과 선방 및 사문의 거처를 짓되 엄밀하게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태종이 보위를 이어받자 역시 선대의 업을 따라 경읍의 사방에 탱화의 성상을 건립하고 사문으로 하여금 민속을 교도하게 하였다. 황시(皇始) 연간에는 조군(趙郡)의 사문 법과(法果)가 계행이 청정하고 지극하여 법적(法籍)을 널리 펴게 되자, 태조가 조칙을 내려 그를 불러들여 사문의 통관(統綰)으로 삼아 스님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그가 말씨를 공손히 하고, 시주를 후하게 하였는데, 태종이 전보다 더욱 극진하게 예우하였다. 영흥(永興) 연간에 보국의성자충신후안성공(輔國宜城子忠信侯安城公)의 시호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황제가 늘 그의 처소로 친히 행차하였는데 출입문이 협소하여 수레가 드나들지 못하자 다시 이를 넓혔다. 태상(太常) 연간에 여든 살로 세상을 떠나자 황제가 세 번이나 그 장례에 임하여 노수장군(老壽將軍) 조호령공(趙胡靈公)이라 추증하였다. 법과 스님은 마흔 살에 처음 사문이 되었다. 세속의 자식이 있어 맹()이라 불렀다. 이에 조칙을 내려 법과 스님에게 내려진 작위를 이어받게 하였다. 이하 생략.서술한 것 중에서 사문 등의 글은 많이 실려 있지 않다.

세조 도()가 즉위하자 태조와 태종의 업을 계속 본받아 매번 덕이 높은 사문을 초빙하여 함께 토론하였다. 4월 초파일이 되면 모든 불상을 수레에 싣고 대로를 행진케 하였는데, 황제가 친히 문루에 올라 이를 구경하면서 꽃을 뿌려 예배하였다.

세조가 혁련창(赫連昌)을 평정하고서 사문 혜시(惠始)를 초빙하였는데, 그는 본래 장씨(張氏)로 청하(淸河) 사람이다. 구마라집16)이 경전을 번역하여 낸다는 소식을 듣고 장안으로 찾아가 몸소 친견하고 선정을 익혔다. 백거(白渠) 북쪽에 있으면서 낮에는 성 안에 들어가 강의를 듣고 저녁에는 처소로 돌아와 3()를 맑게 하니 식견이 있는

 

많은 이들이 따랐다. 유유(劉裕)가 요홍(姚泓)을 멸망시키고 아들 의진(義眞)을 남겨 장안에 주둔케 하자 의진과 그 막료(幕僚)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나중에 의진이 장안을 떠나자 혁련굴(赫連屈)이 뒤이어 장안을 침공하여 도인이나 속인이나 어린이나 늙은이가 모두 살육을 당했다. 혁련굴이 혜시의 몸에 날카로운 칼날을 갖다 대었으나 몸에 상처가 나지 않자 크게 화를 내며 혜시를 직접 앞에다 불러 놓고 차고 있던 보검으로 몸소 내리쳤다. 그렇게 해도 상해를 입히지 못하자 바로 겁을 내며 죄를 빌었다. 나중에 경도(京都)로 나아가서 가는 곳마다 교화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자취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세조가 스님을 존중하여 매번 예를 올려 존경을 다하였는데 처음 선을 익힐 때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50여 년 동안 일찍이 드러누운 적이 없었다. 맨발로 진흙탕을 지나더라도 발이 더럽혀지지 않았고 그 색이 더욱 희어졌기에 세상에서는 백각아련(白脚阿練)이라고도 불렀다.

스스로 떠날 때를 알아 재계하고 단좌하자 승도들이 그 주위를 가득 메웠다. 선정에 든 채로 명이 끊어지자 그 시체를 열흘간이나 놓아두었는데도 용모와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죽은 지 10여 년 후에 다시 관을 열어 개장하였는데 처음의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기에 세간에서 모두 기적이라 칭송하였다. 장구[]를 운구하는 이가 무려 6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감동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중서감(中書監) 고윤(高允)이 그 공덕의 자취를 전하여 기렸으며, 무덤가에 석정사(石精舍)를 세워 그 탱화가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다.

세조는 본시 노장(老莊)을 아름답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암송하였는데, 춘추에도 해박하면서 뜻을 무공(武功)에만 두었다. 비록 불법에 귀의하여 사문을 존중한다고는 하였으나 불경의 가르침을 살피지 않고 추구하는 것이 단지 인연 과보의 이치뿐이었기에 구겸지(寇謙之)가 청정무위(淸淨無爲)로써 선화(仙化)를 증득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그 술법을 믿고 따랐다. 사도(司徒) 최호(崔浩)가 구겸지의 도를 받들었는데 특히나 부처님을 신봉하지 않아 황제에게 누차 말하기를, 이는 허무맹랑하여 세간의 낭비일 뿐이라고 모략하였다. 황제가 그 구변이 해박한 것을 보고 이를 점차로 믿게 되었다.

회개(會蓋)의 오()가 행성(杏城)에서 반란을 일으켜 관중(關中)이 소란스럽게 되었다. 황제가 서쪽을 정벌하고자 장안에 당도하였는데 사원에 들어가

 

이곳을 살펴보다가 사문들이 관청에서 내어 준 술을 마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 더욱이 그 방 안에 들어가 재물을 살펴보니 활과 화살에다 아울러 지방 관리와 부호들이 기증한 물건이 대체로 수만을 헤아렸다. 이에 황제가 사문이 법에 어긋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노하였는데, 최호가 따라다니다가 이 틈을 타서 진언하자, 그만 조칙을 내려 장안의 사문을 주살하고 불상을 깨뜨려 불단 아래 넣어 두고서 천지사방 모두 장안에서 행해진 사건에 따르도록 명하였다. 다시 조칙을 내려 말하였다.

저들 사문은 서융(西戎)의 허무맹랑함에 의지하여 괴이하고 불길한 징조를 만들어 내니, 이는 가지런히 다스려 교화하며 천하에 순덕(淳德)을 펴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왕공(王公) 이하 사사로이 사문을 부양하는 이는 모두 사문을 보내고 정해진 기한을 넘겨서도 사문을 내보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고 그 사실을 알고서도 그냥 용인한 자는 그 일족까지 몰살하리라.”

이 때에 공종(恭宗)이 태자감국(太子監國)으로 있었는데 원래 불도(佛道)를 존경하였기에 그 형벌과 살생이 너무 지나치다고 누차 표를 올리면서 이는 도상(圖像)의 죄가 아니라고 변호하였다. 두세 번을 거듭하였어도 황제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다음과 같이 조칙을 내렸다.

예전에 후한의 무도한 임금들이 삿된 것에 미혹되어 거짓 꿈을 꾸고서 오랑캐의 요귀를 믿어 천상(天常)을 어지럽혔으나 예로부터 9()에는 이 같은 것이 없었다. 큰 소리만 치고 인정(人情)을 근본삼지 않으니 일찍이 숙계(叔季)의 세대에 임금을 미혹하고 주상을 침범하였더라도 이보다 더 어지러운 적이 없었다 하리라. 이리하여 정교(政敎)가 행해지지 않고 예의가 크게 손상되어 귀신의 도가 극성스러우니 왕법(王法)까지도 업신여기게 되었다. 이 이래로 대를 거듭하여 환난이 일고 천벌이 내려서 생민이 모두 죽게 되어 5()17)은 모두 폐허가 되고 천 리 이내는 한적하여 사람 자취를 보지 못하게 된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짐이 하늘을 계승하여 그 명(:)을 계승하매 운수가 다하는 피폐함에 임하였으니, 거짓된 것을 없애 참다움을 바로잡고자 하노라.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의 정치를 회복시켜 오랑캐의 신을 모두 소탕하여 그 자취조차 남아 있지 않게 하여 풍씨(風氏)에게 양보함이 없게 하겠다.

지금 이후로 오랑캐의 신을 섬기거나 진흙이나 구리로 그 형상을 조성하는 이는 일족까지 모두 주살할 것이다.

 

비록 오랑캐의 신이라 일컫더라도 지금 오랑캐들에게 이를 물어보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가 전대의 한나라 사람으로 무뢰배였던 유원진(劉元眞)과 여백강(呂伯强)의 무리가 오랑캐의 그릇된 말을 얻어다가 노장의 거짓됨[虛假]을 이용하여 더 보태고 늘린 것으로 모두가 진실이 아니다. 마침내 왕법조차 피폐하게 만들어 행하지 못하게 하니 참으로 간적(奸賊)의 괴수이다. 세상에 상도(常道)에 어긋난 사람이라야 상도에 어긋난 일을 저지를 수 있으니, 짐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같이 역대의 거짓된 물건을 없애겠는가?”

마침내 유사(有司)가 선포하였다.

소장하고 있는 모든 탱화와 성상 및 오랑캐의 경전을 모두 부수고 태워라. 사문은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모두 파묻어 버려라.”

이 해가 진군(眞君)18) 7(446) 3월이다. 공종의 말이 비록 아직 시행되지 않았고 다소나마 조칙의 선포를 늦추게 하였기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미리 알고 각자 계책을 세워 경읍 사방의 사문들이 대부분 도망치거나 숨어 화를 면했으며, 금은으로 조성한 성상과 경전을 모두 거두어 숨겨 놓았다. 그러나 흙과 나무로 지은 절과 탑 및 성교(聲敎)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집론자(集論者)가 변론하여 말하였다.

황제는 본래 융마(戎馬)의 고을 출신인지라 원래 문의(文義)의 자취라고 할 것이 없다. 군사(軍事)에만 몰두하여 가는 데마다 살육을 일삼으면서 이런 것을 정치로 알았으니 여타의 것은 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과오를 기술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사관(史官)까지도 죽였던 것이다. 최호의 무고를 받고 그 거짓을 가리지 못하고 그대로 행하다가 마침내 석문(釋門)을 주살하면서 일대의 쾌거라 자찬하였다. 오래지 않아 역병(疫病)이 돌게 되자 뒤늦게 후회하였지만 소용이 없자, 마침내 최호를 원수같이 보고 형벌을 혹독히 가하였는데 이야말로 천하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처음에 최호가 구겸지를 쫓았는데, 구겸지가 최호를 나무랐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마침내 구겸지가 경은 지금 스스로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으니, 마침내 문벌마저 망할 것이다라고 타일렀다. 진군 11(450)에 이르러 최호가 5()을 받아 주살되었는데 당시 나이가 일흔이었다. 황제가 지난 일을 몹시

 

후회하였으나 이미 업()을 저지른 뒤였다. 이를 다시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어려웠다. 공종이 은밀히 노력했어도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였다.

이 때에 법령이 다소나마 관대해져 신심(信心) 있는 집안에서는 사문을 다시 섬기게 되었고, 몰래 법복을 입고 강의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진군 13(452) 2월에 이르러 황제가 역병으로 죽었다. 아들 황()이 참언 때문에 죽고 손자가 옹립되었다.

별전(別傳)을 검토해 보면, 최호는 불법만을 훼손한 것이 아니다. 일찍이 천사(天師) 구겸지를 숭상하면서 선도(仙道)를 배웠다. 부인 곽씨가 석가의 전적을 신봉하여 금강반야경을 독송하였는데 최호가 이를 빼앗아 태워 버리고 그 재를 뒷간에다 버렸다. 나중에 차고에 가두어 성남으로 압송될 때 위사(衛士) 10여 인이 그의 머리 위에 오줌을 누고 사람들이 소리내어 그를 욕하자, 최호가 탄식하며 이것은 내가 경전을 내다 버린 현보(現報)이다라고 말하였다.

처음에 최호가 간특한 말을 궁리하여 석문(釋門)을 주살하는데, 묘한 글로 갖은 비난을 다하여 조칙을 내리라고 권유하였으니, 참으로 요괴 가운데 우두머리라 하겠다. 그러나 황제도 이를 물리치지 못하였으니, 상도(常道)에 어긋난 사람이라야 상도에 어긋난 일을 지지를 수 있다는 그 말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최호의 문벌은 모두 주살되었고, 청하(淸河) 최씨의 경우도 인척이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았는데, 아울러 범양(范陽) 노씨(盧氏)ㆍ태원(太原) 곽씨(郭氏)ㆍ하동(河東) 유씨(柳氏)까지도 모두 최호의 인척간이라 하여 그 일족까지 몰살시켰다. 시경에서도 참언하는 이는 사악하니, 온 나라를 어지럽히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영험한 말이라 하겠다.”

집론자가 변론하여 말하였다.

예로부터 3()으로 형벌을 받은 자로서 이 경우가 가장 혹독하다 하였으니, 어찌 간사한 말을 꾸며 인사(仁祠)에 재앙을 내리고 무고한 이들을 죽게 만들었는데 자신만 이를 면할 수 있겠는가? 과거에 지은 죄를 반성하여 스스로 돌이켜 과거로 되돌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아니하고 다른 이를 학대하는 것을 일삼으니 끝내 조용히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후회하여도 소용없는 일이다.

예전에 용봉(龍逢)은 하나라의 걸 임금에게 재난을 당하였고, 비간(比干)은 은나라의 주왕(紂王)에게 배를 갈렸으며, 주왕은

 

포락지형(炮烙之刑)19)으로 형벌을 엄하게 하고 한편으론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첩실이나 즐겁게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어찌 이를 정화(正化)라고 하였겠는가? 마음대로 그릇된 것을 꾸며 내어 이를 기리면서 어질다고 외쳤으나, 나중에 남소(南巢)에서 백기를 펼치고 그 머리를 내거는데 대신할 이가 없어 자기가 직접 하였으니,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몸도 없어져 거둘 곳조차 없었다. 재앙이 발뒤꿈치를 떼기도 전에 잇달아 끝내는 자신도 망하고 그의 인척들에게까지 미쳤다.

이 이후로 대대로 선양(禪讓)의 도가 갑자기 일어났다. 위문(魏文)이 그 실록을 열람하여 종고시대(終古時代)를 조사하였는데 요순도 아마 이것을 근심한 듯하다. 그러므로 불경(佛經)두 개의 위의가 떨어졌으니 나라에 무슨 상도가 있겠는가?’라는 말이 있는데 참으로 이것을 일컬은 것이다.

세조는 이처럼 은혜를 베풀 수 있었음에도 그가 본래 유도(幽都) 출신인지라 예의를 행할 수 없었으니, 자비로운 다스림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예전의 무슨 업을 타서 중원을 차지하고서 이같이 방자한 흉행을 일삼았는지 가려내거나 알아낼 길은 없으나, 학정(虐政)을 행하고 온당치 못한 것을 섬기면서도 스스로를 자랑삼아 일말의 후회조차 없었다.”

이 때에 사문 현고(玄高)가 있었는데, 공문(空門)의 뛰어난 호걸로서 영통하여 대중을 감득시켰다. 도왕(道王)이 하서(河西)의 변()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돌아오자 태무제(太武帝)의 신임을 받아 태자 황()의 스승이 되었다. 황은 본래 효도와 공경을 다하였으며 태어나면서부터 불법을 숭앙하였다. 최호와 구겸지가 가까스로 황제의 총애를 입게 되었으나, 황이 섭정하게 되면 혹 위험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여 황이 도모하는 바가 따로 있으니, 이에 대해 먼저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황제에게 무고하였다.

황제가 이를 그대로 믿고 태자를 궁궐 속에 깊숙이 유폐하였다. 이 때 황제가 꿈을 꾸었는데, 그 조부가 칼을 쥐고서 태자는 어질고 착하며 충성스러운데 어떻게 참언을 믿는가?”라고 말하며 화를 내었다. 황제가 잠에서 깨어나 조정의 대신을 모아 놓고 이를 말하자, 제웅백(諸雄伯)이 간언하였다.

태자는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유폐되어 욕을 보고 있습니다.”

이후 황제가 다시 태자를 신임하게 되었다. 마침내 진군 5년 정월에 다음과 같이 조칙을 내렸다.

짐이 조종중광(祖宗重光)의 단서를 계승하여 홍업(鴻業)을 일으켜 만대에 융성케 하고자 하는데, 무업(武業)

 

비록 빛나더라도 문교(文敎)가 창달하지 못하기에 이는 태평의 치술로 존중할 바가 아니다. 지금 국내가 편안하고 백성이 부유하기에 마땅히 제도를 정하여 만세의 법을 만들어야 한다. 음양에는 왕래(往來)가 있고 4()에는 대서(代序)20)가 있는 법인데 자식에게 넘기고 어진 이를 내세워 안전하게 서로 부촉하는 것은 백성의 피곤함을 쉬게 하여 이를 장구히 하려는 까닭이니,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영전(令典)이다. 황태자에게 만기(萬機)를 이어 다스리고 백규(百揆)를 통리(統理)하게 할 것이다. 다시 어진 이를 천거하여 열직(列職)에 세우고 사람을 골라 벼슬을 내리고 출척(黜陟)하게 하겠다. 조정의 선비나 백성들은 모두 태자에게 자신을 신()이라 호칭하라.이하 생략.”

이에 최호가 다시 무고하였다.

태자의 앞서 있었던 일은 실제로 모반의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현고 스님의 도술에 의탁하여 선제로 하여금 꿈에 나타나도록 한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은 논하기도 힘들고 그 사적도 밝히기 어려운지라 만약 일찍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커다란 화근이 될 것입니다.”

황제가 다시 이 말을 곧이듣고 태자를 유폐시켜 죽이고서 현고 스님을 잡아다가 평성(平城) 남쪽에서 목을 매달았으니, 바로 송나라 원가(元嘉) 21년째(444)이다. 그날 밤 문인들이 그의 죽음을 몰랐는데 홀연히 광명이 탑을 감싸다가 방으로 들어오는데, “내가 이미 떠나갔노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제자들이 그 시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유언이라도 남겨 달라고 청하자, 현고 스님이 갑자기 일어나 앉으면서 말하였다.

대법의 응화(應化)는 인연에 따라 성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한다. 그 자취에 있어서는 성쇠가 있다 하겠으나 이치는 언제나 그대로이다. 단지 그대들이 오래지 않아 나와 같이 되지 않을까 그것이 염려스럽다. 그대들이 죽은 다음에 법이 다시 부흥할 것이니 착하게 마음을 닦아 후회가 없도록 하라.”

말을 마치고 다시 눕자 그대로 명이 끊어졌다. 최호가 참언한 말이 너무 깊어서 아비가 자식마저 시기하여 끝내 유폐시켜 죽게 하였다. 하물며 사문은 말할 나위가 있었겠는가?

태무제가 진군 13(452) 25일 붕어하였으나, 태자가 이미 유폐되어 죽었기에 오왕(吳王)9일에 즉위하여 영평(永平) 원년으로 연호를 고쳤다.

 

101일 오왕이 다시 붕어하자, ()가 준()인 황손(皇孫)이 즉위하여 연호를 다시 흥안(興安)으로 고쳤다. 이 사람이 바로 문성제(文成帝)이고, 묘호(廟號)가 고종(高宗)이다. 마침내 불교가 대광명을 멀리 4해에 드리웠으니, 본 주()의 여러 나라들이 왕으로 받들지 않음이 없었다. 북위(北魏)가 비록 남송(南宋)을 제압하고 점차 강성해져서 마침내 진군명주(眞君明主)라 자칭하였으나, 누가 이에 속겠는가? 간신을 믿어 아들조차 시기하였는데, 누가 이를 애도하겠는가? 끝내 역병에 걸려 스스로 화를 입었으니, 이보다 더 혹독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백성이 오로지 반정(反正)만을 생각하였으니, 그 존립이 어찌 일순간이 아니었던가?

흥안(興安) 원년(452)에 마침내 고종(高宗)이 보위에 오르자, 조칙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대체로 제왕이란 천명을 받들어 인도(仁道)를 드리운다. 그가 생민(生民)에게 은혜를 내려서 군품(群品)을 구제하여 이롭게 하는 것이 비록 예로부터 존재하였더라도 오히려 그 풍렬(風烈)을 펼친다면 이로써 춘추에서 숭명(崇明)의 예를 칭찬하고, 제전(祭典)에 은혜를 베푸는 족속으로 등재될 것이니, 어떻게 석가여래의 공덕이 대천(大千)세계를 구제하여 그 은택을 진경(塵境)에 흐르게 할 수 있겠는가?

생사를 추구하는 이는 그 달관(達觀)에 감탄하고, 문의를 열람하는 이는 그 묘문(妙門)을 귀히 여기니, 참으로 왕정(王政)의 금률(禁律)를 보좌하고 인지(仁智)의 선성(善性)을 두텁게 하여 온갖 사도를 물리치고 정각(正覺)을 연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대 이래로 숭상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우리 나라에서도 항상 우러르고 섬겨온 바이다. 세조 태무황제께서 변방을 개척하여 은택이 멀리까지 미치게 되어 사문과 도사가 순성(純誠)을 어질게 행하였으니, 혜시 스님의 본보기가 멀리까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풍화와 의교(義敎)가 서로 감응하여 때때로 숲과 같았고, 산해(山海)의 깊은 곳에는 괴이한 물건이 많이 있어 간사한 무리가 형태를 가탁하여 여러 사찰 가운데서 흉당(兇黨)을 이루었기에 선조(先朝)가 그 거짓된 죄로 인하여 죄 있는 이를 살육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유사가 성지를 잘못 인도하여 모두 금단(禁斷)하였는데, 경목황제(景穆皇帝)가 매번 이를 개탄하였으나 국사가 번다하여 미처

 

다시 회복할 겨를이 없었다.

짐이 홍서(鴻緖)를 계승하여 만방에 군림하매 선대의 뜻을 이어서 그 도를 융성케 하고자 하여 지금 여러 주()ㆍ성()ㆍ군()ㆍ현()에서 대중이 많이 모이는 곳마다 각각 부처님의 성상(聖像)1()씩 세우도록 명하니, 그 재물의 사용에는 제한을 두지 말라.

도법(道法)을 애호하여 사문이 되고자 하는 이는 연배가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양가집 출신으로 성품과 행실이 돈독하며 고을에서 모두 칭송하는 이에게는 출가를 허락한다. 대체로 대주(大州)에는 50명을 두고, 소주(小州)에는 30명을 두면 악을 교화하여 선으로 나아가도록 도의 가르침을 전파하기에 족할 것이다. 지금부터 천하가 그 풍화(風化)를 계승하되, 아침에 얻지 못하였다면 저녁에라도 이를 거두어야 하니, 이전에 손상된 탱화와 사찰은 다시 원상으로 회복시키도록 하고, 불상과 경론은 모두 드러내도록 하라.”

이 때에 계빈국(罽賓國)의 왕족 출신 사문 사현(師賢)이 동쪽으로 다니면서 양성(涼城)에 이르렀다가 다시 경성(京城) 아래 지방으로 다니면서 불법이 폐해지는 것을 보게 되자, 방편으로 의술(醫術)을 행하면서 도를 지키며 훼절하지 않았다. 수복되는 날에 다시 사문이 되었으니, 동년배 다섯 사람을 황제가 친히 삭발해 주고 사현 스님을 승통(僧統)으로 삼았다.이하 생략.

흥광(興光) 원년(454)에 유사에게 칙령을 내려 5층의 대사찰마다 태조 이래의 다섯 황제를 위하여 석가문(釋迦文)의 성상 다섯 구()를 주조케 하였으니, 각각 크기가 16척으로 적금(赤金) 25만 근을 사용하였다.

사문 담요(曇曜)는 황제가 몸소 예배하고 스승으로 모셨는데 황제에게 경서(京西)의 무주(武州) 서산(西山)의 석실 다섯 곳에 굴을 뚫고 불상을 각각 하나씩 조성하도록 청하였다. 가장 높은 것이 70척이었고, 그 다음이 60척이었다. 조각이 섬세한 것이 만대의 으뜸이었으니 지금도 이를 친견한 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계곡의 깊이는 30리나 되는데 동쪽을 스님들의 사찰로 삼고서 영암(靈巖)이라 이름하였다. 서쪽은 비구니의 사찰로서 각각 돌을 뚫어 감실을 만들었는데 천 명이나 수용할 수 있었고, 그 뒤에 만들어진 것도 차례대로 즐비하였다. 바위 절벽 가운데에는 높이가 7리나 되는 험준한 곳이 있는데 불감(佛龕)이 서로 서로 연이어져 있으며,

 

간혹 끊어져 있기도 하다. 불상의 수량은 측량키 어려웠으니, 어떤 도인이 나이가 여든이 되도록 성상에 예배하는 것으로 업을 삼아 한 분의 성상에 한 번씩 예배하다가 중간쯤 있는 감실에서 죽었다. 그 시신이 땅에 엎드려진 채로 돌로 봉해 두었는데, 아직까지도 이것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으니, 그 시대를 헤아리기 어렵다. 삭주(朔州) 동쪽으로 3백 리, 항안진(恒安鎭)의 서쪽으로 20여 리 되는 곳에 있으니, 이는 다녀온 이들이 말한 것인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복사(福事)라 여겨진다.”

황흥(皇興) 원년(467)에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가 태어났는데 항안(恒安)의 북대(北臺)에 영령사(永寧寺)7층 부도를 세웠다. 높이가 3백여 척이고, 그 기초가 넓은 것이 천하제일이었다. 또 천궁사(天宮寺)에다 석가문의 성상을 조성하였는데, 높이가 43척이고 적금 10만 근과 황금 6백 근을 사용하였다. 다시 높이가 10장이나 되는 3층의 석조 부도를 조성하였는데, 대들보와 서까래까지 위아래를 연이어 쌓아 올리되, 크기에 관계없이 모두 돌로 쌓아 올렸다. 튼튼하고 치밀하기가 참으로 경화(京華)의 장관이었다.

연흥(延興) 원년(471)에 현조(顯祖) 헌문제(獻文帝)가 태자 승개(僧蓋)에게 양위하였는데, 일명 굉()으로 바로 효문제이다. 나이가 불과 다섯 살이었으나 총명하고 깊이가 있어서 생각을 가다듬어 기미를 터득하였다. 처음 보위에 오르자 현조가 북원(北苑)의 숭광궁(崇光宮)으로 옮겨서는 불교의 경전[玄籍]을 두루 익혔고, 녹야(鹿野)의 부도를 원림 가운데의 서산(西山)에 세웠다. 다시 숭광궁에서 오른쪽 10리 되는 곳에 암굴의 선방을 세워서 선승(禪僧)이 머물게 하였다.

승명(承明) 원년(476)에 현조(顯祖) 태상황이 붕어하자 건명사(建明寺)를 세웠다. 이후 내세의 복을 짓고자 출가하여 절을 세운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태화(太和) 16(492)에 조칙을 내려 매년 4월 초파일과 715일 백중에 대주(大州)인 경우에는 100, 중주(中州)

 

50, 하주(下州)20명에게 승니(僧尼)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발령하는 즉시 시행케 하였다.

태화 19(495)에는 늘 서주(徐州) 백탑사(白塔寺)로 행행(幸幸)하였는데, 수행하던 여러 왕과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이 절에는 근자에 명승인 숭() 법사가 계시는데, 구마라집 스님에게 성실론(成實論)21)을 전수받아 나중에 연() 법사에게 전수하였고, 연 법사는 다시 등() 스님과 기() 스님의 두 법사에게 전수하였다. 짐이 매번 성실론을 익히는데 사람의 깊은 정리를 풀어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절에 와서 그 길을 오르며 의업(義業)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고조의 권속도 늘 궁궐 내에서 강론에 참석하였는데 등 법사가 서거하자 그를 애도하기 위하여 비단 천 필을 보시하고 승재(僧齋)를 설치하며 경성(京城)에서 7일 동안 행도(行道)하며 다음과 같이 조칙을 내렸다.

짐의 스승 등() 법사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었다. 등이 아파 매우 고통스러워하셨으나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약으로 치료하였으나 등 법사가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여 곧바로 가보지 못하였다. 바로 사제의 의례로 문 밖에서 곡을 하니, 승속[緇素]이 모두 받들도록 하라.”

서역의 사문 발타(跋陀)는 도업이 깊었기에 황제가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이에 소실산(少室山) 북쪽에 소림사(少林寺)를 세워 조칙을 내려 머물게 하고 스님에게 옷을 공양하였다. 215월에 조칙을 내렸다.

구마라집 법사는 참으로 5()가 신출하고 4()을 마음으로 섭입한 분이다. 항상 머물던 절에 아직도 자취가 남아 있으니 기쁘게 그 자취를 따르면 멀거나 가깝거나 정이 깊어질 것이다. 옛터에 3층 부도를 건립하라. 또한 어리석고 잔인함에 핍박받아 도를 위하여 몸을 바치셨다. 이미 잠시나마 속례(俗禮)와 같다면 마땅히 대를 이을 아이[子胤]가 있어야 한다. 널리 찾아다니며 소식을 듣는 대로 예우를 다하여라.”

먼저 감복조(監福曹)를 세웠다가 다시 소현조(昭玄曹)로 개칭하여 관속을 갖추게 하고 승무(僧務)를 끊게 하였다. 지금의 동문사(同文寺)나 숭현서(崇玄署)가 바로 이것이다. 고조 때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사문으로는 도순(道順)ㆍ혜각(慧覺)ㆍ승의(僧意)ㆍ혜기(慧紀)ㆍ승범(僧範)

 

도변(道辯)ㆍ혜도(慧度)ㆍ지탄(智誕)ㆍ승현(僧顯)ㆍ승의(僧義)ㆍ승리(僧利)가 있었는데, 모두 의행(義行)으로 존중을 받았다.

위나라의 효문제는 성천자(聖天子)였다. 다섯 살에 보위를 선양받아 열 살에 즉위[服冕]하였는데, 태화 18(494)에 낙양으로 천도하고서 20(496)에 성씨를 원씨(元氏)로 고쳤다. 문장 백 편이 남아 있는데 참으로 고금에 으뜸이다. 처음 보위에 올라 조칙을 쓸 때는 유사의 손을 빌렸으나, 태화 연간 이후에는 스스로 붓을 들었으니, 이는 전대와 후대의 여러 황제들이 따를 수 없었다. 승행편(僧行篇)에 그 조칙이 그대로 실려 있다.

세종이 즉위하자, 다음과 같이 조칙을 내렸다.

승가[緇門]와 속인[素人]은 서로 달라서 법률 또한 다르다. 그러므로 도교를 내세워 서로 현양하니 각각 편의에 따르는 것을 금한다. 스님으로 살인 이상의 죄를 범한 이는 속가의 격식에 따라 처단하고, 여타의 범죄는 모두 소현서에 송부하여 내율(內律)의 승제(僧制)로 판결하라.”

희평(熙平) 원년(516)에 조칙을 내려 사문 혜생(慧生)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경전과 율장을 채집케 하였는데, 7년이나 걸려서 정광(正光) 3(522) 겨울에야 돌아왔으니 획득한 경론이 170부였다. 경명(景明) 초에 세종이 대장추경(大長秋卿)에게 조칙을 내려 대경(代京) 영암사의 석굴에 기준하여 낙수(洛水) 남쪽 이궐산(伊闕山)에다 고조와 문소(文昭) 황태후를 위하여 석굴 두 곳을 경영하였는데, 땅에서 310척이나 떨어져 있었다. 나중에 산이 너무 높아 깎는 데 힘이 들어 조성하기가 곤란하다는 주청을 받고 약간 아래로 옮기도록 하였으나, 땅에서 백 척 높이였고 남북으로는 140척이었다. 영평 연간에 세종이 석굴 한 곳을 조성하였으니 모두 세 곳이었다. 경명(景明) 원년(500)에서 정광(正光) 4(523)에 이르기까지 24년이 걸려서야 완성되었는데, 동원된 인부가 802366명이었다.

 

숙종(肅宗) 희평(熙平) 연간에 성 안에 영녕사(永寧寺)를 지었는데 영태후(靈太后)가 친히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기단에 사찰의 낙성을 표시하였다. 탑이 9층이나 되고 높이가 40여 장()이나 되어 비용이 헤아릴 수도 없었다. 경명사의 탑도 그에 버금간다. 이후로 관청이나 개인적으로 조성하는 사찰과 불탑의 수효가 매우 많아졌다.

신구(神龜) 원년(518), 사공(司空) 상서령(尙書令) 임성왕(任城王) ()이 사찰과 탑묘가 점차로 늘어나 백성의 거처에 지장을 주는 일이 많게 되었다고 아뢰었다. 그 대강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여래께서 가르침을 천명하신 것은 대체로 산림을 주로 하였는데 지금의 스님들은 도시[城市]를 애호하니 어찌 쓸쓸하고 누추한 곳이 경행(經行)에 합당하고, 시끄럽고 떠들썩한 곳이 선정에 머무를 수 있는 곳이겠습니까? 당연히 이익 때문에 그 마음을 이끌려 스스로 제지하지 못하고 이에 머물다 보면 참다움을 잃게 되고 이를 조성하는 사람 또한 그 복이 감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석씨의 조강(糟糠)22)이고 법문의 사서(社鼠)23)로서 내계(內戒)에서도 허용하지 않는 바이니, 왕전(王典)에서도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상주한 내용은 옳다고 하겠으나 얼마 되지 않아 천하가 환난을 입게 되었고, 게다가 하음(河陰)의 화()가 일어났다. 조정의 선비로서 죽게 되면 다시 그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곤 하자 금령을 내려 다시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흥화(興和) 2(540)에 조칙을 내려 업성(鄴城)의 옛 궁궐을 천평사(天平寺)로 고쳤다.

세종 이래 무정(武定) 말년까지 사문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는 혜맹(慧猛)ㆍ혜변(慧辯)ㆍ혜심(慧深)ㆍ승섬(僧暹)ㆍ도은(道銀)ㆍ승헌(僧獻)ㆍ도희(道睎)ㆍ승심(僧深)ㆍ혜광(慧光)ㆍ혜우(慧顒)ㆍ법영(法榮)ㆍ도장(道長) 스님이었으니, 모두 세속이나 승도들 사이에서 존중받았다. 위나라가 천하를 통치하게 되면서부터 선양하기까지 불경이 유통되어 중국에 크게 모였으니, 대략 415부로 도합 1,919권이었다. 정광(正光) 이후로 천하에 근심이 많아지고 왕이 부역을 더욱 늘이자, 이 때 편호(編戶)에 소속된 사람들이 연이어 입도(入道)하였다. 모두 사문을 흠모하는 것을 빙자하여 실제로는 조세와 부역을 피하고자 함이었으니, 그 번잡함이 극에 달했는데, 중국에 불법이 행해진 이래로 일찍이 이 같은 일이 없었다. 대략 승니의 숫자를 따져 보면 2백여

 

만 명이고, 사찰은 3만여 곳이나 되었는데, 그 병폐가 한번 이에 다다르자 다시 돌이키지 못하였기에 이 때문에 식견이 있는 이가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도가의 근원은 노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대체적인 것을 말해 보면 먼저 천지가 생겨나니, 이로써 만물이 갖추어지고 위로는 옥경(玉京)24)에 처하여 신왕(神王)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래로는 자미(紫微)25)에 있으며, 비선(飛仙)의 주인이 된다. 천변만화의 덕()이 있다 하나 실제로 부덕(不德)한 것이며, 물사(物事)에 감응(感應)하지만 그 자취는 무상(無常)한 것이다. 아미산(峨嵋山)에서 헌원(軒轅)에게 수여하고, 목덕(牧德)에서 제곡(帝嚳)을 가르치고, 대우(大禹)가 장생(長生)의 비결을 얻어 듣고, 윤희(尹喜)도덕경의 종지를 받았다. 단서(丹書)ㆍ자자(紫字)ㆍ승현(昇玄)ㆍ비보(飛步)의 경전과 옥석(玉石)ㆍ묘유(妙有)ㆍ영통(靈洞)의 설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여기에 적을 수는 없다.

그 가르침의 대강은 모두가 삿된 행실을 없애고 심신(心神)을 씻어 내어 행을 쌓아 공을 이루고 덕을 세워 선()을 늘려서 백일승천하여 세상에서 장생(長生)을 이루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진시황이나 한무제가 이를 애틋하게 여겨서 쉬지 않고 마음을 쓰며 힘껏 섬겨 이를 추구하였으나 끝내 이에 다다르지 못하고 후대에까지 한을 남겼다. 또 이 때문에 난대(欒大)26)와 서씨(徐氏)27)를 주살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미혹시키는지라 따라 배우는 이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영제(靈帝)가 탁룡(濯龍)에 꽃 일산을 지어 놓고 단장(壇場)을 설치하여 예배하였다. 아울러 장릉(張陵)이 곡명산(鵠鳴山)에서 도를 받은 것을 계기로 천궁장(天宮章)’을 전하였는데, 그 책이 1,200여 권으로 제자들이 이어받아 크게 펼쳤다.

제사지내고 무릎 꿇어 예배드리는 것마다 각각 법도를 만들었으니, 마침내 3() 9() 120() 일체의 신을 모두 통괄하고 다시 겁수(劫數)를 칭하였는데, 불경을 살짝 표절하여 그 겁의 종말에는 천지가 모두 소멸한다고 하였다. 그 책은 대부분 금주(禁呪)와 비서(秘書)가 많았으니, 그 무리가 아니면 잠시라도 이를 열람하지 못하게 하였다. 금을 녹여 옥단(玉丹)을 만들고 부적을 써서 물을 뿜는 기묘한 방술이 수천만 가지인데,

 

위로는 날개가 돋아[羽化] 하늘을 난다고 하고, 다음은 재앙을 다스려 화를 면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이가 간혹 그것을 섬기기도 하였다.

처음 문제가 진()나라에 빈객으로 갔을 때, 따르는 이[從者]이궐산(伊闕山)에서 신선이 되어 등천하였다고 하였다. 태조가 노자의 말을 좋아하여 이를 외우면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천흥(天興) 연간에 의조랑(儀曹郞) 동밀(董謐)복식선경(服食仙經)수십 편을 올리자 그를 선인박사(仙人博士)에 봉하였다. 선방(仙坊)을 세워서 백약(百藥)을 끓이고 제련하여 서산(西山)에 봉해 두고 장작불로 고아 낸 다음에 죽을죄를 지은 이에게 이를 복용케 하였으나 모두 죽어서 효험이 없었다. 태조가 유달리 이를 연마하여 태의(太醫)인 주담(周澹)이 약초를 달이고 채집하는 노역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여 마침내 그 일을 없애고자 하였다. 그래서 암암리에 자기 처를 선인박사 장요(張曜)에게 보내 첩을 삼게 하였다. 장요가 그 죄를 감추었으나 죽을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벽곡(辟穀)28)을 청하였다. 이에 태조가 허락하여 장요에게 비용을 내어 주며 숲 속에 조용한 집을 짓고 바라지하는 민가 두 가구를 공급하였다. 이와 같이 단약(丹藥)을 제련하는 관사(官事)가 끊이지 않고 오래 계속되다가 마침내 태조가 이를 게을리 하게 됨에 따라 중지하게 되었다.

세조 때 도사 구겸지는 자()가 보진(輔眞)인데 남옹주(南雍州) 자사 찬()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선도(仙道)를 좋아하여 장로(張魯)의 술법을 닦아 복식(服食)하고 단약을 먹었으나 해를 거듭하여도 효험이 없었다. 성공흥(成公興)이란 선인(仙人)이 구겸지의 집에서 머슴을 살고 있었는데, 나중에 구겸지가 7()를 계산하다가 점점 아득해져서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공흥이 물었다.

어째서 풀어내지 못하십니까?”

구겸지가 대답하였다.

내가 수년 동안이나 산법(算法)을 배웠으나 주비(周髀)29)로 해도 맞지 않는다.”

성공흥이 구겸지에게 자신이 일러 주는 대로 늘어놓게 하자 잠깐 사이에 곧바로 해결되었다. 이에 구겸지가 탄복하여 스승으로 섬기려 하였으나 성공흥이 극구 사양하며 도리어 구겸지의 제자가 되었다. 얼마 있다가 성공흥이 화산(華山)에 들어가 석실에 머무르면서 약초를 캐어 구겸지에게 주면서 먹게 하였더니, 다시는 굶주림이 없어졌다. 다시 함께 숭고산(崇高山)의 석실로 들어가면서 성공흥이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만약 선약(仙藥)을 가져오면 의심하지 말고 잡수셔야 합니다.”

곧 어떤 사람이 약을 가져왔으나

 

모두가 독충(毒蟲) 따위의 냄새나는 물건들이었다. 구겸지가 이를 꺼려서 달아나 버렸다. 나중에 성공흥이 돌아와 자세히 물어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선생님은 신선이 되기는 틀렸고 단지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성공흥이 구겸지를 7년 동안 섬기다가 말하였다.

이제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내일 정오에 떠나야 합니다.”

기약한 시간이 되자 과연 세상을 떠났다. 두 명의 어린아이[童子]가 보였는데, 한 명은 법복을 들고, 한 명은 석장과 발우를 들고 성공흥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왔다. 그러자 성공흥이 갑자기 일어나서 옷을 입고 발우를 들고 석장을 짚은 채로 떠나갔다.

구겸지가 숭악산(崇岳山)에서 뜻을 지켰는데, 신서(神瑞) 2(415) 10월에 구름을 타고 용을 부리고 백령(百靈)을 거느리는 대신을 산 정상에서 만났다.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 자칭하며 구겸지에게 말하였다.

천사(天師) 장릉(張陵)이 세상을 떠난 이래로 땅 위에 선직(仙職)이 비었는데, 상곡(上谷) 구겸지는 행실이 바르고 이치에 맞는지라 내가 그대에게 천사의 직위를 수여하겠노라. 그대에게 운중신과(雲中新科)20권을 수여할 터이니, 이것은 개벽 이래로 세상에 전하지 않은 것이다. 그대는 나의 신과(新科)를 펼쳐서 도교(道敎)를 정비하되 3()의 거짓된 법30)인 쌀을 바치고 돈을 거두며 남녀의 기()를 합치는 술법을 없애도록 하라. 대도(大道)는 청허(淸虛)한 것인데 어떻게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로지 예도(禮度)로써 으뜸을 삼고 여기에다 복식(服食)과 폐련(閉練)을 보태거라.”

옥녀(玉女) 구의(九疑) 12인을 시켜 구겸지에게 도인(導引)하는 구결법(口訣法)을 전수하였다. 마침내 벽곡(辟穀)의 기()가 왕성해진 것을 얻자 안색이 맑아졌으니, 제자 10여 인이 모두 그 술법을 얻었다.

태상(泰常) 8(423) 10, 목토(牧土)의 상사(上師) 이보문(李普文)이 숭악산에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상노군의 현손(玄孫)이 예전에 대군(代郡)의 상건(桑乾)에 머물렀는데 한나라 무제 때에 도를 얻어 목토궁(牧土宮)의 궁주(宮主)가 되었다. 36토를 다스리고 인귀(人鬼)의 정치를 하는데 그 땅이 18만 리이다.

 

그 중방(中方) 1만 리 주위에 360방이 있다.”

제자를 보내어 말하였다.

숭악(崇岳)이 통괄하는 범위는 한나라 강토 1만 리인데 이를 겸지에게 전수하여 고()를 짓게 하여 이르기를, ‘녹도(錄圖)60권과 진경(眞經)을 그대에게 부촉하니 북방의 태평진군(太平眞君)을 보좌하여 천궁(天宮)의 정륜법(靜輪法)을 이어서 극치를 이룩한다면 진선(眞仙)으로 등천(登天)하리라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였다.

땅 위의 생민(生民)이 말겁(末劫)에 다가가는지라 교법을 행하기가 몹시 어려우니 남녀 모두가 단우(壇宇)를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예배케 하라.”

또 말하였다.

두 의()의 사이에 36()이 있으니 천마다 36()이 있고, 궁마다 1()가 있다. 적송(赤松)ㆍ왕교(王喬)ㆍ한종(韓終)ㆍ장안세(張安世)ㆍ유근(劉根)ㆍ장릉(張陵)은 근세의 선인으로 모두가 따를 만한 사표[翼從]이다. 구겸지에게 명하노니, 저들 군선(群仙)과 더불어 도반이 되어라.”

다시 말하였다.

부처는 예전에 서쪽 오랑캐 나라에서 도를 얻었으니 32천 가운데 연진궁(延眞宮)의 궁주(宮主)이다. 가르침이 힘들고 용맹스럽기 때문에 그 제자들이 모두 삭발하고 물들인 옷을 입으며 인도(人道)를 끊었는데 천상의 의복이 모두 이와 같다.”

시광(始光) 연간에 처음으로 그 책을 받들어 세조에게 헌납하자, 이에 구겸지를 장요가 벽곡하는 곳에 머물게 하고 음식물을 공급하였다.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이 말을 전해 듣고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하면서 이를 그대로 믿지 않았다. 오직 최호만이 그 말을 남다르게 여겨 구겸지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그 술법을 받았다. 상소를 올려 그 같은 일을 칭찬하였다.

신이 듣자오니 성왕(聖王)이 천명을 받자 바로 하늘의 응보가 있었는데, 바로 하수(河水)와 낙수(洛水)에서의 용도(龍圖)와 구서(龜書)입니다. 그 말이 미물[蟲獸]에 의탁한 글이기에 이를 밝히지 못하다가 오늘날에 사람과 신이 서로 만나 손으로 적었으니, 그 글의 깊고 묘한 뜻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예로부터 이 같은 일이 없었으니, 예전의 한나라 고조가 비록 영명하고 뛰어난 군주였어도 상산사호(商山四皓)31)

 

오히려 이를 부끄럽게 여겨 절개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은둔해 살고 있던 덕이 청아한 신선들조차 부르지 않아도 지금 스스로 찾아오니, 이야말로 폐하가 헌원(軒轅)과 황제(黃帝)와 그 자취를 같이하는지라 천부(天符)가 응한 것입니다. 어찌 세속의 보통 말로써 상령(上靈)의 명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문득 이를 염려합니다.”

세조가 기뻐하여이 때 나이가 불과 아홉 살이었다. 사신을 보내 옥백(玉帛)과 제물을 바쳐 숭악산에서 제사지내고 그 산중에 남아 있는 제자들을 맞아들이면서 천사로 봉하여 존중하였다. 도단을 세우고 신법(新法)을 현양(顯揚)하고자 천하에 이를 포고케 하니, 도교의 업이 크게 펼쳐졌다. 최호가 천사를 섬기면서 매우 정중하게 절하였기에 어떤 사람은 그를 비웃기도 하였다.

이 때에 중악(中岳)의 도사 30여 명이 천사의 도량을 경도(京都)의 동남쪽에 세우면서 단을 겹겹이 쌓아 5층으로 만들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제도를 따르면서 도사 120여 명의 옷과 음식을 공급하였다. 재계하고 6()32)마다 기도드리며 달마다 주회(廚會)를 여니, 수천 명이 모이곤 하였다.

구겸지가 아뢰었다.

폐하야말로 진군(眞君)으로 세상에 임하신 것이니, 정륜천궁(靜輪天宮)을 건립하신다면 이야말로 개벽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겠습니다. 마땅히 단에 올라 부서(符書)를 받아 성덕을 널리 펴십시오.”

세조가 이 말을 따라 도단(道壇)에 올라 부록(符籙)을 받았는데 법가(法駕)와 기치(旗幟)를 모두 청색으로 하였으니, 이는 도가의 색을 따른 것이다. 이 이후로 황제가 즉위하게 되면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

이에 공종(恭宗)은 구겸지가 정륜천궁을 매우 높이 쌓아 올려 개와 닭소리가 들리지 않게 해서 상천의 신()과 서로 교통하려고 하였으나, 그 노역의 양이 수만여 명에 이르는 데다 몇 년이 걸려도 완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세조에게 말하였다.

인도(人道)와 천도(天道)는 달라서 높고 낮음에 모두 분수가 정해져 있습니다. 지금 겸지가 언제 이룬다고 기약할 수도 없는 일을 요청하니, 이는 옳지 못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재물과 인력이 낭비되고 백성을 피폐케 하니, 어찌 그 같은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반드시 그 말대로 해야 한다면 차라리 동산(東山)의 만인애(萬仞崖)로 그 공로를 대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제도 이를 온당하게 여겼으나 단지 최호만이 이를 찬성하여 그 뜻을 거스르기 힘들자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말하였다.

나 또한 이것이 이룰 수 없는 것임을 압니다. 일이 이러하니 오삼백(五三百)의 노고[]가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진군 9(448)에 구겸지가 죽자 도사의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는데도, 여러 제자들은 시신이 해탈하여 변화하여 떠났다고 생각하였다. 정륜천궁도 마침내 완공되지 못하고 곧 중지되었다.

경조(京兆)의 위문수(韋文秀)는 중악(中岳)에 은거하였다. 세조가 방사(方士)를 불러들여 금단(金丹)의 일을 물어보니 대답하였다.

신통은 아득하고 깊어서 그 변화를 실로 헤아리기 힘듭니다. 어쩌다 만나 본다 하여도 미리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신이 예전에 스승에게 이를 부촉 받았어도 아직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조는 그가 호족 출신으로 점잖은 것을 중히 여겼는데, 상서(尙書) 최이(崔頤)와 더불어 왕옥산(王屋山)으로 파견하여 금단을 합성케 하였으나 결국 이루지 못하였다. 이 때에 방사가 모여들었으니 전후로 수십 명이 되었다. 모두 명성과 이력이 뛰어났는데, 하동(河東)의 기섬(祁纖)이란 사람이 관상을 잘 보았기에 세조가 그를 어질게 여겨 상대부(上大夫)로 제수하였다.

영양(潁陽)의 강략(絳略)ㆍ문희(聞喜)ㆍ오소(吳劭)는 도인법(導引法)으로 정기를 길러 백 살이 넘도록 신기(神氣)가 쇠하지 않았다. 항농(恒農)의 염평산(閻平山)은 백가(百家)의 책을 널리 열람하였으나 그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관록(官錄) 받는 것을 사양하여 황제가 관직을 제수하여도 완강히 거절하였다. 부풍(扶風)의 노기(魯祇)가 혁련(赫連)씨의 학정을 만나자 그 땅을 피해 한산(寒山)에서 수백 명을 가르쳤는데 방술(方術)만을 애호하여 물욕은 없었다.

하동의 나숭지(羅崇之)는 송진[松脂]을 먹고 오곡은 먹지 않으면서, “중수산(中修山)에서 도를 얻고 동굴이 곤륜산과 봉래섬과 통해 선인과 왕래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황제가 향리로 돌아가 단을 세우고 기청(祈請)하라고 명을 내리고 하동에 조칙을 내려 필요한 물자를 대어 주라고 하였다. 숭지가 동굴에 들어가 1백여 보 가서 바로 막히자 다시 불러내고는 유사가 거짓된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고 죄 줄 것을 주청하였으나 세조가 그를 용서하여

 

현자(賢子)를 기다린다는 뜻을 알렸다.

동래(東萊)의 왕도익(王道翼)은 한신산(韓信山)에서 40여 년간 은거하였는데 조[]를 끊고 보리를 먹으면서 경장(經章)과 부록에 달통하였으나 속세에 어울리지 않았다. 현조(顯祖)가 청주자사를 시켜 도성으로 오라고 소환하였으나 여전히 원래의 지조를 지켰다. 이에 승조(僧曹)에게 명하여 죽을 때까지 옷과 음식을 보내 주게 하였다. 태화(太和) 15(491)에 조칙을 내렸다.

지극한 도는 형체가 없어서 허적(虛寂)을 위주로 삼는 것인데, 한나라 이래로 단사(壇祠)를 세운 것도 선조가 그 지순(至順)에 귀의할 만하기에 사원을 세운 것이다. 예전에 경성 안에 거처하는 집이 드물었는데, 지금은 고을마다 집들이 즐비하여 사람과 신이 서로 한데 뒤섞이게 되었다. 이는 지극한 법을 공경하고 숭상하며 신의 도를 깨끗이 하고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성의 남쪽 상건(桑乾) 음악산(陰岳山)의 남쪽에 그 처소를 옮겨 세우고 민호 50호를 공급케 하여 제사지내는 비용을 충당케 하며, 아울러 이름을 숭허사(崇虛寺)라 하라. 각 주마다 은사(隱士)를 부르되 인원을 90인으로 정하라.”

낙수(洛水)에서 업()으로 천도하면서 그 자취는 예전의 일 그대로 시행하였다. 도단을 남쪽 교외에 두었으니 사방 2백 보였다. 정월 7일과 97일 및 105일에 단주(壇主)인 도사와 가인(歌人) 160명이 제사의 예법을 행하였는데, 여러 도사들 가운데 세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문 데다 술법 또한 존중할 만한 것이 없었기에 마침내 무정(武定) 6(540)에 이르러 유사가 이를 폐지하라고 보고하였다.

하동의 장원유(張遠遊)와 하간(河間)의 조정통(趙靜通), ()나라 문양왕(文襄王)이 수도에 별도의 관사를 설치하고 그 도술을 존중하며 예우를 극진히 하여 접대하였다.

내가, 천사 구겸지가 태상노군이 말했다고 기술한 것을 검토해 보면, 실로 봉래에 머문 것을 해하(海下)에 있다 하였고, 곤륜산에 오른 것을 천상에 노닐었다고 하는 정도이다.

또한 36() 1만 리 간에 각 방의 360여 곳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장각(張角)36방과 무엇이 틀리겠는가?

후한서황보숭전(皇甫嵩傳)에 따르면, 거록(鉅鹿)의 장각이 대현랑(大賢郎)이라 자칭하며 황로(黃老)를 스승으로 삼아 섬기고, 장릉(張陵)의 술법을 행하면서 부수(符水)의 주법(呪法)을 써서 백병을 치료하였다. 제자 여덟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도법(道法)을 널리 폈는데 갈수록 속임수가 많아졌다. 10년 사이에 대중의 수가 10만에 이르렀으니, 청주(靑州)ㆍ서주(徐州)ㆍ유주(幽州)ㆍ기주(冀州)ㆍ형주(荊州)ㆍ양주(楊洲)ㆍ연주(兗州)ㆍ예주(豫州)의 여덟 주마다 이에 응하지 않는 백성이 없었다. 바로 36방을 설치하고 방()마다 장군(將軍)이라 호칭을 하였다. 대방(大方)1만여 명이고, 소방(小方)6천여 명이다. “창천(蒼天)이 죽으니 황천(黃天)이 옹립되리라. 갑자(甲子) 해에 천하가 대길하리라라는 요언을 퍼뜨려 백토(白土)로 경읍(京邑)의 사찰 대문마다 갑자라는 글을 새기게 하였다.

중평(中平) 원년(184) 35일 내외에 일제히 기병하여 모두 도사의 황복을 입고 황건을 쓰고 사람을 죽여 하늘에 제사지내기도 하였다. 이에 적당 수십만 무리가 처음 영천(潁川)에서 기병하여 천하를 어지럽혔는데 황보승에게 토벌되었으나, 잔당이 소멸되지 않고 아직도 남아 이들을 따르고 있다.

 

9) 제서술불지(齊書述佛志) 왕소(王劭) 저작(著作)

왕소는, “석씨의 도는 좁은 소견으로 이를 바가 아닌데, 어찌 망령되이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열어구(列御寇)의 책을 인용하여 상나라 태재가 공자에게 누가 성인인지 물은 일을 기술하였다. 다시 황제(黃帝)가 꿈에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서 노닐었다고 하였는데 화서씨의 나라란 부처님께서 신령스럽게 노니시는 곳이다. 이 같은 말은 부처님과 흡사하다. 석륵(石勒)ㆍ부견(符堅)ㆍ요흥(姚興)의 시대에 경전의 번역이 점차로 확대되었다. 대체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굴복시키고자 많은 우언(寓言)으로써 방편을 삼았는데, 도대체 어째서

 

신비스럽고 황당한 것이 극에 달했는지 모르겠다. 그 말하는 것은 인신(人身)의 선악과 세상사의 인연인데, ()ㆍ비()ㆍ희()ㆍ사()와 상()ㆍ낙()ㆍ아()ㆍ정()으로 이를 풀어내되 지극히 밝은 것이 해와 달과도 같으니, 정각(正覺)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것을 증명하겠는가? 백성[黔首]들도 명()에 귀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달인(達人)은 몸과 입을 삼가고 지혜의 정()을 닦아 구경의 보리로 평등하게 해탈하는 것이고, 아울러 이것을 거스르는 자는 이치를 통하지 못하니, 힘을 다하고 재물을 쓰더라도 공과 이익의 번뇌만이 탁해질 뿐이다. 이에 이르러 6()조차 모두 빛을 잃었으니, 실로 이와 같이 깊은 이치가 일찍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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