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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1972 불교(고승전 13권 7편/ 高僧傳)

by Kay/케이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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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고승전(高僧傳) 137

 

10) 석혜경(釋慧敬)

혜경은 남해 사람이다. 어려서 형초(荊楚) 지방에서 유학하였다. 또한 경론에 널리 뛰어나고, 항상 복된 일을 짓기를 힘썼다. 그런 까닭에 교리를 이해하는 공부는 완전할 수 없었다. 무릇 가서 이르는 곳마다, 모두 탑과 불상을 일으켜 세워서 대중의 일을 도와 이루었다.

그 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다시 운봉사(雲峯寺)ㆍ영안사(永安寺) 등 여러 절을 수리하였다. 혜경은 이미 계율 있는 절개에 정밀하고, 지조가 엄숙하고 밝았다. 이 때문에 영외(嶺外)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모두 의지하여, 자문 받고 품수 받았다.

그 후 칙명을 받아 승주(僧主)가 되었다. 가르쳐 이끄는 데 공이 있었다. 혜경의 노비 하나가 사미가 되었을 때, 문득 귀신에게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 그 후 산의 요정이 모습을 나타내서 혜경을 찾아왔다. 자세히 허물과 실수를 사과하면서 말하였다.

부하 권속들이 알지 못하여, 엉뚱하게 법사의 권속을 어지럽혔습니다.”

얼마 후 모두가 평상대로 회복되었다.

 

모든 일으켜 세우는 복된 일을 모두 서방정토에 회향하였다. 임종하던 날에는, 방에 기이한 향기가 감돌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쳤다.

 

11) 석법헌(釋法獻)

법헌은 광주(廣州) 사람이다. 처음 북사(北寺)에 머물렀다. 절이 오래되어 조락하고 쇠해졌다. 그러자 법헌은 인연 있는 시주들을 거느리고, 다시 수리하고 지붕을 고쳤다. 이어 절 이름을 연상사(延祥寺)라 하였다.

그 후 장미산(藏薇山)에 들어가 절을 창건하였다. 절이 이룩된 후, 두 동자가 손을 잡고 찾아와 노래하였다.

 

장미산에 도와 덕이 있어

기쁨과 즐거움이 바야흐로 다하지 않네.

 

말이 끝나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온 절이 놀라고 감탄하면서, 모두 그 신령하고 기이함에 경탄하였다. 법헌이 그 후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경쇠줄이 끊어지려 하는데, 왜 고치지 않는가

법헌이 놀라 일어나서 가서 보니, 드리워진 줄이 곧 땅에 닿으려 하였다. 그가 손을 대어, 경쇠가 부러지고 손상된 것이 없었다.

법헌은 출가한 이래로 항상 복된 일로 시주하기를 권하였다. 마음을 선()과 계율에 깃들어, 한 번도 절개를 이지러뜨린 일이 없었다.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12) 석법헌(釋法獻)

법헌의 성은 서()씨며, 서해(西海)의 연수(延水) 사람이다. 아버지가 외삼촌을 따라 양주에 이르자 곧 출가하였다. 원가(元嘉) 16(439)에 이르러, 비로소 서울로 내려와 정림상사(定林上寺)에 머물렀다. 경ㆍ율에 널리 뛰어났다. 뜻하는 일에 굳세고 날래서, 훌륭히 중생들을 구제하고, 절들을 수리하고 다듬었다.

앞서 도맹(道猛)이 서쪽에 노닐며, 두루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몸을 버릴 각오로 서원하여, 그곳에 가서 성인의 자취를 보려 하였다.

전송의 원휘(元徽) 3(475)에 금릉(金陵)을 출발하여, 서쪽 파촉(巴蜀) 지방에 노닐었다. 길은 하남(河南)에서 출발하여 예예(芮芮)를 경유하였다. 우전국(于闐國)에 도달한 후, 파미르 고원을 넘고자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벼랑에 가로놓인 다리가 끊어졌다. 마침내 우전국에서 되돌아왔다.

그 사이에 불치아[佛牙]한때, 사리 열다섯 과와 아울러 관세음멸죄주(觀世音滅罪呪)조달품(調達品)을 얻었다. 또 구자국(龜玆國)의 금퇴첩상(金槌鐷像)을 얻었다. 이에 돌아왔다. 그가 경유한 길은 위험하고 막혔음이 그의 별기(別記)에 보인다.

 

불치아는 본래 오전국(烏纏國)에 있었다. 오전국에서 예예(芮芮)로 왔고, 예예에서 다시 양()나라 땅으로 왔다. 법헌을 불치아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다. 15년 동안 비밀히 예배하고 섬겼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였다. 문선왕(文宣王)의 꿈에 감응하여, 비로소 도인과 속인들에게 이 사실이 전해졌다.

법헌은 계율의 행실이 맑고 순수하며, 덕이 남들의 모범이 되었다. 낭야(瑯琊)의 왕숙(王肅)과 왕융(王融), 오국(吳國)의 장융(張融)과 장권(張綣), 사문 혜령(慧令)과 지장(智藏) 등이 모두 몸을 맡겨, 발을 이어 그의 훈계를 숭상하였다.

통합대장경 고승전(高僧傳) 137

 

현창(玄暢)

법헌은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칙명으로, 장간사(長干寺)의 현창과 더불어 승주(僧主)가 되었다. 양자강의 남북 양쪽 기슭을 나누어서 일을 맡았다.현창은 본래 진주(秦州) 사람이다. 역시 계율을 지킴이 맑고 깨끗하였다. 문혜(文惠)태자가 받들어, 계율을 내려주는 스승으로 모셨다. 그 후 법헌은 칙명을 받고, 삼오(三吳)에서 이부대중[二衆]을 가려내었다. 현창도 역시 동쪽으로 가서, 거듭 수계(受戒)의 법을 폈다.

당시 법헌과 현창 두 승려는 모두 어려서부터 계율의 금제를 익혀, 당세에 경합할 사람이 없었다. 전송(前宋)의 무제와 함께 이야기하면서도, 매번 이름을 일컬으며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 후 중흥사(中興寺)의 승종(僧鍾)이 건화전(乾和殿)에서 황제와 만났다. 황제가 승종에게 안부를 물었다. 승종이 대답하였다.

빈도는 요즘 괴로운 기()가 있습니다.”

황제가 빈도라는 말을 싫어하였다. 마침내 상서(尙書)인 왕검(王儉)에게 물었다.

선배 사문들이 제왕과 이야기할 때, 무엇이라 자신을 칭했는가정전에 앉았는가앉지 않았는가

왕검이 대답하였다.

()나라와 위()나라 때는 불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때라서, 그에 관한 전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위국(僞國北魏) 때부터 불법이 조금씩 성해지면서, 모두가 빈도(貧道)라고 자신을 칭하고, 또한 앉기도 했습니다.

()나라 초기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시대가 중간에 이르러 유빙(庾氷)과 환현(桓玄) 등이, 사문도 모두 제왕에게 공경을 다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였으나, 일이 모두 그냥 가라앉았습니다. 전송의 중엽에도 역시 자못 예법을 갖추게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대부분 자리에 앉으며, 빈도라 칭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현창과 법헌은 도의 일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스스로 이름을 칭하였다. 하물며 다른 승려에 있어서랴읍배(挹拜)는 너무 심하나, 이름을 쓰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

그때부터 사문(沙門)

 

모두 제왕에게 이름을 칭하였다. 이것은 현창과 법헌에게서 비롯되었다.

현창은 건무(建武) 초엽(494)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5세이다. 법헌은 건무 말엽(497)에 세상을 떠났다. 현창과 더불어, 종산(鍾山)의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법헌의 제자 승우(僧祐)가 그를 위하여, 묘 옆에 비를 조성하였다. 단양(丹陽) 수령인 오흥(吳興)의 심약(沈約)이 비문을 지었다.

법헌이 서역에서 얻은 불치아와 불상은 모두 정림상사(定林上寺)에 있었다. 불치아는 보통(普通) 3(522) 정월에, 문득 병장기를 잡은 몇 사람이 초저녁에 문을 두드리며 칭하였다.

임천 전하의 노복이 반역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알렸다.

불아각(不牙閣) 위에 있습니다.”

누각을 열어 검사해볼 것을 요청하였다. 절의 담당자가 곧 그들의 말에 따라 누각을 열어 주었다. 임천왕의 장수가 불아좌(不牙座) 앞에 이르러, 상자를 열고 불치아를 취하였다. 삼배(三拜)를 올리고, 비단수건에 불치아를 담아 산 동쪽을 돌아 떠났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끝내 그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13) 석승호(釋僧護)

승호는 본래 회계 섬현(剡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곧 고행의 절개로 의지를 극복하며, 계율의 행실이 엄숙하고 맑았다.

그 후 석성산(石城山)의 은악사(隱嶽寺)에 거주하였다. 절 북쪽에 푸른 절벽이 있어, 곧바로 수십여 길이나 솟았다. 그 중앙에 해당하는 곳에 부처님의 불꽃 광배 같은 모습이 있었다. 그 위로 숲을 이룬 나무들이 있어, 굽은 나무줄기가 그늘을 드리웠다. 승호가 경행(經行) 때마다 절벽이 있는 곳에 이르면, 곧 빛나는 광명이 보였다. 관악기와 현악기에 맞춰, 노래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에 향로를 받쳐 들고 서원을 일으켰다. 널리 산에서 열 길의 돌부처를 새겨 조성함으로써, 미륵불의 천 자에 이르는 모습을 공경하는 것에 견주었다. 인연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용화회상[三會]에서 만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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