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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1969 불교(고승전 13권 4편/ 高僧傳)

by Kay/케이 2023.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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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고승전(高僧傳) 134

 

5) 석승혜(釋僧慧)

승혜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복업을 닦기를 좋아하였다. ()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장안 사람 행장생(行長生)과 함께, 서울의 파오촌(破塢村) 안에 절을 세웠다.

처음에는 그 지역보다 먼 곳에 거처를 잡아, 초가 몇 칸을 세웠다. 곧 승려들을 모아 재()를 마련하였다. 밤중에 이르자, 법당 안의 두 등불이 문득 자연적으로 앞으로 수십 걸음을 나아갔다. 기름종지가 전과 같아서, 기울어지고 엎질러지는 일은 없었다. 대중들은 놀라고 감탄하였다. 여러 나이 든 승려에게 물어보니, 모두 말하였다.

등불이 옮겨간 곳은, 예전에 외국의 도인이 탑을 세운 곳이다.”

이에 함께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 등불이 옮겨간 상서로움을 표시하여, 숭명사(崇明寺)라 이름 지었다.

 

6) 석승익(釋僧翼)

승익은 본래 오흥(吳興)의 여항(餘杭)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믿음과 슬기가 있어, 일찍이 티끌세상과 인연을 끊을 지조가 있었다. 처음 출가하여서는 여산사(廬山寺)에 머물며, 혜원(慧遠)에게서 수학하였다. 푸성귀를 먹고 검소하게 고행의 절개를 지켜, 문인들로부터 존중을 받았다. 만년에는 관중(關中)으로 갔다. 다시 구마라집에게 사사하여, 경장ㆍ율장ㆍ논리를 따지는 것을 나란히 모두 섭렵하였다. 또한 법화경한 부를 외웠다.

()의 의희(義熙) 13(417)에 도반인 담학(曇學)과 더불어 회계(會稽)에 노닐었다. 산천을 밟고 찾다가,

 

진망(秦望)의 서북쪽에 다섯 개의 높은 산봉우리가 나란히 솟은 것을 보았다. 거기에 기사(耆闍耆闍崛山)의 기상이 어려 있었다. 이에 풀을 이어 암자를 짓고 법화정사(法華精舍)라 일컬었다.

태수(太守) 맹의(孟顗)와 부자인 진재(陳載)가 나란히 마음을 기울여, 덕에 머리 숙이고 찬조하여 준공을 이루었다.

승익은 푸성귀를 먹고 개울물을 마시길, 30여 년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전송의 원가(元嘉) 27(450)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산사에 비를 세워서, 그가 남긴 덕을 기렸다. 회계의 공관(孔逭)이 비문을 지었다.

승익과 함께 노닌 사문 담학은 후에 진망령(秦望嶺)의 북쪽으로 옮겨 터를 잡아, 낙림정사(樂林精舍)라 이름 지었다. 소상(韶相)ㆍ관천(灌蒨) 모두가 동악(東岳)의 명망 있는 승려들로서, 다 함께 이곳에서 머물렀다.

 

도경(道敬)

당시 도경은 본래 낭야(瑯琊)의 으뜸가는 족속이다. ()나라 때 우장군(右將軍)이었던 왕희지(王羲之)의 증손이었다. 그러나 세상을 피해 출가하였다. 심정이 산골짜기를 사랑하여, 약야산(若耶山)에 깃들어 현류정사(縣溜精舍)를 지었다. 도경은 그 후에 대중승려를 공양하기 위하여, 마침내 구족계를 버렸다. 오로지 10()에만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7) 석승홍(釋僧洪)

승홍은 예주(豫州) 사람이다. 서울의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반듯하고 깨끗하였다. 후에 교화에 인연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16척의 금불상을 조성하였다. 녹여서 상을 주조하는 일은 비로소 마쳤지만, 아직 미처 모형을 열어보지는 못하였다. 당시는 진()나라의 말기라, 구리의 사용을 매우 엄하게 금지하였다. 이를 범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었다.

전송의 무제(武帝)가 당시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다. 승홍이 죄에 연루되어, 재상의 관부에 묶여 있었다. 그러면서 오직 관세음보살만을 염송하며, 한마음으로 불상에 귀의하였다. 밤 꿈에 자신이 주조한 불상이 찾아와, 손으로 승홍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무섭느냐

승홍이 말하였다.

죽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불상이 말하였다.

근심하지 말아라.”

불상의 가슴을 보니, 사방 한 자 가량 구리 빛이 불에 그슬리고 끓은 자국이 있었다. 곧 형을 집행할 때가 되었다. 재상 관부의 참군(參軍)이 죽이는 일을 감독하였다. 죄인을 실은 소가 달려 나가 수레가 허물어져, 이로 인하여 다시 하루를 연기하였다. 그 후 이어 명령이 내려, 팽성(彭城)에서 사자가 와서 말하였다.

승홍이라는 사람을 아직 죽이지 않았다면, 놓아주어라.”

마침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돌아와 모형을 열어 불상을 보았다. 가슴 앞에 과연 불에 그슬리고 끓은 자국이 있었다.

 

그 후 승홍은 고행으로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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