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결정장론(決定藏論) 상권 2편
진제(眞諦) 한역
김철수 번역
현량경계(現量境界)1)를 반연하는 경우에 쉽고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식들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들이 함께 생겨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본(種本)이란 만약 아라야식을 떠나서 안(眼) 등 6식(六識)이 서로 바탕이 된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선식(善識)이 멸할 때 불선심(不善心)이 생기고, 불선식(不善識)이 멸할 때 선심(善心)이 다시 생하며, 선식과 불선식이 멸할 때 무기심(無記心)이 생긴다. 하계심(下界心)이 멸하면 중계식이 생기고 중계심(中界心)이 멸하면 상식(上識)이 생기며 상식이 또한 멸하면
하심(下心)이 다시 생긴다. 유루식이 멸하면 무루심이 생기고, 무루심이 멸하면 유루가 다시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6식은 서로의 근본 바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례대로 마음[心]이 멸하면서 무수겁 동안에 또한 다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아라야식이 모든 것의 근본 바탕이 됨을 알 수 있다.
비시사(非是事)란 모든 식이 함께하지 않으면 이런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는 기사(器事)이고, 둘째는 착신사(捉身事)이며, 셋째는 이를 아사(我事)라고 말하는 것이고, 넷째는 진사(塵事)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일은 생각생각[念念]에 함께 생겨난다. 만약에 하나의 식이 한 생각 가운데서 네 가지 경우를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신수(身受)에 대해 말하자면, 만일 아라야식을 떠나 신수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 신수의 뜻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진실한 마음을 짓든 진실하지 않은 마음을 짓든 반드시 먼저 사유해야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정심(定心)이든 부정심(不定心)이든 모든 수(受)는 몸[身]에서 갖가지 많은 것을 생해야 온갖 수(受)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아라야식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무식정(無識定)에서라면 이런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만일 무상정(無想定)이나 무식정(無識定)에 들어가면 6식은 다 멸하니 이 사람은 마땅히 죽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무심정(無心定)에 들어가도 식은 멸하지 않는다. 기절한 것은 아니라는 말은, 만약에 아라야식이 떠나면 기절한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두 사람의 목숨이 임종시에는 선한 사람은 발이 차가워지면서 위로 정수리까지는 따뜻하다. 정수리가 차가울 때 그 사람의 목숨은 곧 멸한다. 악한 사람이 죽을 때에는 정수리로부터 차가워져 발에 따뜻한 기운이 없어졌을 때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친다. 의식이 항상 몸에 있는 것은 아라야식이 몸을 집지(執持)하기 때문이니 아라야식이 멸하면 몸이 곧 차가워져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이 차고 따뜻한 두 가지 일은 의식으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아라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울타남을 설하면 다음과 같다.
경계는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고
다시 상호간에 인연이 되며
함께 상응하여 생하고
번뇌와 함께 멸하네.
간략히 말해서 네 가지 뜻이 있어 아라야식의 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종의 나타났다가 멸하는 경계는 아라야식을 바탕으로 두 가지 경계가 생기니, 첫째는 내부를 집지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외부의 기세간[器]을 집지하되 모든 상모(相貌)를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내부를 집지함이란 그릇된 아견을 집착한 습기(習氣)의 세력이 근(根)ㆍ색(色)과 더불어 함께할 때 집지하면 경계가 된다. 이러한 경우는 욕계와 색계에 있고, 무색계 중에는 오로지 그릇된 아견에 집착한 습기의 세력만이 존재한다. 두 번째의 외부의 기세간을 집지하되 상모를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은 내부에서 아라야식에 의해 집지되면 곧 외부의 기세간을 집지하는 것이 된다. 비유하자면 등이 심지와 기름을 내부에 간직하면 외부로 비추는 작용이 있는 것과 같이 아라야식의 경우도 내외가 또한 그러하다. 이 경계는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고 미세하여 세간의 다문(多聞) 지혜인이라도 알 수가 없다. 이 경계는 항상하면서도 달라짐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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