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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187 불교(개원석교록 4권 18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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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418

 

지승 지음

 

사문 담마야사는 중국말로는 법칭(法稱)고승전에서는 법명(法明)이라 번역하였으나 뜻이 맞지 않는다.이라고도 한다. 계빈국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14세가 되어서는 불야다라(弗若多羅)도 그를 인정해주어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다. 성장하여서는 기백이 높고 시원하였으며, 전아하고 신령스런 지혜가 있었다. 경률(經律)을 두루 보아 훤히 깨닫는 것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생각은 팔선(八禪)18)을 닦는데 있었고, 마음은 칠각(七覺)19)을 공부하는[遊學]데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부두바태(浮頭婆駄)20)라고 하였다. 산과 호수에서 홀로 수행하면서도 호랑이나 외뿔소를 피하지 않았다. 혼자 거처하여 사유(思惟)하면서 밤과 낮을 잊었다. 일찍이 나무 아래서 수행하며 늘 스스로를 엄하게 꾸짖었다.

나이 30에 이르도록 아직 과위()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게으른 것이냐?”

이에 여러 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정진하고 괴로움을 겪으며 지은 죄를 참회하였다. 이어 꿈에 박차천왕(博叉天王)21)을 뵈었는데, 그가 말하였다.

사문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널리 교화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하거늘, 어찌 자질구레한 예절[小節]에 얽매여 홀로 자기만을 좋게 할 뿐인가? ()는 여러 인연을 빌려 다시 때를 기다려서 무르익게 되는데, 분수가 아닌데도 억지로 구하면 죽도록 하여도 증험이 없게 된다.”

꿈에서 깨어나 스스로 생각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도를 전수하고자 하였다. 그는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나라를 거쳐 진()나라 융안(隆安) 연간(397~401)에 처음으로 광주(廣州)에 이르러 백사사(白沙寺)에 머물렀다.

담마야사는 비바사율(毗婆沙律)을 잘 외웠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대비바사(大毗婆沙)라고 하였다.

그때 청신녀(淸信女) 장보명(張普明)이 있었는데, 불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다. 담마야사는 그녀를 위하여 부처님 생애의 연기(緣起)에 대하여 설하고, 아울러 차마경(差摩經)1권을 번역해 내었다.

의희(義凞) 연간(405~418)에 상안(常安)으로 갔다. 당시 요흥(姚興)이 신하의 신분으로 제왕의 칭호(稱號)를 함부로 사용僭號]하면서도, 불법을 매우 존숭하고 있었다. 담마야사가 그곳에 이르자 매우 특별하게 예우를 하였다. 마침 천축 사문 담마굴다(曇摩掘多)중국말로 법장(法藏)가 관중(關中)으로 들어왔는데, 동기상구(同氣相求)22)라 완연히 옛 친구들 같았다. 이로써 담마야사와 함께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毗曇論)을 번역하였다. 후진(後秦) 홍시 9년 정미(丁未, 407)에 범문(梵文)을 써내기 시작하여, 16년 갑인(甲寅, 414)에 이르러 멈췄다. 경사(經師)들은 점차로 중국말[秦語]을 익히어 스스로 번역하게 되어, 17년 을묘(乙卯, 415)에야 비로소 끝마쳤으니, 모두 22권이었다. 진나라 태자 요홍(姚泓)이 친히 이치의 의미를 관리하였고, 사문 도표(道標)가 그를 위하여 서문을 썼다. 낙영락경(樂瓔珞經)1권을 번역하여 냈다.

담마야사는 후에 남쪽 강릉(江陵)에서 노닐다가 신사(辛寺)에 머물면서, 선법(禪法)을 크게 펼쳤다. 편안하게 공부하던 빈객[]들이 가시덤불을 헤치고[披榛] 이른 자가 3백여 인이나 되었다. 무릇 도착한 선비나 서민들은 비록 그 전에는 신심(信心)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를 보고 나면 모두가 공경하고 마음으로 따랐다. 담마야사는 스스로 말하길 한 스승과 한 제자가 있어 도를 익혀 모두 아라한[羅漢]이 되었다하니, 전수(傳授)한 사람은 그 이름이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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