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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124 불설도신족무극변화경(佛說道神足無極變化經) 2권

by Kay/케이 2024.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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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도신족무극변화경(佛說道神足無極變化經) 2

 

불설도신족무극변화경 제2권


서진 안법흠 한역
홍승균 번역


이때 월 천자(月天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미묘함이 이처럼 깊고 깊으니, 참으로 기이합니다. 이것은 불세존께서 위없이 바르고 참되시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베풀어 행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합니다. 이런 것을 눈으로 모든 법행(法行)을 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만 좋고 자신만 이로우면서 도는 해치는 행을 일으키지 않으며, 오래전부터 이미 신상(身想)의 행을 끊고 벗어났으며,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겁 동안 행하면서도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으며, 끝내 타락하지 않습니다. 도를 끝까지 밝히고 불법을 만족하는 데에는 몇 가지 법다운 행이 있습니까?
세존이시여, 보살은 심오한 법의 행을 억백천만의 부처님에게서 작증(作證)하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자여, 보살에게는 네 가지 일이 있어서 심오한 법의 행에 이르는 것이지, 억백천만의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작증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들을 네 가지라 하는가?
천자여, 보살은 모든 요의(要義)에 굳건히 머물러 일체지(一切智)를 지니고 출가하며, 크게 설법하고 정진하면서 나약하지 않다. 일체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가진 것 모두를 버리며, 보시의 수레[施輿]에 굳건히 머물러서 곧 크게 자비한 일을 얻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고 물으시는 대로 모두 대답한다. 선권방편(善權方便)을 얻어 모든 공덕을 이루고 나서는 다시 나머지 덕(德)마저 이룬다.
천자여, 이것이 네 가지 일이니, 보살은 심오한 법을 행할 때 무수한 수의 억백천의 부처님에게서 증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지은 바에 굳게 머무나니
그 지혜가 또한 이러하니라.
지난 세상에서 지은 지혜를
또한 끝내 내버리지 않느니라.

일체지로써 하기 때문에
행한 일을 근심하지 않으며

모든 형상과 빛깔과 모습을
모조리 다 분명히 아느니라.

하는 일에 항상 정진하며
끝끝내 방일하지 않고
마음 또한 게으르지 않나니
그 행하는 것들 또한 이와 같아라.

그 모든 짓고 하는 일들
모두 일체를 향한 근심이니
이처럼 모든 중생들에게
항상 평등한 마음이로다.

항상 자비로운 마음 일으켜
모든 사람들 근심하고 걱정하며
고생하는 모든 자들 불쌍히 여겨
모두를 안온하게 하고 싶어라.
원컨대 빨리 부처님이 되어
모든 고뇌를 남김없이 끊고
온갖 보배들을 가득 얻어서
그 둘 곳이 다함이 없었으면.

언제나 선권(善權)의 지혜로써
모든 방편을 가르치고 배우며
열심히 힘써 공덕을 짓고
이렇게 행하며 만족할 줄 몰라라.

짓는 것이 구경(究竟)이 있으니
행함이 언제나 응당 그러해라.
도의 차례에 안주할 뿐
거처(居處)는 전혀 생각지 않아라.

이와 같은 모든 법들을
두루 굳게 지니어라.
보살로서 이를 행하는 자들은
제행(諸行)을 두루 요득(了得)하리라.

이 깊고 깊은 법에서
할 일을 두루 모두 갖추며
억백천의 부처님 처소에서
짓는 일들 게으르지 않아라.

이때 월 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보살이 깊고 깊은 행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자여, 보살은 또한 범인(凡人)의 법에 대해 바라는 것이 없고, 또한 부처님의 법에 대해서도 구하는 것이 있지 않으며, 또한 범인의 법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 없다. 부처님의 법과 범인의 법에 평등하여 차이가 없으므로 범인의 법에 대하여 구하는 것이 없고, 부처님의 법에 대해서도 또한 얻는 것도 없으며 잃는 것도 없다. 범인에 대해서도 차이가 없고 불법에 대해서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또한 범인의 법은 높지 못하고 부처님의 법은 높다고 말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범인의 법도 끊을 것이 없으며, 부처님의 법도 역시 끊을 것이 없다. 이와 같이 태어나고 태어나며 또 태어나니, 이것을 범인의 법이라 하고, 이와 같은 것이 부처님의 법이다. 이 두 가지 법은 공(空)이고 적(寂)이며 정(定)이니, 이와 같은 것이 처소가 없음[無處]을 아는 것이다.

또한 범인의 법에서 구하는 것이 있지 않고, 부처님의 법에서 구하는 것도 있지 않다. 범인들의 법의 처소에서 가지는 것이 있지 않고, 부처님 법의 처소에서 가지는 것도 있지 않다. 이와 같은 두 가지가 또한 범인을 보지 않고 범인이 아닌 자도 보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이 아는 것이 보이는 대로 보는 것[如眼見]이다.
보이는 것은 모두 공(空)이고 무상(無相)이며 또한 모두 무원(無願)이다. 이와 같은 지혜가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며, 이와 같은 지혜가 부처님의 법이다. 또한 부처님에 대하여 유(有)니 무(無)니 하지 않는다.
또한 여기에 안온함이 있다거나 괴로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것은 좋다거나 이것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이런 것들은 모두 공(空)이고 또한 허공처럼 공한 것이다. 또한 공에서 공을 보지 않으며, 또한 알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다. 어째서인가? 이미 이것 또한 습기(習氣)로서 노쇠가 있고 생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천자여, 법과 법을 법(法)이라 하고 법주(法住)ㆍ법멸(法滅)ㆍ법적(法寂)이라 하지만, 여기서 또한 스스로 보지도 않고 또한 보는 바도 없으며, 또한 스스로 알지도 않고 또한 아는 바도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천자여, 범인이든 제자이든, 벽지불이든 삼야삼불(三耶三佛:等正覺)이든, 수결(受決:受記)이든 심오한 행[深行]이든, 천자여, 보살은 제법(諸法)이 공이니 불법이 공이니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이와 같이 천자여, ‘법’은 법이란 음성일 뿐이다. 저것도 좋은 음성이며 이것도 좋은 음성이니 여기에 있어서 얻을 수 없고, 이와 같이 얻을 수 없기에 ‘나[我]’가 없으며, 이와 같이 나가 없는 것이기에 머문다느니 머물지 않는다느니 말하지 않고 버리는 것이다.
천자여, 모든 법이 이와 같이 셀 수가 없으며 불법 또한 분별할 수가 없다. 천자여, 그것을 비유하자면 이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법과 불법을 항상 생각하여 이렇게 행하여야 하며, 또 생각하여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식이 없는 생각[無識念]을 일으키고 식이 없는 생각을 행하며, 불법에 대해서도 또한 사유(思惟)함이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응당 사유를 따르고자 해서이며
일어남을 위해서인 바, 다시는 이런 지혜를 짓지 않으며, 법계에서 늘어나는 것이 있지 않고, 또한 있지도 않으며 있지 않지도 않다.
그리고 또한 습법지(習法智)가 법에 대하여 능히 이를 증감하지 못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만일 애욕법(愛欲法)과 무애욕법(無愛欲法)을 모두 깨달아 안다면 어느 곳이 욕(欲)이며 어느 곳이 무욕(無欲)이겠는가? 이미 이런 것을 분명히 알고서는 다시는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자여, 보살은 깊고 깊은 행을 얻어서 끝내 법을 보지 않으며, 또한 끝내 불법을 이와 같이 보거나 이와 같이 관찰하지 않으며, 이런 시각을 짓는다고 보지도 않는다. 천자여, 보살중(菩薩衆)에 대해서는 마(魔)나 혹은 마천(魔天)이라도 이와 같은 설을 깨뜨리지 못하니, 천자여, 부처의 설명은 이와 같다.”
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짓는 것은 매우 기특하여 이 모든 지혜로운 일들을 구족하게 압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죽고 사는 일을 분명히 알기에 이처럼 도를 구하면서 나태함이 없습니다. 이와 같으니 일어나고 사라지며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이 다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자여, 비유컨대 이는 마치 허깨비[幻化]와 같아서 오거나 가거나 앉거나 구하는 것이거나 설하는 것이거나 간에 역시 모두 존재하는 것이 없다.
천자여, 비유컨대 허깨비와 같다. 모든 법을 알고자 한다면 모두 이와 같으니, 모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과 과거와 미래와 지금 현재의 그 겁수(劫數)도 또한 이와 같다. 보살은 또한 일어남을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전세(前世)에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천자가 다시 여쭈었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세존이시여, 보살이 만일 생기고 일어나고 하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떤 이유로 도리천에 올라와 낳아주신 어머님이 계신 곳에서 여름 석 달을 보내시는 겁니까? 세존께서는 마야(摩耶)부인에게서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천자에게 대답하셨다.
“여래의 태어남은 죽고 사는 법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여(如如)로 머무는 것이다. 여(如)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니, 부처의 태어남은 이와 같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천자여, 부처는 반야바라밀에서 태어나니, 모든 불세존은 반야바라밀에서 태어난다. 어째서인가? 32대인상(大人相)은 마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자여, 반야바라밀을 이렇게 알아야 하니, 반야바라밀은 부처님 어머니의 몸이며, 32대인상을 모두 반야바라밀로부터 배워야 한다.”
월 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제가 충분히 사유해보았습니다만 반야바라밀에서는 태어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세존께서는 반야바라밀이 곧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천자여, 그대가 한 말과 같다. 보살은 마땅히 보살이 배워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얻으면 곧 부처님 몸의 모습인 32대인상을 얻게 되어 그들을 귀의시키고,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부처님만의 18법(法)ㆍ대자대비삼매(大慈大悲三昧)로 홀로 가고 거닐며, 부처님의 지혜로 다른 이들의 의사를 알고 모두들 찾아와 귀의하게 되니, 이는 모두 마야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천자여, 부처님의 지혜는 반야바라밀에서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루 다 셀 수 없는 한량없는 수의 여러 지혜로운 일들이 있지만 지금 대충만 들어 말하는 것이니, 모두 다 이와 같다.”
천자가 다시 여쭈었다.
“모든 불세존께서는 그 법이 모두 다 구족하십니다. 이와 같이 여여(如如)하여 그와 같이 온 자가 그와 같음을 따라서 이루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천자가 보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보건대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을 따라 태어났지만 또한 반야바라밀을 따라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법에 대하여 그 생각의 근이 없고 또 근(根)을 일으킴도 없으며 또한 싸워서 제거하는 일도 없는데, 어떻게 세존께서 반야바라밀에서 태어나겠습니까?”
대답하셨다.
“천자여, 여법한 여래, 곧 여여한 자는 만들어진 법을 따르지만 그 법은 생기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으며 없어지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천자여, 생기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참으로 이와 같은 것을 달리 지혜라고 하니, 그 지혜는 반야바라밀에서 생기는 것으로서 이를 달살아갈(怛薩阿竭:如來)이라 한다. 반야바라밀에서 태어났으므로 이와 같이 태어난 것은 다시는 생기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이와 같아서 천자여, 생기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보살은 신속히 반야바라밀에 다가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천자여, 반야바라밀의 지혜는 다할 수 없으며, 또한 반야바라밀을 다할 수가 없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지혜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만 이 반야바라밀의 다할 수 없는 지혜를 알 수 있습니까?”
다시 말씀하셨다.
“천자여, 지혜란 사유한다고 지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아서 천자여, 지혜란 것이 만일 사유한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이라면 그런 지혜는 그 다할 수 없는 지혜가 되지 못한다. 어째서인가? 천자여, 마음과 앎만 수고롭게 하고 끝내 다함이 없는 지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런 것은 지혜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천자여, 지혜란 무사유지(無思惟智)이니, 만약 지혜가 다함이 있다면 지혜가 될 수 없다.”
천자가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다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 묻고 어디에서 알아야 합니까?”
대답하셨다.
“천자여, 다할 수 없다는 그것은 방자(放恣)함을 따르지 않으며 평등하게 구하는 것이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방자하지 않다는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대답하셨다.
“천자여, 삼계에서 온갖 악을 저지르며 버리지 못하고 또 삼계의 온갖 악을 벗어나지도 못했다면, 다시 삼계의 온갖 악행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자여, 그 처소에 각각 따르며 방자하지 않는 것이다. 그 과보란 어떤 것인가? 삼계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니, 이것이 그 과보이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자 중에서 이것을 따라서 삼계를 다니면서 중생들을 위해 법을 설한 자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자여, 욕계(欲界)에서 능히 제자를 위해 제자의 법을 설하더라도
그 욕계를 이롭게 할 수 없으며, 색계나 무색계에서 능히 제자를 위해 제자의 법을 설하더라도 아무런 이득이 없다. 삼매(三昧)로써 삼계(三界)를 노닐면서 법을 설하더라도 불세존이 설한 법을 다 깨달을 수 없으며, 또한 볼 수도 없다. 삼매의 힘으로 욕계를 노닐면서 설법을 하더라도 색(色)이 없다.
천자여, 비록 욕계에 노닐긴 하지만 다시 벗어나야 할 것이 있을 수는 없으며, 삼매의 힘으로 색계와 무색계에 노닐긴 하지만 무색계에서 설하는 것들이 색계와 무색계에 아무런 이익이 없으며, 벗어날 것도 전혀 없다. 비록 삼계를 노닐더라도 그저 자신의 해탈만 가능할 뿐, 자신이 남들을 이롭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천자여, 비록 삼계를 알긴 하지만 삼계에 미련을 두지 않고 좌정하고서 공법(空法)을 지킨다.
또한 욕계를 익히지 않으니, 색계에서도 그건 불가능하며 또 무색계에서도 그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삼계에서 그건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삼계에 태어나지 않으면서 또한 삼계에 태어나며, 가는 곳 또한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이와 같아서 천자여, 이런 무리들은 이곳에서 몸을 잃어버리지만 이를 알지 못하며, 또한 가는 것도 보지 않고 돌아오는 것도 보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일체 모든 법이 삼계에서 서로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천자여, 비유컨대 허공과 같아서 생기지도 않고 볼 수도 없으며, 짓는 자도 없고 지나간 것들이 다시 만나지도 않는다. 이와 같아서 천자여, 삼계의 모든 법들이 모두 이와 같다.”
이러한 법을 말씀하시자, 하늘과 모든 하늘의 무리들 중에서 7만 2천의 천자들이 번뇌와 때를 멀리 여의고 모든 법에 대한 법안이 깨끗해졌으며, 전세(前世)에서 이미 공덕을 지은 1만 6천의 천자들이 지금 다시 이 설법을 듣고는 다들 아뇩다라삼야삼보(阿耨多羅三耶三菩: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하였고, 8천의 보살들이 불기법인(不起法忍:무생법인)을 얻었다.
이때 집회에 모인 대중들이 모두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받들어서 다들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꽃이
자신들의 옷자락 위에 있는 것을 보고는 이를 모두 부처님께 뿌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위신력으로 곧 그 꽃들이 온 도리천에 가득하도록 하셨다. 이때 석제환인(釋提桓因)이 나와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참으로 기이합니다. 세존이시여, 이들 모든 족성자(族姓子)들이 뿌린 꽃들은 본래 볼 수 없던 것들입니다.”
그러자 월 천자(月天子)가 석제환인에게 말하였다.
“구익(拘翼:교시가)이여, 세존 또한 일찍이 볼 수 없던 분이십니다. 꽃도 또한 이와 같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구익이여, 이 마음을 가지고 세존을 본다지만 그 마음이란 완전히 없어져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익이여, 우리가 볼 수 있는 일들이 있다면 그것은 다 전에는 미처 보지 못하던 것들입니다.”
석제환인이 물었다.
“천자여, 당신은 어떻게 부처님을 봅니까?”
천자가 대답하였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 저를 보시는 것처럼, 제가 부처님을 뵙는 것 또한 그와 같습니다.”
석제환인이 또 물었다.
“어떻게 봅니까?”
대답하였다.
“구익이여, 여래는 여여(如如)한 색(色)이고 여여한 통(痛)1)이며 상(想)ㆍ행(行)ㆍ식(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렇게 여래를 봅니다.
구익이여, 저는 색으로 여래를 관찰하지 않으며, 또 통(痛)이나 상(想)으로 여래를 관찰하지도 않으며, 또 행이나 식으로 여래를 보지도 않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색은 본래 그런 것이어서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통ㆍ상ㆍ행ㆍ식 역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이 5음법(陰法)의 모양[相]이라지만 그 모양과 모양 아닌 것은 모두 널리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구익이여, 여래는 이처럼 볼 수가 없습니다. 구익이여, 그리고 또 여래를 뵙고 싶다면 마땅히 부처님께서 저를 보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제가 부처님을 뵙는 것 또한 그러합니다.”
다시 물었다.
“천자여, 부처님께서 그대를 보듯이 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천자가 대답하였다.
“지금 부처님께서 여기 계시니, 직접 부처님께 여쭈어 보시면 됩니다.”
그러자 석제환인이 나아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월 천자를 보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색으로 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통양(痛痒:受)ㆍ사상(思想:想)ㆍ생사(生死:行)ㆍ식(識)으로 보는 것도 아니며, 또한 전세(前世)로 보는 것도 아니고 미래로 보는 것도 아니고 현재로 보는 것도 아니며, 또한 범인(凡人)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범인의 해탈로 보는 것도 아니며, 또한 배움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법의 일을 배우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또한 아라하(阿羅訶:아라한)로 보는 것도 아니고 아라하의 법의 일로 보는 것도 아니며, 또한 제자의 법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벽지불의 지위로 보는 것도 아니고 부처의 지위로 보는 것도 아니니, 그 보는 바가 이와 같다.
구익이여, 이와 같은 것이 부처님을 보는 것이니, 이와 같이 부처님을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없는 것이며, 이와 같이 보는 것이 없는 것이 바로 등견(等見)이다. 이와 같이 시현(示現)하는 것을 일체시현(一切示現)이라 하며 심제시현(審諦示現)이라 하니, 이와 같이 본다.
구익이여, 이것을 여래라 하니, 여래는 법계에 대하여 결감(缺減)하는 것이 없다. 구익이여, 구익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여래가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 무엇을 보는 것인가?”
대답하였다.
“이것을 부처님을 뵙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라는 이 이름은 색에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아서 여래는 여기에서 그 수를 세어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것이 부처님을 뵙는 것입니까?”
대답하셨다.
“그러하다, 구익이여. 보살은 무소종생인(無所從生忍:무생법인)을 얻어서 모든 법계에 평등하게 머물며, 또한 이 법을 떠나지 않고 그 법을 본다.”
석제환인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월 천자는 무소종생법인(無所從生法忍)을 얻었습니까?”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의 말에 대답하셨다.
“그것은 직접 월 천자에게 물어보라. 분명 너에게 대답해 줄 것이다.”
그러자 석제환인이 월 천자에게 물었다.
“인자(仁者)여, 지금 무소종생법인을 얻었습니까?”
월 천자가 대답하였다.

“구익이여, 무소생(無所生)이라면 생기(生起)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석제환인이 말하였다.
“그럴 수 없습니다.”
천자가 다시 말하였다.
“구익이여, 가령 무소생이 생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새삼 무소종생법인을 얻었느냐고 묻습니까?”
천자가 다시 말하였다.
“구익이여, 법계는 무소생입니다. 그 비유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계는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 석제환인이 곧 이런 생각을 하였다.
‘만일 월 천자의 말과 같다면, 이는 이미 무소종생법인을 얻은 것이며, 부처님께 가까이 다다른 것이며, 삼야삼보(三耶三菩:正等正覺)에 다다른 것이다.’
이때 월 천자가 석제환인의 마음속 생각을 알고 그에게 말하였다.
“구익이여, 얻을 인(忍)이 없는 자는 삼야삼보의 자리를 얻기가 어렵지 않지만, 인을 얻지 못한 자는 삼야삼보의 자리로부터 매우 멉니다.”
석제환인이 다시 말하였다.
“천자여,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천자가 대답하였다.
“구익이여, 이미 인을 얻은 자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얻지 못한 자는 삼야삼보와 아유삼불(阿惟三佛:現等覺)의 자리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무소종생인을 얻었기 때문에 능히 무소종생을 무소생(無所生)처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도(道)입니다.”
석제환인이 다시 물었다.
“천자여, 도는 어디서 찾는 것입니까?”
천자가 대답하였다.
“구익이여, 도란 삼계(三界)에 나[我]가 없는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석제환인이 다시 물었다.
“삼계에 나란 것이 없다면 어떻게 구합니까?”
천자가 대답하였다.
“법대로라면 생기지 않고 생기지 않는 것도 또한 생기지 않습니다. 도에 합당하게 하는 것, 이것이 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한다면 이렇게 구하는 것은 구함을 구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일어남이 없는 것입니다.”
이때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참으로 기이합니다, 세존이시여.
월 천자가 하는 말은 깊고 깊기가 그와 같습니다. 어디에서 죽어 여기로 와 태어났으며, 여기에서 죽으면 다시 어느 곳에 태어납니까?”
이때 월 천자가 석제환인에게 말하였다.
“구익이여, 환사(幻師)가 남자나 여자를 변화로 만들 경우, 어디서 죽어 여기로 와 태어난 것이며 여기에서 죽으면 다시 어느 곳에 태어나겠습니까?”
석제환인이 다시 천자에게 대답하였다.
“환상이나 허깨비는 일어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없습니다.”
천자가 구익에게 말하였다.
“말씀하신 것처럼 허깨비는 모여서 합함이 없는 것에서 생겨난 것이며, 없어질 때도 또한 모여서 합함이 없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아서 허깨비를, 총명한 자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가까이하지 않지도 않습니다.”
석제환인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천자여. 지금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천자가 석제환인에게 말하였다.
“구익이여, 그대의 질문과 마찬가지로 나의 대답 역시 그러하며,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법도 허깨비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가지고 ‘이 천자가 어디서 죽어 여기로 와 태어났으며, 여기서 죽으면 어디 가서 태어나는가?’ 하고 부처님께 여쭤보았으면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천자가 석제환인에게 말하였다.
“구익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래처럼 변화하는 것과 변화된 것도 마찬가지이니, 그럴 경우 가고 오며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으로 보고 알 수 있겠습니까?”
석제환인이 대답하였다.
“천자여,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천자가 다시 말하였다.
“이 허깨비에게도 작위(作爲)하는 것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석제환인이 말하였다.
“작위하는 것이 있습니다.”2)
천자가 다시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구익이여. 변화한 모든 법도 이와 같습니다. 오고 가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이렇게 본다면, 구익이여, 여기에는 작위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익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여기에서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세활(細滑:觸)ㆍ법(法)을 보는 것이 아닌 것 또한 그러합니다. 이 허깨비인 사람이 이와 같은 일들을 보고 듣고 알 수 있겠습니까?”
석제환인이 말하였다.

“천자여, 보고 듣고 알 수 없습니다.”
천자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구익이여.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여러 수로 분류해 모든 법을 아는 것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보거나 듣거나 마음으로 법을 생각하더라도 역시 물들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또한 여기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하는 것도 아니며 벗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이와 같은 말과 이와 같은 법을 일체중생을 위해 설하고 대중을 위해 설하지만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자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월 천자는 처소가 없고 생기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설합니다. 이 천자는 제자의 지위에 있지도 않고 보살의 지위에 있지도 않습니다. 보살을 보건데, 어떻게 무수한 겁의 생사의 일들을 기억하며, 중생을 키워 기르면서도 어떻게 전혀 알 수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구익이여, 보살로서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은 자가 있다면 생긴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또한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리라. 이런 유의 보살을 보려 한다면 백 년을 반니원(般泥洹:반열반)에 든 아라한을 보듯이 해야 하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남이란 생각도 없고 나란 생각도 없으며, 또한 남들이 없다는 생각도 없고 내가 없다는 생각도 없는 것이 또한 그와 같다.
구익이여, 정진의 즐거움과 열심히 고행하는 것이 보살이 짓는 일이지만 또한 생긴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한 남이란 생각도 없고 나란 생각도 없으니, 모든 법의 체성(體性)은 본래 모두 니원(泥洹:열반)이다.
이와 같아서 구익이여, 일체중생은 묶여 있는 것도 아니고 벗어나는 것도 아닌데도 이 법을 요지(了知)하지를 못한다. 이 보살은 이런 까닭에 이를 풀어주려고 시현(示現)하는 것이며, 사념(思念)하기 때문에 대비(大悲)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보살은 지치거나 싫증내지 않으며 한량이 없는 구리(拘利)3)의 백천 겁에 나태하지 않다.
비유하자면 구익이여,
불구덩이에 어떤 사람이 떨어졌을 때, 어떤 대비심(大悲心)을 가진 남자가 자신의 몸도 아끼지 않고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으며 다섯 가지의 소욕(所欲)과 모든 즐거움마저 내팽개치고서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그 사람을 안고 나와 자신도 구출하고 그 사람도 구출하는 것과 같다. 구익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사람이 한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닌가?”
석제환인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이 한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구익이여.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보살이 하는 일은 그것보다도 더 어려우니,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마음을 발하여 모든 공양의 도구들을 지니려고 하고, 자신이 가진 것들을 모두에게 베풀어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지만 구익이여, 또한 이것보다 더한 것이 있으니, 이런 광명의 덕으로 모든 것을 비추어 보여주는 일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다 모든 제자들과 벽지불 위로 넘어서는 것들이니, 보살마하살은 스스로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에 이른다.
또한 구익이여, 어디서 죽어 이곳으로 와 태어났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니, 잘 들어라 구익이여, 이 나라의 한 부분인 동쪽, 이 불찰(佛刹)로부터 92나술(那術:억) 백천의 부처님의 나라를 지나 이름이 라타나살차(羅他那薩遮)진(晋)나라 말로 진보심체오장(珍寶審諦奧藏)이다라는 세계가 있다.
그곳에는 온갖 보물이 나무가 되어 그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무수한 색깔들을 하고 있으며, 경행(經行)하는 곳은 무수한 보물들로 되어 있으며, 그 나라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온갖 보물들로 꾸며져 빈틈이 없다. 그곳의 땅은 모두 감유리(紺琉璃)이고, 무수한 보물들이 여기에 간간이 섞여 있다.
또한 구익이여, 이름이 라타나광기(羅陀那光祇)진(晋)나라 말로 진보적취(珍寶積聚)이다라는 세계가 있다. 구익이여, 이 세계의 부처님 명호는 라타나문다라제야아단갈라유(羅陀那文陀羅帝耶阿丹竭羅油)진나라 말로
진보호장출과상취(珍寶豪場出過上聚)이다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이시며, 지금 현재도 설법하고 계신다. 그 부처님나라에는 어머니라는 사람이 없고 어머니라는 소리도 들을 수 없으며, 또한 제자(弟子)나 연일각(緣一覺:緣覺)의 도가 없고, 순전히 보살들만 불찰에 가득하다.
또한 구익이여, 진보호장출과상취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이신 이 세존께서 하시는 낱낱의 설법마다 72구리(拘利)의 보살들이 모두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는다.
보살들은 이러한 인(忍)을 얻은 다음 ‘뛰어나고 이름난거란본에는 명(名)이 다(多)로 되어 있다 진귀한 보물이라면 천상의 것이건 이 세상의 대성(大性)들 것이건 일체를 모두 그만 사용하리라’고 마음으로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모든 불찰들이 모조리 동요하고, 즉시 삼천대천 불찰의 여러 무수한 보물과 연꽃과 갖가지 꽃들, 빛깔이 매우 선명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그 안에 가득 차고 불토에 뿌려졌다.
그것들이 모두 부처님 위에서 화개(華蓋)로 변화해 그 불찰을 두루 덮은 뒤, 이 보살들은 갑자기 공중으로 뛰어올라 다른 곳의 부처님께 날아가 공양하고 예를 올리면서 문안을 드리고 법을 듣고자 하였다.
또한 구익이여, 법인(法忍)을 얻은 보살은 한 곳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지 않고 모든 불찰들을 두루 다닐 수 있지만, 법인을 얻지 못한 보살은 다른 세계로 갈 수 없다.
또한 구익이여, 저 불세존께서는 출현하시고 12겁 동안 저 부처님께서는 머무시는 곳마다 밤에 항상 세 번 설법하셨는데, 설법을 하고 나면 72구리의 보살들이 불기법인을 얻곤 하였다.
이와 같아서 구익이여, 불기법인을 얻지 못한 보살은 다른 세계의 불찰로 갈 수 없지만 불기법인을 얻은 보살은 다른 세계의 불찰로 갈 수 있다.
이와 같은 보살들이라야 그곳에서 죽은 다음 다른 세계의 불찰에 태어난다.
이와 같아서 구익이여, 이것으로써 다른 것들도 비교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이루 셀 수도 없는 억 불찰의 모든 보살들이 모두 그러하다.
구익이여, 저 진보적취(珍寶積聚) 찰토(刹土)에 있는 모든 자들은 3악도에 떨어질 걱정이 없으며, 또한 고지(苦智)도 없고 낙지(樂智)도 없다. 또한 묻는 바도 없고 설하는 것도 없으며, 고생도 없고 음식도 없다. 어째서인가? 모든 보살들이 법의 기쁨으로 음식을 삼기 때문이다. 그 찰토에는 나한이니 벽지불이니 하는 이름도 없다.
이와 같이 구익이여, 진보적취국토, 그 불찰의 세존은 진보호장출과상취 여래(如來)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이시다. 이 월 천자는 그 불찰에서 죽은 다음 이 도리천에 와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찾아와 부처를 보려 하였고, 나에게 예를 올리고 나를 돌고 나에게 문안을 여쭌 것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처럼 찾아왔으며, 이러한 물음을 통해 이 모임의 헤아릴 수 없는 수천의 사람들이 두루 이해하는 바가 있게 되었고, 또 모임의 나머지 보살들이 모두 불기법인을 두루 갖추게 된 것이다.
구익이여, 이 월 천자가 일부로 찾아와 부처를 만나는 것은 모든 법을 보호하려고 하고, 그 법을 지니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가 반니원(般泥洹)에 든 뒤 그 마지막 법이 다하려 할 때, 바로 그런 기간에 도를 얻어 사람 속에 태어나 이렇게 설한 깊고 깊은 법, 널리 비추는 이런 법을 가지고 무수한 백천 사람들을 두루 가르치려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들 불기법인을 즐겨 배우고자 할 것이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마지막으로 법이 사라지려할 때 그곳에서 죽어 제4(第四)의 도술천(兜術天:도솔천)의 모임에 태어나 미륵보살이 계신 곳에서 모든 불세존의 도(道)의 일들을 강설할 것이다.
그러면 전세에 한 번도 도에 대한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던 이루 셀 수도 없는 백천의 천자들이
이제 그 말씀을 듣고 모두 아뇩다라삼야삼보의 마음을 발할 것이며, 미륵불이 내려와 정각(正覺)을 얻을 때에는 이 보살들이 만 세 동안 미륵불을 받들어 섬기며 집에 머물면서 항상 미륵불과 여러 스님들을 공양할 것이다.
그리고 그 뒤 4천 명의 사람들이 함께 집에 있을 때의 믿음으로 출가여 도를 행하며 곧 사문이 될 것이다. 사문이 된 뒤에는 미륵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이 계신 곳에서 몸과 목숨이 다하도록 언제나 법을 지킬 것이고, 미륵불이 반니원에 든 뒤에는 법에 머물며 항상 법을 지닐 것이며, 이 현겁(賢劫)의 천불(千佛) 중 네 분을 제외한 부처님들을 모두 공양하며 그곳의 부처님들을 받들어 섬길 것이다.
그리고 이들 모든 불세존께서 설하신 경에서 범천의 청정한 행을 닦을 것이며, 최후에는 항하(恒河)의 모래알만큼 많은 수의 겁을 일곱 번이나 지나간 뒤에 그 세계에서 부처가 되어 그 명호를 월광요(月光曜)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이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자 월성(月星) 천자가 이 천자에게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지금 부처님으로부터 수결(授決:授記)을 받았으니, 분명 아뇩다라삼야삼불(阿耨多羅三耶三佛)을 이룰 것입니다. 그대는 과거에 어떤 은혜가 있었고 어떤 공양을 했으며, 어떤 애경(愛敬)과 희락(喜樂)과 환희(歡喜)의 일들을 지어서 부처님께 보시하였기에 이처럼 여래께서 그대에게만 수결하시는 것입니까?”
이때 월 천자가 월성 천자에게 말하였다.
“여래께서는 선(善)하다고 하여 사람에게 수결을 주는 것이 아니며 또한 외경하였다고 해서 사람에게 수결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사람에게는 줄 수 있고 이 사람에게는 줄 수 없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보살이란 자기가 스스로 보살의 법을 배우는 것이며, 그러면 곧 세존께서 그에게 구경의 일을 기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대 그대는 왜 저에게 ‘그대가 부처님께 무슨 은혜가 있기에 부처님께서 이처럼 공경하고, 이처럼 사랑하고, 이처럼 생각하고, 이처럼 기뻐하고, 이처럼 베푸십니까?’ 하는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월성 천자가 월 천자에게 물었다.
“이런 기쁨을 어느 곳에서 보아야 합니까?”
월 천자가 월성 천자에게 대답하였다.
“기쁨이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월성 천자가 다시 말하였다.
“마음이란 마음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인데, 무엇이 이 솟아오르는 기쁨[踊躍]을 일으킵니까?”
대답하였다.
“솟아오르는 기쁨이란 가질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최상의 솟아오르는 기쁨입니다. 만약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이 솟아오르는 기쁨의 최상입니다.”
월 천자가 월성 천자에게 말하였다.
“그와 같은 것이 솟아오르는 기쁨입니다. 그런 솟아오르는 기쁨에 옳지 못한 것이 있다면 솟아오르는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이 솟아오르는 기쁨은 방일(放逸)한 행위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솟아오르는 기쁨 속에서 항상 솟아오르듯 기뻐하면 그만두고 물러서는 생각이 다시는 생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월성 천자여, 당연히 이런 법에서 구하기 때문에 솟아오르는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법에서 이를 행하며 이것에 방일하지 않고 이것을 구하며, 구하지도 않고 또 구함을 벗어나지도 않습니다. 어째서인가? 법계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며 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월성 천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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