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도신족무극변화경(佛說道神足無極變化經) 1권
불설도신족무극변화경(佛說道神足無極變化經) 제1권
서진(西晋) 안법흠(安法欽) 한역
홍승균 번역
이와 같이 들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도리천(忉利天)을 유행하시다 파질수(巴質樹:晝度樹) 아래의 감유리석(紺琉璃石)에 계셨다. 부처님께서는 그 위에 앉아 여름 석 달이 다 가도록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셨다.
대비구의 무리들과 함께하셨는데, 8천이나 되는 비구들은 다 아라한[羅漢]들로서 모든 번뇌가 다하고 신족(神足)이 갖추어져 능히 작위(作爲)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7만 2천 명의 보살은 신통(神通)에 통달해서 모두 다린니(陀隣尼:다라니)를 얻고, 모든 사람들이 마음먹고 있는 것과 하고자 하는 바를 다 알며, 무수한 부처님세계를 자유자재로 어디든 다니는 자들이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권속(眷屬)에게 둘러싸여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계셨다. 이때 제천(諸天)의 무리들 중에 두 천자(天子)가 있었으니, 한 명은 이름이 월(月) 천자이고, 또 한 명은 이름이 월성(月星) 천자였는데, 이들도 그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때 월 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친 다음, 앞으로 나와 오른쪽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지금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걱정 말고 물어보아라.”
이에 월 천자는 기뻐하며 즉시 게송으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일체를 위하는 커다란 자비(慈悲)
순후(純厚)하시고 이익을 얻으셨으며
이를 세워 지도(至道)를 얻으시고
매우 깨끗한 감로(甘露)를 보시합니다.
이윽고 스스로 편안함을 얻어
모든 번뇌를 멸해 없애시고
다시 일체 중생을 편안케 하시기에
그래서 이처럼 여쭙고자 합니다.
저 무수한 겁(劫) 동안
하신 일 너무도 힘겨웠으니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보시함에 만족이 없으셨습니다.
일체에게 평등한 마음 가지고
모든 사람 똑같이 걱정해 주시니
그러시기에 이제 원하오니
인중존(人中尊)께 여쭙고자 합니다.
온갖 상호 스스로 장엄한
부처님 몸을 뵙는 자
모두들 뛸 듯이 기쁜 마음 내나니
복전(福田) 덕분에 얻는 것입니다.
넓고 길기가 끝이 없으며
무량하여 큰 바다보다 더하나니
그래서 지금 여쭙고자 합니다.
그 덕을 뛰어넘을 자 없는 분께.
또한 다른 뜻도 없고
다른 마음도 역시 없나니
삼계(三界)의 장중웅(將中雄)으로서
모든 이의 생각을 분명히 아십니다.
그 몸으로 하시는 일
일찍이 남을 따라한 적 없나니
그래서 지금 여쭙고자 합니다.
이 세상의 대지(大智)께.
덕이 있음과 덕이 없음
찬탄하여 기림과 헐뜯어 비방함
명성 있음과 명성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세상의 여덟 가지 일[八事] 모두 알고
이를 분별하여 완전히 아시나니
그래서 지금 여쭙고자 합니다.
모든 두려움 이미 벗어나신 분께.
또한 일체 중생 보호하시길
자신을 지킴과 다름없이 하며
이런 일에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으니
삼계(三界)에서 모두 그렇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비심 품고
의심하지 않으며 원한이 없나니
그래서 이처럼 여쭙고자 합니다.
대지(大地)처럼 행을 지키는 분께.
보시하고 계율 지키며
그 마음 너무도 깨끗하고
차라리 자신의 신명(身命)을 버릴지언정
끝까지 계율을 범하지 않으십니다.
몸이나 입으로 하는 것처럼
마음 또한 그와 같으시니
그래서 지금 여쭙고자 합니다.
이 세상을 건너신 분께.
인욕(忍辱)으로 그 마음을 다스리고
굳건하게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시니
이 모든 것이 지혜로 하시는 일
애써 노력하신 것 다 보았습니다.
온갖 호오(好惡)와 진에(瞋恚)
그 모든 것을 능히 참으시니
그래서 지금 여쭙고자 합니다.
할 일을 모두 마치신 분께.
정진(精進)의 힘 너무도 강해
모든 논의를 초월하는 것이니
세상을 위해 애써 노력하시며
자신을 위한 적은 일찍이 없습니다.
밤낮으로 언제나 구하심이
콸콸 흘러 바다로 들어가듯 하나니
그래서 지금 여쭙고자 합니다.
그 덕(德) 하늘에 알려진 분께.
이러한 모든 욕망의 일들을
삼계에서 다시는 하지 않고
일체를 모두 사랑하시며
모든 것을 능히 항복시킵니다.
선순(禪旬)을 이미 모두 갖추셨고
신족(神足) 또한 그러하나니
그래서 지금 여쭙고자 합니다.
사람 중에 맹웅(猛雄)이신 분께.
지금 크신 지혜(智慧)로
무소락(無所樂)을 이미 건너시고
겁 겁의 모든 악사(惡事)를
모조리 다 여의셨습니다.
공한처(空閑處)에 계시면서
자재하시며 모든 법을 아나니
그래서 지금 여쭙고자 합니다.
세속과는 다르게 짓는 분께.
신족(神足)의 공덕과 지혜로
해서는 안 될 일 모두 없애고서
이로부터 다른 찰토(刹土)에 이르며
자비스러운 마음이라고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어떤 생각도 없나니
그래서 지금 여쭙고자 합니다.
세상사람 사랑하여 시현(示現)하신 분께.
이때 마귀들 모두 찾아와
함께 모여 큰 모임 되었지만
곧 도법(道法)의 힘을 쓰시자
모든 마귀들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드디어 마귀들 항복받고 나자
저절로 도가 이루지게 되었나니
그래서 지금 여쭙고자 합니다.
그 공덕 가장 뛰어나신 분께.
일체가 땅에 머물고
금좌(金座)가 땅에서 솟아나며
곧장 도를 깨닫게 되셨으니
부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곧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셔서
모든 이치를 다 이해하셨으니
그래서 지금 여쭙고자 합니다.
사람 중에서 가장 높으신 분께.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의 공덕
높은 중에서도 더욱 높으며
이미 부처님과 같은 마음 얻어서
법대로 경행(經行)을 설하십니다.
모임에 참여한 이들 이미 건넜으니
모든 이들의 도사(導師)이십니다.
그래서 그 이치를 묻습니다.
삼계(三界)가 모두 은혜를 입은 분께.
이와 같이 월 천자가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한 뒤에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대신통지(大神通智)를 섭지(攝持)하여 최고의 도무극(度無極:바라밀)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보살이 불가사의한 선권방편(善權方便)을 얻어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을 알게 된다는 것은 무엇이며, 보살이 모든 법을 알아서 일행(一行)으로 삼고 일미(一味)로 삼고 일입(一入)으로 삼고 일교설(一敎說)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혜를 얻어 스스로 자유롭고 남들을 위해 설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보살이 깊고 깊은 계율을 얻어서 방일(放逸)한 행동을 하지 않고 스스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리[無上正眞道]를 이루어 불경계(佛境界)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묻고 싶었던 것이 이런 것들입니다. 세존이시여, 부디 이를 설명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월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천자여, 여래의 업을 익히고 싶어서, 큰 승나승열(僧那僧涅:사홍서원의 갑옷)을 입고 싶어서, 큰 싸움에 뛰어들어 큰 도사(導師)가 되고 싶어서, 모든 것을 제도하고 싶어서, 큰 배를 만들고 싶어서,
큰 법륜(法輪)을 굴리고 싶어서, 큰 보시를 하고 싶어서, 큰 법신(法身)이 되고 싶어서, 큰 법우(法雨)를 내리고 싶어서, 큰 법화(法火)를 피우고 싶어서, 큰 법고(法鼓)를 치고 싶어서, 큰 법번(法幡)을 드날리고 싶어서, 큰 법계(法界)를 설하고 싶어서, 큰 법성(法聲)을 전하고 싶어서, 큰 법영(法英)을 다스리고 싶어서, 큰 법지(法智)를 나타내고 싶어서, 삿된 견해와 제사[祀祠]를 끊고 싶어서, 온전한 큰 제사를 세우고 싶어서,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헤아릴 수 없는 모양의 일들을 지어 모든 자들을 위하고 싶어서 이런 문제들을 여래에게 묻는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자여, 부디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 보라. 내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 보살마하살은 큰 지혜를 얻어서 깊고 깊으며 미묘한 계(戒)에 이르고,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리를 스스로 이루어 가장 바른 깨달음[最正覺]을 이루느니라. 이와 같이 천자여, 불세존이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여 월 천자는 여러 대중들과 함께 합장하고서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들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자여, 보살에게는 네 가지의 법이 있어서 제일차별대통(第一差別大通)의 섭지(攝持)를 체득(逮得)하는 것이다.
어떤 것들을 네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모든 법의 모양이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법을 구하여 찾는 것이며, 셋째는 모든 법이 다함이 없으므로 안온함을 얻어 배움의 증명을 얻는 것이고, 넷째는 법성(法性)을 벗어난 어떤 법도 보지 않으며 여타의 법계에 대해서도 어떤 희망(悕望)을 가지고 이를 생각하거나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그 네 가지이다.
천자여, 법의 모양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도 공(空)이고 미래도 공이고 현재 또한 공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 또한 모두 허공처럼 공임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자여, 오래도록 앉아서 삼매에 들어 각각 알지 못하는 곳에 대하여 그 공임을 사색하는 것, 이것을 모두를 분명히 아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천자여, 이런 곳을 아는 것을 분별하여 깨달아 아는 것이라고 한다. 분명히 깨달아 모든 것이 해결되면 곧 상(相)을 바꾸어 가르치는 것을 얻게 되니, 시처(是處)ㆍ
지처(知處)ㆍ조립처(造立處)ㆍ분별처(分別處)ㆍ여시처(如是處)ㆍ해의처(解議處)를 돌려가면서 서로서로 전하는 것을 공덕(功德)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천자여, 모든 법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법 또한 나를 생각지 않으며, 나 또한 법을 생각지 않는 것이다. 법이 일어나면 일어나고 법이 머물면 머무는 것이니 천자여, 모든 법이 이와 같아서 이러한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은 모두 이미 없는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으면 전전(轉前)을 하는 바, 전전하면 곧 다시는 기멸처(起滅處)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소유(所有)가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이다. 무소유와 여법(餘法)에 대하여 사유(思惟)하지만 비록 사유하더라도 여법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설하는 것도 없고 또한 머무는 것도 없으며, 비록 여법에서 대명(大明)을 짓는다 하더라도 그 법을 행하지도 배우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천자여, 모든 법이 허공의 마음과 같음을 보살이 알게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천자여, 삼계(三界)를 조작(造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자여, 마음은 형상이 없고 또한 볼 수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고 또한 환상[幻]처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마음[心]과 마음의 법[心法]이라지만 마음을 찾아보면 역시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과 마음의 법이라지만 마음은 찾아보아도 도저히 얻을 수 없다. 이 마음은 또 알 수 없는 것이며, 이와 같이 마음의 모든 법 또한 얻을 수 없고 또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법은 끝내 존재하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존재하는 것 보기를 환상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살핀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이미 지난 것임을 알며, 이미 지난 것이므로 일체 모든 것을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아니, 이와 같이 모든 법이 허공처럼 평등하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천자여, 마치 허공은 볼 수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고 자라는 것도 없는 것처럼, 모든 법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을 안다. 이런 허공처럼, 또 허공이 고요하고 깨끗하듯이, 이와 같은 모든 법 역시 고요하고 깨끗하다.
이와 같이 천자여, 보살이 모든 법의 법성(法性)을 알게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천자이여, 보살은 모든 법 또한 볼 수 없으며 또한 얻을 수 없다고 배운다. 눈도 또한 귀를 보지 못하고 귀도 또한 귀를 알지 못하며, 귀도 또한 눈을 보지 못하고 눈도 또한 눈을 알지 못한다.
코도 또한 혀를 보지 못하고 혀도 또한 혀를 알지 못하며, 혀도 또한 코를 보지 못하고 코도 또한 코를 알지 못한다. 코는 또한 몸을 보지 못하고 몸도 또한 몸을 알지 못하며, 몸도 또한 생각을 보지 못하고 생각도 또한 생각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법은 움직이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는 것이라면, 법이란 마땅히 법성이 머무는 곳이라고 어떻게 평등하게 알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눈으로 보고 알아서 법을 분별하고는 그러하고 그러하지 않음을 말하지 않으며 따르지도 않는다. 이런 이유로 그 항상 머무는 곳을 알게 되며 또한 법에서 쇠퇴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밖에서도 들어가지 않고 안에서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쇠하거나 쇠하지 않음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아야 하며, 또한 법에 생기는 것이 있거나 머무는 곳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머무는 것이 제대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자여, 이것이 바로 법성(法性)이다. 이와 같은 법성은 또한 일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없지만 또한 모든 법을 나타낸다. 생기는 것도 없고 일어나는 것도 없는 데 머묾으로써 그 머무는 곳[止處]을 이와 같이 자세히 살펴야 하니, 마땅히 눈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혜 또한 그러하다. 또한 법성으로 대하지도 않고 벗어날 것도 없으면서 일으키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면 저 모든 법의 법성이 이로써 모두족할 것이다.
이와 같이 천자여, 이것이 네 가지의 법이니, 보살이 크게 신통한 지혜의 지님을 얻어서 최고의 도무극(度無極)을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자여, 무엇을 신통(神通)이라 하고, 무엇을 지혜(智慧)라 하는가? 천자여, 신통이란 모든 법에 대하여 그 요의(要義)를 모조리 아는 것이며, 저 하나하나의 지혜를 모두 남김없이 요해(了解)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자여,
이것을 신통이라고 하니 모든 법에 대하여 아(我)와 아명(我名)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천자여, 아자(我者)이면서도 어긋나지 않는 것, 이것이 법의 지혜이다.
이와 같이 천자여, 보살은 이런 이유로 신속히 큰 신통의 지님을 얻고, 그 지혜가 원하는 바에 대하여 싫증을 내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원하는 바를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천자여, 지혜는 사람의 눈을 뛰어넘는 천안(天眼)의 청정함을 얻어서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도 없는 무수한 억천만의 불찰(佛刹)들을 모두 보고, 이들 불찰에서 모든 불세존과 그 제자의 무리들을 본다. 천이(天耳)를 가지고 모든 불세존께서 설하시는 법을 모조리 들어서 이를 모두 이해한다.
이들 모든 불찰에 사는 모든 사람들, 배웠거나 안 배웠거나, 상품이든 중품이든 하품이든 모든 일들을 다 깨달아 안다. 능히 신족(神足)을 지녀 모든 불찰들을 두루 다니면서 노닐고, 지난 세상의 헤아릴 수도 없는 겁(劫) 중에 일어난 일들을 모조리 알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들을 모조리 탐색하여 알고, 그들이 살아온 삶의 본말을 모조리 알게 된다. 이런 지혜를 지녀 스스로 증득하고, 곧 모든 자들을 위해 법을 설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천자여, 지혜로 보살마하살은 일체지(一切智)를 체득(逮得)하여 부처님께서 지으신 바를 모두 얻어서 머물며, 신속히 모든 불법을 체득하여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리의 가장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부처님께서는 곧장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러한 큰 신통을
모두 이미 만족하고서
선권(善權)으로 베푼 것
보니 공덕의 모습이로구나.
이와 같은 것 모두 하나로부터
모든 법을 모조리 깨달아 안 것이요,
깊고 깊은 정계(淨戒)의 덕도
역시 모두 이로 하여 이루어지도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모든 법을 모조리 알고도
끝내 여기서 행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까 그것이 걱정이어라.
일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요,
그 법 또한 이와 같나니
비유하자면 허공과 같아서
법의 이치가 차별이 없어라.
이에 법을 자세히 살피면
곧 그 법을 볼 수 있고
법계를 의심하지 않으면
그에 따라 분명히 깨달아 알리라.
법에 굴복함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구족하게 알아라.
이를 분별해 깨달아 안다면
스스로 신통을 얻게 되리라.
지나간 과거의 모든 법들은
모두가 텅 빈 허공이며
마땅히 오게 될 미래의 법도
또한 존재하는 것 없어라.
이제 모든 현재의 법도
또한 모두 허공과 같나니
이와 같이 본다면
모든 것이 다 동등하리라.
이러한 3세(世)의 모든 법은
모두 허공과 같나니
이것은 또 나의 것[我所]이 아니지만
나[我]가 아닌 것도 또한 아니어라.
이로써 일생을 스스로 알 것이니
모든 것이 또한 그러하구나.
이와 같은 모든 소견(所見)들이
곧 바뀌어 믿음이 되리라.
저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안다면
공덕이 다시는 같지 않으리라.
모든 이를 위해 법을 설하되
법을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리라.
또한 분노나 원한이 없고
옳고 그름도 말하지 않으며
거기에 또한 의심하는 것 없고
또한 다시 깨달을 것도 없어라.
이러 이와 같은 자라면
곧 모든 법을 세우게 될 것이며
이에 익혔던 모든 것들이
모조리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
이리하여 아무런 남은 법이 없으니
모든 법이 모두 다 그러하며
또한 다른 어떤 법에도
다시는 소견을 갖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생기지도 않고
그것이 다시 있지도 않나니
그리하여 들어갈 곳이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어라.
곧 덕(德)을 체득(逮得)하고
일체를 위해 법을 설하며
법의(法義)를 널리 설명하지만
도(道)라고 하는 생각이 없어라.
그 마음 삼계(三界)에서
이미 매우 아름답고 상쾌하나니
마음이 이미 이러한 자는
모든 것을 볼 수 없으리라.
색(色)이 없음이 그림자와 같으니
그 형상 또한 이와 같나니
법을 찾고 구했었던
그 마음 이미 그쳤느니라.
만약 이 법이 있다고 하여
그 마음을 찾고 구하려 한다면
법은 또한 마음을 보지 못하고
마음 또한 법을 보지 못하느니라.
바로 이와 같은 마음에 대해
마음이 다시 마음을 구하지만
마음은 이미 이러한 것이니
모든 습(習)들을 볼 뿐이라.
모든 법들도 이와 같아서
법을 비난할 수 있는 자 없나니
존재하는 어떤 사상도
방해하고 막을 수 없느니라.
이루지 못했던 모든 법들을
내가 모조리 판별하였나니
그 법은 허공과 같아서
항상 머물며 증감이 없어라.
비유컨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생기는 것이 전혀 없나니
이미 이와 같다면
모든 법을 보게 되리라.
또한 저 허공에
어떤 작위(作爲)를 하는 것도 아니며
이와 같은 것을 좋음이라 하나니
모든 법이 또한 이와 같아라.
눈은 귀를 보지 못하고
귀도 눈을 보지 못하며
혀도 코를 보지 못하고
코도 혀를 보지 못하네.
몸도 마음을 보지 못하고
마음도 몸을 보지 못하나니
저마다 각기 그곳에 있건만
곳곳이 서로 보지 못해라.
남들로부터 듣기도 하고
자신을 따라 알기도 해라.
이리하여서 모두가 가능하니
중생을 위해 법계(法界)를 설해라.
법계가 바로 이런 것이니
그것이 모두 평등하다네.
6쇠(衰:六根)가 나를 알지 못하고
나 또한 6쇠를 알지 못해라.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알라
배워야 할 모든 법들을
이러한 것을 배우고 나면
그 지혜 한량이 없으리라.
시방세계를 모두 보리라
무수한 억천의 부처님들이
제자의 무리와 함께 계신 것을
존귀한 그 설법 모두 들으리라.
누군가 이러한 법에 대하여
널리 사람들에게 설한다면
이에 그 한량없는 지혜가
이미 매우 맑고 깨끗하리라.
계율(戒律)의 덕을 잘도 설하고
구족하게 얻어 들었으며
모든 이치를 깨달아 알고
분별이 모두 만족하리라.
그 마음이 생각하는 것
일체를 모두 다 알며
곧 신족(神足)의 힘으로
무수한 찰토(刹土)를 노니느니라.
무수히 많은 억천만 겁이
무수한 항하의 모래알 같더라도
지난 세상에 행한 것들을
남김없이 보고 분명히 알리라.
이와 같은 수행으로 해서
5통(通)을 이미 얻게 되며
곧 이로 인해 앞으로 다가가리라.
안온하고 위없는 깨달음으로.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
빠짐없이 함께 머물게 될 것이니
아직 도를 얻지 못했다면
도를 당하여 그 이치를 구하리라.
이에 모든 법들을 보니
모두 비어서 보이는 것이 없구나.
문득 마음이 마구 들뜨니
그 기쁨이 더할 수가 없어라.
세상의 모든 마(魔)의 무리들
그 터럭조차 움직일 수 없고
바른 깨달음을 신속히 얻으리니
위없는 최상의 높음이어라.
“천자여, 또 네 가지 법이 있어서 보살마하살이
불가사의한 선권방편(善權方便)의 공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것들을 네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전세(前世)를 아는 지혜 공덕을 얻는 것이다. 둘째는 어떤 의탁할 곳이 없는 자, 추위에 떠는 자, 괴로워하는 자, 고통 받는 자, 근심 걱정하는 자 등, 온갖 괴로움을 겪는 그런 자들을 보면 즉시 솟구치듯 마음을 일으켜 이들을 구하고자 하며, 이들을 모두 다 가르쳐서 부처님의 도리를 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는 모든 법으로 불의(佛意)를 지녀 일체 중생을 얽어매며, 전세의 멀고 오랜 공덕과 복우(福祐)를 가지고 권조(勸助)하며, 또 모든 과거 부처님들의 복우와 공덕을 가지고 권조하여 모두를 근심과 괴로움에서 해탈시켜 풀려나 멀리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이런 공덕들을 통틀어 고생하고 액난(厄難)을 당하는 자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넷째는 마음을 일으키고서 모든 원을 만족하지 않은 적이 일찍이 없으며, 또한 번뇌에서 벗어나겠다는 마음을 내고서 사람들로 하여금 도(道)에 이르지 못하게 한 적이 일찍이 없으며, 또한 모두를 도에 이르지 못하게 한 적이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가령 내 마음이 도에 이르고 싶으면 도 또한 내 마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혜가 곧 마음으로부터 마중을 받고 마음이 곧장 도의 지혜에 이르러 구화구사라(漚和拘舍羅)1)를 지니고서 공덕에 있어서 그것을 증익(增益)하고, 법계에 있어서 그것을 허물지 않으며, 가히 사의(思議)할 수 있는 법에 대하여 그 배움이 만족할 줄 모르며, 또한 모든 공덕에 있어서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이와 같이 모든 공덕을 배로 지으면서도 만족함이 없으며, 심법(心法)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고 마음 역시 공덕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 항상 보시를 받들어 행하면서도 마음이 청정하여 희망하는 바가 없으며, 항상 금계(禁戒)를 받들어 지니며 이를 결감(缺減)하지 않는다.
인욕(忍辱)의 힘으로 동요하지 않으며, 정진을 더하여 나태하지 않으며, 선(禪)의 삼매에 들어 산란하지 않으며, 지혜로워 어리석지 않는다. 항상 모두에게 공양하며 탐하는 것이 없고, 자비로써 은혜를 갚으며 근심하는 바가 없으며, 생기는 것을 사유(思惟)하여 생기는 것이 없음에 도달하고,
그 설한 법을 근심하며 모두를 도탈케 하고자 근심한다.
천자여, 보살행은 이와 같아서, 그 소복(小福)이라도 아는 자는 그 구화구사라로써 짓는 것이 무수하여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천자여, 보살은 이 모든 법에 대하여 이루 계산할 수 없는 지혜를 얻어 모든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요달(了達)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어째서인가? 천자여, 모든 법은 공하고[空], 상이 없으며[無想:無相], 원하지 않는 것[不願:無願]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공은 헤아려 분별할 수 없고 마음이 얻은 것도 헤아려 분별할 수 없으니, 작은 공덕을 짓더라도 구화구사라로 짓는 것이 무수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어째서인가? 이와 같이 도(道)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마음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행은 헤아릴 수 없으니, 끝이 없어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법 또한 끝이 없고 헤아릴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불세존의 도의 법도 또한 끝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또 천자여, 보살은 구화구사라로 모든 행에 있어서 모두 최고를 넘어서며, 최고를 넘어서고 난 뒤 모든 사람들을 그들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바에 따라 보시하고 희구(希求)하고 설법하는 자들을 법으로써 도탈(度脫)시켜 준다.
또 천자여, 보살로서 이미 이러한 자는 이루 계산할 수 없는 무수한 소행법(所行法)을 체득하여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一心:禪定)ㆍ지혜를 남김없이 구족한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업신여기는 마음이 없으며, 계율을 결감(缺減)하는 일 없이 계율을 통해 늘 이익을 얻는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 모욕을 참되 설사 욕설을 퍼붓고 업신여기더라도 이를 모두 참아내며, 정진을 통해 모든 선한 덕을 합쳐서 모으며, 참선을 통해 모든 정(定)을 체득하며, 지혜에 있어서 어떤 걸림이나 막힘도 없다.
또 천자여, 보살은
구화구사라로써 제자들에게 현행(現行)하여 그 법을 따라 교화하되 자신의 내부에는 어떤 희망하는 바도 없으며, 벽지불에게 현행하여 그 법으로써 교화하되 그 내부에는 어떤 희망하는 바도 없다.
이와 같이 천자여, 보살은 이 네 가지 법으로 불가사의한 선권(善權)의 지혜를 얻는다.”
이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괴로움[苦]엔 두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나와 남인 것이라
나의 괴로움을 스스로 없애고
아울러 남의 것도 없앨 수 있느니라.
모든 사람들을 걱정하고 염려하여
마음으로 도사(道事)를 요달(了達)하게 하고
법과 마음에 대해서도 또한 그렇게 하여
모두들 하나의 이치를 이해하게 하느니라.
일체 중생에게 복덕을 베풀며
3세에서 애써 고행하고
부처님들께서 행하신 복덕으로
모든 자들을 권조(勸助)하느니라.
이와 같은 공덕의 복으로
받들어 올려 모두에게 보시하고
모든 마음이 원하는 바에 따라
속히 부처님의 지혜를 체득하리라.
모두들 마음을 발하게 하여
바르고 참된 도를 배우게 하며
다시는 마음이 다른 도리를
구하는 일이 있지 않느니라.
마음이 도를 바라지 않으니
보아도 또한 볼 수가 없어라.
도의 모양이 마음과 같으니
마음의 모양도 역시 그러해라.
법들이 다들 이런 것들이라
나에게도 나[我]라는 것은 없어라.
스스로 공덕을 볼 줄 안다면
맑은 공덕을 늘리고 보태리라.
몸에는 늘어나는 것 없으며
법계는 사의(思議)하기 어려워라.
언제나 도처(道處)에 머문다면
이것이 곧 부처를 구함이네.
마음에 일찍이 염(念)함이 없이
호존(豪尊)하여 스스로를 도와라.
마음을 항상 도에다 두고
정진하며 게으름이 없어라.
보시를 하며 만족할 줄 모르고
언제나 굳건히 계율을 보호하며
인욕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인근(人根)을 만들어 세우지 않느니라.
날이면 날마다 정진을 행하고
언제나 신공(身空)을 스스로 염하며
참선을 하여 적정(寂靜)에 들고
지혜는 모든 것을 건널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길러 배양하니
짓는 일 연꽃과 같으며
보시와 지계 청정하여
남들에게 바라지 않네.
언제나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고
모든 법을 빠짐없이 분명히 알며
모든 법을 깨달아 익히나니
그 지혜 생각조차 어려워라.
일체 중생을 위해 설법하며
어떠한 막힘도 없나니
만일 누군가 이런 수행 한다면
그가 바로 보살이어라.
모든 것이 다 공(空)임을 깨닫고 알기에
보시는 적어도 과보는 무량하며
있다느니 없다느니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일찍이 방자한 적 없어라.
일체 행을 모조리 알아서
원하는 대로 벗어나고 건너며
바라는 것에 따라 보시하면서
설법하고 교화를 번성하게 하느니라.
보시하고 나선 후회가 없고
계율을 지키며 휴결(虧缺)함이 없으며
인욕하고 또 정진하며
선정과 지혜 닦으며 자신을 대단하다 하지 않네.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고
인욕하고 정진하며
선정에서 삼매에 들고
혜시(慧施)로 항복받고 조복(調伏)하느니라.
그는 성문의 수행에 있어서나
그리고 벽지불에게 있어서도
좋아하는 것을 따라 도탈시켜 주지만
속으로는 그들을 따르지 않느니라.
이 법에 굳건히 머물며
보살은 어떤 집착도 없으니
헤아리기 어려운 권혜(權慧)로
신속하게 모든 것 항복받느니라.
“또 천자여, 보살에게 네 가지의 법이 있어서 모든 법이 일미(一味)가 되고, 일입(一入)이 되고, 일설(一說)이 되며, 그 지혜로 모든 이치를 이해하여 통달[解達]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이와 같이 천자여, 보살은 법계(法界)에서 일체지(一切智)의 공덕을 얻어 파괴하는 것이 없으면서 모든 법이 공(空)임을 믿고, 또한 법계에 대하여 이것은 내가 지은 것이고 이것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이것은 내가 지은 것이라고 해도 틀리고, 이것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해도 모두 틀리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잘못된 모든 습을 없애면 곧 일체법지(一切法智)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천자여,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다.
보살은 모든 법이 일미가 되고 일입이 되고 일설이 됨을 알 수 있으니, 이와 같은 지혜가 온갖 지혜의 이치를 모두 이해하여 통달하고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 속제(俗諦)나 도제(道諦)에서 자비로써 법륜을 굴리며, 행할 것이 있으면 이를 행하고, 은혜를 베풀 것이 있으면 그 은혜를 베풀고, 주립(住立)할 것이 있으면 그것을 세우되 곧 법으로써 그것을 주립하며, 법의 크나큰 자비로써 그것을 굴린다.
모든 법에 대하여 이것은 높고 이것은 낮다고 말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며, 입법(入法)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행법(行法)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며,
또 약간법(若干法)에 대해서도 역시 보는 바가 없다. 범인(凡人)의 법을 익히고 알아서 곧 다시 범인의 법을 행하며, 이 범인의 법에 대하여 역시 추켜세우는 것도 없고 낮추는 것도 없다.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인 이러한 법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한 바, 곧 모든 법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모든 법계에서 그 허물어짐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일인(一忍)을 얻고 공(空)을 감인(堪忍)하며, 공을 감인하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입과 마찬가지로 모든 법입(法入)도 그러하니, 마치 무소생입(無所生入)과 같은 것이다.
천자여, 이와 같이 보살은 불세존의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리에 가까이하지만, 부처님을 가까이한다거나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허물어지게 마련인 사법(事法)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사람들 간의 차이도 보지 않고, 도리의 차이도 보지 않으며, 모든 사람도 보지 않고, 또한 도리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계에 대해 시비(是非)를 말하지도 않고
법계에 대해 깨뜨릴 것 없다는 말도 않나니
법계가 이러하듯 모든 것이 이러하니
사유하지 않는다면 이치를 깨닫지 못하리라.
모든 법은 공(空)하다고 이미 믿고
6쇠(衰)를 오랫동안 공과 함께하면
모든 법 공적(空寂)하여 자재를 얻으리니
만약 한 곳 공하면 나머지도 그러하네.
법에 보는 것 없고 보는 자도 없으며
나란 것도 없으니 얻을 수가 없어라.
이런 것을 내가 만일 배워 얻으면
자세히 살펴서 도의(道意)를 깨치리라.
행이 적정(寂靜)하여 공장(空藏)에 미치니
지(止)와 상(相)이 모든 법처(法處)를 따르네.
모든 법이 적연(寂然)함을 모조리 알면
이런 적정에서는 불가함이 없어라.
세간법(世間法)과 최세간법(最世間法)을 모두 알아
의심하지 않고 돌아가지 않으며
원(願)을 끊지 않아 원하고 또 원하며
법을 듣고 항상 생각하여 나태함이 없어라.
셀 수 없는 한량없는 세월에
그 몸이 지은 것 스스로 보지 않고
5도(道)를 돌면서도 법을 보지 않으니
범인(凡人)과 나한(羅漢)도 알 수 있더라.
범인이 익힌 것을 항상 생각하여 설하고
이와 같은 일들과 나한의 법을
또한 다시 추켜세우지도 낮추지도 않으며
적정(寂靜)하여 받아들이지 않나니 그렇게 아느니라.
모든 법수(法數)를 모조리 다 알고
법계에서 파괴하는 것 없으며
인욕(忍辱)과 허공이 다른 것 없으니
모든 법 허공임이 이와 같아라.
인욕이 허공과 같아 생각하는 것 없고
모든 법들이 일지(一智)에 들어가나니
무언가로부터 생김이 없고 습(習)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행하는 도가 어렵지 않으리라.
이와 같이 한량없는 도를 가까이하고
이것을 심념(心念)하며 나태함이 없으며
나이건 남이건 법은 이와 같으니
구하여 얻을 것 없음이 깨달음의 도리이니라.
“천자여, 보살에게는 또 네 가지 법이 있어서 깊고 깊은 계행(戒行)으로 방일(放逸)하지 않는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이와 같이 천자여, 보살은 스스로 사유한다. 무엇을 계(戒)라 하는가? 이와 같이 자신의 소행을 스스로 보아서 몸으로 행한 선(善)과 입으로 말한 선과 마음으로 염한 선을 모두 아는 것이니, 이것을 계라고 한다.
무엇을 몸으로 행한 것이라 하며, 입으로 말한 것이라 하며, 마음으로 염한 것이라 하는가? 몸의 일을 범하지 않아서 죽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몸이 행하는 선이라 한다.
무엇을 입으로 말하는 선이라 하는가?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입으로 말하는 선이다.
무엇을 마음으로 염하는 선이라 하는가? 질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잘못 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마음으로 염하는 선이라 한다.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몸과 입과 마음이 행하는 대로 모두를 얻게 되니, 이렇게 하지 않고도 능히 그 덕을 두루 설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또한 파랑도 노랑도 빨강도 하양도 분홍도 아니고, 잡색(雜色)도 아니고 또 안식(眼識)으로 식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처럼 또한 의식(意識)으로 분별하여 알 수도 없다.
어째서인가? 이것은 불생(不生)이어서
생기는 것이 없고, 일어난다지만 일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불생이어서 생기는 것이 없고 불기(不起)이므로 일어나는 것이 없으므로 드디어 무능설보연(無能說普演)의 덕을 체득(逮得)하게 되며, 이때 마음이 안주하여 흔들리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만나볼 수 없고 두루 연설할 자가 없다. 이와 같이 능히 두루 연설할 자가 없고, 또한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고 이런 행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말하지도 않는다. 마음 또한 볼 수가 없어서 이와 같이 마음을 말하며, 계 또한 그 자취를 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천자여, 보살은 깊고 깊은 계의 덕을 체득한다.
또 천자여, 보살은 소견(所見)을 벗어난 몸의 공덕을 알게 되어 소견이 일어남이 없다는 것을 아니, 계(戒)이건 악계(惡戒)이건 모두 짓는 것이 없다.
또한 천자여, 보살은 깊고 깊은 법요(法要)에 들어가 머물게 되어 이와 같이 살펴 배워야 할 모든 일들과 깊고 원대한 행을 모두 다 행하며, 모든 승(乘)의 행들을 모두 다 행한다. 이것을 계(戒)라고 하며, 이와 같은 행이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남도 속이지 않는 것이니, 이런 것을 깊고 깊은 계[甚深戒]라 한다.
또 천자여, 보살은 계를 범하지 않고 계를 허물지 않으며 계를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무엇을 보살이 계를 범하지 않고, 계를 허물지 않으며, 계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 하는가? 천자여,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으면 곧 계를 보호할 수 있다. 천자여, 스스로 알 수 있으면 계를 알아서 이 계를 소홀히 하지 않고, 배운 것을 빠트리지 않으며, 계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계율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모든 남들의 법을 모두 다 안다. 어디가 남들이 있는 곳이며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남들을 어기지 않는 것이 또한 이와 같다. 천자여, 이런 까닭에 모든 사람을 건너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자여, 이것이 그 네 가지의 법이니, 보살은 이처럼 깊고 깊은 계를 얻어서 방일하지 않는다.”
이때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행하는 것
법답게 깨끗하고 또 깨끗하여라.
그 행이 보물보다도 나으니
이 계는 보살과 어울리도다.
이러한 위없는 열 가지 계[十戒]를
지혜롭게 지키고 보호하는 보살
몸과 입과 마음으로 허물지 않나니
이 계가 최고의 지혜이니라.
짓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나니
생한다지만 생김이 없어라.
심는 것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으니
없는 지혜를 어떻게 얻을까?
모이지도 않고 계(戒)를 짓지도 않으니
눈으로 보아도 볼 수가 없고
귀와 코와 입으로도 알 수 없으며
몸과 마음으로도 알 수 있는 것 아니어라.
6근을 만들지 않고
머무는 곳 또한 없어라.
이 계가 정말 깨끗하지만
계 또한 머무는 곳 없어라.
계를 지키며 방일(放逸)하지 않고
계에 대한 아상(我想)이 없어라.
계를 옹호하되 계상(戒想)이 없으니
이것으로 해서 깊은 계를 얻느니라.
이렇게 하여 신행(身行)을 보고
모든 소견(所見)을 벗어나며
망령된 견해를 따르지 않으니
계에 대하여 상념(想念)이 없어라.
계율을 따라 깊은 법에 들어
모든 행을 온전히 실천하고
있음을 멸하여 능히 보호하며
계에 대해 다른 생각 없어라.
나가 있으면 계도 있고
나가 없으면 계도 없는 것
이것을 일러 두려움이라 하니
나라고 알면 곧 계가 있느니라.
공적한 계는 생각이 없고
적정한 계는 집착이 없으며
공적한 계는 때가 없고
적정한 계는 사유하지 않느니라.
계를 어기지 않는 것 가장 훌륭하나
계에 대하여 자랑하지 않으며
계도 또한 아상(我想)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깊고 깊은 계이니라.
계에 대하여 매우 용감해서
선(善)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으며
하나의 계로 온갖 행을 갖추나니
모든 법이란 얻을 수 없는 것.
계라는 생각 가지는 것 어리석음이요
계가 없는 것을 계를 지키는 것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계의 과보를 없애는 짓이라
5도(道)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모든 소견을 멀리 벗어나면
나의 것은 모두 보이지 않나니
계 또한 보이는 것이 없기에
5도의 길이 두렵지 않아라.
보아도 보지 않는 것이 보는 것이니
선하지 않은 계는 늘어나지 않으리라.
나에 대하여 병(病)이 없으니
계를 익히면 모두를 제대로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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