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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075 불설대승보살장정법경(佛說大乘菩薩藏正法經) 37권

by Kay/케이 2024.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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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불설대승보살장정법경(佛說大乘菩薩藏正法經) 37

 

대승보살장정법경 제37권


서천 역경삼장 조산대부 시광록경 전범대사 사자사문 신 법호 등 한역
변각성 번역


11. 승혜바라밀다품 ⑤

부처님께서는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을 보살이 법으로 법을 관찰하는 염처라 하는가? 이른바 보살이 거룩한 지혜의 눈으로 모든 법을 보고 그 속에 들어가 아는 것이다. 나아가 보리도량에서 모든 법성을 관찰하지만 티끌만큼도 보는 것이 없다. 만일 공(空)을 해탈하면 그것은 곧 무상(無相)의 해탈이며, 무원(無願)의 해탈이며, 불기(不起)의 해탈이며, 무생(無生)의 해탈이며, 무작(無作)의 해탈이며, 무성(無性)의 해탈이며, 연생(緣生)의 해탈이니, 보살은 모든 법을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
어떤 것을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나가 없다는 뜻이요, 사람이 없다는 뜻이며, 중생이 없다는 뜻이요, 수자(壽者)가 없다는 뜻이니, 이것을 법이라 한다. 어떤 것을 비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나라는 견해ㆍ사람이라는 견해ㆍ중생이라는 견해ㆍ수자라는 견해ㆍ항상하다는 견해[常見]ㆍ아주 끊어진다는 견해[斷見]ㆍ있다는 견해[有見]ㆍ없다는 견해[無見] 등이니, 이것을 비법이라 한다.
사리자여, 이 법과 비법은 곧 모든 법과 비법을 다 포섭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른바 공ㆍ무상ㆍ무원의 세 가지 해탈문이 곧 모든 법이요, 나라는 견해 등에 깊은 마음으로 집착하는 것은 곧 비법임을 두루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법관(法觀)을 닦을 때에 극히 미세한 법도 전연 보지 않으면 해탈법과 보리도에서 다 출리를 얻어 장애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정에 대해 사랑한다는 생각과 가엾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저 번뇌와 수번뇌(隨煩惱)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깨친 이치와 같이 평등하게 깨쳐 들어가면 사람과 법이 모두 공(空)이어서 번뇌의 쌓임이 없고, 저 번뇌의 자성이
곧 보리의 성품이요, 이 보리의 자성이 곧 번뇌의 성품임을 깨닫기 때문이니, 이런 염처에는 모든 법이 평등하여 마치 허공과 같으니라.
또 보살이 법관을 닦을 때는 모든 불법을 잘 대치(對治)하고, 유정들을 관찰하여 그 생지(生智)를 다하며, 그 무위를 증득하여 무생(無生)의 지혜를 떠나고, 무생의 경계에서 버리는 바가 없다.
이렇게 법관(法觀)의 염처를 통달하면 곧 일체의 법념(法念)에 편히 머무르며, 일체의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에는 즐거움을 내지 않고, 결정코 모든 부처님의 염처에 편히 머물러 언제나 잊지 않고, 또 우치의 헷갈림이 없으며, 나아가 최후 경계의 법관(法觀)의 염처에서 무량한 같이하지 않는 경계를 잘 연설하며 일체의 불법에 평등하게 들어가 저 유정들 마음을 기쁘게 하며, 일체 악마의 법을 저절로 알게 되나니, 이것을 법으로 법을 관찰하는 염처라 하느니라.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은 승혜바라밀다에서 이와 같은 네 가지 염처의 선교를 얻는다.
어떤 것이 보살의 보리분의 선교인가? 보리분법에 일곱 가지가 있다. 그 일곱 가지란, 첫째는 염보리분(念菩提分)이요, 둘째는 택법보리분(擇法菩提分)이며, 셋째는 정진보리분(精進菩提分)이요, 넷째는 낙보리분(樂菩提分)이며, 다섯째는 적열보리분(適悅菩提分)이요, 여섯째는 삼마지보리분(三摩地菩提分)이며, 일곱째는 사보리분(捨菩提分)이니, 이것을 일곱 가지라 한다.
어떤 것이 염보리분인가? 이른바 깨친 법을 생각[念]하여 관찰하고 분별하며 분석하고 가리며 깨닫는 것이며, 또 그 법의 체상(體相)을 생각하여 따라 깨치고 모든 법이 공(空)임을 기억을 따라 아는 것이니, 이것을 염보리분이라 한다.
어떤 것이 택법보리분인가? 이른바 8만
4천 법의 무더기 가운데서 지혜로 생각하여 가리고 법답게 가린 뒤에는 그것이 요의(了義)이면 요의라 하고, 그것이 요의가 아니면 요의가 아니라 하며, 저것이 세속이면 세속이라 하고, 그것이 승의(勝義)이면 승의라 하며, 그것이 비밀이면 비밀이라 하고, 그것이 결정이면 결정이라 하여 그대로 생각하고 가리나니, 이것을 택법보리분이라 한다.
어떤 것이 정진보리분인가? 이른바 법을 생각하고 가려 지해(知解)를 버리고, 선정을 즐겨 닦으며, 고요하고 가뿐하여 굳세고 용맹한 힘으로 저 집착을 꺾어 버리고, 보리의 도를 즐겨 물러나지 않으며, 무거운 짐을 버리지 않나니, 이것을 정진보리분이라 한다.
어떤 것이 낙보리분(樂菩提分)인가? 이른바 법의 음성을 즐겨 듣고는 그 마음이 청정하여 권태를 내지 않으며, 온갖 반연과 번뇌의 결박을 떠나며 지성으로 우러르며, 나아가 몸의 털이 기쁨으로 일어서고 큰 법의 즐거움을 얻나니, 이것을 낙보리분이라 한다.
어떤 것이 적열(適悅)보리분인가? 이른바 삼마지에서 저 장애되는 혼도(惛掉) 등의 성질을 떠나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다 가뿐함을 얻게 하나니, 이것을 적열보리분이라 한다.
어떤 것이 삼마지보리분인가? 이른바 등인(等引)의 마음이 모든 법의 지혜를 알고 매우 깊은 데에 편히 머물러 모든 법성이 다 평등함을 보나니, 이것을 삼마지보리분이라 한다.
어떤 것이 사보리분(捨菩提分)인가? 이른바 근심이거나 기쁜 법에 마음의 동요가 없고, 세간법에 있어서도 더하거나 덜함이 없으며, 거룩한 도를 따라 자타에 대해 다 머무름도 움직임도 없고 또 고뇌도 없나니, 이것을 사보리분이라 한다.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은 승혜바라밀다에서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보리분의 선교를 얻느니라.
어떤 것을 보살의 성도(聖道)의 선교라 하는가? 여기 여덟 가지가 있으니, 그 여덟 가지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바른 견해요, 둘째는 바른 분별이며, 셋째는 바른 말이요, 넷째는 바른 업이며, 다섯째는 바른 생업이요, 여섯째는 바른 정진이며, 일곱째는 바른 생각이요, 여덟째는 바른 선정이니, 이것을 여덟 가지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견해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견해에 있어서 세간을 초월하여 나라는 견해ㆍ사람이라는 견해ㆍ중생이라는 견해ㆍ수자(壽者)라는 견해에서 발생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또한 항상하다는 견해ㆍ아주 끊어진다는 견해ㆍ있다는 견해ㆍ없다는 견해ㆍ선하고 선하지 않다는 견해와 나아가 열반이라는 견해에서 발생하는 것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바른 견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분별이라 하는가? 이른바 탐욕과 분노와 우치 등 모든 번뇌를 분별하여 일어나지 않게 하고, 계율과 선정과 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을 분별하여 편히 머물게 하나니, 이것을 바른 분별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말이라 하는가? 이른바 자타의 좋은 벗에 대해 그 말에 피차가 없고, 완전히 상응하여 평등한 도에 들어가나니, 이것을 바른 말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업이라 하는가? 이른바 흑업(黑業)을 지음이 없게 하여 모두 없애고, 백업은 그것들끼리 화합시켜 순수히 잘 성숙케 하나니, 이를 바른 업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생업이라 하는가? 이른바 깨끗한 종족의 제자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성도를 위하기 때문에 그것을 더욱 늘리고 원만히 하여 제 신명을 기르고, 난잡한 일로 남을 속여 나쁜 요구를 많이 하지 않으며, 남의 이익을 보고 질투를 내지 않고, 자기 이익에 있어서 그 소득을 따르되 즐거워하지 않나니, 이를 바른 생업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정진이라 하는가? 이른바 삿된 행인 탐욕ㆍ분노ㆍ우치 및 수번뇌(隨煩惱)에 대해서는 근면과 용기를 내지 않고 성제도(聖諦道)에 들어가고, 열반의 과(果)로 나아감에는 잘 수순하여 큰 근면과 용기를 내면 이것을 바른 정진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생각이라 하는가? 이른바 이 생각에서
바른 도에 편히 머무르면서 아첨과 윤회의 허물을 떠나고 나아가 열반의 도를 보며, 이 생각에서 또한 번뇌를 멀리 떠나 성도에 대해 헷갈림과 어지러움이 없으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선정이라 하는가? 이른바 정달(正達)의 평등이 곧 모든 법의 평등이니, 등지(等持)에 편히 머물고, 그 정달에서 잘 초월하며, 또 보살이 등지에 편히 머물러 일체 유정을 잘 해탈시키며, 앞의 정달도 잘 초월하면 이것을 바른 선정이라 한다.
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모든 보살들을 위해 이 여덟 가지 성도에서 다함이 없는 성도를 열어 보이시느니라.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은 성도의 선교에서 조도(助道)의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 어떤 것을 조도라 하는가? 이른바 사마타와 비발사나이니, 이것을 조도라 한다.
어떤 것이 사마타인가? 이른바 마음을 담박하게 하여 고요하고 극히 고요하며, 지극히 고요하고 모든 감관을 껴잡아 동요하지 않으며, 높고 낮음이 없으며, 말은 오직 삼가고 은밀하며 또한 아첨이 없고, 마음을 한 경계에 쏟아 분잡함과 험난함을 멀리 떠나며, 한적한 곳에 있기를 즐기고, 그 몸과 목숨이 청정하고 고르며, 위의의 도행(道行)이 항상 근신하며, 나아가서는 음식을 갖추어서 때를 알고 분수를 알며 그 수량을 알며, 혹 비방을 듣더라도 잘 참으며, 더욱 깊은 마음으로 항상 고요히 앉기를 즐긴다.
그러므로 정분(定分)을 마음먹고, 자ㆍ비ㆍ희ㆍ사에서 방편으로 걸림 없이 편히 머물러 관(觀)을 닦되 초선(初禪)에서 8선까지 이르며, 사마타에서 먼저 내가 말한 대로 닦고, 여기서 다시 한량없는 사마타가 있는데, 이 행을 또 수순해야 하나니, 이것을 사마타라 한다.
어떤 것이 비발사나인가?
이른바 지혜의 갈래에서 모든 법이 공하여 나도, 사람도, 중생도, 수자도 없음을 관찰하고, 저 5온이 마치 허깨비 같다고 관찰하며, 18계(界)가 곧 법계성(法界性)임을 관찰하고, 12처(處)가 빈 촌락 같음을 관찰하며, 눈 등의 감관이 경계를 따라 움직임을 관찰하고, 저 연기법(緣起法)이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관찰하며, 중생의 견해는 마침내 버릴 것임을 관찰하고, 또 원인은 반드시 과보를 부름을 관찰하며, 과보는 현재의 증득함과 같음을 관찰하고, 모든 정달(正達)은 더욱 초월할 것임을 관찰한다.
또 비발사나란, 이른바 모든 법이 공과 같다고 보이는 것은 상도 없고 원(願)도 없으며 차별도 없다는 것이다. 인(因)이 없이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곳이 없음을 관찰하며, 얻어짐이 없음을 보고 관찰되는 것이 없음을 얻으며, 관찰되는 것이 없는 데서 다시 더 자세히 관찰되는 것이 없음을 관찰하나니, 관찰하는 자도 또한 그와 같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은 곧 여실한 관찰이니, 여실한 관찰에서 진실한 선교의 비발사나를 얻는다. 이런 보살은 이 행에서 타락하지도 않거니와 또한 저 선근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사리자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승혜바라밀다에서 이런 조도법을 얻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저 보살의 정도(正道)의 선교에 네 가지 상(相)이 있으니, 그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아직 생기지 않은 죄업과 모든 불선법을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요, 둘째는 이미 생긴 죄업과 모든 불선법을 끊으려는 것이며, 셋째는 아직 생기지 않은 선법을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며, 넷째는 이미 생긴 선법을 오래 머물러 파손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온갖 관행을 닦아 잊음이 없게 하고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 바른 소원을 포섭하느니라.
이상에서 말한 모든 불선법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것이니, 마음 깊이 결심한다는 것은 다 덧말이며,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 바른 소원을 포섭하고
마음 깊이 관찰하는 것도 또한 덧말이니, 왜냐하면 이른바 법은 모임이 없고 깊은 마음으로 해탈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선법이라 한다.
불선법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계율과 선정과 지혜에서 대치(對治)함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계율에서 대치하는가? 이른바 계율의 이름과 지음이 계율을 헐고 타락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선정에서 대치하는가? 삼마지의 무더기가 산란한 마음을 일으켜 거룩한 행을 파괴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지혜에서 대치하는가? 이른바 가지고 있는 법수(法數)가 자주 견해를 일으켜 앎을 장애하고 승혜의 무더기가 나아가는 바가 있어 견해 없음을 파괴하는 것이니, 이것이 계율과 선정과 지혜에 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죄업과 모든 불선법의 이런 행상은 깊은 마음으로 결심하고 그것을 끊어 없애기 위해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 바른 소원을 다 포섭한다. 이 불선법은 마음으로 덮어 열어 보이지 않고, 일체 선법의 마음을 항상 모아 대치하는 탐욕과 분노와 우치 등은 다 인연으로 생기는 것임을 안다. 그리하여 부정관(不淨觀)으로는 탐욕을 대치하고, 자비관(慈悲觀)으로는 분노를 대치하며, 연생관(緣生觀)으로는 우치를 대치하여 모든 번뇌를 깨끗이 하나니,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또 모든 있는 법은 다 끊을 것이 아니고 그 모든 법을 관찰해야 하나니, 이것을 처음과 둘째의 정단(正斷)이라 한다. 말하는 바 아직 생기지 않은 선법은 그것을 발기시키기 위해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 바른 소원을 포섭한다는 것, 이것은 한량없이 있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른바 보살은 모든 선의 근본을 심고 정진하여 훌륭한 행을 즐겨 거두려 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한량없는 선법을 모아 쌓는 것을 셋째 정단이라 한다.
또 정단이란, 이미 생긴 선법을 오래 머물게 하여 파손이 없고
잊음이 없게 하기 위해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 바른 서원을 껴잡는다. 만일 이 선근을 보리로 회향한다고 하면 그것은 곧 덧말이니, 왜냐하면 회향할 보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선근은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 발심과 같이 삼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만일 삼계를 벗어난다면 이 선근은 곧 모두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발심과 같이 삼계를 벗어나기 때문이며, 만일 삼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일체지지로 회향할 수 있어서 이 선근은 다함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넷째 정단이라 한다.
사리자여, 이상이 보살마하살이 승혜바라밀다행으로 네 가지 정도의 선교를 얻는 것이니라.
또 보살마하살의 정도의 선교에는 다섯 가지 상(相)이 있으니, 그 다섯 가지란, 첫째는 신근(信根)이요, 둘째는 정진근(精進根)이며, 셋째는 염근(念根)이요, 넷째는 삼마지근(三摩地根)이며, 다섯째는 승혜근(勝慧根)이다.
신근이란 무엇인가? 신(信)에는 네 가지 법이 있으니, 네 가지란, 첫째는 바른 견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신에는 세간과 윤회의 행이 있어서 저 업보를 얻고, 그것을 대치(對治)하고, 그 목숨으로 말미암아 죄업을 짓지 않는다. 보살행을 믿고 그대로 수행하며, 생활 도구에 집착을 내지 않고, 매우 깊은 승의(勝義)와 모든 요의(了義)에 대해 바른 앎을 내며, 유정의 행에서 모든 법의 공상(空相)과 무상(無相)의 상을 믿으며, 모든 견해의 지음에 대해서는 즐겨 믿거나 알려고 하지 않고, 부처님 법의 힘과 무외(無畏) 등을 듣고는 모든 애착과 다른 말들을 떠나고, 저 불법을 다 쌓아 모으나니, 이것을 신근이라 한다.
어떤 것이 정진근인가? 이른바 이 법을 믿고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을 정진근이라 한다.
또 이 정진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을 쌓아 모으되, 그 염근(念根)을 파괴하지 않나니, 이것을 염근이라 한다. 또 이 염근이 파괴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에서 삼마지근이 오직 일경성(一境性)이니, 이것을 삼마지근이라 한다. 또 이 삼마지근의 일경성으로 말미암아 저 혜근(慧根)으로 모든 법을 관찰하여 잘 아나니, 이것을 혜근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이 5근을 쌓아 모으고 얽어 붙이면 곧 일체 불법을 원만히 하게 되어 기별을 받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다. 비유하면 외도의 다섯 가지 신통이 태장(胎藏)을 받지 않고, 나아가 남녀 등 기관을 뛰어넘는 것이 저 부처님 세존과 보살들이 이 5근을 성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승혜바라밀다로 다섯 가지 정도의 선교를 얻는 것이다.
사리자여, 또 보살의 정도에는 다섯 가지 상이 있으니, 다섯 가지란 첫째는 신력(信力)이요, 둘째는 정진력이며, 셋째는 염력(念力)이요, 넷째는 삼마지력이며, 다섯째는 승혜력이다.
어떤 것이 신력인가? 이른바 법을 신해(信解)하는 것이다. 비록 악마 파순이 부처님 몸으로 변해 가지고 와서 친근하며 별다른 법을 말하더라도, 이 신력 때문에 이 바른 법을 티끌만큼도 파괴하지 못하고, 지혜로 자세히 살펴 그것을 다 없애 버린다. 또 악마의 말은 불법이 아니고 4대종(大種)과 모든 업보를 착각으로 쌓아 모은 것인데, 보살은 신해(信解)의 힘으로, 깊은 마음으로 자세히 관찰하고 그것을 다 믿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의 신력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보살의 정진력인가? 이른바 용맹 정진을 일으켜 선법을 깊이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에 있거나 견고한 힘을 얻어 하늘이나 사람이 가진 힘은
심지어 보살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을 동요시키지 못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정진력이라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의 염력인가? 이른바 법의 염처(念處)에 그 마음이 안주하여 저 모든 번뇌가 어지럽히지 못하며, 이 염력으로 저 번뇌를 다 깨뜨리고 다시 이 청정한 바른 생각을 얻나니, 이것을 보살의 염력이라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의 삼마지력인가? 이른바 한적한 곳에 혼자 있으면서 모든 분잡을 떠나고, 일체 말과 소리를 다 멀리 떠나 대치할 반연이 없나니, 이것을 첫째 선정이라 한다. 또 잘 자세히 관찰하기에 장애가 없게 되면 이것은 둘째 선정이라 한다. 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행에 장애가 없어지면 이것을 셋째 선정이라 한다. 또 바른 법을 거두어 잡아 유정을 교화하여 버림이 없고 장애 없게 되면 이것을 넷째 선정이라 한다. 또 네 가지 선정행에 대한 그 대치법을 깨뜨릴 수가 없고, 그 선정으로 멀리 떠나지 않아 삼마지에 애착을 내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의 삼마지력이라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의 승혜력인가? 이른바 한 찰나에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잘 아는 것이니, 이런 지혜는 깨뜨릴 수가 없으며, 일체 공교(工巧) 내지 세간의 갖가지 기예도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짓기 어려운 것을 다 능히 짓는다. 보살은 현재에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얻나니, 이른바 지혜가 높이 나타나 모든 세간을 다 이기는데, 일체의 하늘ㆍ사람ㆍ아수라 등으로는 깨뜨릴 수 없나니, 이것을 보살의 승혜력이라 한다.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은 승혜바라밀다에서 이런 다섯 가지 정도의 선교를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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