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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072 불설대승보살장정법경(佛說大乘菩薩藏正法經) 34권

by Kay/케이 2024.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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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불설대승보살장정법경(佛說大乘菩薩藏正法經) 34

 

대승보살장정법경 제34권


서천 역경삼장 조산대부 시광록경 전범대사 사자사문 신 법호 등 한역
변각성 번역


11. 승혜바라밀다품 ②

“또 사리자여, 만일 보살마하살로서 승혜바라밀다행을 행할 때 이 보살장 정법의 뛰어난 이치와 이익을 청정하게 좋아해 이 정법을 수지 독송하는 이라면, 선지식이라는 생각을 내고 용맹 정진하여 바르게 마음을 껴잡아 저 바른 서원과 4정단(正斷)을 일으키기 위해 일체 법에 상응하여 걸림이 없게 되어야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는 이 뜻을 거듭 밝히기 위해 게송을 설하셨다.

선지식을 존중하고
설법하는 스승 얻고
법을 듣는 대중 만들고
언제나 바른 행에 머물러라.

그 신명 아끼지 않고
정근함이 최상이다.
진실한 지혜에 편히 머물면
승혜(勝慧)가 청정해지리.

스스로 바른 법 알고
깨끗이 믿으면 다 통한다.
출리(出離)를 깨닫기 때문에
부처님처럼 널리 열어 보이리.

또한 저 지혜로운 이처럼
문구(文句)의 뜻을 잘 통달하고
청정한 행을 항상 닦으면
배움의 모든 자리에 나아가게 되리.

더럽거나 깨끗한 법
그 모두에 집착 없으면
그 집착이 없기 때문에
법에 멸망이 없으리.

정진을 즐거워하므로
몸은 빨리 가뿐해진다.
이 법을 다 듣고는
지혜가 늘어나 잊음이 없다.

지혜의 생각에 항상 머물러
선하고 선하지 않은 법 알고
최상승을 배우기 때문에
생각하는 지혜의 힘을 통달해
저 유정들의 마음을 안다.

나와 같이 긴긴 밤 동안
이 법을 배우기 때문에
승혜가 청정해져서
유정들의 마음 알고는
그들을 위해 바른 법 가르친다.

“또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이 승혜바라밀다의 미묘하고 청정한 광명의 법문과 또 성자들에 대해 바른 견해를 일으키고
부처님 말씀대로 그것을 수행하면, 두 가지 인연으로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
그 두 가지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남의 말소리를 얻는 것이요, 둘째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만일 보살로서 행과 상응하는 보살장의 정법은 듣지 못하고서 깊은 법률삼마지문을 조금 듣고 기뻐하여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증상만(增上慢)을 품고 악마의 그물 속에 떨어져 생로병사와 우비고뇌(憂悲苦惱) 및 수번뇌(隨煩惱)에서 다섯 종류의 욕락에 집착하여 윤회를 계속할 것이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저 유정들은 유루(有漏)를 따르므로 해탈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리자여, 만일 누구나 법사를 친근하여 이 정법을 듣고는 알고 죄를 짓지 않고 옳은 이익이 아닌 것을 멀리하면, 듣는 지혜를 늘리어 묘한 열반을 보고 청정하고 용맹하여 훌륭하고 묘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이런 보살마하살은 이 보살장 정법의 희유한 법률과 뛰어난 의리를 수지 독송하고, 나아가 광대한 가르침을 듣고 남을 위해 해설하여 상응한 행을 얻느니라.
또 사리자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보살장의 정법을 듣지 못하면 저 상응의 뜻을 얻지 못하리니, 성인의 도와 극히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여래께서는 저 유정들에게 노사에서 해탈하도록 항상 결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떤 것이 상응의 뜻인가? 이른바 이 보살마하살은 상응과 불상응을 멀리 떠나나니, 이것이 상응의 뜻으로서 상응의 뜻에서 덧말[增語]이 없게 되느니라. 또 보살의 상응의 뜻은 음향에서 일으킬 수 없는 것이며, 아라한도 낼 수 없다. 그러나 거기서 난 음향은 과거나 미래 어디서나 찾아보아도 마침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서 나서 어디로 사라지는가?
만일 과거를 통달한 말의 음향이면 과거는 이미 사라진 것이며, 만일 미래를 통달한 말의 음향이면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이요, 만일 현재를 통달한 음향이면 현재는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한 말이나 아직 하지 않은 말이나 당장 하는 말은 어디를 찾아보아도 다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상응의 뜻을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사리자여, 보살의 상응의 뜻을 이렇게 배운 사람은 또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가? 이른바 이 보살은 일체 법은 자성이 본래 멸한 것이라 관(觀)하고, 일체 법은 자체가 본래 고요한 것이라 관하며, 일체 법의 자성은 평등하다 관하고, 일체 법은 끝내 나지 않는다고 관하며, 일체 법은 끝내 일어나지 않는다 관하고, 일체 법은 끝내 모이지 않는다고 관하며, 일체 법은 끝내 멸함이 없다고 관한다. 이럴 때에는 여실히 관하는 것도 또한 관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관하는 것도 아니요 관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관찰의 뜻이라 하나니, 이렇게 배워야 한다.
만일 어떤 보살이 이 정법에서 의혹하고 우치하면 그것을 깨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 법은 해탈의 문이 아니라 하여 근면과 용기를 버려 통달할 마음을 내지 않아 그 뜻에 다 상응하지 않는다. 또 이 모든 법의 정견(正見)은 곧 여여견(如如見)이니, 곧 어떤 것을 모든 법은 여여견이라 하는가? 이른바 견해가 없는 것이니, 이같이 견해가 없으면 곧 덧말을 내지 않고, 덧말을 내지 않으면 쌓아 모으지도 않느니라. 어떤 것이 쌓아 모으지 않음인가? 이른바 덧말에 상대가 없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이로써 모든 행은 남도 없고 지음도 없다고 관찰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정견 가운데서 바른 출리를 얻는 것이다.
또 바른 출리의 행은 무엇이 그 원인이 되는가? 이른바 일체 법이 곧 불법이라는 것이니, 그러므로 바른 출리의 행을 구하고자 하면 이 보살장 정법의 뛰어난 의리를 수지하고
독송하며 듣고서 남을 위해 해설하고, 나아가 이 정법에서 상응의 뜻을 얻어야 하나니, 이것을 바른 출리행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여, 만일 보살이 승혜바라밀다행을 행할 때에는 이 미묘하고 청정한 광명의 법문을 바로 잘 깨치고 의처(意處)를 관찰하여 입해(入解)의 뜻을 낸다.
어떤 것이 의처이며, 어떤 것이 입해인가? 이른바 이 보살이 삼마지를 가지(加持)하는 곳이요, 비발사나(毘鉢舍那)를 관찰하는 곳이며, 최상의 바라는 곳이요, 마음으로 즐기는 곳이며, 상속해 끊이지 않는 곳이요, 덧없는 곳이며, 인연하는 곳이요, 반연해 생기는 곳이며, 나도 없고 사람도 없고 수자(壽者)도 없는 곳이요, 머무름도 없고 머무르지 않음도 없으며, 감도 없고 가지 않음도 없는 곳이며, 인과를 모으지도 않고 무너뜨리지도 않는 곳이며,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익히는 곳이요, 공ㆍ무상ㆍ무원이 취해지지 않는 곳이며, 삼마지(三摩地)와 삼마발저(三摩鉢底)가 취해지는 곳이니라.
삼마지와 삼마발저에 의지해서 발생하지 않는 곳이며, 신통의 지혜가 다 취해지는 곳이요, 번뇌가 다하지 않은 곳이며, 생명 없음을 관찰하는 곳이요, 상응한 행이 아닌 곳이며, 일체 유정의 나가 없음을 관찰하는 곳이요, 대비를 버리지 않는 곳이며, 모든 생(生)의 두려움을 보는 곳이요, 집착하는 마음이 있는 곳이며, 탐욕을 떠나는 곳이요, 현재 법을 탐하는 행을 떠나지 않는 곳이며, 5욕락을 버리는 곳이요, 법의 즐거움을 버리지 않는 곳이며, 모든 실없는 말을 떠난 곳이며, 선교한 방편을 버리지 않는 곳이니, 이런 모든 법은 다 입해(入解)를 낸다. 사리자여, 이것을 의처와 입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여, 저 의처를 왜 정리(正理)의 도라 하는가? 이른바 뜻이 곧 도이기 때문이요, 문(門)이 곧 도이기 때문이며, 입이 곧 도이기 때문이요, 인(因)이 곧 도이기 때문이요, 모음이 곧 도이기 때문이며, 서로 틀리지 않음이 곧 도이기 때문이요, 논쟁 없음이 곧 도이기 때문이며, 버림이 곧 도이기 때문이다.
들어감도 없고 들어가지 않음도 없음이 곧 도요,
실없는 말 없음이 곧 도이며, 비방함 없음이 곧 도요, 더하지 않음이 곧 도이며, 감하지 않음이 곧 도요, 남[生] 없음이 곧 도이며, 변함없음이 곧 도요, 다스릴 바 없음이 곧 도이며, 진여가 곧 도요, 실제가 곧 도이며, 여래가 곧 도요, 다름없음이 곧 도이며, 여여(如如)가 곧 도요, 3세가 평등함이 곧 도이다.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을 분별해 머무르지 않음이 곧 도요, 안계(眼界)ㆍ색계(色界)ㆍ안식계(眼識界)에 머무르지 않음이 곧 도이며, 이계(耳界)ㆍ성계(聲界)ㆍ이식계(耳識界)에 머무르지 않음이 곧 도요, 비계(鼻界)ㆍ향계(香界)ㆍ비식계(鼻識界)에 머무르지 않음이 곧 도요, 설계(舌界)ㆍ미계(味界)ㆍ설식계(舌識界)에 머무르지 않음이 곧 도이며, 신계(身界)ㆍ촉계(觸界)ㆍ신식계(身識界)에 머무르지 않음이 곧 도요,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에 머무르지 않음이 곧 도이며, 승의(勝義)에 따름이 도요, 바른 지혜에 따름이 도요, 요의계경(了義契經)을 따름이 곧 도요, 바른 법을 따름이 곧 도이기 때문이니, 사리자여, 이것을 정리의 도라 한다.
또 보살마하살은 정리의 도를 깨쳐 들어감으로써 관찰이 곧 관찰함이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관찰도 아니요 관찰 아닌 것도 아닌 것을 관찰의 뜻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상응하는 뜻으로 이 정법에 우치하고 어두우면 이 법은 해탈의 문이 아니라 하여 근면과 용기를 버리고 원기를 내지 않아 통달하는 바가 없어 그 뜻에 모두 상응하지 않는다. 또 저 유정들의 정견(正見)은 곧 여여견(如如見)이다. 또 어떤 것을 여여견이라 하는가? 이른바 견해가 없음이니, 견해가 없으면 곧 덧말을 내지 않으며……상대가 없나니……(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 보살장의 승혜바라밀다의 행을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또 뜻에 나[我]가 없으면 일체 법에도 나가 없고, 또한 일체 법에 나가 없으면 모든 유정들에게도 나가 없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 곧 관찰의 뜻이다.
또 윤회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가 평등하여 상응한다. 이와 같이 번뇌의 체성(體性)이 일체 법의 체성과 상응하지마는 상응과 불상응에 조금도 집착하지 않아야 관찰의 뜻에 훌륭한 이해를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 보살장과 완전히 상응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체 유정을 가지(加持)하여 버리지 않고 바른 법을 가지하여 어긋나지 않느니라.
사리자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상응의 뜻을 얻음이라 하며, 듣는 바의 상과 뜻을 알아 들어가는 것을 이렇게 관찰하면 저 여여한 견해와 승혜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또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이 승혜바라밀다행을 행할 때에는 승혜를 얻고 거기 머물면서 일체 유위법(有爲法)과는 함께 머물지 않기 때문에 무명 내지 노사(老死)와는 다 함께 머물지 않는다. 또 살가야견(薩迦耶見), 내지 본말(本末)의 62견(見)과 다 함께 머물지 않고, 세간의 8법이 헐거나 기리거나 다 함께 머물지 않으며, 5온(蘊)ㆍ12처(處)ㆍ18계(界) 내지 일체 반연(攀緣)과 다 함께 머물지 않는다.
또 만(慢)ㆍ증상만(增上慢)ㆍ사만(邪慢) 내지 20종류의 수번뇌와 다 함께 머물지 않으며, 또 상품(上品)ㆍ중품ㆍ하품에 있어서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내지 일체의 번뇌와 함께 머물지 않으며, 또 우치의 어두움과 눈병과 결박 등과 나아가 일체 비열한 법과 다 함께 머물지 않는다.
또 번뇌마(煩惱魔)ㆍ온마(蘊魔)ㆍ천마(天魔)ㆍ사마(死魔) 내지 일체 마업(魔業)과는 다 함께 머물지 않고, 나ㆍ사람ㆍ중생ㆍ수자ㆍ양자(養者)ㆍ사부(士夫)ㆍ보특가라ㆍ의생(意生)ㆍ
유동(儒童) 내지 일체 아견(我見)과 다 함께 머물지 않으며, 또 업장(業障)ㆍ번뇌장(煩惱障)ㆍ법장(法障)ㆍ견장(見障)ㆍ보장(報障)ㆍ지장(智障) 내지 일체 상속하는 습기(習氣)와 다 함께 머물지 않고, 또 서로 장애하는 사유 분별과 보고 듣고 깨닫고 하는 등 모든 얽맴과 다 함께 머물지 않는다.
또 탐욕과 보시, 계율 깨뜨림과 계율 지킴, 분노와 인욕, 게으름과 정진, 산란함과 선정, 나쁜 지혜와 좋은 지혜 내지 일체 바라밀다와 다스림의 있고 없음, 옳은 지혜와 그른 지혜 등 이런 것과는 다 함께 머물지 않고, 또 일체 치우친 과보와 상(常)과 무상, 선과 불선, 유죄와 무죄, 윤회와 열반 내지 일체 그릇된 다스리는 법과는 다 함께 머물지 않는다.
또 갖가지 불법, 갖가지 국토, 갖가지 유정과는 다 함께 머물지 않고, 또 세속과 승의(勝義), 지혜 있음과 지혜 없음, 내지 일체 유정의 결심하는 모양 등과는 다 함께 머물지 않으며, 또 뛰어난 지혜와 뛰어난 행과 유위의 체상(體相) 내지 일체의 심의식(心意識)을 두고 짓는 자와는 다 함께 머물지 않는다. 사리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승혜바라밀다행이니, 저런 한량없는 유위의 행법과는 다 함께 머물지 않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이 승혜바라밀다행을 행할 때는 보살장(菩薩藏)에 편히 머물면서 모든 법을 승혜로 가리어 결정하여 열 종류의 선교(善巧)를 얻는다. 열 종류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온(蘊)의 선교요, 둘째는 계(界)의 선교이며, 셋째는 영역[處]의 선교요, 넷째는 진리의 선교이며, 다섯째는 바른 앎의 선교요, 여섯째는 따름의 선교이며, 일곱째는 지식의 선교요, 여덟째는 보리분(菩提分)의 선교이며, 아홉째는 성스러운 도의 선교요, 열째는 연생(緣生)의 선교이니라.

어떤 것을 온(蘊)의 선교라 하는가? 이른바 이 5온은 물거품과 같고, 물 위의 거품과 같으며, 아지랑이와 같고, 파초와 같으며, 요술과 같고, 꿈과 같으며,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뜬구름과 같고, 거울 속의 형상과 같다.
이른바 색온(色蘊)이란 마치 물거품과 같나니, 저 물거품 속에는 나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으며, 사부(士夫)도 없고, 의생(意生)도 없으며, 유동(儒童)도 없는 것과 같다. 만일 세간의 체성(體性)이 이와 같다면 색온의 체성도 그럴 것이니, 이것을 색온의 선교라 하느니라.
이른바 수온(受蘊)이란 물 위의 거품과 같나니, 저 물 위의 거품 속에는 나ㆍ사람ㆍ중생ㆍ수자(壽者)ㆍ사부(士夫)ㆍ의생(意生)ㆍ유동(儒童) 등이 다 없으며, 만일 세간의 체성이 이와 같다면 수온의 체성도 그럴 것이니, 이것을 수온의 선교라 하느니라.
이른바 상온(想蘊)이란 마치 아지랑이와 같나니, 저 아지랑이 속에는 나ㆍ사람ㆍ중생ㆍ수자……가 다 없고, 이것을 상온의 선교라 하느니라.
이른바 행온(行蘊)이란 마치 파초와 같나니, 저 파초 속에는 나ㆍ사람ㆍ중생ㆍ수자……가 다 없고, 이것을 행온의 선교라 하느니라.
이른바 식온(識薀)이란 요술과 같나니, 저 요술 속에는 나ㆍ사람ㆍ중생ㆍ수자……가 다 없고, 이것을 식온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이 5온을 말하였는데, 곧 저 세간은 찰나 사이에 변하고 무너지는 형상이니, 만일 이 세간의 체성이 이렇다면 저 세간의 체성도 그럴 것이다. 그 체성은 어떤가? 이른바 괴롭고 무상한 체성이니, 저 온의 체성도 그와 같은 것이다.
사리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승혜바라밀다의 행으로서 모든 온의 선교를 잘 얻는 것이다.
또 어떤 것을 계(界)의 선교라 하는가? 이른바 지계(地界)가 곧 법계이지만
법계는 거친 상이 없고, 수계(水界)가 곧 법계이지만 법계는 부드러운 상이 없으며, 화계(火界)가 곧 법계이지만 법계는 뜨거운 상이 없고, 풍계(風界)가 곧 법계이지만 법계는 움직이는 상이 없다.
안식계(眼識界)가 곧 법계이지만 법계는 보는 상이 없고, 이식계(耳識界)가 곧 법계이지만 법계는 소리를 나타내는 상이 없으며, 비식계(鼻識界)가 곧 법계이지만 법계는 냄새를 맡는 상이 없고, 설식계(舌識界)가 곧 법계이지만 법계는 맛을 아는 상이 없으며, 신식계(身識界)가 곧 법계이지만 법계는 감촉을 깨닫는 상이 없고, 의식계(意識界)가 곧 법계이지만 법계는 관찰하는 상이 없다. 이와 같이 자체의 계와 법계는 둘도 아니요 다르지도 않느니라.
또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가 둘이 아니요 다르지도 않으며, 윤회계와 열반계가 둘이 아니요 다르지도 않고, 이 공계(空界)와 일체 법계가 둘이 아니요 다르지도 않나니, 성품이 공(空)하고 분별을 떠났기 때문에 둘이 아니요 다르지도 않다. 유위계를 깨쳐 들어가는 것이 곧 무위계를 깨쳐 들어가는 것이며, 나아가 한량없는 계를 이와 같이 가리고 결정하여 깨쳐 들어가는 것이라 한다. 사리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승혜바라밀다의 행에서 모든 계의 선교를 얻는 것이니라.
또 어떤 것을 영역[處]의 선교라 하는가? 이른바 이 눈의 영역[眼處]은 본래 공(空)이요,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영역도 본래 공으로서 거기에는 나도 없고 내 것[我所]도 없는 것이다. 저 보살이 이와 같이 눈의 체성 내지 뜻의 체성을 여실히 알면 그는 영역의 결택(決擇)이 없고 갖가지의 결택이 없으며 선(善)의 결택이 없어서 선과 불선의 법의 두 상에 굴리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영역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이 영역의 선교는, 이른바 눈의 영역과 물질의 영역이니, 이와 같이 눈으로 빛깔을 보고는
싫어해 버리는데 이렇게 싫어해 버리면 그것은 바른 행이 아니다. 또 저 귀의 영역과 소리의 영역, 코의 영역과 냄새의 영역, 혀의 영역과 맛의 영역, 몸의 영역과 감촉의 영역, 뜻의 영역과 법의 영역, 이와 같이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 싫증을 내는데, 이렇게 싫증을 내면 그것은 바른 행이 아니다.
또 보살은 성도(聖道)의 영역과 성도가 아닌 영역에 다 대비(大悲)를 쌓고 이루어 저 험난한 성도가 아닌 영역의 유정들로 하여금 성도에 머무르게 하겠거니와 그 성도의 영역에서도 버리지 않아야 한다. 사리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승혜바라밀다의 행으로 모든 영역의 선교를 얻는 것이니라.
또 어떤 것을 진리[諦]를 아는 선교라 하는가? 이 진리의 선교에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괴로움의 지혜와 모임의 지혜와 멸함의 지혜와 도(道)의 지혜이니라. 괴로움의 지혜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온(蘊)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괴로움의 지혜라 한다. 모임의 지혜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탐애를 모으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모임의 지혜라 한다. 멸함의 지혜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이미 난 것을 멸해 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멸함의 지혜라 한다. 도의 지혜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평등한 법에서 평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것을 도의 지혜라 한다. 만일 보살이 이 네 가지 진리에서 이와 같은 지혜로 유정을 성숙시켜 증득하지 않으면 이것을 진리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진리의 선교에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세속의 진리와 승의(勝義)의 진리와 상(相)의 진리이다. 세속의 진리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상상(想像)과 음성과 언어와 문자 내지 세간의 모든 행이니, 이것을 세속의 진리라 한다. 승의의 진리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마음에 반연하는 것이 없거늘 하물며 문자이겠는가? 이것을 승의의 진리라 한다. 상의 진리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모든 상이 한 상이요, 한 상은 상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상의 진리라 하느니라.
저 보살이 세속의 진리를 설명하기에 권태를 느끼지 않고,
승의의 진리에서 바른 행을 잃지 않으며, 상의 진리에서 상 없음을 따르면, 이것을 진실한 상이라 하며, 이것을 보살의 진리의 선교라 한다.
또 이 한 진리에는 두 가지가 없으니, 이른바 고요함의 진리이다. 이 진실한 한 진리가 평등과 불평등을 따라 진실하고 묘한 작용을 잘 굴리면 진리의 선교를 얻을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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