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불설대승보살장정법경(佛說大乘菩薩藏正法經) 36권
대승보살장정법경 제36권
서천 역경삼장 조산대부 시광록경 전범대사 사자사문 신 법호 등 한역
변각성 번역
11. 승혜바라밀다품 ④
“또 사리자여, 일체 유학(有學)인 아나함과 벽지불은 이 복행(福行)에서 먼저 이와 같이 훌륭한 마음을 내어야 물러나지 않는 일생보처(一生補處)가 되고, 다음에 부처가 될 것이다. 또 보살마하살은 여기서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 세존에 대해 수희(隨喜)하는 마음을 내고, 이 복행 가운데서 일체 선근에도 다 수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 부처님께 청해 묘한 법륜을 굴리시게 해야 할 것이다. 또 이 복행 가운데서 일체 보리의 선근을 다 함께 회향(回向)해야 한다.
아직 보리심을 내지 못한 자에게는 그것을 내게 하고, 이미 보리심을 낸 자에게는 보살은 그들을 위해 회향을 설명하며, 이양(利養)으로 빈궁한 이를 껴잡아 주고, 약품을 병자들에게 베풀어 주며, 겁내고 약한 자에게는 친근하여 가엾이 여겨 주고, 계율을 깨뜨리는 자는 법으로 보호해 주어 죄의 과보를 벗어나 열반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
화상 아사리를 부처님 세존처럼 존중하고 공양하여 법을 강하는 자리에서는 용맹 정진하며, 법사를 구해서는 백 유순(由旬)의 길이라도 일부러 가서 바른 법을 즐겨 듣되 염증을 내지 말고 설법하는 이에게는 바라는 것이 없이 항상 친근하여 공경하고 공양하되, 제 부모처럼 하여 권태를 내지 않아야 하느니라.
또 복행 가운데서 몸과 입과 뜻이 어지럽지 않아 온갖 허물을 떠나고, 부처님의 탐묘에 머물러서는 깨끗한 복을 거두고 모든 선근을 모아야 한다. 원만한 상호로 화신(化身)을 장엄하고, 온갖 입의 허물을 떠나 말의 업을 장엄하며, 승해(勝解)로 결정하여 한마음을 장엄하고,
유희 신통으로 부처님 세계를 장엄하며, 청정한 지혜로 법상(法相)을 장엄한다.
저 정법을 듣고는 모든 장애를 떠나 장애가 없게 되며, 설법하는 이를 기꺼이 칭찬하고, 그 설명한 법에는 집착도 내지 않거니와 무너뜨리지도 않나니, 이렇게 해탈 법문을 장엄하고, 동산 숲을 부처님과 스님에게 보시하나니, 이렇게 부처님의 보리수를 장엄하며, 온갖 선근을 심고 일체를 가엾이 여기며, 업혹(業惑)이 청정하여 생멸이 없게 되나니, 이렇게 보리도량을 장엄하느니라.
다함이 없는 원을 내고 온갖 진기한 노리개를 보시하여 원만하고 다함이 없는 보배스런 손을 얻으며, 눈살 찌푸림을 멀리 떠나 평등하기 손바닥 같으며, 일체를 즐겨 보시해 먼저 얼굴의 장엄을 얻어 저 유정들이 즐거이 바라보며, 빛이 깨끗하고 장엄한 장식을 유정들에게 보시하여 광명을 얻어 일체를 두루 비추며, 찬미한 말은 쌓은 습관 때문이 아니며, 계율과 복과 덕의 창고가 모두 깨끗하며, 인간이나 천상에 나서도 10선(善)의 도업(道業)이 다 청정하거니와 신통 변화도 또한 버리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며, 깊은 마음이 청정하고 평등하게 교화를 퍼 저 유정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최상의 법과 훌륭한 해행(解行)으로 힘을 따라 설명하여 일체 복행을 잘 거두어 받는다. 또 일체 지혜의 마음을 일으키고 일곱 가지 거룩한 재물을 갖추고 믿음을 먼저 행으로 삼아 일체 세간의 사랑과 공경을 받는다. 그러므로 결정코 가장 먼저 깨우치고 인도하여 일체의 불법과 온갖 선근을 원만하게 하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복행의 선교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보살의 지행(智行)의 선교라 하는가? 이른바 인연에서 지해(智解)를 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인연인가? 이른바 깊은 마음으로 아는 이를 따라 법회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즉 부지런히 좋은 벗을 구하고, 부처님의 지혜에 머물러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에는 머무르지 않으며, 논의사(論議師)에 대해 매우 믿음과 즐거움을 낸다. 그 설법하는 이는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고는 마음으로 만족하여 그 지혜를 아끼지 않고 계속해서 깊고 묘한 법을 연설하며, 그 법을 듣는 이는 그것을 위해 이렇게 법을 구함에 상응하면 곧 여기서 지행이 상응할 것이다.
어떤 것이 법을 구함에 상응한 것인가? 이른바 법사에게서 조그만 이치를 얻고는 초저녁과 새벽에 생각하고 가리고 헤아려 이런 것이 어째서 옳은 이치요, 그른 이치인가를 되풀이해 연구하면서도 나아가 마음에 얻음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장애를 떠나고 더러움이 없어 벗어나는 지혜를 얻고 진실한 행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매우 깊은 법과 광대한 법과 끝없는 법과 외도를 이기는 법에서 지혜의 앎이 통철하여 항상 광명을 놓으면서 가장 높이 나타나 마치 산봉우리보다 우뚝하다. 용맹 정진하면서 무거운 짐을 버리지 않고 뛰어난 행을 행하되 마음은 한 경계를 생각하며 즐겨 결심하여 두타행을 버리지 않으며, 항상 법의 즐거움을 즐기면서 세속행을 가지지 않고 세간을 뛰어넘는 법을 구하고는 기억하여 잊지 않고 성족(聖族)의 제자들에게 연설하면 그들은 다 기뻐한다. 좋은 인연으로 그들을 계도(啓導)하여 계율을 받들어 지니고 부끄러워함으로 장엄하여 부처님의 도로 나아가게 한다.
무명의 어두움에 덮인 모든 지혜 없는 자들은 모두 스스로 멀리 떠나 혜안(慧眼)이 청정하게 되며, 광대한 깨달음과 깊고 묘한 깨달음과 극히 묘한 깨달음과 관찰하는 지혜로 다시 잘 자타의 공덕을 분별하여 그 업보를 순숙하고 원만히 하며 청정하게 하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지행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지혜를 구하는 보살은 법사에게 네 가지 보시를 행하나니, 그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자작나무 껍질ㆍ종이ㆍ붓ㆍ먹 등과 묘한 법좌(法座)와
일체의 이양(利養)과 법집게찬(法集偈讚) 등이니, 이것이 네 가지이니, 지행(智行) 가운데서 성취하게 한다.
또 지행 가운데서 법사 앞에서 네 가지 수호(守護)를 성취해야 하나니, 그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몸을 수호하는 것이요, 둘째는 선(善)을 수호하는 것이며, 셋째는 장소를 수호하는 것이요, 넷째는 교화하는 대중을 수호하는 것이니, 이것을 네 가지라 한다. 또 지행 가운데서 다시 네 가지 무거운 짐을 성취하나니,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법과 지혜와 재물과 보리(菩提)이니, 이것을 네 가지라 한다.
또 지행 가운데서 다섯 가지 힘을 성취하나니, 이른바 첫째는 믿음의 힘이니 법을 잘 아는 것이며, 둘째는 정진의 힘이니 부지런히 많이 들음을 구하는 것이며, 셋째는 기억하는 힘이니 보리심을 잊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선정의 힘이니 일체 법에 결정코 평등한 것이며, 다섯째는 훌륭한 지혜의 힘이니 다시 많이 듣기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다섯 가지로서 지행 가운데서 원만하게 되는 것이다.
또 지행 가운데서 네 가지 계율을 성취하나니, 그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법을 진실히 하는 계율, 법을 부지런히 구하는 계율과 법을 결정하는 계율과 보리로 향하는 계율이니, 이것을 네 가지라 한다.
또 법을 부지런히 구하는 자는 지행 가운데서 네 가지 인내를 성취하나니, 그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악인이 와서 헐고 욕하더라도 보복하지 않고 좋은 말로 뉘우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바람ㆍ햇볕ㆍ추위ㆍ더위ㆍ주림ㆍ갈증 등을 잘 참는 것이며, 셋째는 화상 아사리가 바뀌더라도 잘 시봉하는 것이요, 넷째는 공ㆍ무상ㆍ무원의 세 가지 해탈문에서 큰 법인(法忍)에 머무르는 것이니, 이것을 네 가지라 한다. 또 네 가지 정진을 성취하나니,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많이 들음에 정진하는 것이요, 총지(摠持)에 정진하는 것이며, 변설(辨說)에 정진하는 것이요, 바른 행에 정진하는 것이니, 이것을 네 가지라 한다.
또 지행 가운데서
다시 네 가지 훌륭한 선정을 성취하나니, 이른바 상(相)을 떠난 고요함이요, 마음을 한 경계에 쏟는 것이며, 신통에 들어가는 선정이요, 부처님의 지견을 깨치는 것이니, 이것을 네 가지라 한다.
또 지행 가운데서 네 가지 법을 성취하나니, 그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모든 유(有)는 머무르지 않고, 자연의 성품이 아니며, 네 가지 인연이 생멸하는 것인데, 이것을 주재(主宰)가 없고, 오직 하나인 신해(信解)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네 가지 법이라 한다. 또 네 가지 방편을 성취하나니,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세간을 따라 변하는 것이요, 둘째는 경전을 따라 변하는 것이며, 셋째는 법을 따라 변하는 것이요, 넷째는 지혜를 따라 변하는 것이니, 이것을 네 가지라 하는데, 지행 가운데서 다 갖추는 것이다.
또 네 가지 걸림 없는 도를 성취하나니,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이른바 바라밀다(波羅蜜多)와 7보리분(菩提分)과 8성도(聖道)와 일체지지(一切智智)이니, 이것을 네 가지 걸림 없는 도라 한다. 또 네 가지 싫증 없음을 성취하나니,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이른바 많이 들으매 싫증이 없고, 변설에 싫증이 없으며, 심사(尋思)에 싫증이 없고, 지혜에 싫증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네 가지라 한다.
또 지행 가운데서 이와 같이 알고 보고는 다시 일체 유정과 일체 국토에 수순하는데, 즉 보시ㆍ계율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승혜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이다.
왜냐하면 사리자여, 나아가 모든 보살은 결정코 모든 지혜 가운데서 이 지견을 길잡이로 삼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이 지혜에 편히 머무르면 일체의 지행을 통달하고, 모든 부처님 위신의 호념(護念)을 받으며, 어떤 악마들도 그 틈을 타지 못하여 일체지지를 두루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리자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승혜바라밀다에서 지행의 선교를 얻는 것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보살의 염처(念處)의 선교인가?
보살의 염처에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몸으로 몸을 관찰하는 염처요, 둘째는 느낌으로 느낌을 관찰하는 염처이며, 셋째는 마음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염처요, 넷째는 법으로 법을 관찰하는 염처이다.
어떤 것이 몸으로 몸을 관찰하는 염처인가? 사리자여, 이 보살이 몸의 관찰을 닦을 때 몸의 과거를 관찰하고, 몸의 미래를 관찰하며, 몸의 현재를 관찰하되, 이 몸은 전도(顚倒)에서 났고, 인연을 따라 멸하는 것으로 움직임도 없고 지음도 없으며 제 성품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다.
비유하면 저 산림과 약초ㆍ종자 등과 같은 것이다. 즉 이것은 인연을 따라 났고, 또한 제 성품과 집착할 것도 없는 것이다. 또 이 몸은 장벽(墻壁)이나 와력(瓦礫)이나 초목이나 그림자와 같다. 이른바 온(蘊)ㆍ처(處)ㆍ계(界)는 집착할 것이 없고, 공(空)이며, 나와 내 것[我所]이 없고, 덧없으며 빨리 없어지고 견실하지 않으며, 뒤바뀐 법이요 싫어할 것이며, 견고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관찰하여 항상 즐겨 견고한 몸을 부지런히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래의 몸이니, 여래의 몸이란 이른바 법계의 몸이요 금강의 몸이며, 깨뜨릴 수 없는 몸이요 견고한 몸이며, 삼계(三界)에서 가장 훌륭하고 묘한 몸이다. 이러한 관(觀)을 닦을 때 알아야 하나니, 즉 범부의 몸은 추하고 무거우며, 더럽고 나빠 온갖 허물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 몸은 일체의 허물을 떠난 것이니, 그러므로 가장 묘한 여래의 몸을 얻어야 하느니라.
또 저 유정들의 몸을 관찰해야 한다. 즉 무엇으로 만들어져 끊임없이 상속하는가? 이른바 4대종(大種)과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만들어 유지하며, 습관의 공능은 한량없는 힘이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지계(地界)ㆍ수계(水界)ㆍ화계(火界)ㆍ풍계(風界)의 바깥 4대종에는 갖가지 문과 갖가지 곳과 갖가지 이름과 갖가지 모양과 갖가지 물질이 있어서 이로 말미암아
일체 유정들은 다 목숨을 유지하는 것처럼 몸의 4대종이 모이고 일어나는 것도 그와 같다. 즉 갖가지 문ㆍ갖가지 곳ㆍ갖가지 이름ㆍ갖가지 모양ㆍ갖가지 물질이 있어서 이로 말미암아 일체 유정들이 그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다.
별상(別相)으로 몸은 무상(無常)이라고 관찰하면서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별상으로 몸은 괴로운 것이라고 관찰하면서도 열반에 머물기를 즐겨 하지 않으며, 별상으로 몸은 무아(無我)라 관찰하면서도 유정의 교화를 버리지 않고, 별상으로 몸은 공적(空寂)한 것이라 관찰하면서 끝내 적멸(寂滅)이 없으며, 별상으로 몸은 멀리 떠날 것이라고 관찰하면서도 선법을 버리지 않나니, 그가 잘 이렇게 몸으로 관찰하면 그것은 견고하지 않고 사랑할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안 몸을 관찰하는 자는 번뇌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임을 알고, 바깥 몸을 관찰하는 자는 모든 번뇌가 함께 모이는 것이 아님을 아나니, 그리하여 청정한 몸의 업과 청정하고 장엄한 신상을 성취하여 하늘과 사람의 찬양을 받을 것이다. 사리자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몸으로 몸을 관찰하는 염처를 얻는 것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보살이 느낌으로 느낌을 관찰하는 염처라 하는가? 이른바 보살은 저 일체 고락 등에 대한 느낌을 지혜와 방편으로 잘 알아야 한다. 즉 모든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는 탐하는 뜻이 없고, 만일 나쁜 세계에서 괴로운 감촉을 느끼는 것을 보면 대비심(大悲心)과 무연식(無緣息)의 뜻을 일으키며, 고락의 감촉에 대해서는 무명이 없는 뜻으로 생각을 따라 그것을 잘 안다. 그리하여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로움도 아니요 즐거움도 아닌 것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살은 지혜와 방편으로 저 유정들을 혹은 성취시키고 혹은 멀리 떠나게 한다. 그러나 그 유정들은 거기서 떠나게 되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즐거움을 느끼면 따라서 즐거움을 주고,
그들이 괴로움을 느끼면 따라서 없애 주며,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님을 느끼면 일체지지를 따라 편안함을 얻게 하고, 묘하고 큰 방편으로 그들을 거두어 묘한 법을 말해 주어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편안함을 얻게 한다.
어떤 인연으로 이런 느낌을 말하는가? 선을 성취하면 즐거운 느낌이 있고, 불선을 저지르면 괴로운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여기서 나ㆍ사람ㆍ중생ㆍ수자 등에 대해 갖가지 느낌을 일으키나니, 이른바 잡으려는 느낌ㆍ가지려는 느낌ㆍ뒤바뀐 느낌ㆍ변계(遍計)의 느낌ㆍ나쁜 견해의 느낌ㆍ눈이라는 생각의 느낌 내지 뜻이라는 생각의 느낌, 물질이라는 생각의 느낌 내지 법이라는 생각의 느낌이며, 내지 눈의 접촉이 반연이 되어 생기는 모든 느낌이다. 간단히 말하면 나아가 안팎의 법에 대해 뜻의 접촉이 반연이 되어 생기는 모든 느낌이니, 이 가운데서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또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것을 느낌이라 하느니라.
또 그 전체 가운데에서 혹은 한 가지 느낌이 있으니, 이른바 한마음의 나타남이요, 두 가지 느낌은 안과 밖의 나타남이며, 세 가지 느낌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나타남이요, 네 가지 느낌은 4대(大)의 나타남이며, 다섯 가지 느낌은 5온(蘊)이 지은 뜻이요, 여섯 가지 느낌은 6처(處)의 여러 가지 추측이며, 일곱 가지 느낌은 7식(識)이 머무르는 곳이요, 여덟 가지 느낌은 8사(邪)의 상응이며, 아홉 가지 느낌은 9유정(有情)의 거처요, 열 가지 느낌은 10선업도(善業道)이며, 나아가 통틀어 말하면 모든 느낌은 갖가지 작의(作意)이니, 그러므로 유정도 한량없고, 느낌도 한량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 보살은 즐거운 느낌을 관찰할 때 모든 유정들이 생사의 경계에 머무름을 보면 그들로 하여금 지혜를 내게 하고 그들을 위해 선함과 선하지 않은 느낌을 가르치나니, 사리자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느낌으로 관찰하는 염처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보살이 마음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염처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보살은 비밀히 수호하여 바른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며, 이 마음을 관찰한다. 즉 그것은 빨리 생멸하여 형상과 머무르는 곳이 없고, 또 안에 있는 것도 아니요,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 내는 마음은 극히 미세한 마음의 모양을 멀리 떠나 그 방위와 분량을 얻을 수 없음을 안다. 이 마음이 모은 선근도 극히 미세하여 다 멀리 떠나고 또 방위도 분량도 없다. 또 이 마음을 보리로 회향하고, 스스로의 체상(體相)을 마음으로 아는 것이 없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 없으며, 마음으로 들어감이 없느니라.”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른바 보리심은 저 선한 마음과 작용하여 함께 행하지 않으며, 또 선근의 마음도 보리심과 함께 행하지 않고, 또 선근의 마음은 회향하는 마음과도 함께 행하지 않으며, 또 회향하는 마음은 보리의 마음과 선근의 마음과도 다 함께 행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관찰하면 놀람이나 두려움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매우 깊은 연기(緣起)를 얻어 인과를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법성의 마음은 곧 유정들의 법성이니,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인연에 도로 붙이면 움직임도 지음도 없고 또 주재(主宰)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저 복장(覆障)과 같아 함께 행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법성(法性)이며, 또 복장심(覆障心)인가? 법성의 마음이란 이른바 이곳에서 다 베풂이 없는 것이니, 만일 일체의 소유를 두루 회향하여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면 이것은 마음의 복장이며, 저 환화(幻化)와 같이 찰나 사이에 가장 고요해지면 이것을 법성의 마음이라 한다. 또 만일 모든 계율을 모아 일체의 빠른 신통에 회향하면 이것은 마음의 복장이며, 마치 몽상과 같이 끝내
모두 없어지면 이것을 법성의 마음이라 한다.
만일 인욕을 즐기는 힘, 내지 회향하여 장엄을 두루 덮으면 이것은 마음의 복장이며, 마치 아지랑이와 같아서 마침내 몸과 마음의 모양을 떠나면 이것을 법성의 마음이라 한다.또 만일 일체의 정진을 일으키고 회향하여 일체 불법을 원만히 하면 이것은 마음의 복장이요, 마치 물속의 달과 같아 잡을 수도 없고 보는 것도 없으면 이것을 법성의 마음이라 한다. 또 만일 일체의 선정ㆍ해탈ㆍ삼마지ㆍ삼마발저를 모든 부처님의 삼매에 회향하면 이것을 복장이라 하고, 빛깔도 봄도 상대도 나타남도 없으면 이것을 법성의 마음이라 한다.
또 만일 지혜로 분별하고 일체 청정한 글귀와 뜻을 설명하고 회향하여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원만히 하면 이것을 복장이라 하며, 갖가지로 시설하는 것을 법성의 마음이라 한다. 또 만일 선근에 간단이 있으면 이것을 복장이라 하며, 마음이 인(因)이 없이 생기면 이것을 법성의 마음이라 한다. 또 만일 보리분(菩提分)으로 인하여 법이 일어나면 이것을 복장이라 하고, 여섯 경계를 해탈하면 이것을 법성의 마음이라 하며, 또 만일 부처님의 경계에 단멸(斷滅)이 있으면 이것을 복장이라 한다.
사리자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마음을 관찰하는 행을 행할 때 신통에 편히 머무르면 그 신통을 한마음 속에 얻어 일체 유정의 마음의 향하는 바를 다 알며, 그것을 알고는 그 본성을 따라 설법한다. 또 대비(大悲)에 머무르면 그 대비를 얻어 일체 유정을 교화해 제도하되 권태를 느끼지 않고, 이 관행에서 이 마음을 가지하여 다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또 비록 생사의 경계에 들어가더라도 모든 얽맴을 끊어 없애고, 이 심념의 지혜를 일으키지 않고 모든 행법을 초월하나니, 이것은 일체의 성문이나 벽지불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마음에 편히 머무르게 되며,
나아가 일체 불법을 원만히 한다. 이 마음은 찰나 사이에 저 승혜와 평등하게 상응하여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결과를 성취하나니, 사리자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마음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염처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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