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43 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

by Kay/케이 2024. 7. 23.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100

 

 


법원주림 제100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100. 전기편(傳記篇)[여기에는 6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번역부(翻譯部) 잡집부(雜集部)
반야부(般若部) 흥복부(興福部) 역산부(歷算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듣건대, 9하(九河)의 흐른 자취는 독려하여 신령한 언덕[靈丘]에 쌓이고 4철(徹)의 바른 법도는 글로 써서 뭇 옥문[群玉]에 간직되었으며, 또한 청구자부(靑丘紫府)와 3황(皇)이 돌에 새긴 글들이 있고 녹검황승(綠檢黃繩)과 육갑영비경(六甲靈飛經)의 글자가 있지만, 어찌 여래께서 비밀히 간직하신 저 밝은 구슬[明珠]과 같고 모든 부처님께서 본받으신 저 맑은 거울[淨鏡]과 같을 수야 있겠는가. 녹야원(鹿野園)의 4제(諦)의 법과 룸비니[監毘尼]의 8장(藏)의 글을 향산(香山)의 거대한 힘인들 어찌 질수 있다 하겠으며 용궁에 있는 보배 상자 또한 헤아리지 못한다.
진실로 우리의 스승 석가모니는 덕의 근본이 깊게 뻗어서 스스로 3기(祇)의 처음에 심으셨고, 묘한 과위는 홀로 뛰어나서 1백 겁(劫)의 끝까지 이루셨기 때문이다. 법계(法界)를 통틀어서 지혜[智]가 되고 허공(虛空)을 다하면서 몸[身]이 되셨으므로 차라리 그 기(氣)는 두 가지 뜻(義)을 품수하고 그 도(道)는 만물(萬物)에 두루할 따름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몸은 계시지 않는 데가 없어서 그 수량은 규구(規矩)의 밖을 다하고, 지혜는 하지 않음이 없어서 그 작용은 사의(思議)의 표상이 끊어졌다. 사람들의 일로써는 측량할 수 없거늘 어찌 처소로써 논할 수 있겠으며, 삼계(三界)의 큰 스승이요 만고(萬古)에 홀로 뛰어난 분이신데, 나의 평범한 재주로써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주공(周公)이 지은 주례(周禮)ㆍ주악(周樂)과 공자가 술한 주역(周易)ㆍ시경(詩經)과 여사(予賜)의 언어와 상언(商偃)의 문학과, 더 나아가 좌원방(左元放)과 갈치천(葛稚川)과
하상공(河上公)과 주하사(柱下史)에 미친다 하더라도 이는 다같이 이 세상 안에서 몰아가는 것이거늘 어찌 이야기 꺼리나 되겠는가.
우리 함령(含靈)의 복이 다하여 법왕(法王)께서 가신 것인데, 드디어 발제하(跋提河) 언덕에서 머리를 북쪽으로 하여 열반하셨으니 춘추(春秋)는 80이었다. 응신(應身)을 낱알처럼 부수었으니 피를 흘리셨음을 무엇으로 따를 것이며 다투어 최후의 의심을 결단하고 임종(臨終)의 공양을 받들었다. 아아, 지혜의 횃불이요 인자한 구름이 소멸해 버렸으니, 오랜 세월 동안 모든 제자들은 참으로 슬퍼할 뿐이로다. 이제는 그 잘생긴 모습[相好]은 향단(香壇)에서 쳐다보고, 통발과 올가미[筌蹄]는 패엽(貝葉)에 기록되어 3장(藏)으로 받아 지니고, 4의(依)로 처지를 도우면서 우리 스승의 교풍(敎風)이 추락되지 않으니, 특히 이럴 것을 믿고 가셨으리라.
다만 정법(正法)이 상법[像法]으로 점차 옮기면서 온갖 정(情)이 거짓되고 경박하며, 사람은 옛과 지금으로 바뀌면서 말세의 운(運)에 이르렀을 뿐이다. 이미 북쪽에서 물러나 점차로 다시 동쪽으로 옮아 왔으니, 그런 까닭에 금인(金人)이 유장(劉莊:後漢의 明帝)의 잠자리에 꿈으로 나타났고 가섭마등(迦葉摩騰)이 채음(蔡愔)의 권유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남기신 교법을 한(漢)나라 땅에 유포하게 한다. 이것을 시초로 하여 지금까지 6백여 년이 되었다. 그로부터 뒤에 강승회(康僧會)와 축법호(竺法護)와 불도징(佛圖澄)과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잇달아 이 땅으로 와서 방등(方等)을 왕성하게 폈고, 드디어 도생(道生)ㆍ도안(道安)의 법려(法侶)와 혜엄(慧嚴)ㆍ혜관(慧觀)의 문도(門徒)들이 다 같이 명성을 버리고 벼슬을 하직하고서 집단으로 귀의하였다.
이에 황당(皇唐)에 이르렀을 때, 현장(玄獎) 법사는 그 덕이 고금에 우뚝하고 명성은 우주에 높았는데 150여의 나라를 널리 다니면서 경험을 한 후 경론 1,500 권을 번역하였으니, 착함과 아름다움을 다한 이요, 참으로 칭송하고 찬양할 만하다. 앞뒤의 보배로운 권축(卷軸)이 아마 5천 권에 이르러 법의 문이 널리 열리고 치도(緇徒)들이 번성하였으니, 승니와 속인들이 이익을 받았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젊어서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문전(文典)을 익혔고 뒤에는 황제(皇帝)와 노자(老子)의 현언(玄言)을 사모하였으나, 이는 모두가 고통의 바다를 초월하지 못하고 오히려 화택(火宅)에 빠져 있었으니, 참으로 영구하고 지대한 것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치심뿐이었다. 그리하여 전대(前代)의 맑은 티끌을 희구하고 군영(群英)의 먼
자취를 우러르면서 이 바른 길[正道]로 돌아와 스스로 빠진 진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본시 욕심을 여읜 일인(逸人)이요 삿됨을 꺾은 대장(大將)이라 했거니와 나는 이런 무리에 기꺼이 참여하게 되었으니,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이제 앞뒤로 번역한 경전을 나열하면, 통틀어 18대(代) 동안 내놓은 여러 경은 5천여 권이 되었으나 불법이 동쪽으로 유포된 뒤에 세 번이나 법의 파멸을 당하는 바람에 잃어버린 실역(失譯) 경본(經本)이 410부(部) 538권이나 되었다. 지금 여기에 열거한 바는 제왕(帝王)의 연대와 대소승(大小乘)의 경전과 부질(部帙)의 강요(綱要)만을 총괄하여 기술한 것이요, 구체적으로 사람과 법을 기록하는 일은 그의 기본 되는 곳에 맡겨 둔다. 그리고 고금의 승니와 속인으로서 영특하고 현명한 박학자(博學者)들이 내놓은 여러 저서는 아마 3천여 권은 될 것이다. 또 전후의 제왕으로서 크고 작은 복을 일으킨 이를 열거하였고, 또 부처님께서 염부제에 강림하신 연대와 시절을 간략하게 산출해 둔다. 이러한 간요(肝要)한 것을 아울러 그 뒤에 붙여 두노니, 장래의 현철한 분은 같이 보면서 기록을 넓혀 주기 바란다.

(2) 번역부(翻譯部)
가만히 살펴보건대, 상대(上代)에 경이 있으면서부터 어질고 덕 있는 이가 필기로 받아 적었으며 매양 헤아려야 할 말[度語]에 이르러서는 호어(胡語)를 한어(漢語)로 번역한 말이 아닌 것이 없었다. 또 동하(東夏) 9주(州)에서는 서역(西域)을 천축(天竺)이라 했는데, 이것은 전체를 부르는 이름으로서 혹은 신독(身毒)이라고도 했다. 마치 범어(梵語)로 이 나라를 지나(脂那) 진단(眞丹) 또는 진단(震旦)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것은 대개가 소리만을 따른 것이니, 초(楚)ㆍ하(夏)가 있을 뿐이다. 만일 한(漢)이라 한다면 한나라는 유씨(劉氏) 양대(兩代)의 하나의 국호로 그친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왕위를 다음 임금에게 물려주었다. 또 위(魏)와 진(晋)은 동일하지 않으므로 반드시 제왕(帝王)의 칭호에 의거하여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이제 이 기록에서는 모두 고쳐서 바르게 했다.
또 호(胡)나라의 여러 오랑캐는 바로 서방의 변두리에 사는 속된 무리들로 이 나라에서는 강(羌)ㆍ만(蠻)ㆍ이(夷)의 오랑캐 종족에 속하게 되거늘 어찌 경서(經書)에서 조차 호나라 말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천축에서 출생하셨는데, 그 국토에서는 선비의 종족[士族]과
바라문(婆羅門)이면 모두 범(梵)이라고 불렀다. 범이란 청정하다[淸淨]는 뜻이며 이들은 광음색천(光音色天)의 후예들이다. 그 광음천에서 천신들이 맨 먼저 내려온 것인데, 겁초(劫初)에 이곳으로 와서 지비(地肥)를 먹은 자로서 몸이 무거운 이들은 가지 못하고 그대로 사람이 되면서 그들의 본명을 따서 짐짓 범(梵)이라 일컬은 것이다. 언어와 글이 이미 하늘을 상징(象徵)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범서(梵書) 또는 범어(梵語)라 한 것이니, 마치 옛날에는 승려들을 모두 속성(俗姓)으로 부른 것과 같다.
석가(釋迦)라는 것은 진(秦)나라 때부터 생긴 것이다. 사문 석도안(釋道安)은 당시에 유독 빼어났고 뛰어나게 총명한 분인데 이렇게 말하였다.
“이미 머리를 깎고 옷을 물들여서 석가를 잇고 있으니, 아들이 비록 아버지와 다르다 하더라도 성(姓)은 다름이 없다. 이제 출가한 이들은 모두 석(釋)이라는 성을 써야 한다.”
그리고 4아함(阿含)을 번역하다가 과연 ‘4성(姓)이 출가하면 동일한 석종(釋種)이 되었다’는 것을 보고 대중들은 모두가 탄복하였다. 그 네 성이란 첫째는 찰제리(刹帝利)이니, 이들은 왕의 종족이다. 둘째는 바라문이니, 이들은 수행이 높은 사람들이다. 셋째는 비사(毘舍)이니, 이 나라의 평민들과 같다. 넷째는 수타(首陀)이니, 가장 낮은 이들이어서 이 나라의 종들과 같다. 그리고 도안은 바로 진(晋)ㆍ진(秦)의 시대에 목록(目錄)을 바르게 고치고 여러 경전에 주(注)를 내면서 스스로 미천(彌天)이라 부르며 말세의 본보기가 되었으나 오히려 ‘호어(胡語)를 진어(秦語)로 번역한다’는 말을 했으니, 이것 또한 곤륜산(崑崙山)의 한 개 조약돌이라서 아름다움을 다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위에서 ‘호나라 말’이라고 한 데만 있으면, 모두 범(梵)이라는 글자로 바꾸어 놓았다. 바라노니, 뒷날 학식이 높고 사리에 밝은 이들은 좋게 말을 하면서 그 바르고 진실함을 얻을 것이다.
후한조(後漢朝) 때에 이어서 역경(譯經)에 종사한 승려와 속인[道俗]은 12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률(經律) 등은 334부(部)[416권이며, 실역(失譯)한 경전은 125부 148권]이다.
전위조(前魏朝)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는 6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률 등은 13부[24권]이다.

남오(南吳) 손씨(孫氏)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와 속인은 4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과 전기 등은 148부[185권이며, 실역한 경전은 110부 291권]이다.
서진조(西晋朝)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와 속인은 13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과 계율[戒] 등은 451부[717권이며, 실역한 경전은 8부 15권]이다.
동진조(東晋朝)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와 속인은 27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과 전기 등은 263부[585권이며, 실역한 경전은 53부 56권]이다.
전진(前秦) 부씨(符氏)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는 8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과 전기 등은 40부[238권]이다.
서진(西秦) 걸복씨(乞伏氏)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는 1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은 14부[21권이며, 실역한 경전은 8부 11권]이다.
후진(後秦) 요씨(姚氏)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는 8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과 전기는 124부[662권]이다.
북량(北涼) 저거씨(沮渠氏)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와 속인은 8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과 전기 등은 32부[224권이며, 실역한 경전은 5부 17권]이다.
송조(宋朝)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와 속인은 23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과 전기는 210부[490권]이다.
전제조(前齊朝)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와 속인은 19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과 전기는 47부[346권]이다.
양조(梁朝) 때에 이어서 역경에 조사한 승려와 속인은 21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ㆍ율ㆍ전기 등은 97부[780권]이다.
후위(後魏) 원씨(元氏)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와 속인은 13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ㆍ논(論)ㆍ전(傳)ㆍ녹(綠) 등은 87부[302권]이다.

후제(後齊) 고씨(高氏)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와 속인은 2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ㆍ논은 7부[53권]이다.
후주(後周) 우문씨(宇文氏)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와 속인은 11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ㆍ논ㆍ천문(天文) 등은 30부[104권]이다.
진조(陳朝)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와 속인은 3인이며, 번역하여 낸 경ㆍ논ㆍ전기ㆍ소(疏) 등은 40부[347권]이다.
수조(隋朝) 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와 속인은 20여 명이며, 번역하여 낸 경ㆍ논 등은 90여 부[510여권]이다.
황조(皇朝)때에 이어서 역경에 종사한 승려들은 11명이며, 번역하여 낸 경ㆍ론 등은 2백여 부[1500여 권]이다.
또 여러 경ㆍ율ㆍ논으로서 전해진 것을 합하면 8백 부[3,361권에 5만 6,170장] 326질(帙)이다.
대승경(大乘經)의 첫 번째 번역은 2백 부[685권에 1만 1,042장] 66질이다.
대승경의 두 번째 번역은 202부[497권에 7,290장] 49질이다.
소승경(小乘經)의 첫 번째 번역은 108부[435권에 6,670장] 49질이다.
소승경의 두 번째 번역은 96부[114권에 977장] 6질이다.
소승률(小乘律)은 35부[274권에 5,813장] 28질이다.
대승론(大乘論)은 74부[502권에 9,130장] 52질이다.
소승론(小乘論)은 33부[676권에 1만 2,177장] 68질이다.

현성의 집전[賢聖集傳]은 49부[184권에 2,808장]18질이다.
(3) 잡집부(雜集部)
선원(仙苑)에서 성도(成道)를 알리고, 금하(金河)를 고요히 건너가 중생들에게 사랑을 펴고 어리석은 이들을 끌어들여서 근기를 따라 꾀를 베풀고 욕망을 따라 덕화를 펴면서 모조리 휘몰아 한번 교화하매 대천(大千)세계가 한데로 뭉쳤으니, 그 도(道)를 받은 이는 헐뜯기 어려웠고 그 종(宗)을 전한 이는 알기 쉬웠다.
드디어 동하(東夏)로 유포된 지 6백 년 동안에 나라말로 번역된 권수(卷數)는 5천이었고, 영특하고 준수한 승려와 속인들이 성인의 법을 가까이 하면서 낸 문기(文記)도 3천여 권이나 되었다. 불법을 장엄하여 성인의 가르침을 드날렸으니, 그 글은 빛나고 뜻은 깊어서 자못 묘하기 가관(可觀)이었다. 그러나 세월을 지나면서 있던 것은 없어지고 부질(部帙)은 흩어져서 떨어져 나갔으니, 비록 큰 수량이 있었다고 해도 부족한 데가 많았으므로 장안(長安)을 찾았을 적에는 수량이 줄어져서 겨우 천 권이 될까 말까 했다.
오직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는 바로 진(晋)나라 때에 혜원(慧遠) 법사가 지은 가람(伽藍)인데, 나라의 법도로 주관하고 유지함으로서 온갖 경전과 잡집(雜集) 등을 각각 따로따로 창고를 지어서 한데 보태어 안치하였다. 그리고는 일을 맡은 이가 견고하게 지키고, 금하여 관장함이 극히 엄격하여서 서로가 교대할 때는 받은 수량 그대로 전해 주었다는 말을 듣고, 가서 보매 과연 뒷날 법의 파멸을 염려해서 가르침을 온전하게 맡고 있었다. 이제 보고 들은 바의 것을 그대로 자세히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뒷날에 다시 더 있는 것을 보면 이 곳에 보충해 주기 바란다.]
『기사굴산해(耆闍崛山解)』[『승우록(僧祐綠)』에 있다.]
『중경목(衆經目)』
위의 2부는 서진(西晋) 사문 축법호(竺法護)가 냈다.
『즉색유현론(卽色游玄論)』
『변삼승론(辯三乘論)』
『석몽론(釋夢論)』
『성불변지론(聖不辯知論)』

『도행지귀(道行指歸)』
『본업사제서(本業四諦序)』
『본기사제서(本起四諦序)』
위의 7부 7권은 동진(東晋) 애제(哀帝) 때에 사문 지둔(支遁)이 지었다.[자(字)는 도림(道林)]
『비담지귀(毘曇指歸)』
위의 1권은 애제(哀帝) 때에 사문 축승건(竺僧虔)이 지었다.
『역유천축기전(歷游天竺記傳)』
위의 1권은 동진(東晋) 때에 평양(平陽) 사문 석법현(釋法縣)이 지었다.
『법성론(法性論)』
『명보응론(明報應論)』
『석삼보론(釋三寶論)』
『변심식론(辯心識論)』
『불경왕자론(不敬王者論)』
『사문단복론(沙門袒服論)』
『불영찬(佛影讚)』
『묘법연화경서(妙法蓮華經序)』
『수행방편선경서(修行方便禪經序)』
『삼법도론서(三法度論序)』
『대지도론서(大智度論序)』
『대지도론요약초(大智度論要略鈔)』 20권
『문대승중심의십팔과(問大乘中深義十八科)』[아울러 구마라집(鳩摩羅什)법사의 답도 있다.]
위의 13부 총 35권은 진(晋)의 효무제(孝武帝)와 안제(安帝) 때에 여산(廬山) 사문 석혜원(釋慧遠)이 지었다.
『신무형론(神無形論)』
위의 1권은 동진(東晋) 때에 양도(楊都) 와관사(瓦官寺) 사문 석승부(釋僧敷)가 지었다.

『유마힐경자주(維摩詰經子注)』 5권
『궁통론(窮通論)』
위의 2부6권은 진(晋)의 효무제(孝武帝) 때에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사문 석담선(釋曇詵)이 지었다.[이 분은 혜원(慧遠) 법사의 제자이다.]
『인물시의론(人物始義論)』
위의 1권은 진(晋)의 성제(成帝) 때에 사문 석법창(釋法暢)이 지었다.
『고일사문전(高逸沙門傳)』
위의 1권은 진(晋)의 효무제(孝武帝) 때에 염동(剡東) 앙산(仰山) 사문 석법제(釋法濟)가 지었다.
『입본론(立本論)』 9편(篇)
『육식지귀(六識指歸)』 12수(首)
위의 2권은 진(晋)의 효무제(孝武帝) 때에 형주(刑州) 상명사(上明寺) 사문 석담미(釋曇微)가 지었다.
『마명보살전(馬鳴菩薩傳)』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제바보살전(提婆菩薩傳)』
『실상론(實相論)』[구마라집(鳩摩羅什) 법사 주(注)]
위의 4권은 진(晋)의 안제(安帝) 때에 천축국(天竺國) 구마라집(鳩摩羅什) 법사가 짓고 번역하다.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불진공론(不眞空論)』
『물불천론(物不遷論)』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
위의 4권은 진(晋)의 안제(安帝) 때에 경조(京兆) 사문 석승조(釋僧肇)가 지었다.
『석박론(釋駁論)』
위의 1권은 진(晋)의 안제(安帝) 때에 사문
석도상(釋道常)이 지었다.
『선불수보론(善不受報論)』
『불무정토론(佛無淨土論)』
『응유연론(應有緣論)』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
『불성당유론(佛性當有論)』
『법신무색론(法身無色論)』
『이제론(二諦論)』
위의 7권은 송조(宋朝) 초에 용광사(龍光寺) 사문 석축도생(釋竺道生)이 지었다.
『삼보기(三寶記)』 20권
『정주자(淨住者)』 20권
『선명험(宣明驗)』 3권
『잡의기(雜義記)』 20권
위의 4부 63권은 제(齊)의 사도(司徒)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 소자량(簫子良)이 지었다.
『승천달성론(承天達性論)』
『원혼지(寃魂志)』 2권
『계살훈(誡殺訓)』 1권
위의 3부는 제(齊)의 광록대부(光祿大夫) 안지추(顔之推)가 지었다.
『술승중식론(述僧中食論)』 1권
위의 1부는 남제(南齊)의 심휴문(沈休文)이 지었다.
『명상기(冥祥記)』 10권
위의 1부는 제(齊)의 왕염(王琰)이 지었다.
『출삼장집기(出三藏集記)』 16권
『법원집(法苑集)』 15권
『홍명집(弘明集)』 14권
『세계기(世界記)』 10권
『살바다사자전(薩婆多師資傳) 5권

『석가보(釋迦譜)』 4권
『대집등삼경기(大集等三經記)』
『현우경기(賢愚經記)』
『집삼장인연기(集三藏因緣記)』
『율분오부기(律分五部記)』
『경래한지사부기(經來漢地四部記)』
『율분십팔부기(律分十八部記)』
『십송율오백나한기(十誦律五百羅漢記)』
『선견율비바사기(善見律毘婆沙記)』
위의 14부 72권은 양조(梁朝) 때에 양주(楊州) 건안사(建安寺) 사문 석승우(釋僧祐)가 지었다.
『중경요람법게(衆經要覽法偈)』 21수(首)
위의 1권은 양(梁)의 무제(武帝) 때에 사문 석도환(釋道歡)이 지었다.
『기신론소(起信論疏)』 2권
위의 1부는 양(梁)의 태청(太淸) 4년에 진제(眞諦) 법사가 냈다.
『중경요초일부병목록(衆經要抄一部幷目錄)』
위의 1부는 양제(梁帝)의 칙명으로 장엄사(莊嚴寺)의 사문 석승민(釋僧旻) 등이 정림상사(定林上寺)에서 지어서 출간했다.
『화림불전중경목록(華林佛殿衆經目錄)』 4권
위의 1록(錄) 4권은 양제(梁帝)의 칙명으로 안락사(安樂寺)의 사문 석승소(釋僧紹)가 지었다.
『경률이상일부병목록(經律異相一部幷目錄)』 55권
『명승전병서목(名僧傳幷序目)』 31권
『중경공성승법(衆經供聖僧法)』 5권
『중경목록(衆經目錄)』 4권
『중경호국귀신명록(重經護國鬼神名錄)』 3권
『중경제불명(衆經諦佛名)』 3권[16년에 출간]

『중경옹호국토제용명록(衆經擁護國土諸龍名錄)』 1권
『중경참회멸죄법(衆經懺悔滅罪法)』 3권
『출요율의(出要律儀)』 20권
위의 9부 122권은 양제(梁帝)의 칙명으로 장엄사(莊嚴寺)의 사문 석보창(釋寶唱) 등이 지었다.
『대반열반경자주(大般涅槃經子注)』 70권
위의 1부 70권은 양조(梁朝) 때에 건안사(建安寺)의 사문 석혜명(釋慧明)이 주(注)를 냈다.
『의림(義林)』 80권
위의 1부 80권은 양(梁)의 간문제(簡文帝)의 칙명으로 개선사(開善寺)의 사문 석지장(釋智藏) 등 20명의 대덕(大德)이 지었다.
『내전박요(內典博要)』 40권
위의 1부 40권은 상동왕기실(湘東王記室)의 우효경(虞孝敬)이 지은 것으로 자못 황람유원(皇覽類苑)과 같은 종류이다. 뒤에 출가하여 이름을 혜명(慧命)이라 하였다.
『고승전십사권병목록(高僧傳十四卷幷目錄)』
위의 1부는 양조(梁朝) 때에 회계(會稽) 가상사(嘉祥寺)의 사문 석혜교(釋慧皎)가 지었다.
『벌마소(伐魔詔)』 1권
위의 1부는 양조(梁朝) 때에 승회(僧會)가 지었다.
『전법륜론(轉法輪論)』 180권
위의 1부 180권은 양조(梁朝) 때에 칙명으로
대덕(大德)과 학사(學士)들이 함께 지었다.
『바라문천문(婆羅門天文)』 20권
위의 1부 20권은 양(梁)의 무제(武帝) 천화(天和) 연간에 마륵국(摩勒國) 사문 석달마류지(釋達摩流支) 법사가 번역하여 냈다.
『대품경자주(大品經子注)』 50권[혹은 1백 권]
위의 1부는 양(梁)의 무제(武帝)가 주(注)를 냈다.
『법보련벽(法寶連壁)』 2백 권
위의 1부는 양(梁)의 간문제(簡文帝) 소강(蕭綱)이 황태자로 있을 적에 몸소 내경(內經)을 열람하고 과역(科域)을 지휘하여 모든 학사(學士)로 하여금 엮어 쓰게 한 것이며, 이어서 편성한 책으로 같은 화림편략(華林遍略)이 있다.
『경사탑사기(京師塔寺記)』
위의 1부는 양조(梁朝) 때에 상서(尙書) 병부랑중(兵部郞中) 겸 사학사신(史學士臣) 유구(劉璆)가 칙명으로 지었다.
『신불멸론(神不滅論)』 1권
위의 1부는 양조(梁朝) 때에 정도자(鄭道子)가 지었다.
『바수반두전(婆藪槃豆傳)』 1권
『번외국어(翻外國語)』 7권
『중경통서(衆經通序)』 2권
위의 3부 10권은 서천축(西天竺) 우선니국(優禪尼國) 삼장법사(三藏法師) 구나라(拘那羅)[진(陣)나라 말로 번역하여 진제(眞諦)라 한다.]가 번역하여 냈다.
『낙양지가람기(雒陽地伽籃記)』 5권
위의 1부 5권은 원위(元魏) 때에 업도(鄴都)의
기성군수(期城郡守) 양현지(楊衒之)가 지었다.
『오명론(五明論)』[성명(聲明) 의방(醫方) 공교(工巧) 주술(呪術) 인명(因明)]
위의 다섯 가지 논(論)은 위(魏)의 명제(明帝) 때에 파두마국(波頭摩國)의 삼장율사(三藏律師) 양나발타라(攘那跋陀羅)가 사나야사(闍那耶舍)와 같이 장안(長安)의 옛 성[舊城]에서 번역하였다.
『주중경요(周衆經要)』 22권
『일백이십법문(一百二十法門)』
위의 2부 23권은 위(魏)의 승상(丞相) 왕우문(王宇文)과 흑태명(黑泰命)과 사문 석담현(釋曇顯) 등이 지었다.
『석노자화호전(釋老子化胡傳)』
『십팔조난도장(十八條難道章)』
위의 2권은 주조(周朝) 때에 신주(新州) 원과사(願果寺)의 사문 석승면(釋僧勔)이 지었다.
『산화론(散華論)』 8권
위의 1부 8권은 주조(周朝) 때에 양주(楊州)의 서현사(栖玄寺) 사문 석혜선(釋慧善)이 지었다.
『지도론(至道論)』
『순덕론(淳德論)』
『견집론(遣集論)』
『불살론(不殺論)』
『거시비론(去是非論)』
『수공론(修空論)』
『영유론(影喩論)』
『법계보인명(法界寶人銘)』
『염식상문(厭食想文)』
『승애보살전(僧崖菩薩傳)』
『소법사전(韶法師傳)』
『험선지식전(驗善知識傳)』
위의 12부 12권은 주조(周朝)의 무제(武帝) 때의
사문 석망명(釋亡名)이 지었다.
『삼보집(三寶集)』 11권
위의 1부 11권은 주조(周朝)의 무제(武帝) 때에 사문 석정애(釋靜藹)가 모든 경전에 의거하여 지었다.
『삼교론(三敎論)』
위의 1권은 주조(周朝)의 무제(武帝) 때에 사문 석도안(釋道安)이 지었다.
『소도론(笑道論)』 3권
위의 1부 3권은 주조(周朝) 무제(武帝)의 칙명으로 전에 사예(司隸)를 지낸 모극(母極) 백견란(伯甄鸞)이 불교와 도교(道敎)의 두 교를 저울질하면서 지었다.
『주고조문난불법(周高祖問難佛法)』 2권
위의 1부 2권은 주(周)의 무제(武帝)가 전에 승려였던 업도(鄴都)의 임도림(任道林)과 같이 논의(論議)하면서 무제의 칙명으로 지었다.
『왕씨파사론(王氏破邪論)』 1권
위의 1부 1권은 주(周)의 무제(武帝) 때에 전에 사문이었던 상주(相州)의 왕명광(王明廣)이 위원숭(衛元嵩)이란 이가 불법을 파괴하는 일에 대항하는 글이다.
『안민론(安民論)』 12권
『도신론(陶神論)』 10권
『인과론(因果論)』 2권
『성적기(聖迹記)』 1권
위의 4부 25권은 수조(隋朝) 때에 상주(相州) 대자사(大慈寺)의 사문 석영유(釋靈裕)가 지었다.
『대근기행잡록집(對根起行雜錄集)』 36권
『삼계위별록집(三階位別錄集)』 4권

위의 2부 40권은 수(隋)의 초에 서경(西京)의 진적사(眞寂寺) 사문 석신행(釋信行)이 지었다.
『중경목록(衆經目錄)』 7권
위의 7권은 수조(隋朝)의 개황(開皇) 14년에 대흥선사(大興善寺) 사문 석법경(釋法經) 등 20인의 대덕(大德)들이 칙명을 받들어 지었다.[양화사(量化詞)의 석승목(釋僧穆)과 일엄사(日嚴寺) 사문 언종(彦琮)이 구역(區域)과 조목을 나누어 자세히 말한 것을 모아서 엮었다.]
『십종대승론(十種大乘論)』 1권
위의 1부는 수(隋)의 대흥선사(大興善寺) 사문 석승찬(釋僧璨)이 지었다.
『논장(論場)』 31권
위의 1부 31권은 수(隋)의 대흥선사(大興善寺) 사문 성도(成都)의 석승곤(釋僧琨)이 지었다.
『범성육행법(凡聖六行法)』 20권[또한 10권ㆍ7권ㆍ5권ㆍ3권 및 1권으로 된 것도 있다.]
위의 1부 무릇 46권은 수(隋) 창주(滄州)의 빼어난 사문 석도정(釋道正)이 지었다.
달마급다전(達摩笈多傳) 4권
『통극론(通極論)』 1권
『변교론(辯敎論)』 1권
『변정론(辯正論)』 1권
『통학론(通學論)』 1권
『선재동자제지식론(善財童子諸知識論)』 1권
『신역경서(新譯經序)』 1권
『복전론(福田論)』 1권
『승관론(僧官論)』 1권
『서역현지(西域玄志)』 10권

위의 10부 22권은 수조(隋朝) 때에 일엄사(日嚴寺) 사문 석언종(釋彦琮)이 지었다.
『술석도안지도론해(述釋道安智度論解)』 24권
『존폐론(存廢論)』 1권
『상학론(傷學論)』 1권
『염수론(厭修論)』 1권
위의 4부 27권은 수조(隋朝) 때에 장안(長安) 사위사(舍衛寺)의 사문 석혜영(釋慧影)이 지었다.
『정이전(旌異傳)』 20권
위의 1부 20권은 수조(隋朝) 때에 상주(相州)의 수재(秀才) 유림랑(儒林郞) 후군소(候君素)가 문황제(文皇帝)의 칙명을 받들어서 지었다.
『통명론(通命論)』 2권
위의 1부 2권은 수조(隋朝) 때에 진왕부(晋王府) 제주(祭酒) 서동경(徐同卿)이 지었다.
『내외방통비교수법(內外傍通比較數法)』 1권
위의 1권은 수조(隋朝) 때에 번경학사(翻經學士) 경양(涇陽)의 유빙(劉憑)이 지었다.
『개황삼보록(開皇三寶錄)』 15권
위의 1부 15권은 수조(隋朝) 때에 번경학사(翻經學士) 성도(成都)의 비장방(費長房)이 지었다.
『중경법식(衆經法式)』 10권
위의 1부 10권은 수(隋)의 개황(開皇) 15년에 문제(文帝)의 칙령으로 유사(有司)가 지었다.
『번경법식론(翻經法式論)』 10권

『제사비명(諸寺碑銘)』 3권
위의 2부 13권은 후수(後隋)의 번경사문(翻經沙門) 석명칙(釋明則)이 지었다.
『서내법(序內法)』 1권
『내훈(內訓)』 1권
위의 2권은 후수(後隋)의 번경사문 석행거(釋行炬)가 지었다.
『향성감로(香城甘露)』 5백 권
위의 1부 5백 권은 후수(後隋)의 칙명으로 혜일도량(慧日道場)의 사문 석지과(釋智果)와 유사(有司)가 함께 지었다.
『삼덕론(三德論)』 1권
『입도방편문(入道方便門)』 2권
『경유론(鏡喩論)』 1권
『무애연기(無礙緣起)』 1권
『십종독경의(十種讀經儀)』 1권
『무진장의(無盡藏儀)』 1권
『발계연기(發戒緣起)』 2권
『법계도(法界圖)』 1권
『십불퇴론(十不退論)』 1권
『예불의식(禮佛儀式)』 1권
위의 10부 12권은 대당(大唐) 때에 서경(西京)의 연흥사(延興寺)의 사문 석현완(釋玄琬)이 지었다.
『파사론(破邪論)』 1권
『변정론(辯正論)』 8권
위의 2부 9권은 당조(唐朝) 때에 종남산(終南山)의 용전사(龍田寺) 사문 석법림(釋法琳)이 지었다.
『석의론(析疑論)』 1권
『속시원영화(續詩苑英華)』 10권
『주금강반야경(注金剛般若經)』 1권

『제경강서(諸經講序)』 1권
위의 4부 13권은 당조(唐朝) 때에 서경(西京) 기국사(紀國寺)의 사문 석혜정(釋慧淨)이 지었다.
『내덕론(內德論)』 1권
위의 1부 1권은 당조(唐朝) 때에 문하전의(門下典儀) 이사정(李師政)이 지었다.
『변량삼교론(辯量三敎論)』 3권
『선관사전론(禪觀四銓論)』 10권
위의 2부 13권은 당조(唐朝) 때에 경사(京師) 서명사(西明寺)의 사문 석법운(釋法雲)이 지었다.
『주승니계본(注僧尼戒本)』 2권[소기(疏記) 4권]
『주갈마(注羯磨)』 2권[소기(疏記) 4권]
『행사산보율의(行事刪補律儀)』 3권
『석문정행참회의(釋門正行懺悔儀)』 3권
『석문망물경중의(釋門亡物輕重儀)』 1권
『석문장복의(釋門章服儀)』 1권
『석문귀경의(釋門歸敬儀)』 1권
『석문호법의(釋門護法儀)』 1권
『석씨보략(釋氏譜略)』 1권
『성적견재도찬(聖迹見在圖贊)』 1권
『불화동점도찬(佛化東漸圖贊)』 2권
『석가방지(釋迦方志)』 2권
『고금불도론형(古今佛道論衡)』 4권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 10권
『속고승전(續高僧傳)』 30권
『후집속고승전(後集續高僧傳)』 10권
『광홍명집(廣弘明集)』 30권
『동하삼보감통기(東夏三寶感通記)』 3권
『서명사록(西明寺錄)』 1권
『감통기(感通記)』 1권
『기원도(祇洹圖)』 2권
『유법주지감응(遺法住持感應)』 7권
위의 22부 117권은 대당(大唐) 때에 서명사(西明寺) 사문 석도선(釋道宣)이 지었다.
『선림초기(禪林鈔記)』 30권
위의 1부는 서경(西京) 홍복사(弘福寺)의 사문 회은(會隱)과 서명사(西明寺)의 사문 현칙(玄則) 등 10인이 대당(大唐) 인덕(麟德) 2년 칙명을 받들어서 북문(北門)의 서룡문(西龍門) 수서소(修書所)에서 온갖 경전을 요약하여 골라서 뽑아냈다.
『주금강반야사위국(注金剛般若舍衛國)』 2권
위의 1부 2권은 당조(唐朝) 인덕(麟德) 2년에 서명사(西明寺)의 사문 현칙(玄則)이 주(注)를 냈다.
『대당서역전(大唐西域傳)』 12권
위의 1부 12권은 당조(唐朝) 때에 서경(西京) 대자은사(大慈恩寺)의 사문 현장(玄獎)이 칙명을 받들어서 지었다.
『법원주림』 1백 권

『제경요집(諸經要集)』 20권
『대소승선문관(大小乘禪門觀)』 10권
『수계의식(受戒儀式)』 4권
『예불의식(禮佛儀式)』 2권
『대승략지관(大乘略止觀)』 1권
『변위현진론(辯僞顯眞論)』 1권
『경복론(敬福論)』 3권
『사분율토요(四分律討要)』 5권
『사분율니초(四分律尼鈔)』 5권
『금강반야집주(金剛般若集註)』 3권
위의 11부 154권은 당조(唐朝) 때에 서경(西京) 서명사(西明寺)의 사문 석도세(釋道世)[자(字)는 현휘(玄惲)]가 지었다.
『대당중경음의(大唐衆經音義)』 20권
위의 1부 20권은 당조(唐朝) 때에 서경(西京) 대자은사(大慈恩寺)의 사문 석현응(釋玄應)이 지었다.
『주신번능단금강반야(注新翻能斷金剛般若)』 1권
『주이제삼장성교서(注二帝三藏聖敎序)』 1권
위의 2권은 당조(唐朝) 서경(西京) 보광사(普光寺)의 사문 석현범(釋玄範)이 지었다.
『서경사기(西京寺記)』 20권
『사문법림별전(沙門法琳別傳)』 3권
『사문불경록(沙門不敬錄)』 6권
위의 3부 29권은 당조(唐朝) 때에 서경(西京)
홍복사(弘福寺)의 사문 석언종(釋彦琮)이 지었다.
『주반야심경(注般若心經)』 1권
위의 1권은 당조(唐朝) 때에 무시극(武侍極)[자(字)는 민지(愍之)]이 주(注)를 냈다.
『주열반경(注涅般經)』 40권
위의 40권은 당조(唐朝) 때에 변주자사(辯州刺史) 이현진(李玄震)이 주를 냈다.[이 분은 영공(英公)의 아우이다.]
『중천축행기(中天竺行記)』 10권
위의 1부 10권은 당조(唐朝) 때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왕현책(王玄策)이 지었다.
『서역지(西域志)』 60권
『도화(圖畵)』 40권
위의 2부 도합 1백 권은 당조(唐朝) 인덕(麟德) 3년에 칙령을 받들어서 백관(百官)들이 지었다.
『명보기(冥報記)』 2권
위의 1부는 당조(唐朝) 영휘(永徽) 연간에 이부상서(吏部尙書) 당림(唐臨)이 지었다.
『명보습유(冥報拾遺)』 2권
위의 1부 2권은 당조(唐朝) 때에 중산랑(中山郞) 여령(餘令)[자(字)는 원휴(元休)]이 용삭(龍朔) 연간에 지었다.
『육도론(六道論)』 10권
위의 1부 10권은 당조(唐朝) 때에 좌위장사(左衛長史) 겸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양상선(陽尙善)이 지었다.
『현상론(顯常論)』 2권
위의 2권은 당조(唐朝) 때에 이현기(李玄冀)가 지었다.
『변진론(辯眞論)』 1권
위의 1권은 당조(唐朝) 때에 원만경(元萬頃)이 지었다.

『귀심록(歸心錄)』 30권
위의 30권은 우위위록사(右威衛錄事) 소선자(蕭宣慈)가 지었다.

(4) 반야부(般若部)
『대반야경(大般若經)』 범본(梵本) 20만송(萬頌)을 번역하여 6백 권으로 편성(編成)하였다.[합하면 4처(處) 16회(會)가 있으며, 자은사(慈恩寺) 현장(玄獎) 법사가 번역하였다.]
제1회(會)는 왕사성(王舍城) 취봉산(鷲峰山)에 계시면서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13만 3,600송(頌)이다. 이를 번역하여 4백 권 79품(品)으로 편성하였다.[단역(單譯)이다.]
제2회도 왕사성 취봉산에 계시면서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2만 5천 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78권 85품으로 편성하였다.[중역(重譯)이다.] 대품(大品)ㆍ방광(放光)ㆍ광찬(光讚)의 3본(本)에 해당되며, 총 80권이다. 이번의 번역은 78권으로 범본에 의거하여 동일하게 편성하였다.
제3회도 왕사성 취봉산에 계시면서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1만 8천 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59권 31품으로 편성하였다.[단역이다.]
제4회도 왕사성 취봉산에 계시면서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8천 송이다.이를 번역하여 18권 29품으로 편성하였다.[중역이다.] 소품(小品)ㆍ도행(道行)ㆍ신도행(新道行)ㆍ명도(明渡)의 4본에 해당된다. 이번의 번역은 18권으로 범본에 의거하여 동일하게 편성하였다.
제5회도 왕사성 취봉산에 계시면서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4천 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10권 24품으로 편성하였다.[단역이다.]
제6회도 왕사성 취봉산에 계시면서 설하셨으니, 범본으로 2,500송이다.이를 번역하여 8권 17품으로 편성하였다.[중역이다.] 승천왕반야(勝天王般若)에 해당된다.
제7회는 실라벌(室羅筏) 서다림급고독원(誓多林給孤獨園)에 계시면서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8백 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2권 무품(無品)으로 편성하였다.[중역이다.] 문수반야(文殊般若)에 해당된다.
제8회도 실라벌 서다림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4백 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1권 무품으로 편성하였다.[단역이다.]
제9회도 실라벌 서다림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3백 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1권 무품으로 편성하였다.[중역이다.] 금강반야(金剛般若)에 해당된다.
제10회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왕궁 마니보장전(摩尼寶藏殿) 위에 계시면서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3백 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1권 무품으로 편성하였다.[단역이다.]
제11회는 실라벌 서다림급고독원에 계시면서 보시바라밀다[施婆羅蜜多]를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2천 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5권 무품으로 편성하였다.[단역이다.]
제12회도 실라벌
서다림급고독원에 계시면서 계율[戒]바라밀다를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2천 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5권 무품으로 편성하였다.[단역이다.]
제13회도 실라벌 서다림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인욕[忍]바라밀다를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4백 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1권 무품으로 편성하였다.[단역이다.]
제14회도 실라벌 서다림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정진[勤]바라밀다를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8백 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2권 무품으로 편성하였다.[단역이다.]
제15회는 왕사성 취봉산에 계시면서 선정[定]바라밀다를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8백 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2권 무품으로 편성하였다.[단역이다.]
제16회는 왕사성 죽림원(竹林園)의 백로지(白鷺池) 곁에 계시면서 지혜[慧]바라밀다를 설하셨으니, 범본으로는 2,500송이다. 이를 번역하여 8권 무품으로 편성하였다.[단역이다.] 이 16회의 서(序)는 장안(長安) 서명사(西明寺)의 사문 현칙(玄則)이 지었다.

(5) 흥복부(興福部)
석가의 가르침이 진단(振旦)으로 와서 깨우치고 구제함이 지극하여서 막힘 없이 통하고, 더러움을 떨쳐버려 깨끗이 되었다. 그 동안의 서응(瑞應) 등은 자세히 엮어 앞에서 알렸거니와 여기서는 서너 가지 조목을 기술하여 후학(後學)에게 바친다. 옛날의 선비들은 가서 가르침을 찾되 뜻은 대승(大乘)에 있었는데, 서역(西域)을 출발하려 할 적에 장애가 있었다. 그것은 경을 불에다 던졌으나 경의 몸은 타지 않고 불이 도리어 꺼진 것이다. 드디어 동쪽으로 이 땅에 도달하였으니, 바로 『방광경(方廣經)』이 그 경이다. 또 『담무참(曇無讖)』이 『열반경(涅槃經)』을 얻어서
양토(凉土)에 이르렀을 적에, 도둑이 밤에 몰래 훔치러 들어오긴 했으나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머리 조아리며 사죄를 하였다. 또 주무(周武)가 법을 파멸시킬 적에 불상을 헐고 경은 불에 태웠는데, 그 장경(藏經)이 서로 잇닿으면서 위로 올라가다가 문득 허공 끝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을 모두가 보았었다. 이러한 일들은 너무도 많아서 자세히 기록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가르침을 넓히는 것은 사람에게 있으니 나라가 근본이 되어서 사람들은 출가시키고 절을 세우며 불상을 그리고 경을 번역하는 등, 그 시대에 따라 찾아보아야 한다. 그 때문에 불교를 창성하게 하고 밝게 한 내력을 서술하게 되었는데, 한(漢)과 위(魏) 이후에는 진실로 만족할 만하게 드러내거나 알릴 것이 없으므로 진(晋)ㆍ송(宋)부터 지금까지를 대략 순서를 매겨 본다.
진(晋)의 세조(世祖) 무황제(武皇帝)[크게 불사(佛事)를 넓히고 가람(伽藍)을 널리 지었다.]
진(晋)의 혜제(惠帝)[흥복사(興福寺)를 지었고 항상 1백 명의 승려에게 공양했다.]
진(晋)의 민제(敏帝)[장안(長安)에다 통령사(通靈寺)와 백마사(白馬寺) 등 두 군데의 절을 지었다.]
- 서진(西晋)의 2경(京)에 있는 절을 합치면 180개소(個所)였고, 경은 13인이 73부(部)를 번역했으며, 승니(僧尼)의 수는 3,700명이었다. -
진(晋)의 중종(中宗) 원제(元帝)[강좌(江左)에 와관사(瓦官寺)와 용궁사(龍宮寺) 등 두 군데의 절을 지었고, 단양(丹陽)에서 1천의 승려를 출가시켰다.]
진(晋)의 숙종(肅宗) 명제(明帝)[흥황사(興皇寺)와 도량사(道場寺) 등 두 군데의 절을 지었고 의학(義學)에 1백의 승려를 모았다.]
진(晋)의 현종(顯宗) 성제(成帝)[중흥사(中興寺)와 녹야사(鹿野寺) 등 두 군데의 절을 지었고 의학에 1천의 승려를 모았다.]
진(晋)의 태종(太宗) 간문제(簡文帝)[불상을 조성하고 승려를 출가하게 했으며 절을 세웠고 장간(長干)에 목탑(木塔)도 세웠다.]
진(晋)의 열종(烈宗) 무제(武帝)[황태(皇泰) 초에 본기사(本起寺)를 세웠다.]
- 동진(東晋)의 104년 동안에 세운 절은 1,768군데였고, 경은 27명이 263부를 번역했으며, 승니의 수는 2만 4천 명이었다. -
송(宋)의 고조(高祖) 무제(武帝)[입으로는 범본(梵本)을 독송하고 손으로는 『계경(戒經)』을 베꼈다. 영근사(靈根寺)ㆍ법왕사(法王寺) 등 네 군데의 절을 지었고 항상 1천의 승려에게 공양했다.]

송(宋)의 태종(太宗) 명제(明帝)[1장(丈) 8척(尺)의 금상(金像)을 조성하고 해재(解齋) 때에는 부처님 사리(舍利)의 감응이 있었다. 홍보중사(弘普中寺)를 지었고 명승(名僧)을 청했다.]
송(宋)의 태조(太祖) 문제(文帝)[재(齋)를 받들고 살생하지 않았으며, 선령사(禪靈寺)를 지었고, 항상 1천의 승려에게 공양했다.]
- 송조(宋朝) 때에는 절이 도합 1,913개소였고, 경은 1,10부를 번역했으며, 승니의 수는 3만 6천 명이었다. -
제(齊)의 태조(太祖) 고제(高帝)[손으로는 『법화경(法華經)』을 베끼고 입으로는 『반야경(般若經)』을 독송했다. 4월 8일에는 항상 금불상을 조성하고, 7월 15일에는 널리 절에서 우란분회(盂蘭盆會)를 베풀면서 3백 명의 승려에게 공양했다. 척기사(陟屺寺)와 지관사(止觀寺) 등 두 군데의 절을 지었다.]
제(齊)의 세조(世祖) 무제(武帝)[소현사(昭玄寺)와 유현사(游賢寺) 등 두 군데의 절을 지었고, 3백 명의 승려에게 3교(敎)로 국량을 연구하고 4년 동안 정(定)을 가르치게 했다.]
제(齊)의 고종(高宗) 명제(明帝)[일체경을 베끼고, 1천의 불상을 조성하며 입으로는 『반야경』을 독송하고 항상 『법화경』을 지녔다. 귀의사(歸依寺)를 지었고 선승(禪僧)을 소집하였으며, 항상 6재(齋)를 지녔다.]
- 제조(齊朝) 때에는 절이 도합 2,015개소였고, 경은 72부를 번역했으며, 승니의 수는 3만 2,500명이었다. -
양(梁)의 고조(高祖) 무제(武帝)[오시론(五時論)을 지어서 사방에다 전했다. 광택사(光宅寺)와 동태사(同泰寺) 등 다섯 군데의 절을 지었고 항상 1천의 승려에게 공양했으며, 국내에 널리 6재일(齋日)과 8계(戒)를 지니게 했다.]
양(梁)의 태종(太宗) 간문제(簡文帝)[자경사(慈敬寺)와 보은사(報恩寺) 등 두 군데의 절을 지었고, 피를 뽑아서 스스로 반야(般若) 10부를 베꼈으며, 원이 끝나는 날에는 먹지도 않고 재를 지냈다. 『집기(集記)』 2백여 권과 『법보연벽(法報連壁)』 2백여 권을 지었다.]
양(梁)의 중종(中宗) 원제(元帝)[천거사(天居寺)와 천궁사(天宮寺) 등 2개소의 절을 지었고, 1천의 승려에게 공양하였으며, 스스로 『법화경(法華經)』과 『성실론(成實論)』을 강했다.]
- 양조(梁朝) 때에는 절이 도합 2,846개소였고, 경은 248부를 번역했으며, 승니의 수는 8만 2,700명이었다. -
양의 선제(宣帝)
양의 명제(明帝)
- 위의 두 황제는 사직(社稷)을 중흥(中興)시킨 이다. 형주(刑州)에 천황사(天皇寺)와 척기사(陟屺寺)와 대명사(大明寺) 등 여러 사찰을 지었다. 강릉(江陵)에서 정사를 보았으며, 그 하나의 주(州)에 있던 불사만 해도 108개소였고, 승니의 수는 3,200명이었다.

진(陳)의 고조(高祖) 무제(武帝)[양주(楊州)에 동안사(東安寺)와 흥황사(興皇寺)와 천거사(天居寺) 등 네 군데의 절을 지었고, 온갖 경 12장(藏)을 베꼈으며, 금동의 불상 1백만 구(軀)를 조성하고 7천 명을 출가시켰으며, 옛 절 32개소를 수리했다.]
진(陳)의 세조(世祖) 문제(文帝)[50의 장경을 베끼고 승니 2천 명을 출가하게 하였으며, 옛 절 60개소를 수리했다.]
진(陳)의 고종(高宗) 선제(宣帝)[양주(楊州) 금중(禁中)에 태황사(太皇寺)와 7급(級) 목탑을 세웠다. 또 숭황사(崇皇寺)를 짓고 찰간(刹竿)의 높이 15장(丈) 아래에 부처님의 손발톱을 안치했다. 금불상 2만여 구를 조성하고 옛 절 50여 개소와 옛 불상 130만 구를 수리하였으며 12의 장경을 베끼고 1만 명을 출가시켰다.]
- 진조(陳朝) 때의 다섯 황제 44년 동안에 절은 1,232개소가 있었고, 국가에서 새로 지은 절이 1,700개소요, 관(官)에서 지은 절이 68개소이며 성곽(城郭) 안의 큰 절도 3백여 개소가 있었다. 승니의 수는 3만 2천 명이었고 경은 11부를 번역하였다. 여지도(輿地圖)에서 이르되 “양(梁) 무제(武帝)가 도읍한 옛터에 7백여의 사찰이 있었던 것을 후경(候景)이 난(亂)을 일으켜 다 불에 태웠으나 진(陳)나라가 나라와 백성을 통일한 뒤에는 절을 모두 수리하고 지붕을 새로 이었으며, 우뚝 솟은 탑(塔)들은 별처럼 벌려 있어서 마치 연(輦)이 거동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경전과 불상의 풍부함도 말로는 다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
위(魏)[원씨(元氏)]의 태조(太祖) 도무황제(道武皇帝)[오랑캐 땅에다 15급(級)의 탑을 세웠다. 또 개태사(開泰寺)와 정국사(定國寺) 등 두 군데의 절을 지었고 온갖 장경을 베꼈으며 1천의 금불상을 조성했다. 그리고 3백의 승려들이 매월 법회에 모였다.]
위(魏)의 고종(高宗) 문성제(文成帝)[불교를 거듭 부흥시키고 석문(釋門)도 다시 열었으며 무릇 승니를 3만 명이나 출가시켰다.]
위(魏)의 현조(顯祖) 헌문제(獻文帝)[초은사(招隱寺)를 지었고 좌선승(坐禪僧)을 소집했다.]
위(魏)의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업(鄴)에 안양사(安養寺)를 짓고는 사방의 승려들을 소집했으며, 6궁(宮)의 시녀(侍女)들까지도 3장재월(長齋月)과 6재일(齋日)을 지니게 했다. 달마다 불상을 조성했고 사람들을 놓아주며 출가하게 했다. 손에서 경전을 놓지 않고 늘 읽으면서 반드시 외우고야 말았다. 또 선황(先皇)을 위하여 재차 대행(大行)을 다스리면서 공양을 베풀었고 승니 1만 4천 명을 출가하게 했다.]
위(魏)의 세종(世宗) 선무제(宣武帝)[식건전(式乾殿)에서 스스로 『유마경(維摩經)』을 강했고, 보통사(普通寺)ㆍ대정사(大定寺)등 네 군데의 절을 지었으며 항상 1천의 승려에게 공양을 했다.]
위(魏)의 숙종(肅宗) 효명제(孝明帝)[업(鄴)에 대각사(大覺寺)를 지었다.]
위(魏)의 경종(敬宗) 효장제(孝莊帝)[다섯 개의 정사(精舍)를 지었고, 1만의 석불상을 조성했다.]

서위(西魏)의 무제(武帝)[장안(長安)에 척기사(陟屺寺)를 지었고 2백의 승려에게 공양을 했다.]
위(魏)의 문제(文帝)[반야사(般若寺)를 지었고 빈궁한 이들에게 재물을 주었으며, 입으로는 『법화경』을 외우고 몸으로는 부처님의 계율을 지녔다.]
- 원위(元魏)는 17인의 제왕이 17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국가의 큰 절이 47개소가 있었으며, 북대(北臺)에는 항상 돌을 조각하여 감실(龕室)을 두었다. 동쪽 30리에는 왕공(王公) 등의 절이 839개소가 있었고 백성들이 세운 절도 3만여 개소나 있었으며, 총 출가한 승니의 수는 2백여만 명이었고 경은 49부를 번역하였다. 불교가 동쪽으로 유포된 이래 여기서 가장 흥성하였으나, 오직 태무(太武) 때에 사도(司徒) 최호(崔皓)의 아첨을 하는 말을 신용하여 바른 교를 파멸시켰으므로 7년 간이나 깊이 숨어버렸다. 뒷날 거짓 아첨한 것임을 알고 최씨를 죽인 뒤에 도로 불교를 회복시켰으니, 그 광명은 예전보다 더 빛났다. -
제(齊)의 고조(高祖) 문선황제(文宣皇帝)[등극하자마자 선(禪)을 닦았고 명조(明稠) 선사에게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기내(畿內)에서는 육식(肉食)을 끊고 술을 금했으며 매를 놓아주고 그물을 없앴다. 또 천하에 도살(屠殺)을 금했고 3장재월(長齋月)과 6재일(齋日)을 백성들에게 권하여 지키게 했으며, 공사(公私) 간에 훈신초(薰辛草) 또한 제거시켰고 8천 명을 출가하게 했다.]
제(齊)의 숙종(肅宗) 효명제(孝明帝)[선황(先皇)을 위하여 12장경(藏經) 도합 3만 8,047권을 베꼈고 3천여 명을 출가하게 했다.]
제(齊)의 세조(世祖) 무성제(武成帝)[보탑(寶塔)을 조성하였고, 『대품경(大品經)』을 독송했다.]
- 고제(高齊)의 여섯 군주 28년 동안에 황가(皇家)에서 세운 절이 43개소였고, 경은 14부를 번역하였으며, 출가시킨 사람들은 위(魏)나라와 맞먹었다. -
주(周)의 효명제(孝明帝)[선황(先皇)을 위하여 직성상(織成像)과 높이 2장(丈) 6척(尺)의 등신단상(等身檀像) 12구와 모든 시위(侍衛)하는 상(像)을 조성했다.]
주(周)의 태조(太祖) 문제(文帝)[장안(長安)에다 추원사(追遠寺)와 척호사(陟岵寺)와 대승사(大乘寺) 등 여섯 군데의 절을 세웠고 1천 명을 출가하게 했다. 또 다섯 군데의 절을 지었고 실(實) 선사를 공양했다.]

주(周)의 효선제(孝宣帝)[부처님 해를 거듭 빛나게 했고 소상(素像)과 4감(龕)의 1만여 구를 조성했으며, 『반야경』 3천 권을 베꼈고 6재일(齋日)과 8계(戒)를 항상 넓히면서 끊이지 않았다.]
- 주나라 때 우문씨(宇文氏)의 다섯 황제 25년 동안에 절은 도합 931개소였고, 경은 16부를 번역했다. 효민황제(孝愍皇帝)가 나라를 처음으로 세워서 오래되지 않은 동안까지는 불법을 열심히 닦느라고 조금도 겨를이 없었는데, 고조(高祖) 신무황제(神武皇帝)가 3보(寶)를 믿지 않다가 이 세상에서 중병(重病)의 과보를 받았다. -
수(隋)의 고조(高祖) 문황제(文皇帝)[개황(開皇) 3년에 주조(周朝) 때의 폐사(廢寺)들을 모두 일으켜 세웠고 명산(名山) 아래에 각각 절을 세웠으며, 1백여 주(州)에는 사리탑(舍利塔)을 세웠다. 승니의 수는 23만 명이었고 세운 절은 3,792개소였으며, 경은 46장(藏) 13만 2,086권을 베꼈다. 옛 경전도 3,853부를 고쳤으므로 불상은 10만 6,580구를 조성했으며 그 밖에 따로 조성한 것은 자세히 알 수조차 없다.]
수(隋)의 양제(煬帝)[효문황제(孝文皇帝)와 헌황후(獻皇后)를 위하여 장안(長安)에다 두 군데의 선정(禪定)과 두 군데의 목탑(木塔)과 따로 절 열 군데를 세웠으며, 관(官)에서 10년 동안 공양을 바쳤다. 옛 경전 612장(藏) 2만 9,172부를 고쳤고, 옛 불상 10만 1천 구를 수리했으며, 새 불상 3,850구를 조성했다. 출가한 승니의 수는 6,200명이었다.]
- 수대(隋代) 두 군주의 47년 동안에 절은 3,965개소가 있었고 출가한 승니의 수는 23만 6,200명이 있었으며, 경은 82부를 번역했다. -
대당(大唐) 고조(高祖) 태무황제(太武皇帝)
요(堯)를 빼앗아 진(晋)을 앉히고 무왕(武王)을 계기로 주(周)의 터전이 잡혔듯이 구름이 일고 용이 올라서 이 백성들을 어루만져 세상을 호령하자, 한 임금[一王]을 좇으면서 운(運)을 일으키고 9합(合)으로 인하여 기꺼이 추대(推戴)되셨다. 스스로 뒤섞인 터를 일으켜 경실(京室)을 정해 놓고, 세상을 사랑하는 규칙(規則)을 벌써 공표하고 약속한 법의 교시(敎示)를 바로 펴셨다. 아울러 5성(星)을 모으고 교화가 사방에 미치자 땅은 벼리[網]가 도로 바르게 되고 하늘은 바[維]가 새롭게 고쳐지니, 동쪽으로부터 서쪽에 이르기까지 멀리까지 평안하고 가까이도 숙연해졌다.
그리고 정의의 기치를 들어서 처음부터 지휘하매 지나가는 길마다 화려한 그림자로 변했으며, 망사(望祀)의 영단(靈壇)에서는
많은 복을 구하고 신사(神祠)의 오른편에는 가람(伽藍)을 삼가 지었다. 이야말로 영선(靈仙)이라 하겠는데, 그 묘함은 신제(神製)와 같았으니, 고운 색채가 서로 비치고 아름다운 글귀로 장식되었다. 또 화관(畵觀)의 낭떠러지에는 비스듬이 궁궐이 임하고 화당(華堂)에는 수목이 높이 솟고 무성하여서 가까이에 연봉(蓮峰)을 대하고 있었으며, 불상을 조성하고 경을 써서 복을 닦았다. 또 경내(京內)에는 회창사(會昌寺)와 승업사(勝業寺)와 자비사(慈悲寺)와 증과사(證果寺)의 네 절과 선니사(仙尼寺) 등이 모여 있었다.
또 옛날에 살던 집은 흥성사(興聖寺)로 바뀌었고, 아울러 주(州)에는 의흥사(義興寺)를 지었으니, 그 당우(堂宇)들은 다 같이 웅장하고 미려하며 불상은 아름다운 조각으로 이루어졌다. 무덕(武德) 원년에는 주작문(朱雀門)의 남쪽으로 사람들이 통행하는 길거리 위에 널리 도량(道場)을 세워서 무차회(無遮會)를 베풀자 법려(法侶)들이 많이 모임은 마치 취령(鷲領)이 처음 열렸을 때와 같고 명빈(名賓)들이 훌륭함은 마치 학림(鶴林)에 처음 모여드는 이들과 같아서 수레와 말이 몰아 닥쳐 사녀(士女)들과 수레로 온통 매웠으니, 다투어 선지(禪枝)를 덮어 가림은 마치 계제(禊祭)의 음복을 다투는 것 같았다.
또 태조(太祖) 원황제(元皇帝)와 원정황후(元貞皇后)를 위하여 전단(栴檀)으로 만든 등신상(等身像) 3구(軀)를 조성하되 9(九)ㆍ5(五)의 신비한 위의를 꾀하고 4(四)ㆍ8(八)의 영묘한 형상을 본땄으니, 조각한 칼의 장식은 이미 우전왕(優塡王)보다 열등함이 있지만 도금의 빛남은 실로 사닉왕(斯匿王)에게 부끄럼이 없었다. 또 그 해의 중춘(仲春)의 달에는 사문(沙門) 49명에게 명하여 궁내로 들어와 도(道)를 행하게 하니, 드디어 천궁(天宮)에서 설한 범어(梵語)의 메아리가 재차 자미(紫微)에 흘렀고 왕역(王域)에 대한 비전(秘典)의 음성이 다시 황옥(黃屋)에 드날렸었다. 그 뒤로부터는 그 숭고한 믿음이 더 떨어지는 때가 없었다.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
태역(太易)ㆍ태초(太初)의 기운[氣]을 받고 천황(天皇)ㆍ천제(天帝)의 신령함을 의뢰하여 깊숙한 방에서 고양(高陽)의 기초를 열고 아름다운 터에서 중화(重華)의 사업을 구상하매 붉은 광명이 문 안으로 흘러들고 자줏빛 기운은 하늘을 찔렀다. 얼굴[龍顔]ㆍ가슴[鳳臆]의 형모와 이마[日角]ㆍ턱[月懸]의 길조(吉兆)와 눈[河目]ㆍ입[海口]의 기이함과 위가 풍요하고 아래가 예리한 기특한 상(相)들을 두루 다 갖추었다. 그는 뛰어나게 총명함은 진상(眞相)을 꿰뚫어 보았으므로
미래를 알고 과거를 감추었으며, 깊은 이치를 탐구하여 미묘함에 들어서 정신을 궁구하고 성품(性品)을 다하셨다.
무릇 그 천수(天授)의 바탕은 저절로 되었건만 지난날에는 본래부터 갖춘 덕을 숨기고 있다가 천하에 경륜(經綸)을 편 것이다. 수(隋)나라의 판도가 바뀌고 안팎이 산산이 붕괴되면서 불은 곤봉(崑峰)을 태우고 물은 창해(滄海)까지 날 적에 모두는 사슴을 쫓는 뜻이 되었고 저마다 국호(國號)의 잘못이란 태도를 보였다. 황하(黃河)에 도읍한 이래로 용과 독사 등이 쓰러져 죽고, 중원(中原)의 땅에서는 옥과 돌이 다 함께 타게 되자, 드디어 땅의 거죽과 하늘이 드리움이 다투어 내소(來蘇)의 한탄을 있게 하였고 수도(首都)와 중요한 구역에서는 사람들이 저축(杼軸)의 슬픔을 일으키게 되었다.
우리 황제(皇帝)는 제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 그래서 하늘이 책봉(冊封)하는 명(命)을 받아 9오(伍)를 갖추 편성하여 6군(軍)을 모두 통솔하매 마치 기와가 부서지고 얼음이 녹으며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하지 않음이 없었고, 개선(凱旋)의 노래와 포로를 바치되 더불어 공(功)을 논함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리하여 벌써 요사스런 기운을 떨어버려서 구우(區宇)가 하나로 평정되고 고조(高祖)의 엉긴 정신[凝神]이요 육성(毓聖)의 닫는 생각[馳想]이어서 고요한 산수(山水)의 경치 밖이었다. 지나간 날의 만방(萬方)의 혼란과 괴로움은 백신(百神)에 대한 잘못된 제사였으나 뛰어나게 밝은 고풍(高風)을 굽혀서 물에 빠진 온 천하 백성을 건져 주었으니, 백성들은 재조(再造)의 덕을 입었고 만물은 재성(裁成)의 은혜를 짊어졌다.
실로 황옥(黃屋)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창생(蒼生)에 대한 염려를 몰래 품고 있었으니 때문에 양위(讓位)에 대한 생각은 늘, 마음 속에서 잊음이 없었고 짊어진 짐을 풀겠다는 뜻은 하는 일마다 분명히 나타났었다. 제교(禘郊)를 의탁할 수 있음을 기뻐하고 종사(宗祀)에 주인이 있음을 기원하면서 때를 고찰하고 날을 간택하여 대보(大寶)를 소양(少陽)에게 전하였으니, 스스로의 지능을 살펴 두 마음을 품은 태자를 어루만져 드디어 3선(善)을 좇아 만국(萬國)을 바르게 하였으므로 천하는 거듭 보력(寶歷)을 열어 제도가 쇄신되고 새나라가 되었다. 적현(赤縣)에 임하면서 크게 장엄을 맹세하고 백성을 무마하면서 널리 이익을 일으켰으니, 4등(等)의 해가 열리면서 두루 요(堯)의 구름을 비추었고 6도(度)의 바람을 드날리면서 한껏 순(舜)의 비가 내렸다.
정관(貞觀) 원년 헌춘(獻春)의 달에는 조서를 받고 온 경내(京內)의 덕행 있는 중승(衆僧)들이 다 같이
내전(內殿)으로 들어와서 각각 7일을 채웠으니, 유사(有司)들은 공양 준비에 온 정성을 다했었다. 3년이 되어서 황제는 그 해의 곡식이 익지 않을 것을 근심하는 한편, 백성을 가엾이 여겨 조서를 내려서 정성을 드리게 하자, 숙덕(宿德)과 시자(侍者) 14명이 천문(天門)의 거리에서 7일 동안 기우제(祈雨祭)를 올렸으니, 성인의 힘이 가만히 도와서 농사에 대풍(大豊)을 이룬지라 집집마다 풍부하여 만상(萬箱)에다 거두고 나라는 넉넉하여 9년 동안의 밑천이 되었다. 이로부터는 언제나 풍년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 옛날 처음에 든 정의의 기치와 귀신같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싸움터에서 적을 멸망시켰으므로, 그 원혼(冤魂)들이 원수를 맺을까 저어하여 그 해 겨울에는 경성(京城) 승니로 하여금 7일 동안 도를 행하게 하고, 온갖 의복을 보시하는 등, 이 수승한 인연을 빌려서 정성껏 참회하여 씻어 없앴으며, 싸움터였던 곳에는 모두 가람을 지었으니, 소인사(昭仁寺)와 등각사(等覺寺) 등 10여 사찰이 그것이다. 3년의 봄에는 또 승니로 하여금 조서를 받들어 매월 27일 동안 도를 행하면서 『인왕경(仁王經)』을 독송하게 하였고 나라에서 재공(齋供)바치는 일을 일정한 법으로 삼았다.
또 파파 삼장(波頗三藏)에게 3교(敎)를 겸하여 익히고 10과(科)를 시험하여 인재를 등용하게 하였으므로 석혜승(釋慧勝) 등 19명은 선(善)을 일으키며 경전을 번역하게 된 것이다. 또 태무황제(太武皇帝)를 위하여 종남산(終南山)에 용전사(龍田寺)를 지었고, 아울러 무제(武帝)에게 등신상 6구를 보내 주게 하여 영원히 공양하게 하였다. 또 목태후(穆太后)를 위하여 홍복사(弘福寺)를 지었고, 절이 다된 뒤에는 황제가 몸소 가서 스스로 점안(點眼)을 하였으며 극히 많은 돈과 재물을 보시하였다. 그리고 대덕(大德) 10명을 불러 친히 말씀하다가, 그 때의 사주(寺主) 도의(道意)가 태후에 관한 말을 꺼내자, 슬퍼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 오랫동안 훌쩍훌쩍 울면서 말하였다.
“짐(朕)은 일찍 자애로운 어버이를 여의고 은혜를 갚지 못했으니, 효도를 다하지 못한 한탄으로 가슴이 터질 지경입니다. 큰복을 의뢰하고 위로 부처님의 가호를 입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짐이 자주 노자(老子)를 곁에 두는데, 스님들은 원망하지는 않으십니까?”

도의가 대답하였다.
“승가(僧家)의 도는 마음을 편안히 가지면서 도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어찌 감히 소홀히 여기겠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불도의 크고 작음을 짐은 오래 전에 알고 있고 석가(釋迦)와 이씨(李氏)의 높고 낮음도 사물에 통효한 사람이면 스스로 환히 알고 있거늘 어찌 일시(一時) 위에 있다하여 곧 수승한 것으로 여기겠습니까? 짐은 노자를 종(宗)으로써 이어 받았으므로 우선 노자를 좇아 먼저 복을 심은 뒤에 마음을 돌려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특히 요사이 보시를 행하면서 모두가 석문(釋門)을 향하고 있고 무릇 수리한 바는 모두 불사(佛寺)를 위하고 있으니, 여러 법사들은 짐의 뜻을 알 것입니다.”
또 목황후(穆皇后)를 위하여 경선관(慶善館) 곁에 자덕사(慈德寺)를 지었다.
사문 현장(玄奘)이 석장(錫杖)을 5천축(天竺)에 떨치면서 정법(正法)을 찾아 드날리기 위해서 수레로 8수(水)를 돌고 왔다. 그리고는 은미한 말을 생각하고 밝히면서 19년 동안이나 조칙을 받들어 경을 번역할 때 전후의 포상(褒賞)과 떳떳한 도리를 격에 맞게 드러내었고, 내밀(內密)히 사신을 보내어 돌봐주되 10일을 건너뛰지 않았다. 몸소 정신을 기울여 그를 위해 서문을 지었으니, 경과 종(宗)을 인용하여 불교의 진리를 찬양하였다. 출가시킨 승니들은 3만여 명이었고, 금은의 등신상과 진주상(眞珠像) 등에 이르러서는 자못 만여 구가 넘을 텐데, 상세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지금의 황제는 성인이요 신령이라서 능력이 많고 재주가 많으니 함이 없이 다스리는데도 멀리는 이운(離運)의 괘(卦)를 잇고, 도덕이 있는 풍모는 진실로 염제(炎帝)와 태호(太昊)에 견주리라. 한가한 밭에서는 쉬면서 읊고 나란히 줄 선 집은 모두가 부자이며, 산과 도랑은 신령함을 나타내고, 중간과 바깥을 행복하게 하였으니, 3보(寶)에 대한 중임(重任)을 맡은 이요 4생(生)에 대한 짐을 지신 이다. 전생에 선근(善根)을 심으면서 오랫동안 수승한 업을 닦았는지라, 숭고한 믿음의 도가 저절로 천자(天資)에서 드러난 것이다. 효경(孝敬)하는 마음은 대개가 성품에서 연유되나니, 옛날 태자로 있을 때에 오래도록 마음 속에 품은 것이 분명히 나타난 것이다. 이에 유사(有司)를 보내어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위하여 자은사(慈恩寺)를 지었다.
그 형용의 뛰어남을 살피건대, 그 형세는 산천이 시조(市朝)처럼 둘러싸 있는 요해처(要害處)이다. 무인[鳧人]에게 명하여 터를 닦게 하고 겨우 은패(銀牌)를 옮기니 바로 금원(金園)이었다. 법려(法侶)들은 어깨를 비비었고 조정의 귀인들은 머리를 늘어뜨렸다. 그 땅은 높은 담으로 성곽(城郭)이 둘러 있고
1백 치(雉)의 길이로 길게 꼬부라졌으며, 층(層)으로 되어 귀퉁이를 잇고 9중(重)의 넓이로 연장되어 있었다. 여기에 널리 집채들이 즐비하여 있는데, 장대함과 미려함이 두루 갖추어져서 별을 쳐다보는 아름다운 경치에다 말뚝을 치고 줄을 쳐 놓았다. 옥(玉)으로 된 신은 빛을 뿌리고 금으로 된 문고리는 무늬가 반짝거렸으며, 긴 복도 안에서 묵으면서도 도리어 하늘을 지붕 삼았다. 그리고 떠있는 기둥과 수놓은 두공은 위로 운기(雲氣)를 도모하고 높은 처마와 새긴 난간은 아래로 무지개를 띠었다. 영탑(影塔)은 바라볼수록 근엄하게 하고 경대(經臺)는 가지런한 시렁을 향기롭게 하며, 단청(丹靑)에는 큰 가마솥을 다하였고 수초(水草)로 수놓은 장식은 기이함을 다하였다. 보배 방울은 바람에 울려 소리를 내고 금으로 된 쟁반은 이슬을 받았으며, 드문드문 치는 종은 밤하늘에 흩어지고 청아한 범성(梵聲)은 아침에 들렸으니 정혜(定慧)로써 의지할 바요 영이(靈異)로써 깃들 바였다.
또 문제(文帝)가 경에 서문을 쓴 뜻을 말해보건대, 기술한 성스런 기문(記文)이 많기는 하나 여기에는 싣지 않는다.
고종황제(高宗皇帝)
이미 공손히 보위(寶位)를 인수하게 되자, 경사스런 복으로 제도를 쇄신하여 새나라가 되었으며, 끝없는 효도로써 선황(先皇)을 생각하고 은혜로운 물로써 백성을 적셨다. 정호(鼎湖)의 수레[駕]는 아득하여서 따르지 못하고, 장릉(長陵)의 혼(魂)은 유유하여서 더욱 영원한지라, 드디어 정업(淨業)을 일으켜 복전(福田)을 심었다. 선제(先帝)가 거동한 궁(宮)은 취미(翠微) 옥화(玉華)를 다 같이 버리고 절을 만들었으니 공양과 보시가 은근하고 두터웠으며 불상은 아름다운 조각으로 시설하였다. 매양 무왕(武王)과 목후(穆后)의 제일(祭日)에는 경내(京內)의 승니를 다하여 7일 동안 도를 행하였고, 태종(太宗)과 문덕황태후(文德皇太后)의 기일(忌日)에는 널리 승니들이 21일 동안 도를 행하였다.
불상을 조성하고, 경전을 쓰고, 승니를 출가시키고, 공양을 베푼 일 등은 보기도 하고 듣기도 했지만 여기서는 요약하여 설명해야겠다. 현경(顯慶)의 연대에서는 항상 현장(玄奘) 법사로 하여금 궁내로 들어와서 번역하게 하였고 자은사(慈恩寺)의 대덕과 다시 교대시키면서 도를 행하기를 잠시도 그만두지 않았다. 또 조칙을 내려서 황태자를 위하여 서경(西京)에 서명사(西明寺)를 지었고, 이어 동도(東都)의 낙(雒)으로 내려가서는 또 경애사(敬愛寺)를 지었으며, 절에는 따로따로 금전을 썼으니, 각각 20만 관(貫)이 넘었다. 그 사우(寺宇)와 당전(堂殿)과 존상(尊像)과 번기의 빛남은 묘하기가
천선(天仙)보다 더하고 공교하기가 귀신보다 더하였다. 또 여러 왕과 공주(公主)들을 위하여 서경(西京)에 자계사(資戒寺)ㆍ숭경사(嵩敬寺)ㆍ초복사(招福寺)ㆍ복수사(福壽寺) 등 20여 사찰을 지었다.
그리고 내궁(內宮)에게 칙명하여 유영(遺影)을 본떠서 수놓은 상(像)을 조성하게 하였으니, 1격자(格子)의 높이에 12장(丈)이라 눈과 귀가 놀랄 정도라서 뒷날에도 없는 일이었고, 예전보다 더욱 빛이 나면 다섯 가지 색깔이 널리 퍼져 있고 여섯 가지 무늬가 섞여서 빛났다. 그 닦아 드날림은 희고 아름다운 손에 의탁하였고 둥근 달은 나란히 짝을 이룬 바늘에 그려졌는데, 그 고움은 연(燕)나라의 명주보다 뛰어났고 현란함은 촉(蜀)나라의 비단보다 더했으며, 벌려 보호해서 9화(華)의 채색을 진열하고 엉켜 휩싸여서 7요(曜)의 광채를 머금었었다. 이것을 자은사(慈恩寺)에 부송하여 모시게 하면서 길이 공양을 충당하게 하셨다.
또 만기(萬機)의 여가에는 8정도(正道)에 마음을 썼고, 친히 거룩한 생각을 굽혀 몸소 신필(神筆)을 잡아서 대자은사(大慈恩寺)와 융국사(降國寺)의 비문을 짓고 썼으니, 맑은 이슬에 엉겨 빛났고 고운 무늬는 운치가 흘렀다. 그 글을 곧은 돌에 새겨 놓았으니, 오래도록 빛나고 전해지면서 두드릴수록 지극한 이치가 드날릴 것이요, 그 미사여구(美辭麗句)는 오묘한 진리를 비추어 낼 것이다. 또 자주 승려와 도사(道士)에게 조서를 내려서 명교(名敎)를 고찰하고 궁구하게 하였는데, 매양 논의(論議)하는 자리에 나와서 몸소 옳고 그름을 상세히 결정하였고 그 사항들을 빠짐없이 모아 놓게 하였다.
이미 천지에 일의 성공을 알린 뒤에는 태산을 오르면서 봉경(封境)을 다스렸고 덕은 하늘[上玄]에 양보하고 공은 대성(大聖)에게 미루었다. 그리고 조칙을 백성에게 반포하여 천하의 모든 주(州)에 각각 한 군데의 사찰을 짓게 하고, 모두 일곱 번 승니를 출가시켰다. 상서가 있을 적마다 그날을 기록하여 삼가 그 지도와 책에 따라 편찬한 뒤에 제왕에게 보이게 하였으므로 도(道)는 세상에 퍼지고 인(仁)은 동식물에게까지 적셨다. 일관(日觀)에게는 제사를 숭상할 것을 신칙하고 명당(明堂)에서는 교화하는 일을 밝혔으므로 진리(眞理)와 속제(俗諦)를 한데 합쳐 넣었고 옛과 지금을 자루에다 동여매었으니, 아직 우리 황제보다 더 융성한 이는 없으리라. 총장(總章) 원년에는 조칙을 내려서 서경(西京)에다 다시 명당(明堂)ㆍ건봉(乾封)의 두 현(縣)을 두시면서 그 덕을 나타내며 모든 후곤(後昆)에게 전하였다.
이 3대(代) 이래로 이 하나의 나라에는 절이 4천여 개소가 있었고, 승니의 수는 6만여 명이었으며, 경전과 불상은 수 억조(億兆)여서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경은 1500여 권이나 번역하였다.

(6) 역산부(歷算部)
대당(大唐) 정관(貞觀) 13년 겨울 10월에 칙명으로 형부상서(刑部尙書) 유덕위(劉德威)와 예부시랑(禮部侍郞) 영호덕분(令狐德棻)과 시어사(侍御史) 위종(韋悰)과 옹주사공(雍州司功) 모명소(毛明素) 등이 파견되어 법림(法琳) 법사에게 물었다.
“『변정론(辯正論)』 제5권에 의거하건대, 요장겸(姚長謙)이 역서(曆書)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는 소왕(昭王) 갑인년(甲寅年)에 출생하셨고, 목왕(穆王)의 임자년(壬子年)에 멸도(滅度)하셨다’고 했는데, 무슨 연유로 『법현전(法顯傳)』에서는 ‘성인께서는 은왕(殷王) 때에 탄생하셨다’고 했고, 상정지기(像正之記)에서는 ‘부처님께서는 주(周)나라 평왕(平王) 때에 탄생하셨다’고 했고, 도안(道安)이 지은 논(論)에서는 ‘환왕(桓王)이 확실하다’고 고집했으며, 비장방(費長房)의 기록에서는 ‘장왕대(莊王代)’라고 고집했습니까? 어째서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서로 틀리고 문란하며 어느 것을 꼭 그렇다고 의지할 만한 것이 없습니까? 선후의 같지 않음과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한 까닭을 자세히 밝혀 주십시오.”
법사가 대답하였다.
“나는 듣건대, 대성인께서 중생에게 응(應)함은 본래 만물의 이익을 바라는 것이라 감(感)이 있으면 이내 나타나므로 근기마다 보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일음(一音)으로 말씀하셔도 저마다 그 종류에 따라 이해한다’고 하셨으니, 논하는 음성이 이미 그렇다면 언어의 바탕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전기(傳記)에서 밝힌 바도 도리를 분석함이 없는 것도 아니니, 나는 이제 근거를 바로잡기 위하여 저 여러 사람들의 주장을 취하여 먼저 그 진실임을 열거하고 나중에 그 거짓임을 진술하겠습니다.
삼가 위국(魏國)의 담모최(曇謨最) 법사와 제조(齊朝)의 상통(尙統) 법사와 수력박사(修曆博士) 요장겸(姚長謙) 등에 의하고 『주목왕천자전(周穆王天子傳)』과 『주서이기(周書異記)』와 전한(前漢) 유향(劉向)의 『열선전서(列仙傳序)』와 『고구이록(古舊二錄)』과 후한(後漢)의 『법본내전(法內本傳)』과 부의(傳毅)의 『법왕본기(法王本記)』와 오(吳)의 상서령(尙書令) 감택(闞澤) 등의 여러 서적에 근거하여 『아함경(阿含經)』 등에 준하여 자세하게 추구하리니, 진실에 의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희주(姬周)의 제5대
소왕(昭王) 하(瑕)가 즉위한 지 23년 계축(癸丑)의 해 7월 15일에 흰 코끼리 형상으로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정반왕궁(淨飯王宮)의 마야(摩耶)부인에 의탁해 태(胎) 안으로 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후한(後漢)의 『법본내전(法本內傳)』에서 명제(明帝)는 마등(摩騰) 법사에게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날과 달을 알 수 있습니까?’
마등 법사가 말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축(癸丑)년 7월 15일에 몰래 마야부인에게 의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왕 24년 갑인년(甲寅年) 4월 8일에 람비원(嵐毘園) 안의 바라수(波羅樹) 아래서 오른쪽 겨드랑이로부터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요경(普曜經)』에서 이르되 ‘큰 광명을 널리 놓아서 삼천계(三千界)를 비추셨다’고 하셨으며, 『주서이기(周書異記)』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소왕 24년 갑인의 해 4월 8일에 강물ㆍ샘물ㆍ못물이 갑자기 범람하면서 넘쳐 흘렀고 궁전과 사람이 사는 집과 산천과 대지가 모두 다 진동하였으며, 그 밤에는 5색의 광명이 쭉 뻗쳐 아주 은밀하게 서쪽에 두루 차면서 모두 푸르고 붉은 빛깔이 되었으므로, 소왕은 곧 태사(太史) 소유(蘇由)에게 묻기를 ≺이 무슨 상서 입니까?≻라고 하자, 소유가 말하기를 ≺큰 성인께서 서방(西方)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이런 상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고 하였으므로, 다시 소왕이 말하기를 ≺이 하늘 아래서 왜 그러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소유가 대답하기를 ≺다른 일이 아닙니다. 1천 년이 지나면 그 가르침이 여기에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소왕은 곧 석공(石工)을 시켜서 돌에 새겨 남교(南郊)의 천사(天祠) 앞에다 묻어 두게 하였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것이 바로 이 해입니다.
그리고 소왕 42년 임신(壬申)의 해 4월 8일의 한밤중에 성을 넘어 출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응경(瑞應經)』에서 이르되 ‘태자 나이 19세 때의 4월 8일 밤중에 천인(天人)이 창 가운데서 합장하고 말하기를 ≺지금 곧 떠나셔야 하옵니다≻고 하였으므로 이내 마부에게 명하여 떠나가셨다’ 고 하였으니, 바로 이 해입니다.

주(周)나라 제6대 목왕(穆王) 만(滿) 2년 계미(癸未) 2월 8일에 부처님의 연세 30세에 도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요경(普曜經)』에서 ‘보살은 샛별이 돋을 때에 환히 크게 깨달으셨다’고 했으니, 바로 이 해입니다.
목왕 52년 임신(壬申)의 해 2월 15일 부처님의 연세 79세 때에 처음 멸도하셨기 때문에 『열반경(涅槃經)』에서 ‘2월 15일날 열반하신 때에는 갖가지 광명이 나왔고, 땅이 크게 진동하여 그 소리는 유정천(有頂天)까지 이르렀으며, 광명은 삼천세계를 두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곧 『주서이기(周書異記)』에서 이르되 ‘목왕이 즉위한 지 52년 임신의 해인 2월 15일 아침에 폭풍이 갑자기 일어나서 인명과 집이 손상되고 수목이 부러지며 산천과 대지가 모두 다 진동하였고, 오후에는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서방에서 흰 무지개 열두 줄이 남쪽과 북쪽에 쭉 뻗어 있으면서 온밤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목왕은 태사(太史) 호다(扈多)에게 묻기를 ≺이것은 무슨 징조입니까?≻라고 하자, 호다가 대답하기를 ≺서방에 계신 큰 성인께서 멸도하셨으므로 쇠상(衰相)이 나타났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으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해가 바로 이 해입니다.
처음 소왕 24년 갑인의 해에 탄생하신 때로부터 지금의 대당(大唐) 함형(咸亨) 2년 기해(己亥)의 해까지 그 연월을 모두 계산하면 1천6백 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지금의 대당 건봉(乾封) 3년까지면 다시 19년이 더 있으므로 앞의 해까지 다 합하면 총 1,637년이며, 다시 건봉 3년에서 개원(開元) 11년 계해(癸亥)의 해까지 55년이 더 있으므로 앞의 해까지 다 합하면 총계 1,692년에 해당합니다.
또 왕현책(王玄策)의 『서역행전(西域行傳)』에서 이르되 ‘마가다국(摩伽陀國) 보리사(菩提寺)의 대덕
사나거선타(賖那去線陀)가 경과한 세월을 산출해 낸 것에 의하건대, ≺석가보살은 나이 19세 때의 4월15일의 초저녁에 성을 나가셨고, 30세 때에 도를 이루셨으며 79세 때에 열반에 드셨다≻고 했으니, 그로부터 함형(咸亨) 2년까지 계산하면 1천3백95년이 된다’고 했습니다.[서역국의 책력의 계산법은 우리 나라와는 같지 않기 때문에 길고 짧음에 다름이 있지만, 앞에서 산출한 것이 옳고 뒤에 서술한 것은 잘못입니다.]
이제 『법현전(法顯傳)』을 살펴보건대, ‘성인께는 은왕(殷王) 때에 출생하셨다’는 것인데, 법현이 비록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그 전(傳)이 의거할 만한 것이 못되니 연월(年月)도 특히 어긋나고 풍속도 달라서 실로 그가 한 말은 막연합니다. 또 두 분 안공(安公)의 주장도 이상합니다. 을축(乙丑)을 오히려 갑인(甲寅)에 한데 포함시키고 있으므로 모두 근거한 데가 없고 징험할 만한 것도 못됩니다.
또 『상정지기(像正之記)』도 의거하기에 분명하지 않습니다. 안공(安公)이 논하고 있는 것은 『구마라집기(鳩摩羅什記)』에 근거를 둔 것인데, 『구마라집기』는 안세고(安世高)를 이어받았다는 것입니다. 안세고는 한(漢) 나라 환제(桓帝) 때에 낙양(雒陽)에 있으면서 번역과 집필(執筆)을 하신 분이라서 환제의 시대를 근거하고 있으나, 구마라집은 진(秦)나라 때에 처음 왔거 안세고는 한나라 때에 먼저 왔었으므로 두 스님의 서로 떨어진 사이는 무려 3백 년이나 됩니다. 안세고를 이어받아서 그에 의거하여 기술되었다고 믿고 있으나, 그것은 안세고가 논한 것이 아닙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잘못 진술된 것이라서 다 같이 그 당시에 전하는 이의 과오일 것입니다.
또 수(隋)나라 번경학사(翻經學士) 비장방(費長房)이 ‘부처님께서는 장왕(莊王) 때에 탄생하셨다’고 말하였는데, 비장방은 두 나라 장왕을 같은 세대로 보지만 주(周)나라 장왕은 10년은 곧 노(魯)나라 장왕 7년입니다. 다만 항성(恒星)을 보고 징험하면서 그 별에 근거하여 부처님의 탄생을 말하고만 있는데, 항성에 대하여 아직 잘 모르고 있고 별도의 다른 일 때문일 것입니다.
또 『문수사리열반경(文殊師利涅槃經)』을 살펴보건대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지 250년 후에 문수는 설산(雪山) 안으로 가서 5백의 선인(仙人)을 교화한 뒤에 본토로 다시 돌아와서 큰 광명을 놓아 세계를 두루 비추고는 열반에 들었다’고 했는데, 항성의 상서는 바로 그 때인 것입니다.

비장방은 또 ‘2월 8일에 탄생하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4월이었고 2월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장방의 판단한 바는 아직 일의 근원을 궁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장방은 말하기를 ‘주(周)나라에서는 11월 달이 정월(正月)이 되므로 4월이라는 것은 지금의 2월이다’고 했는데, 비록 2월을 끝내 4월이라 한다 하더라도, 봄과 가을의 1부(部)를 살펴보면 연(年)은 노후(魯候)의 연을 쓰고 있고 월(月)은 주왕(周王)의 월을 취하고 있습니다. 항성이 본래 주나라 세상에서 상서를 일으켰으므로 모름지기 주나라 일월(日月)에 근거해야 됩니다. 비장방이 말하는 ‘부처님께서 장왕(莊王) 10년 2월 8일에 탄생하셨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맹랑한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2월이었다면 항성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비장방은 또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4월 8일에 내려오셔서 태 안에 의탁하셨다’고 했는데, 태에 의탁한 것을 이미 주나라의 달[月]로 썼다면 탄생하신 것도 주나라 날이어야 될 것이니, 지금의 2월이라는 말 역시 잘못입니다. 만일 주나라에서 11월을 정월로 친다면 여래께서는 11월에 탄생하실 수가 없습니다. 범인(凡人)들이 정월에 태에 들어가면 곧 10월에 출생하는 것이므로 4월에 태에 들었다면 곧 정월달에 출생해야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과 같이하시려고 마음을 굽히셔서 7월에 태 안에 들어가셨으므로 4월에 탄생하시게 된 것입니다.
왕소(王邵)의 『제지(齊誌)』에서 이르되 ‘주(周)나라의 4월이면 여름의 6월 달이다’고 했는데, 이로 미루어 헤아려 보아도 4월에 탄생하셨다면 그것은 7월에 태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지금 6월이라 한 말은 그 절기(節氣)를 취한 것이니, 비록 7월을 양보한다 하더라도 끝내 6월에는 속할 것입니다. 진실로 왕소의 말한 바가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비장방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주나라 혜왕(惠王) 19년 계해(癸亥)의 2월, 샛별이 돋을 때에 도를 이루셨다’고 했는데, 역시 큰 과오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유향(劉向)의 『고구이록(古舊二錄)』을 살펴보면 ‘주나라 혜왕 때면 이미 점차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유포되었고 그로부터 105년 후에 노자(老子)가 비로소 5천문(千文)을 말하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혜왕 때에 비로소 성불하셨다면 그 때는 경전의 가르침이 낙경(洛京)에 전해지지 않았어야 합니다.
또 혜왕은 곧 장왕(莊王)의 손자입니다. 계해년(癸亥年)이면 그와 서로 떨어지기
105년일 뿐이므로, 비로소 성불하게 되었다거나 경전이 이미 여기에 왔다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곧 여래께서 세상을 49년 동안 교화하셨고 가섭(迦葉)의 결집(結集)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였으며, 그 법문(法門)이 동쪽으로 점차 들어온 것이 바로 이 주(周)나라 때이므로 유향(劉向)의 말은 진실로 잘못이 없으며, 비장방의 기록은 결코 의거할 것이 못 됩니다.
자세히 살피건대, 성인은 방소가 없어야 되고 그 진리는 추측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동서가 멀리 떨어지고 연대(年代)가 아득한데다 다시 6국(國)의 종형(從衡)과 진(秦)의 5전(典)을 불태운 일 등을 만남이겠습니까? 연기(年紀)를 기록한 이가 적지 않고, 제력(帝曆)을 매기는 이가 많으면서도 서로 어긋나서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며 들쭉날쭉 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의 뜻을 주장하면서 저마다 지남(指南)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모든 사첩(史牒)을 상고함으로서 간략하게 멀고 가까움과 거짓과 확실함과 먼저와 나중이 있음을 대강 진술하였습니다.”

감응연(感應緣)[대략 세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3보(寶)에 대한 감통(感通)과 신령스런 감응의 상서로운 뜻을 서술함
후한(後漢)의 명제(明帝)가 감통(感通)으로 인하여 처음에 품은 지극 한 뜻을 서술함
송(宋)의 사문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감통(感通)으로 인하여 머 리를 바꾼 뜻을 서술함

3보(寶)에 대한 감통(感通)과 신령스런 감응의 상서로운 뜻을 서술함
대저, 3보가 널리 보호되는 것에는 각각 관장하는 이와 보존하는 곳이 있다. 부처님과 승(僧)의 두 자리는 스승과 제자로서 순종함이 있음을 나타내고 음성과 가르침[聲敎]은 한 문(門)이라서 교화 인도하는 신령한 곳집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승려는 근기를 따가 식견(識見)의 인연으로 숨거나 나타나고, 법은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라 멸장(滅障)의 조짐으로 언제나 임한다. 그런 까닭에 몸을 버리는 게송의 글귀는 항상 낭떠러지에서 나열하게 되고, 끼치신 법의 글과 말은 용왕의 궁전에 모두 모여 있다.
진실로 이 3성(聖)을 공경하고 중히 여기려면 보살펴 기르듯 하는 수고로움을 빌리고, 내세와 현세에 은혜를 입으려면 뒤바뀜을 쉬게 하는 좋은 기술을 기뻐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받아 지니고 읽고 외면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를 내리고, 말씀대로 수행하면 감응(感應)이 있지 아니함이 없지만 천축(天竺)에서의 지나간 일들은 짐짓 보통 이야기로 여겨버렸고, 진단(震旦)에서 나타난 인연들은 통상 있는 일에 휩싸여 버렸다.
선비가 갔을 적에 경을 불더미에 던졌지만 불길이 꺼지면서 타지 않았고, 도둑이 패엽(貝葉)을 객실에서 훔쳤지만 너무 무거워서 들지 못했다. 혹은 감실과 장경이 하늘의 곳집으로 오르기도 하고, 혹은 상서로움이 왕과 신하에게 나타나기도 하며, 혹은 7난(難)이 그로 말미암아 소멸되기도 하고, 혹은 두 가지 인이 과보를 구하였다. 이와 같은 일들이 많이 있지만 기술하지 않으면, 듣기 어려우므로 감히 전(傳)을 따라 기록하여 모든 후생(後生)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믿는 이를 위하여 베풀 것이요, 의심하면 말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지극하면 마치 돌이 뚫려 화살이 꽂히는 것과 같나니, 마음이 결단하면 그렇게 된다. 물이 흐르면 얼음은 건너가고, 뜻에 의심하면 단번에 끊어진다. 이런 일들은 오히려 선비와 범속에도 항상 전해 있거든, 하물며 지혜가 민첩하여 공(空)을 중히 여기고 도(道)가 뭇 존재[有]를 뛰어남이겠는가. 심량(心量)이 가리키는 바이면 속의 극미(極微)까지 다하게 되니, 인연으로 된 업(業)은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고 상서로운 종류는 부신(符信)처럼 합치한다.
이치는 숨거나 잠자코 있는 것이 아니므로 기술하면서 여기에 모았다. 그러나 전에 있던 일들이 찾아보면 그 일들은 전기(傳紀)에서 나오는데, 괴상함과 그윽한 상서로 쏠리고 기이함과 인과의 응보로 나타난다. 이런 일들은 아주 많으므로 그런 것을 다 열람해야 하는데, 그러한 글을 믿기 어려울까 두려워서 짐짓 거듭 공경하기를 권하는 것이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가 감통(感通)으로 인하여 처음에 품은 지극한 뜻 을 서술함
오장나국(烏仗那國)의 옛 도읍 달려라천(達麗羅川) 가운데에 큰 가람(伽藍)이 있고, 그 곁에 높이 1백여 척이나 되는 나무로 조각한 자씨상(慈氏像)이 있는데, 금빛 나는 용모는 반짝거리고 영묘한 감응이 은밀히 통했다. 말전지가(末田厎迦) 아라한이 장인(匠人)을 이끌고 도사다천(都史多天)에 올라가서 친히 묘한 몸을 관찰하기를 세 번이나 한 뒤에 공을 마친 것이니, 이 불상이 계시고서부터 법이 점차로 동방으로 유포되어 염한(炎漢)에까지 미친 것이다.
『명제내기(明帝內記)』에서 말하였다.
“영평(永平) 7년 갑자(甲子)의 가을인 9월 낮에, 별이 서쪽에 나타났고, 명제(明帝)의 꿈에 신인(神人)의 키가 1장(丈) 6척(尺)이었고 얼굴은 순금빛이었으며 정수리에는 일월 같은 광명이 있었는데, 자유자재하게 날아다니고 숨었다 나타났다 함이 장애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에 신하들에게 묻자 모두가
경하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태자의 사인(舍人)인 돈황(燉煌)의 부의(傳毅)가 아뢰었다.
‘신(臣)이 듣건대, 외국에 정반왕(淨飯王)의 태자 실달다(悉達多)는 전륜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이루셨는데 명호를 석가문(釋迦文)이라 한다 합니다. 폐하의 꿈에 일깨워주심은 감응이 아닐까요?’
그 말을 듣고 즉시 칙사(勅使)를 서방으로 보내어 40여 국을 찾고 지난 뒤에야 사위국(舍衛國)에 이르렀는데, 한 스님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오래 전에 멸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인의 가르침 60만 5천의 말씀을 베낀 뒤에 백마(白馬)에다 싣고 돌아왔다. 지나온 길이 워낙 험하고 좁아서 그 밖의 짐승들은 다 죽었으나, 백마는 더욱 강성해졌으므로 그 신이함을 가상히 여겨서 낙양(雒陽)에 백마사(白馬寺)를 지었다.”
패엽(貝葉)의 참된 글이 서방에서 흘러들어온 것도 이 때가 시작이고, 부처님의 광명이 해를 등지고 동방으로 비춘 것도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가르침의 은혜에 흠뻑 젖으면서 복된 숲을 분주히 쏘다녔고 바람에 부채를 부치듯 말에 싣고 상국(上國)을 향해 몰아오는 등, 근원과 갈래의 가장 요긴하고 종요로움은 진실로 이 날의 새벽에 세워진 것이다. 주서(周書)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장육(丈六)의 몸이 적동(赤銅)의 색과 같았음은 특별히 그러리라 여겼으며 정성의 감(感)이 아직 순수해지기도 전에 교(敎)는 와서 유포되었다.”

송(宋)의 사문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감통(感通)으로 인하여 머리를 바꾼 뜻을 서술함
송(宋)나라 경사(京師) 중흥사(中興寺)의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는 우리나라 이름으로 공덕현(功德賢)이며 중천축(中天竺) 사람이다. 어려서 5명(明)의 모든 논(論)과 음양(陰陽)ㆍ주술(呪術) 등을 배워서 널리 알리지 않음이 없었고, 머리 깎은 뒤에는 오로지 경학에 뜻을 두어 3장(藏)을 두루 통했다. 사람됨이 인자하고 공손했으므로 스승을 섬기되 예를 다하다가 얼마 뒤에 소승(小乘)의 스승을 하직하고 대승(大乘)의 스승에게 배우러 나아갔다. 대승의 스승은 그를 시험하려고 경갑(經匣)에 가서 경을 더듬어 가져오게 하였더니 곧 『대품경(大品經)』과 『화엄경(華嚴經)』을 가져왔으므로, 그 스승은 가상히 여겨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대승에 중한 인연이 있도다.”
그런 뒤에 강송(講誦)을 널리 폈고 그를 대적할 이가 없었다.
송나라 원가(元嘉) 12년에 광주(廣州)에 이르렀더니, 자사(刺史) 위랑(韋朗)이 표(表)를 올려 임금께 알렸으므로 송나라 태조(太祖)는 편지를 보내서 영접했다. 그가 경도(京都)에 이르자 태조는 마치 길을 가다가 만난 사람과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하듯 기뻐했다. 처음은 기원사(祇洹寺)에 머무르다가 뒤에 초왕(譙王)이 형주(荊州)를 진압하고 함께 가기를 청했으므로 가서
지신사(止辛寺)에 있었다. 초왕이 『화엄경』 등의 번역을 청하려고 발타라에게 맡겼으나 송나라 말을 잘하지 못했으므로 부끄러워하는 한편, 한탄을 하면서 곧 아침저녁으로 예배 참회하며 관세음(觀世音)보살께 감응을 청했다. 마침내 꿈에 어떤 사람이 흰옷을 입고 칼을 가지고서 한 사람의 머리를 들고 그의 앞으로 와서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근심을 하시오?”
발타라가 그 동안의 사실을 자세히 말해 주자 그 사람이 말하였다.
“근심할 것 없습니다.”
이내 칼로써 머리를 벤 뒤에 새 머리로 바꾸어 주면서 말을 잘하게 한 뒤에 다시 말하였다.
“아프지는 않습니까?”
“아프지 않습니다.”
이때 꿈에서 바로 깨어났는데, 마음과 정신에 희열을 느꼈다. 아침이 되어서 남에게 말을 붙여 보자 송나라 말을 모두 알아 들을 수 있었으니, 그로부터 강설(講說)에 나아갔다.
원가(元嘉) 말경에 초왕이 자주 괴이한 꿈을 꾸자 발타라가 말하였다.
“경도(京都)에서 장차 1년이 못 되어 화란(禍亂)이 있겠습니다. 원흉(元凶)이 역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효건(孝建)의 초(初)가 되어서 초왕이 역모를 꾀하며 절개를 바꾸었다. 발타라는 얼굴에 근심을 띠면서 미처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는데, 초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발타라는 간절히 간(諫)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반드시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빈도(貧道)는 객(客)이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초왕은 그의 물정(物情)을 믿고 있던 터라 강제로 핍박하여 그와 함께 내려가다가 양산(梁山)에서 패했다. 마침 적의 큰 배가 쫓아오는데 닿을 언덕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구제될 수 없었으므로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만을 부르면서 손에 대지팡이를 잡고 몸을 강물에 던졌다. 그런데 물이 무릎까지 밖에 차지 않았다. 지팡이로 물을 찔러 보았더니 너무도 깊고 세차게 흘렀다. 돌아보매 아직 어린아이였다.
“너는 어린아이인데 어떻게 나를 건네 줄 수 있겠느냐?”
그런데 정신이 어슴푸레해지면서 여남은 걸음을 떼었을까 했는데 벌써 언덕에 올라와 있었다. 즉시 가사[納衣]를 벗고 동자에게 주려고 뒤돌아보았으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면서 그제야 신력(神力)이었음을 알았다.
뒷날 말릉(秣陵)의 지경에 있는 봉황루(鳳凰樓)의 서쪽에다 절을 세웠다. 매양 밤중이 되면 갑자기 어떤 것이 문을 밀치면서
불렀으나, 아무리 보아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중들도 여러 번 가위눌리는 악몽을 꾸었으므로, 발타라는 향을 사르고 주원(呪願)을 하였다.
“너희들은 전생의 인연으로 살고 있는데, 나는 지금 절을 세워 도를 행하고 예배 참회하면서 항상 너희들을 위하고 있다. 만일 머무르려거든 절을 수호하는 선신(善神)이 될 것이요, 만일 머무르지 않으려거든 저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이러한 뒤에 승려와 속인들 10여 명이 같은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귀신 수천이 모두가 짐을 꾸려 지고서 옮겨가는 것을 보았다. 이로부터 절 대중은 편안히 지내게 되었다. 지금 도후(陶後)의 물가에 있는 백탑사(白塔寺)가 바로 그곳이다.
게송을 읊는다.

모든 부처님께 머리 조아리옵니다.
원컨대 영묘한 위력 보호하시고
정성을 베풀어 청하온 것을
혹시 탓하거나 나무라지 마옵소서.

어둠속에 빠져서 아직
원각(圓覺)으로 돌아갈 데를 깨치지 못하고
애욕의 바다에 오래 빠져 있사오니
배와 노를 바라는 바이옵니다.

차별을 집착해서 어기고 다투는데
화합(和合)을 바로 의지처로 삼고
현지(玄旨)로써 취함[取]과 유(有)를 여의고
진리로써 허물과 어김을 끊으리라.

8정도(正道)는 어기고 게을리 하면서
쓸모 없는 이론으로 백비(百非)에 들어가
버림[捨]은 같이하면서도 말[辯]은 다르므로
물듦[染]과 청정함[淨]이 섞여 희미하나이다.

금은 가려내고 자갈은 버리며
옥을 쪼면서 굴레를 제거하노니
의심하고 사유하면서 기틀을 궁구함을
능인(能人)께서는 널리 살피소서.

계합되어 큰 도[大道]를 이루게 되면
곧은 말로 덕을 숭상하는 것을
굽실거리면서 침범한다고
누가 감히 헐뜯고 비방하리오.

원하옵건대, 은혜를 베푸시고
경사스러운 일도 발휘하시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엾이 여기셔서
가르침과 자비를 드리워 주옵소서.

거룩한 가르침을 채취하여 모아서
요긴한 것만을 엮어서 빛나게 이으노니
열 돌[十周] 만에야 완성하면서
3업(業)이 몹시 피로해 있나이다.
바라는 것은 말대(末代)에 전하여
간략하게 듣고도 기틀을 알아서
8사(邪)에서는 다툼을 쉬고
4구(句)에서는 비(非)를 끊사옵니다.

미혹[惑]을 버리고 믿음[信]을 간직하며
지혜의 미묘함을 훈습으로 이루어서
함생(含生)들이 똑같이 감응하여
저마다 전의(轉依)가 이루어지이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