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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40 법원주림(法苑珠林) 97권

by Kay/케이 2024.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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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97

 


법원주림 제97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97. 송종편(送終篇)[여기에는 4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사명부(捨命部) 견송부(遣送部)
수생부(受生部)

(1) 술의부(述意部)
생각건대 4대(大)의 독 그릇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 6적(賊)의 미치광이가 이를 경계로 삼아 모두 집착하고 있으므로 다시는 거슬러 흐를 기약이 없고 오직 순환(循環)하는 세력만 있을 뿐이다. 가령 한 개의 털을 쪼갬으로써 천하를 이익 되게 한다 해도 그것을 아끼면서 행하지 않고, 한술 밥을 뿌려줌으로써 잇따라 다른 양식이 생길 터인데도 그것을 아까워하면서 주지 않는다. 생사(生死)에 빠져서 머무르고 유위(有爲)에 달라붙어 집착하고 있으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마음놓지 못하시고 보살들은 그들에 대해 피눈물을 흘리신다.
가만히 보건대 세속 사람들은 부모 상(喪)을 당하여 대부분이 장례를 잘 치르기 위해서 산목숨을 널리 죽여서 친족을 모으고 빈객을 공대한다. 구차하게 현재 잘 보이기 위해서 업인(業因)을 피하지 않고, 혹은 밖의 비방을 두려워하여 안으로 옳은 일을 닦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가 죽으면 여기에 고통을 더 겹치게 하고 어머니가 임종하면 끓는 물과 숯을 더욱 증가시킨다. 그러므로 삼계(三界)를 빙빙 돌면서 6도(道)를 계속 다니게 하나니, 4취(趣)에는 돌아가기 쉽지만 만겁(萬劫)은 인도하기 어려운지라 자모(慈母)의 혼령에게 마음 아파하고 역자(逆子)의 깊은 독을 가엾게 여긴다. 다만 심한 가뭄이 오래면 반드시 단비[甘雨]의 은택을 생각하게 되고, 병의 재난이 많으면 양의(良醫)의 약만을 고대할 뿐이다.
생각건대 부모도 이미 범부라서 악업이 없다해도 죄의 원인은 소멸하지 않고 고통의 과보는 배제하기 어렵다. 만일 모든 수승한 복을 의뢰하지 않으면 쾌락의 과보를 어떻게 증득할 수 있겠는가? 바라노니, 임종할 때에는 원을 세우면서 시타(尸陀)에 들게 하고 장례
치르는 비용으로 몸을 돕고 아울러 공덕을 닦으며, 나는 새와 딛는 짐승의 굶주림을 구제하여 장차 오는 세상의 빚을 면할 수 있게 하라.

(2) 사명부(捨命部)
『십이품생사경(十二品生死經)』에서 말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죽음에는 12품류가 있다. 어떤 것이 12품류인가? 첫째는 남음이 없이 죽는 자이니, 아라한(阿羅漢)으로서 집착하는 바가 없다. 둘째는 죽음을 건너는 사람이니, 아나함(阿那含)을 말하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셋째는 남음이 있게 죽는 사람이니, 사다함(斯陀含)을 말하며 갔다가 도로 온다. 넷째는 죽음을 건너는 일을 배우는 사람이니, 수다원(須陀洹)을 말하며 도의 자취를 본다. 다섯째는 죽음에 속지 않는 사람이니 8등인(等人)을 말한다. 여섯째는 죽음을 기뻐하는 사람이니, 일심(一心)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일곱째는 자주 죽는 사람이니, 악계(惡戒)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여덟째는 죽음을 후회하는 사람이니, 범부를 말한다. 아홉째는 죽음을 꺼리거나 삼가지 않는 사람이니, 고독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말한다. 열째는 죽음에 얽매이고 달라붙는 자이니 축생을 말한다. 열한째는 죽어서 불에 타는 자이니, 지옥(사람)을 말한다. 열두째는 죽어서 배고프고 목마른 자이니, 아귀를 말한다. 비구는 이런 것을 분명히 알면서 방일(放逸)하지 말지니라.’”
또 『정도삼매경(淨度三昧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사람이 선악의 업을 지으면 천상에 태어나거나 지옥에 떨어지는데, 임종할 때 저마다 영접하는 사람이 있다. 병들어서 죽으려고 할 때 그의 눈에는 와서 영접하는 이가 보이나니, 천상에 가서 태어날 사람이면 천인이 하늘옷을 가지고 풍악을 잡히면서 와서 영접하고, 다른 세계에 가 날 사람이면 그의 눈에 존귀한 사람이 그에게 묘한 말씀을 하는 일이 보이게 되며, 만일 악을 행하여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면 그의 눈에는 병사들이 칼과 창을 가지고 그를 찾으면서 둘러싸는 것이 보이게 된다. 이처럼 그가 보는 일은 동일하지 않은데, 입으로는 다 말할 수가 없으며, 저마다 그가 지은 업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 것이다. 하늘은 억울하게 함부로 하는 일이 없으며 공평하고 정직하여 두 마음이 없나니, 그의 지은 바에 따라 하늘의 법은 그를
다스린다.”
또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였다.
“사람이 죽으려 할 때에는 중음(中陰)의 모양을 보게 된다 만일 악업을 행한 사람은 3악도(惡道)에서 고통받는 것을 보게 되고, 혹은 염라왕(閻羅王)이 여러 무기를 가지고 와서 붙잡아 데리고 가는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고통받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만일 선업을 행한 사람이면 모든 천상의 궁전에서 천녀들이 장엄하게 차리고 재미있게 놀면서 쾌락을 누리는 훌륭한 일을 보게 된다.”
또 『법구유경(法句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시면서 하늘과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실 때였다. 어느 한 장자가 길가에 살고 있었는데 재물이 수없이 많은 부자였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었을 때 장가를 들어 아내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7일이 되기 전에 서로 공경하는 부부는 상춘(上春) 3월의 계절이라서 재미있게 구경하면서 놀려고 뒷동산으로 갔다. 마침 동산 안에 벚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높은 가지에 크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다. 신부가 꽃을 갖고 싶었으나 꺾어다 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신랑이 그녀를 위하여 나무로 올라갔다. 그런데 잘못하여 가는 가지를 밟는 바람에 가지가 찢어지면서 떨어져 죽었다. 온 집안 사람들은 모두 그 아들에게로 달려와서 하늘을 부르며 소리 높여 울다가 기절하였고, 한참 만에야 다시 깨어났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가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관(棺)에 넣어 집으로 돌아와서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세존께서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가엾이 여기셔서 그들을 찾아가 물으셨다. 장자와 집안 사람 모두는 부처님을 뵈옵고 흐느껴 울면서 예배하고 그 쓰라림을 자세히 아뢰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그치고 법을 들어라. 만물은 무상하여 오래 보존될 수가 없다. 나면 죽음이 있는 것이요 죄와 복은 서로 따른다. 이 아들은 세 곳에서 그를 위해 슬피 울고 괴로워하면서 기절하게 하였으며 또한 참기 어렵게 하였으니, 그는 끝내 누구의 아들이고 어느 분이 그의 어버이가 되는고?’
세존께서는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목숨은 마치 꽃과 열매와 같아서 성숙하면
항상 떨어질 것을 두려워한다.
태어나면 모두 고통이 있거늘
그 누가 죽지 않을 수 있겠느냐.

처음부터 애욕을 좋아하여
그림자 같은 태(胎) 안으로 들어가길 바라서

번개와 같은 형체와 목숨을 받았으니
밤낮으로 흐르며 그치기 어렵다.

이 몸은 죽기 마련인 물건이며
정신은 형상이 없는 법이니
목숨은 죽고 다시 나거니와
죄와 복은 없어지지 않는다.

마치고 비롯하는 것이 한 세상뿐 아닌데
어리석음으로 장구(長久)하기를 애착하면서
스스로 지어서 고락(苦樂)을 받으니
몸은 죽되 정신은 상실하지 않는다.

장자는 이 게송을 듣고 뜻이 풀리면서 근심을 잊었다. 그는 길게 무릎 꿇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아들은 전생에 어떠한 죄를 지었기에 한창 좋은 나이에 일찍 죽었습니까? 원하옵건대 본래 행했던 죄를 해설하여 주소서.’
부처님께서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지나간 옛적에 한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활과 화살을 가지고 신수(神樹) 안에 들어가 놀고 있었다. 그 곁에 어떤 세 사람이 그 안에 있으면서 구경하고 있었다. 마침 나무 위에 참새가 있자 어린아이가 쏘려고 하는데 그 세 사람이 권하면서 말하였다.
≺만일 참새를 맞출 수 있다면 세간에서도 건장한 남아이리라.≻
어린 아이는 기분이 좋아서 활을 당겨 쏘았다. 참새는 맞아서 즉사하였으며 세 사람도 같이 웃었다. 세 사람은 어린아이가 도와 기뻐하다가 각자 갈 데로 떠났다. 그로부터 여러 겁 동안 나고 죽고 하면서 서로가 만나 그 죄를 받았다.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은 복이 있는 이라서 지금 천상에 있고, 또 한 사람은 바다 속에 변화로 태어나서 용왕(龍王)이 되어 있으며, 또 한 사람이 바로 오늘날 장자의 몸이다. 그 어린 아이는 먼저 천상으로 가서 그 천인의 아들이 되었다가 목숨을 마치고 장자의 아들이 된 것이며, 이제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으니 곧 바다 속으로 가서 용왕의 아들이 되겠지만 그가 나는 바로 그 날 금시조왕(金翅鳥王)이 그를 잡아먹을 것이다. 오늘날 이 세 곳에서 괴로워하며 슬피 울고 있으니,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느냐? 전생에 그를 도와 기뻐했기 때문에 이 세 사람은 이와 같은 과보를 받는 것이니라.’
그리고 세존께서는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정신은 삼계(三界)의
좋고 좋지 않은 세 곳으로 나아가
몰래 다니면서 잠자코 이르지만
가는 곳마다 메아리가 응한 것 같네.
색욕(色欲)은 색이 있는[色有] 것이 아니니
일체의 원인은 전생의 행이니라.

마치 종자가 본래 형상 따르듯이
저절로 받는 과보도 그림자와 같다.

부처님께서 게송을 마치시자 장자는 뜻이 풀렸고, 집 안 사람 모두도 기뻐하면서 수다원의 도를 얻었다. 또 『사분율(四分律)』에 설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왕이 목숨을 마치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온갖 것은 반드시 다한 데로 돌아가고
높은 이는 마침내 떨어져야 하며
태어나면 죽지 않음이 없나니
목숨이 있는 것은 모두 무상하다.

중생은 유(有)의 수에 떨어져서
일체가 다 유위[有爲]이니
일체의 세간에는
늙고 죽지 않는 이 하나도 없다.

중생에게는 바로 항상한 법이어서
태어날 적마다 모두 죽게 되나니
그 지은 바의 업에 따라서
죄와 복에는 과보가 있다.

악업을 지으면 지옥에 떨어지고
선업을 지으면 천상에 나며
높은 행으로 좋은 갈래[善道]에 가서 나면
무루(無漏)의 열반을 증득하게 된다.
(3) 견송부(遣送部)

自述
생사(生死)가 고리처럼 순환하는 것은 세속의 진리[俗諦]를 여의지 못한다. 비록 출가하여 수승한 도(道)를 뜻한다 하더라도 분단(分段)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변역(變易)을 아직 제거하지 못해서 거푸 삼계에 의존하고 세속을 따르면서 천류(遷流)하고 있다. 그러면서 살고 죽고 하면서 모두가 안팎으로 의지하고 있으니, 임종한 날에 안치(安置)하게 될 마땅한 곳과 장지(葬地)로 보낼 때의 위의를 아래에서 자세히 말하여 둔다. 우선 죽은 시체에 대하여 논하면 남과 북에 안치함은 혼(魂)과 백(魄)이 같지 않기 때문이니, 이제 간략히 기술하겠다.
『예기(禮記)』 「예운(禮運)」에서 말하였다.
“몸의 백(魄)은 내려가니 기(氣)가 위에 있음을 알 것이다. 죽은 이는 북쪽으로 머리하고 산 이는 남쪽으로 향한다.”
교특생(郊特生)이 말하였다.
“혼(魂)과 기(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몸[形]과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제사지낼 때는 모든 음양(陰陽)의 이치를 구한다.”
제의(祭儀)에서 말하였다.
“기(氣)라 함은 신(神)의 왕성함이요, 혼이라 함은 귀(鬼)의 왕성함이다.”

『좌전(左傳)』 소이(昭二)에서 자산(子産)은 조경자(趙景子)에게 말하였다.
“사람이 나고 죽고 변화하는 것을 백(魄)이라 하므로 이미 생겨난 백이 양(陽)에 속하는 것을 혼(魂)이라 한다. 사물을 쓸 때 정력이 많으면 혼백이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精爽)이 신명(神明)에 이르면 필부(匹夫)와 필부(匹婦)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그 혼백조차도 오히려 사람에 의지함을 재앙으로 여기거늘 하물며 맑은 하늘[良霄]이겠는가? ”
『회남자(淮南子)』에서 말하였다.
“하늘의 기운(天氣)이 혼이 되고 땅의 기운[地氣]이 백이 된다. 백이 혼에게 물었다.
‘도(道)는 무엇으로써 체성[體]을 삼는가?’
혼이 대답하였다.
‘형상이 없는 것이다.’
백이 말하였다.
‘형상이 있다. 만일 없다면 무엇 때문에 묻겠는가?’
혼이 말하였다.
‘나는 다만 만난 바가 있을 뿐이다. 보아도 형상이 없고 들어도 소리가 없는 것을 소위 심오하고 미묘한 것[幽冥者]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도(道)이면서도 도가 아님에 비유한다.’
또 물었다.
‘이미 혼과 백이 따로 임을 알았다. 오늘날 속인이 죽으면서 무엇 때문에 옷[衣]을 혼이라고 부르고 백이라고는 부르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혼은 바로 영(靈)이요 백은 바로 시체[屍]이다. 그러므로 예(禮)에서는 처음 죽었을 때 자기가 입었던 옷을 시체의 백 위에 옮겨 주고 혼은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옷을 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혼은 자기의 옷을 알므로 옷을 찾아서 돌려보낸다. 만일 혼이 백에게 돌려보내면 곧 시체의 입을 막은 솜이 움직이거니와 만일 혼이 백에게 돌려보내지 않으면 입을 막은 솜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치로써 한 말이기 때문에 혼을 부른다고 할 뿐 백을 부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상복요기(簫喪服要記)』에서 말하였다.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그의 부친의 장례를 지낼 때에 공자(孔子)가 묻기를 ≺어떻게 혼 옷[魂衣]을 만드시겠습니까?≻라고 하자, 애공이 대답하기를 ≺혼 옷은 백도(伯桃) 때에 생겼습니다. 백도가 형산(荊山)아래의 길에서 추위를 만나 죽게 되자, 그의 벗 양각(羊角)이 슬퍼하면서 그 시체를 맞이하여 혼신(魂神)의 추위를 가엾이 여긴 나머지 일부러 혼 옷을 고쳐 만들었다 합니다. 우리 부친은 생전에 수놓은 비단옷을 입으셨고 돌아가시면서도 옷을 입으셨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옷을 만듭니까?≻라고 하였다.’

‘어째서 번(幡) 위에 그의 성명을 써야 하는가?’
‘번은 혼을 불러서 건지(乾地)에 안치하게 한다. 혹은 그의 이름을 알므로 이름을 찾아서 암실(闇室)을 들어가게 되며 또한 백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혹은 중실(重室)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중(重)이라 함은 겹친다는 뜻이니 겹쳐 있는 깊숙한 안방에 제사의 음식을 모두 두게 한다. 산 이와 죽은 이는 각각 구별되고 밝음과 어둠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귀신은 어두운 데서 먹고 산 사람은 밝은 데서 먹는다. 그러므로 거듭 거친 대자리로 그 음식 거리를 사서 골방 속에다 두는 것이니, 곤지(坤地)에 안치하는 것이다.’”
서역(西域)의 장례법에 의거하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에 떠내려보내는 것이요, 둘째는 불에 태우는 것이며, 셋째는 흙에 파묻는 것이요, 넷째는 숲 속에 버리는 것이다.
『오분율(五分律)』에서 말하였다.
“만일 불에 태울 적에는 돌 위에다 놓고 태울 것이요, 풀이나 흙 위에서 태워서는 안 된다. 벌레를 상할까 두려워서이다.”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여래와 전륜성왕(轉輪聖王) 두 사람만은 모두 화장(火葬)하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통상 앞에서 말한 네 가지 장례를 대부분 다 이용한다.”
『오분율』에서 말하였다.
“시체는 응당 파묻어야 한다.”[이것은 국법에서 몸 태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여름에 태우면 벌레를 죽일까 두려워서이다. 이 때문에 파묻게 하는 것이다. 그밖에 물이나 숲에 버리는 것은 관계하지 않는다.]
또 『사분율』과 『오백문사(五百問事)』에 의거하건대, 만일 여래의 탑을 보았거나, 5중(衆)으로서 출가한 사람의 무덤이나 탑을 보았을 적에는 자기보다 위이면 모두 생시의 나이와 법랍(法臘)의 선후에 의하여 예배하면 된다. 만일 속인들이 출가한 사람의 무덤이나 탑을 보았을 적에는 상하를 가릴 것이 없이 모두 공경하고 예배해야 된다.


自述
이미 그와 같음을 알았다. 모든 승니와 속인들이 만일 스님[師僧]이나 부모의 관[柩]을 대하면 밖에서 조문(弔問) 온 사람이 죽은 이보다 아래면 그 시체 앞으로 가서 통상대로 절을 하고, 그런 뒤에 먼저 그 아들의 손을 잡고 잠자코 위로하고, 그 뒤에 대덕(大德)이 있는 곳으로 와서 슬픈 뜻을 자세히 말하면서 절을 하면 된다. 또한 어리석은 속인들에게서 보는 일이거니와, 망령되이 법의 가르침을 행하고 점차로 다른 이에게까지 가르치면서 부모와 숙백(叔伯)과 존친들의 망령(亡靈)에게 절을 하지 않으면서 말한다.

“나는 이미 계(戒)를 받았고 그는 귀신이 되었다. 그러므로 절은 합당하지 않다. 계를 깨뜨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교에서도 합당한 일이 못 되며, 도리어 무지(無知)의 죄를 초래하는 것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스님 등은 나의 법신(法身)을 길러 주셨고, 부모와 숙백 등은 나의 육신을 길러 주셨으니 이런 분에 의지하여 젖을 먹고 자라나서 성인(成人)이 된 것이다. 이런 은덕을 생각하면 하늘처럼 끝이 없고 보답하기 어려워서 겁(劫)을 지내면서도 그 은혜를 갚아야 하겠거늘, 어찌 일생(一生) 만으로 그만 둘 수 있겠는가? 공경함과 은혜를 갚지 않고 도리어 태만한 생각을 일으킨다면 발꿈치를 쫓는 비루한 자이거늘 어찌 효자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지극하신 성인이면서도, 오히려 몸소 돌아가신 부왕(父王)의 시체를 붙들어 보내셨거늘, 하물며 하천한 범부로서 태만한 생각을 일으켜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되 “은혜를 아는 것은 대비(大悲)의 근본이요, 은혜를 모르는 이는 짐승보다 더 못하다”고 한 것이다.
또 『정반왕니원경(淨飯王泥洹經)』에서 말하였다.
“백정왕(白淨王)은 사위국(舍衛國)에 있으면서 병이 위독하여 죽으려 할 때, 세존과 난타(難陀) 등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왕사성(王舍城) 기사굴산(耆闍崛山) 안에 계셨는데 그 곳은 50유순(由旬)이나 떨어져 있었다. 세존께서는 영취산(靈鷲山)에 계실 적에 천이(天耳)로써 부왕이 생각하는 소리를 멀리서 들으시고 곧 아난(阿難) 등과 함께 공중을 날아와 그곳에 이르셨다. 그리고 손으로 왕의 이마를 만지면서 왕을 위로한 뒤에 왕을 위하여 『마하바라본생경(摩訶波羅本生經)』을 말씀하셨다. 왕은 설법을 듣고 아나함과를 얻었으며 다시 부처님께서 손을 끌어다 가슴 위에 놓았다. 부처님께서 또 설법을 하시자 아라한과를 얻었다. 그리고 무상함이 이르러서 목숨이 다하고 숨이 끊어지면서 홀연히 후세(後世)로 나아갔다.
화장[闍維]하려 할 적에 부처님께서는 난타와 함께 널의 머리 앞에 공손히 서 계셨고 아난과 나운(羅雲)은 발 쪽에 서있었다. 아난이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원하옵건대, 제가 백부(伯父)의 관(棺)을 메게 하옵소서.’
나운이 또 아뢰었다.
‘원하옵건대, 제가 할아버님의 관을 메게 하옵소서.’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들을 위로하며 말씀하셨다.
‘미래의 세간 사람들은 모두가
흉포하여 부모가 기러주신 은혜를 갚지 않을 것이므로, 이 불효한 중생들을 교화하는 법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여래가 몸소 부왕의 관을 메려고 하느니라.’
그 때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고, 모든 산들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솟았다가 잠기기를 마치 물 위의 배와 같았다. 그리고 온갖 하늘과 용과 귀신들이 모두 상여 앞으로 와서 소리 높여 슬피 울었다. 사천왕이 억백천의 귀신들을 데리고 와서 모두 함께 상여를 들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는 미래 세상의 부모에게 불효한 이들을 위하여 큰 자비로써 몸소 부왕의 관을 메려고 하시오나 저희들은 부처님의 제자요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 수다원과를 얻었사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의당 부왕의 관을 메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곧 사천왕에게 부왕의 관을 메도록 허락하자 이내 변하여 사람으로 되었다. 온갖 백성들도 모두 슬피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존께서는 몸소 손으로 향로를 붙잡고 앞에 서서 묘소로 나가셨다. 그리고 천 명의 아라한으로 하여금 큰 바닷가 위로 가서 우두전단(牛頭栴檀)과 갖가지 향나무를 가져오게 하여 그것으로 불을 피우고서 말씀하셨다.
‘괴롭고 공하고 무상함은 마치 허깨비와 같고 물 속의 달과 거울의 형상과 같도다.’
그리고 몸이 다 타자 모든 왕들은 저마다 5백 개의 병에 우유를 담아 가지고 그것으로 불을 껐다. 불이 꺼진 뒤에는 다투어서 함께 뼈를 거두어 금강(金剛)의 함에다 넣고 곧 그 위에다 탑을 세우고서 비단 번기와 일산을 달고 탑묘에 공양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왕 정반(淨飯)께서는 청정한 분이라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셨다.’”
또 『불모니원경(佛母泥洹經)』에서 말하였다.
“대애도(大愛道) 비구니는 부처님의 이모이시다. 차마 부처님 뒤에 열반할 수 없음을 깨닫고 먼저 열반하려고 제근녀(除饉女) 5백 명과 함께[곧 비구니를 말한다. 『강승회법경경(康僧會法鏡經)』에서 말하기를 ‘범부는
6진(塵)을 탐하여 물든다. 마치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탐하면서 만족할 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금의 성인은 탐욕을 끊고 6정(情)의 주림[饉]을 제거[除]하기 때문에 출가한 비구니를 제근(除饉)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손으로 부처님의 발을 어루만지고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는 머리 조아리고 떠나갔다. 그리고는 신족(神足)의 덕을 나타내어 저절로 자리에서 없어지면서 동쪽으로부터 와서 공중에 머물러 열여덟 가지의 신변(神變)을 나타냈다. 8방(方)과 상하(上下)에서도 역시 그와 같이 하면서 큰 광명을 놓아 모든 어둠을 비추고 위로는 모든 하늘을 밝게 비추었다. 그런 뒤에 5백 명의 제근녀들은 변화로 모두 함께 불에 타면서 동시에 열반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가(理家)들에게 권하여 5백 명의 상여를 만들게 하고 삼씨 기름과 향과 꽃과 녹나무와 가래나무의 재목 등으로 5백 명의 제근녀를 장사지내고, 순수하고 바른 음악으로써 공양하였다. 온갖 범부와 성인들은 그것을 보며 슬피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화장이 끝나자 사리를 받쳐들고 부처님께로 나아갔으며, 이때 사방에서 각각 250명의 아라한이 신족(神足)으로 날아와서 부처님 발에 머리 조아리고 사리 있는 곳에 도달하여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를 가져다 담은 뒤에 그 발우를 나의 손 안에다 놓아라.’
아난이, 명하신 대로하자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 모인 사리는 본래 더러운 몸이었다. 흉포하고 질투와 음모로 도를 부수고 덕을 깨뜨렸다. 지금 어머님은 능히 구제받아 장부의 행을 일으켜 응진(應眞)의 도를 얻으셨다가 열반하셨으니 어찌 장하지 않느냐?’ 그리고는 명을 내려서 탑을 세우고 공양하게 하셨다.”
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아난과 나운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대애도의 몸을 모셔 오너라. 내가 몸소 공양해야 되겠다.’
그 때 석제환인(釋提桓因)과 사천왕 등이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원하옵건대, 몸소 심신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공양하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 두라, 그만 두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부모는 자식을 낳으셔서 많은 이익을 주셨다. 기르신 은혜가 무거운지라 젖을 먹이며 품에 안으셨으니,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하며 갚지 않으면 안 되느니라.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어머님들께서도 먼저 멸도를 취하셨으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몸소 화장한 사리에게 공양하셨느니라.’
그 때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이 모든 귀신들을 시켜 전단(栴檀)의 숲으로 가서 전단나무들을 가져다 넓은 들판에 놓게 하였다. 부처님께서 몸소 상여의 한쪽 다리를 들고 아난이 다른 한쪽 다리를 들고서 허공을 날아 무덤 사이에 도달하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전단나무를 가져다 대애도의 몸 위에 놓으신 뒤에 말씀하셨다.
‘네 사람에게는 응당 탑을 세우고 공양하여야 한다. 첫째는 부처님이요, 둘째는 벽지불(辟支佛)이며, 셋째는 번뇌가 다 한 아라한이요, 넷째는 전륜성왕이니, 모두가 10선(善)으로써 만물을 교화했기 때문이니라.’ 그 때 인민들은 곧 사리를 가져다 탑을 세우고 공양하였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 의하면 대애도는 이모이며 난타(難陀)의 친어머니라고 하였다. 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하였다.
“4부(部)의 제자 중에서 도를 증득한 이로서 맨 앞과 맨 뒷사람을 간략하게 말하면 우선 8인이 된다. 비구 중에서 맨 처음에 도를 증득한 이는 구린(拘隣) 비구이니 교화를 잘하였고 위의를 잃지 않았다. 맨 나중에 도를 증득한 이는 수발타라(須跋陀羅)이니 도를 증득한 그 날 바로 열반에 들었다. 비구니 중에서 맨 처음에 도를 증득한 이는 대애도(大愛道) 비구니이며 맨 뒤에 도를 증득한 이는 타라구이국(陀羅俱夷國) 비구니이다. 우바새 중에서 맨 처음에 도를 증득한 이는 상객(商客)인 남자이며 맨 나중에 도를 증득한 이는 구이나마라(俱夷那摩羅)이다. 우바이 중에서 맨 처음에 도를 증득한 이는 난바(難婆) 여인이며, 맨 나중에 도를 증득한 이는 람(藍) 우바이이다.”

(4) 수생부(受生部)
무릇 태어나면 8식(識)으로 유지되고 죽으면 4대(大)가 흩어진다.
1백 년도 빨리 가서 끝내 마멸(磨滅)로 돌아가고 삼계(三界)를 순환하면서 정지함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이르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마치는 것이니 이미 났는지라 소멸하게 된다”고 했나니, 성인의 가르침이 거짓이 아니라서 스스로 보고서 경의를 표한다. 그런 까닭에 이 인연 가운데서 여섯 가지 문을 들어 간략히 기술한다.
첫 번째 문은 임종할 때이다. 몸의 차고 더움을 검사하여 그 선악을 증험하면서 미래의 과보를 자세히 안다. 그러므로 『유가론(瑜伽論)』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 유정(有情)이란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니, 임시로 목숨을 지니게 된 것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가 같고, 죽을 때는 통상 점차로 죽거나 단번에 죽는다는 것이 모든 스승들에게 서로 전해지고 있다. 선(善)을 지은 사람은 아래로부터 차가운 촉감이 배꼽까지 이르고, 그 위에는 따뜻한 기운이 있다가 그 뒤에 다 한다. 즉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만일 머리나 얼굴에 따뜻한 기운이 있다가 그 뒤에 다하면 곧 하늘 갈래[天道]에 태어난다. 만일 악을 지은 이는 그와는 반대이니, 위로부터 허리까지 따뜻한 기운이 있다가 없어지면 아귀(餓鬼) 갈래에 태어나고, 허리에서부터 무릎까지 따뜻한 기운이 있다가 없어지면 축생(畜生)에 태어나며, 무릎에서부터 그 아래로 다리까지 따뜻한 기운이 있다가 없어지면 지옥 안에 태어난다. 무학(無學)이 열반에 들게 되면 따뜻한 기운이 혹은 심장에 있게 되기도 하고 혹은 정수리에 있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유가론』에서 이르기를 “갈라람(羯羅藍)이란 맨 처음에 의탁하는 곳이어서 곧 육심(肉心)이라 한다. 이렇게 의식[識]이 이곳에 맨 처음 의탁하므로 이것을 맨 마지막에 버리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를 해석하여 보자. 『유가론』에 의하면, 선을 지으면 위에 태어나기 때문에 아래로부터 점차로 버리면서 육심에 이르고 그 뒤에야 위를 버린다는 말이요, 악을 지으면 아래에 태어나기 때문에 먼저 위에서부터 버리면서 육심에 이르고, 그 뒤에야 아래를 버린다는 것이다.
『구사론(俱舍論)』에서 말하였다.
“만일 사람이 막 죽고 있으면 몸의 어느 부분에서 의식(意識)이 끊어지는가? 만일 한꺼번에 몸이 죽으면 감관과 함께 의식은 일시에 모두 소멸되지만 만일 사람이 차례로 죽게 되면 다음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차례로 죽는 이는 다리에서 배꼽으로
그리고 심장에서 의식이 끊어진다.
하인(下人)은 하늘에 나지 못하고
중인(中人)과 상인(上人)은 악도에 나지 않는다.”

논중(論中)의 해석에서 말하였다.
“만일 사람으로서 반드시 악도에 가서 생(生)을 받을 이거나 인도(人道)에 태어날 사람들은 차례로 죽으며, 아라한 같은 사람은 심장에서 의식이 끊어진다. 「유여부(有餘部)」에서는 머리 위에서 끊어진다고도 말한다. 왜냐 하면 몸의 감관은 이곳에서 의식과 함께 소멸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막 죽으면 이 몸의 감관은 마치 뜨거운 돌과 물이 점차로 감축되면서 소멸하듯이 다리 등의 처소에서 차례로 소멸된다.”
이를 해석하여 보자. 『구사론』은 소승(小乘)의 이치를 기술하기 때문에 “몸은 이곳에서 의식과 함께 소멸한다”고 하지만 만일 대승(大乘)에 의거하면 “몸의 감관은 이곳에서 본식(本識)과 함께 소멸한다”고 한다.
두 번째는 생을 받는[受生] 방법이다. 『구사론』에 의하면, 가서 이르게 되는 곳이 태어날 갈래[道]이기 때문에 여기서 생긴 중음(中陰)의 중생은 전생 업의 세력으로 생긴 눈으로 말미암아 비록 가장 먼 곳에 있다손 치더라도 태어날 곳을 능히 보게 된다 하였다. 그곳에서 부모가 될 이가 성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만일 남자가 될 것이면 그 어머니에 대하여 곧 남자로서의 음심을 일으키고, 만일 여자가 될 것이면 그 아버지에 대하여 곧 여인으로서의 음심을 일으킨다. 이 뒤바뀐 마음으로 성을 낸 이 중유(中有)의 중생은 이 두 가지의 뒤바뀐 마음으로 말미암아 유희하고 싶어서 태어날 곳으로 가는데, 이것이 바로 곧 속(屬)할 데를 기꺼이 얻는 것이다. 이때 부정(不淨)은 이미 태(胎)에 이르러 환희심을 내면서 그대로 그곳에 의탁하여 나게 된다. 이 찰나(刹那)부터 이 중생은 5음(陰)이 화합하여 견실하게 되고 중유의 5음은 곧 소멸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비로소 생을 받게 된다. 만일 그것이 남아이면 태 안에서 어머니의 왼쪽 겨드랑을 의지하여 얼굴을 어머니의 등을 향하여 쭈그리고 앉고, 만일 그것이 여아이면 태 안에서 어머니의 오른쪽 겨드랑을 의지하여 어머니의 배를 향하여 머무르게 된다. 만일 남아도 아니고 여아도 아니면 태 안에서 욕망하는
종류에 따라 생을 의탁하게 되며, 머무르는 것도 역시 그렇게 한다. 중유는 남자나 여자와는 달라서 감관을 구족함이 없기 때문이 남아이든 여아이든 생을 의탁하여 머무르게 되는데, 뒷날 태 안에서 점차로 자라다가 혹은 고자[黃門]가 되기도 한다. 태생(胎生)과 난생(卵生)의 두 생의 의탁하는 도리는 이와 같다.
그러나 만일 중생이 습생(濕生)을 받고자 하면 향기[香]를 좋아하기 때문에 태어날 곳에 이르는데, 이 향기가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않음은 전생에 지은 업을 따른다. 만일 그것이 화생(化生)이면, 그 처소를 좋아하기 때문에 일부러 태어날 곳에 이른다. 만일 그가 지옥으로 갈 중생이면 어떻게 그 처소를 좋아하다가 태어나는가? 마음이 뒤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이 중생이 추운 바람과 찬비를 몸에 맞으며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지옥의 불이 활활 타는 것을 보고 아주 사랑스런 생각이 들면서 그 따뜻한 기운을 얻으려고 일부러 그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 몸에 열풍(熱風)이 불어 빛과 불길 등으로 지짐을 당하면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있을 때는 한지옥(寒地獄)의 시원함을 보고 찬 기운을 애착하면서 일부러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태생과 난생의 두 생은 부모의 성행위를 사랑하지만 습생과 화생의 두 생은 그렇지 않고 적백(赤白)에 의탁하여 몸이 되기 때문에 이런 일은 없다. 습생은 다만 향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태어날 곳에 이르는데, 업의 선악을 따라 좋아하는 향기의 깨끗함과 더러움이 있을 뿐이다. 화생은 다만 의지하게 될 처소를 좋아할 뿐이니 지옥이 비록 고통받는 처소이나 그 죄인이 좋아해서 애착하는 처소를 얻으려고 그곳에서 생을 받는 것이다. 왜냐 하면 좋아하지 않으면 생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논(論)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지었으면 그와 같은 일을 감응해서 태어나는 것이니, 그 때 그 몸으로 지은 그러한 일을 그대로 보고 그 때의 다른 중생도 역시 그러함을 본다. 이 때문에 그곳으로 간다.”
옛날의 여러 법사들도 다 이런 말을 했다.
“만일 그 중생의 나이 30세일 때 살생을 하고 중생을 그물로 잡았다 하자, 그리고 이런 일을 할 때는 반드시 벗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업을 받아서 지옥에 태어나지만 뒷날 중음으로 있는 동안에도 자기 몸이 옛날
30살 일 때 그물로 산 목숨을 잡을 때와 똑같은 언행을 보게 되고, 또 옛날의 벗도 과거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지옥에는 옛날 강호(江湖)에서 본 여러 벗들과 같은 이들이라 서로가 이끌면서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변화를 일으켜서 곧 그 안에서 생을 받는다.”
그 뒤에야 옛날에 지었던 업들이 아주 많았지만 필경 이 한 가지 업 때문에 끌려서 지옥에 났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이 20세 때에 이런 업을 지었든, 혹은 30세 때에 이런 업을 지었든, 뒷날 중음이 되었을 동안에는 자기 몸이 옛날 업을 지을 때의 젊고 늙음을 그대로 보게 되고, 지옥의 중생을 볼 적에도 다 같이 자기 연배처럼 나이가 서로 비슷함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이 중생들에게 연모하는 생각을 일으키면서 그곳에 나아가게 되고, 이 애욕으로 말미암아 생을 받는 것이다. 경부(經部)의 논사(論師)들이 이러한 해석을 한 것이다. 또 『유가론(瑜伽論)』에서 말하였다.
“만일 박복하게 살면 장차 하천한 집에 태어난다. 그는 죽을 때나 태 안에 들 때 갖가지 어지러운 소리를 듣게 되고, 또 저절로 우거진 숲과 대와 갈대와 물억새 따위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만일 복이 많은 이는 장차 존귀한 집에 가 태어난다. 그는 그 때 저절로 고요하고 아름답고 뜻에 맞는 음성을 듣게 되고 또 저절로 궁전에 오르는 등, 뜻에 맞는 모양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또 『구사론』에서 말하였다.
“만일 사람이 임종할 때 삿된 소견의 마음을 일으키면, 이 사람은 먼저의 착하지 않은 일이 인(因)이 되고 삿된 소견이 연(緣)이 되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다.”
어떤 논사(論師)는 말하였다.
“온갖 착하지 않은 일은 모두가 아는 지옥의 인이거니와 이 착하지 않은 그 밖의 것으로 축생과 아귀 안에 가 떨어진다.”
또 나쁜 업이 왕성한 까닭에 축생 안에 떨어진다. 마치 음욕이 왕성한 까닭에 비둘기나 참새나 원앙새 안에 태어나고, 성을 냄이 왕성한 까닭에 도마뱀이나 독사나 전갈 안에 태어나며, 어리석음이 왕성한 까닭에 돼지나 양이나 조개 안에 태어나고, 교만함이
왕성한 까닭에 사자나 범이나 이리 안에 태어나며, 들뜨고 장난이 왕성한 까닭에 원숭이 안에 태어나고, 간탐과 질투가 왕성한 까닭에 굶주린 개 안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만일 그 중에서도 조그마한 선행이 있거나 복이 있으면 비록 축생에 났다 하더라도 조그마한 낙을 누린다. 몸과 입의 두 가지 업이 비록 마음이 주(主)가 되기는 하나 그 구업(口業)으로 보(報)를 받는 이가 많다. 가령 사람에게 욕설을 퍼붓고 경솔한 것이 원숭이와 같으면 곧 원숭이 안에 태어난다. 가령 ‘욕심이 많고 포악함이 마치 마귀와 같다’고 하거나 ‘말하는 것이 마치 개 짖는 소리와 같다’고 하거나 ‘미련한 것이 마치 돼지나 양과 같다’고 하거나 ‘소리가 마치 나귀가 우는 것과 같다’고 하거나 ‘걸음을 걷는 것이 마치 낙타와 같다’고 하거나 ‘스스로 뽐내는 것이 마치 코끼리와 같다’고 하거나 ‘악한 것이 마치 달아나는 소와 같다’고 하거나 ‘음탕한 것이 마치 참새와 같다’고 하거나 ‘겁 많은 것이 마치 고양이나 삵과 같다’고 하면, 이러한 모든 악은 그 구업을 따라 보를 받는다.
그리고 3독(毒)으로 말미암아 근본이 되는데, 3독 중에서도 탐애(貪愛)가 가장 무겁나니, 마치 베의 한 끝을 잡아끌면 나머지 것이 모두 따라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도론(智度論)』에서 ‘만일 탐애를 끊지 않으면 그 탐애는 윤생[潤生]하게 한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4생(生)은 모두가 탐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니, 마치 음욕이 많으면 참새 안에 태어나는 것과 같고, 맛에 탐함이 많으면 뒷간 안의 생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 애욕 때문에 난생(卵生)이 되고 향기의 맛을 탐내기 때문에 습생(濕生)을 받는 것이니, 그가 애착하는 바를 따르기 때문이다. 또 은근하고 중한[重慇] 업을 일으키면 화생(化生)을 받는데, 가령 은근하고 중한 마음으로 죄짓는 일을 좋아하면 죽을 때에 지옥을 보면서 그곳으로 가서 화생하며, 만일 은근하고 중한 복을 애착하면 천상세계에 가서 화생한다. 그러므로 『성론(成論)』에서 말하였다.
“마치 나무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그 나무는 오히려 더 자라듯이, 탐욕의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고통 주는 나무가 언제나 존재한다.”
또 『유가론(瑜伽論)』에서도 말하였다.
“어떻게 하여 내[我]가 생기느냐 하면 애욕이 간단없이 생하기 때문이다.”
무시 이래로 쓸모 없는 이론을 좋아해서 그것이 인(因)이 되어 이미 훈습(熏習)되었기 때문이요,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은 업이 인이 되어 이미 훈습되었기 때문이요, 그 의지할 바탕[所依體]은 두 가지 인의 뛰어난 세력 때문이니, 종자(種子) 안에
이숙(異熟)이 있어서 간단없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죽을 때에는 마치 저울 양 끝이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결국에는 똑같아지는 것처럼 이 가운데서 반드시 모든 감관을 갖추게 된다. 악업을 지은 이가 얻게 되는 중유(中有)는 검은 양의 빛깔이나 혹은 캄캄한 밤의 빛깔과 같으며, 선업을 지은 이의 중유는 마치 흰옷의 빛깔이나 청명한 밤의 빛깔과 같다. 『구사론』에서 말했다.
“이 중유는 5근(根)을 구족하는데 금강(金剛) 등도 장애하지 못한다. 수미산(須彌山) 아래 금강 안에는 두꺼비가 있지만 그 안에 생을 받는 중유는 미세한 물질이라서 금강도 장애하지 못한다. 천안(天眼)을 지닌 이만이 이 일을 볼 수 있다.”
거듭 들었던 일을 증거로 들면, 일찍이 어느 사람에게 들은 것인데, 쇠를 달구어서 뜨겁게 한 뒤에 그것을 깨뜨려서 보니 벌레가 나왔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수명이 길고 짧은 일이다. 『구사론』에서 말했다.
“만일 생이 정해지지 않고 그 밖의 다른 곳에 있을 적에는 이 갈래 안에서 모두 생을 받게 된다. 비유하면 소는 여름철에 교미(交尾)를 많이 하고, 개는 가을철에 많이 하고, 곰은 겨울철에 많이 하고 말은 봄철에 많이 하고, 야간(野干) 등은 일정한 때가 없이 교미를 하는데, 이때 이 중생이 소에 가서 나야 하는데도 그 때가 여름철이 아니면 야간 안에 태어난다는 것이며, 또 개 안에 가서 태어나야 하는데도 그 철이 아니므로 야간 안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또 구사(俱舍)의 소승사(小乘師)들에게 네 가지 해석이 있으나 다 같지 않다. 첫째의 설(說)에서는 극히 짧은 시간에 죽더라도 이미 5음을 받아 난다고 한다. 둘째의 설에서는 7일 동안만 머무르게 되고, 7일이 찬 뒤에는 중유로 있으면서 시절에 제한이 없다고 한다. 셋째의 설에서는 49일 동안 머무르게 되고, 태어날 연[生緣]이 아직 갖춰지지 않으면 죽은 뒤에 다시 받되 역시 시절에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넷째의 설에서는 생을 받을 연을 따르되 겁(劫)을 지나면서 까지도 머무르면서 목숨을 마치지 않는다고 한다. 다섯째의 설에서는 『유가론』에 의하여 말하면, 만일 아직 태어날 연을 얻지 못하면 7일 동안 머무르다가 죽어서 다시 나되 49일 까지
죽고 나고 하며, 그로부터 이후는 어떻든 태어날 연을 얻고 만다고 한다. 이것은 앞의 네 가지와는 같지 않다.
네 번째는 신통력의 더디고 빠른 일이다. 『구사론』에서 말했다.
‘이 중음이 공중을 유람하며 다니다가 마치 사람이 목숨을 버리는 것 같이 한량없는 세계 밖으로 가서 생을 받아야 되면 잠깐 동안에 그곳에 가 도달하게 된다. 이승(二乘)의 신통력으로는 아직 하나의 세계도 나가지 못할 시간인데도, 중음은 벌써 한량없는 세계 밖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비록 부처님의 시력이라 할지라도 역시 그 밖의 갈래[道]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그곳에 가서 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나니, 업의 힘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업으로 인한 신통의 수승함을 논하자면, 수승한 범부인 일승(一乘)의 신통을 억누르게 된다. 『바사론(婆沙論)』에서 말하였다.
“신족(神足)의 수승함은 부처님의 신통보다 더 빠르다.”
다섯 번째는 서로서로 보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구사론』에 의하면 만일 생이 같은 갈래의 중음이면 반드시 서로가 본다고 한다. 만일 사람에게 천안(天眼)이 있으면 가장 청정하니, 이는 하나의 도의 지혜가 있는 이들이라서 이런 사람은 역시 저 태어남을 볼 수 있다. 만일 과보를 얻은 천안이면 볼 수 없으니 아주 미세하기 때문이다.
『살바다부(薩婆多部)』에서 말하였다.
“만일 같은 인도(人道) 중에서 생을 받는 이라면 같은 인도의 중음이라서 서로가 볼 수 있다. 이 이치는 정해진 것이어서 그 밖의 갈래의 중음은 볼 수가 없다. 만일 사람이 천안을 닦아 얻었으면 이 천안은 바로 도에 의하여 얻은 것이므로 중음의 빛깔을 볼 수 있지만 만일 과보로 얻은 천안이면 중음의 빛깔을 볼 수 없나니, 그 중음의 빛깔이 다른 빛깔보다 미세하기 때문이다.”
『정량부(正量部)』에 의하여 말하면, 천도(天道)의 중음은 다섯 갈래 중음의 빛깔을 모두 볼 수 있지만, 인도의 중음은 천도의 중음을 볼 수 없나니, 그가 볼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례로 앞의 것도 볼 수 없는 것이라서 나아가 지옥도(地獄道)의 중음도 앞의 네 가지 갈래의 중음을 보지 못하니, 그가
볼 바가 아니라서 오직 지옥도의 중음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여섯 번째는 몸의 크고 작은 일이다. 『구사론』에서 말한다.
“몸은 6ㆍ7세 되는 어린아이만큼 하고, 아는 것과 총명함도 그 정도이다. 만일 보살이 중음으로 있으면, 마치 조금 아픈 사람에게 크고 작은 모습이 모두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비록 중음에 있다손 치더라도 막 태 안으로 들어가려 하면서 1만 구지(俱胝)의 염부주(剡浮洲)를 두루 비출 수 있다.
게송을 읊는다.

높은 집[高堂]은 진실로 객(客)을 치는 집이요
괴업[壞業]의 이치는 늘 끌어당긴다.
옥갑(玉匣)은 바야흐로 관(觀)에 맡고
금대(金臺)는 더 연장하지 말라.

상여의 소리[挽聲] 길 따라 멀어지고
담쟁이의 그림자[蘿影]는 소나무에 걸려 있다.
어찌 10념(念)에 머무를 수 있으랴.
오직 4연(緣)을 따라야만 한다.

허깨비를 만들어서 같고 다름을 지어서
그 변화를 희롱하며 많은 몸을 만드는데
어리석은 이들이 나와 남[人我]이라고 다투거늘
그 누군들 또 진실이라 일컫지 않겠는가?

잘못된 이[謵者]는 오래 가고 공고함을 의심하겠지만
통달한 이[達者]는 허깨비요 빈객(賓客)임을 안다.
친소(親疎)가 이미 정해짐이 없거늘
어찌 푸른 하늘을 보면서 수고롭게 슬퍼하는가.”

감응연(感應緣)[간략히 열여섯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한(漢)의 애제(哀帝) 때, 어떤 여인이 잉태하여 두 달밖에 되지 않은 태아가 뱃속에서 울었다.
한(漢)의 평제(平帝) 때, 어떤 소를 치는 여인이 봄에 죽었는데 염한 지 6일 만에 관속에서 나왔다.
한(漢)의 건안(建安) 동안에 이(李)라는 이가 나이 젊어서 죽었는데 14일 만에 다시 소생했다.
한(漢)의 진류(陳留) 사후(史姁)는 죽을 적에 유촉(遺囑)이 있었는데 뒤에 그대로 들어맞았다.
한(漢)의 풍귀(馮貴) 사람은 죽은 지 1백 년이 지났으나 도둑이 그 무 덤을 파보았더니 얼굴빛이 옛날 그대로였다.
한(漢)의 영제(靈帝) 때, 요서(遼西) 사람이 요수(遼水) 물 위에 관 (棺)이 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속에서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백이 (伯夷)의 아우 고죽군(孤竹君)이다”했다.

한(漢)의 북해(北海) 영릉(營陵)에 사는 어떤 도인(道人)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 죽은 사람과 서로 만나볼 수 있게 했다.
한(漢)의 무제(武帝) 때에 제왕의 총애를 받은 이부인(李夫人)이 뒤 에 죽자 슬퍼하다가 제왕은 그녀를 장막 안에서 보았다.
한(漢) 때, 두하(杜嘏)의 집에서 장사를 지내다가 여종이 잘못하여 나 오지 못했는데, 10년이 지난 뒤에 무덤을 파보자 그 여종은 아직도 살 아 있었다.
한(漢)의 낙양(洛陽) 사문(沙門) 달다(達多)는 묘를 파다가 산 사람 을 얻었는데 그는 죽은 지 12년이었다.
진(晋)의 당준(唐遵)은 갑자기 죽었다가 하루 저녁을 지난 뒤에 소생 했는데 그가 당한 영묘한 감응들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진(晋)의 사문 하라갈(訶羅竭)은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 모두 영징 (靈徵)이 있었는데, 그 신기하고 이상함은 헤아리기 어려웠다.
진(晋)의 사문 축법혜(竺法慧)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 영묘한 감 응이 있었는데, 그 신기한 변화는 측량하기 어려웠다.
송(宋)의 사문 혜인(慧印)에게 황천(黃遷)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뒤의 일들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수(隋)의 사문 석현경(釋玄景)은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뒤의 상서로운 징조들이 모두 들어맞았다.
당(唐)의 거사(居士) 배칙남(裵則男)이 갑자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서 저승에서 본 일들을 말했는데, 모두가 그대로였다.

한(漢)의 애제(哀帝) 때, 어떤 여인이 잉태하여 두 달밖에 되지 않은 태아 가 뱃속에서 울었다.
한나라 애제 건평(建平) 4년 4월에 있었던 일이다. 산양(山陽) 쪽에 한 여자가 살았는데, 밭은 한 뙈기도 없었다. 그녀는 아이를 밴 지 아직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뱃속에서 울었으므로 태어나자 키우려 하지 않고 그만 밭두덕 위에 파묻어 버렸다. 그런데 사흘 후에 어떤 사람이 지나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으므로 그 어머니는 파내어 길렀다.

한(漢)의 평제(平帝) 때, 어떤 소를 치는 여인이 봄에 죽었는데 염한 지 6일
만에 관속에서 나왔다.
한나라 평제 원시(元始) 원년 2월에 북방[朔方]의 넓은 데서 소를 치는 여인 조(趙)씨는 병이 들어 앓다가 봄철에 죽었다. 그녀를 염해서 관에 넣은 지 6일 만에 관 밖으로 나와 스스로 말하였다.
“죽은 남편을 만났는데 말하기를 ‘나이 27세인데 당신은 죽어서는 안 됩니다’고 하더라.”
태수(太守) 담(譚)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음(陰)이 지극하여 양(陽)이 되었으니, 아랫사람이 위가 되겠구나.”
과연 그 뒤에 왕망(王莽)이 왕위를 빼앗았다.

한(漢)의 건안(建安) 동안에 이(李)씨라는 이가 나이 젊어서 죽었는데 14일
만에 다시 소생했다.
한나라 건안 중년에 이(李)씨라는 이가 젊어서 일찍 죽었다가 14일 만에 다시 살아났는데, 그의 말이 귀신처럼 완전히 들어맞았다. 헌제(獻帝) 초에는 평중(平中) 장사(長沙)의 환(桓)씨가 죽었는데, 한달 남짓이 된 뒤에 그의 어머니가 관 속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열어 주어서 살아나게 한 일도 있었다.

한(漢)의 진류(陳留) 사후(史姁)는 죽을 적에 유촉(遺囑)이 있었는데 뒤에
그대로 들어맞았다.
한나라 진류 고성(考城)에 사는 사후(史姁)는 자(字)가 위명(威明)이다. 젊은 나이에 병이 들어 죽으려 할 때, 그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제가 죽으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저를 파묻을 적에 대 지팡이로 저의 무덤 위를 받쳐 놓아주십시오. 그러다가 만일 대 지팡이가 뾰족이 나오면 저를 파내어 주십시오.”
그가 죽게 되자 그를 파묻으면서 그의 말대로 받쳐 놓았다. 그런 뒤에 7일 만에 가서 보았더니, 지팡이가 과연 뾰족이 나와 있었다. 땅을 곧 파내자 살아 나왔으며, 우물로 가서 목욕을 하고 나자 옛날과 같이 회복되었다. 나중에 이웃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하비(下邳)로 가서 호미를 팔다가 잘 팔리지 않자 돌아가고 싶어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는 잠시 집에 갔다 오겠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으며 말했다.
“어떻게 천리 길이나 되는데, 잠깐만에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오?”
그가 대답하였다.
“하룻밤만 자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리하여 서로가 믿지 못하였으므로 편지를 써 주면서 답장을 받아오라고 함으로써 그것으로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하룻밤을 자고 돌아오면서 과연 답서를 모두 받아 왔으므로 소식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고성령(考城令) 강하(江夏) 담고화(譚賈和)가 그런 말을 듣고 그의 누님이 병이 들어 고향에 있었으므로 그 소식을 급히 알고자해서 그를 청하여 가서 살펴보고 오도록 했다. 길이 멀어서 3천 리였으나 이틀만에 답서를 가져 왔으므로 사정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한(漢)의 풍귀(馮貴) 사람은 죽은 지 1백 년이 지났으나 도둑이 그 무덤을
파보았더니
얼굴빛이 옛날 그대로였다.
한나라 풍귀(馮貴) 사람이 죽은 지 1백 년이 되었으나 도둑이 그 무덤을 파보자 얼굴빛은 생시와 같았고 다만 살만이 조금 찼을 뿐이었으므로 도둑들이 그를 서로 시기하다가 뒤에 일이 발각되었다.

한(漢)의 영제(靈帝) 때, 요서(遼西) 사람이 요수(遼水) 물 위에 관(棺)이 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속에서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백이(伯夷)의 아우
고죽군(孤竹君)이다” 했다.
한나라 영지현(令支縣)에 고죽성(孤竹城)이 있었는데 옛날 고죽(孤竹)의 나라였다. 영제(靈帝) 광화(光和) 원년에 요서(遼西) 사람이 요수(遼水) 물 위에 관(棺)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건져다 놓고 부수려고 했다. 그런데 관 속에서 사람 말소리가 났다.
“나는 백이(伯夷)의 아우 고죽군(孤竹君)입니다. 바닷물이 나의 관곽을 부서뜨려서 그 때문에 떠내려 온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부수어서 무엇하시렵니까?”
그 사람은 두려워서 감히 쪼개지 못하고 그대로 사당[廟]을 짓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관리와 백성들로서 어떤 이라도 그 속을 보려고 하는 이는 모두 까닭 없이 죽어 버렸다.
한(漢)의 북해(北海) 영릉(營陵)에 사는 어떤 도인(道人)은 사람들로 하여
금 이미 죽은 사람과 서로 만나볼 수 있게 했다.
한나라 북해의 영릉에 어떤 도인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 죽은 사람과 서로 만나볼 수 있게 했다. 같은 군(郡) 사람이 부인이 죽은 지 이미 수년이 지났었다. 그런 말을 듣고 가서 만나 말하였다.
“저로 하여금 죽은 부인을 한번만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그러자 도인이 말하였다.
“좋습니다. 당신이 가서 만나 보십시오. 만일 북소리가 들리거든 빨리 나오십시오.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도인은 서로 만난 뒤에 지킬 제약을 말해준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가 만났다. 함께 말하면서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며 사모하는 정이 생시 때와 똑같았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북소리가 들렸다. 더 머무를 수 없음을 한탄하면서 문으로 나올 때 문이 닫히면서 그의 옷 뒷자락이 문틈에 끼어서 끊어졌다. 그리고 떠나온 뒤에 한 해 남짓이 되었을 때 이 사람도 죽었다. 집안 사람들이 그 사람을 묻으려고 무덤을 열어 부인의 관을 보았더니, 그 덮개 아래에 옷 뒷자락이 끼여 있었다.

한(漢)의 무제(武帝) 때에 제왕의 총애를 받은 이부인(李夫人)이 뒤에 죽자
슬퍼하다가 제왕은 그녀를 장막 안에서 보았다.
한나라 무제(武帝)에게 총애를 받던 이부인(李夫人)이 있었다. 그 부인이 뒤에 죽게 되자 무제는 슬퍼하면서 그리워함이 그지없었다. 그러자 도사[方士] 소옹(少翁)이 말하였다.
“그 혼신(魂神)을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장막을 시설하여 등불을 밝게 켜 놓았다. 무제가 멀리서 바라보니 아름다운 여인이 장막 안에 있었는데 이부인의 모습과 같았다. 그러나 더 나아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한(漢) 때, 두하(杜嘏)의 집에서 장사를 지내다가 여종이 잘못하여 나오지
못했는데,
10년이 지난 뒤에 무덤을 파보자 그 여종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한나라 두하(杜嘏)의 집에서는 장사를 지내다가 여종이 잘못하여 그만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10여 년 만에 합장(合葬)을 하려고 무덤을 파보았더니 그 여종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그녀가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얼마 있다가 그녀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녀는 스스로 말하였다.
“한두 밤을 잤을 뿐입니다.”
처음 그 여종이 파묻힐 때가 15세였고 무덤에서 나온 뒤에 다시 15ㆍ6년 살다가 시집을 보냈는데 아들이 있었다.[위의 아홉 가지 증험은 『수신이기(搜神異記)』에 나온다.]

한(漢)의 낙양(洛陽) 사문(沙門) 달다(達多)는 묘를 파다가 산 사람을 얻었
는데 그는 죽은 지 12년이었다.
한나라 보리사(菩提寺)는 서역(西域) 사람이 세웠으며 모의리(慕義里)에 있었다. 사문 달다(達多)가 묘를 파서 벽돌을 끄집어내다가 어떤 사람을 얻었으므로 상부로 보냈다. 당시 태후(太后)는 한나라 명제(明帝)와 함께 화림원(華林園)의 도당(都堂)에 있다가 괴이한 일이라고 여겨 황문랑(黃門郞) 서흘(徐紇)에게 물었다.
“상고(上古) 이래로 이런 일이 있었소?”
서흘이 말하였다.
“옛날 위(魏)나라 때, 무덤을 파다가 곽광(藿光)의 사위 범(范)의 친구 집 여종을 얻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조(漢朝)의 폐립(廢立)을 말했었는데 사서(史書)와 꼭 부합했습니다. 그다지 이상해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태후는 서흘로 하여금 그의 성명과 죽은 지가 몇 년 되었으며 무엇을 먹고살았는가를 묻게 했다. 죽은 이가 대답하였다.
“신(臣)의 성은 최(崔)요 이름은 함(涵)이며 자(字)는 자홍(子洪)이요 박릉(博陵) 안평(安平) 사람입니다. 아버님 이름은 창(暢)이요 어머님 성은 위(魏)씨이며, 집은 성(城)의 서쪽 부재리(埠財里)에 있습니다. 죽을 때의 나이는 15세였고 지금은 27세입니다. 땅 밑에 있으면서 12년 동안 늘 술에 취한 듯 누워서 먹은 것은 없습니다. 때로 놀러 다니다가 혹 음식을 만나기도 했으나 꿈속과 같았으므로 무어라 말로 다하지 못하겠습니다.”
태후는 곧 문하록사(門下錄事) 장준(張俊)을 부재리로 파견하여 함의 부모를 찾게 했다. 과연 최창과 그의 처 위씨가 있었으므로 장준은 최창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죽은 아들이 있었습니까?”
최창이 대답하였다.
“자홍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나이 15세 때에 죽었습니다.”
장준이 말했다.
“남에게 발굴되어 지금 다시 살아나서 화림원에 있습니다. 주상(主上)께서 나를 보내서 물어보게 했습니다.”
최창은 그 말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말하였다.
“실은 그런 아들이 없습니다. 아까는 잘못 말한 것입니다.”
장준은 그대로 돌아와 그 사실을 자세히 태후에게 아뢰었다. 태후는 장준을 시켜 함을
그의 집으로 데려가게 했다. 최창은 함이 문 앞에 와 있음을 듣고는 불을 피워 놓고 손에는 칼을 잡았으며, 또 위씨도 복숭아나무 가지를 쥐고 그를 내쫓으면서 말했다.
“너는 올 필요가 없다. 우리는 너의 부모가 아니요 너도 우리의 아들이 아니다. 빨리 떠나서 재앙이 없게 하라.”
최함은 할 수 없이 버리고 떠나갔다. 그는 경사(京師)의 마을 안[衖內]을 돌아다니다가 항상 절 문 아래서 잤으며 여남(汝南) 왕창(王暢)이 준 누런 옷 한 벌로써 지냈다. 그러면서 성질이 햇빛을 두려워했으므로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고, 또 물ㆍ불과 병기 등속을 두려워했으므로 항상 길을 달리기만 했다. 그러다 지치면 쉬고 천천히 걷는 일은 없었다. 그 때의 사람들은 그가 아직도 귀신이라고 여겼다. 낙양(雒陽)의 큰 저자 북쪽에 봉종리(奉終里)가 있었고 그 마을 안에서는 대부분이 죽은 사람에 관한 도구와 모든 관곽(棺槨)을 팔고 있었다. 함은 말하였다.
“잣나무로 만든 관에 뽕나무를 엇갈리게 놓지 말라.”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함이 말하였다.
“내가 땅 밑에 있을 때 귀신 병사들을 보았는데, 어느 한 귀신이 말하기를 ‘이것은 잣나무로 만든 관이라 병사들이 앉을 자리는 면하겠구나’ 했다.”
그러자 어느 관리가 말하였다.
“그대는 비록 잣나무로 만든 관에 뽕나무를 교차시키기는 했으나 드디어 병사들을 면하지 못했다.”
경사(京師)에서는 이 잣나무가 용귀(勇貴)함을 듣고 관을 파는 이들을 의심했다. 그래서 최함의 말을 지워버리기 위해 이런 말을 퍼뜨렸다 한다.[이 한 가지 증험은 『낙양사기(洛陽寺記)』에 나온다.]

진(晋)의 당준(唐遵)은 갑자기 죽었다가 하루 저녁을 지난 뒤에 소생했는데
그가 당한 영묘한 감응들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진나라 당준의 자(字)는 보도(保道)이며 상우(上虞) 사람이다. 진나라 태원(太元) 8년에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가 하룻밤을 지나고 다시 살아나서 말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불러서 데리고 갔는데, 하나의 성부(城府)에 이르렀다. 아직 다 가기 전에 나의 종숙(從叔)이 성 안에서 나오다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나에게 물었다.
‘네가 무엇 때문에 왔느냐?’
내가 대답했다.
’고모님과 누님을 뵙지 못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내일 날이 새면 출발하여 가 뵈려고 하는데, 밤에 몇 사람이 나타나 급히 불러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즉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는 길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종숙이 말하였다.
‘너의 고모님은 돌아가신 지 2년이나 되었다. 너의 큰 누님의 아들 도문(道文)이 근간에 이곳으로 잡혀 왔다가 은혜를 입어 놓여났는데도 그대로 머물러 구경하면서 노느라 즉시 돌아가지 않았다. 여러 날이 지난 뒤에야 돌아갔으나 집에서는 벌써 염을 마치고
관속에 넣고 있었다. 그가 시체에 들어가서 관이 흔들리자 그 집에서는 깨어날 것을 바라면서 관을 길에다 내려놓고 열려고 하다가 점쟁이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점쟁이는 불길(不吉)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끝내 감히 열어보지 못했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파사(把沙)의 역사(役事)에 가 있으면서 모진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이 받고 있다. 너는 빨리 떠나야 한다. 여기서 머뭇거리지 말라. 또 너의 누이동생도 이미 죽었으니, 지금 너의 고모와 함께 지옥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언제 벗어날지는 모른다. 너는 이제 돌아가거든 그 아들에게 ≺부지런히 공덕을 닦아서 그들이 면할 수 있게 하라≻고 말하여라.’
그러면서 나에게 돌아가는 길을 가리켜 주셨다. 그리고 작별하려 할 적에 또 나에게 부탁하였다.
‘너는 도로 살아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경하할 일이다. 세상에 있기는 잠시 동안이라 마치 비바람에 날리는 티끌과 같으며 천당이나 지옥에서 받는 쾌락과 고통은 응보(應報)인 것이다. 나는 옛날 그런 말을 듣기만 했다가 지금에야 그 사실들을 직접 보고 있다. 너는 의당 착한 업에 힘쓰고 효도와 공경에 힘쓸 것이며 불법을 사랑하고 계율을 지키면서 부디 범하지 않아야 한다. 한번 사람의 몸을 버리고, 여기 벌받는 땅으로 들어오면 그 혹심한 고통은 말로 다 못하며 스스로 후회한들 어찌 미치겠느냐. 부디 힘쓰면서 명심하여 잊지 말 것이다. 우리 집의 친족들은 살아 있을 때 죄와 복을 믿지 않다가 지금은 줄줄이 도탄(塗炭)에 빠져서 길이 혹독한 고통을 받고 있다. 그 타고 문드러지고 상하고 비통해 하는 것은 잠시도 쉬는 일이 없다. 하루 동안 악을 고치고 선을 하려 한들 무엇이 되겠느냐. 나는 그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있기 때문에 너에게 부탁하는 것이니 온 집안 사람에게 권하고 교화하여 함께 힘쓰도록 하라.’
이 말을 마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작별하고 나서 길을 따라 돌아왔다. 잠깐 만에 집에 닿았는데 집에서는 관을 다 손질한 뒤에 한창 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시체에 가서 붙자 시체는 곧 숨이 통했다. 며칠이 되자 점차로 나아졌기 때문에 친족과 아는 이들에게 권하고 보이면서 다 같이 큰 법을 받들게 된 것이다.”
처음 당준의 고모는 남군(南郡)의 서한(徐漢)에게 시집갔고, 누님은 강하(江夏)의 낙유(樂瑜)에게 시집갔으며, 누이동생은 오흥(吳興)의 엄만(嚴晩)에게 시집갔으나 길이 하도
멀어서 소식이 끊긴 지가 오래였다. 당준은 몸이 낫게 되자, 드디어 세 개의 군(郡)에 가서 그들을 찾았다. 고모와 누이동생과 누님의 아들은 과연 다 같이 죽은 뒤였다. 누님 역시 아들 도문의 관이 움직이기에 상여를 내려놓았었다는 말을 했는데, 모두가 종숙이 말한 그대로였다. 당준에게서 도문이 횡사하게 되었다는 뜻을 듣자 그 누님은 더욱더 애통해 하면서 거듭 그를 위해 옷을 만들었다. [이 한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진(晋)의 사문 하라갈(訶羅竭)은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 모두 영징(靈
徵)이 있었는데, 그 신기하고 이상함은 헤아리기 어려웠다.
진나라 낙양(雒陽)의 석하라갈(釋訶羅竭)은 본시 양양(襄陽) 사람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2백만 구절의 경전을 외웠고, 성품은 허현(虛玄)하며 계행을 지켰다. 행동이 착하고 얼굴이 잘났으며, 두타(頭陀)를 많이 행하면서 혼자 산야(山野)에 묵었다. 진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9년에 잠시 낙양에 들렀을 적에는 역질(疫疾)이 몹시 번져 있었는데 그가 가서 주원(呪願)하면 모두 나았다. 진나라 혜제(慧帝) 원강(元康) 원년에 그는 상루지산(上婁至山)의 석실(石室)에 들어가서 좌선하고 있었다. 그 석실은 물에서 아주 멀리 떨어졌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산골 물을 대주려 했다. 그러자 하라갈이 말하였다.
“수고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일어나 왼발로 석실의 서쪽 석벽(石壁)을 밟았다. 그러자 움푹 들어갔는데 발을 뽑아 내자마자 물이 솟아 나왔다. 맑고 향기로우며 맛이 좋은 물이 사철 내내 끊어지지 않았으며, 와서 마신 사람들은 모두 굶주림이 그치고 질병이 없어졌다. 원강 8년에 단정히 앉아서 죽었으며 제자들은 국법에 의하여 화장했다. 그런데 불에 태운 지 여러 날이 되었지만, 그 시체는 아직도 불 속에 앉아서 영영 재가 되지 않았으므로 도로 석실에다 옮겨 두었다. 뒷날 서역 사람 축정(竺定)[자(字)는 안세(安世)이다.]이 진나라 함화(咸和) 중년에 그 나라에 가서 친히 그 시체를 살펴보았으나 엄연하게 평좌하고 있었다. 죽은 지 30여 년이었다. 축정은 뒤에 경사(京師)에 와서 승니와 속인들에게 그것을 전했다.

진(晋)의 사문 축법혜(竺法慧)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 영묘한 감응이
있었는데, 그 신기한 변화는 측량하기 어려웠다.
진나라 축법혜는 본시 관중(關中) 사람이다. 행동이 방정하고 계행이 있었으며, 숭고산(崇高山)에 들어가서 불도밀(佛圖蜜)을 스승으로 섬겼다. 진나라 강제(康帝) 건원(建元)
연간에 양양(襄陽)으로 와서 양숙자사(羊叔子寺)에 머물렀다. 별청(別請)도 받지 않고 매양 걸식을 했으며, 승상(繩床)을 가지고 다니면서 한적하고 넓은 길에다 깔아 놓고 앉았다. 때로 비를 만나면 기름에 절은 옷을 덮고 비가 그치면 승상만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찾으면 잠깐 사이에 벌써 승상에 와 있었다.
매양 제자 법소(法昭)에게 말하였다.
“너는 지나간 세상에 한 마리의 닭다리를 부러뜨린 일이 있다. 그 재앙이 곧 닥치리라.”
얼마 있다가 법소는 남이 그를 던지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져 영영 못쓰게 되었다. 또 뒤에 제자에게 말하였다.
“새 들[新野]에 한 늙은이가 곧 죽게 되었구나. 내가 가서 구해야겠다.”
그리고는 이내 밭 두덕 사이를 갔는데 과연 한 늙은이가 소를 데리고 밭을 갈고 있었다. 축법혜는 그에게 소를 달라고 했으나 늙은이는 주지 않았다. 그러자 축법혜는 그의 앞으로 가서 스스로 소의 코를 붙잡았다. 늙은이는 그의 기이한 행동이 두려워 드디어 소를 그에게 주었다. 축법혜는 소를 끌고 주원(呪願)하면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돌아와 소를 늙은이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 늙은이는 며칠 되지 않아서 죽게 되었다.
뒤에 서쪽을 정벌했던 유이공(庾移恭)이 양양을 진압했다. 그는 본디 불법을 받들지도 않았기 때문에 축법혜에게 비상한 행적이 있음을 듣고는 매우 질투하고 있었다. 축법혜는 미리 제자에게 말했다.
“나에게 전생의 과보가 곧 닥치리라.”
권속들에게 경계하고 권하면서 부지런히 복과 선을 닦게 했다. 그런지 이틀 후에 과연 잡혀가서 형(刑)에 처해졌으니 춘추는 58세였다. 죽으려 할 때에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억울하게 나는 형을 당한다. 내가 죽고 나서 3일 후에는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리라.”
그 날이 되자 과연 큰비가 쏟아졌다. 성문 밖이 깊이 한 길쯤 패이면서 유이공의 권속과 살고 있던 백성들이 모두 다 빠져 죽었다. [위의 두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송(宋)의 사문 혜인(慧印)에게 황천(黃遷)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살아 있
을 때와 죽은 뒤의 일들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송나라 혜원(慧遠) 사문은 강릉(江陵) 장사사(長沙寺) 스님이다. 그의 스승 혜인(慧印)은 선법(禪法)을 잘 닦았으므로 선사(禪師)라고 불렸다. 혜원은 본래 혜인의 종이었으며 이름은 황천(黃遷)이었다. 나이 20세 때에 혜인이 매양 정(定)에 들면 황천의
전생이 보였고, 바로 그는 혜원의 스승이었으므로 드디어 제자로 삼은 것이다. 혜원은 항상 강릉시의 서쪽에 있는 양도산(楊道産)의 집에 있으면서 반주삼매(般舟三昧)를 닦았다. 힘써 고행한 지 1년여 만에 그로 인하여 드디어 감응이 나타났다. 혹은 하루 동안에 10여 곳의 재(齋)에 나아가기도 하고, 또 밤낮 내내 도를 수행하고 경을 독송하고 있는데도 각각의 집에는 모두 황천이 와 있음을 보았으므로 대중들은 점점 공경하고 기이하게 여기면서 도를 얻은 이라고 생각했다.
효건(孝建) 2년의 어느 아침에 스스로 말했다.
“죽을 때가 되었구나.”
그리고 도산에게 말했다.
“내일 저녁에 나는 당신 집에 가서 죽을 것입니다.”
다음 날 도산은 8관재(關齋)를 베풀면서 온밤 내내 등불을 켜 놓았다. 초저녁과 밤중이 지나도록 황천은 대중들과 함께 도를 행하고 편안하여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4경(更)이 된 뒤에야 고달프다고 누우면서 얼굴빛이 점점 변해지더니 잠깐 사이에 숨을 거두었다. 온 경내에서는 그를 위해 37재(齋)를 지냈고 탑을 세웠다. 그 탑은 지금도 있다. 죽은 지 오래 된 뒤였다. 그의 몸이 다보사(多寶寺)에 나타나서 담순(曇珣) 도인에게 말하였다.
“명년(明年) 2월 23일에 여러 하늘들이 함께 와서 영접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떠나가 버렸다. 담순은 곧 장사 선방(長沙禪房)에서 90일 동안의 재를 지내며 몸을 버려서 보시했다. 그리고 그 날이 오자 숨이 가빴으므로 그는 틀림없이 죽을 것임을 알고 승니와 속인들에게 널리 말을 퍼뜨려 법회(法會)를 성대하게 열었다. 3경(更) 중간쯤 되었을 때 대중 스님들을 불러서 물었다.
“들리고 보이는 것이 있습니까?”
대중 스님들이 말했다.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담순은 말하였다.
“공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나고 향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으니, 황천(黃遷)과의 약속이 이제 다가왔습니다.”
대중 스님들은 비로소 당(堂)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담순은 벌써 숨을 거두었다. [이 한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송(宋)나라 때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성명은 잊었다. 부부가 같이 자다가 날이 새자 아내가 일어나서 나가고 뒤에 남편도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아내가 방으로 돌아와 보니, 그의 남편이 아직도 이불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때 여종이 밖에서 오면서 말했다.
“주인 어른이
거울을 찾습니다.”
그 아내는 여종이 속인다 생각하고 침상 위를 가리키며 여종에게 보이니 여종이 말하였다.
“지금 막 주인 어른이 계신 곳에서 왔습니다.”
달려가서 그 남편 되는 이에게 말하자 그는 크게 놀라면서 들어왔다. 부부가 함께 이불 속에 있는 사람을 보매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잠들고 있는 것이 꼭 그의 형상이었고 하나도 다른 데가 없었다. 비로소 그가 혼신(魂神)임을 알고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고 함께 손으로 천천히 침상을 어루만지자 드디어 축 늘어지면서 자리로 들어가며 점차로 소멸해 버렸다 .부부는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남편은 앓아 누웠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다가 죽었다. [이 한 가지 증험은 『속수신기(續搜神記)』에 나온다.]
송나라 때에 한 서생(書生)이 멀리 가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가 불을 켜놓고 밤에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아들이 그들 앞으로 와서 탄식하며 말하였다.
“지금 저는 혼백(魂魄)입니다.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 부모가 그에게 묻자 아들은 대답하였다.
“이 달 초에 병이 났다가 오늘 아무 시간에 죽었습니다. 지금 낭야(琅耶)의 임자성(任子成)의 집에 있는데, 내일은 염(殮)을 할 것이므로 부모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그 부모는 말하였다.
“그 곳은 여기서 천리 길이다. 아무리 가고 싶다 하더라도 어떻게 가 볼 수 있단 말이냐?”
그 아들이 말하였다.
“밖에 탈 것이 있습니다. 가시면 저절로 이르시게 됩니다.”
그의 부모는 그를 따라가서 수레에 올라탔다. 그런데 갑자기 잠을 자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며 새벽닭이 울 때쯤 되어서 그곳에 벌써 도착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탔던 수레를 보았더니 혼백이 타는 목마(木馬) 수레였다. 드디어 주인을 만나고 아들에게로 가서 슬피 울다가 그가 병든 그 동안의 일들을 물어 보았더니 아들의 말과 같았다. [이 한 가지 증험은 『수신기(搜神記)』에 나온다.]

수(隋)의 사문 석현경(釋玄景)은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뒤의 상서로운 징조
들이 모두 들어맞았다.
수나라 상주(相州) 업하(鄴下)에 살던 석현경은 성이 석(石)씨이며 창주(滄州)사람이다. 현미(玄微)한 뜻을 모두 이해했고 대승(大乘)을 순수히 강(講)했다. 뒤에 사흘 동안 앓아 누워 있다가 시자(侍者)들에게 말하였다.
“현경은 미륵불(彌勒佛)을 뵙고 싶다. 어떻게 야마천왕(夜摩天王)이 되겠느냐?”
또 말하였다.
“손님들이 극히 많으니, 맡았으면 모름지기 보살펴야 한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자 석현경이 대답하였다.
“범부가 지닌 의식(意識)으로는 어떻게 생각할 수조차 있겠소? 아까 하늘들이 와서 맞이하려 했었소.”
그런 뒤에 기이한 향내가
온 절에 가득 찼으므로 대중들이 다 같이 맡았다. 다시 석현경이 말하였다.
“나는 가려고 한다. 장차 세간에 태어나서 선지식(善知識)이 되겠다.”
드디어 그 자리에서 죽었으니, 곧 대업(大業) 2년 6월이었다.
그는 늘 원을 세워서 말하였다.
“나의 뼈를 물 속에다 가라앉혀 놓아라.”
그래서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뜻을 따라서 자맥하(紫陌河)의 깊은 물 속에다 장사지냈다. 3일이 지난 뒤에 가보니, 가라앉혀 놓았던 곳에는 도리어 모래 무덤이 아주 높고 험준하게 만들어져서 물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승니와 속인들은 그 우아한 상서를 기이하게 여겼다. 그 자취는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이 한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唐高僧傳)』에 나온다.]

당(唐)의 거사(居士) 배칙남(裵則男)이 갑자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저
승에서 본 일들을 말했는데, 모두가 그대로였다.
당나라 조주(曹州)의 이호(離狐) 사람 배칙남은 정관(貞觀) 말년 21세 때에 죽었다. 3일을 지난 뒤에 다시 살아나서 스스로 이런 말을 했다.
“처음 죽자마자 한 사람이 왕에게로 데리고 갔다. 왕의 옷은 백색이었는데 너무나 산뜻하고 깨끗했다. 왕이 이 사람을 시켜서 소를 데려다 땅을 갈게 했으므로 하소연했다.
‘형제들이 어려서 양친을 모실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자 왕도 곧 가엾이 여기면서 사자(使者)를 시켜 남쪽으로 데려가게 했다. 그리하여 세 번째 중문(重門)에 닿아서 들어가 보았더니, 끊는 가마솥[鑊湯]과 칼로 된 산[刀山]과 칼나무[劒樹]가 있었다. 또 수천 명의 머리를 모두 베어서 땅 위에 줄지어 놓았는데, 이 머리에 붙은 입은 다 같이 “배고파 죽겠다”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우리 마을에 나이 70쯤 되는 한 노모(老母)가 있었는데 당시 아직 죽지 않은 이였다. 그런데 끓는 가마솥으로 나아가서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바라보고 나서 도로 왕에게로 갔는데 같은 마을 사람 장성(張成)이 나타났다. 그도 역시 아직 죽지 않은 이였다. 어느 한 사람이 장성을 고해 바치면서 말하였다.
‘아무개의 집을 부수어 버렸습니다.’
왕이 사자를 시켜 조사하게 했는데 사자가 와서 보고하였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자 장성이 말하였다.
‘쟁기질을 하다가 모르는 결에 쟁기가 그 무덤을 부서뜨린 것입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왕이 말하였다.
‘네가 아무리 고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으로 조심하지 않은 탓이다.’
드디어 사람을 시켜서 그의 허리에 곤장(棍杖) 일곱 대를 치게 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왕은 나에게 말하였다.
‘너에게는 다시 할 일이 없다. 너를 놓아줄 터이니 빨리 돌아가거라.’
그리고는 왕은 사람을 시켜 보내 주게 했다. 그래서 북쪽 담장을 넘으려고 담장에 올라가서
우리 집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곡성(哭聲)이 들렸으므로 뛰어서 담장을 내려오는데, 그 바람에 갑자기 깨어나 일어나 앉은 것이다.”
소생한 뒤에는 마을 사람들을 위하여 넌지시 말해주었다. 읍(邑) 사람들이 장성의 허리를 보았더니, 일곱 대의 곤장 자국이 있었으며 그 자국은 몹시 검푸른 멍이 들어있었다. 그에게 묘를 부서뜨린 일이 있느냐고 묻자 “거짓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노모도 곧 병이 들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습유(冥報拾遺)』에 나온다.]
당나라 낭야(琅耶)의 왕지홍(王之弘)은 정관(貞觀) 연간에 심주(沁州)의 화천 현령(和川縣令)으로 있었다. 딸을 박릉(博陵)의 최궤(崔軌)에게 시집보냈는데 최궤는 화천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죽은 지 수십 일이 지났을 때 그의 집에 갑자기 최궤의 말소리가 한밤중에 들렸다. 처음에는 온 집안이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그 뒤에는 보통으로 여기면서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궤는 이 집 사위입니다. 비록 처가(妻家)에다 영(靈)을 두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지만 괴롭고 의지할 데가 없어서입니다. 다만 저를 위하여 놓아두기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의 아내가 청을 들어 주었더니, 아침저녁으로 메를 놓을 때 고기를 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오직 소찬(素餐)만을 놓게 하였다. 그리고 항상 부처님께 예배하기를 권하면서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했다. 또 지옥 안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말하였다.
“사람은 일생 동안 항상 살생과 불효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 밖의 죄들이야 작은 것들뿐이다.”
또 말하였다.
“궤가 비록 죄는 없다손 쳐도 큰 노자와 복이 없으니, 궤를 위하여 자주자주 재를 베풀어주십시오, 아울러 『법화경(法華經)』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과 『관음경(觀音經)』의 3경을 각각 2부(部)씩 베껴 주시면 옛날 지은 공덕과 합쳐서 구제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는 오지 않았다. 왕씨 집에서는 일단 그의 말에 의하여 경전을 베끼고 재공(齋供)을 베풀었더니, 궤가 갑자기 다시 와서 감사하다 하면서 이어 말하였다.
“이제는 곧 작별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온 집안 사람들이 울면서 전송했다. 궤에게는 유복자(遺腹子)가 있었는데 벌써 나이 4ㆍ5세쯤 되었다. 그에 대해서 말하였다.
“궤의 이 아들은 반드시 벼슬을 하게 될 것이니 잘 길러 주시기 바랍니다.”
그 이후로부터 다시는 오지 않았다. [이 한 가지 증험은 왕지홍 자신이 말해 준 것을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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