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99권
법원주림 제99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99. 잡요편(雜要篇)[여기에는 10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사의부(四依部) 사과부(四果部)
사식부(四食部) 정구부(淨口部) 명종부(鳴鐘部)
입중부(入衆部) 구법부(求法部) 쇠상부(衰相部)
잡행부(雜行部)
(1) 술의부(述意部)
무릇 신령한 진리는 소리가 없으므로 언사(言辭)로 인하여 뜻을 묘사하고 언사는 자취가 없으므로 문자를 반연하여 음성을 헤아린다. 그러므로 문자는 언사의 올가미[蹄]가 되고 언사는 진리의 통발[筌]이 된다. 음성과 뜻은 부합되어 어느 하나도 잃을 수 없나니, 이 때문이 문자를 응용하여 우주(宇宙)를 두루 다스린다. 비록 자취는 번거로운 문자[翰墨]라 하더라도 진리를 정신과 맺어주는 것이다. 다만 경론(經論)의 넓고 많은 양을 자세히 기록해서 두루 미치기가 어려운데, 기록의 전함은 번거롭게 얽혀 있지만 사건에는 자세함과 간략함이 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넌지시 알리면서 후학(後學)에게 열어 보이고, 가르침의 연(緣)이 되는 자취를 시설하여 환히 갖추어지게 한다. 세속 일의 근원을 가르치려면 어느 것이나 답답함이 있겠지만 조목과 문장[章條]을 찾고 조사하여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것[樞要]만을 검토하고 추려서 그것만을 종이와 붓으로 엮어 앞의 편(篇)에서 자세히 열기(列記)하였으니, 그 나머지 힘써야 할 갖가지 일들을 끌어 모아 세속을 제도하는데 행할 수 있는 것만을 벌여 놓는다. 이것을 소통하고 난 뒤에 바라는 일은 혼미[昏昧]함이 점차로 제거되고 법의 등불이 멀리 비추는 것이다.
(2) 사의부(四依部)
대저, 근기가 둔하고 시기가 경박한 때라서 믿음의 견고함은 갖추기 어렵고 행(行)이 천박하고 덕(德)이 하열한지라 지혜의 바름은 헷갈리기 쉽나니, 반드시 근기와 가르침이 서로 부합되어야 문자와 진리가 모두 갖추어진다. 그러므로
경에서도 ‘비록 1천의 문장을 외운다 하더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고 하신 것이다. 이제 바른 이치를 세우려면 모름지기 종지의 뜻[宗意]에 의거해야 하니, 가르침에는 권교(權敎)와 실교(實敎)가 있고 수행에는 어둠과 밝음이 있다. 그러므로 달을 보았으면 손가락은 저절로 잊혀져야 되고, 뜻[意]을 얻었으면 말은 저절로 쉬어져야 하거늘, 어찌하여 뜻이 도의 문[道門]을 얻었는데도 오히려 막힌단 말인가. 그러므로 경에서는 4의(依)를 말하면서 3위(位)를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사람[人]의 사의이다. 이는 곧 4의의 보살[開士]이니, 처음의 현위[初賢]부터 지극한 성인[極聖]까지이다. 사람의 바탕[資]에는 번뇌[漏]가 없고 법의 본체[體]에는 성품이 공한지라 이 4의에 의거하게 되면 성위(聖位)를 이어받고 삿된 뒤바뀜이 없게 된다.
둘째는 행(行)의 4의이다. 이는 곧 밥을 빌어서 먹고, 누더기[糞掃衣]를 입으며, 두타(頭陀)를 행하고, 난야(蘭若)나 나무 아래 앉아 있는 것이다.
셋째는 법(法)의 4의이다. 아래서 자세히 기술하는 것과 같다. 이 세 가지 법을 세워서 말세의 거울[龜鏡]로 삼나니, 진실로 이는 뭇 행의 으뜸이 되는 스승이다. 큰 성인께서 하신 말씀은 끝내 거짓이 없으므로 가르침에 준하여 일을 행하면 마침내 바르게 되고 삿되지 않는다. 첫째와 둘째의 4의는 지금 세속에서 반드시 소용되는 것은 아니므로 따로 장(章)을 붙여서 우선 법의 4의만을 기술하는 것이니, 삿됨과 바름을 증험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 생각건대 상호(相好) 없는 부처님조차도 오히려 악마의 형상에 미혹되거든, 하물며 식(識)이 있는 범부가 혼란을 받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법의 4의를 세워서 그 본보기를 삼으리라.
첫째는 법(法)에 의지하고 사람[人]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정(情)이 있는 존재이니 법이라야 비로소 궤범(軌範)이 된다. 성품이 공하면 도리를 바르게 하고 본체가 여의어 있으면 거짓되지 않나니, 곧 이러한 법을 씀으로써 바른 법에 의지하게 된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가르침을 다하여 이 흔적을 충분히 밝히셨다. 지금 일을 행하는 이들이 정(情)에 따라서 망령되이 서술하는데도 대부분이 법을 버리고 사람을 따르고 있다. 사람을 따르면서 법칙을 일으킨다면, 어긋남을 초래하여 맡긴 일을 저버림으로써 몸과 마음을 함정에 빠뜨리게 된다. 만일 그 속된 마음을 돌이켜 거룩한 가르침에 의거하고 은밀한 마음으로 일에 힘쓰면서 그릇됨을 알아 성품이 공하면 이 마음을 타고서 길[道路]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니, 일부라도 그릇됨을 알면 분명히 공의 본체[空理]를 따르는 것이 되겠지만, 일부라도 살피기를 싫어하면 분명히 존재의 현상[有事]을 어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안주하는 것을
법 성품의 진실한 도[法性眞道]를 닦아 나아간다고 한다.
둘째는 이치[義]에 의지하고 말[語]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말이란 언설(言說)이라서 바로 통발[筌]을 치는 것이며, 이치는 통달할 진리이어서 만물을 교화할 도(道)이다. 이를 깨달아 알고 나면 생각이 끊어지고 말이 막히니 법조차도 오히려 버려야 하겠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경에서는 뗏목을 버린다는 비유[捨筏之喩]가 있는 것이니 사람이 목격한 일에 대한 이야기만을 품을 뿐 언전(言筌)의 뜻으로는 표시하지 않는다. 뜻을 얻고 나면 말은 쉬게 되나니, 달을 묘한 손가락에 비유하면 일마다 밝지 않을 수 없지만, 요즈음 이치를 얻는다[得義] 함은 바로 말을 외운[誦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실로 도를 행하는 이는 항상 관찰하고 항상 간파(看破)하는 것이니, 항상 관찰하여 말에 의지하고 항상 간파하여 이치를 따른다. 소위 말이 이치를 따른다는 것은 도로 이 말을 외운 데로 되돌아가는 것인데, 하지만 끝없는 때로부터 허망한 습기로 고집하는 소견이 단단할 뿐이다. 고요히 물러나서 자세히 연구해야 비로소 이 허물을 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달리고 날면서 그 소리를 쫓는다 해도 미치지 못하리니,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셋째는 지혜[智]에 의지하고 식(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식이 현행(現行)하여 6진(塵)을 따라 분별하는 것이니, 눈이 보는 빛깔과 귀가 듣는 소리에 헷갈려서 깨닫지 못한다면 소와 양과 헤아림[度]이 같고 삿된 범부와 행동[行]이 같다. 큰 성인께서는 대경[境]이 바로 자기의 마음이라고 가르쳐 보였으나, 어리석은 범부들이 6진은 식 밖의 것이라고 굳게 고집하니, 이 때문에 교화하고 인도한다 해도 될 까닭이 없으며, 그것을 버려야 알게 된다. 막히면 범부의 의식으로 돌아가고 뒤바뀌면 성인의 마음도 버린다. 어리석고 미혹된 이는 세월을 보내면서 항상 세 가지 뒤바뀜에 빠져 있으므로 용감하게 힘써야 특별히 뛰어날 것이다.
생각이 움직이면 곧 아는 것을 식에 의지한다고 하고, 흐름에 따라 돌이킬 줄 아는 것을 수분지(隨分智)라고 한다. 이와 같이 공을 더하면서 점차로 밝아지고 커진 뒤에야 진경(塵境)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대경은 마음 밖이 아니요, 바로 자기 마음의 모양이거늘 어찌 어리석고 미혹되어 증애(憎愛)의 마음을 망령되이 낼 것인가. 생각하고 선택하여 마지않으면 소와 양과는 다름을 알 것이다.
【문】 그대는 이와 같은 이론을 세워서 지혜와 어리석음이 다름을 밝히나 어떠한 달관(達觀)으로써 오히려 범부의 식이라 일컫는가?
【답】 성인의 지혜는 가없고 공을 쌓으면서 덕을 드러내거늘, 어찌 한번의 진술로써
곧 깨끗하게 이룩된다 하겠는가? 이것은 다만 말을 얻었을 뿐인데도 말을 따르면서 집착하고 있는 것이니, 이 집착은 무시이래로 익히고 훈습되어서 3기(祇) 동안 끊임이 없었음을 깊이 알아야 비로소 기울이고 다하게 된다. 피가 섞인 젖이면 말이 셀 수 없으나, 기복(起伏)의 모양이 여기에 있게 되니 경에서 ‘초지(初地)에 보시를 행하고 나머지는 분수에 따라 닦는다’고 한 말씀과 같다. 높은 궤범으로 위의를 세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닦고 배우게 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한 번의 이해로 남은 그 지혜를 다할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반드시 지혜는 다할 수 있되 아직은 높고 수승하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지금의 사람들은 입으로는 그것이 공임을 말하면서도 마음은 아직 존재[有]를 잊지 못하고 있다. 허공을 오르고자 일어나지도 않았으니 불에 들어가는 일은 더욱더 어렵다. 이는 모두가 마음의 모양인데도 봉하고 헷갈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뒤에 통달하게 되면 마음을 따라 전용(轉用)하게 되거늘 어찌 날으는 새가 공중에서 놀지 않겠는가. 스스로 항상 베[市]와 같은 불로 씻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으리라.”
넷째는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경은 다 같이 성스러운 말씀을 담은 것이다. 무릇 도에 드는 이는 앞장서서 이것을 알아야만 일마다 통달하지 않음이 없고, 의심도 모두 결정된다. 다만 중생들의 성품과 식이 깊고 얕고 영리하고 둔함이 같지 않으므로, 큰 성인으로 하여금 뜻[情]을 따라 따로따로 설명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극한 도[至道]에 의거하면 이것은 자기의 마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삼계(三界)의 위와 아래를 통틀어서 법의 이치는 오직 마음일 뿐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세계의 의보(依報)에 나아가서 마음을 밝힌 것이다. 또 이르되 “여여(如如)와 진제(眞際)와/열반(涅槃)과 법계(法界)와/갖가지 의생신(意生身)은/부처님께서 오직 심량(心量)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세간을 벗어난 법의 본체에 의거하여 마음을 밝힌 것이다. 끝까지 궁구하여 실제(實際)에 이르면 마지막에는 이의 근원에 도달한다. 흐름을 따라 나아가 감응하면 근본 되는 분명한 이치[了義]로 돌아오리니, 그러므로 더욱 법으로써 권형과 기틀[權機]을 약정(約定)하는 것이다.
또 『대집경(大集經)』에서 말씀하셨다.
“또 사리불아, 보살 마하살에게 4의법(衣法)이 있어서 또한 다할 수 없다. 어떤 것을 4의법이라 하는가?
이치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 의지하고 식에 의지하지 않으며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않으며,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이치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말[語]이 세간의 법에 들어가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치[義]는 세간 밖의 법으로서 문자가 없는 모양을 아는 것이다. 말을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로 조복하고 옹호한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치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가 평등한 데로 들어감을 아는 것이다. 말이 나고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치란 나고 죽음에 성품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말이 열반의 맛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치는 열반에 성품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말을 모든 승(乘)이 처소를 따라 편안히 머무른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치는 모든 승이 한 모양인 지혜의 문으로 들어감을 아는 것이다.
말이 모든 버림[捨]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치란 세 가지의 청정함이 그 자체이다. 말이 몸과 입과 뜻으로 청정한 계율을 받아 지니는 공덕과 위의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치는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바가 전혀 없으면서도 온갖 청정한 계율을 수호하고 지님을 요달(了達)하는 것이다. 말이 성냄과 뽐냄과 교만함을 인욕으로써 끊어 없앤다고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치는 모든 법에서 무생인(無生忍)을 얻음을 요달하는 것이다. 말이 온갖 선근(善根)을 부지런히 행한다고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치는 처음도 끝도 없이 정진에 편안히 머무르는 것 그 자체이다. 말이 모든 선정의 해탈과 삼매와 삼마발제(三摩跋提)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치란 멸진정(滅盡定)을 아는 것이다. 말이 온갖 문자와 지혜의 근본을 모두 듣고 지니는 것이라면, 이치란 이 지혜의 이치를 말로써는 설명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말이 37조도(助道)의 법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치란 모든 조도의 법을 수행하여 과위를 증득할 수 있음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말이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와 도제(道諦)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치란 멸제(滅諦)를 증득하는 것이다. 말이 무명(無明)의 근본과, 나아가 나고[生] 늙어 죽음[老死]에 반연한다고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치란 무명이 사라지고, 나아가 늙어 죽음도 사라짐을 아는 것이다. 말이
선정과 지혜를 돕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치란 해탈하는 지혜를 밝히는 것이다. 말이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치란 선근(善根) 아닌 것이 곧 해탈임을 아는 것이다. 말이 장애 되는 법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치란 걸림 없는 해탈을 얻는 것이다. 말이 3보의 한량없는 공덕을 찬양하는 것이라면 이치란 3보의 공덕은 욕심을 여읜 법이 성품이라서 무위(無爲)의 모양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말이 발심해서부터 도량에 앉아서 닦고 쌓으면 보리의 공덕을 장엄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이치란 한 생각의 지혜로써 온갖 법을 깨닫는 것이니라.
사리불아, 요점을 들어서 말한다면 8만 4천의 법 무더기를 설명하는 것을 바로 말이라 하며, 모든 문자로는 펴서 말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을 바로 이치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지혜(智)에 의지하고 식(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식이란 4식주처(識住處)이니, 4식주처는 색(色) 식주처와 수(受) 식수처와 상(想) 식주처와 행(行) 식주처이며, 지혜란 4식(識)의 성품이 머무르는 데가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만일 식이 지대(地大)와 수대(水大)와 화대(火大)와 풍대(風大)를 아는 것이라면, 지혜는 4대(大)에 머무르되 법의 성품은 차별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식의 안식(眼識)이 빛깔[色]에 머무르고 이식(耳識)이 소리[聲]에 머무르고 비식(鼻識)이 냄새[香]에 머무르고 설식(舌識)이 맛[味]에 머무르고 신식(身識)이 접촉[觸]에 머무르고 의식(意識)이 법[法]에 머무르는 것이라면, 지혜는 안의 성품은 고요하고 밖에서는 행하는 바가 없으며, 식의 법에는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식이란 오로지 반연할 바[所緣]를 취하여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이요, 지혜란 마음에 반연할 바도 없고 모양도 취하지 않아서 모든 법 가운데서 희구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식이란 유위(有爲)의 법을 행하는 것이요, 지혜란 행하는 바가 없는 무위(無爲)의 법 성품이어서 앎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식이란 나고 머무르고 사라지는 모양이요. 지혜란 나고 머무르고 사라지는 모양이 없는 것이다.
사리불아, 이것을 지혜에 의지하고 식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어떤 것이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냐 하면, 『불요의경』에서는 수행하는 도를 분별하지만 『요의경』에서는
과위를 분별하지 않는다. 『불요의경』에서는 짓는 일이 무슨 업이든 과보가 있음을 믿지만 『요의경』에서는 모든 번뇌를 다한다. 『불요의경』에서는 모든 번뇌를 꾸짖지만 『요의경』에서는 희고 깨끗한 법[白淨法]을 찬양한다. 『불요의경』에서는 생사의 괴로움을 설명하지만 『요의경』에서는 생사의 열반이 하나의 모양이요 둘이 없다. 『불요의경』에서는 갖가지로 장엄된 문자를 찬양하거니와 『요의경』에서는 심히 깊은 경전은 지니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려움을 설명한다.
『불요의경』에서는 대부분이 중생들을 위하여 죄와 복의 모양을 말하면서 법을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에 기쁨과 슬픔을 내게 하지만 『요의경』에서는 무릇 연설한 바는, 반드시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으로 조복되게 한다. 『불요의경』에서는 아(我)ㆍ인(人)ㆍ중생(衆生) 등은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가 없다고 설명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는 보시하면 받는 것이 있다고 설명하거니와 『요의경』에서는 공(空)하고 모양[相]이 없고 염원[願]이 없고 지음[作]이 없어서 아(我)ㆍ인(人)ㆍ중생(衆生)과 짓는 이와 받는 이가 없음을 말하고 항상 한량없는 모든 해탈문을 말한다. 이것을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어떤 것이 법(法)에 의지하고 사람[人]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사람이란 사람을 껴잡아 취해서 짓는 이와 받는 이를 보는 것이요, 법이란 짓는 이거나 받는 이로 볼 만한 사람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란 범부로서의 착한 사람과, 믿고 수행[信行]하는 사람과, 여덟 가지 사람[八人]과 4과(果)의 사람과, 벽지불인 사람과 보살인 사람 등이다. 한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이익된 바가 많고, 많은 사람들이 즐거움을 받으며, 세간을 가엾이 여겨 대비의 마음을 내고, 인간ㆍ천상 안에서 이롭게 하는 바가 많은 것이니, 이른바 모든 부처님들은 세속의 진리[世諦]에 의지하기 때문에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짐짓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만일 어떤 이라도 이와 같은 소견을 껴잡아 취했다면 이것을 사람에게 의지한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는 화신(化身)인 사람을 보는 것을 교화하기 위하여 일부러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다고 설명한 것이다. 온갖 것은 평등하여 다른 성품이 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은데,
만일 의지함이 있는 것이 법 성품이라면 끝내 다시는 한 모양의 법과 동일한 법 성품을 여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온갖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사리불아,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4의(依)로서 다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3) 사과부(四果部)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에서 말하였다.
“수행하는 이가 이미 초과(初果)의 도의 자취를 얻으면 모든 5욕(欲)이 다 무상(無常)으로 돌아감을 알기는 하나 모두 없애지는 못한다. 왜냐 하면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애욕이 일어나지만 아직은 끊어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어떤 범지(梵志)가 정결(淨潔)함을 스스로 기뻐하면서 아래 집으로 내려가다가 나중에 갑자기 손가락을 더럽힌 것과 같다. 그가 대장장이에게 가서 말하였다.
‘손가락이 더럽혀져서 깨끗하지 못하니 불로 태워주십시오.’
그러자 대장장이가 달랬다.
‘그런 마음은 내지 마십시오. 그 밖의 방편으로도 이 더러움은 제거할 수 있으니, 재로 닦은 뒤에 물로 씻으면 됩니다. 설령 내가 불로 태운다 해도 당신은 참아 내지 못합니다. 불의 뜨거운 고통이 몸에 닿으면 앞의 것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범지는 성을 내며 대장장이를 꾸짖었다.
‘자기 마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헤아리고 있구려. 자신이 참아내지 못한다 하여 남까지 참아내지 못한단 말이오. 나는 더러워진 이런 손은 소용이 없습니다. 감히 길에 나가지도 못하고, 남들이 나에게 접촉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내가 만일 그들에게 가까이하면 나의 도덕을 잃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도술과 천문과 지리와 온갖 전적(典籍)을 알지 못함이 없거늘 어떻게 이 부정한 것이 다섯 손가락에 묻어 있단 말이오. 더 망설일 것 없으니, 나의 말대로 이 손가락의 더러움을 없애주시오.’
대장장이는 그의 말을 듣고 부젓가락을 빨갛게 달구어서 그의 손가락을 걸상 위에 놓고 지졌다. 범지는 뜨거워지자 그 고통을 참아 내지 못하고, 손가락을 끌어서 얼른 입에다 넣었다. 그것을 본 대장장이가 크게 웃어대면서 젊은 범지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자칭 총명하고
배움이 많다고 했소. 옛 것을 탐구하여 지금을 잘 알아서 모두 통달하지 않음이 없다면서 청정하고 티가 없는 척 자랑을 하더니, 이제는 견디지 못하여 부정한 손가락을 입속에 갖다 넣는구려. 경솔하면 스승감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하오.’
범지가 대답하였다.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때는 손가락이 부정하게 보이더니, 마침 불의 독을 만나고 보내 이내 손가락의 더러움을 잊어버렸습니다.’
도를 구함도 마찬가지라서 오랜 세월 동안 닦고 익혀서 애욕을 여의었지만, 마침 좋은 여색(女色)을 보면 음심(婬心)이 도로 동하게 된다. 왜냐 하면 모든 감관이 아직 제어되지 못했고, 모든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했으며 삿된 뿌리가 아직 제거되지 못했고, 바른 정(定)이 아직 생기지 못했으며, 전생의 애욕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음욕이 도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에 게송으로 말하리라.
색욕(色欲)을 보면서 수행할 바를 구한다면
비록 이치를 알고 도의 자취에 이르렀다고 해도
머리에 상념의 꽃을 이고 계속 그 냄새를 맡는 것이니
마치 강물이 바다로 나가면서
그렇게 하려고 뜻하는 것과 같다.
두 번째 도의 자취는 사다함(斯陀含)을 증득한 사람이다. 스스로 ‘나의 몸은 이 음욕을 익히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마치 그 밖의 범부가 정욕의 더러움을 말하는 것과 같다. 욕심이 없음을 즐기고 밤낮으로 관찰하면서 오로(惡露)를 수습하면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적어지고 왕래하는 도를 얻어서 한 번만을 욕계(欲界)에 태어나 부지런히 고통의 근원을 끊는다. 갔다 오게 됨을 얻으면 모든 애욕이 일어남이 없고, 청정해지면서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얇아지기는 하나, 마음에는 항상 아직 다 끊지 못했으므로 늘 괴로움과 우환은 있다.
가령 어느 남자에게 아내가 있었다. 잘 생기고 얼굴에 흠이 없었으면 온갖 영락으로 그 몸을 장엄하였으므로 그 남편은 더 사랑하였다. 비록 이런 미색이었으나 그는 음귀(婬鬼)여서 진짜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한다.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의 남편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아내는 살과 피를 먹고사는 나찰(羅刹)입니다.’
그 남편은 남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여러 번 그런 말을 듣자 남편은 마음에 의심이 생겼다. 사실을 알아보려고 밤에 누워서 크게 코를 골며 자는 척하고 있었다. 아내는 잠이 든 것으로 알고 몰래 일어나 성을 나가서 무덤 사이로 향하였다. 남편은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동정을 살피다가, 아내가 옷과 보물로 된 여러 장식들을
벗어서 한 쪽에다 놓아두고 얼굴빛이 험악하게 변하면서 긴 어금니를 드러내고 머리 위로는 불길이 훨훨 일며 눈은 마치 불같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아주 두려운 모양을 하고서 죽은 사람 앞으로 다가가 손으로 그의 살을 움켜쥐고 아작아작 씹어먹었다. 남편은 이런 일을 보자 그제서야 그가 사람이 아니고 귀신임을 알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 평상 위에 누워 있었다. 아내도 곧 뒤따라 들어와서 평상 위의 남편 곁에 옛날처럼 누웠다. 남편은 아내가 영락으로 장엄하고 얼굴이 잘생긴 것을 보자 도로 친근감이 들었다. 그녀가 무덤 사이에서 죽은 사람의 살을 뜯어먹던 일을 생각하면 더럽고 싫증이 날 뿐만 아니라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지만 마음을 돌리고 아내를 바라보자 도로 음욕심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렇게 갔다가 돌아오는 도를 얻은 사다함이라도 만일 겉모습이 잘 생기고 예쁜 것을 보면 음욕의 생각이 도로 동하거니와, 만일 오로(惡露)의 더럽고 부정한 것을 말하면 음욕의 생각은 이내 사라진다.
이에 게송으로 말하리라.
사람 몸을 변화하여 갑옷을 벗듯이
음귀(婬鬼)의 모습으로 무덤 사이로 가서
죽은 시체를 뜯어먹는 것을 보고
남편은 그제야 나찰임을 알았다.
세 번째 도의 자취는 아나함(阿那含)이 된 사람이니, 다시는 욕계에 돌아오지 않음[不還]을 증득한 이다. 갔다가 돌아옴[往還]을 증득한 앞 사람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욕계에서 4결(結)이 이미 엷어졌고 그 밖의 것은 더 적다. 도리어 거룩한 진리를 관찰하여, 애욕의 허물에 고통이 많고 편안함이 적은 것을 보며 애욕을 익히지 않아야겠다고 한다. 마치 범부와 서인(庶人)들이 정욕을 품는 것을 쉬파리가 시체에 달라붙는 것과 같다고 여기거늘, 내가 어째서 제거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남김 없이 소멸시키고 번뇌가 다하는 선(禪)을 얻은 연후에야 안온하게 된다. 비유컨대 마치 어떤 사람이 한여름 더위를 견디지 못하여 부채를 찾아 스스로 부치고 물에 들어가 목욕할 것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오고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매우 뜨거운 것으로 보고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원하니, 이에 오로관(惡露觀)을 수행하여 영원히 색욕과 모든 성냄과 어리석음을 벗어나며 5음(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곳을 자세히 보면서 멸해 없애야 안정하게 된다. 지견(知見)이 그와 같으면 곧 5결(結)이 끊어지면서 음개(陰蓋)가 없어져 불환(不還)의 도를 얻는 것이다.
아나함과는 세간에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니, 애욕을 벗어나고 모든 어리석음이 없으므로 음귀(婬鬼)의 우환도 곧 청정하게 되고 뭇 뜨거움도 없어진다. 만일 색욕을 보면서 항상 부정한 것이라고 보면 그 허물과 더러움을 알게 된다. 가령 먼 데서 오는 장사꾼들이 있다 하자. 저마다 몹시 지쳐 있었고 29일의 밤이라 달도 없어서 캄캄한데 한밤중에야 성문(城門)에 도달하였다. 문이 닫혀 있어서 열리지 않았으므로 빙빙 돌다가 남쪽 담장으로 갔더니, 빗물이 담긴 깊고 넓은 못이 있었다. 거기에는 죽은 시체와 닭과 개와 여러 종류의 벌레들이 살아있기도 하고 죽은 것도 있고 가라앉았기도 하고 떠있기도 하여 백천만억 것이 뛰어 돌아다녔으며, 성 안의 쓰레기는 모두 쳐다 넣었고, 머리털과 똥오줌도 그 물 속에 다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멀리서 온 객들이라 일찍이 가 본 일도 없었으므로 어떤 곳인 줄 알 리가 없었으며 게다가 몹시 지친데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던 참이라 마음껏 마셨다. 그러자 더위도 없어져서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으며 몸도 피로가 풀려서 가뿐해졌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누워 잤다. 다음 날 날이 새자 피로도 풀렸으므로 깨어난 뒤에 물을 떠다 쓰려고 다시 못으로 나가서 보니, 너무도 더럽고 부정하였으므로, 혹 어떤 이는 도망가기도 하고, 혹 어떤 이는 눈을 감아버리기도 하고, 혹 어떤 이는 코를 막기도 하고, 혹은 어떤 이는 구토(嘔吐)를 하기도 하였다.
이에 게송으로 말하리라.
비유컨대 마치 성 곁의 물에
갖가지 부정한 것 있는데도
멀리서 왔고 문을 닫았는지라
모두 함께 이 못에서 쉬었다.
처음 온 이들이라 알지 못한 채
배고프고 목말라서 한껏 마셨고
그리고 목욕까지 해서 더위를 없앤 뒤에
몹시 지쳤는지라 누워서 잠을 잤다.
날이 샌 뒤에 물가로 가서
자세히 보고서야 더러움을 알고
사람들은 다 같이 메스꺼워하면서
저마다 구토를 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 도를 증득함으로써
5욕락의 편안하지 않음을 보고
선정에 들어가 근심이 없으면
욕락 보기를 더러운 물 보듯 한다.
아나함이 도를 수행할 때 선정을 즐기고 애욕을 살피는 것을 마치 저 장사꾼이 부정한 물을 싫어하듯 하고, 또한 마치 젖먹이가 철이 없을 때는 더러운 것을 갖고 장난을 하다가 나이가 점점 많아지면 앞의 장난감을 버리고 다시 다른 일을 좋아하며, 그러다가 늙어지면 앞의 일들도 모두 버리고 법으로써 스스로 즐기는 것과 같다.
이미 불환의 도를 얻은 사람도 마찬가지라서 온갖 나고 죽는 5도(道)의 즐거움을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보기 때문에 더욱 정진하여 시종일관 벗어나려 하면서 삶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
이에 게송으로 말하리라.
비유컨대 마치 어떤 어린아이가
땅에서 부정한 것을 갖고 장난하다가
나이가 드디어 장성해지면
장난하지 않고 그 밖의 것을 좋아함과 같다.
수행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삼계(三界)를 수호하고 제도하나니
그 때 드디어 정진하다가
구족하게 4과(果)의 도를 이룬다.
네 번째는 무학(無學)의 아라한이다. 도를 수행할 때에는 배우는 자리[學地]에 있지만 시종 즐기지 않고 도무지 좋아함이 없다. 삼계를 탐내지 않고, 온갖 번뇌[結]를 끊으며 3독(毒)이 영원히 없어지고, 5근(根)ㆍ5력(力)과 모든 각의(覺意)를 염함으로서 멸도를 보아 적멸하게 된다. 마치 왕이 술에 취한 코끼리를 놓아주었을 때 어금니가 날카롭고 흉악한지라, 만난 이는 모두가 죽는 것과 같고, 또한 독룡이 항상 독기를 토하는지라 당한 이는 모두가 죽는 것과 같으며, 또한 독사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지라 접촉하면 모두가 해를 입는 것과 같다.
삼독의 번뇌도 그와 같아서, 일어나고 접촉하면 모두 해를 당하여 삼계에 떨어지게 된다. 오직 10력(力)과 각의와 해탈이 있을 뿐이나, 다 끊어 없앨 수는 없으므로 수행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나는 이미 아라한이 되어 집착함이 없음을 증득하였고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하였으며 맑은 행[梵行]을 깨끗이 닦아 할 일을 다 마쳤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자기의 이익을 체득하였으며 생사가 이미 끊어졌고 평등한 지혜를 얻었으며 무학의 법을 이루어서 피차를 제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게송으로 말하리라.
그 왕이 내놓은 취한 코끼리는
흉악하고 어금니가 날카로우며
모든 용과 뱀은 독을 품고 있었으므로
만나는 이는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
모두 교화하여 조복되게 하고
도리어 그 마음을 잘 껴잡으면
뭇 근심들이 남김 없이 다하여
삼계에서는 두려울 것이 없다.
수행으로 배움의 자리에 머무르고
부동으로 거룩한 도를 이루어
이미 자기의 이익을 체득하고
괴로움을 건너서 언제나 편안하다.
이미 다섯 가지 품류[五品]를 끊고
구족하게 여섯 가지 신통을 이루었으며
모든 진로(塵勞)를 끊어 없앴음은
물이 옷의 때를 빼는 것과 같다.
이를 말하여 정사(正士)라 하나니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라
가장 으뜸가게 번뇌를 없앤 이이니
그러므로 무학의 자리[無學地]라 한다.”
(4) 사식부(四食部)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중생들은 네 가지 음식으로 생명을 오래 양육하나니, 무엇이 네 가지 음식인가? 이른바 단식(段食)과 경락식(更樂食)과 염식(念食)과 식식(識食)이다. 어떤 것을 단신이라 하는가? 지금 사람들이 먹는 것으로서 입에다 음식물을 넣고 씹어서 먹는 것이니, 이것을 단식이라 한다. 어떤 것을 경락식이라 하는가? 의복과 우산과 일산과 여러 가지 향과 꽃과 쪼이는 불과 향유(香油)로서 부인들이 모으는 것들이며, 그 밖에 몸으로 쾌락을 느끼는 것이니, 이것을 경락식이라 한다. 어떤 것을 염식이라 하는가? 뜻으로 염하고 상상하고 사유한 바를, 혹은 입으로 말하기도 하고, 혹은 몸으로 접촉하기도 하면서 지니게 되는 모든 법들이니, 이것을 염식이라 한다. 어떤 것을 식식이라 하는가? 뜻으로만 아는 것이니, 범천(梵天)으로부터 유상천(有想天)ㆍ무상천(無想天)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식(識)으로써 밥을 삼는데 이것을 식식이라 한다. 이 네 가지 음식으로 유전하면서 나고 죽는 것이니라.”
또 『증일아함경』에서 말했다.
“세존께서는 아나율(阿那律)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법은 음식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다. 눈은 빛깔을 음식으로 삼고 귀는 소리를 음식으로 삼으며 코는 냄새를 음식으로 삼고 혀는 맛을 음식으로 삼으며 몸은
닿음[觸]을 음식으로 삼고 뜻은 법(法)을 음식으로 삼으며 열반은 방일(放逸)함이 없음을 음식으로 삼느니라.”
그 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묘한 법으로 다시 음식을 살펴보면 아홉 가지 일이 있다. 인간에게는 네 가지 밥이 있나니, 첫째는 단식(段食)이요, 둘째는 경락식(更樂食)이요, 셋째는 염식(念食)이요, 넷째는 식식(識食)이니라.
다시 다섯 가지가 있나니, 이것은 출세간(出世間)의 음식이다. 첫째는 선정의 음식[禪食]이요, 둘째는 서원의 음식[願食]이며, 셋째는 생각함의 음식[念食]이요, 넷째는 8해탈의 음식[解脫食]이며, 다섯째는 기쁨의 음식[喜食]이니, 이것이 출세간의 음식이다. 모두가 생각을 오로지 하여 네 가지 음식은 버리고 이 출세간의 음식을 이룩할지니라.”
또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신심(信心)과 자비심으로 갖가지 음식을 사람에게 보시하면 죽어서 질다라천(質多羅天)에 나서 갖가지 쾌락을 받을 것이며, 그곳에서 죽으면 사람 몸을 받은 후에 큰 부자가 되어서 재물이 넉넉하고 항상 바른 법을 행하게 된다.”
또 『정법념경』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병든 사람들에게 탕약을 보시하여 병고(病苦)를 여의게 하면 죽어서 욕경천(欲境天)에 나서 5욕의 쾌락을 받을 것이며, 하늘에서 죽은 뒤에 만일 사람 몸을 얻으면 크게 부자가 되고 재물이 많게 된다. 또 병자가 죽으려 할 적에 목이 마르는 것을 보고 사탕물이나 얼음물을 보시하면 이 사람은 죽은 뒤에 청량천(淸凉天)에 나서 하늘의 쾌락을 받을 것이며, 그 하늘에서 죽은 뒤에는 사람 몸을 받아서 항상 배고픔과 목마름을 여의게 된다.”
또 『오분율(五分律)』에서 말하였다.
“만일 그 달의 당직이 되어서 음식을 감독하는 사람이 설고 익고 짜고 신 것들을 알고자 하면, 손바닥 안에다 놓고 혀로 맛볼 수 있다.”[재법(齋法)에서나 경전에서는 허락되지 않는다. 입으로 맛본다는 것은 좋은 마음이 없고 탐내는 마음으로 맛을 보게 되기 때문에 범하는 것이다.]
(5) 정구부(淨口部)
『십송률(十誦律)』에서 말하였다.
“‘어떻게 입안을 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을
입안에다 넣고 세 번 돌린 뒤에 뱉어내는 것이니, 이것을 입을 깨끗이 하는 법[淨口法]이라 하느니라.’”
또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큰 모임에서 설법하고 계셨는데, 어떤 비구가 입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바람이 잘 통하는 데에 앉아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아시면서도 짐짓 물으셨다.
‘이 비구는 무엇 때문에 혼자 앉아 있느냐?’
비구가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제정하신 계율에는 나무로 이를 씻고 쑤시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나이다. 그 때문에 입안에 냄새가 나서 남들에게 더러운 냄새를 피울까 염려하여 일부러 바람이 잘 통하는 데에 있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무로 이를 씻고 쑤시는 일을 허락한다. 아주 긴 것은 여섯 손가락만큼 하고, 아주 짧아도 네 손가락 길이 이상으로 만들어라. 이를 씻고 쑤실 때에는 안 보이는 조용한 곳에서 하되 먼저 깨끗이 손을 씻을 것이며, 입안을 청소한 뒤에는 물을 머금었다가 버릴 것이다. 입안을 청소할 때에는 그것을 삼키지 말 것이며, 만일 의사가 병이 낫는다고 하면 삼키는 것도 허락한다.
만일 이가 없으면 염분이 많이 섞인 흙 재[灰滷土]나 전강석(塼礓石)이나 초목으로 입을 씻어야 한다. 밥을 먹은 뒤나 밥을 먹고 있을 때, 물을 돌리려면 깨끗한 물로써 하되 먼저 손과 그릇을 씻은 연후에 물을 돌릴 것이고 만일 손이 더러우면 잎을 받쳐서 들어야 하다. 또 물을 마실 때에는 입술을 그릇 안에 넣되 이마가 닿게 하지말고 입술을 대고 마셔야 한다. 마실 때에도 다 마시지 말고 조금은 남기되, 씻어낼 만한 물이 입까지 오면 그만 떼고 버릴 것이다. 물을 돌리는 사람은 그릇을 잘 보호하여 깨끗이 간직해야 하며, 만일 누가 입술을 넣거나 이마가 닿는 것을 보면 한 곳에 놓아두고 풀을 넣어 표시를 해 두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깨끗한 물이 아님을 알게 해야 하다. 또 때 아닐 적[非時]에 음료수를 돌릴 때에도 역시 앞의 법과 같이 할지니라.’”
또 『승기율』에서 말씀하셨다.
“비구는 새벽에 일어나면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하며, 다섯 손가락을 건성으로 씻지 말아야 한다. 또 씻을 때에는 겨드랑까지 올리지 말고 팔목까지만 올려서 그 잎만 깨끗하게 할 것이며, 건성으로 씻지도 말고 또 너무 닦아서 피가 나게 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고 거마초(巨摩草)가루나 재[조두(澡豆)와 쥐엄나무 가루] 등으로 씻어야 하며 닦을 때에는 소리가 나게 해야 한다. 손을 깨끗이 씻은 뒤에 다시 다른 이가 댔으면 부정하게 되었다 할 것이니, 다시 손을 씻어야 한다.
비구는 밥을 먹기 전에는 의당 손을 보호해야 하며,
만일 머리를 만졌거나 옷을 잡았으면 다시 씻어야 한다.[비구는 물론이요, 속인도 그럴 것이다.] 경을 독송할 때에 밥을 받을 때에도 이에 준해서 행하면 된다. 손을 깨끗이 하는 것조차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손으로 생명을 죽여서 피를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서 몸과 입을 더럽히는 것이겠느냐? 비록 법을 전하려 한 것일지라도 마음은 역시 부정한 것이다.”
또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그 때 모든 비구들이 집 안에서 악취가 나는 것을 근심하고 있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물을 뿌리고 쓸어야 한다. 만일 그래도 악취가 나면 향을 이겨서 바를 것이요, 또 그래도 악취가 나면 집의 네 귀퉁이에 향을 달아 두어야 한다.’”
또 『십송률(十誦律)』에서 말하였다.
“그 때 어떤 비구가 양지(楊枝)로 입안을 청소하지 못해서 악취가 났으므로 부처님께 아뢰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양지를 쓸 것을 허락하느니라. 거기에는 다섯 가지 이익이 있나니, 첫째는 입이 쓰지 않다. 둘째는 입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셋째는 풍(風)을 제거한다. 넷째는 열병(熱病)을 제거한다. 다섯째는 가래를 없앤다. 또 다섯 가지 이익 되는 일이 있다. 첫째는 풍을 제거한다. 둘째는 열풍을 제거한다. 셋째는 입맛이 돈다. 넷째는 음식을 잘 먹는다. 다섯째는 눈이 밝아진다.’
또 『사분율』에서 말하였다.
“양지를 쓰지 않으면 다섯 가지 과실이 있다. 첫째는 입에서 냄새가 난다. 둘째는 특별히 좋은 맛이 생기지 않는다. 셋째는 열이나 가래에 관한 병이 낫지 않는다. 넷째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섯째는 눈이 밝아지지 않는다.”
또 『오분율』에서 말하였다.
“양지를 쓴 뒤에는 반드시 씻어서 버려야 한다. 벌레가 그것을 먹고 죽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또 『삼천위의(三千威儀)』에서 말하였다.
“양지를 쓰는 데는 다섯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끊을 때에는 규정대로 해야 한다. 둘째는 망가뜨릴 때에는 법대로 해야 한다. 셋째는 끝을 긁고 쑤실 때에는 3분(分)을 더 초과해서는 안 된다. 넷째는 이를 긁어낼 때는 가운데 세 개의 이만 해야 한다. 다섯째는 즙(汁)으로 씻어서 자신만 사용해야 한다.
혀를 긁어낼 때에는 다섯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세 번 이상 긁어내지 말 것이다. 둘째는 혀에서 피가 나면 즉시 중지할 것이다. 셋째는 크게 손을 흔들어서 승가리(僧伽梨)나
발을 더럽히지 말 것이다. 넷째는 양지를 사람이 다니는 길에 버리지 말 것이다. 다섯째는 남들이 안 보는 조용한 데서 할 것이다.”
(6) 명종부(鳴鐘部)
『부법장경(付法藏經)』에서 말하였다.
“때에 계니타(罽膩吒)라는 국왕이 있었다. 포악하고 무도하였으며 자주 정벌을 나갔고, 인민들을 심하게 부리면서 만족할 줄 몰랐으며 4해(海)의 왕노릇을 하고자 늘 변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친척들은 떨어져 있으면서 언제나 ‘이러한 고역을 면하여 편히 쉴 수 있겠는가.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그를 제거시키자. 그런 뒤에야 우리들이 쾌락을 누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던 참에 왕이 학질을 앓았는데, 학질을 진정시키려고 사람이 그의 위에 올라앉았는데 잠깐 사이에 숨이 끊어졌다. 그는 마명(馬鳴) 비구의 설법을 들은 인연 때문에 큰 바다 속에 가서 머리가 천 개나 붙은 고기로 태어났다. 그런데 칼 수레바퀴 [劒輪]가 빙빙 돌면서 그의 머리를 자르면 계속 그 자리에 다시 자라났고 자라나면 차례로 다시 잘라 나갔다. 이렇게 차츰차츰 한없이 되풀이했으므로 잠깐 만에 그의 머리는 큰 바다에 가득히 찼다.
이때 대중에서 유나(維那)를 맡은 아라한에게 그 왕이었던 고기가 아뢰었다.
‘지금 이 칼 수레바퀴는 건치(揵稚)소리가 들리면 이내 정지합니다. 그러므로 그 동안은 고통을 조금이나마 쉬었습니다. 원컨대 대덕이여, 저를 가엾이 여기셔서 건치를 좀 오랫동안 울리게 해 주십시오.’
그 아라한은 가엾이 여긴 나머지 그를 위하여 오래도록 쳤다. 그렇게 7일을 지난 뒤에는 고통받던 일이 끝이 났다. 나중에도 이 절에서는 그 왕으로 인하여 쳤던 것이 선례가 되어서 점차로 건치를 오래 치게 되었으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이다.’”
自述
이미 경전의 뜻을 알았다. 종을 울리는 일은 고통을 제도함과 동시에 대중을 집합하는 데 이용한다. 그러므로 유나가 종을 치려고 할 적에는 용모를 단정히 하고 합장하고서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하며, 종으로 인하여 선(善)을 생각하면 곧 받던 고통이 끝나게 된다.
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종을 칠 때에 모든 악도(惡道)의 온갖 고통이 다 같이 정지하기를 원하고, 또 종소리를 들으면서 아울러 게송을 찬탄하면,
5백억 겁의 생사의 중죄가 제거된다.
악마의 힘과 원수를 항복 받고
번뇌를 다하여 남음이 없게 하며
맨 땅에서 건치를 치면
비구들은 듣고 모여야 한다.
법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생사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이 묘한 음향을 듣고
모두가 다 여기 모여야 한다.
다른 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종소리를 듣고도 누워 있으면
탑을 수호하는 선신(善神)이 성을 내며
현재의 인연과 과보가 얇아져서
미래에는 독사 몸의 과보를 받는다.
어디서나 종소리가 들리면
누워 있던 이는 반드시 일어나서
합장하고 착한 마음 일으켜야
모든 성현께서 다 기뻐하신다.
큰 종이 울려서 중생들을 깨우고
그 소리 시방의 국토에 두루하면
식(識)이 있는 중생들이 널리 듣고 알아서
중생의 오랫동안 받는 고통이 제거된다.
6식(識)은 어두워서 온밤 내내 고통 받고
무명(無明)은 덮이어서 오래도록 헷갈릴 제
밤낮의 종소리에 열리고 깨달으면
정신이 편안해지면서 신통을 얻는다.”
도선율사(道宣律師) 『주지감응기(住持感應記)』에 의하건대, 기원(祇園)의 계율원(戒律院) 안에는 무게 30만 근(斤)의 동종(銅鐘)이 있었다. 대천 세계의 성인들을 모으려고 사천왕이 함께 조성한 것인데, 목련(目連)이 신통력으로 치면 그 소리가 먼 데까지 떨치면서 들렸다. 종대(鐘臺)의 높이는 7장(丈)이었고 종의 모양은 오(吳)나라의 것과 같았다. 4면에는 해와 달과 별과 산천과 하해(河海)의 형상이 있었고, 또 말ㆍ섬ㆍ저울ㆍ자 등의 모형도 있었다. 목련이 치게 되면 표시할 일에 따라 소리가 나면서 알려 주었지만 범부 스님이 치면 소리만 났을 뿐이라고 한다.
그 계율원에는 또 큰 종이 있었다. 종대 높이 4백 척 위에 무게 10만 근이 되는 금종(金鐘)이었는데, 모양은 마치 대접과 같았다. 그 위에 1천의 윤왕상(輪王像)이 있었고, 또 1천의 아들들도 저마다 구족했으며, 또 아홉 마리의 용과 8공덕수(功德水) 등, 갖가지 것으로 장엄되어 있었다. 이 큰
종은 겁초(劫初) 때에 전륜왕이 조성하여 놓고 성인에게서 계(戒)를 받았으며, 이미 신통을 얻은 이가 치면 소리가 삼천세계까지 떨치면서 모든 성인들이 듣고 모두 과위를 깨쳤으며 악취(惡趣)에 있던 이들이 들으면 전생의 일들을 알았다 한다.
기원에는 따로 논사원(論師院)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모양이 마치 장구[腰鼓]와 같은 하나의 동종(銅鐘)이 있었다. 이것은 건달바왕(乾達婆王)이 조성했다고 하는데, 그 위에는 범왕ㆍ제석ㆍ마왕ㆍ사천왕ㆍ8부(部)와 남자들의 형상이 있었다. 만일 어떤 외도가 와서 치고 논의(論義)를 하려 하면 신통이 있는 나한으로 하여금 그 종을 쳐서 소리가 삼천세계까지 떨치게 하였으니 그 외도들이 부딪쳐 뽐내려 하다가도 이 종소리를 듣고 나면 그만 모든 감관이 둔해지면서 감히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만일 좋은 마음으로 의심을 결단하려고 청하는 이는 이 종소리를 듣고 보리를 일으키면서 불퇴전(不退轉)을 얻었다고 한다.
또 수다라원(修陀羅院)이라는 별원(別院)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모양이 오(吳)나라 것과 같이 생긴 하나의 석종(石鐘)이 있었다. 마치 푸른 벽옥(碧玉)과 같았으며, 열 섬들이 만큼 컸다. 손잡이 위에는 삼십삼천(天)의 형상이 있고 4면에는 금과 은으로 음각되거나 양각되어 있었다. 동서 양면에는 큰 보배 구슬이 있고 움푹 들어간 뱃속은 크기가 다섯 되들이 만큼 했으며 여덟의 귀는 반짝거리면서 마치 꽃 모양과 같았고, 둘레에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처음 도를 이루실 때의 형상이 있었다.
해가 돋을 때가 되면 종 위에서 모든 변화한 부처님들께서 12부경을 설하시는데, 사위성(舍衛城)의 동남(童男) 동녀(童女)들이 모두 와서 들었다. 그리고 법을 들은 이는 깨달아서 성인이 되지만 음욕을 범한 이는 법을 듣지 못할 뿐더러 마니대장(摩尼大將)이 금강저(金剛杵)로써 그를 두드렸다. 또 백억세계 안의 소리가 광명 가운데서 들렸고 백천의 석가불께서 수다라경(修多羅經)을 설하시는 것이 모두 들렸다. 이 종은 바로 구루진불(拘樓秦佛)께서 조성하셨으며, 그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는 사갈용왕(沙竭龍王)이 거두어 갔다가
석가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자 용왕이 다시 가지고 왔었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시려 하자 곧 종이 먼저 알려주었다.
“이로부터 3개월 뒤에는 열반에 드시리라.”
종 손잡이에 있는 모든 하늘들이 듣고서 다 눈물을 흘렸다. 열반하신 뒤에는 이 종을 용왕이 다시 가져갔다 한다.
또 아난의 방 앞에 동으로 만든 하나의 경쇠[磬]가 있었다. 다섯 되들이 만큼 컸고 경쇠 방울의 4면은 모두 황금으로 새겨졌는데 과거의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손잡이 위에는 자마금(紫磨金)으로 아홉 마리 용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등 위에는 천인들의 형상이 서 있었다. 망치를 가지고 치면 소리가 삼천세계까지 떨쳤고, 그 음성 안에서는 역시 모든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경계하시는 법을 설하셨다. 이 경쇠는 범천왕(梵天王)이 조성하였으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사갈용왕이 역시 바다의 궁중으로 거두어 갔다 한다.
(7) 입중부(入衆部)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무릇 대중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다섯 가지 법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인자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둘째는 스스로 낮추기를 마치 먼지 묻은 수건을 씻듯 해야 한다. 셋째는 앉고 일어나는 법을 알아야 하리니, 만일 상좌(上座)를 보게 되면 그대로 앉아 있지 말아야 하고, 만일 하좌(下座)를 보게 되면 일어서지 말아야 한다. 넷째는 그 대중에 들어가면 세속의 일을 스스로 설명하든 다른 이가 청해서 설명하든 도통 말하지 않는다. 다섯째는 만일 대중 안에서 뜻에 맞지 않는 일이나 마음이 불안한 일을 당하더라도 잠자코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지도론(智度論)』에서는 “부처님의 거룩한 제자들이 화합되게 살기 위하여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첫째는 성현처럼 말을 하고 둘째는 성현처럼 잠자코 있다”고 하였다.[지금 재(齋)를 지낼 때나 법회 때를 보건대, 후생(後生)이 앞서 가서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한 뒤에 설령 상좌나 늙은 스님들이 오는 것을 보아도 도무지 일어나지도 않고 영접하거나 겸손하게 자리를 사양하는 일조차 없다. 법이 멸해도 너무도 멸했다. 이런 일은 젊은이들도 같다. 또 다른 귀하고 훌륭한 집안들을 보건대, 새로 상(喪)을 치를 때면 효도를 너무 중히 여겨서 죽은 부모를 위해 멀리까지 와서 재(齋)를 지내기도 한다. 그런데도 스님들은 방탕하고 기뻐하고 떠들어 대면서 대중을 문란하게 하고 있으니, 어찌 세속에서 고승(高僧)을 헐뜯는 무리들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삼천위의경(三千威儀經)』에서 말하였다.
“무릇 평상에 오르려 하는 이는 일곱 가지의 법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조용히 평상에 걸터앉는다. 둘째는 기어서 평상에 올라가지 말아야 한다. 셋째는 평상에서
소리가 나게 하지 말 것이다. 넷째는 평상을 크게 털면서 소리가 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는 크게 입맛을 쩍쩍 다시거나 탄식하면서 세상일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섯째는 개 떼처럼 누워있지 말아야 한다. 일곱째는 때맞추어 얼른 일어난다.”
『지지론(地持論)』에서 말하였다.
“만일 중생을 보면 의당 위로하고 기뻐하는 얼굴로써 먼저 말을 붙이면서 온화한 빛으로 보고 바른 생각을 지닌 채 그 앞에 있어야 한다. 만일 보살이 다른 중생들에게 진실한 공덕이 있는 것을 알면, 혐오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으로써 다른 이에게 말하지도 않겠지만 또한 찬탄하는데도 ‘잘하십니다’ 하고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죄를 범하는 무리라 한다. 대부분 이런 범죄를 범하는 것은 더러운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양섭론(梁攝論)』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중생을 볼 적에는 의당 기뻐하는 빛으로 웃으면서 먼저 말을 붙이고 그런 뒤에야 함께 말을 해야 한다.”
『오분율(五分律)』에서 말하였다.
“인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과실이 있다. 첫째는 흉악하여 참지 못한 것이요, 둘째는 뒤에 뉘우치면서 원망하는 것이며, 셋째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나쁜 소문이 널리 퍼지는 것이며, 다섯째는 죽어서 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8) 구법부(求法部)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지 못하면,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遠塵離垢] 법안(法眼)의 청정함을 얻지 못한다. 어떤 것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법을 듣기 좋아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비록 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귀를 기울여서 듣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이해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아직 법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방편을 써서 애써 구하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얻게 된 법을 잘 수호하지 않는 것이요, 여섯째는 순인(順忍)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와 반대의 것이면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서 법안의 청정함을 얻게 된다.”
또 『살바다론(薩婆多論)』에서 말하였다.
“속인의 옷을 입은 이로서 불도를 얻는 이는 없다. 반드시 32상(相)이 있고 출가하여 법의(法衣)를 입고 위의가 두루 갖추어져야 한다.”
『잡심론(雜心論)』에서 말하였다.
“만족할 줄 앎[知足]은 현재의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요, 욕심이 적음[小欲]은 미래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현재에 1전(錢)도 갖지 않기는 어렵지만 미래에
전륜왕이 되지 못하기는 쉽다.”
또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아직 얻지 못한 재물에 대하여 탐을 내지 않는 것을 ‘욕심이 적다’고 하고, 이미 얻은 재물에 대하여 탐을 내지 않는 것을 ‘만족할 줄 안다’고 한다.”
따라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은 바로 현재요, 욕심이 적은 것은 바로 미래이다.
(9) 쇠상부(衰相部)
『분별연기초승법문경(分別緣起初勝法門經)』에서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늙으면 다섯 가지 쇠손(衰損)이 있다. 첫째는 수염과 머리칼[鬚髮]의 쇠손이니, 그의 수염과 머리칼의 색이 변하고 파괴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몸 모양[身相]의 쇠손이니, 형색과 피부의 힘이 쇠퇴하고 손상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짓는 일[作業]의 쇠손이니, 말을 할 적에 기(氣)가 오르고 숨을 헐떡거리면서 몹시 급해지는 것은 몸이 떨리기 때문이요, 섰을 적에 구부러지는 것은 허리와 등뼈가 모두 힘이 없기 때문이며, 앉았을 적에 수그러지는 것은 몸이 파리하고 약해지기 때문이요, 다닐 적에 꼭 지팡이를 짚는 것은 몸이 허하여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무릇 생각하고 아는 것이 우둔해지는 것은 생각이 어두워지고 산란해지기 때문이다. 넷째는 받아 씀[受用]의 쇠손이니, 현재의 살림살이는 수용이 열악하기 때문이요, 놀이나 쾌락의 온갖 것을 현재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요, 온몸의 감관으로 행하는 바 경계에서는 빠르고 날카롭게 행할 수가 없거나 혹은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수명[命根]의 쇠손이니, 수명이 다하여 죽음에 가까워졌기 때문이요, 젊어서 죽을 연(緣)을 만났을 적에 견뎌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함경(阿含經)』에서 말하였다.
“머리가 희어지는 것에는 네 가지의 인연이 있다. 첫째는 화(火)가 많아서다. 둘째는 우환이 많아서이다. 셋째는 병이 많아서이다. 넷째는 머리털이 일찍 세는 내림 때문이다.
사람이 병들어서 야위는 데도 네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는 먹는 것이 적어서이다. 둘째는 우환이 있어서이다. 셋째는 근심이 많아서이다. 넷째는 병이 있는데도 조섭하지 못해서이다.
먼저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네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머리가 희어지는 것이요, 둘째는 늙는 것이며, 셋째는 병드는 것이요, 넷째는 죽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일은 피할 수도 없고 또한 물리칠 수도 없다.
온갖 맛은 여덟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는 쓴맛이요, 둘째는 떫은맛이며, 셋째는 매운 맛이요, 넷째는 짠맛이며, 다섯째는 싱거운 맛이요, 여섯째는 단 맛이며, 일곱째는 신맛이요,
여덟째는 분명하지 않은 맛이다.”
(10) 잡행부(雜行部)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발난타(跋難陀) 비구가 길에 가면서 크고 둥근 일산을 펴고 가자 모든 거사(居士)들이 멀리서 보고 왕이 아니면 대신이라 여겨 두려워서 길을 피했다가 자세히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하여 비구가 부처님께 묻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비구는 일산을 가지고 길에 있거나 다니지 말 것이며, 또한 달지도 말 것이다. 비가 올 때에는 절 안에서 나무껍질이나 잎이나 대로 우산을 만드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니 또 큰 부채를 갖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다니다가 더위가 심하면 나뭇잎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물건으로 부채를 만드는 것은 허락한다.’
그 때 비구들이 벌레와 풀과 먼지와 이슬이 몸 위에 떨어지는 것을 근심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拂子)를 만드는 것을 허락한다. 풀과 나무의 껍질과 잎과, 혹은 실과 부스러진 비단으로 만들 것이다.’
그 때 어떤 비구가 꼬리로 만든 불자를 갖고 있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져도 되느니라.’
당시 어떤 나이 젊은 비구가 시간과 일과 수(數)에 대한 서로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판[算子]으로써 기록하고 셈하는 것을 허락한다.’”
또 『사분율』에서 말하였다.
“그 때 여러 비구들이 자신의 재능을 부리고, 또 노래를 부르면서 공양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지 말 것이니라.’
그들이 두려워하고 삼가면서 감히 속인들에게도 재능을 부리면서 공양을 하지 못하게 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허락하느니라.’
그리고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은 탑에 공양한 뒤에 마시고 먹는 것을 모르는구나.’
‘누가 먹어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나 사미나 우바새와 경영하며 짓는 이가 먹어야 하느니라.’”
또 『살바다론(薩婆多論)』에서 말하였다.
“무릇 출가한 사람은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가격을 낮춰서 남의 물건을 구하지 말 것이니, 돌길라(突吉羅)가 된다.
대중 스님의 옷은 세 번까지 부르기 전에는 아직 값을 올릴 수 있지만 세 번을 부른 뒤에는 더 올리지 말 것이다. 대중 스님들도 옷을 주지 말 것이니, 이미 남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비구가 세 번 불러서
옷을 얻으면 후회하지 말아야 하며, 설령 후회한다 해도 반환하지 말 것이며 대중 스님들도 역시 반환하지 말 것이다.”
또 『신바사론(新婆沙論)』에서 물었다.
“‘이생(異生)과 성인 중, 그 누구에게 두려워함이 있는가?’
‘이렇게 말한 이가 있다. 이생에게는 두려움이 있되[이생이란 범부(凡夫)를 말한다.] 성인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성인은 이미 다섯 가지 두려움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두려움이란 첫째는 생활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이요, 둘째는 나쁜 이름에 대한 두려움이며, 셋째는 대중을 무서워하는 두려움이요, 넷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며, 다섯째는 악취(惡趣)에 대한 두려움이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여의주(如意珠)는 바로 마갈(摩竭)이란 큰 고기의 뇌 속에서 나왔다. 그 고기의 몸길이는 28만 리요, 이 구슬의 이름은 금강견(金剛堅)이다. 이 여의주에 있는 첫째의 힘은 온갖 독에 중독된 사람이 보면 모두 녹아 없어지게 하며, 또 그 광명이 몸에만 닿아도 역시 독이 소멸된다. 둘째의 힘은 열병(熱病) 앓은 사람이 보면 이내 낫고 그 광명이 몸에만 닿아도 역시 낫게 된다. 셋째의 힘은 그 사람에게 한량없는 백천의 원수가 있다 해도 이 구슬을 갖기만 하면 모두가 친한 이가 된다.
모든 하늘의 손톱 하나의 값어치는 염부제(閻浮提)의 한 사람과 맞먹는다.’”
또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그 때 여러 비구들이 뱀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근심하고 아직 욕심을 여의지 못한 비구도 두려워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놀라는 것을 허락한다. 대통에 담아다 버리거나 줄로 묶어 가지고 가서 땅에다 놓아주어라. 그리고 쥐가 집 안에 들어오거든 우리를 만들어서 그 속에 담은 뒤에 나가서 버리도록 하라. 또 전갈이나 지네나 그리마가 집 안으로 들어오거든 해진 물건이나 진흙 그릇에다 비로 쓸어 담거나 싸서 밖에다 놓아주어라.’
또 방안에 밤에는 박쥐가 들어오는 것을 근심하고 낮에는 제비나 새가 들어오는 것을 근심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새장을 만들되 드문드문 막아 놓는 것을 허락한다. 아니면 격자 창으로 막아 놓아라.’
당시 어떤 늙고 병든 비구가 이[虱]를 잡아서 땅에다 버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지 말
것이니라. 그릇에 담거나, 또는 솜 안에다 주워서 놓는 것을 허락한다. 만일 이가 달아나거든 대통을 만들어서 담아야 한다. 그래도 이가 대통에서 나오거든 덮개를 만들어서 막아 놓아야 한다.’[그 추위와 더위에 따라 기름기가 섞인 때를 먹으면서 더욱 자라게 된다.]
또 『사분율』에서 말하였다.
“그 때 여섯 무리의 비구들이 외도의 사택(舍宅)에 있으면서 길하고 흉한 예언서[符書]에 관한 주문과, 지절(枝節)에 관한 주문과 찰리(刹利)에 관한 주문과 사람이 살고 죽고 길하고 흉함을 아는 주문과 모든 음성을 이해하는 주문을 외우고 있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지 말 것이니라.’
‘그들은 그것을 남에게 가르치면서 생활해 가고 있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두 그래서는 안 되느니라.’
그 때 세존께서는 비사리국(毘舍離國)에 계셨는데, 여러 리사(離奢)들이 코끼리와 말과 수레와 연(輦)을 타고 칼을 차고 와서 세존을 뵈려고 그 칼과 무기들을 절 밖에다 놓고 안으로 들어와 세존께 문안을 드렸다.
이렇게 여러 속인들이 칼을 가지고 와서 비구들의 창고에다 맡기려 하자 두려워하면서 감히 받지 않으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단월들을 위하여 견고한 창고에다 두는 것은 허락한다.’”
또 『오백문사(五百問事)』에서 말하였다.
“경전 위에 묻은 먼지를 입으로 불지 말 것이며, 불상의 먼지도 이에 준할 것이다. 비록 바른 경전이 아니라 할지라도 모름지기 삼가야 하며, 또한 헌 경전을 태우지도 말 것이니, 중한 죄를 얻게 됨은 마치 부모를 태우는 것과 같다. 모르고 한 것이면 죄가 되는 것이 좀 경하다.”
또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불이 타는 것을 바라보면 일곱 가지 이익이 없다. 첫째는 눈을 파괴한다. 둘째는 빛깔을 파괴한다. 셋째는 몸이 연약해진다. 넷째는 옷의 때가 파괴된다. 다섯째는 침구가 파괴된다. 여섯째는 계를 범하는 연(緣)이 생긴다. 일곱째는 세속의 말을 증가시킨다.”
간병(看病)하는 법에 대하여 『승기율』에서 말하였다.
“병든 사람이 아홉 가지 법이 성취되면 반드시 횡사(橫死)할 것이다. 첫째는 이익이 되지 않는 음식인 줄 알면서도 탐을 내서 먹는 것이요, 둘째는
양을 헤아릴 줄 모르는 것이며, 셋째는 속에 있는 음식이 아직 소화되지 않았는데도 먹는 것이요, 넷째는 음식이 아직 소화되지 않고 게워내는 것이며, 다섯째는 이미 소화되어서 나와야 할 것인데도 억지로 지니고 있는 것이요, 여섯째는 먹는 것이 병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병을 따라 먹기는 하되 양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요, 여덟째는 게으른 것이며, 아홉째는 지혜가 없는 것이다.”
또 『월상녀경(月上女經)』에서 말하였다.
“유마힐(維摩詰)의 처(妻)의 이름은 무구(無垢)이며, 그 처가 9월에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월상(月上)이라 지었다.”
또 『불설이구시녀경(佛說離垢施女經)』에서 말하였다.
“파사닉왕(波斯匿王)에게 딸이 있었으니, 이름은 유마라달(維摩羅達)이었다. 진(晋)나라 말로는 이구시(離垢施)이다. 그의 나이 12세였는데, 단정하고 예쁘게 생겼으며 극히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또 『전여신경(轉女身經)』에서 말하였다.
“수달장자(須達長者)의 처의 이름은 정일(淨日)이었으며, 딸의 이름은 무구광(無垢光)이었다.
게송을 읊는다.
간결(簡潔)한 요체를 모으고
위험한 것은 버리기를 바란다.
만 가지 행이 곧고 굳어야
6진(塵)이 비로소 닫히게 된다.
맹렬하고 엄하기는 서리 같은 마음으로
밝고 빛나기는 옥(玉)처럼 단속해서
마치 그것이 경규(瓊珪)같이 되면
희고 깨끗하여 흠이 없으리라.”
'매일 하나씩 > 적어보자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어보자] #4544 법집요송경(法集要頌經) 1권 (12) | 2024.07.23 |
---|---|
[적어보자] #4543 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 (14) | 2024.07.23 |
[적어보자] #4541 법원주림(法苑珠林) 98권 (28) | 2024.07.23 |
[적어보자] #4540 법원주림(法苑珠林) 97권 (30) | 2024.07.22 |
[적어보자] #4539 법원주림(法苑珠林) 96권 (20) | 2024.07.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