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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37 법원주림(法苑珠林) 94권

by Kay/케이 2024.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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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94

 


법원주림 제94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93. 주육편②

감응연(感應緣)[간략히 열네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한(漢)의 낙자연(洛子淵)
진(晋)의 사문 법우(法遇)
진(晋)의 신야(新野)의 유소지(庾紹之)
송(宋)의 장소덕(蔣小德)
송(宋)의 사문 축혜치(竺慧熾)
오(吳)의 제갈각(諸葛恪)
주(周)의 무제(武帝)
수(隋)의 조문약(趙文若)
당(唐)의 손회박(孫廻璞)
당(唐)의 돈구(頓丘)의 이씨(李氏)
당(唐)의 참군(參軍) 정사변(鄭師辯)
당(唐)의 위지십(韋知十)
당(唐)의 사적씨(謝適氏)
당(唐)의 임오랑(任五娘)

한(漢)의 낙자연(洛子淵)
한(漢)나라 효창(孝昌) 때에 용사(勇士) 낙자연(洛子淵)이라는 이가 있었다. 자기 스스로 낙양(雒陽) 사람이라고 했으며, 효창 연간에 팽성(彭城)을 지키고 있었다. 그와 같은 진영(陣營) 사람인 번원보(樊元寶)가 휴가를 얻어 경사(京師)로 돌아갈 때였다. 낙자연이 편지 한 통을 써서 갖다 주게 하면서 말하였다.
“나의 집은 영대(靈臺) 남쪽 낙수(雒水) 근방에 있습니다. 당신이 그 집으로 가면 집 안에서 사람이 나와서 만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보는 그의 말대로 영대 남쪽으로 갔더니 사람 없는 집이 있었으므로 잠깐 들렀다가 나오려 하는데 갑자기 한 늙은이가 나타나서 물었다.
“어디서 오셨는데 여기서 방황합니까?”
원보가 그에게 자세히 말을 하자 늙은이가 말하였다.
“나의 아들이오.”
그리고는 편지를 받고 원보를 인도하여 들어갔다. 드디어 관청 같은 집이 나타났는데 아주 넓었고 아주 화려했다. 자리에 앉자 여종으로 하여금 술을 가져오게 했는데, 조금 있다가 여종이 죽은 한 어린 아이를 안고 지나갔으므로 원보는
몹시 괴이하게 여겼다. 얼마쯤 지나자 술이 나왔는데 술 빛이 아주 붉고 향기와 맛이 이상했다. 그리고 맛좋은 음식까지 곁들였는데 바다와 육지의 것을 다 갖추었다. 술을 마신 뒤에 가겠다고 하자 늙은이가 원보를 전송해 주면서 말했다.
“앞으로는 만날 기약이 없구려.”
그 말이 처량한 기색으로 아주 은근했다. 그리고 늙은이가 도로 들어가자마자 이제까지 있던 그 문조차 없어져버렸으며 오직 높은 낭떠러지 앞에 맑은 물결이 있을 뿐이었다. 조금 있다 나이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동자가 보이는데 방금 빠져 죽은 아이였다. 그 코 안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는데, 그제서야 마셨던 술이 그 피였음을 알았다. 그리고 팽성으로 돌아왔는데 낙자연도 이미 없어진 뒤였다. 원보와 자연은 3년 동안 같이 성을 지키고 있었으면서도 그가 낙수의 신(神)임을 모르고 지냈다.[이 한 가지 증험은 『낙양사기(雒陽寺記)』에 적혀 있는 것이다.]

진(晋)의 사문 법우(法遇)
진(晋)나라 형주(荊州) 장사사(長沙寺)에 석법우(釋法遇)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가 어디 사람인지는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뜻이 돈독했으므로 3분(墳)과 8삭(索)을 다 읽었다. 도안(道安) 법사를 섬기다가 무상함을 깨닫고 동쪽 땅으로 도피하여 강릉(江陵) 장사사에 있으면서 경전을 강설했는데, 배움을 받는 이가 4백여 명이나 되었다.
당시 어느 한 스님이 술을 먹고 저녁의 소향(燒香)을 걸렀으나, 법우는 벌을 주지 않았을 뿐더러 쫓아내지도 않았다. 도안 법사가 멀리서 그 말을 듣고 죽통(竹筒)에다 곤장 하나를 넣어서 손수 봉한 뒤에 이름만을 적어 법우에게 부쳤다. 법우가 봉함을 뜯고 보자 곤장이었으므로 곧 말하였다.
“이것은 술 때문이다. 나의 가르침과 통솔이 부족하여 멀리까지 근심을 끼쳐드렸구나.”
그리고는 곧 유나(維那)에게 명하여 건치(揵稚)를 쳐서 대중을 모이게 하고는 곤장이 든 통을 향 놓는 탁자 위에다 놓았다. 그리고 향을 사른 뒤에 법우는 일어나서 대중 앞으로 나와 곤장 통을 향하여 공손히 절하고 땅에 엎드리면서 유나로 하여금 곤장 세 대를 치게 했으며 끝난 뒤에는 곤장을 통 속에 넣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책망했다. 그 때 경내에 있던 스님들과 속인들은 모두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그로부터 학도들은 업에 힘쓴 이가 더욱 많아졌다. 그 후 혜원(慧遠)에게 글을 써서 보냈다.
“제가 미약하고 암둔하여 제대로 대중을 통솔하지 못했으므로 화상(和尙)께서는
이역 땅에 계시면서도 오히려 멀리까지 우념(憂念)하여 주셨습니다. 저의 죄가 참으로 깊습니다.”
나중에 강릉에서 죽었으니 춘추는 60세였다.[이 한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진(晋)의 신야(新野)의 유소지(庾紹之)
진(晋)나라 신야(新野)의 유소지(庾紹之)는 젊었을 적의 이름이 도복(道覆)이었다. 진나라 상동 태수(湘東太守)인 남양(南陽)의 송협중(宋協中)과는 형제를 맺고 지나면서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소지는 원흥(元興) 말년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런데 의희(義熙) 중년에 갑자기 몸을 나타내서 송협중에게로 왔다. 모습과 입은 옷은 평소와 같았다. 두 발에다 쇠고랑을 차고 왔다가 쇠고랑을 벗어서 땅에다 놓고 앉았다. 협중이 물었다.
“무슨 이유로 오시게 되었소?”
그가 대답했다.
“잠시 동안 휴가를 얻었습니다. 당신과는 친한 사이라 일부러 들렀습니다.”
협중이 귀신에 관한 일을 질문하였더니, 유소지는 들은 척도 않고 아주 뾰루퉁하여 말하였다.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살생하지 말아야 하오. 만일 모두 끊을 수가 없다면 소라도 죽이지 마시오. 그리고 고기를 먹을 때에는 그것을 먹는다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송협중은 말하였다.
“5장에 있는 마음과 고기가 어찌 다른 것입니까?”
“마음이란 착한 정신이 깃드는 집이오. 그 죄가 더욱 중합니다.”
그리고 친척들에 대하여 자세히 묻고 세상일들을 말하고 있다가 마지막에는 또 술을 청했다. 협중은 때때로 수유주(茱萸酒)를 마셨으므로 그것을 차려 왔다. 술이 나와 잔을 건네자 마시지 않고 말하였다.
“수유 냄새가 나는구려.”
협중이 말하였다.
“그것이 싫습니까?”
“하관(下官)들이 모두 두려워합디다. 나 혼자만이 아닙니다.”
유소지의 말소리가 높고도 씩씩했으므로 이런 말을 할 때에는 평소에 하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고 조금 있다가 협중의 아들이 멀리서 왔다. 소지는 신발 소리를 듣고 몹시 두려워하는 빛을 띠며 협중에게 말하였다.
“산 사람이 죽은 이를 보게 될 것 같아서 더 머무를 수가 없구려. 당신과는 3년 동안 못 보게 되겠소.”
그리고는 쇠고랑을 차고 일어나 문을 나가자마자 사라져버렸다. 협중은 뒤에 정원랑(正員郞)이 되었는데 과연 3년 만에 죽었다.

송(宋)의 장소덕(蔣小德)
송(宋)나라 장소덕(蔣小德)은 강릉(江陵)사람이다. 악주자사(岳州刺史)로 있을 적에 주순(朱循)은 청사 감사(聽事監師)로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두터워서 부지런하고 근신함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주순은 그를 좋아하여 매양 불사(佛事)가 있게 되면 그에게 그 일을 맡게 했다. 대명(大明) 말년에 병을 얻어 죽었는데 밤 3경(更)에 염(殮)을 하려 할 때 다시 살아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어떤 사자가 와서 왕이 나를 부른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따라가 그곳에 이르자 왕이 말하였소.
‘그대는 부지런히 힘쓰면서 작은 일에도 조심하고 큰 법을 경건하게 받들고 있으므로 천제(天帝)의 정성스런 교지가 있기에 당신을 단독으로 불렀습니다. 속히 좋은 땅으로 가셔야겠습니다. 당신의 명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이제 내가 특히 부른 것이니, 당신은 오늘부터 천당 안의 쾌락과 기쁨을 누리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매우 좋아하면서 응낙하자 왕이 말하였다.
‘당신은 우선 집으로 돌아가서 하고 싶은 대로 모두 부탁하고, 그리고는 공덕으로 짓고 빨리 오셔야 합니다. 7일 후에 다시 오십시오.’
나는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 한 곳에 아주 초라한 작은 집이 있었다. 그 집에서 신사(新寺)에 있던 난공(難公)을 만났다. 그와는 본디 아는 사이였으므로 서로가 문안한 뒤에 난공이 말하였소.
‘빈도(貧道)는 출가한 이후에 아직 술 마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난공(蘭公)에게로 갔는데, 그가 하도 간절히 권하는 바람에 술 한 되쯤 마셨습니다. 이 때문에 왕에게 불려 왔습니다. 빈도가 만일 이 죄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으레 천당으로 올라갔을 터인데, 이제는 이 초라한 집에서 3년 동안 산 후에야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집에 와서 그의 말을 증험하기 위하여, 곧 그 저녁에 사람을 시켜서 가 보게 했는데 난공(難公)은 과연 그 날 난공(蘭公)의 처소에 와서 누워 자다가 그 밤에 죽었다.”
소덕도 몸이 다 나았으므로 7일 안에 복 짓는 공양을 크게 베풀었고 기한이 다 되어 갑자기 죽었다. 주순이 곧 가산을 털어서 난(蘭)과 난(難)의 두 스님을 다 같이 신사(新寺)에 같이 살게 하였는데, 난공(難公)의 도행이 더욱 정밀하여 다른 스님들과는 같지 않았다 한다.

송(宋)의 사문 축혜치(竺慧熾)
송(宋)나라 사문 축혜치(竺慧熾)는 신야(新野)의 사람이며 강릉(江陵)의 사층사(四層寺)에 살고 있었다. 영초(永初) 2년에 죽었는데, 제자들이 그를 위하여 7일 동안 재를 베풀고
그 날 저녁이 되어 소향(燒香)까지 끝냈다. 그리고 도현(道賢) 사문은 길을 가다가 혜치를 만났다. 또 제자가 방에 이르렀는데 그 앞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사람 같은 모양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혜치였다. 용모와 의복이 생시와 똑같았는데 도현에게 말하였다.
“자네 아침에 고기를 먹던데 맛있던가?”
도현이 말하였다.
“맛이 있었습니다.”
혜치가 말하였다.
“나는 고기를 먹은 죄로 지금 아구(餓狗) 지옥에 가있네.”
도현이 두려워하면서 미쳐 대답하기도 전에 혜치가 다시 말하였다.
“자네 만일 믿지 않거든 나의 등 뒤를 보게.”
등을 돌려 도현에게 보이는데, 거기에는 세 마리 노란 개가 있었다. 형상의 반은 당나귀와 같았는데, 눈은 아주 붉고 그 빛이 문 안까지 비쳤으며, 당장 혜치에게 덤벼서 물려 하다가 다시 그만 두었다. 도현은 이를 보고 놀라서 기절하였다가 한참 만에 깨어나서 그런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이 두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오(吳)의 제갈각(諸葛恪)
오(吳)나라 유제(幼帝)가 즉위했을 때에 제갈각(諸葛恪)은 정사를 보좌했고, 손준(孫峻)은 시중대장군(侍中大將軍)으로 있었다. 제갈각은 고집이 세고 남을 업신여겼으며, 손준은 남에게 험하게 굴면서 권세를 좋아했다. 봉황(鳳皇) 3년에 제갈각은 신성(新城)을 공격했으나 공이 없이 돌아왔으므로 손준은 그것을 트집잡아 유제에게 제갈각을 죽이게 했다. 그 날 제갈각은 정신이 산란하여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장약(張約)과 등예(騰裔)가 손준의 모함을 제갈각에게 알리자 제갈각이 말하였다.
“어린 아이인데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술이나 밥 때문에 해코지하는 위인(爲人)에 불과한데.”
그리고, 제갈각은 친히 믿는 사람에게 약술을 들려서 따르게 하고 그의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마침 집에서 기르던 개가 따라오다가 그의 옷자락을 물고 세 번이나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나 제갈각은 뒤를 돌아보면서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두려우냐? 뭐 걱정할 것 없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손준이 매복시킨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손준은 뒤에 병이 들었는데, 꿈에 제갈각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하면서 미친 소리로 늘 지껄였다.
“제갈각이 나타났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었다.[『원혼지(怨魂志)』에 나온다.]

주(周)나라 무제(武帝)
주(周)나라 무제(武帝)는 달걀 먹기를 좋아해서 한 끼에도 몇 개씩 먹었다. 요리를 하는 의동(儀同)의 이름은 발호(拔虎)였는데, 늘 음식을 올릴 때에 입맛을 돋구어 주었으므로 총애를 받았다. 수(隋)의 문제(文帝)가 즉위해서도 여전히 요리를 감독하여 식욕을 돋구어 주었다. 개황(開皇) 중간에 갑자기 죽었으나
심장이 아직도 따뜻했으므로 집안 사람이 차마 묻지 못하고 있었는데, 3일 만에 다시 살아나 말을 하면서 먼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를 수레에 태워 임금님[至尊]을 뵙게 해 주십시오. 무제(武帝)의 말을 전해야겠습니다.”
수레를 타고 나아가서 청하자 문제(文帝)가 불러 들여서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런 내용의 말을 하였다.
“처음엔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 불렀기 때문에 따라가 한 곳에 이르렀는데, 큰 땅구멍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었다. 겨우 구멍 입구에 다달았을 때 멀리 서쪽으로 말을 타고 오는 1백여 명이 보였다. 그 거동과 호위가 마치 왕과 같았는데, 얼마 있다가 구멍 입구에 닿은 이는 주나라 무제였다. 의동이 절을 하자 무제가 말하였다.
‘왕이 너를 불러서 나의 일을 증명하려 하는구나. 너에게는 죄가 없다.’
그리고는 곧 궁중으로 들어갔으며 의동도 사자의 인도로 궁문을 들어가 정전(庭前)에 이르렀다. 무제는 왕과 자리를 같이하면서 더욱 공경하는 얼굴이었으며 사자가 의동으로 하여금 왕에게 절을 하게 하자 왕이 물었다.
‘너는 무제를 위해 음식을 장만하였다. 지금까지 백단(白團)을 몇 개나 올렸느냐?’
그러나 의동은 백단이 무엇인지 몰라서 좌우를 돌아보자 좌우의 신하가 가르쳐 주었다.
‘달걀을 백단이라 한다.’
의동이 곧 대답하였다.
‘무제께서 백단을 잡수신 것은 사실이나 그 수가 몇 개인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왕이 무제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을 내어보아야겠소.’
무제가 슬픈 빛을 띠고 일어나자, 갑자기 정전에는 쇠로 된 평상과 옥졸 수십 명이 나타났다. 모두가 소의 머리에 사람 몸이었다. 무제는 벌써 평상 위에 누워있었다. 옥졸이 쇠로 된 들보를 가져다 위에서 누르자 무제의 양쪽 겨드랑이가 터지면서 달걀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잠깐 만에 평상만큼 쌓였는데 아마 10여 섬[斛]은 될 것 같았다. 그리고는 왕명으로 다 세어 마치자 평상과 옥졸은 갑자기 없어졌다. 무제도 왕이 있던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의동에게 말하였다.
‘나를 위해 너는 대수(大隋)의 천자(天子)에게 말하여 주어라. 옛날에는 나와 함께 식사도 했으며, 창고에 있는 구슬과 비단도 역시 내가 저축한 것이다. 지금의 내 몸은 불법을 멸망시킨 연고로 극히 큰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나를 위해 공덕을 좀 지어달라고 하라.’
그리하여
문제는 천하 사람들에게 칙명을 내려서 1전(錢)씩 거두어서 그를 위해 복을 빌어 주었다. 수나라 외조(外祖) 제공(齊公)이 친히 뵙고 문안한 뒤에 집으로 돌아와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수(隋)의 조문약(趙文若)
후수(後隋)의 대업(大業) 연간에 옹주(雍州)의 장안현(章安縣)에 성은 조(趙)씨요 이름은 문약(文若)이란 사람이 있었다. 죽은 지 7일이 되어서 집안 사람들이 크게 염하고 관에다 넣으려 하는데 한 발을 오므렸다. 집안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감히 관에 넣지 못하고 있는데, 문약이 살아났으므로 권속들이 기뻐하면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문약이 이런 말을 하였다.
“죽으려 할 때 사람이 나타나서 염라왕에게로 인도되었는데, 왕이 나에게 물었다.
‘네가 살아 있을 때에 무슨 복업을 지었느냐?’
내가 왕에게 대답하였다.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받아 지녔습니다.’
그러자 왕이 찬탄하면서 말하였다.
‘장하십니다. 그 복이 제일입니다. 당신이 비록 복과 선행을 지었기는 하나, 우선 당신을 모셔다 그 죄를 받는 곳을 보여 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는 한 사람을 시켜 나를 인도하게 했다. 북쪽으로 10보(步)쯤 가자 하나의 담장 구멍이 보였는데 나에게 그 구멍으로 들어가게 했다. 담장 벽에 한 사람이 있다가 손을 구멍 속으로 넣어서 내 머리를 잡아서 끌어내었는데, 몹시 고통스러웠다. 담장을 넘어가 바깥을 보니 큰 지옥들이 있었다. 가마솥에서 끓는 물과 고통 주는 도구들에 의해 죄인들은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말로는 다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돼지와 양과 닭과 물고기와 거위와 오리 등, 많은 족속들이 있다가 다투어 덤비면서 문약의 목숨을 가져가려 했으므로 내가 말하였다.
‘나는 너희들의 몸을 먹지 않았거늘 무엇 때문에 덤벼드는가?’
그 짐승들이 저마다 대답하였다.
‘네가 옛날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 아무 때, 아무 곳에서 나의 머리와 다리를 먹었고, 갈가리 찢어 나누어서 남들과 함께 먹지 않았느냐, 무엇 때문에 숨기느냐?’
나는 짐승들의 하는 말이 사실이었으므로 감히 더 거역하지 못했다. 오직 일심으로 염불을 하면서 모든 죄를 깊이 참회할 뿐이었으며, 다른 말은 하지도 못하고 여러 짐승들에게 살려 주기만을 빌었다.
당시 나는 복을 닦아서 착한 과보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여러 짐승들에게서 용서를 받았으며 복을 닦기 위해 잠시 풀려났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사자의 인도로 왕에게로 와서
죄를 받는 곳과 당한 일들을 다 말하였다. 왕은 한 주발의 못[釘]을 나에게 먹게 하고 아울러 다섯 개의 못을 나의 머리와 손과 발에다 친 연후에야 놓아주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살아나게 되었다.”
이런 일을 자세히 말할 때에도 머리가 아프고 손발이 아팠는데, 오랜 동안 복을 닦고 나서야 통증은 점점 낫게 되었다. 그로부터는 더 부지런히 힘쓰면서 『금강반야경』을 독송했으며, 잠시 동안도 감히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스님들과 속인들로서 친한 사람이든 소원한 사람이든 모두 『반야경』을 받아 지니도록 권할 뿐이었다.
나중에 일이 있어서 한 역(驛)의 대청 위에서 잠시 동안 누워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 때 꿈에 푸른 옷을 입은 한 여인이 급하게 와서 살려 달라고 청했다. 문약은 놀라 깨면서 곧 역장(驛長)을 불러서 물었다.
“당신은 나를 위하여 살생을 하려 하지 않았소?”
역장이 대답하였다.
“실은 공(公)을 위하여 작은 양 한 마리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 양이 무슨 빛이었습니까?”
“푸른빛의 암컷이었습니다.”
문약이 말하였다.
“당신은 급히 놓아주십시오. 내가 그 값을 드릴 터이니, 도로 갚고 놓아주십시오.”
이것은 진실로 『반야경』의 위력으로 말미암아 은밀히 돕는 감응(感應)이었다.

당(唐)의 손회박(孫廻璞)
당(唐)나라 전중시의(殿中侍醫) 손회박(孫廻璞)은 제음(濟陰) 사람이다. 정관(貞觀) 13년에 어가(御駕)를 따라 구성궁(九成宮)의 삼선곡(三善谷)에 가 있었는데, 위태사(魏太師)와는 이웃집이었다. 일찍이 밤 2경(更)에 밖에서 어떤 사람이 ‘손시의’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회박이 일어나서 나가 보았더니 위태사의 명이라 했다. 그리하여 나가서 보니 두 사람이 나타나서 회박에게 말하였다.
“관(官)에서 회박을 부른다.”
회박이 말하였다.
“나는 걸어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 곧 회박의 말을 가져와 타게 했다. 두 사람을 따라가는데 천지가 마치 대낮과 같이 밝았다. 회박은 괴이하게 여겼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회박을 끌고 골짜기를 나와서 조당(朝堂)의 동쪽을 지나 동북쪽으로 6ㆍ7리쯤 갔다. 목숙곡(苜蓿谷)까지 왔을 때에 멀리서 두 사람이
한봉방(韓鳳方)을 데려 가면서 회박을 데리고 가는 두 사람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잘못 데려가고 있구려. 우리가 붙잡아 가는 자가 옳은 사람이오. 당신들은 그 사람을 놓아주시오.”
그래서 그들은 곧 회박을 놓아주었다. 회박이 길을 따라 돌아오는데 길이 뚜렷한 것이 평소에 다니던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여 말을 매놓고 여종을 보니 문에 기대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담을 넘어 들어가 문을 열어 보았더니, 자기의 몸과 아내가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하여 회박이 자기의 몸을 취하려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할 수 없이 남쪽 벽에 붙어 서서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으나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집 안은 아주 환했다. 벽 귀퉁이의 거미줄 안에는 두 마리의 파리가 걸려 있었는데 한 마리는 크고 한 마리는 작았다. 그리고 들보 위에 걸려 있는 약물들도 다 보였다. 모두가 분명하지 않음이 없었는데도 평상으로 다가갈 수 없었으므로 그제서야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몹시 걱정되고 한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아내와 이별할 수는 없었으므로 남쪽 벽에 오랫동안 기대 서 있었는데, 잠깐 동안 졸다가 갑자기 놀라서 깨보니 자기 몸이 평상 위에 누워 있었다. 집 안은 온통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아내를 불러서 일으켜 불을 켜게 하고 보니, 회박의 온몸은 몹시 더럽혀져 있었다. 일어나서 거미줄을 보았으나 분명한 것이 아까와 다름이 없었다. 말을 가서 보니 역시 아주 더럽혀져 있었다. 한봉방은 그 날 저녁에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그 후 17년에 회박은 칙명을 받들고 급히 역마를 몰아 제주료(齊州療)로 가서 제왕(齊王)의 병을 고쳐 주고는 낙주(雒州)의 동효의역(東孝義驛)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서 물었다.
“당신이 손회박이시지요?”
회박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째서 물으십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귀신입니다. 위태사(魏太師)께서 문서를 주시기에 따라와서 당신의 방을 기억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문서를 회박에게 내보여 주었다. 회박이 보니 그것은 정국공위(鄭國公魏)가 부른다는 서명이었다. 회박이 놀라면서 말했다.
“정공(鄭公)은 아직 죽지 않았거늘 어째서 당신을 시켜서 문서를 보냈다는 말이오?”
귀신이 말하였다.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태양도록대감(太陽都錄大監)이 되어 계십니다. 그 때문에 나를 시켜서 당신을 부르게 한 것입니다.”
회박이 그를 가까이 앉히고 음식을 잘 대접했더니, 귀신은 몹시 기뻐하면서 회박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그 때 회박이 청하였다.
“나는
칙명을 받들어 심부름을 하다가 아직 돌아가지 못했으니, 정공이 나를 추궁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경사에 돌아가 일을 상주(上奏)한 연후에 명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낮에는 같이 가고 밤에는 같이 자면서 드디어 문향(閿鄕)에 이르렀다. 그 때 귀신이 하직하면서 말했다.
“나는 미리 관문(關門)을 나가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는 모습을 감췄는데, 회박이 관문을 지나 서문(西門)을 나오자 귀신은 벌써 문 밖에 서 있었다. 둘은 다시 동행을 하여 자수(滋水)까지 왔다. 귀신이 또 회박과 이별하면서 말하였다.
“당신이 일을 다 아뢴 뒤를 기다렸다가 끝나면 서로 만나기로 합시다. 당신은 부디 훈신채(葷辛菜)를 먹지 마십시오.”
회박은 그것을 허락하고서 일을 다 아뢴 뒤에 정공을 방문하였더니 벌써 죽은 뒤였다. 죽은 날짜를 조사해 보았더니 효의역에 있었던 그 전날이었다. 회박은 틀림없이 자기가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집안 사람들과 기약 없는 작별을 했으며 스님들을 청해다 도를 행하고 불상을 조성하며 경전을 베꼈다. 이렇게 하기를 꼬박 6, 7일이 걸렸다. 밤에 꿈을 꾸는데, 앞서 본 그 귀신이 와서 불렀다. 회박이 따라가자 귀신은 그를 높은 산으로 인도했으며 산꼭대기에는 큰 궁전이 있었다. 그 곳으로 들어가자 대중들이 많았는데, 한 군자(君子)가 영접하면서 말하였다.
“이 분은 복을 닦았으므로 여기에는 머무르게 하실 수 없다. 보내드려라.”
그러자 곧 회박을 산 아래로 밀쳐버렸다. 그는 떨어지면서 놀라 깨어났으며 지금까지 병이 없이 살고 있다. 회박 자신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당(唐)의 돈구(頓丘)의 이씨(李氏)
당(唐)나라 기주(冀州) 돈구현(頓丘縣)에 성은 이(李)씨요, 나이 70여 살이 된 노모가 있었다. 아들도 없고 외로운 늙은이였으며, 오직 남종과 여종 두 사람만이 있었다. 오랫동안 술장사를 하였는데, 술에다 잿물을 조금씩 섞어 팔면서 겨우 살림을 꾸려나갔다. 정관(貞觀) 연간에 병으로 인해 숨이 끊어졌는데 죽은 지 이틀이 되었다. 장례 기구는 모두 마련했으나 심장 위가 조금 따뜻했으므로 기다렸더니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겪은 일들을 말하였다.
“처음에 다 같이 붉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문 앞에 와서 불렀으므로 나갔더니, 위에서 보내서 왔다고 했다. 곧 그들을 따라가서 하나의 성(城)에 이르렀는데 고을을 둘러싼 성곽과도 같았다. 측원(側院)으로 끌려갔는데 한 관인(官人)이 있었다. 의관을 하고 큰 소매를 늘어뜨린 채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으며 좌우에도 아주 많은 사람이 있었다. 계단 아래에는 쇠고랑을 찬 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방어하고 매달리고 하는 것이 생시와 같았다.
관부(官府)에서 보내온 이가 노모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함부로 술을 팔아서 남의 물건을 많이 취했으며, 『법화경(法華經)』을 베껴 쓴다 한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는데 어째서 완성하지 못했는고?’
노모가 자세히 말하였다.
‘술은 여종으로 하여금 만들게 했고 그 분량도 여종이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경은 이미 천 문(文)의 돈을 은(隱) 선사에게 부쳐 드렸습니다.’
그러자 곧 여종에게 사자를 보내서 잠깐 사이에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한 뒤에 여종에게 태형(笞刑) 40대를 때리고 놓아주었다. 은 선사에게도 파견하여 물었는데, 사실이라고 대답하자 노모에게 말하였다.
‘당신을 7일 동안 놓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경이 다 완료되면 미래에 좋은 곳에 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보내 주었으므로 다시 살아났다.”
또 어떤 사람은 물어서 그 사실을 정정하였다.
“노모가 처음 죽었을 때는 여종에게 아무 일이 없었는데, 오래 있다가 살아나서 보니 배와 등이 파랗게 부르터 있었다. 아마 그것이 볼기 40대를 맞은 흔적일 것이다.”
은 선사란 분은 본래 객승(客僧)인데 절에 딸린 돈구(頓丘) 땅에서 나이 6, 70이 되도록, 출가한 뒤에는 줄곧 두타(頭陀)와 걸식으로 하루 한 끼씩만 먹으며 잠시도 그치는 일이 없었으므로 원근의 대덕(大德)들까지 모두 공경하고 흠모하였다. 노모가 병들어 죽은 뒤에 은 선사의 꿈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와서 물었으므로 꿈속에서 대답하였다.
경을 베끼고 있는 일이 사실이다.
노모는 고향 마을의 권속과 은 선사가 행한 도에 힘입어서 여러 경생(經生)에게 삯을 주어, 여러 사람의 손으로 경전을 베꼈다. 그리하여 경을 꼭 7일 만에 다 완료하고 돌아와 보니 먼저의 두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났으므로 노모가 말하였다.
“심부름하신 분이 오셨소. 다들 잘 사십시오.”
그 소리가 끝나면서 죽었다. 은 선사는 현재에도 살아 계시며, 스님들과 속인들이 흠앙하며 공경하고 있다.

당(唐)의 참군(參軍) 정사변(鄭師辯)
당(唐)나라 동궁(東宮) 우감문(右監門)의 병조참군(兵曹參軍) 정사변(鄭師辯)은 나이 아직 젊었을 때에 갑자기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말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처음 몇 사람이 나타나 나를 붙잡고 데리고 가서 관부의 대문으로 들어갔다. 죄수들 1백여 명이 있었으며 모두가 북쪽을 향해 여러 줄로 서 있었다. 모두 여섯 줄이었는데,
그 앞줄에 있는 이들은 형상도 살찌고 하얀 데다 좋은 옷을 입어서 마치 귀인과 같았다. 그러나 뒷줄로 갈수록 점점 파리했으니, 혹은 쇠고랑을 차기도 하고, 혹은 건(巾)과 띠를 벗고 모두 소매를 나란히 잡고 있었다. 엄하게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사변은 셋째 줄의 동쪽 끝에서 세 번째에 서 있었다. 역시 건과 띠를 벗고 소매를 붙잡고 있었는데, 걱정되고 두려워 오로지 한마음으로 염불만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살아 있을 때에 잘 알고 지내던 스님이 나타나서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는 데로 들어 왔으나 병사들은 막지 않았다. 그대로 사변에게로 와서 말하였다.
‘평소에 복을 닦지 않더니, 이제 갑자기 어떻게 하려 하오?’
사변이 구제해 주기를 애원하자, 그 스님이 말하였다.
‘내가 이제 그대를 구해줄 터이니, 나가면 계율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사변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잠깐 동안에 죄수들은 관인 앞으로 끌려 들어가서 차례로 심문을 받았는데, 그 동안에 문 밖에서 스님은 5계를 수여하고 병에 든 물을 그의 이마에 부어주면서 말하였다.
‘해가 서쪽으로 향하면 살아날 것이다.’
또 한 벌의 노란 배자[帔]를 사변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것을 입고 집으로 가서 깨끗한 곳에 벗어 두시오.’
그리고는 돌아가는 길을 가리켜 주는데, 사변은 그것을 입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겹 배자를 평상 모서리 위에다 놓았다. 그리고 눈을 뜨면서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집안 사람들이 놀라 흩어지면서 외쳤다.
‘시체가 일어나려 한다.’
그러면서 모두 도망쳤으나 어머니만은 가지 않고 물었다.
‘네가 살아났느냐?’
사변이 대답했다.
‘해가 서쪽으로 향해야 살아날 것입니다.’
사변은 한낮이 아닌가 의심이 났으므로 어머니에게 물은 것이다. 어머니가 말하였다.
‘한밤중이다.’
그제야 죽고 사는 것이 서로 어기고 밤과 낮이 반대임을 알았으며 해가 서쪽을 향할 때에 살아나서 밥을 먹고 나았다. 그런데 아직도 그 배자는 평상 끝에 있었는데 사변이 일어나자 배자의 형상이 점점 사라지면서도 빛이 나더니 7일 만에야 다 없어졌다. 사변은 5계를 잘 지켰다.
그런데 수년 후에 한 친구가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하도 권해서 사변은 부득이 저민 고기 한 점을 먹었더니, 그날 밤 꿈에 나찰로 변화해서 수척이나 되는 손톱과 이빨로 산돼지를 붙잡고 뜯어먹었다. 아침이 되어 깨어나 보니 입에 비린내가 나고 침이 온통 피였으며 남들이 보고 입에 가득 차 있다고 했는데, 모두 엉긴 피였다. 사변은 깜짝 놀라며 감히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 수년 후에 장가를 들었는데, 처가(妻家)에서 너무도 졸랐으므로 고기를 먹었다. 그런 뒤에는 증험도 없어졌다. 그 후 5,6년 뒤부터는 몸에서 악취가 나고, 늘 큰 종기가 생겨 터지고 문드러지면서 낫지 않았는데, 아마도 파계한 까닭이 아닌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옛날 사변과 동궁(東宮)에서 같이 대화하던 이가 직접 말해 준 것을 듣고 말한 것이다.[위의 다섯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당(唐)의 위지십(韋知十)
당(唐)나라 우금오병조(右金吾兵曹) 경조(京兆)의 위지십(韋知十)은 영휘(永徽) 중년에 양 한 마리의 다리를 삶았다. 반나절을 끓는 물에 넣어서 삶았는데도 그대로 있었으므로 지십은 성을 내면서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무를 평소보다 열 배 더 때라.”
그러나 어쩐 일인지 아무리 삶아도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쪼개 보았더니, 그 안에서 지름 한 치 되는 구리로 된 불상이 하나 나왔는데, 광명이 번쩍거리고 상호(相好)가 원만했다. 그로부터 그 집은 일생 동안 감히 고기와 술을 먹지 않았다. 중산랑(中山郞) 여령(餘令)이 친히 듣고 말해 주었다.

당(唐)의 사적씨(謝適氏)
당(唐)나라 옹주(癰州)의 만년현(萬年縣) 염촌(閻村)은 파수(灞水)와 위수(渭水)의 사이에 있었다. 여기에 살던 사씨(謝氏)라는 여인은 같은 고을에 사는 원씨(元氏)에게 시집을 갔고, 거기서 낳은 딸은 회룡촌(廻龍村)에 사는 내아조(來阿照)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사씨는 영휘(永徽) 말년에 죽었는데 용삭(龍朔) 원년 8월에 내씨에게 시집간 딸이 꿈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내가 생시에 작은되를 만들어 술을 팔면서 값은 많이 받으면서도 술의 양은 너무도 적게 주었다. 지금 그 죄에 걸려서 북산(北山) 아래 사는 사람의 집에 소로 태어났고, 근자에는 법계사(法界寺)의 하후(夏候) 스님의 집으로 팔려 갔는데, 지금은 나를 대려다 성남(城南)에서 논밭을 갈게 하고 있다. 너무도 그 고통이 심하다.”
이런 꿈을 꾸고서 그 딸은 눈물을 흘리면서 남편 내아조에게 말했다. 그런 뒤 2년 정월에 법계사의 어떤 비구니가 아조가 살고 있는 마을에 왔으므로 그 딸은 비구니에게 그런 일을 물었더니, 그 비구니가 말했다.
“하후 스님도 있고 그런 사실이 있다.”
그 딸이 곧 절에 가서 그를 찾았더니 “근자에
북산 아래서 소 한 마리를 사와서 현재 성남에서 땅을 갈고 있다”고 했다.
딸이 눈물을 흘리면서 절 비구니에게 청하자, 비구니는 사람을 딸려 보내 주었으므로 그곳으로 갔다. 이 소는 평소에 한 사람만이 다룰 수 있었고 만일 딴 사람을 만나면 제멋대로 굴면서 들이받았다. 그런데 이 딸을 보자마자 와서는 그의 온몸을 혀로 핥으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그 딸은 곧 하후 스님께 청하여 값을 치르고 딸의 집으로 데려왔다. 지금 현재 아조의 집에서 기르고 있는데, 그 딸은 언제나 ‘어머니’라 부르면서 받들기를 다한다 했다. 경사(京師)에 사는 왕후(王侯)의 비(妃) 등 많은 지체 높은 이들이 불러 놓고 보면서 다투어 돈과 비단을 보시하고 있다.

당(唐)의 임오랑(任五娘)
당(唐)나라 용삭(龍朔)원년 낙주(雒州) 경복사(景福寺)의 비구니가 수행하던 방 안에 임오랑(任五娘)이라는 시동(侍童)이 있었다. 그가 죽은 뒤에 수행하던 방 안에다 오랑의 영(靈)을 모셔 놓았는데, 달포쯤 지난 뒤에 언니와 아우는 한밤중에 갑자기 영이 있는 자리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우는 처음에 몹시 두려워하다가 그 뒤에 가서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내가 생시에 절 위에서 고기를 먹었다가 큰 고통에 걸려서 나의 몸 위에 부스럼이 나있다. 상과 자리를 더럽힐까 두려우니, 너는 재를 상 위에 많이 가져다 놓아라.”
아우는 그의 말대로 재를 놓았다가 나중에 살펴보니 상 위에는 많은 피고름이 고여 있었다.
또 아우에게 말하였다.
“언니가 아파서 바느질을 못하고 있으니, 너의 옷이 남루하구나. 베를 가져다 놓아라. 내가 너를 위하여 적삼과 버선을 만들어 주겠다.”
아우가 베를 영가를 모신 상 위에 가져다 놓았다가 밤을 지내고 나서 보니 다 되어 있었다.
또 그 언니에게 말하였다.
“제가 어릴 때에 무릎을 앓을 때 방게 한 마리를 죽여 그 즙을 내어서 상처에 발라서 나은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죄로 도림(刀林) 지옥에 들어가 있고, 살 속에는 현재 부러진 칼 일곱 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언니는 인자한 생각으로 저를 위해 공덕을 지어서 구제하여 주십시오. 언니도 절박하여 서로 돕고 힘쓰지 못한 사정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몸에 따른 의복은 죽은 자에게 이익이 없을 뿐이며 아직 해지지 않았으니, 그것으로나마 이용하십시오.”

언니가 아직 대답하기도 전에 말하였다.
“제가 가지러 갑니다.”
한참 있다가 또 말하였다.
“의복을 가져 왔습니다. 지금 상 위에 있습니다.”
언니가 시험삼아 가서 보았더니 염(斂)할 때의 의복이었다. 그리하여 그 옷을 정토사(淨土寺)의 보헌(寶獻) 스님에게 보내어서 그것을 빙자하여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베껴 썼다. 매양 한 권을 다 베낄 때마다 와서 말하였다.
“이미 한 개의 칼이 나왔습니다.”
마침내 7권을 다 베껴서 마치자 와서 말하였다.
“일곱 개의 칼이 모두 다 나왔습니다. 이제 복의 도움을 입어 곧 남에게 의탁하여 태어날 것입니다.”
그리고는 언니와 누이가 서로 통곡하다가 이별을 했다. 오흥(吳興)과 심현법(沈玄法)이 이를 말해 주었으며, 정토사 스님 지정(智整)이 설명해 준 바와도 역시 같았다.[위의 세 가지 증험은 『명보습유(冥報拾遺)』에 나온다.]
선 율사(宣律師)의 『감응기(感應記)』에 의거하여 말한다.
“사천왕들이 선 율사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큰 광명을 놓으시고 하늘ㆍ사람ㆍ용ㆍ귀신 등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정법(正法)이 멸한 뒤에 많은 비구들은 나의 소승교(小乘敎)의 자취에 집착하고 비니(毘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내가 비구들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허락했다 하고, 이러한 비구들이 승가람(僧迦藍) 안에서 중생을 살해하되 마치 사냥꾼과 도수장같이 할 것이다. 또 어떤 비구는 비단옷을 입고 음녀의 집과 술집에 놀러 다니며, 3장(藏)을 익히지 않고 금계를 지니지 않으리니 애통하고 가슴아픈 일이다. 이 나쁜 비구들은 나의 가르침을 비방하면서 더럽히고 있거늘 그 혀가 어찌 떨어지지 않겠느냐?
모든 비구들에게 이르노라. 나는 한량없는 겁으로부터 머리와 눈과 골수와 뇌를 버렸고, 혹은 흉년 든 세상에서는 큰 살의 몸이 되어서 굶주린 이들에게 보시하였으며, 혹은 안팎의 재산을 보시하면서도 끝내 인색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 발심해서부터 부처가 되기까지 어찌 제자들에게 중생의 고기를 먹으라고 했겠느냐?
내가 열반한 뒤에 저 나쁜 비구들도 차례로 나의 자리에 보충되어 하늘과 인간의 스승으로서 중생을 인도하여 도의 과위를 얻게 할 것이거늘, 어찌 하늘과 인간의 스승된 입으로
중생의 고기를 먹는다는 말이냐?
내가 처음 도를 이루었을 때 비록 비니 중에서 세 가지 정육(淨肉)을 먹으라고 허락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4생(生)의 무리가 아니다. 이는 모든 선정의 고기이며, 이는 불가사의한 고기라서 너희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거늘, 무엇 때문에 나의 가르침을 비방하면서 더럽히는가. 나는 『열반경(涅槃經)』과 『능가경(楞伽經)』 가운데서 온갖 생명이 섞인 고기는 모두 다 끊으라 하였고, 계를 지닌 사람은 모든 중생의 살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만일 어떤 나쁜 비구가 비니의 가르침 가운데서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거나, 명주 옷 입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말한다면 이는 바로 악마의 말이다. 나는 성도한 때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오직 거친 베와 흰 무명으로 된 세 가지 옷만을 입었으며 아직 비단옷은 입어 본 일도 없거늘 어째서 나를 비방하는가?≻’”

94. 예탁편(穢濁篇)[여기에는 4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오신부(五辛部) 체기부(嚔氣部)
변리부(便利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5음(陰)은 헛되고 임시적(臨時的)이며 4대(大)는 덧없고 위태롭다. 이 임시적인 물질을 받았으니 그 일은 마치 그림의 병(甁)과 같고, 이 더러운 형상을 받았으니 굽지 않은 그릇과 같다. 안과 밖이 실체가 없으므로 닿거나 칠하면 모두가 물든다. 또한 염부제의 더러운 형질로 부정한 것이 몸에 가득히 찬 데다가 항상 고기와 술을 먹고 늘 훈신채(葷辛菜)를 먹으므로 그 악취는 위로 치밀어 올라서 모든 하늘의 옷이 찢어지고 선신(善神)이 수호하지 않으며 악귀(惡鬼)가 다투어 침노한다.
범부의 승니(僧尼)조차도 오히려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하거늘, 하물며 성현으로서 멀리 하지 않겠는가? 아울러 다시 8고(苦)가 절박하고 9횡(橫)이 해를 재촉하므로 생각생각마다 옮겨 흐르고 마음마음마다 일어났다 사라진다. 한갖 6정(情)에 물들 뿐이면 끝내 3악도에 떨어지리니, 원컨대 저마다 몸을 닦으면서 그 마음과 입을 깨끗하게 할지어다.

(2) 오신부(五辛部)

『능가경(楞伽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大慧)야, 이와 같은 온갖 파ㆍ부추ㆍ마늘ㆍ염교는 악취가 나고 깨끗하지 않아서 성인의 도를 장애한다. 또한 세간의 사람과 하늘의 청정한 곳까지도 장애가 되거늘, 하물며 모든 부처님 정토(淨土)의 과보이겠느냐? 술 또한 그와 같으니라.”
또 『열반경(涅槃經)』에서 말씀하셨다.
“나아가 파와 부추와 마늘과 염교까지 먹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라서 장차 고통받을 곳에 태어나, 악취가 나서 깨끗하지 않으므로 성인의 도를 장애한다. 또한 세간의 사람과 하늘의 청정한 곳까지도 장애하거늘 하물며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의 과보이겠느냐. 술도 또한 그와 같아서 성인의 도를 장애하고 착한 업을 손상시키며 모든 허물을 내게 한다.”
또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말하였다.
“5신(辛)을 먹지 않아야 한다. 무엇이 5신인가? 첫째는 부추요, 둘째는 파이며, 셋째는 마늘이요, 넷째는 흥거(興渠)이며, 다섯째는 달래이다.”
또 『범망경(梵網經)』에서 말하였다.
“불자야, 5신을 먹지 말 것이다. 마늘과 부추와 파와 달래와 흥거이니, 이 다섯 가지는 먹지 말아야 한다.”
또 『오신보응경(五辛報應經)』에서 말하였다.
“7중(衆)들은 고기와 훈신(葷辛)을 먹지 말 것이니, 이것을 먹고 경론을 독송하면 죄를 얻는다. 병든 이에게는 허락하되 가람 밖의 속인의 집에서 먹을 것이며, 먹은 뒤에 49일이 다 되면 향탕(香湯)에 목욕을 하고 그런 뒤에 경론을 독송해야 범하지 않는다.”
또 『승기율(僧衹律)』ㆍ『십송률(十誦律)』ㆍ『오분율(五分律)』 등에서도, 그 밖의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든 비구에게만 마늘을 7일 동안 먹는 것을 허락하되,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방에서만 먹을 것이며, 먹은 뒤에는 대중이 쓰는 평상이나 이불에 누워서는 안 되고 대중이 대변ㆍ소변을 보는 곳이나 강당이 있는 곳에는 모두 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 청을 받거나 대중과 함께 밥을 먹어서도 안 되고, 부처님께 나아가 예배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바람이 잘 통하는 먼 곳에서 예배하면 된다. 그리고 7일이
다 된 뒤에 목욕을 하고 옷을 바로 입은 뒤에야 대중에 들어갈 수 있다.
만일 부스럼이 있는 이가 의사의 명으로 향을 발라서 치료해야 할 때는 먼저 부처님께 고양하고 난 연후에야 몸에 바를 것을 부처님께서는 허락하셨다. 으슥한 곳에서 하늘 것 등은 앞의 법과 동일하다.[출가하여 성품이 정결해도 오히려 작법(作法)을 이렇게 하거늘, 하물며 세속의 범인들에게 먹는 것을 허락함에 있어서랴.]

(3) 체기부(嚔氣部)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만일 선방(禪房) 안에 있으면서 재채기를 할 때에는 방자하게 너무 큰 소리가 나게 하지 말 것이다. 재채기가 나오려 하면 손으로 코를 막고 참아야 하며, 만일 참을 수 없으면 손으로 코를 가리고 재채기를 해야 되고 여러 사람의 자리에 콧물이나 침이 떨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 만일 상좌(上座)가 재채기를 하면 ‘화남(和南:합장, 공경의 뜻)’하고 말해야 하고, 하좌(下座)가 재채기를 하면 잠자코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당시 세존께서 재채기를 하시자 모든 비구들이 주원(呪願)하면서 ‘오래 사시옵소서’라고 하였다. 당시 어떤 거사가 재채기를 하며 비구에게 절을 하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로 하여금 주원하면서 ‘오래 사십시오’라고 하게 하셨다.”
또 『승기율(僧祇律)』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급하게 방귀가 나오려 해도 억제해야 한다. 그래도 참을 수 없으면 아래로 가서 앉아야 하며, 앞에 있으면서 냄새를 풍겨서는 안 된다. 만일 냄새가 나서 참을 수 없으면 길로 내려가 바람이 잘 통하는 데 있으면서 날려 보내야 한다.”
또 『비니모경(毘尼母經)』에서 말하였다.
“기(氣)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품[上氣]이요, 둘째는 방귀[下氣]이다. 하품이 나오려 할 때에는 사람 앞에서 입을 벌려 하지 말 것이요, 반드시 얼굴을 돌리고 사람 없는 곳에서 입을 벌려 하품을 해야 한다.
또 방귀가 나오려 할 때에는 대중 가운데서 뀌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방편을 써서 밖으로 나와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뀌어야 한다. 그러한 뒤에 다시 대중에게 들어감으로서 대중으로 하여금 혐오감과 천히 여기는 마음이 나지 않게 할 것이다. 탑에 들어갈 때에는 방귀를 뀌지 않아야 하고,
탑을 모신 나무 아래서나 대중 가운데서도 방귀가 나오지 않게 해야 하며, 스승의 앞과 대덕과 상좌 앞에서도 소리가 나게 방귀를 뀌어서는 안 된다. 만일 뱃속에 병이 있어서 급하면 밖으로 나가야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혐오감과 천히 여기는 마음이 나지 않게 해야 한다.”

(4) 변리부(便利部)
『우발기왕경(優鉢祇王經)』에서 말하였다.
“가람(伽藍)의 경계 안의 땅에 함부로 대변과 소변을 하는 이는 5백 생 동안 몸이 발파(拔波)지옥에 떨어지며, 그 뒤에는 20소겁(小劫) 동안 대소변이 널린 더러운 땅을 안고 황천(黃泉)까지 이른다.”
또 『비니모경(毘尼母經)』에서 말하였다.
“여러 비구가 살고 있는 방 앞과 그 중간에 소변을 누어서 악취 때문에 모두가 다닐 수 없었다. 부처님께서 이 냄새를 맡고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지금부터는 모든 비구들이 승가람의 아무 곳에나 소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느 으슥한 일정한 곳을 지정하여 누어야 한다. 그리고 기와 그릇이나 나무통을 땅 속에다 묻어 놓고, 그 곳에 소변을 눈 뒤에 덮개를 만들어 덮어서 냄새가 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또 『비니모경』에서 말하였다.
“만일 뒷간에 갈 때에는 먼저 산가지를 가지고 문 앞까지 가서 세 번 손가락을 튀기어 소리를 낸다. 그것은 사람과 비인(非人)이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산가지가 없어도 안 되고 벽 위에 문질러도 안 되며 뒷간의 판자나 들보나 기둥에다 문질러도 안 되며 돌을 써서도 안 된다. 그리고 푸른 풀과 흙덩이와 부드러운 나무 껍질과 부드러운 잎사귀와 기이한 나무들도 모두 쓸 수 없으며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나무와 대와 갈대로 만든 산가지 뿐이다. 그 크기는 아주 긴 것은 한 뼘이고, 짧은 것은 넷째 손가락 길이이다. 이미 쓴 것을 너무 흔들어서 깨끗한 것을 더럽게 하지 말 것이며, 깨끗한 산가지 속에 두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뒷간에 가는 법이며
산가지를 쓰는 법이다.
뒷간에는 두 가지 처소가 있다. 첫째는 일어나고 앉는 곳이요, 둘째는 물을 쓰는 곳이다. 앉고 일어나고 옷을 걷어올리는 곳은 일어나고 앉고 하는 그 곳이며, 뒷간 문 앞에는 깨끗한 병에 물을 담아 두고 또 하나의 작은 병이 놓여 있어야 된다. 만일 자기 병이 있으면 그것을 써야 하고, 만일 자기 병이 없으면 뒷간 곁에 놓여 있는 작은 병을 쓸 것이며, 곧장 대중들이 쓰는 큰 병의 물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이것이 뒷간에 가서 물을 쓰는 법이다.
탑 앞에서나 대중들 앞에서 화상과 아사리 앞에서는 입을 벌려 크게 코를 풀거나 침을 뱉지 말아야 한다. 만일 코를 풀고 싶거나 침을 뱉고 싶으면 으슥한 곳으로 가야 하며, 남들로 하여금 혐오감과 천히 여기는 마음이 나지 않게 해야 한다. 이것이 코를 풀고 침을 뱉는 법이다.”
또 『삼천위의경(三千威儀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대소변을 누고 씻지 않으면 그 비구는 돌길라죄(突吉羅罪)가 된다. 또한 청정한 대중이 쓰는 방석 위에 앉지 말 것이며 3보께 예배해서도 안 된다. 설령 예배 한다 해도 복덕이 없다.
또 집 뒤의 뒷간에 가는 데 25가지 일이 있다. 첫째, 대소변이 하고 싶어서 가는 때에는 길 위의 상좌(上座)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 둘째, 남에게 절도 받지 않는다. 셋째, 갈 때에는 머리를 숙이고 길을 보고 가야 한다. 넷째, 가서는 세 번 손가락을 튀긴다. 다섯째, 이미 사람이 거기서 손가락을 튀기면 독촉하지 말 것이다. 여섯째, 들어가면 똑바로 서서 손가락을 튀기고 걸터앉는다. 일곱째, 바로 한가운데에 걸터앉는다. 여덟째, 한 발은 앞으로 한 발은 뒤로 내지 말 것이다. 아홉째, 몸을 기대지 말 것이다. 열째, 옷을 걷어 올려서 구덩이 안까지 드리우게 하지 말 것이다. 열한째, 너무 힘을 써서 얼굴이 붉어지게 하지 말 것이다. 열두째, 앞을 똑바로 보고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다. 열셋째, 벽을 더럽히지 말 것이다. 열넷째, 머리를 숙여서 구덩이 안을 보지 말 것이다. 열다섯째, 음기(陰器)를 보지 말 것이다. 일여섯째, 음식을 손으로 잡지 말 것이다. 열일곱째, 풀로써 땅을 덮지 말 것이다. 열여덟째, 풀을 가져다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자를 쓰지 말 것이다. 열아홉째,
물을 쓰되 너무 허비하지 말 것이다. 스무째, 더럽히면서 씻지 말 것이다. 스물한째, 물을 쓸 적에 사용한 손을 사용하지 않은 손에다 대지 말 것이다. 스물두째, 흙을 쓸 적에는 세 번만 떠서 쓴다. 스물셋째, 비누를 써야 한다. 스물넷째, 세 번만 물을 떠서 쓴다. 스물다섯째, 설령 물과 풀과 흙을 보았다 해도 그 날의 당직(當直)에게 말을 해야 한다. 만일 자신이 가지고 온 것이면 마음대로 해도 좋다.”
또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대소변을 행한 뒤에 물로 씻지 않고서 대중이 쓰는 방석이나 평상이나 이불을 받아 쓰면 죄가 된다.”
또 『십송률(十誦律)』에서 말하였다.
“대변을 누고 씻지 않으면 대중의 침구 위에 앉거나 눕지 말 것이니, 죄가 된다.”
또 『마덕륵가론(摩德勒伽論)』에서 말하였다.
“대소변을 누고서 씻지 않으면 예배하지 말 것이다. 그 밖에 물이 없는 곳이거나 비인(非人)이 성을 내게 되거나 수신(水神)이 성을 내거나, 혹은 약을 먹기 위해서라면 씻지 않아도 범한 것은 아니다.”
또 『삼천위의경(三千威儀經)』에서 말하였다.
“깨끗이 씻지 않고 부처님께 예배하면 설령 예배한다 해도 공덕이 없다.”
또 『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말하였다.
“어느 한 비구가 손가락을 튀기지 않고 대소변을 누었으므로 귀신의 얼굴에 오물이 묻었다. 그 마귀는 크게 성을 내어 그 사문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 사문이 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마귀는 그의 뒤를 따르면서 단점을 엿보았지만 끝내 틈을 얻지 못하였다.”[이미 이런 일을 알았으므로 뒷간에 갈 적에는 반드시 기침하여 소리를 내야 한다.]
또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였다. 사위성(舍衛城)안에 니제(尼提)라는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아주 가난하고 하천한 이라서 항상 남의 변소를 쳤다. 부처님께서는 그가 제도될 때임을 아시고 곧 아난을 데리고 그가 있는 곳으로 가셨다. 때마침 니제는 똥을 메고 성(城)을 나가서 그것을 버리려다가 병이 깨져 몸이 온통 더러워졌다. 멀리서 세존을 보고는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차마 부처님을 뵙지 못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곳으로 가셔서 그를 위하여 설법을 하시자, 곧 신심을 내어
출가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난으로 하여금 강물 속으로 데려가서 물을 퍼부어 씻게 하시고, 기원(祇洹)으로 데리고 가셨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해 설법하시자 수다원(須陀洹)이 되었고 곧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나라의 인민들과 왕은 그가 출가했음을 듣고 모두가 원망하면서 말했다.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이런 사람의 출가를 허락하셨을까?’
파사닉왕(波斯匿王)은 곧 부처님께로 가서 그 일을 말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부처님께 가다가 마침 니제를 만났다. 그는 기원의 문 앞에 있는 큰 돌 위에 앉아서 헌옷을 깁고 있었는데 7백의 하늘들이 향과 꽃으로 공양하고 있었다. 왕은 그를 보고 기뻐하면서 부처님을 뵙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니제 비구는 돌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자유자재로 하다가 부처님께 아뢰고 나서 들어가게 하였다. 왕은 부처님께로 가서 먼저 이 일부터 물었다.
‘아까 그 비구의 성과 이름은 무엇이옵니까?’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바로 왕의 나라 안의 하천한 사람으로서 변소를 치던 니제입니다.’
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비방하던 마음을 이내 없애고, 니제에게로 가서 발을 잡고 예배를 한 뒤에 참회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왕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니제 비구는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기에 이런 천한 몸을 받았습니까?’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옛날 가섭부처님[迦葉佛]이 열반하신 뒤에 어느 한 비구가 출가하여 자유로이 대중의 일을 처리하면서 몸이 잠시 동안 아팠습니다. 그래서 드나드는 것이 싫어져서 변기(便器)를 가져다가 볼 일을 본 뒤에 한 제자를 시켜서 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수다원이었습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생사에 유랑하면서 늘 하천한 사람이 되어 5백 생 동안 남을 위해 변소를 쳤습니다. 그러나 옛날 출가하여 계를 지닌 공덕으로 지금 나를 만나게 되었고 출가하여 도를 얻은 것입니다.’[이런 이치 때문에 방 안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말 것이니, 앞과 같은 죄를 초래하기 때문이니라. 자주 보는 일이거니와 속인들은 게을러서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변기를 방 안에다 두고 대소변을 본 뒤에 남을 시켜서 날마다 버리게 하는데 미래 세상에는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진다. 비록 지옥에서 나오게 된다손쳐도 오히려 돼지나 개나 쇠똥구리나 뒷간의 벌레가 된다.]”
또 『불설제재환경(佛說除災患經)』에서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옛날 지나간 세상에 가섭부처님께서 사람의 수명이 2만 세일 때 불사를 마치시고
열반에 드셨다. 그 때 선경(善頸)이라는 왕이 사리에게 공양하기 위하여 높이 1유순(由旬) 되는 7보의 탑을 세웠다. 온갖 중생들이 등불을 켜고 향을 사르었으며 향과 꽃과 비단으로 공양하고 예배하며 섬겼다.
당시 여러 여인들이 탑에 공양하기 위하여 함께 와서 탑의 주변을 소제하고 있었다. 그 때 개똥이 탑의 주변을 더럽혀 놓았으므로, 어느 한 여인이 손으로 집어서 버렸다. 그런데 어느 한 여인이 땅에 있던 개똥을 손으로 버리는 것을 보고 침을 뱉고 웃으며 말하였다.
‘너의 손은 더러우니 가까이 오지 말라.’
그러자 그 여인은 역정을 내면서 말했다.
‘너는 못쓰게 된 음탕한 물건이지만 나의 손은 물로 씻으면 다시 깨끗해진다.’
그리고는 부처님ㆍ천인사(天人師)께 공경해마지 않으면서 손으로 부정한 것을 다 없앤 뒤에 곧 손을 씻고 탑을 돌며 서원을 세웠다.
‘이제 탑의 주변을 소제하여 더러움도 없앴사오니, 저로 하여금 세상마다 진로(塵勞)의 때[垢]가 소멸되고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게 하옵소서.’
그 때 탑의 주변을 소제한 여인들이 바로 지금의 모임에 있는 여인들이니, 당시 땅을 소제하고 진로의 소멸을 원했으므로 감로(甘露)의 맛을 먹고 있었다. 손으로 개똥을 없앤 그 때의 여인은 바로 지금의 내녀(柰女)이니, 당시 원을 세우면서 더러운 모임과 함께 하지 않고 발원한 바가 청정했으므로 그 복의 과보를 얻었고, 그 때문에 태 안의 더러운 곳에 의지하지 않고 매양 꽃에서 난 것이다. 그녀는 그 때 나쁜 소리로 ‘음녀’라고 한 번 꾸짖은 말 때문에 지금 이 음녀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부처님을 만나서 법을 듣고 수다원을 증득한 것이니라.”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남천축(南天竺)의 법도 있는 집안에 한 계집아이가 있었는데, 반드시 일찍 일어나서 뜰과 문 안팎을 깨끗이 소제하게 하였다. 이 장자의 딸이 일찍 일어나서 땅을 쓸고 있는데, 마침 여래께서 문 앞을 지나가셨다. 그녀는 여래를 보자 기뻐하면서 마음을 한곳에 쏟아서 부처님을 보고 있다가 수명이 다하여 곧
죽으면서 천상에 가서 났다.
대개 천상에 가서 난 이에게는 으레 세 가지 생각이 있는 법인데, 그녀도 ‘본시 어떤 몸이었을까?’ 생각하다가 스스로 사람 몸이었음을 알았고, ‘지금 어디에 나 있는가?’ 생각하다가 그곳이 틀림없이 하늘임을 알았으며, ‘옛날에 무슨 업을 지었기에 여기에 태어났을까?’ 생각하다가 부처님을 뵙고 기뻐한 착한 업으로 이 과보를 받았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중한 은혜에 감사하면서 부처님께 공양하였고, 부처님께서 그를 위하여 법을 말씀하시자 수다원을 증득하였다.”
또 『신바사론(新婆沙論)』에서 말하였다.
“옛날 덕차시라(德叉尸羅) 나라에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월광왕(月光王)이 천 개의 머리를 버린 곳에 갔다가 무우왕(無憂王)이 세운 영묘(靈廟)에 개똥이 있는 것을 보고는 부처님의 자리 앞에 있으면서 생각하였다.
‘여기는 청정한 곳이거늘 어떻게 개똥이 더럽힌단 말이냐?’
그래서 손으로 없앤 뒤에 향을 이겨 발라서 장식하였다. 그 착한 업의 힘 때문에 이 여인은 온몸에서 향기가 났는데, 마치 전단나무와 같았으며, 입 속에서는 항상 푸른 연꽃 향기가 풍겼다.
모든 중생이 청정함을 수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의 번뇌로 인하여 바깥의 모든 더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 때문에 논(論)에서는 게송으로 말하였다.

‘세간의 모든 더러운 풀이
좋은 논밭을 더럽히듯이
이렇듯 모든 탐욕의 더러움은
모든 중생[含識]을 더럽히게 된다.

세간의 모든 더러운 풀이
좋은 논밭을 더럽히듯이
이렇듯 모든 성냄의 더러움은
모든 중생을 더럽히게 된다.’

또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실 때였다. 나열성(羅閱城) 곁에 하나의 흐린 물이 있었다. 수렁이라 더러웠는데, 여러 가지 썩은 찌꺼기들이 많이 있었으며 나라 안의 백성들이 똥오줌을 모두 그 안에 버렸다. 그 속에 형상이 마치 뱀과 같은 큰 벌레가 있었는데, 네 개의 발까지 붙어 있었다. 그 흐린 물에서 이리저리 다녔는데, 혹은 가라앉기도 하고, 혹은 나오기도 하면서 언제나 그 속에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당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데리고 그 구덩이로 가셔서 비구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들은 이 벌레가 전생에 행한 일을 알고 있느냐?’
비구들이 모두 함께
말하였다.
‘모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바시부처님[毘婆尸佛] 때에 여러 상인들이 바다에 들어가 보물을 캤었다. 값진 보물을 많이 얻어서 편안히 돌아온 뒤에 그 중에 으뜸가는 보물만을 골라서 대중 스님들에게 보시하여, 대중이 먹는 음식을 마련하는데 보태 쓰게 하였다. 스님들은 그 보물을 받아서 마마제(摩摩帝)에게 맡겨 두었는데, 나중에 대중이 먹을 음식이 떨어지려 했으므로 그에게 돌려달라고 했으나 주지 않았다. 대중 스님들이 간곡히 달라고 하자 마마제는 성을 내면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똥이나 먹어라. 이 보물은 내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달라고 하느냐?≻
그는 스님들을 속이면서 나쁜 말로 욕을 했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자 아비(阿鼻) 지옥에 떨어져서 항상 끊는 똥 속을 뒹굴면서 91겁 동안 지냈다. 그리고 지옥에서 나와서는 지금 이 속에 빠져 있는데, 7불(佛)이 나오신 이후부터 오늘까지 이 벌레가 되었고, 현겁(賢劫) 천불(千佛)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그러하리라.’”
또 『백연경(百緣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 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에 계실 때였다. 사리불과 대목건련은 밥을 먹기 전에 먼저 지옥과 축생과 아귀를 관찰하고, 그런 뒤에야 밥을 먹었다.
목련은 한 아귀가 몸은 마치 타다 남은 기둥과 같고, 배는 마치 큰 산과 같으며, 목구멍은 마치 가는 바늘과 같고, 머리칼은 마치 송곳날처럼 그의 몸을 감고 찔렀으므로, 온 뼈마디에서 불이 뿜어 나오고 크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사방으로 달려 다니며 똥오줌을 구하여 음식을 삼으려 하였으나 종일토록 고달프기만 할 뿐 얻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목련은 곧 아귀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업을 지었기에 그토록 고통을 받고 있느냐?’
아귀가 대답하였다.
‘해가 있는 곳에서는 등불이 필요 없다오. 여래ㆍ세존께서 지금 현재 세상에 계시니, 당신은 가서 물어 보시오. 나는 지금 굶주려 있기 때문에 대답할 기력조차 없소.’
그래서 목련은 곧 부처님께로 가서 그가 지은 업행(業行)과, 받는 고통에 대하여 자세히 아뢴 뒤에 여쭈었는데, 그 때 세존께서는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잘 들으라. 나는 너를 위하여 말하리라.
이 현겁(賢劫) 동안에 사위성(舍衛城) 안에 재보가 한량없고 헤아릴 수조차 없는 한 장자가 있었는데 언제나 종을 시켜 사탕수수의 즙을 짜서 대가(大家)에 보내주게 하였다. 어떤 벽지불이 몹시 목이 마른 병을 앓고 있었는데, 좋은 의사가 약을 처방하면서 사탕수수의 즙을 먹으면 병이 즉시 낫는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벽지불은 그 장자의 집으로 가서 사탕수수의 즙을 구걸하였다. 당시 그 장자는 그가 오는 것을 보자 기뻐하면서 그의 아내 부나기(富那寄)에게 말하였다.
≺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꼭 나가 보아야겠소. 당신은 남아 있다가 사탕수수의 즙을 가져다 벽지불께 드리십시오.≻
그 때 그의 아내는 대답하였다.
≺당신은 나가 보십시오. 제가 드리겠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나간 뒤에 벽지불의 발우를 받아 가지고 으슥한 곳으로 가서 소변을 발우 안에다 누고 사탕수수의 즙으로 발우 위를 덮고는 벽지불에게 주었다. 벽지불은 받은 뒤에 곧 그것이 사탕수수의 즙이 아님을 알고 땅에다 버리고 빈 발우를 가지고 돌아갔다. 아내는 나중에 목숨을 마치고 아귀 안에 떨어져서 늘 굶주림에 시달림을 받고 있나니, 이 업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받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어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 그 장자의 아내를 알고 싶으냐? 바로 지금의 부나기 아귀니라.’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모든 비구들은 간탐하는 일을 버리고 생사를 미워하였으므로 사문의 네 가지 과위[四沙門果]를 얻은 이도 있고, 벽지불의 마음을 낸 이도 있었으며, 위없는 보리의 마음을 낸 이도 있었다. 그 리고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남의 피와 살을 먹으면서
탐내는 독으로 자비(慈悲)가 없이
이 몸의 더러운 물질만을 기르면
벌레 세상 안에서 녹아 없어지리라.

스님들의 청정한 그릇을 지키지 않아서
이 뒷간 안에서 벌레가 되어 있나니
그 뒤의 과보는 지옥에 들어가
받아야 할 고통 다 알지 못하리.”

감응연(感應緣)[간략히 세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송(宋)의 석혜과(釋慧果)
제(齊)의 석홍명(釋弘明)
당(唐)의 사홍폐(謝弘敝)의 처 허씨(許氏)

송(宋)의 석혜과(釋慧果)
송(宋)나라 경사(京師) 와관사(瓦官寺)의 석혜과(釋慧果)는 무주(婺州)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채소만 먹고 고행하며 업을 닦았다. 송나라 초(初)에 경사의 와관사에 있으면서 법화(法華)의 10지(地)를 독송했다. 일찍이 뒷간 앞에서 한 귀신이 나타나 공경을 다하면서 혜과에게 말하였다.
“옛날 대중 스님을 위해 유나(維那)로 있으면서 법대로 하지 않은 작은 일로 인해 똥을 먹는 귀신 안에 떨어져 있습니다. 법사께서는 덕이 본디 높고 밝으시며 또 자비심을 갖고 있으니 원컨대 구제되는 길을 도와 주소서.”
그리고 또 말하였다.
“옛날에 돈이 3천 문(文)이 있어서 저 감나무 뿌리 아래 묻어 두었습니다. 원컨대 그것으로 복을 닦아 주소서.”
그리하여 혜과는 즉시 대중에게 시켜서 파서 가져오게 하였다. 혜과는 그 얻은 돈 3천 문으로 그를 위하여 『법화경』 1부를 찍고 아울러 재를 지내 주었다. 그 뒤에 꿈에 이 귀신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이미 생(生)을 바꾸었습니다. 옛날보다 아주 더 훌륭합니다.”
혜과는 송나라 태시(太始) 6년에 죽었으며 춘추는 76세였다.

제(齊)의 석홍명(釋弘明)
제(齊)나라 영명(永明) 연간에 회계(會稽)의 석홍명(釋弘明)은 운문사(雲門寺)에 있으면서 『법화경』을 독송하고 예배와 참회를 업으로 삼았다. 매양 아침이면 물병이 저절로 가득히 찼는데, 여러 하늘의 동자(童子)들이 그를 위하여 심부름을 했다. 또 호랑이가 감동하여 방안으로 들어와 평상 앞에 엎드려서 오랫동안 있다가 떠나기도 했다. 또 어린아이가 나타나 경을 들으면서 말하였다.
“옛날에 이 절의 사미입니다. 스님들의 주방에서 음식을 훔쳐먹고 지금 뒷간 안에 떨어져 있습니다. 상인(上人)의 독경 소리를 듣고 일부러 와서 듣고 있습니다. 원컨대 방편을 도우셔서 이 누(累)를 면하게 하옵소서.”
다음 날 그를 위하여 설법을 했더니 깨달아 알고서 그제야 나타나지 않았다. 또 뒷산의 산정(山精)이 와서 괴롭혔으므로 다음 날 그를 붙잡아다 줄로 허리를 매놓았더니 그 귀신이 사과했으므로 드디어 놓아주었다. 그 뒤부터는 영영 그런 일이 없어졌다.[위의 두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당(唐)의 사홍폐(謝弘敝)의 처 허씨(許氏)
당(唐)나라 오왕문학(吳王文學) 진군(陳郡)의 사홍폐(謝弘敝)의 처 고양
허씨(高揚許氏)는 무덕(武德) 초년에 병이 들어 죽었다. 죽은 지 4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말을 하였다.
“2ㆍ30인에게 붙잡혀 지옥으로 들어갔다. 아직 관부(官府)를 보기 전에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데, 비록 얼굴은 알 수 없었으나 고모부 심길광(沈吉光)의 말소리 같았으므로 내가 물었다.
‘말소리가 고모부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머리가 없으십니까?’
그 때 남쪽 사이에서도 사람이 ’고모부’ ‘이모부’ 하고 불렀는데, 모두가 아무 성씨의 어른이었다. 길광은 곧 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았다가 어깨 위에다 놓으면서 나에게 말하였다.
‘너는 우선 여기에 있으면서 서원(西院)을 향하지 말고 나를 기다려라. 너를 위해 가서 곧 나갈 수 있도록 청해야겠다.’
그는 드디어 말하던 곳에 서서 다시는 이쪽 저쪽을 보지도 않았다. 길광은 한가한 것 같으면서도 거간(居間)할 힘이 있는 듯했다. 그래서 두 밤을 지냈는데, 그제야 길광이 와서 나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제 이리 오너라. 왕이 너를 여기(女伎)로 삼으려 한다. 만일 불려 가거든 관현악(管絃樂)에 대하여 안다고 하지 말라. 그래도 되지 않으면 아는 이를 끌어대라. 내가 너를 위해 증명해 주겠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벼슬아치가 장부를 안고 끌어 들였다. 왕이 그에게 물었다.
‘관현악에 대하여 잘 아느냐?’
내가 말하였다.
‘도통 모릅니다.’
다시 말하였다.
‘그것은 심길광이 자세히 압니다.’
그러자 왕이 길광에게 물었는데, 그가 대답했다.
‘잘 모릅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빨리 내보내라. 더 둘 필요가 없다.’
그 때 길광은 내보내려 하면서 곧 장부를 갖고 있는 사람과 함께 무슨 계책을 세운 것 같았으나,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장부를 가진 사람이 말하였다.
‘낭자의 공덕의 힘이 비록 강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먼저 조그마한 죄가 있습니다. 따라가서 받아 버리면 도리어 몸의 업이 모두 청정해지리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다른 하나의 큰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 문은 아주 작았는데, 역시 어떤 사람들이 죄를 받고 있는 것이 크게 보였다. 나는 몹시 놀라고 두려워서 그 맡고 있는 이에게 청하여 물었다.
‘평생 동안 복을 닦았거늘 무슨 죄로 여기에 데려오셨습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낭자는 일찍이 깨끗하지 않은 주발에 밥을 받아다 부모에게 드렸소. 이 죄를 받아야 나가실 수 있소.’
그러고는 기어이 녹인 구리 즙을
입에다 부어 넣었는데, 그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자주 깨어나서 보면 입 안이 모두 문드러져 있었다. 그런 뒤에 길광이 곧 말하였다.
‘이 사람에게서 경전 한 권을 받아서 기억해 두어라. 그리고 돌아가서 받아 지니며 게으르지 말라. 지금 이후로 80여 년은 더 살 것이다.’
허씨는 생시에 경을 독송한 일도 없었는데, 소생한 뒤에 경 한 권을 얻어 독송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묻고 찾아 보았으나 그 경은 전에는 없었다. 지금 현재도 받아 지니고 독송하면서 빠뜨리지 않고 있는데, 그 경은 글을 싣지 않은 것이 많았다. 다시 살아난 뒤에도 길광은 아직 살아 있었으며 2년 후에야 죽었다. 무릇 모든 친속들이 죽으려 하는 이가 있으면 3년 전에 모두가 땅 아래서 미리 본다.”
허씨의 종부제(從父弟) 인(仁)이 이런 말을 해 주었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기(冥報記)』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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