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96권
법원주림 제96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96. 사신편(捨身篇)[여기에는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대체로 색(色)의 성품은 상(象)이 없어서 접촉하면 반드시 공으로 돌아가고 세 세상[三世]은 허망한 가짜라서 미묘한 곳에 들면 끝내 흩어진다. 비록 하늘을 돌리고 또 땅을 진동시킬 수 있는 위력이라 해도 마침내는 마멸되어 없어지고, 재나라의 관[齋冠]과 초나라의 끈[楚組]의 화려함이라 해도 티끌과 흙에서 구해 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형상은 정해진 바탕이 아니고 뭇 인연으로 모인 것이라서 4진(塵)이 같지도 않으니 바람[風]과 불[火]이 항상 다르고 갈라지면서 분리되는 것이라 본래 한물건이 아니다. 연나라의 간[燕肝]과 월나라의 담[越膽]으로도 족히 비유하지 못하니 보살이 중생을 이롭게 함에서 비로소 그 뜻을 다한다. 그런데도 오래도록 이 혼탁한 데에 빠져 있으면서 전생(轉生)을 그치지 않으니, 한 생각을 혹시 만난다 해도 일찍이 때를 옮긴 적이 없다. 죄장과 습기가 배제되어야 미혹된 그 길에서 돌아서게 된다. 멋대로 가리키며 공을 부름을 이름하여 유(有)라 하고 몸을 기르며 목숨을 해침을 이름하여 독(毒)이라 하나니, 몸 밖의 재물을 축적하여 욕심을 채우고 자기 몫이 아닌 것을 훔쳐서 사치를 이루었거늘 어찌 살갗을 따습게 하고 배를 만족시키는 그런 것이었을 뿐이겠는가. 심지어 상자를 쌓아서 창고에 채우며 도마가 넘치도록 부엌을 채우는 등, 끝없는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허환(虛幻)한 나[我]에 공양하면서 또한 만족할 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일을 고요히 생각해 보면 어찌 죄스럽지 않겠는가.
이제 이미 허물을 깨닫고 나니 한갓 굽지 않은 기와 병(甁)을 길렀을 뿐이다. 만물과 내가 다 같이 공하거늘 보배로이 아낄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몸이 허깨비요 거짓임을 아는 것은 대사(大士)로서의 떳떳한 마음이요,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구함은 보살로서의 평생의 소원이다. 삼계(三界)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는 집임을 알 것이요 4생(生)은 꿈이요 허깨비의 경계임을 깨달을 것이다. 외서(外書)에서 이르되 “삶은 몸으로써 객사[逆旅]를 삼고 죽음은 천지로써 관곽(棺槨)을 삼는다”고 했고, 내서(內書)에서 이르되 “왕자가 몸을 던지매 그
공은 9겁(劫)을 뛰어 넘고 살을 베어서 비둘기와 바꾸매 삼천세계가 놀라며 진동했다”고 했다. 지금을 거느리고 옛[古]을 집착하며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면서 흰 소[白牛]로 하여금 길을 오래 갈 능력이 있게 하고 보배 배[寶舟]로 하여금 저 언덕에 건널 세력이 있게 할 것이다.
(2) 인증부(引證部)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지나간 세상에 마하라타(摩訶羅陀)라는 왕이 있었으며 항상 착한 법을 행하였으므로 적이 없었다. 당시에 왕자 셋이 있었는데 자못 뛰어났었다. 첫째 태자의 이름은 마하파나라(摩訶波那羅)요, 다음 왕자의 이름은 마하제바(摩訶提婆)이며, 막내 왕자의 이름은 마하살타(摩訶薩埵)였다. 이 세 왕자는 동산에서 재미있게 놀다가 점차 대숲으로 가서 수레를 멈추고 쉬고 있었다. 첫째 왕자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오늘 마음이 몹시 두렵다. 이 숲 속에 잘못된 일이 있지나 않을까?’
둘째 왕자가 다시 말하였다.
‘나는 오늘 스스로 몸을 아끼지 않겠다. 다만 사랑하던 이들과 이별하는 것이 마음에 근심이 될 뿐이다.’
셋째 왕자도 말하였다.
‘나는 오늘 유독 두려움이 없으며 또한 근심 걱정도 없습니다. 산중은 고요한 곳이라 신선(神仙)이 찬탄했으며, 이곳은 한적한지라 사람들로 하여금 안온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는 다시 차츰차츰 앞으로 나가다가 마침 새끼를 낳은 지 7일이 된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났다. 일곱 마리의 새끼가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데 너무도 굶주려서 몸이 바짝 말랐으며 목숨이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첫째의 왕자가 이 호랑이를 보고 나서 말하였다.
‘만일 굶주림이 더 핍박하면 반드시 새끼들을 잡아먹겠구나.’
그러자 셋째 왕자가 말하였다.
‘형들 가운데서 누가 이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겠습니까?’
첫째 왕자가 말하였다.
‘이 호랑이의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다. 다른 데서 그를 위해 먹이를 구할 수 없으므로 그의 목숨은 틀림없이 구제되지 못한다. 누가 이를 위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겠느냐?’
둘째 왕자가 말하였다.
‘버리기 어려운 온갖 것 가운데서 자기 몸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셋째 왕자가 말하였다.
‘만일 모든 보살이 남을 이익 되게 하고자 하면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자 모든 왕자는 마음으로 크게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다가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 때에 셋째 왕자가 말하였다.
‘저는 이제 몸을 버릴 때가 왔습니다. 저는 옛날부터 이 몸을 많이 버리기는 했으나 도무지 한 일이 없습니다. 때를 따라 기르며 모자람이 없게 했는데도 은혜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해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또 덧없음과 무너짐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제 이 몸을 버려서 위없는 업(業)을 짓고, 생사의 바다 안에서 큰 교량이 되겠으며, 영원히 근심 걱정과 덧없는 변화를 여의고, 지혜와 공덕을 구족하게 성취하겠습니다.’
그리고 곧 또 말하였다.
‘형님들은 이제 권속들과 함께 궁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나서 왕자 마하살타는 호랑이에게로 가서 몸에 입었던 옷을 벗어 댓가지 위에다 놓고 이렇게 서원을 세웠다.
‘저는 이제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고 가장 수승하게 위없는 도를 증득하고 3유(有)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습니다.’
왕자는 이런 서원을 한 뒤에 곧 스스로 몸을 던져 주린 호랑이 앞에 누웠으나 대비의 힘 때문에 호랑이는 어떻게 하지 못했다. 왕자는 ‘호랑이는 이제 야위고 몸에 기력이 없어서 내 몸의 피와 살을 먹지 못하는 구나’라고 생각하고는 곧 일어나 칼을 찾았으나 끝내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곧 마른 대꼬챙이로 목을 찔러서 피를 내었다. 이때 대지(大地)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해는 밝은 빛이 없어졌으며, 또 여러 가지 꽃과 갖가지 묘한 향이 비처럼 내렸다. 그 때 공중에서는 여러 하늘들이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전에 없던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장하십니다, 보살이시여. 진실한 대비자(大悲者)로서 중생을 위하여 버리기 어려운 몸을 능히 버리시는구려. 오래지 않아서 청정한 열반을 증득하시리이다.’
호랑이는 피가 흘러서 왕자의 몸을 더럽히는 것을 보고 곧 피를 핥아먹다가
그의 살까지 먹었으며 남은 것은 오직 뼈뿐이었다. 그 때에 두 형은 대지가 크게 진동하고 해에 밝은 빛이 없고 모든 꽃과 향이 비처럼 내리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이는 우리 아우가 사랑하던 몸을 버렸겠구나’하였다. 그리하여 두 왕자는 마음에 크게 근심하고 슬피 울며 한탄하였으므로 용모가 초췌해졌다. 그들은 함께 호랑이가 있는 데로 가서 아우가 입었던 옷이 모두 다 댓가지 위에 있고 해골과 머리칼과 손ㆍ발톱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흘린 피가 여기저기 땅을 더럽힌 것을 보자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서 뼈 위에 쓰러져 기절하였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깨어나서 손을 들고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였다.
‘우리 아우가 나이는 어린데도 재능은 남들보다 뛰어납니다. 부모님께서 사랑하셨는데 갑자기 몸을 버렸으니, 우리는 이제 궁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서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차라리 여기서 수명을 같이 하겠습니다. 차마 돌아가서 부모님과 권속을 뵙지 못하겠습니다. ’
그 때 막내 왕자가 데리고 간 시종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서 서로 말하였다.
‘지금 우리 님께서는 어디에 계실까?’
그 때 왕비는 잠을 자다가 꿈에 유방이 잘리고 어금니가 빠졌으며 세 마리의 비둘기 새끼가 한 마리의 매에게 먹히는 꿈을 꾸었다. 그 때 대지가 진동하자 왕비는 놀라 깨어나서 마음에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 게송으로 말하였다.
오늘, 무엇 때문에
대지(大地)와 큰물이
모두 다 진동하고
만물은 제 자리에서 편안하지 못할까?
해는 밝은 빛을 잃고서
마치 덮이고 가려진 것 같으며
나의 마음은 걱정되고 근심되어서
눈두덩이 들썩거리는구나.
마치 내가 지금
보이고 있는 헐떡거리는 모습에는
반드시 재앙과 이변이 있고
불상사와 괴로움이 있을 것 같구나.
왕비가 이 게송을 말하고 나자 밖에 있던 하인은 왕자의 소식을 듣고 마음에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곧 왕비에게
아뢰었다.
‘아까 밖에서 여러 시종들에게 들은 일이온데, 왕자님을 찾았으나 어디에 계시는지 모른다 하옵니다.’
왕비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대왕에게로 가서 이 일을 자세히 전하자, 왕은 듣고 목메어 울며 괴로워하다가 눈물을 거두면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오늘 내가 마음속으로 애지중지하던 아들을 잃었단 말이냐?’”
그 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그 때에 대왕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가져다 왕비에게 뿌리매
한참 있다가 소생하게 되었다.
왕비는 다시 제정신이 들자
작은 소리로 왕에게 물었다.
‘우리의 아들은 지금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그러자 대왕은
그의 왕비에게 말하였다.
‘내가 지금 대신과
사자를 보내어
이리저리 두루 다니면서
왕자를 찾도록 하겠으니
왕후께서는 이제 우선
크게 근심하지 마셔야 합니다.’
대왕은 이와 같이
왕비를 달래고 위로한 뒤에
곧 수레를 급히 차리고
그 궁전에서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대왕은
궁전을 출발한 뒤에
사방을 두루 돌아보면서
왕자를 찾고 있었다.
번뇌와 한탄으로 마음이 어지러워
어디에 있는 지 모르고 있는데
마침내 멀리서
소식을 가지고 온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속히 왕에게로 와서
이렇게 말을 전하였다.
‘원컨대 왕은 근심하지 마소서.
모든 왕자들은 살아 계시므로
오래지 않아 이곳으로 오셔서
왕을 뵙게 되리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에
또 한 신하가 다가와서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아셔야 하오리다.
한 분의 왕자는 이미 돌아가셨고
두 왕자만이 살아 계시나
슬픔과 고달픔에 괴로워하나이다.
셋째 왕자님은
새로 새끼를 낳은 호랑이가
7일 동안 굶주려서
제 새끼를 도로 잡아먹을까 걱정하고
이러한 호랑이의 처지를 보자
깊이 자비의 마음을 내었으니
장차 중생을 제도하고
미래 세상에
보리(菩提)를 깨달아 이루겠다는
큰 서원을 세웠나이다.
그리고는 곧 높은 곳으로 올라가
몸을 굶주린 호랑이에게 던졌고
호랑이는 굶주림에 몰리던 터라
곧 일어나 잡아먹게 되었으며
모든 피와 살은
이미 모두 없어졌고
오직 뼈만이
여기저기 땅에 흩어져 있더이다.’
이때 대왕은
신하의 이 말을 다 듣고 나서
더욱더 정신을 잃어
기절하여 땅에 주저앉았다.
근심과 걱정의 왕성한 불이
그의 몸을 활활 타게 하였으며
모든 신하와 권속들도
역시 모두 그와 같았다.
물을 가져다 왕에게 뿌리매
한참 있다가 소생하고서
다시 일어나 손을 들고는
소리를 높여 통곡하였다.
또 어떤 신하가 와서
왕에게 아뢰었다.
‘아까 숲 속에서
두 왕자님을 뵈었는데
몹시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슬피 울며 부르짖다가
정신을 잃고 기절하여
저절로 땅에 쓰러지기에
신(臣)이 곧 물을 구해서
그 몸 위에 뿌렸나이다.’
‘막내아들은
내가 애지중지하였는데
무상(無常)의 큰 귀신이
문득 삼켜 버렸구나.
그 나머지 두 왕자도
지금 비록 살아 있기는 하나
근심의 불에
훨훨 탈 것이므로
혹시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빨리 가서
그 숲 속에 이르러
아들을 모두 맞이하여 싣고
급히 궁전으로 돌아가겠다.’
어머니는 뒤에 처져서
극도로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모든 시중들과 함께
그 숲으로 나아갔다.
가던 도중에
두 왕자가
하늘을 부르고 땅을 치면서
아우의 이름 부르는 것을 보았고
그 때 왕이 그 앞으로 나아가
두 왕자를 껴안으면서
슬피 울고 눈물을 흘리며
길을 따라서 궁중으로 돌아와
속히 두 왕자로 하여금
어머니를 뵙게 하였다.
부처님께서 수신(樹神)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알아야 한다.
그 때에 왕자로서 몸을 버려서
호랑이에게 먹힌 마하살타는
바로 지금의 내 몸이며
그 때의 대왕인
마하라타는
바로 지금의 부왕이신
수두단(輸頭檀) 그 분이시며
그 때의 왕비는
바로 지금의 마야(摩耶)이시고
첫째의 왕자는
바로 지금의 미륵이며
둘째 왕자는
바로 지금의 조달(調達)이며
그 때의 호랑이는
바로 지금의 구이(瞿夷)이며
당시 일곱 마리 호랑이 새끼는
지금의 다섯 비구[五比丘]와
그리고 사리불과
목건련이 그들이니라.’
그 때 대왕 마하라타와 왕비는 슬피 울고 눈물을 흘리면서 모두 다 몸에 입고 있던 의복과 영락을 벗어버리고, 대중들과 함께 대숲 속으로 가서 아들의 사리(舍利)를 거두어 그곳에다 7보의 탑을 세웠다. 당시 왕자 마하살타는 목숨을 버릴 때에 이렇게 서원을 세웠다.
‘원하옵건대, 저의 사리는 미래 세상에 산수(算數)의 겁을 지나도록 항상 중생을 위하여 불사(佛事)를 짓게 하옵소서.’”
또 『법화경(法華經)』의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요약하여 말하였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숙왕화(宿王華)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지나간 세상 한량없는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수의 겁(劫) 전에 부처님께서 계셨으니, 명호는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여래 이시다. 그 때 그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희견(一切衆生喜見)보살 등 여러 보살과 모든 성문들을 위하여 『법화경』을 말씀하셨다. 이 희견보살은 고행(苦行)익히기를 좋아하였으며 일월정명덕부처님의 법 중에서 정진과 경행(經行)을 하면서 일심으로 부처를 구하되 1만 2천 년을 채우고 나서 스스로 생각하였다.
‘내가 비록 신력으로써 부처님께 공양하고 있기는 하나 몸으로써 공양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그리하여 곧 온갖 향을 먹으면서 1200년을 채운 뒤에 향유(香油)를 몸에 바르고 정명덕부처님 앞에서 하늘의 보배옷으로써 스스로 몸을 감고 온갖 향유를 붓고는 신통력으로써 스스로 몸을 태웠다. 그 광명은 두루 80억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세계를 비추었고 그 안에 계신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동시에 찬탄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이를 진실한 정진이라 하고 이를 진실한 법으로
여래께 공양한다 하느니라.’
그의 몸은 1200년을 탔고 그런 뒤에야 없어졌다. 희견보살은 이렇게 법 공양을 하고 나서 목숨을 마친 뒤에 다시 정명덕부처님 국토 안의 정덕왕(淨德王) 집에 홀연히 변화로 출생하였다. 그리고 부왕에게 아뢰었다.
‘정명덕부처님께서는 지금도 계시는데 저는 먼저 그 부처님께 공양하여 이미 일체 중생들의 말을 이해하는 다라니[解一切衆生語陀羅尼]를 얻었고 다시 이 『법화경』도 들었습니다. 저는 이제 다시 이 부처님께 공양하고, 나아가 그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거두어 8만 4천의 보배 탑을 만들고, 곧 8만 4천의 탑 앞에서 1백 가지 복으로 장엄한 팔을 7만 2천 년 동안 태워 공양함으로써, 성문을 구하는 수 없는 대중과 아승기의 한량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뇩보리심을 내게 하겠습니다.’
그 때 모든 보살과 하늘ㆍ사람ㆍ아수라 등은 그가 팔이 없는 것을 보고 근심하고 슬퍼하였다.
‘희견보살은 바로 우리들의 스승이며 우리를 교화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지금 팔을 태우셨으니, 몸이 불구자이시다.’
이때 일체중생희견보살은 대중 가운데서 서원을 세웠다.
‘저는 두 팔을 버렸으니 반드시 부처님의 금빛 몸을 얻을 것이옵니다. 만일 그것이 진실이요 거짓이 아니라면 저로 하여금 두 팔이 도로 예전대로 회복되게 하소서.’
이렇게 서원하자마자 저절로 도로 회복되었다. 이렇게 할 때 대천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고 하늘에서는 보배꽃이 비처럼 내렸으므로 온갖 사람과 하늘들은 전에 없던 일을 얻었다.”
부처님께서는 숙왕화(宿王華)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 바로 지금의 약왕(藥王)보살이니라. 만일 어떤 이가 발심하여 아뇩보리를 얻고자 손가락과 나아가 발가락 하나를 태워서 부처님 탑에 공양하면,
나라와 성과 처자와 삼천대천 국토의 값진 보배로써 공양하는 이보다 더 뛰어나느니라.’”
【문】 보살이 몸을 버리는 것이 자살(自殺)의 죄가 되지 않는가?
【답】 계율에 의하면 생명을 아직 버리기 전에는 방편의 작은 죄로서 투란차(偸蘭遮)를 얻게 되지만 만일 목숨을 버리고 난 뒤에는 죄에 속할 만한 근거가 없다. 그런 까닭에 살인의 대죄는 되지 않는다. 만일 대승의 보살계에 의하면, 나고 죽음을 싫증내어 부처님께 공양하거나 일체 중생을 위하여 대비의 마음을 일으켜서 다른 이의 뜻을 해친 일이 없으면 도리어 복을 초래하게 되거늘, 어째서 죄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문수사리문경(文殊師利問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자기 몸을 죽이면 죄의 과보가 없다. 왜냐 하면 보살같이 몸을 죽이면 공덕을 얻을 뿐이기 때문이다. 나의 몸은 나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만일 몸이 나로 말미암는데도 죄의 과보를 얻는 것이라면 손톱을 깎으면서 손가락을 손상하는 것도 죄가 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스스로가 몸을 손상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몸을 버리는 것은 무기(無記)가 아니라 복덕을 얻을 뿐이니, 그것은 번뇌가 사라지기 때문이요 몸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청정한 몸을 얻게 되는 것은, 비유하면 마치 더러운 때가 낀 옷을 잿물로 빨면 때가 없어지고 옷만 남는 것과 같다.”
[그 밖의 경전을 들어서 밝히건대, 보살이 몸을 버린 일은 하나 둘만이 아니다. 마치 월광(月光)이 머리를 버리고 시비(尸毘)가 다리를 베는 것과 같으며, 혹은 사자와 코끼리가 되어서 어금니와 가죽을 버리기도 하며, 혹은 사슴과 새가 되어서 재액을 만난 나무꾼을 구제하기도 하며, 혹은 큰 거북과 큰 자라가 되어서 사람의 수난(水難)을 구해 주기도 하며, 혹은 큰 고깃덩이의 산이 되어서 굶주린 이들에게 베풀어주어 고통을 구제하기도 하는 등 이와 같은 일을 자세히 나열하자면 하나만이 아니다. 다 같이 해당된 편(篇)에 따로따로 산재해 있거니와 글이 번거로울까 두려워서 거듭 기술하지 않는다.]
게송을 읊는다.
공승(龔勝)은 유감 없이 살았고
계업(季業)은 한껏 다함이 있으며
혜수(嵇叟)는 몸가짐이 이미 절박했고
곽자(霍子)의 목숨도 역시 죽었다.
자꾸 두꺼워지는 서리맞은 잣나무요
축축한 데 솟아나는 바람맞은 버섯이니
우연히 서로 만나 끝내 슬퍼할 때
길고 짧음에 민감할 바 아니다.
나와 동무들의 뜻한 바대로
암상(巖上)에서 없어지지 못함을 한탄하며
마음을 전송하고 정각(正覺)하기 전에는
이 고통 오래도록 참았다.
이미 인아(人我)가 공(空)임을 알았거늘
어찌하여 근심하며 삼가지 않겠는가?
오직 원하건대 내생(來生)에는
원수나 친한 이가 친분을 같이하라.
감응연(感應緣)[간략히 아홉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황제(黃帝) 때의 영봉자(寧封子)
송(宋)의 사문 석혜소(釋慧紹)
송(宋)의 사문 석승유(釋僧瑜)
송(宋)의 사문 석혜익(釋慧益)
양(梁)의 사문 석도탁(釋道度)
주(周)의 사문 석승애(釋僧崖)
주(周)의 사문 석정애(釋靜藹)
수(隋)의 사문 석대지(釋大志)
당(唐)의 사문 석회통(釋會通)
황제(黃帝) 때의 영봉자(寧封子)
영봉자(寧封子)는 황제 때의 사람인데, 세간에서 전하기를 황제를 위하여 바른 교화를 폈다 한다.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나보았더니 그의 손바닥 안에 불이 있었는데 5색(色)의 연기가 들락날락 했다 한다. 오래도록 그것을 봉자(封子)에게 가르쳤으며 봉자는 불을 쌓아놓고 스스로 태우면서 연기를 따라 오르락내리락 했는데, 그 숯은 다 탔으나 그 뼈는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사람들이 함께 영북산(寧北山) 속에 장사지냈기 때문에 영봉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한 가지 증험은 『수신기(搜神記)』에 나온다.]
송(宋)의 사문 석혜소(釋慧紹)
송(宋)나라 임천(臨川) 초제사(招提寺)에 석혜소(釋慧紹)라는 이가 있었는데 씨족(氏族)은 잘 모른다. 어릴 적에 어머니가 고기를 먹이면 바로 토해 버리고 채소를 먹이면 싫어하지 않았으므로 채소만 먹였다. 여덟 살이 되어서 출가하여 승요(僧要)의 제자가 되었다. 가르침을 받아 부지런히 힘쓰고 고행으로 절개를 나타냈다. 뒤에 승요를 따라 임천 초제사에 있으면서 은밀히 몸을 태울 뜻을 품고 항상 사람을 사서 나무를 베어다 쌓았다. 동산(東山)의 석실(石室)에 높이 수 척이 되게 쌓고 그 중앙에 하나의 감실[龕]을 만들어
자기 몸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놓고 절로 돌아와서 승요에게 하직을 했다. 승요는 간절히 간하면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몸을 태우는 날에는 동산에서 대중이 8관재(關齋)를 베풀고 있었으므로 아는 이들과 고별을 했다. 그 날은 온 경내에 인파와 수레가 가득 찼고 금전과 보물을 가져오는 이도 헤아릴 수 없었다. 초저녁이 되어서 도(道)를 행하는데 혜소는 스스로가 향을 사르고, 향을 사른 뒤에는 촛불을 잡고 나무에 불을 붙이고서 그 안으로 들어가 앉아 약왕(藥王)의 「본사품(本事品)」을 독송하기 시작했다. 대중들이 벌써 보이지 않았으므로 혜소는 그들이 이미 떠나간 줄 알았으나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모두가 나무가 쌓인 데로 간 것이었다. 나무에 이미 불이 환히 붙어 있을 적에도 독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불이 이마까지 왔을 때에도 일심으로 외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말소리가 뚝 끊어졌다. 대중들은 모두가 크기가 말[斗]만한 큰 별이 곧장 연기 속으로 내려왔다가 이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이들은 모두가 ‘천궁에서 혜소를 영접해 갔다’고 했다. 그리고 3일이 지난 뒤에야 나무는 다 탔다. 혜소는 임종할 적에 동학(同學)에게 말하였다.
“내가 몸을 태운 곳에서 오동나무가 날 것이니, 부디 베지 말라.”
그 후 3일 만에 과연 오동나무가 났다. 혜소가 몸을 태운 때가 원가(元嘉) 26년이며 그의 나이 28세였다.
송(宋)의 사문 석승유(釋僧瑜)
송(宋)나라 여산(廬山) 초제사(招提寺)의 석승유(釋僧瑜)는 성이 주(周)씨이며 오흥(吳興) 여항(餘杭) 사람이다. 약관(弱冠)에 출가하여 닦는 업이 평소에 순수했다. 원가(元嘉) 10년에 동학인 담온(曇溫)ㆍ혜광(慧光) 등과 함께 여산의 남쪽 고개에서 같이 정사를 짓고 이름을 붙여 초은사(招隱寺)라고 했다. 승유는 일찍이 3도(塗)에 결박되어 있는 정(情)과 형(形) 때문이라 여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이 다하려면 형 또한 없어져야 한다. 약왕의 행적이 어찌 유독 멀다고만 하겠느냐?”
그는 이런 말을 자주자주 하면서 맹세했다. 처음 분신(焚身)을 서약한 것이 송나라 효건(孝建) 2년 6월 3일 이었다. 나무를 쌓아 놓은 곳에 감실을 만들어 놓고 스님들을 청하여 재를 올린 뒤에 대중과 작별을 고했다. 그 날은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끼면서 비가 내렸다. 그 때 승유는 서원하였다.
“만일 저의 뜻한 바가 극히 현명한 일이라면 하늘은 맑아져야 하고, 만일 감응이 없는 것이라면 이 비가 세차게 쏟아져야 합니다. 이 4배(輩)로 하여금 신령한 감응이 거짓 없음을 알게 하소서.”
그 말이 끝나자마자 구름은 걷히고 맑게 개었다. 초저녁[初夜]이 다 될 무렵에 나무를 쌓아 둔 감실 안으로 들어가서 합장하고 편하게 앉은 뒤 「약왕품(藥王品)」을 독송하기 시작했다. 불길이 뒤섞여 타오를 때에도 오히려 합장한 채 흐트러지지 않았다. 승니와 속인들로서 아는 이들은 그 자리로 달려와 가득히 메우고서 다 같이 머리 조아려 예배하면서 인연 맺기를 원했다.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은 자줏빛 서기(瑞氣)가 공중으로 뻗쳐오르면서 오랫동안 있다가 스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때의 나이 44세이다. 그로부터 14일 후에 승유의 방 안에서는 두 그루의 오동나무가 났다. 뿌리와 가지가 포동포동하고 크고 가는 모양이 같았으며, 흙을 뚫고 곧게 우뚝 솟아올라서 드디어는 기이한 나무를 이루었다. 깊이 아는 이들은 열반을 빛나게 한 사라쌍수(娑羅雙樹)라고 했으며, 승유의 희망으로 짐짓 이런 증험이 나타났다고 여겼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쌍동사문(雙桐沙門)이라고 불렀다. 오군(吳郡)의 장변(張辯)이 평남장사(平南長史)가 되어서 친히 이 일을 보고 나서 자세히 이런 변화를 전하며 말하였다.
유유(悠悠)하고도 현묘한 기틀[玄機]이요
망망(茫茫)하고도 지극한 도[至道]로다
들고나고, 나고 죽는
그 어느 것이 묘한 보배인고.
옛날의 약왕보살 때부터
특수한 교화로 뛰어났다는
그런 말을 지난날에 들은 일이 있었더니
이제 와서 보매 이 사람이로구나.
빼어난 사문이라서
지혜와 선정의 마음이 공고하여
신령한 자줏빛의 서기가 어렸고
나타난 자취로는 쌍수(雙樹)가 났네.
그 덕행(德行)은 좋아할 만하고
그 지조(志操)는 귀히 여길 만하다.
그가 남기신 빛나는 일들이
혹시 방불(髣髴)하게나마 나타났으면 한다.
송(宋)의 사문 석혜익(釋慧益)
송(宋)나라 석혜익(釋慧益)은 광릉(廣陵) 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수춘(壽春)에 있었다. 송나라 효건(孝建) 동안에 도읍에서 나와 죽림사(竹林寺)에 있으면서 부지런히 고행을 닦았다. 그가 몸을 태울 것을 맹세하자, 여러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는 헐뜯기도 하고 어떤 이는 찬양하기도 했다. 대명(大明) 4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쌀알을 물리치고 깨와 보리만을 먹었고,
6년에 이르러서는 보리 등도 끊고 소유(蘇油)만을 먹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소유도 끊고 향환(香丸)만을 먹었는데, 비록 4대(大)는 미약하나 정신만은 바르고 돈독했다. 효무는 그의 기이함을 더욱 공경하고 은근히 위로하면서 태재(太宰) 강하왕(江夏王) 의(義)를 절로 보내어 공손히 혜익을 달랬으나 혜익의 맹세한 뜻은 고쳐지지 않았다.
대명(大明) 7년 4월 8일에 몸을 태우려고 종산(鍾山)의 남쪽에다 가마를 놓고 기름을 채우게 했다. 그리고는 아침에 소수레를 타고 사람이 끌어서 절로부터 산으로 갔다. 제왕(帝王)은 많은 백성이 의탁할 데요, 또 3보(寶)가 맡겨지는 곳이라, 스스로 대(臺)로 들어가 운룡문(雲龍門)에 이르자 걸어서 내려오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제왕에게 아뢰게 했다.
“혜익 도인이 지금 몸을 버리러 가면서 문에 나와 하직을 드리며 깊이 불법을 부촉합니다.”
그러자 제왕은 용태를 고치고서 몸소 운룡문으로 나왔으며, 혜익은 제왕을 뵙자 거듭 불법을 부촉한 뒤에 하직하고 떠났다. 제왕도 계속 따라 왔으며 모든 왕과 비후(妣后)와 도인ㆍ속인ㆍ선비와 서민 등으로 산골짜기를 가득히 메웠고, 옷을 던져 주고 보물을 버리는 이가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혜익은 가마솥으로 들어가 작은 평상에 의지하여 겁패(劫貝)로써 자신을 감은 뒤 그 위에 하나의 긴 모자를 쓰고 기름을 그곳에 부었다. 마침내 불을 붙이려고 하자 제왕은 태재를 시켜 가마솥에 있는 데로 가서 회유하였다.
“도를 닦는 행은 방법이 많거늘 하필 목숨을 죽이려 합니까? 세 번 더 생각한 뒤에 다시 다른 방도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태재가 대답하였다.
“미미한 몸이요 천한 목숨이거늘 어찌 제왕의 유념(留念)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마음과 성인의 자비가 이 몸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세상 사람이 출가하는 데에 조칙을 내리셔서 즉시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혜익은 자기 손으로 촛불을 잡고 모자에 불을 붙였다. 모자가 활활 타자 촛불을 버리고 합장하고 「약왕품(藥王品)」을 독송하기 시작했다. 불이 눈썹까지 왔을 때도 독송하는 음성은 여전히 분명했으나, 다음에 눈에 이르자 그제야 흐려졌다. 귀하고 천한 이를 가릴 것 없이 슬퍼하고 탄식하는 메아리가 깊은 골짜기에 떨쳤으며, 모두가
손가락을 튕기면서 부처님을 부르고 한탄하면서 눈물을 훔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불은 뒷날 아침이 되어서야 꺼졌으며, 제왕은 그 때 공중에서 피리 부는 소리를 들었고 기이한 향내를 맡았으며 해가 져서야 궁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꿈에 혜익이 나타나 석장(錫杖)을 떨치며 나타나서 다시 불법을 부촉했다. 다음 날 제왕은 그를 위해 재를 베풀어 제도하였고, 재주(齋主)로 하여금 그 동안의 상서로운 징조를 자세히 아뢰게 했다. 그 몸을 태운 처소에다 약왕사(藥王寺)를 짓고 본사(本事)를 본뜨게 했다.
양(梁)의 사문 석도탁(釋道度)
양(梁)나라 보통(普通) 연간에 소장엄사(小莊嚴寺)에는 도탁(道度) 선사가 있었다. 계행이 순수하고 대승[摩訶衍]에 아주 밝았으므로 양나라 제왕은 공경하고 존중하기를 4과(果)를 증득한 선사를 대하듯 하였다. 매양 이 몸을 싫어하여 독이 있는 나무같이 여기면서 말했다.
“만일 몸과 목숨이 무상하다면 시타림(屍陀林)에 버려서 길짐승ㆍ날짐승에게 베풀어줌으로서 보시바라밀[檀度]을 원만하게 하는 것도 역시 착한 업이 되기는 하지만 8만의 벌레를 다 태워버릴 수는 없으므로 권할 바는 아니다.”
그리고는 점차로 나무를 쌓아 놓고 차츰차츰 음식을 줄여 나갔다. 보통 7년 11월 3일에 종이 저절로 울렸는데, 절 대중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무슨 조짐인지 헤아리지 못했다. 그 달 8일에 또 종이 저절로 울렸으므로 대중들과 함께 착한 연분을 맺고 그 뒤부터는 다시 먹지 않았다. 오직 깨끗한 병에 맑은 물을 떠다 놓고 하루에 한 되 가량을 마셨을 뿐이다. 25일의 아침이었다. 절 대중들이 같이 가서 병을 보았는데 5색의 광명이 번쩍거렸으며 여러 가지 서기(瑞氣)가 왕성하게 올라갔다. 29일 날 아침이 되어서 사주(寺主) 승전(僧全) 등 몇 사람이 함께 선실(禪室)로 올라가는데, 멀리 보이는 감실[龕] 안에서 자줏빛 광명이 밖으로 비쳐 나왔다. 그 날 저물 무렵에 갑자기 새 떼 5ㆍ6백 마리가 한 나무에 모여 앉더니 얼마 있다가 서쪽으로 날아갔다. 그 날 밤 2경(更) 초쯤 되어서 여러 가지 색깔의 광명이 절의 방과 집을 비추었고, 5경(更) 중간쯤 되어서 산꼭대기에서 요란하게 불이 타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놀라서 달려가
보았더니, 선사가 합장하고 불 속에 있는 것을 보았다. 춘추(春秋)가 66세였다. 자사(刺史) 무릉왕(武陵王)이 사람을 보내 물을 뿌려서 쓸고 거두어서 그곳에다 탑을 세웠다. 뒷날 산꼭대기에서 돌로 만든 경쇠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아주 청아했다. 몸을 태운 곳에는 말라죽은 큰 나무가 10여 년 동안 있었다는데, 선사가 산에 들어가 그 나무 아래 항상 앉아 있었더니 그 다음 봄에는 가지와 잎이 돋아났다. [이 한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주(周)의 사문 석승애(釋僧崖)
주(周)나라 익주(益州) 사문 석승애(釋僧崖)는 성이 모(牟)씨이다. 어릴 적에는 말이 적었고 놀러 다니는 데도 섞이지 않았다. 매양 산에 있는 샘물에 놀러 가서 반드시 먼저 절을 한 뒤에 물을 마셨다. 혹은 눈도 깜짝거리지 않고 무엇을 살피며 종일토록 앉아 있기도 했으므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몸이란 나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뒷날에는 반드시 태워버리겠습니다.”
그가 나이가 들어 성장하여 싸움터에 있을 적에는 용감했고 기강이 엄정했다. 일찍이 벗들을 따라 고기를 잡은 뒤에 자기 몫을 나누어주면 도로 물에다 던져 넣으면서 벗들에게 말하였다.
“살생이란 좋은 업이 아니다. 나는 지금 온몸에 부스럼이 있으니 맹세코 사냥은 하지 않겠다.”
그리고는 그의 사냥 기구들을 태워버렸다. 당시 오랑캐의 수령(首領) 수백 인이 함께 못에 방죽을 쌓고 고기를 기르려 했는데, 승애는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연거푸 그곳으로 가서 구경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길이가 한 자쯤 되는 기이한 뱀이 나타났다. 머리와 꼬리가 모두 붉었는데, 잠깐 동안에 커지면서 한 길 남짓 되었고 둘레는 5, 6척이 되었다. 그러자 오랑캐들은 뿔뿔이 달아났다. 그 뱀은 곧 물로 들어가 꼬리를 들더니 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붉은 빛이 온 들에 가득히 찼다가 오래된 뒤에야 사라졌다. 나중에 그 무리들이 모여 와서 앞에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말하였으므로 승애가 말하였다.
“그것은 근심할 것 없습니다. 다만 살생하는 일만 끊으면 뱀은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못에 둑 막는 일을 그만두라고 권했다. 그런데 그들이 허락하기도 전에 갑자기 둑이 터지며 무너져 버렸다. 그는 곧 출가했고 주나라 무성(武成) 원년 6월에 익주성(益州城)의 서쪽 길 끝에서 베로 좌우의 다섯 손가락을 싸고 불에 태웠다. 어떤 이가 물었다.
“손가락을 태우는데도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승애가 대답했다.
“고통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마음에는 이미 고통이 없거늘 손가락 어디에 고통이 있겠습니까?”
그 때 사람들이 다 같이 승애보살이라고 불렀다. 혹은 어떤 이가 물었다.
‘풍질(風疾)이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치료하지 않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몸은 모두가 공일뿐인데 어디를 치료한다는 것입니까?”
또 물었다.
“5근(根)과 4대(大)는 대경이 있는 것이거늘 어째서 공이라 하십니까?”
“4대와 5근이 또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그러자 모두가 그의 말에 굴복하였다.
효애사(孝愛寺) 태(兌) 법사란 이는 큰 견해(見解)를 지닌 이었다. 승애의 행적을 듣고 제자 수십 인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서 예배 공경하고는 옷을 벗어서 그에게 보시했다. 그리고는 대중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참으로 반야(般若)를 아시는 분이요 한갓 입으로만 말하는 이가 아니다.”
이로부터 승니와 속인들이 모여들어서 갑절 더 숭앙하고 신봉했다.
그리고 왼손의 손가락이 다 타버리고 불이 다음 손바닥의 뼈로 옮자 골수가 끓어오르면서 불길이 꺼지려고 했다. 그러자 오른손의 남은 손가락에다 대를 끼고 심지를 끌어올렸으므로,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었다. 승애가 대답하였다.
“모든 중생은 인연 때문에 인욕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인욕하지 않으면 인욕하도록 권하고 타지 않으면 타라고 권할 뿐입니다.”
아울러 또 설법을 통해 권하면서 자비를 행하고 고기를 끊게 했다. 그리고 연기와 불길이 훨훨 일면서 낮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는데, 두 손이 다 탔어도 눈썹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또 4중(衆)을 위하여 설법을 하고 경을 독송하는데, 말씀이 간절하고 요긴한 이치에 이르면 대중의 머리를 끄덕이면서 빙그레 웃기도 했고, 때로 대중의 마음에 게으름이 나면 승애는 사사로운 자기 자신의 뜻을 이야기하기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산중에 있으면서 처음에는 글자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경전 말씀을 들으면 구절구절마다 마음과 상응하거늘 어째서 지극한 마음으로 고요히 듣지 않느냐? 만일 나 자신을 어긴다면 공연히 이 손을 태운 것이거늘, 어찌 땔나무나 하는 나무꾼과 다르겠느냐?”
이 때에 대중들은 두려워하며 엄숙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에 다시 대중에게 말하였다.
“말겁(末劫)이라 경망하고 오만해져서 마음은 갈수록 경박해진다. 불상 보기를 마치 나무 조각과 같이 여기고, 경전 듣기를 마치 바람이 말의 귀를 스쳐가듯 한다. 이제 대승의 경교(經敎)를 베끼기 위하여 일부러
몸과 손을 태운 것이니, 갑절 불법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온 경내의 남자와 여인이 모두 와서 그를 수만 바퀴 돌았는데, 승애의 이연(怡然)하고 잔잔한 얼굴빛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주 성의 서쪽 큰길에 모여서 담론하고 법을 교환했다. 처음에 가랑비가 와서 거의 옷이 젖으려 할 적에 곧 마음을 거두고 정(定)에 들면 이내 구름이 걷히고 밝아지곤 했다. 그리고 다섯 개의 손가락뼈가 타서 마치 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되어갈 적에 홀연히 길이가 각각 세 치씩 모두 자라나고 희기가 마치 눈 같았다. 승니들 모두가 말하였다.
“보살께서 멸도하신 뒤에는 사리를 받들어 탑을 일으켜 공양할 수 있게 하소서.”
그러자 승애는 입에서 새로 난 다섯 개의 이를 뽑아 대중에게 주면서 말했다.
“탑이 될 만하다.”
7월 14일이 되자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서 마치 땅이 진동하고 땅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므로 사람과 짐승들이 모두 놀랐으며, 공중에서는 개ㆍ양ㆍ용ㆍ뱀과 무기 등의 형상이 나타났다가 조금 뒤에야 도로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묻자 승애가 말하였다.
“걱정할 것이 없소. 경수삼매(驚睡三昧)일 뿐입니다. 내가 몸을 버리고자 하니 공양거리를 갖추도록 하시오.”
당시 효애사(孝愛寺) 도(導) 선사는 계행이 아주 뛰어났고 나이 많은 대덕(大德)이었는데, 6바라밀의 석장(錫杖)과 자줏빛 이불을, 승애가 불로 들어가려 할 적에 증정했다. 또 승연(僧淵)은 멀리서 무늬 있는 비단을 부송했으니, 그들의 뜻은 몸을 따르기를 원해서였다. 그 때 사람들은 보시한 재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두 대덕이 보내준 물건임을 몰랐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갑자기 시자 법타(法陀)에게 말하였다.
“너는 가서 도(導)선사께서 주신 석장과 자줏빛 이불과 가사를 가지고 와서 나를 위하여 쓰도록 하라.”
그리고는 곧 분신할 곳으로 나아갔다. 그 때 승니와 속인 10만여 대중들이 그의 수레를 에워싸고 통곡하자 승애가 말하였다.
“오직 보리심만 지키면 통곡할 이치가 없으리다.”
그리고는 곧 높은 자리에 올라가 대중을 위해 설법했으며, 때때로 눈을 들어서 쌓아 놓은 나무 더미를 보면서 기쁜 듯이 혼자 웃었다. 또 오른쪽 겨드랑이를 대고
누워 자는데 도무지 숨을 쉬지 않아 마치 나무로 된 사람과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물었다.
“때가 되었는가?”
그리고는 발을 떼면서 먼저 대중 스님들에게 말하였다.
“부처님의 법은 만나기 어려우니 함께 보호하고 지녀야 합니다.”
그는 전부터 나무를 쌓아서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는 누각처럼 만들어 놓고, 그 위에다 건성으로 조그마한 방을 지은 뒤에 기름을 부어 두고 있었다. 승애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서 누각을 세 바퀴 돌고는 네 개의 문 쪽을 보고 예배한 뒤에 그 위로 올라가 난간을 기대어 아래를 보면서 반야(般若)를 기억하게 했다.
그 때 시주(施主) 왕찬(王撰)이 두려워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만일 불을 놓으면 곧 성인을 불태우는 것이 되어서 장차 중한 죄를 얻을 것이다.”
승애는 남 모르게 그의 생각을 알았으므로 왕찬에게 누각으로 오르게 한 뒤 팔로 그의 머리를 만지면서 말하였다.
“당신은 누각에 나온 것을 죄가 되리라고 근심하지 마시오. 도리어 큰복을 얻게 되리다.”
그리고는 내려가 불을 붙이도록 재촉했으나, 모두가 두려워하면서 횃불을 땅에다 놓고 우두커니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승애는 팔로써 횃불을 끼고 먼저 서북쪽에다 붙이고, 다음으로 서남쪽에다 붙였다. 삼씨를 말려서 짠 기름이라 불길이 확 일어나며 활활 타올랐다. 불을 놓은 뒤에 왕성하게 타는 불 속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두 번째 예배할 때는 몸이 타면서 갈라졌고 다시 거듭 한 번 예배 할 때는 몸이 숯불 위로 넘어졌다. 그리고 나무가 다 타서 불이 꺼지면서 뼈와 살은 모두 재가 되었으나 오직 심장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붉으면서도 축축했다. 또 간(肝)과 장(腸)과 비(脾)와 위(胃)는 아직도 서로 붙어 있었으므로 다시 40수레의 나무를 가져다 그것들을 태웠다. 하지만 창자와 위는 타서 오그라졌지만 심장만은 본래 대로였다. 이 때에 태(兌) 법사가 명하여 그것을 거두어서 탑 아래에다 장사지냈다.
아직 불에 타기 전이었을 때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보살께서는 멸도하시면서 상서로운 모양을 보여 주소서.”
그러자 승애는 대답하였다.
“나의 몸은 다할 수 있지만 마음만은 파괴할 수 없으리라.”
이 말을 들은 여러 사람들이 말했다.
‘마음이란 형상이 없어서 타고 없어지고 할 것이 없다.’
뒤에 심장이 남아있게 되자 그제야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승애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여러 가지 기이한 일들을 나타냈는데 수십 가지가 있다. 일찍이 어느 한 집에서 계(戒)를 받으려 할 때였는데, 까닭 없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보물을 보시하려 하면서 왜 망설입니까?”
여러 사람들은 서로가 영문을 몰랐다. 마침 양씨(楊氏) 부인이
은비녀를 보시하려 하면서 남편이 책망할까 두려워하고 있다가 결단을 내어 보시하는 일이 있었다. 또 효애사(孝愛寺)의 불흥(佛興)이라는 스님은 마시고 먹는 것을 몹시 좋아하였으므로, 세속에 흘러서 법도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가 승애의 수레 뒤를 따라가면서 사사로이 원을 세우며 말하였다.
“이제 성인을 만났으니, 맹세코 술과 고기를 끊으리라.”
그리고는 돌아가 절에 이르렀는데 빛이 누런 사람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그대는 고기를 끊을 수 있다. 아주 잘한 일이다. 그대가 만일 한 중생의 고기를 먹으면 곧 일체 중생의 고기를 먹는 셈이다. 만일 또 먹으면 곧 온갖 부모와 권속들의 고기를 먹는 것이 된다. 꼭 먹고 싶다면 죽은 시체 속의 벌레도 고기이니, 그 고기를 먹어라.”
또 말하였다.
“날마다 여섯 때[六時]에 선(善)을 생각하는 일은 아주 좋은 일이다. 만일 항상 그렇게 하지 못하면 한 때만이라도 좋으며, 이렇게 한 번 생각하는 그 마음도 역시 좋은 일이라서 모두가 악(惡)을 소멸할 수 있다.”
그 말씀이 참되고 바른 것이었고 그 음성이 온화했으므로 장차 물어보려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멸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불흥은 마음에 늘 두고 생각하면서 정진하고 탑을 돌며 염송하고 있는데, 또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부지런히 재(齋)를 지니면서 중생으로 하여금 고기를 먹지 않게 하며, 또 아귀로 하여금 항상 배부르게 할지어다.”
이러한 감응과 가피를 자세히 살펴보매 모두가 승애의 힘이었다. 또 처음 누각에 오를 때에 사문 승육(僧育)은 대건창사(大建昌寺)의 문에 있었는데 높이 네댓 길에 너비 서너 길이 되는 불빛이 땅으로부터 일어나 누각 곁에서 치밀어 오른 뒤에 오래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또 처음 분신하던 날, 익주의 절에 있던 대덕 사문 보해(寶海)가 물었다.
“이것은 불입니다. 어째서 보살은 불에 타면서도 도무지 아프다는 생각이 없습니까?”
승애가 대답하였다.
“중생은 상(相)이 있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아플 뿐이니라.”
또 물었다.
“항상 말씀하시되 중생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실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이미 그들을 위해 마음으로 대신 받고 있거늘, 어째서 그리 될 수 없겠습니까?”
“보살은 자기 자신이 태우고 있고 중생은 따로 죄가 성숙되어서 각자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거늘, 어째서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마치 손을 태우는 것과 같습니다. 한 생각의 선근(善根)이 곧 악을 소멸하는 것이거늘 어찌 대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시자 지염(智炎)에게 말하였다.
“내가 멸도한 뒤에 병든 사람들을 잘 공양하도록 하라. 그는 본시 대개가 모든 부처님과 성인께서 방편으로 나타낸 변화의 몸이라서 다 같이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다. 스스로 큰 마음의 평등이 아니면 어찌 공경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진실한 행이니라.”
그 모임에 앉아 있던 사람 중에서 승애가 성인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사람을 지적하고서 이름을 부르며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응(應)하시지만 일정한 형상이 없으십니다. 혹은 누추한 병자가 되기도 하고, 나아가 축생의 하류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단월(檀越)은 삼가하여 경망(輕妄)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불에 타고 있을 때는 모두가 기이한 형상들을 보았다. 혹은 둥근 일산이 승애를 덮었는데 어떤 도인이 그 일산 위에 있는 것을 보기도 했고, 혹은 5색 광명이 마치 사람의 형상처럼 되어서 네 곳의 문에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혹은 누각 위가 마치 해가 돋아 나오는 형상같이 되고 아울러 꽃비가 내리는데 큰 것은 마치 열 말들이 구유 통만큼 하기도 했고, 작은 것은 돌고드름 조각만큼 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5색으로 한데 어울려 어지러이 내려오며 맞붙어 있는 것이 하나만이 아닌데 떨어지자마자 모두 소멸되어버리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승애가 멸도한 뒤에는 비현(郫縣) 사람이 비강(郫江) 가에서 공중을 보았더니,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면서 그물로 된 수레[絡轝]에 승애가 타고 있었는데 몸에는 노랑 반납(班納)을 입었고 한쪽은 자줏빛 이불로 가리고 석장(錫杖)을 잡았으며 그의 뒤에는 5ㆍ6백 의 스님들 모두가 큰 우산을 쓰고 공중을 날아 서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또 동주(潼州) 영과사(靈果寺)의 스님 혜책(慧策)은 승애가 멸도 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위해 큰 재를 지내려고 일부러 식전에 시장을 갔었는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동남쪽으로부터 깔리면서 해를 가리고 그늘지게 하더니 5색이 분명한 용 털[龍毛]의 비가 내렸다. 긴 것은 한 자 반쯤 되었고 짧은 것은 여섯 치쯤 되었다. 또 모든 꽃과 번기와 향 연기의 비가 공중에 꽉 차 어지러이 내렸는데 대중들 모두가 다 보았다. 또 처음 심장의 사리를 거두어서 평소에 살았던 절로 돌아왔을 때에는 그것들 모두가 꽃무더기가 머금은 왕성한 빛이 되어서
뜰과 집안을 비추었다 한다.
또 아가니타사(阿迦膩吒寺)의 스님 혜승(慧勝)은 몸이 아파서 평상에 있느라고 분신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마음에 늘 한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꿈에 승애가 한 사미를 데리고 석 섬 정도의 향과 전단 가루를 휘장으로 싸가지고 와서, 네 개의 덩어리로 나눈 뒤에 혜승을 돌면서 향불을 피웠다. 혜승은 두려워하면서 말하였다.
“범부일 뿐입니다. 아직 몸을 태울 수는 없습니다.”
승애가 말하였다.
“두려워할 것 없다. 병을 쪼일 뿐이니라.”
향이 다 타고나자 이내 상쾌함을 느끼면서 건강해졌으므로 또 상서로운 일을 청하매 그는 대답하였다.
“내가 익주에 있을 때는 이름을 속여 승애라고 했을 뿐이다. 진짜 이름은 광명변조보장(光明遍照寶藏)보살이다.”
혜승은 깨어난 뒤에 힘이 평소 때보다 갑절 더 솟았다. 어느 때 바깥 마을에서 승애를 위해 재를 지내다가 혜승은 크게 부르짖으며 말하였다.
“복이 중한 동주(潼州)의 승니와 속인들은 상서를 보았지만 우리들은 죄장이 두터워서 도무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 소리에 맞추어서 2백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두가 하늘에서 눈과 같은 흰 꽃이 어지러이 뒤섞여서 햇빛에 번쩍거리며 가득히 내려오는 걸 보았다. 차츰 때가 지나서는 그 꽃의 모양이 점점 커지면서 일곱 치쯤 되는 쟁반같이 되었는데 모두가 금빛으로 변한 것이 하도 밝고 맑아서 눈을 부시게 했다. 4부 대중들이 다투어 붙잡으려 했으나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이가 나무를 끌어 잡고 높이 올라가서 바라보며 잡으려 하면 모두가 위로 날아 올라가 버렸다. 또 성도(成都)의 백성 왕승귀(王僧貴)란 이는 승애가 분신한 뒤에 온 집안이 고기 먹는 일을 끊었는데, 나중에 이 일로 인하여 장차 출가할 것을 사사로이 말하고 있었다. 그 때가 2경(更)이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단월(檀越)”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쫓아가서 문을 열고 보매 한 분의 도인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부디 고기를 먹지 말지어다.”
그 말씀과 뜻이 하도 간곡했을 뿐만 아니라 소리를 내어 울면서 떠나갔으므로 그 뒤를 달려가며 쫓았으나 가까이 가는 것 같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가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또 분신한 뒤의 8월 중순에 오랑캐인 모난당(牟難當)이란 이는 교산(嶠山)의 꼭대기에 가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활과 화살을 잡고 눈을 들어 사슴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승애가 한 마리의 푸르고 큰 사슴을 타고 나타났다. 사냥꾼은 놀라면서 말하였다.
“익주에서 이미 몸을 태워
돌아가셨는데 지금 어떻게 여기에 계십니까?”
그러자 승애가 대답하였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사람들을 속였을 뿐이다. 그대는 몸을 태울 수 있는가? 사냥하면 죄가 되는 것이니, 그대는 부지런히 힘써 농사나 짓도록 하라.”
그리고는 떠나가 버렸다. 또 겨울이 되어서 승애의 형의 아들이 시내 가운데 있는데, 갑자기 산골에서 수만의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승애가 두 스님을 데리고 석장을 짚고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를 따라가서 가사를 붙잡으려 하자 승애가 말하였다.
“너는 나를 붙잡으려고 수고한다.”
그리고는 그 앞의 닭과 돼지들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이들의 음성도 모두가 설명하는 것이 있어서 너희들이 하는 말과 같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다른 나라의 말소리를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사람과 짐승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가 불성(佛性)이 있다. 다만 나쁜 업 때문에 이런 몸을 받아 있을 뿐이다. 너는 오직 농사에만 힘쓰고 새나 짐승들은 기르지 말라.”
그의 말은 아주 간곡했다. 이렇듯 그는 왕왕 몸을 나타내었고 사람들의 뜻을 미리 알았으니, 모두가 대강 이런 것들이다. 자세한 일들은 『사문망명집(沙門忘名集)』과 비장방(費長房)이 지은 『삼보록(三寶錄)』과 『익부집이기(益部集異記)』에 기록되어 있다.
주(周)의 사문 석정애(釋靜藹)
주(周)나라 종남산(終南山) 석정애(釋靜藹)는 성이 정(鄭)씨이며 형양(滎陽) 사람이다. 일찍부터 세속에서 명예를 드러냈고 온화함과 인자하기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으며, 신령한 그릇이 까다롭지 않고, 세상 밖의 일에 우뚝 뛰어났었다. 그는 마음을 달래면서 말하였다.
“나는 불행할 때에 태어나서 5탁(濁)의 어지러움을 만나 세상의 평판을 잃고 있다. 비루한 데 있으면서 진퇴유곡(進退維谷)이니, 세상을 피해 숨어살아야겠다.”
드디어 마음과 입이 서로 위로하면서 숭악(嵩岳)에 파묻혀 경론(經論)을 찾고 뒤지면서 밤과 낮을 잊었다. 그리고 천축(天竺) 범승(梵僧)의 석학(碩學)들이 지닌 높은 행은 세간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다는 걸 듣고 서쪽으로 함양(咸陽)에 도달해서 도를 구하며 정통하였고 10년 동안을 문을 닫고 있었다. 나중에 종남(終南)에 들어가 그곳에서 마치겠다는 뜻을 두었으니 산수(山水)와 자연의 좋은 경치에 묻혀 돌아올 것을 잊고 있었다. 그 산에는 본래 물이 없었으므로 산골 물을 마셔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두워진 저녁에 사람이 곁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와서
앞발로 땅을 긁어 파놓고 떠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날이 샌 뒤에 자세히 살펴보니 축축한 습기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파 보았더니 샘물이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로부터는 물을 길어 오는 수고를 덜었으니, 지금의 석곡(錫谷) 피세보(避世堡)에 있는 호파천(虎爬泉)이 그것이다.
뒤에 주나라 무제(武帝)가 불법을 멸망시킬 때였다. 건덕(建德) 3년 5월에 관중(關中)에서 포학(暴虐)하게 굴었는데, 그 화(禍)가 끝난 뒤인 6월 15일이 되자 조정을 그만둔 금성공(金城公)은 민부(民部)로 부임되어 왔다. 그가 다스리던 관아에서 측근들과 함께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가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갑자기 대여섯 조각으로 된 물건이 허공을 날아 오르며 일직선으로 길을 이루었다. 큰 것은 위로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솟았고 작은 것은 열 말들이 곳집만 했으며 점차로 작아지다가 그 나머지 몇 조각은 더욱 작아지면서 아래로 내려왔다. 그 빛은 황색과 백색으로서 공중에서 말렸다 펴졌다 하는 것이 마치 다리 없는 깃발과 같았다. 그 날의 하늘은 맑게 개어서 기상도 고요했고 작은 먼지조차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다만 뜨거운 햇빛만 더할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동관부(冬官府)로 갔는데 그 길은 원토(圓土)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그 북쪽에 겹으로 된 담장을 보니 그 위에 노란색으로 된 책이 있었으므로 가시나무를 걸치고 올라가 보았더니 바로 『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 제19권이었다. 그 연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며 날아다니다가 이곳에 떨어졌다.”
그 때 3보를 처음 파멸시키는 때라서 형법(刑法)이 준엄했다. 그 때문에 그곳에 늘어앉은 관리들에게 대강만 보여주고 옷소매에 감추었다가 도로 상자에 넣어 봉함했다. 처음에 무제는 정애의 지조가 굳셈을 알고 기꺼이 그를 만나보기 위해서 3위(衛)의 군사 20명에게 칙명을 내려 산을 돌아다니며 모전 옷 입은 도인[氈衣道人]을 찾게 하였다.
“짐(朕)은 상경(上卿)을 삼아 함께 천하를 다스리고 싶다.”
그러나 정애는 산에 깊이 숨어서 살고 있었으므로 찾아내지 못했다. 그 뒤에 태일산(太一山) 석곡(錫谷)에 숨어살면서 위대한 법이 몰락하여 승니와 속인들이 의탁할 데가 없음을 보았다. 그 과보에 얽혀서 도울 힘이 없었으므로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세상에 이익 없는 자이니 곧 몸을 버리리라.”
앞에서 말한 5중(衆)은 처음에는 사모하거나 따르지 않았다. 정애는 우선 대소승(大小乘)의
3보(寶)에 관한 집기(集記) 20여 권을 널리 모아서 여러 개의 바위굴 속에 감추어 두고 후대(後代)로 하여금 다시 일으키게 했다. 그 뒤 몸을 싫어하는 뜻이 절박한지라 혼자 다른 바위에 의거하면서 제자에게 산에서 내려가도록 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새벽이 되자 정애는 반석(磐石) 위에 가부하고 앉아서 하나의 속옷만을 걸치고 자기 몸의 살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돌 위에다 펴놓고 창자는 끌어내어 소나무 가지에다 걸었으며, 아직 상하지 않은 장부와 남아 있는 근육과 손발과 머리와 얼굴들을 잘게 깎아서 모두 없앴다. 오직 뼈만이 남았다. 그리고는 칼로 심장을 도려내어 그것을 받들고 죽었다. 시자는 마음이 놀랍고 두근거려서 온밤 내내 잠을 못 자고 다음 날 새벽에 달려가 보았더니 아직도 합장하고 심장을 받들고 있었다. 얼굴은 서쪽을 향해 가부좌하고 있는 것이 처음 그대로였다. 상처와 남아 있는 뼈에는 피가 하나도 묻어 있지 않았으며 다만 흰 젖이 뚝뚝 흘러내려서 돌 위에 엉겼을 뿐이었다. 드디어 돌을 포개어 무덤을 만들고 밖으로 나와서 염(殮)했다. 이 때가 주나라 선정(宣政) 원년 7월 16일이었으며 춘추는 45세였다.
그 제자들은 그 시대에 이름 있는 분들이라 따로따로 다른 데에 자세히 전해져 있다. 친히 모신 사문 혜선(慧宣)은 안팎의 일에 널리 통했고 지조와 원력이 기특했다. 산이 무너져서 우러를 데 없음을 애통해 하고 들보가 내려 앉아 의지할 데 없음을 슬퍼하면서, 이에 꽃다운 도[芳猷]를 비와 탑을 세운 곳에 기록해 두었다. 뒷날 도를 찾고 현인을 사모한 어떤 이가 산으로 들어가 예배하고 공경하면서 험한 낭떠러지를 돌다가 비로소 정애가 쓴 유게(遺偈)가 석벽(石壁)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제목에는 “처음에는 피로 쓰려고 하였으나,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흰빛으로 변했다”고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보살의 인자한 피였다. 드디어 먹으로써 그 글을 쓰면 이렇다
“모든 인연 있는 이들은 집에 있는 이거나 출가한 이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모두 다 잘 계실 것이며, 불법 가운데서 물러나지 마십시오. 만일 물러나시면 곧 좋은 이익을 잃게 됩니다. 나는 세 가지 인연으로 이 신명을 버리나니, 첫째는 몸에 허물이 많음을 본 것이요, 둘째는 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며, 셋째는 속히 부처님을 뵈옵고 옛 성인과 같이 되려고 해서입니다.”
그리고 게송을 나열하였다.
무익한 몸이
사람들의 공(功)만 번거롭게 하므로
형상을 쪼개어 돌에 펴놓고
신체를 흩어서 소나무에 걸어 둡니다.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와
산신(山神)과 수신(樹神)과
그리고 도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버린 이 몸을 관찰하십시오.
원컨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나의 이 해골을 보고
번뇌의 큰배가
모두 엎어져 사라지게 하소서.
원컨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내가 몸을 버렸음을 듣고
천이(天耳)를 성취하여
끝내는 보리(菩提)를 이루게 하소서.
원컨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나를 기억할 때
염력(念力)과 다문(多聞)과
총지(總持)를 두루 갖추게 하소서.
이 보응(報應)이 한번 다하면
4대(大)가 시들어 떨어지고
샘물과 숲으로 가는 길이 끊어져서
암실(巖室)에서도 소리가 없으리.
날짐승과 길짐승에게 두루 보시하고
그리고 곤충에 이르기까지
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서
선근(善根)이 안으로 충만해질지어다.
원컨대 제가 미래 세상에
속히 선서(善逝)를 이루게 함으로서
몸과 마음이 자유자재하며
반드시 중생을 구제하게 하소서.
이 몸은 깨끗하지 못하니
아래로 똥주머니와
아홉 구멍으로 항상 흐르는 것이
마치 둑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다.
이 몸은 나쁜 것이어서
쳐다볼 수조차 없나니
얇은 가죽 안에 피를 싸고
때와 오물로 더럽혀져 있다.
이 몸에서 나는 더러운 악취는
마치 죽은 개의 악취와 같으며
살과 살이 합쳐져 이루어져서
꽃다운 존재가 아니다.
이 악취 나는 몸을 관찰하건대
무상한 것에 갇힌 바 되어서
나아가도 물러서도 면할 수 없으며
마침내는 개미와 땅강아지 만난다.
이 몸은 끝내 보존되기 어렵고
그 생명은 반드시 다하기 마련이니
여우와 이리에게 먹히게 되며
마지막엔 벌레와 구더기 된다.
하늘과 인간의 남녀(男女)로서
잘나고 못나거나 귀하고 천한 이들
죽음의 불에 타게 되리니
잠시 동안 나타나는 번개와 같다.
죽음의 법이 사람을 침범하므로
원수 중에서도 원수인 것이니
나는 그를 원수로 여기면서
맹세코 그 근원을 끊어버리리.
이 몸에는 즐거움이란 없으니
독사가 들어 있는 상자와 같고
4대(大)로 둘러싸여서
1백 가지 병이 서로 얽혀 있다.
이름이 있는 것은 고통의 무더기요
늙고 병들고 죽을 운명이라니
몸과 마음을 뜨겁게 괴롭히므로
온갖 허물이 많다.
이 몸에는 나[我]가 없어서
그 때문에 자유자재하지 못하며
진실이 없어서 멋대로 계교하나니
범부가 맡아서 다스리는 바이다.
오랜 세월 동안 미혹되었고
허망하고 뒤바뀐 생각에 부림당하여
착한 뿌리[善根]를 상실한지라
축생과 죽음을 같이 했다.
백 번 천 번 이 몸을 버리면서
그 피와 젖이 바다를 이루었고
뼈는 쌓여서 큰산이 되었나니
장차 오는 세상에선 갑절 더하리.
일찍이 이익 되는 일을 하지 못하고
헛되이 애를 쓰며 수고만 했으며
중생에게도 이익이 없었고
법에 대해서도 보탬이 없었다.
고통을 참으면서 이 몸 버리므로
그 공용(功用)은 그지없으리니
맹세코 물러나지 않을 것이며
네 가지 뒤바뀜[四倒]도 벗어나리라.
이 더러운 형상을 버린 뒤에
청정한 국토에 나게 되어서
한생각에 연꽃이 피는
아미타불 처소에 있기를 원한다.
속히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과 성현들을 뵈옵고
세 가지 악도[三塗]를 길이 하직해서
바른 도[正道]를 결정하리라.
그 과보로 다섯 가지 신통을 얻어서
자유자재하게 날아다니며
보배 나무의 열매를 먹듯이
위대한 생멸 없음[無生]을 증득하리라.
법신(法身)이 자유자재하여
3유(有)를 끊지 않으면서도
악마의 도를 무찔러 없애서
법을 보호함에서는 우두머리가 되리.
10지(地)가 만족하게 되고
신통 변화가 견줄 데 없으며
덕(德)이 4승(勝)을 갖추게 되면
법왕(法王)이라고 부르게 되리.
원컨대 이 몸을 버리고 나면
빨리 자유자재하게 되어서
법신의 자재로움으로
모든 갈래[趣] 안에 있게 하소서.
이익이 있는 처소를 따르면서
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구제하면
다시 업도 응당 다할 것이며
유위(有爲)도 모두 그렇게 되리.
삼계(三界)는 무상하여
모두가 자재하지 않으며
남이 죽여서 죽음에 이르러도
끝내는 이런 데로 돌아가리라.
지혜로운 이는 좋아하지 않으면서
응당 이런 생각해야 하리니
뭇 인연이 이미 모였지만
그 업(業)이 오늘에야 다하네.
수(隋)의 사문 석대지(釋大志)
수(隋)나라 여산(廬山) 감로봉(甘露峰)의 석대지(釋大志)는 성은 고(顧)씨요 회계(會稽) 산음(山陰) 사람이다. 천태 지자(天台智者) 대사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오랫동안 엎드려 받들었다. 그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면 그의 신령한 뜻을 알 수 있었으므로 보는 이마다 눈을 크게 뜨고 그가 비범(非凡)한 그릇임을 헤아리게 되었다. 뒤에 연화산(蓮華山) 감로봉의 남쪽에다 정관 도량(靜觀道場)을 세워 놓고
두타(頭陀)를 업으로 삼았다. 한 몸을 초개처럼 여겨서 으르렁거리는 범을 피하지 않았고, 나쁜 짐승이 있음을 듣고도 그 곳에 가서 몸을 던졌지만 모두가 피하며 잡아먹지 않았다. 7년 동안을 지내면서 참선을 끊이지 않았고 만년에는 이 산의 복림사(福林寺)에 있으면서 큰 업[大業]의 핍박을 만나자 숨어 피해 다니면서 유랑 행각을 했다. 법의 쇠퇴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을 개탄하였으며 옷과 형태를 바꾸어서 거친 베를 걸쳐 입고 불당 안에 있으면서 높은 소리로 통곡했다. 사흘 낮 사흘 밤을 그치지 않으므로 절 스님들이 가서 위로하자 대지가 말하였다.
“내가 악업을 한탄하다가 이렇게 되었소. 반드시 이 몸이 다해야 바른 가르침이 밝아지리다.”
그리고는 마침내 동도(東都)로 가서 임금에게 표(表)를 올렸다.
“원컨대 폐하는 3보를 흥왕하게 하소서. 나는 하나의 팔을 숭악(嵩岳)에서 불태워 나라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제왕은 그것을 허락하고 칙명으로 큰 재를 베풀었으므로 7중(衆)이 모두 모였다. 대지는 3일 동안을 먹지 않고는 큰 누각 위에 올라가 쇠 화로를 벌겋게 달군 뒤에 그 팔이 타서 검게 되기까지 지졌다. 그리고 칼로 끊어서 살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나자 다시 그 뼈도 검게 되기까지 지졌다. 그런 뒤에 베로 싸서 밀랍을 부으면서 태우니 그 빛이 바위굴까지 번쩍거렸다. 그 때 대중들은 그의 고행을 보고 모두가 마음 아파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대지는 더욱 태우고 지지면서도 말씨나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고 말과 웃음이 전과 같았다. 혹은 법구(法句)를 외우면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기도 하고, 혹은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면서 말소리가 간절하기도 했다. 팔이 다 탄 뒤에는 먼저와 같이 누각에서 내려와서 7일 동안 선정에 들었다가 가부좌하고 앉아서 죽었다. 이때 나이 43세였다.
당(唐)의 사문 석회통(釋會通)
당(唐)나라 종남산(終南山) 표림곡(豹林谷)의 사문 석회통(釋會通)은 옹주(雍州)의 만년(萬年) 어숙천(御宿川)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검소함을 좋아했고 임천(林泉)에서 묵으며 굳은 절개와 계행을 지키는 것이 그의 본래의 뜻이었다. 종남산의 표림곡에 가 숨어서 업을 다스리면서 『법화경』을 독송했다. 「약왕품(藥王品)」에 이르러 기꺼이
목숨을 버리려고 결심하고서 사사로이 나무를 모았다. 정관(貞觀) 말년의 고요한 밤에 숲 속에 나무를 쌓아서 굴을 만든 뒤 경을 독송하다가 「약왕품」에 이르자 곧 불을 붙였다. 바람에 불길이 일어나면서 연기와 불이 왕성하게 타는데도 그 속에서 우뚝 가부좌하고 앉았으며 독송하는 소리가 전과 같았다. 그러할 때에 서남쪽에서 희고 큰 광명이 불 더미로 흘러 들어오자 그제야 몸이 앞으로 넘어졌다. 새벽이 되자 몸과 불이 다 소멸되었으므로 그 뼈를 거두어서 탑을 세우고 새겼다.
또 정관(貞觀)의 초에 형주(荊州)에 비구니 자매가 있었다. 함께 『법화경』을 독송하였는데 육신을 크게 싫어하여 같이 몸을 버리려고 했다. 의식(衣食)을 절약하면서 고행을 숭앙했고 모든 향유(香油)를 먹으면서 점차로 음식을 끊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단번에 음식을 끊고 향밀(香蜜)만을 먹었다. 그러나 정신력의 가피로 뜻한 바는 상쾌했으므로 승니와 속인들에게 두루 고하였다.
“기일을 정하여 몸을 태우리라.”
그리고는 정관 2년 2월 8일에 형주의 큰 길거리에다 두 개의 높은 자리를 마련해 놓고 밀을 묻힌 베로 정수리까지 온몸을 다 감고 얼굴만을 내 놓았다. 대중들이 산처럼 모여 와서 노래로 찬탄했다. 그리하여 『법화경』을 독송하다가 약왕이 분신한 곳에 이르자 언니가 먼저 아우의 정수리에다 불을 붙이고, 다음에는 아우가 언니의 정수리에다 불을 붙였다. 맑은 밤에 두 개의 횃불이 일시에 같이 빛났으며, 불길이 눈까지 내려올 때도 독송하는 소리는 더욱 낭랑했고 점차로 코와 입까지 내려왔을 적에야 비로소 소리가 끊어졌다. 그 다음 날 새벽이 되자 함께 앉은자리에서 연달아 일어나면서 일시에 불[火]로 화했다. 그 해골은 부스러졌으나 두 개의 혀만은 다 같이 남아 있었으므로 온 대중은 기뻐하면서 한결같이 찬탄하고는 그들을 위해 높은 탑을 세웠다.
또 가까운 병주(幷州)성의 서쪽에 한 서생(書生)이 있었는데 나이는 24ㆍ5세였다.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분신 공양하기를 서원한 뒤에 여러 다발의 쑥을 모아 말려서 광주리에 넣어 쌓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비밀이라면서 말해주지 않았는데, 뒷날 한밤중에 불을 놓아 스스로 태웠다. 사람들이 가서 구하려 했을 때에는 불이 왕성하여 이미 죽어 있었다.
또 정관 연간에 서경(西京)
홍복사(弘福寺)에 현람(玄覽)이라는 스님이 있었으니 조주(趙州)의 방자(房子) 사람이다. 항상 참선과 독송과 예배와 참회를 즐기면서 업으로 삼았는데 매양 법 권속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록 업을 항상 함께 하고는 있지만 맹세코 목숨을 버리려고 한다.”
정관 18년 4월 초가 되자 모든 의복을 벗어서 통틀어 하나의 두건[幞]을 만들어서 본사(本寺)의 스님에게 보낸 뒤에 한 벌의 홑옷만을 입고서 몰래 서경의 동쪽 위수(渭水)의 음홍(陰洪) 방죽 곁으로 갔다. 다음 날 아침에 위수에 나가서 염불과 예배를 마친 뒤에 물 속에다 몸을 던졌는데, 여러 사람들이 건져내자 대중을 보며 말하였다.
“나는 신명을 버리려고 서원한 지가 오랩니다. 그 뜻은 보살[大士]이 버리기 어려운 데도 능히 버리는 것을 배우고 싶어서입니다. 모든 경전에 있는 올바른 행동이니, 굳이 막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일을 방해하던 대중들도 말과 뜻이 장했으므로 그대로 두었다. 그러자 곧 물로 들어가 합장한 채 부처님을 부르면서 널리 발원한 뒤에 소용돌이치는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3일이 된 뒤에야 그 시체가 나왔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건져내어서 탑을 세우고 글을 새겼다. 본사에서는 그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 곧 보내온 두건을 열어 보고서야 유서를 발견했다. 유서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공경하여 시방 3세의 모든 부처님께 아뢰옵니다. 제자 현람은 출가한 지 12년이오며 비록 승려의 수에 들어 있기는 하오나 큰 업을 아직 이루지 못했사옵니다. 이제 보시바라밀[檀波羅蜜]의 행을 수행하고자 하옵니다. 마치 살타(薩埵)가 몸을 버리고 시비(尸毘)가 다리[股]를 끊고 어왕(魚王)이 살코기로 산을 이룬 것이 경문에 자세히 실려 있는 것과 같나이다. 부디 예전의 성인을 좇아 감히 후진(後塵)이기를 청하옵니다. 그리고 옷과 물건의 여러 기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할 것을 위임합니다.”
임종한 날에는 사람들이 대개 침착하지 못한 법인데, 동학들이 이 글을 보고서야 비로소 가서 찾았고, 그 죽음과 유서가 부합되어서,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위의 네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唐高僧傳)』에 나온다.]
나는 옛날의
한량없는 겁 동안에
소중히 여기는 몸을 버리면서
그로 인해 보리를 구했느니라.
가령 내가 국왕이었거나
그리고 왕자였을 적에는
언제나 버리기 어려운 것 버리면서
그로 인해 보리를 구했느니라.
나는 전생 일을 기억하고 있다.
큰 나라에 왕이 있었으니
그 왕의 이름은 곧
마하라타(摩訶羅陀)였다.
이 왕에게는 아들이 있어서
크게 보시할 수 있었으니
그 아들의 이름은
마하살타(摩訶薩埵)였다.
다시 두 형이 있었으니
그 장자의 이름은
대파나라(大波那羅)였고
차자의 이름은 대천(大天)이었다.
세 사람이 함께 유람하다가
사람 없는 어느 산중에서
새로 새끼를 낳은 호랑이가
굶주리며 먹이가 없는 것 보았다.
그 때 훌륭한 이 보살은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며 말했다.
‘내가 이제 마땅히
소중한 몸을 버려야겠다.
이 호랑이가 혹시
배고픔이 매우 절박하면
어쩌면 도로 제 새끼를
잡아먹을 지도 모른다.’
곧 높은 산으로 올라가
호랑이 앞에 스스로 몸을 던져서
그 호랑이 새끼들로 하여금
생명을 보전할 수 있게 하였다.
이때 대지(大地)와
모든 큰산이
다 진동하였고
모든 벌레와 짐승들도 놀랐다.
호랑이와 이리와 사자 따위는
사방으로 뿔뿔이 도망쳤으며
세간은 모두 캄캄해지면서
모든 광명이 없어져버렸다.
이 때에 두 형은
대 숲에 있으면서
마음에 근심과 괴로움을 품고
몸부림을 치며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고 점차 찾아 나서서
드디어 호랑이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호랑이와 그 호랑이 새끼들의
입에 피가 묻은 것을 보았다.
또 해골과 머리칼과
털과 손톱과 발톱과 치아를 보았으며
이곳 저곳에 피가 흘러
낭자한 것을 보았다.
이 두 왕자는
그런 일들을 보고 난 뒤에
마음이 답답하여 기절하면서
저절로 땅에 쓰러져버렸다.
그리하여 재와 먼지와 흙이
온몸에 뒤범벅이 되어서
바른 정신을 잃어버리고
미친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그들이 데리고 간 시종들은
이러한 일들을 보고 나서
그들 역시 비통해하면서
먼저 소리내어 통곡하였다.
그리고는 서로가 찬물을 가져다
함께 뿜고 뿌렸으니
그러한 뒤에야 깨어나
다시 살아났다.
당시 왕자가
몸을 버리는 그 시각에
후궁(後宮)과 후비(后妣)와 채녀(婇女)들과
5백 의 권속들은 함께 어울리고
재미있게 즐기고 있었다.
왕비는 이 때에
두 유방에서 젖이 흐르고
모든 팔다리의 온갖 마디가
침으로 찌르듯이 아팠으므로
마음이 괴롭고 근심이 생기고
사랑하던 아들을 잃은 것 같았다.
그리하여 왕비는
빨리 왕에게로 가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슬피 울면서 말하였다.
‘대왕이여, 이제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으세요.
걱정과 근심의 왕성한 불이
지금 저를 태우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두 유방에서
한꺼번에 젖이 흘러 나왔고
몸이 몹시 괴로운 것이
마치 침으로 찌르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당하는 이러한 일은
상서로운 징조가 아닌 것 같으니
아마 사랑하던 아들을
다시는 못 볼까 두렵습니다.
지금 이 몸과 목숨을
대왕에게 받들어 올리오니
원컨대 속히 사람을 보내어
저의 아들을 찾아 주소서.
꿈에서 세 마리의 비둘기 새끼를
저의 품안에 안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놈이
저의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그런데 매 한 마리가 날아와서
저에게서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이러한 꿈을 꾸고 난 뒤에
곧 근심이 생기면서 괴로워졌습니다.
제가 지금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목숨을 구제하지 못할까 해서이니
원컨대 속히 사람들을 보내어
저의 아들을 찾아내 주소서.’
이때 왕비는
이러한 말을 다하고 나서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다시 땅에 쓰러져 버렸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다시금 근심하고 괴로웠으니
사랑하던 아들을
다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왕의 대신들과
그리고 모든 권속들이
모두 다 모여와
왕의 좌우에 함께 있으면서
소리를 높여 슬피 울부짖으매
그 소리가 천지를 움직였다.
당시 성 안에
있던 모든 인민들은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나서
깜짝 놀라 모두가 나왔다.
그리고는 저마다 말하였다.
‘지금 그 왕자께서는
살아서 곧 오신다는 것인가,
이미 사망하셨다는 것인가?
이 보살께서는
항상 부드러운 말씀을 하셨고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이제는 만나뵙기 어렵게 되었구나.
벌써 여러 사람들이
숲 속에 들어가 찾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서 저절로
틀림없는 소식을 얻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그 때
이렇듯 두려워하면서
다시 슬퍼하고 울부짖으니
그 슬픔은 신기(神祇)를 감동시켰다.
그 때 대왕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가져다 왕비에게 뿌리니
한참 있다가 소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로 정신을 차린 뒤에
아주 작은 소리로 왕에게 물었다.
‘우리 아들은 지금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그 때 왕비는
그 아들이 염려되는 까닭에
갑절 더 괴로워하였고
잠시도 그 마음을 쉬지 않았다.
‘애석하도다, 나의 아들아.
형상과 빛이 단정했거늘
어떻게 하여 하루아침에
나를 버리고 죽는다는 말이냐.
어째서 나의 이 몸이
먼저 죽지 않고
이러한 여러 괴로운 일들을
당하게 한다는 말이냐?
착한 아들의 아름다운 빛깔은
마치 깨끗한 연꽃과 같거늘
그 누가 너의 몸을 무너뜨려서
서로 나뉘어 흩어지게 하느냐?
그 자는 바로 나의
옛날의 원수가 아니면
본래의 업연(業緣)이 미치게 되어
그것으로 너를 죽이게 되었을까?
나의 아들의 얼굴과 눈은
깨끗하기가 마치 둥근 달과 같은데
하루아침에 생각지도 않던
이런 재앙을 만나게 되었구나.
차라리 이 내 몸으로 하여금
부수어서 티끌이 되게 할지언정
나의 아들은
목숨을 잃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꾼 꿈으로 보아
이미 과보를 받았을 터인데
내가 바로 무정(無情)하여서
이런 고통을 견디고 있구나.
내가 꾸었던 꿈 같아서는
어금니가 빠지고
두 개의 유방에서 일시에
젖이 저절로 흘러 나왔으니
이는 반드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잃음이라.
꿈에 세 마리의 비둘기 새끼 중
한 마리를 매가 빼앗아 갔으니
세 아들 가운데서
반드시 한 아들을 잃었으리라.’
그 때 대왕은
곧 왕비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제
대신과 사자를 보내서
이리저리 두루 다니며
왕자들을 찾아볼 것이니
당신은 이제 우선
크게 걱정하지 마셔야 합니다.’
대왕은 이렇게
왕비를 위로하고 나서
곧 수레를 마련해서
그 궁전을 출발하였다.
마음이 근심되고 걱정되어
괴로움에 몹시 시달렸으므로
비록 대중 안에서 있었다 하더라도
얼굴 모습이 초췌했는데
궁성을 나오자마자
사랑하는 아들들을 찾고 있었다.
그 때 또한
한량없는 모든 사람들이
땅이 울리도록 슬피 울면서
곧 왕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이때 대왕은
궁성을 출발한 뒤에
이쪽 저쪽 사방을 돌아보며
그 왕자들을 찾고 있었으나
번뇌와 한탄으로 마음이 어지러워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데
맨 나중에 멀리서
소식을 가져오는 한 사람을 보았다.
머리는 먼지투성이가 되고
그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으며
몸에는 더러운 재를 칠하고
슬피 울면서 그곳으로 다가왔다.
그 때 대왕 마하라타는
그런 모습으로 오는 사신을 보고 나서
갑절 더 한탄하고 괴로워하며
머리를 들고 소리를 높여
하늘을 우러러보며 통곡하였다.
그보다 먼저 보냈던 사신이
이어서 다시 오게 되었는데
그가 이미 왕에게로 와서는
이러한 말을 아뢰었다.
‘원컨대 왕은 근심하지 마소서.
모든 왕자님은 살아 계시므로
오래지 않아 여기에 이르러
왕으로 하여금 볼 수 있게 되리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다시 어느 한 신하가 왔는데
왕이 근심과 괴로움으로
얼굴 모습이 초췌하고
몸에 입고 있는 옷도
때가 끼고 더러워진 것을 보고 말했다.
‘대왕께서는 아셔야 하시리라.
한 분의 왕자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두 분 왕자님은 살아 계시나
슬픔에 젖어 있어서 믿지 못하겠습니다.
셋째의 왕자님은
호랑이가 새로 새끼를 낳고
7일 동안을 굶주려 있어서
도로 제 새끼를 잡아먹을까 두려웠으니
이러한 호랑이의 처지를 보고 나서
큰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장차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미래의 세상에서는
보리를 증득하여 이루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는 곧 높은 데로 올라가
호랑이 앞에 몸을 던졌나니
호랑이는 굶주림의 핍박을 받아
곧 일어나 잡아먹었습니다.
온갖 피와 살덩이는
이미 모두 다하여 버렸고
오직 해골만이
땅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더이다.’
이때 대왕은
신하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또 다시 기절하여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근심 걱정의 왕성한 불이
그의 몸을 활활 태웠고
모든 신하와 권속들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였다.
물을 가져다 왕에게 뿌리자
한참 있다가 소생했으며
다시 일어나 머리를 들고
소리를 높여 통곡하였다.
다시 어떤 신하가 와서
왕에게 아뢰었다.
‘아까 숲 속에서
두 왕자님을 뵈었는데
몹시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슬피 울며 눈물을 흘리다가
정신을 잃고 기절하여
저절로 땅에 쓰러지더이다.
그리하여 신(臣)이 곧 물을 구해다가
그 몸 위에 뿌려 주었더니
한참 만에야
도로 소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방을 바라보았으나
큰불이 활활 타올랐으므로
붙잡아서 잠시 동안 일어났지만
곧 다시 땅에 주저앉아버리고
소리를 높여 통곡하였으며
그러다가 아우의 공덕을
갑자기 또 찬탄하더이다.’
이때 대왕은
사랑하던 아들을 이별하게 되자
그 마음은 답답해졌고
기력도 피로하여 쇠약해졌으나
괴로워하면서 슬피 울었다.
그리고는 다시 생각하였다.
‘나의 막내둥이는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는데
무상함의 큰 귀신이
갑자기 그만 삼켜버렸구나.
그 나머지 두 아들도
지금 비록 살아있기는 하나
근심의 불에 타고 있으니
혹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빨리 가서
그 숲 속에 이르러
두 아들을 맞아 태우고
급히 궁중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들의 어머니가 뒤에 있으면서
몹시 근심하고 괴로워하다가
심장과 간장이 터져버리면
혹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두 아들이라도 보면
그의 마음이 위로가 되어
아직 남아 있는 그 수명을
끝까지 보존할 수 있게 되리라.’
그리하여 대왕은
이름이 있는 코끼리를 타고
모든 시종들과 함께
그 숲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중로(中路)에서
그의 두 아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치면서
아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았다.
이때 왕은 그들 앞으로 가서
두 아들을 껴안고
소리를 높여 슬피 울다가
길을 따라 궁중으로 돌아와
속히 그 두 아들에게
어머니를 만나보게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수신(樹神)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알아야한다.
그 때 왕자로서 몸을 버려
호랑이에게 먹힌 마하살타는
바로 지금의 내 몸이니라.
그 때 대왕인
마하살타는
바로 지금의 부왕(父王)이신
수두단(輸頭檀) 그 분이시며
그 때의 왕비는
바로 지금의 마야(摩耶)이시다.
첫 번째 왕자는
바로 지금의 미륵이요
두 번째 왕자는
바로 지금의 조달(調達)이며
그 때의 호랑이는
바로 지금의 구이(瞿夷)이니라.
당시 호랑이의 일곱 마리 새끼는
바로 지금의 다섯 비구[五比丘]와
그리고 사리불과
목건련이 그들이니라.’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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