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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34 법원주림(法苑珠林) 91권

by Kay/케이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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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91

 


법원주림 제91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89. 수재편(受齋篇)[여기에는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바른 법[正法]이 유포된 까닭은 경전을 귀중히 여기는 데에 있고 복밭[福田]이 더욱 자란 까닭은 그 공(功)이 재계(齋戒)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끼의 저녁밥을 거르면 그 복은 양식이 남아 돌게 하고 1전(錢)의 밑천을 베풀면 그 과보는 하늘보다 월등하다. 그런 까닭에 복밭을 중히 여겨야 하고 재물은 가벼이 여겨야 하리니, 함께 무차회(無遮會)를 세움으로써 다 함께 한량없는 복을 부를 것이다.

(2) 인증부(引證部)
『구잡비유경(舊雜譬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4성(姓)이 부처님을 청하여 밥을 드시게 하였다. 당시에 어느 한 사람이 우유를 팔러 갔다가 큰 성바지[大姓]가 밥을 먹지 못하게 하면서 재(齋)를 지니고 계(戒) 받는 것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경을 들은 뒤에야 돌아왔다. 그의 부인이 말하였다.
‘나는 아침까지 당신을 기다리면서 아직 밥을 먹지 않았소.’
그러나 부인은 억지로 남편으로 하여금 밥을 먹게 하면서 그의 재에 대한 뜻을 깨뜨려 버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일곱 번 천상에 가 났고 일곱 번 인간에 와서 났다.
법사는 말하였다.
‘하루만이라도 재를 지니면 60만 년 동안 양식이 남아돈다. 또 다섯 가지의 복이 있다. 첫째는 병이 적고, 둘째는 몸이 안온하며, 셋째는 음욕의 뜻이 적어지고, 넷째는 잠이 적어지며, 다섯째는 천상에 나게 되어서 항상 전생에 했던 일들을 안다.’

또 파사닉왕(波斯匿王)이 말리(末利) 부인에게 향영(香瓔)을 주고자 하여 궁전으로 불러내어서 보았더니, 부인은 재일(齋日)이라 소복(素服)을 입고 나왔다. 6만의 부인 가운데서도 밝기가 해와 달 같았으며 평소보다 갑절 더 아름다웠다. 왕은 마음이 송연(悚然)해지므로 더욱 공경하면서 물었다.
‘무슨 도덕이 있으시기에 그렇게 환히 빛나십니까?’
그러자 부인이 왕에게 아뢰었다.
‘제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복이 적은지라 이렇게 여인의 몸을 받아서 정태(情態)가 더럽고 밤낮으로 명을 재촉해 3악도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나이다. 이 때문에 달마다 불법의 재를 받들면서 애욕을 끊고 도(道)를 따르고 있사오며 세상마다 복을 받고자 하옵니다. 그 향영은 세존께 바치옵소서.’”
또 『중아함경(中阿含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녹자모(鹿子母) 비사가(毘舍佉)가 새벽에 목욕하고 희고 깨끗한 옷을 입고는 아들과 며느리들의 권속을 데리고 부처님께로 와서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세존께 아뢰었다.
‘제가 이제 재를 지녔으면 좋겠나이다.’
그러자 세존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거사(居士)의 부인은 지금 어떠한 재를 지니고 싶은가? 재에는 세 가지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소를 놓아기르는 아이의 재[放牛兒齋]요, 둘째는 니건의 재[尼揵齋]이며, 셋째는 거룩한 8지재[聖八支齋]니라.
무엇을 소를 놓아 기르는 아이의 재라 하는가? 소를 놓아 풀을 뜯기는 아이가 아침에는 진펄 가운데 놓아 두었다가 해가 저물면 거두어서 마을로 돌아오느니라. 그는 마을로 돌아올 때 생각하기를 ≺나는 오늘 이곳에서 소를 놓아 먹였으니, 내일은 저곳에서 소를 놓아 먹여야겠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소에게 물을 마시게 했으니, 내일은 저곳에서 소에게 물을 마시게 해야겠다. 나와 소가 오늘은 이곳에서 묵었으니, 내일은 저곳에서 묵어야겠다≻고 하느니라. 그와 같아서 어떤 사람이 재를 지닐 때에 생각하기를 ≺난 오늘 이와 같은 밥을 먹었으니, 내일은 저와 같은 밥을 먹어야겠다. 나는 이와 같은 음료수를 마셨으니 내일은 저와 같은 음료수를 마셔야겠다. 나는 오늘 이와 같은 음식을 먹고
소화시켰으니, 내일은 저와 같은 음식을 먹고 소화시켜야겠다≻고 하나니, 그 사람이 이렇게 밤낮으로 탐욕의 허물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소를 놓아 기르는 아이의 재라 하느니라. 만일 이렇게 재를 지니면 큰 이익도 얻지 못하고 큰 과위도 증득하지 못하며 큰 공덕도 없고 널리 유포되지도 않는다.
무엇을 니건의 재라 하는가? 만일 출가한 니건이면 그는 남들에게 권하기를 ≺그대들은 동쪽의 1백 유순(由旬) 밖에 있는 중생이 있으면서 그대들을 옹호하고 있으니, 칼과 몽둥이를 버리라. 이와 같이 남쪽ㆍ서쪽ㆍ북쪽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고 하면서, 혹은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어 ≺우리는 부모와 처자가 없다≻고 하며 허망한 말을 권하며 참된 이치라 하기도 하며, 혹은 고행을 하면서 스스로 굶주리는 등 온갖 삿된 법에 집착하기도 하나니, 이것을 니건의 재라 하느니라. 만일 이렇게 재를 지니면 역시 큰 이익을 얻지 못하고 큰 과위도 증득하지 못하며, 큰 공덕도 없고 널리 유포되지도 않느니라.
무엇을 거룩한 8지재라 하는가? 견문이 많은 성인들의 제자가 재를 지닐 때 생각하기를 ≺아라하(阿羅訶) 진인(眞人)께서는 몸과 수명이 다하시도록 살생을 여의고 살생을 끊으며 칼과 몽둥이를 버리신다. 자기 자신에게나 남에게 부끄러워함이 있고, 자비심이 있으면서 온갖 것을 이익 되게 하시며 곤충에 이르기까지 살생에 대한 마음이 청정하시다. 나아가 몸과 수명이 다하시도록 때 아닐 적의 음식을 여의고 때 아닐 적의 음식을 끊으며 한 끼만 잡수시고 저녁밥은 잡수시지 않으며 때맞추어 잡수시기를 좋아하신다. 나는 이 부문에서는 아라하 등과 같아서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재를 설명한다≻고 한다. 그들은 이 거룩한 8지재에 머무른 뒤에는 위의 것에 대하여 다시 여래ㆍ무소착(無所着) 등 10호(號)와 세간 밖의 청정한 법을 기억하면서 더러운 악과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나니, 이것을 거룩한 8지재라 하느니라. 만일 족성녀(族姓女)가 거룩한 8지재를 지니면 죽은 뒤에는 6욕천(欲天)에 가 나고 멀리는 네 가지 사문의 과위[四沙門果]를 얻으리라.’”

또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위성(舍衛城)에 계실 때였다. 남방에 대림(大林)이라는 읍(邑)이 있었는데 당시 어느 상인(商人)이 소 여덟 마리를 몰고 북방의 구다국(俱多國)에 가서 한 상인과 함께 진펄 안에서 소를 놓아 먹이고 있었다. 그 때 어느 이차(離車)가 용을 붙잡아서 먹으려 하였다. 그 붙잡힌 용은 용녀(龍女)였는데 그 용녀는 포살(布薩)의 법을 받은지라 해치려고 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이차는 코를 뚫어서 끌고 갔다. 상인은 그것을 보고 곧 인자한 마음을 일으켜서 이차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 용을 끌고 가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나는 죽여서 먹으려고 합니다.’
상인이 또 말하였다.
‘죽이지 마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소 한 마리를 드릴 터이니, 바꾸십시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으므로 차츰 여덟 마리까지 다 준다고 하자 그제야 말하였다.
‘이 고기는 아주 맛이 있는 것인데, 이제 당신을 위하여 놓아주겠습니다.’
그리고는 소들과 바꾸었다.
상인은 용녀를 놓아 보낸 뒤에 생각하였다.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다시 쫓아가서 붙잡아 갈까 두렵구나.’
그리고는 다른 못 안에다 놓아주면서 뒤를 따라가 보고 있었다. 그러자 용은 사람으로 변화하여 상인에게 말하였다.
‘하늘[天]께서 저의 목숨을 베푸셨습니다. 이제 은혜를 갚고자 하니 함께 용궁으로 들어가십시오. 하늘의 은혜를 갚아야겠습니다.’
상인이 대답하였다.
‘용의 성질은 갑작스러워서 언제 변하여 성을 낼 지 모릅니다. 혹은 나를 죽일지도 모릅니다.’
용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 그 사람이 나를 묶었지만 나의 힘은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포살의 법을 받고 있었는지라, 도무지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을 뿐입니다. 하물며 하늘께서는 이제 저의 수명을 살려 주셨는데 어찌 해치겠습니까? 만일 가시지 않겠다면 조금만 여기에 계십시오. 제가 먼저 가서 정돈을 좀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곧 들어갔다. 뒤를 따라서 상인도 용궁으로 들어가다가 용궁 문 곁에 두 마리의 용이 한 곳에 묶여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대들은 무슨 일로 묶여 있는가?’
대답하였다.
‘이 용녀는 반달 동안에 3일씩 재법(齋法)을 받는데, 우리 형제가 이 용녀를 수호하고 있다가 잘못하여 저 이차에게 붙잡히게 했습니다. 이 때문에 묶여 있는 것인데, 하늘께서는 인자한 말씀을 하셔서 우리를 놓아주게 해 주십시오.’
용녀는 그 동안 정돈을 다 하고 나서
즉시 곧 궁중으로 불러 들여서 보배 평상 위에 앉게 하고는 아뢰었다.
‘용궁 안에는 수명이 다하기까지 소화되는 음식이 있고, 20년 동안 소화되는 음식이 있고, 7년 동안 소화되는 음식이 있으며, 염부제(閻浮提) 사람이 먹는 음식도 있습니다. 하늘께서는 이제 어느 음식을 드시겠습니까?’
‘염부제의 음식을 먹겠습니다.’
그러자 곧 갖가지 음식을 차려다 주었다. 그 때 상인이 용녀에게 물었다.
‘이 용들은 무엇 때문에 묶여 있습니까?’
용녀가 대답하였다.
‘이들에게는 잘못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당신은 죽이지 마십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들을 죽여야 합니다.’
‘당신이 그들을 놓아 주어야 나는 이 음식을 먹겠습니다.’
그러자 용녀가 즉시 말했다.
‘곧장 그렇게 놓아줄 수는 없고, 6개월 동안 벌로서 인간에 내쫓아 버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음식을 먹은 뒤에 상인은 용궁 안을 보았더니 갖가지 보물로써 궁전이 장엄되어 있었으므로 용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러한 장엄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포살의 법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이오?’
‘우리 용의 법에는 고통 받는 다섯 가지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낳을 때와 잠잘 때와 음행할 때와 성낼 때와 죽을 때입니다. 하루 동안에도 세 번이나 가죽과 살이 땅에 떨어지면서 이글거리는 뜨거운 모래가 몸을 지집니다.’
다시 물었다.
‘당신은 어떤 것을 구하고자 하십니까?’
‘인간 안에 태어나겠습니다. 축생 안에서는 괴롭고 법을 모르기 때문에 여래께 나아가서 출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용녀는 곧 금덩이 여덟 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이 금이면 당신의 부모와 권속들이 종신토록 쓰셔도 다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말하였다.
‘당신은 눈을 감으십시오.’
용녀는 곧 신통 변화로 본국에다 데려다 놓았다. 그리하여 그 상인은 여덟 개의 금덩이를 부모에게 드리면서 말했다.
‘이것이 바로 용이 준 금입니다.’
그리고 잘라서 쓰고 나면 다시 또 생겼으므로 수명이 다하도록 썼으나 다하는 때가 없었다.[생각건대 인자한 일은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잠시 동안 용녀를 구제한 은혜의 과보도 오히려 이렇게 뛰어나거늘, 하물며 큰 재를 지녀 복을 받는 일이 어찌 적겠는가?]”
또 『보살수재경(菩薩受齋經)』에서 말하였다.
“‘아무개는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옵고, 스스로 교법에 귀의하오며, 스스로 승가에 귀의하나이다.

아무개는 몸으로 행한 악과 입으로 말한 악과 뜻으로 생각한 악을 이제 이미 없애버렸나이다.
아무개는 며칠 동안 낮과 밤으로 보살의 재를 받아 스스로 보살님께 귀의하옵나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의 재일에는 10계가 있느니라. 첫째, 보살은 재일에 연지와 분과 향을 바르거나 꽃을 달지 말 것이다. 둘째, 보살은 재일에 노래하고 춤추고 북을 치면서 풍악을 울리거나 장식하지 말 것이다. 셋째, 보살은 재일에 높은 평상 위에 눕지 말 것이다. 넷째, 보살은 재일에 한낮이 지난 뒤에는 밥을 먹지 말 것이다. 다섯째, 보살은 재일에 칼이나 금ㆍ은 등의 값진 보물을 갖지 말 것이다. 여섯째, 보살은 재일에 수레나 소와 말을 타지 말 것이다. 일곱째, 보살은 재일에 아이나 노비나 짐승을 때리지 말 것이다. 여덟째, 보살은 재일에 모두 이 재를 지니면서 분수에 따라 보시로 복을 지을 것이다. 보살은 재일에 누울 때를 제외하고는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 일체의 시방에서 재계를 지닌 이와 6도(度)를 행한 이가 있으면, 저 아무개는 모두 도와 편안하게 하고 한량없이 권하고 돕고 기뻐하면서 복을 베푸오니, 시방의 온갖 사람과 사람 아닌 이들이 고통과 액난을 받는 곳에 있으면 모두가 복을 얻어서 근심과 고통에서 해탈하게 하옵시며,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어 안온함과 풍요의 즐거움이 끝이 없어지이다≻고 할 것이다. 아홉째, 보살은 재일에 그릇 안의 음식을 다 먹지 말 것이다. 열째, 보살은 재일에 여인과 함께 웃지도 말고 같이 앉아 있지도 말 것이며 여인도 역시 그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10계이니, 범하지 말 것이요
남을 시켜서 범하게 하지도 말 것이며, 또한 남들이 범하도록 권하지도 말 것이니라.’”
보살의 해재법(解齋法)은 이렇게 말한다.
“나무 불 나무 법 나무 비구승. 저 아무개는 얼마 되지 않는 낮과 얼마 되지 않는 밤에 보살의 재를 지녔사오며, 분수에 따라 보시하였사오니 장차 6바라밀(波羅密)을 얻어야 하오리이다.”
모든 보살은 6만의 보살이 행하는 법과 같이 재일의 밤에는 일부분은 참선하고 일부분은 독경하고 일부분은 눕는 것과 같이 한다. 이것이 보살이 재일에 하는 법이다.
정월 14일부터 받아서 17일에 해재한다.
4월 8일부터 받아서 15일에 해재한다.
7월 1일부터 받아서 16일에 해재한다.
9월 14일부터 받아서 16일에 해재한다.


自述
이미 재를 받고 나서 만일 해재하고 싶다면 반드시 환히 밝아져야 비로소 죽을 먹게 되며, 그렇지 않으면 파재(破齋)이다. 무엇을 환히 밝을 때라 하는가? 『살바다론(薩婆多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밝은 모양에는 세 가지 빛이 있다. 만일 해가 염부제(閻浮提)의 나무에 비치면 검은 빛이 있게 되고, 만일 나무의 잎에 비치면 푸른빛이 있으며, 만일 나무의 잎을 지나가게 되면 흰빛이 있게 된다. 이 세 가지 빛 가운데서 흰 빛이 바로 환히 밝을 때이니, 비로소 해재할 수 있고 죽을 먹을 수 있다.
게송을 읊는다.

달마다 맑은 재(齋) 세우게 되면
좋은 날마다 끝없는 복을 부르나니
4부중(部衆)은 이 때에 모이게 되고
7중(衆)은 모여서 법당에 오른다.

조용히 청아한 범패(梵唄)가 일어나면
슬퍼하듯 애원하듯 궁상(宮商)이 울리며
향기는 허공 위로 올라가
바람 타고 먼 데로 흩어져 간다.

덕(德)을 찬탄하며 깊은 이치 연구하여
말로써 오묘한 향내를 펴며
번뇌 씻고 묘한 구절을 바치면
때가 되면 아름다운 글이 터진다.

승속[緇素]이 서로 의탁하면서
재물[財]ㆍ법(法)의 보시로 신령한 빛 일으키매
복 밭이 이 저녁에 가득히 차고

그 은혜 존(存)과 망(亡)을 세우누나.

감응연(感應緣)[대충 네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동진(東晋) 사문(沙門) 법현(法顯)
송(宋)나라 사문 승가달다(僧伽達多)
송(宋)나라 거사(居士) 곽전(郭銓)
고제(高劑)의 사문 보공(寶公)

동진(東晋) 사문(沙門) 법현(法顯)
동진(東晋)의 서주(徐州) 오사(吳寺)에 모셔 있는 태자 사유상(太子 思惟像).
옛날 진(晋)나라 사문 법현(法顯)이 굳은 지조를 힘쓰면서 서천(西天)의 성인이 계시던 자취를 돌아다닐 때였다. 한 절에 들렀더니 온 대중이 영접하였다. 법현이 그 때에 마침 병을 앓게 되자 주인 상좌(上座)가 몸소 간병해 주면서 사미에게 객스님을 위하여 본국으로 가서 음식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자 잠깐 동안에 갔다 돌아오는데 다리에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면서 말하였다.
“팽성(彭城)의 오창응(吳蒼鷹)의 집으로 가서 밥을 구걸하다가 개에게 물렸다.”
법현은 그가 수만 리 밖을 얼마 되지 않는 동안에 갔다 오는 것을 괴이히 여기다가, 그제야 절에 계신 스님들이 다 보통 사람들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뒤에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일부러 팽성으로 가서 오창응을 방문하여 그에게 그런 일을 자세히 물어 보았더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대답하면서 아직도 문에 피가 칠해진 것을 가리켜 보였다. 그 때에 법현은 말하였다.
“이것은 아라한이신 성인의 피입니다. 그 때에 음식만 구걸했을 터인데 어째서 다치게 하셨습니까?”
창응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럽고 또 한편 죄송해서 곧 그 집을 절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이 양도(楊都)로 가서 모든 경전과 불상을 구하기 위해 떠났다. 마침 강 한중간을 건너가고 있는데 배가 한쪽으로 기울더니 갑자기 길이가 한 길[一丈]씩이나 되는 두 개의 뼈가 물결을 따라 올라와 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물결은 잔잔해져서 저 언덕까지 건너왔다. 이 일을 임금에게 아뢴 뒤에야 용의 이[龍齒]임을 알았다.
창응은 아직도 불상을 구하지 못했으므로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서 잠시 동안 숲 사이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한 바라문승(婆羅門僧)이 불상을 모시고 가는 것을 만났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서주로 가서 오창응에게 공양할 것입니다.”

창응이 말하였다.
“틀림없이 말씀대로라면 제자가 바로 오창응입니다.”
창응은 그 승려가 불상을 곧 건네 주었으므로 모시고 돌아와 서울에 도착했다. 그때에 임금은 영을 내려서 똑같은 불상 10구(軀)를 조성한 뒤에 발 밑에다 ‘남들은 새 불상과 옛 불상에 대하여 말을 하지 말라’고 새겨 놓고는 창응 한 사람으로 하여금 혼자 그 본래의 불상을 찾아내게 하였다. 창응은 본래의 불상이 꿈에 그 본래의 모습을 지시해 주셨으므로 바로 맞추어서 도로 찾아냈다. 그 본래의 불상이 동쪽 서주로 돌아갈 때에는 매양 신령한 광명을 놓으셨다. 원위(元魏) 효문제(孝文帝)가 청하여 북대(北臺)에다 모셨고, 고제(高劑) 후주(後主) 때에 사신 상표지(常彪之)를 파견하여 업(鄴) 아래로 모시게 했다. 제(齋)나라가 멸망하고 주(周)가 폐멸하자 스님들이 몰래 감추었고, 수나라가 교법을 열 때에 도로 광영이 거듭 드러나게 되었다. 지금 상주(相州)의 대자사(大慈寺)에 모셔져 있다.[이 한 가지 증험은 『진사잡록(晋史雜錄)』에 나온다.]

송(宋)나라 사문 승가달다(僧伽達多)
송(宋)나라 경사(京師) 도림사(道林寺)에는 사문 승가달다(僧伽達多) 등이 있었다. 다 같이 경론(經論)에 널리 통달했으나 너무 참선을 업으로 삼는 것에 치우쳐 있었다. 원가(元嘉)의 초에 송나라 지경을 유행할 적에 승가달다는 항상 산중에서 좌선하고 있었다. 시일이 다가왔으므로 생각에 재(齋)를 받으려고 하는데 새 떼들이 과일을 물고 날아와서 그에게 주었다. 그래서 승가달다는 생각하기를, ‘옛날 원숭이가 꿀을 바치자 부처님께서도 받아 잡수셨다. 이제 나는 새들이 음식을 주는데 무엇 때문에 안 받아 먹겠느냐’ 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다.[이 한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송(宋)나라 거사(居士) 곽전(郭銓)
송(宋)나라 순양(順陽)의 곽전(郭銓)은 자(字)가 중형(仲衡)이며 진(晋)나라의 익주 자사(益州刺使)였다. 죽은 지 30여 년 후에 갑자기 몸을 나타내어 남양(南陽)에 사는 사위 유응지(劉凝之)의 집에 왔다. 수레의 호위가 대단했는데 그는 응지에게 말하였다.
“내가 귀양갈 일이 생겼네. 나를 위하여 서른 분의 스님을 모셔다 재회(齋會)를 베풀어 주게. 그래야 면할 수 있네.”
그런 말을 하고는 그만 보이지 않았다. 유응지는 도깨비의 장난이라 여기면서 뜻에 두지 않았다. 그 후에 곽전은 또 딸의 꿈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내가 귀향을 가서 벌을 받게 되어 있어서 이미 사위에게 재회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했었다. 좀 도와줄 수 없느냐?”
이런 꿈을 꾸고 딸은 새벽에 일어났더니, 곽전이 나타나 문 밖을 지나가면서 성을 내면서 말하였다.
“끝내 구제받지 못해서 이제는
죄를 받으러 가는 길이다.”
딸이 뛰어가서 아버지를 불러 멈추게 하고는 물었다.
“어디서 재회를 베풀어야 합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우리 집으로 가서 하면 된다.”
그리고는 홀연히 또 사라져버렸다. 그리하여 유응지는 곧 허겁지겁 공양을 마련하여 재를 베풀었다. 재회가 끝나자 어떤 사람이 곽전의 전갈이라 하면서 응지에게 이런 말을 들려 주었다.
“자네의 두터운 은혜로 비로소 용서를 받았네.”
이런 말을 한 그 뒤부터는 아무 일도 없어졌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고제(高劑)의 사문 보공(寶公)
고제(高齊) 초의 사문 보공(寶公)은 숭산(嵩山)에서 속세를 떠나 조용히 사신 분이었다. 아침에 임려(林廬)로부터 백록산(白鹿山)을 향해 가다가 길을 잃어버렸는데 해가 사시(巳時)쯤 되었을 적에 갑자기 종소리가 들렸으므로 그 소리를 따라 나아갔다. 바위와 바위굴에 거듭 막혔으나 계속 타고 올라갔는데 그러다가 하나의 절이 나타나서 깊은 숲에 홀로 자리잡고 있었다. 세 개의 문은 정남(正南)이었고 빛이 번쩍거렸다. 더 앞으로 문 있는 데까지 가서 현판을 보았더니 영은지사(靈隱之寺)라고 쓰여 있었다. 문 밖에는 대여섯 마리의 개가 있었고 그 크기는 마치 소와 같았다. 흰털에 검은 부리였으며 혹은 뛰놀기도 하고, 혹은 누워 있으면서 보공을 곁눈질하여 보기도 했다. 보공은 두려운 생각이 나서 돌아가려는 참이었는데 그 순간 호승(胡僧)이 밖에서 들어 왔다. 그래서 보공이 그를 불러 보았으나 아무 대답 없이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으며 개들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한참 있다가 보공은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다가가서 다음 문으로 들어갔다. 집의 사방 주위에는 방문들이 모두 닫혀져 있었으며 곧장 그대로 가니 강당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높고 장엄하게 생긴 걸상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보공은 서남쪽의 모퉁이로 들어가 걸상 위에 앉았다. 그런 지 한참 되었는데 갑자기 기둥 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쳐다보았더니, 거기에는 샘 크기만큼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때 비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멍을 통하여 날아 내려왔다. 마침내 5,60인쯤 되었으며, 자리를 찾아 앉은 뒤에 서로에게 물었다.
“오늘 끼니때에는 어디서들 잡수시고 오셨습니까?”
그러자 어떤 이는 예장(豫章)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성도(成都)라 하기도 하고, 혹은 장안(長安)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농서(隴西)라 하기도 하고, 혹은 우계(右薊)라 하기도 하고, 혹은 북령(北嶺)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남방의 5천축(天竺)이라 하기도 하였다. 모두가 가지 않은 데가 없었으며 갔다 온 곳도 곧 천리 만리가 되었다.
제일 마지막에 한 스님이 공중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다투어 물었다.
“어째서 그리 늦으셨소?”
그 스님이 대답하였다.
“오늘
상주성(相州城) 동쪽 피안사(彼岸寺)에서 감 선사(鑒禪師)가 강(講)하는 법회가 있었는데 저마다 이치를 들고 나와 논의하였습니다. 후생(後生)들이 아주 총명하고 걸출하여서 힐문하고 있었는데 말이나 뜻이 날카로웠습니다. 자못 가관(可觀)이었으므로 모르는 결에 그만 늦어버렸습니다.”
보공은 본래 감 선사를 화상(和尙)으로 섬겼던 터라 이런 말을 듣고 말참견도 할 겸, 그가 감 선사의 큰 제자임을 알리기 위하여 옷을 바로 잡고 일어나서 여러 스님들에게 말하였다.
“감 선사가 바로 저의 화상이십니다.”
그러자 모든 스님들이 똑바로 한참 쏘아보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서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오직 보공 혼자만이 떡갈나무 아래 있는 넓고 평평한 큰 돌 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까까지 있던 절집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며 바위와 골짜기만이 있었다. 날짐승들이 날아와 시끄럽게 지저귀었으므로 마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거기서 나온 뒤에 그것을 상통(尙統) 법사에게 물었더니, 상통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절은 조(趙)나라 때에 불도징(佛圖澄) 법사께서 지은 곳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성현들이 살고 계시며 범부들이 사는 곳이 아니랍니다. 그리고 나타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옮기며 일정한 곳에 없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산으로 가면 아직도 종소리를 듣는다 한다.[이 한 가지 증험은 『후군소정이기록(侯君素旌異記錄)』에 나온다.]


90. 파재편(破齋篇)[여기에는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생각건대 덧없고 괴롭고 공(空)하므로 생기는 슬픔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우환을 생각하게 한다. 오랜 세월 동안 거꾸로 매달린 고통을 슬퍼하고 보잘것없이 함정에 빠졌음을 서러워하나니, 그를 생각만 해도 아프고 쓰라리며 또한 몹시 두렵다. 진실로 복전(福田)이 가볍고 얇으면 신시(信施)를 녹이기 어렵고 재계가 견고하지 못하면 그 일은 굽지 않은 흙 병[坏甁]과 같으니, 깨지기는 쉽고 지니기도 어려우며 또 서리와 이슬과도 같은데,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은 더욱 왕성하여 그 집착은 아교와 칠보다 더욱더 굳다. 오랜 겁의 재앙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다만 한 몸의 목숨만을 근심하고 있는데, 그런 까닭에 배불리 먹고 오래도록 잠자고 있으니, 개ㆍ돼지와 무엇이 다르랴. 재를 깨뜨리고 밤에 먹는 것은 아귀의 갈래와 다름이 없나니, 이 때문에 시주(施主)는 때에 알맞은 복을 잃게 되고 중승(衆僧)은 좋은 밭의 종자를 손상하게 된다.


(2) 인증부(引證部)
『사리불문경(舍利弗問經)』에서 말하였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모든 단월들이 상가의 가람(伽藍)을 짓고 후히 살림을 대면서 오가는 스님들께 공양을 하거니와 형상만으로 출가한 어떤 스님은 때 아닐 적[非時]에 남이 걸식해서 맡겨 놓은 밥을 먹는데, 주어서 먹게 하는 이와 먹는 이는 어떠한 죄를 얻게 되나이까? 그리고 그 본시의 단월은 어떠한 복을 받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때 아닐 적에 먹는 이는 바로 파계한 사람이요, 이는 도계(盜戒)를 범하는 사람이다. 때 아닐 적에 주는 이도 역시 파계한 사람이요, 역시 도계를 범하는 사람이다. 단월의 재물을 훔친 것이요, 이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진 것이니, 시주의 뜻이 아니다. 시주에게도 복이 없음은 재물을 잃었기 때문이니, 오히려 발심(發心)이 있어도 그대로 놓아두고 세워두는 선(善)일 뿐이니라.’
사리불이 말하였다.
‘때에 받고 때에 먹다가 다 먹지 못한 이가 때 아닐 적에 다시 먹거나, 혹은 어떤 이가 때에 받아서 때 아닐 적에 먹게 되면 모두 복을 얻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때와 먹는 것이 청정하면 이것이 곧 복전이요, 이것이 곧 출가요, 이것이 곧 상가요, 이것이 곧 하늘과 인간의 좋은 벗이요, 이것이 곧 하늘과 인간의 길잡이이거니와, 그것이 청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파계가 되어서 이것은 대겁(大劫)의 도둑이요, 이것은 곧 아귀요, 죄의 굴 집[窟宅]이니라.’
때 아닐 적에 밥을 찾는 이나, 때와 때 아닐 적에 주어서 이를 먹게 한 이도 도에서 물러난 이라 하니 이것을 악마라 하고, 이것을 3악도라 하고, 이것을 깨진 그릇이라 하고, 이것을 나병(癩病)에 걸린 사람이라 하나니, 좋은 결과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는 걸식한 것을 훔쳐서 스스로 생활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모든 바라문조차도 때 아닐 적에는 먹지 않고, 외도 범지조차도 삿된 생활로써 먹지 않거든 하물며 나의 제자로서 법을 알고 법을 행하는 이가 그러할 수 있겠느냐? 무릇 이와 같은 이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이는 나의 법과 이익을 훔치고 도리에 어긋난 일에 집착하는 사람이니, 이를 밥을 훔쳐 먹는 법답지 못한 사람이라 하느니라.
훔쳐서 주고 훔쳐서 받는 한 덩이, 한 움큼의 음식이나 한 조각의 소금과 한방울의 초[酢]라 해도 모두 죽으면 장을 태우는[燋腸] 지옥에 떨어져서
이글거리를 철환(鐵丸)을 삼킬 것이요, 그 지옥에서 벗어나면 돼지와 개로 나서 모든 부정한 것을 먹게 된다. 또 나쁜 새로 나서 사람들은 그의 소리를 괴상히 여기며, 그 뒤에는 아귀로 나서 가람(伽藍) 안으로 돌아와 뒷간에 있으면서 백천만 년 동안 더러운 찌꺼기를 먹고 있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지만 가난하고 하천하여 사람들이 버림과 미움을 받으며, 사람들이 신용하지 않는 것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느니라. 차라리 한 사람의 물건을 훔친 죄가 오히려 가볍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것을 빼앗았기 때문이요, 어진 복전이었기 때문이며, 출세간의 도[出世道]를 끊었기 때문이니라.’”
또 『건타국왕경(揵陀國王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실 때였다. 당시 건타(揵陀)라고 하는 국왕이 있었으며 바라문을 받들어 섬기고 있었다. 그 바라문은 산중에 살면서 과일 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당시 어떤 나무꾼에 의하여 그 과일나무가 훼손되었다. 바라문을 그것을 보고 곧 데리고 왕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버릇없이 나의 과일나무를 훼손해버렸소. 왕은 죄를 다스려서 죽이십시오.’
왕은 바라문을 공경히 섬긴 터라 감히 어기지 못하고 곧 그를 죽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소가 남의 벼를 먹다가 그 주인에게 맞아서 그의 뿔 하나가 부러졌다. 피가 흘러서 얼굴이 범벅이 되고 그 아픔은 참을 수가 없었으므로 소는 왕에게로 가서 아뢰었다.
‘제가 실로 버릇없이 이 사람의 벼를 조금 뜯어먹었습니다만 그렇다 하여 저의 뿔을 분질러버렸습니다.’
그 때 벼의 주인도 역시 따라와서 왕의 처소에 와 있었다. 왕은 새와 짐승의 말을 알아들었으므로 왕은 소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를 위해서 그를 죽이겠다.’
소가 곧 대답하였다.
‘지금 비록 이 사람을 죽인다 하더라도 역시 저로 하여금 아프지 않게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간단하게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만 명하여 주십시오.’
왕은 소의 이 말에 감동하여 생각하였다.
‘내가 섬긴 바라문은 과일나무가 좀 훼손되었다 하여 나로 하여금 사람을 죽이게 했으니, 이 소보다도 못할 터인데 무엇 때문에 그의 도를 믿겠느냐?’ 그리고는 곧 부처님께로 가서 온몸을 땅에 던져 예배하면서 말하였다.
‘원하옵건대, 5계와
10선(善)을 받게 해 주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시(布施)와 지계(持戒)는 현세에 복을 얻는 것이요, 인욕(忍辱)과 정진(精進)과 선정[一心]과 지혜(智慧)는 그 복이 한량없어서 후세에 천상에 가서 태어나느니라.’
그러자 왕은 기뻐하면서 수다원(須陀洹)의 도를 얻었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왕과 소는 본래 어떠한 인연이 있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부처님 때에 왕과 이 소는 형제였고 우바새였다. 함께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 재계를 지니다가, 왕은 법을 지켜 정진하여 감히 게으르지 않았으므로 목숨을 마친 뒤에 천상에 오르고, 천상의 수명이 다한 뒤에는 내려와 국왕이 되었거니와, 소는 그 때에 재를 범하여 밤에 밥을 먹었으므로 뒤에 그 죄를 받고, 죄를 마친 뒤에는 5백 세상 동안 소가 되었다. 그러나 전생에 앎이 있었기에 일부러 와서 왕의 뜻을 깨우쳐 준 것이니, 소도 7일 후에는 목숨을 마치고 천상에 가 날 것이니라.’
그리고 나서 부처님께서 거듭 말씀하셨다.
‘4배(輩)의 제자들은 재계를 받아 지니면서 범하지 말 것이니라.’”
또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祈樹給孤獨園)의 정사(精舍)에 계시면서 하늘과 사람과 용과 귀신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계실 때였다.
동방에 울다라파제(鬱多羅波提)라는 나라가 있었고 거기에 바라문들 5백 명이 있었다. 서로 함께 항하(恒河) 물가에 있는 3사신(祠神)의 못에 가서 때를 깨끗이 씻고 벌거숭이가 되어 신선이 되고자 했으니, 마치 니건(尼揵)의 법과 같았다. 그들이 가는 길은 진펄을 경유하게 되어 있는데 잘못 들어서 길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중도에 먹을 양식까지 떨어졌다. 그들이 멀리서 하나의 큰 나무를 바라보매 마치 신령한 기운이 있는 듯이 보여서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므로 그 나무 아래로 달려가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바라문들은 소리 높여 크게 울었다. 그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쳐 있었으므로 이 진펄에서 영락없이 죽게 되었다. 이때 수신(樹神)이 몸을 나타내며 범지들에게 물었다.
‘도사들은 어디서 오며,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그들은 소리를 같이 하여 대답하였다.
‘신령한 못에 가서 깨끗이 목욕하고 신선이 되려고 합니다. 지금 배고프고 목이 말라 있으니 가엾이 여기셔서 구제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수신은 손을 들어서 온갖 맛있는 음식을 손에서 흘러 넘치도록 그들에게
먹고 마시게 하였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음식은 길 갈 때에 먹을 양식으로 충분히 받았다. 그들은 떠나려고 하면서 신에게 가서 물었다.
‘본래 어떠한 덕을 닦으셨기에 이렇게도 신력이 뛰어나십니까?’
수신은 범지들에게 대답하였다.
‘내가 본래 살던 곳은 사위국입니다. 당시 수달(須達)이라는 대신이 있었는데,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을 하려고 저자에 가서 타락[酪]을 샀으나 타락을 가져올 이가 없자 나에게 삯을 주고 가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정사에 도착해서는 나를 시켜 따르게 했는데 다 따른 뒤에는 씻을 물을 돌리고 그대로 있으면서 법을 들었습니다. 모두가 기뻐하면서 한량없이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재(齋)를 받들고 저물녘에 돌아왔으나 밥을 먹지 않자, 아내가 괴이하게 여기면서 나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한이 되는 일이 있으십니까?≻
≺한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장차 수달이 동산에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을 보았고, 나를 청하여 재에 갔었는데, 그 재의 이름은 8관재(關齋)라 합니다.≻
그러자 아내는 벌컥 성을 내면서 말하였다.
≺구담(瞿曇)은 세속을 어지럽히고 있거늘 어찌 그를 받아들인다는 말이오. 당신이 밥을 먹지 않으면 재앙은 그로부터 생길 겁니다.≻
그리고 아내가 너무도 정겹게 다그쳤으므로 그만 함께 밥을 먹어버렸습니다. 나는 그 밤으로 수명이 다하여 밤중에 죽어서 혼신이 여기 와서 났습니다. 어리석은 아내 때문에 나의 재법이 깨뜨려졌고 그 업은 가볍지 않아서 이 진펄에 와서 수신이 되었으며 타락을 가지고 간 복으로 손에서는 음식이 나옵니다. 만일 재법을 끝냈더라면 응당 천상에 나서 부자가 되어 저절로 흡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게송을 읊었다.
제사를 지내도 재앙의 뿌리를 심어서
밤낮으로 가지와 줄기를 자라게 하는구나.
헛되이 하는 고행(苦行)은 몸의 근본을 부수지만
재법(齋法)은 세간을 제도하는 신선일세.”

또 『백연경(百緣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초야(初夜)에 5백의 천자(天子)들이 향과 꽃을 가지고 광명을 번쩍거리며 기원림(祇洹林)을 비추면서 부처님께로 와서 예배한 뒤에 물러나 앉았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시니 모두가 수다원과를 얻고 부처님을
세 번 돌고 도로 천궁(天宮)으로 갔다. 그 날 새벽에 아난이 모든 천자들이 온 인연을 묻자,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지나간 세상, 가섭불(迦葉佛) 때에 두 바라문이 국왕을 따라 부처님께 와서 예배하고 문안하였다. 그 때 그 일행 중의 한 우바새가 두 바라문에게 권하여 함께 재법을 받았다. 그 중 한 분은 하늘에 나기를 구하였고, 또 한 분은 인간의 국왕이 되기를 구하면서 받은 뒤에 다 함께 바라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 때에 모든 바라문들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배고프실 터이니, 함께 음식을 드십시다.≻
이렇게 은근히 여러 번 권하자, 그들의 뜻을 거절하지 못하고 천상에 나기를 구하는 이는 음식을 먹었다. 결국 재를 깨뜨렸기 때문에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나중에 목숨을 마치면서 용의 세계에 가서 났다. 음식을 먹지 않은 이는 국왕이 될 수 있었다.
그 용은 전생에 함께 재를 받았기 때문에 그 국왕의 동산에 있는 못 안에 살았다. 당시 동산지기는 날마다 늘 좋은 과일을 국왕에게 바치고 있었는데, 못 속에서 빛과 향기가 아주 좋은 한 개의 맛있는 과일을 얻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출입할 때에는 항상 저 문감(門監)의 눈에 뜨이게 되므로 나는 이 과일을 그에게 선사해야겠다.≻
그가 과일을 갖다 주자 문감은 그것을 받고 다시 생각하였다.
≺내가 출입할 때에는 항상 내시(內侍)의 눈에 뜨이게 되므로 나는 이 과일을 그에게 선사해야겠다.≻
그가 과일을 갖다 주자 내시는 받고 나서 생각하였다.
≺부인께서 나를 위하여 늘 대왕에게 나의 덕을 칭찬해 주시니, 나는 이 과일을 부인에게 선사해야겠다.≻
그가 과일을 갖다 주자 부인은 그것을 받은 뒤에 대왕에게 올렸다. 왕은 과일을 받아서 먹어보더니 아주 향기롭고 맛이 있었으므로 곧 부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 과일을 어디서 얻어 오셨습니까?≻
그러자 부인이 즉시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저는 내시에게서 얻었습니다.≻
이렇게 차츰차츰 규명해 나가다가 동산지기에 이르렀다. 왕은 곧 그를 불러서 물었다.
≺나의 동산 안에 이렇게 맛있는 과일이 있었거늘 어째서 보내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었느냐?≻
동산지기가 그 본말(本末)을 자세히 설명하였으나 왕은 곧이 듣지 않고 그에게 말하였다.
≺지금부터는 늘 이 과일을 보내라. 만일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너를 죽이리라.≻
동산지기는 돌아와 그 동산 안에 들어가 소리내어 울면서 말했다.
≺이 과일은 종자가 없는데 어떻게 얻는다는 말인가?≻
그가 어쩔 줄 모르고 있자. 이때 그 용왕은 그의 울음 소리를 듣고 변화로 사람 몸이 되어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동산지기는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그러자 용은 그의 말을 듣고 도로 물 속으로 들어가 그 좋고 맛있는 과일을 금으로 된 소반 위에 얹어서 동산지기에게 갖다 주면서 말하였다.
≺당신은 이 과일을 왕에게 올리십시오. 그리고 아울러 나의 뜻을 전하면서 이런 말을 해 주십시오.
나와 국왕은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본래 친한 벗이었고 함께 범지로 있으면서 같이 8재계(齋戒)를 받았습니다. 저마다 소원을 구하다가 당신은 계가 온전하였기에 국왕이 될 수 있었지만 나는 계가 온전하지 못하여 이 용으로 태어났습니다. 나는 이제 도로 재법을 받들어서 이 몸을 버리고자 하니, 원컨대 왕은 나를 위하여 8관재문(關齋文)을 구하여다 나에게 주십시오. 만일 어기신다면 나는 당신 나라를 온통 큰 바다로 만들어버리겠습니다.≻
동산지기는 과일 소반을 받아서 왕에게 바친 뒤에 다시 용이 부탁하던 말을 하였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나서 아주 언짢아하였다. 그 당시에는 불법이라고 하는 이름도 없었으므로 하물며 다시 8관재문이 있을 수 있었겠느냐? 만일 그 일을 이루지 못하면 위해를 당할까 두려웠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룰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당시 국왕에게는 가장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한 대신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말하였다.
≺용이
나에게 8관재문을 구하고 있으니, 경(卿)이 좀 얻어다 주십시오.≻
대신이 대답하였다.
≺지금의 세상에는 불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왕이 다시 말하였다.
≺그대가 만일 얻어다 주지 않으면 나는 반드시 경을 죽이겠소.≻
대신은 왕의 말을 듣고 나서 물러나 집으로 왔으나 얼굴빛이 변하면서 근심과 고뇌에 쌓이게 되었다. 당시 대신에게는 연세가 많은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는 밖에서 들어오는 아들의 얼굴빛이 평소와 다른 것을 보고 물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동안의 사실을 자세히 설명해 드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우리 집 기둥에 광명이 있는 것을 보았다. 너는 그것을 베어 쪼개 보아라.≻
대신이 시험삼아 베어서 쪼개 보았더니, 경전 두 권이 나왔다. 한 권은 바로 12인연(因緣)이었고, 한 권은 바로 8관재문이었다. 대신은 이 경을 얻고 나서 매우 기뻐하면서 금 소반에다 올려 왕에게 바쳤다. 왕도 경을 얻고 나서 하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는 용왕에게 보내주자 용왕은 그것을 받은 뒤에 아주 기뻐하면서 값진 보물을 왕에게 선사하였다.
그리고는 용은 있던 데로 돌아와 5백의 용자(龍子)와 함께 부지런히 힘쓰면서 8관재의 법을 받들어 닦았다. 그 뒤에 목숨을 마치고는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고, 그 하늘들이 와서 나에게 공양한 것이니, 바로 그 광명이었느니라.’
부처님께서 이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 재법을 받들어 닦은 5백의 용자를 알고 싶으냐? 바로 지금의 5백 천자가 그들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인연을 말씀하실 때에 네 가지 사문의 과위[四沙門果]를 얻은 이들도 있었고, 위없는 보리심을 일으킨 이들도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또 『유교법률(遺敎法律)』에서 말씀하셨다.
“‘만일 출가한 사람이 1일을 수레와 말을 타면 5백일의 재를 없애고, 1년 365일을 타면 18만 일의 재를 없애버린 셈이 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물었다.
‘무엇 때문에 비구가 수레나 말을 타면 5백 일 동안의 재를 없애게 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는 바로 계율을 아는 사람이므로 다른 이들이 보고 비방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죄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다만
늙고 병든 이가 잠시 타는 것만은 범한 것이 아니니라.’[ 【문】 어째서 속인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가? 【답】 출가한 이는 청정하고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지만 속인은 흐리고 지저분하고 늘 죄를 짓고 살육을 보통으로 여긴다. 어찌 경중(輕重)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보면서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게송을 읊는다.

탐심(貪心)으로 만족하는 일 없고
복(福)과 선(善)을 일찍이 근심한 일 없으며
오로지 맛있는 음식만을 구하면서
배불리 먹으며 부끄러워함이 없다.

흐린 번뇌 완전히 씻지 못하고
마음의 때(垢)를 어찌 제거할 수 있으랴.
재를 깨뜨려 항상 밤에 먹으면
신시(信施)를 저버려 녹이기 어려우리.

세월은 유구한데 목숨은 짧고
업(業)을 재촉해서 어둠 속에서 논다.
4류(流)의 바다를 떠돌아다니면
6도(度)의 배를 만나기 어려우리.

작은 악(惡)도 오히려 고치지 못하면서
큰 선(善)을 어찌 닦을 수 있겠는가.
동산의 못에 있는 용과 같은 무리거늘
어찌 높은 상류(上流)에 오를 수 있으랴.”

감응연(感應緣)[대략 세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진(晋)나라 손치(孫稚)
제(齊)나라 왕씨(王氏)
당(唐)나라 이사일(李思一)

진(晋)나라 손치(孫稚)
진(晋)나라 손치(孫稚)는 자(字)가 법휘(法暉)이며 재국(齋國) 반양현(般陽縣) 사람이다. 아버지 조(祚)는 진나라 태중대부(太中大夫)였다. 치는 어려서부터 법을 받들었는데, 나이 18세가 되는 함강(咸康) 원년(元年) 8월에 병이 들어 죽었다. 조는 그 뒤에 무창(武昌)으로 이사갔다. 3년 4월 8일에 사문 우법계(于法階)가 불상을 봉송하면서 집 문 앞을 지나갔으므로 그 부부와 집안 모두가 나가서 구경하고 있었다. 치 역시 사람들 가운데 어울려서 불상을 모신 이들을 따라갔다. 그러다가 부모를 보게 되자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아 문안을 드렸다. 그런 뒤에 부모를 따라서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조는 얼마 전부터 병을 앓고 있었는데 치는 말하였다.
“재앙이 모이게 됨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수호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5월에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직하고 떠나갔다. 그 해 7월 15일에 다시 돌아와 엎드려 절하고 문안하였는데 모두가 생시(生時)와 같았다. 그리고는 이런 말도 하였다.
“외조부(外祖父)께서 태산부군(太山府君)이 되셨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어머니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네가 아무개의 아들이 아니냐. 아직 올 때가 못 되었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왔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답하기를 ‘백부(伯父)께서
대신 벌을 받게 하려고 저를 데리고 왔는데 이유를 캐어물었더니, 가죽채[鞭]로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변명해 드려서 용서를 받게 했습니다.”
치의 형 용(容)의 자(字)는 사연(思淵)이었는데, 그 때 그의 곁에 있었다. 치는 그에게 말하였다.
“비록 옛 몸은 여의었다 하더라도 아직 낙(樂)을 누리고 있습니다. 독서만 하고 있을 뿐 다른 원은 없습니다. 형은 다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다만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선행을 닦는 데에 생각을 두십시오. 복은 스스로 사람을 따르는 것입니다. 저는 2년 동안 배움이 성취되면 국왕의 집에 날 것입니다. 같은 또래가 5백 인이나 되는데 지금 복당(福堂)에 있습니다. 배움이 성취되면 모두가 제6천상으로 가서 태어날 것입니다. 저도 본래 천상에 가서 태어나게 되어 있지만 다만 선조(先祖)들을 변호해주는 인연에 얽매여 있어서 그 때문에 저 혼자만이 왕가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5년 7월 7일이 되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주성(邾城)에 장차 외적(外敵)의 난(難)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해 주었으며, 그 밖의 사례도 아주 많았으나 모두가 다 말대로 되었다. 집안 사람들이 그것을 감추고 일부러 전하는 이가 없었다.
또 그는 말하였다.
“선조들에게는 많은 죄가 있으니, 의당 그 분들을 위하여 복을 지으셔야 합니다. 저는 이제 인간의 몸을 받게 될 것이므로 다시는 오고 가고 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다만 선조님들을 구제하는 일 뿐입니다. 부형들께서는 부지런히 공덕을 위해 복을 지으십시오. 공양할 때에는 힘써 깨끗하게 하시고 하나하나 법답게 하시면 으뜸가는 복을 받을 것이며 그 다음이면 그 다음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그러할 수 없다면 한갓 쓸데없이 베풀 뿐입니다. 마땅히 평등한 마음으로 나와 남을 분별하는 마음이 없게 해야 그 복이 많습니다.”
조에게는 당시 여종이 있었다. 치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을 때 갑자기 병이 들어서 거의 죽을 정도로 온몸이 모두 아팠다. 치가 말하였다.
“이 여종이 배반하려 했으므로 제가 전에 매를 좀 때렸습니다. 다시는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치가 여종에게 묻자 그녀가 대답하였다.
“전에는 실로 배반하려고 남들과 모의를 했습니다. 기일(期日)이 거의 다가왔지만 그대로 머물러 있겠습니다.”

제(齊)나라 왕씨(王氏) 사랑(四娘)
제(齊)나라 왕씨(王氏)의 이름은 사랑(四娘)인데, 영명(永明) 3년에 병이 들어서 죽었다. 시체를 땅에다 내려놓고 염하던 이가 그의 심장이 따뜻함을 깨닫고 일부러 파묻지 않고 있었는데 이틀 밤을 지나자 몸에 차츰 따스한 기운이 돋더니 숨이 점점 돌아왔다. 한참 있다가
말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어떤 두 사람이 맡아서 나를 데리고 가는데 하나의 큰 문에 이르렀다. 그 때 한 사문이 의자[胡床]에 걸터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어떻게 해서 왔느냐?’
그리고는 그 두 사람을 나무라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사람을 잘못 잡아왔구나.’
그들을 각각 채로 40대를 때리고 나에게 말하였다.
‘낭자(娘子)는 돌아가십시오.’
내가 대답하였다.
‘아까 오던 길이 어슴푸레해서 길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시켜 길을 좀 가리켜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사문은 곧 한 사람에게 명하여 호송하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았을 때에 나보다 먼저 죽은 남종이 높은 누각 위에 기대 있다가 깜짝 놀라면서 사랑에게 물었다.
‘어째서 갑자기 여기에 오셨습니까? 신부(新婦)를 만나고 싶습니까?’
‘어디 있는 줄 모르겠네. 좀 불러서 보내 주게.’
그가 말하였다.
‘보내줄 수는 없습니다. 사랑께서 가 보십시오. 앞으로 가시다가 서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개의 말채찍을 그에게 던져 주면서 말하였다.
‘이 채찍을 꽉 잡고만 가면 저절로 길이 알아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몇 리를 가다가 신부를 만났는데, 그는 곧 나의 올케였다. 한창 괴로운 벌을 받으면서 4체(體)는 온통 모래 섞인 흙에 묻혀 있었다. 마치 거위와 오리에게 옷을 입혀서 길 곁에 매달아 놓은 것과 같았다. 서로가 보자마자 슬피 울었다. 그 올케는 이런 말을 하였다.
‘살아 있을 적에 죄를 지어서 지금 이런 모진 고초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을 굽혀서 뺨에다 대고 도와줄 것을 애걸하려 하는데도 손이 오그라져 있어서 뺨까지 닿지 못하였다.
또 좌우에서 고통받은 소리만 들릴 뿐 형상들은 보이지 않았으므로 내가 물었다.
‘이것이 무슨 소리들입니까?’
그녀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바로 수행하지 않았던 스님들이니, 재를 깨뜨리고 계를 범했으므로 이런 괴로운 과보를 받으면서 울부짖는 소리들이오.’
그리고 길을 따라서 돌아오는데 순식간에 집에 닿았다. 나의 시체를 보매 아주 미운 생각이 들어서 도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자, 모르는 결에 어떤 사람이 나를 밀쳐서 넘어뜨렸다. 그제야 몸으로 들어가 차츰 소생하였다.”
이 사람은 지금 편안하게 아직도 살고 있다.[이 두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당(唐)나라 농서(隴西) 이사일(李思一)
당(唐)나라 농서(隴西)의 이사일(李思一)은 지금 상주(相州)의 부양현(滏陽縣)에 살고 있다. 정관(貞觀) 20년 정월에 이미 죽었다가 하루가 지나서 소생했다는 말이
『명보기(冥報記)』에 기재되어 있다. 영휘 3년 5월에 또 죽었는데 하룻밤을 지나 소생하고서는 이런 말을 하였다.
“아직 명이 다하지 않아서 왕이 돌려 보내주었다. 그런데 왕 앞에서 상주 부양현의 법관사(法觀寺) 스님 변규(辯珪)를 보았으며 또 회복사의 스님 홍량(弘亮)과 혜보(慧寶)도 보았다. 이 세 분은 모두 왕 앞에 있었다. 변규가 명관(冥官)을 보면서 대답하였다.
‘혜보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의당 공덕을 닦아야 합니다만 변규와 홍량은 금년에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고 했다.”
변규 등은 과연 그 해에 잇달아 죽었다. 그 뒤에 그 절 스님이 한 무당으로 하여금 홍량 등의 옛 방으로 가서 두 스님을 불러 놓고 묻게 하였더니, 변규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재를 깨뜨렸기 때문에 지금 큰 고통을 받고 있다.”
그리고는 겸하여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를 위해 재를 지내 주어서 이 고난을 구제해 달라.”
그래서 제자들이 곧 그를 위해 재를 지내 주었다. 무당이 다시 말하였다.
“변규는 이미 죄를 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홍량이 말하였다.
“나는 재를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겸하여 남들의 장단점을 말했으므로 지금 혀를 뽑아내는 고통을 받고 있어서 말도 많이 할 수 없다.”
상주 지력사(智力寺)의 스님 혜영(慧永) 등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습유(冥報拾遺)에 나온다.]

91. 상벌편(賞罰篇)[여기에는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대체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미워함은 함식(含識:생명 있는 존재)이면 다 같이 기뻐하는 바요, 이익을 기뻐하고 손해에 성을 냄은 인지(仁智)로서도 면하지 못할 바다.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의(義)를 밟는다면 뜻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성질이 굽고 화평을 해치면 매양 절통하게 한을 남긴다. 사마천(史馬遷)이 이르되, ‘죽음이란 기러기의 털보다 가볍다’ 했고, 장주(莊周)는 이르되, ‘삶이란 천하보다 귀중하다’ 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에서 성품을 어기면 곧 저승을 원망하게 되고 상(賞)과 벌(罰)에서 차례를 어기면 슬퍼하는 소리에 기(氣)가 맺힌다. 그림자와 메아리는 귀와 눈에 있고 잠을 자고 깨고 함은 영혼[精爽]에 있으면서 가서는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나니, 아아, 두렵고 슬퍼할 일이다. 바라건대, 권세와 호귀한 자리에서도
명경(明鏡)을 보면서 위엄을 움츠리고, 이익과 욕심의 감정에서도 원귀(元龜)를 열며 생각을 눌러 이길 것이니, 죄가 없으면 허리와 목[腰領]의 온전함을 누리고 복을 실천하면 겁석(劫石)의 수명을 같이 하리라.

(2) 인증부(引證部)
『백유경(百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두 사람이 함께 사탕수수를 심으면서 맹세하며 말하였다.
‘작황(作況)이 좋으면 상을 주겠거니와 좋지 않으면 중벌을 내리리라.’
이때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사탕수수는 극히 달다. 만약 눌러 짜서 즙(汁)을 내어 도로 사탕수수에 부어 주면 그 나무는 반드시 더 잘 자라리라’고 하고, 즙을 짜서 맛이 더 좋은 것을 바라면서 부었더니 도리어 종자가 썩어버렸다.
세간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착한 일과 복을 구하고 싶어서 자기의 호귀(豪貴)함만을 믿은 나머지 권세에 의지하여 아래 백성들을 협박하여 재물을 빼앗아 그것으로 복과 선을 짓고 있으니, 오는 세상에 도리어 재앙을 얻을 것을 모른다. 마치 사탕수수를 눌러 짜서 이것도 저것도 모두 잃게 되는 것과 같다.”
『아육왕경(阿育王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아육왕(阿育王)은 부인 연화(蓮華)에게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얼굴이 아주 잘 생겼고 눈이 구나라(駒那羅)의 눈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구나라(駒那羅)[『부법장전(付法藏傳)』에서는 이름을 법증(法增)이라 했다.]라고 지었다. 왕이 아주 사랑하였으며, 장대해지자 장가를 들였는데 그의 부인의 이름은 진금만(眞金鬘)이었다.
후에 왕과 함께 계두마사(鷄頭摩寺)의 상좌(上座)에게로 갔는데 상좌 야사는 그가 반드시 눈을 잃게 될 것을 알고 항상 그를 위하여 ‘눈은 덧없는 것’이라고 설법했다. 왕의 대부인(大夫人) 제실라차(帝失羅叉)는 그의 눈이 잘 생긴 것을 보자 음심이 동했으므로 괴롭게 굴었다. 그 아들은 귀를 막으면서 그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부인은 성을 내면서 늘 그의 약점을 엿보며 그의 눈을 도려 내버리려고 했다.
뒷날 북방 건타라국(乾陀羅國) 득차시라(得叉尸羅)라는 성에서 인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은 그를 파견하여 진압시켰다. 그런 뒤에 왕은 병이 나서 입 안에서는 똥냄새가 나고 몸의 온 털구멍에서는 똥물이 흘러나왔으나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왕은 칙명으로
구나라를 불러다 왕위를 계승시키려고 했다. 제실라차는 이 소식을 듣자 생각하기를 ‘그가 만일 왕이 된다면 나는 살아날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하고는 곧 방편을 써서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왕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즉시 국내에 칙명을 내려서 왕의 병과 같은 이가 있으면 모두 데려오도록 명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고쳐 낼 수 있습니다.’
그 때 한 남자가 이와 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의사에게 가서 물어 보았더니 의사는 ’고칠 수 있으니 데려 오라’고 했다. 그리하여 의사에게로 데려갔는데 의사는 즉시 부인에게 보내버렸다. 부인은 그를 죽여서 배를 째고 보았더니 벌레가 있었다. 위에 있던 똥을 걷어 내고 그 아래로 따라 내려갔지만 역시 그대로 박혀 있어서 갖가지 약을 다 써보았으나 그 벌레를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마늘을 넣어 주었더니 그 벌레는 곧 죽었다. 이 일을 보고는 왕에게 마늘을 먹도록 권하였다. 왕이 마늘을 먹었더니, 벌레가 죽어서 항문으로 나왔다. 왕은 병이 낫게 되자 부인에게 말하였다.
‘소원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부인이 대답하였다.
‘7일 동안만 왕이 되고 싶습니다.’
왕은 즉시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왕이 된 뒤에 거짓으로 조서(詔書)를 만들어서 득차시라의 사람에게 말하였다.
‘구나라는 아주 큰 죄를 지었다. 급히 가서 눈을 도려 내버려라.’
조서를 다 작성한 뒤에 왕을 보았더니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하여 왕의 인장을 몰래 훔쳤는데, 그 때 왕은 꿈에서 놀라 깨면서 부인에게 말하였다.
‘꿈에 두 마리의 독수리가 나의 아들 구나라의 눈을 도려내는 것을 보았소.’
그리고는 도로 잠이 들었다가 다시 꿈에서 깨어나 부인에게 말하였다.
‘구나라가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땅에 앉아 있는 꿈을 꾸었소.’
그러나 부인이 위로해 주자 다시 잠이 들었다. 잠이 든 뒤에 부인은 훔친 인장을 조서에다 찍고 나서 사신에게 주어 보냈다. 왕은 또 꿈에서 어금니가 빠져버리는 것을 보고 날이 샌 뒤에 관상쟁이를 불러서 꿈에 대한 길흉을 점쳐 보게 하였다. 관상쟁이는 말하였다.
‘이 꿈은 틀림없이 왕자께서 눈을 잃을 조짐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자 합장하고서 말했다.
‘사방에서 불도를 보호하는 선신과, 그리고 교법과 스님들을 믿는 이들께 귀명하옵니다. 원컨대 저의 아들을 보호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조서는 그 나라에 도달했다. 구나라는 조서를 받아보고 그 말을 믿어서 전다라(旃陀羅)를 고용하여 그의 눈을 도려내려고 하였으나 그 일을 하려는 이가 없었다. 다만 업연(業緣)이 성숙되었으므로
얼굴에 여덟 개의 추한 점이 있는 사람이 스스로 와서 눈을 도려내겠다고 했다. 왕이 그 추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먼저 한 눈을 도려내어서 나의 손 안에다 놓아라.’
그가 칼을 들고 눈으로 향하자 모든 백성들이 원통해 하며 크게 부르짖었다.
‘괴이한 일이로다. 괴로운 일이로다.’
이렇게 울며불며 탄식을 하면서 모두 어쩔 줄을 몰랐다.”
또 『부법장전(付法藏傳)』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 악인을 구하려고 오른쪽 눈을 후벼내어 손바닥에 놓고는 그것을 자세히 살피면서 생각하기를 ‘야사(耶舍)께서 본시 경계하시던 바이다’라고 하고 이렇게 말했다.
‘눈은 무상하여서 마치 허깨비와 같다고 하셨다. 옛날에는 기묘하던 것이 지금 자세히 살펴보니 무엇이 사랑스럽다는 말인가? 위태하고 썩은 냄새나는 것을 버리고 오로지 가장 수승하고 청정한 지혜의 눈을 구하리라.’
이렇게 관찰할 때에 수다원을 증득했다. 그리고 다시 한 눈을 도려내어 거듭 깊이 관찰하면서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지극해지자 사다함과(斯陀含果)를 증득했다.
그의 부인 진금만은 남편의 눈을 도려냈다는 말을 듣자 놀라 허겁지겁 울면서 와서 그 모습을 보고는 기절하였다가 한참 만에 다시 깨어났다. 그 때 구나라는 게송으로 부인을 타일렀다.

옛날에 나는 나쁜 업을 지어
도리어 오늘에야 스스로 받습니다.
온갖 세간은 괴로움 뿐이어서
은혜와 사랑도 만나면서 이별함을
그대는 자세히 살펴야 하거늘
어째서 소리 높여 우십니까?”

또 『아육왕경(阿育王經)』에서 말하였다.
“이때 구나라왕은 부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들 스스로 지은 죄를 오늘에야 받은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하는 이도 만나면 이별하거늘 어째서 울부짖습니까?’
그리고는 사신을 몰아내게 한 뒤에 부부는 서로가 함께 거문고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면서 걸식하여 살아갔다. 그렇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므로 왕궁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문지기가 그들을 못 들어가게 했으므로 할 수 없이 문 밖에 있는 코끼리의 마구간 안에서 자고, 동틀 무렵에 자신들의 괴로운 일을 거문고에 실어서 탔다.
왕은 거문고 소리를 듣자 아들 생각이 간절해졌기 때문에 곧 사람을 시켜서 소경을 불러 들였다. 구나라가 왕에게로 오자 왕은, 소경에다 형용이 수척하고 옷이 남루한 것을 보고 도무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아들과 조금 비슷한 모습을 보고 즉시 물었다.
‘네가 바로 나의 아들 구나라가
아니냐?’
‘네, 그렇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기절하여 땅에 넘어졌다. 물을 뿌려서 소생하게 되자, 그를 안아 무릎 위에다 놓고 손으로 눈을 어루만지며 울면서 말하였다.
‘너의 눈이 본래 구나라와 같기에 그에 따라 이름까지도 지었는데, 이제는 모두 없어졌구나.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꼬. 그 누가 너의 눈을 도려내었기에 이토록 너를 고생시키고 초췌하게 만들었단 말이냐? 속히 나에게 말해달라. 나는 지금 너의 형체가 초췌한 것을 보니 마치 활활 타는 불에 나의 몸과 마음이 다 타서 모두 문드러져 없어지는 것 같다.’
아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저 스스로 지은 업이라 다른 이를 원망할 수 없습니다. 부왕의 칙서를 받아 보니 눈을 도려내라고 왕의 인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맹세하면서 말하였다.
‘만일 내가 눈을 도려내라 했다면 스스로 혀를 끊겠다. 만일 왕의 인장을 찍었다면 나의 이를 뽑아버리겠다. 만일 나의 눈으로 보았다면 이 눈을 도려내버리겠다.’
그리고 나서 왕은 뒤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바로 제실라차가 칙서를 거짓 만들어서 눈을 도려내게 했음을 알아차리고 불러서 꾸짖었다.
‘이 불길한 악물아, 어느 땅이 너를 살려 두겠느냐? 너는 지금 당장에 스스로 땅을 파서 빠져 죽어라. 너는 실로 나의 원수로다. 거짓으로 사랑한 척 붙잡고 있었다니.’
이렇게 갖가지로 꾸짖고 나서 호교(胡膠)를 쌓아 불을 놓아서 태워 죽였다.”
또 『부법장전(付法藏傳)』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때 구나라 왕자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부왕에게 아뢰었다.
‘이제 만일 그에게 보복을 가하면 반드시 오랜 겁 동안 함께 원수가 되십니다. 비유하면 마치 소리로 인하여 메아리가 응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마치 젖먹이 아이가 철이 없어서 부모를 욕하고 미워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 해도 그의 부모가 어찌 그 아이에게 성을 낼 수 있겠습니까? 일체 중생도 그와 같아서 항상 번뇌에 덮여 있기 때문에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것이 마치 이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어떻게 그를 본받아서 성을 내겠습니까?’
그러나 왕의 독한 마음은 더욱 왕성해져서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무를 많이 쌓아 기름을 뿌려 태워서 죽였다.”

또 『아육왕경(阿育王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때 모든 비구들이 그것을 보고 나서 존자 우파국다(優波★多)에게 물었다.
‘어떠한 인연이 있었습니까?’
존자가 대답하였다.
‘구나라는 옛날에 바라내(波羅柰)국의 한 사냥꾼이었다. 산의 굴 속에서 5백 마리의 사슴을 만났는데, 만일 한꺼번에 다 죽이면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악취가 날 것이므로 그 눈들을 도려내고는 하루에 한 마리씩 잡아먹었다. 그로부터 5백 번 몸을 받으면서 늘 눈의 도려냄을 당했다.
또 과거의 구류손불(拘留孫佛)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단엄(端嚴)이라는 국왕이 있었다. 그 왕은 부처님을 위하여 돌탑을 세워서 7보로 장엄하였는데, 그 왕이 죽은 뒤에 불신(不信)이라는 한 나쁜 왕이 그 탑을 파괴하여 보물을 가져갔으므로 흙과 나무만이 남아 있었다. 구나라는 그 때 장자의 아들이었는데, 도로 7보로써 이 탑을 수리하고 다시 큰 불상을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하고 본래의 탑과 똑같게 한 뒤에 서원을 세웠다.
‘저로 하여금 오는 세상에 이 부처님과 같이 수승한 해탈을 얻게 하옵소서.’
이처럼 본래대로 탑을 수리하였기에 존귀한 집에 태어나게 되었고, 옛날 불상을 조성하였으므로 늘 단정한 몸을 받았으며, 서원을 세운 까닭에 지금 도의 자취를 얻게 된 것이다.”
또 왕현책(王玄策)의 『서국행기(西國行記)』에 의거하면 이렇게 되어 있다.
“그 왕은 마음으로 저 간악하고 악독한 계실(繼室)의 소행임을 알자 독기를 품고 성을 내어 계실에게 형을 가했다. 그리고 그 때 그를 보좌한 이들은 모두 설산(雪山)의 동북쪽의 자갈만 있는 불모지(不毛地)에다 귀양보냈다.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에 있던 성승(聖僧) 연사(宴沙)는 큰 아라한이었다. 왕이 덕이 높은 것을 듣고, 눈먼 왕자를 데리고 가서 지나간 일을 자세히 아뢴 뒤에 말했다.
‘가엾이 여기셔서 눈이 밝아지게 해 주소서.’
스님은 왕의 청을 받고 널리 온 나라에 고하였다.
‘나는 내일 깊은 법을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릇을 가지고 와서 눈물을 담도록 하라.’
그래서 이 날 모든 스님들과 속인들이 다투어 멀리서 왔다. 12인연(因緣)의 설법을 들을 때에 온 대중들은 슬피 울면서 피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그릇에 받은 그 눈물을 모두 거두어 금 소반에다 놓고 스님은 서서 서원하였다.

‘아까 설법한 그 이치가 만일 타당하다면, 원컨대 대중의 눈물로 왕자의 눈을 씻어서 다시 밝아지게 해주시옵고, 그 이치가 만일 타당하지 않으면 먼 눈이 그대로 있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는 눈물을 가져다 눈을 씻어 주자 드디어 본래 대로 밝아졌다.
그 때 왕과 왕자는 그 기쁨과 경사로움을 이기지 못했으며 대중들도 다 함께 기뻐하며 모두가 칭송하였다.
‘성인의 힘이라야 그렇게 된다.’
당시의 왕자가 바로 이 구나라왕이니, 지금도 탑은 남아있다.”
또 『불본행경(佛本行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걸식할 때가 되었으므로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혼자 걸식하러 나가셨다. 차츰 대병장촌(大兵將村)으로 향해 가시다가 그 읍(邑)에 도달하신 뒤에 바로 병장(兵將) 바라문의 집으로 가셨으며 그 집에 이르시자 곧 그 문 안으로 들어가셔서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그 때 병장 대바라문에게는 두 딸이 있었으니, 하나의 이름은 난타(難陀)요, 또 하나의 이름은 바라(波羅)였다. 당시 그 두 딸은 부처님께로 와서 부처님의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니, 모두 수다원과를 얻었다. 그리고 삼귀의와 5계를 받은 뒤에 곧 부처님의 발우를 가져다가 좋고 향기롭고 맛있는 음식을 발우 안에 가득히 담아서 부처님께 바쳤다. 세존께서는 그 밥을 받으신 뒤에 그 마을에서 나오셨다.
그 때 제바(提婆) 대바라문은 다른 이로부터 저 대사문(大沙門)께서 이 곳에 오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곧 생각하였다.
‘나는 일찍이 그 대사문에게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청을 하여 허락 받은 일이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토록 가난하니, 애가 타는구나. 무슨 수를 써야할까?’
그의 아내가 남편 제바에게 말하였다.
‘말씀드릴 일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제가 옛날 젊었을 때에 병장 대바라문이 저를 희롱하면서 세상일[世事]을 요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때 허락하지 않자 그는 잠시 손만을
잡았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나를 데려다 그에게 주어서 세상일을 행하게 하고서 그로부터 다소의 돈과 재물을 구해다가 그것으로 저 대사문께 음식을 장만하여 보시하셨으면 합니다.’
그 때 제바는 그의 아내에게 대답하였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나 바라문의 도리로서 그러한 일을 시킨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바는 곧 병장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장하고, 장하십니다. 저에게 5백 전(錢)만 빌려 주십시오. 만일 제가 갚으면 좋습니다만 소홀히 하다가 갚지 못하게 되면 우리 부부 두 사람이 함께 당신 집에 들어가서 당신을 위하여 힘써 일하겠습니다.’
그 때 병장은 곧 제바에게 5백 전을 주면서 말하였다.
‘당신은 가지고 가셔서 마음대로 이용하십시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다시 다른 이에게 빌려다 저에게 갚지 마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자력으로 일을 하여 저에게 갚으십시오.’
그 때 제바는 병장의 곁에서 법에 의거하여 5백 전을 받은 뒤에 자기 집으로 와서 그 아내에게 주고 음식을 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곧 숲 속으로 가서 부처님께 나아가 아뢰었다.
‘여래를 청하고자 하옵니다. 거룩하신 대덕 사문 구담(瞿曇)이시여, 원하옵건대, 내일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시옵소서.’
이때 세존께서는 잠자코 청을 받아들이자 부처님을 하직하고 돌아왔다. 자기 집으로 와서는 성 안의 모든 거리로 나가서 불에 익힌 음식을 모두 사 왔다. 그리고 제바는 밤 동안에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다 장만 한 뒤에 날이 밝자 온 집안을 청소하고 자리를 펴놓고 나서 부처님께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음식이 다 마련되었나이다. 원컨대 저의 집으로 나오시옵소서.’
그 때 세존께서는 때가 되었는지라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가셔서 제바의 집에 이르러 펴 놓은 자리에 앉으셨다. 그러자 부부는
손수 여러 가지 미묘하고 청정하고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부처님 앞에 서서 세존께 바치면서 아뢰었다.
‘원하옵나니 여래께서는 마음대로 잡수십시오.’
그리고 제바는 부처님께 밥을 올린 뒤에 따로 부처님 곁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앉고 나자 세존께서는 곧 제바를 위하여 알맞게 설법하셔서 기쁘게 하신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셨다.
그 때 제바는 부처님을 봉송하기 위해 나왔고, 제바의 아내는 다른 이에게서 옷을 빌려다 입었으므로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는 곧 옷을 벗어서 한 곳에 놓고 땅을 소제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한 도둑이 갑자기 와서 그 옷을 훔쳐갔다. 아내는 옷을 잃었으므로 크게 근심하고 있는데, 제바가 부처님을 봉송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가 몹시 근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십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대답하였다.
‘빌려 입었던 옷을 누가 훔쳐 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없어져버렸습니다.’
제바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답답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면서 말하였다.
‘나는 남에게서 5백 전을 빌려다 그것으로 공양거리를 마련했고, 당신은 이제 남에게서 옷을 빌려다 입었는데 갑자기 또 잃어버렸구려. 우리 집은 가난한데 무엇으로 다 보상한단 말이오.’
결국 ‘무슨 수를 써야 할까?’라고 생각하다가 제바는 스스로 죽어버릴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곧 시타림 속으로 가서 큰 나무 위로 올라가 땅 아래로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떨어질 수가 없어서 다시 크게 근심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그 도둑이 그 옷을 가지고 시타림(尸陀林)으로 갑자기 돌아와서 제바가 올라가 있는 나무 아래에 땅을 파서 묻어 놓고 그 위에다 대변을 누고 떠나가 버렸다. 제바는 나무 위에서 이런 일을 다 보고 있다가 도둑이 떠나자마자 나무 위에서 내려와 그 옷을 파서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바의 아내는 집
안을 샅샅이 소제하고 있다가 그 집의 모퉁이가 갑자기 저절로 내려앉은 것을 보고 머리를 숙여 땅 아래를 자세히 보았더니, 거기에는 하나의 적동(赤銅)으로 된 병이 있었고 그 안에는 금이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둘째의 병과 셋째 넷째의 것도 모두 다 병이었는데, 다시 그 아래를 자세히 살펴보니 적동으로 된 하나의 독이 보였다. 역시 그 독 속에도 금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녀는 금을 보고 나서 크게 놀라며 큰 소리로 남편을 가리키면서 부르짖었다.
‘여보, 여보. 빨리 오십시오, 빨리 오십시오. 나는 이미 저것을 얻었습니다.’
제바는 아내의 소리를 듣자마자 생각하기를 ‘아내가 가련하구나. 어째서 정신까지 잃고 저렇게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하고 말하였다.
‘빌려 입었다가 잃어버렸던 옷은 내가 찾아 왔습니다. 그 옷은 현재 여기에 있는데, 무엇 때문에 ‘나는 이미 그것을 얻었다’고 소리치는 것입니까?’
그리고 제바는 옷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면서 그의 아내에게 물었다.
‘집에 그대로 계셨으면서 당신이 무엇을 얻었다는 말이오?’
그러자 그의 아내는 곧 그 금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여보, 나는 이것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이때 제바는 다시 아내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잃어버렸던 옷을 나도 역시 얻었습니다.’
아내는 그 옷을 주인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그 때 제바는 생각하기를 ‘나는 혼자서 이렇게 많은 금을 오래 두고 쓸 수는 없다’ 하고, 곧 5백 전 어치의 금을 가지고 병장의 집으로 가서 그 대병장에게 말하였다.
‘제가 어진 이에게 빌린 5백 전을 이 금으로 반환하겠습니다.’
그러자 병장은 제바에게 말하였다.
‘나는 전에도 당신에게 말씀드렸거니와 다른 이에게서 돈을 빌려 나에게 갚지 말고 자기 힘으로써 나에게 갚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바는 다시 말하였다.
‘나는 다른 이에게서 이 물건을 빌려 온 것이 아닙니다.’
병장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이것이 어디서 났습니까?’
제바가 대답하였다.
‘나는 땅에서 이
금이 있는 곳집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 때 제바는 이내 병장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와서 그 금이 있는 곳집을 보여 주었다. 병장은 한 무더기의 숯을 보았으므로 제바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왜 속이는 것이오? 나에게 숯을 보여 주면서 금이라 하니 말입니다.’
이때 제바는 다시 거듭 병장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실로 진짜 금입니다. 불 피우는 숯이 아닙니다.’
이렇게 두번 세번 말한 뒤에 손으로 그 금 곳집을 대면서 부르짖었다.
‘이것은 금이요 숯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다시 서원하였다.
‘저 선업(善業)의 인연으로 이 금을 얻게 되었다면 병장에게도 보이게 하옵소서.’
이 말이 끝나자마자 숯은 곧 금이 되었다. 병장은 이 땅에 묻힌 금을 보고 나서 다시 물었다.
‘당신은 누구에게 공양하셨습니까? 하늘에게 하셨습니까, 신선에게 하셨습니까, 아니면 착한 사람에게 하셨습니까? 그 분이 당신에게 이런 과보를 주셨을 것입니다.’
제바가 대답하였다.
‘저는 오늘 집에서 대사문에게 공양했을 뿐입니다. 음식을 보시한 감응으로 그 분이 도우셔서 이런 공덕의 과보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병장이 말하였다.
‘이 금 곳집은 모두가 다 그 선업의 인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 과보는 남이 빼앗을 수도 없고 남이 끊게 할 수도 없으니, 당신은 의심하지 마시고 안온한 마음으로 쓰십시오.’
그 때 제바는 생각하였다.
‘대사문께 음식을 보시하여 이런 큰 공덕이 생겼구나.’
그러자 마음이 크게 기뻐서 환희작약하였다. 기쁨이 온몸에 가득 찬 그는 다시 부처님께 나아가 거듭 부처님을 청하여 집으로 오셔서 공양하게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부부 두 사람이 자리를 펴고 앉아 법을 들으려 하였으므로, 그들의 마음의 행과 체성(體性)과 모든 번뇌가 얇아졌음을 아시고 그들을 위해 네 가지 진리[四諦]를 말씀하시자 수다원과를 얻었다.
당시 모든 비구들은 곧 물었다.
‘저 제바와 그의 아내는 옛날에 어떠한 업을 지었기에
부처님 곁에 와서 거룩한 법을 증득하는 과보를 얻게 되었으며, 다시 어떠한 업을 지었기에 먼저는 가난하다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부자가 된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옛날 가섭불(迦葉佛)에게서 3귀의와 5계를 받았으나 보시를 행하지 않은 이가 바로 지금의 제바니라. 그러나 죽으려 할 적에 원을 세우면서 나를 만나기를 원했으므로 그 인연 때문에 나를 만난 것이니라. 보시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가난한 과보를 얻은 것이요, 밥을 가져다 나에게 보시하였으므로 현재 세상의 과보를 얻었느니라. 이런 인연 때문에 너희 모든 비구들은 의당 늘 불법승의 곁에서 공경과 희유한 마음을 내면서 마치 제바가 현재의 몸으로 복을 받은 것과 같이 해야 하나니, 간탐으로 보시하려 하지 않으면 이제 빈천과 고생하는 우환을 받느니라.’
게송으로 읊는다.

의(義)가 있으면 곧 합(合)하고
의가 없으면 곧 여의나니[離]
이괘(離卦)는 길한 것이 아니요
합하는 상(象)이라야 원형[規]을 이룬다.

공이 있으면 상을 주어야 하고
공이 없으면 다스려야 한다.
억울하게 죄를 씌우지 말 것이니
앙갚음을 당함에 의심 없으리라.”

감응연(感應緣)[대략 열세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주(周)의 두국(杜國)의 백상(伯常)
한(漢)의 왕제(王濟)의 좌우(左右)
한(漢)의 우림중랑(羽林中郞) 유은(游殷)
진(晋)의 부양현령(富陽縣令) 왕범(王範)
진(晋)의 장준(張駿)
진(晋)의 양산(羊珊)
진(晋)의 공기(孔基)
진(晋)의 유량(庾亮)

제(齊)의 진자융(眞子融)
제(齊)의 문선제(文宣帝) 고양(高洋)
양(梁)의 유대부(劉大夫) 무명씨(無名氏)
진(陳)의 무제(武帝) 진패선(陳覇先)
당(唐)의 『왕현책행전(王玄策行傳)』에서 말한 업(業)을 다는 저울

주(周)의 두국(杜國)의 백상(伯常)
주(周)나라 두국(杜國)의 백(伯)은 이름이 상(常)이며, 주나라 대부(大夫)였다. 선왕(宣王)의 첩 여구(女鳩)가 그와 간통(姦通)하기를 바랐으나 두백(杜伯)이 말을 듣지 않자, 여구는 선왕에게 고해 바쳤다.
“백상은 몰래 첩과 교접하고 지냈습니다.”
그러자 선왕은 그 말을 믿고 두백을 서둘러 가두어 놓고 설보(薛甫)와 사공의(司空錡)로 하여금 두백을 죽이게 했다. 그의 벗 좌유(左儒)가 아홉 번이나 간(諫)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으며 좌유도 죽게 되었다. 두백은 죽은 뒤에 곧 사람이 되어 왕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백상의 죄가 무엇이오?”
왕은 주술사를 불러서 두백이 한 말을 그에게 하자 주술사가 말하였다.
“맨 처음 두백을 죽이자고 왕에게 모의한 이가 누구십니까?”
왕이 말하였다.
“사공의니라.”
주술사가 말하였다.
“어째서 사공의를 죽여서 그에게 용서를 받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선왕은 사공의를 죽인 뒤에 주술사로 하여금 두백에게 사과하도록 했다. 그러나 두백은 여전히 사람으로 와서 그의 죄 없음을 말했으며, 사공의도 사람으로 와서 말하였다.
“신(臣)이 무슨 죄가 있었습니까?”
그리하여 선왕은 황보(皇甫)에게 말하였다.
“주술사와 내가 모의하여 사람을 죽였다. 내가 죽인 자들은 모두가 사람이 되어 나타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그러자 황보가 말하였다.
“주술사를 죽여서 용서를 비십시오.”
그리하여 선왕은 주술사를 죽인 뒤에 겸하여 용서를 빌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주술사 역시 사람으로 와서 말하였다.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 어째서 그것을 죄로 삼아 신을 죽였습니까?”
그런 지 3년 뒤에 논밭에 나가서 유람할 때였다. 따라온 사람들도 들에 가득 차 있었다. 한낮에 두백이 흰 말을 타고 흰 옷을 입은 채
사공의는 왼쪽에, 축은 오른쪽에다 거느리고서 붉은 관을 쓰고 길 왼쪽에서 나와 붉은 활에 붉은 화살을 잡고 선왕을 쏘았다. 선왕은 심장에 화살을 맞고 등골뼈가 부러지면서 활집처럼 엎드려서 죽어버렸다.

한(漢)의 왕제(王濟)
한(漢)나라 때에 왕제(王濟)의 좌우(左右)가 늘 어두운 때가 되면 여종에게 가서 왕제의 옷과 재물을 가져갔다. 그 때에 여종이 그와 간통하기를 요구했으나 그 사람이 ‘안 된다’면서 말을 듣지 않았으므로 여종은 말하였다.
“만일 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내가 큰 소리로 외치겠소.”
그러나 그 사람이 끝내 듣지 않자 여종은 부르짖었다.
“아무개가 나를 강간하려 합니다.”
그래서 왕제는 곧 사람을 시켜 그를 죽이게 하였다. 이 사람은 죄 없음을 간곡히 하소연하였으나, 왕제는 믿지 않고 끌고 갔으므로 그는 왕제를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억울해서 죄를 받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부군(府君)을 하늘에다 송사할 것입니다.”
그를 죽이고 난 뒤에 왕제는 병이 들었는데, 홀연히 이 사람이 나타나 그에게 말하였다.
“전에 진실을 자세히 말했는데도 보아주지 않았으니 이제는 너도 의당 가야 한다.”
왕제는 그런지 며칠만에 죽었다.

한(漢)의 유은(游殷)
한(漢)나라 때의 유은(游殷)은 자(字)가 유제(幼齊)이다. 한나라에서 우림중랑장(羽林中郞將)을 지냈는데, 예전부터 사예교위(司隸校尉) 호진(胡軫)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호진은 드디어 유은을 조가 있는 것처럼 꾸며서 죽였다. 유은이 죽은 지 달포쯤 되었을 때였다. 호진은 병이 들어 누웠고 눈알이 튀어나왔는데 “형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형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는 말만 되뇌일 뿐이었다. 유은이 귀신을 데리고 온 것이었으며, 그는 마침내 죽었다.

진(晋)의 부양현령(富陽縣令) 왕범(王範)
진(晋)나라 부양현령(富陽縣令) 왕범(王範)에게는 도영(桃英)이라는 첩이 있었다. 그는 퍽 자색이 아름다웠으며, 그의 관아 안에 있는 정풍(丁豊)과 사화기(史華期)의 두 사람과 간통하고 있었다. 왕범이 일찍이 출행하여 돌아오지 않은 때였다. 장내(帳內)의 도독(都督) 손원필(孫元弼)이 정풍의 문 안에서 환패(環珮)의 소리가 들렸으므로 엿보았더니 도영과 함께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원필은 문짝을 두드리면서 그들을 꾸짖자 도영은 곧 일어나 속옷을 붙잡고 살쩍을 치켜올리면서 신을 신고 안으로 돌아갔다. 원필은 또 사화기가 도영의 사향(麝香)을 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두 사람은 원필이 그것을 고해바칠까 두려워서 도리어
이렇게 비방했다.
“원필과 도영이 사사로이 통하고 있다.”
그러자 왕범은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기어이 원필을 죽이고 말았는데, 당시 진초(陳超)라는 이가 곁에 있으면서 원필의 죄를 부추기며 죽이게 했다. 뒷날에 왕범은 관직이 바뀌어 돌아가게 되었다.
진초 또한 도읍을 나와서 왕범을 보러 가다가 적정산(赤亭山) 밑에서 천둥이 치는 비를 만났다. 날은 저물었는데 홀연히 어떤 사람이 진초의 겨드랑이를 마구 붙잡고 거친 진펄 속으로 끌고 데려갔다. 번개가 번쩍 하는 빛에서 하나의 귀신을 보았는데, 얼굴은 아주 검푸른 빛이었고 눈에는 동자도 없었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손원필이다. 황천(皇天)에 하소연해서 허락을 받고 계속 너를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제야 만나게 되었구나.”
그리고는 진초의 머리를 받아 피가 흘러내리자 귀신이 말하였다.
“왕범이 이 사건의 주범이니, 먼저 그부터 죽여야겠다.”
그 때 가경백(賈景伯)과 손문도(孫文度)가 태산(太山)의 현당(玄堂) 아래 있으면서 함께 죽고 사는 명부를 수정하고 있었다. 도영의 혼백도 여청정(女靑亭)이라는 데에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 곳은 바로 제3지옥의 이름이며 황천 밑에 있었다. 오로지 여귀(女鬼)만을 다스리는 곳으로서 그녀는 그렇게 던져져 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귀신은 온데 간데 없어져버렸다.
진실로 이런 일을 당한 뒤에 양도(楊都)에 도달하여 왕범에게로 갔다. 아직 그 일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귀신이 나타나서 밖으로부터 왕범의 장막 안으로 재빠르게 들어왔다. 그리고 밤이 되었을 때 왕범은 막 잠이 들다가 갑자기 가위에 눌리며 연이어 큰 소리만을 지르면서 깨어나지 못했다. 집안 사람이 푸른 소를 끌어다 왕범의 위에 올려 놓았고 아울러 도인(桃人)이 곁에서 노끈으로 후려쳤다는 것이다. 날이 밝아져서 조금 소생했으나 10여 일 만에 죽었다. 첩도 역시 갑자기 죽었다.
진초는 이것을 보고 장간사(長干寺)로 도망쳐서 성명을 바꾸어 하규(何規)라는 이름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지 5년 후 3월 3일 날 물가에서 술에 취한 채 진초가 말하였다.
“이제 다시는 그 귀신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머리를 숙여 물 속을 보았더니, 귀신의 그림자가 벌써 그 안에 있었고 손으로 진초를 후려쳤다. 그러자 코에서 한 되쯤의 피가 흐르더니, 수일 만에 죽었다.

진(晋)의 장준(張駿)
진(晋)나라 때 장준(張駿)은 양주(凉州)에 웅거하고 있었다. 적군을 진압한 장군으로서 무예가 뛰어나고 위엄이 있는 음감(陰鑒)을 몹시 꺼리면서 해치려 하였다. 그의 종족(宗族)이 강대하였고 공이 많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의 주부(主簿) 위찬(魏纂)에게 넌지시 음감이 모만했다고 무고(誣告)하도록 하였으니 장준이 핍박하자 음감은 자살하였다. 그로부터 3년 후에 위찬은 병이 들었는데, 음감이 나타나 곁에 있었으므로 드디어 죽었다.

진(晋)의 양산(羊珊)
진(晋)나라 때의 양산(羊珊)은 자(字)가 의팽조(懿彭祖)며 진나라의 여릉태수(盧陵太守)였다. 사람됨이 억세고 몹시 포악했으며, 나라의 인척(姻戚)임을 믿고 방자함이 더욱 심했다. 약간의 원한이 있기만 해도 형을 가해 죽였으며,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량(庾亮)을 우리에 가두어 송치했었다. 이런 일을 유사(有司)가 자세히 적어서 장계(狀啓)를 올리며 임금에게 아뢰었다.
“양산은 고을의 장병과 관리와 백성 간량(簡良) 등 290인을 죽였으며, 한갖 귀양보낸 이만도 1백여 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목을 베어 시가(市街)에 버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8의(議)에 의거하여 용서해 주시기를 청했으므로 현종(顯宗)은 조서(詔書)를 내렸다.
“이런 일은 고금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 이를 참을 수 있다면 그 어느 것을 참을 수 없겠느냐? 무슨 8의가 있을 수 있느냐? 바로 옥(獄)에 가두고 죽음을 기다리도록 하라.”
양산의 형 자분(子賁)은 전에 남군공주(南郡公主)에게 장가를 들었던 터라 이를 이유로 해혼(解婚)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낭야(琅耶) 효왕비(孝王妃) 산씨(山氏)에게는 양산이 생질이었으므로 간곡히 양산의 용서를 청하였다. 그러자 사도(司徒) 왕준(王遵)은 양산의 죄를 아뢰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며 극히 중한 법으로 다스려야 하나, 산대비(山大妃)께서 걱정과 근심으로 병이 날 지경이니, 폐하(陛下)의 망극(罔極)한 은혜로 생명만이라도 보전하게 해 주십시오.”
이리하여 조칙을 내렸다.
‘산대비께서는 생질이 하나뿐이라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도 간곡하며, 피를 토하도록 깊고 중하니 짐(朕)도 너무나 안쓰럽도다. 대비의 무육(撫育)하신 은혜를 받았으니 자친(慈親)과 같으신데, 만일 참기 어려운 병을 견디시지 못하여 단번에 잘못이라도 생기면 짐 또한 무슨 낯으로 대하겠는가. 이제 양산의 생명만이라도 보존해 주어서 대비의 위양(渭陽)으로서의 은혜를 위로하려 한다.”
이리하여 이름을 삭제하고 백성을 만들었다. 그런 얼마 뒤에 양산은 병이 들었는데, 항상 간량 등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억울한데 어찌 받을 수 있겠느냐. 이제 함께 황천(黃泉)으로 가서 이야기해 보자.”
결국 양산은 그 날 밤을 세우고 죽었다.

진(晋)의 회계(會稽) 공기(孔基)
진(晋)나라 때 회계(會稽)의 공기(孔基)는 학문에 힘쓰고 지조가 있었다.
족인(族人) 공폐(孔敝)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에 공폐는 자신의 두 아들을 맡기며 공기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그런데 공폐의 아들들은 다 같이 흉악하고 난잡하였으며, 그들의 뜻한 바와 받드는 바도 같지 않았다. 공기는 이를 여러 번 공폐에게 말하였는데, 이 때문에 아들들은 이에 대해 항상 분노하고 있었다. 뒤에 공폐는 죽고 상복(喪服)도 벗게 되었으므로 공기는 옛날의 정의로 양주(羊酒)를 가지고 가서 아들들을 위로하였다. 그런데 아들들은 오히려 묵은 원한을 품고 몰래 남종을 보내서 길 곁에 숨어 있다가 공기를 죽였다.
그리고 아직 남종이 돌아오기 전이었다. 오히려 공기가 먼저 와서 눈을 부릅뜨고 소매를 걷어올리면서 노기 띤 소리로 말하였다.
“간사하고 추악한 어린 놈들아, 얼굴은 사람이면서 마음은 짐승이로구나. 나에게 옛날에 돌봄을 받았으니 평생 동안 거두어 모시도록 할 터인데, 무슨 원한이 있기에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하는 것이냐. 하늘을 업신여기고 부모를 망각한 일이라 사람과 귀신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너의 집 종자를 끊어버리리라.”
이 뒤로부터는 자주자주 형상을 나타냈다. 공씨 집안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서 큰아들이 뒷간을 가다가 갑자기 졸도하였다. 그 뒤를 이내 따라가 보았으나 벌써 땅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그 다음 아들은 병이 들어서 또 죽었다. 형제간에 모두 후사(後嗣)가 없어졌다.

진(晋)의 유량(庾亮)
진(晋)나라 때에 유량(庾亮)은 도후칭(陶後稱)을 죽였다. 함강(咸康) 5년 겨울철의 모임[冬節會]이 있을 때에 문인과 무인 수십 명이 갑자기 모두 일어나면서 섬돌을 향하여 예배를 드렸다. 유량은 깜짝 놀라면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다 같이 말하였다.
“도공(陶公)께서 오십니다.”
도공은 바로 후칭의 부친 간(★)이었다. 그리하여 유량도 일어나 영접해 들였다. 도공을 붙잡은 두 사람은 모두가 다 오래 전부터 원한을 품은 이들이었다. 그가 명을 내리자 좌우의 수십 명이 모두 감추고 있던 창을 꺼내 들었으며, 도공은 유량에게 말하였다.
“이 늙은이는 너희 집을 대대로 섬겼었다. 이런 은혜는 생각지 않고 도리어 나의 아들을 죽이다니, 그래서 일부러 와서 묻는다. 후칭이 무슨 죄였더냐. 너의 몸을 이미 제(帝)에게 하소연하였다.”
유량은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그만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8년 하루만에 죽었다.[위의 여덟 가지 증험은 『원혼지(怨魂志)』에 나온다.]

제(齊)의 진자융(眞子融)
제(齊)나라 진자융(眞子融)은 제나라에서 일찍이 정경(井陘)이 되어 관문(關門)에서 세금을 단속하고 있었다. 당시 뇌물을 너무 많이 받았으므로 사람들의 고소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제나라 임금은 법을 행사면서도
끝까지 다스리는 데에 뜻이 있었으므로 병주성국(幷州城局)의 참군사(參軍事) 최원(崔瑗)과 중서사인(中書舍人) 채휘(蔡暉)를 보내어 함께 그의 죄를 조사하게 하였다. 그런데 자융에 관한 일은 모두가 사전에 용서해 주는 일들이었으므로 최원 등도 임금의 뜻으로 용서해 주기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 자융이 사형을 받으려 할 때에 온갖 방법으로 하소연하였으나 자신을 보아주지 않자 그는 맹세하였다.
“만일 이들이 평안하고 길하다면 이는 천도(天道)가 아닐 것이다.”
그가 죽은 지 15일 만에 최 원은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1년쯤 지나서 채 휘도 병이 들어 누었는데 살이 문드러져 떨어지고 온갖 고초를 다 받다가 1백여 일쯤 되어 죽었다.

제(齊)의 문선제(文宣帝) 고양(高洋)
제(齊)나라의 문선제(文宣帝) 고양(高洋)이 죽자 태자 은(殷)이 왕위를 이었는데, 연호는 건명(乾明)이라 하였다. 문선제와 어머니가 같은 아우 상산왕(常山王) 연(演)은 본래 병주(幷州)에 있으면서 권세가 대단하였다. 그는 문선제의 인산(因山)의 일로 임금의 관(棺)을 따라 업(鄴)으로 나왔다. 지위가 명망으로 의심을 받는 데다 여전히 상서(常書)를 기록하는 일이 머물러 있었으므로 상산왕은 마침내 분해하면서 몰래 딴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임금은 그것을 눈치채고 그의 하는 일을 반성하게 하였더니, 그가 말하였다.
“안팎의 모든 관료들을 모두 모이게 하십시오.”
그리고는 곧 건명의 심복 상서령(尙書令) 양준산(陽遵産)등 다섯 명을 포박해 놓고 모두 그들의 죄상을 아뢰면서 베어 죽였다. 그리고 곧 건명을 폐위시키고 자기 자신이 임금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효소제(孝昭帝)이다. 뒤에 병주에 있을 때에 하늘의 운기를 보는 이가 아뢰었다.
“업(鄴) 안에 천자(天子)의 기운이 있습니다.”
평진왕(平秦王) 고귀언(高歸彦)이 건명을 죽이도록 권하였으므로 마침내 수갑을 채워서 병주로 향해가다가 죽였다. 그 해에 효소제에게는 자주 문선제가 나타나 여러 요사스러운 귀신의 모습으로 그에게로 와서 아들을 찾았다. 그리하여 효소제는 온갖 것을 갖추어서 재앙을 물리치는 기도를 올렸으나, 끝내 원한을 풀어주지 못하고 죽었다.

양(梁)의 유대부(劉大夫) 무명씨(無名氏)
양(梁)나라 강릉(江陵)이 함락될 때에 관내(關內)의 사람 양원휘(梁元暉)는 일신성(日新城)에서 벼슬을 했다는 유(劉)씨 성을 가진 한 사대부(士大夫)를 포로로 잡았다. 그의 이름은 모르는데, 그 사람은 먼저 후경의 난[侯景亂]을 만나 집안 식구를 모두 잃었고, 오직 살아 남은
나이 어린 아들만을 몸소 안고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과 같이 칼을 목에 쓰고 가다가 눈을 만났다. 길 걷는 것이 더디자 원휘는 그를 핍박하면서 아이를 버리게 하였다. 유대부가 동정을 구하며 죽음으로써 간청하였으나 원휘는 기어이 강탈하여 눈 속에다 던져버리고 매로 아랫도리를 치면서 몰았다. 유대부는 걸음을 걸을 때마다 머리를 돌리면서 애절히 울부짖다가 모진 고생 끝에 쓰러졌는데, 게다가 슬픔까지 더하여 수일 만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 날마다 원휘에게 유대부가 나타나서 손을 끌면서 아이를 찾았으니 이로 인해 병이 들었다. 비록 그에게 뉘우치면서 용서를 빌었으나 계속 와서 괴롭히는지라, 원휘는 병을 앓으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죽었다.

진(陳)의 무제(武帝) 진패선(陳覇先)
진(陳)나라 무제(武帝) 진패선(陳覇先)은 양(梁)나라 대사마(大司馬) 왕승변(王僧辯)을 살해한 뒤, 이어서 왕승변의 모든 장수들을 토벌하고 있었다. 의흥태수(義興太守) 위재(韋載)는 황문랑(黃門郞)에게 넷째 아들을 놓아준 뒤에 왕승변을 위하여 성을 굳게 수호하고 있었다. 진패선은 자주 나아가 포위하며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나중에 거듭 성을 치다가 위재를 달래면서 말을 전했다.
“왕승변의 친당(親黨)은 모두 이미 멸망했고, 이 외로운 성 하나 뿐입니다. 바라는 바가 무엇이관대 그렇게 지나치게 저항하는 것입니까? 만일 항복하게 되면 부귀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위재의 대답이 왔다.
“선비에게는 모두 지기(知己)가 있는 법이라 왕공(王公)을 위하기 때문에 대군(大軍)에 저항하면서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제 또한 명공(明公)이 강(江)의 왼쪽을 모두 평정했다는 것을 듣고 있으니, 성을 끝까지 지킨다 해도 반드시 살아날 길은 없습니다. 다만 칼날이 여러 번 오고가고 하면 살상이 너무 심할 것이요, 군인들이 분을 내면 다 온전치 못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늙은 모친께서 당(堂)에 계시므로 더욱 화가 그 곳에 미칠까 더욱 두렵습니다. 그 때문에 구차하게 차일피일하면서 아직 귀순하지 못하고 있으니 반드시 서약을 해 주신다면 감히 오래도록 뛰어난 무용을 수고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진패선은 백마(白馬)의 목을 베어 보내며 서약하였으며 그 결과 위재는 마침내 문을 열어 주었고 진패선도 역시 관대한 신의를 보였다. 그리하여 양도(楊都)로 돌아간 뒤에 진패선은 즉위(卽位)하였다. 나중에 위재로 하여금 정벌하러 가는 데에 따르게 하였는데, 그가 조금 늦게 오자 묵은 원한으로 그를 죽였다. 얼마 뒤에 대전(大殿)에서
일을 보고 있을 때 위재가 나타났으므로 놀라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광엄전(光嚴殿)으로 옮아가 앉았다. 위재가 또 그 곳까지 따라 들어왔으므로 좌우를 둘러 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죽었다.[위의 네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당(唐)의 『왕현책행전(王玄策行傳)』 에서 말한 업을 다는 저울
당(唐)나라『왕현책행전』 에는 이런 말이 있다.
마가타국(摩伽陀國)의 법에는, 만일 죄를 범하면 고문이나 약탈을 가하지 않고 오직 신령한 저울만으로 그것을 달아본다. 사람을 다는 법에는 물건과 사람의 경중을 서로 비슷하게 한 뒤에 그 물건을 저울 한 끝에다 놓고 사람을 한 끝에다 놓아서 양 끝이 평형이 되게 한다. 그리고는 또 하나의 부적[符]을 만들어서 역시 다른 물건과 그 무게가 같게 한다. 그런 뒤에 곧 부적을 사람의 목에다 매어 놓고 부적과 함께 달았던 다른 물건을 먼저의 물건에다 첨가한다. 그리하여 만일 사람이 죄가 없으면 곧 물건이 있는 끝이 무거워지고, 만일 그 사람에게 죄가 있으면 물건이 있는 끝이 가벼워진다.
이 경중에 의거하여 선과 악의 죄를 부과하게 되는데 눈을 후벼파고 팔을 끊으며 손가락을 자르고 발꿈치를 베었다. 이렇게 범한 죄의 경중을 보면서 그 형벌을 행하고 있었는데, 만일 부채 따위의 조그마한 죄는 다 같이 두 발에 쇠고랑을 채우는 것으로 벌을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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