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 6권
보살영락경 제6권
축불념 한역
장용서 번역
18. 무량경품(無量逕品)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나 선여인으로서 세 가지 선행(禪行)을 받들어 지니면서 닦아 익힌 자는 문득 여러 가지 훌륭한 공덕을 얻어서 갖출 것이며, 여러 부처님 나라에 노닐면서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모시느니라.”
그때에 부처님께서 대중 가운데 계시면서 문득 이 게송을 말씀하셨다.
지나간 세상 항하 모래 수의 부처님
모두 세 가지 선(禪)의 법으로 말미암으니,
상이 없고 원하지 않는 법[無相不願法]이
거룩하신 율행[聖律行]에 곧 응하셨도다.
세 가지 선의 근본 법
스스로 열반을 얻게 되나
설사 한량없이 외우더라도
그 법은 능히 다하지 못하도다.
만일 한 사부(士夫)로 하여금
한량없는 겁(劫)을 머물러 살게 하여
그 가운데서 선포해 설하게 하더라도
세 가지 선의 근본은 다하지 못하도다.
과거의 식(識)을 스스로 관하니
뜻으로 능히 선포할 바 아니로다.
미래의 식도 또한 그러하니
식이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로다.
형상이 없어서 볼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생사의 병을 심네.
9지(地)의 법을 사유해서
그 뒤에 비로소 깨침을 얻도다.
범행(梵行)의 청정한 법은
여래의 가르침을 옹호해서
낱낱이 분별코자 하지만
여래의 몸을 창달하지 못하네.
3세(世)에 견줄 이 없는 존자
온갖 욕심의 그물을 깨뜨리고
모든 속박과 집착에 이끌림을
영원히 없애서 남음이 없도다.
세상을 보니 온갖 변화가 있어
생겨나고 생겨나면서 늘 머무름 없네.
하물며 식의 근본인
몸의 여섯 소굴을 나타냄을 알고자 함이랴.
본래 나는 있음을 짓지 않았으니
있음에 물들면 곧 더러움 생기므로
모두 세 가지 선(禪)의 법을 말미암아
이내 보리수[道樹] 밑에 앉았어라.
만일 어떤 족성자가
마음을 베풀어 헤아리고자 하면서
여래의 몸 분별하지만
털끝만치도 같지 않도다.
과거의 모든 법계(法界)
하나하나 부사의하고
이 세 가지 선을 말미암아
비로소 명호를 칭하게 되었네.
만일 식의 근본 헤아리고자 하여
있음이 아닌 법이라고 분별하면
나아가는 바가 수없이 변해
곧 세 가지 선의 행에 응하네.
나의 생겨남은 이미 스스로 편안하고
또한 능히 여러 사람을 편안케 하노라.
그러나 사람은 사념과 상념이 많으니
내가 인도하여 알게 하리라.
내 본래부터 균등한 선정으로
관(觀)을 행하여 세 가지 선을 깨달았나니
유지(有地)의 식의 상념이 아니어서
과거의 행을 초월했도다.
생겨남은 본래 나와 남으로부터
유전하면서 5도(道)로 나아가나니
일생의 번뇌[垢]가 능히 다하면
세 가지 선에 응했다고 이르리라.
구경(究竟)에도 세 가지 법 있으니
본래의 깊은 요점[要]을 살펴 비추어서
둘을 현재의 지혜로 삼고
도관(道觀)까지 셋이라 말하리라.
이 의취(義趣)를 능히 다하면
세 가지 선의 한량없는 행이요,
이것 또한 불가사의해서
세 가지 법의 행을 궁구해 다했도다.
또 은혜와 사랑의 근본 알아
점점 굴러서 정(定)에 들어가고
이미 스스로 스승에게서 받아
뒤에 비로소 도의 깨침 이루었도다.
혹은 삼천세계에 나타내는 것을
마치 사람 손바닥의 구슬 보듯 하고
낱낱이 청정한 관(觀)에 들어서
온갖 번뇌를 씻어 버렸어라.
만일 사람이 정(定)을 도모하고 헤아림이
말[斗]이나 곡[斛]으로써 하고자 하면
비록 이런 마음 세울 수는 있으나
어찌 이런 이치 있을 수 있으랴.
심념(心念)엔 변두리가 없어서
생겨나고 생겨나면서 쉼이 없나니
마치 물이 바다에 들어가듯이
늘고 주는 것 볼 수 없어라.
하물며 마음의 본래 근원을
사람이 헤아리고자 하고
마음이 염(念)하는 바를 찾고자 하지마는
어찌 이런 이치가 있으리오.
성인이 내려오시어
세상에 나타나 보이신 까닭은
짐짓 허공을 헤아려서
곡[斛]과 말[斗]의 양을 알게 하고자 하심이라.
생각의 생겨나고 생겨남을 분별하여
앞과 뒤, 그리고 중간을
낱낱이 다 능히 알아서
나고 죽는 근본의 씨를 끊었어라.
사람의 마음 한 종류가 아니라
약간의 종자를 지어 행하여도
스스로 본제(本際)에 떨어져서
끝내 못에 스스로 빠지도다.
과거 여러 항하의 모래 수의
온갖 법이 다 동등했거니
모두 세 가지 선행(禪行)을 말미암아
위없는 도를 이루게 되었도다.장래의 여러 부처님도
또한 마땅히 이 행을 가지고
여러 중생으로 하여금 편히 처하게 하고
함께 같이 도의 깨침 이루시리.
내 이제 성불(成佛)을 해서
이 모든 세계의 왕이 됨은
또한 3세의 지혜로
위없는 도를 이루었기 때문이로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이 게송을 설하시고 나서 문득 선남자와 선여인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무수한 항하 모래 수효의 겁 동안에 부처님이 출현하셨으니, 이름이 견무(見無)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ㆍ명행성위(明行成爲)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 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天人師)라 일컬었고, 불세존(佛世尊)이라고 호칭하셨다. 또한 이곳에서 성불했을 때 그 나라에 임금이 있었으니 이름을 길만[吉滿]이라고 하였다.그 왕이 이곳을 다스리고 교화하자 백성들이 번성하였고, 오곡(五穀)이 잘되어 풍년이 들었고, 7보(寶)를 성취하였다. 이른바 ‘7보’란 구슬의 보배[珠寶]ㆍ마차 보배[輪寶]ㆍ옥녀 보배[玉女寶]ㆍ말 보배[馬寶]ㆍ코끼리 보배[象寶]ㆍ창고 보배[典藏寶]ㆍ군사 보배[典兵寶]이다. 다시 1천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재주가 많고 용맹하였으며, 여섯 가지 기예[六藝]를 두루 갖추었다.그때에 길만 대왕은 나이가 이미 늙고 쇠하여서 왕의 자리를 버리고 저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을 따라서 범행(梵行)을 청정하게 닦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왕의 자리를 첫째 왕자에게 물려주고 문득 견무(見無)부처님 처소에 나아가 범행 닦기를 구하였으니, 저 부처님을 따라다니면서 열두 해 동안 이 세 가지 선[三禪]을 닦았으나 당시는 오히려 한 구절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였다.다시 저 부처님께서 세상을 버리신 이후 중간 20대겁(大劫) 동안에는 부처님이 없었는데, 뒤에 부처님이 출현하시자 다시 그 부처님께 나아가서 범행(梵行)을 닦았다. 이렇게 하여 12억 나술의 온갖 부처님을 겪었는데, 낱낱의 여러 부처님 처소에서 청정하게 범행을 닦았으며, 다시 그 이래로 무수한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오래오래 지난 후에 비로소 광명(光明)여래ㆍ지진ㆍ등정각을 만나서 그에게 세 가지 선의 지혜[三禪慧]를 받으니, 지금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얻었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모인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때의 길만 국왕이 어찌 다른 사람이랴.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때의 길만 국왕은 지금의 나, 석가모니부처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이니라. 그 이후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 세 가지 선[三禪]을 얻어서 본행이 자연히 부처를 이루어 이렇게 도량에 앉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쌓은 공덕을 생각하니
수없는 부처님을 거치었네.
여러 가지 번뇌를 만났지만
능히 스스로 제도하지는 못했네.
그 동안 항하 모래 수효의
무수한 부처님께 공양하고
처자와 나라 재물로 보시했건만
이 세 가지 법은 얻지 못했었네.
나중에 광명 부처님 만나서
비로소 이 존귀한 지혜 얻어
꾸준히 청정한 행을 닦아
비로소 세 가지 선법 깨쳤도다.
담연(澹然)하여 걱정이나 두려움 없고
생겨남도 없고 오염도 없어서
뭇 상호로 스스로 장엄하니
이 때문에 인중존(人中尊)이라 호칭했네.
나의 평등한 지혜로 말미암아
뭇 상념의 집착을 일으키지 않고
이 천상과 세상 사람을 교화해
삼계의 존귀함을 맡아서 거느렸네.
그때에 부처님께서 이 게송을 말씀하시고 나자, 당시 자리에 있던 백천억의 중생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無上正眞道意]를 발하였고, 다시 온갖 천상과 세간 사람들이 염(念)한 바의 도에 따라 각각 스스로 성취하였다.
그때 보살이 있었으니 이름을 정(淨)이라고 불렀다. 그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저 전륜성왕(轉輪聖王)이 4천하를 거느리게 되자 문득 7보(寶)를 갖출 수 있었으며, 그런 뒤에야 비로소 이름하여 전륜성왕이 되나이다.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도 일곱 가지 법의 바라밀이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이름하여 지진 등정각이 되셨나이다. 이제 부처님께 여쭙사오니, 일곱 가지 법을 형상이 있다고 하시나이까, 형상이 없다고 하시나이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그치어라. 족성자야, 내 이제 너의 기민한 말솜씨를 알았노라. 족성자가 질문한 여래의 일곱 가지 법은 곧 형상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법은 너무나 깊어서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전륜성왕의 7보(寶)는 형상이 있나이까, 형상이 없나이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느 것은 형상이 있고 정(情)도 있으며, 어느 것은 형상은 있으나 정이 없느니라. 어떤 것이 형상도 있고 정도 있는 것인가? 옥녀 보배[玉女寶]ㆍ코끼리 보배[象寶]ㆍ말 보배[馬寶]ㆍ창고 보배[典藏寶]ㆍ군사 보배[典兵寶] 등은 형상도 있고 정도 있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형상은 있고 정은 없는 것인가? 바퀴 보배[輪寶]와 구슬 보배[珠寶], 이것은 형상은 있지만 정은 없는 것이니라.”그때 정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전륜성왕과 같은 이는 하늘의 자리에 있으면서 뜻으로 염(念)하는 바가 있으면 이윽고 염(念)한 바가 곧 이르나이다. 이때 형상이 있고 정이 있더라도 왕이 염하면 문득 이르니, 정이 있다고 해도 이르고 정이 없다고 해도 이르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비록 정이 있더라도 왕이 염하면 문득 도달하니, 그것들이 왕의 뜻을 알고서 이르는 것은 아니니라.”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들이 비록 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바퀴 보배ㆍ구슬 보배와 무엇이 다르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야. 바퀴 보배ㆍ구슬 보배도 또한 염을 말미암아 이르느니라.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음향의 언교(言敎)가 있느냐, 없느냐?”
정보살이 아뢰었다.
“언교(言敎)가 없나이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느니라, 족성자야. 정이 있더라도 염을 쓰는 까닭에 곧 이르지만, 정이 없는 두 가지 보배는 언교를 취하지는 않느니라.”
정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떠하나이까. 부처님이시여, 만일 전륜성왕의 심념(心念)이 문득 이른다면, 바퀴 보배ㆍ구슬 보배로 하여금 언교가 있게 하고자 할 수 있나이까, 없나이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느니라. 왜냐하면 전륜왕의 위력(威力)이 그렇게 하도록 문득 언교가 있게 하느니라.”
정보살이 아뢰었다.
“전륜성왕은 통(通)도 아니요, 감(感)도 아니나이다. 어떻게 정 없는[無情] 것으로 하여금 언교가 있게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전륜성왕은 세속의 통함[世俗通]을 얻어서 세상 사물을 생각에 응하는 대로 할 수 있지만, 다만 정(情) 있는 것을 정 없는 것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느니라.”정보살이 다시 여쭈었다.
“정 있는 것을 정 없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이제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낱낱이 분별하리라. 정 있는 것으로 하여금 정 없음에 이르게 하고, 정 없는 물건으로 하여금 정 있음에 이르게 하니, 잘 생각하고 생각하여라. 이제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설하리라.가령 전륜성왕이 저 형상이 있고 정이 있는 중생이 애착하여 즐기는 것을 능히 버리지 못한 채 영원히 간직하여 끝내 변하지 않고자 하는 것을 관하고서, 스스로 자기 자신이 왕의 거룩한 자리를 받은 걸 생각하며 다만 그 복만을 보고 마멸됨은 보지 않으니, 이것을 형상 없는 물건을 정 있게 함이라고 하느니라.가령 선남자나 선여인 가운데 도의 자취[道迹]를 이미 이룬 이는 항상 스스로 사유하길 ‘나는 이제 버렸으므로 다시는 애착하고 즐겨하지 않는다. 이 형상을 멸하여 식에 물들지 않으려고 한다’라고 하니, 이것을 형상이 있어도 정을 멸한다고 말하느니라.”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가령 4법계(法界)에서 하나의 법계가 늘면 여러 법계가 줄어들고, 여러 법계가 모조리 늘면 하나의 법계가 줄어든다. 이것은 정 있음으로 말미암아 늘어나는 것이지, 정 없음을 말미암아 늘어나는 것은 아니니라.”
정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가령 부처님께서는 ‘내가 이제 정 있음으로 정 없음에 이르고, 정 없음으로 정 있음에 이르는 것을 마땅히 설하겠노라’고 하셨는데, 이제 부처님은 다만 정 있음으로 정 없음에 이르는 것만을 설하였을 뿐, 부처님께서 정 없음으로 정 있음에 이르는 것을 설하심은 듣지 못하였나이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족성자야, 지금 발한 그대의 물음은 모두 부처님의 위신(威神)이시니라. 나는 이제 그대에게 반문하리니 마땅히 낱낱이 나에게 답하여라.
어떠하냐. 족성자야,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처음 배움의 경지[學地]에 있으면서 배움의 법인 7무루관(無漏觀)을 성취하면, 이때에 다시 범부(凡夫)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대답하였다.
“없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느니라. 족성자야, 이것을 정 있음에서 정 없음이라고 말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떠하냐. 족성자야, 만일 이제 무학(無學)이 아홉 가지 청정한 도를 닦으면, 그때에 다시 7무루관이 있겠느냐, 없겠느냐?”대답하였다.
“없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불퇴전의 보살이 허공관(虛空觀)을 얻어서 16성행(聖行)을 닦으면, 그때에 무학(無學)은 아홉 가지 청정한 도를 닦겠는가, 못 닦겠는가?”
대답하였다.
“못하나이다,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고 그러하니라. 족성자야, 이것을 정 있음에서 정 없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물어 말씀하셨다.
“이제 8주(住) 보살이 부처님의 형상을 얻어 32성제(聖諦)를 얻으면, 그때에 다시 아홉 가지 청정한 도가 있겠느냐, 없겠느냐?”
대답하였다.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족성자야, 이것을 정 있음에서 정 없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하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떠하냐. 족성자야, 9지(地) 보살은 그때에 다시 32성제가 있느냐 없느냐?”
대답하였다.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족성자야, 이것을 정 있음에서 정 없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떠하냐. 족성자야, 지금의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이 최후에 열네 가지 여러 번뇌를 항복받으면, 그때에 다시 3선행(禪行)이 있는가, 없는가?”
대답하였다.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족성자야, 이것을 정 있음에서 정 없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이미 그대를 위하여 정 없음에서 정이 있고, 정 있음에서 정이 없음을 말하여서 문득 여래의 도의 가르침[道敎]을 능히 갖추고 보살의 자리에 올라가 도량에 나아감은 마치 달빛이 뭇별 가운데서 밝아서 일체를 널리 비추어 비춤을 입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정이 없음에서 정이 있고 정 있음에서 정 없음을 갖추면, 문득 여래의 거룩한 행을 갖추어서 몸은 황금빛으로 뭇 덕이 우뚝 높아서 마치 자마금산(紫磨金山) 같고 뭇 지혜가 자재하느니라.”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오늘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는 정 없음에서 정이 있나이까. 정 있음에서 정이 없나이까?”그때 세존께서 정보살에게 이 뜻을 물으시고 나서 문득 몸의 마디마디로부터 광명을 놓으시어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 널리 비추어서 다 금빛으로 하시고 광명을 도로 거두어 들이셨다. 그러시고는 문득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족성자여. 이제 무상(無相)의 법으로써 여래에게 이 뜻을 묻는구나.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은 9지(地)를 이미 지난 까닭에 정 없음에서 정이 있음이 성불에 이르게 되고 나아가 도량에 이르렀다. 이것을 정이 있음에서 정이 없음이라고 이르느니라. 왜냐하면, 모두 중생에게 있는 상념의 집착을 말미암기 때문이니라.”정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듯이, 중생인 까닭에 정 있음에서 정이 없음에 이르는 것인데, 여래께서도 아직 여의지 못하였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벌써 여의었느니라. 비록 처해 있어도 또한 물들지 않느니라.”
또 물어 여쭈었다.
“어떠하나이까, 세존이시여. 여래는 별개의 정으로 정 있음에서 정이 없게 하시나이까. 혹은 오직 정 있음에서 정이 없을 뿐이옵나이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여래에게는 다시 별개의 정이 없는 가운데 다시 정 있음에서 정이 없음에 이르는 것이니라. 다만 제일의(第一義)로 하기 때문에 정 있음에서 정이 없느니라.”
정보살이 다시 여쭈었다.
“무엇이 정이 없는 것이오며, 무엇이 정이 있는 것이옵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나에게는 벽지불과 아라한의 마음은 없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慈心]ㆍ어여삐 여기는 마음[悲]ㆍ기뻐하는 마음[喜]ㆍ옹호하는 마음[護]은 있다. 이것을 정 있음에서 정이 없음이라고 말하느니라.”정보살이 아뢰었다.
“여래께서는 오늘, 정 있음에서 정이 없는 것이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정 없음에서 정 없음도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느니라.”
정보살이 여쭈었다.
“어느 것이 그러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마음이 멸하여 무위(無爲)에 의탁해 있다. 이것을 정 없음에서 정 없음이라고 말하느니라.”정보살이 물어 여쭈었다.
“무위도 정이 있음이요, 정 없음도 또한 정이 있음은, 가짜 호칭[假號]을 이름붙인 것이나이까? 세존이시여, 어찌하면 ‘나는 지금 마음이 멸하여 무위에 의탁하여 있다’고 말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그렇고 그러하느니라. 그대의 말대로 이니라. 일체의 모든 법은 모두가 가짜 호칭이니, 이 또한 정 없음에서 정이 있고 정 있음에서 정이 없음이니라.”정보살이 다시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법은 어지럽고, 모든 법은 일정치 않고, 모든 법은 무상(無常)한데, 어찌하여 가짜 호칭의 법 중에서 다시 정 있음에서 정이 없고 정 없음에서 정이 있다고 말씀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떠하냐, 족성자여. 내 이제 마땅히 제일의로써 그대에게 물으리니, 그대는 마땅히 낱낱이 나에게 답하여라. 그대는 이제 정이 있느냐, 정이 없느냐?”대답하였다.
“정이 있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정은 무엇에 서있는가?”
대답하였다.
“정 없음에서 섰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지금 정이 있는데, 어떻게 정 없음에서 섰다고 하는가?”대답하였다.
“있음을 버리고 없음으로 나갔으므로 정 없음에서 섰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정 없음이 이미 무위라면, 무엇에 서있는가?”
대답하였다.
“세운 바 없음에 섰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제 어떠한 법을 써서 세운 바 없음에 섰는가?”대답하였다.
“저는 이제 정 있음을 보지도 않고 정 없음을 보지도 않나이다. 그리하여 세운 바 없음에 섰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그대는 일체 모든 법은 가짜 호칭이라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가짜 호칭의 법 가운데 정 없음에서 정이 있음을 말하고 정 있음에서 정이 없음을 말하는가? 만일 응당 그렇다면, 모든 법은 어지럽고, 모든 법은 일정치 않고, 모든 법은 무상하느니라. 그대는 지금 정 있음도 아니고 정 없음도 아니기 때문에 세운 바 없음에 섰다고 다시 말하지 않았는가.”그때 정보살은 침묵을 지키면서 답하지 못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그대는 어떠어떠한 뜻을 관하고 있기에 침묵을 지키면서 답하지 않는가?”
정보살이 아뢰었다.
“저는 제일의(第一義) 중에서 말도 없고 설함도 없음을 관하는 까닭에 침묵을 지키고 있나이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족성자여. 일체 모든 법은 모두 다 가짜 호칭이니라. 가짜 호칭의 법에서는 비진(非眞)이고 비유(非有)이지만, 물들어 더러운 마음을 쓰는 까닭에 중생은 이를 통달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저마다 스스로 이것은 열반이고 이것은 생사(生死)라고 말하지만, 제일의의 청정관(淸淨觀)으로 보면 열반도 없고 또한 생사도 없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문득 이 게송을 말씀하셨다.
일체의 모든 법계는
본래 없어서 있는 바가 없는데
나고 죽음을 달관하지 못하여
법이 으레 있다고 여기니,
3세(世)의 고(苦)를 겪고 나서
나아가 보살의 길을 구하며
퇴전(退轉)을 항하 모래 수처럼 한들
어찌 본래 없음에 달할 수 있으랴.
10력(力)의 부처님, 현세를 불쌍히 여기시고
중생의 무리 어여삐 생각하사
가짜 호칭의 법을 연설해서
지극한 도의 밝음을 알게 하시며,
해탈하여 견줄 이 없는 부처님
법의 소리 속히 연설하시어
한량없는 중생의 무리에게
법의 감로를 듬뿍 채우네.
큰 도는 형상이 없고
유정(有情)과 무정도 아니니
다만 물들어 더럽힌 마음을 내면
세 가지 선(禪)을 얻지 못하리.
만약 근본을 닦아 익히고자 하거든
청정한 일곱 가지 무루(無漏)와
아홉 가지 청정한 경지를 창달할지니,
이것이 소위 도의 문에 나아감이네.
처음 도량에 나아가고자 하여
얽매어 집착한 열네 가지 마음을
부처를 얻으면 마땅히 멸해야 하고
그런 뒤에 도의 과를 이루어야 하네.
열여섯 가지 온갖 훌륭한 진리와
보살의 온갖 법인(法印)으로
감로의 지혜를 수기 받아
그로 인해 여래라고 호칭하도다.
서른두 가지의 법의 근본과
보살의 신통지혜로
3세의 근심을 소멸시키면
점차 열반에 이르네.
대저 불도를 구하고
부처님 나라를 장엄하여
시방세계에 명성이 두루하고 싶다면
선(禪)을 닦아야 곧 얻으리.
무루의 세 가지 선행(禪行)은
모든 부처님의 깊고 오묘한 곳간,
중생을 위하여 서원을 세우고
죽음이 없는 법을 설하도다.
행이 다해 행을 짓지 않고
과(果)도 또한 과보가 없고
도(道)는 평등한 지혜로 따라오니
마음이 한결같아 삿된 생각이 없네.
네 가지 믿음은 여래의 보배요
여섯 가지 외도는 세상 번뇌라 하네.
일곱 가지 깨달음의 청정한 방편으로
여덟 가지 도가 갖추어 이루어지도다.
세속의 5신통의 도는
새가 허공을 가는 것 같아서
목숨은 땅[地大]에 매었으니
나고 죽음의 어려움 면치 못하나,
6신통의 대승의 도는
허공 사이를 노닐면서
끝내 퇴전(退轉)하지 않으니
이 편안함은 여지가 있지 않도다.
지혜의 관(觀)으로 청정을 요달해서
어둠 속을 모조리 비추어
집착도 없고 물들지도 않는 까닭에
하늘에서 가장 높은 이[天尊:부처님]라 호칭하네.
도(道)의 생겨남은 스스로 나지 않으니
인연이라야 비로소 도가 있도다.
법마다 스스로를 알지 못해
비고 고요하나니 무엇을 도라 하랴.
사람은 본래 생사에 처해서
유랑하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나니
정진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면
점점 거룩한 율[聖律]에 감응하리.
마음의 구슬은 본래가 스스로 밝아서
바깥의 광명을 빌지 않지만,
해와 달에는 다섯 가림 있으니
어찌 능히 비추는 바 있으랴.
부처님의 근본 행은 청정하여서
마음의 지혜에 흠과 티끌이 없네.
스스로 제도하고 다시 상대를 제도하면
이르는 곳마다 걸림이 없도다.
여러 가지 욕망을 능히 끊고
여러 가지 얽매임과 집착을 제거하면
여러 가지 법의 광명으로 비추어서
어리석음의 어둠을 알지 못하리.
열반은 성품이 청정하여
오가는 것을 볼 수 없고
깊고 미묘하여 볼 수 없고
담박하여 변하고 바뀌지 않도다.
선정의 한결같은 뜻에 들어서
온갖 시방(十方)을 감동시키고
신족의 도력(道力)도 강하여서
여덟 가지 진리를 손상하지 않도다.
그 까닭에 큰 서원 발해
눈물로 중생을 불쌍히 여겨
대신하여 고통 받기를 염(念)하나니
이것이야말로 실로 훌륭하도다.
사람은 무상을 헤아리지 못하고
삼계의 영화를 탐내고 집착하여
바람에 불려 떨어진 낙엽처럼
나아가는 바를 따라 유전하네.
허공은 변제(邊際)가 없듯이
도의 행도 또한 가없네.
허공은 음향으로써 보답하지만
비고 고요함은 근본이 없네.
사람은 본래 어머니 태에서 나오면
행에 따라 5도(道)로 물드니,
선악이 사람의 형상을 추적함은
마치 그림자가 그 몸을 따름과 같도다.
만일 5음(陰)을 능히 멸하면
신식(神識)은 공(空)으로 돌아가
다시는 나고 늙고 죽지 않으리니
이곳은 실로 쾌락하네.
모든 부처님의 곳간을 알려 해도
깊고 그윽하여 볼 수가 없으니,
경계를 넘고 3세를 넘어서
나고 죽음의 언덕을 돌아보라.
본래 나[我]는 어리석고 미혹해서
이 이글거리는 가마솥에 들었었지만
지금은 이 재앙을 여의고
청정한 연못에서 유희하도다.
나는 이제 비록 고통을 면했으나
나만 여의고 그대는 못 여의었으니
혼자 좋은 것은 큰 서원 아닐세
어찌 홀로 멸도를 취하겠는가.
다시 현생(現生)에 돌아와
방편으로 교화하고 번뇌에 처하면서
널리 제도하길 끝없도록 하니
겁수(劫數)의 기간을 마다하지 않도다.
나날이 제도함이 항하의 모래 같아서
이와 견줄 짝이 없으나
털끝만한 자기 공훈을
내세워 계교하지 않도다.
제도한 이를 가깝게도 생각지 않고
제도 못한 이를 멀리 생각하지도 않으며
심식(心識)은 담박하여 한결같아서
구경에 이르러도 걸림이 없도다.
색상(色相)은 몸에 갖추어 있고
얼굴은 비할 데 없이 준수하며
모든 근(根)이 마침내 순수하게 성숙해서
이내 커다란 즐거움을 이루네.
총명한 근기는 행을 갖추었으나
깨달음은 오히려 다시 점차적이어서
어리석은 이를 만나면
이것이 바로 심각한 어려움이네.
보살이 정의(定意)에 들어가면
유와 무의 상념을 염(念)하지 않아
혼자 걸어도 두려움 없어
덕으로 온갖 어려움[山岳]을 지나가도다.
행자에게 다섯 품이 있어
나아가고, 물러나고, 중간의 법이 있네.
뜻을 세움이 수미산[安明]과 같고,
마음이 굳건해 움직일 수 없도다.
6바라밀의 큰 신통 지혜
신족(神足)으로 오감을 통해
법계에 세 가지 생각이 없으니,
그 까닭에 법륜을 능히 굴리네.
본래 한량없는 선(善)을 쌓아
스스로 인중존(人中尊)을 이루고,
도는 평등하여 세 가지 근본이 없는데,
마음으로 안팎의 청정을 헤아리도다.
성품의 행(行)에는 약간의 차이 있으나
법을 행함에는 차이가 없네.
다만 세상을 위하여 말하는 이는
차이가 있는 품을 분별한다네.
과거의 행에도 여러 겁 동안
일찍이 상념을 일으킨 적 없으니
그러므로 노니는 마음 경계가 없어
허공에 정체되어 있지 않도다.
땅은 지극한 정성의 근본이 되어
더럽고 더럽지 않음을 능히 참네.
지혜의 마음이 용납하는 바는
제도하고 제도하지 않음을 보지 않도다.
성인의 행은 매우 훌륭해서
이 온갖 고통을 능히 참으며
억 겁에 공덕을 행하여서
비로소 한 법의 근본을 이루도다.
세 가지 정(定)과 공과 무상
무원(無願)으로 온갖 법을 행하고,
온갖 지혜와 10력(力)의 슬기로
생겨남이 없는 곳을 초월하도다.
본래 음향의 지혜를 닦은
여덟 가지 소리[八聲]는 매우 청정하고 미묘하네.
5온(薀)의 행을 분별하여
사념과 상념의 탐냄을 없애도다.
나고 죽음의 근본에 빠진 채
벗어날 요긴한 길 구하지 않는데,
세 가지 근본에서 근본을 버리지 않아야
곧 도의 요체에 나오리라.
스스로 숙명통(宿命通)을 인식하면
법신은 불가사의해서
있음[有]을 헐고 무등(無等)을 이루리니
이 힘은 막을 수 없네.
허공은 양(量)과 경계가 없어서
하나도 아니고 둘, 셋도 아니네.
본래의 서원을 따라 행해서
온갖 묘한 도를 청정히 닦네.
나고 죽음의 찌꺼기 법을
어리석은 자는 탐내고 즐기지만,
지혜의 관(觀)으로 물들어 집착함 없으면
어리석고 미혹한 법을 영원히 없애네.
보살은 고요함을 즐겨서
한량없는 법을 사유하고,
현재에 나고 멸하지 않아서
있음도 아니요 있지 않음도 아니네.
스스로 숙명통을 인식해서
본래의 나고 죽음의 뿌리를 관하면
마치 사람이 강과 바다에 임박한 것 같아서
이내 떨면서 두려워하네.
큰 서원의 바라밀은
도지(道地)의 행을 바르고 평등이 하여
앉거나 눕거나 깊은 곳간에 들어가
더러운 행을 언제나 여의네.
땅ㆍ물ㆍ불ㆍ바람ㆍ공(空)에
신식(神識)은 집착에 기대어 머무니,
소굴의 처소를 구하고자 하지만
신식의 취향을 알지 못하네.
사람도 또한 믿음이 그러해서
인연은 함께 합쳐져 모이지만
식은 4대(大)와 공을 여의므로
제각기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네.
법의 바다는 끝이 없어
안팎의 티끌도 받아들이지만
본래의 성품은 스스로 청정하여서
더러운 물듦을 분별하지 않네.
큰 도는 본래 법이 없어서
법을 관해도 안팎이 청정하고,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염(念)하지 않으니
세상의 지혜로는 견줄 것이 없네.
여러 가지 온갖 소리와
양(量)이 있고 양이 없는 법은
겁수(劫數)의 마멸법이라 깨달으면
어찌 상존(常存)하는 것이 있을까보냐.
중생의 액운을 능히 끊어주고
네 가지 마(魔)의 경지 영영 여의어
탐하고 시기함이 본래 성품 없어
이에 청정한 관(觀)에 감응하네.
본래 보리수 밑에 앉아서
첫 밤과 중간도 또한 마찬가지로
한마음, 한뜻으로 그치니
정의(定意)는 다시 어지러움 없네.
7일 동안 체(體)가 기울지 않고
3세의 법을 모두 살펴서
하나를 멸하니 다시 하나 없어
이로부터 이내 깨쳤다네.
이제 이미 부처를 이루어
제도 못한 이를 불쌍히 여겨서
위없는 법을 굴리면서
녹야원에 있노라.
먼저 네 가지 밝은 지혜인
고(苦)ㆍ집[習]ㆍ멸(滅)ㆍ도(道)의 지혜를 설해
깨닫지 못한 이를 위하여
세 번 설하여 성취케 하니,
온갖 한량없는 대중은
감로의 법을 처음 듣고
모두 무생(無生)의 마음 얻어서
다시는 나고 멸함이 없느니라.
비록 이 생(生)을 나타냈으나
신(神)은 한량없는 세계에 노닐어서
가는 데마다 법륜을 굴리고
곳곳에서 변화를 나타내네.
여기에서 부처 되려고 나타나서
열 달을 어머님의 태(胎) 속에 있었으나
성인에겐 티끌과 때가 없어서
다섯 가지 욕심을 탐내지 않네.
이 까닭에 정진하여 배워서
‘있다’, ‘없다’의 식을 여읨을 생각하면
체(體)의 성품과 행이 자연스러워
법계를 헐지 않으리.
지나간 것은 헤아릴 수 없고
오는 것 또한 다함이 없으며
현재는 다시 변하고 바뀜은
신식의 소재가 됨이니라.
식은 나고 죽음의 근본이 되어
유랑함에 다함이 없으니
무위의 언덕에 이르고자 하면
세 가지 선을 으뜸으로 삼아라.
바라건대 무색(無色)의 법을 얻어
형상 없는 옷으로써 물들이고
없음에서 스스로 즐겨야지
3유(有)에 처하기를 원하지 말라.
내 본래의 굳은 맹세를 염(念)하건대
본제(本際)의 중생을 위하여
다시 세속을 따르더라도
큰 서원의 마음 빠트리지 않네.
보살의 세 가지 근본 행함에
서로 승부의 마음이 있으니,
나는 이제 비로소 스스로 통달하여
정진 가운데 최고가 되었네.
여래가 나타낸 변화는
능히 사량할 수 없으니,
혹 바윗돌 사이에 처해도
고요하고 잠잠해서 언설이 없네.
안의 6진(塵) 분별하매
나도 없고 남의 상념도 없으니,
바깥 법도 당연히 그러해서
항상의 상념은 항상의 상념이 아니네.
나는 처음 뜻을 발하면서부터
행을 세워도 내 몸만 위하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먼저 깨쳤지만
어찌 나머지를 위하지 않으랴.
그러므로 힘써 부지런히 배우는 이
본래의 염원을 저버릴까 걱정하여
아직 제도 못한 자를 제도함이니
이것을 여래의 맹세라고 말하네.
부처는 본래 처음부터 원을 발하여
겁수의 어려움은 걱정하지 않았으니,
비록 티끌 욕심에 처해 있지만
이 고통 또한 오래지 않으리.
바른 법은 본래 둘이 없어서
차품(差品)에 3호(號)가 있네.
도는 해와 달의 비춤과 같아서
높고 낮은 마음이 있지 않노라.
하나의 지(智)와 하나의 혜(慧)는
본래 하나의 원(願)으로부터 이루어졌으니,
나는 이제 하나를 버리지 않으니
이 때문에 제일 존귀한 이라고 호칭하네.
두 관(觀)은 하나의 법으로부터이고
염(念)을 행하여 세 가지 고통 지나면
본래 괴로움의 경계가 없다고
법신은 스스로 분별하리라.
보살은 방편의 슬기를 잡아
사람으로 하여금 법의 상념 없게 하고
참 사람[眞人]의 뜻은 늘 청정해서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을 생각지 않네.
항상 큰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중생을 염(念)하길 빠트리지 않아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법의 뜻을
영락(瓔珞)하여 갖추는 지혜 있네.
도의 근본은 스스로 나가 없으니
이것에서 중생의 입이 나왔고,
중생을 위해서는 본래 스스로
나가 없다고 설할 수 없네.
이제 마땅히 행이 있음을 설하여
도의 자취를 점점 보게 해서
항상의 상념이 없음을 알게 하면,
오랜 후엔 반드시 스스로 깨달으리라.
세상에 있으면서 성스러운 행을 닦으며
끝내 의(義)의 근본을 잃지 않지만,
문자를 쓰는 까닭에
세상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네.
온갖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온갖 정(定)의 뜻에 노닐면
사람 가운데 신룡(神龍)으로 걸어
4무외(無畏)를 얻네.
여래는 따로 제(諦)가 있으니
하나하나 불가사의해서
의지함도 없고 물든 바도 없으니
이 때문에 인중존(人中尊)이라 호칭하네.
무릇 사람은 세상의 법도를 배워서
일제히 상념 없음에 이를 수 있지만
일구(一句)의 진의(眞義)로
생사에 처하지 않음만 못하다네.
그때 세존께서 이 게송을 설하시고 나서 말씀하셨다.
“어떠하냐, 족성자여. 이 정 있음과 정 없음의 뜻을 자세히 살펴서 이해했느냐?”대답하였다.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실로 이와 같이 훌륭한 말씀은 없나이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정 없음에서 정 있음과 정 있음에서 정이 없는 뜻을 외고 받아 지니면, 문득 능히 온갖 여러 법을 갖추리니,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과 일체 성현은 모두 이 뜻을 말미암아 성불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후부터 저희들 모두 이 선남자나 선여인이 정 없음에서 정이 있고 정 있음에서 정이 없음을 받아 지니고 외는 것을 반드시 옹호하겠나이다. 왜냐하면 제가 관하는 바로는 여래께서 설하신 것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부처님이 모두 이 뜻을 말미암아 성취했기 때문이니, 저희들도 또한 마땅히 이 법의 뜻에 미쳐야 하겠나이다.”그때 이름을 무관(無觀)이라고 하는 보살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팔을 드러내고 합장한 채 꿇어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 여덟 사람은 이 현겁 속에서 선남자나 선여인으로서 이 글귀의 뜻을 받아 지녀서 외는 이가 문득 마땅히 열 가지 공덕의 복을 얻도록 옹호하겠나이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첫째는 형상이 없는 법을 얻고, 둘째는 법의 곳간[法藏]에 깊이 들어가고, 셋째는 변재(辯才)가 제일이 되고, 넷째는 한량없는 법을 얻고, 다섯째는 빠른 지혜를 얻고, 여섯째는 큰 서원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일곱째는 정의 뜻[定意]이 자재하고, 여덟째는 중생의 생각[念]을 거슬러 알고, 아홉째는 무생(無生)의 마음을 세우고, 열째는 행이 본래 자연(自然)인 것이니,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글귀의 뜻을 받아 지녀서 외는 이는 문득 마땅히 열 가지 공덕을 얻을 것이옵나이다.
만일 삼천대천세계 속에 가득 차있는 선남자나 선여인으로 하여금 보살의 도를 모두 성취하게 하더라도, 이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글귀 하나의 뜻을 받아 지녀서 외는 것만 못하옵니다. 왜냐하면 온갖 훌륭한 공덕이 모두 이를 말미암아 생겼기 때문입니다.”그때 세존께서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하냐, 족성자여. 가령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을 모두 석제환인(釋帝桓因)이 되게 하였다면, 그 공덕의 복이 많은가, 적은가?”
정보살이 아뢰었다.
“몹시 많고 몹시 많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믿음을 세운 선남자나 선여인이 세 가지 선의 근본[三禪本]을 닦은 것만 못함이니, 그 공덕의 복은 매우 많고 매우 많으니라.”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만일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을 모조리 범천(梵天)이 되게 하여서 낱낱의 범천에 신덕(神德)이 한량이 없다면, 그 공덕의 복은 많겠는가, 혹은 적겠는가?”
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몹시 많고 몹시 많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하여도, 이것은 1지(地)의 보살마하살이 세 가지 선의 행[三禪行]을 닦은 것만 못함이니, 그 공덕의 복은 가히 측량할 수 없으며 비유로써 비교할 수 없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벌써 1지(地)에 있으면서 보살의 칭호를 얻어 가지고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찼게 하였다면, 그 공덕의 복은 많겠는가, 적겠는가?”
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많고 매우 많나이다. 부처님이시여.”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2지(地)의 보살마하살이 세 가지 선의 행을 닦은 것만 못함이니, 그 공덕의 복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2지의 세 가지 선의 행은 1지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만일 2지(地)의 보살로 하여금 모조리 성취케 하여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차게 하였다면, 그 공덕의 복이 많겠는가, 적겠는가?”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많고 매우 많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3지의 보살마하살이 세 가지 선의 행을 닦은 것만 못함이니, 그 공덕의 복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3지 보살은 2지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하냐, 족성자여. 만일 3지 보살마하살이 세 가지 선을 갖추어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찼다고 하면, 그 공덕의 복은 많겠는가, 적겠는가?”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많고 매우 많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4지 보살마하살이 세 가지 선의 행을 닦은 것만 못함이니, 그 공덕의 복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4지의 세 가지 선은 3지의 세 가지 선이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4지 보살마하살이 세 가지 선을 갖추어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찼다고 하면, 그 공덕의 복이 많겠는가, 적겠는가?”
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많고 매우 많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5지 보살이 세 가지 선의 닦은 것만 못함이니, 그 공덕의 복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5지의 세 가지 선은 4지의 세 가지 선이 미칠 바 아니기 때문이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만일 5지의 보살마하살이 세 가지 선을 갖추어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찼다고 하면, 그 공덕의 복이 많겠는가, 적겠는가?”
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많고 매우 많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6지 보살이 세 가지 선을 닦은 것만 못함이니, 그 공덕의 복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6지의 세 가지 선은 5지의 세 가지 선이 미칠 바 아니기 때문이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6지의 보살이 세 가지 선을 갖추어서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찼다고 하면, 그 공덕의 복은 어째 많겠는가, 적겠는가?”
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많고 많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7지 보살이 세 가지 선을 닦은 것만 못함이니, 그 공덕의 복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7지의 세 가지 선은 6지의 세 가지 선이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만일 7지의 보살이 세 가지 선을 갖추어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찼다고 하면, 그 공덕의 복은 많겠는가, 적겠는가?”
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많고 매우 많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8지 보살이 세 가지 선의 행을 닦은 것만 못함이니, 그 공덕의 복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8지의 세 가지 선은 7지의 세 가지 선이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9지의 보살이 세 가지 선을 갖추어서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찼다고 하면, 그 공덕의 복은 많겠는가, 적겠는가?”
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많고 매우 많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10지 보살마하살이 세 가지 선을 닦은 것만 못함이니, 그 공덕의 복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10지의 세 가지 선은 9지의 세 가지 선이 미칠 바 아니기 때문이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10지 보살이 세 가지 선을 갖추어서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찼다고 하면, 그 공덕의 복은 많겠는가, 적겠는가?”
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많고 매우 많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마하살만은 못함이니, 왜냐하면 일생보처의 세 가지 선은 10지(指)의 세 가지 선이 미칠 바 아니기 때문이니라.”부처님께서 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일생보처 보살이 세 가지 선의 행을 닦아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찼다고 하면, 어떠한가, 족성자여, 그 공덕의 복이 많겠는가, 혹은 적겠는가?”
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매우 많고 매우 많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잠깐 동안 세 가지 선을 생각하시어 그 공덕을 얻으신 것만 못함이니, 그 공덕의 복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느니라. 온갖 여러 부처님은 이 세 가지 선으로 말미암아 일체 모든 법을 갖추었느니라.”
그때에 부처님께서 문득 게송을 설하셨다.
세 가지 선은 모든 부처의 어머니,
일체의 법을 낳고
중생의 고통을 건지니
이로 인해 인중존(人中尊)이 되었노라.
10지 보살의 종자
얻은 선(禪)이 같지 않으니,
근본 지혜에는 약간이 없고
쉬는 마음을 제일로 삼네.
현재의 열여섯 가지 법
그 가운데서 스스로 즐겨하지만
3독(毒)의 근본에 의지하지 않으니
비로소 열 가지 구절의 뜻에 응하네.
한량없는 경계 뛰어 넘고
근본의 관행(觀行) 잃지 않아서
여러 중생 제도하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모든 법은 꿈같고 허깨비 같아
있음도 아니요 있지 않음도 아니네.
온갖 무리 모조리 교화하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비록 아직은 10지에 있으면서
능히 불사(佛事)를 베풀어 짓지 못해도
갖가지 변화를 나타낼 수 있으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견줄 수 없는 열두 가지 바퀴로
본래 없음의 행을 널리 창달하고
온갖 근본을 받아들이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나고 죽음 한량이 없고
3유(有)의 길에 막힘없어
식신(識神)은 자연히 옮기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사람은 이미 항상하지 않음을 알고
세상의 영화와 총애[榮寵]에 집착하지 않아
참 사람[眞人]은 이것도 저것도 다 끊으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정이 있음은 정 있음이 아니요
정 없음도 또한 마찬가지이네.
도의 행이 삼계를 지나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나고 죽음 본래 조짐이 없고
인연으로 온갖 법이 있을 뿐
저와 저가 서로 모르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사랑과 연민으로 널리 기르고
신상(身想)의 근본에 집착하지 않으며
법의 성품에는 높고 낮음 없으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보살의 근본 행은
오직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으로
열반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도는 네 가지 평등한 마음으로부터이고
큰 서원은 움직일 수 없으며
열 가지 지혜는 뭇 도를 넘으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보시바라밀을 갖추어
낮고 열등한 사람을 건져주어서
곳을 따라 그 생각을 채워주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계를 지켜 범하는 바 없음이
마치 길상의 병을 보호하듯 하고
생각 생각에 잡된 상념 없으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인욕행(忍辱行)의 근본은
상대를 받아들여도 마음이 변치 않고
허공처럼 상념이 없음이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수없는 겁 동안 정진하여
끝내 게으름 품지 않고
중생이 무리를 가르치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세 가지 선의 행 바르게 받아
한 뜻으로 염(念)하면서 변치 않고
시방세계를 감동시키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지혜의 큰 바다 연못
평등하여 둘이 없고
온갖 망상을 없애버리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선권(善權)엔 방법이 없고
변현(變現)엔 한량이 없어
귀천(貴賤)이 있음을 헤아리지 않으니
이를 일러 세 가지 선의 행이라 하네.
그때에 부처님께서 이 게송을 설하시고 나자 백천억의 중생들이 위없는 마음을 모두 발하여 세 가지 선의 행을 얻었다.
19. 수행품(隨行品) ①
그때 하늘ㆍ용ㆍ귀신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와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 그리고 여러 보살마하살ㆍ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각각 스스로 생각을 내었다.
‘우리들이 부처님의 신령한 지혜와 변화의 한량없음을 관하고자 여러 세계에 노닐다가 본 고장에 돌아온 것을 깨달아 아는 이가 없다.’
그때에 범천(梵天)이 있으니 이름을 존부존(尊復尊)이라고 불렀다. 다른 곳 부처님 세계로부터 와서 세 가지 선을 행하여 지났으므로 두려울 바가 다시없었다. 그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팔을 들어내고 합장한 채 꿇어앉아서 게송을 지어 여쭈었다.
천존(天尊)은 세 가지 통달한 지혜로
3세의 근본을 모조리 관하여서
미혹을 끊으시고 의심도 없애서
신령한 지혜의 도(道)를 나타내시네.
있는 그대로 성품이 자연스러워서
행이 3유(有)를 초월했으니,
보살 영락(瓔珞)의 지혜는
총체적으로 어떤 행을 위함인가.
도수(道樹)는 모든 법의 근본이니
무생(無生)의 마음이 제일이네.
스승 없이 스스로 깨쳤으니,
무슨 행을 따라 얻었는가.
낮고 변변치 않은 경지 초월하여
위로는 보살도를 사모하고
네 가지 요긴한 법을 창달하니
범행(梵行)은 청정의 근본일세.
천상과 세간의 중생 무리들
생각 생각이 각각 같지 않아
상념을 멸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함은
무엇을 말미암아 이루어지는가.
법계는 본래 스스로 공하고
받는 지혜가 약간 있어서
하나의 행[一行]으로 부처를 짓게 됨은
다시 무엇을 말미암아 이루는가.
나고 죽은 열두 바다에
유전하면서 오히려 멈추지 않지만
부처님 지혜는 변제(邊際)가 없어서
찾아 연구하여 그들을 제도하네.
도는 본래 일상(一相)으로부터이니
끊고 멸하여 나는 바 없으면
바깥 몸의 번뇌를 관하고
안의 법도 또한 마찬가지이네.
온 곳은 여기서 먼데
기꺼이 법을 듣기를 원하오니
오직 부처님께서 낱낱이 연설하시어
영원히 티끌의 그림자 없애주소서.
그때 부처님께서 존부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족성자여, 부처님 앞에서 이 뜻을 능히 묻는구나. 이제 마땅히 게송으로써 낱낱이 분별해 주리라.”
본래 수없는 세대로부터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본말의 공(空)을 보지 않으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 하네.
한량없는 법을 사유하고
본말의 공을 분별하여
도과(道果)가 오염되지 않으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생각하는 바 삿됨에 처하지 않고
바른 법의 근본 여의지 않아
일상(一相)이 본래 스스로 고요하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10력(力)은 삼천세계의 왕으로서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을 영원히 제도하고
본래 없는 법을 닦아 행해서
5음의 고통 없애주시네.
지혜의 밝음이 비추는 곳은
위로 허공의 무제(無際)까지 사무치니
잘 교화하여 본래의 교법을 따르면,
이를 일러서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공의 성품 고요하고 편안하며
무상(無相)과 무원(無願)도 또한 그러하여
세 가지 정(定)은 평등하여 짝이 있으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그 정(定)에 들어갈 때면
온갖 법은 있는 바 없어서
몸의 물듦을 버리고 한 몸이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모든 부처님의 법 다르지 않아
그 사람을 따라 분별하니.
과거에 이미 멸한 행이
어찌 다시 뿌리의 조짐이 있으랴.
사람의 지혜로 닦고 익혀서
믿음을 지켜 권법(權法)을 삼아
저절로 ‘나’라는 상념 멸하니
이를 일러 행에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아득히 먼 예로부터
중생은 ‘있음’에 물들어 집착하여
있음을 끝내 스스로 알지 못하니
어찌 상념 없는 법을 인식하랴.
다만 대성인(大聖人)이신 분만이
분별하시어 그 품류를 따라서
올바른 요체로 인도를 하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겁수(劫數)의 기한도 어렵게 여기지 않아
손가락 튀기듯 하는 것과 같지만
어리석고 미혹한 사람 깨우치기 어렵고
착함에 나아가게 함이 정말 어렵네.
한 몸[一身] 다시 한 몸으로부터
억만해(億萬姟)를 지나도록
차별을 두지 않고 불쌍히 여겨서
제도치 못했으면 결코 버리지 않네.
행이 본래 자연을 말미암고
날카롭고 둔함이 각각 품(品)이 있어
이제 큰 광명을 입으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나’는 본래부터 스스로 행을 지어
이제 다시 그 갚음을 받으니,
행이 다하면 삼계도 없어서
홀로 서서 의지함이 없네.
사람이 생각하는 뭇 항상된 상념은
성현의 율(律)과 가르침이 아니네.
피차의 상념을 능히 버림이야말로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몸을 헤아리니 본래 스스로 없는데
하물며 식신의 생각[識神念]이 있겠는가.
어리석고 미혹한 중생의 무리
처음부터 능히 버리지 못하네.
도인(道忍)에 다섯 가지 행이 있고
초념(初念) 속에도 마찬가지라서
부정관(不淨觀)을 사유하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몸이 청정하여 티와 때가 없어
끝내 삿된 업을 짓지 않고
입이 참되고 정성스런 까닭은
본래 속임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일세.
도의 윤택[道潤]이 미치는 곳에
문득 구제할 바가 있게 되면
전에 거칠고 난잡함을 말미암음이니
어찌 윤택이 미치지 못함을 원망하랴.
큰 서원은 항상 평등하여서
거칠고 세밀함을 생각지 않고
행이 평등하여 피차가 없으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사람은 그 어려움을 초월할 줄 알아
스스로 지켜서 딴 생각 없고
스스로 구제하고 다시 남도 건지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가령 사람이 5색을 보는 것처럼
스스로 그 식의 상념을 일으켜
고통의 쌓임이 이로 말미암아 불어나
큰 재난과 근심을 여의지 않네.
식의 법은 볼 수가 없어서
인연으로 약간의 생각을 내어
한번 나고 다시 한 번 멸하니
면하고자 하여도 너무나 어렵구나.
도의 지혜에 다섯 가지 모습 있어
이루어지고 파괴되는 법을 분별하니
행이 다하여 소굴이 없어도
그때 식(識)은 마침내 있는 바일세.
한 형상은 한 형상을 받아서
몸마다 마멸되지 않으니
대저 그 나무를 베고자 해서
다 없애려거든 뿌리를 남겨두지 말라.식의 뿌리가 줄기를 뻗어서
이르는 곳마다 걸림 없으니
힘센 장사와 여러 선도(仙道)들
누가 그 근본을 능히 찾으랴.
오직 삼계의 존자만이
능히 가두어 달아나지 않게 하고
지혜의 불로 태워버려서
어둠의 장소는 알지 못하게 하네.
무명은 뭇 행의 연료이고
착함의 근본을 억제해 막으니
여덟 가지 해탈의 물로 씻어서
때를 없애니 티끌 그림자도 없노라.
나고 죽고 오고 가는 고통은
지금 세상에서 뒷세상으로 나아가니
애달프다, 이 고통과 고달픔
성인이 아니면 누가 능히 구제하랴.
온갖 하늘은 복 받은 집이고
네 범천[四梵]도 또한 그러하니
행은 청정한 과보를 말미암아
덕을 인간 가운데 으뜸으로 삼네.
생각하니 옛적으로부터
본래 세 가지 악취(惡趣)가 없었는데
스스로 지어서 지금 각기 받으니
어찌 다시 의심 있으랴.만일 여러 부처님으로 하여금
도의 가르침을 나타내지 않게 한다면
문득 여래 계신 곳에서
그 허물을 비방하여 말하였으리.
나도 또한 너희들 불쌍히 여기노라,
생을 받아서 근본에 요달치 못함을.
이와 같은 중생의 무리는
성현의 가르치심 받지 않네.
지나가신 부처님 한량이 없건만
너는 보고 듣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의 항하 모래 수의 부처님께
어찌 제도를 받을 수 있으랴.
사람의 마음 확연히 깨치면
겁수의 기한을 기다리지 않고
한번 듣고 문득 성불하여
여러 법계를 거치지 않네.
다만 중생의 무리 생각하니
도에 힘쓰지 않아
이 때문에 스스로 떨어져서
5도(道) 연못에 영원히 처해 있네.
마치 새가 허공을 나는데
날개를 의지해야 갈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 지관(止觀)의 정(定)이 없으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공의 지혜 얻으랴.나고 죽음은 한정이 없고
도의 힘은 백 가지 행을 지나네.
형상 없는 옷으로 물들여서
스스로 도의 과(果)를 이루리.
5음 본래 형상 없지만
형태의 색상(色相)을 지어서
그 덕이 제석과 범천을 능가하여
상 없는 법[無相法]을 설하네.
행하는 사람은 바깥의 색을 관하고
안의 식은 가서 분별하네.
저 색은 내가 지은 것 아닌데
나의 마음 스스로 가서 물드네.
색은 본래 나의 근본 아니고
색의 성품은 끝내 없으니
나의 식을 헤아림도 그러해서
본래 무엇으로부터 생겼는가.
스스로 그렇게 깨치면
바깥 색은 스스로 공적하고
안의 식도 또한 그러해서
담연(澹然)하여 본래 생겨남이 없네.
사람이 비상공(非常空)을 생각하여
몸의 근본법을 스스로 관하면
그대로 저기에 이르게 되어
영원히 무위의 언덕에 처하리.본래 5음의 몸 받아
해탈코자 하지만 능히 여의지 못하니
태를 받은 것이 큰 근심이라서
여의지 못하니 무슨 이익 있으랴.
5분법신(分法身)을 갖추고
계ㆍ정ㆍ혜[戒定慧]의 이해를 이루며
도덕의 향을 피워서
세간의 냄새와 더러움을 없애네.
사람이 밝은 지혜를 닦아서
억 겁 동안 게으르지 않으면
뭇 덕이 자연히 갖추어져
견줄 이 없다고 호칭하네.
뜻에 어긋나도 습속(習俗)을 따르고
존귀함에 처해도 교만하지 않아
행에 따라 높고 낮음을 좇으면
영원히 편안함에 처하도록 서게 하네.
혹은 3악도의 고통에 들어가서
방편의 지혜를 나타내어
밖으론 고통을 대신 받는 듯하지만,
내면의 마음은 물드는 바 없네.
나는 옛적 무수한 세상에서
보살의 도를 닦아 행하여
믿음을 다한 인(忍)을 얻어서
행이 2주(住)의 경지를 지났네.그때에 모든 부처님 모여서
널리 시방으로부터 오는 것은
하나의 하렬(下劣)을 위해서
구원 없음을 면케 하고자 함이네.
여러 부처님 각각 손을 펴시어
죄에 이르지 않도록 막으셨지만
죄의 힘 가릴 수 없었으므로
손을 물리치고 옥에 끌려 들어가네.
여러 부처님 그 뒤를 찾아서
지옥 속으로 다시 들어가
저 죄인을 구원하여
뭇 고뇌를 여의게 하고자 하시네.
여래는 신령한 지혜의 힘으로
몸에서 큰 광명을 놓으셔서
지옥 속을 널리 비추시면
환히 밝아서 하나의 색과 같네.
죄인이 광명을 보고서
다시는 몸의 고통스러운 상념이 없고
모두 다 광명을 입어서
지옥의 고난을 여의게 되네.
오직 저 한 중생만은
모든 부처님도 구원하지 못하시나니
5역(逆)의 삼가지 못한 행이
바로 이 고뇌를 이루었네.나는 이때부터
나아가면서 게을리 앉았고
나고 죽는 고통으로도
중도에 마음을 바꾸지 않았네.
지금은 이미 성불을 얻어
호칭을 석가모니라고 하나니
5음의 몸 헐어 없애고
뭇 덕을 널리 갖추었네.
죄를 받음이 끝내 끝장이 없고
선의 근원도 인식하지 못하니
행이 다하여 뭇 덕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허공의 성품에 감응하네.
이제 또한 죄를 받으면서
구원 없는 자 있을까 걱정이니
신력(神力)으로 능히 제지해 머물게 해도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공의 성품 비록 청정하지만
행이 차야만 비로소 갖추게 되니
신족의 다섯 가지 신통법으로는
이 고달픔을 능히 여읠 수 없네.
5음 각각 성품이 있어서
짓는 바가 한 품(品)이 아니네.
인ㆍ지(忍智)의 바라밀은
행이 갖춰져야 비로소 이루게 되네.도는 온갖 법의 근본을 내고
있음이 없는 법[無有法]을 북돋아 키우니
뜻을 세우기 수미산[安明] 같아서
끝내 헐어 없앨 수 없네.
비유하자면 어떤 사내가
마음대로 경계를 만드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바라는 대로 얻을 수 있지만
죄를 면하고자 함은 너무나 어렵네.
7보(寶)의 여러 궁전과
코끼리ㆍ말ㆍ나라ㆍ재물 보배
이것은 모두 허깨비 같아서
잠깐 동안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으며,
전륜성왕이라는 자리는
4천하를 거느리고 있지만
이 또한 마멸의 법이어서
무상하여 오래 존재하지 않네.
저 닦아 행하는 사람
색의 근원을 분별하여
본래 스스로 그렇다고 이해해 아나니
이것을 일러 색음(色陰)을 이루었다고 하네.
몸의 아픔은 백팔 가지이고
안과 밖과 중간의 법이 있으니
아픔이 나오는 데를 알면
이것이 통음(痛陰)에 응하는 법이네.상념은 아지랑이가 이글거리는 것 같아서
허물어지면 본래 있는 바가 없으므로
상념을 억제하여 생겨나지 않게 할지니
이것을 일러 상음(想陰)에 응한다고 하네.
세 가지 행이 세 가지 법 이루어
셋을 멸하면 곧 셋에 응하므로
3독(毒)의 뿌리를 뽑아내어 끊으면
3세(世)의 유(有)에 물들지 않네.
다섯 가지 법을 벌써 갖추어
식이면서 식 없음을 받지 않아
안팎의 여섯 티끌 없으니
이를 일러 식온(識薀)이라 한다네.
네 가지 방편의 도를 잡아
4무애지(四無畏智)를 타고
네 가지 도과(道果)의 증명을 초월하니,
때문에 네 가지 취요(聚要)에 응하네.
나고 죽는 바다는 경계가 없어
광대하여 가장자리가 없으니
여섯 신족의 도를 타면
곧 그 연못에 노닐 수 있네.
어리석고 미혹한 종자 불쌍히 여기어
완습(翫習)하면서 버리지 않음은
형상이 마치 파초 나무와 같아서
껍질은 있어도 속은 알맹이가 없네.나는 이제 보리수의 밑에서
온갖 도의 품(品)을 영락하여
공훈이 백억을 초월하니
세웅(世雄)이 존귀하기 으뜸이네.
오늘날 부처님께서
5탁 세계에 출현하시었지만
티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니
마치 연꽃이 집착 없는 것과 같네.
그 마음 마땅히 수호하여
번뇌에게 미혹되지 않고
안으론 여덟 가지 바른 깨달음으로
몸과 마음의 법을 영락하여야 하네.
밖으로 여러 가지 상호로써
온갖 국토를 장엄하고
밝은 지혜로 두 관(觀)을 닦으면
상호를 스스로 장엄하게 꾸미리.
본래 4대(大)로부터 이루어져서
이루어짐과 무너짐은 있는 바가 없네.
앞의 생각[前念]이 뒤의 생각[後念] 아니매
새롭게 티끌 번뇌를 이루네.
마음을 일체에게 베풀어서
높고 낮음에 거슬리는 바 없고
안으로는 바라밀을 갖추면
의지함도 없고 처할 곳도 없네.계를 지켜서 항상 한마음으로
저를 관해도 범하는 바 없고
뭇 도덕을 옹호하여서
계의 성품의 행을 빠트리지 말라.
3지(地)에 열 가지 법 있는데
형상이 없어서 볼 수가 없고
권도로 속여서 죽음에 들어가
세상의 경로를 나타내 보이네.
세상에 나서는 온갖 고생과 근심
걱정과 두려움 무수히 변해도
성인은 능히 오고 가면서
이것을 위태롭다고 하지 않네.
큰 도는 본래 형상이 없어서
있음도 아니고 생겨남도 없는 지혜이니
모습[相]마다 바라밀이어서
몸을 스스로 영락하네.
눈으로 봄은 위아래로 깜짝거리지만
멀리 보는 데는 한계가 없네.
바라밀을 닦고 깨끗이 하여
이 걸림 없는 과보를 얻으리라.
발뒤꿈치[跟]는 가늘고 평평하고 발라서
대성인(大聖人)의 자리를 닦아 이루니
이제 더러움 없는 과보를 얻어서
도의 바라밀을 갖추네.발뒤꿈치는 중금(重金)을 편 것과 같아
또 티끌의 물을 받지 않으며
발을 들면 회오리바람 같아서
기관에 접촉의 장애가 없네.
마음의 꽃은 티끌에 집착하지 않아
속으로 기뻐하면 색은 밖으로 발해서
모두 인욕의 과보를 말미암음이니
이 때문에 바라밀이라 호칭하네.
마음을 금강(金剛)처럼 잡아서
도지(道地)의 법을 널리 펴서
과거 한량없는 세상을 알아
걸림 없는 바라밀을 갖추네.
입으로 여덟 가지 소리를 연설하여
온갖 말씀의 가르침 모조리 펴고
지극한 정성으로 유(有)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을 속이지 않는 바라밀이라고 하네.
도(道)는 세 가지 관(觀)의 상념을 말미암아
평등한 지혜 능히 미치고
마음이 시비에 집착하지 않아
무생(無生)의 바라밀에 응하네.
처음에 큰 서원의 마음 발함은
적은 수의 사람을 위함이 아니니
자연히 도의 깨침을 이루면
이것을 공을 갖춘 바라밀이라 이름하네.신족으로 부처님 나라에 노니니
몸과 마음이 한계나 걸림이 없고
한 뜻[一意]으로 옮기고 바꿈 없음은
신족의 바라밀이네.
본래 색을 말미암아 유(有)에 떨어졌으므로
색이 항상함이 있지 않음을 알았으니
이제 이 색신(色身)을 받음은
뭇 상호의 바라밀이네.
아픔의 법은 안팎이 있어서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이 있지도 않으니
안팎의 법을 없앰은
행 없음의 바라밀이네.
같이(根)에 다섯 가지 법 있음은
요컨대 열여덟 가지 가짐을 말미암음이니
분별하여 다섯을 덜어버리면
갚음 없는 바라밀이네.
몸ㆍ입ㆍ뜻을 지켜서 수호하고
방일함이 없게 잘 거두어서
청정한 음향이 널리 비춤은
여덟 가지 도[八道]의 바라밀이네.
세 가지 각관(覺觀)에 의지하지 않고
또한 일어나고 멸함도 내지 않고
뜻을 쉬어 다시 생겨나지 않으니
말 없는 바라밀이네.청정하기 연꽃과 같고
널리 들어도 물들지 않으며
늘 중생을 교화함은
청정한 가르침의 바라밀이네.
평등하여 두 상념이 없고
치우쳐 집착하는 마음 품지 않아서
해가 허공을 비춤과 같음은
혜관(慧觀)의 바라밀이네.
어진 지혜는 헤아릴 수 없고
남이 없음도 볼 수가 없으니,
보시의 마음ㆍ한량없는 지혜는
도지(道智)의 바라밀이네.
삼천대천세계의
일어나고 멸함이 있는 바 없음을 관해서
일체를 잘 깨침은
무상(無想)의 바라밀이네.
생겨남이 본래 생겨남이 없고
인연이 모든 법을 낸다고 알아서
유무(有無)의 도를 성취함은
평등의 바라밀이네.
걸림 없는 도를 총지하고
해탈하여 지혜를 성취하고
분별해도 ‘나’라는 상념 없으면
공하고 청정한 바라밀이네.나고 죽음에 다섯 가지 어려움 있음은
세속 티끌에 물들어 집착한 탓
공의 한량없는 경계에 노니는 것은
방편 지혜의 바라밀이네.
나고 죽음의 결박에서 이미 벗어나
해탈 가운데서 유희하면서
청정하여 어지러운 생각 없음은
과보의 바라밀이네.
세상에 있으면서 고행(苦行)을 나타내고
마음을 금강처럼 잡아서
3유(有)의 길을 이미 초월했음은
자연의 바라밀이네.
혹은 허공의 경계에 있으면서
법을 염(念)하여 어지러운 상념 없음이
마치 허공이 포용하는 것과 같음은
무형의 바라밀이네.
유쾌하도다, 무생(無生)의 도여.
모든 번뇌가 영원히 끊기고
가고 옴이 있음도 보지 않으니
행 없음[無行]의 바라밀이네.
신족에 네 가지 일 있어서
시방 국토에 늘 노닐면서도
몸과 마음이 모두 비고 고요함은
밝은 지혜의 바라밀이네.본래 평등한 마음으로부터
한 뜻도 물든 바 없고
마음이 한량없는 경계를 초월함은
미묘(微妙)의 바라밀이네.
세상에 태어난 고통을 관하여 요달하니
한 모습[一相]도 일어나는 바가 없어서
도의 마음은 옮길 수 없으니
금강의 바라밀이네.
배움 없음으로 범행(梵行)을 닦아
아홉 차제(次第)를 초월하여서
행이 다하여 치열하지 않으니
영락(瓔珞)의 바라밀이네.
도는 세 가지 혜관(慧觀)으로부터
정의(定意)의 행을 분별하고
스스로 쉬어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무량(無量)의 바라밀이네.
네 가지 나쁜 갈래에서 건져내어
차례를 초월하여 증득을 받지 않아도
자연히 무명을 멸함은
등분(等分)의 바라밀이네.
도의 가르침은 실로 미묘해
정진으로도 넘어갈 수 없고
평등하여 두 가지 법이 없으니
온갖 행의 바라밀이네.세상에 나옴이 뭇 고난이니
위없는 도를 늘 익혀서
유무의 자취를 보지 않음은
온갖 상념의 바라밀이네.
나고 죽음은 한계와 걸림이 많아
지혜의 빛을 보지 못하므로
도의 힘으로 선포해 창달하니
적행(積行)의 바라밀이네.
아홉 가지 선의 법 성취하여
세속 지혜에 물들지 않고
낱낱이 상념을 분별하니
계훈(戒訓)의 바라밀이네.
그러므로 법을 나타내어
온갖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서
제도함과 제도함 없음을 보지 않으니
고요한 뜻[寂意]의 바라밀이네.
한량없는 세계에 노닐면서
온갖 성현을 받들어 섬기고
가르침을 받아서 잊지 않으니
총지의 바라밀이네.
다시 변화를 능히 나타내어
모든 부처님 국토를 감동시키되
또한 스스로 높다고 아니하니
뜻을 멸함[滅意]의 바라밀이네.지난 세상을 되돌아 생각하고
보살의 도를 널리 닦아서
안의 온갖 번뇌에 집착하지 않으니
행을 관하는 바라밀이네.
여러 부처님 국토를 닦고 다스리니
청정해서 티와 때가 없고
한량없는 사람을 제도해 해탈시키니
법계의 바라밀이네.
중생의 근(根) 한량없지만
신체는 극히 청정하여서
안팎이 유(有)에 물들지 않으니
법을 요달한 바라밀이네.
삶을 족히 탐내지 않고
권현(權現)으로 방편 없음을 알아
온갖 상념을 내지 않으니
무등(無等)의 바라밀이네.
신법(身法)의 약간의 종자도
또한 번뇌를 내지 않아서
신체의 모습을 장엄하니
공덕의 바라밀이네.
무앙수의 겁으로부터
쌓고 쌓으며 법의 근본을 닦지만
그 쌓고 쌓음이 자기를 위함이 아니니
신통의 바라밀이네.6정(情)이 유(有)에 집착하지 않고
한량없는 지혜를 분별하여
허공제(虛空際)를 지나갈 수 있으니
일심(一心)의 바라밀이네.
사람 가운데 태어나기 어렵고
몸을 받음은 한량이 없지만
눈은 바깥 색에 집착하지 않으니
무념의 바라밀이네.
뜻을 잡아서 탐착함이 없으며
생겨나고 생겨나면서 쉬지 않고
안의 뭇 행을 스스로 멸하니
공관(空觀)의 바라밀이네.
두려움 없어서 집착한 바 없고
안팎의 법도 보지 않으며
도의 뜻에는 약간이 없으니,
신지(神智)의 바라밀이네.
부처님 몸은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번뇌에 물들지 않은 채
지혜의 통달이 백겁을 지나치니
무심의 바라밀이네.
앞의 마음은 지금 마음이 아니고
생기고 생기면서 끊어지지 않아
한 뜻으로 일어난 바 없으니
큰 지혜의 바라밀이네.억백천의 중생을
제도하지만 제도를 보지 않아서
심념(心念)에 그릇됨과 삿됨이 없으니
오락(娛樂)의 바라밀이네.
행이 다해서 고(苦)의 증명을 받고
3세의 근본을 통달해 알아서
소승(小乘) 뜻이 있지 않으니
본말(本末)의 바라밀이네.
고통에서 고통을 생각지 않고
네 가지 비상(非常)을 요달해 알아서
생을 다하고서 다시 몸이 없으니
성제(聖諦)의 바라밀이네.
본래 한량없는 부처님으로부터
수기 받아 장차 부처를 이룰 것인데
그래도 스스로 기뻐하지 않으니
등시(等施)의 바라밀이네.
마음은 본래 불가사의하고
덕은 한량없음을 초월해
유무(有無)의 관(觀)을 분별하니
정적(靜寂)의 바라밀이네.
5도(道)는 뭇 고통의 근원으로서
청백(淸白)의 법을 낳지 못하고
8등(等)으로 지나가는 도행(道行)은
현신(現身)의 바라밀이네.인체(人體)는 본래 법이 없어서
법계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가 백 가지 행을 지남은
무외(無畏)의 바라밀이네.
한마음, 한 생각 동안에
증명을 받으면 어려움 없고
온갖 번뇌의 법을 영원히 여의니
큰 성현의 바라밀이네.
본말을 영원히 스스로 여의어서
또한 ‘나’를 보지 않으며
신력(神力)도 허공과 같으니
지족(知足)의 바라밀이네.
위의(威儀)를 스스로 거두어 지니고
온갖 상호(相好)에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지켜 범하는 바 없으니
친근(親近) 바라밀이네.
나는 무수한 세대로부터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고
온갖 법계를 훼손하지 않았으니
원함 없음[無願]의 바라밀이네.
또한 온갖 법에 대해서
희망이나 요행이 있지 않아서
유(有)도 아니고 생겨난 바도 없으니
적행(積行)의 바라밀이네.저쪽과 이쪽의 언덕을 생각지 않고
나고 죽음의 바다도 초월하여서
온갖 근본을 찾아 다함은
다함없음[無盡]의 바라밀이네.
열여섯 가지 불가사의함은
또한 열여섯 가지 지혜라 이름하여
고통으로부터 법 없음에 이르니
집착 없음의 바라밀이네.
나고 죽음은 끝이 없어서
혹은 나왔다 혹은 사라지니
이를 다 능히 관하여 요달해 아는 것은
성공(性空)의 바라밀이네.
몸의 법은 서른두 가지로서
오염으로 청정치 못한 행을
낱낱이 능히 분별하니
집착 없음의 바라밀이네.
안식(眼識)은 안팎이 있어서
바깥 몸의 들어옴을 받지 않아도
두려움 없어서 움직이는 바 없으니
자심(慈心)의 바라밀이네.
나와 같이 보리수에 앉아
금강의 자리를 장엄하고
마군을 항복시켜서 두려움 없음은
큰 사랑[大慈]의 바라밀이네.중생의 무리 불쌍히 여겨서
사람을 제도하되 제도함 보지 않아
널리 제도함에 한계가 없으니
스스로 여읨[自離]의 바라밀이네.
과거는 다시 생기지 않고
미래의 티끌에 물들지 않아
지혜의 마음은 안팎이 없으니
의심 없음[無疑]의 바라밀이네.
안팎의 음(陰)과 지(持)와 입(入)은
온갖 번뇌를 내지 않고
하나를 지켜 방일하지 않으니
신족(神足)의 바라밀이네.
눈은 바깥 색에 집착하지 않고
혀도 또한 다시 맛을 알지만
탐내고 집착하는 상념을 없애니
형상 없음[無形]의 바라밀이네.
보살의 마음을 분별하여
청정한 관(觀)으로 집착한 바 없고
도가 평등한 지혜를 좇으니
위의(威儀)의 바라밀이네.
스스로 숙명지(宿命智)를 인식해서
본래 좇아온 바를 알고
다시는 상념을 일으키지 않으니
현생(現生)의 바라밀이네.지혜로운 자는 세상에 있으면서 교화하여
고통을 다하니 남음이 없고
생사의 근본을 뽑아서 끊으니
고행(苦行)의 바라밀이네.
연민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양육을 능가하고
지혜는 보편적이라서 높고 낮음 없어
안으로 스스로 몸을 보지 못하니
탐냄 없음의 바라밀이네.
덕은 한량없는 경계에 노닐어
깨쳐 아는 자가 없어도
또한 스스로 칭찬하지 않으니
법신(法身)의 바라밀이네.
다시 온갖 부처님으로부터
공혜(空慧)의 한량없는 법을 받아
자연히 고제(苦際)를 다하니
일어나지 않음[不起]의 바라밀이네.
도는 평등의 지혜로부터
3유(有)의 상념에 물들지 않아
이로부터 신족을 얻으니
무아(無我)의 바라밀이네.
범하는 네 가지에 얽매고 집착하여
삼계의 환난을 여의지 못함을
생을 다하도록 다시 짓지 않으니
통혜(通慧)의 바라밀이네.무앙수의 겁으로부터
정의(定意)를 교란하지 않고
뜻 또한 옮겨 바꾸지 않으니
본제(本際)의 바라밀이네.
신령한 지혜는 변제(邊際)가 없어
유(有)에 탐착함을 영원히 없애서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게 되니
적멸의 바라밀이네.
도의 지혜로 일곱 가지 품을 관하여
법계에는 들쑥날쑥함이 없고
일상(一相)은 볼 수 없으니
무형(無形)의 바라밀이네.
열반은 나고 멸함 없고
행하는 자취도 있는 바 없어서
능히 피차 속에서 여의니
수행(隨行)의 바라밀이네.
무명은 뭇 행의 근본이니
열두 바다를 유전하면서도
식(識)에 물들지 않음은
집착 없음의 바라밀이네.
이러한 4제(諦)는
갖가지 도의 과(果)를 낳고
4선(禪)을 말미암아 상념을 멸하니
정의(定意)의 바라밀이네.여래의 여덟 가지 해탈은
고통도 없고 즐거움도 없어서
현재의 번뇌를 능히 멸하니
근심 없음의 바라밀이네.
삼계에 의지해 머무르면서
번뇌를 짓지 않고
신통 지혜를 닦아 익힘은
쾌락의 바라밀이네.
머묾도 없고 오고 감도 없으며
또한 법의 성품도 헐지 않고
번뇌의 경계를 영영 없앰은
변함없음의 바라밀이네.
가령 색은 본래 색이 없는 것이어서
색의 성품은 항상 스스로 그러하니
3세의 고통을 요달해 알면
멸의(滅意)의 바라밀이네.
바깥의 번뇌[塵垢]를 받지 않고
정의(定意)에 다른 상념 없어
생이 다해도 다시 짓지 않음은
받음 없음[無受]의 바라밀이네.
변화를 나타냄이 무앙수이면서도
끝내 스스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
도의 지혜에 세 가지 걸림 없음은
본제(本際)의 바라밀이네.정(定)에 들어서 세 가지 상념 없애고
나ㆍ다른 사람ㆍ수명을 보지 않으며
믿음을 잡아서 치달리지 않음은
뭇 지혜의 바라밀이네.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법과
삼매의 성스러운 길의 관(觀)으로
고요히 한뜻[一意]을 멸함은
회래(懷來)의 바라밀이네.
도는 한량없는 법을 내고
이로부터 저기에 도달하게 되어
3세의 고통을 그윽이 요달함은
수락(受樂)의 바라밀이네.
나는 것은 큰 재앙이라
온갖 법계를 뚫어 새게 함을 알아서
하나를 버리고 물들어 집착하지 않음은
온갖 묘함[衆妙]의 바라밀이네.
자비의 네 가지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를 널리 윤택하게 해서
교화해 인도해도 존비(尊卑)가 없음은
큰 지혜의 바라밀이네.
4대(大)의 인연의 형상
그 체성(體性)은 옮길 수 없어
해탈문에 도달하고자 함은
세 가지 지향[三向]의 바라밀이네.만일 겁이 모조리 타고자 하더라도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품지 않고
자연히 도의 힘에 통함은
상념 없음[無想]의 바라밀이네.
또한 스스로 생각을 내지 않고
약간의 상념을 분별하여
부처님의 지혜에 다함이 없음은
큰 바다[大海]의 바라밀이네.
공훈(功勳)은 뭇 행을 초월하고
본래의 업은 한량이 없어
하나도 없어서 하나를 보지 않음은
이군(離群)의 바라밀이네.
큰 서원으로 원(願)을 갖추고
몸의 형상 없음을 관해서
네 마군의 환란을 깨뜨려 부숨은
장엄(莊嚴)의 바라밀이네.
무념은 모든 법의 근본이고
열반은 고요하여 청정하니
여러 부처님의 노니시는 곳은
깊은 곳간[深藏]의 바라밀이네.
상 없음[無相]은 볼 수 없으니
하나부터 성불하기까지
마음의 근본법을 여의어 버리면
한뜻[一義]의 바라밀이네.온갖 도과(道果)를 궁구해 다하여
세 가지 소굴이 있지 않아서
지혜의 비춤이 변제(邊際)가 없음은
근본 세움[立本]의 바라밀이네.
나고 죽는 온갖 어려움에도
함이 없어서 맑고 편안해
다섯 가지 번뇌 내지 않음은
총지의 바라밀이네.
한량없는 세계에 두루 노닐며
중생의 무리 교화하고
나고 죽음의 고통을 겪음은
괴로움 끊음의 바라밀이네.
현재에 어머니 포태(胞胎)에 처해도
실은 유(有)에 물들어 집착하지 않아
마음이 청정하기 허공과 같음은
근본 지혜의 바라밀이네.
과보 받을 것을 보지 않고
온갖 밝은 지혜를 과보로 증득하고
네 가지 도의 근본을 분별함은
닦아 지님[修持]의 바라밀이네.
본래 한량없는 세상으로부터
법계는 불가사의해서
평등하여 두 마음이 없음은
넓은 지혜[廣慧]의 바라밀이네.불법은 매우 깊고 묘하여
2승(乘)의 미칠 바가 아니고
한량없는 행을 초월함은
의심 없음의 바라밀이네.
먼저 그 안근(眼根)을 청정히 하고
마음의 근본 행을 깨끗이 닦아
보살이 도를 사모하여 미침은
청정한 뜻의 바라밀이네.
뜻을 금강처럼 잡고
청정하여 티와 더러움이 없어서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영영 여읨은
도과(道果)의 바라밀이네.
옛날 옛적의 여러 부처님
이 원길(元吉)의 나무에 앉으셔서
네 마군의 원수를 항복시킴은
참는 힘[忍力]의 바라밀이네.
신식(神識)은 허공에 두어
애초부터 화내는 마음 없고
또한 번뇌도 내지 않음은
초월의 바라밀이네.
신령한 힘은 한량없어
일체 모든 세계를 초월하고
또한 욕심에 집착하지 않음은
번뇌 없음[無垢]의 바라밀이네.대저 공(空)을 궁구해 다하고자 하여
안을 깨끗이 하고 밖도 그렇게 해서
비상(非常)의 상념을 분별함은
인연의 바라밀이네.
광명이 여러 세계를 비추어
온갖 어두움을 없애버리고
약간의 상념도 일으키지 않음은
번뇌 끊음[斷垢]의 바라밀이네.
혜관(慧觀)에는 세 가지 법 있어
욕심ㆍ화냄ㆍ어리석음을 영원히 없애서
색(色)에 물들게 되지 않음은
지행(智行)의 바라밀이네.
설령 억천 겁으로부터
의지와 큰 서원의 마음으로
중생의 무리 보지 않음은
청정한 가르침의 바라밀이네.
여덟 가지 평등한 큰 도의 행으로
안팎으로 ‘나’라는 상념 없어서
부처님 세계, 법계가 청정함은
한량없음[無量]의 바라밀이네.
사람은 본래 그 행을 닦아
12인연을 뽑아버려서
탐욕을 없애고 유(有)에 집착하지 않음은
한뜻[一意]의 바라밀이네.인도(人道)의 행을 닦고자 하여
몸ㆍ입ㆍ뜻 먼저 막아
열 가지 선이 뭇 행의 근본 됨은
법에 응함의 바라밀이네.
본래 어리석음 짓지 않아
근본이 존재하게 되니
열 가지 슬기와 한량없는 지(智)는
본무(本無)의 바라밀이네.
법계는 불가사의인데
두려움 없는 법을 성취하여
나고 죽음의 근본을 다함은
중담(重擔)의 바라밀이네.
부처님은 자비와 지혜가 평등하여
기르심에 높고 낮음이 없으며
오염된 마음 없애버림은
바람 없는[無望]의 바라밀이네.
대승의 뜻 발하여서
여러 장애를 대하여 제도하고
나고 죽음의 근본을 보지 않음은
멀리 여의는[遠離] 바라밀이네.
큰 서원으로 근고(勤苦)를 잡아서
온갖 정의(定意)를 유희하고
반복의 마음 항상 품음은
집착을 잊는[忘執] 바라밀이네.중생의 평등한 지혜로
온갖 근본 모조리 알아서
티끌 욕심의 마음 품지 않음은
권혜(權慧)의 바라밀이네.
큰 도는 매우 묘한 것이라
번뇌와 욕심에 동요하지 않아
세 가지 공[三空]으로 본래의 뜻을 버림은
구경(究竟)의 바라밀이네.
이 현겁(賢劫) 가운데서
여러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사
고통을 뽑고 세 가지 장애 없앰은
주선(周旋)의 바라밀이네.
몸으로 평등한 광명 놓아서
수없는 중생을 제도하시고
생겨남을 알아서 생겨남에 물들지 않음은
선우(善友)의 바라밀이네.
위없는 도를 이루고자
선지식을 친근히 해여
고통의 본제(本際)를 능히 다함은
다함없음[無盡]의 바라밀이네.
네 가지 길에 오가는 일 없고
무수한 겁에 수명이 머물면서
도의 근본을 궁구해 다함은
변함없음[無變]의 바라밀이네.나고 죽음을 궁구하여 다하고자
퇴전(退轉)의 마음을 품지 않고
용맹하고 굳건하여 헐 수 없음은
뜻을 세움[立志]의 바라밀이네.
보시를 행함에 애착하는 바 없고
또한 세 가지 상념을 내지 않아
본말이 모조리 스스로 공함은
해혜(解慧)의 바라밀이네.
도의 힘은 허공과 같아
5음의 몸 헤아리지 않아서
색은 본래 색이 있음이 아니니
청정의 바라밀이네.
남이 없음은 뭇 지혜의 근본
항상하다는 상념은 참이 아니고
교화 있음을 보지 않음은
지력(智力)의 바라밀이네.
지나간 세상 무수한 겁에
나와 같은 호칭의 부처님 있어
평등한 법의 근본 닦음은
형상 없음[無形]의 바라밀이네.
대변(大辯) 여래 나셔서
애착과 욕심의 번뇌 소멸하고
중생의 무리를 가르치심은
신근(信根)의 바라밀이네.그 이름이 무애(無礙)이신 부처님
한량없는 겁을 고행하시고
뜻을 거두어 방일하지 않음은
계를 지킴[守戒]의 바라밀이네.
다음엔 이름이 홍서(弘誓)이신 부처님
교화하는 데 높고 낮음이 없어서
뜻이 허공처럼 평등함은
인욕(忍辱)의 바라밀이네.
그 이름이 대원(大原)이신 부처님
나고 죽음의 뿌리를 다 궁구해서
무수한 몸을 변화함은
은근(慇懃)의 바라밀이네.
도는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허공의 지혜를 보지 않으니
형상이 없어 볼 수 없음은
자비의 바라밀이네.
갱락(更樂)의 86가지는
보살이 닦아 행할 것으로서
3독(毒)의 근본이 없음은
일어나지 않음[不起]의 바라밀이네.
성현의 열여섯 가지 마음
모조리 있는 바 없음을 알아서
온갖 법계를 헐지 않음은
몸 없음[無身]의 바라밀이네.한마음[一心], 한 생각[一念] 가운데
선정의 관(觀)을 여의지 않고
다시 한뜻으로부터 일어남은
상념 없음[無想]의 바라밀이네.
허공은 변제(邊際)가 없고
뜻이 고요해서 물들어 더러움 없듯이
하나를 버리고 하나에 집착하지 않음은
정의(定意)의 바라밀이네.
나는 본래 이 행에 응하여
고요하여서 상념이 없고
뜻을 쉰 곳에 나타나 있음은
걸림 없음[無礙]의 바라밀이네.
선정으로 스스로 뜻을 멸하고
청정한 관(觀)으로 세 상념 멸해서
도의 지혜 자연히 청정함은
제염(除染)의 바라밀이네.
부처님의 경계는 불가사의하고
중생의 경계도 또한 그러해서
법의 성품이 자연히 고요함은
형상 없음[無形]의 바라밀이네.
나고 죽음의 어려움 능히 제도하여
삼계의 고통을 생각지 않고
뜻을 참아서 상념을 일으키지 않음은
맑고 고요함[澹泊]의 바라밀이네.3세의 정의(定意)에 들어가서
모조리 중생의 뿌리를 알아
안팎의 몸을 스스로 관함은
원하는 것 없음[無願]의 바라밀이네.
8부(部)의 귀신 세계
저를 따라서 교화해
신족의 힘을 나타냄은
자취를 멸함[滅跡]의 바라밀이네.
착한 방편으로 중생을 가르치되
본말의 공함을 여의지 않고
4무외(無畏)를 분별함은
무아(無我)의 바라밀이네.
안팎의 몸을 사유하고
공무혜(空無慧)를 분별하여
내가 있음을 관하지 않음은
법의 뜻[法意]의 바라밀이네.
태어나 성현을 만났음을 즐겨하고
여덟 가지 해탈에 집착한 바 없으며
뭇 상념을 일으키지 않음은
여환(如幻)의 바라밀이네.
바른 법에 남녀 없고
뜻은 사념과 상념을 말미암아 나네.
깊은 법을 볼 수 없음은
오로(惡露)의 바라밀이네.몸을 한량없는 형상으로 나누었다가
다시 도로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도
능히 깨달아 아는 이가 없음은
신밀(身密)의 바라밀이네.
여래는 뭇 상호를 갖추어
색신(色身)이 세간에 노니시면서
신족으로 교화하심은
의지함 없음[無猗]의 바라밀이네.
범부는 배움에 들어가지 못하여
안팎의 몸을 관하지 못하니
성현의 지혜 매우 깊고 묘함은
상호(相好)의 바라밀이네.
본래 신족으로부터 일어나
뜻의 법에 높고 낮음 없어
보살의 형상 없는 관(觀)은
안락(安樂)의 바라밀이네.
선정(禪定)은 생각의 기다림 없어서
마음을 쉬어서 집착한 바 없으니
여덟 가지 해탈의 연못에 노니는 것은
지성(至誠)의 바라밀이네.
사람은 다섯 가지 고통의 법 알아
무위(無爲)의 도를 우러러 닦으니
6신통의 무루법[法無漏]은
성현의 바라밀이네.신통으로 세간에 노닐며
성현의 율(律)을 항상 익혀서
안팎의 법을 보지 않음은
이름 없음[無名]의 바라밀이네.
행을 익혀서 교만함이 없고
뒤바뀐 마음 품지 않으며
온갖 결박을 일으키지 않음은
더러움 없음[無穢]의 바라밀이네.
만일 다시 죽은 송장을 보아도
깨끗함과 깨끗지 못함 분별하지 않고
안팎으로 집착한 바 없음은
아만 없음[無慢]의 바라밀이네.
위의(威儀)를 법률에 맞게 하고
거동을 망령되게 아니하며
뭇 지혜로 스스로 호위함은
대함 없음[無對]의 바라밀이네.
몸 없음을 도의 요체로 삼고
티끌에 물들지 않아서
앉으나 누우나 마음이 항상 정(定)함은
스스로 지킴[自守]의 바라밀이네.
성인이 세속을 불쌍히 생각하여
감로의 법을 비처럼 내려주고
한량없는 지혜를 펴서 창달함은
교화를 받음의 바라밀이네.널리 보시함은 은혜가 많고
각관(覺觀)으로 마음의 근본 없애
고통의 환난 덜어 없앰은
덤벼 싸움[挌戰]의 바라밀이네.
마음으로 한량없는 법 생각하고
한량없는 변화를 나타내 보여서
신통 지혜의 근본을 찾아 생각함은
용맹하고 힘찬[奮迅] 바라밀이네.
안의 법에 생각하는 바 없지만
항상 바깥 티끌에 물들게 되니
저 무생(無生)의 지혜로써 함은
종원(從願)의 바라밀이네.
뭇 정(定)으로 스스로 영락하고
안식(眼識)은 상념을 일으키지 않아
저도 또한 스스로 있지 않으니
옮김 없음[無移]의 바라밀이네.
뭇 지혜를 닦아 익혀서
해탈바라밀의 지견(知見)으로
불사(不死)의 장(漿)을 마시고자 함은
감로(甘露)의 바라밀이네.
청정한 관(觀)으로 탐착(貪着)함이 없고
지혜바라밀도 공하여 다름이 없어
네 가지 도과(道果)를 분별함은
유전(流轉)의 바라밀이네.마치 어떤 사내가
감내하면서 수고로움을 받는 것처럼
마음 지혜에 티끌의 물듦이 없음은
염원을 따르는[隨願] 바라밀이네.
모습마다 각각 과보가 있어도
행이 있고 법이 있음은 아니어서
네 가지 선의 행을 초월함은
생진(生盡)의 바라밀이네.
전생에 본행을 말미암아
남에게 화내고 노하는 일 없어
자연히 8난(難)을 여의는 것은
초월의 바라밀이네.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바
모임에는 이별이 있어
성인의 큰 서원의 마음이 아님은
분별의 바라밀이네.
무(無)로써 본유(本有)를 비추어
밖이 없음을 사무치게 보아서
형상의 누(累)가 자연히 멸함은
봄이 없는[無見] 바라밀이네.
허공계에 나아감이
빨라서 걸리는 바 없고
중간의 법 생각하지 않음은
율에 응하는[應律] 바라밀이네.근본을 요달하면 한 법도 없으나
지취(志趣)는 각각 다르니
세상에 따라 그 색을 물들임은
결박을 푸는[解縛] 바라밀이네.
3독(毒)의 근본을 분별하면
행이 다해서 곧 행에 응하여
본래 나의 것 아님을 알면
신본(身本)의 바라밀이네.
마음으로 노닐어 자재함을 얻어
욕망을 불타는 것처럼 관해서
5도(道)를 소멸해 없앰은
청량(淸凉)의 바라밀이네.
무원(無願)은 3유(有)에 있으면서
다섯 가지 욕심의 법을 탐내어 집착하니
여덟 무간지옥을 영원히 여읨은
말씀[言說]의 바라밀이네.
일어나고 멸함이 정해짐이 없고
총지(摠持)로 잊지 않아서
온갖 지혜가 족함은
널리 들음[博聞]의 바라밀이네.
지혜를 받음에 네 가지 품이 있어
남은 깨닫지만 스스로는 모르니
이를 반연하여 7공(空)에 미침은
재빠름[捷疾]의 바라밀이네.부처님 도는 궁진(窮盡)하기 어려워
마음으로 능히 헤아릴 바 아니로되
도관(道觀) 없음을 다 아는 것은
7각(覺)의 바라밀이네.
서른일곱 가지의
여래의 성도(聖道)의 길을 분별하여
한뜻으로 상념을 일으키지 않음은
명신(名身)의 바라밀이네.
멀고 가까운 법을 감싸서 알고
걸림 없는 도를 생각하지 않아
열 가지 명호가 하나하나 다름은
수 없음[無數]의 바라밀이네.
깊고 요긴한 법 강설해 주고
마음은 겁내고 약함을 품지 않아서
무상(無相)을 원하고 구하지 않음은
지력(智力)의 바라밀이네.
올바른 8등혜(等慧)에 들어
공(空)한 성품의 행을 헐지 않고
속으로 법을 스스로 사유함은
과에 이르는[逮果] 바라밀이네.
명색(名色)이 약간 변함에
애착으로 번뇌의 병에 들어서
본래 없음에 능히 도달하지 않음은
잘 살핌[善察]의 바라밀이네.열 가지 법은 공하여 변함없고
의념(意念)은 상념을 얽매고 집착하여
밖에서 들어옴을 생각하지 않음은
한제(限齊)의 바라밀이네.
세상의 괴로운 사람을 연민하여
근심하고 걱정함을 끝없이 하여
그들을 위하여 권도 방편을 세움은
교화를 나타내는[現化] 바라밀이네.
마음이 굳건하기 금강과 같아
유위(有爲)에게 결코 헐리지 않고
감로의 법으로 물을 대줌은
깊고 요긴함[深要]의 바라밀이네.
본래 허공의 지혜로 인하여
해탈하여 걸림이 없으니
지혜의 밝음으로 번뇌를 버림은
보고 들음[見聞]의 바라밀이네.
성현의 법률 받들 줄 알고
계(戒)ㆍ문(聞)ㆍ혜(慧)ㆍ정(定)의 마음으로
도의 의지가 강함은
빠트림 없는[無闕] 바라밀이네.
몸이 본래 형상 없는 줄 알아서
생사의 법을 조리고 볶아서
맑고 고요하여 공적함에 돌아감은
결박을 푸는[解縛] 바라밀이네.지혜 있는 이 세속의 변함에 따르되
끝내 갱락(更樂)에 집착하지 않으며
맺힘을 풀어 괴로움의 근본 끊음은
높고 으뜸가는[尊上] 바라밀이네.
사람 가운데 세상의 영웅이신 스승님
한량없는 세상을 지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속임을 품지 않음은
말로 응하는[言應] 바라밀이네.
마음으로 불가사의를 생각하고
깊은 법장을 궁구하여 다하며
여래의 경계를 분별함은
도각(道覺)의 바라밀이네.
여래의 열 가지 글귀의 뜻은
각각 형상이 없고
고요하여서 음성이 없음은
수결(授決)의 바라밀이네.
공하여 형상 없다고 몸을 관하여
청정하여서 물든 바 없어
본래 없는 법을 증장하는 것은
행이 다함[行盡]의 바라밀이네.
여래께서 수기를 주어서
여여(如如)하여 변하고 바뀜이 없어
나고 멸함의 근본을 보지 않음은
본래 청정[本淨]의 바라밀이네.정각(正覺)의 가르치시는 바
온갖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모두 덮어주고 보호받게 함은
비할 바 없는[無比] 바라밀이네.
사람을 위하여 다리를 만들고
온갖 법을 궁구하여 다하며
점점 깊은 곳간에 들어감은
괴로움 여의는[離苦] 바라밀이네.
중생의 무리를 교화하여
법의 경계를 여의지 않고
도량에 나아감은
스스로 지킴[自守]의 바라밀이네.
중생이 돌아가 나아갈 바는
도의 문으로 모두 향함이니
뭇 지(智)와 자재한 슬기는
걱정 없음[無患]의 바라밀이네.
세상과 함께 횃불 광명을 만들고
중생을 위하여 눈을 만들어
돌아가 나아갈 바를 알게 함은
큰 도[大道]의 바라밀이네.
10력(力)이 세상에 출현하신 바는
근심과 괴로움을 근절시켜 주심이니
지혜로 여러 유(有)를 허는 것은
신령한 슬기[神慧]의 바라밀이네.한가하고 고요한 곳에 즐겁게 있으면서
본래 행한 바를 닦아 익히고
중생에게 능히 변화해 나타남은
지름길[徑路]의 바라밀이네.
한량없는 겁 가운데서
괴로움을 지켜서 괴로움을 버리지 않아
열 가지 법의 보배를 갖춤은
여읨 없음[無離]의 바라밀이네.
관정(觀定)은 허공과 같이
널리 능히 비추는 데 있으니
스스로 관하고 다시 저를 관함은
평등한 성품[等性]의 바라밀이네.
여러 부처님의 국토를 관해서
뭇 지혜로 스스로 영락하고
시방세계에 두루 노니는 것은
고요함[寂然]의 바라밀이네.
다시 한량없는 법을
여래께서 펴서 창달하시어
비법(非法)의 근본을 소멸함은
굳건함[牢固]의 바라밀이네.
중생이 교화 받음에 응하여서
법을 들으면 문득 깨치게 되니
이들 전생의 식이 날카로움은
재빠름[捷疾]의 바라밀이네.온갖 여러 법의 근본은
있음도 아니요 또한 없음도 아니어서
도가 무상(無想)으로부터 나옴은
여덟 가지 법의 바라밀이네.
지혜가 한량없음을 비춤이
마치 사자의 두려움 없음과 같아
무상(無常)한 법을 관하여 봄은
무생(無生)의 바라밀이네.
법을 설하여서 설함이 있지 않고
사람을 제도하되 제도함이 있지 않은 채
훌륭한 방편으로 백겁을 지남은
물듦 없음[無染]의 바라밀이네.
사라지지도 않고 다하지도 않으면서
온갖 사람에게 비추고
여래의 지혜를 펴서 창달함은
욕심 없음[無欲]의 바라밀이네.
법을 설해서 법의 상념 없어서
나와 남을 보지 않으며
큰 자비로 유무(有無)를 제도함은
전륜(轉輪)의 바라밀이네.
뭇 새들이 연못 가운데의
푸른 연꽃과 부용꽃 사이에서 즐기듯
선적(禪寂)이 상념을 영원히 없앰은
일 없음[無事]의 바라밀이네.법을 설함에 세 가지 일 있으니
그 본말의 공함을 없애어
이 한량없는 세계를 제도함은
의지함이 없는[無猗] 바라밀이네.
사람의 근원을 생각해 살피고
저의 마음과 식과 뜻을 관해서
보살의 서원을 여의지 않음은
필경(畢竟)의 바라밀이네.
때를 따라 방편을 행하고
괴로움으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아서
늘고 주는 뜻을 영원히 버림은
여법(如法)의 바라밀이네.
환술(幻術)이 안식에 집착하여
출생이 있음을 보지 않으니
이식(耳識)이 저 소리를 들음은
공을 이해하는[解空]의 바라밀이네.
만일 저 솜씨 좋은 요술쟁이가
갖가지 음식을 화현해 내어도
비식(鼻識)으로 분별함은
향훈(香薰)의 바라밀이네.
가령 화현으로 지은 것은
그 뜻이 불가사의하나
궁구하여 다함을 얻고자 함은
미식(味識)의 바라밀이네.본래 갱락(更樂)을 지어서
몸으로 온갖 법의 근본을 상념하고
뜻을 거두어 자연히 엎드림은
권현(權現)의 바라밀이네.
청정한 음향으로써
시방세계를 두루하고
계와 덕의 향도 그러하니
범함이 없는[無犯] 바라밀이네.
환술(幻術)은 진실하지 않아서
어리석은 이들을 속이고 미혹하니
진실한 법으로 인도하여 이끄는 것은
진제(眞際)의 바라밀이네.
중생의 뿌리를 찾아도
성인이 아니면 능히 헤아릴 수 없으니
대성인(大聖人)을 권화(權化)함은
교법을 세움[立敎]의 바라밀이네.
청정하기 연꽃과 같아
끝내 티끌과 때를 받지 않고
뭇 행의 밖으로 차례를 초월함은
뜻을 잡음[撿意]의 바라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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