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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634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 5권

by Kay/케이 2024.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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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 5

 

보살영락경 제5권

축불념 한역
장용서 번역

14. 생불품(生佛品)
그때에 자리에 보살마하살이 있었으니, 이름이 분별설시(分別說施)로서, 옛적에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에게 뭇 덕의 근본을 지었다. 그 보살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나아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거룩하시고 거룩하나이다, 부처님이시여. 자못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이 과거ㆍ미래ㆍ현재에서 한 때[一時] 한 날[一日]에 과거의 세 가지 일과 미래와 현재의 세 가지 일을 알면 성불할 수 있겠나이까, 없겠나이까?”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은 그 변화에 따라 국토를 관하여 보아서 중생에게 알맞게 응하시어 이루는 바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니라. 마치 보살마하살이 국토로써 국토를 삼지 않고 중생으로써 중생을 삼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법계를 분별해서 법의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니, 여래의 신령스런 지혜는 세속의 지혜와는 같지 않느니라. 세속의 지혜란 욕계ㆍ색계로부터 유상ㆍ무상천(有想無想天)에 이르기까지를 소위 세속의 지혜라고 이르나니, 오늘날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는 이 지혜를 일찍이 초월하셨느니라.그렇다면 어떻게 온갖 법을 낳아서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을 이루는 것인가? 이 일은 그렇지 않나니, 왜냐하면 여래는 여여(如如)하기 때문이니라. 여래의 여여는 세계가 여(如)요, 온갖 법의 성품도 여(如)요, 부사의(不思議)도 여(如)요, 미래도 여(如)요, 저 세계의 겁수도 여(如)요, 여래의 겁수도 여(如)요, 하나도 여(如)요, 둘 아님도 여(如)요, 모든 있는 것[諸有]도 여(如)요,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함도 여(如)이니라. 또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집착의 끊음도 없느니라. 모든 부처님께서 내놓으신 명호는 저 겁수를 제한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어서 이루다 기재할 수 없느니라. 긴 것이 있음도 보지 않고, 또한 짧은 것도 보지 않으며, 또한 생(生)함도 보지 않고 멸함도 보지 않느니라.그렇다면 어째서 온갖 법을 낳는가? 형상이 없으면 볼 수가 없으니 미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무기(無記)는 유기(有記)를 보지 못함이 형상이 없는 법이 갖가지로 다른 것과 같으니라. 이름과 글귀[名句]의 몸도 또한 그러하고, 맛의 몸[味身]도 또한 그러하니라. 각각 명자의 몸[名身]이 없고, 각각 구절의 몸[句身]이 없고, 각각 맛의 몸이 없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은 각각 텅 비어서 선(善)도 있지도 않고, 악(惡)도 있지도 않으며, 또한 복도 있지 아니하고, 복이 있지 않음도 있지 않으며, 혹은 행이 있기도 하고, 혹은 행이 없기도 하느니라.”그때에 보살이 있었으니, 이름이 무진혜(無盡慧)로서 성품이 공하고 여여하여 법 없음[性空如如無法]을 얻었다. 그 보살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여쭈었다.
“제가 이제 여래 앞에서 행이 있음[有行]과 행이 없음[無行]이 공한 성품의 여여한 법[空性如如法]과 같음을 말해보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좋다. 그대는 마음대로 설하여라.”무진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유행(有行)과 무행(無行)을 닦아 익히면, 문득 일체 모든 법을 능히 갖추어서 등정각을 성취하리니, 어떤 것이 유행과 무행인가? 온갖 법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없으니, 이것을 무행이라고 합니다. 반드시 마지막에는 온갖 법을 과거와 미래와 현재라고 분별하니, 이것을 보살의 유행이라고 이릅니다. 한량없는 명자의 몸[名身]이 있지만 본말(本末)을 보지 못하고, 한량없는 구절의 몸[句身]이 있지만 본말을 보지 못하고, 한량없는 맛의 몸[味身]이 있지만 본말을 보지 못하니, 이것을 보살의 무행이라고 이릅니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3세법의 생겨남이 있고 멸함이 있음을 알더라도 그 가운데서 있는 바가 없음을 분별하면, 이것을 보살의 유행이라고 이르나이다.”이때에 무진혜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직 구경(究竟)이 아닌 법을 구경이 되게 하고, 아직 멸진하지 못한 법을 멸진하게 하면, 이것을 보살의 무행이라고 이르며,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서 한량이 있음도 보지 않고 한량이 없음도 보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의 유행이라고 이릅니다.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처음으로 도의 마음을 내어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행하되, 칭찬ㆍ꾸지람과 괴로움ㆍ즐거움과 날카로움ㆍ쇠함과 훼방ㆍ기림으로도 그 마음속에 거리낌이 없나니, 이것이 보살의 무행이라고 이릅니다. 가령 삼천대천세계 속의 중생이 한뜻, 한마음으로 3세(世)의 단멸(斷滅)의 법을 분별한다면, 이것을 곧 보살의 유행이라고 합니다.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한량없는 겁 동안에 근고의 행[勤苦行]을 행하여 부처님의 언교(言敎)를 들어 지니고자 하면, 이것을 보살의 무행이라고 이르며, 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을 행하되 네 가지 평등한 것으로 스스로 칭찬하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의 유행이라고 합니다.물들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음에는 과거ㆍ미래ㆍ지금의 현재가 없나니, 이것을 보살의 무행이라고 이릅니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의(義)도 아니고, 의 없음[無義]도 아니며, 이루어짐이 있음도 아니고, 이루어짐이 없음도 아니며, 대(對)가 있음도 아니고, 대(對)가 없음도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을 보살의 유행이라고 합니다.혹은 국토가 청정하여 물든 바 없기 때문에 국토에서 성취된 바가 있음을 스스로 보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의 무행이라고 이른다. 만일 다시 여러 가지 법에서 망령된 소견을 내지 않아서 일어난 바가 없고, 다함없는 법으로 능히 스스로를 꾸미면, 이것을 유행이라고 합니다.
또한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없는 것도 아니면, 이것을 보살의 무행이라고 이릅니다. 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한 세계의 국토를 관하기를 허공과 다름없이 관하고, 다른 국토를 한 국토에 매여 있게 하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의 유행이라고 이릅니다.다시 본래 3세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마하살이 있음을 스스로 관하여 보아서 과거와 미래와 지금의 현재가 있다고 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무행이라고 이릅니다.
다시 다음에 족성자여,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낱낱이 분별하는데, 계(界)가 나의 계가 아니고, 세(世)도 나의 세가 아니며, 있음[有]도 나의 있음이 아니라 하면, 이것을 보살의 유행이라고 이릅니다.
다시 다음에 족성자여, 삼계를 분별하여 행하는 바 없이 행하면서 짓는 것도 보지 않고 또한 짓지 않음도 보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의 무행이라고 이르나이다.”그때에 부처님께서 무진혜보살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어떠한 법에 머물러서 이것을 설하는 것인가? 무행은 유행에서 일어나고, 유행은 무행에서 일어나는데, 무엇을 말미암아 여래를 좇아서 유행ㆍ무행을 스스로 말하는가?”
무진혜보살이 부처님께 다시 아뢰었다.
“본래 자각(自覺)으로부터 지금과 같은 첫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 부연하시어 널리 밝혀 주십시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선남자여, 그대의 말한 바대로 하리니 잘 생각하고 기억하여라. 오늘은 여래께서 반드시 그대를 위하여 그 가르침을 부연하리라. 어떠한가, 족성자여. 그대가 본래 뜻을 발하여 위없는 등정각을 이룬 것은 유행으로부터인가, 무행으로부터인가?”
대답하였다.
“유행으로부터도 아니고 무행으로부터도 아니옵나이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인가 족성자여, 만일 유행으로부터도 아니고 무행으로부터도 아니라면, 어떻게 등정각을 이룰 수 있겠는가?”
대답하였다.
“있음[有]도 여여(如如)하고, 없음도 여여하니, 이 때문에 유행으로부터도 아니고 무행으로부터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본래 어찌하여 이 물음을 발설하지 않았는가. 나는 먼저 유행과 무행을 이미 말하였느니라.”
15. 본말품(本末品)
그때에 부처님께서 장차 보살의 행[菩薩行]을 나타내 보이시고자 즉각 본정삼매(本淨三昧)에 들어서,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온갖 법의 본말을 모조리 보게 하시고, 다시 중생으로 하여금 온갖 부처님의 한량없는 세계를 보게 하셨다. 모든 부처님 세존께는 성취한 이와 성취하지 못한 이가 있으며, 혹은 1지로부터 10지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신행(身行)과 현재가 아닌 신행이 있는데,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이에 대해 낱낱이 분별케 하셨다.그때 부처님께서는 집착 없는 등정각으로 장차 중생을 제도하시고자 문득 웃으시었다. 면문(面門:입)으로부터 큰 광명을 놓아서 한량없는 항하의 모래 수효와 같은 국토를 비추시자, 욕계로부터 위로 유상무상천에 이르기까지 다 광명을 보는데, 저 광명에서 한량없는 중생의 근본을 연출하였다. 어떻게 중생의 본말이 되는가에 대해 선남자나 선여인이 한 가지 법을 닦아 행하여 한량없는 지혜를 문득 능히 갖추어서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교화하였다.그때 부처님께서 모인 무리에게 집착 없는 행에 대해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집착 없는 행인가? 처음에 뜻을 발하면서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54가지 법은 공행(共行)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그래서 선남자나 선여인은 늘 사유하면서 잠시도 여의지 말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54가지인가?
우선은 5음(陰)을 분별하여 일어나매 일어남을 알고 멸하매 멸함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저 5음에는 남[生]이 있기도 하고 남이 없기도 하며, 성스러운 행이 있기도 하고 성스러운 행이 없기도 하며, 공관(空觀)이 있기도 하고 공관이 없기도 하다.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5음(陰)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나며 무엇으로 말미암아 멸하는가를 분별하면, 색(色)은 본래 생겨남이 없으나 바로 지금 생겨남이 있어서 색을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라고 이해하니, 혹은 색의 있음[有]이기도 하고 혹은 색의 없음이기도 하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색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본래 색이 있지 않으므로 본래의 색을 보지 못한다. 과거 속에서 과거의 색을 보지 못하고, 미래 속에서 미래의 색을 보지 못하고, 지금 현재 속에서 현재의 색을 보지 못한다. 과거의 색은 미래의 색도 아니요 현재의 색도 아니며, 미래의 색은 과거의 색도 아니요 현재의 색도 아니며, 현재의 색은 과거의 색도 아니요 미래의 색도 아니다. 보살마하살은 모두 능히 분별하여 낱낱이 모든 것을 아느니라.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은 아픈 법을 분별하여 아픔이 일어나는 바가 없음을 이해해 안다. 과거의 아픔을 관하는데, 본래 이 아픔이 없고 또한 이 아픔이 과거에 있지 않음을 안다. 과거의 아픔은 미래나 지금이 아니요, 미래의 아픔은 과거나 지금이 아니요, 지금의 아픔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아픔은 본래 이 아픔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지금의 아픔을 관하기를 이전의 아픔도 아니고 나중의 아픔도 아니며, 과거의 아픔도 아니고 미래의 아픔도 아니며, 아픔도 또한 스스로 아픔을 알지 못한다고 해야 하느니라. 그러한 뒤에야 비로소 근본도 청정하고 지말(枝末)도 청정함을 아느니라.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라면 응당 과거 5음의 상념을 마땅히 사유하여야 하느니라. 법에는 본래 이 상념이 없으니, 과거의 5음의 상념은 미래와 현재의 상념을 알지 못하고, 미래의 상념은 과거와 현재의 상념을 알지 못하고, 현재의 상념은 과거와 미래의 상념을 알지 못하나니, 상념에는 본래 상념이 있지 않느니라.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미래 속에서 미래의 상념을 분별한다면, 미래의 상념은 미래의 상념을 스스로 알지 못하며, 미래의 상념은 과거와 현재의 상념을 알지 못하고, 미래와 과거의 상념은 미래를 알지 못하고, 과거의 상념은 미래와 현재의 상념을 알지 못하느니라.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현재 속에서 과거의 상념을 분별한다면, 또한 과거의 상념이 없고, 미래의 상념을 분별한다면 또한 미래의 상념이 없고, 현재의 상념을 분별한다면 또한 현재의 상념이 없다. 현재와 과거에서 역시 과거의 상념이 없고, 현재와 미래에서 역시 현재와 미래의 상념이 없으며, 현재의 상념에서도 또한 상념이 있지 않느니라.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라면 다시 과거에서 5음의 행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났으며 다시 무엇으로 말미암아 멸하는가를 마땅히 분별하여야 한다. 과거의 행은 또한 행이 있지 않으니, 과거의 행을 분별해도 과거의 행이 아니다. 과거의 행은 미래의 행도 아니요 현재의 행도 아니다. 미래의 행은 과거의 행도 아니요 현재의 행도 아니다. 현재의 행은 과거의 행도 아니요 미래의 행도 아니다. 과거와 미래의 행은 과거와 미래의 행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의 행은 과거와 현재의 행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행은 본래 있는 바가 없어서 또한 행이 있지 않기 때문이니라.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라면 미래 속에서 문득 미래의 행을 마땅히 갖추어야 하느니라. 미래 속에서 과거의 행을 보지 않고 현재의 행을 보지 않으며, 미래 속에서 미래를 보지 않고 과거의 행은 미래를 보지 않으며, 현재의 행은 미래도 현재의 행도 보지 않나니, 왜냐하면 본래 이 행이 있지 않기 때문이니라.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라면 현재 속에서 다시 마땅히 분별하여야 하느니라. 과거의 행 또한 과거의 행이 없고, 또한 미래의 행도 없고, 또한 현재의 행도 없다. 현재의 행에서 현재와 과거의 행을 관(觀)해도 또한 현재와 과거의 행을 보지 않고, 현재에서 현재와 미래의 행을 관해도 또한 현재와 미래의 행을 보지 않나니, 온갖 행을 관하여 요달하면 있는 바가 없느니라.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라면 과거 속에서 과거의 식을 관해도 또한 과거의 식을 보지 않고, 미래의 식에서 또한 미래의 식을 보지 않고, 현재의 식에서 또한 현재의 식을 보지 않고, 과거의 식에서 또한 과거와 미래의 식을 보지 않고, 과거 속에서 또한 과거와 현재의 식을 보지 않고, 또한 식도 보지 않느니라.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라면 미래 속에서 과거의 식과 미래의 식을 보지 않고, 미래 속에서 미래와 과거의 식을 보지 않고, 미래와 현재의 식도 보지 않느니라.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라면 현재의 식에서 과거의 식을 보지 않고, 미래의 식도 보지 않고, 현재 속에서 현재와 과거의 식을 보지 않고, 현재 속에서 미래의 식을 보지 않느니라.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5음의 본말이 공(空)함을 분별한다고 말하느니라.”
16. 비유식비무식품(非有識非無識品)
그때 형향(形響)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저번에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중생의 근본을 이미 말씀하신 것을 들었나이다. 저는 오늘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입고서 ‘식(識)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을 말하고자 하나이다. 오직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만 허락하여 주시오면 감히 나서서 설하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설하기를 원하거든 설하여 보아라.”
형향보살이 곧 부처님 앞에서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중생의 근원을 아시려는
세존의 크나큰 서원,
신령스런 존자의 가르치심을
오늘 이미 들었나이다.
본래 무수한 부처님으로부터
이 요법(要法) 듣기를 항상 구했나니
이제야 성존(聖尊)의 가르치심 입어
‘있음’과 ‘없음’의 가르치심을 들었나이다.
옛적에 저는 수없는 겁에
여러 부처님을 받들어 섬겨서
저는 지금 이미
음향ㆍ변재에 으뜸을 얻었나이다.
모습 또한 모습이 있지 않고
또한 ‘있음’, ‘없음’도 보지 않아서
티끌도 없고 온갖 때도 없으시니
지금의 호칭은 ‘인중존(人中尊)’이라네.
사람의 남[生]은 본래 남이 없거니
하물며 나에게 다시 남이 있으리오.
내가 ‘남이 없는’ 뜻으로써
적은 지혜의 근본을 말하려 하나이다.
감히 어리석은 정(情)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치심 펴려 하지 않나니
옛적의 행한 근본을 스스로 기억해서
오직 들은 걸 감히 의심하지 않을 뿐이로다.
나고 죽음에 한량이 없어
몸을 받고 다시 몸 받나니
마지막엔 의심만 품고서
오직 부연하시는 것 듣기만 하나이다.
그때에 형향보살이 이 게송을 설하고 나서는 부처님 앞에서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으뜸가는 진리[第一義]를 이해해서 저 식(識)과 이 식(識)을 구별하지 않는 것을 소위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다고 말하나이다. 행에 집착함이 있음도 보지 않고 행에 집착함이 없음도 보지 않으며, 모든 법은 한 모습[一相]이어서 다 없기도 하고 다 있기도 하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종성을 분별하여서 ‘이것은 청정한 식이다’, ‘이것은 청정한 식이 아니다’, ‘나의 상호는 성취되었다’, ‘저의 상호는 성취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능히 관하여 요달해도 있는 바가 없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 시절을 분별하여서 모든 부처님을 뵙는데, 이 겁에는 부처님이 있고 저 겁에는 부처님이 없어도 부처님이 있다고 희열을 품지 말고 부처님이 없어도 다시 슬퍼하지 말지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제가 다시 중생의 무리에서 권도의 방편이 있는 자와 권도의 방편이 없는 자를 관하여 보는데, 그 가운데에서 상념의 행을 일으키지 아니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 다시 중생을 관해서 그 연세의 한정된 수(數)를 아나니, 어떤 중생은 마땅히 앞의 겁으로부터 제도를 얻을 자가 있고, 어떤 중생은 마땅히 뒤의 겁으로부터 제도를 얻을 자가 있고, 어떤 중생은 응당히 현재의 겁으로부터 제도를 얻을 자가 있으며, 또한 이 겁에서 제도함 있음과 제도함 없음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그때 보살이 있었으니 이름이 중상구족(衆相具足)이었다. 그 보살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저도 또한 부처님 앞에서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을 감히 설하고자 합니다.”
다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써 게송을 설하였다.
항하 모래수의 부처님에게서
이 온갖 덕의 업을 짓고
마음으로 등정각을 생각해
행을 쌓아 전생 일[宿命]을 아시네.
나[我]와 남[人]과 수명에 집착하지 않고
나고 죽음에 근본 없어
도의 모습은 형상의 조짐도 없음이니
이제 인중존(人中尊)을 만났네.
3세(世)의 평등한 지혜는
식(識)도 아니고 식 없음도 아니니,
행이 다하매 행을 짓지 않아
곧 제자에게 결단[決]을 맡겼어라.
하나의 식은 또한 하나가 없으니
깊은 법요(法要)를 깨쳐서
여러 부처님의 세계인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를 초월하도다.
본래 무수한 세상[世]으로부터
설하심 듣고서 깨침을 얻었나니
원컨대, 부처님 앞에서
식이면서 식 없음 설하심을 듣고자 하나이다.
깊고 묘한 법을 분별하여
이제 인중존(人中尊)을 뵈옵나니
다 열반의 경계에 도달해서
오직 말씀하심을 듣고자 하나이다.
그때에 중상구족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어, 오늘 저의 호칭은 ‘온갖 상을 갖추었다[衆相具足]’고 하나이다. 하지만 상(相)이 일어나도 상이 일어난 줄 모르고, 상(相)이 멸하지만 상이 멸하는 줄 알지 못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중상구족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어, 제가 스스로 생각하오니, 옛적에 식혜(識慧)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이 요체를 설하심을 들었나이다. 온갖 중생들이 처음 뜻을 발하면서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식의 상(相)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낱낱이 6쇠(衰)와 6입(入)을 분별하여서 과거의 쇠함이 과거의 쇠함이 아닌 줄 알고, 미래의 쇠함이 미래의 쇠함이 아닌 줄 알고, 현재의 쇠함이 현재의 쇠함이 아닌 줄 알아서 그 가운데서 상념의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소위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종성생보살(種姓生菩薩)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어, 오늘 부처님 앞에서 음향보살이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을 설함을 들었고, 다시 중상보살이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을 설함을 들었나이다. 어떻습니까, 부처님이시여. 앞에서 말한 식(識)은 어떤 것을 식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空)과 동등하니라.”종성생보살이 다시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어떤 것이 공과 동등함이옵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겨남도 아니요 멸함도 아니요 집착을 끊어버림도 아니니라.”
종성생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지금 부처님께 식의 일어나는 바를 여쭈었사온데 공으로써 저에게 답하신 것이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느니라. 내가 지금 설한 식은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니라. 이 때문에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호칭하느니라.”종성생보살이 아뢰었다.
“식은 상(相)이 있습니까, 상이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식은 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상이 없는 것도 아니니라.”
종성생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째서 식은 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상이 없는 것도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상이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지금의 상도 아니니라. 따라서 본래의 식은 지금의 식이 아니요, 지금의 식은 본래의 식이 아니라고 말하느니라. 이 때문에 식은 상이 있지도 않고 상이 없지도 않다고 말하느니라.”그때에 종성생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만일 상이 있어도 식이 아니라 하고 상이 없어도 식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식을 식이라고 말씀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식이 일어난 바를 따를 뿐이니라. 식이 일어나면 일어나고 식이 멸하면 멸하니, 이 때문에 상이 있지도 않고 상이 없지도 않다고 말하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아직도 식이 있다고 하겠는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형태도 없고 상(像)도 없어서 지금 있지도 않고 과거에 있지도 않고 미래에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이미 식에 식이 있지 않아서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과거도 아님을 스스로 설했느니라. 그대는 지금 이 무엇을 말한 것인가?”“말하고자 하는 식입니까, 종성(種姓)의 생겨남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 식이 보살에게서 생겨남을 물은 것이 아니다. 다만 식을 ‘있다’고 하느냐, ‘없다’고 하느냐를 물었을 따름이니라.”
대답하였다.
“식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옵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족성자여.”그때 종성생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떠하나이까. 부처님이시여, 오늘처럼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는 식으로부터 ‘있다’고 말씀하시고 ‘없다’고 말씀하시나이까, 식으로부터 ‘있다’고 말씀하시고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떠한 뜻으로 여래께 묻는 것인가?”종성생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전에 부처님께서 ‘너는 이제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을 설하느냐.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있느냐,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없느냐’고 물으시기에, 저는 답하기를 ‘없나이다. 부처님이시어, 지금 부처님 말씀처럼 현재ㆍ미래ㆍ과거의 식이 없다고 하시면, 저와 여래의 식은 어디에 있나이까?’ 하였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앞서 식이 있지도 않고 식이 없지도 않다고 말하였느니라. 다만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을 위하여 약간의 법으로 중생을 깨닫게 하였을 뿐이니라.
족성자여, 어떠한가.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법을 체득해 안다면 문득 일체의 모든 법을 능히 갖출 것이니라.”그때에 보살이 있었으니 이름을 역성(力盛)이라고 불렀다. 그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도 또한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을 감히 설하겠나이다.”
역성보살이 곧 부처님 앞에서 게송을 설하였다.
본래 10력(力)의 존자로부터
이 있고 없는 식을 들었나니
거룩한 이의 여덟 가지 도(道)는
걸림 없는 지혜를 펼치셨도다.
음성은 각각 다르고
중생계도 같지 않으나
은혜를 베푸는 견줌 없는 상념은
일컬어 10력(力)이라 하였도다.
만일 내가 뒤에 성불하면
온갖 법계를 분별할 때
하나의 행을 따를 뿐 둘은 없으리니,
오직 원하오니 식(識)을 설함을 들어주소서.
도는 본래 나[我]로부터 생기고
나로 말미암아 식은 나지 않았나니
사념이나 상념이 없음을 계교한다면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 아니로다.
작은 것을 쌓아 큰 행에 이르러야
비로소 스스로 깨침을 이루나니
나고 죽음을 헤아릴 수 없을진대
신식(神識)이 어찌 다할 수 있으랴.
내 이제 존신(尊神)을 이어받아
약간이나마 스스로 연설코자 하나니
오직 원컨대 거룩한 분 앞에서
온갖 불장(佛藏)에 다가갈 수 있길 바라옵나이다.
그때 역성보살은 이 게송을 설하고 나서 문득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떠하나이까, 세존이시여. 만일 분별이 있으면 여래의 10력(力)은 무너뜨려 헐 수 없나이다. 어째서 여래의 10력은 무너뜨려 헐 수 없는가? 첫째는 여래께서 뜻을 발하여 위없는 등정각을 구하시므로 무너뜨려 헐 수 없나니, 이것을 보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 다시 화합을 알아서 피차(彼此)와 본말(本末)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 중생의 행을 관하여 근본적으로 자연(自然)을 깨달아야 비로소 한량없는 근본의 좇아온 바를 아나니, 이것을 보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일체 모든 법은 본래 형상이 없는데, 어리석음을 쌓은 까닭에 문득 이 식을 냅니다. 이 어리석음을 분별해도 일어나고 멸함이 좇아온 바를 알지 못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 온갖 지혜를 분별하는데, 세 가지 일의 행의 근본이 있나이다. 밝음 있음[有明]으로부터 도리어 4전도에 떨어지는데, 4전도에서 환화(幻化)를 요달하면 뒤바뀜을 보지 않고 뒤바뀜 아님도 보지 않으니, 이것을 보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다시 네 가지 일에서 중생의 본말을 관하여 다섯 가지 행을 갖춘 이는 이윽고 능히 사유하여 곧 다섯 가지 일을 이루나니,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라면 본래의 행 없음에서 행하므로 행한 자취가 없나이다. 어떤 것들을 다섯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생각[念]이요, 둘째는 옮기는 생각[轉念]이요, 셋째는 근본[本]이요, 넷째는 어리석음[癡]이요, 다섯째는 다함없음[無盡]이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다시 식의 법은 불가사의해서 무(無)나 훌륭한 방편은 사람이 헤아릴 바가 아니니, 네 가지 일의 행이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 생겨나고 멸함이 있음을 보면서도 문득 능히 일어나고 멸함을 보지 않음을 성취하시니, 이것을 보살의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이라고 말하나이다.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는 과거ㆍ미래ㆍ현재를 관하여도 또한 과거ㆍ미래ㆍ지금 현재의 근본을 보지 않으시며, 만약 5도(道)에 태어나서 5도(道)의 중생의 형상을 받고 나면 5도(道)를 분별함을 얻어서 저의 들어갈 바에 따르시며, 다시 능히 분별하여 형상이 있는 근(根)과 형상이 없는 근(根)을 받으십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미 하늘의 근을 받았으면 용의 근을 받지 않으니, 비록 그렇더라도 용의 근을 받고자 하면 문득 갖가지 법우(法雨)를 능히 내리십니다.선남자나 선여인이라면 야차의 근을 얻었다가 저 야차의 근을 여의고, 아수라의 근을 받아서 다시 능히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을 갖추고, 저 아수라의 근을 버리고서 저 건달바의 근을 받고, 저 근을 버리고 나면 문득 능히 식이 있으면서 식이 없음을 갖추고, 긴나라ㆍ마후라가 등 사람인 듯 사람 아닌 것들 또한 마찬가지나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통진법장(通盡法藏)은 불가사의하다고 말하나이다.”
17. 무량품(無量品)
“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아, 보살마하살은 다시 모든 부처님께서 교법을 정하시매 한량이 있고 한량이 없는 것을 능히 다 알 수 있느니라.
족성자여, 어떠한가. 보살마하살은 모든 부처님께서 이 삼매에 들어서 모든 부처님께서 베푸신 교법의 한량 있음과 한량없음을 다 알고,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입의 행을 설하시고, 몸의 행을 설하시고, 뜻의 행을 설하심을 능히 다 아느니라.혹은 시방세계에 노님을 다시 나타내 보이는데, 동쪽 한량없는 세계를 건너가면서 건너갈 바의 경계[界]를 건너가되 동쪽 여러 부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을 잃지 않으며, 남쪽 한량없는 세계를 건너가면서 건너갈 바의 경계를 건너가되 남쪽 여러 부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을 잃지 않으며, 서쪽으로 한량없는 세계를 건너가면서 건너갈 바의 경계를 건너가되 서쪽 여러 부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을 잃지 않으며, 북쪽으로 한량없는 여러 세계를 건너가면서 건너갈 바의 경계를 건너가되 북쪽 여러 부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을 잃지 않으며,동북쪽으로 한량없는 세계를 건너가면서 건너갈 바의 경계를 건너가되 동북쪽 여러 부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을 잃지 않으며, 동남쪽으로 한량없는 세계를 건너가면서 건너갈 바의 경계를 건너가되 동남쪽의 여러 부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을 잃지 않으며, 서남쪽으로 한량없는 세계를 건너가면서 건너갈 바의 경계를 건너가되 서남쪽의 여러 부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을 잃지 않으며,서북쪽으로 한량없는 세계를 건너가면서 건너갈 바의 경계를 건너가되 서북쪽의 여러 부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을 잃지 않으며, 다시 위쪽[上方]의 한량없는 세계에 노닐면서 건너갈 바의 경계를 건너가되 위쪽의 여러 부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을 잃지 않으며, 다시 아래쪽[下方]의 한량없는 세계에 이르러서 건너갈 바의 경계를 건너가되 아래쪽의 여러 부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을 잃지 않느니라.”그때 부처님께서 넓고 긴 혀[長廣舌]를 내놓아 큰 광명을 놓으셔서 무수 시방세계에 널리 비춤으로서 뭇 모임으로 하여금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매우 깊은 가르침인 건너갈 바의 경계[界]를 건너가심에 대해 설함을 듣게 하시었다.
“여기에 열여덟 가지 지혜의 밝음이 있다.
족성자나 족성녀가 문득 여래의 베푸신 가르치심을 갖출 수 있어서 능히 계(界)로 하여금 계 아닌 상념을 있게 하고, 능히 계 아닌 것으로 하여금 계의 상념을 있게 하여 저 세계에서 하나의 관법을 설하나니, 이것을 선남자ㆍ여인이 열여덟 가지 지혜의 밝음에서 하나의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미래의 무수한 세상일을 미리 알고, 아울러 과거와 현재의 부처님과 비(非)부처님, 보살과 비(非)보살을 알면, 이것을 보살이 열여덟 가지 지혜의 밝음에서 둘째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과거의 한량없고 가없고 무수해서 다하여도 다함을 보지 못하고 일어나도 일어남을 보지 못하나니, 이것을 보살이 열여덟 가지 지혜의 밝음에서 셋째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안팎으로 네 가지 비상한 행을 분별하여 그 가운데서 스스로 관하여 신행(身行)을 갖춘 것을 소위 보살이 열여덟 가지 지혜의 밝음에서 넷째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부처님의 경계는 한량없고 불가사의하건만 문득 모든 부처님의 두 가지 일을 능히 분별해서 어리석음과 애착이 다 성품이 공함을 아나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열여덟 가지 밝은 지혜에서 다섯째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만일 안팎의 공을 하나하나 능히 관할 수 있다면, 나는 저[彼]의 유(有)가 아니고 저는 나의 유가 아니라서 낱낱이 비고 고요하여 있는 바 없음을 아나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열여덟 가지 법에서 여섯째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족성자여, 허공은 모양이 없으매 허공으로 더불어 모양을 지을 수 없지만, 그 가운데서 몸은 저 허공과 같다고 스스로 분별하는 것을 소위 선남자나 선여인이 열여덟 가지 법에서 일곱째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형상이 있든 형상이 없든, 혹은 소리가 있든 소리가 없든, 그 가운데서 분별하여 다 있는 바가 없으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열여덟 가지 법에서 여덟째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일곱 가지 관(觀)이 낳은 4성제(聖諦)의 법과 총지와 열여덟 가지 공행(空行)을 알면,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열여덟 가지 법에서 아홉째의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형상 없는 법의 성품이 또한 남이 있기도 하고 남이 없기도 함을 알아서, 그 가운데서 분별하여 다 있는 바가 없으면, 이것을 보살이 열여덟 가지 밝은 지혜에서 열째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한량없는 세계에서 일어남이 있고 멸함이 있는 것을 마치 요술쟁이가 거울 속의 형상을 보는 것처럼 안다면, 이것을 보살이 열여덟 가지 밝은 지혜에서 열한째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은 다시 일곱 가지 괴로움의 근본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첫째는 이 마음이 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요, 저 마음도 여기에 있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둘째는 저 괴로운 마음도 내가 없고 남이 없으며, 이 괴로운 마음도 내가 없고 남이 없다. 셋째는 온갖 부처님의 세계는 불가사의하건만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은 그 양을 다 헤아릴 수 있다. 넷째는 선남자나 선여인이라면 괴로움이 공하고 ‘나’가 아님을 안으로 스스로 사유해서 몸 있음을 보지 않는 것이 마치 거울이 형상을 비치는 것과 같다. 다섯째는 만일 내가 형상을 받아 열 가지 몸의 법[十身法]을 끊으면, 또한 열 가지 몸이 본래 나로부터 있음을 보지 않는다.여섯째는 두려움 없는 법으로 저 수(受)에 희롱당하지 않고, 온갖 수(受)의 가르침이 있어도 뜻을 바꾸지 않는다. 일곱째는 관행(觀行)ㆍ무행(無行)ㆍ본행(本行)ㆍ아행(我行)ㆍ미래행(未來行)ㆍ비유비불유(非有非不有)ㆍ비무비불무(非無非不無), 이것을 일곱 가지 고행이라고 호칭한다. 이것을 보살이 열여덟 가지 밝은 지혜에서 열두째의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라면 한량없는 공의 상념에서 한량없는 공을 관해서 스스로 생각[念]을 내지 않고 또한 저 생각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량없는 세계는 공하여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이 열여덟 가지 밝은 지혜에서 열셋째의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다시 한량없는 4고(苦)를 마땅히 관하여야 한다. 어떤 것이 4고인가?남섬부주 안에서 한량없는 중생의 괴로움의 근본을 보는 것인데, 첫째는 태어나는 괴로움이니, 태어남의 본말을 알아서 태(胎)의 액운을 항상 생각하고, 둘째는 늙은 괴로움이니, 형상이 달라지고 색깔이 변하여 건장한 뜻이 있지 않고, 셋째는 병의 괴로움이니, 한 가지 요소가 더해지면 한 가지 병이 늘어나고, 4대(大)가 더해지면 네 가지 병이 늘어나고, 한 가지 요소가 멸하면 한 가지 병이 멸하고, 4대(大)가 멸하면 네 가지 병이 멸한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병을 일어나고 멸한다고 하는가. 일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는가.”그때 이름을 본멸(本滅)이라고 부르는 보살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4대(大)는 본래 멸하여서 일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어떤 것이 4대(大)가 본래 멸해서 일어나지 않고 멸하지 않는 것이냐?”대답하였다.
“본래 4대(大)가 없으니, 이제 생겨남은 본래 있지 않나이다. 이런 까닭에 본래 멸해서 일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어떤 것을 본래 멸함이라 하며, 어떤 것을 일어남이 멸한다고 하는가?”
대답하였다.
“본래 형상 있음이 없고 본래 생겨남이 있지 않나이다. 괴로움을 보지도 않고 괴로움 아님을 보지도 않나니, 이것을 본래 멸함[本滅]이라고 말하며, 일어남이 멸한다고 말한 것은 나의 마음이 현재 이 마음을 능히 잠복시켜서 일어나지 않게 함이니, 이것을 일어남이 멸한다고 하나이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과거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에서 과거의 마음은 현재의 마음이 아니요, 현재의 마음은 과거의 마음이 아니니, 어찌하여 본래 멸하고 일어남이 멸한다고 하느냐?”
대답하였다.
“‘본래’라 함도 멸함이 없고, ‘일어난다’ 함도 멸함이 없나이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본래 멸함[本滅]과 일어남이 멸함[起滅]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가?”
대답하였다.
“생겨남이 없는[無生] 까닭에 생겨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본멸(本滅)보살을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훌륭하도다. 능히 여래 앞에서 명쾌하게 이 말을 하는구나. 이른바 죽음의 괴로움이란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 몸을 버리고 몸을 받는 중간에 머물러서 과거ㆍ미래ㆍ현재에 나아갈 바를 모르는데, 그때를 당하여 정신이 문득 공포에 질리나니, 이것을 죽음의 괴로움이라 이른다. 이것을 보살이 열여덟 가지 밝은 지혜에서 열넷째의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다시 다음에 족성자여. 만일 남자나 여인이 ‘나’가 없음[無我]ㆍ괴로움[苦]ㆍ공(空)ㆍ몸 아님[非身]을 분별하면, 이 네 가지 행을 갖추어서 문득 여래의 수기(授記)를 받을 수 있다. 어떤 것이 넷이 되는가. 족성자여,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나’와 ‘나 없음’, 색이 있지 않음과 색이 없지 않음을 계교해서 있는 바가 없음을 이해해 마친다면, 이것을 ‘나 없음’이라고 이른다.만일 다시 선남자나 선여인이 법계를 사유하면서 괴로움에 근본이 없고 괴로움이 있지 않아서 또한 나고 멸함도 있지 않다고 설하나니, 이것을 괴로움과 괴로움 없음을 분별한다고 이른다. 가령 중생의 한량없는 상념이 허공계에 두루 차서 이 상념이 본식(本識)이 낳은 바로서 모두 공에서 다함을 두루 안다. 이것을 일러 공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비신(非身)’인가. 이른바 ‘비신’은 내가 나의 분별을 얻어서 ‘나’에게 ‘나’가 없고, 보는데 봄이 없고, 듣는데 들음이 없고, 보는 것이 있지 않고, 듣는 것이 있지 않다. 이것을 ‘비신’이라고 이른다. 이것을 보살이 열여덟 가지 밝은 지혜에서 열다섯째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다시 다음에 족성자여. 가령 나의 여(如)는 모든 부처님의 여(如)와 모든 부처님 법의 여(如)와 다르지 않고, 불유불법불유여(不有佛法不有如)도 또한 다시 다르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이 열여덟 가지 밝은 지혜에서 열여섯째의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족성자여, 선남자나 선여인들아,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은 본래의 행원(行願)에서 균등하게 나뉜 중생의 3독(毒)의 많고 적음을 알아서 3독(毒)ㆍ세 가지 청정한 법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이 열여덟 가지 밝은 지혜에서 열일곱째의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다시 다음에 족성자여.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과거의 무수한 항하 모래 수의 겁을 스스로 생각하고, 다시 현재의 무수한 항하 모래 수의 겁을 알고, 다시 미래의 무수한 항하 모래 수의 겁을 알아서, 그 가운데서 낱낱이 분별하여도 있는 바가 없나니, 이것을 보살이 열여덟 가지 밝은 지혜에서 열여덟째의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열여덟 가지의 밝은 지혜를 분별하면, 대중 속에서도 두려울 바 없는 것이, 마치 용맹스럽고 건장한 국왕에게 거느린 바가 있어서 온갖 친근한 자들이 모두 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빠트림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성스러운 지혜의 법의 가르침을 얻어서 법인(法印)으로 봉하게 되면, 곧 능히 한량없는 지혜의 문을 갖추나니, 어떠한 것이 한량없는 지혜의 문이 되는가. 온갖 부처님은 불가사의하고, 온갖 부처님의 국토도 불가사의하고, 온갖 법도 불가사의하고, 온갖 법의 성품도 불가사의하고, 비구승도 불가사의하고, 승가의 법도 불가사의하고, 절[僧刹]도 불가사의하니라. 이와 같은 법의 행에 다시 네 가지 일이 있으니, 무엇이 넷이 되는가.첫째는 본래 무수한 겁의 한계를 거치면서부터 항상 한뜻으로 그르침이 없으니,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일행(一行)의 근본을 지켜서 다함 있고 다함없음을 안다면, 온갖 부처님의 다함 있음과 다함없음을 알아서 곧 평등한 도의 행을 능히 갖추느니라.”
그때 보살이 있으니 이름이 월광조(月光照)였다. 그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이제 다함이 있고 다함이 없는 온갖 법문의 행을 감히 설하겠나이다.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법의 근본에서 다섯 가지 행을 갖추어 문득 여래의 근본을 다 알 수 있는가. 어떤 것이 넷이 되는가.첫째, 세상에 있으면서 거취를 다 알아 도의 법과 세상의 법을 분별하니, 이것을 첫째의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한다.
다시 형상ㆍ빛깔ㆍ모습이 없는 정의(定意)로 온갖 국토에 감응해서 그 나라에서 중생을 교화하여 무위(無爲)의 가르침을 나타내 보이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둘째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한다.
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자기 몸의 법에서 스스로 몸을 보지 않고 한량없는 중생을 능히 제도하여서 끝내 중생의 법계를 버리지 않으니, 이것을 셋째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한다.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여래의 세 가지 법행(法行)의 근본을 분별한다. 어떤 것이 세 가지 법행의 근본인가? 첫째는 걸어 다니는[經行] 것이니, 갈만 하면 알아서 가고, 올만 하면 알아서 오고, 앉을 만하면 알아서 앉으면서도 뜻을 밝은 상념에 붙잡아매어 마음을 어지럽게 아니한다. 둘째는 앉아서 참선함[坐禪]이니, 만일 자리에 나아가서 결가부좌하고자 하면, 문득 뭇 상념을 버리고 한뜻, 한마음으로 그 몸을 이전하지 말고, 선정을 마칠 때까지 처음부터 어지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다시 작용을 일으켜서 온갖 선(善)한 일을 베풀면, 짓는 바가 반드시 이루어져서 다른 나머지 상념이 없으리라. 이것을 세 가지 법 가운데서 네 가지 법을 성취했다고 말한다.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서 당장의 생겨남[當生], 아직 생겨나지 않음[未生], 이미 생겨났음[已生]을 다 알아서 문득 그 가운데서 사자후(獅子吼)를 지어 근본행의 법을 잃지 않으니, 이것을 다섯째의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들아,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다시 여래의 세 가지 행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여래의 선정은 세속의 선정이 아니고, 또한 아라한ㆍ벽지불의 선정이 아니고, 또한 1지와 2지 내지 10지의 선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선정은 한정이 있지만 여래의 선정이란 한정이 없기 때문이니라.”그때에 부처님께서 월광조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세속의 선정을 하겠는가, 배움이 있는 선정을 하겠는가, 배움이 없는 선정을 하겠는가, 1지에서 나아가 10지까지 이르는 선정을 하겠는가?”
월광조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여래에게서 들은 바 그 중의 여러 가지 일과 여러 가지 있음[有]을 따르겠나이다. 남자든 여자든 욕계의 중생이 처음 뜻을 발하면서부터 성불(成佛)에 이르기까지 처음 도의 경지에 있어서 보살의 지위에는 처하지 못하는데, 그 가운데서 문득 과거의 선(禪), 미래의 선, 지금 현재의 선이란 세 가지 선을 얻나이다.이 선남자나 선여인이 비록 이 세 가지 선을 얻어서 바로 몸 가운데의 과거 몸, 몸 가운데의 미래 몸, 몸 가운데의 현재 몸을 스스로 알 수 있지만, 다른 몸 가운데의 과거 몸은 능히 알지 못하고, 다른 몸 가운데의 미래 몸도 능히 알지 못하고, 다른 몸 가운데 지금 현재의 몸도 능히 알지 못하나이다.
이와 같은 선남자나 선여인이 어떻게 몸 가운데의 과거 몸을 아나이까. 그래서 세존이시여, 만일 앉아 참선할 때 문득 스스로 몸을 관해서 청정하지 못한 생각을 일으킨 뒤 문득 스스로 생각하기를 ‘애달프다, 나의 이 몸은 마멸의 법에 있구나’ 하고 한뜻, 한마음으로 오직 청정하지 못함만 알 뿐 그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나이다.그때 선남자나 선여인이 다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이 몸을 버리고 나서 마땅히 다시 관(觀)을 구하여야 한다. 가령 나의 지금 몸은 나 없음[無我]을 이해해 알았지만, 그러나 바깥 물건[外物]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낱낱이 분별하여 있는 바가 모조리 없다고 안다’고 하는데, 이것을 현재의 몸에서 문득 과거와 미래를 사유할 수 있다고 말하나이다.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은 스스로 자기 몸과 외물(外物)을 관하고 나서 이 마음을 버리고 마땅히 다시 관(觀)을 구하여야 하길 ‘나는 이제 이 몸을 다 분별하니,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다. 저 중생이란 나의 몸과 같은가, 같지 않은가?’ 하고서, 문득 바깥사람 안의 과거 몸을 분별하되 ‘애달프고 슬프도다, 이 몸의 마멸도 오래지 않겠구나’ 하고 문득 청정치 못한 상념을 일으키는데, 이미 청정치 못한 상념을 내었다면 외부 사람 안의 과거 몸은 자기와 다름없음을 알게 됩니다.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라면 이 바깥사람 안의 과거 몸을 버리고 나서는 다시 마땅히 관(觀)을 내어야 하니 ‘어떻게 이 사람 안의 과거 마음은 무엇으로부터 생겼으며 무엇으로부터 멸하게 될까’ 하고서, 다시 스스로 사유하여서 바깥사람 안의 과거 마음을 버리고 문득 다시 바깥사람 안의 미래 마음을 생각하기를 ‘애달프다 이 몸이여,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부터 멸하는가’라고 하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으로서 보살의 지위에 있는 이가 문득 세 가지 선의 행[三禪行]을 능히 갖추었다고 말하나이다.”부처님께서 다시 월광조보살에게 물으셨다.
“어떻게 배움의 경지에서 세 가지 참선의 법을 닦느냐?”
월광조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미 믿음의 경지에 있으면 이를 일러 ‘배우는 사람[學人]’이라 하니, 문득 앞으로 나아갈 길을 향하고자 하는데, 바로 여섯 군데 고요한 곳이나 혹은 나무 밑이나 무덤 사이에 한가한 곳 그리고 허공이나 맨 땅에 나아가 결가부좌하고서 단정한 마음으로 사유하면서 세 가지 참선의 행법을 스스로 갖추고자 하나이다.이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스스로 속으로 생각하기를 ‘스스로 안의 과거 몸을 관하니, 본래 어디로부터 왔으며 다시 어디로 사라질 것인가?’라고 하면서, 다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애달프다, 이 몸은 본래 생겨난 바가 없고 본래 멸한 바가 없구나’ 하나이다. 선남자나 선여인은 곧 이 몸을 버리고 나서 다시 관(觀)을 구하는데, ‘나의 지금 이 몸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를 따라 멸하였나. 미래의 몸도 또한 마찬가지인가?’ 하고, 문득 스스로 생각하기를, ‘안의 미래 몸은 어디로부터 나며 어디를 따라 멸할 것인가?’ 하면서 문득 스스로 ‘이 안의 미래 몸도 또한 생겨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멸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내옵니다.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배움의 경지에서 안의 몸에 세 가지 선을 갖추었다고 말하나이다.어떻게 하면 배움의 경지에서 남의 몸에서 안의 몸을 관하여 세 가지 선을 갖추겠나이까. 이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몸을 버리고 나서 바깥 몸을 스스로 관하면서 ‘안의 과거 몸은 본래 어디로부터 났으며 본래 어디를 따라 멸할 것인가?’ 하면서 문득 스스로 생각하기를 ‘애달프다, 남의 안의 과거 몸은 어디로부터 났으며 어디를 따라 멸할 것인가?’ 하고, 다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안의 과거 몸은 나지도 않고 또한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나이다.다시 이 몸을 버리고 나서 다시 관(觀)을 구하는데, ‘이 안의 과거 몸이 이미 다시는 나지 않고 이미 다시는 멸하지 않는다. 이 안의 미래 몸은 어디로부터 날 것이며 어디를 따라 멸할 것인가?’라고 하면서 문득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안의 미래 몸도 또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나이다.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다른 몸 안의 과거와 미래의 몸에서 세 가지 선[三禪]을 갖추었다고 말하나이다.”부처님께서 월광조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배움이 없는 자리[無學地]에서 선남자나 선여인이 세 가지 선[三禪]을 갖추는가?”
월광조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번뇌의 자리에 나아가서 무루의 법을 끊고자 하여 문득 스스로 생각하면, 즉 결가부좌하고서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안의 과거 몸은 어디로부터 났으며 어디를 따라 멸할 것인가?’ 하고서 다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안의 과거 몸도 또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나이다.이때에 배움이 없는 선남자나 선여인은 이 관(觀)을 버리고 나서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안의 과거 몸을 이미 보았으니, 마땅히 다시 나와 나의 과거 몸도 멸함을 보지 않고 또한 생겨남을 보지 않으며, 또한 겁도 있지 않고 또한 나고 죽음도 없고 또한 나라[刹土]도 없다고 관해야 한다’고 하나이다.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배움 없는 자리에서 세 가지 선을 갖추는 것이라 말하나이다.”부처님께서 다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1지(地) 보살이 온갖 행을 다하지 않고 세 가지 선(禪)을 갖추는가?”
대답하였다.
“무신관(無身觀)으로 몸과 염(念)을 관하고, 무념의 근본으로 염행(念行)을 잃지 않사오며, 소리로써 음향을 받지 않고, 첫 보살의 경지를 지나서 세 번 믿음의 경지를 지나고, 세 번 일체의 모든 법을 초월하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세 가지 선을 갖추었다고 말하나이다.”부처님께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그대의 1지의 세 가지 선은 보지 못하였는가?”
대답하였다.
“유계(有界)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설하지 못 하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몸이 없느냐, 몸이 있느냐. 어째서 설하지 못 하느냐?”
대답하였다.
“몸은 있나이다.”부처님께서 다시 물어 말씀하셨다.
“몸이 법의 몸[法身]이냐, 4대(大)의 몸이냐?”
대답하였다.
“부모의 몸이옵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제 부모의 몸으로 어떻게 세 가지 선을 성취하였는가?”월광조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처음에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을 구하려고 보리수[樹王] 아래 앉아서 두려움도 없고 무서운 마음도 없이 문득 삼계의 연치법(然熾法)을 염(念)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스스로 사유하기를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능히 몇몇 중생인 과거의 수다원, 과거의 사다함(斯多含), 과거의 아나함(阿那含), 과거의 아라한(阿羅漢), 과거의 벽지불을 제도하기 위해 다 열반에 드시었다’고 하였고,다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미래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라고 하였나이다. 이것을 1지 보살이 첫 번째 선의 행을 갖추었다고 말하나이다. 저와 같은 1지 보살이 삼계(三界)를 관하여 보면, 1지행의 근본이 아라한과 벽지불을 넘어서나니, 이것을 1지 보살이 두 번째 선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나이다. 만일 1지(地)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안팎을 분별하여 몸의 세 가지 공을 지키고, 법의 가르침을 연설하되 다르고 잘못됨이 없으면, 이것을 1지 가운데서 세 번째 선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나이다.”부처님께서 다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찌하여 사다함ㆍ아나함의 세 가지 선을 말하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미 견지(見地)에 있으면서 문득 스스로 사유하기를, ‘자기 몸 안의 과거 몸과 안의 미래 몸은 또한 이 몸이 있지 않고, 또한 부처의 상념도 없고, 또한 법의 상념도 없고, 또한 몸의 상념을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을 안의 과거 몸에 세 가지 선을 갖추었다고 말하나이다.어떻게 해야 안의 미래 몸에 세 가지 행을 갖추나이까. 이때 사다함은 다시 안팎을 스스로 관해서 여러 가지 번뇌를 버리고는 세 가지의 선의 경지에 생각을 붙잡아 매어 잊지 않는데, 비록 스스로 증득하였다고 하지만 자기 모습을 헐지 않나이다. 마치 법마다 자기 모습이라서 스스로 명자의 몸[名身], 구절의 몸[句身], 맛의 몸[味身]을 분별하는 것과 같나이다.
다시 밖의 한량없는 중생을 관해서 부처의 상념을 일으키지 않고, 부처의 상념을 성취하면 평등하고 둘이 없어서 다 청정케 하여 오고 감을 보지 않게 하고 멀고 가까움이 없게 하는데, 이것을 사다함이 안의 미래 몸에서 세 가지 선을 갖추었다고 말하나이다.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이 단정히 앉아 사유하여 돌아오지 않는 도[不還道]를 얻어서 문득 스스로 분별하는데, ‘나는 이제 결코 증명[證]을 받는 경지에 있어서 온갖 법의 자연의 상(相)을 헐지 않는다. 스스로의 증명을 살피건대, 나는 이미 하나를 지났고, 이미 둘을 지났고, 이미 셋을 지났으므로 다시는 가고 오지 않는다. 생사에 처해서도 심의(心意)가 담박하여 옮겨 다니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자기 몸에서 과거를 관한다고 하며, 미래도 또한 마찬가지이나이다.”그때에 부처님께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아나함(阿那含)은 과거의 법을 얻느냐, 과거의 법을 못 얻느냐?”
대답하였다.
“아나함은 과거의 법은 얻어도 과거의 법을 다하지 못하나이다. 어째서 과거의 법은 얻지만 과거의 법을 다하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아나함의 몸은 과거에 있고 법은 미래에 있기 때문이니, 이것을 과거의 법은 얻지만 과거의 법은 다하지 못한다고 이르나이다.또다시 다음에 아나함의 몸은 미래에 있지만 법은 이미 과거이니, 이것도 또한 과거의 법은 얻지만 과거의 법은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아, 가령 아나함은 몸이 과거가 아니고 몸이 현재가 아니지만, 법은 이미 과거이고 법은 이미 현재이니, 이것을 아나함은 과거의 법은 얻지만 과거의 법을 다하지는 못한다고 이르나이다.”부처님께서 다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사다함(斯多含)은 과거의 법을 얻고 과거의 법을 다하느냐?”
대답하였다.
“사다함은 비록 과거의 몸이 있다고는 하지만, 과거의 법을 얻지 못하고 과거의 법을 다하지도 못하나이다.”
“어째서 사다함이 과거의 몸은 있지만, 과거의 법을 얻지 못하고 과거의 법을 다하지 못하느냐?”대답하였다.
“사다함의 과거 몸은 벌써 멸하였고 과거의 법은 다하지 못하였나이다. 미래의 법은 스스로 관해버렸고, 과거의 법도 또한 있는 바가 없나이다. 가령 아나함은 과거의 몸은 없지만 과거의 법은 있나이다. 그런 까닭에 사다함은 그렇지 않나이다. 마치 밝은 거울로 그 얼굴을 보는 것이 얼굴과 얼굴끼리 서로 보는 것만 못함과 같나이다. 이런 까닭에 사다함은 아나함만 못합니다. 아나함의 식(識)이 순수하게 단련된 금과 같다면, 사다함의 식은 단련되지 못한 금과 같나이다. 이 까닭에 차별이 있나이다.”부처님께서 다시 물어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그대의 말과 같다면 아나함은 과거의 법을 얻어서 과거의 법을 다하였고, 미래의 법을 얻어서 미래의 법을 다하였다. 이미 처소를 성취했는데도 법은 성취하지 못하느냐?”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나이다. 비록 단련한 금은 이루었지만 오히려 그릇은 이루지 못하였나이다. 금이란 이름은 있지만 형상은 얻지 못하나이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족성자여. 이 뜻을 잘 말하였다. 아나함은 과거의 법이 없어서 과거의 법을 다했으며, 미래의 법이 없어서 미래의 법을 다했느니라. 이제 아라한은 과거의 법을 얻어서 과거의 법을 다하였느냐, 미래의 법을 얻어서 미래의 법을 다하였느냐?”
대답하였다.
“과거의 법을 얻었으나 과거의 법을 다하지 못하였고, 미래의 법을 얻었으나 미래의 법을 다하지 못하였나이다. 이런 까닭에 차별이 있나이다.”이때에 부처님께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2지(地)의 보살이 세 가지 선의 행을 갖춘 것인가?”
대답하였다.
“마치 2지 보살이 위없는 지진ㆍ등정각을 발한 것처럼 안의 몸도 보지 않고 밖의 몸도 보지 않은 채 생각을 앞에다 붙잡아매고서 문득 스스로 사유하기를 ‘나는 지금 안의 몸에 안의 과거 몸이 있는가, 안의 과거 몸이 없는가,안의 미래 몸이 있는가, 안의 미래 몸이 없는가?’라고 하는데, 이 관(觀)을 버리고 나서 다시 시유하기를 ‘나는 지금 이미 안의 몸이 없고, 이미 밖의 몸이 없으니, 어떻게 안의 몸에서 안의 과거 몸을 구하며 안의 미래 몸을 구하랴’고 하니, 이것을 2지의 보살이 자기 안팎의 몸에서 세 가지 선을 갖추었다고 말하나이다.이때에 2지 보살은 다시 이와 같이 생각하나이다.
‘나는 이제 안팎의 몸을 모조리 다 분별하였다. 반드시 다음에는 남의 안팎의 신법(身法)은 나와 다른가, 다르지 않은가를 관해야 하고, 더욱 스스로 전진해서 남의 안팎의 몸에 과거의 몸이 있는가, 과거의 몸이 없는가, 미래의 몸이 있는가, 미래의 몸이 없는가를 관해야 한다.’
이 선남자나 선여인으로서 2지에 있는 이가 남에게서 과거의 몸을 관하니 과거의 몸이 없고, 남에게서 미래의 몸을 관하니 미래의 몸이 없으니, 이것을 2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남의 과거 몸에서 세 가지 선을 성취한다고 이르나이다.”부처님께서 다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3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은 3지 가운데서 세 가지 선을 성취하느냐?”
답하여 아뢰었다.
“만일 3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단정히 앉아서 ‘과거의 몸을 내관(內觀)하면 과거의 몸이 있는가, 과거의 몸이 없는가. 미래의 몸을 내관하면 미래의 몸이 있는가, 미래의 몸이 없는가?’ 하고 사유하고, 다시 스스로 ‘나는 초지(初地) 안의 과거 몸이 없는가, 있는가. 과거의 몸도 또한 다시 초지 안의 미래의 몸이 없는가, 있는가. 미래의 몸에도 또한 다시 초지의 남 안에 과거의 몸이 없는가, 있는가. 과거의 몸에도 또한 다시 초지의 남 안에 미래의 몸이 없는가, 있는가?’하고 사유하며, 미래의 몸도 다시 관하기를, ‘2지에서 과거의 몸을 내관(內觀)하면 과거의 몸이 있는가, 과거의 몸이 없는가. 미래의 몸을 내관하면 미래의 몸이 있는가, 미래의 몸이 없는가?’ 하며, 다시 스스로 사유하기를 ‘나는 2지 안에 과거의 몸이 없는가, 있는가. 과거의 몸도 또한 다시 2지 안에서 미래의 몸이 없는가, 있는가. 미래의 몸도 또한 다시 2지의 남 안에서 과거의 몸이 없는가, 있는가. 과거의 몸도 또한 다시 2지 안에서 미래의 몸이 없는가, 있는가.미래의 몸은 가령 내가 이제 나의 3지 중 안의 과거 몸에 안의 과거 몸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다시 스스로 안의 미래 몸을 관하면 안의 미래 몸이 없고, 스스로 지(地) 속에서 남의 안의 과거 몸을 관하면 남의 안의 과거 몸이 없고, 남의 안의 미래 몸을 관하면 남의 안의 미래 몸이 없거늘, 하물며 나에게 몸이 있다거나 몸이 없다고 하오리까.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3지 가운데에서 세 가지 선을 갖추었다고 이르나이다.”그때에 부처님께서 다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선남자나 선여인이 4지(地) 가운데에서 세 가지 선을 갖추겠는가?”
대답하였다.
“만일 4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단정히 앉아 시유하기를, ‘과거의 몸을 내관(內觀)하면 과거의 몸이 있는가, 과거의 몸이 없는가. 미래의 몸을 내관하면 미래의 몸이 있는가, 미래의 몸이 없는가?’하며, 다시 스스로 사유하기를 ‘나에게 초지, 2지, 3지의 과거 몸이 없고 또한 미래의 몸도 없거늘, 하물며 4지의 안에 과거 몸이 있으랴?’ 하니, 4지 안에 과거의 몸이 없고, 4지 안에 미래의 몸이 없고, 4지 안에 미래의 몸이 없나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4지 가운데서 세 가지 선을 성취했다고 이르나이다.”부처님께서 다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5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5지 가운데에서 세 가지 선을 갖추는가?”대답하였다.
“만일 5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단정히 앉아 사유하기를, ‘과거의 몸을 내관(內觀)하면 과거의 몸이 있는가, 과거의 몸이 없는가. 미래의 몸을 내관하면 미래의 몸이 있는가, 미래의 몸이 없는가?’하며, 다시 스스로 사유하기를, ‘내가 이제 이미 1지, 2지에서 4지까지 버리고, 4지 중에서 과거의 몸을 내관해도 과거의 몸이 없고 미래의 몸을 내관해도 미래의 몸이 없는데, 다시 이것을 버리고 나서, 남의 안의 과거 몸을 관해도 과거 몸이 없고, 남의 안의 미래 몸을 관해도 미래 몸이 없거늘, 하물며 5지의 안에 과거의 몸이 있겠는가, 과거의 몸이 없겠는가. 남에게서 미래의 몸을 관해도 미래의 몸이 없다’고 하나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5지 가운데서 세 가지 선을 갖추었다고 이르나이다.”부처님께서 다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선남자나 선여인이 6지 가운데서 세 가지 선을 갖추겠는가?”
대답하였다.
“만일 6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단정히 앉아서 사유하길, ‘무아신(無我身) 속의 안을 관함에서 나의 몸 없음을 관하면, 과거의 몸이 있는가, 과거의 몸이 없는가. 미래의 몸을 내관하면 미래의 몸이 있는가, 미래의 몸이 없는가?’하나니, 이것을 6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6지 가운데에서 세 가지 선을 성취하였다고 이르나이다.6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무아신(無我身)을 버리고 나서, ‘남에게서 안을 관하면 과거의 몸이 있는가, 과거의 몸이 없는가. 남에게서 안을 관하면 미래의 몸이 있는가, 미래의 몸이 없는가?’하며, 다시 스스로 사유하기를, ‘남에게서 과거의 몸을 내관하니 과거의 몸이 없고, 남에게서 미래의 몸을 내관하니 미래의 몸이 없다’고 하나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6지 가운데서 세 가지 선을 성취하였다고 이르나이다.”부처님께서 다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7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어떻게 하여 7지 가운데서 세 가지 선을 성취하는가?”
대답하였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 단정히 앉아서 사유하기를, ‘과거의 몸을 내관하면 과거의 몸이 있는가, 과거의 몸이 없는가. 다시 미래의 몸을 내관하면 미래의 몸이 있는가, 미래의 몸이 없는가?’하고, 선남자나 선여인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길 ‘나는 이제 이미 1지(地)를 버렸다. 안의 과거 몸에 과거의 몸이 없고, 안의 미래 몸에 미래의 몸이 없다.나아가 6지에 이르기까지 안의 과거 몸에 안의 과거 몸이 없고, 안의 미래 몸에 미래의 몸이 없으니, 어찌 7지 가운데서 안의 과거 몸이 있을 것이고 안의 과거의 몸이 없을 것이며, 안의 미래 몸이 있을 것이고 안의 미래 몸이 없을 것이냐?’ 하나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7지 가운데에서 세 가지 선을 성취하였다고 이르나이다.”부처님께서 다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선남자나 선여인이 7지 가운데에서 남의 안의 과거 몸을 관해도 과거 몸이 아니고, 남의 안의 미래 몸은 미래 몸이 아니냐?”
대답하였다.
“선남자나 선여인이 남의 안의 과거 몸을 관해도 남의 안의 과거 몸이 있지 않고, 남의 안의 미래 몸을 관해도 남의 안의 미래 몸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쳐라, 그만두어라. 족성자여, 이는 그대의 경계가 아니니라. 왜냐하면 7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은 남의 안의 과거 몸을 관해도 또한 남의 안의 과거 몸이 있지 않고 오직 남의 안의 미래 몸이 없을 뿐인데,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선남자나 선여인이 7지 가운데에서 남의 안의 미래 몸을 성취한다고 말하는가?”월광조보살이 다시 부처님에게 아뢰었다.
“가령 제가 남의 안의 미래 몸을 관하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나이다. 그런 까닭에 성취한다고 말하였나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8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8지 가운데서 세 가지 선을 성취하는가?”대답하였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단정히 앉아서 사유하기를, ‘안으로 과거의 몸을 관하니 안으로 과거의 몸이 없고, 안으로 미래의 몸을 관하니 안으로 미래의 몸이 없다. 남의 안의 과거 몸을 관해도 안의 과거 몸이 없고, 남의 안의 미래 몸을 관해도 안의 미래 몸이 없다’라고 하며, 어느 때는 선남자나 선여인이 스스로 안의 과거 몸을 관할 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이 마치 허공 같아서 안의 미래 몸을 능히 멸하지 못한다.어느 때는 안의 미래 몸을 관할 때 안의 과거 몸을 능히 멸하지 못하며, 어느 때는 남의 안의 과거 몸을 관할 때 남의 안의 미래 몸을 능히 멸하지 못하며, 남의 안의 미래 몸을 관할 때 남의 안의 과거 몸을 능히 멸하지 못하나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8지 가운데에서 세 가지 선을 성취한다고 이르나이다.”부처님께서 다시 월광조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9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9지 가운데에서 세 가지 선을 성취하는가?”
대답하였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단정히 앉아서 사유하기를, ‘안을 관하면 과거의 몸이 있는가, 과거의 몸이 없는가. 스스로 안으로 미래의 몸을 관하면, 미래의 몸이 있는가, 미래의 몸이 없는가?’하고,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관(觀)을 버리고 나서 다시 ‘남의 안의 과거 몸을 관하면 과거의 몸이 있는가, 과거의 몸이 없는가. 남의 안의 미래의 몸을 관하면, 안의 미래 몸이 있는가, 안의 미래 몸이 없는가?’합니다.이 관(觀)을 버리고 나서 다시 이렇게 사유하나이다.
‘나는 본래 안의 과거 몸이 없고 과거의 몸이 없으며, 본래 안의 미래 몸이 없고 미래의 몸이 없거늘, 하물며 남의 바깥의 과거 몸이 있으며 과거의 몸이 없고, 남의 바깥의 미래 몸에 미래의 몸이 없으랴.’
이처럼 집착하는 마음이 굳건하여 본래의 서원을 버리지 않으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9지 가운데서 세 가지 선을 성취하였다고 이르나이다.다시 다음에 9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은 마땅히 다시 세 가지 선의 행을 닦아 도량에 앉기까지 어기거나 잃지 말아야 하나니, 어떤 것이 셋 가지인가? 첫째는 관(觀)이고, 둘째는 행(行)이요, 셋째는 근본이다.
만일 세 가지 선을 성취하는 이는 문득 도량에 이르게 됨을 갖출 수 있나니, 어떤 것이 ‘관(觀)’인가? 법계를 분별하고 중생의 근본을 알아서 뭇 모습을 장엄함이니, 이것을 ‘관’이라고 이른다.어떤 것이 행(行)인가? 보리수[佛樹]에 나아가 몸의 색상(色相)을 나타내지만, 온갖 번뇌가 이미 다해서 티끌과 때에 오염되지 않으니,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행하시는 네 가지 항상되지 않은 법을 일러 행(行)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근본인가? 보살마하살이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는 이제 큰 서원을 이미 갖추었다’라 하고, 마땅히 중생으로 하여금 이 큰 서원을 갖추게 하나니, 이것을 일러 근본이라고 한다. 선남자나 선여인 가운데 이 세 가지 행을 갖춘 이는 문득 도량에 이르게 됨을 능히 갖출 수 있다.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은 다시 마땅히 세 가지 선(禪)을 갖추어서 도량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이 셋 가지인가? 첫째는 공공(空空)이고, 둘째는 공상(空想)이고, 셋째는 공식(空識)이니, 이 세 가지 공을 갖춘 이는 문득 도량에 이르게 됨을 능히 갖출 수 있다.무엇을 공공(空空)이라 하는가? 이른바 ‘공’이란 안의 법의 공과 바깥 법의 공을 관하여 한 세계, 두 세계, 나아가 무수 아승기 세계까지 관한다. 이것을 일러서 공공이라고 한다. 무엇을 공상(空想)이라 하는가? 문득 정의(定意)에 들어가 세계를 다 관하면서도 공(空)의 있음ㆍ공의 없음ㆍ나의 있음ㆍ나의 없음을 생각하지 않나니, 이것을 일러 공상이라고 한다. 무엇을 공식(空識)이라고 이르는가?정의(定意)에 들어갈 때에 다시 이런 관(觀)을 하길 ‘나는 지금 중생 생각[念] 때문에 다시 다른 상념이 없으니, 마땅히 중생을 청정케 하기를 나와 다름이 없게 하겠다. 그렇지만 이 중생에게는 한량없는 식이 있으니, 이제 나는 무슨 식으로 저 중생의 식을 교화하여야 하는가. 나는 이제 마땅히 공식(空識)으로 이 세계를 다 공과 같게 함으로서 저 중생으로 하여금 식의 집착을 분별하게 하여야 한다’라고 하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9지 가운데서 이 세 가지 선을 갖추었다고 말하나이다.다시 세 가지 법이 닦아 행할 만하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세계를 분별함이요, 둘째는 중생계를 분별함이요, 셋째는 제일의(第一義)를 분별함이다. 만일 이 세 가지 법을 닦으면 문득 도량에 능히 나아가는 데 두려울 것 없다.어떤 것이 세계를 분별하는 것인가? 온갖 세계를 다 두루 관하여서, 청정한 자든 청정하지 못한 자든 모조리 요달해 알아서 어긋나거나 그르침이 없고, 뜻에 따라 선택해서 부처님의 국토를 닦아 다스리니, 이것을 세계를 분별한다고 이른다. 어떤 것이 중생계를 분별하는 것인가?다시 온갖 중생을 두루 관하여 항상 권도의 방편[權便]으로 교화해서 큰 서원의 광대한 마음을 버리지 않으며, 겁수(劫數)를 지나도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나니, 이것을 선남자나 선여인이 중생계를 성취하였다고 이른다. 어떤 것이 제일의를 성취하는 것인가? 낱낱이 중생의 의취(義趣)를 분별해서 모조리 공(空)으로 돌아가니, 나와 남과 수명도 없고 또한 하나나 둘이라는 분별도 없다. 온갖 법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인, 이것을 으뜸가는 뜻을 분별한다고 이른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세 가지 법을 성취하면, 문득 도량에 나아감을 능히 갖출 수 있다.다시 세 가지 신족(神足)이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신족으로 과거의 법을 알고, 둘째는 신족으로 미래의 법을 알고, 셋째는 신족으로 현재의 법을 아는 것이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세 가지 법을 갖추면, 문득 도량에 이르게 됨을 갖출 수 있으리라.어떤 것이 신족으로 과거의 법을 아는 것인가? 여기서 9지(地)의 선남자나 선여인은 과거의 법이 허공의 상념과 같음을 알아서 과거의 중생을 분별하는데, 욕심ㆍ화냄ㆍ어리석음으로 마음이 오염된 이와 욕심ㆍ화냄ㆍ어리석음으로 마음이 오염되지 않은 이를 낱낱이 분별하면서도 집착함이 없나니, 이것을 신족으로 과거의 법을 안다고 말한다.어떤 것이 신족으로 미래의 법을 아는 것인가? 이 9지에서 선남자나 선여인은 미래의 형상을 받을 중생을 아는데, 욕심ㆍ화냄ㆍ어리석음으로 마음이 오염된 이와 욕심ㆍ화냄ㆍ어리석음이 없어서 마음이 오염되지 않은 이를 낱낱이 분별하면서도 집착한 바 없나니, 이것을 신족으로 오는 세상의 법을 안다고 이른다. 다시 다음에 9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은 현재의 온갖 중생을 아는데, 욕심ㆍ화냄ㆍ어리석음으로 마음이 오염된 이와 욕심ㆍ화냄ㆍ어리석음이 없어서 마음이 오염되지 않은 이를 낱낱이 분별하면서도 집착한 바가 없나니, 이것을 신족으로 지금 현재의 법을 안다고 이른다. 이것을 9지에서 세 가지 법을 성취하여 도량으로 나아간다고 말하나이다.다시 다음에 9지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세 가지 법으로 도량에 이르게 되나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몸이 청정[身淨]함이요, 둘째는 입이 청정[口淨]함이요, 셋째는 뜻이 청정[意淨]함이니, 이 세 가지 법을 갖추면 도량에 이르게 된다.어떤 것이 몸이 청정함인가? 몸은 벌써 한량없는 덕행(德行)을 초월했고, 본행(本行)은 이미 멸하여 다시는 몸의 행[身行]을 짓지 않아서 몸마다 통달하여 걸리는 바가 없나니, 이것을 9지(地) 보살의 몸이 청정함이라고 이른다. 어떤 것이 입의 청정인가? 한량없는 가르침을 내면서도 일찍이 매우 깊은 묘한 곳간을 이지러트리거나 손상시키지 아니하니, 이것을 입의 청정이라 이른다. 어떤 것이 뜻의 청정인가? 물들어 집착함을 없애서 티끌과 때를 받지 않나니, 이것을 뜻의 청정이라고 이르나이다.”
그때에 월광조보살이 문득 이 게송을 읊었다.
몸은 청정하여 티와 더러움 없고
안팎으로 물든 바도 없네.
덕이 높으셔 견줄 이 없고
욕심과 분노의 이름 영원히 없네.
입이 청정하여 온갖 교법 설하시되
어떠한 허물도 새나오지 않고
멸도를 성취하실 때까지
입으로 가르치심 다함없어라.
뜻이 청정하여 탐내고 집착함 없고
자비와 연민은 늘고 줄지 않아
한량없음 가운데 태어나시어
깨치지 못한 이를 깨우쳐 주시네.
9지(地)에 법계를 지나니
있지도 않고 또한 없지도 않아
이들 선남자들은
이미 여래의 경계에 들어갔도다.
나는 본래 한량없는 세월동안에
부지런히 배우며 스승을 따랐지만
이 행을 아직 밟지 못했거니
하물며 나머지 타락한 이들이랴.
행을 지켜서 집착한 바 없어
한결같이 부처를 이루길 쌓으면
행은 삼계를 초월하고
사람 중의 사자후라네.
“이것을 9지(地)의 선남자나 선여인이 세 가지 법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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