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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619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7권

by Kay/케이 2024.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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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7

 

보살선계경 제7권

구나발마 한역
최윤옥 번역

19) 조보리수법여품(助菩提數法餘品)무엇을 보살마하살의 다라니(陀羅尼)라 하는가? 다라니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法)다라니이고, 둘째는 의(義)다라니이며, 셋째는 사(辭)다라니이고, 넷째는 인(忍)다라니이다.
법다라니는 보살이 마음에 새겨 기억하며 잊지 않는[憶念] 것이다. 염력(念力)으로 해서 큰 지혜를 얻고, 큰 지혜로 해서 모든 법계를 안다. 언사(言辭)와 자구(字句)를 단단한 마음으로 받아 지니어 한량없는 세간을 거치면서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
의다라니는 법다라니에 따라 순리대로 좇아서 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다. 한량없는 세간을 통하여 이를 받아 지니어 잊어버리지 않는다. 사다라니는 보살마하살이 중생들의 갖가지 악을 깨뜨리기 위해 신령한 주문[神呪]을 받아 지니어 읽고 외워서 통리(通利:통달하여 걸림이 없음)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주술(呪術)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법을 받아서 지니는 것이니, 그 첫째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오신(五辛:파ㆍ마늘 등 냄새나는 다섯 가지 채소)을 먹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사음(邪婬)하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부정(不淨)한 집에서는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법을 구족하면 능히 한량없는 중생을 크게 이익되게 하며, 모든 나쁜 귀신과 모든 독(毒)과 모든 병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인다라니는 보살마하살이 지혜의 힘으로 해서 마음이 적정(寂靜)함을 좋아하여 남들과 함께 거처하지 않고 묵연(默然)히 말없고, 벗 없이 홀로 지내는 것이다. 음식에 대하여 만족함을 알아서 한 종류의 음식만 먹으며, 좌선(坐禪)하여 사유(思惟)하고 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다.
이때 부처님은 곧 다라니주(陀羅尼呪)를 외우게 한다.
을치밀치기치비찬제반단나사바하
乙致蜜致羈致毘羼提般檀那莎 呵
보살은 이때 부처님으로부터 이를 받은 다음 깊은 마음으로 관찰하여 글자에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글자에 뜻이 없으니 뜻이 있는 말이 없고, 뜻이 있는 말이 없으면 글 또한 뜻이 없으며 법 또한 뜻이 없다. 뜻이 없으니 모든 법은 모조리 설명할 수가 없다. 뜻이란 모든 법이 뜻이 없다는 뜻이다.
인력(忍力) 때문에 네 가지 다라니를 능히 명료하게 알며, 명료하게 알기 때문에 인다라니의 구족함을 얻는다. 능히 인다라니를 구족하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게 된다.보살마하살이 초아승기겁(初阿僧祇劫)에 행(行)을 닦을 때에 이 법(法)과 의(義)의 두 다라니를 얻었고, 이 법과 의의 두 다라니로 인하여 삼매를 닦았으며, 삼매를 닦아 서원(誓願)을 발함에 따라 다시 사(辭)와 인(忍)의 두 다라니를 얻었다.
보살이 만일 네 가지를 구족할 경우 네 다라니를 얻는다. 그 첫째는 다섯 가지 욕심을 탐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중생에 대해 질투심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능히 보시를 하고 보시한 뒤에 후회하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바른 법[正法]을 즐겨 듣고 보살의 법장(法藏)과 보살의 마이(摩夷:論藏ㆍ行母)를 받아 지니어 읽어 외우고 글씨로 쓰고 해설하는 것이다.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큰 서원(誓願)을 발한다고 하는가? 거기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발심발원(發心發願)이고, 둘째는 유발원(有發願)이며, 셋째는 행발원(行發願)이고, 넷째는 선발원(善發願)이며, 다섯째는 대발원(大發願)이다.
처음 보리심을 발할 때를 발심발원이라 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인천(人天)에 태어나기 때문에 유발원이라 하며,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무량심(無量心)을 닦는 것을 행발원이라 하고, 모든 보살의 선법(善法)을 닦는 것을 선발원이라 하며, 신명을 아끼지 않고 바른 법을 보호하여 지키는 것을 대발원이라 한다.보살이 만일 열 가지의 공양으로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에 공양하고 바른 법을 보호하여 지키며, 법을 지키는 자를 보면 공양하고 공경할 경우, 이를 대발원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도솔천 내지 대열반(大涅槃)에 태어나는 것을 대발원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처음의 발심(發心)을 좇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데까지 이르면 이것을 대발원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모든 유(有)에 변재(遍在)하여 그에 따라 몸을 받으면 이것을 대발원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항상 대승보살의 법장(法藏)과 보살의 마이(摩夷:論藏)로 중생을 교화하면 이것을 대발원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연설하는 것은 모두 이익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선근(善根)이 없는 자에게 선근의 싹이 생기게 한다. 이것을 대발원이라 한다.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공삼매(空三昧)를 닦는다고 하는가? 보살이 모든 법에 설할 만한 자성(自性)이 있는가를 깊이 본다면, 이 설할 만한 자성은 설할 수 없는 자성 중에는 없기 때문에 공삼매라 한다.
어떤 것을 일러 무원삼매(無願三昧)라 하는가? 모든 법을 선설(宣說)할 수 있다고 하기 때문에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있게 되고, 나와 나의 것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괴로움[苦]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기 때문에 모든 법은 선설할 수 없음을 알고, 이 때문에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나가 없고 나의 것이 없으므로 새삼 원하고 구하지 않는다. 이것을 무원삼매라 한다.
어떤 것을 일러 무상삼매(無相三昧)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이 선설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선설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번뇌의 모양[相]이 전혀 없고, 모양이 없으므로 적정(寂靜)이라 하며, 적정을 닦기 때문에 이것을 무상삼매라 한다.여래는 어째서 세 가지 삼매를 설하는가? 모든 법에는 무릇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위의 유[有爲有]이고, 둘째는 무위의 유[無爲有]이다. 유위의 유는 나와 나의 것을 말하고 무위의 유는 이른바 열반이다.
유위의 유는 보살마하살이 모든 괴로움을 관찰하고 원하거나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무원삼매라 한다.
무위의 유는 이른바 열반이다. 보살마하살은 열반 중에서 즐겁다는 생각[樂想]을 하지 않는다. 이것을 무상삼매라 한다.
무위(無爲)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보살은 원하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보살마하살은 유(有)가 있음을 보고 무(無)가 없음을 본다. 유에는 무가 없고 무에는 유가 없다. 이것을 공(空)이라 한다. 보살은 이때 공삼매를 닦아 진실한 지혜를 얻는다.
이러한 삼매는 성문과 연각도 역시 닦고 배우나 능히 설하지는 못한다.모든 법은 선설할 수 없는 것이지만 모든 불ㆍ보살이 중생들로 하여금 적정(寂靜)을 얻게 하기 위해 이 네 가지 법을 설한다.
일체 유위법(有爲法)은 무상(無常)이며, 괴로움[苦]이며, 무아(無我)이며, 열반적정이다.
모든 불ㆍ보살은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 네 가지 법을 설하는 것이니, 응당 이미 설한 모든 법계(法界)의 모든 법의 근본을 안다. 이것을 우타나(優陀那)라 한다.
우타나는 과거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이 또한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능히 위[上]를 짓는 것을 우타나라 하며, 선법을 증장하는 것을 우타나라 한다.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은 유위법이 모두 무상임을 안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유위법이 가히 무상임을 설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모든 유위(有爲)는 무상이다.모든 법성(法性)이 진실한 뜻에 있어서 인과가 없으므로 선설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모든 법이 모두 생겨나고 멸한다는 것을 모양을 지어서 말한다.
이래서 과거의 유위는 역시 생기고 역시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법은 원인[因]이 있음을 보지 못하며 자성[性]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 원인과 자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의 법이 이처럼 무상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법은 생기는 것은 알고 없어지는 것은 모른다. 현재의 법은 그 원인[因]은 보지 못하고 그 과보[果]를 보고 자성을 본다.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성은 알고 원인은 모르는 것이다.
미래의 유위법은 생기고 없어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원인은 있지만 과보는 알지 못하며 자성을 알지 못한다. 아직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원인을 알지만 자성은 모른다.이때 삼세를 보아 하나하나의 생각에 세 가지 모습이 있음을 관찰한다. 만일 한 염을 지나면 네 가지 모습이 있다.
먼저 법이 멸하고 나면 차례로 유사한 법[相似法]이 생긴다. 이것을 생(生)이라 한다.
생기고 난 뒤에는 일을 짓는다. 이것을 주(住)라 한다.
맨 먼저 법상(法相)이 멸하는데 법상이 멸하고 나면 상사(相似)를 본다. 이것을 노(老)라 한다.
태어난 뒤에 주(住)하지 않고 이념(二念)에 이를 경우, 이것을 괴(壞)라 한다.보살은 유위법의 모양[相]이 한 가지임을 본다. 생(生)ㆍ주(住)ㆍ노(老)의 경우에도 또한 이와 같다. 다만 허물어지는 상[懷相]만이 다르다. 어째서인가? 세 가지 모습[相]과 함께 주(住)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상을 보는 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有)이고, 둘째는 무(無)이다. 유는 세 가지 상이고 무는 네 번째의 상[第四相]이다.
보살은 유위법(有爲法)을 보는 데 있어 생을 보지 않으며, 주를 보지 않으며, 노를 보지 않으며, 괴를 보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생ㆍ주ㆍ노ㆍ괴는 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색법(色法)으로서의 생, 색법으로서의 주, 색법으로서의 노, 색법으로서의 괴를 보며, 생ㆍ주ㆍ노ㆍ괴를 보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은 방편으로써 불견(不見)의 네 가지 상을 관찰한다. 방편으로 관찰한다는 것은 보살관(菩薩觀)이다.만일 색법을 떠나 별도로 생(生)이 있는 것이라면 색법이 생길 때에도 생은 또한 당연히 생긴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법은 당연히 이생(二生)이다. 그 첫째는 색생(色生)이고, 그 둘째는 생생(生生)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생(生)은 법에 즉(卽)하기도 하고 법에서 떠나기[離]도 한다. 만일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생생이 없으며, 만일 법을 떠나 별도로 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치가 그럴 수 없다.
만일 떠나지 않는다면 그럴 때에는 색(色)에 생(生)이 없나니, 생인연(生因緣) 때문이다. 생ㆍ주ㆍ노ㆍ괴가 역시 이와 같다.
만일 괴(壞)가 자성이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이 괴 또한 생겨나고 허물어지는 것임을 안다. 만일 괴가 생기는 것이라면 마땅히 모든 유위법이 멸함이 없다는 것을 안다. 입정(入定)할 때나 입멸(入滅)할 때 심법(心法)과 심수법(心數法)이 언제나 다시 생기고, 색법이 멸할 때도 역시 다시 생긴다. 어째서인가? 이 허물어짐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모든 법이 당연히 항상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보살이 색법을 떠나서는 네 가지 상을 보지 못한다. 유위법의 자성이 무상함을 알기 때문에 또한 항상 유위는 무상이라고 말한다.보살은 유위의 법에 세 가지의 괴로움이 있음을 본다. 고고(苦苦)와 행고(行苦)와 괴고(壞苦)이다. 이런 관계로 여래는 유위법은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은 유위법이 무아(無我)라고 본다고 하는가? 무아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무아(衆生無我)이고, 둘째는 법무아(法無我)이다.
중생무아란 중생은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법이 없는 것도 아니며, 법이 있는 것[有法]과 법이 없는 것[無法]을 떠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중생무아라 한다.
법무아란 모든 법은 설할 수 있으나 설할 만한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법무아라 한다.
이와 같이 두 가지의 무아가 있으므로 여래는 유위법은 모두가 무아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유위법에 대하여 현재의 인(因)을 끊어버리고 미래의 인을 막으면 이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데, 번뇌가 없으므로 적정(寂靜)이라고도 한다.만일 보살이 청정하지 못한 마음으로 열반을 관하거나, 성문이 아직 도과(道果)를 얻지 못하고 열반을 관하면, 모두 진실로 열반의 자성을 알지 못하는 바 역시 열반상(涅槃相)이다. 비유컨대 대왕(大王)이 자식을 위한다 하여 나무를 깎아 코끼리ㆍ말ㆍ사슴ㆍ토끼를 만들어 주면, 임금의 자식들은 진짜가 아닌 코끼리나 말 등을 진짜인 것으로 생각하고, 임금이 혹시 코끼리나 말을 찬탄하면 자식들은 모두 깎아 만든 코끼리와 말을 찬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나중에 바깥에 나가서 진짜 코끼리나 말을 보고는 그만 부끄러워하며 생각한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코끼리와 말이 아닌 것을 보고 코끼리와 말이라고 생각했으며, 어떻게 해서 이름이 같고 모양이 같다 하여 진짜라는 생각을 했는가?’역시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성문인 사람이 아직 도과(道果)를 증득하지 못하여 생사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여래가 이들을 위하여 열반의 적정을 설하면, 보살이나 성문은 듣고 나서 역시 참된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참된 열반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일어나는 마음을 열반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 뒤에 팔정도(八正道)를 닦은 다음 청정한 지혜를 얻어 생사의 집을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열반의 자성이 어떤 것인지를 참으로 알고 드디어 부끄러워하며 생각한다.
‘우리들이 어떻게 열반이 아닌 것에 열반이라는 생각을 일으켰을까?’비유하자면, 병이 든 사람이 훌륭한 의원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이때 의원은 병을 고치기 위해 증세에 따라 약을 준다. 그러면 병자는 약을 받고 기뻐하며 진짜 좋은 약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먹는다. 약을 먹은 뒤 아프던 병이 낫지만 다시 다른 병[餘病]이 생긴다. 그러면 의원은 먼저 주던 약을 끊고 다시 다른 약을 준다. 그러나 병자는 이같이 말한다.
“대사(大師)께서 주신 먼젓번의 약이 매우 좋아서 능히 병을 고쳤습니다. 이 약은 능히 그러하지 못할 것입니다.”의원이 비록 이 약이 좋다고 해도 병자는 여전히 믿지 않는다. 그러다가 병자가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그때서야 약을 믿고 부끄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부처의 설법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중생이 듣고 작은 번뇌가 없어지면 즉시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다시 번뇌가 생겨서 부처도 무상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래가 이들을 위하여 다시 깊고 깊은 법을 설하면, 비록 다시 듣기는 하지만 정작 믿지는 않고 본래의 것을 진실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만일 보살이 청정한 도를 얻으면 그때서야 비로소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여래를 실상(實常)이라고 하면서 생각한다.
‘내가 어째서 여래를 무상하다고 했는가?’
이래서 여래는 유위법이란 모두 무상이고, 괴로움[苦]이며, 무아(無我)이고, 열반적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20) 공덕품(功德品)보살마하살이 보리행(菩提行)을 닦는 데에 다섯 가지의 불가사의가 있다. 그 첫째는 모든 중생들을 연민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생사의 고통을 받는 것이며, 셋째는 선방편(善方便)을 써서 중생을 조복(調伏)하는 것이고, 넷째는 마음을 발하여 깊고 깊은 어려운 이치를 알고자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불가사의한 신족(神足)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법은 모든 중생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가사의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보살마하살에게는 또 다섯 가지의 불가사의가 있다.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괴로움의 인[苦因]을 받고, 괴로움의 인을 받기 때문에 안락함을 얻으며, 안락함을 얻기 때문에 불가사의의 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
그리고 보살은 생사의 허물과 열반의 적정(寂靜)을 보지만,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열반을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생사에 유전(流轉)한다. 이것을 수락(受樂)이라 한다. 즐거움을 받기 때문에 불가사의의 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
그리고 보살은 공한(空閑)함을 즐겨하여 적정하고 묵연하며, 모든 중생을 위하여 바른 법[正法]을 풀어 설한다. 이것을 수락이라 하며, 즐거움을 받기 때문에 불가사의의 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
그리고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육바라밀을 행하지만 또한 육바라밀의 과보[果]는 구하지 않는다. 이것을 수락이라 하며, 즐거움을 받기 때문에 불가사의의 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
그리고 보살마하살은 남의 일을 경영하기를 마치 자기 일을 하듯이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을 수락이라 하며, 즐거움을 받기 때문에 불가사의의 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
이것을 보살의 다섯 가지 불가사의의 법이라 한다.보살은 또 다섯 가지가 있어서 모든 중생에 대하여 그 마음가짐이 평등하다.
첫째는 처음으로 보리심을 발할 때에 널리 모든 중생을 위하고 한 사람만을 위하지 않는다. 이것을 평등이라 한다.
둘째는 보살이 대비(大悲)를 닦을 때에 널리 모든 중생을 위하고 한 사람만을 위하지 않는다. 이것을 평등이라 한다.
셋째는 보살이 모든 중생을 하나의 자식으로 여기는 일자(一子)의 경지를 닦을 때 널리 모든 중생을 위하고 한 사람만을 위하지 않는다. 이것을 평등이라 한다.
넷째는 보살은 널리 십이인연이 모두 다 같은 유(有)임을 관찰한다. 이것을 평등이라 한다.
다섯째는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할 때에 널리 모든 중생을 위하고 한 사람만을 위하지 않는다. 이것을 평등이라 한다.보살마하살에게는 또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명(正命)을 가르쳐 닦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간사의 방편을 가르쳐 익히는 것이며, 셋째는 가난한 자를 보면 방편으로 교화하여 가난의 고통을 깨뜨리게 하는 것이고, 넷째는 가장 선한 자를 위해 바르고 참된 도를 설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삼승(三乘)을 위해서 삼승법(三乘法)을 설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섯 가지의 이익이라 한다.중생에게 보살의 은혜에 보답하는 다섯 가지의 법이 있으니, 첫째는 선법과 모든 금계(禁戒)를 받아서 지키는 것이고, 둘째는 받은 뒤에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가난을 깨뜨리는 것이며, 셋째는 삼보에 공양하는 것이고, 넷째는 보살에게서 법을 듣고 이를 받아 지니어 읽어서 외우고, 글씨로 쓰고, 분별하고 해설하여 다시 남에게 가르치는 것이며, 다섯째는 법을 지키는 자를 보면 공경하고 공양하는 것이다.보살마하살이 보리의 도를 행함에 있어 지극한 마음으로 원(願)을 세워서 언제나 다섯 가지를 구한다. 첫째는 항상 세간에 부처님이 나오시기를 발원하는 것이고, 둘째는 항상 육바라밀을 구족하기를 발원하는 것이고, 셋째는 항상 보살의 법장(法藏)과 보살의 마이(摩夷:論藏)를 구하기를 발원하는 것이고, 넷째는 항상 해탈을 얻기를 발원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항상 권속(眷屬)들이 성취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섯 가지라 한다.보살에게는 또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자리이타품(自利利他品)」에서 설한 것과 같다.
보살에게는 또 다섯 가지가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신속하게 얻는다. 첫째는 법을 보호하는 것[護法]이고, 둘째는 선행(善行)을 수행하는 것이며, 셋째는 지혜의 힘이고, 넷째는 전심하여 적정(寂靜)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살의 종성(種性)을 안정적으로 얻는 것이다. 이것을 다섯 가지라 한다.법을 보호한다는 것은 보살이 다라니(陀羅尼)의 옹호를 구족하는 것으로 남을 따라서 법을 듣기 때문에 신속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또 보살은 호념(護念)함을 구족하는데, 호념하기 때문에 법을 들어서 잊지 않는다. 또 보살은 지혜의 옹호를 구족하는데, 지혜를 옹호하기 때문에 법계를 분별한다. 또 보살은 호심(護心)을 구족하여 모든 근(根)을 조복하며, 또 보살은 타심(他心)의 옹호를 구족하여 타행(他行)을 따른다. 이것을 법을 옹호한다고 한다.
선행을 수행한다 함은 보살이 법에 대하여 순응하여 해석하고 순응하여 설하며, 항상 선법과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의 회향을 발원하는 것이다. 이것을 선행이라 한다.
지혜의 힘이란 보살마하살이 초발심(初發心)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까지이다. 이것을 지혜의 힘이라 한다.
전심하여 적정한다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십정법(十淨法)으로써 여래께 공양하되, 위에 설한 바와 같이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적정이라 한다.
보살의 종성을 확실하게 얻는다는 것은 이른바 보살이 모든 중생을 하나의 아들로 보는 일자(一子)의 지위와 불퇴전(不退轉)의 지위에 머무는 것이다. 이것을 보살이 보살의 종성을 확실하게 얻는다고 한다.보살마하살에게는 선법(善法)을 훼손하고 감(減)하게 하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과 법을 설하는 이에게 능히 공양하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방종하고 게으른 것이며, 셋째는 즐겨 번뇌를 일으키고 마음이 들떠서 쉼이 없는 것이고, 넷째는 같은 보살에 대하여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살장(菩薩藏)에 대하여 거꾸로 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보살에게 선법(善法)을 증장(增長)하게 하는 다섯 가지 법이 있으니, 첫째는 법과 법을 설하는 이에게 공양하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을 다잡아서 정진하는 것이며, 셋째는 일어나는 번뇌를 즐거운 마음으로 멸하여 없애는 것이고, 넷째는 같은 보살에 대하여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살장에 대하여 그 뜻에 순응하여 이해하는 것이다.사실은 보살이 아니면서 거짓으로 보살이라 하고, 사실은 사문이 아니면서 거짓으로 사문이라 하며, 사실은 바라문이 아니면서 거짓으로 바라문이라 하고, 보살계를 얻지 못하여 중도(中道)로 동지(同止)하지 못하는 것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악한 성품[惡性]이고, 둘째는 금기를 어긴 자를 옹호하는 것이며, 셋째는 선정을 얻지 못하고도 선상(禪相)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고, 넷째는 잘못된 행위[邪命]로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며, 다섯째는 지혜로운 자를 보면 질투심이 생겨 비방하는 것이다.진실로 보살이고, 진실로 사문이며, 진실로 바라문이고, 보살계를 얻어 동지(同止)하는 것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착한 성품[善性]을 조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금기를 어긴 자를 다스리는 것이며, 셋째는 실제로 선정을 얻고도 그 모양을 보이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바른 업[正命]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며, 다섯째는 지혜로운 자를 보면 기뻐서 찬탄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데에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악법을 깨뜨리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법계를 알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짓거나 범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넷째는 범하면 뉘우치고 부끄러워하게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모든 근(根)을 조복케 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방일(放逸)하지 않게 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악한 지식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는 것이고, 여덟째는 적정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멀리 번뇌를 떠나게 하는 것이고, 열째는 해탈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열 가지라 한다.보살에게 주는 기별(記別)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살성이 결정되어 있으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아직 발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보살성은 없지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살성이 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도 발하는 것이고, 넷째는 한량없는 세월 동안 보리를 위하여 선행을 수행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설하지 않을 때의 정(定)을 정득(定得)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설할 때의 정을 정득하는 것이다. 이것을 여섯 가지라 한다.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정득하는 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유성(定有性)이고, 둘째는 불퇴심(不退心)을 얻는 것이며, 셋째는 무릇 하는 일이 모두 중생을 위해 선법의 싹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보살은 이 세 가지의 정(定)으로써 부처님의 소기(所記)로 삼는다.
보살은 다섯 가지를 구족하지 못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 그 첫째는 보리의 마음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연민한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것이며, 셋째는 열심히 정진하지 못하는 것이고, 넷째는 금계를 존중하여 무겁게 여기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모든 세간의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보살이 만일 이와 같이 다섯 가지를 구족하지 못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 만일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법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런 이치는 여기에는 없다.보살이 항상 닦아 쌓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방일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중생을 위하여 그들의 가난과 곤고(困苦)를 깨뜨리는 것이며, 셋째는 삼보(三寶)에 공양하는 것이고, 넷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금계를 지키고 이를 범하면 곧장 깨닫는 것이며, 다섯째는 짓는 바의 착한 일을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廻向)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보다 나은 열 가지의 법이 있으니, 첫째는 보살성이 다른 모든 성보다 나은 것이고, 둘째는 처음으로 발하는 보리심이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발심(發心)보다 나은 것이며, 셋째는 비리야(毘梨耶)바라밀과 반야(般若)바라밀이 다른 모든 바라밀보다 나은 것이고, 넷째는 유연한 말로 포섭하는 방법이 다른 모든 포섭보다 나은 것이며, 다섯째는 여래가 모든 중생보다 나은 것이고, 여섯째는 비심(悲心)이 다른 모든 무량심(無量心)보다 나은 것이며, 일곱째는 사선(四禪)을 닦는 것이 다른 모든 선보다 나은 것이고, 여덟째는 공삼매(空三昧)가 다른 모든 삼매보다 나은 것이며, 아홉째는 멸진정(滅盡定)이 다른 모든 멸정(滅定)보다 나은 것이고, 열째는 정방편(淨方便)이 다른 모든 방편보다 나은 것이다. 이것이 곧 열 가지의 법이다.오직 불ㆍ보살만이 능히 유포(流布)할 수 있는 것이라서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ㆍ천마(天魔)ㆍ범천(梵天) 등은 유포할 수 없다. 그렇지만 만일 부처님을 따라 들으면 능히 유포할 수 있는 것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유포(法流布)이고, 둘째는 실유포(實流布)이며, 셋째는 방편유포(方便流布)이고, 넷째는 승유포(乘流布)이다.
법유포란 십이부경(十二部經)을 차례로 풀어서 설하는 것이다.실유포에 한 가지가 있으니 거짓말하지 않는 것[不妄語]을 말한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세제(世諦:世間의 道理, 속세의 이치)와 제일의제(第一義諦:佛性의 究竟의 眞理, 勝義諦)이다.
또 세 가지가 있으니, 상실(相實)ㆍ구실(口實)ㆍ행실(行實)이다.
또 네 가지가 있으니,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말한다.
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실(因實)이고, 둘째는 과실(果實)이며, 셋째는 지실(智實)이고, 넷째는 지경계실(知境界實)이며, 다섯째는 무상실(無上實)이다.또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실실(實實)이고, 둘째는 허망실(虛妄實)이며, 셋째는 지실(智實)이고, 넷째는 원리실(遠離實)이며, 다섯째는 증실(證實)이고, 여섯째는 수실(修實)이다.
또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애실(愛實)이고, 둘째는 고실(苦實)이며, 셋째는 해탈실(解脫實)이고, 넷째는 법실(法實)이며, 다섯째는 해실(解實)이고, 여섯째는 성실(聖實)이며, 일곱째는 비성실(非聖實)이다.
또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행고실(行苦實)이고, 둘째는 고고실(苦苦實)이며, 셋째는 생고실(生苦實)이고, 넷째는 멸실(滅實)이며, 다섯째는 번뇌실(煩惱實)이고, 여섯째는 해탈실(解脫實)이며, 일곱째는 선행실(善行實)이고, 여덟째는 선과실(善果實)이다.
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상실(無常實)이고, 둘째는 고실(苦實)이며, 셋째는 부정실(不淨實)이고, 넷째는 공실(空實)이며, 다섯째는 무아실(無我實)이고, 여섯째는 유애실(有愛實)이며, 일곱째는 단애실(斷愛實)이고, 여덟째는 단이애방편실(斷二愛方便實)이며, 아홉째는 유여열반실(有餘涅槃實)이다.
또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수가 아닌데도 억지로 짓는 고실(苦實)이고, 둘째는 가난의 고실이며, 셋째는 사대(四大)가 조복되지 않은 고실이고, 넷째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실이며, 다섯째는 미운 자와 만나게 되는 고실이고, 여섯째는 업실(業實)이며, 일곱째는 과보실(果報實)이고, 여덟째는 번뇌실이며, 아홉째는 선사유실(善思惟實)이고, 열째는 정견실(正見實)이다.
이것이 열 가지 법으로서 실유포라 한다.방편(方便)유포는 방편품(方便品)에서 설한 바와 같다.
승(乘)유포는 이른바 성문승(聲聞乘)ㆍ벽지불(辟支佛)ㆍ보살승ㆍ불승(佛乘)이다. 이것을 사승(四乘)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방편에 다섯 가지의 무량(無量)이 있음을 관찰한다. 첫째는 중생계의 무량함이고, 둘째는 세계(世界:器世間 또는 國土世間의 뜻)의 무량함이며, 셋째는 법계(法界)의 무량함이고, 넷째는 조복계(調伏界)의 무량함이며, 다섯째는 조복방편(調伏方便)의 무량함이다.
중생계에는 예순한 가지가 있는데, 주희지(住喜地)보살이 중생계를 관찰하여 무량으로 전화(轉化)한 것이다.세계의 무량함에는 한량없는 이름이 있으므로 이런 세계를 사바(娑婆)라 한다. 그래서 범천(梵天)을 사바주(娑婆主)라 한다.
법의 무량함은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가 전화하여 한량이 없게 된 것이다.
조복무량에 한 가지가 있으니 조복의 사유[調伏故]를 말한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구족한 번뇌와 구족하지 못한 번뇌이다.
또 세 가지가 있으니 상근(上根)ㆍ중근(中根)ㆍ하근(下根)이다.
또 네 가지가 있으니 바라문(婆羅門)ㆍ찰제리(刹帝利)ㆍ비사(毘舍)ㆍ수다라(首陀羅)이다.
또 다섯 가지가 있으니, 탐욕이 많고, 증오가 많고, 어리석음이 많고, 교만함이 많고, 악함이 많은 각관(覺觀:思念, 생각)이다.또 여섯 가지가 있으니, 출가자ㆍ재가자ㆍ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未熟]ㆍ이미 성숙한 자[已熟]ㆍ아직 해탈하지 못한 자[未得解脫]ㆍ이미 해탈한 자[已得解脫]이다.
다시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들으면 곧 이해하는 것이요, 둘째는 비유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요, 셋째는 한 구절 한 구절씩 이해하는 것이요, 넷째는 한 글자 한 글자씩 이해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현재에 성숙함[現在熟]이요, 여섯째는 다른 세상에서 성숙함[他世熟]이요, 일곱째는 인연을 따라 성숙함[隨因緣熟]이다.
다시 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팔중(八衆)이다.
다시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름이 여래조복(如來調伏)이요, 둘째는 성문(聲聞)조복이요, 셋째는 연각(緣覺)조복이요, 넷째는 보살조복이요, 다섯째는 난(難)조복이요, 여섯째는 이(易)조복이요, 일곱째는 연어(軟語)조복이요, 여덟째는 가책(呵責)조복이요, 아홉째는 연어가책(軟語呵責)조복이다.
다시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옥이요, 둘째는 축생이요, 셋째는 아귀요, 넷째는 욕계인천(欲界人天)이요, 다섯째는 중음(中陰)이요, 여섯째는 색(色)이요, 일곱째는 비색(非色)이요, 여덟째는 상(想)이요, 아홉째는 무상(無想)이요, 열째는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이다. 이것을 열 가지라 한다.
이 쉰다섯 가지를 한량없는 것으로 본다.중생계와 조복계(調伏界)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중생계는 자성이 있음[有性]과 자성이 없음[無性]을 전혀 분별하지 않는 것이며, 조복계는 유성과 무성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 쉰다섯 가지를 한량이 없는 것으로 본다.
중생계와 조복계(調伏界)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중생계는 자성이 있음[有性]과 자성이 없음[無性]을 전혀 분별하지 않는 것이며, 조복계는 유성과 무성을 분별하는 것이다.
조복방편무량(調伏方便無量)은 초품(初品)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보살의 다섯 가지 한량없음[無量]이 모든 방편을 섭취(攝取)한다.
보살마하살이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당연히 네 가지를 구해야 한다. 첫째는 추물(推物)이고, 둘째는 추명(推名)이며, 셋째는 추성(推性)이고, 넷째는 추분별(推分別)이다. 이 네 가지는 역시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모든 불ㆍ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데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설법할 때에 즉시 사제(四諦)를 깨닫는 것이요, 둘째는 설법할 때에 즉시 해탈을 얻는 것이요, 셋째는 설법할 때에 즉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하는 것이요, 넷째는 설법할 때에 보살 찬제(提)를 얻는 것이요, 다섯째는 중생이 설법을 듣고는 이를 받아 지니어 읽어 외우고, 글씨로 쓰고, 해설하여, 바른 법[正法]을 옹호해서 지키는 것이다. 이것을 모든 불ㆍ보살이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여 대공덕(大功德)의 불가사의를 얻는다고 한다.어떤 것을 대승(大乘)이라 하는가? 일곱 가지의 대(大)가 있으므로 대승이라 한다.
그 첫째는 법대(法大)이다. 법대란 보살법장(菩薩法藏)이 십이부경(十二部經) 중에서 최대 최상임을 말하는데 그래서 비불략(毘佛略)이라 한다.
둘째는 심대(心大)이다. 심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해대(解大)이다. 해대는 보살장인 비불략경(毘佛略經)을 해설하는 것이다.
넷째는 정대(淨大)이다. 정대는 보살이 발심(發心)한 뒤에 그 마음이 청정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데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는 장엄대(莊嚴大)이다. 장엄대란 보살이 공덕장엄과 지혜장엄을 구족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여섯째는 시대(時大)이다. 시대는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해서 3아승기겁 동안 고행을 수행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구족대(具足大)이다. 구족대는 보살이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구족하여 스스로 장엄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법대ㆍ심대ㆍ해대ㆍ정대ㆍ장엄대ㆍ시대의 육대(六大)를 인(因)이라 하고, 구족대를 과(果)라 한다.여덟 가지 법이 있어 능히 모든 대승(大乘)을 섭취한다. 그 첫째는 보살의 법장(法藏)을 풀어 설하는 것이요, 둘째는 보살장의 이치를 해설하는 것이요, 셋째는 보살장 중의 모든 불ㆍ보살의 불가사의함을 설하는 것이요, 넷째는 그 이치를 생각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그 이치를 닦아 쌓는 것이요, 여섯째는 구족한 이치를 얻는 것이요, 일곱째는 닦아 쌓은 과보를 얻는 것이요, 여덟째는 깊고 깊은 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을 여덟 가지라 한다.
이와 같이 배우는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보살이 보살의 보리를 수학(修學)하는 데에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성주(性住)요, 둘째는 입(入)이요, 셋째는 부정심(不淨心)이요, 넷째는 정심(淨心)이요, 다섯째는 성숙하지 않음[不熟]이요, 여섯째는 성숙함[熟]이요, 일곱째는 부정(不定)이요, 여덟째는 정(定)이요, 아홉째는 일생득(一生得)이요, 열째는 현신득(現身得)이다.
성(性)을 정(定)하여 마음을 청정하게 해서 모든 법을 배우는 것을 주(住)라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하는 것을 입(入)이라 하며, 입(入)이 청정한 지위를 얻지 못한 것을 부정이라 하고, 청정한 지위를 얻으면 정이라 하며, 정(淨)이 아직 필경(畢竟)의 지위에 들지 못했을 때를 미숙이라 하고, 필경의 경지에 들면 성숙[熟]이라 하며, 성숙이 아직 정(定)의 경지에 들지 못한 것을 부정이라 하고, 이미 정의 경지에 들면 정이라 한다.성숙함[熟]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일생(一生)을 통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고, 둘째는 현재의 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로 보살마하살이 능히 보살계를 받아서 보살계를 행한다. 이 열 가지의 보살계가 모든 보살을 섭취한다.
만일 지극한 마음으로 보살계를 받아 지키어 수행할 경우, 이러한 이를 보살이라 하며,마하살이라 하며, 지자(智者)라 하며, 용건(勇健)이라 하며, 상선(上仙)이라 하며, 불자(佛子)라 하며, 불지(佛持)라 하며, 대승(大勝)이라 하며, 불계(佛戒)라 하며, 무외(無畏)라 하며, 대성(大聖)이라 하며, 상주(商主)라 하며, 선사(船師)라 하며, 대명칭(大名稱)이라 하며, 연민(憐愍)이라 하며, 대공덕(大功德)이라 하며, 자재(自在)라 하며, 법지(法持)라 하며, 불가사의라 하며, 능히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를 손바닥 위의 아마륵과(阿摩勒果)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안다고 한다.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보살이다”라고 하였지만 보살계를 받지 않아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보살계를 행하지 못하더라도 믿는 마음만 있으면 마땅히 이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싶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보살이다”라고 하였지만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보살계를 받아 지키지 못하고 마음으로 믿지도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명자보살(名字菩薩:진정으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지 못한 이름뿐인 보살)이라 한다. 이런 사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보살이다”라고 하면서 보살계를 받아 지키어 지극한 마음으로 보살계를 수행하고 믿는다면, 이런 사람은 열 가지 보살 속에 들었다고 하며 오래지 않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정득(定得)하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보살이다”라고 하면서 보살계를 받았으나, 능히 그 금계를 지극한 마음으로 옹호하여 지키지 못하고 그 받은 것을 허물어 깨뜨리며, 마음에 믿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경우, 이를 보살의 전다라(旃陀羅:최하층의 천인계급)라 하고 보살(菩薩)이란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의보살(義菩薩)이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2. 여법주(如法住)
1) 보살상품(菩薩相品)진실(眞實)보살은 다섯 가지의 모양[相]이 있다. 보살이 다섯 가지의 모양을 구족하기 때문에 진실보살이라 한다. 그 첫째는 연민하는 마음이고, 둘째는 부드러운 말이며, 셋째는 용감하고 굳건함[勇健]이며, 넷째는 탐내지 않음[不貪]이며, 다섯째는 깊은 이치를 해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법에 다섯 가지의 지혜가 있으니 첫째는 성(性)이고, 둘째는 인연이며, 셋째는 공덕과(功德果)이고, 넷째는 차제(次第)이며, 다섯째는 섭취이다.연민성(憐愍性)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극한 마음[至心]이고, 둘째는 법대로 하는 것[如法]이다.
지극한 마음이란 중생에게 안온(安隱)함을 베푸는 것이니, 이것을 성(性)이라 한다.
법대로 한다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이미 즐거웠던 것과 같이 중생에게 베푸는 것이다. 이것을 법대로 한다고 한다.유연성(柔軟性)이란 먼저 하는 말[先意語]이고, 기쁘게 하는 말[觀喜語]이며, 악을 멀리하는 말[遠惡語]이고, 이익되게 하는 말[利益語]이다. 이것을 유연성이라 한다.
용건성(勇健性)이란 마음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용맹하고 과감하여 능히 중생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것을 건성(健性)이라 한다.
불탐성(不貪性)이란 모든 보시를 모두에게 보시하고, 모든 보시를 청정하게 보시하며, 보시한 뒤에는 후회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불탐성이라 한다.
해설심의성(解說深義性)이란 네 가지 걸림없는 지혜[無礙智]이다. 이것을 해설심의성이라 한다.연민(憐愍)에 다섯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고통받는 중생이고, 둘째는 악을 행하는 중생이며, 셋째는 방종한 중생이고, 넷째는 사견(邪見)을 가진 중생이며, 다섯째는 번뇌를 즐기는 중생이다.
고통받는 중생은 항상 고뇌만 받으며, 일념(一念)의 즐거움도 없다. 이것을 고통을 받는다[受苦]고 한다.
또 어떤 중생이 비록 고통을 받지는 않더라도 신(身)ㆍ구(口)ㆍ의(意)의 열 가지 악업(惡業)을 짓기를 마치 열여섯 가지 악율의(惡律儀:惡戒)와 같이 할 경우, 이것을 악을 행하는 중생이라 한다.
또 어떤 중생이 악업을 행하지 않고 고뇌를 받지 않더라도, 다섯 가지 욕심[五欲]에 탐착(貪着)하여 즐겨 놀이에 빠지며, 자기 몸을 탐애(貪愛)하여 선업(善業)을 닦지 않을 경우, 이것을 방일(放逸)이라 한다.
또 어떤 중생이 고뇌도 받지 않고 악업도 행하지 않으며 방일하지도 않으나, 해탈을 구한다고 하면서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보고, 과보가 아닌 것을 과보로 본다면, 이것을 잘못된 견해라 한다.
외도(外道) 등과 같이 어떤 중생이 고뇌도 받지 않고, 악업도 행하지 않고, 또한 방일(放逸)하지 않고 삿된 소견을 가지지도 않으니, 번뇌가 구족하여 번뇌의 장애에 매여 있어서 선법을 닦지 못하면, 이것을 연민(憐愍)인연이라 한다. 이 인연으로 해서 연민하는 마음이 증장(增長)한다.유연(柔軟)인연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선한 좋은 말[先語]이고, 둘째는 선한 기쁨의 말[喜語]이며, 셋째는 선한 두려움이 없는 말[無畏語]이고, 넷째는 선한 맑은 말[淨語]이며, 다섯째는 선한 가르침의 말[敎語]이다. 이 다섯 가지 인연을 유연어(柔軟語)라 하는데, 사섭품(四攝品) 가운데에서 설한 것과 같다.
용감하고 굳건한 인연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위의 삼십칠조보리품(三十七助菩提品) 가운데에서 설한 것과 같다.
탐내지 않는 것에 다섯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불별하지 않는 보시[不分別施]이고, 둘째는 기쁘게 하는 보시[喜施]이며, 셋째는 마음을 다해 하는 보시[至心施]이고, 넷째는 청정한 보시[淨施]이며, 다섯째는 법대로 얻고자 하는 바에 따라 하는 보시[如法得財施]이다. 이것을 불탐의 다섯 가지 인연이라 하는데, 시품(施品)에서 설한 것과 같다.심오하고 깊은 이치를 설하는 데 다섯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수다라(修多羅:經)의 심오하고 깊은 이치를 설하여 공(空)의 뜻을 해설하고, 삼세(三世)ㆍ중음(中陰)ㆍ퇴(退)ㆍ불퇴(不退)ㆍ아(我)ㆍ아소(我所), 불성ㆍ보살성ㆍ여래ㆍ열반ㆍ삼승(三乘)의 뜻을 해설하고, 색(色)ㆍ조색(造色)ㆍ십이인연을 해설하는 것이다. 이것을 수다라의 이치라 한다.
둘째는 능히 비니(毘尼:律)의 이치를 설하여, 이것은 범하는 것이고 이것은 범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뉘우칠 만한 것이고 이것은 뉘우칠 만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가볍고 이것은 무거우며, 이것은 성중(性重)이고 이것은 차중(遮重)이라고 해설하는 것이다. 이것을 비니의 심심한 이치를 설한다고 한다.
셋째는 논장[摩夷]의 뜻을 설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때 중생을 위해 범하는 것의 이름들을 설하며, 남들을 위해 가벼운 것을 설하여 무겁게 하고 무거운 것을 설하여 가볍게 한다. 한 사람을 위해 참회하게 하며 대중에 이르기까지 참회하게 한다. 이것을 논장의 깊고 심오한 이치를 설한다고 한다.
넷째는 능히 스스로 바른 뜻[正義]을 해설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능히 모든 법의 명(名)과 자(字)를 아는 것이다.연민공덕과(憐愍功德果)란 보살이 자심(慈心)으로 모든 중생을 위하는 것이다. 악심(惡心)을 깨뜨리기 위해 자심을 닦아 쌓아서 능히 중생을 이익되게 하여 마음에 회한이 없다. 항상 닦아 쌓기 때문에 현세의 즐거움을 얻는다. 그래서 여래께서 자공과(慈功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독(毒)도 능히 해치지 못하고 칼도 능히 상처내지 못한다. 잠을 자도 악몽을 꾸지 않고 모든 하늘이 옹호한다. 이승의 몸을 버리고 초선천(初禪天)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연민하는 공덕의 과보라 한다.유연어공덕과(柔軟語功德果)란 보살마하살이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닦아서 능히 현재의 입의 네 가지 악과(惡過)를 깨뜨리는 것이다. 이 부드러운 말씨는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사랑하고 기꺼워하여 즐겨 듣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부드러운 말씨가 갖는 공덕의 과라 한다.용건공덕과(勇健功德果)란 보살이 현재에 능히 게으름을 깨뜨려 기쁨의 낙을 받아서 적정을 즐기는 것이다. 계율로 금지된 것을 옹호하여 지키되 마음에 회한이 없으며, 스스로 인욕(忍辱)을 닦고 남에게도 인욕을 행하도록 가르친다. 모든 고행을 닦아 보리를 장엄하되 마음에 퇴전(退轉)함이 없다. 이것을 용맹하고 강건한 공덕의 과보라 한다.탐내지 않는 것[不貪]과 깊은 이치를 해설하는 것[解說深義]의 두 공덕의 과보는 위에서 설한 바와 같다.차제(次第)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맨 먼저 자심(慈心)을 닦는데 중생을 조복하기 위해서이다. 다음으로는 부드러운 말로 말하는데 악업(惡業)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모든 중생들이 악업을 받는 것을 보아도 마음에 두려워하지 않고 구호(救護)의 마음이 생기는 것을 용건(勇健)이라 한다. 중생을 조복하기 위해 혜시(惠施)를 행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탐내지 않음[不貪]과 깊고 심오한 뜻[深義]을 설한다.
보살마하살은 이 다섯 가지 모양[相]을 따라 여섯 가지 바라밀을 섭취(攝取)한다.
연민상(憐愍相)은 선(禪)바라밀을 섭취하고, 유연어(柔軟語)는 시(尸)바라밀과 반야(般若)바라밀을 섭취하고, 용건상(勇健相)은 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찬제(提)바라밀ㆍ반야바라밀을 섭취하고, 불탐(不貪)은 단(檀)바라밀을 섭취하고, 깊고 심오한 뜻을 설하는 것은 반야바라밀과 단바라밀을 섭취한다.
2) 선품(禪品)보살마하살이 가정에 있든 출가를 하든 모두 네 가지의 법이 있어서 능히 닦고 배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행(行)을 얻으며, 선업방편(善業方便)으로 중생을 연민한다.
선업방편이란 바라밀을 베풀기 위해 선행(善行)ㆍ전심행(專心行)ㆍ상행(常行)ㆍ정행(淨行)을 닦는 것이다.
선행이란 보살이 만일 재물이 있어 걸구하는 자에게 베풀 때, 은혜의 있고 없음을 보지 않고 복전(福田)이든 복전이 아니든 상관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사람ㆍ하늘ㆍ사문(沙門)ㆍ바라문이 있다 해도 능히 보살의 시심(施心)을 막아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선행이라 한다.
전심행이란 보살이 혜시를 할 때에 찾아와 걸구하는 자가 있으면 안팎의 재물을 털어서 모두 베풀어 주면서도 마음에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전심시(專心施)라 한다.
상행이란 보살이 혜시를 할 때에 찾아와 걸구하는 자가 있으면 그것이 때이든 때가 아니든 따지지 않고 얻는 대로 베푸는 것이다. 이것을 상행이라 한다.
정행이란 보살이 혜시를 할 때에 찾아와 걸구하는 자가 있으면 명예 때문에 혜시하는 것도 아니고 천락(天樂)을 위해 혜시하는 것도 아니며 시품(施品) 가운데에서 설한 것과 같이 베푸는 것이다. 이것을 정행이라 한다.이러한 혜시의 네 가지는 시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바라밀ㆍ반야바라밀의 경우에도 역시 이와 같다.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의 선방편이라 하는가? 만일 마음이 동요하여 불법을 깨뜨리고 싶으면 이를 조복(調伏)하기 위해 선방편을 행하며, 중인(中人)을 불법에 들게 하고자 하여 선방편을 행하며, 비록 들어감이 아직 성숙하지 못하더라도 이를 성숙하게 하기 위해 선방편을 행하며, 들어가서 이미 성숙하면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해 선방편을 행하며, 보살이 세간의 의술의 방술과 기술의 이론들을 말하기 위해 선방편을 행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보살계를 받아서 굳게 지켜 허물지 않고자 하여 선방편을 행하며, 선원(善願)방편을 행하며, 성문승(聲聞乘)방편을 행하며, 벽지불승(辟支佛乘)방편을 행하며, 대승(大乘)방편을 행한다.이들 열 가지 방편이 능히 다섯 가지 일을 짓는다. 처음의 네 방편은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며, 세간의 방술(方術)의 방편은 잘못된 논의[邪論]들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보살은 보살의 금계를 받아 지니어 끝내 계를 범하지 않으며, 설사 계를 범하더라도 즉시 참회한다. 선발원(善發願)방편은 하고싶은 일을 따라서 즉시 능히 얻는다. 보살의 세 승(乘)의 방편은 그 근기를 따라 법을 설한다.
이렇기 때문에 보살은 이와 같은 열 가지의 방편으로 능히 다섯 가지의 일을 지으며, 이 다섯 가지 일로 해서 필정(必定:不退轉)을 구족하고 능히 세간의 모든 일을 얻는다. 현재이든 타세(他世)이든 마찬가지이다.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남을 이익되게 한다고 하는가? 사섭품(四攝品)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의 선발원(善發願)이라 하는가? 보살이 짓는 모든 선업(善業)으로서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어서 다른 과보[餘果]를 구하지 않고 오직 무상(無上)의 보리도과(菩提道果)만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선발원이라 한다.
여래가 만일 출가자와 재가자를 위하여 금계를 설할 경우, 이와 같은 네 가지 일을 모두 섭취한다.
만일 출가 또는 재가의 보살이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보살의 금계를 받아서 지킬 경우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그러나 출가한 보살이 재가의 보살보다 낫다. 어째서인가? 출가한 보살은 모든 보살의 금계를 획득하지만 재가의 보살은 보살의 모든 금계를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출가한 보살은 능히 적정(寂靜)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수행하지만 재가의 보살은 능히 적정한 범행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출가한 보살은 능히 삼십칠품(三十七品)을 수행하지만 재가의 보살은 능히 삼십칠품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출가한 보살은 모든 세간의 일을 해탈하지만 재가의 보살은 세간의 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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