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8권
보살선계경 제8권
구나발마 한역
최윤옥 번역
3) 정심품(定心品)보살마하살이 중생을 연민하는 데에 일곱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이 일곱 가지인가? 첫째는 두려움이 없는 것[無畏]이고, 둘째는 진실(眞實)이고, 셋째는 근심하지 않는 것[不愁]이고, 넷째는 구하지 않는 것[不求]이고, 다섯째는 애욕의 마음을 갖지 않는 것[不愛]이고, 여섯째는 광대(廣大)이고, 일곱째는 평등(平等)이다.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연민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세 가지 업의 선(善)을 닦아서 중생의 모든 악업(惡業)을 깨뜨린다. 그래서 이것을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연민하되 번뇌의 사랑이 아니므로, 법주(法住)가 아니고, 비니주(毘尼住)가 아니며, 망어(妄語)가 아니고, 비처(非處)를 교화하지 않는다. 이것을 진실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은 연민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위하여 열심히 고행(苦行)을 닦지만 마음에 근심이나 후회가 없다. 이것을 근심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모든 중생들이 보살에게 구하지 않는 데도 모든 보살은 스스로 자심(慈心)을 닦는다. 이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연민을 닦을 때에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탐심(貪心)을 가지지 않는다. 탐심이 없다는 것은 은혜의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자심의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애욕의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라 한다.
보살이 자심을 닦음에 있어 설사 중생이 때리고 욕하고 괴롭히고 해치더라도 끝내 자비를 닦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광대라 한다.
보살이 자심을 닦는 것은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널리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을 위하고 한량이 없는 법계를 위하는 것이다. 이것을 평등이라 한다.
이것이 일곱 가지의 방법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방법을 구족하는 것을 보살의 지극한 마음의 청정이라 한다.심청정(心淸淨)에 열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상정(無上淨)이고, 둘째는 여법정(如法淨)이며, 셋째는 바라밀정이고, 넷째는 진실의정(眞實義淨)이며, 다섯째는 불가사의정이고, 여섯째는 안온정(安隱淨)이며, 일곱째는 낙정(樂淨)이고, 여덟째는 불방정(不放淨)이며, 아홉째는 견고정(堅固淨)이고, 열째는 불방정(不放淨)이고, 열한째는 부정정(不淨淨)이고, 열두째는 정정(淨淨)이고, 열셋째는 선정(善淨)이고, 열넷째는 조복정(調伏淨)이고, 열다섯째는 성정(性淨)이다.보살마하살은 지극한 마음으로 오로지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를 염한다. 이것을 무상정이라 한다.
보살이 보살의 금계를 받으면 지극한 마음으로 이를 옹호하여 훼범(毁犯)하지 않도록 한다. 이것을 여법정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은 지극한 마음으로 다섯 가지 바라밀을 구족한다. 이것을 바라밀정이라 한다.
보살은 지극한 마음으로 법계가 나[我]가 없으며 나의 것[我所]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유포(流布)하기 때문에 사부(士夫)라 한다는 것을 알며, 십이부경(十二部經)의 깊고 심오한 뜻을 분명하게 통달하여 안다. 깊고 심오한 뜻이란 곧 제일의(第一義:불교의 근본 원리)이다. 이 첫째의 이치를 진실의정이라 한다.
모든 불ㆍ보살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불가사의하다. 이것을 불가사의정이라 한다.보살이 지극한 마음으로 자비심을 닦는 것은 널리 모든 중생에게 안락을 베풀려는 것이다. 이것을 안온정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은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자비심을 닦아서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한다. 이것을 낙정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을 위하여 자비심을 닦되, 무식심(無食心)ㆍ무과심(無果心)ㆍ무은보심(無恩報心)을 구하지 않으며, 또한 중생이 모든 악행을 행하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이것을 불방정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므로 그 마음이 견고하여 이를 파괴할 수 없다. 이것을 견고정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은 한량이 없는 세간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보리의 선행(善行)을 닦는 바, 이와 같은 보리 및 보리의 도는 공허함과 거짓이 없다. 이것을 불광정이라 한다.보살마하살이 아직 해지(解地)를 얻지 못하였으면 이것을 부정정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정지(淨地)에서 필경지(畢竟地)에까지 주(住)하면 이것을 정정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필경지에 주하여 단(檀)바라밀을 닦으면 이를 선정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정지를 얻음으로 해서 그 마음을 조복하면 이를 조복정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정지 및 필경지에 주하는 것을 성정이라 한다. 성정은 이를 닦아 쌓은 뒤에 청정해진 것이 아니고 본래의 자성(自性)이 그러하여 몸과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성정이라 하는 것이다.보살이 이와 같이 열다섯 가지의 법을 구족하면 능히 다음과 같이 열 가지의 일을 짓는다.
보살이 무상정을 인하여 능히 삼보(三寶)에 공양한다. 삼보에의 공양은 곧 모든 보리의 도의 근본을 장엄하는 것이다.
보살이 수지정(受持淨)을 인하기 때문에 능히 보살의 금계(禁戒)를 받아 지녀 몸과 목숨을 버림에 이르기까지 끝내 이를 훼범(毁犯)하지 않으며, 만일 기억을 잊어버려서 범할 경우, 즉시 참회한다.
보살이 바라밀정을 인하여 언제나 능히 모든 선법을 닦아서 방일(放逸)하지 않음을 성취한다.
보살이 진실의정을 인하므로 비록 번뇌가 있을지라도 중생을 위하여 생사를 유전(流轉)하면서 끝내 열반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
보살이 불가사의정을 인하여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불법에 대하여 크게 믿는 마음을 얻어서 도과(道果)를 닦게 한다.보살이 안온정ㆍ낙정ㆍ불방정을 인하여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구족하게 성취하되, 마음에 근심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보살이 견고정을 인하여 열심히 닦아 정진하여 게으름을 깨뜨리고 방일하지 않음을 성취한다.
보살이 불광정을 인하여 곧장 아뇩다라삼먁보리를 얻어서 선법을 증장(增長)하며 무염(無厭)을 수행한다.
보살이 조복정과 성정을 인하여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써 중생을 교화하고, 능히 안온(安隱)으로써 인(人)ㆍ천(天)의 모든 중생에게 베푼다.
보살의 성정은 세 가지 정(淨)을 포섭한다. 이른바 부정정ㆍ정정ㆍ선정이다.
과거와 미래에 현재의 모든 부처와 모든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니 과거에 이미 얻은 것과 미래에 얻은 것과 금생에 얻은 것이니, 어느 것이든 이 열다섯 가지의 정(淨)을 통하지 않고는 얻는 것이 없다.
만일 누가 말하기를 “보살이 이 열다섯 가지의 정법(淨法)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한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4) 생보리지품(生菩提地品)보살마하살이 성(性)이 구족하고, 계(戒)가 구족하고, 보살계의 학습이 구족하고, 보살상(相)이 구족하고, 보살의 장엄을 성취함이 구족하면 열다섯 가지의 청정심(淸淨心)으로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이 청정하다.
보살은 열두 가지의 행(行)이 있어 모든 보살의 소행(所行)과 열세 가지의 여래의 행을 섭취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무승행(無勝行)이라 한다.
어떤 것들을 보살의 열두 가지 행이라 하는가? 첫째는 성행(性行)이고, 둘째는 해행(解行)이며, 셋째는 희행(喜行)이고, 넷째는 계행(戒行)이며, 다섯째는 혜행(慧行)이다.
혜행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공조보리행(共助菩提行)이고, 둘째는 공제행(共諦行)이며, 셋째는 공십이인연행(共十二因緣行)이다.
보살마하살은 실제와 같은 소견으로 실제와 같은 법을 본다. 만일 실제대로 보지 않으면 생사를 유전하며, 만일 실제대로 보면 모든 고통을 끊는다. 이 때문에 보살의 지혜에 세 가지가 있으니, 이것을 혜행(慧行)이라 한다.여섯째는 행행(行行)이고, 일곱째는 무상행(無相行)이며, 여덟째는 불루행(不漏行)이고, 아홉째는 무행행(無行行)이며, 열째는 무애행(無礙行)이고, 열한째는 보살행이며, 열두째는 구족행(具足行)이다. 이것을 열두 가지의 행이라 한다.
보살이 만일 이 열두 가지의 행을 행하면 능히 모든 행과 여래의 행을 섭취하여 모든 여타의 행을 이긴다. 그렇기 때문에 무승행(無勝行)이라 한다.
성행이란 보살마하살이 보살의 공덕을 닦아서 선법이 구족한 것이다. 모든 선법을 닦기 때문에 언제나 선법을 즐거워하여 모든 불법의 종자를 받아서 지니며, 스스로 자신의 몸에 불법의 종자가 있음을 알아서 거친 번뇌를 깨뜨린다. 이것을 성행이라 한다.
보살이 이 성행을 구족하면 끝내 지극하고 무거운 번뇌를 일으켜 오역죄(五逆罪)는 짓거나 일천제(一闡提)가 되지 않는다. 이것을 성행이라 한다.
해행이란 보살마하살이 보리심을 발하여 수행하는 모든 행(行)이다. 이것을 해행이라 한다.성행(性行)보살이 성행을 행할 때 이것이 보살행이다. 십이행(十二行) 및 여래행(如來行)의 인(因)이 비록 모든 행의 인이나 아직 이행(異行)을 얻지 못한다. 그런데 하물며 여래행이겠는가? 역시 미처 인을 얻지 못하고, 역시 미처 과(果)를 얻지 못하며, 역시 미처 정(淨)을 얻지 못한다. 만약 하나의 행을 얻으면 이것을 해행(解行)이라 하고, 이것을 여래행을 행한다고 한다. 역시 미처 얻지 못한 여래행이며, 미처 청정하지 못한 여래행으로서 해행정해행(解行淨解行)을 얻었다고 한다. 정해행(淨解行)으로 해서 희행정희행(喜行淨喜行)을 얻으며, 희행정(喜行淨)으로 해서 계행정계행(戒行淨戒行)을 얻는다. 이와 같이 하여 십이행(十二行)에까지 이르는데, 이것을 보살행이라 한다. 보살행정보살행(菩薩行淨菩薩行)을 구족하면 이미 여래행정여래행(如來行淨如來行)을 얻은 것이다.
희행(喜行)은 보살이 지극한 마음으로 보리심을 청정히 하는 것이다. 이것을 희행이라 한다.계행(戒行)은 보살이 먼저 성중(性重)을 청정히 하여 차중(遮重)을 허물지 않는 것이다.
계정(戒淨) 때문에 세선(世禪:世間禪)을 닦는데, 이것을 혜행(慧行)이라 한다.
세간의 도[世道]를 타고 네 가지 진리[四眞諦]에 들어가 삼십칠품(三十七品)을 닦는데, 이것을 함께 돕는 보리행[共助菩提行]이라 한다.
보리를 닦아 도와서 진실로 네 가지 진리[四諦]를 본다. 이것을 공제행(公諦行)이라 한다.
열두 가지 인연을 함께 하는 행(行)이란 만일 네 가지 진리를 볼 경우, 모든 고통이 인연을 따라 생기고 인연을 따라 없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열두 가지 인연을 함께 하는 행[共十二因緣行]이라 한다.행행(行行)이란 보리를 돕기 위하여 열심히 수행하여 정진하는 것이다. 이것을 행행이라 한다.
무상행(無相行)이란 비록 중생상(衆生相)과 보리상(菩提相)을 보지 못하더라도 보리심을 닦아서 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무상행이라 한다.
불루행(不漏行)이란 보리심을 돕기 위하여 금계(禁戒)를 꿋꿋이 지키어 이를 훼범(毁犯)하는 일이 없으며, 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불루행이라 한다.
무행행(無行行)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뒤에 중생을 조복하는 수행을 하고 보리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무행행이라 한다.
보리행이란 무상행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리행이라 한다. 분별하지 않는 법계행(法界行)을 보리행이라 한다.무애행이란 법계의 분별없음을 닦고, 한량없는 중생을 위하여 바른 법을 풀어 설해서, 일생 동안이든 현재의 몸이든 간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닦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상행(無上行)이라 한다.
무상행을 수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차례로 얻은 뒤에는 모든 불사(佛事)를 짓는다. 이것을 여래행(如來行)이라 하는데 성행(性行)을 구족한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열두 가지의 행을 확실하게 얻으면 해행을 구족한다.
보살마하살이 누추상(漏麁相)을 끊으면 희행(喜行)을 구족한다.
보살마하살이 희행에서처럼 퇴전(退轉)하지 않으며 나아가 보살행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보살마하살이 성행(性行)을 행할 때에 모든 법의 모양[相貌]을 전혀 보지 않으며 나아가 보살행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보살이 성행을 행할 때에 선법(善法) 및 선법의 과(果)를 구하지 않으며 내지 보살행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보살마하살이 성행을 행할 때에 큰 지혜의 힘[大智力]을 얻으며 내지 보살행에 이르기까지 역시 이와 같다.보살마하살이 성행을 행할 때에 다섯 가지의 두려움[怖畏]을 끊는다. 첫째는 불활외(不活畏)이고, 둘째는 악명외(惡名畏)이며, 셋째는 사외(死畏)이고, 넷째는 악도외(惡道畏)이며, 다섯째는 대중외(大衆畏)이다.
때때로 아직도 몸과 입과 마음의 악업이 남아 있으며, 때때로 다섯 가지 욕심[欲]에 대한 탐심이 생기며, 자신의 소유 재물에 대하여 때때로 아까워하며, 때때로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남을 따른다.
혹시 불(佛)ㆍ법(法)ㆍ승(僧)이 진실인지 진실이 아닌지의 여부를 보지 못하기도 하며, 모든 부처와 보살의 불가사의한 인(因)을 구하지 않고 과(果)를 구하지 않으며, 많은 것도 구하지 않고 적은 것도 구하지 않으며, 얻든 얻지 못하든 간에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방편이 아닌 행(行)을 행하며, 방편인 행을 행하지 않는다. 지혜에 대해 조금 들었다가도 가끔 잊어버리고, 고통이 구족하여 지혜에 이익이 되지 못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조금 생각하지만 열심히 정진하지 않고, 깊고 심오한 신해(信解)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을 볼 경우, 마음속에서는 이를 사실과 거꾸로 보며, 몸을 다른 세상에 버리고 바른 생각[正念]을 잊어버린다.
혹시 지혜를 얻었다가도 가끔 이것을 잃어버리고, 그때그때 필요한 방편을 잘 알아서 중생을 조복하지 못한다.
법을 설할 때에 글자나 문구(文句)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들은 것을 더러 받아들이기도 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 활을 쏘는 사람과 같아서 더러 맞히기도 하고 맞히지 못하기도 한다.
보리심을 발하여 더러 퇴전(退轉)하기도 하고 퇴전하지 않기도 하며, 보살이 받은 금계를 훼범(毁犯)하기도 하고, 자신이 즐기고 싶어서 중생을 위하지 않기도 한다.
혹은 보살이 가진 과보 및 복덕의 과보[福德果]를 보기도 하는데 심오한 법을 들을 때에는 놀라 두려워하기도 하고 기뻐서 즐거워하기도 한다.어떤 때는 깊이 믿다가도 어떤 때는 의심이 생겨서 자비의 마음을 능히 닦지 못하기도 하며, 남에게 조그마한 즐거움을 베풀고는 크게 기뻐하여 만족해하기도 한다.
보살의 모습[相]이 없으며, 보살의 장엄함이 없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보아도 무상도(無上道)까지와는 거리가 멀어 능히 이르지 못하며 마음으로 대열반(大涅槃)을 염(念)하나 보리를 돕는 법과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모습들을 성행(性行)보살이라 한다.
해행(解行)보살에 세 가지의 인(忍)이 있으니 하ㆍ중ㆍ상을 말한다. 하인(下忍)을 얻을 경우에는 이와 같은 종류의 모양은 상(上)이고, 중인(中忍)을 얻을 때에는 이와 같은 종류의 모양은 중(中)이며, 상인(上忍)을 얻을 때에는 이와 같은 종류의 모양은 하(下)이다.
희행(喜行)을 얻을 경우 이와 같은 모양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선(善)을 지향한다. 이처럼 선법(善法)을 구족하기 때문에 이것을 정심(淨心)이라 한다.해행보살이 비록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인(忍)은 가지고 있지만 마음은 청정하지 못하다. 어째서인가? 세 가지의 인을 수행할 때에 하ㆍ중ㆍ상의 청정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다.
희행(喜行)에 주(住)할 때에는 모든 악을 끊어버리기 때문에 청정하다. 또 희행에 주할 때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하여 남의 말에 순응하여 따르며, 또 스스로 사유(思惟)하는데 이러한 두 가지의 연으로 해서 그 마음이 견고하게 된다. 이것을 정원(淨願)이라 한다.
세간의 법을 떠나 출세간의 과(果)를 얻어서 중생의 고통을 깨뜨리고 성문과 연각의 발원을 이긴다. 보살마하살의 일념(一念)의 발원은 능히 한량이 없고 가이없는 복덕을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발원은 흔들림이 없고 다함이 없으며, 퇴전(退轉)하지 않고 한없이 성대하게 불어나서 필경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이것을 진원(眞願)이라 한다.
진원보살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누가 도심(道心)을 발하는가 이고, 둘째는 무엇을 인하여 발심하는가 이며, 셋째는 발심하는 것이 어떠한 성(性)인가이고, 넷째는 발심에 어떤 공덕이 있는가이다. 발심을 할 때에는 이러한 네 가지의 관찰이 있다.
누가 도심을 발하는가[誰發道心]는 해행(解行)을 성취하여 선공덕(善功德)ㆍ선행(善行)ㆍ보리도(菩提道)를 구족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생은 보리심을 발하게 된다.무엇을 인하여 발심하는가[因何發心]는 보리의 도를 구족하게 장엄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한량없는 행을 닦아서 모든 불법과 모든 불행(佛行)을 구족하게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연이라 한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보리심을 발한다.
모든 발심(發心)은 보리를 장엄하며, 모든 수행은 보리의 일이다.
모든 지혜와 모든 불사(佛事)를 따라서 멀리 범부(凡夫)나 보살의 명자(名字)를 떠나되, 범부의 지위를 떠나 결정(決定)의 지위에 들어가서 부처의 종성(種性)을 일으켜 불자(佛子)의 이름을 얻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정득(定得)하여 대희심(大喜心)을 얻어, 멀리 탐욕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으로부터 떠난다.
남들을 위하여 보리의 도를 풀어 설하고, 모든 불법ㆍ불사(佛事)ㆍ불행(佛行)을 구족하게 장엄하여 희심(喜心)을 획득해서 적정(寂靜)의 즐거움을 받는다.
멀리 번뇌로부터 떠나서 몸의 안락을 얻고 청정한 선법(善法)을 성취하여 구족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이 접근하여 지심(至心)ㆍ정심(淨心)으로 보살을 취향(趣向)한다.모든 두려움을 여의고 크게 기쁜 마음을 얻는다. 깊이 보리심을 발하여 멀리 다섯 가지의 두려움을 여의고 무아상(無我相)을 닦아 나[我]가 없고 나의 것[我所]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다.
나가 없고 나의 것이 없다는 것을 보기 때문에 육신에 탐착(貪着)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불활(不活)의 두려움으로부터 떠나게 되는 것이다.
남의 물건을 구하지 않으며 심지어 한 푼의 돈도 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항상 이렇게 발원한다.
“어떻게 하면 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큰 이익을 얻게 할 수 있을까?”
이러하기 때문에 악명(惡名)의 두려움으로부터 떠나게 되는 것이다.
아견(我見)을 멀리 여의고 아견을 여의기 때문에 나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의 두려움을 여의게 되는 것이다.지극한 마음으로, 내가 몸을 버리면 항상 모든 부처 및 보살과 함께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다. 그래서 악도(惡道)의 두려움을 여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지극한 마음으로 출세간의 법을 구한다. 그 때문에 대중의 두려움을 여의게 되는 것이다.
보살이 이들 두려움을 멀리 여의게 되면, 역시 깊고 심오한 뜻을 듣는 두려움[聞甚深義畏]으로부터도 떠나게 되고, 모든 교만과 번뇌(煩惱)의 악심(惡心)을 여의며, 세간의 즐거운 마음[喜心]도 여의어서 청정심(淸淨心)을 얻고, 허물어지지 않는 마음[不壞心]을 얻으며, 광대심(廣大心)을 얻고, 불공심(不共心)을 얻는다.
이와 같은 마음들을 얻기 때문에 열심히 수행하여 정진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염(念)하기 때문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믿기 때문에 열심히 정진하여 보리를 돕는 법을 닦는다. 이것을 희행(喜行)이라 한다.
희행(喜行)에 주(住)하기 때문에 마음에 청정함을 얻으며,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지극한 마음으로 언제나 여래에의 공양을 염한다. 항상 법의 옹호를 염하며, 법을 증장(增長)하기를 염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전념하여 중생을 조복하고, 부처님의 세계에 주하여 모든 부처를 친근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들어 불국토(佛國土)를 청정히 하고, 항상 불ㆍ보살과 함께 하여 식행(識行)을 잘 아는 데 친근하기를 염하며,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불사(佛事)를 짓는다.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언제나 이런 발원을 한다. 이것을 대원(大願)이라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한량없는 백천의 발원을 선원(善願)이라 한다.
이처럼 발원한 뒤에는 현재세에서 열심히 닦아 정진하는 바, 희행(喜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열 가지 법을 닦는바 모든 불법을 믿기 때문이다.
열두 가지 인연으로 인해서 중생들이 고통을 받는다. 이처럼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해 해탈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비심(悲心)을 닦고, 중생에게 안락한 일을 베풀기 위해 자심(慈心)을 닦으며, 중생들의 고뇌하는 일을 깨뜨리기 위해 신명도 아끼지 않고, 신명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안팎의 재물을 버린다.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고통을 받으면서도 뉘우치지 않으며, 마음에 뉘우치지 않기 때문에 능히 모든 세간의 전적(典籍)과 방술(方術)을 알고, 세간의 전적을 알기 때문에 능히 중생들이 하ㆍ중ㆍ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 하ㆍ중ㆍ상을 따라서 부끄러워함[慙愧]이 구족해진다.이와 같은 일들을 닦으면 그 마음이 퇴전(退轉)하지 않고 용맹하고 강건한 힘을 얻어서 남들의 재물을 받게 되어, 능히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에 공양한다. 이것을 열 가지의 법[十法]이라 한다.
열 가지의 법이란, 첫째는 믿음[信]이고, 둘째는 비(悲)이며, 셋째는 자(慈)이고, 넷째는 보시[施]이며, 다섯째는 근심하지 않는 것[不愁]이고, 여섯째는 세간의 전적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일곱째는 세간에 순응하여 따르는 것이고, 여덟째는 부끄러워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하늘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 것[愧]이며, 열째는 건(健)이다.
보살마하살이 이 열 가지의 법을 닦는 것은 계율을 지키기 위함이다.
아홉 가지의 법을 행하여 도의 과보[道果]를 관찰한다.
공덕의 과환(過患)을 알면 능히 도를 닦아서 지극한 마음으로 이를 받아 지키어 모든 행(行)을 경과한다. 그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능히 중생을 생사의 바다에서 건네주고, 능히 중생들에게 모든 선행(善行)을 행하도록 가르친다.보살은 이때 희행(喜行)에 주(住)하여 마치 보살장에서 설한 것을 듣고 보는 것처럼 한량없는 부처님을 본다.
그리고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한량없는 이름과 한량없는 부처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안 뒤에는 지극한 마음으로 능견(能見)을 보기를 구한다. 이것을 선원(善願)이라 한다.
또 다시 발원하기를 “원컨대 제가 항상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서 원하는 대로 왕생(往生)하게 하소서”라고 한다. 이것을 선원이라 한다.
모든 부처님 세계에의 왕생을 얻고자 하여 자신의 능력에 따라 불보ㆍ법보ㆍ승보에 공양하고, 법을 듣고 이를 받아 지키어 법대로 머무른다. 수행하는 선법은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廻向)하며, 사섭법(四攝法)을 써서 중생을 섭취한다. 이 때문에 선법이 증장(增長)해서 불꽃처럼 성하게 일어난다.
삼보(三寶)에 공양하여 중생을 섭취하면 무량겁(無量劫)을 통해 몸과 마음이 청정해져 마치 황금을 계속 단련하면 그 색깔이 더욱 밝아지는 것과 같다. 보살의 마음도 역시 이와 같다. 그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선법이 청정하다.보살마하살이 사람의 몸을 받을 때에 전륜왕이 되어 사천하(四天下)에 군림하면서 마음대로 자재하여 인색함과 탐욕을 멀리 여의며, 또한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인색함과 탐욕을 깨뜨리고, 사섭법(四攝法)으로써 중생을 섭취한다. 지은 선법이 많든 적든 간에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廻向)하며, 중생들이 모두 다 무상도(無上道)의 이익을 얻도록 발원한다.
이럴 때에 보살은 부지런한 정진을 통하여 가정을 버리고 도(道)를 위한다. 일념(一念) 사이에 능히 백 가지의 삼매를 구족하고, 일념 사이에 온갖 세계의 부처님을 보며, 역시 온갖 부처님이 수행하는 곳을 안다.
또한 능히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진동하며, 그 몸이 능히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경과한다. 광명은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두루 가득하고, 신통력으로 능히 변화를 일으켜 한 몸이 백 가지로 바뀐다. 갖가지 중생으로 변화의 몸을 만들어 과거와 미래의 각각 백 겁의 일들을 분명히 알고, 백법문(百法門)과 음입계(陰入界)의 문에 든다. 모든 것들을 각각으로 알아서 능히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며, 권속을 위해 모두 신통(神通)을 얻게 한다.보살마하살이 희행(喜行)에 주할 때에 능히 이러한 신통 등의 일을 짓는 것은 원력(願力)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보살의 발원(發願)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희행(喜行)보살에 여섯 가지의 발심(發心)이 있으니, 첫째는 선원(善願)을 발하여 열심히 정진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청정을 행하기 위함이며, 셋째는 이행(異行)을 얻기 위함이고, 넷째는 선근(善根)을 청정히 하기 위함이며, 다섯째는 선유(善有)하기 위함이고, 여섯째는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희행은 십주(十住) 가운데 환희지(歡喜地)의 설과 같다.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지(地)라 이름하고, 스스로를 이롭게 하기 때문에 행(行)이라 이름한다.
계행(戒行)보살에는 어떤 모양[相]이 있는가? 희행보살이 가지고 있는 공덕은 계행보살이 모두 구족한다.열 가지 정심(淨心)이 있으니, 첫째는 마음이 청정하여 공경을 다해 모든 스승ㆍ화상ㆍ기구(耆舊)ㆍ숙덕(宿德)을 받들어 섬기되 속이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이 청정하여 동법(同法)의 보살을 보고 먼저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이 청정하여 모든 번뇌의 마업(魔業)을 이기는 것이고, 넷째는 마음이 청정하여 모든 행(行)에 온갖 허물이 많음을 보는 것이며, 다섯째는 마음이 청정하여 열반의 공덕을 보는 것이고, 여섯째는 마음이 청정하여 보리를 돕는 모든 법을 수행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마음이 청정하여 보리를 돕는 적정(寂靜)을 닦는 것이고, 여덟째는 마음이 청정하여 세간법의 오염을 받지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마음이 청정하여 성문승을 떠나서 즐거이 대승을 생각하는 것이고, 열째는 마음이 청정하여 언제나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열 가지 정심이라 한다.
이와 같은 열 가지의 정심을 갖춘 것을 계지행(戒地行)이라 한다.
계지행을 행할 때에는 성계(性戒)를 구족하며 그릇된 업[邪業]의 계를 함께 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기뻐하지 않는다. 가벼운 계(戒)도 훼범하지 않는데 하물며 중계(中戒)와 상계(上戒)이겠는가?열 가지의 선법을 갖추면 선(善)과 불선(不善)을 알고, 선업과 악업을 알고, 선유(善有)와 악유(惡有)를 알고, 시승(是乘)과 비승(非乘)을 아나니, 인(因)이든 과(果)이든 모두를 분명하게 안다.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스스로 이 열 가지의 선(善)을 행하고, 다시 중생들에게 이 열 가지의 선을 행하도록 가르친다.
만일 악업의 인연으로 해서 모든 중생들이 고행(苦行)을 받으면 연민하는 마음이 생겨 대비(大悲)를 닦아 쌓아 가는데 중생들이 받는 고통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계행(戒行)보살은 몸이 적정하고 마음도 적정하다. 몸과 마음이 적정하면 흡사 진금(眞金)에 가사바약(迦私婆藥)이 묻은 것과 같아서 불에 넣으면 곧 깨끗해진다. 보살의 선한 마음이 닦는 선법도 역시 이와 같다.
보살마하살이 계행에 주할 때에 만일 세간에 태어나 전륜왕이 되어 사천하(四天下)에 군림한다면 능히 중생의 금계(禁戒)를 훼범(毁犯)하는 악업을 바꾸어서 중생을 선법의 금계 중에 편안히 안주하게 한다. 나머지는 처음에 설한 것과 같으며, 또한 십주(十住)의 이구지(離垢地)의 설과 같아서 모든 훼계(毁戒)의 오염을 멀리 여읜다. 그래서 이구지라 하는 것이다. 보살계를 가르치기 때문에 계행(戒行)이라 하는데, 정지(淨地)와 기행은 그 뜻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혜행(慧行)보살에게는 어떤 모양[相]이 있는가? 혜행보살은 열 가지의 정심(淨心)을 얻어서 다음과 같이 관(觀)한다.
“내가 지닌 열 가지의 정심은 퇴전(退轉)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유루(有漏)의 법에 대해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고 기꺼워하지 않으며, 나는 유루의 법에 대해 기꺼이 이를 대치(對治)하는 법문(法門)을 닦아 쌓아가되, 이러한 대치하는 일을 퇴전하지 않는다. 모든 유루 번뇌의 마업(魔業)이 이기지 못하도록 하고, 닦아 쌓아가기 때문에 사심(捨心)을 일으키지 않는다. 나는 불ㆍ보살의 행을 매우 좋아하고 기꺼워하며, 불보리를 위하여 모든 고행을 닦되 싫어하거나 뉘우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지극한 마음으로 오로지 대승(大乘)을 염(念)하며, 항상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자 한다. 혜행보살은 모든 행(行)에 한량이 없는 고행이 있음을 보는 것이다.”이러한 관(觀)을 가지게 되면 모든 행이 물들지 않아서 부처님의 공덕과 지혜 및 한량이 없는 복덕의 행을 보게 되며,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서 지닌 공덕을 염하여 크게 믿는 마음을 얻는다. 중생들을 위하여 그들의 고뇌의 문제들을 깨뜨리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심(悲心)을 닦고 방편을 잘 생각한다.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해탈을 위하기 때문에 대치에 대하여 보며, 대치를 얻기 위해서 관선삼매(觀善三昧)를 하고, 보살 법장의 경전을 즐겨 듣는다.
이미 듣고 나면 열심히 닦아 정진한다. 법을 듣기 때문에 신명을 아끼지 않으며, 안팎의 재물을 부모ㆍ화상ㆍ스승ㆍ장로ㆍ학덕이 있는 연장자[耆舊]ㆍ덕있는 자[有德]에게 공양하고, 모든 중생들을 위해 온갖 고통을 무수히 받는다.
만일 보살 법장(法藏)의 한 자, 한 구절, 하나의 게송(偈頌), 하나의 이치라도 얻어 들으면, 즐겁고 기뻐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들어찬 진귀한 보배를 얻는 것보다도 나으며, 제석신(帝釋身)ㆍ천마신(天魔身)ㆍ범천신(梵天身)ㆍ전륜왕신을 얻은 것보다도 낫다.
“만일 내가 가지고 있는 한 글자, 한 구절, 하나의 게송, 하나의 이치가 바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능히 고통을 받아 큰 불구덩이에 던져지게 되더라도 응당 너에게 주겠다.”보살은 듣고 기뻐서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곧장 이렇게 말한다.
“설사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들어찬 사나운 불길이라도 무량겁을 두고 오히려 그 속에서 견뎌야 할 것인데 하물며 작은 불이겠는가?”
보살은 이때 열심히 정진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에 진실한 이치를 얻는다면 능히 이익이 되겠지만, 위가 없는 불법은 자구(字句)로 해서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이치를 터득하기 위해 세간의 사선(四禪)과 사무색정(四無色定)ㆍ사무량심(四無量心) 및 오신통(五神通)을 닦는다.정(定)을 닦기 위해 욕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여 태어나서 보리를 닦아 도와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비록 욕계에 태어났으나 욕계의 맺힘이 없다.
먼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끊어 없앤다. 그것은 마치 진짜 금[眞金]은 무수히 담금질과 두드림[鍊治]을 받아도 끝내 줄어드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청정한 선근(善根)을 닦기 때문에 제석천의 뛰어난 몸[勝身]을 얻는다. 탐욕을 즐기는 자의 탐욕을 깨뜨리기 위함이며, 모든 선법을 사유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중생으로 하여금 진실로 능히 행계(行界)와 중생계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며, 고통받는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을 얻어 선방편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며, 부모ㆍ화상ㆍ소승ㆍ장로ㆍ복덕인(福德人)에게 공양하기 위해서이며, 중생으로 하여금 법대로 주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선정을 얻어 삼매와 신통을 잘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십주(十住)의 명지(明地)에서 설한 것과 같다.
십주의 명지와 같이 혜행(慧行)도 역시 그러하여 아무런 차별이 없다.조보리행(助菩提行)보살에는 어떤 모양[相]이 있는가? 혜행보살에게 열 가지의 법이 있다는 것은 먼저 말한 대로이다. 이러한 법에 주하면 마음을 깨뜨릴 수 없어서 지혜를 수집하여 능히 중생을 위해 바른 법을 풀어 설해서 이들을 조숙(調熟:악을 조복하고 선을 성숙시킴)하게 한다.
이미 조숙한 자에게는 해탈을 설하여 부처의 종성(種性)이 생기게 한다.
삼십칠품(三十七品) 및 선방편(善方便)을 닦으므로, 멀리 아견(我見)과 단견(斷見:사람이 죽으면 空無로 돌아간다는 그릇된 소견)으로부터 떠나서 모든 번뇌를 끊고 인심(忍心)ㆍ연심(軟心)ㆍ선심(善心)ㆍ정무량행심(淨無量行心)을 얻어 은혜를 알고 은혜를 염(念)하며, 한량없는 청정한 선법을 구족한다.
열심히 정진하여 상지(上地)의 모든 선업(善業)을 닦아 지어서 법계와 중생계를 분명하게 안다. 그리하여 모든 악인(惡人)과 악마 및 그 권속이 능히 변동시키거나 그 마음을 가로막아 허물지 못한다.
나머지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흡사 기술자[工匠]가 황금 영락을 만들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환희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것과 같다.보살의 선법도 역시 이와 같아서 성문이나 벽지불 등으로부터 흔들려 기울어지지 않으며 야마천(夜摩天)에 태어나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견해[我見]를 깨뜨린다. 이것을 보살이 보리를 돕는 행[菩薩助菩提行]이라 한다.
이익이 되는 지혜를 닦고자 하며, 삼십칠품을 닦아서 모든 소견과 모든 번뇌[漏]를 깨뜨리고자 하며, 모든 업을 차단하고자 하며, 선법을 증장(增長)하고자 하며, 지위[地]를 청정하게 하고자 해서 보살이 조보리행(助菩提行)을 닦는다. 십주 중의 염지(炎地)에서 설한 바와 같다.
조보리행도 또한 이와 같아서 아무런 차별이 없다.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것을 지(地)라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행(行)이라 한다.
제행(諦行)보살은 먼저 열 가지의 청정법(淸淨法)을 얻는다. 크게 청정하기 때문에 공제행(共諦行)이라 한다.제행보살은 한량없는 세계의 한량없는 부처님을 보며, 네 가지 진리[四眞諦]에 십행(十行)이 있음을 본다.
가령 괴로움[苦]를 설한다고 하자. 무엇 때문에 설하며, 무슨 인연으로 설하며, 어떻게 설하며, 누가 설하는가? 이와 같이 하면 능히 진실로 아는 것이다. 집(集)ㆍ멸(滅)ㆍ도(道)도 역시 이와 같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볼 때 진리의 방편[諦方便]을 알아서 모든 괴로움[苦]과 모든 진리[諦]의 과환(過患)과 공덕을 본다.
모든 중생을 위해 비심(悲心)을 증장하며, 모든 중생의 과거와 미래 세계의 업을 안다. 세간의 진리[世諦]를 분명히 알아서 그릇된 법[邪法]을 받아들임을 알고, 이런 그릇된 법을 가진 자를 위해 해탈을 설한다.
장엄하는 일을 알아서 염심(念心)을 구족하고 혜심(慧心)을 구족하며, 갖가지의 방편으로 중생을 조복한다. 모든 세간의 방술(方術)을 터득해서 중생을 교화하여 갖가지의 고통을 깨뜨린다.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능히 중생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베풀고, 능히 중생들의 가난과 곤고(困苦)를 깨뜨리며, 처(處)와 비처(非處)를 알아서 삿되게 신(神)에게 제사 지내는 것들을 깨뜨린다. 거꾸로 해설하는 보살장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실한 도리를 설한다.
나머지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비유하자면 진짜 금[眞金]에 갖가지 보배가 섞여 있어서 가치가 한량없는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도 역시 이와 같아서 가지고 있는 선법이 성문이나 벽지불 등 하지(下地)의 보살보다 뛰어나다.
혜행(慧行)보살은 마치 해와 달의 빛과 같아서 능히 허물거나 가릴 수 없으며, 비람(毘嵐:폭풍의 이름)의 대풍(大風)과 같아서 능히 옮길 수 없다.
보살마하살이 가진 지혜도 역시 이와 같아서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 등이 능히 움직일 수 없으며, 세간법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는다.육신을 버리고 도술천(兜術天) 위에 왕생(往生)하여 크게 자재함을 얻어서 삿된 법[邪法]을 깨뜨리고 한량없는 억수의 복덕을 성취한다.
이와 같은 보살의 지혜를 구족하는 것은 중생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진체(眞諦)의 방편설(方便說)을 알려는 까닭이며, 생사에 큰 고통이 있음을 보기 위해서이고, 대비심(大悲心)을 증장시키고자 해서이며, 공덕과 지혜의 두 장엄을 구족하고자 해서이고, 선원(善願)을 발하기 위해서이며, 염심(念心)ㆍ시심(施心)ㆍ혜심(慧心)을 더욱 증장시키기 위해서이고, 모든 선법을 사유하고자 해서이며, 중생을 조복하여 행하게 하고자 해서이고,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방편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며, 선근(善根)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나머지는 위에서 설한 바와 같으며, 십주(十住) 중의 난승지(難勝地)의 설과 같다. 제행(諦行)도 역시 그러하여 아무런 차별이 없다.공십이인연행(共十二因緣行)보살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보살마하살이 공십이인연행에 주(住)할 때에 모든 법의 첫째가는 이치의 모양[第一義相]을 본다.
첫째가는 이치의 모양이란 곧 모든 법의 모양이 없는 것이다. 모든 법은 말할 수가 없으므로 모양이 없다[無相]고 이름하는데, 모양이 없다는 것은 생기고 없어지는 모양[生滅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생기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 생기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없음의 평등함을 본다. 시종이 없이 평등하고, 유(有)와 무(無)가 평등하며, 취함이 없고 버림이 없음이 평등하며, 허환(虛幻)처럼 평등하고, 성(性)이 없음이 평등하며, 유도 없고 무도 없이 평등하다.
보살이 이러한 여러 평등에 주하게 되면 대비(大悲)를 증장하여 지극한 마음으로 오로지 보리의 법을 염(念)해서 세간의 생겨나오고 없어지고 하는 곳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열두 가지 인연을 알고, 연(緣)을 따라 생기는 법을 알며, 열두 가지 인연을 따라 세 가지의 해탈문(解脫門)이 생겨난다는 것을 안다. 이른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해탈문이다.
세 가지의 해탈문을 닦아서 아상(我相)ㆍ아소상(我所相)ㆍ작상(作相)ㆍ수상(受相)을 영원히 끊어버린다. 이것을 제일의(第一義)라고 한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진실을 사유하는 것이다.번뇌는 인연이 화합한 것으로서 견고하지 못하고 인연은 견고하지 못한 것이기에 위태롭고 취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가 없으며 나의 것이 없다.
한량이 없는 온갖 고통을 성취하여 구족하면 나는 능히 유위(有爲)의 법을 허물어 흩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비록 허물어 흩어버린다 하더라도 영원히 없앨 수는 없나니 내가 유위를 옹호하여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게 되면 곧 걸림이 없는 지혜행(智慧行)을 얻으며, 걸림이 없는 지혜행을 앎으로 해서 모든 세간 속에서의 행함에서 걸림이 없어진다. 걸림이 없는 지혜행을 얻었으므로 이것을 제칠지(第七地)의 인(忍)을 섭취한다고 한다.
보리의 공유위행(共有爲行)을 닦아 도와서 유위의 법을 영구히 멸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영구히 멸하지는 않지만 역시 물들거나 집착[染着]하지도 않는다.보살은 이때 이 방편을 닦아서 곧 만공삼매문(萬空三昧門)을 얻나니, 만공문과 마찬가지로 무상문(無相門)과 무원문(無願門)도 역시 그러하다. 삼만삼매문(三萬三昧門)을 닦기 때문에 모든 잘못된 견해[邪見]와 외도(外道)ㆍ성문ㆍ연각, 모든 마귀의 권속들이 능히 움직이거나 변동시키거나 저지하여 무너뜨릴 수 없다. 나머지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실로 제석천이나 전륜성왕이 쓴 금관은 각종 보배로 장식되어 있어 모든 하늘이나 세간의 사람들이 즐겁게 바라보듯이 보살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다.
또한 모든 부처의 모든 보살이 기꺼이 보는 바가 된다. 그것은 마치 해와 달의 빛이 모든 광명 중에서 밝은 것과 같이 보살의 지혜도 역시 이와 같다.보살마하살은 십이인연행에 주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법의 평등함을 보게 한다. 열두 가지 인연을 알아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고, 세 가지 해탈문(解脫門)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며, 모든 잘못된 상[邪相]을 깨뜨리기 위해서이고, 생사에 유전하는 것을 방편으로 교화하기 위해서이며, 걸림이 없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고, 걸림이 없는 지혜행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며, 한량없는 삼매문(三昧門)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고, 파괴하지 않고 변동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며, 선법(善法)을 증장하기 위해서이고, 모든 유(有)를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나머지는 십주(十住)의 현전지(現前地)에 대한 설명과 같다. 십주 중의 설과 여기서 설한 바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행행(行行)보살에는 어떤 모양[相]이 있는가? 보살이 조보리행(助菩提行)을 얻을 때에 능히 한량없는 삼매를 얻음을 구족하는 바, 공세간(共世間)과 불공세간(不共世間)이 있다. 구족하기 때문에 제칠행(第七行)에 드는 것이다.
보살은 이때 세간의 법에서 크게 자재함을 얻어서 지극한 마음으로 자비를 염하고 공덕장엄과 보리장엄을 모조리 증장시키며 보살이 얻은 보리를 돕는 법을 성문이나 벽지불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는다. 법계ㆍ중생계ㆍ세계계(世界界)를 알고 부처님의 몸과 마음을 안다.
이때 이와 같은 공덕을 구족하여 부처님의 경계가 상(相)이 없고 업(業)이 없고 각지(覺知)가 없음을 알아서 한량없는 불토(佛土)를 본다. 걷든 멈추든 앉든 눕든 모든 행위에 있어서 도심(道心)을 잃지 않는다.보살은 이때 하나하나의 염(念) 중에서 모두 열 가지의 바라밀을 증장(增長)하여 보리를 돕는 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
보살은 희행(喜行)에 주(住)할 때에 인연을 발원한다. 제이행(第二行)에 주하여 모든 금계를 허무는 인연을 멀리 여의고, 제삼행(第三行)에 주하여 선원(善願)을 증장하여 법의 광명을 얻으며, 제사행에 주하여 모든 불도(佛道)의 수행을 방해하는 인연을 여의고, 제오행에 주하여 세학장(世學障)을 여의며, 제육행에 머물러 깊은 이치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이 일곱 가지 법으로 하여금 모든 불법에의 취향(趣向)을 증장시키게 하며, 보리를 돕는 법의 증장을 구족하게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차례로 응당 여덟 번째의 정행(淨行)을 얻게 된다. 궁극적인 청정이기 때문에 정행이라 하며, 일곱 가지 행(行)이 섞여 있으므로 정행이라 이름하지 않는다.이 행에 주할 때에 모든 번뇌를 끊어버린다. 그리하여 더불어 함께하지[俱] 않지만 또한 떠났다[離]고 이름하지도 않는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함께 한다는 이름을 얻지 않지만 부처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떠났다는 이름도 얻지 못한다.
세 가지 업(業)이 청정하여 모든 세간 방술(方術)의 방편을 분명하게 알아서 능히 삼천대천세계의 인간계와 천상계의 도사(導師)가 되는데, 다만 팔지(八地)만은 제외한다.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은 마음이 더불어 같은 것이 없지만 역시 팔지는 제외된다. 한량이 없는 법문(法門)을 자재(自在)하게 드나들며, 영원히 성문과 벽지불의 도를 떠난다. 이것을 청정한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이라 한다.
또한 도를 수행하되 싫증이나 만족함이 없어서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유위법(有爲法)을 설하며, 몸과 입과 마음이 모든 모양에서 떠나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깊은 법인(法忍)을 얻는다.여섯 가지 행(行)을 행할 때에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간다. 지금의 이 행 중에서 비록 염념(念念)마다 멸하지만 열반을 취하지 않는다. 이것을 불가사의라 한다. 비록 모든 중생과 함께 보리행을 행하지만 세간법의 더럽힘을 받지 않는다. 나머지는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세 가지 해탈문(解脫門)을 닦아 중생을 조복하여 성문이나 연각에 머물지 않게 하며, 중생을 조복하여 오욕(五欲)의 즐거움으로부터 떠나서 모든 잘못된 견해[邪見]를 끊게 한다.
이것을 닦을 때에 선법이 증장하여 능히 그 마음을 깨뜨리거나 움직여 굴릴 수 없다. 비유하자면 마치 진짜 금이 온갖 보배에 섞여 있어서 그 가치가 한량이 없는 것과 같다. 보살의 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한량이 없고 가이없어서 가히 헤아려 셀 수 없다.
또한 햇빛과 같아서 모든 중생들이 능히 생각하고 논의할 수 없다. 보살의 지혜의 빛도 역시 이와 같다.보살마하살이 이 행(行)을 닦는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한량없는 수의 모든 삼매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고, 모든 모양을 취하는 마음을 깨뜨리게 하기 위해서이며, 선방편을 얻어서 도를 닦게 하기 위해서이고, 부처님의 세계를 보고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며, 능히 심심한 여러 법문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이고, 보리를 돕는 법을 구족하게 얻게 하기 위해서이며, 길이 정법(淨法)과 부정법(不淨法)을 끊어버리게 하기 위해서이고, 보리의 도를 구족하게 장엄토록 하기 위해서이며, 정심(淨心)의 업 때문이다. 모든 세간의 방술(方術)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한량없는 법문과 모든 삼매를 얻는다. 성문이나 연각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십주(十住)의 원행지(遠行地)의 설과 같으며, 원행지행(遠行地行)의 뜻과 다를 것이 없다.무상행(無相行)보살에는 어떤 모양[相]이 있는가? 보살마하살이 초행(初行)에 주할 때에 열 가지의 행법(行法)을 얻어서 모두 법의 이치를 알며 세 가지의 세간[三世]이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안다. 과거가 생겨나지 않으며, 미래가 없어지지 않고, 현재가 모양이 없다[無相]. 인연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첫째가는 이치의 모양[第一義相]을 가히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법은 설할 수 없지만 그 유포(流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비록 유포할 수는 있지만 사실상 성(性)은 있지 않다. 그 성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원인[因]도 없고 과보[果]도 없다.그러나 불가설성(不可說性)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어째서인가? 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가설성(可說性)이 곧 모양[相]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이름은 잘못된 상[邪相]이며, 만일 여기 있는 어떤 물건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처음과 중간과 나중에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시간 중에 번뇌가 행하여지지 않고, 바른 법계(法界)에 들어 사유(思惟)함이 없이 마음이 평등함을 얻어 의혹의 그물[疑網]을 버린다.
이와 같은 열 가지의 지혜를 구족하게 되면 제팔행(第八行)에 들어가게 된다. 보살마하살이 이 행(行)에 주할 때에 곧 적정의 무생법인(無生法忍:不生不滅의 진리를 깨달아 거기에 定住하는 일)을 얻는다.또한 네 가지 구하는 것[求]이 있어 모든 법을 구하며, 네 가지 진지(眞知)가 있어 모든 법을 안다. 앎을 구하기 때문에 능히 모든 사악한 업[邪業] 등을 단절하고, 사악한 업을 단절하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음을 본다. 어째서인가? 지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번뇌가 없어지지 않음을 본다. 어째서인가? 생겨남의 인연[生因]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에 모든 맺힘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서 인(因)을 모으지 않기 때문이다.
네 가지의 구하는 것은 진실품(眞實品)에서 설한 것과 같으며, 네 가지 진실지(眞實智)는 해행(解行)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 행을 적정법인(寂靜法忍)이라 한다.이런 관계로 보살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무생법인을 얻기 때문에 깊고 심오한 보살행을 얻으며, 깊고 심오한 보살행에 머물 때에 무상행(無相行)을 행한다.
만일 과환(過患)이나 미세상(微細相)이 있더라도 지금은 모두 멀리 여읜 것이다. 그래서 이 행(行)을 적정이라 한다.
깊고 심오한 보살행에 머물게 되면 기꺼이 법류(法流:正法의 끊임없는 흐름)에 머물러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慰喩]을 권발(勸發)한다. 이처럼 권발하기 때문에 일어나 법문에 들게 되고, 법문을 얻기 때문에 열 가지의 심자재(心自在)를 얻음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자재함을 얻으면 오래 가까이 주하려 해도 능히 마음대로 되고, 어떤 정(定)에 들고자 하면 마음대로 들 수 있고, 어떤 행을 행하려 하면 마음대로 행할 수 있으며, 일념(一念) 중에 필요한 물건을 필요에 따라 즉시 얻게 된다.만일 세간의 방편을 자세히 알고자 하면 즉시 잘 알 수 있고, 어떤 유(有)에 태어나고 싶으면 마음대로 가서 태어날 수 있고, 신통변화를 보이고 싶으면 마음대로 나타내어 보일 수 있으며, 서원(誓願)을 세우고자 하면 마음대로 얻을 수 있고, 해관(解觀)을 짓고자 하면 마음대로 성취하며, 법계를 알려고 하면 금방 알 수 있다. 글자를 알고 싶고, 어휘를 알고 싶고, 어구(語句)를 알고 싶고, 법처(法處)와 비법처(非法處)를 알고 싶으면 즉시 알 수 있다. 이것을 자재한 여덟 가지 행의 공덕이라 한다.
한 생각 한 생각의 짧은 시간 속에서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보는 바, 나머지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진짜 금의 비유나 해와 달의 비유 또한 역시 이와 같다.보살마하살이 이 행(行)에 주할 경우, 중생들이 집착한 상(相)을 깨뜨리고, 진실을 위하여 제일가는 이치[第一義]를 보며, 진실의 지혜를 얻고, 적정의 무생인(無生忍)을 얻으며, 심심(甚深)한 행을 알고, 법류(法流:正法의 흐름)에 주하며, 불법의 문에 들고, 불가사의의 법문에 들며, 불법 가운데서 마음을 허물어뜨릴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으며, 한량이 없는 신족(神足)을 얻고, 열 가지의 자재함을 얻으며, 열 가지 자재(自在)한 공덕을 얻고, 선근이 적정하며, 모든 유(有)에 대하여 자재하게 왕생(往生)한다.
나머지 법은 십주(十住) 가운데 부동지(不動地)의 설과 같으며, 부동지행(不動地行)과 이 행은 서로 아무런 차별이 없다.
네 가지 걸림이 없는 행[四無礙行]의 보살에게는 어떤 모양[相]이 있는가? 보살마하살은 깊고 심오한 행(行)을 행함에 있어 싫어함이나 만족함이 없다. 위가 없는 지혜를 닦아서 모든 법을 구족한다.
중생에게 설하기 위하여 법계를 분명하게 안다. 법계란 이른바 번뇌의 때묻음과 깨끗함이다. 누가 번뇌의 때가 묻었고 누가 청정한지를 명료하게 안다. 이와 같은 법을 설하는 것을 대법사(大法師)라 하며, 한량이 없는 다라니(陀羅尼)를 성취한다고 한다.방편설(方便說)의 말의 의미가 다함 없음을 알며, 법을 받아서 법을 지키고, 중생을 따라 염(念)하며 그들을 위해 설한다. 때가 아닐 때는 설하지 않으며, 즐거움을 따라 설한다. 이것을 보살의 네 가지 걸림이 없는 지혜[無礙智]의 행이라 한다. 나머지의 공덕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이 이 행에 주(住)하여 모든 중생을 위해 적정(寂靜)에 들고, 모든 중생을 위해 법계를 알며, 모든 중생의 불가사의한 대법사가 되고, 선법(善法)의 증장을 위한다.
광설(廣說)은 십주(十住) 중에서 선혜지(善慧地)의 설한 바와 같다. 중생들에게 안온하고 즐거움을 베풀기 위해 보살마하살이 무애행(無礙行) 중에 머무르니 선혜지행(善慧地行)의 이치와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보살행에 머무는 보살에는 어떤 모양[相]이 있는가? 보살마하살의 정무애행(淨無礙行)은 법왕(法王)을 위해 정삼매(淨三昧)에 들고자 하기 때문에 모든 지혜를 구족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최후로 얻은 삼매법문(三昧法門)은 모든 부처님과 함께 하여 부처님과 같이 한 자리에 앉아서 모든 행을 행하여 모든 법을 안다. 해탈의 방편을 알고, 부처님의 수행 장소를 알며, 한량이 없는 해탈의 다라니문(陀羅尼門)을 알고, 크게 잘 기억하여 잊지 않음[大憶念]을 알며, 크게 신통한 선근의 적정을 알며, 청정한 모든 유를 안다.
나머지는 십주(十住)의 법운지(法雲地)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보살의 장엄한 보리의 도와 보살행의 법운지를 구족하여 여러 부처님과 함께 보리를 얻은 다음, 중생들에게 한량없는 법우(法雨)를 베풀면, 이러한 법우는 능히 모든 번뇌의 먼지를 씻어 내린다. 그리하여 법의 싹을 틔워서 선한 싹을 자라게 하여 선근(善根)을 성숙시킨다. 그래서 이 지위를 법운지라 하며, 이러한 이치로 인해 보살행이라 한다.
만약 후지(後地)의 공덕이 선지(先地)의 없음에 대해 말한다면, 하나하나의 행(行)을 닦아 한량없는 나유타(那由他)의 겁을 겪고 나서 마침내 삼아승기(三阿僧祇) 대겁의 구족함을 얻어야만 모든 행을 얻는다.처음 아승기 대겁에서는 해행(解行)을 얻고, 해행을 지난 다음에는 두 번째의 대아승기겁에서 희행(喜行)을 얻으며, 희행을 얻을 경우 또한 무상행(無相行)을 행한다. 무상행을 지난 뒤에는 세 번째 아승기 대겁에서 무행무상행(無行無相行)을 얻는다. 이것을 보살이 결정행(決定行)을 얻었다고 한다.
무행무상행을 지나면 무애지행(無礙智行)을 얻고, 무애지행을 지나면 보살행을 얻는다.
아승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겁(大劫)으로 셈하거나 이름할 수 없는 아승기이며, 둘째는 중겁(中劫)으로 셈하거나 이름할 수 없는 아승기이다. 보살이 수행하는 것은 곧 이 대겁의 아승기이다.
만일 어떤 보살이 열심히 정진하여 능히 한량이 없는 중겁을 굴리되, 대겁은 굴리지 못한다고 한다면,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행을 닦을 경우, 능히 번뇌장(煩惱障)과 지혜장을 깨뜨린다. 무상행(無相行)을 행할 경우 모든 번뇌의 상(相)을 단절하며, 그 뒤의 행을 행할 때에 영구히 습기(習氣)를 끊어버린다. 이것을 여래행(如來行)이라 한다.지혜장(智慧障)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죽[皮]이고, 둘째는 살갗[膚]이며, 셋째는 뼈[骨]이다. 희행(喜行)을 얻을 때에 이미 피장(皮障)을 끊고, 무상행(無相行)을 얻으면 능히 부장(膚障)을 끊으며, 여래행(如來行)을 얻으면 능히 골장(骨障)을 끊는다. 이와 같은 행을 구족하면 열한 가지의 청정을 얻는다.
첫 행(行)에서는 성정(性淨)을 얻고, 제2행에서는 해정(解淨)을 얻으며, 제3행에서는 심정(心淨)을 얻고, 제4행에서는 계정(戒淨)을 얻으며, 제5행에서는 원정(願淨)을 얻고, 제6, 제7, 제8행에서는 지장엄정(智莊嚴淨)을 얻으며, 제9행에서는 보리장엄정(菩提莊嚴淨)을 구족하고, 제10행에서는 진실지정(眞實智淨)을 구족하며, 제11행에서는 무애지정(無礙智淨)을 구족하고, 제12행에서는 일체지정(一切智淨)을 구족하며, 제13행에서는 습기정(習氣淨)을 얻는다.제1행 및 제2행에서는 보살장(菩薩藏)을 들으면 곧 신심(信心)을 얻고, 제3행에서는 지극한 마음으로 원(願)을 세워 나머지 행을 닦으며, 제4, 제5, 제6행에서는 법상(法相)을 분명하게 알고, 제7행에서부터 제13행까지는 적정한 모든 행이 필경행(畢竟行)을 인과(因果)로 한다.
성문에도 열두 가지 행(行)이 있다. 성문의 성(性)이 있으면 이것을 초행(初行)이라 이름하고, 만일 세간의 제일가는 법을 얻으면 제2행이라 이름하며, 고법인(苦法忍)을 얻는 것을 제3행이라 이름하고, 네 가지의 신심계(信心戒)를 얻어서 청정을 얻으면 제4행이라 이름하며, 만일 계(戒)대로 주(住)하여 법이 증장함을 얻으면 제5행이라 이름하고, 만일 사제(四諦)를 보면 제6행, 제7행, 제8행이라 이름하며, 무상삼매(無上三昧)를 닦으면 제9행이라 이름하고, 세 삼매를 구족하게 성취하면 제10행이라 이름하며, 해탈을 얻으면 제11행이라 이름하고, 아라한과를 제12행이라 이름한다.
3. 필경지(畢竟地)
1) 생품(生品)보살생(菩薩生)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모든 것, 모든 행(行), 모든 보살정(菩薩淨)이 중생으로 하여금 안온(安隱)하고 즐겁도록 하는 것이다.
그 첫째는 고통을 여의기 위한 유[爲離苦有]이고, 둘째는 마음에 따라서 행하는 유[隨心行有]이며, 셋째는 승유(勝有)이고, 넷째는 자재유(自在有)이며, 다섯째는 보살 최후의 유[菩薩後有]이다.멀리 고통을 여의기 위한 유[遠離苦有]는 보살이 만일 중생들의 기갈이나 고뇌, 흉년을 만나 곡식이 귀함을 볼 경우, 원력(願力)을 써서 한량이 없는 유순(由旬)의 큰 물고기 몸을 받아 중생에게 베풀어 준다. 중생들은 먹고 나면 기갈이 가신다. 그러나 원력인 까닭에 몸은 더욱 불어난다.
만일 악한 세상을 만나 모든 중생들에게 사백네 가지의 병이 동시에 발작을 한다면 보살은 이때 대원력(大願力)으로 대의왕(大醫王)이 되어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병고(病苦)를 멀리 여의게 한다.
만일 악세를 만나 사방에서 전란이 일어나 중생들이 두려움에 떠는데도 땅을 가진 자들은 나라를 다투어 싫증을 내거나 만족할 줄을 모른다면 보살은 이때 큰 힘과 세력이 있는 대법왕(大法王)이 되어 선방편(善方便)을 써서 양쪽을 화합시키고 부드러운 말로 그들의 나쁜 마음을 깨뜨린다. 그리하여 때리지 않고 벌하지 않으며, 가두거나 속박하지 않고, 목숨을 끊지 않고 재물을 뺏지 않도록 하며, 중생들을 같은 자식처럼 평등하게 보아 중생을 연민한다.만일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하늘을 공양하고 삿된 업[邪業]을 지으면 보살은 이러한 삿된 견해를 깨뜨리기 위하여 귀신의 몸을 받아서 보이되, 꿈에 나타나서 가르쳐 말하기를 “너는 지금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라고 한다. 이같이 보살은 중생들의 모든 고뇌를 깨뜨리기 위하여 모든 유(有)의 형태를 받아서 나타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고통을 여의게 하기 위한 유(有)라 한다.마음을 따라 행하는 유[隨心行有]는 보살마하살이 원력(願力)을 써서 축생의 갖가지 몸들을 받아 보여주어 축생의 온갖 악업(惡業)을 깨뜨리는 것이다. 악한 귀신의 몸을 짓고 악한 사람의 몸을 지으며, 또 나쁜 견해를 가진 바라문의 몸도 짓는다. 때로는 오욕(五欲)을 탐하는 몸을 지어 보이기도 한다.
먼저 그들의 마음을 따라서 갖가지 몸을 받아 보여주는데, 중생들이 악업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유(有)의 몸을 받았지만 악업을 짓지 않으며, 만약 저들이 짓는다 해도 자신은 끝내 짓지 않는다. 그러면 중생들이 보고 또한 본받아서 짓지 않게 되나니, 선방편을 써서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악업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을 따라 행하는 유라 한다.승유(勝有)는 보살이 태어날 때 모든 중생들보다 뛰어난 것이다. 성(性)이든, 색(色)이든, 명(命)이든, 과보(果報)이든 그러하다. 과보는 「자리이타품(自利利他品)」에서 설한 바와 같다. 이것을 승유라 한다.자재유(自在有)란 처음의 희행(喜行)으로부터 십이행(十二行)까지를 수행하는 것으로서 보살은 이때 받은 몸을 보여준다. 이것을 자재라 하는데 자재(自在)란 곧 원력(願力)이기도 하다. 성지(性地)로부터 십이행에 이르기까지 전륜왕의 몸과 자재천(自在天)의 몸을 받으며 아가니타천(阿迦尼陀天)의 몸까지 받는다. 아가니타의 모든 유(有)를 지나게 되면 모든 유 중에서 더 이상이 없는 몸[無上身]을 얻게 된다. 원력(願力)과 업력(業力) 때문이다. 이것을 자재유라 한다.보살 최후의 유[菩薩後有]는 보살 최후의 몸으로서 보살의 유라 한다. 장엄한 보리를 구족하게 성취하여 바라문의 종성(種姓)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찰제리(刹帝利)의 종성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모든 불사(佛事)를 짓는다. 이것을 보살 최후의 유라 한다.
과거의 보살마하살도 역시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유를 받았으며, 현재와 미래의 모든 보살들도 역시 그러하다. 이 다섯 가지 유로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보를 얻는다. 그리고 만일 보살이 이 다섯 가지 유를 받아서 보여줌을 수행한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매일 하나씩 > 적어보자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어보자] #4622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0) | 2024.08.08 |
---|---|
[적어보자] #4621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9권 (0) | 2024.08.08 |
[적어보자] #4619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7권 (0) | 2024.08.07 |
[적어보자] #4618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6권 (0) | 2024.08.07 |
[적어보자] #4617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5권 (2) | 2024.08.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