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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616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4권

by Kay/케이 2024.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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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4

 

 

보살선계경 제4권

구나발마 한역
최윤옥 번역

10) 시품(施品)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여 육바라밀을 구족하게 장엄(莊嚴)하니, 단(檀)바라밀ㆍ시(尸)바라밀ㆍ찬제(提)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반야(般若)바라밀을 말한다.
어떤 것을 보살의 단바라밀이라 하는가? 보살의 보시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성시(性施)이고, 둘째는 일체시(一切施)이며, 셋째는 난시(難施)이고, 넷째는 일체자시(一切自施)이며, 다섯째는 선인시(善人施)이고, 여섯째는 일체행시(一切行施)이며, 일곱째는 위제시(爲除施)이고, 여덟째는 자리이타시(自利利他施)이며, 아홉째는 적정시(寂靜施)이다.성시란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여 나와 남이 함께 이로운 것이다. 안으로 착한 마음과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을 내며, 재물에 대해 선량하여 마음속에 탐착이 없다. 이것을 보시라 한다. 보살이 보시를 행하는 데는 금계(禁戒)를 받아 지녀 정진해서 십이부경을 믿고, 인(因)을 믿고 과(果)를 믿으며, 중생들이 재물을 구하는 바에 따르면서 아까워하는 마음이 없다. 이와 같은 신업ㆍ의업ㆍ구업으로 마음과 재물을 보시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사(事)가 곧 오음(五陰)이니, 이것을 성시라 한다.어떤 것을 일체시라 하는가? 일체시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내물(內物)이고, 둘째는 외물(外物)이다. 보살마하살이 무량세에 중생에게 보시하기 위하여 음신(陰身)을 받았으니, 이것을 내물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음식을 토해 귀신에게 먹이기 위해서 스스로 식사를 하고 나면 저들에게 토시(吐施)한다. 이것이 내물이다. 이 두 가지 일에서 떠나는 것을 외시(外施)라 한다.보살마하살이 몸을 버리면서 보시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살이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속타(屬他)이다. 구하는 자가 있는데도 보시하지 않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성취할 수 없는 바, 이것을 보살이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속타란 보살마하살이 보리를 위하기 때문에 몸이 중생에게 속한 것이 마치 세간인과 같으며, 의복과 음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남에게 부림당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자신에게서 자재함을 얻지 못하나, 모든 중생은 보살의 몸에 대해서 머리ㆍ눈ㆍ골수ㆍ뇌에서 나아가 손발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취용(取用)해서 자재함을 얻는다.외시(外施)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마음에 탐착과 인색함이 없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이 내외(內外)에 대하여 보시하거나 보시하지 않거나 한다. 보살마하살은 중생들이 보시를 받은 뒤 이락(利樂)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면 보시를 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시를 받은 뒤에 반드시 이락을 얻으면 곧 보시를 행한다. 보살이 만일 자신의 보시로 해서 중생들이 고통을 받고 선법을 행하는데 방해를 받는 것을 알게 되거나, 또는 비법(非法)으로 구하는 경우에도 보시하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이 만일 백천만억의 중생들이 비법의 인연으로 얻지 못할 것을 구하는 것을 보게 되면 신명을 잃게 되더라도 끝내 이들을 위하여 혜시(惠施)를 행하지 않는다. 비법으로 구한다 함은 이른바 살생ㆍ속임ㆍ도둑질ㆍ해침 같은 것들이다. 이것을 불시(不施)라 한다. 또 다른 불시가 있으니, 보살마하살은 만일 자신에게 이익이 많다는 것을 알고 무량한 중생이 와서 구할 경우 당연히 보시하지 않는데, 이 또한 보시라 한다. 어째서인가? 정심(淨心)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악마거나 악마의 권속이라는 것을 알면 당연히 보시하지 않으며, 만일 악마에게 미혹되어 혼란스러워진 자가 와서 구할 때에도 역시 보시하지 않는다. 만일 광치(狂癡)하거나 뇌란(惱亂)하려는 자가 있을 경우 이런 구걸자에 대해서도 역시 보시하지 않는다. 이것을 내불시(內不施)라 한다.외불시(外不施)란 불ㆍ독ㆍ칼ㆍ술 등이 능히 중생에게 악연을 짓기 때문에 보살은 끝내 이런 것으로 남에게 보시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이익을 짓는 것이라면 보시한다. 보살마하살은 결코 남이 악업을 짓도록 하지 않으며, 만일 보시를 받은 자가 받은 뒤에 반드시 악업을 행할 것을 안다면 역시 보시하지 않는데 이 또한 보시라 한다. 어째서인가? 정심(淨心) 때문이니 손으로 비록 보시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은 이미 버린 것이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보살은 보시를 받은 사람이 받은 뒤에는 반드시 무량한 악업을 지어서 삼악도에 떨어질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베풀지 않는다. 보살이 비록 보시를 받는 자가 그 재물을 받고 마음에 기뻐하리란 것은 알지만, 그러나 삼악도의 고통을 면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베풀지 않는다.보살마하살은 결코 남들에게 그물을 쳐서 사냥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며, 또한 남들에게 바수천(婆藪天)을 섬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스스로 짐승을 잡아 천신(天神)에게 제시하지 않으며, 남에게도 짐승을 잡아 하늘에 제사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물로써는 와서 구하는 자에게 베풀지 않으며, 모든 원악(怨惡)ㆍ타매(打罵)ㆍ계박(繫縛) 같은 것으로도 절대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 만일 고통스럽고 가난과 근심으로 인해 자살하려는 자가 칼ㆍ창 같은 것을 구하더라도 역시 베풀지 않으며, 또한 남에게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못물에 빠지거나 불 속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만일 병에 걸린 자가 찾는 물건이 있을 경우 의원이 금하는 것은 절대 베풀어 주지 않는다. 음식을 탐하는 자가 밥을 먹었을 경우 밥을 찾더라도 주지 않는다. 이것을 불시(不施)라 한다.보살마하살은 부모나 사장(師長)이라 하여 보시하지 않으며, 설사 국왕[國主]을 위하더라도 남의 아내가 자식을 멋대로 취하여 남에게 보시하지 않는다. 다만 성읍ㆍ취락ㆍ국토는 제외한다. 만일에 자신의 아내나 자식, 그리고 동복(僮僕)ㆍ권속(眷屬)ㆍ종족일 경우, 먼저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여 타일러 달래고, 그래도 마음에 내켜 하지 않으면 당연히 보시하지 않는다. 설사 달가워하는 자라도 원가(怨家)ㆍ악인(惡人)ㆍ나찰(羅刹)ㆍ악귀(惡鬼)ㆍ전다라(旃陀羅) 같은 종류에게는 절대로 베풀어 주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성읍ㆍ국토ㆍ취락을 남에게 혜시(惠施)한다 하더라도 결코 포악한 자에게는 주지 않는다. 또한 부모ㆍ사장(師長)ㆍ형제ㆍ처자ㆍ동복ㆍ노비 등이 소유한재물을사사로이남에게보시하지않는다.보살은 비법(非法)으로 재물을 구해서 보시하지 않으며, 보시를 할 때도 자신의 권속에 대해서 성내거나 때리거나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고 좋은 말로 교도(敎導)해서 기뻐하도록 하는데, ‘이와 같은 보시의 복보(福報)가 너에게도 몫이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보살은 보시를 할 때 그 마음이 평등하여 이것이 복전(福田)인가 비복전(非福田)인가를 살피지 않고, 원(怨)과 친(親), 종성(種姓)의 존비 등을 따지지도 않는다.
이미 승락한 물건에 대해서는 결코 다시 후회하지 않으며, 많이 주기로 한 것을 결코 적게 주지 않는다. 먼저 좋은 것을 주기로 하고서 나중에 나쁜 것을 주는 일이 없으며, 비록 나쁜 것을 주기로 했더라도 좋은 것을 주고, 조금 주기로 했더라도 많이 준다. 보살이 보시를 할 때, 기쁘지 않은 마음이나 성난 마음이나 어지러운 마음으로 하는 일이 없으며, 보시를 한 뒤에 결코 받은 자에 대하여 보답을 생각하는 일이 없다.보시를 할 때에는 받는 자가 존귀하다고 해서 공경하고 받들어 올리지 않으며, 받는 자가 비천하다고 해서 집어던지며 주지 않는다. 혹시 받는 자가 주먹질하고 욕지거리하면서 빼앗아가도 보살은 그런 것에 대해 결코 성내지 않는다. 다만 번뇌를 꾸짖을 뿐이지 사람을 나무라지 않으며, 이런 자에 대해서는 깊이 연민을 일으킬 뿐 결코 염두에 두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런 보시로 인해 자신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성취하게 되고, 이런 보시가 또한 능히 보리를 장엄하지만, 과보를 구하기 위해 보시를 행한 것이 아니라서 모든 베풀어준 보시를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회향(廻向)한다. 또 남을 가르치기 위해 보시한 것이 아니며, 보시의 과보가 있다는 것을 들어서 보시하는 것이 아니니, 경(經)에서 “음식을 베풀면 힘을 얻고, 의복을 베풀면 색(色)을 얻고, 탈 것을 베풀면 낙(樂)을 얻고, 등불을 베풀면 호안(好眼)을 얻고, 방사(房舍)를 베풀면 수의물(隨意物)을 얻는다”고 말한 것은 결코 이와 같은 과보를 바라고 보시를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연민 때문에 보시를 하는 것이며, 가난을 없애고자 보시를 하는 것이며,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나아가게 하고자 보시를 하는 것이다.비시(非施)로 보시하지 않는다. 비시란 잔식(殘食)으로써 성인(聖人)에게 보시하지 않는 것이며, 성인이 아닌 자는 구하지 않으며, 베풀지 않는 것이다. 잔식으로 부모ㆍ사장(師長)ㆍ장로ㆍ유덕인(有德人)에게 베풀지 않으며, 구하는 자에게는 당연히 보시하되, 결코 토한 것이나 고름ㆍ땀ㆍ콧물ㆍ가래ㆍ분토(糞土) 등이 섞인 밥을 남에게 보시하지 않으며, 더러운 음식으로도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
무릇 음식을 베풀 때는 많든 적든 간에 먼저 말을 한 후에 베풀며, 말하지 않고는 베풀지 않는다. 파를 먹지 않는 자에게는 파가 섞인 밥을 주지 않으며, 고기를 먹지 않는 자에게는 고기 섞인 밥을 주지 않으며, 술을 못 먹는 자에게는 술을 곁들인 밥을 주지 않는다. 혹시 술 냄새가 나더라도 역시 안 준다.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물건을 보시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보살마하살은 와서 구걸하는 이를 보면 그 즉시 보시하며, 결코 보시를 이유로 남을 채근질하여 요구해서는 안 된다. 천락(天樂)을 위해 보시하지 않으며, 이름을 날리기 위해 보시하지 않으며, 보답을 바라고 보시하지 않으며, 전륜성왕을 봄이라 하여 보시하지 않으며, 마천(魔天)이나 범천(梵天)의 몸이라 하여 보시하지 않으며, 국왕이나 장자(長者)라 하여 공경하고 공양하고 존중하면서 보시하지 않는다.
적은 물건이라도 오히려 보시하는데 더구나 많은 것이겠는가? 속이기 위해 보시하지 않으며, 남의 권속을 깨뜨려 자기 권속을 만들어가 나아가 남의 취락ㆍ성읍ㆍ국토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보시하지 않는다. 보살이 보시할 때 상좌(上座)에게 손으로 받들어 올리며, 사미(沙彌)ㆍ지계(持戒)ㆍ훼계(毁戒)에 이르기까지 귀찮고 싫어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보살이 보시할 때는 결코 걸구(乞求)하는 이를 꾸짖거나 헐뜯어서는 안 되며, 교만하다 하여 보시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보살마하살은 모든 재물에 대하여 언제나 버릴 생각을 가지며, 항상 중생을 위하여 재물을 저축한다. 만일 보살이 자기 몫을 이미 버린 것을 확실히 알면, 자기 몫을 취해도 죄가 없다.
보살마하살이 구하는 이를 보았을 때, 기쁜 마음이 생기는 것이 마치 중병이 든 자가 훌륭한 양의(良醫)를 만난 것 같아서 필요한 바에 따라 한껏 들어주고, 삼시(三時)로 기뻐하니, 이른바 베풀기 전과 베풀 때와 베푼 다음이 그것이다.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언제나 이와 같은 마음을 내며, 설사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와서 걸구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해 보아서 재물이 많은 경우에는 고르게 나누어 주고, 만일 재물이 부족하다면 먼저 가난한 이를 구호한다. 이런 발원(發願)을 하면 이는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인(因)이 되는 것이다.인색함에 세 가지가 있으니 상ㆍ중ㆍ하를 말한다. 보살마하살은 먼저 하의 인색함을 깨뜨린다. 하의 것을 깨뜨리면 능히 중의 인색함과 상의 인색함, 둘도 깨뜨릴 수 있다. 만일 스스로 자신의 인색함을 깨뜨렸으면 다시 중생을 위하여 그 인색함을 깨뜨리는 법을 말한다. 설법을 하면 중생들이 이익을 받는다.
그리고 보살은 구하지 않는 이에 대해서도 힘껏 재물로 보시하며, 만일 재물이 없으면 반드시 방편의 역력(役力)으로 찾아내서 혜시(惠施)하며, 만일 재시(財施)가 없으면 당연히 법시(法施)를 해서 중생을 교화한다. 너는 지금 어째서 혜시를 행하지 않는가? 앞 사람이 만일 따라서 보시를 하면, 깊이 기뻐하면서 신력(身力)으로 도와 그 부추김을 대신한다. 또 재물이 없는 이는 마땅히 지혜로써 모든 중생을 위하여 선과 악을 열어 보인다.
그리고 보살이 정전(正典)으로 사견(邪見)을 베풀지 않는 것은 목숨을 살리려고 경률(經律)을 팔아먹지 않는 것이니, 독송(讀誦)하는 자에게는 마땅히 베풀어야 함에도 아끼고 주지 않는 것을 법의 인색함이라 한다. 능히 설법할 수 있음에도 설법하지 않는 것도 또한 법의 인색함이라 한다. 만일 자신이 남들에게 법으로써 보시할 수 없다면 어떻게 중생의 번뇌를 깨뜨릴 수 있다고 하겠는가?보살은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재물이 없어 보시할 수 없으며, 또한 진뇌(瞋惱)하여 스스로 마음을 태우지 않는다. 그리하여 선방편(善方便)으로써 걸구하는 이를 위로하여 타일러 달래면서도 나는 아직까지 찾아오려는 뜻을 부르지 않은 적이 없다. 어째서인가? 처음 발심할 때에 모든 중생에게 보시하겠다고 스스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살이 걸구하는 자가 찾아왔다는 말을 들으면, 곧장 나가서 맞이해 들이면서 좌석을 내어 준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는 먼저 이야기를 꺼내어 부드러운 말로 물어보고, 필요한 물건은 빠짐없이 베풀어 준다. 보살마하살이 처음 발심(發心)할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을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 및 모든 중생에게 보시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제자가 옷과 발우와 물건을 스승에게 드리면 스승이 비록 취하지 않더라도 그 제자는 무량한 복을 받게 되는 것과 같다. 보살도 또한 그러하다. 자신이 가진 재물을 여러 부처님과 보살에게 드리면 여러 부처님과 보살이 비록 받지 않더라도 이를 베푼 자는 역시 무량한 복을 받게 해서 마치 항하사(恒河沙)처럼 항상 보살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보살마하살은 자기 재물을 마치 시방의 여러 부처님과 보살이 맡겨 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부처님과 보살이 이런 재물에 대하여 아까워하는 마음이 없음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이 뜻에 따라 자유롭게 중생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또한 보시해서는 안 될 자를 깊이 통찰해서 이렇게 타이른다.
“이런 물건들은 사실 나의 소유가 아니라 바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소유인 것이다.”
그리하여 부드러운 말로 걸구하는 자를 깨우쳐서 성내고 원망하지 않도록 하니, 이 때문에 보살이 재(財)와 법(法)의 두 보시를 성취하여 구족하는 것이다. 이 두 보시를 구족하면 성(性)을 알고, 인(因)을 알고, 과(果)를 알고, 분별을 안다.
보살이 원증(怨憎)하는 이에게 보시하는 것은 자인연(慈因緣) 때문이며, 고통받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비인연(悲因緣) 때문이며, 덕이 있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희인연(喜因緣) 때문이며, 권속(眷屬)ㆍ형제ㆍ동복(僮僕)에게 보시하는 것은 사인연(捨因緣)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의 인지혜시(因智慧施)라 한다.그리고 보살은 해시심(害施心)을 안다. 해시심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량세를 지나오면서 보시를 익히지 않은 때문이며, 둘째는 재물이 적기 때문이며, 셋째는 탐착하여 재물을 좋아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후세의 선과보(善果報)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찾아와 걸구하는 자를 보고서 보시할 마음을 즉시 내지 않는 것은 곧 보살이 무량세를 지나오면서 보시하는 마음을 익히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에 보살은 응당 지혜의 힘으로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내가 옛날 무량세 이래로 보시를 익히지 않아서 즉시 발심하지 못한다. 지금 나에게 많은 재물이 있고 이를 걸구하는 자가 있는데도 만일 혜시(惠施)하지 않는다면, 미래세(未來世)에 다시 인색한 마음을 증장(增長)해서 끝내 이에 수순(隨順)하지 못해 보시의 마음을 닦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보살이 찾아와 걸구하는 이를 보고도 재물이 적다고 하여 시심(施心)을 곧장 내지 못할 경우, 보살은 다시 지혜의 힘을 빌려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무량한 악업의 인연 때문에 무량세 중에 몸이 타자(他者)에 속해 커다란 고뇌와 굶주림ㆍ갈증ㆍ추위ㆍ더위를 받아서 무량한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업연(業緣) 때문에 자신의 재물이 적게 된 것이니, 지금 또한 보시하지 않는다면 다시 미래세의 가난과 곤고(困苦)를 증장할 것이요, 지금 만일 이 적은 재물이라도 남에게 보시한다면 비록 지금은 가난하고 곤고하겠지만 삼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능히 얼마 없는 재물이라 하여 아까워하는 마음을 깨뜨릴 수 있다.
그리고 보살이 걸구하는 이를 보고도 좋은 재물에 대해서 탐착하는 마음이 생겨 베풀려는 마음을 곧장 낼 수 없으면, 이럴 때에 보살은 당연히 지혜로써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무상(無常)을 보고 상(常)이라고 생각하고, 아소(我所)가 없는데도 아소가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만일 보시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탐착할 것이니 이는 나의 전도(顚倒)이다.’
이렇게 하면 보살이 능히 좋아하는 물건에 탐착하는 마음을 깨뜨릴 수 있다.그리고 보살이 과보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보시를 행하지 않는다면, 이럴 때 보살은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모든 법은 상(常)이 없으며 정(定)이 없다. 만일 상과 정이 있다면 보시가 필요 없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인과가 없기 때문이다. 상이 없기 때문에 인과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지금 보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리의 도과(道果)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면 보살이 능히 과보를 구하지 않는 마음을 깨뜨리고 과보를 구하지 않는 마음을 깨뜨리고 혜시(惠施)를 행할 수 있다.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전도(顚倒)를 알아서 법이 결정함이 없고 상상(常相)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능히 네 가지 원악심(怨惡心)을 깨뜨린다.
그리고 보살은 내신(內身)이 적정(寂靜)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사유하여 항상 이렇게 염(念)한다.
‘내게 만일 재물이 있다면 당연히 모든 부처님과 보살에게 공양하게 하겠으며 법보와 승보에 보시하겠다.’
이것을 보살의 혜시라 한다. 재물이 있든 없든 간에 언제나 이와 같이 하면서 마음을 다짐하여 사유한다. 법시(法施) 또한 마찬가지이니, 이것을 일체시(一切施)라 한다.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능히 난시(難施)를 보시한다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만일 적은 재물을 가지고도 항상 혜시하면 이것을 난시라 한다. 마음으로 애지중지하여 탐착하는 재물이나, 무량세 중에게 열심히 추구하여 얻은 것이나, 큰 방편의 역력(役力)으로 얻은 것과 같은 것들을 남에게 혜시하는 것을 난시라 한다.
어떤 것을 일체자시(一切自施)라 하느냐? 보살마하살이 만일 스스로 보시를 행하고, 부모ㆍ형제ㆍ처자ㆍ권속ㆍ노비로 하여금 보시를 하게 하면 이를 일체자시라 한다.
어떤 것을 선인시(善人施)라 하는가? 만일 선남자가 선심(善心)으로 보시하며, 신심(信心)으로 보시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보시하며, 자신의 손으로 보시하며, 때에 맞게 보시하며, 법에 따라 재물을 얻는 대로 보시한다면, 이것을 선인시라 한다.어떤 것을 보살의 일체행시(一切行施)라 하는가? 과보를 구하지 않는 것을 일체행시라 하며, 항상 보시하는 것을 일체행시라 하며, 복전시(福田施)를 일체행시라 하며, 복전과 비복전(非福田)을 살피지 않는 보시를 일체행시라 하며 때와 때 아닌 것을 살피지 않는 것을 일체행시라 하며, 재물이 보시할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살피지 않는 것을 일체행시라 한다.
어떤 것을 보살이 없애기 위하여 하는 보시라고 하는가? 만일 중생이 배고프고 목마르고 고통스럽고 번뇌하면 이런 것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보시를 하되, 추운 이에게는 옷을 베풀고, 탈 것을 찾는 이에게는 탈 것을 주고, 영락(瓔珞)을 구하는 이에게는 영락을 주고, 도향(塗香)ㆍ말향(末香)ㆍ잡화(雜華)ㆍ등명(燈明)과 방사(房舍)ㆍ와구(臥具)ㆍ병에 따른 의약의 경우에도 역시 모두 이와 같이 한다. 이것을 없애기 위하여 하는 보시라 한다.어떤 것을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보시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만일 재물과 법(法)을 그들에게 베풀면 능히 자신과 중생을 위하여 이세(二世)의 낙(樂)을 지으며, 항상 중생에게 무외(無畏)의 낙을 베풀어서, 이른바 호랑이ㆍ사자ㆍ물ㆍ불ㆍ왕난(王難)ㆍ원적(怨賊)을 능히 구제한다. 이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보살마하살의 법시(法施)는 무릇 말하는 것이 애초부터 전도(顚倒)함이 없는 것으로 이를 법시라 하며, 모든 중생을 잘 가르쳐서 경계하는 것을 정법시(淨法施)라 한다. 보살의 재시(財施)는 현재를 이익되게 하지만, 법시를 행하면 능히 현재와 타세(他世)를 이익되게 한다. 재시는 또 중생에게 현세의 고통을 짓는 일도 있지만, 법시는 그러하지 아니하여 능히 현재와 타세의 즐거운 일을 짓는다. 재시는 청정하지 않지만 법시는 청정하다. 재시를 행하는 이는 무변(無邊)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지만, 법시의 보시는 무변시(無邊施)라 이름한다. 재시는 얻기 쉽지만 법시는 만나기 어렵다. 이것을 자타(自他)가 이익이 되는 보시라 한다.어떤 것을 적정시(寂靜施)라 하는가? 적정시에는 열 가지가 있다. 이 열 가지는 무엇인가? 첫째는 무애시(無礙施)이고, 둘째는 무착류시(無錯謬施)이며, 셋째는 비장엄시(非莊嚴施)이고, 넷째는 무고심시(無高心施)이며, 다섯째는 무착심시(無箚心施)이고, 여섯째는 무수시(無羞時)이며, 일곱째는 무수시(無愁施)이고, 여덟째는 무비면시(無面施)이며, 아홉째는 무구은보시(無求恩報施)이고, 열째는 불구과보시(不求果報施)이다. 무애시란 보살마하살이 보시를 행할 때에 모든 바쁜 일[劇務]이나 세사(世事)의 장애를 받지 않는 것이니, 비록 걸구하는 자의 마음에 답답하거나 지체함이 없음을 알더라도 능히 신속하게 희사하여 그 구하는 바에 맞추어 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무애시라 한다.무착류시란 보살마하살이 결코 보시에 과보가 없다거나 선악의 과보가 없다고 언념(言念)하지 않고, 또한 바수(婆藪)가 말한 것처럼 살생을 해서 하는 보시가 좋은 과보를 얻는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탐착함이 없는 보시의 인연으로써 세간의 즐거움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果)를 얻는 것이다. 이것을 무착류시라 한다.비장엄시란 보살마하살이 결단코 재물을 모아 좋게 장엄하는 것으로 보시를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얻으면 얻는 대로 보시해서 결코 쌓아두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보살이 재(財)와 명(命)의 두 법이 상(常)이 없으며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깊이 알기 때문이다. 찾아와 걸구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보시를 하고, 결코 내가 장엄하게 한 다음에 주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장엄하여 하는 보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장엄한다는 이름을 얻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이 만일 장엄함을 기다려서 보시한다면 곧 중생으로 하여금 크게 고통과 번뇌를 당하게 할 것이다. 이것을 비장엄시라 한다.무고심시는 보살마하살이 찾아와서 걸구하는 이를 보면 스스로 낮추는 마음이 생겨서 자신이 시주(施主)라고 자랑하지 않고,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남보다 뛰어난 보시를 행한다는 명칭을 위해서 보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무고심시라 한다.
무착심시는 보살마하살이 명칭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이러한 명칭을 잘 관찰하는 일은 공(空)과 같고 바람[風]과 같으며 연뿌리[藕根] 속의 실과 같다. 내가 만일 명칭을 위한 보시를 구한다면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니, 이 때문에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 명칭을 구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무착심시라 한다.무수시(無羞施)는 보시를 행할 때에 삼시(三時)를 기뻐한다. 이것을 무수시라 한다.
무수시(無愁施)는 보살마하살이 소중히 여기는 재물을 보시하고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근심이 없다. 이것을 무수시라 한다.
무비면시는 보살이 모든 중생을 두루 관찰할 때 그 마음이 평등하여 기쁘게 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무비면시라 한다.불구은보시는 연민하고 자비를 수집(修集)하며, 안락을 베풀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불구은보시라 한다.
불구과보시는 보살마하살이 보시를 행할 때에 전륜성왕의 몸과 삼십삼천(三十三天)ㆍ마천(魔天)ㆍ범천(梵天)의 재물의 자재함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보살은 유위법(有爲法)이 파초(芭蕉)나무처럼 무상함을 깊이 보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보시할 때 과보를 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구과보시라 한다.
이와 같은 열 가지가 능히 보살로 하여금 단(檀)바라밀을 구족하게 성취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11) 계품(戒品)무엇을 일러 보살마하살의 계(戒)라 하는가? 계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계(自性戒)이고, 둘째는 일체계(一切戒)이며, 셋째는 난계(難戒)이고, 넷째는 일체자계(一切自戒)이며, 다섯째는 선인계(善人戒)이고, 여섯째는 일체행계(一切行戒)이며, 일곱째는 제계(除戒)이고, 여덟째는 자리이타계(自利利他戒)이며, 아홉째는 적정계(寂靜戒)이다.보살마하살이 자성계를 갖추는 데에는 네 가지의 공덕이 있다. 첫째는 청정한 마음으로 다른 이로부터 받는 것이며, 둘째는 그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여 받은 계를 훼손하면 마땅히 지극한 마음으로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것이다. 뉘우친 뒤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감히 다시 범하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이 다른 이로부터 계를 받아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부끄럽기 때문에 이를 호지(護持)하여 범하지 않는다. 만일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여 받은 계를 훼손하면 마음에 부끄럽기 때문에 감히 이를 덮어 감추거나 나아가 하룻밤을 묵히지 못한다. 보살이 만일 계를 범하고도 하룻밤을 묵혀 경과한다면 단순하게 한 번 범한 것만으로 참회할 수 없으며 당연히 염념(念念)마다 무량범(無量犯)의 참회를 해야 한다. 어째서인가? 만일 이처럼 많은 범계(犯戒)를 일범(一犯)으로 참회한다면 참회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으며 받는 자는 죄를 얻는다.보살이 다른 이로부터 계를 받아 지님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참괴(慙愧)이고, 둘째는 지심견지(至心堅持)인 바, 보살마하살은 지극한 마음으로 계를 지녀 끝내 훼범(毁犯)의 마음을 갖지 않는다. 셋째는 받은 뒤에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호지(護持)하는 것이며, 넷째는 청정한 마음으로 받아 지니는 것이다.
보살이 네 가지 공덕(功德)의 계를 구족하면 능히 네 가지의 일을 지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불범(不犯)이고, 둘째는 범하게 되면 즉시 뉘우치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에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넷째는 회한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성계(性戒)라 한다.
셋째는 보살을 진실계(眞實戒)라 하고, 자타리계(自他利戒)라 하며, 요익중생계(饒益衆生戒)라 하고, 이익중생의계(利益衆生義戒)라 하며, 증장인천계(增長人天戒)라 하고, 무량공덕계(無量功德戒)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은 계를 성취하여 마음에 연민이 생기면 능히 무량한 중생을 교화한다.보살이 만일 객진번뇌(客塵煩惱)로 하여 참회하지 못하면, 언제나 당연히 계 지니는 것을 찬탄하고 계 깨뜨리는 것을 가책하며, 훼금(毁禁)을 말하는 이로부터 죄를 견책받게 된다. 이러할 경우에는 비록 훼범(毁犯)이라고는 하지만 죄과가 경미하여 필경에는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을 자성계(自性戒)라 한다.
일체계(一切戒)란 재가자와 출가자가 받는 모든 계를 말한다. 재가자와 출가자의 계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계(戒)이고, 둘째는 수선법계(受善法戒)이며, 셋째는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행하는 계이다.어떤 것을 계라 하는가? 이른바 칠종계(七種戒:七衆戒)로서 비구ㆍ비구니ㆍ식차마나(式叉摩那)ㆍ사미ㆍ사미니(沙彌尼)ㆍ우바새ㆍ우바이이다. 보살마하살이 만일 보살계를 받아 지니고자 할 경우, 먼저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칠종계를 받아야 한다. 칠종계는 곧 심취(心趣)를 청정하게 하는 보살계로서, 예를 들어 세간의 사람들이 대왕(大王)을 청하고자 할 때 먼저 거처하는 집안을 깨끗이 하는 것과 같다. 이 칠종계는 재가자와 출가자가 함께 받는 것이다. 보살계도 역시 이와 같다. 이처럼 출가자와 재가자가 함께 받는 것을 계(戒)라 한다.
어떤 것을 수선법계(受善法戒)라 하는가? 선법계란 보살마하살이 칠종계를 떠나는 것이다. 보리를 위하기 때문에 신ㆍ구ㆍ의로 짓는 열 가지 선법을 닦는다. 이것을 수선법계라 한다.신ㆍ구ㆍ의는 보살마하살이 계지(戒地)에 주(住)하여 독송하고 베껴 쓰며, 분별하고 해설하며, 사마타(舍摩他)와 비파사나(毘婆舍那)를 사유(思惟)하고 수집(修集)하며, 사장(師長)ㆍ화상(和上)ㆍ장로ㆍ덕있는 이를 공경하여 공양올리고 존중하여 찬탄하며, 때때로 살펴보고 주사(走使)를 공급하는 것이다. 늙고 병들어 길에서 지쳐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 의발(衣鉢)을 대신 메기도 하고, 설법이나 경패(經唄)를 보면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감탄하며, 계를 지니는 이를 보면 힘을 다해 옹호하고 그 지계를 찬탄하면서 모든 중생이 정계(淨戒)를 받아 지니기를 발원하며, 계를 깨뜨린 자를 보면 깊이 연민하여 좋은 말로 나무라고 참회하도록 한다.신ㆍ구ㆍ의업이 지은 선(善)을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회향하도록 서원(誓願)을 세우고, 신ㆍ구ㆍ의에 기력이 있는 동안에 열성적인 마음으로 불ㆍ법ㆍ승 삼보에 공양드리며, 선법을 증장하기 위하여 근수 정진(懃修精進)하며, 모든 선법을 얻기 위하여 불방일(不放逸)을 수집(修集)한다. 언제나 지극한 마음으로 계를 염하고 계를 옹호하여 제근(諸根)을 조복하고, 음식을 만족하게 여기며, 편히 누워 자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초야(初夜)와 후야(後夜)에 경전을 읽어 외우고, 삼보를 억념(憶念)하여 선우(善友)를 친근히 하며, 그 말하는 것을 즐겨 듣고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반성한다. 안 뒤에는 참회하여 깊이 부끄러워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억념하여 다시는 훼범(毁犯)하지 않는다. 불ㆍ법ㆍ승과 동사(同師)ㆍ동법(同法)ㆍ동계(同戒)ㆍ동학(同學)을 향하여 참회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이것을 수선법계라 한다.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계를 실천하는 데에 열한 가지가 있다. 만일 중생이 선을 닦으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가서 은근히 일러주고 함께 반려가 되어 같이 선업을 지으며, 병(病)을 볼 줄 아는 자가 있으면 또한 찾아가 권유(勸喩)하고 함께 반려가 된다. 만일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중생이 있으면 즉시 방편을 써서 이들을 위하여 해설하고, 은혜를 받은 곳이 있으면 염하여 이를 갚고자 한다. 갚는다는 것은 이른바 금계를 견지하여 십이부경을 독송하고 베껴 쓰며, 바른 뜻을 생각하여 분별해서 해설하고, 중생을 이른바 사자ㆍ호랑이ㆍ물ㆍ불ㆍ왕적(王賊) 등 갖가지 공포로부터 구제하여, 이들 중생을 이러한 공포들로부터 멀리 분리하여 옹호하여 주는 것이다.만일 중생이 친한 이를 잃거나 재물의 손실이 있거나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서 근심하고 걱정하면, 능히 법을 말하여 고통과 번뇌로부터 떠나도록 하며, 가난하고 곤고(困苦)한 자가 있으면 곧장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배풀어 준다.
법을 받아 지녀 제자를 받아들이고 모으되 명리(名利)를 위하지 않으며, 법을 받아 지녀 사중(四衆)을 왕래하며 함께 강론하되 이양(利養)을 위하지 않으며, 법을 받아 지녀 국왕ㆍ대신ㆍ장자(長者)를 친근히 하되 이양을 위하지 않는다.
단월(檀越)을 위해 인정에 끄달려서 법이 아닌 신ㆍ구ㆍ의업을 조작하지 않으며, 비시(非時)에는 다른 이의 집에 왕래하지 못한다. 재가자와 출가자가 모두 비시인 경우이다. 비시란 이른바 탐착할 때와 분노할 때, 우둔할 때와 큰 바람이 불 때, 큰 비가 올 때 및 시집가고 장가갈 때, 잔치를 벌릴 때, 어딘가로 막 가려할 때이다. 이상의 비시를 제외한 것을 위시(爲時)라 한다.이미 얻은 선법의 공덕을 따라 모두 전교(轉敎)하여 모든 중생이 탐착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없도록 하며, 훼계(毁戒)한 자를 보면 깊이 연민하여 청정한 마음으로 좋은 말로 타이르기를 마치 부모가 자식들에게 하듯이 하되, ‘너희가 범한 것을 응당 드러내어 법에 따라 참회해야 할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종전처럼 그들로부터 공급과 신력(身力)의 작역(作役)을 받아서는 안 되며, 당연히 경우에 따라 적당한 방법으로 적벌(謫罰)하고, 만일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당연히 사묘(寺廟) 밖으로 이들을 몰아낸다. 불법의 증장(增長)을 위하여 교화[敎]ㆍ가책[呵]ㆍ처벌[罰]ㆍ빈출[擯]이 불가능한 자를 같이 거주시킬 경우, 이를 파계(破戒)라 하며, 비사문(非沙門)이라 하며, 비바라문(非婆羅門)이라 한다.불법 중에 취명(臭名)인 전다라(旃陀羅)를 도아(屠兒)라 한다. 전다라 등과 도아는 비록 악업을 행하지만 여래의 정법(正法)을 깨뜨리지 못하므로 굳이 삼악도에 떨어지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스승이 되어 제자를 교화하고 꾸짖어 이끌지 못하면 불법을 깨뜨리게 되어 기필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명예를 위해 무리를 모아들인다. 이것을 사견(邪見)이라 하며, 마제자(魔弟子)라 한다. 제자를 기르지 않으면 여래의 정법을 깨뜨리지 못하지만, 나쁜 제자를 기르면 불법을 깨뜨리게 되고 불법을 깨뜨리므로 마제자라 하며, 자신의 이양(利養)을 위하여 무리를 모으는 바, 이를 사견이라 한다.신통(神通) 및 타심지(他心智)와 식숙명지(識宿命智)를 갖춘 다음이라야 비로소 보살계를 가지고 남을 교화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악제자(惡弟子)라도 능히 기를 수 있다. 어째서인가? 방편을 알기 때문이다. 방편을 알기 때문에 악법을 깨뜨리고 선법을 열어 보인다. 그런데 비구가 이러한 세 가지 지혜를 구족하지 못하고, ‘나는 이 세 가지의 지혜를 구족하여 충분히 악제자를 받아 기를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런 자는 죄가 무겁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라. 이런 일에서 떠나는 것을 이타계(利他戒)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선계(善戒)며 이익타계(利益他戒)인 계를 성취하는 것을 호계(好戒)를 위하여 모든 계를 섭수하여 지닌다고 하며, 도피안계(到彼岸戒)라 하며, 해탈계라 하며, 무상계(無上戒)라 하며, 무인과계(無因果戒)라 하며, 상락아정계(常樂我淨戒)라 하며, 필경무변계(畢竟無邊戒)라 하며, 일체선방편계(一切善方便戒)라 한다.보살이 만일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보살계를 억념(憶念)한다면 모든 성문과 연각보다 뛰어날 수 있으며, 만일 능히 보살계를 구족할 수 있다면 또한 육지 보살(六地菩薩)보다 뛰어나게 될 것이다. 만일 보살이 전륜왕(轉輪王)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배워 해탈계를 받는다면 오욕(五欲)을 마치 가래침인 양 뱉어버리고 이를 생각하거나 찾지 않고 후회하거나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며, 천상(天上)의 오욕의 즐거움까지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할 것이다. 인천(人天)의 쾌락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금계를 받아 지닌다. 오욕의 즐거움을 불이나 독이나 뱀처럼 보고 삼악취(三惡趣)처럼 보며, 그들의 공양을 받는 것을 마치 토한 음식처럼 보아서 마음에 탐착하지 않는다.세간의 사람들이 만일 인천(人天)의 수락(受樂)과 이양(利養)과 명예를 위하여 금계를 받는다면 그런 자는 계를 얻었다고 할 수 없음을 마땅히 알아라. 계를 성취한 이는 승려들 속에 있으면서도 마치 공처(空處)에 있는 것과 같으므로 이를 적정(寂靜)이라 한다.중생들을 교화할 수 없기 때문에 법을 옹호하지 못하며, 신명(身命)을 아끼기 때문에 법을 옹호하지 못하며, 이양(利養)을 탐하기 때문에 법을 옹호하지 못하며, 원망과 거리감 때문에 법을 옹호하지 못하며, 두려움과 거리낌 때문에 법을 옹호하지 못하며, 교만 때문에 법을 옹호하지 못하며, 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법을 옹호하지 못하며, 연민하는 마음 때문에 법을 옹호하지 못하며, 두렵고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법을 옹호하지 못한다. 이를 파계(破戒)라 하며, 부적정(不寂靜)이라 한다.만일 계에 대하여 지족(知足)의 마음이 생긴다면 이런 자는 계를 지닌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겠다. 인계(因戒)를 알기 때문에 모든 보살의 무량 삼매를 얻는다. 만일 계가 없으면 무량 삼매를 증장하지 못한다. 삼매를 위하기 때문에 금계를 호지(護持)한다.보살로서 보살계를 받아 지닌 사람은 차라리 목숨을 잃을지언정 결코 법이 아닌 말을 들어서 사용하거나 악인과 함께 거주하지 않으며, 모든 악한 각관(覺觀)을 염하거나 일으키지 않는다. 만일 이런 것이 일어날 경우에는 부끄러워하여 가책하고 참회한다. 무리들 중에서 혹시 악어(惡語)나 악사(惡事)ㆍ악법(惡法)ㆍ악성(惡聲)ㆍ악의(惡義)를 들으면 즉시 일어나 가버린다.
그러나 만일 이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이를 꾸짖어 가르치지 않고 그냥 두고 가버린다면 이를 범(犯)이라 하며, 제재할 힘이 없어서 그냥 머물러서 들어도 역시 범이라 한다. 만일 들으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계를 지녔다고 하고, 들으려는 마음이 있을 경우에는 계를 깨뜨렸다고 하며, 만일 즐겨 들으면 계를 깨뜨렸다고 하고, 즐겨 듣지 않으면 계를 받아 지닌 것이라 한다. 마음으로 뉘우치면 계를 받아 지닌 것이지만 마음에 뉘우치지 않으면 계를 깨뜨리는 것이다.보살로서 보살계를 받아 지닌 자는 결코 자신이 받은 계가 화상(和上)이나 스승을 통하여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로부터 받는다고 생각한다. 만일 자신이 받은 계가 스승이나 화상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면 보살계라고 이름하지 않으며, 시방의 부처님과 보살로부터 받았을 경우 보살계라 한다.보살마하살이 만일 십팔부승(十八部僧)을 분별하면 보살계를 얻었다고 하지 않으며 이들이 모두 시방의 모든 불보살의 제자라고 평등하게 보면 보살계를 얻었다고 이름한다. 만일 일체가 다 시방의 모든 불보살의 제자로서 대지(大地)에 주(住)하는 것이라는 것을 살핀다면 대지에 주하는 인연으로 하여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중생계(衆生界)는 불가사의하며, 중생법계(衆生法界)는 불가사의하며, 중생성(衆生性)은 불가사의하며, 중생계(衆生戒)는 불가사의하다.내가 아직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했는데 어떻게 18부(部)를 분별한다고 하는가? 내가 만일 분별한다면 일체계(一切戒)ㆍ무애계(無礙戒)ㆍ무상계(無上戒)를 얻지 못한다. 능히 이렇게 보기 때문에 과거에 보살이 금계를 얻은 것처럼 보살계를 얻는다. 보살이 만일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곧 무량 무변의 복덕을 얻어서 능히 시방의 불보살의 마음을 알며, 또한 보살계를 구족한 이가 무상도(無上道)를 얻는다는 것을 안다.
보살마하살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아직 무상도를 성취하지 못했을 때에는 번뇌가 구족하여 보살계를 배웠으며, 구족하게 성취한 뒤에 무상도를 얻었음을 본다. 따라서 나의 지금의 이 몸도 역시 중생이며 역시 오음(五陰)을 가지고 있고, 역시 번뇌를 가지고 있어서, 역시 보살계를 받아 보리를 수집하면 역시 당연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나 또한 신ㆍ구ㆍ의로 짓는 악업을 조복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보살이 보살계를 받아 지니면 지극한 마음으로 생각을 오로지 하여 자신의 지난 잘못을 반성하고 남의 단점을 따지지 않으며, 악을 행하는 자를 보아 마음에 성내거나 한스러워하지 않고, 계를 깨뜨린 자를 보아도 마음에 연민하여 성내거나 고뇌하지 않는다. 보살로서 보살계를 받아 지닌 이는 설사 악인으로부터 주먹이나 몽둥이나 칼로 얻어맞거나 고약한 욕설을 들더라도 그들에 대하여 악심(惡心)을 품지 않으며 거친 말로 보복하지 않는다.
보살이 보살계를 배우는 데는 다섯 가지의 불방일(不放逸)이 있으니, 그 첫째는 이미 지은 범죄를 보면 법에 따라 참회하는 것이며, 둘째는 장차 지을 범죄를 보면 법에 따라 참회하는 것이며, 셋째는 현재의 범죄를 보면 법에 따라 참회하는 것이며, 넷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견고하게 지녀 범하겠다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범한 뒤에는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섯 가지의 방일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보살로서 보살계를 수지한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덕을 당연히 덮어 감추고 범한 죄과는 모두 들추어낸다. 욕심이 적어서 만족함을 알고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며, 항상 즐겁고 적정(寂靜)하여 마음에 회한이 없다. 스스로를 높이거나 경솔하지 않으며, 적멸행(寂滅行)과 미세행(微細行)을 닦아 사명(邪命)을 깨뜨린다. 보살로서 이러한 법을 성취한 이를 보살이 보살계에 주(住)한다고 한다.
보살로서 보살계를 받아들이고 배운 이는 과거의 오욕(五欲)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으며, 미래의 오욕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으며, 현재의 오욕에 대하여 탐착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항상 즐겁고 적정(寂靜)하여 악한 각관(覺觀)을 깨뜨려서 구족한 불방일행(不放逸行)을 성취하며, 모든 중생을 감히 업신여기지 않아서 인욕을 성취하여 정심(淨心)을 구족한다.정계(淨戒)를 배우는 자는 신명을 아끼지 않으며 재물을 아끼지 않는다. 파계(破戒)의 번뇌인연을 잘 알아서 이 파계의 번뇌를 잘 조복하며, 진심(瞋心)을 조복하고 중생들의 뇌해(惱害)의 마음을 능히 조복한다. 전도를 분명히 알고 선인과(善因果)를 안다. 선인과를 알기 때문에 이것을 열심히 추구하며, 선인과를 믿지 않는 전도를 깨뜨린다. 모든 법에 상(常)ㆍ아(我)의 상이 없으며, 낙(樂)ㆍ정(淨)의 상도 없음을 보아서, 중생들이 무상(無常)을 거꾸로 상으로 보고 무락(無樂)을 거꾸로 낙으로 보며, 무아(無我)를 거꾸로 아로 보고 부정(不淨)을 거꾸로 정으로 보는 네 가지 전도를 깨뜨린다.
선계(善戒)를 수학(修學)하여 시인(施因)ㆍ계인(戒因)ㆍ인인(忍因)ㆍ정진인(精進因)ㆍ선정인(禪定因)ㆍ지혜인(智慧因)을 수집(修集)한다. 보살은 자신을 이익되게 하고 남을 이익되게 하는 계를 받아 지니기 때문에 중생을 교화하여 선업을 행하게 한다. 선을 닦는 자와 함께 하여 반려를 삼으며, 언제나 중생을 가르쳐서 삼보(三寶)에 공양하게 한다.이별(離別)함을 보면 알맞은 방편을 써서 다시 화합하게 하고, 병고(病苦)를 보면 몸소 공급하며, 소경을 보면 필요한 의복과 음식을 공급하고 길을 안내하고 법을 잘 말하여 주며, 귀머거리를 보면 땅 위에 글씨를 써서 내용을 알려 주며, 절름발이를 보면 자기 수레에 태우되, 만일 수레가 없으면 몸소 업어준다. 탐착한 자가 그 탐착으로 해서 고통받는 것을 보면 법을 말해 주어 그 탐고(貪苦)를 덜어주고, 진ㆍ에ㆍ치ㆍ의에 대해서도 역시 이렇게 한다. 길을 가는 사람이 지쳐 보이면 그 짐보따리를 대신 져주고 음료ㆍ평상과 이부자리 등 필요한 것을 베풀어 주며, 몸을 보살펴 주고 안마하여 준다.
그리고 즐겨 죄업을 짓는 중생을 보살이 보게 되면 법을 잘 말하여 주되, 좋은 말과 좋은 내용으로 어휘나 어맥(語脈)이 맞도록 하며, 차례에 따라 차근차근 말하여 선법을 증장하도록 설명을 충분하게 한다. 보리의 도를 장엄하고자 할 경우 선방편으로써 교화하여 악업을 깨뜨리며, 간탐(慳貪)한 자를 위해 간법(慳法)을 말하여 깨뜨리고 선법과 온갖 재물을 증장시킨다.만일 중생이 불법을 믿지 않으면 법을 잘 말하여 신심(信心)이 생기도록 하고, 중생이 가진 번뇌의 악업을 깨뜨려서 팔정도(八正道)를 얻도록 법을 말하여 준다.
그리고 보살이 보살계를 배우면 크게 서원(誓願)을 내어 중생의 모든 악과 사견(邪見)을 깨뜨려 준다. 은혜를 알아서 은혜에 보답하고, 참을성 있는 말과 부드러운 말로 먼저 물어보며, 사장(師長)ㆍ장로ㆍ유덕(有德)에게 공양드린다. 또한 사자ㆍ호랑이ㆍ물ㆍ불ㆍ왕난(王難)ㆍ원적(怨賊) 등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을 능히 깨뜨린다.만일 중생이 부모ㆍ형제ㆍ권속ㆍ처자ㆍ동복(僮僕)을 잃거나, 재물의 손실이 있거나,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게 되면 능히 방편을 써서 그에 맞게 법을 말하여 그 고뇌를 제거하며, 항상 중생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베풀어 준다. 이른바 의복ㆍ음식ㆍ방사(房舍)ㆍ와구(臥具)ㆍ병수의약(病瘦醫藥)ㆍ향화(香華)ㆍ영락(瓔珞)ㆍ등촉(燈燭) 같은 물건들이다.
만일 보살로서 보살계를 받아 지닌 자가 제자를 기르면서 이들을 잘 교화하여 설법ㆍ시도(示導)해서 탐ㆍ진ㆍ치 등을 조복하도록 하지 못하고, 의복ㆍ음식ㆍ방사ㆍ의약 등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어질고 후덕한 단월(檀越)을 구할 수 없다. 만일 단월을 위해 불법의 요체를 잘 말하면서 얻은 재물을 고르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이런 자는 당연히 명예를 위하는 것이지, 제자를 기른다 해도 법을 위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만일 수시로 설법하고 가르치되, 성(性)을 위하고 역(力)을 위하고 보살장(菩薩藏)을 위하며, 보살의 금계를 구족하여 팔정도(八正道)를 닦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한다면, 이것을 보살이 진정으로 제자를 기르는 것이며 명예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보살로서 보살계를 수학(受學)한 이는 먼저 중생의 성계(性界)를 보고 이를 알아야 하며, 그런 다음에 함께 거주하면서 성계를 전(轉)하여 응하는 대로 설법하고 뜻에 따라 공행(共行)한다. 그들을 조복시켜 갖가지 악을 짓지 못하게 하고, 악법을 깨뜨려서 선법을 중장하며,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혜시(惠施)한다. 악을 짓는 자를 보면 깊이 연민하고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깊이 비뇌(悲惱)한다. 자신이 지은 모든 악업 등에 대해서는 마음에 근심하지 않지만, 남들이 짓는 것을 보면 특별히 슬퍼하고 근심한다. 어째서인가? 보살이 자신의 신ㆍ구ㆍ의의 악업에 대해서는 대지인연력(大智因緣力)이 있어서 능히 신속하게 조복하고 마음을 열어서 참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보살이 남을 위해서도 역시 신ㆍ구ㆍ의의 악업을 조작하는데, 남들의 악업을 조복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남들의 마음을 따르려 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때로는 환락을 현수(現受)하는데 남들을 조복하기 위해서이다. 보살마하살이 남들을 위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찍이 취하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은 비록 중생을 따르더라도 경망하지 않으며, 웃지 않으며, 때리지 않으며, 욕하지 않으며, 나쁜 일은 말하지 않으며, 자신의 덕을 찬양하지 않고 남에게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 남을 친근하지도 않고 불친근하지도 않으며, 비록 친근히 하더라도 비시(非時)에는 하지 않는다. 남들이 사랑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잘못을 말하지 않으며, 사랑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찬탄하지 않는다.중생의 근기를 모르면 깊은 진리를 말하지 않으며, 따라 구걸하지 않고, 남들이 비록 많은 보시를 하더라도 응당 만족하게 여기고, 남의 공양을 받는 것을 마음에 감락(甘樂)하지 않는다. 항상 기꺼이 재물을 덜어서 남에게 공급하고, 언제나 기꺼이 남의 좋은 일을 찬탄한다.
금계(禁戒)를 범한 자에게는 계를 말하지 않고, 신심(信心)이 없는 자에게는 믿음을 찬탄하지 않으며, 탐심(貪心)이 있는 자에게는 혜시(惠施)를 찬탄하지 않으며, 독송을 기꺼워하지 않는 자에게는 다문(多門)을 찬탄하지 않으며, 어리석고 어두운 자에게는 지혜를 찬탄하지 않는다.만일 금계를 범한 자에게 계(戒)를 찬탄하면 기뻐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으며 분노와 수치심만 생긴다. 분노하기 때문에 불법과 이를 말하는 이에 대하여 크게 악심(惡心)이 생기고, 악심이 생기기 때문에 지옥을 증장한다.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와 같다면 중생에게 지옥의 인연을 베풀게 되는 것이므로 보살이라 하지 않는다. 수의설법(隨意說法)에서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로움을 찬탄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역시 모두 이와 같다.만일 보살이 크게 신족(神足)이 있다면 능히 그를 불신하는 자들을 위해 보살계를 말할 수 있다. 어째서인가? 이런 이는 능히 신통력으로 그들에게 열(熱)지옥ㆍ한(寒)지옥ㆍ대(大)지옥ㆍ소(小)지옥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의 말을 믿지 않는가? 이 악과(惡果)를 보라” 하고는 사람 가운데 조작하여 지옥을 받도록 한다. 그리고는 “네가 만일 이처럼 보살계를 믿지 않는다면 지금 다시 이와 같은 악과를 받게 된다”라고 한다. 그러면 그들 믿지 않던 자들이 이런 일을 눈앞에 보고는 놀라고 두려워서 곧장 신심(信心)이 생긴다.보살은 또한 그들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신통력을 써서 나찰상(羅刹像)을 나타내 보이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을 찾아내어 그 목숨을 끊어버리고자 한다. 믿는 자에 대해서는 당연히 호념(護念)하겠다.”
그러면 그들 믿지 않던 자가 이런 일들을 듣고 보고는 곧장 두려움이 생기게 되고 그 두려움 때문에 보살계를 믿게 된다.다시 신력(神力)으로 밀적상(密跡像)을 나타내어 금강저(金剛杵)를 잡고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보살계를 믿지 않는 자가 있다면 당장 그 머리를 깨뜨려 일곱 조각을 내겠다.”
그러면 그들 믿지 않던 자들은 이런 광경을 듣고 보고는 곧 두려운 마음이 생기며, 이 두려움 때문에 곧장 믿게 된다.
그리고 다시 신력(神力)을 써서 갖가지 몸을 만들되, 한 몸을 만들기도 하고 여러 몸을 만들기도 하며, 수목(樹木)이나 산하(山河) 같은 몸, 무애신(無礙身)ㆍ대신(大身)ㆍ소신(小身)을 만들기도 한다. 그 몸에서는 물이 나오고 불이 나온다. 그러면 그들 믿지 않던 자들이 이것을 보고는 묻는다.
“이런 광경들은 도대체 무슨 과보입니까?”
그러면 모두 보살계의 과보라고 대답한다. 그들이 다 듣고 나서는 보살계에 대하여 크게 신심이 생긴다.만일 신통력이 없으면서 그들 믿지 않는 자에게 보살계를 말하면 무량한 죄를 얻는다. 무량한 죄란 무량세를 두고 받는 것이다. 이것을 무량이라 한다. 비록 오역(五逆)이 있다 해도 아직도 이에 비유하기엔 부족하다. 어째서인가? 오역죄는 그래도 아사세왕(阿闍世王)처럼 이전이 가능하지만 그들 믿지 않는 자의 죄는 이전이 불가능하며, 오역죄는 기껏해야 일세(一世)를 가지만 믿지 않는 자의 죄는 무량세를 두고 받는다. 그래서 내가 비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설사 불물(佛物)ㆍ법물(法物)ㆍ승물(僧物)ㆍ현전승물(現前僧物)을 취하더라도 이러한 죄보(罪報)와는 역시 비교할 수 없다. 어째서인가? 이런 죄보는 기껏해야 일세를 가지만 믿지 않는 자의 죄는 무량세를 간다.
마치 십 항하(恒河)의 모래와 같이 많은 중생들이 보리심을 내는 것과 같다. 설사 어떤 이가 능히 이처럼 많은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퇴전(退轉)하게 하여 사견(邪見)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이런 죄보가 많지 않은 자의 죄에 비하여 아무런 차별이 없다. 다시 이런 많은 중생들을 모두 다섯 가지 지(地)에 주하게 하고, 가령 어떤 자가 그들의 눈을 모두 빼앗는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죄보는 비록 매우 큰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의 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그리고 또 어떤 이가 모든 부처님의 탑묘(塔廟)를 깨뜨리고 모든 불제자를 살해하고 모든 부처님의 경전을 불태워 버린다고 하더라도 이런 죄보가 크기는 하지만, 믿지 않는 자를 위해 보살계를 말하여 얻는 죄보가 또한 이것과 같다. 어째서인가? 인(因)을 따라 지옥을 낳으며 인을 따라 열반에 들기 때문이다. 말하는 자가 무량한 고통을 얻는 것에 인연한다. 이 때문에 말하는 자가 무량한 죄를 얻는 것이다. 비록 대중(大衆)인 무량한 중생을 맡아서 능히 인천(人天)의 선업과 신심(信心)을 내게 할 수 있다고 알아도, 이들 대중 속에 한 사람이라도 믿지 않는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역시 말할 수 없다. 이것을 보살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선계(善戒)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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