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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617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5권

by Kay/케이 2024.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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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5

 

 

보살선계경 제5권

구나발마 한역
최윤옥 번역

12) 인품(忍品)무엇을 일러 보살마하살의 성인(性忍)이라 하는가? 지혜의 힘이기에 능히 갖가지 고뇌 등을 견디어 낸다. 일체를 참는 것이 일체인(一切忍)이다. 일체인에는 연민이 있으므로 자비로운 마음[慈心]을 얻는다.
성인(性忍)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출가(出家)이고, 둘째는 재가(在家)이다. 재가와 출가에 모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들의 구타나 욕설 등을 능히 참는 것이며, 둘째는 모든 고통을 능히 스스로 참아 견디는 것이며, 셋째는 선법(善法)을 인내하고 즐기는 것이다.중생들의 구타나 욕설을 능히 참는다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혹시 중생들로부터 얻어맞거나 욕설을 들으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이 몸이 지은 악업에 인연하여 지금 이처럼 갚음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저들에게 화를 내겠는가? 나 또한 이러한 고통과 번뇌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금 만약 참지 않는다면 뒤에는 더더욱 많아질 것이다.치욕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을 고통스러운 번뇌에 인연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받은 몸과 번뇌는 중생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나의 허물이다. 만일 나쁜 일이 있을 경우,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 참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 스스로 짓는 것이다. 만일 스스로 짓는다면 응당 다시 생사의 고통을 스스로 받게 될 것이다. 몸이 만일 고통을 받게 된다면 참지 않겠는가?
성문이나 연각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하면서도 오히려 인욕(忍辱)을 닦아 쌓아서[修集] 하는데, 하물며 내가 지금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려고 하면서 어떻게 참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만일 참지 않는다면 보살의 금계(禁戒)를 구족(具足)하여 팔정도(八正道)를 닦아 쌓아서 무상도(無上道)를 얻지 못한다.’보살마하살이 이러한 관점을 가질 때에 다섯 가지의 인(忍)을 닦는다. 그 첫째는 원한[怨]과 친근함[親], 원한도 친근함도 아닌 것 중에서 인(忍)을 수행하는 것이며, 둘째는 상ㆍ중ㆍ하의 사람들에게서 인을 닦아 쌓는 것이며, 셋째는 수고를 받는 사람[受苦]ㆍ즐거움을 받는 사람[受樂]ㆍ고통도 받지 않고 즐거움도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인을 수집하는 것이며, 넷째는 복덕(福德)이 있는 사람ㆍ복덕이 없는 사람ㆍ복덕이 있는 것도 아닌 사람ㆍ복덕이 없는 것도 아닌 사람들에게서 인을 닦아 쌓는 것이며, 다섯째는 모든 종류의 악인(惡人) 중에서 인을 닦아 쌓는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인(忍)을 성취하려면 다섯 가지 생각[想]을 수집한다. 그 첫째는 중생이라는 생각[衆生想]이고, 둘째는 법이라는 생각[法想]이며, 셋째는 무상하다는 생각[無常想]이고, 넷째는 괴롭다는 생각[苦想]이며, 다섯째는 나와 나의 것이 없다는 생각[無我我所想]이다.보살이 저들 악인으로부터 얻어맞았을 경우, 어떻게 그가 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는가? 보살은, 과거세에 생사를 유전하였기 때문에 공경하고 공양해야 할 부모나 사장(師長)ㆍ화상(和上)ㆍ권속(眷屬)ㆍ친족이 아닌 중생이 없다는 것을 자세히 관찰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되면 원망하고 증오하는 생각은 사라지고 친한 벗이라는 생각이 생긴다. 친한 벗이라는 생각이 생기면 능히 인을 닦아 쌓는다. 이럴 때에 중생이라는 생각을 성취한다.
법이라는 생각은, 중생이란 그 이름이 법계(法界)이며 유위법(有爲法)이며 유루법(有漏法)이라는 것을 보살이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계가 다시 법계를 마주한 것인데 누구를 때리며 누구에게 화를 내겠는가?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고, 수명[壽]도 목숨[命]도 없고 대사(大士)도 범부(凡夫)도 없다. 지혜의 힘을 써서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보게 되면 중생이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법상을 성취하게 된다.무상하다는 생각이란, 보살이 모든 중생과 모든 유위법과 유루법이 한결같이 항상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무상인데 욕을 하는 자는 누구이며 욕을 먹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만일 욕을 하는 자나 먹는 자로 하여금 잠깐 멈추어 머물게 한다면 모든 법이 무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항상하는 것[常]이라면 누가 욕을 하고 누가 욕을 먹는단 말인가? 항상하는 것이든 항상하지 않는 것[無常]이든 간에 모두 이런 주고받음의 두 가지는 없다. 모든 것에 주고 받음이 없으므로 당연히 자그마한 악한 마음도 생길 수 없는데 어떻게 때리고 욕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보살은 항상하다는 생각을 깨뜨리고 무상하다는 생각을 닦으며, 능히 무상하다는 생각을 닦아 쌓으므로 인심(忍心)을 성취하고, 인심을 성취한 까닭에 보리도(菩提道)를 닦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 얻는다.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괴로움이라는 생각을 닦아 쌓는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관찰한다.
‘만일 욕계(欲界)의 중생이 대자재(大自在)함을 얻으려 한다면 전륜왕처럼 재물이 풍요로운 요재거부(饒財巨富)도 세 가지 고통이 있는데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삼고란 부변고(復變苦)ㆍ생사고(生死苦)ㆍ고고(苦苦)를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설사 중생에게 이런 세 가지 고통이 있다 해도 나는 당연히 성내지 않는다. 만일 내가 성을 낸다면 어떻게 저들 중생의 세 가지 고통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내가 만일 성을 낸다면 그것은 중생의 세 가지 고통을 증장(增長)하는 것이 된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즐겁다는 생각[樂想]은 사라지고 괴롭다는 생각[苦想]이 생긴다. 능히 괴롭다는 생각의 인연을 닦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팔정도(八正道)를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나도 없고 나의 것도 없다는 생각[無我無我所想]을 닦아 쌓는다고 하는가? 보살은 자세히 관찰한다.
“모든 외도(外道)들은 나라는 자체는 항상한 것이라고 설한다. 만일 나라는 실체가 항상한 것이라면 중생에게는 내가 없다. 어째서인가? 중생은 곧 오음(五陰)이기 때문이다. 오음은 항상함이 없다. 만일 내가 없다면 어떻게 나를 있게 하는 것[我所]이 있겠는가? 따라서 나도 없고 나의 것도 없다.”보살은 다시 이렇게 본다. 아(我)란 곧 보리심(菩提心)이라고. 보살이 처음 보리심을 발할 때 중생에 대하여 일자(一子)라는 마음을 가지는데 이것을 아소라 한다. 그리고 ‘만일 내가 저들에게 성을 낸다면 어떻게 아가 있고 아소가 있다고 하겠는가? 내가 만일 성내는 마음을 증장(增長)한다면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보아 인(忍)을 성취해서 나도 없고 나를 있게 하는 것도 없다는 마음을 증장하여 무아상을 얻는다. 이런 인연으로 하여 팔정도를 닦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능히 중생의 구타와 매 등의 고통을 인내한다고 하는가? 이럴 때에 보살은 다시 이렇게 관찰한다.
‘나는 과거에 다섯 가지 욕심[欲]으로 해서 온갖 고통을 실컷 받았다. 집에서는 일을 하고 밭을 갈아 농사를 짓느라고 갖가지 고통을 받았으며, 군주 가까이서는 물건을 사고 팔며 장사를 하느라고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때 나는 비록 이러한 갖가지 큰 고통을 받았으나 이익은 얻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고뇌를 받는다면 당연히 이익을 얻는다. 그러니 내가 만일 큰 이익을 얻으려 한다면 당연히 계산할 수 없는 무량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이렇게 서원(誓願)할 경우 보살은 능히 온갖 고통을 견디어 참아내는데 이렇게 받는 고통을 일체고(一切苦)라 한다.
일체고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의고(依苦)이고, 둘째는 세법고(世法苦)이며, 셋째는 위의고(威儀苦)이고, 넷째는 섭법고(攝法苦)이며, 다섯째는 걸식고(乞食苦)이고, 여섯째는 정진고(精進苦)이며, 일곱째는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고통이고, 여덟째는 영사고(營事苦)이다.
의고는 이름을 네 가지 의고(依苦)라 한다. 비구가 사의를 받은 뒤 출가하여 계(戒)를 받으면 구족비구(具足比丘)라는 이름을 얻는다. 적은 밥과 적은 옷, 와구(臥具)와 병을 고치는 약을 얻으면서도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후회하는 마음 없이 능히 허물어지는 것이 괴롭다는 마음[壞苦心]을 닦아 쌓아 나가면 팔정도(八正道)를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이것을 의고라 한다.세법고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통[求不得苦]이고, 둘째는 악성고(惡聲苦)이며, 셋째는 현대악법고(現對惡法苦)이고, 넷째는 고고(苦苦)이며, 다섯째는 잃어버릴까 두려운 고통[亡失苦]이고, 여섯째는 사물이 다하는 것에 대한 고통[物盡苦]이며, 일곱째는 늙는다는 고통[老苦]이고, 여덟째는 몸이 아픈 고통[病苦]이며, 아홉째는 죽음에 대한 고통[死苦]이다. 이것을 세법고라 한다.보살이 이 같은 아홉 가지 고통을 받을 때에 근심하거나 번뇌하지 않으며, 마음으로 후회하지 않고, 무상(無上)한 보리의 마음을 폐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기 때문에 보리심을 증장하고, 보리심이 증장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위의고(威儀苦)는 몸의 네 위의를 말한다. 그 첫째는 행(行)이고, 둘째는 주(住)이며, 셋째는 좌(坐)이고, 넷째는 와(臥)이다. 보살이 걷거나 앉거나 할 때에 밤낮으로 항상 악업을 짓는 마음을 조복(調伏)하여 행좌(行坐)의 고통을 참는다. 때가 아니면 눕지 않고 때가 아니면 머물지 않는다. 안이나 밖에서 머무는 곳은 평상이나 땅이나 풀이나 낙엽이다. 이러한 네 곳에서 항상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에 대하여 공양하기를 염(念)한다. 경법(經法)을 찬탄하고 금계(禁戒)를 받아 지니며 무상법(無上法)을 보호하고 지켜 널리 중생을 위하여 설한다. 진리를 바르게 사유(思惟)하고 법에 설한 대로 머무르며, 법계(法界)를 분별하여 사마타(舍摩他)와 비바사나(毘婆舍那)를 닦는다. 보살이 이와 같이 법을 닦을 때에 설사 많은 고통이 있더라도 기꺼이 견뎌내면서 참고 받아들인다. 이것을 위의고(威儀苦)라 한다.섭법고(攝法苦)에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몸에서 먹을 것을 좋아하는 마음[飾好]을 버리는 것이며, 둘째는 수염과 머리카락을 깎아 없애는 것이며, 셋째는 가사를 입는 것이며, 넷째는 모든 세간사에 대하여 자재함을 얻지 않고 남에게 명속(命屬)시키는 것이며, 다섯째는 생활[活命]을 걸구(乞求)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생업(生業)에서 멀리 떠나 욕심을 줄이고 만족함을 아는 것이며, 일곱째는 친족과 다섯 가지 욕심의 즐거움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이것을 섭법고라 한다.걸구하는 고통은 신상(身上)에 이바지하는 물건인 의복ㆍ음식ㆍ방사(房舍)ㆍ와구(臥具)ㆍ병을 고칠 의약(醫藥) 등 일체를 남으로부터 구하되, 얻지 못한다고 하여 불만을 갖지 않고 얻으면 만족하게 여겨서, 수명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욕심ㆍ기악(伎樂)ㆍ익살[戱笑]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이러한 고통을 인내한다. 이것을 걸식고(乞食苦)라 한다.정근고(精懃苦)는 보살이 정근하여 삼보에 공양하고 보살의 장경(藏經)을 받아 지녀 독송(讀誦)하며, 이를 베껴 쓰고 해설해서 그 뜻을 생각하되, 밤낮으로 중단하지 않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정진(精進)해서 성도(聖道)를 닦아 쌓는 것이다. 정진하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견디어 낸다. 이것을 정진고(精進苦)라 한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한 고통이란 위에서 내외(內外)를 이롭게 하는 열한 가지 일에서 설한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을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고통이라 한다.영사고(營事苦)는 발우를 씻고, 옷을 꿰매고, 물감을 들이고, 빨래를 하며, 여러 스님들이 일을 해서 사장(師長)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만일 공양을 하려면 불상(佛像)과 탑(塔)을 닦고 쓴다. 선법을 위하는 것이므로 결코 쉬지 않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기 때문에 갖가지 고통도 참는다. 이것을 영사고라 한다br/>인요선법고(忍樂善法苦)에 여덟 가지의 인(忍)이 있다. 삼보가 가진 공덕을 받아들이는 인이며, 불보살의 불가사의인(不可思議忍)이며, 인인(因忍)이며, 과인(果忍)이며, 선방편인(善方便忍)이다. 불보살의 성품에 다시 두 가지 인이 있으니, 첫째는 구경인(究竟忍)이고, 둘째는 정지혜인(淨智慧忍)이다. 이것을 법인(法忍)이라 한다.어떤 것을 일러 보살의 난인(難忍)이라 하는가? 난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량한 중생이 보살을 때리고 욕하더라도 보살이 능히 참는 것이며, 둘째는 보살이 자재(自在)한 힘이 있어야 능히 때리고 욕할 수 있지만 참고 받아들이고 갚음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보살이 호귀(豪貴)한 종족에 처해 있으면서도 능히 참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어떤 것을 일러 일체자인(一切自忍)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원한[怨]ㆍ친함[親] 중이나 원한도 친함도 아닌 것[非怨親] 중에서 참는 것으로 하인(下忍)ㆍ중인(中忍)ㆍ상인(上忍)이 있으니, 이것을 일체자인이라 한다.선인인(善人忍)에 다섯 가지의 인을 아는 공덕[知忍功德]이 있으니, 첫째는 악한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마음이 어지러운 것을 꺾어 가라앉히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에 근심과 번뇌가 없는 것이며, 넷째는 죽을 때에 회한이 없는 것이며, 다섯째는 죽은 뒤에 천인(天人)의 즐거움을 받는 것이다. 보살은 인(忍)에 이와 같은 공덕이 있음을 보기 때문에 중생을 교화하여 인을 실천하도록 하며, 또한 스스로 인을 닦아 증장시키고, 인욕을 찬탄하며, 인을 실천하는 자를 보면 공경하고 존중하며, 찬탄하여 예배한다. 이것을 선인인이라 한다.일체행인(一切行忍)은 보살마하살이 참지 않는 자[不忍者]가 가지고 있는 과악(過惡)을 보는 것이다. 무엇을 일러 나쁜 과보라 하는가? 능히 삼악도(三惡道)를 얻는 것을 말한다. 악도(惡道)가 두렵기 때문에 응당 인(忍)을 수행한다. 연민하기 때문에 참으며, 자비심을 닦기 위해 참으며, 부드러운 마음을 위해 참으며, 중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참으며, 지극한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기 때문에 참으며, 찬제(提)바라밀을 구족하기 위해 참으며, 출가(出家)했기 때문에 참으며, 수계(受戒)했기 때문에 참으며, 성품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참으며, 무량세인(無量世忍)을 수집하기 위해 참으며, 인성(忍性)을 얻기 위해 참으며, 무애무진(無愛無瞋)을 얻기 위해 참으며, 법계(法界)를 보기 위해 참으며, 중생계를 보기 위해 참는다. 일체시(一切時)를 참으며, 일체국(一切國)을 참으며, 일체심(一切心)을 참는다. 이것을 일체행인이라 한다.제인(除忍)은, 만일 가난한 자가 자주 보살을 찾아와 필요한 것을 구걸하며 찾거나, 또는 악인이 찾아와 역시 구걸하며 찾거나, 또는 파계한 자가 다시 찾아와 구걸하며 찾으면, 악심을 깨뜨리고 인심(忍心)을 수집하는 것이다. 파고(破苦)를 위하기 때문에 낙사(樂事)를 혜시(惠施)한다. 이것을 제인이라 한다.자리이타인(自利利他忍)은 보살이 기갈(飢渴)ㆍ한열(寒熱)ㆍ풍우ㆍ악수(惡狄)를 인내하면서 끝내 방일하지 않고, 생사의 고통을 받으면서 중생을 연민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인(忍)을 얻으면, 현재의 모든 선법을 증장하여 멀리 번뇌를 떠나서 다른 세상[他世]에 무량한 선한 과보를 얻으며, 중생의 모든 악한 마음을 조복한다. 악한 마음을 조복하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그 편의를 얻지 못하며, 현재에 안락하고 후세에 선한 과보를 얻는다. 이것을 자리이타인이라 한다.적정인(寂靜忍)은 보살이 만일 모든 악한 중생들로부터 얻어 맞거나 욕설을 들을 경우, 저들에 대하여 끝내 악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며, 원망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좋은 벗이라는 생각을 짓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악인(惡人)들이 없다면 나의 선법(善法)을 어떻게 증장시키겠는가? 욕하는 자를 보면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고 타일러 달래고, 자비심을 닦아서 능히 욕계(欲界)의 번뇌를 깨뜨린다.
이상과 같은 십인(十忍)을 구족한 보살은 능히 팔정도(八正道)를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13) 정진품(精進品)어떤 것을 보살의 성정진(性精進)이라 하는가? 성정진은 심근정진(心懃精進)이다. 선법(善法)을 붙들어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중생에게 무상도(無上道)를 얻게 하는 것이며, 전도(顚倒)를 깨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성정진으로 해서 신(身)ㆍ구(口)ㆍ의(意)의 삼업(三業)이 선해진다. 이것을 성정진이라 한다.
일체정진(一切精進)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世]이고, 둘째는 세간을 벗어나는 것[出世]이다.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재가(在家)이고, 둘째는 출가(出家)이다. 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장엄(莊嚴)이고, 둘째는 선법을 섭취하는 것이며, 셋째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장엄이란 보살마하살이 처음 발심(發心)할 때에 열심히 정진하는 장엄이다. 내가 만일 한 사람을 능히 해탈시킬 수 있으려면 무량겁 동안 지옥에서 크나큰 고통을 받아야 한다. 크나큰 고통을 받은 다음이라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보리를 얻고 나서 한 사람을 해탈시킬 수 있게 되기까지에도 역시 지옥의 고뇌를 겪으며 마음이 휴식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장엄이라 한다.
보살이 장엄을 구족하여 정진하면 성문이나 연각이 얻는 모든 공덕을 이기는 것이니, 이 공덕은 다 헤아릴 수 없다. 어째서인가?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 큰 고뇌를 받기 때문이다. 혹시 한 사람을 위해서 큰 고뇌를 받는다 해도 오히려 무량무변한 공덕을 얻는데 더구나 모든 중생을 위함이겠는가? 이것을 보살의 장엄정진(莊嚴精進)이라 한다.선법을 섭취하는 근정진(懃精進)이란 단(檀)바라밀ㆍ시(尸)바라밀ㆍ찬제(提)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반야(般若)바라밀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근정진을 부동(不動)이라 하는 것은 모든 번뇌와 모든 악업과 모든 잘못된 견해[邪見]와 모든 고뇌에 기울어져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또 견고(堅固)하다 하는 것은 강건하게 장엄[健莊嚴]하기 때문이다. 또 일체(一切)라 하는 것은 세간의 방술(方術)과 출세간의 법을 알기 때문이다. 또 구족방편(具足方便)이라 하는 것은 진실한 인연으로 도(道)를 닦아 쌓기 때문이다. 또 진실이라 하는 것은 진실한 진리[義]를 얻었기 때문이다. 또 광(廣)이라 하는 것은 모든 때 중에서 휴식이 없기 때문이다. 또 조복한다고 하는 것은 근수정진(懃修精進)하여 교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곱 가지가 선법을 증장한다. 이것을 선법을 섭취하는 정진[攝取善法精進]이라 한다. 열심히 정진하기 때문에 육바라밀 근정진법(懃精進法)을 구족한다. 모든 향하여 나아가는 보리법 중에서 이것이 무상무승(無上無勝)의 인연에 가깝다. 그래서 여래가 경(經) 중에서 설하기를, “아난(阿難)이여, 근정진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신속하게 얻게 한다”고 하였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근정진에 열한 가지가 있으니, 계(戒) 중에서 설한 바와 같다.난정진(難精進)은, 보살마하살이 옷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며, 법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며, 잠자리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며, 나라는 생각[我想]을 짓지 않으며, 나를 있게 한다는 생각[我所想]을 짓지 않으며, 법이라는 생각[法想]을 짓지 않으며, 도라는 생각[道想]을 짓지 않으며, 보리라는 생각[菩提想]을 짓지 않고, 또한 보리를 위하여 근수정진하는 것이다. 이것을 난정진이라 한다. 모든 때ㆍ모든 나라ㆍ모든 마음에서 근수정진한다. 이것이 또한 난(難)이다. 급하지도 않고 느긋하지도 않은 곳에서 실천한다. 이것을 난정진이라 한다.
난정진에 두 가지의 인(因)이 있으니 첫째는 비(悲)이고, 둘째는 혜(慧)이다.일체자정진(一切自精進)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악업에서 떠나는 것이며, 둘째는 선법을 늘리는 것이며, 셋째는 선법을 빛나게 닦는 것이며, 넷째는 지혜를 늘리는 것이다.
악법에서 떠난다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부지런히 닦아 정진하면 악법이 생기지 않는 것인데, 열심히 방편을 지어서 생기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선법을 늘린다는 것은 이미 생긴 선법을 방편을 써서 늘리고 넓히는 것이다.
선법을 빛나게 닦는다는 것은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의 인연을 열심히 닦아 지극한 마음으로 생각을 다잡아서 선법을 받아들여 이를 지키는 것이다.
지혜를 늘린다는 것은 만일 보살이 열심히 닦아 정진할 경우, 불법(佛法)을 많이 듣고 선정[定]을 닦아서 지혜를 늘리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일체자정진이라 한다.선인정진(善人精進)이란 보살이 선법을 위하기 때문에 열심히 정진할 때에 설사 몸이 불에 타더라도 뜨거워하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선법을 닦을 때에, 열심히 정진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지옥 불의 뜨거움조차도 느끼지 못하는데, 더구나 세간의 불이겠는가?
보살은 정진을 하는 데 있어 많게도 하지 않고 적게도 하지 않으며 평등하게 실행한다. 정진을 늘림에 있어 잘 조복(調伏)하여 제어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의 청정함 때문이며, 쉼없이 마음에 후회하지 않으려는 까닭이며, 크나큰 이익을 얻어서 전도(顚倒)되지 않으려는 까닭이며, 필경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려는 까닭이다. 이것을 선인정진이라 한다.일체행정진(一切行精進)이란, 항상 열심히 정진하는 것이며, 지극한 마음으로 정진하는 것이며, 지혜로 정진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이며, 장엄하게 정진하는 것이며, 고뇌를 참고 정진하는 것이며, 동요함이 없이 정진하는 것이며, 시도 때도 없이 정진하는 것이며, 만족한 줄을 모르고 정진하는 것이다.
보살이 일체행정진을 성취하는 것을 대력(大力)이라 한다.항상 열심으로 정진하는 것은 편안하게 선정에 머물러 좋은 곳에 처해서 굳건하게 장엄하여 쉬거나 그치는 일이 없이 선법을 얻으려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진하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까닭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정진하고자 하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보리심을 늘리려는 까닭이다.
방편심(方便心)으로 정진하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그의 마음을 모든 번뇌의 때로 더럽히지 않고, 몸을 도구로 삼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려는 까닭이다.승(勝)정진은 보살마하살이 선법을 위하여 몸을 태우는 불조차도 구제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보살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을 이긴다.
구(求)정진은 보살마하살이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모든 방술(方術)을 구하는 것이다.
학(學)정진은 보살마하살이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신속히 얻으려는 것이다.
이타(利他)정진은 보살마하살에 열한 가지가 있으니 지계품(地戒品)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 범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범했다 하더라도 참회해야 한다.
제(除)정진 및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정진은 인(忍)에서 설한 것과 같다.적정(寂靜)정진에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의(宜)이며, 둘째는 닦아 쌓는 것[修集]이며, 셋째는 동요하지 않는 것[非動], 넷째는 굳건히 지키는 것[堅持]이며, 다섯째는 일체시(一切時)이며, 여섯째는 세 가지 상을 연유하는 것[緣三相]이며, 일곱째는 평정[捨]이며, 여덟째는 산란하지 않은 것[不散]이며, 아홉째는 조어(調御)이며, 열째는 보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만일 어떤 번뇌가 일어나면 보살은 그 병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하여 증상에 따라 대치(對治)한다.
예를 들어 탐욕이 일어나면 그것이 부정(不淨)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며, 분노와 증오심이 일어날 때는 자비의 마음[慈心]을 닦으며, 미련한 마음이 생기면 십이인연에 대하여 관찰하며, 잡념이 일 때는 아나파나(阿那波那:호흡을 세어서 마음을 통일하는 觀法)의 관법으로 다스린다.
교만함을 깨뜨리려면 중생계(衆生界)를 본다. 이것을 의(宜)정진이라 한다.보살의 정진은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끝나는 것도 아니며, 한량없는 세간에서 끊임없이 성취한다. 이것을 닦아 쌓는 정진이라 한다.
보살은 정진을 함에 있어 항상 열심히 닦아서 언제나 처음처럼 한다. 이것을 움직이지 않는[非動] 정진이라 한다. 모든 시간을 통해서 열심으로 정진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정진이라고 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언제나 사장(師長)과 학덕 있는 연장자[耆宿], 덕망있는 이를 친근히 하여, 닦아서 배우고 많은 것을 들으며, 삼매(三昧)를 닦을 때는 그 뜻에 대하여 생각하며, 열심으로 정진을 실천하고, 순응하여 따르는 마음으로 듣고 받아들인다. 이것을 견지(堅持)정진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의 마음이 전도(顚倒)되지 않아서 사마타(舍摩他:止息)를 닦아야 할 때는 사마타를 닦고, 비바사나(毘婆舍那:觀察)를 닦아야 할 때는 비바사나를 닦고, 사(捨:平靜)를 닦아야 할 때는 사를 닦는다. 이것을 일체시(一切時)정진이라 한다.보살이 정(定)ㆍ혜(慧)ㆍ사(捨)를 잘 알아서 세 가지 모양을 닦아 쌓으니 들어오는 모양[入相]ㆍ머무르는 모양[住相]ㆍ일어나는 모양[起相]이다. 바른 생각을 잃지 않고 지극한 마음으로 열심히 정진한다. 이것을 세 가지 모양에 연유하는 정진[緣三相精進]이라 한다.
보살이 만일 여러 부처와 보살의 부지런한 정진에 대하여 들으면 불가사의하게 느끼고, 듣고 나서는 스스로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근심하고 번뇌하지 않으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것을 사(捨)정진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때때로 모든 근(根:威受機能)과 모든 입(入:感受領域)을 조복(調伏)하여 음식을 만족하게 여기고 초야(初夜:人定, 저녁)와 후야(後夜:鷄嗚, 새벽)에 잠을 줄이고, 지극한 마음으로 산란함이 없이 방일(放逸)하지 않고 장엄을 추구하여 열성적인 정진을 발휘한다. 그리하여 진실의 뜻을 닦아서 마음의 전도(顚倒)함이 없이 이치에 순응하여 도(道)를 닦는다. 이것을 부산(不散)정진이라 한다.
보살은 정진을 급하게도 완만하게도 하지 않으며, 일을 함에 있어서 중도(中道)의 방법으로 행한다. 이것을 조어(調御)정진이라 한다.보살의 정진은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회향(廻向)한다. 보살마하살이 성(性)정진에서 적정(寂靜)정진을 닦는 데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기 때문에 이것을 일체(一切)정진이라 한다.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회향한다는 것은 과거세의 모든 보살이 가졌던 정진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며, 미래세의 모든 보살이 가질 정진이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며, 현재세의 모든 보살이 지극한 마음으로 방일함이 없이 가지는 정진이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정진[趣向精進]이라 한다.
14) 선품(禪品)무엇을 일러 보살마하살의 성선(性禪)이라 하는가?
보살이 만일 보살 법장(法藏)을 들으면 그 뜻을 생각하고, 세간선(世間禪)과 출세간선에서 마음을 한 곳에 고정하여 선정과 지혜를 균등하게 나누어 도(道)를 닦아 쌓는다. 이것을 성선(性禪)이라 한다.일체선(一切禪)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이고, 둘째는 출세간이다. 이 두 가지에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선에 든 현재에 즐거움을 받는 것이고, 둘째는 선에 들어 보리를 늘리는 것이며, 셋째는 선에 들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현재에 즐거움을 받는다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모든 의혹의 그물[疑網]을 깨뜨리고 몸과 마음이 적정(寂靜)하여 즐거움을 멀리 여읨[遠離樂]을 받아들여 모든 교만을 깨뜨리는 것이다. 맛에 탐착(貪着)하지 않고 모든 상(相)을 떠난다. 이것을 선에 든 현재에 즐거움을 받는다[入禪現在受樂]고 한다.선에 들어 보리를 늘린다는 것은 보살마하살의 선정에 갖가지 연(緣)이 있는 바, 사유할 수 없으며, 계산할 수 없으며, 한량이 없는 것이다. 십력성(十力性)을 붙잡아서 갖가지 삼매를 얻는다. 이러한 삼매는 모든 성문과 벽지불 등이 아직 그 이름도 모르는데 더구나 이를 수집할 수 있겠는가? 또한 공법(共法)이 있으니, 이른바 팔승처(八勝處)ㆍ십일체처(十一切處)ㆍ사무애지(四無礙智)ㆍ원지(願智)ㆍ무쟁지(無諍智)ㆍ정지(頂智)로서, 이와 같은 공유(共有)의 법을 늘리기 때문에 이것을 선에 들어 보리를 늘린다[入禪增長菩提]고 한다.선에 들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데는 열한 가지가 있으니, 「지계품」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열한 가지의 선을 닦아서 구족(具足)하면 능히 중생을 교화하여 고통과 번뇌를 깨뜨린다.
선법(善法)의 갖가지 지혜를 닦아서 은혜를 알아 은혜를 보답하며, 능히 중생의 갖가지 고뇌를 구제하고, 모든 필요로 하는 물건을 혜시(惠施)한다. 방편을 잘 알아서 능히 제자를 기르며, 제자로 하여금 뜻하는 대로 받아들여 실천하게 한다.
이러한 여러 선정을 일체선이라 한다.난선(難禪)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살마하살이 선정에 들 때에 받는 쾌락이 모든 세간의 즐거움과 출세간의 즐거움보다 뛰어나지만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고 욕계(欲界)의 몸을 받는 것이다.
둘째는 보살마하살이 선정을 닦되, 한량없고 가없는 아승기(阿僧祇)와 같이 생각할 수 없고 셈할 수도 없이 삼매를 닦는 것이다. 모든 성문과 벽지불 등은 능히 그 들어간 경계를 알지 못한다.
셋째는 보살마하살이 선인연(禪因緣)으로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이것을 난선이라 한다.일체자선(一切自禪)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공각관(共覺觀)이고, 둘째는 공희(共喜)이며, 셋째는 공락(共樂)이고, 넷째는 공사(共捨)이다. 이것을 일체자선이라 한다.
선인선(禪人禪)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애(無愛)이고, 둘째는 공자(共慈)이며, 셋째는 공비(共悲)이며, 넷째는 공희(共喜)이며, 다섯째는 공사(共捨)이다. 이것을 선인선이라 한다.일체행선(一切行禪)에 열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선무기(善無記)이고, 둘째는 신족(神足)이며, 셋째는 취사마타(趣舍摩他)이며, 넷째는 취비바사나(趣毘婆舍那)이며, 다섯째는 자리(自利)이며, 여섯째는 이타(利他)이며, 일곱째는 다섯 가지 신통한 공덕선(功德禪)을 얻는 것이며, 여덟째는 사인연(辭因緣)이며, 아홉째는 의인연(義因緣)이며, 열째는 사마타상인연(舍摩他相因緣)이며, 열한째는 비바사나상인연(毘婆舍那相因緣)이며, 열두째는 사상(捨相)인연이며, 열셋째는 현재에 즐거움을 받는 행(行)의 인연이다. 이것을 일체행선이라 한다.제선(除禪)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살이 삼매에 들어 능히 중생의 갖가지 고통의 독(毒)인 이른바 폭풍ㆍ우박ㆍ눈ㆍ비ㆍ열병ㆍ귀병(鬼病) 같은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을 선(禪)이라 한다. 둘째는 만약 삼매에 들 경우 능히 중생의 몸이 가진 네 가지 큰 조적(調適:조화롭고 쾌적함)하지 못한 고통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을 선이라 한다. 셋째는 만약 삼매에 들 경우, 능히 심한 가뭄으로 기근이 들게 된 세상에 단비를 내려주는 것이다. 이것을 선이라 한다. 넷째는 만약 삼매에 들 경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갖가지 두려움인 이른바 사람에 대한 두려움, 귀신에 대한 두려움, 물에 대한 두려움, 땅에 대한 두려움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선이라 한다. 다섯째는 만약 삼매에 들 경우 능히 광야에서 굶주리는 중생에게 물ㆍ간장ㆍ음식과 필요한 물건을 베푸는 것이다. 이것을 선이라 한다. 여섯째는 만약 삼매에 들 경우 능히 가난하고 고생하는 자들에게 갖가지 필요한 물건을 베푸는 것이다. 이것을 선이라 한다. 일곱째는 만약 삼매에 들 경우 능히 시방 중생의 방일(放逸)함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것을 선이라 한다. 여덟째는 만일 삼매에 들 경우 능히 중생의 갖가지 의혹의 그물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것을 선이라 한다. 이상의 것을 제선(除禪)이라 한다.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선[自利利他禪]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신족(神足)을 인하여 선에 들기 때문에 중생을 조복(調伏)하는 것이다. 둘째는 타심지(他心智)를 인하여 선에 들기 때문에 중생을 조복하는 것이다. 셋째는 진실설(眞實說)을 인하여 선에 들기 때문에 중생을 조복하는 것이다. 넷째는 악한 중생을 위하여 이들에게 지옥의 고통을 보여 주려고 선에 드는 것이다. 다섯째는 벙어리가 된 자에게 말을 하도록 하려고 선에 드는 것이다. 여섯째는 생각을 잃어버린 자에게 생각을 하게 하려고 선에 드는 것이다. 일곱째는 십이부경(十二部經)과 보살법장(法藏)과 보살마이(摩夷:行母)를 이치에 따라 해설하여 법을 위해 오랫동안 머물게 하려고 선에 드는 것이다. 여덟째는 능히 중생의 갖가지세간의 일인 서소(書疏)ㆍ산수(算數)ㆍ독송(讀誦)ㆍ서인(書印)ㆍ금장(金匠)ㆍ목장(木匠)ㆍ와장(瓦匠) 같은 것을 가르치려고 선에 드는 것이다. 아홉째는 큰 광명을 베풀어서 세 가지 악한 세계 중생의 고뇌를 깨뜨리기 위해 선에 드는 것이다. 이것을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선이라 한다.적정선(寂靜禪)에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법적정정(世法寂靜淨)이고, 둘째는 출세법(出世法)적정정이고, 셋째는 방편(方便)적정정이고, 넷째는 근본(根本)적정정이고, 다섯째는 상(上)적정정이고, 여섯째는 입(入)적정정이고, 일곱째는 주(住)적정정이고, 여덟째는 기(起)적정정이고, 아홉째는 자재(自在)적정정이고, 열째는 번뇌지혜이장(煩惱智慧二障)적정정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의 적정정을 정선(淨禪)이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은 열 가지 선을 닦아 쌓으면 한량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여 위가 없는 보리의 과보[菩提果]를 얻는다. 그래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보살들이 모두 이 선을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15) 혜품(慧品)무엇을 일러 보살의 성혜(性慧)라 하는가? 모든 지혜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법계(法界)를 분별한다. 이것을 성혜라 한다.
또 잘 배우기 위한[善學] 다섯 가지 방술로써 이른바 내방술(內方術)ㆍ인론(因論)ㆍ성론(聲論)ㆍ의방(醫方)ㆍ일체세사(一切世事)가 있는데, 이것을 성혜라 한다.일체혜(一切慧)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의 것이며, 둘째는 출세간의 것이다.
이 두 가지에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실상과 같은 여실(如實)을 알며, 다섯 가지 방술(方術)을 알며, 삼취(三聚:근기에 따른 중생의 세 가지 부류)의 중생을 알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방편을 알며, 법계를 설한 수 없음을 알며, 네 가지 진제[四眞諦]와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든 법계에 대한 각관(覺觀)이 없으며, 모든 법계(法界)를 보아 마음에 평등하고, 버림도 아니고 집착도 아니며,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끊어지는 것도 아닌 중도(中道)를 설한다. 이것을 지혜라 한다.
둘째는 세간의 일과 출세간의 법을 아는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기 때문에 이를 지혜라 한다. 셋째는 깊이 법계를 관찰하여 분별해서 풀어 설하는 것이다. 중생의 이익을 위하기 때문에 이를 지혜라 한다.
이런 것을 일체혜(一切慧)라 한다.난혜(難慧)에 열한 가지가 있으니, 「지계품」 중에 설한 것과 같다. 중생을 조복(調伏)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잘 안다. 이것을 난혜라 한다. 모든 법계에 장애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을 난혜라 하며, 모든 중생을 위하여 깊이 법계를 설하는 것을 난혜라 하며, 나[我]가 없다는 것과 나의 것[我所]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을 난혜라 한다.
일체자혜(一切自慧)란, 능히 성문법장(聲聞法藏)과 보살장을 받아 지녀 이를 읽어 외우고 해설할 경우 수지(修智)를 얻고 수지로 해서 지혜의 힘을 얻으며, 지혜의 힘으로 해서 닦을 만한 것과 닦을 수 없는 것, 지을 만한 것과 지을 수 없는 것을 알아서 지극한 마음으로 한량없는 일을 본다. 이것을 일체자혜라 한다.선인혜(善人慧)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바른 법[正法]을 들음으로 해서 얻는 것이고, 둘째는 바른 법을 생각함으로 해서 얻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함으로 해서 얻는 것이고, 넷째는 전도(顚倒)되지 않고 법의 처소(處所)를 보는 것으로 해서 얻는 것이며, 다섯째는 번뇌를 깨뜨림으로 해서 얻는 것이다.
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능히 미세한 깊고 깊은 뜻을 아는 것이고, 둘째는 선정을 닦아서 법계를 아는 것이며, 셋째는 공혜(共慧)로 장엄하여 지혜를 얻는 것이고, 넷째는 부처와 보살을 따라서 오는 것이며, 다섯째는 적정(寂靜)한 마음과 나아가 필경(畢竟)의 마음을 구족하게 획득하는 것이다. 이것을 선인혜라 한다.일체행혜(一切行慧)에 열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고지(苦智)이고, 둘째는 집지(集智)이며, 셋째는 멸지(滅智)이고, 넷째는 도지(道智)이며, 다섯째는 진지(盡智)이고, 여섯째는 무생지(無生智)이며, 일곱째는 법지(法智)이고, 여덟째는 비지(比智)이며, 아홉째는 세지(世智)이고, 열째는 통지(通智)이며, 열한째는 인지(因智)이고, 열두째는 역지(力智)이며, 열셋째는 초심지(初心智)이다. 이것을 일체행혜라 한다.제혜(除慧)는 사무애지(四無礙智)ㆍ세간지(世間智)ㆍ출세간지(出世間智)를 말하는데, 모든 어둠을 깨뜨리기 때문에 이것을 제혜라 한다.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지혜는 처음의 ‘다섯 가지 방술(方術)’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방술의 인연으로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이것을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지혜라 한다.적정혜(寂靜慧)는 진실을 위하기 때문에 닦아 쌓으며,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닦아 쌓으며, 진리[義]를 얻기 위하여 닦아 쌓으며, 인과를 알기 위하여 닦아 쌓으며, 전도(顚倒)를 깨뜨리기 위해 닦아 쌓으며, 방편을 잘 알기 위해 닦아 쌓으며, 지어야 할 일과 짓지 말아야 할 일을 알기 위해 닦아 쌓으며, 번뇌를 알기 위해 닦아 쌓으며, 필경(畢竟)의 얻음을 위해 닦아 쌓는다. 이것을 적정혜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열 가지의 지혜를 구족한 것을 지(智)라 하고, 혜(慧)라 하며, 또한 필경이라 하고, 또한 진실이라 하며, 또한 무량혜(無量慧)라 한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지혜의 인연 때문에 보살이 반야(般若)바라밀을 구족하며, 반야바라밀을 구족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불경(佛經)에서와 같이 반야(般若)를 구족하기도 하고 구족하지 못하기도 하는데 당연히 열 가지 성(性)과 나아가 적정(寂靜)까지를 알아야 한다. 혹시 하나의 바라밀을 설하기도 하고 혹시 둘ㆍ셋ㆍ넷ㆍ다섯ㆍ여섯의 바라밀을 설하기도 한다. 만일 하나를 설하면 여섯을 포괄하고 나아가 여섯을 설해도 역시 여섯을 포괄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하나하나 속에서 열 가지 이름[名字]을 듣고 이를 받아들여 받들어 간직해서 읽어 외우고 글씨로 쓰며, 분별하여 널리 설해서 중생을 교화하면, 필경에는 당연히 육바라밀을 구족하게 성취할 것이다.
16) 연어품(軟語品)어떤 것을 일러 보살의 성연어(性軟語)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의 환희어(歡喜語)ㆍ낙문어(樂聞語)ㆍ실어(實語)ㆍ법어(法語)ㆍ의어(義語)ㆍ중생을 이롭게 하는 말을 성연어라 한다.일체연어(一切軟語)란 보살마하살이 당초에 서로 모르는 어떤 사람을 만날 경우, 만난 다음 부드러운 말로 먼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만일 앞에 있는 이가 단정하고 덕망이 있어 자기보다 나은 경우에도 질투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며, 교만함을 깨뜨리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몸이 편안한지, 길을 오느라고 지치지는 않았는지, 고뇌함은 없는지 물어본다. 잘 오셔서 만나 뵙게 되었다고 인사한다. 평상(平床)이나 좌석을 내주고 장수(漿水:米飾)를 베풀어 주는 것은 세간의 법을 행하는 것이다. 중생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보살은 결코 모든 중생에 대하여 추악한 말인 이른바 사살(死殺)이니 파괴니 겁탈이니 실물(失物)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고, 오직 착한 말인 이른바 “그대의 아이들은 장대하여 이제는 혼인을 하였는가?”, “재물이 늘어나고 곡식은 풍년이 들었는가?”, “지혜는 성취하였는가?”, “금계(禁戒)를 믿고 보시는 증진하였으며 널리 많은 것을 들었는가?” 하는 등의 말을 한다.
보살은 이처럼 법어(法語)를 구족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이것을 일체연어라 한다.해석연어(解析軟語)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을 따르는 것이고, 둘째는 출세간을 따르는 것이다.
세간을 따르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하세(下世)이고, 둘째는 상세(上世)이다.
출세간을 따르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바른 법[正法]으로 자신을 이롭게 하는 출세간이고, 둘째는 바른 법으로 남을 이롭게 하는 출세간이다.보살마하살은 상세와 하세의 세간의 법을 위해 부드럽게 말하며,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출세간을 위해 부드럽게 말한다. 이것을 해석연어라 한다.
난연어(難軟語)란, 만일 어떤 중생이 보살을 해치면 보살은 저들에 대하여 자식처럼 생각하면서 지극한 마음과 부드러운 말로 때리는 자나 욕하는 자, 협박하는 자를 타이르는 것이다. 또 난연어는 보살마하살이 항상 어리석은 자를 위하여 부드러운 말로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으로 온갖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설법하는 것이다. 비록 큰 고통을 받더라도 다시 이어서 가르쳐 타이른다. “네가 즐겨 부지런히 배우면 뒤에 응당 나와 같이 될 것이며 혹은 더 나아질 수도 있다”고 하면, 이것을 난연어(難軟語)라 한다.그리고 보살은 성내는 자나 질투하는 자나 인색한 자를 보거나, 스승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장(師長)ㆍ부모ㆍ유덕한 자를 속이는 자, 나쁘고 해로운 잘못된 견해[邪見]로 해치는 전다라(전陀羅:인도의 四姓 중 최하층 계급인 수다라의 밑에 있는 천민)를 보면, 더불어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나쁜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을 난연어라 한다.일체자연어(一切自軟語)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번뇌의 인연을 깨뜨리기 위해 하는 부드러운 말이며, 둘째는 인천(人天)의 인연을 낳기 위해 하는 부드러운 말이며, 셋째는 선법의 인연을 늘리기 위해 하는 부드러운 말이며, 넷째는 보리 인연을 장엄하기 위해 설하는 부드러운 말이다.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네 가지 진제(眞諦)를 설하여 저들로 하여금 해탈하게 하려는 것이며, 둘째는 네 가지 뒤바뀜[四倒:常ㆍ樂ㆍ我ㆍ淨에 대한 그릇된 견해]을 깨뜨리려는 것이며, 셋째는 방일(放逸)을 깨뜨리려는 것이며, 넷째는 의심을 깨뜨리려는 것이다. 이것을 일체자연어라 한다.선인연어(善人軟語)는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교화할 때 어떤 인연 때문에 설법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해설(解說)인연 때문에 설법하며, 장엄보리인연 때문에 설법하며, 신족(神足)인연 때문에 설법하며, 지계(持戒)인연 때문에 설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법이 연고(緣故)를 따라 생기고 연고를 따라 멸한다. 이것을 선인연어라 한다.
일체행연어(一切行軟語)는 설법을 할 때에 들어야 할 자도 있고 막아야 할 자도 있을 경우 유연한 말로 법성(法性)에 순응하고 따라서 전도(顚倒)되지 않도록 문자를 설하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자가 있으면 능히 부드러운 말로 그 두려움을 없애주고, 구걸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부드러운 말로 허락하고 베풀어 주는 것이다. 이것을 일체행연어라 한다.
제연어(除軟語)는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인 망어(妄語:거짓말), 양설(兩舌:이간질), 악구(惡口:욕설ㆍ험담 등), 의미가 없는 말을 여의는 것이다. 보면 보았다 하고, 들으면 들었다 하고, 알면 안다 하고, 의식하면 의식한다고 한다. 못보고 못듣고 모르고 의식하지 못할 때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을 제연어라 한다.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연어[自利利他軟語]는 만일 고통을 받는 사람을 만날 경우 부드러운 말로 말해 주는 것이다. 부드러운 말로 중생을 교화할 경우, 혹은 부드러운 말로 중생을 가르쳐서 훈계하고, 혹은 부드러운 말로 가르쳐서 바른 소견을 가지도록 하고, 혹은 부드러운 말로 가르쳐서 혜시(慧施)를 행하도록 하고, 혹은 부드러운 말로 가르쳐서 정명(正命)을 실천하도록 하고, 혹은 부드러운 말로 바른 법을 설한다. 이것을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부드러운 말이라 한다.적정연어(寂靜軟語)에 스무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성력품(性力品)」에서 설한 것과 같다.
성이타(性利他)는 만일 보살이 남들을 가르쳐서 훈계할 경우, 계(戒)의 뜻을 분별하여 법주(法住:법 안에 들어있는 진리)의 뜻에 따라 설하는 것이다. 중생을 불쌍히 여겨 자비심을 닦으며, 지극한 마음으로 교화하여 중생을 조복(調伏)한다. 이것을 성이타라 한다.일체이타(一切利他)는 아직 미숙한 중생을 해탈하게 하는 것이므로 현세의 즐거움과 타세(他世)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출가한 자를 교화하는 것을 타세락(他世樂)이라 하며, 법을 설하여 교화해서 욕계(欲界)의 맺힘을 깨뜨리게 하는 것을 현재타세락(現在他世樂)이라 한다. 욕계의 모든 번뇌를 깨뜨리므로 몸과 마음이 적정(寂靜)하고, 몸과 마음이 적정하므로 안락함을 얻는다. 이것을 일체이타라 한다.난이타(難利他)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만일 어떤 중생이 선근(善根)을 심지 아니하여 선인(善因)이 없을 경우 교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난이타라 한다.
둘째는 만일 어떤 중생이 재물이 많고 세력이 자재하여 마음이 탐착(貪着)하고 인색할 경우 교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째서인가? 방일(放逸)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난이타라 한다.
셋째는 만일 외도(外道)의 나쁜 소견이 있을 경우 교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째서인가? 어리석고 미쳐있기 때문이다. 능히 이런 자들을 교화하면 이익을 얻는다. 이것을 난이타라 한다.일체자리이타(一切自利利他)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믿음이 없는 자에게 가르쳐서 믿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계(戒)가 없는 자에게 가르쳐서 계를 지니도록 하는 것이고, 셋째는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자를 가르쳐서 혜시(惠施)를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고, 넷째는 어리석은 자를 가르쳐서 지혜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을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이롭게 남에게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선인이타(善人利他)는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교화하여 진실을 알고, 때를 알고, 의(義)를 알고, 부드러운 말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교화하여 자비를 닦도록 한다. 이것을 선인이타라 한다.일체행이타(一切行利他)는 보살마하살이 중생들의 찬탄할 만한 것을 보면 아름다운 말로 찬탄하여 주고, 책망할 만한 일이 있으면 충고하는 말로 나무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바른 법[正法]에 대하여 믿는 마음을 깨뜨리면 능히 이를 조복하고, 불법에 들지 않은 자는 교화하여 들어오게 하고, 이미 들어온 자에게는 바른 법을 설하여 주고, 저들의 선근을 더욱 자라게 해서 삼승(三乘) 중에 조복하여 안치(安置)한다. 이미 근기가 익은 자에게는 해탈을 설하여 주고, 성문(聲聞)은 기꺼이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하도록 하고, 잘 장엄하지 못하는 자는 교화하여 장엄하게 하고, 정성(定性:이미 갖추어져 있는 本性)이 없는 자는 교화하여 성심(性心)을 정하게 한다. 이것을 일체행이타라 한다.제리타(除利他)는 만일 어떤 중생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을 때에는 교화하여 부끄러워할 줄 알게 하고, 거칠고 사나운 자는 교화하여 마음을 닦게 하고, 시샘하고 질투하는 자는 질투심을 깨뜨려 없애게 하고,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자는 인색한 마음을 끊어 없애게 하고, 의심하는 자는 의혹의 그물을 깨뜨려 없애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제리타라 한다.
자리이타(自利利他)는 보살마하살이 언제나 십선(十善)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것을 자리이타라 한다.적정이타(寂靜利他)는 열 가지가 있는데, 내적정(內寂靜)을 잘하는 것에 다섯 가지가 있고, 외적정(外寂靜)을 잘하는 것에 또한 다섯 가지가 있다.
안의 다섯 가지의 첫째는 청정함[淨]이고, 둘째는 변천하지 않는 것[不轉]이고, 셋째는 차례로 설하는 것[次第]이고, 넷째는 변유(遍有)이고, 다섯째는 선법(善法)을 순응하여 따르는 것이다.청정함이란 보살이 악법(惡法)ㆍ부정법(不淨法)ㆍ불선법(不善法)을 써서 중생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청정함이라 한다.
전하지 않는 것이란 보살이 해탈에서 해탈이 아닌 것을 설하지 아니하며, 청정법(淸淨法)에서 청정하지 않은 것을 설하지 아니하며, 전도되지 않은 것에서 전도를 설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전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해탈이 아닌 것에서 해탈을 설하지 아니하며, 부정법에서 청정을 설하지 아니하며, 전도법(顚倒法)에서 전도가 아닌 것을 설하지 아니한다. 이것 또한 전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차례대로 설하는 것이란 보살이 아둔한 자를 보면 쉽고 얕은 이치를 설하여 그를 조복시키고, 근기가 보통인 자에게는 중간 정도의 법을 설하고, 근기가 날카로운 자에게는 상법(上法)을 설하는 것이다. 처음에 혜시(惠施)를 설하고, 다음에 지계(持戒)를 설하고, 나중에 지혜를 설한다. 이것을 차례대로 설하는 것이라 한다.
변유(遍有)란 보살이 법을 설할 때에 중생의 종성(種性:사회적 신분 계급)이나 빈부 따위를 살피지 않고 그들의 능력과 지혜에 따라 법을 설하여 저들 중생으로 하여금 안락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변유라 한다.
선법(善法)에 순응하여 따른다는 것은 중생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하법(下法)을 얻을 것인가, 중법(中法)을 얻을 것인가, 상법(上法)을 얻을 것인가를 판단하여 그에 따라 설하여 주는 것이다. 이것을 선법에 순응하여 따른다고 한다.외적정(外寂靜)의 다섯 가지는, 첫째는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위하여 한량없는 자비심을 닦는 것이며, 둘째는 중생을 위하여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것이며, 셋째는 큰 희견(喜見)을 얻어서 모든 중생이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며, 넷째는 크게 자재(自在)함을 얻고서도 오히려 중생에게 종속되어 마치 노비[僮僕]와 같이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살이 큰 위덕(威德)을 갖추고서도 여전히 겸손하게 낮추어서 마치 전다라(旃陀羅)의 자식과 같이 하는 것이다.
이상을 내(內)ㆍ외(外)적정(寂靜)의 남을 위한 것[利他]이라 한다.어떤 것을 일러 보살마하살의 이익을 같이 함[同利]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선법(善法)을 구족하게 성취하면 다시 이 법을 중생에게 돌려서 권면(勸勉)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살이 이익을 같이 한다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함께 실천하기 때문에 중생을 교화한다. 중생이 선법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견고해져서 이를 기울여 흔들기가 어렵다. 무엇 때문인가? 보살이 이런 좋은 법을 성취하고 나서 이를 나에게 돌려 권화(勸化)해서 내가 안락함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중생들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다. 만일 선법을 닦아서 나쁜 결과를 얻는다면 보살마하살이 결코 스스로 닦지도 않을 것이며 나에게 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보살이 한량없는 중생에게 자신과 같은 이익을 권화할 경우, ‘보살이 저 자신도 성취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권한다’라는 말을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너 자신도 착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들에게 선법을 행하라고 권하느냐?’고 말할 자도 역시 없다.그리고 보살에는, 자신은 성취하고 남에게는 권하지 못하는 자가 있고, 자신은 성취하지 못하고도 남에게는 권하는 자가 있으며, 자신도 성취하고 남에게도 권하는 자가 있고, 자신도 성취하지 못하고 남에게도 권하지 않는 자도 있다.
스스로는 성취하고도 남에게는 권하지 않는 자는 동사(同師)ㆍ동학(同學)ㆍ동법(同法)ㆍ동덕(同德)으로써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자신은 성취하였으나 남에게는 권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자신은 성취하지 못했으면서도 능히 남에게 권하는 것은, 보살이 만일 악업을 행하는 악한 중생인 전다라(旃陀羅) 내지 축생(畜生)을 볼 경우, 저들을 조복하기 위해 저들과 함께 몸을 받아서 같이 일을 하는 것이니 악업(惡業)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자신은 성취하지 못했으면서도 능히 남에게 권한다고 한다.
자신도 성취하고 능히 남에게도 권하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스스로 선법을 성취하고 남에게도 이를 권해서 선법을 이루게 하여 교만과 경멸하는 마음을 깨뜨리고 마음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을 자신도 성취하고 남에게도 권한다고 한다.
자신도 성취하지 못하고 남에게도 권하지 못하는 것은 보살이 스스로 방일하여 중생을 교화해서 조복하지 못하는 것이다.보살마하살이 육바라밀로써 스스로 몸을 장엄하고 사섭법(四攝法:보살이 중생을 불법으로 포섭시키는 네 가지 행위)으로써 중생을 장엄하며, 보살마하살이 육바라밀로써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조복하고 사섭법으로써 중생의 마음을 조복한다.
몸과 입과 마음이 청정하므로 보리수법(菩提數法)이 청정하고, 자신의 몸이 청정하므로 중생의 마음이 청정하다. 선한 몸과 마음을 성취하기 때문에 위가 없고 나은 것이 없고 공통함이 없다[無上無勝無共]고 한다. 이 위가 없고 나은 것이 없고 공통함이 없는 것으로 중생을 교화한다. 이것을 이익을 같이 한다[同利]고 한다.보살마하살은 중생과 때와 사물에 대하여 전혀 분별함이 없다.
중생에 대하여 분별함이 없다는 것은 보살이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단(檀)바라밀 내지 반야(般若)바라밀을 행하여 모든 선법을 구하는 것이다.
때에 대하여 분별함이 없다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모든 시간에 있어서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열심으로 정진하여 선법을 구하는 것이다.
사물에 대하여 분별함이 없다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온갖 사물을 받아서 저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물에 대해 탐착(貪着)하는 마음이 없다.
이들 세 가지 분별함이 없는 인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보살마하살은 기꺼이 모든 선행(善行)을 닦되, 마음에 뉘우치거나 퇴전(退轉)함이 없다. 인연을 닦아 쌓기 때문에 능히 중생의 잘못된 법[邪法]과 잘못된 견해[邪見]을 깨뜨린다. 스스로의 닦음과 배움으로 선근이 증장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선행의 공덕을 관찰하므로 모든 그릇된 견해가 능히 막아 허물지 못한다. 끝내 전륜왕의 몸이나 석가모니의 몸[釋身]ㆍ마구니의 몸[魔身] 및 범천의 몸[梵身]을 구하지 않으며, 은혜의 갚음이나 이양(利養)ㆍ명예ㆍ장수(長壽)ㆍ육신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는다.
보살이 이와 같은 법을 닦으면 단(檀)바라밀에서 반야(般若)바라밀까지를 얻어서 구족한다. 이것을 이익을 같이한다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익을 같이 함을 닦을 때에 마음이 동요하거나 무너지지 않으며, 청정하고 적정(寂靜)하여 커다랗게 밝아 가려짐이 없다. 보살마하살은 청정한 심지(心地)에 머물러 무상선법(無上善法)과 광명선법(光明善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
광명선법이란 보살마하살이 행하는 선법으로서 그 무엇도 이를 능히 헐뜯어 비방할 수 없는 것이다.보살마하살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닦은 선법이 동요되어 움직임 없이 밤낮으로 자라서 증가하기를 마치 초승달이 부풀어 오르듯이 하는 것이다. 적정선법(寂靜善法)이란 보살이 얻은 삼매의 적정함이 여래와 같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아주 가까운 것이다.보살마하살은 모든 혜시(惠施)와 지계(持戒)가 사섭(四攝)의 인연이기 때문에 금강신(金剛身)을 얻고 법신과(法身果)를 얻으며, 보살마하살은 난시(難施)와 난계(難戒)의 인연 때문에 여래의 불가사의한 공덕의 묘과(妙果)를 얻으며, 일체자시(一切自施)와 일체자계(一切自戒)의 인연 때문에 모든 인천(人天)이 받들어 모시는 공양의 과(果)를 얻으며, 선인시(善人施)와 선인계(善人戒)의 인연 때문에 중생 속에서 위가 없는 자가 되며, 일체행시(一切行施)와 일채행계(一切行戒)의 인연 때문에 여래의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얻으며, 제시(除施)와 제계(除戒)의 인연 때문에 보리수 아래의 도량에 앉았어도 마왕(魔王)의 권속이 능히 다치게 하지 못하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시(施)와 계(戒)의 인연 때문에 여래의 상락(常樂)의 해탈을 획득하며, 적정시(寂靜施)와 적정계의 인연 때문에 네 가지 적정과(寂靜果)인 이른바 신적정(身寂靜)ㆍ연(緣)적정ㆍ심(心)적정ㆍ지(智)적정과 십력(十力)ㆍ사무소외(四無所畏)ㆍ대비(大悲)ㆍ념처(三念處)ㆍ오지(五智)ㆍ삼매(三昧)를 얻는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 불공법(不共法)의 수가 있으며, 지혜를 이롭게 하기 때문에 한량없는 불공법의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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