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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618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6권

by Kay/케이 2024.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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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6

 

보살선계경 제6권

구나발마 한역
최윤옥 번역

17) 공양삼보품(供養三寶品)어떤 것을 일러 보살마하살이 여래를 공양한다 하는가? 여래를 공양하는 데에는 모두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색신(色身)을 공양하는 것이고, 둘째는 탑(塔)을 공양하는 것이며, 셋째는 현견(現見)공양이고, 넷째는 불현견(不現見)공양이며, 다섯째는 자(自)공양이고, 여섯째는 타(他)공양이며, 일곱째는 이익(利益)공양이고, 여덟째는 최승(最勝)공양이며, 아홉째는 청정(淸淨)공양이고, 열째는 수지(受持)공양이다.색신을 공양한다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색신을 보고 공양하는 것이다. 이것을 색신을 공양한다고 한다.
탑을 공양한다는 것은 만일 보살마하살이 여래를 위하여 탑묘(塔廟)를 짓고 불상과 불감(佛龕)과 석굴(石窟)을 만들었을 경우, 헐고 낡은 탑은 보수하고, 새 탑에는 꽃과 향을 공양하는 것이다. 이것을 탑에 공양한다고 한다.현견(現見)공양이란 보살마하살이 만일 여래의 형상이 현상(現像)함을 보았을 경우, 마치 현실에 부처님을 보듯이 하는 것이다. 시방의 부처님을 보았을 때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현견공양이라 한다.
불현견공양이란 보살마하살이 만일 현재의 모든 부처와 부처의 탑묘에 공양하여 믿고 이해하는 마음[信解心]을 얻을 경우, 지금 현재 보는 것에 대하여 이처럼 공양하면 역시 과거와 미래의 부처에게도 공양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모든 여래는 동일한 법성(法性)이기 때문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이 된다. 만일 현재의 불탑(佛塔)에 공양할 경우 과거와 미래의 불탑에도 역시 공양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이러한 모든 불탑은 동일한 법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의 부처에 공양하면 이미 시방의 모든 부처에게 공양한 것이며, 만일 하나의 불탑에 공양하면 이미 시방의 불탑에 공양한 것이다. 불감과 석굴을 만들고, 낡은 탑을 보수하고, 불탑에 공양할 때도 역시 이와 같다. 이것을 불현견공양이라 한다.또 불현견공양이란 만일 부처를 보지 못하고 불탑을 보지 못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이것이 여래이며 이것이 불탑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와 모든 탑과 모든 굴과 모든 상(像)에 대해서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불현견공양이라 한다.
불현견공양이 또 있으니, 보살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여래를 위하여 탑묘를 세우거나 감굴(龕窟)을 만들거나 하는 것이다. 하나, 둘 또는 한량없는 수를 지을 수 있는 대로 능력에 따라 짓는다. 이것을 불현견공양이라 한다.
이렇게 하면 복덕의 과보가 한량이 없으며 한량없는 범복덕과(梵福德果)를 섭취한다. 보살하마살은 이런 인연으로 해서 무량겁을 통해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으며, 또한 능히 보리의 도를 장엄한다.
보살마하살이 삼보(三寶)를 실제로 보지 않고 공양을 베푸는 것이 실제로 보고 베푸는 공양보다 나아서 이를 헤아리거나 비교할 수가 없고 얻은 과보도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어리석은 자는 직접 본 뒤에 공양을 베풀지만, 지혜로운 자는 비록 직접 보지 않더라도 능히 공양한다. 이것을 불현견공양이라 한다.스스로 짓는 공양[自作供養]은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공양하거나 불탑에 공양할 경우 자신이 직접 주관하고 남을 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자공양(自供養)이라 한다.
타공양(他供養)은 부처나 불탑에 공양을 하려고 할 경우,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서로 어울려서 함께 하고 혼자 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란 이른바 부모ㆍ처자ㆍ종친(宗親)ㆍ권속ㆍ노비[僮僕], 왕(王)ㆍ신하ㆍ바라문ㆍ장자(長者), 이웃ㆍ아는 사람ㆍ내부인(內部人)ㆍ외부인ㆍ남녀ㆍ가난한 자ㆍ부자인 자ㆍ괴로운 자ㆍ즐거운 자, 스승ㆍ화상(和上), 동사(同師)ㆍ동화상(同和上), 동주(同住)ㆍ동법(同法)ㆍ동학(同學)ㆍ동국(同國)ㆍ동명(同名)ㆍ동성(同姓)과 내지 잘못된 견해를 가진 자 및 전다라(旃陀羅)이다. 이것을 타공양이라 한다.타공양이 또 있으니, 보살마하살이 재물이 많아서 풍족할 경우, 자비심을 발하여 중생에게 혜시(惠施)하는 것이다. 혜시를 할 때에 이렇게 발원한다.
‘중생들이 가난하여 복덕이 적으니 이제 이 혜시를 받게 되면 나는 응당 권하여 삼보에 공양토록 하겠다. 삼보에 공양한 인연으로 해서 가난을 깨뜨리고 많은 복덕을 받기 바란다.’
이렇게 발원한 뒤 중생에게 혜시하고, 혜시가 끝나면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에 공양하도록 한다. 이것을 타공양이라 한다.이익공양(利益供養)이란 보살이 부처와 불탑에 의복ㆍ음식ㆍ와구(臥具)ㆍ의약ㆍ방사(房舍)를 받들어 보시하고 공경하고 예배하며, 또한 갖가지 꽃들과 바르는 향ㆍ가루 향ㆍ부스러기 향ㆍ기악(伎樂)ㆍ번기[幡]ㆍ일산[蓋]ㆍ등불을 공양하는 것이다. 또한 여래의 한량없는 공덕을 찬탄하며, 오체(五體)를 땅에 던져 오른쪽으로 세 번 내지는 한량없이 돈다. 그리고는 금ㆍ은ㆍ유리ㆍ수정ㆍ가패(珂貝)ㆍ자거(車渠)ㆍ마노(馬瑙) 및 몸의 영락(瓔珞)ㆍ종령(鍾鈴) 등과 나아가 한 보의 돈, 한 가닥의 실, 한 톨의 쌀알까지 받들어 바친다. 이것을 보살의 이익공양이라 한다.
최승(最勝)공양이란 보살이 부처와 불탑에 베푸는 공양으로 이익공양ㆍ상항(常恒)공양ㆍ호물(好物)공양ㆍ현견(現見)공양ㆍ불현견(不現見)공양ㆍ자(自)공양ㆍ타(他)공양ㆍ지심(至心)공양ㆍ희심(喜心)공양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고 즐거워하여 삼보(三寶)에 공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양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회향한다. 이것을 최승공양이라 한다.청정(淸淨)공양이란 보살이 부처와 불탑에 손수 공양하고, 교만과 가벼이 업신여기는[輕賤] 마음으로 남을 시켜 하게 하지 않으며, 방일(放逸)함이 없이 열심히 정진하되 지극한 마음, 청정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나라의 임금에게 믿음과 존경이 생기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며, 국왕ㆍ대신ㆍ장자ㆍ거사의 공양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공덕을 드러내기 위해 공양하는 것이 아니다. 지어진 형상(形像)에 대하여 자황(雌黃)ㆍ계란ㆍ나차교(羅差膠)ㆍ기름[油]ㆍ소(酥) 등으로 땅에 바르지 아니하며, 교향(膠香)이나 훈향(薰香)을 태워서 공양하지 아니하며, 파가화(頗迦花) 등도 또한 공양하지 않는다. 모든 냄새나는 꽃은 아무리 빛깔이 좋아도 공양하지 않으며, 기타 갖가지 냄새나고 더러운 물건은 공양하지 않는다. 이러한 여러 가지 공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청정공양이라 한다.
수지(受持)공양이란 보살이 자신의 재산을 내거나 타인에게 구해서 불상과 불탑을 만들되, 하나ㆍ둘 또는 백ㆍ천ㆍ만ㆍ억으로 한량없이 만들며, 그 불상의 하나하나와 불탑의 하나하나에 공경하여 예배하고, 좋은 꽃이나 향, 기악ㆍ등불ㆍ영락ㆍ번기ㆍ일산으로써 공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공양의 인연으로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거나 불도(佛道)를 구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보살마하살이 불퇴지(不退地)에 머물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처럼 불퇴지에 머물면 모든 불토에서 몸을 받아도 걸림이 없다.보살마하살이 스스로 재물을 내지 않고 남의 재물을 걸구하지도 않고 이렇게 발원한다.
‘만일 염부제(閻浮提)에 있는 중생이 능히 불보ㆍ법보ㆍ승보에 공양하고, 사천하(四天下)로부터 삼천대천세계와 시방의 한량없고 가이없는 세계에 있는 중생에 이르기까지 상ㆍ중ㆍ하로써 삼보(三寶)에게 공양하면 나는 응당 지극한 마음으로 그 기쁨을 따르겠다.’
또 이렇게 발원한다.
‘이 인연으로 해서 모든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성취하게 하소서.’
이것을 보살이 위없는 보리의 도를 장엄한다고 하며, 이것을 법대로 공양을 짓는다고 한다.보살마하살이 자심(慈心)을 닦되, 마치 각우경처럼 하며, 비심(悲心)ㆍ희심(喜心)ㆍ사심(捨心)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모든 유위(有爲)한 것은 항상함[常]이 없으며, 아(我)가 없으며, 즐거움[樂]이 없으며, 청정함[淨]이 없다. 열반 공덕의 미묘함을 깊이 관찰하여 불(佛)ㆍ법(法)ㆍ승(僧)ㆍ보시[施]ㆍ지계[戒]ㆍ천(天) 등과 나아가 보이지 않는 법계까지의 선설할 수 있는 작은 분상(分相)들을 염(念)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육바라밀을 취향(趣向)하여 행하며, 사섭법(四攝法)으로 중생을 섭취(攝取:濟度)한다. 이것을 법대로 공양을 짓는다고 한다.만일 비구가 금탑(金塔)ㆍ금상(金像)ㆍ은탑ㆍ은상과 수정ㆍ진주ㆍ자거(車渠)ㆍ마노ㆍ벽옥(璧玉)으로 만든 불탑과 불상에 공경하여 공양하는 것을 언제나 즐거워하면서 기쁘게 보고, 진흙과 나무로 된 불탑과 불상에 공양하고 공경하는 것을 즐겁게 보지 않는다면, 이런 자는 법대로 공양을 짓는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라.
이처럼 법대로 공양을 짓는 것을 더 높을 수 없는 공양[無上供養]이라 하며, 더 나을 수 없는 공양[無勝供養]이라 하며, 가장 높은 공양[最上供養]이라 한다. 이러한 공양은 모든 공양을 능가하여 능히 한량이 없고 더 나을 수 없는 과보[果]를 얻는다.보살마하살이 삼보에게 공양하는 것은 여섯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복전(福田)이 더 나을 수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은혜를 알아서 은혜에 보답하려는 때문이며, 셋째는 일족(一足)ㆍ이족(二足)ㆍ다족(多足)ㆍ무족(無足)의 모든 중생보다 낫기 때문이며, 넷째는 우담발화(優曇鉢花) 같은 꽃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스승이나 화상(和上)이 없이 저절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성취하기 때문이며, 여섯은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세간의 낙과 출세간의 낙의 인(因)을 획득하게 하기 때문이다. 법(法)과 승(僧)도 역시 그러하다.보살이 보살계를 받고자 할 때는 당연히 화상(和上)을 보고 여덟 가지 법[八法]을 갖추었으면 그를 따라 계(戒)를 받는다.
그 첫째는 우바새계(優婆塞戒)와 사미계(沙彌戒)와 대비구계(大比丘戒)를 구족(具足)함이며, 둘째는 능히 공양을 바치는 것이며, 셋째는 계를 지키는 것[持戒]과 계를 훼손하는 것[毁戒]의 양상을 능히 잘 관찰하는 것이며, 넷째는 사마타(舍摩他)와 비바사나(毘婆舍那)를 얻는 것이며, 다섯째는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연민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능히 자신의 즐거움을 버리고 중생에게 혜시(惠施)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두려움이 없음이며, 여덟째는 법이 아닌 것은 설하지 않고 법이 아닌 것은 듣지 않으며, 법이 아닌 것을 설하면 나무라고 타이르는 것이다.능히 비방하고 헐뜯고 때리고 욕하고 괴롭히고 해치고 하는 등의 모든 고통을 참으며, 탐욕스럽고 성내고 어리석은 등의 금계(禁戒)를 허무는 자와 게으른 자를 인내한다.
대중 속에 처하여 법을 설하되 피로하다고 하여 사양하지 않으며, 뜻을 잘못 풀이하지 않고 또한 잘못 말하지도 않는다. 말이 부드러워서 본래 거칠거나 사납지 않으며, 언제나 중생을 생각하여 안락하게 하고자 하며, 의문이 있으면 즉시 묻고 부끄럽거나 창피하게 여기지 않는다.
방편을 잘 알아서 중생을 교화하고, 모든 중생들의 번뇌를 알아서 여기에 대치(對治)한다. 모든 중생에 대하여 마음을 평등하게 가지며, 귀함과 천함이나 높고 낮음에 대한 차별이 없고, 육근(六根)이 구족하고 위의(威儀)가 편안하고 단정하다.참소하는 말을 믿지 않고 자상하고 청정하게 수행하며, 스스로 자만하여 남을 경멸하지 않고, 이로운 공양이나 외부에의 나타냄이나 아첨과 사곡(邪曲)을 위하지 않는다.
탐착하고 질투하고 아까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만일 자신이 이익을 얻으면 먼저 남에게 미루어 주며, 마음이 항상 여일하여 방일(放逸)함이 없고, 남들이 이익을 얻는 것을 보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기뻐한다.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아서 오직 육물(六物)만을 비축하며, 육물 이외에는 생기는 대로 혜시(惠施)한다.언제나 앞에 있는 이를 권하여 금지하는 것을 범하는 대로 이를 겉으로 드러내게 하고, 억념(憶念)을 보여주어 뉘우치는 법을 잘 알게 한다. 병들고 고통 받는 자를 잘 돌보아 보양(保養)하며, 결코 성문법장(聲聞法藏)이나 보살장의 허물을 들어서 말하지 않는다.
만일 이상의 법들을 구족한 이가 있으면 그를 화상(和上)으로 삼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계(戒)를 받은 뒤에는 화상이 병이 날 경우 응당 급사(給使)가 되어 주고, 병이 없을 때에는 응당 가르침을 따라 행한다.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맞이하여 예배하고 곁에서 모시면서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을 받들어 보시한다.법어(法語)를 따르며, 법에 따라 행하고 동전(動轉)하지 않는다. 범하는 죄는 그에 따라 성실하게 말한다.
법을 들을 때에 부처님 생각, 법에 대한 생각, 비구승에 대한 생각을 하고, 난상(難想)ㆍ안상(眼想)ㆍ대지인상(大智因想)ㆍ대광명상(大光明想)을 하면 대과보상(大果報想)이 바로 대열반의 무상도(無上道)의 인(因)이라는 생각을 얻으며, 상락상(常樂想)을 얻으며, 사마타(舍摩他)와 비바사나(毘婆舍那)의 생각을 얻는다.
이러한 생각들은 곧 진실법(眞實法)에 대한 생각으로서 이것을 법을 듣는 공덕(功德)을 구족한다고 한다.
또 법을 들을 때에는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믿는 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나는 이제 파계한 자를 따르지 않겠다’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은 하열한 종성(種姓)으로서 근기가 구족하지 못하다. 바르지 못한 말을 하는 사람은 성품이 좋지 못한 사람으로서 법을 물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들어야 한다.
보살마하살이 보살계를 받는 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혜이고, 둘째는 어리석음이다. 만일 위에서와 같이 생각하고 관찰할 경우 이를 우치(愚癡:어리석음)라 하는 것이니, 선법(善法)을 늘리지 못하며 큰 지혜를 얻지 못한다.보살은 네 가지 무량심(無量心)인 자심(慈心)ㆍ비심(悲心)ㆍ희심(喜心)ㆍ사심(捨心)을 닦는다. 네 가지 무량심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연(衆生緣)이고, 둘째는 법연(法緣)이며, 셋째는 무연(無緣)이다.
중생연이란 보살마하살이 자심을 닦아서 삼취(三聚)의 모든 중생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인데, 삼취란 첫째는 즐거움을 받는 것[受樂]이고, 둘째는 고통을 받는 것[受苦]이고, 셋째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不苦不樂]을 받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자심을 닦아서 즐거움을 받는 것을 보면 이를 증장(增長)시키고, 고통받는 중생을 보면 그 고통을 멸하는 즐거움이 생기게 하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사람을 보면 고락(苦樂)을 끊어 없애고 열반을 얻게 한다. 이것을 중생연이라 한다.
법연이란 보살마하살이 오직 법상(法相)만 관하고 중생상(衆生相)을 짓지 않는 것이다. 만일 내가 자심을 닦음에 있어 중생이 없다면 누가 괴로움을 여의고 누가 즐거움을 얻겠는가? 이것을 법연(法緣)이라 한다.
무연(無緣)이란 중생상과 법상(法相)을 버리고 자심(慈心)을 증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연이라 한다.
자심 이외의 나머지 세 가지 무량심에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다.
보살마하살이 만일 중생으로 인하여 무량심을 닦을 경우, 이런 마음이 외도(外道)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성문이나 벽지불(辟支佛)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보살마하살의 네 가지 무량심(無量心)을 합치면 비심(悲心)이다. 그래서 보살을 대비(大悲)라 한다. 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관찰하니 백열 가지가 있는데, 이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대비를 닦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백열 가지가 되는가? 한 가지는 생고(生苦:受胎에서 出生까지의 고통)이다.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구하나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이고, 둘째는 얻은 뒤에 잃어버리는 고통[得已失苦]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고고(苦苦:탐탁하지 않은 대상으로부터 받는 고통)이고, 둘째는 행고(行苦:세상의 변화와 관련하여 받는 고통)이며, 셋째는 괴고(壞苦:좋아하는 것의 變滅로부터 받는 고통)이다.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이고, 둘째는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고통[怨憎會苦]이며, 셋째는 죽음의 고통[死苦]이고, 넷째는 오음(五陰)이 없어지지 않는 고통이다.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탐욕에 인연한 고통[欲因緣苦]이고, 둘째는 증오에 인연한 고통[瞋因緣苦]이며, 셋째는 수면(睡眠)에 인연한 고통이고, 넷째는 도회(掉悔:들떠서 어지럽고 후회하며 걱정하는 것)에 인연한 고통이며, 다섯째는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데 인연한 고통이다.
다시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악도(惡道:三惡道)에 인연한 고통이고, 둘째는 악도의 과보[果]로서의 고통이며, 셋째는 많이 구하는 데 따른 고통이고, 넷째는 지켜 보호하려는[守護] 고통이며, 다섯째는 얻을수록 만족을 모르는 고통이고, 여섯째는 잃어버리는 데 따른 고통[失苦]이다.다시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태어나는 데 따른 고통[生苦]이고, 둘째는 늙음에 따른 고통[老苦]이며, 셋째는 질병에 따른 고통[病苦]이고, 넷째는 죽음에 따른 고통[死苦]이며, 다섯째는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고통이고, 여섯째는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고통이며, 일곱째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데 따른 고통[求不得苦]이다.
다시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추위의 고통이고, 둘째는 뜨거움의 고통이며, 셋째는 배고픈 고통이고, 넷째는 목마른 고통이며, 다섯째는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고, 여섯째는 니건자(尼揵子:外道인 자이나敎. 苦行을 숭상함)처럼 스스로 만드는 고통이며, 일곱째는 왕사(王事:임금의 일) 등과 같은 남이 주는 고통이고, 여덟째는 구위의고(久威儀苦)이다.
다시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신의 가난에 따른 고통이고, 둘째는 남의 가난에 따른 고통이며, 셋째는 친하고 사랑하는[親愛] 것이 죽어 사라지는[死滅] 데 따른 고통이고, 넷째는 재물을 잃어버림에 따른 고통이며, 다섯째는 질병에 따른 고통이고, 여섯째는 파계(破戒)에 따른 고통이며, 일곱째는 사견(邪見)에 따른 고통이고, 여덟째는 현재의 고통이며, 아홉째는 다른 세상[他世]에 대한 고통이다.다시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음식이 있으나 그릇이 없는 고통이고, 둘째는 길을 가는 데 있어 탈 것이 없는 고통이며, 셋째는 갖가지 영락과 꽃과 향기를 구하는 데도 얻지 못하는 고통이고, 넷째는 기악(伎樂:음악, 풍류)과 유희(遊戱:놀이)를 구하나 얻지 못하는 고통이며, 다섯째는 광명(光明)을 구하는 데도 얻지 못하는 고통이고, 여섯째는 부릴 자를 구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이며, 일곱째는 장수(漿水:米飮, 끓여서 식힌 물)를 구하나 얻지 못하는 고통이고, 여덟째는 옷을 구하나 얻지 못하는 고통이며, 아홉째는 얻어서 쓰지 못하는 고통이고, 열째는 찾아와 걸구하는 것을 보는 고통이다.
다시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일체고(一切苦)이고, 둘째는 대고(大苦)이며, 셋째는 일체자고(一切自苦)이고, 넷째는 법대로 주(住)하지 못하는 고통이며, 다섯째는 전고(轉苦)이고, 여섯째는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며, 일곱째는 해고(害苦)이고, 여덟째는 좇아다니는 고통이며, 아홉째는 일체행고(一切行苦)이다.일체고란 지난날의 인연으로 연유하여 현재에 얻는 고통이며, 대고란 중생들이 무량한 세간에서 지옥의 고통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일체자고는 지옥ㆍ축생ㆍ아귀ㆍ인간ㆍ천상의 고통과 같은 것이며, 법대로 주하지 못하는 고통은 모의를 해서 남을 해치려다가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화를 당한다든가, 음식을 탐내다가 나중에 큰 고통을 받는다든가, 탐욕ㆍ분노ㆍ어리석음을 생각하는 고통이라든가, 몸과 입과 마음의 악업(惡業)을 인연하여 받는 고통이라든가, 금계(禁戒)를 깨뜨리고 받게 되는 근심 걱정과 같은 것들이며, 전고(轉苦)는 현재는 임금의 몸으로서 타세에 이르러 노비가 되는 고통이나, 현재는 부모ㆍ형제ㆍ처제간이면서 타세에 이르러 증오하는 원수가 되는 고통이나, 현재는 큰 부자인데도 타세에 이르러 가난뱅이가 되는 고통과 같은 것이다.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하는 고통은 오래 살고 싶고, 단정한 모습을 갖고 싶고, 상족(上族)의 신분을 얻고 싶고, 부귀를 누리고 싶고, 육체의 힘을 얻고 싶고, 지혜를 얻고 싶고, 원수나 대적하는 자를 없애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고통이다.
해고(害苦)란 세간의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으나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이고, 출가한 사람이 번뇌를 없애고 싶으나 없애지 못하는 고통, 일이 어려운 고통, 전쟁이 일어나는 고통, 무인지경의 광막한 길을 가야 하는 고통, 손발이 잘리게 되는 고통, 갇히고 매이고 얻어맞고 묶이는 고통, 몰리어 바깥으로 쫓겨나는 고통 같은 것들이다.일체행고(一切行苦)란 고통을 인해서 고통을 받고, 즐거움을 여의어 고통을 받고, 모든 감수(感受)를 끊지 못해서 고통을 받고, 출가를 못해서 괴롭고, 적정(寂靜)할 수 없어서 괴롭고, 보리를 못 얻어서 괴롭고, 생각이 복잡해서 괴롭고, 범부(凡夫)라서 괴롭고, 사대(四大:地ㆍ水ㆍ火ㆍ風으로 이루어진 몸)가 괴롭고, 삼계(三界)가 괴롭고, 번뇌가 괴로운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을 백열 가지의 고통이라 한다.보살은 이러한 고통들을 관찰하여 대비(大悲)의 마음을 증장시킨다.
이러한 큰 고통들은 열여덟 가지에 인연해서 증장하게 된다. 열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어리석음에 따른 고통이고, 둘째는 과보를 받는 고통이며, 셋째는 행위의 고통[行苦]이고, 넷째는 항상하다는 것에 대한 고통[常苦]이며, 다섯째는 태어나는 고통[生苦]이고, 여섯째는 스스로 만드는 고통이며, 일곱째는 남들이 주는 고통이고, 여덟째는 계(戒)를 깨뜨리는 것에 따른 고통이며, 아홉째는 사견(邪見)에 따른 고통이고, 열째는 과거세상에 대한 고통이며, 열한째는 대고(大苦)이고, 열두째는 지옥고(地獄苦)이며, 열셋째는 인간과 천상(天上)의 고통이고, 열넷째는 전고(轉苦)이며, 열다섯째는 받음에 대한 고통[受苦]이고, 열여섯째는 알지 못함에 대한 고통[不知苦]이며, 열일곱째는 증장되는 고통[增長苦]이고, 열여덟째는 게으름의 고통[懈怠苦]이다.보살은 언제나 네 가지 일의 인연으로 해서 대비(大悲)라 한다. 그 첫째는 중생들이 고통을 받게 되는 인연이 깊고 깊어 이해하기 어려움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량없는 세간을 통하여 닦아 쌓는 것이며, 셋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닦아 쌓는 것이고, 넷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중생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일의 인연 때문에 능히 중생을 위하여 수고하고, 겸손하고, 인내하고, 괴로워하며 괴로운 몸을 받는다. 그래서 보살을 정대비(淨大悲)라 하고 정대비는 여래지(如來地)라 한다.
보살마하살은 이 백열 가지를 본다. 그리하여 모든 보살이 이를 닦아 쌓으니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대비를 증장한다. 이러한 보살은 능히 중생상(衆生相)과 법상(法相)이 대비를 낳는 것을 보지만 무연(無緣)의 상(相)이 대비를 낳는 것은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비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다. 여래가 능히 이러한 세 가지를 구족하기 때문에 대비라 한다.
보살이 대비(大悲)를 닦기 때문에 몸의 적정(寂靜)을 얻고 마음의 적정을 얻으며, 이와 같은 몸과 마음의 적정한 인연으로 해서 능히 중생들이 가진 번뇌를 깨뜨리고 정지(淨地)와 일자지(一子地:모든 중생을 외아들처럼 여기는 보살의 지위)에 주(住)하여 모든 중생을 자식처럼 사랑한다.
대비의 인연으로 해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열심히 행하고 괴로이 행하면서도 마음에 후회하거나 물러섬이 없으며, 성문(聲聞)의 도(道)와 같이 네 가지 진리[四諦]를 깨달을 때에 무루(無漏)의 즐거움을 받는다.보살이 비심(悲心)을 닦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보살이 비심을 닦는 것은 단지 중생을 위한 것으로, 자신을 위하여 비인연(悲因緣)을 닦지 않는다. 보살은 신명(身命)과 재물까지 아끼지 않으면서 비인연을 닦아서 몸을 버리고 몸을 받고 하되 끝내 여래의 금계(禁戒)를 허물어서 잃지 않으며, 얻기 어려운 삼매를 능히 즉시 얻고, 얻기 어려운 지혜를 능히 즉시 얻는다.
그래서 여래가 경(經) 가운데서 설하였다.
“보살이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디에 있는가? 응당 대비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량없고 가이없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대비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마음을 닦아서 현재의 즐거움을 얻어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멀리 고뇌를 여의게 하며, 한량이 없고 위가 없는 공덕을 쌓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장엄한다.
18)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어떤 것을 일러 보살마하살의 부끄러움[慙愧]이라 하는가? 참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성(性)이고, 둘째는 인연이다. 성(性)이란 보살마하살이 자신이 지은 법이 아님을 스스로 알고 나쁜 과보[惡報]를 두려워하여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며, 인연이란 보살이 자신이 지은 악에 대하여 남들이 알까 저어해서 부끄러운 마음을 내는 것이다.
성참괴(性慙愧)는 보살성(菩薩性)처럼 인연으로 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보살이 닦는 참괴는 팔정도(八正道)의 인연처럼 인연을 좇아 얻는다.
참괴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짓지 않아야 하는데도 지어서 생기는 부끄러움이고, 둘째는 지어야 하는데도 짓지 않아서 생기는 부끄러움이며, 셋째는 마음에 저절로 의심이 생겨서 일어나는 부끄러움이고, 넷째는 덮어서 감춘 죄에 대해 남들이 알까봐 두려워서 생기는 부끄러움이다.어떤 것을 일러 보리살타(菩提薩)라 하는가? 살타란 용맹하고 건장하여 두려움 없음에 대한 이름이다.
보살의 성(性)에는 건장한 힘이 있으며, 그 성이 건장하기 때문에 능히 번뇌를 조복하여 그 마음을 따르지 않고, 모든 고통과 온갖 공포를 능히 참는다. 비록 공포가 있더라도 보살이 가진 선법(善法)의 장엄을 흔들어 움직이지 못한다. 이것을 성(性)의 용맹하고 건장한 힘이라 하며, 이 때문에 보리살타라 한다.
보살의 성의 용맹하고 건장한 힘에 다섯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온갖 생사의 고통이고, 둘째는 중생이 갖가지 악업을 행하는 것이며, 셋째는 한량없는 세간에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것이고, 넷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보살의 금계를 굳건히 지키는 것이며, 다섯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깊은 법을 들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보살마하살은 다섯 가지 인연이 있어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크게 고절(苦切:殘害, 呵夷)을 받아도 마음에 근심이나 고뇌함이 없다. 그 첫째는 크게 용맹하고 건장한 힘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근심이 없음을 닦아 쌓아가기 때문이며, 셋째는 선방편(善方便)으로 부지런하고 씩씩하게 정진(精進)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지혜의 힘이 튼튼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전념하여 비심(悲心)을 닦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세간의 서적을 이해한다고 하는가? 보살이 세간의 방술(方術)을 잘 알고, 글자를 알고 문장을 알고 말을 알고 그 뜻을 알면 입과 마음이 화합하여 전념해서 받아 지닌다. 이것을 보살이 법을 알고 이치를 안다고 한다. 법을 알고 이치를 알기 때문에 능히 남을 위하여 설하고, 그 설하는 인연으로 해서 법의 지혜[法智]와 이치의 지혜[義智]가 불어난다. 이것을 듣는 지혜[聞慧]라 하며 생각하는 지혜[思慧]라 한다. 이러한 듣는 지혜와 생각하는 지혜의 인연으로 보리법(菩提法)을 도와서 이를 불어나게 한다.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세간을 안다고 하는가? 세간에 두 가지 있으니 첫째는 중생세간이고, 둘째는 기세간(器世間)이다.
보살마하살은 중생의 세간을 관찰한다. 그래서 경에서 말하였다.
“세간의 고행(苦行)은 생사에서 받는 것이다. 따라서 생사를 모르면 해탈할 수 없다.”
여래는 중생의 세간을 잘 안다. 그래서 경에서 말하였다.
“중생에게는 다섯 가지 혼탁함[濁]이 있으니, 첫째는 명탁(命濁)이고, 둘째는 중생탁(衆生濁)이며, 셋째는 번뇌탁(煩惱濁)이고, 넷째는 견탁(見濁)이며, 다섯째는 겁탁(劫濁)이다.예를 들어 지금의 사람들은 그 수명을 백 년도 채우지 못하는데 이것을 명탁이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중생들이 부모ㆍ스승ㆍ어른ㆍ화상ㆍ사문ㆍ바라문 등을 잘 봉양하지 못하고, 의리를 따라 행하지 않으며, 현재세와 미래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혜시(惠施)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복덕을 기꺼워하지 않으며, 재식(齋食)의 공양을 받으면서 금계를 지키어 정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것을 중생탁이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중생들이 번뇌로 인해서 부모를 살해하고, 어머니의 자매와 그 밖에 다른 친속(親屬)에 대하여 강제로 비법(非法)을 행하며, 중생들과 악한 인연을 짓고, 활ㆍ화살ㆍ칼ㆍ몽둥이ㆍ창 같은 무기를 쌓아두고, 많은 중생들이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악담과 욕설을 하고 이치가 없는 말을 한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온갖 악함이 있어서 선하지 못한 번뇌가 일어날 때에 이것을 번뇌탁이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중생들이 법이 아닌 것을 법으로 보고 법을 법이 아닌 것으로 보며,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설하고 법을 법이 아니라고 설한다. 이와 같이 보고 설하기 때문에 바른 법[正法]을 파괴하고 삿된 법[邪法]을 늘린다. 그리하여 한량없는 중생들이 삿된 소견[邪見]을 닦는데 이것을 견탁(見濁)이라 한다.
악한 때의 악한 중생에게 세 가지의 내악겁(內惡劫)이 일어나니, 첫째는 기근내겁(飢饉內劫)이며, 둘째는 역병(疫病)내겁이며, 셋째는 도병(刀兵)내겁이다. 이것을 겁탁(劫濁)이라 한다.”
이것을 보살이 중생의 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그리고 보살은 기세간을 알며, 기세간이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인연을 잘 안다. 그래서 경에서 설하였다.
“가전연(迦栴延)이여, 여래는 세간을 잘 알고, 세간의 인(因)을 알며, 세간의 멸(滅)을 알고, 세간의 도(道)를 알며, 세간의 맛을 알고, 세간의 괴로움을 알며, 세간의 해탈을 안다.
가전연이여, 육입(六入)과 오음(五陰)과 사대(四大) 등을 사람의 몸이라 한다. 세간을 따라 사람의 몸으로 모양을 짓는데 이것을 나[我]라 하고, 중생이라 하며, 수명(壽命)이라 하고, 사부(士夫)라 하며, 아무개라고 한다.
이러한 이름들은 그 성(性)에 진실함이 없다. 그런데도 번뇌 때문에 중생들은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안다’고 말한다.
보고 듣고 아는 것 또한 진실이 없다. 음식이니, 괴로움이니, 즐거움이니, 장수(長壽)니 단명(短命)이니 하는 이름들을 유포하는 것, 이것을 유포(流布)라 한다.
유포는 모양[相]이라 하며, 진실이라 하지 않는다.
여래가 중생세간과 기세간을 잘 알기 때문에 여래가 세간을 잘 안다고 한다.”보살이 만일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복덕이 나은 자를 보면 응당 일어나서 받들어 맞이하여 예배하고 문신(問訊:머리 숙여 합장하고 안부를 묻는 것)하며, 편안한 자리를 베풀어 드린다.
만일 나이나 복덕이 자기와 대등한 자를 보면 먼저 문신하고 겸손하게 낮추어 부드럽게 말하면서 손을 이끌어 함께 앉는다. 교만한 마음으로 내가 저들보다 나은 체하지 않는다.
만일 나이나 복덕이 자신보다 적은 자를 보면 먼저 부드러운 말로 복덕을 권면(勸勉)하고, 선법을 행하도록 교화하며, 마음으로 경멸하거나 소홀하게 여기지 않는다. 설사 잘못이 있더라도 결코 꼬집어 풍자하지 않으며, 필요한 물건들을 넉넉하게 베풀어 준다.보살은 상ㆍ중ㆍ하의 모든 중생들에게 먼저 부드러운 말로 선법을 교화하고, 음식과 법으로 이들을 섭취(攝取:濟度)한다.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과 선한 생각 등을 모두 중생에게 회향(廻向)한다.
그리고 언제나 이렇게 생각한다.
‘바라건대, 나는 모든 중생들과 악한 인연을 짓지 않고,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원망하는 생각을 짓지 않으며, 언제나 친절한 생각을 가져서 성을 내지 않으리라.
설사 성내는 자가 있어도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혹시 남들이 성내며 때린다고 하더라도 응당 법계(法界)를 보리라.
그리하여 신업ㆍ구업ㆍ의업을 항상 스스로 응중(凝重)하여 열네 가지 일인 이른바 여섯 가지 방편과 네 가지 악한 지식(知識)과 네 가지 선한 지식을 구족하리라.선생경(善生經)에 설한 바와 같이 언제나 금세(今世)와 후세를 이익되게 하고, 능히 재물을 구하고, 얻으면 보호하여 삶의 경영을 풍요롭고 여유있고 넉넉하게 하며, 복덕을 지어서 탐욕하지 않고 인색하지 않으리라.
환술(幻術)을 지어내서 세상 사람을 속여 미혹시키지 않으며, 금계를 지켜 부끄러워하고, 기부(寄附)를 하는 자가 있으면 의혹을 품지 않고, 중생 보기를 진실을 바라보듯 하리라.
항상 선한 벗을 가까이 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열 가지 선(善)을 권면하리라.
보면 본다고 하고, 들으면 듣는다고 하고, 깨달으면 깨달았다 하고, 알면 안다고 하리라.’
이 때문에 보살을 세간을 안다[知世間]고 한다.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배우는 사의(四依)라 하는가? 보살은 이치에 의지할 뿐 문자(文字)에 의지하지 않는다. 보살은 법을 들음에 있어 문자에 의지하여 듣지 않으며 오직 이치에 의해서만 듣는다.
보살마하살은 법에 의지할 뿐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법과 법이 아닌 것을 알아서, 이런 법은 부처님이 설한 것이고, 이런 법은 장로(長老)가 설한 것이며, 이런 법은 여러 스님[衆僧]들이 설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만일 법이 아닐 경우 비록 부처님께서 설하는 것을 듣는다 해도 마음에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바른 법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도 아니고, 장로가 설한 것도 아니고, 여러 스님들이 설한 것도 아닐 경우, 비록 부처님이나 장로나 승려의 설이 아닐지라도 이것은 법상(法相)이므로 들으면 믿고 받아들인다.
보살마하살은 요의경(了義經:大乘經典)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小乘經典)에 의지하지 않는다. 요의(了義)에 의지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고 이동할 수 없는 것이며, 요의경이란 의심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만일 요의경에서 의심이 생긴다면 움직일 수도 있고 이동할 수도 있게 된다.
보살은 지혜에 의지할 뿐 정식(情識)에 의거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지혜를 닦는 것을 정지(淨智)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깊고 깊은 이치를 이해하며, 비록 깊은 이치에 대해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헐뜯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이 사의(四依)를 성취하였다고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사의를 성취하면 능히 분명하게 세간의 도와 출세간의 도를 안다.보살에게는 또한 네 가지의 도(道)가 있으니, 이 네 가지의 도로 모든 법계를 알아서 걸림이 없는 지혜[無礙智]를 얻는다.
네 가지의 도란 곧 네 가지의 걸림이 없는 지혜이다. 모든 법계를 아는 것을 법이 걸림이 없는 지혜[法無礙智]라 하며, 모든 법의 성(性)이 걸림이 없는 지혜이며 전도가 없는 지혜[無顚倒智]임을 아는 것을 이치가 걸림이 없는 지혜[義無礙智]라 하며, 보살이 모든 법의 갖가지 이름을 아는 것을 말이 걸림이 없는 지혜[辭無礙智]라 하며, 보살이 만일 모든 법계의 모든 법의 이름과 모든 법의 이치가 다 설할 수가 없는 것임을 알 경우, 이를 요설(樂說)이 걸림이 없는 지혜[樂說無礙智]라 한다.
보살이 네 가지 걸림이 없는 지혜를 구족하면 음입계(陰入界)의 방편과 십이인연의 방편과 시처비처(是處非處)의 방편을 알며, 보살이 네 가지 걸림이 없는 지혜를 구족하면 보리의 도를 스스로 분명하게 알아서 남들을 위하여 분별해서 널리 설한다.어떤 것을 보리를 장엄한다 하는가? 보리를 장엄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공덕장엄이고, 둘째는 지혜장엄이다.
「자리이타품(自利利他品)」에서 설한 바와 같이 보살이 만일 초아승기겁(初阿僧祇劫)에서 이러한 두 가지의 장엄을 닦아 쌓으면 하(下)장엄이라 하고, 제2아승기겁에서 닦아 쌓으면 중(中)장엄이라 하며, 제3아승기겁에서 닦아 쌓으면 상(上)장엄이라 한다.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삼십칠품(三十七品)을 닦는다 하는가? 보살이 네 가지 걸림이 없는 지혜를 구족하여 방편지(方便智)를 얻는데 이 방편지로 해서 삼십칠품을 닦는다. 그렇지만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아 얻지 못하며, 역시 이승(二乘)이 닦는 도품(道品)을 안다. 이승을 아는 것을 초품(初品)에서 설한 것과 같다.
어떤 것을 보살이 닦는 삼십칠품을 안다 하는가? 보살은 몸을 보아서 신관(身觀)을 따른다. 이러한 관점을 가질 경우 신상(身相)에 집착하지 않고 공상(空相)을 짓지 않으며 또한 이 몸이 선언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이것을 몸을 보는 첫째의 이치[觀身第一義]라 한다. 유포하기 때문에 이름을 설하여 몸이라 하는데, 몸 이외의 삼십칠품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보살마하살이 이 몸을 볼 때에 고통[苦]을 짓지 아니하고, 모임[集]을 짓지 아니하며, 멸함[滅]을 짓지 아니하고, 멸인연의 길[滅因緣道]을 짓지 아니한다. 어째서인가? 법계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이 만일 이와 같이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안다면 이것을 첫째 의미의 삼십칠품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보살이 만일 각관(覺觀:細思와 麤思)으로써 삼십칠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사마타(舍摩他:止息)라 한다.
보살이 만일 법계의 진실은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면, 이것을 비바사나(毘婆舍那:관찰)라 한다.
보살의 사마타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치의 사마타[第一義舍摩他]이고, 둘째는 기(期)사마타이며, 셋째는 진실(眞實)사마타이고, 넷째는 번뇌의 원망과 증오(怨憎)를 여의는 사마타이다. 보살은 네 가지의 사마타를 구족하여 모든 법계를 알며, 이 네 가지의 사마타를 구족한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해서이다.
보살의 비바사나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네 가지의 사마타와 함께 하는 행(行)이고, 둘째는 멀리 전도(顚倒)를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한량없는 법계를 분별하는 것이고, 넷째는 법계가 걸림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보살이 이 네 가지의 비바사나를 닦는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해서이다.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선방편(善方便)이라 하는가? 선방편에 열두 가지가 있으니 내육종(內六種)과 외육종(外六種)이다.
내육종이란 보살이 항상 일체 중생에 대하여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켜서, 진실로 모든 행(行)을 분명히 알고, 언제나 기꺼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계념(繫念)하는 것이다. 기꺼이 중생을 위하여 생사를 윤회하고, 진실로 번뇌와 번뇌를 깨뜨리지 못함을 알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열심히 닦아 정진한다. 이것을 내방편(內方便)이라 한다.
외육종이란 적은 보시로도 한량이 없는 복덕을 받게 하고, 공덕이 있는 자를 증장시키며, 불법을 파괴하는 자에게 믿음이 생기게 하고, 이미 믿는 자는 이를 증장시키며, 아직 잘 성숙하지 못한 자는 잘 성숙되게 하고, 잘 성숙된 자는 해탈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외방편(外方便)이라 한다.어떤 것을 일러 적게 베풀고도 한량이 없는 복덕을 얻는다 하는가? 만일 어떤 중생이, 보살이 설하는 법을 듣고 한 움큼의 밥을 굶주린 개에게 주었을 때 베푼 것이 적고 복전(福田) 또한 박하지만 능히 보살의 도에 회향하기 때문에 얻는 바의 복의 과보는 한량없다.
공덕이 있는 자를 증장한다는 것은 만일 어떤 중생이 먼저 팔관재계(八關齋戒)를 받을 경우 보살이 다시 그를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해서 무상의 보리에 회향하게 하는 것이다.만일 어떤 중생이 깊이 잘못된 소견에 집착하여 한 달을 먹지 않는데 낮에는 끊고 밤에는 먹고 한다면, 보살은 즉시 그를 위하여 바른 법[正法]을 강설해서 그 잘못된 마음을 깨뜨리고 팔계(八戒)의 재법(齋法)을 받아 지키게 한다. 보살은 잘 재계하지 못하는 고통을 깨뜨리고 선법을 받아 지니게[受持] 하며 재계하도록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해탈을 추구하면서도 그 방편을 모르면 보살은 그를 위해 중도(中道)의 참된 이치를 설하여 양 극단의 생각[二邊]으로부터 떠나게 한다.만일 어떤 중생이 천신(天身)을 얻으려고 깊은 물과 뜨거운 불에 뛰어들고자 하면 보살은 그를 위하여 이러한 현실의 고통을 깨뜨려 주고, 지계(持戒)를 설해서 현세에는 즐거움을 받고 후세에는 하늘의 몸[天身]을 받도록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적정(寂靜)함을 위해 사비타전(四毘陀典:바라문의 네 가지 베다 경전)을 읽어 외우고 해설하고 하면 보살은 즉시 십이부경(十二部經)을 가르쳐서 그 뜻을 분별하여 생각하게 한다.그리고 보살은 세간에 있는 가장 좋은 꽃과 향으로 삼보(三寶)에게 공양하고, 또한 중생에게도 공양하게 한다. 스스로 시방의 한량이 없는 모든 부처를 향하여 발원 공양하고, 또한 중생에게도 시방의 부처를 향하여 발원 공양하게 한다.
그리고 보살은 언제나 염불(念佛)과 염천(念天)을 닦으며, 역시 중생에게도 육념(六念)을 닦게 한다.
그리고 보살은 몸과 입으로 지은 선업(善業)이 많든 적든 간에 모두 중생에게 베풀고, 역시 이러한 법으로 중생을 교화한다.그리고 보살은 언제나 이렇게 발원한다.
“모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들은 모두 나의 몸에 모아서 다른 사람들이 이를 받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는 역시 이 법으로 중생들에게 행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보살이 만일 과거와 현재세에 허물이 있을 경우, 시방의 모든 부처에 회향하여 참회하고, 또한 이 법으로써 중생들이 행하도록 가르친다.그리고 보살은 스스로 능히 네 가지의 무량심(無量心)을 닦으며, 역시 중생에게도 이 네 가지 무량심을 행하도록 한다.
공덕이 있는 자에게는 이를 증장하게 하며, 불법을 깨뜨리는 자에게는 믿음이 생기게 하고, 이미 믿는 자는 이를 증장시키며, 잘 성숙하지 못한 자는 잘 성숙하게 하고, 이미 성숙한 자는 해탈을 얻게 한다.
보살마하살은 이 네 가지의 법을 위해 여섯 가지를 닦는다. 그 첫째는 남을 따르는 것이고, 둘째는 장애가 없는 것이고, 셋째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마음이 서로 닮은 것이고, 다섯째는 은혜를 갚는 것이고, 여섯째는 청정함이다.남을 따른다[隨他]는 것은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할 경우, 먼저 부드러운 말로 저들의 마음을 따라 말하고, 몸과 입과 뜻에 따라 능력에 맞게 혜시(惠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들로 하여금 공경하여 환희의 마음과 낙법(樂法)의 마음이 생기도록 한 뒤에 강설한다.
중생들의 상ㆍ중ㆍ하의 근기에 따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법을 설하되, 시절에 따라 설하고, 차례에 따라 설하며, 전도되지 않게 설하고, 이익이 되도록 설하며 연민을 가지고 설한다.
만일 신통력으로 응감하여 교화하여 구제하는 것이 필요하면 신족(神足)을 보여준다.
간략한 것을 능히 자세히 설하고 자세한 것을 능히 간략히 설하며, 의심의 그물을 깨뜨리고 억념(憶念)을 베풀어 주며, 널리 분별하여 선정에 들고 나오게 한다.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깊고 깊은 공(空)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즉시 이를 열어 보여서 분별해서 풀어 강설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방등(方等:廣大하고 平等함)한 대승(大乘)의 경전을 비방하면 즉시 법을 설하여 이를 조복시킨다.
예를 들어 어떤 중생이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여래가 설한 것을 보면, 아무런 법도 없고 아무런 사물도 없다고 했다. 모든 법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마치 허공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고, 뜨거운 불꽃과 같고, 건달바성(乾達婆城:신기루)과 같고, 물속에 비친 달 같고, 소리의 메아리와 같다고 했다.”
이처럼 법성(法性)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에 비방을 하게 된다. 불경이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잘못된 견해에서 나온 말이다.보살마하살은 선교(善巧:능란함)한 방편으로 차츰차츰 이들을 위해 수다라(修多羅:經典)의 뜻을 열어 보이되, 뜻에 따라서 말한다.
“모든 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은 설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법(無法)이라고 하며, 그 설할 수가 없다는 것은 그 근본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물(無物)이라 한다. 만약 애초에 설할 수 없는 것이 없고, 그 설할 수 없는 것의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생겨남[生]이 있고 멸함[滅]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생겨남이 없고 멸함도 없다고 설하신 것이다.
만일 생겨남이 없고 멸함이 없으면 허공(虛空)이라 한다. 마치 허공중에 한량없는 색(色)이 있고 한량없는 업(業)이 있는 것과 같아서, 모든 색이나 업이 이른바 가고 머물고, 굽히고 펴고, 구부리고 우러르고 하는 장애가 없다.
만일 이처럼 모든 색이나 모든 업이 없는 것을 허공이라 한다면 이런 허공은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허공에는 모든 색과 업이 있으므로 이를 선설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허공의 성을 선설할 수가 없다는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저 허공이 설할 수가 없는 것이라면 모든 색이나 모든 업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보살마하살이 성지(聖智)를 얻었기 때문에 법계는 말로써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이때 보살은 잘못된 모양[邪相]을 깨뜨리고, 모든 법은 있는 것이며 모든 법은 설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보살이 처음에 이와 같은 성지(聖智)로써 중생을 교화하면, 중생이 얻어 듣고는 법성(法性)이 마치 허공처럼 선설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여래는 모든 법이 허공과 같아서 마치 허깨비[幻]처럼 성상(性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설하는 것이다. 성인도 역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설한 것이다.
허깨비[幻]가 만일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무슨 인연으로 해서 어떤 때는 볼 수 있고 어떤 때는 볼 수 없으며 만일 실제로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사람들이 갖가지 모양을 보는가? 실제로 없는 법은 당연히 모양을 보일 수 없다. 모든 법계도 역시 이와 같다.모든 범부(凡夫)들은 이름과 모양[名相]이 있다고 말한다. 이름과 모양이 있으니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제일의성(第一義性)은 설명할 수 없으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법계는 허깨비처럼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은 모든 법계에 대하여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늘리지도 않고 줄이지도 않는다. 진실일 경우 그 진실을 알아서 역시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살이 방편을 잘 따른다고 한다.걸림이 없다[無障]는 것은 이런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찾아와 걸구하는 사람을 보면 이렇게 말한다.
“선남자(善男子)여, 네가 만일 지금 삼보ㆍ부모ㆍ스승ㆍ장로ㆍ사문(沙門)ㆍ바라문에게 공양한다면, 네가 필요로 하는 물건인 의복ㆍ음식ㆍ침상ㆍ와구(臥具)ㆍ병약(病藥)과, 꽃ㆍ향ㆍ영락ㆍ번개(幡蓋)ㆍ기악(伎樂)과, 전택(田宅)ㆍ옥사(屋舍)ㆍ일꾼[僕使]ㆍ탈 것 등 생활에 쓰이는 모든 물건들을 너에게 주겠다.”
만이 중생들이 두려워하고 근심하면 보살은 이렇게 말해 준다.
“네가 만일 지금 삼보에서 바라문에 이르기까지 이들에게 공양한다면 나는 마땅히 너에게 의복ㆍ음식 등 필요한 것들과 생활에 쓰이는 모든 도구들을 주겠으며, 또한 네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일도 구해 주겠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병들었으면 또한 이렇게 말해 준다.
“네가 만일 지금 삼보에서 바라문에 이르기까지 이들에게 공양한다면 나는 마땅히 너를 위하여 훌륭한 의원(醫院)을 구해서 병을 진찰하여 좋은 약을 쓰게 하고, 의복ㆍ음식과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주어서 너의 병이 낫게 하겠다.”
이러한 중생들이 만일 보살의 말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보살은 당연히 갖가지 방편을 써서 반드시 뜻대로 되도록 하여 주고, 만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보살은 이때에 사심(捨心:중생에 대하여 愛ㆍ憎ㆍ親ㆍ怨이 없는 평등한 마음)을 닦는다. 만일 믿고 받아들이는데도 보살이 이들을 위해 뜻에 맞게 하여 주지 않으면 죄를 얻는다.보살은 먼저 교화하여 삼보ㆍ부모ㆍ스승ㆍ장자에 공양하고 계(戒)를 지니어 정진하게 하며, 그들을 조복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도록 한다.
만일 먼저는 말을 받아들이다가 뒤에 가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를 연민하기 때문에 그 눈 앞에서 호통치고 꾸짖으나 실은 나쁜 마음에서 하는 것이 아니며, 물건을 베풀어 주지 않고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다 해도 밉고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조복(調伏)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걸림이 없다[無障]고 하며, 흔들림이 없다[不動]고 한다.
마음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보살이 만일 자재한 몸을 얻어서 왕ㆍ대신(大臣) 등 권속(眷屬)이 많을 경우, 먼저 이렇게 외친다.
“만일 나의 경계 안이나 집안의 사람으로서 삼보ㆍ부모ㆍ스승ㆍ장자ㆍ사문ㆍ바라문에 대하여 공양하지 않고, 계율을 훼손[毁戒]하고 게으른 자가 있으면 나는 당연히 그의 의복이나 음식을 끊어버리고, 때리고 욕하고 포박해서 감옥에 가두며, 죽이고 추방하겠다. 대신을 시켜 감찰해서 누가 계를 지키고 누가 계를 지키지 않는지 파악하겠으며, 누가 능히 부모와 삼보를 공양하고 누가 부모와 삼보를 공양하지 않는지 살펴보겠다.”
이렇게 할 때 중생들은 두렵기 때문에 모든 악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선법(善法)을 닦아서 보리심과 같게 한다. 이것을 상사방편(相似方便)이라 한다.은혜를 갚는다[報恩]는 것은 이런 것이다. 보살이 만일 시주하는 사람으로부터 의복ㆍ음식ㆍ와구(臥具)ㆍ병약(病藥)ㆍ방사(房舍)를 받되, 많이도 받고 적게도 받으며, 혹시 두려운 일을 만날 경우 누군가 이를 구제하여 풀어주고, 혹시 병이 날 경우에 누군가 치료하여 주며, 혹은 법을 설하는 것을 듣고 의심을 깨뜨리기도 한다. 그러면 보살마하살은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교화하여 선법을 행하도록 한다. 이것을 은혜를 갚는다[報恩]고 한다.
보살이 법을 설하면 중생이 듣고 나서 즉시 삼보ㆍ부모ㆍ스승ㆍ장자ㆍ사문ㆍ바라문 등에 공양하고 계를 지키며 정진한다. 이것을 은혜를 갚는다고 한다.적정(寂靜)이란 이런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궁극적인 보리의 경지에 안주하여 적정한 보리의 도를 닦아서 도술천(兜術天:미륵보살이 교화 설법하는 內院과 天衆의 환락장소인 外院으로 이루어짐)에 태어나, 오래지 않아서 염부제(閻浮提:南贍浮洲)에 내려와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을 안다.
중생은 이를 듣고 모두들 서원(誓願)을 발한다.
“이처럼 보살이 성불(成佛)할 때 우리도 당연히 이런 불법에 출가하여 도를 배워야겠다.”
이때 보살은 염부제에 내려와 찰리(刹利:인도 四姓 가운데 정치ㆍ경제적 지배계급) 바라문의 가문에 몸을 의탁하여 태어난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오욕(五欲)의 즐거움을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고행(苦行)을 수행하는데 고행을 하는 자에게는 공경함이 생긴다. 괴로운 마음[苦心]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고행을 닦고 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성문ㆍ연각의 보리의 마음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도를 이루고 나면 묵연(默然)히 안주[住]한다. 제석천왕(帝釋天王)과 범천왕(梵天王)이 찾아와 권청(勸請)하기 때문이다. 범천의 계청(啓請)은 중생으로 하여금 바른 법[正法]에 대하여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이다.이때 세존께서는 즉시 불안(佛眼)으로써 모든 중생들을 관찰한 다음에 법을 설하신다. 불안으로 관찰하는 것은 악명(惡名)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니 악명이란 이른바 중생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다만 범천왕의 권청 때문에 그러신 것이지 연민함 때문이 아니다.”
만일 불안으로 중생을 관찰하여 법륜(法輪)을 굴릴 경우 중생들의 사악한 바퀴[邪惡輪]를 깨뜨린다.
법륜을 굴린 뒤에는 무리를 모아 놓고 계율을 마련한다.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보살의 적정방편(寂靜方便)이라 한다. 중생으로 하여금 믿는 마음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며, 불법에 들지 않은 자로 하여금 불법에 들게 하기 위해서이며, 미숙(未熟)한 중생으로 하여금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이미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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