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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621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9권

by Kay/케이 2024.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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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9

 

보살선계경 제9권

구나발마 한역
최윤옥 번역

2) 섭취품(攝取品)보살마하살이 모든 행(行)을 닦을 때에 중생을 잘 섭취하는 여섯 가지 일이 있다. 그 첫째는 지심섭취(至心攝取)이고, 둘째는 증익섭취(增益攝取)이며, 셋째는 취섭취(取攝取)이고, 넷째는 구경섭취(究竟攝取)이며, 다섯째는 불필경섭취(不畢竟攝取)이고, 여섯째는 후섭취(後攝取)이다.보살마하살이 처음에 발심(發心)할 때에 중생을 마치 부모ㆍ형제ㆍ처자ㆍ권속처럼 섭취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골똘하게 생각하면서 방편으로 섭취하되, ‘어떻게 하면 능히 중생에게 안락함을 베풀 수 있을까’라고 한다.
이렇게 발원하면서 능력에 따라 베풀어 주면 이것을 보살이 지극한 마음으로 섭취한다고 한다.
보살마하살은 비록 부모나 형제ㆍ처자ㆍ권속 등에 대해서도 수승한 행[勝行]을 닦는 마음으로 교만함 없이 갑절로 더하여 공양한다. 만약 국왕(國王)이 되어 그 권속에게 설할 때에도 역시 그렇게 한다.증익(增益)이란 악법을 깨뜨리고 선법을 가르치며 수시로 예배하고 찬탄하고 공양하는 것이다. 의복ㆍ음식과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베풀어 주고, 은혜를 알아 은혜에 보답하고, 병을 돌보고 약을 주며, 모든 노비와 사환에 대하여 천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형제처럼 생각한다.
설혹 죄를 지은 자를 보더라도 이를 참고 감내하며 포용해서 받아들여 부드럽게 말하고 거칠고 사납게 대하지 않는다. 만일 나라의 임금이 되었을 경우, 모든 권속에 대하여 고통을 주지 않고 그 목숨을 끊지 않으며, 형벌을 멀리 내버리고 바른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되, 본래의 종성(種姓)이 가진 분계(分界)에 따른다. 남의 나라 땅에 대하여 탐을 내고 빼앗지 않으며, 능력에 따라 백성을 길러주고 다 같은 자식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가지고 있는 재물은 권속들과 함께 나누어 쓴다.
말씨는 성실하고 부드럽게 하여 거친 말을 하지 않으며, 인색함과 탐욕을 버린다. 이것을 보살의 증익섭취라 한다.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을 섭취하는 데에 두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재시(財施)이고, 둘째는 법시(法施)이다. 재시를 통해서 가난을 없애고 법시를 통해서 잘못된 견해를 깨뜨린다.
모든 중생에 대하여 그 마음가짐이 평등하며, 법을 베푸는 일을 아까워하지[法慳] 않고, 스승의 태도를 짓지 않으며, 교만한 생각을 갖지 않는다. 은혜에 대한 보답을 구하지 않고 공양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복을 구하고자 하여 찾아와 공양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막아서 거절하지 않는다. 복덕의 장엄을 증장(增長)하기 위해서이다.만일 선법(善法)을 닦고 계(戒)를 지키어 정진하는 자가 있으면 돌보아서 공양하고 몸소 집사(執使)가 되며,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 이치를 해설하여 주고 이치를 이해하는 자에게는 이를 증장시키도록 설하여 준다. 만일 의심의 그물[疑綱]을 가진 자가 있으면 깊은 이치를 설명해 주어서 능히 의심을 끊어 없애도록 한다. 저들과 고락을 함께 하되 마음에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다.
죄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선방편(善方便)을 써서 교화하여 참회하게 하고, 때로는 꾸짖어 나무라고 때로는 찬탄하여 준다. 병들어 고통받는 자를 보면 버리지 말고 돌보아 주며, 방편을 잘 써서 아픈 곳을 없애준다.만일 어떤 중생이 하색(下色)ㆍ하진(下進)ㆍ하념(下念)ㆍ하지(下智)라 하더라도 마음으로 업신여기거나 가벼이 보지 않으며, 수시로 바른 마음의 인연을 설하여 준다.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자를 보면 법을 설하여 위로하고 깨우쳐 준다.
스스로 자기 생각에만 몰두해 남의 말을 믿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는 자는 만일 베풀어 주는 바를 얻으면 다른 사람들과 같아져서 비심(悲心)을 닦아 구족하게 성취한다.
혹시 정명(正命:신업ㆍ구업ㆍ의업을 짓지 않고 바르게 살아가는 일)인 자를 보면 먼저 묻는다. 악심(惡心)을 멀리하고 언제나 선법(善法)을 닦으며, 결코 방일(放逸)하지 않고 게으름을 멀리한다.
그리고 항상 이렇게 발원한다.
‘어떻게 하면 나의 복덕을 모두에게 평등하게 나누어줄 수 있을까?’
보살마하살은 아무 때나 취섭취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리할 때가 되어야 비로소 섭취한다. 이것을 보살의 취섭취라 한다.만약 모든 중생들의 모든 근기가 무뎌 선근(善根)이 잘 성숙되지 않았으면 오래오래 섭취한다. 어째서인가? 궁극에 가서는 마땅히 청정한 마음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중간 정도의 근기가 중간 정도로 성숙했으면 그렇게 오래 하지는 않는다. 어째서인가? 그렇게 오래지 않아도 청정한 마음을 얻기 때문이다.
만약 영리한 근기일 경우, 쉽게 성숙하고 잘 성숙하며, 쉽게 깨끗해지고 쉽게 조복된다. 이것을 보살의 후유섭취(後有攝取)라 한다.
이상의 것을 보살의 여섯 가지 섭취라 한다.
정법(正法)의 섭취에 있어 보살마하살은 이 여섯 가지 섭취로써 삼세의 모든 중생을 섭취한다. 과거ㆍ미래ㆍ현재에서 보살이 중생을 섭취함은 모두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섭취를 벗어나지 않는다.보살마하살이 중생을 섭취할 때에도 열두 가지 어려운 일이 있다.
보살마하살은 나[我]가 없고 나의 것[我所]이 없으며 중생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중생을 위하여 고행(苦行)을 닦는데 이것을 첫 번째 어려움[一難]이라 한다.
다른 자를 조복하기 위해서 꾸짖음[呵責]을 행하며, 또한 스스로 금계(禁戒)를 옹호하여 지켜서 이를 허물어 상처내지 않는다. 이것을 두 번째 어려움[二難]이라 한다.
가진 재물은 적은데 걸구(乞求)하는 자가 매우 많을 경우 이것을 세 번째 어려움[三難]이라 한다.
보살의 한 몸이 많은 사람들에게 얽매여 있어서 쫓아다니며 급사(給使) 노릇을 할 경우, 이것을 네 번째 어려움[四難]이라 한다.제천(諸天)에 방일(放逸)하여 저들과 함께 몸을 받았으나, 그 내심(內心)은 본래 방일하지 않을 경우, 이것을 다섯 번째 어려움[五難]이라 한다.
항상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일하지만 스스로는 금계(禁戒)에 대하여 이를 허물어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경우, 이것을 여섯 번째 어려움[六難]이라 한다.
언제나 탐욕스럽고 증오심이 많으며 어리석고 인색하고 알랑거리고 간사스러운 악인과 함께 지내더라도 저들의 행동을 따르지 않을 경우, 이것을 일곱 번째 어려움[七難]이라 한다.
생사에 온갖 과환(過患)이 많음을 알면서도 이를 버리지 않을 경우, 이것을 여덟 번째 어려움[八難]이라 한다.모든 번뇌와 생사의 허물이 많아서 목숨을 버릴 때에 아직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지만, 비록 청정하지는 못해도 바른 생각[正念]을 잃지 않을 경우, 이것을 아홉 번째 어려움[九難]이라 한다.
아직 청정한 마음은 얻지 못했지만 능히 자신의 사랑하는 대상인 처자ㆍ권속들을 남에게 베풀 경우, 이것을 열 번째 어려움[十難]이라 한다.
중생들이 마음이 달라서 경계가 같지 않지만 때로는 부드러운 말을 하고 때로는 행사(行捨:평등한 마음가짐)를 할 경우, 이것을 열한 번째 어려움[十一難]이라 한다.
끝내 방일하지 않지만 번뇌를 끊지 않는 것을 열두 번째 어려움[十二難]이라 한다.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경중(輕重)을 두지 않지만, 때로는 가볍게 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겁게 대하기도 하며, 때로는 그 경계를 보기도 하고, 때로는 굳건한 마음[健心]을 짓기도 하며, 때로는 원(願)을 세우고, 때로는 방일하지 않기도 하며, 때로는 지혜를 닦고, 때로는 유연(柔軟)함을 닦으며,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행사(行捨:평등한 마음가짐)를 하며, 열심히 정진하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며, 때로는 방편을 쓰기도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배울 경우, 열두 가지 어려운 처[難處]에 대하여 마음으로 근심하거나 후회하지 않으며, 능히 자신을 옹호하고 또한 남을 이롭게 한다.
3) 필경품(畢竟品)보살마하살이 십이행(十二行)을 닦음에 있어 칠지(七地)가 있는 바, 여섯은 보살지(菩薩地)이고 나머지 하나의 지는 성문(聲聞)과 보살이 함께 한다.
그 첫째는 성지(性地)이고, 둘째는 해지(解地)이며, 셋째는 정심지(淨心地)이고, 넷째는 지지(持地)이며, 다섯째는 정지(定地)이고, 여섯째는 정행지(定行地)이며, 일곱째는 필경지(畢竟地)이다. 이것을 칠지(七地)라 한다.성행(性行)과 해행(解行)이 각각 하나의 지가 되고, 희행(喜行)을 정심지라 하며, 계행(戒行)과 혜행(慧行)과 무상행(無相行)이 합하여 지지(持地)가 되고, 무행무상행(無行無相行)을 정지라 한다. 무애지행(無礙智行)을 정행지라 하며, 여래행(如來行)을 필경지라 한다. 필경지의 이후는 마땅히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보살이 하지(下地)에서부터 정심지로 들어갈 경우, 어떻게 하여 능히 삼악도(三惡道)의 고통을 단절하는가? 보살이 세속의 누선(漏禪)을 닦는다. 누선을 닦으면 세간의 정선(淨禪)을 얻고, 정선을 닦으면 곧 해지를 얻어서 보리를 장엄하여 백열 가지의 자비를 닦는다. 자비를 닦기 때문에 중생에 대하여 비심(悲心)을 얻는 것이다. 비심을 얻으므로 삼악도를 마치 자기 집처럼 즐거워한다.
보살이 삼악도에 머물고 있음을 스스로 관찰하여 보리를 장엄할 때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큰 고뇌를 받는다.
그리하여 “만일 나의 청정한 마음이 세력(勢力)이 있는 것이라면 원컨대 중생들이 가진 고뇌를 모두 나에게 모이게 하소서”라고 크게 선한 원(願)을 세운다. 이러한 선원(善願)의 원력(願力)과 세정선(世淨禪)으로 하여 몸과 마음의 번뇌의 습기(習氣)를 멀리 여의며 습기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사대신(四大身)을 바꾼다.사대신이 바뀌면 세정선을 인하여 삼악도에 이르지 않는다. 이리하여 보살이 삼악도의 고통을 단절하고 해지(解地)를 지나 정지(淨地)에 든다. 나머지 공덕은 행품(行品) 중의 십정심(十淨心)의 설과 같다.
이 십정법(十淨法)에는 짓지 않는 마음[不作心], 일으키지 않는 마음[不發心], 보살계를 받지 않는 것, 믿지 않는 마음[不信心], 나쁜 마음[惡心], 자비를 닦지 않는 것, 화내는 마음[瞋心], 어리석게 후회하는 마음[憂悔心], 자애롭지 않은 마음[不慈心], 방일한 마음[放逸心]에 대한 열 가지 대치(對治)가 있다.
하는 말이 거칠고 사나우며 신명(身命)을 탐하고 아까워하여 세간을 따르지 않으며, 게으르고 나태해서 부끄러움을 모르며, 고뇌가 몸을 핍박하고 의혹이 얽히고 겁약(怯弱)하며, 부처님ㆍ불법(佛法)ㆍ스님에게 공양하지 않는 등 이러한 청정하지 못함을 대치한다.
이 십정법에서 처음의 세 법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고, 나중의 일곱 가지 법은 장엄(莊嚴)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보살마하살은 보리와 보리의 도를 믿는다. 보리의 도를 믿기 때문에 고통받는 중생을 보고 대자심(大慈心)을 일으키며, 자심이 생기기 때문에 곧 이렇게 발원한다.
“원컨대 나는 이와 같은 고통들에서 중생들을 구제하고 싶다.”
연민하기 때문에 몸을 내던져 혜시(惠施)를 하되 탐내거나 아까워하는 것이 없으며,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기에 마음에 걱정이나 후회가 없다. 마음에 후회하지 않으므로 세간의 방술(方術)을 알고, 세간의 방술을 알기 때문에 시절(時節)을 잘 알아서 중생들의 마음을 따르나니, 시절을 알기 때문에 지세간(知世間)이라 한다.
지혜의 힘이 있기 때문에 객번뇌(客煩惱)가 생기면 깊이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저들 번뇌가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한다. 이것을 용건(勇健)이라 한다.
용건하기 때문에 방일함이 없고, 방일하지 않으므로 선법을 닦는다. 선법을 닦기 때문에 보살계를 받고, 보살계를 받기 때문에 삼보에게 공양하며, 삼보에게 공양함으로 해서 그 마음이 청정해진다. 이것을 정지(淨地)라 한다.
4) 행품(行品)보살마하살이 해지(解地) 내지 보살지(菩薩地)에 주(住)하는 데에는 네 가지 행(行)이 있으니, 첫째는 바라밀행이고, 둘째는 보리행이며, 셋째는 신통행(神通行)이고, 넷째는 숙중생행(熟衆生行)이다.
바라밀행이란 앞에서 말한 여섯 바라밀에다 방편(方便)바라밀ㆍ원(願)바라밀ㆍ역(力)바라밀ㆍ지(智)바라밀을 모두 합해 열 가지 바라밀이다. 이것을 바라밀행이라 한다.
선방편(善方便)에 열두 가지가 있으니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것을 방편바라밀이라 한다.원바라밀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것을 원바라밀이라 한다.
십력장엄정(十力莊嚴淨)을 역바라밀이라 하며, 모든 법의 옳은 곳과 그른 곳을 아는 것을 지바라밀이라 한다. 세간의 진리[世諦]를 알기 때문에 지바라밀이라 하며, 제일가는 의제[第一義諦]를 알므로 반야(般若)바라밀이라 한다.
또 한량없는 지혜를 방편바라밀이라 하고, 승승지(勝勝智)를 구하는 것을 원바라밀이라 하며, 네 마구니[魔]의 장애를 받지 않으므로 역바라밀이라 하며, 능히 모든 법의 진실한 성질을 알기 때문에 지바라밀이라 한다.사념처(四念處) 내지 팔정도분(八正道分)과 사구(四求)ㆍ사진지(四眞智)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것을 보리행이라 한다.
신통(神通)은 불가사의품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육통(六通:여섯 가지 신통력)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을 신통행이라 한다.
두 가지 무량(無量)인 조복무량(調伏無量)과 방편무량(方便無量)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을 숙행(熟行)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의 이와 같은 네 가지 행(行)이 모든 행을 포섭한다.보살마하살이 한량없는 아승기에 궁극에는 청정한 모든 선법(善法)을 구족하여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 등을 이기고 결국에는 보리도과(菩提道果)를 섭취한다. 궁극에 가서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에 이것을 열 가지 바라밀이라 한다.
만일 차례로 설한다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치고(對治故)이고, 둘째는 생고(生故)이며, 셋째는 득과고(得果故)이다.선법의 대치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색하고 탐내는 것이고, 둘째는 악업(惡業)이며, 셋째는 성내는 마음이고, 넷째는 게으름이며, 다섯째는 어지러운 마음이고, 여섯째는 어리석음이다. 이 여섯 가지 법의 인연으로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이 여섯 가지 법을 깨뜨리기 위하여 여섯 바라밀을 설하는 것이니, 단(檀)바라밀에서부터 반야(般若)바라밀까지이다. 여섯 바라밀은 곧 네 바라밀을 포섭하는데 이것을 대치(對治)라 한다.생(生)이란, 보살마하살이 모든 세속의 물질들을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면 이것을 단(檀)바라밀이라 하고, 출가한 뒤에 보살계를 받으면 이것을 시(尸)바라밀이라 하며, 금계(禁戒)를 옹호하여 지키기 때문에 비록 매를 맞고 욕을 먹더라도 묵묵히 받아들이되 갚으려 하지 않는데 이것을 찬제(提)바라밀이라 이름하며, 청정하게 금계를 지키고 열심히 선법(善法)을 닦는 것을 비리야(毘梨耶)바라밀이라 이름하며, 정진하기 때문에 오근(五根)이 조복되는 것을 선(禪)바라밀이라 이름하며, 오근이 조복되어 참된 법계를 아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하는데 이것을 생(生)이라 한다.과보(果報)란 보살이 현재에 보시 등의 선법을 닦아서 몸을 버릴 경우 밖으로는 큰 재물을 얻고 안으로는 다섯 가지 구족(具足)을 얻는 것이다.
다섯 가지 구족이란 인간계(人間界)나 천상계(天上界)에 태어나 목숨[壽]ㆍ색(色)ㆍ힘[力]ㆍ안락(安樂)ㆍ변재(辯才)를 얻는 것인데 이것을 시과(施果)라 이름한다.
시인연(施因緣)으로써 선법(善法)을 닦아서 마음에 질투함이 없고 중생의 죄과(罪過)를 인내하면, 이것을 제2의 과보를 구족한다고 한다.
시인연으로써 세간의 일이나 출세간의 일을 짓더라도 마음에 싫어하고 후회함이 없으면, 이것을 제3의 과보라 이름한다.
시인연으로 해서 마음이 유연해져서 어지럽고 산란함[錯亂]이 없으면 이것을 제4의 과보라 이름한다.
시인연으로 해서 이것은 복전(福田)이며 이것은 복전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알고, 이것은 보시할 수 있고 이것은 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며, 방편을 잘 알아서 재물을 구하여 재물을 취할 경우, 이것을 제5의 과보라 이름한다.네 바라밀이 여섯 바라밀을 섭취하는 데에 세 가지 계율[三戒]이 있으니, 첫째는 계를 따르는 계[隨戒戒]이고, 둘째는 마음을 따르는 계[隨心戒]이며, 셋째는 지혜를 따르는 계[隨智戒]이다.
보살의 시바라밀을 계를 따르는 계라 이름하고, 선바라밀을 마음을 따르는 계라 이름하며, 반야바라밀을 지혜를 따르는 계라 이름한다.
이 세 가지 계를 제외한 보살계란 없나니, 보살의 세 가지 계가 모든 계를 섭취하기 때문이다.
보살에게는 능히 중생을 이롭게 하는 네 가지가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보리를 위하여 선법을 닦는 것이고, 둘째는 먼저 참된 지혜로써 모든 법의 뜻을 아는 것이며, 셋째는 선법을 증장하는 것이고, 넷째는 중생의 근기를 성숙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는 보살이 능히 중생을 크게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이 네 가지를 떠나서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런 이치는 없다.
5) 삼십이상팔십종호품(三十二相八十種好品)열세 가지 여래행(如來行)을 필경불지(畢竟佛地)라 한다.
필경불지에 백사십 가지 불공법(不共法)이 있으니, 이른바 삼십이상ㆍ팔십종호ㆍ사일체행정(四一切行淨)ㆍ십력(十力)ㆍ사무소외(四無所畏)ㆍ삼념처(三念處)ㆍ삼불호(三不護)ㆍ대비(大悲)ㆍ상불망실(常不忘失)ㆍ단번뇌습(斷煩惱習)ㆍ일체지(一切智)이다. 이것을 백사십 가지의 불공법이라 한다.삼십이상(三十二相)이란, 첫째는 발바닥이 평평한 것[足不平]이고, 둘째는 발바닥에 천 개의 바퀴살 무늬[足下千輻輪]이며, 셋째는 손가락이 가늘고 긴 것[指纖長]이고, 넷째는 발꿈치가 반듯하고 원만한 것이며, 다섯째는 손발가락이 망만(網縵:물갈퀴)인 것이고, 여섯째는 수족이 부드러운 것이며, 일곱째는 장딴지(종아리의 볼록한 곳)가 이니연(伊尼延) 사슴왕[鹿王]과 같은 것이고, 여덟째는 복사뼈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반듯하게 섰을 때 손이 무릎에 닿는 것이고, 열째는 음경(陰莖)이 감추어진 모양이 코끼리나 말과 같은 것이며, 열한째는 몸이 둥글고 만족하여 니구다(尼拘陀)나무와 같은 것이고, 열두째는 몸의 털이 위로 쏠리는[上靡] 것이며, 열셋째는 털의 하나하나가 오른쪽으로 선회(旋回)하는 것이고, 열넷째는 몸이 황금빛인 것이며, 열다섯째는 항상 빛나는 얼굴의 빛이 두루 7자가 되는 것이고, 열여섯째는 살갗이 곱고 연하면서 티끌이 묻지 않는 것이며,열일곱째는 몸의 일곱 군데(두 손바닥, 두 발바닥, 두 어깨, 목덜미)가 풍만한 것이고, 열여덟째는 윗몸이 수사자의 모양과 같은 것이며, 열아홉째는 팔꿈치가 반듯하고 원만한 것이고, 스무째는 결골(缺骨)이 평평하고 원만한 것이며, 스물한째는 몸이 반듯하고 곧은 것이고, 스물두째는 입의 이빨이 마흔 개인 것이며, 스물셋째는 이빨이 촘촘하여 성기지 않은 것이고, 스물넷째는 이빨 색깔이 흰 것이며, 스물다섯째는 협차(頰車:턱 또는 볼)가 네모반듯하여 사자와 같은 것이고, 스물여섯째는 맛 중에서 최상의 미각(味覺)을 얻은 것이며, 스물일곱째는 육계상(肉髻相:정수리가 솟아 상투처럼 불룩한 것)이 있는 것이고, 스물여덟째는 넓고 긴 혀이며, 스물아홉째는 맑고 깨끗한 목소리이고, 서른째는 눈이 감청색(紺靑色)인 것이며, 서른한째는 눈이 우왕(牛王:소의 왕)과 같은 것이고, 서른두째는 양미간(兩眉間)에 흰 털이 난 것이다.팔십종호(八十種好)는 다음과 같다. 손가락 발가락이 합쳐서 스무 개인데 이것을 이십호(二十好)라 한다. 그리고 손과 발의 앞과 뒤를 합쳐서 여덟 곳이 평평하고 원만하며, 양쪽의 복사뼈ㆍ무릎ㆍ허벅다리의 여섯 곳이 미묘하고 아름다우며, 손에 삼취(三聚)가 있으며, 어깨와 팔꿈치와 팔의 여섯 곳이 평평하고 원만하며, 허리의 기중(奇中)을 이호(二好)라 하며, 사타구니[]와 양쪽 엉덩이[尻]를 삼호(三好)라 하며, 마장(馬藏:부처님의 생식기)과 두 장딴지(또는 上腕)가 삼호이며, 허리ㆍ배꼽ㆍ양쪽 갈비ㆍ양쪽 겨드랑이ㆍ두 젖을 여덟이라 하며, 배ㆍ가슴ㆍ등뼈ㆍ목을 합쳐 육십(六十)이라 한다. 거기에 위아래의 이와 어금니, 위아래의 입술과 잇몸, 양쪽 뺨, 양쪽 살쩍, 두 눈, 두 어깨 및 코의 두 구멍과, 이마 위의 양차(兩)와, 양이두(兩耳頭)의 원만하고 만족할 만한 것을 합쳐서 팔십(八十)이라 한다.보살마하살이 정지(淨地)에 주(住)하게 되면 업력(業力) 때문에 비록 이와 같은 팔십종호를 얻지만 아직 크게 밝고 청정하지는 못하다. 도수(道樹:보리수)가 일어날 때에야 비로소 밝고 청정함을 얻는데 밝고 청정하지 못할 때에는 보살지행(菩薩地行)이라 한다.
보리를 장엄하는 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근(近)이요, 둘째는 원(遠)이다. 원은 아직 삼십이상과 팔십종호의 과보를 얻지 못한 것이다. 만일 근이란 이름을 얻으면 삼십이상에 팔십종호라고 말한다. 중생으로 하여금 선업(善業)을 짓도록 하기 때문이다.
중생이 갖가지 악업을 지으면 그 악업 때문에 갖가지의 나쁜 과보를 얻는다. 이 때문에 여래께서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를 설하며, 갖가지 선업과 갖가지 선한 과보를 설한다. 중생이 이를 들으면 곧 갖가지의 악업을 깨뜨려 없앤다.보살이 지극한 마음으로 청정한 계를 닦아서 지키기 때문에 발바닥의 평평함을 얻는다.
부모ㆍ화상(和上)ㆍ스승ㆍ장로ㆍ유덕한 자에게 공양하면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발바닥의 바퀴살 모양[輪相]을 얻어서 모든 중생에 대하여 해코지할 마음을 갖지 않고, 겁주고 협박하여 도둑질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모ㆍ화상ㆍ스승ㆍ장로ㆍ유덕한 자를 보면 멀리 나가 맞아들여 편안히 자리에 모시고 공경하고 예배하며 교만한 마음을 깨뜨려 없애면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가늘고 긴 손가락을 얻는다.
위의 세 가지 행(行)을 갖추면 발꿈치가 반듯하고 원만함을 얻는다.
사섭법(四攝法)으로써 중생을 섭취하면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손발가락의 물갈퀴를 얻는다.
좋은 소유(蘇油)로써 부모ㆍ화상ㆍ스승ㆍ장로ㆍ유덕한 자를 씻어주면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손발이 부드러움을 얻는다.
선법(善法)을 닦되 싫증이나 만족을 모르면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반듯한 장딴지[腸]를 얻는다.
법을 들으면 기뻐하고 즐겨 남들을 위하여 설하며 법을 위하여 주사(走使)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복사뼈가 드러나지 않는 상(相)을 얻는다.삼업(三業)이 청정하여 병든 자를 돌보고 약을 베풀며, 교만을 깨뜨려 없애고 음식의 만족함을 알면,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바로 서면 손이 무릎에 닿는 상을 얻는다.
분열되는 것을 보면 좋은 말을 해서 화합시키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닦고 남에게도 역시 닦도록 가르치면,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마장(馬藏:생식기가 몸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의 상(相)을 얻는다.
스스로 세 가지 업을 청정하게 하고 남에게도 역시 청정하게 가르치며, 만일 중생이 사대(四大:몸)를 조복하지 못할 경우 능히 이들을 위해 치료해 고쳐주면,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몸이 원만한 상을 얻는다.
법을 들으면 기뻐하고, 즐겨 남들을 위해 설하면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몸의 털이 위로 쏠리는[上靡] 상을 얻는다.
모든 법의 깊고 심오한 이치를 사유하여 선법(善法)을 즐겨 닦고, 부모ㆍ화상ㆍ스승ㆍ장로ㆍ유덕한 자를 공양하고, 길을 가거나 불탑(佛塔)이나 승방(僧坊:僧房)을 찾을 경우, 흙덩이ㆍ돌ㆍ가시덤불 등 깨끗하지 못한 것을 치워 없애면,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몸의 털의 상(相)을 얻는다.
만일 음식ㆍ영락(瓔珞) 등을 남들에게 베풀고, 증오하는 마음을 없애면,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두 가지 상(相)을 얻는데, 그 첫째는 금빛[金色]이고, 둘째는 항상 빛을 발하는[常光] 것이다.어떤 업연(業緣)으로 해서 일일모상(一一毛相)을 얻는가? 곧 이러한 업연으로 해서 몸이 곱고 연하여 먼지가 붙지 않는 상을 얻는다.
중생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항상 베풀어 주면,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몸의 일곱 군데가 원만한 상을 얻는다.
스스로 교만을 깨뜨리고 성품을 부드럽게 조복(調伏)하며,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 법대로 행하고, 불선(不善)을 제거하고 선법(善法)을 가르치면,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윗몸이 사자와 같은 상을 얻으며, 어깨가 원만한 상과 결골(缺骨)이 평평하고 원만한 상을 얻는다.
어떤 업연으로 해서 섬세한 손발가락의 상을 얻는가? 곧 이 업연으로 해서 몸이 균형 잡힌 상을 얻는다.
이간질[兩舌]하는 것을 멀리 버리고 싸움을 화합시키면,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마흔 개의 치상(齒相)과, 이빨이 촘촘하여 성기지 않은 상과, 이빨이 고른 상을 얻는다.
욕계(欲界)의 자비를 닦으면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이빨이 흰 상을 얻는다.
걸구(乞求)하는 자를 보고 기꺼이 맞고 보내면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네모반듯한 협차(頰車:턱 또는 볼)의 상을 얻는다.중생을 마치 같은 자식처럼 평등하게 볼 경우,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최상의 맛의 상을 얻는다.
항상 중생에게 더없는 법의 맛[無上法味]을 베풀고, 망각하는 자를 보면 기억하도록 하여 주며, 스스로 오계(五戒)를 지키어 남에게도 이를 가르쳐 주며, 비심(悲心)을 닦아서 능히 크게 법을 베풀면,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육계상(肉髻相)과 광장설상(廣長舌相)을 얻는다.
진실한 말[實語]ㆍ기쁜 말[喜語]ㆍ법다운 말[法語]ㆍ부드러운 말[軟語]을 하고 때가 아닐 경우 말을 하지 않으면, 이런 인연으로 하여 맑고 깨끗한 목소리[梵音聲相]를 얻는다.
비심(悲心)을 닦아서 모든 중생들을 마치 부모와 같이 보면, 이런 인연으로 하여 두 가지의 모양[相]을 얻는데, 그 첫째는 눈이 감청색(紺靑色)인 상이고, 둘째는 눈이 소의 그것과 같은 상이다.
덕이 있는 사람을 보고 진실함을 칭찬하고 찬탄하면 이런 인연으로 하여 백호(白毫)상을 얻는다.삼십이상(三十二相)에 대하여 비록 각각으로 그 인연을 말했지만 참된 인연은 금계(禁戒)를 지키어 정진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만일 금계를 지키어 닦아 정진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사람의 몸도 얻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삼십이상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무견정상(無見頂相:부처님의 머리가 상투처럼 불룩하여 정수리가 보이지 않는 상)과 육계상은 같은 말로서 차이가 없다.
그리고 모든 짓는 일에 대하여 마음이 안정되어 뉘우침이 없으면 이런 인연으로 해서 발바닥이 평평한 상을 얻으며, 만일 지극한 마음으로 지을 경우, 이런 인연으로 하여 일천 개 바퀴살의 윤상(輪相)을 얻고, 둘째와 셋째의 손가락이 망만(網縵:물갈퀴)인 상과, 몸의 일곱 군데가 풍만한 상과, 피부가 곱고 부드러운 상과, 어깨가 원만한 상과, 결골(缺骨)이 풍만한 상과, 몸이 반듯하게 균형 잡힌 상과, 혀가 길고 넓은 상을 얻는다.
만일 항상 끊임없이 지으면 이런 인연으로 해서 손가락이 긴 상과, 바로 서면 손이 무릎에 닿는 상과, 항상 나오는 빛이 일곱 자나 되는 상과, 이빨이 촘촘하여 성기지 않은 상을 얻는다.
만일 청정하게 지을 경우, 이런 인연으로 하여 그 나머지 상을 얻는다.
그리고 또 만일 중생들에 대하여 순수하게 선한 마음을 가지면 이런 인연으로 하여 손발이 부드러운 상과 살갗이 곱고 매끄러워서 티끌이 묻지 않는 상을 얻는다.차례에 따라 수행하고 시절에 맞추어 수행하면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제2, 제3, 제4의 상을 얻는다.
기꺼이 선법을 닦되, 마음에 후회하거나 퇴전(退轉)함이 없으면,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황금빛의 몸을 얻으며, 항상 빛이 나는 상과, 이빨이 흰 상과, 양 미간의 털이 흰 상을 얻는다.
만약에 찬탄을 듣더라도 교만한 생각을 하지 않고, 선법을 덮어 감추어서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할 경우, 이런 인연으로 해서 마장상(馬藏相:부처님의 성기가 몸 안에 감추어진 상)을 얻는다.
닦고 있는 선법을 보리에 회향(廻向)할 경우, 이런 인연으로 하여 한 개의 털구멍에 하나의 털이 나는 상과, 몸의 털이 위로 쏠리는 상과, 입 안의 이빨이 마흔 개인 상과, 가장 뛰어난 맛의 상을 얻는다.
부지런히 정진하면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네모반듯한 협차(頰車:턱 또는 볼)의 상과, 윗몸이 사자와 같은 상을 얻는다.
지극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사랑하여 생각하고 같은 자식으로 보아주면 이러한 인연으로 하여 이빨이 고른 상과, 눈이 감청(紺靑)으로 푸른 상과, 소[牛]의 눈인 상을 얻는다.
선법을 닦되 싫증이나 만족을 모르면 이런 인연으로 하여 그 나머지의 상을 얻는다.보살마하살이 성행(性行)에 머무를 때에 삼십이상의 업을 닦는다. 정행(淨行)에 머물 경우 비록 이와 같은 삼십이상이 있지만, 상(相)이 구족하지 못하여 아직 밝고 청정함을 얻지 못한다. 십삼행(十三行)에 주해야 비로소 뚜렷하게 드러나서 모든 불법을 구족한다.
비록 한량이 없는 상(相)의 중생들이 같지 않지만, 하ㆍ중ㆍ상의 불가사의함이 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삼십이상을 설한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가진 공덕을 모두 합쳐 하나로 모으면 바로 여래의 일모상(一毛相)과 같다. 그런데 모든 털구멍마다 지닌 공덕을 하나로 모으면 곧 일호(一好)를 이룬다.
모든 좋음[衆好]이 가진 공덕을 한 데 모아서 이를 백 배로 늘리면 드디어 일상(一相)을 이룬다.
다만 미간에 흰 털이 난 상과 무견정(無見頂)의 상만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의 모든 상을 합쳐서 이를 천 배로 늘리면 이상(二相)을 이룬다.삼십이상과 팔십종호가 가진 공덕을 하나로 모아서 천만억(千万億)의 배수로 늘리면 드디어 여래의 깊고 요원한 여음(蠡音)을 이룬다. 그 소리는 한량이 없고 끝이 없는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들린다.
여래께서는 이와 같이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한다. 그런 까닭에 여래 세존을 무상(無上)이라 하며, 행하시는 법을 무상행(無上行)이라 한다.
삼십이상과 팔십종호에 세 가지의 한량없음이 있으니, 첫째는 세 겁의 한량없음[三劫無量]이고, 둘째는 선을 닦음의 한량없음[修善無量]이며, 셋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함의 한량없음[利益衆生無量]이다. 그래서 여래께서 한량없는 공덕[無量功德]을 성취한다고 말한다.
6) 주품(住品)보살의 사정(四淨)이란 첫째 신정(身淨)이고, 둘째 연정(緣淨)이며, 셋째 심정(心淨)이고, 넷째 지정(智淨)이다.
영원히 습기(習氣)를 단절하고 청정한 근기를 얻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 몸이 자재(自在)함을 얻어서 태어남과 죽음[生滅]에 자유로우면 이것을 신정이라 한다.
신통자재함을 연정이라 한다.
선법을 닦아 마음이 번뇌로부터 떠나면 이것을 심정이라 한다.모든 법을 알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으며, 자재한 지혜를 얻어서 모든 법행(法行)을 알면 이것을 지정이라 한다.
보살은 이 네 가지의 청정법에 의해서 십력(十力)을 얻는다.
무엇을 십력이라 하는가? 첫째 시처(是處)와 비처(非處)를 아는 것이고, 둘째 모든 업을 아는 힘이며, 셋째 모든 선정과 해탈을 아는 힘이고, 넷째 모든 근(根)의 날카로움과 무딤을 아는 힘이며, 다섯째 모든 중생해(衆生解)를 아는 힘이고, 여섯째 중생계를 아는 힘이며, 일곱째 지극한 곳의 도를 아는 힘이고, 여덟째 과거세(過去世)를 아는 힘이며, 아홉째 천안력(天眼力)이고, 열째 누진력(漏盡力)이다.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은 진실하여 어긋나는 것이 없다. 그래서 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如來ㆍ如去)라 한다.
만일 선과(善果)와 불선과(不善果)의 진실인연(眞實因緣)ㆍ진실체(眞實體)ㆍ진실성(眞實性)ㆍ진실주(眞實住)ㆍ진실생(眞實生)을 설하면 이것을 시처(是處)의 선과와 불선과요 인(因)으로 인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고, 이것을 비처(非處)로서 교만한 지혜를 깨뜨리는 것이라 하며, 진실지(眞實智)라 하고, 일체지(一切智)라 하며, 무애지(無礙智)라 하고, 정지(淨智)라 하며, 이만지(離慢智)라 한다.차례로 셈하므로 제일력(第一力)이라 하고, 위가 없으므로 일체행(一切行)이라 하며,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모든 악마를 깨뜨리므로 힘[力]이라 하고, 진실로 장엄하여 자재함을 얻으므로 구족(具足)이라 이름하며, 능히 모든 공포를 깨뜨리므로 열반이라 이름하고, 팔정도(八正道)의 인(因)을 인하여 모든 고뇌를 깨뜨리므로 무상(無上)이라 이름하며, 법대로 안주하므로 진실이라 하고, 스스로 청정한 법을 얻어서 중생을 연민하여 풀어 설하므로 범륜(梵輪)이라 한다.
범륜은 여래(如來)라 이름하며, 여래는 청량(淸凉)이라 이름하며, 청량은 계(戒)라 이름한다.
청정한 계를 받아 지키어 계대로 설하면 이것을 청정한 정설(正說)ㆍ실설(實說)ㆍ이익설(利益說)ㆍ광대설(廣大說)ㆍ무애설(無礙說)ㆍ일체설(一切說)ㆍ필경설(畢竟說)ㆍ무상설(無上說)ㆍ무루설(無漏說)ㆍ무위설(無爲說)ㆍ외설(外說)ㆍ현전설(現前說)이라 이름한다.이런 관계로 대사자후(大師子吼)라 이름하고, 선력방편(善力方便)이라고 이름하며, 진실인(眞實因)이라고 이름한다.
진실의 인연으로 해서 진실의 과(果)를 얻는다. 이른바 인과(人果)ㆍ천과(天果) 및 무상과(無上果)이다. 무상과이므로 무상(無上)이라 한다.
만일 업을 짓고 나서 얻는 과를 증장하면 과거라 하며, 업을 짓고 나서 과보를 받지 않더라도 역시 과거라 한다.
아직 업을 짓지 않았으나 지으려고 하며, 아직 과를 얻지 않았으나 얻고자 하면 이것을 미래라 하며, 이미 지은 업에 대해 아직 과보를 얻지 않았으며, 과보를 얻은 업이 이미 멸해서 지나가 버렸으면 이것을 현재라 한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업에 세 가지가 있으니, 몸ㆍ입ㆍ뜻의 과를 말한다. 몸ㆍ입ㆍ뜻의 과는 어느 곳에서든 몸ㆍ입ㆍ뜻의 선업(善業)을 지으면 이곳에서 과를 얻고, 어느 곳에서나 몸ㆍ입ㆍ뜻의 악업(惡業)을 지으면 이곳에서 과를 얻는다. 이것을 시처(是處)라 한다.순일(純一)하고 선(善)한 업은 악과(惡果)를 얻지 않는데 이것을 비처(非處)라 이름한다. 선하지 못한 악업은 선과(善果)를 얻지 못하는데 이것을 비처라 이름한다. 인업(人業)은 지옥의 과보를 받지 않는데 이것을 비처라 이름한다. 지옥의 업은 인보(人報)를 받지 않는데 이것을 비처라 이름한다.
다만 능히 신계(身戒)와 심혜(心慧)를 닦는 것을 제외하고 지옥의 과보를 인간이 가벼이 받으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지옥보(地獄報)라 이름하며, 인간이 가벼이 받으므로 인과(人果)라 이름하는 바, 이것을 시처비처(是處非處)라 이름한다.사선(四禪)ㆍ팔해탈(八解脫) 같은 법은 자재(自在)하게 수득(修得)한다. 자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여래께서 언제나 삼매에 계시면서 법을 설할 때에 범천왕(梵天王) 등은 다만 소리만 듣고 모습[貌]은 보지 못한다.
이러한 선정과 해탈에 두 가지의 번뇌가 있으니, 얻기 전에는 얻고자 하여 걱정하고 얻은 뒤에는 후퇴하여 물러나거나 잃게 되지는 않을까를 걱정하는 것이다.
여래가 이와 같은 두 가지 걱정을 끊어버리고 나면 크게 자재함을 얻어서 모든 중생들 마음의 온갖 생각들을 안다.
그러나 비록 분명하게 깨달아 알더라도 마음으로 집착하여 탐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며, 구족하게 수행하여 얻고자 하면 곧 얻고, 크게 얻고, 쉽게 얻어서, 얻은 뒤에는 후퇴하여 물러나지 않는다. 이것을 제삼의 선정해탈력(禪定解脫力)이라 한다.
신(信) 등의 오근(五根)에 상ㆍ중ㆍ하가 있음을 안다. 들음을 따라 생기는 것과 바르게 사유하여 생기는 것을 근력(根力)이라 이름한다.
상ㆍ중ㆍ하의 욕망을 아는 것을 해력(解力)이라 이름한다.
갖가지 성(性)인 성문성(聲聞性)ㆍ연각성ㆍ여래성ㆍ중생탐성(衆生貪性) 내지 팔만 사천의 번뇌성을 아는 것을 제오력(第五力)이라 이름한다.
번뇌를 인하여 갖가지 세계의 몸을 얻게 됨을 아는 것을 제육력(第六力)이라 이름한다.
모든 번뇌에 각기 대치(對治)하는 방법이 있음을 알고, 모든 유(有)에도 역시 각기 대치하는 길이 있음을 알며, 모든 악과 잘못된 견해를 깨뜨리는 대치를 알 경우, 이것을 지처도력(至處道力)이라 이름한다.사방의 갖가지 중생들의 갖가지 명자(名字)들을 분명하게 안다. 과거의 중생은 여덟 가지를 생각하는데 첫째 이름[名]이고, 둘째 생(生)이며, 셋째 성(姓)이며, 넷째 음식[食]이며, 다섯째 고락(苦樂)을 받는 것이며, 여섯째 목숨[壽]이며, 일곱째 머묾[住]이며, 여덟째 목숨이 끊어지는[命終] 것이다.
다시 여섯 가지를 생각하는데 첫째 명자(名字)이고, 둘째 찰리(刹利) 등의 종성(種姓)이며, 셋째 친족과 부모이고, 넷째 음식이며, 다섯째 빈부(貧富)이고, 여섯째 수요(壽夭)이다. 이것을 제팔력(第八力)이라 한다.
천행(天行)을 사선(四禪)이라 하는데, 사선과(四禪果)를 얻기 때문에 천안(天眼)이라 이름하며, 순선과(淳善果)를 구족하게 획득하기 때문에 청정(淸淨)이라 이름한다.
밝음이 같지 않기 때문에 과인안(過人眼)이라 이름하며, 유욕계천안(有欲界天眼)이라 이름한다. 비록 이름은 같으나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안(天眼)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천안으로 아는 자는 중생의 타락을 보게 되는데 타락은 천(天)이라 이름하며, 또한 타락을 인사(人死)라 이름한다.생(生)을 중음(中陰)이라 한다. 중음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선(善)이고, 둘째는 불선(不善)이다. 불선한 중음은 색깔이 마치 검은 누갈(褐:모직물) 같아서 어두운 밤에는 청정한 눈이라야 볼 수 있다. 청정한 천안(天眼)이 중음을 보면 색깔이 역시 이와 같다.
선중음(善中陰)은 색깔이 마치 바라나(婆羅) 여인의 옷과 같아서 달이 밝을 때에는 청정한 눈이라야 볼 수 있다. 청정한 천안이 중음의 색깔을 보는 것 역시 이와 같다.
검은 색을 한 자는 하행중생(下行衆生)이라 이름하고, 흰 색을 한 자는 상행(上行)중생이라 이름한다. 몸ㆍ입ㆍ뜻의 악업(惡業)의 인연으로 해서 하행이라 이름하며, 몸ㆍ입ㆍ뜻의 선업의 인연으로 하여 상행이라 이름하는 것이다.악업(惡業)은 잘못된 견해라 이름한다. 잘못된 견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환이 가능한 것[可轉]이고, 둘째는 전환이 불가능한 것[不可轉]이다. 인과(因果)를 비방하고 성인(聖人)이 없다고 말하면 전환이 불가능하다 하고 인(因)이 아닌 것을 인으로 보고 과(果)가 아닌 것을 과로 보면 전환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기 때문에 악업은 잘못된 견해라 이름하고, 선업은 바른 견해[正見]라 이름한다. 네 가지 진리[四諦]를 비방하지 않고 선업과 악업에 대한 참된 과보를 받는다. 그래서 선업을 정견이라 이름한다. 악업의 인연은 죽으면 지옥에 떨어지는데 과보 받기를 즐겨하지 않으므로 지옥이라 이름한다. 악업에 방일(放逸)하면 기필코 날개를 달고 지옥으로 날아 떨어질 것이다.
인과를 분명히 보기 때문에 천안(天眼)이다. 선업의 인연은 악사(惡死)를 지나 즐겨 과보를 받아서 인간계와 천상계의 몸을 받는다. 정견(正見)으로 해서 선한 존재[善有]로 태어나는 것이다. 선한 존재[有]로 태어난 자를 사람과 하늘이라 이름하고 확실하게 분명히 보기 때문에 천안(天眼)이라 한다.어떤 것이 선유(善有)인가? 선인연(善因緣)으로 하여 선과(善果)를 얻으면 이것을 선유라 이름하며, 이것을 제구력(第九力)이라 이름한다.
신계(身戒)와 심혜(心慧)를 닦는 인연으로 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번뇌를 끊음으로 하여 무루(無漏)의 신계와 심혜를 얻는다.
번뇌가 없는 신계와 심혜에 두 가지가 있으니,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이다. 이 두 도로 인하여 마음이 해탈을 얻고 지혜가 해탈을 얻는다. 마음과 지혜의 해탈을 얻음으로 하여 능히 신통(神通)을 보여서 중생을 교화한다. 이것을 제십력(第十力)이라 한다.
십력(十力)의 보살은 성(性)을 알고 분별을 알며, 자상(自相)ㆍ공상(共相)ㆍ불공상(不共相)을 알고, 평등을 알며, 업을 알고, 차례를 알며, 훌륭함과 훌륭하지 못함을 안다. 보살은 능히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일을 안다.
성을 안다는 것은 십력의 성이 곧 오근(五根)의 성인 것이다. 지혜가 많기 때문에 지성(智性)이라 이름하고 처(處)와 비처(非處)를 안다고 말하지, 처와 비처를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진(漏盡:번뇌의 단절)에 이르기까지 역시 이와 같다.분별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시간을 분별하는 것이고, 둘째는 행(行)을 분별하는 것이며, 셋째는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분별하는 것이다.
십력은 능히 모든 시간을 안다. 이른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이다. 이것을 시간을 분별한다고 이름한다.
십력은 능히 모든 시방 세계의 한량없는 번뇌의 대치(對治)를 안다. 이것을 행을 분별한다고 이름한다.
십력은 능히 모든 색상(色相)을 안다. 이것을 자상이라 이름한다. 색의 무상함과 내지 모든 법이 무상함을 알 경우, 이것을 공상이라 이름하고 이것을 자상과 공상을 분별한다고 한다.
불공(不共)이란 십력이 모든 성문이나 연각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시방의 모든 부처가 함께 십력을 얻으면, 이것을 평등(平等)이라 이름한다.
업을 안다는 것은 처비처(處非處)를 아는 힘이 인(因)을 실로 인으로 알고, 과(果)를 실로 과로 아는 것으로서, 이것은 제이력(第二力)이다.
여래는 자업(自業)의 과보를 분명하게 알고, 또한 중생들이 소유한 업과(業果)를 안다. 선정과 해탈의 힘에 인하기 때문이다.여래는 세 가지의 시현(示現)을 얻어서 능히 중생을 조복하며, 근기를 아는 힘으로 인하여 중생들이 하(下)ㆍ중(中)ㆍ상(上)근기인가를 분명히 알고, 근기를 알기 때문에 그 근기에 따라서 법을 설한다.
해력(解力)을 인하여 여래가 모든 중생의 선성(善性)과 악성(惡性)을 알아서 악성을 제거하고 선성을 가르친다.
세계력(世界力)을 앎으로 인하여 여래는 항상 세간의 법을 행하면서도 그 세간의 법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다. 세계를 알기 때문에 중생계를 알고, 중생계를 알기 때문에 근기에 따라, 마음에 따라, 그들의 번뇌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한다.여래는 어떻게 하여 처음에 중생을 가르쳐서 불법에 들게 하는가? 여래가 만일 처음에 성문보살을 가르쳐서 불법에 들게 할 경우 이렇게 말한다.
“선남자여, 너는 응당 깊은 즐거움으로 적정(寂靜)하고 고즈넉하고 한적한 곳에 홀로 처하여 수행하여야 한다. 네가 처음 태어났을 때 부모가 너를 위하여 말해준 이름과, 내지 여러 스승님이나 화상(和上)이 말해준 이름들을 지극한 마음으로 살펴보아라. 부모나 스승들이나 화상들이 말해준 나의 이러한 이름들이 안팎의 육입(六入:六根과 六境)에 있는가, 없는가?
선남자여, 네가 만일 안팎의 제입(諸入)으로부터 떠나서 모든 존재[有]를 보지 않는다면, 너는 그때 진실한 지혜를 얻어서 이 따위의 이름들은 거짓이요 참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법 또한 참이 아니며 이름 또한 참이 아니다. 이름이나 법이 참이 아닌데 여기에 어떻게 교만함이 생기겠는가?
선남자여, 너는 이때 다시 눈[眼]과 눈이라는 이름을 관찰하여 보라. 눈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름이고, 둘째는 유포(流布)이다. 눈의 이름이 눈은 아니고, 눈의 모양[相]도 눈은 아니다. 만약 어떤 물건을 두고 눈이라 이름한다면 그런 물건은 역시 없다. 만일 실제로 눈이 있다면 그 이름 또한 실제일 것이다.만일에 진실한 것이라면 중생이 태어날 때 저절로 알 것이기 때문에 가르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도 아직 가르치지 않고도 아는 자는 보지 못했다. 이치가 이러하기 때문에 이름도 진실이 아니고 사물도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에 대한 인식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질 때 안팎의 제입(諸入)에 대한 집착은 끊어지고, 이러한 안팎의 제입에 대한 집착을 끊음으로 해서 모든 법상(法相)을 단절하고 모든 법상을 단절함으로 해서 모든 법의 성(性)을 진정으로 안다.
모든 법의 성[一切法性]이란 진실이 아닌 것은 어떤 모양[相貌]이 없음을 말한다.선남자여, 이러한 관점을 가지게 될 때, 모든 지혜[一切智]를 얻고 싶고, 초선천(初禪天)에서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까지를 얻고 싶으며, 성행(性行)에서 여래행(如來行)까지를 얻고 싶으며, 보살지(菩薩地)의 육통(六通)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싶은 것이다. 이 모두를 얻을 수 있는 것을 제육력(第六力)이라 이름한다.
지처도력(至處道力)을 인하여 진실한 도와 진실하지 못한 도를 아는 바, 진실하지 못한 도를 깨뜨리고 진실한 도를 보여준다.
숙명력(宿命力)으로 인하여 중생들이 고통을 받음을 알고, 알고 나면 생사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또한 중생에게 가르쳐서 생사를 즐거워하지 말고 항상하다는 견해[常見]를 깨뜨리게 한다.
천안력(天眼力)으로 인하여 남들에게 기별(記:수행자가 미래에 成佛할 것에 대한 개별적ㆍ구체적인 예언)을 주고 단견(斷見:死後의 身心이 空無로 돌아간다고 보는 妄見)을 끊어버린다.
누진력(漏盡力)으로 인하여 여래는 자신이 이미 해탈을 얻었음을 스스로 알아서 능히 중생이 여래가 아닌 것을 보고 진실한 여래라고 말하는 것을 깨뜨리며, 사문(沙門)이 아닌 것을 보고 진짜 사문이라 하고, 바라문이 아닌 자를 보고 진짜 바라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깨뜨린다.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이 십력(十力)도 동시에 얻는다.
어떤 것을 일러 차례[次第]가 있다고 말하는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처음으로 인과를 본다. 그러므로 첫 이름을 처비처력(處非處力)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인과를 누가 받아서 짓는 것인가 하는 것을 업력(業力)이라 이름한다.
업을 깨뜨리기 위해 선정을 닦으며, 중생들이 누가 능히 수행을 하고 누가 수행을 하지 못하는가를 알기 위해 제근(諸根)을 관찰한다.
근(根)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ㆍ중ㆍ상을 말하며 이것을 중생성(衆生性)이라 이름한다.
이것을 제오력(第五力)이라 한다.
성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고 청정하지 못함을 아는데 이것을 세계라 이름한다.
청정한 마음과 청정하지 못한 마음의 인연을 알고자 하기 때문에 지처도(至處道)를 안다. 이러한 도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끊는데 이것을 숙명천안력(宿命天眼力)이라 이름한다.
두 소견이 단절되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영구히 끝나는데 누진력(漏盡力)이라 이름한다.
이것을 차례라 이름한다.또 차례가 있으니,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처음에는 먼저 시처비처(是處非處)를 보고 다음에 세간의 업을 본다. 세간의 업을 깨뜨리므로 해서 선정과 해탈을 보며, 이어서 중생이 능히 도를 닦는지 닦지 못하는지를 본다. 다음에는 천안(天眼)으로 모든 중생들의 모든 근기의 예리함과 무딤[利鈍]을 본다. 알고 싶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먼저 말한 것과 같다.
또 차례가 있으니,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시처비처를 보며, 십이인연이 어떻게 하여 나왔는가를 본다. 이 때문에 업을 본다. 중생의 모든 업은 수보(受報)가 있기도 하고 수보가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천안으로 어떤 것인가를 본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법계(法界)를 본다. 이것을 해(解)라 한다. 법계와 세계는 차별이 없다.조복(調伏)하기 어려움과 조복하기 쉬움을 알고 싶기 때문에 숙명(宿命)을 알고, 가르침을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않을지를 알기 위해 근기의 예리함과 둔함을 아는 것이다. 안 뒤에는 팔정도분(八正道分)을 설한다. 이것을 지처도(至處道)라 이름한다.
도력(道力)으로 모든 번뇌를 끊는 것을 누진력(漏盡力)이라 이름한다.
처비처력(處非處力)과 업력(業力)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선업과 악업에 따라 선과(善果)와 악과가 있음을 분명히 아는 것을 시처비처력이라 이름하며, 지은 자는 받게 되어 있고 짓지 않으면 받지 않는 것을 업력이라 이름한다.
불선(不善)한 업을 조복하고자 하여 선정을 닦는다. 조복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믿음[信]이고, 둘째는 믿지 않음[不信]이다. 이 때문에 그 근기를 본다.
믿는 마음[信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삼보를 믿는 것이고, 둘째는 마혜수라(摩醯首羅:外道가 믿는 大自在天)를 믿는 것이다. 이것을 해탈이라 이름한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ㆍ중ㆍ상을 말한다. 이것을 세계력(世界力)이라 이름한다.세계를 안 뒤에는 세간의 도와 성문도(聲聞道)ㆍ연각도ㆍ보살도ㆍ불도를 설한다. 이것을 지처도력(至處道力)이라 이름한다.
모든 중생의 선인(善因)과 악인, 무거운 업과 가벼운 업을 관찰한다. 이것을 숙명력(宿命力)이라 이름한다.
이러한 앎으로 인하여 항상하다는 견해[常見]와 단멸한다는 견해[斷見]를 끊는다. 이것을 천안(天眼)이라 이름한다.
진실을 보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영원히 끝나는데 이것을 누진력(漏盡力)이라 이름한다.
십력(十力)의 본성은 모두 지성(智性)으로서 아무런 차별이 없다. 그런데 경계(境界)의 연으로 해서 차별이 있다고 설한다.
사무소외(四無所畏)는 늘 말했던 것과 같다.
여래는 중생을 위하여 다음 네 가지를 설한다. 첫째는 성문의 불공법(不共法)의 해탈이고, 둘째는 성문의 공(共)해탈이며, 셋째는 중생고(衆生苦)의 해탈이고, 넷째는 중생을 위해 고통을 끊고 해탈을 얻기 위하여 대치(對治)를 설하는 것이다.성문불공(聲聞不共)이란 이런 것이다. 나는 깨달아 알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법이란 너는 모르는 것이며, 나도 또한 사문ㆍ바라문ㆍ사람ㆍ하늘ㆍ마천(魔天)ㆍ범천(梵天)이 법대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다고 한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나의 번뇌가 이미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문이나 또는 마천과 범천이 진실대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너의 번뇌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보지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나는 이미 도를 얻었지만 이 도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또한 모든 사문이나 또는 마천과 범천이 진실대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너는 아직 도를 얻지 못했으니 이것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도의 장애를 설하지만 장애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나도 또한 모든 사문이나 또는 마천과 범천이 진실대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장애를 설한 것은 장애가 아니라고 말한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부처님께서 모든 보살과 모든 성문을 위하여 설법한 말씀을 부처님 열반 뒤 결집(結集)할 때에, 성문장(聲聞藏) 속에는 보살이란 이름을 빼고 보살장(菩薩藏) 중에는 보살이란 이름을 두었다. 그래서 방등(方等:毘佛略, 十二部經의 한 유형, 여기서는 大乘經典)을 보살장이라 한다.
불공성문이란 여래의 삼념처(三念處)를 말하는 것이다. 여래가 법을 설하면 지극한 마음으로 들어서 받아들이고, 마음이 기뻐서 모든 안락을 받으며, 법대로 주(住)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더라도, 부처님은 역시 기뻐하지 않고 사심(捨心)을 닦아서 바른 생각[正念]을 잃지 않으며 방일하지도 않는다.
여래가 법을 설할 때에 이를 믿어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설한 바와 어긋나더라도, 부처님은 역시 성을 내지 않고 근심하거나 고뇌하지 않으며, 사심을 닦아 바른 생각을 잃지 않고 방일하지도 않는다.
여래가 법을 설할 때에 더러는 듣고 더러는 듣지 않더라도, 듣는다 하여 기뻐하지 않으며 듣지 않는다 하여 근심하지 않고, 사심을 닦아 바른 생각을 잃지 않으며 방일하지 않는다.
이것을 삼념처라 한다.또 성문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삼불호(三不護)를 말한다. 여래는 몸과 입과 명(命)을 보호하지 않는다. 아라한(阿羅漢)이 있어 무기업(無記業)을 기록한다. 생각이나 마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무기업이란 이름이 돌길라(突吉羅:몸과 입으로 지은 惡業)이다. 여래는 이미 모든 무기업을 단절하였다. 어째서인가? 항상 바른 생각[正念]을 닦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는 마음을 따라 설하며 권속을 가책(呵責)한다. 이른바 거친 말을 몰아내고 마음에 두려움과 어려움이 없음을 더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몸과 입과 명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또 성문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이른바 대비(大悲)이다. 먼저 말한 바와 같다.
여래는 어떤 일을 지으며, 어디에서 지으며, 어떤 인연으로 지으며, 어떻게 지으며, 언제 짓는가?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능히 실제대로 알면 이것을 염심(念心)이라 이름한다.
여래가 어떤 일을 아는가(짓는가) 하는 것은 모든 행(行)을 말하며, 어디에서 짓는가 하는 것은 모든 세계를 말하며, 어떤 인연으로 짓는가 하는 것은 중생을 조복하는 것을 말하며, 어떻게 짓는가 하는 것은 선방편(善方便)을 말하며, 언제 짓는가 하는 것은 모든 시간을 말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여래는 항상 바른 생각[正念]의 마음을 닦는다.여래 세존은 몸을 움직이든, 눈을 깜박이든, 말을 하든, 길을 걷든, 걸음을 멈추든, 무엇을 짓든 모든 시간 속에서 번뇌의 습기가 없다. 이렇기 때문에 여래는 영원히 번뇌의 습기(習氣)를 단절하였다고 말한다.
아라한 등은 이러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문과는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래가 깨달아서 안 것이 세 가지 법모음[法聚:각종 法門의 纂輯]이다. 그 첫째는 이익을 얻는 이치의 모음[得利益義聚]이고, 둘째는 이익이 아닌 이치의 모음[非利益義聚]이며, 셋째는 이익도 아니고 불이익도 아닌 이치의 모음[非利益非不利益義聚]이다. 여래는 이 세 가지의 모음을 아주 분명하게 안다. 그래서 여래는 모든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백사십 가지의 불공법(不共法)을 성문이나 벽지불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문불공(聲聞不共)이라 한다.보살행을 행할 때에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를 얻는다. 그러나 아직 밝고 청정하지는 못하다. 보리수[道樹] 아래 앉아서 스승 없이 삼십칠품을 닦아야만 비로소 밝고 청정함을 얻는다.
지위(地位)를 배운 보살은 금강삼매(金剛三昧)를 얻으며, 다음 차례의 이념(二念)은 십력(十力)과 모든 불법 내지 모든 청정한 지혜를 얻는다. 모조리 얻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라 하며, 무애지(無礙智)ㆍ무장지(無障智)ㆍ정지(淨智)ㆍ적정지(寂靜智)ㆍ청정지(淸淨智)ㆍ구족지(具足智)라 한다. 이것을 필경지(畢竟地)라 한다.
모든 보살행과 모든 보살지를 지나서 여래지(如來地)에 들어 여래행을 행하면 무상신(無上身)을 얻어서 보살신(菩薩身)을 바꾸어 영원히 습기를 끊어버리고 필경지에 주(住)한다.
보살마하살이 불법(佛法)을 보는 것은 마치 나곡(羅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보는 것 같지만, 여래 세존은 전혀 이런 일이 없다. 그래서 청정이라 한다.필경지에 머무는 보살이 불법을 보는 것은 마치 멀리서 사물의 색깔[物色]을 보는 것 같지만 모든 부처님이 불법을 보는 것은 마치 가까이서 사물의 색을 보는 것과 같다.
필경지의 보살이 불법을 보는 것은 마치 캄캄한 데서 사물의 색을 보는 것 같지만, 모든 부처님이 불법을 보는 것은 마치 밝은 대낮에 사물의 색을 보는 것과 같다.
필경보살은 아직 모태(母胎)에서 출생하지 않은 것과 같으나, 여러 부처님 세존은 이미 출생한 것과 같다.
필경보살은 꿈 속에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지만, 여러 부처님 세존은 깨어 있으면서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필경보살은 마치 밝지 않은 등불과 같으나 여러 부처님 세존은 대단히 밝은 등불과 같다.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능히 모든 부처님 세계에서 불사(佛事)를 베풀어 짓는다. 불사를 짓는 것에 아홉 가지가 있는데 하나하나의 불사가 능히 한량없는 중생을 크게 이익되게 한다.
아홉 가지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스스로 대장부의 일을 하여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대장부의 일을 믿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로써 그 몸을 장엄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들의 의혹의 그물을 깨뜨리는 것이다.
셋째는 여래가 십력(十力)을 구족하는 것이다. 십력을 구족하기 때문에 능히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힘이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곧 능히 잘 이해하여 의심을 깨뜨리고 중생을 조복하여 그 잘못된 견해를 깨뜨리는 것이다.
넷째는 여래가 사무소외를 구족하여 삼보를 믿고, 중생을 조복하여 잘못된 견해를 깨뜨리며, 크게 사자후(師子吼)를 토하는 것이다.다섯째는 여래가 삼념처(三念處)를 구족하여 설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설하여 모든 번뇌를 깨뜨리며, 능히 도중(徒衆)을 기르고, 능히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여래가 삼불호법(三不護法)을 구족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고 중생을 조복하며, 밤낮으로 항상 불안(佛眼)으로 모든 중생을 관찰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여래가 대비(大悲)를 구족하고, 찬제(提)바라밀을 구족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여의어서 안락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여래가 어지럽거나 그릇됨이 없음을 구족하여 염심(念心)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이 없이도 법대로 행하고 법대로 주(住)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조복하고 중생들의 모든 방일함을 깨뜨린다.
아홉째는 여래가 영원히 번뇌의 습기를 단절하여 의법(義法)과 비의법(非義法)ㆍ비의비비의법(非義非非義法)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여래는 의법을 설하고 비의법과 비의비비의법을 버린다.여래는 일백사십의 불공법(不共法)을 구족하므로 이와 같은 아홉 가지의 불사를 능히 짓는다. 이것을 여래행(如來行)이라 하며, 이것을 여래지(如來地)라 하며, 이것을 여래 필경지(畢竟地)라 한다. 어째서인가? 여래행ㆍ여래지ㆍ여래필경지를 위하여 한량없는 수의 나유타겁(那由他劫) 동안 보살계를 받고 보살행을 닦았기 때문이다.
필경보살은 능히 한량없고 가이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필경지에 머물게 한다.
여래의 불법은 모두 중생을 위한 것이며 스스로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문이나 연각이 가진 법은 자신의 이익만 위할 뿐 남에게 주는 이익은 적다. 이 때문에 이승(二乘)에는 불공법(不共法)이 없다. 무상(無上)의 불법은 결코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과는 같지 않다.
대비(大悲)가 어지럽거나 그릇됨[錯謬]이 없어 습기를 끊는다. 모든 지혜는 오지삼매(五智三昧)이다.
여래는 모든 불공법을 구족한다. 그래서 무상(無上)이라 한다.이 경전은 보살의 금계(禁戒)를 풀어 설한 것이며, 보살도(道)ㆍ보살계과(戒果)ㆍ일체보살행ㆍ일체보살계과행(戒果行)을 풀어 설한 것이다. 그래서 보살지(菩薩地)라 하며, 보살장(藏)이라 하며, 보살마이(摩夷:論藏)라 한다. 모든 대승 경전(大乘經典)의 무애지경(無礙智經)을 섭취한 것이다.
만일 하늘이나 사람이나 사문이나 바라문이 이 경전을 믿고 받아들여, 설법을 듣고, 읽어 외우고, 글씨로 쓰고, 널리 설하여, 그 뜻을 분별함을 수행하며, 이를 지키는 자를 보면 공양하고 공경하여 존중하고 찬탄하며, 등촉ㆍ향ㆍ꽃ㆍ기악(伎樂)을 공양한다면, 이런 자는 응당 시방에 계신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호념(護念)함을 받고 그 이름이 일컬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리하여 한량없는 공덕이 모여들 것이다. 어째서인가? 보살계의 인연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바, 보살계를 받아 지키어 읽어 외우고, 글씨로 쓰고 해설하기 때문이다.
여래의 바른 법[正法]은 영원히 머물러 없어지지 않으므로 모든 악한 비구가 차츰 줄어들지만, 만일 보살계가 없다면 모든 악한 비구들이 점차 치성(熾盛)하여 여래의 바른 법이 오래지 않아 없어질 것이다.
이때 우파리(優波離)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전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우파리여, 이 경의 이름을 선계(善戒)라고 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보살지(菩薩地)라 하고, 보살비니마이(菩薩毘尼摩夷)라 하며,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모든 선법(善法)의 근본’이라 하며, ‘안락의 인(因)’이라 하고, ‘모든 바라밀의 모음’이라고 해야 하느니라.”이때 우파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서 예배하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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