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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27 법원주림(法苑珠林) 84권

by Kay/케이 202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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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84권

 


법원주림 제84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85. 육도편⑤


5) 선정부(禪定部)[여기에는 5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두타부(頭陀部)
이익부(利益部) 선정부(禪定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신통의 수승한 업은 선정[定]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무루(無漏)의 지혜로운 뿌리는 고요함[靜]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말하기를 “깊이 선정을 닦으면 5신통(神通)을 얻고 마음이 한 곬[一綠]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삼매(三昧)의 모양이다”고 했다. 서(書)에서도 이르되 “형상은 마치 마른 나무와 같이하고 마음은 마치 죽은 재와 같게 해야 한다”고 했다.
마음은 부귀로도 굴복시키지 못하고 빈천(貧賤)도 어쩌질 못해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니, 정신은 그윽함[冥漢] 속에 깃들게 하고 형상은 진애(塵埃)의 겉으로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한 곳에 껴잡는 것이 바로 공덕의 총림(叢林)이요, 뜻이 조각조각 흩어진 때를 곧 번뇌의 나찰(羅刹)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담광 석자(曇光釋子)가 사나운 범을 무릎 앞에서 항복 받았고 나계선인(螺髻仙人)이 새의 보금자리를 정수리 위에 두어서 살게 한 것이다. 이것으로도 대사(大士)가 항상 고요히 앉아 수행하되 번뇌를 끊지 않으면서 열반에 들고 도법(道法)을 버리지 않으면서 범부의 일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몸은 머리로부터 발에 이르기까지 서른 여섯 가지 물건(物)과 8만 마리의 벌레로 가득 차 있어서 깨끗하지 못하고 덧없고 괴롭고 공(空)하고 나[我]가 아닌 것인데, 다만 중생의 심성(心性)만이 마치 원숭이가 뛰놀면서 나무를 휘어잡거나 기뻐하면서 제멋대로 내닫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관찰해야 한다. 눈을 감고 몸을 단속하면서 마음을 바루고 뜻에 힘쓰지 못하면 억세어서 교화하기 어렵고 사납고 거스르는 것을 조복받지 못해서 다섯 가지 티끌을 가까이 하고 익히므로 삼계(三界)에 유전하게 된다.

외도(外道)의 유혹에 넘어가고 천마(天魔)의 지팡이를 짚게 되면, 그때부터 영원히 괴로움의 바다에 빠지고 길이길이 험한 감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는 다 정(情)에 끌린 사념들이 함부로 풀리고 심신(心神)을 흔들어서 혼란케 한 연유이니, 마치 바람 속의 등불과 같고 물결 속의 달과 같아서 출렁거리면서 가벼이 움직이고 쏘다니면서 넘쳐흐를 것이다. 그림자가 이미 나타나지 않거늘 아무리 비춘다 한들 어찌 밝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온갖 악은 이를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요, 모든 선은 이로 말미암아 막히고 없어지는 것이다. 진실로 의혹을 끊는 수행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탐냄ㆍ성냄을 일으키게 되고 무지를 굴복시키지 못해서 지나치게 즐거운 느낌[樂受]이 많게 된다. 드디어 선정을 막는 의혹이 거듭 겹치면서 다투어 오고 정려(靜慮)를 방해하는 연(緣)이 뒤섞여 쌓이게 되면 다섯 가지 번뇌가 마음을 덮고 선의 문[禪門]이 이미 닫혀버린다.
6진(塵)이 마음 속에 있으면 어지러운 생각이 항상 내닫나니, 마치 미친 코끼리에 굴레가 없는 것 같고 장난하는 원숭이가 나무를 만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생각마다 마음을 다잡아 새록새록 쌓아 일으켜야 한다. 어찌 앞의 생각이 모두 악하다고 해서 오로지 고통을 이기면서 티끌[塵]을 고요히 할 수 있겠으며, 뒤의 생각이 모두 선을 일으킬 것이라 해서 방종한 뜻으로 악함을 드러내겠는가. 그런 까닭에, 논(論)에서는 네 때[四時]를 찬미했고 경(經)에서는 한 생각[一慮]을 찬탄한 것이다. 그런 뒤에야 생각이 바로 잡혀서 범부의 생각을 고치고 끊을 수 있으니, 만일 이 이치를 어기면 성인도 어찌할 수 없다.
지금의 삼라만경(森羅萬境)은 스스로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모든 감관을 의지하고 기대야 만안의 생각이 느껴 일어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줄 아는가? 이제 마음이 안에서 느끼면 일이 밖에서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고, 때로는 밖에서 생긴 것을 반연하여 안의 마음이 물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라. 안팎이 서로가 돕고 곁과 속이 번갈아 작용하는 것이니, 임금과 신하인 마음[心]과 의식[識]을 모두 버릴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마음의 왕[心王]이 바르면 여섯 신하[六臣]가 삿되지 않으며, 의식이 혼미하여지면 그 주인이 밝지 아니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제 여섯 신하가 참회하고 저마다 부끄러워하면서 여섯 감관[六根]을 제어하여 내닫거나 흩어짐이 없게 해야 한다.

(2) 인증부(引證部)
『법구경(法句經)』의 심의품(心意品)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였다.
어느 한 도인이 강가의 나무 아래 있으면서 도를 닦은 지 12년이 되었으나 탐내는 생각이 제거되지 않고 마음은 치닫고 뜻은 흩어졌다. 다만 눈으로는 빛깔, 귀로는 소리, 코로는 냄새, 입으로는 맛, 몸으로는 느낌, 마음으로는 법인 여섯 가지 욕심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몸은 고요한데도 뜻은 노닐면서 편히 쉬는 일이 없었으므로 12년 동안이나 되었는데도 도를 얻지 못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제도할 수 있음을 아시고 사문으로 변화하신 뒤에 그 곳으로 가셔서 나무 아래 함께 묵으셨다. 잠시 뒤에 달이 환히 밝아오자 한 거북이 한 마리가 강물 속에서 나와 나무 아래로 왔다. 그 뒤에 또 물개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먹이를 찾아 다니다가 거북과 서로 만났다. 그가 곧 거북을 먹으려 하자 거북은 머리와 꼬리와 네 개의 발을 오므려서 껍데기 속으로 감추어버렸다. 결국 먹을 수 없게 된 물개가 포기하고서 조금 멀리가자, 거북은 다시 머리와 발을 내서 유유히 기어갔다. 이와 같이 어떻게 할 수 없게 함으로서 드디어 벗어나게 되었다.
이때 도인은 변화한 사문에게 말하였다.
‘이 거북에게는 생명을 보호하는 갑옷이 있어서 물개가 틈을 얻을 수 없구료.’
변화한 사문이 말하였다.
‘나는 세간 사람들이 이 거북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덧없음을 모르고서 6정(情)을 제멋대로 굴리므로 바깥 악마가 틈을 얻습니다. 그렇게 되면 몸은 무너지고 정신은 떠나며 나고 죽음이 끝이 없어서 다섯 갈래[五道]를 바퀴 돌 듯 하는데 그 받는 괴로움은 백천 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은 뜻이 짓는 것이니, 마땅히 스스로 힘쓰면서 열반[滅度]의 편안함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에 변화한 사문은 곧 게송으로 말하였다.

6정을 감춤을 거북과 같이 하고
뜻을 방어하기를 성(城)과 같이 하라.
지혜가 악마와 싸움을 하여
이기면 근심이 없게 되리라.”

또 『구리뢰옥경(求離牢獄經)』에서 말하였다.
“당시 아육왕(阿育王)의 아우가 있었는데 이름은 선용(善容)[위타수기(違陀首祇)라고도 한다]이라 했다. 산에 들어가 사냥을 하다가 모든 범지(梵志)들이 벌거숭이 몸으로 고행을 하는데도 얻은 바가 없음을 보고서 왕의 아우는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여기에서 도를 행하고 있는데, 무슨 근심과 허물이 있기에 성취가 없습니까?’
범지(梵志)들이 대답하였다.
‘앉아 있으면 사슴 떼들이 와서 자주 교미(交尾)를 합니다. 그 모습을 본 우리들은 마음이 동하여서
자제할 수가 없습니다.’
왕자는 이 말을 듣자 즉시 나쁜 생각을 일으켰다.
‘이들 범지는 바람을 먹고 공기를 마시느라 기력이 쇠약한데도 오히려 음욕의 허물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구나. 석자 사문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평상에 앉아 있고 의복은 철을 따라 입고 게다가 향기로운 꽃이 저절로 훈습하거늘 어찌 음욕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때 아육왕은 아우가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을 듣고 몹시 근심하면서 생각하였다.
‘나에게는 아우 하나가 있을 뿐이다. 갑자기 삿된 소견을 일으켰으니 영영 미혹에 빠질까 두렵구나. 나는 방편을 써서 그의 나쁜 생각을 없애야겠다.’
그리고는 곧 궁중으로 돌아가 궁녀들을 저마다 잘 꾸미게 한 뒤에 선용에게로 가서 함께 서로 재미있게 즐기게 하고는 대신의 우두머리에게 명하였다.
‘나에게 생각한 바가 있으니, 만일 내가 경(卿)에게 ≺선용을 죽이라≻고 하면 경 등은 즉시 ≺7일 동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면 왕의 말씀대로 죽이겠습니다≻고 말하십시오.”
그래서 모든 궁녀들은 즉시 가서 재미있게 즐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은 몸소 가서 아우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나의 궁녀와 처첩을 데려다가 네 멋대로 즐기고 있느냐.’
그리고는 몹시 성을 내면서 윤(輪)을 공중에 던지고는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고하였다.
‘경들은 알고 계시오. 나는 아직 쇠하거나 늙지 않았소. 또한 바깥의 도둑이나 강한 적이 우리 국경을 침입한 일도 없소. 나는 일찍이 옛날의 어진 이들이 말한 속담에 ≺대저, 사람이 복이 있으면 사해(四海)가 귀순하여 오고, 복이 다하고 덕이 박해지면 좌우가 배반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나 스스로 살피건대 아직 이런 변은 없는 것 같지만, 그런데도 나의 아우 선용은 나의 궁녀와 처첩을 유혹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소.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나의 면목이 서겠소? 그대들은 데리고 가서 저자에 나아가 죽여버리시오.’
그러자, 신하들이 간하였다.
‘대왕이여, 신들이 하는 말을 들어 주소서. 아우라고는 이 한 분만이 있을 뿐입니다. 또 아드님이 아직 어려서 계승할 이도 없습니다. 원컨대, 7일 동안 왕으로 삼으신 뒤에 왕명에 의거하라고 요구하십시오.”
그러자 왕은 잠자코 있으면서 신들의 간한 바를 허락하였다. 왕은 다시 너그러운 은혜로 신하들에게 칙어(勅語)를 내려
왕자에게 허락할 것을 명하였다.
‘나의 복식(服飾)을 입히고 천관(天冠)과 위용(威容)을 나와 다름이 없게 한 뒤에 나의 궁전 안에 들어가 풍악을 잡히면서 함께 재미있게 즐기게 하시오.’
그리고는 다시 한 신하에게 말하였다.
‘오늘부터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채 날카로운 칼을 뽑아 들고 선용 왕자에게로 가서 기한이 7일 동안이라고 알리시오.”
그리하여 그 신하는 그 곳으로 가서 말하였다.
‘능력껏 마음을 터놓고 다섯 감관의 쾌락을 즐기십시오. 이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시면 죽은 뒤에는 후회하실 것이며 아무리 원망해도 쓸 데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뒤에 그 신하는 다시 가서 말하였다.
‘6일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날마다 가서 말하였으며, 마지막 하루가 남자 신하는 가서 말하였다.
‘왕자여, 아셔야 합니다. 6일이 벌써 다 지났으니, 내일 하루만 있으면 죽으셔야 할 터이니, 마음껏 5욕을 즐기십시오.’
마침내 7일이 다되자 왕은 신하를 시켜서 묻게 하였다.
‘어떠한가? 왕자는 7일 동안 마음껏 자유로이 쾌락을 누렸느냐?’
아우는 왕에게 대답하였다.
‘대왕이여, 아셔야 하십니다. 보지도 않았고 듣지도 않았거늘 무슨 쾌락이 있겠나이까?’
왕이 아우에게 물었다.
‘나의 복식을 입고 나의 궁전에 들어가 궁녀들과 즐겼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거늘 어찌하여 눈앞에서 보지도 않았고 듣지도 않았으며 쾌락을 누리지 않았다고 속이느냐?’
아우가 왕에게 아뢰었다.
‘죽어야 할 사람이라서 비록 아직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어도 죽은 것과 다름이 없사온데, 무슨 뜻이 있어서 5욕에 집착했겠나이까?’
왕은 아우에게 말하였다.
‘어허, 어리석음을 깨우친 게로구나. 너는 지금 하나의 몸을 백 가지로 근심하고 한 몸이 없어진다고 해서 5욕이 있는데도 즐기지 않았다. 어찌 사문이 3세(世)를 근심하면서 하나의 몸이 죽어 없어지면 다시 하나의 몸을 받아서 억백천의 세상 동안 몸과 몸으로 고통을 받고 한량없이 괴로워하는 것과 비길 수 있겠느냐. 비록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남과 더불어 하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의식이 궁핍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쓰라린 일을 염려하기 때문에 출가하여 도를 닦아서 무위(無爲)인 세간을 건너는 법요(法要)를 구한다. 만일 부지런히 힘쓰지 않으면 다시 몇 겁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왕자는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리어 왕에게로 나아가 아뢰었다.
‘이제 왕의 가르침을 듣고서야 깨달았나이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은 실로 싫어해야 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으로서 쉬지 않고 유전하나이다. 원하옵건대, 대왕이여, 도를 닦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삼가고 조심하면서 수행하겠나이다.’
왕은 아우에게 말하였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인 줄 알 것이다.’
그리하여 아우는 즉시 왕을 하직한 뒤에 사문이 되어서 금계(禁戒)를 받들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다가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었으며 6통(通)이 맑게 사무쳐서 걸림이 없어졌다.”
또 『아육왕전(阿育王傳)』에서 말하였다.
“아육왕은 아우가 도를 깨쳤다는 소식을 듣자 몹시 기뻐하면서 머리를 조아려 예배 공경하고 오래도록 공양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미 세상을 싫어하고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맹세코 숲속에 있으면서 남은 목숨을 부양하려 했기 때문에 아육왕은 곧 귀신을 시켜서 자기 성 안에다 산과 물을 만들게 하였는데 산의 높이가 수십 길[丈]로서 인적이 끊어지고 사람의 왕래가 없게 하였다. 그 때에야 아우는 왕의 명에 응하였다. 그리하여 의복과 재물을 대강 버리고 높이 장육(丈六)이 되는 석상(石像) 1구(軀)만을 조성한 뒤에 산의 감석실(龕石室)에서 그 아우를 공양하였다. 이산과 석상은 지금도 다 같이 남아 있다.”

(3) 두타부(頭陀部)
대개 5욕(欲)ㆍ5개(蓋)ㆍ5전(纏)은 다 같이 선정의 장애이니, 일찍 없애 버리고 그 마음이 고요해야 도를 닦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장(章) 안에서는 12두타(頭陀)의 행을 자세히 설명한다.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알면 이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 서천(西天)에서는 두타라 하고 여기 말로 변역하면 두수(抖擻)이니, 손으로 물건을 들어서 털어버린다는 뜻이다. 즉 이 법을 행하면 번뇌를 떨어버리고 탐착을 여읜다는 뜻이니, 마치 옷[衣]을 털면 먼지나 때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비유로써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그 명칭을 두타라 한 것이다.
경과 논에서 다르게 설명이 되었는데 각기 12가지를 말하였다. 전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모두 한데 묶어서 말하면, 합계 열여섯 가지가 있다. 의복[衣]에 대하여 네 가지가 있고, 음식[食]에 대하여 여섯 가지가 있고, 처소[處]에 대하여 여섯 가지가 있다. 그러므로 합하여
열여섯 가지이다.
의복에서의 네 가지란, 첫째는 누더기[糞掃衣]요, 둘째는 가사[毳衣]이며, 셋째는 기운 옷[納衣]이요, 넷째는 세 가지 옷[三衣]이다. 음식에서의 여섯 가지란, 첫째는 걸식(乞食)이요, 둘째는 차례대로 하는 걸식[次第乞食]이며 셋째는 때가 아닌 때에 남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不作餘食法食]이요, 넷째는 한 자리에 앉아서 먹는 것[一坐食]이며, 다섯째는 받은 밥만을 하나로 뭉쳐서 한 번 먹는 것[一團食]이니 발우 안에 든 밥만을 먹는다[節量食]고도 하며 여섯째는 정오가 지나면 과실 즙이나 석밀(石蜜) 따위도 마시지 않는다[中後不飮漿]이다. 처소의 여섯 가지란 첫째는 아란야 처소에 있는 것[在阿蘭若]이요, 둘째는 무덤 사이에 사는 것[在塚間]이며, 셋째는 나무 아래서 사는 것[在樹下]이요, 넷째는 한데에서 사는 것[在露地]이며, 다섯째는 항상 앉아 있는 것[常坐]이요, 여섯째는 자리가 깔려 있는 대로 앉는 것[隨坐]이다. 이 열여섯 가지를 나누기도 하고 포함시키기도 하여 열두 가지로 말한 것이다.
의복에서의 네 가지는 『사분율(四分律)』과 『지도론(智度論)』에 의거하면 다 같이 두 가지만을 말한다. 첫째는 기운 옷[納衣]을 입고 둘째는 세 가지 옷[三衣]을 입는다는 것만 있으며 나머지 두 가지는 말하지 않았다. 『열반경(涅槃經)』에 의거하면 의복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하였다. 첫째는 누더기를 입고, 둘째는 가사를 입고, 셋째는 세 가지 옷을 저축한다는 것만 있으며 기운 옷은 말하지 않았다.
음식에서의 여섯 가지를 『열반경』에서는 세 가지만 말하였다. 이른바 걸식과 한 자리에 앉아서 먹는 것과 받은 밥만을 하나로 뭉쳐서 한 번 먹는 것이다. 차례대로 걸식하는 것을 말하지 않은 까닭은 법답게 걸식을 하면 반드시 차례가 있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받은 밥만을 하나로 뭉쳐서 한 번에 한 자리에 앉아서 먹게 되면 저절로 때가 아닌 때에 남은 음식을 먹거나 정오가 지난 뒤에 과실 즙을 마신다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사분율』 안에서는 음식에 대하여 네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세 가지는 앞의 것과 같고 차례대로 걸식하는 것만이 더 있다. 지도론 안에서는 음식에 대하여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때가 아닌 때에 남은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처소의 여섯 가지는 『지도론』에서는 다섯 가지를 말했는데, 자리가 깔려 있는 대로 앉는 것이 제외되어 있다. 『열반경』과 『사분율』에서는 모두 여섯 가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모든 부(部)에 의거하여 통틀어 열여섯 가지가 있게 된 것이다.
또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서는 12두타의 이름이 조금 다르다. 첫째는 목숨이 다하기까지 걸식하는 것[盡形乞食]이요, 둘째는 아련야의 법을 받는 것[受阿練若]이며, 셋째는 누더기를 입는 것[著糞掃衣]이요, 넷째는 한자리에 앉아서 먹는 것[一坐食]이며, 다섯째는 항상 앉아 있는 것[常坐]이요, 여섯째는 밥 먹은 뒤에 때 아닐 적에는
마시지 않는 것[食後不受非時飮]이며, 일곱째는 다만 세 가지 옷만을 가지는 것[但有三衣]이요, 여덟재는 가사[毳衣]를 받으며, 아홉째는 깔려 있는 대로 앉는 것[隨敷坐]이요, 열째는 나무 아래에 머무르는 것[樹下住]이며, 열한째는 빈 땅에 머무르는 것[空地住]이요, 열두째는 죽은 사람의 사이에 머무르는 것[死人間住]이다.
첫째, 목숨이 다하기까지 걸식하는 것에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 번째는 쓰이는 바와 살아가는 일이 자신에게 있고 남에게 속해 있지 않다. 둘째는 중생이 나에게 보시할 적에 먹는 사람은 3보(寶)에 공양한 연후에 먹어야 한다. 세 번째는 만일 어떤 이가 나에게 보시하면 먹는 사람은 자비심을 내야하며 ‘나는 부지런히 정진하며 보시에 잘 머무르게 해야겠다’고 하고서 비로소 먹는다. 네 번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순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가득 채우기가 쉽고 양생(養生)하기도 쉽다. 여섯 번째는 수행에 장애가 되는 교만의 법을 깨뜨린다. 일곱 번째는 소견이 없는 으뜸가는 선근이다. 여덟 번째는 내가 걸식하는 것을 보면 착한 법을 닦는 다른 이도 나를 본받게 된다. 아홉 번째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남자와 더불어 모든 인연을 맺는 일이 없다. 열 번째는 차례대로 걸식하기 때문에 중생에 대하여 평등한 마음을 내므로 곧 일체 중생을 돕는 지혜를 심는다.
둘째, 아련야(阿練若)의 법을 받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 번째는 자유자재로 오고 가고 한다. 두 번째는 나[我]도 없고 내 것[我所]도 없다. 세 번째는 장애가 없이 마음대로 머무를 수 있다. 네 번째는 마음은 더욱 아련야에 머무르는 것을 즐거이 익힌다. 다섯 번째는 머무르는 데가 욕심도 적고 일도 적다. 여섯 번째는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음은 공덕을 구족하기 위해서이다. 일곱 번째는 대중의 시끄러운 말소리를 멀리한 까닭이다. 여덟 번째는 비록 공덕을 행한다 하더라도 은혜의 보답을 구하지 않는다. 아홉 번째는 선정을 수순하여 일심(一心)을 얻기 쉽다. 열 번째는 텅 빈곳에 머무르면 장애 없는 생각을 내기가 쉽다.
셋째, 누더기를 입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 번째는 의복 때문에 집에 있는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두 번째는 의복 때문에 의복을 구걸하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세 번째는 역시 방편을 쓰면서 의복을 얻는 모습을 말하지 않는다. 네 번째는 의복 때문에 사방을 다니며 구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는 설령 의복을 얻지 못한다 해도 근심하지 않는다. 여섯 번째는
얻는다 해도 기뻐하지 않는다. 일곱 번째는 천한 물건은 얻기 쉬우므로 근심이 없다. 여덟 번째는 순조로운 행으로 처음부터 4의법(衣法)을 받는다. 아홉 번째는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열 번째는 남의 탐냄을 받지 않는다.
넷째, 한 자리에 앉아서 먹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 번째는 차례를 구하는 일이 없다. 두 번째는 먹는 것에 고달픔이 없다. 세 번째는 쓰는 데에 고달픔이 없다. 네 번째는 먹기 전에 고달픔이 없다. 다섯 번째는 먹는 법이 예법(禮法)에 든다. 여섯 번째는 먹고 소화된 뒤에 먹는다. 일곱 번째는 방해받을 근심이 없다. 여덟 번째는 질병이 적다. 아홉 번째는 신체가 가뿐하다. 열 번째는 몸에 쾌락을 느낀다.
다섯째, 항상 앉아 있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 번째는 몸의 즐거움을 탐내지 않는다. 두 번째는 수면의 즐거움을 탐내지 않는다. 세 번째는 침구의 즐거움을 탐내지 않는다. 네 번째는 누울 때에 겨드랑이를 자리에 대는 고통이 없다. 다섯 번째는 몸의 욕심을 따르지 않는다. 여섯 번째는 좌선(坐禪)을 얻기 쉽다. 일곱 번째는 경전을 독송하기 쉽다. 여덟 번째는 잠이 적어진다. 아홉 번째는 몸이 가벼워서 일어나기 쉽다. 열 번째는 방석과 침구와 의복을 구하려는 마음이 얇아진다.
여섯째, 밥 먹은 뒤에, 때 아닐 적에 마시지 않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 번째는 많이 먹지 않는다. 두 번째는 만족하게 먹지 않는다. 세 번째는 맛있는 음식을 탐내지 않는다. 네 번째는 구하는 바의 욕심이 적다. 다섯 번째는 방해받을 근심이 없다. 여섯 번째는 질병이 적다. 일곱 번째는 가득 채우기가 쉽다. 여덟 번째는 양생(養生)하기가 쉽다. 아홉 번째는 만족할 줄을 안다. 열 번째는 좌선하고 경전을 독경하여도 몸이 고달프지 않는다.
일곱째, 오직 세 가지 옷만을 가지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 번째는 세 가지 옷 외에는 구하거나 받으려는 고달픔이 없다. 두 번째는 수호하려는 고달픔이 없다. 세 번째는 쌓아두어야 할 물건이 적다. 네 번째는 몸에 입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여긴다. 다섯 번째는 미세한 계율을 능히 행한다. 여섯 번째는 가고 오고 하는 데에 폐단이 없다. 일곱 번째는 몸이 가뿐해진다. 여덟 번째는 아련야의 법을 수순하며 머무른다. 아홉 번째는 어디 가서 살아도 애석함이 없다. 열 번째는 도(道)를 수순하며 행한다.

여덟째, 가사를 받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 번째는 거친 옷가지 안에 든다. 두 번째는 구하는 바가 적다. 세 번째는 뜻대로 앉을 수 있다. 네 번째는 뜻대로 누울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세탁하기가 쉽다. 여섯 번째는 물들이기도 쉽다. 일곱 번째는 벌레가 망가뜨리는 일이 적다. 여덟 번째는 망가뜨리기가 어렵다. 아홉 번째는 다시는 그 밖의 옷을 받지 않는다. 열 번째는 구하는 도를 잃지 않는다.
아홉째, 깔려 있는 대로 앉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 번째는 좋은 정사(精舍)를 구하여 머무르는 고달픔이 없다. 두 번째는 좋은 방석이나 침구를 구하는 고달픔이 없다. 세 번째는 상좌(上座)를 괴롭히지 않는다. 네 번째는 하좌(下座)로 하여금 근심되게 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는 욕심이 적어진다. 여섯 번째는 일이 적어진다. 일곱 번째는 얻는 대로 사용한다. 여덟 번째는 사용하는 것이 적으므로 할 일도 적다. 아홉 번째는 다투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열 번째는 남이 쓰고 있는 것을 빼앗지 않는다.
열째, 나무 아래 머무르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 번째는 방사(房舍)를 구하는 고달픔이 없다. 두 번째는 방석이나 침구를 구하는 고달픔이 없다. 세 번째는 사랑하는 것 때문에 갖는 고달픔이 없다. 네 번째는 받아 써야 하는 고달픔이 없다. 다섯 번째는 처소에 대한 이름이 없다. 여섯 번째는 싸울 일이 없다. 일곱 번째는 4의법(依法)에 수순한다. 여덟 번째는 적으면서 얻기 쉽고 허물이 없다. 아홉 번째는 수순하며 도를 닦는다. 열 번째는 여러 가지 시끄러운 행이 없다.
열한째, 죽은 사람 사이에 머무르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 번째는 항상 무상하다는 생각[無常想]을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항상 죽는다는 생각[死想]을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항상 부정하다는 생각[不淨想]을 할 수 있다. 네 번째는 항상 온갖 세간은 즐겁지 않다는 생각[不可藥想]을 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항상 사랑하게 될 온갖 사람을 멀리 여읠 수 있다. 여섯 번째는 항상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지닌다. 일곱 번째는 항상 희롱받을 일을 멀리 여읜다. 여덟 번째는 마음이 항상 세상을 싫어하고 여읜다. 아홉 번째는 부지런히 정진을 한다. 열 번째는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다.
열둘째, 빈 땅에 머무르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 번째는 나무
아래를 구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나의 소유(所有)를 멀리 여읜다. 세 번째는 다투는 일이 없다. 네 번째는 설령 다른 데로 간다 해도 애석함이 없다. 다섯 번째는 희롱 받을 일이 없다. 여섯 번째는 바람ㆍ비ㆍ추위ㆍ더위ㆍ모기ㆍ등에 및 독충 등의 괴로움을 능히 참는다. 일곱 번째는 음성의 가시에 찔리는 일이 없다. 여덟 번째는 중생으로 하여금 성내게 하거나 원망을 하게 하지 않는다. 아홉 번째는 자신도 근심이나 원한이 없다. 열 번째는 여럿이 시끄럽게 구르는 일이 없다.
또 『보량경(寶梁經)』에서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비구가 만일 아란야 처소에 이르고자 하면 여덟 가지 법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나는 몸을 버리리라’고 하고, 둘째는 ‘목숨을 버리리라’고 하며, 셋째는 ‘이것을 버리리리라’고 하고, 넷째는 ‘온갖 좋아하는 곳을 여의리라’고 하며, 다섯째는 ‘산간에서 죽은 것은 마치 사슴의 죽음과 같아야 한다’고 하고, 여섯째는 ‘아란야 처소에서는 아란야의 행을 받아야 한다’고 하며, 일곱 째는 ‘법으로써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고, 여덟 째는 ‘번뇌로써 살아가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4) 이익부(利益部)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선정을 닦는 데는 열 가지 법의 있어서 2승(乘)들과는 같지 아니하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선정을 닦는 데에는 나가 없나니 여래의 모든 선정을 구족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선정을 닦을 때는 맛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나니 물든 마음을 버리고 자기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정을 닦으면서 모든 신통의 업을 갖추나니 중생의 모든 마음을 알아서 행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선정을 닦으면서 중생의 마음을 알게 되나니 일체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선정을 닦으면서 대비(大悲)를 행하나니 모든 중생의 번뇌의 맺힘을 끊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선정을 닦으면서 모든 선정 삼매의 들고남을 잘 아나니, 삼계(三界)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선정을 닦으면서 항상 자재함을 얻나니 온갖 모든 착한 법을 구족하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선정을 닦으면서 그 마음이 적멸하나니, 2승의 모든 선정 삼매 보다 수승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선정을 닦으면서 항상 지혜에 들어가나니 모든
세간을 벗어나서 저 언덕[彼岸]에 이르기 때문이다. 열째는 선정을 닦으면서 바른 법을 일으키나니, 3보를 이으면서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선정은 성문의 것과 벽지불의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말하였다.
“다시 네 가지 선정이 있어서 지혜를 두루 갖춘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항상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둘째는 항상 일심을 좋아하며, 셋째는 선정과 신통을 구하고 넷째는 걸림 없는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또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이 고요히 앉아 있으면 열 가지 이익이 있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그의 마음이 흐리지 않고, 둘째는 방일하지 않는 데에 머무르며, 셋째는 모든 부처님께서 사랑하며 기억하시고, 넷째는 바른 깨달음의 행을 믿으며, 다섯째는 부처님의 지혜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여섯째는 은혜를 알며, 일곱째는 바른 법을 비방하지 않고 여덟째는 잘 방어하고 금할 수 있으며, 아홉째는 조복하는 지위에 이르고, 열째는 4무애지(四無礙智)를 증득하는 것이니라.”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이 한적한 곳을 좋아하면 열 가지 이익이 있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 인가? 첫째는 세간의 일들을 반성하고, 둘째는 시끄러움을 멀리 여의며, 셋째는 어기거나 다툼이 없고, 넷째는 괴로움이 없는 곳에 머무르며, 다섯째는 유루(有漏)가 증가하지 않고, 여섯째는 송사를 일으키지 않으며, 일곱째는 편안히 머무르면서 고요하며 잠잠하고, 여덟째는 해탈을 수순하고 상속하며, 아홉째는 해탈을 속히 증득하고, 열째는 공을 적게 들이면서도 삼매를 얻는 것이니라.”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이 선정과 상응하면 열 가지 이익이 있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의식(儀式)에 편안히 머무르고, 둘째는 인자한 경계를 행하며, 셋째는 모든 괴로움의 열(熱)이 없고, 넷째는 모든 감관을 수호하며, 다섯째는 기쁨과 즐거움이 먹게 되고, 여섯째는 애욕을 멀리 여의며, 일곱째는 선정을 닦되 헛되지 않고, 여덟째는 악마의 그물에서 해탈하며, 아홉째는 부처님의 경계에 편안히 머무르고, 열째는 해탈이 성숙되는 것이니라.”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이 두타(頭陀)의 걸식을 좋아하면 열 가지 이익이 있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아만(我慢)의 당기를 꺾고, 둘째는 친함과 사랑을 구하지 않으며, 셋째는 명예와 소문을 위하지 않고, 넷째는 성인의 종성에 머무르며, 다섯째는 아첨하지도 않고 속이지도 않으면서 딴 모양을 나타내지 않고 또 오만하지도 않으며, 여섯째는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고, 일곱째는 다른 사람을 헐뜯지 않으며, 여덟째는 사랑함과 성냄을 끊어 없애고, 아홉째는 만일 남의 집에 들어가되 음식을 위하지 않아도 법보시[法施]를 행하며, 열째는 설법하면 사람들이 믿고 받게 되느니라.”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삼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것이요, 둘째는 보살의 것이다. 이 모든 보살은 보살 삼매 안에서는 자재함을 얻지만 부처님 삼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제불요집경(諸佛要集經)』에서 말하였다.
“문수시리(文殊尸利)가 부처님의 모임을 뵙고자 하였으나 도달할 수가 없었고, 모든 부처님께서 각기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시고 나서야 문수시리는 모든 부처님께서 모여 계시던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한 여인이 부처님 근처에 앉아서 삼매에 들어 있었다. 문수시리는 들어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난 뒤에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찌하여 이 여인은 부처님 근처에 앉아 있을 수 있는데, 저는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시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여인을 깨워서 삼매로부터 일어나게 하여 그대 스스로 물어 보라.’
문수시리는 곧 손가락을 튀겨서 그녀를 깨우려 하였으나 깨울 수 없었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깨울 수 없었으며, 손으로 잡아서 끌어당겨 보았으나 깨울 수가 없었다. 또 신통력으로 대천(大千) 세계를 진동시켰으나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문수시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깨울 수 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큰 광명을 놓아서 하방(下方)세계를 비추시니, 그 안에 기제개(棄諸蓋)라고 하는 한 보살이 있다가 즉시 하방으로부터 나와서 부처님께로 다가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한 뒤에 한쪽에 물러나 서 있었다. 부처님께서
기제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이 여인을 깨우라.’
기제개보살이 즉시 손가락을 튀기자 이 여인이 삼매에서 일어났다. 문수시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삼천대천세계를 움직였는데도 이 여인을 깨어나게 할 수 없었사온데, 무슨 인연으로 기제개보살은 한번 손가락을 튀겨서 삼매에서 일어나게 했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시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여인으로 인하여 처음에 보리(菩提)의 뜻을 내었고, 이 여인은 기제개보살로 인하여 처음으로 보리의 뜻을 내었었느니라. 이 때문에 그대는 이 여인을 깨어나게 할 수 없었나니, 그대는 모든 부처님의 삼매 가운데에 공덕이 아직 원만하지 못하지만 이 기제개보살은 삼매 가운데서 자재함을 얻었느니라. 부처님의 삼매 가운데서 적은 데서 시작하여 많은 데로 들어갔는데도 아직 자유자재하지 못한 까닭이니라.’”

(5) 선정부(禪定部)
『선비요경(禪秘要經)』에서 말하였다.
“아련야(阿練若)비구는 다섯 가지 일로 인하여 미친 기운[狂]이 일어났다. 첫째는 어지러운 소리로 인해서요, 둘째는 나쁜 이름으로 인해서이며, 셋째는 이양(利養)으로 인해서요, 넷째는 바깥 바람[外風]으로 인해서이며, 다섯째는 속의 바람[內風]으로 인해서다. 그 때 세존께서 주문을 말씀하셨다.

나무불타나무달마나무싱가나무마하리사 비사라사 아돌타달타 사만다 발
南無佛陀南無達磨南無僧伽南無摩訶梨師 毘闍羅闍 謁咄陀達陀 娑滿馱 跋
사라시 다라굴다서다자리자리 마하자리우마리마륵시 싣담비사비 아사비리
闍邏翅 陀邏崛茶誓茶遮利遮利 摩訶遮利吁摩利摩勒翅 悉耽鞞闍鞞 阿闍鞞梨
구국국시 살바타라니시 아션뎨마구마예우미우미마하 마사화하
究菊菊翅 薩婆陀羅尼翅 阿扇提摩俱摩詣吁彌吁彌摩呵 摩娑禍呵


세존께서는 이 주문을 말씀하신 뒤에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신주(神呪)는 과거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고, 나도 지금 현재에 이 주문을 말하고 있으며, 미래 세상의 미륵과 현겁(賢劫)의 보살들도 널리 말씀하리라. 이 신주의 공덕은 자재천(自在天)과 같아서 후세의 5백 세상 동안 모든 나쁜 비구로 하여금 청정한 뜻을 얻게 함으로서 4대(大)의 더함과 줆을 조화하여 잘 다스리게 하며, 또한 마음 속의 404가지 병과 404가지 맥(脈)에서 일어나는 무너지는 경계와 98사(使)의 성욕(性欲) 종자를 다스리고 또한 업장으로 계율을 범하는 모든 악을 다스려서 영영 다하여 남음이 없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72가지 병과 근심을 잘 다스리는 다라니라고 하며, 또한 5음(陰)의 무명을 뽑아내는 근본 다라니라고도 하며, 또한 온갖 부처님과 모든 성문이 앞에 나타나서 참된 법을 말해 주어 모든 번뇌[結使]를 깨뜨린다고도 하느니라.”

감응연(感應緣)[대략 여섯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진(晋)의 사문(沙門) 지담란(支曇蘭)
송(宋)의 사문 석현고(釋玄高)
송(宋)의 사문 석보상(釋普常)
재(齋)의 사문 석승조(釋僧稠)
수(隋)의 사문 석법진(釋法進)
당(唐)의 사문 석혜융(釋慧融)

진(晋)의 사문(沙門) 지담란(支曇蘭)
진(晋)나라 시풍(始豊) 적성산(赤城山)의 지담란(支曇蘭)은 청주(靑州) 사람이다. 채식(菜食)을 하면서 참선을 즐겼으며 30만의 말씀을 독송하였다. 진나라 태원(太元) 연간에 섬현(剡縣)에서 유행하다가 뒤에 시풍 적성산에 있을 때였다. 한 곳에 있는 숲 속의 샘이 맑고 넓은 것을 보고서 그 곳에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갑자기 키가 몇
길[丈]이 되는 사람이 나타나서 담란을 부르면서 떠나가라고 했다. 또 여러 기이한 날짐승과 길짐승들이 나타나서 담란을 위협했다. 그러나 담란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즐거워하자 비로소 무릎을 꿇고 예배하면서 말하였다.
“주기왕(珠欺王)이 바로 저의 장인이라 위향산(韋鄕山)으로 가겠습니다. 이곳은 양보하여 스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에 갑자기 수레를 타고 오는 소리가 어슴푸레 들리더니 따라온 사람들이 봉우리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머리싸개를 한 사람이 주기왕이 온다고 알리자마자 벌써 그 앞에 처자와 남녀 등 23명을 대동한, 세상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단정한 이가 담란에게 와서 인사를 올렸다. 담란이 물었다.
“어느 곳에 머무르고 계시오.”
그가 대답했다.
“낙안현(樂安縣) 위향산(韋鄕山)입니다. 오래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이제야 온 집안이 함께 와서 뵈옵는 것입니다. 3귀의의 계율을 받게 하여 주소서.”
담란은 즉시 계를 수여했는데, 그는 법을 다 받고 나자 돈 1만과 꿀 두 그릇을 주고는 하직하면서 떠나갔다. 피리를 불고 풍악을 울렸는데 그 음향이 산골짜기에 가득히 떨쳤으며 담란과 참선하는 대중 10여 명은 다 함께 이것을 듣고 보았다.
진나라 원희(元熙) 연간에 산실(山室)에서 죽었는데 춘추는 83세였다.
송(宋)의 사문 석현고(釋玄高)
송(宋)나라 위위(僞魏)의 평성(平城)에 석현고(釋玄高)가 있었다. 성은 위(魏)씨요 본명은 영육(靈育)이며 빙익(憑翊)의 만년(萬年) 사람이다. 어머니 관(冠)씨는 본래부터 외도를 믿고 있었다. 처음 위씨에게 시집가서 첫 딸을 잉태하였는데 곧 현고의 큰 누이였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부처님을 믿으면서 어머니를 위하여 기원하였다.
“원컨대, 온 가문이 다른 소견이 없게 하시고 큰 법을 받들게 하옵소서.”
그의 어머니는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3년에 꿈에서 호승(胡僧)이 꽃을 방 안에 가득 뿌리는 것을 보고 태몽(胎夢)임을 깨달았다. 그런 뒤 4년 2월 8일에 아들을 낳았는데, 집 안에 갑자기 이상한 향기가 가득하고 광명이 벽을 비추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그쳤으므로 그 어머니는 아이를 낳을 적의 상서로운 조짐을 따서 영육(靈育)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때의 사람들도 매우 희귀하게 여겼다. 다시 세고(世高)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나이 12세 때에 양친을 하직하고
산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느 날 한 서생(書生)이 세고의 집에 와서 몸을 기탁하여 묵은 뒤에 말하였다.
“중상산(中常山)으로 들어가서 은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곧 세고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이날 저녁 무렵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서 전송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세고의 안부를 물으러 왔으므로 그의 부모가 말하였다.
“어제 서로가 전송했으면서 이제 또 찾으십니까?”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말하였다.
“도무지 갔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거늘 어찌 전송했다고 하십니까?”
부모는 비로소 어제 전송한 이가 신인(神人)임을 깨달았다.
세고는 세속과 세상을 등지면서 현고(玄高)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총명하였으므로 더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이 15세가 되자 벌써 산승(山僧)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였으며, 계를 받은 이후에는 오로지 참선과 계율에 힘썼다. 관중(關中)의 부타발(浮陀跋) 선사가 석양사(石羊寺)에서 법을 넓히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현고는 가서 그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열흘 동안에 선법을 묘하게 통했으므로 부타발이 감탄하며 말하였다.
“장하도다. 불자여, 이렇게까지 깊이 깨치셨구려.”
이 때부터 얼굴을 낮추고 겸손하면서 스승의 예를 받지 않았다. 이에 현고는 지팡이를 끌고 서진(西秦)으로 가서 맥적산(麥★山)에 은거(隱居)하였다. 배우는 문도들이 1백 명이나 되었는데, 그의 가르침을 숭앙하고 그의 선도(善道)를 품수했다. 당시 장안(長安)의 사문 석담홍(釋曇弘)은 진(秦)나라 땅에서는 뛰어난 분이었는데, 이 산에 숨어 있으면서 현고와 함께 서로 만나 업을 같이하는 벗이 되었다.
이때 걸복치(乞伏熾)에는 쟁반처럼 걸쳐 있는 농서(隴西)가 있고 서쪽으로는 양토(凉土)에 접해 있었으며 항상 배우는 이들이 3백여 명이나 있었다. 그 중에서 현소(玄紹)라는 이는 진주(秦州)의 농서 사람인데 모든 선(禪)을 배우고 궁구하여 신통이 자재하였다. 손가락에서 물을 내어 현고에게 공양함으로서 세수와 양치질을 하게 했는데, 그 물은 향기롭고 깨끗하여서 보통의 물보다 갑절 더 기이했다. 매양 세간의 것이 아닌 꽃과 향기로서 3보에게 바쳤으며, 이같이 현소와 같은 신령한 이가 또 11명이나 있었다.
현소는 뒤에 당술산(堂術山)으로 들어가서 입적(入寂)하였으므로 나중에는 담홍과 함께 하남(河南)으로 갔었다. 국왕과 신민들이 길에 나와서 영접했으며, 안팎이 공경하고 받들면서
국사(國師)로 숭앙하였다. 하남을 다 교화한 뒤에는 양토로 갔었는데, 저거몽손(沮渠蒙遜)이 깊이 공경하고 섬겼으며 그곳에 모인 뛰어난 이들도 높고 수승한 견해를 일으켰다.
그 때 서해(西海)에 번승인(樊僧印)이라는 이가 있었다. 역시 현고에게서 수학하였으나 뜻이 협소하고 도량이 좁았으므로 적은 것을 얻고서도 만족히 여기면서 말하였다.
“이미 아라한이 되었으며 선문(禪門)을 단번에 다하였다.”
그래서 현고는 은밀하게 신통의 힘을 써서 번승인으로 하여금 정(定) 속에서 시방의 끝없는 세계에 계신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이 동일하지 않음을 두루 보게 하였다. 번승인은 한 여름 동안 그 보았던 바를 찾았으나 영영 다할 수가 없자, 비로소 선정의 물에는 밑이 없음을 알고서 크게 부끄러움을 내었다.
당시 위(魏)나라의 오랑캐 탁발도(託跋燾)가 분수 넘치게 평성(平城)을 점거하고 양토의 지경을 침입하였으므로 탁발도의 장인 양평왕(陽平王)이 현고를 청하여 같이 위도(僞都)로 돌아왔다. 평성에 도달한 뒤에는 크게 법의 교화를 퍼뜨렸으며, 위조(僞朝)의 태자 탁발황(託跋晃)은 현고를 스승으로 섬겼다. 탁발황은 한때 참소(讒訴)를 받아서 부왕의 의심을 사고 있었으므로 현고에게 말하였다.
“공연히 억울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찌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현고는 금광명재(金光明齋)를 올려서 정성껏 참회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탁발도의 꿈에 그의 조부와 부친이 나와서 칼을 뽑아 들고 위엄을 떨치면서 물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헐뜯는 말을 믿고 태자를 의심하고 있느냐?”
탁발도는 놀라 깨어나서 신하들을 모두 모아 놓고 혼신들이 꿈에서 말한 일을 말하자, 신하들이 다 함께 말하였다.
“태자는 허물이 없습니다. 실로 황령(皇靈)께서 오셔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마침내 탁발도는 태자에 대하여 다시는 의심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것은 현고의 정성으로 인한 감화의 힘이었다.
당시 최호(崔皓)와 관천사(冠天師)는 둘 다 예전부터 탁발도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태자 탁발황이 왕의 자리를 잇는 날에는 그들의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거짓으로 꾸며서 참소하였다.
“태자의 예전 일은 실로 모반의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현고의 도술이 선제(先帝)들로 하여금 꿈에 현신하여 그와 같은 말씀을 하게 함으로써 형(刑)을 면케 했을 뿐입니다. 만일 죽여 없애지 않으면 반드시 더 큰 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탁발도는 드디어 그들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크게 노하면서 즉시 칙명으로 현고를 체포하게 하였다. 현고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은밀히 말한 적이 있었다.
“불법이 쇠망하게 되었다. 나와 혜숭(慧崇)은 그 화(禍)를 맨 먼저 받으리라.”
이 말을 들은 이들은 모두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 양주(凉州) 사문 석혜숭(釋慧崇)은 바로 위조(僞朝)인 위(魏)나라 상서(尙書) 한만덕(韓萬德)의 문사(門師)였다. 그의 덕은 현고의 다음이었는데 역시 의심을 받고 있었다. 위조(僞朝) 태평(太平) 5년 9월에 이르러서 현고와 혜숭은 함께 구금되었다가 그 달 15일에 화를 만나 평성의 동쪽 모퉁이에서 죽었으니, 춘추는 43세요 이 해가 송(宋)나라 원가(元嘉) 21년이었다. 그 날 저녁에도 문인(門人)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날 밤 3경(更)에 갑자기 광명이 나타나서 현고가 먼저 살고 있던 곳의 탑을 세 바퀴 돌고는 도로 선굴(禪窟)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광명 속에서 “나는 이미 죽었느니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하여 모든 제자들은 비로소 입적했음을 알고 아주 슬피 통곡하였다. 그들은 시체를 영접하여 성의 남쪽 들판에서 목욕시키고 빈소로 옮겼다. 혜숭은 따로 다른 곳에 있었다. 온 도성의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 슬퍼하고 놀라지 아니함이 없었다.
제자 현창(玄暢)은 그 때 운중(雲中)에 있었는데, 위나라 도성과는 6백 리나 떨어져 있었다. 아침에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서 그 변(變)을 알리면서 이어 6백 리를 달릴 말을 주었으므로 채찍을 날리면서 돌아왔으나 해질 무렵에야 도성에 도달했다. 스승이 이미 죽었음을 보고 애가 끊어질 듯 비통해하다가 동학(同學)들과 함께 울면서 말하였다.
“법은 이제 멸망했으니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이제 해탈하시면 다시 일으키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화상께서는 일어나 앉으십시오. 화상의 덕은 보통 사람이 아니므로 반드시 비추셔야 하십니다.”
이 말을 마치자마자 현고의 두 눈이 차츰차츰 열리면서 빛이 나고 기쁨을 띠었다. 그리고 몸에서는 온통 땀이 나고 향기가 자욱하더니 잠깐 만에 일어나 앉아서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큰 법의 응화(應化)는 인연을 따라서 흥성하고 쇠퇴한다. 흥성과 쇠퇴는 자취에 있지만은 진리는 항상 담연(湛然)한 것이다. 다만 너희들도 오래지 않아 나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오직 현창만은 남쪽에서 제도할 수 있으리라. 너희들이
죽은 뒤에 법은 다시 흥성할 것이니 스스로 마음을 잘 닦으면서 중도에 후회함이 없게 하라.”
말을 마치자마자 벌떡 누우면서 숨이 끊어졌다. 다음날 아침에 관을 옮겨서 화장하려 했으나, 나라의 제도가 허락하지 않는지라 구덩이를 파서 매장했다. 도인과 속인들이 슬퍼하면서 바라던 일이 실패로 돌아간 듯 울부짖었다.
사문 법달(法達)은 위국(僞國)의 승정(僧正)으로 있었다. 평소에 현고를 흠앙한 지 오래였으나 아직 수업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입적했음을 듣고 통곡하면서 말하였다.
“성인께서 세상을 떠났으니 장차 또 누구에게 의지할꼬?”
그리고는 여러 날을 먹지 않으면서 늘 현고를 부르다가 말하였다.
“성인께서는 자유자재하시거늘 어찌하여 한 번이라도 나타나지 않나이까.”
그러자 그 소리에 맞추어서 현고가 허공을 날아왔으므로 법달은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애걸하였다.
“원컨대, 구호하여 주소서.”
그러자 현고가 말하였다.
“그대의 업은 무거워서 구제하기 어렵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지금부터는 방등(方等)에 의거하여 참회하라. 그러면 가벼이 받게 될 것이다.”
법달이 말하였다.
“괴로움의 과보에서 해탈할 수 있도록 불쌍히 여기어서 구제하여 주소서.”
현고가 말하였다.
“온갖 안녕(安寧)이 오직 그대에게 있음을 잊지 않으면 되느니라.”
법달이 또 말하였다.
“법사와 혜숭 스님은 어느 곳에 태어나셨습니까?”
현고가 말하였다.
“나의 소원은 나쁜 세상에 태어나서 중생을 구제하는 데에 있었으므로 벌써 염부제에 도로 태어났다. 그러나 혜숭은 항상 극락세계에 갈 것을 기원했으므로 벌써 소원을 이루었느니라.”
법달은 또 물었다.
“법사께서는 이미 어느 지위에 이르러 계십니까?”
현고가 말하였다.
“나의 제자들 중에 아는 이가 있느니라.”
이렇게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법달은 몰래 현고의 제자들을 찾아갔더니, 모두가 다 말하였다.
“그는 바로 득인(得忍)보살이시다.”
위조(僞朝)의 태평 7년에 탁발도는 과연 불법을 훼멸(毁滅)시켰으니, 모두가 현고의 말과 같이 되었다.

송(宋)의 사문 석보상(釋普常)
송(宋)나라 촉(蜀)의 안락사(安樂寺) 석보항(釋普恒)은 성이 곽(郭)씨요 촉군(蜀郡)의 성도(成都) 사람이다. 어린아이일 적에 일찍이 햇빛 속의 성승(聖僧)이 구름 속에 있으면서 설법하는 것을 보고는 집 사람들을 향해 말을 하였으나 모두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뒤에 출가하기를 간절히 바라다가 그 고을의 안락사에 가서 머물렀는데,
한 방에 혼자 있으면서 권속도 두지 않았다. 조용한 업인 선을 익혀서 잘 들고나고 머무르면서 촉도(蜀韜)율사와 뜻을 같이했는데,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었더니 광명이 눈썹으로부터 곧장 내려가서 금강제(金剛際)까지 이르렀으며, 그 광명 속에서는 여러 색상(色像)이 나타났는데 전생의 업보가 명료하여졌다.”
송(宋)나라 승명(昇明) 때의 사람이 농담으로 말하였다.
“장차 돌아가실 날에는 약간의 병(病)이 있겠는데, 오직 친척의 한 하인만이 그것을 보겠구나.”
그러한 다음날 아침에 편안히 앉아서 입적하였는데 손가락 세 개를 구부리고 있었다. 시험삼아 펴 보았지만 펴고 나면 도로 구부러졌다. 살아 있을 때는 몸의 빛이 검었으나 죽은 뒤에는 희고 고왔다. 이에 대중들은 도를 얻은 이의 법에 의거해 화장하기 위해서 나무를 쌓아 처음 불을 붙이자 여섯 빛깔의 연기가 일어나면서 수묘한 향기가 가득히 찼다. 고을에서는 옥현재(玉玄載)를 데려다가 그를 위하여 찬탄하는 글을 짓게 했다.

대각(大覺)은 아득하여 형상이 없고
현응(縣應)은 귀하여 편안함을 잊었도다.
한 생각이 도량(道場)에 모이니
헛되이 만겁(萬劫) 동안 길이 지냈구려.

마음을 믿으매 동쪽 생각 헛되고
성인을 만나매 서쪽 그림자 아름답다.
묘한 이치로 삼계(三界)를 맑히시니
혼신은 4선(禪)의 경계에 돌아가리.

속된 물건 예로부터 들쭉날쭉하지만
참 성품의 진리는 항상 빛나도다.
빛을 감추고서 덧없는 세상에 계셨으니
끼치신 덕 바야흐로 멀리 미치리.

재(齋)의 사문 석승조(釋僧稠)
제(濟)나라 업서(鄴西)의 용산(龍山) 운문사(雲門寺)의 석승조(釋僧稠)는 성이 손(孫)씨이다. 원래는 창려(昌黎)에서 났지마는 뒤에는 거록(鉅鹿)의 영도(癭陶)에서 살았었다. 성품과 애정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효도와 신의로 이름이 알려졌다. 세간의 전적을 부지런히 배워서 경사(經史)에 두루 통했으나, 도(道)의 기틀이 숨어서 두드리자 갑자기 세간의 번뇌가 싫어졌고 한 번 불경을 열람하매 환히 풀리면서 신묘하게 알아졌다.
처음 도방(道房)선사에게서 지관(止觀)을 받아 익혔고, 다음에는 조주(趙州)의 장홍산(障洪山) 도명(道明) 선사에게서 열여섯 가지의 수승한 법을 받았다. 일찍이 작산(鵲山)의 고요한 곳에서 감통한 신(神)이 와서 희롱하면서 어깨를 안고 허리를 누르며 기운을 정수리 위에다 뿜어댔으나, 승조는 죽음으로써 마음을 다잡았으므로 깊은 정(定)을 증득하였다. 그리하여 9일 동안 일어나지 않다가 정에서 깨어났는데, 뜻과 생각이 맑디맑으면서
세간이 싫어지면서 즐거운 것이 없게 되었다. 곧 소림사(少林寺)의 조사(祖師) 삼장(三藏)에게 나아가 자기의 증득한 바를 드러내 보였더니 발타(跋陀)가 말하였다.
“총령(蔥嶺)의 동쪽에서 선학(禪學)의 최고봉은 그대가 바로 첫째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깊은 법요(法要)를 받았으며 곧 숭악사(崇嶽寺)에 머물렀다. 그 곳에는 스님들이 1백 명이나 있었는데 샘물이 적어서 겨우 먹고만 살았다. 하루는 홀연히 해진 옷을 입고 빗자루를 낀 부인이 나타나 계단 위에 물러앉아서 스님들이 외우는 경을 듣고 있었다. 대중은 그가 신인(神人)임을 헤아리지 못하고 꾸짖어 쫓아냈다. 부인이 노기를 띤 채 발로써 샘을 밟고 서 있자 물이 바짝 말라버렸으며 몸도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대중이 그것을 승조에게 말하자 승조는 그 우바이(優婆夷)를 불렀다. 세 번을 부르자 나왔으므로 곧 그 신에게 말하였다.
“대중 스님들이 도를 수행하고 있으므로 마땅히 더 옹호해야 하느니라.”
그러자 그 부인이 발로써 옛 샘을 벌리자 물이 곧 솟아올랐다. 당시 그가 하는 기이한 행동들이 이와 같았다. 뒤에 회주(懷州)의 서쪽 왕옥산(王屋山)으로 가서 앞의 법을 닦아 익히던 때였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싸우면서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바위가 진동하는 것을 듣고서 석장(錫杖)을 그들 가운데다 대자 저마다 흩어져서 떠나갔다. 어느 때는 홀연히 선경(仙經) 두 권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으므로 승조가 말하였다.
“나는 본래 불도를 수행하고 있거늘 어찌 세상에 오래 사는 이가 되려고 하겠느냐?”
그러자 잠깐 만에 저절로 없어졌다. 그의 어두움과 밝음에 감동하는 것이 모두 이런 것들이었다. 또 회주 마두산(馬頭山)에 옮겨 살 때였다. 위(魏)나라 효명(孝明)이 일찍부터 그의 아름다운 덕을 받들어 전후 세 번을 불렀으나 굳이 사양하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또 북쪽의 전상산(轉常山)에 옮겨 있을 때에는 정주자사(定州刺使) 누예(★叡)와 팽성(彭城)의 왕고유(王高攸) 등이 청하여 법을 받았으며, 도인과 속인이 다투어 나아가서 예배하고 공양하는 모습이 길을 메웠다. 그리고 명예와 이익에 걸려 있는 이에게는 게송을 말하여 중지시켰으므로 모두가 다 검소하여졌다. 제(濟)나라 문선(文宣)이 천보(天保) 2년에 조칙을 내렸다.
“오래 전부터 풍덕(風德)을 듣고 늘 생각하면서 만날 것을 말하고 있다가, 이제야 정주자사에게 스님을 서울[鄴]에 모시도록 명하였습니다.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그 뜻이 홀로 선(善)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바라건대, 곧 석장(錫杖)을 메시고
잠시라도 오셔서 지극한 도를 널리 펴시어 이 괴로움과 어지러움을 구제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이날까지는 산을 벗어나도 반드시 산으로 돌아와 이리저리 마음대로 다니면서 구애됨이 없었다. 승조가 산에 있으면서 쌓은 업이란 평생 동안 제도하는 일에 있었으므로 칙명의 부름이 있어도 절대로 명을 받들음이 없었다. 그러나 너무도 간절하였으므로 마침내 청을 승낙하고 그 날 바로 옷을 떨쳐입고 산을 나오려 하자, 절 안과 양쪽 봉우리가 갑자기 놀라 진동하면서 애절하게 울렸으므로 사람과 짐승들이 놀라서 요동하고 날짐승ㆍ길짐승이 날며 도망쳤다. 이와 같이 3일 동안을 그렇게 하자 승조는 돌아보며 말하였다.
“접촉하는 무리마다 도(道)를 사모하고 인(仁)을 품는 것에 뜻이 있었거늘, 어찌 애정(愛情)은 지키기 쉽고 방탕(放蕩)은 지니기 어려운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고는 일과 머무름에 언약을 두지 않고 석장(錫杖)을 짚고 장부(漳滏)로 나아가니, 제(帝)가 몸소 큰 수레를 끌고 교외까지 나와서 영접했다. 천하가 선(善)으로 돌아간 것이 모두 승조 때문이었다.
또 운문산(雲門山) 절에서 그가 머무르던 선굴(禪窟) 앞에는 깊은 구덩이가 있었는데, 털옷을 입고 늠름한 늙은 모습을 한 사람이 나타나서 가마솥을 놓고 불을 때고 있었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갑자기 큰 이무기가 물 속에서 나와서 가마 속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승조가 발로 그것을 치워버리자 이무기는 드디어 물러 들어갔다. 그리고 털옷 입는 사람도 없어져버렸다. 그 날 밤에 남자로 변화한 신이 와서 승조에게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는 말하였다.
“제자에게는 아이들이 있는데 해마다 나쁜 신에게 잡아먹히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목숨이 아깝긴 하지만 감히 그것을 당해 내지 못합니다. 제자는 이미 늙어서 장차 죽을 것이므로 스스로 잡아먹히려고 했던 것인데, 스님이 보호하여 주셨기 때문에 이 재난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승조가 물을 찾아서 뿜어내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로 변해버렸다.
때에 어떤 사람이 선제(宣帝)에게 승주를 오만하고 공경함이 없는 이라고 참소하였으므로 선제는 크게 노하여 몸소 죽이려고 했다. 승조는 마음으로 저절로 느껴서 알았으므로 아직 한 번도 부엌에 들른 적이 없는 분이 갑자기 아무 까닭 없이 가서 말하였다.
“내일 큰손님이 오실 것이니 많이 장만하라.”
그리고는 밤 5경(更)이 되자 먼저 소 수레를 타고 혼자 골짜기의 어귀로 갔다. 절에서 20여 리가 떨어진 곳인데 혼자 외로이 길 곁에 서 있었다. 잠시 후에 선제가 도착하여서 괴이하게 여기면서 그 까닭을 물었으므로 승조가
말하였다.
“피의 부정한 것이 가람(伽藍)을 더럽힐까 두려워서 여기에서 문안드릴 뿐입니다.”
그러자 선제는 말에서 내려와 예배하고 부복한 뒤에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상서령(尙書令) 양준언(楊遵彦)에게 말하였다.
“이와 같은 진인(眞人)을 어째서 훼방했느냐?”
그리고는 몸소 승조를 업고 절로 가고자 했다. 승조가 한사코 거절하자 선제가 말하였다.
“제자가 스님을 업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닌다 해도 이 죄를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하였다.
“제자의 전생 몸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승조가 대답하였다.
“나찰왕(羅刹王)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죽이는 일을 좋아하십니다.”
이렇게 말하고서 동이에다 물을 떠놓고 주문을 외운 뒤에 선제로 하여금 몸소 보게 했는데, 그 몸의 영상이 나찰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매년 정월 초하룻날에는 늘 한 해 동안의 길흉을 물었는데, 천보(天保) 10년에 이르러서 말하였다.
“금년에는 좋지 못합니다.”
선제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물었다.
“스님은 또 어떠합니까?”
“빈도(貧道) 역시 오래가지 못합니다.”
10월이 되어서 선제는 붕어(崩御)했다. 그리고 다음 해, 곧 제(齋)나라 건명(乾明) 원년 4월 13일 진시(辰時)에 승조도 아무 병환 없이 단정히 앉아 산사에서 입적했다. 춘추는 81세였으며, 입적할 때에 기이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 찼으므로 맡은 이들은 정신이 황홀했다. 칙명으로 은근히 조문을 했고 중국의 화장하는 법에 의거하게 했는데, 사부 대중이 온 산에 가득 찼고 그 밖의 사람도 수만이었다. 향나무를 천 겹으로 쌓고서 해가 한낮이 되었을 때에 불을 붙였는데, 도인과 속인들의 애절한 통곡 소리가 시내처럼 흘러갔다. 위에서는 수백 마리의 흰 새들이 연기 위를 빙빙 돌면서 슬피 울어댔다. 얼마 지난 뒤에 유골을 거두어서 절의 서북쪽에다 벽돌로 탑을 세워 모셨는데, 매양 신령한 빛과 기이한 향기가 도인과 속인들을 감동시켰다.
살아 있을 때에 선제가 승조에게 물었다.
“제자는 아직 부처님의 영험을 보지 못했습니다. 행여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승조가 말하였다.
“이는 사문으로써 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선제가 억지를 쓰자 가사를 땅에다 던져 놓았다. 그러자 선제가 수십 명을 시켜서 들게 하였으나 옴짝달싹하지도 않았다. 그 뒤에 승조가
사미에게 명하여 가져오게 하자 처음부터 무거울 것이 없었다. 그로 인해 신심이 더욱 돈독하여졌다.[이상 네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수(隋)의 사문 석법진(釋法進)
수(隋)나라 익주(益州) 향응산사(響應山寺) 석법진(釋法進)은 성씨와 가족을 잘 모른다. 선(禪)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스님과 제자들은 언제나 죽림(竹林)에서 좌선하였으며, 네 마리의 늙은 호랑이가 좌우를 돌고 있었으나 스님은 그 모양을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
스님이 뒤에 가르친 것은 수관(水觀)이었다. 절에서 일하는 사람이 땔나무를 가지러 갔다가 승상(繩床) 위에 맑고 좋은 물이 있는 것을 보고 두 개의 흰 돌을 주어다 물 속에 넣어 두었다. 법진이 저물어서 절로 돌아왔으나 더욱 등이 아픈 것을 깨달았으므로 절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자세히 물었더니 ‘돌을 넣어 두었다’고 했다. 다음날 가서 그 돌을 제거하라고 하고는 아침부터 참선을 했다. 절에서 일하는 사람이 도로 가서 보았더니 처음과 같이 맑은 물이었으며, 곧 돌을 제거했더니 아팠던 것이 즉시 나았다. 그로 인해 선정을 익히면서 이 산에서 나오지 않았다.
개황(開皇) 연간에 촉(蜀)나라 왕인 수(秀)가 익주(益州)에 왔을 때에 비(妣)에게 병환이 있자 법진을 청하여 치료하게 했다. 그리고 뒤에 하직하고 산으로 돌아올 때에는 왕과 비가 몸소 전송했으며, 왕과 비는 법진의 발이 땅에서 4ㆍ5촌(寸)씩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대업(大業) 13년 정월 8일에 이 산에서 입적했다.

당(唐)의 사문 석혜융(釋慧融)
당(唐)나라 장안(長安)의 보광사(普光寺) 스님 혜융(慧融)은 자(字)가 원조(圓照)요 속성은 장(張)씨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정진하면서 조그마한 악도 범하지 않았다. 나이 젊었을 때에 머리를 깎고 곧 참선의 대열에 참여했다. 일찍이 태산(泰山)에 숨어 있었고 뒤에는 칙명으로 서울에 들어와 보광사에 머물러 있었다. 종남산(終南山)에 유행할 적에는 오기도 하고 가기도 했는데, 어느 때는 산을 오르다가 눈을 만났다. 너무 깊이 쌓여서 더 나갈 수가 없게 되었는데, 이때 갑자기 한 마리의 호랑이가 앞에 와서 귀를 펴며 납죽이 엎드렸다. 혜융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올라탔더니 호랑이는 혜융을 업고 올라갔다. 항상 새 두 마리가 숲속을 오갈 때에는 앞에 가면서 길을 인도했다. 영휘(永徽) 초에 이르러서
본사에서 입적했으며, 절 스님들은 혜융의 방 위에서 5색의 광명이 일어난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산에서 몸을 화장할 때에 살과 뼈는 모두 녹아 없어졌으나 심장(心腸)만은 문드러지지 않았다.[이상 두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唐高僧傳)』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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