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85권
법원주림 제85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85. 육도편 ⑥
6) 지혜부(智慧部)[여기에는 3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혜익부(慧益部)
(1) 술의부(述意部)
대체로 두 가지 장엄(莊嚴)에서는 혜(慧)를 가장 수승한 것이라 하고, 3품차제(三品次第)에서는 지(智)를 그보다 앞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였다.
“다섯 바라밀[五度]에 지혜가 없으면 마치 어리석은 소경과 같다.”
그러한 까닭에 반야(般若)는 세간을 잘 벗어나게 하고 모든 번뇌[有結]를 깨뜨려 없앤다. 석론(釋論)에서도 말하였다.
“부처님은 바로 중생의 어머니요 반야는 부처님을 능히 낸다.”
이 말은 지혜는 온갖 중생의 조모(祖母)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서(外書)에서는 ‘예(叡)ㆍ철(哲)ㆍ흠(欽)ㆍ명(明)은 곧 방운(放勛:堯 임금)의 덕(德)이라 일컫고,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를 공자[宣尼]의 도(道)라 한다’고 했으니, 의당 지혜의 법을 닦지 않을 수 없고 세간 벗어나는 인(因)을 익히지 않을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큰 어두움을 밀쳐 없앰은 마치 만월(滿月)이 3악도[三途]를 비추는 것과 같고, 교묘히 뭇 독을 떨쳐 버림은 마치 마기(摩祇)가 만악(萬惡)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찌 덧없는 것에 방종하면서 길이 미혹에 빠질 수야 있겠는가. 모양을 취하여 서로 얽히면 나의 마음도 얽혀 맺히기 때문에 항상 애욕이 많고, 항상 무명(無明)이 넉넉하여서 인연(因緣)을 요달하지 못하고 대치(對治)를 닦지 못한다. 그러한 까닭에 울울(鬱鬱)하게 무성한 아만(我慢)의 산은 거의 숭화(嵩華)만큼 높고, 도도(滔滔)하게 흐르는 애욕(愛慾)의 물은 드디어 창명(滄溟)만큼 넓어진다. 때로는 마음대로 단멸이나 항상[斷常]을 고집하고 치우치게 즉함과 여읨[卽離]을 논하기도 한다. 정신[神]이 누렇고 정신이 흰 것을 나는 보았고 나는 안다느니 하거나, 하나의 다리를 항상 들고 서 있고 다섯 방향의 변두리가 늘 타고 있으며, 풀을 뜯어먹는 소를 배우려 하고 똥을 먹는 개와 같아지려고 애쓰기도 한다. 혹은 하천한 진리[下諦]를 왕성하게 말하고 있지만 어찌 중도(中道)의 종지를 알겠으며, 혹은
네 가지 베다[四韋陀]를 북돋우어 고집하고 있으나 어찌 대승(大乘)의 뜻[旨]을 깨치겠는가? 혹은 그윽한 곳에서 처음 깨달음이 생기면 그 밖의 것은 영영 모른다고 하면서 세간의 정상(定常)은 오직 이것만이 귀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또 비유상(非有想)을 말하면서 이것만이 열반을 증득한다고 하기도 하며 자재천(自在天)이 세간을 만들 수 있다고 하나니, 이는 어리석고 흐리멍덩하고 노둔하고 못난 사람이라서 손가락을 보면서 달을 구하고[看指求月] 나무 그루를 지키면서 토끼를 기다리는[守株竣兎] 격이다. 오히려 낙타와 말도 의심하거늘 어찌 콩과 보리를 분간하겠는가.
비록 알아서 기뻐하며 웃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비비(狒狒)와 다르지 않고, 한갓되이 식별해서 말하는 것은 성성이[猩猩]와 다르지 아니하다. 진실로 ,공(空)의 이치를 모르면 언제나 무명에 처해 있을 것이니, 무릇 이 뒤바뀐 마음을 모두 삿된 소견이라 한다. 5주(住)의 번뇌가 아직 한 터럭만큼도 줄어지지 않았고, 108번뇌[使]의 얽매임도 아직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사(大士)는 여덟 글자를 구하기 위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번뇌[纏] 안에 있다가 괴로움을 만나면 곧 물러날까 두려워서이니, 그러므로 스스로 마음에 새겨서 그 뜻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2) 인증부(引證部)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법을 구하기 위한 까닭에 법을 베푸는 이가 말하였다.
‘만일 일곱 길[仞]이나 되는 불구덩이에 몸을 던질 수 있으면 그대에게 법을 주리라.”
보살은 이 말을 듣고 한량없이 기뻐하면서 생각하였다.
‘나는 법을 위해서라면 몸과 목숨조차고 오히려 아끼지 않고 아비지옥(阿鼻地獄)의 모든 나쁜 갈래 안에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을 수 있겠거늘 하물며 인간 세계의 조그마한 불구덩이에 들어감으로써 법을 얻어들을 수 있는 일이겠느냐?’”
『일체공덕삼매경(一切功德三昧境)』에서 말하였다.
“석가는 과거 세상의 오랜 세월 동안에 5통(通)의 선인(仙人)으로서 이름을 최승(最勝)이라고 했다.”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석가문불은 본래 보살이었을 적에 이름이 낙법(樂法)이었다. 당시 세상에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아서 좋은 말을 듣지 못했으므로 사방으로 법을 구하면서 게으르지 않았으나 끝내 얻을 수 없었다. 그 때 악마가 바라문으로 변해서 그에게 말하였다.
‘나에게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한 글귀의 게송이 있다. 그대가 피부를 종이로 삼고 뼈를 붓으로 삼고 피를 먹으로 삼아서 이 게송을 베껴 쓴다면 그대에게 주리라.’
낙법은 즉시 스스로 생각하였다.
‘나는 여러 세상 동안 몸을 수없이 죽였으면서도 이런 이익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는 이내 스스로 피부를 벗겨서 급히 말린 뒤에 그 게송을 쓰려고 하자 악마는 곧 몸을 없애버렸다. 이때 부처님께서 그의 뜻을 아시고 곧 하방(下方)에서 솟아 나오셔서 그를 위하여 깊은 법을 말씀하셨으므로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또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법을 위한 인연으로 몸을 깎아 등을 만들고서 가죽과 살을 차곡차곡 포개 놓고 소유(蘇油)를 붓고는 그것을 태우면서 심지로 삼았다. 보살은 그 때 이 큰 고통을 받으며 스스로 그의 마음을 꾸짖으면서 말하였다.
‘이와 같은 고통을 지옥의 고통에 견준다면 백천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너는 한량없는 백천 겁 동안 큰 고통을 받았으면서도 도무지 이익이 없었다. 네가 만일 이 가벼운 고통조차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할 수 있겠느냐?’
보살이 이렇게 관찰하자 몸으로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고, 그 마음은 물러나지 않았으며 동요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았다. 보살은 그 때 스스로 ‘나는 반드시 아뇩보리를 얻게 된다’고 깊이 알았다. 보살이 그 때 구족한 번뇌를 아직 끊지 못했다면, 법을 위한 인연으로 능히 머리ㆍ눈ㆍ골수ㆍ뇌ㆍ손ㆍ발ㆍ피 및 살을 중생에게 보시할 수 있었겠으며, 몸에 못을 박아서 바위에 던지고 불속으로 나아갈 수 있었겠는가? 보살은 그 때 비록 이와 같은 한량없는 뭇 고통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이 물러나지도 않고 동요하지도 않으며 변하지도 않았으니, 보살은 마땅히 ‘나는 지금 반드시 물러나지 않는 마음이 있으므로 장차 아뇩보리를 얻으리라’고 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또 『대집경(大集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한 글자와 한 글귀의 게송을 위하여 시방세계의 값진 보배를 법왕(法王)에게 바쳐 보시하며, 그 한 게송의
인연으로 몸과 목숨을 버리게 된다. 비록 한량없는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겁 동안 이러한 보시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한 번 보리의 일을 듣고 마음에 기쁨을 내는 것보다는 못하다. 바른 법을 즐거이 듣고 즐거이 말하게 되면 언제나 모든 부처님과 모든 하늘이 기억하게 되며, 이 기억하는 힘 때문에 세간에 있는 온갖 경전을 모두 통달하게 된다.”
또 『대방편보은경(大方便報恩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항상 부지런히 선지식(善知識)을 구함은 불법을 하나의 글귀, 하나의 게송, 하나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듣기 위해서이니, 삼계의 번뇌는 모두 다 시들어버린다. 보살이 마음에 뜻을 두고 부처님의 말씀을 구할 때에는 법을 갈구하는 정(情)이 중하므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니, 설령 이글거리는 뜨거운 쇠와 활활 타오르는 땅을 밟는다 해도 근심거리로 여기지 않는다. 보살은 하나의 게송을 위해서라도 몸과 목숨조차 오히려 아끼지 않거늘 하물며 12부(部)의 경전이겠는가? 하나의 게송을 위해서도 오히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거늘 하물며 그 밖의 재물이겠는가?
법을 들은 이익 때문에 몸은 안락하게 되고 믿는 마음과 곧은 마음과 바른 소견을 깊이 낸다. 설법한 이를 보면 마치 부모를 뵙는 것같이 하므로 마음에 교만함이 없다.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들을 뿐, 이익[利養]을 위하지 않으며,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자기의 이익을 위하지 않는다. 바른 법을 위하는 까닭에 왕의 재난과 배고픔과 목마름과 추위와 더위와 범ㆍ이리 등의 나쁜 짐승과 도적들에게서 받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먼저 번뇌의 모든 감관을 조복한 연후에 법을 듣는다.”
또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이러한 방편으로 법을 구하므로 온갖 값진 보배에 대하여 귀하게 여기거나 아까워하는 것이 없으며, 이런 물건에 대해서는 어렵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만일 한 글귀라도 일찍이 듣지 못했던 법을 얻으면 삼천대천세계 안에 가득 찬 값진 보배를 얻은 것보다 수승하며, 하나의 게송을 얻어들으면 전륜성왕과 석제환인(釋帝桓因)과 범천왕(梵天王)이 사는 곳을 얻은 것보다 수승하다. 보살은
생각하였다.
‘나는 한 글귀의 법을 받기 위해서라면 설령 삼천대천세계 안에 큰불이 가득 차 있다해도 위의 범천으로부터 스스로 몸을 던져서 내려와야 하겠거늘 하물며 조그마한 불이겠는가? 나는 온갖 지옥의 고통을 모두 받으면서도 오히려 법을 구해야 하겠거늘 하물며 인간 안의 조그마한 모든 고뇌들이겠는가?’
법을 구하기 위하여 이러한 마음을 내면, 들은 법처럼 마음은 항상 기쁘고 즐거워져서 일체를 바르게 관찰할 수 있다.”
『미증유경(未曾有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비마국(毘摩國)의 사타산(徙陀山)에 한 마리의 야간(野干)이 있었는데, 사자에게 쫓기다가 한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사흘이 지난 뒤에 마음이 열리면서 죽음을 분별하여 스스로 게송으로 말하셨다.
온갖 것은 모두가 덧없는 것이거늘
사자에 먹히지 못했음이 한스럽구나.
어쩌다가 이 우물에서 죽게 되었는가.
목숨을 탐내다가 공(功)없이 죽는구나.
공이 없음을 한탄할 수는 있지만
다시 인간 세상의 물을 더럽히다니.
시방의 부처님께 참회하오니
원컨대 저의 마음 비추어 보소서.
전생에 지은 모든 악한 과보를
현재에 다 갚아서 다하게 하시고
이로부터 밝은 스승을 만나
수행이 다하여 부처 되게 하소서.
제석(帝釋)이 이 게송을 듣고 8만의 모든 하늘들과 함께 그 우물곁으로 와서 말하였다.
‘성인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여 오래도록 어두운 데 있었습니다. 아까 범상하지 않은 말씀을 하셨는데, 다시금 그 법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야간이 대답하였다.
‘천제(天帝)는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 시의(時宜)를 모르는구려. 법사는 아래에 있고 자기는 그 위에 있으니, 처음부터 공경함을 닦지 않으면서 어찌 법요(法要)를 묻습니까?”
그래서 제석은 하늘 옷[天衣]을 모두어 잡은 채 머리를 두드리며 참회하면서 말하였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옛날 일찍이 세간 사람들을 보건대, 먼저 높은 자리를 깔고 그런 뒤에 법사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여러 하늘들이 저마다 보배 옷을 벗어서 차곡차곡 쌓아 높은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야간이 자리에 올라서 말하였다.
‘두 가지 큰 인연이 있습니다. 첫째는 설법하여 하늘과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이니 복이 한량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음식을 보시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천제가 아뢰었다.
‘우물에 빠지게 된 재앙을 면할 수 있는 공덕도 의당 큰 것일 텐데, 어찌하여 은혜가 미치지 않습니까?”
대답하였다.
‘살고 죽는 일은 저마다 의당한 것인데도, 어떤 사람은
삶을 탐내고 어떤 사람은 죽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모르고서 부처님 법을 어기고 밝은 스승을 만나지 않으며, 삶을 탐내고 죽음을 두려워하다가 죽어서는 지옥에 떨어집니다. 어떤 지혜 있는 사람은 3보를 받들어 섬기고 밝은 스승을 만나서 악을 고치고 선을 닦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살기를 싫어하고 죽음을 싫어하지 않다가 죽은 뒤에는 천상에 가서 납니다.’
천제가 말하였다.
‘높으신 분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목숨을 보전하게 한 것은 아무 공이 없습니다. 원컨대, 음식을 보시하고 법을 보시하는 것을 들려주십시오.’
대답하였다.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것은 하루 동안의 목숨을 구제하는 것이요, 값진 보배를 보시하는 것은 한 세상 동안의 궁핍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법하여 교화하는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세간을 벗어나는 도(道)로써 3승(乘)의 과위를 얻고 3악도(惡道)를 면하여 인간과 천상의 쾌락을 받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부처님은 법으로 보시하는 공덕이 한량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제가 말하였다.
‘스승의 현재 몸은 업보로 된 것입니까, 응화(應化)로 된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이는 죄의 업보이지 응화가 아닙니다.’
천제가 말하였다.
‘성인께서 죄의 업보라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원컨대 그 인연을 들려주십시오.’
대답하였다.
‘옛날 파라내국(波羅奈國) 파두마성(波頭摩城)에서 한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찰리(刹利)의 종성으로서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는데, 특히 배우고 익히기를 좋아했습니다. 나이 12살이 되어서 스승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으니, 시절을 잃지 않고 50년 동안 96가지 경서를 통달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화상(和尙)의 은혜였는데 그 공은 갚기 어려웠습니다. 먼저 지혜를 배운 연유로 저절로 전생의 일을 알았는데, 왕위를 받은 뒤에는 사치하고 음탕하면서 쾌락에 집착했더니 과보가 다하고 목숨을 마친 뒤에는 지옥과 축생에 가서 났습니다.[이하는 생략하고 기술하지 아니한다.]’
그러자 제석은 8만의 하늘들과 함께 그로부터 10선(善)을 받았으며 천궁으로 돌아가면서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언제 이 죄보를 버리고 천상에 나시게 됩니까?’
야간이 말하였다.
‘지금부터 7일 후에는 이 몸을 버리고 도솔천에 가서 납니다.
당신들도 그 하늘에 가서 나기를 원하십시오. 보살들이 많이 계시면서 설법하고 교화하시니까요.’
마침내 7일 후에 목숨이 다하자 도솔천궁에 가서 났으며, 다시 전생 일을 알고는 10선(善)의 도를 행하였다.”
또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바라내국에 계실 때였다. 숲 속에서 모든 천상과 인간의 사부대중을 위하여 묘한 법을 드러내서 말씀하고 계셨다. 이때 공중에서 5백 마리의 기러기 떼가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 깊이 좋아해서 빙빙 날며 내려오다가 사냥꾼이 쳐놓은 그물 속에 걸려 그 속에 모두 떨어졌다. 이렇게 사냥꾼에게 죽게 된 기러기들은 모두 도리천(忉利天)으로 가서 났다. 처음 태어났을 때, 부모의 무릎에 앉은 여덟 살짜리 인간의 아이만큼 컸는데, 단정하기 견줄 데 없었고 광명은 마치 금산(金山)과 같았다. 그들은 스스로 ‘나는 무슨 인연으로 여기에 와서 났을까?’라고 생각하다가, 곧 전생의 일을 알고는 법의 과보임을 좋아하면서 다 함께 꽃을 가지고 염부제로 내려와 세존의 발에 예배하고 아뢰었다.
‘저들은 법음을 듣고자 했다가 묘한 하늘에 가서 났나이다. 원하옵건대 거듭 열어 보이소서.’
부처님께서 4제(諦)를 말씀하시자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고 곧 천상으로 되돌아갔다.”
(3) 이익부(利益部)
또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말하였다.
“여섯째, 보살이 지혜를 수행하는 데에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어서 2승과는 같지 아니하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선정과 지혜를 분별하는 근본을 생각한다. 둘째는 단견(斷見)ㆍ상견(常見)을 버리지 않는 두 가지 치우침을 생각한다. 셋째는 인연으로 생기는 모든 법을 생각한다. 넷째는 중생과 나와 사람의 수명이 없음을 생각한다. 다섯째는 3세(世)의 가고 오고 머무르는 법을 생각한다. 여섯째는 행을 일으키는 것마다 인과가 끊어지지 않음을 생각한다. 일곱째는 법이 공[法空]하나 선을 심기에 게으르지 않음을 생각한다. 여덟째는 모양이 없는[無相]데도 중생 제도하길 그만두지 않음을 생각한다. 아홉째는 원이 없는[無願]데도
보리 구하길 여의지 않음을 생각한다. 열째는 지음이 없는[無作]데도 현재 몸을 받길 버리지 않음을 생각한다. 이와 같은 지혜는 성문과 벽지불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이 반야를 행하면 열 가지 이익이 있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온갖 것을 모두 버리면서도 베푼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며, 둘째는 계율을 지니어 이지러지지 않으면서도 계율에 의지하지 않으며, 셋째는 인욕의 힘에 머무르면서도 중생이란 생각에 머무르지 않으며, 넷째는 정진을 행하면서도 몸과 마음을 여의고, 다섯째는 선정을 닦으면서도 머무르는 바가 없으며, 여섯째는 마왕 파순(波旬)이 어지럽게 하지 못하며, 일곱째는 다른 이의 언론(言論)에 대하여 그 마음이 동요하지 않으며, 여덟째는 나고 죽는 바다의 맨 밑까지 통달하며, 아홉째는 모든 중생에 대하여 뛰어난 자비를 일으키며, 열째는 성문과 벽지불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니라.’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이 많이 들음[多聞]을 믿고 좋아하면 열 가지 이익이 있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번뇌가 의지하고 돕는 것을 알며, 둘째는 청정함이 의지하고 돕는 것을 알며, 셋째는 의혹을 멀리 여의며, 넷째는 바르고 곧은 소견을 지으며, 다섯째는 그릇된 도를 멀리 여의며, 여섯째는 바른 길에 편안히 머무르며, 일곱째는 단 이슬[甘露]의 문을 열며, 여덟째는 부처님의 보리에 가까워지며, 아홉째는 일체 중생에게 광명을 지어 주며, 열째는 나쁜 길[惡道]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니라.’”
또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말하였다.
“다시 네 가지 지혜로써 지혜를 완전히 갖춘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단견(斷見)에 머무르지 않고, 둘째는 상견(常見)에 들지 않으며, 셋째는 12인연(因緣)을 분명히 알고, 넷째는 나 없음의 행[無我行]을 참고 힘쓰는 것이다.
보살은 또 네 가지 옹호하는 법으로써 지혜를 완전히 갖춘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법사 옹호하기를 마치 자기의 군주와 같이 하고, 둘째는 모든 선근을 옹호하며, 셋째는 세간을 옹호하고, 넷째는 남을 이익 되게 하는 사람을 옹호하는 것이니라.
보살은 또 네 가지 만족할 줄 모르는 행으로써 지혜를 완전히 갖춘다. 첫째는 많이 들음을 좋아하면서 만족할 줄 모르고, 둘째는 설법을 좋아하면서 만족할 줄 모르며, 셋째는 혜(慧)를 행하면서 만족할 줄 모르고, 넷째는 지(智)를 행하면서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다.”
또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불자여, 온갖 모든 부처님은 열 가지 시기를 어기는 일이 없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온갖 부처님은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에 시기를 어기는 일이 없고, 온갖 부처님은 선근의 업보에 시기를 어기는 일이 없으며, 온갖 부처님은 보살에게 수기를 주시는 것에 시기를 어기는 일이 없고, 온갖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를 따라 신통력을 나투어 보이는 것에 시기를 어기는 일이 없으며, 온갖 부처님께서는 여래의 몸을 나타내는 것에 시기를 어기는 일이 없느니라. 온갖 부처님께서는 모두 버림을 행하는 것에 시기를 어기는 일이 없고, 온갖 부처님께서는 성(城)과 마을로 들어가는 일에 시기를 어기는 일이 없으며, 온갖 부처님께서는 기뻐하는 중생을 거두어 주는 일에 시기를 어기는 일이 없고, 온갖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교화하기 어려운데도 놓아 버리지 않고 조복하는 일에 시기를 어기는 일이 없으며, 온갖 부처님께서는 불가사의하고 자재한 신력을 나투어 보이는 일에 시기를 어기는 일이 없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온갖 모든 부처님께 있는 열 가지 시기를 어김이 없는 일이니라.”
게송을 읊는다.
3악도는 거리가 서로 떨어져 있지만
6도(度)는 서로가 겨레붙이인 것이니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는 어두움을 열어 준다.
네 가지 무량심으로 인자하게 비추고
3학(學)으로는 가엾이 여기나니
이러한 복되고 이익 되는 일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고양될 뿐이다.
물듦과 깨끗함은 뜻[情]을 따르고
가짐과 버림은 나 자신이 하는 일이니
흥성함이나 쇠망함의 이치를 알아서
허망한 것 쉬고 구하는 것 그만 두라.
여섯 가지 폐단을 오래도록 막아버리고
8정도로 텅 비어 융화시키면
복(福)과 지혜[智]가 다 같이 감응하고
이치[理]와 분량[量]이 다 함께 통한다.
감응연(感應緣)[대략 일곱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진(晋)의 정호신(亭湖神)의 사당
위(魏)의 사문 석지담(釋志湛)
당(唐)의 사문 석혜인(釋慧因)
당의 사문 석혜릉(釋慧稜)
당의 사문 석법민(釋法敏)
당의 사문 석공장(釋空藏)
당의 사원대부(司元大夫)의 처 소씨(蕭氏)
진(晋)의 정호신(亭湖神)의 사당
진(晋)나라의 양주(楊州) 강가에 정호신(亭湖神)이 있었는데 매우 엄격하였고 심히 포악하였다. 당시 한 객승(客僧) 바라문(婆羅門)으로서 법장(法藏)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주문을 잘 지니면서 모든 삿된 독을 물리쳤고 모두 영험이 있었다. 이와는 달리 어떤 젊은 스님이 법장에게 가서 주문을 배웠는데, 여러 해를 지난 뒤에는 학업이 성취하여 그 역시 모든 삿된 독과 악을 항복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일부러 정호신이 있는 사당에 머무르면서 주문을 외우며 신을 항복시키려 했다. 그 날 밤에 신이 나타나자마자 그는 죽어버렸다. 스승인 법장은 제자가 주문을 외우다가 죽어버렸다는 말을 듣고서 분노한 나머지 스스로 밤에 신이 있는 사당으로 가서 성을 내며 주문을 외우다가 신이 출현하자마자 그도 역시 죽어버렸다.
이들과 같은 절에 사는 스님으로서 매양 반야(般若)를 받아 지니는 이가 있었다. 그는 스승과 제자가 다 같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신이 있는 사당으로 가서 밤에 금강반야를 외우고 있었다. 한밤중이 되자 바람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리더니 깜짝하는 사이에 큰 물건이 나타나는데, 그 형상이 뛰어나고 훌륭했으며 앞에 불쑥 솟아나면서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 모습이 특이하고 두렵기 짝이 없었으며 이가 길고 날카로웠는데, 눈빛을 번개처럼 번쩍거리면서 갖가지 신통 변화를 부리는 모습이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경을 외던 스님은 단정히 앉은 채 바른 생각으로 경을 외면서 찰나 동안도
게으르지 않았다. 겁도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자, 그 신은 태연히 형상을 나타내면서 그 모든 위세를 거두고 스님 앞으로 와서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 공경하면서 외우는 경을 들었다. 경을 다 외운 뒤에 스님은 신에게 물었다.
“단월(檀越)은 어떤 신령(神靈)이기에 처음 왔을 때는 사납고 험하게 굴다가 이제는 기뻐하는 얼굴로 대하는고?”
신이 대답하였다.
“제자는 나쁜 업보로 그렇게 된 것이며, 이 호수의 신인데 경을 외우는 스님을 매우 믿고 공경합니다.”
그러자 다시 물었다.
“만일 그대 신이 믿고 공경한다면, 무슨 이유로 앞의 두 스님을 다 죽게 하였는고?”
“앞의 두 스님이 죽은 것은 대승의 경전을 받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며 성내는 마음으로 주문을 외웠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앞에 나타나자 거꾸로 욕설을 퍼붓고 나쁜 말을 외우면서 제자를 항복시키려 하였으나, 제자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두 스님은 제자의 형상이 험악한 것을 보고 저절로 두려워서 죽은 것이지, 제자가 일부러 두 스님을 죽인 것은 아닙니다.”
그 때 근방의 도인과 속인들은 앞의 두 스님이 죽은 것을 보고 이 경을 외우는 스님도 죽었으리라 여기면서 함께 가 보았더니 편안한 용모로 태연하게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심히 괴이하게 여기면서 다투어 그 까닭을 묻자, 그 스님은 앞에 있던 일들을 자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진실로 이는 반야의 위력이었고 성인의 가르침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로부터 모든 사람이 발심하여 반야를 받아 지니는 이들이 많아졌다.
위(魏)의 사문 석지담(釋志湛)
위(魏)나라의 태악(泰岳) 인두산(人頭山)의 함초사(銜草寺) 석지담(釋志湛)은 제주(濟州) 산장현(山莊縣) 사람이다. 이 분은 낭공(朗公)의 증손 벌되는 제자이다. 행실과 처신이 순수하고 돈후하며, 하는 일마다 반성하면서 말이 적었다. 함초사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 절은 바로 송(宋)나라의 구나발마(求那跋摩)가 세운 절이었다. 모든 날짐승ㆍ길짐승이 놀고 있으면서도 놀라거나 요란하지 않았으며, 항상 법화경을 독송하는 일이 그의 일정한 업무였다.
입적하는 날에 사문 보지(保誌)는 양무제(梁武帝)에게 아뢰었다.
“북방의 산장현 함초사에 사는 한 스님은 바로 수다원(須陀洹)의 성인이십니다. 오늘 열반에 드십니다.”
양도(楊都)에 있는 도인과 속인이 지공(誌公)에게 물으면 모두 멀리 향해 예배하게 하였다.
지잠은 단정히 앉아서 숨을 거두었는데,
두 손 다 한 손가락씩을 펴고 있었다. 서천축(西天竺)의 어떤 스님이 풀이하였다.
“만일 두 번째 과(果)의 성인이면 두 손가락씩을 펴야 할텐데 지잠은 한 손가락씩만 펴고 있으니 반드시 이는 초과(初果)이리라.”
인두산에서 장례를 치루고 탑을 조성하여 안치하였는데 새와 짐승들이 더럽히지 않았다. 지금 아직도 있다.
또 옹주(雍州)의 어떤 스님도 역시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백록산(白鹿山)에 숨어 있었는데, 감응으로 한 동자(童子)가 항상 공양을 올리었다. 죽은 뒤에 시체를 바위 아래에다 놓아 두었는데 다른 뼈는 다 썩어 없어졌지만 오직 혀만은 여러 해 동안 썩지 않았다.
또 제(濟)나라 무성(武成) 시대에 병주(幷州) 동간산(東看山) 곁에 사는 어떤 사람이 땅을 파다가 한 처사(處士)를 발견하였다. 그 빛이 황백색(黃白色)이었는데 곁에 이상한 것이 있어서 찾아보았더니 한 물건이 나타났다. 마치 사람의 양 입술 같았는데, 그 속에는 깨끗하면서도 붉은 색의 혀가 있었다. 이 일을 천자가 듣고 여러 도인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아는 이가 없었다. 사문 대통(大統) 법사가 천자에게 아뢰었다.
“이 분은 『법화경』을 독송한 이라 6근(根)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은근히 천 번만 독송하면 반드시 이런 징험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자 중서사인(中書舍人) 고진(高珍)에게 명하였다.
“경(卿)은 바로 믿음이 있는 사람이니 몸소 가서 보시오. 반드시 영이(靈異)한 일이 있을 터이니 청정한 곳에 옮겨 놓고 재를 베풀면서 공양해야 하오.”
그리하여 고진은 칙명을 받들고 그 곳으로 가서 『법화경』을 독송하는 모든 사문들을 모은 뒤에 저마다 향로를 가지고 깨끗이 재계하고서 그의 주위를 돌면서 축원하였다.
“보살께서 열반하신 연대는 벌써 오래입니다. 상법(像法)이 유행하는 이시기에 받들어도 잘못이 없다면 영감(靈感)을 나타내 보이소서.”
이 말을 겨우 시작하자마자 입술과 혀가 일시에 벌떡벌떡 뛰었다. 비록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경을 독송하는 것과 같았으니, 그 자리에서 보는 이들은 모두 털이 곤두서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고진이 이 일을 천자에게 아뢰자 조칙으로 혀를 넣을 석함(石函)을 보내 주면서 산실(山室)에다 옮기게 하였다.
또 위(魏)나라 태화(太和) 초년(初年)에 북대(北代)의 한 환관(宦官)이 스스로 몸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불구임을 슬퍼하면서 여러 번 임금에게 입산수도(入山修道)할 것을 애걸하였더니 칙명으로 허락이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1부(部)의 화엄경을 가지고 가서 밤낮으로 독송하면서 예배하고
참회하기를 게으르지 않았다. 첫여름에 산으로 가서 6월 말이 되었는데, 수염이 모두 다 생기고 생식기도 다시 나타나서 장부의 모습으로 완연히 복구 되었다. 이 일을 임금에게 자세히 아뢰었더니, 고조(高祖)는 신앙이 더욱더 깊어졌고 내궁(內宮)에서는 놀라며 의아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북대의 나라에서는 화엄경이 더욱 왕성해졌다.[이상 두 가지 증험은 후군 소집(候君素集)에 나온다.]
당(唐)의 사문 석혜인(釋慧因)
당(唐)나라 서경(西京)의 대장엄사(大莊嚴寺) 석혜인(釋慧因)은 속성이 우(于)씨이며 오군(吳郡)의 해염(海鹽) 사람이다. 품성이 온유하였고 감식(鑒識)하는 힘이 남보다 뛰어났다. 뒤에 장간(長干) 변(辯) 법사에게로 가서 삼론(三論)을 받아 배우면서 실상(實相)의 은미한 말을 궁구하고 만자(滿字)의 그윽한 뜻을 넓혔는데, 물을 한 그릇에 쏟아 놓고 보매 그 푸른 물감은 쪽보다 더 푸르렀다. 변 법사는 뒤에 고요한 산림으로 돌아가면서 학도들을 그에게 맡겼으니, 수업한 제자가 5백여 명이었고 뒤를 이으며 등불을 전하기 30년이었다.
진(陳)나라 태건(太建) 8년에 안거(安居)가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저승의 사자가 와서 말하였다.
“왕께서 법사를 청하십니다.”
그때 사자를 따라온 이들이 서로 떠들어대고 거문고와 퉁소를 한꺼번에 울렸다. 그는 그때 호흡은 죽은 이와 같았으나 몸은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는데, 이레를 지난 뒤에야 깊은 정(定)에서 일어나듯 깨어났다. 학도들이 묻자 그가 말하였다.
“상자 속을 보라. 어떤 물건이 있을 것이다.”
살펴서 찾아보았더니 비단 두 필이 있었다. 그가 이어서 말하였다.
“이것은 선물로 보낸 것이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거듭 묻자, 말하였다.
“허망한 생각이요 뒤바뀐 일이다.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 나는 염라왕의 부름을 받고 여름 동안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독송했었다. 저승에서는 석 달 동안을 지냈다고 했으며, 또 지옥의 여러 모양과 다섯 가지 고통[五苦]의 차례도 보았다.”
대저 자비가 저승과 이승에 다하였고 수행이 지극해서 감통하지 않았다면, 어찌 저 저승을 가서 혼신이 딴 세상에서 노닐 수 있었겠는가? 정관(貞觀) 원년(元年) 2월 12일에 대장엄사에게 입적하였으니 춘추는 89세였다.
당의 사문 석혜릉(釋慧稜)
당(唐)나라 양주(襄州) 자금사(紫金寺)의 석혜릉(釋慧稜)은 성이 신도(申屠)씨이다. 무릇
법의 담론이 있을 때는 모두가 다시 말해 보게 하였는데, 토하는 말은 질박하였으며 이치를 말하면 은미한 데에 들어갔다. 그때 사람들은 다 같이 그를 뜻을 얻은 혜릉[得意稜]이라 불렀다.
정관(貞觀) 14년 정월 중순에 감통사(感通寺)에 있던 창(昶) 법사가 말하였다.
“꿈에 염라왕이 나타나서 혜릉 스님에게 삼론(三論)을 강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내가 ‘법화경을 강함이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혜릉이 말씀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혜릉은 항상 지옥에 있으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대승경을 강하겠다고 원을 세웠으므로 이미 이런 징험이 있었고 이런 원을 다하였었다.
9월 말이 되어서 장왕(蔣王)이 혜릉의 기운이 허약해진 것을 보자, 소주 우유[韶州乳] 두 량을 보내 주면서 억지로라도 드시게 했다. 그날 저녁 꿈에 한 의관을 차린 사람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이 우유는 먹지 마십시오. 염라왕께서 도량을 다 장엄해 놓았으며 우유약이 많이 있습니다.”
10월 중순이 되어 해가 지고 어둑어둑 할 때에 드디어 낫지 않을 것을 깨닫고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의 5장(臟)은 벌써 다 무너져서 아픈 데도 없다.”
그리고는 4경(更)에 일어나 앉아서 사주(寺主) 보도(寶度)에게 말하였다.
“기억하건대, 나이 8세 때에 용천사(龍泉寺)에 가서 관세음보살께 빌려고 했는데, 기사(耆闍)에 닿기도 전에 벌써 세 번을 강했던 것이 눈앞의 일과 같이 환하다.”
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법사께서는 얼른 일어나서 향을 피우십시오. 사자가 곧 도착합니다.”
보도가 말하였다.
“어떤 사람인가?”
“염라왕의 사자가 혜릉 법사를 영접하러 옵니다.”
그리하여 곧 일어나서 향을 피우고 목욕하고 참회하면서 부처님께 예배를 마치고는 방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보도와는 따로 음식을 먹었는데, 죽을 먹다가 다 먹기 전에 문득 일생 동안의 사기(私記)를 가져다 불태우면서 말했다.
“이 사기는 다른 이에게 읽혀도 그 이치를 터득하지 못한다.”
그리고 조금 먹고 있을 때 기이한 향기가 갑자기 풍겨오니 혜릉은 용태를 바로 하고서 곧 죽었다. 이때가 14년 10월 16일이며 춘추는 65세였다.
당의 사문 석법민(釋法敏)
당(唐)나라 월주(越州) 정림사(靜林寺)의 석법민(釋法敏)은 성이 손(孫)씨요 단양(丹陽) 사람이다.
『법화경』과 『삼론(三論)』을 항상 강하면서 끊이지 아니했다. 정관(貞觀) 원년에 단양으로 도로 나와서 『화엄경』과 『열반경』을 강하였다. 2년이 되자 월주에서 전도독(田都督)이 일음사(一音寺)로 따라왔는데, 도사와 속인에게 강한 수가 천여인이 되었으므로 그 경사스런 모임을 축하해 주었다.
19년에 회계(會稽)의 선비들이 정림사로 가서 『화엄경』 강해 주기를 청하였다. 6월 말의 어느 날, 한창 대중을 모아서 강을 하고 있는데 뱀이 법민의 정수리에 몸의 절반을 매달고 있었다. 길이는 7척 정도였고 황금빛이었으며 5색 광명을 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강이 다 끝나자 어디론지 모르게 숨어버렸다.
여름이 다 끝나자 일음사로 돌아왔다. 어느 날 밤에 붉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법민에게 예배하고 말하였다.
“법사께서 강하신 4부(部) 대경(大徑)의 공덕이야말로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모름지기 다른 지방으로 가서 교화하셔야 하기 때문에 동방에서 와서 법사를 영접하는 바입니다.”
제자 수십 명이 이 모습을 다같이 보았다. 이 일이 있기 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은 까닭 없이 캄캄하였었는데 막 입적하려 할 때에 갑자기 큰 광명을 놓았으므로 밤의 밝기가 낮과 같았다. 그리고는 곧 입적하니 춘추는 67세였다. 상여가 나가기 전의 7일 동안 기이한 향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당의 사문 석공장(釋空藏)
당(唐)나라 경사(京師)에 있던 회창사(會昌寺)의 석공장(釋空藏)은 성이 왕(王)씨이다. 선조는 진양(晋陽)에 살았었으나, 지금은 옹주(雍州)의 신풍현(新豊縣)에 살았다. 어머니는 처음 잉태한 날부터 저절로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고, 냄새가 나는 마늘과 파와 고추 같은 매운 것을 먹지 않았다. 잉태한 아이로 인하여 은밀히 달라지게 한 것이다.
태어난 뒤에는 영감(靈鑒)이 날마다 늘어났고 마음 씀이 높고 원대하였다. 경론(經論)을 독송하면서 생각을 중생 구제에 두었는데, 총명과 근면은 견줄 데가 없었으며 날마다 1만 마디의 말을 외웠다. 나이가 들어서 장성해졌을 때는 경론 3백여 권을 외웠고, 뭇 경에서 따온 대승의 요긴한 글귀는 10여 권이 되었는데 모두 세상에 유통되었다. 현겁(賢劫) 천불에게 날마다 한 번 예배하였고, 봄과 여름에는 방등경(方等經)을 외우면서 항상 앉아 있었고 눕지 않았으니, 그 대단한 근면은 더할 나위가 없었고 촌음(寸陰)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정관(貞觀) 16년 5월 12일에 회창(會昌)에서 생을 마쳤는데 춘추는 74세였다. 몸은 용지사(龍池寺) 곁에다 버렸고 유골을 거두어 탑을 세웠는데, 그 해골에는 두 귀가 서로 통해 있었고 정수리에는 두 구멍이 있었으며 눈언저리에는 합해진 구멍이 각각 세 개씩 있었다. 제자들이 영원히 가신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비를 회창사에 세웠는데, 좌복야(左僕射) 연국공(燕國公) 우지녕(于志寧)이 글을 지었다.
또 석유유(釋遺裕)라는 이는 항상 『법화경』을 독송했는데 천여 번이나 외웠었다. 정관(貞觀)의 초(初)에 병으로 인하여 죽음이 입박하자 친구 혜곽(慧廓)에게 부탁하였다.
“자주 경을 외우기는 했으나 뜻으로 영험을 바랐었소. 몸이 죽은 뒤에는 해골을 드러낼 필요가 없고 10년 동안 매장해 두었다가 파내어서 혀가 문드러졌는가를 살펴보시오. 만일 문드러지지 않았다면 나를 위해 하나의 탑을 세우고 경을 읽은 감응을 보여 주시오.”
그리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죽었으니, 그의 부탁한 대로 매장하였다.
정관 11년이 되어서 혜곽과 아는 친구들이 그의 묘를 열어 보았다. 몸의 살은 모두 다 없어졌는데 혀만이 썩지 않고 있었다. 한 고을의 남녀들이 다 함께 보고 공경한 뒤에 함에다 혀를 넣어서 양륙(楊陸)의 북쪽, 성곡(性谷)의 남쪽 언덕에다 탑을 세우고 명(銘)을 새겨 두었다. 아는 이들은 존엄하게 여기면서 더욱 신심을 내어 경을 독송하였다.
또 경성(京城)의 서쪽, 풍곡향(豊谷鄕)의 남쪽인 복수(福水) 남사촌(南史村)이라는 곳에 사가서(史呵誓)라는 이가 있었다. 젊어서부터 착한 생각을 품고 늘 『법화경』을 독송하였는데, 임종할 적에는 감응으로 기이한 향기가 온 마을에 가득히 풍겼다. 매장한 지 10년 후에 그의 아내가 죽었으므로 묘를 파서 합장을 하는데 혀가 선명하게 나타났으며 보통과는 달리 아주 붉었다.
또 소복야(蕭僕射) 송국공(宋國公)과 그의 형 태부사(太府寺) 대경(大卿)은 영화로운 지위에 있던 높고 귀한 분들이며 국사(國史)에 다 같이 전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기꺼이 도업(道業)에 뜻을 두어서 촌음도 버리지 않고 『법화경』을 만 번이나 암송하였다. 형제가 각각 『법화경』 천 부(部)를 만들어서 서생(書生)으로 하여금 정결히 대조하고 교정하여 오류가 없게 한 뒤에 장식한 함에다 담아서 여기저기 주어서 유통시켰으며, 청해 받은 사람은
이름을 저마다 한 통씩 기록한 뒤에 몸소 낮과 밤에 한 번씩 예배하고 공경했다.
송국공은 스스로 10여 권의 경소(經疏)를 지었는데, 널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살피고 마음을 기울여서 반 평생 동안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운 부분을 따와 자기의 소견을 붙였던 것이다. 4시(時)에 따로 하는 일이 없이 자리에 올라가 항상 강을 하였으며, 품평(品評)을 여는 첫날이 되면 매양 경성(京城)의 덕망 있는 이와 조야(朝野)의 재상과 귀인들을 불러 놓고 몸소 자리에 나아가 손님과 주인의 예를 다하였다.
형 대경은 경 독송하기를 좋아하였다. 베껴 쓴 『법화경』 천 부는 몸소 대조하여 교정하였으며, 매일 조정에 나가서는 반드시 곁의 시중하는 사람에게 경을 가지고 앞에 있게 하면서 공사(公事)를 보았다. 그러다가 틈만 나면 스스로 대조하면서 읽었으며 날마다 한 번씩 독송하는 것을 일정한 격식으로 삼았다. 이 신령한 상서와 징험의 흔적들은 다 기록하기 어렵다. 가문이 높고 원대한지라 전해지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이상의 네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唐高僧傳)에 나온다.]
당의 사원대부(司元大夫)의 처 소씨(蕭氏)
당(唐)나라 소씨(蕭氏)는 바로 사원대부(司元大夫) 최의기(崔義起)의 처이다. 그는 소갱(蕭鏗)의 따님이며, 갱은 또 복야(僕射)의 조카이다. 소씨는 사람됨이 시기와 질투가 많았고 성을 잘 냈으며, 노비를 때리기 좋아하고 업보(業報)를 믿지 않았다.
인덕(麟德) 원년에 수레를 따라 낙양(雒陽)으로 왔는데, 2년 정월에 죽어서 지옥에 있었다. 소씨의 수하에 늘 사랑하던 여종이 있었다. 이름은 윤옥(閏玉)이었고 나이는 18세였다. 비록 그가 오랑캐인 여종이었으나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불법을 믿고 좋아했다. 2월에 들어서 온 집안이 부인을 위해 3ㆍ7일재를 지내고 있었다. 스님들이 한창 공양하고 있을 때에 부인이 재를 보기 위해서 왔다. 목에는 칼을 쓰고 허리는 쇠사슬로 묶엿는데 옥졸이 따라붙고 있었다. 딴 사람은 아는 이가 없고 이 여종만이 보았는데, 부인의 혼령이 이 여종에게 달라붙어서 소리를 내는데 부인이 살던 때의 말소리와 똑같았다. 말을 전하게 하면서 온 집안 모두를 향하여 말하였다.
“나는 최씨 집에 시집왔을 때 성품이 성냄이 많고 제멋대로 질투를 냈으며, 노비를 때리기 좋아한데다 인과(因果)까지도 믿지 않았소. 지금 지옥에 있으면서 극히 중한 벌을 받고 있는데, 이 모든
고통은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소. 온 집안에서 오늘이 3ㆍ7일이라 하여 나를 위해 재를 지낸다는 말을 듣고 옥관(獄官)에게 청하여 하루 동안 휴가를 받아 잠시 재를 구경하는 참이오.
아들과 딸 그리고 온 집안 식구에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들과 같이 살면서 몸의 세 가지[身三]와 입의 네 가지[口四]와 뜻의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3독(毒)으로써 성내기 좋아하고 그대들을 때렸을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는 질투를 하였소. 노비나 첩이면 모두 좋지 않게 보고서 악업을 일으켰기 때문에 지금 이런 고통의 과보를 받고 있는데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너희 아들과 딸과 온 집안의 대소ㆍ내외의 권속들은 나의 참회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기쁨을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너희 아들과 딸은 내가 젖을 먹여 기른 은혜를 생각해서 내가 평생 동안 거두었던 살림살이를 빨리 보시하여 복을 지음으로써 내가 받은 고통을 건져 주기 바란다. 7ㆍ7일이 되어 나를 위하여 재를 지낼 때에는 이 공덕 때문에 빨리 성취할 수 있게 해다오. 나는 잿날이 되면 다시 관인(官人)에게 청하여 올 것이다.
남편과 아들딸에게 말합니다. 남편도 평생 동안 성질이 급하여 성을 많이 냈는데 분수에 넘치게 성을 내면서 노비들을 때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3보를 믿고 상하를 공경하면서 재계를 닦아 지니고 보시와 인욕이 끊어지지 않기를 권합니다.”
그리고는 떠나려고 하다가 모두에게 또 말하였다.
“나는 우선 윤옥이를 데리고 가서 내가 지옥에 있으면서 받는 고통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겠습니다. 5ㆍ6일 지나면 돌려보내서 그대들로 하여금 내가 받는 죄의 고통이 거짓인가 참인가를 알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끝내자마자 윤옥은 그 자리에서 곧 죽어버렸다. 심장 위만 따뜻했고 다른 부분은 모두 다 차가웠다. 몸이 땅에 누워 있었는데도 감히 매장하지 못했다.
이 여종이 지옥에 도달했을 때 하나의 큰 전원(殿院)의 문이 나타났다. 엄숙한 병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것은 왕이 있는 궁전이어서 감히 엿볼 수가 없다고 했다. 또 가다가 동원(東院)에 닿았다. 따로 하나의 청(廳)위를 보았더니 한 대관인(大官人)이 있었는데 그가 죄를 판단하는 관원이라 했다. 다시 그 청원(廳院)을 지나가자 동쪽에 지옥에서 쓰는 갖가지 고통 주는 기구들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그림과 같았다.
부인이 여종에게 말하였다.
“너는 내가 죄를 받는 고통을 구경하여라.”
이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갖가지 옥졸과 여러 나찰들이 부인을 치고 던지고 몸의 살을 저며서 가마솥에 넣어 끓이고 삶았다. 삶은 뒤에는 도로 살아났으며, 살아난 뒤에는 다시 여러 감옥을 지나갔다. 쇠 젓가락으로 혀를 뽑아 내자 쇠 까마귀가 쪼아댔으며 다시 쇠평상에다 눕히자 몸에 불이 훨훨 타는 새들이 날아와서 일시에 몸에 와 붙었다. 그리고는 죽었다가 도로 살아났으며, 살아난 뒤에는 다시 모든 고통을 받았는데 말로는 다 설명할 수조차 없었다.
부인이 소생한 뒤에 곧 그의 부친인 소갱이 황금빛 나는 연꽃 자리를 타고 공중에 나타났다. 소갱은 평생 동안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도 고기나 술이나 냄새나고 매운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항상 법화경을 날마다 한번씩 외웠고 3보를 공경하면서 밤낮으로 여섯 때 동안 예배와 독송을 빠뜨리지 않았다. 지금은 좋은 곳에 태어나서 딸이 고통 받는 것을 보자 일부러 그녀를 구제하러 온 것이다. 소갱이 딸에게 말하였다.
“내가 살았을 때에 늘 너에게 신심을 내고 성을 내지 말라고 권하였는데도 너는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런 재앙을 받는 것인데, 너는 또 무슨 일로 이 여종을 데리고 왔느냐?”
딸이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이 딸이 평생토록 믿지 않다가 지금 이런 죄의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이 여종을 데리고 와서 이 딸이 받고 있는 죄벌의 경중을 보게 하였다가 온 집안 남녀에게 전하게 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녀의 말을 인정하고서 딸에게 말하였다.
“내가 비록 좋은 곳에 태어났지만 너의 고통을 온전히 구하지는 못한다. 네가 노력하여 스스로 힘써서 발심해야 하며, 온 집안이 함께 도와서 복과 선을 지어야 네가 지옥에서 벗어나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날 수 있으리라.”
이 말을 하고 마치자마자 갑자기 나이 젊고 단정하게 생긴 한 바라문이 공중으로부터 와서 부인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인과를 믿지 않았기에 지금 이런 죄의 고통을 받는다. 이 여종의 총명이 어떠한가? 내가 경을 가르쳐 주어서 온 집안에 전하게 하고, 또 세간 사람들에게 믿음을 내게 하고 싶다.”
부인이 대답하였다.
“스님께서는
가르치기만 하십시오. 이 여종은 총명하므로 경을 외울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먼저 금강반야(金剛般若)를 가르쳐 주었다. 처음 두세 줄을 배울 때에는 한두 글귀를 잊었지마는, 계속해서 가르쳐 주었으므로 점점 반 장 한 장을 외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도 잊지 않고 외워버렸다. 다시 약사경(藥師經)과 법화경(法華經)을 가르쳐 주었는데 한 번 배우면 모두 잊지 않았다. 이 3부(部)는 모두가 범음(梵音)으로 된 것이요, 한나라 말로 된 것이 아니니, 문장과 글귀가 올바르고 음과 운이 맑고 밝았다. 문구에 모두 익숙해지자 놓아 보내 주었다. 그녀가 오려고 할 때 말하였다.
“너는 집으로 가서 사람을 만날 적마다 그들을 위하여 외워라. 한(漢)나라의 도속(道俗)들은 너의 음을 분별하지 못하다가 범음을 잘 아는 바라문을 찾아 외워보게 한 뒤에야 비로소 잘하고 못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간 사람들은 대개가 삿된 도를 믿고 섬기면서 불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네가 오랑캐인 여종이면서도 오히려 삼본(三本)의 범경(梵經)을 외울 수 있음을 보고 어찌 신심을 내지 않겠느냐. 만일 한 사람이라도 삿된 데서 떠나 바른 길에 들면 부인이 복을 얻을 뿐만 아니라 너도 뒷날에 삼도(三塗)에 들지 않게 된다.”
이 말을 다 듣고 나자 놓아보냈는데, 그녀가 집으로 와서 깨어나니 옛날과 같았다. 즉시 집안의 높고 낮은 이를 모두 모아놓고 부인이 지옥에서 받는 고통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오히려 주인이나 자식들마저 믿지 않을까 두려워서 땅에 누운 채 부인이 지옥에서 받던 고통을 흉내 내었다. 혹은 부인의 입을 벌려서 이글이글한 철환(鐵丸)을 넣으면 입도 벌개지고 배가 타면서 불과 같았던 것을 말해 주었고, 혹은 부인의 혀를 두세 자[尺] 남짓 뽑아 놓고 쇠 보섭으로 갈던 것을 말해 주었으며, 혹은 부인이 쇠 평상 위에서 고통을 받을 때에 온몸이 벌겋게 타면서 마치 불과 같았던 것을 말해 주었다. 이렇게 변화 무쌍한 갖가지 고통 받는 모습을 나타낸 뒤에야 다시 깨어나서 부인에게 부친이 신칙하던 일을 말하였고, 또 바라문이 경을 가르쳐 주 것은 부인이 지옥에서 벗어나
천상에 오르는 과보를 받게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이 여종은 즉시 온 집안을 위하여 똑바로 앉아서 경을 외웠다. 문장과 글귀가 모두 범음이었는데, 소리 기운이 맑고 밝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듣기 좋게 하였다. 온 집안 사람 모두가 이 좋고 나쁜 영험들을 보았고, 부인의 아들과 딸들은 아직까지 듣지 못했던 일을 듣고는 온몸을 치면서 소리 높여 통곡하였다. 그들이 애통해 하는 모습은 부인이 처음 죽었을 때보다 더했다. 도인과 속인과 관리들까지도 이 얘기를 들은 사람이면 모두가 권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어 불도에 귀의하였고 재계가 끊어지지 않았다.
인덕(麟德) 원년에 서역(西域)의 네 바라문이 와서 부처님의 정골(頂骨)을 바친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하여 나중에 친척 권속이 되는 장군 설인궤(薛仁軌)의 집 안에서 재를 올리게 되었는데 모든 친척들이 다 모였다. 이때 모든 관인(官人)들이 함께 의논하였다.
“이 여종이 경을 외우기는 하나 범경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들은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네 바라문을 불러오도록 하자.”
그리하여 장군 집으로 와서 재를 지내게 되었는데 여종도 다시 불렀다. 네 스님에게는 지옥에서 배웠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특별히 어떤 바라문에게서 이 3부경을 배웠다고만 이야기하고는 곧 서역 스님 앞에서 여종으로 하여금 외우게 하였다.
우선 『금강반야경』을 다 외워 마치자 네 바라문은 일시에 모두 일어나서 합장하고 찬탄하면서 전에 없던 희귀한 일이라고 괴이 여기면서 말하였다.
“어떻게 한(漢)나라 사람으로서 이럴 수가 있을까?”
다시 약사경과 법화경을 외워 마치자 더욱더 기뻐하면서 스승처럼 공경하고 곧 통역을 시켜 말하였다.
“ 이 여인은 어떻게 이와 같은 교묘한 문장과 글귀를 얻게 되었습니까? 문구가 올바르고 경전에 익숙하여 잘못이 없습니다. 우리 서역에서 잘 독송하는 이라해도 이렇게까지는 못합니다. 범인으로서는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관인들이 비로소 사실대로 말해 주자, 서역 스님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성인의 힘의 가피가 아니면 어찌 이렇게 언사가 올바를 수 있겠는가?”
이 광경을 본 모든 관인과 도속들도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불법을 깊이 믿고 감히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장군이
이런 일을 보고 나서 황제에게 아뢰자, 황제는 듣고 나서 백관에게 칙어를 내렸다.
“진실로 알라. 불법은 뭇 성스러운 것 중에서 으뜸이며 명명(冥冥)한 가운데서 가호(加護)를 주시거늘 누가 믿지 않을 수 있겠느냐.”
백관들은 삼가 사례하고 전에 듣지 못했던 것을 경하하며 말하였다.
“진실로 3보는 크게 복되고 은혜가 무거워서 자비로 4생(生)을 덮어 주시지만, 신하들은 어리석어서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옵니다. 성인과 범인이 이익을 받거늘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최대부(崔大夫)도 인덕 2년에 죽었다. 그의 집은 서경(西京)의 궁성 동쪽 익선방(翼善坊)에서 서문(西門)이 있는 큰 거리로 나아가 남쪽 벽(壁)을 타고 올라가면 도달하게 된다. 여종이 경을 외우는 것을 보고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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