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22 법원주림(法苑珠林) 79권

by Kay/케이 2024. 7. 19.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79권

 


법원주림 제79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84. 십악편 ⑦


13) 사견부(邪見部)[여기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처음으로 불법에 들어가서는 반드시 신심(信心)을 제일로 해야 한다. 이것은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보배산에 갔을 때 만일 믿는 손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과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사견(邪見)을 일으켜 3보(寶)도 4제(諦)도 없다 하며, 화도 없고 복도 없으며 나아가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선악의 업보도 없고 금세와 후세의 중생이 받는 생(生)도 없다 하면서 불법을 비방한다. 이런 사람은 선악의 법을 다 부수나니, 이것을 선근(善根)을 끊는 것이라 한다. 그는 결정코 아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2) 인증부(引證部)
『대품경(大品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누구나 『대승반야경』을 믿지 않고 비방하면, 그는 바로 아비지옥에 떨어져 무량 백천만억 년 동안 지독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즉, 한 지옥에서 또 다른 한 지옥으로 가서 이 겁이 끝나면 다른 방면의 큰 지옥에 나며, 다른 방면의 겁이 끝나면 다시 이 방면의 큰 지옥에 나나니, 이렇게 시방세계를 두루 돌아다닌다.
다른 방면의 겁이 끝나면 다시 이쪽의 큰 지옥에 나고, 지옥의 죄가 끝나면 축생 세계에 나나니, 이렇게 또 시방세계를 두루 다닌다. 축생의 죄가 끝나면 인간에 나되 불법이 없는 곳에 태어나게 되며, 빈궁하고 하천하며 모든 기관이 원만하지 못하고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비록 우치한 축생이 아니요 총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망령되이 다른 집착을 내면 그것도 사견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성실론』에서 말하였다.
“우치에도 차별이 있다. 왜냐 하면 모든 우치가 다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치가 왕성하여 차츰 사견을 이루면 이것은 악업의 도(道)이다. 그러므로 우치를 따라 사견을 증장(增長)시키면 곧 중죄가 되어 반드시 아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바로 사견에 대해 말하면 거기 경중(輕重)이 있다. 가벼운 것은 변할 수 있는 것이요, 무거운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에서 말하였다.
“사견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변할 수 있는 것이요, 둘째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인과(因果)를 비방하고 성인이 없다 하면 이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요, 인(因)이 아닌 것을 인이라 보고, 과(果)가 아닌 것을 과라고 보면, 이것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업을 사견이라 하고, 선업을 정견(正見)이라 하는 것이다. 4제(諦)를 비방하지 않더라도 성도(聖道)에 미혹하면 도리(道理)가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오직 항상 몸만 괴롭힘으로써 해탈을 구하게 되니, 이것은 마치 개가 흙덩이만을 쫓아가면서 그 근본을 찾을 줄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대장엄론』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사자는 화살을 맞았을 때 바로 그 사람을 찾아 쫓아오고, 어리석은 개는 사람이 때릴 때 곧 기왓장이나 돌을 쫓아가면서 그 근본을 찾을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사자란 지혜로운 사람을 비유한 것이니, 그 근본을 찾아 번뇌를 멸할 줄 아는 것이요, 어리석은 개란 즉 외도들을 비유한 것이니, 5열(熱)에 몸을 구우면서 마음의 근본을 모른다는 것이다.[5열이란, 사면에 불을 두고 위에는 뜨거운 해가 있는 것이니, 그 속에서 몸을 구우면서 괴로이 도를 구하는 것이다.] 다만 어리석은 모든 범부들은 참도에 미혹하여 몸과 마음에 나[我]가 없음을 관찰할 줄 모르고 고행만을 배움으로써 그것을 도라 하니, 이것은 저 외도들이 망령되이 삿된 법을 행하고 잘못된 집착으로 진실에 어긋나 오직 악법만을 이루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사견의 죄는 중하기 때문에 비록 계율 등 3업이 다 좋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사견의 악심(惡心)을 따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비유로 스스로 말씀하셨다.

“쓴 종자를 심으면 비록 4대(大)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다 쓴맛인 것처럼, 사견을 가진 사람도 이와 같아서 비록 계율을 지니고 정진하더라도 다 악법이 된다.”
그러므로 조그만 보시와 지혜에 집착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다. 집착이 없으면 교화하기 쉽지만 집착이 있으면 교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파괴할 뿐 아니라 남까지도 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실론』에서 말하였다.
“차라리 행하지 않고 그만둘지언정 사도(邪道)는 행하지 말라. 사도를 행하면 죽은 뒤에는 악취(惡趣)에 떨어지느니라.”
또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염라왕은 다음 게송으로 죄인을 나무랐다.

너의 삿된 견해는 우치하다.
우치의 덫에 치인 사람아.
너는 지금 이 지옥에 들어와
큰 고통의 바다에 있다.

악견(惡見)은 모든 복을 다 태우고
인간에서도 가장 비루한 사람이다.
너는 지옥의 결박을 두려워하지만
이것은 바로 너의 집이다.

만일 저 삿된 견해는 예속되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 아니다.
모두가 다 지옥으로 오나니
원수의 마음에 속았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바로 제1의 원수이다.
이 원수를 가장 악하다 한다.
이 원수는 능히 사람을 묶어
이 염라왕이 있는 곳으로 보낸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다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마음은 미니어(彌泥魚)이다.
이것은 애욕의 집에 머문다.
업을 지을 때에는 기뻐 웃다가
괴로움 받을 때는 울부짖는다.

또 『수행도지경』에서는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그 입에는 어리석음이 있고
사람의 마음이 어두움을 품으면
그는 악도 전연 생각하지 못하고
또 선한 마음도 생각하지 못한다.

어리석고 멍청하여 항상 혼미하여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마치 한 더위에 굽히고 삶겨
아무것도 성숙하지 못함과 같다.

어리석음이 몸에 밴 사람은
모든 기관이 완전하지 못하여
소나 염소들 그 속에 나고
그 뒤에는 저 지옥에 떨어진다.

『월광동자경(月光童子經)』과 『신일경(申日經)』에서 말하였다.
“어느 때
신일(申日)이라는 장자는 외도 6사(師)의 말을 따라 부처님과 스님들을 청하려 했다. 외도들은 장자로 하여금 그 집의 중문 밖에 깊이 5장 6척의 깊은 구덩이를 파고 그 반쯤을 숯불로 채우고 가는 철사를 걸쳐 그 위에 흙을 얇게 덮어 놓게 했다. 그리고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 거기 독약을 넣어 두고는 그 불구덩이를 밟고 오게 하고 독약이 든 밥을 먹게 하면 그를 해칠 수 있을 것이니, 이렇게 하면 반드시 부처를 죽일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장자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였고, 외도들은 모두 기뻐했다.
그날 장자는 부처님께 나아가 부처님과 대중을 은근히 초청했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그의 어리석음을 구제하기 위해 잠자코 허락하셨다. 신일은 속으로 기뻐하면서 그의 계획대로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미산 같은 독약과 대천 세계와 같은 큰 불과 예리한 칼의 칼날도 부처님의 털 하나도 어찌할 수 없었다. 지금 그 불구덩이와 독약이 든 밥으로 부처님을 해치려 하는 것은 마치 모기와 등에가 태산을 흔들려 하고, 파리와 눈에놀이가 그 날개로 햇빛과 달빛을 가리려 하는 것과 같아서 한갓 스스로를 파괴할 뿐이니 빨리 참회함만 못한 것이다.
그 때 장자는 죄의 덮개에 덮여 마음이 열리지 않았으므로 세존께서는 가만히 생각하셨다.
‘지금 내가 받은 장자 신일의 초청은 보통 초청과 다르다.’
그리고는 신통을 널리 나타내시어 시방세계를 진동시키고 백천의 대중과 용ㆍ귀신 등, 공중을 날고 땅으로 다니는 셀 수 없는 무리를 모으셨다. 그들이 모두 그 집에 모이는 것은 장자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부처님께서는 신통의 힘으로 그 불구덩이를 7보(寶)의 못으로 변화시키고, 음식은 8미(味)를 모두 갖추게 하고 하늘의 감로(甘露)로 변하게 해 그것을 먹는 사람들은 모두 배부르고 기뻐했다.
6사(師)들은 모두 두려워 달아나고, 장자는 머리를 조아리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 발 앞에 꿇어앉아 모두를 자백했다. 그는 이제 깨달음으로써 부처님의 구제를 받았으며, 그 이외의 대중은 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복을 얻고 구제되었으니, 그 사람의 수는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또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부처님께서 부왕(父王)에게
고하셨다.
‘사위국의 수달(須達) 장자의 늙은 하녀 비저라(毘低羅)는 살림을 절약해서 살았습니다. 장자는 그 하인에게 창고 자물쇠를 주면서 창고 안에 있는 물건의 출납(出納)을 모두 위임했습니다. 장자는 부처와 스님들을 초청하여 일체를 공급했습니다.
그 때 어떤 병자 비구가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수달의 늙은 하녀는 성질이 인색하여 부처와 스님들을 꺼리고 미워하여 말하였습니다.
≺우리 장자는 우매하고 미혹하여 저 사문의 요술에 속고 있다. 저 걸사(乞士)들은 요구가 많고 만족할 줄 모르거늘 무슨 도가 있다 하겠는가?≻
그리고 다시 악한 발원을 했습니다.
≺언제나 부처니 중이니 하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나쁜 말을 한다는 소문이 온 사위국 안에 두루 퍼졌습니다.
왕비인 말리 부인은 이 말을 듣고 말하였습니다.
≺수달 장자는 좋은 연꽃 같아서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데, 왜 저런 독사를 기르고 있을까?≻
그리고 수달 장자의 아내를 불러 말하였습니다.
≺너희 집의 그 노파는 그처럼 욕설하고 비방하는데, 왜 그녀를 쫓아내지 않는가?≻
수달의 아내는 꿇어앉아 말리 부인에게 말하였습니다.
≺앙굴마(央掘魔) 같은 악인도 부처님께서 제압하실 수 있었거늘 어찌 저런 여자쯤이야 제압할 수 없겠습니까?≻
부인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였습니다.
≺나는 내일 부처님을 청할 것이니, 그 노파를 이리로 보내라.≻
이튿날 공양 때가 되어 장자는 그 노파를 보내고, 자기는 병에 금을 담아 가지고 가서 바사닉왕의 공양을 도왔습니다.
말리 부인은 그 노파가 오는 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부처님께서 이 사견을 가진 여자를 교화해 구제하시면 나는 반드시 큰 이익을 얻을 것이다.≻
그 때 부처가 정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난타는 왼쪽에서 모시고 아난은 오른쪽에서 모시고 라후라는 뒤에서 따랐습니다. 노파는 부처를 바라보자 매우 놀라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리고 ≺이 악인이 내 뒤를 따라온다≻ 하면서 곧 달아나려 했습니다.
개구멍으로 빠져나가려 하면 개구멍이 곧 막혔고, 사방의 문도 모두 닫혔으며, 오직 정문만이 열려 있었습니다. 노파는 곧 부채로 그 얼굴을 가렸습니다. 부처는 그 앞에서 그
부채를 거울처럼 만들어 아무 걸림이 없게 하셨습니다. 그녀가 돌아서서 동쪽을 보면 동쪽에 부처가 있었고, 서방ㆍ남방ㆍ북방에 다 부처가 있었습니다. 머리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면 거기도 부처가 있었고, 머리를 숙이고 땅을 내려다보면 땅이 부처로 변했습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열 손가락 끝이 다 부처로 변했습니다. 노파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자 곧 마음의 눈이 열려 허공의 화불(化佛)이 시방세계에 가득했습니다.
그 때 그 성내에 25인의 전타라 여자와 또 50인의 바라문 여자와 여러 종족의 여자와 말리 부인의 궁중에 있는 여자 등 모두 5백 명의 여자들은 다 부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녀들은 부처가 노파를 위해 허공을 다니면서 무수한 몸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는 다 사견을 버리고 부처에게 정례하고 ≺나무불(南無佛)≻ 하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숲과 같이 많은 화불(化佛)들을 보고 이내 보리심을 내었습니다. 노파는 그 사견 때문에 아직 믿음은 내지 못했으나 부처를 보았기 때문에 80만억 겁 동안의 생사를 통해 지은 죄가 없어졌습니다.
그녀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주인[大家]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오늘 큰 악한 상대를 만났습니다. 그는 구담으로서 왕궁의 문 앞에 나타나 온갖 요술을 부렸습니다. 몸은 금산(金山)과 같았고 눈은 푸른 연꽃과 같았으며 큰 광명을 놓았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나무농 안에 들어가 백장의 가죽으로 그 농을 덮고 흰 모포로 머리를 싸매고 어두운 자리에 번듯이 누웠습니다.
부처가 기원으로 돌아가려 하자 말리 부인은 부처에게 말하였습니다.
≺기원으로 돌아가시지 마시고 저 사견의 여자를 교화시켜 주십시오.≻
부처가 말리 부인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여자는 죄가 중해 부처와는 인연이 없고 라후라와는 큰 인연이 있습니다.≻
부처는 기원정사로 돌아와 라후라를 보내면서 말하였습니다.
≺너는 수달의 집에 가서 저 노파를 구제하여라.≻
라후라는 전륜성왕으로 변하고, 이때 1,250명의 비구는 왕자로 변하여 수달의 집에 가서 그 노파를
옥녀보(玉女寶)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성왕은 여의주(加意珠)로 그녀의 얼굴을 비추어 그녀가 옥녀보로 변한 것을 보게 했습니다.
그녀는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문들은 공연히 도가 있다고 큰 소리를 치지마는 아무 영험도 없었다. 그런데 성왕은 세상에 나와 많은 곳에 이익을 주어 이 노파를 옥녀보로 만들었다.≻
이렇게 말하고는 5체(體)를 땅에 던져 성왕에게 예배했습니다. 그 때 성왕의 창고지기 신하는 왕의 10선(善)을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이 10선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성왕님께서 말씀하신 이치는 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왕에게 예배하고 참회하여 그 마음이 아주 유순해졌습니다.
그 때 라후라와 비구들은 본래 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노파는 이것을 보고 말하였습니다.
≺불법은 청정하여 중생들을 버리지 않고 내가 폐악해도 도리어 교화해서 제도할 줄을 안다.≻
그리고 곧 5계를 받고 수다원이 되어 부처에게 나아가 예배하고 전의 죄를 참회했습니다. 그리고 부처에게 청해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어 허공에서 열 여덟 가지 변화를 보였습니다.
바사닉왕과 말리 부인은 이것을 보고 부처에게 물었습니다.
≺이 노파는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 노비로 태어났으며, 또 무슨 복이 있어 부처님을 만나 도를 얻었습니까?≻
부처가 말하였습니다.
≺먼 옛날 한 보개등왕(寶蓋燈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왔다가 열반하신 뒤, 그 상법(像法) 시대에 잡보화광(雜寶華光)이라는 왕이 있었고, 그 아들 쾌견(快見)은 출가하여 도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자임을 믿고 항상 교만하였으므로 그의 스승은 그를 위해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경』의 큰 공(空)의 이치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왕자는 이 설법을 듣고 이것을 사설(邪說)이라고 잘못 알아 그 스승이 열반한 뒤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화상은 공(空)을 숭상하고 지혜가 없어 다만 공만을 찬탄한다. 나는 후생에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 아사리는
지혜와 변재를 모두 갖추셨으니, 생생(生生)에 선지식이 되리라.
이렇게 말하고는 모든 대중으로 하여금 다 사견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는 비록 계율을 지녔더라도 반야를 비방하여 사설이라 잘못 이해했으므로 목숨을 마친 뒤에는 아비지옥에 떨어져 80억 겁 동안 무량한 고통을 받았으며, 죄를 다 받고 지옥에서 나와서는 빈천한 사람이 되어 5백 생 동안은 귀머거리와 장님이었고, 1,200생 동안은 항상 노비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 때의 그 화상(和尙)은 바로 지금의 나요, 그 아사리란 바로 지금의 저 라후라이며, 그 왕자 비구는 바로 저 노비요, 그 제자들은 지금의 저 사견을 가진 여자들로서 보리심을 낸 자들입니다.’”
또 『살차니건자경(薩遮尼乾子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울사연성(鬱闍延城)의 엄치왕(嚴熾王)은 살차니건자(薩遮尼乾子)에게 물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3보(寶)를 믿지 않고 절과 경서와 불상을 불사르며 욕설하고 비방하면서 ≺만든 상(像)에는 복덕이 없다. 그것에 공양하는 것은 현세의 손해일 뿐 아니라 내세에도 아무 이익이 없다≻ 하고, 혹은 절과 모든 형상을 미워하여 그런 곳에 가는 것을 방해하거나 그것을 부수어 없애거나 다른 곳에 옮기거나, 혹은 사문의 방이나 토굴을 부수거나, 혹은 3보의 물건과 동산ㆍ전답ㆍ집ㆍ코끼리ㆍ말ㆍ수레ㆍ노비ㆍ6축(畜)ㆍ의복ㆍ음식 및 일체의 보물을 빼앗거나, 혹은 사문을 붙잡아 채찍질로 부리며 그들의 면세(免稅)를 꾸짖으면서 속세로 돌아가게 하거나, 혹은 때로는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갖가지로 희롱하고, 어떤 때는 그들을 헐뜯고 나무라고 비방하며, 혹은 막대기로 손수 때리거나, 혹은 그 몸을 상해하는 등, 이런 악인은 어떤 중생의 부류에 속합니까?’
니건자가 답하였다.
‘대왕이여, 그런 사람은 악역(惡逆) 중생의 부류에 속합니다.
대왕이여, 그런 무리는 마땅히 상품(上品)으로 그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지극히 무거운 근본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다섯 종류의 근본 죄가 있습니다. 그 다섯 종류란, 첫째, 탑과 절을 부수고 경전과 형상을 불사르며 3보의 물건을 취하거나 남을 시켜 취하게 하여 그것을 보고 기뻐하면, 이것을 제1의 근본중죄라 합니다. 둘째, 3승의 법을 비방하고 어려움을 덮어두고 헐뜯으며 그것을 숨기면, 이것을 제2의 근본중죄라 합니다. 셋째, 어떤 사문이 신심으로 출가하여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계를 가지거나 가지지 않거나 간에 그를 감옥에 가두고 수갑과 사슬로 묶어 채찍질로 부리거나 그 발조(發調)를 나무라면서 강제로 가사를 벗겨 세속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혹은 그를 죽이면, 이것을 제3의 근본중죄라 합니다. 넷째, 5역죄(逆罪) 중에서 하나를 범하면, 이것을 제4의 근본중죄라 합니다. 다섯째, 일체 선악의 업보가 없다고 비방하거나, 오랜 밤 동안 항상 10악업을 행하며 후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스스로도 악을 짓고 남을 짓게 하면서 거기 굳게 집착하여 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제5의 근본중죄라 합니다.
대왕이여, 만일 이런 근본중죄를 범하고도 참회하지 않으면, 그는 반드시 일체 선근을 다 태워 없애고 대지옥에 들어가 끊임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나올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국내에 이런 악인이 있으면 3보를 헐어 없애므로 일체의 아라한과 모든 부처님들과 성인들이 다 나라를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슬피 울고 선신(善神)이 보호하지 않으며, 백성들은 서로 죽이고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며, 용왕이 숨어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일어나고, 바람과 비가 때를 맞추지 않아 오곡(五穀)이 성숙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기 때문에 백골이 들에 깔리며, 유행병이 많아 무수한 사람들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이 각자 제 허물임을 모르고 도리어 하늘과 선신(善神)들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또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서 말하였다.
“일곱 종류의 중죄가 있으니, 그것은 다 중생들로 하여금 아비지옥에 떨어져 8만 4천의 대겁(大劫)을 지내게 한다. 그 일곱 종류란, 첫째는 인과를 믿지 않고, 둘째는 시방 부처가 없다고 비방하며, 셋째는 반야를 배우지 않고, 넷째는 4중계(重戒)를 범하면서 헛되이 시주의 음식을 먹으며, 다섯째는 승단에 속한 물건을 쓰고, 여섯째는 행이 깨끗한 비구니를 겁탈하며, 일곱째는 6친(親)과 부정한 행을 행하는 것이다.”
또 『소오탁경(小五濁經)』에서 말하였다.
“5역죄(逆罪) 외에 또 다른 5역죄가 있다. 즉 첫째는 양친에게 교만하고 귀신을 섬기며, 둘째는 임금을 질투하며, 셋째는 후생(後生)을 업신여기고, 넷째는 생명을 천하게 여기고 재물을 귀하게 여기며, 다섯째는 복을 버리고 죄로 나아가는 것이니라.”
또 『중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리석은 범부가 몸으로 악을 행하고 입으로 악을 행하며 뜻으로 악을 행하면, 그는 목숨을 마친 뒤에 악취(惡趣)의 지옥에 나서 지독한 고통을 받고 즐거움이란 전연 없느니라.
비유하면 도적질한 사람을 왕이 그 죄를 다스릴 때, 왕이 사람을 시켜 아침에 백 개의 창으로 찔러도 그 목숨은 그대로 있고, 낮에도 또 2백 개의 창으로 찔러도 그 목숨은 그대로 있으며, 저녁에 또 3백 개의 창으로 찌르면 그 몸은 다 헐리고 찢어져도 그 목숨은 그대로 있는 것과 같으니라.’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창에 찔리는 고통이 어떻겠느냐?’
비구들이 답하였다.
‘하나의 창에 찔려도 고통이 대단하겠거늘, 하물며 3백 개의 창에 찔림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손수 콩만한 조약돌 하나를 집어 비구들에게 보이며 말씀하셨다.
‘내 손에 있는 이 돌 하나와 저 설산(雪山)의 돌을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많겠느냐?’
비구들이 답하였다.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설산의 돌이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3백 개의 창에 찔리는 고통도 저 지옥의 고통에 비하면 이 돌만큼 적고, 지옥의 고통은 저 설산의 돌처럼 많아 백천만 배라는 비유로도 말할 수 없으니, 지옥의 고통은 이러 하느니라. 그러면 지옥의 고통은 어떠한가? 어떤 중생이 지옥에 떨어지면 옥졸(獄卒)은 뜨거운 도끼로 그 목을 찍어 네 조각이나 여덟 조각을 내면서 백천 년 동안 이렇게 고통을 주어도 그 목숨은 끊어지지 않는다. 그 고통이 끝난 뒤에는 다시 쇠평상에 앉히고 쇠족집개로 입을 벌려 뜨거운 철환(鐵丸)을 먹이면서 백천 년을 지낸다.
또 쇠평상에 앉히고 뜨거운 구리쇠 녹인 물을 입에 쏟으면서 백천 년을 지내며, 다음에 쇠땅에 눕히고 뜨거운 쇠못을 그 몸과 머리에 못질하면서 백천 년을 지낸다. 다음에는 그 혀를 내어 쇠땅을 핥게 하고 못을 박아 마치 소가죽처럼 펴서 백천 년을 지내고, 또 목의 힘줄을 잡아당겨 수레에 붙이고 백천 년을 지내며 또 뜨거운 쇠땅 위를 걸어다니게 하여 백천 년을 지내고, 다시 뜨거운 불산에 내려가게 하여 발을 들어 위에 두면 피와 살이 다 녹고 발을 들면 다시 나면서 백천 년을 지내며, 다시 뜨거운 가마솥 물에 삶으면서 백천 년을 지낸다.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죽지는 않고 죄악의 과보가 다해야만 거기서 나오나니, 이런 것이 지옥의 고통이니라.
지옥의 죄가 끝나 갖가지 축생들 속에 나서는 항상 어두운 곳에서 서로 잡아먹으면서 받는 그 고통은 다 말할 수 없다. 축생의 죄가 끝나면 혹 인간에 나지마는 축생에서 사람으로 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니, 마치 눈먼 거북이 물에 떠도는 나무 구멍을 만나는 것과 같다. 설사 사람으로 나더라도 빈궁하고 하천하여 남의 부림을 받고 얼굴은 추루하며, 혹은 불구자가 되고, 혹은 수명이 짧으니라. 만일 악업을 지으면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 영원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이 몸과 마음과 뜻으로 3악(惡)을 행하면, 그가 받는 죄가 이와 같으니라.’
부처님께서 이어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이 몸으로 선을 행하고 입으로 선을 행하며 뜻으로 선을 하면, 그는 목숨을 마치고 천상에 나서 한결같이 즐거움을 누리느니라. 그것은 마치 전륜성왕이 7보와 인간의 네 가지 오묘함을 갖추는 것과 같으니라.’
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을 즐겁다 하겠는가?’
비구들은 답하였다.
‘1보(寶)와 1묘(妙)만으로도 지극한 즐거움이라 하겠거늘, 하물며 7보와 4묘로 사는 것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다시 콩만한 조그만 돌을 집어 비구들에게 보이면서 말씀하셨다.
‘내 손 안의 이 하나의 돌을 저 설산(雪山)에 있는 돌에 비하면 어느 것이 많겠는가?’
비구들이 대답하였다.
‘저 설산의 돌이 너무 많아 비유로도 말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전륜왕의 즐거움도 저 천상의 즐거움에 비하면 이 조그만 돌과 같고, 천상의 즐거움은 저 설산의 돌과 같아서 백천만 배의 비유로도 말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천상의 즐거움은 어떠한가. 만일 누가 천상에 나면 그가 받는 6진(塵)은 모두 마음대로 되므로 그 받는 지극한 쾌락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느니라. 또 만일 천상에서 내려와 인간에 나면 제왕의 집에 나고, 혹은 대성(大姓)의 집에 나서 크게 부귀하여 재보가 풍족하며 명예가 멀리 퍼지고 얼굴이 단정하고 묘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느니라.’
부처님께서 이어 말씀하셨다.
‘만일 지혜로운 사람이 3업의 선을 행하면 이런 복을 받느니라.’
부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다 세간의 유루(有漏)의 즐거움이다. 만일 선근을 닦아 보리로 회향하면, 그가 생사 가운데서 받는 과보와 내지 열반이 끝내 무궁하니라.’”
또 『중아함경』에서 말하였다.
“그 때 사화제국(斯和提國)의 비사왕(陴肆王)은 큰 부자로서 재보가 무량하였다. 왕은 사화제의 범지(梵志)ㆍ거사(居士)들과 함께 북방의 시섭화림(尸攝和林)으로 가서
존자 구마라가섭(鳩摩羅迦葉)을 만나 서로 문안하고 한쪽에 앉아 가섭에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즉 후세도 없고 중생의 생(生)도 없다고.’
가섭이 말하였다.
‘지금의 이 해와 달은 금세입니까, 후세입니까?’
왕이 말하였다.
‘비록 그렇게 말씀하시더라도 후세는 없고 중생의 생은 없는 것입니다.’
가섭은 갖가지 비유와 방편으로 말하였으나, 왕은 굳이 고집하여 자기 소견을 버리지 않았다.
가섭이 다시 말하였다.
‘당신은 내 비유의 말을 들으십시오. 슬기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으면 그 뜻을 이해합니다. 대왕이시여, 마치 돼지를 기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 마른 쇠똥을 보았는데, 그것은 매우 많았고 주인도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 똥은 우리 돼지를 먹여 기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지고 가리라.≻
곧 그것을 모아 지고 가다가 중도에서 큰비를 만나 똥이 녹아 흘러 그 몸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을 버리지 않고 지고 갔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스스로 무량한 악을 받고 또한 남의 미움도 받았습니다. 아십시오. 대왕도 이와 같습니다. 만일 당신이 남에게 두려움과 수치를 주기 위해 그 견해를 버리지 않으시면 당신 스스로 무량한 악을 받고 또한 사람들의 미움도 받을 것이니, 그것은 꼭 저 돼지 기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사문은 비록 그렇게 말하지만, 내 소견으로는 다만 나를 분노케 하고 두려워하게 하며 어리석다 할 뿐이니 결코 버릴 수 없습니다.’
가섭이 다시 말했다.
‘다시 내 말을 들으시오. 이것은 마지막 비유입니다. 만일 당신이 알아들으면 좋거니와 알아듣지 못한다면 나는 다시 설법하지 않겠습니다.
대왕님, 마치 큰 돼지가 5백 마리 돼지의 왕이 되어 험난한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도중에서 큰 호랑이를 만나 가만히 생각하다가 호랑이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싸우려면
나와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나를 지나가게 하라.≻
호랑이는 이 말을 듣고 돼지에게 말했습니다.
≺너와 싸우겠다. 길을 비켜 줄 수는 없다.≻
돼지는 다시 말했습니다.
≺너는 조금 기다려라. 나는 우리 조부님이 입으시던 갑옷을 입고 와서 너와 싸우리라.≻
호랑이는 이 말을 듣고 곧 생각했습니다.
≺저것은 내 상대가 아니다. 더구나 조부의 갑옷이겠는가?≻
그리고 곧 돼지에게 말했습니다.
≺네 마음대로 하라.≻
돼지는 본래 살던 측간에 가서 똥 속에 뒹굴어 온몸에 똥을 바른 뒤에 호랑이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너는 나와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길을 비켜라.≻
호랑이는 돼지를 보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내가 항상 잔잔한 여러 벌레들을 잡아먹지 않는 것은 내 어금니를 아끼기 때문인데 하물며 이 악취 나는 돼지를 가까이하겠는가?≻
그리고 곧 돼지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게 길을 비켜 주고 너와 싸우지 않겠다.≻
그래서 돼지는 지나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호랑이를 돌아보고 다음 게송으로 말했습니다.

호랑이야, 네게도 네 발이 있고
내게도 또한 네 발이 있다.
너는 왜 나와 싸우지 않고
그저 두려워 달아나느냐.

호랑이도 이 말을 듣고 다음 게송으로 답했습니다.

너의 털은 부숭부숭 모두 일어서
모든 짐승 중에서 가장 밑이다.
돼지야, 너는 빨리 가거라.
그 똥 냄새를 못 견디겠다.

돼지는 뽐내면서 다시 다음 게송으로 말했습니다.

마갈타와 앙가, 두 나라 사람
내가 너와 싸운다고 다 들었다.
너는 와서 나와 함께 한 번 싸우자.
왜 두려워 달아나느냐?

호랑이도 이 말을 듣고 다음 게송으로 말했습니다.

너의 온몸의 털이 모두 더럽다.
너의 돼지 냄새가 내게 다 벤다.
네가 싸워 구태여 이기려 하면
나는 지금 너에게 승리를 주리라.


존자 가섭은 말하였다.
‘당신이 만일 분노와 공포와 우치를 취하고 끝내 버리지 않으려 한다면 당신은 스스로 무량한 악을 받고 또한 사람들의 미움도 받을 것이니, 그것은 저 호랑이의 승리를 받아낸 돼지와 같은 것입니다.’
비사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봉행하고 최상의 묘한 지혜를 구하였다.”
정보송(正報頌)에서 말하였다.

6적(賊)은 간사하고 또 거짓이며
7식(識)은 참됨을 어지럽히어
현묘하고 바른 이치를 비방하고
거짓말과 탐욕과 분노에 지배된다.

악업을 이리저리 함부로 짓고
충성스런 말 즐겨 듣지 않다가
저 무간지옥에 한 번 들 때는
온갖 고통이 다투어 몸을 얽는다.

습보송(習報頌)에서 말하였다.

사견으로 우치의 업을 지으면
저 아비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겁이 다하여 인간에 나더라도
다시 사견을 상속한다.

사견은 정견과 서로 어긋나
저절로 아첨과 간사함 된다.
만일 이 마음 고치지 않으면
잇고 이어져 지옥을 못 끊는다.

감응연(感應緣)[대략 열세 가지 증험을 든다.]

송(宋)의 심승복(沈僧覆)
송(宋)의 석도지(釋道志)
송(宋)의 당문백(唐文伯)
송(宋)의 주종(周宗)
송(宋)의 왕회지(王淮之)
송(宋)의 저거몽손(沮渠蒙遜)
위(魏)의 최호(崔皓)
주(周)의 무제(武帝)와 수(隨)의 조문창(趙文昌)
수(隨)의 석혜운(釋慧雲)의 숙부(叔父)
당(唐)의 태사령(太史令) 부혁(傅弈)
당(唐)의 형부랑중(刑部郞中) 송행질(宋行質)
당(唐)의 강등생(姜滕生)
당(唐)의 요명해(姚明解)

송(宋)의 심승복(沈僧覆)
송(宋)나라 오흥(吳興)의 심승복(沈僧覆)은 대명(大明) 말년(末年)에 본토(本土)에서 흉년이 들었을 때, 생활을 위해 산양(山陽)으로 가서 낮에는 들녘의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고 밤에는 절 근처에 와서 묵었다. 그 때 산양의 여러 절에는 소형(小形)의 동상(銅像)이 매우
많았다. 승복은 고향의 몇 사람과 함께 동상을 훔쳐 상자 네 개에 가득 채웠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다 함께 돈을 만들다가 일이 탄로되어 드디어는 붙들려 서울로 가게 되었다. 그는 배를 타고서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불에 타는데 밤낮 부르짖으면서 고통을 견딜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처형을 당하기 전에 앉아 죽었는데, 온몸이 다 터져 문드러진 것이 마치 불에 탄 것 같았다. 오홍군의 주형(朱亨)은 승복과 친한 사이였는데, 이 사실을 직접 보았다.

송(宋)의 석도지(釋道志)
송나라 사문 석도지(釋道志)는 북다보(北多寶)의 승려이다. 그는 일찍이 전탑(殿塔)을 맡아보면서 휘장ㆍ일산 등 보물로 된 장식품을 훔친 것이 매우 많았고, 뒤에는 불상(佛像) 눈썹 사이의 구슬[珠相]까지 훔쳤다. 그리고 담에 구멍을 뚫어 마치 밖에서 도둑이 들어온 것처럼 해 두었으므로 스님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수십 일이 지나 그는 병을 얻었다. 어떤 이상한 사람이 창으로 그를 찌르면서 왔다갔다하는데, 그가 올 때면 그는 놀라 부르짖으며 소리를 치며 피를 흘렸다. 처음에는 한낮에도 그런 일이 한두 번 있었다. 그 뒤에는 병이 더하고 창으로 찌르는 수도 자꾸 잦아 온몸에는 상처투성이요 부르짖는 소리도 그치지 않았다. 그 절의 스님들이 그에게 무슨 죄가 있지나 않은가 의심하고 참회시키기 위해 그 까닭을 물었으나 그는 여전히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2, 3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백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구원을 청하였다.
“나는 어리석고 무지하여 저승이 없다 생각하고 자포자기하여 죄를 지어 이런 재앙을 받습니다. 살아서는 고초를 받고 죽어서는 도확(刀鑊)에 걸릴 것이니 이미 다 죽어 가는 이 몸을 가엾이 여기십시오. 이제 남은 물건이라고는 없고 오직 의복과 털신이 있을 뿐이니, 혹 한 번의 모임에 충당되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청원하고 참회했다.
“옛날 훔친 구슬[珠相]은 두 개인데 하나는 이미 여자의 소유가 되었으니 다시 찾을 수 없고, 하나는 돈을 받고 팔아 지금 진(陳)씨 집에 있으니 다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도지가 죽은 뒤에 스님들은 모여 그 구슬을 모두 도로 찾고 또 참회하는 재를 올렸다.
공인(工人)이 구슬을 다시 끼울 때 아무리 이리저리 맞춰 보았으나 도저히 끼이지 않았으므로 스님들이 다시 향을 사르고 예배하자 그제야 비로소 맞추어졌다.
1년쯤 뒤에 그 동학(同學)들은 어두운 밤에 공중에서 무슨 말소리가 있어 자세히 들어 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도지의 소리였다.
그가 말하였다.
“나는 죽은 뒤에 고통을 받으면서 여러 해를 지냈으나 벗어날 기약이 없더니 여러 스님들의 가엾이 여기는 구호를 힘입고 또 구슬을 도로 찾았기 때문에 그 가혹한 고통이 잠깐 그쳤습니다. 그 은혜를 느꼈기 때문에 잠깐 와서 이렇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들릴 때, 비리고 썩는 더러운 냄새가 견디기 어려웠으나 말을 마치자 차츰 사라져 비로소 그쳤다.
이 사실은 태시(泰始) 말년에 그 절에 일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적어 둔 것이다.

송(宋)의 당문백(唐文伯)
송(宋)나라 당문백(唐文伯)은 동해(東海)의 당유(戇楡) 사람이다. 그 아우는 도박을 좋아해 가산을 탕진했다. 그 마을에 절이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이 혹 부처님께 돈을 바치면 아우는 여러 번 그것을 훔쳐 썼다. 그 뒤에 그가 나병에 걸렸을 때, 점쟁이가 말했다.
“부처님의 돈을 훔친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가 화를 내어 말하였다.
“부처가 무슨 영험이 있기에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들었겠는가? 내가 시험삼아 다시 훔칠 것이니, 나도 병이 나야 할 것이다.”
예전 현령(縣令)인 하흔지(何欣之)의 아내가 보개(寶蓋)의 띠 4매를 짜서 부처님께 올렸는데, 그는 그것을 훔쳐 허리띠를 만들었다. 1백 날이 못 되어 그는 나쁜 병에 걸렸다. 처음에는 허리띠를 맨 자리에 종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 때는 원가(元嘉) 초년이었다.

송(宋)의 주종(周宗)
송(宋)나라 주종(周宗)은 광릉(廣陵)의 비여(肥如) 사람이다. 원가(元嘉) 7년에 유언지(劉彦之)를 따라 왕사(王師)를 치다가 패배하여 같은 고을 사람 여섯과 함께 가만히
도망쳐 팽성(彭城)으로 가서 어떤 빈 절에 가게 되었다. 그 절에는 스님들이 없고 형상(形象)만이 있었는데 모두 수정으로 만들었었다. 그들은 그것을 훔쳐 마을에 나가 팔아 음식을 사 먹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병약하다 하여 여럿이 업신여겨 거기에 끼워 주지 않고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3, 4년 뒤에 주종 등 5인은 다 나병이 들어 죽고, 거기에 끼이지 못한 한 사람만은 완전히 면하였다.

송(宋)의 왕회지(王淮之)
송(宋)나라의 왕회지(王淮之)는 자는 원증(元曾)이며, 낭야(琅琊) 사람이다.
그는 대대(代代)로 유교를 숭상하여 불법을 믿지 않고 늘 말하였다.
“몸과 정신이 다 없어지는데, 어찌 3세(世)가 있겠는가?”
원가(元嘉) 때에 그는 단양현령(丹陽縣令)이 되어 10년 동안 병을 앓다가 죽었다가 조금 뒤에 다시 깨어났다. 그 때 건강령(健康令) 하도력(賀道力)이 그를 문병하고 평상에서 내려오는데, 회지가 도력에게 말하였다.
“나는 비로소 불교가 거짓이 아님을 알았소. 사람은 죽어도 영혼만은 있다는 것이 참으로 증험이 있었소.”
도력이 말하였다.
“명부(明府:현령을 말함)는 평생의 지론(持論)이 그렇지 않았는데, 어째서 지금 그 견해가 달라졌습니까?”
회지는 엄숙한 얼굴로 말하였다.
“영혼은 참으로 다하지 않는 것이오. 불교는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이 말을 마치자 그는 이내 죽었다.[이상 다섯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송(宋)의 저거몽손(沮渠蒙遜)
송(宋)나라 저거몽손(沮渠蒙遜) 때에 사문 담마참(曇摩讖)은 널리 통달하고 학식이 많아 몽손의 무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위(魏)씨는 이순(李順)을 보내어 몽손을 양왕(凉王)으로 배수(拜授)하고 담마참을 요구했다. 그러나 몽손은 인색하여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담마참은 위나라로 가려고 여러 번 몽손에게 청하므로 몽손은 화를 내어 담마참을 죽여 버렸다. 그 뒤로는 한낮에도 항상 담마참이 나타나 몽손을 칼로 치니, 몽손은 그로 인해 병이 들어 이내 죽었다.[이 증험은 『원혼지(寃魂志)』에 나온다.]

위(魏)의 최호(崔皓)
송(宋)나라 문제(文帝)의 원가(元嘉) 23년 병술(丙戌)은 바로 북위(北魏)의 태평진군(太平眞君) 7년이다. 주(周)의 태무제(太武帝)는 최호(崔皓)의
간사함과 아첨함을 신임해 구겸(寇謙)을 존중하여 천사(天師)로 삼았다. 그리고 무제는 석종(釋種)을 죽이고 절을 헐어 음사(婬祀)로 만들었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은 다 말하였다.
“강승(康僧)이 상서로운 징조를 감득하여 태황(太皇)이 세운 절이니, 만일 그것을 헐면 후환이 두렵습니다.”
또 후궁(後宮) 안, 땅 속에서 금불상 하나를 얻었을 때, 최호는 그것을 더러운 것이라 했다. 그 때 그의 음부(陰部)가 매우 아파 울부짖었는데,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었다.
태사(太史)가 점을 쳐보고 말하였다.
“큰 신(神)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널리 이름난 산에 기도하고 사묘(祠廟)에 새전(賽錢)을 많이 보시했다. 그러나 안으로 고통은 더욱 심하였다.
그래서 신심이 있던 어떤 궁인(宮人)이 무제에게 여러 번 간(諫)하였다.
“폐하(陛下)의 병환은 불상을 침범했기 때문이니, 부처님께 기도들이면 혹 나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최호가 말하였다.
“부처님이 과연 크게 신령스러운가 한 번 시험삼아 빌어 보리라.”
한 번 기도하자 병이 이내 나았다. 최호는 기뻐하여 마음을 고치고 이에 수레로 강승회(康僧會) 법사를 맞이하여 참회를 청하고 5계를 받는 등 깊이 공경하고 존중했다. 무제는 비로소 구겸의 간사함을 알고 그에게 중벌을 주되, 서교(西郊)에 보내어 그 몸을 땅에 묻고 입만 내게 하여 네거리에 다니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입에 대변을 보게 하였고, 그를 죽인 다음에는 그 도당들도 다 베어 죽였다. 경인년(庚寅年)에 이르러 무제는 병에 걸려 비로소 잘못을 깨닫고 또 담시백족(曇始白足) 선사가 와서 깨우쳤으므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내어 곧 최호를 베어 죽였다.
임진년(壬辰年)에 이르러 무제가 죽고 그 손자 문성(文成)이 임금이 되어 절을 다시 세우고 7년 만에 다시 3보를 일으켰다. 화평(和平) 3년에 소현도통(昭玄都統) 사문 석담요(釋曇曜)는 이전의 능폐(陵廢)를 슬퍼하고 지금 다시 일어남을 기뻐하여 이 대(臺)의 석실사(石室寺)에서 여러 스님들을 모아 경전을 번역하여 후세의 어진 제자들에게 물려주어 법장(法藏)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땅속에서 얻은 불상은
진주(秦周) 때에 이미 불교의 영험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옛날 후주(後周)는 위(魏)의 국운(國運)을 이어받았고, 위는 진(晋)나라 터를 물려받았으니, 그 이외의 외톨이 왕들은 의거할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 때에는 스스로 사존(司存)은 있으나 나라와 황제는 모두 몰락하여 곧 여러 필삭(筆削)을 따랐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주(周)나라 선조 우문각(宇文覺)은 곧 서위(西魏)의 대승상(大丞相) 흑태(黑泰)의 세자(世子)다. 흑태는 고양왕(高陽王)을 천거하여 위제(魏帝)로 삼았으니, 위제는 장안(長安)으로 옮겨 옷과 번기를 검은빛으로 고치고 연호를 대통(大統)이라 하였다. 18년을 지내다가 연호를 폐지하고 황제를 쫓아내고 위제왕(魏齊王)을 세우니, 그는 4년 만에 죽었다. 문각은 위제(魏帝)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가 그 해에 쫓겨났고, 그 아우 유(毓)가 황제로 있다가 4년 만에 죽었으며, 그 아우 옹(邕)이 즉위하니 태조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성질이 활달하고 도량이 커서 여러 소왕(小王)들을 통어(統御)하였다. 즉위 12년에는 그 숙부 대총재(大冢宰)와 진국공(晋國公) 호(護)의 부자 10인과 그 신하 6인을 다 죽이고 연호를 건덕(建德)이라 하였다. 3년에 이르러서는 도사 장빈(張賓)의 요사스런 말을 받아들여 “불법은 나라에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는 불법을 모두 없애 버렸다. 6년에는 동쪽의 제(齊)나라를 평정하고,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오던 공사(公私)의 절을 모두 없애어 불상을 녹이고 깎아 버리며 불경을 불살라 버리고, 주현(州縣)의 4만의 절을 모두 왕공(王公)에게 하사하고, 3방(方)의 승려 3백만 명을 모두 환속(還俗)시켜 서민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로써 주(周)의 천하가 무사하고, 재앙으로 몸이 크게 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뜻은 높고 생각이 멀어 연호를 선정(宣政)이라 고쳤는데, 5월에 죽었다.
태자 빈(贇)이 즉위하여 제왕(齊王)의 부자(父子) 8인을 다 죽이고 연호를 대성(大成)이라 고치고, 2월에는 그 아들 연(衍)을 태자로 세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연호를 대상(大象)이라 고치고, 자호(自號)를 천원(天元) 황제라 하고,
황후 4명을 두는 등 그 위의와 복식(服飾)은 예보다 배나 많았다. 대상 2년 5월에 천원황제가 죽고, 그 태자 연(衍)이 즉위하여 정월 1일에 연호를 대정(大定)이라 고치고, 2월에 수(隨)에 왕위를 물려주니, 주(周)는 무릇 5제(帝)가 25년 동안 장안(長安)에서 나라를 다스렸었다.[이상 두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唐高僧傳)』에 나온다.]

주(周)의 무제(武帝)와 수(隨)의 조문창(趙文昌)
수(隨)나라 개황(開皇) 11년에 내태부사승(內太府寺丞) 조문창(趙文昌)이 갑자기 죽었다. 그러나 심장 위가 조금 따뜻하였으므로 그 집 사람들은 감히 염(殮)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뒤에 다시 깨어나 그는 말할 수 있었다. 그 권속들이 괴이히 여겨 물었더니, 그가 말하였다.
“내가 죽을 때 어떤 사람이 나를 끌고 염라왕에게로 갔다.
왕이 내게 물었다.
‘너는 일생 동안 무슨 복을 지었느냐?’
나는 답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공덕을 지을 만한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일심으로 『금강반야경』을 외운 것뿐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자, 합장하고 단정히 앉아 찬탄하여 말하였다.
‘좋고 좋습니다. 당신은 『반야경』을 잘 수지하였으므로 불가사의한 그 공덕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왕은 붙들어 온 사자에게 말하였다.
‘잘 조사하라. 함부로 사람을 데리고 오지 말도록 하라.’
사자는 잠깐 동안 조사해 보고 잘못된 것을 알고는 왕에게 보고했다.
‘이 사람은 착오입니다. 앞으로 20여 년은 더 살아야 합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곧 사자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 사람을 데리고 경장 창고 안에 가서 『금강반야경』을 가지고 오너라.’
사자는 분부를 받고 곧 나를 데리고 서쪽으로 5리쯤 가 창고로 갔다. 거기는 수십 칸의 집이 있었는데 매우 화려하였으며, 그 안에는 경전이 가득 찼는데 금으로 된 경전으로서 장식이 매우 좋았다. 나는 이것을 보자 신심이 더욱 생겨 일심으로 합장하여 눈을 감고 손이 가는 대로 한 권을 뽑았다. 크고 작은 책들이 모두 내가 옛날 외우던 것 같았다. 나는 황급하여 혹 『금강반야경』이 아닐까 염려하여 사자를 물러가라 했으나, 사자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목을 보자
‘공덕 중에서 제일이다’ 한 것을 보았다. 내가 곧 펼쳐 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금강반야경』이었다. 나는 못내 기뻐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왕에게로 갔다. 왕은 한 사람을 시켜 책을 들고 서쪽에 서게 하고, 나를 동쪽에 서서 그 경을 외우게 한 뒤에 사자를 시켜 시험해 보게 했다. 그러나 나는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다 외웠다. 그러자 왕은 나를 놓아 돌려보내면서 말하였다.
‘너는 부지런히 이 경을 수지하여 잊거나 폐하지 말라.’
그리고 한 사람을 시켜 나를 인도하게 하여 남문으로 나가게 했다. 막 문을 나서려는데 거기서 나는 주무제(周武帝)가 남문 동쪽 방 안에서 목에 세 겹의 칼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제는 곧 나를 불러 말하였다.
‘너는 본래 우리 나라 사람이다. 잠깐 이리 오너라. 네게 할 말이 있다.’
내가 곧 달려가 무제에게 예배하였더니, 무제가 내게 말하였다.
‘나를 알겠느냐?’
‘저는 옛날 폐하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저는 폐하를 압니다.’
무제가 다시 말하였다.
‘너는 나의 옛 신하다. 너는 지금 집에 돌아가거든 수(隨)의 문황제(文皇帝)에게 나의 모든 죄를 다 말하고, 또 내가 불법을 없앤 중죄 때문에 그 죄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변명해 달라. 그 때에 나는 위원숭(衛元嵩)의 사주를 받아 불법을 멸했지마는 그 뒤로는 원숭을 붙들지 못하여 결말을 내지 못한 것이다.’
내가 물었다.
‘원숭이 어디로 갔기 때문에 대왕님이 붙잡지 못했습니까?’
무제는 답하였다.
‘나는 그 때 원숭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불법을 멸한 것이 잘못이었다. 원숭은 삼계(三界) 밖의 사람으로서 염라왕이 관할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붙들지 못했었다. 너는 수황제에게 말해 조그만 물건으로라도 공덕을 닦아 달라고 하라. 나는 그 복의 도움으로 이 지옥을 벗어나기 바란다.’
나는 그 부탁을 받고 하직하고 떠났다. 조금 있다가 남문 밖으로 나와 큰 똥구덩이 속에서 어떤 사람이 머리털만 내놓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인도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이는 어떤 사람인가?’
인도하는 사람은 대답하였다.

‘이는 진장(秦將) 백기(白起)입니다. 조(趙)나라 병사를 생매장했기에 여기 감금해 둔 것인데, 그 죄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어 나는 깨어났다.”
문창은 3일이 지나 앓던 병이 다 나았다. 문창이 이 사실을 모두 문제에게 아뢰어 문제는 왕명으로 온 국내에 두루 알렸다. 사람들은 각기 돈을 내어 주무제를 위해 『금강반야경』을 돌려 읽고 또 3일 동안 재(齋)를 올렸고, 이 사실을 그대로 적어 『수사(隋史)』에 넣었다.
수(隨)의 석혜운(釋慧雲)의 숙부(叔父)
수(隨)나라 동천(東川)의 석혜운(釋慧雲)은 범양(范陽) 사람이다. 12세 때에 출가하였고,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배우기를 힘썼다. 18세 때에 나귀를 타고 숙부의 집에 가서 자는데, 숙부는 그 나귀를 보고 탐을 내어 혜운을 죽이려고 칼을 들고 갔다. 동쪽 담 밑에 누런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주먹을 들고 그를 꾸짖었다.
“이 도인은 장차 법을 통한 대사(大士)가 될 것인데, 어찌 차마 해치려 하는가?”
숙부는 겁을 내어 그 부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니, 부인이 말하였다.
“당신 마음이 강하지 못해 눈에 어른거린 환상일 뿐입니다.
숙부는 이 말을 듣고 다시 갔다.
또 서쪽 담 밑에서 누런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도인을 죽이지 말라. 만일 죽이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
이에 숙부는 겁을 내어 그만두었다. 이튿날 아침에 혜운은 숙부를 하직하고 그의 누이 집을 향해 떠났다.
숙부는 또 칼을 가지고 전송하러 나와 말하였다.
“이 길은 매우 험난하여 지나가기 어렵기 때문에 전송하러 나왔다.”
그리고 혜운의 뒤를 따랐다. 길이 깊고 막혔을 때, 숙부가 뒤에서 칼을 휘둘러 치려 했는데, 갑자기 누이가 곁에 나타나 그 화를 면했다. 그러나 혜운은 그런 줄을 전연 몰랐다. 그 뒤에 혜운은 이름과 덕이 멀리 퍼졌다. 개황(開皇) 때에는 그 제자 5백 명을 데리고 숙부 집을 지나게 되었다. 숙부는 그를 보자 그의 교화를 입고 지난 허물을 깊이 부끄러워하여 비단 열 필을 혜운에게 올리고 부부는 비로소 옛 잘못을 자백했다. 혜운이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설법하니, 그들은 독심(毒心)을 아주 끊게 되었다. 그는 항상 이 일로 그 문인들을 경계하여 말하였다.
“나는 옛날부터 좋은 것을 타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남에게 누를 끼치겠는가?”
그는 학도들을 미리 훈계하였으므로 문도들은 이 말을 듣고 다 검소하였다.
혜운은 큰 명망이 있었는데, 그의 최후는 아무도 모른다.
당(唐)의 태사령(太史令) 부혁(傅弈)
당나라 태사령(太史令) 부혁(傅弈)은 본래 태원(太原) 사람으로서 수(隨)나라 말년에 부풍(扶風)으로 이사했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천문(天文)과 역수(曆數)에 능하고 총명하고 말재주가 능했다. 무덕(武德)으로부터 정관(貞觀) 20년까지 항상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그는 본래 불법을 믿지 않았으므로 항상 승니(僧尼)를 업신여겼으며, 심지어 돌로 된 불상으로 기와와 벽돌을 만들어 썼었다. 그러다 정관 14년 가을에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다.
처음에 부혁은 그 친구 부인균(傅仁均)ㆍ설이(薛頤) 등과 함께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설이는 전에 인균에게 5천 전(錢)의 빚을 지고는 갚지 못하였다. 인균이 죽은 뒤에 설이의 꿈에 인균이 나타나 생전처럼 이야기하였다.
설이가 인균에게 물었다.
“내가 전에 진 빚은 누구에게 붙일까?”
인균이 대답했다.
“지옥 사람에게 붙여 보내라.”
설이가 물었다.
“지옥 사람이라니, 그는 누군가?”
인균이 대답했다.
“그는 바로 태사령 부혁이다.”
그리고 설이는 꿈을 깨었다.
그날 밤에 소부감(少府監) 빙장명(憑長命)이 또 꿈에 전에 죽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다가 그들에게 물었다.
“경전에 죄와 복의 과보를 말하였는데, 참으로 그것이 있는가?”
저들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다 있다.”
장명이 또 물었다.
“부혁은 평생에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죽어서는 무슨 과보를 받겠는가?”
저들이 답하였다.
“죄와 복의 과보는 반드시 있는 것이다. 부혁은 이미 월주(越州)로 귀양갔다가 장차 지옥 사람이 될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장명은 전(殿)에 들어갔다가 설이를 보고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했다. 설이도 또 자기 꿈을 이야기하고 둘이서 꾼 꿈이 다 꼭 같았으므로 모두 함께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죄와 복의 과보는 믿지 않을 수 없다.”
설이는 이미 그런 증험을 보았기 때문에 곧 돈을 부혁에게 붙여 보내면서 또 꿈도 이야기했다. 며칠 뒤에 부혁은 갑자기 죽었다.
부혁이 죽던 날 큰 나쁜 징조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 이야기할 수 없다. 임(臨)이 전정(殿庭)에 있을 때 위의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 꿈 이야기가 다 같았었다.

당(唐)의 형부랑중(刑部郞中) 송행질(宋行質)
당(唐)나라 상서 형부랑중(尙書刑部郞中) 송행질(宋行質)은 박릉(博陵) 사람이다. 그는 성품이 불법을 믿지 않고 항상 비방하였는데, 영휘(永徽) 2년 5월에 병으로 죽었다. 6월 9일에는 상서 도관령사(尙書都官令史) 왕도(王璹)가 갑자기 죽었다가 이틀 뒤에 깨어나 말하였다.
즉 처음 죽을 때 어떤 네 사람이 와서 말하였다.
“관부(官府)에서 너를 잡아오라 한다.”
이에 왕도는 그들을 따라 어떤 대문으로 들어갔다. 북으로 향한 청사(廳舍)가 매우 웅장한데, 청사의 서쪽에는 얼굴이 퉁퉁하고 검은 어떤 사람이 앉아 있었고, 청사의 동쪽에는 어떤 스님이 앉아 관원(官員)과 마주하여 북을 향해 있었으며, 거기에는 각각 책상과 안석과 담요가 있었다. 2백여 명의 시동(侍童)들은 혹은 관(冠)을 썼고 혹은 머리를 땋았으며, 얼굴은 다 아름다웠다. 계단 아래에는 관리의 책상이 있었고, 어떤 노인이 큰칼을 쓰고 묶인 채 동쪽 계단 밑에 서 있었다. 왕도도 뜰에 이르자 곧 결박당했다. 관리가 종이와 붓을 가지고 와서 물었다.
“정관 18년에 장안(長安)의 좌사(佐史)로 있을 때, 무엇 때문에 이수달(李須達)의 적(籍)을 고쳤느냐?”
왕도가 답하였다.
“저는 전에는 장안 좌사로 있다가 정관 16년에 다른 데로 옮겼고, 17년에는 사농사부리(司農寺部吏)로 있었으니, 18년에 고친 적은 제 죄가 아닙니다.”
청상(廳上)의 대관(大官)은 이 말을 듣고 동쪽 뜰 밑의 늙은 죄수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왜 거짓 고소를 했는가?”
죄수가 말하였다.
“수달의 나이는 실지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는데, 왕도가 수달의 적을 고쳐 나이가 더 보태졌던 것입니다. 어찌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왕도가 다시 말하였다.
“저는 17년에 받은 임명장이 지금도 있습니다. 더 조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관은 왕도를 데리고 온 세 사람을 불러 왕도의 결박을 풀고 임명장을 가지고 오게 했다. 임명장이 오자 대관은 읽어보고 늙은 죄수에게 말하였다.

“왕도의 전임(轉任)은 아주 분명하다. 너의 고소는 이유 없다.”
그리고는 그 늙은 죄수를 북문 밖으로 보내게 했다. 문을 나오니 거기는 깜깜한데 많은 성(城)이 있었고, 성 위에는 성가퀴가 있어 아주 나쁜 곳 같았다. 대관은 책상에 앉아 왕도에게 말했다.
“너는 죄가 없으므로 돌려보낸다.”
왕도는 예배하고 하직을 고했다. 관리는 왕도를 데리고 동쪽 계단으로 가서 스님에게 하직을 고했다. 스님은 왕도의 팔에 도장을 찍어 주면서 “잘 가시오” 했다.
왕도는 다시 관리의 인도를 받아 동남으로 가서 3중문(重門)을 지나는데 매번 문지기는 그 팔의 도장을 조사해 보고서야 비로소 통과시켰다. 서문에 이르자 문은 매우 장대하고, 층층 누각에 붉은 가루를 칠한 3문(門)이 모두 열려 있고, 그 형상은 마치 궁성의 문과 같았으며, 문지기는 매우 엄해 팔의 도장을 확인하고서야 통과시켰다. 문 동남쪽으로 수십 보쯤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왕도를 불러 왕도가 돌아보았다. 그는 시랑 송행질로서 얼굴빛은 시꺼먼데 마치 젖은 땅과 같았으며, 맨 머리에 흐트러진 허리로 낡고 붉은 도포를 입었고, 머리털은 짧게 드리워 마치 호인(胡人) 같았다. 그는 청사의 계단 밑에 서 있었는데 어떤 관리가 지키고 있었다.
서쪽으로 성 가까이 큰 목패(木牌)가 있는데, 높이는 1장 2촌쯤이요, 그 목패에 큰 글씨로 “여기는 죄인을 조사하는 곳이다. 왕인(王人)이면 지나갈 수 있다” 하였다. 그 글씨는 사방 1척으로서 매우 분명했다. 청사 위에 책상이 있고 관원(官員) 같은 사람이 안석에 앉아 있을 뿐 다른 사람은 없었다.
행질은 왕도를 보자 슬퍼하고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너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왕도가 답하였다.
“관청에서 적을 고쳤다 해서 잡혀 왔다가 죄가 없어 지금 돌아가는 길이다.”
행질은 왕도의 두 손을 잡고 말하였다.
“나는 관리에게 잡혀 왔는데 공덕부(功德簿)가 있느냐고 물었지마는 내게 공덕부가 없어 이런 고초를 당한다. 더구나 배고프고 추운 고통은 말할 수 없다. 그대는 부디 우리 집에 가서 빨리 공덕을 지으라고 전해다오.”
그는 몇 번이고 간절히 부탁했다. 왕도가 승낙하고 떠나 수십 보쯤 갔을 때, 행질은 또 왕도를 불렀다.

왕도가 미쳐 돌아와 말하기 전에 어떤 관리가 청사 위에 앉아 화를 내며 왕도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죄인을 다스리는데,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여기 왔느냐?”
그리고 옥졸(獄卒)을 시켜 그의 귀를 때리고 밀면서 가라고 했다.
왕도는 달아나 또 어떤 문에 이르자 그곳 문지기가 말하였다.
“너는 귀를 맞았으니 귀가 먹었겠다. 내가 그 귓속에 든 것을 빼내어 주리라.”
그리고 곧 손으로 귀를 후볐다. 귀가 울면서 효험이 있자 곧 문 밖으로 쫓아내었다. 문 밖은 칠과 같이 어두워 왕도는 어딘지 몰라 손으로 서쪽과 남쪽을 더듬어 보았으나 모두 장벽뿐이요, 오직 동쪽만이 틔어 있었으나 어두워 더 갈 수 없었다. 잠깐 동안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 왕도를 붙잡아 온 관리가 문에서 나와 왕도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참 잘하셨습니다. 내게 천 전(錢)을 주셔야 합니다.”
왕도는 응하지 않고 혼자 가만히 생각했다.
‘나는 죄가 없어 놓여났는데 무엇 때문에 뇌물을 요구할까?’
그가 다시 말하였다.
“당신은 그대로 갈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아까 당신을 데리고 그 관문을 빨리 지나게 하지 않았다면 2일 동안의 결박을 당신은 더 받았을 것이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왕도는 마음속으로 그렇다 생각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사과하고 말하였다.
“당신 요구대로 하겠습니다.”
그가 말하였다.
“내게는 동전(銅錢)이 필요치 않습니다. 백지전(白紙錢)을 가지고 싶습니다. 15일 안에 가져오십시오.”
왕도는 승낙하고 돌아가는 길을 그에게 물었다.
그가 말하였다.
“여기서 동쪽으로 2백 보쯤 가면 어떤 곳에 이르러 뚫어진 담 구멍으로 불빛이 보일 것이니, 그 담을 밀어 넘어뜨리면 바로 당신 집에 가게 될 것입니다.”
왕도는 그 말대로 했다. 어떤 담에 이르러 그것을 밀어 넘어뜨리고 나가니 거기가 바로 그가 살던 융정방(隆政坊) 남문이었다. 집에 돌아가니 집안 사람들이 울고 앉아 있었다. 15일이 되었는데도 왕도는 돈주는 일을 잊고 있었는데, 다음날 다시 병이 들어 기절했다. 그 때 그 관리는 다시 와서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신용이 없다. 내게 돈을 주기로 약속해 놓고 이행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다시 그대를 데리고 가겠다.”
그리고 곧 왕도를 끌고 금광문(金光門) 밖으로 나가 구덩이로 들어가라 했다. 왕도는 1백 번이나 절하면서 사과하여 드디어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살아난 왕도는 집 사람을 시켜 흰 종이 1백 장을 사서 돈을 만들어 보내 주었다. 이튿날 왕도는 다시 병이 위독했는데, 그 때 그 관리가 다시 나타나 말하였다.
“그대가 내게 돈을 보내 주었으나 그 돈이 좋지 않다.”
왕도는 사과하고 다시 깨어나 20일이 되어서는 60전으로 흰 종이 1백 장을 사서 돈을 만들고, 다시 술과 음식을 차려 융정방 서문 밖 개울물에서 돈을 불살랐다. 그 뒤로 왕도는 건강한 몸으로 부지런히 불경을 염송하였다.
이상은 임(臨)이 들은 이야기로서 그 때 형부시랑(刑部侍郞) 유연객(劉燕客)과 대리소경(大理少卿) 신무장(辛茂將) 등과 함께 대리(大理)로 있으면서 죄인을 취조할 때 유연객이 왕도를 불러와서 신무장 등과 대질(對質)시켜 신문한 것이다.[이상 세 가지 증험은 『명보기(冥報記)』에 나온다.]

당(唐)의 강등생(姜滕生)
기주(冀州)의 고관성(故觀城) 사람 강등생(姜滕生)은 무덕(武德) 말년에 갑자기 악질(惡疾)을 만나 몽산(蒙山)에 들어가 여러 해 동안 요양했으나 끝내 낫지 않았다. 그 뒤에 집에 돌아와서는 몸이 문드러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다 빠졌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흰 석상(石像)을 보았는데, 그 길이는 3척 남짓하였다.
그 석상이 등생에게 말하였다.
“내 손을 붙여 주면 나는 네 병을 곧 낫게 하리라.”
등생은 아침에 일어났는데 분명히 기억했다.
무덕(武德) 초년에 그는 기장밭에서 새를 쫓을 때 그 마을의 불당(佛堂)에서 『유마경』을 가지고 나와 그것을 찢어 지팡이 끝에 매고 그것으로 새를 쫓았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경전을 찢는 것은 큰 죄다.”
그러나 등생은 도리어 그를 꾸짖고 불당에 들어가 거기 모신 흰 석상을 때리니, 그 오른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완연히 꿈에서 본 그 석상이었다. 등생은 불상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땅에 대어 예배하고 지심으로 참회하고, 석공을 시켜 그 손을 다시 붙이고 경전 40권을 출간하고 절을 다시 지었다. 1년이 못 되어 그의 병은 완전히 나았다. 그 고을 사람들은 그 석상을 성상(聖像)이라 불렀다. 그 절과 불상은 다 현재
그대로 있다.

당(唐)의 요명해(姚明解)
당(唐)나라 요명해(姚明解)는 본래 보광사(普光寺)의 사문이었다. 그 성질은 총명하여 문재(文才)가 있으며 글씨를 잘 쓰고 단청(丹靑)도 잘했으며, 나아가 음악에 있어서도 당시에는 독보적(獨步的)이었다. 그래서 늘 속세의 일을 좋아하고 도문(道門)은 즐기지 않았었다. 용삭(龍朔) 원년에는 조인(詔人)에 추천되어 낙양(洛陽)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다시 속세로 돌아와 자못 남긴 말이 있었으나 얼마 안 있다가 죽었다. 그 뒤에 서로 잘 알던 정토사(淨土寺)의 스님 지정(智整)의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명해는 전생에 복업(福業)이 없어 내교(內敎)를 따르지 않다가 지금 큰 죄를 받아 몹시 굶주리고 있습니다. 혹 고인(故人)에 대한 정이 있으면 한 끼 먹여 주시겠습니까?”
지정은 꿈속에서 승낙하고 깨어나서는 음식을 차려 놓았다. 밤이 되어 막 잠이 들었을 때, 명해는 다시 나타나 부끄러워하면서 감사했다.
용삭 2년 가을에는 또 화공(畵工)의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나는 불법을 믿지 않다가 지금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부디 나를 위해 2ㆍ 3권의 경전을 베껴 주십시오.”
그리고는 손을 잡고 은근히 이별시를 지었다. 그리고 화공을 시켜 열여덟 번을 외워 그것을 기억하게 했다. 화공은 꿈을 깨어서도 그 시를 기억했다.

손을 맞잡고 헤어질 수 없어서
가슴을 만지면서 상심하노라.
원통하여라. 세월은 잠깐인데
슬프고나, 저승의 길은 멀어라.

소나무 숲은 들바람에 놀라고
거친 길에는 찬 서리가 내린다.
이제 헤어지거니 무엇을 선물하리.
부디 내전(內典)에 마음을 두라.

그 화공은 원래 문자를 모르는 사람이라, 꿈에서 깨어나자 곧 사람을 시켜 그 시를 적어 명해의 친지와 고인에게 보였더니, 모두 “이것은 명해의 문체가 틀림없다”고 했다. 이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였고, 서울과 지방 사람들은 다 이 사실을 널리 퍼뜨렸다.[이상 두 가지 증험은 『명보습유(冥報拾遺)』에 나온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