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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04 법원주림(法苑珠林) 61권

by Kay/케이 2024.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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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61

 

법원주림 제61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68. 주술편 ②

감응연(感應緣)[대략 여덟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전주(前周)의 갈유(葛由)
진(晋)의 석기역(釋耆域)
진(晋)의 축불도징(竺佛圖澄)
진(晋)의 축법인(竺法印)
송(宋)의 석보의(釋寶意)
송(宋)의 석배도(釋杯度)
송(宋)의 석현창(釋玄暢)
잡속환술(雜俗幻術)

전주(前周)의 갈유(葛由)
전주(前州)의 갈유(葛由)는 촉강(蜀羌) 사람이다. 전주의 성왕(成王) 때에 그는 나무에 염소를 새겨 팔며 살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나무 염소를 타고 촉중(蜀中)으로 들어갔다. 촉중의 왕후(王侯)와 귀인들이 모두 그를 따라 수산(綏山)으로 올라갔다. 수산은 아미산(峨嵋山) 서남에 있어 끝없이 높았는데, 따라간 사람들이 아마도 돌아오지 않았으니 모두 신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里論)에 말하였다.
“수산에 나는 복숭아 하나를 얻으면 비록 신선은 되지 못하더라도 호걸은 될 수 있다.”
수산 밑에는 사당을 세운 곳이 수십 곳이나 있다.[『수신기(授神記)』에 있다.]

진(晋)의 석기역(釋耆域)
(晋)나라 낙양(洛楊)의 석기역(釋耆域)은 천축(天竺) 사람이다. 중국과 서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일정하게 사는 곳이 없었다.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나며 성질은 자유로워 갑자기 속인 행세도 했었다. 그 행적이 일정하지 않아 아무도 헤아리지 못했다.
천축(天竺)을 떠나 부남(扶南)으로 올 때는 여러 바다를 건너고 교광(交廣)을 지내면서는 여러 가지 신기한 행동이 있었다. 양양(襄陽)으로 와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 할 때 그 사공은 이 천축 사문의 누추한 옷을 보고 업신여겨 배에 태우지 않았는데, 배가 북쪽 언덕에 대었을 때에 기역은 벌써 거기 와 있었다. 길을 가다가 두 마리 호랑이가 귀를 눕히고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보고는 손으로 그 머리를 만지자 호랑이는 길에서 내려갔다. 양쪽 언덕에서 이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모두 떼를 지어 그를 따라갔었다.
진(晋)나라 혜제(惠帝) 말년에 낙양으로 갔을 때는 여러 도인들이 다 그에게 예배했으나 그는 높은 자리에 걸터앉아 안색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전신(前身)을 말하였다.
“지법연(支法淵)은 염소 세계에서 왔고, 축법흥(竺法興)은 인간에서 왔다.”
또 다른 스님들의 옷이 화려한 것을 비방하여 소법(素法)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또 낙양의 궁성을 보고는 말하였다.
“저것은 마치 도리천궁(忉利天宮)을 방불하는구나. 다만 자연의 일이 사람의 일과 다를 뿐이다.”
그리고 기역은 사문 기암밀(耆闇密)에게 말하였다.
“저 궁전은 도리천이 내려와서 지어 놓고 올라갔다. 용마루 기와 밑에 1,500개의 그릇이 있을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은 모두 말하였다.
“옛날 들으니 그 장인(匠人)이 그릇을 만들어 기와 밑에 두었다더라.”
또 말하였다.
“궁전이 낙성된 뒤에 그 장인은 해를 입었다.”
형양(衡陽)의 태수(太守)로 있는 남양(南陽) 등영문(滕永文)이 낙양의 만수사(滿水寺)에 있을 때 병에 걸려 여러 해 동안 낫지 않고 두 다리가 오그라져 일어나 다닐 수가 없었다. 기역이 가서 보고 말하였다.
“당신은 병을 고치고 싶습니까?”
기역은 곧 깨끗한 물 한 잔과 버들가지 하나를 가져오게 하여 버들가지로 물을 친 뒤에 손을 들어 영문을 향해 주문을 세 번 외웠다. 그리고 영문을 붙잡아 일으키니, 영문은 곧 일어나 걷되 전과 같았다.
또 그 절에 있는 사유나무[思惟樹] 수십 그루가 말라죽어 있었다. 기역은 영문에게 물었다.
“저들 나무가 죽은 지는 얼마나 됩니까?”
영문은 여러 해가 되었다고 했다. 기역이 나무를 향해 위와 같이 주문을 외우니, 나무들은 곧 꽃이 피고 지엽이 무성했다.
상방서(尙方暑)에서 일하는 어떤 사람이 병이 들어 곧 죽게 되었다. 기역은 발우를 병자의 배 위에 놓고 흰 천을 그 위에 덮고는 수천 마디의 주문을 외웠다. 곧 더러운 냄새가 온 방에 가득하였다. 그러자 병자는 말하였다.
“나는 이제 살았다.”
기역이 사람을 시켜 그
천을 들게 하자 발우에는 진흙 같은 것이 두어 되나 담겨 있었는데, 그 냄새가 고약해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고, 병자의 병은 말끔히 나았다.
낙양에 난리가 가까워지자 기역은 낙양을 떠나 천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낙양의 사문 축법승(竺法行)은 고승이었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를 시켜 기역에게 청하였다.
“상인(上人)은 도승이십니다. 한 말씀을 남겨 두어 우리의 영원한 경계로 삼게 하십시오.”
기역은 대중을 모으라 하여 대중이 다 모이자 높은 자리에 올라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몸과 입과 또 그 뜻을 삼가
부디 어떤 악도 범하지 말고
일체의 선을 다 수행하라.
이렇게 하면 세상을 제도하리.

이렇게 말을 맺고 잠자코 있었다. 범행은 다시 청하였다.
“상인은 우리가 일찍이 듣지 못하던 말씀을 일러 주십시오. 그런 게송의 이치는 8세 동자도 다 이미 알고 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인께 바라던 것이 아닙니다.”
기역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8세에 외우더라도 1백 세에 행하지 않으면 외우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다 도를 얻은 자를 존경할 줄은 알면서 그것을 행해 스스로 도를 얻을 줄은 알지 못하니, 그것이 슬픈 일이다. 말은 비록 적으나 이것을 행하면 이익이 많으니라.”
기역은 이에 하직을 고했다. 수백 사람들이 모두 기역을 점심에 청했을 때 기역은 다 가기로 허락했다. 이튿날 점심 때 5백 사람 집에 모두 기역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다 자기 집에만 기역이 온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서로 물어보고 비로소 기역이 몸을 나누어 간 줄을 알았다. 그가 떠날 때 여러 도인들은 그를 하남성(河南城)까지 전송했는데, 기역은 천천히 걸어갔으나 아무도 따르지 못했다. 기역은 이에 땅에 금을 그으면서 말하였다.
“여기서 이별합시다.”
그 날 장안(長安)에서 오는 사람은 다 기역을 절에서 보았다 했고, 또 호습(胡濕)이라는 상인은 그날 저물 때에 기역을 유사(流沙)에서 만났다 했으니, 그 거리를 따져 보면 9천여 리를 간 셈이었다. 그는 서국(西國)으로 돌아간 뒤에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

진(晋)의 축불도징(竺佛圖澄)
진(晋)나라 업중(鄴中)의 축불도징(竺佛圖澄)은 서역 사람이며,
본성은 백(帛)씨이다. 젊어 출가하여 성질은 밝고 곧으며 학문에 힘써 수백 만언의 경전을 외우고 글과 뜻을 잘 알았다. 비록 중국의 유사(儒史)는 읽지 않았으나 여러 학자들과 변론할 때 의심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다 외워 틀림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스스로 말하였다.
“다시 계빈국(罽賓國)으로 가서 명사(名師)들의 강의를 받아 서역에서는 모두 도를 얻은 사람이라 한다.”
진(晋)나라 회제(懷帝) 영가(永嘉) 4년(310)에 낙양에 와서는 포교에 뜻을 두고 신주(神呪)를 잘 외워 귀신을 잘 부리며, 참기름에 연지를 섞어 손바닥에 바르고는 천리 밖의 일을 손바닥을 통해 다 보되, 마치 직접 보는 것과 같았으며, 깨끗이 재(齋)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 함께 보게 했다. 또 풍경 소리를 듣고 앞날의 일을 말하되, 모두 영험이 있었다.
이에 초야(草野)에 숨어살면서 세상의 변화를 관찰했다. 그 때 석륵(石勒)은 갈파(葛波)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오로지 사람을 죽임으로써 위엄을 떨치고 많은 사문들까지 해쳤다. 도징은 백성을 가엾이 여겨 도로써 석륵을 교화시키려고 지팡이를 짚고 석륵의 군문(軍門)으로 갔다. 석륵의 대장 곽흑략(郭黑略)은 본래 불법을 믿는 사람이므로 도징은 흑략의 집에 머물렀다. 흑략은 도징에게서 5계를 받고 제자의 예로써 도징을 섬겼다. 석륵은 도징을 불러 물었다.
“불법에 어떤 영험이 있는가?”
도징은 석륵이 깊이 이치를 깨닫지 못함을 알고 바로 도술로써 영험을 보이리라 생각하고는 곧 대답하였다.
“지극한 도는 비록 심원하다 하더라도 가까운 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도징이 곧 발우에 물을 담고 향을 피우며 주문을 외우자 발우 물에서 푸른 연꽃이 나와 그 빛이 눈을 부시게 했다. 석륵은 이것을 보고 감복했다. 도징은 석륵에게 간하였다.
“대개 왕의 덕화(德化)가 천하에 두루 퍼지면 4령(靈)이 상서를 나타내고, 정치가 사납고 도가 사라지면 혜패(慧孛)가 뒤에 나타납니다. 항상한 상(像)은 현상을 보이고, 길흉(吉凶)이 행을 따르는 것은 곧 고금의 떳떳한 징조요 하늘과 사람의 밝은 경계입니다.”
석륵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였으니, 무릇 죽임을 당할 사람으로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이
18, 9인이었다. 그 뒤에 석륵은 분노하여 여러 도사들을 죽이려 하고, 또 도징도 괴롭히려 하므로 도징은 곧 흑략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만일 장군의 사자가 와서 내 있는 곳을 묻거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라.”
과연 사자가 와서 찾았으나 도징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 석륵에게 보고했다. 석륵은 놀라면서 말하였다.
“내가 악의로 성인을 대했으므로 성인은 나를 버리고 떠났다.”
석륵은 밤새껏 자지 못하고 도징을 만나기만을 생각했었다. 도징은 석륵이 후회함을 알고 이튿날 아침에 석륵에게로 갔다. 석륵은 물었다.
“어젯밤에는 어디 갔었습니까?”
도징은 대답하였다.
“당신이 성을 내었기 때문에 어젯밤에는 일부러 피했지만 지금은 당신이 마음을 고쳤기 때문에 감히 와서 뵈옵는 것입니다.”
석륵은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도인이 잘못 생각했습니다.”
양국(襄國) 성참(城塹)의 수원(水源)은 그 성의 서북쪽 5리에 있는 범란사(汎灡祀) 밑에서 흘러나오는데 그 물이 갑자기 말랐으므로 석륵은 도징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물이 다시 나올 수 있게 하겠습니까?”
도징은 대답하였다.
“지금 곧 용에게 분부하십시오.”
석륵의 자(字)가 세룡(世龍)이었으므로 석륵은 도징이 자기를 비웃는다 생각하고 말하였다.
“바로 그 용이 물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물었을 뿐입니다.”
도징은 말하였다.
“내 말은 진실이요 농담이 아닙니다. 물 근원에는 반드시 용이 살고 있으니, 지금 가서 명령하시면 반드시 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 법수(法首)와 몇 사람을 데리고 그 수원으로 갔다. 그 수원은 이미 다 말라 수레바퀴처럼 갈라져 있었으므로 존자들은 모두 물을 얻기 어려울까 염려했다. 도징은 승상(繩牀)에 앉아 안식향(安息香)을 피우며 몇 백 자의 주문을 외웠다. 이렇게 3일 동안 계속 했을 때, 갑자기 물이 조금 흘러나오면서 길이 5, 6치쯤 되는 조그만 용이 물을 따라 기어 나왔다. 도사들이 모두 가서 이것을 보려 할 때 도징은 말하였다.
“용에게는 독기가 있으니 부디 가까이 가지 말라.”
조금 있다가 큰 물이 흘러나와 성참이 다 찼으니, 도징의 이런 예언은 다 말할 수 없다.
석륵은 왕위에 오른 뒤로는 도징을 더욱 돈독히 섬겼다. 그 때 석총(石蔥)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그 해 도징은 석륵에게 경계했다.

“금년에는 파에 벌레가 있어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사람을 해칠 것이니, 백성들로 하여금 파를 먹지 못하게 하십시오.”
석륵이 온 나라에 영을 내려 아무도 파를 먹지 못하게 했더니, 그 해 8월에 과연 석총이 달아났다. 석륵은 도징을 더욱 존중하여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도징에게 물어본 뒤에 시행하고 대화상(大和尙)이라 불렀다.
석호(石虎)의 아들 빈(斌)은 뒤에 석륵의 아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갑자기 병이 나서 죽어 이틀이 지났다. 석륵은 석호에게 말하였다.
“짐(朕)이 들으니 괵(虢) 태자가 죽었을 때 편작(扁鵲)이 살렸다 한다. 대화상은 우리 나라의 신인(神人)이라 급히 가서 알리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다.”
도징이 이 말을 듣고 곧 버들가지를 들고 주문을 외우니, 잠깐 사이에 빈은 깨어났고, 한참 있다가 아주 나았다.
석륵은 어린애들을 많이 절에 보내어 공양을 받게 했는데, 4월 8일에는 석륵이 직접 절에 가서 불상을 목욕시키고 아이들을 위해 발원했다. 건평(建平) 4년 4월에는 하늘이 고요하고 바람이 없었는데, 탑의 풍경이 혼자 울고 있었다. 도징은 대중에게 말했다.
“저 풍경 소리가 말하기를 금년 안에 나라에 큰 상(喪)이 있을 것이라 한다.”
그 해 7월에 과연 석륵이 죽고 그 아들 홍(弘)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조금 있다가 석호가 홍을 폐하고 자기가 왕이 되어 도읍을 업(鄴)에 옮기고 연호를 건무(建武)라 하고 마음을 다해 도징을 섬기기 석륵보다 더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렸다.
“대화상은 이 나라의 보배이다. 영화로운 벼슬도 받지 않고 높은 녹(祿)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와 녹을 기울이지 않으면 무엇으로 그 덕을 나타내겠는가? 지금부터는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고 조각한 수레를 타고, 조회하는 날과 화상이 궁전에 오를 때는 상시(常侍) 이하는 다 수레를 메고 여러 태자는 부축해 오르게 하며, 주상(主上)이 ‘대화상이 오신다’ 하고 외치면, 대중은 다 일어남으로써 그 존엄을 나타내게 하라.”
또 영을 내렸다.
“위사공(僞司空) 이농(李農)은 아침 저녁으로 친히 가서 문안하고 여러 태자들은 5일에 한 번씩 문안하여 짐(朕)이 공경하는 뜻을 표하라.”
그 때 도징은 업성(鄴城)의 중사(中寺)에 있으면서 그 제자
법상(法常)을 북방의 양국(襄國)에 보냈다. 제자 양기성(梁基城) 밑에서 함께 자게 되어 수레를 맞대고 밤을 새워 도징 화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른 아침에 각기 헤어져 길을 떠났다. 법좌가 돌아와 도징을 뵙자 도징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는 어젯밤에 법상과 수레를 맞대고 네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옛사람의 말에 ‘공경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그윽한 데서도 고치지 말라. 삼가지 않아서 되겠는가? 혼자 있어서도 게으르지 말라. 그윽하고 혼자임은 공경하고 삼감의 근본이다’ 하였으니, 너는 이것을 모르는가?”
법좌는 깜짝 놀라 부끄러워하면서 참회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은 늘 서로 말하였다.
“악심을 내지 말라, 화상이 너를 안다.”
심지어 도징이 있는 곳을 향해서는 바로 대고 침을 뱉거나 대소변을 보지 못했다.
그 때 태자 석수(石遂)의 두 아들이 양국(襄國)에 있었는데, 도징은 석수에게 말하였다.
“작은 아들이 요즘 병에 걸려 있을 것이니 곧 가서 데리고 오시오.”
석수가 곧 사람을 보내어 가 보았더니 과연 앓고 있었다. 큰 의사 은등(殷騰) 및 외국의 도사들이 모두 자기네가 고칠 수 있다 했다. 그러나 도징은 그 제자 법아(法牙)에게 말하였다.
“만약에 성인이 다시 나오셔도 이 병을 고칠 수 없거늘, 하물며 저런 무리들이겠는가?”
3일 뒤에 과연 그는 죽었다.
그 뒤에 진(晋)나라 군사가 회사(淮泗)로 나와 농북(壟北)과 와성(瓦城)을 다 핍박하므로 3방에서 급함을 알려 인심이 매우 시끄러웠다. 이에 석호는 화를 내어 말하였다.
“나는 부처를 받들고 스님들을 공양했는데 이제 외구(外寇)의 침노를 받으니, 부처는 영험이 없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도징이 일찍 들어가자, 석호가 이 사실을 도징에게 물으니, 도징은 석호에게 간했다.
“대왕은 전생에 큰 상주(商主)로서 계빈사(罽賓寺)에서 대회를 열었고, 거기 60명의 아라한이 있었는데, 이 미미한 나도 그 대회에 참여했습니다. 그 때 어떤 도인이 내게 ‘이 대회의 주인은 목숨을 마치면 닭으로 태어날 것이요, 뒤에는 진(晋)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 했습니다. 지금 대왕은 주상이 되었으니, 어찌 복이 아닙니까? 국토에 도둑이 침입하는 것은 나라의 상사(常事)인데
왜 이로써 3보를 비방하면서 가만히 독심을 일으키십니까?”
석호는 이에 깨치고 꿇어앉아 사과했다. 일찍이 석호는 도징에게 물었다.
“불법에 살생하지 말라 했습니다. 짐은 천하의 주인이 되어 형벌과 살생이 아니면 천하를 숙청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미 계를 어기고 살생했거늘, 아무리 부처를 섬긴들 무슨 복을 받겠습니까?”
도징은 말하였다.
“제왕이 부처를 섬김은 몸으로 공경하고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3보를 선양하고 포학하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흉악하고 우치하며 무뢰함에 이르러서는 교화가 아니고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죄가 있으면 죽이지 않을 수 없고 악이 있으면 형벌이 없을 수 없습니다. 다만 죽여야 할 것을 죽이고 형벌해야 할 것을 형벌할 뿐입니다. 만일 마음대로 포악하고 법이 아니게 죽인다면 아무리 재물을 기울여 법을 섬긴다 해도 그 앙화는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욕심을 버리고 자비심을 일으켜 그것이 일체 중생들에게 두루 미치면 부처의 가르침은 길이 융창하고 복은 비로소 멀리 뻗을 것입니다.”
석호는 비록 이대로 다 행하지는 못했으나 그 이익됨은 적지 않았다.
석호의 상서(尙書)인 장리(張離)와 장량(張良)은 집이 부자로서 부처를 섬겨 각기 큰 탑을 세웠다. 도징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부처를 섬김은 청정하여 욕심이 없고 자비를 마음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단월(檀越)은 비록 겉으로는 큰 법을 받들지만 탐욕과 아낌이 다 없어지지 않아 사냥에 법도가 없고 재물을 쌓아 끝이 없습니다. 한창 현세의 죄를 짓고 있거늘, 어찌 복의 과보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장리와 장량 등은 그 뒤에 과연 죽임을 당하고 모두 망했다.
도징은 일찍이 그 제자를 서역에 보내어 향을 사오라 했다. 그가 떠난 뒤에 도징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손바닥을 보니, 향을 사러 간 제자가 지금 아무 곳에서 도둑을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
도징은 곧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우면서 그를 멀리서 구원한다고 했다.
뒤에 그 제자는 돌아와 말하였다.
“아무 달 아무 날 아무 곳에서 도적의 겁탈을 당해 거의 죽게 되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향기를 맡더니 도적은 아무 이유 없이 놀라면서 ‘구원할 군사가 왔다’ 하고 달아나더라.”
석호는 늘 연(燕)나라를 치려 하였으므로 도징은 간하였다.
“연나라는 그 운수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끝내 이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석호는 여러 번 치러 갔다가 대패하고 비로소 도징의 충고를 믿었다.
또 황하(黃河)에서는 이전에는 자라[黿]가 나지 않았는데 누가 그것을 잡아 석호에게 바쳤다. 도징은 그것을 보고 한탄하였다.
“환온(桓溫)이 물에 들어간 지 오래지 않았다.”
환온의 자(字)는 원자(元子)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또 도징은 일찍이 석호와 함께 중당(中堂)에 오르다가 갑자기 놀라면서 마라였다.
“변변(變變)이다. 유주(幽州)에 큰 화재가 있을 것이다.”
도징은 곧 술을 가져오게 하여 뿌리고는 한참 있다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불이 다 꺼졌다.”
석호가 사람을 유주에 보내어 그 사실을 알아보았더니, 그는 돌아와 말하였다.
“그날 불이 사문(四門)에서 일어났는데 서남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와 소나기를 내려 불을 껐는데, 그 비에서 술냄새가 몹시 났다.”
또 석호의 건무(建武) 14년 7월에 석선(石宣)과 석도(石韜)는 서로 석호를 죽이기를 도모했다. 석선이 절에 가서 도징과 같이 앉아 있을 때 부도의 풍경 하나가 혼자 울고 있었다. 도징은 석선을 보고 말하였다.
“저 풍경 소리의 뜻을 아십니까? 풍경 소리가 ‘오랑캐가 낙도(落度:구제받지 못함)한다’고 합니다.”
석선은 얼굴빛이 변하며 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이오?”
도징이 속여 말하였다.
“늙은 오랑캐가 도를 위해 말없이 산에 있지 않고 좋은 옷을 입고 요를 겹쳐서 깔고 앉았으니, 어찌 낙도가 아니겠습니까?”
석도가 뒤에 왔다. 도징이 한참 동안 석도를 자세히 바라보자 석도가 두려워하면서 그 까닭을 물었다. 도징은 말하였다.
“괴상합니다. 당신 피에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8월에 도징은 제자 10여 인을 시켜 별실에서 재를 지내게 하고 도징은 잠깐 동합(東閤)으로 들어갔다. 석호는 그 부인 두(杜)씨와 함께 도징에게 문안했다. 도징은 말하였다.
“겨드랑이 밑에 도적이 있습니다. 10일 이내에 이 절 동쪽과 이 궁전 동쪽에서 피를 흘리는 일이 있을 것이니, 부디 동쪽으로는 가지 마십시오.”
두씨는 말하였다.
“화상은 망령이 드셨습니다. 도적이 어디 있습니까?”
도징은 곧 말을 바꾸었다.
“6정(情)이 받아들이는 것은 다 도적입니다. 늙었으니 망령도 당연하지요. 다만 젊은 사람을 혼미하게 하지 마십시오.”
도징은 은연중에 말하고 끝내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2일 뒤에 과연 석선은 사람을 보내 절에서 석도를 죽이고, 석호가 문상 올 틈을 타서
큰 반역을 일으키려 했으나 석호는 먼저 도징의 경계를 받았기 때문에 그 화를 면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석선이 감옥에 갇혔을 때 도징은 석호에게 간하였다.
“석선은 폐하의 아들인데 중한 죄는 주지 마십시오. 만일 폐하께서 그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시면 폐하는 아직 60여 년을 더 사실 것이나 만일 석선을 기어이 죽이시면 석선은 장차 혜성(彗星)이 되어 내려와 업(鄴)의 궁전을 쓸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석호는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쇠사슬로 석선의 턱을 꿰어 끌어올린 뒤에 나무를 쌓고 불을 놓아 태워 죽이고, 그 궁속(宮屬) 2백여 인을 붙잡아 모두 수레로 사지를 찢어 장하(漳河)에 던져 죽였다. 도징은 제자들에게 분부하여 별실의 재를 파하게 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 어느 날 요사스런 준마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그 꼬리는 불에 탄 형상으로 중양문(中陽門)으로 들어와 현양문(顯陽門)으로 나가서 머리를 동궁(東宮)으로 두었으므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동북쪽으로 향해 달아나더니 조금 뒤에는 보이지 않았다. 도징은 이 소문을 듣고 한탄했다.
“재앙이 벌써 닥쳤구나.”
그 해 11월에 석호는 태무전(太武殿) 앞에 신하들을 모으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도징은 나직이 말하였다.
“궁전마다 가시가 숲을 이루어 장차 사람의 옷을 다 찢겠구나.”
석호가 사람을 시켜 궁전 돌 밑을 뒤져보았더니 가시가 나 있었다.
도징은 절에 돌아와 불상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말하였다.
“장엄을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는 혼잣말로 ‘3년을 유지할까?’ 하다가 스스로 ‘못 한다’고 답하였다. 또 ‘그러면 2년, 1년, 백 일, 한 달……’ 하다가 스스로 ‘안 된다’ 하고는 이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그 제자 법조(法祚)에게 말하였다.
“무신년(戊申年)에 화가 싹트기 시작해 기유년(己酉年)에는 석(石)씨가 망할 것이다. 나는 그 난리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석호에게 보내어 하직하는 글을 주었다.
“사물의 이치는 반드시 변천하는 것이요, 사람의 신명은 보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빈도(貧道)의 재환(災幻)의 몸은 변화할 때가 이미 닥쳤습니다. 특별한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미리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석호는 이 글을 보고 창연(悵然)히 말하였다.
“화상께 병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는데 왜 갑자기 떠나신다 하는가?”
석호는 궁중을 나와 절에 가서 도징을
위안하고 타일렀다. 도징은 석호에게 말하였다.
“생(生)으로 나오고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은 도의 떳떳함이요, 수명의 길고 짧음은 분수에 정한 것이니, 마음대로 늘릴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도는 행의 완전함을 중히 여기고 덕은 게으르지 않음을 귀하다 하는 것이니, 진실로 그 업조(業操)에 결함이 없으면 죽었다 하더라도 살아 있음과 같습니다. 도리를 어기면서 수명을 늘리려는 것은 원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에 다 말하지 못한 뜻은 국가를 위하는 마음을 부처의 이치에 두고 인색함이 없이 법을 받들며, 절을 많이 일으켜 그것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나타내는 것을 덕이라 일컫습니다. 부디 아름다운 복을 누리십시오.
그러하온데 펴는 정치가 사납고 극렬하며 법도 없는 형벌이 가혹하고 참담하여, 드러나게는 성인의 경전을 어기고 그윽하게는 법의 훈계를 위배하면서 스스로 징계하고 고치지 않으면 마침내 아무 복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마음을 낮추고 생각을 고쳐 아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나라의 복이 늘어나고 도인과 속인들이 기뻐하고 신뢰하여 목숨을 마치고 돌아가더라도 남은 한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석호는 비통하게 오열하면서 반드시 떠날 것을 알고 곧 도징을 위해 뫼구덩이를 파고 무덤을 만들었다. 도징은 12월 8일에 업궁사(鄴宮寺)에서 죽었으니, 때는 진(晋)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 4년(348)이었다. 관리와 서민들이 모두 슬피 울고 온 나라가 다 문상하였으니, 나이는 117세였다. 곧 임장(臨漳) 서쪽 자백(紫白)에 묻었으니, 그것은 석호가 만든 무덤이었다.
조금 있다가 양독(梁犢)이 난리를 일으키고 이듬해에 석호가 죽었다. 염민(染閔)이 왕위를 빼앗을 때 석(石)씨의 종족을 모두 죽였다. 염민의 자(字)는 극노(棘奴)이니, 도징이 전에 말한 ‘가시가 숲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도징의 왼쪽 유방 곁에 구멍 하나가 있었으니, 둘레는 4, 5치로서 배 속과 통했으므로 때로는 창자를 내고 혹은 솜으로 구멍을 막았다. 밤에 책을 읽으려 할 때는 으레 솜을 빼면 온 방안이 환했다. 또 재일(齋日)이 오면 으레 물가에 나가 창자를 들어내 물에 씻은 뒤에 다시 배 속에 넣었다.
도징의 키는 8자요, 풍채는 고아하며 경전의 깊은 뜻을 잘 해석하였고, 세상 일도 겸해 통달했다. 강설할 때에는 큰 뜻을 바로 가리켜 처음과 끝의 글과 말도 다 환히 알게 하며,
다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를 고통에서 구해 주었다. 두 사람의 석(石)씨가 흉악하고 횡포를 부릴 때 도징이 아니었다면 누가 감히 그들의 비법을 말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백성들은 그 은혜를 날로 입으면서도 그것을 몰랐을 뿐이었다.
불조(佛調)와 보리(菩提) 등 수십 명의 훌륭한 스님들은 다 천축의 강거(康居)로부터 수만 리의 길을 멀다 않고 그 발로 사막을 걸어 도징에게 와서 교훈을 받았었다. 또 번하(樊河)의 석도안(釋道安)과 중산(中山)의 축법아(竺法雅)도 다 관하(關河)를 넘어와서 도징의 강설을 들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 정묘한 이치를 통달하고 깊은 뜻을 연구했다. 도징은 늘 말했다.
“나는 고향에서 업(鄴)까지 9만 리를 걸었고 집을 버리고 도에 들어간 지 109년이다. 술은 입에 댄 적이 없고 오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계에 어긋나는 것은 행한 일이 없고 욕심이 없어 구하는 것이 없다.”
그를 따라 수업하는 사람이 수백 명이었는데, 전후 모두 합하면 수만 명이었다. 지나는 주군(州郡)마다 절을 세워 모두 893개소이니, 이처럼 성대한 포교는 아무도 따르지 못했다.
처음에 석호가 도징을 관에 넣을 때 생시에 쓰던 지팡이와 발우를 함께 넣었는데, 뒤에 염민(染閔)이 왕위를 빼앗고 그 관을 열었을 때에는 오직 발우와 지팡이만 있었고, 도징의 시체는 없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도징이 죽은 달에 어떤 사람이 유사(流沙)에서 도징을 보았다고 하더라” 했다. 또 뒤에 모용준(慕容俊)은 도업(都鄴)이 석호 궁중에 있을 때 늘 꿈에 호랑이가 그 팔을 무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석호의 동티라 생각했다. 곧 사람을 시켜 석호의 시체를 동명관(東明錧)에서 파내었는데, 그 시체는 아직 썩지 않았었다. 용준은 그 시체를 밟고 꾸짖었다.
“죽은 오량캐가 감히 산 천자(天子)를 위협하느냐? 너는 궁전을 낙성했을 때 네 아이의 반역을 당했거늘 어찌 남을 해치려느냐?”
용준은 매를 때려 모욕하고 장하(漳河)에 던져 버렸다. 시체가 다리 기둥을 의지해 떠내려가지 않았으므로 진장왕(秦將王) 맹(猛)이 이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이것은 마유(麻襦)의 참언(讖言)이다. 마유란 자는 바로 위현(魏縣)의 유민(流民)으로서 그
종족은 알 수 없다. 그는 항상 베로 만든속옷에 베바지를 입고 시장에서 구걸했는데, 미친 사람 같았지만 현인(賢人)이었다. 혹자는 그가 도징과 아주 친밀한 사이라 했다. 그는 처음 석호를 만나 이야기할 때 다른 말은 없었고, 오직 “폐하께서는 장차 일주전(一柱殿) 밑에서 돌아가실 것입니다”고만 했다. 뒤에 부견(符堅)이 업(鄴)을 정벌할 때 모용준의 아들 위(暐)는 부견의 대장 곽신호(郭神虎)에게 붙들렸으니, 실로 전에 호랑이를 꿈꾸던 증험이었다. 전융조(田融趙)의 기록에는 “도징은 죽기 수년 전에 손수 무덤 구덩이를 파고 무덤을 만들 때 이미 그 무덤이 반드시 파일 것을 알았으며, 또 시체가 거기 없었다”고 하였지만 무엇 때문에 미리 두려워했겠는가? 이것은 융조의 잘못된 말이다.
불도징을 혹은 불도등(佛圖燈)이라 하고, 혹은 불도등(佛圖橙)이라고도 하는데, 다 범음(梵音)을 취해 같지 않을 뿐이다.

진(晋)의 축법인(竺法印)
진(晋)나라 사문(沙門) 축법인(竺法印)은 진나라 태원(太元) 때에 추류(隹流)로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안북장군(安北將軍) 태원왕(太原王) 문도(文度)와는 매우 친한 벗이었다. 일찍이 그와 함께 생사의 보응을 이야기했으나 아득하여 밝히기 어려워 그 도리를 어느 정도 이해는 했으나 분명히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서로 맹약하였다.
“죽은 뒤에 앎이 있어 과연 죄와 복의 보응을 보거든 서로 알려 주자.”
법인은 그 뒤에 회계(會稽)에 살다가 다음 해에 죽었으나 왕은 서울에 있으면서 그런 줄을 모르고 있었다. 왕의 꿈에 법인이 나타나 서로 반기고 기뻐하며 문안했다. 법인은 말하였다.
“빈도(貧道)는 어느 때 병으로 죽었습니다. 죄와 복은 헛되지 않아 그 응보는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 같은 것입니다. 단월(檀越)님은 부디 부지런히 도덕을 닦아 그 신명(神明)을 구제하십시오. 전에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와서 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이내 사라졌다. 왕은 그 뒤로는 부지런히 불법을 믿고 받들었다.

송(宋)의 석보의(釋寶意)
송(宋)나라 경사(京師) 중흥사(中興寺)의 사문 보의(寶意)는 범어로는 아나마저(阿那摩低)이며, 성은 강(康)씨이다. 강거(康居) 사람으로서 대대로 천축(天竺)에 살았다.
송나라 효건(孝建) 때에 경사에 와 있으면서 경론(經論)을 잘 알았으므로 삼장(三藏)이라고 불렸다. 항상 수백 개의 조개를 굴려 곧 길흉을 알고 신주(神呪)에 능하여 손바닥에 향을 바르고는 과거의 일도 잘 알았다.
송나라 세조(世祖)가 그에게 구리로 된 타구(唾具)를 보시하였다. 높이는 2자 남짓했다. 보의는 항상 그것을 평상 앞에 두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그것을 훔쳐 갔다. 보의는 자리를 말아 거기에 대고 주문을 수십 번 외우면서 3일을 지냈다. 그러자 타구는 돌아와 그 자리 속에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다. 이에 4방의 도속(道俗)들은 다 그의 신이(神異)함에 감복했다.

송(宋)의 석배도(釋杯度)
송나라 경사의 석배도(釋杯度)란 이는 그 성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항상 나무 술잔을 타고 물을 건너다니므로 배도라 이름했다. 처음 기주(冀州)에 있을 때는 자잘한 행은 닦지 않았으나 신통의 힘이 탁월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 유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일찍이 북방의 어떤 집에서 자다가 그 집에 있는 금불상을 훔쳐 가지고 갔다. 주인은 깨어나 그 뒤를 쫓았는데 배도가 천천히 가는 것을 보고 말을 타고 쫓아갔으나 미치지 못했다. 맹진강(孟津江)에 이르러서는 나무 술잔을 물에 띄우고 그것을 타고 건너가는데 바람의 힘을 빌지 않고도 나는 듯이 빨리 갔다. 조금 뒤에 언덕에 대어 경사에 도착했다.
그 때 나이는 40쯤 보였는데 다 헤어진 누더기 옷은 몸을 거의 가리지 못했으며 말은 대중이 없고 기쁨과 성냄이 고르지 않았다. 혹은 한겨울에 얼음을 부수고 물에 들어가 목욕하고 혹은 나막신을 신고 산에 오르며 혹은 맨발로 시장에 들어갔다. 그럴 때는 오직 호로병 하나만을 메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다. 연현사(延賢寺)에 잠깐 갔을 때 법의(法意) 도인은 딴방을 주어 그를 대우했다. 그 뒤에는 과주(瓜州)로 가려고 걸어서 강가로 갔을 때 사공이 그를 배에 태우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술잔에 발을 포개고 사방을 돌아보며 읊조리는데 술잔은 저절로 흘러 바로 북쪽 언덕에 도착했다.
광릉(廣陵)으로 가다가 어떤 촌집에 이르렀을 때 그 이(李)씨 집에서는 마침 팔관재(八關齋)를 지내고 있었다. 주인과는
전연 모르는 사이였으나 배도는 바로 재당(齋堂)으로 들어가 앉으면서 그 호로병을 중정(中庭)에 두었다. 대중은 모두 그의 얼굴이 누추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없었고, 주인은 그 병이 길에 방해된다 하여 그것을 담 밑으로 옮기려 했다. 그래서 몇 사람이 그것을 들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배도는 음식을 다 먹은 뒤에 병을 들고 떠날 때 웃으면서 “사천왕(四天王)이라”고 했다.
그 때 그 집에 있는 아이가 그 병 속을 엿보았다. 거기 네 아이가 있었는데, 모두 키는 몇 치쯤 되고 얼굴이 단정하며 옷은 깨끗했다. 그래서 곧 뒤쫓아가 찾아보았으나 간 곳이 없었다. 3일 뒤에 이씨는 서계(西界)의 몽룡나무[蒙龍樹] 밑에 앉아 있는 배도를 보고 곧 가서 예배하고 집으로 청해 와서 한 달 동안 공양했다. 배도는 특히 재계하는 일이 없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심지어 신회(辛鱠)까지 먹으면서 속인과 다름이 없었다. 백성들이 그런 것을 올리면 혹은 받고 혹은 받지 않았다.
패국(沛國)의 유흥백(劉興伯)은 연주(兗州)의 자사(刺史)가 되어 사람을 시켜 배도를 청했다. 배도는 여전히 병을 지고 왔다. 홍백이 사람을 시켜 그것을 들고 보라 했을 때 10여 인이 들어도 들리지 않아 홍백이 직접 가서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직 다 헤어진 누더기와 나무잔 하나뿐이었다. 뒤에 다시 이씨 집으로 가서 20여 일을 묵었다.
어느 날 아침에 배도는 갑자기 가사 한 벌을 청하면서 점심 때까지 마련해 달라 했다. 이씨는 곧 시작했으나 점심 때까지 다 되지 않았다. 배도는 잠깐 나간다 하면서 나가 저물 때가지 돌아오지 않았다. 온 마을 사람들은 다 이상한 향내를 맡고 의심하며 괴이한 일이라 하고 사방으로 찾아보았다. 배도는 북쪽의 어떤 바위 밑에서 헤어진 가사를 깔고 누워 죽어 있었다. 머리 앞과 다리 뒤에는 다 연꽃이 나 있었는데, 아주 곱고 향기로운 꽃은 하룻밤 동안에 다 시들었다. 온 고을 사람들이 다 함께 장례를 지냈는데 며칠 뒤에 북방에서 오는 어떤 사람이 배도가 병을 지고 팽성(彭城)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관을 열어 보았더니 거기에는 가죽 신발만이 있었다.
배도는 팽성으로 가서 황흔(黃欣)이라는 불교 신도를 만났다. 황흔은 배도를 보자 예배하고 집으로 청해 갔다. 그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보리밥뿐이었으나 배도는
맛나게 먹으면서 반년을 그 집에서 지낸 뒤에 한 번은 갑자기 황흔에게 말했다.
“내게 필요하니 호로병 36개만 구해 주시오.”
황흔은 말하였다.
“열 개는 구할 수 있지만 원체 가난해서 그 모두는 구할 수 없습니다.”
배도는 말하였다.
“당신은 그저 찾아보십시오. 당신 집에 있을 것입니다.”
황흔은 온 집안을 두루 찾아보았다. 과연 36개를 찾아 그것을 뜰 위에 벌여 놓았다. 그러나 숫자는 맞지만 모두가 다 허물어진 것이었다. 황흔이 차례로 그 병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그것은 다 새롭고 완전한 것이었다. 배도는 그것들을 다 꼭 봉한 뒤에 황흔을 시켜 열어 보라 했다. 거기에는 돈과 비단 등이 가득 들어 있어 백만 금이나 되었다. 식자들은 그것은 배도의 분신(分身)이 다른 세계에서 받아 온 보시를 황흔에게 준 것이므로 황흔은 그것을 받고 큰 공덕이 될 것이라 했다.
1년이 지난 뒤에 배도가 황흔에게 하직하고 떠나려 하였으므로 황흔은 그를 위해 노자를 장만해 주었다. 이튿날 아침에 노자와 양식은 그대로 있고 배도는 간 곳이 없었는데, 한 달쯤 지나 배도가 다시 나타났다.
그 때 조구(潮溝)에 사는 주문수(朱文殊)라는 사람은 젊어서부터 불법을 믿었었는데, 배도는 그 집에 자주 왔었다. 문수는 배도에게 말했다.
“제자가 몸을 버려 고통을 없애려 하오니 구제하여 좋은 곳에 태어나 법려(法侶)가 되게 해 주십시오.”
배도가 잠자코 답하지 않고 있자, 문수는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불법에는 잠자코 있는 것이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배도는 오군(吳郡)으로 들어가다가 길에서 고기낚는 사람을 보고 고기 한 마리를 청했다. 그는 다 죽어 가는 고기 한 마리를 주었다. 배도가 그것을 받아 물 속으로 도로 던지니 고기는 씩씩하게 헤엄치며 갔다. 또 가다가 그물치는 사람을 보고 다시 고기 한 마리를 청했다. 그가 성을 내면서 주지 않았으므로 배도는 돌멩이 두 개를 집어 물 속에 던졌다. 조금 있다가 물소 두 마리가 그물 속에서 싸워 그물을 다 찢어 버리고 간 곳이 없어졌다. 배도는 가만히 숨어 송강(松江)으로 갔다.
배도는 물 속에서 일산을 펴서 그것을 타고 언덕에 도착했다. 그리고 회계(會稽)의 염현(炎縣)을 지나 천태산(天台山)에 올라갔다가 몇 달 뒤에 돌아왔다.
그 때
경사에 있는 외국 도인 가타(佉吒)는 경사의 장간사(長干寺)에 머물고 있었다. 승오(僧悟)라는 객승(客僧)이 가타와 한 방에서 자다가 가만히 창 틈으로 내다보았다. 가타가 그 절의 찰간(刹竿)을 들고 구름 속에 들어갔다가 그것을 가지고 도로 내려왔다. 승오는 감히 말은 못하고 다만 더욱 공경하고 우러렀다. 그 때 또 장노(張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나 음식을 그다지 먹지 않는데도 몸은 뚱뚱하고 항상 기뻐하면서 겨울에도 여름에도 늘 홑옷만 입고 있었다. 가타는 길에서 장노를 만나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동쪽에서 채돈(蔡㹠)을 보았고, 남쪽에서는 마생(馬生)을 방문했으며, 북쪽에서는 왕년(王年)을 만났고, 지금은 배도를 만나러 가는데, 여기서 자네를 만나는구나.”
장노는 이에 홰나무에 제(題)하고 노래했다.

아득한 천지 안에
그 빛남이 실로 환한데
무슨 일로 혼미한 사람
미혹해 스스로 재앙을 부르는가?

즐거운 곳에는 가는 사람 적은데
괴로운 길은 주머니 뒤지듯 한다.
송백(松柏)의 뜻을 못 가지고서
무엇 때문에 바람 서리 생각하는가?

한가히 자연(紫烟) 밖에 노닐고
긴 노래로 하늘 밖에 나간다.
맑은 영혼의 형상이 없는 바깥 세상에
아마 인연이 있는 고향 있으리.

세요(歲曜)는 한후(漢後)를 도왔고
진려(辰麗)는 은왕(殷王)을 도왔다.
이여(伊餘)는 두 신선 아닌데
그 자취를 구방(九方)에 숨겼다.

또한 떠도는 속자(俗子)를 보겠는데
눈에 닿는 것마다 슬픔뿐이다.
비요(肥謠)는 유념(有念)을 관찰하거니
어찌 금장(衿章)을 다했다 하리.
가타는 말하였다.
“전에 선생을 뵈오매 깊은 산골에서 참선할 때는 한번 앉아 1백 년을 지내면서 큰 자비와 훈훈한 마음에 고요한 생각과 바른 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게송을 적었다.

슬프구나, 세상 사람들이여,
손해와 이익만 따지는구나.
욕심을 부려 정신을 더럽히면서
거짓으로 기쁨을 내고 있다.

생각하면 이 철인(哲人)은
깊이 깨닫고 먼저 보았다.
몸을 물거품이라 생각하였고
형상을 번개로 보았다.

여러 번 그 명예를 더럽혔고
꿈에도 벼슬을 추하다 했다.
색(色)을 보고는 공(空)을 깨쳤고
사물을 보고는 변화를 슬퍼했다.

어지러움 버리고 유(有)를 끊었고
습기를 끊고
그리움 없앴으며
푸른 가지의 후미진 그늘에서
흰 대풀로 자리 삼았다.

밭이랑을 의지해 깨를 심었고
벼랑 곁에서 물을 마셨다.

슬기와 선정으로 헤아리고 비추어
묘함과 참됨을 날로 모였다.
자비는 더욱 늘어만 가고
깊은 생각은 게으름 없다.

이렇게 말한 뒤에 그들은 각기 떠났는데, 그 뒤에는 길이 이 두 사람을 다시 보지 못했다. 전하는 말에는 그들은 승오를 데리고 남악(南岳)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장노와 배도는 서로 만나 말이 매우 많았다 하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배도는 그 뒤에도 경사에 얼마 동안 머물렀으나 누가 청할 때는 가기도 하고 가지 않기도 했다. 그 때 남주(南州)에 진(陳)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집이 넉넉했다. 배도는 그 집에 가서 음식을 자주 먹었다. 그 때 그 도하(都下)에 또 다른 배도가 있다는 말이 들렸다. 진씨 부자 5인이, 이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가서 보았더니, 과연 자기 집의 배도와 형상이 똑같은 배도가 있었다. 진씨가 그를 위해 한 홉의 꿀과 생강과 손칼과 훈륙향(熏陸香)ㆍ수건 등을 차려 주었더니, 그 배도는 곧 꿀과 생강은 다 먹고 다른 것은 그대로 무릎 앞에 두었다. 그들은 혹시 자기 집의 배도인가 하고 두 사람을 거기 두고 다른 세 사람은 집에 돌아왔는데, 자기 집의 배도는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무릎 앞에도 향ㆍ손칼 등이 그대로 있었고, 다만 꿀과 생강을 먹지 않은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이에 배도는 진씨에게 말하였다.
“이 칼이 무디니 다시 갈아야 하겠다.”
거기 남아 있던 두 사람은 돌아와 말하였다.
“그 집의 배도는 영은사(靈隱寺)로 벌써 옮겨 갔다.”
그 집의 배도는 갑자기 진씨에게 황지(黃紙) 두 장을 청해 글을 적다가 다 적기 전에 그 종이를 접었다.
진씨는 물었다.
“상인(上人)은 무슨 증서를 쓰시렵니까?”
배도가 답하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자취를 끊었다.
그러나 저 도하의 배도는 여전히 산과 도회로 오가면서 신주(神呪)를 많이 외웠다. 그 때 유상(庾常)의 여종이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잡지 못하고 배도에게 물었다. 배도는 말하였다.
“저 금성(金城)의 강가의
빈 무덤 속에 죽어 있다.”
그래서 가 보았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그 때 공영자(孔寧子)는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서 청사(廳舍)에서 이질에 걸려 사람을 보내 배도를 청하였다. 배도는 주문을 마친 뒤에 고치기 어렵다고 하면서 네 명의 귀신이 다 큰 상처를 입은 것을 보았다고 했다. 영자는 울면서 말하였다.
“옛날 손은(孫恩)이 난리를 일으켜 우리 집은 군사들에게 다 파괴를 당하였고 양친과 숙부가 다 피살되었다.”
영자는 과연 죽었다.
또 제해(齊諧)의 장모 호(胡)씨가 병에 걸려 여러 가지로 치료했으나 낫지 않았다. 뒤에 제해는 스님들을 청해 재를 지내고 있었다. 승총(僧聰)이라는 도인이 배도를 청했다. 배도가 와서 한 번 주문을 외우니 병이 곧 나았다. 제해는 감복하고 배도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곧 그 전기를 지었으니, 지금까지의 기적은 대략 위에서 말한 것과 같았다.
원가(元嘉) 3년(426) 9월에 배도는 제해와 하직하고 갈 때 돈 만 냥을 주면서 재를 지내 달라고 부탁했다. 배도는 거기서 떠나 적산호(赤山湖)에 가서 이질에 걸려 죽었다. 제해는 그를 위해 재를 지내고 그 시체를 거두어 건업(建鄴)의 복주산(覆舟山)에 장사지냈다.
4년(427)에 오흥(吳興)의 소신(邵信)이란 사람은 불법의 독실한 신자로서 상한병(傷寒病)에 걸려 아무도 감히 고치려 하지 못했다. 소신은 슬피 울면서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생각했다. 갑자기 어떤 스님이 나타나 배도의 제자라 자칭하면서 말하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스승님이 곧 오실 것입니다.”
소신은 물었다.
“배도 스님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오신다고 합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오시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울 것이 있습니까?”
그가 옷 안에서 한 홉쯤 되는 가루약을 주면서 먹으라 하니, 소신은 그것을 먹고 병이 곧 나았다.
또 두승애(杜僧哀)라는 사람은 남쪽산 밑에 살았다. 일찍이 배도를 섬겼는데, 그 아들의 병이 위독하여 배도를 생각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이튿날 갑자기 배도가 나타나 이야기하는 것이 전과 같았으며 주문을 외우니 아이의 병이 곧 나았다.
5년(428) 3월 8일에 배도가 다시 제해의 집에 나타났다.
여도혜(呂道慧)는 이 말을 듣고 놀랐으며, 조천기(祚天期)ㆍ수구희(水丘熙)들도 모두 그를 보고 크게 놀라 곧 일어나 예배했다. 배도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금년에 큰 흉년이 들 것이니 모두들 부지런히 복업을 닦으시오. 법의(法意)라는 도인은 큰 덕이 있으니 그에게 가서 인사하고 옛 절을 수리해 세우면 화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대문 뒤에서 어떤 스님이 배도를 불렀다. 배도는 이들에게 하직을 고하면서 말하였다.
“빈도(賓道)는 지금 교광(交廣)으로 갑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떠났는데, 그 뒤로는 자취를 끊었다. 세상 사람들도 말하였다.
“때로는 혹 그를 본 사람이 있다 하나 그 사실이 확실하지 않으므로 전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송(宋)의 석현창(釋玄暢)
송촉(宋蜀)의 제후산(齊後山)의 석현창(釋玄暢)은, 성은 조(趙)씨이며, 하서(河西)의 금성(金城) 사람이다. 젊어서 가문이 오랑캐에게 멸망당하고 그 화가 현창에게 미쳐 왔다. 오랑캐 장수는 현창을 보자 부하를 제지시키면서 말하였다.
“이 아이는 그 안광(眼光)이 밖으로 쏘는 것을 보면 범상한 아이가 아니다.”
그래서 그 화를 면했다. 현창은 양주(凉州)로 가서 출가했다. 그 뒤에 오랑캐가 불법을 멸하고 많은 사문들을 해칠 때에도 현창은 달아날 수 있었다.
원가(元嘉) 22년(445) 5월 17일에 평성(平城)을 출발하여 대군(代郡)의 상곡(上谷)을 지나 동쪽으로 태행산(太行山)을 넘고 유주(幽州)와 기주(冀州)를 다 지나서 남방의 맹진(孟津)으로 가려 했다. 그의 손에는 오직 하나의 버들가지와 한 줄의 파만이 들려 있었다. 오랑캐들이 뒤를 쫓아 곧 잡히려 했을 때 그는 그 버들가지로 모래를 쳤다. 모래가 일어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사람도 말도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조금 있다가 모래가 가라앉자 오랑캐들은 다시 쫓아왔다. 현창은 이에 강 속에 몸을 던지고 파 잎을 콧구멍에 꽂아 숨을 쉬면서 물을 건너 8월 1일에 양주(楊州)에 도착했다.
그는 경률(經律)에 통달하였고 선정의 이치를 깊이 알았으며 길흉(吉凶)을 점쳐 모두 영험이 있었다. 송의 문제(文帝)는 그를 더욱 존중하여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뒤에
형주(荊州)의 장사사(長沙寺)에 있을 때는 손을 펴면 향이 나오고 손바닥에서 물이 나오는 등 그 신변을 헤아릴 수 없었다. 송나라 말년에는 배를 타고 멀리 성도(成都)로 가서 처음 대석사(大石寺)에 있을 때는 손수 금강밀적(金剛密迹) 등 16의 신상(神像)을 그렸다.
승명(昇明) 3년(479)에는 또 서계(西界)를 여행하면서 민산(垊山)을 유람했다. 이리하여 민산군(垊山郡)의 북부 광양현(廣陽縣)의 경계에서 제후산(齊後山)을 둘러보고는 드디어 거기서 목숨을 마칠 마음을 정했다. 이에 곧 바위를 의지해 골짜기 곁에 초막을 지었다. 그의 제자 법기(法期)는 어떤 신인(神人)이 말을 타고 푸른 홑옷을 입고 산을 한 바퀴 돌면서 절을 세울 자리를 찾는 것을 보았다. 건원(建元) 4월 23일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제흥사(齊興寺)라 했다. 이 때는 바로 제나라 태조가 하늘의 명을 받던 날이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만리 밖에서도 꼭 맞은 것이다.
그 때 부염(傅琰)은 성도(成都)를 다스리면서 현창의 덕을 우러러 스승으로 대우했다. 현창은 절을 지은 뒤에 부염에게 다음 글을 보냈다.
“빈도(貧道)는 형주(荊州)에서 여러 해를 살았으나 나이 늙고 병이 들어 인간의 시끄러움이 싫어졌습니다. 그 때문에 멀리 민산(岷山)에 의지하여 이 언덕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여기는 광양(廣陽)의 동쪽이요, 성(城)에서 천 보쯤의 거리입니다. 산은 구불구불 멀리 뻗어 나가고 봉우리는 중첩해 있습니다. 산골에는 네 개의 시내가 흐르고 다섯 봉우리가 벌여 있어 성곽을 안고 읍(邑)을 품었습니다. 세 방향을 둘러보면 산과 봉우리를 등에 졌고 9류(流)를 멀리 바라봅니다.
지난해 4월 23일에 공사를 시작해 마치고 지난 겨울에 이곳을 찾으니, 그 때는 바로 폐하께서 천자의 위(位)에 오르시던 날이었습니다. 대개 들으니,그 도가 태극(太極)에 짝하면 아름다운 상서가 스스로 나타나고, 그 덕이 2의(儀)와 같으면 신(神)의 감응이 반드시 나타난다 합니다. 그러므로 하락(河洛)에는 유주(有周)의 징조가 빛났고, 영석(靈石)에는 대진(大秦)의 징조가 나타났던 것이니, 가만히 생각하면, 이 산의 부험(符驗)이 어찌 제제(齊帝)의
신령스런 감응이 아니겠습니까? 단월님은 나라를 받드는 정(情)이 깊어 운(運)이 보이고 때를 증험있게 하여 마음에 잊을 수 없거니, 어찌 사실을 빠뜨리겠습니까?”
그리고 다음의 산찬(山贊) 1편(篇)을 지었다.

높고 높아라, 제후산이여,
깊고 미묘함에서 생겨났도다.
상서를 간직한 지 얼마나 오래던가.
제호(帝號)에 비로소 나타났도다.

산봉우리는 성인의 천하를 실었고
조짐은 아름다운 이름을 내렸도다.
뾰족한 산뿌리에는 구름이 평탄하고
높은 봉우리에는 놀이 평온하다

바위를 본받아 절을 생각하고
재[嶺]를 헤아려 경(經)을 엮으며,
공사를 시작하던 날에
자정(紫庭)에 용이 날았다.
도는 벗들의 두 가지 위의요
천하 사람은 그 마음 같았거니
영원한 그 천자의 자리여
산의 그 덕은 신령함을 표했다.

부염은 이 글의 뜻을 천자에게 아뢰고 나라에서는 조칙을 내려 백호(百戶)를 떼어 그 봉급에 충당하게 했다.
뒤에 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고 사도(司徒) 문선왕(文宣王)의 칙령으로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다가 중도에 병을 얻어 그대로 서울에 도착했다. 대중의 신망 속에 영근사(靈根寺)에 머물다가 조금 뒤에 죽으니, 나이는 69세였다.[이상 여섯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잡속환술(雜俗幻術)
진(晋)나라 조후(趙侯)는 젊어서부터 여러 가지 주술(呪術)을 좋아하였다. 얼굴은 여위고 추하며 키는 몇 자에 지나지 않았으며, 동이에 물을 떠다 놓고 눈을 감고 앉아 주문을 외우면 물고기와 용들이 당장 나타났다.
조후의 집의 쌀을 쥐들이 훔쳐 먹었다. 조후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칼을 들어 땅에 금을 그어 감옥을 만들고는 사방 문을 열고 등으로 향해 휘파람을 부니, 쥐들이 모두 모여 왔다. 이에 주술을 부렸다.
“쌀을 먹지 않은 놈은 그대로 지나가라.”
그랬더니, 겨우 10여 마리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배를 가르고 보니 쌀이 가득 들어 있었다.
또 한번은 맨발이라 나막신이 필요하여 머리를 치켜들고 가만히 읊조리니 나막신 두 짝이 저절로 내려왔다.
또 그 얼굴이 추하다고 웃는 자가 있으면 곧 거짓으로 술잔을 차려 놓고, 사람들이 입을 대면 곧 코가 막혀 숨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했다. 술잔을 땅에 두면 아무도 들지 못했다.
또 영강(永康)에 기석산(騎石山)이 있는데 그 산 위에 돌사람이 돌말을 타고 있었다. 조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사람과 말의 머리가
한꺼번에 떨어졌는데, 지금도 그 산에 그대로 있다.[이 한 가지 증험은 『이원(異苑)』에 나온다.]
『포박자(抱朴子)』에서 말하였다.
“옛날 오(吳)나라에서 하(賀) 장군을 보내어 산적(山賊)을 쳤다. 적 중에 주술을 잘 부리는 자가 있어 싸울 때마다 관군(官軍)들의 칼이 도무지 빠지지 않고 활을 쏘면 화살이 다 돌아와 으레 싸움에 졌다. 하 장군은 이치를 알고 생각이 있어 이에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금(金)에 칼날이 있으면 주술을 부릴 수 있고, 벌레에 독이 있으면 주술을 부릴 수 있다고 한다. 만일 칼과 독이 없으면 주술을 부릴 수 없을 것이다. 적이 반드시 우리 군사에게 주술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칼이 있기 때문이니, 우리에게 칼이 없으면 적은 우리에게 주술을 부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곧 나무 몽둥이를 많이 만들고 용맹과 힘이 있는 정예로운 군사 5천 명을 뽑아 선봉에 세워 모두 몽둥이를 들게 했다. 저 산적들은 주술에 능한 그것만을 믿고 끝내 견고한 수비를 하지 않았다. 이에 관군이 몽둥이만으로 공격하니, 그 주술을 부릴 수 없어 몽둥이로 때려 죽인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하였다.
“영녕(永寧) 원년에 서남이(西南夷) 선국왕(禪國王)이 천자의 궁중에 와서 음악과 요술쟁이[幻人]를 바쳤다. 요술쟁이는 변화를 부려 불을 토하고 스스로 사지를 갈라 소와 말의 머리로 바꾸었다. 이듬해 원회(元會)에 궁정(宮庭)에서 그 요술을 부려 안제(安帝)와 대신들은 그것을 구경하고 매우 신기하다 했다.”
『후위서(後魏書)』에서 말하였다.
“열은국(悅殷國)의 정군(貞君)이 9월에 사신을 보내어 조회(朝會)를 드리고, 또 환인을 보내었다. 그 환인이 사람의 목을 베어 혈맥을 끊고 사람의 머리뼈를 때려 부수니, 피가 줄줄 흘러 여러 되가 되었다. 풀을 그의 입에 넣어 씹어 삼키게 하니, 피가 곧 멎었다. 세조(世祖)는 이것을 거짓이라 하여 그를 사형수(死刑囚)를 가지고 시험하였더니 다 영험이 있었다. 또 장마가 지게 하고 사나운 바람을 일으키며, 큰 눈을 내리게 하고 사나운 못물을 건너가기도 했다.”
최홍(崔鴻)의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북량록(北凉錄)」에서 말하였다.
“현시(玄始) 14년
7월에 서역(西域)에서 칼을 삼키고 불을 먹는 요술부리는 사람을 바쳤다.”
또 『서경잡기(西京雜記)』에서 말하였다.
“국도룡(麴道龍)은 요술을 잘 부렸다. 동해(東海) 사람 황공(黃公)은 젊을 때 능히 뱀을 부리고 호랑이를 부리며, 서서는 구름과 안개를 일으키고 앉아서는 산과 강을 만들었다.
또 진(晋)나라 영가(永嘉) 때에는 천축(天竺)의 오랑캐가 강남(江南)에 왔다. 그 사람은 갖은 요술을 다 부려 혀를 끊었다 이었다 하고, 불을 토했다 삼켰다 했다. 사람들이 모여 구경할 때 그는 혀를 끊으려고 먼저 사람들에게 혀를 내어 보인 뒤에 칼로 그것을 끊어 흐르는 피가 땅을 덮으면, 끊어진 토막을 그릇에 담아 사람들에게 두루 보이고 또 입 안에 있는 반 조각난 혀도 두루 다 보인 뒤에 조금 있다가 다시 그것을 붙이고 또 본래와 같음을 사람들에게 보였으니, 참으로 혀가 끊어졌다 이어졌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또 비단을 사람에게 주어 각각 한 쪽씩 잡게 하여 그것을 끊어 두 동강을 낸 뒤에, 다시 맞대고 주술을 부리면 그것은 다시 이어져 본래와 다름없이 하나가 되었다.
또 불을 토할 때는 먼저 그릇에 약을 담고 그 한 조각을 기장엿에 묻혀 두세 번 호흡한 뒤에 입을 벌리면 입안에 불이 가득 차 있고, 불에 가까이 가서 태우면 곧 불이 나왔다. 그 불 속에 종이나 실노끈을 던지면 그것이 다 타서 없어지는 것을 사람들은 다 보았다. 그리고 그 재를 헤치고 다시 들어내면 그것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또 『영귀지(靈鬼志)』에서 말하였다.
“태원(太元) 12년에 외국의 도인이 왔다. 그는 능히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하며 구슬과 금ㆍ은 등을 토해 내었다. 그리고 자신이 배운 그 요술의 스승은 속인이요 사문이 아니라 했다. 그는 길을 가다가 어떤 짐꾼이 한 되들이쯤 되는 조그만
농을 지고 가는 것을 보고 그 짐꾼에게 말하였다.
‘나는 걸어가기에 매우 피로하다. 나를 좀 지고 가라.’
짐꾼은 매우 괴상히 여겨 그를 미친 사람이라 생각하고 말하였다.
‘좋을 대로 하라. 그러나 그대를 어떻게 지겠는가?’
그는 말하였다.
‘만일 그대가 허락한다면 나는 그 농 안에 들어가리라.’
짐꾼이 더욱 괴이히 여기면서 농을 내려놓으니 그는 농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농은 더 커지지도 않고 사람도 작아지지 않았으며, 그것을 져 보아도 무거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몇 십 리를 가다가 어느 나무 밑에서 짐꾼은 점심을 먹기 위해 그를 불러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는 먹을 것이 있다고 하면서 나오지 않고, 그 농 안에서 음식과 그릇을 내고 갖가지 맛난 반찬을 죽 벌여 놓고는 도리어 짐꾼을 불러 같이 먹자 했다. 반쯤도 먹기 전에 그는 짐꾼을 보고 말하였다.
‘나는 내 아내와 같이 먹겠다.’
그리고는 곧 입에서 한 여자를 토해 내었다. 나이는 20세쯤이요, 옷과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들은 같이 먹다가 아직 다 먹기 전에 그 남편은 누웠다.
부인은 짐꾼에게 말하였다.
‘내게 바깥 서방이 있는데 지금 와서 같이 먹으려 합니다. 이 남편이 깨더라도 당신은 이런 말을 마시오.’
부인은 곧 입 안에서 한 젊은 사내를 토해 내어 음식을 함께 먹었다. 이렇게 농 안에 세 사람이 있었는데도 너르거나 비좁은 일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그 남편이 움직이면서 깨려 하자 여자의 바깥 서방은 떠났다. 그는 짐꾼에게 말하였다.
‘이제 가십시오.’
그는 곧 여자를 입 안에 넣고 다음에는 음식과 그릇을 다 입 안에 넣었다.
이 사람이 여기 왔을 때 이 나라에 큰 부자가 있었다. 재산은 수만이나 성질이 인색하였다. 이 사람은 짐꾼에게 말하였다.
‘내가 당신을 위해 저 사람의 그 인색한 성질을 고쳐 주리다.’
그는 곧 그 집에 갔다. 그 집에는 주인이 매우 사랑하는 좋은 말이 있어 기둥에 매어 두었는데 갑자기 간 곳이 없어 아무리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튿날 그 말이 닷 되들이의 독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주인은 독을 부수려 했으나 끝내 되지 않았다. 그는 주인에게 말했다.
‘백 사람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여 저 궁핍한 사람들에게 보시하면 그 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은 급히 음식을 만들어
그렇게 했다. 그러자 말은 도로 기둥에 매여 있었다. 또 이튿날에는 집에 있던 그의 늙은 부모가 갑자기 보이지 않아 온 집안이 모두 황급히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다가 갑자기 그 부모가 깊은 항아리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구출할 방법을 알지 못하여 다시 그에게 가서 물었다. 그는 대답하였다.
‘천 사람이 먹을 음식을 만들어 빈궁한 사람들에게 보시하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이 그렇게 하였더니, 그 부모는 평상 위에 앉아 있었다.”
『유명록(幽冥錄)』에서 말하였다.
“안개(安開)는 안성(安城)의 무당으로서 요술에 능하여 늘 신사(神祠)에 갔다. 한번은 북을 차고 삼생(三牲)을 주관할 때, 나무를 쌓고 불을 붙여 불꽃이 왕성할 때 띠를 묶고 불 속에 들어갔다. 장지(章紙)는 모두 탔으나 안개의 몸과 옷은 처음 그대로였다. 그래서 왕은 그를 의심했다. 그는 강주(江州)로 왕을 모시고 가게 되었다. 그는 거짓으로 왕을 위해 머리의 비녀[簪]를 씻고 연잎으로 모자를 만들었는데, 그가 와서 앉은 뒤에야 연잎이 보였으므로 그 자리의 사람들이 다 놀랐다.”
『이원(異苑)』에서 말하였다.
“고양(高陽) 신성(新城)의 수민(叟民)은 진(晋)나라 함녕(咸寧) 때에 음사(淫祠)의 요술을 위해 백관(百官)을 배치해 두었다. 또 물에 스스로를 비쳐 보고는 그 백관들의 의관이 정연함을 나타내어 백성들을 현혹시키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권위로써 그를 잡아 죽였다.”
또 『이원(異苑)』에서 말하였다.
“상우(上虞)의 손계(孫溪)의 종은 온갖 요술을 부렸다. 원가(元嘉) 초년(424)에 주인을 배반하고 건안(建安)에 들어갔다가 뒤에 민간(民間)에 나와서는 오랜 수벽(瘦癖)을 고칠 때는 그 배 안에 바로 들어가 아프지 않게 했다. 또 사람의 바람이 든 머리를 고칠 때는 흐르는 피가 질펀하면 그 자리를 불어 곧 멎게 하고, 찌르거나 곧 싸매었다. 호랑이에게 물리거나 뱀에게 물리는 등 여러 독에 걸려 죽게 된 것도 주술을 부려 다 낫게 했다. 하늘을 향해 길게 휘파람 불면 뭇 참새들이 모여 오며, 밤에 모기나 등에에게 주술을 부리면 그것들은 다 그 곁에서 죽었다.
13년(436)에 장산(長山)에서 그
본 주인에게 붙들려 주인은 그 주술로 반드시 배반할 것을 알고 곧 여러 겹으로 결박했는데, 어느새 간 곳이 없었다.”
『열자(列子)』에서 말하였다.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에 서극국(西極國)에서 어떤 환인(幻人)이 왔다. 그는 물 속에 들어가 금과 돌을 관통하며 산을 뒤엎고 성(城)을 옮기며 허공을 타도 떨어지지 않고, 물건에 부딪쳐도 걸리지 않는 등 천만 변화가 그 끝이 없었다. 물건의 형상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도 바뀌게 했다.[사람으로 하여금 전에 알던 것을 잠깐 잊게 했다.] 그래서 목왕은 그를 신처럼 공경했다.”
『환담신론(桓譚新論)』에서 말하였다.
“방사(方士) 동중군(董仲君)은 어떤 죄를 범하고 옥에 갇히자, 거짓으로 죽어 눈이 움푹 들어가고 벌레가 들끓었다. 그래서 요술이란 무엇이나 다 되는 줄을 알았다. 또 코로 불고 입으로 노래하며 혀를 내고 눈썹을 세우며 눈을 움직였다.
또 형주(荊州)에는 코로 물을 마시는 오랑캐가 있고, 남역(南域)에는 머리가 날아다니는 오랑캐가 있으니, 이것은 요술이 아니다.”
『공위칠인(孔煒七引)』에서 말하였다.
“요술을 부리는 사람은 때를 따라 부린다. 즉 외씨를 심고 소채씨를 뿌려 금시에 8자나 자라게 하며, 향을 던져 더러운 냄새를 쫓고 금을 팔고 은을 팔며, 하늘을 가리켜 구름과 안개를 일으키고 땅을 그어 강과 바다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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