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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06 법원주림(法苑珠林) 63권

by Kay/케이 2024.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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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63

 

법원주림 제63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71. 기우편(祈雨篇)[여기에는 4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기제부(祈祭部) 강우부(降雨部)
하해부(河海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성인의 도는 허적(虛寂)하기 때문에 뚜렷한 감응은 방위가 없고, 그 방위 없는 감응이기 때문에 어디에고 감응하는 것이다. 요즈음 음양(陰陽)이 고르지 못해 가뭄이 계속되어 오랫동안 북성(北城)에서 기도했으나 서교(西郊)에는 비가 응하지 않는다. 성상(聖上)께서는 백성들의 실업을 걱정하고 농사의 흉년을 염려하시어 음식을 줄여 가난을 구제하며 새벽에 일어나 옷을 입고 저녁 늦게 진지를 드시니, 그 정성은 상하에 미치고 그 옥백(玉帛)은 산천에 두루하신다. 그러나 신령스런 물은 적시지 못하고 기도하여도 구름은 쌓이지 않는다.
생각하면 슬기의 횃불은 빛을 감추나 비추지 않는 어두움이 없고, 신령스런 공은 헤어리기 어려운지라 느낌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러러 3보께 의지하여 1승(乘)을 연설하며 미묘한 말을 읽고 여기 큰 복을 심는 것이다. 원컨대 법의 가르침이 비로소 열리고 인자한 구름이 멀리 퍼지며, 현묘한 말이 크게 빛나고 큰 은혜가 멀리 비쳐 아름다운 벼는 들판에 연이어 빼어나고 상서로운 과일은 온 숲에 두루 열리소서.
옷은 오직 8잠(蠶)을 입고 음식은 반드시 7확(穫)을 의지하며, 세계는 모두 중향성(重香城)과 같고 중생은 완연히 안양계(安養界)와 같아서 이루어지지 않는 청이 없고 기도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으며, 모두 이 선정의 물에 목욕하고 성스런 지혜의 근원을 계승하여 이 애욕의 그물을 찢고 유무(有無)의 경계를 뛰어나게 하소서.


(2) 기제부(祈祭部)
『대운륜청우경(大雲輪請雨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큰비를 청하거나 비가 그치기를 청하려거든 너희들은 자세히 들으라. 그법은 이러하니라. 즉 비를 청하는 사람은 일체 중생에 대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8계(戒)를 받은 뒤에 빈 땅에 푸른 장막을 치고 열 개의 푸른 번기를 달고 그 자리를 깨끗이 소제하여 쇠똥을 바르고 주문 외우는 스님을 청해 푸른 좌석에 앉게 하라. 8계를 받은 재가인이나 계를 지키는 비구는 다 깨끗한 옷을 입고 좋은 향을 피우며 또 가루향을 법사 자리에 흩고 세 종류의 깨끗한 음식을 먹어야 하나니, 이른바 우유와 낙(酪)과 또 현미이다.
이 『대운륜경』을 읽을 때에는 동쪽을 향해 앉아 밤낮 지심으로 읽는 소리를 끊이지 않게 하여 일체 부처님께 공양하라. 또 깨끗한 물을 새 병에 넣어 4유(維)에 두고 그 재력에 따라 갖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모든 용들에게 공양하라. 또 꽃과 향을 도량의 사면에 뿌리고 또 각각 순수하고 새롭고 깨끗한 쇠똥 즙으로 용의 형상을 그려라.[『야사법사전(耶舍法師傳)』에서 “서역의 풍속에는 소는 능히 밭을 갈아 만물을 나게 하기 때문에 쇠똥을 깨끗하다 하여 범천과 제석천과 소를 위해 다 사당을 짓고 거기에 제사한다”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그 속정(俗情)을 따르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깨끗하다 하신 것이다.]
동쪽으로는 법좌에서 3주(肘)쯤 떨어진 곳에 한 몸에 머리가 셋인 용과 그 권속을 그리고, 남쪽으로 법좌에서 5주쯤 떨어진 곳에 한 몸에 머리가 다섯인 용과 그 권속을 그리고, 서쪽으로는 법좌에서 7주쯤 떨어진 곳에 한 몸에 머리가 일곱인 용과 그 권속을 그리고, 북쪽으로는 법좌에서 9주쯤 떨어진 곳에 한 몸에 머리가 아홉인 용과 그 권속을 그려라.
그 주사(呪師)는 몸을 잘 단속하되, 깨끗한 물이나 흰 재[灾]에 주문을 외워 마음에
기억하고 주거를 제한하여 한 걸음이나 혹은 여러 걸음 이내로 제한하고, 물이나 재로 출입금지 구역을 제한하며, 혹은 실에 주문을 외워 그것을 목이나 손이나 혹은 발에 매며, 주문을 외운 물이나 재를 정수리나 혹은 이마에 뿌리고 생각하였다.
‘악심이 있는 자는 이 경계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 주사는 일체 중생에 대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일체 부처님과 보살들의 사랑의 가호를 청하며 이 공덕을 회향하여 모든 용에게 나누어 주라.
비가 오지 않아 이 경을 외울 때에는 하루, 이틀, 내지 7일 동안 송경을 끊지 않고 위의 법대로 하면 반드시 비가 내리지만 바다의 조수는 그 한계를 넘지 않게 한다. 만일 이대로 원만히 수행하면 비가 안 올 리 없지만 다만 믿음과 정성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또 『대운륜청우경약요(大雲輪請雨經略要)』에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용왕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옛날에 대비운생(大悲雲生)여래께 들은 다라니이다. 과거의 여러 부처님께서 이미 위신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도 지금 그에 따라 말하리라. 이것은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가엾이 여기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오는 세상에 가뭄이 들면 비를 오게 하고 홍수가 날 때는 비를 그치게 하며 병으로 죽거나 험난할 때는 그것도 모두 멸할 것이다. 또 모든 용들을 모을 수 있고, 모든 하늘을 기쁘게 하며 일체 악마의 경계를 부수고 중생들을 다 안락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곧 다음 주문을 말씀하셨다.

다냐타마하야 나 바바 살니 실리뎨수라기미 디리다바가라마바야라싱하
怛絰他摩訶若引那引婆婆引薩尼一失梨帝殊羅攲彌二地履荼毘迦囉磨鉢耶囉僧呵
다녜
바라마비라 니마라구나계투소라야바라비 비마람가야사티 바하라
怛禰三波羅摩避囉闍四尼摩羅求那雞鬪蘇栗耶波羅毘五毘摩嵐伽耶師▼(口+致)六婆呵囉
바하라
婆呵囉七
나모야나 사가라비로자나야 다타가다야 나모사바빌타 모디사디비하
南無若那一沙伽羅毘盧遮那耶二多他竭多耶三南無薩婆佛陀四菩提薩坻毘呵五
또 주문을 말씀하셨다.

다타다타 뎨티뎨티 투주투주 마하마니 마구타 모림다라시비사 우류바
怛吒怛吒一帝致帝致二鬪晝鬪晝三摩訶摩尼四摩俱吒五毛林達羅尸比沙六于留必
나 사마라타 뎨리가라다나디사타남 바아라타라사디나 바리사타이하염
那七三磨羅他八帝利曷囉怛那地師吒南九跋折囉陀羅薩坻那十跋利沙他伊呵閻
부뎨디피 사바하
浮提地畢 莎 呵十一
아바하야매 사바나감 몌뎨라디디나 모디디다부바감매나 나라나라 녜리
阿婆何夜寐一薩婆那鉗二迷帝羅質坻那三菩提質哆弗婆鉗寐那四那羅那羅五禰梨
녜리 노로노로 사바하
禰梨六奴盧奴盧七莎 呵八

또 주문을 말씀하셨다.

석가라살디나 바라바라사디 마하나가 이하염부뎨비 사바하
釋迦羅薩坻那一鉢羅婆羅沙地二摩訶那伽三伊呵閻浮提卑 莎 呵四

또 주문을 말씀하셨다.

아사타마가 살디나 바라바리사타 마하나가 이하염부뎨비 사바하
阿師吒摩迦一薩坻那二鉢囉婆利沙他三摩呵那伽四伊呵閻浮提卑 莎 呵五

또 『대방등대운경(大方等大雲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국토에서
비를 빌고자 하면 육재일(六齋日)에 그 국왕은 마땅히 깨끗이 목욕하고 3보께 공양하며 용왕의 이름을 존중하고 찬탄하며 불러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4대(大)의 성질은 변하게 할 수는 있어도 이 주문을 외워 비가 오지 않는 수는 없느니라.”
이 경에 있는 신주(神呪)는 3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다 함께 말씀하신 것이니라.

우구례 모구례 두디 비두디 타니갈디타나래디 타나싱 탑혜
郁究隷 牟究隷 頭坻 比頭坻 陀尼羯坻 陀那賴坻 陀那僧 塔兮

(3) 강우부(降雨部)
『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에서 말하였다.
“하늘과 용은 다 비를 내린다. 무엇으로 분별하는가? 하늘은 안개 같은 가는 비를 내리고, 용은 굵은 비를 내린다. 또 아수라가 하늘과 싸울 때에도 비를 내린다. 거기 두 종류가 있으니, 기뻐하는 비와 성내는 비다. 비가 곱게 알맞게 내리면 이것은 기뻐하는 비요, 천둥과 번개와 벼락을 함께하면 이것은 성내는 비다.”[이 이외에 구름비와 번개, 천둥 등은 다 앞의 「일월편(日月篇)」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증일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용의 세계가 불가사의한 것과 같이 세간은 불가사의하느니라.’
‘어떻게 이 비가 용의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용의 입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용의 눈이나 귀나 코ㆍ몸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런 것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용의 생각에서 나올 뿐이다. 즉 악을 생각해도 비가 오고, 선을 생각해도 비가 오며, 또한 근본으로 말미암아서도 이 비가 내리는 것이다.
수미산 중턱에 대력(大力)이라는 하늘이 있다. 그것은 중생의 생각을 다 알고 비를 내린다. 그러나 그 비도 저 하늘의 입이나 눈ㆍ귀ㆍ코 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다 그 신력에 의해 비가 내리는 것이니라.’”
또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불자야, 비유하면 용의 마음에 따라
비가 내리는 것으로서 비는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요 밖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닌 것처럼 여래의 경계도 이와 같아서 마음의 생각을 따라 생각생각에 무량 불가사의한 지혜를 내지만 이 지혜는 나오는 곳이 없느니라.”
또 말씀하셨다.
“‘일체의 바닷물을 다 용왕의 마음의 원(願)이 일으키는 것처럼 여래의 지혜도 이와 같아서 그것은 다 큰 원력에서 생기는 것이니라.
불자야, 여래의 지혜의 바다는 무량 무변하여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조그만 비유로 말할 것이니, 너희는 자세히 들으라.
불자야, 이 염부제 안에서 흘러나오는 2,500의 강물은 다 바다로 들어가고, 구야니(俱耶尼) 안에서 흘러나오는 5천의 강물도 다 바다로 들어가며, 불파제(弗婆提) 안에서 흘러나오는 8,400의 강물도 다 바다로 들어가고, 울단월(鬱單越) 안에서 흘러나오는 1만의 강물도 다 바다로 들어간다. 불자야, 이와 같이 이 4천하 안에 있는 2만 5,900의 강물은 다 바다로 들어간다. 불자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물이 많으냐?’
‘예, 매우 많습니다.’
‘불자야, 그러나 10의 광명(光明) 용왕이 바다에 내리는 빗물은 다 앞의 물보다 많고, 1백의 광명 용왕이 바다에 내리는 빗물은 또 앞의 물보다 많으니라. 이와 같이 80억 용왕이 각각 바다에 내리는 빗물은 다 앞의 물보다 더욱 많지만 사가라용왕의 태자 불생(佛生)이 바다에 내리는 빗물은 또 앞의 물보다 더 많으니라.
불자야, 10의 광명 용왕이 사는 못물로서
바다에 흘러 들어가는 것은 앞의 물보다 많고, 1백의 광명 용왕이 사는 못물로서 바다에 흘러 들어가는 것은 앞의 물보다 더 많으며, 이렇게 내지 사가라용왕의 태자가 사는 못물이 바다에 흘러 들어가는 것은 앞의 물보다 더 많으니라.
불자야, 저 80억 용왕과 내지 사가라용왕의 태자가 바다에 내리는 빗물과 그가 사는 못물도 다 사가라용왕이 비를 내린 바닷물과 사가라용왕이 사는 못에서 솟아나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물에 비하면 이것이 배나 더 많으며, 이것의 솟는 물결과 흐르는 물은 푸른 유리빛으로 큰 바다에 차 있어서 그 솟아나는 것이 때가 있기 때문에 바다의 조수는 언제나 그 때를 잃지 않느니라.
불자야, 이와 같이 큰 바다의 물은 무량하고 보물도 무량하며, 중생도 무량하고 대지도 무량하다. 불자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큰 바다의 물이 무량하냐?’
‘예, 실로 그 물은 깊고 넓어 비유할 수 없습니다.’
‘불자야, 이와 같이 바닷물은 깊고 넓어 무량하더라도 여래의 무량한 지혜 바다에 비하면 백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내지 비유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다만 그 응화(應化)에 따라 비유할 뿐이니라.’”

(4) 하해부(河海部)
『신바사론(新婆沙論)』에서 말하였다.
“이 섬부주(贍部洲) 안에 있는 사대하(四大河)는 그 권속이 각각 넷으로서 그 방면을 따라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이른바 이 섬부주 안에 큰 못이 있으니 이름은 무열뇌(無熱惱)이다. 이것이 흘러 나가서 된 사대하는, 첫째는 긍가(殑伽)요, 둘째는 신도(信度)요, 셋째는 박추(縛芻)요, 넷째는 사다(私多)이다. 처음의 긍가하는 무열뇌지의 동쪽에 있는 금코끼리의 입에서 나와 그 못을 오른쪽으로 한 번 돌아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다음의 신도하는 무열뇌지의 남쪽에 있는 은소의 입에서 나와 그 못을 오른쪽으로 한 번 돌고 남해로 들어간다. 다음의 박추하는 무열뇌지의 북쪽에 있는 유리말의 입에서 나와 그 못을 오른쪽으로 한 번 돌고 서해로 들어간다. 다음의 사다하는 무열뇌지의 북쪽에 있는 파지가사자(頗胝迦師子)의 입에서 나와 그 못을 오른쪽으로 한 번 돌고 북해로 들어간다.
긍가하에 네 권속이 있으니, 첫째는 염모나(閻母那)요, 둘째는 살락유(薩洛瑜)요, 셋째는 아씨라벌저(阿氏羅筏底)요, 넷째는 막혜(莫醯)이다. 신도하에도 네 권속이 있으니, 첫째는 비파사(毘★奢)요, 둘째는 알라벌저(謁羅筏底)요, 셋째는 설저다로(設咀荼盧)요, 넷째는 비저사다(毘咀娑多)이다. 박추하에도 네 권속이 있으니, 첫째는 벌자나(筏刺拏)요, 둘째는 폐저자니(吠咀刺尼)요, 셋째는 방사(防奢)요, 넷째는 굴민바(屈愍婆)이다. 사다하에도 네 권속이 있으니, 첫째는 살리(薩梨)요, 둘째는 피마(避魔)요, 셋째는 날지(捺地)요, 넷째는 전광(電光)이다.
이렇게 큰 이름만 말했지만 사대하에는 각각 5백의 권속이 있어 모두 합하면 2천 사하가 각각 그 방면을 따라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그런데 이런 사대하가 아직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혹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령 어떤 사람이 신력이나 주문으로 성제현관(聖帝現觀)에 들지 못하게 하려 해도 그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니라.”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큰 바다에 8대 불가사의가 있는 것과 같다. 그 여덟이란, 첫째는 차츰 더 깊어가는 것이요, 둘째는 깊어서 그 밑바닥에 닿기 어려움이며, 셋째는 동일한 짠맛이요, 넷째는 조수가
한계를 넘지 않음이며, 다섯째는 갖가지 보배가 있음이고, 여섯째는 몸이 큰 중생이 거기 사는 것이며, 일곱째는 시체를 잠재우지 않는 것이고, 여덟째는 모든 흐름과 큰비가 와도 불지도 줄지도 않는 것이다.”
또 『금강삼매불괴불멸경(金剛三昧不壞不滅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아, 알아라. 큰 아뇩지(阿耨池)는 사대하(四大河)를 내고, 이 사대하는 나뉘어 팔하(八河)가 되며, 염부제의 모든 흐름이 다 큰 바다로 돌아간다. 옥초산(沃焦山) 때문에 큰 바다는 불지 않고, 금강륜(金剛輪) 때문에 큰 바다는 줄지도 않는다. 이 금강륜이 수시로 돌기 때문에 큰 바닷물이 동일한 짠맛이다.”
또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야, 긍가하(殑伽河)에는 일곱 종류의 중생이 있다. 첫째는 항상 빠져 있는 것이요, 둘째는 잠깐 나왔다가 도로 빠지는 것이며, 셋째는 나와서는 그대로 있는 것이요, 넷째는 나와서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며, 다섯째는 둘러보다가는 가는 것이요, 여섯째는 갔다가는 다시 멈추는 것이며, 일곱째는 물과 뭍으로 나다니는 것이다.
항상 빠져 있다는 것은 이른바 큰 고기이니, 그것은 큰 악업을 짓고 몸이 무거워 깊은 데 있기 때문에 항상 빠져 있다는 것이다. 잠깐 나왔다가 도로 빠진다는 것은, 이른바 큰 고기로서 이런 것은 악업을 지었기 때문에 몸은 무거우나 얕은 데 살면서 잠깐 광명을 보고, 광명으로 인해 나왔다가 몸이 무겁기 때문에 다시 빠진다는 것이다. 나와서 머문다는 것은, 이른바 저미어(抵彌魚)로서 얕은 물에 살면서 광명을 보기 때문에 나와서 머문다는 것이다. 두루 사방을 관찰한다는 것은, 이른바 착어(錯魚)로서 먹이를 구하기 위해 사방을 두루 본다는 것이다. 보고 간다는 것은, 이른바 착어는 멀리서 다른 물건을 보고 저것은 먹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빨리 가서 먹기 때문에 보고는 간다는 것이다. 가서 머문다는 것은, 이른바 착어는 가서 먹을 것을 먹고는 곧 머물기 때문에 가서 다시 머문다는 것이다.
물과 뭍으로 나다닌다는 것은, 이른바 거북이다.”[일곱 종류의 중생에 비유한 것은 경전과 같으므로 번거롭게 다 적지 않는다.]
게송으로 말하였다.

현묘한 말[言]이 처음 열려
구름과 안개가 하늘에 올라
많이 모여 밑으로 내리 퍼져
소나기로써 산천에 두루한다.

모든 풀은 다 자라 우거지고
오곡(五穀)은 논밭에서 다 익거니
자비와 복의 힘이 아니면
어찌 풍년을 즐거워하랴?

감응연(感應緣)[대략 스물두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진(秦)의 중숙현(中宿縣) 관정(觀亭)의 수신(水神)
진(秦)의 단양현(丹陽縣) 호수 곁에 매고신(梅姑神)이 있음
한(漢)의 야랑돈(夜郞豚) 수축왕(水竺王)의 사당에 죽절신(竹節神) 이 있음
한(漢)의 중평(中平) 연간에 강물 안에 있는 물여우가 모래를 머금어 사람을 쏨
한(漢)의 영창(永昌) 때 불위현(不韋縣)에 금수(禁水)의 독기(毒氣) 가 있음
태산(太山)의 동쪽에 있는 예천(澧泉)의 물을 마시면 신령(神靈)이 있음
두 화산(華山)이 다다른 황하(黃河)에 신패(神牌)가 있어 흐름을 가 름
황제(黃帝) 때 적장(赤將) 자여(子𨏐)는 바람과 비를 따라 오르내림
신농(神農)씨 때의 적송자(赤松子)는 우사(雨師)로서 물을 마시고 불 에 들어감
한(漢)의 사문 천길(千吉)은 비를 빌었는데 손책(孫策)이 시기하여 죽이려다가 괴변을 당함
한(漢)의 사문 축담개(竺曇蓋)는 비를 빌어 영험이 있음
진(晋)의 사문 승군(僧群)은 산에 숨어 신의 감응으로 물을 마시고 배 고프지 않았음
진(晋)의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은 지팡이로 땅을 파 샘물이 솟아남
진(晋)의 사문 우법란(于法蘭)은 마른 시내에 맑은 물을 흐르게 함
진(晋)의 사문 섭공(涉公)은 주문으로 용을 발우 안에 내려오게 함
진(晋)의 사문 불도징(佛圖澄)이 비를 빌 때, 흰 용 두 마리가 나타남
진(晋)의 사문 담마라찰(曇摩羅刹)은 주문으로 마른 물을 다시 흐르 게 함

송(宋)의 사문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는 비를 빌어 곧 비가 내리게 함
제(齊)의 사문 담초(曇超)는 어떤 신(神)의 청을 받고 비를 내리게 함
양(梁)의 안국사(安國寺)의 서상(瑞像)이 빛을 놓은 곳에 샘물이 솟 음
당(唐)의 사문 공장(空藏)은 비를 빌어 영험이 있음
당(唐)의 사문 혜선(惠璿)은 산에 살 때 물이 없었는데 신(神)의 감응 으로 물을 얻음

진(秦)의 중숙현(中宿縣) 관정(觀亭)의 수신(水神)
진(秦)나라 때, 중숙현(中宿縣) 천리수(千里水)의 관정(觀亭)에 강신(江神)의 사당이 있었다. 거기를 지나면서 정성을 드리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미쳐 산으로 달아나 호랑이로 변했다. 중조현(中朝縣)의 어떤 사람이 낙양(洛陽)에 갔다 돌아오다가 길에서 어떤 나그네를 만났다. 그는 편지를 부탁하면서 말하였다.
“우리 집은 관정(觀亭)의 사당 앞에 있는데, 돌 사이에 달려 있는 등나무가 바로 거기입니다. 등나무만 두드리면 스스로 대답할 것입니다.”
그가 돌아와 그 말대로 했더니, 과연 어떤 두 사람이 물 속에서 나와 편지를 받아 가지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곧 다시 나와 말하였다.
“강백(江伯)님이 당신을 보고 싶다 하십니다.”
이 사람은 얼떨결에 따라갔다. 집이 화려하고 음식이 향기로우며 말씨와 접대가 세간과 다름없었다.

진(秦)의 단양현(丹陽縣) 호수 곁에 매고신(梅姑神)이 있음
진(秦)나라 때 단양현(丹陽縣)의 어느 호숫가에 매고(梅姑)의 사당이 있었다. 매고는 날 때부터 도술이 있어서 신을 신은 채 물 위를 다녔다. 뒤에 도법(道法)을 저버렸으므로 그 남편이 화를 내어 그녀를 죽여 강물에 던졌다. 그녀는 물에 떠돌다가 지금의 사당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영하(鈴下)의 무당이 그 시체를 염만 하고 매장은 하지 않았더니, 곧 모난 머리와 옻칠한 관(棺)이 그 사당 밑에 있었다. 회망지(晦望之)는 말하였다.
“때때로 안개 속에 신을 신은 흐릿한 형상이 있어서 그 사당 곁에서는 고기를 잡거나 사냥할 수 없으며, 길을 잃고 물에 빠질 근심이 있다.”
그리고 무당은 말하였다.
“매고가 살해를 당했기 때문에 살생을 미워하는 것이다.”

한(漢)의 야랑돈(夜郞豚) 수축왕(水竺王)의 사당에 죽절신(竹節神)이 있음
한(漢)나라 때 야랑돈(夜郞豚) 수축왕(水竺王)의 사당이 있었다. 옛날 어떤 여자가 물가에서 빨래할 때 큰 대마디가 여자의 발 사이로 흘러 들어와 아무리 밀어내어도
가지 않았다. 어린애 우는 소리가 있어 대마디를 쪼개고 한 사내를 얻어 길렀다. 아이는 재주와 무력(武力)이 있어 드디어 이료(夷獠)들의 왕이 되었고, 대에서 나왔다 해서 성을 죽(竹)이라 했다. 그 쪼갠 대를 들에 버렸는데 곧 대숲을 이루었다.
왕은 일찍이 돌 위에서 놀이하면서 국을 끓이려 했는데, 물이 없었으므로 칼로 돌을 치니 샘물이 솟아 나왔다. 지금 축왕의 물과 깨어진 돌과 대숲이 모두 그대로 있다. 한나라 사신을 당(唐)이 꾀어 죽였으므로 이료들은 원한을 호소했다. 그러나 축왕은 혈기(血氣)로 자라지 않았으므로 왕자를 구해 세웠고, 태수(太守) 오패(吳霸)는 글을 올려 그 셋째 아들을 제후(諸侯)로 봉했다. 지금도 축왕(竺王)의 대마디 사당이 있다.[이상 세 가지 증험은 『이원(異苑)』에 있다.]

한(漢)의 중평(中平) 연간에 물 안에 있는 물여우가 모래를 머금어 사람을

한(漢)나라 중평(中平) 연간에 어떤 물건이 강물 속에 있어 그 이름을 역(𧌒:물여우) 또는 단호(短狐)라 하였다. 이것이 모래를 머금어 사람을 쏘는데, 거기 맞는 사람은 몸 근육이 아프고 두통이 생기며 열이 나고 심하면 죽는다. 사람들이 방술(方術)로 그것을 잡아 누르면 그 살 속에서 모래만이 나올 뿐이니, 시(詩)에 이른바 “귀신이라 할까 물여우라 할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한 것과 같다. 지금 세속에서는 이것을 시내의 독[雞毒]이라 하고, 과거의 선비들은 이것을 남방의 남녀들이 한 물에서 목욕한 습기에서 생긴 것이라 했다.

한(漢)의 영창(永昌) 때 불위현(不韋縣)에 금수(禁水)의 독기(毒氣)가 있음
한(漢)나라 때, 영창군(永昌郡) 불위현(不韋縣)에 금수(禁水)가 있었다. 물에 독기가 있어 11월과 12월에만 그 물을 건널 수 있고, 정월에서 10월까지는 건널 수 없는데, 이때 그 물을 건너면 병에 걸려 사람이 죽었다. 그 독기에는 어떤 악물(惡物)이 있었는데, 그 형상은 볼 수 없고 무슨 소리가 있는 것 같아 무엇을 가지고 그 물 속을 비추면 나무일 때는 나무가 부러지고 사람이 부딪치면 곧 죽는다. 세속에서는 그것을 귀신이라 불렀다.

태산(太山)의 동쪽에 있는 예천(澧泉)의 물을 마시면 신령(神靈)이 있음
태산(太山) 동쪽에 예천(澧泉)이 있는데, 그 형상은 우물과 같고 그 본체는 돌로 되어 있다. 그 물을 떠 마시려는 사람이 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꿇어앉아 뜨면
샘물은 흐르는 듯 솟아나와 얼마든지 뜰 수 있지만 혹 오만하면 샘물은 줄어든다. 그것은 신명이 항상 바라기 때문이다.

두 화산(華山)이 다다른 황하(黃河)에 신패(神牌)가 있어 흐름을 가름
두 화산(華山)은 본래 하나의 산이었다. 하수(河水)가 굽이쳐 돌아가는 곳에 신패(神牌)가 있어서 그 물을 갈라 물이 순하게 흐르게 하였으니, 그 손과 발의 자국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장형(張衡)이 「서경부(西京賦)」에서 기리기를 “큰 신령이 힘써 지고, 뛰어난 손바닥이 멀리 쳐서 물을 굽이치게 하였다” 한 것이 이것이다.

황제(黃帝) 때 적장(赤將) 자여(子𨏐)는 바람과 비를 따라 오르내림
적장(赤將) 자여(子𨏐)는 황제(黃帝) 때 사람으로서 오곡(五穀)은 먹지 않고 온갖 풀과 꽃만을 먹었다. 요(堯) 임금 때에 와서는 목공(木工)이 되어 바람과 비를 따라 오르내리고 때때로 시장에서 주살[繳]을 팔았으므로 격부(繳父)라고 했다.
『주례(周禮)』의 춘관(春官) 종백(宗伯)의 일례(日禮)ㆍ사명(司命)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의 별이니, 풍백은 기성(箕星)이요, 우사는 필성(畢星)이며, 현위사(玄渭司)의 사명(司命)과 문창(文昌)은 제4, 제5의 별이다.
『포박자(抱朴子)』에서 말하였다.
“하백(河伯)이란 화음(華陰) 사람으로서 8월의 상경일(上庚日)에 강을 건너다가 빠져 죽었으므로 천제(天帝)가 하백으로 임명했다.
‘하백은 경진일(庚辰日)에 죽었으므로 배를 수리하지 않고 멀리 갔다가는 물에 빠져 돌아오지 못한다.’”

신농(神農)씨 때의 적송자(赤松子)는 우사(雨師)로서 물을 마시고 불에 들
어감
적송자(赤松子)는 신농(神農)씨 때의 우사(雨師)로서 수옥(水玉)을 먹음으로써 신농씨를 가르쳤다. 능히 불에 들어가 스스로 탔으며 곤륜산(崐崙山)에 가서는 항상 서왕모(西王母)의 석실(石室)에 들어가 바람과 비를 따라 오르내렸는데, 염제(炎帝)씨 때에도 우사(雨師)가 되었는데 지금 우사의 근본이다.[이상 일곱 가지 조항은 『수신기(搜神記)』에 있다.]

한(漢)의 사문 천길(千吉)은 비를 빌었는데 손책(孫策)이 시기하여 죽이려다가 괴변을 당함

한(漢)나라의 손책(孫策)은 회계(會稽)를 평정한 뒤에 군사를 거두고 한제(漢帝)를 맞이했다. 그 때 도인 우길(于吉)이 손책의 군중(軍中)에 있었다. 날이 몹시 가물어 뱃길이 매우 어려웠으므로 손책이 스스로 나가 군인들을 독려할 때마다 장군과 군사들이 우길의 곁에 많이 있는 것을 보고 화를 잔뜩 내어 말하였다.
“내가 우길보다 못하냐?”
그리고 우길을 결박지어 햇빛 아래 두고 비를 내리게 하라 하면서 말하였다.
“만일 비를 내리게 하지 못하면 베어 죽이리라.”
조금 있다가 구름이 모여들고 비가 마구 쏟아지더니 얼마 안 되어 냇물이 넘쳤다.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고 우길은 죽음을 면하였으나 손책은 더욱 분노하여 죽이려 생각했다. 이 때문에 속이 상할 때마다 늘 우길이 보이는 듯 나타났다. 뒤에 사냥을 나갔다가 자객(刺客)의 해침을 받고 치료하여 조금 나아 거울을 들고 얼굴을 비춰 보니 거울 속에 우길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면 우길은 없었다. 이렇게 재삼 되풀이하다가 거울을 땅에 내리치고 크게 부르짖으며 상처가 터져 이내 죽었다.[이것은 『원혼지(冤魂志)』에 나온다.]
한(漢)의 사문 축담개(竺曇蓋)는 비를 빌어 영험이 있음.
한(漢)나라 사문 축담개(竺曇蓋)는 진군(秦郡) 사람이다. 진실하고 확실하게 고행하면서 발우를 들고 지팡이를 날리며 4배(輩)를 교화했다. 장산(蔣山)에 있을 때는 항상 반주삼매(般舟三昧)를 수행하고 더욱 신주(神呪)에 능하여 그 영험이 많았다. 사마(司馬) 원현(元顯)이 그를 매우 공경하여 받들었고, 위장군(衛將軍) 유의(劉毅)는 그 고행을 듣고 고숙(姑熟)으로 불러와 매우 사랑하고 대우했다.
의흥(義興) 5년에 큰 가뭄이 들어 호수가 다 마르고 농사가 모두 말라 산천에 기도하여 수십 일을 지냈으나 아무 감응이 없었다. 유의가 스님을 청하여 재를 올릴 때 담개도 거기 있었다. 재를 마치고 담개가 몸소 배를 타고 냇물에 배를 띄울 때 문무(文武)의 벼슬아치와 남녀들과 온 고을 사람들이 다함께 갔다. 담개는 중류에 이르러 향을 피우고 예배하면서 지성으로 강개(慷槪)했다. 그리고 『해룡왕경(海龍王經)』을 소리를 내어 읽자 구름 기운이 갑자기 일어났고, 반쯤 읽었을 때는 사방의 늪에 물이 고였으며, 책을 다 읽자마자 큰비가 마구 쏟아져
호수가 가득 차 그 해 농사는 대풍이었다. 유경숙(劉敬叔)은 그 때 유의의 국랑중령(國郞中令)이 되어 친히 이 모임에 참여하여 직접 이 일을 보았다.

진(晋)의 사문 승군(僧群)은 산에 숨어 신의 감응으로 물을 마시고 배고프지 않았음
진안(晋安)의 나강현(羅江縣)에 곽산(霍山)이 있는데, 높아서 해를 가렸다. 그 위에 돌 목욕통이 있었으니, 그 지름은 수 길[丈]이었으며, 그 통 안에는 샘물이 있었는데 깊이는 5, 6자였고, 항상 넘쳐흐르고 있었다. 옛날 노인들은 말하였다.
“여러 신선들이 놀면서 고기를 낚던 곳이다.”
사문 승군(僧群)은 항상 그 산에 숨어 살면서 늘 이 물만 마셔도 배가 고프지 않아 끝내는 밥을 먹지 않았다. 진안 태수 도기(淘夔)가 이 말을 듣고 그 물을 구하므로 승군이 이 물을 도기에게 보냈다. 그러나 물은 산을 나오자 곧 냄새가 났다. 그래서 도기는 바다를 건너 그 산으로 갔다. 그 때 날씨는 청명했는데 도기가 그 산 밑에 이르자 바람과 비에 날이 어두워졌다. 이렇게 세 번이나 되풀이하다가 끝내 거기 가지 못했다.
승군이 있는 곳에서 그 샘물까지 사이에는 시내가 있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내왕할 때는 나무 하나로 다리를 놓았다. 뒤에 그 다리를 건너려 할 때 날개 부러진 오리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다리에 서서 승군을 쫓으려 하므로 도저히 건너갈 수 없어서 지팡이로 밀치려 했으나 그것이 물에 떨어져 죽을까 겁이 났다. 전하는 말에 그 때 그의 나이는 140세라 했다. 승군은 임종 때 대중에게 말하였다.
“내가 젊어서 오리 한 마리의 날개를 부러뜨린 일이 있었는데. 혹 이 오리의 갚음이 아니겠는가?”

진(晋)의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이 지팡이로 땅을 치니 샘물이 솟아남
진(晋)나라 심양(尋陽)의 여산(廬山)의 서편에 용천정사(龍泉精舍)가 있으니, 이것은 바로 사문 혜원(慧遠)이 세운 것이다. 혜원은 처음 남으로 건너가 그 구역을 매우 사랑하여 절을 세우려 했으나 그 방위를 알지 못하여 제자들을 보내 숲 속의 시내를 뒤지다가 이 자리에서 쉬었다. 그 때 스님들이 다 목이 말라 모두 일어서서 서원하였다.
‘만일 여기에 절을 세울 만하면 원컨대 신력으로 아름다운 샘물이 솟아나게 하소서.’
그리고 지팡이로 땅을 치자 맑은 샘물이 솟아 나왔다. 그래서 그 물을 모아
못을 만들고 절을 지었다. 그 뒤에 몹시 가물어 여러 스님들을 거느리고 『해룡왕경(海龍王經)』을 읽으면서 백성들을 위해 비를 빌었다. 경을 다 읽기 전에 그 샘물에서 뱀과 같은 어떤 무엇이 하늘로 올라갔다. 이윽고 큰비가 사방에서 쏟아져 높고 낮은 곳이 두루 다 은혜를 입었다. 용의 조짐이 있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천이라 했다.

진(晋)의 사문 우법란(于法蘭)은 마른 시내에 맑은 물을 흐르게 함
진(晋)나라 사문 우법란은 고양(高陽) 사람이다. 15세 때에 출가하여 도량과 식견이 침착하고 빼어나며 지조가 곧고 발랐다. 깊은 바위 사이에 있는 절에서 밤에 좌선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그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법란이 손으로 그 머리를 만지자 호랑이는 귀를 세우고 엎드려 수일을 지낸 뒤에 돌아갔다.
축호(竺護)는 돈황(燉煌) 사람이다. 그 풍신(風神)과 정우(情宇)는 법란 다음이었다. 그 때 범어의 경전을 번역한 수는 매우 많았으나 말이 번잡하고 게송이 정리되지 않았다. 축호는 이에 그 요지를 추리고 무리한 글을 깎으며 또 산중에서 제자도 양성했다. 그 산에는 맑은 시냇물이 있어 먹고 목욕하기 충분했는데, 어떤 나무꾼이 그 물을 더럽혀 물은 곧 마르다가 이윽고 아주 끊어졌다. 축호는 시냇가를 배회하면서 한탄하였다.
“만일 물이 마른다면 나는 장차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이 말을 마치자, 맑은 물은 흘러 곧 시내에 넘쳤다.
이 두 사람은 다 무혜(武惠) 때 사람이다. 지도림(支道林)은 그들의 상(像)을 찬탄하였다.

우법란이 세상을 초월하여
현묘한 뜻을 몸소 증득하고
기꺼이 산 속에 숨으니
자비는 호랑이를 감동시켰다.

축호는 맑고 고요하며
도덕은 깊고 아름다웠다.
시냇가에서 나직이 읊조리니
마른 샘물이 다시 솟았다.[이상 네 사람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진(晋)의 사문 섭공(涉公)은 주문으로 용을 발우 안에 내려오게 함
진(晋)나라 장안(長安)의 섭공(涉公)은 서역 사람이다. 마음이 고요해 기운을 마시고 오곡을 먹지 않았으며, 하루 5백 리를 갔고, 미래의 일을 말할 때는 그 영험이 손바닥을 맞대는 것과 같았다.
부견(符堅)의 건원(建元) 11년에
장안현(長安縣)에 가서 비밀한 주문으로 신룡(神龍)을 내려오게 했다. 날이 가물 때에는 부견은 항상 섭공을 청했다. 그가 용에게 주문을 외우면 조금 있다가 용이 발우 안에 내려오고 하늘에서 갑자기 큰비가 내렸다. 부견과 대신들은 직접 와서 발우의 용을 보고 모두 그 신통에 감탄하였다. 부견은 그를 국신(國神)으로 만들었고, 관리와 백성들은 다 끊이지 않고 와서 귀의했다. 이로부터는 가뭄 걱정이 다시는 없었다. 16년 12월에 그가 아무 병도 없이 죽으니, 부견은 매우 통곡했다. 죽은 지 7일에 부견은 그의 신통을 생각하고 시험삼아 관을 열어 보았다. 시체는 보이지 않고 오직 염한 옷만이 그대로 있었다.
17년에 이르러서는 정월에서 6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부견은 음식을 줄이고 시장을 철폐시킴으로써 화기(和氣)를 맞이하였는데, 7월에 비가 내렸다. 부견은 중서(中書) 주동(朱彤)에게 말하였다.
“섭공이 있었더라면 내가 어찌 이처럼 하늘에 마음을 태웠겠는가? 그이야말로 큰 성인이시다.”
주동은 말하였다.
“그 주술은 깊고 묘하여 실로 과거에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진(晋)의 사문 불도징(佛圖澄)이 비를 빌 때, 흰 용 두 마리가 나타남
진(晋)나라 때의 불도징(佛圖澄)은 넓은 주술이 영원하고 도예(道藝)가 뛰어났다. 진의 건무(建武) 연간 정월에서 6월까지 큰 가뭄이 들었다. 석호(石虎)는 그 태자를 보내 임장(臨漳)의 서쪽 골짜기에 가서 오랫동안 빌었으나 비가 내리지 않아 석호는 도징을 시켜 직접 비를 빌게 했다. 그러자 곧 흰 용 두 마리가 사당에 내려오고 비가 수천 리에 내려 그 해는 대풍이었다. 불법을 모르던 오랑캐 무리들도 도징의 신기한 영험을 듣고 모두 멀리서 예배하였고, 말하지 않아도 다 교화되었다.

진(晋)의 사문 담마라찰(曇摩羅刹)은 주문으로 마른 물을 다시 흐르게 함
진(晋)나라 장안(長安)의 축담마라찰(竺曇摩羅刹)은 법호(法護)라 한다. 그 조상은 월지(月氏) 사람이요, 본성은 지(支)씨이며 대대로 돈황(燉煌)에 살았다. 그는 천성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조행(操行)이 청묘하고 부지런했다. 뜻이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만리 밖의 스승을 찾았으며 하루 만언(萬言)을 외우되 한 번 훑어보고는 다 외웠다. 그러므로 6경(經)을 두루 보고
7적(籍)으로 마음을 즐겁게 하며 세상은 비록 칭찬하고 헐뜯기를 힘쓰나 그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 때는 진무(晋武)의 세상이었다. 서울서는 비록 절과 불상을 숭상했으나 방등(方等)의 경전들은 다 총령(葱嶺) 밖에 있었다. 법호는 이것을 안타까이 여겨 크게 발분하여 대도를 펴기에 뜻을 두고 드디어 서역으로 따라가서 많은 경론을 가지고 중하(中夏)로 돌아왔다. 길을 오면서 번역하고 진나라 글로 베끼니, 그 얻은 경전은 『현겁(賢劫)』ㆍ『정법화(正法華)』ㆍ『광찬(光讚)』 등 165부였다. 부지런히 힘쓰는 것은 오직 도를 펴는 것으로 업을 삼아 일생 동안 베끼고 번역하면서도 괴롭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뒤에는 깊은 산에 들어가 숨어살았다. 그 산에 맑은 시냇물이 있어 그것으로 항상 목욕하고 양치질하였는데, 뒤에 어떤 나무꾼이 그 물을 더럽혀 조금 있다가 물이 말랐다. 법호는 시냇가를 배회하면서 한탄하였다.
“사람이 덕이 없어 드디어 맑은 샘물의 흐름을 그치게 하였구나. 만일 물이 참으로 마른다면 의지할 데가 없다. 이제 바로 떠나야 할 뿐이다.”
이 말을 마치자 샘물이 솟아나 시내를 채웠으니,그 깊은 정성에 감응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지둔(支遁)은 그의 상을 이렇게 찬탄했다.

법호님의 맑고 고요함이여
도덕은 깊고도 아름다워라.
깊은 골짜기에서 나직이 읊조리니
마른 샘이 물을 씻었다.

아득하여라, 법호님이여.
하늘이 뽑은 크고 아름다움이라.
흐르는 모래에 발을 씻고
깊은 이치를 빨리 깨달았도다.
그 뒤에 장안의 청문(靑門) 밖에 절을 세우고 부지런히 도를 행하여 그 도덕의 교화는 멀리 퍼지고 그 명성은 사방에 멀리 들려 수천의 승도들이 모두 받들어 섬겼다.
진의 혜제(惠帝)가 서쪽으로 달아나고 관중(關中)이 소란하여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질 때 법호와 그 문도들은 동쪽으로 피하여 민지(澠池)로 가서 병을 만나 죽었으니 나이는 78세였다. 뒤에 손작(孫綽)이 『도현론(道賢論)』을 지어 천축의 7승(僧)과 죽림(竹林)의 7현(賢)에 비교하니, 높은 산과 큰 근원을 생각한 것이다.

송(宋)의 사문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는 비를 빌어 곧 비가 내리게 함

송(宋)나라 대명(大明) 6년(462)에 천하가 크게 가물어 여러 달 동안 산천에 기도했으나 아무 영험이 없었다. 세조(世朝)는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삼장 법사를 청해 비를 빌게 하면서 말하였다.
“반드시 영험이 있게 하시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법사를 다시 만나지 않겠소.”
발타라는 말하였다.
“폐하(陛下)께서 3보를 우러러 의지하면 하늘이 감동하실 것이니 반드시 비를 내리실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다시는 뵙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곧 북쪽 호수의 낚시터로 가서 향을 피우고 기도하였는데 음식을 먹지 않고 잠자코 경을 외우며 가만히 비밀한 주문을 외웠다. 이튿날 오후에 서북쪽에서 일어나는 구름이 처음에는 둥근 일산 같더니, 해질 녘에는 바람이 일고 구름이 모여 연일 비가 내렸다. 이튿날 아침에 대신들이 와서 축하하고 세조는 법사를 위로하며 계속 보시를 내렸다. 태종(太宗) 때에는 예배와 공양이 더욱 융숭했다.
태시(太始) 4년(468) 정월에 몸이 편치 못함을 깨달았다가 임종하는 날에는 오랫동안 서서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하늘의 꽃과 성인의 상이 보인다.”
정오가 되어 마침내 죽으니 나이는 75세였다. 태종은 더욱 애통해 하면서 위로의 보시가 매우 후하였고, 정승들이 모두 모여 장례를 지냈으니, 영화와 슬픔이 구비되었다.

제(齊)의 사문 담초(曇超)는 어떤 신(神)의 청을 받고 비를 내리게 함.
제(齊)나라 전당(錢唐) 영원산(靈苑山)의 석담초(釋曇超)는, 성은 장(張)씨이며, 청하(淸河) 사람이다. 키는 8자요, 얼굴은 볼 만하며 나물밥에 베옷으로 하루 점심만 먹으며, 처음에는 용화사(龍華寺)에 있었다. 원가(元嘉) 말년에 남방 시흥(始興)으로 가서 산수를 두루 구경하고 혼자 나무 밑에서 잤으나 호랑이나 외뿔소가 해치지 않았다.
대명(大明) 연간에 서울에 돌아와 태조(太祖)가 즉위하게 되자 태조의 명령으로 요동(遼東)으로 가서 선도(禪道)를 널리 펴고 거기서 2년 동안 있으면서 법의 교화를 크게 행했다.
조금 뒤에 다시 전당의 영원산으로 가서 한 번 선정에 들면 여러 날을 일어나지 않았다. 한번은 갑자기 바람과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어떤 사람이 홀(笏)을 들고 와서 자칭하였다.
“나는 엄진동통(嚴鎭東通)이다.”
조금 있다가
또 어떤 사람이 왔다. 얼굴은 매우 단정하고 우위(羽衛)를 계속 펄럭이면서 아랫자리에서 예배하고 자칭 제자라 했다. 그리고 말하였다.
“저는 여기서 7리 밖에 있사온데 이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법사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와서 아뢰는 것입니다. 동쪽의 부양현(富陽縣) 사람이 지난 겨울에 벽돌을 만들려고 산기슭의 흙을 파다가 용의 방을 부수었기 때문에 용의 무리들이 화를 내어 3백 일 동안 비를 주지 않습니다. 지금 벌써 1백 일 동안 못물은 다 마르고 농사는 아주 못 짓게 되었습니다. 법사님은 도덕과 신통이 있으시므로 우러러 청하는 것이오니, 앞에 가시면 반드시 감응을 얻어 창생을 구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담초는 물었다.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것은 본래 단월(檀越)의 힘입니다. 빈도(賓道)가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인(神人)은 말하였다.
“제자의 부곡(部曲)은 다만 구름만은 일으킬 수 있으나 비는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는 것입니다.”
담초가 드디어 허락하자 그 신인은 갑자기 떠나 버렸다. 담초는 남으로 5백 리 밖의 적정산(赤亭山)에 이르러 멀리서 용을 위해 축원하고 설법했다. 밤이 되자 용들은 다 사람으로 화하여 담초에게 와서 예배했다. 담초가 다시 설법하고, 그들의 청을 받아 3귀계(歸戒)를 주었더니, 그들은 자칭 용이라 했다. 담초는 그들에게 비를 청하고 서로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날 밤에 용들은 담초의 꿈에 말하였다.
“본래는 분하기 때문에 서원을 세웠으나 법사님이 선으로 인도하시니 감히 명령을 어길 수 없었습니다. 내일 오후에는 반드시 비를 내리겠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담초는 사람을 보내어 현령(縣令)에게 알렸다.
“배를 준비하면 강 위에서 『해룡왕경(海龍王經)』을 읽겠습니다.”
현령은 그 청대로 곧 스님을 청해 돌머리에 배를 띄우고 경을 읽었다. 경을 마치자마자 드디어 구름이 일고 큰비가 내려 높고 낮은 곳이 다 풍족하여 그 해는 큰 풍년이었다.
담초는 영명(永明) 10년(492)에 죽었으니 나이는 74세였다.[이상 다섯 사람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양(梁)의 안국사(安國寺)의 서상(瑞像)이 빛을 놓은 곳에 샘물이 솟음.
양(梁)나라 안국사(安國寺)는 말릉현(袜陵縣) 도향(都鄕) 동하리(東下里)에 있다. 영명(永明) 9년(491)에 세운 절로서 높이
6치 5푼의 금동상(金銅像) 1구(軀)가 있다. 지난 천감(天監) 6년 2월에 이 절 동방(東房)에 연이어 있는 셋째 칸 안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었다. 그 뒤, 이 방 주인 약왕(藥王)이라는 여승이 있는 방 책상 앞에서 때때로 어떤 광명이 나와 온집을 두루 비추었다. 23일에 이를러 그 광명이 비추는 곳에서 갑자기 샘물이 솟아나고 그 물을 따라 이 불상(금동상)이 나와 원근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기뻐했다. 그 샘물이 마르지 않으므로 인해 벽돌을 쌓아 우물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이 한 가지 증험은 『양경사기(梁京寺記)』에 나온다.]
당(唐)의 사문 공장(空藏)은 비를 빌어 영험이 있음.
당(唐)나라 석공장(釋空藏)은 정관(貞觀) 연간에 경사(京師)의 회창사(會昌寺)에 있으면서 3백여 권의 경전을 외우고 교화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는데, 양천(凉川)의 들에 노닐다가 이리 온 것은 그럴 만한 인연이 있어서였다.
옛날 남전(藍田)의 부아산(負兒山)에 가서, 외우던 경전과 보릿가루 6되를 가지고 한 달 양식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21일을 지내는 동안, 하루에 두 되를 먹었어도 그래도 다 먹지 못했다. 또 신령스런 솥을 얻었으나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다.
때로는 옥천사(玉泉寺)에 가서 일생을 마칠 것이라 생각했다. 그 때 큰 가뭄이 들어 샘은 마르고 농작물은 다 탔으므로 온 절의 스님들이 다 흩어지게 되었다. 공장이 지심으로 기도하여 곧 샘물이 솟아나고 비가 마구 쏟아져 도인과 속인은 모두 놀라며 감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정관 16년(642)에 회창사에서 죽어 부악산에 장사했다.

당(唐)의 사문 혜선(惠璿)은 산에 살 때 물이 없었는데 신(神)의 감응으로
물을 얻음.
당(唐)나라 양주(襄州) 광복사(光福寺)의 석혜선(釋慧璿)은 성은 동(董)씨다. 『삼론(三論)』과 『열반경』에 통달했고, 『노자』ㆍ『장자』 등 속서(俗書)도 오래전부터 환히 알았으므로 그 명성은 오랫동안 한남(漢南)에 자자했다.
정관(貞觀) 23년(649)에 『열반경』을 강의하였는데, 4월 8일 밤에 산신(山神)이 말하였다.
“법사님은 빨리 집을 지으십시오. 오래지 않아 서방극락세계에 나실 것입니다.”
7월 14일에 혜선은 『우란분경』의 강의를 마치고 손을 모으고는 말하였다.
“나는 항상 보시로 살았으니, 지금은
일호(一毫) 이상을 모두 흩어 시방의 스님들과 고독한 거지들과 또 모든 외도들에게 보시하리라.”
이렇게 말하고 법좌에서 죽었으니, 나이는 79세였다.
처음 광복사에 있을 때는 절이 산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에 물을 끌어오기가 수고로워 다른 절로 옮겨 가려고 했다. 밤에 어떤 신인(神人)이 키는 1길[丈]인데 붉은 도포를 입고 혜선에게 예배하며 말했다.
“스님은 이 절에 계시면서 항상 대승경을 강의하고, 소승경은 생각지도 마십시오. 소승이란 높은 산에 물이 없는 것과 같아서 사람을 이롭게 하지 못하지만 대승경은 마치 큰 바다와 같습니다. 이 산에서는 많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한 사람이 대승경을 독송하고 강설하면 여기 있는 보배가 빛나고 권속이 번영하며 음식이 풍요할 것이지만, 만일 소승이 있으면 앞의 일들을 다 잃고 말 것입니다. 부디 여기 계시어 모든 소망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헤선이 말하였다.
“이 산꼭대기 절에서는 전에는 물을 얻을 수 없었다.”
신인은 말하였다.
“법사님이 쓰실 물은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내월 8일에는 반드시 물을 얻을 것입니다. 저 검남(鈐南) 자모산(慈母山)의 큰 샘물에 가서 용왕에게 청하십시오.”
신인은 말을 마치자 곧 사라졌다. 기한인 8일의 전날 7일 초저녁에 큰 바람이 갑자기 서남방에서 일어나며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쏟아져 절 북쪽 한고조(漢高祖)의 사당 밑과 불단 뒤 수백 보 지경에 밤새도록 내리다가 새벽에야 그쳤다. 그리고 맑은 샘물은 향기롭고 맛나 대중이 모두 경하했다. 혜선이 여기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용천(龍泉)은 차츰 말랐으니, 이 영험에 의해 온 절 스님이 다 감탄했다.[이상 세 가지 증험은 다 『당고승전(唐高僧傳)』에 나온다.]

72. 원과편(園果篇)[여기에는 5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수과부(樹果部)
손상부(損傷部) 종자부(種子部)


(1) 술의부(述意部)
가만히 생각하면, 왕사성(王舍城)의 죽원(竹園)은 다닐 때에 드는 곳이요, 영취산(靈鷲山)의 석실(石室)은 참선할 때에 의지하는 곳이다. 깨끗한 주거는 시방에 두루하고, 자비의 교화는 삼계(三界)에 통한다. 그러므로 수달(蕦達) 장자를 멀리 추모하고 암라(菴羅)를 높이 사모하며 다함이 없는 인(因)을 숭상하고 무너지지 않는 자리를 만든다. 마음을 일으켜 공경에 어긋나면 그 업은 탕탄(湯炭)을 모은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면 마음을 내고 그것을 보면 돌아가기를 잊어, 복을 더하고 선을 내는 것을 일러 가람(伽藍)이라 하는 것이다.
만일 진심으로 그것을 지으면 그것은 비록 작으나 크고 많은 복을 얻거늘 하물며 큰 것이겠으며, 만일 거짓 마음으로 그것을 지으면 그것은 비록 크나 적은 복을 얻거늘 하물며 작은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수행하는 자로서 만일 그것을 지으려면 반드시 법에 의할 것이요 거짓을 부리지 말지니라.

(2) 인증부(引證部)
『과거인과경(過去因果經)』에서 말하였다.
“모든 승가람 가운데 죽원(竹園)의 승가람이 제일 처음이다.”
또 『심념중본경(心念中本經)』에서 말하였다.
“나열기국(羅閱祈國)의 장자 가란타(迦蘭陀)는 생각했다.
‘내 동산을 니건(尼揵)에게 보시한 것이 애석하다. 만일 부처님께서 먼저 오셨더라면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보시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 보시한 것은 아주 버린 것이라고 후회하고 한탄했다. 반사(半師)라는 대귀장군(大鬼將軍)은 그 생각을 알고 곧 열차(閱叉)를 불러 니건을 쫓아내면서 말하였다.
‘이 발가벗은 부끄럼 없는 것들은 여기 있지 말라.’
니건은 놀라 달아났다. 장자는 기뻐하며 거기에 정사(精舍)를 지어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보시했다.”
또 『보살장경(菩薩藏經)』에서 말하였다.
“아난아, 나는 이 죽원에서 『보살장경』의 퇴전(退轉)하지 않는 바퀴를 굴려 일체 중생들의 의심을 끊으리라. 아난아,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다 이 빈
땅에서 『보살장경』을 설하셨느니라.
아난아, 탐욕과 분노와 우치를 가진 모든 중생들도 이 죽원에 들어오면 탐심과 분심을 내지 않고, 온갖 새들도 여기 들어와서는 때 아닌 때에는 울지 않으며, 병사왕(萍沙王)도 여러 채녀(採女)들과 함께 이 동산에 들어와서 서로 즐길 때에는 애욕이 없음을 스스로 깨달았고, 그 여자들도 다 그러했다. 그 때 왕은 즐길 때마다 항상 이렇게 생각했었다.
‘세상에 부처님께서 계시면 나는 이 동산을 부처님께 바치고, 부처님께서 계시면 나는 설법을 들으리라.’
왜냐 하면 공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야 이 동산에 계시고 5욕(欲)을 가진 사람은 여기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동산에는 살무사ㆍ지네ㆍ등에 등의 독충이 없고, 그들도 여기 있게 되면 그 독심이 없어지나니, 이것은 이 동산만의 특수한 공덕이니라.”
또 『정법념처경』에서 말하였다.
“만일 중생이 신심이 청정하여 이 동산을 스님들에게 보시하여 쓰게 하면 그는 목숨을 마친 뒤에 건타라천(揵陀羅天)에 나서 그 천녀들에게 둘러싸여 백 배나 안락할 것이다. 또 어떤 중생이 선으로 마음을 닦고 추위와 더위를 막기 위해 의옥(義屋)을 지어 쓰게 하면 그는 목숨을 마치고는 상자의천(常姿意天)에 나서 5욕(欲)을 즐기고,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에 나면 왕사(王師)가 될 것이니라.”

(3) 수과부(樹果部)
『입세아비담론(立世阿毘曇論)』에서 말하였다.
“염부나무는 염부제 북쪽의 니민타라강(泥民陀羅江) 남쪽 언덕에 있다. 이 나무 둥치는 본래 정주(正州)의 중앙인데, 이 나무 둥치 복판에서 동서의 가지까지 그 사이는 천 유순(由旬)이다. 이 나무는 생장이 원만하여 모양은 사랑스럽고 가지와 잎은 서로 덮어 오래 있어도 마르지 않고 어떤 바람과 비도 침입하지 못하며 차례로 서로 덮어 높이는 1백 유순이다.
아래 둥치는 크고 곧아 마디가 없고 50유순 위에야 비로소 가지가 있다. 둥치의 직경은 5유순이요 둘레는 15유순이며, 그 낱낱 가지는 가로 뻗어 50유순이요, 중간은 1백 유순이며 둘레는 3백 유순이다.
그 열매는 매우 맛이 있어서 벌꿀과 같고, 그 크기는 독[甕]만하며, 그 씨의 크기는 세간(世間)의 염부자(炎浮子)의 씨와 같고, 그 겉에는 새와 짐승의 형상이 있다. 동서 가지의 열매는 많이는 염부제의 땅에 떨어지고, 적게는 물에 떨어진다. 남쪽 가지의 열매는 다 염부제에 떨어지고, 북쪽 가지의 열매는 다 강물에 떨어져 물고기에게 먹힌다. 나무 뿌리는 다 금모래가 덮고 있어 봄에 비가 와도 새지 않고, 여름에는 뜨겁지 않으며 겨울에도 추위가 없다. 건달바와 약차들이 다 이 나무 밑에 산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옛날 왕사성에 두 비구가 있었다. 이들은 다 신통이 구족한 벗으로서 이 나무를 보기 위해 다가갔다. 익은 나무 열매가 땅에 떨어져 저절로 쪼개지므로 한 비구가 꼭지 구멍으로 손을 넣어 씨를 찾았는데 가장 긴 셋째 손가락도 씨에까지 닿지 않았다. 손을 빼자 열매즙에 물들어 손톱이 다 빨갛고, 그 향기는 사람의 마음까지 물들여 코로 그 향기를 맡았다. 둘째 비구가 물었다.
‘당신은 그것을 먹고 싶어하십니까?’
첫째 비구는 대답하였다.
‘장로님, 나는 먹지 않으렵니다.’
이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욕심의 번뇌를 버린 것을 가장 훌륭하다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 이 향기를 맡으면 그는 곧 마음의 기운을 내어 발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떠난 어떤 외인(外人)도 이 향기를 맡으면 욕심 떠난 자리를 잃는 것이다.
이 두 비구는 왕사성에 돌아와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 때
장경(長脛)이라는 왕종(王種)이 있었다. 성은 구리(拘利)씨로서 전생 업의 과보로 신통을 얻어 물 속을 다닐 때에는 앞발이 빠지기 전에 뒷발을 옮겨 놓았고, 풀잎 위로 다닐 때에는 쓰러지지 않았는데 곧 발을 옮겨 걸을 수 있었다. 그는 부처님에게서 이 나무 이야기를 듣고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도 저 염부나무까지 갈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갈 수 있다.’
이 사람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북으로 향해 떠났다. 일곱 산을 넘고 제7의 금변산(金邊山) 꼭대기에 서서 북을 향해 몸을 솟구쳐 멀리 바라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두움뿐이었으므로 그는 겁이 나서 돌아왔다.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물으셨다.
‘너는 저 염부나무까지 갔다 왔느냐?’
그는 말하였다.
‘가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물으셨다. .
‘너는 무얼 보고 왔느냐?’
그는 말하였다.
‘어두움만 보고 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 어두운 빛이 바로 염부나무니라.’
그는 다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오른쪽을 세 번 돈 뒤에 다시 북으로 향해 떠났다. 일곱 산을 다시 넘고 뒤의 일곱 산을 넘고 또 여섯 큰 나라를 지나고 다시 일곱 큰 숲을 지나 숲 속에 있는 일곱 강을 건넜다. 또 아마륵숲과 하리륵숲 내지 염부나무 남쪽 가지를 지나 그 위로 북쪽 가지까지 갔다. 이 사람은 밑을 내려다보았다. 물빛은 보통 물빛과 달라 맑게 환히 트이어 아무 걸림이 없었다. 이 사람은 생각하였다.
‘내 신통은 지금 여기서도 성취될 수 있을까?’
그는 이내 발로 물을 딛고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았다. 발이 물에 닿자 돌처럼 물 속에 빠졌다. 이 사람은 말하였다.
‘여기서는 내 신통이 통하지 않는다. 이 물은 가벼워 마치 연유기름과 같이 물 위에 떠 있다. 만일 이 물을 떠서 저 물에 던지면 곧 돌처럼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나무 열매 하나를 따 가지고 돌아가 부처님께 바쳤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여러 대중들에게 주셨다. 열매즙이 부처님 손을 물들이므로 부처님께서는 그 손으로
산의 돌을 치셨다. 지금도 그 붉은빛이 옛날과 다름이 없고 젖은 것도 마르지 않고 손바닥 자국도 분명하다. 옛날에 과일을 부수어 조각을 내었기 때문에 이 돌을 조각조각바위라 한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우루빈라 가섭을 교화시키면서 이 열매를 주셨다.
이 염부나무 바깥에 두 숲이 있으니, 그 형상은 반달과 같고 이 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그 안에 있는 숲을 하리륵(呵梨勒)이라 하고, 그 바깥의 숲을 아마륵(阿摩勒)이라 한다. 이 과일이 익었을 때에는 그 맛이 매우 좋아 시지도 않고 쓰지도 않아 마치 벌꿀 같으며, 그 크기는 스무 말의 그릇과 같다. 아마륵숲 남쪽에 또 일곱 숲이 있고 일곱 강이 사이사이에 끼여 있다. 즉 가장 북쪽에 있는 숲을 암라(菴羅)라 하고, 둘째를 염부(剡浮)라 하며, 셋째를 사라(娑羅)라 하고, 넷째를 다라(多羅)라 하며, 다섯째를 인림(人林)이라 하고, 여섯째를 유림(榴林)이라 하며, 일곱째를 겁필타(劫畢他)라 한다. 이것들의 열매 맛도 맵지도 쓰지도 않고 벌꿀과 같다.
이 인림의 열매 형상은 사람과 같은데, 욕심을 떠난 사람이 이것을 먹으면 선정을 잃는다. 그 겁필타숲 남쪽에 6대국이 있으니, 최남국의 이름은 고류(高流)요, 둘째는 구랍바(俱臘婆)이며, 셋째는 비제하(毘提訶)요, 넷째는 마하비제하(摩訶毘提訶)이며, 다섯째는 울타라만타(鬱多羅曼陀)요, 최북극의 여섯째는 사희마라야(捨喜摩羅耶)이다. 이 6국 사람은 다 선량하여 10선법을 지니며, 짐승들은 스스로 죽이려고 사람에게 와서 그 살을 먹인다. 여기는 검정소가 가장 많아 그 꼬리털로 집을 덮는다. 그 땅에는 보리가 스스로 나서 경작할 필요가 없고, 이 보리는 익은 뒤에도 겨가 없으며 사람들은 그것으로 밥을 지어 먹는데, 그 맛은 꿀처럼 달고 맛나다.”
또 『장아함경』에서 말하였다.
“염부제라 하는 까닭은, 그 밑에
높이가 30유순 되는 금산(金山)이 있고 염부나무가 있기 때문에 염부금(閻浮金)이라 한다. 염부나무 열매의 형상은 호리병과 같고 그 맛은 꿀과 같다. 이 나무에는 다섯 개의 큰 욋가지[柧]가 있는데 사면의 네 개와 위의 하나이다. 그 동쪽 욋가지의 열매는 건달바가 먹고, 그 남쪽 욋가지 열매는 7국 사람이 먹는다. 7국이란, 즉 첫째는 구루국(拘樓國)이요, 둘째는 구라바(拘羅婆)이며, 셋째는 비제(毘提)요, 넷째는 선비제(善毘提)이며, 다섯째는 만타(漫陀)요, 여섯째는 바라(婆羅)이며, 일곱째는 바리(婆梨)이다. 그 서쪽 욋가지의 열매는 바다 벌레가 먹고, 그 북쪽 욋가지의 열매는 새와 짐승이 먹으며, 그 위의 욋가지 열매는 성수천(星宿天)이 먹는다.”
또 『중아함경』에서 말하였다.
“과거 염부제 사람의 수명이 8만 세였을 때, 고라바왕(高羅婆王)이란 전륜성왕이 세상에 나왔고, 그 나무 이름은 선주니구류왕(善住尼拘類王)이었다. 그 나무에는 다섯 가지가 있었으니, 첫째 가지의 것은 왕과 왕후가 먹었고, 둘째 가지의 것은 태자와 신하들이 먹었으며, 셋째 가지의 것은 그 나라 백성들이 먹었고, 넷째 가지의 것은 사문과 바라문이 먹었으며, 다섯째 가지의 것은 새와 짐승들이 먹었다. 니구류나무 열매의 크기는 두 되들이 병과 같았고, 맛은 요밀환(淖蜜丸)과 같았다.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훔치는 사람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몹시 굶주려 얼굴이 여위었다. 그 열매가 달린 그 가지를 꺾어 가지고 돌아갔다. 그 니구류나무에 어떤 하늘이 의지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생각했다.
‘염부제 사람은 참으로 이상하다. 왜 은혜도 모르고 갚을 줄도 모를까? 나는 차라리 이 나무에 열매가 열지 않게 하리라.’
또 어떤 사람이 몹시 배가 고파 그 열매를 먹으려고 나무에 가 보았으나
열매가 없었다. 그는 곧 고라바왕에게 가서 아뢰었다.
‘천왕님, 아십시오. 저 니구류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장사가 팔을 굽혔다 펴는 사이에 삼십삼천에 올라가 제석천에게 아뢰었다.
‘구익(拘翼)님은 아십시오. 니구류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이에 제석천과 고라바왕은 장사가 팔을 굽혔다 펴는 사이에 니구류나무 가까이 가서 큰 물과 폭풍우를 일으켜 그 나무뿌리를 뽑아 거꾸러뜨렸다. 이리하여 그 나무를 의지해 있던 하늘은 매우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제석천 앞에 섰다. 제석천은 물었다.
‘너는 왜 우느냐?’
저 하늘은 말하였다.
‘홍수와 폭풍우가 뿌리를 뽑아 거꾸러뜨렸습니다. 저 니구류나무를 본래대로 세워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석천은 다시 홍수와 폭풍우를 일으켜 니구류나무를 본래대로 세워 주었다.”
또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설산(雪山) 꼭대기에 약왕수(藥王樹)가 있는데, 그 이름을 뿌리에서 나는 것도 아니요 뿌리에서 나지 않는 것도 아니라 한다. 그것은 가로의 길이가 680만 유순이요 최하는 금강제(金剛際)이다. 이 나무가 뿌리를 낼 때 염부제의 모든 나무도 뿌리를 내고, 또 줄기ㆍ가지ㆍ잎ㆍ꽃 등을 낼 때 염부제의 모든 나무도 다 줄기ㆍ가지ㆍ잎ㆍ꽃 등을 낸다. 그 나무는 뿌리가 줄기를 내고 또 줄기도 뿌리를 낸다. 그 때문에 이름을 뿌리에서 나는 것도 아니요 뿌리에서 나지 않는 것도 아니라 한 것이다. 이것은 어디서나 다 나서 자라지만 오직 지옥이나 깊은 구덩이나 수륜(水輪)에서만은 생장하지 않는다.”
또 『잡아함경』에서 말하였다.
“옛날 구렵(拘獵)이라는 왕이 있었고 그 나라에는 수파제환(羞波提桓)이라는 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 둘레는 560리요 뿌리
둘레는 840리며 높이는 4천 리요 가지는 사방 2천 리에 뻗었다. 이 나무에는 다섯 종류의 과일이 있고 도(道)에는 다섯 면(面)이 있다. 첫째 면은 국왕이 궁중의 여러 여자들과 함께 먹고, 둘째 면은 대신과 관리들이 함께 먹으며, 셋째 면은 백성들이 함께 먹고, 넷째 면은 승려와 도사들이 함께 먹으며, 다섯째 면은 새와 짐승들이 함께 먹는다. 과일의 크기는 한 되들이 병과 같고, 맛은 꿀처럼 달며 지키는 이도 없고 서로 훔치지도 않는다.
그 때 사람의 수명은 8만 4천 세이다. 그런데 아홉 종류의 병이 있으니, 첫째는 추위요, 둘째는 더위이며, 셋째는 주림이요, 넷째는 목마름이며, 다섯째는 대변이요, 여섯째는 소변이며, 일곱째는 애욕이요, 여덟째는 많이 먹음이며, 아홉째는 늙음이다. 그 때 여자는 나이 5백 세라야 시집간다.”[이것은 미륵불(彌勒佛)이 세상에 나오는 때와 같다.]

(4) 손상부(損傷部)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천타(闡陀)비구는 나무로 방을 만들기 위해 살라(薩羅) 숲의 나무를 베어 와서 방을 만들었다. 그 때 그 숲 속에 이 나무를 의지만 하던 귀신이 천타에게 말하였다.
‘그 나무를 베지 마십시오. 지금 내 어린아이들이 바람과 비를 맞으며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천타는 말하였다.
‘이 죽은 귀신아, 빨리 떠나라. 여기 살지 말라. 누가 너를 보기 좋다 하더냐?’
그리고 곧 베어 갔다. 이 귀신은 매우 슬피 울면서 애들을 데리고 부처님께로 갔다. 부처님께서는 그 사정을 아시면서 짐짓 물으셨다.
‘너는 왜 우느냐?’
귀신은 답하였다.
‘세존, 존자 천타가 제 숲의 나무를 베어 방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내 아이들은 바람과 비를 맞으며 의지할 데가 없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이 귀신을 위해 설법하여 그 슬픔을
달래 주시고, 거기서 멀지 않은 숲을 가리켜 거기서 살게 하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천타를 나무라셨다.
‘여래가 여기서 한 밤을 잘 때 좌우의 나무들과 사람들은 다 탑이 된다. 그러므로 귀신들이 즐겨 여기 와서 머무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왜 욕설로 그들을 꾸짖느냐?’”
또 『사분율』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신수(神樹) 베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만일 베면 돌길라죄(突吉羅罪)가 된다.”
또 『정법념처경』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라도 계를 지니고 사견(邪見)을 떠났으면, 어떤 사람이 귀신이 의지하거나 야차가 의지하는 큰 나무를 베는 것을 보거든 그것을 말려 베지 말게 하라. 이 귀신들은 사람을 해치지 않느니라. 그들은 나무에 의지하면 즐거워하고 나무가 없으면 괴로워하느니라. 그러므로 나무를 베지 않는 사람은 목숨을 마친 뒤에는 환희천(歡喜天)에 나서 여러 천녀들과 즐거워하고 천상의 목숨을 마치고 인간에 나면 편안하고 부자가 되느니라.”
또 『비니모경(毘尼母經)』에서 말하였다.
“비구는 다음 다섯 종류의 나무를 베지 말지니라. 첫째는 보리나무요, 둘째는 귀신나무며, 셋째는 염부제나무요, 넷째는 아사타나무며, 다섯째는 시타림나무이니라.
또 만일 비구가 3보를 위하면 세 종류의 나무를 심는다. 첫째는 과일나무요, 둘째는 꽃나무요, 셋째는 잎나무이니라. 이것은 다만 복만 있고 허물은 없느니라.
어떤 비구는 나무 위에서 편히 살기 위해 나무를 묶어 침상을 만들고는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고 나무 위에서 대소변을 보았다. 그 때 그 나무에 사는 귀신은 화를 내어 그 비구를 때려 죽였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비구들은 나무 위에서 편히 살려고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고 대소변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 다섯 종류의 나무는 베지 못한다. 첫째는 보리나무요, 둘째는 귀신나무며, 셋째는 길 복판의 큰 나무요, 넷째는 사타림나무며, 다섯째는 니구류나무이니라. 그러나 불탑을 부수거나 승가람을 부수거나
나무 때문에 화재가 나면 그럴 때는 그 네 종류의 나무라도 벨 수 있다. 단 보리나무만은 안 된다.
다섯 종류의 나무는 쓸 수 있다. 첫째는 불에 탄 나무요, 둘째는 용의 불에 탄 나무이며, 셋째는 저절로 말라죽은 나무요, 넷째는 바람에 부러진 나무며, 다섯째는 떠내려온 나무이니 이런 나무는 쓸 수 있느니라.”

(5) 종자부(種子部)
『장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무슨 인연으로 이 세간에 다섯 종류의 종자가 있는가? 큰 바람에 의해 불패(不敗)세계에서 이 나라에 불려온 것이다. 첫째는 뿌리 종자요, 둘째는 줄기 종자며, 셋째는 마디 종자요, 넷째는 속이 빈 종자며, 다섯째는 종자의 종자이니, 이것을 세간의 다섯 종류의 종자라 하느니라.”
또 『기세경(起世經)』에서 말하였다.
“무슨 인연으로 다섯 종류의 종자가 세간에 나왔는가?”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동방의 모든 세계가 혹은 이루어졌다가 무너지고, 무너졌다가 이루어지며, 혹은 이루어져 머무르고, 남방ㆍ서방ㆍ북방의 이루어짐과 무너짐 및 머무름도 이와 같다. 그 때 아나비라(阿那毘羅)라는 큰 바람이 있어 따로 다른 곳의 이루어지고 머무르는 세계에서 다섯 종류의 종자를 불어 이 세계에 흩고 또 흩으며 나아가서는 크게 흩는다. 그것은 이른바 뿌리의 종자ㆍ줄기의 종자ㆍ마디의 종자ㆍ접촉의 종자ㆍ종자의 종자이니, 이것을 다섯 종류의 종자라 하느니라.
염부나무 과일의 크기는 마가다국(摩伽陀國)의 한 되들이의 독과 같은데, 그 과일을 딸 때 즙이 흘러나와 빛깔은 흰 젖과 같고 맛은 꿀처럼 달다. 염부나무 과일이 나는 곳에는 5분(分)의 이익이 있으니, 이른바 동ㆍ남ㆍ서의 3방과 상ㆍ하의 2방이다. 동방에서 나는 것은 건달바들이 다 먹고, 남방에서 나는 것은 7대(大) 취락의 백성들이 먹는다.
7취락(聚落)이란, 첫째는 부정규(不正叫)요, 둘째는 규환(叫喚)이며, 셋째는 부정체(不正體)요,
넷째는 현(賢)이며, 다섯째는 선현(善賢)이요, 여섯째는 뇌(牢)이며, 일곱재는 승(勝)이니라. 서방에서 나는 것은 금시조(金翅鳥)들이 먹고, 상방에서 나는 것은 허공의 야차들이 먹으며, 하방에서 나는 것은 바다의 벌레들이 다 먹느니라.”
또 『관불삼매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설산(雪山)에 있는 양가타나무는, 그 열매는 매우 크고 그 씨는 매우 작은데 그 내력을 따지면 향산(香山)에서 온 것으로서 바람의 힘으로 설산까지 온 것이다. 한겨울의 한창 추울 때는 나찰과 야차들이 으슥한 산굽이의 높은 곳에 있으면서 대소변의 더러운 것을 땅에 가득 채우면 사나운 바람이 눈을 몰아 그 위를 덮고, 차츰 50유순이나 되는 깊은 구덩이가 된다.
이 과일은 그 대소변의 힘으로 그 땅에 나서는 뿌리와 줄기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 등이 아주 무성해진다. 봄 3월에는 사방에서 바람이 일어나 얼음과 눈은 다 녹고 이 과수만이 남아 있다. 이 과일의 형색은 염부제의 과일에 비할 것이 아니다. 그 형상은 둥근 것이 반 유순이나 되며, 바라문이 이것을 먹으면 선도(仙道)를 얻고 5통(通)을 구족하며, 수명이 1겁으로서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범부가 이것을 먹으면 네 종류의 사문의 과(果)를 얻고, 3명(明)과 6통(通)을 다 갖춘다.
또 어떤 사람이 그 종자를 가지고 염부제의 기름진 땅에 심으면 이내 돋아나서 높이는 1다라수(多羅樹)와 같고, 그 이름은 구율타(拘律陀)이다. 그 과일 이름은 다륵(多勒)이며, 크기는 닷 되들이 병과 같고, 이것을 먹는 사람은 열병이 낫는다.’”
또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설산(雪山)에 인욕(忍辱)이라는 풀이 있어 소가 만일 이것을 먹으면 곧 제호(醍醐)를 만드니니라.’
게송으로 말하였다.


기원(祇園)에서 신의 감응을 받고 와서
녹원(鹿苑)에서 구린(拘隣)을 교화했다.
성인은 복의 땅에 살고
현사(賢士)는 산수를 즐긴다.

천 잎이 나타났다는 말 잠깐 듣고
때로는 온갖 고운 꽃을 흔든다.
향기로운 풀은 다 땅에 가득하고
신령스런 버섯은 방 앞에 두루하다.

맛난 못에는 8수(水)가 흐르고
신령스런 우물에는 9천(泉)이 솟는다.
빛나는 번기가 높이 나부끼나니
감응을 받고 나는 신선 내려온다.

새는 천 소리의 지저귐을 희롱하고
사람은 온갖 복밭 노래한다.
성대하여라, 훌륭한 이곳이여.
누가 이것 보고 머무르지 않으리.”

감응연(感應緣)[대략 열두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주(周)의 은왕(隱王) 2년에 땅이 갑자기 커짐
하(夏)ㆍ진(秦)ㆍ주(周)ㆍ한(漢) 때에 산이 없어짐
한(漢)의 애제(哀帝) 때에 영수(靈樹)의 괴변이 있음
한(漢)의 건소(建昭) 5년(B.C.34)에 큰 느티나무의 변괴가 있음
한(漢)의 영제(靈帝) 때에 두 가죽나무의 괴변이 있음
한(漢)의 광화(光和) 연간에 영초(靈草)의 괴변이 있음
진(晋)의 영가(永嘉) 연간에 두더지의 괴변이 있음
오(吳)의 선왕(先王) 때에 영수(靈樹)의 괴변이 있음
오(吳) 때에 태수(太守)의 군경(郡境)에 영사(靈槎)의 괴변이 있음
태고(太古) 때에 여자와 말가죽이 누에로 변함
송(宋)의 사문 석승유(釋僧瑜)가 죽은 뒤에 그 방에서 오동나무 두 그 루가 남
당(唐)의 왕현책(王玄策)의 『서국행전(西國行傳)』에서 금산(金山) 이 있다고 하였음

주(周)의 은왕(隱王) 2년에 땅이 갑자기 커짐
주(周)나라 은왕(隱王) 2년 4월에 제(齊)의 땅이 갑자기 커지되, 길이는 1길[丈] 남짓하고 높이는 1자 5치였다. 『경방역요(京房易妖)』에서 말하였다.
“땅이 커질 때 4시(時)로 상고하면
봄과 여름에는 길(吉)이 많고 가을과 겨울에는 흉(凶)이 많다.”
역양군(歷陽郡)이 하루 저녁에 땅 속으로 가라앉아 큰 늪이 되었으니, 지금의 마호(麻湖)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운승추(運升樞)는 말하였다.
“고을[邑]에서 음(陰)을 이야기하고 양(陽)을 감추는 것은 서로 해치지 않는다.”

하(夏)ㆍ진(秦)ㆍ주(周)ㆍ한(漢) 때에 산이 없어짐
하(夏)의 걸(桀) 때에는 여산(厲山)이 없어졌고, 진(秦)의 시황(始皇) 때에는 삼산(三山)이 없어졌고, 주(周)의 현왕(顯王) 32년(337)에는 송(宋)의 대구사(大丘祀)가 없어졌고, 한(漢)의 소제(昭帝) 때에는 진(陳)의 유창읍사(留昌邑祀)가 없어졌다. 『경방역전(京房易傳)』에서 말하였다.
“산이 잠자코 스스로 옮기면 천하에 전쟁이 일어나고 사직(社稷)이 망한다.”
그러므로 회계(會禊) 산음(山陰)의 낭사(琅邪)에 괴상한 산이 있으니, 세상에 전하는 말에 본래 낭사의 동무산(東武山)이라 한다. 그 때 밤에 바람과 비가 일어났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니 이 산이 있었다. 백성들이 괴상히 여겨 이름을 괴산(怪山)이라 했다. 그 때 동무현(東武縣)에 있던 산도 하루 저녁에 없어졌으니, 그 형상을 아는 사람은 저것이 옮겨 온 줄을 알았다. 지금 괴산 밑에 동무리(東武里)가 있으니, 그것은 산이 스스로 온 데서 나온 이름인 것이다.
또 교주(交州)의 취주산(脆州山)이 청주(靑州)로 옮겨 갔으니, 대개 산이 옮긴다는 것은 다 알 수 없는 이변이다. 이상의 두 가지 사실에 있어서 그 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상서(尙書) 김등(金縢)은 말하였다.
“산이 옮기는 것은, 임금이 도인을 등용하지 않고 현인(賢人)이 일어나지 않으며, 혹은 녹(祿)이 공실(公室)을 버리고 상과 벌이 임금에게서 나오지 않으며, 사문(私門)이 작당하여 다스릴 수 없어서이니, 장차 세상이 바뀌고 연호가 변할 것이다.”
말하였다.
“하늘을 잘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물어본다.”
하늘에 4시(時)와 5행(行)이 있어 해와 달이 서로 밀고,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드는 것은 그치지 않고 돌아가기 때문이다. 만일 4시가 바뀜을 그르치고 추위와
더위가 서로 어기며, 5위(緯)가 남거나 줄며 별들의 운행이 어긋나며, 일식(日蝕)과 월식이 커지고 살별[彗]이 어지러이 날면, 이것은 천지가 그 철을 잃는 것이다. 이 추위와 더위가 때를 어기는 것은 천지의 지극한 흉(凶)이다. 그러므로 돌이 서고 흙이 뛰는 것은 천지의 부스럼이요, 산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은 천지의 종기이며, 센바람과 사나운 비는 천지가 내뿜는 기운이요, 비가 내리지 않아 냇물이 마르는 것은 천지가 타는 것이니라.

한(漢)의 애제(哀帝) 때에 영수(靈樹)의 괴변이 있음
한(漢)나라 애제(哀帝) 건평(建平) 3년(B.C.4)에 영릉(零陵)에 나무가 있었는데, 그 둘레는 1길 6자요, 길이는 14길 7자이다. 어떤 사람이 그 밑동 9자 남짓을 베어다 말랐는데 3월에 그 나무는 본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여남(汝南) 평양(平陽) 수향(邃鄕)의 어떤 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가지와 잎을 내어 사람의 형상 같은데, 몸은 청황색이요, 얼굴은 희었으며 머리털은 차츰 자라 6치 1푼쯤 되었다. 『경방역전(京房易傳)』에서 말하였다.
“왕의 덕이 쇠하고 아랫사람이 장차 일어나려면 사람의 형상과 같은 나무가 난다.”
그 뒤에 왕망(王莽)이 왕위를 빼앗았다.

한(漢)의 건소(建昭) 5년에 큰 느티나무의 변괴가 있음
한(漢)나라 건소(建昭) 5년(B.C.34)에 연주(兗州) 자사 호상(浩賞)이 백성들이 사사로이 세우는 사당을 금하였다. 산양(山陽)의 탁향사(槖鄕社)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관리가 그것을 베어 버렸다. 그날 밤에 그 나무는 본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설(說)에 말하였다.
“무릇 끊어 버려 말랐던 것이 다시 살아난 것은, 다 폐한 것이 다시 일어날 상(像)이다.”
이것은 세조(世祖)에 응한 것이다.

한(漢)의 영제(靈帝) 때에 두 가죽나무의 괴변이 있음
한(漢)나라 영제(靈帝) 희평(熹平) 3년(174)에 우교(右校)를 따로 지었는데, 거기 두 그루의 가죽나무가 있었다. 그것은 다 높이가 4자였다. 그 중의 한 그루가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1길 남짓이 더 자라 굵기도 한 아름이었다. 그것은 오랑캐의 형상으로서 머리털을 다 갖추었다.
그 5년 10월에는 정전(正殿) 곁에 느티나무가 있어 60아름인데 저절로 뽑혀 거꾸로 서서 뿌리는 위에 있고 가지는 밑에 있었으나 무성하여
나무의 됨됨이 굽지 않고 곧고 발랐다. 또 장안성(長安城) 서북쪽 6, 7리에 빈 나무가 있었는데, 그 안에 사람이 있고 얼굴에는 털이 났었다.

한(漢)의 광화(光和) 연간에 영초(靈草)의 괴변이 있음
한(漢)나라 광화(光和) 7년에 진류제 음동군(陳留濟陰東郡) 원구리기(寃句離祇) 경계에 난 풀은 사람의 형상으로서 활을 가지고 있었고, 소ㆍ말ㆍ용ㆍ뱀ㆍ새ㆍ짐승 등이 희고 검은 것처럼 각각 그 빛깔과 같았으며, 깃ㆍ털ㆍ머리ㆍ눈ㆍ날개를 다 갖추고 있었는데, 다만 비슷할 뿐만 아니라 그 형상이 더욱 순수하였다. 옛날에 말하였다.
“초요(草妖)에 가깝다.”
이 해에 황건적(黃巾賊)이 일어나 한(漢)나라는 쇠약해졌다.
오(吳)나라 오봉(五鳳) 원년(254) 6월에 교지국(交阯國)의 피[稗]가 벼로 변했다.
진(晋)의 영가(永嘉) 연간에 두더지의 괴변이 있음
당(唐)의 왕현책(王玄策)의 『서국행전(西國行傳)』에 금산(金山)이 있다.
진(晋)나라 영가(永嘉) 5년(311) 11월에 두더지가 연릉(延陵)에서 나왔다. 곽박(郭璞)이 이것을 점치고 임지익(臨之益)을 만나 말하였다.
“이 군(郡)의 동현(東縣)에 요망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를 잡는 사람은 자신도 곧 죽을 것이다.”

오(吳)의 선왕(先王) 때에 영수(靈樹)의 괴변이 있음
오(吳)의 선왕(先王) 때에 육경숙(陸敬叔)은 건안(建安) 태수가 되어 사람을 시켜 큰 나무를 베게 했다. 도끼를 몇 번 내리치자 갑자기 피가 쏟아져 나왔다. 나무가 다 베어져 갈 때 사람 머리에 개의 몸을 한 것이 나무에서 나와 달아났다. 경숙은 말하였다.
“이것을 팽후(彭侯)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잡아 삶아 먹었다. 그 맛은 개고기와 같았다.

오(吳) 때에 태수(太守)의 군경(郡境)에 영사(靈槎)의 괴변이 있음
갈조(葛祚)의 자는 원선(元先)이니 단양(丹陽) 구용(句容) 사람이다. 오(吳) 때에 형양(衡陽) 태수가 되었다. 그 군(郡)의 경계에 큰 뗏목이 물에 가로누워 요괴(妖怪)를 잘 부렸으므로 백성들은 그것을 위해 사당을 세웠다. 그곳을 지나는 나그네는 반드시 그 사당에 기도하는데, 기도하여 뗏목이 가라앉으면 배가 맞부딪치지 않고 뗏목이 뜨면 그 때문에 배가 부서졌다.
갈조는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끼 등 연장을 준비하고 다음날 그것을 없애 버리려 했다. 그날 밤에 사당지기와 그 곁에 사는 사람들은 강물이 사나운 속에 어떤 사람의 이상한 소리를 듣고 다 괴상히 여겨 이튿날 아침에
나가 보았다. 뗏목은 물을 따라 몇 리를 떠내려가다가 어떤 물굽이진 곳에 대어 있었다. 그 뒤로는 나그네들은 파선 당할 걱정이 없어졌고 형양 사람들은 갈조를 기려 비를 세웠다. 그 비문에 말하였다.
“바른 덕으로 물리쳤나니 귀신들이 다 옮겨갔도다.”

태고(太古) 때에 여자와 말가죽이 누에로 변함
옛날 이야기에 이런 말이 있다.
“태고 때에 어떤 사람이 멀리 타국에 가고 집에는 오직 아들ㆍ딸 한 사람씩만 있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말 한 마리가 있었는데, 말은 그 딸이 맡아 길렀다. 시골에 구차하게 살면서 딸은 아버지를 생각하고 장난삼아 말에게 말했다.
‘네가 너를 위해 우리 아버지를 모셔오면 나는 네게 시집가리라.’
말은 이 말을 듣자 고삐를 끊고 아버지 있는 곳으로 바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말을 보자 놀라고 기뻐하면서 곧 그 말을 잡아 타 보았다. 말은 제가 온 곳을 바라보고 그치지 않고 슬피 울었다. 아버지는 말하였다.
‘이 말은 이렇게 아무 탈도 없는데 혹 우리 집에 무슨 변고가 있는가?’
곧 말을 타고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짐승이지만 비상한 정이 있기 때문에 특히 정성스레 길렀다. 그러나 말은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고 그 딸이 드나드는 것을 보면 늘 갑자기 기뻐하면서 기운을 내었다. 이렇게 되풀이하므로 그 아버지는 괴상히 여겨 가만히 딸에게 물었다. 딸은 사실을 다 이야기하고는 말하였다.
‘반드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는 말하였다.
‘일체 말하지 말라. 우리 가문의 치욕이다. 그리고 절대 말 가까이 가지 말라.’
이에 활을 쏘아 말을 죽이고 그 가죽을 뜰에 널어 두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다시 떠났다. 그 딸은 이웃 여자와 함께 장난삼아 그 가죽을 발로 차면서
‘너는 짐승이면서 사람을 아내로 삼으려 했다. 그래서 이렇게 가죽을 벗겼으니 왜 스스로 재앙을 불렀느냐?’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가죽은 우뚝 일어나 이 여자를 똘똘 말아 어디로 가 버렸다. 이웃 여자는 당황하였으나 어떻게 할 수 없어 곧 그 아버지에게 알렸다. 아버지가 돌아와 찾았으나 이미 늦었다. 며칠 뒤에 큰 나뭇가지 사이에서 그 딸과 말가죽을 발견했는데, 그들은 두 누에로 화하여
나무 위에 고치를 지었다. 그 고치는 실올이 굵고 커서 보통 고치와 달랐다. 이웃 여자는 그 나무를 길렀더니 그 씨가 몇 배나 되었다. 그래서 그 나무 이름을 상(桑:뽕나무)이라 했다. 상(桑)은 곧 상(喪:죽음)이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다투어 이 나무를 길렀으니, 지금 세상에서 기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른바 상잠(桑蠶)이란 옛날 누에와 다른 종류이다. 생각하면 천궁신(天宮辰)은 마성(馬星:말별)이다. 『잠서(蠶書)』에서 말하였다.
“해와 달이 큰 불을 만나면 그 종자를 목욕시킨다.”
이 누에는 말과 같은 기운이다.
『주례(周禮)』에서 말하였다.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원잠(原蠶)을 금하게 한다.”
그 주해에서 말하였다.
“두 가지가 다 큰 것이 될 수 없다. 원잠을 금한 것은 그 말을 해치기 때문이다.”
또 『한례(漢禮)』의 「황후가 몸소 뽕을 따 누에신에게 제사하는 글」에서 “원유부인(苑窳婦人) 우씨공주(寓氏公主)”라 했으니, 공주란 곧 여자의 존칭이요, 원과부인은 과거에 누에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세상에 혹 누에를 여아(女兒)라 하는 것은 바로 옛사람이 남긴 말이다.[이상 열 가지 증험은 『수신기(搜神記)』에 나온다.]

송(宋)의 사문 석승유(釋僧瑜)가 죽은 뒤에 그 방에서 오동나무 두 그루가 남
송(宋)나라 석승유(釋僧瑜)는 오흥(吳興) 사람으로서 성은 주(周)씨이다. 20세에 출가하여 호를 신리(神理)라 하고 고행을 부지런히 닦아 시종 변하지 않았다.
원가(元嘉) 15년(438)에 여산(廬山)에 노닐 때 동학의 담온(曇溫)ㆍ혜광(慧光) 등과 함께 다 지조가 곧고 깨끗하며 깊숙이 살기를 좋아하여 그 산 남쪽에 절을 지었으니, 지금의 초은정사(招隱精舍)가 바로 그것이다. 승유는 늘 생각하였다.
‘3도(道)에 빠져 있는 것은 마음과 몸 때문이다. 마음이 장차 다하면 몸도 또한 버려야 하는 것이니, 약왕(藥王)의 발자국이 어찌 홀로 멀다 하겠는가?’
그래서 여러 번 서원을 세웠다. 처음에는 맹세한 뒤로 마흔네 번 몸을 태웠다.
효건(孝建) 26년 3월에 장차 본뜻으로 나아가려 할 때는 도인과 속인들이 가서 구경하느라고 수레와 말이 길을 메워 끊이지 않았다. 승규는 대중을 거느리고 도를 행한 뒤에 그들에게 경을 가르치고 계를 일러 주었다. 그 날은 짙은 구름에 비가 오려 하자, 승유는 이에 서원을 세웠다.

‘만일 내 뜻한 바가 극히 밝으면 날씨가 청명해지고, 만일 그 기약한 정성에 감응이 없으면 곧 비가 쏟아져 이 4배(輩)들로 하여금 신(神)의 감응이 어둡지 않음을 알게 하여 주소서.’
이 말을 마치자 곧 구름이 걷히고 날이 밝게 개었다. 타는 불꽃이 얽힐 때 합장하고 근본으로 돌아가자 자줏빛 기운이 하늘에 올라 연기 밖에 따로 나타나면서 해 그림자가 옮기지 않았다.
24일에 승유가 있던 방에 두 그루의 오동나무가 나서 뿌리와 가지가 무성하고 굵고 가늚이 하나 같으며 느티나무를 꿴 듯 꼿꼿이 서면서 드디어 큰 나무를 이루었다. 식자들은 이것을 바라보수(波羅寶樹)라 하여 지옥을 환히 밝힌다 하였으니, 승유가 바라던 것이기 때문에 이런 증험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승유를 쌍동(雙桐)사문이라 불렀다.
그 때 오군(吳郡)의 장변(張辯)은 평남(平南)의 장사(長史)로 있으면서 이 일을 직접 보고 자세히 전하였다.[이것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당(唐)의 왕현책(王玄策)의 『서국행전(西國行傳)』에서 금산(金山)이 있다
고 하였음
토번국(吐番國)에서 운산(雲山)의 남계(南界)로 향해 굴로다(屈露多)ㆍ실립(悉立) 등의 나라에 이르면 다 말하였다.
“이 역(驛)에서 북으로 9일 동안 가면 어떤 보배산이 있다. 그 산의 흙과 돌은 모두 황금인데 그것을 가지는 사람은 다 재앙을 만난다.”[왕현책(王玄策)의 『서국행전(西國行傳)』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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